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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 외교관시험 5년내 폐지/일반공무원 시험으로 통합

    【도쿄 연합】 일본 정부는 늦어도 5년 이내에 현재의 외교관 시험을 폐지,일반 국가공무원 시험으로 통합키로 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5일 보도했다. 외교관 시험의 5년내 폐지 방침은 하시모토 정권이 중점 추진해온 정부부처 통폐합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국내문제를 모르는 외교관이 늘고 있는데다 외교업무에 필요한 어학은 채용 후 습득해도 지장이 없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외무성은 외교관 시험 폐지론에 대해 미국,영국,한국 등 주요국가가 대부분 외교관을 독자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반대해 왔다.
  • 청와대 비서실 우먼파워 실감

    ◎1∼3급 비서관 32명중 4명 전격 발탁/“능력 있으면 차별 안한다” DJ 의지 반영 앞으로 청와대 비서실 내 ‘여성파워’가 만만치 않을 조짐이다.24일 발표된 1∼3급의 비서관 인선에 박금옥 총무비서관을 비롯, 4명의 여성 비서관이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날 발표된 32명의 비서관 가운데 10%가 넘는 수치다.과거 김영삼정부가 단 한 명의 여성비서관(정옥순 교육문화비서관)을 배출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무엇보다 여성의 권익신장에 관심을 기울여 왔던 김대중 대통령의 여성정책과 무관치 않다.평소 “능력있는 여성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김대통령의 여성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비서실장 직속의 총무비서관에 임명된 박금옥씨(42)는 청와대 ‘안살림’을 총괄하는 자리인 만큼 여성의 섬세함을 바탕으로 ‘깨꿋하고 작은 청와대’를 꾸려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박비서관은 91년에 합류한 비서진 출신으로 92년 대선실패 이후 김대통령의 6개월간 영국체류때 수행할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박지원 공보수석도 “여성으로서 보기 드물게 의리가 있다”는 말로 그녀의 충성심을 높이샀고 주위에서는 “깔끔한 일처리가 돋보인다”며 ‘능력’에 점수를 주고있다. 여성정책 비서관에 임명된 안희옥 전 서울시 여성정책보좌관(58)의 경우 92년 정무장관실 조정관으로 파견돼 문민정부의 여성정책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66년부터 서울시 공무원으로 가정복지·부녀아동 분야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신여성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서울시의 ‘개그우먼’으로 불릴 정도로 대인관계와 친화력이 뛰어나다. 일반공보 비서관으로 임명된 박선숙 전 대통령당선자부대변인(38)은 가감없는 ‘여론 전달’의 역할을 맡았다.이번 대선당시 김당선자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순발력을 인정받았다는 평이다.대학 졸업후 재야운동을 하다 95년 당시 민주당 선거대책위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친화력과 치밀함이 주요 무기다. 행사기획 비서관에 임명된 조은희 전 경향신문기자(37)는 취재 일선에서 왕성한 ‘일욕심’과 끈질긴 ‘근성’이 돋보였다는 평이다.김중권 비서실장과 같은 경북 울진출신이다.
  • 업무인수 고려… 현직 10명 유임/청와대 비서 인선 배경

    ◎당 출신 7명… 행사기획엔 신문기자 발탁/정책기획수석실 재경원 사단 포진 눈길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24일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할 비서관내정자 32명의 명단을 확정,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청와대 비서관 인선의 가장 큰 특징은 현직 비서관이 10명이나 유임됐다는 점이다.정무수석실에서는 박명재 행정비서관이,경제수석실에서는 안종운 농림·해양수산비서관 자리를 지켰으며,외교안보수석실에서는 조건식 통일·권종락 외교통상·이성규 국방·송민순 국제안보 비서관이 모두 유임됐다.또 사회복지수석실에서는 김희선 보건환경 비서관이 계속 근무하게 됐으며,공보수석실에서도 박정호 해외언론·이덕주 연설담당·이하용 보도지원 비서관 등 3명이 유임됐다. 비서관 인선내용을 발표한 박지원 공보수석내정자는 “공보수석실의 경우 세계무역기구(WTO) 및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해외 언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공무원 출신을 써야 했다”고 설명하고 “그러나 현재 유임된 비서관들도 다시 정부에 돌아가고,다른 사람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따라서 새 정부의 청와대가 업무 인수인계를 마무리하고 어느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대규모 개편이 예상된다. 현직 비서관 유임이 많았기 때문에 당에서 발탁된 인사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박금옥 총무·김득회 정책2·이상환 정무·이용희 정책조사·장성민 홍보·박선숙 일반공보·정은성 통치사료 비서관 등 7명이 당 출신 비서관이다. 발탁 인사로는 행사기획비서관에 경향신문 기자인 조은희씨(37)를 임명한 것이 눈에 띈다. 비서관들의 출신지역은 서울이 10명으로 가장 많고 경기와 전남,경북 출신이 각각 4명,전북이 3명,경남이 2명,대구·광주·충북·강원·황해도 출신이 각각 한명씩으로 대체로 고른 분포를 보였다.다만 대전,충남출신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이번 인선으로 정책기획수석실은 기획조정비서관에 최종찬 조달청차장,정책1비서관에 이윤재 재경원정책국장,정책3비서관에 오종남 재경원대외경제총괄과장이 내정되는 등 강봉균 수석과 가까운 재경원 사단이 포진하게 됐다.정무수석실의 행정비서관은 총무처 출신인 박명재 현 비서관과내무부 출신의 조영택 인수위전문위원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다 박비서관으로 낙점돼 행정자치부 내에서 두 부처 출신간의 경쟁도 볼만하게 됐다.
  • 살빼기에 왕도는 없다/‘기적의 ○○요법’ 등 현혹 금물

    ◎운동­식이요법 병행만이 최선/금식·단식 되레 요요현상 초래 여성들중에는 자기가 ‘뚱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실제로 비만인 사람도 있지만 정상체중인데도 몸무게 때문에 괜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이들은 무리해서 다이어트를 하는데 체중이 일시적으로 빠지기는 하지만 다이어트가 끝나면 다시 늘어나고 오히려 건강만 해치게 된다. 전문의들은 비만치료에는 왕도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꾸준한 운동과 적절한 식사만이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 49세의 여교사 장모씨.157㎝의 키에 몸무게는 70㎏.비만으로 판정받았다.콜레스테롤수치는 295.정상이 160∼200임을 감안하면 고지혈증 환자다.지방간 증세도 있었다.혈압도 높아서 세 가지 종류의 고혈압약을 먹고 있었다. 장씨는 식욕이 남달리 강한 편은 아니지만 적게 먹는 편도 아니다.매끼 한 공기 남짓한 양의 식사를 하는 정도. 장씨같은 사람은 우선 하루 1시간씩이라도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실내자전거타기나 속보가 적당하다. 식이요법도 병행한다. 식사량은 매끼 반공기로 절반으로 줄였다.대신 반찬은 골고루 먹게 해 영양섭취는 충분했다. 이처럼 3개월 꾸준히 치료를 받은 뒤 장씨는 몸무게가 9㎏이나 빠졌다.콜레스테롤 수치도 185로 정상으로 돌아왔다.지방간증세도 없어졌다.고혈압은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약을 절반만 먹을 정도로 좋아졌다. 인제대의대 상계백병원 비만클리닉 강재헌 교수(02­950­1150)가 최근 치료한 환자다. 강교수는 비만한 여성들뿐 아니라 일반 여성들도 금식이나 단식 등 잘못된 방법으로 살을 빼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실패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기적의 △△요법’,‘○○치료법’을 비롯한 초저열량 식이요법은 효과가 있는 듯하지만 사실 매우 위험한 방법이라고 경고한다. 이런 식으로 기초대사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지방만 빠지는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몸안의 근육까지 분해해서 몸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특이하게 비만과 함께 영양실조나 빈혈이 생길 수 있다.음식섭취량을 줄이면서 편식하기 때문에 기초영양분인 철분이나 비타민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다. 이렇게되면 지방,근육이 함께 줄어들어서 키나 체중에 비해 전체적인 지방의 양은 오히려 많아진다. 잘못된 다이어트가 오래되면 거식증,폭식증을 비롯,심하면 20∼30대에 벌써 골다공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에는 포도다이어트,감자다이어트 등 단품다이어트(한 가지 식품만 먹고 살을 빼는 방법)가 늘고 있지만 이것도 결국은 또다른 형태의 단식이라는 것이 전문의들의 공통된 의견이다.일시적으로 살이 빠질지는 모르지만 다이어트를 그만두면 다시 살이 찌는 ‘요요현상’이 반복된다는 설명이다.
  • 야당세력의 형성(대한민국 50년:8)

