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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편한 美·中관계 최악 치달을수도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중관계가 더 이상 악화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있다. 그간의 미·중관계도 냉전 이후 가장 안좋은 상태라는 평가가 있어왔지만 8일 발생한 유고주재 중국대사관 오폭사고는 중국인 4명이 사망하는 인명피해를 내면서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중국입장에서는 그간 미국쪽에서 좋지않은 평가와 지적이 계속되면서 반미감정이 쌓여왔던 게 사실이다. 미국은 올초 유엔에서 중국 인권상황의 개선을 촉구하는 결의안에 서명한 것을 비롯,지난 2월 국무부가 발표한 중국 인권상황보고서,세계무역기구(WTO)가입을 둘러싼 신경전,그리고 최근 계속된핵기술 절취논란 등으로 중국을 불편하게 해왔었다. 따라서 오폭사고는 중국인들 사이에 미국측에 대한 감정을 일시에 분출시킨셈이 됐다. 중국내 일부에서는 오폭사고마저도 미국이 고의로 저지른 ‘계산된 공격’으로 간주하며 유고를 위한 군대파견을 주장하고 나올 정도로 감정이 극에달한 모습이다. 시각을 달리해 중국당국으로서는 계속된 미국으로부터의 비난에 수세의 자세에서 이제는 적극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는 호기(?)를 만났다고 볼 수 있다. 사고가 나자 즉각 유엔안보리를 즉각 소집해 미국주도 나토공격에 대한 비난 등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것도 이같은 분위기를 대변한다. 그러나 최악은 곧 최선을 향한 시발점으로 풀이할 수 있다.이번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는 의회내 중국핵기술절취 논의를 비롯,미국내에서 중국에 대한비난을 다소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가져와 양국 관계개선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때이른 기대도 없지 않다. hay@
  • 中 전역서 反美시위 격렬…유고 中대사관 오폭 항의

    [워싱턴 최철호특파원·베이징 베오그라드외신종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의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 오폭에 항의하는 반미 시위가 8일에 이어 9일 중국 전역에서 격렬하게 벌어지는 등 유고사태가 새로운 긴장 국면을맞고 있다. 중국 대학생 2만여명은 이날 젠궈먼와이(建國門外)에 있는 베이징(北京) 주재 미국 대사관 주변에서 나토군의 유고연방 주재 중국 대사관 폭격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앞서 지난 7일 밤(현지시간) 나토군기가 베오그라드 시내를 집중 폭격하는과정에서 중국 대사관에 3발의 미사일을 오폭,관영 신화(新華)통신 기자 등모두 4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중국 정부는 성명을 통해“나토의 중국 대사관 공격은 중국의 주권을 침범하는 횡포이자 외교관계 협약 및 국제관계의 기본준칙을 짓밟는 행위”라고항의하고 8일 새벽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를 요청했다. 미 국무부는 남서부 청두(成都)의 미국 영사관 건물이 방화당하고 상하이(上海) 주재 영사관이 공격당하는 등 시위가 격화되자 10일부터 이틀간 중국주재 미 대사관과 4개 총영사관을 잠정 폐쇄한다고 8일 발표했다. 중국 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나토는 9일 새벽 유고 제3의 도시 니스를 공격하는 등 공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8일 팅커공군기지에서 중국 대사관 오폭은 ‘비극적인 실수’라고 유감을 표명했으나 공습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제이미 셰이 나토 대변인도“유고의 연방(무기)조달 및 공급이사회 건물이당초 공격목표였으나 인접한 중국 대사관이 잘못 공격을 받았다”면서“고의적인 공격이 아니었지만 끔찍한 사고로 인한 인명손실에 깊이 사과한다”고말했다.그러나“나토의‘동맹군작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hay@
  • [제2공화국과 張勉](20) 요동치는 軍:下

    장면(張勉)정부 국방정책의 큰 줄기인 ‘감군(減軍)’은 처음부터 장벽에부닥쳤다.장면이 민의원 첫 시정연설에서 밝혔듯이 군 병력을 줄이려는 이유는 경제적인 데 있었다.국정목표로 내건 ‘경제제일주의’를 실현하려면 국방비를 줄여 그 돈을 경제건설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방비 규모는 국가예산의 40%를 넘을 정도였다.장면정부는 국방비가예산의 20% 수준으로 줄 때까지 지속적으로 병력을 감축할 계획이었다.모자라는 병력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장비 현대화,화력 증강 등으로 보완할 생각이었다.주한미군이 있는 한 국가안보에는 이상이 없으리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에 따라 장면정부는 집권하자마자 ‘10만 감군’을 발표했다.그러나 이는 한국군과 미국 양쪽의 반발에 직면한다.장면이 새로 임명한 최경록(崔慶祿)육군참모총장부터가 앞장섰다.최총장은 민의원에서의 취임인사에서 “감군은 전투능력을 심각하게 떨어뜨릴 것”이라면서 정부의 계획에 “원칙적으로반대한다”고 밝혔다.주한 유엔군사령부와 미대사관,미 국방부 등에서도 완곡한 반대 의사를 잇달아 흘렸다. ‘정군(整軍)’을 주장하는 영관급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전력 약화’라는 측면 말고도 그들이 감군을 거부하는 까닭은 또 있었다.그것은 인사적체에 따른 불만이었다. 예컨대 육사1기생은 절반쯤이 입대 5년 만에 별을 달았는데 그들보다 4년늦게 시작한 8기생들은 12년이 지나도록 준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대령 숫자도 10%가 채 안됐다.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상태에서 감군으로 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이들이 달가워할 리 없었다. 섣불리 감군을 발표한 장면정부는 사면초가에 몰렸다.그렇다고 정책의 정당성과 목표를 홍보하고 설득하려는 노력도 별로 없었다.1960년 9월14일 열린군수뇌회의가 감군 규모를 5만명으로 줄여달라고 건의하자 장면정부는 이를받아들였다. 11월 초 권중돈(權仲敦)국방장관은 “일부 감군이 있지만 한국군 병력은 60만명을 유지한다”고 공식발표해 감군정책을 포기한다.국가정책의 전체적인틀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 시도조차 못된 채 무너져 내린 것이다. 감군의 무산과 함께 장면정부는 군인사에서도 실책을 거듭한다.어느 정부건 정권유지에 핵심이 되는 요소가 군을 통제할 수 있는 자체 인맥을 형성하는 일이다.그런데도 장면정부는 이를 경시했다. 장면이 총리가 되자 허정(許政)과도정부 수반은 그에게 “국방장관만은 이종찬(李鍾찬)을 계속 기용하라”고 권유한다.민주당에서 국방전문가로 통하는 이철승(李哲承)도 똑같이 이종찬을 추천한다.그같은 격변기에 군에서 두루 존경받는 이종찬이야말로 적임자라 할 만했다. 그렇지만 장면은 이종찬 대신 현석호(玄錫虎)에게 장관을 맡긴다.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을 앉힌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최경록도 이종찬처럼 이승만(李承晩)의 정치적인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한 꿋꿋한 군인이었다.특히장면이 부통령으로 출마한 ‘3·15부정선거’때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서경호를 도맡는 등 모든 일을 은밀하게 도와준 충실한 장성”(鄭一亨 당시 외무장관 회고록에서)이었다. 장면과 최경록은 그러나 처음부터 어긋난다.최경록은 감군정책을 공개리에반대했고,미 국방부 군원국장인 파머대장이 ‘정군 반대’를 밝히자 정면으로 반박해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장면정부를 난처하게 만든다. 최경록은 61년 2월17일 육참총장에서 물러난다.임기는 2년이지만 실제로는반년도 못 채우고서였다.그가 해임되자 국회는 ‘총장 경질을 둘러싼 상황’을 전면조사하겠다고 나섰다.장면은 “최총장을 바꾼 이유는 공공연하게 반미감정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장면과 최경록의 갈등은 군정책에 관한 이견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한편에서는 장면내각의 핵심세력과 수석 국무위원인 정일형 외무장관 사이의 다툼 때문이라고도 풀이한다.최경록은 가족관계로 정일형·이태영(李兌榮)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최경록의 후임에는 장도영(張都暎)중장이 취임한다.장도영을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한 것은 장면정부의 군 인사 중에서도 최악이었음이 석달 뒤 5·16쿠데타 때 드러난다.그는 쿠데타가 추진돼 성공을 거두는 전과정에서 쿠데타군과 장면정부에 ‘양 다리를 걸쳐’ 쿠데타 저지를 가로막은 장본인이었다. 사실 ‘장도영 육참총장’은 누가봐도 이해하기 힘든 선택이었다.장도영은 대표적인 정치군인이었다.자유당정권의 2인자인 이기붕(李起鵬)국회의장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그를 ‘아버지’로 모셨다.3·15부정선거 때는 2군사령관으로 후방 군부대의 부정선거에 큰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도영은 60년 9월17일 최경록 육참총장에게 예편신청서를 제출하지만 되돌려받는다.그는 참모총장 자리를 통보받았을 때 “내가 총장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당황했고 사양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장도영 총장 취임을 누가 주선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5·16 이후 나온 관계자들의 증언은 한결같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변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단지 영어에 능통한 장도영 부부가 미8군 장성들과 아주 가깝게 지냈으므로 미군쪽 추천이 강력하지 않았나 추측될 뿐이다. 감군 추진에 따른 군부의 반발과 잘못된 인사로 장면정부는 군 통제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이승만정권에서는 군 출신을 각료의 10%쯤 배정한 것과는 달리 장내각은 군 출신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심지어 국방부의 장·차관 자리마저 배려하지 않았다. “장면정부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조직력이 강한 군부를 소외시켰다”는 어느 정치학자의 지적처럼 군에 무심(無心)했던 정부는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용원기자 ywyi@
  • 日 군사대국 재무장하나-국회 통과 배경과 전망

