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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씨 비리수사­여의 수습방향

    ◎민자 “검찰 수사뒤 정국 해법 모색” 확고/“비자금사건 흥정대상 될수 없다”/국민회의측 공세 강력대응 태세 10일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를 향한 민자당 강삼재 사무총장의 어조는 부드러웠다.김총재에 대해 『무슨 뜻으로 말씀하셨는지 모르지만…』이라고 경어를 쓰기까지 했다.김총재가 노태우 전대통령으로부터 돈을 받은 의혹을 제기하던 전날의 강하고 격앙된 말투와는 사뭇 달랐다. 강총장의 이같은 변화는 김총재의 유화제스처에 대해 화답한 것으로 일단 풀이된다.김총재는 이날 『정치문제는 정치권에서 풀어야 한다』고 대선자금시비를 둘러싼 장외투쟁방침을 사실상 철회하는 발언을 했다.이에 강총장은 『뒤늦게나마 다행』이라고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민자당은 사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는 원칙적으로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파문을 조기에 수습해야 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치협상」을 제의하는 듯한 김총재의 입장표명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비자금사건은 정치적 흥정거리가 아니므로 「검찰수사종료전협상불가」라는 것이다. 강총장의 화답이 정치적 절충을 수용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고 우려한 듯 손학규 대변인이 협상불가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나섰다.조기수습을 위한 정치적인 해결모색은 검찰수사 뒤에야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국민회의측 공세에는 단호하게 응징하겠다는 방침은 확고하다.국민회의측이 이날 김총재에 대한 명예훼손혐의로 강총장을 고소키로 결의하고,김영삼 대통령이 3천3백억원의 정치자금을 노씨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자 즉각 「맞불작전」으로 반격에 나선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여기에는 손대변인은 물론 이신범 부대변인등 대변인단이 총동원됐다.손대변인은 『평민당 창당에 의한 야권분열,87년 중간평가유보,89년 광주 5공 청산합의등 주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자금수수설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날 강총장의 공격을 되풀이했다. 민자당은 국민회의측이 당분간 「이중플레이」로 나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김총재도 「비자금수렁」에 빠져 있는 만큼 확전을 원치 않으며 『서로 아픈 데는 건드리지 말자』고부분휴전을 제의하면서도 여권에 대한 압박전을 계속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실제로 강총장에게는 김총재의 측근들로부터 『너무 심하다.그럴 수 있느냐』는 항의 내지는 경고에서부터 『서로 헐뜯어서 좋을 게 있느냐』는 타협조의 말에 이르기까지 전화가 잇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 민자­국민회의 대선 자금 폭로전

    ◎“DJ 일관되게 노씨 지원” 직격탄­민자/“김 대통령도 2천억 받았다” 반격­국민회의 민자당이 9일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스스로 실토한 20억원 말고 노태우 전대통령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자,국민회의는 김영삼대통령이 노씨로부터 1천수백억원의 정권인수자금을 받았다고 반격하는 등 양측간의 공방이 폭로전 양상으로 가열되고 있다. ▷민자당◁ 국민회의측의 잇따른 공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면서 「이에는 이」식의 맞대응으로 나섰다. 강삼재 사무총장은 이날 국민회의 김총재가 5공청산을 끝내주고 중간평가를 취소해 주는 대가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비자금 정국과 관련해 공개적으로는 처음으로 김총재를 표적으로 삼았다.강총장은 이날 고위당직자회의가 끝난 뒤 기자간담회를 자청,준비한 자료를 격앙된 어조로 읽어 작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했다. 강총장은 『DJ는 말로 일관되게 노씨를 도왔던 사람』이라고 결론부터 내린 뒤 이를 뒷받침하는 세가지 사례를 열거했다.『87년 대선 때 평민당을 창당해 야권을 분열,「노대통령 만들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89년 3월 중간평가 논란 때 DJ는 위헌의 소지가 있다며 유보토록 해 노씨를 도왔다.노씨의 비자금 계좌의혹이 처음 나왔을 때 DJ는 노씨 돈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강총장은 『이처럼 주요 사안 고비고비마다 DJ가 노씨를 지원했을 때마다 정치자금 수수설이 난무했던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직격탄을 퍼부었다. ▷국민회의◁ 강총장 발언에 대해 한마디로 음해와 중상모략이라고 일축했다.무엇보다 여권핵심부의 「김대중죽이기」각본에 따른 것으로 믿고 있다. 박지원 대변인은 『20억원 이외의 돈은 한푼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이 나라 정보를 한손에 쥐고 있는 집권당 사무총장이 설을 빙자,음해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박대변인은 5공청산과정에서 상당한 액수를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아마도 당시 김영삼통일민주당총재가 돈을 받았기에 우리당 총재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잘못 짚었다』고 주장하고 『먼저 김대통령이당시 얼마를 받았는지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맞받았다. 한편 김총재의 측근인 최재승의원은 이날 예결위 질의자료를 통해 『김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을 하루 앞둔 지난 93년2월24일 노태우전대통령과 회동,1천수백억원의 정권인수자금을 건네받았다』고 주장하며 역습을 시도했다.
  • 노태우씨 비리 수사­대선자금 민자 입장

