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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은 속전의 속셈(모스크바 새 증언:25)

    ◎스탈린,서방 분열 노려 한국전 지속 고집/미·중 접근을 우려… 휴전회담 결렬 모색/모에 “협상 서두르지말라”… 압력 넣기도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에도 줄곧 스탈린은 사실상 전쟁을 계속하자는 입장을 고수했다.그의 입장에서 볼때 한국전쟁은 미국의 두손을 한반도에 묶어두는 외에 서방 동맹국들 사이에 그리고 미국내 여론에도 분열을 조장하는 2중의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외에도 스탈린은 이 전쟁이 중국과 미국이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다고 판단했다.1930년대 모택동이 미국과 회담한 이래 스탈린은 줄곧 미·중 두나라의 접근을 우려해왔다.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스탈린은 북한과 중국 내부의 휴전지지 분위기를 억누르기 위해 무척 애썼음이 다양한 문서들을 통해 입증된다. ○다양한 문서통해 입증 휴전회담시작전인 전쟁초기 소련의 입장을 참고로 살펴보자.50년 12월 7일 소련공산당(당시 이름은 전연방 볼셰비키공산당)은 유엔대표부 앞으로 한국전쟁에 대해 평화적 태도를 취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다.(정치국회의록 N79.제189항) 『현재 한국전 상황으로 볼 때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을 중지할 것을 건의한 귀하의 입장은 잘못됐음.현재 미군은 패배를 거듭하고 있고 완전패배를 면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휴전제의를 계속 내놓고 있음.따라서 다음 2가지 사항을 제의할 것. (1)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2)한국문제는 한국민의 손에 맡길 것.』 이와는 달리 중국·북한측은 당시 유엔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휴전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매달리고 있었다.다시 회담진행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51년 8월13일 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휴전회담과 관련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대통령문서소.소련군 총참모부 제2총국.전문번호 N22834) 『적대표들은 38도선 획정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를 거부함.적은 현상황과 현전선에서 휴전에 들어가고 완충지대 설치를 주장함.…중략…회담진행 상황과 회담장 밖의 상황을 종합고려할 때 적이 우리의 38도선 휴전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같음.적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양보를 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회담을 결렬시킬 준비를 하고 있음.적이 휴전개시 시점에 대한 입장을 양보할 것 같지는 않음. 우리 입장을 분명히 정리할 필요가 있음.38도선을 따라 휴전을 성사시키고 그외 부차적인 양보만 할수 있다는 게 우리의 최종 목표라면 회담결렬에 대비해야 함.본인을 비롯 우리 동지들은 적대관계 지속에 반대함.제한된 물자보급,일반적인 국제정세,우리 나라의 입장,그리고 현상황에서 북한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38도선을 고수하려다가 회담결렬을 맞기보다는 현전선에서 휴전을 성사시키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함. 그런 다음 3∼5년 동안 힘을 다시 모을수 있을 것임』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38도선 휴전 입장을 고수하기보다는 미국측 주장대로 현전선에서의 휴전을 분명하게 건의한 것이다.물론 3∼5년 동안 힘을 모아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는 자기 입장을 내세우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탈린은 줄곧 비타협적인 입장을 고수했다.51년 11월 19일 스탈린은 모택동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대통령문서소.전문번호 N6849) 『휴전협상관련 동지의 평가에 동의함.그러나 미국이 비록 협상을 지연시키고는 있으나 조기 휴전을 보다 필요로하는 쪽은 미국임.이는 현국제정세를 봐도 마찬가지임.만약 중·조선 동지들은 협상에서 보다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싶다 하더라도 절대 서두르지 말고 조기 휴전을 바란다는 의중을 절대 내보이지 말기 바람』 북한측도 휴전을 바라기는 중국과 마찬가지였다.이를 입증하는 전문이 있다.이듬해인 52년 1월16일 당시 외상이던 박헌영은 중국군총사령관 팽덕회를 찾아갔다.팽덕회는 이 회담내용을 모택동에게 즉각 보고했다. 『박헌영은 조선국민 모두가 평화를 원하며 전쟁 계속에 반대한다고 강조했음.하지만 소련과 중국동지들이 전쟁을 계속하는 게 유익하다고 믿는다면 북조선노동당 중앙위는 어떤 난관도 이기고 현재 입장을 고수하겠다고 했음. ○비타협적 입장 고수 이에 대해 본인은 현재 상황이 아군에게 유리하고 미군에게 불리하다고 설명하고 그런 이유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음.회담 말미에 박헌영은 자기가 말한 내용은 자신의 사견이며 노동당 중앙위와 북조선정부의 공식입장이 아니라고 강조했음』 한편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휴전성사를 위해 기자회견을 갖고 모종의 이니셔티브를 취하려했다가 소련의 반대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다음은 이와 관련,52년 3월5일 소련외무부가 소련당 정치국 앞으로 보낸 전문.(문서번호 N36/35) 『북한주재 소련대사 라주바예프동지가 김일성에게 판문점 회담과 관련 다음과 같은 주문을 했다고 보고했음.라주바예프동지는 김일성에게 다음 3가지 문제에 관해 인터뷰할 것을 제의했음.첫째,미국측의 회담지연 문제.둘째,휴전조건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중립국감시위에 소련대표 참여.셋째,미국의 협상지연에 대한 북한의 입장개진. 외무부 입장에서 볼때 라주바예프동지의 견해는 절대 받아들일수 없음.그런 인터뷰가 발표되는 것은 조선·중국측이 입장이 초조해하고 안달해하는 것으로 해석될수 있음』 소련당정치국도 3월7일 답전을 보내 (문서번호N.P86/33)『우리는 협상을 서두르지 않음.그것은 본국의 이익에 배치됨.라주바예프동지의 제안을 받아들일수 없음』이라고 밝혔다.이렇게 해 김이 라주바예프의 이름을 빌려 시도했던 것이 분명한 인터뷰기도는 무산됐다. ○스탈린이 직접 보내 이런 가운데 김일성은 7월17일 직접 스탈린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5025/sh) 『경애하는 요시프 비사리요노비치동지께.조선의 전반적인 상황을 분석한 결과 우리는 휴전협상이 무한정 끌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지난 1년간 우리는 사실상 군사행동을 중단하고 수비전략에 치중했음.그런 결과 적은 거의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았고 반면 우리는 인적·물질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음. 따라서 적은 최근 조선내 여러 발전소를 파괴했으며 이를 수리할 시간여유 조차 우리한테 주지 않고 있음.52년 7월 11일 밤부터 12일 새벽 사이 평양에 대한 단 한차례 공습으로 평화스런 주민 6천명이 사망,부상을 당했음.적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조건들을 내걸고 있음. 중국동지들은 이조건들을 수락하지 않음.우리도 물론 모택동동지의 이런 입장에 동의함.하지만 북조선인민공화국의 정부와 국민이 더 이상의 부당한 손실을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요한 시설을 방어하고 적극공세를 취할 필요가 있음.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하는 바임. 1,방공망 강화.10개 대공여단에 대한 추가 무기지원이 필요함.50%는 중국이 나머지 50%는 소련이 제공해주기 바람. 2,전투기의 야간작전 강화. 3,적의 관심을 우리 후방에서 돌리고 회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대규모 지상군 작전을 펼칠 필요가 있음.우리의 전투력강화를 위해 빠른 시일내에 기술 및 물자지원을 해주기 바람. 4,동시에 우리는 휴전회담의 조속타결과 전투중지 및 제네바협약에 의거한 포로교환을 강력히 요구해야 함.이런 요구는 모든 평화애호 국민들이 지지할 것이고 한국의 교착상태를 타개할 것임』 김일성은 이 전문 말미에 『같은 내용의 전문을 모택동동지에게도 보냈음』이라고 덧붙였다. 전쟁계속을 위한 추가 무기지원을 해주든지 아니면 휴전협상을 서두르자는 두가지 요청을 담았지만 무게는 후자에 두고 있었다.그리고 김일성은 위기에 몰리자 전형적인 수법,즉 모·스탈린 양자관계를 묘하게 이용하려했음을 이 전문은 다시 한번 보여준다. ◎새로 밝혀진 사실/스탈린,모택동·김일성의 휴전의사 무시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비로소 스탈린이 전쟁을 결정할 때와 중국군 참전결정을 할 때 왜 그렇게 교묘하고도 집요하게 빠지려 하였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났다.이번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휴전보다는 전쟁을 계속하려 하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그는 자국의 유엔대표부 앞으로 직접 비밀전문을 보내 한국전쟁에 대해 유엔에서 평화적 태도를 취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있다.모택동과 김일성에게 보내는 전문이 아니라 자국의 유엔대표에게 직접 보내는 이 비밀전문은 그가 모택동과 김일성의 휴전의사를 무시하고 전쟁의 계속을 주장한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그것은 중국과 북한을 담보로 하여 미국을 계속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그는 중국·북한을 내세워 미국과 대리전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모택동과 현지 중국 군지휘관과 협상대표들,그리고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롯한 북한지도부는 전쟁의 지속을 원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모택동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유엔측의 현전선에서의 휴전의견을 받아들여 조기에 전쟁을 끝내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물론 이는 처음 밝혀지는 사실이다.그러나 스탈린은 『조기 휴전을 더 바라는 쪽은 미국』이라면서 『조기휴전의사를 절대로 내보이지 말라』고 모택동의 의사를 무시하였다.박헌영과 김일성의 의견도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실제로 모택동과 김일성·박헌영이 적극적으로 종전의사를 갖고 있었고 그러한 정책을 추구하였는지는 더 많은 방증자료를 기다려야겠지만 우리는 이번 자료를 통해 스탈린이 전쟁을 계속하려 하였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 북한 공산정권 수립(새로쓰는 한국 현대사:26)

    ◎대의원 선거 흑백함 놓고 전형적 공개 투표/북노당 출신 당권장악 하자 남노당측 불만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38이북의 공산주의자들도 자체 정권 수립을 서두른다.단독정부 반대,통일정부 수립이란 명분을 내세워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입북과 5·10총선거를 거부했던 그들로서는 자체 정부 수립을 더이상 늦출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정권수립을 일찍부터 준비해온 만큼 막상 그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7월달 초에 이미 결정 1948년 8월25일 북한 전역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이 날짜는 7월9·10일 열린 북조선 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이미 결정난 것이었다.8·25선거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먼저 「친일분자 제외」라는 명목아래 반대세력의 선거권·피선거권을 빼앗아버렸다.또 인구 5만명에 하나꼴인 2백12개 선거구의 출마자를 미리 지정하고 이에 대해 찬반을 묻는 흑백함선거를 실시했다.흑백함선거란 투표장에 흑백 2개의 투표함을 설치해 찬성자는 흰 함에,반대는 검은 함에용지를 넣는 전형적인 공개투표 방식이다.더욱이 주민들을 직장·마을별로 집단 동원한데다 병자·노약자에게는 투표함을 들고 찾아가 투표를 시켰다.말하자면 투표를 하지 않을 자유마저도 박탈한 비민주적인 선거였다.따라서 유권자 4백52만6천65명 가운데 99.97%인 4백52만4천9백42명이 참가해,98.49%가 찬성표를 던진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나왔다. 어쨌든 2백12명의 대의원이 선출됐고 여기에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에서 미리 뽑은 남쪽의 대의원 3백60명을 합쳐 제1기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됐다.「해주회의」는 북한정권이 남한 주민의 의사까지 모두 수렴했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마련한 행사였다.48년 7월 남한 각지에서는 인민 대표를 뽑는다는 지하선거가 남로당 주도로 실시됐다.여기서 선정된 대표들은 해주에서 8월21일 대회를 열어 최고인민회의 남쪽 대의원을 선출했던 것이다. 9월2일 최고인민회의가 개막돼 의장에 허헌 남로당 위원장,부의장에 김달현(천도교청우당 위원장)과 이영(근로인민당 부위원장)을 각각 선출했다.둘째날에는 대의원 5백72명에 대한 자격심사 결과를 발표했다.대의원 가운데 여자는 69명으로 12.1%이고,연령은 30∼40대가 2백32명으로 가장 많았다.성분별로는 농민(34%),사무원(26.7%),노동자(20.9%)순이었으며 특이하게도 전지주가 1명 있었다. ○각본대로 선거 연출 한편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와 8.25선거를 각본대로 연출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북한정권 수립 작업은 그러나 곧 암초에 부딪힌다.내각 구성을 놓고 북로당과 남로당 사이에 권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남쪽에서도 내각이 구성된 뒤 불만을 품은 한민당이 야당으로 돌아선 일이 있지만 북쪽 사정은 훨씬 심각했다.내각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바로 정권장악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연일 회의를 열어 내각 구성을 논의했다.먼저 각 성의 상(장관)을 어떤 비율로 나누느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남로당은 대의원 숫자를 감안,남북이 6대 4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결국 남북이 절반인 10명씩 맡기로 결정했다.그러나 실제 남로당과 북로당이 차지한 자릿수는 크게 차이가 났다.북쪽을 완전 장악한 북로당은 지분 가운데 9석을 가졌지만 남로당은 남쪽지분 중 5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나머지 5석은 기타 정당들이 나눠가졌다.내각 구성에서 북로당은 남로당을 압도한 셈이다. 비율이 정해진 뒤 구체적인 인선에 들어가자 갈등은 증폭됐다.내각 수상은 소련에서 점지한 김일성으로 이미 정해졌고 부수상 3명도 남의 박헌영과 홍명희,북의 김책 등으로 쉽게 결정됐다. 정작 문제가 된 자리는 사법상이었다.남로당은 최용달을 사법상으로 추천했다 북로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다시 이승엽을 내세웠다.이에 대해 북로당은 『이승엽이 남쪽에서 할 일이 많으므로 무임소상이 알맞다』고 주장했고 남로당은 『그가 남로당 현지 지도부를 맡았던 지도자이므로 권위있는 자리를 줘야 한다』고 맞섰다. 외무상 자리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북로당은 주영하를,남로당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지낸 남한출신 이강국을 각각 추천했다.양쪽은 외무상이 남쪽 지분임을 인정,부수상 박헌영이 겸직한다는 선에서 타협했다.주영하는 교통상으로 자리를 바꿨고 신진당 출신 이용이 도시경영상으로 결정됐다.내각 구성 논의는 「인민공화국」선포 하루전까지 계속됐고 몇몇 자리는 김일성에게 인선을 위임했다.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는 김두봉이 내정됐다. ○주로 연안파가 득세 북한 공산정권의 첫 내각과 주요 직책 명단은 다음과 같다.(★표는 남쪽 출신)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 홍명희(★) 김책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민족보위상 최용건▲국가검열상 김원봉(★) ▲내무상 박일우 ▲외무상 박헌영(★) ▲산업상 김책 ▲농림상 박문규(★) ▲상업상 장시우 ▲교통상 주영하 ▲재정상 최창익 ▲교육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이승엽(★) ▲문화선전상 허정숙 ▲노동상 허성택(★) ▲보건상 이병남(★) ▲도시경영상 이용(★) ▲무임소상 이극로(★) ▲최고재판소장 김익선 ▲최고검찰소장 장해우 ▲법제위원회 위원장 허헌(★). 내각이 구성되자 남로당은 큰 불만을 품게 된다.숫적으로도 열세인데다 비교적 힘있는 자리들을 대부분 빼앗겼기 때문이다.특히 연안파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내무·재정·문화선전상 등을 거머쥔 것에도 못미친다고 판단했다.이같은 불만은 정권 수립후 여러 형태로 노출됐고 드디어는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돼 남로당파의 몰락을 불러오게 된다. 9월8일 최고인민회의 5일째 회의에서는 「인민공화국」헌법을 승인하고 즉시 「전조선 지역에서 인공헌법을 실시한다」고 공표했다.이어 ▲그동안 북한을 통치해온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정권이양 선언 ▲최고인민위원회의를 이끌 상임위원회 위원장 및 위원 선출 ▲새 수상에 김일성 선출 및 조각 위임등 각종 요식절차를 끝냈다. 1948년 9월9일 상오 10시.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최고인민회의 6일째 회의가 열렸다.김일성이 등단해 조각 결과를 발표하자 대의원들은 박수로 승인했다.김일성은 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을 정식 선포했으며 그 자리에 모인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열렬히 환호했다.일제로부터 벗어난지 3년,남쪽에서 대한민국이 출범한지 25일만에 북쪽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별도의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노동당중앙위 출당 결정서/반대세력은 현 일·반동지주로 몰아 숙청/당 추천 국비생 부친 경력까지 면밀 분석/「반공」 혐의 드러나면 “파렴치범” 추가시켜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광복과 함께 38이북 지역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친일분자니 반동지주니 갖은 구실을 붙여 무자비하게 숙청했다.따라서 1948년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할 당시 이렇다 할 반대파는 북한에 존재할 수 없었다.설사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국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찾아낸 한장의 출당 결정서는 당시 실정을 실감나게 보여준다.「19 47년 10월29일 북조선노동당 중앙검열위원회 상무위원회」명의로 작성되고 「절대비밀」 도장이 찍힌 이 결정서는 한재련(당시 25세)이라는 청년당원을 쫓아내는 이유를 밝혔다. 한재련은 당시 25세로 김일성대학 역사문학부 철학과 1학년이었다.당의 추천을 받은 국비생이었고 민청 중앙위원,당세포책임자를 맡은 촉망받는 공산주의자였다.그런 그가 쫓겨난 이유는 간단하다.출신성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결정서는 먼저 한경련이 ▲해방후 한달동안 신민당에 몸담은 적이 있으며 ▲부친이 일제 때 10년동안 형사로 활동했음을 지적했다.결국 공산주의에 반대한 신민당 입당 경력이나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성분을 뒤늦게 알게 돼 쫓아낸다는 뜻이다. 결정서는 이와 함께 「학습에 태만하고 음주 방탕하였으며」,「학교 공금 1천5백원을 횡령했다」는 등의 이유도 덧붙였지만 이는 한경련을 파렴치범으로 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출신성분이 좋지 않으면서도 국비생에 당의 중책까지 맡은 사람이라면 개인적인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경련은 유명한 인물이 아니어서 출당후 그가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 길은 없다.다만 해방이후 6·25전쟁 때까지 수백만의 북한 동포가 공산정권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듯이 그도 어느땐가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 대한민국 땅에 정착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 1·4후퇴(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7)