    가이드라인은 96년 4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일본총리가 발표한 ‘신 안보공동선언’을 구체화한 것으로 두 나라 군사동맹관계의 강화가 골자였다. 당시 일본에선 안보 불안과 미군기지 철수여론이 높아가던 시점이었다.반미감정의 확산 속에서 양국은 무역불균형에 따른 마찰도 확대되고 있었다. 일본으로선 자위대의 군사행동범위의 확대요구 등 우경화 물결 속에서 미국의 동맹강화 요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듬해인 97년 9월 두 나라 정부차원에서 새로운 방위협력지침으로 확정됐다.지난달 중의원을 통과한 관련법안은 이를 뒷받침해주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신 안보공동선언’의 실현을 위한 결정판이다. 이로써 두 나라는 더한층 강화된 군사동맹관계를 확보하게 됐다.미국에겐냉전종식이후 일본을 축으로 하는 아시아지역 안보의 틀을 확립하게 됐다. 96년 타이완(臺灣)해협에서의 중국군 무력시위,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및 실험 등 동북아에서 발생한 일련의 긴장상황은 일본의 군사적 대응능력 강화라는 명분에 힘을 실어주면서 여론을 부채질해왔다. 그러나 대내외적인 파장과 갈등은 두고두고 문제가 될 전망이다.우선 일본국내적으로 “주변지역의 유사시 등 전쟁상황에 일본이 끌려들어가는 것이아니냐”는 비판도 있다.미군기지문제로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어온 오키나와(沖繩) 지자체 등은 주변사태때 협력거부를 이미 선언했다. 후방지원이란 단서가 있지만 공격을 받으면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시 상대국과의 교전행위 발생가능성도 있다. 일본 자위대의 활동영역도 크게 확대됐다.‘평화헌법’을 비롯,각종 규정에 묶여 부자유스러웠던 자위대의 손발을 풀어준 것에 비유된다.종전(終戰)후일본을 무장해제시킨 미국이 반세기만에 군사대국 일본의 길을 터줬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석우기자 swlee@
  • 러, 유고사태 해결사로-’국제 보안군’ 협상 낙관

    러시아가 코소보 사태의 평화적 종식을 위한 핵심 해결사로 급부상하고 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유고특사인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는 29일 두번째 유고 방문에 앞서 독일과 이탈리아를 찾았다.체르노미르딘과 회담한 뒤 슈뢰더 독일 총리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군의 철수가 입증만 된다면 나토의 공습을 잠정 중단할 수도 있다”고 밝혔으며 마시모 대통령은 코소보 사태의 평화적 해결로 가는 희망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번 방문에서 협상의 최대 난제인 코소보 주둔 국제보안군의 성격에 대해합의볼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는 체르노미르딘은 유고 방문뒤,곧바로 영국·프랑스로 향할 계획이다.나토 핵심 국가들을 모두 찾아 평화협상의 실질적주도자임을 과시하겠다는 의미다. 앞서 모스크바는 코소보 문제 해결에 나선 각국 외교관들과 정치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스트로브 탈보트 미 국무부 차관,파판드루 그리스 외무장관,액스워디 캐나다 외무장관이 모스크바를 잇따라 찾았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29일 옐친과 체르노미르딘을 만나코소보사태를 논의했다. 나토의 지속적인 공습과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서방의 이같은 움직임은 5개월째 돌파구를 찾지못하고 있는 코소보 사태 해결에 러시아를 끌여들여 해결점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쪽으로 방향타를 잡았기 때문이다.서방의 입장에서 러시아는 대 유고 협상의 유일한 채널.냉전종식 이후 반미 및 반서방 성향의 국가와 서방과의 분쟁 중재자로 나섬으로써 무너져 내린 강대국의자존심과 외교력 회복에 애써온 러시아의 욕구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미국이 러시아의 중재역할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한 것은 이달 초.공습외에다른 해결책은 없다는 나토의 공식입장에도 불구,고어 부통령은 프리마코프총리에게 장시간 전화를 걸어 코소보 문제 해결노력을 호소했다. 나토가 기존 ‘나토 평화유지군’안 대신 ‘국제 보안군’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러시아 참여 여지를 일찌감치 마련해둔 조치라는 분석도 강하다.러시아는 현재 코소보 주둔군의 성격을 유엔이 통제하는 비무장평화군(러시아 포함)으로 하자는 안을 내놓고 있다. 양측의 현격한 입장차로 볼때 체르노미르딘의 순방 성과가 바로 나오길 기대하기는 힘들다.그러나 코소보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정치적 협상 테이블을거쳐야 하고 여기서 러시아의 역할이 더욱 커지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나토의 유고공습 ‘최후의 승자는 러시아’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바로이 때문이다.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20)

    정공채 長詩 '미8군의 차'(中) 초봄에 어울리지 않는 정시인의 복장을 넌지시 보던 수사관은 오늘 구속될걸 어떻게 알고 미리 준비해 왔느냐면서 너스레를 떨었고,이 말에 그는 아예 징역살이를 각오하게 되었다.아니나 다르랴,보통 때같으면 12시면 점심 먹고 1시에 다시 오라고 했는데 이날은 정오가 지나도 여전히 수사를 계속하기에 마무리 지어서 검찰로 송치하려나 보다고 단단히 마음을 조였다. 그런데 1시 경 수사가 끝나고 절차대로 서류에다 날인을 하자 수사관은 “이제 집에 가도 좋습니다”고 말했다. 어리둥절한 정시인에게 수사관은 그간 문인 4명에게 이 시에 대한 견해를 자문한 결과 한 분만 반미적인 시라고 했고 나머지 분은 민족주체성을 서정적장시로 엮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했더라면서,정치적 참여시를 쓰지 말 것을 당부하며 “기소 중지” 처분이 내려졌다고 알려 주었다.바로 그 네 분이란김용호·김현승·조연현·조지훈이었음이 나중 밝혀졌다. 이런 사건이 항용 그렇듯이 풀려나는 것으로 명쾌하게 결말이 나는 게 아니라 그 공포감은 일생동안 지배하기 마련인데,그건 환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당장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된다. 바로 자신은 누군가로부터 항상 ‘감시를 당한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도록 강박관념에 사로 잡히고 마는 것이다. 정시인도 예외는 아니었다.그에게도 ‘감시’가 따랐는데,그게 정확히 언제까지 어떻게 추진되었는지는 시인 자신이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아마 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항상 감시 당하고 있다”는 고정관념이 굳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는지도 모른다. 정시인에게도 매주 1회 일체의 활동을 조사해 가는 절차가 따랐고,이로 말미암아 그는 분방했던 시인적인 삶으로부터 나이답지 않는 노장적(老莊的)세계관으로 다가서는 계기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전후 한국 시문학에서는 보기 드문 현실 비판의식을 지닌 ‘우중(雨中)의 다리 위를 거닐며’(‘사상계’ 1960.9)같은 작품을 써왔으나 이 사건을계기로 시도,인생행로도,문단에서의 처신도 깡그리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시인은 지금 이렇게 회고한다. “만약 내가 그런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생길 무렵 누군가로부터 가입 권유를 받았을 때 아마 참여했을 것입니다” 이 한마디는 ‘미8군의 차’로 정시인이 겪은 인생역정을 상징한다.이 작품은 계속 묻혀 있다가 1979년에야 첫 시집 ‘정공채 시집’을 내면서 게재했지만 그땐 이 장시를 주목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시끄러울 때였고,한국시도‘미8군의 차’ 정도의 현실비판은 훌쩍 뛰어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양식을 지닌 비평가라면 이 장시가 오늘에도 유효하며 문학사적으로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필화사건이 언제나 그렇듯이 발표하고 한참 동안 잠잠하다가 어디선가 불쑥 불거져 나오기 마련인데,‘미8군의 차’도 그랬다.정공채 시인은 이 작품을 2년간 치밀한 메모와 구상으로 벼르다가 1963년 정초 휴가 때 3일간 꼬박매달려 200자 원고지 156매를 완성시켜 그 해 마지막 달 ‘현대문학’지에발표했었다. 국내 비평가들로 부터는 별 반응이 없었던 이 시가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아 번역되기 시작했다.당시 일본문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던 ‘신일본문학’을 비롯하여,오다 마코도(小田實)가 주관했던 ‘제3세계의 문학’과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에 이르기까지 무려 11종에 이르는 언론매체들이 이 시를 소개,게재했다.일본 문단에서 한국의 시가 이렇게 선풍을 일으킨 것은 그 뒤 김지하가 등장할 때까지는 없었던 일이었다. 전 31장으로 구성된 ‘미8군의 차’는 ‘장시’란 명칭으로 분류되었는데,통상 장시는 서사시적 구성을 갖추기 마련이었다.정시인은 이 시를 통해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의 고통과 주체성의 상실을 노래하고자 했다. 그러자면 한 주인공을 내세워 서사구조를 만들면 가장 쉽고 재미있게 전개될 것이라고 여겼으나 그럴 경우에는 시인 자신의 의도가 너무 쉽게 노출되기때문에 서사시가 아닌 ‘서정적 장시’로 쓸 것을 결심했다.말하자면 뚜렷한 사건 전개가 없이 정황과 분위기에 따라 서정성을 가미하여 그 서정성이 독자로 하여금 민족 주체성을 느끼게 만든다는 장치였다. 1963년의 한국 문단적 상황으로서는 현실비판 의식을 위한 시로서 최상의 기법이었다 하겠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19)정공채 長詩’미8군 차’(上)