    ◎“문민정부 탄생에 흠집없다” 자신감/“김 대통령은 노씨 뒷돈 받은 사실 없어”/일부 내역 공개… “검찰서 최종 검증할것” 민자당이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사건에서 비롯된 대선자금 문제에 대해 내부입장을 정리하고 나서는등 비자금정국 수습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어 주목된다. 대선자금 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계속 보인다면 야당측의 대선자금 공개요구와 여론의 불신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상황판단에 따른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미 「노전대통령으로부터 돈을 받은 바 없다」고 말했지만 민자당으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노씨로부터 민자당에 유입된 대선지원금 및 정치자금 규모,전달경위 등에 대해 국민의 의혹을 씻어야 하는 처지다. 김윤환 대표위원이 6일 확대당직자회의에서 『대선자금에 대해 밝혀야 한다는 여론이 국민들 사이에 적지 않다』고 전제한 뒤 노씨와 민자당의 자금관계를 일일이 설명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대선기간중에 노씨로부터 받은 돈은 없으며 그의 탈당(10월5일)이후 받은 돈도 없다는 게 김대표의 설명이다.다만 노씨가 민정당 및 민자당 총재로 있던 4년9개월동안 정당활동보조비로 매달 10억원 정도만 받아 왔다는 것이다.김대표는 그러나 그 구체적 근거가 되는 자금수입 및 지출내역에 대해서는 『산출할 방법이 없다』면서 『줬다는 사람이 밝히든지 검찰에서 밝힐 일이며 검찰에서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자당이 이처럼 대선자금 내역을 공개하면서도 검증을 검찰의 몫에 맡긴 것은 무엇보다 정치권 전반에 대한 국민들의 깊어진 불신을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강삼재 사무총장은 『우리가 먼저 대선자금 내역을 1백원이라고 공개한다 한들 국민들이 그대로 믿어줄 분위기가 아니며 어차피 검찰수사를 통해 입증이 돼야 한다』면서 『이중으로 부담을 입느니 검찰수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밝히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대선자금을 포함,새정부출범전의 민자당 회계관련 서류가 전혀 보존돼 있지 않는 점도 대선자금을 검찰수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라고 당관계자들은 설명했다. 재정국의 한 관계자는 『대선자금에 대해서는 선거법에 따라 선관위에 신고된 내역 말고는 아무 것도 보존된 서류가 없으며 선거기간 전의 당운영비등도 마찬가지』라면서 『김영구 당시 사무총장의 기억말고는 우리가 증빙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자당도 검찰수사결과 당운영비등 노태우총재시절 민자당에 유입된 정치자금과 선거자금의 구분이 쉽지 않다는 점에 고심하고 있다.명목과 자금수수 시기가 언제이든 그 규모면에서 야당쪽에 건네진,또는 건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금보다 규모가 클 것이고 국민들은 이를 현정부와 연관시켜 이해할 것이라는 걱정이다. 강총장은 이에대해 『솔직히 국민들이 대선자금과 당운영비의 차이를 이해해 줄지는 의문』이라고 했다.강총장은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김영삼 당시대표가 개인적으로 노씨로부터 뒷돈을 받은 일은 없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2인자를 용인하지 않는 여권의 생리상 김영삼당시대표는 자금관계등에서 사무총장이라는 공식창구를 통하지 않고서는 총재와 직거래가 불가능했고,이 점에서 문민정부의 탄생에흠집이 될 문제는 없었다는 것이다.여권의 한 관계자도 『김영삼당시 대표는 노씨로부터 별도 정치자금을 제공받지 못하고 측근들이 직접 근근이 이를 조성했었다』면서 『따라서 김대통령의 도덕성을 겨냥한 야권의 정치공세는 무위로 끝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어수선한 「비자금 정국」 민자 내부 결속 나섰다/“노씨 사건 6공 비리 단절일뿐”­김 대표/“계파 구분없는 공천” 원칙 천명­강 총장 민자당 김윤환대표위원은 6일 「비자금정국」의 해법을 세갈래로 구체화했다.6공과의 단절이 아니라 6공비리와의 단절이 그 첫째이고,비자금사건 및 대선자금 시비를 철저히 검찰에 맡긴다는 원칙의 고수가 둘째다.또다른 하나는 비자금정국과 정기국회 등 정국운영을 차별화함으로써 평상국면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민자당은 이같은 원칙아래 적전분열양상을 보여온 당 내부에 대해 추스르기 내지는 기강잡기에 본격 나섰다.정계개편설을 둘러싼 김대표와 민주계 일각과의 갈등조짐,6공인사를 배제하는 쪽으로의 공천궤도수정 논란,여기서파생된 지도부 경질설 등이 위험수위라는 상황판단에 따른 것이다. 김대표는 이날 확대당직자회의에서 이영희여의도연구소장을 직접 거명,11월호 정책논단의 권두언에 「6공단절론」이 실린 것을 설명하라고 질책섞인 지시를 했다.『6공단절론이 아니라 6공비리와의 단절론』이라는 해명을 이소장으부터 받아낸 뒤 노씨사건이 6공단절로 이어질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김대표의 강한 어조는 「하주(김대표의 아호)흔들기」에 대한 반격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이처럼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자 강삼재사무총장이 수습에 나섰다.강총장은 이날 정계개편설에 대해 『일부의 의견이라고 할지언정 청와대나 당의 흐름과는 다른 것』이라고 못박으면서 민정계측 위무에 적극성을 보였다. 강총장은 이로 인해 김대표의 심기가 불편해진데 대해 정계개편설을 흘린 것으로 알려진 박종웅의원으로 하여금 김대표에게 직접 해명토록 했다.또 『최형우·김덕용의원등 민주계 실세인사들에게도 행동 하나하나가 당론처럼 비쳐질 수 있으니 유념해야 한다고 부탁했으며 이들 의원들도 조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그러면서도 『대표옆의 사람들이 과민보고 하는 바람에…』라고 정계개편설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김대표측을 간접적으로 원망했다. 강총장은 이어 『민정계를 무조건 배제한다고 해서 무슨 대안이 있느냐』고 반문해 계파구분없는 공천원칙을 밝혔다.그러나 『6공비자금에 연루됐거나,4공화국등 정치드라마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사 등은 자연스럽게 걸러질 것』이라고 5·6공 인사의 일부 배제를 시사했다. 이같은 움직임에 따라 당 내부갈등은 일단 봉합단계에 들어설 것같다.하지만 비자금정국 자체의 폭발성이나 이로 인한 정치권의 복잡성때문에 언제 다시 문제가 불거져 나올지는 속단할 수 없는 형편이다.
  • DJ,「대선자금」 방어 나섰다

    ◎노씨 비자금 수사 「DJ 죽이기」로 판단/“더는 밀릴수 없다” 김 대통령 집중 공격 지난달 27일 노태우 전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시인한 북경 발언이후 입을 봉하고 있던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3일 입을 열었다.그동안 정계뿐 아니라 온 나라가 노씨 비자금 태풍에 휩쓸렸지만 20억에 대한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무언의 행보를 계속해온 김총재였다. 특히 다른사람도 아니고 호남지역에서 「5·18 주범의 한사람」으로 지목되는 노전대통령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적과의 동침」이란 성격때문에 김총재는 「고개숙인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1주일만에 입을 열고 김대통령에게 한판 승부의 위해 도전장을 냈다.자신이 도덕적 비판을 받고 있는 마당에 이처럼 강수를 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노씨가 공개할 것으로 예상,선수를 친 것이 결과적으로 「20억 고백」의 덫에 걸리게 된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자면 정면돌파의 강수밖에 길이 없다고 판단한것 같다.이와 관련,김총재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여권핵심부의 「시나리오」를 상당부분 파악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특히 누구보다 김대통령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김총재로서는 김대통령의 향후 정면돌파 드라이브를 짐작했음직하다. 여권이 이번 비자금파문 검찰수사의 종점을 「DJ 죽이기」로 설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더이상 수세로 밀려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정가에는 지난 89년 노전대통령이 선거공약이었던 중간평가를 취임 1년만에 취소하는 과정에서 김총재가 적잖은 자금을 받았느니,92년 대선 때 노씨와 세번 독대,20억보다 훨씬 많은 수백억대를 챙겼다는 설들이 마치 이번 사태가 터지기전 노씨와 관련된 4천억 비자금설이 떠돌았던 것처럼 괴문서 등으로 유포되고 있다.김총재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김총재의 이날 발언은 20억원을 받았다고 시인한 자신과 「정황으로 보아」 자신보다 많은 선거자금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데도 한푼도 받지 않았다고 밝힌 김대통령과 누가 깨끗하냐고 외치는 「항변」식의 반격작전인 것이다.불쑥 20억원을 시인함으로써 이를 「분명한 사실」로 만들어 놓은 자신의 경솔함이 억울하게만 느껴지는 대목인 셈이다. 결국 확증은 없지만 「정황」만으로 라도 김대통령이 엄청난 선거자금을 받았다고 공격,이를 「감정적」 쟁점으로 확산시키고 자신의 20억원이 소액임을 부각시켜 나갈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김총재는 『이 일로 헌정중단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단서를 달고 정기국회의 중요성도 또한번 역설했다.어렵게 정계복귀한 마당에 판이 완전히 깨져서는 곤란하다는 계산이다.서로 죽기살기로 막판까지 가지는 말자는 제의인 셈이다.그러나 검찰수사과정에서 김총재의 추가 자금수수가 드러날 경우 문제는 어려워 질 수밖에 없다. 김총재의 공격에 대한 김대통령의 응답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 여야「대선자금 신경전」 갈수록 치열/노태우씨 비리­정치권의 대응

    ◎정치판 공멸 막을 접점찾기 모색­여/도덕성 논쟁서 상대 흠집내기로 비화­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14대 대통령선거자금 유입 파문으로 확산된 이후 각 정파간의 신경전이 갈수록 치열해 지고 있다.민자당은 이 문제에 대한 규명도 검찰수사에 맡기겠다는 원칙 아래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는 듯한 분위기지만 김대중 총재의 20억원 수수시인으로 도덕성 시비에 휘말린 국민회의를 비롯,야3당은 김영삼대통령도 조속히 대선자금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며 강도 높은 대여공세를 펴고 있다. 특히 김대통령이 이날 낮 3부요인과 정당대표 초청 오찬회동에서 지난번 대선 때 노전대통령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힌데 대해 일제히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여기에다 야3당간의 물고 물리기식 흠집내기도 점입가경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민자당◁ ○…김대통령이 30일 밝혔듯이 「예외 없는 법적용」을 통해 비자금 파문을 조기 매듭짓는 반면 대선자금 시비는 스스로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기조 아래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는 등 「2분법적(이분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특히 대선자금 문제는 조급히 해결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 당직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한 당직자는 『국민회의 김대중총재가 정부 여당을 압박하고 있지만 자신도 20억원을 받은 이상 한배를 탄 처지』라고 규정했다.여기에다 자민련 김종필총재에 대해서도 1백억원 수수설이 제기되고 있는 등 대선자금의 모든 내역이 드러난다면 자칫 정치판이 깨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따라서 정치적인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야당◁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대선자금을 둘러싼 국민회의와 민주당의 「회색논쟁」,자민련 김종필총재를 옥죄기 시작한 정치자금 1백억원 수수설 등이 뒤얽히면서 적도 없고 우군도 없는 「전방위 전시상황」으로 내닫고 있다.온갖 「입」들을 동원한 설전단계를 지나 야당끼리의 고발전으로까지 확전되고 있다. ○…국민회의는 이날 상오 김총재가 참석한 가운데 지도위원회의를 소집,정국대처방안을 논의한 끝에 김대통령의 대선자금 공개와 노전대통령의 구속을 강력히 요구하며 강공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이와함께 향후 대응방안은 당의 공식기구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김총재를 당 공식기구의 뒤편으로 돌리고 김대통령의 대선자금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여권을 압박하는 대신 김총재가 노전대통령으로부터 대선자금을 받은 부담을 덜자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에 맞서 민주당은 이날 상오 원내대책회의를 열어 김대통령의 대선자금 공개를 거듭 촉구하는 한편 국민회의의 「비방」에 정면대응키로 했다.민주당은 특히 국민회의가 연일 민자당 민주계와의 사전담합설을 제기하고 나서자 적이 당혹스런 모습을 보이면서 고발등 법적 대응까지 불사한다는 태세다.의원들은 『1노3김이 궤멸위기에 직면,초조해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종필 총재에 대한 1백억원 비자금수수 의혹이 제기되면서 마침내 비자금태풍의 중심권에 들어선 자민련은 발설자인 민주당진상조사위원장인 강창성의원 등을 고발하겠다고 밝히는 등 반격에 나섰다.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1백억원설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보고 다각도로 대응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 대선 자금 흐름과 깊은 연관/비자금 공방 JP 왜 침묵하나

