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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태경 의원 부산사무실에 흉기 배달 “곧 죽는다” 협박문구

    하태경 의원 부산사무실에 흉기 배달 “곧 죽는다” 협박문구

    새누리당 하태경(부산 해운대·기장을)의원 부산사무실에 협박성 문구와 흉기가 배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하태경 의원에게는 지난 10월 중국 선양에서 국제 특송을 통해 협박성 소포가 배달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누군가 직접 하태경 의원 사무실 입구에 협박 도구와 문구를 놓고 간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2일 부산기장경찰서와 하태경의원실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쯤 기장군에 위치한 하태경 의원 사무실 출입구에서 협박 문구가 적힌 흉기와 종이가 발견됐다. 출입입구 바닥에 놓여진 흉기의 한쪽 면에는 ‘하태경’ 다른 편에는 ‘곧 죽는다’라는 하태경 의원의 신변을 위협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또 출입문에는 ‘민족반역자처단 투쟁위원회’라는 명의로 하태경 의원을 비난하는 글귀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흉기와 협박성 문구는 이날 아침 사무실에 출근한 직원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태경 의원 측은 발견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증거 분석작업을 벌이는 한편 주변 폐쇄회로(CC)TV화면을 조사하고 있다. 하태경 의원은 현재 호주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영화관·학교 이어 공항까지 총성 덮친 美, 안전한 곳 없다

    영화관·학교 이어 공항까지 총성 덮친 美, 안전한 곳 없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공항 국내선 터미널에서 지난 1일(현지시간)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큰 혼란이 벌어졌다. 최근 쇼핑몰, 영화관, 초등학교에 이어 공항에서까지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자 “이제 미국엔 맘 놓고 다닐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날 오전 9시 20분쯤 LA 공항 제3터미널 검색대 앞에서 폴 시앤시아(23)라는 청년이 갑자기 가방에서 공격용 반자동 AR15 소총을 꺼내 100여발을 난사했다. 검색을 진행하던 연방교통보안청(TSA) 요원 제라도 허낸데즈(39)가 총에 맞아 숨졌고 다른 요원 2명과 승객 등 모두 7명이 다쳤다. 시앤시아는 총기난사 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총에 맞아 쓰러진 허낸데즈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다시 내려가 확인사살을 하는 모습이 폐쇄회로TV에 담겼다. 그는 검색을 마친 승객들이 탑승을 기다리는 게이트 앞까지 진입했다가 출동한 경찰과 총격전 끝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얼룩 무늬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항공권을 끊은 뒤 검색대로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기난사에 혼비백산한 승객들과 공항 직원들이 황급히 대피하면서 터미널은 아수라장이 됐다. 활주로의 비행기 동체 밑으로 몸을 피한 사람들도 있었다. 항공기 이착륙이 일시 중단되고 공항 인근 도로가 모두 폐쇄돼 극심한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 한 승객은 “줄을 서 있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렸고 누군가가 ‘총이다! 모두 엎드려!’라고 소리쳤다”면서 “엉금엉금 기어서 터미널을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승객이 많은 LA 공항이 일시 마비되면서 1550개 항공편과 승객 16만 7000명의 여행 일정이 차질을 빚었다. 공항은 하루 뒤인 2일에야 정상화됐다. 검거 당시 시앤시아의 가방에는 “TSA 요원을 모두 죽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연방정부를 비난하는 글이 적힌 메모지와 수백발의 총알이 들어 있었다. 이에 따라 경찰은 반정부주의적 편집증을 갖고 있는 시앤시아가 TSA에 특별한 원한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CNN 등에 따르면 연방수사국(FBI)이 시앤시아의 소지품에서 발견한 메모에는 ‘뉴월드오더’에 대한 것으로 보이는 불만도 포함돼 있었다. 뉴월드오더는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은밀하게 활동하는 엘리트들의 비밀결사체를 뜻한다. 그가 음모론에 몰두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메모에 TSA를 ‘반역자’로 표현하고 재닛 나폴리타노 국토안보부 장관을 멸시하는 내용이 담긴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새 영화] 노라노

    [새 영화] 노라노

    “남들이 입으니까 나도 입는다면 그야말로 민족 반역자” 1967년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뒤 전국이 미니스커트 열풍에 휩싸이자 한 신문이 내보낸 기사의 제목이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에게는 ‘25일 구류 처분’이 떨어졌고, 언론은 “미니에 속지 말자” “각선미에 자신 없는 여성은 긴 치마를 입을 것” 같은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그만큼 미니스커트는 남성 중심의 경직된 사회에 충격을 던진 하나의 사건이었다.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뒤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디자이너로 꼽히는 노라노(85)가 있었다. 다큐멘터리 ‘노라노’는 “1947년 내 나이 스무살,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노라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지난해 열린 60주년 기념전 ‘라 비앙 로즈(La Vien Rose·장밋빛 인생)’를 중심으로 노라노의 삶을 돌아본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처음으로 노라노의 옷을 입었던 ‘신여성’들과 다음 세대의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노라노를 “패션이라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패션의 역사를 개척한 주인공이라고 회고한다. 배우 엄앵란이 “대중문화의 기수”라고 치켜세우는 노라노는 최초의 기성복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여성들이 소비 문화의 주체로 등장하던 1960년대에 노라노는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여자를 멋있고 당당하게” 만든 디자이너였다. ‘두개의 문’과 ‘종로의 기적’을 제작한 여성주의 미디어공동체 연분홍치마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주체적인 여성으로 독립했던 노라노의 삶이다. 노라노는 전쟁으로 일제에 끌려갈 처지가 되자 임시방편으로 육사 출신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지만 불합리한 시집살이를 참지 못하고 열 아홉살에 스스로 집을 뛰쳐 나온다. 노라노는 “시댁에서 잘 대해줬다면 디자이너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면서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 갈 길을 가자고 결심했다”고 돌아본다. 희곡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주인공 노라의 이름을 따 ‘노명자’에서 노라노가 된 그는 “지금도 낯선 길에서 선택할 용기를 잃지 않고 싶다”고 담담히 덧붙인다. 3년을 따라다닌 끝에 촬영을 시작했다는 김성희 감독은 ‘인간 노라노’의 미시사를 통해 억압되고 배제됐던 여성의 욕구와 욕망이 정당하게 인정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93분. 31일 개봉. 전체 관람가.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전직 美 정보요원들 스노든에 ‘내부 고발상’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적인 개인 정보 수집 활동을 폭로한 뒤 러시아로 임시 망명한 전직 중앙정보국(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30)이 미 샘애덤스협회가 주는 내부 고발자상을 수상했다. 10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전직 미국 정보요원들이 만든 샘애덤스협회는 지난 7월 스노든을 올해의 ‘샘애덤스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한 데 이어 스노든에게 직접 상을 주기 위해 관계자 4명을 모스크바로 파견했다. 베트남전 당시 내부 비리를 고발한 전직 CIA 요원 새뮤얼 애덤스(1934~1988)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단체는 정보보호 및 정보윤리 강화를 위해 힘쓴 정보 관련 전문가를 선정해 매년 상을 수여하고 있다. 2010년에는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를 설립한 줄리언 어산지가 이 상을 받았다. 스노든에게 직접 상을 건넨 협회 관계자들은 지난 9일 모스크바의 한 호텔에서 스노든을 만나 약 5시간 동안 작은 규모의 시상식을 치르고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다고 말했다. 이들은 스노든의 상태가 좋아 보였고 현재 스노든이 러시아어와 문학을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아들을 만나기 위해 10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스노든의 부친 론 스노든이 이날 아들과 상봉했다고 BBC 방송 러시아어 인터넷판이 11일 전했다. 방송은 안전 문제로 인해 현지 언론이 스노든 부자의 상봉에 대해 보도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공항에서 열린 즉석 기자회견에서 론은 “지금까지 아들과 직접 접촉한 적이 없어서 아직 그의 생각을 모른다”면서도 “확신하는 것은 에드워드는 반역자가 아니며 (정보기관의 불법 활동을 공개한) 폭로자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평등 외쳤던 정여립 되살리고 싶었어요”