    1964년 3월 어느날 정공채 시인은 녹번동 자택에서 ‘반공사상 계몽연구소’ 명의로 된 등기우편물 한 통을 배달받았다.그 순간 시인의 뇌리에는 지난 겨울 직장이었던 일성신약 상무실로 불려가 만났던 말끔한 한 신사가 떠올랐다.‘중앙정보부’ 소속이라고 밝힌 그 신사는 정시인을 명동의 장미다방으로 임의 동행,보통 이상의 자세한 신상명세서를 작성해 갔었다.정시인은이게 필시 ‘현대문학’ 1963년 12월호에 발표했던 장시 ‘미8군의 차’ 때문이려니 싶어 무척 불안했다.그 뒤 몇 번인가 다른 얼굴의 ‘중정’소속 신사가 다녀가곤 해서 초조감은 증폭되었으나 그게 큰 문제로 번지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던 참에 받은 편지였다.서신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정공채 귀하 귀하는 반공법 피의자로 문의지사가 유하오니 내 30일(금요일) 오전 9시까지 당소에 출두할 사. 추신: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 것.귀하에게 극히 불리함.출두시 인장을 지참할 사. 중앙정보부 수사관 서” 이런 내용에다 약도까지 그려진 이 한 통의 편지가 정공채 시인의 문학적생애는 물론이고 삶의 뿌리까지 뒤흔드리라고는 그 자신도 예상치 못했다.경남 하동 출신의 정시인은 진주 농고를 거쳐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부산일보기자,학원사에 이어 ‘민족일보’기자로 오소백 사회부장 밑에서 시경출입을 하기도 했었다.이어 문화방송 프로듀서로 있다가 일성신약으로 직장을 옮긴,당시 시인으로서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운 좋은 소시민이었다. 정시인의 경력에 등장하는 ‘민족일보’란 어떤 신문이었던가.“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이란 기치로 1961년 2월 13일 창간했다가 5·16 쿠데타 3일 후인 5월 19일 종간 당한 분단시대 언론사의가장 비극적인 일간지였다.송지영,이상두,양수정 등 당대의 명논객들을 포함한 13명이 ‘혁명재판’에 회부되어 발행인 조용수는 사형이 집행되고 신문지령은 총 92호밖에 못나온 단명의 바로 그 신문이다.창간호 1면에 김수영의 ‘쌀난리’란 시를 게재했던 이 신문은 이후 ‘다가온 춘궁’(신석정),‘총알은 아직도 날고있다’(김재원),‘4.19시’(김수영),‘핏방울이 고여있던한 컬레의 신발처럼’(신동문) 등 다분히 현실고발적인 작품들을 실었다.이중 주목할만한 두 시인도 있다.‘무섭지 않느냐’는 제목의 시는 오탁번 현고려대교수의 작품인데,당시엔 원주고교생이라고 신분을 밝힌 채 실려있다. 이 시로 오시인이 관계당국에 연행,조사받은 건 말할 필요도 없다.다른 한편은 바로 폐간 하루 전인 5월 18일자 시인데 계엄군의 검열로 제목과 시인의 이름이 완전히 삭제당해 있는데,그게 바로 권용태시인의 ‘구름은 아직도’란 작품임이 최근 밝혀졌다. “병실같은/그늘진 조국의 하늘 아래서/나는,/서러운 식민지의 밤을 걸을때처럼/어두운 가슴으로 살아간다”고 시작되는 이 햇빛도 못 본 시는 권용태시인으로 하여금 수사당국에 연행 당해 고초만 받도록 만들었다. 정공채 시인은 위의 서신이 지시한대로 동대문 운동장 건너편 덕수상고 옆소재 ‘반공사상 계몽 연구소’로 출두,지레 겁먹었던 것과는 달리 로이드테 안경의 수사관에게 신사적인조사를 6일 동안 출퇴근 형식으로 받았다.심문의 초점은 정시인의 사상이 ‘반미주의’에다 ‘교도민주주의자’인가에 모아졌다.6.25 이후 송병수의 ‘쇼리 킴’이나 백인빈의 ‘조용한 강’,오영수의 ‘안나의 유서’같은 몇몇 양공주 등장 소설 말고는 그때까지 미국과 미군에 대하여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미8군의 차’란 제목은 단연불온으로 비칠 수 있었다.그러나 미군만 비판했다고 처벌할 수는 없으니 사상적으로 좌경분자란 낙인이 필요했겠는데,그 논리적 근거를 ‘교도민주주의자’에서 마련할 셈이었다.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제창한 ‘교도민주주의’란 반제·민족·사회주의 노선으로 제3세계 지식인들을 잠시 매료시켰던이념이었다. 정공채 시인은 자신이 ‘민족주의자에 민주주의자’라는 입장으로 대응했지만 끝이 안보이는 수사는 불현듯 “이제 조사는 끝나고 구속 될 것같은 예감”을 갖게 만들었다.4월초 수사 6일째인 토요일 아침 정시인은 그날 구속될것같은 낌새로 아예 두툼한 내의에다 외투까지 갖고 출두했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평화봉사단 ‘제2의 전성기’

    │워싱턴 외신종합│미국의 평화봉사단(Peace Corps)이 다시 옛 전성기를 되 찾게 됐다. ‘미국 문화와 가치의 전도사’로 불리는 평화봉사단은 4일 올해 4,000명의 단원을 모집한다고 발표했다.74년 이후 25년만에 가장 많은 인원이다. 현재 80개국에서 활동중인 6,000명 단원중 절반이 올해로 2년간의 임기를 마치게 된 데 따른 것으로 계획대로라면 연말에는 7,100여명이 된다. 이같은 대폭 증원은 빌 클린턴 대통령이 98년 연두교서에서 평화봉사단원 1 만명 모집계획을 밝히고 의회에 20% 예산증액을 요청한 데 따른 것으로 이미 2억4,000만달러가 확보됐다. 평화봉사단의 마크 기어런 단장은 단원의 97%가 대졸자이고 15%는 석사 이 상 학위 소지자라고 밝혔다.단원들도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위스콘신, 하버드 등 명문대 출신이 대부분이다.평균 연령은 28세.올해는 50세가 넘는 단원도 전체 모집인원의 8%가량인 320여명을 선발한다. 평화봉사단은 61년 정부 산하기구로 창설,38년 동안 120개국에 15만명이 파 견돼 의료봉사,영어교육,영농지원을 벌이며미국 문화와 가치를 전파하고 친 미 성향을 심어왔다. 90년대 들어 평화봉사단원들은 환경보호,중소기업 개발지원,자연재해 대비 활동 등도 벌이고 있으며 활동무대를 동구권으로 확대하고 있다. 60년대 대원이 1만명이 넘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가 80년대 제3세계의 반미 감정 고조로 움츠러들었던 평화봉사단이 21세기를 앞두고 다시 활발한 활동 을 준비하고 있다.
  •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내일부터 ‘파티’ 공연