    ◎“공개땐 정치생명 위기” 판단 김종필 자민련총재는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파문에 관한 한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JP(김총재)는 지난 19일 박계동 의원(민주)이 처음 제기한뒤 이 문제에 관해 견해를 밝힌 적이 없다.『대변인이 잘 하고 있는데 뭘…』이라는 단 한마디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전부다. 그러나 대변인의 성명이나 논평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실제로 안성열 대변인은 지난 27일 김대중 국민회의총재가 노전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시인한데 대해 비난논평을 냈다가 곤욕을 치러야했다. JP는 이날 충남 부여의 대간첩대책본부를 방문하던중 소식을 전해듣고 못마땅함을 표시했다.안대변인은 『논평을 보류해달라』고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이를 국민회의의 「반격논평」과 연결짓는 시각도 있기는 하다.국민회의는 안대변인의 논평에 반사적으로 「JP 1백억원 계좌설」을 내놓았었다.「논평보류」는 이에 당혹감을 느낀 결과가 아니겠느냐는 추측이다. 그러나 김총재를 잘아는 사람들은 그가 오로지 「1백억원설」에몰려 논평을 보류시켰다는 추측을 일축한다.그보다는 「말려들때 말려들더라도 자진해서 비자금 공방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시로 해석한다.JP가 최근 당무회의에서 대세가 비자금에 대한 결의문 채택쪽으로 기울었음에도 만류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JP가 1백억원설의 「혐의」를 시인하는 것으로 비쳐질지도 모르는 엄청난 부담을 짊어지면서 비자금 파문을 비껴가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권에서는 이에 대해 『그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놓고 있다. JP는 김영삼대통령·노전대통령과 함께 3당합당의 주역이다.그는 집권여당의 대표로 14대 대통령선거를 치렀다.대선자금의 흐름을 그보다 많이 알고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그가 아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하면 자신과 DJ는 물론 김대통령에게도 적지않은 타격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에 충실하면 되는 김대통령과는 달리 JP는 「미래」를 도모해야 한다.3김씨에 얽힌 비자금공방은 곧 세대교체론을 부각시키게 되고,그 피해자는 자신과 DJ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JP는 자신이 대선자금파문의 핵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빨치산의 최후(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1)