    “평등 외쳤던 정여립 되살리고 싶었어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말해 반역자가 된 불우한 정치가, 정여립을 픽션으로 되살려내 현재로 불러내고 싶었습니다.” 첫 장편소설 ‘홍도’(다산책방)로 제3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김대현(45) 작가가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출판간담회를 열었다. 138편의 응모작을 제치고 당선된 ‘홍도’는 정여립에 대한 영화를 준비하던 동현이 자신이 433세이며 정여립의 외손녀라고 주장하는 홍도를 만나며 시작된다. 노르웨이 헬싱키 반타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8시간의 비행 동안 동현은 조선시대 중반부터 현대까지 휘감아도는 홍도의 이야기를 ‘소설’이라 생각하며 듣지만 어느새 빠져들고 만다. 기축옥사, 임진왜란, 천주박해 등 역사의 큰 물줄기와 홍도 개인의 역사가 섞여들며 흘러가는 서사가 흡인력 있게 전개된다. 특히 환생한 아버지, 연인과 거듭 만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죽지 못하는 여자 홍도라는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박범신 소설가는 “‘홍도’라는 캐릭터 덕에 우리는 이제까지의 역사와 달리 타자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팽팽하게 살아 있는 또 다른 역사상을 갖게 됐다”며 “이것만으로도 ‘홍도’의 문제성은 단연 압도적”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정여립 누이의 손녀로 설정한 홍도는 내가 잘 아는 사람, 아내에서 캐릭터를 따온 인물”이라며 “지금도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이 인물을 통해 역사가 현재에도 이어진다는 의미를 주고, 역사적 사실과 개인이 흘러온 시간을 연결하는 고리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첫 소설로 문학상을 거머쥔 그는 영화계에서도 첫 작품으로 수상한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1999년 단편영화 ‘영영’을 연출해 칸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진출했으며 핀란드 팜페레국제단편영화제에서 디플로마스오브메리트상과 이란 국제청년단편영화제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美 시민단체 “전화 감청은 위헌” 정부 제소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개인정보 수집 스캔들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시민단체가 미 정부기관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나섰다. 11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미국의 시민단체 미국시민자유연맹(ACLU)과 뉴욕시민자유연맹(NYCLU)이 “NSA의 전화 감청 행위는 수정헌법 1조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와 4조에서 보장하는 사생활을 침해했다며 관련 고위 관계자들을 상대로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ACLU는 법원에 NSA의 통화 내용을 수집하는 기밀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고 미 정부가 그동안 보관해 오던 모든 통화내역을 삭제하도록 명령할 것을 요청했다. ACLU가 제소한 고위 관계자는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을 비롯해 국방부, 법무부, 연방수사국(FBI) 등 관련 당국 수장들이다.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되자 기업들은 “기업이 정부의 정보 공개 요청에 적극 협조한 것처럼 비치는 것은 오해”라며 해명에 나섰다. 구글은 이날 공식블로그에 에릭 홀더 법무장관과 로버트 뮬러 연방수사국(FBI) 국장에게 보낸 서한을 공개해 “구글이 마치 정부기관의 고객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허용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스노든과 8년간 그와 교제했던 여자 친구 린지 밀스(28)는 이날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스노든은 미스터리한 남자였다”고 밝혔다. 홍콩에서 자취를 감춘 스노든은 12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 인터뷰를 갖고 “나는 반역자도 영웅도 아니다. 미국인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노든은 “정의로부터 숨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범죄 행위를 알리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서 미 정부의 본국송환 요청에 맞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9)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하)

    [명사가 걸어온 길] (9)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하)

    백기완(80)의 마음은 찰랑거린다. 가득 차서 찰찰찰 흘러넘친다. 부조리에 대한 울분만은 아니다. 그는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법”이라고 했다. 시와 이야기, 영화를 빼놓고 백기완의 삶은 성립하지 않는다. 시집만 네 권을 썼다. 그는 “샘물이 콸콸 넘쳐서 메마른 땅을 적시듯, 엄마가 우물에서 뜬 물동이 찰찰 넘치듯 찰랑찰랑 넘치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라고 했다. 첫 시는 어린 시절 냉이의 싹을 보고 썼다. 나물 캐던 어머니는 “비바람을 이기고 살아남는 목숨들, 너무나 수북해 보듬어 주고 싶은 싹에는 손을 대는 게 아니다”라며 싹은 뽑지 않았다. 시심(詩心)이 싹텄다. 그는 “그런 걸 보고 어떻게 시가 안 나오겠느냐”고 했다. 예술을 향한 그의 사랑은 민초(民草)에 대한 사랑만큼 깊다. 찰랑거림의 시작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그의 민중 미학을 이루는 알맹이다. 그도 자신이 이야기꾼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좌중은 그의 이야기에 발을 동동 구르며 자지러지거나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그 화산 같은 입심의 근원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 우리 집은 하루가 멀다 하고 쌀이 떨어졌어요. 아무리 밥 달라, 떡 달라 해봐야 어떡해요, 쌀이 없는데. 할아버지는 왜놈들한테 매를 맞고 돌아가셨지요. 쫄딱 깨진 아픔과 배고픔에 내가 만날 우니까 엄마랑 할머니가 달래느라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배고픈 민중을 닮아 있다. 학교에서 배운 글보다는 거리에서 체득한 말에 가깝다. 이야기의 주체도 ‘머리’가 아닌 ‘몸’이다. 몸으로 사는 민중을 이해하지 않고 그의 민중 미학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가진 거라고는 알통밖에 없는 무지렁이 민중들이 뭘 흘려요. 땀밖에 흘릴 게 더 있겠어요. 흘린 땀은 땅으로, 자연으로 갑니다. 흘러서 넘치는데 네 것 내 것이 없지요. 자본주의 문명이 몸으로 일한 사람들의 열매까지 뺏어 먹는 것과는 달라요. 땀 흘리는 사람들은 병들고 배고파서 죽고 약 올라서 죽고 대들다가 반역자로 몰려서 죽어요. 이런 민중들이 꾸는 꿈을 ‘바랄’이라고 합니다. 이 바랄의 세계가 이야기입니다. 온몸으로 일구지 않으면 바라던 사람이 죽는 게 바랄이에요.” 그가 땅과 대륙을 자주 입에 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땅은 민중들의 한 자락 꿈인 동시에 몸으로 일구는 대상이다. 민중은 땅을 일구듯 이야기를 일군다.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는 백기완을 두고 “대륙적 정서를 가졌다”고 평했다. 그는 ‘저치 가는 이야기’를 했다. “옛날에 아무리 일을 해도 살 수 없는 무지렁이들이 거역의 등불을 치켜들었습니다. 조정에선 그 들불을 끄려고 오랑캐를 끌어들였지요. 뿔대 돋힌 젊은이 6만명이 오랑캐를 물리치고 같이 압록강을 건너가요. 이 땅별(지구)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아니에요. 그 자리에 사랑과 나눔과 영원을 상징하는 진달래와 밤나무, 은행나무를 심으면서 가요. 남이 뚝 자른 손바닥만 한 땅에서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고 그 안에서도 ‘나는 몇 평이다’, ‘나는 몇 뙈기다’ 하면서 ‘짜나리’(좀팽이)처럼 배배 꼬지 않아요. 그 넓은 대륙의 마음이 ‘저치’예요.” 민중은 몸으로 이야기한다. 그는 이야기의 고유한 성질로 ‘말림’을 꼽았다. 말림은 소리꾼이 몸짓으로 상황을 연출하는 ‘발림’과 가깝다. “소설은 머리로만 쓰지만 이야기는 온몸으로 한다.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소설과 이야기를 비교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가 격해진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눈빛도 이상하고 손가락도 막 움직이고 발가락도 쑤시고. 어떻게 보면 깡패 같기도 하고 우악스럽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춤추는 것 같기도 하고.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것, 그게 말림이에요. 말림은 듣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환경에 따라 달라져요. 뼈대는 그대로지만 정서는 달라지는 거예요. 뒷골목에서 이야기하느냐 시장 바닥에서 이야기하느냐, 듣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게 민중들의 이야기예요.” 백기완은 “재워주고 밥 준다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주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모이는 서울 명동의 뒷골목에서 이야기판을 벌이며 술을 얻어 마시기도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심이 이야기’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이기주의와 정신적 허무주의가 판을 쳤다. 그 막판에 ‘용이냐, 이심이냐’를 들이대고 싶었다”고 했다. “이심이는 착하고 힘없는 바닷물고기예요. 힘센 물고기들에게 부대끼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맞아요. 용왕을 찾아갑니다. 용왕은 ‘힘센 놈이 힘없는 놈을 먹는 게 용궁의 법도’라며 ‘저놈 잡으라’고 내쫓아요. 오갈 데 없어진 이심이는 목숨을 걸고 싸우기로 하지요. 싸우다 보니 온몸에 쇠비늘이 하나둘 생겨나요. 다시 용왕에게로 쳐들어가니 어이쿠 놀란 용왕이 팍삭 상어로 변해 버려요. 그 대단한 줄 알았던 용왕이 고작 상어라니…. 용왕을 물리친 이심이는 힘없는 물고기들을 위한 ‘벗나래’(세상)를 만들고 함께 살아갑니다.” 그는 “썩은 수챗구멍에서 구슬이 생기기만을 기다리며 용꿈만 꾸는 것은 출세주의의 환상”이라면서 “그 환상을 깨부수고 부정과 싸우는 이심이에게서 배우자는 이야기”라고 덧붙인다. 모질게 고통받다 벼랑 끝에서 삶을 이겨 낸 장산곶매의 또 다른 변주 같다. 민중은 그의 영화에서도 중요한 소재다. 그가 영화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영화야말로 오늘의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단돈 만원’, ‘대륙’, ‘쾌지나 칭칭나네’ 등 영화 대본도 3편 썼다. 그가 영화에 처음 눈을 뜨게 된 계기도 민중의 활력 때문이었다. “1954년 경기도 여주에 농민 운동을 하러 갔어요. 농부들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데 웬 아낙네가 딸이랑 절구질을 하는 모습이 보이더라고. 아낙은 서른 서넛, 딸은 열일곱이나 되었을까. 둘 다 젖가리개가 없어요. 어머니는 서른서넛밖에 안 돼도 그때는 애 키운 뒤니까 젖이 출렁출렁, 딸은 탱탱하고 포동포동해요. 둘이 번갈아가면서 쿵, 쿵, 쿵, 쿵 맞절구질을 하는데, 그 역동성에 깜짝 놀랐어요. 쿵, 쿵 절구를 찧을 때마다 출렁이는 음악적인 그림. 내가 그 모습을 잡아야 한다고 그랬어요. 이 땅의 농기구가 움직이는 모습을 다 영상으로 꾸려보자 했는데 그때 뭐 카메라가 있어 필름이 있어 돈이 있어. 그래서 대신 ‘농민’이라는 시를 썼어요.” 1965년 한·일 협정 때도 백기완은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다. 독립군을 도와 일제에 맞서 싸우다 숨진 어린 엿장수 이야기였다. 그때만 해도 드물었던 16㎜ 카메라를 동성영화사에서 빌렸다. 백기완은 “어떤 놈이 술 먹겠다고 카메라를 몰래 가져가 술집에 잡혀먹는 바람에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영화의 꿈은 깨졌지만 지금도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젊었을 때는 배는 고프고 할 게 있나, 나 혼자 영화 이론 책을 뒤적거리고 그랬어요. 다시 영화를 만든다면 ‘들쑥이’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들쑥이는 열일곱 먹은 어여쁜 춤꾼인데 깡패들이 잡아다 양놈한테 팔아버리려고 하거든. 순결을 지키려고 끝까지 싸우다가 두 다리가 부러져요. 그래도 ‘짓밟혀도 일어나 이 세상을 휘젓는 춤을 다시 빚으리라’ 하며 온몸으로 춤을 춰요. 지금도 떠올리기만 하면 눈물이 나는 실화예요. 사람의 몸짓, 말림이 뭔지 보여주려고 해요. 지금은 몸이 아니라 다 돈으로 움직이잖아. 들쑥이의 일생을 영상 언어로 꾸리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버릴 수가 없어요.” 길을 돌아 영화에서 시로 다시 온다. 백기완은 “참된 예술은 찰(시)밖에 없다. 영화는 찰을 오늘의 예술로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백기완의 예술 세계에서 시와 이야기와 영화는 환상(環狀)을 이룬다. 그는 “시는 걸레 짜듯 쥐어짜는 게 아니다. 사람의 역사적 삶에서 나온다”고 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시’라는 말을 압니까. 시라는 말도 모르고 써본 적도 없어요. 민중들은 사는 게 괴로워요. 혼자만 울어요. 샘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샘이 곧 자기 땀샘이라. 자기가 보여요. 뭔가 퍼뜩 끓어 넘쳐요. 그게 시예요.”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감옥에서였다. “배알이 튕겨져 나올 만큼 모질게 맞았다”는 차디찬 옥에서 무슨 뜨거운 것이 그리 넘쳤을까. 그는 “굳이 가장 아끼는 시를 말하라면 감옥에서 군사 양아치들한테 매를 맞고 죽음의 숨결을 먹으로 삼아 썼던 ‘묏비나리’와 별 볼품은 없지만 ‘아, 나에게도’를 꼽겠다”고 했다. 백기완은 온몸을 들썩이며 감옥에서 처음으로 쓴 시를 읊었다.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 (중략) // 추렴거리도 없이 낚지볶음 안주 많이 집는다고/ 쥐어박던 그 친구가 좋았다/ 우리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헐벗고 굶주려도/ 결코 전전하지 않았다 (중략)// 그렇다 내 이십대 초반/ 민족상잔 직후의/ 강원도 어느 화전민 지대였지/ 열 여섯쯤 된 계집애의/ 등허리에 핀 부스럼에서/ 구데기를 파내주고/ 우리는 얼마나 울었던가 (중략)// 백번을 세월에 깎여도/ 나는 늙을 수가 없구나/ 찬바람이 여지없이 태질을 한듯/ 다시 끝이 없는 젊음을 살리라/ 구르는 마룻바닥에/ 새벽이 벌겋게 물들어 온다 (‘젊은 날’ 중) 그는 오랜 시간의 인터뷰 중 몇 번이나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 나에게도 회초리를 들고 네 이놈 내려칠 어른이 한 분 계셨으면”(‘아, 나에게도’) 하고 외기도 했다. “사람은 늘 그리움으로 산다.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사람 이상의 사람이 되느냐 하는 그리움이 예술이고 문화”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야기를 마치는 그의 마음은 가만히 찰랑인다. “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이 지금은 다 뭘하는지…. 내가 죽는다 산다 해도 전화 한 번 없네. 그런 면에서 보면 내 이야기꾼의 삶은 실패라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좋은 이야기를 하고 그걸 듣는다고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가슴에 심어주는 게 중요하지 반드시 성공하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의 역사는 아닙니다. 심어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 사상이고 이야기예요.”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주요 작품 <시집> 1982년 젊은 날 1985년 이제 때는 왔다,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공저) 1989년 백두산 천지 1996년 아, 나에게도 <극본> 1994년 단돈 만원 1995년 대륙 1996년 쾌지나 칭칭나네 <이야기·소설> 1991년 이심이 이야기 2004년 장산곶매 이야기 2009년 따끔한 한 모금 2012년 하얀 종이배 (시나리오 작업 중)
  • [공연리뷰] 연극 ‘안티고네’

