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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警이 독립운동가 공적 증언

    항일운동을 펼치고도 관련자료가 없어 독립유공 포상에서 제외된 독립운동가가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일제 형사의 ‘증언’을 받아내,뒤늦게 훈장을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 당시 동료들의 증언으로 포상받은 사례는 더러 있었으나 일경이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확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제 말기인 1942년 5월 비밀결사조직 ‘친우회’를 결성,네차례에 걸쳐 부산시내에 반일전단을 살포한 이광우(李光雨·75·부산시 동구 좌천동)씨는 44년 6월 부산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단기 1년,장기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아 출옥했다. 이씨는 이에 따라 지난 89년 정부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냈으나 관련판결문이 첨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사보류 조치를 받았다. 이후 이씨는 김천형무소와 정부기록보존소 등에서 자료를 수소문했으나 한국전쟁 등으로 자료가 소실됐다는 답변만을 들었다. 이씨는 이어 당시 자신을 검거한 일경 하판락(河判洛·88·부산거주)씨가해방 후 반민특위에 검거됐을 때 자신과 관련된 언급을 했었고 자신 역시 하씨의 죄상을 밝히는 증언을 했던 기록 등을 근거자료로 제출하기로 했으나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하씨는 일제 때 경남도경 고등과 외사주임으로 독립운동가를 조사했었다. 한편 지난 11일 하씨는 기자와 단독인터뷰에서 “일경으로 있을 때 이광우씨 건을 취급했었다”면서 “필요하면 추가로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국가보훈처측은 “당사자의 증언인데다 관련 문건이 뒷받침돼 자료가치가 충분하다”며 이씨의 공적을 새로 심사할 뜻을 밝혔다. 하씨는 해방 후 목재수입상 등을 경영하면서 비교적 여유있게 살아왔다. 정운현기자 jwh59@ *친일경찰 하판락씨 인터뷰 일제 때 경남도경 고등과 외사주임으로 독립운동가를 뒤┌榕年? 하판락씨는 “일제 경찰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그동안 숨겨온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언제 경찰에 들어갔나. 진주고보(3회)를 마치고 진양군청 고원(雇員)으로 근무하던중 1936년 경찰에 투신했다. ◆일경 시절 주요 담당업무는. 경남도경 소속 수상경찰서,고등과 외사계에서 적색분자·외사범 검거를 담당하며 해방때까지 근무했으며 최종계급은 경부보였다. ◆1943년 ‘친우회 불온전단사건’과 관련,주동자 이광우씨를 검거한 것을기억하는가. 부하인 김소복과 함께 그 사건을 다뤘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경위와 재판결과는. 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울 마포형무소에 구금됐다.서울에서 3회,부산에서 1회 등 모두 4차 공판을 거쳐 최종 무혐의로 풀려났다. 부산 정운현기자
  • 대한매일 金三雄주필 칼럼집 ‘보는 사람 없어도‘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이 신문지면 등에 내보냈던 촌철살인의 글을 묶어 칼럼집 ‘보는 사람 없어도 달은 거기 있는가’를 펴냈다.범우사 8,000원. 저자는 지난 25년간을 독재와 맞서 민주화 투쟁을 펼치면서 올곧게 살아온이 시대의 논객.대한매일에 근무하기 이전에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야당기관지를 만들며 민주화와 왜곡된 역사 바로잡기에 힘써왔다. 책은 지난해부터 올 7월까지 대한매일과 자매지인 뉴스피플에 게재된 글을사회정의와 민주화,통일 문제 등 6가지 주제로 나눠 싣고 있다.대한매일 백무현 화백이 삽화를 곁들여 컬럼의 딱딱함을 덜어 준다. 저자는 ‘반민특위’와 ‘인혁당’사건 등을 통해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 잡고 햇볕론을 비롯한 당면정책과 국가적 과제 등을 분석한다.더불어 음악과문학 속에 숨겨진 역사에 대한 단상도 펼친다. 정기홍기자
  • 반민특위 옛 청사터에 기념標石

    해방후 친일파 처단을 위해 구성되었던 반민특위의 기념표석(標石)이 특위와해 50년만에 옛 청사터에 세워질 예정이다.민족문제연구소(소장 金奉雨)주도로 마련된 기념표석은 해방직후 반민특위 청사가 있던,현 남대문로 국민은행 본점 건물 앞에 건립된다.기념표석은 가로 1m,세로 80㎝ 크기의 대리석재질로 표면에는 ‘반민특위 본부가 있던 자리’라는 문귀가 새겨진다.표석건립행사는 20일 정오. 반민특위 총무과장을 역임한 이원용(李元鎔·79·경기도 부천시)씨는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측 요청으로 당시 반민특위 청사의 정확한 위치 등을 고증해준 적이 있다”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이 겨우 반세기만에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화제의 책]

    ◆공자의 이름으로… 중국의 명·청대에 한창 나이의 여성이 많이 숨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예문서원이 펴낸 ‘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전여강 지음,이재정 옮김)은그 이유로 정절을 강조하는 당시 사회·경제적 분위기를 꼽았다. 명·청대에는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의 가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로 국가가 보상을 하고 각 지방 관아에서는 ‘열녀’를 추앙해,결과적으로 수절과 자살을 장려했었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또 당시 과거시험의 경쟁 심화로 남성들이 깊은 좌절을 겪게 되고,이것이여성 자살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자살 여성이 많은 곳은 과거시험에 실패한 학자의 수도 많았다는 것.귀신이되면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민간신앙도 여성을 죽음으로 몰게 한 주요원인이라고 책은 말한다.저자는 그러나 당시 여성들이 ‘공자(유교)의 이름으로’ 죽었으며,‘공자가 죽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값 7,500원. ◆증언 반민특위… 해방직후 구성된 ‘반민족행위 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반민특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주요 인사 7명의 최초 증언록이다.제목은 ‘증언 반민특위,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정운현 지음,삼인 펴냄). 저자는 이 책의 가치를 사장될 뻔했던 역사의 편린을 담은 ‘행운의 책’이라고 평가했다.그래서 증언자들의 말투까지 실어 진실을 그대로 전달하려는노력을 보였다. 80년대초 귀순한 신경완씨의 북한의 친일파 청산실태에 대한 증언은 사료적인 가치를 더한다.뛰어난 기억으로 북한의 친일파 청산실태를 소상하게 밝힌신씨는 증언 3개월만에 작고했다. 증언자들은 반민특위의 구성경위와 체포 당시의 반민족주의자들의 태도 및수감 때의 정신상태,반민특위 해체를 부른 이른바 지난 49년의 ‘6.6사건’전말,반민특위 활동자의 역사의식과 개인적인 성향,특위관계자에 대한 이승만과 친일파의 협박 및 회유책도 소상히 전하고 있다.값 9,000원. ◆정치야 맛좀 볼텨 시사 만평의 묘미는 짓눌리고 응어리진 가슴을 시원스레 뚫어주는 데 있다. 시사 만화가 박재동씨의 ‘정치야 맛좀 볼텨’는 작가가 지난해 TV 시사만평에서 세태를 풍자한 시사 애니메이션 작품을 그림과 함께 CD로 구성한 것이다. 왜곡되고 뒤틀린 우리 사회의 환부를 촌철살인의 시각으로 날카롭게 꼬집어독자의 마음을 통쾌하게 만든다. 책에는 39개의 얘기가 실려 있다.고급옷 로비사건을 비롯해 세풍사건,한일어업협정,대기업 빅딜 등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굵직한 사건을 다룬다.정치적으로 민감해 TV에 방영되지 못했던 작품들도 모두 담았다.한 시대의 정치 사회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작품마다 기획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자세하게 실어,시사 애니메이션 작가 지망생의 교재로 활용될 수 있다(박재동 지음, 산성미디어 펴냄). 값 1만2,000원. 정기홍기자 hong@
  • 독립운동가 10명 후손 근황

    일제하 독립투쟁에 헌신한 순국선열·애국지사의 후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대의 위업을 현창하면서 꿋꿋하게 살고 있다.더러는 독립운동가 단체에서 활동하는 후손도 있다.몇몇 후손들의 근황을 살펴본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장손 최창규(崔昌圭·63)씨는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 국내 최초로 서울대에 ‘한국학’ 과목을 개설한 주인공.국회의원과 독립기념관장을 거쳐 98년부터 성균관 관장으로 재직중이다.의암 유인석 선생의 유일한 손자 유준상(柳濬相·77)씨는 광복회 정화위원회 활동을 주도한 바 있으며 교편생활과 개인사업을 하다 현재는 은퇴,노후를 보내고 있다. 13도 의병총대장 이인영 선생의 손자 이종갑(李鍾甲·78)씨는 전직 경찰 출신으로 10여년째 순국선열유족회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조부를 비롯해 숱한 선열들이 순국한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관내 사무실에서 월간지 ‘순국(殉國)’을 발행해 오고 있다.의병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증손 이경규(李經揆·59)씨는 지난해 증조부의 의병전투상황을 기록한 ‘운강창의일록(雲崗倡義日錄)’을 공개한 바 있으며 역시 운강의 ‘작전지도’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바 있다. 초대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 이석희(李奭熙·67)씨는 대우그룹 공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통한다.서울대 졸업후 68년 대우그룹에 입사한 이씨는 그룹내 주요기업 사장·회장을 역임했으며 지난해 경영일선에서은퇴,㈜대우의 상담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씨의 부친은 내과의사로 유명했던 이의식(李義植)씨로 해방후 반민특위 검찰관을 지냈으나 6·25때 납북됐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외아들 신수범(申秀凡)씨는 91년 작고했다.지금은 며느리 이덕남(李德南·56)씨가 단재 선생의 기념사업 활동을 하고 있다.단재의손자 신상원(申尙原·28)씨는 올해초 국가정보원에 특채됐는데 이는 단재와같은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李會榮)선생의 손자인 이종찬(李鍾贊) 국민회의 부총재가 안기부장 재직 시절 배려한 결과다. 백암 박은식 선생의 후손은 현 독립기념관장 박유철(朴維徹·61)씨로 박씨는 건설부 행정관료 출신이다.박씨의 부인 양준자(梁俊子·56)씨는 백암과 같이 구한말 항일지 ‘대한매일신보’에서 같이 근무했던 양기탁(梁起鐸)선생의 손녀다. 임시정부의 상징적 인물인 백범 김구 선생은 두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 김인(金仁)은 해방 직전 타계했으며 차남 김신(金信·77)전교통부장관이 가계를대표하고 있다.올봄 김전장관은 모친을 경기도에서 이장,효창원의 부친 묘소와 합장했으며 조모 곽낙원(郭樂園)여사와 형 김인 선생의 묘소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했다.장남 김진(金振·50)씨는 지난해 11월 주택공사 상임감사(차관급)로 부임했다.현 정권의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배려차원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유족으로는 탤런트 김을동(金乙東·54·여)씨가 잘 알려진 인물이다.장손 김경민(金慶珉·44)씨는 지난 91년 가이후 일본총리의 방한에 항의,탑골공원 맞은편 노상에서 할복자살을기도한 바 있다.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백산 지청천(일명 이청천)장군의 딸 지복영(池復榮·79)여사는 부친과 같은 광복군 출신으로 지난 95년 부친의 일대기‘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끌며-항일 무장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을 펴낸 바 있다.지여사는 해방후 교편생활을 거쳐 독립유공자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반민특위 해체이후 친일파