    40대 가장이 있다.비엔나에서 유학 도중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고 귀국해 선 독문학 교수로 자리잡았다.아들 딸 하나씩 두고 남부럽지 않게 살다 전원 주택으로 이사왔다.순박한 이웃사람과 맑은 공기가 만족스럽다. 오는 31일 밤11시에 예술의 전당 자유소 극장에서 올리는 ‘파티’는 탄탄 대로의 삶으로 시작한다.하지만 그것은 잠시,불청객이 끼어들면서 흐름은 급 반전한다. 교수 부부가 유학시절을 떠올리며 무드를 잡는데 불길한 전화벨소리가 울 린다.동장을 앞세운 주민들이 이사를 축하하러 집으로 온다는 것이다.자칭 ‘화해의 길트기 모임’소속 사람들이다.겉으로 보면 선량한 이 이웃들은 술 을 마시다 돌변한다.억지를 부리다 어느덧 주인 행세를 한다.난장판은 7막에 서 극에 이른다. 예기치 않은 적대감에는 낱낱의 사연이 배어있다.공부를 잘했으나 집안이 몰락해 배달부 등 삶의 바닥을 기면서 배움에 한이 맺힌 동장,대학에 진학한 첫사랑 여학생이 ‘재수생이 격에 맞지 않다’며 떠나버리자 충격을 받고 시와 현실을 오락가락하는 삼수생 홍사형,구청 청소부의 딸로 태어나 들은 칭찬이라곤 ‘청소 잘한다’는 말밖에 없는 이정례…. 꿈의 좌절과 자기 깜냥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눌려있던 잠재의식이 동경의 대상인 교수를 보자 이그러지고 폭발한 것이다. 윤영선 작가가 작품을 착상했다는 존 케이지의 ‘반미학’의 한 구절은 연극 을 보는 한 방법을 제시한다.“파티는 끝났다.그러나 손님은 머무르고자 한 다.왜냐하면 그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에.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하고,집은 엉망이 된다.집안을 청소하자는 한마디 말도 없이 우리 모두 함께 있어야만 한다”. 안주할 곳 없는 사람에 견주면 일상의 안정감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메시지 도 느껴진다.지식인이 지닌 인간에 대한 애정과 포용이 실천이 동반되지 않 으면 값싼 동정심이거나 배부른 여유일지 모른다는 문제의식도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독특한 맛은 한 가정의 울타리를 깬 세력을 애매하게 처리했다는 점이다.기존의 공포·부조리극(카뮈 ‘오해’ 핀터 ‘생일파티’ 등)이 대개 나쁜 사람이나 악마적 존재를 설정했다면 이 작품은 외부의 실 체가 불투명하다.친근한 이웃이 때론 적이 될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연출을 맡은 이성렬은 “누구도 파괴하지 않지만 누구도 파괴 할수 있다 는 역설을 담고 싶었다”면서 “선이면서 악이기도 한 양면성을 포착하려는 의도였다”고 말한다. 동장 역을 맡은 김동수의 노련한 연기와 주·조연 할 것 없이 개성있는 연 기가 조화를 이룬 것도 미덕이다.특히 이정례 역을 맡은 성은경의 귀기어린 연기는 인상적이다.독특한 연기와 일상의 평온을 깨는 기괴한 방식에 놀라고 웃다가 파티는 끝난다.마지막에 남는 섬*한 질문 하나.내 가정은 안전한가?. 이봉규 남명렬 정재은 김혜민 정철민임진순 등 출연.1월17일까지 평일 오 후 7시30분,금·토 오후 3시·7시30분,일·공 오후 3시·6시,월요일 쉼.(02) 580-1880?곗골a? vielee@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이라크 공습 클린턴­후세인 손익계산서

    ◎클린턴/美 이미지 타격 “적자”/“탄핵지연술” 비난여론/세계경찰 윤리성 손상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 이번 이라크 공습으로 클린턴은 무엇을 얻고 잃었을까. 더 잃을 것이 없던 클린턴으로서는 얻은 것이 있겠으나 미국 전체로 본다면 손익계산서는 적자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클린턴 개인으로서는 대통령직을 연장해가는 데 큰 이익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탄핵 표결이 하루 연장되는 동안에 공화당의 차기 하원의장인 리빙스턴의 스캔들이 터져나와 주었다.이것은 공화당이 우세한 하원이 탄핵을 논의하는 데 엄청난 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총력전을 펼치면서 클린턴을 지지하는 국민여론 외에 탄약이 부족하던 민주당 의원들에게 크루즈 미사일을 장전해준 격이 됐기 때문이다.클린턴 개인에 대한 비난은 얻은 것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전체로는 잃은 것이 많다.우선 윤리성을 앞세운 지구촌 경찰 국가의 이미지가 클린턴 탄핵에 맞물리면서 크게 손상됐다. 또 러시아가 17일 주미대사를 소환해 불쾌감을 나타내는 등 미국에 대한 전세계의 여론이 이번 공격으로 양분됐다.이는 외교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후세인/정치위상 강화 ‘흑자’/아랍권 지지세력 확대/핵무기개발 빌미 얻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이번 미국과 영국의 공습을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공산이 높다.살아남기만 한다면 그는 잃을 게 별로 없다는 지적이다. 이번 공습의 1차 목표는 이라크내 생화학무기 등 대량 살상무기 생산시설의 파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후세인의 축출과 신정부 수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습에도 불구,무기 생산시설의 완전 파괴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군사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유엔 무기사찰단(UNSCOM)의 지적대로 무기 생산시설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는데다 설사 시설이 파괴된다 해도 무기 설계도의 복사판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정부세력도 후세인에게는 별로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다.공습에 따른 이라크 국내와 아랍권의 반미감정이 그에게는 큰 힘이 되고 있다.영국에 망명한 야권은 분열양상을 보여 걱정거리가 못된다.더욱이 2,000대 이상의 탱크와 43만명의 병력 등 군사적 지지기반도 충분하다.따라서 그는 걸프전 이후 7년간 계속돼온 유엔의 무기사찰에 종지부를 찍고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개발에 전력 질주할 가능성이 높다.
  • 金大中 대통령 과거사 언급은 “미래지향” 메시지

    ◎“냉전의 세계사속 불행 겪었던 시기”/국군파월 우회 표현 【하노이 梁承賢 특파원】 베트남을 방문중인 金大中 대통령의 정상외교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두나라 과거문제에 대한 언급과 호치민 묘소 참배이다. 베트남이 외교적으로 아무런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金대통령은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르엉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공식 거론했다. 요지는 ‘냉전이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양국이 불행을 겪었던 시기도 있었으나…’이다. 비록 우회적인 표현이나 한국군의 참전을 확인시켜주는 언급이다.金대통령은 16일 르엉 국가주석 초청 만찬에서도 “두나라 사이엔 불행했던 과거도 있었다”는 입장을 피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金대통령의 언급은 한때의 불행을 극복하고 이제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자는 데 무게가 실려 있다.이를 위해 짚고 넘어갈 것은 짚고 가자는 외교적 구상이다. 베트남인들이 국부로 추앙하는 호치민 묘소의 참배 및 헌화도 이를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다.이는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양국관계가 그만큼성숙했다는 의미이자 베트남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의 인식 또한 크게 달라졌음을 방증한다. 金泳三 전 대통령은 지난 96년 11월 베트남을 방문했지만 외교관계자들의 건의를 물리쳐 가면서까지 끝내 호치민 묘소를 참배하지 않았다.반미(反美)전쟁을 주도한 공산혁명가였던 호치민의 부정적 이미지가 걸림돌이 된 것이다. 정부의 한 외교관계자는 “베트남인들은 자국에 대한 최고 예우를 호치민묘소 참배와 헌화로 보고 있다”며 “金대통령의 묘소 참배와 과거문제 언급은 곧 양국 관계발전의 의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즉 정상의 확고한 의지가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행보라는 것이다.
  • 북 핵사찰 수용케 하려면(사설)

