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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 발전상 보니 독일 광부 30년 피로 확 풀려”

    “조국 발전상 보니 독일 광부 30년 피로 확 풀려”

    “말로만 듣던 조국의 눈부신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힘들었던 30년 독일 광원생활의 피로가 확 풀립니다.” 경북도의 초청으로 23일 재독 영남향우회 소속 고향 방문단 39명과 함께 고국을 찾은 성규환(69·재독 한인광산근로자협회장·재독 영남향우회 초대회장 역임)씨. 그는 “경북도가 조국이 어려웠던 1960∼70년대에 독일에 파견돼 광원과 간호사로 일하며 고생한 우리들을 초청해 준 데 대해 감사한다.”면서 “이는 우리 정부조차 못했던 일”이라고 거듭 감사해 했다.1977년 광원으로 독일에 간 영천 출신인 성씨는 “우리들은 타국 땅 깊이 1000m의 섭씨 40도가 넘는 막장에서, 함께 갔던 간호사들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시체를 닦는 일로 외화를 벌며 한평생을 살면서 항상 고국 발전을 염원했다.”며 “죽기 전에 고국의 변모상을 둘러 보게 돼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그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에서 광원 등이 벌어 들인 수입은 1970년대 한국 경제 성장의 ‘종자돈’ 역할을 했다고 자부했다. 이 기간 파독된 광원과 간호원은 1만 8000여명. 파독 계약 조건은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70∼90%)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독 정부는 이를 담보로 1억 5000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하지만 그는 “재독 교포 1세대들은 현역에서 은퇴한 뒤 연금을 받고 살지만 경제적으로는 대부분 넉넉하지 않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2세들은 학계·법조계·의학계 등에 속속 진출해 한인 사회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다고 했다. 한편 방문단 일행은 이날 구미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및 금오공대 유비쿼터스 체험관, 문경 석탄박물관 등을 방문한 뒤 24일 안동 하회마을과 울진 등을 견학한다.25일에는 포스코와 경주 문화유적지,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장을 찾고 26일 울산의 기업체 시찰로 고향 방문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대구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어떻게 지내십니까] 남장 여성정치인 김옥선 前의원

    [어떻게 지내십니까] 남장 여성정치인 김옥선 前의원

    7,9,12대 국회에 등원했던 김옥선(73) 전 의원.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남장(男裝) 여성 정치인으로만 유명했던 게 아니다. 그녀는 서슬 푸른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가 금배지를 박탈당했던 이른바 ‘김옥선 파동’의 주인공이었다. 남존여비 풍조가 뿌리 깊은 우리 정치판에서 남자들보다 더 과감한 의정활동으로 이름을 떨쳤던 그녀를 만나 근황을 들어봤다. ●“40세에 정치생명 박탈된 10년을 식물인간처럼 살아” 9대 국회 때인 1975년 10월8일. 김 전 의원은 대정부질문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딕테이터(독재자) 박’으로, 유신정권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으로 맹공했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의 야유 속에 정회가 선포돼 발언도 마치지 못했고, 일부 발언은 속기록에서도 삭제됐다. 이상이 ‘김옥선 파동’의 시발로, 그녀는 그로부터 닷새 후에 의원직을 내놔야 했다. 의원직 사퇴 32돌을 며칠 앞두고 만난 그녀는 무척 정정해 보였다.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단정하게 빗어올린 신사풍의 헤어스타일은 여전했다. 그러나 웅변조의 어투에도 불구하고, 여성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는 감지됐다. 특히 “40세에 정치생명을 박탈당해 인생 황금기 10년을 식물인간처럼 살았다.”며 명예회복의 당위성을 설파할 때가 그랬다. 그녀는 유신체제를 비난한 자신의 속기록 복원을 명예회복을 위한 최선의 자구책으로 보는 듯했다. 그러나 “속기록 복원은 사초를 바로잡는 일인데, 후배들이 너무 무성의한 것 같다.”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지난 2005년 국회운영위에 속기록 복원 청원이 제출돼 소위에서 여야가 사실상 합의하고도 위원장 교체 등 이런저런 이유로 전체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는 등 흐지부지됐기 때문이다. 속기록 복원 등을 통한 명예회복은 물론 손해배상 소송(고법에선 기각됐지만, 대법원 계류중) 등 법정투쟁을 계속할 계획이다. 특히 올 하반기에 회견을 통해 여론을 환기한다는 복안이다. ●“어머니가 죽은 오빠 그리워해 남장 하게 돼” 얼마 전 종영된 TV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남장 여자 주인공을 등장시켜 시선을 끌었다. 서구에선 ‘드래그 킹’(남장 여자)이나 ‘드래그 퀸’(여장 남자)이란 속어에서 보듯 복장을 바꿔 입는 사람이 드물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선 파격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 전 의원은 퍽 선구적이다.1950년대부터 이미 남장으로 살아왔다는 점에서다. 그녀는 이에 얽힌 비화 두 가지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우선 “어머니가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 죽은 오빠를 그리워하는 것을 보고” 1남3녀 중 막내인 자신이 남장을 하게 됐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뛰어들어 환경에 적응하는 방편이었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물들인 군복이나 작업복이 편해서 입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복장은 제쳐두더라도 그녀는 어떤 면에서 남성 의원들보다 더 치열한 정치활동을 펼쳤다.‘김옥선 파동’이 그녀의 의원직 사퇴로 결말이 난 뒤 당시 안국동 신민당사에는 예리한 1회용 면도날을 동봉한 항의 서신이 날아왔다고 한다. 남성 의원들에게 중요한 ‘뭔가’를 자르라는 힐난성 주문이었다. 굳이 이런 일화를 들추지 않더라도 그녀는 남성 지도자에 의해 ‘간택’되는, 정치판의 화초이기를 거부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그녀는 “(정치판에) 속좁은 남성들이 너무 많다.”면서도 “여성이기에 남성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후배 여성 정치인들에게 충고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여권 신장을 주장하면서 지역구 공천이나 비례대표에 여성 프리미엄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얘기였다.“진정한 성 평등은 남성들과 똑같이 경쟁해서 쟁취해야 한다.”고도 했다. 악연을 맺었던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서는 의외로 우호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지난번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거물 정치인 한 사람이 “독재자의 딸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고 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박 전 대표의 성장과정(유신 전)이 박정희 시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박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YS·DJ 현실정치 훈수 그만뒀으면” 그녀는 2002년 대선에 입후보했다가 포기한 것을 끝으로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공사다망하다. 올 3월엔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헌정회 회장 자리를 놓고 거물 정객인 이철승(素石) 전 신민당 대표와 경합했으나, 반탁 학생운동 대선배였던 소석에게 회장 자리를 내줬다. 내친김에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 3김씨에 대한 인물평을 요청하자, 그녀는 “그 사람들은 너무 후배들을 안 키웠다.”고 받아넘기며 말을 아꼈다. 그래도 “그들 나름대로 카리스마 같은 게 있었지 않았느냐.”고 되묻자,“그것도 지역주의에 기반한 것에 불과하다.”면서 “그만큼 국민을 우려먹었으면 됐지, 이제 현실정치에 대한 훈수를 그만했으면 한다.”고도 했다. 올해 대선에선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는 물음엔 “나중에 후보자의 인물을 검토해 보고 후원할 것”이라며 더 이상의 언급을 자제했다. 인터뷰 도중 김 전 의원은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느냐?”고 조크를 던졌다. 그러고는 “연애할 나이에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느라고 경황도 없었다.”고 자답했다. 그러면서 “물론 결혼해서도 사회사업이 가능하다.”면서 “다만, 모자원 아이들 옷가지를 사도 똑같은 것을 샀는데, 아무래도 친자식이 있었다면 좋은 것은 (친자식을 위해) 골라놓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부연 설명했다. 김 전 의원은 요즘 1955년 자신이 설립한 송죽학원을 종합대학교로 발전시키는 프로젝트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즉 중국의 샨시(陝西) 중의학원 및 사범대학과 컨소시엄 형태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보건·복지와 한의학에다 예술 분야까지 망라하는 교육의 전당을 세우겠다.”는 계획이다. 김 전 의원은 “하느님이 생명을 연장해 주시는 만큼 나이와 관계없이 이 나라와 사회, 국민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것”이라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운 필생의 소망을 토로했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그녀는 누구인가 ‘알파걸’(α-girl)은 미국 하버드대 아동심리학자 댄 킨들런 교수가 만든 신조어다. 똑같은 조건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여러 면에서 남성을 능가하는 여성을 가리킨다. 이석(異石) 김옥선 전 의원은 ‘원조 알파걸’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그녀는 19세란 어린 나이에 사회사업에 뛰어들었다. 국내 최초로 에벤에셀 모자원을 설립한 것이다. 한국전이 남긴 상흔인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의 자생력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 21세 때인 1955년엔 고향인 장항에서 정의여중을,1959년엔 정의여고를 각각 설립해 교육사업에도 발을 디뎠다. 특히 서해의 낙도인 충남 보령시 원산도에 원의중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들의 이사장이나 초대 교장을 맡으면서 교장실이나 이사장실을 따로 만들지 않은 사실은 지금도 회자된다.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한다는 지역구 국회의원 배지도 세 번이나 달았다.26세에 정계에 투신한 뒤 7대 국회에서 건국 이래 처음으로 당선무효소송을 제기해 1년만에 당락 번복 승소 판결을 받아내 배지를 달았다.9대 국회에선 당선 1년반 만에 이른바 ‘김옥선 파동’으로 물러난 뒤 10년 동안 공민권이 박탈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1984년 정치해금과 함께 12대 총선에서 3선에 성공했다.1992년 대선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 전 의원은 사회사업가·교육자·정치인에다 기독교계 지도자 등 1인4역의 인생을 살아왔다. 부침이 많은 삶이었지만, 신앙과 낙천적인 생활관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보는 듯했다. 그녀는 “IMF 위기를 맞았을 때부터 자가용을 버리고 택시 등 대중교통 수단만 이용한다.”고 귀띔했다. 영업용 택시 기사들이 하루 일당도 못 번다는 얘기를 듣고 그 길로 승용차를 처분했다는 것이다.“이후 택시 이용 총횟수가 8000번은 넘는다.”고 통계까지 제시하며 웃었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문화마당] 사이비 민주화/소설가 송기원