    일제 패망과 함께 햇볕에 봄눈 녹듯이 사라졌어야 할 친일파가 다시 고개를 들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해독을 끼치고 있는 것은 해방후 ‘역사의 매듭’을 짓는 상징적 통과의례마저 없었기 때문이다.오늘날 친일파에 대한 개념과 현실이 이처럼 유리되고 결국 착종되는 현상이 개인차원에 그치지 않고 집단무의식으로까지 번져 우리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이중적 태도와 감정,의식과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경향마저 있다. 해방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가 중도에 와해된 것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또다른 요인으로는 미군정의 방해공작을 들 수 있다.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안을 놓고 찬탁·반탁으로 나뉜 것이 결국 좌우대립으로 굳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탁치에 반대하는 친일세력이 ‘민족세력’으로 복권돼 도덕적 명분을 획득하였다.상대적으로 임정세력은 통일전선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이 반민특위 해체의 뿌리가 된셈이다.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재등용한 명분 가운데 하나는 건국초기 전문지식을갖춘 ‘인재부족’이었다.여기에 미·소간의 냉전으로 한국이 반공의 최일선 국가가 되자 ‘반공이데올로기’가 추가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국가가 위기를 맞자 친일파들이 본격적으로 경험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주어지게 된 것이다.친일세력은 한국전쟁과 ‘반공’이념을 고리로 다시 한국사회의 전면에 등장하였으며 이들의 독점적 지위는 이후 계속됐다. 군부와 경찰분야에서 친일파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이 때문이다.국방장관·육참총장은 일본군 출신이 아니면 결격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로 일본군 출신 일색이다.경찰의 경우 미군정 당시 간부 가운데 80% 이상이일제경찰 출신이었다는 통계가 있다. 친일세력이 미국의 정책을 등에 업고 지배세력으로 재부상한 배경에는 그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쌓아온 정치·경제·문화적 토대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그리고 이는 민주당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도 청산은 커녕 오히려 확대,재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친일파 연구 어디까지 왔나

    해방후 친일파 척결문제는 새국가 건설과 함께 시대적 당위로 당시 우리민족앞에 주어진 양대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 문제는 친일파들의 조직적인 저항과 이들을 비호한 이승만정권의 방해공작으로무산되고 말았다.따라서 20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이 문제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으며 결국 21세기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 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광복회 주최,본사 후원으로 세종문화회관대회의장에서 열리는 ‘친일파 청산과 민족정기 선양’ 학술대회는 20세기에 발생한 문제를 세기의 끝에서 되짚어 본다는데 의의가 있다. 해방후 반민특위의 활동이 좌절된 이래 한동안 이 문제는 우리사회에서 공식 거론할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재야사학자 고 임종국씨(89년 작고)만이 평생 이 문제를 천착해왔을 뿐 학계에서조차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방치돼 왔다. 친일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논의는 90년대 이후 우리사회의 민주화 열기와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점차 관련학계·재야연구자들의연구테마로 부각됐다.그러나 이미 당사자 상당수가 사멸한데다 관련자료의 부족으로 아직 체계적인 연구나 자료수집은 미비한 실정이다.반면 90년대 이후친일파문제가 우리사회 전반에서 공식 논쟁거리로 부각됨에 따라 관련 친일파들의 동상철거·서훈박탈·연구서 출간 등 사회운동 차원에서 큰 성과를거둔 바 있다. 한편 이번 대회는 90년대 이후 고조된 우리사회의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과반성의 연장선상에서,20세기 정리차원에서 시도된 면도 없지 않다.따라서 이번 행사를 통해 친일파 문제를 매듭지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인 연구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광복회는 서울대회에 이어 11일부터 23일까지 산하 11개 시·도지부에서 주제발표자들을 중심으로 연사를 초빙,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반민법·반민특위 활동

    친일파 청산과 관련,해방후 입법부의 활동은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특위를 구성한 것이 그것이다. 전문과 3장 22조로 구성된 반민법은 반민족행위자(친일파)의 범주를 협소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으로 이는 최소한의 처벌을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19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활동에 들어간 반민특위는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 속에 일제의 주구로 활동한 각계의 대표적인 친일파들을 검거,민족의 이름으로 단죄해 나갔다. 그러나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행정부는 불법적인 활동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으며 마침내 반민특위를 중도에 와해시키고 말았다.특위 출범초기부터 ‘시기상조’ 운운하며 친일파 청산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승만은 특위가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을 검거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며경찰을 동원하여 반민특위를 습격,특경대원들을 연행하였다(소위 ‘반민특위습격사건’).사건 다음날 이승만은 한 외신과의 회견에서 ‘특경대 해산은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불과 8개월간의 활동기간중 특위가 다룬 반민족행위 조사 건수는 총 682건(민간인 고발건 포함)으로 이는 당시 생존 친일파 가운데 악질적인 친일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특위는 해당자들에게 징역형·공민권 정지 등 인적 청산과 함께 재산몰수형을 동시에 적용,친일파들의 물적 기반 청산도 아울러 시도했다.이는 우리사회에서 구체적·합리적으로 친일파를 청산하려했던 노력으로 평가된다. 한편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 노력이 좌절된 것은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공격했기 때문이다.당시 이승만은 ‘치안확보’를 위해서라고 변명했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다.오히려 친일파들이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공급하고 절대적 충성을 맹세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독립운동가 가운데한 사람이었던 이승만의 이같은 처사는 당시 민족세력과 민중에 대한 배신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4·19혁명은 독재자이며 배신자인 이승만에 대한 타도이자 응징이었다.
  • [정직한역사되찾기]연재를 마치며-자료제공·격려해준 독자에 감사

    작년 8월14일자로 첫회 연재를 시작한 ‘친일의 군상’은 연재 8개월만에 34회로 나래를 접는다.이 연재물은 본지가 과거 ‘서울신문’의 구각을 벗고구한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뿌리를 되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한 야심작이었다. 한국언론사에서 일간지 사상 처음으로 시작한 이 연재는 시작 전부터 학계와 독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해방후 반민특위의 좌절로 친일파 문제는 ‘역사의 미라’처럼 썩지 않은 채 논란의 여지로 남겨져 왔다.그러나 언론계는 물론 역사학계조차 정치적 상황을 이유로 한동안 이 문제를 외면해왔다.오직 재야사학자 임종국만이 외로운 길을 가며 평생을 이 분야 연구에바쳤을 뿐이다.이 연재는 그가 뿌린 씨앗이 싹 하나를 움틔운 것이라고 할수 있겠다. 본사가 이 연재를 시작한 취지 중의 하나는 금세기에 발생한 역사적 문제는 금세기에 마무리하고 넘어가자는 역사적 사명의식에서였다. 수년전 모 일간지에서도 이같은 내용의 연재를 시도한 적이 있다.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그때만 해도 분위기가 성숙되지 못했던 탓인지도 모른다.따라서 이번에 본지가 이 연재를 기획,실행에 옮길 수있었던 것은 50년만의 정권교체와 같은 우리사회의 대변혁이 한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연재기간중 자료제공과 함께 편지나 전화로 격려해주신 독자여러분께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특히 자신의 부친이 연재대상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자료제공과 함께 호의를 베풀어주신 파인 김동환의 자제 김영식 선생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본 연재물은 대상인물을 일부 추가하여 조만간 단행본으로선보일 예정이다. 정운현기자
  • [정직한 역사 되찾기](33)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

