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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도청 이전따른 목포권 발전전략’ 심포지엄

    목포를 무관세 ‘자유항지역’으로 지정,외국기업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이보장되는 신개방 거점이자 동북아 관문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국토연구원 박양호(朴良浩) 국토계획연구실장은 30일 오후 새정치국민회의목포·신안갑지구당(위원장 金弘一)과 목포대 공동 주최로 전남 목포시 신안비치호텔 대회의실에서 열린 ‘신도청 이전에 따른 목포권 발전전략’ 심포지엄에서 ‘신도청 중심의 환황해경제권 중심기지화 전략’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이같이 말했다. 박실장은 “과거의 수출촉진이나 수입자유화 차원의 개방에서 벗어나 전략적인 신개방 거점을 구축해야 한다”면서 “목포권을 자유항으로 지정·육성해 물류,가공,수출입 등 자유로운 국제교역 활동을 무관세로 보장하고 소득·법인세 등 각종 세제혜택과 사회간접자본(SOC),첨단정보통신망 구비 등 기업하기 편리한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목포권은 환남해축과 환황해축이 만나는 차세대 도시권으로 개발해야 한다”면서 주요전략으로 국제자유도시 지정과 함께 ▲광주·목포 광역권의 중심지 ▲서해안·남해안 신산업지대망의 연계중심지 ▲주력산업군집의모델도시권 ▲신자원활용지역 및 환경도시 ▲한국힐리콘밸리의 거점 ▲국제관광의 중심지 ▲지역간 협력·제휴의 시범도시권으로 육성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목포·무안·해남·영암·진도·신안을 통합,공동발전을 유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놔 관심을 모았다. 목포대 지역개발과 이종화교수는 이날 ‘신도청 이전에 따른 지역발전틀 재편 구상’이란 주제발표에서 “목포권 주도로 한·중·일 공동자본과 투자에 의한 환황해 경제협력기구를 창설하고 이를 목포권에 유치해야 한다”면서“도청 신도시는 국제교류기능을 충실히 할수 있는 시설이나 공간 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교수는 “목포권 발전을 위한 개발개념은 ‘교류’,‘해양’,‘문화’에서 찾아야 한다”면서 “목포권이 유치할 산업업종도 목포권의 지역적 특성은 물론 일본 큐슈지역과 중국 상해지역내 업종과 수평적 분업과 협력이 가능한 업종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목포대 임해지역개발연구소장 박종철교수는 ‘신도청 도시개발 방향’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신도청 소재 신도시의 개발 목표는 ▲전남도청의 역할을수행하는 행정도시 ▲전남의 새로운 구심점 확보 ▲지역균형개발의 전기 마련 ▲해양개발의 거점 형성 ▲21세기 모델 신도시 등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박교수는 “신도시는 20만명을 수용하는 복합다기능도시로 건설하는 것이타당하다”고 말하고 “도시기능은 행정기능,주거기능,국제교류기능의 일부를 담당해 24시간 움직이는 도시가 되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주제발표에 이어 목포시,해남·영암·무안·진도·신안군 등 목포권 6개 시·군 자치단체장과 박재순(朴載淳) 전남도 자치행정국장 등이 참석해 목포권 발전전략을 놓고 토론했다. 이에 앞서 김홍일의원은 축사에서 “전남도청의 무안군 이전은 낙후된 전남 서남권 개발의 촉진제뿐 아니라 전남 전체 지역발전의 계기가 될것”이라면서 도청 이전에 따른 갈등 치유를 촉구한 뒤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목포권과관련된 기존 개발계획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와 새로운 관점에서의 지역발전 전략이 논의되도록 하자”고 말했다. 한편 김의원은 이날 ‘광주∼목포광역권의 지식기반 지역발전 구상’이란정책자료집을 펴냈다. 목포 임송학기자 shlim@
  • 관찬기록에 나타난 독도 영유권/양태진 토문회 회장(특별기고)

    ◎삼국사기에 신라영토 첫 기록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함에 있어서는 몇가지 요건이 필요하다.이 가운데 문헌적 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절대요건이다.문헌은 관찬기록과 사찬기록으로 구분되는데,영유권분쟁은 상대가 있는 만큼 기록이 한 나라의 대표성을 가져야 하며 따라서 관찬을 뜻할 수 밖에 없다.그리고 그 기록은 양보다는 질적 측면에서의 요건이 중시된다. 독도에 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는 삼국사기를 들지 않을 수 없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2년(511년)조에 「하유월 우산국 귀복」이라 하여 지금부터 1480여년 전에 울릉도와 그 속도인 독도가 신라에 귀속됐음을 알 수 있다.그후로 섬주민들은 해마다 신라에 토산물을 바쳐왔다. 우산국이라는 국호는 고려 현종대에 와서 기록상 끝난다.이는 우산국이 명실공히 고려의 행정관할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이어 관련기록들은 고려사,고려사지리지로 이어진다. 