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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인조 택시 떼강도/만취승객 살해까지

    택시 운전사가 낀 9인조 택시 강도사건을 조사하는 서울 서초경찰서는 24일 일당 가운데 주범 박승원씨(28·서초구 반포동) 등 6명이 만취 승객을 폭행 끝에 살해한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이들은 지난 9월9일 하오 9시30분쯤 서울 중구 북창동 앞길에서 술에 취해 택시에 탄 회사원 김정규씨(49·서울 은평구 갈현동)로부터 빼앗은 신용카드로 현금을 인출하려다 비밀번호가 틀리자 김씨를 둔기로 때려 숨지게 한뒤 실족사를 가장하기 위해 강남구 역삼동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 주차장에 버렸다.
  • 택시기사 낀 택시강도단 검거/10명 영장·1명 수배

    ◎한밤 취객 태워 21차례 돈뺏어 택시를 몰고 다니며 밤늦게 귀가하는 취객을 상대로 강도짓 을해온 택시기사가 낀 분업형 9인조 택시위장 강도단이 경찰에 적발됐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23일 주범 박승원씨(28·전과 7범·서울 서초구 반포동) 등 일당 8명을 붙잡아 특수강도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유모씨를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이들은 지난 4일 하오 11시30분쯤 서울 강남구 역삼동 르네상스호텔 앞길에서 W교통 소속 서울 33사 5114호 택시에 탄 김모씨(46·회사원)를 흉기로 위협해 현금 85만원과 신용카드 등을 빼앗고 신용카드로 1천2백여만원을 인출했다. 경찰은 이들이 지난 6월부터 지금까지 4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질러 1천7백만원 어치의 금품을 빼앗은 사실을 일단 확인했다.그러나 일부 범인들이 10여건의 범행을 더 저질렀다고 진술함에 따라 여죄를 추궁하고 있으며 피해액도 수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이들로부터 택시와 승용차 3대,지갑 22개,통장 7개,신용카드 24개,핸드폰 5개 등 5천만원대의 금품을 증거물로압수했다. 이들은 일당인 현직 택시기사 박찬수씨(30·전과 1범·서울 강서구 내발산동)가 운전하는 택시에 밤늦게 귀가하는 취객을 골라 태운뒤 미리 타고 있던 공범 한명을 내려준다며 한적한 곳으로 유인,망치 등 흉기로 협박하고 승용차로 뒤따라 온 다른 공범들이 합세하는 수법을 썼다.범인들은 빼앗은 돈으로 서초구 반포동에 1천만원짜리 전세방 2개를 얻어 각각 5명과 4명씩 합숙을 하며 범행을 저질러왔으며 빼앗은 돈을 유흥비 등으로 탕진했다. 한편 서울 강남경찰서도 이날 영업용 택시를 몰고 다니며 여자승객을 상대로 금품을 털어온 박선훈씨(30·택시기사·서울 강북부 미아동) 등 2명에 대해 특수강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 박길연 전 유엔주재대사 외교부 부부장으로 재직(북의 사람)

    85년부터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대사로 활동하다가 지난 5월 평양으로 소환돼 한동안 활동이 눈에 띄지 않던 박길연이 현재 외교부 부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북한 관영 중앙통신은 리비아 혁명 27주(9월1일)를 맞아 평양주재 리비아 임시대리대사 라마단 엘라우비가 지난 3일 저녁 연회를 마련한 소식을 보도하면서 연회에 참석한 박길연을 외교부 부부장으로 호칭,그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중앙통신은 이날 연회에 박길연 외에 최고인민회의의장 양형섭,정무원 보건부장 김수학,당중앙위 부부장 최진수,군 중장 박승원 등 간부들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박길연은 43년 자강도 출생으로 60∼70년대 버마·싱가포르 등지에서 외교관생활을 했으며 지난 83년11월 외교부 부부장을 거쳐 85년부터 한시해(현조평통서기국장)의 후임으로 유엔주재 대표를 맡았었다. 박길연은 앞으로 미국에 북한 외교대표부가 개설될 경우 초대대사로 유력시되고 있다.
