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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朴 “이회창 출마 正道 아니다”

    朴 “이회창 출마 正道 아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12일 “이회창 전 총재가 출마한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또 “저는 한나라당 당원이고 한나라당 후보는 이명박 후보인 것에 변함이 없다.”면서 “한나라당으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처음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오전 서울 삼성동 자택 앞에서 이명박 후보의 전날 기자회견 내용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에게 “저는 제가 한 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이 전 총재의 출마에 부정적 입장을 피력하면서 이 후보에 대한 지지의사를 우회적으로 밝힘에 따라 이 전 총재의 출마로 위기에 처한 ‘이명박 대세론’이 위력을 회복할지 주목된다. 박 전 대표는 다만 “이 전 총재가 이런저런 비난을 감수하고 출마한 것은 한나라당이 그간 여러가지를 뒤돌아보고 깊이 생각해 잘 대처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며 이 후보측의 당 운영방식에 대한 비판을 덧붙였다. 박 전 대표는 또 자신을 포함한 이 후보와 강재섭 대표간 ‘3자 정례회동’ 제안에 대해서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이라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박 전 대표의 입장을 전해들은 이명박 후보는 “그렇게 말했다면 그 말 뜻과 같은 생각을 갖는다.”며 “(나도)어제 이 전 총재가 탈당한 데 대해 다소 책임이 있다고 얘기했다.”고 화답했다. 이 후보는 이날 경북 구미의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 전 대표와)정권 재창출, 좌파정권 집권 저지에 뜻이 같으므로 앞으로 합심해서 잘 해나가겠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 후보는 박 전 대표가 ‘3자회동 정례화’에 난색을 표한 데 대해서는 “일이 있을 때 만나 얘기할 수도 있고 전화로 할 수도 있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면 이 전 총재는 박 전 대표의 언급에 대해 “현 상황에서 그분으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연 박지연 홍희경기자 carlos@seoul.co.kr
  • 이명박 “박근혜는 큰 정치인”

    이명박 “박근혜는 큰 정치인”

    “박근혜 전 대표와 함께 정권 창출하고 동반자가 되어 함께 나아갈 것이다.”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가 대구·경북에서 무소속 이회창 후보 출마에 따른 이른바 ‘창풍(昌風)’ 잠재우기에 나섰다. 진압 카드는 역시 박근혜 전 대표와의 화합이었다. 이 후보는 12일 오후 박 전 대표의 정치적 고향인 경북 구미로 달려갔다.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린 ‘국민성공대장정-대구·경북 대회’에서 그는 박 전 대표를 ‘큰 정치인’이라 일컬었다.“경선을 통해 깨끗이 승복하는 박 전 대표처럼 크나큰 정치인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막노동하던 시절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있었는데 그 소원을 풀어준 사람이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도 했다. 한반도대운하가 박 전 대통령의 ‘미완의 꿈’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박정희 향수와 지역발전의 기대감을 동시에 자극하기도 했다. 앞서 오전엔 박정희 대통령 생가를 방문, 방명록에 ‘한강 기적에 이어 낙동강, 영산강 기적을 이루겠습니다. 그러하여 대한민국 제2의 경제도약 이루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강재섭 대표는 연설 도중 박 전 대표의 비서실장을 지낸 유정복 의원을 단상으로 올려 함께 손을 맞잡기도 했다. 그는 “오늘 박 전 대표의 손을 잡아 올리려 했는데, 원본이나 사본이 똑같으니 비서실장 손이라도 한번 잡아 올려보자.”며 ‘박심(朴心)’에 한껏 기댔다. 이날 행사는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에서 치러졌던 다른 대회와 달리 1만 5000여명의 당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격정적으로 치러졌다. 박 전 대표를 향한 이 후보의 적극적 ‘구애’에는 무엇보다 김경준씨 귀국을 앞두고 언제든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담겨 있다. 박 전 대표가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를 정도가 아니라고 했으나 자신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언급한 것은 아니다. 당내 갈등 역시 소멸한 것이 아니라 잠복해 있다. 한 핵심 당직자는 “박 전 대표의 언급에도 불구,BBK변수가 남아 있어 당장 지지율 변화가 크지는 않을 것”이라며 “김경준 귀국 이후 여론이 어떻게 흐르느냐가 마지막 변수”라고 말했다. 구미 한상우기자 cacao@seoul.co.kr
  • 昌 “거짓·돈에 빠진 타락한 세력과 대결”