    일제강점기 친일파는 조선내는 물론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수립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나 일본 본토도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이들은 대개 군부나 행정기관 등 일제의 권력기관에서 일제통치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를 나와 고급장교로 활동한 친일 군인들이 이에 속하며 또 일본이나 만주국의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고급엘리트 관료로 활동한 자들을 들 수 있다.한 단계 낮은 직급에서는 밀정이나 행동대원 등 앞잡이로 활동한 자들을 거론할수 있겠다. 일본 본토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파로 박춘금(朴春琴·1891∼1973)을 들수 있다.그는 조선인으로서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두 번씩이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그의 친일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극력 친일파 가운데 일제말기 일제가 임명한 귀족원 의원을 제외하면 일제통치 전 기간을 통해 일본 국회에 진출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박춘금은 여러 형태의 친일파 가운데서상당히 드문 유형에 속한다.친일파 가운데는 지식을 팔아 일제에 아부한 집단이 있는가하면,경제적 기반을 일제통치에 제공한 대가로 기득권을 보전하고 일제와 유착관계를 형성해온 부류도 있다.그러나 박춘금은 그도저도 없는 자였다.그는 오직 몸뚱이 하나로친일대열에서 성공한 자였다.그는 수하에 폭력조직을 거느린 소위 ‘정치깡패’ 집단의 우두머리였다.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하수인으로 폭력집단이 존재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식민지시절에도 이같은 집단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주먹으로 친일배의 정상에 오른 그의인생역정을 더듬어 보자. 박춘금은 1891년 경남 밀양 태생으로 본관도 밀양이다.부 박금득(朴今得)과 모 박차연(朴且連)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년시절 그는 일본인 술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판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일본으로건너간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하지가 않다.다만 그가 한 연설에서 토로한 말에 따르면,일본에 도착할 당시 수중에 가진 돈은 1원 49전뿐이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관비유학생 50명인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했다. 1920년경 그가 이기동(李起東)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한 사실은 확인된다.이기동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 활동한 대표적인 재일 친일파다.상구회는 1921년말 ‘상애회(相愛會)’라는 사회사업단체로 개편되는데 23년 요코하마·나고야·오사카 등에 지부를 조직,조직을 확대하였다.그럴듯한 이름의 간판을 내건 이 ‘상애회’가 바로 박춘금 일당의 일본내 친일활동의 모태가 된다. 막노동판의 주먹패 박춘금이 일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인근 지역을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수 십만 명의 인명피해는 물론 재산피해도 엄청났던 이 천재(天災)를 맞아 일제는 동요한 민심을 수습하고 조선인을탄압할 목적으로 당국의 개입하에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거나 방화를 일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여기에는 미즈노(水野鍊太郞) 당시 내무상의 조선인에 대한 개인감정이 개입됐다는 지적도 있다.미즈노는 1919년 9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따라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부임하기 위해 서울역에 첫 발을 디뎠다가 강우규(姜宇奎)의사의폭탄세례를 받은 인물). 이에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관헌과 함께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체포와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최소 6,000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바로 이때 박춘금은 상애회 회원 300여명을 동원,‘노동봉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인 희생자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을 자청하였다.이 무렵 박춘금 일당은이미 일제당국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상호 자연스레 교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춘금은 일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상애회 본부 사무실을 마련하는 등 입지를 넓혀갔다.28년 박춘금은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는 이사장에 총독부 경무총감 출신의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영입했다.회장에는 이기동을 앉히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실권을 행사하였다.이 무렵 상애회는 일본내 주요도시에 지방본부를 설치하였고 회원수도 2만명을 헤아렸다.이듬해 29년 상애회관을 지어 사무실도 독립하였고 마루야마 취임 1주년때는 사이토를 기념식 행사장에 초청하는 등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세력가로 부상한 그는 상애회 조직을 바탕으로 정계진출을 추진하였다.32년 2월 실시된 제18회 총선때 그는 도쿄 5구(區)에 출마,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놀라운 것은 조선인 유권자가 1,236명뿐인 이곳에서 6,966표를 얻었다는 점이다.그의 열렬한 친일성이 일본인 유권자들을 설득시킨 점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정계 실력자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거직후인 2월 23일자로 그가 사이토 전 조선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불초 이번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의 영관(榮冠)을 얻게 된 것은 모름지기 귀대(貴台,손위사람의 높임말)의 두터운 정과 성원을 입은 것이라 여기며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한데서 이같은 점을 엿볼 수 있다.이후 그는 한 차례 낙선했다가 40년 제20회 총선에서 재선하였으나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이후 그는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친일대열의 선봉장을자처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친일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 주최 학병격려대연설회에 참석하여 “고이소(小磯)총독이 (조선)군사령관 시절 군사령부를 방문,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도인에 대한 병역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밝히고는 “(학도병)4천이나 5천이 죽어 2천5백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고 외쳤다(매일신보 1943.11.19). 당시 일제가 학도병을 전선으로 내몬 것은 그 이면에는 조선의 미래의 지식분자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것이었다.그가 이같은 일제의 의도를 대변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는 그런 혐의를 둘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8·15 해방을 불과 50일 앞둔 1945년 6월 25일.그는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친일파들을 동원,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그 자신이 당수에 취임하였다.당시 전세는 이미 기울어 일본은 패퇴를거듭하였고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이 임박한 시기였다.대의당은 바로 이 때‘최후결전’의 자세로 결성된 것이다. 대의당은 ‘강령’에서 “모든 비(非)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해서는 단연이를 분쇄한다”고 밝혔는데 여기서 ‘비결전적 사상’이란 ‘반전·반일’의 총칭이다.해방후 친일파들의 죄상을 조사,폭로한 ‘민족정기의 심판’에따르면 대의당은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명을 학살하려 했던 ‘살인단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당시 총독부 경무국이 세운 ‘요시찰인에 대한조치계획’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해방후 그는 살길을 찾기 위해 수하를 시켜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돈봉투를보내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이 때문에 그는 반민특위의 체포,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특위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를 송환하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모두 3번 결혼했는데 첫째,둘째 부인은일본여자였고 66년 75세때 세번째로 결혼한 여자는 당시 60세의 한국여자(82년 사망)였다.두번째 일본인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장남 박춘남(朴春男·89년 일본에서 사망)은일본 릿교(立敎)대학 3학년 재학중 자진하여 학도병에 출진했었다. 일제당시 일본에서 박춘금과 교류한 적이 있다는 한 일본군 장교출신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은 마약중독으로 거의 폐인이돼버렸다고 한다.73년 3월 31일 박춘금은 일본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사망,현지에 묻혔다.친일 반민족자 박춘금의 일생은 그제서야 막을 내렸다.죽어서도 그는 고국보다 일본을 택한 것인가,아니면 죽어서도 고국으로 올 수가 없었던 탓일까. 정운현기자 jwh59@
  • [정직한 역사 되찾기](32)춘원 이광수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송욱(宋稶) 전 서울대 교수(80년 작고)는 생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 지식인의 역사적 현실’이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편린 하나를 남긴 바 있다.문학소년이던 중학생 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당대의 대문호이자 우상이었던 춘원 이광수를 만나볼 요량으로 춘원의 부인(허영숙)이 경영하던 산부인과병원으로 찾아갔다.간호사의 안내로 병원의 긴복도를 지나 온돌방에 다다르자 춘원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황송해하며 춘원에게 큰 절을 올리고 일어설 무렵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그러자 춘원이 “이 방송은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에서 올리는 ○○제(祭)의 실황 중계방송이죠”라며 자못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춘원은 일본군국주의 종교의식에 방송을 통해서 참가하고 있는 것이었다.의외의 장면을 목도하고 춘원에 대해 실망을 느낀 두 사람은 이내 그와 작별하였다.두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춘원은 “이제부터는 작품을 일어로도 쓸 수 있고 우리말로도 쓸 수 있어야죠”라고 권했다.이후로 그는 춘원의 글을 많이읽지 않았다고 적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창씨명 香山光郞).역사속에서 우리는 그를 어찌 볼 것인가?그의 당대에서부터 사후 반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려 왔다.문학적 업적을 강조한 ‘대문호’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라는 평가도 있다. 지난 92년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유족·추종자들이 기념행사를 하면서작성한 한 자료에 의하면,그를 연구한 석·박사 학위논문이 40여편이나 됐다.그런데 그 논문의 주제는 전부 문학분야였다.그의 일제하 친일행적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이래놓고 그의 진면목을 탐구했다고 할 수는없다. 이처럼 그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생애 전반을 아우르기 보다는 문학분야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그에 대한 평가가 균형을 잃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춘원처럼 ‘시대의 인물’로 활동한 자는 그가 활동할 당시의 시대상황과 당시 민중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인식했느냐 하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춘원이 문인인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2·8독립선언’의 작성자이자 샹하이 시절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든 ‘민족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춘원의 변절에 대해 민중들이 안타까와 하고 분노해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춘원을 문인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마치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을 군인,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을 스님으로만 평가하는 것과 다름 없다.춘원에대한 평가는 이래서 시각교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민족지사’의 거울에 비춰본 춘원은 어떤 모습인가.한마디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진 모습이다.그의 일생을 통해 정신사를 관통하고 있는 ‘친일’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춘원은 1892년 평안남도 정주에서 과거에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이종원(李種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명은 보경(寶鏡).5세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세 때 동양고전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총명한 그였지만 10세때 콜레라에 걸린 양친이 사망,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러던중 14세 때 천도교 유학생으로 일본 메이지(明治)학원에 입학하면서처음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데다 별다른 학문적 기초나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제국주의라는 물결이 넘실대는 일본이라는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지게 됐다.그의 비극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주체의식을 키우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도일 초기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1909.12.15,제19호)에 일본어로 된 단편소설 ‘사랑인가’(원제 ‘愛か’)를 발표하였다.조선인 소년이 일본인 소년을 신격화하여 연모하는,일종의 동성애를 내용으로 하는 이 소설은 내용보다는 발표시점이 문제다.그가 이 소설을 탈고한 날짜(1909.11.18)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동양천지를 뒤흔드는 의거가 조선인 손에서 일어난 그 무렵 그는 하숙방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191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발표한 후 ‘전조선여성의 연인’ 소리를 듣던 그는 본처와 이혼한 후 허영숙(許英肅)과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으며 1919년 2월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을 작성,일약 민족지사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선언’을 자세히 뜯어보면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反)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오족에게 참정권,집회·결사의 자유,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라며 일제가 ‘합병’당시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삼고있는데 이는 강도가 한 약속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2년 남짓 활동하다가 애인 허영숙의권유로 ‘독립신문’ 편집을 그만두고 사랑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왔다.월탄박종화(朴鍾和)는 그의 ‘일기’에서 춘원의 귀순(歸順)은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허영숙이 설득한 결과이며 이 일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秦學文)은 홧김(?)에 일본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쓴 바 있다. 귀국(1921.3)도중 춘원은 선양(瀋陽)에서 체포돼서울로 호송됐으나 별다른 조사나 재판 없이 곧 석방되었고 두달 뒤 5월에는 허영숙과 결혼하였다.다시 9월에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면담하는 등 그는 그때부터 이미 당국의비호를 받고 있었다.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듬해 5월 그는 잡지 ‘개벽’에 일제의 반독립 논리를 민족논리로 위장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동아일보 입사는 그 이듬해 23년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월 300엔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보수를 받았다.24년 그는 동아일보에 다시 ‘민족적 경륜’이라는 대일 타협노선의 논설을 발표,어용적 민족개량·자치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위의 두 글에서 그는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약소국의 침략·지배를 정당화한 것을 배낀 것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개월전인 37년 6월 그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이 단체 역시 발족 당시부터 총독부와 사전협의하에 조직된 단체이고 보면 독립운동단체라고 할 것도 없다.경기도 경찰부장 지바(千葉)는 “민족본능인지하수(독립사상)가 지표(地表)로 분출했을 때는 극격히 막지말고,버려두지도 말고,자연의 유력(流力)을 이용해서 바다로 흘러가도록 ‘도랑을 설치’하라”고 하였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林鍾國)은 “이 ‘도랑’이 바로‘민족개조론’이요,수양동우회요,‘민족적 경륜’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춘원은 전시협력을 위주로 보다 행동적인 친일대열에가담하게 된다.39년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북지황군위문작가단)결성식의 사회를 맡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이해 10월 결성된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에서 그는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는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모범적인(?) 창씨개명을 내놓으면서 일반인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그리고는 외쳤다.“…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매일신보’,1940.9.4) 심지어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고 있는데 공감하기 힘들다. 해방직후 춘원은 향리에 칩거하며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쓴 바 있다.그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여인들을 홍제원(弘濟院)에서 목욕시킨 후 정조문제를 거론치 못하도록 한 예를 들어 친일파문제도 이처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수감돼 있던 그는 재산보전을 위해 허영숙과 위장이혼하는 교활함까지 드러냈다.일관된 친일과 타협으로 일제강점기를 산 춘원.그는 공사를 막론하고역사와 민족 앞에 단 한번도 진실한 적이 없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31)문명기

