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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성모대관(聖母戴冠) 벽화와 고려 은제 사리함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성모대관(聖母戴冠) 벽화와 고려 은제 사리함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가톨릭교회로 고대 로마 양식의 4대 성전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고딕 양식의 이 대성당은 여러 번에 걸친 손상과 추가적인 건설 작업을 거쳤음에도 원래의 구조를 보존하고 있는 로마의 유일한 대성당이다. 대성당 이름인 마조레(Maggiore)는 ‘위대함’과 ‘중요함’이라는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로마의 성당 가운데 ‘가장 거대한 성당’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 대성당이 한때 교황의 임시 관저가 되었다가 후에 지금의 바티칸 궁전으로 옮겨졌다.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성모대관’ 성당 벽에는 1295년경 화가이며 모자이크 작가인 자코포 토리티가 그린 성모대관(聖母戴冠)의 광경이 있다. 중세의 대표적 작품이다. 승천한 마리아에게 성부, 천사, 그리고 성자(예수) 등이 머리에 관을 씌운다. 즉 마리아는 즉위식을 거쳐 옥좌(玉座)에 앉게 된다. 성모와 그리스도가 같은 옥좌에 나란히 앉는 것은 파격적인 신분 상승이다. 그리스도가 어머니 마리아를 천상의 모후(母后)로서 그 영예를 더하기 위해서 그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하늘로 맞아들였다는 전승에서 비롯된 신앙이다. 비잔틴 시대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자주 보이는 중요한 도상이다. 그러면 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역사가 전개되면서 점점 그 위치를 굳건히 잡아가는가. 그것은 마치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자비심을 형상화한 관음보살의 신앙이 점점 높아지고 점점 여성화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구석기 시대 이래의 카오스에서 탄생한 대모지신(大母地神) 신앙의 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중앙의 큰 원을 서양과 일본에서는 메달리온(Medallion)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보이는 ‘큰 메달 모양의 보석’ 모양 같아서 그리 부르지만 옳지 않은 용어다. 필자는 보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둥근 원 안에 마리아와 예수가 앉는 옥좌와 그 주변에는 갖가지 모양의 보주들로 장엄하였으며, 특히 옥좌 등받이에는 동서양에 가장 흔한 직선으로 된 보주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보관도 갖가지 보주로 표현하며 마리아로부터 발산하는 보주를 상징한다. ●까만 둥근 원은 소우주·전체의 장대한 궁륭은 대우주 그리고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것을 모두가 별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은 보주에서 영기가 발산하는 광경이다. 이 글에서는 제한된 지면으로 수많은 기독교회화와 불교회화의 예를 들어 까만 부분의 무량한 보주를 증명할 수는 없다. 이처럼 까만 둥근 원은 우주(대보주)를 상징하며 온갖 보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림 전체를 보면 까만 둥근 원은 소우주이고 그것을 포함한 전체의 장대한 궁륭은 대우주라고 일단 생각해 두기로 한다. 그런데 까만 원 바로 위의 반원형 조형은 우리나라 사찰로 치면 닫집에 해당한다. 즉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는 광경이다. 그 외의 대공간인 대우주에는 만물이 생성되는 장대한 드라마가 묘사되고 있다. 이 장대한 생명생성의 과정을 풀어보기로 하자. 필자가 처음 접한 사진은 일본 소학관에서 펴낸 세계미술전집에 실린 것으로 성모대관의 장면만 자른 것이었다. 전체 벽화를 보고 싶었으나 구할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전체 사진을 겨우 찾아냈을 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다 ①. 사진 상태가 좋지 못하지만 그대로 싣는다. 3년 전 채색분석할 때 그 시발점을 보고 싶었으나 흐린 전체 그림에서 그 비밀을 풀어낼 수 있었다. 수많은 채색분석을 한 체험으로 예감이 있어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지 초보자는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그 시발점을 보니 커다란 영기잎이 세 갈래로 갈라진 형태가 겹겹이 나오는 조형에서 길고 긴 영기문이 조형원리에 의해 끝없이 전개하고 있다. 아칸서스가 아니다. 그런데 그 시발점은 강과 같은 물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자세히 보면 물고기가 보인다. 만물생성의 근원인 물이 흐르고 있으며 그로부터 영기문이 전개하고 있으며 만물을 상징하는 갖가지 새들이 화생하고 있다 ②. 서양학자들의 눈에는 큰 원 내부 성모대관의 도상에만 관심이 있어서 나머지는 생략되어도 좋은 장식무늬로 취급하고 있다. 까만 큰 원 좌우 양쪽에 성인들과 당시의 교황이 바라보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천사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도상들은 도상학이라는 이름 아래 충분히 연구되어 있다. 그러나 주변의 영기문에 대하여 서양 학자들이 설명하기를 ‘제멋대로 뻗은 꽃무늬 장식으로 둘러싼 메달리온’이라 부르고 있어서 상징성은 밝힐 수 없었다. ●주변의 영기문의 전개는 성모대관을 영기화생 시키는 것 그러나 오히려 그 주변의 영기문의 전개가 큰 보주 안의 성모대관이란 사건을 영기화생시키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채색분석한 것을 문자언어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이제 여러분은 해독의 힘이 생겼으므로 조형언어로 쓴 조형예술을 자세히 살피며 해독하기 바란다. 오른쪽 절반은 부분 사진만을 보고 채색분석한 것이고, 그 후 오늘 전체 사진을 보며 이어서 전체를 채색분석한 것이므로 색이 다른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 ●고려 은제 사리함에도 영수(靈獸)·영조(靈鳥)의 영기문 전개 필자는 수년 전 개인 소장의 고려시대 일곱 겹 은제 사리함을 본 적이 있었는데 영기문이 없는 가장 큰 사리함 안에 있는 중첩된 여섯 개 사리함의 표면에 영수(靈獸)와 영조(靈鳥)들이 영기문을 전개하면서 화생하는 것을 보고, 만물생성의 드라마를 크게 깨친 적이 있었다. 그런 체험이 있었으므로 같은 시기 로마의 성당에서 만물이 영기화생하는 똑같은 영기문의 전개원리의 조형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③. 불교에서 사리(舍利)라는 것은 여래의 몸을 지칭하기도 하고, 여래가 설법한 절대적 진리를 담은 경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사리는 결국 보주로 귀결한다. 필자는 박물관 재직 시 큰 규모의 불사리장엄전(佛舍利莊嚴展)을 기획하고 도록에 장편의 논문을 실은 적이 있다. 최근 새로이 출현한 사리함 표면에 새겨진, 끝없이 전개하는 영기문에서 생명이 생성하는 광경의 바탕에 수많은 작은 원형들이 빼곡히 차 있다.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은 어자문(魚子文), 즉 물고기알이라 부르고 있으나 보주를 나타낸다. 무량한 보주에서 결국 만물생명이 화생한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서양에는 ‘신의 천지창조’란 말이 있다. 그러나 중국, 한국에는 천지창조란 말은 없지만, 일원(一元)의 기(氣)에서 생긴 음기(陰氣)와 양기(陽氣)의 조화로 하늘과 땅이 생겨났다는 사상이 있다. 동양에는 신(God)의 개념은 없지만 심오한 자연(自然)의 개념이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내용은 영원한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동서양의 천지창조는 내용은 다르지만 결국 영기문이란 조형으로 나타낸 영기화생으로 귀결된다. 천지창조로 시작하는 우주 만물생명의 생성에 대하여는 동양의 음양오행설이 역경, 노자, 장자 등에서 설해졌고 이 사상이 그대로 불교와 유교에 융합되어 왔으며, 서양에서는 그리스 철학, 기독교의 성경 등에 설해져 있는데 그런 고전들을 익히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그러나 필자는 문자언어로 쓴 자구(字句)에 얽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형언어를 해독하면서 우주의 만물생성 이치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바티칸 미술관 천장의 성화(聖畵)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바티칸 미술관 천장의 성화(聖畵)