고려 목종 7년(1004년)에 우릉도인이 일본인번에 표착한 사실이 있으며 현종 9년(1018년)에는 우산도민을 동여진의침입으로부터 구원했다고 한다.인종 때인 1123년에는 본토에서 볼 수 없는 울릉도 과일과 나뭇잎 등을 바쳤다.이밖에 의종 11년(1157년)과 명종 27년(1197년),충목왕 2년(1346)에도 울릉도·독도 관련기사가 보인다. 이처럼 여러 대에 걸친 관원들의 파견과 내왕은 울릉도는 물론 독도에 대한 지리적 지식의 확대와 행정권의 밀착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고려사 지리지 울진현 조에 『우산,무릉은 본래 두 섬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하여 독도의 실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이는 실상과 부합되는 것이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본토로부터의 도주민을 끌어오거나 왜구·여진인들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 공도정책을 취한 바 있다.그러나 이는 결코 행정권이나 영유권 포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하자 울릉도인이 입조하였고 태종실록 17년(1417년) 2월5일 안무사 김인우로 하여금 울릉도민을 내륙으로 데려오게 한 바 있다.세종 7년(1425년) 김인우를 다시 울릉도로 파견할 때 그 직함을 우산무릉등처안무사라 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동일 관할지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후 세종연간 강원도 연해민이 울릉도 밖 요도를 확인한 바 있고 성종연간에는 삼봉도발견을 기록하고 있는데 요도·삼봉도는 모두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후 안용복이 독도에 침입한 일본인을 몰아낸 사건은 숙종실록과 동문휘고,통문관지,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해방십등에 언급됐다. 1706년,1711년,1727년에는 섬을 답사해 지도를 만들도록 한 바 있으며 토산물을 대량 채취하기도 했다. 근세에 들어 고종은 1882년 울릉도 개척령을 발표했으며 2년후에는 김옥균을 동남제도 개척사겸 포경사로 임명,개척에 힘썼다.이어 그해 7월 전재항등 16가구 54명을 울릉도에 이주시켰음이 성책에 나온다.이밖에 고종 18년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일기가 있고,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에 따라 의정부 참정대신 박재순 명의로 1906년 5월20일 지령 제3호를 통해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천명했다. 위 기록들은 독도영유권을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주요 자료일 뿐 이밖에도 독도를 우리땅으로 여긴 관찬기록은 많이 있다.
  • 부실광고 통신판매사 13곳 적발/통산부

    ◎비씨·국민카드 포함… 시정령 통신판매업자들이 대부분 광고에 담을 내용을 제대로 표시하지 않는 등 광고를 부실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산업부는 4일 우편 또는 신문에 광고를 낸 뒤 소비자와 전화로 구매계약을 하는 비씨카드 등 13개 통신판매업자를 대상으로 광고내용을 조사한 결과 조사대상업체가 모두 광고표시사항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이들 업체들은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광고문안에 상품의 종류 및 판매가격 등 6개 사항을 담아야 하는데 신문광고 또는 카탈로그에 상품 제조원,상품 인도시기,대금 지급시기 및 방법 등을 표시하지 않았다. 통산부는 적발업체에 이달말까지 광고표시사항을 준수하도록 시정명령을 내렸다.1년안에 시정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시도지사로부터 업무정지명령처분을 받는다. 적발된 업체는 아진할인프라자(대표 김미숙),한독건강(대표 장석구),S­마트(대표 김인희),OK마켓(〃),소프트라인(대표 송필원),동원산업(대표 오동필),스마트홈쇼핑(대표 이상철),삼미스포츠(대표 대경호),메도산홈쇼핑(대표 고웅범),모레이 하우스(대표 박재순),국민신용카드(대표 이기용) 등이다.
  • 교회공사장 붕괴 인부 5명 사상

    【고양=윤상돈 기자】 18일 하오5시20분쯤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 12의12블록 백석교회 신축공사장에서 지상1층 옥상슬라브 콘크리트타설도중 옥상슬라브 전체가 붕괴됐다. 사고로 옥상위에서 콘크리트타설작업을 하던 박재순(58),강순희씨(60) 등 인부 2명이 숨지고 현장소장 김은기씨(43) 등 3명이 중경상을 입고 인근 세영병원등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인부 강성표씨(43·서울 은평구 증산동 213의5)는 『일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뒤돌아 옥상 끝으로 가던중 「쾅」하는 소리와 함께 가운데 부분부터 순식간에 무너졌다』고 말했다.