    ◎중국군 파상공세… 2개 사단 서울 재점령/모,김일성에 “북조선군 사단수 감축 필요” 전문/4∼5월 춘계대공세 맞춰 소제무기 증강 촉구 파상공세를 펼치던 중국군은 마침내 51년1월4일 다시 서울을 점령했다.그후 1월8일 모택동은 스탈린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15227).바로 팽덕회,김송,박일우등 3명의 전선사령관이 서울점령직후 김일성앞으로 보낸 작전보고서의 사본이었다. 『1.제116보병사단과 117보병사단병력 일부가 오늘(1월4일)서울을 점령했음.적군 병력은 한강이남의 강안으로 패주했음.적은 한강과 산악지대등 자연적인 지형지물을 이용해 잔여병력을 끌어모아 시간을 끌며 이후 전투에 대비할 가능성이 있음. 2.만약 적이 한강이남을 따라 방어선을 펴고 김포공항을 장악하고 제물포항을 이용해 보급품을 조달할 경우 서울은 적의 공습과 포공격의 위협을 받을 것임.이는 아군의 춘계대공세에 매우 불리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음.만약 적을 한강이남지역에서 더 패주시킬 경우 김포공항을 아군이 장악함은 물론 재물포항도 아군수중에 넣을 수 있음.아울러 춘계대공세때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되는 것임.적이 남으로 계속 후퇴할 경우 아군은 수원을 점령한뒤 추가 작전지시를 기다리겠음. 1월4일 24시. 팽덕회,김송,박일우』 ○“인민애국세력 승리” 이 전문을 읽은 스탈린은 전문위에다 자필로 다음과 같이 써서 모택동앞으로 보냈다.『본인은 팽덕회를 비롯한 사령관들이 1월4일자로 김일성에게 보낸 작전건의문을 읽었음.필리포프의 견해로는 이 건의가 타당하며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한다고 생각함.진심으로 서울을 점령한 귀하에게 축하를 보냄.이는 인민애국세력이 반동세력에 거둔 위대한 승리임』 추후 작전전개와 관련,1월16일 모택동은 김일성앞으로 다음과 같은 충고를 보냈다.이 전문사본은 북경주재 소련대사관을 통해 스탈린에게도 보고됐다(전문번호 N15 603). 『현재 중국 동북부에서 훈련중인 10만명의 조선인 신병들은 2∼3개월후면 훈련이 끝남.이들을 인민군 각급 부대에 배치하되 각 중대인원은 1백명이상,사단병력은 1만∼1만명이상으로 구성돼야함.북조선군은 사단,여단급 부대가 너무 많음.모든 병력을 15개정도의 사단으로 나누어 이들에게 소련제무기를 제공할 필요가 있음.그럴 경우 조선문제를 최종 마무리할 춘계대공세(4월∼5월사이)때 이들이 중국의용군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음. 향후 2∼3개월사이 중국의용군과 북조선군은 신병들을 보충해 부대를 새로 개편하는 중대한 대규모 작업을 해내야함.신병들에게 고참병들의 경험을 가르쳐야 하고 무기증강,철도보수,식량 및 탄약저장등을 마무리해야함.앞으로 있을 군사작전에서 적군사령부가 취할 수 있는 대안은 다음의 2가지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됨. 1.아군의 공세에 밀려 크게 저항을 못하고 조선을 떠남.우리의 준비가 완벽하고 전력이 자기들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적은 물러날 것임.2.적은 부산,대구지역에서 최후저항을 벌일 것임.하지만 이 경우에도 저항이 무모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조선을 떠날 것임.물론 이를 위해선 우리도 충분한 준비를 갖추어야됨.그렇지 않을 경우 1950년 6월에서 9월사이 북조선군이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할 것임. 객관적인 상황에 비추어 2월에 공세작전을 한번 펼친뒤 다시 휴식을 취하며 마지막 대작전에 대비한 병력재편성에 착수해야함.중국과 조선동지들은 인내를 갖고 필요한 준비에 임해줄 것을 바람』 이렇게 1·4후퇴를 계기로 김일성,모택동,스탈린 3인은 다시 한번 한반도무력통일이 임박했다는 벅찬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아울러 중국군의 대공세를 계기로 작전의 거의 모든 전권을 어느덧 모택동이 행사하고 있음도 이 전문은 보여주고 있다. 이 전문을 받아본 김일성은 곧바로 중국군 전선사령관 팽덕회를 만나 후속문제를 논의했다.팽덕회는 김과의 회담결과를 1월19일 모택동에게 보고했다.이 전문도 물론 북경의 소련대사관을 통해 1월21일자로 즉각 스탈린에게 보고됐다(전문번호 N15974). ○모,작전 전권 행사 『김일성과의 회담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함. 1.김일성을 비롯한 북한동지들은 미군과 그의 괴뢰군들을 남쪽으로 패주시키기 위해서는 북조선군 병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음.북한동지들은 최소한 2개월은 휴식을 취하며 병력재편성에착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음.박헌영은 이와 다른 입장을 보였으나 본인의 추가설명을 들은뒤 수긍했음.소련군사고문관도 앞으로 있을 추가 대공세는 결정적인 마무리작전이 돼야하기 때문에 북조선 당정치국의 뜻에 따라 완벽한 준비를 갖추는게 바람직하다는데 동의했음. 2.해안방어 관련.소련으로부터 기뢰1천개,대전차 지뢰를 비롯한 각종 지뢰 20만개를 제공받았음.이중 10만개는 해안방어에 사용키로 했고 기뢰는 제일 중요한 항구들의 방어에 사용키로 했음. 3.5개군 편성건.각 군은 3개사단으로 편성키로 결정했음.현재 1군을 제외한 나머지 군들은 모두 4∼5개사단으로 편성돼있음.그러나 이들 사단들은 모두 3천∼5천명의 병력만 보유한 불완전한 사단임.본인은 남조선군포로들중 2만명을 5개군에 골고루 배치해 넣자고 제의했으나 북조선동지들은 이에 반대했음. 4.새로 해방된 지역에서 일할 장교숫자가 부족함.서울인구는 이전에 1백50만이었는데 현재도 1백만이 남아있음.식량,연료난이 극심함.피란민,실업자들에 대한 보조가 전무함.인민군,중국의용군이 보유한 식량도 최저수준임』 팽덕회는 이 전문에서 이밖에도 크고 작은 각종 문제를 북한측과 협의해 시행에 옮기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그중 몇가지만 더 소개한다.점령지역 통제강화,적군 사기저하를 위해 노력,북한주민들의 봄파종 지원,피란민 지원대책,미군·남조선괴뢰가 일시점령중인 지역에 대한 정치선전공세강화,적의 후방에 침투할 특수부대창설 등등.하지만 이런 일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할지에 대해서는 추후 재차 협의키로 했다고만 밝히고 있다. 하지만 1·4후퇴를 계기로 한껏 고조됐던 중국군,북한군진영의 축제분위기는 1월말을 고비로 눈에 띄게 수그러지기 시작했다.그리고는 곧이어 불안,공포,때에 따라선 엄청난 히스테리현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관련문서들은 또한 중·소간에도 불협화징조가 커져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스탈린은 계속해서 소련군의 직접개입을 피하려 했다.소련군사고문단,조종사를 비롯한 군병력 일부를 한국전에 파견하기는 했지만 매번 모택동,김일성 양자로부터 몇차례씩 간곡한 파견요청을 받은 후에야 마지 못해 이에 응했다. 스탈린은 또한 병력지원뿐 아니라 무기,탄약지원에도 모,김일성 두사람이 요청한 것보다 훨씬 못미치는 양을 지원해 주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소련의 형편 역시 크게 넉넉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휴전협상은 시간벌기 51년 1월28일자로 모택동은 스탈린앞으로 전문을 보내 제4차 공세작전을 펼 뜻을 밝히고 이에 대한 스탈린의 의중을 물었다.이 전문에서 모택동은 같은 날짜로 전선의 팽덕회장군앞으로 보낸 작전지시문을 동봉했다(전문번호 N16052.51년 1월29일 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 다음은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의 주요내용.『서울과 재물포인근 지역으로 진격한 적군 2만∼3만명을 격퇴시키기 위해 제4차 공세작전준비에 즉각 착수할 것.대전­안동 북부지역을 점령할 것.재물포와 서울,그리고 한강이남지역을 확고히 장악한뒤 전선을 남하시킬 것.중국군,북한군 병력을 15∼30㎞북쪽으로 후퇴시킨뒤 임시휴전협상에 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적들은 우리병력이 북으로 물러나고 한강을 자기들이 장악한 뒤에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싶어하기 때문임.4차 공세가 끝나면 적들은 한반도문제의 해결을 위한 평화협상을 제의할 것임.그렇게되면 이 협상은 중국,북조선에 유리하게 됨.이후 아군은 2∼3개월 휴식과 준비기간을 거쳐 결정적인 제5차 대공세를 감행할 것임』 어떤 경우에도 불리한 상황에서 휴전협상에 임하지 않는다는 것과 휴전협상은 추가 대공세를 펴기 위한 시간벌기로 이용할뿐이라는 점을 전선사령관에게 주지시키기 위한 작전지시문이었다.
  • 소의 「북영토 포기」 시나리오(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2)

    ◎스탈린,「평양정권 중·소로 완전 철수」 검토/“계속 저항 무의미… 모든 병력·장비 후송” 전문/중군군 참전 결정따라 당일 철수명령 백지화 스탈린이 3번째로 생각한 대안은 보다 충격적인 것이다.바로 김일성정권 자체를 몽땅 철수시키겠다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50년 10월13일 스탈린은 김일성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10월13일 스탈린이 김일성 앞으로 보낸 전문)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함.중국동지들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음.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중국·소련으로 완전철수를 준비해야 함.모든 병력과 군사장비를 모두 가지고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함.이와 관련한 활동계획을 상세히 보고할 것.향후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한 역량을 유지시켜야함』.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같은 날 즉각 김일성·박헌영에게 전달했다.슈티코프는 두사람과의 면담결과를 이렇게 보고했다.(10월14일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김일성,불만속 동의 『10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났음.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전문내용을 전해듯고 의외라는 반응이었음.그러나 김일성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기는 하지만 스탈린 동지가 그런 충고를 한다면 이를 이행하겠다고 답했음.김일성은 스탈린의 충고를 다시한번 읽어달라고 요청한 뒤 박헌영에게 이를 받아적도록 지시했음.김일성은 이와 관련한 준비작업에 필요한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음』 그러나 김일성정권 자체를 북한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이 구상은 같은 날 잇따라 전달된 다른 전문에 의해 백지화됐다.바로 중공군의 참전결정을 알리는 긴급전문이었다.김일성에게 정권과 군대를 모두 데리고 북조선에서 철수하라는 전문을 보낸 직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슈티코프앞으로 내려보냈다. 『평양.슈티코프대사앞.김일성에게 전달할 것. 모택동으로부터 중국공산당이 상황을 재검토,조선동지들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받았음.중국군의 불충분한 무기사정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결정을 내렸다고 함.본인은 모택동으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음.중국지도자들의 새 결정에 따라 어제 날짜로 보낸 북조선군을 북조선 북쪽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의 전문은 실행을 보류할 것. 1950년 10.13. 핀시(편집자 주:스탈린의 가명)』 중공군참전이 결정된 직후인 11월 2일 김일성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60 06 03sh 50년 11월 2일.스탈린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 ○군사고문단 잔류요청 『중국동지들과의 합의에 따라 인민군 병력이 향후 전투에 대비 만주영토로 이동배치됐음:9개 보병사단,1개 사관학교,1개 탱크연대,훈련비행연대 1개를 포함한 항공사단.아울러 6개 전투사단이 규모가 상향조정돼 조선영토에서의 전투준비에 임하고 있음.본인은 경애하는 핀시동지(스탈린의 가명)에게 위 병력의 훈련지도를 위해 소련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국방부 보고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쿠드리야초프 중장의 보고.11월 11일.대통령문서소.p.51) ⑴만주지방:제6군(제18·제68·제36 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씩.제7군(제13·제32·제37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제8군(제42·제45·제76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사관학교 병력 1만 5천명. ⑵조선지역:제1군(제8·제46·제47 보병사단.제17기계화사단).각 사단병력 1만명.제3군(제1·제3·제15 보병사단,제26보병여단,제105탱크사단,제10사단,제6여단).제5군(제1·제12·제38·제24 보병사단).그외 4개의 독립사단(제2·제4·제5·제7)등 총20여개의 사단. ⑶적의 후방에 잔류병력.제2군(제31보병사단,제27보병여단,그외 독립 해병여단). 종합하면 총병력 25만∼27만명.8개군.25개 보병사단,3개 보병여단,1개 탱크사단,1개 기계화사단,해병여단 1개,독립보병연대,1개 독립탱크연대,사관학교 1개등이다. 한편 4번째 시나리오인 향후전투준비편을 살펴보자. 50년 9월 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했다.(슈티코프가 김일성의 서신을 첨부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60 03 82sh). 『미제국주의자들은 이제 조선영토 전역을 점령해 이를 향후 극동침략의 군사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을 것임.독립·자유·국가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은 장기화되고 매우 어려워질 것 같음. 미군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조종사,탱크운전요원,통신전문가,기술장교를 시급히 훈련시켜야 함.이와관련,다음 사항을 요청함. ⑴소련에서 수학중인 북조선학생중 2백∼3백명을 선발해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것을 허락해줄 것. ⑵재소한인중에서 1천명의 탱크운전요원,조종사 2천명,통신요원 5백명,기술장교 5백명을 양성토록 허락해줄 것』 바로 이튿 날인 10월 10일 모스크바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차관을 찾아가 소련에서 유학중인 북조선학생 전원(남학생 6백69명,여학생 69명)을 모두 항공학교로 전학시킬 것을 건의했다.다만 통신전문대학에서 수학중인 학생들은 군사무선학교로 전학시켜달라고 요구했다.(그로미코차관과 주영하와의 대화록.외교문서). ○북,공군1개 연대 창설 한편 10월 20일 그로미코차관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주영하 대사를 통해 받은 요청과 슈티코프 대사가 보내온 요청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보고했다.(그로미코가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N255­GE.50년 10월 20일)즉 주대사는 항공학교와 무선학교 양쪽에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한 반면 슈티코프가 전문으로 보낸 요청서에는 항공학교 한곳만 적혀있다는 것이었다.그로미코차관은 주대사가 이 경우 슈티코프 대사의 보고내용을 따르라고 말해 그대로 시행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군사고문관 자하로프 장군은 모스크바로 보낸 전문을 통해 11월 1일자로 훈련시킨 29명의 조선조종사들로 공군1개 연대를 창설했다고 보고했다.그리고 11월 1일 이 연대소속 전투기 8대가 완주방면으로 최초출격,B­29기와 무스탕등 2대를 격추시켰다고 보고했다.야크­9기를 타고 출격한 조선조종사들은 귀환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자하로프 장군은 안동지역에 리 파르트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인 혼성사단이 창설됐다고 이 보고서에서 밝혔다.(자하로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N26 416.50년 11월 11일) 11월 13일 모스크바 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소련국방부의 E 쿠르두노프 국장서리를 찾아가 소련유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에게무선훈련을 가르치는 문제를 재차 요청했다.주대사는 이밖에도 재소한인들중에서 조종사,탱크운전요원,무선요원을 선발해 교육시키는 문제를 김일성이 이미 요청했음을 상기시켰다.김일성은 이 문제를 서둘러 실행에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대사는 전했다.(E 쿠르드노프 국방성국장서리와 주영하 북한대사의 대화록.50년 11월 13일) ○연해주서 조종사 훈련 11월 20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조선인 조종사 훈련계획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전문번호 N75 835)『1.조선유학생 2백∼3백명을 선발해 훈련시키는 계획은 만주 양지에 있는 조종사학교에서 시행될 예정임.소련교육관을 파견하겠음.2.폭격기 2개 연대에 배속될 조종사 훈련은 만주주둔 소련군 사단중 한곳에서 실시할 수 있음.훈련은 미그­15를 이용하고 훈련을 마친 뒤 미그­15를 조선조종사들에게 제공하겠음. 폭격기 조종사 훈련은 연해주에 있는 조종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이 편리함.TU­2 폭격기가 폭격연대에 제공될 것임』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완전철수 위기에까지 몰렸던 김일성정권은 중공군의 참전결정으로 이렇게 다시 반전의 계기를 마련,대반격에 나설 준비를 갖추어갔다. ◎새로 밝혀진 사실/북한군 9개사단 만주이동 첫 공식 확인/재소한인·유학생 군사훈련→참전 드러나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북한정권의 생존문제였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번 자료에서는 중요한 사실 한가지가 새로이 밝혀져있다.19 50년10월13일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서 『중국·소련으로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전문은 이 시점에서 소련이 북한영토를 완전히 포기하려하였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이 시점은 김일성과 북한정부가 평양을 막 탈출한 직후 시점이었다.전쟁을 일으키도록 동의,지원해 놓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한을 버리려 하였던 것이다.이는 스탈린식 이중전술이었다.이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및 소련의 대북한정책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석점을 재공해줄 것이다.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는 기존의 연구와 자료에서도 일부는밝혀졌던 것이지만 그것이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일성은 이러한 스탈린의 제의에 대해 못마땅해하였으며,그러면서도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중국측의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세 역전에 직면하여 산악으로 이동하여 빨치산 투쟁을 하려 계획하고 있었다.그러나 스탈린이 『지원불가­철수』를 통고하자 이를 이행하려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철수계획이 중국군의 참전결정으로 당일날 변경되었다는 점도 아주 흥미를 끄는 새로운 사실이다. 한편 50년11월 현재 만주와 북한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의 병력 분포현황도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실이다.만주지방으로 대규모의 북한군이 이동하였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이 자료는 공산측 자료를 통해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흥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또한 이번 회에는 재소한인을 훈련시켜 참전케한 사실도 새로이 밝혀져있다.
  • 북 「38선 퇴각」 전후(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1)