  • 스탈린 사망이후(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29)

    ◎소 새정권 주도로 휴전협상 급피치/소,“북한측 협상대표 남일 교체하지 말라” 지시/김일성엔 신변위험 들어 조인식장 불참 요청 스탈린사망과 함께 휴전협상은 소련 주도하에 급피치를 올렸다.흥미있는 것은 스탈린 사후 긴급히 채택된 소련공산당 및 내각의 결의안이 보여주듯 휴전협상 초기 모택동이 한동안 전권을 행사하는 듯 하다가 종전시점에 이르러서는 다시 소련이 모든 결정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앞회에 소개한 소련내각의 결정문은 조기휴전 방침과 함께 중국·북한당국이 취할 세부조치사항에 대해서도 일일이 지시를 내렸다. 『첫째,클라크장군에 대한 답변에 관해,김일성과 팽덕회동지는 클라크장군에게 답신을 낼 때 환자 및 부상포로교환에 대한 그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양측 대표간 판문점 휴전회담의 재개를 제의할 것.부상포로 및 환자교환문제의 타결은 포로문제 전체의 해결을 뜻하며 나아가 군사행동 중지 및 휴전협정 체결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임. 둘째,북경 성명에 관해,중국당국은 이 성명에서 북조선당국과클라크장군의 제의에 대해 협의,전적으로 지지키로 합의했다고 밝힐 것.아울러 판문점 자국 대표들에게 클라크장군과 협상을 시작하라고 지시할 것』 ○중·북한 취할자세 지시 기본적으로 소련 각료회의 결정문은 한국전의 즉각적인 종결의지와 함께 한국전과 관련,소련·중국·북한 3국의 유대를 다시 한번 과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3월 25일소련의 몰로토프는 김일성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내 북한에 억류돼 있는 프랑스인 14명을 조속히 석방해주라고 요청했다.소련이 종전을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섰는 지를 보여주는 한 예다.(전문번호N6352) 『3월 21일 프랑스 정부가 소련정부앞으로 북조선에 억류돼 있는 프랑스인 14명의 석방을 위해 힘써줄 것을 요청해왔음.…중략…우리는 현상황에서 프랑스정부의 이런 요청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게 정치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함』 전쟁종결을 가장 기뻐한 사람중에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은 바로 김일성이었다.사실상 거의 모든 힘이 소진된 채 마지못해 전쟁에 끌려가던 김은 소련대표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듯고 뛸듯이 반가워 했다. 김은3월 29일아침 소련특사인 쿠즈네초프,페도렝코 두 사람으로부터 소련의 전쟁종결 방침을 전해들었다.두 사람은 모스크바로 보낸 보고전문에서 김의 반응을 이렇게 전했다.(전문번호N8265)『김일성은 우리의 통보를 듣고 매우 흥분했음.그는 이렇게 반가운 소식을 듣게 돼 정말 기쁘다고 말하고 는 그 통지문을 자세히 한번 보고 싶다며 우리와 다시 만나자고 청했음』 이렇게 해서 그날 하오 소련특사 두사람은 다시 김일성과 만났다.다음은 김을 두번째 만난 뒤 이들이 본부에 보낸 보고전문.(전문번호N8298) 『김일성은 한국문제에 관한 소련정부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음.그리고 이 제의들이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겨지기 바란다고 했음.아울러 김은 우리측이 한반도 종전과 평화달성을 위해 이니셔티브를 취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음.김은 현상황을 지속시키는 것은 중·조선국민을 비롯,전세계 민주진영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음. 김은 현재 매일 3백∼4백명의 인명피해가 나는 등조선측 피해가 심각하니 미국과 교환포로의 숫자를 놓고 논란을 계속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음.김은 현상황에서는 소련의 제안이 최상의 방안이라고 거듭 말했음』 김일성은 이와 함께 협상이 본격화될 것에 대비해 북한에 억류중인 전쟁포로의 숫자파악과 판문점협상의 실무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한편 소련당국은 북측 협상대표를 계속 남일로 내세우라고 지시했다.