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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 프로야구 “이적생이 책임진다”

    ‘진가를 인정받겠다’-.99프로야구는 이적생들의 활약이 눈부실 전망이다. 출범 18년째를 맞는 올 시즌은 양대리그 도입과 함께 전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대형 ‘빅딜’이 두드러진 특징이다.각 팀들은 우승을 향해 간판 선수까지 무차별적으로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는 사활을 건 ‘구조조정’을 단행,기존 판도를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빅딜의 결과는 예측불허지만 기존 팀에서 잔뼈가 굵은 간판 이적생들은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기 위한 눈물겨운 사투를 벌일 것이 틀림없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유니폼을 갈아입은 주전급 선수들은 15명정도.‘굴러온 돌’인 이들은 ‘박힌 돌’을 밀어내고 팀의 중책을 맡았다.기대대로 전지훈련과 연습경기에서 명성에 걸맞는 기량을 발휘,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빅딜의 진앙지 삼성에서는 간판 타자인 양준혁과 트레이드된 ‘특급마무리’임창용(전 해태)이 145㎞를 웃도는 강속구를 뿌리며 팀 우승을 견인할 태세를 갖췄다.김상진(전 두산)과 노장진(전 한화)은 열악한 선발진에 단비를뿌리며 10승이상씩을 자신하고있고 ‘슈퍼미들맨’김현욱(전 쌍방울)은 날카로운 제구력을 뽐내며 허리를 든든히 받치고 있다.또 거포 김기태(전 쌍방울)도 호쾌한 타격으로 이승엽,찰스 스미스와 함께 중심타자 몫을 거뜬히 소화해 내고 있다. 현대에 둥지를 튼 ‘풍운아’임선동(전 LG)은 동계훈련을 통해 체중을 무려 10㎏을 감량하며 불같은 강속구로 명예회복을 벼르고 있다. 해태에서는 트레이드에 불만을 품고 잠적소동까지 벌였던 양준혁이 아품을뒤로하고 믿음직한 홈런포를 가동해 팀의 희망이 되고 있다.또 마무리로 낙점된 곽채진(전 삼성)도 빠른 볼로 코너웍을 구사,이강철의 시즌 결장으로시름하는 팀에 한줄기 빛을 선사하고 있다. 이밖에 두산의 투수 차명주(전 롯데)와 강타자 최훈재(전 해태),롯데의 포수 최기문(전 두산),쌍방울의 투수 박정현과 가내영(이상 전 현대),해태의투수 권명철(전 두산) 등도 유니폼을 갈아입고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 록음악 중심 다양한 장르 선보여/98 가요계 결산

    ◎음반 판매량 감소… 히트곡만 모은 편집앨범 ‘빅히트’/50만장 이상 팔린 앨범 고작 10장/김종환 ‘사랑을…’ 110만장 ‘최고’/미모·가창력 갖춘 여가수들 선전 IMF로 인한 전반적인 경기침체의 여파는 가요계도 예외가 아니었다.연초 대형 음반도매상들이 일제히 부도를 내면서 일기 시작한 불길한 조짐은 곧 음반판매량 감소로 이어졌고,이는 1년내내 가요계와 음반시장을 침울하게 만들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선보이고,언더그라운드 음악이 활성화되는 등 질적으로는 고무적인 한해였다는 평가도 있다. ●판매량 격감 신나라유통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올 한해 50만장 이상 팔린 앨범은 10장이다.지난해 15장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3분의 2수준이다. 또 판매량 30만장대의 앨범은 지난해 30위권에 머물렀으나,올해에는 23위로 순위가 껑충 뛰어오르는 등 음반 판매량이 전반적으로 급감했다.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은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로 110만장이 나갔다.이어 H.O.T의 ‘열맞춰’(106만장),김건모의 ‘사랑이 떠나가네’,서태지의 ‘테이크5’(각 105만장),신승훈의 ‘지킬수 없는 약속’(100만장)등 5장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50만장 이상 팔린 음반은 쿨의 ‘애상’,유승준의 ‘나나나’,터보의 ‘굿 바이 예스터데이’(각 80만장),SES의 ‘오,마이 러브’(60만장),김정민의 ‘비’(52만장)등이다. ●여가수 열풍 여자가수는 안된다는 가요계의 오랜 통설을 뒤집은 한해였다.SES,핑클을 선두로 김현정,리아,진주,박정현 등 많은 여자가수들이 가창력과 미모를 무기로 선전했다. 이소라 엄정화 양파 박지윤도 꾸준히 인기를 모아 음반판매량 40위안에 드는 저력을 과시했다. ●편집음반 히트 음반판매량이 격감하자 제작사들은 히트곡만을 모은 편집앨범을 앞다퉈 내 재미를 봤다.록레코드에서 제작한 명작시리즈는 선곡과 음반재킷 등 돋보이는 기획력으로 빅히트를 기록했으며,삼성뮤직,웅진뮤직,신나라뮤직 등의 음반사들도 잇달아 편집음반을 냈다.특히 ‘구자형이 뽑은 위대한 한국가요 100’은 완성도 높은 음악들을 선별 수록해 명반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장르의다양화 댄스음악이 주류를 이룬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록음악을 중심으로 테크노,포크,R&B등 여러 장르의 음반이 다양하게 발매됐다.김경호,자우림,윤도현밴드,주주클럽,뱅크,부활,김종서밴드 등은 일정 수준이상의 앨범 판매량을 보였다.이밖에 기존 앨범홍보를 위해 부수적으로 제작하던 뮤직비디오에 대한 개념이 달라진 것도 특징.유승준의 ‘나나나’,조성모의 ‘To heaven’ 같은 뮤직비디오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앨범판매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박정현 기자 ‘프랑스인들은 배꼽도 잘났다’ 펴내

    ◎유아독존 프랑스 문화의 오만/특파원 시절 수집한 자료 토대/사고방식·생활습관 철저 해부 ‘예술과 낭만의 나라’ 프랑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배타적이고 거만한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관광객들이 영어로 이야기하면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 프랑스인들이다. 프랑스인들의 그러한 오만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서울신문 파리특파원을 지내고 현재 행정뉴스팀에 근무하고 있는 박정현 기자는 ‘이는 자신의 배꼽만 보고 남은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박씨는 최근 펴낸 ‘프랑스인들은 배꼽도 잘났다’(자작나무 펴냄)는 책에서 프랑스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르 농브릴 뒤 몽드’라고 말한다. 직역하면 ‘세계의 배꼽’이지만 ‘세계의 중심’ 또는 ‘세계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가 우주의 중심이고 내가 있음으로써 세상이 존재한다는 프랑스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적 사고가 바로 배꼽사상이라는 것이다. 배꼽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남긴 데카르트. 박씨는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그의 회의론은 모든 세상이 자신의 머리속에서 출발하고 우주의 중심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의미로 해석돼 오늘날까지 프랑스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을 지배한다는 것. 프랑스적인 중화(中華)사상은 개인생활 뿐만 아니라 외교에도 나타난다. 샤를 드 골 이후 프랑스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개의 거대한 축에 맞서 ‘독자외교’라는 독특한 외교전략을 구사한다. 냉전시대에는 동서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국제정세를 데탕트의 길로 유도하지만 소련의 붕괴로 미국이 강대국으로 등장한 90년대에는 미국 주도의 신질서를 비난하는 반항아가 된다. 탈냉전 이후 미국이 내건 이데올로기는 ‘세계화’. 우리나라를 포함,지구촌이 세계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을 때 세계화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무역을 표방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미국을 위해 무역장벽을 철폐하자는 것이라며 거부반응을 보인 나라가 바로 프랑스였다고 말한다. 특파원들의 저서는 대부분 주재국에 대한 신변잡기적인수준을 벗어나기가 쉽지않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통념을 넘어 프랑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프랑스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야겠다는 기자의 오기가 자극,관련 서적과 신문,잡지를 보면서 프랑스 사회에 대한 기초자료를 모았으며 책의 내용이 객관적인가에 대한 자문도 많이 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탄탄한 자료수집과 철저한 검증과정으로 인해 이 책은 프랑스에 대한 사회·문화비평서로서의 힘을 갖는다.
  • 미군정 폐지와 행정권 인수(대한민국 50년:7)

