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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8) 18세기 유랑지식인들 정감록을 퍼뜨리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8) 18세기 유랑지식인들 정감록을 퍼뜨리다

    ‘정감록’이 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1730년대였다. 그것도 차별의 땅 서북지방에서였다. 정감록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고해 조야(朝野)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인데, 금지령 속에서도 재빨리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다. 누가, 왜 정감록을 퍼뜨렸는가? 그들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이번 호에선 18세기 황해도 출신 술사(術士)인 박서집을 만나 이 문제를 집중 검토하려고 한다.1731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어린 시절 한글본 정감록을 읽었다. 나중엔 예언에 빠져 정든 고향을 등진 채 홀로 충청도 진천으로 이주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1782년 정감록 사건에 연루돼 처벌된 사람이다. 박서집과의 대화는 물론 가상 대담이다. 하지만 그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만은 아니다. 필자가 여러 종류의 역사자료를 읽으며 재구성한 것이다. ●술사 박서집 정감록을 발견하다 백: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록이 남부지방에 전파된 것은 대강 언제쯤이었을까요? 박: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알겠어요. 하지만 내 경우엔 이랬어요. 난 사실 어렸을 때 집에서 정감록을 읽었어요. 우리 집은 양반은 아니라도 선친께서 까막눈은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한문에 능통하셨단 얘긴 아니고 그저 ‘명심보감’과 ‘소학’ 정도는 동네 서당에서 배우셨지요. 이유야 자세히 모르겠지만 하여간 우리 집엔 정감록이 있었어요. 백:술사님이 태어난 해가 1731년(영조 7년)이었다지요. 그렇다면 아홉 살 되던 1739년(영조 15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정감록이 문제가 됐습니다. 술사님은 그때 벌써 정감록을 읽으셨나요? 박:아니지요. 열두 살 때 읽었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아주 선명해요.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서당을 다녔으니까 글은 제때 배운 셈이지요. 읍내 서당에서 ‘사서’(四書)도 좀 읽고 해서 문리는 제법 나 있는 편이었어요. 그래도 한문 책 읽기는 늘 까다롭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그해 한여름에 설사가 심해 집에서 쉬다 심심해서 벽장을 뒤졌어요. 벽장 깊이 감춰둔 정감록을 발견했어요. 한글로 된 필사본이라 단숨에 읽어 버렸어요. 너무 재밌어 그 뒤에도 가끔씩 꺼내 읽었어요. 백:첫눈에 정감록에 반하신 것 같습니다. 무엇이 술사님을 그렇게 매료시켰나요? 박:아까부터 자꾸만 ‘술사, 술사’ 하고 부르는데 듣기에 별로 안 좋아요. 그건 나를 좀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에요. 기왕이면 도사(道士)라든가 거사(居士) 같은 칭호로 부르는 게 좋겠어요. 이래 봬도 내가 실은 못하는 것이 없어요. 아픈 사람에게 약을 처방해 주지, 땅도 좀 볼 줄 알아서 지관(地官)이라고 대접하는 이들도 많았고 점도 칠 줄 알거든요. 백:죄송합니다. 그럼 거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요새 사람들은 거사님이 살던 18세기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서당에 다닌 사람들은 유교 경전만 읽는 줄로 알고 있어요. 박:틀린 생각이지요. 서당에선 천문이나 풍수에 관한 책을 전혀 가르치지 않지요. 그러나 서당에서 배운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다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는 거죠. 훈장님들도 실은 의술이나 풍수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 마을 사람들의 자문에 자주 응하곤 했어요. 나도 한때는 훈장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이지만 말예요. 백:몰라 뵈었습니다. 훈장님! 그러면 훈장님은 주리론(主理論)이니 주기설(主氣說)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성리철학을 훤히 다 아시겠군요. 대단하십니다. 박:솔직히 말해 난 그런 건 잘 몰라요. 관심도 별로 없고, 실상 배운 적도 없어요. 내 특기라면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잡학이었어요. 대개 시골훈장들이 다들 그랬어요. 백:아마도 평민 출신 훈장님이라서 더욱 잡학에 강했다는 말씀인가 보군요. 그런데 훈장님은 52세 되던 1782년(정조 6년) 정감록 사건 때 충청도 진천에서 체포되셨잖아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서북의 술사들 남쪽으로 향하다 박:그때 그 이야길 여기서 꼭 해야 되나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군요. 당시 난 관가에 불려가서 아주 경을 쳤어요. 그건 그렇다 치고 내 본업이야 잡술(雜術)을 파는 사람이었지 어디 점잖은 훈장이라 할 수 있나요. 날 훈장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거사라고 불러 주시오. 백:그래요, 거사님. 그런데 거사님은 왜 정든 고향을 떠나셨지요? 박:솔직히 말해 나와 같이 먹물 든 사람이 무슨 낙으로 농사를 짓겠어요? 속이 답답해 절대 안 되지요. 그렇다고 내 처지에 과거에 급제해 무슨 벼슬이라도 하겠어요? 그 역시 아니었어요. 차별 받는 서북지방 그것도 평민 출신인 나로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어요. 정말 답답한 이야기지만 나 같은 사람은 도무지 마땅히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이 거의 없었어요. 나이 스물을 넘기자 난 점점 노골적으로 사회질서에 불만을 품게 됐어요. 그런 내 모습을 보는 게 서글펐지만 하는 수 없는 노릇이었어요.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고 봐요. 차별이 심한 세상에서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어요. 백:거사님의 말씀이 이해가 돼요.20세기의 일입니다만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킹 목사는 백인들의 가혹한 차별정책에 맞서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며 소수자의 꿈과 희망을 부르짖었어요.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나 1970년대 유신정권 아래서 철저히 소외됐던 특정 지역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똑같은 맥락에서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해온 여성들의 고통도 마찬가지 일 거예요. 누구든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서면 절망하기 십상이겠지요. 박:고통스러운 내 삶에 희망을 안겨 준 것이 정감록이었지요.‘양반 놈들의 조선’이 끝나야 뭐가 돼도 제대로 될 거라는 생각뿐이었어요. 처음에 난 황해도 평안도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마흔 살 무렵엔 아예 남쪽지방으로 이주했어요. 정감록이 약속한 구원의 땅은 남쪽에 주로 많았거든요. 난 계룡산 언저리를 배회하기도 했고, 삼남지방의 십승지며 수많은 길지를 찾아 일일이 답사했지요.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더군요. 백:거사님이 남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군요. 거사님이 남쪽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도 혹시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나요? 박:그러니까 1770년대였어요. 정감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지요. 바로 내가 관련된 1782년 12월의 정감록 사건만 해도 실은 그 증표가 아닐까 해요.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어요. 예컨대 반역죄로 죽은 문인방 선생님만 해도 평안도 양덕 출신이었지요. 함께 죽은 문 선생님의 제자 백천식도 참 불쌍해요. 문 선생님은 천문과 점술의 대가였어요. 우린 모두 선생님의 말씀대로 정감록이 예언한 새날이 곧 밝아올 줄로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시기상조였던가 봐요. 백:1782년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문인방을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대접하는 걸로 보아 거사님도 그 부하가 분명하군요? 박:문 선생님은 당시 충청도 진천의 산골에 머물렀어요. 진천은 마침 계룡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데다가 그곳이 십승지로도 손꼽히는 길지랍니다. 특히 목천이 아주 좋아요. 뿐더러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해서 진천이야말로 살기에 가장 좋단 말도 있잖아요. 게다가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이 잉태된 곳이라지요. 그 서기가 아직 남아 있는 곳이라 문 선생님과 제자들은 진천 땅에 머물렀던 거지요. 백:정리하면 문인방과 거사님은 서북 출신으로 정감록을 충청도에 퍼뜨린 전도사였다는 말씀이 되는군요. 박:우리 말고도 여러 명이 있었어요. 황해도 평산 사람으로 지관을 업으로 삼았던 권택인이란 친구가 마침 기억나는군요. 그 친구는 신형하란 젊은이와 친했는데 정감록을 가르쳐 준 일이 있었대요. 한데 이 신형하란 친구가 1780년대 초반엔 이미 전라도로 내려와서 활동 중이었지요. 나나 문 선생님과 함께 연결이 돼 있었지요. 어쨌거나 우리가 삼남지방에 처음 내려갔을 적만 해도 거기 사람들은 정감록이란 이름만 들었지 내용은 다들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그러다 보니 우리가 움직이는 곳마다 정감록이 차츰 퍼져나갔어요. 우린 길지도 살필 겸 직업이 풍수와 점술이라 각지를 떠돌며 돈도 벌 겸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단 말이 있잖아요. 전국의 길지를 배회하며 정감록을 선전하는 우리에게 혐의를 둔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린 마침내 관가에 고발을 당했지요. 문 선생님이나 나나 굴비 두름처럼 한데 묶여 역모죄로 엄한 처벌을 받았어요. 우리에겐 세상을 바꿀 뜻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역량이 부족해 무엇 하나 변변히 준비한 것은 없었어요. 한데도 반역자란 누명을 쓴 채 관헌에 붙들려가 죽게 됐으니 참 기막힌 노릇이었지요. 백:참 딱한 말씀이네요. 어쨌거나 거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지네요. 요컨대 거사님을 비롯한 서북 출신 술사들이 정감록을 전국 각지에 유행시킨 주인공이었단 점은 틀림없군요. ●유랑 지식인들의 사회적 생리와 정감록 박:지금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은 유랑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 같아요. 경제적인 기반이 없이 ‘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거나 ‘혀를 놀려서 먹고 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 늘 떠돌아 다녔어요. 이런 사람들이 미약하나마 하나의 사회세력을 이룬 것은 역시 18세기가 아니었을까 해요.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이른바 몰락한 양반이었지요. 그러나 대다수는 서얼이나 평민이었다고 봐요. 문인방 선생님이나 나는 틀림없는 평민이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난한 하급지식인으로서 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서당과 같은, 이를테면 사설 교육기관이 전국 어디나 많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훈장 목숨은 파리 목숨 같았어요. 요새 말로 고용이 불안정해 늘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고요. 백: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도 18∼19세기 한국사회에 서당이 많이 늘어난 것을 냉소적으로 기술한 적이 있더군요.“군현에는 각 면마다 수십 개 마을이 있고, 대략 네댓 마을에 반드시 서당 한 개 씩은 있다. 서당마다 한 훈장이 앉아 있는데 글을 잘못 가르치는 시골의 무식한 훈장인 주제에 아이들을 수십명이나 거느린다.”라고 했어요. 박:정약용의 말이 좀 지나친 감은 있어요. 그래도 전국 어디서나 초보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서당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말은 분명히 맞아요. 이런 상황이 지속돼 평민이나 서얼 출신의 중하급 지식인이 대량으로 배출됐던 거지요.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단 이야긴데 우리들은 애초부터 과거에 붙기도 어려웠고, 요행으로 시험에 붙었댔자 벼슬길에 나갈 가능성도 거의 없었죠. 신분과 지역이란 이중의 벽을 좀체 넘어설 수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사정이 그렇고 보니 먹고 살길이 막연해 유랑의 길로 나서는 경우가 아주 많았지요. 이를테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지식인들이라서 현실 비판적이었고 자연히 정감록을 애호하는 핵심적인 부류가 됐어요. 백:그렇군요. 남부지방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정감록을 퍼뜨린 문인방이나 거사님이야말로 18세기에 등장한 유랑 지식인의 전형이었군요. 자력으로는 당면한 정치 및 사회적 불만은 물론이고 생활고조차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사님과 같은 분들은 정치적 예언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던 거죠. ●정감록 사건에 대한 집권층의 대응조치 박:정감록을 빌미로 역모를 꾀한다는 고발이 있기만 하면 조정은 잔뜩 긴장했던 것 같아요. 정감록을 모두 압수해 불태워 버리자든가 정감록의 출처를 끝까지 조사하자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백:그러나 미봉책을 편 것도 사실이었어요.1739년 정감록이 처음 나왔을 때도 국왕 영조는 함경도 경성에 살던 유학자 이재형 부자를 한직에 등용해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어요. 조선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는데도 초야에 묻혀 있던 한두 명의 선비를 발탁한다고 상황이 해결될 수 있었을까요? 박:아마 국왕은 민간에 퍼져 있던 정감록을 모두 거둬들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해요. 정감록을 유포한 장본인을 체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공연히 소란을 피웠댔자 민심만 자극될 테니 어떻게 하겠어요? 차라리 미봉책을 펴는 게 상책이란 판단을 한 걸 테죠. 백:그 말씀이 그럴 듯하군요. 거사님이 처벌 받은 지 한 해 뒤 해주에서 또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어요. 거사님의 고향 해주에서 말이죠. 그런데 국왕 정조의 처분은 매우 관대했어요.“‘정감록’이 안필복의 집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집사람들이 저술한 것은 아니다. 큰 죄는 아니다.”라면서 관련자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했어요. 예언서라는 게 허무맹랑한 내용뿐이므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말했지요. 박:그러나 국왕 정조는 정감록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이상한 일이 황해도에서 발생할까 염려한다.”고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죠. 국왕은 정감록을 이용해 왕조에 대한 반역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도 ‘정감록’을 빙자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지 않아요. 백:해주 사건이 터진 지 2년 지나서였죠.1785년 서울을 비롯해 각지의 인사들이 두루 가담한 이른바 이율과 양형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래서겠지만 같은 해에 전라도 구례 화엄사의 윤장(允藏) 스님은 절간에 ‘정감록’을 숨겨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적발돼 흑산도로 유배됐어요. 그렇게 본다면 1783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석방된 안필복의 경우는 오히려 예외로 생각되기도 하는군요. 박:1785년 이후에도 ‘정감록’ 사건은 계속 발생했어요. 신분차별과 지역차별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봐요. 