    [공연리뷰] 연극 ‘안티고네’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은 한결같이 이런 반응이다. “한태숙스럽다.” 예술사전의 연극 분야에 등재될 법한 표현이다. 뜻이라면 ‘간결한 무대 위에 강렬한 이미지를 올려놓는다’이거나 ‘어둡고 암울하며 잔혹하며 처절하다’가 될까.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른 ‘안티고네’는 처음부터 ‘한태숙 연극’이라고 강렬하게 전달했다. 무대 바닥은 객석 쪽으로 오르막을 이룬다. 천장과 좌우도 안쪽으로 좁아지니,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커다란 액자 같은데, 사람들이 끝에 몰려 있으니 낭떠러지 같기도 하다. 오르막 경사는 9도라는데, 굉장히 가파른 느낌이다. 배우들이 오르내릴 때면 힘겹고 위태로워 보인다. 테베의 새로운 통치자가 됐지만, 적통이 아니라는 불안감에 휘둘리는 크레온, 아버지이자 오빠인 오이디푸스와 두 오빠까지 잃은 안티고네, 가혹한 운명의 두려움에 휩싸인 동생 이스메네, 폭정 속에 살아 남아야 하는 시민들, 어디에도 평온한 사람이 없는 상황을 표현하기에 매우 효과적인 무대다. 극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빗소리, 사람들의 속삭임, 흉조의 울음소리가 뒤섞이는 가운데 목소리가 들려온다. “반역자, 반역자!” 격렬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시체가 굴러 내려온다. 몸 한가운데가 짓이겨져 피범벅이 된 시체는 안티고네의 오빠 폴리니케스다. 크레온은 폴리니케스에 대한 애도와 매장을 금지하라는 칙령을 내리고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었다. 안티고네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죽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면서 시신을 수습하려다가 붙잡혔다. 극은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이 중추다. 크레온이 인간의 법을 주창하는 인물이라면, 안티고네는 신의 뜻을 받든다. 두 인물에게서 절충은 없다. 뜻을 굽히지 않는 안티고네는 동굴에 감금된 채 자결하고, 고집스럽게 신념과 통수권을 지키려던 크레온은 아들과 부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스스로 붕괴된다. ‘안티고네’와 엮이는 소포클레스의 두 작품 ‘오이디푸스’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고 이 작품을 접하면, 관계에서 오는 갈등이나 긴장감을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통치자로서 살다가 죽음에 이른 아버지를 끝까지 지킨 안티고네에게서 ‘누군가’를 투영할 수도 있겠다. 2500년 전 이야기가 현대에서도 깨달음을 던지게끔 하는 고전의 힘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태숙 연출가와 전작 ‘오이디푸스’(2011)를 함께했던 김창기 조명 디자이너, 이경은 안무가, 김우성 의상 디자이너 등 대부분 스태프가 이번에도 참여했다. 비탈 무대, 부분 조명, 현대적인 의상 등을 비슷하게 가지고 왔다. 달라진 것은 가운데가 갈라지는 무대. 안티고네의 어두운 내면이자 그를 옥죄는 감옥이다. 먼저 노장의 열연에 박수를. 하지만 TV 속 모습이 너무 익숙한 탓일까. 신구(크레온)의 독특한 억양이 가끔 무대 위에서 어색하게 들린다. 김호정(안티고네), 손진환(파수꾼) 등 많은 배우가 제 역할을 해냈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띈 건 역시 박정자였다. ‘오이디푸스’에 이어 다시 예언자 티레시아스 역을 맡은 그는 신의 뜻을 읽는 영험함과 만사가 귀찮은 노인네의 괴팍함, 크레온에게 경고하는 섬뜩함을 단 두 번 출연하면서 제대로 뿜어냈다. 흑백의 조명 아래서 격렬한 움직임, 불길한 기운을 전하는 흉조의 날갯짓 등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몸짓과 연기가 암울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국립극단과 예술의전당이 함께 제작한 ‘안티고네’는 CJ토월극장에서 28일까지 공연한 뒤 5월 24~26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극장, 6월 21~23일 대전문화예술의전당 앙상블홀로 이어진다. 2만~5만원. 1688-5966.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3D 무장 ‘지.아이.조 2’ 복면 벗은 이병헌 빛났다