    ◎정부수립후 3개월 지나서야 ‘정권’ 확보/한·미대표단,군­경찰 지휘권 놓고 첨예 대립/하지­이승만 직접담판 통해 ‘점진 이양’ 합의 1948년 9월4일 열린 제헌국회 제57차 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정 사이에서 진행되는 행정권이양 회담에 관해 중간보고를 했다.이총리의 보고는,국회가 9일전 긴급결의해 국회의장 명의로 서한을 보낸데 따라 갖게 됐다.이총리는 회담에서 한국측 수석대표였다. 이총리는 먼저 “한미 양국간에 이견이 있어 회담에 매달리다 보니 경과보고가 늦어졌다”고 사과한 뒤 “행정권을 완전히 이양받은 다음에야 인적·물적 토대에 근거하여 시정방침(국정지표)을 마련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이날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0일째인데도 정부가 아직 행정권을 인수하지 못해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사실을 국무총리가 공개시인하고 양해를 구한 것이다. ○재산권처리 협상도 난제 2년 11개월에 걸친 미군정은 형식상 48년 8월16일 0시를 기해 폐지됐다.16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령 제1호를 발표,미군정청 과도정부로부터 이관되는 행정업무를 11부4처별로 정리했다.이에 따라 17일부터 신생정부 각부처의 장은 과도정부의 미국인 고문들과 구체적인 인수절차 협의에 들어갔다.19일에는 대통령 담화를 통해 과도정부에 소속된 한국인 관리의 직책을 새정부에서도 보장했다. 이처럼 한국정부가 발빠르게 인수절차를 밟았다고 해서 행정권이 쉽게 넘어온 것은 아니었다.양쪽은 인계인수할 행정권의 범주를 결정하는 큰 테두리에서 상당한 견해차를 보였다. 한국정부와 미군정 간의 행정권이양 회담은 16일 하오2시 중앙청내 미군정 민사처 사무실 200호실에서 처음 열렸다.양쪽 대표는 한국에서 이총리와 윤치영 내무부장관·장택상 외무부장관,미군정측의 무초 주한미국대사·헬믹미군정 민사처장(소장)·드럼라이트 미군정 정치고문 참사관 등 6명이었다.무초대사는 그달 23일에야 부임하는 바람에 첫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회의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첨예하게 대립한 부분은 ▲군(당시의 조선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과경찰에 대한 지휘권 문제 ▲한미간 재정 및 재산권처리에 관한 협정 등이었다.군정측은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는 한 군과 경찰에 대한 지휘권을 미군사령부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한국정부로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재정문제에 관해서는 한국측이 미군정이 보유한 물적 재산을 최대한 넘겨받기를 원했고,더불어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도 요구했다.회의에 진전이 없자 양쪽은 하루에 상하오 두차례로 회동을 늘리기로 합의,이를 한국정부 김동성 공보처장이 정식 공표하기도 했다. 당시 회담에 임한 미군정측은 “이범석 총리를 비롯한 한국측 대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손아귀에 쥐어 있기 때문에 논의과정에서 권위를 갖지 못한다”는 시각을 가져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가 출국을 사흘 앞둔 8월24일 이대통령을 방문,직접 담판을 짓고서야 ‘군경에 관한 통수권’문제가 해결됐다.26일 조인한 ‘군사통수권 이양에 관한 협정’내용은 ▲군경에의 통수권은 가급적 점진적으로 이양하되 ▲미국이 국방경비대·해안경비대 장비를 원조하며 ▲미군이 주둔하는 한 이 문제를 계속 협의한다는 것이었다. ○9월30일에 시정연설 이 합의에 따라 경찰지휘권이 대한민국의 내무부장관에게 정식으로 넘어간 것은 9월3일 정오를 기해서였다.내무부는 곧바로 경찰조직 9국실 가운데 감찰실·총감부·수사국·교육국·공보실 등 5개국을 없애고 공안국·통신국·총무국·여자경찰국 등 4국실만 남기는 개혁을 단행했다.지방경찰 직제는 그대로 유지했는데 막상 지방 경찰력을 인수할 때는 미군정청과 가까운 일부인사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물자 현금 인사 및 정부직권의 이양’협정은 9월11일 타결됐다.이승만 대통령은 9월30일 국정지표를 제시하는 시정방침 연설을 할 수 있었다.미군정 과도정부의 중앙 각부처가 인원·재산 등을 한국정부에 이관하는 작업이끝난 날은 11월 18일이었고 지방 행정기구까지 완전히 신생정부가 인수한 때는 11월 20일이었다.정부수립 석달여가 지나서야 대한민국의 행정권이 비로소 확립된 것이다. 미군정청(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은 1945년 9월9일 서울 중앙청(옛 총독부)에 설치됐다.행정실무를 책임질 첫 군정장관으로는 아놀드 소장이 임명됐다.미군정은 초기부터 ‘영어를 알고 행정겸험이 있는’한국인을 활용한 고문제도를 시행했다.45년 12월에는 한 직위에 미군과 한국인을 한사람씩 두는 ‘한인·미인 양국장’제도로 바꾸었다.이때 참여한 인사가 광공국장 대리 오정수,학무국장 유억겸,농상국장 이훈구,경무국장 조병옥 등이다. ○행정훈련서 친미 양성 해방된지 1년쯤 지났을 때는 모든 부처의 장에 한국인이 진출,한인관료 체계가 자리잡았다.47년 2월12일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했고,그해 6월3일에는 미군정청 한국인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라 개칭했다.이어 47년 9월12일에는 행정권을 남조선과도정부에 넘겨 새정부에의 이양에 대비했다. 이같은 미군정청의 정책에 대해서는 두가지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하나는 미군정이 나름대로 일정표를 갖고 한국인들에게 행정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며,다른 하나는 신생국가에 친미파를 조직적으로 양성했다는 시각이다. 미군정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토대를 마련한 공이 적지 않은 반면에,일제의 한인 관료군대부분에게 재생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일제청산에 큰 걸림돌을 남기기도 했다. 미군정이 이땅에 시행한 법령은 태평양 미육군 총사령부 포고 4건,남조선과도정부법령 14건,미군정법령 219건,행정명령 24건,부령 및 지령 115건,조선과도정부입법결의안 4건,미군정청포고 7건,기타 11건 등 모두 398건에 이른다. ◎미,한국협상대표단 불신/본사 특별취재반,‘제이콥스 보고서’ 입수 확인/“이범석 권한 없고 이승만이 모두 결정” 미국이 한미 행정권 이양회담에 임하면서 이범석총리를 비롯한 한국측 대표단에 불신을 가진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최근 입수한 ‘제이콥스 보고서’는 당시 회담 분위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J K 제이콥스는 주한 미24군 정치고문으로 회담경과를 정기적으로 미 국무부에 보고했다.이번 자료는 1948년 8월22일 작성했으며 그가 보낸 5번째 보고서이다. 제이콥스는 8월20일 상오10시와 하오2시 7∼8차 회의가 잇따라 열렸으며,7차 회의에서 이총리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고 결정권은 아직도 이승만 대통령 수중에 있다”고 실토했음을 보고했다.이어 미군정측의 헬믹소장이 구체적인 항목들을 나열하며 의견을 물었지만 이총리는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고 전했다. 이같은 한국측 태도에 자극받았음인지 하지사령관은 8월24일 이승만을 만나 ‘군사통수권 이양 협정’을 직접 협상했다.미 본국 정부도 우회전술로 한국정부를 압박했다. 트루만 미국대통령은 8월27일 ‘한국경제원조 계획’을 미군정에서 다루지 말고 국무부 경제협력국에서 수립할 것을 지시했고,마샬 국무장관은 9월1일 기자회견 석상에서 “미국은 국제연합 한국위원단(UNTCOK)의 보고가 있을때까지 행정권 이양에 관한 최종 결정을 미룰 수밖에 없다”고 공언했다. 이후 한미행정권 이양에는 가속도가 붙었다.이승만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기 보다는,회담에서 상대가 내민 카드를 서로 탐색하다가 결국 수뇌부에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특별취재반 ▲이경위 부국장겸 정치부장 ▲이용원 문화부 차장 ▲김경웅 정치부기자 ▲최병렬 문화부 기자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정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국무회의(대한민국 50년:6)

    ◎48년 첫각의 단기냐 서기냐 갑론을박/50년대 미 기록 “이승만 독주로 요식행위에 불과”/5·16후 한동안 일요일 빼곤 매일 열어… 시국 반영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기 꼭 열흘전인 1948년 8월5일 중앙청 2층 이시영 부통령실. 이범석 전 민족청년단장을 비롯해 장택상 윤치영 김도연 이인 조봉암 유진오씨 등 당시의 ‘거물’들이 한사람씩 들어섰다.이승만 박사가 7월20일 간접선거에서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뒤 지명한 국무총리와 장관들이었다.신임각료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이대통령이 들어섰다.장관들은 예를 갖춘뒤 회의에 들어갔다.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이대통령이 주재한 사상 첫 국무회의였다. 회의를 하는 동안 이대통령과 각료들은 약간 흥분해 있었다.일제 때의 독립운동,미군정하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초대 11부3처장관 출범 국무회의는 정부가 수립됐다는 감격의 상징이었다.흥분을 삭이고 국무위원들이 다룬 의제는 구미지역에 특사파견문제.신생국가에다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외국의 국가승인을 위한 외교가 절실했던 탓이다.미국과 구라파지역에 특사로는 조병옥 박사와 김활란 여사가 임명됐다.특히 조박사의 임무는 미국의 주한 미군철수계획을 저지하는데 모아졌다.조박사의 노력에도 미국 설득이 여의치 않자 이대통령은 장면 박사를 초대 주미대사로 파견했다. 초대 11부 4처의 장관을 맡은 국무위원들은 각 정파의 분배를 고려한 연립내각으로 이뤄졌다.이대통령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소속은 윤치영 내무·전진한 사회·이청천 무임소장관 뿐이었고 김도연 재무장관은 김성수씨의 한국민주당,임영신 상공은 여성국민당수,김병연 총무처장관은 조선민주당 소속이었다.그외에 장택상 외무장관은 전수도 경찰청장,이인 법무장관은 전검찰청장,민희식 교통장관은 전군정청 운수부장,조봉암 농림 구영숙 보건장관은 무소속이었다.대학별로도 철저한 균분이 이뤄졌다.안호상 문교(서울대교수),유진오 법제처(고려대교수),이순택 기획처(연세대교수),정인보 고시위원장(국학대학장) 등이었다. 연립내각 구성은 국무총리 인준과정에서의 진통때문이다.이대통령은 7월27일 정부 공보 1호로 초당적이고 이북을 대표할 이윤영 조선민주당부위원장을 총리로 임명하는 추천서를 국회에 제출했다.반대세력인 국회의 한국민주당·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은 토의조차 거치지 않고 부결시켜 버렸다.대통령의 직무에 대한 국회의 첫 비토였던 셈이다.한민당은 김성수씨를 국무총리에 임명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이대통령은 이범석 민청단장을 총리로 지명했다.이초대총리는 한민당이 반대했으나 가까스로 인준됐다.국회는 그러나 민희식 유진오씨 등의 신임각료에 대해 친일논쟁을 제기하는 동시에 대통령에게 숙청을 건의해 최초 국무위원들은 첫걸음부터 삐꺽였다. 이대통령은 이런 논란끝에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으며 미군정은 이날 자정을 기해 군정해제를 선포했다.해가 바뀐 49년의 첫국무회의는 1월3일 월요일 하오 3시30분 부통령실에서 열렸다.이대통령은 간단히 개회만 하고 국무총리와 내무장관이 사회봉을 이어받았다.법원조직법·검찰청법·변호사법 등 3건을 심의했고 이총리는 당시 주한 중국대사가 찾아와 한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한다고 통보했음을 알렸다.당시로서는 정부의 체계를 세우고 외국으로부터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국가 승인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미국인들이 남기고 있는 50년대 국무회의에 대한 평가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이대통령의 독주아래 힘 한번 쓰지 못하는 허수아비 회의라는 얘기다.사실 이대통령 때 뿐 아니라 대통령제하의 국무회의는 의례통과일 수 밖에 없었다. ○고 총리 ‘각의 활성화’ 마련 국무회의 의장인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는 경우는 외국순방후의 설명,97년 국제통화기금(IMF) 차관도입 동의안 같은 주요사안을 심의할 때 뿐이다.의사봉은 대부분 부의장인 국무총리 몫이 됐다.전두환 대통령 당시에는 직접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경우도 있었다.서슬 퍼런 전대통령 앞에서 국무위원들은 절절 매야 했다.행여 전대통령이 질문을 하면 법안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장관들은 혼쭐이 났다.결국 국무회의 개최장소는 청와대를 떠나 정부세종로청사 19층으로 되돌아 왔다.국무회의는 헌법(88조,89조)상 국정의최고심의기구이지만 실제 운영은 법령안·조약안을 심의,의결하는데 그친다.법안심의도 이미 차관회의를 거쳐 상정됐기 때문에 토론도 거의 없다.고건 총리가 지난해 3월 부임하자 ‘국무회의 운영 활성화 방안’을 마련한 사실도 국무회의의 무기력함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역대 총리는 이범석 초대에서부터 고건 총리까지 모두 30명.여기다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던 10명의 총리서리까지 합치면 모두 40명이었지만 총리에 따라 국무회의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다.군·학자·법관·행정관료 등 출신 배경에 따라 국무회의 진행방식도 달라졌다.딱딱한 분위기가 연출됐는가 하면 매끄럽게 회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혼란기때 가치 빛나 국정의 최고심의기구인 국무회의는 혼란기에 더욱 그 가치가 빛났다.4·19의거,5·16혁명,80년 신군부의 등장….합법성을 가지려면 국무회의는 필수불가결한 절차였다.60년 4월19일 상오 9시 중앙청 3층 국무회의실.이대통령과 허정 외무·권승열 법무장관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학생데모대 사태가 보고됐다.경비계엄선포·비상계엄선포 등의 안건도 의결됐다.하루만인 4월20일 또다시 국무회의가 열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반영했다.데모사건 피살자의 장례비를 한사람당 50만환씩 지급하기로 하는 안건이 처리됐다. 5·16 혁명이 일어난뒤 국무회의는 며칠동안 열리지 못했다.23일 하오 5시 국무회의에서는 ‘군사혁명에 따른 정치·도의적 책임을 지고 총사퇴할 것’을 의결했다.총리가 배석자를 나가달라고 주문하면 국무위원 총사퇴 결의를 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국무회의는 대외관계를 중단하지 않도록하고,성행하던 유언비어 단절을 위해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국무회의는 혁명이후 당분간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려 국정을 다뤘다.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옹/“이 대통령 개별 설득 단기 채택”/“한글전용법 제정 제의했으나 모든 장관 반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문교부장관을 맡아 50년까지 3년간 장관직을 역임한 ‘한뫼’ 안호상옹(96). 안전장관은 대한민국 정부의 기초를 세운 초대내각 11부4처의 국무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국무회의 운영에 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당시 안전장관이 제안한 제도·법 등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돼 아직도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장관은 “첫번째 국무회의로 기억하는데 국가 연호에 대한 갑론을박이 치열했어요.갑자을축의 육갑파도 있었고,서기연호를 쓰자는 사람도 있었죠.또 임시정부수립연도부터 쓰자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안전장관은 국무회의가 끝난뒤 이승만 대통령을 따로 찾아가 단기사용을 설득하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하자고 제안했으며 이대통령이 이를 모두 받아들여 다음 국무회의에서 결정됐다.그러나 단기사용은 5·16 이후 서기로 바뀌었다. 또 한문세대가 지배적이었던 그 당시 안전장관이 발의한 한글전용문제도 국무회의의 큰 관심거리였다.이 문제로 회의에서는 장관들간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국무회의에서 내가 한글전용법을 제정하자고 했더니 모든 장관이 반대했어요.특히 나하고 가까운 사이였던 임영신 상공부장관이 공격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서로 ‘무식쟁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죠.침묵만 지키고 있던 이대통령이 안되겠던지 ‘과하니 그만하시오’라면서 중단시켰어요”. 이처럼 하나의 안건을 놓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당시 장관들은 나라를 새로 세운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안전장관은 또 “그때는 가난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각료들도 돈이나 권력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초대내각에서 제일 먼저 사임한 민희식 교통부 장관은 철도사고에 책임을 지고 40일만에 물러났으며 전진한 사회부 장관은 공무원노동조합을 금지한데 대해 화를 내고 그만두었다.또 무임소장관이던 이청천씨는 “싹을 보니 틀렸다”는 말만 남기고 각의에서 물러났다.이 모두가 내각 6개월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안전장관은 전했다. □특별취재반 이경형 부국장겸 정치부장 이용원 문화부 차장 김경홍 정치부 차장 최병렬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희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초대 대선과 첫 조각(대한민국 50년:5)

