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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회의 해산 말라”/소 보수파,거센 반격

    ◎인민대표회의 이틀째 표정/옐친,고르비 비난했다 칭찬도/“핵 무기 통제권 연방 보유” 일치 ○…인민대표대회 이틀째 회의가 열린 3일 발언에 나선 대부분의 대의원들은 전격적으로 제안된 최고회의 해산제안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과도기간동안 최고회의를 존속시킬 것을 촉구,개혁파에 대한 일대반격을 시도. 과거 반체제 역사학자였던 로이 메드베데프는 공산주의자 진영을 대변해 행한 연설에서 『최고회의는 반드시 존속해야 한다』면서 인민대표대회 개막일 나자르바예프 카자흐공대통령이 제안한 정국수습방안은 『헌법절차는 물론 인민대표대회 회의절차에도 위반되는 것』이라고 맹비난. 백러시아공화국 대의원인 알렉산데르 주라플레프는 또 발표에서 『상설의회격인 최고회의의 해산을 용인할 수 없다』면서 『우리는 최고회의를 개혁해야만하며 국가를 구해야만 하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은 지난 3일 공화국들은 자유연방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러시아공은 신주권국연방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 옐친은 또 쿠데타는 우연히 일어난게 아니라면서 고르바초프를 비난하는가 하면 쿠데타가 있기전인 3주 전보다 지금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확신감을 더 갖고 있다고 말하는등 고르바초프대통령을 저울질하기도. ○…이틀째 열린 인민대표회의에서 각 공화국의 대표들은 핵무기통제는 중앙의 권한으로 남겨두는데 의견을 일치했다고. 이날 회의에서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대통령이 핵무기의 중앙통제를 주장한 것을 비롯,그루지야공화국의 한 대의원은 15개공화국의 집단방위체제를 규정하는 조약체결을 요구하기도. 그러나 막상 핵의 통제권이 쿠데타 이전에 연방대통령과 군지휘관이 각각 열쇠를 한개씩 갖는 「2개의 열쇠」체제에서 연방지휘하에 이 집단방위체제가 열쇠를 갖게하는 「다열쇠」체제로 더 복잡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 ○…고르바초프대통령은 보수강경파들이 지난 2일의 정국수습방안을 「반헌법적인 쿠데타」로 비난한 것을 비난. 고르바초프는 기자들에게 『제2의 쿠데타 운운하는 것은 아주 위험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민수주의를 실현할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는 『그 가능성들이 아직 사라져 버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오히려 더많은 민주주의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낙관론을 펴기도.
  • 공화국 입지 강화… 고르비 견제/소 최고회의,연정구성 촉구 의미

    ◎연방정부의 와해 막고 위상은 격하/러시아 독주… 타공화국 조연 양상 각공화국정부가 참여하는 소연방 연립정부를 1개월내에 구성하도록 고르바초프대통령에게 「지시」한 소연방최고회의의 30일 결정은 공화국의 입지강화와 연방정부의 위상격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이는 1차적으로 쿠데타 이후 실추된 권위회복을 노리며 서서히 반격을 개시한 고르바초프대통령에게 결정적인 타격이다.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의 독주에 대한 여타공화국들의 견제효과도 아울러 노린 조치로 풀이된다. 연방정부는 공화국들이 필요에 의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징적인 기구에 불과할 뿐 이제 더이상 공화국위에 군림하는 막강한 존재로 간주하지 않으며 실권은 모두 공화국들이 차지하고 연방정부는 껍데기뿐인 조정자로서의 역할만 남겨두겠다는 의지표명이라는 점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한 직격탄이라고 할 수 있다. 옐친이 이미 연방정부의 각료임면권을 사실상 주도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려진 이 조치는 군소공화국들이 이 권한을 나눠갖자는 것이어서 대러시아주의에 대한 제동의 의미도 강하다. 연방최고회의의 결정이 없더라도 고르바초프는 연방정부 구성과정에서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를 비롯한 각공화국들의 협조와 참여를 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KGB의장과 내무·국방장관의 지명권을 옐친에게 넘겨줬던 불가피한 양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자발적인 협조와 강요된 협조와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앞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과 공화국지도자들의 입김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사이의 분기점을 이루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당시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요청,최고회의의 압도적인 가결을 얻어내고 KGB의 개편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정국주도권 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그러나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통령포고령을 발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박탈당한데 이어 자신이 국가안보위원회에의 참여를 권유했던 셰바르드나제 전외무장관과 야코블레프 전대통령보좌관 포포프 모스크바시장 등 개혁파 인사들로부터도 거절당하는 등 침체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또다시 결정적인 쐐기를 맞은 것이다. 이제 새로운 연방체로의 변모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소련내에서 고르바초프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조연에 그칠 수 밖에 없게 됐다.명실상부한 주연으로 등장한 옐친을 위시한 공화국 지도자들의 뜻에 따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내정을 그들의 손에 맡겨야 할 궁색한 처지에 몰린 것이다.외교를 전담한다고는 하지만 실세를 우대하는 국제정치의 생리상 외교무대의 주연자리도 안정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반면 옐친은 견제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구성될 새로운 연방체제에서 러시아공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밝히고 여타 공화국의 핵무기 공유와 반러시아 소요를 절대로 허용치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등 상승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발트3국을 방문,독립협상을 주도하는가 하면 루츠코이부통령을 보내 우크라이나공과 군사·경제협정을 체결한데 이어 카자흐공과도 협력협정을 체결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발트3국을 포함한 15개 공화국의 경제장관들은 30일 모스크바에서 만나 최소한 경제공동체만이라도 구성하는 문제를 논의,소연방의 급격한 와해는 일단 비켜갈 전망이다.그러나 러시아에 이어 2·3번째 영향력을 갖고있는 우크라이나와 카자흐공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공화국들은 종전의 연방정부보다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려드는 러시아공에 대해 우려의 눈길을 감추지 않고 있다.국경재검토권이 러시아공에 있다는 오만불손한 태도 뿐 아니라 연방정부의 경제각료를 러시아공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는데 대한 불안때문이다.이 불안은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천연자원의 공급방식을 어떤 방식으로 뒤바꿔 놓을지 모르는 데서 연유한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보수강경파를 의식하는 가운데 협조속의 경쟁을 벌였던 소련정국은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독무대식 권력쟁탈전 국면을 어느덧 지나 이제 러시아와 여타공화국들간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진전돼가고 있다.
  • 고르비­옐친 「힘겨루기」 돌입/소 정정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공화국 지지 업고 실세회복 안간힘/고르비/연방 배제 독자행보… 주도권 유지/옐친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의 독주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쿠데타로 인해 실추된 권위의 회복을 노리며 반격에 나섰는가 하면 각공화국에서도 「대러시아」주의의 부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일고있다. 옐친에 의해 전적으로 주도됐던 쿠데타 이후 소련정국이 이제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힘겨루기 국면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셈이다.이 와중에서 군소공화국들은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기를 거부하며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독주세력을 견제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28일 옐친에게 연방법을 준수하도록 촉구했다.옐친이 남발한 월권적인 포고령이 쿠데타라는 비상시에는 적절했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권한을 침해하는 이같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와 함께 고르바초프는 파블로프총리가 이끌던 쿠데타 당시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청,연방최고회의의 압도적인 가결을 얻어내고 KGB의 중추기구인 간부협의회를 해체시켰으며 핵심정책결정기구인 국가안보위원회를 과거 측근들로 구성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쿠데타 후유증에서 벗어나 정국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발빠른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또 카자흐공화국에 대표단을 급파하는 등 연방체제의 와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지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방이탈공화국과의 국경재검토권이 러시아공에 있다는 옐친진영의 발언은 여타 군소공화국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러시아공이 또다른 「대형」으로 출현할 것만 같은 이같은 불안감은 옐친의 독단에 대한 비난과 견제의 형태로 표출됐다. 연방최고회의는 옐친의 연방재정 통제조치를 무효화하고 공산당 재산을 연방내무부에 귀속시키는등 옐친의 포고령에 정면으로 맞서는 결정을 내렸다.옐친은 러시아공화국내 공산당재산을 공화국에 귀속시킨다는 내용의 포고령을 발표했었다. 이같은 분위기 변화를 감지한 옐친은 외환과 귀금속에 대한 러시아공의 거부권행사방침을 철회,연방대외경제은행에 양도하고 우크라이나공에 현재의 국경존중을 약속하는등 사법권과 영토분쟁에서 양보할 뜻을 비추며 일단 첨예한 대립을 자제했다. 그러나 오는 9월2일 인민대표대회를 앞두고 최대한 기득권을 따내야하는 처지에 놓인 옐친은 일단 획득한 정국주도권의 고삐를 완전히 늦추지만은 않았다.그자신 돌연 라트비아공을 방문,발트3국의 독립과 관련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듯한 이미지 제고효과를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 루츠코이 러시아공부통령을 우크라이나공에 보내 군사·경제협정을 체결하면서 연방정부를 배제한 채 경제공동체 구성을 위한 15개공화국의 정상회담 개최를 촉구한 것은 앞으로 새로 구성될 소련연방의 성격을 독립국 공동체 형식으로 규정하며 러시아공이 중심역할을 맡겠다는 의도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한 것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공은 러시아공과 경제·군사협정을 체결하기는 했지만 「향후 러시아의 침략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독자적인 공화국군대를 창설할 움직임을 보이는등 경계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고있다.카자흐공화국의 나자르바예프대통령은 연방정부와 공화국간의 조속한 경제협정 체결을 촉구,러시아공을 견제하기 위해 연방정부를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15개공화국 정상회담에 고르바초프연방대통령도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속담대로 소련 최대의 실세로 부상한 옐친이 현재로서는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그런 점에서 러시아공과 여타공화국간의 조정자로서 고르바초프의 역할이 비중을 더해가고 있는 시점이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르바초프를 적극 지지하는 것만은 아닌 것은 연방최고회의가 고르바초프의 비상대권을 박탈한데서 명백히 드러났다. 과거 견제세력이 없는 가운데 경쟁을 벌였던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이제 도처에 견제세력들이 산재한 가운데 권력쟁탈전을 벌여야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있다.물론 아직까지는 이들의 힘겨루기가 체중에 비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런 상태로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 재기 시도하는 고르비

    ◎옐친 독주 공화국 반발도 한몫/“연방유지” 대세타고 역공세 펼쳐 소련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이는 옐친에 대해 월권행위를 하지말라는 고르바초프의 28일 경고로 확연히 드러났다.소련의 새 지도자로 급격히 부상하는 옐친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쿠데타로 정치적 생명에 큰 타격을 받은 고르바초프가 이같은 반격을 가한 것은 소련의 연방제유지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는데다 쿠데타후 옐친에의 반발이 가시화한데 따른 것이다. 옐친이 민주화의 새 기수로 등장한 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옐친은 쿠데타후 많은 초헌법적 월권행위를 범했다.이는 옐친의 독재에 대한 서방의 우려를 불렀다.옐친은 또 러시아공화국의 주도를 지나치게 강조,몇몇 공화국들로부터 공산당독재에서 러시아공화국독재로 바뀔 뿐이란 반발을 샀다.이때문에 옐친과 공화국들간에 마찰이 생겼고 고르바초프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연방체제의 유지는 고르바초프와 옐친 모두가 지켜야할 절대명제다.경제관계를 포함,끊임없이 제 목소리를 내는 각공화국들간의 이해조정,핵무기배치등 군사문제,대외관계조정등에 있어 연방제가 유지되지 않으면 소련은 필연적으로 파탄의 길밖엔 없다. 두사람은 이에 대해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그러나 연방정부의 권한폭에 대해선 큰 견해차를 보인다.연방정부의 권한축소가 불가피해도 연방정부의 지나친 약화는 연방제유지를 불가능하게 할수 있다.옐친은 이를 무시했다.이는 옐친의 실수이며 고르바초프의 반발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고르바초프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으로 말해진다.사실 고르바초프가 이번의 타격에서 완전히 회복,과거의 절대적 권위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그러나 소련은 아직도 고르바초프를 필요로 하고 있다.혼돈속의 소련을 안정시키는게 지금 고르바초프의 역할이다.그이후 고르바초프는 자연스럽게 배턴을 넘길 것이고 배턴을 이어받을 사람은 현재로선 옐친이 가장 유력하다. 이같은 인식은 옐친진영에서도 보여진다.옐친은 26일 새 연방대통령선거 불출마를 밝혔다.이는 옐친이 자신의 행동에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고르바초프와 공생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볼수 있다.따라서 고르바초프의 경고에 대한 옐친측의 큰 반발은 없을 것같다. 옐친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경고는 고르바초프에게 또한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할수 있다.그러나 이것이 고르바초프의 완전한 정치적 부활까지 이어지기는 힘들 것이다.단지 자신의 주도로 시작된 소련의 개혁이 완결될수 있는 기반을 닦을 기회가 주어진 것일뿐이다.
  • “찬탈과 숙청” 소 권력투쟁 74년