    ◎48년 8월 한민당 “이승만정권에 투쟁” 선포/조각 배분 푸대접 받자 초대총리 지명 인준 부결/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대 ‘보수야당’ 성격 고착 이승만정권에 대응한 야당세력의 출현은 바로 한국민주당에서 비롯된다. 한민당은 미군정기인 45년 9월16일 좌우대립속에서 지주세력 등 우익측 인사들로 결성된 보수반공연합체 정당으로 출발했다. 중경의 임시정부를 정통정부로 추대하고,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민공화국 타도를 모토로 내걸었다. 한민당은 창당 당시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의 임정요인들을 지지하고 이들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했으나 김구 등 임정세력들과의 노선차이로 결별했다. ○건국까지는 손발 맞춰 그러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민당은 손발을 맞춰 건국까지 이끈다.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는 ‘정약결혼’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이승만은 그들의 국내 지지기반이 필요했고 대신 한민당은 이정권에서 권력을 주도하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이승만은정약결혼속에서도 내심 ‘친일정당’으로 비판받던 한민당과 계속 제휴하는 것은 자신의 노선까지도 손상받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바로 조각작업에 착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드러냈다. 먼저 한민당이 국무총리로 내세운 당위원장 김성수안을 거부하고 조선민주당 부당수였던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국회인준을 요구했다. 이에 한민당도 기다렸다는듯 즉각 인준을 부결시켰으며,결국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해 인준받은 이승만은 김도연에게 재무장관 자리 하나를 주는 것으로 한민당의 조각참여를 제한했다. 한민당은 이 사건을 ‘이승만의 배신’으로 간주하고 자연스럽게 야당의 길로 전향했다.한민당의 이승만에 대한 불만은 48년 8월8일 발표한 성명에 잘 나타나있다. 이 성명은 ‘…본당원으로서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극히 빈약하다.본당은 신정부에 대해 시시비비주의로써 임할 것은 물론이거니와…”라고 주장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포한 것이다. 한민당은 본격 야당으로 강화하기 위해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세력 등을 규합,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한민당은 창당 3년4개월만인 49년 1월26일 자연해체하게 되고 49년 2월10일에는 민국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민국당은 이어 정부12개부처의 각료중 7명이나 차지해 세를 불려나갔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 개헌밖에 없다고 여겨 이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민국당은 50년 1월 79명의 서명으로 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50년 3월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졌으나 부결로 끝났다. ○49년 2월 민국당 창당 하지만 민국당은 동조자를 확보해 계속 이정권에 도전하는 공세를 펴나갔다.민국당 신익희의 국회의장직 진출로 민국당이 반 이승만세력을 한창 규합해 갈 즈음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로써 국회활동도 중단되고 정쟁은 사그러지는 듯 했으나 이승만측의 정권에 대한 욕심은 굳건했다.전쟁중에도 민국당이 차지한 의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선거를 치르기 위한 직선제 개헌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어 청·장년들을 강제징집·수용해놓고 간부들은 돈을 횡령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겪으며 정부불신임이 팽배해지면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이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마구 잡아들인 ‘부산정치파동’으로 연결돼 반정부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문헌들에서 한민당은 흔히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로,또한 이승만의 독재적인 행정부 권력에 맞서는 의회 특권의 수호자로 묘사돼있다. 그러나 한민당은 사실상 토지와 지방권력등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군림했으며 재원의 분배와 부의 통제를 둘러싸고 중앙 행정권력과 투쟁을 벌일 뿐이었다. ○6·25중에도 개헌 추진 미 중앙정보국(CIA)은 당시 한국 국회를 대한민국 내의 ‘민주주의 정신의 터전’이고 흔히 입법부에서의 논의가 정부관리들과 가열된 공방을 야기시켰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이 국회가 ‘서구의회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집행부에 대해서는 전혀 효과적인 억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승만의)‘보나파르티즘’(Bonapartism)에 어떤 장애도 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민당은 민주국민당으로 변신해서도 국가관료의 고위지도부에 계속 참여했다.49년초 도지사,시장,군수등의 명단은 45∼46년 지방관리들의 명단과 놀라울 정도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민당이 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면서도 이승만정권의 정책에는 동조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한민당은 이승만의 보수주의적 반공노선에 동조함으로써 혁신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면서도 자기 지분을 늘리기 위해 6·25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의원내각제 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CIA가 50년 당시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경쟁’은 ‘보수지도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했다’고 평가한데서도 알 수 있다. 한민당은 수많은 당명의 교체속에서도 현재까지 한국 야당의 명맥을 이어준 ‘뿌리’로 치부되고 있다.그러나 첫 야당이 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댐으로써 지금까지 한국정치에서 야당의 성격을 보수로 규정하게 만드는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야 한민당 관료기구 주도”/49년 미 관리 작성 ‘남한정세 조사’ 보고서 확인 이승만정권시기 관료기구에서 한민당의 주도성과 한계는 1949년 3월 미국관리 맥도널과 로지엘이 직접 대한민국 전역을 여행하며 작성한 ‘남한 정세의 조사’라는 보고서와 미국무부 문서 등 당시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한 정세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각 지역의 도지사·시장·군수 등은 1945∼46년 미군정기 지방관리와 거의 일치함을 보여준다.한민당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으면서도 관료기구를 주도했던 것이다.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도 역시 ‘산업가 및 지주들’의 후원을 받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정당이었다.따라서 이승만정권과 이들 야당세력 사이에는 ‘권력을 향한 경쟁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이었으며 ‘내부 파벌투쟁 또한 강력해 하찮은 자극에도 당을 뛰쳐나가게’ 만들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야당은권위주의적 통치권을 획득하려는 노력에 의해 움직여졌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체질적 요소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미 공문서 기록관리청(NARA) 국무부 일반문서중 50년총선관련자료(Developments concerning the 1950 general election)에 따르면 당시 한국 정당의 정강은 유교체제탓인지 정부에 대해 온정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표현돼있다.게다가 당시 이는 정강자체는 의미없는 것으로 여겨져 부실한 정당정치를 알 수 있다.이들간에 이데올로기의 차이도 권력투쟁에 있어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민국당과 대한국민당 양대정당 사이의 주요한 이슈는 민국당이 행정부에 반대하고 국민당은 지지한다는 차이,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국민당 당수 윤치영도 주한미대사관 관리에게 개인적으로 “우리 당과 민국당의 위치에 큰 차이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민국당은 자유주의를 공언했으나 산업가,지주 등의 지지를 등에 업어 보수정당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 총리 인준 타협하라(김호준 정치평론)