  •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을 반박한다/신용하 서울대 교수·사회학

    ◎“한일합방 국제법상 원천적 무효” 과거 일본의 총리와 정치인들이 한반도 침략과 관련한 망언을 수없이 되풀이해왔지만,최근 무라야마 도미이치 현총리의 망언을 대하고는 더욱 커다란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무라야마 총리만은 이전의 총리들과는 다른,양식을 갖춘 인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그가 왜 그런 발언을 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각종 조약을 맺은 것은 당시의 국제공법에 비쳐서도,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완전히 불법적인 것이다. 우선 을사5조약을 보자.일제는 1904년 2월8일 대규모의 일본군대를 한반도에 불법 상륙시키고,러일전쟁을 도발했다.주권국가인 대한제국의 아무런 승인도 없이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킨 것은 합법인가,불법인가.더욱이 남의 나라 강토에서 외국과의 전쟁을 도발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만든 것이 합법인가,불법인가. 당시 일제는 러일전쟁에는 참가하지 않은,2개 사단의 대한제국주차(주둔) 일본군을 보내 대한제국의 수도와 조정을 장악했다.1905년 11월17일일제는 바로 이 주차군으로 대한제국의 궁궐을 포위,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한 것이다. 당시의 국제공법에 따르면,전제군주국가가 외국과의 조약을 맺으려면 황제가 승인,비준하는 서명날인이 있어야 한다.또 입헌군주국과 공화국에서는 황제의 서명날인에 의회의 동의가 추가돼야 조약이 체결되는 것이다.그런데 과연 대한제국의 조약체결권자인 광무황제가 을사5조약에 서명,날인을 했는가. 당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황제의 자문기구인 어전회의가 2차례 열렸다.황제가 참석한 1차 회의에서 조약체결안은 만장일치로 부결됐다.그러자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주차군사령관은 황제가 참석한 회의라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며 황제를 배제시킨채 2차 회의를 열어 조약체결에 찬성하도록 강요했다.이때도 총리대신서리인 한규설이 완강히 반대하자 일본군은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연행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이런 상황에서 5명의 반역자가 일본군의 무력에 굴복한 것이다.그러나 그 회의는 자문회의였기 때문에 국제법상 아무런 구속력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또일본은 당시 외무대신 박재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고노스케가 서명한 조약안을 황제에게 추인받으려 했으나,광무황제는 끝까지 서명날인하지 않았다.따라서 이 조약은 성립조차 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마치 이 을사5조약이 성립된 것처럼 대외에 공포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1906년 2월1일에는 한양에 일본통감부를 설치했다.식민지화를 위한 정지작업이 시작된 것이다.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조약이기 때문에 거기에 근거한 일본통감과 통감부는 전적으로 불법이다. 또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은 당시 일제의 이러한 불법행위에 대해 대한제국 전역에서 국민들이 항일의병을 조직해 무력항쟁을 했다는 사실이다.일제가 불법적인 무력으로 국권을 빼앗으려 하니 생명을 걸고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당시 축소발표된 일본군측의 통계로도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14만1천6백명의 의병이 참가한 2천8백60회의 전투가 벌어져,1만6천7백명의 의병이 사망하고 3만6천7백70명이 부상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일제는 1910년 8월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하는데,그 조약문도 일본 정부와 통감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서 서명을 강요한 것이다.당시 서명자는 일본의 데라우치 통감과 대한제국의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이다.그러나 통감 설치를 규정한 을사조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데라우치 통감의 서명은 국제공법상으로 원천적인 무효인 것이다.한일합병조약 뿐만 아니라,일본통감이 내린 모든 명령과 지시,법규등은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인 것이다. 실제로 2차대전 종전을 전후한 카이로 선언,포츠담 선언,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등에서 국제사회는 일본의 침략적 야욕으로 맺은 조약은 전부 무효라고 선포했으며,1945년 8월10일 일제는 항복하면서 포츠담 선언의 무조건 수락을 통보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을사5조약과 한일합병조약은 불법적인 것이고,이를 일제가 무력으로 강제집행한 것에 불과하다. 무라야마 총리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이제라도 『한일합병조약이 법적으로 유효했다』는 발언을 취소하고 한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다.
  • 정당연설회서 인사/장관·지사 등 넷 고발/민주당 전남지부

    【광주=최치봉 기자】 민주당 전남도지부(지부장 유인학 의원)는 21일 민자당의 전남 나주정당연설회와 관련,최인기 농수산부장관 조규하 전남지사 정병섭 나주시장 박재순 전남도 농정국장 등 4명을 통합선거법 위반혐의로 도선관위와 광주지검에 고발키로했다. 민주당 도지부는 『「이 날 상오 11시부터 2시간 동안 전남 나주시 남내동 남산시민공원에서 열린 민자당 정당연설회장에 최장관 등 현직 공무원이 단상에 올라 인사를 한 것은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라며 22일중 고발장을 제출키로 했다』고 밝혔다.