    ◎김일성,전황 불리해지자 “소군 파병” 급전/“연합군 북진 저지할 공군력 지원 절실” 호소/소 국방,“서울이남 모든 병력 신속 철수” 명령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밀리는 가운데 슈티코프 대사는 9월 30일 모스크바 본부에 대사관인원의 철수요청을 하기에 이른다.(N182sh.그로미코가 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미군기의 공습으로 북조선내 거의 모든 공장이 파괴됐음.이런 상황하에서 업무를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소련 군사고문단과 대사관 직원 거의 전부를 본국귀환토록 허락해주기 바람』 이에 대해 그로미코외상은 『평양에 불안감을 배가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철수는 불가하다』고 답했다고 보고서에 적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지도부는 마침내 소련의 직접개입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내용의 스탈린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준비했다.이 서한은 9월 29일자로 김일성·박헌영 공동명의로 작성돼 이튿 날인 9월 30일 슈티코프 대사에게 전달됐으며 슈티코프대사는 이를 같은 날 곧바로 스탈린에게 전문으로 보고했다.(19 50년 9월 30일 스탈린앞으로 보내는 슈티코프의 전문.전문번호 N60 03 08sh) ○박헌영과 공동명의 『스탈린 동지께. 조선노동당을 대신해 우리는 조선해방자이시고 전세계 노동자의 최고지도자이신 당신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당신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조선인민들에게 끊임없는 동정과 원조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서한을 통해 우리는 조선민족이 미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는 해방전쟁의 전선상황에 대해 보고드리고자 합니다.인천(제물포)지역에 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는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인민군들은 진격하는 적부대를 맞아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다.그러나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불리합니다.적의 공군은 약 1천대에 달하는 각종 비행기를 갖추고서 공중을 완전장악해 우리의 저항을 용납치 않습니다.전선에서는 적의 기갑부대들이 전투기 수백대의 엄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작전을 펴 우리 병사와 장비에 막대한 손실을 가하고 있습니다.동시에 적의 폭격기들은 철도,도로,전화·전신망,수송수단등 모든 시설을 자유자재로 파괴하고 있습니다.이로 인해 아군은 정상적인 보급이 안되고 제때 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런 어려움은 모든 전선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적이 서울을 완전장악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이 때문에 남조선 남부전선에서 싸우던 인민군은 북쪽에 있는 적에게 봉쇄당했습니다.남쪽전선에 있는 병력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탄약,무기,식량을 공급받지 못합니다.어떤 부대들은 부대간 통신도 안되고 적에게 포위됐습니다. ○보급로 끊겨 전선 마비 적들은 서울을 점령한 뒤 북으로 진격을 계속할 것이 분명합니다.따라서 우리는 이런 불리한 상황이 계속돼 미군침략자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으로 믿습니다.병력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적절한 공군력이 필요합니다.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훈련된 병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우리에게 계획을 실행에 옮길 여유를 주지 않고 신속한 작전으로 북조선으로 진격해온다면 그 때는 우리 힘으로 적을 막을수 없습니다.따라서 경애하는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지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다시말해 적이 38도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소련의 직접 무력원조가 정말 필요합니다. 만약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을 비롯한 여타 인민민주국가의 군대내에 국제의용군 부대창설을 지원해 주십시요.그리하여 우리의 투쟁에 무력지원을 해주도록 하십시요.위의 요청에 대해 당신의 지시를 기다립니다. 존경을 표하며.조선노동당중앙위. 김일성·박헌영』 이 서한이 보여주듯이 김일성은 애당초 소련군 파병을 요청했다.이 요청을 받은 스탈린이 여러 구실을 달아 소련군파병을 거부하고 대신 중공군을 보내라고 모택동을 설득한 것이다. ○“6개사단 창설 지시” 한편 소련당국은 9월 27∼30일자로 마트베트 장군이 연이어 보낸 전문에 대한 답신을 9월 30일 평양으로 보냈다.마트베트 장군의 전문은 김일성이 인민군총사령관과 국방상직은 겸직하고 남조선 사람들로 6개사단을 새로 만들고 싶으니 필요한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의 보고서였다.소련당국은 이 답신에서 김일성의 군직접통제를 위한 겸직과 남조선에서 데려온 사람들로 6개사단을 새로 만드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소련공산당정치국 결정.전문번호 NP78­118).아울러 6개 사단창설에 필요한 무기,탄약,기타장비는 10월 5∼20일 사이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이 전문은 중국 운전병을 파견해주도록 소련이 중국에 말해달라고 한 부탁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그런 부탁을 중국동지들에게 직접 하는 것은 무방하되 소련을 핑계로 되지는 못하게 하라』고 못박았다. 한편 이 시기에 소련은 전황이 크게 불리해짐에 따라 한반도 전략에 있어 몇가지 시나리오를 동시에 검토하기 시작했다.이 시나리오는 크게 5가지로 나누어진다.ⓛ북조선에 전술적인 충고와 지원을 계속하는 것 ②북조선의 소련대표부 철수 ③북조선공산정권과 북조선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방안 ⑤철수후 반격을 위해 북조선군을 훈련시키는 방법 ⑥중국이 전쟁에 개입토록 압력을 가하는 것.결국 마지막 ⑦의 방안이 채택되기는 했지만 당시 모스크바와 평양간 오간 전문들은 나머지 네가지 방안 모두 심각하게 논의됐음을 보여준다. 문서들을 근거로 이 방안들을 하나하나 재구성해본다. ⑧전술적 충고. 9월 28일 서울수복과 함께 소련은 서울 이남에 남아있던 인민군을 북으로 철수시키는 문제가 첫째 과제로 떠올랐다.이 전술적 충고에서 소련당정치국은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가능한한 신속하게 병력을 북으로 철수시킬 것을 군사고문단에 지시했다.50년 10월 2일 불가닌 국방장관은 평양의 마트베트 소련군사고문단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포위된 병력을 철수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거듭 귀하에게 강조했음.남쪽에 포위된 인민군을 북쪽으로 철수시키는 일을 최우선 임무로 간주할 것.남쪽에 남아있는 병력들,특히 지휘관들에게 그룹이든 개별적으로든 어떤 수를 쓰더라도 북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할 것.전선이 따로 없음.그들은 자기 영토에서 싸우는 것임.인민들도 그들을 지원하고 있음.중화기들도 미련없이 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신속히 북으로 철수할 것.야음을 이용하고 적이 아직 점령치 않은 지역을 이용해 철수할 것.어떻게든 포위망을 벗어나 가장 귀중한 자산인 병력만은 빼내올 것.이 임무수행을 위해 모든 방안을 동원할 것』 ○소 개입사실 탄로 우려 그러나 슈티코프 대사는 10월 5일 상황이 긴박하니 대사관직원 및 그 가족,군사고문단등 소련에서 파견된 인원 모두를 본국으로 철수시키자는 긴급전문을 본부에 타전했다.이에 대해 당정치국은 같은 날 답신전문을 채택 이튿 날 이를 슈티코프 대사에게 보냈다.소련대표부를 철수시키라는 내용이었다.(당정치국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N14 05sh) 『①소련 대표부 파견 인원과 고문단들을 귀국시키는 결정은 10월 5일자로 보낸 전문 N18 909에 의해 이미 지시한대로임.②재소한인들의 가족을 귀국시키는 문제는 상황에 따라 대사가 결정할 것.③공군기술자 가족과 군사고문단 가족은 조선영토에서 반드시 철수시킬것.④필요한 경우 재소한인을 포함,모든 소련시민은 소련과 중국영토로 철수시킨다는 대사의 제안에 동의함』소련군의 개입사실이 탄로날것을 두려워한 결정이었다. ◎새로 밝혀진 사실/소,국군38선 넘기전 「평양공관 철수」 거론/중국군 개입등 다섯가지 시나리오 검토 먼저 50년 9월30일 슈티코프가 모스크바 본부에 평양주재 소련대사관 인원의 철수를 요청하고 있는 사실은 이번 자료에서 처음 밝혀진 것이다.10월1일에 국군이 38선을 넘었음을 생각할 때 매우 빠른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미군의 공습 때문이었다.그러나 평양의 불안감을 이유로 그로미코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진 것이다.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면서 소련이 다섯가지의 한반도전략 시나리오를 검토했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이번에 밝혀진 많은 사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의 하나일 것이다.즉 여기에서 소련은 북한에 대한 지원의 계속,소련대표부의 철수,북한정권의 한반도에서의 철수,반격을 위한 북한군 훈련,중국의 개입압력 등의 다섯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음이 최초로 밝혀진 것이다.이는 앞으로 전체 내용이 공개된다면 한국전쟁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점을 규명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보인다.이번 자료에서 우선은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정보를 얻은 셈이다. 9월28일 유엔군의 서울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위기에 처하자 소련 국방상 불가닌이 직접 명령을 내려 가능한한 빨리 전원이 북한으로 돌아 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점도 처음 밝혀졌다.가장 귀중한 자산인 병력을 데려오기 위해 모든 방안을 동원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10월1일 국군이 38선을 넘자 소련은 자국 소련대사관 인원과 군사고문단들을 철수시킬 것을 지시하고 있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전쟁에는 소련 공산당이 최고위 수준에서 직접 개입하고 결정을 내려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회의 연재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이 「미소간의 전쟁」으로 넘어가면서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롯한 북한지도부는 소련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것 이상 군사적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됐다.박명림
  • 인천상륙작전 전후(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0)

    ◎스탈린,소 군사고문단에 “작전 실책” 추궁/“병력 이동­탱크사용 전술 결정적 과오” 격노/김일성,연합군 「38선 진격」 당황… “소 개입” 요청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지시와 지원하에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50년 9월 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은 평양주재 슈티코프대사와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단장 마트비예프장군 앞으로 보내는 지시문 채택을 승인했다.이 지시문은 스탈린이 직접 작성해 서명한 것이었다.여기에서 스탈린은 서울을 비롯,남동부전선에서 전세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중대한 작전변경을 결심했다. ○병력철수 작전 못마땅 스탈린은 작전부진의 주 책임을 소련군사고문단의 실책으로 몰아붙였다.다음은 이날 당 정치국 회의록에 기록된 지시문의 내용.(19 50년 9월7일.당 정치국회의록 N78.조선전쟁문제회의록p.1) 『최근 수일간 전선상황이 심각해졌음(서울과 동남부전선 모두).이는 전선사령부와 군단사령부,병력지휘부 특히 전술분야의 병력구성분야에서의 중대한 실책으로 야기됐음. 소련군사고문단들은 이들 실책에 보다 큰 책임이 있다.우리 고문단들은 4개 사단을 주전선에서 서울외곽으로 철수시키는데 있어 총사령관의 명령을 제때 충실하게 이행치 못했다.결정적인 시기에 이를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그 결과 7일을 허비해 미군이 서울 이남에서 큰 전술적 이득을 획득케 했다.만약 이들 사단의 철수가 제때 이루어졌더라면 서울 이남의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임』 스탈린은 이와함께 탱크사용 전술이 크게 잘못됐다는데 대해 격노했다. 『탱크를 투입할 때는 사전에 박격포공격을 통해 탱크가 진격할 길을 치워야 하는데 최근 이 원칙도 지키지 않고 탱크를 투입했다.이 때문에 우리 탱크들이 쉽게 적에게 파괴됐다』 스탈린은 또 미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에 크게 우려하며 군사고문단들이 이에대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슈티코프대사가 미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 프라우다신문 기자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매우 못마땅해하며 『이런 전략경험의 미숙,맹목성이 남부의 병력을 서울지역으로 이동시키는데 의문을 야기시켰다』고 질책했다.이와함께 스탈린은 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장군에게 인민군사령부가 병력을 동남부로부터 신속하고 질서있게 이동시켜 서울 동·남·북부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그는 병력이동시 작전수칙 8개항을 직접 지시했다. ○「8개 수칙」 직접지시 『①주력군 철수는 강력한 후방지원하에 시행할 것.경험많은 전투사령관들이 후방지휘를 책임질 것.대전차포부대,탱크가 후방방어를 지원할 것.②후방방어는 지뢰등을 이용한 장애물을 설치,이중삼중의 방어선을 만들 것.주력군 철수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후방방어는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수행돼야함.③주력사단은 분리이동이 아니라 전체가 이동해야 함.주력군 선두는 포,탱크부대를 앞세워 전투태세를 갖춘상태에서 나아가야 함.④탱크는 반드시 지상군과 함께 투입하되 사전에 포공격을 한 다음 투입할 것.⑤선두부대는 주력군이 도착하기 전 교량,교차로,주요도로 등을 점령해야 함.⑥철수시 정보수집과 부대간 통신유지에 특별히 신경을쓸 것.⑦방어선 구축시기에는 병력의 전선배치를 피할 것.공격작전 개시 전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함.⑧인민군사령부와 병력간 통신시 무선암호를 사용할 것.…중략…이미 지시한 바대로 군사고문단은 단 한명도 포로로 잡히지 않도록 방안을 강구할 것』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전세는 북한측에 더욱더 어렵게 전개됐다.스탈린은 김일성과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단의 긴급요청을 받고 마침내 소련공군 부대를 북한에 주둔시키기로 동의했다.즉각 관련부대에 대한 명령이 소련군지도부에 내려졌다. 50년 9월 21일바실리예프스키 원수가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 N11 72SS)『①평양방어 임무를 맡은 「야크­9」전투비행여단의 전속에 관해 보고함.이 여단의 전속배치를 위해 연해주 보로실료프시 인근에 주둔중인 147비행사단 전력에 의존할 것을 제의함.전투기의 이동배치시 안동­평양지구에서 공중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함.…중략… ②북조선내 비행단 정비인력이 부족함으로 인해 위에 언급한 여단의항공기술대대 1개를 안동 경유 철도를 이용,평양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음.동시에 북조선이 탄약,연료가 부족하다면 이를 평양에 공급할 것임.③북조선이 공군관제기술과 공중경보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장비를 공급해 주어야 함.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공군기들이 활주로에서 적군기의 기습공격을 당할 우려가 높음.…』 이틀 뒤인9월 23일 바실리예프스키 원수는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소련공군의 한국전 참전을 위한 최종계획을 보고했다. 바실리예프스키 장군은 이 보고서에서 『아군 조종사들이 평양부근에서 1차 교전만 가지면 미군기들에 의해 즉각 정체가 탄로날 것임.왜냐하면 공중전에서 조종사들간 무선교신이 러시아말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임』이라며 이 부분에 각별한 신경을 써줄 것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소련공군기의 참전태세가 완료된 즈음,북한군의 전세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스탈린으로부터 전황파악 임무를 부여받고 전선으로 간 마트베프 장군은 9월27일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 N60 0262sh) 『서부전선(서울)과 동남전선(부산 방향)의 전황이 인민군에게 매우 불리함.미군은 인민군의 주력을 포위격멸하기 위해 총공세를 펴고 있음.제물포에 상륙작전을 폈고 이곳으로부터 북쪽과 대구 북서방향으로 진격중임. ○김,6개사단 창설 계획 미군은 강력한 공군력의 지원을 엎고 인민군의 후방과 전방지역에 가공할 공습을 가하고 있음.미군은 수원 동쪽과 동남쪽 25∼30㎞까지 진격했음. 9월 25일 19:00,김일성은 서울일원과 북부전선과 동남방향의 제2군에게 최선을 다해 적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음.9월 26일 소련군고문단들이 김일성을 만났음.이 면담에서 김일성은 전시 총사령관과,전쟁상 직을 자신이 모두 맡겠다고 밝혔음.김일성은 특히 남쪽으로부터 동원가능한 최대인력을 데려와 이들로 6개 보병사단을 창설하겠다고 말했음.중국철도가 조선으로 오는 군수품 때문에 크게 붐기기 때문에 이들 6개 사단창설에 필요한 무기,탄약 수송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게 바람직하다고 했음.이 면담에서 우리는 김일성과 다음 사항에 합의했음.①효율적인 병력통제체제 확립.②물자,기술공급,수송,도로이용을 원활하게 할 것.③방어선 구축.북조선군은 운전병이 부족함.김일성이 중국측에 운전요원 1천5백명 보내달라고 요청할 것임.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슈티코프대사를 만나 전선상황을 브리핑했음. 슈티코프대사가 전한 바에 따르면 김은 다음과 같이 말했음. 마트베프 장군은 9월 30일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를 계속했다.『슈티코프는 김일성의 이같은 요청에 대해 자기는 현재 인민군의 정확한 위치,사정을 알지 못해 충고할 수는 없으나 38도선으로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지는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함. 김일성은 본인에게 적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음.본인은 이에 대해 그것은 아직 불투명하지만 38도선의 방어선 구축은 서둘러야 한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다시 한번 자력으로 통일을 이룩하고 싶다고 말하며 15개 사단을 창설해 전투를 계속하겠다고 강조했음.김일성은 그러나 만약 적이 38도선 넘어 진격해올 경우 새로운 사단창설은 물론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가 없다고 말했음. ○모에도 공군지원 요청 김일성은 이와 관련,스탈린동지께 서한을 보내 충고를 듣고 싶다고 말했음.본인은 이와 관련,들려줄 충고는 없을 것이라고 답했음.김일성은 이 서한에 공군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했음.최근 모택동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같은 부탁이 포함돼 있었음.본인 판단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매우 초조해 있음.당황하고 비관적이었음. 상황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음.서울이 함락됐음.38도선을 향해 신속히 진격하는 적을 상대로 효과적인 저항을 펼수있는 병력이 없음.정치상황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음』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김일성은 마침내 강경한 어조로 소련군의 직접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새로 밝혀진 사실/스탈린,9월초 “인천상륙작전 대비” 지시/「소 공군 투입계획」 중 공군 참전에 확정 9월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직접 지시문을 채택하였다는 점은 소련이 한국전쟁을 지도부 전체 수준에서 논의하였음을 보여준다.즉 그것은 이미 미국과 소련의 세계전쟁이 되어있었던 것이다.이날의 지시문에서는 작전 부재의 책임을 소련군사고문단에게 직접 묻고있다.서울부근에서 지체한 것도 소련고문단의 책임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심지어 사령부와 예하부대와의 협조 및 통신 연락미비 탱크사용전술에 있어서의 오류 등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한 점까지 직접 지시하고 있다.다른 한가지 새로운 점은 스탈린이 이미 9월초에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서울부근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라고까지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거대한 전쟁을 여러 번 치렀던 스탈린으로서는,특히 2차세계대전을 미국과 함께 치렀던 그로서는 이미 미국의 고전적인 상륙전술을 깊이 인지하고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공산진영은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을 사전에 거의 알고도 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세번째로 소련공군의 참전방침이 이미 중국군의 참전 이전인 9월에 결정되었다는 점이다.이 역시 아주 새로운 사실로서 지금까지 소련공군참전결정은 10월에 중국군의 참전교섭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통설의 부정인 것이다.또한 흥미있게도 조종사들에 의한 러시아어무선교신의 위험성을 이미 지적하고있다는 사실이다.이는 실제로 소련공군이 참전한 후 위장을 위해 중국어나 한국어를 사용하였던 점에 비추어 그러한 위장의 계획이 일찍부터 세워졌음을 알게해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 “좌익에 사회혼란 죄과 물어야 안정된다”/건국이념과 정통성

    ◎이철승 민자회공동대표 강연 우리사회의 보수우익단체 가운데 하나인 「자유민주민족회의」가 주최한 광복50주년기념 대강연회가 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다음은 이 강연회에서 「자민회」의 공동대표인 이철승씨가 「건국이념과 정통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강연을 요약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정통성은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운동에서 그 뿌리를 두었다.그 정신은 반공반탁 투쟁과 대한민국 수립으로 이어졌고 스탈린의 꼭두각시인 김일성의 6·25 남침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한 호국영령들의 희생으로 승화되었다. 그런데 이 땅에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이 뿌리를 내리고 그 선대들의 거룩한 희생의 혜택으로 국민들이 풍요를 구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과거를 잊기 시작했다.김일성사관의 앞잡이들은 좌익수정주의사관의 전도사 부르스 커밍스와 같은 사이비 학자들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내세워가며 우리의 현대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국내 공산당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 저질렀던 제주도 반란·대구폭동·여수 순천 반란사건 등이 민중운동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6·25 남침을 북침이라고 호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우리나라 건국이념의 척추를 부러뜨릴지도 모르는 사태로까지 치닫고 있는 일차적 책임은 후대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시키지 못한 정부와 기성세대들에게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또한 이와 같은 사태가 역대정권의 독재성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할수 없다.그 독재정권하에 반국가적 좌익을 포함한 모든 반정권 세력들이 규합했다.북의 대남 통일전선 전술과 수많은 간첩침투로 지하당인 노동당을 조직했고 과거 보도연맹등의 세력과 그 가족들을 결속시켜 우리 상·하층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다행히 그들 중의 몇몇은 외형으로는 제거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학계·방송·언론계·노동계·문화계에 모두 침투했다.역사교과서 개편준거안 사건은 막을 수 있었지만 또다시 「카프」작가들의 망령이 되살아나 「태백산맥」「남부군」「여명의 눈동자」「모래시계」등과 같은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문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족진영에서는 「태백산맥」을 1년전에 고발했다.그러나 검찰은 그 책이 수백만의 독자를 확보한 지가 이미 오래라는 이유로 그 해독성을 인정하면서도 손을 못대고 있다.최근 김숙희 전교육부장관의 『6·25는 명분 없는 전쟁,그리고 월남파병은 용병이었다』라는 망언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즉각 북한 노동신문이 김 전장관을 두둔하는 대대적인 선전 공세를 편 것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우리는 심각히 분석해 보아야 한다. 최근 다행히 일부 유력일간지들이 소련의 6·25의 내막이란 비밀문서와 평양주재 초대 소련대사였던 스티코프의 비망록을 입수해서 그 내용을 폭로했다.스티코프는 19 46년9월 중순부터 대구폭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2차에 걸쳐 일화 총 5백만엔을 박헌영 등에게 지원했고 폭동이 끝난 후에도 소련화로 1백22만루블을 빨치산에게 지원한 것으로 밝혀졌다.현재까지 6·25남침이나 대구폭동이 민중의 자생적 항쟁이었다는 좌익의 주장은 거짓으로 판명된 것이다. 소련의 강요로백남운의 신민당,여운형의 건민당,박헌영의 공산당이 합쳐서 남로당을 만들어 남한의 폭력 적화를 총지휘 한 것도 드러났다.이제 부르스 커밍스 등의 수정사관을 신봉하던 국내 혁신진보의 탈을 쓴 정치인이나 학자및 좌익이론가들을 그들의 은신처로부터 끌어내어 주사파를 양산하고 학원과 노동계·문화 사회를 혼란케한 죄과에 대해서 책임을 물어야 우리 사회가 안정이 될수 있다. 지금 탈냉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남북관계는 더 험악한 냉전속으로 빠져들고 있다.김일성이 남긴 유언중에는 『광복 50주년을 통일의 원년으로 서울에서 경축하자』는 장담을 하다 죽었다.북쪽은 지금 우리 학생및 노동운동권을 총동원하고 선동해서 그 유언을 실천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있으며 금년에는 그와 같은 책동이 극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여기서 흥청망청하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남북이 함께 망하고 우리 한반도는 19세기말과 같이 또 다시 외세의 간섭을 받는 식민지적인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
  • 전쟁초기의 작전 양상(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9)

