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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9) 정읍·고창·부안 동학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9) 정읍·고창·부안 동학로

    갑오년(1894년) 음력 1월 고부(지금의 전북 정읍시) 봉기로 발발해 같은 해 12월 전봉준 등 주요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막을 내린 미완의 혁명. 그 정신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1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자마다 이견이 있지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는 곡조에는 누구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민초들에게 두고두고 양각으로 아로새겨진 이 기억은 그러나 권세가들에게도 특별했긴 매한가지다. 무수한 세도가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그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했고 머리를 조아렸던 혁명이다. 그 정신을 오롯이 기리고 있는 전북 정읍·고창·부안의 동학로를 찾았다.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끝자락에 있는 황토현 전적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곳이다. 화강암으로 된 비석 위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 즉, ‘폭정을 없애고 나라를 보존하여 인민을 안정하게 한다’라고 쓰여 있다. 동학농민군은 갑오년 음력 4월 7일 이곳에서 정규 정부군인 전라 감영군과의 전투에서 최초·최대 승리한 것을 이렇게 기념했다. ●과거 권력자들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 1963년 10월 3일 제막식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참석했다. 여기서 박 의장은 “동학혁명은 부패·당파싸움·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들에게 항거한 최초의 대규모 서민혁명으로 그 정신은 길이 계승돼야 한다.”면서 “5·16혁명도 이념면에서는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진윤식(69) 고창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은 “5·16군사쿠데타를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으려는 꼼수였다.”고 비판했다. 또 같은 목적으로 전두환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황토현 기념관·전봉준 장군의 동상 등을 세우도록 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당시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읍농고에서 열린 13회 동학문화제에 참석한 이후 이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기념사업회장을 구속하고, 정읍군수·경찰서장을 직위해제했다. 박대길 정읍시 동학농민혁명선양팀장은 “군부정권이 행한 ‘정화사업’은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적비 뒷산인 두승산에 오르면 동쪽으로 배들평야, 서쪽으로는 부안군 백산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동학로 끝에서 황토현로, 말목장터로를 따라오면 배들평야 끝으로 만석보터가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정읍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곳에 새로 만석보를 만들어 군민들에게 물세를 물렸고, 이에 전봉준 등이 주동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자 사발통문을 쓰고 농민들과 함께 관아를 습격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었다. ●“농민도 성실히 일하면 잘사는 사회”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면, 고창은 동학농민군의 조직·사상이 잉태된 곳”이라고 고창군 관계자들은 말한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갑오년 음력 3월 20일 고창지역에 있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무장현에서 봉기를 했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충청도는 물론 경상·강원·황해도 등 전국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손화중은 당시 최시형과 함께 양대 동학접주 중 하나였다. 이런 점에 주목한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길은 전봉준로, 녹두로와 함께 동학농민군로, 손화중로 등으로 그 의미를 담고 있다. ‘인민은 나라의 근본이요, 그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진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만 꾸미고 오직 제 혼자 온전할 방법에만 힘쓰면서 녹봉과 벼슬자리만 도둑질하니 어찌 다스려지리오’ 동학농민군로가 끝나는 지점인 전남 영광과 접한 무장현 봉기 장소에 있는 기념비에는 당시 만들어진 이 포고문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정부관료들에게 훈계해도 될 법한 글귀다. 농민이기도 한 진 소장은 “무장포고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저임금은 서푼어치라도 매년 오르지만, 쌀값만은 십수년째 16만원 내외로 같은 값이다. 정부는 전 국민을 먹여 살리는 국가기간산업인 농업을 경시하고 있다.”면서 “농민도 성실히 일하면 국민평균소득 정도는 벌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118년전 동학농민군이 이루고자 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사회모습”이라고 강조했다. ●민란 아닌 혁명인 이유는 ‘인권중시사상’ 과거 고부군에 속했고 지금은 부안군에 속한 백산(白山). 이곳에서 열린 백산대회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신나는 장면 중 하나다. 해발고도 47m에 불과한 낮은 산인 백산은 사방이 평야지대에 홀로 솟아 시야 확보가 쉽고, 호남 서부지역 교통의 요지였다. 정읍 배들평야 쪽에서 이곳 백산까지가 동학로라 이름 붙여졌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갑오년 음력 3월 25~26일 1만명 가까운 농민군이 모였다. 전봉준 장군을 총대장으로 조직이 재편됐고 호남·호서 일대에 격문이 나붙었다. 백산에서 농민군 군율인 4대 명의·12조 기율도 제정된다. 왜 동학농민혁명이 ‘민란’이 아닌 ‘혁명’이었는지, 이 군율에 나타난다. 4대 명의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함부로 없애지 않는다.’는 내용이, 12조 기율에는 ▲항복한 사람은 따뜻하게 대한다 ▲곤궁한 사람은 구제한다 ▲굶주린 사람은 먹여준다 ▲도주하는 사람은 쫓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은 진휼한다 ▲병든 사람은 약을 준다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때 집결한 농민군은 한 달 뒤 조선왕조의 본향이자 전라도 수도인 전주성 점령까지 승승장구했다. 이런 백산에서의 기억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부안이야말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직접 계승한 곳”이라는 자부심으로 남았다. 정재철 백산고 국사교사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부안에 저항정신·애향심으로 남아 있다.”면서 “그 힘으로 2003~2005년 2년 2개월여 전 군민의 방폐장 반대 시위를 벌인 것”이라고 말했다. 세 지역 중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가장 활발한 곳도 역시 부안이다. 상서면 호암수도원에는 천도교 교구가 설치돼 있고, 주기적으로 집회가 열린다. 민관이 함께 통치하는 집강소를 세우는 등 새 시대를 열어가던 동학농민혁명군은 갑오년 음력 11월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하면서 급격히 쇠퇴한다. 한 달 뒤 전봉준은 옛 친구의 밀고로 전라도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고, 이듬해 을미년 음력 3월 교수형을 당한다. 이런 안타까운 결말에 민초들은 이런 노래를 남겼다. ‘가보(甲午·1894년)세. 가보세. 을미(乙未·1895년)적 을미적 병신(丙申·1896년)되면 못 가보리’ 혁명이 성공했다면 달랐을까. ‘동학로’라 이름붙여진 서로 다른 길들은 한결같이 가난한 농촌길이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좋아 이 지역 쌀 생산은 전국 최고지만, 농민들의 소득은 여전히 밑바닥이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10회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 약수로를 소개합니다.
  • 김광두·안종범·윤병세 등 정책전문가 ‘선봉’

    김광두·안종범·윤병세 등 정책전문가 ‘선봉’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인력 풀은 국가미래연구원 등 정책 주도 학자 그룹, 친박 신·구주류와 원로 멤버 등 정치인 그룹, 비상대책위 그룹, 실무 비서진 그룹으로 나뉜다. 정치인 중심이었던 2007년 경선 캠프와 달리 정책 중심으로 진용이 구축되면서 국가미래연구원 출신 인사들이 부각되고 있다. 국가미래연구원은 2010년 12월 설립된 박 전 위원장의 싱크탱크다. 회원들이 캠프 요직에 임명되면서 자연스레 박근혜의 ‘두뇌집단’으로 떠올랐다. 연구원장인 김광두 서강대 명예교수, 안종범 의원을 비롯해 정책위에 합류한 윤병세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수석, 현명관 전 전경련 부회장, 기획조정특보를 맡은 최외출 영남대 교수 등이 연구원 멤버다. 경제 전문가인 강석훈 의원도 2007년 경선에 이어 박근혜 경제공약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정치권에선 최경환 캠프 총괄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친박 신주류가 핵심으로 떠올랐다. 박 전 위원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최 총괄본부장은 4·11 총선 공천 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비판에 휘둘리기도 했으나 캠프를 총괄하는 중임을 맡으면서 굳건한 입지를 재확인했다. 비서실장 출신으로 직능본부장인 유정복 의원, 조직본부장 홍문종 의원, 비서실장 이학재 의원, 윤상현 공보단장 등도 신주류로 분류된다. 박근혜의 입 역할을 자처했던 이정현 최고위원, 2007년 경선 캠프 대변인이었던 김재원 의원도 신주류로 구분된다. 이들이 박 전 위원장에게 직언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면 친박 구주류는 대선 국면에서 박 전 위원장과 서먹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07년 경선 당시 좌장이었던 김무성 전 의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유승민 의원, 재벌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이혜훈 의원 등이 그들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김용환 새누리당 고문을 필두로 한 원로그룹 7인회와 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은 후방 지원군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비대위원장 시절을 함께한 비대위, 공천심사위 멤버들은 가장 최근에 합류했다. 청와대 경제수석 출신의 김종인 공동선대위원장은 새누리당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 개념을 도입한 주인공이다. 그가 박 전 위원장 경제공약을 중도로 수렴해 지지층을 확대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반 MB’ 성향의 이상돈 중앙대 교수도 비대위원 출신으로 캠프에 합류했다. 비서진 그룹은 박 전 위원장의 1998년 정치 입문 이후 한솥밥을 먹어온 이재만·이춘상 보좌관, 정호성·안봉근 비서관이 대표적이다. 친박 의원들의 보좌진인 음종환, 남호균, 김춘식, 이희동, 이동빈, 이춘호 보좌관도 박 전 위원장이 직접 인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사상계, 초기 박정희정권과 어떤 관계였나”… 정진아 건국대 교수 논문