    昌 “거짓·돈에 빠진 타락한 세력과 대결”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 조중동, 참여정부…. 무소속 이회창 후보가 선긋기를 시도한 대상들이다. 이회창 후보는 12일 오전 남대문 단암빌딩에서 열린 ‘전국 민생투어 출정식’과 대전 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열린 뉴라이트 대전포럼 주최 토론회에서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를 맹비난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그는 출정식에서 한나라당을 “법과 원칙을 우습게 아는 타락한 세력”으로 사실상 규정하고 “돈과 성공만능주의에만 빠진 타락한 세력과 대결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전 토론회에서는 “나라라는 것은 돈 잘 벌고 재주 좋고 능력 좋아서 출세하는 사람들로만 되는 게 아니다.”라며 탈세와 금융사기 등 각종 비리 의혹에 연루된 이명박 후보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언론에도 칼날을 세웠다. 출정식에서 그는 “일방적으로 기사와 사설에서 출마를 비판적으로 다뤘다.”며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을 중앙선관위에 고발할지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대전 토론회에서는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이 인격 살인과 같을 정도로 비판·비난 공격욕설을 퍼부었다.”고 비난했다. 반면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측근들과는 달리 계속 끌어안으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날 박 전 대표의 비난 발언을 듣고도, 이 후보는 “제가 만일 한나라당 안에 있었으면, 누가 그렇게 물으면, 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면서 “현 상황에서 그분으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자칫 오해가 있을 수 있어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박 전 대표를 극도로 예우하는 모습이다. 강삼재 전략기획팀장은 ‘백지연의 SBS전망대’에 출연,“희망사항은 있다.(박 전 대표가) 저희의 충정을 헤아리고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며 박심(朴心)에 대한 여지를 남겼다. 이 후보는 13일 경북 구미의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찾는 등 박 전 대표를 향한 ‘구애’를 이어가기로 했다. 이 후보는 박 전 대표 대신 국민을 우군으로 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나흘 중 사흘을 지방에서 ‘한댓잠’을 자는 강행군을 하는 이유도 결국 국민을 향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대전 토론회에 점퍼 차림으로 등장한 그는 이날 주최측이 준비한 꽃다발을 거절하고, 장애인을 초청해 역으로 자신이 꽃다발을 건넸다. 원고 없이 즉석연설을 하는 ‘파격’도 선보였다. 이 후보는 “즉석연설은 처음이다.”라고 고백했다. 대구 홍희경 서울 구동회기자 saloo@seoul.co.kr
  • [열린세상] 이씨조선의 꼭두각시극/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열린세상] 이씨조선의 꼭두각시극/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변호사가 사제관으로 피신하고, 사제단이 변호사를 보호한다. 과거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이 그리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21세기 디지털시대에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나 보던 일이 다시 벌어진다. 어찌된 일일까? 이번 일은 우리 사회의 권력이동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실제로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 정치권력을 비판하려면 목숨을 건 실존적 결단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요즘 “대통령 씹는 것이 국민 스포츠가 되었다.”는 어느 여당 정치인의 푸념대로, 이제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것은 부담없이 즐기는 가벼운 오락이 되었다. 시장권력은 다르다. 이건희 회장한테 명예박사학위를 주는 데에 반대해 시위를 벌인 학생들은 학교와 동료 학생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사태에 책임을 지고 고대 보직교수들이 일괄사표를 내놓았다. 그 학교 학생들이 전직 대통령의 학교진입을 막았을 때에도 올라오지 않았던 교수들의 목이 일개 기업 회장을 위해 총장님 책상 위에 줄줄이 올라온 것이다. 그뿐인가? 얼마전 ‘시사저널’이라는 잡지에서 이건희 회장도 아니고,2인자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거의 모든 기자들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기자들의 대량 해직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나 있었던 일 아닌가? 심상정 의원이던가? 멀쩡한 의원들이 고장난 녹음기처럼 같은 소리를 반복하면 삼성에서 다녀갔다고 보면 된다고 했던 것이? 명색은 국민이 뽑는다 하나, 의정활동의 범위를 정해주는 것은 삼성.‘법’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것은 그들이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넣지.” 이것이 대한민국 검찰의 원칙인지. 이제 우리는 떡값 받은 검사를 색출하는 일을 떡값 먹은 검찰에 맡겨야 한다. 그뿐인가? 떡값 리스트에는 법관과 대법관의 이름까지 들어 있단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법부까지 기업의 조종에 춤을 추어왔다는 얘기가 된다. 국세청은 어떤가? 폭로에 따르면 검찰이 먹은 것에 0이 하나 더 붙는다고 한다. 역시 납세의무를 남다르게 수행하는 데에는 품이 많이 드나 보다. 불쌍한 것은 언론. 받아먹었다는 돈이 겨우 십만원 단위다. 광고로 이미 데스크를 커버할 수 있으니, 기자들에게는 그냥 애들 과자값만 줘도 된다는 얘길 게다. 명절날 떡값. 세시풍속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기업이 나서서 민족문화의 명맥을 이으려 한다. 귀한 일이다. 특히 막대한 돈을 들여 민속극의 전통을 되살린 공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남사당의 전통은 입법, 행정, 사법, 나아가 언론까지 동원된 저 거대한 꼭두각시극 속에 면면히 살아 숨쉬게 되었다. 일개 기업이 사법, 입법, 행정이라는 국가의 근간을 쥐고 흔든다. 일개 기업이 헌법적 가치를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는 일개 ‘기업’이 아니라 일개 ‘가문’이 하는 일이다. 이 모두가 결국 일개 가문에서 억지로 기업을 사유화하려 드는 데에서 비롯된 일이 아닌가. 디지털 시대에 아직도 세습을 하는 곳이 세군데 있다. 북조선, 한국교회, 그리고 삼성.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왜 세습을 하냐고 물으면,“리더십 때문”이라고 대답한단다. 북한에서 세습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게다. 그렇다면 삼성은 어떤가? 삼성도 회장 가문의 리더십이 없이는 붕괴하고 말까? 회장 ‘가문’이 없다고 삼성이라는 ‘기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다면 그것은 기업이 아니라 아마 사이비종교일 게다. 가문과 기업은 구별되어야 한다. 졸지에 이씨조선의 시대를 맞은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기업은 가족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라는 근대적 기업윤리가 아닐까?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 “昌 기자회견후 박정희 묘소 참배”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자신의 개인 사무실이 있는 남대문 단암빌딩에서 기자회견을 갖기로 했다. 이흥주 특보는 6일 “기자회견은 이 전 총재가 인고의 삶을 보낸 곳과 연관된 장소에서 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 특보와의 일문일답. ▶기자회견 장소는. -이 전 총재가 그동안 정계를 떠나 여러 가지 어려운 삶의 시간을 보냈던 단암빌딩 내의 빈 사무실에서 하는 게 옳다고 저희 실무진이 검토했다.5층 빈 사무실에서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나. -단언해서 말 못 드린다. ▶기자회견 전에 한나라당 관계자나 국민중심당 심대평 후보를 만날 계획은. -내가 주선한 적은 없다. 이 전 총재가 외롭게 고심한 것은 그만큼 국민에게 말씀드릴 사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후 그런 것이 있을지는 그 다음에 검토할 사안이다. ▶기자회견 이후 행보는. -국립현충원 참배 일정을 준비 중이다. 무명용사탑에 헌화하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에 참배할 것이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서울광장] 멀지만 가야 할 복수국적제/황성기 논설위원

    [서울광장] 멀지만 가야 할 복수국적제/황성기 논설위원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인 인요한(미국명 존 린튼) 박사는 귀화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포기했다. 귀화 절차를 밟는 데 갖출 서류가 산더미처럼 많았다. 무려 38가지였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의 귀화에 미국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 부인의 한국 국적 회복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두 손 들었다. 선교사 후손으로 순천에서 태어나고 자라 ‘내 영혼은 한국인’이라는 그는 그렇게 귀화 희망을 접었다. 지금은 인 박사 부부 모두 영주권(F5)을 지녀 외국인이지만 큰 불편없이 살고 있긴 하다. 그런 그에게 법무부가 이중국적 허용을 추진한다는 소식은 듣던 중 반가운 일이었다. 그는 국적법이 개정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하겠노라고 빙긋 미소를 던졌다. 국적 유지 여부가 애국심을 판단하는 기묘한 잣대가 된 것은 오슬로 국립대 박노자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박정희 시대의 병영국가’에서이다. 이 시대의 잔재가 병역 기피와 맞물려 지금껏 국적 포기나 이중국적을 반국민적 행위로 인식토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한국 국적 포기자는 17만명에 이른다. 취득자는 5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저출산으로 2050년에는 인구의 10%를 외국인으로 채워야 할 판이다. 두뇌 확보에 고심해온 정부는 병역필자에 한해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외국인 인재도 우리 국적을 지닐 수 있도록 한 방안을 내놓았다. 9세기 신라에도 ‘이중 국적자’가 있었다. 김진이나 김자백 같은 재당(在唐) 신라인들이다. 이들은 당나라와 일본, 신라를 무대로 활발한 해상 무역을 펼쳤다. 당은 외국인이 귀화하면 10년간 조세를 면제해주고 출입국과 교역, 재산과 노비는 물론 국내 여행과 혼인, 의복에 이르기까지 중국인과 같은 처우를 누리도록 했다. 산둥 반도를 중심으로 신라방에 거주했던 이들은 때로는 신라인, 때로는 당인으로 살았다. 지금으로 치면 재미·재일 교포처럼 재당 교포였던 셈이다. 역사학자 권덕영은 이민족을 받아들인 개방 정책이 당나라 번성의 한 이유라고 봤다. 정부는 이중 국적제가 외국인 인재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하지만 국적을 복수로 갖도록 한다고 해서 선진국이든, 중·후진국 출신이든 두뇌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기대는 장밋빛에 가깝다. 고3 딸을 둔 인요한 박사는 다른 직원들은 다 받는 학자금 보조 혜택을 국제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못 받도록 한 병원 규정이 못마땅하다. 외국인이든 귀화인이든 한국인 학교에 보내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법률이나 세제만 고친다고 인재가 오는 게 아니다. 교육, 의료나 주거, 레저 면에서 삶의 질이 인재를 유인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는 사회 곳곳을 세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잠재적 이중국적 대상자인 700만 재외 동포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중국적이라는 말만 들어도 반발하는 히스테릭한 심리가 우리 사회에는 존재한다. 표현을 가치중립적인 복수 국적으로 바꾸고, 의식을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중국적을 병역필에 한해 허용할 때 생기는 여성 역차별이나 단일 국적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과 중국 정부 등과의 협의도 난제다. 외국인 100만명 시대라지만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여야 생존할 수 있는 ‘문명사적 전환기’에 우리는 서 있다. 길은 멀어도 언젠가는 가야 할 여정에 복수국적제가 놓여 있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공주 계룡~정안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공주 계룡~정안