    ◎하지 사령관 서재필 대통령 꿈꿨다/암살 겁내 출마거부… 결국 국회 간선서 이승만 당선/초대총리 이윤영 제청,인준 부결 수모… 이범석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 지도력과 개성에 관해서는 평판이 극명하게 엇갈렸다.“대한민국을 세운 국부”“운산광산을 팔아먹은 매국노”“프린스톤 사람”(무초) “×자식”(하지)….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J.R.하지 중장은 애초부터 서재필을 귀국시켜 대통령에 입후보시키려 했다. 그것은 다분히 이승만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했다.당시 하지의 개인고문으로 일하던 서재필은 이미 암에 걸려 있었다.그는 자신이 살해될 것이라는 피해의식 때문에 입후보를 거절,미국에 돌아간 직후 운명했다. 19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간선으로 치러진 초대 대통령선거에는 결국 이승만과 김구,안재홍 등 3인이 나섰다.이미 예견된 대로 이승만은 196명의 재석의원 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김구는 겨우 13표를 얻었다.그리고 안재홍은 2표,무효가 1표였는데 무효는 미국 국적의 서재필에 투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7월24일 중앙청서 취임식 압도적인 다수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7월24일 중앙청 광장에서 취임식을 가졌다.“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그는 독립의 공을 연합군측에도,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독립운동파에도,국내의 항일투쟁 세력 어느 곳에도 돌리지 않았다.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다. 이승만은 취임후 곧바로 이화장에서 조각에 착수했다.‘조각의 산실’로 등장한 이화장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73세의 이승만은 철저하게 자신이 신뢰하는 측근만을 각료에 임명했다.그러나 그의 건국 내각은 국무총리 인준을 놓고 출발부터 상처를 입었다.이승만은 북한의 조선민주당 위원장인 조만식의 후광을 내세워 부위원장인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제청했다.하지만 이윤영 총리안은 제헌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는 수모를 겪었다. 지면이 거의 없는 이윤영을 내세운 것 자체가 당시 정황으로 볼때 무리였다.한민당의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회의 공론이었다.그러나 이승만은 자칫 한민당에 업힐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를 애써 무시했다.국회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발판을 국회에 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초대내각은 결국 항일독립운동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실마리를 풀었다.그리고 내무 윤치영,외무 장택상,국방 이범석,재무 김도연,법무 이인,문교 안호상,농림 조봉암,상공 임영신,사회 전진한,체신 윤석구,교통 민희식,법제처 유진오,공보처 김동성,무임소 이윤영 등으로 조각을 마무리했다.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인선은 국회에서 친일논쟁이 가열되면서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다.1948년 8월15일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은 출범했다.이와 함께 이날 상오 0시를 기해 미 군정은 폐지됐다. 이승만은 모든 관리들을 하향식으로 통제하려고 했다.이와 관련,미 중앙정보부(CIA)는 “이승만은 국무총리를 마치 ‘행정보좌관’처럼 부리고 있다”고 혹평했다.또한 미대사관은 상공부 장관 임영신을 “2다스의 속옷만으로도 매수당하는” 인물로 파악했다.그는 부패로 쫓겨난 최초의 각료라는 오명을 남겼다. 이같은 이승만 정권의 최고 통치방침 가운데 하나는 유엔에서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새롭게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계속 의존했던 만큼 합법정부로서의 국제적 승인을 즉각 얻어내지 못했다.1948년 10월19일 재일조선청년단체의 암살 위협 속에 이승만은 일본을 방문했다.목적은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를 만나 대한민국의 방위와 국제적 승인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 주한미국대사 무초에 의하면 이승만은 맥아더를 특별히 존중했다고 한다.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질 때마다 맥아더를 찾았다.1945년 10월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은 환국과 더불어 그를 만났다.1948년 10월 회담은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미국이 한국을 지키겠다는 계획을 이승만으로 하여금 내외에 공표토록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역을 맡았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은 1948년 10월8일 유엔에 제출할 최종 보고서를 채택했다.이 보고서에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 의해 성립된 한국정부는 정부의 기능이 점차 개선되어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모든 유엔 가맹국들은 한반도 전체의 독립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한다는 권고 내용도 포함시켰다.이 보고서는 제3차 유엔총회에서 심의에 부쳐졌다.1948년 12월12일 마침내 대한민국은 유엔 총회에서 46대 6으로 승인됐다.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된 것이다.그 후 대한민국은 소련과 그 동맹국가들을 제외한,50여개국의 자유진영 국가들로부터 개별적인 승인을 받았다. ○임정 세력 반대속 출범 대한민국의 출범은 민족사적으로 볼 때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진정한 의미의 민족국가가 비로소 출범한 것이다.우리 민족이 주권확보를 위해 장기간 노력해온 결과로,그 자체가 민족 숙원사업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남북에서는 상이한 정권이 출범했다.그것은 무엇보다 미·소 강대국의 서로 다른 한반도 정책에 기인한다.이는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정책에 있다.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반소·반공정책에 의한 남한지역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유엔이 결정한 데서 비롯됐다.당시 유엔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그대로 추수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제헌국회가 남북통일특별대책위 설립안을 부결시켰다는 사실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이는 국회가 남북통일문제를 도외시한 뚜렷한 징표라는 점에서 그렇다.국회소집 무렵 김구·김규식 등은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했다.통일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하려고 한 이들을 이승만은 공산당으로 몰아부쳤다.그렇듯 대한민국 정부는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의 반대 속에서 출범했던 것이다. ◎미,이승만 신뢰하지 않았다/본사특별취재반,미 CIA 작성 비밀보고서 입수/“독립위해 최선 다했지만 재난 불러올 행동 가능”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참된 애국자였다.그러나 그는 독립한국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최선을 다했다.……위험이 도사리고 있다.이승만은 증폭된 자아의식 때문에 재난을 불러올 행동을 하거나 적어도 신생 한국정부와 미국의 이해를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직설적인 평가를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의 국립공문서보존기록관리청에서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1948년 10월28일에 작성한 2급비밀보고서 ‘대한민국의 생존전망(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을 찾아냈다. 이 보고서는 당시 워싱턴 정책담당자들의 상황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자료다.이 문건에 의하면 미국은 결국 이승만을 옹립했지만 결코 신뢰하지는 않았다.따라서 미국은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계속했다.또한 미국은 군정이 끝난 후에도 CIC나 G­2,CIA 등을 통해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이 행한 부정축재 사실과 같은 부정적인 정보를 모았다. 또 방위와 재원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했다. 이 보고서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승만은 개인적인 이익과 로비활동도 들추어냈다. 워싱턴 임시정부 한국위원회의 수장이었던 이승만은 그 지위를 상당히 이용했다고 밝힌다.사적인 로비활동이야말로 이승만에게는 전쟁이 끝난뒤의 소중한 정치적 밑천이 되었다는 것이 보고서의 시각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얼룩진 헌정(대한민국 50년:4)

    ◎52년 첫 개헌… 87년까지 9차례 뜯어 고쳐/이승만 이어 박정희도 종신집권 노려 헌법손질/69년 3선 개헌­72년 유신 선포… 대통령 간선 고착/전두환 쿠데타 집권… 87년 6월 항쟁 직선제 확립 이승만은 1954년 2차개헌으로 종신집권에의 길을 텄다.그러나 이는 몰락을 재촉했다.1960년 4·19혁명은 마침내 이정권의 무한권력 추구를 좌절시켰고 6월15일 3차 개헌을 가져왔다.큰 골격은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이다.그리고 헌법재판소를 설치하고 법률유보조항을 손질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정리하는데 촛점을 맞췄다.그러나 내각제 도입으로 3·5부정선거범 등에 대한 처벌근거인 정·부통령선거법이 소멸되자 혁명 주체세력들은 거세게 반발했다.학생들의 의사당 난입 등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집권민주당은 11월29일 이승만 정권하의 반민주행위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 근거규정을 헌법 부칙에 설치하는 4차개헌을 단행했다. 헌법의 수난은 갈수록 심화됐다.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군사쿠데타는 헌정파괴라는 극단적사태를 몰고왔다.국회는 즉각 해산됐다.이듬해 12월16일엔 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에 의한 5차 개헌이 단행했다.이 개헌안은 인권규정을 보강하고 미국식 사법심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외견상으로는 3권분립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그러나 핵심 골자는 부통령제 폐지와 정당설립 규제 등으로 대통령에게 권한을 몰아주었다. ○6차 3선개헌 날치기 처리 박정희는 5차개헌으로 부활된 새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중임제한 규정에 부닥치자 전에 이승만이 걸었던 전철을 답습했다.영구집권의 획책한 것이다.중임제한 폐지 개헌안이 야당의 거센 반대에 부디ㅊ치자 1969년 10월21일 새벽 국회 제3별관에서 야당의원들을 따돌린채 여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만으로 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다.3선개헌으로 불리는 6차개헌이 그것이다. 개헌뒤 실시된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대통령 3선에 성공했다.그러나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박정희 634만표,김대중 539만표로 나타난 개표결과는 영구집권에 대한 위기감을 증폭시켰다.그래서 영구집권을 확실하게 제도화하는 장치를 마련했다.이것이 바로 헌정 수난의 절정판인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유신은 1972년 7월17일에 선포됐다.이날은 아침나절 약간 흐렸으나 낮부터는 전국적으로 맑았다.시민들의 생활은 평온했으며 각 관청들만 막바지에이른 국정감사로 다소 부산했다.이날 상오까지만 해도 국체변혁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나 물밑에서는 이를 위한 시나리오가 극비리에 착착 진행됐다.상오9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우시로쿠(후궁호랑) 주한일본대사와 만나 약 20분간 요담한데 이어 10시 15분부터는 필립 하비브 미국대사와 40분간 요담을 가졌다. 유신을 통보한 자리였지만 누구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러나 하오가 되면서 여기저기서 이상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서울 소공세무서에 대한 국정감사를 행하던 재무위에서는 “야당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국회가 해산될지 모른다”는 협박투의 발언이 여당의원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날 상오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에서는 박정희 주재로 마지막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박정희는 둘러앉은 보좌관과 비서관들을 응시하다가 서랍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모두 한번씩 읽어보고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하오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헌법 정지,국회 해산,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개헌,….’달리 의견이 있을수 없었다.너무도 엄청난 일에 모두 할말을 잃었다.이어 외무장관 김용식은 하오5시 주한외교사절 23명을 불러 유신단행을 설명했다. 계엄선포 H아워를 1시간 앞둔 하오6시 청와대에서는 영문도 모른채 소집돼온 국무위원들이 비상계엄령을 의결했고 같은 시간 시내 전역의 주요 공공건물에는 계엄군이 포진하기 시작했다.중대뉴스가 예고된 하오7시,라디오에서는 헌법의 효력을 2개월간 중지시키겠다는 박정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유신이 일단 선포되자 개헌작업은 미리 짜인 각본에 맞춰 일사천리로 진행됐다.작업은 신직수 법무·이경호 보사·서일교 총무처장관과 유민상 법제처장,헌법학자 한태연·갈봉근 교수로 구성된 법무부 헌법심의회에서 맡았다.하지만 실상은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팀으로 구성된 일명 ‘기획소위’가 건네준 골자를조문화하는 것에 불과했다.이때 심의회의 역할이 어땠는지는 “이 헌법의 기본골격은 이미 고위층에서 만든 것이므로 골격 자체에는 일체 손을댈 수 없습니다”고 한 신직수의 발언이 입증하고 있다. 개헌안은 유신선포 25일만인 11월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됐다.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간선과 대통령의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국회의원 3분의1과 대법원장 등 전법관 임명권 보유 등 사실상 대통령 1인의 무한권력 창출이었다. 박정희에게 유신헌법은 종신집권을 담보해주는 안전판이었다.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종말로 향하는 단초이기도 했다.국내 상황은 팽팽한 긴장으로 치달았고 최대우방 미국과도 갈등이 깊어갔다. ○80년 8차개헌 간선제 유지 서울신문이 최근 입수한 미국 국무부의 ‘한미관계의 조사’라는 보고서는 당시 한미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돼 갔음을 보여준다.유신 직후인 73년 미연방수사국(FBI)의 정보를 토대로 국무부가 작성한 이 문건에서 이미 미국이 경제원조 중단과 미군철수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결국 안팎으로 시련을 겪던 유신은 끝내는 1979년 박정희의 피살과 함께 또한번의 헌정중단 및 개헌을 초래했다.공백상태의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은 민심을 얻기 위해 1980년 10월27일 복지규정 보강 등으로 위장한 8차 개헌을 실시하지만 권력획득의 핵심인 대통령 간접선거는 그대로 유지했다.전두환 군사정권은 강압적 통치로 일관하다 직선제 개헌 요구로 상징되는 전국민적 저항에 굴복하고 말았다.그래서 87년 6월29일 개헌을 수용하기에 이른다.이 9차 개헌의 결과물이 현행 헌법이다. 헌정 50년을 맞는 올해는 그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가 정권을 인수인계하는 뜻깊은 해다.하지만 헌법은 또다시 개정의 고비를 맞고 있다.내각제 공약을 내건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합정권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미,73년부터 “유신철회” 압박/본사특별취재반,미 하원보고서 입수 확인/“주한미국 철수” 일방선언­‘코리아게이트’ 돌출 유신이 절정을 이뤘던 1970년대 중반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은 급기야 1977년 3월9일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를 일방선언했고 6월에는 미중앙정보국(CIA)의 청와대 도청사건이 불거졌다.한국내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한국정부의 항의가 거세자 미국은 박동선 사건으로도 불리기도 했던 코리아게이트를 돌출시켜 한국정부를 더욱 옥죄었다. 모두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철회를 겨냥한 미국정부의 압박전술이었다.그런데 미국은 이처럼 유신에 대해 명백하게 거부태도를 보이기 훨씬 전부터 유신의 몰락을 예견한 교포들의 지적들을 주목했으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압박수단도 강구했었음이 최근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문건에서 확인됐다. 이 문건은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1978년 작성한 ‘한미관계의 조사’(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라는 보고서에 포함된 것으로 1973년 9월 미연방수사국(FBI)의 정보보고를 토대로 하고 있다. 문건은 김대중 등 미국내에서 반한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인과 교포들의 증언을 인용한 것이다.문건은 “남한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으로 인해 아시아권에서 점차고립되는 상황이고 대미관계에서도 원조와 군사지원을 둘러싸고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문건은 이어 “한국인들은 만약 미국이 일본과의 공조아래 경제원조 및 권사지원 철회로 압력을 가할 경우 박정희 정권은 급격히 붕괴할 것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이 문건이 작성된 직후부터 미국내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의 활동에 대한 FBI의 사찰이 강화됐다.이와 더불어 한미 정부간에 인권침해와 내정간섭을 놓고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됐던 사실에 비추어 이 보고서는 미국정부의 정책결정에 큰 작용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제헌헌법 탄생과 훼절의 발자취(대한민국 50년:3)