    3D 무장 ‘지.아이.조 2’ 복면 벗은 이병헌 빛났다

    영화 ‘지.아이.조’(2009)는 전 세계에서 3억 246만 달러(약 3295억원)를 벌어들였다. 제작비(1억 7500만 달러)보다 1억 달러 남짓 남겼으니 톡톡히 재미를 본 셈. 파라마운트가 속편 제작에 나선 건 당연했다. 1편의 스티븐 소머즈 감독 대신 존 추 감독이 메가폰을 잡으면서 큰 변화가 있었다. 데니스 퀘이드, 조지프 고든 레빗과 시에나 밀러가 빠진 대신 드웨인 존슨과 브루스 윌리스가 합류했다. 특히 스톰쉐도 역을 맡은 이병헌의 비중은 주연급으로 커졌다. 1편에선 늘 흰색 복면을 쓰고 나왔지만, 2편에서는 대부분 장면을 맨 얼굴로 소화했다. 그만큼 북미시장에서 인지도가 높아졌다는 얘기다. ‘지.아이.조 2’(28일 개봉)의 얼개는 간단하다. 파키스탄에서 핵무기 이송작전을 수행하던 최강 특수부대 지.아이.조는 정체불명의 적에게 급습을 당한다. 리더 듀크(채닝 테이텀)는 물론 부대원 대부분 목숨을 잃는다. 로드블럭(드웨인 존슨) 등 세 명만 목숨을 건진다.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들이 반역자로 몰려 제거됐음을 알게 된다. 배후에 코브라 군단이 있음을 직감한 로드블럭은 대통령의 정체에 의심을 품는다. 스톰쉐도(이병헌)는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코브라 사령관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미 대통령으로 모습을 바꾼 잘탄과 함께 코브라 군단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1964년 미국 완구회사 하스브로에 의해 탄생해 ‘액션 피규어’(30개 이상의 관절을 움직일 수 있는 캐릭터 모형)란 개념을 만들어냈던 ‘지.아이.조’는 마블 코믹스를 통해 만화로 출간된 데 이어 1985년 TV시리즈로도 만들어졌다. 영화로 재탄생한 ‘지.아이.조’ 또한 역동적인 액션과 악역 배우들의 호연이 맞물려 큰 성공을 거뒀다. 2편 역시 전형적인 ‘팝콘무비’다. 존 추 감독은 1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3차원(3D)을 통해 히말라야 산맥과 워싱턴 DC의 액션장면들을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특히 드웨인 존슨과 이병헌 등의 격투신을 바로 옆에서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병헌도 “강력하고 다양한 액션이 있어 스트레스를 풀기에 부족함이 없는 팝콘무비”라면서 “요즘 한국영화의 점유율이 80% 안팎일 만큼 최전성기인 것 같다. 한국영화를 당연히 사랑해야겠지만, 내가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도 아껴달라”며 웃었다. 하스브로의 완구에서 출발한 ‘트랜스포머’처럼 ‘지.아이.조’ 역시 속편 완성도에 대한 의견은 엇갈릴 듯하다. 고유한 서사를 가진 원작이 없는 태생적 한계인 셈. 액션의 참신함은 떨어지고, 드라마는 느슨해졌다. 히말라야 암벽에서 닌자들이 펼치는 아찔한 액션 등 3D의 공간감과 입체감을 살린 장면들은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1편에서 특수무기로 에펠탑을 무너뜨리는 장면 같은 압도적 볼거리는 없다. 지.아이.조 군단과 맞서는 코브라군단의 전투력도 1편에 비해 무기력하다.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는 이병헌이 연기한 스톰쉐도다. 한국배우이기 때문은 아니다. 스톰쉐도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입체적인 캐릭터다. 식스팩을 드러낸 채 물오른 액션은 물론, 코브라 군단의 음모에 휘말려 악인의 길을 걷게 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까지 드러낸다. 이병헌은 “1편에서는 복면 때문에 눈빛과 몸짓만으로 표현해야 했다. 2편에서는 복면을 쓰지 않는 장면이 대부분이라 감정 표현이 수월했다. 오랜 기간 누명을 쓰고 살아온 스톰쉐도는 겉으론 차갑고 시니컬하지만 내면에는 트라우마가 있는 어두운 인물이다. 2편에서 비밀이 밝혀지면서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폭발하는 대목을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설명했다. ‘지.아이.조 2’는 애초 지난해 6월 개봉 예정이었지만, 9개월여 미뤄졌다. 소문이 무성했다. 존 추 감독은 “재촬영을 하게 되면 스태프나 배우들 모두가 고통스러울 게 뻔했지만, 용단을 내려야 했다. 3D가 최상의 답이라 생각됐고, 개봉날짜를 늦춰가면서까지 재작업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반면, 할리우드의 한 온라인매체는 개봉이 늦춰진 이유가 채닝 테이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편에서 특수부대의 리더를 맡았던 테이텀은 2편에선 일찌감치 사라진다(?). 하지만 1편이 개봉한 ‘서약’ ‘21 점프 스트리트’ 등이 거푸 대박을 터뜨리면서 흥행배우로 부상했다. 부랴부랴 테이텀이 나오는 장면을 재촬영했다는 후문이다. 파라마운트는 ‘지.아이.조 2’의 전 세계 홍보투어 첫 테이프를 한국에서 끊었다. 급부상한 아시아 영화시장과 이병헌의 영향력에 대한 기대 때문일 터. ‘지.아이.조 2’의 흥행은 파라마운트에도 중요하다. 2011년 19.2%의 시장점유율로 1위에 올랐지만, 지난해 8.4%에 그친 탓에 7위로 몰락했다. 올해도 ‘잭 리처’ ‘가디언즈’ 등의 부진 탓에 파라마운트의 점유율은 6위(7.7%)에 머물고 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北, MB 정권교체 발언에 “최후 발악” 발끈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북한의 ‘정권교체’(레짐 체인지)를 언급한 데 대해 16일 “민족반역자의 최후 발악”이라고 맹비난했다. 통신은 이날 논평에서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행위에 대처한 자위적 조치인 제3차 핵실험 앞에 어떻게나 얼이 나갔는지 시간이 갈수록 넋두리”라고 비난하며 ‘만고역적’, ‘대결병자’ 등 각종 욕설을 동원해 이 대통령을 헐뜯었다. 또 “‘임기 말까지 남북관계를 동결상태에 둘 각오가 돼 있다’는 집권 초기의 악담 그대로 지난 수년간 민족공동의 이념과 성과물을 전면 부정하고 체계적으로 말아먹었다”며 한반도에 엄중한 사태가 조성된 것은 미국과 이 대통령의 ‘반공화국 대결책동’ 때문이라고 거듭 비난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5일 ‘국민원로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대화와 협상으로 핵을 포기시킬 수 없다. 정권이 바뀌고 무너지기 전에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며 북한의 ‘정권교체’ 필요성을 거론했다. 한편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부인 리설주는 이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71회 생일인 ‘광명성절’을 맞아 당·군 주요인사들과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제1위원장과 리설주는 인민군 육군, 해군, 항공 및 반항공군, 노농적위군 명예위병대 대장의 영접보고를 받은 뒤 김 위원장의 시신이 있는 영생홀과 훈장보존실, 열차 보존실 등을 둘러봤다. 지난 1월 1일 새해 첫날을 맞아 남편과 함께 모란봉악단 신년경축공연을 관람한 이후 40여일 만에 등장한 리설주는 지난번보다 살이 빠진 듯한 모습이어서 출산설에 더욱 무게가 실릴 것으로 보인다. 중앙통신은 이날 “참가자들은 장군님을 천년만년 길이길이 받들어 모시고 최고사령관 동지의 영도 따라 백두의 행군길을 남해 끝까지 이어가며 주체의 선군혁명위업을 기어이 완성해 나갈 불타는 결의를 다짐했다”며 행사 분위기를 전했다. 통신은 또 “제3차 지하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함으로써 그 어떤 제재도 압력도 두려워하지 않는 선군조선”, “무진막강한 핵 억제력을 가진 천하무적의 백두산혁명강군이 있기에 조국통일대전의 승리는 확정적”이라며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부각시키는 표현도 잇따라 사용했다. 김성수 기자 sskim@seoul.co.kr
  • 공산체제 체념한 사람들의 기막힌 얘기들