    金大中 대통령의 북한현안에 대한 미·북간 일괄타결방안은 북한 핵의혹해소의 현실적인 해법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金대통령은 미국의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 조정관에게 ‘북한에 대해 줄 것은 주면서 요구할 것은 요구해 미·북간의 모든 문제를 함께 타결할 것’을 제시했다. 핵의혹 해소와 미사일 개발중지 문제등을 대북경제제재 해제,미북관계 정상화,식량지원등의 대가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라 미국과 북한의 반응이 주목된다. 핵개발 의혹을 받고있는 북한의 금창리 지하시설에 대한 사찰문제로 미국의 대북 강경분위기는 점차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제네바 핵합의’의 파기위험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찰스 카트먼 한반도특사의 지난 달 방북에 이어 4일부터 뉴욕에서 열리고 있는 미·북회담도 미국의 사찰수용 요구와 북한의 보상전제가 팽팽히 맞서 타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의 핵의혹 지하시설에 대한 사찰거부는 ‘핵합의’의 명백한 위반이므로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군사조치를 포함한 강력한대응을 해야한다는 강경분위기가 행정부의 포용정책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현재의 행정부 입장으로는 사찰에 대한 추가보상은 불가능한 형편이며 북한의 양보가 없는한 당장 내년도 50만t 중유지원도 어려운 처지이다. 최근 북한의 움직임도 심상찮다. 뉴욕의 미북회담을 앞둔 지난 2일 인민군총참모부 대변인이 미국과의 군사대결 불사를 선언한데 이어 전쟁결의를 다지는 대규모 군중집회와 강도높은 반미선동을 계속하고 있다.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사일의 추가발사를 준비하고 있는 징후도 보이고 있다. 金正日 체제의 내부 결속을 위한 것이거나 위기를 앞세워 보다 많은 실속을 차리기 위한 벼랑끝 회담전술이라는 분석도 가능할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동결을 전제로 2기의 경수로 건설과 매년 50만t의 중유를 지원하기로 한 ‘제네바 핵합의’에 따라 핵개발의혹이 있는 금창리지하시설에 대한 사찰은 당연하다. 사찰에 대한 추가 보상요구는 억지다. 그러나 미국과 북한이 지금과 같은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제네바합의’는 깨어질 수밖에 없다.한반도는 당연히 94년 합의이전의 긴장사태가 불가피할 것이다. 남북한은 물론 미국등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 상황이다. 미북 관계정상화나 대북경제제재완화는 미국도 이미 약속한 것이다. 언젠가는 지켜야 할 일이다. 이런점에서 金대통령의 일괄타결방안은 미북간의 현안을 타개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좋은 해결책이라고 본다. 미국의 적극적인 수용을 기대한다.
  • 친일의 군상/前 이화여대 총장 金活蘭(정직한 역사 되찾기)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잣코 구경만 할 수가 잇겟습니까.이 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서부터 되여 잇섯습니다.내지(일본)학도들과 함께 전문대학 법문계(문과) 반도(조선)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이르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엿습니다.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거러가야될 길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가지 리유 때문에 참렬을 못하는 것입니다.…아프로는 결전하의 국가목적에 쪼차 한사람이라도 더만히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할 각오가 잇슬 뿐입니다.” 金活蘭(1899∼1970)이 1943년 12월25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기고한 ‘男子에게 지지안케­皇國女性으로서의 使命을 完遂’라는 제목의 기고문 중 한 대목이다. ◎이대 키운 공 크지만 ‘여성계 상징’으론 논란 여지/3·1운동 당시 한때 지하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1936년 이화학당 부교장 시절부터 변절 첫 걸음/동포청년 전쟁에 내몰고도 사과 한마디 없어/“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일제하 지식인이 신문에 쓴 친일성향의 글 한 두편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평가받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거대한 감옥’또는 ‘노예선’으로 불리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쓴 글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다.우선 생명에 위협이 있었느냐,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했느냐 하는 점 등이다. 모든 지식인들에게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몇몇 의사·열사가 이에 속할 뿐이다.그러나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그러나 거의 모든 친일 지식인들은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친일 지식인들이 더 비난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때문이다. 일제시대 여성 지식인이었으며 최근 그의 이름을 딴 상(賞)제정 문제로논란이 되고 있는 김활란은 역사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답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이유는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그의 이름을 딴 상 제정은 지식인 사회에서 여러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흔히 김활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 가운데 하나는 ‘여성박사 제1호’다.그는 학사·석사·박사를 따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5년간 미국유학을 했다.귀국해서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절러(당시 이화여전 교장)의 뒤를 이어 1939년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다.굳이 나눈다면 그는 친미(親美)인사로 분류되는 사람이다.그런 그가 ‘대동아전쟁’이 터지자 친일,반미(反美)인사로 돌변하였다. ○전쟁 터지자 반미로 돌변 “저 흑노(黑奴)해방의 싸움을 성전(聖戰)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고 했다.…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東亞)의 천지로부터 미영(美英)을 격퇴하여 버리자”.김활란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결성식(1941.12.27,부민관 대강당)에서 ‘여성의 무장’이란 주제로 미영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일제하 대부분의 친미·기독교계 인사들(白樂濬·申興雨 등)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다시 친미인사로 변신했다.그는 미군정 시절 초대 이화여대 총장에 취임했고 이승만정권 하에서 한미(韓美)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3·1만세의거 당시 김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치고 모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그 무렵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돼 활동하고 있었다.‘7인의 전도대(傳道隊)’를 만들어 기독교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한 전도활동 수준을 넘는,일종의 민족운동이었다.20년대 후반 좌우 민족진영의 통합으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뒤이어 27년 4월 여성계 민족단체로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었다.그는 근우회 창립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 31년말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농촌교육 관련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귀국후 문맹퇴치·봉건잔재 타파 등을 내걸고농촌운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미국유학을 한 인텔리 여성의 소박한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일제 침략전쟁 미화·선전 그의 친일행보는 36년 이화학당 부교장으로 있던 시절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해 말 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하였다.37년 1월 그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7월 들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이 단체는 한일병합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의 부인들이 주동이 돼 전쟁물자로 바칠 금비녀·가락지를 모으기 위해 결성한 친일 여성단체였다.이후 여러 친일단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방송선전협의회,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임전대책협의회,조선교화단체연합회,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 등등. 그의 활동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 활동이다.38년 6월 조선YWCA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매일신보,38년 6월9일)라며 일본YWCA에 가맹을 발표하였다.당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를 당하고 구속자·순교자가 잇따르던 때였다. 39년 4월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한 이후 그의 친일행각은 본격화되었다.물론 그 배경에는 학교를 지키기 위한 목적도 없지는 않았다.그러나 김해 김씨인 그의 문중이 본관을 따라 ‘김해(金海)’로 창씨를 한 것과는 달리 그는 독자적으로 ‘천성활란(天城活蘭·아마기 가쓰란)’으로 창씨개명하였다.‘어차피 창씨를 해야한다면 정말 (일본식으로)창씨를 해서 자신의 독립된 일가를 세울 생각’이었다.(金貞玉의 저서 ‘이모님 金活蘭’중에서)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살아 ‘대동아전쟁’ 개전(41.12.8) 이후부터는 강연·방송은 물론 가두로 나서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선전하였다.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등 인력동원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촉구했다. 43년8월1일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황국신민의 무쌍(無雙)한 영광인 징병제는 드디어 우리에게도 실시되었다.…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공하옵신 성지(聖旨)에 다시금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위하여 불덩이 같이 끓는 피와 몸을 통털어 바쳐 성은(聖恩)에 보답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반도 남아의 의기를 뵈일 기회는 드디어 왔다.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수 천년 역사 이래 모처럼 보는 거룩한 감격…”(‘매일신보’1943년 8월7일)이라고 썼다. 그는 해방직전 심한 눈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자신을 문병차 찾아온 조카(金貞玉 전 이대교수)에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다닌 죄값”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김정옥의 앞의 책 중에서) 당시 여기자 崔銀喜는 그를 두고 ‘모질고 악착한 역경을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산 행운아’라고 평했다.식민지 시대와 격동기를 산 지식인의 일생이 대체로 고뇌와 아픔으로 점철됐겠지만 그는 상류층의 한 층을 이루는 생애로 일관하였다. 그가 60년 가까이 이화인(梨花人)으로 살면서 일제하와 건국기에 학교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만 하다.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나아가 한국여성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 가운데 ‘흠결’은 큰 편이다.이대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의 친일활동이 적극적이었다.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추진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보다는 그의 떳떳하지 못한 삶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김활란 연보 1899년 인천 출생 1914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1918년 이화여전 교수·부교장 1928년 ‘근우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1년 미국 컴럼비아대 철학박사(‘여성박사 1호’) 1937년∼45년 애국금차회·임전대책협의회·조선언론보국회 등 친일 단체 간부로 활동 1939년∼70년 이화여전 교장·이화여대 총장·이화학당 이사장 1948년∼65년 한국대표로 유엔총회 6회 참석 1950년 공보처장 1952년 ‘코리아타임스’ 사장 1954년∼61년 국제기독교선교위원회 부위 원장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195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1963년 대한민국장·막사이사이상·다락방상 수상 1965년 대한민국 순회대사 1970년 별세,망우리 금란동산에 묻힘.대한민국 1등수교훈 장추서 1996년 추모문집 발간,그의 친일 논쟁을 계기로 ‘인터넷 반민특위’이 등장 1998년 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계획 발표로 찬반논란
  • 민주열사 열전:13/前경원대생 宋光永(정직한 역사 되찾기)

