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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계 큰 별 지다…강수연, 55세로 별세(종합)

    영화계 큰 별 지다…강수연, 55세로 별세(종합)

    4살에 데뷔한 반세기 영화인‘씨받이’로 세계 3대 영화제 첫 수상문화행정으로 보복 넓혀…9년 만에 스크린 복귀 앞두고 비보 영화배우 강수연씨가 7일 오후 3시쯤 별세했다. 지난 5일 쓰러져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던 강씨는 사흘만인 이날 끝내 숨을 거뒀다. 1966년 서울 태생으로 올해 나이 만 55세(한국 나이로는 57세)인 강씨는 4살 때였던 1969년 동양방송(TBC) 전속 아역 배우로 데뷔, 현재까지 50여년의 배우 인생을 살았다. 아역 시절 ‘똘똘이의 모험’(1971) 등에 출연하며 동양방송(TBC) 전속 배우로 연기했다. 이후 KBS 청소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1983) 등으로 하이틴 스타로 성장했다. 스물한 살 때인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었었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한국 배우는 고인이 최초였다. 1989년에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당시 공산권 최고 권위였던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받았다. 1990년대에도 활발한 작품활동으로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경마장 가는길’(1992), ‘그대 안의 블루’(1993) 등 수많은 흥행작을 냈다. 이 영화들로 대종상영화제·백상예술대상·청룡영화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국내외 영화제·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만 10차례에 달한다. 2001년에는 SBS TV ‘여인천하’로 정난정 역을 맡으며 오랜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했다. 이 드라마로 그해 SBS 연기대상을 받았다.‘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스크린 복귀 앞두고 비보 이후 고인은 연기 활동을 줄이는 대신 문화행정가로 변신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출범 초기부터 심사위원·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2015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2014년 이른바 ‘다이빙벨 사태’ 이후 수년 동안 계속된 갈등과 파행의 책임을 지고 2017년 사퇴했다. 고인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물러난 이후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 참석이 4년 만의 공개 활동이었다.지난해 연상호 감독의 신작 ‘정이’(가제)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며 단편 ‘주리’(2013) 이후 9년 만에 스크린 복귀를 앞두고 있었다. 장편 극영화 주연은 ‘달빛 길어올리기’(2010)가 마지막이었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정이’는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편 영화계는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현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을 위원장으로 영화인장 장례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 감독 이우석·임권택·정진영, 배우 김지미·박정자·박중훈·손숙·안성기 등이 고문을 맡았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층 17호에 차려졌다. 발인은 11일이다.
  • 영화배우 강수연, 55세로 별세…‘월드스타’ 너무 이른 영면

    영화배우 강수연, 55세로 별세…‘월드스타’ 너무 이른 영면

    ‘원조 월드스타’ 영화배우 강수연이 7일 오후 3시께 별세했다. 향년 55세. 고인은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뇌출혈 증세로 쓰러진 뒤 사흘째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 치료를 받아왔다.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4세 어린 나이에 동양방송(TBC) 전속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고인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1987)로 베네치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한국 배우로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이라는 새 역사를 썼고 2년 뒤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거머쥐는 영광을 누렸다. 1990년대에도 활발한 작품활동으로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경마장 가는길’(1992), ‘그대 안의 블루’(1993) 등 수많은 흥행작을 냈다. 이 영화들로 대종상영화제·백상예술대상·청룡영화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국내외 영화제·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만 10차례에 달한다. 고인은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 페미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다. ‘스크린쿼터 수호천사단’ 부단장을 맡으면서 미국의 통상압력에 맞서 한국영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2001년에는 SBS TV ‘여인천하’로 정난정 역을 맡으며 오랜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했다. 이 드라마로 그해 SBS 연기대상을 받았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출범 초기부터 심사위원·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2015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2014년 이른바 ‘다이빙벨 사태’ 이후 수년 동안 계속된 갈등과 파행의 책임을 지고 2017년 사퇴했다. 고인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물러난 이후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 참석이 4년 만의 공개 활동이었다. 지난해 연상호 감독의 신작 ‘정이’(가제)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며 단편 ‘주리’(2013) 이후 9년 만에 스크린 복귀를 앞두고 있었다. 장편 극영화 주연은 ‘달빛 길어올리기’(2010)가 마지막이었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정이’는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다. 영화계는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현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을 위원장으로 영화인장 장례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 감독 이우석·임권택·정진영, 배우 김지미·박정자·박중훈·손숙·안성기 등이 고문을 맡았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층 17호에 차려졌다. 조문은 8일부터 가능하며 발인은 11일이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22일 강원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린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한 강수연의 모습이다.
  • 이민정·오윤아 블랙…손예진♥현빈 하객

    이민정·오윤아 블랙…손예진♥현빈 하객

    배우 오윤아가 현빈·손예진 결혼식 현장 사진을 공개했다. 현빈과 손예진은 지난달 31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그랜드 워커힐 호텔 내 애스톤하우스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리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오윤아는 2일 인스타그램에 “참 예뻤던 날~ 정연이도 만나구 ㅠㅠ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던..”이라며 여러 장의 사진을 올렸다. 오윤아는 하객으로 참석해 엄지원, 이민정 등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윤아는 슬림한 검은색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를 착용, 우아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이민정 또한 검은색 옷을 입었고, 엄지원은 핑크색 슈트를 입고 등장했다. 이날 결혼식은 축사 장동건, 사회 박경림, 축가 거미·김범수·폴킴, 부케를 받은 공효진부터 고소영, 공유, 서장훈, 박중훈, 박솔미, 설경구, 손지창, 송윤아, 안성기, 하지원, 한재석, 황정민 등 시상식을 방불케하는 하객 라인업으로 화제를 모았다.
  • [속보]현빈♥손예진, 결혼식 ‘내부사진’ 공개

    [속보]현빈♥손예진, 결혼식 ‘내부사진’ 공개

    배우 현빈(40)과 손예진(40)이 결혼해 톱스타 커플이 또 한 쌍 탄생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북한 장교와 재벌 상속녀로 출연해 달콤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로맨스를 꽃피운 두 사람은 2년의 열애 끝에 실제 부부가 됐다. 현빈과 손예진은 31일 이날 오후 4시 서울 광진구 그랜드워커힐 호텔 애스톤 하우스에서 웨딩마치를 울렸다. 이번 결혼식은 비공개인만큼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됐다. 청첩장을 소지한 하객만 입장이 가능했다. 본식에 앞서 현빈과 손예진은 사전 행사에 참석했다. 두 사람과 혼주를 제외한 참석자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현빈은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있었고, 손예진은 풍성한 레이스로 장식된 A라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결혼식이 시작되고, 손예진은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 버진로드를 걸었다. 이어 현빈이 손예진의 손을 잡고 단상에 섰다. 손예진은 결혼식 중간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부케는 손예진과 친분이 두터운 배우 공효진이 받았다. 결혼식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현빈과 친한 배우 장동건이 축사를, 방송인 박경림이 사회를 맡았다. 축가는 가수 거미, 김범수, 폴킴이 불렀다. 이날 결혼식 하객으로는 배우 안성기, 주진모, 박중훈, 황정민, 하지원, 장영남, 엄지원, 송윤아, 공효진, 이민정 등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은 아직 계획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현빈과 손예진은 2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두 사람은 영화 ‘협상’을 통해 친분을 쌓았고 두 차례 열애설이 불거졌으나 부인했다. 이후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함께 출연하며 연인으로 발전했고 지난해 1월 종영 후 열애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지난달 10일 결혼을 공식 발표했다.
  • 배우 박중훈, 만취운전 자숙 1년만에 활동 재개 신호

    배우 박중훈, 만취운전 자숙 1년만에 활동 재개 신호

    만취 음주운전 적발 후 자숙 중이던 배우 박중훈이 근황을 전했다. 박중훈은 18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오랜만에 소식을 전합니다"라며 "지난해에는 그저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많이 해서 의미 있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운동을) 하루 2시간 언저리쯤 하다 보면 어느새 800~1000(킬로)칼로리를 소모하게 되더라. 당연한 얘기지만 에너지가 많이 좋아진다, 운동의 중요함을 새삼 느끼게 됐던 한 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전 이제 2022년에는 밖으로 좀 나오려고 한다. 올해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박중훈은 지난해 3월 서울 강남구 한 아파트 입구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약 100m를 만취 상태로 운전했다가 적발됐다. 박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취소 기준(0.08%)을 넘었다. 박씨는 당시 대리운전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아파트 입구까지 간 뒤 기사를 돌려보내고 직접 차를 주차장까지 몰았으며, 사고를 내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같은해 5월 박씨를 벌금 700만원에 약식 기소했고 법원은 검찰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약식 기소는 비교적 혐의가 가벼운 경우 정식 재판에 넘기지 않고 서면 심리만으로 약식명령을 내려달라고 검찰이 법원에 청구하는 절차다. 박씨는 2004년에도 음주운전으로 적발돼 면허가 취소된 바 있다.
  • 박중훈, 화천대유 초기 투자 연루 의혹... 소속사 측 “확인 어려워”

    박중훈, 화천대유 초기 투자 연루 의혹... 소속사 측 “확인 어려워”