    “사상계, 초기 박정희정권과 어떤 관계였나”… 정진아 건국대 교수 논문

    ‘사상계’는 1960~70년대 가장 대표적인 ‘민족적 저항 잡지’로 손꼽힌다. 1970년 5월 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폐간 처분을 받고 사라진 것도 지식인들에게는 ‘저항’을 떠올리는 역사의 한 장면이 된다. 그러나 사상계와 박정희 정권이 처음부터 악연은 아니었다. 사상계의 경제부문 편집위원들은 군사정권의 경제개발정책 골격을 형성할 만큼 협조적이었다.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 수립, 농업과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 7%대의 높은 성장률 추구, 국민의 소비절약과 내핍의 일상화, 수출증가 등이 그것이다. 정진아(43)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는 신간 ‘냉전과 혁명의 시대 그리고 사상계’(작은 소명출판 펴냄)에 실은 소논문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사상계 경제팀의 개발담론’에서 사상계와 박정희 정권의 관계를 파헤쳤다. 사상계 인사들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4·19 민주주의 혁명의 계승자로 바라보며 장면 정부의 무능을 극복하려는 불가피한 혁명으로 평가한 것이다. 당시 지식인 대부분이 호의적이었다. 정 교수는 “지식인들은 박정희 등 군사쿠데타 세력들이 ‘혁명 과업을 완수한 뒤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처음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 호응 따라서 사상계 경제부문 편집위원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과 각 부처 장관의 고문 등으로 참가했다. 특히 김준엽은 고문 요청을 거절했다가 장준하 등의 적극적인 권유를 받아들여 수락했다.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제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성안 과정에 사상계 편집위원인 성창환 고려대 교수와 이정환 연세대 교수가 참여했다. 정 교수는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한 상황에서 사상계 소장 학자들의 경제개발론을 포용해 환심을 샀지만, 정책 운용에서 점차 노선을 달리했다.”고 말했다. 사상계와 박정희 군사정권 사이의 틈은 군사정권이 한일회담 과정에서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려고 하자 벌어졌다. 사상계 측은 대일 청구권 문제를 우선 해결한 뒤 국교를 수립하고, 그 뒤에 일본과의 경제실무를 협의하는 한·일 협정을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결과는 반대였다. 이어 군사정권이 군정 연장을 시도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버리고 원칙 없는 한일회담을 강행하자 사상계는 1962년 7월부터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 “의욕의 과잉”, “체계화되지 않은 혼합경제 정책으로 혼란 가중”을 들어 비판하기 시작했다. 1년 2개월의 밀월이 박살 나는 순간이다. 군사정권도 중앙정보부를 설치해 대민 사찰을 강화하고,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해 정적들을 숙청해 나갔다. ●‘민생 vs 국가부흥’ 가치 엇갈려 정 교수는 “사상계는 경제개발안에서 일자리 창출 등 ‘민생’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군사정권은 ‘민족과 국가의 부흥’이라는 전체주의적 가치에 역점을 뒀다. 또한 사상계가 민주화와 산업화의 동시 진행을 요구한 반면, 군사정권은 산업화 이후에 민주화를 주장해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형식적인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게 됐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현재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극심한 양극화나 민주주의의 제한 등은 모두 선(先) 산업화, 후(後) 민주화를 주장했던 박정희 정권 때부터 배태된 것”이라며 “파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그때그때 해결하지 못한다면 파이를 다 키운 뒤에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1960년대 경제개발의 교훈”이라고 지적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박근혜의 인생역정… 현대사 담긴 ‘질곡의 삶’

    박근혜의 인생역정… 현대사 담긴 ‘질곡의 삶’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대권을 향한 재도전의 길에 섰다. 12월 대선에서 당선된다면 우리나라 첫 여성 대통령이자 아버지와 딸이 대통령이 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올해로 만 60세인 그는 나이만큼 흘러온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질곡의 삶을 살아왔다. 양친을 모두 흉탄으로 잃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비운의 공주’이자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과 14년간 이어온 의정 활동을 디딤돌 삼은 정치 지도자다. 박 전 위원장은 1952년 2월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 사이의 2녀 1남 중 장녀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9살이던 1961년 육군 소장이던 부친이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을 잡았고 1963년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박 전 위원장은 1979년까지 청와대, 권부의 핵심에서 정치와 권력을 배웠다. 성심여고를 거쳐 이공계인 서강대 전자공학과(70학번)를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부국강병을 앞세운 선친의 영향이 컸다. 인생의 첫 굴곡은 22살 때 찾아왔다.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간첩 문세광의 총탄에 절명했다. 신문기사로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만볼트의 전기가 훑고 지나가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삶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퍼스트 레이디 대행’이라는 굴곡진 공인의 길로 들어섰다. 원칙주의자 박근혜의 모습은 이즈음부터 서서히 드러난다. 사소한 국정도 수첩에 일일이 기록하며 챙겼다. 폭설이 온다는 날씨 정보만 나와도 “전국을 빠짐없이 챙기라.”며 청와대 참모진 보고를 메모했다는 일화가 있다. 10·26 사태가 난 이튿날 새벽 1시, 유고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첫마디는 “전방의 상태는 괜찮습니까.”였다. 이후 서울 중구 신당동 옛집에서 보낸 18년간의 야인 생활 동안 그는 아버지 저격범 김재규를 비롯해 박정희 체제를 누렸던 이들의 배신으로 인해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저서인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에는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배신하는 사람의 벌은 다른 것보다 자기 마음 안의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성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는 점이다.”라고 나와 있다. IMF 사태 직후인 1998년 15대 국회의원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박 전 위원장은 원칙 정치의 외길로 접어들었다. 당 대표 시절엔 ‘수첩공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세세히 기록하는 면모가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천막당사 2주년인 2006년 3월 한국 정당 최초로 ‘대국민 실천백서’를 출간한 것도 이런 소신의 방증이다. 정치인으로서 박근혜가 주목받은 사건은 2000년 당 총재 경선 때다. 경선에서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부총재로 당선됐으나 이듬해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해 당 개혁안을 요구하며 탈당, ‘미래연합’을 창당하는 강단을 보였다. 2002년에 재입당한 그는 불법 대선 자금 수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침몰 직전이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았다. 국민 앞에 과거를 반성하고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의미에서 ‘천막당사’를 감행했고 직후 치러진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싹쓸이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121석이라는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면서 그는 ‘선거의 여왕’이 됐다. 2009년 9월부터 1년 넘게 이어진 세종시 수정 논란은 ‘박근혜 원칙론’의 대표 격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때 약속했던 ‘행정복합도시’를 ‘교육과학 중심 경제도시’로 바꾸려 하자 박 전 위원장은 세종시 원칙론을 고수하며 정부 수정안을 무산시켰다. 원칙주의자로 비치는 그의 모습은 그러나 ‘불통 이미지’라는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대권 주자로서 가장 큰 한계점이기도 하다. 이런 당 안팎의 비판에 대해 박 전 위원장은 10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소신과 불통을 구분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박근혜 대선 출사표… 키워드는 ‘국민행복’

    박근혜 대선 출사표… 키워드는 ‘국민행복’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10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박 전 위원장은 오전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지지자 4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출마 선언식을 갖고 “국민 모두가 각자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길에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면서 18대 대선 출사표를 던졌다. 박 전 위원장은 “국정 운영의 패러다임을 국가에서 국민으로, 개인의 삶과 행복 중심으로 확 바꿔야 한다.”면서 ‘국민 행복’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실제 박 전 위원장은 이날 30여분 동안 이뤄진 연설에서 ‘국민’을 무려 74차례 언급할 정도로 강조했다. 박 전 위원장은 국민 행복을 위한 3대 핵심 과제로 ▲경제 민주화 실현 ▲일자리 창출 ▲한국형 복지 확립을 제시했다. 그는 “경제 민주화를 통해 중소기업인을 비롯한 경제적 약자들의 꿈이 다시 샘솟게 하겠다.”면서 “고용률 중심의 국정 운영 체제를 구축하고 생애 주기별 맞춤형 복지제도를 확립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경제 민주화와 일자리, 복지를 아우르는 ‘5000만 국민 행복 플랜’을 추진하겠다.”면서 “복지 수준과 조세 부담에 대한 국민 대타협을 추진하겠다.”고 제안했다. 박 전 위원장은 출마 선언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재벌의 지배 구조 개선과 관련, “기존 순환 출자된 부분은 현실성을 감안할 때 기업 판단에 맡기더라도 신규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규제가 검토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 대기업 총수의 사면 복권 문제에 대해 “구형을 받았는데 얼마 있으면 또 뒤집혀 법치를 바로잡는 데 굉장히 악영향을 준다.”면서 제한 가능성을 시사했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이자 5선 국회의원인 박 전 위원장의 대선 도전은 2007년에 이어 두 번째다. 5년 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패했으나 이후 ‘대세론’을 형성하며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발돋움했다. 한편 박 전 위원장은 출마 선언 이후 첫 외부 일정으로 11일 충청 지역을 방문한다. 대선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충청권을 공략하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평등 실현으로 경제·국가운영 근본 바꿔야”