백:조선의 통치자들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킴으로써 정감록의 유행을 차단하려 했지만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늦어도 1780년대엔 ‘정감록’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게 틀림없어요. 정감록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평민 출신의 유랑 지식인들 특히 서북 출신 술사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거사님은 바로 그 주역이지요. 박:내가 죽은 지 200년도 더 지났지만 이렇게 회포를 풀 수 있어서 퍽 다행이었어요. 이젠 정말 편히 잠들겠어요. 나라의 평안을 축수합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예언서는 예언가의 이름을 빌려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단군조선 때의 ‘신지’, 후삼국의 ‘도선’, 조선의 ‘남사고’와 ‘이토정’은 유명한 예언가였다. 그들의 이름을 딴 ‘신지비사’‘도선비기’‘남사고비결’‘토정비결’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한 예언서였다. 대부분 내용은 위작으로 보이지만 신지비사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나머지 책들은 아직 남아 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정감록’은 어떠한가? ‘영조실록’에 보면 ‘정감의 참서’라고 돼 있어 예언가 정감이 쓴 책으로 보아야 옳다. 아닌 게 아니라 현전하는 정감록을 읽어 보아도 예언가 정감이 중요하다. 정감은 누구인가? 그는 실존 인물이었는가? 만약 가공 인물이라면 하필 왜 정감인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정감비기’ 또는 ‘정감비결’이 아니라 ‘정감록’인가? 역사상 최초로 문제가 됐던 정감록은 어떻게 생긴 책이었을까? 나는 정감록이 정감록인 까닭을 좀더 정확히 알고 싶다. 이번 호에서 검토될 사항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다뤄진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이다.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이번 호에서도 정감록의 기원을 밝히려는 나의 새로운 시도는 계속된다. ●실존 인물 정감이 정감록의 저자?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17세기 초반에 정감(鄭鑑)이란 관리가 있긴 했다. 그는 흔히 소과(小科)라 불리는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됐다. 실록엔 형조 정랑(正郞)이란 중견관리로 나와 있다. 관리로서 제법 성공한 편이다. 그는 당시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난 행위를 많이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광해 8년(1616) 5월 국왕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헌부는 정감의 치부를 샅샅이 들춰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도 말썽을 일으켜 처벌된 사실이 있다고 했다. 일가친척이 성관계를 가진 여성을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고도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의 독직(瀆職) 행위였다. 고위층의 청탁 유무와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판결을 내린다 했다. 사헌부의 주장대로 정감은 부도덕한 부패 관리의 전형이었을까? 강경한 사헌부의 처벌 요구와는 달리 국왕이 정감에게 내린 처벌은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분이었다. 광해군은 정감의 벼슬을 바꾸는 소극적인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불법 행위에 대한 사헌부의 고발이 한낱 풍문에 근거한 것이라 중벌이 가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정감을 애써 두둔할 생각이 내겐 없다. 내 관심은 17세기 전반 형조정랑을 지낸 정감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의 참서’와 무슨 관계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무 관계도 없었다. 형조정랑 정감은 생전에든 사후에든 단 한번도 예언서 ‘정감록’의 저자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1782년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사건 피의자 박서집의 진술이 참조된다. 그는 정감록의 유래에 대해 “그것이 처음 나온 것은 고려 왕조 때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이런 진술을 취조관들도 문제삼지 않았다. 요컨대 정감록의 저자 정감은 가공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씨가 조선왕조의 대안? 가공 인물 정감이 하필 정(鄭)씨인 이유는 무엇인가? 250개나 되는 한국의 많은 성씨들 가운데서 굳이 ‘정’을 가공의 예언자에게 준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에 눈을 돌려보자. 조선 왕조가 출범한 14세기 말부터 정감록이 출현한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정씨 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반 왕조적인 인물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정몽주(鄭夢周)를 빠뜨릴 수 없다. 그는 고려 말의 대표적 유신(儒臣)이었다. 충의(忠義)를 다하기 위해 그는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쳤다. 결국 태종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손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善竹橋)에서 무참히 격살(擊殺)됐다. 흥미롭게도 ‘정감록’에 보면 정감이 정몽주를 후손이라 부르고 있다. 둘째, 정도전(鄭道傳)도 거론해야 옳다. 그는 조선 개국의 중심인물이었다. 조선의 수많은 제도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런 까닭에 현대 역사학자들 중에는 정도전을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도전은 정말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의 갈등에 관련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셋째, 정여립(鄭汝立)이 있다. 재능과 학식이 탁월했던 그는 선조 연간에 불붙기 시작한 당쟁에 휘말려 국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향리에서 세월을 보내던 정여립은 끝내 반역자로 낙인 찍혀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는 도주하던 끝에 깊은 산골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그가 정감록을 지었다고 보기도 하고 그의 비참한 운명을 애달파하기도 했다. 이밖에 영조 때 역모를 일으켰다가 죽은 정희량(鄭希亮)이 주목된다.1728년 그는 이인좌 등과 함께 남부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엔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그는 거창에서 관군에 붙잡혀 사형 당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정희량이 아직 살아 있고 머지않아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온다는 유언비어가 각지에 유행할 정도였다. 그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기인(奇人)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민중의 기림을 유독 많이 받았다. 알다시피 역사상 반왕조적인 인물로 지목된 사람은 결코 한둘이 아니었다. 이씨와 김씨를 비롯해 여러 성씨가 골고루 뒤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위에서 언급한 몇몇 정씨는 민중들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존재였다. 정여립과 정희량의 일생은 특히나 비극적이었고 신비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민중들은 그들에 관한 추억을 더듬으며 더욱더 정씨를 이씨 왕조의 대안으로 삼게 된 것도 같다. 물론 민중의 이러한 역사인식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정성진인’에서 ‘정감’까지 16세기 말 정여립이 죽고 나서부터였다. 다음은 정씨 왕조가 들어설 차례란 생각이 민중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런 생각이 차츰 영글어 17세기엔 이른바 ‘정성진인(鄭姓眞人)’이 민중들 사이에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달리 말해 정씨 성을 가진 완벽한 인간이 출현해 민중을 도탄에서 구해낼 거란 믿음이었다. 그런 인식이 널리 퍼진 가운데 18세기 전반 정희량이 붙들려 죽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켰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정성진인설’을 적극적으로 사방에 유포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정희량은 현실에선 실패했다. 그럼에도 민중의 뇌리엔 ‘이씨 왕조를 대체할 이는 정씨뿐이다.’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18세기에 등장한 정감록은 민중의 그런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준 것으로 봐야 한다. 정감록의 핵심 내용은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감(鑑)이란 이름의 뜻은? 좀더 생각해 보면 정감록에 예언가의 이름을 ‘감(鑑)’이라 설정한 이유도 무척 궁금하다. 그것을 일부 이본엔 ‘감(堪)’이라고도 했다. 예언가의 이름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지 따져 보고 싶다. 가공 인물을 대단한 예언가로 부각시키려 했을 때 우선적으로 고려될 점은 이름에 담긴 상징성이었을 것이다. 고도의 상징성을 가진 이름이라야 예언서의 독자들 그리고 민중을 설득해 믿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숙고의 결과가 ‘감(鑑)’ 또는 ‘감(堪)’이란 글자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감(堪)’은 감여(堪輿) 즉 풍수지리를 뜻한다. 달리 표현하면 ‘감’은 천도(天道),‘여’는 지도(地道)라고도 한다. 감이란 글자를 이름으로 쓴다면 본인이 풍수가 또는 예언가임을 이미 천명한 셈이 된다. 현전하는 정감록은 풍수지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감(堪)’은 책의 성격에 적합한 이름이다. 하지만 내가 본 정감록의 대부분은 ‘감(鑑)’을 주인공으로 정해 두고 있다.‘거울 감(鑑)’자엔 도대체 무슨 깊은 뜻이 담겨 있어 그런가? 고대로부터 한국에선 거울이란 사물은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인식돼 왔다. 거울은 과거, 현재 및 미래를 비추는 마술적인 존재로 주목돼 왔다.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다뉴세문경은 당시 최고지배층이었던 제사장들이 소유했던 특수한 물건이었다. 주술을 비롯한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에도 거울의 마술적 속성은 여전하다. 무당들은 누구나 명도(明圖)라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명도를 이용해 집을 나간 사람을 찾거나 잃어버린 물건의 행방도 점친다. 무당들은 명도 거울이 신(神)의 영력(靈力)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바로 그 거울이 있어서 인간의 미래를 투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거울이 국가의 운명을 예언하는 데 동원된 적도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아직 궁예의 부하로 있던 시절, 낡은 청동 거울에 새겨진 예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 그리고 후삼국의 통일을 예언한 것이었다. 중국 고대에 ‘은감불원(殷鑑不遠)’이라는 말도 있었다. 은(殷)나라의 거울은 먼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부연하면 주(周)나라 왕은 바로 앞선 시기에 존재한 은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보란 뜻이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거울로 삼으란 것이다. 이 경우 거울이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정감록의 주인공 정감 역시 역사의 교훈을 알려준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데 있었다. 정감록은 거울이란 이름을 가진 정감을 저자로 내세워 거울이 가진 주술성을 빌리고자 했다. 한마디로 말해 거울의 신비한 힘에 의존한 정감록은 결코 한 자도 틀리지 않는 예언서란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록(錄)’은 조선후기에 등장한 예언서 따지고 보면 예언서 ‘정감록’의 제목이 ‘록(錄)’자로 끝나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다. 이게 웬 말인가 되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려고 역대 예언서의 이름을 모두 조사해 봤다. 놀랍게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에 발견된 예언서 중에 ‘록’자로 제목이 끝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예언서들은 그 제목이 무슨 무슨 비기(秘記), 비사(秘詞)’ 또는 유훈(遺訓)이라 돼 있었다.‘기’와 ‘사’는 한문학의 장르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예언서는 은연중에 문학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짐작은 실제로 예언서를 검토해본 결과와 일치한다. 한시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운문(韻文) 형태의 예언서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훈’자를 예언서 제목으로 삼은 경우는 도덕적인 명령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고려시대에 나온 ‘해동고현유훈(海東古賢遺訓)’이 대표적인 예다. 이 ‘유훈’도 문장의 표현 방식은 역시 운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은 그 제목부터 새롭다.‘록’은 ‘실록’을 연상시킨다. 수사의 멋과 맛을 중시하는 과거의 예언서와 달리 앞으로 일어날 사실을 묵묵히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태도와 정신이 엿보인다. 예언서 정감록은 서술양식도 과거의 운문에서 벗어나 산문(散文)이 되었다. 한문학을 대표하는 시문(詩文)을 버리고 역사책의 전형인 편년체(編年體)를 택하거나 유교 경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화체를 선택했다. 정감록은 기왕의 예언서와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서술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18세기의 정감록은 한글본이었다! 정조 6년(1783) 1월에 발생한 정감록 사건의 연루자 안필복은 자기가 읽은 정감록에 대해 상세히 진술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가 집에 소장했던 정감록은 책자의 길이가 52∼62㎝, 두께는 4㎝,200장 정도 분량이었다. 정감록은 형태와 크기에 있어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여느 한적(韓籍)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정감록이 백지에 한글(諺文)로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필사본이었다. 안필복의 진술이 있기 한 해 전에도 정감록 사건이 있었다. 그때 피의자 박서집은 정감록에 대해 “저는 어렸을 때 단지 한글로 된 ‘정감록’을 보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출생 연도를 감안하면, 그가 정감록을 읽은 시기는 1740∼50년대에 해당한다. 아마도 1739년 최초로 조정의 관심을 끌었던 정감록은 박서집이 읽은 한글본 정감록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유행한 ‘정감록’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정감록이 본래 한글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20세기에 와서 정감록을 집대성한 여러 편찬자들뿐만 아니라 정감록을 연구한 학자들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정감록이라 하면 한문으로 된 ‘감결(鑑訣)’을 원본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20세기 초 ‘비난정감록진본(非難鄭鑑錄眞本)’을 편찬한 현병주는 ‘감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본장의 기록문자가 즉 정감록의 원본이다. 본장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전 사회를 통하여 오백년간의 시선이 집주(集注)하던 정감록의 편명이 성립된 것이다.” 그 뒤의 다른 연구에서도 정감록이라면 으레 한문본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다. 이 한문본은 18세기의 한글본 정감록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이것은 반드시 규명해야 할 장래의 과제다. ●새 예언서의 출현은 조선후기 사회문화의 변화를 반영해 정감록의 등장은 조선 후기 사회에 일어난 사회문화적 지각변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더이상 극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시기엔 내면의 미묘한 감정이나 사물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상세히 서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서사적인 글쓰기가 유행하게 돼 정감록과 같은 편년체 또는 대화체 서술이 일반화된 것이다. 책이 흔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종이 생산량도 늘어났고 소비도 활발해 정감록과 같은 필사본 예언서가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상층 지식인들 사이에선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추구하는 지적 분위기가 유행했다. 정감록을 향유한 하층 지식인과 민중들도 사실성을 강조하는 시대적 담론에 그 나름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구태의연한 ‘정감비결’이나 ‘정감비기’가 아니라 하필 ‘정감록’이 된 데는 다 그만한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 정감록이 한글본이었다는 점도 중요한데 지식의 생산과 소비는 더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정감록과 더불어 새 시대의 동은 터 오고 있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5)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下)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5)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下)