    ◎스탈린이 사실상 남침작전 총지휘/침략개시일 승인·김일성에 일일이 작전지시/“미 군사개입 공개항의 하라” 평양에 비밀전문 6월22일에는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앞으로 암호전문의 해독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이후 일체의 암호전문 해독을 금지한다는 모스크바의 지시가 하달됐다.그뒤 평양대사관과 본부 외무부간 전문교신은 연말까지 중단됐다.대신 크렘린은 전시통신을 전담하는 소련군총참모부 제8국을 통해 평양대사관과의 교신을 계속했다.이 교신내용은 대통령문서소에 보관돼 있다. 전쟁개시와 함께 스탈린은 사실상 작전의 총지휘권을 행사했다.작전개시일을 승인했고 김일성의 작전명령에 일일이 간섭했다.중국·북한군 사령부에 작전지시를 일일이 내려보내기도 했다.그러나 전쟁초기 이러한 일사불란한 협력관계는 미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바뀌며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50년 7월1일 스탈린은 소련군 총참모부 제8국을 통해 평양의 소련대사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34681sh). ○“계속 진격해야” 독려 『① 귀하는북조선군당국이 갖고 있는 계획에 관해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전진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진을 일단 멈추기로 결정했는가.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두말할 것없이 계속 진격해야한다.남조선 해방이 앞당겨질수록 개입(미국의 개입을 지칭)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 ② 미군기들이 북조선 영토를 공습하는데 대해 북조선 지도자들의 반응을 보고하라.이 공습으로 겁을 먹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감을 유지하고 있는가. ③ 북조선 지도자들이 미군의 공습과 군사개입에 대해 공개항의할 의사는 없는가.우리가 생각하기에 공개항의를 해야한다. ④ 북조선이 탄약과 기타 군수품들을 공급해달라고 한 요청에 대해 7월10일까지 이를 완전히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알릴 것』 이튿날인 7월2일 슈티코프대사는 스탈린앞으로 다음과 같이 북한지도부의 분위기를 전했다.『6월28일 서울을 함락함으로써 북조선지도부의 사기는 매우 높음.그러나 미군기의 공습이 잦아지고 라디오방송을 이용한 미국의 북조선에 대한 악선전이 가열되면서 북조선지도부의 분위기가 다소 악화되고 있음』 일부 지역에서는 최종 승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일부 「해방지역」에서는 사태를 관망하려는 움직임이 주민들 사이에 일고 있다고 이 전문은 보고했다.슈티코프대사는 김일성,박헌영이 미군개입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인식하고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혔다.김일성은 위기타개를 위해 보병부대,탱크,해군부대의 추가창설 계획을 밝히고 군사총동원령을 발동시킬 계획이라며 슈티코프의 의견을 물었다. 이와함께 김두봉,홍명희는 인민군만으로는 미군과 맞서 싸우기 힘들다며 조심스레 소련의 입장을 타진했다.슈티코프대사는 이같은 입장타진은 김일성의 개인비서 한사람이 소련대사관을 찾아와 전달했다고 전문에서 밝혔다. 7월4일 슈티코프소련대사는 역시 총참모부 8참모부를 통해 스탈린앞으로 7월3일 김일성,박헌영과의 면담결과를 보고했다(전문번호 N405840). 『김일성은 군사작전이 너무 느리게 진행된다고 불평했음.특히 중부전선에서 너무 느리다고 했음.도하작전은 민족보위상이 현장에서 직접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수행이 제대로 안됐다고 지적.김일성은 자기가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자탄했음.김일성은 전선과 해방지구 모두 사정이 심각하다고 강조.그는 미군 상륙부대가 북조선의 항구나 공정낙하산부대를 이용해 북조선군 후방에 침투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강조.김은 이같은 가능성에 대비키 위해 많은 양의 추가 무기지원을 요청.2개 사단,12개 해병대대,해양경찰대 수개부대를 무장시킬 양의 무기임.김은 북조선지역의 철도역들이 미군공습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무기들을 만주를 경유,안동­신의주­평양으로 신속히 보내줄 것을 요청.김은 북조선이 예비연대와 탱크여단 2개의 창설을 시작했다며 무기와 탱크가 필요하다고 했음.김일성은 한 보좌관에게 이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작전통제 능률을 높일 방안을 물었음.김은 앞으로 미군을 상대로 싸워야한다며 북조선군의 지휘능력을 강화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그는 총참모부를 전투병력에 보다 가까이 옮겨가기 위해 작전통제와 지휘조직을 도와줄 소련 군사고문관 1명의 파견을 요청했음』 슈티코프대사는 평양주재 소련군사고문단장인 바실리예프장군과 공동으로 다음사항을 김일성에게 건의한 것으로 이 전문은 밝히고 있다.『① 총사령관 참모총장 군사위원회 총참모장으로 구성되는 군사평의회가 이끄는 2개의 군사그룹을 창설할 것.각 군사그룹은 휘하에 4∼6개의 하급부대를 둘 것.② 전선사령관 총참모장 전선군사평의회가 이끄는 전선사령부를 창설할 것.이 전선사령부는 총참모부 책임하에 구성.③ 민족보위성은 이미 소규모이기 때문에 그대로 존속시킬 것.민보성은 전투병력에(식량,연료,탄약등)모든 필요한 보급품을 공급하는 외에 예비병력,신병 훈련,공화국 북부에 상륙방어부대를 창설하는 임무를 맡는다.④ 김일성을 인민군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무기 대량지원 요청 김일성은 슈티코프대사의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두사람은 군병력 조직개편이 전선의 작전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합의했다. 슈티코프대사는 마지막으로 『병력편성 분야의 소련군사고문관 2명을 파견해줄 것(1명은 편성사령관 고문관,1명은 포병사령관 고문관).소련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장군과 전선사령부에 파견된 소련군장교들이 서울로 함께 이동하는 것을 허가해 줄 것을 요망함』이라는 것으로 이 전문을 끝냈다. 8월28일 스탈린은 슈티코프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격려의 뜻을 담은 전문을 전달했다.그러나 이 전문의 진짜의도는 김일성에게 새로운 작전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전문번호 N75021,소련군총참모부 제8참모부). 『①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중앙위는 김일성동지와 그의 동료들이 남조선인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위대한 투쟁을 벌이는데 찬사를 보낸다.김일성동지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다.소련공산당 중앙위는 조만간 침략자들이 치욕속에 조선반도에서 쫓겨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② 김일성동지는 외세개입자들과 맞서 싸우는 이 전쟁에서 항상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고 당황해선 안된다.일부에서 진격이 지연되고 국지적인 패배를 겪는다고 낙담해선 안된다.이런 전쟁에선 누구도 계속 승리만 거둘수는 없다.러시아 내전 때는 더 심했고 독일과의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조선인민들이 거둔 성공은 바로 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들이 됐고 제국주의의 멍에를 벗으려는 아시아 해방운동의 기치아래 들게됐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지금부터 모든 피착취 인민의 군대들은 조선인민들로부터 미국과 기타 제국주의자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해야한다는 사실을 배울 것이다.김일성동지는 조선이 이제 혼자가 아니라 동맹국들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동맹국들이 당신을 도와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1919년 영·불·미 외세와의 전쟁당시 러시아는 지금 조선동지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소 군사고문 파견 전문 ③ 김일성동지에게 공군력을 산개시키지 말고 전선에 집중시킬 것을 충고한다.전선에서 공격은 반드시 적진에 결정적인 공습을 가하는 것과 함께 시작돼야한다.인민군 전투기들은 적기로부터 인민군을 방호할 수 있는 전투력을 보유해야 한다.필요시 우리가 폭격기,전투기를 추가로 보내줄 수 있다』 8월29일 슈티코프대사로부터 이 편지를 전달받은 김일성은 크게 감동,이튿날 노동당중앙위 정치국회의를 소집해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식답장을 채택했다.『우리의 경애하는 교사이신 스탈린동지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구절로 이어지는 이 답장은 스탈린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감사의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 ◎새로 밝혀진 사실/김일성 “전진속도 느리다” 자책/서울 제한점령설 허구 입증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의 상황을 다룬 이번 9회에는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들어있다.가장 중요한 사실은 스탈린이 전쟁의 결정과정보다 전쟁의 전개과정에 훨씬 더 깊숙이 개입,『남조선해방이 앞당겨질수록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하는등 사실상 초전부터 스탈린과 김일성의 공동의 전쟁이었음이 이번 문서에서 확인된 것이다. 두번째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는 항상 소련의 의사를 문의하고 소련은 그에 상세히 답변하는가 하면,어떤 것은 문의에 앞서 미리 지시하는등 이번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1950년 11월 공군이 개입하기 이전부터 소련이 이 전쟁에얼마나 깊숙이 개입하였는지 확인하게 된다. 세번째는 김일성은 초기에 전진속도가 너무 느린것에 대해 심각하게 불만,자책하고 있음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이는 김일성이 서울까지만 점령하려했다는 제한전쟁설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번째는 김일성이 이미 전쟁 초기부터 미군의 상륙부대나 공정부대가 북한후방으로 침투할 위험이 높다고 인식,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다섯번째는 스탈린·김일성과 같은 고위수준에서의 전쟁수행방식의 공동결정 뿐만 아니라 현지전쟁수행에서도 소련과 북한은 긴밀하게 협의,공동수행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끝으로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이 곤경에 처했을때 스탈린은 오히려 『폭격기와 전투기를 추가로 보내줄 수 있다』고까지 말하면서 고무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자료를 통해서 밝혀졌다.
  • 「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 시리즈를 읽고

    ◎한국전 배경·전개과정 밝혀냈다/러 강도 자료보다 다양… 역사 재구성 기여 기대 우리는 왜 지나간 역사적 사건의 자료를 발굴하고 그것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가?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여 주는가? 최근에 「서울신문」에 집중 연재되고 있는 한국전쟁관련 구소련자료를 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거듭 던지게 된다.이 자료들은 일부는 과거에 알려진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 우리에게 더욱더 새롭게 역사의 의미를 반추하게 만든다. 특히 19 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약 반세기 전의 사건에 대해 우리는 왜 아직도 관심을 가지고 이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노력하는가?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첫번째는 이 사건의 크기 때문이다.이 사건은 의심의 여지없이 한국현대사 최대의 사건이었고 또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다.두번째는 그 영향의 크기 때문이다.이 사건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분단상태를 지속하고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세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진실이 아직도 완벽하게 밝혀져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바로 이점에서 이번 자료의 발굴은 의미를 지닌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의 추적은 그 사건을 기록한 자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자료는 진실의 보관자이자 전달자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사실은,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자료조차도 반드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거기에는 기록자의 주관이 들어가며 공개될 때에도 역시 정치적 판단이 게재된다. 이점에서 냉전의 해체는 현실의 변화 뿐만 아니라 역사해석에서도 하나의 전환점이 되지않을 수 없었다.그것은 두가지 점에서 그러하였는데 하나는 그것이 역사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방대한 구소련의 자료들이 공개됨으로써 냉전시기의 사태들을 재해석 하게하였다는 점이다. 세계의 많은 학자와 대학,연구기관들이 냉전의 해체이후 구소련의 자료를 발굴하려 노력하고 있고 이 자료들은 냉전시대 현대세계사의 비밀을 밝혀줄 『마지막 보고』로 불렸다.우리에게 구소련의 자료들은 특히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그것은 분단,북한정권수립,전쟁 등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 고비들이 스탈린시기 소련의 정책과 밀접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분단과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의 정책은 이 두 사건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측면이 아닐 수 없었다.사실상 분단과 초기 북한정권수립에 대해서는 그동안 국내외 학자와 언론,여러 기관들의 노력으로 상당부분이 밝혀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아직도 한국전쟁에 관해서는 다른 시기에 비해 소련부분의 역사적 사실이 훨씬 덜 알려져 있었다.이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는 지난해 김영삼 대통령이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 거의 전부였다. 이번에 「서울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자료들은 앞의 옐친문서와 몇가지 중요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첫번째는 우선 양적인 측면이다.지난번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된 문서의 양은 기본문헌 100건 279페이지와 보충문헌 116건 269페이지였다.그러나 이번 발굴,공개된 자료는 950건에 3천여 쪽에 달한다.약 6배에 달하는 양인 것이다.우리는 멀지않은 시기에 이 문건 전부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그럴 경우 이는 한국전쟁과 초기 북한,소련의 대한정책의 규명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자료의 출처이다.지난번에 대통령에게 전달된 문서들은 러시아 외무성문서 중심이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외무성문서뿐만 아니라 대통령문서보관소,구소련공산당중앙위,국방부문서가 포함되어 있어 훨씬 더 다양한 자료를 담고 있다. 세번째는 자료발굴의 주체이다.이점이야말로 앞의 두가지 차이보다 더 큰 차이일 것이다.지난번 대통령에게 전달된 문서들은 전부 러시아측이 선정하여 전달한 것이었다.우리는 러시아가 스스로 선정한 자료만을 전달하였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단정하지는 않지만,그러나 자료의 공개는 공개자의 판단에 크게 좌우되지 않을 수 없다.지난번 자료는 이점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외교문서는 전달하였지만 정작 중요한 내부정보문서와 정책결정·내부토론문서는 거의 전달하지 않았다.이번 「서울신문」의 자료도 후자를 전부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점에 관한한 옐친이 전달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이를테면 이 두 문서는 전쟁의 결정과 전개과정에 있어 스탈린의 역할에 대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 자료를 보면서 누가 방화자냐,누가 더 주도적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이제 접을 때가 되었다고 본다.그점은 사실 더이상 규명치 않아도 될만큼 분명해진 것이기 때문이다.필자가 판단하기에 스탈린과 모택동·김일성은 각기 제각각의 국가적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이점을 망각하면 우리는 영원히 소모적인 논쟁에 빠질 뿐이다.김일성·박헌영이 주도하였다고 해서 마치 스탈린·모택동의 역할과 책임이 축소되거나 면제되는듯한 논의는 전혀 옳은 것이 아니다.그들 역시 자기 국가의 관점에서 동의를 하고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워싱턴에 보관되어있는 북한의 방대한 당시 자료들,우리의 자료들,그리고 이미 대부분이 공개된 미국의 자료,아직 거의 공개되지 않고 있는 중국의 자료와 함께 이번의 러시아자료를 총체적으로 종합 검토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시대에 가장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던 한국전쟁에 대해 그 완벽한 재구성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이번 자료가 그에 큰 기여를 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 모­김 북경 비밀회담(모스크바 새 증언:7)

    ◎모택동,김일성에 남침 세부작전 일일이 지도/모택동/“평화통일 불가능… 무력침공 밖에 없다”/미 개입땐 중국 지원병력 파병 재확인 □모 충고사항 장병에 구체적 임무 부여 모든 작전 신속하게 전개 대도시는 우회공격 할 것 적의 군사력 파괴에 주력 스탈린이 모택동앞으로 보낸 전문은 스탈린·김일성 두사람이 무력남침을 결행키로 합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소련군총참모부 제8국·전문번호N8600·1950년 5월14일). 『모택동 동지앞.조선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리포프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국제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선인들의 통일제의에 동의했음.이와 함께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동지들이 공동으로 내려야 한다는 데도 합의했음.중국동지들이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최종결정은 새로운 논의가 있을 때까지 미루어야 함.조선동지들이 이번 회담의 상세한 내용을 귀하에게 통보할 것임.­필리포프』 ○스팔린 가명 사용 스탈린은 김일성과 남침계획을 확정지은 뒤 이같이 모택동에게 뒤늦게 통보,그의 체면을 살려 주는 체하면서 개전의공범으로 만들려고 했다.재미있는 것은 남침결정 사실을 문서화한 이 전문에서부터 스탈린은 「필리포프」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이후 그는 필리포프외에 「환시」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이보다 이틀전인 5월12일 평양의 슈티코프대사는 본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전문을 띄웠다.『5월12일 김일성의 요청으로 그와 박헌영을 면담.김일성은 북경주재 대사 이주연이 김일성의 중국방문을 주재로 모택동·주은래를 만났다고 했음.주은래는 이 방문을 공식방문으로 하자고 주장.반면 모택동은 언제 북조선이 통일작전을 개시할 계획이냐고 묻고는 답도 기다리지 않고,군사작전을 곧바로 시작할 계획이라면 비공식 방문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함. 모택동은 또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며 무력에 의한 통일밖에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함.미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해서도 모택동은 미국이 그런 작은 나라에서 3차세계대전을 시작할 리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함.김일성은 이에 덧붙여 이주연대사는 자기와 모택동간의 회담을 논의할 권한이없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그래서 그를 소환해 견책한 뒤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음.5월10일 이주연대사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모택동을 만나 정식으로 김일성의 접견승인을 받았다고 함.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5월13일 아침 출발예정임.김일성은 그때까지 자신이 타고 갈 비행기를 준비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음.이에 대해 본인은 비행기는 이미 준비돼 있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문제를 당중앙위에서 토의하지 않고 김책(정치국원)과만 의논했다고 함』 여기서 엿볼 수 있듯이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을 추진하면서 스탈린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크게 신경을 썼다.이주연 대사를 소환해 견책한 것도 스탈린을 의식한 쇼였다.모택동과의 회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다룰 의제를 다음과 같이 슈티코프 대사에게 통보했다.다음은 슈티코프가 보낸 보고전문의 계속.『김일성은 모택동과 다음의 문제들을 토의할 계획이라고 함. 1,무력통일 의향을 알리고 모스크바 회담 결과를 통보. 2,조만간 북조선과 중국간 무역협정체결과 통일 후 양국간 우호조약체결을 희망.3,중국공산당과 북조선노동당 중앙위간 교류문제.4,북조선 수력발전소 건설,중국거주 조선인문제등 상호관심사 논의』 이와 함께 김일성은 중국거주 조선인군 부대가 갖고 있는 일본제 및 미제 무기에 쓸 탄약공급을 중국측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총참모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 김일성은 이 물건들은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전군이 사용할 3벌 분량의 탄약이 이미 비축돼 있다는 것이었다.김일성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이미 필요한 원조는 다 받기로 합의됐기 대문에 실제로 모택동으로부터 원조받을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5월13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예정대로 북경으로 날아갔다.도착 당일 저녁늦게 모택동과의 1차회담이 이루어졌다.그리고 주은래는 로신 북경주재 소련대사를 불러 회담결과를 설명했고 로신대사는 이를 곧바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다음은 로신대사가 보낸 5월13일자 전문. 『1,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에 도착했음.2,조선지도자들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상황이 바뀌어 북조선이 작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사항을 설명했음.이 문제는 조선지도자들과 중국,특히 모택동과 의논해야 된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도 전달됐음.3,조선지도자들은 이틀간 북경체류예정임.…중략…모택동 동지는 이 문제에 관해 필리포프 동지가 직접 설명해주기를 원함.중국동지들은 신속한 답을 원함』 ○개전땐 승리 보장 이튿날인 5월 14일 로신대사는 스탈린·김일성의 모스크바 회담결과에 대해 본국에서 보낸 전문을 받아 모택동에게 전달했다.그리고 로신 대사는 같은 날 모택동의 반응을 본국으로 타전했다.이 전문내용에 의하면 모택동은 신속한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지하며 승리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북한지도부가 내린 현 남북한 정세와 남북한 군사력 균형에 대한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모는 또한 통일 뒤 중소조약과 유사한 우호동맹조약 및 상호원조조약을 북조선과 체결할 것을 북조선지도자들에게 제의했다고 밝혔다.물론 이같은 조약체결은 스탈린동지의 의견을 들은 뒤에 추진할 것임도 덧붙였다. 5월15일 2차회담에서 모택동은 김일성·박헌영과 무력남침에 대해 상세한 입장교환을 했다.회담 뒤 로신대사는 양측(주은래·박헌영)으로부터 별도 브리핑을 통해 회담결과를 전해 들었다.회담결과의 대한 양측의 설명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다음 사항은 양측 브리핑내용이 일치한다.김일성이 먼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합의한 남조선 침공계획을 모에게 설명했다.즉 1단계 준비 및 병력집중배치.2단계 북조선이 수차례 평화통일 공세를 펼칠 것.3단계 남측이 이 평화통일제의를 거부하는 즉시 군사작전 개시.모택동은 이 3단계 작전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모택동은 작전과 관련,몇가지 중요한 충고를 덧붙였다.우선 모든 병사와 지휘관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할 것.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돼야 하며 대도시는 우회할 것.대도시 점령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됨.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적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데 두어야 함.이미 알려진 대로 후일 김일성은 모택동의 이 「귀중한」 충고를 제대로따르지 않아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3단계 계획」 동의 그 다음 모택동은 일본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물었고 김일성은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답했다.다만 미국이 2만∼3만의 일본군을 파병할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는다고 김일성은 말했다.하지만 그 경우 북조선군은 더욱 열심히 싸울 것이기 때문에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자신했다. 주은래가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에 따르면 이 말을 듣고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일본군의 개입은 전쟁을 장기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진짜 개입위험이 큰 쪽은 일본보다 미국이라고 모택동은 말했다.그러나 김일성은 이같은 지적에 대해 『미국은 극동에 군사적 개입의사가 없다』고 미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미국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중국에서 물러 났으며 한국에서도 이같이 신중한 입장을 지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후일 전쟁발발 직후인 50년 7월2일에도 주은래는 로신 대사에게 미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같은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반면 김일성은 끝내 미국의개입가능성을 과소 평가했다. 박헌영이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은 주은래의 것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다음은 로신이 본부에 보고한 박헌영의 브리핑부분.『50년 5월16일.박헌영의 발언.모택동은 일본군의 개입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음.미군개입시 중국이 병력을 보내 북조선을 지원하겠음.모택동은 또 소련은 미국과 38도선 분할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했음.반면 중국은 그같은 의무규정에 얽매이지 않아 북조선에 대한 지원을 쉽게 확대할수 있음』 5월15일 저녁 공식일정을 끝낸 김일성 일행을 위해 모택동은 만찬을 베풀었다.만찬시작 전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이렇게 말했다.『모택동 동지와의 회담은 매우 순조로웠다.모동지는 해방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모동지는 모스크바에서 있은 스탈린동지와 본인사이의 합의사항을 모두 지지했다』 이튿날 5월16일 스탈린은 모택동앞으로 전문을 보내 통일 뒤 중국·북한간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우여곡절끝에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인간 무력남침에 대한 합의는 이렇게 마무리됐다.이제 남은 것은 공격개시의 택일뿐이었다.
  • 1948년 남북연석회의(새로쓰는 한국현대사:20)