    ◆경북 영덕 최고부자 文明琦 잊을만 하면 한번씩 기자를 찾아와 친일파·현대사 인물 등에 관한 자료(정보)를 제공해주는 분이 한 분 계신다.겨우 이름 정도를 알고 있을 뿐 그 분의 신상에 대해선 자세히 알 길이 없다.다만 그 분이 건넨 자료 가운데는 대단히 우수한 것들이 많음에 번번이 놀랄 뿐이다.자료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통해 그 분의 방대한 독서량과 해박한 지식에 대해서도 혀를 내두를 뿐이다. 특히 누구는 누구의 부친이고,누구는 누구와 사돈간이고… 등등의 ‘사람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이런 이야기는 공간(公刊)된 자료나 문헌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으로 때로는 문헌자료 이상의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지난 겨울에 찾아와 건넨 그 분의메모 속에는 일제때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군에 군납(軍納)을 하면서 떼돈을 번 손창식(孫昌植)을 비롯해 여러 명의 친일파가 등장한다.그런데 그중 한명은 한 때 자신이 그의 ‘괴짜인생’을 교훈으로 삼을 뻔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70년대 초반 어느 신문에서 그 사람의 출세비화를 다룬 적이 있는데그때는 그의 친일행적을 전연 몰랐다는 것이다.이야기는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일제때 경북 영덕 읍내 영덕경찰서장집 마당에 아침마다 팔뚝만한 삼치 한마리가 떨어져 있곤 했다.이를 이상히 여긴 그 집 식모가 어느날 아침 이를서장에게 고하자 서장은 주인공을 찾아보라고 하였다.며칠 만에 식모가 삼치를 떨어뜨리는 주인공을 잡고 보니 그는 지게에 생선을 지고 다니며 파는 생선장수였다.마침내 서장이 나와 무슨 연유로 매일 아침 마당에 생선을 놓고가느냐고 묻자 그 생선장수는 “서장님께서 치안을 잘 유지시켜 주시니 덕택에 저 같은 사람도 생업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달리 보답할 길은 없고 해서제가 파는 생선이나마 드려서 아침 밥상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탄복한 서장이 “내가 뭐 도울 것은 없소?”하고 묻자 그는 “특별한 부탁은 없습니다만…밑천이 달려 물건을 많이 받아올 수가 없어서 겨우 지게꾼 행상을 하는 것이…”하고는 말끝을 흐렸다.그러자 서장이 “그럼내가 생선도매점에 소개장을 하나 써주겠소” 하고 약속을 하였다. 당시만 해도 거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경찰서장의 소개장 덕에 그는 이 일대에서 생선장사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생선을 미끼로 출세길을 튼 이사람은 일제 당시 경북 영덕 일대 최대의 부자 문명기(文明琦·창씨명 文明琦一郞)였다.일제로부터는 ‘애국옹(愛國翁)’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민족사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보자. 문명기는 1878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문승환(文承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씨 부자가 언제,어떤 경로로 경북 영덕에 뿌리를 내리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조선총독부가 시정 25주년 기념으로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1935년 간행)에 따르면 그는 29세 때인 명치 40년(1907년)쯤 제지업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있다. 생선장사로 돈을 모은 그가 제지업에 눈을 돌린 것은 이 일대가 종이원료가 풍부한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그는 자기 공장에서 종이를 생산하면서 다른 공장의 종이를 사서 이를 만주로 내다팔기도 하였다.사업이 번창해지자 그는 제지업계의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목하에 광제회(廣濟會)라는 재단법인을만들어 종이 생산·판매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아울러 그는 이같은 이권단체를 통해 일제 관헌과 조직적으로 유착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산업과 제지업에서 자본을 축적한 그는 당시 유행하던 금광사업에투자하였다.일제 당시 대부분의 기간산업은 일본인들이 독차지하고 있어서조선인들이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운(運)을 담보로 한 금광사업 정도였다. 따라서 이 분야는 조선인 사업가들이 일제로부터 별 간섭 없이 진출할 수 있던 분야이자 조선인 토착자본의 집중 투기대상이기도 했다.1932년 영덕군 지품면 도계에 있던 금은광산을 인수,자신의 이름을 따 ‘문명광산’으로 명명하였는데 그는 이 광산에서 ‘노다지’를 캐 향후 사업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경북지방의 모퉁이인 영덕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가 중앙무대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35년 그가 육·해군기 각 1대씩 비용으로 10만원을 헌납하면서부터다.그는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금광을 일제 당국의 주선으로 일본유수의 미쓰코시(三越)측에 12만원을 받고 매각하고는 그 대금 가운데 10만원을 비행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이다.어림잡아도 현재의 10억원 규모의 거액을 비행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일제는 그를 ‘애국옹(愛國翁)’이라고 치켜세우며 대대적으로 선전에 활용하면서 그가 헌납한 돈으로 구입한 비행기를 ‘문명기호(文明琦號)’로 명명하였다.경성비행장에서 열린 명명식에는 일본의 해군대신 대리가 참석하였고 행사 후 해군기 6대가 축하비행을 하는 등 요란을 떨었다(매일신보 1935.4. 7). 이후 그는 곧바로 영덕 국방의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다시 재향군인회 특별회원,일본적십자사 특별회원 등에 선임되었다.일약 이 지역의 명사로 등장한 그는 뒤 이어 경북도회 의원,중추원 참의에 피선돼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명성과 함께 그의 친일 행위는 더욱 노골화되어 갔다. 그는 조선 전역에서 ‘1군(郡) 1대(臺) 헌납운동’을 펴자고 주창하고는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만들어 여기에 1만원을 기부하면서 대대적인 헌납운동을전개했다.이후 전국에서 군 단위나 단체별로 헌납 주체의 이름을 딴 ‘애국기헌납운동’이 꼬리를 물고 뒤따랐다.밀양 지역의 ‘밀양호 (密陽號)헌납운동’의 경우 총모금액은 10만원,모금대상은 전 밀양주민인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당시 ‘헌납병 환자’ 또는 그의 이름을 빗댄 ‘야만기(野蠻琦)’ 등으로 불린 그는 두 차례의 헌납에 이어 다시 육군과 해군에 각각 2만원,4만원을 헌납하였다.또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에는 비행기로는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이번에는 ‘헌함(獻艦)운동’을 제창하고는 솔선하여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동광(銅鑛) 3개를 기부하였다(매일신보 1943.1.24).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일제의 강요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수동적·소극적 친일을 한 반면 그의 친일은 다분히 의도적·적극적이라는 데 분명한 차이가있다.중일전쟁이 발발(1939.7.7)하자 그는 황군(皇軍·일본군) 위문차 북지(北支·북중국)로 가는 도중 평양에서 강연회를 개최,전쟁 미화를 골자로 한친일연설을 하였으며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경부선 주변 각도시를 순회하며위문결과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듬해에는 의남(義男)단원을 강제로 모집,수많은 조선청년을 북지의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일어판 친일지 ‘조선신문’사장,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면서 일제의 침략전쟁협조에 광분하였다. 그의 대표적 친일행각 중 하나는 그가 전시하 황도(皇道)선양을 목적으로조선 내 각 가정에 ‘가미다나(神棚)비치운동’을 전개한 사실이다.‘가미다나’란 일본의 개국신(開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영부(靈符)를 안치한 것으로,이를 집안 높은 곳에 비치해 조상신으로 모시고는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전국으로 보급하기 위해 광제회라는 보급단체를 조직,자신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경성부윤(현 서울시장)을 명예회장에 추대,남산 조선신궁에서 가미다나 분포식을 거행하고는 1차로 서울시내 각 정회 총대(町會 總代,동장) 130여명에게 가미다나를 나눠주었다.이후로 조선 내 각 가정에서는 신사참배와 함께 일본황실의 조상을 강제로 받들어야만 했다. 평소 일본 신도(神道)의 철저한 맹신자였던 그는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한것으로도 유명하다.집안 치장이나 의복·언어는 물론 생활방식까지도 전부일본식으로 개조하여 철저한 일본인이 되고자 하였다.1943년 7월 그는 황도선양회를 만들어 자신이 회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1949.1.29)돼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호적에 따르면 이후 행방불명돼 생사확인이 곤란하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29)

    반민특위 ‘검거 제1호’ 박흥식(朴興植)이 특위로 잡혀온 것은 1949년 1월8일 오후 4시30분.특위 부위원장 김상돈(金相敦)의 지시를 받은 조사관 김용희(金容熙)와 서기관 박희상(朴喜祥)은 특경대원 7명을 데리고 서울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사장실을 급습하였다.당시 특위가 박흥식을 첫 검거대상자로 지목한 것은 그가 미국도피를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특위 조사관 일행이 화신 사장실을 급습할 당시 박흥식은 외무부 관계자들과 미국여행권(여권번호 00130호)관계로 대화를 나누고있었다.신분을 밝히고 동행을 요구하자 박흥식은 영국제 고급담배를 꺼내 조사관들에게 권하며 “정리할 서류가 좀 있으니 5분만 시간을 주시오”라며지연작전을 폈다.‘독안에 든 쥐’라고 판단한 조사관들이 이를 허락하자 박흥식은 옆방으로 들어가더니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그새 비밀문을 통해 박흥식은 다른 방으로 가서는 모처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그의 구원요청은 허사로 돌아가고 그의 양손에는 마침내 수갑이 채워졌다. 한 때 ‘조선 제일의 부자’로 불리던 박흥식(1903∼1994)은 평남 용강군에서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족 부양을위해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시작으로 사업에 첫 발을 내디뎠다.천부적인 상술과 뛰어난 친화력으로 그는 1924년 고향에서 불입자본금 10만원으로 선광당인쇄소를 시작하였다. 2년 뒤 그는 사업무대를 서울로 옮겨 선일지물을 창립하였다.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자본금 25만원인 이 회사에 그는 6만5,000원을 불입하였는데 이 돈은 토지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대출받은 5만원과 나머지 일부를 그가 부담한 것이었다.그는 주로 총독부 당국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식산은행·한성은행 등의 은행돈을 최고 수 천만원까지 끌어다가 사업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당시 금융가에서 그는 최고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편 종로 네거리에서 공동경영하던 금은방·잡화상을 매수,1931년 화신백화점을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가 그의 모기업이 되었다.화신백화점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사은경품판매,연쇄점 운영 등의 경영기법을 도입,승승장구하였다.이어 1936년에 설립한 화신연쇄점은 최고 번성기를 구가하던 37년경에는 전국에 연쇄점 수만 350개가 넘었다. 당시 그는 총독부의 도움으로 식산은행에서 3,000만원을 대부받았는데 그로서는 자본과 신용만 중요할 뿐 자본의 성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화신의 자본을 두고 ‘매판적 상업자본’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자본의 성격과 함께 사업방식도 그렇다.화신백화점과 함께 화신연쇄점은 일본 오사카(大阪)의 영업소를 통해 일본상품을 다량 수입,국내에 살포함으로써 국내시장을 일제상품의 소비처로 전락시켰는데 이는 당시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지 지배정책이었다.이 때문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은행대출과 관련,하등의 통제도 받지 않았었다. 한편 반민특위에 검거된 그는 제3조사부의 예비조사를 마치고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검거된지 47일만인 3월22일 기소되었는데 검찰측 조사기록은 무려 6,000 페이지에 달했다.그의 기소장에 나타난 죄명은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위반이었다. 반민특위에서 지목한 그의 대표적인 반민족행위는 일제말기 비행기공장을만들어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한 점과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인 1944년 2월 그는 일본의 항공전력 증대를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 설립허가를 총독부와 일본내각에제출하였다. 수차례 일본을 다녀온 끝에 자본금 5,000만원으로 회사 설립허가를 받은 그는 그 해 10월 자신이 대표가 되어 주식을 공모하였다.그는 총독부의 힘을빌어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안양공장을 접수하였고 인근 토지를 몰수하여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다.비행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대가로 조선의 해산물·직물 등을 송출하였다. 공장의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징용자였다.44년 11월부터 총4회에 걸쳐 1,717명을 선발한 후 1개월간 경기도 광주에서 조선군의 지도로 기본훈련을 시킨후 다시 일본 나고야(名古屋)나 만주로 보내 실습을 시킨 다음 안양공장이나만주비행기공장으로 보내 비행기 제조에 종사시켰다. 흔히 박흥식의 조선비행기(주)는 비행기를 만들려다 일제 패망으로 그만둔것으로만 알려져 있다.그러나 특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45년 5월 당시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2·3호기도 부분품 제작중에 있었으며 9월말 작업을 완료할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박흥식은 자신이 경영하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비행기 기술공을 양성하려 했던 사실도 조사과정에서 새로 밝혀졌다.실제로 전장에 투입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비행기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된 단계였다. 일제패망후 그는 조선군사령부로부터 조선비행기에 투자한 금액과 격려금까지 받았으나 이중 일부를 주주들에게 나눠주고는 대부분 착복하였다. 한편 그의 친일은 각종 친일단체 활동에서도 두드러졌다.30년대 후반 그는조선총독부 주최 산업경제조사회와 시국대책조사회에 조선대표로 참여하여일제의 시국대응책에 대해 자문역할을 하였다.또 각종 전쟁협력행위에 가담하였는데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이사·배영동지회 상담역을 비롯해 임전대책협의회·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특히 임전대책협의회 발족시 민규식(閔奎植) 김연수(金秊洙) 등과 함께 각각 20만원씩을 기부하였으며 전시채권 가두판매에 나서기도 했다.징병제 찬양이나 학병 권유에 나선 것은 물론이다.총독부 고관을 비롯해 군부 경찰 금융계 등 광범위한 권력층과 사귀면서 이들의 비호를 받던 그는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특위 조사과정에서 우가키를 ‘숭배’하였다고 실토한 바 있다. 바로 우가키가 총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화신백화점·화신연쇄점이 최고의전성기를 누린 점은 두 사람의 친분관계와 무관치 않다.미나미(南次郞)총독과도 유착관계가 남달라 그가 조선총독에서 이임,귀국하자 ‘영원히 못잊을자부(慈父)’라는 담화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특위가 그를 ‘검거대상 1호’로 지목한 것은 그의 미국 도피음모 이외에도 그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 했기때문이었다.특위의 활동개시가 예견되자 그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장직상(張稷相) 등과만나 모종의 음모를 꾀하였다.그는 당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있던 친일경찰 최란수(崔蘭洙)에게 수사비 명목으로 10만원을 지원한 사실이 특위 조사과정에서 밝혀졌다. 기소 1주일만인 3월 28일 반민특위의 첫 공판이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열렸다.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의 재판은 구속 103일만인 4월20일 그의 병보석으로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특별재판부가 병보석으로 그를풀어주자 당시 특별검찰부 검찰관 9명은 전원 사표로 이에 맞섰고 사회·정당단체에서도 격렬한 성명으로 특별재판부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해 9월26일 그는 ‘공민권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이유는 그가 군수공장을 경영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비행기를 제작,일제에 지원하지는 않았고,또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피동적으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특별재판부가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린 데는 속사정이 있었다.친일경찰의 반민특위습격사건(일명 ‘6·6사건’)에 이어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특위의 중심인물이었던 소장파 의원들이 대거 제거된데다 6월29일 백범 김구선생의 피살로 친일파척결의 정신적 기둥마저 상실한 상태였다.법적으로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역사의 법정에서 그는 여전히 ‘유죄’로 남아있다. 해방후 그는 사업재기를 노렸지만 80년 화신산업의 부도로 마침내 막을 내렸다.부채청산을 위해 자신이 수십년간 살아오던 집까지 내놓았지만 ‘물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종로 네거리 옛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어느새 새 임자가 나타나 그의 부(富)를 되살리려는듯 현재 빌딩공사가 한창이다. 정운현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7) 崔麟