    ◎48년 7월17일 대통령제·단원제 공포/48년 5·10총선후 헌법­정부조직법 기초위 출범/대통령제­내각제·단원제­양원제 17차례나 격론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서 ‘대한민국 50년’이 지니는 가장 값지고 유별난 의미는 그것이 헌정의 역사라는데 있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그 탄생부터 굴절과 훼절로 출발했고 이는 곧 헌정의 비극,나아가 국가와 국민의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48년 5·10총선은 정부수립 작업에 탄력을 붙여놓았다. 그 선거를 통해 개원한 제헌국회는 5월 31일 개원날부터 무엇보다 급한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초안을 만들어낼 기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을 선출하는 안건을 결의했다. 다음날 기초위원을 선출할 전형위원 10명이 선정됐고 6월 1일에는 서상일을 위원장으로 하는 헌법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헌법학자 유진오 등 전문위원 10명도 위촉됐다. 헌법 초안 작성의 중추역을 맡은 유진오는 양원제,내각책임제,농지개혁,중요 기업의 국영화 등을 골자로 한 안을 내놓았다.이때 미군정 사법부장이던 전문위원 권승렬이 예고없이 독자안을 제출,위원회는 두 안을 각기 원안과 참고안으로 삼아 심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헌법 굴절의 역사는 곧바로 시작됐다. 1차독회 국회 부분에 이르러 한민당계와 조봉암이 양원제 반대론을 폈다. 이어 곧바로 다수위원의 반대로 확산,양원제는 졸지에 단원제로 바뀌었다. ○기초위선 내각제 원안 통과 여기서 유진오의 헌법초안 작업 참여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국회가 공식으로 제헌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김성수의 한민당 등 정부수립의 3대 주축세력으로부터 각각 초안작성을 의뢰 받았다. 이때 그는 앞의 중요 골자들을 수용할 것을 요구,3대 세력으로부터 동의를 받아놓은 터였다. 따라서 기초위의 단원제 채택은 의원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묵시적으로 담합한 성격이 강했다. 유진오안이 근본적인 변질의 길로 들어선 것은 6월 16일 제2차 독회때부터다. 국회의장 이승만은 이날 부의장 신익희를 대동,심의장소인 중앙청 회의실에 예고없이 나타났다. 유진오의 내각제 옹호설명을들은 뒤 연설을 시작한 이승만은 자신은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며 반드시 대통령책임제를 해야 한다는 말을 마친뒤 휭하니 나가버렸다.바로 한달전 신익희를 통해 유진오에게 “내각책임제가 되면 대통령은 할 일이 적어지지만 부득이한 일”이라는 견해를 밝혔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내각책임제가 대세였다. 오히려 내각제 반대를 주장하던 허정도 지지쪽으로 돌아설 정도였다. 이승만의 뜻에 관계없이 기초위는 관련조항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잠시 유진오 등을 상대로 회유에 나서봤지만 여의치 않자 며칠뒤 다시 기초위에 찾아와 협박을 가했다. 단순한 반대 표시가 아니라 만일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채택되면 어떤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는 선언이 그것이다. 이 말을 던진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이에 기초위원들은 허정과 유진오,전문위원 윤길중을 이화장에 보내 이승만을 설득하는 등 내각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의 버팀목은 이내 무너져갔다. 한민당이 먼저 굴복했다. 22일 계동 김성수의 집에 모인 백관수 김도연 서상일 조병옥 등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바꾸는 초안수정 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 수정안은 이튿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본회의는 17차례나 토론을 벌였지만 대세가 이미 이승만쪽으로 기운데다 핵심 골간이 결정된 터여서 대통령중심제가 우세하게 돌아갔다. 그래서 안건상정 20일만인 7월 12일 내각책임제는 만세삼창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만장일치로 공화국 헌법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 만장일치라는 이승만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날 표결방법은 기립이었다. 당시 대동청년단 소속의원이던 생존 제헌의원 김인식(현 제헌동지회장)은 “이문원 의원이 의원석 중간쯤에 기립하지 않고 끝까지 앉아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승만은 당시 대통령제를 택할 경우 초대 대통령이 확실시되는 사실상의1 인 권력자였다. 대중적 지지면에서 그와 겨룰수 있는 김구와 김규식은 5·10 총선을 거부,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되는 어떠한 정치행위에서도 입지가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윤길중은 나중 “제헌당시 한 사람의 고집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던 것이 그후 우리 헌정사에서 독재,장기집권,정통성문제 등에 대한 시비가 끊임없이 제기된 원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어떻든 대한민국 헌법은 7월 17일 이승만의 서명 공포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그탄생의 내력은 윤길중의 증언처럼 장차 전개될 헌정사의 불행을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이승만 고집 대통령제로 이를 입증하듯 1952년 7월 7일 제1차 개헌이 이른바 발췌개헌이라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달여 전 총선 참패로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의 자유당은 직선제를 시도했다. 그것도 국회제안 개헌안과 행정부제안 개헌안 가운데 일부를 발췌,국회에 공포분위기를조성한뒤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 1954년 11월 29일의 2차개헌(사사오입 개헌)도 헌정사에 얼룩을 덧칠했다. 자유당은 직선제의 문은 열었지만 대통령 중임제한규정에 부딪치자 이 벽을넘기 위해 다시 개헌을 꾀했다. 국회 투표결과는 의원정수 203명중 가결에 필요한 찬성표가 136명에서 1명 모자라는 135표로 나왔다. 부결이 선포됐지만 자유당은 사사오입이라는 해괴한 계산원리를 끌어들여 가결로 밀어붙였다. ◎증언/“대통령제였지만 내각제 요소 많아”/김인식 제헌동지회장 1948년 7월 제헌헌법의 탄생과정을 지켜본 제헌의원은 현재 5명만이 생존해 있다. 그중 3명은 병석에 누워있어 당시 상황을 기억할수 있는 사람은 김인식 제헌동지회장(85) 등 둘뿐이다. 김회장은 당시 헌법이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책임제로 급변한 상황을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뒤바뀌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본회의에서 헌법초안축조토론을 많이 했지만 대통령제에 대한 토의는 활발하지 않았어요. 모두들 이박사(이승만)가 고집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들 믿었지요.” 김회장은 그러나 제헌헌법은 문제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았으며 의원들의 자부심도 컸다고 전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제였지만 내각제적 요소가 많이 가미돼 권력집중을 막을수 있었어요. 실제로 제헌국회때는장관도 국회에서 불신임 가결만 하면 곧바로 바뀌었고 이승만 대통령도 정기적으로 국회에 나와 국정에 대해 설명하고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2대국회 중간쯤부터 이대통령이 국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헌법도 자기 뜻에 맞춰 갈아치우기 시작하더군요.” 김회장은 우리 헌정사의 불행의 출발이 바로 여기서부터 싹텄다고 지적했다. “평범한 개인도 자기가 지은 집에 대해서는 애착이 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대통령은 자기가 지은 멀쩡한 집을 자기 손으로 허물었어요. 나라의 장래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겠구나 생각했는데 결국 그 생각이 맞아들어갔어요. 그 뒤에도 마찬가지였고요.” 김회장은 제헌의 주역으로서 헌정사 50년을 통해 얻은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위정자들의 마음가짐입니다. 우리가 정부를 수립하고 헌법을 만들던 그때의 건국정신과 제헌정신만 지켰다면 그런 불행들은 없었을 겁니다. 앞으로도 그렇고요.”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렬 문화부 차장급 김종호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정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국호·상징물 제정(대한민국 50년:2)