    경기 성남시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을 받는 화천대유자산관리(화천대유) 초기 투자에 배우 박중훈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소속사 측은 확인이 어렵다고 밝혔다. 28일 박중훈 소속사 나무엑터스 측은 박중훈이 화천대유의 초기 운영 자금을 댄 투자사 엠에스비티에 거액을 빌려줬다는 일부 매체 보도와 관련해 “개인적인 부분이라 확인이 어렵다”고 밝혔다. 앞서 이날 일부 매체는 엠에스비티가 2015년 화천대유에 초기 운영 자금의 일부인 60억원을 빌려줬고, 다음해 이 대여금을 투자금 131억원으로 전환하면서 화천대유 사업부지의 우선수익권을 얻었다고 보도했다. 또 엠에스비티의 투자 자금 출처로 박중훈을 지목하며, 박중훈이 지분율 100%로 최대 주주인 일상실업이 엠에스비티에 2015∼2016년 20억원, 2017년 54억원을 빌려줬다고 전했다.
  • 아파트 단지 내 음주운전, 배우 박중훈 벌금 700만원

    아파트 단지 내 음주운전, 배우 박중훈 벌금 700만원

    음주운전 혐의로 약식 기소된 배우 박중훈(55)씨에게 700만원의 벌금형이 내려진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27단독 신세아 판사는 지난달 7일 박씨의 음주운전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벌금 700만원의 약식 명령을 내렸다. 박씨는 지난 3월 26일 오후 9시 30분쯤 술에 취한 채 서울 강남구에 있는 지인의 아파트 입구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약 100m를 운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박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취소 기준(0.08%)을 넘었다. 박씨는 당시 대리운전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아파트 입구까지 온 뒤 기사를 돌려보내고 직접 차를 주차장까지 몰았고, 사고를 내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지난 5월 박씨를 벌금 700만원에 약식 기소했고 법원은 검찰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약식 기소는 비교적 혐의가 가벼운 경우 정식 재판에 넘기지 않고 서면 심리만으로 약식명령을 내려달라고 검찰이 법원에 청구하는 절차다. 앞서 박씨는 2004년에도 음주운전으로 적발돼 면허가 취소된 바 있다.
  • 아파트 주차장서 만취운전…배우 박중훈, 검찰 송치

    아파트 주차장서 만취운전…배우 박중훈, 검찰 송치

    배우 박중훈이 검찰에 송치됐다. 19일 서울 강남경찰서는 영화배우 박중훈(55)씨를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 혐의로 16일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지난달 26일 오후 9시 30분쯤 술에 취한 채 강남구에 있는 지인의 아파트 입구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약 100m를 운전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는 당시 대리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아파트 입구까지 온 뒤 기사를 돌려보내고 직접 운전대를 잡은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취소 수준(0.08%)을 넘었다. 다만 경찰 조사 결과 음주운전 도중 접촉사고를 내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아파트 직원의 신고로 출동해 박씨의 음주운전 사실을 확인했다. 박중훈 소속사 나무엑터스는 “책임을 깊이 통감하며, 배우 역시 깊게 반성하고 있다. 팬들께 심려와 실망을 끼쳐드려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했다. 한편 박씨는 앞서 2004년에도 음주운전으로 적발돼 면허가 취소된 바 있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박중훈 만취 상태서 음주운전… ‘면허 취소 기준 2배’

    박중훈 만취 상태서 음주운전… ‘면허 취소 기준 2배’

    영화배우 박중훈(55)씨가 만취 상태로 음주운전을 하다가 경찰에 검거됐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박씨를 도로교통법 위반(음주운전)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고 28일 밝혔다. 박씨는 지난 26일 오후 9시 30분쯤 강남구의 한 아파트 입구에서 지하주차장까지 약 100m 거리를 만취 상태로 운전한 혐의를 받는다. 당시 박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76%로 운전면허 취소 기준(0.08%)에 해당했다. 경찰은 이날 오후 10시 20분쯤 “술을 마신 사람이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를 끌고 왔는데 신분 확인에 협조를 하지 않는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박씨임을 확인했다. 앞서 박씨는 2004년에도 강남구에서 술을 마시고 차를 몰다가 면허가 취소된 적이 있다. 박씨는 지인과 함께 술을 마신 후 대리운전 기사에게 차를 운전하게 해 이 아파트 입구까지 온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입구에서 대리운전 기사를 돌려보내고 자신이 직접 운전해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들어갔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박씨는 현장에서 음주운전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 박중훈, 음주운전뒤 주차장서 잠자다 경찰 조사받아[전문]

    박중훈, 음주운전뒤 주차장서 잠자다 경찰 조사받아[전문]

    영화배우 박중훈씨가 만취 상태로 운전대를 잡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박씨를 도로교통법(음주운전) 위반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고 28일 밝혔다. 박씨는 26일 오후 9시30분쯤 서울 강남구 한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지하주차장까지 술에 취한 채 운전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는 술을 마시고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아파트 입구까지 온 뒤 입구에서부터 직접 운전대를 잡아 지하주차장으로 끌고 간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에 따르면 음주 측정 결과 박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76%로 면허취소 수치(0.08%)를 넘은 것으로 파악됐다. 박중훈 소속사 나무엑터스는 “박중훈씨와 관련 좋지 않은 소식으로 심려를 끼쳐 드린 점에 대해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소속사는 “박중훈씨는 26일 저녁 지인 두 명과 함께 술을 마셨고 저녁 9시, 대리운전기사분이 운전하는 차량을 두 대로 나누어 타고 근처 지인의 집으로 이동했다”며 “아파트 단지 안에 도착해 지하 진입로 입구에서 대리운전기사분을 돌려보낸 후 직접 주차를 한 박중훈씨는 잠시 잠이 들었다”며 음주운전 적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경찰은 서울 강남구 소재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음주운전자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이어 “이후 주차장에 경찰이 도착하였고 현장에서 박중훈씨는 블랙박스 제출 및 경찰 조사에 성실히 임한 후 귀가했다”면서 “또 대리운전기사분이 이를 함께 진술해 주셨다”고 했다. 소속사 측은 “당사는 이유를 불문하고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 점에 대해 책임을 깊이 통감하고 있으며 배우 역시 깊게 반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씨는 지난 2004년에도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이하 나무엑터스 공식입장 전문. --------------------------------------------- 안녕하세요. 나무엑터스입니다. 본사 소속 배우 박중훈씨 관련 입장을 말씀드립니다. 먼저, 좋지 않은 소식으로 심려를 끼쳐 드린 점에 대해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박중훈씨는 26일 저녁 지인 두 명과 함께 술을 마셨고 저녁 9시, 대리운전기사분이 운전하는 차량을 두 대로 나누어 타고 근처 지인의 집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 도착해 지하 진입로 입구에서 대리운전기사분을 돌려보낸 후 직접 주차를 한 박중훈 씨는 잠시 잠이 들었습니다. 이후, 주차장에 경찰이 도착하였고 현장에서 박중훈씨는 블랙박스 제출 및 경찰 조사에 성실히 임한 후 귀가하였습니다. 또한 대리운전기사분이 이를 함께 진술해 주셨습니다. 당사는 이유를 불문하고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 점에 대해 책임을 깊이 통감하고 있으며 배우 역시 깊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박중훈씨를 사랑해 주시는 팬분들께 심려와 실망을 끼쳐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인사] 한국예탁결제원, 병무청, 국무조정실·국무총리비서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 한국예탁결제원 ◇ 부장 보임 △ 총무부장 최순돈 △ 펀드서비스부장 성보경 △ 의결권서비스부장 고병근 △ 증권대행부장 박인선 △ 증권예탁부장 서보성 △ 사회적가치추진단장 배재호 ◇ 부장 전보 △ 전자등록업무부장 윤관식 △ 전략기획부장 조성일 △ IT기획부장 이상섭 △ 증권정보부장 우현순 △ RFR 산출·공시 추진단장 백상태 △ IT인프라운영부장 이청우 △ 리스크관리부장 이재철 △ 채권등록부장 강승철 △ 경영관리부장 김홍진 △ 청산결제부장 이승권 △ 인사부장 정종문 △ 자산운용지원부장 김정민 △ 대구지원장 김종욱 ◇ 팀장 보임 △ 리스크관리부 컴플라이언스팀장 손진 △ 전략기획부 대외협력팀장 박재용 △ 사회적가치추진단 일자리·사회적가치추진팀장 윤순욱 △ IT기획부 IT기획팀장 박현욱 △ 전자등록업무부 전자등록총괄팀장 김경덕 △ 리스크관리부 리스크통제팀장 오정숙 △ 인사부 노사협력팀장 손수현 △ 펀드서비스부 펀드컨설팅팀장 박정미 △ 총무부 직원행복팀장 김륜경 △ 사모펀드투명성강화추진단 선임전산역 이동훈 △ 증권대행부 대행업무팀장 정성욱 △ RFR 산출·공시 추진단 선임조사역 임영진 △ 정보보호부 IT보안팀장 한영우 ◇ 팀장 전보 △ 펀드서비스부 펀드회계팀장 고흥석 △ 글로벌기획부 선임조사역 최흥규 △ 글로벌서비스부 글로벌권리관리팀장 강경필 △ 전략기획부 전략기획팀장 이기운 △ 연구개발부 신사업개발팀장 신우철 △ 혁신기업지원부 혁신창업지원팀장 김승현 △ 정보보호부 정보보호기획팀장 조성국 △ IT기획부 IT표준화팀장 김민지 △ 증권담보부 Repo팀장 우종하 △ 혁신기업지원부 선임조사역 고정재 △ 재무회계부 자금운용팀장 채양기 △ 대전지원 선임조사역·지원장직무대리 송재만 △ 연구개발부 조사연구센터팀장 오봉록 △ RFR 산출·공시 추진단 선임조사역 배종혁 △ 경영관리부 경영관리팀장 박중훈 △ 증권대차부 채권대차팀장 이동성 △ 증권예탁부 증권예탁팀장 오종옥 △ 채권등록부 채권등록1팀장 김옥주 △ 연구개발부 선임조사역 문진혁 △ IT서비스2부 펀드지원팀장 이남순 △ 홍보부 홍보2팀장 이민희 △ 글로벌기획부 글로벌기획팀장 김훈 △ 글로벌사업부 글로벌사업팀장 박기환 △ 사모펀드투명성강화추진단 선임조사역 강신규 △ 전자등록업무부 계좌부관리팀장 이성하 △ 혁신기업지원부 크라우드펀딩지원팀장 전일우 △ 글로벌기획부 글로벌금융팀장 윤정민 △ 총무부 총무2팀장 성재혁 △ 인사부 인사팀장 김수정 △ 감사부 선임검사역 이준우 △ 나눔재단 사무국장직무대리 윤택수 △ 청산결제부 주식결제팀장 김병만 △ RFR 산출·공시 추진단 선임조사역 이승환 △ 주식·파생등록부 파생결합증권팀장 반재혁 △ 청산결제부 채권결제팀장 김정철 △ 글로벌서비스부 글로벌정보관리팀장 박세규 △ 증권정보부 증권정보관리팀장 손태순 △ 증권대행부 명의개서팀장 조덕우 △ IT인프라운영부 네트워크관리팀장 권용현 △ IT인프라운영부 시스템관리팀장 김형욱 △ 경영관리부 성과관리팀장 이호형 △ 인사부 선임비서역 임창균 ■ 병무청 ◇ 고위공무원 승진 △ 부산지방병무청장 윤주봉 ◇ 고위공무원 임용 △ 충북지방병무청장 이창영 ◇ 과장급 승진 △ 병역조사과장 심선용 ■ 국무조정실·국무총리비서실 ◇ 팀장급 △ 복지정책팀장 구본철 ■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 홍릉강소특구사업단장 최치호
  • “해외여행 못 가니 명품백이라도”… 강남 매장 대기줄만 200팀