    1949년 3월 20일 서울지방법원(구 대법원 건물)대법정.법정안은 발디딜 틈도 없이 초만원이었다.오후 1시 정각 검찰관과 재판관이 입장하자 재판이 시작되었다.재판관의 뒤로 법정 정면에는 중앙에 태극기를 두고 한 쪽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휘호가 걸려 있고 다른 한 쪽에는 ‘3·1독립선언서’가 걸려 있었다. 피고인석에는 백발에 수척한 모습의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그의 나이 71세,이름은 최린(崔麟)이었다.‘3·1의거’ 당시 오세창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던 바로 그 최린이었다.그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지 5일만인 49년 1월 13일 명륜동 자택에서 체포돼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중의 한 사람으로,청장년 시절 항일운동에 몸바쳤던 그가 해방된 조국의 법정에서 민족반역자로 지목돼 심판을 받는 것은 민족의비극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서성달(徐成達) 검찰관이 그의 죄상을 읽어내려갔다.‘▒죄명:반민법 제4조 2항(중추원 참의),3항(칙임관이상의 고관),10항(친일단체의 수뇌간부)위반.▒범죄사실:피고인 최린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여 보성중학교장 및 보성전문 강사를 역임하고,기미독립운동시 33인의 1인으로서 천도교회의 대표로 기독교,기타 종교단체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음으로 인하여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고,그 후 천도교 중앙종리원 등 장로로 있었던 자인 바, 1)1934년 이른 봄부터 1937년까지의 약 2년여,1939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시까지의 약 5년여에 도합 7년여간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 참의로서 조선총독의 자문에 의하여 총독정치에 기여하고, 2)…’.이어서 검찰관이 기소장 낭독을 마치자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서순영(徐淳永) 재판장이 경력을 물은 뒤에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그는 “기미년 당시 일제에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뿐이다”며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최린(1878∼?,창씨명 佳山麟)은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다.그의 집안은 중인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후에 그가 출세와 신분 상승을 위해권력에 집착한 것은 그의 출신 성분이 한 원인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같은중인 출신인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변절에 대해서도 이같은 논리를 펴는 견해도 있다. 청년시절 그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애국자임은 사실이나 그 무렵그의 민족의식에 대해서는 회의론을 펴는 견해도 만만찮다.1909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천도교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던 그는 1차대전 종결후 ‘민족자결주의’ 물결과 1919년 2월 도쿄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선포하자 이에 고무돼 ‘3·1독립선언’에 가담하였다. ‘3·1의거’ 당시 그의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그가 이 일로 체포돼 재판정에서 행한 발언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그는 “조선이 병합된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또 당시 조선의 정치는 지독한 악정이어서도저히 조선의 안녕·행복을 유지·증진하기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합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피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1919.7.17 예심조서)고 진술하였다. 또 독립선언서 선포와 관련,“…본래의 의사는 극히 온건한 수단에 의하여선언서를 발표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인민을 선동하는 것 같은 문귀 등은피한 것이므로 우리들의 선언서를 본 사람은 그러한 폭동에 가담할 리 없으리라고 생각한다”(일자 미상)고 진술하였다. 첫번째 진술은 일제의 ‘한일합병’ 논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두번째 진술내용은 자신들이 주도한 ‘3·1의거’를 ‘폭동’ 운운하고 있는 그가 과연 ‘민족대표’였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또 재판장이 ‘현재의 조선인의 지모와 실력으로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그는 “일본정부의 도움을 얻으면 독립국으로 설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결국 그가 말한 ‘독립국’은 일제의 통치를 사실상 인정한 범위 내에서의 ‘자치국’ 정도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그가 나중에‘자치운동’에 나서는 것과 무관치 않다. ‘3·1의거’로 의거 당일 일경에 체포된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21년 12월 22일 일제당국의 ‘배려’로 가출옥하였다.‘3·1의거’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齋藤實)총독은 그가 표방한 ‘문화정치’의 전위대로 최린을 이용할 작정이었다.그의 가출옥 배경에는 사이토의 정치참모인 아베(阿部充家,‘京城日報’사장 역임)의 공작이 있었다. 그가 가출옥한 직후 아베가 사이토에게 보낸 편지에 ‘…오늘날의 형세로보아 민원식·선우순 따위의 운동으로는 도저히 일대 세력을 이룩하기는 어렵고,간접사격으로…일을 꾸미자면…여기에는 이번에 가출옥한 위인들 중 최린이 안성맞춤의 친구입니다…’(1921년 12월 29일자)라는 귀절이 보인다.‘기미독립선언서’ 작성자로 최린보다 앞서 가출옥(1921.10.19)한 육당 최남선이 아베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런 내용이 들어있다.‘…이번에 최린군을비롯하여 제군의 출감을 보면서 백열(柏悅)의 정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특히 당사자들도 선생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있습니다… ’(1921년 12월 25일자,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서 입수) 1926년 9월 그는 일제의 경비지원으로 구미 각처로 여행을 떠났다.당시 파리에 체류중이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과의 염문이 떠돌던 시기가 바로이 무렵이었다.그 해 10월말 일본에 도착한 그는 다시 아베를 만나 “오늘날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데 확신을 하고 있으며 조선의회 설치가 조선민심의 안정을 꾀하는데 가장 긴요하고,나도 민중의 신임만 얻으면 조선의회의 한 사람이 되기를 사양치 않겠다”며 ‘조선자치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가 처음으로 ‘친일’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1933년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걸고 일선융합(日鮮融合)을 외치면서 부터다.이듬해 4월 그는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더니 8월에는 ‘시중회(時中會)’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동아(東亞) 제(諸)민족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 매진할 것,특히 조선은 일선융합(日鮮融合)·공존공영이 민족갱생의 길’이라고 외쳤다. 37년 다시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이 해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보도를 적극 독려하였다.이 무렵 그는 총독부의 전시 최고심의기구인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후방지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에 참여하면서 전쟁지원에 협조하기도 했다. 또 1941년 8월에 결성된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을 거쳐 10월 이 단체가 윤치호(尹致昊)계열의 흥아보국단과 통합,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탄생하자 단장에 취임하였다.징병제 선전과 학병권유에 앞선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일제 패망직전인 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라는 친일언론단체를 조직,회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짧은 ‘항일’에 비하면 그의 ‘친일’은 길고 열렬했다.해방후 천도교측은 그의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은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반민특위에 구속돼 민족반역자로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 49년4월 20일 3회 공판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됐다.재판과정에서 그는 다른 피고인에 비해 비교적 솔직한 참회로 재판부와 방청객들로부터 동정을 샀다.심지어 그는 “민족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고 사죄해 법정안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6·25전쟁 와중에 납북된 이후 그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반민특위 재판과정에서 그는 친일한 동기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 망명도,자살도 하지 못하고 일본 군문(軍門)에 항복했다’고 털어놓았다.결국 그는 부모에 대한 효(孝) 위에 나라에 대한 효,즉 충(忠)이 있음을 몰랐던 셈이다. 정운현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해방전후사의 인식’

    ▒8·15의 민족사적 인식=송건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책은 모두 당시의직책임)▒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진덕규 이대 교수▒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김학준 서울대 교수▒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오익환 경향신문 기자▒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임종국 저술가▒8·15직전의 독립운동과 그 시련=조동걸 안동대 교수▒김구의 사상과 행동의 재조명=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장▒이승만 노선의 재검토=김도현 영남일보 편집부장▒8·15를 전후한 여운형의 정치활동=이동화 성균관대 교수▒해방후 농지개혁의 전개과정과 성격=유인호 중앙대 교수▒미군정 경제의 역사적 성격=이종훈 중앙대 교수▒소설을 통해 본 해방 직후의 사회상=염무웅 문학평론가
  • 친일의 군상(22회)-독립선언서 기초 崔南善