이 때문에 김일성은 남일을 외교부장으로 임명하려던 계획을 다소 늦추겠다고 소련대표들에게 말했다. ○불인 포로 석방 요청 당시 북한내부에서는 박헌영 일파에 대한 숙청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어서 권력상층부의 자리바꿈이 대폭으로 이루어지던 시점이었다.전선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착된 채 장기간 계속됨에 따라 전쟁이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이 본격화됐던 것이다.김일성은52년 12월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조직과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역설했는데 이후 그의 연설을 연구학습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뒤인 53년초부터 박헌영 일파의 체포에 나섰다.그래서 박헌영숙청에 앞서 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등 주요 남로당 계열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이들은 이후 전쟁이 종결된지 3일 후인 53년 7월 30일기소돼 다음달에 재판을 받았다.이후 박헌영도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하여 감행한 간첩행위」「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행위」「공화국정권 전복음모행위」등 3가지 조목으로 체포돼 55년 12월사형을 선고 받았다. 어쨌든 소련의 적극적인 자세로 휴전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53년 6월 3일 몰로토프 소련외상은 미국의 볼렌대사와 만나 판문점 휴전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막바지 의견조정작업을 마쳤다.몰로토프와 볼렌대사간의 회담을 기록한 메모랜덤은 『두사람은 판문점회담을 성공시키기 위한 방안에 합의했음.볼렌대사는 판문점회담의 성공이 모든 당사자가 희망하는 바라고 말했고 이에 대해 몰로토프,볼렌 두 사람의 의견이 완전일치했음』이라고 적고있다. 소련정부는 중·북한측에게 미국의 휴전제의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지시하면서 답신에 답을 구체내용을 일일이 적시해 보낸바 있다.소련당국은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한듯 이번에는 클라크장군이6월 29일자 서신을 통해 보내온 제안에 대해 김일성·팽덕회가 보낼 답신의 초안을 직접 작성해서 두 사람앞으로 보냈다. 다음은7월 4일 소련공산당중앙위 최고간부회의가 채택한 「김일성·팽덕회가 클라크의 53년 6월 29일자 서신에 대해 보낼 답신의 초안에 관한 결정」의 주 내용이다.간부회의는 이를 곧바로 북경과 평양으로 타전했다.(당중앙위 간부회의 결정문.NP14/1) 『소련정부는 지금까지 휴전협상 과정이 중·조 양국의 전략에 따라 성공적으로 진행돼왔음을 믿어의심치 않음.중·조 양국은 전세계에 평화의지와 협상의지를 과시했음.…중략…이에 따라 휴전협정 체결에 장애가 되는 모든 장애물이 제거됐음.아울러 미국은 국내외 정책에서 큰 곤경에 처하게 됐음. ○중도 휴전필요성 역설 이같은 새로운 상황전개에 따라 미국지도부는 군사적 광기를 유지시키는 데 심각한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했음.아울러 대중 여론의 압력이 점차 커져서미국의 지도부는 한국전 종결을 오래 미룰 수 없게 됐음.물론 아직도 미국과 이승만 일당이 휴전협정 연기를 획책할 가능성은 남아 있음. 소련정부는 김일성동지가 휴전협정 서명을 위해 판문점으로 가는 문제를 의논하고 싶음.하지만 이승만 일당이 김일성동지에 대해 어떤 위험한 술책을 가할지 모르기 때문에 김일성동지는 판문점으로 가지 않는 게 바람직함.다른 조선동지를 대신 판문점으로 보내 휴전협정을 체결토록 하기 바람.중국동지들도 이에 동의할 것으로 기대함』 한편 이보다 하루 전인 53년 7월3일 북경주재 소련대사관은 휴전협상에 관한 중국정부의 입장을 입수,이를 본부에 타전했다.이 장문의 전문은 휴전필요성을 역설하는 중국정부의 입장을 상세히 담고 있다. 『최근 12일간 이승만정권은 전쟁포로를 석방하고 휴전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음.한국전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음.…중략…그러나 이승만은 오히려 미국을 설득시키려고 함.그의 요구는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미국의 결심에 배치됨.이 때문에 미국과 이승만간의 2주동안 진행된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음. 