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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주 小史

    8.10 ?경기도 광주,서울시 철거민 단지주민 5만여명 소요(1971) ?대우자동차,삼성중공업 등 39개 업체 근로조건 개선주장 노사분규 발 생,이후 노사분규 대규모 확산(1987) 8.11 ?YH여공 신민당사 농성 강제 해산(1979) 8.12 ?민·참 양원 합동회의, 제 2공화국 대통령에 윤보선(尹潽善) 선출(19 60) ?금융실명 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명령 발표 로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1993) 8.13 ?서울시 의원 및 전국 도의원 선거(1956) ?울릉도 근해 무장간첩선 격침(1983) ?한총련,연세대 점거 농성사건(1996) 8.14 ?한일협정 국회비준(1965) 8.15 ?해방(1945)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 ?정부,서울환도(1953) ?남 파병,국회통과(1965) ?남북통일에 관한 8·15선언 발표(1970)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저격사건 발생 및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19 74) ?독립기념관 개관(1987) ?광복 50주년 중앙경축식(1995)
  • 기술관료 사기‘바닥 맴돈다’…20년간 제자리걸음

    기술관료들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다.처우도 시원찮고,일반 행정직에 비하면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생각들이다.‘인사와 보수에서 획기적인 개선이 이뤄지지 않으면 모든 기술직은 사표를 쓰자’는 주장마저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실정이다.기술관료들의 불만과 현실을 알아본다. ■보수 기술직만이 받는 기술업무수당은 지난 79년 박정희(朴正熙)대통령시절 기술관료를 지원한다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20년이 지났는데도 수당은한푼도 오르지 않았다.5급 2만5,000원,6∼7급 1만5,000원,8∼9급 1만원. 20년전 9급 공무원의 본봉(1호봉)이 8만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기술수당은상당했던 것이다. 현재 9급 1호봉 36만9,000원으로 4배 이상 오르는 동안에수당은 제자리 걸음을 했다.기술직 공무원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수당”이라고 한탄하고 있다.행정자치부는 기술수당을 인상할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공직에 들어와 6급 18년째라는 한 기술직 공무원은기획예산처 홈페이지에 “모든 기술직은 사표를 쓰자”고 주장했다.또다른기술직은“인사·보수면에서 획기적인 개선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승진연한 기술직은 조직내에서도 행정직에 비해 승진이 늦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서울시의 경우 5급에서 3급으로 승진하는데 일반행정직은 18년,기술직은 22년으로 4년이나 차이가 나는 것으로 밝혀졌다.또 각 구청의 기술직이갈 수 있는 자리에 행정직이 많다는 불만도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IMF이후 잇따른 구조조정에서 기술직 출신은 상대적으로피해가 적은 편이라고 주장한다. 서울시의 경우 3급이상 행정직 8개,기술직11개 자리 가운데 구조조정과정에서 기술직의 자리는 줄지 않았지만 행정직은 재무국장,재정기획관,교통기획관 등 다섯자리가 줄었다는 얘기다. 한 행정전문가는 “행정직 공무원들이 기술직을 폄하하는 등 기술직 경시분위기에 따른 피해의식이 큰 작용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술고시 ‘거품’ 기술직의 불만이 높은 가운데서도 지난달 치른 기술고시의 경쟁률은 123대 1로 치열했다.그러나 이는 최근 공대생들의 취업문이좁아진데 따른 ‘거품’현상이라는 지적이다.기업·연구소등의 채용이 대폭줄어들면서 할 수 없이 기술고시로 몰린다는 얘기다.김모(26·Y대 전자공학과 졸)씨는 “IMF이전만 해도 공대생들은 취업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최후의 선택으로 기술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박정현·장택동기자 jhpark@
  • 金대통령, 탄신100주년 기념회 관계자 접견 안팎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5일 고(故) 장면(張勉)박사 탄신 100주년 기념회인 ‘운석기념회’ 관계자 6명을 접견한 자리는 부드러우면서 화기애애했다고박선숙(朴仙淑)청와대부대변인이 전했다.이 자리에서는 장박사의 생전의 업적과 기념사업에 대한 많은 얘기가 오고갔다. 김대통령은 “장면박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고 국가적으로 관심을 가질수 있는 시대가 돼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르게 산 분들은 비록 생존시에 좌절이나 실패,혹은 누명을 쓰는 일이 있어도후세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바로잡아가야 한다”며 동학혁명을실례로 적시했다. 김대통령은 장박사를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분”으로 평가했다.그러면서 “이번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국민들이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지도자로서 장박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수환(金壽煥)추기경도 “장박사가 정부수립 과정에서 유엔 승인을 받기위해 로마 바티칸에 도움을 청하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펼친 일을 신학교 학생때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기념회이사장인 강영훈(姜英勳)전총리 역시 “주미대사 시절 외국 외교관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분”이라며 건국과정과 6·25전쟁 당시의 기여를 되새겼다.이와 관련,정부는 장박사에게 이승만·박정희 전대통령이 받았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키로 했다. 접견에는 장박사의 아들인 춘천교구청 장익 주교와 이성모(李性模) 전 장면총리비서관도 참석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반민특위 해체이후 친일파

    일제 패망과 함께 햇볕에 봄눈 녹듯이 사라졌어야 할 친일파가 다시 고개를 들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해독을 끼치고 있는 것은 해방후 ‘역사의 매듭’을 짓는 상징적 통과의례마저 없었기 때문이다.오늘날 친일파에 대한 개념과 현실이 이처럼 유리되고 결국 착종되는 현상이 개인차원에 그치지 않고 집단무의식으로까지 번져 우리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이중적 태도와 감정,의식과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경향마저 있다. 해방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가 중도에 와해된 것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또다른 요인으로는 미군정의 방해공작을 들 수 있다.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안을 놓고 찬탁·반탁으로 나뉜 것이 결국 좌우대립으로 굳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탁치에 반대하는 친일세력이 ‘민족세력’으로 복권돼 도덕적 명분을 획득하였다.상대적으로 임정세력은 통일전선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이 반민특위 해체의 뿌리가 된셈이다.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재등용한 명분 가운데 하나는 건국초기 전문지식을갖춘 ‘인재부족’이었다.여기에 미·소간의 냉전으로 한국이 반공의 최일선 국가가 되자 ‘반공이데올로기’가 추가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국가가 위기를 맞자 친일파들이 본격적으로 경험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주어지게 된 것이다.친일세력은 한국전쟁과 ‘반공’이념을 고리로 다시 한국사회의 전면에 등장하였으며 이들의 독점적 지위는 이후 계속됐다. 군부와 경찰분야에서 친일파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이 때문이다.국방장관·육참총장은 일본군 출신이 아니면 결격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로 일본군 출신 일색이다.경찰의 경우 미군정 당시 간부 가운데 80% 이상이일제경찰 출신이었다는 통계가 있다. 친일세력이 미국의 정책을 등에 업고 지배세력으로 재부상한 배경에는 그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쌓아온 정치·경제·문화적 토대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그리고 이는 민주당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도 청산은 커녕 오히려 확대,재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 [기고] 웬 ‘후3金론’