    1970년대에 종로 5가 기독교 회관을 처음 찾았을 때였다. 김지하 시인을 위시하여 고은 시인, 양성우 시인 등 불의한 권력에 대항하여 싸우다 구속된 문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기도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도 나는 그곳에서 소위 민주화란 말을 처음 들었을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민주화란 말 자체가 너무 새롭고 신기해서 사뭇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함께 외치면서는 어쩔 수 없이 눈시울마저 뜨거워졌다. 새롭고 신기한 가슴 떨림은 또 있었다. 무종교에 가까웠던 나로서는 기독교에 대하여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느 목사님의 강연을 들으면서는 사뭇 가슴이 떨리다 못해 하마터면 ‘나도 기독교를 믿어볼까’하고, 전혀 있지도 않은 신심마저 생겨날 뻔했다. 목사님의 강연 요지는 간단했다. 지금 이 땅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셨는데, 그 재림예수는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소위 이 땅의 불의한 세력에 맞서 싸우거나 고통당하는 민중 자체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이 땅에 예수가 재림했다는 주장 자체가 새롭고 신기했는데, 게다가 그렇게 이 땅에 온 예수가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민중 그 자체라는 주장에 이르러서는 마치 심봉사가 번쩍 눈이라도 뜨는 듯한 개안(開眼)의 감동까지 밀려왔다. 흔히 자신이야말로 재림예수라고 주장하는 지도자를 둔 기독교 종파마다 사이비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도 이 땅의 고통 받는 민중 자체가 바로 재림예수라는 주장이 전혀 사이비처럼 여겨지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 땅의 민중을 고통 받게 하는 불의한 세력은 70년대에는 박정희씨의 유신정권으로, 그리고 80년대에는 전두환씨의 신군부정권으로 어쩔 수 없이 낙인찍혔다. 마침내 90년대에 들어서는 이 땅에 민주화가 찾아오고, 얼마 후에는 소위 민주화 운동이란 것을 앞세운 문민정부를 거쳐 2000년대에는 마침내 참여정부까지 들어섰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민주화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거리며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나는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누구에게 현장을 들킨 듯한 마음이었다. 어쩌다 누군가가 내 이름 앞에 민주화라는 말을 덧붙이면 나는 마치 전신에 똥물이라도 뒤집어쓴 듯한 마음이기까지 했다. 아아, 종로 5가 기독교 회관에서 처음으로 민주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새롭고 신기한 마음이 어떻게 해서 이제는 그처럼 부끄러운 마음으로까지 변해버린 것일까. 돌이켜보면, 이 땅이 민주화가 되면서 이미 70년대 종로 5가의 민주화는 사라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문민정부며 참여정부라는 권력이 민주화라는 말을 앞세우면서부터 이미 민주화는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민주화 세력이 권력의 주체가 되면서부터 이 땅에서 민주화라는 말은 알게 모르게 더러운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민주화라는 말이 더럽게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70년대 이 땅의 고통 받는 민중에게 왔던 재림예수를,2000년대의 누군가가 아니 어느 종파가 나서서 저 재림예수야말로 민중이 아닌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누군가의 재림예수가 진짜일 것인가. 그렇듯이 70년대의 민중이 만들어낸 민주화를 2000년대의 누군가가 아니 어느 정파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민주화가 진짜일 것인가. 민주화에 있어서 사이비와 진짜의 구별은 너무나 명백하다. 아직도 누군가가 자신이 민주화 세력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렇게 그의 정파가 민주화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그런 민주화는 사이비다. 저 들판의 꽃처럼 아무도 모르게 홀로 피어있는 민주화가 진짜다. 소설가 송기원
  • [씨줄날줄] 이인제의 대권3修/이목희 논설위원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이인제 의원의 정치적 아버지는 김영삼(YS) 전 대통령이다. 작은 키에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을 듯한 다부진 분위기가 닮았다. 이 후보는 20년전 YS에 이끌려 정치에 입문, 사랑을 듬뿍 받았다.YS 후광으로 노동부 장관, 경기도지사를 역임했다.1994년 YS는 니혼게이자이 인터뷰에서 “깜짝 놀랄 세대교체”를 역설하며 당시 46세의 이 후보를 대권주자 반열에 올렸다.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패배 후 그가 당을 뛰쳐나가려 하자 YS는 말렸다.YS의 동물적인 감각이 발동했을 것이다. 자식같은 이 후보가 탈당하면 정치장래가 암울해진다는 것을…. 그러나 이 후보는 YS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오히려 한걸음 더 나가버렸다. 대구·경북표를 의식해 ‘리틀 YS’를 떠나 ‘리틀 박정희’ 이미지 부각에 주력했다. 이후 이 후보에게서 선거승복, 아름다운 패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측과 손을 잡았음에도 2002년 경선에서 실패했고, 그 역시 불복했다. 무려 8차례나 당적을 옮긴 진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이념좌표도 혼란스러웠다. 가장 보수쪽에 위치한 정당에서 진보개혁을 표방한 정당까지 다양하게 옮겨 다녔다. 한때 장점으로 거론되던 빳빳한 분위기는 아집과 독선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명쾌한 말솜씨와 논리가 구차한 변명으로 들리곤 했다. 이 후보는 연말 대선을 앞두고 범여권 후보단일화의 한 축이 되었다. 이 후보의 정치역정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그의 출마를 상수(常數)로 보는 시각이 많다. 대권 3수(修)의 기회를 쉽게 포기하겠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내년 총선에서 공천을 노리는 민주당 원외위원장들이 그의 등을 강하게 떠밀고 있다. YS도 3수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영 승산이 보이지 않으면 화끈하게 돌아서는 정치감각을 지녔다.3당합당 외에 크게 명분없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 후보는 민주투쟁을 하던 때의 YS가 가르쳐준 정치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출마 고수나 후보단일화 어느 쪽을 선택하든 뚜렷한 명분을 갖추기 바란다. 대권 3수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 복원이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석방협상 정부가 나서라”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해적에게 납치돼 150일 넘게 억류돼 있는 원양어선 ‘마부노호’ 한국인 선원들에 대한 석방운동이 각계로 확산되고 있다. 전국해상산업노동조합연맹은 14일 경주에서 지난 11일 열린 ‘전국해상노련 단위 노조 간부 교육대회’에서 마부노호 사태 해결을 위한 대국민 서명운동과 성금모금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부산지역 기독교 인사들의 모임인 ‘21세기 포럼’도 지난 12일 부산롯데호텔에서 모임을 갖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연계해 피랍선원들의 석방을 도와 달라고 각계에 호소하기로 했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부산시민단체협의회·부산여성NGO연합회 등 시민단체들도 최근 모임을 갖고 15일부터 청와대와 국회를 항의방문하고 성명서를 전달하며 선원 피랍사태 해결을 촉구한다. 소말리아 피랍선원을 위한 시민모임 홈페이지(www.gobada.co.kr)에는 12일 하루에만 2500여명이 방문, 피랍 선원들의 조속한 석방을 기원했다. 박정희씨는 자유게시판에서 “탈레반에 납치된 교인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구출됐지만 생업에 종사하다 해적에게 납치된 선원들은 아직 인질로 남아 있다.”면서 “정부가 나서 조속히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부산시도 수산진흥과에 전담부서를 두고 정부 관련기관 등에 조속한 사태 해결을 요청하고 있다. 한국인 선원 4명 등 모두 24명이 타고 있던 마부노 1,2호는 지난 5월15일 해적들에게 납치됐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부고]