이같은 상황에서 클라크장군이 6월 29일,김일성과 팽덕회가 보낸 서신에 응답한 것임.응답한 목적은 이승만에게 미국이 그의 요구에 양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임.즉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에 관계없이 휴전협정을 체결하겠다는 것임.아울러 전 세계에 미국이 전쟁종결을 원한다는 점을 과시하겠다는 뜻임』 ◎새로 밝혀진 사실/소,중·북한에 “종전 동의하라” 지시/김일성은 “최상의 방안… 환영” 응답 이번 사료를 통해 우리는 한국전쟁의 종전이 소련의 동의로 인해 가능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종전방침을 확정하자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중국에 넘어갔던 전쟁의 주도권이 다시 소련에게로 넘어갔다.그러면서 한국전쟁의 한 주체인 공산측의 세나라 사이에 합의가 이뤄졌다.이 내부 합의가 이뤄지자 다음 단계인 유엔측과의 합의는 의외로 쉬웠다.즉 한국전쟁의 종전과 관련하여 더 어려웠던 것은 때로는 공산측 내부의합의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일단 방향을 선회하자 소련은 중국과 북한에 아예 명령형 전문을 보내 『클라크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라』고 했다.미국의 제의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까지 지시하고 있다.소련은 또한 대외적으로 발표할 성명의 내용까지 지시하고 있었으며 성명의 초안까지 작성해주고 있었다.새 지도부는 스탈린이 주로 배면에 숨어 전쟁을 조종하였던 방식에서 벗어나 앞장서서 종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소련은 북한과 중국의 협상대표 선정,김일성의 판문점 방문여부 문제에까지 깊숙이 개입하여 결정해주었다.재미있는 것은 소련이 이승만의 행동과 그 의도를 정확히 알고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전과 관련하여 가장 흥미있는 점은 김일성의 반응이었다.그가 소련의 종전결정에 대해 매우 기뻐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소련의 제의에 대해 『정말 기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그는 소련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상의 방안이다』면서 흥분한 채 『정말 기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휴전과 관련한 그의 반응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이는 전쟁을 시도하고 이를 실패한 그로서는 이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또한 이는 전쟁의 지속을 주장하면서 격렬하게 휴전반대운동을 벌인,전쟁을 당한 이승만과도 극적으로 대비된다.
  • 마포대교서 5중 충돌/30대여성 등 8명 사상

    30일 하오 10시쯤 서울 마포대교에서 승용차끼리 5중충돌사고가 일어나 2명이 숨지고 6명이 중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중이다. 이날 사고는 여의도에서 마포방면으로 달리던 서울 3나5384호 엑셀승용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마주오던 서울 3무2933호 승용차등 4대와 연쇄충돌하면서 일어났다. 이날 사고로 가해차량에 타고 있던 운전자 박승원씨(35)와 함께 탑승한 우경숙씨(33·여)등 2명이 그자리에서 숨졌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6)

    ◎혁신창간의 주역들/“새 민족신문” 애국지사 총결집/「민족대표 33인」중 오세창 등 3명 참여/편집진인선도 “독립완성” 부합 인물로/이관구주필 주도… 몽양도 “각당 함께 혁신” 축하 8·15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11월22일 우리민족을 대변할 진실된 언론기관으로 재출발하게 된 서울신문은 당시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던 군소신문들과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달랐다. 