    2007년 11월 1일 필자의 새로운 학문적 여정을 여는 ‘한국미술의 탄생’이 찍혀 나오는 광경을 인쇄소 2층에서 내려다보며 ‘저 책이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미 2005년 나의 운명을 결정지은 첫 그리스 여행에서 서양 미술 전체를 풀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세계 미술사의 정립을 위한 서장(序章)’이다. ‘세계의 조형예술 용으로 읽다’는 그리스 첫 여행을 생각하면 꼭 10년 만에 쓰는 셈이다. 꿈이 이루어져 현실이 된 것이다. 빙켈만이나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에 가지 않았다. 필자의 그리스 여행은 앞으로 서양 미술사에 등장할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가 그리스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서양미술사학은 어둠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이제 비로소 진정한 ‘세계의 르네상스’가 올 것이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참된 르네상스가 아니었다. 코린트 주두는 물론 아칸서스도 잘못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재생 혹은 부활을 이르는 르네상스라 할 수 있겠는가. 중세 미술에 비하면 르네상스 미술은 세속화됐다는 느낌을 가져왔다. 동양 미술사가 연꽃 모양을 실제 연꽃으로 잘못 알았던 것을 무량보주로 바로잡은 것처럼 잡초에 불과한 아칸서스라는 특정 식물이 서양 미술사를 지배했던 것을 만물생성의 근원인 영기잎, 즉 무량보주로 바로잡게 됐다. 그 계기를 마련한 ‘한국미술의 탄생’이 인쇄되고 있었을 때 바닥에 굴러다니는 광고 쪽지를 주워 보고는 깜짝 놀랐다. 꽤 높은 수준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어느 성당의 그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천장의 네모 틀 안 그림 밑에 적힌 ‘성 미카엘이 가르가노 산에 현신하다’(S Michael In Monte Gargano Apparet)라고 쓴 것을 실마리로 오랫동안 추적해 이 그림의 화가를 천신만고 끝에 알아냈다. 체사레 네비아(1536~1622). 대천사 미카엘을 주제로 한 그림은 바로 로마시대 지도가 양쪽에 전시된 바티칸 교황궁 미술관 ‘지도갤러리’(gallery of Maps)의 120m나 되는 엄청나게 긴 궁륭천장에 그려진 화려하고 웅장한 그림들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 8년 전 인쇄소에서 주운 그림을 추적해 오늘 채색분석하고 있으니 운명적인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터널 볼트에 그려진 장식들은 체사레 네비아와 지롤라모 무치아노 등 매너리스트 화가들이 그린 것이다. 미카엘 대천사 그림의 위아래에는 여인으로 표현된 두 천사의 영기화생 도상, 구획마다 무량하고 다양한 보주의 조형들, 괴기한 조형들과 다른 형태의 용들이 수없이 많다. 사방 한 면을 채색분석해 보니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즉 체사레의 그림 주변 그림들을 서양 학자들은 그로테스크라 부르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무엇인지 모르면 무조건 문양 혹은 장식이라 부른다. 그러면 성화를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면 서양 학자들이 그로테스크하다고 하는 조형들은 누가 그렸을까? 전혀 다른 양식의 그림을 한 사람이 그릴 수 있을까? 아마도 이름 없는 수많은 유능한 무명의 장인들이 참여했을 것이다. 유학자들이 말하는 ‘괴력난신’의 세계가 말 그대로 파노라마처럼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은 대개 유명한 화가가 그린 미카엘 대천사의 현신을 보려고 가는 교황 일행 장면만이 눈에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화생하게 하는 그 주변의 그림들은 생명 생성의 놀라운 세계다. ‘주변’이 아니고 오히려 ‘주체’가 된다. 그 무엇인지 모를 조형을 최초로 밝혀 보여 드리려 한다. 미카엘 대천사는 천사들의 대군단을 이끌고 악마를 퇴치하므로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수호신으로 경배한다. 그러므로 그림 양쪽의 천사는 아마도 미카엘 대천사가 이끄는 천사들을 상징하며, 나아가 성 미카엘 대천사의 영기화생을 웅변하는 것이 아닐까. 원래 미카엘 대천사는 미청년으로 묘사되다가 점점 여성적으로 나타난다. 마치 관음보살이 원래 대장부이나 점점 여성적으로 표현돼 가듯 천사들은 여성적으로 변화한다. 동서양의 같은 현상이다. 영기문은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므로 반드시 채색분석해 단계적으로 보여 드려야 한다. 필자가 천사의 영기화생을 단계적으로 채색한 것은 무려 50단계가 넘는데 그중 일곱 단계만 보여 드리기로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선으로 그린다 ②. 그다음, 실은 천사의 몸부터 채색해야 하나 끝부분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끝의 영기문에서 천사가 화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릴 때 영기화생하는 조형 과정은 역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끝 부분은 빨간 세 가닥 조형이 있는데, 동양에서도 용의 꼬리 끝을 이렇게 표현해 꼬리로부터 용이 화생하게 한다. 그런데 뜻 밖에도 용 같은 몸의 등에 작은 보주들이 표현돼 있지 않은가. 그 용 같은 꼬리와 몸은 놀랍게도 아칸서스라고 부르는 두 갈래 영기문 조형에서 나오고 있다. 즉 천사의 치마 같은 연두색 영기잎 부분에서 녹색 영기잎이 화생하고 다시 그 영기잎 갈래에서 용의 꼬리가 화생하고 있다 ③. 즉 천사의 두 다리는 용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니, 천사는 용성(龍性)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용의 꼬리에 걸쳐 있는 빨갛고 커다란 제1영기싹은 만물생성의 근원으로 그 끝에서 아기 천사가 화생하고 있다. 천사 역시 현실에 없는 영기화생한 영기문이다. 마침내 하반신의 영기문에서 천사의 몸이 화생하고 ④ 다시 두 팔이 영기잎(아칸서스 모양)으로 변한다. 그 영기잎의 두 갈래 사이로부터 줄기가 제1영기싹 모양으로 도르르 말리며 나오고 ⑤, 그 끝에서 영기꽃이 피며 무량한 보주가 나오고 있다 ⑥, ⑧. 만일 필자가 보주를 몰랐다면 상태가 안 좋은 사진에서 작은 보주들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 사경 표지의 조형에서, 영기꽃의 씨방에서 보주가 무량하게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밝히지 못했더라면 이 르네상스 시대의 조형을 읽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국내에서도 고려사경 표지를 읽어 내지 못하는 까닭은 씨앗(종자)이 보주로 승화한다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인데, 아직도 연꽃이니 모란이니 보상화니 학자들마다 제각각 부르고 있다. 일본 대승사 소장 고려 사경 변상도의 표지 그림을 밝힌 적이 있다 ⑨. 마지막으로 날개 모양이 천사의 몸에서 영기문으로 발산하고 있다. 마치 동양 비천의 천의는 천의가 아니고 영기문이듯 날개는 날개가 아니고 제1영기싹으로 이루어진 영기문이다. 그 증거로 날개가 녹색으로 칠한 영기문에서 날개 모양이 화생하고 있지 않은가 ⑦. 좌우 대칭이므로 한쪽만 읽으면 전체를 읽을 수 있다. 장엄한 천사의 영기화생 광경이며 결국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고 있다. 동서양이 이처럼 같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넓은 구획선에는 갖가지 모양의 보주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서양 학자들이 ‘달걀’이라 부르는 것들도 있고 ‘로제타’라도 부르는 모양도 있지만,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모두 보주, 즉 무량보주의 표현이다. 즉 천사로부터 발산한 무량한 보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틀 위 중심에 영적 존재의 얼굴이 있고, 용의 입에서 양쪽으로 영기문이 발산하듯 아칸서스 모양 영기문에서 줄기가 화생하며 끝에서 무량보주꽃, 즉 영기꽃이 핀다. 마치 아래 천사의 영기화생을 간략화한 것 같다. 그 양쪽으로 놀랍게도 용 두 분이 꼬리가 얽히며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①. 사진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얼굴의 윤곽은 뚜렷하며 용의 배 부분에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 있어서 용을 영기화생시키고 있음을 어렵게 찾아냈다. 이것도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가운데, 특히 용의 영기화생 조형과 똑같다. 고구려 용이 연두색 제1영기싹이 연이은 영기문에서 화생하듯이 이 르네상스 시대의 용도 아칸서스가 아니라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에서 화생하고 있다. 그 꼬리도 빨간 제3영기싹이 아닌가. 그런데 서양 학자들이 그로테스크하다고 일축했던 엄청난 양의 조형들이 성당에 가득 차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성당에는 예수 혹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경배의 대상으로 돼 있다. 그 두 존재는 이미 현실적인 인간이 아니라 불교의 여래와 보살처럼 영기화생한 만물생성의 근원임을 다음 회에서 증명할 것이다. 성령(聖靈)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즉 성령화생(聖靈化生)이며 바로 영기화생(靈氣化生)을 뜻한다. 영기는 곧 성령이다. 그러면 왜 괴력난신의 세계, 그로테스크한 광경들이 사찰이나 성당에 많은가. 현실에서 본 형태로는 그러한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 장인들은 하나님(神)처럼 새로운 조형을 창조해야 한다. 장인들은 보이지 않는 우주의 대생명력을 보이도록 창조해 표현했으므로 사제들이나 인문학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장인들은 마음 놓고 진리의 세계를 조형적으로 표현해 왔다. 그 대생명력, 즉 성령이 바로 하나님이다. 기독교에서는 수호신 성 미카엘이 퇴치하는 악마들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기괴한 용이다. 그러나 성당에 얼마나 용의 조형이 많은가. 영기화생하는 용을 보면 악마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이 천장에는 형태가 다른 수많은 용 그림이 가득 차 있다. 성당이야말로 생명이 영원히 생성하는 거룩한 생명의 성전이 아닌가. 예수님이 바로 만물생성의 근원이 아닌가. “보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니 나는 세상의 생명이요 빛이니라.” 바로 이 선언이 이미지로 창조돼 우리가 수천 년 동안 보지 못했던 괴력난신의 세계, 그로테스크의 세계가 역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중앙의 유명한 그림보다 무명의 장인이 그린 주변의 넓은 공간에 가득한 기괴한 조형들이야말로 영원한 생명 생성의 세계를 표현한 참된 성화(聖畵)들이라 할 수 있다. 현대 과학의 천문학, 생물학, 의학 등에서는 허블 망원경을 발명해 눈에 보이지 않던 더 멀리 있는 별들의 존재를 밝힐 수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던 바이러스를 전자현미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 도구들이란 불교의 말을 빌리면 방편반야(方便般若)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 그 도구들이 탄생한 것이다. 목적이 도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문·예술 분야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지만, 진즉 본 사람은 없다. 필자는 그 보이지 않는 조형을 눈으로 보고 조형 원리를 파악한 후에 사상과 연관시켜 공부하고 있다. 그런 후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도구가 채색분석이다. 지금 채색분석을 통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조형을 단계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채색분석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분은 필자 홈페이지의 ‘학문일기’에서 ‘채색분석법(彩色分析法)이란?’을 검색해 읽어 보시기 바란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글로벌 인사이트] “이념 아닌 사람을 섬기라” 쿠바에 직언한 교황, 美도 놀래키나