    요즈음 김영삼 전대통령(YS)은 민주산악회 재건 선언 등 일련의 행보에서정치활동을 재개하고 있다.김대중대통령(DJ)은 김종필국무총리(JP)와 내각제 유보를 합의한 후 +α를 통한 신당 창당을 도모하고 있다.언론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진행을 보면서 ‘후3김 시대’가 도래했다고 혹평하고 있다. 과거 1970년대 DJ와 YS는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민주화 투쟁을 선도하였던 반면,JP는 개발독재에 의거한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정치인이었다.이 당시만 해도 3김이라는 정치 용어는 인구에 회자되지 않았다.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면서 DJ,YS,JP는 각각 자신들이 담지하고 있던 70년대의 정치적 기능,예컨대 민주화 역할과 JP의 산업화 기능에서 벗어나 개발독재 시대의 정치적 지배논리인 지역갈등에 의해 지역이해를 대변하는 정치가로 변신하였다.이로써 80년대 본격적인 3김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최근 이러한 지역갈등에 의거,YS가 정치를 재개하려는 것은 과거 우리 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을 볼모로 자신의 향후 입지를강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3김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표 향방을 가르는 정치적 시장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물론 지역주의가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요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렇지만 과거국가발전모델이 위기에 처한 현단계에서 우리 국민들은 전 국민적 이해가 걸린 새로운 발전모델 정착문제,다양한 사회집단간 이해조정문제 등도 지역주의 문제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국민적 인식은 최근 실시된 보선에서 집권여당이 지역연합에 의한 연합공천을 했음에도불구하고 패배했다는 점이 극명하게 보여준다.이에 대해 ‘국민의 정부’는지역주의보다는 폭넓은 개혁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개혁세력과의 연합을 통한 신당 창당,중산층과 서민 대책 등의 21세기 대비 개혁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과거 한국의 발전모델이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다는 점은 이미 IMF위기에 의해 입증되었다.IMF위기는 단순히 경제위기가 아니라 그동안 60년대 이후한국을 이끌고 왔던 지배적 발전양식의 위기를 의미한다.따라서 IMF위기는 정치·사회적 발전형태의 변화까지도 포괄한다.이러한 역사적 전환기에서 YS가 구태의연한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정치재개를 선언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까? 더욱이 과거 발전모델의 계승자로서 YS가 과거 발전모델의정치형태인 지역주의에 매몰되어 정치 재개를 선언한다는 것은 환란발생의책임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정치적 노욕으로 우리 국민들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국민의 정부’도 이에 대해서는 일말의 책임이 있다.과거 발전모델을 청산하고 새로운 21세기형 국가발전양식을 국민들에게 제시하면서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를 걸었다면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후3김론’은 결코 대두되지못했거나 최소한 정치적 해프닝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이것은 ‘국민의 정부’의 치열한 역사인식이 부족한 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만일 ‘국민의 정부’가 IMF 탈출을 단기적 처방만으로 끝나는 것으로 인식한다면,‘국민의 정부’의 역사적 자리매김은 박정희 모델의 최후의 계승자로 평가될 것이다.‘후3김론’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정부’의 새로운 패러다임 정립·실천을 통해서만 극복이 가능하다.
  • 표현 부적절성 여권 논리

    이른바 ‘후(後)3김시대’라는 신조어(新造語)가 정치적 의도 속에서 쟁점화하고 있다.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지난 4일 ‘반 3김선언’을 하면서부터 여론의 경계심에 편승,인구에 회자하는 빈도수가 점차 늘고있다.‘후3김시대’는 공동정권의 연내 내각제개헌 유보 이후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상상력과 분석이 밑바탕을 이룬다. 여권 관계자들은 우선 ‘3김’이라는 표현의 적정성에 문제를 제기한다.한관계자는 “3김은 군사정권때 집권자들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로 세사람을 함께 매도하는 식의 ‘3김 인식’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실제‘3김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는 시기는 80년 서울의 봄 때와 92년 대선 때등 짧은 기간이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나머지는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에서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절이었다는 평가다. 특히 ‘후3김’이라는 표현은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부각시키려는 악의가 숨어있다고 분석했다.나아가 현직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청산 대상으로 매도하려는 뜻도 포함돼 있다는 지적이다.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을 물러나야 할 대상으로 삼으려는 의도는 헌정중단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총재의 신임투표 주장에 대해 청와대측은 “헌정중단을 요구하는 것인가”라며 그 성격을 분명히 해야한다고 꼬집었다.그들은 신임투표 반대가 60.5%,찬성이 25%로 국민이 헌정중단 사태를 경계하고 있다는 여론조사결과를 적시한다. 또 ‘3김시대’에 대한 평가는 국민이 선택할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 80년 5공 군부의 등장 이후 3김청산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지난 대선때 이총재의 ‘3김 청산’도 마찬가지 결과였다.여권관계자들은 내년 총선때 세대교체와 맞물려 3김청산이 선거이슈가 될 것으로 보고 이에 대비중이다.다시 말해 국민이 투표로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끝으로 김대통령과 이총재는 현실정치에서 여야의 지도자로 엄연한 ‘정치시장 참여자’라는 것이다.김전대통령의 정치재개 문제는 야당의 분열과 갈등에 관한 문제로 야권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지,‘후3김시대’로 비약해 현직대통령을 매도하는 것은 정치도의나 윤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양승현기자 yangbak@
  • 구미시, 朴正熙대통령 20주기 추모사업 추진

    경북 구미시가 고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 20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모사업을 추진한다. 28일 구미시에 따르면 박대통령 생가보존회와 공동으로 서거일인 10월26일생가에서 추모제를 치르고,추모일을 전후해 구미시 문화예술회관에서 박 전대통령의 활동상을 담은 사진전시회와 역사기록영화제를 각각 개최한다. 이와 함께 박 전대통령의 업적 등을 중심으로 한 학술발표회를 열며,연극‘박정희,박정희’를 서울 극단 ‘즐거운 사람들’과 공동 제작할 예정이다. 구미 한찬규기자 cghan@
  • 세종로청사 명칭‘중앙청’으로 바뀐다