    ○여야 모두 절박한 입지 타툼 새 정부 출범일이 다가오면서 ‘JP총리’ 인준문제를 둘러싼 정치권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거대 야당 한나라당은 ‘JP총리 반대’를 당론으로 굳힐 태세다.반면에 신여권은 “난국타개에 야당이 협조해야 한다”고 한나라당을 압박하며 ‘JP총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타협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여야는 새 대통령 취임일인 오는 25일 국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격돌할 판이다.만일 국회가 JP총리 임명안을 거부한다면 정치권은 물론 온 나라가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다. 신여권은 ‘JP 총리’는 지난 12·18 대선에서 이미 국민동의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DJP 공동집권을 대선 최대공약으로 내걸어 승리했기 때문에 JP총리 임명동의는 국민의 뜻이라는 것이다.그러니 야당은 군소리 말고 JP총리 임명안을 지지하라는 것이다.아니면 각개격파하겠다는 것이 신여권의 으름장이다. 물론 한나라당측 입장은 그게 아니다.‘JP총리’는 DJP의 내부합의일 뿐 존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더구나 3김청산을 대선공약으로 내건한나라당이 IMF 시대에 역행하는 구태의연한 ‘JP총리’를 어떻게 인정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한나라당의 대통령제 고수 입장도 내각제 추진공약을 내건 JP를 거부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헌정사를 돌아보면 총리가 국회에서 인준을 거부당한 사례가 몇차례 있었다.하지만 그 파장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총리는 2인자인 때문에 임명안이 부결되면 제2,제3의 대안을 내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JP총리’가 거부될 경우 대통령만 있고 총리와 내각은 없는 기형적인 정부가 일시 존재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새 정권은 DJ와 JP의 공동정권이다.‘JP총리’는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를 받는 ‘대독 총리’가 아니라 독자적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파트너이다.공동정권의 한 축인 JP가 무너지면 DJ의 국정운영이 심각한 타격을 받는 것은 물론 정권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정이 절박하기는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물론 이 경우는 역의 상황이다.JP총리의 등장은 한나라당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다.지금 구여권에선 신여권으로 이적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다만 국민회의로 바로 가기엔 정서가 맞지 않아 주저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그런 참에 JP총리가 등장하면 때를 만났다는 듯 자민련행이 밀물을 이룰 것이란 전망이다.특히 충청권과 TK지역의 동요가 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JP총리’인준문제는 단순히 총리로서의 적격여부를 확인하는 통과의례가 아니다.여야 모두에게 사활적 문제가 걸린 입지 다툼이라고 보아야 한다.부결되면 DJP 정권이 흔들리고,통과되면 한나라당이 와해위기에 몰리는 제로섬 게임과도 같은 것이다.따라서 이 문제는 우리가 다당제를 인정하는 한 여야 모두의 입지와 공존을 보장하는 바탕에서 원만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금은 ‘IMF 해법’ 찾을때 특히 지금은 오직 ‘IMF 체제’극복에 국력을 결집할 때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강력하게 형성돼 있는 때다.이런 국난극복의 뜨거운 의지 때문에 한국은 국제사회로부터도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고있다.만일 여야가 대결정치의 재연으로 이 분위기를 깨뜨린다면 그처럼 망국적인 행위도 없을 것이다.정치권은 경제난 타개에 모아진 국민 의지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행동할 때다.그러자면 우선 정치권의 최대현안인 ‘JP총리’문제를 격돌없이 처리하는 지혜부터 발휘해야 할 것이다. ‘JP총리’문제의 원만한 해법으로는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첫째,JP의 초대 총리직 사양이다.물론 그 대안은 한나라당이 수용할 수 있는 자민련 인사라야 할 것이다.그래야 DJP의 약속도 지켜지고 새 정부의 출범도 순조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앞으로 정계개편이 자연스럽게 진행돼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다수당으로 부상하면 그때 JP를 총리로 옹립하라는 것이다.그러나 이 방안은,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과연 다수당이 될지도 두고 볼 일이려니와 당사자인 JP가 그럴 뜻이 없고 신여권도 이미 ‘JP총리’임명 강행방침을 굳혔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내각제 유보’ 천명 고려를 둘째는,DJ가 “JP총리’임명과 내각제 추진은 무관하다”고 내각제 유보를 천명하는 것이다.DJ의 진의가 무엇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JP총리 임명은 지난 대선때 DJT연합이 공약한 내각제 개헌으로 가는 수순으로 받아들여 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지금 내각제 개헌론이 부상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정치권은 금방 격렬한 찬반공방과 어수선한 이합집산으로 벌집 쑤셔놓은듯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다.또 DJ는 취임초부터 레임덕 현상에 부딪칠지 모른다.이렇게 되면 정치안정과 국민화합을 전제로 한 IMF체제 극복노력은 내부적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내각제 추진 유보는 한나라당에 대해 입장선회의 명분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난국타개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고려할 만한 대안이라고 하겠다.이런 대안이 성립하려면 한나라당도 ‘JP총리 반대’를 경직된 당론으로 굳히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 중앙부처 조직·인력조정 내용:Ⅰ

    18일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가 확정,발표한 중앙부처 내부조직 및 인력조정안은 다음과 같다. ◇내부조직 개편의 내용 ▲인력의 감축 가.대상:16만1천8백55명(국가 일반공무원) ­중앙부처:9만5백1명 ­현업기관:7만1천3백54명 *대통령비서실,경호실,감사원 제외(별도계획으로 추진) *교육공무원(28만6천1백37명),경찰·공안(11만2천2백16명)제외 나.감축:1만7천6백12명(정원의 10.9%) ­98년도:7천7백62명(4.8%) ­99년도:6천3백92명(4.0%) ­2000년도:3천4백58명(2.1%) ▲유사 관련 기능의 통합 ­외교통상 교섭기능을 외교통상부로 일원화한다. ­농수산 기본통계 작성기능을 통계청으로 일원화한다. ­중소기업정책기능을 중소기업청으로 통합한다. ▲국가경쟁력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기능은 보강 ­지속적인 정부혁신을 위한 행정개혁과 규제개혁 기능을 보강한다. ·기획예산위원회에 ‘정부혁신실’ 설치 ·국무조정실에 ‘규제개혁조정관’ 설치 ­국민의 권리구제기능을 보강한다. ·행정심판위원회,국민고충처리위원회 보강 등­특허 심사 전문인력을 보강한다.(96명) ­식품·의약품 안전과 동·식물 검역기능을 강화한다. ·보건복지부 소속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청’ 신설 ·동·식물 검역인력 증원(70명) 등 ­여성정책 관련 기능을 보강한다. ·여성특별위원회에 ‘사무처’(4개 조정관) 설치 ·교육부 등 5개 중앙부처에 ‘여성정책담당관’ 신설 ­고용안전 기능과 국민복지 기능을 강화한다. ·고용보험 담당인력 증원(120명) ·‘국립공주정신병원’ 신설(162명) ·보건복지부를 업종별 조직에서 기능별 조직으로 개편 ▲지방자치단체 기능 이관 ­문화관광부소속 국립지방박물관(9개),칠백의총관리소의 관리 등 ­해양수산부의 수산종묘배양장,어촌지도소 기능 등 ­농촌진흥청의 종자공급소(2000년) ▲민간위탁 및 이양 ­항로표지 제작·수리,선박검사,항만청소선 운영 등 항만관리기능(98∼99년) ­국군홍보관리소의 제작·집행기능(99년) ­대덕연구단지 관리,서울과학관 운영 등 시설관리·운영기능(99년) ­국립목포결핵병원 운영(99년) ­국립중앙극장 운영 등(99년) ­건설공사의 시험·조사,항공무선표지소 운영(99년) ­국제교육진흥원의 국제교육교류사업(99년) ­농산물 검사,추곡수매 업무(2000년) ▲공사화 추진 ­철도사업 및 우정사업은 2001년에 공사화(약 6만명) ­지방산림관리청의 국유림관리는 국립공원관리공단과 통합(약 730명:99년) ▲책임경영행정기관(Agency)화 ­운전면허시험장의 운전면허 기능(1천2백70명),국립의료원(801명),교육훈련기관 등 ▲행정기관 운영의 효율화 ­총액예산제도를 도입·운영한다. ·예산 총액범위 내에서 각부 장관의 재량권 확대 ­공무원 총정원제를 도입·운영한다. ·공무원 총정원을 법령으로 규정 ·장관에게 ‘과’ 단위 이하 조직편성 자율권 부여 ­실·국·과 조직외에 ‘팀’·‘단’ 등 탄력적인 조직구성이 가능토록 한다.(통상교섭본부 등) ◇정부혁신을 위한 제도의 개선 ▲경쟁원리에 입각한 인사관리 혁신 ­고위직 공무원의 계약제 임용과 성과급 제도를 도입한다. ­행정의 전문화를 위한 인사제도 개혁을 추진한다. ▲성과관리체제의 확립 ­중장기 국가전략계획과 연계하여 성과 위주의 목표 관리체계를 구축한다. ▲고객중심 행정서비스 실현 ­‘시민헌장제도’ 도입 등 행정서비스 제공에 시장 및 경쟁원리를 적극 도입한다. ▲전자정부의 구현 ­정보자원의 중점관리 및 One­Stop/Non­Stop 행정서비스 체제를 구축한다. ▲별도정원 인력의 감축 ­국내외 각종 연구소 및 국제기구에 파견된 별도정원 인력은 2년에 걸쳐 30%를 감축한다.(교육파견정원은 별도) ◇분야별·직급별 감축 내역 □중앙부처 일반직 및 현업기관 구분 현정원 감축 감축% 계 159,806 △17,462 10.9% 정무직 97 △15 △15.5% 1급 138 △14 △10.1% 국장급(2·3급) 713 △65 △9.1% 과장급(3·4급) 2.871 △167 △5.8% 5급이하 155,987 △17,201 △11.0% □외무공무원(재외공관 포함) 구분 현정원 감축 감축% 계 2,049 △150 △7.3% 정무직 3 1특1·2급 72 △12 △16.7% 1급 68 △2 2.9% 2·3급 355 △21 △5.9% 4급 470 △17 △3.6% 5급이하 1,081 △99 △9.2%
  • 문화상품권 새달 16일 첫 등장/영화·공연 관람 음반 구입 가능