    1733년 7월 전라도 남원성벽에 괴벽보가 나붙었다. 머지않아 영조 임금이 쫓겨나고 새 세상이 열린다는 내용이었는데 벽보를 직접 작성한 사람은 남원 부자 김영건의 아들들이었다. 이 벽보에는 김씨들의 숙적인 이유성 일가의 이름이 도용돼 있어 이씨들을 모함하기 위해 그랬을 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그처럼 단순하고 우발적이었을까? ●이여매와 이여진 형제의 이름으로 된 벽보 남원성벽에 내걸린 벽보는 이유성의 아버지 이여매와 숙부 이여진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이 형방은 문서를 읽고 나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에 이런 흉악한 문서에 제 이름 석자를 붙여 걸어둘 바보가 과연 있겠는가? 형방은 박 호장, 최 이방 등과 이 문제를 상의한 다음 이씨 집안과 다투고 있던 김영건 부자에게 혐의를 두었다. 일차로 김영건 부자를 연행한 다음 그 집안을 수색했다. 그 과정에서 벽보의 초안이 발견돼 사건은 싱겁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김씨들이 괴문서의 말미에 이여매 형제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면,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그러나 원수의 이름을 빌려 반역의 의지가 명백한 벽보를 붙일 만큼 김씨들은 무지몽매했을까? 벽보를 손수 쓴 김원팔로 말하면 제법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그 정도 계산도 못할 만큼 청맹과니는 결코 아니었다. 김원팔 형제가 남문 옆 성벽에 벽보를 붙여두고 집으로 돌아간 직후, 세 사람의 괴한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둘은 좌우에서 망을 보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벽보의 맨 끝에 “이여매와 이여진 씀”이란 글귀를 추가했다. 그 글씨체는 영락없이 김원팔의 것이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 보면 왼쪽으로 좀더 비스듬히 올라간 것이 눈에 띌 만도 했다. 눈썰미가 남다른 이방 최정도는 그 점을 이미 정확히 짚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필체의 미세한 차이를 말하지 않았다. “사건은 이 정도로 마무리돼야 한다. 만약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면 남원은 헤어날 길이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건의 근원적인 규명이 아니다. 확대 수사는 도리어 민심을 뒤흔들어 놓을 뿐이다. 여기서 종결시키자. 더 이상의 불필요한 잡음을 불러일으키지 말고 사적 원한에 근거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마무리하자. 그것이 모두에게 좋다. 어차피 이 세상은 그런 것이다!” 이것이 남원의 사정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던, 아니 18세기 한국사회의 물정을 정확히 파악했던 최정도 이방의 생각이었다. ●김영건 일가를 저버린 지하조직 따지고 보면 그랬다. 조직은 김원팔 일가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작정했다.18세기에는 하삼도만 해도 남원 운봉 함양의 지리산, 부안의 변산, 충청도 계룡산과 오서산, 합천의 가야산 등지를 잇는 지하조직이 결성돼 있었다. 조직원의 수가 얼마나 됐고 조직의 구성이 어땠는지 전모를 정확히 파악할 길은 없지만, 수십 수백 명이 가담한 비밀결사가 존재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런 지하조직의 최종 목표는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고 용화세계 또는 미륵세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동학에서 말하는 지상천국, 후천세계의 원형이 이미 18세기에 형성되고 있었다. 지하조직은 ‘정감록’을 비롯한 각종 비결을 앞세워 민심을 선동했다. 조직은 나라를 원망하는 각양각색의 인사들을 점조직으로 편성했다. 조직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처의 부자들을 포섭하거나 도적질을 하기도 했다. 남원부자 김영건 같은 이는 지하조직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쓸모있는 인물이었다. 김영건은 천민출신이라서 기존의 사회질서를 반대했으며 자금력도 어느 정도 충분한 데다 김원팔과 같이 유능한 아들이 있어 지하조직의 한 귀퉁이를 맡길 만했다. 김영건 자신은 아마 짐작도 못했을 테지만, 지리산에 근거지를 둔 지하조직은 오래 전부터 김영건 일가를 포섭하는 데 큰 관심이 있었다. 일찌감치 지하조직의 지도부는 김영건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남원, 운봉, 함양 일대를 제 손금 들여다보듯 훤히 아는 탁발승들이 바로 조직의 중추였는데,17세기 후반 영건의 어머니 분금이 무작정 노씨 집을 뛰쳐 나왔을 때 지리산에서 굶어 죽지 않고 무사히 남원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 실은 어느 탁발 승려 덕택이었다. 그 인연은 영건이 모르는 사이에도 계속됐었다. 나중에 분금이 아들 영건에게 남긴 유언 가운데 부처님의 원력을 말한 것도 다 그런 사정이 있어서 나온 말이었다. 양반 정 노인의 신분시비 사건으로 김영건은 큰 충격을 받아, 현세를 지배하는 논리에 회의를 품게 된다. 하지만 그는 천품이 온화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조직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희생을 바칠 사람은 못 되었다. 지하조직은 그런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의 세 아들들에게 더더욱 큰 기대를 걸었다. 지하조직은 지도부에 속한 변산의 승려 태진과도 연줄이 있는 최봉희를 시켜 김원팔, 김원하, 김원택 3형제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 최봉희는 우선 비결을 가지고 그들을 설득하려 했고, 가장 먼저 그 먹이를 문 사람은 김영건의 막내아들 김원택이었다. 그 덕분에 김원팔과 김원하를 조직에 가담시킬 수 있게 됐다. 그런데 1732년 가을부터 김원택은 조직을 이탈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김원택은 지하조직이 추구하는 목적이 지극히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고, 조직 활동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김씨 일가의 담당인 최봉희 보기를 꺼려했다. 그는 형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있었다. 조직은 김원택에 대해 다각도로 회유책을 폈으나 전혀 통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됐다. 조직은 마지막 수단을 고안했다. 김영건 일가에게 괴벽보를 작성해 남원읍성에 부착하도록 지시했다.3형제가 공동으로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들을 묶어두지 않으면 장차 조직을 관리하기가 어려울 것이란 게 상부의 판단이었다. 김원팔 형제가 벽보를 붙이는 순간에도 조직은 멀리서 그 광경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 나타난 것은 약속한 3형제가 아니었다. 김원택이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 담당책 최봉희는 상부와 긴급히 상의했고, 그 처방은 간단명료했다. 김씨 일가를 희생시켜라! 그리고 최봉희 넌 멀리 도망쳐라! 우리 조직의 남원 지부는 당분간 활동중지다! 그러나 이 벽보를 계기로 민심을 한 번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김원택과 최봉희의 머리싸움 거슬러 올라가 살펴 보면, 남원의 일부를 담당한 최봉희는 부자 김영건이 가장 사랑하는 막내아들 김원택에게 접근했었다. 최는 세상 물정에 두루 밝은데다 붙임성이 대단히 좋았다. 게다가 남원에선 손꼽히는 양반가문의 후예였다. 집이 가난한 것만 빼놓으면 도무지 나무랄 데가 없는 선비였다. 출신이 미천해 고민하고 있던 김원택 일가로선 그런 최봉희와 사귀게 된 것이 큰 영광이었다. 최봉희의 지식에 매료된 김원택은 장형 원팔과 중형 원하에게 차례로 최를 소개했다. 김원팔 등은 매일 같이 최봉희를 만났고 그 때마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후의를 베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마치 최봉희가 김원팔의 식객(食客)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처음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최봉희는 김씨 일가의 내면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시작했고, 김원택은 바로 그 점을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원택은 최가 자기 형들과 함께 만든 필묵계에도 관여하길 거부했다. 그는 두 형과 아버지 김영건에게 최를 멀리하라고 몇 차례 간청하였으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벽보를 붙이는 문제가 집안에서 거론되자 김원택은 최가 배후 인물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충직한 종 남산을 성밖으로 내보내 최봉희가 숨을 만한 곳을 미리 수소문하라고 했다. 만일의 경우 관가에 연락해 최봉희가 즉각 검거되도록 손을 써둔 것이었다. 김원택은 장차 아버지와 형들이 벽보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멸문의 화를 당할 게 너무 억울했다. 만일 집안에 화가 닥치면 최를 비롯한 지하조직도 분쇄되어야 마땅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하조직은 점조직이라 최봉희 위에 누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원택은 그동안 최봉희에게 들은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모두 정리해 보았다. 문득 변산 승려 태진의 이름이 뇌리에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할수록 태진과 최봉희의 관계는 예사롭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사건이 터졌을 때 원택은 배후조종자로 태진을 고발했다. ●‘정감록’ 사건의 마무리 김영건 4부자를 비롯해 최봉희, 태진 등은 제각각 검거된 장소와 시각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창덕궁의 정문인 인정문(仁政門)에 설치된 특별수사본부에 끌려가 엄한 취조를 받았다. 때로 국왕 영조가 직접 심문에 나설 정도였다. 제1급 시국사건으로 취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끌려가 조사를 받은 사람이 삼사십 명이나 됐고, 전라도 각처에서 일시 검거돼 취조받은 사람은 수백을 헤아렸다. 인정문 앞에선 열흘 넘게 날마다 지독한 고문이 계속됐다. 몽둥이찜질은 기본이고, 인두로 몸 지지기, 정강이뼈 뒤틀기, 무릎 관절 부수기 등은 이를테면 선택사항이었다. 혐의자들은 차례로 단독 심리를 거쳐, 관련자와 대질 신문을 받은 뒤 다시 재심리를 받았다. 중간에 말이 바뀌면 모든 수사과정이 처음부터 되풀이됐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거듭된 고문과 그 중간에 잠깐 끼어든 달콤한 회유, 그리고 교활한 유도신문이 연달았다. 머리 좋고 경험 많은 의금부 관리들을 비롯해 조정대신들 그리고 국왕 영조까지 직접 심문에 나섰기 때문에, 그 자리에 끌려 나온 사람은 여간한 배짱과 지능으로는 조금도 숨기거나 속일 수가 없었다. 며칠만 닦달을 하면 고분고분 모든 사실을 실토하게 되었다. 특히 사건 심리의 초기 단계에는 가능한 모든 범위로 수사가 확대되었다. 털끝만큼이라도 혐의가 있어 뵈는 사람은 연일 추가로 체포돼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김원팔과 그의 아버지 김영건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판결도 내려지기 전에 형틀에서 죽고 말았다. 실상 벽보 사건에 전혀 가담하지 않는 김원택도 맞아 죽었다. 고문을 잘 견뎌 용케 살아남은 이는 김원하였다. 그는 역적의 아들이란 죄로 또다시 두들겨 맞은 다음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이럴 때도 고수는 따로 있었다. 지하조직의 하급간부 최봉희는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 있긴 했지만 그의 죄를 증명할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지 않아 외딴섬으로 귀양가는 데 그쳤다. 본래 점조직으로 운영된 조직이다 보니 김영건 부자는 최봉희의 윗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수사과정에서 최봉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지만, 특수 훈련을 받은 최봉희는 노련했다. 최는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지하조직의 비밀은 하나도 노출시키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제침으로써 수사본부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수사본부는 최봉희를 미치광이로 규정함으로써 그에 대한 수사를 매듭지었다. 조직의 거물이자 당시 전라도내에서 이름난 승려였던 변산의 태진은 자신을 변호하기에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남사고 비결’을 소장했다는 점만 인정했을 뿐, 벽보 사건과 무관하다는 점을 끝까지 주장했다. 영조는 “태진의 대답이 범행을 자백한 것이나 마찬가지구나!”라고 하여 태진이 사건에 관련돼 있다고 보았지만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다른 방법이 없어 태진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섬으로 귀양보냈다. ●조정은 지하조직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가? 당시 도승지 홍경보는 영조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지금 영남 하도(下道, 경상남도)와 호남의 인심이 매우 험악합니다. 만약 수사를 여기서 멈춘다면 괴수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각별히 헤아려서 연루자를 체포해야겠지만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런 뜻으로 공문을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영조는 홍경보의 말이 옳다며 민심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사를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수사는 불가능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하조직에 음양으로 관련돼 있었던 데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사정이 조금만 더 악화되면 조직에 대거 참여할 기세였다. 이런 판국에 혐의자들을 함부로 붙들어다 고문하게 되면 조정이 정말로 우려하는 반란 또는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야말로 혹 떼려다 혹 붙인다는 말처럼 될 수도 있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관리들은 자신들의 임기에만이라도 그저 별일 없이 조용하기를 바랐다. 