    “해외여행 못 가니 명품백이라도”… 강남 매장 대기줄만 200팀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난 1년간 자영업은 차례대로 무너졌다. 지난해 2월 중국 후베이성을 거친 외국인 입국 제한을 시작으로 서울 명동 같은 외국인 관광·쇼핑 명소가 타격을 받더니 5월에는 이태원 클럽발 확산으로 서울 주요 상권이 붕괴했다. 지난 8월 수도권에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적용되면서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매출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특히 집합금지 업종으로 분류된 노래방과 헬스장, PC방의 타격이 컸다. 재난지원금 등 정부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제보다 방역이 우선이라는 국민적 합의에 자영업자들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서울신문은 코로나19 확산 1년을 맞아 19일 서울 주요 상권 5곳(중구 명동, 서대문구 신촌동, 용산구 이태원1동, 종로구 종로1·2·3·4가동, 강남구 청담동)의 업종별 매출 증감률을 분석하고 상권마다 자영업자 10명씩 총 50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매출액 분석은 서울시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 데이터를 이용했다. 상권 특징마다 업종별 매출액 감소 차이는 있었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보다 사정이 어렵다고 상인들은 토로했다. 이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고 매출 상승세를 보인 상권과 업종도 있었다. 손꼽히는 부촌인 강남 청담동의 가방업종 매출은 코로나19 전보다 수십 배 뛰었고, 집합금지업종으로 분류된 헬스장 역시 매출액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명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이기석(61)씨는 지난해 4월 직원을 한 명 줄였다. 2~3월 매출액이 줄어든 것은 어떻게든 버텨 봤지만, 다음달엔 버틸 수가 없었다. 한때 이씨 가게는 과거 일본 공영방송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돼 일본인 관광객 사이에 유명세를 탔다. 많을 땐 하루에 손님 300명 정도를 받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지금은 월세 120만원과 전기·가스비 등 100만원을 내고 나면 빠듯하다. 이씨는 지난 18일 “오늘도 2000만원 대출을 신청했다. 4차 재난지원금이 나올 만큼 코로나19가 계속된다면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광·쇼핑 명소인 명동은 지난해 1월 20일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국내에서 발생한 이후 빠르게 상권이 식었다. 코로나19 여파로 한국을 찾는 일본·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니 장사가 잘될 리 없었다. 명동의 한식업 점포 한 곳당 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1월 3278만원이었지만 2월 2374만원, 3월 1909만원으로 떨어졌다. 3개월 사이 42.8%가 감소했다. 소매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가장 최근 자료인 지난해 3분기 명동 가방매장의 평균 매출은 코로나19 영향이 없던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2%나 감소했다. 화장품(55.1%↓), 의류(44.8%↓), 신발(35.8%↓) 모두 하락세였다. 현장 체감 온도는 더 나빴다. 지난 18일 기준 명동거리는 주한중국대사관이나 명동성당 인근 등을 제외하면 10개 점포 중 문을 연 점포 1개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월세가 그나마 저렴하고 서울시가 월세를 반값으로 낮춰 받는 지하상가도 10개 중 2~3개꼴로 ‘잠정 휴업’ 상태다. “사람들이 이태원을 ‘코로나19 걸리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낙인효과가 쉽게 사라질까요. 이태원에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요.”용산구 이태원에서 12년째 주점을 운영하고 있는 구자훈(52)씨는 이날 텅 빈 가게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태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이태원의 성장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최근 이태원의 위기가 누구보다 마음 아프다. 지난해 초까지는 금방 종식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발 사태 이후 간신히 버티던 매출이 90%나 빠지면서 희망이 무너졌다. 최근 하루에 가게를 찾는 손님은 고작 3팀 정도다. 밀린 임대료를 갚으려고 부업으로 배달 플랫폼업을 하고 있지만 변변찮다. 구씨는 “어려움은 둘째 치고 과거와 같은 날이 다시 올지 확신이 없다는 게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이태원1동 상권의 매출액은 1년 내내 곤두박질쳤다. 특히 일반 음식점의 경우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중식이 80.8%, 일식과 한식은 각각 68.5%, 56.5% 감소했다. 서울 전체 같은 기간 업종 매출액 평균 증감률(중식 16.2%↓, 한식 15.2%↓, 일식 1.1%↓)을 크게 웃돈다.문제는 이태원의 낙인효과다. 이태원을 찾는 고객의 80%는 외지인인데 지난해 5월부터 집단감염에 대한 공포감이 극대화하면서 발길이 끊겼다. 지난해 1월 코로나19 발생 이후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던 이태원 상권 매출액은 지난해 5월 기준 전월보다 호프업종은 49.7%, 치킨전문점은 46.4%, 한식은 46.5% 급락했다. 야간 영업 의존도가 높은 것도 문제다. 외식업은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매출이 전체의 70~80%를 차지한다. 이태원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최지훈(46·가명)씨는 “가뜩이나 어려운 업주들에게 1~2시간만 장사하고 문을 닫으라고 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하다”며 “영업 제한 시간을 상권에 맞게 조정해야 이태원 상권을 살릴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화여대 앞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에요.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발길이 뚝 끊기니까 상권이 죽어 버렸죠. 이대는 원래 미용실, 신발·옷가게가 싼 걸로 유명해요. 외국인 상대로 박리다매식으로 장사했는데 5000~1만원짜리 옷 한두 벌을 손님 5명에게 판다고 무슨 장사가 되겠어요.” 5년간 이대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이정희(33·가명)씨는 지난해 5월부터 코로나19 충격이 컸다고 했다. 손가락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던 이씨는 3~4월은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정확히 5월부터 손님 수가 쭉 떨어졌다고 했다. 반등도 없었다. 하루 300만원까지 찍었던 매출은 하루에 1만원짜리 옷 한 장 팔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이씨는 “주변에 오피스텔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보면 인적은 없고 공사판인 곳에 누가 이곳에 오려고 하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18일 찾은 신촌 내 이대 정문 앞 상권과 신촌역 부근에는 적막감만 흘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자 신촌동 주요 소매점의 매출 타격이 컸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가방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91.5% 줄었다. 화장품업도 74.7% 줄었고 의류업은 61.2% 줄었다. 옷가게를 운영하는 성지민(40)씨는 “어떨 때는 (손님이 가게에) 하루에 한 명도 안 들어올 때도 있다”며 “보증금이 1억원 정도라고 하면 6000만원 정도가 월세로 빠졌다”고 말했다. 신촌역 부근 대학가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학생이 등교할 필요가 없다 보니 유동인구는 자연스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한식업 매출액은 전년 대비 36.6% 줄었고 대학생들이 부담 없이 찾는 패스트푸드점과 치킨전문점, 분식점 매출액은 같은 기간 46.0%, 57.1%, 44.3% 줄었다. 신촌역 부근에서 찜닭집을 운영하는 김장훈(44·가명)씨는 “이 가게는 대학생이 이용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평소엔 학생들이 3~4인 단위로 자주 왔는데, 지금은 초토화됐다”며 “세금 낼 돈도 없어 대출금 1억원 중 일부로 세금을 냈다. 그렇다고 폐업할 엄두도 못 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종로는 학원에 다니는 성인 학생들과 사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많은 곳이다. 일과 수업이 끝난 후 갖는 저녁 모임이 활발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오후 9시 이후 영업이 제한된 음식점을 중심으로 매출이 크게 줄었다. 회식 단골 메뉴인 삼겹살 등이 포함된 한식 업종과 중식 업종은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4.6%, 29.0% 감소했다. 서울시 전체 매출 감소분(각각 15.2%, 16.2%)을 고려하면 종로1·2·3·4가동은 이보다 2배 가까이 줄었다. 회식 후 2·3차를 위해 가던 업종들은 타격이 더 컸다. 회식 자체가 크게 줄었거니와 1차만 모인 후 모임을 해산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노래방, 당구장 등이 대표적으로 지난해 집합금지 업종으로 지정돼 절반을 문을 닫은 채 보내기도 했다. 종로1·2·3·4가동의 노래방 매출은 같은 기간 3분기 매출액은 67.2%가 급감했다. 당구장 매출액도 서울시 전체로 보면 거의 줄지 않았지만, 종로의 경우 39.7%가 감소했다. ‘종각 젊음의 거리’ 상권만 따로 보면 당구장 매출은 62.3% 줄었다. 종로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박중훈(가명)씨는 “2주간 겨우 14만 3000원을 번 적도 있었다”면서 “평소에도 오후 9~10시쯤 첫 손님을 받곤 하는데 운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각 젊음의 거리 일대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김성훈(가명)씨는 “이 일대는 임대료가 비싸다. 1층은 한 달에 1500만원 정도 하고, 나도 2층 전체를 쓰면 한 달에 2000만원 정도를 낸다. 규모가 크게 장사하는 사람부터 타격을 크게 입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월요일 오전 10시. 청담동 인근 갤러리아백화점 샤넬 매장 앞에는 고객 16팀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 앞에서 만난 손님들은 “지갑이나 가방을 사기 위해서” 왔고, 주로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매장을 방문한 여성은 “해외여행을 못 가는 대신 생일을 맞아 저 자신에게 명품백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비웃기나 하는 듯 청담동에 있는 명품매장의 소비는 급격하게 늘었다.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매장은 가방 업종으로 분류되는데, 지난해 3분기 청담동 내 가방 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96.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품거리를 품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의 임의적 분류)에 한정하면 매출 상승액은 같은 기간 1380.1%에 이른다. 코로나19에 갈 곳 잃은 돈들이 명품 구입에 쏠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 전역 기준 가방 판매점의 같은 기간 매출액 상승률(23.5%↑)과 비교해도 50배 이상이다. 명품으로 분류할 만한 다른 소매업도 활황이었다. 시계·귀금속 업종의 매출은 같은 기간 148.2% 상승했고, 화장품 업종도 148.6% 뛰었다. 청담동 인근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해외 인기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는 주말에는 오픈시간에 맞춰 가도 벌써 200팀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며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들이 명품을 구입하는 등 일종의 보복 소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일식과 중식의 매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같은 기간 청담동 내 일식과 중식의 매출액은 12.6%, 16.3% 올랐다. 일식과 중식의 경우 고급 음식점이 많고 개별 방으로 구분된 식당이 많다 보니 코로나19의 영향을 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집합금지업종이었던 피트니스센터도 같은 기간 18.5% 매출액이 늘었다. 골프연습장은 79.4%나 늘었다. 사회부 사건팀 : 이성원·오세진·김주연·이주원·손지민·최영권 기자
  • “해외여행 못 가니 명품백이라도”… 강남 매장 대기줄만 200팀