    재정경제원이 (주)한국문화진흥이 신청한 ‘영화 영상음반공연예술 문화상품권’발행사업에 대한 인가결정을 11일 내림에 따라 다음달16일부터 문화상품권이 공식 발매,유통된다. 이 문화상품권은 5천원권으로 발행되며 영화·공연 관람권이나 비디오·음반을 구입할 때 현금처럼 사용된다.상품권은 영화관 영상음반 유통점·공연장·공영권 예매서점 등 4천704개의 가맹점에서 판매한다.
  • 원로 영화감독 김기영씨/자택 화재… 부인 함께 사망

    원로 영화감독 김기영씨(78)가 5일 상오 3시쯤 서울 종로구 명륜동 1가 자택에서 발생한 불로 부인 김유봉씨(69·치과의사)와 함께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불은 한옥 내부 20여평을 태워 2천여만원의 재산피해를 내고 30여분만에 꺼졌다.경찰은 2주전쯤 김감독의 집에서 전기가설 공사를 했다는 주변의 말에 따라 공사과정에서 전기배선에 문제가 생겨 불이 났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김감독은 지난 50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53년 영화계에 입문,55년 반공영화인 ‘주검의 상자’를 시작으로 ‘하녀’(60년),‘현해탄은 알고있다’(61년),‘화녀’(71년),‘충녀’(72년) 등 30여편의 작품을 만들었다.최근 김감독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지난해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김감독의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2남1녀가 있으며 김감독 부부의 시신은 서울 중앙병원에 안치됐다.(02)489­3299.
  • 교원정년 61세(사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교육부 건의로 초·중·고 교사의 정년을 현행 65세에서 61세로 낮추는 문제를 검토하는 것에 대해 교원 단체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성명서를 통해 교원정년 단축은 “경제논리에 치중한 비교육적이고 반개혁적인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이같은 반발은 이미 예상됐던 일이고 또 당연해 보인다.그동안 교육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취급 받아온 교원들의 입장에서 교직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정년을 단축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교육부가 내세웠다는 “고연령층 교원 1명을 줄이면 3명의 신규 교원을 더 채용할 수 있다”는 논리는 실제로 경제논리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전국민의 고통분담을 통해서만 살아 남을 수 있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재 아래서 교육계만 무풍지대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교원들이 교직수당 인상분을 반납했다고 하지만 우리 경제위기는 그이상의 희생을 모든 국민에게 요구하고 있다. 일반공무원 보다 유독 높게 책정된 교원정년의 단축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온 문제였다.평균수명이 연장된 고령화 시대에 다른 직종의 정년을 오히려 늘려야지 교원 정년을 끌어내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일반기업체 근무자의 경우 50대에서 대부분 직장을 떠난다.IMF사태 이후엔 30∼40대도 직장에 남아 있기가 불안한 상황이다. 사회전반의 흐름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교육계도 교원정년 단축 논의를 보다 생산적으로 끌고 가야 할 것이다.이번 기회에 획기적인 교원 처우개선,복지향상 등을 이루어 내고 교원 사회에도 경쟁원리를 도입해야 한다.교직이 지금처럼 낮은 처우와 사회적 지위를 감수하면서 65세 정년이 최대유인책인 한 우리 교육의 질적 향상은 기대할 수 없다.
  • JP 김 당선자 특사로 중국 간다

    ◎중공당 초청 형식 8일부터 4일간/DJ 친서 휴대… 달러 도입 추진 관심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가 평생 처음 중국에 간다.의전도 갖춘다.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특사 자격이다.김당선자 친서를 갖고 간다.중국 공산당이 초청하는 형식이다.8일부터 4일간이다. JP(김명예총재)는 지난 93년 민자당대표때 중국방문을 추진했다.하지만 성사직전 팽당하자 무산됐다. 그러다가 자민련이 ‘공동집권당’이 되자 재추진하게 됐다는 후문이다.지난달 ‘밀사’가 중국을 다녀온 것으로 전해진다.때맞춰 지난달 21일 장정연 주한중국대사는 JP를 예방했다. JP측은 이런 사실이 공개되자 매우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오는 4일까지 보안을 유지키로 중국측과 합의했기 때문이다.양국간 관계개선을 위한 의례적인 방문만은 아님을 시사한다. 그가 전달할 ‘DJ 보따리’에 무엇이 담길지는 속단할 수 없다.다만 최근 국내외적 상황과 연관지어 유추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우선 중국은 달러 보유에서 세계 1위다.‘금융경협’과 맞물려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김명예총재는 또‘총리인준’이라는 ‘발등의 불’을 꺼야 한다.이를 보다 수월케 하기 위한 외교행보로 보인다.어쨋든 반공보수주의자인 JP가 방중하는 것은 다목적 포석인 것 같다.
  • 초대 대선과 첫 조각(대한민국 50년:5)