    ◎지리산 본거지로 군사시설 파괴·후방 교란/휴전협정뒤 숙청·토벌로 조직 “지리멸렬” 1953년 7월27일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가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일단 마무리 됐다.그러나 남한 곳곳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흔히 빨치산 또는 유격대로 알려진 대한민국에서는 「공비」라 부른 공산주의자 무장집단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이 「전선없는 전쟁」은 1956년까지 계속됐다. 남한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부터 활동 했다.처음에는 남로당 출신이 주축을 이뤘지만 1949년 3월 북한이 간부들을 파견,빨치산부대를 직접 지휘케 하면서 빨치산은 정규군에 버금가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이는 물론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남한내 공산당 조직을 재가동,전쟁 때 국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한 조치였다. ○「남한 민중봉기」 염두 이어 전쟁 직전인 50년 6월 북한은 남한 각 도에 「정치공작대」5∼6명씩과 일부 무장병력을 다시 침투시켰다.6월10일 김달삼이 이끄는 유격대 2백50여명이 경북 청도 운문산에 유격구를 마련하는 임무를 띠고남하했다.24일에는 남도부를 사령관으로 한 766군부대(7백66명으로 구성)가 해군 함정을 이용,포항 쪽으로 상륙했다.같은 날 또 다른 유격대 2백50여명이 강원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이 부대들은 뒷날 북한 정규군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개전 다음날인 6월26일 김일성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평양방송을 통해 「해방전쟁」승리를 위해 남한 주민들은 총궐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특히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는 더욱 강력한 주문을 했다.곧 『해방구를 확대·창설해 적의 배후를 공격,소탕하라』고 촉구했다.구체적으로는 『적의 참모부를 습격하고 철도·도로·교량과 전신·전화선등을 절단,파괴하고 도처에서 반역자를 처단하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민중봉기」를 염두에 둔 김일성의 이같은 요구는 당시 남한실정을 전혀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김일성의 기대에 찬 독촉이 쉴새없이 방송됐지만 어느 곳에서도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에서 20만 지하당원들이 민중을 이끌고 호응할 것』이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무산됐다. 물론 일부 지방에서는 빨치산의 파괴활동이 벌어졌다.가장 널리 알려진 빨치산부대인 지리산 이현상부대는 8월10일 대구 주변인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미군통신부대를 기습,미군 20여명을 살상하고 무전기 14대,소총 20정을 빼앗아갔다.이들은 8월25일에는 경남 거창 미군사령부를 습격,1백여명의 인명피해를 낸 뒤 탱크 3대,화물차 30여대를 부쉈다.9월6일에는 경북 청도에서 북한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밖에 경남 백운산유격대,경북의 배철이 지휘한 유격대,전남 빨치산,남해안유격대들이 미 공군기지를 점령하거나 경찰과 전투를 벌였고 마을 청년들을 끌고가 빨치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또 북한군 점령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할 때는 적극 나서 북에서 내려온 공산당원들을 도왔다. 하지만 이같은 활동은 전쟁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박헌영·김일성의 기대와는 달리 빨치산은 민중과 괴리돼 있어 힘을 쓰지 못했다.게다가 전쟁전 한국정부가 꾸준히 소탕작전을 벌여 기본조직을무너뜨린 것이 빨치산 세력약화에 결정적 요소가 됐다. 빨치산은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북한군이 밀리면서 뿌리잘린 풀잎처럼 역사의 틈바구니를 떠돈다.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쫓겨간 10월 8일 북한 노동당 정치국 군사위원회는 남한 각 지방당 조직에 『(북한군의)조직적인 후퇴를 보장하기 위해 각 도당이 책임지고 유격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김일성도 이틀 뒤 방송에서 전세가 불리해 「전략적으로」후퇴하니 빨치산은 뒤에서 유엔군의 발목을 잡아 북진 속도를 늦추라고 강조했다.이를 위해 ▲당을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유엔군이 이용할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군사시설은 파괴할 것 ▲입산경험자와 입산이 가능한 자는 산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남강원도로 후퇴할 것등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빨치산은 지역별로 유격대를 재편성,산악지대에 들어갔다.이들은 나중에 완전 소탕될 때까지 산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남기 위한」처절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당시 입산자들은 민청원·자위대원등 남로당 계열과 북에서 파견한 내무서원·정치보위부원·정치공작대원이 대부분이고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도 적잖게 끼어 있었다. ○이승엽 당정 총 지휘 북한군이 후퇴하자 지리산 이현상 부대는 잠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달아나는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갔다.1950년 11월 강원도 평강군 후평리에는 이현상부대를 비롯해 다른 곳에서 도망해온 빨치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이곳에는 당시 남한내 당·정을 총지휘한 이승엽이 기다리고 있었다.이승엽은 이곳에 모인 빨치산으로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해 이현상을 부대장으로,여운철을 정치위원으로 삼았다.이때 새로 편성된 이현상부대는 직속부대원 1백50여명 말고도 승리사단 4백여명,혁명지대 1백여명,인민여단 1백50여명등으로 구성됐다. 이현상 부대는 지리산을 본거지로 정하고 남하했다.먼저 태백산맥을 타고 1950년 12월 말쯤 충북 단양에 이르러 문경경찰서를 기습하는등 유격전을 벌였다.다시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에 이르러서는 남한내 6개 도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이 자리에서 빨치산은남부군을 결성,통일된 지휘체제를 구성했다.이현상이 총사령관을,이영회가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빨치산은 북한 노동당의 지시에 따라 남부군을 해체하고 6개 유격지대 체제로 바꾸는등 여러차례 조직개편을 했다.또 북한에서 지도부와 북한군을 남파하는등 안간힘을 썼고 가끔 경찰서·열차를 습격하지만 큰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38선 일대에서 전선이 고착된 1951년 11월 말 한국 정부는 토벌전투사령부를 전북 남원에 설치,빨치산 소탕에 적극 나서 영호남 일대 빨치산은 치명타를 입고 지리산으로 모여들었다.이후 거듭되는 토벌작전에 몰린 빨치산은 「보급투쟁」이란 명목으로 산간마을에서 생필품을 약탈하는 것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지도자 대부분 피살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것은 남한내 빨치산에겐 사형선고와 같았다.박헌영·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 간부들이 대부분 숙청되면서 빨치산은 북한정권에서 버림받게 된다.휴전협정에서도 빨치산의 지위에 관한 규정은 전혀 없어 이들에게는 북으로 돌아갈 길마저 막혔다. 1953년 4월 북한 노동당의 남로당계 숙청계획에 따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됐다.8월에는 이현상이 지리산 빗장골에서 토벌대에 사살됐다.54년 초 김지회·이영회부대가 각각 전멸당하고 빨치산의 마지막 지도자 남도부가 대구에서 체포돼 남한 빨치산은 사실상 소멸됐다.한국정부의 기록에는 1954∼5년에도 「공비 출현,소탕」사실이 가끔 등장한다. 1956년 7월13일 전북 정읍에서 「공비 1명 사살,2명 생포」를 끝으로 빨치산은 정부기록에서 사라졌다. 빨치산은 조선노동당의 혁명전략 계획에 따라 조직돼 활동한 집단이었다.이들의 투쟁은 민족사에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했다.결국 빨치산은 공산주의가 이 땅에 남긴 역사적 범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그러나 빨치산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여러 형태로 잠복해 남아 있다. ◎「빨치산 신문」 한국전중 10여종 발행/남부군 「승리의 길」 등 타블로이드판 지면 대부분 전투원 선동­선무 할애 우리 학계의 빨치산 연구는 매우 미약하다.그동안 「빨치산」이란 말조차 금기처럼 여겨온 사회 분위기에 비추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관련자료는 이우태씨(필명 이태)의 「남부군」을 비롯한 수기 3∼4종에 불과하다. 이같은 현실에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 미국립공문서 보존관리국(NARA)에서 빨치산이 한국전쟁 발발이후 간행한 신문 10여종을 찾아냈다.국내 처음으로 공개되는 이 빨치산신문들은 그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따라서 학계는 이 신문들이 빨치산연구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 1951년 5월5일자로 발행한 「승리의 길」10호는 타블로이드판 한장에 양면으로 기사를 실었다.앞면 머리기사는 「총사령관 로명선」이 쓴 「5·1절을 맞으면서」란 논설.『5월1일은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력량과 국제적 단결을 시위하는 날』이란 의미 부여와 함께 그 내력을 소개하고 『남부군 전체 군무자 동무들』의 분발을 촉구했다.또 신문 사고의 형태로 『남부군 산하 각부대들이 3월21일부터 4월14일까지 수안보·칠성·청천·봉화·립석을 공격하여 이를 해방시켰다』고 전했다.아울러 「적 사살 1백25명,부상 30명,포로 48명,각종 무기 37정,탄약 2천2백37발」등의 전과를 올렸다고 보도했다. 1951년 11월23일자 「승리의 길」27호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진술한 김일성의 보고를 실었다. 이밖에 빨치산 신문들은 많은 지면을 전투원 선동에 할애 했다.즉 『용감하고 귀중한 빨치산들이여,적들의 지휘처와 참모부를 기습 소탕하며 기동력을 마비시키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하라』『리승만의 반동적 지방의회선거를 철저히 파탄 분쇄하자』는 등으로 채웠다.이따금 이명제의 서사시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29호)따위 문학작품이나 감상문,외신,전투실기,정찰기,여순병란 회고기등도 실었다.
  • 소형차시장 “후끈”/기아·대우 “현대 게 섰거라”

    ◎아벨라 델타·티코 「엑센트 아성」 공략/할부 판매기간 늘리고 부품값 인하 기아자동차와 대우자동차가 하반기부터 소형(아반떼와 에스페로 등 준중형 포함)승용차시장에서 현대자동차에 도전장을 내면서 종전의 중형차(쏘나타Ⅱ·크레도스·프린스) 위주에서 소형차로 경쟁이 확대되고 있다. 기아와 대우가 소형차시장에 도전하면서 올해 현대가 점유율 50%대를 달성할 가능성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기아의 도전이 거세다.기아는 지난달 21일부터 아벨라 델타를 판매하며 「소형차 우세」를 선언했다.이 차는 노치백(트렁크와 뒷자석이 분리된 형태)스타일이다. 국내 소비자가 해치백(트렁크와 뒷자석이 일치된 형태)스타일에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노치백을 개발했다.지난 92년2월 1천5백억원을 투자해 개발에 들어간 지 3년여만이다.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해치백형의 인기가 좋다. 기아는 아벨라 델타를 월 4천대,프라이드와 기존 아벨라를 각각 3천대,세피아를 8천대 판매한다는 계획이다.이렇게 되면 소형차에서 현대에 뒤지지 않는다.아벨라 노치백의 작년 판매대수는 3만7백24대로 라이벌인 현대 엑센트의 9만5천3백94대에 훨씬 뒤지는 부진을 보였다. 대우의 소형차 카드는 경승용차인 티코.대우는 정부의 경차(경차)지원방안확정으로 지난달부터 티코 판매에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지난달부터 96년형 티코를 판매하면서 할부조건도 종전의 36개월에서 48개월로 늘렸다.지난달말부터는 티코부품의 소비자가격을 평균 10% 내리는 등 「티코 붐」조성에 나서고 있다. 실제로 티코의 판매량은 늘고 있다.지난달 티코는 5천4백78대가 팔려 전달보다 87%나 늘어났다.지난달의 계약대수는 7천1백대나 됐으나 생산이 주문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이달에는 6천7백대,다음달부터는 국민차 창원공장을 풀가동해 매월 9천대씩 생산할 계획이다.씨에로와 에스페로를 포함해 이달부터는 매월 1만5천대의 소형차를 판매한다는 전략이다. 현대는 베스트셀러카인 아반떼의 생산라인을 풀가동해 매월 2만대씩 국내에 판매하며,기아와 대우의 공세에 맞대응한다는 전략.그동안은 수출로 월평균 1만5천대씩 국내에 판매했으나 하반기에는 아반떼 수출을 다소 줄이고 내수에 주력할 방침이다. 또 엑센트의 디자인과 색상을 내년 모델부터는 일부 바꾸는 것도 검토중이며,엑센트의 고급모델을 새로 시판해 선두자리를 지키겠다는 전략이다. 현대는 올들어 지난 7월까지는 보통 54%의 점유율을 보였으나 8월에는 50.8%,지난달에는 50.2%로 턱걸이로 50%대에 올랐다.기아와 대우의 반격이 거세기 때문이다.두 회사가 특히 소형차에서 현대를 공략해 전체 승용차 판매에서 현대의 점유율은 갈수록 줄 것으로 예상된다. 올들어 지난달말까지 팔린 승용차(지프 제외) 75만2백38대중 소형차(준중형 포함)는 51.7%인 38만7천6백48대로 아직은 소형차 비중은 높다.현대·기아·대우자동차의 소형차시장 쟁탈전이 올해의 전체 승용차시장판도에 어떤 변화를 몰고올지 주목된다. 한편 대형차와 고급차를 주로 생산해온 미국의 「빅3」와 독일의 벤츠·BMW 등도 경쟁력 있는 소형차를 잇달아 개발해 관심거리다. GM은 91년,크라이슬러는 작년 소형인 새턴과 네온을 각각 판매해 재미를 보고 있다.GM은 오는 2004년까지 북미와 유럽을 동시에 겨냥한 소형경량차를 개발할 방침이며,포드는 현재의 에스코트를 대체할 CDW 170 외에 97년 시판을 목표로 CDW 167 개발작업도 하고 있다. 벤츠는 스위스의 시계업체와 공동개발한 길이 2.5m,폭 1.5m인 2인승 미니카를 오는 98년부터 시판할 계획이다.97년부터는 「A93」도 판매할 예정이다. BMW도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형차생산이 필수적이라고 보고영국의 로버가 생산하던 로버 미니의 모델을 개조해 새 소형차를 내놓을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의 주력수출차종인 소형차에서 선진국의 개발경쟁이 불붙어우리의 입지는 그만큼 줄어들 가능성도 점쳐진다.독자기술의 확보와 생산방식의 혁신,부품업체의 육성 등의 노력이 절실한 때다.
  • 현대·기아 1t트럭 신경전/“봉고J2 판매 1위” 기아광고 발단