    [글로벌 인사이트] “이념 아닌 사람을 섬기라” 쿠바에 직언한 교황, 美도 놀래키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처음으로 최강대국 미국과 유엔을 방문한다. 쿠바를 방문 중인 교황은 22일부터 27일까지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 유엔 총회 연설, 뉴욕 ‘그라운드 제로’ 방문 등을 한다. 교황으로선 29번째 미국 방문이지만 일정만 보면 정치인처럼 보인다. 이번 방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단골 주제인 기후변화, 사회 불평등, 교회 개혁 문제 등에 대해 강도 높은 메시지를 내놓을 것으로 기대된다. 쿠바의 마지막 날 교황은 앞서 20일(현지시간) 쿠바 혁명의 주역인 피델 카스트로(89) 전 국가평의회 의장과 40분간 만나 환담했다고 교황청 대변인이 밝혔다. 카스트로 전 의장은 와이셔츠 위에 체육복을 걸친 상태로 교황을 맞았다. 교황은 70년 전 카스트로 전 의장이 다닌 가톨릭 예수회 고교의 교사인 아르만도 로렌테 신부의 책과 관련 CD 등을 전달했다. 카스트로 전 의장은 답례로 브라질의 대표적 해방신학자인 프레이 베투 신부와 자신의 대화를 담은 책 ‘피델과 종교’를 증정했다. 교황으로선 세 번째 쿠바 방문이다. 교황은 이날 오전 수도 아바나의 중심부인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인간 존중의 메시지를 전했다. 교황은 “이념이 아니라 섬기는 마음으로 서로 아끼라”면서 “섬김은 결코 이데올로기가 아니니 이념이 아닌 사람을 섬기라”고 강조했다. 교황이 이데올로기보다 이념을 강조한 것은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인 점을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날 저녁 미사에서는 원고 대신 즉흥 연설로 “신은 교회가 가난해지기를 바란다”며 성직자들이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빈자와 약자를 돕는 데 노력할 것을 주문했다. 美 파격 의전 22일 쿠바 일정을 마친 교황은 미국 워싱턴 근교의 앤드루스공군기지에 도착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부부, 조 바이든 부통령으로부터 영접받는다. 다음날 교황은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서 1만 4000여명의 손님과 함께 오바마 대통령이 주최하는 환영식에 참석한다. 환영식 전에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오바마 대통령과의 양자 회담이 계획돼 있다. 순방 셋째 날인 24일에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한다. 뉴욕으로 이동한 교황은 25일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고 9·11테러가 발생한 ‘그라운드 제로’에서 다(多)종교 예배를 집전한다. 순방 마지막 날인 27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1만 5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이번 순방의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다. 가톨릭 신자인 바이든 부통령은 27일 교황 환송식을 여는 등 교황이 참석하는 대부분의 행사에 동행할 예정이다. 79세의 교황은 미국에서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연설을 하는 강행군을 한다. 쿠바에서 한 여덟 번의 연설과 합하면 이번 순방에서 한 연설은 모두 스물여섯 번에 이르지만 영어 연설은 네 번뿐이다. 기후 회담 오바마 대통령이 교황에게 최고의 영전을 베푸는 이유는 그가 12억 가톨릭 신자의 수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바마 정부가 임기 후반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려는 기후변화 방지, 사회 불평등 해소, 사법 개혁 등에 대한 교황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미국 퀴니피액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9월 미국 내 교황의 지지도는 66%로,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이고 유력 대권 주자인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보다 높다. 교황과 오바마 대통령 간 양자 회담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주제는 기후변화다. 최근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한 ‘청정전력계획’을 발표한 오바마 대통령은 오는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를 앞두고 교황의 지원을 고대하고 있다. 교황도 지난 6월 기후변화 문제에 강력 대처할 것을 주문하는 회칙을 발표하는 등 오바마 대통령과 기후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교황의 미국 방문 목적은 미국 내 가톨릭 인구의 중요성과 두 세계 정상의 가치관 공유를 인정하는 것”이라면서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에 대해 정책적 대화가 오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교황은 또 사회 불평등 등에 대해서도 메시지를 던질 것으로 보인다. 바티칸 관계자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유엔 총회 연설에서 교황이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문제인 “세계 금융시장의 독재성”, “일회용 소비문화의 유해성”을 비롯해 인신매매, 실업, 전쟁, 소수 종교 및 인종의 박해 등을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교회 개혁 등의 종교 문제도 빠지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 15년간 미국 가톨릭계는 교회 성범죄 스캔들과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 그리고 교리의 보수화 등으로 인해 신자의 급감을 겪어 왔다. 퓨리서치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4년까지 300만명의 신자가 교회를 떠났으며 같은 기간 전체 인구 대비 가톨릭 신자 비율은 23.9%에서 20.8%로 감소했다. 미국 가톨릭 관계자들은 개혁적인 교황의 순방으로 쇠퇴하던 미국 가톨릭이 회복하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도했다. 교황은 순방 전에 두 가지 중대한 개혁 즉, 신부가 낙태한 여성을 사면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결혼 무효화 절차를 간소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시카고의 세인트메리성당 부제인 케이트 보하릭은 “교회로부터 추방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번 조치를 환영하며 교회로 돌아올 것”이라면서 “그들은 원래 가톨릭 신자였으나 이혼 또는 낙태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로부터 지옥을 선고받았다고 느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인류 향한 메시지 그러나 교황의 메시지를 접할 미국민은 점점 비우호적으로 변하고 있다. 지난 7월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교황 지지도는 59%로 지난해 2월의 76%에 비해 17% 포인트 하락했다. 특히 보수층의 지지도는 지난해에 비해 27% 포인트 급락한 45%를 기록했다. FT는 지난 7월 교황이 남아메리카 국가들을 순방할 때 “규제받지 않는 자유시장은 악마의 배설물이며 교묘한 독재정권”이라고 말하며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보인 것이 미국 보수층이 돌아서게 된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지난 6월 교황이 기후변화에 관한 회칙을 발표하며 “자연을 약탈하는 거대 기업”들을 비난한 것도 환경규제에 반대하는 미국 공화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가톨릭 신자이자 공화당 대선 경선에 나선 젭 부시 후보는 “종교를 정치적 논쟁거리로 삼아선 안 된다”고 했으며 릭 샌토럼 후보 또한 “과학은 과학자들에게 맡기고 교회는 신학과 도덕에 집중해야 한다”며 교황과 각을 세웠다. 미국 가톨릭 내 보수파도 교황의 교회 개혁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하고 있다. 결혼 무효화 간소화 조치가 발표된 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미국의 보수파 성직자인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은 “교회 내에서 결혼제도를 무자비하게 공격한 것에 통탄한다”면서 교황의 개혁 조치에 대해 “감정에 치우친 것”이라고 반발했다. 보수파는 또 교황이 이란 핵협상을 지지하고 미국과 쿠바 간 관계 정상화를 물밑에서 도왔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이자 반미주의자라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교황의 메시지를 보수, 진보의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분석하기는 어렵다는 목소리도 있다. 교황에 대한 평전을 쓴 폴 발레리는 AP와의 인터뷰에서 “교황이 진보적 경향을 갖고 있을 수 있지만 보수적 경향 또한 있다”면서 “다만 교황은 교리 문제보다는 빈곤 문제에 더 집중하고 싶어 할 뿐”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의 닉 미로프 칼럼니스트는 “교황은 진보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닌, 다양한 소수 계층을 교회로 끌어들여 가톨릭의 저변을 넓히고자 하는 복음주의자”라고 평가했다. 교황이 이번 미국 순방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든 특정 교인이 아닌 전 인류를 향한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AP는 분석했다. AP는 교황이 유머감각을 갖고 있으며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교황은 가톨릭 교리를 알지 못 하는 비교인에게도 자신의 메시지를 알기 쉽게 전달한다고 덧붙였다. 뉴욕 대교구의 티머시 돌런 추기경은 “교황은 단순함, 겸손, 진실함만으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서 “교황의 연설에는 대본도, 홍보도, 마케팅도 없다. 오직 교황 그분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오바마, 교황 방미때 공항 영접…백악관서 90분간 최고 의전