    ◎김구 도착전 개최… 북서 분위기 일방적 주도/명목뿐인 대표 내세워 각본대로 인공수립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용운(조사부 〃)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는 19 48년 4월 19일 하오6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막을 올렸다.김구는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아침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군중의 저지에 부딪쳤다.그의 거처인 경교장 뜰에 새벽부터 몰려든 학생·청년들은 김구에게 『북행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김구는 몸소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냈다.『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칠십여년(72살)이 되었다.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이대로 가면 조선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절절하게 호소했다.그러나 군중은 끝까지 김구의 평양행을 만류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뒷담을 넘어 북행길에 나섰다. ○김규식은 참석 망설여 김구의 북행에는 아들 김신과 비서 선우진이 동행했다.김구 일행은 자동차편으로 개성,여현(지금의 판문점)을 거쳐 밤늦게 평양에 닿았다.한편 김규식은 이틀 늦은 21일 서울을 떠나 다음 날 새벽 평양에서 합류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이들이 민족통일을 이루고,또 민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어렵게 평양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하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는 시각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구의 경우 당시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당시 그가 북행을 결심할 무렵 한국문제는 유엔 결의에 의해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쪽으로 굳어져 있었다.이는 이승만의 의도이기도 했다.이에따라 이승만은 그 세력을 급속히 넓혀간 반면 경쟁관계에 있던 김구는 궁지에 몰리는 판이었다.결국 김구는 남북협상을 하나의 정치적 돌파구로 여겨 모험을 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비해 김규식은 끝까지 연석회의 참석을 망설인 것으로 전해진다.그는 나름대로 남북협상의 한계를 예상했지만 자신이 그동안 주도해 온 남쪽에서의 좌우합작이라는 명분의연장선상에서 부득이 평양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구가 도착하기 몇시간 전인 19일 하오6시에 남북연석회의는 시작됐다.개회사에 이어 김일성이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하고 잇따라 박헌영·백남운·허 헌이 등단해 연설하는등 회의는 북쪽의 일방적인 주도 분위기로 이어졌다.마지막 날인 4월 23일 연석회의는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미·소)양군 철퇴 요청서」「전조선 동포에게 격함」등 여러가지 결정서·성명서가 채택됐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의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백95명이 참가했다고 공식 발표됐다.남쪽에서 참가한 단체는 41개,주요인사는 김구·조소앙·엄항섭·조완구(이상 한독당),김규식·여운형·원세훈(이상 민족자주연맹),그리고 홍명희 민주독립당 당수등 50여명으로 파악됐다. 연석회의에 이어 26∼30일에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남북 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이 때 비로소 김구·김규식은 북쪽의 김일성·김두봉과 합동으로,또는 개별적으로 여러차례 회합을 가졌다.이 네명이 실질적으로 합의한 사항은 30일 공동성명서 형태로 발표됐다.4개 항의 내용은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 ②외국군대 철거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확인 ③조선인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④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등이다.특히 각 정당은 성명서 말미에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와 이 선거로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지지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해주서 2차모임 갖자 남한 대표들은 북에 잔류를 희망한 홍명희 등 70명을 남겨두고 5월 4일 귀경했다.남북연석회의는 대단한 성과나 거둔 듯이 보였다.김구·김규식은 5월 6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단선 반대」입장을 재천명했다.5월 8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주도로 총파업이 단행됐고 각급 학교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의사에 상관없이 총선거는 무난히 치러졌다.「총선 거부」로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서 밀려난 남한의 남북협상파들은 급격히 몰락한다.「5·10 선거」가 실시된 뒤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파 정치인이나 정당들은 「단독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다시금 발표하지만 이미 메아리없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한편 평양에서는 5월 25∼26일 「남북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총선저지가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소집을 결정한다.6월 11일 북한측은 남쪽의 남북협상파 인사,정당에게 6월 23일 해주에서 제2차 회의를 갖자고 전격 제의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등 초청을 받은 인사들은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첫째 그동안 남한정국이 변해 공개적으로 해주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비공식으로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는 남한 당국의 법률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돼 있었다.결국 김구·김규식은 불참을 통고했으며 북조선노동당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대회를 평양에서 강행했다.이 회의는 남한에서의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통일정부로서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남로당 지하선거 실시이 해주회의에서는 김구·김규식을 이용해 「5·10선거」를 방해하려 한 북한의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자신들의 참여없이 이처럼 엄청난 결정을 내린데 대해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쪽의 남북협상파 정치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하지만 이미 「쏘아버린 화살」꼴이 됐다. 이후 남북협상의 흐름은 철저히 북한측 의도대로 잡혀갔다.명목상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8월 21일 해주에서 열렸다.이 자리에는 남로당이 지하선거에서 선출된 이른바 「남한 대표」1천여명이 나왔다.거의가 남쪽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일부 정당인사가 구색용으로 들어있었다.이들은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울 때 남한 주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선전한 것은 물론이다. 남북협상의 기운은 이로써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남북협상의 전과정을 돌아보면 남쪽의 정치인들이 북한측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김일성의 김구·김규식 초청­연석회의 개최­5·10선거 반대 결의­제2차 대회의인민공화국 수립 결정­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등의 계획된 수순을 밟아나갔던 것이다.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의 남북협상파들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기회는 한번도 얻어내지 못했다.모든 것은 북한쪽의 뜻대로 진행됐을 뿐이었다. ◎UNTCOK 보고서/김규식 등 남대표 불러 융숭한 대접/“남에 전기공급”약속후 1주뒤 끊어 북한은 1948년 4월 19∼25일까지 열린 평양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선전기회로 철저하게 활용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평양 연락장교 보고서」(1948년 4월 16일)등의 여러 자료는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이 보고서는 남한의 방문자들에게 감명을 주려고 북한 당국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평양시내의 도로를 보수하고 연일 시민들을 동원,청소를 하는 한편 길가의 건물에 페인트를 발랐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평양방송 청취기록도 이를 뒷받침했다.UNTCOK 평양방송 청취기록은 「남한 대표들이국영공장 근로자들의 열성과 한 마을의 생활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여기에는 「국영공장 휴게실에서 노동자의 피아노 반주에 놀랐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어 UNTCOK 기록을 보면 연석회의 일정이 끝난 4월 25일에는 40만명이 모인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가한 뒤에 메이데이 기념 인민군 열병·분열행사도 참관한 것으로 되어있다.어떻든 남한 대표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4월 30일에는 대동강 쑥섬에서 낚시·보트놀이와 함께 어죽잔치를 즐긴 이들은 조만식의 남한 동행을 제의만 하고 적극 매달리지는 않았다.이 물놀이는 하오4시까지 계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상적인 시찰여행과 대접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UNTCOK의 당시 분석이다.그래서 김규식은 김일성의 4월 25일 저녁초대 연설에서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고 북한을 극찬했다.김규식은 또 「우리 민족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련의 제의를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식으로 미·소 양군 즉각철수안을 지지하고 나섰다.이같은 미·소 양군 즉시 철수론은 지극히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이 증명하고 있다. 한편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는데,그 안에는 북한이 남한에 계속 전력을 공급키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 「정보개요」(1948년 5월)에 따르면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그날 저녁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14일 실제 전력이 끊겼다.
  • 김일성·스탈린 모스크바 비밀회담(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5)

    ◎스탈린,김에 「3단계 남침계획」 수립지시/스탈린/“「엘리트 공격사단」·추가부대 창설을”/김일성/“모택동 동지도 조선해방 지원약속”/모택동,“김­스탈린 남침합의” 듣고 「조선인 사단 파견」 결정 □3단계 작전계획 ①38선 가까이에 병력집결 ②북에서 먼저 평화안 제의 ③평화안 거부땐 기습공격 김일성이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다룰 의제로 제의한 항목은 다음과 같다(1950년3월23일·슈티코프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 「1.남북조선 통일방안 및 방법(의도는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임) 2.경제문제. ⓐ)북조선 경제개발.개발계획의 방향·기간.2·3·5년? 남조선 개발문제는? ⓑ)북조선 철도의 전기화. ⓒ)소련으로부터 산업장비·자동차 추가수입문제. ⓓ)북조선 농업개발문제. ⓔ)소련전문가 파견. 3.중조관계. ⓐ)모택동과의 회담. ⓑ)중국과의 조약체결문제. ⓒ)중국거주 조선인,조선거주 중국인문제. 4.아시아 공산당·노동당간 협조문제.」 ○소서 특별기 제공 이 전문을 보낸 이튿날 슈티코프대사는 재차 김일성과 만나 스탈린이 김과 박헌영 두 사람을 만나는 데 동의했다고 통보했다.김일성은 출발일을 3월30일로 잡겠다고 말했고 이에 슈티코프는 특별기를 이용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물론 이 특별기는 소련이 제공해야 하는 것이었다.슈티코프대사는 3월24일자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이 특별기는 3월29일 평양에 도착해야 함.비행기가 못올 경우 원산에서 군함으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간 뒤 그곳에서 특별객차를 단 기차를 이용,모스크바로 가야 함」 이렇게 해서 김은 소련이 제공한 특별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거의 한달을 그곳에 머물렀다.이 기간중 김일성은 세차례 스탈린과 회담했다.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시간·장소별로 별도기록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는다.아마도 보안유지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아예 대화속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하지만 이들의 회담내용은 당시 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국이 내용을 종합한 상세한 보고서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귀한 자료이기 때문에 보고서를 전재하기로 한다(1950년3월30∼4월25일.김일성의 소련방문건.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국작성). 「스탈린동지는 김일성에게 국제환경과 국내상황이 모두 조선통일에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고 강조했다.국제적 여건으로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대해 승리를 거둔 덕분에 조선에서의 행동개시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중국은 이제 국내문제로 인한 시름을 덜었기 때문에 관심과 에너지를 조선지원에 쏟을 수 있게 됐다.중국은 이제 필요하다면 자기군대를 무리없이 조선에다 투입할 수 있다.중국의 승리는 심리적으로도 중요하다.이는 아시아 해방의 기운을 증명했고 대신 아시아 반동세력과 그들의 주인인 미국·서방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미국은 중국에서 물러나 이제 더이상 군사적으로 새 중국당국에 도전치 못한다. 이제 중국은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세력에 대한 도전을 더 망설일 것이다.미국에서 오는 정보에 의하면 미국내에도 타국에 개입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소련이 원자탄을 보유하고 유럽에서의 위상이 강화됨으로써 이런 불개입분위기는 더 심화되고 있다.하지만 우리는 이 해방의 찬반을 다시 한번 따져봐야 한다.첫째 미국이 개입할지 여부를 검토하고,둘째 중국지도부가 이를 승인하는 경우에 한해 해방작전은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전투수단 기계화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치 않을 것이란 견해를 밝혔다.그것은 북조선 뒤에 소련·중국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미국 스스로 대규모전쟁을 벌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내용. 김일성=모택동동지는 항상 조선전체를 해방하는 우리의 희망을 지지했습니다.모택동동지는 중국혁명만 완성되면 우리를 돕고,필요할 경우 병력도 지원하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조선통일을 이루겠습니다.우리는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스탈린=완벽한 전쟁준비가 필수입니다.무엇보다 군사력의 준비태세를 잘 갖추어야 합니다.엘리트 공격사단을 창설하고 추가 부대창설을 서두르시오.사단의 무기보유를 늘리고 이동·전투수단을 기계화해야 합니다.이와 관련된 귀하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상세한 공격계획이 수립돼야 합니다.기본적으로 공격은 3단계로 작성하시오.(1)38도선 가까이 특정지역으로 병력집결.(2)북조선당국이 평화통일에 관해 계속 새로운 제의를 내놓을 것.상대는 분명 이를 거부할 것임.(3)상대가 평화제의를 거부한 뒤 기습공격을 가할 것. 옹진반도를 점령하겠다는 귀하의 계획에 동의합니다.공격을 개시한 측의 의도를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북측의 선제공격과 남측의 대응공격이 있은 뒤 전선을 확대할 기회가 생길 것이오.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합니다.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됩니다.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함께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이 전쟁에 직접개입하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소련은 다른 지역,특히 서방에서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다시 한번 모택동과의논할 것을 강조했다.모택동이 아시아문제에 정통하다는 점을 덧붙였다.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에 군대를 보낼지 모르기 때문에 직접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김일성은 전쟁승리에 대한 강한 자심감을 내 보이며 스탈린을 안심시키려 했다.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국 보고서의 계속. 「김일성은 스탈린동지에게 왜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인지 상세한 분석을 해 보였다.공격은 신속히 수행돼 3일이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또한 남조선내 빨치산운동이 강화돼 대규모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미국은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이고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전체 조선국민은 열렬히 새 정부를 지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강조했음.박헌영은 남조선내 빨치산활동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음.그는 20만 당원이 그곳에서 대규모폭동을 주도할 것이라고 밝혔음」 이 회담에서 김일성과 스탈린 두 사람은 1950년 여름까지 북조선군이 완전한 동원태세를 갖추고 북조선군 총참모부가 소련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구체적인 남침계획을 수립하기로 합의했다.모스크바회담을 계기로 남침계획수립의 주도권은 어느덧 김일성으로부터 스탈린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남침승인과 함께 스탈린은 즉석에서 구체적인 3단계 작전방향까지 김에게 제시했던 것이다.한편으로 스탈린은 모택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한국전쟁을 아시아공산화운동의 일환으로 만들고자 했음이 이 문서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일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모택동과 스탈린 두 사람중 누가 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두 사람은 때론 경쟁적으로,때론 상대측에 일을 떠넘기는 식으로 김일성을 지원했다.우선 중국은 1940년대말부터 김일성의 권력강화와 군사력강화에 지대한 관심을 표시했다.국민당과의 내전중에도 모택동은 김일성의 남조선 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필요하다면 병력지원까지 할 것을 수차례 약속한 바 있다.다만 중국내전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 것이다.그리고 모택동과 스탈린 두 사람은 남침문제를 주제로 회담도 가졌다.그래서 스탈린과 김일성 두 사람이 모스크바회담에서 모택동을 제외한 채 무력남침에 합의했다는 보고를 받고 모택동은 매우 섭섭한 반응을 보였다.물론 모택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지원의사를 재삼 다짐했다. ○방소결과 중 통보 김일성은 49년3월 모스크바를 다녀온 뒤,5월초 인민군 정치보위국장이며 당중앙위원인 김일을 중국으로 보냈다.김일성은 5월14일 슈티코프대사를 만나 김일의 방중결과를 통보했다(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전문.5월15일). 「김일을 중국으로 보냈다.방문목적은 중국공산당중앙위와 교류를 맺고 중국군내 조선인사단(만주출신 조선인으로 구성)에 관해 협의하기 위해서다」 하고 김일성은 설명했다.김일은 4월30일 고강(고강)을 만나 중국공산당 중앙위로 안내됐다.그러나 김일의 진짜방문목적은 조선군 사단을 북한으로 전출시켜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모택동은 이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일을 통해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친서를 전달했다.친서에는 조선군 전출문제 외에도 남침문제가 언급돼 있었다.이에 대해 모택동은 『군사행동은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으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답했다.시기적으로 스탈린보다 모택동이 먼저,더 적극적으로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지지한 것이다.
  • 크렘린의 남침 결단(모스크바 새증언:4)