    “해외여행 못 가니 명품백이라도”… 강남 매장 대기줄만 200팀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난 1년간 자영업은 차례대로 무너졌다. 지난해 2월 중국 후베이성을 거친 외국인 입국 제한을 시작으로 서울 명동 같은 외국인 관광·쇼핑 명소가 타격을 받더니 5월에는 이태원 클럽발 확산으로 서울 주요 상권이 붕괴했다. 지난 8월 수도권에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적용되면서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매출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특히 집합금지 업종으로 분류된 노래방과 헬스장, PC방의 타격이 컸다. 재난지원금 등 정부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제보다 방역이 우선이라는 국민적 합의에 자영업자들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서울신문은 코로나19 확산 1년을 맞아 19일 서울 주요 상권 5곳(중구 명동, 서대문구 신촌동, 용산구 이태원1동, 종로구 종로1·2·3·4가동, 강남구 청담동)의 업종별 매출 증감률을 분석하고 상권마다 자영업자 10명씩 총 50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매출액 분석은 서울시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 데이터를 이용했다. 상권 특징마다 업종별 매출액 감소 차이는 있었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보다 사정이 어렵다고 상인들은 토로했다. 이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고 매출 상승세를 보인 상권과 업종도 있었다. 손꼽히는 부촌인 강남 청담동의 가방업종 매출은 코로나19 전보다 수십 배 뛰었고, 집합금지업종으로 분류된 헬스장 역시 매출액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명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이기석(61)씨는 지난해 4월 직원을 한 명 줄였다. 2~3월 매출액이 줄어든 것은 어떻게든 버텨 봤지만, 다음달엔 버틸 수가 없었다. 한때 이씨 가게는 과거 일본 공영방송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돼 일본인 관광객 사이에 유명세를 탔다. 많을 땐 하루에 손님 300명 정도를 받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지금은 월세 120만원과 전기·가스비 등 100만원을 내고 나면 빠듯하다. 이씨는 지난 18일 “오늘도 2000만원 대출을 신청했다. 4차 재난지원금이 나올 만큼 코로나19가 계속된다면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광·쇼핑 명소인 명동은 지난해 1월 20일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국내에서 발생한 이후 빠르게 상권이 식었다. 코로나19 여파로 한국을 찾는 일본·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니 장사가 잘될 리 없었다. 명동의 한식업 점포 한 곳당 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1월 3278만원이었지만 2월 2374만원, 3월 1909만원으로 떨어졌다. 3개월 사이 42.8%가 감소했다. 소매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가장 최근 자료인 지난해 3분기 명동 가방매장의 평균 매출은 코로나19 영향이 없던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2%나 감소했다. 화장품(55.1%↓), 의류(44.8%↓), 신발(35.8%↓) 모두 하락세였다. 현장 체감 온도는 더 나빴다. 지난 18일 기준 명동거리는 주한중국대사관이나 명동성당 인근 등을 제외하면 10개 점포 중 문을 연 점포 1개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월세가 그나마 저렴하고 서울시가 월세를 반값으로 낮춰 받는 지하상가도 10개 중 2~3개꼴로 ‘잠정 휴업’ 상태다. “사람들이 이태원을 ‘코로나19 걸리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낙인효과가 쉽게 사라질까요. 이태원에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요.”용산구 이태원에서 12년째 주점을 운영하고 있는 구자훈(52)씨는 이날 텅 빈 가게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태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이태원의 성장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최근 이태원의 위기가 누구보다 마음 아프다. 지난해 초까지는 금방 종식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발 사태 이후 간신히 버티던 매출이 90%나 빠지면서 희망이 무너졌다. 최근 하루에 가게를 찾는 손님은 고작 3팀 정도다. 밀린 임대료를 갚으려고 부업으로 배달 플랫폼업을 하고 있지만 변변찮다. 구씨는 “어려움은 둘째 치고 과거와 같은 날이 다시 올지 확신이 없다는 게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이태원1동 상권의 매출액은 1년 내내 곤두박질쳤다. 특히 일반 음식점의 경우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중식이 80.8%, 일식과 한식은 각각 68.5%, 56.5% 감소했다. 서울 전체 같은 기간 업종 매출액 평균 증감률(중식 16.2%↓, 한식 15.2%↓, 일식 1.1%↓)을 크게 웃돈다. 문제는 이태원의 낙인효과다. 이태원을 찾는 고객의 80%는 외지인인데 지난해 5월부터 집단감염에 대한 공포감이 극대화하면서 발길이 끊겼다. 지난해 1월 코로나19 발생 이후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던 이태원 상권 매출액은 지난해 5월 기준 전월보다 호프업종은 49.7%, 치킨전문점은 46.4%, 한식은 46.5% 급락했다.야간 영업 의존도가 높은 것도 문제다. 외식업은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매출이 전체의 70~80%를 차지한다. 이태원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최지훈(46·가명)씨는 “가뜩이나 어려운 업주들에게 1~2시간만 장사하고 문을 닫으라고 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하다”며 “영업 제한 시간을 상권에 맞게 조정해야 이태원 상권을 살릴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화여대 앞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에요.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발길이 뚝 끊기니까 상권이 죽어 버렸죠. 이대는 원래 미용실, 신발·옷가게가 싼 걸로 유명해요. 외국인 상대로 박리다매식으로 장사했는데 5000~1만원짜리 옷 한두 벌을 손님 5명에게 판다고 무슨 장사가 되겠어요.” 5년간 이대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이정희(33·가명)씨는 지난해 5월부터 코로나19 충격이 컸다고 했다. 손가락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던 이씨는 3~4월은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정확히 5월부터 손님 수가 쭉 떨어졌다고 했다. 반등도 없었다. 하루 300만원까지 찍었던 매출은 하루에 1만원짜리 옷 한 장 팔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이씨는 “주변에 오피스텔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보면 인적은 없고 공사판인 곳에 누가 이곳에 오려고 하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8일 찾은 신촌 내 이대 정문 앞 상권과 신촌역 부근에는 적막감만 흘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자 신촌동 주요 소매점의 매출 타격이 컸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가방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91.5% 줄었다. 화장품업도 74.7% 줄었고 의류업은 61.2% 줄었다. 옷가게를 운영하는 성지민(40)씨는 “어떨 때는 (손님이 가게에) 하루에 한 명도 안 들어올 때도 있다”며 “보증금이 1억원 정도라고 하면 6000만원 정도가 월세로 빠졌다”고 말했다. 신촌역 부근 대학가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학생이 등교할 필요가 없다 보니 유동인구는 자연스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한식업 매출액은 전년 대비 36.6% 줄었고 대학생들이 부담 없이 찾는 패스트푸드점과 치킨전문점, 분식점 매출액은 같은 기간 46.0%, 57.1%, 44.3% 줄었다. 신촌역 부근에서 찜닭집을 운영하는 김장훈(가명·44)씨는 “이 가게는 대학생이 이용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평소엔 학생들이 3~4인 단위로 자주 왔는데, 지금은 초토화됐다”며 “세금 낼 돈도 없어 대출금 1억원 중 일부로 세금을 냈다. 그렇다고 폐업할 엄두도 못 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종로는 학원에 다니는 성인 학생들과 사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많은 곳이다. 일과 수업이 끝난 후 갖는 저녁 모임이 활발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오후 9시 이후 영업이 제한된 음식점을 중심으로 매출이 크게 줄었다. 회식 단골 메뉴인 삼겹살 등이 포함된 한식 업종과 중식 업종은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4.6%, 29.0% 감소했다. 서울시 전체 매출 감소분(각각 15.2%, 16.2%)을 고려하면 종로1·2·3·4가동은 이보다 2배 가까이 줄었다.회식 후 2·3차를 위해 가던 업종들은 타격이 더 컸다. 회식 자체가 크게 줄었거니와 1차만 모인 후 모임을 해산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노래방, 당구장 등이 대표적으로 지난해 집합금지 업종으로 지정돼 절반을 문을 닫은 채 보내기도 했다. 종로1·2·3·4가동의 노래방 매출은 같은 기간 3분기 매출액은 67.2%가 급감했다. 당구장 매출액도 서울시 전체로 보면 거의 줄지 않았지만, 종로의 경우 39.7%가 감소했다. ‘종각 젊음의 거리’ 상권만 따로 보면 당구장 매출은 62.3% 줄었다. 종로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박중훈(가명)씨는 “2주간 겨우 14만 3000원을 번 적도 있었다”면서 “평소에도 오후 9~10시쯤 첫 손님을 받곤 하는데 운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각 젊음의 거리 일대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김성훈(가명)씨는 “이 일대는 임대료가 비싸다. 1층은 한 달에 1500만원 정도 하고, 나도 2층 전체를 쓰면 한 달에 2000만원 정도를 낸다. 규모가 크게 장사하는 사람부터 타격을 크게 입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월요일 오전 10시. 청담동 인근 갤러리아백화점 샤넬 매장 앞에는 고객 16팀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 앞에서 만난 손님들은 “지갑이나 가방을 사기 위해서” 왔고, 주로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매장을 방문한 여성은 “해외여행을 못 가는 대신 생일을 맞아 저 자신에게 명품백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비웃기나 하는 듯 청담동에 있는 명품매장의 소비는 급격하게 늘었다.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매장은 가방 업종으로 분류되는데, 지난해 3분기 청담동 내 가방 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96.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품거리를 품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의 임의적 분류)에 한정하면 매출 상승액은 같은 기간 1380.1%에 이른다. 코로나19에 갈 곳 잃은 돈들이 명품 구입에 쏠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 전역 기준 가방 판매점의 같은 기간 매출액 상승률(23.5%↑)과 비교해도 50배 이상이다. 명품으로 분류할 만한 다른 소매업도 활황이었다. 시계·귀금속 업종의 매출은 같은 기간 148.2% 상승했고, 화장품 업종도 148.6% 뛰었다. 청담동 인근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해외 인기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는 주말에는 오픈시간에 맞춰 가도 벌써 200팀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며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들이 명품을 구입하는 등 일종의 보복 소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일식과 중식의 매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같은 기간 청담동 내 일식과 중식의 매출액은 12.6%, 16.3% 올랐다. 일식과 중식의 경우 고급 음식점이 많고 개별 방으로 구분된 식당이 많다 보니 코로나19의 영향을 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집합금지업종이었던 피트니스센터도 같은 기간 18.5% 매출액이 늘었다. 골프연습장은 79.4%나 늘었다. 사회부 사건팀 - 이성원·오세진·김주연·이주원·손지민·최영권 기자
  • 관광객 사라진 명동, 낙인에 우는 이태원… “희망이 있긴 할까요”