    육당(六堂) 崔南善을 ‘역사의 저울’에 달면 공(功)으로 기울까,과(過)로기울까? 공과가 교차되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참으로 어렵다.견해나 입장에따라 한 쪽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이다.육당 최남선(1890∼1957)이 바로 그런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육당은 3·1의거 당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문필가·출판인 등으로 알려진 인물이다.70이 안되는 생애를 살다간 그지만 그가 문화사 분야에서 남긴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다. 육당은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사인 신문관(新文館)을 설립,계몽도서를출판하였다.또 이듬해에는 종합잡지 ‘소년(少年)’을 창간,창간호에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게재한 사실은 우리 문화사 첫 페이지에기록돼 있다. 육당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민족적 면모는 그가 3·1의거 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사실이다.문체를 두고 지나치게 나약하다거나 한문투라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지만 그는 이 일로 31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그러나 그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이받은 건국훈장을 받지 못했다.이유는 간단하다.그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친일파 중에는 초창기 민족진영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일제말기에 가서 친일로 변절한 사람이 상당수 있다.그러나 육당은 사정이 다르다.1921년 10월 가출옥으로 석방된 그는 출옥 직후부터 일제와 ‘교감’을 하고 지냈다. 출옥 이듬해 그는 16년동안 운영해온 신문관을 그만두고 동명사(東明社)를설립,주간지 ‘동명(東明)’을 창간하였는데 창간과정에서부터 일본측 인사로부터 도움을 받은 구석이 역력하다.출옥후 육당이 일본인 거물인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잡지는 ‘동명(東明)’이라는 이름으로 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중략).잡지건은 진력한 성과가 가까운 시일안에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금후의처분은 모든 것을 하나로 하여 선생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이 편지는 본지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입수,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임) 특히 이 편지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을 보면 정말 이 편지를 육당이쓴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다.“지난날 (선생께서) 경성(京城,서울)을 출발하실 때부친과 함께 역까지 달려갔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정각에 늦어 실례가 많았습니다.”우선 보고(報告)를 드리면서 이것으로 붓을 놓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사이토(齋藤實)총독의 정치참모이자 총독부 일어판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의 사장을 지낸 아베(阿部充家)였다.‘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애국지사 육당 최남선의 면모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3·1의거가 발생한지 불과 2년 9개월만의 일이다. 육당이 친일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것은 1928년 10월 총독부의 역사왜곡기관인 ‘조선사편수회’의 편수위원직을 수락하면서부터다.조선사편수회는1911년 총독부가 ‘구습(舊習)제도의 조사와 조선사 편찬계획’을 목표로 발족한 단체.본래 목적은 조선을 영구히 강점하기 위해 조선인을 일본인으로개조한다는 ‘동화주의(同化主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편찬하려는 조선사는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 왜곡이 주목적이었다.육당은 편수위원으로 위원회활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실무자로 직접편찬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928년∼36년).이밖에도 그는 총독부가 위촉하는 여러가지 위원직을 수락,일제에 협조했는데 이 공로로 그는 중추원 참의(주임관 대우·1936.6∼38.3)를 지냈다. 육당의 대표적인 친일행적중의 하나는 만주에서 있었다.중추원 참의를 물러난 직후인 1938년 4월 그는 만주행에 올랐다.처음 맡은 직책은 만주의 친일지 ‘만몽일보(滿蒙日報)’의 고문자리였다.원래 이 자리는 秦學文이 있던자리였는데 진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다.1년뒤그는 다시 만주국의 엘리트 양성기관인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부임하였다.대우는 칙임(勅任)교수에 월급은 400∼500원으로 최상급이었다.(‘삼천리’1938년 5월호). 사학자로 육당과는 절친한 친구였던 위당(爲堂) 鄭寅普선생이 그의 집 대문앞에 술을 부어놓고 “이제 우리 육당이 죽고야 말았다”며 대성통곡을 한것은 그가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한 것을 두고 한 것이었다.육당은 이 대학예과에서 만몽(滿蒙)문화사를 강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건국대학 교수 재직중 그는 1940년 10월에 조직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다.이 단체는 일본 관동군의 반공·선무(宣撫)공작을 지원한 친일단체로 독립군과 항일빨치산을 상대로 한 귀순공작이 주임무였다.이 단체의 총무 朴錫胤은 육당과 처남-매부간으로 나중에만주국 외교부 조사처장,‘매일신보’ 부사장 등을 지냈다. 육당의 친일은 일제 말기까지 계속됐다.4년 7개월간의 만주생활을 청산하고 1942년 11월 귀국한 그는 칩거하면서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그러던중 이듬해말 총독부의 부탁으로 李光洙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훗날 육당은 자신의 학병권유가 마치 조국의 광복을 대비하여 ‘민족 기간요원 양성’을 위한 행위였던 것처럼 변명하고 있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다.속으로는 일제패망을 확신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그는 일제의 필승을 장담하면서 대일본제국의성전(聖戰)을 위해 조선청년들이 전쟁터로 나가 죽어야 한다고 공언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그는 학병권유를 한 반면 그의 3남은 그와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경도(京都)상고 출신으로 동경(東京)제대 법학부에 재학중이던 그의 3남 漢儉(1922∼?)은 학병출진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해방을 맞았다.해방후 월북하여 문학대학·김일성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그는 부친의 친일행적 때문에 적잖은 곤욕을 치뤘다고 한다(북한 고위직 출신 신모씨 증언). 49년 1월 초부터 반민족행위자 검거에 나선 반민특위는 2월 들어 문화계 인사를 손대기 시작했다.2월 7일 마침내 육당의 우이동 집에 특위 조사관들이들이닥쳤다.자택에서 ‘조선역사사전’의 원고를 집필중이던 그는 “시대적현실을 역행할 수 없다”며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같은 날 세검정에서는 춘원 李光洙가 체포됐다.일제하 문화계의 양대 거물이었던 두 사람이 ‘역사법정’에 끌려나온 것이다. 마포형무소 수감시절 육당은 ‘자열서(自列書)’라는 일종의 ‘반성문’을쓰기도 했다.“내가 변절한 대목,즉 왕년에 신변의 핍박한사정이 지조냐학식이냐의 양자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아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며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도 내가 잘 안다”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학문을 위해 지조를 버렸다.이 선택을 그는 ‘변절’이 아닌 ‘방향전환’이라고 했다.명색이 학자를 자처한 그가 지조와 학식을 별개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그에게 지조있는 지식인이 되어줄 것을 기대한 자체가 조선동포들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 金昌淑선생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의 일이다.한번은 전옥(典獄,교도소장)이 육당이 쓴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을 갖고 와서는 읽고 감상문을 쓰라고 했다.심산은 첫 몇 장을 읽고는책을 전옥에게 던지며 이렇게 호통쳤다.“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기미년 독립선언서가 남선(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않았는가.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그의 죄가 남는다”고.
  • 정직한 역사되찾기-친일의 군상(20회)

    ■친일 고문경찰 盧德述 지난 8월 정부기록보존소가 건국 50주년을 맞아 공개한 ‘이승만관계 문서 철’(1949년 1월분) 가운데는 이런 내용의 기록이 있다. ‘반민특위(反民特委)의 무분별한 난동은 치안과 민심에 중대한 영향을 주 는 터이므로 헌법 범위 내에서 단호한 대책을 강구하신다는 유시(諭示)에 대 하여 법무장관은 노덕술을 반민특위 조사관 2명이 반민특위 사무실내 금고에 2일간 수감하였다는 보고가 유(有)하고 대통령 각하는 차(此) 불법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시 정 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중에서) 위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이 49년 2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일제때 고등계 형 사 출신이자 수도청(서울시경 전신) 수사과장을 지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 특위 조사관들을 체포,감시하라고 지시한 내용이다.그동안 이 대통령이 반민 특위의 활동을 못마땅해 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관을 체포하라고 직접지시한 사실은 처음 밝혀진 내용이다.즉 이 대 통령이 친일파를 비호했다는 주장이 문서로 공식 확인된 셈이다.전 국민이 친일파 처단을 부르짖던 그 시절,대통령까지 나서 비호한 노덕술은 대체 어 떤 인물인가? ▲제1사단 헌병대장 시절의 노덕술(당시 계급은 소령임) 盧德述(1899∼?·창씨명 松浦鴻)은 일제때 대표적인 친일경찰 가운데 한 사 람이다.해방무렵 그는 조선인으로서는 불과 수 명에 불과한 경시(警視·현 총경계급에 해당)까지 승진한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특히 그는 일제하 27년간 사상관계 사건,즉 독립운동 관련 사건만 취급한 고등경찰 출 신으로 일제로부터 훈7등 종6위의 훈장까지 받았다.그의 친일성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이다. 1949년 1월 9일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에 대한 검거를 시작으로 반민족행 위자 검거에 돌입한 반민특위는 보름만인 1월 25일 새벽 2시경 마침내 노덕 술을 검거하였다.그를 체포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반민특위는 1월초 부터 ‘노덕술 체포대’를 편성,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좀처럼그의 은신 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유는 간단했다.경찰이 그의 신변을 보호해주면서 비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중 특위는 노덕술이 그의 애첩 金花玉의 집(관훈동 29번지)을 들락거 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을 급습,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체포대는 곧바 로 그가 은신해 있던 李斗喆(당시 동화백화점 사장)의 집(효창동 소재)을 덮 쳐 그를 체포하였다.체포 당시 노덕술은 권총 여섯 자루와 도피자금 34만 1 천원이 든 가방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체포후 서울형무소에 수감중이던 그는 3월 30일 특별검찰부 徐成達 검찰관에 의해 정식 기소돼 재판에 회부됐다. 이로써 친일경찰에 대한 단죄가 시작된 것이다. 노덕술은 경남 울산출생으로 울산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이 경영 하던 잡화상의 고용인 노릇을 하기도 했다.1920년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한 후 경남 경찰부 보안과 근무를 시작으로 친일경찰의 길에 들어섰다.20년대 에 그는 주로 경남지방의 여러 경찰서에 근무하였는데 당시 그의 직책은 사 법경찰이었다.그러나 그는 고등계 경찰의 소관업무인 사상사건(독립운동 관 련사건)을 자발적으로 취급하면서 일제에 충성을 과시하였다. 1929년 金圭直이 회장으로 있던 비밀결사조직 ‘혁조회(革潮會)’를 탄압, 김규직 외 1명을 사망케 하고 그 관계자들을 2∼3년간 복역케 하였으며 동래 경찰서 사법주임 시절에는 ‘동래고보 맹휴(盟休)사건’에 관련된 학생들의 사찰과 검거에 앞장선 것으로 밝혀졌다.또 1929·30년 여름 조선인 일본유학 생들이 하계휴가를 이용,귀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자 이들이 일본정치를 비 난했다는 구실을 들어 강연자 수 명을 검거,취조하였다. 1932년 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시절에는 반일단체인 M·L당(黨) 조직원 金載 學이 메이데이 시위행렬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직접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 끝에 송국(送局),벌금형을 받게 하였다.이같은 공로로 그는 1934년 평 남 보안과장으로 승진,출세가도를 달렸다.일제말기인 1944년 평남 경찰부 보 안과장 재직시에는 화물자동차 다수를 직권으로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 공케 하는 등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협력한사실도 있다.조선인이라는 신 분과 빈약한 학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위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일제 에 대한 그의 남다른 충성심 때문이었다. 한편 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할 당시 그의 죄목은 ‘반민법 위반’ 하나만이 아니었다.그는 이미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의 피의자였으며 체포후에는 다 시 ‘반민특위요원 암살음모사건’ 피의자 죄목이 추가되었다.소위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은 張澤相 저격용의자 林和가 수사도중 사망하자 경찰은 임 화가 조사도중 도망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무부 수사국장 趙炳^^이 담당경찰관을 조사한 결과 고 문치사로 밝혀졌고 그 배후에는 노덕술과 崔雲霞 두 사람이 있었다.그러나 당시에는 장택상이 수도청장으로 있으면서 노덕술 일파를 비호하고 있어 수 사를 못하고 있다가 48년 9월 金泰善이 새 수도청장으로 부임하면서 노덕술 에 대한 체포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김태선 역시 “당시 공산당 타도에 공이 많은 선배를 경찰의 손으로 체포할 수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어서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경찰관 4명을 그의 궁정동 자택에 파견했다”고 밝힌 바 있다.(‘국립경찰 창설’ 51회, 중앙일보·74.12.11) 한편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검거된 직후 극우 테러리스트 白民泰(일명 鄭民 泰로 해방전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주장도 있음)가 놀랄만한 사실 하 나를 폭로하였다.구속된 노덕술이 주동이 돼 서울시 경찰국 수사과장 崔蘭洙 ·부과장 洪宅喜 등이 자신에게 반민특위의 중견요원인 盧鎰煥·李文源 등 간부 7∼8명에 대한 암살을 부탁했다는 것.노덕술 등은 백민태에게 이들을 시외 모처로 납치해 강제로 ‘우리는 이남에서 살 수 없으니 이북으로 가겠 다’는 내용의 유서를 받은 후 암살해버리면 뒷처리는 경찰이 알아서 하겠다 고 했다는 것이다. 특위요원들에 대한 암살음모가 공개되면서 특위와 친일경찰 진영은 극한대 립으로 치달았다.당시 친일경찰 세력을 정권의 한 축으로 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의 석방을 요청하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묵살하였다.49년 6월 6일 발생한 친일경찰들의 반민특위습격사건(소위 ‘6·6사건’)은 이때부터예견된 사건이었다. 노덕술을 비롯해 이 사건 관련자 4명은 검찰에 구속돼 재판에 회부됐다.49 년 5월 29일 열린 제7차 공판에서 “피고인들이 수사의 권위자로 많은 공로 가 있으나 증거가 충분한 만큼 만행을 묵과할 수 없다”고 하여 각각 징역 4 년을 구형받았다.그러나 반민특위 습격사건 후 특위가 무력해진 가운데 열린 선고공판에서 노덕술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인정받았고 최난수·홍택희 등은 각각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노덕술은 당장 석방되지는 않았다.‘반민법위반’ 사건처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 역시 그리 오래 끌지 않았다.반민법 개정으로 공소시효가 8월 31일로 단축돼 반민특위는 껍데기만 남은 형국이었다.반민피 의자로 기소된 자 가운데 극소수만 재판을 받았으며 이들도 대부분 공민권 정지나 집행유예·병보석 등으로 풀려났다.또 실형선고를 받은 자들도 재심 청구를 통해 대부분 석방되었다.김태선의 증언에 의하면,노덕술 역시 병보석 으로 출감돼(일자 미상)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반민특위가 해체되면 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헌병사’에 따르면 그는 9·28수복 당시 제1사단 헌병대장(소령)을 지냈다.이후 부산CID(육군범죄수사단)와 서울 15CID 대장을 역임한 그는 金 昌龍 특무대장이 모종의 비리사건 관련자로 그를 구속시키면서 역사의 무대 에서 사라지고 말았다.경찰청 조회결과 그의 생사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흔적도 없이 사라질 한 생애를 그는 악행(惡行)만 쌓다가 간 것이다.
  • 나아갈 길-버려야 할 국민성, 세워야 할 참가치