    정부 세종로청사의 명칭이 ‘중앙청’으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는 19일 주례 간부회의에서 “세종로청사는 총리가근무하는 핵심적인 정부기관이므로 행정지역으로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중앙청사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는 국무조정실과 비서실측의 건의를 받고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중앙청은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 시절 철거된 국립중앙박물관(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난 71년부터 83년까지 총리실 및 일부 부처의 청사로 사용될 때 불리던 이름이다.김 총리도 70년대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 시절 총리를 맡았을 때 이 중앙청 집무실을 사용했다. 총리 집무실은 83년 5월28일 옛 중앙청 3층에서 세종로청사 901호로 이전됐다. 총리의 집무실을 중앙청으로 부르기로 한 것은 김 총리의 역할강화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총리는 이날 이례적으로 2시간이나 회의를 계속하면서 실업대책,전국 도로망 실태로부터 시작해 내년의 6·25 50주년 기념사업 및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의 준비상황,그리고 최근 대학생의 농촌활동 실태에 이르기까지행정 하나하나를 꼼꼼히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김 총리는 보고를 받는 도중에 세세한 사항까지 질문을 던져 국무조정실과 총리비서실 당국자들이 미처 답변을 하지 못하는 사태도 빚어졌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그러나 정무비서실에서 최근 여야 및 국회의 움직임을 보고하자 ‘다 알고있다’는 듯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도운기자 dawn@
  • 朴前대통령 일생담은 사이버기념관 곧 개설

    “박정희 대통령은 고령 박씨 29대 손(孫)으로‥‥” 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사이버기념관이 곧 개설된다. 경상북도 구미시는 인터넷 상에 ‘박 대통령의 사이버기념관’(http:///presidentpark.kumi.kyongbuk.kr)을 임시 개설하고 마무리작업을 진행중이라고19일 밝혔다.공식 개설은 박 대통령에 관한 학술논문과 자료 등을 보충한 뒤8월 초에 할 예정이다. ‘박 대통령의 사이버기념관’은 ▲인간 박정희 ▲산을 담은 초가집 ▲저도(猪島)의 추억 ▲지나온 발자취 ▲기념사업 ▲사진여행 등 6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인간 박정희’란에는 박 대통령이 쓴 ‘나의 소년일기’등 어린 시절부터 군인 시절까지의 생애가 위인전 형태로 소개돼 있다.‘저도의 추억’에는박 대통령의 저서와 휘호 등이 수록돼 있으며,‘지나온 발자취’에는 주로박 대통령의 연설문이 실려 있다.‘사진여행’에는 200여장의 관련 사진이게재될 예정이다. 구미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을 재조명하고 기념관을 구미에 유치하기 위해 홈페이지를 개설했다”면서 “정치색은 최대한 배제하고 인간 박정희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겨레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시는 등 민족중흥을 이룩하신 영도자”(인간 박정희 중) 등 박 대통령에 대한 상찬(賞讚 ) 일색이어서 논란도 예상된다. 장택동기자 taecks@
  • 「한국의 지역주의와 해소방안」지역주의의 정치적 특성

    ‘망국적인 지역주의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창간 95년을 맞은 대한매일이 한국정치학회와 함께 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주최한 ‘한국의 지역주의와 해소방안’ 특별 학술회의에는 김종필(金鍾泌)총리,차일석(車一錫)대한매일 사장 등 200여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했다.학술회의에서 참석자들은▲지역주의와 정치적 특성 ▲지역주의 심화과정과 현황 ▲지역주의 해소방안의 모색 등 3가지 주제로 세분,심도있는 토론을 벌였다. [정치문화와 지역주의-이남영 숙명여대교수] 선거에서 나타나는 지역주의는 상당 부분 ‘3김(金)구도’라는 현실 정치의반영이다. 영호남의 지역주의는 국가 권력 장악을 둘러싼 ‘패권주의적’ 성격이 가미돼 있다.영호남 유권자들의 지역주의 성향은 즉시적으로 지역에 돌아오는 혜택을 추구하기보다는 정권 장악을 통하여 장기적으로 유리한 사회환경을 조성하고자 하는 동기가 숨어있다. 반면 충청지역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기 때문에 단독 정권 창출의 가능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희박하다.이런 의미에서 이 지역의 지역주의는 정권 창출이라는 거대한 목표보다는 지역적 이해추구라는 ‘실제적’이며 유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김종필씨의 정치행보가 ‘친(親)김영삼’으로부터 ‘친 김대중’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실제적인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따라서 충청지역이 기반인 자민련이 내각제를 주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토대위에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일 수 있다. 지역주의 구조는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감정적 경쟁 사회로 몰고가면서 점차 경쟁력 없는 사회로 후퇴시켰다.따라서 21세기 국경을 초월한 무한 경쟁시대를 맞아 합리적 방향의 경쟁구조 확립이 시급하다.지역을 초월한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선 구조화돼 있는 3김 정치구조와 국민들 사이에 팽배한 지역주의의 척결이 첫걸음이다. 지역주의 타파의 가장 효과적 방법은 편견의 사회적 확산을 방지하는 일이다.가정과 학교,사회에서 탈지역주의적인 교육과 지역평등 강조를 사고 깊숙이 침투시켜 지역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점차 희석시키는 방안이다. [지역주의의 또다른 배경-김일영 성균관대교수]지역주의 발생 원인과 관련해서는 대개 역사적 잔재,정치·경제적 차별,그리고 인위적 동원이라는 세 요인이 거론되고 있다. 전근대로부터 근대에 걸쳐 한국에는 지역주의가 있었다.한국의 지역주의는고려 후기까지는 3국 분립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지방분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 중앙집권이 확립되면서부터는 중앙이 특정지역을 차별하는 지역차별적 성격으로 변했다.적어도 조선에서 지난 50년대에 이르기까지영호남간의 차별이나 갈등은 심각한 정치적 및 사회적 문제가 아니었다. 전근대와 근대 사이에서 지역주의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연속적이지만 내용면에서는 불연속적이다.차별과 동원이 있기 전에도 상당한 지역적 격차가 있었다.이 격차는 정책이나 정치적 의도의 결과이기보다는 식민통치,동아시아냉전 등 지정학적 요인의 의도치 않은 결과 또는 부산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존의 격차에 차별과 동원이란 인위적 조작을 가해 그것을 현재와같이 호남을 ‘왕따’시키는 지역주의로 만든 데에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책임이 크다. 지역주의를 호남 ‘왕따’에서 그치지 않고 영남의 남북간 대립이나 충청의 ‘제몫 찾기’로까지 확대(소지역주의의 발흥)시킨 데에는 당시 야당 지도자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 지역감정은 90년 3당 합당과 97년 DJP연합을 거치면서 선거연합을 통한 지역동원의 형태로 바뀌었다. [선거와 지역주의-辛起鉉 전북대교수]71년 대선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던 정치적 지역주의는 80년대 후반의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선거정치를 결정하는 지속적 변수가 됐다. 국민 모두가 지역주의에 대해서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폐해를 비판하면서도 지역주의에 몰입하거나 휩쓸리고 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역주의를 정치화하는 대표적 공간은 선거다.지역색을 보여주지 못하는 정당은 득표도 시원치 않고 의석점유도 보잘것없었다.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정당은 여전히 주요 경쟁 주체로서의 위상을 발휘하고 있다. 이미 형성됐던 호남정서와 영남정서에 이어 95년 선거에서는 충청정서까지가세하면서 한국사회의 지역정서가 다극화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것이 97년의 대통령선거로까지 이어져 그야말로 지역대결의 극치를 보여줬다.불균형 발전이나 소외 의식을 가졌던 지역에서는 이에 대한 시정을,지역패권을 유지해왔던 지역에서는 급격한 박탈감에 따른 시정을 기대하고 있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권력을 각 지역에 동등하게 분산시키는 지방자치야말로 지역등권의 첫걸음이다. 다만 지역등권의 논리를 제대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현 단계에서의 투자 우선순위를 불균형과 시급성 등의 차원에서 적정하게 판단해 가야 한다.
  • 새국면 맞은 稅風수사·정국 급랭