    ◎하지 사령관 서재필 대통령 꿈꿨다/암살 겁내 출마거부… 결국 국회 간선서 이승만 당선/초대총리 이윤영 제청,인준 부결 수모… 이범석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 지도력과 개성에 관해서는 평판이 극명하게 엇갈렸다.“대한민국을 세운 국부”“운산광산을 팔아먹은 매국노”“프린스톤 사람”(무초) “×자식”(하지)….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J.R.하지 중장은 애초부터 서재필을 귀국시켜 대통령에 입후보시키려 했다. 그것은 다분히 이승만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했다.당시 하지의 개인고문으로 일하던 서재필은 이미 암에 걸려 있었다.그는 자신이 살해될 것이라는 피해의식 때문에 입후보를 거절,미국에 돌아간 직후 운명했다. 19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간선으로 치러진 초대 대통령선거에는 결국 이승만과 김구,안재홍 등 3인이 나섰다.이미 예견된 대로 이승만은 196명의 재석의원 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김구는 겨우 13표를 얻었다.그리고 안재홍은 2표,무효가 1표였는데 무효는 미국 국적의 서재필에 투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7월24일 중앙청서 취임식 압도적인 다수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7월24일 중앙청 광장에서 취임식을 가졌다.“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그는 독립의 공을 연합군측에도,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독립운동파에도,국내의 항일투쟁 세력 어느 곳에도 돌리지 않았다.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다. 이승만은 취임후 곧바로 이화장에서 조각에 착수했다.‘조각의 산실’로 등장한 이화장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73세의 이승만은 철저하게 자신이 신뢰하는 측근만을 각료에 임명했다.그러나 그의 건국 내각은 국무총리 인준을 놓고 출발부터 상처를 입었다.이승만은 북한의 조선민주당 위원장인 조만식의 후광을 내세워 부위원장인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제청했다.하지만 이윤영 총리안은 제헌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는 수모를 겪었다. 지면이 거의 없는 이윤영을 내세운 것 자체가 당시 정황으로 볼때 무리였다.한민당의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회의 공론이었다.그러나 이승만은 자칫 한민당에 업힐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를 애써 무시했다.국회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발판을 국회에 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초대내각은 결국 항일독립운동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실마리를 풀었다.그리고 내무 윤치영,외무 장택상,국방 이범석,재무 김도연,법무 이인,문교 안호상,농림 조봉암,상공 임영신,사회 전진한,체신 윤석구,교통 민희식,법제처 유진오,공보처 김동성,무임소 이윤영 등으로 조각을 마무리했다.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인선은 국회에서 친일논쟁이 가열되면서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다.1948년 8월15일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은 출범했다.이와 함께 이날 상오 0시를 기해 미 군정은 폐지됐다. 이승만은 모든 관리들을 하향식으로 통제하려고 했다.이와 관련,미 중앙정보부(CIA)는 “이승만은 국무총리를 마치 ‘행정보좌관’처럼 부리고 있다”고 혹평했다.또한 미대사관은 상공부 장관 임영신을 “2다스의 속옷만으로도 매수당하는” 인물로 파악했다.그는 부패로 쫓겨난 최초의 각료라는 오명을 남겼다. 이같은 이승만 정권의 최고 통치방침 가운데 하나는 유엔에서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새롭게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계속 의존했던 만큼 합법정부로서의 국제적 승인을 즉각 얻어내지 못했다.1948년 10월19일 재일조선청년단체의 암살 위협 속에 이승만은 일본을 방문했다.목적은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를 만나 대한민국의 방위와 국제적 승인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 주한미국대사 무초에 의하면 이승만은 맥아더를 특별히 존중했다고 한다.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질 때마다 맥아더를 찾았다.1945년 10월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은 환국과 더불어 그를 만났다.1948년 10월 회담은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미국이 한국을 지키겠다는 계획을 이승만으로 하여금 내외에 공표토록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역을 맡았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은 1948년 10월8일 유엔에 제출할 최종 보고서를 채택했다.이 보고서에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 의해 성립된 한국정부는 정부의 기능이 점차 개선되어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모든 유엔 가맹국들은 한반도 전체의 독립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한다는 권고 내용도 포함시켰다.이 보고서는 제3차 유엔총회에서 심의에 부쳐졌다.1948년 12월12일 마침내 대한민국은 유엔 총회에서 46대 6으로 승인됐다.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된 것이다.그 후 대한민국은 소련과 그 동맹국가들을 제외한,50여개국의 자유진영 국가들로부터 개별적인 승인을 받았다. ○임정 세력 반대속 출범 대한민국의 출범은 민족사적으로 볼 때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진정한 의미의 민족국가가 비로소 출범한 것이다.우리 민족이 주권확보를 위해 장기간 노력해온 결과로,그 자체가 민족 숙원사업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남북에서는 상이한 정권이 출범했다.그것은 무엇보다 미·소 강대국의 서로 다른 한반도 정책에 기인한다.이는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정책에 있다.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반소·반공정책에 의한 남한지역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유엔이 결정한 데서 비롯됐다.당시 유엔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그대로 추수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제헌국회가 남북통일특별대책위 설립안을 부결시켰다는 사실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이는 국회가 남북통일문제를 도외시한 뚜렷한 징표라는 점에서 그렇다.국회소집 무렵 김구·김규식 등은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했다.통일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하려고 한 이들을 이승만은 공산당으로 몰아부쳤다.그렇듯 대한민국 정부는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의 반대 속에서 출범했던 것이다. ◎미,이승만 신뢰하지 않았다/본사특별취재반,미 CIA 작성 비밀보고서 입수/“독립위해 최선 다했지만 재난 불러올 행동 가능”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참된 애국자였다.그러나 그는 독립한국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최선을 다했다.……위험이 도사리고 있다.이승만은 증폭된 자아의식 때문에 재난을 불러올 행동을 하거나 적어도 신생 한국정부와 미국의 이해를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직설적인 평가를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의 국립공문서보존기록관리청에서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1948년 10월28일에 작성한 2급비밀보고서 ‘대한민국의 생존전망(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을 찾아냈다. 이 보고서는 당시 워싱턴 정책담당자들의 상황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자료다.이 문건에 의하면 미국은 결국 이승만을 옹립했지만 결코 신뢰하지는 않았다.따라서 미국은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계속했다.또한 미국은 군정이 끝난 후에도 CIC나 G­2,CIA 등을 통해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이 행한 부정축재 사실과 같은 부정적인 정보를 모았다. 또 방위와 재원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했다. 이 보고서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승만은 개인적인 이익과 로비활동도 들추어냈다. 워싱턴 임시정부 한국위원회의 수장이었던 이승만은 그 지위를 상당히 이용했다고 밝힌다.사적인 로비활동이야말로 이승만에게는 전쟁이 끝난뒤의 소중한 정치적 밑천이 되었다는 것이 보고서의 시각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민속마을(테마 탐방)