    “평등 실현으로 경제·국가운영 근본 바꿔야”

    “2012년 대통령 선거는 ‘국민 아래 김두관’과 ‘국민 위의 박근혜’의 대결이다.” 민주통합당 김두관 전 경남지사는 8일 한반도 최남단인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정조준했다. 1988년 경남 남해 이장, 1995년 남해 군수로 정계에 본격 입문한 지 17년 만에 대선 무대의 도전자가 되는 드라마틱한 인생 주인공이 됐다. 김 전 지사는 이날 평등을 국정 키워드로 내세워 “올해 시대정신은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신자유주의를 극복해 평등국가를 여는 것”이라며 “평등국가의 실현을 통해 경제 체질과 국가운영의 근본을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출마 연설에는 ‘평등’이라는 단어가 21차례, ‘서민’이 14차례, ‘재벌’이 10차례 등장했다. 대선 슬로건 역시 ‘내게 힘이 되는 나라, 평등국가를 향하여’를 제시했다.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세상은 평등이 기본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라며 “새로운 대한민국을 추동하는 힘은 평등과 균형”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지사는 12월 대선 구도에 대해 “대한민국을 크게 바꾸자는 세력과 이대로 좋다는 세력 간의 대결이며, 재벌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세력과 재벌의 부당한 횡포를 막아내야 한다는 세력 간의 대결”로 규정하며 “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해 대한민국이 특권·재벌공화국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 전 지사는 출정식에서 대규모 지지세를 과시했다. 원혜영, 김재윤, 안민석, 김영록, 문병호 의원 등 의원 멘토단 7명과 천정배 전 의원 등 원외 15명, 생활정치포럼·자치분권연대 등 외곽 조직 및 팬클럽인 ‘피어라 들꽃’ 인사와 지역 주민 등 6000여명이 ‘김두관’을 연호했다. 그는 출마 선언 후 곧바로 22일까지 보름 동안 전국을 도는 ‘김두관의 시민대장정’에 올랐다. 그의 삶은 좌절과 패배의 가시밭길이었다. 마늘 농사를 짓는 빈농의 아들로 남해종합고를 다니다 1977년 국민대에 합격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했다. 그러고는 2년 뒤에 경북전문대에 입학했다. 25세 때인 1986년 재야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로 활동하다 직선제 개헌투쟁 청주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다. 농민운동가로 30세에 마을 이장이 된 후 최연소인 36세로 남해 군수에 당선됐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남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참여정부 첫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된 지 7개월 만에 한총련의 미군부대 기습시위 사건으로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3·17·18대 총선에서 3전 전패했고 2002년, 2006년 경남지사 선거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신 뒤 2010년 6월 무소속 야권 단일후보로 경남지사가 됐다. 6전 5패의 선거 전적은 거꾸로 그를 ‘오뚝이’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정계에서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는 김 전 지사는 당내에서는 탈친노(친노무현) 행보로 ‘친노 적자’인 문재인 상임고문과 대조적인 발걸음을 하고 있다. 김 전 지사는 출사표를 던지면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 “나는 친노에서 육두품이고 친노 그룹의 지분은 1%에 불과하다.”고 말했었다. 자신의 자서전 ‘아래에서부터’에서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주군과 참모의 관계가 아닌 동지적 관계”라고 기술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대해 “안 원장이 50%의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한 민주당 주요 후보들의 지지가 오르지 않을 것이며 어떤 형태로든 (안 원장이) 정리되면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1987년 체제 출범 후 25년이 지난 만큼 개헌이 필요하다.”며 “5년 단임의 대통령중심제를 개혁하기 위해 대선에서 승리하면 개헌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안동환·해남 이범수기자 ipsofacto@seoul.co.kr
  • 김두관 주요 정책공약

    김두관 주요 정책공약

    김두관 전 경남지사는 8일 대선출마를 공식화하며 ‘평등국가’를 비전으로 내세웠다. 김 전 지사는 해남 땅끝마을에서 열린 대선 출마 선언식에서 “2012년의 시대정신은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신자유주의를 극복해 평등국가를 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그가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논어의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백성들은 가난한 것에 노하기보다는 불공정에 화낸다)이라는 구절과도 맥이 닿아 있다. 김 전 지사는 ‘평등’을 근간으로 한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중요 의제로 설정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매월 실질 생계비를 50만원씩 줄이겠다고 밝힌 뒤 음성과 문자 무료화 등 통신비 절감, 정유사 원가검증제도 및 주택수당 도입, 간병비 건강보험 적용 등을 주요 공약으로 정했다. 이 외에도 지방의 국공립대학부터 반값 등록금 실현, 직업교육형 고등교육 전면 무상화, 사회균형선발 30%까지 의무화, 공공부문의 채용에 지역인재 할당제 도입을 공약했다. 노인들을 위한 정책으로는 기초노령연금 임기 내 2배 인상, 틀니 건강보험에서 전액 지원을 내걸었다. 육아 문제에 대해서는 급여를 통상임금의 40%에서 50%로 확대, 아빠들의 육아휴직 실질화, 직장보육시설을 300인 이하인 경우에도 설치하도록 했다. 김 전 지사는 현재 8대2인 중앙과 지방의 재정 비중을 선진국 수준인 6대4로 개선함으로써 지방분권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경제 공동체 강화를 위한 정책으로는 제2, 제3의 개성공단 설립, 남과 북의 지하자원 공동개발, 취임 원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해남 이범수기자 bulse46@seoul.co.kr
  • [한·일정보협정 파장] 野 “국가간 협정을 2개월간 대통령이 몰랐다니…”

    민주통합당은 지난 5월 초 정부가 한·일 정보보호협정과 관련해 일본과 가서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김황식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김관진 국방부 장관에 대한 해임 촉구 결의안을 제출하기로 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3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대통령은 ‘몰랐다’고 화내고 청와대와 관계 부처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대통령이 화낼 일이 아니라 책임질 일”이라며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와 총리 등 관계자의 인책, 한·일 정보보호협정 전면 백지화를 촉구했다. 특히 전날 정부가 국방부 정책실장과 외교부 국장이 이용섭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찾아와 국무회의에서 통과할 것이라고 보고했다는 발표를 번복한 것과 관련해 “이 정책위의장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자 발표 1시간 만에 (발언을) 취소했다. 왜 야당을 걸고 넘어지느냐. 장·차관도 모르게 즉석 안건으로 상정하고는 통과되자 발표도 하지 않으면서 야당 정책위의장에게 보고했겠느냐. 참 한심하다.”고 비판했다. 이 정책위의장은 기자들과 만나 “청와대의 반응을 지켜본 뒤 조만간 김 총리와 외교·국방 장관에 대한 해임 촉구 결의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대선을 앞두고 정부·여당에 외교, 안보의 ‘실정’ 책임을 물어 ‘레임덕’을 가속화시키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정성호 대변인은 5월 협정 가서명에 대해 “두 달 전에 만들어졌는데도 숨긴 것은 처음부터 밀실 처리를 작정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대통령은 꼼수로 국민을 희롱하지 말고 협정 밀실 추진에 대해 사죄하고 책임자를 모두 문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은 또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게 한·일 정보보호협정 폐기에 동참하라며 공세를 퍼부었다. 박 원내대표는 “박 전 비대위원장이 그동안 아무 소리 않다가 다시 국회에서 논의하고 연기된다 하니 절차상 유감을 표명했는데 다 된 밥상에 숟가락 놓을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정 대변인은 “한·일 협정 원조는 196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졸속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면서 “박 전 비대위원장은 당시 혼란이 되풀이되기 전에 협정 폐기에 동참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이무생 “서부극·에로틱 코미디 다 어울려 밋밋한 얼굴이 나만의 경쟁력”

    이무생 “서부극·에로틱 코미디 다 어울려 밋밋한 얼굴이 나만의 경쟁력”