    한나라당 김태원(金兌原)전재정국장의 검찰수사를 계기로 정국에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한나라당은 ‘야당파괴’ ‘이회창(李會昌)총재 죽이기’라며 국회 의사일정을 거부하며 ‘전면전’을 선언했다.반면 여당은 정치공세에 불과하다며 일축했다.“범죄혐의로 수배중이던 사람을 체포했는데 무슨 정치공작이냐”고 반박했다. ■여당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검찰수사와 국회운영의 분리를 주장했다. 국민회의는 야당이 세풍수사를 ‘야당 죽이기’로 규정하자 “구태를 벗지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화갑(韓和甲)사무총장은 “야당도 이제 세풍수사는 사법수사에 맡기고 국정운영에 정상적으로 협조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박상천(朴相千)원내총무는 향후 여야협상을 감안한 듯 “좀더 알아봐야 겠다”며 즉각적인 반응을 삼갔다.김옥두(金玉斗)총재비서실장은 “수배중인 사람을 체포해 수사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자민련도 세풍사건이 정치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경계했다.김현욱(金顯煜)사무총장은 “사법당국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며 “국회 밖 문제를 국회에서정치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특검제와 국정조사를 통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대선자금 수사 촉구로 대여 선전포고를 했다.“전쟁을 하자니까 전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일전불사(一戰不辭)태세다.‘국회농성’과 ‘장외투쟁’까지 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잇따라 열린 주요당직자회의와 총재단회의,긴급 의원총회 등에서는 시종 여당을 성토하는 격앙된 분위기가 계속됐다.“단순한 금전출납을 하는 당 재정국장을 수사하는 것은 정당사상 초유의 일”로 정치보복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총재단회의에서 신경식(辛卿植)사무총장은 “과연 이 정권을 같이 정치를해야할 상대로 봐야 하는지,이 정권을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지 심각히 검토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분개했다.최병렬(崔秉烈)부총재는 “대선자금을 건드려 야당을 기죽인뒤 국면을 전환하고자 하는 전략”이라고 흥분했다. 의원총회에서는 발언을 자제하던 중진의원들이 포문을 열며강경 분위기를주도했다.“분노를 금할 길 없다”고 말문을 연 박관용(朴寬用)부총재는 “박정희(朴正熙)정권도 정치적으로는 DJ를 탄압했어도 정치자금문제를 건드린적은 없다”고 김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안택수(安澤秀)대변인은 “국민회의 인선은 야당파괴와 이총재 죽이기를 위한 ‘신장개업’이었다”고 말했다.이부영(李富榮)총무는 마지막으로 “특검제와 국정조사를 통해 이총재와 김대통령의 대선자금을 동시 수사하자”고 촉구했다. 최광숙기자 박찬구기자 bori@
  • 李萬燮대행 취임一聲과 정치역정

    이만섭(李萬燮) 신임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은 12일 “십자가를 지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대행은 “실타래처럼 얽힌 정국을 어떻게 풀어갈지 가슴이답답하다”고 털어놨다.그러면서도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을 받드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와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다.‘소원한 관계’라는 일부 보도를 간접 부인한셈이다. 이대행은 바른 말 하는 정치인으로 정평이 나있다.과거 공화당 시절부터의트레이드 마크다.이대행은 평소 “바른 말을 하는 정치인이 필요하다.그게국민과 당,대통령을 위하는 길이다”라고 말해왔다.상임고문 시절에도 그랬다.옷사건으로 김태정(金泰政) 전 법무장관의 경질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을 때 국민회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하지만 이대행은 김장관의 사퇴를주장하는 ‘총대’를 멨다.지난 5월31일 확대 간부회의에서의 일이다. 그의 정계 입문은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의 인연에서 출발했다.그는 5·16후 최고회의 의장인 박 전대통령을 만났다.모 신문사 정치부기자 시절이었다.그는 박 전대통령의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라는 신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했다.63년 박의장을 찾아가 ‘옆에서 돕겠다’고 말했더니박의장이 매우 좋아했다고 전했다. 그해 박 전대통령의 대선 유세에 합류했다.대선 직후 만 31세에 전국구로금배지를 달았다.실제로 박 전대통령의 총애를 받았지만 69년 3선개헌을 하려고 할 때 반대하면서 박 전대통령과 틀어졌다.그해 공화당 의원총회에서권력형 부정부패의 핵심인 이후락(李厚洛)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의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정치인으로서의 36년간은 비교적 순탄했다.7선에다 한국국민당 총재,국민신당 총재,신한국당 대표서리 등의 이력이 말해준다.남에게 알리지 않고 자녀들의 결혼을 시킬 정도로 ‘청렴’ 이미지도 있다.하지만 정치생활의 대부분을 여당에만 머물렀다는 비판도 없지않다.한윤복(韓潤福·67) 여사와의 사이에 1남 2녀. ▲대구·67세▲연세대 정외과▲6·7·10·11·12·14·15대의원(7선)▲한국국민당 총재▲국회의장▲신한국당 대표서리▲국민신당 총재곽태헌기자 tiger@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27)한승헌의 ‘어떤弔辭’(중)