    ●손주항(전 국회의원)씨 상배 10일 중앙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5시30분 (02)860-3591●박종세(전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씨 상배 준수(유퍼스트 매체국장)증수(SK엔카 실장)씨 모친상 10일 아주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31)219-4116●이동훈(대한항공 차장)창훈(한국건설관리공사 이사)씨 모친상 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6시 (02)3010-2251●안승현(중소기업진흥공단 과장)욱현(대우조선해양 홍보팀 차장)씨 부친상 박재환(알엠에스코리아 이사)이정기(삼광섬유 차장)씨 빙부상 10일 고대안암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18-601-2198●이준구(미국 거주)윤구(신한은행 호치민지점 차장)승구(미국 거주)씨 부친상 박정희(미국 거주)송확호(에이엔텍 이사)박춘호(다올섬유 사장)씨 빙부상 9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92-3299●윤형오(현대오토넷 차장)씨 상배 1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010-2235●유승한(미국 NIH.NCI 프로그램 디렉터)씨 부친상 박동환(울산대 공대 교수)권명상(강원대 수의과대학장)이치욱(미국 패시픽대 기계공학과 교수)씨 빙부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30분 (02)3410-6914●이광연(은성코퍼레이션 고문)수연(봉천프라자약국 대표)순일(미국 거주)씨 부친상 이영규(은성코퍼레이션 대표)씨 빙부상 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9시 (02)3410-6915●이우철(MBC 송출기술국 부국장)씨 빙모상 9일 국립의료원, 발인 11일 오전 10시 (02)2262-4812●박제만(전 신천초등학교 교사)씨 별세 서홍석(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전문위원)윤석(삼안건설기술공사 부회장)씨 모친상 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1일 오전 11시 (02)3410-6905●곽태문(일동제약 상무)태기(사업)태용(사업)씨 부친상 10일 전남 여수장례식장, 발인 12일 오전 7시 (061)688-4471●박재종(현대중공업 부장)재홍(자영업)씨 부친상 유완근(한국방송광고공사 영업3국장)씨 빙부상 10일 부산 삼신전문장례식장, 발인 12일 오전 7시 (051)323-0044●강석수(통영시청 체육청소년과장)씨 모친상 10일 통영장례식장, 발인 12일 오전 8시30분 (055)641-2828●임춘섭(여천 NCC 재경팀장)언섭(자영업)형섭(광주발전연구원 연구위원)씨 부친상 도재기(경향신문 국제부 차장)강성준(서울지하철공사 주임)씨 빙부상 10일 순천의료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61)759-9095●성성기(호남온실 대표)을기(전 외환은행 마포지점장)헌규(호남온실 상무)경준(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상현(동국대 경영대 〃)씨 부친상 최정선(한경대 영어학과 교수)씨 시부상 10일 익산 팔봉장례식장, 발인 12일 오전 10시 (063)853-4444
  • [깔깔깔]

    ●소에 관한 단상 소 한마리가 있었다. 모처럼 농촌을 찾아 한자리에 모인 전직 대통령들이 소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소, 미국서 보냈구나∼” 박정희 대통령:“임자, 이 소 잘 키워서 새마을 운동에 쓰면 좋갔구만.” 전두환 대통령:“본인은 술안주로 잡아 먹었으면 해∼” 노태우 대통령:“먹지 말고 어디다 감춰두는 기 안낫겠나?” 김영삼 대통령:“이 소 현철이 줬으면 딱 좋겠구마는….” 김대중 대통령:“에∼김정일 국방위원장 갖다주게 한마리만 더 있었으면 쓰것습니다.” 소를 한참이나 노려보던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니, 쌍꺼풀 어데서 했노?”
  •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가보았지] 남북 동물원 규모전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가보았지] 남북 동물원 규모전

    남북정상회담이 한창이다. 첫 정상회담 때 만큼의 감동은 아니지만 양국정상이 손을 맞잡는 모습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게 한다. 분단 이후 팽팽한 대결구도 때문에 남북한은 여러 부분에서 불필요한 자존심 경쟁을 벌였다. 그 중 하나가 동물원의 크기다. ●“평양동물원보다 크게” 세계동물원기구협회에 따르면 서울대공원 동물원의 크기는 유명한 미국 샌디에이고 동물원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다. 고참 사육사들은 “이렇게 넓은 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의 덕”이라며 입을 모은다. 사정은 이러하다.1978년 6월 초. 과천 서울대공원의 건설준비가 한창이던 남서울대공원건설사업소 사무실에 소위 ‘높은 어르신’의 지시가 내려왔다. 내용은 “새 동물원의 규모는 무조건 평양 중앙동물원보다 크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왕 만들 바엔 평양 중앙동물원보다 크게 만들라는 것.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단순명료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이 같은 지시는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을 통해 내려왔다. 동물원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 지시가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창경원에서 동물원을 철수시키고 따로 동물원을 건립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과천 막계리에 관련 부지를 마련하는 과정에도 대통령이 직접 개입할 정도였다. ●북한도 경쟁 탓에 허풍(?) 바로 건설사업소엔 비상이 걸렸다. 윗분들이 비교 대상으로 삼은 평양 중앙동물원의 크기는 268만 1000㎡. 당초 기획했던 동물원의 크기가 24만 8000㎡인 점을 고려하면 부지도 그 안에 들어갈 시설도 모두 11배 이상 부풀려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셈이다. 결국 동물원의 최종 부지 규모는 평양보다 22만 3141㎡가 큰 290만 4806㎡로 정해졌다. 지금 보면 넌센스지만 ‘멸공’이 시대구호였던 당시로는 북한보다 작은 동물원은 위정자들의 자존심상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북한도 남한을 의식해 좀 허풍을 떤 듯하다는 점. 평양 중앙동물원은 당시 규모 외에도 총 340종 10만 1159마리의 동물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랑했다.70년대 세계 최고인 서베를린 동물원(2275종 1만 4000여마리)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많다. 우습지만 동물원 수족관에 멸치 떼를 키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숫자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박근혜, 올 추석연휴는 집에서

    박근혜, 올 추석연휴는 집에서

    박근혜(얼굴) 전 한나라당 대표는 이번 추석 연휴를 서울 삼성동 자택에서 보내면서 향후 정국 구상에 몰두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표는 이명박 후보측이 추석 직후 구성될 것으로 보이는 당 선대위에서 공동선대위원장 또는 고문직을 맡아 달라고 제의할 경우, 수용할지 여부와 어떤 식으로 당의 정권교체에 협력할지 등을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추석 당일에는 동생 지만씨 부부, 근령씨와 함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을 것으로 전해졌다. 추석 이후 10월부터는 박 전 대표도 본격적인 외부 활동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주요 당직과 시도당 위원장 인선에서 ‘이명박 쏠림’ 양상을 보인 데 이어 21일 전격 단행된 당 사무처 인사에서 친박 직원들이 대거 교체되는 등 최근 당 분위기와 관련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된다. 박 전 대표는 전날 본회의 참석에 앞서 기자들에게 “10월에는 지역에 일이 많죠.”라고 말해 다음달에는 지방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할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앞서 박 전 대표는 20일 밤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린 글을 통해 “풍성한 추석을 맞아야 할 이때에 태풍 피해로 슬픔과 고통을 받는 국민이 계셔서 마음이 아프다. 복구가 하루빨리 이뤄져서 피해 입으신 분들도 한가위를 따뜻하게 보내시길 기원한다.”고 이재민들을 위로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특파원 칼럼] 미국이 보는 한국 대선