    공산체제 체념한 사람들의 기막힌 얘기들

    ‘중국의 모옌(57)이냐, 일본의 하루키냐’며 지켜보던 2012년 노벨문학상은 지난 11일 중국의 소설가 모옌에게 돌아갔다. ‘대체 모옌이 누구냐?’ 싶지만 장이머우 감독의 토속성이 강한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라고 하면 무릎을 딱 치며 감탄사를 연발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안다’는 우쭐한 기분의 표현이겠지만 사실 그의 작품을 국내에서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은 각 출판사의 판매 부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영나 문학동네 해외1팀 부장은 “한국 독자들이 영미 작가를 선호하기 때문에 ‘대박’작품은 없지만, 공산주의 체제에서 체념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기가 막힌 이야기들이 환상과 꿈과 농담으로 버무려져 있다.”고 했다. 모옌의 작품이 대중성이 높지 않다고 해도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창비,문학동네, RHK, 민음사 등 각 출판사는 작품마다 최소 1쇄 2000부 정도를 더 찍는다. 1955년 생으로 수수가 붉게 타는 듯이 익어가는 아름다운 산둥성 가오미현 출신의 모옌은 1981년 문단에 데뷔한 이래 30년간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쉬지 않고 수많은 작품을 내놓지만, 국내에 번역·출판된 작품은 10개 안팎이다. 인터넷 서점이나 교보문고 등에서 한 달 동안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 특별할인 판매전에 돌입하니, 모옌 연구에 들어가보자.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문학동네 펴냄)는 표제작을 포함해 3편의 중편소설을 모았다. 표제작의 주인공 딩 사부는 정년을 한 달 앞두고 공장에서 해고당하자, 엉뚱한 생계대책을 세운다. 숲 속에 버려진 폐차를 개조한뒤 연인들에게 장소를 빌려주는 ‘아담한 휴게소’를 차린 것이다. 딩 사부가 생계와 숲 속의 차 안에서 들려오는 온갖 교성 사이에서 위태로운 생존의 줄타기를 한다는 웃기지만 울고 싶은 이야기다. 문학동네에서는 ‘달빛을 베다’도 추천작이다. ‘인생은 고달파 1·2’(창비 펴냄)에서 고밀 동북향의 지주였던 서문뇨는 중국의 토지개혁이 진행되자 악덕 지주로 낙인 찍혀 1950년 총살당한다. 염라대왕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한 끝에 환생을 약속받았지만, 나귀, 소, 새끼돼지, 개, 원숭이 등으로 태어났다. 2001년 1월 1일 새벽 밀레니엄 베이비로 태어난 남천세는 5살이 되던 해 자신의 윤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지난 50년 동안 중국에서 일어났던 각종 격변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 입혀서 기괴하고 황당무계하며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능청스럽게 펼친다. RHK에서는 ‘풀 먹는 가족 1·2’와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1·2’를 2007년에 발간했는데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열띤’ 판매를 기대하고 있다. 역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특히 ‘풀 먹는 가족’은 콜롬비아의 노벨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마르케스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다. 송명주 RHK 문예1팀장은 “모옌이 민중의 밑바닥 삶을 유쾌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는 측면에서 김기덕 영화감독의 작품 코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름다운 중국 여배우 공리가 생각나는 ‘붉은 수수밭’의 원작소설인 ‘홍까오량 가족’(문학과지성사 펴냄)은 고량주 양조장집 아들에게 팔리 듯 시집가던 따이펑리옌의 삶을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을 중심으로 그려놓았다. ‘개구리’(민음사 펴냄)는 최근 작품으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조카가 일흔이 넘은 고모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고모는 젊은 시절 실력 있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살아 있는 보살이자 삼신 할멈’이었으나 공군 조종사인 약혼자가 타이완으로 망명하면서 ‘반역자의 약혼녀’라는 꼬리표를 단다.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 탓에 고모는 임신중절수술을 하도록 강요받는데, 국가가 개인의 삶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구조를 들여다본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10가지 감정 이야기

    감정이 없는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2003년 개봉된 영화 ‘이퀼리브리엄’의 줄거리를 잠시 들여다보자. 제3차 대전이 일어났다. 이후 ‘리브리아’라는 새로운 세계가 생겨나고 ‘총사령관’이라 불리우는 독재자의 통치하에 놓인다. 전 국민들은 ‘프로지움’이라는 약물에 의해 통제되고 이 약물을 정기적으로 투약함으로서 온 국민은 사랑, 증오, 분노 등의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리브리아’에서 철저히 전사로 양성된 특수요원들은 ‘프로지움’ 투약을 거부하고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반역자들을 제거하며 책, 예술, 음악 등에 관련된 모든 금기 자료를 색출하는 임무를 맡는다. 이 영화는 감정이 억눌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거꾸로 감정이 인간에게 있어 필수 불가결한 조건임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의 삶은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다. 갑자기 들려오는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으슥한 골목길에서는 사람과 닮은 형상만 봐도 공포를 느낀다. 연인이나 오랜 벗의 격려 한마디에 금세 행복해지기도 한다. 19세기 후반 찰스 다윈이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 대하여’를 세상에 내놓은 이래 감정은 다양한 지역과 인종을 가로질러 인간 종의 보편적이며 우리의 뼈대만큼이나 선천적이고 구조적이며 규칙적이라는 사실이 상식화됐다. 신간 ‘인간다움의 조건’(스튜어트 월턴 지음, 이희재 옮김, 사이언스 북스 펴냄)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든 10가지 감정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간의 감정을 생물학적 성질과 문화적 성질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바라본다. 인간의 문화사를 통해 감정의 문화사를 들여다보는 과감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담고 있다. 저널리스트이자 문화사 전문가인 저자는 다윈이 꼽은 인간의 기본 감정 6가지에다 4가지 감정, 즉 질투, 수치, 당황, 경멸 등을 더했다. 개별 감정이 처음 시작된 기원에서부터 국가나 언론, 광고 매체 등이 적극적으로 감정을 이용하고 조작하는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문학과 예술, 철학, 대중문화를 밀도 있게 분석한다. 다시 말해 감정이 어떻게 인간 사회를 바꿨고 또 인간 사회는 어떻게 감정을 변화시키는지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예를 들어 원초적인 공포의 감정은 모든 신앙의 원동력이며 또 우리 사회생활과 문화생활의 태반을 떠받치는 기반이라는 주장 등이 흥미롭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6)‘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선택! 역사를 갈랐다] (26)‘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혁명가 인정받는 ‘김옥균’ vs 테러리스트 된 ‘홍종우’ 정부 차원에서 주요한 역사적 개념을 규정하는 북한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갑신정변을 ‘근대 부르주아 혁명운동’으로 변경했다. 한국에서 김옥균(金玉均·1851~1894)과 갑신정변에 대한 견해는 연구자들 간에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최초의 혁명적·진보적 개혁운동으로 보고 봉건제 청산을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전개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일본이라는 외세 동원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변혁 주체로서의 역할은 인정하는 편이다. 반면 이와 대비시켜 우리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홍종우(洪鍾宇· 1850~1913)는 대다수 사람들이 갑신정변 주도 인물인 김옥균 암살범이자 독립협회와 대척점에 있던 황국협회를 주도하던 반(反)개화, ‘테러리스트’로만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다. 당연히 그 평가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보수반동 성향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갑신정변’ 3일천하… 실패한 비운의 개화파 김옥균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반역자로 처단된 고균(古筠) 김옥균. 권력과 세력을 잃고 망명지를 떠돌다가 목숨을 잃고 주검마저 능욕을 입은 비운의 개화파….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변의 주체들과 일정 부분 이해를 같이했던 윤치호의 아버지이자 군부대신 등 고위관료를 역임한 윤웅렬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다음의 여섯가지로 꼽았다. 1. 군주를 위협한 점 2.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3.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4.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 평가한 점 5. 왕과 왕비의 의향을 어긴 점 6. 당붕(黨朋)의 도움 없이 일을 조급하게 처리한 점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서 정권의 핵심인사 살해에 앞장섰던 서재필은 후일 회고담에서 실패 원인을 ‘민중의 무지몰각’에 돌리고 있다. 그는 광범위한 민중의 원동력과 잠재력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도했다. 정변은 국민적 동의 없이 진행된 것이다. 후일 김옥균은 일본을 ‘이용’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용당한 것이고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봉건제도 청산을 위한 노력에만 초점을 맞추었지만 상대적으로 제국주의 침략 세력에게는 관대하거나 이를 생각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와 친한 일본인들은 후쿠자와(福澤諭吉), 도야마(頭山滿), 고도(後藤像二郞) 등 ‘대아시아주의자’이자 한국 침략을 적극 옹호한 인물 일색이었다. 말년의 김옥균은 이른바 삼화주의(三和主義)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흥아지의견’(興亞之意見)에 기초해 이를 설명했는데, 그 골자는 ‘삼국제휴 서력방알’(三國提携 西力防?)을 통해 아시아를 부흥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제창하게 된 것도 정신적 스승인 후쿠자와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흥아지의견’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서 과연 김옥균이 후쿠자와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삼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평화롭게 공존공생하자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4년 러일전쟁 직후 그동안 일본에 망명했던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관련자들은 모두 귀국하여 복권되고 식민지 시기 대다수는 친일의 거두로서 식민지 지배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에게는 유신(維新)을 처음 제창한 사람이고 문명의 선각자로서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가 융희 4년(1910) 7월 27일에 추증되었다. 김옥균 추종 세력은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이전 활동을 과장·미화하였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이르면 일제는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대동아공영권을 통한 아시아 지배와 조선 민중에 대한 무제한의 통제 명분을 김옥균이 주장한 삼화주의에서 찾았다. 김옥균의 삼화주의는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숱하게 왜곡되어 갔다. ●홍종우, 실정 맞는 근대화 추구… 佛르피가로도 ‘개화인사’ 인정 경기도 몰락한 선비의 가문에서 출생한 홍종우는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86년 3월부터 프랑스행을 결심하여 1888년 나가사키와 규슈, 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이어 1890년 12월 파리로 들어갔다. 그는 프랑스 유학 후 거의 2년 동안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연구보조자로 활동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책,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다. 홍종우는 프랑스어 번역본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공화국에 사는 데 습관이 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기질의 문제이다. 기후가 국민의 관습에 끼치는 영향은 오래전에 증명되었다. 그 누구도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과 같이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다른 정체(政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 일에 있어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존경과 애정을 바칠 것을 미리 약속한다.” 홍종우의 정체관이 그간의 시대 담론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목표는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문화를 조화·절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척사위정론자들과 다른 것이었으며, 민족 주체성과 민족 문화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화 지상주의론자와도 구분되었다. 1893년 귀국을 결심한 그는 그해 12월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때 고종의 밀명으로 도쿄에 온 이일직과 만났고, 그로부터 김옥균 암살을 제의받게 된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만나 프랑스 정국을 소개하고 세계 대세와 동양 정세를 논하는 한편 그의 상하이행을 유도했고 상하이 동화양행에서 김옥균은 결국 홍종우가 쏜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는 아관파천 이후부터다. 그는 국왕을 황제로, 세자를 황태자로 높이는 한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건원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수립과 황제 즉위식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홍종우는 대한제국 성립 당시 비서원승으로 활약한 이래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경제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대외적으로 열강의 조선 이권 침탈에 대한 절대불가론으로, 내적으로는 국가재정의 확충과 국내 상인의 몰락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론인 보호주의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한러은행 설치 반대, 외상의 도성 개잔(開棧)과 내지행상 반대, 절영도 석탄고 임대 및 광산이권 양도 반대, 조선 연해어업 및 홍삼 사매(私買) 반대, 방곡실시, 광무연호 주조, 상권보호 등이다. 정치·사회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군주권의 절대화, 군권(軍權)의 확립과 군사권 간섭 반대, 각부 고문관과 각국 공사의 내정 간섭 반대, 불평등 조계 개정, 만국공법의 철저한 준수, 공정한 인사정책, 민선의원(民選議院) 설립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근대적 지도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정부의 자립과 과감한 개혁이 이를 보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자 그는 ‘개화당의 영수’ ‘조선독립의 혁명가’ 김옥균 암살범으로 다시 각인되었고, 근대화를 저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는 명실상부한 개화인사였다. 프랑스 저명 신문 르피가로지도 그렇게 보고 있다. 잘 알다시피 홍종우는 프랑스 최초의 한국 유학생이자 많은 부분 우리 실정에 맞는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그가 수구파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고 그 역시 수구적인 언급을 한 바 없다. ●편견 지우고 입체적으로 보아야 김옥균과 홍종우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같다 하더라도 양자 간에는 분명한 대립각을 갖고 있었다. 김옥균과 달리 홍종우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외국으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인식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현실을 서구에 알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선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현실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부재 상태에서 문화적 전통과 제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 및 일본의 제도를 무차별하게 도입하는 것은 오히려 그 나라의 발전에 커다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김옥균처럼 문명개화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보면서 제국주의 이웃 강국을 끌어들여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방식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만약 그럴 경우에는 자칫 국가를 상실할 위험이 뒤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갑신정변 당시와 지금 한국을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 정세는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조재곤(동국대학교 연구교수)
  • [사설] 세습체제 비판 인사들 처단하겠다는 북한