    ◎48년 7월1일 제헌국회서 ‘대한민국’ 확정/제헌국회 헌법기조위원회/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논의/이승만 의장 ‘대한민국’ 상요 대세로 1948년 7월1일 제21차 회의가 열린 제헌국회 본회의장.의원들은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을 놓고 2차 독회에 들어갔다.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신익희 부의장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항목부터 축조심의에 들어갔다.이승만 의장(독촉)이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국호개정이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국호는 차차 국정이 정돈되어 가지고 거게에 민간의 의사를 들어가지고… 그러니까 국호문제에 있어서는 다시 문제 일으키시지를 말기를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국회 속기록) 이에 대해 최운교 의원(무소속)이 헌법기초위에서 심의한 국호가 몇가지며 그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반대에 부딪쳤다.이어 1조를 원안대로 통과시키자는 동의를 재청·삼청까지 얻어냈다.이때 조봉암 의원(무소속)이 제동을 걸었다.조의원은 “우리민족이 다 그렇게 만족치 않을 것이니 다음에 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그는 1차 독회에서도 “대한민국이란 말은 역사적 합리성으로 보거나 체제로 보거나 형식적 법통으로 보거나 천만부당하다”며 반대했었다. ○찬성 163·반대 2로 통과 이승만 의장이 다시 발언에 나서 고칠 필요가 있으면 다음에 하고,일단 원안대로 통과시키자고 무마했다.의회는 거수표결에 들어가 제1조를 재석 188명에 찬성 163명,반대 2명으로 통과시켰다.한민족의 새 역사를 열어 나갈 신생국의 이름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됐다.1948년 8월15일 정부가 출범하기에 앞서 한달 보름전 일이다. 새나라 출발에는 국호 제정이 선결과제지만 이승만의 모두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나라이름을 짓는 데는 많은 진통이 따랐다.국호가 갖는 상징성이 지대한데다,당시 좌우가 갈리고 정당·사회단체가 난립한 상태에서 각기 주장하는 바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미군정 때 장차 수립할 우리 민족의 국가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좌우대결이 치열해지면서는 남한지역과 우파는 대한민국을,북한지역과 좌파는 조선을 지지하는 ‘남대한·북조선,우대한·좌조선’으로 굳어져 갔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대한제국 때 처음 쓰였다.1897년 고종이 중국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국임을 강조하느라 황제를 칭하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1919년 상해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따라서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당연한 우리나라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를 부인하는 세력들이 해방후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예컨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대한’이라는 국호를 부정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한 각 정치세력에게서 임시정부 수립대강에 관한 답신서를 받았다.이에 따르면 한민당이 결성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와 신익희 주축의 입법의원은 ‘대한민국’을,좌우합작위원회가 주도한 시국대책협의회는 ‘고려인민공화국’을 주장했다.민주주의민족전선은 건준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 집착했고,건준을 부정하는 북조선노동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국호를 규정했다.각 정치집단은 국호제정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다툼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다. 제헌국회가 구성된 뒤 헌법기초 위에서 논의한 국호로는 ‘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등이 있었다.이때도 일부에서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국호를 제정하자고 주장했다.그런데 5월31일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사용함에 따라 이 이름은 제헌의원들간에 대세로 자리잡았다. 국호에 관한 찬반 논의는,이승만 행정부가 1950년 1월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을 법률로 제정하자 자연 소멸됐다.“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또는 한국)으로 하고,북한 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위해 조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45년 12월 첫 태극기 게양 국호외에 국가의 상징인 국기·국가도 제정과정에서 많은 논의를 거쳤다.태극기는 대한제국이 정식 인정해 상해임정이 이어받은 국기였다.태극기는 1945년 12월24일 처음으로 미군정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성조기와 함께 게양됐다.당시 조선성냥회사 사장인 신창균이 하지 장군의 보좌관에게 부탁해 성사시킨 것이다.미군정은 이듬해 1월14일 군정청 광장에서 태극기 게양식을 가짐으로써 국기임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무렵 만담가 신불출은 공연에서 태극기가 국기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비아냥거렸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이처럼 좌파세력을 포함한 일부에서 거부하긴 했지만 민심은 태극기 사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다만 그 도안이 다양한 데 문제가 있었다.독립문에 새긴 것,구왕실 소장품,미군정 문교부에서 공포한 도안,우리국기보양회가 제안한 모양 등 여러가지 태극기가 뒤섞여 사용됐던 것이다.현재의 태극기는 1949년 10월15일 문교부고시 제2호로 공포됐다. 그리고 애국가 가사는 1910년쯤 거의 완성됐으며 안익태가 곡을 붙인 현재 애국가는 1946년 5월 ‘임시 중등음악 교본’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그러나 제헌국회에서는 “국가는 적당한 시기에 남과 북 전체 민족의 의사로서 제정하자”며 논의를 유보했다.따라서 애국가는 사회관행상 국가로서 불릴뿐 아직도 법적으로는 공인받지 못한 상태이다. ◎“성조기와 함께 미군정청에 태극기 게양하자”/45년 하지 장군보좌관에 요구 성사 시킨 신창균옹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지 석달여만인 1945년 12월24일 미군정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과연 독립을 이룰 것인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던 그때 이는 국민에게 크나큰 위안을 준 ‘사건’이었다. 그같은 선물을 국민에게 전한 신창균옹(90)은 1940년부터 마카오에서 임시정부의 연락책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45년 4월 귀국한 그는 미군이 진주하자 9월 중순 하지 장군의 보좌관인 윌리엄스 중령을 찾아갔다.중령의 아버지는 선교사로 입국해 공주 영명고교 교장을 지냈고,그 때문에 중령은 한국땅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다.신옹은 윌리엄스 교장에게 세례를 받은 인연으로 동갑내기인 중령과 친하게 지냈다. 중령을 만난 신옹은 “미군정청에 성조기가 휘날리는데 이곳은 조선땅 아닌가.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도 함께 게양하자”고 요구했다.중령은 그의 말에 찬성하면서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니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12월 중순 신옹이 군정청의 연락을 받고 가보니 중령은 이미 귀국했고 후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태극기를 게양하기로 결정했으니 태극기를 빨리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한국사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태극기는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당당하게 국기로서 대우받게 됐다. 신옹은 이후 조선성냥공장의 사장으로 새나라 경제부흥에 힘쓰는 한편 임정 요인들이 귀국해 만든 한국독립당에서 연락부장 등을 맡으며 활약했다.1948년 김구가 남북협상차 평양을 방문할 때 수행하기도 했다.이후 일관되게 진보정치운동을 벌였으며 현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남측본부 의장을 맡고 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문화부 차장) 최병렬(문화부 차장급) 김종면(문화부 기자) 박정현(정치부 기자) 서정아(정치부 기자) 강선임(DB부 기자)
  • 새 발굴 자료와 증언으로 다시쓰는 현대사(대한민국 50년:1)

    ◎바람속에 밝힌 등불/1948년 8월15일 감격의 새아침 열리다/유엔 총선감시단 평양행 좌절되고/좌·우 이념대립속 ‘5·10선거’ 실시/해방 3년만에 반공정권 탄생/미 군정 정책 혼선으로 우익진영은 분열되고 북은 빨치산까지 양성/정부 권력구조 싸고 이승만·한민당 또 갈등/끝내 ‘대통령중심제’로 올해 1998년은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한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다.그 반세기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파란만장한 당대사다.그럼에도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했던 여러 공화국의 정치상황 때문에 가려진 부분을 다 들추어내지는 못했다.또 전통주의의 수정주의에 입각한 학계의 양극화 현상은 현대사가 더러 왜곡 기술되는 오류도 드러냈다.그래서 서울신문은 새로 발굴한 자료와 생존자의 증언으로 엮은 주간기획물 ‘대한민국 50년’을 연재키로 했다.이 시리즈는 우선 대한민국 50년 역사속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었다.이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다가오는 21세기 미래사를 발전적으로 이끄는 작업의 하나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새해가 밝았다.세밑 그믐날 잔뜩 찌푸렸던 하늘도 활짝 개었다.수은주는 영하 11도7분까지 내려가 기온은 쌀쌀했지만,날씨만큼은 쾌청했다. 우리 민족에게 새해 원단은 늘 각별한 것이었다.해방을 맞고나서 세번째 돌아온 새해는 더욱 그러했다. 전해인 1947년 11월14일 유엔 총회가 한국독립을 위한 계획안을 채택해 두었던 터라 고무적일 수 밖에 없었다.유엔총회의 한국독립 계획안은 1948년 3월31일까지 남북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국회 및 정부를 조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1947년 봄부터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구상했다.미국의 대외정책문서(FRUS)에 나타난 이같은 구상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시사하는 것이었다.미·소의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반도문제를 합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소련은 한반도문제의 유엔 이관을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섰다.그 대신 1948년초까지 남북한 주둔 미·소병력을 동시에 철수,한국인들 스스로가 외부개입 없이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의를 내놓았다. 소련의 제의는 명분상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당시 남북한 현실을 비교하면 남한쪽에는 위험한 것이었다.북한에는 이미 소련의 지원에 따라 사실상의 정부로 보아도 무방할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이와는 달리 남한에는 권한과 지지기반이 취약한 남조선 과도정부가 있기는 했다.그러나 미군정의 일관된 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우익 민족진영은 분열된 상태였고,북한의 조정을 받는 강한 공산세력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1948년 새해 첫날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큰 사건 하나를 딛고 넘어갔다.이날 경무부장 조병옥은 이른바 ‘인민해방군’사건을 서둘러 발표했다.그런 어수선한 판에 1월4일에는 38선을 경비하는 북한 보안대원들로부터 황해도 연백경찰서 장곡지서가 습격되었다.그리고 15일에는 개성경찰서 여현지서가 피습되는 가운데 남로당 출신으로 이루어진 야산대라는 이름의 빨치산이 전국에서 설쳤다.이들 야산대는 소규모 빨치산에 불과했다.그러나 북한은 대규모 게릴라전을 위해 이 해에 평남 강동학원을 차렸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유엔 감시아래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키로 한 유엔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이에따라 총선을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UNTCOK)이 1월8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서울에서는 영등포공업지대 근로자들이 임금인상과 고용직 근로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간 날이었지만,시민들의 환영은 대단했다.이날 KPS메논 인도 대표와 오스트레일리아·시리아 등 3개국 대표가 먼저 도착한데 이어 캐나다·프랑스·필리핀·엘살바도르 대표가 29일까지 서울에 왔다.유엔한위 1진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유엔한위가 북한에 한 발도 못 들여놓을 것이라는 김일성 발언이 나왔다.그 때만해도 의례히 해보는 상투어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미군정연락장교편에 평양으로 보낸 유엔한위의 입북신청은 소련군사령 참모장에 의해 거절되었던 것이다.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유엔한위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놓고 미군정과남한 정치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속회담을 열었다.우파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환영했으나 우익중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반대했다.그리고 김규식을 주축으로 한 중도파도 통일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에 섰다.좌익도 물론 반대했다. 유엔한위는 남한 단독선거가 유엔 결의와 부합되는지를 놓고 고심했다.그러다 이 문제를 유엔 소총회에 넘겼다.소총회는 2월19일 유엔한위의 접촉이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 우선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받아들였다.투표결과는 미국 입장에 대한 찬성 31,반대 2,기권 11로 나타났다.유엔 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쪽으로 손을 들어주자 유엔한위는 곧 바로선거준비에 들어갔다.그리고 정치권에서도 이승만 중심의 우익진영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미군정은 우익진영과 협조하여 선거준비에 들어가는 한편 3월17일에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발표했다.전통적인 민주선거원리에 입각한 이 선거법은 21살 이상의 남녀 모두를 유권자로 규정했다.이 선거법에 나타난 특이한 점은 일제에 빌붙어살았던 부일협력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 박탈이다.새 정부의 민족정통성 확립을 위한 것이었는데,일제 청산은 뒷날 이승만정권에 의해 퇴색되었다.선거일은 처음 5월9일로 정했으나 일요일 투표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날인 10일로 바꾸었다. 단독선거를 반대하면서 남북협상에 운명을 걸고 평양으로 떠났던 김구와 김규식이 5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5·10선거를 방해하려는 북한 의도에 말려들었을 뿐 남북협상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5·10선거 역시 예상했던 대로 평온하지 못한 분위기속에 진행되었다. 총선거에는 대한독립촉성회,한민당,대동청년단 말고도 45개 군소정당이 나왔다.특히 무소속이 많아 전체 당선자 198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85명이 무소속이었다.이어 대한독립촉성회가 55명,한민당이 29명,대동청년단이 12명,다른 군소정당과 사회단체가 19명의 국회의원을 냈다.이들이 바로 제헌의원인데,국회는 5월31일에 개원되었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에,신익희와 김동원을 부의장에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7월17일에 열렸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의 주장대로 대통령중심제를 권력구조로한 헌법을 통과시켰다.그리고 7월20일에는 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7월24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헌법 골격을 가지고 갈등을 빚었던 한민당과 또 격돌을 벌였다.이승만은 귀국 이후부터 자신을 추종하면서 대통령으로까지 밀어준 한민당을 각료 선임에서 소외시켰던 것이다.그래서 민국당에 이어 민주당으로 개편한 한민당의 뿌리는 1960년 4·19혁명기까지 이승만과 영원한 정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선포식은 8월15일 상오10시쯤 중앙청 광장에서 베풀었다.미군사령관 J R 하지 중장은 미군정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해방을 맞은지 꼭 3년만에 독립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극심한 혼란속에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군정의 갈등,공산주의 세력들과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하고 어렵사리 태어났다.그러나 제1공화국이라고도 말하는 내정체제하의 반공정권은 그 장래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로부터 50년,꼭 반세기를 맞은오늘 험란한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야당지도자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새 정부가 막 돛을 올릴 참이다.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이 걸어온 반세기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그 역사속에는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한 여러 단계의 공화국이 기록되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대선 특별취재단 가동/기자 90명 선거운동·투개표 밀착취재