    ◎정권이양때 「인민의 뜻」 배제/개혁·보수파가 번갈아 집권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재임중 쿠데타에 의해 실각됨으로써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래 소련권력의 정상을 차지해온 7명의 정치지도자 가운데 흐루시초프에 이어 두번째로 자연사가 아닌 이유로 도중하차한 지도자가 됐다. 지난 여섯차례의 정권이양과정을 보면 예측불허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통해 후계자가 결정돼왔으며 후계자가 집권한 후에도 실질적인 전권을 장악하기까지는 짧게는 1∼2년,길게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같은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의 진통은 전임자의 정책을 계승하는 측보다는 반대하고 공격하는 측의 입장이 우월한 양상을 보여 집권자의 변화에 따라 개혁과 보수의 성향이 번갈아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왔다. 공산혁명후 소련의 첫지도자인 레닌은 10월혁명후 사회주의연립정부를 구성하자는 사회혁명당등 온건사회주의 정파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볼셰비키 단독정부를 수립,자신이 총리가 되고 트로츠키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그러나 이어서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25%의 지지밖에 얻지못해 소수정부를 유지해오다 이듬해인 18년 국회를 해산하고 볼셰비키를 전러시아공산당으로 개칭,1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동시에 자신이 국가수반격인 인민위원회의 의장직을 차지,반대파들을 숙청해가며 24년 사망할때까지 절대적인 지도자로 군림했다.레닌은 1차대전이 끝난후 식량부족과 경제침체가 극에 달하자 21년 개인기업허용및 농만들의 자유로운 식량처분권등을 인정하는 신경제정책(NEF)을 실시했다. 그러나 레닌이 죽자 트로츠키의 2인자 부상 예상을 뒤엎고 스탈린·지노비에프·카메네프의 3두체제가 등장했다.당시 스탈린은 실권없는 당서기장으로 이론이나 실제활동에서 두드러지지 못한 인물이었으나 코민테른 책임자 지노비에프와 공산당 정치국원 카메네프를 재빨리 포섭,레닌의 신경제정책 지지를 표방한 부하린등 우파를 제거했다.그 다음에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이간질시키는 각개격파전술을 구사,레닌 사후 5년만인 1929년말 명실공히 당과 소연방의 최고지도자로 실권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공업화와 농업집단화를 강제적으로 추진시키는 무자비한 경제정책을 추진했으며 반대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36년에는 공산당을 모든 공공조직과 국가조직의 핵심으로 규정한 새헌법을 발포,39년부터 52년까지 당대회를 한번도 열지 않은채 철권통치를 해왔다. 53년 30년 가까이 독재체제를 구축해온 스탈린이 죽자 당내에는 유력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집단지도체제가 불가피해 당시 총리 말렌코프·KGB의장 베리아·외무장관 몰로토프·정치국원 흐루시초프의 4두체제가 수립됐다.원래 스탈린 사망 다음날인 3월6일 당중앙위원회와 정부및 최고회의 합동회의에서 말렌코프를 당간부회 의장·당제1서기·총리등 3개요직에 앉힘으로써 말렌코프체제가 수립되는 듯했으나 4인의 암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돼 불과 8일만에 당중앙위 총회에서 당 제1서기직을 흐루시초프에게 넘기도록 결정,말렌코프의 권력은 줄어들었으며 이어서 베리야가 KGB를 이용,권력장악을 시도한다는 이유로 숙청됐다. 이후 2년동안 권력투쟁을 벌인뒤 55년 말렌코프를 총리직에서 제거함으로 흐루시초프는 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흐루시초프는 이른바 「해빙」이라는 신정책을 시도했으며 반스탈린정책을 추진,고르바초프등 당시 젊은 당료들을 고무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64년 10월 쿠바위기와 중소이념논쟁 격화등으로 인한 당내불만의 고조로 그가 휴양차 모스크바를 비운 사이 그의 추종자들인 브레즈네프·수슬로프·포드고르니·코시긴등에 의해 추방당했다. 이어서 등장한 것은 총리 코시긴·당제1서기 브레즈네프·최고회의 간부회의의장 포드고르니등에 의한 이른바 트로이카체제(3두체제)였다. 브레즈네프는 이 체제내에서 옛질서의 회복을 강력히 추진하는 반흐루시초프정책을 밀고나가 2년후 서기장에 올랐으나 코시긴총리가 죽고 새헌법이 통과된 77년에야 전권을 장악할수 있었다. 82년11월 브레즈네프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정치국원 체르넨코와 경쟁을 벌이던 안드로포프 연방최고회의의장은 이틀만에 당서기장에 올랐으며 그는 불과 7개월만에 국가원수격인 연방최고회의간부회의의장에 선출됨으로써 전권을 장악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5개월만에 사망했고 72세의 고령인 체르넨코가 불과 4일만에 후계자로 결정됐다.그 과정에서 고르바초프·로마노프·알리예프등 소장파들의 강한 도전이 있었으나 일종의 과도체제라는 묵계하에 체르넨코가 지명될수 있었다.그는 브레즈네프의 후광을 받으며 성장해왔기 때문에 강력한 보수체제로의 회귀를 꾀했으나 불과 13개월만에 병사,최단명 지도자를 기록했다. 85년3월 체르넨코가 죽자 고르바초프가 후임 서기장에 선출됐으며 그는 1년동안 최고의 정적인 로마노프·빅토르 그리신등을 축출하고 전권을 장악,다음해 3월 개최된 제27차당대회에서 소련의 대변혁을 가져온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발표했다. 그는 이어서 90년 3월에는 헌법을 개정,대통령에 취임했으나 군내부의 보수파와 옐친등 급진개혁파등의 도전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이같은 소련의 권력이양과정을 볼때 이번 쿠데타로 누가 권좌에 오르든 상당기간 또 한차례의 권력투쟁은 불가피할것으로 보인다.
  • 신데탕트·페레스트로이카 “위기”(크렘린 대지진:1)

    ◎“개혁혼란·경제난 타개”구실,보수파 반격/동서화해 조류 역류 위기… 세계가 긴장 동·서화해의 새로운 국제조류가 역류할 위기를 맞고 있다. 2차세계대전이후 세계사를 지배해온 냉전시대의 막을 내리게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실각하고,소련이 다시 강경보수화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실각으로 소련은 최대의 정치적위기를 맞았으며 국제정치무대의 주인공 중의 하나였던 고르바초프의 퇴장은 국제정치 기류를 크게 바꿀 것으로 전망된다. 전세계를 놀라게 한 고르바초프의 실각은 최근 절정에 이른 소련내의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갈등과 대립에서 보수파가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소련 공산당은 지난15일 고르바초프의 핵심 측근이며 개혁정책 입안자인 야코블레프를 축출,개혁파에 대한 대반격을 본격화했다. 소련군부도 군기관지 적성을 통해 『군내의 모든 공산당원들은 일치단결하여 당과 군을 방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혀 오랜 침묵을 깨고 자기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었다. 소련의 강경·보수파들은 지난 16일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이 공장의 공산당 활동금지조치를 적용하자 더 이상 개혁파에게 밀리면 끝장이라는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20일로 예정돼 있던 신연방조약체결 하루전날 고르바초프를 축출했다. 강경파 지도자들은 소련의 새로운 「탄생」을 저지한 것이다. 관영 타스통신은 소련은 새로 구성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의해 통치될 것이며 의장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 맡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은 소련 강경보수파의 상징인 군부와 KGB가 장악한 것으로 분석된다. 8명의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과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KGB의장이 포함돼 있는 사실이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위원회에는 또 발렌틴 파블로프 연방총리,보리스 푸고 내무장관등 강경파들로 구성돼 있어 소련이 다시 강경보수파의 통치시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수 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동유럽의 대변혁을 가져오며 서방세계에서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소련의 경제를 회복시키는데는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를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점진적인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해 왔다. 정통적인 공산주의 경제체제로는 소련의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접목시키는 「실험」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고르바초프의 실험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는 면도 없지않다. 소련의 경제성장은 오히려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때도 있었고 고질적인 식량난은 더욱 악화돼왔다. 더욱이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소연방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리투아니아공화국등 발트해 3개공화국을 비롯,6개공화국이 신연방조약 가입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국가해체과정」을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밝혀,발트해 3개공화국 등이 주도하고 있는 소련내의 분리·독립움직임을 힘으로라도 저지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강경보수파들은 소연방이 해체되는 것을 막아야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분리독립을 추진하고 있는 발트해 3개공화국들의 독립의지도 매우 강하기 때문에 마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자유의 실체를 체험한 이들의 저항도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분리독립을 추진하는 공화국 국민들 뿐만아니라 러시아공화국등 다른 소련인들의 반응도 주목된다. 옐친대통령의 급진개혁 깃발아래 개혁을 서두르는 러시아공화국 국민들도 개혁이 후퇴될 경우 반발이 예상된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물론 비상사태선포가 소련 각부문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혁의 길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개혁의 속도나 방법에 대해 보수파들이 큰 불만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소련의 개혁속도는 늦추어지지 않을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강경보수파들도 개혁은 계속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어떤 식의 개혁이든 현재 소련이 안고 있는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의 실각은 소련 국내보다 오히려 세계사적인 측면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도 할수 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갈등과 대립의 시대를 마감하고 동서화해의 새시대를 개막시켰다. 고르바초프의「대변혁 드라마」는 유럽의 정치지도를 다시 그리게 만들었으며 지구촌 곳곳의 분쟁을 하나 하나 해결시켰었다. 그의 개혁정책은 냉전의 마지막 잔재로 남았던 한반도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한국은 소련과 국교정상화를 이루었으며 북한도 지금까지의 철저한 고립정책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한반도의 긴장완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이같이 세계를 무겁게 누르고 있던 냉전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화해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하는데 미국과 함께 주연역을 맡았었다. 그러나 세계사를 바꾸어 놓은 고르바초프의 「정치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이 내리기도 전에 또다른 힘에 의해 중단됐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이 강경보수파에 의해 중단된 것이다. 소련의 보수화는 미국을 주축으로한 서방세계를 긴장시킬 것이다. 미국은 고르바초프를 소련역사상 최초로 믿을만한 파트너로 생각하고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를 체결하는 등 미소밀월시대를 맞았었다. 그러나 미소의 밀월시대는 일단 끝났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냉전의 시대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많지 않다고 정치분석가들은 전망한다.소련도 「스탈린이나 브레즈네프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국제정치 역학관계는 미국의 대소대응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이 새로운 지도자들과 어떤 관계를 정립하느냐에 따라 국제정치의 성격도 크게 변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시대의 화해의 새국제질서가 정착되기는 당분간 힘들 것으로 보인다. 고르바초프의 환한 웃음이 국제정치무대에서 사라지면서 국제정치가 난기류에 휩싸이고 있다.
  • 정면대결로 치닫는 소 개혁­보수파