    ◎스탈린­모택동 비밀회동… “북 남침 지원키로”/김일성,중 공산화에 고무… “개전”고집/스탈린,“전쟁나면 북 지원”전문 보내/소,북 3개 정예사단 창설·「무기구입 차관」제공 약속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최초로 남침허용을 요청한 49년 3월부터 이듬해 1월 만찬장사건이 일어나기까지 10개월여 동안 적어도 표면적으로 스탈린은 전쟁 개시를 원치 않았다.49년 9월 툰킨 대사대리가 김일성의 옹진반도 점령계획을 보고한 것을 시발로 평양의 소련대사관과 모스크바 사이에 오간 전문들은 김일성이 남침 개시를 요청하고 스탈린이 이를 말리는 식으로 계속됐다.49년 10월30일부터 수일간 스탈린과 슈티코프대사간에 오간 전문들을 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기도를 막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읽을 수 있다. ○“전쟁기도 못 마땅” 스탈린은 9월24일 당정치국결정을 통해 김일성에게 남침불가를 통보한 바 있다.그러나 슈티코프 대사는 그후에도 김일성이 옹진반도점령,해방구건설 등에 미련을 못버린다는 사실을 계속 보고했다.이 일을 두고 스탈린은슈티코프 대사를 크게 질책하기에 이른다.『10월30일.슈티코프 대사에게 엄중경고함.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조선에 대해 국지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대사의 행동은 적절치 못함.그런 도발은 우리의 이익에 매우 위험하고 적으로 하여금 대규모 전쟁을 시작할 빌미를 주는 것임.대사의 행동은 전적으로 무책임한 것임』 크게 놀란 슈티코프 대사는 이튿날 곧바로 해명전문을 스탈린 앞으로 띄웠다.『본인은 북조선 내무성에 파견된 우리 고문관 보두아긴 대령을 통해 북조선이 38도선을 침범치 못하도록 엄중 감시하라고 지시했음.본인은 북조선당국에게 남조선을 무력침공하라는 충고를 결코 한 바 없음』 스탈린은 이 해명에도 불구하고 11월20일 당중앙위 명의로 재차 경고전문을 슈티코프에게 보냈다.『귀하가 제출한 해명은 전적으로 불만족스러움.이는 바로 모스크바가 내리는 지시사항을 귀하가 이행치 않는다는 증거임.38도선에서 어떤 긴장도 발생시켜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대신 귀하는 이 문제를 놓고 토의를 벌였음』 호된 질책을 당한슈티코프 대사는 이후 김일성의 남침계획 관련 보고를 중단했다.대신 남한의 북침기도에 관한 보고만 수차 스탈린 앞으로 더 보냈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이러한 초기 입장을 바꿔 김일성의 남침의사에 동조하게된 것은 언제,무슨 계기가 발단이 된 것일까.그것은 바로 중국내전에서 모택동이 승리한 것이다.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가장 크게 고무된 사람은 바로 김일성이었다.김일성이 만찬장사건을 일으킨 것도 사실은 모택동의 승리에서 얻은 용기의 일단을 보인 것이었다.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을 해방시켰으니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김일성은 생각했던 것이다.더구나 모택동은 중국내전만 끝나면 북조선을 도울 수 있다는 언질을 여러차례 김에게 했었다.1950년 1월30일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답신이 스탈린으로부터 떨어졌다.모스크바에서 면담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소 차관 전용 허용 이날 스탈린은 전쟁불가를 고수하던 종전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다음의 전문을 슈티코프 대사 앞으로 보냈다.『…김일성 동지의 불편한 심기를 이해함.그러나 그가 지금남조선과 관련해 도모하려는 중대사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도 이해해야 함.무엇보다 큰 위험부담이 없는 쪽으로 일을 꾸며야 함.그가 이 문제와 관련,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면 나는 항상 그를 만나 이야기할 준비가 돼있음.이런 나의 입장을 김일성에게 전달하고 이 문제에 대해 내가 그를 도울 준비가 돼있다는 점을 강조할 것』 김일성과 스탈린 사이에 구체적인 남침계획이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이 전문이 되는 셈이다.그러나 마치 면담허락의 조건인 양 스탈린은 이 전문에서 매년 최소한 2만5천t의 납을 소련에 공급해달라고 요구하며 『김일성이 이 요구를 거절하지 말 것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슈티코프 대사는 전문을 접수한 바로 그날 김일성을 만났다.이날 면담내용은 이튿날 스탈린 앞으로 보낸 보고전문에 상세히 기록됐다.『50년 1월31일.각하의 지시에 다라 김일성 동지를 만났음.김일성은 내가 전달한 내용을 매우 만족스럽게 받아들였음.동지께서 그를 만나겠다고 한 사실과 이 문제(남조선 해방문제)와 관련,그를 지원해 주겠다고 한 사실에 그는 매우 큰 감명을 받았음.김은 스탈린동지의 진의를 한번 더 확인하고 싶어 스탈린동지께서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 자기를 만나자고 한 게 분명하냐고 재차 물었음.본인은 이 전문내용으로 판단할 때 그렇다고 확인해주었음.김은 자기는 언제든지 스탈린동지를 만날 준비가 돼있다고 덧붙였음』 이와함께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소련이 요청한 납을 10∼15일 이내에 약속대로 보내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전문을 보낼 바로 그 시점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은 모택동과 만나고 있었다.김일성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때 스탈린 모택동 두사람은 북한의 남침시 지원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그렇게도 전쟁을 애원했던 사람은 김일성이었지만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함과 함께 북한의 남침문제에 대해서 스탈린 모택동 두사람이 이니셔티브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2월2일 스탈린은 슈티코프 대사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다음 사항을 김일성 동지에게 주지시킬 것.그가 나에게 의논하고자 하는 문제는 현시점에서 완벽한 보안이 유지돼야 함.북조선의 다른 지도자들은 물론 중국지도자들도 알아서는 안됨.이는 적에게 비밀을 유지하기 위함임.…중략…지금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는 모택동 동지와의 회담에서 우리는 북조선의 군사력과 방어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이를 도울 필요성과 방안에 대해 논의했음』 이틀 뒤 김일성이 먼저 슈티코프 대사를 만나자고 요청했다.그리고는 즉각 다음의 문제들을 제기했다.(대통령문서소보관.슈티코프 대사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50년 2월4일.김일성은 전군을 10개 사단으로 증강시키기 위해 추가 지상군사단을 편성하고 싶다며 본인의 의견을 물었음.본인은 이것이 매우 중대한 문제라고 답하고 우선 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이 있느냐고 물었음.아울러 이에 대해 조언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했음.김일성은 소련정부가 51년도 분으로 주기로 한 차관을 50년도에 쓸 수 있도록 자기가 직접 스탈린 동지에게 요청토록 해달라고 했음.그는 이 차관으로 3개 지상군사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고 싶어했음.본인은 이 요청을 본국정부에 보고하겠다고 답했음』 스탈린은 2월9일자 전문을 통해 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다고 답했다.그는 이 3개사단을 엘리트장교,현대식 장비를 갖춘 정예부대로 만들라는 별도주문까지 덧붙여 보냈다.다음은 전문내용.『김일성을 만나 3개사단 창설을 추진하라고 이를 것.이 사단들은 경험있는 장교들과 훈련 잘된 사병,현대무기를 갖춘 정예부대로 만들어야한다는 점을 그에게 유념시킬 것.51년도분으로 책정된 차관을 50년도로 전용시켜 3개사단 창설에 필요한 무기구입에 쓰도록 승인한다는 것도 알릴 것』 ○「무력남침」못 박자 바로 이튿날 슈티코프 대사는 김일성을 만나 이 사실을 통보하고 곧바로 같은날 스탈린에게 그 결과를 보고했다.슈티코프 대사는 『김일성이 이 사실을 듣고 매우 기뻐했으며 원조에 대해 스탈린 동지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몇번이나 되풀이 했다』고 보고했다.이후 김일성은 모스크바 방문준비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방문절차와 관련,모스크바와 평양간 수차례 전문이 오갔다.3월20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만나 방문날짜를 4월초로 잡고 박헌영을 대동하고 싶다고 말했다.아울러 이번 방문을 1946년도와 마찬가지로 비공식(비밀) 방문으로 하고 싶다고 주문했다.방문준비는 모두 마쳤으며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다음의 사항을 논의하고 싶다며 회담의제를 내놓았다. 김일성이 제의한 이 의제는 3월21일자 슈티코프 대사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①남북조선 통일 방안과 방법에 관해 ②북조선의 경제발전에 관해 ③가능하다면 당사업에 관해. 3월23일 슈티코프 대사는 이 의제를 더 상세히 정리해 다시 모스크바로 보냈다.①통일방안 ②경제문제 ③중·조선관계 ④아시아공산당,노동당의 협력문제 등으로 세분한 이 전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①항의 통일문제이다.그런데 3월1일자 보고전문에서 「남북조선통일 방안과 방법」으로 기술됐던 이 항목이 이틀 뒤의 이 전문에서 『남북조선 통일 방안과 방법.의도는 군사적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는 데 있음』이라는 쪽으로 바뀌어졌다.통일방안을 아예 「무력남침」으로 못박자고 김일성이 요청한 결과였다.
  • 50년 「만찬장 사건」(모스크바 새 증언:3)

    ◎김일성 “개전 수일내 서울점령” 호언/“옹진반도 공략을” 소대사에 간청/“스탈린 다시 만나게 해달라” 졸라/「남침승인」 늦어지자 모택동 들먹이기도 이주연 북한대사의 중국파송을 위해 마련된 만찬이 50년 1월 17일 저녁 박헌영외교부장의 관저에서 열렸다.김일성,박헌영,김두봉을 비롯한 북한 고위층인사들과 소련대사,공사,중국대사,무역대표부 인사들이 대거 초대됐다.슈티코프대사는 1월 19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김일성의 이날 만찬장에서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했다.(대통령문서보관소) 식사가 끝난 뒤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의 이그나테프와 펠리센코 두 참사관에게 다가갔다.그리고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이제 중국해방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으니 다음은 남조선동포들을 해방할 차례라고 떠들었다.그리고는 남조선 인민들은 자기를 믿고 따르고 있으며 북조선의 군사원조를 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빨치산만 가지고는 문제를 풀 수 없다.북조선에는 훌륭한 군대가 있다고 주장했다.이렇게 떠들어대던 김일성은 『요즈음 통일문제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못잔다.남조선 해방과 조국통일 과업을 더 늦추면 나는 조선인민들의 신임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력통일 늦출 수 없다 그런 뒤 김은 자신의 모스크바방문 때 스탈린이 남침을 먼저 시작하지 말라고 한 사실을 언급하며 『하지만 이승만이 북침공세를 시작하지 않고 따라서 남조선해방통일과업이 자꾸 미뤄지고 있으니 내가 스탈린 동지를 다시 찾아가 남침개시 허락을 받아야겠다』고 말했다.그리고 자신은 공산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여서 먼저 전쟁을 시작할 수 없다느니,스탈린 동지의 명령이 자기한테는 법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의 허락이 필요하다느니 하며 횡설수설했다고 슈티코프 대사는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는 또 만약 스탈린동지를 만날수가 없다면 모택동동지가 모스크바방문을 마치는 대로 그를 찾아가 만나겠다고 말했다.그는 모택동이 중국내전만 끝나면 자기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모택동을 들먹이며 협박조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은 것이다.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소련대사관의 두 참사관은 그의말을 가로막고 화제를 바꾸어버렸다. 그 다음 상황을 슈티코프대사는 다음과같이 적고있다.『그러자 김일성은 내게 다가왔다.그리고는 이승만 군대에 대한 공격개시문제를 비롯,한반도상황을 논의하도록 스탈린 동지를 만날수 없겠느냐고 물었다.만약 스탈린을 못 만나면 모택동 동지를 만나겠다고 했다.그리고는 왜 옹진반도 공격을 허락하지 않느냐고 내게 따져물었다.인민군은 3일이면 옹진반도점령을 끝내고 수일내 서울까지 밀고갈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본인은 그에게 스탈린동지를 만나는 것은 문제가 안될 것이라고 답했음.그러나 옹진반도 공격은 안된다고 잘라 말하고는 그를 피해 만찬장을 떠났음』 이날 김일성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는 『스탈린동지를 만나게 해달라』『나는 자나께나 남조선해방만 생각하고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슈티코프 대사는 보고서 끝머리를 이렇게 마쳤다.『만찬이 끝날 즈음 김일성은 취한 상태였음.그의 모든 대화는 매우 흥분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음.본인은 그의 이날 대화의 목적이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고 우리의 입장을 타진해보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함』 이 보고서 한통을 통해 우리는 당시 김일성이 얼마나 남침의욕에 가득차 있었는지,그리고 당시 소련지도부의 눈에 비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한눈에 짐작할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를 49년 여름으로 잠시 거슬러올라가 보자.김일성이 스탈린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기남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얼마나 끈질기게 매달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있다.김일성,박헌영 두사람은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슈티코프대사를 8월 12일,14일 연이어 만났다.남침 불가피론을 설득키 위한 목적에서였다.다음은 슈티코프대사가 1차면담 뒤 본부에 보낸 보고전문.(대통령문서소.슈티코프대사와 김일성,박헌영의 대화록) 『두사람은 남조선이 조국통일민주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방안을 거부했으므로 무력남침 외에 대안이 없다고 강조했음.김일성은 자기가 지금 남침을 개시하지 않으면 조국통일의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고 말했음』 그해 6월 25일을 기해 김일성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고몇차례에 걸쳐 대남 평화공세를 펼쳤다.6월 30일에는 평양에서 남북노동당 연합회의를 열어 남북노동당을 합당,조선노동당으로 발족시키고 김일성을 위원장에,박헌영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한 바 있다. ○선제공격 필요성 강조 그러나 슈티코프대사는 이 요청에 대해 그해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김일성·스탈린 회담에서 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뚜렷한 무력우위를 확보치 못했다며 스탈린이 거부했다는 점을 거듭 상기시켰다.김일성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남조선 주둔 미군이 물러난 마당에 38도선 분할규정을 지킬 아무 의미가 없다.스탈린동지가 남조선이 선제공격을 가해올 경우에만 대응공격을 하라고 했지만 남조선은 이제 북침계획을 연기시킨 것 같다.남조선은 2차대전 전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고수하려했던 것처럼 38도선 고수에 총력을 쏟고있다.따라서 스탈린동지가 권유하신 대응공격 기회는 없어졌다』며 선제공격 필요성을 되풀이했다.김일성은 이와함께 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확고한 무력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강조했다.그러나 슈티코프도 지지않고 두사람의 현실파악이 너무 낙관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지적하며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한발 물러나 강원도 삼척지구에 해방지구 건설전략을 제의했고 슈티코프는 『그것까지 막을수는 없지만 신중한 분석과 준비를 거친 뒤 실행에 옮길 것』을 권고했다.하지만 해방지구건설은 애당초 김의 목표가 아니었다.8월 14일 김은 슈티코프를 만나 다시 무력남침 필요성을 역설했고 슈티코프는 계속 불가입장을 되풀이했다.그러자 김이 들고나온 전략이 바로 옹진반도 점령 계획이었다. 이 자리에서 두사람은 두가지 사항에 합의했다.『첫째,북조선에 소련제 무기를 긴급히 추가제공할 필요성이 있다.김일성은 전군에 지급할 2∼3벌의 탄약풀세트 지원을 요청.둘째,김일성은 옹진반도 점령을 목표로한 국지전개시를 제의.옹진반도 점령시 38도선 방어선을 1백20㎞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추가 공세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수 있다고 김은 강조』 슈티코프는 『모든 작전은 북조선군의 작전능력과 전반적인 정세파악을 확실히 한후에만 실행에 옮길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슈티코프대사는 8월27일 이 대화전문을 스탈린 앞으로 보냈다.그러나 슈티코프대사는 이 보고문에 남침계획이 매우 무모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그는 『첫째,현재 한반도에 실제로 2국가가 존재하며 남한은 미국등 여러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따라서 남침시 미국이 무기·탄약뿐아니라 병력을 직접 파병할 것임.둘째,미국이 소련에 대한 악선전의 기회로 활용할 것임.셋째,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확고한 군사우위 미확보.넷째,남조선은 강한 군·경찰군을 창설했음』등을 남침불가의 이유로 들었다.슈티코프대사는 대안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옹진반도 점령은 권할만함.그러나 남조선군의 반격능력이 강할지 모르고 그 경우 장기전이 될수있음』이라고 덧붙였다. ○소대사 “계획 무모하다” 슈티코프 대사가 본국휴가를 떠난 뒤 김일성은 대사대리인 툰킨공사를 만나 옹진반도 작전계획을 재차 설명한 것이다.툰킨 공사가 김의 이 요청을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스탈린이 소련 당정치국결정을 통해 전면남침은 물론 옹진반도 작전까지 금지시킨 것은 전편에서 이미 기술한 바있다. 당시 소련 당정치국의 남침불가 결정은 소련외무부,국방부가 북한군전력을 종합적으로 평가 비교해서 내린 결론이었다.대통령문서소에는 9월23일자로 그로미코 외무장관,불가닌 국방장관이 스탈린에게 제출한 이 정치국결정의 초안이 보관돼있다.정치국결정의 내용은 거의 이 초안과 일치한다.다만 스탈린이 결재과정에서 몇군데 흥미있는 손질을 한 대목이 눈에 띈다. 스탈린은 초안말미에 『…북조선은 남측의 무력공격개시시 이를 격퇴하고 북조선정부의 영도아래 조선통일을 이루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한다…』라고 쓴 부분을 만년필로 긋고 『남측이 도발할 경우 북조선은 이를 격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고쳐썼다.「무력통일」운운한 문구를 삭제한 것이다.그외에 북한의 무력증강 필요성이 언급된 부분들도 스탈린은 모두 그 표현을 완화하거나 삭제하는 등 끝까지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려했다.그러던 차에 앞서 기술한 김일성의 「만찬장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 남침야욕 노골화(6·25 내막/모스크바 새증언:2)

    ◎김일성,“개막 두달내 남한점령” 장담/49년9월 소 공사에 남침구상 처음 표명/“전쟁 허락해 달라” 집요하게 스탈린 설득/“국지전·전면전” 선택권은 크렘린에 맡겨/평양,빨치산 지휘자 8백명 남파… 게릴라전 지도 김일성의 구체적인 남침구상이 최초로 문서로 드러난 것은 1949년 9월3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의 툰킨공사가 스탈린앞으로 보낸 극비보고전문이다.전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대통령문서보관소) ○스탈린 관심 표명 김일성이 밝힌 이 최초의 구체적 남침 계획에 대해 스탈린은 일단 관심을 표명했다.그리고는 9월 11일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앞으로 한반도정세에 관해 다음의 항목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⑴남조선군의 전력에 대한 평가.규모·무기·전투능력등. ⑵남조선내 빨치산운동상황.개전시 그들로부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지. ⑶)북조선이 전쟁을 시작할 경우 남조선 인민들이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⑷남침시 미군이 취할 입장 ⑸북조선의 군사력·무기·전투능력.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툰킨공사는 곧바로 12∼13일 양일간 김일성·박헌영을 면담했다.재미있는 것은 툰킨공사와의 면담에서김일성의 태도는 이전의 남조선의 군사적 위협에서 대남 무력침공이 성공할 수 있다는 쪽으로 급변했다는 것이다.다음은 9월14일 툰킨공사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김과의 면담내용. 『⑴남조선군은 장교들의 훈련수준이 아주 낮다고 함.김일성은 38도선에서 벌어진 몇차례 교전결과를 토대로 이같이 평가했음.김은 현재 남조선군 거의 모든 부대에 북한첩자들이 침투해있다고 했음.그러나 내전이 벌어졌을 때 실제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할지 여부는 말하기 어렵다고 했음. ⑵김일성·박헌영은 현재 남조선에 1천5백∼2천명의 빨치산이 활동중이라고 했음.김은 그러나 이들로부터 큰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했음.남한출신인 박헌영은 김과 다소 다른 견해를 밝혔음.그는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음. ⑶북한이 선제공격을 시작할 경우 남한국민들의 반응은 좋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말했음.김은 금년 봄 모택동이 북조선대표 김일에게 말한 내용을 인용,지금 전쟁을 시작하기보다는 중국내전이 고비를 넘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음』 그러나 바로 이튿날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전날과 달리 북조선이 군사작전을 시작할 경우 남조선 국민들도 이를 환영할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불리하지 않다고 주장했다.슈티코프대사는 이를 통역으로 나온 허가이(편집자주:재소한인으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비서)의 영향탓이라고 분석했다.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김일성은 다시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고 따라서 전면전 대신 옹진반도와 반도동쪽의 개성까지 남한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작전이 좋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김일성은 북조선군이 남조선군과 비교해 강점으로는 탱크·박격포·비행기등 기술적인 면과 훈련·사기등에서 앞서고 약점으로는 조종사의 숫자 및 훈련부족·군함부족·탄약부족·대구경총의 전투태세 미흡등을 들었다.김일성은 먼저 옹진반도를 공격,그곳에 주둔중인 남한군 2개연대를 궤멸시키고 반도를 점령한 뒤 동쪽의 남조선영토 일부를 점령하면 일단 공격을 중단하고 상황을 살피겠다고 했다.남한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싶으면 계속 남진하되 그렇지 않으면 옹진반도를 확고히 해 방어선을 3분의1 정도 줄이겠다는 계산이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남침의사를 밝히면서도 스탈린의 의중을 알기 위해 끝까지 분명한 뜻을 밝히지 않았다.물론 남침의사를 내비친 것은 스탈린이 원칙적으로 이에 동의할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그러면서도 남한 군사력에 대한 평가,국지전을 할지 전면전을 할 것인지 등에 대해 입장이 오락가락한 것은 결국 스탈린이 결정을 내려주기를 기다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툰킨공사는 이 보고전문 말미에 김일성·박헌영과는 다른 견해를 덧붙이며 전쟁개시에 강한 브레이크를 걸었다. ○무력통일밖에 없다 『김일성이 제의하는 국지전은 필히 남북한간 내전으로 발전될 것임.현재 남북한 지도부내 내전 지지자는 극소수임.현단계에서 북조선이 내전을 시작하는게 과연 현명한 일인지 생각해야 함.본인은 현명치 못한 판단으로 생각함.북조선군은 남쪽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신속한 작전을 수행할 만큼 강하지 못함.빨치산과 남조선인민들의 도움을 가정하더라도 신속한 성공을 기대하기 힘듦.내전으로 확대되면 정치·군사 양면에서 북조선에 불리함.첫째로 전쟁확대는 미국에 이승만정부를 지원할 명분을 줌.미국은 중국에서 패했기 때문에 매우 적극적으로 남조선문제에 개입하려 함.또한 전쟁피해가 커지면서 남조선국민들 사이에 전쟁을 시작한 측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커질 것임』 그는 이 전문과 함께 남북한의 정치경제·군사 관련장문의 보고서를 스탈린앞으로 보냈다.이 보고서는 그동안 알려진 당시상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인용치 않기로 한다.다만 한가지 툰킨공사가 이 별도보고서에서 김일성이 남침의사를 갖고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그는 김일성·박헌영 두사람이 한반도에서 평화통일 가능성은 없어졌고 무력에 의한 통일의 길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그러나 여기서도 툰킨공사는 남침시 미군개입과 반소선전에 악용될 가능성등을 들어 전쟁개시에 강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그는 전쟁보다 남조선내 빨치산부대의 활동을 지원하는게 보다 현명하다는 견해를덧붙였다. 이같은 보고를 접한 크렘린은 9월24일 당중앙위 정치국 이름으로 북조선의 남침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북한지도부에 전달케했다(소련공산당중앙위 정치국결정.회의록 N191).이 결정에서 크렘린은 군사적으로 인민군이 장기적인 작전을 벌일 준비가 안돼 있어 지금 작전을 시작하면 적을 패배시킬 수도 없을 뿐아니라 북조선에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움을 초래하게 된다고 못박았다.이 결정은 「조선인민들이 통일을 고대하고 있다는 동지의 견해에는 동의한다.그러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무엇보다 남조선내 빨치산운동을 강화하고 대규모 반정부 기운이 성숙되기를 기다리라」고 충고했다.옹진반도 점령작전에 대해서도 소련지도부는 『이는 남조선과의 전면전 초기단계로서 시작돼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못박았다. ○빨치산운동 강화를 1차 면담에 이어 두번째로 김일성의 개전허가요구를 거절한 것이지만 스탈린의 이 결정은 좀더 확실한 승리를 위한 작전지시문 같은 느낌을 준다.아울러 김일성과 스탈린 두사람간 전쟁개시에대한 공감대는 이 무렵을 전후해 확고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10월4일 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들고 김일성·박헌영을 다시 만났다.그리고는 바로 그날 저녁 스탈린앞으로 다음과같이 이 면담결과를 보고했다.『김일성과 박헌영은 우리의 통보를 냉담하게 받아들였음.김일성은 「좋다」는 한마디만 했고 박헌영은 모스크바의 논리가 옳다고 수긍한 뒤 남조선에서 빨치산운동이 확산되기를 기다리는게 좋다고 동의했음.현재 남조선에서는 북조선에서 파견한 8백명이 빨치산운동을 지도하고 있다고 했음』 소련의 이같은 설득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남침의사를 굽히지 않았다.이듬해인 50년 1월17일 평양에서는 박헌영외상이 주최한 한 만찬이 열렸다.1월10일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안전보장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킨다고 선언한지 꼭 1주일째 되는 날이었다.이 만찬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취한 김일성은 소련·중국 대표들을 붙들고 자신의 남침의지를 다시한번 강하게 나타냈다.이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계산된 행동을 한 것이다.
  • 스탈린­김일성/「남침 대화록」 최초 발굴