인쇄시설등 시설면에서의 완벽한 구비는 물론이거니와 1904년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로 창간되어 구한말 격동의 6년간과 또 일제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의 36년간등 모두 42년동안 중단없이 역사 기록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왔기 때문에 서울신문이 국내외적으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당시 좌·우익 대립상황 속에서의 위상설정을 비롯,앞으로 서울신문을 이끌고 나갈 경영진과 편집진의 구성문제등은 단순한 일개 신문창간의 차원이 아니라 미군정당국의 향후 언론정책의 방향을 가늠케하는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하지중장이주문 미군정청으로부터 매일신보를 새로운 신문으로 창간토록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사람은 성재 이관구와 안당 하경덕 이었다.해방 2개월 후인 10월중순쯤 하지중장은 조선일보 정경부장과 조선중앙일보 주필등을 거치며 언론계 중진으로 활약했던 이관구에게 매일신보를 인수,위창 오세창을 사장에 추대하고 새로운 신문을 창간해 줄것을 요청했다.또 한편으로는 당시 하버드대 출신 철학박사로 연전교수로 있던 하경덕을 매일신보의 자산을 인수,관리하는 재산관리인으로 위촉했다. ○김동준 재정담당 대임을 맡은 이들에게 놓여진 선결과제는 신문창간에 필요한 재원확보와 대내외적으로 수긍할수 있는 권위있고 양심적인 인사들로 경영및 편집진을 구성하는 문제였다.이들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돼 나갔다.오세창선생의 서도 제자인 김무삼이 청년실업가 김동준을 이들에게 소개해왔던것.김동준은 광산업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으로 해방과 건국 과정에서 언론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때마침 원주의 토지를 매각한 충분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간 자본금을 쾌척할 준비가 돼있었다. 이같이 재원문제가 해결되자 간부진 인선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초대사장에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으로 지조높은 항일민족주의자로 추앙받던 오세창선생을 추대하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수 없었다.이어서 역시 33인중의 한분인 권동진과 벽초 홍명희 두사람을 상징적인 고문으로 추대,진용을 더욱 강화시켰다. 창간의 실질주역이자 미군정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하경덕은 부사장,자본투자자 김동준은 전무에,그리고 신문경영에 오랜 경험을 갖고 있던 이원혁과 조중환이 상무에 각각 인선됐다.해방직후 「매일신보 자치위」를 결성,6백여사원들과 함께 자체적으로 신문을 발행하며 외부로부터의 매일신보 접수기도를 막아냈던 문화부기자 윤희순은 출판국장겸 상임감사에 선임됐다.이렇게 짜여진 초창기 경영진은 다음과 같다. ▲사장=오세창 ▲고문=권동진 홍명희 ▲부사장=하경덕 ▲전무=김동준▲상무=이원혁 조중환 ▲취체역=김무삼 ▲상임감사역=윤희순 ○편집국에 10개부 당시 81세의고령인 오세창선생은 처음에는 사장취임을 고사했다.그러나 그가 자세를 바꿔 사장취임을 결심하게 된것은 해방후 혼란상을 보이고 있던 언론계 현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자신의 여생을 진정한 민족 언론기관 수립에 바쳐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던 그는 서울신문 창간이 순조롭게 진행,자리가 잡히게 되면 물러서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 창간 4개월만에 하경덕부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났다. 한편 편집진용은 주필로 선임된 이관구의 주도로 짜여졌다.그는 창간사설에서 「해방후 민주주의적 질서수립과 독립완성」이라고 스스로 설정한 과제에 부합할 인물들을 물색했다.편집국장에는 대산 홍기문을 내정했다. 1903년 충북 괴산에서 벽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가 일본대학 문학부와 조도전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귀국후 중동학교 교사로 있다가 부친의 권유로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언론계에 입문한 그는 논설위원도 겸임하며 문필을 날렸으며 문자보급 캠페인등 계몽사업에 주력했다.