  • 영산강 수계/“농사 젖줄” 4개댐 저수율 24%

    ◎가뭄특별취재반 전남서 책7신/저수지 7곳 바닥… 3천여곳은 절반 그쳐/1백50㎜ 비와도 5만여㏊ 모내기 못해 5개월째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광주·전남지역에는 지금 20여년전에 겪은 「쌍둥이 한해」의 악몽이 되살아 나고있다. 지난 67년과 68년 이 지역에는 연속 가뭄이 몰아닥쳤다.68년에는 벼 재배면적의 4분의1인 5만1천여㏊의 논에서 모내기를 하지 못했다.또 그해 여름내내 비가 오지않아 10만9천2백25㏊의 논은 벼가 말라붙었다.당시 쌀 생산량은 1백70만섬.목표치 3백90여만섬의 절반을 밑돌았다. 비슷한 상황이 올해 또 이곳에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68년 강수량은 8백60여㎜.지난해 강수량은 8백97㎜로 평년 평균강수량의 3분의2 수준이다. 전남지역 농업용수는 장성·나주·광주·담양 등 영산강수계의 4대호와 3천2백4개 저수지에서 공급되고 있다. 장성호 등 4개 댐의 저수율은 24%.지난해 같은 기간의 69%에 크게 못미치고 있다.3천2백여개 저수지는 7개가 바닥을 드러낸 것을 비롯,평균저수율은 47%다.지난해 78%의 절반을 약간웃도는 수준이다. 전남도 박재순 농정국장은 4월말까지 3백㎜의 비가 오지 않으면 천수답 1만7천여㏊는 모내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고있다. 또 1백50㎜의 비가 내리면 5만5천여㏊의 논에서 모내기를 할 수 없게된다.68년 가뭄에 버금가는 것이다. 1㏊의 논에서 쌀을 생산하기 위해 5천여t의 물이 들어가는 것을 근거로 산출한 것이다. 이 지역의 1월부터 4월까지의 평균강수량은 2백70㎜.이 정도의 비만 내리면 아쉬운대로 고비를 넘길 수 있으나 상황이 심상치 않다.올들어 내린 비는 35.8㎜로 평년의 42.5㎜에 비해 6.7㎜가 적다. 생활용수의 형편도 여의치 않다.광주·전남지역은 주암·수어 등 2개댐과 47개 저수지에서 식수등 생활용수가 공급되고 있다.공급비율은 주암댐과 저수지가 각각 45%이며 나머지는 수어댐이 차지하고 있다. 저수지의 저수율은 25%로 지난해 64%와 비교하기가 어렵다.주암댐은 아직 여유가 있다.저수율은 53%로 예년 평균저수율 47.9%를 웃돌고 있으며 수위도 98.68m로 발전가능수위 85m에 비해 14m가량 높다.그러나 주암댐은 쓰임새가 많다.전남 공단지역의 공업용수 공급원인 주암댐은 현재 광주지역 식수로 30만t,영산강 하천 유지수로 15만t등 모두 45만t을 초과방류하고 있다. 현재는 이 지역 가뭄을 결정적으로 진정시켜 주고 있지만 가뭄이 장기화되면 힘에 부치게 된다. 농정관계자들도 최악의 경우 주암댐물을 쓰려한다.수어댐도 저수율이 64%로 지난해 46%에 비해 높지만 이 댐은 공단지역을 끼고 있는 광양시 몫이다. 수량부족으로 수질상태도 88년 이후 최악이다.영산강환경관리청에서 채수하는 나주대교의 생화학적산소요구량(BOD)은 지난 1월 평균 6·2ppm.지난해 같은 기간의 5.1ppm에 비해 1.1ppm 높아진 것이다.목포시민의 식수원인 몽탄취수장은 주암댐에서 하천유지수 명목으로 물을 방류하고 있는데도 0.5ppm 상승한 3.8ppm이다. 몽탄취수장의 암모니아성질소농도는 더욱 심하다.원수 농도가 2월 평균 4.72ppm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4.31ppm보다 높다.정수
  • “구한말 3개 한·일조약 무효”/여·야의원,결의안 국회제출

    ◎민자선 철회 검토 여야의원 20명은 3일 을사5조약,정미7조약,한일합방조약 등 3개 한일조약의 원천무효를 확인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재순과 일본국 특명전권공사 임권조사이에 맺어진 을사5조약과 1907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국 통감 이등박문이 서명한 정미7조약,1910년 이완용과 일본국 통감 사내정각가 서명한 한일합방조약 등은 원천적 무효라고 선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민자당은 이에 대해 이들 조약이 지난 65년 한일협상때 이미 공식적으로 무효화된 점을 감안,이 안건을 철회하는 것을 검토중이다.
  • 이혼부인·두 자녀 토막살해 암매장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는 15일 이혼한 부인과 2자녀를 살해,토막낸 뒤 암매장한 정문흠씨(38·노점상·영등포구 신길6동 4065)를 살인및 사체유기혐의로 안소준씨(23·노점상·동대문구 청량리2동 205)를 사체유기혐의로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 정씨는 지난 7일 낮 12시40분쯤 서울 영등포구 신길6동 4358 지하셋방에 사는 전부인 박재순씨(41·)를 찾아가 말다툼을 벌이다가 박씨가 『이혼한 놈이 웬 참견이냐』며 욕설을 퍼붓자 부엌에 있던 흉기로 박씨의 목을 3차례 내리쳐 살해한 혐의를 받고있다. 또 정씨는 옆에 있던 딸 혜진양(8·국교1년)과 유치원에서 돌아오던 아들 승진군(4)을 같은 방법으로 차례로 살해했다는 것이다. 범행 후 정씨는 이들의 사체를 2∼3토막씩으로 절단한 뒤 평소 알고 지내던 안소준씨를 불러 안씨의 승용차에 싣고 고향인 경북 예천군 보문면 우래리 낙동강상류 모래사장에 암매장했다는 것이다.