    충남 논산시 상월에서 공주시로 넘어온 옛길은 계룡면 경천에 다다른다. 이곳에 섰던 5일장은 한때 공주에서 가장 컸다. 저녁 때 도착한 이 시장터는 한가한 분위기에 파리만 날렸다. 이곳에서 20년째 경천철물점을 운영하는 이영수(70)씨는 “옛날에 시장이 섰을 때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면서 “10여년 전 시내버스가 들어온 뒤로 5일장이 죽었다.”고 말했다.1000평은 됨 직한 장터는 차들만 몇대 주차돼 있고 텅 비어 있다. ●마을에 승병 영규대사의 묘 그 전에는 신원사, 갑사는 물론 신도안에서 왔다고 한다. 이들 지역은 계룡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한복판인 이 시장으로 모두 몰려들었다. 장이 서면 철물점에 농기구를 사려는 손님이 들끓었다. 국밥집마다 손님이 넘쳐났고 술집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둥그런 시장 주변을 따라 죽 늘어서 있던 가게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이씨는 “그때를 기억해서인지 5일장이 섰던 2일과 7일에 떠돌이 옷장수 2명이 찾아온다.”고 씁쓰레하게 웃는다. 일제 때 경천에 면사무소가 있었으나 1930년 월암리로 이전했다. 이씨는 “정석모(전 내무부 장관) 아버지가 면장할 때 옮겼어.”라며 아쉬워했다. 옛길은 국도 23호와 갈라져 소로로 내달린다. 계룡초등학교 담을 끼고 바로 좌회전해 농로를 따라가면 유평1리가 나온다. 이 마을에 임진왜란 때 최초로 승병을 일으킨 영규대사(?∼1592년) 묘가 있다. 이 마을 출신이다. 영규는 서산대사의 제자다.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 옆 마을인 월암리로 피신했다 숨졌다. 묘는 충남도기념물 15호이다.1810년 순조 때 세워진 비석도 있다. 주민 박상희(70·여)씨는 “동네 주민들이 1년에 한번 제사를 지내준다.”고 전했다. ●‘정감록´ 흔적이 배인 땅 길은 계룡면 사무소 앞에서 국도 23호와 합쳐진다.3㎞쯤 달리면 널티고개가 나타난다. 경사가 완만하다. 이 고개에 물이 넘치면 ‘정씨 왕조’가 세워진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정감록에 나오는 왕조를 일컫는다. 널처럼 속이 비었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무넘이’라고 불렀다. 고개가 관통하는 동명리 이장 유병상(67)씨는 “정씨 왕조 얘기는 잘 모르지만 우리와 인근 마을에 농수를 대기 위해 기산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오는 관이 고개를 지나고 있다.”고 말했다. 고속도로처럼 닦인 국도를 타고 10㎞쯤 내달리면 금강 앞이다.1㎞ 전방에서 빠져 시내쪽으로 가다 보면 소학동이 나온다.‘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가 이 마을에 있다. 향덕은 통일 신라 경덕왕시절인 755년 부모가 가난과 유행병으로 시달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기록에 있는 최초의 효행사적으로 알려졌다. 왕이 향덕의 효행을 알고 벼 300석과 집 등을 하사했다. 이후 ‘효가리(孝家里)’라고도 불려졌다. 비석 앞에는 48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높이 11m, 둘레 3.3m로 매년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을 빈다. ●“귀향온 사람 나루터 건너자 목 베어” 금강변을 따라 난 도로로 1㎞쯤 넘어 가면 공주대교 앞 장기대나루가 나타난다. 공주대교 밑에 만든 게이트볼장에 있던 팔순 가까운 할아버지는 “30년 전만 해도 노를 저어 강을 건너주는 나룻배 한 척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양에서 귀양 오는 사람들이 나루터를 건너면 목을 많이 쳤다.”며 “옛날에는 강 옆 산에 시신을 묻은 고린장터가 많았다.”고 귀띔했다. 지금은 강에 펌프장이 설치돼 있다. 나루터에는 수백년 된 팽나무가 있었다. 나룻배를 묶어두고 손님들이 쉬어가던 나무다. 교량이 건설되면서 공주대로 옮겨 심었으나 얼마 안가 죽었다. 이곳에서 시내를 지나서 7㎞쯤 떨어진 곳에 우금치가 있다. 이 고개는 전봉준 장군이 1894년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운 동학혁명전투 중 최대 격전지다. 공주대 윤용혁(역사교육과) 교수는 “주력 동학군은 이인쪽을 통해 공주로 올라왔지만 일부는 공주 구간 옛길로 진입했다.”고 설명했다. 동학혁명은 우금치 전투의 대패로 결국 실패했다. 금강을 건넌 옛길은 공주대와 신관초교를 거치지만 지금은 길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정안천 주변을 따라가던 길이 국도 23호와 만나는 곳은 조선조 숙박시설이 있었던 모란 마을이다. 얼마 안가 국도변에 붙어 있는 ‘석송정’이 나온다. 마을 이름도 정안면 석송리다. 이 정자는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내려올 때 잠시 쉬어 갔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지방 유림들이 세웠다. 인조가 이곳을 지날 때 지방 유림들이 백성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세금 감면을 해줬다고 한다. 훼손된 것을 1985년 공주시가 복원했다. 정자 주변에 인조가 ‘석송동천(石松洞天)’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 생가터에 비석만 잠시 국도와 헤어진 옛길은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1851∼94년)과 만난다. 그가 6세까지 산 정안면 광정리 생가터다.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된 것처럼 생가터는 썰렁하다. 유허비와 안내판만 잔디에 서 있을 뿐이다. 10여가구가 있었다던 마을은 사라졌고 ‘감나무골’로 불리듯 붉게 익어가는 감나무 몇 그루만 서있다. 그의 묘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에 있다. 김옥균 생가터에서 나오면 옛길은 곧바로 국도와 합쳐진다.3∼4분을 달리면 길은 또다시 국도와 갈라져 차령고개로 오른다. 차령산맥의 모태가 되는 지점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훈요10조에서 ‘차령고개 이남, 금강 밖은 등배(반역)의 산세이므로 그 지역 인물을 등용하지 마라.’고 한 곳이다. 지금은 국도가 따로 나 차들이 드물다. 울창한 숲만이 옛 위용을 알려준다. 차령고개 밑 정안면 인풍리 주민 조주형(67)씨는 “옛날엔 숲이 더 우거졌었다.”면서 “50년 전만 해도 천안 행정리 5일장에 가려면 고개에 도둑떼가 많아 혼자 소를 끌고 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주변에 ‘도둑골’이라는 마을까지 있었다고 한다. 차령고개는 당초 ‘금북정맥’으로 불렸으나 일제가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차령고개는 공주와 천안의 경계 지점으로 정상에 오르자 천안시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보인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태조 이성계 금강변 신도안에 도읍 구상 충남을 가로지르는 금강은 한양을 끼고 도는 한강에 이어 항상 한 나라의 수도로 떠오른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도 금강변 공주·연기지역에 행정도시 건설이 추진되지만 수도로 거론된 역사는 백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는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위례성에서 건국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한강유역인 현재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고구려에 의해 개로왕이 죽고 밀리면서 백제 문주왕이 475년 다음 수도로 정한 곳이 금강변 웅진, 충남 공주다. 지금은 금강의 ‘금’자가 비단 금(錦)을 사용하지만 웅진의 곰웅(熊)자를 딴 웅수(熊水)에서 ‘곰강’으로 불리다 금강으로 변했다고 한다. 백제 중흥의 기틀을 다져놓은 무령왕에 이어 즉위한 제26대 성왕이 538년 이전한 수도는 ‘사비’이다. 충남 부여로 역시 금강변에 위치한다. 부여를 통과하는 금강은 별도로 ‘백마강’으로 불린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호국룡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전설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말로 용을 낚았다고 전해지는 바위인 조룡대(釣龍臺)는 고란사 앞에 있다. 백제는 660년 사비시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만다. 금강변이 다시 수도로 떠오른 건 조선 건국 때. 초기에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자락인 신도안을 수도로 정했었다. 금강에서 가까운 곳이다. 한양에 밀려 공사가 1년 만에 중단됐지만 아직도 주춧돌 등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이곳에서 ‘정씨 진인이 나타나 새 왕조를 세운다.’는 예언서가 등장했다.‘정감록’이다. 선조 때에 발생한 정여립(1546∼89년)난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설이 있다. 정감록의 파괴력이 지속되면서 무속인이 신도안으로 몰렸다.1975년에만 해도 상제교, 태을교 등 104개 신흥종교 시설이 있었으나 계룡대를 조성하는 ‘620사업’으로 거의 사라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금강변 공주·연기를 행정 수도로 검토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후 이곳을 행정수도로 정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일부 국민들의 반대로 ‘행정도시’로 격이 낮아졌지만 이 사업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전북 장수군에서 충남 서천 금강하구둑까지 394㎞를 흐르는 금강.2014년까지 대통령 직속기관 4개, 재정경제부, 교육인적자원부,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등 총 49개 중앙행정기관이 들어서는 행정도시 ‘세종시’가 백제의 옛 영광을 재현할지 기대되고 있다. 공주대 윤용혁 교수는 “한반도 중심인 한강을 둘러싼 싸움에서 밀리면 다음으로는 천상 금강이 가장 적지다.”며 “대외적으로 교통이 좋은 강을 끼고 있고 넓은 평야지대 등 수도로서는 조건이 무척 좋다.”고 말했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朴 “이재오,오만의 극치”