    며칠 전에 워싱턴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의 한반도 전문가가 한국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장문의 보고서를 발표했다.‘한국의 변덕스러운 정치 조망’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보고서에는 미국이 오는 12월에 실시되는 한국의 대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잘 나타나 있다. 우선 미국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보고서에는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할 것으로 보인다.”는 문구가 몇 군데 들어있다. 물론 이 후보가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많이 앞서 있지만 진보 진영의 후보가 결정되면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함께 하면서 1∼10%포인트 차이의 승부가 될 것으로 이 보고서는 전망했다. 반면 미국이 ‘꺼리는’ 후보는 김근태·정동영 의원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미국 투자가 입장에서 보면 후보 가운데 김근태와 정동영이 탈락하거나 큰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적었다. 이 보고서는 두 후보를 가장 진보적이고 ‘반(反) 기업적’이라고 지칭했다. 보고서는 진보진영의 후보 가운데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이해찬 전 국무총리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했다. 대체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손 전 지사를, 노무현 대통령은 이해찬 전 총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보고서에는 노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도 담겨 있다.“진보 진영의 후보 가운데 누구도 노 대통령처럼 한·미관계를 분열적으로 만들거나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보고서 말미에 한국 대선과 관련, 미국 정부가 취해야 할 ‘조치’들도 제안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이 한국의 ‘386이후 세대’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19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면서 반미 성향에 빠졌던 386세대보다는 그 다음 세대가 미국에 우호적이라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이 보고서는 그러나 만일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한국 정부가 대북정책 등과 관련해서 무조건 미국 정부의 입장을 따를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보수 또는 진보라는 이념적 성향을 갖겠지만 그가 추진하는 정책은 다분히 중도적일 것이라고 이 보고서는 예상했다. 이 보고서는 여러모로 참고할 만한 점이 많지만 한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각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점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보고서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호남지역에서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80년에 광주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기 때문”이라고 기술했다. 보고서를 쓴 전문가에게 “박 전 대통령은 79년에 사망했으며,80년에 광주를 진압한 중심인물은 전두환 장군”이라고 지적해줬다. 그 전문가는 “나의 실수”라고 인정하며 “보고서를 내기 전에 다른 한반도 전문가 3명에게 회람을 시켰지만 아무도 그같은 잘못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1년전에 서울의 주한대사관으로 부임하는 미국 외교관과 골프를 함께 친 적이 있다. 당연히 한국의 대선이 화제에 올랐다. 이 외교관에게 “한나라당 경선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이회창은 어떠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무심코 이회창 전 총재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지만,‘미국이 이 전 총재를 지지하는가’라는 의문도 생겼다. 며칠 뒤 주미대사관의 고위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냈다. 고위관계자는 “미국이 이 전 총재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아직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얘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한국을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도운 워싱턴 특파원 dawn@seoul.co.kr
  • “26년만이지만 진실 밝혀져 기뻐”

    “26년만이지만 진실 밝혀져 기뻐”

    “26년 만입니다. 늦게라도 진실이 밝혀져서 기쁩니다.” 20일 신상한(51) 한국산업은행 윤리준법실장은 밝게 웃었다. 이날 오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제23·24회 사법시험 면접탈락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결정(18일)을 발표한 직후였다. ‘사법시험 면접탈락 사건’은 제23회(1981)와 24회(1982) 사법시험 응시자 중시국 관련 시위전력이 있는 신 실장 등 10명의 응시자 중 안기부가 ‘국가관·사명감 등 정신자세에 흠결이 있다.’는 이유로 2회 연속 면접에서 탈락시킨 사건이다. 당시 신 실장은 서울법대 75학번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초기에 참여한 반독재투쟁이 문제가 돼 수차례 구류를 살았고, 학교에서도 정학처분을 받았다. 사법시험을, 그것도 3차 면접에서 연이어 불합격한 까닭에 대해 신 실장은 “물증을 대긴 어려웠지만 떨어진 사람 면면을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법시험 면접탈락 대상자’ 명단은 안기부 방침을 전달받은 총무처장관이 2차 시험 합격자의 소속대학 학적부와 학교장 의견서 등을 토대로 작성했고, 면접위원들에게 시위 전력자들을 일괄 불합격시킬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연이은 불합격에 상심한 신 실장은 더이상 시험보길 포기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신 실장은 “전두환 정권 하에서 시험 합격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면서 “면접을 봤던 교수들도 시위 전력 때문이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4명은 다시 시험(84년 3명,86년 1명 합격)을 봐서 법조인이 됐지만, 신 실장 등 6명은 다른 길을 택했다. 신 실장 외에도 정진섭 한나라당 의원, 박연재 KBS 목포방송국장,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 조일래 한국은행 법규실장, 황인구 SK가스 석유개발팀장 등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진실규명을 요청하면서 경제적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니다.”면서도 “국가 권력 남용으로 발생한 일인 만큼 불합격 처분 취소와 사법연수원 입소 권고 결정이 내려진 것은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날 진실규명 결정 발표와 함께 피해자들에게 불합격 처분 취소 및 사법연수원 입소기회를 부여할 것을 국가에 권고했다. 신 실장은 “국가가 위원회 권고를 받아들이더라도 경제적 문제 등으로 사법연수원에 입소할지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활동 후 고향에서 법조인 생활을 하고 싶다는 정진섭 의원과 “제자들 보기 쑥스럽다.”며 입소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한인섭 교수를 제외하면, 신 실장을 포함한 4명은 국가가 권고를 이행해 오랜만에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될 날을 기대하고 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민족경제론’ 외친 故박현채 그의 삶과 사상 되짚어본다