    관광객 사라진 명동, 낙인에 우는 이태원… “희망이 있긴 할까요”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난 1년간 자영업은 차례대로 무너졌다. 지난해 2월 중국 후베이성을 거친 외국인 입국 제한을 시작으로 서울 명동 같은 외국인 관광·쇼핑 명소가 타격을 받더니 5월에는 이태원 클럽발 확산으로 서울 주요 상권이 붕괴했다. 지난 8월 수도권에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적용되면서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매출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특히 집합금지 업종으로 분류된 노래방과 헬스장, PC방의 타격이 컸다. 재난지원금 등 정부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제보다 방역이 우선이라는 국민적 합의에 자영업자들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서울신문은 코로나19 확산 1년을 맞아 19일 서울 주요 상권 5곳(중구 명동, 서대문구 신촌동, 용산구 이태원1동, 종로구 종로1·2·3·4가동, 강남구 청담동)의 업종별 매출 증감률을 분석하고 상권마다 자영업자 10명씩 총 50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매출액 분석은 서울시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 데이터를 이용했다. 상권 특징마다 업종별 매출액 감소 차이는 있었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보다 사정이 어렵다고 상인들은 토로했다. 이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고 매출 상승세를 보인 상권과 업종도 있었다. 손꼽히는 부촌인 강남 청담동의 가방업종 매출은 코로나19 전보다 수십 배 뛰었고, 집합금지업종으로 분류된 헬스장 역시 매출액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명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이기석(61)씨는 지난해 4월 직원을 한 명 줄였다. 2~3월 매출액이 줄어든 것은 어떻게든 버텨 봤지만, 다음달엔 버틸 수가 없었다. 한때 이씨 가게는 과거 일본 공영방송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돼 일본인 관광객 사이에 유명세를 탔다. 많을 땐 하루에 손님 300명 정도를 받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지금은 월세 120만원과 전기·가스비 등 100만원을 내고 나면 빠듯하다. 이씨는 지난 18일 “오늘도 2000만원 대출을 신청했다. 4차 재난지원금이 나올 만큼 코로나19가 계속된다면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관광·쇼핑 명소인 명동은 지난해 1월 20일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국내에서 발생한 이후 빠르게 상권이 식었다. 코로나19 여파로 한국을 찾는 일본·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니 장사가 잘될 리 없었다. 명동의 한식업 점포 한 곳당 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1월 3278만원이었지만 2월 2374만원, 3월 1909만원으로 떨어졌다. 3개월 사이 42.8%가 감소했다. 소매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가장 최근 자료인 지난해 3분기 명동 가방매장의 평균 매출은 코로나19 영향이 없던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2%나 감소했다. 화장품(55.1%↓), 의류(44.8%↓), 신발(35.8%↓) 모두 하락세였다. 현장 체감 온도는 더 나빴다. 지난 18일 기준 명동거리는 주한중국대사관이나 명동성당 인근 등을 제외하면 10개 점포 중 문을 연 점포 1개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월세가 그나마 저렴하고 서울시가 월세를 반값으로 낮춰 받는 지하상가도 10개 중 2~3개꼴로 ‘잠정 휴업’ 상태다. “사람들이 이태원을 ‘코로나19 걸리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낙인효과가 쉽게 사라질까요. 이태원에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요.” 용산구 이태원에서 12년째 주점을 운영하고 있는 구자훈(52)씨는 이날 텅 빈 가게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태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이태원의 성장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최근 이태원의 위기가 누구보다 마음 아프다. 지난해 초까지는 금방 종식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발 사태 이후 간신히 버티던 매출이 90%나 빠지면서 희망이 무너졌다. 최근 하루에 가게를 찾는 손님은 고작 3팀 정도다. 밀린 임대료를 갚으려고 부업으로 배달 플랫폼업을 하고 있지만 변변찮다. 구씨는 “어려움은 둘째 치고 과거와 같은 날이 다시 올지 확신이 없다는 게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이태원1동 상권의 매출액은 1년 내내 곤두박질쳤다. 특히 일반 음식점의 경우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중식이 80.8%, 일식과 한식은 각각 68.5%, 56.5% 감소했다. 서울 전체 같은 기간 업종 매출액 평균 증감률(중식 16.2%↓, 한식 15.2%↓, 일식 1.1%↓)을 크게 웃돈다. 문제는 이태원의 낙인효과다. 이태원을 찾는 고객의 80%는 외지인인데 지난해 5월부터 집단감염에 대한 공포감이 극대화하면서 발길이 끊겼다. 지난해 1월 코로나19 발생 이후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던 이태원 상권 매출액은 지난해 5월 기준 전월보다 호프업종은 49.7%, 치킨전문점은 46.4%, 한식은 46.5% 급락했다. 야간 영업 의존도가 높은 것도 문제다. 외식업은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매출이 전체의 70~80%를 차지한다. 이태원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최지훈(46·가명)씨는 “가뜩이나 어려운 업주들에게 1~2시간만 장사하고 문을 닫으라고 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하다”며 “영업 제한 시간을 상권에 맞게 조정해야 이태원 상권을 살릴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화여대 앞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에요.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발길이 뚝 끊기니까 상권이 죽어 버렸죠. 이대는 원래 미용실, 신발·옷가게가 싼 걸로 유명해요. 외국인 상대로 박리다매식으로 장사했는데 5000~1만원짜리 옷 한두 벌을 손님 5명에게 판다고 무슨 장사가 되겠어요.” 5년간 이대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이정희(33·가명)씨는 지난해 5월부터 코로나19 충격이 컸다고 했다. 손가락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던 이씨는 3~4월은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정확히 5월부터 손님 수가 쭉 떨어졌다고 했다. 반등도 없었다. 하루 300만원까지 찍었던 매출은 하루에 1만원짜리 옷 한 장 팔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이씨는 “주변에 오피스텔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보면 인적은 없고 공사판인 곳에 누가 이곳에 오려고 하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8일 찾은 신촌 내 이대 정문 앞 상권과 신촌역 부근에는 적막감만 흘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자 신촌동 주요 소매점의 매출 타격이 컸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가방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91.5% 줄었다. 화장품업도 74.7% 줄었고 의류업은 61.2% 줄었다. 옷가게를 운영하는 성지민(40)씨는 “어떨 때는 (손님이 가게에) 하루에 한 명도 안 들어올 때도 있다”며 “보증금이 1억원 정도라고 하면 6000만원 정도가 월세로 빠졌다”고 말했다. 신촌역 부근 대학가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학생이 등교할 필요가 없다 보니 유동인구는 자연스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한식업 매출액은 전년 대비 36.6% 줄었고 대학생들이 부담 없이 찾는 패스트푸드점과 치킨전문점, 분식점 매출액은 같은 기간 46.0%, 57.1%, 44.3% 줄었다. 신촌역 부근에서 찜닭집을 운영하는 김장훈(44·가명)씨는 “이 가게는 대학생이 이용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평소엔 학생들이 3~4인 단위로 자주 왔는데, 지금은 초토화됐다”며 “세금 낼 돈도 없어 대출금 1억원 중 일부로 세금을 냈다. 그렇다고 폐업할 엄두도 못 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종로는 학원에 다니는 성인 학생들과 사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많은 곳이다. 일과 수업이 끝난 후 갖는 저녁 모임이 활발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오후 9시 이후 영업이 제한된 음식점을 중심으로 매출이 크게 줄었다. 회식 단골 메뉴인 삼겹살 등이 포함된 한식 업종과 중식 업종은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4.6%, 29.0% 감소했다. 서울시 전체 매출 감소분(각각 15.2%, 16.2%)을 고려하면 종로1·2·3·4가동은 이보다 2배 가까이 줄었다. 회식 후 2·3차를 위해 가던 업종들은 타격이 더 컸다. 회식 자체가 크게 줄었거니와 1차만 모인 후 모임을 해산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노래방, 당구장 등이 대표적으로 지난해 집합금지 업종으로 지정돼 절반을 문을 닫은 채 보내기도 했다. 종로1·2·3·4가동의 노래방 매출은 같은 기간 3분기 매출액은 67.2%가 급감했다. 당구장 매출액도 서울시 전체로 보면 거의 줄지 않았지만, 종로의 경우 39.7%가 감소했다. ‘종각 젊음의 거리’ 상권만 따로 보면 당구장 매출은 62.3% 줄었다. 종로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박중훈(가명)씨는 “2주간 겨우 14만 3000원을 번 적도 있었다”면서 “평소에도 오후 9~10시쯤 첫 손님을 받곤 하는데 운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각 젊음의 거리 일대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김성훈(가명)씨는 “이 일대는 임대료가 비싸다. 1층은 한 달에 1500만원 정도 하고, 나도 2층 전체를 쓰면 한 달에 2000만원 정도를 낸다. 규모가 크게 장사하는 사람부터 타격을 크게 입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월요일 오전 10시. 청담동 인근 갤러리아백화점 샤넬 매장 앞에는 고객 16팀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 앞에서 만난 손님들은 “지갑이나 가방을 사기 위해서” 왔고, 주로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매장을 방문한 여성은 “해외여행을 못 가는 대신 생일을 맞아 저 자신에게 명품백을 선물했다”고 말했다.코로나19 확산을 비웃기나 하는 듯 청담동에 있는 명품매장의 소비는 급격하게 늘었다.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매장은 가방 업종으로 분류되는데, 지난해 3분기 청담동 내 가방 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96.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품거리를 품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의 임의적 분류)에 한정하면 매출 상승액은 같은 기간 1380.1%에 이른다. 코로나19에 갈 곳 잃은 돈들이 명품 구입에 쏠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 전역 기준 가방 판매점의 같은 기간 매출액 상승률(23.5%↑)과 비교해도 50배 이상이다. 명품으로 분류할 만한 다른 소매업도 활황이었다. 시계·귀금속 업종의 매출은 같은 기간 148.2% 상승했고, 화장품 업종도 148.6% 뛰었다. 청담동 인근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해외 인기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는 주말에는 오픈시간에 맞춰 가도 벌써 200팀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며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들이 명품을 구입하는 등 일종의 보복 소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일식과 중식의 매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같은 기간 청담동 내 일식과 중식의 매출액은 12.6%, 16.3% 올랐다. 일식과 중식의 경우 고급 음식점이 많고 개별 방으로 구분된 식당이 많다 보니 코로나19의 영향을 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집합금지업종이었던 피트니스센터도 같은 기간 18.5% 매출액이 늘었다. 골프연습장은 79.4%나 늘었다. 사회부 사건팀 : 이성원·오세진·김주연·이주원·손지민·최영권 기자
  • 도미노처럼 무너져가는 서울 상권…단, 청담동만 불 밝혔다