    ◎군의 「공산당수호」 다짐 의미/“반당주의 세력”·“쿠데타 기도” 서로 맹비난/고르비의 조정력도 점차 약화… 위기 고조 소련의 군부 등 보수강경파들이 최근 들어 심상치않은 움직임을 보이고있다.잇따라 눈에 띄게 목소리를 높이고있는 것이다.공산당의 분열을 초래하면서 신당 창당작업에 열을 올리는 개혁파 인사들에 대한 반격이 본격적으로 개시된 셈이다. 소련군은 16일 군기관지 크라스나야 즈베즈다지에 기고한 호소문을 통해 『국가의 생존에 매우 중대한 시기가 도래했다』고 주장하면서 공산당과 군이 급진개혁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있다고 경고하는 한편 군이 국가의 방위와 안정을 위해 일치단결해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지난달 23일에는 공산당과 군부 경찰의 수뇌 12명이 보수신문인 소비에츠카야 로시아지에 낸 성명에서 정부내 개혁파들이 국가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국가를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 군부가 일어서 줄 것을 촉구했다.공산당 중앙통제위원회는 15일 고르바초프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개혁파 기수 야코블레프를 당분열을 획책한다는 이유를 들어 출당조치하도록 당중앙위에 권고키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지난달 26일 폐막된 공산당 중앙위가 오는 11월 열릴 제29차 당대회에 상정키로 채택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한다는 내용의 당강령 초안도 그후 대폭 수정돼 상당히 퇴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보수파들이 이같이 일련의 전례없이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데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야코블레프와 셰바르드나제 전외무장관 등을 중심으로 진보정당인 「민주개혁운동」창당준비작업이 활발히 이뤄져 공산당의 분열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섰고,소련최대의 러시아공화국에서는 공산당활동이 대통령령에 의해 금지되는 등 보수파들의 숨통이 점점 죄어드는 반면 개혁파들의 득세여건이 조성돼 가고있는 것이다.보수파들은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같은 보수파의 반격에 대해 개혁파도 만만찮은 대응을 보이고있다.야코블레프는 16일 공산당 탈당을 선언하면서 이즈베스티야지에 발표한 성명을 통해 공산당내 스탈린주의자 강경파들이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고 경고했다.셰바르드나제가 지난해 12월 외무장관직 사임을 전격발표하면서 『독재가 다가온다』고 경고한것과 같은 맥락이다. 비록 충분히 예견돼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일대 격돌을 알리는 신호탄은 쏘아올려졌다.예전에도 이들 양대세력간의 반목과 설전이 간간이 있기는 했으나 이번처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과거 70여년간 소련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던 공산당이 분열 및 위상저하를 목전에 둔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때일수록 관심을 끄는 것은 고르바초프대통령의 정치적 조정능력.고르바초프는 과거에도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이 첨예화됐을 때마다 줄타기작전을 구사,성공리에 무마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경우가 다른 것 같다.셰바르드나제와 야코블레프 등 개혁파 측근들이 모두 고르바초프의 미약한 개혁의지와 줄타기전술에 염증을 느껴 그의 곁을 떠난 상황이고 보수파들도 고르바초프를 무작정 따르기에는 한계상황에 와있기 때문에 그 어느때보다도 영향력이 약화돼있는 고르바초프 자신도 어느쪽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할 처지다.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나 소련의 심각한 경제위기 등을 고려한다면 군부를 포함한 보수파의 쿠데타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완전히 배제할수만도 없는 살얼음판위에 소련정국은 놓여있다.
  • 오만해져 가는 일본(사설)

    일본은 전전의 오만방자했던 시절로 되돌아 가려 하는가.탈냉전의 신질서 형성이라는 과도기적 혼돈상황에 편승하는듯한 일본의 변신이 우려의 경계심을 자아내게 한다.전후 46년 세계는 지금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일본도 변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는지 모른다.세계의 변화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이며 전진적인 방향이다.일본의 변화도 당연히 같은 방향이어야 한다. 우리 눈앞의 일본은 과연 어떤가.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면 잘못본 것일까.아시아의 대일본 비판과 경계에 그동안 비교적 중립적이었던 미·구의 대일본 비판과 경계가 금년들어 거세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물론 일본의 경제공세에 대한 반격일 것이다.그뿐인가.경제뿐 아니라 정치·군사적으로도 대국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일본의 패권주의 부활에 대한 견제와 경고는 아닐까.세계적으로는 몰라도 오늘의 일본이 아시아의 정치·경제·군사적 패권을 노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것 같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일본의 모든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군축을 지향하는 세계와는 반대로 군비 증강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이미 미·소에 이은 세계3위의 군사예산을 자랑하고 있는 일본은 각종 첨단장비의 구입을 서두르고 있다.미국등 서방첨단무기의 심장은 일본의 기술이 장악하고 있다고 일인들은 호언하고 있다.미국의 걸프전 수행도 일본의 돈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본인들의 본심이다.일본은 이미 군사대국이다. 정치대국화 노력도 만만치 않다.G­7등 국제무대에서 아시아의 대변자내지는 아시아 이익의 옹호자를 자처한지는 오래다.걸프해역에의 소해함대 파견도 같은 발상에서다.캄보디아평화협상을 주선하면서 이곳 유엔평화유지군 참여를 희망하고 있다.직접투자와 경협제공등 막강한 경제력을 무기삼아 동남아와 중국,그리고 몽고에서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착실히 사들이고 있다.북한과의 수교협상으로 한반도에 대한 발언권까지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집권 자민당과 외무성 고위층뿐 아니라 일반국민 사이에서도 과거의 「대동아공영권」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고 미신문·잡지들은 전하고 있다.그리고 2차세계대전의 책임은 미국에 있으며 사과는 미국이 해야 한다는 관방부장관의 15일 발언인 것이다. 「대동아공영권 부활론」과 「미국의 전쟁책임론」은 46년동안이나 숨겨온 일본의 본심을 잘도 드러내는 주장들이라 할 수 있다.미국이 일본의 생존권을 위협해 불가피하게 전쟁을 일으켰다는 일제 논리의 부활인 것이다.대동아공영권은 문자 그대로 아시아의 공영을 위해 훌륭한 것이며 한반도 식민지화도 붕괴위기에 빠진 조선의 요청에 따라 불가피했던 것이라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일본은 진심으로 세계에 대해 겸손하고 아시아에 대해 사죄하는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엔(원)의 힘만 믿고 오만해지기 시작하면 아시아는 물론 일본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을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다.일본은 아시아를 지배하는 패권자가 아니고 일본 스스로 잘 쓰는 말인 「아시아의 선린」이 되어야 한다.정치·군사·경제적 영향력이 아니라 아시아 이웃의 참된 마음과 신뢰를 사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아시아도 이제는 옛날의 아시아는 아니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4

    ◎중공군 대공세… 해리고지 3차례 사수/술주정뱅이 연대장과 불화로 지휘권 뺏겨/전선 교착되자 미 병사들 귀국날만 기다려 「철의 삼각지대」로 불리는 철원 부근의 MLR(MainLineofResistance:유엔사령부 주저항선)에 배치된 15연대 2대대의 대대장 명령을 받은 것은 52년 12월말이었다.정보계통에만 근무해 평소 보병대대장을 원했던 나로서는 매우 만족했으며 의욕에 가득차 있었다. 연대는 중부전선을 맡고 있던 미9군단 산하 3사단에 속해 있었고 대대는 9백여명의 병력으로 완전편성돼 있었다.판문점에서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이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투의욕을 잃은채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는 미국방부가 실시한 순환근무제의 영향 때문으로 MLR근무의 경우 보병은 한달근무에 4점,포병과 기갑은 3점을 주는데 그 점수가 36점이 되면,즉 9∼12개월만 무사히 넘기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첫 대대야간훈련을 실시한 것은 부임 3주후였다.밤새 실시된 이 훈련은 실제 야포와 박격포의 사격지원을 받으며 산악에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큰 사고없이 치러졌다.다만 빙판에서 내 오른쪽 발목이 부러진 것이 사고였다.이동외과병원까지 후송됐으나 깁스만 하고 치료도 끝나기 전에 대대로 돌아와버려 상당기간 애를 먹었으며 병원일지에는 「탈영」으로 기록됐다. 그로부터 2주후 연대는 25사단 35연대와 교대,다시 전선을 맡게됐다.우리 대대는 동쪽으로 배치됐는데 전선을 시찰해보니 벙커보수는 물론 교통호 개수,철조망및 지뢰지대 설치등 손을 봐야할 곳이 너무 많았다.더욱이 MLR에서 동북방으로 2㎞쯤 떨어진 전초진지인 해리포스트가 문제였다. 전선 왼쪽에는 이지중대,오른쪽에는 폭스중대를,중앙의 해리포스트에는 조지중대를 배치한후 각중대에 공병팀을 배속시켜 대대적인 진지보수작업을 펴게했다.건너편의 중공군 진지에서도 부대가 바뀐 것을 눈치챘는지 사흘밤을 82㎜와 1백20㎜ 박격포로 신고를 해왔다.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기 위한 많은 자재들의 수송작업은 한국인 근무지원단이 전적으로 맡았는데 사격위험을 무릅쓰고 추위에 험한산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용감하게 일했다. 그러나 며칠후 나는 해리포스트에 갔다 오던중 길아래로 굴러떨어진 보급트럭을 발견하고 내려갔다가 적의 포격을 받고 오른쪽 팔꿈치에 부상을 입어 다시 후송되는 신세가 됐다. 적과의 큰 교전없이 진지강화에 힘을 쏟고 있는 동안 3월중순 스틸웰연대장이 1군단으로 전출되고 러셀 F 에이커대령이 새로 부임했다.그는 술주정뱅이였다.점심부터 마시기 시작하면 보통 밤까지 계속됐다.나도 술은 좋아했지만 전선에서 술만큼은 치명적이라고 생각,대대로 나오는 맥주 쿼터도 모두 유보시킬만큼 엄격했기 때문에 그와는 부임후 첫회식 때부터 충돌이 일어났다.그는 직접 마티니 칵테일을 만들어서 권했다.커피를 마시겠다고 우겼더니 나중에는 욕을 하며 『명령』이라면서 내밀었다.나는 끝내 마시지 않고 나와버렸다. 첫공세는 4월2일밤 개시됐다.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처음에는 60㎜ 박격포 몇발이 해리포스트 위에 떨어지더니 이내 82㎜,1백20㎜ 박격포 세례가 퍼부어졌다.잠시후 천둥소리처럼 큰소리가 나더니 적의 포병사격도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해리포스트는 화산이 폭발하는것 같았다.이따금 섬광에 적 보병부대들이 해리포스트의 등성이로 기어올라가는 것이 보였다.지상공격도 시작된 것이었다.우리 포병의 응사도 곧 개시됐다. 그러나 적들은 주도면밀하게 공격을 가해왔으며 해리포스트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으나 대대본부와의 연결통로가 적에 점거된 상태여서 자칫 포위되기 직전의 상태였다.예비대의 반격을 개시할 시점이었다.오른편 전선을 맡고 있는 폭스중대쪽의 능선을 타고 해리포스트의 우측 적을 섬멸시키는 작전을 전개했다.폭스중대와 포병의 엄호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본부예비대를 내가 직접 지휘했다. 해리포스트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얼마동안 교통호를 따라가다 개활지를 건너야 하는 아주 위험한 이동이었다.적들은 이 반격을 기다렸다는 듯이 교통호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해왔다.내가 먼저 개활지의 한쪽으로 올라서 쏜살같이 건너갔다.모두들 아직 교통호속에 올라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해리포스트 남쪽 통로를 점령하고 있던 적들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해리포스트를 빼앗기느냐 마느냐의 처절한 싸움이었다.치열한 포성이 멎고 우리 예비대가 해리포스트 위에 올라선 것은 동녘이 밝아올 때였다.우리측 사망자는 9명,부상 21명이었으며 우리가 거둔 중공군 시체만 50구에 달했다. 이틀후 나와 애킨슨중위등 17명은 사단장 스마이드소장으로부터 이날의 공으로 은성무공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중공군들은 끈질기게 공세를 감행,20여일후인 4월24일밤 2차공세가 있었고 또 5월10일밤에는 3차공세를 가해왔지만 해리포스트는 끝까지 사수했다.그러나 나는 3차공세를 잘 막아낸후 에이커연대장과의 불화로 그에 의해 대대장직을 박탈당했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3