    朴 “이재오,오만의 극치”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1일 국회 환경노동위 국정감사에 앞서 이재오 최고위원의 최근 발언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오만의 극치라고 본다.”고 짧지만 단호한 어조로 비판했다. 지난달 29일 이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 등의 산행 등을 거론하며 “아직도 경선하는 걸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좌시하지 않겠다.”고 비판했었다. 박 전 대표는 이 후보측이 ‘이명박-박근혜’ 화합 방안으로 김무성 의원을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한 것에 대해서도 “원래 그렇게 하기로 이야기가 돼 있었는데 너무 많이 늦어진 것”이라고 했다. 갈등의 발단이 된 이 최고위원 문제와는 별개의 사안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 후보측에서 ‘이-박 회동’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진 데 대해서는 “만나자고 한 적 없다.”고 했다. 한편 박 전 대표의 측근인 유승민 의원은 이날 KBS라디오 ‘라디오정보센터 박에스더입니다’에 출연,“이 후보께서 당 화합의 걸림돌이 되는 부분을 제거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해 줘야 할 상황이 아니냐.”고 이 최고위원의 사퇴문제를 거듭 제기했다. 반면 박 전 대표 진영의 좌장이었던 김무성 의원은 이날 최고위원 지명 후 기자와 만나 이 최고위원에 대해 “단합을 해치고 대선에 차질이 생기는 수준 낮은 일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면서도 “이 최고위원을 그만두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화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불행한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며 화합을 강조했다. 김 최고위원은 이어 박 전 대표의 이 후보 지원방안에 대해 “유세 참여 등 박 전 대표가 지원하도록 하는 것은 승자의 몫”이라며 1971년 박정희 3선을 저지하기 위한 신민당 경선 얘기를 꺼냈다. 당시 김영삼(YS)후보가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대중(DJ)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무주 구천동에서 거제까지 DJ 당선을 위해 유세하겠다고 밝혔으나 100만명이 모인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DJ만 연설하고 YS는 시골에서 유세하도록 스케줄을 짜, 결국 박정희 3선을 저지하지 못했다고 소개한 뒤,“그런 일 안 생기도록 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 이 후보측의 포용력 있는 정치를 주문했다.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 [주말탐방] 외교부 통역전문가들의 세상