    도미노처럼 무너져가는 서울 상권…단, 청담동만 불 밝혔다

    주요상권 5곳 업종별 매출 분석·심층인터뷰‘경제’보다는 ‘방역 우선’ 지침에 생업 포기“버틸 수 있다” 희망은 머지않아 절망으로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난 1년간 자영업자들이 차례대로 무너졌다. 지난해 2월 중국 후베이성을 거친 외국인 입국 제한을 시작으로 서울 명동 같은 외국인 관광·쇼핑 명소가 타격을 받더니, 5월에는 이태원 클럽 발 확산으로 서울 주요 상권이 붕괴했고, 지난 8월 수도권에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격상으로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매출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특히 집합금지업종으로 분류된 노래방과 헬스장, PC방 등이 타격이 컸다. 그 사이 자영업자에게 재난지원금 등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제’보단 ‘방역’ 우선이라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자영업자들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서울신문은 코로나19 확산 1년을 맞는 20일 서울 주요 상권 5곳(명동, 신촌동, 이태원1동, 종로1·2·3·4가동, 청담동)의 업종별 매출 증감률을 분석하고 상권마다 자영업자 10명씩 총 50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매출액 분석은 서울시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 데이터를 이용했다. 상권 특징마다 업종별 매출액 감소 차이는 있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보다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물론 이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고 매출 상승세를 보인 상권과 업종도 있었다. 손꼽히는 부촌인 강남 청담동의 가방업종 매출은 코로나19 전보다 수십 배 뛰었고, 집합금지업종으로 분류된 헬스장 역시 매출액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외국인 관광객 감소, 첫 직격탄 맞은 명동 명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이기석(61)씨는 지난해 4월 직원을 한 명 줄였다. 2~3월 매출액이 줄어든 것은 어떻게든 버텨 봤지만, 4월엔 버틸 수가 없었다. 한 때 이씨 가게는 과거 일본 공영방송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돼 일본인에게 유명새를 타면서 많을 땐 하루에 손님 300명 정도를 받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그러나 지금은 월세 120만원과 전기·가스비 등 100만원을 내고 나면 빠듯하다. 이씨는 지난 18일 “가게가 작아 그나마 고정비가 많지 않아 버티고 있다”며 “오늘도 2000만원 대출을 신청했다. 4차 재난지원금이 나올 만큼 코로나19가 계속된다면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광·쇼핑 명소인 명동은 지난해 1월 20일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국내에서 발생한 이후 빠르게 상권이 식었다. 코로나19 여파로 한국을 찾는 일본·중국 관광객이 급감하니 장사가 잘될 리가 없었다. 실제로 명동의 한식업 점포당 한 곳당 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1월 3278만원이었지만 2월 2374만원, 3월 1909만원으로 떨어졌다. 3개월 사이 42.8% 떨어진 것이다. 소매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가장 최근 자료인 지난해 3분기(7~9월) 명동의 가방매장의 평균 매출은 코로나19 영향이 없던 전년 동기 대비 71.2%나 감소했다. 화장품(55.1%↓), 의류(44.8%↓), 신발(35.8%↓) 모두 하락세였다. 현장 체감 온도는 더 나빴다. 지난 18일 기준 명동거리는 주한중국대사관이나 명동성당 인근 등을 제외하면 10개 점포 중 문을 연 점포 1개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월세가 그나마 낮고 서울시가 월세를 반값으로 낮춘 지하상가도 10개 중 2~3개꼴로 ‘잠정 휴업’ 상태다. 30년째 명동 지하상가에서 가방을 판 이경구(가명·62)씨는 “빈집은 3040대 남자 사장들이 냉동창고에서 일하거나 택배, 라이더를 하러 간 것”이라면서 “남은 사람들도 적자이지만 나이가 많다. 올해면 ‘코로나가 끝나겠지’ 하는 희망으로 버틴다”고 했다.●이태원 클럽발 확산, 무서운 낙인효과 “사람들이 이태원을 ‘다녀오면 코로나19 걸리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나도 이러한 낙인효과가 쉽게 사라질까 모르겠어요. 이태원에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12년째 주점을 운영하고 있는 구자훈(52)씨는 19일 텅 빈 가게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태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이태원의 성장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최근 이태원의 위기가 누구보다 마음 아플 수밖에 없다. 구씨는 코로나19가 발생한 지난해 초까지는 금방 종식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 발 사태 이후 간신히 버티던 매출이 90%나 빠지면서 희망이 무너졌다. 최근 하루에 가게를 찾는 손님은 고작 3팀 정도다. 밀린 임대료를 갚기 위해 부업으로 배달 플랫폼업을 하고 있지만 변변찮다. 구씨는 “어려움은 둘째 치고 과거와 같은 날이 다시 올지 확신이 없다는 게 가장 두렵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태원1동 상권의 매출액은 곤두박질 쳤다. 특히 일반 음식점의 경우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동기 대비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중식이 80.8% 떨어졌고, 일식과 한식은 각각 68.5%, 56.5% 감소했다. 서울 전체 같은 기간 업종 매출액 평균 증감률(중식 16.2%↓ 한식 15.2%↓ 일식 1.1%↓)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문제는 이태원의 낙인효과다 서울시 상권분석 데이터에 따르면 이태원을 찾는 고객의 80%는 외지인이다. 20~30대 젊은 층이 주요 고객인데 지난해 5월부터 집단감염에 대한 공포감이 극대화하면서 발길이 순식간에 멈췄다. 지난해 1월 코로나19 발생 이후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던 이태원 상권 매출액은 지난해 5월 기준 전월보다 호프업종은 49.7%, 치킨전문점은 46.4%, 한식은 46.5% 급락했다. 야간 영업 의존도가 높은 것도 문제다. 외식업은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매출이 70~80% 집중됐다. 이태원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최지훈(가명·46)씨는 “가뜩이나 어려운 업주들에게 1~2시간만 장사하고 문을 닫으라고 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하다”며 “영업 제한 시간을 상권에 맞게 조정해야 이태원 상권을 살릴 수 있다”고 호소했다.●관광객·대학생 사라진 신촌동, 남은 건··· “이화여대 앞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이 위주예요.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발길이 뚝 끊기니까 상권이 죽어버린 거죠. 