얼마나 애를 써서 얻은 벼슬자리인가. 아직 본전을 다 뽑지도 못했는데 만일 난리가 일어나 벼슬을 놓치게 되는 일이 생겨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 관리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뢰었다. “엄히 조사를 해봤습니다만 별탈은 없는 듯합니다. 백성들이 불안해서 생업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이제 수사를 종결해야 됩니다. 이번 사건은 배후에 무슨 특별한 조직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시골의 무식하고 못돼 먹은 반역자 김영건 4부자가 사적인 원한으로 엉뚱한 짓을 벌인 것입니다.” ●영조의 선택 영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역적 놈들은 과인의 목을 요구한다. 놈들은 이 나라가 망하기만 바라고 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사건을 축소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처리하는 것이 제일이다. 이것은 일부 몰지각한 놈들의 소행이라고!” 결국 왕의 생각이나 조정대신들, 지방관들의 뜻은 남원 이방 최정도의 견해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게 둘러대긴 했지만 왕의 마음은 께름칙했다. 하필 왜 남쪽 지방, 그것도 전라도에서 이런 고약한 무리들이 자꾸 나오는 것일까. 왕은 자기의 친어머니가 전라도 출신의 미천한 나인인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산란했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완전히 눅이지 못한 채 목청을 돋워 각도의 관찰사들을 독려했다. “전라도는 우리나라에서 잡술을 가장 숭상한다고 들었다. 근래 태진이란 중놈의 예언서를 보면 그 폐해의 심각성을 알만 하다. 예언서를 엄금해야 한다. 너희들 휘하의 지방관들에게 명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일체 그런 불온서적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라. 삿된 경전(邪經)을 버리고 성리학에 힘쓰게 하라.” 왕은 ‘정감록’에 대한 이데올로기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낡은 성리학으로 ‘정감록’을 이길 수 있을까.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4)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中)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4)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中)

    뜻밖에도 ‘정감록’에 경도됐던 사람들 가운데는 부자가 적지 않았다. 영조 때 남원의 부자 김영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평소 유복해 보였던 김씨 일가가 비결에 쏠리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남원의 벽보 사건을 좀더 밀도 있게 그려보면 그 답이 보일 것 같다. ●남원성에 나붙은 벽보 영조9년 7월 하순. 그믐날이 가까워 달빛조차 희미한 깊은 밤, 김영건의 두 아들은 괴문서를 남원성벽에 붙였다. 장남 원팔이 문서를 내거는 동안 아우 원하가 망을 보았다. 출입이 가장 빈번한 남문 근처에 한 장의 대형 벽보를 붙이는데 실제 소요된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그들 형제에게는 견딜 수 없이 긴 시간이었다. 당시 남원은 호남 굴지의 대도회라서 날마다 성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수백 명이 성안을 드나들었다. 그들의 눈에 띈 벽보 내용은 삽시간에 호남 일대로, 그리고 지리산 너머 영남 지방으로도 퍼져나갈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튿날 오전 남원부중은 괴문서 이야기로 들썩였다. 그날따라 몸이 불편해 좀 늦게 출근한 최정도 이방(吏房)은 이미 사령들이 수거해온 벽보를 훑어본 다음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조정대신을 강도 높게 비난한 구절도 그랬지만 ‘자미진주(紫微眞主)’ 운운한 것이 영락없는 반역자의 소행이었다. 이방이 알기로, 자미성(紫微星)은 자미원(紫微垣)에 속한 큰 별이다. 그것은 북두칠성의 북쪽에 있는데 천제(天帝) 또는 국왕을 상징한다. 그런데 벽보에 ‘진주’라고 했으니 한양성안 구중궁궐에 엄숙하게 앉아계신 상감께선 왕도 아니고, 자미성 정기를 받은 진짜 왕이 곧 나온다는 얘기다. 벽보엔 상감이 무도하다는 둥 동궁(사도세자)이 미쳤다는 둥 흉악한 언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핀 이방은 새파랗게 질렸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은 이방은 도호부사 조호신에게 긴급사태를 보고하는 한편, 많은 정탐꾼을 풀어 성 안팎에 떠도는 온갖 소문을 즉각 수집토록 했다. 평소 성품이 침착하고 판단력이 있는 이방이었다. 그는 엄하기로 이름난 이 형방, 실무경험이 가장 풍부한 박 호장 등과 함께 수사본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소문들을 비교 종합해 믿을 만한 것을 추려내어 계통별로 분류했다. 범인을 바로 잡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변고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 수사는 신속히 진행돼야 했다. 최 이방은 진행중인 수사에 관해 남원부의 우두머리인 조 부사에게 여러 차례 보고했다. 그러나 서울 명문대가 출신인 부사는 실무에 워낙 어두워 한숨만 내쉴 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많은 정보를 비교분석해 보니 성안에 거주하는 김영건과 세 아들이 용의선상에 떠올랐다. 이방은 사령들을 급파해 우선 그들을 잡아들이고, 김씨 집안에 소장된 모든 문서(文書)를 철저히 수색했다. 그날 해질 무렵 김씨의 문갑에서 두 장의 수상한 문서가 발견됐다. 큰아들 원팔의 필체가 분명했는데, 놀랍게도 벽보의 초안이었다. 두 장 가운데서도 큰 종이에 적힌 문건은 벽보보다 언사가 훨씬 과격했다. 반역자만이 쓸 수 있는, 대역무도한 ‘불온문서’였다. ●정 노인이 일으킨 해프닝 김영건에 대한 남원 사람들의 평판은 무척 좋았다. 그는 성품이 부드럽고 공손하고 단정한 데다 재산도 많았다. 여느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이웃은 물론, 집 앞을 지나는 거지들에게까지 후했다. 최 이방은 소문으로 그런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섣불리 김영건에게 혐의를 둘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문수사 결과를 무시할 수 없어 망설이다가 사령들을 내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영건의 집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는 바람에 이방은 기가 막혔다. 김영건에게는 김원팔, 김원하, 김원택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셋 다 글 잘하고 글씨도 잘 쓴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모두 아버지를 닮아 인물도 훤칠했다. 특히 큰아들 원팔은 과거시험에도 여러 차례 응시했을 정도다. 그는 남원은 물론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를 비롯해 각지의 선비들과 두루 사귀고 있었다. 최 이방은 사실 김영건 일가와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으론 늘 김영건의 유복함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김영건 일가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있었다. 수사에 동참한 이 형방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김영건의 ‘근본’ 즉, 신분을 둘러싼 의혹이 있다고 했다. 형방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이방은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정 노인 사건을 다시금 뇌리에 떠올렸다. 하루는 남원 성 밖에 사는 가난한 양반 정 노인이 읍내에 시장구경을 나왔다가 만취한 상태에서 김영건을 노비의 자손이라고 비방하는 시비가 벌어졌다. 그러나 문제의 정 노인은 평소 행동거지가 단정하지 못해 세인의 평판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인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그 뒤 정 노인은 다시 그런 ‘망령된’ 말을 꺼내지 않아 사건으로 비화되진 않았다. 기억력이 비상한 최 이방조차 이 사건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때 정 노인이 입을 다문 것은 김영건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그런 것이었다. 영건은 노인과 다투지 않고 도리어 그를 살며시 회유했다. 그는 노인을 정중히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약주를 대접했다. 싫은 노릇이었겠지만 그 뒤에도 길가에서 노인을 마주치면 먼저 반색을 했다. 남원 사람들의 눈엔 마치 도량 있는 김영건이 철없는 주정뱅이 노인을 너그러이 용서한 것으로 보였다. 이 사건은 영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몇 년 뒤에 일어났는데, 적어도 아들인 그만은 진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영건의 비밀 사실 김영건은 노비나 별 다름 없이 천한 사람이었다. 남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상도 함양에 노씨 성을 가진 한 양반이 살았는데, 그 집에 막산이란 사내종이 있었다. 그 아내는 이름을 분금이라 했다. 본래 가난한 농사꾼의 딸이었다. 그리고 김영건으로 말하면 분금의 아들이 분명했다. 분금은 어릴 적부터 유달리 영리했고 행실도 조심스러웠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녀의 미색이 너무 뛰어났다는 점이다. 노씨네 행랑것이었던 그녀를 주인양반은 물론 그 집에 드나든 여러 양반들이 다투어 탐을 냈다. 분금은 물론 영건도 이런 집안내력을 꽁꽁 숨기며 살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영건은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야 그 내력을 알게 됐다. 종 막산은 영건이 아직 젖먹이였을 때 돌림병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 그러자 양반들은 아예 마음 놓고 분금에게 집적거렸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체로 취미삼아 그런 불륜을 저질렀다. 분금은 자신이 노리갯감으로 전락하는 것이 너무 원통했다. 엄밀히 말하면, 분금은 본래 노씨 집안의 여종이 아니었으므로 종살이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공연히 노씨네 종으로 간주되는 실정이었다. 한탄으로 나날을 보내던 분금은 남편을 묻은 지 1년 만에 젖먹이 영건을 등에 업고 몰래 주인집을 빠져나와 지리산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틀 동안 산길을 헤매던 분금은 지리산의 서쪽 자락에 있는 운봉을 지나 대도시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말도 있지만, 뼈대 있는 양반집에서 수년 동안 종 아닌 종살이를 한 분금은 양반들의 예의범절에 거의 통달한 편이라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녀는 질병으로 온 가족이 몰살한 어느 한미한 시골선비의 청상과부라고 했다. 영건의 성은 김씨가 됐다. 마침 그 얼마 전 역질이 남원성을 강타했던 탓에 성안엔 주인 없이 텅 빈 집이 여럿이었다. 분금은 그 가운데서도 시장 쪽으로 얌전히 앉은 초가집 하나를 골라 거처로 삼고서 오직 삯바느질에만 매달렸다. 분금은 나이 일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원체 부지런해 해마다 조금씩 재산이 늘어났다. 과부 허리춤엔 은이 서 말이란 속담 그대로였다. 영건이 스무 살쯤 됐을 때 어머니 분금은 논을 네댓 마지기나 장만했다. 영건은 어려서 서당을 몇 년 다녀 까막눈은 아니었다. 그는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 일찌감치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일에 전념했다. 잘 모르는 것은 이웃의 경험 많은 노인에게 물었고, 가끔 시장에 들러 쌀, 콩, 면화, 무명 등의 가격을 조사해 비망록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만일 콩 한 되라도 팔라치면 반드시 시세가 가장 비쌀 때 내놓았다. 이런 식으로 살림을 하다 보니 영건은 곧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됐다. 그런 아들인데도 늙은 어머니는 영건에게 늘 하는 말이 있었다.“누구에게든지 공손해라! 가난한 이웃을 잘 보살펴 주고,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만큼이나 살게 된 것은 모두 부처님의 크신 원력 덕택이다. 절간에 시주를 게을리 하지 말라!” 영건은 그 가르침을 묵묵히 따랐고, 이웃사람들이 모두 영건을 존경했다. 어머니는 세상을 뜨기 전날 밤, 아들을 머리맡에 불러 앉혀 놓고 나직이 말했다.“지금까지 네 아버님의 기일(忌日)이라 믿어온 것이 실은 함양 양반 노씨네 종 막산의 제삿날이다. 나는 그 아내 분금이다. 네 아버지는 경상도 하동 사는 김 선비인데, 이름도 모르고 아무 것도 더는 모른다. 부디 죄 많은 이 어미를 용서해라. 이제 비밀을 네게 털어놓으니 내 가슴이 후련하구나!” ●김영건과 예언서의 만남 김영건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말할 수가 없어 혼자 그저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랬는데 정 노인 사건까지 터져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천도를 핑계 삼아 절간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동안 뭐든 그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던 것인데, 갑자기 하늘이 무너진 것도 같고 인생과 세상에 대한 회의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과연 전생에 무슨 큰 죄가 있어 평생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가. 종 아닌 종이 되어 제 근본을 숨기고 가슴을 졸이며 살아야 되는 내 인생은 도대체 얼마나 불쌍한가. 언젠가 이 비밀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 자식들의 장래는 또 어찌 될 것인가. 이 놈의 세상이 아주 송두리째 바뀌어야 한다. 나같이 천한 사람도 가슴 펴고 떳떳이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와야 된다. 도무지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하구나!” 김영건이 제기한 질문들은 누구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 노인 사건 이후 영건은 사람이 달라졌다. 그의 왕성했던 식욕은 오간데 없어졌고, 일할 마음도 사실은 거의 사라졌다. 세상이 허무하다는 한 생각만이 온종일 영건의 머리에 가득했다. 영건은 그런 자기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해 더욱 고민이었다. 그나마 큰 다행은 그가 가끔은 절간에 들러 스님들과 문답을 나눌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건은 태연한 척 여러 가지 사소한 질문을 던졌다. 스님들 가운데는 더러 영건의 깊은 고민을 눈치 채는 경우도 없지 않아 찻잔을 마주한 승방 문답이 해질 때까지 오래 이어지기도 했다. 절간을 오가는 횟수는 점점 많아졌고 영건은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인연설은 물론 장차 미륵부처가 다스릴 용화세계가 지상에 실현된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밖에 승려 태진이 소지했던 것과 같은 ‘남사고비기’라든지 ‘정감록’에 관해서도 말을 많이 들었다. 정말 그 비결의 내용처럼 세상이 뒤집어져 상놈이 양반도 되는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과연 그런 세상이 올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당시 조정에선 일체의 ‘위험한’ 비결의 독서, 소장, 유포 및 출판을 엄금했다. 금지가 심할수록 비결은 더욱 유행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게 됐다. 영건도 절간에서 객승이 소지한 ‘남사고’를 한두 번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영건은 비결을 베껴 곁에 놓고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졌다. 그는 점차 비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비결을 직접 소장하지 못했고, 비결대로 세상을 바꾸려는 ‘불온한’ 사람들의 무리에 섞이지도 못했다. 그러기엔 영건의 성격이 너무도 소극적이었고 그는 이미 늙었다. 하지만 큰아들 원팔은 달랐다. 영리한 아들은 아버지의 불안과 고민을 대강 눈치 채고 있었다. 아들에겐 최봉희란 약빠른 친구도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이미 ‘남사고’를 소장하고 있었다. 아들은 최의 책을 필사해가지고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들은 위험천만한 ‘비결’ 조직에 점차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남원 양반 이유성의 문제제기 김영건 일가에 정체성의 위기가 다시 찾아온 것은 1733년이었다. 이미 칠순에 접어든 정 노인과 다시 문제가 생긴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정 노인의 외손녀사위인 이유성과 다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술 취한 정 노인이 이유성이 듣는 데서 김영건의 비천한 출신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 노인의 친구 가운데는 젊은 시절 분금을 유독 탐낸 양반이 하나 있었다. 그 양반이 참으로 우연히 남원 읍내 길가에서 이미 노인이 다 된 분금을 마주친 것이 화근이었다. 친구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 노인은 김영건을 노씨네 종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김영건의 비밀을 들은 이유성은 반드시 그것을 폭로하겠다고 별렀다. 스스로 양반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혈기 방장한 양반 이유성에게는 신분이 뒤섞이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을 뒤흔드는 범죄행위였다. 그는 가짜 양반 김영건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유성의 적의를 느낀 김영건 일가는 극도로 긴장했다. 양측의 대립은 갈수록 심각해져 마침내 상대방을 관가에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출된 양측의 문건을 검토한 이 형방은 그들의 주장에 애매한 점이 많은 데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다른 사건들이 많은 관계로 그에 대한 심리를 뒤로 미뤄놓고 있었다. 김영건의 큰아들이 남원성벽에 붙인 벽보에는 게시자가 이유성의 아버지 이여매라고 적혀 있었다. 김씨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이유성 집안에 역모 죄를 뒤집어씌울 계산이었던 모양이다. 정말 그런 단순한 계산에서 김원팔 형제는 위험천만한 벽보를 붙였을까. 아니면 혹시 어떤 비밀집단이 그들의 배후에서 벽보사건을 기획했던 것일까. 도승 자명과 변산 승려 태진, 최봉희, 김원팔 등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다음 호에서 따져볼 것이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샤론 ‘내우외환’