    ◎현대 “구형·타종까지 포함” 반격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설전을 벌이며 신경전을 하고 있다.지난달의 1t급 트럭 판매실적을 둘러싼 견해차 때문이다. 기아자동차가 신차인 봉고 J2 트럭이 지난달의 1t 트럭중 판매 1위를 기록했다고 밝힌 게 발단이었다.기아는 J2는 나온 지 4개월 만에 선두에 올라섰다고 덧붙였다.신문을 통한 대대적인 광고도 이어졌다. 현대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한 관계자는 『기아는 신형봉고 J2 외에 구형봉고트럭과 농촌에서 팔리는 세레스를 모두 포함해 발표했다』며 기아를 공격했다.세레스의 판매량은 7백82대이며,구형트럭의 판매량도 5백대는 될 것이라는 게 현대쪽의 설명이다.그는 현대의 포터 판매대수는 7천7대로 기아의 신형봉고 J2보다 6백여대 많다고 주장했다. 기아도 현대의 주장에 발끈하고 있다.한 관계자는 『지난 6월 신형봉고 J2가 나온 직후 구형트럭 생산을 중단했다』며 현대의 주장을 반박했다.그러나 기아도 J2의 판매에 세레스가 포함돼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세레스도 같이 포함하는 게 관례』라고 설명했다. 현대와 기아가 트럭에서까지 말싸움을 하는 것은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지난 8월까지는 현대가 우세했지만 지난달에는 차이가 없어졌다.이렇게 된 데에는 현대의 리콜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현대는 지난 8월말부터 그레이스·갤로퍼와 함께 포터를 리콜하고 있다.이에 따라 고객은 포터의 안전도에 문제가 있을 것을 우려하는데다 경쟁사에서도 이를 부각시키는 작전을 했기 때문일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기아가 『올 3·4분기(7∼9월)의 내수판매량이 작년동기보다 10.6%나 증가한 데 반해 현대는 전년동기보다 1.2% 줄었다』고 발표한 것도 현대의 심기를 거북하게 하고 있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올해 추석연휴도 길었고,토요 격주휴무제와 노조위원장선거 등으로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라며 변명하고 있다.판매경쟁 못지않게 자동차업계의 말싸움도 점점 볼만해지고 있다.
  • 일본 전자부품 시장 한국·대만 “한판 격돌”

    ◎한국­반도체 등 최대 수출 품목… 방어 “비상”/대만­자회사 설립·기술제휴… 염가판매 공세 한국과 대만이 일본 전자부품 시장에서 한판 격돌이 불가피해졌다.엔고 이후 일본의 유력전자 메이커들이 부품 구매선을 한국과 대만으로 앞다퉈 바꾸면서 선두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대만은 최근 부품 자회사를 현지에 설립하거나 기술제휴 등으로 일본시장을 공략,올들어 섬유를 제치고 우리의 최대 대일 수출품목으로 떠오른 일본의 전자부품 시장을 급속하게 잠식하고 있다. 14일 무공과 무협에 따르면 대만의 최대 PC 모니터 메이커인 CXT가 일본시장 공략을 위해 최근 자본금 5백만엔 규모의 일본 자회사를 설립했다.스캐너 전문메이커인 악토운사도 일본의 소프맵사 등 3개사와 기술 제휴,본격적인 일본 공략에 나섰다. 대만에서 마더보드와 모니터 등을 생산하는 마이타크사도 올해 일본 수출이 50% 이상 늘 것으로 예상된다.파워서 플라이와 모니터·팬 등을 생산하는 대만의 델타사도 올들어 일본의 대형 메이커들에 납품을 시작,매출액 가운데대일수출액이 지난 해보다 2배 이상인 30∼35%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무공은 대만의 파상적인 공격을 피하고 시장선점을 위해 오는 23일 전기·전자 부품수출 상담전을 한국에서 열기로 했다.여기서 한국부품의 우수성을 일본에 알리고 일본업체가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품질수준을 한국업체에 전달한다.일본의 미쓰비시,샤프 등 13개 구매업체와 2백여개의 한국부품 업체가 참가,대규모 수출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대만의 전자부품 수출은 지난 해 전체 대일수출(2백48억달러)의 7∼8%(18억달러)에 불과했으나 연말까지 두배 이상 는 15%(35억달러선)까지 늘어 처음으로 두자리대 점유율에 진입할 전망이다.한국은 지난 해 22억7천만달러,올 8월까지는 22억8천만달러를 일본에 수출,전체 수출(8월까지 1백10억달러)의 20%를 차지하고 있으나 대만의 집요한 추격으로 증가율이 둔화될 전망이다.
  • 이강년 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

    ◎구한말 의병장… 「수도탈환 작전」 주도/제천·죽령서 일군 무더기 생포 “전과”/청풍전투서 잡혀 51세로 옥중 순국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구한말 의병장으로 항일구국운동을 펼치다 옥중순국한 운강 이강년(1858년 12월30일∼1908년 10월13일)선생이 남긴 옥중시의 한 대목이다. 선생은 이 시처럼 일제의 국권침탈만행에 대항해 죽음을 가벼이 여기면서 싸운 애국자였다.선생은 22세 때인 1880년 무과에 급제,선전관등을 지내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사퇴했다.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자 동학군에 투신,심산유곡을 누볐으며 이 경험은 장차 의병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1894년 청일전쟁과 1895년 명성황후시해등 일련의 사건으로 의암 유인석 등이 을미의병전쟁에 나서자 선생도 1896년2월 고향인 경북 문경에서 의병모집활동을 시작했다.유인석은 유학자로서 당시 영남유림의 정신적 지주였다.선생은 우선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으고는 왜적의 앞잡이로 지목된 안동관찰사 김석중 등 3명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이어 선생은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과 함께 고성에서 일본군과 처음 전투를 벌인 뒤 제천으로 이동해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했다.유인석의병장의 유격장이 된 선생은 수안보 병참부대 공격등 많은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그러나 유인석선생이 일제와 관군에게 쫓겨 요동으로 건너가자 1897년 뒤따라 요동으로 갔다.요동에서 이주민 정착을 위해 힘을 쏟던 선생은 고국에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고 판단,다시 단양으로 되돌아왔다.한동안 단양에서 충주 유림과 함께 의병전술등을 연구하던 선생은 1905년 조선의 외교권등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데 이어 1907년 조선군이 해산되자 다시 의병운동에 돌입했다. 원주에서 군사를 모으고 병장기를 갖춘 선생은 기세를 모아 제천으로 진군,민긍호·조동교·오경묵·정대무 등 다른 의병장과 합류해 크게 전투를 펼쳤다.광무황제는 선생의 활약상을 듣고는 선생을 도체찰사에 제수하면서 『의병을 일으키는 초모장으로 임명하니 인장과 병부를 새겨 쓰도록 하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을 먼저 베이고 파직해 내쫓으라』는 내용의 밀지를 내렸다. 제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전국 곳곳의 의병이 몰려들어 선생은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됐다.선생은 이어 충주에 근거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다른 의병장과 약속하고 진격했으나 공격시기를 놓쳐 충주공격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선생의 의병부대는 그 뒤 단양·영월등지에서 일제 및 관군과 대치,다소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펼쳤다.선생은 이 가운데 제천과 죽령에서 각각 적 2백여명씩을 생포하는등 큰 전과를 올려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그러나 겨울에 들어서면서 선생이 병에 걸리는 바람에 풍기전투에서 대패,의병운동의 기세가 꺾이게 됐다.진열을 가다듬어 서울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선생은 전국의 의병장과 함께 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서울로 행군,경기도경계에서 일제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추운 날씨와 적의 거센 반격으로 서울진공에 실패한 선생은 의병부대를 강원도쪽으로 회군,1908년초부터 다시 치열한 항일전쟁을 벌였다.선생은 이해 3월12일 강원도 인제 백담사전투를 비롯,안동·봉화 등에서 일제 수백여명을 쳐부수거나 사로잡았다.선생은 그러나 같은 해 6월4일 청풍 까치봉전투에서 장마비로 화승총을 쏠 수 없게 된 탓에 적의 총에 발목을 맞고 사로잡히고 말았다. 「탄환의 무정함이여,발목을 다쳐 더이상 나아갈 수 없구나,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선생은 옥중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시로 남겼다.선생은 여러차례 재판 끝에 교수형을 언도받고 51세로 의기에 찬 일생을 마쳤다.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JP·DJ 「색깔논쟁」 어디까지