    순제작비 10억원 이하를 보통 저예산 영화로 본다. 저예산 영화 중에는 공들여 촬영을 끝내고도 창고에서 썩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오는 12일 개봉하는 봉만대 감독의 에로틱 코미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이하 ‘섹거비’·제작비 1억 5000만원)와 지하진 감독의 서부극 ‘철암계곡의 혈투’(이하 ‘철투’·제작비 4000만원)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두 작품의 출연진을 살펴보니 주연배우가 같았다. 고창석, 이문식, 성동일 등 충무로의 조역 감초배우라면 몰라도 주연배우가 같은 영화가 한 날 개봉하는 건 드문 일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데 이름은 낯선 이무생(32)이 주인공이다. 운이 좋다 할 수도 있지만, 우산 장수, 나막신 장수 아들을 둔 부모 마음일 수도 있겠다. 저예산 영화라면 개봉 첫주 흥행에 따라 1주일 만에 간판이 내려지는 게 이 바닥 생리다. 이무생은 “개봉 못 할까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다. ‘철투’는 이미 2년 전에 찍은 영화다. 그동안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안절부절못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느긋해지자는 주의”라고 말했다. 신인치곤 담담한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런 것은 아니고요. 엄청 기쁘죠. 가슴도 쿵쾅거리고….”라며 슬쩍 웃는다. 어린 시절 3인조 악당-작두, 도끼, 귀면-에게 일가족을 잃은 한 남자가 강원도 탄광촌을 배경으로 악당들을 처단한다는 내용의 ‘철투’는 2010년 10월쯤 찍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10분짜리 영화학교’란 책을 읽고 서부극을 기획했다.”는 게 지하진 감독의 설명. 일부러 못 찍은 B급 영화 정서를 풍기고 싶었다는 얘기다. 이무생은 “(한국형 서부극이라는 게)나도 의아했다. 감독을 만났더니 웨스턴에 대한 확신이 넘쳤고, 예산 내에서 어떻게 표현할지도 확고했다.”고 말했다. 4000만원짜리 영화이니 현장의 열악함은 불 보듯 훤했다. 그는 “유리조각과 석탄가루가 날리는 폐광촌에서 액션 장면을 찍는다는 게 육체적으로는 괴로웠다. 그런데 한달 동안 아파트를 얻어 감독과 배우, 스태프가 합숙을 하다 보니 대학 때 MT를 온 것처럼 가족적인 분위기가 조성돼 좋았다. 저예산의 어려움을 가족애로 극복했다.”며 웃었다. 고생한 덕인지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2관왕(유럽판타스틱영화제연맹 아시아 영화상·후지필름 이터나상)을 받았고, 몇몇 해외영화제의 초청도 받았다. 한국 성인영화의 거장으로 통하는 봉만대 감독의 복귀작 ‘섹거비’는 올 초에 찍었다. 1996년 포르노 유통시장의 먹이사슬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경제적 압박에 몰려 가짜 스너프 필름을 찍는 영화감독 경태 역을 맡았다. 세운상가에서 탱크도 만들고 총도 만든다는 우스갯소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박정희 정권 때 핵개발의 중심이 청계천이었다는 황당한 음모이론을 코미디의 요소로 끌어 왔다. 그는 “알고 지내던 조감독 형님이 밤 9시쯤 전화를 걸어와 봉 감독과 당장 만나보지 않겠냐고 했다. 봉 감독은 (그의 전작처럼) 섹스 장면을 야하게, 흥분시키듯 찍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사랑이 없는 섹스, 음지에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군상들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크랭크인 한달 앞서 결혼을 한 터라 ‘야한’ 영화가 부담됐을 법도 했다. 두 차례에 걸쳐 극 중 여배우와의 정사 장면이 나오기 때문. 그는 “부담이 되긴 했지만, 특정 장르를 피할 생각은 없었다. 소재가 다를 뿐이지 에로틱한 장면도 연기다. 다른 반찬으로 밥을 먹는 것과 한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아내와 같이 영화를 봤는데 별 얘기는 안 했던 것 같다. 재밌다고만 했다. 솔직히 미안하긴 하다. 아내는 말을 안 했지만, 지인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면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니까.”라고 덧붙였다. 두 작품 모두 B급 영화의 정서가 짙은 데다 난이도(?) 높은 장면도 유독 많았다. 이무생은 “우연히 B급영화스러운 작품을 거푸 찍었다. 딱히 그쪽 취향인 건 아니다.”라면서 “‘섹거비’는 4월 초 바닷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카섹스 장면을 찍었기 때문에 고생스러웠다. 하지만 물리적 고통은 탄광촌에서 찍은 ‘철투’가 훨씬 심했다.”고 털어놓았다. 2007년 연극 ‘그놈, 그년을 만나다’, 영화 ‘방과후 옥상’으로 데뷔했으니 어느덧 6년차다. 아직 성공에 대한 초조함은 없다고 했다. “대중에게 각인되고 싶은 욕심은 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 있다. 일희일비하지 않는다.”고 했다. 끝으로 그에게 배우로서 본인의 장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꽃미남도 아니고 못 생긴 것도 아니다. 밋밋하니까 다양한 색깔을 입힐 수 있는 게 나의 경쟁력”이라며 활짝 웃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11) 시사만화의 어제와 오늘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11) 시사만화의 어제와 오늘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대명사로 군림해 온 시사만화가 여러 해째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권력을 풍자하고 사회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며 서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픔을 대변했던 시사만화가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 무대였던 신문 지면에서 점차 밀려나고 있다. 독자들이 신문을 펼치면 가장 먼저 찾을 만큼 높았던 열독률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위기의 시사만화의 과거를 짚어보고 온라인시대 부활의 가능성을 모색해 본다. 우리 만화의 역사는 시사만화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1909년 이도영 화백이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게재했던 삽화를 근대 만화의 출발로 보는데, 그게 바로 시사만화다. 시사만화는 이렇듯 언론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와 친일파를 풍자하며 민초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대한민보는 일제의 사전 검열에 맞서 시사만화 게재란을 먹칠해 인쇄한 적도 있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시사만화의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등 독재와 억압 속에 말 한마디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시절, 시사만화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했다. 1950년대 들어 시사만화의 스타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대중적인 스타는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동아·조선 등)이다. 이승만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며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고바우 영감에 이어 안의섭 화백의 ‘두꺼비’(경향·한국 등), 김기율 화백의 ‘도토리’(서울), 정운경 화백의 ‘왈순 아지매’(경향·중앙 등), 윤영옥 화백의 ‘까투리 여사’(서울), 오룡 화백의 ‘야로씨’(조선), 이홍우 화백의 ‘나대로 선생’(동아) 등이 차례차례 스타로 떠올랐다. 시사만화의 기본이 권력에 대한 풍자라 필화(筆禍)도 많았다. 대표적인 게 1958년 김성환 화백의 ‘경무대 똥통’·1972년 윤영옥 화백의 ‘새마을 운동 비판’·1986년 안의섭 화백의 ‘대통령 모욕’ 사건 등이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시사 만화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당시 일부 네 칸 만화들은 시대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고, 군사 정권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박재동이란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한겨레 그림판을 통해 참신하고 진보적인 한 칸 만평을 선보이며 스타로 떠올랐다. 이는 신문 시사만화의 주류가 ‘네 칸 만화’에서 ‘한 칸 만평’으로 이동하는 세대 교체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후 김상택(경향·중앙)·백무현(서울) 화백 등이 한 칸 만평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시사만화의 위기가 시작된다. 민주화 이후 만평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언론사들은 시사만화 지면을 점점 줄여나갔다. 2002년 동아일보는 손문상 화백이 떠나며 만평의 맥이 끊겼다. 2004년에는 문화일보와 세계일보가 각각 이재용, 조민성 화백과 갈등을 빚으며 만평을 내렸다. 2007년 매일경제 이필선 화백, 2009년 중앙일보 김상택 화백, 2011년 조선일보 신경무 화백이 지병으로 세상을 뜨며 만평이 자취를 감췄는데, 중앙일보만 박용석 화백이 맥을 잇고 있다. 시대를 풍미하던 네 칸 만화는 상황이 더욱 열악하다. 1999년 조선일보 ‘미스터 삐삐’(안중규), 2002년 중앙일보 ‘왈순 아지매’, 2004년 한겨레 ‘미주알’(김을호), 2008년 동아일보 ‘나대로 선생’이 차례차례 연재를 중단했고 이후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다. 전국 단위 일간지가 한 칸 만평, 네 칸 만화를 모두 게재하던 시절은 옛말이 됐다. 네 칸 만화를 계속 연재해 온 전국 단위 일간지는 서울신문·경향신문·매일경제밖에 없다. 한 칸 만평과 네 칸 만화를 모두 다뤄 온 곳은 서울신문·경향신문뿐이다. 시사만화가 위축되고 있는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시대의 변화다. 과거와 달리 권력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수단이 많아졌고 그 경쟁에서 시사만화가 조금씩 밀려났다. 오프라인 매체의 권위가 무너진 온라인 시대가 오며 사회 풍자 기능을 인터넷 콘텐츠에 상당 부분 내주게 된 것. 언론사 내부의 원인도 있다. 민주화 이후 저항 대상이 정치 권력에서 자본 권력으로 이동했고, 광고주와의 관계를 고려한 언론사 내부 편집 방침과 시사만화가들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언론사들도 부담스러운 시사만화 게재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무한경쟁 시대에 광고매출 감소로 경영난에 봉착한 중소 언론사들은 구조조정 1순위로 시사만화를 올려 놓는 분위기다. 시사만화를 부활시키려면 시사 만화계 자체는 물론이고 언론계의 노력이 절실하다는 의견이 많다. 많은 전문가들이 내부 편집 방향에 얽매이지 않고 시사 만화가의 소신과 창작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독자를 사로잡을 화제작이 자주 나올 수 있도록 작업 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매일 마감을 해야 하는 국내 시사 만화가들은 외국에 비해 정신노동의 강도가 매우 높다. 정치·경제·사회 등 전문 분야별로 전담 시사 만화가를 둬 높아진 독자 수준을 충족시킬 만한 전문성과 깊이를 갖추고 이를 통해 노동 강도를 낮춰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시사 만화계 내부의 변화도 절실하다. 독자의 관심과 욕구가 다양해진 만큼 그동안 갇혀 있던 정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시사만화의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양한 형식 파괴를 시도하며 새로운 시대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필요성도 제기된다. 시사만화 인력이 정체된 만큼 후진 양성 시스템을 고민해 볼 시기다. 현재 전업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사 만화가는 30명 안팎. 그나마 정규직은 10명가량이다. 좁은 시장 탓에 시사 만화가 지망생도 갈수록 줄고 있다. 김을호 화백 이후 여성 시사 만화가는 맥이 끊긴 상태다. 기성 언론에 소속된 시사 만화가에 견줘 상대적으로 더 많은 창작의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에 인터넷 미디어를 통한 시사만화가 늘고 있지만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에는 경제적 기반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새로운 시사만화 플랫폼을 만들어 저변을 넓히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지면이 있는 작가와 지면이 없는 작가 모두를 통합할 수 있는 시사만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배포하고 여기에서 수익 구조를 만들어 작가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다. 앞으로가 매우 중요하다.”(하재욱 전국시사만화협회 사무국장·시사만화가)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행정수도 위헌 결정에 행복도시로 부활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행정수도 위헌 결정에 행복도시로 부활