  • 우수·모범공무원 1천3백47명 포상

    정부는 1일 공직사회의 분위기쇄신과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신한국창조에 앞장서는 공무원」 1천3백47명을 선정,포상했다. 이들 수상자는 우수공무원 3백53명과 모범공무원 9백94명으로 우수공무원에게는 ▲근정훈장(50명) ▲근정포장(45명) ▲대통령표창(1백32명) ▲국무총리표창(1백26명) 이 각각 수여됐다. 6급이하 하위직공무원을 대상으로 선정한 모범공무원에게는 국무총리표창과 모범수당이 지급됐다.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홍조근정훈장◁ 황원섭(정무1장관실) 박권수(비상기획위원회) 김병호(총리행조실) 정수부(법제처) 신현진(기상청) 장윤호(교통부) 민경덕(서울시선관위) 서재국(항만청) 이경문(문화체육부) 방극윤(노동부) 신구범(농림수산부) 김복수(청송교도소) 김동훈(서울 종로구) 주동관(부산 동구) 신태수(대구 시의회) 정하용(충청남도) 송은복(경상남도) ▷녹조근정훈장◁ 권기성(정무2장관실) 윤한철(총리비서실) 정구일(평통자문회의)최충일(대통령비서실) 정응채(통일원) 박광자(공업진흥청) 강공우(국방부) 김효천(조달청) 이범길(통계연수원) 김용기(보훈처) 강형대(수산청) 심동로(산림청) 태석원(외무부) 최광규(건설부) 김성우(보사부) 이도인(국립농업자재검사소) 박안규(법원행정처) 탁태영(농촌진흥청) 민병휘(국세청) 김평종(서울지방국세청) 이우영(철도청) 김창수(〃) 이상훈(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 윤혁경(서울 송파구) 양권용(서울 서대문구) 노승회(교육부) 이지헌(〃) 송기영(전북 임실교육청) 홍순우(내무부) 심무섭(경기도) 박재순(전라남도) 남기성(경북 점촌시) 이종박(대검) ▷근정포장◁ 김현태(상공자원부) 최광태(대전세계무역박람회) 이주형(〃)김도렬(〃) 윤복균(〃) 원상선(과기처) 송정칠(공보처) 이명규(재무부) 남경우(〃) 변근섭(상공자원부) 신명재(〃) 남정우(환경처) 명재정(노동부) 안덕현(농림수산부) 김원길(광주고법) 김연오(농촌진흥청) 유지웅(경기농촌진흥원) 정병춘(국세청) 유장철(〃) 성백영(법무연수원) 김유민(광주소년감별소) 조성래(철도청) 정기철(철도청철도건설창) 서철모(서울특별시) 정유성(서울 시의회) 조애형(서울시 서대문병원) 조기봉(서울시교육위) 김명원(경기도교육청) 김하응(충북대) 강태석(대구교육대) 박성진(내무부) 안신일(부산 영도구) 남기천(경기 용인군) 김정한(경기도) 한영신(강원도) 유의재(충북 괴산군) 이상두(전라북도) 전철현(전남 영안군) 오정석(경상북도) 임광원(〃) 이규윤(경상남도) 손달인(경남 울산시) 박철현(광주직할시) 이광목(인천 남구) 박헌오(대전직할시) ▷대통령표창◁ 윤병삼(특허청) 송재기(특허청) 윤필상(공보처) 이광래(공업진흥청)기조(경제기획원) 신호현(경제기획원) 이종국(기상청) 박희정(환경처) 최종태(국방부) 이충(조달청) 이재붕(교통부) 윤형백(통계청) 현동준(국가보훈처) 이광민(총무처) 이영렬(총무처) 박철수(총무처) 정병운(중앙선거관리위원회) 나택균(수산청) 방기혁(수산청) 민재홍(산림청안동영림서) 정해웅(외무부) 이종천(해운항만청)심종보(해운항만청) 김홍렬(문화체육부) 남달웅(노동부) 이창우(대구지방노동청) 이용산(노동부) 송기섭(건설부) 이융세(건설부) 이우철(보건사회부) 이육상(보건사회부) 박종임(국립의료원) 김우건(국립식물검역소) 최희종(농림수산부) 박윤근(국립농산물검사소) 김동석(농림수산부) 강철구(농림수산부) 김지순(서울민사지방법원) 김태인(서울가정법원) 천상용(대구지방법원) 윤문한(광주지방법원) 조도용(대전고등법원) 이창형(서울민사지방법원) 정남채(수원지방법원) 정재곤(법원행정처) 송인석(농촌진흥청농업기술연구소) 김영진(농촌진흥청) 이병욱(충북진천군농촌지도소) 이완구(전북 익산군 농촌지도소) 김영화(경북 경주시 농촌지도소) 유인인(국세청) 이재원(서울지방국세청) 최광욱(중부지방국세청) 김경수(대전지방국세청) 고원창(광주지방국세청) 안원구(대구세무서) 황수길(부산지방국세청) 장병환(법무부) 김재업(서울지방검찰청) 나영일(법무부) 정상문(대구지방교정청) 박연수(영등포구치소) 양이근(전주교도소) 남기빈(대전출입국관리사무소) 김종태(철도청) 유동배(철도청) 정재홍(철도청) 문재석(철도청설계사무소) 김종태(서울지방철도청) 김종수(부산지방철도청) 강성문(순천지방철도청) 권경호(영주지방철도청) 서정순(서울특별시) 최오곤(서울특별시) 김진연(서울특별시 종로구) 김우신(서울특별시 강남구) 서관수(서울특별시) 박석안(서울특별시) 정효성(서울특별시) 목영만(서울특별시) 안승일(서울특별시) 채희정(서울특별시 상수도사업본부) 이규일(서울특별시교통방송본부) 이만구(서울특별시성동구) 송경섭(서울특별시지하철건설본부) 이현목(교육부) 김현승(교육부) 조흥래(교육부) 이문희(교육부) 이상복(인천시교육청) 주진창(대전직할시교육청) 김준호(대구직할시교육청) 박형근(강원도교육청) 홍재문(충청북도교육청) 임기호(전라남도교육청) 윤문걸(경상남도울주군교육청) 최종복(경상남도삼천포교육청) 전규종(목포대학교) 김호중(공주대학교) 권영세(내무부) 서만근(내무부) 허병태(부산직할시남구) 권기백(부산직할시) 이성철(부산직할시) 김우홍(대구직할시) 여희광(대구직할시) 홍창수(인천직할시 북구) 정현택(경기도) 윤명구(경기도 고양시) 유찬상(경기도 의왕시) 정두현(경기도) 박의현(강원도 철원군) 손학용(강원도) 김용번(충청북도) 권청사(충청북도) 김종원(충청남도 아산군) 이상수(충청남도) 김형진(전라북도 부안군) 안세경(전라북도) 노태홍(전라북도 정주시) 김종빈(전라남도) 김종훈(전라남도 구례군) 김이문(전라남도 나주시) 송동환(경상북도 상주시) 한희태(경상북도 금릉군) 우외진(경상북도 경주군) 이춘식(경상북도 군위군) 구민원(경상남도) 허환구(경상남도) 김종대(경상남도 창원군) 박종표(경상남도 의령군) 황대정(제주도 제주시)