    이스라엘 정부가 20일(현지시간) 유대인 정착촌 철수와 요르단강 서안의 분리장벽 건설을 의결했으나 안팎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당초 발표대로 팔레스타인 수감자 500명을 21일 석방했다. 이스라엘 극우 세력들은 정착촌 철수를 ‘반역행위’로 간주하며 정부 각료들에 대한 암살 위협을 서슴지 않고 있다. 또 팔레스타인측은 서안지구와 이스라엘 영토를 분리하는 장벽 건설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장악하려는 이스라엘의 의도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공격을 모의한 혐의로 구금됐던 이스라엘 극우파 노암 페더먼은 “샤론을 없애려 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는 샤론 총리를 ‘독재자’나 ‘반역자’로 묘사하고 “히틀러가 샤론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는 낙서들이 늘고 있다. 각료들은 가족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라는 협박편지에 시달리고 있다.21개 정착촌이 철수될 가자지구의 유대인들도 반발하고 있다. 일부는 20만∼40만달러의 이주비를 받고 떠날 뜻을 내비쳤으나 상당수는 이번 계획안이 실패할 것을 기대하며 현 거주지에 남을 뜻을 피력했다. 대니 나베흐 복지장관도 “30년간 살던 집에 남겠다는 결정은 합법적”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당초 팔레스타인의 위협을 내세워 요르단강 서안지구내 16%를 가로지르는 분리장벽을 계획,2002년부터 착공에 들어갔다. 그러나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이 일자 이번에 서안지구 영토 7%만 이스라엘측에 포함시키는 새로운 수정안을 내놓았다. 장벽은 콘크리트 벽과 울타리 및 전기감시장치 등으로 건설된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로버트 김 “조국,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서한

    로버트 김 “조국,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서한

    “새해에는 저를 아껴 주신 여러분이 기다리는 고국땅을 꼭 밟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를 빼내 한국에 넘겨준 혐의로 버지니아주에서 보호관찰을 받고 있는 로버트 김(65·한국명 김채곤)이 설날을 앞둔 6일 서울신문 독자들에게 이메일과 자필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새해 인사를 전하며 고국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표시했다. 7년6개월간의 수감생활 끝에 지난해 7월 풀려난 로버트 김은 보호관찰 상태에 묶여 3년 동안은 집 근처 일부 지역만 나다닐 수 있다. 그는 버지니아주 동부 지방법원에 한국방문을 신청했지만, 지난달 27일 기각 통보를 받았다. 그는 1996년 미 해군정보국(ONI) 정보분석가로 근무할 때 한국 대사관 관계자에게 50여건의 기밀 문서를 넘겨준 혐의로 구속됐다. # “어릴 적 명절 풍경 생생, 한국행 무산 아쉬울 뿐” 로버트 김은 ‘서울신문 독자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제목의 이메일에서 “설 준비에 바쁠 명절 풍경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면서 “한국을 떠난 지 39년이지만, 어릴 적 세뱃돈을 받고 연줄에 유리가루를 풀먹여 연싸움을 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돌아봤다. 그는 “6개월이나 준비한 한국행이 무산돼 아쉽지만, 보호관찰 기간이 끝나기 전에도 방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로버트 김은 설날과 선친 김상영 옹의 기일을 맞아 고국을 찾으려 ‘보호관찰 조건 수정’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보호관찰 기간 중 해외여행을 허가해준 전례가 없고, 방문국이 기밀누설의 수혜국인 한국”이라는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 # “나도, 조국도 순진하고 바보스러웠다” 북한 관련 정보를 한국에 넘기고도 한국 정부가 외면하는 바람에 ‘공모자 없는 스파이’로 낙인 찍혀 옥살이를 해야 했던 로버트 김은 과거사 진상규명 움직임 등 최근의 국내 정세에 대해 특별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당시 한국이 아는 북한 정보는 미약했지만, 한국의 지도자들은 너무나 순진하게 한·미 군사정보 교류가 원만하게 공유된다고 믿었다.”고 지적했다. 로버트 김은 “정보가 필요했던 한국에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를 아무 생각없이 ‘유출’한 나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했던 모양”이라면서 “하지만 한국은 나의 조국이었기에 내가 그렇게 ‘바보스러운’ 일을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이 10년 전에 비해 많이 발전했다지만 아직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클럽에서 최하위를 달리고 있다.”면서 “사람은 돈이 많다고 전부가 아니라 사람답게 예절을 갖춰 행동해야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 “한국은 희망이 있는 ‘흥분할 만한 나라’” 로버트 김은 “많은 교포는 고국에 미래가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한국이 참으로 희망이 있는 ‘흥분할 만한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한국에는 풍부한 인적 자원이 있다.”고 전제하고 “미래를 보는 국가가 되기 위해 학교와 가정이 함께 청소년 교육에 나서 ‘정 있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지난해 국민 성금으로 버지니아주에 새집을 마련한 로버트 김은 “침실까지 가는 데 계단이 없는 새집은 나이 든 우리 부부에게 딱 맞는다.”면서 “고국에 계시는 여러분의 사랑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로버트 김은 “몸이 건강한데도 ‘미국의 반역자’라는 딱지 때문에 일자리를 얻기가 힘들다.”고 아쉬워하고 “보호관찰 기간이 끝나고 한국에 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로버트 김은 “우리나라 사람은 정도 많고, 인심도 좋은 데다, 또 산천도 좋으니 그것을 맛보기 위해 빨리 가보고 싶다.”면서 “하루빨리 고국을 찾아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희망으로 편지를 끝맺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코드로 읽는책] 지식인의 죄와 벌/피에르 아술린 지음

    과거사, 특히 친일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우리 사회는 갈등의 악순환을 겪어왔다. 해방후 친일 부역자 청산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친일 지식인들은 그 추종자들이 여전히 대중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에 갈등의 골이 더 깊다. 이런 측면에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사례는 우리에게 거울과 같다. 프랑스는 1944년 8월 나치에서 해방된 후 즉시 과거 청산에 들어가 약 2년에 걸쳐 나치에 협력한 1만여명을 처형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한 것은 부끄러운 과거를 바로잡지 않으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없으며, 올바른 미래를 건설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죄와 벌’(피에르 아술린 지음, 이기언 옮김, 두레 펴냄)은 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에서 이뤄진 지식인 숙청을 다룬 책이다. 신문이나 일기, 회고록, 재판 기록 등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객관적·중립적인 관점에서 지식인 숙청의 실상을 정리했다. 눈에 띄는 점은 일방적으로 숙청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 프랑스에서도 과거청산문제를 놓고, 특히 나치에 부역한 지식인들의 숙청 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약 반년에 걸쳐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과 카뮈가 벌인 논쟁이다. 가톨릭 신자이며 부르주아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모리악은 저항운동을 펼친 지하신문 ‘프랑스 문예’에 카뮈, 사르트르 등과 함께 참여했음에도 우익 대변지 ‘르 피가로’를 통해 숙청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국민화합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카뮈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어온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하신문‘투쟁’지를 통해 모리악의 자비론을 다음과 같이 강력 비판했다. “나는 증오에 대해 조금의 애착도 없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반역자를 사랑할 줄 아는 모리악을 존경하지만, 시민으로서의 나는 모리악을 불쌍하게 여긴다. 이러한 사람은 우리에게 반역자와 졸개들의 나라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회를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보수 지식인들이 숙청에 반대한 데는 자비론이나 국민들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 말고도 지식인들이 특히 가혹하게 처벌받고 있는 데 대한 동정과 저항도 작용했다. 문인이나 언론인, 출판인 등 지식인들이 다른 분야 부역자보다 더 엄중하게 처벌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역사적 범죄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지식인들에게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며, 글쓰기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저자는 프랑스의 지식인 숙청 과정의 문제점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고의든 아니든 숙청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런 점에서 보면 숙청은 목표라기보다는 수단인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친일 청산에 대한 입장이 어떻게 갈리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1만 28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儒林(262)-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62)-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일찍이 공자는 민자건의 효행을 칭찬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남기고 있었다. “효성스럽다, 민자건이여. 그의 부모형제들이 칭찬하는 말에 다른 사람들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실제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아버지가 반역자로 처형된 데다가 어릴 때부터 키가 작고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았던 구양순(歐陽詢·557∼641)은 당고조의 칙령을 받들어 ‘예문유취(藝文類聚)’ 백 권을 편찬하였다. 이 책의 설원(說苑)편에서 민자건의 효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민자건은 두 형제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다른 여인을 들여 재취하였다. 그리하여 또 두 아들을 낳았다. 어느 날 민자건의 아버지가 관가에 가려고 외출을 하는데 마침 마부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 민자건을 불러 수레를 끌도록 하였다. 그날은 몹시 추운 한겨울이었는데 추위에 떨고 있던 민자건이 수레를 끌자 수레도 저절로 떨렸다.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민자건에게 물었다. ‘네가 어디 아픈 거냐. 아니면 추워서 떨고 있는 거냐.’ 그러자 민자건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아닙니다. 춥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말고삐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아버지가 그의 팔을 잡아주다가 문득 그의 옷이 매우 얇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의 계모가 낳은 아이들을 불러 팔을 만져보았는데 그들의 옷은 매우 두툼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계모를 불러 꾸짖었다. ‘내가 당신에게 장가를 든 것은 무엇보다 어미를 잃은 두 자식 때문이었소. 그런데 당신은 나를 속이고 있으니 당장 집을 나가시오.’ 이로써 후처는 집을 쫓겨나가게 되었는데, 민자건이 이를 막아 세우고 난 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어머니가 계시면 한 아들만 옷이 얇지만 어머니가 떠나가시면 네 아들이 모두 헐벗게 됩니다.’” 민자건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계모를 불러들이는 한편 계모도 더 이상 차별을 하지 못하여 화평하였다는 얘기인데, 후세에 민간에는 민자건의 계모가 자기자식에게는 솜을 두어 입히고 민자건에게는 갈대꽃(蘆花)을 두어 입히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으로 얘기가 바뀌어 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덕행과 효행이 뛰어난 민자건을 세도가들이 그대로 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 계강자는 자신의 채읍인 비를 다스릴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비는 대대로 계손씨의 도성이었는데 이미 전유로부터 배신을 당해 정벌까지 하였던 계강자는 충성스럽고 덕행이 뛰어난 후임자를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계강자는 민자건의 소문을 듣자 아버지에게 효성이 깊은 민자건이야말로 자신의 도성을 다스릴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민자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그대를 비땅의 읍재로 삼으려 한다. 그러니 이를 사양하지 말고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효행이 뛰어난 의인이었을 뿐 아니라 권세에도 굴하지 않는 의기를 지녔던 민자건은 단숨에 이렇게 거절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제발 저를 위해 사절하여 주십시오. 만약 다시 저를 부르신다면 저는 반드시 문수(汶水)가에 나아가 숨을 것입니다.”