    ▲ 한승헌의 '어떤 弔辭'(중) 1975년 1월23일 한승헌 변호사가 수사당국에서 일단 풀려난 뒤부터 재연행당한 3월21일까지의 두 달 동안은 반유신독재운동의 전환기로 접어든 격동의연속이었다. 박정희독재정권은 1974년 긴급조치 1·4호로 300명 가까운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구속했으나 국내외의 강력한 비판에 굴복하여 1975년 2월 15일 상당수를 석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바로 이 날 밤 9시40분 영등포구치소에서 풀려난 김지하 시인이 “종신형을 받았는데 벌써 나오다니…세월이 미쳤든지 내가 미쳤든지 아니면 둘 다 미쳤든지”란 출소소감은 당시의시대적인 분위기를 단적으로 축약해준다. 여기에다 1974년 말 동아일보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선두로 시작된 언론자유화 운동은 해가 바뀌자 조선·중앙·문화방송 등 각사들로부터 언론자유실천 결의문이 채택되는 등 독재정권은 점점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이때의 유명한 사건이 바로 관계당국의 개입으로 동아일보에 대한 일체의 광고게재 중단사태이다. 역사상 유례없는 광고란 백지 신문이 나오는가 싶더니이내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쇄도하는 자유언론 실천 기간이 잇따랐다.바로 이런 과정에서 김지하 시인은 ‘동아일보’에다 ‘고행…1974’(1975년 2월25일∼27일)를 연재했는데,그 알맹이는 긴급조치 아래서 일곱 사형수를 낸 인혁당 사건의 허구성을 그 사건 당사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밝혀내는 것이었다. 바로 이 글 때문에 김지하 시인은 3월13일 당시 성북구 정릉동 소재의 박경리 여사 댁 앞에서 연행,재구속 수감당하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인 격랑 속에서 한승헌 변호사는 무엇을 했을까.국제앰네스티한국위원회 창립발기위원이자 이사였고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자유실천문인협의회 이사,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위원이었던 그는 각종 선언문의발표자에다 동아일보 격려광고 기탁 주동자 등으로 이미 깊숙이 던져진 반독재 투쟁의 대열 속에서 몸을 뺄 처지는 커녕 지도적 위치에 서 있었다. 여기에다 결정적인 계기가 닥친 건 바로 김지하 시인의 구속이었다. 한 변호사는 서둘러 김지하 변호인단을 구성,3월19일 서울지방검찰청에 변호인 선임계를 제출했는데,의외로 그 반응은 빨라서 곧장 정보부로부터 변호인 사퇴를 종용받게 되었다. 이미 지난 1월에 취조해둔 ‘어떤 조사’로 언제든지 필요하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할 수 있다는 위협에도 아랑곳 없이 변호인의 기본자세인 권리와의무를 들먹이며 냉정히 거절한 그에게 이튿날에도 똑같은 전화가 걸려왔으나 역시 냉정히 사퇴를 거절했다. 그리고 3월21일 밤.그는 시내 어느 모임에서 곧바로 낯익은 남산 지하실로연행,이틀만에 서울구치소에 수번 2111번으로 수감되었다.요즘과는 달리 당시에는 반공법 피의자에겐 철저한 독거수용으로 일체의 접견이나 도서 반입을 엄금시켰던 시절인데다 특히 변호사란 특수 신분을 감안하여 검찰의 심문조차도 구치소 안에서 실시하여 그야말로 수감자로 하여금 처절한 고립감을주입시킨 때였다. 정치적인 의도가 분명한 사건이기에 석방은 시간문제일거라는 예측이 없지않았고,더구나 검찰총장이 한 원로 법조인에게 석방을 귀띔까지 해주었건만“중정과 청와대 쪽에서 완강히 제지하는 바람에 검찰총장의 모처럼의 언명이 빈말처럼 되어버렸다”(한승헌 ‘시국사건 변호에 대한 보복’)는 대목에서 읽을 수 있듯이 ‘어떤 조사’ 필화사건도 결국은 필화가 겪어야할 운명은 다 치를 수밖에 없었다. 법조계와 문학예술.언론계가 망라되다시피했던 석방운동과 당시까지는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았던 104명의 변호인단 구성 등 숱한 삽화를 남기면서 제2심에서야 간신히 집행유예로 석방된 한 변호사는 1980년 5월 광주항쟁사건에 연루되어 두 번째 옥고를 치르느라 변호사로 복권된 것은 1983년에 이르러서였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 김형욱씨 유족 재산찾기 ‘헛고생’

    지난 79년 반국가 활동을 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金炯旭·당시 54세) 전 중앙정보부장의 가족들이 국가에 빼앗긴 김씨의 재산을 되찾으려다가 실패했다. 김씨는 지난 77년 미 의회에서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과 인혁당 사건 등이 조작됐다고 폭로한 데 대한 보복으로 박정희(朴正熙)정권이 김씨 한사람만을 겨냥해 제정한 ‘반국가행위자 처벌법’에 따라 기소돼 82년 궐석 상태에서 징역 7년형과 함께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지난 93년과 96년에 각각 이 법의 상소권 박탈과 궐석재판·재산몰수 조항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김씨의 재산은 서울 신당동의 대지 582평,성북동 임야 3,700여평 등으로 96년 당시 시가 1,000억원대에 이른다. 위헌 결정을 근거로 김씨의 부인 신영순(申英順·68·미국 거주)씨는 97년서울 삼선동 땅 4,517평을 국가로부터 불하받은 사람으로부터 전매받은 황모씨 등 11명을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말소 청구소송을 냈다. 대법원 민사2부(주심 鄭貴鎬대법관)는 1일 “위헌적인 법률에의해 이루어진 등기가 무효임에 분명하더라도 위헌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시효취득 기간이 지났다면 소유권을 인정해야 한다”며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깨고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따라 김씨의 다른 재산 되찾기도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 임병선기자 bsnim@
  • 加 유력 일간지 ‘金대통령 인터뷰’ 대대적 보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7월초 미국·캐나다 국빈방문에 앞서 최근 캐나다 유력 일간지 ‘글로브 앤 메일’(Globe & Mail)과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이 미사일 발사실험을 한다면 또다시 고립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이어 김대통령은 “46년간의 남북대치를 종식시키기 위해 대북 화해정책을펴왔다”면서 “하지만 이는 상호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북한은 우리가 원하고 있고 필요한 것은 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김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이 ‘당근과 채찍’식 접근으로,필요하면 채찍을 사용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만일 북한이 도발해오면 강력하고 결단력있게 대응할 것이나 우리측에선 어떤 종류의 군사적 도발도 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또 남북한 해군 함정들의 서해교전과 금강산 관광객 억류로 ‘햇볕정책’에 대한 국내 비판이 일고 있지만 아직 국민의 80%는 자신의 대북 화해정책을지지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냉전종식의 유일한 길은 미국이 소련과의 화해를 위해 사용했던 실용적인 접근 방법뿐”이라고 말하면서 “관계를 단절해 공산정권이 더많은 압박과 고립으로 빠지게 되면 이들은 더욱 호전적이고 강력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때문에 이번 김대통령의 미국·캐나다 국빈방문은 북한의 고립을 종식시키기 위해 미국과 벌이는 대북정책의 대대적인 재검토 작업과 함께 햇볕정책에 대한 국제적 지지 강화에 그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김대통령과의 회견 내용을 28일자 1면에 게재한 글로브 앤 메일은 “아시아의 만델라로 불려온 김대통령이 만델라처럼 자신을 억압한 박정희 전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을 제안,국민들을 놀라게 했다”고 소개하면서 또한 김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화해정책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경옥기자 ok@
  • 장충체육관 운영권 민간이관