    ◎양당,「위장보수」·「쿠데타 합리화」 설전 계속/민자에 어부지리 우려 화해 가능성 남아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위장보수」론으로 시작된 자민련과 국민회의의 입씨름이 점입가경이다. 자민련의 안성열 대변인은 3일에도 『김대중씨가 공산침략으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적령기임에도 군대에 가지않은 사실에 주목한다』고 갈기를 세웠다.김총재가 민주주의 운운하지만 군대에 가지않은 것으로 보아 진정 나라를 지킬 투철한 애국심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전날 국민회의 박지원 대변인이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전복한 자」라고 김종필 총재를 매도했던데 대한 반격이었다.안대변인의 말씨는 점잖았지만 밤새도록 김대중 총재의 가장 「아픈 곳」이 어디일까를 숙고한 흔적이 역력했다. 박대변인이 곧바로 『김대중 총재를 중상모략하고 5·16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것은 후안무치하고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반격에 나선 것은 물론이다. 색깔논쟁을 먼저 제기한 것은 자민련 김총재.그는 지난달 30일 기자간담회에서 『여야 여타정당과 정파가 느닷없이 보수를 들고나오는데 그것은 모두 위장된 것이며 참된 보수는 우리뿐』이라고 피력한데서 비롯됐다.「보수」를 강조하며 중산층에 미소를 보내고 있는 김대중 총재와 『우리만이 참된 보수』라고 주장한 민자당 최형우의원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결정적으로 국민회의를 발끈하게 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아직도 우리사회에 잠복하고 있으며 다만 세상이 바뀌니까 옷을 갈아입고 보수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라는 김총재의 발언이었다.직접 거명하지 않았지만 김대중 총재를 겨냥했다는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했다. 그러자 국민회의 설훈 부대변인은 『김종필총재가 진정한 보수 운운하며 우리를 비난한 것은 옳지못한 일』이라며 『보수와 수구의 의미를 혼동치 말라』고 맞받아 쳤었다.3일 두 대변인의 성명전은 제2라운드인 셈이다. 이날 두 대변인의 거친 입담만 보면 이 싸움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인다.그럼에도 두당 관계자들은 가시돋친 설전에도 불구하고 다툼이 싱겁게 마무리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공동의 적」인민자당에게 어부지리를 줄 수 없다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박대변인은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비난을 삼가자며 『우리는 김종필 총재에 대해서 어떤 비난도 자제해 왔다』고 「화해의 신호」를 보냈다.전면전으로 치닫느냐,화해의 악수를 나누느냐는 공은 이제 자민련쪽으로 넘어가 있는 것 같다.
  • 보스니아군 공세 중지시켜야(해외사설)

    러시아정부는 최근 유엔안보리 앞으로 서보스니아지역에서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정부군의 공세를 중지시킬 방안을 강구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이같은 촉구는 보스니아사태 해결을 위한 최선의 방안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정당한 요구이다. 나토와 유엔은 사라예보 부근지역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군사목표물들에 대한 공습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고무돼있다.하지만 이 시점에서 크로아티아·회교도측의 공세를 눈감아 준다면 진정한 평화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 회교도측의 공세로 반야루카지역에서 30만명의 세르비아난민이 발생했다.이 지역이 유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라예보주민들보다 소홀히 간주해선 곤란하다.크로아티아 회교도들은 세르비아계에 대한 나토의 공습에 힘입어 지난 4년간 당한 피해를 보상받았다.그리고 서방은 회교도의 최근 반격을 묵인하고 있다. 크로아티아군이 진격하는 지역은 리처드 홀부르크 미국특사의 중재안에 따라 어차피 크로아티아의 수중에 들어갈 땅이다.크로아티아의 진격은 정치적으로 오히려 세르비아지도자들을 유리하게 만들었다.그렇지 않고 이 지역에서 자진철수를 할 경우 세르비아지도자들은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설득하는데 애를 먹을 것이다. 이제 회교도·크로아티아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지역의 50%를 장악했다.이는 평화안에서 자기들에게 돌아갈 몫이다.문제는 이들이 공세를 계속해 군사균형을 자기들 우위로 뒤바꾸려고 한다는 것이다.모하메드 사키르베이 보스니아외무장관은 빼앗긴 지역을 「해방」시키기 위한 공세를 중단할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해방」이라는 표현이 정당한지도 의문이다.보다 큰 문제는 반야루카지역에서 회교도군의 진격을 중지시켜야한다는 것이다.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나토의 공습이 가해져야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토가 보스니아 회교도를 편들기 위해 개입했다는 러시아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그래서 회교도 크로아티아의 공세가 계속될 경우 조만간 세르비아의 대규모 반격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전쟁의 규모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커진다.
  • 「보」 정부군,영토 60% 장악/대세계 공세지속

    ◎평화회담 악영향 우려 【사라예보 AF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습으로 수세에 몰린 가운데 반격에 나선 보스니아 회교정부군은 보스니아내 크로아티아계와 함께 보스니아 전영토의 50%를 차지하고 공격을 계속 펼치고 있어 내전 당사자의 확전을 초래하고 평화회담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유엔 관계자가 18일 경고했다. 유엔 관계자들은 보스니아 회교정부군이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의 최대 거점인 반야 루카 50㎞ 이내까지 육박했다는 일련의 주장을 믿지 않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 민주계 「제목소리」 낸다/중진 의원들의 최근 움직임