  • [화두로 본 2004 정치] 수도이전 위헌에 “관습헌법이 뭐야”

    [화두로 본 2004 정치] 수도이전 위헌에 “관습헌법이 뭐야”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4·15총선 물갈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신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 국가보안법 폐지안 개혁입법 처리 논란….2004년 정국은 충격적이고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점철됐다. 올해만큼 정치가 ‘청룡열차’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한 적도 없었다는 평가가 많다. 말 그대로 넘치는 말잔치 속에 올해 정국의 다사다난했던 변화를 조망해보기 위해 화두를 주제로 한 정치 캘린더를 꾸며본다. ●1월, 오세훈 의원의 불출마 선언과 물갈이 열풍 여야 중진 의원들이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줄줄이 구속됐다. 수사가 막바지에 접어들자 한나라당의 초선 오세훈 의원은 6일 “정치가 아니라 전쟁을 하듯 늘 갈등만 했던 게 부끄럽다.”며 4·15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는 정치권 ‘물갈이 열풍’으로 번져 자진 사퇴 의원들이 잇따랐다. 그는 ‘돈 안드는 정치’를 위한 정치자금법, 선거법 등을 만드는 데 일조해 이들 법안은 ‘오세훈법’으로 통했다. ●2월,與 ‘총선 올인’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은 13일 “총선에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공직자 사퇴시한 15일을 이틀 앞둔 때였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총선 출마 압력을 견디다 못해 12일 사퇴해버렸다. 참여정부는 총선용으로 징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진표 경제부총리, 이영탁 국무조정실장, 한명숙 환경부 장관, 변재일 정통부 차관 등을 총선 출마에 합류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어떤 일이 생길지….”라는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3월, 노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노 대통령은 2월24일 방송클럽 토론회에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압도적 지지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3월4일 “선거법 9조의 공무원 선거중립 의무 위반”이라고 밝혔고, 의견서를 청와대로 보냈다. 이에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9일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다. 노 대통령은 11일 사과를 거부하고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 뜻에 따라 정치적 결단을 하겠다.”며 재신임과 연계시켰다. 야당은 12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고, 이날 오후 5시15분 대통령의 권한은 공식 정지됐다. 한나라당은 23일 여의도 천막당사 시대를 열었다. ●4월, 정동영 의장 ‘노인폄하 발언’ 파문 열린우리당 정 의장의 3월26일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해도 괜찮다. 집에서 쉬셔도 된다.”는 발언이 인터넷에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탄핵 ‘후폭풍’으로 총선에서 299석 중 3분의2석을 싹쓸이 할 것이라는 전망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정 의장은 12일 선대위원장·비례대표 후보에서 사퇴했다. 열린우리당은 초선 108명(108번뇌)을 포함해 151석,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의 선전 속에 121석을 차지했다. 민주노동당은 10석으로 첫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5월, 탄핵소추안 기각 헌법재판소는 14일 “중대한 헌법과 법률 위반이 아니다.”고 노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윤영철 헌재 소장은 최종 기각 주문을 내리기 전에 “대통령의 권한과 정치적 권위는 헌법에 부여받은 것이며, 헌법을 경시하는 대통령은 스스로 권한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라며 ‘충고’의 메시지도 전달했다. 고건 국무총리는 대통령 직무대행직을 그만두게 됐고,24일 사표를 제출했다. ●6월, 책임총리제 도입 노 대통령은 8일 5선 중진인 열린우리당 이해찬 의원을 새 총리 후보로 공식 지명했다. 앞서 경남지사 출신의 김혁규 의원을 총리후보로 내정했으나, 당 안팎의 반발로 관철되지 못했다. 노 대통령의 정치특보였던 문희상 의원은 노심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다가 내부 반발이 일자 “나는 총독이 아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는 14일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와 관련해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발언했다가 파문을 일으켰고,30일 정 전 의장과 함께 보건복지부 및 통일부 장관에 각각 임명됐다. ●7월, 박근혜 대표 ‘국가 정체성 전면전’ 한나라당 박 대표는 19일 전당대회에서 재선출됐고,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돌아가신 분과 싸우자는 것이냐.”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킨 열린우리당의 ‘친일진상규명법’에 반발했다. 박 대표는 2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간첩과 빨치산을 민주화 인사로 판정했는데 대통령이 경고 한번 하지 않았다.”면서 “정부가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상황이 계속되면 야당이 전면전을 선포해야 할 시기가 올 것으로 본다.”고 강경 대응을 선언했다. 강금실 법무장관은 28일 사퇴하면서 “너무 즐거워 죄송하다.”는 어록을 남겼다. ●8월,與 지도부 친일행적 논란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논란이 돼 온 부친의 친일 행적이 사실로 확인되자 19일 의장직을 사퇴했다. 열리우리당에선 과도체제 주장 등이 제기됐으나 당헌 당규에 따라 이부영 의장이 승계했다. 친일과 관련한 시련은 광복절이 끼어 있는 8월 계속 열린우리당 지도부을 괴롭혔다. 친일진상규명법을 추진하던 김희선 의원은 ‘할아버지 김학규 장군’ 혈통 논란에 시달렸다. 이미경 상임중앙위원도 아버지가 일제시기에 일본에서 헌병을 지낸 전력이 드러나 곤혹을 치렀다. ●9월 노 대통령,‘국보법 박물관으로 보내야’ 노 대통령은 5일 MBC ‘시사매거진2580’과의 대담프로에서 “국가보안법은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지금은 쓸 수도 없는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라며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발언은 국보법과 관련해 열린우리당에서 사분오열되고 있던 의견을 ‘폐지’로 확고하게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고, 한나라당 박 대표는 “법치국가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10월, 관습헌법으로 수도이전 위헌 열린우리당은 국보법 등 4대 입법을 당론을 확정짓고 연내 관철을 선언했다. 헌재는 21일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에 대해 재판관 8대 1로 ‘관습헌법론’을 토대로 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지난 7월12일 서울시 의원 50여명과 공무원 대학생 등 169명의 청구인단이 헌법소원을 했을 당시 언론들도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이 위헌판결이 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처음 들어보는 이론”이라고 불만을 표시했고, 한나라당은 환호했다. ●11월, 이 총리 ‘차떼기 당’발언 논란 이 총리는 10월28일 정치분야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한나라당은 지하실서 차떼기하고 고속도로에서 수백억 받은 당”이라고 발언한 것을 놓고 한나라당이 반발하면서 국회 파행으로 이어졌다. 이 총리가 한나라당 폄하 발언과 함께 “조선·동아일보는 역사의 반역자”라고 했다가 설화를 입었다. 한나라당은 이 총리가 사과할 것을 요구하며, 대정부 질의를 거부해 국회는 2주일이 넘도록 공전됐다. 이 총리는 9일 ‘사의’라는 이름으로 사과했다. ●12월, 이철우 의원 北 노동당원 논란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8일 국회 본회의 5분 발언에서 “열린우리당 포천·연천의 이철우 의원이 지난 92년 노동당원으로 현지 입당하고 당원번호까지 받았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열린우리당은 ‘수구 냉전세력의 백색테러’로 규정하며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기로 하는 등 강력히 대응했다. 주 의원은 “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다.”는 주장도 곁들였다가 오히려 ‘색깔론’,‘정형근 의원 고문 논란’ 등 역풍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문소영 박지연기자 symun@seoul.co.kr
  • [오일만특파원 베이징은 지금] 살인 부른 온라인게임 광풍

    중국에서 열풍처럼 불고 있는 온라인 게임이 살인사건으로 번지는 비극이 잇따르고 있다. 인터넷 게임에 중독된 취안융즈(全永智·29)와 그의 여자친구는 최근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레전드 월드’라는 대결 게임에서 ‘반역자’(逆天)라는 네티즌에게 늘 ‘살해’당하는 것에 앙심을 품고, 살인을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ID ‘반역자’가 모 대학 대학원생 왕(王)씨인 것을 확인한 취안은 지난달 29일 왕씨의 단골 게임방으로 찾아가 뺨을 때리며 ‘항의’를 하다 급기야 싸움을 말리던 왕씨 친구 쉬(徐)씨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것이다. 또 온라인 게임의 고수로 불렸던 자오신(趙欣·23)은 인터넷에서 사귄 여자친구 류(劉)모양을 살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난한 고학생 자오는 수년전 실연을 당한 뒤 도피처로 택한 온라인 게임에 몰두,2년만에 게임의 고수로서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자오는 인터넷 채팅에서 만난 류모양과 사랑을 키웠고 ‘인터넷 동거’를 거쳐 ‘현실의 애인’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현실로 돌아서는 순간 비극이 시작됐다. 결혼까지 약속한 류모양은 대학생이 아닌, 노래방 접대부로 밝혀졌고 ‘사기’를 당한 것에 격분, 그녀를 살해한 것이다. 미국에 이어 세계 2대 인터넷 대국인 중국은 각종 인터넷 범죄로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중국 최대도시인 상하이(上海)의 경우 지난해 청소년 범죄 가운데 26%가 인터넷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상하이시 검찰 주샤오핑 청소년과장은 “폭력적인 온라인 게임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청소년 범죄가 매년 30% 이상 늘고 있다.”고 밝혔다. 인터넷 비용을 위한 강도 사건이나 모방적인 성범죄가 급증하는 것도 최근의 추세다. 중국의 저명한 심리 전문가인 왕샹난(王翔南) 박사는 “현실과 공상이 뒤엉키면서 성인 모방 충동이 강한 청소년들의 심리적 공백은 심각한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oilman@seoul.co.kr
  • 儒林(216)-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16)-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그러고 나서 거백옥은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말을 아무리 사랑한다 하더라도 하찮은 것으로 노여움이 생기면 사랑이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 사마귀처럼 무모하게 권력자와 맞서서도 안 되고 호랑이를 기르듯 그의 성질을 따라 잘 길들여야 하며, 말을 다루듯 조심하여 권력자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만 조심하면 천성이 경박하고 무도한 권력자와도 어울려 지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벼슬을 함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행동, 상대의 본성을 따르는 처세가 가장 적절한 몸가짐이라 할 것입니다.” 거백옥의 초청으로 다시 위나라에 간 공자는 그러나 전보다 더 초라한 식객으로 전락한다. 영공과의 관계도 소원해져서 완전히 소외되는데 이 장면을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어느 날 영공은 공자를 불러 군진법(軍陣法)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 군진이란 군대가 전투에 임해서 펼치는 진영(陣營)을 말하는 것으로 영공이 공자에게 군진에 대해서 물었던 것은 공자가 전투경력은 전혀 없는 백면서생임을 비웃는 일종의 말장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공의 속마음을 꿰뚫은 공자는 다만 이렇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제사 지내는 일에서는 일찍이 들은 바가 있사오나 군사에 관한 일은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뿐이 아니다. 영공이 얼마나 공자를 무시하였던가는 사기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영공의 태도로 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공자는 다음에도 영공과 대담한 적이 몇 번 더 있었다. 그러나 대화 도중 영공은 날아가는 기러기나 쳐다보면서 공자의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무시당한 공자는 다시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간다. 이때가 기원전 492년 공자의 나이 60세 때였다. 그러나 공자가 진나라에 들어간 이후에도 전국시대의 정세는 극도로 혼란한 난세였다. 그것은 그해 여름 위나라의 영공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손자인 첩이 왕위에 올라 출공(出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태자는 괴외였으나 망명 중이었으므로 혼란기를 틈타 괴외의 아들인 첩을 왕위에 옹립하였던 것이다. 이 기회를 간웅 조간자가 놓칠 리가 없었다. 