    ‘행정수도→위헌판결→행정도시(세종시)로 변경→세종시 착공→수정안 논란→수정안 국회 부결’ 세종시의 원조인 행정수도 건설계획은 2002년 9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 내놓았다. 오는 9월부터 총리실을 필두로 중앙 행정기관 이전이 이뤄져 세종시는 첫 구상 이후 꼭 10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한계에 부딪힌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고 낙후된 지역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남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균형발전론이다. 충남 연기군과 공주시 72.91㎢가 예정지로 정해졌다. 정부는 2004년 신행정수도특별조치법을 공포했으나 최상철 서울대 교수 등이 헌법소원을 제기, 그해 10월 21일 위헌 판결이 났다. 헌법재판소는 “행정수도 건설 계획은 우리나라 수도가 서울이라는 관습 헌법을 위배했다.”고 보았다. 위헌 판결이 나자 주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땅값이 다락같이 뛰는 것을 믿고 보상도 받기 전에 대출받아 인근 부여·논산 등에 논밭을 산 상태에서 행정수도가 백지화되면 땅값 폭락으로 하루아침에 쪽박을 찰 처지였기 때문이다. 2004년 9월 말까지 행정수도 예정지 주변 농협이 대출한 돈은 모두 1100억원대에 달했다. 주민들은 곧 행정수도 사수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매일같이 집회를 열고 생존권 투쟁에 나섰다. 헌법재판관과 한나라당 허수아비에 불을 붙이며 격렬한 분노를 쏟아냈다. 정부는 청와대 등을 제외한 상당수 정부 부처만 옮기는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로 방향을 바꿨고, 2005년 3월 관련 특별법이 국회에서 의결됐다. 하지만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3개월 뒤 행정도시는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수도 분할반대 범국민운동본부에서 행정도시건설 특별법 위헌확인 소원을 헌법재판소에 재차 낸 것이다. 원주민들은 다시 들고일어났다. 시민사회단체도 동참했다. 헌재는 그해 11월 위헌확인 소원을 각하했다. 2006년 1월 행정도시건설청이 개청됐고, 토지보상 등에 나섰다. 행정도시 이름도 국민공모를 통해 ‘세종시’로 확정했다. 세종시는 2007년 7월 마침내 착공됐으나 1년도 못가 또다시 흔들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취임 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세종시에 유치해 명품도시를 만들겠다.”고 했고, 여당은 같은 해 6월부터 “세종시는 자족 기능이 없어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수정안’이다. 수정론자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국무총리가 되자 주민들의 저항이 불을 뿜었다. 전국 200여 시민사회단체도 나서 ‘원안사수’에 힘을 보탰다. 결국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됐다. 이어 12월 세종시설치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면적이 지금의 465.23㎢로 확대됐다. 첫 구상부터 6년간의 대장정 끝에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도이전 프로젝트인 백지계획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가 백지화된 바 있는 충남 연기·공주 지역은 비로소 세종시로 그 꿈을 실현했다.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지금&여기] 이름에서 ‘은행’ 떼는 저축은행/윤창수 경제부 기자