    [주말탐방] 외교부 통역전문가들의 세상

    지난 9월7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후 언론 설명회. 노무현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회담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 달라고 두차례나 요청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부시 대통령이 언급한 ‘새로운 한반도 안보체제’나 ‘한국전 종결을 위한 평화조약 서명’에 대해 미국측 통역이 한국어로 번역,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옮기지 않고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등 추상적 표현으로 축약하는 바람에 오해를 산 것이다. 이는 정상회담이나 장관회담 등 주요 외교행사에서 통역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전세계를 누비며 외교활동을 벌이는 대통령과 외교통상부 장관 옆에는 그들의 말을 가장 정확하게 통역, 전달하고자 구슬땀을 흘리는 외교관들이 있다. 바로 외교부 통역전문가다. 통역외교관들을 통해 외교가에서 벌어지는 통역의 보람과 애환 등을 들어봤다. ●언어별 2∼3명씩 국내외 포진 현재 대통령 통역을 맡는 외교부 통역전문가들은 10여명 정도다. 일반적으로 언어별 본부에 2명, 재외공관에 1명 등 3명씩 두는데, 이들 중 본부 베테랑 1명이 대통령 통역을 담당한다. 1990년대까지는 언어·국제관계 특채 외무관들이 주로 통역을 맡았으나 2000년대 들어 통역의 전문·분업화에 맞춰 언어별로 통역 전문 계약직을 뽑고 있다. 이들은 3년쯤 후 외무공무원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외대 등 통번역전문대학원이나 해외 석·박사 출신으로, 대통령 및 외교장관 통역뿐 아니라 대통령부인·국무총리 등 고위인사 통역과 북핵 6자회담 등 주요 회담·협상 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현재 대통령 통역의 최고참은 추원훈(43·스페인어) 정책총괄과 1등 서기관. 한국외대 서반어과, 마드리드국립대 박사 출신으로 1998년1월 국제관계전문 특채로 입부했다. 지난 2월 중남미국에서 정책기획국으로 옮겼지만 대통령 통역은 여전히 그의 몫이다. 대통령 통역은 물론,6자회담 통역을 담당하는 서명진(36·일본어) 일본과 2등 서기관과 신희경(36·중국어) 중국몽골과 2등 서기관은 2003년 입부한 동갑내기 베테랑.2004년 2월 2차 6자회담때부터 최근까지 6자회담만 10여차례 참여, 북핵 전문가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러시아어는 정수영(31) 러시아·CIS과 3등 서기관과 배선경(30) 3등 서기관이 책임지고 있다. 이들과 함께 6자회담에서 영어 통역을 맡고 있는 김종민(30) 북핵협상과 2등 서기관은 해외파 통역장교 출신으로,6자회담 통역 중 ‘청일점’이다. 외교부 인사기획관실 관계자는 “영어는 기본이기 때문에 따로 통역을 두지 않고 담당 과에서 통역 수준의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박정연(28) 서유럽과 3등 서기관이 불어 통역을, 한수진(32) 중유럽과 3등 서기관이 독일어 통역을 맡고 있다. 아랍어 통역은 정선미(31) 걸프지역과 3등 서기관이, 스페인어 통역은 임재금(27) 중미과 3등 서기관이 각각 담당하고 있다. ●“매순간 긴장 늦출 수 없어” 이들은 외교 관련 통역이 일반 통역과 달리 민감한 내용이 많아 “정확성과 함께 보안 유지가 최우선”이라고 입을 모은다. 매끄러운 통역으로 일본측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 서명진 서기관은 “한·일 관계는 사연이 많고 감정적 현안도 많아 항상 조심스럽다.”며 “통역은 일반 직원들보다 회담 등 관련 내용에 대해 더 조심해야 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과의 양자협의 통역 등으로 가장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신희경 서기관은 “대외 보안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대통령·장관 등 고위 인사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옮길 때마다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신 서기관은 6자회담 ‘2·13합의’때 합의문 작성 과정이 새벽까지 이어져 이를 기다리며 애를 태웠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귀뜀했다. 정수영 서기관은 “일반 통역과 달리 의전이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며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대통령의 우회적 표현도 제대로 파악,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중요하다.”고 말했다. 6자회담 통역은 정확한 단어 선택과 팀워크가 중요하다고 한다. 정 서기관은 “회담 성격상 단어 하나에 모두 민감해 정확한 단어 선택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쓴다.”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전문 용어도 많아 공부를 하며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6자회담 통역들은 전문 용어의 혼동을 막기 위해 사전에 상의하고 외국어에 없는 것을 어떻게 표현, 일관성을 유지할 것인지 고민한다고 한다. 회담이 성공한 뒤 오는 보람과 기쁨도 크지만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통역의 운명이다. 한 서기관은 “통역은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호된 질책을 받게 돼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며 “그러나 통역이 외교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최근 후배들을 맞았다. 지난달 특채된 실무인력 90여명 중 5명이 통역 전문으로 뽑혔다. 외교부 이원익 인사운용팀장은 “해마다 본부 및 재외공관 수요에 따라 언어별 통역을 충원한다.”며 “최근 일본어 1명, 러시아어 2명, 독일어 1명, 스페인어 1명 등 총 5명을 뽑았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젊어진 청와대 영어통역 대통령의 영어 통역은 다른 언어와 달리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에서 담당한다. 영어는 그만큼 쓸 일이 많기 때문에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있는 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 영어 통역을 살펴보면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박 전 대통령 시절에는 지난 8월 별세한 조상호 전 체육부 장관이 의전수석을 맡아 10여년간 영어 통역을 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 때는 고(故) 김병훈 의전수석이 영어 통역을 맡았다. 이때만 해도 차관급인 의전수석이 영어 통역과 의전을 같이 하던 시절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는 외교부 출신들이 청와대 비서관실로 옮기거나 파견을 나가 영어 통역을 담당했다. 노 전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맡았던 노창희 당시 의전수석은 주영국대사, 외무부 차관 등을 지낸 뒤 청와대로 옮겼다. 노 수석과 함께 곽중철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도 노 전 대통령과 개인적 인연으로 영어 통역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는 외시 11회인 박진 한나라당 의원이 외교부를 떠나 영국으로 유학한 뒤 귀국,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맡아 영어 통역을 했다. 박 의원은 하루종일 통역을 한 뒤 지쳤을 때 김 전 대통령이 “밥 먹었느냐.”며 챙겨줬을 때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김 전 대통령 후반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초반까지는 최종현(51·외시 19회) 외교부 정책기획협력관이 의전비서실로 파견, 영어 통역을 했다. 이어 당시 외교장관 보좌관이던 강경화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 부판무관이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를 의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30대 젊은 서기관들을 영어 통역으로 받아들였다. 김일범(34·외시 33회) 정책개발과 서기관을 시작으로 이여진(33·외시 31회) 서기관, 이태식 주미대사 아들인 이성환(31·외시 33회) 서기관에 이어 정의혜(32·외시 31회) 서기관이 바통을 이어받아 실무형 영어 통역과 의전을 함께 하고 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여소영 주중국대사관 서기관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어 통역의 가장 큰 적은, 방언(方言)과 고어(古語)’. 대통령 중국어 통역 출신인 주중 대사관 여소영 서기관이 겪은 일.2003년 중국 지방 고위인사들이 단체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했다. 갑자기 한 인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시를 한 수 읊겠다며 예정에 없는 발언을 했다. 문제는 ‘고어투’로 된 ‘자작시’인데다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지방의 ‘사투리’. 중국 사극에서나 들을 수 있는 옛 표현들이 쏟아졌다. 앞뒤 문맥과 분위기에 맞춰 무리없이 통역을 마쳤지만, 아찔했던 순간. 특히 중국 사투리는 다른 지방 중국인들에게도 ‘외국어’인지라, 중국인들도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이라 할 만 했다. 여 서기관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외교부의 외국어 능력 시험 1급 획득자다. 영어·일어 등 모든 외국어를 통틀어 유일한 기록이다. 초·중·고교를 한국에서 화교학교를 다니고 국립타이완대학교에서 학사·석사를 마친 것이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지금도 라디오를 들으며 아나운서의 발음대로 따라해보고 한시(漢詩)를 외우며, 들어보지 못한 사투리를 접하려 노력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의 일이다. 한 주요 인사가 서예 작품을 선물하면서 띄엄띄엄 광둥(廣東)어를 섞기 시작했다. 중국측 통역이 쩔쩔 매며 당황할 때 그의 통역을 도와줬던 적도 있다. 과거 유학 시절에 광둥 친구를 룸메이트로 만나 광둥말을 익힌 덕분이다. 그가 꼽는 중국어만의 공부 포인트.“중국어는 대화 가운데 고전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문학작품을 많이 읽고 외우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고전을 다 외울 수는 없잖아요. 외운 것도 또 잊게 돼있기 때문에 계속 반복하는 수 밖에 없지요.” 과거 리펑(李鵬)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부인이 방한했을 때, 중국 대사관 직원인 줄 알고 이것저것 부탁하다가 한국 외교관임을 알고 뒤늦게 그에게 사과를 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jj@seoul.co.kr
  • DJ “납치사건 朴전대통령이 지시”

    |교토 박홍기특파원|김대중 전 대통령은 30일 1973년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가 분명하다.”면서 “늦었지만 한국과 일본 정부는 진상을 확실히 밝혀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최영근 전 의원이 박 전 대통령 사망 후에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사건 전모를) 듣고 이를 전했다.”고 말했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 전 대통령이 지시했지만 한달간 (중앙정보부가) 안 움직였으며 다시 지시를 받은 뒤 살해하기로 했다.”는 말을 최 전 의원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교토 리쓰메이칸 대학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은 이날 교토시내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밝히면서 “일본 정부나 한국 정부 모두 납치 사건과 뒷 수습에 있어서 내 인권을 무시한 데 대해 항의한다.”고 말했다. 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진상조사 발표 보고서에 대해 “납치 목적은 나를 살해하기 위한 것이 분명한 데도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하지 못했다는 것은 유감”이라고 강조했다. 납치사건을 둘러싼 한ㆍ일 정부간 사과 수위 논란과 관련해서는 “일본은 주권이 침해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도 과거를 청산하는 마당에 분명히 청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일본에서도 납치에 동참한 사람 하나도 처벌하지 않았다.”면서 “이것도 우스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수사를 진전시켜 진상을 밝히기 위해 증언이 필요하다면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증언할 용의가 있다.”면서 “수사를 할 준비가 돼 있느냐가 선결 과제다.”라며 일본측의 확실한 자세를 요구했다. 일본 경찰이 진상규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데 대해선 “일본에 온다니까 일본 경찰에서 참고인으로 조사에 응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hkpark@seoul.co.kr
  • 李, 박정희 28주기 깜짝 참배