    ◎해저 케이블 극비 절단… 중공군 큰 타격/“중국본토 공격” 맥아더의 도전 실패로/중공군까지 밀리자 소,돌연 휴전제의 내가 도쿄의 극동사령부를 경유,함흥에 도착한 것은 50년 11월30일이었다.각부대에 특공중대의 배치및 활용등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미 중공군의 대공세가 여기저기서 확인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는 8군단 소속 2사단과 1기갑사단의 한 연대가 청천강을 따라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받고 있었다.이른바 군우리(편집자주:평안남도 개천)전투로 알려진 청천강변의 전투에서 2사단은 엄청나게 우세한 중공군의 공세에 의해 참패했으며 뿔뿔이 흩어진 병력들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얼어죽거나 포로로 잡혔다.이 때문에 다른 8군병력에게도 중공군 조우와 관계없이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산동∼대련 통신끊겨 동부전선의 중공군 공세 역시 야만적인 것이었지만 10군단의 대응은 다소 달랐다.압록강을 향해 전진배치돼있던 7사단은 지형관계로 소규모부대 단위로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 10군단사령부는 함흥 교외의 옛 일본비행장 부근 눈덮인 벌판에 여러개의 텐트촌으로 형성돼 있었으며 포위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인근의 어항인 흥남에서 철수토록 돼있었다.나는 한국에 있는 미군중에 중국의 전술에 대하여 잘아는 몇안되는 장교중의 하나였다.중공군은 미군이 보다 효율적으로 싸운다면 물리칠수 있을것 같았다.중공군은 한밤중에 소규모 단위로 이동하는데 이는 매복에 약하고 인해전술 공격은 위치선정이 잘된 포병의 공격에 취약했다. 나는 얼마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함흥을 떠나 몇시간 후에 서울에 도착해보니 서울은 어지러운 상황이었고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피란민들로 뒤덮여 있었다.서울은 불과 6개월만에 공산군에 의해 두번째 점령당하게 됐으며 유엔군사령부는 반공시민들에게 남쪽으로 피란할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후 6개월동안 노스캐롤라이나의 베닝기지에서 특공중대 훈련에 또다시 열중하고 있었다.한국전쟁은 상호 처절한 시소게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워커 8군사령관은 서울북부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서울은 51년1월4일 공산군에 의해 다시 점령된채 매슈 리지웨이장군이 후임 8군사령관을 맡고 있었다.유엔군의 전선은 서울남쪽에서 불과 60마일 떨어져 형성돼 있었다.유엔군은 1월말부터 다시 공세를 강화,3월달에 서울은 재탈환되었다. 그러나 이해 봄 더 큰 사태진전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것에서 발생했다.4월11일 트루먼대통령이 맥아더원수를 극동군사령관직에서 갑작스레 해임한 것이다.그 후임에는 리지웨이장군이 임명되었으며 8군사령관으로는 제임스 밴 플리트장군이 맡게 됐다.맥아더장군의 해임은 불행하게도 필연적인 것이었다.사실 그의 임무는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이 시작됐을때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당시 한국에서의 미국정책의 목표는 군사적 대립상태를 안정시키고 남한을 재건하는데 있었다.군인의 임무는 그가 신병이건 맥아더와 같은 노련한 5성장군이건 본국정부의 명령은 어리석다 생각되더라도 합법적인 것은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장군은 그같은 명령을 묵살하고 의회와의 연계를 통해 지휘계통도 무시했던 것이다.그의 목표는 중공을 무찌르는 것이었고 그같은 목적 수행을 위해 그는 중국본토에의 공습과 지상공격을 요청했다.그는 또 압록강을 잇는 다리들과 남만주의 중국 비행장들을 모두 폭파할 것을 주장했다.그러나 맥아더장군의 이같은 변칙적 작전주장은 그가 이 전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높이는데 더 목적이 있는듯이 보였다.그는 결국 도박을 했고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해 여름부터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의 지휘를 받는 연합군은 중공군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그들을 38선 이북으로 다시 몰아내고 있었으며 그렇게 되자 소련은 마침내 유엔에 휴전을 제의하게 됐다.이에따라 38선 근처의 도시인 개성에서 종전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되게 됐다. 워싱턴에 있는 CIA본부로 불려간 것은 51년 12월이었다. ○북 청년 게릴라 자원 나를 만난 빌 디퓨이대령과 리처드 스틸웰대령은 미국정부는 특히 한국전에 참전하고 있는 중공군의 통신망을 교란시키는등 중국본토에서의 게릴라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정권에 압력을 넣기로 결정했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그들은 이 작전은 일본에 신설된 지역본부에서 맡게되며 수송기편대와 연안상륙정부대의 지원을 받게된다고 설명하면서 육군에서는 그같은 임무를 맡아줄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한국에 다시 돌아간 것은 52년 새해였다.한국전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중공군 교란작전의 이름은 JACK(Joint Advisory Commission Korea)이라고 명명됐고 서울에 새본부를 만들었으며 동래에 있는 벤 반더부르트대령의 지휘를 받았다. 우리는 우선 북한 서부해안의 여러개 섬에 비밀 정보망을 구축했으며 원산 앞바다의 여도를 장악,전초기지로 삼았다.이같은 작전에는 중무장된 쾌속함이 동원됐다.우리의 주된 임무는 한국인 정보원들을 공중 또는 해안으로 침투시켜 군사정보를 빼내오는 일이었다.이 일에는 북한으로부터 피란온 많은 젊은이들이 용감하게 자원하고 나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미 목표는 남한 재건 우리가 해낸 한국에서의 가장 큰 작전은 황해바다 한가운데를 지나 중국본토산동반도와 만주 대연을 잇는 해군 케이블선을 절단한 것이었다.그 케이블선은 한국에 침공중인 중공군사령부와 북경을 연결하는 라인으로 중공군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그후 중공군사령부의 북경과의 연락은 무선전화를 이용하게 됐는데 대부분이 우리 측에 도청됨으로써 휴전협상과정에서 우리측은 중공군의 정보에 대해서는 항상 앞설 수 있었다. 우리의 주된 해상공격은 주로 동해의 여도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그곳에서는 육상이나 해상침투는 물론 원산항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까지 체크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적의 후방교란과 함께 유엔군측의 전투수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
  • 고르비 “또 하나의 정치적 승리”/소 새당강령 채택 안팎

    ◎“갈라서면 공멸”보·혁 갈등속 표면적 단합/침묵 보수파,11월 당대회서 반격 분석도/“외면받는 공산당의 자구책”… 시민들 큰 기대 안해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최근 들어 치러진 몇번의 당중앙위 총회가 모두 그랬지만 소련공산당의 이번 당중앙위 총회도 철저히 고르바초프의 각본·연출·주연으로 이뤄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번 당중앙위를 통해 고르바초프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또한번의 정치적 승리를 거둔셈이다. 당초 예상됐던 일정보다 하루 앞당겨 26일 폐막된 당중앙위 총회는 고르바초프가 워낙 획기적인 새당강령을 제출해 큰파란이 일것으로 예상됐었다.계급투쟁·민주집중제 포기등 공산당의 기본이념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사회민주주의제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바로 공산당 스스로 자신들의 존립기반을 허무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의는 새당강령을 거의 만장일치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이례적으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 대한 강력한 비난성명까지 채택하는 등 단합된 모습을 연출했다.하지만 소련공산당이 70여년의 역사상 그야말로 「역사적인」체질개선을 하는 자리였지만 고르바초프가 희망한대로 이번 회의가 보수·개혁간의 분열을 막고 쇠퇴일로에 있는 당이 활로를 찾는 계기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폐막후 기자회견을 지켜본 많은 서방기자들을 비롯,현지분석가들은 이번 회의를 계기로 당내분열상이 가라앉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하고 『당의 분열은 일시 중지된 것일뿐 오는 11월로 예정된 당대회가 열리면 다시 재연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당중앙위원인 불가린도 폐막직후 로시아TV와 가진 회견에서 『이번 회의는 어디까지나 일시적 단합의 장이었다』고 말했다. 회의개막 전까지만 해도 TV·라디오 등에 나와 『나라를 자본주의자들에게 팔아넘기려는』 세력들을 몰아내자며 고르바초프 축출기도까지 거론하던 강경보수세력들은 첫날 고르바초프가 새강령초안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거의 일체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27명이나 발언에 나섰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보수세력들이 끝까지 침묵한데 대해 이곳 분석가들은 상당히의아해하는 반응들이다.당중앙위문제에 정통한 한 학자는 이에 대해 『공산당의 전통적인 관례를 생각하면 이해할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다시말해 보수파들이 희의개막 전 장외에서는 고르비의 정책을 비난하고 심지어 사임요구까지 거론했지만 막상 회의가 시작돼 장이 서자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하는』공산당 특유의 생리를 보였다는 것이다. 연방최고 회의의장 루키야노프는 이에대해 로시아 TV와의 회견에서 보수파들이 고르비의 새강령안에 분명 불만이 있겠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가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고르비에게 조직적으로 반발할수는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그렇다고 자신들의 유일한 권력기반인 당을 떠날수도 없어 「못마땅하지만」새강령을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 또한 홀가분하게 당서기장직을 내놓을 가능성도 점쳐졌었으나 역시 막강한 조직의 당을 포기할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이번 당중앙위가 비교적 조용히 끝난 것도 양측 사이에 이런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특히 고르바초프대통령은대통령포고령을 비롯 자신이 갖고 있는 헌법상의 모든 권리를 총동원해 옐친이 내린 주요기관내의 공산당세포의 정치활동금지 조치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의회 헌법감시위원회에게는 옐친이 내린 포고령에 대해 위헌여부를 철저히 가리라는 지시도 내려졌다. 스스로 개혁노력은 하겠으되 당에 대한 외부의 도전은 절대 용납치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정치국원인 알렉산더 자소호프는 폐막뒤 기자회견에서 『일부 쟁점사항에 대해 찬반양론이 개진됐으나 당의 단합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내내 계속됐다』고 말해 개혁을 추진하되 당내단합을 유지하는 문제에 상당한 비중이 주어졌음을 짐작케했다.일반시민들은 중앙위 총회의 결과에 대해 서로 상반된 입장들을 보이고 있다.어떤 이들은 국민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는 당이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라며 당이 과거 공산당시절로 되돌아갈까 두렵다고 말했다.옐친에게 내려진 경고가 한 신호라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새강령이 채택되면 공산당도 이제 과거와는 크게 다르게 변할 것이고 이들이 막강한 조직력을 가지고 개혁을 본격추진하면 나쁠게 없지 않느냐는 입장을 보였다.페레드트로이카를 처음부터 주도해온 고르바초프에 대한 기대를 아직 버리지 않은 부류들이다. ◎공산국의 반응/중국,새강령채택에 침묵/쿠바,ML주의 고수 선언 【북경 AFP 연합 특약】 중국의 관영언론들은 27일 소련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 폐기와 사회민주주의체제로의 전환을 주내용으로 하는 새 당강령의 채택을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27일자 신문에서 26일 폐막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 대해 일체 보도하지 않았으며 신화사통신과 차이나 데일리 등은 이 회의를 소련공산당과 러시아공산당간의 불화라는 시각에서 짧게 보도했다. 신화사통신은 이날 모스크바발로 중앙위원회에서 참석 위원들이 압도적인 지지로 고르바초프대통령의 제안을 의제로 채택했다고만 보도하고 그 제안의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아바나 로이터 연합 특약】 카스트로 쿠바대통령은 26일 『쿠바의 공산주의 일당체제는 변하지 않을것』이라고 강조,소련공산당 중앙위의마르크스―레닌주의 포기를 의식한듯한 발언을 했다. 카스트로는 이날 마탄자 혁명 38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일으킨 혁명은 그 이념이나 그 명칭까지도 바꿀수 없다』고 말하고 『인류 역사에서 최상의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사회주의』라고 강조했다.
  • “변신”·“분당”…기로에 선 소공산당/“탈레닌”선언…당개혁의 앞날