    오바마, 교황 방미때 공항 영접…백악관서 90분간 최고 의전

    오는 22일부터 엿새간 미국을 방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극진한 영접을 받게 된다고 폭스뉴스가 1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오바마 대통령 내외가 영접을 위해 직접 공항에 나가는가 하면 백악관에 레드카펫이 깔리고 예포가 울리는 등 극소수의 세계적 지도자들만이 받는 각별한 의전과 예우가 펼쳐질 것이라고 이 방송은 전했다. 먼저 오바마 대통령은 22일 수도 워싱턴 D.C. 인근 메릴랜드 주 앤드루스 공군기지로 가 교황을 직접 맞는다. 부인 미셸 여사와 함께다. 두 정상이 악수를 할 수도 있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가톨릭 신도들처럼 교황의 오른손에 낀 금반지에 입을 맞출 수도 있다. 이어 다음 날인 23일 교황은 역대 교황 가운데 세 번째로 백악관을 찾는다. 교황을 태운 리무진이 백악관 남쪽 잔디 입구로 들어오면 교황이 밟을 레드카펫이 펼쳐져 있다. 카펫 끝에는 오바마 대통령 부부가 기다리고 있다. 이 잔디에서는 오바마 대통령 내외 외에도 가톨릭 신자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하객이 교황을 맞는다. 교황이 의전에 개의치 않는다고는 하지만, 주최 측의 의전을 거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백악관 의전행사는 90분간 진행된다. 차량이 도착하면 21발의 예포가 울리고 군악대의 짧은 연주가 있다. 이어 미국 국가와 바티칸 국가가 잇따라 연주된다. 오바마 대통령이 먼저 환영인사를 하면 교황이 답사한다. 두 정상은 백악관 건물로 잠시 들어갔다가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객들에게는 간단한 에티켓이 요구된다. 우선 짙은 색 옷을 입어야 한다. 상의 소매는 팔꿈치를, 치마의 끝단은 무릎을 각각 덮어야 한다. 교황은 'Your Holiness'(성하·聖下) 라고 불러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과 교황은 2014년 만난 바 있다. 낙태에 관한 입장 차이에도, 두 정상은 미국의 쿠바와 이란 정책, 기후변화, 가난 및 소득불평등 문제 등에 대해서 공감대가 크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초 조찬 기도회에서 "다른 미국인들처럼 나도 교황의 미국 방문을 정말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
  • 닮은 듯 다른 우리 딸… 스타일을 물려주세요

    닮은 듯 다른 우리 딸… 스타일을 물려주세요

    진분홍 가죽 라이더재킷에 블랙진을 받쳐 입은 그는 왼팔로 둘째 딸을 안아 올렸다. 오른손에는 일회용 컵을 든 채였다. 첫딸은 하늘거리는 분홍 치마를 입고 허리춤에 검은 라이더재킷을 홀쳐 맸다. 검은 시폰 치마를 입은 둘째는 언니와 같이 리본핀을 머리에 꽂아 멋을 부렸다. 록시크 차림의 모녀가 향한 곳은 동네 마트였다. 1년 전 이맘때 파파라치에게 포착된 미국 할리우드 배우 제시카 알바와 두 딸 아너, 헤이븐의 모습이다. 오늘은 딸내미에게 어떤 옷을 입힐 것인가. 엄마들이 아침마다 딸의 옷장 앞에서 하는 고민일 것이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육아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 유명인이 자녀와 입는 커플룩이 화제가 되면서 이들의 옷차림을 따라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과거의 모녀 커플룩은 아이에게 초점을 두었다. 화려하고 밝은 원색에 캐릭터를 강조한 귀여운 옷을 함께 입는 식이다. 요즘 엄마들은 딸에게 성인 옷의 축소판을 입히는 미니미룩을 선호한다. 여성복 디자인을 아동복으로 제작한 상품이 인기다. 여성복 브랜드 보브는 지난달 말 8~13세 어린이를 위한 ‘V주니어’를 선보였다. 톰보이도 엄마나 이모와 함께 입을 수 있는 주니어 라인을 출시했다. 김주현 보브 마케팅 담당 과장은 “아동복과 성인복의 유행은 전혀 별개였지만 요즘 초등학생은 패션에 민감해 전형적인 아동복 대신 어른스러운 옷을 좋아한다”면서 “엄마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즐겨 입는 브랜드의 디자인을 그대로 따른 아동복을 원하는 수요가 많아 주니어 라인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미니미룩을 잘 입으려면 한 가지를 기억하는 게 좋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엄마와 딸이 똑같은 차림을 하는 건 다소 촌스럽다. ‘데칼코마니’는 남녀 커플룩에서도 피하는 연출법이다. 외투, 상의와 같은 한 가지 아이템은 통일하되 하의나 액세서리는 색감만 맞추는 게 자연스럽다. 엄마와 딸이 같은 디자인의 오버사이즈 무스탕 코트를 같이 입는다고 치면 딸은 밝은 회색 스웨터나 티셔츠에 A라인 주름치마를 입어 깔끔하게 연출한다. 엄마가 타이포그래피(글씨)가 들어간 니트와 운동복 바지를 받쳐 입으면 딸과 세련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마린풍 유행에 맞춰 세일러 블라우스를 커플룩 아이템으로 골랐다면 딸은 짧은 감색 반바지를, 엄마는 같은 색 와이드팬츠(통바지)를 입으면 보기 좋다. 김예진 V주니어 마케팅 담당 대리는 “아이들은 활동량이 많기 때문에 바지와 운동화처럼 실용성 있는 옷과 소품을 활용하고, 엄마는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긴 부츠나 청 와이드팬츠로 감각적인 차림을 강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캠핑과 나들이가 많은 가을에는 아웃도어 의류로 가족 패션을 완성할 수 있다. 아웃도어 브랜드는 바람막이 재킷과 경량 다운점퍼 등 주요 아이템을 성인복과 아동복으로 나누어 내놓는다. 같은 디자인인데 사이즈만 달라 미니미룩을 표현하기 쉽다. 대부분의 아웃도어 브랜드는 한 가지 디자인을 여러 색상으로 출시한다. 전문가들은 엄마와 딸 또는 아빠와 아들이 비슷한 색감을 입어 같고도 다른 시밀러룩(유사한 차림)을 연출하는 법을 추천했다. 아웃도어 브랜드 네파는 키즈 미니미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성인복 가운데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을 아동복으로 재구성한 제품이다. 일교차가 큰 시기에 캠핑을 간다면 가벼운 바람막이 재킷을 입는 게 좋다. 네파 ‘바유 방풍재킷’은 성인제품과 이름까지 같다. 바람을 막아 주면서도 시원한 기능성 안감을 사용해 간절기에 입기 적당하다. 날이 더 추워지면 ‘바티칸 라이트 구스다운 재킷’으로 패밀리룩을 나타낼 수 있다. 세이지 김 네파 디자인실장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같은 색감의 후드점퍼를 걸치거나 가방 또는 모자 등의 소품을 통일하면 캐주얼한 커플룩이 완성된다”고 말했다. 신발은 모녀 커플룩에 처음 도전하기 좋은 아이템이다. 강주원 금강제화 디자인 실장은 “엄마와 딸이 줄무늬 티셔츠나 피케셔츠와 같은 단순한 옷을 입고 끈이 없어 활동하기 편한 슬립온 슈즈나 워커부츠를 신으면 튀지 않지만 은근한 멋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유아 화장품 업계에도 미니미 바람이 분다. 엄마의 화장대에 관심 많은 여자아이를 겨냥해 성인 화장품을 본떠 만든 제품이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출시돼 두 달 만에 16만개가 팔린 프리메라 베이비 선쿠션은 에어쿠션과 생김새가 같다. 동그란 퍼프를 손가락에 끼우고 스펀지를 눌러 선크림을 묻힌 뒤 얼굴에 펴 바르는 방식이다. 김효정 프리메라 브랜드 매니저는 “자녀를 둔 연구원들이 아이들이 싫어하는 크림타입의 자외선 차단제를 쓰면서 느낀 불편함을 개선해 내놓은 제품”이라면서 “엄마처럼 화장하는 듯한 느낌을 줘서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서동철 칼럼] 그들을 안달하게 만든 것이 방중 성과다