    ◎위법·탈법 부정선거 고발창구도 운영 서울신문은 제15대 대통령선거 보도를 전담할 특별취재단을 구성,대통령후보 등록일인 26일부터 투표일인 12월18일까지 운영합니다. 본사와 전국의 지방취재진 90명으로 구성된 특별취재단은 각 후보와 정당의 선거운동 및 투개표 결과등을 현장에서 입체적으로 취재,신속·정확하고 공정하게 보도할 계획입니다. 서울신문은 특히 21세기를 여는 대통령을 뽑는 이번 선거가 깨끗하고 돈안드는 새로운 정치문화의 틀을 다지는 계기가 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각오입니다.독자 여러분들과 더불어 위법·탈법·타락선거 현장의 고발은 물론 참된 지도자를 뽑는 여건을 조성해 나가기 위해 호흡을 함께 할 것을 다짐합니다. 취재단 명단 ◇단장 이경형부국장 겸 정치부장 ◇본부 김인극(전국부장) 김명환(사진부장) 최태환 김경홍 이목희(이상 정치부 차장) 황진선(사회부차장) 윤청석 박재범(전국부차장) 조명환(경제부 차장) ◇서울 양승현(반장) 한종태 구본영 황성기 박선화 박대출 서동철 노주석 강동형 정기홍 박정현 진경호 이탁운 박현갑 김경운 박찬구 오일만 박은호 김태균 김상연 박준석 조현석 이지운 강충식 ◇경기·인천 정일성(반장) 박영효 김명승 김학준 조덕현 윤상돈 김병철 박성수 ◇강원 정호성(반장) 조성호 조한종 ◇부산·경남 김세기(반장) 이용호 왕상관 이정규 김정한 이기철 강원식 손성진 서정아 박희준 ◇대구·경북 김동진(반장) 박성권 육철수 한찬규 황경근 이동구 김상화 ◇광주·전남북 임정용(반장) 임송학 최치봉 남기창 김수환 조승진 ◇대전·충남북 송인국(반장) 최용규 이천열 한만교 김동진 곽태헌 ◇제주 김영주(반장) 오승호 ◇사진취재반 김윤찬(반장) 박영군 송기석 유재임 오정식 이종원 최해국 남상인 김명국 손원천 이호정 최병규 고영훈 ◇부정선거 고발창구=서울 중구 태평로 1가25번지 서울신문편집국,전화:02-721-5131(정치부) 5152(사회부) 5162(전국부) 팩스:721-5261,5263,5264
  • 태극기 표준색도 지정 고시

    ◎50년만에 첫 국제 통용색표기 방식으로/총무처,견본 5만여장 이달중에 보급 [박정현 기자] 정부는 24일 50년만에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색표기방식으로 태극기의 통일된 표준색도를 지정·고시했다. 총무처는 표준색도협의회 등 전문가들의 자문과 학생·시민등의 의견수렵을 거쳐 국제조명위원회(CIE) 등 3가지 방식의 표준색도를 지정했다. 총무처는 태극기 표준색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달 중 태극기견본 약 5만장을 제작해 정부기관·각급학겨·언론·출판사·국기제작업체·재외공관등에 보급할 방침이다. 총무처 최석충 의정국장은 “학생 등이 태극기를 쉽게 그릴수 있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용 크레파스,물감을 개발해 보급할 방침”이라며 “태극기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고조되고 태극기 사랑운동이 한층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 23일 여야 총무회담 임시국회 소집 절충

    여야는 오는 23일 3당 총무회담을 갖고 6월 임시국회 소집을 위한 절충을 다시 벌이기로 해 임시국회의 소집의 돌파구를 찾을수 있을지 주목된다.〈관련기사 4면/박정현 기자>
  • 김병헌 파리특파원 부임

    서울신문 김병헌 파리특파원이 14일 현지에 부임했다.김특파원은 박정현 파리특파원과 교대하여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지역에서 취재활동을 벌인다.
  • “현대사 이끈 거인 사라졌다” 애도/등소평 사망­각국 반응

    ◎경제대국 건설로 세계이익 기여­미/인민 삶의 질 높인 비전갖춘 인물­영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소평은 중국을 현대사회로 이끈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이었다고 서방의 지도자들은 평가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중국의 반체제인사들은 그의 정부가 자행한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상기시켰으며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는 등이 남긴 유산에 법이 반체제인사를 탄압하는 무기로 이용되는 사회체제도 포함돼있다고 지적했다. ▷유엔◁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은 등의 유족과 중국 정부,국민들에게 보내는 성명에서 『그는 헌신적인 지도력으로 국민들의 삶을 무한히 개선시킨 개혁을 일구어 냈으며 이는 의심할 바 없는 그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밝혔다.〈뉴욕=이건영 특파원〉 ▷미국◁ 미 행정부는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소평의 사망에 즉각적으로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 그의 사망이 향후 아시아와 전세계 정세에 미칠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이날 보스턴을 방문중이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즉각 특별성명을 발표,등을 세계무대의 비범한 인물로 치켜세우고 『지난 79년 그의 역사적인 미국방문은 미국과 중국간 협력과 급속한 관계발전의 기초를 쌓았다』면서 『중국이 인권과 법치를 존중하면서 정치적 안정과 개방경제의 대국으로 부상,건전한 국제질서의 동반자가 된 것은 미국과 전세계의 이익에 깊이 부합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24일 중국을 방문키로 돼있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이날 런던에서 성명을 발표,『중국의 변화의 시기에 역사적인 인물』이라며 미·중 관계 정상화에 많은 역할을 했던 인물의 죽음을 애도했다.〈워싱턴=나윤도 특파원〉 ▷대만◁ 대만은 등의 유족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대만 기업들이 등이 주도한 경제개혁정책의 혜택을 보았다고 말하고 등사후 새로운 평화분위기를 조성해 나갈 것을 중국에 제의했다.이등휘 총통 비서관인 황쿤휘는 『대만의 민간부문은 등이 착수한 경제개혁에 참여해 자본,기술,인력을 제공했으며 이는 본토경제발전에 활력을 주입했다』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대만 국방부는 등소평사망이후 본토에서의 군병력이동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 총리는 20일 등의 서거와 관련한 담화를 발표,『깊은 슬픔을 참을수 없다』며 『각하는 중국근대화 정책과 일·중 평화조약 체결은 물론 우호협력관계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기렸다. 하시모토 총리는 또 『앞으로 일·중 관계는 아시아·태평양지역,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양국 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도쿄=강석진 특파원〉 ▷프랑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등의 죽음에 대해 『중국역사의 위대한 인물중의 하나』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고 애도했다. 그는 미망인인 탁림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금세기에서 등만큼 원천적이며 결정적인 변화로 거대한 인간사회를 이끈 인물은 드물었다』고 말했다. ▷영국◁ 존 메이저 영국총리는 『경제적으로 활기차고 성공한 오늘날 중국을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로 묘사하고 『84년 1국 2체제의 개념을 포함하는 홍콩공동선언 입안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84년 등과 홍콩문제를 협상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등이 『중국 인민의 삶의 질을 높인 비전과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그의 1국 2체제라는 개념이 미래의 홍콩에 관한 양국간 합의도출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파리=박정현 특파원〉 ▷러시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중국 최고지도자 등소평의 사망과 관련,강택민 중국주석 앞으로 조전을 보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20일 보도했다. 옐친은 이 전문에서 특히 등소평 시대에 양국간의 과거 앙금이 말끔히 청산돼 호혜평등한 동반자 관계가 정립됐으며 이는 21세기의 전략적 상호 관계의 초석으로작용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 부당한 한국노동법 관심/박정현 파리 특파원(오늘의 눈)

    요즘들어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기구(OECD)의 회원국이 됐음을 실감한다.프랑스의 신문·TV할것없이 한국 노동법 관련 기사가 빅뉴스로 다뤄진다. 전에 없던 일이다.북한 핵문제로 한반도에 한바탕 전쟁이 벌어질 것같은 험악한 분위기였을 때에도 프랑스 신문에서 관련 기사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에 보내는 관심이 늘어났고,이는 OECD 동료 회원국에 대한 동류의식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관심의 질이다.결코 호의적인 관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을 방문중인 OECD산하 노동조합자문위원회(TUAC)의 존 에반스 위원장 등의 행동에 OECD 한국대표부의 관계자들은 분개한다.시위현장에서의 연설등 입국목적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고서도 자신을 추방하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위협했다.파업을 지지한 그들은 한국경제가 더욱 어려워질 경우 책임을 질수 있는가. 프랑스 신문들은 「기적의 종말」(르 피가로 15일),「세계화의 사회적 대가」(르몽드 16일자) 등의 제목을 달아가면서 한국을 난도질 해댄다.마치 톰슨사태로 추락한 프랑스의 위신을 만회라도 해보려는듯이.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OECD 사무국이 보인 행동이다.도널드 존스턴 사무총장은 지난10일 노동계 파업사태에 우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은 월권행위애 해당된다.사무국은 회원국들을 위해 「심부름」을 하는 곳이지 회원국의 국내문제에 공개적으로 언급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명은 시기적으로도 고약할 때를 택했다.구본영 신임OECD대사가 존스턴을 처음으로 만나 신임장을 제정하던 날 성명이 나온 것이다. 전경련과 민주노총,한국정부는 OECD에서 오는 21·22일 각각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할 예정이어서 노사간 대결이 국제무대로 옮겨지는 꼴이 됐다.
  • 서울신물 박정현 특파원 파리 OECD 본부를 가다