    ◎‘학원안정법 음모’ 온몸 항거 분신/학생운동 씨 말리려는 악법 제청 항의 선봉에/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불꽃 확산 시도 “시상에 죽은 내 아들 광영이를 왜 이리도 무서워한당가.제 몸에 불을 지르고 뛰지도 못하는디.왜들 겹겹이 둘러싸고 문상도 못오게끄럼 막는당가.광영이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겠어.어림 반푼 없는 소리제.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그 맴이 어찌 식겠어…” 85년 10월 21일 서울기독병원 영안실.아들의 주검을 앞에 놓고 한 어머니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34일 전 학교에서 분신한 경원대 법대생 宋光永의 어머니 이오순 여사(당시 59세·94년 작고)였다.경찰은 한달 이상 1,000여명의 병력을 동원,병원을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고 출입자를 통제했다.그러나 그토록 삼엄한 경비와 장례 소동까지 불러온 송광영의 분신은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언론에 단 한줄도 보도안돼 그는 85년 9월 17일 오후 2시30분쯤 경원대 운동장에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했다.그날은 학생총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비로 연기된 상태였다.그러나 그는 시위를 주도하며 몸에 불을 붙였고,뛰어가며 외쳤다.“학원안정법 음모 철회하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나라” 인근 성남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서울기독병원으로 옮겨져 한달 이상 사투를 벌이다 끝내 숨졌다. 그가 온몸이 불에 휩싸인 채 몇번씩 쓰러졌다 일어서며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희망이었다.그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의 불꽃을 확산시키려 했다.광주민중항쟁은 5공화국 내내 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군사정권의 강요된 침묵을 깨고 80년 5월 30일 서강대생 김의기가 최초로 광주민주화항쟁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투신했다.그의 투쟁은 노동자 김종태의 이화여대 앞 분신과 또 다른 노동자 홍기일의 전남도청 앞 분신으로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도 5공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시위가 점차 가열됐다.위협을 느낀 군사독재정권은 아예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바로 ‘학원안정법’ 제정 추진이다.골자는 학생의 좌경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위학생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일정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비밀리에 법안을 마련해 국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미리 그 내용이 새어나와 한 일간지에 폭로되면서 반대여론이 들끓자 일단 유보됐다.그럼에도 정권은 당시 손제석 문교부장관의 담화문을 통해 ‘학원소요가 계속되면 학원안정법을 연내에 제정하겠다’며 관철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송광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원안정법 음모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분신의 가장 큰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그는 유서인 ‘양심 선언’에서 ‘결코 총칼이나 학원안정법 따위의 악법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싹을 틔웠던 전태일열사를 가장 존경했다.전태일에 대해 “소외된 민중의 대변인,억눌린 사회에서 참된 인간상을 제시해준 인물”이라고 항상 말했다고 한다.어려서부터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온 그는 소외된 삶들의 아픔을 나눌줄 알았고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화시장 재봉보조원 생활,신문팔이,Y셔츠 장사,돗자리 장사 등 닥치는 대로 밑바닥 삶을 이어갔다.재봉보조원 시절엔 청계피복노조에 적극 참여했다.성격이 활달하고 발이 넓었던 그는 동료들을 취직시켜 주는 일로도 바빴다. 그는 81년 형들이 학교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대학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거기서도 동료학원생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학원을 10일씩이나 빠지면서 사고차를 찾아내 보상금을 타 가족들에게 전해주고 초상까지 치르게 해줬다.또 학원에서 탄 장학금을 집에 오는 길에 구두닦이 소년에게 줘버린 자신을 호되게 야단치는 어머니에게 “그래도 우리는 집도 있는데”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 가장 존경 송광영은 84년 27살의 나이로 경원대 법학과에 입학한다.법학을 선택한 것은 고시에 합격해 어머니에게 효도하고,법관이 돼 사회의 부정부패와 모순을 개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시반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탈 수 있는 것도 한 이유였다.그러나 그해 가을 어용교수 퇴진시위를 주도하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빠지게 된다.‘실존주의철학연구회’ ‘경제문제연구회’ 등의 학습모임을 만들어 이끌었다.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만둘 것을 설득하며 생활비를 끊어버리자 교내에서 구두를 닦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원악법이 통과되면 분신하겠다는 말을 했으나 후배들은 믿지 않았다.그러나 전세금을 빼 학교 등록을 못하던 친구를 등록시키고 분신 열흘 전에는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호적을 정리하러 왔다”고 말하는 등 마지막 삶을 정리해 나갔다.누나 송영숙씨(49)는 “호적을 정리하려고 한 것은 그의 분신으로 형제들이 피해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한다. ‘…난자당하고 처절히 유린된 순백의 종이들이 책상 위에서 울고 있다/이렇게 또 하나의 밤이 사라져가는데/여자는 이제서야 피곤한 육신을 벗어제치고 있다/아! 그날 아침은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분신 얼마 전 써놓은 자작시 ‘에필로그 85’이다.송광영열사는 숨지는순간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민주의 종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연보 ▲1958:광주에서 출생 ▲74년:서울 경신중 졸업 ▲75∼76년:청계피복노조 활동 ▲82년: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84년:경원대 법학과 입학 ▲84년:실존주의철학연구회 만듦 ▲85년:경제문제연구회 만듦 ▲85년:9월17일 “학원안정법 음모 철회” 외치며 분신 ▲85년:10월21일 서울기독병원에서 운명 ◎학원안정법 파동/5共 ‘시위학생 선도교육’ 등 골자 立法 기도/야당·재야 “제도적 폭력” 강력 반발 저지시켜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점차 뜨거워지던 85년 여름,미국의 개입 의혹을 추궁하는 반미 시위가 거센 가운데 공안기관 주도로 중요한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한 일간지가 공식 발표를 2주 앞두고 ‘학원안정법’ 음모를 폭로했다.시안 내용은 삼청교육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학원소요 등과 관련,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자들을 형사처벌 대신일정한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대상자 선정은 문교부에 준사법적 성격의 ‘학생선도교육위원회’를 설치해 하도록 했다. 교육을 거부하거나 교육장소를 무단 이탈하는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해 학생들에게 극도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일부 좌경·용공학생들을 격리시켜 학원의 오염과 소요의 본거지화를 막고 선도교육을 통해 건전한 학교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하지만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학원에 대한 제도적 폭력이라고 즉각 반발했다.대다수 국민도 우려를 나타냈다. 반발이 점차 거세지고 여야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자 정부는 ‘국민적 공감대가 아직 미흡하다’며 법 제정을 일단 유보했다.그러나 당시 이원홍 문공부,손제석 문교부 장관은 소요가 계속될 경우 언제라도 법안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하지만 학원안정법은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다. ◎분신대책위 김해성씨/“당국 협박속 유가족 설득/분신의 의미 찾고자 최선” 송광영 열사의 가족과 몇몇 민주인사들은 그의 입원 치료와 장례문제로 적지않은 고통을 겪었다.그가 입원하자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송광영 동지 분신구명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진상규명과 모금활동을 펴나갔다.치료기간중 상태가 좀 호전되기도 했지만 경찰의 철저한 통제속에 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됐다. 대책위 집행위원장이던 김해성 성남주민교회 전도사(38·현재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집 소장)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환자 시늉을 하며 겨우 2차례 송광영을 면회했다. “가족들을 설득해 당국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말고 분신의 진상과 의미를 찾자고 했지요.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그의 가족들은 저희와 뜻과 행동을 같이했습니다” 김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송광영이 입원했던 서울기독병원은 79년 여공들이 독재정권과 독점자본에 저항했던 YH사건의 YH무역 건물이었다.송광영이 역사적 민주투쟁의 산실이었던 그곳에 다시 경찰을 불러모아 영혼을 태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송광영이 숨지자 대책위는 장례위원회로 바뀌어 사회장을 준비했다.그러나 경찰은 장례 전날 문목사 및 이해학 목사,김소장 등 대책위 관계자들을 모두 연행한 뒤 가족들에게 간결한 장례를 강요했다.또 일방적으로 시신을 강원도 춘성에 매장하려고 했다.그러나 누나 송영숙씨(49·대한생명 근무)가 스카프로 목을 매고 영구차 바퀴 앞에 눕는 등 가족들이 격렬히 저항했다.영구차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병원을 출발할 수 있었다.그는 횃불을 밝힌 가운데 금촌기독묘소에 안장됐다.
  • 라덴 신병 인도/美­탈레반 밀약설