    [지금&여기] 이름에서 ‘은행’ 떼는 저축은행/윤창수 경제부 기자

    저축은행의 옛 이름인 상호신용금고의 탄생은 1972년 ‘8·3 경제조치’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대통령은 8월 3일 이후로 사채는 갚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했고, 어두운 돈이 양지로 나오면서 현재 재벌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기업이 사채를 빌리지 못하도록 하면서 대신 만든 것이 상호신용금고다. 2002년 이름을 바꾼 상호저축은행은 은행보다 예금 금리는 높은 대신 대출 절차가 간편해 불법 대출의 온상이 됐다. 김대중 정부 말기의 온갖 게이트도 저축은행과 얽혔다. 2000년 장래천 전 금융감독원 비은행감독 1국장이 서울 시내 한 여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권력자와 브로커, 기업인이 얽힌 추악한 진실이 땅속으로 묻혔다. 이명박 정부 ‘레임덕’의 진앙도 저축은행이다. 대통령의 형을 비롯해 정치인들이 줄줄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 지난해 1, 2차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환골탈태를 선언한 금융감독원은 3차 구조조정까지 진행하면서 여러 터널을 지나왔다. 저축은행 검사를 담당했던 직원은 대낮에 알 수 없는 폭력을 당하기도 했고, 정신 치료를 받는 직원들도 여럿 생겼다. 저축은행 취재를 담당했던 기자들도 영업정지를 당한 저축은행 직원으로부터 폭언에 시달려야 했다. 조만간 저축은행은 ‘은행’이란 이름을 내놓아야 할 것같다. 새로운 이름은 ‘저축금융회사’가 될 전망이다. 금융 당국은 영업정지된 저축은행을 금융지주가 인수하도록 했고, 은행과 저축은행의 연계 영업을 허용했다. 은행에 대출 상담을 받으러 갔다가 자격이 안 되면 저축은행 상품을 안내받을 수 있는 것이다. 대출모집인에게 갔던 수수료를 절약해 대출 금리가 낮아질 것으로 기대되지만 맹점도 있다. 은행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등을 맞추려고 작은 리스크도 저축은행에 떠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저축은행이 은행이란 이름을 떼고 원래의 목적이었던 서민을 위한 금융기관으로 거듭나 가계부채 대란을 막는 데 작은 밀알이 되길 기대해 본다. geo@seoul.co.kr
  • 이 여인들의 눈물, 외면할 수 있습니까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다룬 ‘학살, 그 이후’(권헌익 지음, 유강은 옮김, 휴머니스트 아카이브 펴냄)는 제사상에 올리는 한 잔의 술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인 저자는 한국인 인류학자다. 인류학자로서 1994년부터 틈나는 대로 베트남을 드나들며 현지조사를 수행했다. 한국인으로서 베트남전 특수로 인해 “내가 살던 가난한 동네에서도 물질적 상황조건이 개선”됐다는, 나중에 깨달은 “도덕적 궁지” 때문이다. 한국인 인류학자로서 저자는 이 책을 “공물(供物)로 내놓는다.”고 해뒀다. 학문적 땀방울 못지않게 인간적 눈물방울이 읽히는 이유다. 저자가 처음 꺼내 놓은 얘기는 1968년 2월 25일 한국군 해병대가 민간인 135명을 학살한 뒤 살아남은 몇몇 주민들이 시체들을 가매장해 둔 것까지 불도저로 모조리 밀어버렸다는 ‘하미 학살’이다.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3월 16일, 미군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이는 ‘미라이 학살’로 널리 알려졌다. 한국군의 행위가 그에 못지않게 잔혹했고, 노엄 촘스키가 “43건의 미라이 학살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을 쓸 정도로 빈번했음에도 왜 미라이 학살만 알려졌을까. “하위 행위자는 폭력적인 마을 평정 작전에서 지배적 행위자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하고도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쉽게 말해 이름을 떨친 종군기자나 연구자들은 미군만 쫓아다녔지, 한국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국가 정체성 운운하며 흥분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을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실제 저자가 만난 학살 생존자들은 시계추처럼 오간 군인들의 극단적 이중성에 곤혹스러워했다. 어제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집 짓는 걸 도와주던 이들이 오늘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는 것이다. 이 극단적 이중성이 어찌 그들 탓이랴. “전쟁이라는 냉혹한 태엽장치에서 시계추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고 “시계추에는 자체의 동학이 있지만 자신의 운동을 통제할 수 없”었을 뿐이다. 저자는 “전후의 삶을 통해 이런 잔인한 동요의 기억과 싸웠다고 믿는다.”는 수준에서 매듭짓는다. 저자가 힘을 모으는 지점은 학살된 이들을 베트남 사람들이 추모하고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저자가 에밀 뒤르켐의 수제자 로베르 에르츠의 ‘상징적 양손잡이’ 개념을 주된 화두로 붙잡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아노미 개념에서 보듯 뒤르켐은 사회적 유대감에 관심을 가졌다. 에르츠는 그다음 단계, 그러니까 사회적 유대가 격렬하게 깨졌을 경우 어떤 양상이 벌어지고 이를 어떻게 봉합할 것인가를 연구했다. 이를 위해 제안한 것이 양손잡이 개념이다. 오른손에게 바른 손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왼손도 함께 바라봐 온전한 양손잡이가 되자는 것이다. 영웅적 군인이 오른손이라면, 학살 피해자는 왼손이다. 저자는 실제 현지조사를 통해 학살 피해자들이 베트남 내부에서도 왼손 취급당했음을 드러낸다. 전쟁 이후 베트남도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수행했다. 전선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젊은이들에게 국가는 전쟁영웅이란 칭호를 부여했고 기념비와 묘지를 바쳤다. 그러나 균열도 드러난다. 북베트남 전사들은 전쟁을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에 투입됐다. 해서 시체를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 웅대한 기념비 옆에 묻으면 된다. 접경지대격인 베트남 중부의 학살 피해자는 다르다. “영웅적 전사자라는 도식 안에서 보면, (학살 피해자들의) 집단 무덤은 재생의 가치가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편의 유해와 상대편의 유해가 뒤죽박죽 엉켜 있는 모호한 대상”이다. 그래서 “혁명 열사들의 유해를 모아 마을의 중심부로 가져왔을 때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유골은 논으로 바꿀 예정인 곳에서 외곽의 모래투성이 황무지로 옮겨졌다.” 비극적 죽음에 눈물 흘릴 공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해원을 위해 사당을 짓고 무당을 불렀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의지할 곳을 잃은 부녀자들이 절과 무당집에 몰려갔듯, 베트남 주민들도 민간전통신앙에 의지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었다. 문제는 국가적 공식 기억에 맞지 않고 과학적 사회주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베트남 정부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이는 딜레마를 낳는다. 전쟁 당시 베트남 인민들이 가장 분노한 것은 외국 군인들이 조상을 모신 사당을 부수고 사람을 함부로 죽였을 뿐 아니라, 장사조차 못 지내게 시체를 마구 훼손하고 뒤섞어 버린 만행이었다. “전쟁 동원 체제에 가장 뚜렷한 기여를 한 조상 사당들이 전쟁이 끝난 뒤에 정치적 불순성과 문화적 후진성의 상징으로 꼽힌 것은 아이러니다.” 이 갈등은 1990년대부터 수면 위로 치솟는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이장운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국가가 조성한 공식 무덤에서 개인 사당으로 유골을 빼내오거나, 버려졌던 유골을 국가의 공식 무덤에 안치하는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베트남전은 이데올로기나 박정희 평가 문제, 유력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 의원의 반발(2001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자 “6·25전쟁에 참전한 16개국도 북한에 사과해야 하느냐.”고 공격했다.) 등이 있어서 한국에서도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빙빙 에둘러 왔지만, 사실 책의 백미는 이 부분이다. 하나만 꼽자면, 하미 전쟁열사묘지에는 ‘전쟁범죄 희생자 35인의 공동무덤’이 있다. 1986년 9월 하미에서는 하미 근처 하지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35명이 학살당한 사건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주민들은 이들 역시 열사라 보고 공식묘지에 묻어 달라고 요구하지만, 정부는 이를 거부한다. “열사란 직접 적과 맞서 싸운 이들”이라서다. 주민들 압력으로 결국 무덤은 조성되지만, 정부는 이들 묘를 파내려고 한다. 그때 주민들은 “낫이나 작대기를 무기 삼아 들었다.” “오늘부터 너희가 우리 적”이라면서. 저자는 무차별적인 학살 때문에 그 수많은 뼈와 해골 가운데 어느 것이 누구의 유골인지 모를 지경이지만, 그럼에도 한 구 한 구 파내 정성스럽게 쓰다듬고 정리하고 가지런히 다시 묻는 이장의 과정 자체가 후손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커다란 치유가 된다는 증언들을 곳곳에서 강조한다. 저자가 끊임없이 길어올리는 것은 ‘농민인지 전사인지 구분 안 되는 악독한 빨갱이 베트콩’ 대신 ‘조상 모시면서 제 땅을 제가 파먹고 살길 원하는, 농경사회라면 흔히 발견되는, 한국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는 농민의 얼굴’이다. “농민 전사들이 군복을 입은 정규군 병사들과 악수를 하고, 정치 장교들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연설을 참고 들으며, 달 없는 밤을 틈타 재빨리 집으로 달려왔을 때, 그들이 여전히 군인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니까 “체제가 공간의 균질성과 정체성의 불변을 고집한 반면, 삶으로 직접 겪는 냉전의 현실은 모순적 공간이나 변증법적 공간이었고, 이러한 현실 속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 동일자가 아니라 쉽게 변화하는 존재였으며, 이런 변형성이야말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제공했다.” 모두가 베트콩이었으되, 그 어느 누구도 베트콩이 아닌 이런 상황을 저자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 책으로 2007년 미국 인류학회가 수여하는 클리퍼드 기어츠상을, 후속작 ‘베트남전쟁의 혼령들’로 2009년 미국 아시아연구협회가 주는 조지 카힌상을 받았다. 해서 책 앞에는 드루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의 서문이 붙어 있다. 한 구절 따온다면 이렇다.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들은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를 위해 죽은 이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가족들에게서 그들을 앗아가 깊은 상처를 남기고 사자(死者)들을 역사의 행위자가 아니라 도구로 뒤바꾼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지금까지도 격렬한 이념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연구가 수행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저자는 한국전쟁 연구 권위자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와 손잡고 ‘한국전쟁을 넘어서’라는 국제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기다려지는 부분이다. 1만 5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씨줄날줄] 과외금지/곽태헌 논설위원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는 대학입시 본고사를 없애고, 예비고사(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과 고교 내신성적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내용이 포함된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을 발표했다. 본고사를 대비해 왔던 당시 고3 수험생과 재수생들은 황당해했고, 대입에 반영되지 않았던 탓에 내신에 신경쓰지 않았던 수험생과 재수생들은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불과 대입이 몇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하룻밤 사이에 입시제도를 뜯어고친 것은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혼란을 준 무모한 ‘졸작’이었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12·12를 거치며 실권을 장악한 서슬퍼런 사실상의 군사정권 시절이니 이런 무지막지한 정책이 가능했다. 당시는 고(故) 최규하 전 대통령 시절이었지만 ‘명목상’이었고, 최고실력자인 육군 중장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때였다. 상식과 합리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지만, 당시 어느 언론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서민과 중산층의 환영을 받은 대책은 ‘과외금지’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많은 욕을 먹지만, 지금도 “잘했다”는 말을 듣는 게 ‘과외금지’다. 요즘보다야 덜했지만 그때에도 학원이나 과외는 성행했다. 국보위는 국영기업체 임직원을 포함한 모든 공직자와 의사, 변호사 등 사회지도급 인사들에게 어떤 형태의 과외공부도 자녀에게 시키지 말도록 했다. 모든 교수와 교사의 과외수업 행위도 금지하고, 중·고등학생들이 사설학원에서 수강할 수 없도록 했다. 전두환 위원장의 말이 곧 법으로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이런 게 가능했다. 민주통합당 정세균 상임고문이 최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개헌을 해서라도 사교육을 전면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요즘 많은 학부모들은 “전두환(전 대통령)이 다시 나와서 과외를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과외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도 크고, 과외를 해야 하는 자녀들도 안쓰럽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입시 제도가 갈수록 재력가와 사회지도층 자녀에게 유리하게 바뀌고 있다. 수능과외는 물론이고, 내신·논술과외도 해야 한다. 입학사정관제다 뭐다 해서 각종 스펙도 쌓아야 한다. 점점 더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다. 과외가 금지되면 보통시민의 자녀들도 기득권층의 자녀와 겨뤄볼 만하다. 신분 상승의 걸림돌이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는 나라, 사회라면 희망은 없다.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 정몽준 “경선 룰 논의 없으면 경선 불참”