    [姜 萬 吉]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경남 마산·65세 ●고려대 사학과졸·문학박사 ●고려대 중앙도서관장 ●월간 ‘사회평론’발행인 ●주요 저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한국민족운동사론’ ‘통일운동시대 의 역사인식’ 절충하고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나는 그것을 수렴이라고 부릅니다.우월성 으로 통일의 기반을 삼는 견해는 우려스럽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姜교수 통일문제는 한반도에서만 유일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냉전구 도는 다 무너졌는데 한반도에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지정학적 위치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력통일이나 독일식 흡수통일이 지정학적 으로 어렵다는 점입니다.한마디로 남북이 대등한 위치에서 평화통일 방법론 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국민의 정부는 이 점에서 방향은 옳게 잡고 있습니 다.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서해안에 간첩선이 출몰하더라도 왜 동해안 에서 금강산 유람선이 뜰 수밖에 없는지,그리고 왜 흡수통일이 아닌 평화통 일이 이뤄져야하는 지를 국민에게 분명하게 설명해 줘야 합니다. ●李교수 남한사회에서는 북한은 모든 것이 이질화됐다고 말합니다.남한의 거울에 비춰 같지 않은 것은 이질화라고 봅니다.그러면 남한은 이질화되지 않았는지 남한 자체를 객체화시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姜교수 지역대결 문제에도 역사적 원인이 있습니다.일제는 한반도 강점을 쉽게 하기 위해서 분열 요인이 별로 없는 우리를 두가지로 분열시켰습니다. 하나는 계급적 차이를 이용한 것이고,다른 하나가 지역갈등 문제였습니다.일 본이 지역갈등의 씨앗을 심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후 해방이 되면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분출되면서 지역문제는 그다지 불 거지지 않았지만,일본군 출신의 朴正熙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악용하기 시 작했습니다.정통성없는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역대립을 조장한 것입니다.그같은 지역대립조장의 결과가 절정에 이른 게 광주민주항쟁이었습 니다만,문민정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고질화돼 있는 형편입니다.최근에 겪은 하나의 어이없는 사례를 들겠습니다.제고향(마산)에서 한 관리가 부정 을 저질러 막상 사법처리되자,부정한 사실 그 자체는 간 곳 없어지면서 아무 개 정권이 우리 지역을 탄압하고 있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부패 관 리 징치보다 지역감정이 우선하는 이런 일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지역감정 문제 해결은 과거 피해를 입었던 쪽이 정권 차원에서 이것을 푸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봅니다.과거 정권의 틀을 벗어나 모든 부문에서 공정하 게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젊은 층이 지역감정이 희박하다는 점입니다.동서문제는 젊은 층이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자리잡으면서 자연히 해소될 것으로 여겨집 니다.기성세대 중에서도 양심적 지식인들이 시민운동을 통해서 지역대립 문 제를 풀어가는 적극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李교수 남한사회의 지역 대립은 근대사회 들어 사회에서 피해적 존재를 만 들어내기 위한 파쇼의 통치전략입니다.19세기 말과 20세기초 독일,폴란드 등 에서 이같은 일이 일어났는데,이 과정에서 600만여명의 유태인이 나치에 학 살당했습니다.유태인은 유럽에 동화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그러나 파쇼 집단은 백인 부르주아사회의 반인간성을 유태인에 투영시켰습니다.유태 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하도록 강요한 것입니다.이같은 원리와 전략이 朴정권에 의해 호남에 적용됐습니다. 나는 철이 든 나이로 일제시대를 살아 잘 아는데,일제시대에는 지역 차별이 없었습니다.해방 뒤와 민주당 정권 때도 지역 차이 없이 정당을 구성했습니 다.지역 차별은 71년 대통선거를 계기로 구조화된 것이 분명합니다.유럽 파 시스트체제 생성과정의 유태인의 존재를 호남에서 찾은 것이지요.●姜교수 역사 교육 쪽으로 화제를 돌려보지요.현대사 교육을 제도교육 쪽에서 보더라 도 지금 2가지 문제가 잘못됐습니다.중·고 국사 교과서가 아직도 朴정권 때 결정했던 그대로 국정교과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사실입니다. 이래선 일본에 역사교육이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곤란할 지경입니다. 그중 국사교과서에서 현대사 부분이 대단히 약합니다.정권의 정당성 문제에 대한 서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북대립적 입장에서 주로 역사를 기술하다 보니 남북화해적 교과 내용이 없습니다.통일된 독일의 경우 옛날 서독 교과 서를 동독지역에서 그대로 쓰고 있어도 문제가 안될 정도입니다.그만큼 객관 적으로 썼다는 얘깁니다.남북의 역사 교과서가 해방 이후 천양지차로 서술돼 있습니다만 민족 화해적인 내용이 더 크게 부각되도록 방향을 잡아가야 합 니다. ●李교수 역사교육의 잘못은 원죄에 속하는 부분이 있습니다.그리고 원죄는 해방 직후 일제 잔재를 토대로 한 새 국가 건설에서 출발합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45∼48년 군사정부를 만들어 통치하면서 일제시대 독 립운동가,혁명가,애국지사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친일 반역행위를 한 개 인을 모아 요직에 배치했습니다.그리고 李承晩정부가 그것을 이어 12년간 통 치했습니다.李承晩 개인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그 정권은 친일 반역자 에 업혀 새 국가를 건설하고 통치한 추악스러운 정권입니다.정부 수립 직후 반민특위법을 만들었지만 한 명도처단하지 못하고 거꾸로 애국지사가 처단 됐습니다.그래서 이같은 사실들이 국정교과서에 들어가지 못하고,또 ‘국정 ’으로 교과서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朴正熙는 제 발로 일본군에 입대해 천황에게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나라의 국정교과서가 어떻게 진실을 기술할 수 있겠습니까.朴正熙는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지성의 요구를 반공(反共)이라는 적대적 긴장을 조성해서 무마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늦었지만 교육을 다시 해야 합니다. ●姜교수 역사교과서를 국사편찬위에서 국정교과서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민 주주의 국가에서 어불성설이고 창피한 일이지요. ●李교수 21세기는 스스로 승리했다는 자본주의 안에 사회적,도덕적,인간적 가치를 재생시켜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나는 자본주의는 절반만 승리 하고 절반은 패배했다고 생각합니다.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는 끝났다” 고 말했지만 나는 21세기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봅니다.IMF는 자본 주의의 발작이자 경련입니다. ●姜교수 20세기에서 자본주의가 살아남게 된 것은 이른바 ‘케인스 혁명’ 이후 사회주의에 약간의 양보를 했기 때문입니다.케인스의 신이론에 따라 자 본주의가 계획경제의 장점을 일부 받아들인 것입니다.반면 국가사회주의는 7 0년대를 지나면서 무너져갔습니다.이제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신자유 주의가 풍미하면서 각종 비인간적인 측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그러나 신자 유주의 체제하에서 비인간적인 사회적 상황이 점점 확대되면서 새로운 (경제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도 더욱 적극화될 것으로 보입니다.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21세기에는 그런 새로운 것을 찾아낼 것입니다.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그런 일에 당연히 관심을 가져 야 하며,그렇게 되기 위해선 우리 정치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남다른 역사의 식을 가져야 합니다. ●李교수 여기서 올바른 언론의 자세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미국 수정헌법 1조는 “의회는 종교,언론자유(Freedom of Speech),출판(Pres s),집회,청원권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고규정하고 있습니다.이 는 오늘날 세계의 모든 문명국가가 헌법 전문에 규정하고 있는 문명사회의 원칙으로,호치민의 북베트남 헌법에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서열에서 출판의 자유가 언론의 자유 다음이라는 것입니다.언론의 자유는 시민과 개인은 무엇이든 책임질 수 있는 범위에서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합니다.또 언론기관보다 개인의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것이 언론기관의 자유로 둔갑돼 있습니다. ●姜교수 崔章集교수 문제가 일어나는 과정을 보고 참 불쾌했습니다.한 학자 가 자기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연구,이론구성을 해놓은 것을 가지고 언론 이 즉흥적으로 평가,시비를 거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학술적 결과 물은 학계 내에서 소화하거나 비판해야 합니다.어떤 이유에서건 학자를 걸고 넘어져 학문을 어렵게 하는 것은 언론기관이 할 일이 아닙니다. ●李교수 우리는 역대 개발독재정권이 경제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그동안 쌓 아온,권력집단의 노획물 같이 수탈할 수 있었던 가치구조와 관습 등 모든 면 을 수술해야 합니다.毛澤東정권이 제도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鄧小平이 모든 체제를 바꿨던 예를 본받아 혁명적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우리 국민은 타 락하고 부패한 지도자 밑에서도 뭔가를 이뤄냈습니다.하물며 새 지도자 밑에 서 혁명하는 마음가짐으로 해 나가면 무엇이든 이루어내지 않겠습니까. ●姜교수 12월31일과 1월1일의 24시간은 다를 게 없는데도 굳이 구분하는 것 은 마음을 새로이 하자는 뜻일 것입니다.(시간의 흐름 위에서)마디를 만들어 새롭게 다짐하면 그것이 역사를 바꿔나가는 일이기도 하겠죠.앞서 언급했듯 이 국민의 정부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정통성을 갖는 정권입니다.새 정부는 올해 역사적 전환점에서 서서 이 정권의 성립 기반을 다시 돌아보고 이를 확실히 정착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가진 역사관을 젊은이들이 다시 이어가게 하면 그 민족 은 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젊은이들의 역사관이 기성세대와 달라야 그 민족사회가 전진할 수 있습니다.기성세대들은 이 점을 인식하면서 젊은 층과 부딪쳐야 조화가 서로 이뤄질 것입니다. 나는 통일을 과정으로 보지 결과로 보지 않습니다.열매를 따려면 나무에 올 라가야 하고,첫 발을 내디디면 두번째 발을 옮기고,그러다가 가시에 찔리기 도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과 같은 통치체제,또는 이념이나 인민의 자유,권리,창의력을 당이 독점 하는 흘러간 공산주의식 체제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그렇다고 남한식으로 통 일의 기틀을 잡는 것도 찬동할 수 없습니다.남한도 해방 후 반세기 동안 친 일파,범죄,부패,타락,잔인성,비인간성,빈부 차이,자본주의가 가지는 주기적 경기변동으로 인한 인간의 재난과 불행 등을 청산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지향 해야 한다고 봅니다.우리는 물신주의(物神主義)에 빠져서 인간 위에 돈이 있 고,모든 가치 위에 돈이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돈을 소유하기 위해 인간의 이기심을 전면적·극단적으로 발동시켜 생산을 극대화시킨 것이 우리 사회의 우월성입니다.그런데 그것은 인간 파괴를 가져옵니다.
  • 친일의 군상:19/을사5적 李根澤 일가(정직한 역사 되찾기)