    ◎탈레반 국제무대 승인·테러 오명벗기 절실/美도 대화 필요성 인정… 달콤한 유혹성 발언/‘사실일땐 탈레반 회교권서 끝장’ 회의론도 미국 대사관 테러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 인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세력 사이에 밀약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최근 미국 뉴욕타임스와 일본 마이니치신문 등이 전하고 있는 밀약설의 내용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활약 중인 라덴(41)의 신병을 넘겨 받는 대신 탈레반 세력에 대해 자금 및 외교적 지원을 한다는 것. 미국으로서는 밀약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이번 테러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는 라덴을 체포하는데 가장 원만한 방법일 수 있다. 탈레반으로서도 군침이 도는 거래다.아프가니스탄의 90%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국제적인 승인을 받은 것은 파키스탄등 세 나라뿐.국제적으로 고립을 면하는데 미국의 지원은 결정적일 수 있다.게다가 이슬람 원리주의 강경 세력이라던가 테러 지원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개선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될 터이다.최근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탈레반이 (거래에) 응하기만 한다면 국제적 승인 획득 환경이 개선될 것”이라고 달콤한 말을 건넨 것도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밀약설을 부채질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활약중인 라덴 등 아랍계 테러리스트의 처리에 탈레반이 골치를 앓고 있다는 점과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을 실효 지배하고 있는 탈레반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 하지만 밀약설에 대해 회의적인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이들은 우선 라덴이 범 회교권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밀약대로 라덴의 신병이 인도될 경우 이슬람 세계에서 탈레반이 입을 타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말한다. 또 반(反)소련 게릴라전에 아랍 의용병으로 참가한 인물들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라덴과 탈레반의 오랜 유대 관계가 아직 금이 간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여하튼 밀약설만으로도 반미 감정에 불타 오르는 이슬람 세계의 속사정이 간단치 않다는 점이 엿보인다고 이들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 美 對테러정책 ‘강하게’ ‘부드럽게’

    ◎군사적 응징 통해 ‘세계 경찰’ 위상 강화/반미세력 결집땐 ‘냉전향수’ 확산 우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에 대한 폭격과 관련,‘강·온 양면작전’으로 선회했다.테러에 대한 미국의 논리를 효과적으로 설파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테러의 주범인 회교근본주의자들을 온건 이슬람권을 비롯,지구촌으로부터 고립시켜 효과적으로 공략하려는 전략 같다. 현재 드러난 상황은 강경이 주류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보복조치 직후 테러기지에 2∼3차례 정도의 추가 폭격을 강력하게 시사한 데 이어,23일 미 대사관의 담장을 넘으려던 알바니아 경찰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빈 라덴이 선전포고하고 테러조직을 통제·지휘하고 있다면 죽더라도 유감스럽지 않다”며 대사관 폭탄테러의 주범으로 거론되는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기 위해 나설 것임을 내비쳤다. 또 리비아가 지난 88년 발생한 팬암기 폭파 용의자로 지목된 리비아인 2명에 대한 국제재판 회부를 거부하면 리비아에 금수(禁輸)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미국이 강경책을 먼저 내세우는 데는 세계 초강대국의 위치를 확고히 굳혔다는 자신감과 세계 여론이 테러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 같다. 그러나 수단의 화학공장에 대한 유엔 진상조사단 파견 반대를 고수해오다가,유엔의 공식조사가 결정되면 협조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며 한발 물러섰다.일방적인 강경책은 피하겠다는 의도다. 군사적 응징 일변도는 장기적으로는 비효과적이라는 판단과 비서방세계의 러시아에 대한 ‘초강대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슬람권의 결속을 더욱 야기시켜 이란 쿠웨이트 파키스탄 등 친미 이슬람권의 입지를 난처하게 만든 대목도 유화정책을 병행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국제테러단·배후에 무력 보복/美,아프간·수단 폭격 왜 했나

    ◎美 대사관 피폭 13일만에/‘궁지’ 클린턴 지지 상승세 ‘테러에 성역(聖域)은 없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의 테러 기지 및 시설을 폭격하며 내건 명분이다. 20일의 폭격은 미국인 12명을 포함해 250여명이 사망하고 5,000여명이 부상한 케냐와 탄자니아 미 대사관 폭탄 테러가 발생한지 13일 만에 이뤄진 무력보복이었다.미국을 겨냥하고 있는 모든 국제 테러와 배후에 있는 단체나나라에 던지는 전면전의 신호탄이기도 하다.나아가 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추가공격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의 테러기지에 대한 폭격 배경을 설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케냐 등의 미 대사관 테러 범인이자 과거 미국을 상대로 ‘피의 테러’를 자행해온 오사마 빈 라덴과 다른 테러 지도자들이 바로 아프가니스탄의 기지에 모여 추가 테러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이들이 손에 넣고자 하는 대량살상용 화학무기가 수단의 제약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어 “전세계 인명을 존중하기 위해 폭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테러분자들의 거점과 인프라를 파괴,미국인을 포함한 무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최근 발생한 국제 테러의 3분의 1은 미국이 표적이었다.이슬람 근본주의자 무장단체 등 테러단들은 “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한 성전”을 외쳐왔다. 클린턴 대통령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을 덮기 위한 ‘국면 전환용’이라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민들이 이번 폭격에 폭넓은 지지를 보내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전 예고도 없이 2개국에 대해 전격적으로 군사공격을 감행한 것은 냉전 종식이후 슈퍼 파워로 부상한 미국의 우월감과 오만에서 비롯됐다는 국제사회의 여론도 따갑다. ◎美 공격 이모저모/아라비아·홍해 군함서 크루즈 미사일 발사/美 보복테러 우려 해외 자국민 신변 경계령 ○…미국은 20일 폭격을 가한 직후 보복테러를 우려,해외 대사관을 비롯한 주요 공관과 미국내 일부 공항에 대한 경비를 강화.미 연방항공국(FAA)은 일부 공항에서 경비강화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고 항공사들에 대해서도 아프가니스탄과 수단 상공을 비행하지 말도록 지시했다.국무부도 해외에 체류하는 미국인들에게 비상 경계령을 내리고 사람이 많은 곳과 반미 감정이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을 피하라고 당부. ○…미군의 공격은 그리니치 표준시(GMT)로 20일 하오 5시30분에 동시에 시작돼 한 시간이 못돼 완료됐다.작전시간은 한국 시간으로는 21일 상오 2시30분이었고 수단은 20일 하오 7시,아프가니스탄은 20일 하오 0시30분이었다. 국방부 관리는 아라비아해와 홍해에서 작전중인 미 해군함에 장치된 75기의 크루즈 미사일만을 사용했다고 설명. ○…폭격 소식은 클린턴 대통령이 휴가로 머물고 있는 미 메사추세츠주 마서스 비녀드섬에서 마이크 매커리 백악관 대변인이 “국가안보에 관한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함으로써 알려지기 시작.클린턴 대통령은 휴가를 중단하고 마서스 비녀드를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미군의 폭격 소식을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이 성추문 사건으로 시달리고 있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이번 폭격 상황을 거의 그대로 묘사한 영화 ‘왜그 더 도그(Wag the Dog)’가 화제.가상의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한 걸스카우트 단원을 유혹했다는 추문으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알바니아에 대한 전쟁을 꾀한다는 내용이라고. ◎당사국 반응/수단­美 폭격은 비난받을 범죄.대사 소환·유엔 제소 방침/아프간­철면피한 적대행위 성토.응전 외치며 수만명 시위 미국의 폭격을 받은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을 비롯한 아랍국가들은 일제히 응전을 다짐하며 미국을 맹렬히 비난했다. ▷수단◁ ○…수단의 가지 살라흐 아타바니 공보장관 겸 정부 대변인은 국영 수단TV와의 회견에서 “미국의 폭격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범죄적 행위”라고 규탄하고 “수단정부는 국제법에 따라 대응조치를 취하겠다”고 다짐. 또 오마르 엘­베시르 수단 대통령은 이날 미국 주재 수단 대사관직원 전원을 본국으로 소환 조치했다고 발표하고 이번 사건을 유엔에 제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프간◁ ○…아프가니스탄 집권회교 무장세력인 탈리반 지도자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는 AIP 통신과의 회견에서 “미군의 공격은 아프간 국민에 대한 철면피적 적대적 행위”라고 성토. 수도 카불에서 남쪽으로 300㎞ 떨어져 있는 탈리반 거점도시 칸다르에서는 수만명의 성난 주민들이 ‘응전’을 외치며 시위. ◎테러 배후 지목 라덴/사우디 출신 巨富… 美에 聖戰 선포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건설 재벌 2세.막대한 부를 회교 극단주의 지원에 쏟아부으며 테러계의 대부로 꼽혀왔다. 79년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면서.‘형제의 나라’ 아프간으로 달려가 탁월한 조직력·재정력을 발판 삼아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9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을 표적삼았다.9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군사훈련기지와 96년의 다란 군사훈련기지,그리고 96년의 뉴욕 월드 트레이드센터 등의 테러사건은 그의 소행으로 추정됐다.아프가니스탄의 ‘아랍 이슬람 전사 양성소’,파키스탄의 ‘세계 이슬람 전선’ 등이 그의 지원을 받는 대표적 테러단체들이다. 57년생으로 아내가 셋 이상일 것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나 수단 등지를 전전하다 96년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96년부터 올해까지 세차례에 걸쳐 “미군이 신성한 아랍국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미국과의 지하드(聖戰)을 불사하겠다”는 종교칙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지형적 장애물 피해 목표물 정확히 강타/레이더에도 안 잡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수단 폭격에 사용한 토마호크 크루즈(순항) 미사일은 지형상의 장애물을 피해가며 일정고도를 날아가 목표물을 정확히 강타하는 최첨단 무기.지상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게 특징.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사가 개발했고 91년 1월 걸프전에서 위력을 떨쳤다. 사정거리 1,600㎞에 길이는 5.5m,무게는 1,200㎏이고 탑재된 폭탄 용량은 450㎏.핵탄두도 탑재가 가능하다.가격은 1기당 100만 달러(13억).
  • 수해 여파 물가 고삐 풀렸다/채소 등 한달새 최고 200% 폭등