  •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철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을사5적 처단 실패후 대종교 창시/32세때 관직 버리고 유신회 조직… 항일/합방후 “민족정기수호” 단군신앙 포교/“암흑시대 겨레의 횃불”…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로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낙안현 남상면 금곡리(현 보성군 벌교읍 금곡리)에서 부친 나용집씨와 모친 송씨 사이에서 3형제중 둘째아들로 출생했다.족보명은 두영이었으나 인영으로 개명한뒤 대종교 창교후 철로 바꿨다. ○전남 보성서 출생 1902년 29세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선생은 32세때 징세서장으로 있다가 일제의 침략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자 1905년 5월 일제부패관리의 실상을 좌시할 수 없다며 관직을 사임했다.그뒤 강진출신 오기호지사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구국운동에 앞장선다.그해 미국 포츠마츠에서 노일전쟁의 종전을 위한 강화회담이 열리게 되자 우리의 입장을 미국조야에 호소하기 위해 도미할 것을 결심,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유람을 빙자,일본 도쿄에 가게 된다.거기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조선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특별전권대사로 조선에 파견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진정한 평화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하자 일왕궁성 앞에서 3일동안 단식하며 항쟁하기도 했다. 선생은 우여곡절 끝에 을사5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기호와 함께 『매국노를 모두 죽이면 국정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며 칼 2자루를 행낭에 감추어 11월30일 귀국한다.이듬해 1월 선생과 오기호는 학부대신리완용 외부대신박재순 군부대신리근택 내부대신리지용 농상공부대신권중현등 세칭 「5적대신」을 일시에 처단할 것을 계획했다.동지들을 규합,자금도 모으고 권총 8정도 구입했다.각국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국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도 작성했다.첫번째 거사일을 음력 정월 초하루(2월13일)로 정하고 5적이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하는 기회를 이용,처단하려 했으나 결사대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했다.이후 4차례에 걸친 처단시도는 이런저런이유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체포된 동지 한명이 고문에 못이겨 거사전말을 실토하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가자 선생은 제발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1907년 7월3일 유배 10년형을 받는다.그는 지도로 유배지가 결정돼 헌병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29일 인천을 출발했다.그러나 운이 좋았던지 유배 4개월여만에 오기호등과 함께 특사로 풀려난다. 1910년 8월 경술7조약 체결로 일제는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완전히 빼앗았다.너무도 치욕적인 조약이어서 선생은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교육의 잘못에 있음을 깨닫게 됐다.선생은 흔들리는 민족전통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단군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단군의 정신으로 민족고유의 종교역사를 완성하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여 보국안민과 제인구세를 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선생은 1909년 정월 15일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오기호등 수십명과 함께 서울 제동 취운정에서 제천의식을 갖추고 단군교를공식 종교로 공표하고 통상의 건국기원에 1백24년이 앞선 4366년을 개천의 기념으로 삼았다. ○초대교주로 추대 모든 교인들로부터 교주인 도사교로 추대된 선생은 1910년 7월30일 칙령을 발표,그때까지 한얼교 또는 천신교로 불리던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하고 대종교의 창시자가 된다.대종교는 이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구심점이 돼 급속도로 발전한다.선생은 대종교의 도사교가 되면서 이름을 인영에서 철로 바꾼다. 선생은 경술7조약이후 일제침략세력을 몰아내는 일이 어렵게 되자 성지순례의 길을 나서게 된다.그 옛날 단군이 남긴 손길과 발자취를 몸소 알고 역사와 교훈을 깨달아 겨레의 나아갈 길을 믿아보려고 한 것이다.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아래의 중국 동삼성에 이르러서는 대종교의 확대포교를 구상하게 된다.이 곳이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살던 곳이었고 수많은 애국독립지사가 정착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선생의 노력으로 대종교는 이 곳에서 크게 번창했다.