    [서동철 칼럼] 그들을 안달하게 만든 것이 방중 성과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여주 시내 한복판에 대로사(大老祠)라는 사당이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이름만 바뀌었을 뿐 살아남았던 대로서원(大老書院)이 같이 있었던 만큼 규모는 제법 크다. ‘위대한 어르신’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대로’란 우암 송시열(1607~1689)을 가리킨다. 건물을 지어 주고 정조가 규장각 제학 김종수에게 현판을 쓰게 하여 내려보낸 것이 1785년이니 우암이 세상을 떠나고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다. 정조가 여주에 우암의 사당을 지은 것은 효종의 무덤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세종의 무덤 영릉(英陵)과 나란히 있는 효종의 무덤 영릉(寧陵)은 가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겪은 인조의 둘째아들 효종은 재위 기간 내내 청나라를 치는 이른바 북벌(北伐)을 부르짖었다. 우암은 그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대로사란 우암의 북벌대의론을 칭송하는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살아생전 조정을 좌지우지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노론은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이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노론에게 죽임을 당하다시피 했음에도 현실 정치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대로사 건립은 앞으로도 노론과 함께 가겠다는 정치적 제스처나 다름없었다. 대로사가 우암을 기리는 사당이지만, 정조의 정치력을 보여 주는 상징물로 세상이 기억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암의 북벌대의론은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구호에 불과했다는 인식도 적지는 않다.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은 조선 사람들의 뇌리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대표적인 실학자의 한 사람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다가 실소한 적도 있다. 우암의 유명무실한 북벌론에 반대해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배우자고 주창한 이른바 북학파의 대표 주자다. 하지만 배우러 떠난 길에도 청나라와 청나라 사람들을 한결같이 ‘오랑캐’로 서술하고 있었다. 우리 역사를 사대주의로 점철된 역사로 규정하는 것은 아베의 과거사 인식만큼이나 어이없다. 국어사전은 사대(事大)를 ‘주체성 없이 힘이 강한 자를 섬기는 태도’라고 설명한다. 당시 청나라가 어떤 존재인가. 그럼에도 끝까지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대상이었고, 백번 양보해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대상이었지 섬김의 대상이라고 생각한 조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우암의 존주대의(尊周大義)에도 이해가 필요하다. 존주대의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라를 따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사상을 따르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조선은 성리학을 명시적인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세계 유일의 국가일 것이다. 존주대의란 가톨릭 국가의 구성원이 바티칸과 교황을 정신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일찍이 로마의 지배에서 허덕였고, 이후 오래도록 교회 권력의 영향권에 있었다. 존주대의의 핵심은 문화와 사상의 중심이었던 중화주의가 명나라를 끝으로 막을 내린 뒤 그 문화와 사상의 중심 역할을 조선이 물려받았다는 주체적인 인식이 아닐까 한다. 조선시대 지식인이 가졌던 의식의 흐름을 조금만 이해한다면 사대주의를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본 언론인이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을 사대주의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어쨌든 미안하지만, ‘이제야 우리 외교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남북 분단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통수’에 걸린 채 사대를 강요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미국은 박 대통령의 행보를 두고 ‘충분히 공감한다’는 메시지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조심스럽게 상황 변화를 지켜보겠다’는 외교적 수사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본 조야(朝野)가 안달하는 것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박 대통령의 방중 성과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 교황 낙태 여성 용서 왜? “죄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황 낙태 여성 용서 왜? “죄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황 낙태 여성 용서 교황 낙태 여성 용서 ‘자비의 희년’ 기간에 한시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또다시 ‘큰 결단’을 내렸다. 교황이 ‘자비의 희년’ 기간에 한시적으로 낙태한 여성을 용서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자비의 희년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올해 12월 8일부터 내년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11월 20일까지다. AFP,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교황은 1일(현지시간) 바티칸 교황청 교서를 통해 “다양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에게 희년 동안 낙태한 것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에 한해 그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고 밝혔다. 가톨릭에서는 낙태가 중죄로 간주돼 낙태를 한 여성이나 낙태 시술을 한 의사들은 곧바로 파문당하게 된다. 용서의 대상은 낙태를 한 여성과 이를 시술한 의사들이다. 2013년 즉위 이후 동성애와 이혼 등 그동안 가톨릭에서 금기시해 온 민감한 이슈들에 대해 포용적인 입장을 잇따라 밝히며 교계 안팎을 놀라게 한 그의 또 다른 파격 행보인 셈이다. 교황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낙태를 결정한 많은 이들을 통해 낙태가 가져온 비극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며 “이로 인해 여성들의 마음에 난 상처와 얼마나 힘겹게 이 같은 결정을 내렸는지를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낙태의 죄는 교구의 최고 고해 신부만이 용서할 수 있는데 이번 희년 동안에는 모든 사제에게 낙태 여성 용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수석 대변인은 “이번 조치는 죄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조치”라고 말했고 치로 베네데티니 부대변인은 “지금으로서는 희년에 한해 적용되는 조치”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교황은 이와 함께 가톨릭교회 개혁을 표방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반발해 1969년 설립된 극보수 가톨릭 단체 ‘성 비오 10세회’(SSPX)에도 문호를 열기로 했다. 그는 “SSPX가 가까운 미래에 가톨릭 주류에 다시 합류하길 바란다”며 “희년 중에는 SSPX 사제들도 다른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낙태 여성 용서합니다” 교황, 또 큰 결단…12월부터 1년간 허용 “대체 왜?”

    “낙태 여성 용서합니다” 교황, 또 큰 결단…12월부터 1년간 허용 “대체 왜?”