    ‘2012 국제앰네스티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김정은으로 권력이양이 진행되던 지난 1월 국가안전보위부를 통해 200명 이상의 관료를 구금한 것으로 드러났다. 요덕수용소 등 정치범수용소 6곳에는 최대 20만명이 구금돼 있다고 한다. 공개처형이 예사로 벌어진다. 북한이 최근 자의적인 체포와 구금을 한층 강화한 것은 3대 세습 강행에 따른 내부 불만을 잠재우고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공포통치’다. 그러나 미국의 식량지원까지 마다하며 김정은 체제 출범을 축하하기 위해 쏘아올린 장거리 로켓 발사가 실패하는 등 체제불안 요인은 상존한다. 북한은 늘 그랬듯 체제불안을 외부로 발산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도모하려는 ‘고전적’ 수법에 기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그제 북한인권운동가 김영환씨, 탈북자 출신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등을 ‘처단’하겠다며 위협했다. ‘우리 주민들의 유린·납치행위에 가담한 범죄자들’에 대한 상응한 조치라는 것이다. 재판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소로 몰아넣는 ‘인권외면국’이 북한 아닌가. 북한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이들에 대한 처단 운운은 상식 이하다. 특히 김영환씨에 대해서는 ‘극악한 민족반역자’ 등 온갖 위협적 언사를 퍼부었다. 중국에 114일간 억류됐다 풀려난 김씨는 “북한 주민은 참혹한 인권 침해와 잔혹한 독재에 시달리고 있다. 북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북한의 실상에 대한 생생한 증언인 셈이다. 유엔인권이사회(UNHRC)는 지난 3월 북한인권결의를 표결없이 채택했다. 그만큼 북한인권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미 국무부가 최근 홈페이지에 게재한 ‘2011년 국가별 테러보고서’에서 북한에 대해 무기수출통제법에 따른 ‘대(對)테러 비협력국’으로 재지정한 것도 유의할 대목이다. 북한은 올해를 사회주의 선진국, 곧 강성대국 원년으로 선포한 바 있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는 이제 선군(先軍)을 넘어서야 한다. 선민(先民)·선경(先經)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체제안정의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이자스민, 외국인 혐오자가 난동 부리자

    이자스민, 외국인 혐오자가 난동 부리자

    “다문화 정책은 민족말살 정책이다.” 11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 주최로 열린 다문화 정책 토론회에서 일부 외국인 혐오단체 회원들이 소란을 피웠다. 이 의원은 결혼 이주여성으로 최초로 지난 4·11 총선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인물이다. 이날 오전 10시쯤 결혼 이주여성과 외국인 노동자 등 200명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다문화 정책의 주요 쟁점 및 입법과제’ 토론회가 시작될 무렵 와이셔츠 차림의 40대 남자가 단상에 뛰어 올랐다. 이 남자는 “반대 토론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피고 없이 원고만으로 재판을 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면서 “다문화 정책은 민족말살 정책”이라고 소리쳤다. 국회 직원과 행사 관계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며 제지하려 하자 그는 “살색이 왜 인종 차별적 표현이야? 이자스민은 국회의원이 아니야. 우리는 이자스민한테 투표한 적이 없어. 지금도 외국인 범죄로 수십 명씩 죽고 있어.”라고 말했다. 이어 몇몇 참석자들이 “너희 같은 반역자들 때문에 이 나라가 어렵다.” “김정일 같은 반역자들”이라고 외치며 동조했다. 이 남자는 소란을 피운지 10여분 만에 밖으로 끌려나갔다. 소란을 피운 사람들은 외국인노동자대책범국민연대, 외국인범죄척결연대 등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토론회가 시작되고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가 “국제적 개방과 다양성으로 인해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싶어 하는 외국인이 많이 늘고 있다.”며 축사를 하자 일부에서 야유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 의원은 인사말에서 “아침부터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 세미나에 참석한 여러분께 다문화 사회를 이루는 일이 정말 어려운 건지 질문을 드린다.”라면서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면 우리 고민보다 더 쉽게 (다문화사회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4월 총선 직후에도 이 의원에 대해 ‘매매혼으로 팔려온 ×’, ‘불법체류자가 판을 치게 됐다’ 등 외국인 혐오자들의 인신공격이 난무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자스민, 외국인 혐오자가 난동 부리자