선생은 한편으로 교인과 교포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도마련,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선생의 이같은 행동은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국내에서는 탄압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선생은 총본사가 있던 화룡면 청파호에서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당시 일제는 신포교규칙에 의한 종교등록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대종교에서는 완벽한 서류를 냈으나 군소종교단체는 모두 등록을 받아주면서도 대종교의 등록서류는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송했다.가증스런 종교탄압이었다.선생의 신변도 위협해왔다.창교이래의 최대의 시련이었다. ○구월산에서 순교 선생은 순교와 수도의 길중 택일을 위해 매일을 기원했다.이윽고 구월산 삼성사 참배계획을 공지하는데 이는 단군 성적지를 믿아 순교하려는 결단이었다.1916년 음력 8월4일 참배길을 떠나 이틀뒤 삼성사에 도착한다.8월 한가위 동네 교인들과 제례를 올린 선생은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방문을 봉하게 하고는 순교의 길을 택한다.다음날 제자들이 선생을 믿았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여러 유서들이 나왔으나 모두 죽음으로써 침략자들에게 항쟁한다는 뜻이었다.선생의 나이 54세. 정부는 이같은 선생의 항일공훈을 추앙하여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최익현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을사조약 체결되자 “항일의병” 횃불/74세 거유,“조약은 무효” 전북 태인에서 거병/대마도 유배뒤 순국… 전국적 배일투쟁 “점화”/“나라위해 생사초월” 무성서원연설 민족혼 일깨워 노옹의 항쟁은 열하루밖에 되지 않았다.그가 이끄는 의병의 병력과 무기도 보잘 것 없었고,정부측의 반응도 냉담했다.정부는 일제의 눈치를 보느라 오히려 해산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면암 최익현­1906년 6월4일부터 14일까지의 「뜨거운 날들」은 선생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붉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요원의 불꽃으로 번지게 한 의병항쟁의 불씨를,선생이 지폈다는 뜻만으로서가 아니다.선생은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데 있으며,인권도 중요하고 민권도 중요하지만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가르치며 이같은 독립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경기도 포천 출생 당대 유학의 거봉으로 74세나 된 선생이,국권회복을 부르짖고 구국창의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은 일관된 삶의 자세에서 비롯됐다.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출생한 면암은 일찍이 이항로 문하에서 「애국여부 우국여가」의 사상을 이어받고,그 이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철저하였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그 부당함을 상소 ▲고종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이 된 뒤,누적된 적폐를 바로 잡으려다 오히려 기득권층의 반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며 지부소(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리며 답을 기다리는 것)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표되자 청토역복의제소를 올려 항일운동을 전개 ▲1905년 소위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박재순·이완용·이근택·이지용·권중현등 「오적」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를 올린 일등은 흐트러짐 없는 인간 최익현의 한 단면이다. 1906년 3월15일.선생은 가묘에 하직을 고하고 집안 사람들과 이별,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상소만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러나 선생은 다시 한번 참담함을 맛보지않을 수 없었다.판서 이용원·김학진·참판 이성렬·이남규등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국란에 대처할 것」을 바랐으나 한사람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선생은 애제자 고석진의 소개로 「태인사람 임병찬」을 만나게 된다.임병찬은 임실군수까지 지내다가 왜인들의 정치를 마다하고 사퇴한 올곧은 선비였다. 『호남의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이후 두달 남짓동안 거의가 준비됐다.시골 포수들로부터 총칼이 모아지고,2백여명의 우국지사가 모여들었다. 6월4일.태인 무성서원에서 있은 선생의 강회는 항일의병의 역사적 분기점을 이룬 날로 기록된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불꽃에 민족혼을 일깨운 의병들은 이날 정읍에 무혈입성,총칼과 탄환을 거두고 군사를 모집했다.또한 일제에 16개 죄목을 들어 국권의 침략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후 정읍에서 흥덕으로,다시 순창 구암사에서 순창읍내로 행군하였을 때에는 의병의 수가 5백여명을 넘게 되었다.힘을 얻은 「면암의병」들은 파죽지세로 곡성을 거쳐 남원으로 밀고 들어 가려 했으나,순창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남원 방비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의병은 8백여명으로 불어났다. 6월11일.