    ◎스탈린 「6·25승인」뒤 전쟁 전권행사/서울신문,소 「극비문서」 9백50건 입수/전황불리하자 평양정권 중망명 계획 【모스크바=이기동 특파원】 한국전쟁과 관련,러시아측에 보관돼 있는 방대한 양의 미공개 비밀문서가 최근 서울신문에 의해 입수돼 그동안 외부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6·25내막을 밝히는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총9백50건,3천여쪽에 달하는 이들 문서는 38도선에서 남북한간 잦은 충돌이 벌어진 47년초부터 전쟁을 거쳐 휴전협정체결에 이르기까지 평양·북경주재 옛소련대사관과 본국 사이에 오간 전문과 크렘린에서 이루어진 전쟁관련 회합의 기록문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그중에는 최초로 공개되는 김일성이 49년3월5일 모스크바를 극비방문했을 때 당시 스탈린수상과 나눈 대화록도 포함돼 있다. 이들 문서는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정부의 주요국가문서보관소인 대통령문서소·외무부문서소·옛소련공산당 중앙위문서소·국방부산하 군사문서소 등지에 보관돼 있는 미공개 6·25 관련문서들이 모두 망라된 것이다. 새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6·25를 일으키기 2년여 전부터 남침개시를 스탈린·모택동에게 계속 요구했으며 반면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과 준비미비등을 이유로 막판까지 남침에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일단 전쟁계획이 가동되기 시작한 뒤에는 전쟁준비·작전수립등 전쟁의 전과정에 스탈린이 거의 전권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스탈린은 특히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북한군에 불리하게 바뀐 뒤 김일성·모택동이 요청한 휴전제의를 거듭 묵살,전쟁의 피해를 배가시킨 장본인으로 드러났다.스탈린은 6·25를 미국의 국력을 소진시킬 절호의 기회로 보고 무리하게 전쟁을 계속 끈 것으로 관련문서는 밝히고 있다. 스탈린은 또 52년8월 주은래와의 회담에서 주가 『북한지도부가 인명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전쟁계속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으나 『이 전쟁은 명분이 큰 전쟁이니 인내심을 갖고 계속하자』고 고집,최소한 1년이상 전쟁을 더 끌기로 합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소련의 입장은 53년3월3일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휴전지지쪽으로 급선회했다. 김일성은 당초 황해의 옹진반도에서 국지전을 시작해 동남쪽으로 전선을 확대하는 계획을 세웠다가 작전개시 불과 나흘 전인 21일 작전계획이 남한에 누출됐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이를 전면전으로 급전환한 것으로 밝혀졌다. 중공군의 참전도 스탈린이 모택동을 수차례 설득해 동의를 얻어낸 것으로 드러났다.모는 당초 수차례 무력지원약속을 김일성에게 했으나 막상 병력지원요청을 받고서는 이를 거부하다 스탈린의 끈질긴 요청을 받고서야 파병결정을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새 자료에 따르면 스탈린은 모택동이 중공군파병을 계속 주저하던 50년10월13일 김일성에게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며 병력과 장비를 모두 가지고 소련·중국영토로 북한정권자체를 철수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김일성·박헌영도 이 지시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나 스탈린동지의 뜻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며 철수준비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 정권철수계획은 바로 이튿날인 10월14일 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중공군 파병결정을 통보해옴에 따라 긴급히 취소된 것으로 새 문서는 밝히고 있다. 한편 김일성이 50년5월 북경회담에서 모택동에게 처음 보고해 승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오던 3단계 작전계획은 이보다 앞선 4월 모스크바회담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한 것임이 이번 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 김일성의 남침 책략(모스크바 새 정언:1)

    ◎6·25내막/서울신문 발굴 소문서속 비사/김일성,“해안방어 취약… 소서 지원해달라”/스탈린/“북 해군 창설·전투기 제공 약속”/김일성/“남한군 6만명… 우리가 더 강해”/49년3월5일 대화록/김일성/“전국토 해방 절호의 기회왔다”/스탈린/“미군 남아있어 때를 기다려야”/49년3월7일 대화록/러 국립문서보관소 미공개자료 9백50건으로 엮는 시리즈 서울신문사는 6·25 반발 45주년,해방 50주년의 해를 맞아 현대사 재조명작업의 일환으로 러시아에 보관중인 미공개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 9백50여건 3천여페이지를 독점 입수했다. 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이 그동안의 노력끝에 러시아의 외무부 문서국을 비롯,대통령 문서국·옛소련공산당 중앙위 문서국·국방부 문서국 등에서 입수한 이들 문서들을 앞으로 20여회에 걸친 시리즈로 독자여러분에게 소개한다. 이 시리즈를 통해 한국전쟁의 준비로부터 전개과정,휴전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모든 의혹과 논쟁들이 말끔히 정리되길 기대한다.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인이 6·25를 공동기획하고 이끌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밝혀진 문서들을 통해 이제는 뒤집을 수 없는 사실로 굳어져 있다.그러면 이 3인중 전쟁에 가장 먼저 뜻을 둔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쯤인가.러시아측 문서에 따르면 1945년 해방을 맞은 뒤 48년 북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그리고 49년말까지 적어도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의사를 갖지 않았다.스탈린은 오히려 미국과 남한의 전쟁도발을 크게 우려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마치 2차 세계대전 전 독일에 대해 품었던 것같이 스탈린은 미국과 남한의 전쟁도발을 피하기 위해 급급했고 한반도에서의 현상유지에 매우 집착했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다음은 이 당시 크렘린의 분위기를 엿보게 하는 문서.(소련군 총참모부 제8국 전문번호 N121973.편집자주=제8국은 소련군 총참모부에서 해외공관과의 비밀통신을 취급하는 부서)러시아대통령문서소에 보관중인 이 비밀전문은 47년 5월 12일 당시 평양주재 소련대표부에 파견된 메레슈코프프장군과 슈티코프장군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긴급요청서였다. 『스탈린동지께.46년 7월 26일 전문번호 N15327로 보낸 우리정부의 결정에 의거,46년 12월 16일 우리는 82명의 소련전문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음.이 전문가 파견은 북한에서 산업시설복구와 철도건설작업을 돕기 위한 것임.그러나 지금까지 단 1명의 전문가도 북한에 도착하지 않았음.…중략… 소련을 비롯한 기타 외국전문가들의 도움없이 북한의 산업,철도체계는 가동되지 못함.북한의 붕괴를 막고 또한 남한에서 향후 우리의 입지와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소련 엔지니어,기술자의 파견이 절대 필요함. ○소전문가 보내라 만약 남북한이 통일돼 임시정부가 구성되기 전까지 소련전문가들이 도착하지 않을 경우 필히 미국 기술자들이 일하러 올 것임.그러면 우리보다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될 것임』 이 전문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보고서 위에다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휘갈겨썼다.『소련전문가 5∼8명을 보내줄 것.그들로 하여금 조선인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독려케 하라.우리가 조선에 너무 깊이 개입해서는 안됨』 북한과 소련관계가 이같은 식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김일성은 48년 2월 인민군 창건,그리고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이듬해인 49년 1월 17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슈티코프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만났다.슈티코프는 이날의 면담내용을 즉각 본부에 보고했다.(러시아대통령문서소 보관)『김일성은 이전에 언급한 바 있는 소련과의 우호협력협정 체결을 다시 희망했음.이에 대해 본인은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하에서 그런 조약체결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설명했음.남한의 반동세력들이 한반도 분단고착화의 기회로 이용하고 미소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수도 있음.이 문제로 김일성과 박헌영은 다소 당혹해 했음.김일성은 강경치는 않지만 조약체결을 고집했고 만약 조약체결이 안되면 소련의 비밀원조협정이라도 맺자고 요구했음.본인의 추가설득을 듣고서 김일성은 일단 지금 우호협력조약체결은 적절치 않다는데 동의했음』 그러나 이 전문보고가 있은 불과 1주일 뒤인 1월27일 슈티코프대사는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다시 보냈다.『북조선경찰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남한 군부대들이 38선 가까이 이동하고 있고 주 작전방향을 따라 병력이 집중배치되고 있음.남한에 파견됐던 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남한에서는 북침설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다고 함.남한장교들은 남한이 먼저 공격을 시작해 이니셔티브를 잡자고 말한다고 함.이에 따라 북조선당국은 38선의 수비를 강화하고 경계를 강화하기 위한 필요한 방안을 취하고 있음. 결론=본인은 현단계에서 남한이 공격해올 가능성은 낮다고 봄.국내외 여건이 이같은 공격을 불허함.이들이 병력을 38선을 따라 이동해 주방향에 집결시켰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음.남한은 북쪽의 서울공격을 항상 예상했기 때문에 서울방어를 위해 이같은 병력이동을 했을 수 있음.최근 남한은 북한에 테러부대 파견을 증대시키고 있음.총 80명의 테러범들이 체포됐음.개성에서는 14명이 체포됐는데 이들은 폭약 5통,액체폭발물 6병,휘발유 1통을 소지하고 있었음.이들은 창고,학교를 불태우고 지방지도자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왔음』 ○북침 가능성 낮다 2월에 접어들면서 평양의 소련대사관이 보내는 남측의 도발보고 건수는 점차 그 횟수가 잦아졌다.2월3일 슈티코프대사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본부의 몰로토프 외상 앞으로 보냈다. 『38도선 상황이 매우 소란함.남한 군경이 매일 38도선을 넘어 북한의 경찰경비초소를 공격함.현재 북한은 경찰 2개 여단으로 38도선을 경비하고 있음.이 여단의 무장은 일본군의 소총뿐임.소총 1정당 탄알은 3∼10발씩뿐임.자동소총은 없음.북한경찰은 남한경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후퇴하거나 탄약이 떨어져 포로로 잡히기도 함. 소련정부의 결정으로 이들 2개여단 병력에게 소련제 무기가 지급되기로 돼있음.소련국방부 명령에 따라 이들 무기들은 해안군사지구에 공급되기로 돼있음.그러나 본인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무기공급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있음.…중략… 그러나 소련정부의 이같은 결정에 따라 북조선은 소총사단 1개,여단 1개를 창설했는데 무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긴급히 이 사태에 손을 써줄 것을 요청함』 ○무기지원 등 요구 슈티코프대사는 하루 뒤인 2월 4일에도 본부에 전문을보내 남한의 대규모 도발을 보고했다.그는 이 공격을 통해 남한군은 38도선 북쪽 2백∼3백m에 위치한 고지 한곳을 점령했고 그옆 38도선 바로 남쪽에 남한군 1개 대대가 배치됐다고 보고했다. 49년 3월 5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극비 방문했다.그는 스탈린과의 면담에서도 38도선의 긴장문제를 제기했다.이날 북조선대표단이 스탈린과 나눈 대화내용은 러시아대통령문서소에 보관돼 있다. 『김=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있습니다.북조선에 대한 반동세력의 도발이 점점 더 격해지고 있습니다.우리도 육군은 있지만 해안방어가 거의 전무합니다.이 점에 소련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스탈린=미군은 남조선에 몇명이 주둔하고 있습니까. 김=최고 2만명쯤 됩니다. 스탈린=남조선은 군대가 있습니까. 김=있습니다.약 6만명입니다. 스탈린=이 숫자는 경찰을 포함한 것입니까. 김=아닙니다.정규군 숫자입니다. 스탈린=그들이 두렵습니까. 김=그렇지 않습니다.하지만 해군을 갖고 싶습니다. 스탈린=누구 군대가 더 강합니까.당신군인가 아니면 그들인가요. 박헌영=우리 군대가 더 강합니다. 스탈린=해군창설을 지원하겠습니다.군용기도 주겠습니다.남조선군 내부에 당신 사람들이 침투해 있습니까. 박=있습니다.하지만 모두 하위계급들이라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스탈린=잘한 일입니다.지금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남조선도 북에 첩자를 보냈을 것입니다.그러니 정신차려야 합니다.요즘 38도선 사정은 어떤가요.남조선군이 침범해 많은 초소들을 뺏겼다가 다시 찾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김=강원도지역 38선에서 충돌이 있었습니다.우리 경찰은 무장이 부실해서 나중에 정규군을 투입해 남조선군을 격퇴했습니다. 스탈린=쫓아냈나요,그들 스스로 물러났나요. 김=우리가 그들을 패배시켰고 그런 다음 그들이 물러났습니다. 스탈린=38도선은 평화로워야 합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기간은 김일성이 인민군창건 뒤 내부적으로 군비증강에 가장 힘을 쏟을 시점이었다.그는 어떻게 하든 남한의 도발위험이 높다는 점을 강조해 소련으로부터 무기지원을 하나라도더 받아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주목할 것은 이날 대화에서 김일성,스탈린 두사람 모두 남침문제는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월 7일 두번째 크렘린회담에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정식으로 남침승인을 요청했다.모스크바 방문의 진짜 목적을 털어놓은 것이다. ○남침 허가해 달라 힘들게 꺼낸 김일성의 남침허가 요청에 대해 스탈린은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밝혔다.러시아대통령문서소에 보관된 49년 3월 7일 스탈린과 북한대표단간의 대화록은 그러나 스탈린 역시 당장의 남침은 불가하지만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완곡한 시사를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일성=스탈린동지.이제 상황이 무르익어 전국토를 무력으로 해방할 수 있게 됐습니다.남조선의 반동세력들은 절대로 평화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들은 자신들이 북침을 하기에 충분한 힘을 확보할 때까지 분단을 고착화하려고 합니다.이제 우리가 공세를 취할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우리의 군대는 강하고 남조선에는 강력한 빨치산부대의 지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탈린=남침은 불가합니다.첫째 북조선인민군은 남조선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확보치 못하고 있습니다.수적으로도 열세이고,둘째 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있습니다.전쟁이 나면 그들이 개입할 것입니다.셋째 소련과 미국사이에 아직도 38도선 분할협정이 유효함을 기억해야 합니다.이를 우리가 먼저 위반하면 미국의 개입을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김=그렇다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통일의 기회는 없다는 말인가요.남조선 인민들은 하루빨리 통일을 해 반동정부와 미제국주의자들의 속박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스탈린=적들이 만약 침략의도가 있다면 조만간 먼저 공격을 해올 것이오.그러면 절호의 반격기회가 생깁니다.그때는 모든 사람이 동지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원할 것이오』 이렇게 최초의 남침 의도 표명은 결실이 없었다.49년 4월에 접어들면서 크렘린은 남한의 정세변화에 점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 했다.4월 17일 스탈린은 슈티코프대사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군사고문단 요청 『본인이 얻은 정보에따르면 5월중 남조선주둔 미군이 일본내 가장 가까운 섬으로 철수할 계획임.철수목적은 남조선군에게 행동의 자유를 더 많이 주기 위해서임.미군철수에 맞춰 유엔감시위원단도 남조선을 떠날 것임. 4·5월중 남조선은 38도선 부근에 병력을 집중시킬 것이 틀림 없음.6월 불시에 북침공격을 감행하고 8월까지 북조선군을 완전 궤멸시킬 목적임.이 정보의 사실여부를 긴급히 확인해 보고하기 바람』(대통령문서보관소) 사흘 뒤인 4월 20일 슈티코프대사는 이 지시사항을 이행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다음과 같은 전문을 스탈린앞으로 보냈다. 『북조선인민군의 전투태세는 매우 미흡함. 1,훈련받은 비행사는 8명 뿐임.훈련기인 U­2기 부족과 항공연료 부족으로 추가훈련을 하지 못하는 실정임. 2,소련군사고문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음.고문단장 스미르노프는 군사지식이 매우 부족하고 또한 태도가 거칠어 북조선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함. 3,무기·탄약생산을 지원한다는 소련정부의 결정은 아직 실행되지 않았음. 4,지금까지 해안방위군이 창설되지 않았음』 이어서 5월 2일 슈티코프대사는 미군철수 동향,남한군의 전투태세 등을 보고하라는 4월 17일자 스탈린의 지시에 대해 상세한 답변전문을 보냈다. 『…우리의 첩자가 보내온 정보와 서울의 라디오방송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과 남조선당국은 남조선 주둔 미군의 철수에 관해 협상하고 있음.…중략…남조선의 북침계획과 관련,남조선당국은 국방군 규모를 계속 증강시키고 있음.국방군은 1949년 1월1일 5만3천6백명에서 3월말 현재 7만명으로 늘었음.특히 기술,특수병력에 관심을 많이 기울여 이들은 2∼4배까지 늘었음.군내부의 불순사병,장교를 숙청하는 조치가 취해지고 있음.미국은 남조선에 많은 양의 각종 무기와 탄약을 보급하고 있음.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의 이런 북침관련 보고는 상당기간 계속 됐다.흥미있는 것은 같은 시기 남한측 군책임자들이 우리정부에 올린 보고서들은 북한측의 우려 할만한 동향에 관해 경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8월 13일 스탈린은 남북한간 전쟁이 시작될 경우에 대비한 소련군의 행동지침을 슈티코프대사 앞으로 내려보냈다.소련은 절대 이 전쟁에 개입하면 안된다는 원칙을 대전제로 한 하달문이었다. 『전쟁이 시작될 경우에 대비해 북조선에 있는 소련 해군기지와 공군부대를 폐쇄할 것.우리가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전세계에 과시하고 또한 적을 심리적으로 무장해제시키며 전쟁이 시작될 경우 우리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함임』 모스크바와 평양 사이에 북침가능성을 놓고 이렇게 숨막히는 전문이 오가는 가운데 49년 9월에 접어들며 김일성은 또 다시 남침의사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수개월에 걸친 내부 준비기간을 거친 다음이었다.
  • 한국전 유발논쟁에 종지부/소자료로 살펴본 6·25전말