    이자스민, 외국인 혐오자가 난동 부리자

    “다문화 정책은 민족말살 정책이다.” 11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 주최로 열린 다문화 정책 토론회에서 일부 외국인 혐오단체 회원들이 소란을 피웠다. 이 의원은 결혼 이주여성으로 최초로 지난 4·11 총선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인물이다. 이날 오전 10시쯤 결혼 이주여성과 외국인 노동자 등 200명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다문화 정책의 주요 쟁점 및 입법과제’ 토론회가 시작될 무렵 와이셔츠 차림의 40대 남자가 단상에 뛰어 올랐다. 이 남자는 “반대 토론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피고 없이 원고만으로 재판을 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면서 “다문화 정책은 민족말살 정책”이라고 소리쳤다. 국회 직원과 행사 관계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며 제지하려 하자 그는 “살색이 왜 인종 차별적 표현이야? 이자스민은 국회의원이 아니야. 우리는 이자스민한테 투표한 적이 없어. 지금도 외국인 범죄로 수십 명씩 죽고 있어.”라고 말했다. 이어 몇몇 참석자들이 “너희 같은 반역자들 때문에 이 나라가 어렵다.” “김정일 같은 반역자들”이라고 외치며 동조했다. 이 남자는 소란을 피운지 10여분 만에 밖으로 끌려나갔다. 소란을 피운 사람들은 외국인노동자대책범국민연대, 외국인범죄척결연대 등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토론회가 시작되고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가 “국제적 개방과 다양성으로 인해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싶어 하는 외국인이 많이 늘고 있다.”며 축사를 하자 일부에서 야유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 의원은 인사말에서 “아침부터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 세미나에 참석한 여러분께 다문화 사회를 이루는 일이 정말 어려운 건지 질문을 드린다.”라면서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면 우리 고민보다 더 쉽게 (다문화사회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4월 총선 직후에도 이 의원에 대해 ‘매매혼으로 팔려온 ×’, ‘불법체류자가 판을 치게 됐다’ 등 외국인 혐오자들의 인신공격이 난무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선택! 역사를 말하다] (15) 박제가와 유수원

    [선택! 역사를 말하다] (15) 박제가와 유수원

    국왕이 내려주는 술잔을 받고 국왕과 더불어 꽃길을 산책하고 시를 쓰는 신하가 있다. 가득 내려진 음식에 국왕의 따스한 눈길을 받는 신하는 감격하여 세상을 품에 얻은 것 같다. 한편, 국왕을 인정하지 않고 끌어내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다가 역모라는 이름으로 대역죄인이 되어 형장에 서 있는 신하가 있다. 그의 학문은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하였지만,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은 왜 이리 다를까? ●정조의 총애 받은 자 vs 북학의 원조지만 잊힌 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경륜의 학자들. 서얼이라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국왕 정조의 총애로 정조시대 북학을 중심 정책으로 만들어낸 박제가와 북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지만 영조대 반역자로 규정된 유수원의 삶은 한편으로 유사하면서 한편으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유수원과 박제가는 모두 우리 역사에서 북학을 강조한 학자들이다. 박제가는 정조가 규장각 5대 검서관의 한 명으로 가장 총애하는 인물이었고 ‘북학의’라는 명저를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유수원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역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아니고는 대부분 관심 밖의 인물이며 그가 ‘우서’(迂書)라는 개혁사상이 가득 담긴 책을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거의 없다. 그만큼 역사의 기억에 남는 인물이 아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가 영조대 ‘나주벽서 사건’(1755년 을해옥사)이라는 역모 사건의 관련자이고 그 탓에 대역죄인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적으로 몰린 그의 이야기가 후세에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얼 출신이었지만 정조의 총애를 입었던 박제가는 정조의 배려에 의해 두 번이나 연행사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중국 문화를 볼 수 있었고, 이러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의 다양한 문화에 적용시켜 변화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북학 정신은 정조의 적극적 후원으로 경세치용학파와 더불어 이용후생이라는 큰 사상으로 발전하여 정조시대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 두 사람 모두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 사상이 있었지만 한 사람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한 사람은 역사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국가 권력의 최고 정점이었던 국왕과의 관계였다.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인물과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와 더불어 파트너로서 국가 개혁에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떤 시대적 이유로 인생과 역사의 평가가 달라졌을까? ●명문 소론 가문 출신의 귀머거리 유수원 유수원은 1694년(숙종 20년)에 유봉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종숙부가 영조 연간 영의정을 지냈던 유봉휘이니 명문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본관인 문화 유씨는 당파적으로 소론이었고, 유수원은 소론의 중심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실 유수원은 소론 중에서도 급진파라고 할 수 있다. 유수원에게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귀머거리였던 것이다. 그가 언제부터 귀가 먹었는지 알 수 없지만, 훗날 영조와의 대화에서도 필담으로 할 정도였으니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신체적 결함은 그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유수원의 종숙인 유봉휘는 영조 즉위년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지만, 영조는 그를 끝내 조선 팔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저주의 땅 경원으로 유배 보내고 말았다. 그 이유는 유봉휘가 “경종이 즉위한 뒤 ‘김창집 등 4명의 노론 대신들이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강요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론 입장에서는 당연히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기에 제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봉휘를 종숙으로 두었으니 유수원 역시 노론에게 있어서는 견제의 대상이었다. 유수원은 20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24세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가히 천재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과거 평균 합격 연령이 41세였으니 24세에 합격한 것은 그가 뛰어난 자질과 열심히 공부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유수원의 급진성은 경종에 의해 정6품의 정언으로 임명받은 후 나타났다. 나라가 안정이 안 되고 국정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소론 온건파인 영의정 조태구가 국정운영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영의정 조태구는 소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종대에 노론 4대신의 입장을 받아들여 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묵인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소론 급진파로서 소론 온건파인 조태억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이미 마음속으로 영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영조가 국왕이 되고자 자신의 형인 경종을 독살하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에선 노론에 대한 적개심만이 아니라 국왕에 대한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집권 세력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는 유수원은 영조를 비롯한 집권 노론에게 중용될 수 없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본격적으로 사회 개혁에 대한 구상과 집필을 하였다. 나라가 왜 이리 어려워졌을까에 대한 고민을 그는 깊이 하였다. 그 결과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 차별이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빈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업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직분을 찾을 수 있고,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나라와 백성은 부국안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농공상이라는 편벽되고 고루한 강제성이 나라의 변화 발전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학문에 관심도 없고 실력도 없는 양반 사대부들이 유생(儒生)이라고 자처하면서 온갖 편법과 협잡으로 벼슬자리를 구한 다음 권력과 세도를 부려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고 진단하였다. 바로 노론을 자임하는 양반들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결국, 양반들 역시 놀고먹을 것이 아니라 일해야 하고 특히 상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훗날 그를 양반상인론의 원조로 평가하는 것이다. 영조는 그의 ‘우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중용하고자 하였으나 노론 대신들의 집요한 반대로 그를 우대할 수 없었다. 나주에 유배 가 있던 소론 윤지는 나주목사 등을 포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영조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영조는 자신의 최대 약점인 경종과의 관계를 건드린 이 사건에 대하여 격노하였고 직접 국문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이 죽어나갔다. 탕평의 군주 영조는 이미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주벽서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관련 인물들을 찾는 과정에서 유수원이 검거되었고 유수원은 영조 앞에서 당당히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그 결과 그는 다음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모든 가족은 관노로 편입되었다. ●박제가 “조선의 가장 큰 폐단은 바로 가난” 유수원과 반대로 서얼 출신이었던 박제가는 정조를 만났다. 흔히들 사람들은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실제 이덕무나 박제가에 대한 정조의 총애는 정약용 이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제가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워서 조선의 발전을 강조한 이용후생 학파의 대명사이다. 연암 박지원, 청장관 이덕무, 그리고 지난해 TV드라마 ‘무사 백동수’의 주인공이었던 야뇌 백동수(1743~1816)와 교류를 하며 북학파의 일원이 된 그는 정조 즉위 후 연경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다녀온 후 북학에 대한 생각을 굳혔다. 이들 모두 정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는 인물들이었다. 정조는 국가 개혁을 위해서라면 당론을 가리지 않고 우대를 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민생 안정을 위해 그는 과감한 주장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의중을 파악한 그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그것이 바로 ‘병오소회’(丙午所懷)이다. 1786년인 병오년에 자신이 품은 생각을 아뢴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바로 중국과의 통상과 양반상인론이었다. 박제가는 그렇게 이야기하였다. “현재 국가의 가장 큰 폐단은 바로 가난이옵니다. 그렇다면, 가난을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중국과 통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박제가는 중국과 통상을 중요시했고, 중국 통상 이후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도 통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양의 선교사들까지 조선으로 입국시켜 그들의 지식을 배워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도 하였다. 국가의 경제적 안정과 백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양반들이 상인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양반상인론은 실제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축성하고 양반들을 대거 상업과 유통업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정책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유수원이 노론으로 전향했더라면 결국, 유수원과 박제가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 사상가이자 관료였다. 하지만, 유수원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박제가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정조시대 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어떤 군주를 만나느냐에 따라 정치적 생명이 달라지는 봉건적 구조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유수원이 만약 영조를 국왕으로 인정하고 노론으로 전향하여 그가 가진 생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면 어떤 세상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박제가가 서얼이라는 이유로 조정에 대한 반감으로 출사하지 않고 역모를 꿈꾸었다면 그의 북학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선택은 어렵고 힘든 것이다. 김준혁(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탈북자 XX들… 하태경은 변절자 죽여버린다” ‘통일의 꽃’ 임수경 의원의 막말