    李, 박정희 28주기 깜짝 참배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28주기인 26일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와 박근혜 전 대표가 나란히 서울 국립현충원을 방문했다. 이 후보가 오전 10시쯤 먼저 박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고 10여분 만에 자리를 떠났다. 박 전 대표는 추도식 한 시간 전인 오전 11시에 도착, 두 사람간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후보는 이날 예정에 없이 현충원을 찾았다. 당초 이 후보는 충청지역 방문 일정으로 현충원 방문 예정이 없었으나 “잠깐만이라도 추도하고 가는 게 좋겠다.”는 참모진의 건의에 따라 일정을 조정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기자들의 ‘이전에도 온 적이 있느냐.’는 물음엔 “그전에도 왔었는데 너무 일찍 왔다 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라고 답했다. 당내에서는 이 후보의 이날 박 전 대통령 묘역 참배를 두고 박 전 대표에 대한 각별한 배려로 보고 있다. 특히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설이 나도는 상황이어서 이 후보로서는 박 전 대표 끌어안기가 절박한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이 전 총재가 출마하더라도 박 전 대표 지원이 없다면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오후 충남 천안에서 열린 ‘국민성공시대 대전·충남대회’ 인사말에서 “지난 경선 때 다 당이 깨질 것이라고 했다.”며 “그런데 한나라당이 어떻게 됐나. 한나라당이 깨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박 대표 말 한마디에 무릎을 탁 치고 ‘큰일났다’고 했을 것”이라고 박 전 대표를 칭찬,‘박 전 대표 끌어안기’ 행보를 이어갔다. 한편 오전 11시에 현충원에 도착한 박 전 대표는 동생 서영·지만씨 등과 함께 유족 대표로 추도식에 참석했다. 박 전 대표는 이 전 총재의 출마설과 연대 등에 대한 질문에 “나오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런 질문 자체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지훈 한상우기자 kjh@seoul.co.kr
  • [사설] 국정원 과거사 진상규명이 남긴 것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어제 ‘김대중(DJ) 납치사건’ 등 7대 의혹사건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일부 연루자들이 협조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정도 진실규명을 한 것을 평가한다. 하지만 DJ 납치사건의 최고책임자가 누구인지 확정하지 못하는 등 미흡한 부분이 있다. 진실위 활동이 종료되더라도 국정원은 올바른 역사를 쓴다는 심정으로 스스로 과거 규명작업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진실위는 1973년 8월 발생한 DJ 납치사건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거나 최소한 묵시적인 승인을 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측은 “진실위원회가 박 전 대통령의 범행지시, 살해목적을 인정할만 한 사실을 밝혀내고도 그 결론에서 우유부단한 입장을 보인 것은 유감”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는 진실위가 확실한 증언과 증거를 찾는 노력을 더 기울였어야 했다고 본다. 진실위 조사에 협조하지 않았던 관련자들도 적절한 방법을 통해 진상을 털어놓고 참회하기를 바란다. 진실위는 동백림 사건 등 과거 정보기관이 실체를 과장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건을 열거했다. 정보기관의 선거 간여, 통제·사찰 실태를 파헤친 것도 의미를 갖는다. 국정원이 과거를 털고 새 모습을 갖추는 과정에서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KAL기 폭파사건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란은 이제 끝내야 한다. 수사상 오류가 있었고, 정치적 이용 의도가 드러났으나 북한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란 본질은 이번에 다시 확인되었다.
  •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DJ납치 조기발표 원했지만…”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DJ납치 조기발표 원했지만…”

    “진실규명을 뛰어넘어 권력기관이 부당하게 통제했던 어두운 역사를 밝히고 싶었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의 안병욱 위원장은 24일 이 같은 바람으로 임기 3년의 고별사를 대신했다. 진실위는 지난 2004년 11월2일, 과거 공권력이 자행한 인권 침해나 불법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국정원 산하 국가기관으로 출범했다.7대 의혹사건 조사를 시작으로 불행했던 과거사의 굴레를 벗어나는 데 주력했다. 이날 김대중 납치사건과 KAL 858기 폭파사건을 끝으로 그동안의 활동을 마무리지었다. 안 위원장은 “지난 3년 동안 처음 기대와 희망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면서도 “많은 제약과 한계 속에서 이 정도 성과를 낸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자평했다. 진실위는 출범 당시 계획을 ▲진실·책임소재 규명 ▲피해자 명예회복 ▲기념사업 등의 단계로 제시했다. 진실위는 그동안 막연한 심증에만 머물러 온 국가기관의 권력 남용 실태를 파헤쳤다.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의 경우, 미흡하지만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도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혁당 사건은 지난 1월 유가족들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간첩단 사건’으로 결론내, 고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씨가 40년 만에 입국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안 위원장의 평가대로 한계도 적지 않았다. 관련자들의 진실 고백에 의존하다보니 사건 당사자들이 생존해있지 않을 경우 조사가 여의치 않았다. 자료접근권과 조사권은 있지만 수사권이 없어 당사자가 진술을 거부할 경우, 속수무책이었다.KAL기 폭파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김현희씨는 끝내 면담에 응하지 않았다. 이어 안 위원장은 “대다수 사건의 관련문서가 없거나, 남아 있더라도 없애버리는 등 원천적인 한계를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사건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치권의 반발 때문에 힘이 빠졌다는 고백도 이어졌다. 부일장학회 헌납사건과 김대중 납치사건이 대표적이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조기 발표할 수 있었지만 한·일관계를 우려하는 정부 입장 때문에 3년을 꼬박 채웠다고 한다. 안 위원장의 기억 속에 가장 힘들었다고 소개한 사건이다. 그는 “개별 사건의 이해 당사자들은 이 정도 결과에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3년 작업에 그칠 일이 아니다.”면서 “국가기관의 부끄러운 과거 고백이 수용될 수 있는 제도와 풍토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피해자측 “새로운 내용없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 아니냐. 새로울 게 없다.”,“아직도 미흡하다.” 24일 국가정보원 진실규명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에 대해 정작 피해자들의 반응은 이렇듯 냉담하기만 했다. 새 정권 들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초반 모습과는 달리 그동안 밝혀진 내용보다 진일보한 게 없고, 너무 늦은 진실규명 착수로 이미 가해자들이 사망한 뒤여서 확실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미완의 보고라는 푸념이다. 이른바 DJ납치사건의 당사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측도 이날 발표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최경환 비서관은 논평을 통해 “성의를 갖고 진상규명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은 평가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범행 지시, 살해목적을 인정할 만한 사실을 밝혀내고도 결론에서 우유부단한 입장을 보인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KAL기 가족회 “국정원의 쇼” ‘KAL기 진상규명 가족회’ 차옥정 회장도 “새로울 게 없는 누구나 다 알던 내용이다. 솔직히 국정원이 쇼를 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KAL기 사건 발표 자체가 100% 김현희 진술에 의존한 것이었는데 진실규명위가 김현희를 조사하지 않은 것은 사건 자체를 조사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지난 8월 245억원의 국가배상 판결에 따라 32년 만에 ‘사법살인’이라는 진실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었던 민청학련·민청학련·인혁당 진상규명위원회 정화영 위원장은 “옛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했던 부분들을 상당부분 밝혀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하재완씨의 부인 이용교씨는 “재심 기회도 주지 않고 판결 다음날 사형을 시킨 것은 박정희 작품이라는 말을 그 당시 사건을 맡았던 사람한테서도 들은 적이 있다.”면서 “그때 사형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정화영 위원장 “조작된 부분 규명 돼” 또 1971년 신민당사에 난입한 대학생 10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가 정보기관으로부터 핍박을 당했던 김성기 변호사는 “이번 진실위 활동을 계기로 과거 우리 사법사에 정치적인 영향 때문에 불이익받았던 판사들이 있었던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권력이 개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평가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당시 가해자들이 사망한 경우가 많아 제대로 된 규명이 되지 못한 것 같다.”면서 “다만 정권이 바뀌고 민주화가 되면서 사법부 스스로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홍성규 강국진기자 cool@seoul.co.kr
  •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과거 정보기관 통제사찰 실태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과거 정보기관 통제사찰 실태