    교황 낙태 여성 용서“낙태 여성 용서합니다” 교황, 또 큰 결단…12월부터 1년간 허용 “대체 왜?”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는 12월 8일부터 시작되는 ‘자비의 희년’(Jubilee of Mercy) 기간에 한해 사제들이 낙태 여성을 용서할 수 있게 했다. 2013년 즉위 이후 동성애와 이혼 등 그간 가톨릭에서 금기시해온 민감한 문제들에 잇따라 포용적인 입장을 밝히며 교계 안팎을 놀라게 한 교황의 또 다른 파격 행보다. 1일(현지시간) dpa·AFP통신 등에 따르면 교황은 이날 발표한 교서에서 “낙태를 한 여성이 진심 어린 속죄와 함께 용서를 구한다면 모든 사제에 이 낙태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교황은 “낙태라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상처를 가슴에 지닌 많은 여성을 만났다”며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실존적이고 도덕적인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가톨릭에서는 낙태가 중죄로 간주돼 낙태를 한 여성이나 낙태 시술을 한 사람들은 곧바로 파문당하게 된다. 낙태의 죄는 교구의 최고 고해 신부만이 용서할 수 있는데, 이번 희년 동안에는 모든 사제에게 낙태 여성 용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교황이 가톨릭 금기들에 대해 파격적일 정도로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3년 7월 선출 이후 처음으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만약 동성애자라 하더라도 선한 의지를 갖고 주님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며 동성애에 대한 유화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어 9월 첫 공식 인터뷰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한다”며 동성애자와 이혼자, 낙태 여성에게 ‘자비’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교황의 행보에 힘입어 지난해 가톨릭 세계주교대의원대회(시노드) 보고서에 동성애와 이혼에 대한 전향적 언급이 담길 예정이었으나 보수파의 격렬한 반대로 결국 최종 보고서에서 빠지기도 했다. 낙태 여성을 한시적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한 교황의 이번 결정에도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낙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대변인은 “이번 조치는 낙태의 죄가 지닌 무게를 축소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며, 자비를 베풀 가능성을 좀 더 넓히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고, 치로 베네데티니 부대변인도 “지금으로서는 희년에 한해 적용되는 조치”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한편, 이날 교서에서 교황은 가톨릭교회 개혁을 표방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반발해 1969년 설립된 극보수 가톨릭 단체 ‘성 비오 10세회’(SSPX)에도 문을 열기로 했다. 교황은 “SSPX가 가까운 미래에 가톨릭 주류에 다시 합류하길 바란다”며 “희년 중에는 SSPX 사제들도 다른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성년’(聖年)으로도 불리는 ‘희년’(禧年)은 가톨릭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특별한 영적 은혜를 베푸는 성스러운 해로, 정기 희년은 1300년 처음 시작돼 25년마다 기념한다. 이번 자비의 희년은 정기 희년과 별도로 지난 3월 교황이 선포한 특별 희년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올해 12월 8일부터 내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인 11월 20일까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교황 낙태 여성 용서 “모든 사제에 낙태 여성 용서 권한 준다”

    교황 낙태 여성 용서 “모든 사제에 낙태 여성 용서 권한 준다”

    교황 낙태 여성 용서교황 낙태 여성 용서 “모든 사제에 낙태 여성 용서 권한 준다”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는 12월 8일부터 시작되는 ‘자비의 희년’(Jubilee of Mercy) 기간에 한해 사제들이 낙태 여성을 용서할 수 있게 했다. 2013년 즉위 이후 동성애와 이혼 등 그간 가톨릭에서 금기시해온 민감한 문제들에 잇따라 포용적인 입장을 밝히며 교계 안팎을 놀라게 한 교황의 또 다른 파격 행보다. 1일(현지시간) dpa·AFP통신 등에 따르면 교황은 이날 발표한 교서에서 “낙태를 한 여성이 진심 어린 속죄와 함께 용서를 구한다면 모든 사제에 이 낙태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교황은 “낙태라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상처를 가슴에 지닌 많은 여성을 만났다”며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실존적이고 도덕적인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가톨릭에서는 낙태가 중죄로 간주돼 낙태를 한 여성이나 낙태 시술을 한 사람들은 곧바로 파문당하게 된다. 낙태의 죄는 교구의 최고 고해 신부만이 용서할 수 있는데, 이번 희년 동안에는 모든 사제에게 낙태 여성 용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교황이 가톨릭 금기들에 대해 파격적일 정도로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3년 7월 선출 이후 처음으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만약 동성애자라 하더라도 선한 의지를 갖고 주님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며 동성애에 대한 유화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어 9월 첫 공식 인터뷰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한다”며 동성애자와 이혼자, 낙태 여성에게 ‘자비’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교황의 행보에 힘입어 지난해 가톨릭 세계주교대의원대회(시노드) 보고서에 동성애와 이혼에 대한 전향적 언급이 담길 예정이었으나 보수파의 격렬한 반대로 결국 최종 보고서에서 빠지기도 했다. 낙태 여성을 한시적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한 교황의 이번 결정에도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낙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대변인은 “이번 조치는 낙태의 죄가 지닌 무게를 축소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며, 자비를 베풀 가능성을 좀 더 넓히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고, 치로 베네데티니 부대변인도 “지금으로서는 희년에 한해 적용되는 조치”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한편, 이날 교서에서 교황은 가톨릭교회 개혁을 표방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반발해 1969년 설립된 극보수 가톨릭 단체 ‘성 비오 10세회’(SSPX)에도 문을 열기로 했다. 교황은 “SSPX가 가까운 미래에 가톨릭 주류에 다시 합류하길 바란다”며 “희년 중에는 SSPX 사제들도 다른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성년’(聖年)으로도 불리는 ‘희년’(禧年)은 가톨릭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특별한 영적 은혜를 베푸는 성스러운 해로, 정기 희년은 1300년 처음 시작돼 25년마다 기념한다. 이번 자비의 희년은 정기 희년과 별도로 지난 3월 교황이 선포한 특별 희년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올해 12월 8일부터 내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인 11월 20일까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낙태 여성 용서합니다” 교황, 또 큰 결단…12월부터 1년간 허용