    정몽준 “경선 룰 논의 없으면 경선 불참”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은 28일 “경선 룰 논의기구를 만들지 않으면 경선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면서 정 의원은 탈당 가능성은 부인해, 경선에 실제로 불참할 경우 연말 대선에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박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대선후보가 되더라도 적극 돕지는 않을 가능성도 언급했다. 정 의원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경선 규칙 논의기구를 안 만들겠다는 발상에 동의하기 어렵다.”면서 “이런 상태에서는 (당내 경선에) 참여하기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탈당 여부에 대해서는 “경선에 참여하지 않으면 탈당할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기분이 좋지 않지만 탈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못 박았다. 정 의원은 박 전 위원장이 후보가 되면 돕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박 전 위원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산에 대해 정확히 말해야 한다. 경제발전도 사실이지만, 군사독재도 사실이기 때문에 공과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박 전 위원장이 2010년 지방선거 때 당의 선거를 도와야 했음에도 어떻게 했는지 잘 아시지 않느냐.”면서 “본인이 후보가 되면 도우라는 말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고 덧붙였다. 정 의원은 또 “박 전 위원장이 당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구했는데 왜 비판하느냐고 하는데, 이에 박 전 위원장 책임은 없나.”라면서 “당시 친이·친박 계파가 아주 적대적이었는데, 계파와 파벌의 실질적인 수장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의원은 8년 전과 비교해 지지율이 현저히 낮아진 데 대한 나름의 이유도 언급했다. 그는 “당시에는 2002년 월드컵이 있어서 찍어준 것이고, 축구협회 회장 정몽준이지 정치인 정몽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면서 “박 전 위원장은 5년 재수했지만, 저는 10년 재수했기 때문에 2002년에 비해 (대선) 준비가 많이 됐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개헌에 대해서는 찬성 입장을 밝혔다. 그는 “역대 대통령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제도적 문제도 있다.”면서 “개헌을 한다면 대통령 권력을 분산해야 하고, 개헌을 안 하더라도 국회로 보다 많은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한·일 군사협정 체결이 지금 시기에 적절한가에 대한 질문에는 “시기와 절차가 모두 잘못됐다. 김황식 총리가 사과해야 한다.”고 밝히고, “한·미 안보 동맹을 넘어 일본이 더 큰 역할을 하라는 것으로, 잘못하면 한·미 안보동맹도 훼손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1971년 ‘교련 철폐투쟁’ 자료 기증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압 통치와 장기 집권에 반대하며 1970년대 초반부터 불붙기 시작한 ‘교련 철폐투쟁’ 문건 등 당시 대학가의 학생운동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자료가 40여년 만에 박물관에 기증됐다. 고려대 박물관은 고려대 졸업생인 최영주(64)씨가 자신이 보관하던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의 성명서와 학회지, 사진 등 70점을 기증했다고 28일 밝혔다. 최씨는 교련 철폐투쟁이 한창이던 1971년 고려대 총학생회 학예부장을 지냈다. 최씨가 기증한 자료는 대부분 교련 철폐투쟁과 관련된 것이다. 문건에는 “학원 군사교육으로 전 국민에게 위기의식을 유포해 사상과 행동을 통제할 합법적 근거를 설정하려 한다.”고 적혀 있어 당시 대학생들이 교련교육 강화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교련 철폐투쟁은 1971년 1학기부터 박정희 정권이 대학에서 군사교육 과목인 교련을 강화하자 대학생들이 ‘학원 병영화 반대’를 주장하며 그해 4월부터 10월까지 전국 규모의 저항운동을 벌인 것이다. 이 기간 각 대학에서는 교련 수강신청 거부와 거리시위가 잇따랐다. 이에 박 정권은 그해 10월 15일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내리고, 군 병력을 대학교에 투입해 2000여명의 학생들을 강제 연행했다. 박 정권은 다음 해인 1972년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고려대 관계자는 “1970년대 학생운동 현장에서 만들어진 자료는 찾기가 힘들다.”면서 “이 시기 민주화운동사 연구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관련 문건 중에는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지역 대학뿐 아니라 영·호남 등지의 여러 대학이 명시된 것도 있어 당시 교련 철폐투쟁이 개별 학교가 아닌 전국 대학의 연대에 의해 진행됐음을 짐작하게 했다. 최씨는 “독재 시절 학생운동 자료를 보관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면서 “학생운동사 연구를 위해 후배들과 친동생의 집 등에 흩어져 있던 자료를 모아 기증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열린세상] 남북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박양우 중앙대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교수

    [열린세상] 남북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박양우 중앙대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교수

    엊그제가 6·25전쟁 6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매년 6월 25일이 되면 초등학교 시절 학교 게시판과 동네 담벼락에 수도 없이 붙어 있던 ‘상기하자 6·25’ 포스터가 생각난다. 그리고 운동장에 모여 우렁차게 불렀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로 시작되는 6·25 노래가 떠오른다. 당시는 6·25와 6·25 노래가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고 기념식에 참석했고 또 노래를 불렀다. 물론 공산당은 아주 나쁜, 상종 못할 악당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이후로 ‘반공’과 ‘멸공’을 수도 없이 외치며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자연스레 나의 학창시절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교육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남북 관련 이데올로기나 체제 논쟁을 할 때면 혹시 정보원이 없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했다. 나는 이런 세상에서 젊음을 보냈다. 아마 대부분의 내 세대가 다 그랬을 것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오십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증폭되는 정치권의 남북 이데올로기 논쟁을 보는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종북’이니 ‘좌빨’이니 하는 생소한 말이 갑자기 횡행하기 시작하더니만 정권 말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수그러들 줄 모르고 있다. 이른바 진보통합당 사태를 계기로 소위 보수 신문들과 집권여당,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과거 독재시절로 회귀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종북문제에 관해 공격적이다. 야당은 야당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거를 언급해 가며 수세에 몰렸던 이데올로기 싸움을 역전시키기 위해 총반격에 나서고 있고 카운터 블로를 맞은 여당은 한 발짝 뒤로 빼고 있는 형국이다. 가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서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진 촌놈들의 현대판 이데올로기 이전투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주변 강대국들은 남북 간은 물론 남남 간의 싸움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기들의 이익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정치인들과 언론이 만든 이 싸움판에서 불쌍한 건 대한민국이요 대한민국 국민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데올로기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양심, 사상, 언론과 학문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 그리고 국민 뇌리에 이데올로기 트라우마가 너무도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지,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루거나 어느 한쪽이라도 편드는 얘기를 하다가는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정치권과 언론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이데올로기 싸움판을 벌여도 시민으로 위장한 일부 정치패들의 집단행동을 빼면 대다수 국민은 지겨운 싸움을 마냥 구경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경직된 사회주의와 불평등한 자본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제3의 길을 주창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남과 북은 서로 상생하지 않으면 모두에게 손해가 된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알게 되었다. 우리 국민은 과거처럼 반공교육을 받지 않아도 이념이 흔들릴 정도로 허약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까지 이데올로기 타령으로 허송세월할 셈인가. 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싶다. 어느 누구도 부당한 권력의 통제 없이 건전한 자유 시민으로 살아가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 아직도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아니라고 말리고 싶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해묵은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분열되고 서로 생채기 내는 상황이 지속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남북 이데올로기라는 벽을 넘어 세계가 부러워하는, 정치경제적으로 모범이 되는 사회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어느 때보다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한 지금, 정치권과 언론이 더 이상 낡은 이데올로기 논쟁에 사로잡혀 공허한 말장난으로 세월을 축내지 말고 유연한 남북관계, 현명한 외교 전략과 효율적인 경제운용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질 등 보다 발전적인 정책의제들에 관해 더 진지한 고민과 대안을 제시해 주길 기대한다.
  • 컷오프 이후를 계산하는 孫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 초반전이 친노(친노무현) 대 비노의 대결구도로 짜여지고 있다. 특히 4강 후보를 보면 친노 후보가 3명, 비노가 1명이다. 문재인 상임고문과 김두관 경남지사, 그리고 정세균 상임고문 등 친노 3명과 비노인 손학규 상임고문 1명이 4강으로 꼽히고 있다. ●예선 뒤 친노 결집 땐 孫 불리 친노 후보가 3명이면 아무리 1인 2표라 해도 경선에서는 친노 성향 대의원이나 시민선거인단의 표가 갈릴 수밖에 없다. 민주당 대선경선기획단은 대선후보 경선 때 1인 2표제를 실시할 예정인 것으로 26일 알려졌다. 대선후보 경선 컷오프(예선)가 실시되는 것은 의미 있는 변수로 꼽힌다. 민주당에선 문·손·정 상임고문이 출마선언을 했다. 김 지사는 다음 달 10일쯤 출마선언을 한다. 조경태 의원도 출마를 선언했고, 정동영 상임고문도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환 의원과 박준영 전남지사도 출마의 뜻을 밝혔다. 이들 8명 외에 추가로 1~2명이 더 나서면 5명 안팎을 남기는 컷오프가 치러질 예정이다. 친노 심판론에서 자유로운 손 고문 측은 현재의 구도가 호남 민심에 다가서는 데 나쁘지 않다고 본다. 다만 호남출신 정세균 상임고문이 호남 출신임을 내세우고, 김두관 지사도 친노색 탈색을 노린다는 얘기도 있어 유불리 예측이 복잡하다. 오히려 범친노 세력이 컷오프 뒤에는 유력주자 한 명에게 힘을 모아줄 경우 손 고문이 불리해질 수도 있다고 본다. 손 고문 측은 “최종적으로 누가 나오든 손·문 고문과 김 지사의 3강 싸움이 될 것으로 본다. 정동영 고문이 나오면 비노 표를 가를 수 있지만 변수는 안 될 것이다. 상황에 따른 대응책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본선 대비용’ 연일 박근혜 공격 손 고문이 당 후보가 되더라도 10월 말~11월 초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야권 후보단일화(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할 상황이라 1, 2단계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본선에도 대비하려는 듯 손 고문은 새누리당의 대선후보 경선 룰이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원하는 방식으로 결정된 데 대해 이날 “모든 것이 박 전 위원장의 말 한마디로, 눈치 하나로 결정되는 의사결정 구조라 갑갑한, 꽁꽁 막히는 정치가 될 것이다.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봐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비판했다. 손 고문은 이날 오전 백범 김구 선생 63주기 추모식에 참석, 통합을 강조한 뒤 오후에는 전주시 남부시장 청년몰의 상가번영회를 찾아 청년상인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 [월요 포커스] 육영수 vs 김근태 스크린서 부활… 대선판 뒤흔들까