    ◎연구팀만 200여개 “세계경제 산실”/26개 분야별 소위서 국제경기흐름 조율/모든회의 비공개… 서류마다 「비」자 일색/지하커피숍엔 각국외교관 등 「정보사냥꾼」 북적 파리시내 서쪽 앙드레 파스칼거리 2번지.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고색창연한 본부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샤토 뮈에트(뮈에트성)이라고 불리는 구관과 비교적 신식인 별관건물이 맞이한다. 구관 건물부터 찾아들었다.방문객 접수창구에서 신분증을 내고 임시방문증을 받는다.OECD 대표부 직원이 아니면 회의에 참석하는 정부대표단도 매번 방문증을 받아야 한다.그만큼 29개 회원국을 대상으로한 OECD의 문턱은 높게 느껴진다. 건물입구에는 OECD라는 간판도 금방 눈에 띄지 않는다.주변에 주차된 외교관 번호판의 승용차들이 OECD 건물임을 말해준다.신분증을 받아 구관을 들어서면 넓은 뜰이 나오고 건물 입구를 쳐다보니 가로 1.5m,세로 1m 크기의 태극기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본부입구 태극기 펄럭 지난달 12일 이시영 주프랑스한국대사가 프랑스 외무성에가입서를 기탁하자마자 게양된 태극기다.한국이 OECD 회원국임을 대외에 알리는 가장 큰 상징이다.나머지 28개 회원국의 국기가 태극기와 함께 나부낀다.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음을 실감케 했다. 샤토 뮈에트는 왕과 귀족들이 가까운 불로뉴숲에서 사냥을 하다 쉬던 「휴식처」.우여곡절을 겪은뒤 1차대전 직후 유태인 출신의 작가 로드 차일드가 인수한다.현관과 회의실 등에 진열된 그림 등 소장품들은 그가 진열한 거의 그대로이다. 차일드는 2차대전이 일어나자 나치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 성을 프랑스 정부에 헌납했다고 한다.전쟁이 끝나고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고 프랑스 정부는 지난 49년 유럽경제협력기구(OEEC)가 설립되면서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OEEC에 이 성을 넘겨줬다. OEEC의 손에 들어간뒤 61년 명의가 OECD로 개편되었으며 그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건물 1층에 있는 회의실은 4개.A∼D까지의 회의실이 있고 이 가운데 C회의실이 바로 매년 5월 각료들이 모여 각료이사회가 열리는 유명한 곳이다. 입구 왼쪽의 계단을따라 올라가자 도널드 존스턴 사무총장의 집무실과 사무국 직원들의 사무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구관을 나와 다시 앙드레 파스칼 거리를 건너 신관에 들어섰다.신관의 지하1층에 위치한 회의실은 9개.나머지는 모두 사무국의 사무실이다. ○사무국 직원 1천900명 구관의 회의실을 합해 모두 11개 회의실이 있지만 매일 열리는 7∼8개의 회의때문에 항상 북적댄다.지하의 커피숍은 회의 막간을 이용해 외교관이나 정부대표단이 정보를 교환하고 휴식을 취하는 장소.다른 선진국 경제정책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각국 외교관과 정부관리들의 눈초리는 커피숍에서도 느껴진다. OECD는 부자들의 모임이라고들 한다.하지만 실제로 OECD를 방문해보면 OECD가 결코 부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회의실이 부족해 파리시내 프랑스정부 소유의 건물로 자리를 옮겨 「더부살이」 회의를 여는 경우도 많다. OECD는 본부를 이전한다는 방침아래 대상지를 물색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영등포구 정도의 크기에다 건물 증개축이 엄격한 파리시내에서 넓은 부지에 번듯한 사무실을 찾기란 쉽지 않다.지난해 여름 한국이 가입협상을 진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OECD 사무국 직원들은 한국이 하루라도 빨리 회원국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한국이 가입하면 예산이 늘어 에어컨을 설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OECD예산은 약 2억6천만달러.이 가운데 1천900여명의 사무국직원들 인건비가 85%를 차지하고 있어 예산은 턱없이 모자란다.때문에 지난해 존스턴체제 출범이후 사무국 기구 축소와 기능정비 검토에 들어갔다.여느 국제기구와 마찬가지로 인력감축바람이 서서히 불어닥칠 것으로 예상된다. ○건물 비좁아 이전 모색 OECD 29개 회원국 가운데 유럽국가들이 22개국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이는 OECD자체가 2차대전후 잿더미의 유럽의 재건을 위한 기구라는 뿌리에서 비롯된다.미국은 마셜플랜이라는 대규모 유럽원조를 했고 유럽 16개국이 원조자금의 배분 등을 논의했던 기구가 OEEC이다. OEEC는 유럽의 경제복구가 어느정도 달성되자 지난 61년 미국과 캐나다 등을 포함한 OECD로 확대 개편됐다.이제는 선진7개국(G7)정상회담의 사무국 역할과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의 막후조정을 할 정도로 국제경제질서를 주무르는 최고의 국제경제기구로 떠올랐다.이런 기구에 가입해 회의에 참석한 우리 정부 관리들은 OECD가입이 백번 잘한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본부가 파리에 소재하고 있어서인지,회원국이 유럽지역에 편중돼 있는 탓인지 유럽 텃세가 심하기로도 유명하다.한국의 가입협상때 아시아국가들은 지원사격을 많이 해준데 비해 유럽국가들은 꼬치꼬치 트집을 잡기도 했다.때문에 백인 기독교사회가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회원국이 되려는 한국을 골탕먹이려 한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최고기구 각료이사회 OECD의 회의 특징은 회원국간 비밀을 중시하고 웬만한 서류에는 「컨피덴셜(비밀)」이라고 찍혀 있다.지난 연말 투자보장협정(MAI)회의에 참석중 OECD건물에서 만난 한국의 한 외교관은 『한국이 정식 회원국이 아닐때 한 위원회의 회의에서 하루에 3번씩이나 쫓겨나는 설움을 겪기도 했다』며 『회원국의 가장 큰 장점은 쫓겨나는 설움이 없이비밀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점』이라고 전했다.그만큼 비회원국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타적이라는 얘기다.회의의 또다른 특징은 「동료간 압력(Peer Pressure)」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회의는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지만 회의에 참석한 외교관들의 말을 빌려 종합해보면 이렇다.A국의 경제정책이 잘못돼 B국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치자.B국의 대표는 어느날 회의에서 『A국의 정책은 국제경제규범에 어긋난다』고 간접적으로 지적하면서 수정을 요구한다.그러고 나면 회원국들은 A국과 함께 토의를 거듭하면서 서로의 정책 조화를 도출해 나가는 점잖은 진행방식이다.이 과정에서 선진국들의 최신 관심사를 파악할 수 있다. OECD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는 이런 각료이사회와 함께 상주대표들이 참석하는 일반이사회가 있다.사무총장을 의장으로 하는 일반이사회가 열리는 매달 두번째및 네번째 목요일은 OECD가 붐비는 날이다.그리고 특별사안이 있으면 한차례 이사회가 더 열려 한달에 2∼3번씩 열리는 셈이 된다.이 자리에서 신규 회원국 가입문제와 위원회별 심사및 검토결과에 대한 최종 승인이 내려진다. 이사회 산하에는 26개의 분야별 위원회가 있고 200여개의 작업반이 구성돼 있다.이들 작업반에서는 문제점으로 지적된 경제정책에 대한 해결방안 등에 대한 연구가 모색된다.이외에 국제에너지기구(IEA),원자력기구(NEA),교육연구혁신기구(CERI) 및 개발센터(DC) 등의 반독립적 부속기관들이 설치돼 있다.
  • “세계인의 눈에 비친 한국”/본사 특파원 신년 전화좌담