    “낙태 여성 용서합니다” 교황, 또 큰 결단…12월부터 1년간 허용

    프란치스코 교황이 또다시 ‘큰 결단’을 내렸다. 교황이 ‘자비의 희년’ 기간에 한시적으로 낙태한 여성을 용서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자비의 희년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올해 12월 8일부터 내년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11월 20일까지다. AFP,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교황은 1일(현지시간) 바티칸 교황청 교서를 통해 “다양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에게 희년 동안 낙태한 것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에 한해 그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고 밝혔다. 가톨릭에서는 낙태가 중죄로 간주돼 낙태를 한 여성이나 낙태 시술을 한 의사들은 곧바로 파문당하게 된다. 용서의 대상은 낙태를 한 여성과 이를 시술한 의사들이다. 2013년 즉위 이후 동성애와 이혼 등 그동안 가톨릭에서 금기시해 온 민감한 이슈들에 대해 포용적인 입장을 잇따라 밝히며 교계 안팎을 놀라게 한 그의 또 다른 파격 행보인 셈이다. 교황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낙태를 결정한 많은 이들을 통해 낙태가 가져온 비극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며 “이로 인해 여성들의 마음에 난 상처와 얼마나 힘겹게 이 같은 결정을 내렸는지를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낙태의 죄는 교구의 최고 고해 신부만이 용서할 수 있는데 이번 희년 동안에는 모든 사제에게 낙태 여성 용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수석 대변인은 “이번 조치는 죄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조치”라고 말했고 치로 베네데티니 부대변인은 “지금으로서는 희년에 한해 적용되는 조치”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교황은 이와 함께 가톨릭교회 개혁을 표방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반발해 1969년 설립된 극보수 가톨릭 단체 ‘성 비오 10세회’(SSPX)에도 문호를 열기로 했다. 그는 “SSPX가 가까운 미래에 가톨릭 주류에 다시 합류하길 바란다”며 “희년 중에는 SSPX 사제들도 다른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템플러(마이클 해그 지음, 이광일 옮김, 책과함께 펴냄) 영국의 역사가가 템플러를 알기 쉽게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템플러는 십자군 원정의 성과로 얻은 성지 예루살렘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1119년 만들어진 성전기사단. 이들은 200여년간 부유하고 막강한 조직력을 발휘했지만 신성 모독과 이단, 난교와 같은 혐의를 받아 주요 구성원들이 화형당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그로부터 700여년이 흐른 뒤인 2001년 로마 바티칸 교황청 비밀 문서고에서 발견된 성전기사단 재판 사료는 이들에게 씌워진 이단 혐의가 무죄였음을 드러내 충격을 주었다. 전설처럼 전해져 온 템플러의 용맹과 헌신, 비극적 종말은 영화와 소설,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에 많은 영감을 주었고 지금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책은 템플러의 등장과 성장, 전성기와 몰락 등 역사적 사실을 면밀하게 추적했다. 특히 대중문화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재창조돼 왔는지를 곁들여 소개하고 있어 도드라진다. 520쪽. 2만 5000원. 대한민국의 위대한 만남 박정희와 박태준(이대환 지음, 아시아 펴냄) 대한민국의 산업화, 근대화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박정희(1917~1979) 대통령과 박태준(1927~2011). 2004년 ‘박태준 평전’으로 호평받은 중진 작가가 ‘박태준의 박정희 회고’를 바탕으로 삼아 완전한 신뢰로 이뤄진 두 사람의 관계를 담담하게 담아 냈다. 두 사람이 관계를 지속하게 만든 진짜 이유며 독특한 관계를 속속들이 보여 준다. 숙명적인 만남과 신뢰를 구축한 군 지휘관 시절,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의 상공업 분야 최고위원,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서 진행한 한·일 국교정상화 정지작업, 귀국 후 적자 공기업인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킨 ‘국가주의 리더십’의 전모가 풀어진다. 한·일경제협력 저변 확대를 위한 한·일경제협회 창립, 미래지향적 한·일경제협력의 제도화를 이룬 리더십이 부각된다. 박정희의 박태준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제철보국(製鐵保國) 동력으로 작용했음을 강조해 주목된다. 472쪽. 1만 7000원. 빚 권하는 사회, 빚 못 갚을 권리(제윤경 지음, 책담 펴냄)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뒤에도 미국의 금융계는 건재했다. 그 금융의 도덕적 해이에 저항해 시민들이 꾸린 ‘오큐파이’ 팀은 2012년 시민들의 악성채권을 사들여 소각하는 ‘롤링주빌리’ 운동을 펼쳤다. 국내에도 그 같은 운동의 일환으로 ‘주빌리 은행’이 출범했다. 51억원의 부실 채권을 소각해 792명의 채무자들을 빚의 고통에서 해방시킨 롤링주빌리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일이다. 그 롤링주빌리 운동에 앞장선 에듀머니 대표가 빚 거래 시장의 실상을 고발했다. 책의 특징은 개개인이 짊어지고 있는 채무자들의 문제를 철저히 그들 입장에서 풀어내려 애쓴 점이다. 채무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빚으로부터 생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한국사회의 금융이 품은 구조적 문제를 파헤쳤다. 금융 시스템의 이면을 비롯해 대부업체들의 불법 추심에 대응하는 방법, 빚을 안 갚아도 되는 현실적 방안들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328쪽. 1만 5000원. 빌리지 이펙트(수전 핀커 지음, 우진하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마을인 이탈리아의 사르데냐는 남녀의 수명이 같은 세계 유일의 마을이다.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이 섬의 언덕배기 마을 사람들은 다른 마을 주민보다 무려 20∼30년을 더 오래 산다. 지구상 여타 지역과 비교해도 100세 노인 숫자가 평균 6배 이상이다. 사르데냐의 장수현상을 연구해온 한 연구자는 100세 노인의 가족들과 진료 기록, 유전 관련 정보를 바탕으로 유전적 고립과 산지라는 지형적 특성, 식습관을 장수 비결로 꼽았다. 책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결을 일상생활에서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이웃과 얼굴을 마주하는 접촉으로 지목했다. 끈끈한 가족애와 공동체 정신, 친밀한 관계가 장수의 묘약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친밀한 관계는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접속이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접촉이 없는 관계는 공허하다는 메시지가 강하다. 516쪽. 2만 1000원.
  • 美대선후보 트럼프 ‘교황 고향 축구팀’ 눈독…이유는?

    美대선후보 트럼프 ‘교황 고향 축구팀’ 눈독…이유는?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69)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고향 축구팀인 ‘산 로렌조’를 사길 원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미국 뉴욕 포스트는 도널드 트럼프가 교황이 가장 좋아하는 축구팀을 매입해 가톨릭 교인이 많은 히스패닉의 지지를 얻으려는 전략이라고 보도했다. 산 로렌조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릴 적부터 응원해온 고향 축구팀으로 유명하며 2013년 리그 정상에 오른 뒤에는 바티칸 성당으로 초대받았다. 2014년에는 남미 최강팀을 가리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구단 106년 역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기록해 교황의 더 많은 환심을 샀다. 또한, 산 로렌조 구단은 첫 남미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름을 따 새로운 홈 경기장의 이름을 짓기로 했다. 그만큼 교황과 구단 둘 사이의 관계가 매우 돈독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실이다. 교황과 산 로렌조 구단의 끈끈한 관계를 알아본 도널드 트럼프는 최근 불거진 미국 내 히스패닉 인종차별 발언을 환기하고자 이 구단 매입을 하려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진=ⓒAFPBBNEWS=NEWS1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사우디 여성 2명에 허락된 첫 참정권

    보호자 없는 여행, 운전, 남자가 있는 곳에서의 수영, 아바야(얼굴·손·발을 뺀 온몸을 가린 옷)를 걸치지 않은 외출, 낯선 남자와의 대화, 축구 같은 경쟁 스포츠, 쇼핑할 때 옷 입어 보기, 화장한 채 외출, 묘역 참배, 검열 안 받은 패션잡지 보기, 바비 인형을 사는 것….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할 수 없는 금지 목록이다. 오는 11월 수많은 금기 중 하나가 깨진다. 여성들이 투표할 수 있는 권리, 참정권이 처음 허락된다. 사우디 여성들이 11월 지방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다고 알자지라가 23일 보도했다. 알자지라는 사우디 신문인 사우디가제트를 인용해 지난 16일 다른 지역보다 유권자 등록을 먼저 받은 메카에서 사피나즈 아부 알 샤마트가 여성 1호로, 메디나에선 자말 알사디가 여성 2호로 유권자 자격을 얻었다고 전했다. 알 샤마트는 “선거 참여는 여성으로서의 국가적 의무”라고 소감을 밝혔다. 현지 언론들은 지방선거에서 21명의 여성 후보가 출마를 준비한다고 보도했다. 바티칸시국과 함께 여성 참정권을 부정해 온 사우디는 2011년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전 국왕의 결정을 계기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왕국인 사우디에는 대선과 총선이 없어 여성들은 참정권을 받은 지 4년 만에 지방선거에서 권한을 행사하게 됐다. 압둘라 전 국왕은 여성들이 투표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지난 1월 타계했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참정권 확보를 환영하면서도, 사우디의 여성 인권 상황은 여전히 취약한 단계라고 평가했다. 국제앰네스티의 캐런 미들턴은 “참정권 부여는 사우디의 여성 차별 극복을 위한 작은 변화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투표할 자격을 얻어도 보호자 없는 외출, 운전이 금지된 상황이라면 투표소까지 가는 일조차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 지적이다. 특히 사우디에선 운전을 허용하지 않는 조치에 대한 반발이 커 이 나라 여성 시민운동가들이 2013년 10월 26일을 ‘여성 운전의 날’로 정하고 직접 운전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20여명이 무더기로 체포됐다. 홍희경 기자 saloo@se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송혜민의 월드why] 바티칸이 외계인을 인정한다고? 400년 전과 달리