마침 괴외가 자신의 영토에 도망쳐 와 있었으므로 괴외를 위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할 수만 있다면 손쉽게 위나라를 손아귀에 쥘 수 있고,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괴외와 그의 아들인 첩 사이에 권력쟁탈전을 벌이게 하기만 해도 위나라는 국력이 분열되어 쉽게 병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간자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영토에 망명해 있었던 반역자이자 야심가인 양호야말로 이런 일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점찍어 두고 있었다. 따라서 조간자는 양호로 하여금 태자 괴외를 호송하여 위나라에 들어가도록 계략을 꾸몄다. 양호는 괴외를 상주로 꾸미고 8명의 장정들에게도 모두 상복을 입힌 다음 마치 위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어 모셔가는 듯이 가장하고 위나라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모두 머리를 풀고 통곡하면서 영공의 죽음을 슬퍼하였으나 실은 국민들을 속여 자기들 편에 끌어들이려는 계략에 지나지 않았다. 출공은 군사를 파견하여 아버지 괴외의 입국을 막았지만 죽일 수는 없었다. 괴외와 양호는 위나라 땅 척으로 들어가 그대로 눌러앉아 살기 시작하였는데, 차마 아버지를 공격할 수 없었던 출공은 제나라에 부탁하여 척을 포위하여 달라고 간청한다. 제나라는 양호에 대한 반감이 있었으므로 즉시 척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함으로써 공자는 또다시 뜻하지 않은 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 儒林(211)-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11)-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자로의 말은 실로 준엄하였다. 평소에 말과 생각과 행동의 일치함을 군자가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라고 가르치고 있던 스승 공자가 반역자의 초청에 응하려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렇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지. 그러나 지극히 단단한 물건은 아무리 갈아도 닳아 엷어지지 않고 지극히 흰 물질은 아무리 검게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썩어서 먹을 수 없는 박이 될 때까지 한 군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어떻게 매달려 있는 채 밥도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를 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어디든 가서 도를 행하고 싶다.” 썩어서 먹을 수 없는 박. 쓸모없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박. 이 무렵 공자가 얼마나 자조하고 있었던가는 자신을 그렇게 묘사한 대목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밥도 먹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한 것을 보면 궁핍한 생활까지 영위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때 공자의 심경을 알려주는 일화가 사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위나라에서 어느 날 공자가 경(磬:돌로 만든 악기)을 연주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삼태기를 지고 공자의 문 앞을 지나다가 말하였다. ‘마음속에 딴생각이 있구나. 저 경을 치는 품이.’ 그리고 또 말하였다. ‘천하다. 각박한 소리를 내다니.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을. 시경에 말했듯이 물이 깊으면 옷 벗어 들고, 옅으면 옷 걷고 건너야만 하는 것을.’” 공자가 경을 연주하는 음악 소리를 듣고 공자를 천하다고 비판한 익명의 사람은 공자의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 현인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이 현인들은 주로 노자의 사상을 따르는 은둔자들인데, 그들의 눈으로 보면 물이 깊으면 옷 벗어 들고, 옅으면 옷을 걷고 건너면 되는 한세상을 물이 깊거나 말거나 옷을 입고 의관을 정제한 채 예를 갖추어 물을 건너려는 공자의 허례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공자는 하릴없이 위나라에서 마음에도 없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허송세월을 한 것처럼 보인다. 평소에 음악을 좋아하여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樂者 天地之和也)’라고까지 극찬한 공자였으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 없이 철저히 소외당한 채 음악을 연주하는 공자의 신세는 그야말로 ‘상갓집의 개’와 같은 처량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공자는 그저 세월을 낭비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 공자는 거문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다른 악기들은 다 다룰 줄 알았으나 거문고에 대해서는 백지인 공자는 위나라의 저명한 악사인 양자(襄子)에게 거문고를 배움으로써 무위를 달래고 있었다. 무엇이든 한번 공부하기 시작하면 철저하게 탐구하는 공자의 학문태도는 여기서도 엿보이는데, 이러한 공자의 면학정신이 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악사 양자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그러나 열흘 동안 겨우 한 곡을 간신히 배운 것이 고작이었다. 양자가 말했다. ‘이제 다른 곡으로 넘어가시지요.’ 그러나 공자는 머리를 흔들면서 대답하였다. ‘아니오. 나로서는 이제야 그 곡조를 습득했을 뿐 절주(節奏)와 수(數)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오.’ 며칠 후에 양자가 다시 말했다. ‘이제는 절주의 수리(數理)를 습득했으니 다른 곳으로 넘어가시지요.’ 그러나 공자는 다시 대답하였다. ‘아직도 이 곡의 뜻을 모르고 있소.’ 며칠 뒤에 양자가 물었다. ‘이제는 뜻을 아셨겠지요.’…”
  • “盧대통령 이념적 발언 자제를” 김부겸의원 공개 비판

    “정말 오랜만에 소신 있는 열린우리당 의원을 보게돼 흐뭇합니다.” “힘없이 맨날 공격당하는 대통령에게 힘을 주지는 못할망정…. 정말 지지자들 복장터지는 거 보고싶소?” 28일 열린우리당 김부겸 의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네티즌들의 ‘찬사’와 ‘비난’이 뒤엉켰다. 이날 김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작심하고 비판한 데 따른 반응이었다. 평소 좀처럼 튀는 발언을 하지 않는 편인 김 의원의 이날 발언은 놀랄 만큼 직설적이었다.“무엇보다 대통령은 이념문제에 대해서는 한발짝 물러났으면 좋겠다. 그것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대통령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가급적 국회에 맡기는 것이 맞다.” 김 의원은 ‘남과의 비교’도 불사했다.“존경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의 최대 피해자였지만, 자기 생각을 밝힌 적이 있었나.…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언론한테 무지하게 당했지만 노변정담을 통해 국민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메시지를 줬다. 모름지기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한다.” 김 의원은 이해찬 국무총리한테도 일격을 날렸다.“출타중 총리의 언표 또한 총리답지 않았다. 뭣하러 특정 신문이 역사의 반역자니 뭐니 했나.” 정권 초반에, 그것도 친노(親盧)세력이 당내의 주축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재선급 여당 의원으로서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고언(苦言)을 던진 것은 그 자체로 과감무쌍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재야파인 김 의원이 내년 초 당의장 경선 출마를 앞두고 당내 중도세력을 유인하는 동시에 독자적 카리스마를 구축하기 위한 장기 포석의 일환이란 관측도 나온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儒林(208)-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08)-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타인과의 약속을 신과의 맹세처럼 생각했던 공자가 공숙씨와의 약속을 이처럼 헌신짝처럼 버린 일은 놀라운 일이다. 단 한번도 약속을 어긴 일이 없었던 공자의 파격적인 행동은 이것이 단 한 번의 예외인 것이다. 공자가 포땅을 벗어나 단숨에 위나라로 발길을 돌리자 원칙주의자인 자공이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방금 공숙씨들과 절대 위나라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 약속을 어겨서야 되겠습니까.” 자공의 질문에 공자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강요에 의한 맹세는 신도 듣지 않는다.” 생명을 위협하는 감금상태 중 일반적인 강요에 의해서 맺어진 협약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공자의 대답은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던 예수의 태도와 상극을 이룬다. 예수는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굳은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로마인 총독 빌라도가 ‘나에게도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인가. 나에게는 너를 놓아줄 수도 있고, 십자형에 처할 수도 있는 권한이 있는 줄 모르느냐.’라고 마지막 회유를 하였을 때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공자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거짓말까지 마다하지 않는데, 이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공자는 현실의, 현실을 위한, 현실에 의한 현실주의적 사상가였던 것이다. 공자는 마침내 위나라로 다시 들어가는데 이것이 세 번째의 입국이었다. 사기에는 이때도 영공이 ‘공자가 왔다는 기별을 받고 교외까지 반갑게 마중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차츰차츰 공자에 대한 대우는 소홀해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공자가 입국했을 때에는 6만 두의 곡식을 녹봉으로 주었으나 두 번째는 영공 자신이 교외에까지 마중하고 부인인 남자도 공자를 회견했었다. 그러나 세 번째로 위나라로 들어왔을 때에는 교외까지 마중은 했으나 영공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고 은근히 공자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 행동은 공자가 포땅에서 반기를 들었던 공숙술 일당에게 곤혹을 치렀단 말을 전해 듣고 공자에게 한 행동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대가 포땅에서 공숙 일당으로부터 큰 수난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소. 어차피 공숙 일당은 반역자라 이들을 토벌하고 싶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영공의 말에 공자는 대답하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공자는 개인의 원한 때문이 아니라 국가에 반기를 든 모반자들은 반드시 처벌하여 국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동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영공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런데 우리 대부들은 이를 불가하다고 말하고 있소. 포는 위나라의 서쪽에 있어 동쪽으로 쳐들어오는 진나라와 초나라를 막는 요충지로 생각하고 있소. 나는 포를 치고 싶은데 말이오.” 망설이는 영공을 향해 공자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제가 본 바에 의하면 포나라 사람들은 공숙술의 편이 아닙니다. 그곳 남자들은 그곳을 다스리는 공숙씨의 지배를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있고, 그곳 여자들은 그곳을 평화로이 유지하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군사를 내어 정벌하신다면 금방 반역자들을 잡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숙씨를 따르는 무리들은 불과 4,5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자 자신이 직접 공숙씨의 군세를 본의 아니게 염탐까지 하였으므로 신빙성이 있었다. 이에 영공은 크게 반기며 말하였다. “좋소. 당장 군사를 동원하여 포를 치겠소.”
  • [사설] 여권 특정언론 비판 자제해야

    언론개혁입법이 탄력을 받고 있는 가운데 특정언론을 겨냥한 여권 고위인사들의 감정적인 비판이 이어지고 있어 걱정스럽다. 언론이라고 해서 비판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행정과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는 고위인사들이 원색적 표현으로 특정언론을 공격하는 것은 정권의 언론관이나, 균형감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기에 충분하다. 이해찬 국무총리는 지난 18일 베를린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역사의 반역자”라고 비판하면서 “조선·동아는 더이상 까불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 열린우리당의 이부영 의장도 20일 조선·동아일보는 과거행적에 대해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여권 핵심인사들이 개인적 경험에 의해 언론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또 술자리 간담회였다고 하더라도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국무총리의 감정섞인 공개발언은 문제가 있다. 뒤질세라 같이 몰아붙인 집권당 대표의 발언도 가벼워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언론의 핵심기능은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비판기능은 권력으로부터 존중받지는 못할지라도 멸시당하고 휘둘려서는 안 된다. 언론도 사람에 의해 운영되는 제도인 만큼 잘못과 실수는 있을 수 있다. 떳떳지 못한 오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독자와 시민, 관련법·제도의 판단을 통해 해결할 일이지 정권이 직접 재단할 일은 아니다. 현재 진행중인 언론개혁 논의도 이런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 어떤 언론사가 됐든간에 여권의 핵심인사들이 경쟁하듯 공격을 하는 것은 언론개혁 입법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 李총리 “조선·동아 역사 반역자” 취중진담?

    李총리 “조선·동아 역사 반역자” 취중진담?