    서울시 소유인 장충체육관의 운영권이 한 빌딩관리 전문업체에 넘어갔다. 체육시설 민간위탁을 추진중인 서울시는 지난 28일 장충체육관과 잠실 탁구장에 대해 공개입찰을 실시한 결과 7,277만원을 써낸 테크포럼(대표 許哲熙)에 장충체육관 운영권이 낙찰됐다고 29일 밝혔다.탁구장은 입찰자가 없어 유찰됐다. 장충체육관 공개입찰에는 대한농구협회와 한국씨름연맹이 응찰했으며,공개입찰을 통해 서울시 체육시설의 운영권이 넘어간 것은 테크포럼이 처음이다. 지난 97년 설립된 테크포럼은 빌딩,스포츠센터,헬스클럽 등을 전문적으로관리해온 회사로 지난해 2억원의 적자를 내는 등 최근 몇년간 적자가 누적돼온 장충체육관 운영에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해 이르면 내년부터 흑자로 전환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테크포럼측은 “조명이나 음향 등 에너지 관리에 노하우를 갖고 있어 불필요한 경비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장충체육관을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장충체육관은 지난 63년2월1일 준공돼 같은해 6월1일 개관했으며,이후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국내 최초의 실내체육관으로서 숱한 국내외 경기를 치러왔다. 특히 지난 72년 12월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체육관선거를 통해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을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등 오욕의 장소로이용되기도 했다. 김재순기자 fidelis@
  • 방송사 토론프로 활성화…토론문화 자리 잡는다

    KBS 등 방송사들이 토론문화의 정착에 앞장서고 있다.토론프로의 숫자가 부쩍 늘었고,전문가들이 격론을 펼치는 등 새로운 토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주제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폭이 크게 넓어졌다. 방송사가 내보내는 토론프로는 ‘생방송 심야토론’(KBS1 토 밤 10시30분)‘길종섭의 쟁점토론’(KBS1 목 밤10시) ‘일요진단’(KBS1 일 오전 10시15분)과 ‘배유정의 열린아침-터놓고 말해봅시다’(MBC 일 오전 8시),‘갑론을박 동서남북’(SBS 일 오전 8시10분),‘생방송 난상토론’(EBS 토 저녁 8시55분)등이 있다. 현재 방송되는 토론프로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KBS1 ‘생방송 심야토론’. 지난 87년 ‘터져나오는 민주화의 요구를 담는 그릇’으로 불리며 화려하게출발,이듬해인 88년 방송대상을 받았다.이 프로에는 재야인사나 운동권 출신도 거리낌없이 나왔다.전문가와 명사들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장면은당시로선 좋은 구경거리였다.90년대 들어 인기가 다소 떨어졌으나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나 ‘공자논쟁’을 다뤄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전화와 PC통신을 통해 시청자의 의견을 반영하고 실시간(리얼타임)으로 패널과 시청자가 토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BS의 ‘난상토론’도 토론프로의 재미를 더해준다.지난해 9월 첫방송된 이 프로는 토론프로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군 것으로 평가된다.이 프로는 우선 주제를 시민단체와 함께 선정,시사성과 공정성을 살렸다.좌석배치도 다른 방송사와 달리 했다.그동안 TV 토론프로들은 시청자를 위해 일렬로 앉는 방식으로 자리를 꾸몄다.그러나 이 프로는 찬·반 양론으로 분명하게 나뉘는사람들을 마주 앉게 했다.서로 침을 튀기며 생각을 밝히다,때론 인신공격이벌어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방송이 끝나기도 한다. ‘싸움판같다’‘질서가 없다’‘찬·반 이분법을 강조한다’는 등의 비난도 받지만 인기도 그만큼 드높다..최근 서강대학 경제학과에는 이 프로를 본따 ‘시사토론회’란 토론동호회가 생기기도 했다. 이철수PD는 “난상(爛商)이란 어지럽게 널려있다는 뜻이 아니라 ‘낱낱이들어 잘 의논함’이라는 뜻”이라면서 “난상이라는 말 그대로 복잡한 사안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시청자 가족들이 서로 토론을 벌이도록 돕는 게 이 프로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토론프로가 이처럼 시청자의 관심을 모으면서 제작자들은 출연자 선정 등에 더욱 신중을 기하고 있다.한 관계자는 “토론프로의 생명은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접전을 벌이는 데 있다”면서 “출연자에게 논리를 적극적으로 펼쳐달라고 주문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 토론프로는 예상밖의 수확도 거두고 있다.출연자들이 예전과 달리 철저하게 준비를 해오는 것이다.자칫하면 논리에서 밀려 억지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탓에 토론프로에 출연하는 교수나 전문가들사이에 ‘공부해야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론프로에 관한 아쉬움도 있다.YMCA시청자시민운동본부 이승정실장은 “좋은 주제와 토론자도 필요하겠지만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이 아니라,EBS의 ‘난상토론’처럼 저녁 가족시간대에 과감한 편성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그는 아울러 “방송사들이 토론문화 정착에 책임감을 갖고 토론프로를 잘 운영해달라”고 주문했다. 허남주기자 yukyung@
  •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씨 20년만의 귀국 인터뷰