    ‘민족경제론’ 외친 故박현채 그의 삶과 사상 되짚어본다

    ‘지구화시대의 자립경제’,‘국경 없는 자본’과 ‘민족경제’,‘신자유주의’와 ‘경세제민(經世濟民) 경제학’….2007년 현재 이런 의미쌍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언어조합이 아니다. 비현실적인 이항대립이자 형용모순 취급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초국적 자본통합이 가속화되고 있는 시대, 민족경제란 시대착오적 화두(?)를 붙들고 끙끙대는 이들이 있다. 민족경제론의 주창자 고 박현채(1934∼1995) 교수(조선대 경제학과)의 후학들이다. ●진보사회과학 중요유산 박현채 사망 10주기(2005년 8월17일)에 맞춰 계획된 ‘지구화시대 박현채 경제사상의 의의와 재구성’ 토론회가 2년여를 끈 끝에 21일 개최된다. 민주사회정책연구원과 ‘고 박현채 전집발간위원회’ 주관으로 서울 중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린다. 토론회는 박현채 사상의 핵심이자 산업화시대 저항담론의 구심점이었던 민족경제론을 지구화 시대의 맥락에서 재성찰·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독재권력에 맞설 언어가 빈곤했을 때, 민족경제론은 시대가 공유한 무기였다.1978년 ‘민족경제론’(한길사) 출간은 한국 토착경제학의 싹을 틔우는 일대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외자주도형 산업화에 대립각을 세우며 자립경제를 주장했던 박현채의 사상은 비판지식인들의 이론적 전진기지가 됐다.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와 책을 묻는 여론조사들은 박현채와 ‘민족경제론’을 늘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아왔다. 산업화시대는 갔고, 지구화시대가 도래했다. 민족경제론은 ‘과거의 이론’으로 버려졌다. 국민국가를 넘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파악할 수 있는 이론적 확장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92년 대선 때까지 박현채가 골간을 잡았던 김대중의 ‘대중경제론’도 97년 대선 땐 유종근 전 전북지사와 이강래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의 손을 거치며 박현채의 흔적을 지웠다. 박현채는 잊혀진 존재가 됐고, 민족경제론은 재벌의 경영권 방어논리로 오용되고 있다. 시대의 변화가 불러온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박현채 후학들은 왜 ‘폐기된’ 민족경제론을 복원하려 하는 것일까. 정확히 말하면 ‘민족경제론의 문자적 복원’이 아닌 ‘민족경제론적 문제의식의 복원’이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민족경제론의 문제의식은 경제총량지표로 파악되는 국민경제가 아닌, 민중 삶을 보장하는 국민경제의 확립”이라면서 “민족경제론은 민중의 기본적 삶과 직결된 공공성이 해체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반드시 재검토돼야 하는 한국 진보사회과학의 중요한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주류경제학이 돌보지 못하는 ‘생활하는 민중의 구체적 삶의 요구’를 지탱하려면 민족경제론의 발전적 재구성이 시급하다는 절박함이 토론회 저변에 깔려 있다. ●DJ 대중경제론에도 영향 토론회의 행간을 읽는 핵심 키워드는 ‘대안적 상상력’이다. 민족경제론 재해석 작업이 당장의 대안을 내놓긴 힘들지만, 대안의 단초가 될 다양한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길 기획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조희연 교수는 민족경제의 재구성 방안으로 공공성 강화를 강조하고, 장상환 경상대 교수는 글로벌 체제의 급진적 변혁 가능성을 탐구한다. 또 권영근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은 자립경제의 단초로 쿠바 모델에 주목하는 견해를 밝힐 예정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화석연료에 의존한 탄소경제’라고 정의하는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석유 고갈과 동반할 자본주의 파국에 대비하려면 지역공동체 운동과 에너지·식량 자립, 지역자치를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며 생태적 자립경제를 주장한다. 박현채 10주기 및 전집발간에 맞춰 기획된 토론회는 발간작업이 늦어지며 한 차례 연기됐고, 박현채 사상을 계승하는 민족경제연구소 설립이 난항을 겪으며 또다시 늦춰져 이번에 열리게 됐다. 박현채가 몸담았던 조선대가 설립을 거부한 이후 연구소는 성공회대·한신대·상지대가 컨소시엄으로 운영하는 민주사회정책연구소가 내부 기관 형태로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민주사회정책연구소는 한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구화와 공공성’이란 주제로 민족경제론의 현재화작업을 체계화하고 있다. 민족경제론의 재구성은 이제 첫발을 떼고 있는 중이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서울광장] 청와대의 생로병사/진경호 정치부 차장

    [서울광장] 청와대의 생로병사/진경호 정치부 차장

    회백색 담 탓일까. 출퇴근길 지나는 청와대는 늘 스산하다. 비라도 오면 내려앉을 듯 무겁고 적막하다.‘권부(權府)’임을 잊는다면, 서울 한복판 7만여평의 넓은 그 곳은 그저 도심 속 섬에 불과하다.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은 그제 일요일, 노무현 대통령이 그곳에서 예순한번째 생일을 맞았다. 진갑상에 미역국이 올랐는지는 모르지만 국무위원 등 부르려던 하객(賀客)은 모두 물렸다고 한다. 부인 권양숙 여사와 가까운 친지만이 그와 생일상을 마주했다. 그가 ‘본받을 공직자’라고 한 유능한 참모 변양균씨의 신정아 스캔들로 ‘할 말이 없게’된 지 일주일 뒤 일이다. 임기 마지막 해 대통령 부부만의 생일상은 처음이 아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퇴임을 한 달여 앞둔 2003년 1월 78회 생일을 부인과 둘이 보냈다.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 왔어야 할 홍걸, 홍업 두 아들은 차가운 구치소에 갇혀 있었고, 다음 대통령이 드리운 권력 무상의 짙은 그늘에 노부부는 더 없는 한기(寒氣)를 느껴야 했다. 우울한 청와대는 낯설지 않다. 대통령이 있고부터 죽 있어 왔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까지 임기말 청와대는 우울하거나 불행했다. 한껏 어깨 펴고 들어섰다가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임기말 증후군의 대표적 증세다. ‘거세된 대통령’(노 대통령의 표현이다)이 우울한 생일상을 받던 그제, 청와대 밖에서는 한때 그의 정치적 동지이자 자산이었던 옛 열린우리당 주역들이 ‘노무현 이후’를 놓고 또 한차례 일합을 겨뤘다.5년 전 종로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내 옆에 있다.”고 한 정동영은 ‘낫(not) 노’, 비노(非盧)를 외치며 선두를 달린다. 한나라당 이적생 손학규는 ‘노(no) 노’, 반노(反盧)로 살 길을 찾는다. 유일한 친노주자인 이해찬도 “대통령이 (특정후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거리를 둔다. 장외시장의 문국현은 아예 자신을 후보 단일화 무대에 올려 놓고는 노무현 정치와는 전혀 다른 프레임의 정치를 외친다. 노 대통령의 우군인 몇몇 인터넷 매체와 386세대들은 친노주자 대신 문국현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임기 마지막까지 할 일은 하고 가겠다는 노 대통령이다. 선거법이 대통령의 입을 틀어막는다며 헌법소원을 내고, 야당 대선후보를 거침없이 고소한 그가 이런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직 내 무대인데, 불러야 할 노래가 많은데 정작 관객들은 고개를 돌리고 다음 가수가 마이크를 넘겨 받으려 드는 이 당혹스러운 현실을 승복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유령선거인단을 동원한 ‘날림 경선’을 불사하며 노무현 이후를 향해 눈에 불은 켠 그들이다. 대통령이 자신도 모르게 선거인단에 포함된 것은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이 얼마나 날림이냐의 문제를 넘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는 야만적 무원칙과 빈곤한 정치신념, 누구든 가로막으면 부수고 가겠다는 전의가 담겨 있다. 그들에게 지지율 20%의 대통령은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아니다. 이명박이 끌어안지 못한 50%의 국민들 마음만 살 수 있다면 ‘노무현 밟고 가기’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권력의 생로병사다. 균형발전정책과 기자실 문에다 대못을 쾅쾅 박을지언정 ‘노무현 이후’에 대해서만은 한 발 물러서는 자세가 노 대통령에게 필요하다. 눈발 날리기 시작한 청와대의 겨울을 오롯이 관조했으면 싶다.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진경호 정치부 차장 jade@seoul.co.kr
  •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하) ‘생활정치’ 꿈꾸는 20대 당원들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하) ‘생활정치’ 꿈꾸는 20대 당원들