    ●베를린서 특파원과 술자리 헝가리 진보정상회담에 이어 유럽을 순방 중인 이해찬 총리가 “조선·동아는 역사의 반역자” “조선·동아는 내 손 안에 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용납할 수 있어도 조선일보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등의 표현을 써가며 조선·동아일보를 강도높게 비판해 파란이 일고 있다. 19일 연합뉴스와 이데일리 등에 따르면 이 총리는 18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을 방문, 현지 특파원과의 술자리를 겸한 간담회 자리에서 이같이 발언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총리는 술을 약간 마신 상태에서 보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친 표현을 쏟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나라 어지럽히고 국민 호도” 이 총리는 “조선·동아일보가 정권을 농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이나 나나 끝까지 철저하게 싸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조·동이 심지어 나라의 인사를 좌지우지한 일도 있으며, 박정희 시대엔 안기부(중앙정보부를 잘못 말함)의 정보로 특종하기도 했으나 한 번도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 일은 없다.”면서 “그러나 이젠 ‘밤의 대통령’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이 총리는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약간 우파적’이라고 자평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ㆍ동은 나나 정부를 용공이나 부패로 몰려 하고, 수도 없이 공격하면서 나라를 어렵게 하고 국민을 호도시켜왔다.”고 말했다. 또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는 퇴보한다. 한나라당식대로 하면 북한에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북한의 급격한 붕괴를 원하지 않는다.”면서 “역사발전에 기여해야지 자기를 위한 역사왜곡은 안된다.”며 야당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 총리는 자리를 끝내면서 “타협해서 보수세력의 부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도 절대 타락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절대로 보수언론의 왜곡 보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말로 정리했다. 이 총리는 7박8일간의 유럽순방 일정을 마치고 20일 귀국한다. ●한나라 “술깨고 귀국하시지…” 한편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은 19일 ‘술 취한 총리, 술 깨고 귀국하시지요’란 제목의 논평을 내고 “총리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처신인데, 이런 것이 참여정부가 말하는 개혁이고 진보의 실체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면서 “총리가 비판언론에 대해 극도의 적대감을 표출하고 언론을 권력실세의 손바닥 안에 있는 조약돌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儒林(200)-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00)-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진나라를 가려면 송나라를 통과하여야 했는데, 그 과정에 있는 광 땅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하북성 대명도의 장환현(長桓縣)인 광 땅을 지날 때였다. 이때 제자 안각(顔刻)이 공자가 탄 수레를 몰고 있었는데, 안각이 말채찍으로 성벽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전날 제가 이곳에 왔을 때에는 저쪽 무너진 성벽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광읍의 주민들은 얼핏 이 말을 듣고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다시 침략해온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양호는 노나라의 반역자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 제나라로 도망쳤던 역적이었다. 제나라는 뒤에 노나라의 요구로 양호를 체포하여 가뒀는데, 그는 다시 송나라로 달아났었다. 송나라로 도망쳐온 양호는 부하들을 몰고 와서 광 땅을 점령하고 횡폭한 짓을 일삼다가 인심을 잃고 다시 진나라로 쫓겨난 뒤부터 광 땅의 주민들은 양호에 대해 치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건장한 공자의 생김새가 양호의 모습과 비슷해서 반신반의하고 있던 주민들은 안각의 말을 듣자 이들을 또다시 침략해 온 양호의 무리들로 착각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공자 일행들을 구금하여 닷새 동안이나 가둬 두었다. 공자는 별다른 걱정없이 금을 타며 노래만을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태연스럽게 노래만 부르던 공자의 마음도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닷새 후, 뒤따라온 제자 안회가 도착하자 공자가 외치며 말하였다. “무사했구나. 난 네가 벌써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던 수제자로 30세나 어렸으나 유독 안회에 대해서만은 여러가지로 칭찬한 공자의 말이 논어에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안회를 수제자로 삼으려는 공자의 각별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 밥과 한 쪽박 물을 마시며 누추한 거처에 살고 있다면 남들은 괴로움도 감당치 못할 것이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참으로 어질도다, 안회여.” 이처럼 안회는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던 탓일까. 이미 29세의 나이 때 온 머리가 하얗게 세었으며, 스승 공자에 앞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이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하며 통곡을 금치 않았다. 그러한 안회가 닷새 동안이나 보이지 않자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탄식한 공자의 태도로만 보더라도 공자가 얼마나 광 땅의 주민들에게 구금되어 시달림을 받았는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안회는 대답하였다. “선생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 그러나 주민들의 위협은 더욱더 거세졌다. 간자(簡子)가 군사를 이끌고 공자 일행을 더욱 사납게 포위하자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여전히 금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자로가 나서서 말하였다. “저들이 우리를 죽이려 합니다. 죽을 바에는 차라리 나가서 싸우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선생님은 태연히 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하였다. “주의 문왕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가 제정한 문화는 바로 나에게 전해 내려오지 아니하는가. 하늘이 만약 그 문화를 없애 버리고자 하셨다면 후세에 태어난 나에게 그러한 문화를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몸에 이렇게 문왕의 문화가 전해져 있는 것을 보면 하늘의 뜻은 주의 문화를 없애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제까짓 광읍 사람들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 儒林(183)-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儒林(183)-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사기에서는 공자를 중도재에 임명한 사람이 정공으로 되어 있으나 이때 정권은 완전히 계환자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계환자에 의해서 공자가 중용되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계환자는 반역자인 양호와 공산불뉴를 몰아내고 내란을 평정한 후 그들에게 협력하기를 거절했던 공자의 바르고 곧은 인격에 감화되었던 것 같다.그보다도 계환자가 공자를 등용한 첫 번째 이유는 민심을 수습할 필요 때문이었다. 이 무렵 공자는 명망을 떨치고 있었다.사마천은 이즈음의 공자를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시,서,예,악의 연구에 몰두하면서 제자들 가르치기에 열중하고 있었다.제자들은 점차로 불어났다.먼 곳으로부터 찾아와 공자의 문하에 드는 제자들도 많았다.” 계환자는 이러한 공자를 정치에 끌어들임으로써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내란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맹의자(孟懿子)에게 알맞은 행상(行賞)까지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맹의자는 공자의 제자였는데,그의 이름은 논어에 단 한번 나오고 있다. “맹의자가 효(孝)에 대해서 물으니 공자께서는 대답하셨다. ‘효란 (부모의 뜻을)어기지 않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맹의자가 내란에서 전공을 세우자 계환자는 맹의자에게 벼슬을 내리려 했는데,그는 자신보다 스승인 공자에게 내려줄 것을 간언하여 계환자는 일석이조의 호기회를 놓칠 필요가 없어 곧바로 공자를 중도재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이런 태도는 노자의 태도와 양극단을 이루고 있다.노자와 공자가 서로 운명적인 상봉을 하고난 후 노자는 적극적으로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 세상 밖으로 사라져 버린 것에 비해 공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중도재란 벼슬까지 맡게 되는 것이다.이는 유가의 도와 도가의 도가 근본적으로 다른 극단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자의 유일한 저서인 ‘도덕경’이 그 첫머리에서부터 도에 대해서 시작하고 있다면 공자도 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심지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아침에 도에 관해서 알게 된다면 저녁에 죽게 된다 해도 괜찮다(朝聞道夕死可矣).” 도를 깨달을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 공자.그렇다면 공자의 도와 노자의 도는 무엇이 다른가. 공자는 도에 대해서 논어의 곳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이른바 대신이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안 되면 물러가야 한다(所謂大臣 以道事君 不可則止).” “나라의 도가 행해지고 있으면 녹을 먹지만 나라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녹을 먹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邦有道穀 邦無道穀 恥也).” “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게 된다(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 “군자의 도는 세 가지가 있는데 나는 아직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지혜 있는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君子道者三 我無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
  • 儒林(182)-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儒林(182)-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자로가 스승 공자를 만류한 사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공자는 공산불뉴의 초청을 받고 말하였다. ‘생각해 보니 옛날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소읍인 풍(豊)과 호(鎬)에서 일어나 왕업을 이룩하여 천자가 되지 않았던가.지금 비 땅도 작은 것이긴 하지만 나의 도를 실천하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공자가 비로 떠나려 하자 제자 자로가 언짢게 여기면서 공자를 만류하였다. ‘그만 두십시오.스승답지 않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나를 부르는 사람이 어찌 공연히 부르겠느냐.나를 통하여 새로운 동주(東周)를 이룩케 하려는 뜻인 것 같다.’” 이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아무도 자신을 등용해 주는 사람이 없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공산불뉴로부터 초청을 받자 그곳이 비록 작은 땅이지만 잘만 하면 문왕과 무왕처럼 왕업을 이룩할 수 있다고 자위하면서 소읍인 비로 가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를 만류한 사람은 거침없이 바른말을 하던 제자 자로.그는 공자가 듣기에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그만 두십시오,스승님답지 않습니다.’라고까지 핀잔하면서 이를 말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자보다 자로의 태도가 더 옳았던 것으로 곧 판명된다. 원래 공자를 초청한 공산불뉴는 반역자였다. 사기에 의하면 정공 8년(기원전 502년) 공자 나이 50세 때에 계씨의 가신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공산불뉴가 계씨와 사이가 벌어져 양호를 충동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그리하여 양호와 공산불뉴는 삼환(三桓)씨의 적자를 폐지하고 비교적 양호와 사이가 좋은 서자들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려고 마침내 계환자를 잡아 가두었던 것이다.그러나 계환자는 절대로 복수하지 않겠다는 맹약을 하는 속임수를 써서 감옥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는데,손아귀를 벗어나자 계환자는 삼환씨의 군대를 동원하여 양호를 반격하니 양호는 결국 패하여 제나라로 도망쳤던 것이다. 원래 공자는 노나라의 임금이었던 소공과 정공들을 무시하고 세력을 떨치던 삼환씨에 대해서도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삼환씨들은 환공(桓公)의 자손들인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씨들을 말함인데,이들은 자신들의 권세만을 믿고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천하의 권력을 자신들 맘대로 주무르던 대부들이었다.그러나 이들의 가신이었던 양호와 공산불뉴가 난을 일으켜 삼환씨들을 가두고 권력을 독점하자 노나라의 정치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양호는 일찍이 공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돼지를 선물로 보냈던 적신(賊臣).‘나라를 잘 다스릴 보배를 지니고 있으면서 나라를 혼란한 채 내버려 둔다면 그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유혹하였던 반역자.이때 공자는 양호의 노골적인 유혹을 ‘좋습니다.장차 나도 벼슬을 하겠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렸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불뉴라고 해서 양호와 다른 사람은 아닌 것이다.오히려 공산불뉴는 양호를 충동질해서 반란을 일으킨 모사꾼이 아닌가.아무리 자기를 등용해 주지 않는다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공자라 할지라도 그런 공산불뉴가 초청한다고 해서 어떻게 성큼 가려 했던 것일까.결국 공자가 떠나려 하자 ‘그만 두십시오.스승님답지 않습니다.’라고 말렸던 자로의 태도가 더 현명했던 것이다. 자로의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방자하게 권력을 휘두르던 이들의 모습에 실망했는지 공자는 끝내 공산불뉴의 초청을 거절한다.사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공자는 끝내 비로 가지 않았다.”
  • 바그다드 중심부 교전 격화

    |바그다드 AFP 연합|바그다드 중심부에서 미군과 저항세력 간의 치열한 교전이 매일 되풀이되는 가운데 이야드 알라위 임시정부 총리가 이라크인 3000여명이 저항세력의 각종 테러공격으로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바그다드 중심부의 하이파 거리에서 12일 오전 발생한 미군과 무장세력 간 교전으로 어린이 2명과 알아라비야 방송기자 1명을 포함,최소 13명이 숨지고 60여명이 다쳤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미군의 공격용 헬기 2대가 교전 후 불타는 미군 탱크 주변에서 춤을 추는 군중들에게 미사일과 기관총을 발사,인명피해가 컸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또 이날 새벽 임시정부 시설과 미국 대사관이 위치한 바그다드 중심부 그린존에 저항세력의 박격포 공격이 감행됐다.또 차량에 폭발물을 싣고 이라크 정부청사와 아부그라이브 수용소로 각각 돌진하던 운전사 2명이 모두 사살됐다고 이라크와 미국의 소식통들이 전했다. 한편 알카에다와 연계해 활동하고 있는 저항세력의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는 인터넷에 올린 음성 메시지를 통해 이라크 임시정부에 새로운 위협을 가했다. 이전에 자르카위 명의로 공개됐던 음성 메시지와 목소리가 같은 성명의 낭독자는 “반역자 알라위는 각오하고 죽음을 기다려라.알라위가 정부의 멍청한 동료들,기독교도들과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알라신의 부름에 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알라위 총리는 이날 영국군이 관할하는 남부 바스라 방문중 기자들과 만나 “이라크에서 일어난 각종 ‘테러 공격’으로 3000명 이상의 이라크인이 숨지고 1만 2000여명이 부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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