창간 편집진용은 다음과 같다. ▲편집국장=홍기문 ▲편집부=서강백(부장)허현 ▲정치부=박승원(부장)김영상 ▲경제부=주련(부장) ▲사회부=최금동(부장)고흥상 양형진 이봉구 인주현 여상현 한규호 윤일모 서병곤 오쾌일 유종대 ▲문화부=홍기무(부장) 조경희 노천명 이시우 이석희 ▲체육부=이용일 이유형 ▲특집부=김명수(부장) ▲사진부=조대식(부장)이병은 권태완 ▲교정부=최일준(부장) ▲조사부=한길수(부장) 이들 편집국의 창간진용은 이주필이 창간사설에서 밝힌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않는 공정하고 또 적확한 보도」를 위해 당시 혼란의 극치에 달했던 정치적 사회적 상황하에서 민족언론으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취해나갔다.또한 이주필의 「은같은 말은 김같은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은 당시 기자들에게 철저한 기자정신으로의 무장과 발로 뛰어 확인하는 책임정신을 가르친 것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져오고 있다. ○벽초3부자 참여 이들 창간진용 가운데 문화부장 홍기무는 편집국장 홍기삼의 친동생으로 벽초3부자가 서울신문 창간에 함께 참여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벽초는 자식 사랑이 남달라 자식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버지와 대화할수 있게 했으며 당시의 분위기로는 상상도 못할 부자상초(맞담배)를 허용,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자식들의 부친에 대한 효도 또한 지극해 홍기문은 월북한 부친을 따라 월북하기도 했다.벽초는 1948년 4월 과도입법의원 신분으로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남한대표로 참석했다가 그대로 눌러 앉았으며 홍기삼은 같은해 11월 조선일보 전무로 있다가 아버지를 찾아 월북했다. 새로운 각오와 불타는 사명감에서 출발된 서울신문을 보는 외부의 기대도 컸다.당시 미군정장관 아놀드는 『나는 서울신문이 조선의 한 독립신문으로 호평받을 것을 확신한다』고 축하인사를 보내왔다.또 여운형은 『덕망 높은 신간부를 맞이하여 제호까지 고쳐 명실이 함께 혁신한 자태로 출발한다는 것은 우리 조선의 앞날을 위해 가장 경축할 일』이라고 치하했다.
  • 추계예술교 문제유출/교수 2명에 집유

    서울형사지법 김희태판사는 30일 추계예술학교 입시문제 유출사건으로 구속기소된 이 학교 교수 김정수피고인(45)과 단국대 천안캠퍼스 국악과장 서한범피고인(47)등 2명에게 업무방해죄를 적용,각각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씩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이들에게 돈을 주고 딸(19)을 부정입학시킨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금숙피고인(46·여)에게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과 추징금 2천만원을,부정입학을 알선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충남국악관현악단단원 박승원피고인(28)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출제교수가 예상문제를 상세히 설명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등 입시풍토를 어지럽힌 사실은 인정된다』며 『그러나 피고인들이 우리것 보존에 공이 큰 국악과교수들인 점등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김피고인등은 93학년도 추계예술학교 입시에서 국악과 국악이론문제를 미리 빼낸뒤 수험생 변모양을 부정학격시키고 그 대가로 학부모 이피고인으로부터 2천5백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었다.
  • 추계예교 입시부정 관련/교수 2명에 3년 구형

    서울지검 형사3부 김필규검사는 17일 추계예술학교 입시문제유출사건과 관련,구속기소된 이 학교 교수 김정수피고인(45)과 단국대 천안캠퍼스 국악과장 서한범피고인(47)에게 배임수재등 혐의를 적용,징역 3년씩을 구형했다. 검찰은 또 구속기소된 학부모 이금숙피고인(46·여)에게 징역2년에 벌금 2천만원을,불구속기소된 박승원피고인(27·충남 국악관현악단원)에게는 징역1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서울형사지법 김희태판사심리로 부정대입사건 첫 공판에서 논고문을 통해 『피고인들은 출제교수등의 지위를 이용,시험문제를 미리 빼돌려 응시생을 부정합격시키는 등 공정해야 할 입시풍토를 크게 어지럽힌 만큼 실형을 구형한다』고 밝혔다.