    정당은 시민사회의 다양한 견해와 요구를 정치로 이어주는 민주주의의 생명줄이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정치학)는 저서 ‘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 “사회의 요구로부터 괴리된 정당체제를 개혁해 정치와 대중사회가 소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들은 권력자와 지역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고, 정당의 주인이어야 할 당원들은 표를 모으기 위한 동원용 도구에 불과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정당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각 정당에서 나오고 있다. 당원 요구를 묵살하는 기성 정당을 뛰어넘어 새 정당을 만들려는 실험도 계속되고 있다.‘생활정치’를 꿈꾸는 20대 젊은 당원들을 만나본 결과 한결같이 “소통이 원활한 정당을 원한다.”고 말했다. ●“보수도 개혁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중장년층의 지지를 받아온 한나라당은 요즘 대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이런 현상을 놓고 일각에서는 대학생들의 보수화를 우려하고 있으나 정작 한나라당 대학생 당원들은 “건강한 보수정당의 기틀을 우리가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백길현(28·경기대 4학년)씨는 “청년당원으로서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 입당했다.”면서 “한나라당을 아래로부터 의견이 수렴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며, 생명력이 영원한 수권정당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인하대 재학 당시 한총련 활동을 했던 이재양(26)씨는 “한국 사회에서 이념 논쟁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좌파나 우파를 떠나 구체적인 정책입안 과정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자체를 잘 몰랐다는 이인규(23·한국기술교육대 4학년)씨는 지난해 당의 대학생 캠프에 우연히 참가했다가 입당했다. 이씨는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는 소통과 공감의 분위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중앙당의 대학생 조직인 ‘2030위원회’ 위원장인 권용태(27)씨는 “보수는 변화와 개혁을 무조건 거부한다는 통념을 깨고 싶다.”면서 “나이 지긋한 당 선배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정당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개혁당에서 활동하다가 열린우리당 기간당원으로 활약했던 김선진(29·서울시립대 4학년)씨는 기간당원제의 실패를 무척 안타까워한다. ●“당원혁명 끝나지 않았다” 김씨는 “국회의원들이 개혁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기간당원제를 찬성하다가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돌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멸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소선거구제가 중대선거구제로 바뀌고, 비례대표를 대폭 늘리면 동원당원이 아닌 기간당원들이 설 자리가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이 원활한 정당을 찾다가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던 서명숙(29)씨는 “기간당원제가 실패했지만 우리는 당내 민주주의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런 문제의식은 당원들의 가슴속에 계속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보진영의 집권을 꿈꾼다” 2000년 창당과 동시에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명재석(28)씨는 당원이 주인인 민노당을 자랑스러워한다. 아직 소수정당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다수당이 되고 집권까지 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명씨는 “여전히 계파별 과두체제 형태인 중앙당의 개혁이 시급하다.”면서 “지역 모임도 주거지 기준을 고집하지 말고, 직장이나 관심 분야가 비슷한 소모임 형태로 개편해야 더 많은 대중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김희선(23·서울대 4학년)씨는 민노당과 비슷한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사회당에서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씨는 “과거 대학생들의 정치적 요구는 한총련과 같은 운동권 조직으로만 수렴됐지만 이젠 정당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사회당원의 이름으로 장애인, 비정규직, 여성 등 사회적인 이슈는 물론 학내의 세세한 문제까지 친구들과 토론하고 행동한다.”고 덧붙였다. 다음달 20일 초록당 창당을 준비중인 초록정치연대의 김경미(25)씨는 자동차를 갖지 않고도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 농업을 파산시키지 않아도 잘사는 나라를 꿈꾼다. 김씨는 “정치는 항상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생각했다.”면서 “내 삶을 변화시키는 작은 동력을 만들기 위해 녹색정치에 뛰어 들었다.”고 말했다. 이창구 유지혜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 “인물 아닌 정책 중심 재편 바람직” 전문가들은 한국 정당정치의 후진성이 여야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고 진단한다. 여론조사 방식을 도입하는 바람에 1인 1표의 등가성이 생명인 평등선거 원칙이 무너졌고, 보통·직접·비밀 선거의 원칙도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을 계기로 새로운 정당체계를 고민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유럽식 계급(대중)정당이나 미국식 포괄정당 중 하나를 선택할 게 아니라 우리 정치 현실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면서 “인물 중심의 정당이 아니라 환경이나 평화와 같은 정책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무소속 임종인 의원은 “당원의 뜻에 따라 후보가 결정되고, 당원들이 지지층을 확대시켜 나가며, 당원과 지지자의 힘으로 당선된 다음에는 전체 국민의 이익과 당원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대의민주주의 기본이 바로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열린우리당의 실패로 갈 곳을 잃은 중도개혁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서민적 진보정당이 출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상환 경상대 교수(경제학)는 “우파 헤게모니를 한나라당이 완벽하게 장악했기 때문에 이와 경쟁할 수 있는 튼튼한 중도개혁 정당이 나와야 하고, 민주노동당도 지금보다 더 대중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컨설팅업체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 역시 이념과 정책에 따른 정당 분화가 필요하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박 대표는 “지역구도가 약화됨에 따라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진보세력이 등장할 수 있다.”면서 “산업·외교·교육·조세·부동산·복지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을 둘러싸고 정치세력이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인터넷 정당’을 주장하고 있는 김두수 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은 “사회 자체가 인터넷을 통해 재편되고, 인터넷이 기존 정당보다 더 강력한 정치적 의사 표출의 수단이 됐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면서 “후보 선출과 주요 정책결정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직접민주주의가 대폭 강화된 인터넷 정당이 조만간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한국정당 오욕의 역사 해방 이후 60년간 수많은 정당이 만들어지고 해체돼 왔지만 제대로 운영된 정당은 찾아보기 어렵다. 핵심 지지층을 확보하지 못한 채 표면적으로 ‘모든 국민’의 이익을 내세우는 포괄정당, 대중적 기반이 허약한 간부정당, 선거에서 이기는 것만 목적으로 하는 선거전문 정당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시작부터 파행이었다. 미군정 법령 제55호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자유당은 이 전 대통령이 하야하자 바로 스러졌다. 애초에 우리나라 법으로 정당을 만들지 못한 ‘정통성의 부재’도 문제지만, 정당이 정책이나 비전이 아니라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며 ‘무원칙한 인맥집단’으로 전락하는 전범(典範)이 된 게 더 큰 문제였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을 거치며 우리나라 정당은 ‘권력자 정당’의 면모를 띤다. 가장 수명이 길었던 민주공화당은 박 전 대통령이 5·16쿠데타 뒤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만들었다. 이를 해체한 전 전 대통령 역시 12·12와 5·17을 거치고 나서 1980년 민주정의당을 창당해 정권의 정통성을 도모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하고 나서도 구태를 벗지 못한다. 이 시기의 정당은 ‘1인 사당(私黨)’,‘지역주의 정당’으로 규정된다.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창당한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자유민주연합 등이 그렇다. 2000년 탄생한 민주노동당,3년 뒤 만들어진 열린우리당은 우리나라에 정당법이 도입된 지 40년 만에 처음으로 근대적 정당의 형식과 내용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당원이 당비를 내고, 상향식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지구당을 법적으로 폐지해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을 만들려는 것이 두 정당의 목표였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기간당원제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정당 개혁은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손혁재 경기대 정치교육원장은 “우리나라 정당은 대중정당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간부정당”이라며 “아직은 당원 문화가 뿌리 내리지 못해 유권자나 당원이 시대 요구에 맞는 의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최인호 산문집 ‘꽃밭’

    최인호 산문집 ‘꽃밭’