    수해 여파로 곡물·채소류 등 장바구니 물가가 급등했다. 14일 한국물가협회에 따르면 곡물 채소 양념류 수산물 등의 가격은 지난달 초보다 최고 200%나 뛰었다.물가협회가 남대문시장 등 서울의 재래시장에서 판매 중인 상품가격을 조사한 결과 지난 달 초 한 개(1.5㎏)에 800원하던 무는 2,000원으로 150% 올랐다. 8㎏에 1만7,500원이던 쌀(일반미)은 1만8,000원으로,콩(1.44㎏)은 4,600원에서 5,400원으로 각각 올랐다. 기상 악화와 어획 부진으로 물량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고등어 한마리 (30㎝)가 2,000원에서 2,500원,삼치(40㎝)는 4,000원에서 5,000원,갈치(70㎝)는 1만5,000원에서 1만8,000원으로 각각 올랐다. 후춧가루(1백g)는 병당 2,000원에서 2,100원,치약(250g)은 1,750원에서 2,000원,형광등(40W)도 1,200원에서 1,700원으로 올랐다. 부산의 경우 지난 달 초 한 통(2.5㎏)에 1,000원하던 배추는 한달만에 3배인 3,000원으로 뛰었고,광주에서 2,000원이던 상추(1㎏)는 6,000원으로 급등했다.
  • 金 대통령 8·15 경축사를 보고/黃台淵 동국대 교수(특별기고)

    ◎제2의 건국과 보편적 세계주의 ○폐쇄적 민족주의 한계 오늘 건국 50주년에 대통령이 선언한 ‘위와 아래로부터의’ 제2의 건국운동은 참여 민주주의,시장경제,보편적 세계주의,지식기반 국가,화합과 협력의 신 노사문화,남북간 교류협력 등 6대 개혁지표를 내걸고 있다. 이 지표들은 모두 국난극복과 세계 속의 선진한국 건설에 본질적 기여를 하는 것들이지만,이 중에서도 닫힌 민족국가에서 열린 국민국가로의 지향을 갖는 ‘보편적 세계주의’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우리의 민족국가적 폐쇄성을 타파하고 세계를 향한 완전 개국(開國)을 겨냥하는 이 지표는 나머지 지표의 달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세계 개방 없이는 세계수준의 민주주의,세계무역기구(WTO)체제 하의 세계적 경쟁력,세계의 인본주의적 보편규범에 입각한 공생과 복지,탈공업시대에 맞는 창조적 문화,탈냉전적 남북관계를 창출할 수 없다. 돌아보면 한국인들은 냉전과 분단,반일감정과 반미감정으로 동서남북이 가로막힌 인공섬에서 살아왔다.자연히 신생 한국은 폐쇄적 민족국가를 생존논리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그리하여 우리의 정서 속에는 늘 외래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잡게 되었다.심지어 오늘날 국난 속에서도 사회 일각에서는 IMF 구제조치와 해외자본 유치에 대해서까지 적대감을 보이고 있다. ○능동적 개항만이 살길 극우에서 극좌까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이 닫힌 민족정서는 시장과 국제적 쌍방통행을 모르는 관치경제와 한국적 권위주의 체제를 만들어냈다.이 폐쇄적 권위주의 체제는 당연히 세계의 변화를 감당할 수 없었고,세계시장에 노출되자마자 국난을 불러왔다.우리의 생존논리였던 폐쇄적 민족정서가 이제 생존을 가로막는 최대의 시대착오적 걸림돌로 둔갑한 것이다. 100여년 전 우리는 늑장 개항으로 망국의 비극을 겪은 적이 있다.우리의 인공섬도 개국을 지체하면 비극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바로 이 점이 오늘 광복절 날 각별히 숙고해야 할 대목이다. 이제 과감한 능동적 ‘개항’으로 보편가치를 수용하여 세계로 나아가는 ‘열린 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민족국가와 국민국가의 두가지 말을 잘뜯어보면,국민국가는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속지주의적 다민족국가를 민족 국가로 지칭할 수 없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이에 반해 독일이나 일본처럼 혈통주의를 택한 나라들은 유보없이 민족국가로 지칭된다. ○열린 ‘국민국가’ 건설을 우리말의 민족국가와 국민국가는 각각 최근에 생겨난 학술적 개념인 ethnic nation state와 civil nation state에 대응한다.민족국가는 본질적으로 폐쇄적·복고적이나,민족국가가 제국주의에 저항할 때는 진보적으로 기능할 수도 있지만,이 한시적 진보성에 오래 안주하면 시대착오를 범하게 된다.이에 반해 국민국가는 본질상 세계시민적·민주적이라서 이질적 문화에 대해 원칙적으로 열려 있다.오늘날 독일 일본 등도 이 국민국가적 요소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따라서 ‘제2의 건국’의 지표로서 ‘보편적 세계주의’가 닫힌 민족국가에서 열린 국민국가로의 구체적 지향을 갖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이러한 세계주의적 시침(時針) 조절만이 민주주의,시장경제,지식중심 발전,인본적 화합과 협력,남북간 탈냉전을촉진하고 보장하기 때문이다.
  • 테러 용의자 라덴/회교 과격파 이끄는 사우디 反政 인사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 폭탄테러사건의 유력한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41). 사우디 아라비아 부호 출신의 회교 근본주의 반체제 인사로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망명해 있다. 이슬람 테러조직인 ‘국제이슬람 전선’을 이끌며 미국과의 ‘성전(聖戰)’을 공언해 반미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이름이 오르내렸다. 몇주전에는 미국과의 ‘지하드(성전)’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회교교령을 발표,미국 정부의 경계를 샀었다. 57년 리야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제다에서 수학하던 16세때부터 몇몇 회교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상속받은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막대한 재산을 과격 회교단체들의 지원에 써온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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