    ◎「GNP 1만불」 걸맞는 국민의식 선진화 시급/국제사회서 저개발국­선진국 가교역 큰 기대/한국 OECD가입 단기적으론 진통/신기술개발 등 경쟁력 강화 서둘러야/세계각국,정부 개혁정책 높이 평가/북 체제 불안… 통일 철저한 대비 긴요 □참석자 ·워싱턴=나윤도 특파원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뉴 욕=이건영 특파원 ·L A=황덕준 특파원 ·도 쿄=강석진 특파원 ·파 리=박정현 특파원 ·북 경=이석우 특파원 ·모스크바=류민 특파원 ·사회=이창순 국제부차장 한국은 20세기의 후반에 들어 눈부신 경제성장을 통해 이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게 됐다.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이 이를 뒷받침 한다.그러나 외국의 눈에 비친 우리는 과연 선진국 자격을 갖춘 나라인가.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아니올시다」이다.특히 국민의식의 수준,선진국에 합당한 국제적 역할 등에 이르면 우리가 개선해야할 부분은 한두가지가 아니다.더구나 앞으로 21세기는 한민족에 있어서는 통일을 이루어야하는 중차대한 시기이다.세계각지에 나가있는 서울신문 특파원들을 전화로 연결해 세계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오늘과 내일은 과연 어떤 모습인지,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선진국의 자격」은 무엇인지를 들어보았다. ­사회(이창순 국제부차장)=세계는 한국의 21세기 국제적 위상을 과연 어떻게 보고 있을까.먼저 국제외교의 중심무대인 유엔에서 보는 시각부터 시작해달라. ▲이건영 뉴욕특파원=유엔의 185개 회원국들은 대부분 한국이 21세기에는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저개발국가들은 특히 한국이 저개발국과 선진국간의 「가교 역할」을 할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경제분야에서의 성공적 경험은 저개발국가들의 경제개발에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유엔내에서도 한국의 영향력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국제사회에서 「무시못할 존재」로서의 역할을 당당히 해낼수 있을 것이라는 이러한 예상은 우리의 국력과 외교력이 그동안 크게 신장된 결과라 할수 있다. ○국력·외교력 크게 신장 ▲나윤도 워싱턴특파원=미국도 한국이 지난 수년동안 국제사회에서 급속한 지위향상을 이룩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그러나 그러한 상승속도가 21세기까지 그대로 유지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더욱이 지위상승에는 그만큼의 비용이 요구되고 있음을 지적한다.우리들도 국제적 지위향상에 대한 자긍심의 대가로 보다 많은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시각은 좀 다를수 있겠는데. ▲강석진 도쿄특파원=일본은 한국의 OECD가입등 선진국화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일본의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의 OECD가입에 대해 총체적으로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으로 본다.그러나 일부 다른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한국경제가 진통을 겪을 것으로 지적한다.일본은 최근 성장세가 주춤거리고 있는 동남아 경제와 함께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이 지속될 것인가라는 점에서 한국의 경제상황과 미래를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다. ○구조적 개혁 지속해야 ▲류민 모스크바특파원=러시아도 한국의 미래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그러나 대국의식 때문인지 공식적으로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다.하지만 세계무역기구(WTO),OECD가입 등 선진국으로 향한 발돋움은 인정하고 이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한국경제의 저력이나 한국상품의 국제경쟁력에 대한 평가는 어떤지.한국과 경쟁하면서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본의 시각은 어떤지. ▲강석진=한국경제는 현재 경상수지 악화,성장둔화,물가상승 등 3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놓쳐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고 일본 전문가들은 진단한다.그리고 기술개발에 대한 태만과 경제의 구조적 약점을 지나치게 방치해 왔다는 지적도 있다.그러나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해서는 높은 저축률과 교육수준,확고한 생산기반 등으로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고 보고 있다.하지만 한국이 국제경쟁력을 높이려면 기술개발노력,법률·규제·행정체제 개혁 등 구조적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한다.일본은 한국의 반도체·조선·제철 부문은 국제경쟁력이 있다고 분석하지만 기계산업·전기전자 부문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평가한다. ▲박정현 파리특파원=유럽은 한국상품의 경쟁력이 여전히 높다고 보고 있다.특히 반도체,자동차,철강등에 집중된 경쟁력은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있다.그러나 연구개발비(R&D) 투자가 적다고 지적하고 한국상품의 질에 대해서도 싸구려라는 인식이 분명하다.시장에서 만나는 프랑스사람들도 한국상품의 질이 높지 않다고 지적하며 유럽에 진출한 한국기업인들도 한국상품에 대한 그러한 인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김재영 워싱턴특파원=미국도 한국경제의 저력은 인정하지만 한국상품의 경쟁력에 대한 평가에서는 별로 좋은 점수를 주지않고 있는 것 같다.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자동차를 비롯한 한국상품은 「싸구려」이상의 매력을 주지못하고 있다. ▲이석우 북경특파원=중국은 한국의 고임금,높은 땅값및 물가,높은 이율 등 구조적인 문제로 내년에도 어려움이 계속될 것으로 본다.그러나 높은 경제수준,근면함,잘 정비된 산업기반 등으로 한국경제의 회복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있다. ○제2의 경제도약 전망 ▲이건영=유엔의 많은 회원국들은 한국의 경제적 저력은 여전히 높다고 본다.물론 일부 국가들은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한국국민의 근면성,경제개발 경험 등을 바탕으로 제2의 경제도약을 이룩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한국정치와 민주화에 대한 평가는 어떤지. ▲나윤도=미국의 정치인이나 학자 등 지식층들이 한국의 민주화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음은 워싱턴에서 쉽게 느낄수 있다.특히 문민정부 시대를 열고 과감한 개혁을 단행한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과 추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미국은 또 한국이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했다는 점에서 한국을 2차대전 이후 계속돼온 미국의 「민주주의 수출(Exporting­Democracy)」 전략의 성공사례로 꼽고 있다. ▲박정현=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도 한국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드문 나라로 평가하고 있다.하지만 유럽국가들은 OECD가입 과정에서도 나타났듯이 한국의 노사관계 발전이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유엔에서 보는 한국 정치와 민주화는 어떤지. ▲이건영=많은 유엔회원국들도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짧지만 멀지않아 진정한 민주화를 이룰 것으로 본다.그러나 한국의 민주화 정도가 일부 유엔회원국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아쉬움도 있다.이는 한국의 상황을 잘 모르는 일부 외국언론들의 비판적 보도에도 일부 원인이 있지만 한국의 정치선진화를 위해서는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한국사회의 성숙도에 대한 견해는 어떤지. ▲강석진=일본은 한국의 사회적 성숙도가 높지 않다고 본다.한국인들의 거칠음,대충대충하는 버릇등에 대해서는 오랜 경멸감을 갖고 있다.올림픽을 계기로 한동안 개선되던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독도 및 과거사문제 등으로 양국간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나빠졌다. ○노사관계 발전 “미흡” ▲이석우=중국도 경제적 성장에 비해 한국인들의 의식수준은 부족한 것으로 평가하는것 같다.또 급속한 산업화속에서 기존 가치관이 무너지고 이를 대체할 가치의식이 아직 정립되지 못한것으로 보고 있다. ▲황걱준 LA특파원=민주화 및 경제성장 등 외형적인 한국의 성숙도는 높다고 보지만 해외관광객이나 해외에 체류하는 한국인들의 사치와 경박스러운 행동은 한국사회 성숙도 평가에 대표적인 마이너스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박정현=프랑스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단행된 과거청산 등의 개혁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그러나 대우전자의 톰슨멀티미디어 인수 백지화과정에서 나타났듯이 프랑스인들은 한국을 여전히 부패한 나라로 보고 있는게 사실입니다.물론 그들의 행동이 감정적인 국수주의 사고에서 나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의 눈에 한국은 여전히 부패한 나라로 보이고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이건영=유엔내의 선진국들은 한국사회의 성숙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국민 의식수준 함양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한국도 이제는 경제성장 제일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국민의 의식수준을 높이는 일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통일은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중요한 의미와 함께 동북아의 세력균형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남북통일과 북한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있는지. ○한국사회 성숙도 낮아 ▲나윤도=미국의 중앙정보국(CIA),국방정보국(DIA)등 정보기관과 전문가들은 한반도문제와 관련,▲북한의 자체붕괴 ▲한국에로의 남침 ▲대화를 통한 남북통일 등 3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그러한 시나리오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결정자들사이에서도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그러나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는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국가들에 안보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연착륙(Soft­landing)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강석진=일본도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를 크게 우려하고 있다.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군사력 증강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없지않다.한반도의 통일이 언제쯤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부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이 일본에 위협이 되지않는 통일방식을 희망하며 특히 통일한국이 중국으로 기울지 않을까걱정하고 있다. ▲이석우=중국은 북한이 현재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있지만 갑작스런 붕괴 가능성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또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이 붕괴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중국은 평화적 통일을 바라는 입장으로 남북한과 등거리 외교전략을 추진,영향력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중국은 또 주변국가들과의 선린정책과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주변의 안정과 평화를 원하고 있기때문에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바란다고 봐야한다. ▲류민=러시아도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가능성을 부정하며 남북통일에는 현실적으로 시간이 좀 걸릴 것으로 본다.그래선지 최근들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성을 띠고 있다. ○미,북 연착륙전략 추진 ▲이건영=유엔회원국들의 대부분은 국제정세의 흐름으로 볼때 남북통일은 시간의 문제이지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으로 본다.많은 나라들은 10년 이내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반도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하지만 갑작스런 통일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나라들도 있다.한국정부는 북한측 정세를 예측하기가 어렵기때문에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나라들이 많다.통일의 방법이 평화적이어야 한다는데는 의견들이 일치하는 것 같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정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강석진=일본은 올해 마무리될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통해 동북아 지역에서 양국간의 협력을 강화한다는 틀을 마련하고 그 틀안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대폭 강화하려 하고 있다.일본은 또 최근 한국과의 안보협력관계도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있다.특히 클린턴 대통령의 2기 체제 출범과 관련,미국과 중국이 관계를 회복해서 미국이 중국을 아시아정책의 중요한 파트너로 삼으려는 움직임에 경계하고 있다. ▲라윤도=클린턴 2기행정부에서 직면하게 될 최대의 국제안보 과제로 북한의 붕괴를 지적하는 견해가 많다.이와 관련해 주한미군문제가 국방예산 동결로 인한 97년 미군의 전략을 수립하는데 있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최대의 적이었던 옛소련의 위협이 제거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한반도에 동일한 규모의 병력을 주둔시켜야 하느냐에 대한문제제기로 주한미군의 감축을 주장하는 측과 북한이 아직도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한미군 감축은 모험이라는 주장이 맞서 있다. 이석우=중국은 동북아에는 긴장요인이 존재하고 있지만 중국과 미국및 일본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지역정세가 안정될 것으로 낙관하는 분위기이다.한반도 정세도 개선될 여지가 있다고 본다.그러나 일본내 우익보수주의자들의 활동강화는 외교적 갈등요인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한다. ○동북아정세 변화 클듯 ▲류민=러시아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가 상당기간 혼미스러울 것으로 예상한다.특히 경제파탄상태에 있는 북한의 움직임이 한반도와 세계정세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와 홍콩을 반환받을 중국이 대만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주목한다.동북아의 이러한 움직임과 관련,미국이 어떻게 조정해 나갈지에 대해서도 러시아는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건영=동북아정세는 그 어느때 보다도 변화의 물결이 강하게 일 것으로 전망된다.남북간에도 경색국면을 거쳐 미·북한간의 관계개선 조치 등이 가시화되면서 부수적으로 긴장완화 조짐이 일 것으로 보이지만 북한측의 체제유지 강박감이 더 강해질 것으로도 예상되어 북한내부,특히 군부에서 남북한간의 긴장완화 움직임에 역행하려는 반작용이 나타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북한의 군사적 동향이 동북아 지역정세의 큰 변수로 등장하겠지만 일본의 군사력 증강과 중국의 해군력 팽창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많은 유엔국가들은 보고 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해외에 살고 있는 교민들의 고국에 대한 기대도 커질 것으로 보이는데. ▲황덕준=미국에 살고있는 교민들은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주재원들이나 관광객들의 과도한 씀씀이와 도피성 유학생들의 방종등에 대해서는 분노하기도 한다.고국의 풍요로움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교민들도 늘어나고 있다.이때문에 풍요로워진 모국이 보다 관대하게 교민들에게 신경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교민들은 또 2중국적 인정문제,2세들의 모국에서의 취업문호 확대 등에 대한 기대도 크다. ▲강석진=재일동포들은 최근 한국경제가 어려워진데 대해 우려를 나타내면서 한국이 다시 경제도약을 이룩하여 선진국의 기틀이 마련되길 바란다.그들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면 일본사회에서의 차별도 줄어들고 자부심도 가질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박정현=프랑스 등 유럽에 살고 있는 교민들은 한국을 제대로 알릴 제도적 장치가 부족한 것에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류민=대부분의 러시아 교민들은 새해 대통령선거가 있지만 우리사회가 어떤 동요도없이 안정되길 바라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들을 종합합해 볼때 앞으로 한국외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는가. ▲김재영=미국관리들은 한·미 관계에 있어서 아직도 한국정부나 외교관들이 한국에 대한 특별대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외교는 냉정한 국익싸움으로 한국도 특별한 대우를 기대하지말고 경쟁력을 갖추어 대등한 입장에서 문제해결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외교다변화정책 펴야 ▲이건영=많은 유엔회원국들은 한국의 국력이 커진만큼 대 미·일 중심의 외교에서 벗어나 외교다변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개도국과 제3세계와의 적극적인 외교도 강조한다.한국은 올해 사상처음으로 안보리이사국과 동시에 경제사회이사국으로 활동하게 됨으로써 한국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좋은 기회를 맞고 있다.이런 기회를 활용하고 한국외교가 국제사회에서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문외교관들의 증원과 함께 국제기구에 진출하는 한국인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이석우=중국은 한국외교가 자주성과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수있는 정책과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박정현=유럽국가들은 한국이 경제성장에 걸맞는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해야 할 것으로 지적한다.한국은 경제력을 외교력으로 전환시키는 능력이 미흡하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현실적인 면에서는 한국외교의 영향력 확대를 반기지 않는 태도도 분명히 있다.
  • 대우전자 배 회장의 분노/박정현 파리특파원(오늘의 눈)

    대우의 톰슨 멀티미디어(TMM)인수결정을 중단시킨 프랑스정부의 조치에 대한 배순훈 대우전자회장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파리를 방문중인 배회장은 10일 하오 한국특파원들과 만나 『프랑스정부의 처사는 차별대우』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배회장은 이어 이같은 불공정성에 대해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할 수도 있다고 말해 법정싸움으로 비화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대우가 TMM인수에 미련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이처럼 프랑스를 강력히 비난하며 공격적 자세로 전환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배회장은 『정부의 결정이 뒤집히는 예측할 수 없는 나라에는 투자할 수 없다』고 프랑스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그는 『12%의 높은 실업률을 안고 있는 프랑스는 고용을 창출하기 보다는 일자리를 없애는 쪽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프랑스의 오락가락하는 정책변화를 지적했다.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프랑스가 알고 보니 굉장히 비효율적인 나라라는 지적도 했다. 알렝 쥐페총리가 분리매각입장을 밝힌데 대해 『분리매각하려면 내부절차만 최소한 6개월이 걸리고 입찰 등의 절차를 감안하면 1년6개월정도가 소요된다』며 『도대체 뭘 알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고 했다. 배회장은 이어 민영화위원회가 지적한 문제점에 대해서 조목조목 반박했다.프랑스는 기술이전을 우려하지만 오히려 대우가 톰슨에 기술이전을 해야할 판이라고 비난했다. 고용약속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에 의문을 제시한데 대해서는 『대우는 8년동안 투자와 고용을 했는데 고용을 한다고 밝혔으면 됐지 어떻게 보장책을 요구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배회장은 이날 간담회에 앞서 장 아르튀 재무경제장관 등 정부각료들과 만나 이런 요지의 반박을 하면서 항의했다.자크 시라크대통령에게도 항의서한을 보냈다.일부 각료는 배회장이 분개하기도 전에 『이럴 수 있느냐』고 분개해 정작 자신은 분개하지도 못했다고 배회장은 전했다.일부 프랑스인들도 차별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같은 일부의 동조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데 배회장의 분노가 도움이 될 것인지 주목된다.
  • 프랑스의 쇄국정책/박정현 파리특파원(오늘의 눈)

    톰슨 민영화 중단결정은 「현대판 쇄국정책」을 보는 듯하다. 프랑스 사람들은 톰슨그룹 민영화중단을 자존심과 명예의 승리라고 의기양양해 있다.국내 최대의 전자업체를 감히 넘보는 동양인을 물리쳤다고 우쭐해 있다. 마치 개국을 요구하는 양이군대를 물리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100여년전 구한말 모습을 연상케 한다. 얼마전 프랑스에 투자한 일본의 전자업체 JVC사가 철수하고 영국으로 옮겨 버리는 등 탈프랑스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높은 임금에다 끊이지 않는 파업 등으로 투자의 장점이 별로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제 프랑스 투자기피의 이유로 정부의 신뢰도가 추가됐다.톰슨민영화 중지결정으로 프랑스 정부의 신뢰성은 곤두박질을 했다.정부의 결정마저 오락가락하는 프랑스에 투자를 하려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민영화 중지결정 직후 프랑스 정부는 이로 인해 외국투자가들이 프랑스 투자를 기피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한 것도 이런 점을 우려해서다.프랑스가 외국 투자를 반기고 있음을 믿어달라고 강조했지만 이말을 그대로 믿을 외국인은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톰슨을 손에 붙들고 지킨 자존심만큼 한국의 자존심은 상했다고 할수 있다.한국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고 말면 그만이지만,프랑스 입장에서는 국가경제 실익의 문제가 걸려 있다. 톰슨 민영화중지로 외국기업의 투자가 줄어들고 경제가 위축되면 그들이 톰슨에서 지킨 자존심은 1프랑어치의 가치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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