    ◎“탈당은 자유”고르비 강공에 보수파 침묵/새강령 확정까진 보·혁공방전 치열할듯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제안한 새당강령안이 소련공산당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채택됨으로써 소련은 지난 70년간 소련을 지배해오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됐다. 또 지난 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이래 추구해온 동구 공산권의 개혁과 개방을 위한 일련의 조치도 마무리짓게 됐다. 26일 폐막된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포기를 내용으로 한 당의 새강령초안을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시킴에따라 소련공산당도 헝가리등 동구 공산당의 민주사회당으로의 변신과 같은 근본적 변혁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번 회의에서는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첨예한 대립이 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보수파들의 침묵 가운데 새로운 당강령을 채택하긴 했으나 앞으로 이 강령을 확정짓기 위해 금년 연말로 예정된 특별당대회까지 양자간에 본격적인 노선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25일부터 이틀간 개최된 이번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대통령은정원 4백12명의 공산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정통사회주의 포기를 근간으로 하는 당강령안을 제출하면서 행한 연설에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선언,당내 보수파들의 이탈로 인한 분당가능성을 공공연히 시사했으며 표트르 루친스키 당정치국원은 이 신강령 확정을 위한 특별당대회를 오는 11월 또는 12월중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보수파들 반격의 강도에 따라 지난해 7월 급진개혁파 지도자인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 탈당한 이래 1년만에 또다시 소련 공산당은 최대의 탈당 또는 분당 위기에 휩싸일 전망이다. 소련 공산당은 이미 지난 1년6개월동안 4백20여만명의 당원이 탈당,현재 1973년 수준인 1천5백만명에 불과하며 그 숫자가 나날이 줄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또다시 대대적인 당의 분열이 생긴다면 공산당은 이제 소수당으로 전락하거나 더이상 존립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더욱이 이번에 채택된 당강령안의 내용은 ▲계급투쟁및 노동계층 대변 원칙의 포기▲서방식 사회민주주의 채택▲사유재산제 도입▲신앙의 자유 인정▲세계경제 진입등 사실상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는 것으로 돼있기 때문에 공산당의 근본적 개혁은 불가피하며 그 과정에서 소수의 보수파에 의한 분당이 전망되고 있다. 현재 소련공산당은 보수파와 급진파,그리고 양자간에 균형을 취하려는 당지도부의 세그룹으로 크게 나누어지고 있다. 그동안 이반 폴로즈코프 러시아공산당 제1서기 등을 주축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고수를 주장해온 보수파는 토지의 사유화와 국영기업·농장의 대규모 민영화를 반대해 왔으며 지난24일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소련내 15개 연방중 10개 연방과 체결한 신연방조약에도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해왔다. 한편 야코블레프 대통령수석고문 등을 주축으로 민주개혁을 주장해온 급진파는 경제활동의 대폭 자유화와 사회민주주의노선으로의 전환을 강력히 주장하며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당의 분할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왔다. 이같은 와중에서 당지도부는 정치적으로는 당을 의회주의정당으로 만든다는 원칙하에 교조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척하고 유연한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당내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해 이른바 민주집중제를 폐지하고 당내 분파를 허용해왔다. 또 경제적으로는 소유형태의 평등이라는 원칙하에 농지의 상속권 인정,민간기업의 보호,생산우선에서 소비우선 등의 점진적 개혁을 추진해 왔다는데 이는 급진파의 견해를 상당부분 수용한 것으로 보수파들로부터는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소련공산당의 해체는 앞으로 시간문제인 것으로 보이며 그같은 징후는 이미 금년초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선거에서 비공산당 후보인 보리스 옐친이 공산당후보를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나타났으며 또 지난 20일 러시아공화국에서 역시 옐친대통령이 모든 작업장에서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더욱 구체화 되었다. 이는 공장이나 학교 혹은 정부기관등에서 당원들의 행동을 일체 금하는 것으로 당세포및 당관료등 당의 권력기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그러나 26일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옐친의 이같은 조치를비난하고 이 포고령의 취소를 위해 대통령령도 불사하겠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또 최근 소련에서 33개시 2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6%가 당의 전면해체를 찬성했으며 공산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설문에 대해서는 12%만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응답했을 뿐이다.개혁파의 독주에 보수파들도 만만치 않은 반격을 가하고 있다.즉 현역군인인 발렌틴 바렌니코프 국방차관·보리스 그로모프 내무차관·유리 블로킨 소유즈그룹공동의장등 보수파 12명은 24일 「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를 발표하면서 『소련지도부가 국가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면서 소련의 보존을 위해서라며 「인민애국운동」이라는 단체를 창설하는등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또한 유리 프로코피예프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 같은 사람도 『새당강령안이 당이 견지해야할 목표와 전망을 적시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는등 여전히 보수파가 숫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어 연말의 당대회까지 상당한 진통이 계속될 것으로보인다. ◎소공산당 새 강령 ▷당의 원칙◁ ▲사회·개인·경제·정치·지성의 자유를 보장한다. ▲생산자간의 자유경쟁을 촉진하고 국제사회에 건설적으로 협력한다. ▲당은 노동자의 이익을 대표하고 민주적 개혁,정치적·경제적 자유,사회적 평등을 추구한다. ▷역사의 교훈◁ ▲우리는 과거를 이상화하지도 않으며 거부하지도 않는다. ▲국가의 부분적 개선이 아니라 근본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당내 인식확산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긴급한 과제와 목표◁ ▲정치상황의 정상화와 소비시장의 안정을 목표로 한다. ▲소련을 주권공화국의 자발적 연방으로 변혁시키고 복수정당제와 3권분립의 원칙을 실행한다. ▲국유·사유·주식·협동조합등 다양한 소유형태와 그에대한 평등한 권리를 승인한 혼합경제로 이행한다. ▲재정의 건전화,인플레의 극복,루블화의 태환성달성,빈곤층에 대한 국가보조를 행한 다음 자유로운 가격형성으로 이행. ▲집단적·개인적 경제형태를 자유롭게 발전시키며 농민에 대한 일체의「강제」를 배제한다. ▲미국등과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시키며 군사력을 삭감,핵·생화학무기는 전폐를 목표로 한다. ▷정치행동◁ ▲의회제 민주주의의 틀속에서 오직 합리적인 정치적 방법으로 활동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정당이나 조직과 연합할 용의가 있다.
  • 소련 공산당의 개혁갈등(사설)

    소련공산당이 또한차례 민주화개혁의 큰 진통을 시작하고 있는것 같다.25일부터 열리는 소공산당 중앙위 총회를 계기로 당의 개혁을 둘러싼 보수·개혁 양파간의 한바탕 격돌이 예상되며 그결과는 소련개혁의 앞날을 가름하는 또하나의 중대한 변화의 고비가 될것으로 주목된다. 이번 대결의 포문을 연것은 개혁파였다.셰바르드나제등 개혁파의 잇단 신당결성 발표는 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하고 개혁을 강요하는 원호사격 같은 것이었다.뒤이어 나온것이 정부기관·공공단체 등에서의 공산당의 조직화된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명령의 지원사격이었다.그 다음이 70년 역사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공산당의 서구민주의회주의 정당화선언이 담긴 고르바초프의 당강령초안인 것이다. 공산당의 분열과 몰락 내지는 군소정당으로의 전락이라는 동구 공산당의 운명을 따를것이냐,과감한 개혁을 통한 사회민주당으로의 변신이라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것이냐의 선택을 강요하는 개혁파의 대보수파 공격이라 할수있는 것이다.소공산당은 작년2월 당대회에서 이미 1당독재의 포기를 선언한바 있으나 1년반이 지난 지금까지 공산당의 국가지배체제는 무너지지 않고있는 실정이며 이것이 소련의 정치·경제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결정적 장애요인이라고 개혁파들은 판단하고 있다.그들은 이 장애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며 고르바초프도 그들과 보조를 함께하면서 보수파의 반응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소련상황이 아닌가 한다. 보수파도 이미 만만치 않은 반발을 보이고 있다.국가 공공조직에서의 공산당활동을 금지시킨 옐친의 명령에 대해 보수파가 일제히 반발을 보인데 이어 바레니코프 국방차관보를 포함하는 12명의 보수강경파 그룹은 23일 군부만이 소련을 혼란상태로부터 보호할수 있다는 군사쿠데타 가능성을 예고하는 듯한 불길한 성명을 발표하는 반격에 나섰다.이들의 성명은 조국을 사랑하지않는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외국의 보호자들에게 노예신세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비난,고르바초프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이런 분위기에서 25일의 중앙위총회가 개최되고 문제의 신당강령안이 제출되는 것이어서 그귀추가 비상한 주목거리인 것이다. 소련공산당의 이같은 보수·개혁 양파 격돌의 진통은 어차피 한차례는 겪어야할 불가피한 과정인지 모른다.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동안의 상황은 소련의 혼돈과 고통을 장기화시키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된다.종래와 같은 공산당주도의 개혁이 한계에 부딪친 느낌의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도 마침내 동구식으로 밑으로부터의 개혁 결단을 내렸는지 모른다.가부간의 분열이 불가피한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국면이란 느낌이다. 보수파의 반격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지만 새당강령이 승인되면 연말의 임시당대회에서 확정시키고 내년엔 최초의 민선연방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것이 앞으로의 정치일정이다.세계는 물론 우리와도 이미 밀접한 관계가 되어버린 소련의 공산당개혁 진통을 주목해가지 않을수 없다.
  • 노 대통령,남북교류 지시의 의미

    ◎이념의 벽 허물 「6.29 선언」/체제 자신감 바탕,북 요구 수용/통일여건 조성의 주도적 포석 노태우대통령의 6일 지시는 우선 우리 정부가 그간 북한당국이나 우리의 재야에 대해 갖고 있던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를 과감히 벗어난 하나의 대북 6·29선언이란 의미를 함축한다. 다시말해 우리 정부는 6공출범 이후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적대국가로 규정해 왔던 소연 및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 획기적인 관계개선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지난 40년이상 금기시해왔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으나 또 하나의 공산주의국가인 북한에 대해서만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 왔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노대통령이 6일 북한에서 제의하고 있는 남북한종단공동순례행사와 통일문제학술대회 개최주장을 받아들이는 한편 재야인사들도 본인이 희망하면 가능한 한 이런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라는 지시를 한 것은 그 자체가 북한식 사회주의,이른바 주체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상대적 자신감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에 침습한다 해도 더 이상 두려워할만한 것이 못된다고 자신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특히 노대통령은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초점이 모아졌던 미국및 캐나다순방외교를 통해 양국 정상들과 통일에 이르는 길에 대한 긴밀한 정책적 조율을 마침으로써 통일정책을 능동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전개될 남북관계의 급격한 변화에 자주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갖게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노대통령은 멀로니캐나다총리가 언급했듯 북한의 공산체제가 곧 붕괴될 것이라는 예상이 서방세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라는 점에 주목,우리 정부가 북한이 내놓고 있는 여러 제의들에 소극적으로 대응해 왔던 기존의 자세를 탈피해 다가오는 통일의 시기에 대비해 보다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과감히 펼침으로써 국제사회의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수 있다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또 노대통령은 집권이후 꾸준히 추진해왔던 국내 민주화조치들이 착착 진행됨에 따라 남은 문제는 「통일」이라 보고 『통일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보다 주도적으로 추진할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 같다. 노대통령은 또 통일정책의 주무부서인 통일원이 6일 「남북교류협력부문사업계획안」(92∼96년)에서 밝혔듯 다가오는 93년 또는 94년이 남북교류협력의 전환점,더 나아가 한반도통일의 전기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이번 미·캐나다순방을 통해 더욱 굳게 할수 있었으며 이 결과 국가보안법 폐지,방북인사석방 등을 남북대화재개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북한에 그들이 제의해 놓고 있는 남북한종단공동순례행사와 통일문제학술대회 등을 공동개최할 수 있는 길을 터줌으로써 남북간 교류를 활성화 하고 남북대화에 한시바삐 임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뱅쿠버지시」로 불리울 노대통령의 이번 지시가 우리 정부의 대북자신감을 바탕으로한 전향적이며 적극적인 선도적 조치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실효를 거둘 것이냐에는 많은 문제점이 제기될 수 있다. 우선 북한측이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가 관건이다.북한은 현재까지 공식입장은 표명하지 않고 있으나 노대통령의 미국및 캐나다순방을 선전매체들을 통해 『민족통일열망에 대한 반역행위이며 언제까지나 미국의 식민지로,핵전초기지로 내맡기려는 범죄행위』라는 주장을 되풀이 해왔다. 따라서 북한은 노대통령의 이번 지시에 대해 당분간은 이같은 논조에 기초,회의적인 비난공세를 늦추지 않은채 「독일식 통일을 꿈꾸는 기도」라고 반격해올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일부에서 제기하듯 노대통령의 이번 지시가 액면 그대로 대북정책에 반영되는데도 어려움이 따를것으로 보인다. 가령 노대통령은 지난해 7월20일 「민족대교류」선언을 발표했으나 그것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숱한 전제조건들이 첨가됨으로써 북한당국및 일부 재야인사들로부터 「8·15범민족대회」를 희석시키려는 맞불놓기가 아니었느냐는 비난을 받았었다. 따라서 노대통령의 이번 지시가 남북관계개선의 획기적인 전기로서 실효를 거두기위해서는 궁색한 퇴로만 찾고 있는 북한당국의 전향적인 호응과 관련부처의 효율적인 후속조치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 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5·끝