이대는 원래 미용실, 신발·옷가게가 싼 걸로 유명해요. 외국인 상대로 박리다매 식으로 장사를 해온 거죠. 이제 그런 게 없으니 5000원~1만원짜리 옷 한두 벌을 손님 5명에게 판다고 무슨 장사가 되겠어요.” 5년간 이대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이정희(가명·33)씨는 지난해 5월부터 코로나19 충격이 컸다고 했다. 3~4월은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정확히 5월부터 손가락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며 손님 수가 쭉 떨어졌다고 했다. 반등도 없었다. 물건을 대량으로 사갔던 외국인 관광객도 코로나19 여파로 자취를 감쳤고, 하루 매출 300만원까지 찍었던 가게 매출은 하루에 1만원짜리 옷 한 장 팔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이씨는 “주변에 오피스텔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보면 인적은 없고 공사판인 곳에 누가 이곳에 오려고 하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8일 찾은 신촌 내 이대 정문 앞 상권과 신촌역 부근에는 적막감만 흘렀다. 옷과 가방 등을 박리다매로 사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자 신촌동의 주요 소매점의 매출 타격이 컸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가방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91.5% 줄었다. 화장품업도 74.7% 줄었고, 의류업은 61.2% 줄었다. 옷가게를 운영하는 성지민(40)씨는 “어떨 때는 (손님이 가게에) 하루에 한 명도 안 들어올 때도 있다”며 “보증금이 1억 원 정도라고 하면 6000만 원 정도가 월세로 빠졌다”고 말했다. 신촌역 부근 대학가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학생이 등교할 필요가 없다 보니, 유동인구는 자연스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한식업 매출액은 전년대비 36.6% 줄었고, 대학생들이 부담없이 찾는 패스트푸드점과 치킨전문점, 분식점 매출액은 같은 기간 46.0%, 57.1%, 44.3% 줄었다. 신촌역 부근에서 찜닭집을 운영하는 김장훈(44)씨는 “이 가게는 대학생이 이용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평소엔 학생들이 3~4인 단위로 자주 왔는데, 지금은 초토화됐다”며 “세금낼 돈도 없어 대출금 1억원 중 일부로 세금을 냈다. 그렇다고 폐업할 엄두도 못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2차 문화 사라진 오피스·학원가 종로 종로는 학원에 다니는 성인 학생들과 사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많은 곳이다. 일과 수업이 끝난 후 갖는 저녁 모임이 활발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오후 9시 이후 영업이 제한된 음식점을 중심으로 매출이 크게 줄었다. 회식 단골 메뉴인 삼겹살 등이 포함된 한식 업종과 중식 업종은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4.6%, 29.0% 감소했다. 서울시 전체 매출 가소분(각각 15.2%, 16.2%)을 고려하면 종로1·2·3·4가동은 이보다 2배 가까이 줄었다. 회식 2·3차 업종들은 타격이 더 컸다. 회식 자체가 크게 줄었거니와 1차만 모인 후 모임을 해산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회식 2·3차 업종인 노래방, 당구장 등은 집합금지 업종으로 지정돼 지난해 절반을 문을 닫은 채 보내기도 했다. 종로1·2·3·4가동의 노래방 매출은 같은 기간 3분기 매출액은 67.2%가 급감했다. 당구장 매출액도 서울시 전체로 보면 거의 줄지 않았지만, 종로의 경우 39.7%가 감소했다. ‘종각 젊음의 거리’ 상권만 따로 보면 당구장 매출은 62.3% 줄었다. 종로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박중훈(가명)씨는 “2주간 겨우 14만 3000원을 번 적도 있었다”면서 “평소에도 오후 9~10시쯤 첫 손님을 받곤 하는데 운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각 젊음의 거리 일대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김성훈(가명)씨는 “보통 2차나 3차로 많이 오는데 문을 열어도 낮에 장사가 돼야 영업을 하지 않겠느냐”면서 “이 일대는 임대료가 비싸다. 1층은 한 달에 1500만원 정도 하고, 나도 2층 전체를 쓰면 한 달에 2000만원 정도를 낸다. 규모가 크게 장사하는 사람부터 타격을 크게 입었다”고 말했다.●해외여행 대신 명품···청담동 샵 매출 폭등 지난 18일 월요일 오전 10시. 청담동 인근 갤러리아백화점 샤넬 매장 앞에는 고객 16팀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 앞에서 만난 손님들은 “지갑이나 가방을 사기 위해서” 왔고, 주로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었다.매장을 방문한 여성은 “해외여행을 못 가는 대신 생일을 맞아 저 자신에게 명품백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비웃기나 한 듯 청담동에 있는 명품매장의 소비는 급격하게 늘었다.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매장은 ‘가방업’종으로 분류되는데, 지난해 3분기 청담동 내 가방업종 매출액은 전년동기 대비 796.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품거리를 품고 있는 압구정 로데오거리(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의 임의적 분류)에 한정하면 매출 상승액은 같은 기간 1380.1%에 이른다. 코로나19에 갈 곳 잃은 돈들이 명품 구입에 쏠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 전역 기준 가방 판매점의 같은 기간 매출액 상승률(23.5%↑)과 비교해도 50배 이상이다. 다른 명품으로 분류할만한 소매업도 증가세를 보였다. 시계·귀금속 업종의 매출은 같은 기간 148.2% 상승했고, 화장품 업종도 148.6% 뛰었다. 청담동 인근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해외 인기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는 주말에는 오픈시간에 맞춰가도 벌써 200팀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며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들이 명품을 구입하는 등 일종의 보복 소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일식과 중식의 매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같은 기간 청담동 내 일식과 중식의 매출액은 12.6%, 16.3% 올랐다. 일식과 중식의 경우 고급 음식점이 많고 개별 방으로 구분된 식당이 많다보니 코로나19의 영향을 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집합금지업종이었던 피트니스센터도 같은 기간 18.5% 매출액이 늘었다. 골프연습장은 79.4%나 늘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손지민 기자 sjm@seoul.co.kr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씨줄날줄] 연예인 매니저의 그늘/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연예인 매니저의 그늘/박록삼 논설위원