  • 신인극작가들 관객에 첫 인사/중앙일간지 신춘문예 희곡당선작 무대에

    ◎서울신문의 「노인과…」 등 7편 선보여 올해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작 공연이 오는 6일부터 15일까지 문예회관 소극장(762­5231)에서 열린다.한국연극연출가협회(회장 윤호진)가 매년 실시해오고 있는 신춘문예 당선작 올해 공연에는 서울신문 조선일보 한국일보 동아일보등 7개 일간지 당선작들이 무대에 올려진다.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신인 극작가들의 참신한 작품들을 무대화시킴으로써 기성 극작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줘 창작극 활성화에 일조할 것으로 연극연출가협회는 기대하고 있다.또 좀처럼 공연기회를 갖기 어려운 신인 극작가들에게 있어 신춘문예 당선작 공연무대는 희곡이 무대에 올려져 하나의 완성품이 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올해 당선작들은 추리극 또는 수사극의 형식을 빌어 인간의 소외 문제를 다루거나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형식을 취한 작품이 눈에 띈다.부부,노인과 젊은이등을 대비·등장시켜 일상의 단조로움과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작지만 절실한 몸부림을 잔잔하게 그려낸 작품도 있어 다양성을 더한다.공연은 매일 하오3시부터 7개 작품이 순서대로 연속적으로 공연된다. 공연작품은 ▲서울신문 「노인과 도배쟁이」(이주영작·박승원연출) ▲세계일보 「주인을 찾습니다」(남경주작·손경희연출) ▲동아일보 「아빠!」(박귀옥작·최용훈연출) ▲한국일보 「흐린강 저편」(정선영작·황남진연출) ▲문화일보 「장마」(조광화작·윤광진연출) ▲중앙일보 「아는 이가 찾아오다」(서진아작·김혁수연출) ▲「메뚜기 한마리가 쇼윈도우에 부딪혀 마네킹을 웃겼네」(임규작·김성노연출).
  • 추계예술학교도 입시부정/돈 받고 실기시험문제 유출

    ◎교수2명 ·학부모 1명 영장 예체능계 실기시험문제를 누출한 대학교수 2명과 문제유출의 대가로 돈을 준 학부모등 3명이 경찰에 적발됐다. 입시부정사건을 수사중인 서울경찰청은 9일 입시생을 상대로 개인지도를 하던 자신의 제자와 입시생학부모로부터 『시험문제를 알려주면 2천만원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시험문제를 알려준 단국대 천안캠퍼스 국악과장 서한범교수(47·서초구 반포본동 반포아파트 70동108)와 서교수에게 실기시험문제를 누출시킨 추계예술학교 김정수교수(45·서초구 서초동 유원아파트 102동 513),학부모 이금숙씨(46·여·성북구 성북1동 158의1)등 3명을 업무방해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이씨로부터 『딸을 대학에 진학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교수에게 시험문제 누출을 부탁한 충남 국악관현악단원 박승원씨(28·충남 천안시 신부동 484의18)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입건했다. 서교수는 지난1월 14일 자신의 집에서 제자인 박씨와 학부모 이씨로부터 『추계예술학교 시험에 딸을 합격시켜주면 2천만원을 사례하겠다』는 말을 듣고 S대음대 후배로 추계예술학교출제교수인 김교수로부터 국악과 실기시험 10문제 가운데 8개를 전해듣고 같은달 25일 박씨와 응시생 변모양(19·H여고졸)에게 알려준뒤 현금 2천5백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있다. 서교수는 이돈가운데 2천만원을 김교수에게 전달했으나 추계예술학교에서도 입시부정이 있었다는 언론보도를 보고 김교수로부터 돌려받은 2천만원과 자신이 챙긴 5백만원등 모두를 학부모 이씨에게 되돌려주었다. 경찰은 또 서교수가 이번 H대 전기입시에서도 변양에게 시험문제를 사전누출시켜 변양을 부정입학시키려했으나 변양이 실기시험에서 실수하는 바람에 불합격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서교수등을 상대로 수사를 벌였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못하고 여죄를 추궁하고 있다. 경찰조사결과 서교수는 박씨등으로부터 이같은 제의를 받고서 변양을 상대로 사전테스트를 실시,변양이 국악이론실력이 부족한 점을 알고 이분야문제를 유출시켜 집중지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서교수는 당초 변양을 추계예술학교에 부정입학시키려했으나 여의치않자 이같은 방법으로 부정입학시키려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학학력인정 각종학교인 추계예술학교는 올해 국악과 합격자 사정에서 국악산조·국악작곡등 4과목의 실기성적을 50%,내신성적 30%,전국 12개 각종학교들이 공동출제한 필기시험 성적을 각각 20% 반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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