    ◎“「독주시비」 의식한 침묵 도움 안된다” 판단/대정부 질문서 “개혁 지속추진” 강조 태세 민자당내 민주계가 목소리를 다시 높이고 있다.그동안 「독주시비」를 의식해 하고 싶은 말을 되도록 억눌러온 것과는 자못 다르다.여권내에서는 금기사항으로 여겨온 차기대권 문제까지 입에 올린다. 민주계의 이같은 움직임은 김윤환 대표위원 체제와 연관돼 묘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민정계의 김대표가 활발한 행보를 보일수록 민주계 인사들의 보폭은 상대적으로 좁아지고 있는 것처럼 비쳐진 것도 사실이다.주요당직만 해도 민주계에서는 강삼재 사무총장이 유일하다.마치「민정계 바다」에 떠있는 「고도」와 같다. 이러한 배경속에 민주계 인사들의 제목소리 내기는 『민주계는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뜻 같기도 하다.침체 분위기를 벗어나 문민정부 출범 초기 때의 위세를 되찾겠다는 의지도 엿보인다. 여기에는 민주계 좌장격인 최형우 의원이 첫 주자로 나섰다.최의원은 얼마전 한 지방신문과의 회견에서 「차기문제」로도 해석될 수 있는「PK(부산·경남)정치지도자론」을 거론했다.김대통령 이후의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는 「정치지도자」가 부산·경남지역에서도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다.『문민정부의 정통성을 잇고 민주 역정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자격기준도 제시했다.최의원의 이같은 발언은 이한동 국회부의장의 「중부권 주자론」과 대비되기도 했다. 이어 민주계 실세 가운데 한사람인 김덕룡 의원이 지난 13일 정부와 민자당간에 불협화음을 노출했던 금융소득 종합과세 문제와 관련,당정을 모두 비판했다.정부측에는 당과 사전협의 없이 일방 결정한 것을,당측에 대해서는 「중산층 끌어안기」의 방향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또 서청원 의원은 이튿날인 지난 14일 지난해 2백억원을 들여 설립했던 여의도연구소의 「무용론」을 제기하며 폐지를 촉구하기도 했다. 민주계의원 상당수는 다음달 19일부터 시작되는 정기국회 대정부질문에도 나선다.모두가 최근의 국정운영이 「개혁 실종」으로 비쳐지고 있는 점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며 개혁의 중단 없음을 강조할 예정이다.문민정부 출범 때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개혁의 전도사」역할을 맡았던 최의원은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 나선다.베트남 방문을 마치고 19일 귀국하는 그는 개혁에 대한 소신을 거침 없이 쏟아내겠다는 각오다.특히 개혁추진 과정에서 나타난 방법상의 하자가 6·27 지방선거 패배를 가져왔다는 주장에 대해 인과관계 분석이 잘못됐다는 점을 분명히 짚겠다는 생각인 것으로 전해진다. 또 황명수 의원은 다음날인 20일 통일·외교·안보분야에서,노승우 의원은 25일 사회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중단 없는 개혁을 촉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민주계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민주계 대반격」의 서곡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그러나 민주계 인사들은 여권 분열로 해석될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김덕룡 의원이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 나서려다 보류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고 있다.
  • 중형 승용·승합차 본격 3파전

    ◎중형­기아 크레도스,쏘나타Ⅱ·프린스 위협/승합­쌍용 이스타나 월 천5백대 판매 “돌풍” 이달 들어 중형 승용차와 승합차의 3파전이 본궤도에 올라,종전의 시장 점유율에도 변화가 일 조짐이다.기아자동차의 크레도스와 쌍용자동차의 이스타나가 공장 풀가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아는 지난 6월 말 크레도스를 판매하며 현대와 대우가 선점한 중형 승용차 시장에 들어갔다.콩코드를 대체한 크레도스를 내놓았으나 도장공장이 완공되지 않아 제대로 생산할 수 없었다.물량공급이 달려 중형차 부문 베스트셀러카인 현대의 소나타◎에 대항하기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지난 달 중순 크레도스 전용의 도장공장이 완공돼,이달부터는 정상적인 생산을 할 수 있게 됐다.기아는 추석 연휴로 이달의 생산은 약 8천대로 잡고 있다.다음 달부터는 1만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이렇게 되면 대우자동차의 프린스를 따돌리고,2위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그동안 기아의 일부 영업사원들도 크레도스의 공급능력 한계로 판촉에 1백% 발벗고 나설입장이 아니었다.그러나 이제는 전력 투구할 수 있게 된 것도 크레도스 판매 증가에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지난 달 크레도스의 판매량은 4천4백77대로 프린스의 7천5백28대에 크게 뒤졌다.쏘나타Ⅱ는 1만4천9백44대.기아는 올 연말부터는 쏘나타Ⅱ를 누르고 중형차 1위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대는 아반떼의 본격적인 수출로 상대적으로 쏘나타Ⅱ를 내수로 돌릴 수 있는 물량이 늘어나 쏘나타Ⅱ의 중형차 1위에는 문제가 없다는 반응이다.실제 현대는 크레도스의 시판을 맞아 맞불 작전으로 쏘나타Ⅱ의 물량공세에 나서,쏘나타Ⅱ는 지난 7∼8월 아반떼를 누르고 베스트셀러카에 오르는 초 강세를 보였다.쏘나타Ⅱ는 지난 6월 이후 월 평균 1만5천대씩의 계약과 판매를 할 정도로 잘 나가고 있다. 대우도 프린스의 판매를 게을리할 수 없는 입장이다.대우는 올해 「선수출 후내수」전략으로 전반적으로 내수 판매가 부진하다.월 7천∼8천대선을 유지하는 프린스에서 어느 정도 위안을 얻고 있는 형편이다.내수쪽에서 프린스의 판매고에 대우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올들어 지난 달 말까지 프린스의 판매는 5만7천7백62대.시판중인 차들 가운데 대우로는 최고의 성적인 5위를 달리고 있다. 승합차 시장도 마찬가지다.쌍용은 이스타나 시판을 앞두고 노사분규로 생산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이 때문에 시판 시기가 당초에는 7월 1일에서 7월 말로 한달 가까이 늦춰졌고 그나마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직원들이 최신식 자동시스템을 다룰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달부터는 월 1천5백∼1천6백대 정도를 팔아 승합차 시장점유율 10% 정도는 무난할 것으로 보고 있다.내년부터는 점유율을 25∼30%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지난 달 현대의 그레이스는 4천4백20대,베스타는 1천7백83대,이스타나는 6백47대가 팔렸으며 이스타나의 주문은 약 7천대가 밀려있다. 봉고신화를 이뤄낸 기아의 반격도 무섭다.기아는 다음 달 쯤 베스타의 후속모델인 NB9을 내놓아 현대를 누르고 1위에 복귀할 꿈을 갖고 있다.
  • 자동차 내수판매 “불꽃 경쟁”/3사,마케팅 강화·영업망 확충

    ◎현대­“시장점유율 50% 유지” 새모델로 수성/기아­“딜러제로 공격 영업”/대우­“완벽한 AS” 현대·기아·대우자동차의 3사 하반기 내수 판매 점유율 경쟁이 불을 뿜고 있다.기아자동차와 대우자동차가 하반기 「대공세」에 나서면서 현대가 승용차 내수 부문에서 점유율 50%대를 유지할 수 있을 지에 관심이 쏠린다. 현대는 지난 91년 승용차 내수 점유율 50%대(51.8%)를 넘어섰으나 지난 3년간은 40%대로 떨어졌다.올해에는 4년만에 50%대 진입을 목표로 세웠었다.지난 7월까지는 현대의 목표는 달성되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8월부터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지난 달 현대의 점유율은 50.8%로 전달보다 4.3% 포인트나 낮아졌기 때문이다. 기아와 대우의 점유율은 27.9%와 21.3%로 각각 전달보다 3.1% 포인트와 1.2% 포인트 높아졌다.지난 달 기아와 대우가 반격의 포문을 열어 올해의 점유율 전망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올들어 지난 달말까지의 점유율은 현대 53.8%,기아 24.8%,대우 21.4%. 기아와 대우는 하반기부터 어느 때보다 공격적인 영업을 펼치고 있다.기아는 딜러를 본격 도입한 게 두드러진 변화다.점포 및 인력에 대한 자금부담을 줄이고 경영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다.올 3월에는 딜러가 30명에 불과했으나 6월 말에는 3백명으로,8월 말에는 4백명으로 늘었다.올해 말까지는 5백명으로 확대해 직영점 5백33곳과 함께 영업점소를 1천여개로 늘릴 계획이다. 또 지역단위 마케팅 활성화 및 영업관리력 강화를 위해 23개의 지역본부를 28개로 확대하고 본사 임원급을 지역본부장으로 전진 배치해 전열을 정비했다. 지난 달 판매는 2만3천63대로 올들어 기아의 월 기록으로는 최고.크레도스가 4천4백77대 팔리며 6위에 오른 데다 세피아(8천8백76대)와 아벨라(3천9백45대)의 실적도 좋았다.이달 중순 아벨라 노치백형(트렁크가 따로 있는 스타일)을 판매하면 프라이드·아벨라 해치백과 노치백형으로 소형차 트로이카 체제를 갖춰 소형 부문 1위도 가능한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이달부터 크레도스 생산이 정상화되기 때문에 올 목표인 점유율 30%는 자신있다는 반응이다. 대우는 영업력과 완벽한 애프터서비스로 신차부족을 극복한다는 계획이다.대우자동차 판매를 위한 「마지막 카드」인 우리자동차의 박성학 사장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신차의 약효는 3개월 내에 불과하며 영업력으로 만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우는 월 평균 5백명씩 영업사원을 늘려 올해 말에는 1만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지역 영업본부장의 절반을 바꿔 세대교체를 통해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고객의 차량과 전담 애프터서비스 요원을 연결하는 「홈 카 닥터제」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입하는 등 서비스 체제가 완벽한 것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 허주의 민자호/총선·대선 대비 총력제제 구축/출범 의미와 과제