    작가의 속살을 잘 벼린 칼로 저미면 거기에서는 어떤 색깔의 피가 배어날까. 또 그 피에서는 어떤 향기가 날까. 모를 일이지만 작가 최인호에게서는 혈관 속에서 자유롭게 뒤섞인 무지갯빛 피가 솟고, 그 피에서는 ‘남경(南京)사향’의 냄새가 풍길 것 같다. 꼭 그렇기야 할까만, 소설에서는 어지간한 감수성이 아니면 작가의 육취(肉臭)를 맡기가 쉽지 않다. 소설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상상의 얼개로 풀어내는 가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근작 최인호의 산문집 ‘꽃밭’(열림원 펴냄)은 그의 살냄새가 물씬한 노작들로 꾸며져 눈길을 끈다. 작가가 육친의 정을 느낀다는 화가 김점선의 사실적이면서 고졸한 밑그림과 함께. ●화가 김점선이 소박한 삽화 그려 우리 문단에서 최인호만큼 성(聖)과 속(俗)을 자유자재로 넘나든 이야기꾼도 흔치 않다. 언젠가는 신성의 속곳을 들추더니, 또 언젠가는 속물의 뱃구레를 걷어차 왕창 오물을 토하게 하는 식이다. 그는 자신의 무지갯빛 피 속에서 가장 순정한 색만 가려 책 이름을 ‘꽃밭’이라고 붙였겠지만 책이 오로지 순정만 담은 것은 아니다. 암 투병 중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워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일화를 끌어다대더니 ‘한때 녀석과 나는 색줏집에서 만년필인가 시계인가를 맡기고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마신 후 할 줄도 모르는 뽀뽀를 끝내고 비내리는 툇마루에 앉아서 처마 끝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함께 물끄러미 바라본 적도 있었다.’며 저어한 고백까지도 주저하지 않는다. 잡스럽되 결코 추하지 않아서 인간적이고, 고고하되 낯설지 않아서 더 우뚝한 그의 문학세계가 글편에 오롯하게 담겨 있다. ●극우파 이시하라에 “자폐의 창호지를 찢어라” 일갈 흔히 최인호를 일러 힘겨운 세상 일에서 한 걸음 비켜선 작가라고들 말한다. 정말 그럴까.‘Yes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편에서 그는 일본 문단의 기린아였으면서 극우 정치인인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를 향해 “이제는 자폐의 창호지를 찢고 한마디하시라.”고 일갈한다. “한국은 일본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한국은 귀하가 쓴 소설 ‘완전한 유희’에 나오는 정신병에 걸린 여인처럼 집단적으로 윤간을 당했습니다. 또한 36년간이나 일본의 군국주의에 귀하의 소설 ‘처형실’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처럼 집단 린치를 당하고 말과 이름을 뺏기고 꽃다운 처녀들은 정신대란 이름으로 창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8·15광복으로 해방은 되었으나 남북으로 나뉘어 아직까지 이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패전하였다면 일본이 마땅히 독일처럼 두개의 국가로 나뉘어야지 어째서 당사국이 아닌 한국이 두개의 분단국으로 나뉘어야 했던가요.” ●‘선정적 방송´ 신랄하게 비판 조선 세종연간에 살았던 유생 최한경의 ‘반중일기’에 실렸으되,‘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임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노랫말의 연원을 훑는 그의 산문정신은 동서와 고금을 가르지 않는다. 파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TV를 켤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에서는 무차별적 선정주의로 치닫는 요즘 방송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가 하면,‘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씨가 제일이고 그 다음이 나’라며 음식을 빨리 먹는 식습관까지 낱낱이 털어놓고 있다. 확실히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공산주의여, 제국주의여, 체제여, 반체제여, 전라도여, 경상도여, 이승만이여, 박정희여, 김일성이여, 빨갱이여, 볼셰비키여, 양키즘이여,38선이여, 핵폭탄이여, 이제 그만 가라.’고 그는 말한다. 정말이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길섶에서] 화장실 대화/이목희 논설위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에 앞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거느리고 일본 간토지방을 공략할 때였다. 도요토미가 적의 성을 향해 오줌을 내뿜으며 도쿠가와에게 따라하도록 강권했다. 힘에 눌린 도쿠가와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도요토미는 소변이란 원초적 행동을 동질화의 매개로 본 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신문사 논설위원들에게 푸짐하게 술을 냈다. 거나해질 무렵 화장실 변기 앞에 지금은 작고한 송건호 선생과 나란히 서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송 선생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남재희 전 의원은 “방광의 압박을 풀었기에 박 전 대통령의 기분이 좋은 때”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딸깍발이 송 선생은 지방 산업시찰을 희망하는 데 그쳤다. 리자오싱 전 중국 외교부장은 중·일 관계가 나쁠 때 아소 다로 전 일본 외교장관과 화장실에서 20여분간 대화를 나눠 해빙무드를 만들었다고 얼마전 밝혔다. 화장실에서 평소 서먹했던 이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보자. 쑥스러울 듯싶지만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변양균 사퇴 파장] 변양균 靑정책실장은 누구

    [변양균 사퇴 파장] 변양균 靑정책실장은 누구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은 문재인 비서실장에 이어 청와대 비서실내 서열 2위의 인물이다.‘경제·사회정책의 수장’이라 할 수 있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옛 경제기획원과 기획예산처에서 관료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그는 참여정부 들어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2005년 1월 기획예산처 장관에 오른데 이어 이듬해 7월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발탁됐다. 그의 고속 승진에는 이해찬 전 총리가 한 몫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2001년 민주당 정책위원으로 파견 근무할 당시 정책위 의장이던 이 전 총리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변 실장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은 전폭적이었다. 부처 조직개편과 공기업 혁신, 정부 성과관리 등에서 내보인 탁월한 업무능력을 높이 샀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그의 능력 뿐 아니라 행동거지도 높이 사 그를 “선비 같은 사람”“공무원으로서 올바로 처신한 사람”으로 평했다고 한다. 청와대 386비서관들도 그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심지어 변 실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높이 평가하는 저서를 집필하는데 대해서도 이들은 “대단히 객관적인 내용”이라며 그의 인식과 시각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고교 시절 미대 진학을 꿈 꾸었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변 실장의 열정은 지대하다.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 그림 실력에다 개인 화실도 갖고 있으며 명화를 모으는 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신정아씨와 스캔들에 얽히게 된 것도 미술에 대한 열정 때문일 것이라는 게 미술계의 정설이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부산고와 고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2002년에는 서강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와대 불교신자 모임인 ‘불자회’ 회장을 맡고 있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주말탐방] 전·현직 대통령 생가 르포