    ◎북경자료 분석통한 진겸교수의 추적/“장기전에 대비하라”…모,인해전술 지시/80만 병력 3조로 나눠 교대 투입/유엔 총공세에 12개군 지리멸멸/미의 휴전안 소 통해 전달받고 무력적화 포기 모택동은 중국지원군을 3개조로 나누어 교대로 한국전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유엔군을 상대로 조기승리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장기전에 대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는 않았다.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모는 『앞으로 몇년이 걸리더라도 미군수십만명의 목숨을 빼앗아 승리를 거두겠다』고 다짐했다. 51년 3월중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팽덕회는 4월6일 중국지원군 당위원회확대회의를 소집,『단기전을 수행하되 장기전에도 대비하라』는 모의 교시를 전달했다. 팽은 이 자리에서 51년중 60만의 병력이 추가징발될 것이며 군사문제가 국가의 최우선과제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유엔군은 중국군의 추가병력이 도착한 4월중순까지 반격을 계속,3월중순 서울을 재탈환하고 전선을 38도선으로 옮겨갔다.맥아더장군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짓기 위해 중국본토를 공격할 것을 워싱턴에 건의했다. 그러나 트루먼대통령은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진격하자 전쟁을 그쯤에서 끝낼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견차 때문에 트루먼대통령은 4월11일 맥아더장군을 유엔군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후임에 리지웨이장군을 임명했다. 미국이 전전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전쟁의 목표를 줄여잡은 것과는 달리 중국은 완전한 승리의 욕심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었다. 51년3월 중국군 제3,9,19군단이 지원군으로 도착하자 팽덕회는 제5차공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4월6일 중국군당위원회에서 팽덕회는 총반격작전 개시일을 4월20일경으로 잡았다. 팽은 이때 미군이 북한지역의 동서해안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가졌으나 기선을 잡기 위해서 공격날짜를 서둘렀다. 중국군 사령부는 이 5차공세를 공격의 주도권을 회복하고 전쟁을 완결짓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5차공세는 4월22일밤 시작됐다. 유엔군 주방어군인 미제24,25사단을 일시에 포위,섬멸하고 서울을 재점령한다는 목표하에 북한인민군 제1군을 포함,총12개군의 대규모 병력이 작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작전은 예상보다 어렵게 진행됐고 서울공격에 나섰던 제64,65군은 유엔군의 공습·포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모택동은 그러나 5차공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서울을 공격하는 척하다가 병력을 돌려 동부전선을 칠 계획을 세웠다. 5월16일 재차공격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한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역시 대대단위 이상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조금씩 남하하다가 5월21일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이틀 후인 5월23일 새벽 유엔군이 총반격에 나서자 중공군은 허겁지겁 퇴각하다 제60군 예하 1백80사단이 전멸하는등 「한국전 기간중 최대의 피해」를 입은채 5차공세를 실패로 끝냈다. 모택동도 마침내 완전한 승리 대신 휴전을 수락할 뜻을 비추기 시작했고 동시에 미국도 종전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미국무부는 당시 프린스턴대 교수로 국무부 고문이던 조지 캐넌을 유엔 주재 소연대사 야코프 말리크와 만나도록 주선,두사람은 5월31일 롱아일랜드에 있는 말리크의 관저에서 만났다. 캐넌은 전전경계선을 유지하는 선에서 협상을 통해 한국전을 끝내고 싶다는 미국정부의 뜻을 밝혔고 소연정부는 이를 즉시 중국측에 전달했다. 이 메시지를 받은 모택동은 6월초 북경으로 김일성을 불러 대응방안을 협의했다. 양자는 전전영토보장과 한반도 주둔 외국군대의 점진적인 철수를 약속한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51년6월23일 말리크소대사는 공식적으로 휴전을 제의했고 중국이 이에 동의했다. 이어 7월10일 중국·북한대표와 유엔군측 대표가 개성에서 첫대좌를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휴전협정조인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2년의 세월이 걸렸다. 중국이 무력승리 정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의 한국전참전 배경을 설명하면서 유엔군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땅으로 진격해 들어올 것에 대한 안보적 불안감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모택동과 중국지도부가 갖고 있던 공산혁명 이데올로기가 보다 중요한 동기였음을 지적하고 싶다. 모는 한국전을 아시아공산혁명의 한 단계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모는 중국이 한국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는 것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국제적 의무」로 생각했다. 이러한 혁명논리가 동원될 때 비로소 모가 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기 전부터 한국전참전준비를 했고,왜 그렇게 무모하게 뛰어들었는가가 보다 분명하게 해명된다. 한국전참전을 통해 중국은 군사전략과 외교면 등에서 몇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현대전에서 무기·병참 등의 열세 속에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가 원자탄 개발에 착수하게 된 것도 이와 관계가 있다.둘째 소연이 공군지원을 하겠다던 당초약속을 어긴 것은 그뒤로 모가 소연을 불신케 된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은 한국전에서의 패배로 그때까지 추구해온 아시아혁명전략을 전면 재조정하지 않을수 없게 됐다.
  • 80일만에 37도선돌파…병참선 재정비(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4)

    ◎북경자료 분석 통한 진겸 교수의 추적/보급난 간파한 유엔군,대대적 기습 반격전/“한강이남 포기… 휴전 모색” 건의에 모가 반대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기 앞서 김일성은 12월초 비밀리에 북경으로 가 모택동을 만났다.두 사람은 이자리에서 중국·북한군 통합사령부를 창설키로 합의했고 팽덕회가 총사령관겸 정치장교로 임명됐다. 팽덕회는 공세작전의 성패는 병참에 달렸다고 판단,즉시 수송 및 보급망 개선에 주력했다.이와함께 중공당중앙군사위는 국공내전참전 용사 8만4천명을 추가동원하고 인민해방군 제19군단에 대해서도 51년3월까지 춘계대공세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의 3차공세는 50년12월31일 시작됐다.초기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돼 이듬해 정월 2일까지 중·북한합동군은 유엔군 방어선을 15∼20㎞정도 밀고 내려갔다.중국지원군 38군과 조선인민군 1군은 서울과 인천을 향해 진격했고 중국군 42군은 인민군 제2,제5군의 지원을 받아 홍천,횡성으로 밀고들어갔다. 이들은 1월4일 서울을 함락하고 1월8일에는 37도선까지 밀고내려갔다.그쯤에서 팽덕회는 전황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중공군들이 엄청난 곤경을 겪고있었기 때문이다.팽은 유엔군이 비록 후퇴를 거듭하고 있지만 전력의 우위와 반격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공격작전을 중지하고 현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전전선에 시달했다. 1월8일 중공군사령부는 「조정기 중 우리의 할일」이라는 지침을 각급부대에 하달,차기 공세에 대비할 것을 명령했다.팽은 공격중지로 유엔군이 반격할 여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았지만 단시일내에 반격해오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팽의 건의대로 공격중지를 허락했지만 미군에게 반격능력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51년1월14일 모는 팽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미군은 최악의 경우 부산·대구지역에서 대규모 저항을 할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한국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월25일 중·북한군지도부는 춘계대공세를 위한 합동작전회의를 개최했다.같은날 유엔군은 김포,인천지역에서 대규모 반격작전에 나섰다.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장군이 불의의 자동차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매튜 리지웨이장군이 대신 작전지휘를 맡았다.리지웨이장군은 중공군의 작전수행능력이 물자,전투장비의 보급난 때문에 1주일 단위로 제한돼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리지웨이장군은 유엔군이 화력·기동성·보급면에서 앞서기 때문에 최단시간내 공세로 국면전환이 가능하다고 보고 반격작전에 나섰다.갑작스런 반격에 당황한 중·북한 합동군사령부는 춘계공세계획을 일단 중지하고 유엔군 저지에 나섰다. 1월27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미군의 작전목표가 『중국군을 한강 이북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탄약,식량의 부족 때문에 3월말까지는 이들의 공격을 저지하기가 힘들다고 보고했다.이와함께 팽은 『정치적으로 가능하다면』한강 이남지역을 포기하고 적당한 시점에서 휴전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그러나 모는 1월28일 저녁 팽에게 전문을 보내 반격할 것을 명했다.모는 이 전문에서 ▲4차공세의 목표는 미군과 이승만정권을 몰아내고 대전과 안동 이북을 점령하는 것▲중국군이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주공격을 원주·홍천방면에 집중시킬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고▲대전·안동이북을 차지하면 일단 2∼3개월 힘을 모은 뒤 마지막 5차공세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팽은 다음날 중·북한군 합동작전회의에서 모의 뜻을 전달하고 반격작전을 개시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전세로 보아 전면반격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선 현위치를 고수하고 서부전선에서만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서부의 중국지원군 제50군과 38군예하 1백12사단은 현위치를 지키고 제39·40·42·66군은 횡성과 지평리에서 진격해오는 유엔군을 공격하도록 했다.동시에 북한인민군 제2군과 제5군은 평창에서 한국군 제7사단을 공격,남진활로를 뚫도록 했다. 전면공격을 요구한 모의 지시에 크게 미흡한 작전계획이었지만 팽은 사실 이 정도도 무리라고 생각했다.1월31일 팽은 모에게 전문을 보내 현시점에서 반격을 개시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팽은 중국병사들이 식량·탄약·신발보급을 제대로 못받아 『눈길을 맨발로 걸어야 할』형편이라고 밝혔다.팽은 2월12일을 공격개시일로 잡았음을 알리고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한국전 전반에서 상황이 불리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공군의 반격은 2월 11일 횡성·원주지역에서 시작됐다.작전초기 한국군 제8사단을 상대로 잠시 승리를 거둔 중공군은 미제2사단의 우세한 탱크·포 화력앞에 많은 전사자를 내고 결국 지평리에서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중·북한 합동군사령부는 37도선북쪽과 38도선 이남의 두곳에 방어선을 치고 둘 중 한곳에서만이라도 유엔군의 북상을 막아보려고 했다.그리고 팽덕회는 북경으로 가 3월말까지 머물며 모와 향후전략을 숙의했다. 팽의 보고를 받고 한국전에 대한 모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모는 3월1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1년안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당초의 생각을 바꿔 전쟁이 2년 정도 더 끌 것같다고 밝혔다. 모는 중국군이 심각한 병참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단위부대 병력충원에 1개월 이상씩 걸린다고 말하고 『38도선 이북을 다시 적에게 내줄 가능성이높다』고 실토했다.이러한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모는 마침내 전략상의 일대 수정을 가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바로 장기전에 대비,총병력을 3개조로 나눠 교대로 전선에 투입한다는 전략이었다.
  • 모택동,김일성의 남침 “원칙적 지지”(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1)