    홍세화(52)씨에게 서울은 인간의 정겨운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 낯선 도시로 다가왔다.파리에서 20년간 이방인 생활을 하다 14일 잠시 서울에 온 홍씨는 인간적인 정감이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서울 동숭동의 한 식당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공항에서 들어오며 서울이 너무 많이 변해 얼떨떨했다.거리도 잘 정돈돼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파트숲과 한강을 보며 시멘트문화의 삭막한 도시로 변한 서울 풍경이 안타까웠다.아파트숲은 자연과 인간과의 융화를 가로막는 장벽처럼 느껴졌다.한강은 파리의 센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큰 소중한 강으로 멋있게 꾸밀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서울의 이러한 모습은 철학의 빈곤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홍씨는 지난 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그동안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해왔다.지난 95년 자전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내우리나라에 그 존재를 알렸다.최근에는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신문사)를 냈다. 그는공항에서 아버지 홍승관(80)씨등 가족과 유홍준 교수등 지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서울에 온 그는 가장 먼저 대학로를 찾았다. 홍씨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많은 실업자나 거지들을 보며 사회보장의 미흡함을 느꼈다.프랑스에서는 1930년대 자전거 타고 바캉스를 가던 시절부터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자동차를 타고 휴가를 떠나는 오늘에도 사회보장이 제대로 안돼 있는 것이 안타깝다.분단이후 사회정의도 안보에 눌리고 경제제일주의에 밀려났다”고 말했다. 그는 파리에서의 택시운전은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내몸을 움직여 살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반가웠다.그 당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는데 택시운전은 나를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게 했다.그는 88년 4월부터 2년4개월간 택시운전을 했다.후배의 권유로 택시운전을 그만둔 그는 지난해까지 한국의상실 프랑스 지사장으로 일했다.지금은 글쓰는 것 외에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그는 “한국의 산과 들 등 자연을 가장 보고 싶었다.보고 싶은 사람도 굉장히 많았으며한 사람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원망하고 싶은 사람도 많았지만 지금은 다 잊었다는 그의 말에는 자신이 강조해온 관용의 자세가 엿보였다. “영구귀국할 것이다.나이가 들면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겠는가.파리의 생활은 ‘나 있는 곳에 우리가 없는 쓸쓸한 이방인의 삶’이다.”그의 부인도 파리생활은 적막한 절간 생활과 같다고 말했다.홍씨는 그러나 “당장 돌아오기는 어려운 상황이다.파리에서 글도 쓰고 한반도를 바라보며 공부도 더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 정권과 과거 정권과의 근원적인 차이는 극우집단이정권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고 말했다.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평가에는 부정적이다.“박정희를 재평가하려는 것은 철학의 빈곤때문이다.땀흘려 일한 사람이 누군데 경제발전을 박정희 한 사람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론은 이미 그 전정권에서 계획이 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을 강하게 비판했다.“한국의 정치 지도층이나공부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책무 의식이 너무 부족하다.”중도좌파의 감성적 사회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그는 가장 힘겨운 때는 80년대 초 전두환정권이 등장했을 때였다고 말했다.“한국사회에 희망이 없어 보였다.” 홍씨는 “한국에 돌아오면 시민운동단체에서 일하고 싶다.그리고 사회진보와 자아실현을 위해 고민하는 젊은이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그들에게 사회적 책무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그는 출판기념회,강연 등바쁜 일정을 마치고 7월7일 프랑스로 돌아갈 예정이다. 이창순기자 cslee@
  • [제2공화국과 張勉](29)-金대통령 특별회고(下)/사료적 가치