    영화 ‘라디오스타’에는 정점을 찍은 뒤 쇠락한 스타와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변두리의 삶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서로 어우러져 빛을 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 먹먹함 속 묘한 희망이 어른거려 훈훈하다. 영화에는 가수왕 출신으로 한때 최고의 스타였지만 이제는 퇴물이 돼 버린 가수 최곤(박중훈) 곁에 그림자처럼 함께하는 이가 있다. 안성기. 최곤의 매니저다. 지방 나이트클럽 일정 잡고, 방송 출연을 위해 갖은 수모를 대신 겪으며, 때로는 술친구도 해주고 때로는 화풀이 대상도 기꺼이 감수하는 역할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스타와 매니저 둘 사이가 결국 끈끈한 우정으로 승화된다. 과거 연예인 매니저는 흔히 ‘가방 모찌’로 불렸다. 연예인의 차를 운전하고, 일정을 잡고 일일이 챙기는가 하면 개인적 잡다한 업무까지 모두 도맡아 하는 수행비서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후 제법 젊잖게 ‘로드 매니저’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다. 최근 이미지가 크게 개선됐다. 시청률 10%를 넘나든 한 인기 예능 프로그램은 아예 연예인과 매니저가 한 팀이 돼 출연,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든 인기 스타를 “형”, “누나”로 부르며 가족처럼 찰떡궁합을 과시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한 연예인의 매니저는 연말 방송연예대상에서 인기상을 받으며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연예인 매니저로 취업하고자 하는 젊은층도 최근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TV 바깥 연예인 매니저의 실제 삶은 과거의 모습과 여전히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최근 한 원로배우의 매니저로 일하다 해고된 김모씨를 통해 그 실체 일부가 확인됐다. 김씨가 밝힌 내용에 따르면 그는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고, 4대보험도 없이 월 150만원의 박봉 속 주당 55시간 이상을 일했다.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매니저로서 본업 외에도 쓰레기 분리 배출, 생수통 배달, 장보기, 구두 수선 등 집 안의 허드렛일이 더해졌다. 김씨 스스로 “머슴살이를 했다”고 표현했다. 원로배우는 “그동안 젊은 친구들이 매니저로 와서 일을 도왔지만 한 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연예계의 뿌리 깊은 관행임을 증명한 것이다. 연예인 매니저로 시작해 어엿한 연예기획사를 차린 이들도 있다. 그러나 연예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이들 중 11%가 아예 계약서조차 쓰지 않거나 3.4%가 구두계약만 한단다. 이 부조리한 관행이 엄존하는 한 연예인들의 성공은 말 그대로 성공 ‘신화’일 뿐이다. K팝, K드라마, K영화 등 연예산업이 발전하는 만큼 함께 일하는 매니저의 노동 가치도 평가하고 존중되길 바란다.
  • 1980년대 청춘영화 대표… 이규형 감독 별세

    1980년대 청춘영화 대표… 이규형 감독 별세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어른들은 몰라요’ 등을 연출하며 1980년대 청춘영화를 이끈 이규형 감독이 지난 7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63세. 고인은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사랑 만들기’(1983)의 각본 작업을 맡으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조민수와 천호진이 주연한 ‘청 블루 스케치’(1986)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듬해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를 내놓으며 한국 영화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박중훈과 강수연, 김세준이 열연한 영화는 차별화된 대사와 연출로 큰 인기를 끌면서 이 감독은 그해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의 주인공이 됐다. 그 후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한국 영화의 뉴 웨이브 시대를 주도했다. ‘헝그리 베스트 5’를 내기 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작가 겸 칼럼니스트로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비운이 계속됐다. ‘DMZ 비무장지대’(2004), ‘굿 럭’(2006)을 선보였지만 모두 흥행하지 못했다. 2009년에는 영화 투자 사기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고, 2011년 다시 같은 혐의로 기소됐다. 고인은 2018년 말 담도암 판정을 받고 수술한 뒤 퇴원했지만, 지난해 재발 진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아내와 딸이 있다. 빈소는 인천 청기와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0일 오전.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땅 195만평 등 재산 뺏기고… 후손들은 가난의 대물림

    땅 195만평 등 재산 뺏기고… 후손들은 가난의 대물림

    후손들 문중 소유 생가 서당서 26년 살아 “의사 부인 노년에 병마와 굶주림에 신음” 형언하기 힘든 곤궁한 사정 신문에 실려 장승원 후손들은 권세 부리고 부귀 누려박상진 의사의 사망과 함께 그 많던 재산은 남의 손으로 넘어갔고 부모와 부인, 후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대대로 겪었다. 일본 밀정들은 유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의사의 아들과 손자들은 일제 치하에서 독립투사, 사상범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취업은 엄두도 내지 못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씨에 따르면 후손들은 의사의 사후 문중 소유인 울산 북구 송정동 생가 옆의 낡은 서당에서 26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가난을 견디기 어려워 1957년 부산으로 이사해 부암동의 방 세 칸짜리 집에서 12식구가 살며 닭을 길러 내다 판 돈으로 연명했다고 한다. 이후 당감동 골짜기로 옮겨 가 살았는데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멀건 죽, 우거지 밥과 개떡을 먹으며 비참하게 살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들의 고생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생존해 있는 의사의 손자며느리(박씨의 어머니) 이갑석 할머니는 “시집온 지 사흘 만에 양식이 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 의사 후손들의 어려운 사정이 부산일보 1961년 3월 5일 자에 실리기도 했다. 의사의 부인 최영백 여사가 당시 81세의 나이에 먹을 양식도 없이 냉방에서 병마와 굶주림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박씨는 날마다 먹어야 했던 죽에 질린 할머니(의사의 며느리)가 1982년 돌아가실 때까지 굶을지라도 죽은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광복 후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은 박 의사처럼 극한의 가난과 싸우면서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했지만, 일제의 권력에 빌붙었던 사람들은 변함없이 권세를 부리고 부귀를 누렸다. 대한광복회가 처단한 장승원의 후손들도 그랬다. 장승원의 장남 장길상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일본인 자본가들이 은행을 설립할 때 투자해 거부가 된 친일파이자 악덕 지주였다. 둘째 장직상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 인사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구속됐다가 풀려났다. 셋째 아들 장택상은 미군정 수도경찰청장으로 부임해 친일 경찰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 장승원의 원한을 품고 있었다. 광복회의 재건을 두고 볼 수 없다며 경찰력을 동원해 방해했다는 것이 박씨는 주장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64년 광복회원의 후손들이 충남 천안삼거리공원에 순국한 광복회원 7인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려 했는데 모종의 방해를 받아 중단됐다고 한다. 모종의 방해라는 것이 바로 장택상 일족의 짓임을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장택상이 사망하고 두 달 후인 1969년 10월에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었던 것만 봐도 그런 점은 분명해진다. 그런 장택상은 현재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박상진 의사 가문과 장승원 가문의 악연은 계속됐다. 장택상의 딸 장병혜는 1990년대 초 ‘역사를 고발한 자, 그를 고발한다’ 등의 책을 펴내면서 광복회를 떼강도 집단, 박 의사를 파렴치한 살인강도라고 썼다. “무슨 놈의 애국지사가 일본 사람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고 동포를 죽이는 애국투사가 있겠는가. 박상진을 애국투사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판결문에 기재된 대로 살인강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살인교사를 한 일당을 독립투사로 변신시키기 위한 활동”이라고 쓰기도 했다. 뉴라이트 계열의 일부 학자가 안중근 의사 등의 독립투쟁을 테러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는 99% 엄마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등의 책을 발간하기도 한 장병혜는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아시아 역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 “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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