광주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고종의 칙지를 전해왔다.선생은 큰 기대를 갖고 이를 펼쳐 보았으나 그 내용은 엉뚱하게도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면암은 『이미 소장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 드렸으니,나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으로 지휘할 바가 아니다』는 답장을 보냈다.그리고 다시 남원진입을 꾀했다. ○고종,의병 해산령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니고 우리측 진위대임이 확인되었다. 진위대(경군)측은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차례나 보내왔다.선생은 괴로워했다. 선생은 임병찬에게 『동포끼리 서로 박해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되었다.선생 곁에 끝까지 남은 의병은 12명 뿐이었다. 6월14일.선생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었다.그리고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대마도 감금 3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선생은 1907년 1월1일 단식 끝에 한많은 적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비정신의 귀표 역사학자 박성수교수(정신문화연구원)는 면암의 항일운동과 관련,『선생은 1876년 개항 이후 줄곧 외침을 경고했으며 이에 맞서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로지 국론을 통일해 일치단결하는 것밖에 없다고 부르짖어 온 분이었다』며 『그러므로 선생이 70고령을 무릅쓰고 무기를 들었다는 소식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는데 외딴 섬 대마도에서 순국하셨다는 소식은 온 국민의 가슴에 칼을 꽂은거나 다름없는 슬픔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고 평가했다. 선생의 항쟁 이후 호남을비롯한 전국 각지에서는 우후죽순처럼 의병들이 일어난 점만 보아도 당시 선생이 위대한 민족주의자로서,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이 입증되는 셈이다. 선생은 순국직전 임병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죽음에 있어 마땅히 죽을 곳에서 죽으면 삶보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나 이제 죽을 것이니 황상에게 올릴 마지막 소를 비밀히 간직하였다가 본국으로 돌아 가는 날 전해주길 바란다』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의 영구행렬 앞에는 「춘추대의 일월고충」이라는 깃발이 나부꼈다.
  • “한­일 합방조약 무효”/북,대일수교회담때 새 근거 제시할 듯

    ◎일지 보도 【도쿄=이창순특파원】 북한은 5·6일 이틀동안 북경에서 열릴 일·북한국교정상화회담에서 보상문제와 관련,「1910년 한일합방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입증하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고 요미우리(독매)신문이 31일 일본외무성소식통을 인용,보도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부당성을 지적해온 북한은 제2차 한일협약 원본에 당시 대한제국의 박재순외무대신과 일본의 임권조 주한공사의 날인은 있으나 통치자였던 고종황제의 서명이 없기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 외언내언

    1905년 11월,일제의 특명전권대사로서 콧대높이 서울에 온 이토(이등박문).주한군사령관 하세가와(장곡천호도)와 헌병대장이 지휘하는 수십명헌병을 데리고 전후 세번이나 궐내를 들락거렸다.◆「보호조약」이라는 이름의 오조약을 받아들이라는 강압수단.이토는 어전각의를 열게 하여 회의에 간섭한다.나중에는 여덟 대신 개개인에게 가부를 묻는 협박까지.마침내 한규설등 세 대신은 거부하고 이완용등 다섯 대신은 찬성한다.그래서 외부대신 박재순과 일공사 하야시(임권조)사이에 조인된 것이 저 굴욕의 을사오조약.외교권은 박탈 당하고 침략기지 통감부가 설치된다.◆서울대 규장각은 이 조약이 무효라고 발표했다.발견된 원본은 국제법상 필요요건인 통치권자 고종황제의 위임장과 추가서명이 없는 문서라는 것.고종은 칙재를 강요 당했지만 끝내 거부하자 부랴부랴 공포를 서둘렀던 듯하다.이는 고종이 당시의 헐버트 미국공사에게 보낸 밀서에도 나타난다.『짐은 총칼의 위협 아래 한일간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없고 금후애도 아니할 것이라…』◆1907년의 정미칠조약의 경우는 아예 순종의 수결을 위조해 버린다.진짜와 너무나 다른 「●」자.하여간 당시 상황에서 모든 조약은 눈가림 요식행위.힘의 과시였다.대신들의 찬반이나 황제의 재가여부에 관계 없이 침략은 계획대로 진전되었을 터이니까.또 무효고 유효고 간에 그들의 강점 터널도 지나와 버린시점.다만 그들의 방자하고 악랄했던 침탈과 당해야 했던 우리의 정정에 한번더 가슴 미어질 뿐이다.◆얼마전 「분노의 왕국」이란 드라마에서 그들의 왕에게 총을 겨누었다 하여 우리재일공관까지 쳐들어갔던 「이토」의 후예들.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어떤 몹쓸짓을 했나부터 바르게 알아야겠다.한국의 마음은 거기서부터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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