    [주말탐방] 전·현직 대통령 생가 르포

    정치의 계절이다. 대선 정국이다.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당들은 당내 예선을 치르느라 바쁘다. 대선 정국인 지금, 대통령들이 꿈을 키웠던 생가(生家)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를 하고 있을까.‘명당(明堂)’으로 불리지만 업적과 인기에 따라 발길 빈도가 엇갈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는 큰 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경선에 나서면서 발길이 크게 잦아졌다고 전해진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는 한창 복원 중이다. 대통령 생가라면 단연 박 전 대통령 집이다. 한국 경제를 발전시킨 최고의 대통령으로, 민주화를 억압한 장본인으로 관심의 중심에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생가는 경북 구미시 상모동에 있다. 박 대통령 생가를 6년째 청소하고 있다는 김영순(56·구미시 사곡동)씨는 “생가를 찾는 연세 드신 많은 분이 박 전 대통령 영정 앞에서 곡을 한다.”고 소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눈물 쏟는 관람객들 이곳에는 연간 45만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다. 생가보존회 김재학(82·전 초등학교장)옹은 “관람객들이 초라한 생가를 보고 ‘이건 아니다.’ ‘너무 했다. 심하다.’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구미시 박 대통령기념사업단 박경하 계장은 “홍보를 안하는데도 찾는 사람이 는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과 악연(?)이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에도 발길이 잦은 편이다. 전남 신안군 하의도 생가에는 외지인들이 연간 1500∼2000명 가량 찾고 있다. 이승현 하의면사무소 직원은 “여름방학 때는 하루 30∼40명, 방학이 끝나면 10명 안팎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목포항에서 하의도까지 2시간20분이 걸리는 데다가 배편도 하루 2∼3번밖에 안돼 방문객이 갈수록 줄고 있다. 김 전 대통령과 ‘민주화를 향한 배’에 동승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는 조금 낫다. 요즘 하루 30∼40명이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의 생가를 찾고 있다. 방학 때면 학부모가 자녀들을 동반한다. 지난해 7만 3000명이 다녀갔고 올해 6만 4000여명이 찾았다. ●을씨년스러운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 반면 ‘80년 민주화의 봄’을 짓밟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가는 발길이 뜸하고 썰렁하기까지 하다.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도로변 전 전 대통령 생가는 대문을 열어 놓아 오가는 행인들이 간간이 들른다. 대구 동구 신용동에 있는 노 전 대통령 생가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훼손이 많이 됐다. 전형적인 시골 촌집으로 2∼3년 전만 해도 주민들에 의해 청소 등 관리가 이뤄졌으나 이후에 방치되고 있다. 한 주민은 “관광객이 가끔 찾기는 하나 전직 대통령의 생가 관리에 정부도, 자치단체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전 전 대통령 생가는 84년 경남도가 2800만원에 사들여 합천군으로 소유권을 넘겼다. 군은 매년 11월 이엉을 엮어 초가 지붕을 보수하고 있다. 강원 원주에 있는 고 최규하 전 대통령의 생가는 현재 없다. 터만 있었지만 2000년 원주시립박물관이 들어서 흔적조차 사라졌다. 박물관에도 유품이나 생가에 대한 자료가 없어 박물관이 최 전 대통령의 생가 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원주에서조차 최 전 대통령은 잊혀져 가고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에 있다. 주민 임승희(54)씨는 “한달에 100명 정도는 구경을 온다.”고 말했다. 특히 풍수가 뛰어난 명당이란 소문이 퍼져 지관 등이 많이 온다고 덧붙였다. 생가는 마을 노인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 年 2000여명 발길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구미시는 생가 주변 7만 7600여㎡를 성역화하고 있다.2020년까지 200억원을 들여 추모관과 생가 원형복원, 연대별(1920∼70년) 시대촌, 내자(內子)의 공원 등을 조성한다. 현재 생가에서는 서거일(10월 26일)과 출생일(11월 14일)에 매년 2차례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거제시는 김 전 대통령 생가 옆에 기록전시관을 건립한다.19억원을 들여 738㎡에 2층 규모로 만들어 김 전 대통령의 일대기와 소장품 등을 전시할 계획이다. 마당 왼쪽에 청동 흉상이 설치돼 있다. 이 흉상은 김 전 대통령이 2000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 허난성 ‘한원비림(翰園碑林)’을 참관한 뒤 휘호를 써준 데 따른 감사의 뜻으로 한원비림이 기증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는 신안군에서 관리인을 두고 제초비와 비품비 등으로 연간 120만∼150만원을 대주고 있다. 추수 후에는 초가지붕 보수비 등으로 700만원을 더 지원한다. 이장 이형열(60)씨는 “대통령 생가가 너무 초라하다는 여론이 있어 생가와 주변을 공원으로 만들려고 최근에 땅을 사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김 전 대통령이 대선과정에 자주 개입하면서 대선 후보로 오르내리는 정치인들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 윤 전 대통령은 생가보다 묘가 위치한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마을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주민들은 지난달 22일 자발적으로 1000여만원을 모아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윤 전 대통령 탄신 110주년 추모행사를 갖고 ‘대통령 마을’로 선포했다. 마을 이장 이성복씨는 “생전에 1주일에 한번씩 내려와 마을에 나무와 꽃을 심고 주민들과 음식을 나눠 먹는 등 음덕을 많이 베풀었다.”고 말했다. 전국종합·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그들의 생가 형태와 규모 대통령 생가 중 가장 큰 집은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다.‘아흔아홉칸’이라고 하나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등 4동뿐이다. 기와집에 총건평 352㎡에 이른다. 윤 전 대통령의 부친이 1920년대에 지었다고 전해진다.1984년 중요민속자료 196호로 지정됐다. 전형적인 중부지역 가옥형태로 윤 전 대통령 장남이 소유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는 58㎡의 초가집과 안채(114㎡), 분향소(119㎡)로 돼 있다. 풍수지리학자들은 금오산의 정기가 이어지는 현월봉 아래 자리한 명당 중의 명당으로 ‘대통령이 날 만한 자리’라고 입을 모은다.1993년 2월 경북도기념물 86호로 지정됐다. 이 집은 박 전 대통령이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0여년 동안 살았다. 대구사범시절 쓰던 책상과 책꽂이, 호롱불 등이 전시돼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는 본채와 사랑채 2동으로 구성돼 있다. 목조 기와집이지만 본채는 76㎡, 사랑채는 26㎡로 보잘것 없는 규모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초년생때부터 대통령 당선때까지의 기록물이 전시돼 있다.1950년 공비가 침입, 모친을 살해했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거제시에서 2명을 배치해 관리하고 있다. 연간 관리비 2000여만원을 지원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가, 관리동, 헛간, 소금전시관, 화염(불에 구운 소금) 제조공장 등 5채로 초가집이다. 김 전 대통령은 4학년 1학기까지 이 집에서 살다가 목포로 전학을 갔다.1999년 김해 김씨 종친회에서 8000여만원을 모아 생가를 복원했다. 대통령 시절 모습을 담은 대형 사진 12개, 붓글씨 액자 2개, 책상과 20여권의 책, 벽시계가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는 안채, 행랑채, 대문 등 초가 건물 3채이다. 총건평은 251.5㎡이다. 당초 5채였으나 2채는 1988년 11월 방화로 소실됐다. 군과 면사무소 직원이 수시로 들러 제초작업 등 보수를 하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는 생가, 우사, 창고로 꾸며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이 태어나 경북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국풍’이라고 하는 풍수학자들은 연기산·윗도덕산 등 생가 앞에 큰 산이 많아 인물이 났다고 얘기한다. 전국종합·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뒤 머물 사저는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 지어지고 있다. 생가 뒤편이다. 시공 업체가 공사현장에 펜스를 치고 작업하고 있어 외부에서는 공사현황을 알 수 없다. 김해시 관계자는 “작업현장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아 정확한 진척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준공 예정일을 감안하면 공정률이 90%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 사저는 다음달 말 준공될 예정이다.3991㎡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1층으로 총건평이 933㎡에 이른다. 지난 1월15일 기공식이 열렸다. 노 대통령의 생가는 사저 앞쪽 463㎡의 터에 목조 슬레이트 건물로 지어져 있다. 본채와 20㎡ 남짓한 헛간이 있다. 마당은 40㎡쯤 된다. 이 집에는 하모(65)씨 부부가 살고 있으나 지난 2월 강모(61)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하씨는 연말까지 집을 비워 주기로 했다. 강씨는 노 대통령과 부산상고 동기로 경남 창원에서 자동차부품회사를 경영하는 기업인이다. 강씨가 생가를 매입한 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친형인 건평씨가 생가를 매입하려고 했으나 가격이 맞지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저가 생가 바로 뒤에 건립되고 있어 조만간 생가를 복원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퇴임 후 강씨로부터 이 땅을 매입하거나 증여받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봉하마을에는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후 관광객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요즘도 휴일이면 200여명씩 찾고 있다. 훗날 노 대통령이 국민들로부터 업적을 어떻게 평가받고 인기를 얻어 어떤 대통령 생가를 닮아갈지 궁금하다. 김해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日 세지마 류조 前 이토추상사 회장 별세

    日 세지마 류조 前 이토추상사 회장 별세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의 이토추 종합상사를 성장시킨 세지마 류조 전 회장이 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95세.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동군 직속상관이었던 것을 비롯,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군부출신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류조 회장은 이날 오전 0시55분 도쿄 자택에서 숨졌다.1938년 육군대학 졸업 후 일본군 대본영 참모로서 활동했다. 종전 뒤에는 옛 소련군의 포로로 잡혀 11년동안 시베리아에서 억류생활을 했다. 1956년 귀국,1958년 이토추에 입사해 주로 항공기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전무, 부사장을 거쳐 부회장, 회장을 지내다 2006년 퇴임했다. 치열한 항공기 판매전을 그린 소설 ‘불모지대’의 주인공 모델로 화제를 낳기도 했다. 고 이병철 삼성 초대 회장, 박태준 전 회장과도 오랜 친분을 쌓았고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83년에는 안보협력 차관 40억달러(약3조 7500억원) 제공을 내세우며 당시 나카소네 총리의 첫 공식 방한을 성사시켰다. 81년 3월 나카소네 내각의 임시행정조사위 위원에 취임해 일본 내에서 반발이 많았던 국철, 전매공사 민영화 작업에 나서 노동계, 정계의 반발을 무마시켰다. 오부치 게이조, 다케시다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 등 정계 요인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전성기 때 정·재계 직함만 100여개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전쟁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로 전후 정치 막후에서 활동한 것에 대한 비판도 따랐다. 생전 자서전에서 ‘대동아전쟁’을 자위전쟁이라고 규정하며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극우파란 평가를 받아왔다. hkpark@seoul.co.kr
  • [부고] 조상호 전 대한체육회장 별세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공헌하는 등 한국스포츠의 산증인이었던 조상호 전 대한체육회장이 25일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1세. 지난 19일 새벽, 평소처럼 산책을 하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옮겨진 조 전 회장은 뇌골절과 뇌출혈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조 전 회장은 1958년 조선대를 졸업한 뒤 61년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보좌하기 시작,63년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으로 일하는 등 박 전 대통령을 14년이나 그림자처럼 보좌했다. 과묵한 성격에 매사 신중한 처신으로 유명했고 영어는 물론 일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에 두루 능통해 박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각국 사절 면담에 통역을 도맡았고 정식 외교관들을 제치고 외교 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다.74년 주이탈리아 대사를 거쳐 제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79년 3월부터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을 맡다가 이듬해 제26대 체육회장으로 선출됐다. 1981년 체육회장 겸 KOC 위원장으로 각국 IOC위원들을 활발히 접촉, 서울올림픽 유치에 기여했다.87년에는 체육부장관을 지냈고 96년에는 한·일월드컵축구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상임고문으로 일해왔다. 고인은 이같은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 체육훈장 청룡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훈장 등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고 장례는 29일 오전 8시 대한체육회장장으로 치러진다.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순임씨와 사이에 1남4녀. 맏사위가 신승남 전 검찰총장(신원CC 회장)이다.(02)3010-2631.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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