    국가정보원 진실규명위원회가 24일 펴낸 보고서에는 과거 중앙정보부와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정치·사법·언론 등 각 분야를 광범위하게 사찰, 통제한 흔적이 담겨 있다. ●여야 막론 ‘무차별´ 정치사찰 박정희 정권 때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의원까지 정치 사찰이 이뤄졌다. 특히 초대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JP) 사찰’이 광범위하다. 3선 개헌 논의 때 JP가 공화당 박종태·김용태 의원을 만나 개헌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개헌이 본격 추진될 경우 자신은 표면에 나서 범국민적인 개헌반대 투쟁을 벌이겠다고 말한 내용이 기록된 문서도 발견됐다.▲전 공화당의장 김종필 동향첩보 통보 ▲김종필 동향 첩보 입수 ▲국회의원 김용태 동향첩보 통보 ▲김용태에 대한 첩보 ▲개헌 논의를 포함한 정계동향이다. ●원하는 판결위해 ‘판사 뒷조사´ 각종 시국사건 때 정보기관은 담당 재판부를 직·간접적으로 압박해 원하는 판결을 유도했다. 1982년 ‘송씨 일가 사건’은 검찰 기소 때부터 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안기부가 모두 개입, 조정했다. “북한 노동당 연락부 부부장 송창섭씨가 남파, 친인척을 간첩으로 만들어 25년간 암약했다.”는 내용의 이 사건은 안기부가 피의자를 불법으로 장기 구금하고 고문으로 진술을 받아낸 뒤 검찰에서도 그대로 말하도록 강요했다. 별다른 물증이 없고, 검찰 조서의 임의성 문제가 제기돼 대법원이 두 차례나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하자 안기부는 검사와 함께 판사를 찾아가 설득했다. 이 밖에도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 등 정권의 의도와 다른 판결을 내린 판사를 뒷조사했고, 검찰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1983년 대법원 비서실장 뇌물사건을 재조사하도록 해 부장판사 2명과 검사장·지청장을 사임하도록 유도했다. ●기자연행·광고통제로 언론 탄압 정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글을 실은 매체에 압력을 가한 것도 정보기관의 몫이었다. 김지하 시인이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정부 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시 ‘오적’을 게재하고, 신민당이 당 기관지인 ‘민주전선’ 6월1일자로 이 시를 다시 싣자 중정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그를 구속하고 사상계의 폐간을 추진했다. 정권에 부담이 되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은 정보기관에 연행돼 조사받은 것도 국정원 보유자료를 통해 공식적으로 첫 확인됐다. 광고를 통제해 언론을 탄압하기도 했다.1973년 주요 광고주 대표를 불러 조선일보에 광고를 실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는 점이 국정원 자료로 확인됐고,1974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도 중정이 주도했음이 유추된다고 진실위는 밝혔다. ●통제 가능한 노조간부 특별 관리 1961년 대한노총을 해산하고 한국노총을 조직한 장본인이 중정이었다. 중정은 직접 통제가 가능한 구성원으로 한국노총 간부를 육성하고 관리했다. 노총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력도 행사했다고 진실위는 판단했다. 중정은 또 김말룡씨 등 비판적 성향의 인물이 간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압, 회유를 반복하며 공작을 벌였다. “용공지하서클을 결성,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며 크리스천아카데미 사회교육원 간사 등을 연행한 1979년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도 중정이 유신체제를 위협하는 반체제 활동으로 간주, 사건의 실체가 과장됐다고 진실위는 강조했다. ●대학별 담당관 운영해 학원 통제 학생운동 사찰은 물론, 대학정책 입안과 학사행정 업무까지 중정과 안기부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학원사태로 제적된 학생의 복교, 타 대학 입학을 막고, 소요가 극렬한 학과는 정원을 감축했으며 비판 성향의 교수는 승진을 불허했다. 주요 학원문제가 생길 때마다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개최해 교련교육, 교수 재임용제, 졸업정원제 등 범정부 대책을 마련한 것도 정보기관이 주도했다. 대학별 담당관을 지정, 운영하는 등 광범위한 정보망으로 학원을 통제한 점도 이번 조사로 밝혀졌다. ●간첩사건, 실체보다 확대·과장 우선 조사한 7대 사건에 동백림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등 3건이나 포함된 것만 봐도 정보기관이 간첩사건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월북한 친인척과 접촉, 간첩교육을 받고 국가기밀을 제공했다며 간첩으로 몬 81년 ‘박동운 사건’이나 납북귀환 어부를 간첩으로 몰아붙인 82년 ‘정영 사건’, 조총련을 찬양하고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했다는 82년 ‘차풍길 사건’ 등 적잖은 간첩사건들이 실체보다 확대, 과장됐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DJ납치사건 남은 의혹·과제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DJ납치사건 남은 의혹·과제

    김대중(DJ)전 대통령의 납치 사건에 대해 국정원 진실위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지시로 실행됐고 사건 이후 조직적으로 은폐됐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1973년 8월8일 DJ가 일본 도쿄 소재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돼, 바다로 옮겨져 용금호에 감금됐다가 8월13일 서울 동교동 자택 부근에서 풀려난 것을 말한다. 진실위는 모든 의혹 사항을 해소하는 데는 미흡했다는 지적이다. 중정직원 11명과 용금호 선원 4명 등의 증언을 듣기는 했으나 핵심자료인 ‘KT공작계획서’를 찾아내지 못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최고위 지시자를 놓고는 이 전 부장의 지시설과 박 대통령의 지시설이 엇갈린 상태에서 구체적인 증거 없이 다소 무리한 결론을 내렸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게 됐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의 불신을 받던 이 전 부장이 DJ의 반유신활동과 관련된 중정의 대처 방안에 대해 강한 질책을 받자 과잉 충성으로 발생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 전 부장과 이철희 당시 중정 정보차장보, 김종필 총리, 김정렴 비서실장, 김치열 법무장관 등은 “이후락이 옆에다 갖다 놓고서 나한테 얘기를 해.”라며 박 대통령이 노발대발했다고 증언했다. 반면 피해자인 DJ의 증언, 사안의 중대성, 박 대통령의 사후 관리 대책 지시를 종합하면 박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란히 제시했다. 국가적인 공작을 이씨가 단독으로 결정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당시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납치사건은 이후락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게 확실하다. 박 대통령의 명백하거나 암묵적인 승인하에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한 전문도 소개했다. 진실위는 공작 목표에 대해서도 단순 납치인지, 살해가 최종 목적인지 명쾌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KT공작계획서’를 작성했다고 시인한 김모씨는 “일본 야쿠자를 이용한 납치계획이었다.”고 증언했으나 윤 모씨는 “야쿠자를 활용, 암살하는 안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엇갈린 진술에 진실위는 “다수의 중정요원 개입, 단계별로 납치가 진행돼 국내로 데려온 후 사면한 상황을 종합하면 공작계획 단계에서 살해안이 논의된 것이 사실이지만, 납치 실행단계에서는 단순 납치 방안이 확정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공작을 지시한 이 전 부장과 지휘라인의 책임자인 김치열 차장은 건강 악화로, 공작부서 책임자인 하모 국장, 현지 공작 총괄책임자인 김모 주일대사관공사는 사망하는 등 핵심 인물에 대한 면담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DJ측 “조사 미진… ”