    28회에 이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회고 증언 가운데 장면(張勉)박사를 만나 가톨릭 영세를 받은 과정 등 5가지 질의에 대한 답변을 싣는다. 장 박사를 만나기 전에도 성당에 나간 것으로 압니다.영세를 받은 과정을들려주십시오. 제 전처의 처가가 가톨릭 집안이기 때문에 자주 성당에 나갔지만 정식으로영세를 받은 것은 1957년이었습니다.그때 저는 유명한 신학자이기도 한 윤형중(尹亨重)신부로부터 교리강독을 받았고 노기남(盧基南)대주교의 방에서 김철규(金哲奎)신부라고,그때 우리 민주당과 매우 가까운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최서면(崔書勉)씨라고,그때 서울교구 사무국장으로 있던 제 친구가 주선했는데 장 박사를 대부로 소개해준 사람도 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장 박사하고 영적으로 대부·대자의 관계가 되었고,그 인연으로 저는 신파의 총수인 장 박사 밑에서 젊은 엘리트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자연히 장 박사 가족하고도 잘 알게 되었는데 특별히 인연이 깊어진 것은 장 박사가 5·16을 겪고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명륜동 자택에 칩거할 때였습니다.과거에 교류가 있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장 박사를 외면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6대 국회의원이던 저는 장 박사를 찾아뵈면서 관계를 유지했고,그 분이 돌아가신 후에도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한번은 장 박사 추도식을 동성고등학교에서 대대적으로 했는데 그것을 제가 전부 주선한 일이있습니다.이런 일들로 해서 장 박사님 가족하고는 더욱 절친하게 되었습니다.제가 1980년 사형 언도를 받아 있을 때 장 박사 사모님께서 제 사형 언도가 풀릴 때까지 매일 그 추운 겨울에 성당에 나가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경제전문가이기도 합니다.장면정부가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와 구체적으로 추진한 ‘국토건설사업’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실현가능성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저는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당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중심이 되어서 입안했습니다. 그리고 국토건설단은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던 장준하(張俊河)씨가 맡아줌으로써 큰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습니다.국토건설단에 젊은 청년들이 정말로 나라를 한번 다시 세운다는 의욕으로 적극적으로참여하는 분위기가 크게 일어났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토건설5개년계획이 얼마나 좋은 안(案)이었나 하는 것은 그후 군사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朴正熙)정권이 추진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토대가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경제제일주의는 장면정권의 양대 모토였는데 여기에 대해서 당시 우리나라 경제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며 예산의 절대적 액수를 원조해주던 미국까지 적극적으로 지지한 바 있습니다.미국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도록합의가 돼 장면총리가 미국을 방문하고자 출발하려는 찰나에 군사쿠데타가일어난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민주당 신파 계열을 지켜온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는다는 표현을 가끔 하십니다.신파의 특성,또는 장점을 설명해 주십시오. 일제시대 관료 출신들이나 은행가들이 해방 후 2대 국회를 중심으로 대거 정계에 등장했습니다.자유당에 의한 사사오입개헌이 일어난 후 이들이 민주국민당과 손을 잡고 민주당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민주당 내에서 민주국민당 계열이 구파를 이루게 되었고 과거의 관료계층이신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과거 관료 대부분은 이승만(李承晩)정권에 협력을 했지만 신파에 참여한 관료 출신들은 양심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자유경제,그리고 남북간의 평화적 교류,이런 것을 생각하는 세력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신파는 구파에 비해 개혁적이었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더 철저한 면이 있었습니다.실제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해서 신파는매우 강하게 투쟁했고,이 점에 있어서 구파하고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4·19가 일어날 무렵 구파는 대거 자유당에 입당했고 신파는 자유당정권으로부터더욱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신파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정신을 이어받았고 그리고 시장경제라고 할까,자유경제에 대한 정신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저는 그 후로 일생의 정치생활을 통해서 일관되게 그때 받은 영향을 그대로 견지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5·16쿠데타 발생 후 장 총리는 수녀원으로 도피했고,윤보선(尹潽善)대통령은 쿠데타를 추인했습니다.두 분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장 박사와 윤보선 두 분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몫이지 제가 여기에서 말할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2공화국 당시의 내각책임제를 어떻게 보십니까.제2공화국,그리고 장 박사에 대해 종합적인 평가를 해주십시오. 정국을 책임지고 잘 장악해 안정을 유지해서,그런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총리였던 장 박사에게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그러나 거기에는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장 박사가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괴롭힌 면이 있었습니다.저는 과거에 내각책임제를 열렬히 지지한 바 있지만 5·16을 겪고 나서 내각책임제에 대해 큰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그 이유는,당시 경험으로 정당과 국회의원이 성숙하지 않고서는 내각책임제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5·16 당시 나라가 공산화 직전에 있었다든가,장정권이 지나치게 부패했다는 쿠데타 명분에 대해서 상당 부분 공정한 주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5·16 직전 정국은 아주 안정이 되었고 오히려 매일같이 일어나던 시위도 거의 가라앉은 상태였습니다.정치 역시 안정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패 역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5·16 후에 장정권의 부패를 대대적으로 조사를 해가지고 신문 양면에 걸쳐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채워서 발표를 했지만 재판결과 부패로서 처벌받은 것은 김영선재무장관이 출장 중 중고품 냉장고 하나를 어느 공무원에게서 선물받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나머지는 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처럼 학생들이 피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를 정치인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사분오열해서 가뜩이나 약한 정권을 잡고 흔드는 일을 한 데다 언론까지 가세해 결국 장정권이 유지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장면정권의 간부였던 한 사람으로서 그 책임을 통감하지만 역시 정치가 안정되고 정권이 성공하려면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특히 정치인은 스스로가 책임 있는 자세로서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그런 건전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 뼈저리게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증언 통설 뒤집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증언은 현직 대통령이 신문 연재물에 직접 참여했다는 의미말고도 증언 자체가 갖는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김 대통령은 먼저 장 박사와 관계를 맺게 된 계기를 “장 박사가 1956년 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무소속인 제가 장 박사 지지를 선언한 것이 신문에 보도돼서”(28회에 게재)라고 공개했다.이 말은 언뜻 이해하기에 쉽지 않다.김 대통령은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므로 56년 당시에는 일개 정치 지망생에 불과했다.그런 그가 장 박사를 지지했다고 해서 신문에 보도되기란 어려웠으리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그때 이미 주목받는 논객이었다.55년 9∼10월에만 동아일보에 다섯 차례 ‘시론’을 실었고,당시 지식인 사회를 대변하는 월간지‘사상계’ 55년 10월호에도 장문의 논설을 발표했다.제목은 ‘노총(勞總)분규와 우리의 관심’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 ‘노조는 유해한가’ 등으로모두 노동운동을 주제로 했다.따라서 ‘장면 부통령후보 지지 선언’이 보도될 만한 여건은 충분했던 셈이다. 60년 4월6일 민주당이 주도한 서울 중심가 시위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밝힌 것(28회 게재)도 상당히 소중한 역사적 증언이다.그날 시위의 전개와 이후‘4·19혁명’에 끼친 영향 등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흔히들 제2공화국의 민주당정부를 4월혁명에 ‘무임승차한’정권이라고 하지만 민주당 인사들의 주장은 다르다.민주당이 4월혁명을 일정 부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3·15부정선거’ 당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지만 막상 서울에서는 3월17일 성남고생 400여명이 거리에 나섰을 뿐 학생·시민의집단적인 움직임은 없었다.이처럼 잠복한 민심을 민주당이 촉발했다는 주장이다.그런데도 그 증거로 ‘4·6민주당 시위’를 내세우고 이 시위를 생생하게 되살린 증인은 여태껏 없었다. 김 대통령의 증언을 보면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하는 과정,일단 시위대에 끼자 경무대를 목표로 삼으려고 한 사실들이 명백하게 밝혀진다.학계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해볼 만한 부분이다. 당 대변인이 된 과정(28회 게재)도 그 무렵 김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60년 ‘7·29총선’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172석을 차지했다.그야말로 제제다사(濟濟多士)라 할 만큼 인재가 넘치는 상태였는데 김 대통령은 선거에서 떨어지고도 대변인이라는 중책을 맡았다.유망한 청년 정치인에게 거는 민주당 지도부의 기대와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대통령은 장면 박사와 제2공화국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에서 “정치인은스스로 책임 있는 자세로서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건전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 뼈저리게 느꼈다”고 결론내렸다.지금의정치권에도 적용되는 주문일 것이다. 이용원기자
  • 극장 간판장이 출신 화가 이상원 佛미술계 입성

    극장 간판장이 출신의 화가가 프랑스 미술계에 입성한다. 한국화가 이상원(65)이 16∼29일 프랑스 파리 살페트리에르 전시장에서 한국화를 알리는 첫번째 전시회를 갖는다. 살페트리에르는 1656년에 세워진 유서깊은 성당.그러나 지금은 파리시가 관리하는 미술전시 공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크리스티앙 볼탕스키를 비롯,아네트 메사지·마리오 메르츠·장 샬르 볼레·레베카 혼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이곳을 거쳐갔다.이번 전시의 주제는 ‘흐르는 시간에 대한 시선’.쌍끌이 어선으로 상징되는 피폐한 어촌 사람들을 그린 인물화 ‘동해인(東海人)’ 등 30여점이 선보인다.모두 100호 이상의 대작들로 가로 5.5m에 이르는초대형 작품도 있다. 이상원은 젊은 시절 극장 간판장이와 초상화가로 삶을 경영했다.그 분야에서 만큼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였다.안중근 의사의영정을 그린 것이 계기가 돼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 등 수많은 국내외 유명인물의 초상화를 그렸다.거만(巨萬)의 부도 모았다.그러나 이상원은 작고한노산 이은상 선생을 만나 순수미술의 길로 들어섰고 독학으로 화업을 일궈나갔다.74년 불혹의 나이에 국전에 입선했으나 곧 민전으로 돌아서 78년 제1회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과 제1회 중앙미술대상전 특선을 차지하며 미술계의시선을 한몸에 모았다. 이상원의 작품은 극사실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그는 진지하고 처절한 삶의 현장을 카메라 렌즈보다 더 박진감 있게 잡아낸다.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놓치지 않는다.그렇기에 그의 작품엔 흡인력이 있다. 거의 모든 작품을 현장작업으로 그리는 이상원은 “소재와 대상의 취재도중요하지만 만나는 인물들로부터 인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현장작업을 중시한다”고 말한다.그는 20여년동안 1,000여점의 작품을 그렸지만 그 그림들을 절대로 팔지 않는다.소중히 간직해 훗날 자신의 전용미술관에 그대로 전시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김종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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