    ◎북경자료 분석 통한 진겸 교수(미 뉴욕주립대)의 추적/“아시아 공산화 기회” 판단/한국군 38선 돌파에 파병 결심/“10월15일 15개 사단 투입” 스탈린에 통보/낙동강전투 때 인천상륙 예상하기도 1950년 6·25 동란 발발 당시 북경정부는 중국의 국가안보와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유엔군의 반격이 개시되기 전부터 한국전 개입을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미 뉴욕주립대의 진겸 교수가 주장했다. 중국계인 진 교수는 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미 대외관계 역사학회 제17차 연례회의에서 발표한 「한국동란중 중국의 목표변화」라는 연구논문에서 최근 공개된 중국 자료를 통해 베일에 싸였던 모택동의 개입결정과정을 소개했다. 이 논문의 요지를 5회에 걸쳐 소개한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자 해디 트루먼 미 대통령은 남한 구출 결의를 즉각 천명하는 한편 대만해협에서 중국군를 견제하기 위해 미 제7함대를 이 수역으로 급파했다. 이러한 미국의 조치는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충격과 더불어 몇 가지 심각한 도전을안겼다. 첫째,아시아 태평양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신호인 미국의 강경대응은 「동아시아가 제국주의 국제전선의 취약지대」라고 믿어온 북경 공산정권의 전반적인 인식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둘째,7함대의 대만해협 이동은 중공당 군부가 1949년 가을 이래 준비해온 대만 해방계획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셋째,북한군과 미국 주도 유엔군의 군사대결은 중국의 국가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한국전은 중공당 최고의 과제인 아시아 공산화와 관련,중국 혁명의 영향확대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모택동과 중공당 지도부가 한국전에 대해 가졌던 인식은 미군 축출에 실패하면 중국에 위험하고 성공하면 아시아 공산혁명을 진전시킬 수 있다는 복합적인 것이었다. 최근 공개된 자료들에 따르면 김일성은 정확한 남침일자 등 세부계획을 중국에 알려주지 않았지만 중공당 지도부는 북한의 남침 의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원칙적으로 이를 지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중공당 지도부는 북한의 남침 전부터 남북한간에 군사대결이 불가피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한국전 발발 5일 후인 1950년 6월30일 중국정부 총리이며 중공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인 주은래는 김일성과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전쟁자료 수집을 위해 대부분이 군사정보요원으로 구성된 일단의 중국 외교관을 북한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7월7일과 10일 주은래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한국전 관련 군사대비 문제에 초점을 맞춘 2개 회의를 주재했다. 이 두 회의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즉 인민해방군의 정예부대인 제4야전군 산하 13군단을 동북국경방위군으로 즉각 개편,필요할 경우 한국전 개입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7월13일 중앙군사위는 동북국경방위군 창설 명령를 공식하달하고 인민해방군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인 15군단장 등화를 13군단장에 임명했다. 또 동북군구 사령관이며 정치위원인 고강으로 하여금 모든 준비업무를 지원토록 했다. 이리하여 8월초까지 25만명 이상의 중국군 병력이 한·만 국경에 포진했다.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을 때 중국군 간부들은주은래에게 북한군 후방에 대한 미군의 기습공격을 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미군 상륙이 가능한 지점으로 군산과 인천을 지적했다. 유엔군 증강과 더불어 중공당 지도부는 한국내 군사상황의 악화를 우려,한국전 개입 준비를 서두르면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9월15일)하기 1개월 전인 8월에 이미 북한군 지원을 위한 9월초 파병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8월말까지 훈련과 그밖의 다른 개입준비를 마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하다는 이유를 들어 고강은 준비기간을 9월말까지 연장해주도록 건의했다. 중국은 또 파병 전에 소련의 협조와 김일성의 동의를 얻는 것이 필요했다. 두 개가 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9월17일 중앙군사위는 파병에 대비,한국의 지형을 조사하기 위한 일단의 군 장교들을 북한에 파견했다. 9월20일 주은래는 중국의 한국전 개입 기본원칙을 수립,모택동의 승인을 받았다. 중국정부는 또 한국전 개입시의 중·소 협조 가능성을 소련과 협의했다. 중국과 소련은 쉽게 일반적인 이해에 도달했다. 중국 지상군이 한국전에 투입되면 소련은 공군을 보내 중국군에 공중우산을 제공하기로 했다. 중국군 파병에 관한 최종결정은 10월1일과 2일 사이에 이뤄졌다. 이에 앞서 9월30일 한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했고 다음날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10월1일 김일성은 평양 주재 중국 대사 예지량과의 긴급회담에서 중국군 개입을 요청했다. 김일성은 또 부총리 박헌영을 모택동에게 보내 이같은 요청을 거듭했다. 10월2일 모택동은 중앙군사위 이름으로 13군단에 대해 임전태세를 완료하고 명령에 따라 언제든지 전쟁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날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소위 「중국의용군」 파병결정을 통보했다. 당시 모택동의 계산은 중국의 병력과 소련의 무기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중국군 12개 사단을 10월15일까지 북한에 투입,38선 이북에서 방어태세를 취하며 소련 무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스탈린에게 말했다. 또 1951년 봄엔 중국군 24개 사단을 추가 파병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해 미군을 섬멸하겠다는 것이었다. 10월3∼5일간 중공당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모택동의 파병결정에 대한 지도부내 이견을 해소하고 팽덕회를 중국 인민의용군 총참모장으로 선임했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중

    ◎낙동강서 대반격… 두달 뒤 압록강 진격/“남북통일 축원” 강물 담은 수통 이 대통령에/국경 도착 이틀 만에 “중공군 침입”… 후퇴 명령 1950년 6월28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불과 4일 만에 수도 서울은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공산군은 빠른 속도로 남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무방비상태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서부전선의 아군 방어선을 조정하기 위해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남으로 철수시키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은 계속해서 하달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홍천의 삼마치고개,원주의 신림고개에서 남진하는 북한 공산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의 장갑차 5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저들의 뛰어난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7월4일에는 전국과 멀리 떨어진 충주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피란민들의 행렬은 홍수를 이루며 지나갔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렇게 탄식했다.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우리 연대 작전과에 있던 여자 타자수가 조금 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어 정말 피란민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그의 얼굴 표정은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충주농업학교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7월5일 아침 일찍이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음성으로 이동했다. 기름고개를 향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중 마침 북쪽에서 내려오던 북한 공산군과 조우하게 됐다. 전투가 시작됐다. 아군의 사기는 그런대로 중천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기름고개를 넘어서자 적군이 줄지어 다가왔다. 우리 부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적 대부대를 깨끗이 섬멸하고 계속 전진했다. 이때 나는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몸 아홉군데에 총알이 박혔다. 중상중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났나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헐렁한 팬츠 하나만 걸친 채 담요에 둘둘 싸여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워낙 부상이 심해 결국 부산에 있는 제5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4층에 있는 중환자실에 눕혀졌다. 대소변도 받아내는 형편이었다.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간호장교 최 소위가 이를 맡아 해냈다. 입원 3일 만에 군의관 이경룡 대위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됐다. 내 몸에 박힌 직사 포탄조각을 여러 개 빼냈다. 수술 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때마다 간호장교 최 소위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다 해도 최 소위의 헌신은 참으로 감사했다. 먼훗날 그녀가 수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까닭없이 그리고 한없이 가슴에 와닿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가 제5육군병원을 떠난 것은 입원한 지 달포가 더 지난 8월24일이었다. 다시 나는 제7연대 제1대대 후방지휘소로 갔다. 8월26일 저녁 제6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신령역 부근에도 적의 박격포탄이 무수히 떨어졌다. 북한 공산당이 낙동강 교두보의 일각을 뚫고 화산 일대를 점령한 뒤 퍼붓는 포탄들이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 제1대대를 연대에서 빼내 사단직할로 하여 화산의 적을 공격케 했다. 이때 나는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 복귀하여 화산지구 탈환임무를 맡았다. 제1중대장으로 복귀해보니 내가 병원에 있었던 50여 일 동안에 중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부상을 당할 때 함께 적군과 싸웠던 소대장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1소대장 한도선 중위는 내가 제1중대를 떠나자 나의 후임이 되어 중대를 지휘했으나 문경새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임으로 제2소대장 강구석 중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나 그는 곧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빠져나갔고 다시 그 후임으로 제3소대장 손종구 소위는 낙동강전투에서 가슴에 적탄을 맞고 후송 도중 숨을 거뒀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제1중대에 장교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중대장대행이 되어 부대를 지휘,전투를 했으나 또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제1중대장에 부임한 도진환소위는 내가 중대장으로 복귀하면서 제1소대장이 되었으나 며칠 후 화산전투에서 전사했다. 2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중에 제7연대 제1중대는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하고 1명의 중대장이 중상을 입는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 전쟁 역사상 불과 2개월 동안에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한 예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1개 중대에서 중대장들의 소모가 이렇게 격심했으나 사병들의 소모는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이는 또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기간은 1950년 6월부터 그해 9월 중순까지의 기간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전사자 통계숫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산 옛 성터 일대에서 숨박히는 격전 끝에 우리는 북진을 시작했다. 문경 원주 홍천 춘천 화천 김화 평강 복계 세포 회양 원산 양덕 성천 순천 개천 희천 회목동 고장 초산을 거쳐 압록강변 신도장마을에 우리 제1중대를 선두로 제7연대 제1대대가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26일 하오 2시15분이었다. 만주에 연결된 뗏목다리 위에는 수백 명의 피란민들이 가득히 차 있었다. 이미 만주로 건너간 수백 명은 줄지어 중국 마을 통천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초산읍에 본부를 두고 재편을 시도하던 북한 공산군 제8사단은 사단장 오백룡 지휘하에 주로 위원읍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모두 만주땅을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했다.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지시로 나는 남북통일을 축원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떴다. 그리고 제1대대에 배속되어 있는 57㎜ 대전차포 철갑탄으로 만주와 연결되어 있는 뗏목다리를 끊어버렸다. 강물에 군화를 적시고 손도 씻다가 하오 4시경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제1중대를 제외하고 제1대대 전병력은 약 10리 서남쪽에 있는 초산읍으로 내려갔다. 나는 이장원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를 신도장분주소(경찰지서) 일대에 배치하여 위원읍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를 차단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뗏목다리를 화력으로 엄호케 했다. 김덕출 소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는 제1소대 좌일선에 연결하여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기슭에 길게 배치하고 박상호 상사가 지휘하는 제3소대는 제2소대에 연결되어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 기슭에 배치했다. 중대 선임장교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서근석 소위의 화기소대 본부와 제1중대 본부는 제2소대지역내에 위치시켰다. 결국 제7연대 제1중대는 강건너 중국대륙을 바라보며 약 1천6백m에 달하는 거리에 늘어서서 국경 경비임무에 들어갔다. 1910년 8월29일. 격변하는 세계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나라 안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권력싸움에 눈이 멀던 우리 조상들. 병들고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기고 국경 경비의 권리를 그들에게 넘겨준 35년간,그 후 남북한 화합을 못 하고 이념의 갈등을 겪으면서 국토가 양단되어 5년,통틀어 40년의 세월을 한을 안은 채 고통 속에서 지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통의 족쇄가 풀리는 첫날이다. 남북을 통일한 배달의 남아들이 압록강 국경선에서 타국땅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은 감격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국경선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10월28일이 되었다. 이날 하오 5시경 초산읍에 있는 제1대대 본부로부터 제1중대에 다음과 같은 청천벽력과 같은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온정일대에서 제2연대가 중국군에게 패하여 후퇴중에 있다.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제1대대는 연대의 일부로서 온정으로 남하한다. 제1중대는 10월28일 하오 7시 초산읍에 집결하라』
  • 「6·25비화」 소 외교연 학자 본지 특별기고