    ◎조선 서민의 정취 담긴 포근한 보금자리/전통가옥 70여호… 예안이씨 집성촌/기와집 10여채 충청도 양반집 전형/영암군수댁 전통정원 조형미 뛰어나/무형문화재 11호 지정 연엽주 유명 【아산=임태순 기자】 산자락에 초가와 기와집이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있다.그 앞으로 작은 시냇물이 마을을 휘감고 흘러 간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이다.한눈에 봐도 풍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민속마을이다.조선 명종(1545∼1567)때 장사랑 벼슬을 지낸 이정이 낙향한뒤 예안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다.문중에 걸출한 인물들이 많아 큰 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많다.그래서 지난 88년에는 전통 건조물 보존지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외암리에는 전통가옥이 70호 남짓 된다.이 가운데 10여채의 기와집은 충청도 양반가의 전통적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영암댁,참판댁,송화댁,병사댁,감찰댁 등으로 불리는 이 집들은 대개 지은지 100∼200년 정도 된다.살기에 편하도록손질이 가긴 했지만 초가집들도 옛맛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외암리의 제1경은 아마 전통 가옥보다는 돌담길일 것이다. 도로를 따라 외암리로 다가서면 멀리 송림숲 사이로 초가와 기와집이 보인다.마을앞 내를 건너면 소로를 따라 돌담길이 나타난다. 담장은 본래 외부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외부로부터 내부를 보호해주고 이쪽과 저쪽을 막아서 공간을 구분해주는 것이 바로 담장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외암리의 돌담길은 폐쇄적이고 답답하기 보다는 친근함과 정겨움으로 다가온다.보는 이로 하여금 소박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느낌은 담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은 데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담장은 까치발을 해야지만 집안을 들여다 볼수 있을 정도로 왠만한 어른들의 키와 나란히 간다.안을 살짝 가리긴 했지만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 것은 아니다.안과 밖을 동시에 배려한 은근함이 배어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덧 마을 한가운데에 다다르고 마음은 고향에 온듯 푸근해진다.이런 곳에 느티나무를 빼놓을수 없다.5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가지를 늘어 뜨리고 기품있게 서 방문객을 맞아준다. 그저 그렇고 그런 것들이 모여 있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흡인력이 있다. 집구경으로 눈을 돌려보자. 마을 동쪽에 있는 참판댁은 충청도 양반가의 전형을 보여준다.민속자료 195호로 지정된 이 집은 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지은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중문간 및 곶간채가 모여,터진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집앞 대문채 앞으로 돌담을 쌓아 고샅 역할을 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중문간 앞에는 아담한 마당을 만들고 장독대 주위에는 나즈막한 돌담을 둘러 아름다운 공간의 연속을 연출한다.특히 이 집에서는 연잎,솔잎,찹쌀로 만든 연엽주가 제조돼 애주가들의 입맛을 다신다.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된 이 술은 임금이 궁핍한 백성들과 함께 하겠다며 호의호식을 거절하자 진상된 약주라고 한다. 마을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영암댁은 전통정원이 자랑이다.전체적으로 깍고 다듬은 흔적이 많아 조경학자들중에는 일본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돌과 나무의 절묘한 배치는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초가집으로는 100여년전에 지어진 오병석씨 댁을 꼽힌다.초가집으로는 상당히 위풍이 당당한데 밤나무로 기둥을 세웠다.정면 6칸,측면은 몸채 1칸에 안팎으로 반칸퇴를 둬 한채에 모든 기능을 갖추었는데 초가집이 주는 푸근함과 아늑함이 물씬 풍긴다. 마을 중심부에서 동향해 있는 장영주씨 초가는 넓게 둘려진 돌담과 옛 모습의 사립문이 어울려 순박한 시골마을의 정취를 안겨준다. ◎개방/보존의 갈림길에 선 ‘영암군수댁’/작은폭포 연못·돌다리·정원수 환상의 조화/관광객 등쌀에 훼손 심각… 일반공개 안해 【아산=임태순 기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고 아무리 값지고 아름다운 문화유산이라도 장롱속에 숨어 있으면 그림의 떡이다. 충남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의 영암군수댁은 잘 짜여진 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작은 폭포와 연못,올망졸망한 돌다리와 징검다리,침엽수와 활엽수의 조화로운 배치 등은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외암리를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번 둘러보고 싶은 곳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정문은 물론 돌담을 끼며 돌아 있는 곁문도 굳게 닫혀 있다.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너머를 힐끔힐끔 훔쳐보다 발길을 돌리기 일쑤다. 아쉽기는 하지만 개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측면에서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들어 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이 집주인은 사생활 침해보다는 다른 이유로 문을 걸어 잠그게 됐다며 다소 뜻밖의 얘기를 했다. 안주인에 따르면 관광객이 한번 왔다가면 정원이 조금씩 훼손된다고 했다.나무 또는 바위틈새에 담배꽁초,휴지조각,필름통 등을 꾸겨 넣는가 하면 형상석이 부서지거나 없어진다.철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고이 가꾼 나무등걸 또는 수석에 올라가 뛰어놀기도 한다.젊은 부부들이 자녀들을 놓아 기르는 탓이다. 안주인은 “손으로 만지는 ‘촉수문화’ 때문인지 눈으로 감상하기 보다는 손으로 만지려 든다”며 “조상들이 정성 들여 가꾼 것을 보존하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게 됐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 개방와 보존의 갈림길에서 보존을 택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장롱속의 보물이 다시 모습을 보이려면 우리들의 주의가 선행돼야 할 것 같다. ◎외암리 민속마을 가는길/아산 송악면 소재지서 1㎞ 거리 위치/아산·온양서 시외버스 하루 7회 운행 아산시 송악사거리에서 공주로 가는 39번국도로 6㎞쯤 가면 송악면 소재지가 나온다.면 소재지 입구 외곽도로로 들어가 이정표대로 1㎞쯤 가면 외암리민속마을이다. 아산버스터미널 또는 온양역앞에서 외암리 강당골행 시내버스가 아침 8시부터 하오 4시10분까지 하루 7번 다닌다.40분 걸린다.외암리에 숙박시설은 없으며 아산시내에 온양관광호텔,그랜드호텔,제일호텔,도고 로얄호텔 등이 있다.
  • 공무원도 경쟁체제로(사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공무원 감축방안으로 직급정년제를 도입하고 정년도 하향 조정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인수위는 본래 특별 입법을 통한 정리해고제를 검토했으나 공무원사회의 동요 등 부작용이 예상돼 방향을 고쳐 잡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수위의 방향이 옳다고 본다.지나친 개혁은 반작용을 낳고 그렇다고 사회 모든 분야가 혹심한 경쟁체제로 들어가고 있는데 공무원사회만 유독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공무원사회가 이제까지 경쟁이 없었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다만 무능한 사람도 한번 들어가면 정년까지 부지하는 모순이 문제였던 것이다.직급정년제는 군이나 경찰에서 이미 실시중인 제도다.이 제도를 일반공무원들에게 적용할 경우 지나친 승진경쟁과 인사의 공정성 시비가 잇따를 것으로 보는 논자도 있으나 부작용보다는 순기능이 더 클것이다. 다만 5급부터 이를 실시할 경우 고시에 합격한후 한번도 승진의 기회 없이 탈락하는 경우가 속출할것으로 보여 직급 정년을4급 서기관부터 적용하는 것이 어떨지 고려해봐야 할것이다.또 일부에서는 이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국제통화기금(IMF)사태 극복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용해보자는 주장이 있다고하나 그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특정기간에만 특정피해자가 생기는 것은 곤란하다. 현재 5급 이상 61세,6급 이하 58세로 돼있는 정년도 우리사회 전반의 추세로 보아 너무 높다는 지적이 많다.다만 현재 제한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연장제를 보다 확대 실시해 유능한 사람은 더 일할 수 있도록 하면 될것이다. 특히 교육공무원의 정년이 65세인 것은 큰 문제다.초등학교의 경우 64세의 할머니 교사가 손자 손녀를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교육의 질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 리투아니아 대통령 당선자 아담쿠스(뉴스의 인물)

    ◎49년 옛소련 강점때 미로 이민… 작년 귀국/영·독 등 5개 국어 능통… 시장경제 지지자 【빌나 AFP DPA 연합】 지난해 미국에서 귀국한 반공산주의 이민자 출신 발다스 아담쿠스(71)가 4일 실시된 리투아니아 대선 결선투표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선거관리위원회가 5일 발표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가 거의 끝난 5일 현재 아담쿠스 후보가 50.3%의 득표율을 기록,49.7%의 득표율을 올린 아르투라스 파울라우스카스 후보(44)를 1만1천여표의 근소한 표차로 앞서 승리가 확정됐다고 말했다. 아담쿠스 당선자는 지난 49년 옛 소련이 고국을 강점하자 미국으로 건너가,지난 71년부터 27년 동안 미 환경보호국(EPA)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봄에 귀국한 이중 국적자다. 그는 16살 때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였으며 고국이 독일에 의해 점령되자 지하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으나 결국 6년 뒤낡은 가방하나와 단돈 5달러를 쥐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어와 독어,리투아니아어,폴란드어,러시아어 등 모두 5개국어에 능통한 아담쿠스 대통령 당선자는 캔자스주에 있는 미군 학교에서 어학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있으며 당선이 되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 새 발굴 자료와 증언으로 다시쓰는 현대사(대한민국 50년:1)