    “김대중 전 대통령은 34년을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기다렸다. 진실이 완전히 밝혀질 때까지 다시 기다리고 요구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측 최경환 공보비서관은 24일 진실위 조사결과에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그는 진실위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범행 지시, 살해 목적을 인정할 만한 사실을 밝혀내고도 그 결론에서 우유부단한 입장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최 비서관은 논평을 통해 “당시 사건의 최고 지시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며 “당시 미국측의 개입으로 김 전 대통령은 수장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미국, 일본 당국자와의 면담 등 사실관계 조사가 여러모로 미진했다.”고 진실위측의 조사 결과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 시민모임 대표를 지낸 한승헌 전 감사원장도 성명서를 통해 진실위의 애매한 결론에 유감을 표시했다. 그는 여러 정황상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살해 의도는 분명했다고 주장하며 “한·일 정부는 김 전 대통령과 한국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동회기자 kugija@seoul.co.kr
  •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박근혜측 “짜맞추기 결론…”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소한 묵시적으로 승인했다는 24일 국정원 진실위의 발표에 대해 일체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박 전 대표측은 “(박 전 대표가) 관련해서 일체 말씀이 없었고, 특별한 논평을 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측 인사들은 반발했다. 경선 과정에서 캠프 대변인을 지낸 이혜훈 의원은 “이랬을 것이다, 저랬을 것이다 식의 추측을 이야기하는 진실위의 발표는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증거는 없는데 정황이 그렇게 보여 최소한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식의 진실위 발표야말로 역사 왜곡”이라면서 “역사를 누군가를 흠집낼 목적으로 짜맞추듯 결론을 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지금까지 진실위가 발표한 사건마다 이런 식이었는데, 정치적 의도와 목적을 두고 활동해온 진실위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과거사에 대한 정치적인 되새김질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朴대통령 묵시적 승인”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朴대통령 묵시적 승인”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DJ)납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국가정보원 전신) 지시로 실행됐고, 사건 이후 중정이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24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6권짜리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진실위의 보고서는 ‘DJ 납치사건’과 관련, 증언이 엇갈리고, 중정이 작성한 핵심자료인 ‘KT공작계획서’가 발견되지 않아 의혹 해소에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진실위는 그럼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 이유로 이 전 부장이 공작추진에 반대하는 이철희 정보차장보에게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며 역정을 냈고, 주일대사관 김 모 공사가 “박 대통령의 결재를 확인하기 전에는 공작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버티다 곧 적극 협조했다는 등의 정황을 들었다. 정황 제시로 결론을 내린 것은 당시 박 대통령의 불신을 받던 이씨의 과잉충성에 의한 단독 범행이라는 주장과 유신체제하에서 박 대통령이 모르게 중대한 공작이 진행될 수 없다는 증언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진실위는 어느 쪽 주장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자 “박 대통령의 사전인지 여부 문제와는 별도로 대통령직속기관인 중정이 납치를 실행하고 사후 은폐까지 기도한 사실에 비추어 통치권자로서의 정치적·법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납치사건의 목표가 DJ의 ‘단순납치’인지,‘살해’였는지에 대해서는 “공작계획 단계에서 살해안이 논의됐지만 납치 실행단계에서 단순납치 방안이 확정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양쪽의 증언을 다 수렴한, 중간적인 입장을 취했다. 과거사위는 또 박정희 정권이 중정을 통해 제5대 대선(1963년 10월)과 7대 대선(71년 4월), 제7대 총선(67년 6월) 등에 개입했다고 밝혔다.10월 유신으로 가는 마지막 대통령 직선제 선거였던 제7대 대선에서 중정은 ‘풍년사업’이라는 공작명 아래 김대중 후보의 낙선을 위해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7년 KAL기 폭파사건에 대해서는 이 사건의 실체가 북한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을 확인했다. 진실위는 그러나 “당시 안기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협이 되는 사건인데도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 검증 없이 서둘러 발표함으로써 수사결과에 일부 오류가 발생했고, 이것이 (기획 조작 등)불필요한 의혹을 유발하는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노동당, 민주당은 DJ납치사건과 관련,“당시 정권의 후예인 한나라당이 공식사과하고 현 정부 차원의 사과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역사적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면밀한 사실 확인이 더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김형준 정치비평] 생산적 ‘가치 논쟁’의 조건

    [김형준 정치비평] 생산적 ‘가치 논쟁’의 조건

    최근 대선정국에서 범여권 후보들이 ‘가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우리 사회는 지금 낡은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충돌하고 있다.”면서 한나라당 이명박후보를 상대로 가치 논쟁을 제기했다.‘재벌 대 서민’,‘경제 대 평화’,‘기업 가치 대 가족 가치’,‘나쁜 성장 대 좋은 성장’과 같은 가치 대결 전선을 만들어 가고 있다. 가칭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는 ‘사람 중심의 진짜 경제’와 특권층만을 위한 ‘부패한 가짜 경제’의 가치 논쟁을 점화시켰다.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보수 정치와 한판 승부를 위해 이명박 후보와 맞설 가치의 연정을 제안했다. 한편, 이명박 후보는 이러한 ‘가치 논쟁’을 허구의 이념논쟁이라며 실용논쟁을 벌이자고 역설하고 있다. 가치 논쟁을 대선 이슈로 부각시켜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만들려는 범여권의 의도를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주주의 선거에서 가치 논쟁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선거란 본질적으로 후보와 정당간에 집권하면 어떤 가치를 실현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가치 논쟁은 정책 선거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성장, 효율, 경쟁, 자율, 경제 등의 보수 가치와 분배, 평등, 책임, 투명, 평화 등의 진보 가치 중에서 유권자의 지지를 받은 가치가 궁극적으로 정책으로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역대 한국 대선에서 가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선거는 아마도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대중 경제론’이 충돌했던 1971년 대선으로 기억된다.2004년 미국 대선에서도 도덕성과 연계된 총기 규제, 동성 결혼, 낙태와 같은 가치 논쟁이 대선 이슈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대선에서 누군가가 가치 논쟁을 제안했다고 해서 국민들이 새로운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생산적인 논의의 장이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생산적인 가치 논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민심과 동떨어진 가치 논쟁은 지양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유, 평등, 민족과 같은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미래 방향을 생산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논쟁이 되어야 한다. 둘째,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을 둘러싼 논쟁이 이뤄져야 한다. 가치의 방향이나 목표만을 내세우면 추상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논쟁의 질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후보간에 차별성을 찾기도 어렵게 된다. 따라서,‘차별 없는 성장’,‘국민 모두가 행복해지는 국민성공 시대’와 같은 구호는 가치 논쟁의 이슈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셋째, 가치 논쟁은 실현 가능성과 내적 일관성의 측면에서 심도 있게 전개돼야 한다. 아무리 가치 논쟁을 벌인다 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낮으면 공허한 것이 되고, 일관성이 떨어지면 인기 영합의 포퓰리즘으로 변질되어 신뢰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넷째, 논쟁의 상호 작용성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라당은 “가치 논쟁은 아무 실익이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논리로 논쟁 자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미래 성장 동력 확충, 중산층 복원, 사회 양극화 해소, 공교육 정상화 등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 범여권과 치열한 가치 논쟁을 펼쳐야 한다. 그때만이 수권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국민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이번 대선이 한국 정치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중대 선거’가 되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유권자에게 달려 있다. 무엇보다 후보들이 제시하는 가치 논쟁에 많은 관심을 갖고 냉정하게 평가해서 투표하는 ‘책임지는 유권자’(responsible voter)가 많아져야 한다. 그때만이 미래 가치에 대한 더욱 활기차고 생산적인 가치 논쟁의 장이 활짝 열릴 것이다. 명지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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