    ◎“북침으로 꾸며라”… 스탈린,6개항 지침 시달/미 개입에 당황… “정면대결 피하라”/중국 파병따라 공군력 지원약속/「중국공산화」 미서 방관하자 남침 결심/종국엔 북한정권 지키기에 급급… 소,휴전 뒤 재도발 우려해 김일성 감시 서울신문은 6·25 41주년을 맞아 소련 외무부 산하 외교아카데미의 B 발레노프 박사(역사학·필명)가 특별기고한 「6·25는 스탈린의 작품」을 게재한다. 발레노프 박사는 외교아카데미의 최고급 간부 중의 한사람으로 중국문제와 한반도문제에 대한 소련내 최고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비밀문서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활용,지금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는 외무부 보관자료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장 극비문서 등을 토대로 한국전 발발 배경과 책임소재 등을 규명했다. 발레노프 박사는 자신이 남북한 관계에서 운신의 폭이 넓지 않은 현역 외무부 관리신분임을 감안,필명으로 게재할 것을 요청해 왔다. 정확히 41년 전 한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그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뒤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났고 세계는 엄청나게 변했다. 소련은 그동안 이념적,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고 강대국들이 「냉전종식」을 선언했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한국전쟁의 진짜 비극의 역사는 여전히 숨겨진 채로 남아 있다. 소련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N 아닌이 밝혀낸 새로운 자료를 비롯,최근 필자가 어렵게 입수한 극비문서들은 비록 단편적이나마 어떻게 해서 그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됐는지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45년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뒤 스탈린은 한국에서 얄타협정과 포츠담협정의 조항들을 위반할 의사가 없었다. 1948년 주은래를 만났을 때도 스탈린은 『중국과 북조선 동지들은 절대 해방전쟁을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혁명세력의 무력이 결코 우위에 있지 않으며 미국이 개입하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는 게 스탈린이 내세운 이유였다. 스탈린은 이렇게 모택동의 손발을 묶고 북조선 정부에 대해서도 38도선에서 무력도발을 삼가도록 단단히 지시를 내렸다. 『동유럽에서 제국주의세력과 싸우기에도 벅차다. 소련의 제1관심 지역은 유럽이다』는 게 당시 스탈린의 생각이었다. 스탈린의 이러한 생각은 그러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승리를 차지하자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모스크바를 찾아온 모택동과 만난 자리에서 스탈린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동안 아시아에서 공산혁명세력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했소. 저개발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내 생각이 틀렸소』 중국공산당의 승리,동유럽의 공산위성정권 수립과 함께 소련 경제가 꾸준히 성장추세를 보이자 스탈린은 관심을 한반도로 돌리기 시작했다. 북한의 소련대사관과 정보기관들은 한반도에서 혁명에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정보들을 지속적으로 보내오고 있었다. 『남한 정부는 붕괴 직전에 와 있고 경제는 침체됐으며 사회불안은 통제불능에 빠져 남한인민들은 한결같이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정보보고들이었다. 남한 인민들은 북조선에서 전개되는 변화들에 「자석처럼」 이끌리고 있으며 자신들의 비민주적인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을 증오하는 반면 소련에 대해서는 최고의 기대감을 품고 있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소련 정보장교들도 한결같이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군사·이념적인 상황은 모스크바에서 지시만 내리면 권력을 탈취할 수 있다는 보고들을 울렸다. ○애치슨 성명에 안심 스탈린은 크게 고무돼 조만간 세계,특히 아시아국가들이 소련의 혁명모델을 뒤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이 성공하도록 돕는 것은 소련의 당연한 의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가지 우려되는 문제는 미국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에서 공산혁명을 수행할 때 미국이 적극 개입치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했다. 모택동을 만나서도 그는 이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1950년 6월12일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성명은 스탈린으로서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당시 소련 외무부에서 지도부에 제출한 보고서는 이 성명을 『미국이 한국의 군사분쟁에 무력개입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분석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대한 의사와 군사능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탐색토록 지시했다. 소련의 외교·군사·정보보고들은 남한내 미 군사력이 전혀 우려할 수준이 아니며 그나마 계속 감축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각국에 파견된 첩보원들로부터도 유사한 정보들이 올라왔고 그 가운데는 미 백악관에서 빼낸 정보들도 있었다. 이 정보들은 영국내 첩보원들에 의해 다시 「더블체크」됐다. 당시 영국 외무부와 정보기관의 고위직책에는 소련첩보 조직이 침투해 있었다. 영국정부가 미국정부에게 새로 수립된 중국 공산당정부에 대한 반대입장을 완화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다는 정보도 런던으로부터 보고됐다. 트루먼 행정부내에는 극동지역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태에도 미국이 무력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정보보고들은 한국에서 미국이 어떤 행동,특히 대응 행동을 취할 가능성에 대해서 거의 「제로」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이밖에 소군 지도부는 미국이 이승만 정부를 지켜줄 수 있을 만한 병력을 한국주변에 배치해 놓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유념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받았다. 스탈린의 의중을 어느 정도 감지한 북한 주둔 소군장성들은 김일성과 함께 한국에서 군사도발을 하는 문제에 대해 크렘린이 관심을 갖도록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군사령관들과 김일성은 어느 주석에서 남한 괴뢰정부를 쳐부수자는 데 의기를 투합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계획은 여러 경로를 통해 스탈린의 귀에 들어갔다. 한국을 중국처럼 무력으로 통일시키자는 계획은 1949년말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때 이미 구체적으로 검토됐고 스탈린은 이듬해 봄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최종결정을 발표하기 전 스탈린은 모택동의 의견을 물었다. 이웃 형제국의 「사회주의 해방운동을 종결짓는 일」에 모택동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전쟁계획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전쟁의 주요지침들을 시달했다. 1,전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가 확보돼야한다. 2,소련이 전쟁에 개입됐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소군사 고문단은 전선으로부터 철수시킨다. 3,북조선 당국은 적과 세계 여론의 주의를 돌려놓기 위해 전쟁 개시 전 평화공세를 강화한다. 동시에 남한당국과의 그들의 앞잡이인 미국이 전면전쟁을 벌일 목적으로 북조선에 무력도발을 일으켰다는 각종 선전을 강화한다. 4,대남 전면공격을 시작하기 전 국지침투를 감행하고 적의 대응공격을 유보하기 위해 전 전선에서 부분공격을 감행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외부세계에 전쟁이 남측에 의해 도발된 것으로 믿게 하는 효과도 얻는다. 5,전면공격은 불시 기습적이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수행돼야 한다. 6,군대가 38도선을 넘는 즉시 남조선 전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난다. 남조선내 「혁명진보세력」들은 북조선에서 군대가 당도하기 전에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전전 평화공세 강화 전쟁 개시일인 6월25일 스탈린은 측근 참모들과 함께 자신의 별장(다차)에 앉아 전선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속속 낭보가 날아들자 스탈린은 희색이 만면해 이렇게 말했다.『세계혁명에 관한 레닌 동지의 예언이 현실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사업의 큰 공훈자들로 기억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각 한국의 마을과 도시들에서는 수많은 남녀,어린이들이 포탄에 맞아 목숨을 잃고 있었다. 한 늙은 독재자의 탐욕과 광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된 것이다. 초기 작전은 극히 순조롭게 진행됐고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은 한달내에 한반도 전체가 해방될 것이라고 보고해 왔다. 스탈린은 측근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신 지도자의 위대한 천재성에 새삼 경외심을 가졌다. 스탈린은 한국전에서의 조기승리를 이미 예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엄청난 사태반전이 일어났다. 그렘린의 예상과 달리 미국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미의 반격은 매우 효과적으로 진행됐다. 평양의 소련대사관에서 보내오는 전문들은 급전직하 비관적인 내용들로 바뀌었고 외교관들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외부의 도움없이 김일성 군대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들이 내려졌다. 스탈린의 측근 참모들은 김일성을 구하기 위해 소련군을 투입시키자는 주장을 계속 내놓았다. 흐루시초프 몰로토프,베리야도 소련군 투입을 지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군이 미군과 맞서 싸울 만한 힘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끝까지 소련투입에 반대했다. 한국전에서의 완전한 패배를 사실상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다. 바로 이때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중공군이 개입한 것이다.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나서지 않으면 미군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군대를 투입시키기 전 모택동은 주은래를 모스크바로 보내 소군과 중공군을 한국전에 보내자고 스탈린을 설득시키려 했다. 스탈린은 남부 휴양지에 있는 자신의 시골별장에서 주은래를 만났다.그는 주은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잘들으시오,동지. 미군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오. 만약 우리가 끼어들면 미국은 사회주의 세계 전체를 모두 파괴시키려 들 것이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결정을 내려야 하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할것이지 아니면 소를 지키기 위해 사회주의 세계 전체를 위태롭게 할 것인지』 주은래도 스탈린의 말에 수긍하고 북경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모택동이 보낸 전문 한통이 소련 주재 중국대사관에 입전됐다. 중공군을 한국전에 투입키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문은 스탈린에게 전달됐고 스탈린도 결국 이에 동의했다. 스탈린과 주은래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중공군이 지상병력을 파견하고 소련군은 북한의 공중방위를 책임진다는 데 합의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스탈린과 모는 두가지 목적을 염두에 두었다. 하나는 북한 공산정권을 지키는 것이고,또 하나는 미국과의 전면대결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피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두 가지 목적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민들이 치른 인명과 물질적인 피해는 너무 끔찍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새 소련지도부는 현상고착을 정책목표로 결정했다(스탈린은 그해 봄 사망했다). 이듬해 흐루시초프는 『한국문제도 독일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돼야 한다』고동료들에게 역설했다. 「두 개의 독일 두 개의 한국」 정책이었다. 흐루시초프는 이제 소련이 북한에 해줄 일은 북한동지들을 도와 북한을 근대화시켜 그 나라를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진열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제국주의 앞잡이 남조선과 무력전쟁이 아니라 경제전쟁에서 이기도록 하자』고 역설했다. 흐루시초프는 실제로 북한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원조를 쏟아부었다. 이러한 원조를 바탕으로 북한은 점차 강성해져 갔다. 그런데 1950년대 후반 들어 소­북한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동기는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통치를 비난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 일을 계기로 소련이 이끄는 「사회주의 형제국」의 대열에서 이탈,외부세계에 빗장을 걸고 소위 「주체사상」을 펴나갔다. ○모,주은래 보내 설득 소련이 북한정권에 대해 갖고 있던 신뢰감은 점차 옅어졌고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는 김일성의 평화의지에 의구심을 갖게 됐다. 브레즈네프와 그의 이념담당 보좌관인 수슬로프는 수시로 외무부에 『북한의 무력도발 움직임을 체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소련지도자들은 북한대표단과 만날 때마다 한반도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련은 이와 함께 북한에 대규모 첨단공격무기르 공급하는 데도 신중을 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소련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방식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캄보디아 등지에서 전통적인 팽창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이렇듯 신중한 정책을 고수하려 한 것은 바로 미국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부터 한국은 물론 기타 모든 문제에서 소련의 입장은 급격하게 변했다. 소련은 이제,첫째 모든 문제에 있어 군사적인 해결방식에 반대하고 있고,둘째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북한식 모델을 이제 더이상 지지하지 않게 됐다.
  • 외언내언

    세계 최대의 민주국가 하면 으레 면적 3백29만㎢ 8억5천만 인구의 인도를 꼽는다. 그 다음이 미국. 9백38만㎢의 면적에 인구 2억5천만이다. 영토면에서는 미국이 앞서나 인구면에서는 인도가 단연 많다. 민주정치에선 인간이 중요하기 때문에 인도를 앞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중심제의 민주국가로 친다면 단연 미국이 세계 최대. ◆미국의 그 명예가 이젠 소련으로 넘어가야 할 모양이다. 미국과 같은 대통령중심제를 선택한 연방은 아직 대통령 선출 자유총선을 치르지 않았지만 15개 공화국 중 최대이긴 하나 12일 대통령선거 투표에 들어간 러시아공화국만 해도 면적이 1천7백만㎢에 인구 1억4천7백만. 유럽과 아시아의 양대륙에 걸쳐 있고 시차만도 11시간으로 5시간의 미국에 비할 바가 아닌 광활한 선거구다. ◆방방곡곡을 누비는 직접 유세는 처음부터 생각할 수도 없는 일. 부통령 후보와 나누어 최대한의 유세를 벌이고 있으나 역부족. 대리유세자를 파견하는 등 새로운 방법이 개발되기도. 6명의 후보가 각축을 벌였으나 싸움은 고르바초프와의 불화로 세계적인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 급진개혁파 옐친과 보수파 리슈코프 전 총리의 결판으로 좁혀진 상태. ◆옐친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보수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관심은 옐친이 50% 이상의 득표로 단번에 당선될 수 있을 것이냐의 여부에 쏠려 있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2차 투표에서 당선되더라도 옐친의 독기는 무디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수파는 그것을 노리는 눈치다. 프라우다의 인신공격이나 엘친의 외환불법거래 스캔들 폭로 등이 그러한 작전의 일환. ◆이래저래 러시아의 첫 대통령선거는 세계적인 주목거리. 세계 유일의 분단상황에 있는 우리에겐 그보다 더한 아쉬움을 자극하기도 한다. 공산종주국에서의 자유총선인 것. 그것은 통일의 가장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 소련의 반대로 무산된 47년 11월의 유엔 남북한 자유총선 결의안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인가. 북한이 소련 같은 민주화만 달성하면 통일은 간단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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