    “탈북자 XX들… 하태경은 변절자 죽여버린다” ‘통일의 꽃’ 임수경 의원의 막말

    민주통합당 임수경(비례대표) 의원이 탈북자 출신 대학생과 전향한 북한인권 운동가 출신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에게 “탈북자 새끼, 변절자” 등 막말을 쏟아내 파문이 일고 있다. 탈북자 출신 대학생인 백요셉 탈북청년연대 사무국장은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1일 저녁 서울 종로구 모 식당에서 남성 2명과 술을 마시던 임 의원을 우연히 만났다.”며 당시 상황을 공개했다. 백씨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임 의원을) ‘통일의 꽃’으로 알고 있었고 대학 과 선배라 용기를 내 사진을 함께 찍었다. 그런데 웨이터가 임 의원 보좌관들의 요구로 내 휴대전화 사진을 마음대로 지웠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보좌관에게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밝혔다. 백씨에 따르면 임 의원은 이에 웃으며 “내게 피해가 갈까 봐 보좌관들이 신경 쓴 것이니 이해하라.”고 말했다. 백씨는 농담으로 “이럴 때 우리 북한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아시죠? 바로 총살입니다. 어디 수령님 명하지 않은 것을 마음대로 합니까?”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표정이 변한 임 의원이 자신에게 폭언을 쏟아냈다는 게 백씨의 주장이다. 임 의원이 자신에게 “야,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까불지 마라. 어디 근본도 없는 탈북자 새끼들이 굴러 와서 대한민국 국회의원한테 개겨?”, “하태경 그 변절자 새끼,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라고 고함을 질렀다는 것이다. 백씨는 페이스북에서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와서까지 ‘김일성, 김정일을 반역했다는 민족 반역자’ 소리를 들으며 노동당에 대한 죄의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수백만 동포들이 굶어 죽고 맞아 죽는 참혹한 현실을 보면서 김일성주의를 버린 하태경 의원을 변절자라고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논리인가.”라고 개탄했다. 임 의원의 폭언을 녹취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논란이 인터넷을 통해 번지자 임 의원은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내고 “모든 논란은 제 불찰로 인한 것이고 부적절한 언행으로 상처를 입었을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어 “하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해를 풀고 사과했으며 백씨에게도 별도로 직접 사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임 의원은 “그날 상황은 새로 뽑은 보좌진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탈북 청년이 내 보좌관들에게 ‘총살감’이라는 말을 해 감정이 순간 격해져서 나온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변절자’ 표현도 학생운동, 통일운동을 함께 해 온 하 의원의 새누리당행을 지적하는 것이었을 뿐 탈북자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서 자신의 트위터에도 “정책으로 일하게 해 주세요.”라며 정치적 논란을 차단했다. 새누리당 김영우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임 의원은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지고, 민주당도 응분의 책임을 지라.”고 요구했다. 김 대변인은 “하 의원과 백씨가 대체 ‘누구’를, ‘어디’를 변절했다는 것인지 변절의 ‘내용’을 분명히 밝히라.”면서 “힘없는 대학생을 향해 인격적 모독은 물론 ‘몸조심하라’며 협박까지 내뱉은 언사는 국민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는 행위”라고 공격했다. 하 의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별로 대응할 가치를 못 느낀다.”고 일축했다. 임 의원은 한국외대(용인캠퍼스) 4학년 때인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 40여일간 북한에 머무르다 돌아온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통일의 꽃’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김대중 정부에서 사면·복권된 이후 방송위원회 남북교류추진위원회 위원, 월간지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이재연·최지숙기자 oscal@seoul.co.kr
  • 임수경, 탈북대학생에게 “변절자 XX 죽여버리겠다” 파문

    임수경, 탈북대학생에게 “변절자 XX 죽여버리겠다” 파문

    민주통합당 임수경(비례대표) 의원이 탈북자 출신 대학생과 전향한 북한인권운동가 출신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에게 “탈북자 새끼, 변절자” 등 막말을 쏟아내 파문이 일고 있다. 탈북자 출신 대학생인 백요셉 탈북청년연대 사무국장은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1일 저녁 서울 종로구 모 식당에서 남성 2명과 술을 마시던 임 의원을 우연히 만났다.”면서 당시 상황을 공개했다. 백씨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임 의원을) ‘통일의 꽃’으로 알고 있었고 대학 과 선배라 용기를 내 사진을 함께 찍었다. 그런데 웨이터가 임 의원 보좌관들의 요구로 내 휴대전화 사진을 마음대로 지웠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이에 ”보좌관에게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덧붙였다. 백씨에 따르면 이에 임 의원은 웃으며 “내게 피해가 갈까 봐 보좌관들이 신경 쓴 것이니 이해하라.”고 말했다. 백씨는 “알겠습니다.”라고 수긍한 뒤 농담으로 “이럴 때 우리 북한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아시죠? 바로 총살입니다. 어디 수령님 명하지 않은 것을 마음대로 합니까?”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백씨는 이때부터 표정이 변한 임 의원이 자신에게 폭언을 쏟아냈다고 주장했다. 임 의원이 자신에게 “야,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까불지 마라. 어디 근본도 없는 탈북자 새끼들이 굴러 와서 대한민국 국회의원한테 개겨?”, “하태경 그 변절자 새끼,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라고 고함을 질렀다는 것이다. 백씨는 이런 임 의원의 폭언을 녹취했다고 밝혔다. 백씨는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와서까지 ‘김일성, 김정일을 반역했다는 민족 반역자’ 소리를 들으며 노동당에 대한 죄의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수백만 동포들이 굶어 죽고 맞아 죽는 참혹한 현실을 보면서 김일성주의를 버린 하태경 의원을 변절자라고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논리인가.”라고 개탄했다. 임 의원은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먼저 저의 발언과 관련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쳐 드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린다.”면서 “모든 논란은 저의 불찰로 인한 것이고 제 부적절한 언행으로 상처를 입었을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어 하 의원과 이날 오전 전화를 해서 오해를 풀고 사과의 뜻을 전했으며 백씨와도 별도의 자리를 통해 직접 사과의 말을 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 의원은 “다만 그날의 상황은 새로 뽑은 보좌진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탈북 청년이 제 보좌관들에게 ‘북한에서는 총살감’이라는 말을 한 것에 대해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나온 발언이었다.”면서 “‘변절자’라는 표현 역시 저와 학생운동, 통일운동을 함께 해 온 하 의원이 새누리당으로 간 것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었을 뿐 탈북자분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임 의원은 앞서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도 글을 올려 “하 의원과는 방식이 다를 뿐 탈북 주민들이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대한민국에 정착하도록 노력하는 측면에서는 관심사가 같다.”고 해명한 뒤 “정책으로 일하게 해 주세요.”라며 정치적 논란을 차단했다. 하 의원은 전화통화에서 “별로 대응할 가치를 못 느낀다.”고 일축했다. 임 의원은 한국외대(용인캠퍼스) 4학년 때인 1989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 40여일간 북한에 머무르다 돌아온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통일의 꽃’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김대중 정부에서 사면·복권된 이후 방송위원회 남북교류추진위원회 위원, 월간지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이재연·최지숙기자 oscal@seoul.co.kr
  • “김정은 ‘혁명혈통’ 아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외할아버지 고경택은 일제시대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을 뒤쫓는 일본군에 군복을 납품하던 제조공장에서 일한 인물이라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텔레그래프는 ‘북한 지도자 김정은의 반역자 외할아버지’라는 제목의 인터넷판 기사에서 “제주도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고경택은 오사카에 있는 일본군 군복 제조공장에서 일했는데 그 군대는 당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하던 김일성을 토벌하는 곳이었다.”면서 “일본의 인권운동가 가토 겐이 일본 내 군 문서 보관소와 의회 도서관 등에 있는 자료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텔레그래프는 이어 “일본 점령군에 협조한 전력은 북한에서 반역 행위로 간주돼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수용소에 투옥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고경택은 1960년대 북한에 돌아간 뒤 김정일이 아낀 그의 딸(고영희) 덕분에 그런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외할아버지의 전력은 김정은의 위상을 북한사회 밑바닥인 ‘적대계층’으로 떨어뜨릴 만하다.”고 전했다. 자유아시아방송(RFA)도 이날 “김정은의 외할아버지가 1930년대에 일했던 오사카 공장이 일본군 군수업체임이 확인됐다.”면서 “이는 김정은이 ‘혁명의 혈통’이 아니라 ‘적대계층’ 출신이라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가토 겐은 RFA 인터뷰에서 “당시 비밀문서로 분류된 2차 세계대전 관련 기록의 일부인 육군관리공장의 목록을 확인한 결과 고경택이 일했던 히로타봉공장(廣田縫工場)이 1930년대 말 일본군에 천막과 군복을 납품하는 군수공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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