    [월요 포커스] 육영수 vs 김근태 스크린서 부활… 대선판 뒤흔들까

    대선의 계절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여의도 정치권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크린에서 대선의 기운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빨리, 그리고 더욱 또렷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대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대선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쏟아지고 있다. 비정한 정치 현실을 다룬 SBS 드라마 ‘추적자’가 인기리에 방영 중인 가운데 유력한 여권 대선주자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퍼스트레이디-그녀에게’(감독 한창학), 지난해 12월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영화화한 ‘남영동’(감독 정지영) 등은 대선 시점인 11~12월에 맞춰 개봉될 예정이다. 특정인을 연상시키는 정치 영화들이 이미지에 치우친 ‘감성 정치’의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흥행 여부가 선거 결과로 이어질지 관심이 쏠린다. 대선을 겨냥한 영화는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 여사의 일생을 다룬 영화 ‘퍼스트레이디-그녀에게’는 7월 말 영화 제작에 착수한 뒤 대선(12월 19일)이 열리는 12월에 개봉된다. 육 여사는 1974년 광복절 행사 도중 암살당한 비운의 영부인이다. 제작사 측은 ‘인간 육영수’에 대해 조명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박 전 비대위원장의 생모를 미화해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야권에서 나오고 있다. 1985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10여 차례 고문을 받았던 김 전 고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남영동’은 최근 촬영을 마쳤다. 대선 전달인 11월을 개봉시기로 잡고 있다. 영화에는 김 고문의 부인인 인재근 국회의원과 천정배 전 의원이 특별출연한다. 또 1980년 5·18 광주 항쟁을 다룬 영화 ‘26년’(감독 조근현)도 새달 크랭크인에 들어가 올 11월 개봉을 예고하고 있다. 개봉시기에 대해 감독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야권에 유리한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는 지적들이다. 이와 함께 드라마 ‘추적자’는 유력한 대선주자의 부인이 교통사고를 낸 뒤 이를 감추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이것을 피해자의 아버지가 파헤쳐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음모를 다루고 있다. 의사와 대법관이 돈에 매수되고 대선 후보 당내 경선 과정에서 탈락한 후보가 탈당해 신당을 창당하는 과정은 현실 정치에서 한 번쯤 봤던 장면이다. 대선 영화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11월 6일 대선을 앞두고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의 죽음을 그린 영화 ‘코드네임 제로니모’(감독 존 스톡웰)가 9월 말~10월 초 개봉될 예정이다. 그러나 특정 후보를 미화하는 영화라고 해서 반드시 그 후보에게 유리한 쪽으로 선거 결과가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지난 4·11 총선 전 사법개혁을 다룬 영화 ‘부러진 화살’과 아동 성범죄를 다룬 ‘도가니’ 등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야권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지만 민주통합당은 총선에서 패배했다. 특정 후보를 미화함으로써 유권자들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해 표심을 이끌어 낼 수도 있지만 시기의 민감성이 유권자의 반감을 일으키고 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는 셈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특정 후보들을 미화, 조명하는 영화들은 대선 시기에 있어서 후보들에 대한 정책, 도덕성, 능력 검증보다 감성과 이미지 정치에 치우쳐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면서 “의도했건 안 했건 영화에는 제작사, 감독들의 사상과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어 관객의 해석 여지를 줄이고 정치를 시스템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보게 하는 선정성을 안고 있다. 현실정치에 연관된 영화라면 오해가 없도록 시기를 늦추는 게 낫다.”고 지적했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책꽂이]

    ●인생고시 (김종수 지음, 기림 펴냄) “자연의 이치를 깨우치면 건강하고 의식 높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강전도사인 저자가 이치의 핵심인 ‘생명온도’를 중심으로 인생을 이야기한다. 생명온도는 인체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진단하는 가늠자로, 오장육부가 높은 면역력을 가지는 40~45도이다. 생명온도가 높으면 원기 충만하고 의식이 맑아 두뇌 회전력이 좋아진다. 반대로 낮으면 무기력하고 질병을 일으키며 천재도 둔재가 된다고 말한다. 그럼, 이런 생명온도를 높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책은 그 방법들을 의식, 신체 작용, 생활, 임신, 육아, 교육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사법시험, 행정고시 등 각종 고시만큼 합격하기 어려운 것이 인생이라, 제목이 ‘인생고시’이다. 문항별 정답을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아 이해가 쉽다. 1만 8000원. ●미안해,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약속 (경찰청 폭력TF팀 지음, 상상나눔 펴냄) 학교폭력 현장을 가장 많이 접해봤을 현직 경찰관들이 함께 썼다. 2011년 대구에서 일어났던 한 중학생의 자살사건 당시 그 학생이 남겼던 유서로 책은 시작한다. 그 이후 숱한 실제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왜, 어떻게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는지 설명하고 주변 어른들이 보다 빨리 알아차릴 수 있는 체크 리스트도 제공한다. 딱딱하지 않게 감성적으로 풀어낸 게 돋보인다. 책 판매수익은 모두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 기부된다. 1만 2000원.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르노 그륀 지음, 조봉애 옮김, 창해 펴냄) 늘 나오는 얘기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박정희도 핵폭탄을 만들고자 했고, 북한도, 한국도, 일본도 핵무장을 하려 든다. 유대인으로 나치즘을 겪었고, 미국으로 도피한 뒤 뉴욕 할렘가에서 정신치료를 했던 경험이 있는 저자는 진정으로 호소한다. 힘이 있어야 나를 지킬 수 있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결국 싸움을 부추기는 것밖에 안 된다고. 남과 공감하고 남과 함께 연대할 수 있을 때 나를 더 잘 지킬 수 있다고 아이들을 가르치자고 제안한다. 1만 2000원. ●왕의 목을 친 남자 (아다치 마사카쓰 지음, 최재혁 옮김, 한권의책 펴냄) 프랑스대혁명사를 다루되 미시사의 방법을 택했다. 사형집행인이었던 샤를 앙리 상송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역사를 재구성한 것. 상송은 대대로 사형집행인을 해왔던 집안의 후손이다. 그의 기록을 통해 대혁명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만져볼 수 있다. 1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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