    ◎바람속에 밝힌 등불/1948년 8월15일 감격의 새아침 열리다/유엔 총선감시단 평양행 좌절되고/좌·우 이념대립속 ‘5·10선거’ 실시/해방 3년만에 반공정권 탄생/미 군정 정책 혼선으로 우익진영은 분열되고 북은 빨치산까지 양성/정부 권력구조 싸고 이승만·한민당 또 갈등/끝내 ‘대통령중심제’로 올해 1998년은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한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다.그 반세기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파란만장한 당대사다.그럼에도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했던 여러 공화국의 정치상황 때문에 가려진 부분을 다 들추어내지는 못했다.또 전통주의의 수정주의에 입각한 학계의 양극화 현상은 현대사가 더러 왜곡 기술되는 오류도 드러냈다.그래서 서울신문은 새로 발굴한 자료와 생존자의 증언으로 엮은 주간기획물 ‘대한민국 50년’을 연재키로 했다.이 시리즈는 우선 대한민국 50년 역사속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었다.이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다가오는 21세기 미래사를 발전적으로 이끄는 작업의 하나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새해가 밝았다.세밑 그믐날 잔뜩 찌푸렸던 하늘도 활짝 개었다.수은주는 영하 11도7분까지 내려가 기온은 쌀쌀했지만,날씨만큼은 쾌청했다. 우리 민족에게 새해 원단은 늘 각별한 것이었다.해방을 맞고나서 세번째 돌아온 새해는 더욱 그러했다. 전해인 1947년 11월14일 유엔 총회가 한국독립을 위한 계획안을 채택해 두었던 터라 고무적일 수 밖에 없었다.유엔총회의 한국독립 계획안은 1948년 3월31일까지 남북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국회 및 정부를 조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1947년 봄부터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구상했다.미국의 대외정책문서(FRUS)에 나타난 이같은 구상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시사하는 것이었다.미·소의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반도문제를 합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소련은 한반도문제의 유엔 이관을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섰다.그 대신 1948년초까지 남북한 주둔 미·소병력을 동시에 철수,한국인들 스스로가 외부개입 없이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의를 내놓았다. 소련의 제의는 명분상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당시 남북한 현실을 비교하면 남한쪽에는 위험한 것이었다.북한에는 이미 소련의 지원에 따라 사실상의 정부로 보아도 무방할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이와는 달리 남한에는 권한과 지지기반이 취약한 남조선 과도정부가 있기는 했다.그러나 미군정의 일관된 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우익 민족진영은 분열된 상태였고,북한의 조정을 받는 강한 공산세력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1948년 새해 첫날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큰 사건 하나를 딛고 넘어갔다.이날 경무부장 조병옥은 이른바 ‘인민해방군’사건을 서둘러 발표했다.그런 어수선한 판에 1월4일에는 38선을 경비하는 북한 보안대원들로부터 황해도 연백경찰서 장곡지서가 습격되었다.그리고 15일에는 개성경찰서 여현지서가 피습되는 가운데 남로당 출신으로 이루어진 야산대라는 이름의 빨치산이 전국에서 설쳤다.이들 야산대는 소규모 빨치산에 불과했다.그러나 북한은 대규모 게릴라전을 위해 이 해에 평남 강동학원을 차렸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유엔 감시아래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키로 한 유엔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이에따라 총선을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UNTCOK)이 1월8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서울에서는 영등포공업지대 근로자들이 임금인상과 고용직 근로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간 날이었지만,시민들의 환영은 대단했다.이날 KPS메논 인도 대표와 오스트레일리아·시리아 등 3개국 대표가 먼저 도착한데 이어 캐나다·프랑스·필리핀·엘살바도르 대표가 29일까지 서울에 왔다.유엔한위 1진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유엔한위가 북한에 한 발도 못 들여놓을 것이라는 김일성 발언이 나왔다.그 때만해도 의례히 해보는 상투어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미군정연락장교편에 평양으로 보낸 유엔한위의 입북신청은 소련군사령 참모장에 의해 거절되었던 것이다.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유엔한위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놓고 미군정과남한 정치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속회담을 열었다.우파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환영했으나 우익중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반대했다.그리고 김규식을 주축으로 한 중도파도 통일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에 섰다.좌익도 물론 반대했다. 유엔한위는 남한 단독선거가 유엔 결의와 부합되는지를 놓고 고심했다.그러다 이 문제를 유엔 소총회에 넘겼다.소총회는 2월19일 유엔한위의 접촉이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 우선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받아들였다.투표결과는 미국 입장에 대한 찬성 31,반대 2,기권 11로 나타났다.유엔 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쪽으로 손을 들어주자 유엔한위는 곧 바로선거준비에 들어갔다.그리고 정치권에서도 이승만 중심의 우익진영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미군정은 우익진영과 협조하여 선거준비에 들어가는 한편 3월17일에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발표했다.전통적인 민주선거원리에 입각한 이 선거법은 21살 이상의 남녀 모두를 유권자로 규정했다.이 선거법에 나타난 특이한 점은 일제에 빌붙어살았던 부일협력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 박탈이다.새 정부의 민족정통성 확립을 위한 것이었는데,일제 청산은 뒷날 이승만정권에 의해 퇴색되었다.선거일은 처음 5월9일로 정했으나 일요일 투표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날인 10일로 바꾸었다. 단독선거를 반대하면서 남북협상에 운명을 걸고 평양으로 떠났던 김구와 김규식이 5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5·10선거를 방해하려는 북한 의도에 말려들었을 뿐 남북협상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5·10선거 역시 예상했던 대로 평온하지 못한 분위기속에 진행되었다. 총선거에는 대한독립촉성회,한민당,대동청년단 말고도 45개 군소정당이 나왔다.특히 무소속이 많아 전체 당선자 198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85명이 무소속이었다.이어 대한독립촉성회가 55명,한민당이 29명,대동청년단이 12명,다른 군소정당과 사회단체가 19명의 국회의원을 냈다.이들이 바로 제헌의원인데,국회는 5월31일에 개원되었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에,신익희와 김동원을 부의장에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7월17일에 열렸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의 주장대로 대통령중심제를 권력구조로한 헌법을 통과시켰다.그리고 7월20일에는 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7월24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헌법 골격을 가지고 갈등을 빚었던 한민당과 또 격돌을 벌였다.이승만은 귀국 이후부터 자신을 추종하면서 대통령으로까지 밀어준 한민당을 각료 선임에서 소외시켰던 것이다.그래서 민국당에 이어 민주당으로 개편한 한민당의 뿌리는 1960년 4·19혁명기까지 이승만과 영원한 정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선포식은 8월15일 상오10시쯤 중앙청 광장에서 베풀었다.미군사령관 J R 하지 중장은 미군정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해방을 맞은지 꼭 3년만에 독립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극심한 혼란속에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군정의 갈등,공산주의 세력들과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하고 어렵사리 태어났다.그러나 제1공화국이라고도 말하는 내정체제하의 반공정권은 그 장래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로부터 50년,꼭 반세기를 맞은오늘 험란한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야당지도자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새 정부가 막 돛을 올릴 참이다.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이 걸어온 반세기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그 역사속에는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한 여러 단계의 공화국이 기록되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IMF 극복 구국운동 전개”/반탁승리 52돌 기념식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총재 이철승)는 29일 하오 한국프레스센타 국제회의장에서 각계 인사 2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52회 반탁승리기념대회를 가졌다. 이 단체는 선언문을 통해 “경제파국으로 국가 부도사태를 맞아 IMF 관리하에 들어 갔다”며 “다시 한번 반탁반공의 정신으로 구국안보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 베를린 자유대/50년 사상 최대 역경

    ◎통독후 맞수 훔볼트대로 교수·학생 대거 이탈/예산까지 삭감 이중고… “제때 개혁 못해 추락” 종전후인 48년,포드재단 후원으로 분단독일의 서베를린에 설립된 자유대학이 예산절감과 교수진 및 학생들의 대거 이탈로 창립 50년만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동베를린 소재의 유서깊은 훔볼트대학이 공산정권에 접수된 후 그 반동으로 설립된 자유대는 90년 동독 공산체제 붕괴 이전까지만 해도 서독 최대의 대학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되고 훔볼트대가 현대화 단계에 들어선 최근 수년간 수많은 교수진과 학생들을 빼앗긴 자유대는 ‘통일의 희생자’로 불투명한 미래에 직면해 있다. 분단이후 훔볼트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강요를 피해 서베를린으로 탈출한 교수,학생들의 저항정신에 기초를 두고 설립된 자유대는 미국 정부와 포드재단 등 민간재력가들의 대규모 후원아래 전후 독일 고등 교육의 선두주자로 급속히 부상했다. 미국식 캠퍼스 유형을 도입한 자유대 건물들은 서베를린 주둔 미군사령부와 나란히 자리를 잡았고 냉전 ‘일선’으로서의 베를린 위치 때문에 창립 초기부터 학생운동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50년대말과 60년대초 이 대학의 반공,반동독 활동은 너무나 거세 오히려 연합군 쪽에서 이를 완화하도록 압력을 가할 정도였다. 60년대말 1만8천명이었던 학생수는 70년대와 80년대에 급증,베를린장벽 붕괴시에는 5만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예산삭감으로 지금 대학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건물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요한 게를라흐 자유대 총장은 “지난 91년이후 예산이 3분의 1이나 깎였다”면서 재정난 타개책으로 최근 부설연구소들을 위한 후원금 모금운동에 착수했다.그는 대학부설 연구소 예산의 40%를 부담하는 후원자들의 이름을 대학건물에 붙여 주겠다는 약속을 내 걸었다. 1963년 서베를린을 방문한 존 F.케네디 미국대통령이 “나는 베를린 시민”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을때 통역을 맡았던 로베르트 로흐너는 자유대에 대한 베를린시의 ‘이상한 태도’를 비난했다.그는 지난 60년대 이 대학에서 공부해 성공한 수많은 정치인들이 지금은 모교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를린 시정부의 과학문화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페테르 라둔스키는 자신들을 구동독과의 경쟁의 희생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러한 비판은 비합리적이라고 반박했다. 자유대의 역경에 대해서는 동정론과 함께 새로운 환경에 적응,개혁을 하지 못한 대학 자체의 실패를 지적하는 비판론도 많다.
  • 위기를 호기로/조정원 경희대 총장(시론)