    ◎代이어 日帝에 충성한 을사 5적 집안/한때 친러파… 大勢 기울자 日에 영합/을사조약 체결 앞장 공로로 요직 역임/충주로 피신한 명성왕후에 생선 잡아바치며 환심 사/왕후 死後 고종에 접근 경찰·군부 실력자 부상/을사조약 체결 과정 자랑 곁들여 설명/부엌서 듣고있던 하녀 식칼내던지며 “흉적” 호통 반민특위가 해산을 1개월 정도 앞둔 49년 7월 하순 어느날.당시 공주중학교 현직교사 한명이 반민특위로 붙잡혀 왔다.이름은 李元九,나이는 37세,죄명은 반민법 제4조 2항 위반.그는 부친 李昌薰이 일제로부터 받은 자작(子爵)작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그러나 조사결과 그의 부친 이창훈은 해방후인 1947년 4월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따라서 그가 일제때 부친의 작위를 습작하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결국 그는 불기소로 풀려났다. 벌써 50년도 넘은 이야기다. 지난 가을 ‘공주갑부 金甲淳’ 취재차 공주를 방문한 기자는 우연히 공주에서 이들 부자(父子)를 만나게 되었다.두 사람 뿐만 아니라 이창훈의 부친을 비롯해 이 집안 4대를 한꺼번에 만났다.그리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후손이 제법 잘 단장한 자리에 차례대로 모두 누워 있었다. 그러면 이 집안의 ‘자작 벼슬’은 원래 주인공이 누구인가? 이창훈인가? 그의 부친인가? 그의 부친이다.‘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이 바로 이창훈의 부친이자 자작의 주인공이다.부자가 자작을 지낸 이 집안의 친일내력을 더듬어 보자. 李根澤(1865∼1919)은 원래 충북 충주사람으로 집안은 대대로 무인가문이었다.본관은 전주(全州).이근택이 출세 줄을 잡은 계기는 좀 특이하다.그가 아직 서울로 올라오기 전인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민비(명성왕후)는 고향인 충주로 피난을 갔다.마침 이근택은 민비의 친정 이웃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매일 민비에게 생선을 잡아다 바쳤다.당시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민비로서는 이 일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환궁후 민비는 이듬해 그를 파격적으로 발탁,‘남행선전관’에 임명하였다.1884년 무과에 합격한 이후 그는 10년간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중앙무대 진출을 모색하였다. ○명성왕후 유품 우연히 얻어 이근택이 대한제국기에 중앙무대에서 요직을 역임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고종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한번은 그가 우연히 일본상점에 들렀다가 비단으로 만든 띠(帶) 하나를 발견하였다.화려한 수를 놓아 만든 것이 첫 눈에 보아도 기품이 있어 보였는데 군데군데 검붉은 흔적은 핏자국이 완연했다.순간 그는 이 허리띠가 민비의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거금 6만냥을 주고 사서 고종에게 바쳤다.고종과 태자는 비명에 간 민비를 다시 만나기라도 한듯이 반가워 했다.이 일로 그는 고종의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하였고 날로 벼슬은 높아졌다.대한제국기에 그는 경무사·경위원 총관·헌병사령관·원수부 검사국장 등을 지내면서 경찰·군사부분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행세했다. 한편 대한제국 초창기 이근택은 친러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우선 출세의 은인인 민비를 일본사람들이 시해했기 때문에 일본과는 개인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또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본 까닭도 있었다.조선내에 친일세력부식에 혈안이 돼 있던 일본측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내 친러파 대신들을 매수·회유키로 방침을 세웠다.여기에 제일 먼저 걸려든 사람이 ‘한일의정서’ 체결 당시 외무대신 서리였던 李址鎔이었다.그는 단돈 1만원에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매수돼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하야시에게 보고하는 첩자노릇을 했다.일제는 회유와 협박이 통하지 않은 李容翊을 일본으로 납치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산이 보이자 한국내에서 그들의 기세는 갈수록 당당해졌다.정부대신들 가운데서도 일본쪽으로 기우는 자가 하나 둘씩 늘어갔다.이근택 역시 친러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일본세력을 의식하기 시작했다.그는 대세가 기울고 있다는 감을 잡고 이를 틈타 또다른 출세를 계획하였다.당초 친러파였던 그는 친일파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하였다. 그는 일본공사관으로부터 기밀비로 30만원을 받고 그 댓가로 궁중의 기밀사항을 정탐하여 이를 일본측에 제공하였다.1905년 9월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그는 군부대신직에 올랐다.이무렵 그는 완전한 친일파가 되어있었다. 마침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그 공로로 이듬해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을 받았다. ○잠자다 자객에 피습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퇴궐한 이근택은 집안식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조약체결 광경을 설명하면서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終身)토록 혁혁(赫赫)할거요”라고 자랑하였다.순간 부엌에서 식칼(饌刀)로 도마를 후려치는 소리가 나더니 한 계집종이 마당으로 뛰쳐나오며 호통을 쳤다.“이 집 주인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하고는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계집종이 집을 나가자 이어 오랫동안 같이 지내오던 침모(針母)도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대한매일신보’,광무 9년 11월 25일자·제86호). 일개 계집종이 이러했을 진대 민중들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조약체결 이듬해 2월 그는 취침중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13군데나 자상(刺傷)을 입었으나 겨우 목숨은 건졌다.거의 회를 쳐놓다시피 한 그를 한성병원에서 한 달만에 살려낸 것이다.그를 치료한 주치의는 나중에 2등 태극장을 받았다. 한번 친일로 들어선 그의 친일행각은 1910년 ‘한일병합’때까지 지속됐다. 병합후 일본정부는 공로자들에게 공적에 따라 작위와 ‘합방은사금’을 공채(公債)로 주었다.이근택은 같은 을사오적인 權重顯·朴齊純 등과 함께 훈1등 자작(子爵,4등급)과 매국공채 5만을 받았다.병합후 그해 10월 중추원 고문으로 취임한 그는 1919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그의 작위는 장남 李昌薰이 이듬해 2월 20일 습작(襲爵),해방때까지 유지하였다.그 역시 일제하 몇몇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는데 말하자면 대(代)를 이어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된 셈이다. ◎’3형제 매국노’/李根澔­李根澤·李根湘/日帝시대 통틀어 최초/죽은뒤 자식이 작위 습작 이근택은 형 李根澔와 동생 李根湘 등 3형제가 ‘한일합병’후작위를 받았다.이근택은 자작,형과 아우는 각각 남작을 받았다.일제시대를 통털어 3형제가 작위를 받은 경우는 이 집안이 유일하다.또 이들의 사후 작위는 모두 자식들이 습작하였다. 이 집안의 ‘스타’는 단연 이근택이다.이근택이 출세길에 들어서자 형제들이 뒤이어 벼슬길에 올랐다.1892년 진사에 급제한 동생 이근상은 군부 주사를 거쳐 1906년 궁내부 대신이 되었다.다시 시종원경과 구한국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그는 ‘한일병합’때 훈2등 남작 작위를 받았다.일제하에서는 중추원 고문과 식산은행 감사를 지냈다.1920년 1월 사망하자 그의 작위는 장남 李長薰이 그해 5월 10일자로 습작하였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는 1878년 무과에 급제하여 경무사,충청·전라·경기 감사,교육참모장,법부대신을 역임하고는 1906년 시종무관장을 지냈다.병합때 훈1등 남작을 받았다.그의 작위는 아들 李東薰이 습작하였다.습작자까지 포함하면 한 집안에 귀족이 6명이나 나온 셈이다. ‘조선귀족열전’을 편찬한 오무라(大村友之丞)는 이들을 두고 “3형제가 모두 왜목림(倭木林) 가운데 3회(會)로서 대신에 올라 일문의 성망을 현양하고 권세를 장악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고 했다.그러나 당시 세인들은 나머지 두 형제를 포함해 이 집안 5형제를 ‘5귀(鬼)’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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