    ◎계파갈등 씻고 당 일신… 구여권 끌어안기/친정 2인자역·내각중심론과 조화 주목 21일 출범한 민자당 김윤환 대표위원 체제는 「화합정치」의 또다른 상징이다.대대적인 사면·복권 조치와 같은 맥락이다. 이로써 오는 25일 집권 후반기를 맞는 김영삼대통령의 국정운영 구상은 보다 명확해졌다.「구여권 끌어안기」라는 궤도수정을 통해 화합·화해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개혁과 세대교체를 이루겠다는 의지의 천명으로 요약된다. 김대통령은 이날 김대표위원 체제를 출범시킨 전국위원회에서 「계파없는 여당」을 역설했다.김대통령은 『천하의 인재를 끌어모아 대화합과 세대교체를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이번에 공개된 12·12 때의 녹음테이프에서 보듯이 역시 군개혁은 옳았다』고 상기시켰다.화합정신이 개혁의 후퇴로 비쳐지는 것을 차단하고 개혁의 큰 줄기에는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한 대목이다. 아울러 허주(김신임 대표위원의 아호)의 대표위원 기용은 지방선거 패배로 흐트러진 전열을 가다듬어 내년 총선 및 내후년의 대선에 대비한 총력체제를 구축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김대통령이 『명장은 한번 질 수는 있어도 두번 져서는 안된다』며 「반성의 토대」위에서 「필승의 의지」를 다진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김대표는 그동안 소외감을 느껴온 민정계의 한축인 이른바 「TK(대구·경북)」세력의 상징처럼 인식돼 왔다.그의 전면포진으로 동요하는 내부 구성원들을 다독거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허주구상」은 앞으로 「3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펼쳐져야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다.먼저 민자당에 대한 김대통령의 친정체제 강화가 예고돼 있는 상황에서 「2인자 역할」을 어떻게 수행해 나가느냐는 문제다.김대통령은 이날 치사에서도 『총재인 내가 직접 당을 챙기겠다』고 강조했다.따라서 김대통령에게 국정운영 스타일의 변화를 주장해 온 김대표가 어떤 방식으로 「조화의 묘」를 이뤄나가느냐는 어려운 숙제가 될 수밖에 없다. 둘째,김대표위원의 기용 자체가 「화합」에 대한 의지를 뜻한다 하더라도 곧바로 화합으로 등식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그가 대표위원에 기용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면서 일부 동요세력들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은 사실이다.그런 반면 김대표위원체제는 김대통령의 「계파종식 선언」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계파간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요인을 내재하고 있다.민주계는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고,하주의 지역적 영향권 밖에 있는 민정계쪽도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벌써부터 「대반격」의 가능성마저 점쳐지기도 한다. 김대표위원 체제에 대한 야권의 거부 기류도 만만치 않다.김대표위원은 『야당이란 늘 그런 것』이라며 괘념치 않겠다는 자세지만 여야관계의 정상화는 김대표위원의 몫이라는 당위적 측면에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셋째,정권재창출이라는 목표에 최대 관건인 민심이반을 되돌리려면 「위민정당」으로서 면모를 일신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당정간의 관계가 먼저 설정되어야 한다.김대표위원은 지방선거 이후 「당우위론」을 역설해 왔다.그러나 최근 유임이 점쳐지고 있는 이홍구국무총리가 개혁에 대한「내각중심역할론」을 강조하고 있어 앞으로의 항해가 생각같이 수월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 크로아티아 전면전/정부군 10만 세계 거점 크닌 진격

    ◎세계선 10여곳 포격 대응 【자그레브 외신 종합 연합】 크로아티아군이 4일 유엔의 협상 촉구를 무시,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를 전면공격하고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 주요도시들에 대한 대대적 반격에 나서 양측간 전면전 발발및 보스니아내전이 크로아티아로 확산돼 발발 후 최대규모로 비화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10만여명의 크로아티아군은 4일 새벽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인 크라이나 수도 크닌에 대한 포격을 시작으로 탱크를 이용,크라이나의 메다크지역으로 진격함으로써 세르비아계 반군에 대한 전면공격에 나섰다.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군은 즉각 크로아티아내 도시들에 대대적 포격을 가했다. 크로아티아 라디오는 『4일 새벽 세르비아계가 시베니크,시사크,카를로바치,고스피치,오굴린,오토차치,수니아,노브스카,토푸사코,두브로브니크 등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이들 지역에 경계경보가 발령됐다』고 밝혔다. 목격자들은 크닌 주변 산들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의 포격전으로포연이 가득했으며 크닌시 중심가는 처음 30분간 2백∼3백발의 집중 포격으로 불바다가 됐다고 전했다. 한편 프란요 투즈만 크로아티아대통령은 방송을 통해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투항을 촉구하고 투항하는 주민들은 사면할 것을 약속했다.투즈만 대통령은 3일밤 고위 안보·국방 보좌관들과 가진 회의에서 세르비아계가 점령한 영토의 회복을 결의한 것으로 보인다.
  • 「군사우위」확신… 영토탈환 총력전/크로아 왜 세계 전면공격나섰나

    ◎「인종청소」로 세계 여론 악화 힘입어 반격/세계 강경정책 표방땐 발칸반도 전면전 보스니아내전은 과연 발칸반도 전역으로 확산될 것인가? 4일 세르비아계에 대한 크로아티아군의 전면공격 시작은 이같은 우려를 한층 고조시켰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는 3일 제네바에서 가진 회담에서 얼굴을 맞댔었다.그동안 군사적 우위를 보였던 세르비아계가 유엔측 평화안을 받아들이고 크로아티아와의 재통합도 논의할 수 있다는 양보 자세를 보인 반면 크로아티아는 회담 결렬을 주장하며 회담장을 떠나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크로아티아의 강경 입장은 91년 6개월간의 전투에서 영토의 5분의1을 세르비아계에 빼앗긴 후 이를 되찾아야겠다는 결의에서 금수조치에도 불구,군사력 비축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이제 군사력에서 세르비아계를 압도하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계와의 접경지역에 10만의 병력을 포진한 반면 세르비아계는 5만 병력으로 맞서고 있다. 그간 세르비아계가 자행해온 인종청소와 난민 학살 등으로 세르비아에 국제사회의 비난이 집중됨으로써 이제까지 세르비아계의 군사적 우위를 가능하게 했던 세르비아공화국의 세르비아계에 대한 지원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도 크로아티아로 하여금 적어도 세르비아공화국이 크로아티아와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간의 전투에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게 만든 것같다. 이같은 크로아티아의 판단은 그러나 세르비아 국민들이 유화자세를 보이고 있는 밀로세비치 세르비아대통령에게 불만을 품고 세르비아계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밀로세비치가 이같은 압력에 굴복,개입을 결정하면 진짜로 발칸반도 전역이 전쟁터가 될 것이다. 크로아티아의 공격으로 내전이 확산되면 세르비아에 집중됐던 비난이 크로아티아로 돌아가며 내전확산 방지를 최우선과제로 꼽는 서방 각국들은 크로아티아에 대한 압력을 한층 가중시켜 크로아티아의 전투력을 떨어뜨릴 것이다. 결국 이번 크로아티아의 공격도 한때 긴장을 고조시켰다가 수그러졌던 과거의 예처럼 한동안 지속되겠지만 어느 기간이 지나면다시 가라앉고 발칸반도의 지루한 「땅 뺏기」 싸움은 또다시 끝없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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