    ◎박헌영,전쟁구상 단계부터 깊이 간여/휴전회담은 스탈린 사망한뒤 급진전 서울신문사의 모스크바 주재 이기동특파원이 발굴한 6·25한국전쟁 관련 자료들은 여러 측면에서 6·25한국전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 준다. 첫째,6·25한국전쟁이 김일성의 발의를 소련의 스탈린과 모택동이 받아들임으로써 계획되고 추진됐음을 다시한번 확인해 주었다.김일성이 북한에 공산정권이 세워진 직후부터 얼마나 끈질기게 남침을 계획했는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흐루시초프의 회고를 믿게 된다.흐루시초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의 제안자는 스탈린이 아니라 김일성이었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둘째,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이 시작될 때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해 들어오지 않을까 염려하고 그래서 김일성에게 여러차례 신중히 검토하라고 지시했음이 다시한번 확인됐다.이번 자료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바로 미국의 군사개입 개연성에 대한 스탈린의 경계심이다. 셋째,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동의하면서도 모택동을끌어넣어 만일에 일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책임이 중국으로도 가도록 책략을 썼음이 다시한번 확인됐다.이 점에서 스탈린의 치밀함과 교활성이 새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넷째,스탈린은 그러나 일단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한 직후부터는 한국전쟁 전반에 대해 철저히 통제권을 행사했음을 이번 자료는 보여주고 있다.이 점이 이번 자료의 중요한 새로운 정보이다. 다섯째,박헌영이 6·25한국전쟁에 대해 그 구상 단계에서부터 열성적이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작년에 러시아 정부가 우리 정부에 넘겨준 자료도 그 점을 확인해주었는데 이번 자료는 그 점을 좀더 자세히 뒷받침해주었다. 박헌영의 권력기반은 어디까지나 남한이었다.그래서 그는 김일성 못지 않게 남침 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추진했던 것이다. 그래서 막상 휴전 회담이 열리게 되고 진전되게 됐을 때 제일 앞장서서 반대한 사람이 바로 박헌영이었다.이 점을 이번 자료는 자세히 밝히고 있다. 여섯째,중국은 1950년 가을에 북한을 살리기 위해 파병한 뒤 1951년초까지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파병의 원래의 목적을 달성했다.그렇게 되자 중국은 휴전을 하고 싶었다. 이 점은 중국 자료에서만 나온다.그런데 이번 자료는 중국 자료에만 나온 그 점이 정확한 것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곱째,스탈린은 그러나 휴전에 반대했다.스탈린은 전쟁을 끄는 것이 미국의 국력을 소진시키고 또 소련에 대해 언제 도전할지 모를 중국의 국력을 소진시키는 길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이 점이 이번 자료에 분명히 나타났다.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의 대결을 끌게 하기 위해 휴전에 찬성하지 않았음을 이번 자료는 증명하고 있다. 여덟째,1953년 3월 휴전을 반대하던 스탈린이 죽자 소련도 중국도 휴전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자료는 그 점을 자세히 증명하고 있다.스탈린이라는 걸림돌이 사라지면서 휴전 회담이 급진전된 배경을 이번 자료는 권위있게 설명한 것이다. 아홉째,여담 비슷한 부분이 되겠는데 김일성이 박헌영 외무상 관저에서 북한주재 소련대사관 간부들을 상대로 술주정을 부렸다는 것은 처음 나온 얘기다.물론 김일성이 박헌영 관저에서 북한주재 소련대사관 간부들을 만났으며,그 자리에서 『왜 소련은 나의 남조선에 대한 군사계획에 동의하지 않느냐』고 말한 사실은 작년에 러시아 정부가 우리 정부에 넘겨준 자료에 나와있다. 그러나 이번 자료는 이날 벌어졌던 일들을 아주 재미있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김일성이 만취해서 마구 떠들어댄 얘기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남한 공산당 막바지 투쟁(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8)

    ◎「국대안반대투쟁」선동… 미군정 곤경에/UN임시위 입국에 다급… 「2·7폭동」결행/경찰서 공격·수송기관 파업… 빨치산운동 계기로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조사부 〃) 해방공간에서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그 얼굴을 달리했다.이는 공산주의 운동의 강력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투쟁은 극렬쪽으로 치달았다. 1947년의 공산당 투쟁은 남로당이 전해 가을에 주도한 국대안반대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3·22총파업과 7·27투쟁으로 이어졌다.이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박헌영이 이끄는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몰락이냐 재기냐의 기로에서서 선택한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다시 말하면 전해의 투쟁전략,신전술에 따른 9월파업과 10월 폭동에서 잃어버린 입지를 생존차원에서 만회하려는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어떻든 그 결과는 남로당,즉 남한 공산당의 붕괴를 자초했다. ○전국적 동맹휴학 지시 우리는 여기서 47년부터 유혈 폭력화되기 시작한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일련의 조직적 투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그 하나가 미군정 법령 102호로 발효된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에 관한 법령」이 도화선을 이룬 국대안반대투쟁이다.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의 조종을 받은 학원내 세포들이 전국적인 동맹휴학을 선동한 46년 9월에 일어났다.미군정이 국립 서울대학교을 창설하면서 미군정법령 102호를 통해 직접적인 학원 간섭의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서울대 상대 공대 사범대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간 것이 시발이 되었다.이어 9월5일 서울대 이공학부 교직원 38명이 총사직을 결의했고 1947년으로 접어들면서 반대투쟁을 본격화함으로써 군정을 곤경에 빠뜨렸다. 이 국대안은 일부 여론에서도 반대입장을 밝혔지만 이처럼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된 것은 조선공산당의 역할이 컸다.그리고 그 배후에는 소련이 버티고 있었다.당시 북한에 주둔했던 소련군 사령부 교육담당관 니콜라이 그즈노프 소좌가 남로당 위원장에게 내린 지령이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한다.그 내용은 『소련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남조선 인민들은 남로당의 계획밑에서 광범한 혁명을 일으킬 임무가 있다.남조선에 있는 모든 학교에서는 광범위하고도 조직적이며 맹렬한 투쟁을 일으키는데 있어 제 1차로 동맹휴학을 합법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76명 피검… 지방당 타격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에 관한 법령」발표는 1차 미·소 공위 결렬후 미군정의 정책에 정면 반대하는 소위 신전술을 폈던 조선공산당에게 호기로 작용했다.그래서 좌익학생단체인 민주학생연맹(민학련)과 학원내 당 세포를 통해 국대안 반대투쟁을 대대적으로 벌일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1947년에 접어들면서 미·소 공위재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남로당은 공위에서 소련의 입장을 우위에 두기 위해 당세확장에 나서는 한편 정치투쟁을 보다 강화했다.미군정도 이에맞서 2월 한달동안 좌익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자 남로당은 3월10일 전평과 지방당을 조직적으로 가동시켰다.이것이 바로 3월 22일 서울 부산 광주 인천 부평 대구 등 주요도시와 공업지대에서 24시간 파업에 들어간 3·22총파업이다. 남로당은파업을 통해 노동자 권리보장과 박헌영 체포령 취소,구속 전평간부 즉시 석방,좌익신문 정간 취소 등을 구호로 내걸었다.이 파업으로 2백 76명이 피검되는 등 남로당은 지방당 조직이 큰 피해를 입었다.설상가상으로 우익으로부터도 종전보다 더 심한 공격을 받는다.남로당으로서는 이 3·22파업의 후유증 청산이 절실했다.그래서 남로당은 후유증 청산과 5월21일 재개된 미소공위에서 유리한 입지확보를 노려 당원 5배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공위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자 공위의 성공을 확신했던 남로당은 당황한 나머지 공위 진전을 위한 군중동원을 기도하기에 이른다.이는 7월27일 전국에서 열린 「미소공위경축 임시정부 수립촉진 인민대회」로 나타났다.전국적으로 열린 인민대회에서는 모두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결정서를 채택했는데 미소공위에 직접 전달되었다.이 결정서는 반탁진영 때문에 공위가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과 실력으로 우익 테러를 분쇄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또 미소공위 협의 대상에서 민전이 가장 적합한 단체라고 강조한 결의서는 임시정부 수립에서 반탁진영을 제외시킬 것과 국호는 인민공화국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당시 소련대표 스티코프는 이에 보조를 맞춰 8월 1일 덕수궁 석조전 회의실에서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가졌다.그는 이 회견에서 『공위의 급속추진을 고대하고 있는 조선인민들의 간절한 요청을 달성하기 위해 공위 본회의에서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한 소수정당 및 단체문제로 업무의 지연을 일으킬수 없으므로 1백47개 정당,단체에 대한 개별 조사를 시작할 것을 제의했다』고 밝혔다.이 개별조사 대상 정당 및 단체문제는 미소공위 결렬의 주요인으로 작용했다.남로당의 7·27투쟁은 일사분란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공산당은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남로당의 몸부림 무위로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8일 서울에 들어오면서 남로당은 다급해졌다.남한만의 단독선거는 곧 남로당 거점 상실을 의미한 상황에서 극렬 저지투쟁은 최선책일 수 밖에 없었다.2월7일 민전과 전평을 내세워 전국에 걸쳐 조직적인 폭동 파업을 결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미국 버클리대 교수를 역임한 R A 스칼라피노는 자신의 저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이렇게 전한다.『엄청난 폭력을 수반한 파업이 일어나자 수송기관들은 태업에 들어갔고 숱한 경찰서가 공격을 받았다.정부관리들이나 보수파의 지도자 가운데 5명이 죽고 13명이 부상,납치됐다.파업 참가자 가운데 28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했으며 1천4백89명이 체포됐다』. 미군정의 마지막해 1948년의 2·7폭동은 남로당이 무장투쟁 전술을 도입한 계기가 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7폭동은 각 지방에 「야산대」라는 무장게릴라 조직(빨치산)을 만들어낸 계기가 됐던 것이다.거의 전쟁이나 다름없었던 제주도 4·3사태도 그 흐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그러나 남로당의 저지투쟁은 무위로 끝났고 마침내 제주도르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5·10선거가 치러졌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 CIC문서 발굴/“하지가 박헌영에 도망칠 시간 주었다”/“체포땐 미소공위 재개에 걸림돌”판단/46년 10월 월북… 남로당 「10월 폭동」지령 해방정국에서 남한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박헌영은 미군정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존재였다.그래서 체포령을 내렸지만 실제 붙잡지 않고 쫓아버렸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 보존관리국(NARA)에서 찾은 주한미군사령부 방첩대(CIC)문서를 통해 밝혀냈다. 이 문서는 1946년 11월 12일 한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 13차회의에서 보고된 「박헌영의 구속영장에 관한 장택상의 진술」.의장(김규식을 지칭)이 박헌영을 체포하는데 경찰이 실패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답변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장택상은 여기서 박의 체포명령은 결코 못 받았다고 전제하면서 얼마후 CIC의 니스트 대령으로부터 찾아보라는 말은 들었다고 답변하고 있다. 그러나 하지 장군으로부터 니스트 대령의 하는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장택상은 하지 장군이 박에게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일부러 벌어 준 것으로 보았다.따라서 박이 체포령을 피해 도망갔는데 이 대목은 하지장군과 러치 장군,맥그린 대령 등이 증명할 수 있다고 장택상은 덧붙였다. 미군정 최고책임자 하지가 박헌영 체포를 지연시킨 까닭은 아마도 소련을 의식한 배려로 풀이될 수 있다.박헌영의 체포는 자칫 미소공위 재개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과 함께 박이 숨어버린다면 공산당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떻든 박헌영은 그해 10월초 체포령을 피해 북으로 넘어갔다.그동안의 증언을 종합하면 박은 38선이 가까운 해주에서 남한공산당을 조종한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소위 국대안반대투쟁과 10월 폭동을 해주에서 지령함으로써 하지가 노린 공산당 무력화 노력은 실패했던 것이다.
  • 좌우합작 실패의 두안(새로쓰는 한국현대사:15)

    ◎“미군정을 인민위 넘기라” 「민전」 일방발표/방헌영,우익 수용못할 「5원칙」 내세워 결렬/미군정고문 버치 개입… 친미세력구축 노력/중도우 김규식·여운형 「합작의 꿈」 무산 미·소공동위원회 1차회담이 1946년5월 무기휴회에 들어간 뒤 미국과 소련,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남북의 정치세력은 단독정부수립을 향해 나아갔다.비록 2차회담이 19 47년 열리긴 했지만 그 회의는 예정된 수순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이처럼 남북분단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의 대응은 어떠했나. 외세에 영합해 정파이익 찾기에 앞장선 무리가 있었는가 하면 민족통일과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도 등장했다.남쪽에서 가시화한 통일독립시도가 바로 좌우합작운동이다.좌우합작운동은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돼 남북분단이 민족 앞에 현실로 대두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차공위 결렬후 손잡아 좌우합작운동을 이끈 양날개는 우파의 김규식,좌파의 여운형이다.김규식은 미·소공위 휴회 직후 열린 「독립쟁취국민대회」에서 『남의 손에 정부가 수립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이제 우리가 자율적으로 정부를 세우자』고 역설한다(한성일보 1946년5월14일자).그리고 그 방안으로 ▲남쪽에서 먼저 좌우파간에 합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과 북의 정파가 통합해 통일정부를 이루자는 「좌우합작론」을 내세웠다.당시 김규식은 우익의 집결체이자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 의장이었다. 김규식의 제안에 좌파모임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장단의 한 사람 여운형(조선인민당위원장)이 대뜸 지지하고 나섰다.이들은 「좌우합작위원회」회의가 정식으로 열리기까지 때로는 단둘이서,때로는 좌우파 각 정당·사회단체대표와 함께 만나 좌우합작을 성사시키려고 애썼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합작운동에 쉽게 동의한 것은 무엇보다 민족통일이 최우선이라는 공감대를 가졌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임시정부수립」계획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데도 뜻을 같이했다.민족이 우선 힘을 합쳐 「임시정부」를 구성하면 신탁통치문제,일제잔재청산등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들이 이데올로기상에서 색깔이 희미했던 사실도 도움이 됐다.당시 미군정의 정보보고서는 김규식을 중도우파,여운형을 중도좌파로 일단 구분한 뒤 『근본은 민족주의자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 46년7월25일 덕수궁에서 열린 좌우합작위 1차회담에는 우파의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붕준등 5명,좌파에서 여운형·성주식·정노식·이강국등 4명이 참석했고 김규식이 사회를 맡았다.또 미군정측 연락장교로 정치고문인 L 버취중위가 출석했다.1차회담에서 양측은 합작의 기본원칙으로 3개 항을 합의했다.곧 ▲진정한 대의에 의한 민주공화국수립 ▲진정한 애국자,혁명가,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세력이 단결하여 민족통일달성 ▲북한에서도 진정한 민주적인 언론출판의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기초 위에서 남북이 합작해야 한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친다.합작위의 좌파 파트너인 민전은 1차회의 다음날에 양쪽 합의사항을 무시한 새로운 「합작5원칙」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그 내용은 「미군정의 정권을 인민위원회에게 넘기라」는 등 미군정과 우파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이 5원칙은 박헌영이 제안한 것으로,그 목적은 좌파내 지도권이 여운형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견제하는 데 있었다.좌파는 이어 7월29일 열린 2차회담에 불참했다. 그리고 나서 8월에 접어들어 정국이 일대격변에 휩싸이는 바람에 좌우합작은 뒷전으로 밀린다.조선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해 「9월총파업」「10월폭동」이 잇따라 벌어졌으며 이에 따른 견해차이로 남쪽의 좌파세력이 4분5열돼 합작운동에 눈돌린 겨를이 없었다. ○기본원칙 3개항 합의 더욱이 미군정이 그해 9월 좌우합작위원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좌우합작운동은 위기를 맞는다.미군정은 김규식이 처음 좌우합작에 나설 때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물론 어떤 때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열의를 쏟았다.정치고문 버취중위는 매번 회의에 참석해 회의진척상황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군정측에 냈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입수한 문서로 확인됐다(별도기사 참고). 이 문서에서 드러나듯 미군정은 자체 필요에 의해 좌우합작을 지원했으며 합작방향을 원하는 쪽으로 이끌기 위해 배후조종을 시도했다.미군정의 목적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에 좌파를 참여시키는 데 있었다.미군정은 친미세력기반을 안정시킬 의도로 과도입법기구인 「입법의원」을 구성하려고 했다.선출방식은 지역유지들을 통한 간접선거였다.미군정은 이에 관한 법령을 46년8월 제정하지만 여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숨겨왔다. 그러나 9월 언론에 관련보도가 나가자 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은 버취중위를 통해 좌우합작위에 눈길을 보낸다.합작위에서 입법위원의 절반을 선출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이는 합작위의 위상을 높여주는 제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합작위 자체를 입법의원으로 수렴하려는 시도였다.미군정의 제의는 거센 찬반논쟁 끝에 좌우합작위에 받아들여진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합작운동에 참여한 숱한 정파가 떨어져나갔다. ○「남 단독정부」로 기울어좌파대표 여운형은 9월23∼30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기자회견을 가졌다.그는 『좌우합작에 쌍방이 매우 접근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중지된 것은 유감』이라면서 『민족공동의 이익을 위하여는 좌우협의가 절대필요하다』고 소신을 밝혔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계속 접촉을 가져 10월7일 「좌우합작의 7대원칙」을 공동명의로 발표했다.그 주요내용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선임시정부수립,후신탁통치해결」을 적극 지지하며 ▲친일파숙청은 임시정부의 입법에 따른다는 것이었다.이들은 입법의원에 대한 합작위원회의 입장을 정리,하지에게 통보했다. 두 사람이 발표한 합작원칙에 대해 김구 주도의 한독당 등 대부분의 정파는 크게 환영했지만 좌우의 대표정당격인 조선공산당과 한민당,그리고 이승만 진영은 분명하게 거부했다. 좌우합작위는 입법의원구성에 참여함으로써 결국 성격이 변질된다.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은 거의 우파들이었고,합작운동보다는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기울어졌다.입법의원은 1947년1월 「신탁통치반대 긴급결의안」을 채택해 단정수립을 촉구하고 나섰다.입법의원을 좌우합작에 활용하려던 좌우합작파는 오히려 그 터전을 잃고 물러나야 했다. 미·소공위 2차회담이 6월25일 열리자 합작파는 「시국대책협의회」를 구성하는등 안간힘을 쓰지만 단정으로 흐르는 거센 물결을 막지는 못했다.그리고 7월19일 합작운동의 좌파지도자인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총격을 받아 숨졌다.좌우합작운동은 막을 내리는 듯하다가 1948년 봄 김구·김규식이 주도하는 「남북 정당·사회단체대표 연석회의」로 마지막 불꽃을 되사른다.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한 운동이었다. 그 원인은 ▲미·소의 한반도 제패전략 ▲정파이익추구에 몰두한 극우·극좌파의 견제 등에 있었다. 그러나 실패한 운동이었다고 해서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좌우합작파가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고 어떻게든 통일자주정부를 세우려 애쓴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남북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는 현시점에서는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이 시대에 활용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박헌영·여운형 갈등… 회담 깨졌다/버치보고서 내용/박헌영,“좌파대표에 회의참석 말라”/버치,좌우양쪽 움직임 낱낱이 파악 미군정 공보국 소속 레너드 버치중위는 하지사령관과 아놀드군정장관의 정치고문이었다.1946년 5월 전임자인 굿펠로의 귀국후 정치고문을 맡았지만 그해 1월5일 박헌영과 존 스톤(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의 기자회견에 간여해 그 내용을 왜곡시키는 등 일찌감치 정치공작에 뛰어들었다.그는 『스스로를 마키아벨리처럼 착각,남한 정계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정치적 책략에 부심한』(마크 게인 저 「해방과 미군정」속에서)인물이었다. 좌우합작에 대한 버치의 공작은 미군정측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다음은 좌우합작위원회 2차회담이 예정된 1946년 7월29일 작성된 「좌우합작회의에 관한 버치의 4번째 보고서」내용이다. 『일요일인 7월28일 저녁 박헌영이 합작위 좌파대표들에게 회의 불참을 지시했고 이 문제로 박과 여운형이 논쟁을 벌였다.다음날 상오 10시 김규식은 여운형으로부터 「몸이 아파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며 며칠동안 입원해야겠다」는 사신을 받았다』 버치는 이어 2차회담 연기가 박헌영과 여운형의 갈등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또 김규식으로부터 좌파 대표인 김원봉·허헌등을 만나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서 보듯 버치는 좌우 양쪽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으며,양쪽의 이견을 조정하거나 한쪽을 설득하는 일도 맡았음을 알 수 있다.미군정의 지원은 초기 좌우합작운동을 활성화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는 합작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에게 끝내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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