    김영삼 정부는 한국병치유와 신한국 건설을 기치로 내세우면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해왔다.그러면서 금융실명제,정치개혁법 제정 등을 통하여 깨끗한 정치를 구현했고 한국의 민주화를 보다 공고히 하였다는 치적으로 후세의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 했으나 개혁주도세력의 분산과함께 구조적인 한국사회의 정경유착은 물론 부조리의 만연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채 경제위기라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고 말았다.한보사태로 국정의 중심이 표류되면서 기아사태와 최근의 외환위기로 인해 한국은 국제금융기구(IMF) 지원금융이 수혈되는 최대의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차기대통령과 새로 구성될 정부는 김영삼정부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무조건적으로 과거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좋은 시책은 계승하면서 개혁의 실패와 문제점을 과감히 시정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한국경제의 위기는 정부는 물론 기업,언론,노사,국민이 모두 피와 땀과 눈물로써 극복해야 할 과제이며,IMF지원금융에 대해서도 한국경제가 승승장구하다가 체계적인 대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국민적 자존심이 상했다는 차원에서 그쳐야지 마치 외침이나 받은 것처럼 지나친 국수주의로 사태를 과장하는 것 역시 옳은 대응방법이 아니다.그러면서 정부와 국민 모두는 오늘의 국가위기를 초래한 원인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근원적인 타개책을 모색해야만 한다. ○무조건적 과거 부정 지양 먼저 정부는 규제완화 등을 통해 비효율적 행정체계를 대폭 손질하고 공무원들은 국민위에 군림했던 권위의식과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 봉사행정으로 전환해야 하며 기업은 국제경쟁력확보에 사운을 걸고 정경유착과 문어발식 기업확장에 따른 방만한 경영을 지양해야 한다.우리 국민은 전통적인 미덕인 근검절약을 재현하여 사치·향략풍조를 추방하고 합리적이고 건강한 소비생활을 실천함과 동시에 생산현장에서의 근면을 생활화해야 한다. ○사치·낭비·향락풍조 추방 최근에 일부 몰지각한 중간상들과 국민들의 사재기 현상은 즉각 중단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극단적인 소비절약도 국민경제의 활성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우리 국민들의 적절하고도 합리적인 소비양태가 모색되어야 하며 기업은 도산을 면키위한 자구책과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할 것이나 대량감원보다는 고통분담방식으로 대량실업을 유발치 않는 것이 사회안정에 기여할 것이다.정부는 신뉴딜정책으로 고용을 창출하고 국가경쟁력이 확보될 수 있도록 노력하되 IMF와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여 한국의 대외적인 신인도를 제고시켜야 한다.아울러 차제에 IMF와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대미외교에 대한 근본전략도 재정립해야 한다.과거 냉전시대에 미국은 소련붕괴와 북한위협에 대비하는 반공외교의 논리에 따라 한국을 무조건적으로 지원하였으나 이념보다는 경제가 우선되는 오늘날에는 미국이 과거처럼 안보관계를이유로 한국의 시장개방을 늦춰주는 배려를 하지 않고 있음도 직시해야 한다. 지난 6공화국의 북방외교에서도 그랬지만 김영삼정부의 다변화,다원화외교도 아쉽기는 하지만 한·미 동맹관계를 통한 협력강화의 기반위에서 펼쳐져야 한다.한국경제 위기에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 있는 미국의 보수파 인사들의 행태에서 약소국외교의 지혜는 강대국과의 감정적 대결논리에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진정한 한국정부의 자주외교는 내실을 다지고 국력배양에 매진하여 외국과의 협상력을 극대화시키는 수단을 갖추는 것으로 부터 출발할 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21세기의 선진한국,통일한국으로 도약코자 하는 한국에게 20세기에 마지막 고통과 인내를 시험하는 과정이라 각해야 하며,위기에도 기회는 항상 주어진다는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때이다. ○정부·국민 신뢰구축 필요 오천년의 역사속에서 시련과 위기를 무수히 극복하고 오늘의 번영을 이루었듯이 우리 민족은 반드시 일어설 것이며 멀리뛰기 위해 다시 웅크리며 두발을 모을 것이라는 각오로 전진해야만 한다.‘정부가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기다리기 전에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보자’는 케네디 전 미국대통령의 연설 내용처럼 정부의 실정과 책임문제도 따져봐야겠지만 시련극복을 위한 전 국민적 의지와단합이 우선되어야 한다.국민은 정부를 믿고 정부는 국민을 믿는 국민적 합의의 기반위에 차기 대통령과 행정부는 위기적 협력제체를 구축함으로써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고 국민을 안심시킬수 있는 정부가 되도록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오늘의 난국을 해결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 김정일은 간첩 남파 중단하라/김학준 인천대 총장(특별기고)

    북한의 권력층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대남정책을 구사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충격적인 사건이 지난 20일 우리의 공안당국에 의해 발표됐다. 북한이 직파한 부부간첩,그리고 그들을 통해 드러난 고정간첩 등은 북한의 권력당국이 여전히 대남 적화 전략에 매달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정치는 탈이념 탈냉전의 시대에 접어든지 오래됐다.아무리 짧게 잡는다고 해도,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기폭제로 삼아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세계는 교류와 협력의 시대에 들어섰다. 그 유일한 예외지대가 한반도임을 우리는 참으로 부끄럽게 여겨왔다.한반도에는 북한의 교조주의적 공산집단이 엄존함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냉전적 이념대결이 지속됐던 것이다.그것 뿐만이 아니다.북한의 ‘벼랑끝 외교’는 때때로 군사적 긴장마저 조성했던 것이다. ○대북 유화정책에 찬물 그런데도 우리는 북한에 대해 ‘유연한 정책’을 써왔다.북한 권력당국과의 대화를 진지하게 모색해 왔을 뿐만 아니라 북한 동포들을 상대로 식량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우리의 그러한 노력은북한의 권력당국을 어떻게 해서든지 협상으로 불러내 이성적 대화로써 한반도 상황을 개선하고 궁극적으로는 평화통일을 성취하겠다는 민족적 충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권력당국은 우리로부터 얻어갈 것은 모두 얻어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간첩들을 끈질기게 남파시키는 이중적 행태를 보여주었다.때로는 무장간첩을 남파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독침간첩을 남파시키기도 했다. 간첩의 남파로써 북한의 권력당국이 얻고자 하는 것은 새삼 따질 필요조차 없이 명백하다.군사기밀의 획득과 민심의 교란 따위일 것이다.거기에 더해,북한의 주체사상을 전파시켜 사상적 오염을 불러일으키고자 했을 것이고,궁극적으로는 북한문제와 통일문제에 관해 친북적 논리가 확산되도록 유도하고자 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북한당국의 그러한 시도에 대한 경계심을 언제나 굳게 가져야할 것이다.북한의 권력 당국이 대남 적화노선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직시해 안보태세에 소홀함이 없도록,그리고 사상의 전선에 허점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러나 북한 당국은 깨달아야 한다.아무리 많은 간첩을 남파시켜 이른바 남조선 해방의 거점을 여기 저기에 확보하고자 한다 해도 한국 시민의 굳은반공 의지 앞에 좌절하고 말 것임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안보태세 재점검 계기 김정일이 권력 승계를 공식화한 뒤 서방세계는 그의 대내외 정책이 비록제한된 범위 안에서라고 해도 현실주의적 노선으로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다.간첩 남파는 그러한 기대를 사라지게 할 뿐이며,그렇게 되면 될수록 김정일정권의 고립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우리는 김정일에게 간첩남파를 전면적으로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그리고 김정일이 이른바 남조선 해방의 헛된 꿈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납치 고교생 빨리 송환 바야흐로 21세기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이제 남북관계도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돼야 할 역사적 시점에 와 있다.그 전환은 우선 김정일의 현실인식 전환으로 시작돼야 한다.개혁과 개방만이 파산에 직면한 북한을 살릴수 있으며,또 자신이 그 길에 들어설 때 진정한 의미에서 남북관계에 진전이 있을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한 권력 당국에게 촉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등학생 시절에 납북 당한 세사람의 우리 대한민국 국민을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려 보내라는 것이다.소년을 납치하여 이른바 이남화 교육의 도구로 써먹는다는 것은 너무나 비인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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