    [송혜민의 월드why] 바티칸이 외계인을 인정한다고? 400년 전과 달리

    외계생명체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공상과학영화를 즐겨보는 마니아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흥미를 가지는 소재다. 지구 외에 또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와 다른 생명체와의 만남을 ‘곧 다가올 미래’로 보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집단 중 하나는 바로 바티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중심으로 세계 종교의 한 축을 구성하는 바티칸은 최근 “지구 이외의 또다른 행성에 외계 생명체가 존재할 것으로 믿는다”는 뜻을 밝혔다. 신(神)의 존재를 믿는 종교단체 및 지도자가 신 이외의 다른 ‘고등 생명체’의 존재를 거론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비교적 드문 일이다. 바티칸은 왜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믿게 됐을까. ▲바티칸 천문대의 역사 바티간 소속으로서 천체를 관측하는 교육 기관인 바티칸 천문대의 역사는 15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회는 부활절과 축일(하느님과 구세주, 천사와 성인들, 거룩한 신비와 구세사적 사건 등을 기념하거나 특별히 공경하도록 교회가 별도로 정한 날) 등을 결정하는데 있어 역법을 이용했다. 즉 천체의 주기적인 운행을 시간 단위로 구분해 날을 정한 것이다. 교회는 하늘의 움직임을 살필 전문가들을 필요로 했다. 때문에 역법이 급속도로 발전한 18세기의 교황들은 바티칸 천문대와 천문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바티칸은 외계생명체를 거론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현 바티칸 천문대 소장인 호세 가브리엘 푸네스 신부는 2008년 “가톨릭 교리나 성경에서도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내용은 없다”고 밝혔으며, 가톨릭과 바티칸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지난 해 5월 바티칸 라디오 정규방송에서 “내일이라도 녹색 피부에 긴 코와 큰 귀를 가진 화성인이 세례받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면서 “세례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문을 닫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은 비교적 근대의 일이긴 하나, 바티칸이 바티칸 천문대를 중심으로 먼 우주를 관찰한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종교재판 천문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적 인물은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다. 그는 망원경으로 달과 목성 등을 관찰하고 역학 연구를 통해 근대 천문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그가 벌인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옹호다. 지동설은 태양이 우주 혹은 태양계의 중심에 있고 나머지 행성들이 그 주위를 공전한다는 우주관이며,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입증할 만한 연구 및 발언을 지속하다 결국 두 차례의 종교재판을 받았다. 당시 교황청이 갈릴레이에게 재판 및 고문을 선고했던 이유는 갈릴레이의 주장이 지구가 중심이라는 ‘진리’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그의 이론들이 이단에 가깝다고 주장하며 그의 모든 서적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지오르다노 부르노(1548~1600) 역시 갈릴레이에 앞서 교회와 다른 뜻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한 바 있다. 이처럼 약 400년 전 바티칸은 우주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지구가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ET’의 존재를 인정한 바티칸 4세기에 걸친 과학과 종교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다. 그는 1992년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비난이 잘못됐음을 인정했고 “진화론은 논리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밝혔다. 갈릴레이에 대한 명예도 회복 시켰다. 그 즈음 등장한 것이 바로 외계생명체였다. 1992년 미국항공우주국(이하 NASA)가 영화 속 캐릭터인 ‘ET’로 대변되는 외계생명체를 본격적으로 탐색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바티칸은 이 탐색 작업에 적극 협력할 뜻을 표명했다. 당시 바티칸 천문대는 이탈리아 언론인 코리에레 델라 세라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들은 지구 외계에 지적 능력을 갖춘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지구상의 인간만이 유일한 고등생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중심주의”라고 전했다. 바티칸의 이 같은 입장 변화는 종교로서 인류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한 바티칸의 의지로 해석된다. 이후 바티칸은 종교와 과학의 간극을 없애는 노력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 기존의 믿음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다만 400년 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우주 만물’이라는 피조물에 ‘외계인’이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외계생명체에 대한 믿음, 종교·개인마다 달라 외계생명체의 존재가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는 ‘진리’처럼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닌 만큼, 종교별로 다양한 입장이 공존한다. 미국 밴더빌트대학교의 천문학자인 데이비드 와인트랍 교수는 자신의 저서 ‘종교와 외계인: 우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Religions and Extraterrestrial Life: How Will We Deal With It?, 2014)에서 외계생명체가 실존한다는 가정하에 “유대교는 자신과 자신이 사는 곳에 있는 신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긴다. 외계인의 존재를 문제화 하지 않는다. 모르몬교는 확실하게 외계인을 믿으며 이슬람교의 코란에도 또 다른 지적 생명체와 관련한 언급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 등의 신비로운 동양 종교들도 이에 대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개신교와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일수록 "외계생명체와 관련한 문제가 더 많을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외계생명체를 향한 믿음은 종교 뿐 아니라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외계생명체가 존재한다고 보는 종교의 신도라 할지라도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이를 부인할 수도 있다. ‘ET’의 실존 여부는 여전히 ‘믿거나 말거나’의 영역이다. 그러나 우주 및 외계생명체의 탐색은 현재진행형이며, 전 세계가 집중하는 고등 학문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교황님, 저 카메라를 봐주세요...모두가 교황을 담기 위해”

    “교황님, 저 카메라를 봐주세요...모두가 교황을 담기 위해”

    프란치스코 교환(Pope Francis)이 7일(현지시간) 바티칸 바오르 6세(Paul VI ) 홀에서 세계 청소년 성체대회(the Youth Eucharistic Movement)에 참가한 젊은이들과 셀피(Selfie)를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 AFPBBNews=News1/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교황님, 저와 셀카 찍어요...”

    “교황님, 저와 셀카 찍어요...”

    프란치스코 교환(Pope Francis)이 7일(현지시간) 바티칸 바오르 6세(Paul VI ) 홀에서 세계 청소년 성체대회(the Youth Eucharistic Movement)에 참가한 젊은이들과 셀피(Selfie)를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 AFPBBNews=News1/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바티칸 “우린 혼자 아냐…외계 생명체 존재”

    바티칸 “우린 혼자 아냐…외계 생명체 존재”

    바티칸이 외계인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영국 인디펜던트 등 해외 언론이 3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바티칸 소속 바티칸 천문대 측은 지구 이외의 또 다른 행성에 외계 생명체가 존재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바티칸 천문대는 1582년부터 우주학을 연구해 왔으며, 최근 NASA가 공식 발표한 ‘제2의 지구’ 또는 ‘슈퍼지구’의 소식을 접한 뒤 이 같은 믿음이 더욱 굳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바티칸 천문대는 “설사 우리 태양계 밖에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 해도 그들이 ‘제2의 예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예수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온 하느님은 인간”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을 한 바티칸 천문대 천문학자는 아르헨티나 코르도바대학을 졸업한 호세 가브리엘 후네스 신부다. 후네스 신부가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2008년에도 “가톨릭 교리나 성경에서도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내용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티칸에서 외계 생명체에 관심을 가지는 성직자는 후네스 신부 외에 또 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해 5월 바티칸 라디오 정규방송에서 “내일이라도 녹색 피부에 긴 코와 큰 귀를 가진 화성인이 세례받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면서 “세례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문을 닫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외계 생명체의 존재 유무를 밝히는 것은 인류의 과제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달 NASA는 케플러우주망원경이 발견한 태양계 외부 행성 후보군을 추가로 발견했다면서 “또 하나의 지구를 찾았다”고 밝혔다. NASA는 지구에서 1400광년 떨어진 케플러 452b가 지구와 가장 닮은 행성이며, 태양과 매우 비슷한 특징의 모체 항성의 궤도를 돌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전주기 역시 386일로 지구와 비슷하다. 케플러 452b의 나이는 60억 년으로, 우리 태양보다 15억 년 더 오래됐다. 온도는 태양과 똑같은 수준인 것으로 추정된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스스로 ‘환생한 예수’ 주장하는 男…“바티칸도 인정”

    스스로 ‘환생한 예수’ 주장하는 男…“바티칸도 인정”

    스스로를 ‘예수의 두 번째 환생’ 이라고 주장하는 70대 호주 남성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데일리메일 호주판의 26일자 보도에 따르면, 호주에 사는 71세의 브라이언 마샬은 자신이 두 번째로 환생한 예수이며 토리노의 수의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토리노의 수의는 예수의 장례식 때 사용된 수의로 알려져 있는 유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진 뒤 부활하기 전까지 그 시신을 감쌌다는 천을 뜻한다. 진위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유물 중 하나로 현재 이탈리아 토리노 성당에 보관돼 있다. 호주 퀸즈랜드에 사는 마샬은 토리노의 수의에 남아있는 예수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과 매우 흡사하며 손과 발에 남아있는 흉터가 예수가 못 박혔을 때 생긴 흉터라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자신을 ‘환생한 예수’라고 인정한 서신이 있다며 이를 공개해 더욱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베네딕토 전임 교황의 서신이라고 주장하는 문서에는 마샬을 ‘예수의 환생’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토리노의 수의에 남겨진 얼굴과 매우 닮았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샬은 “2013년 당시 베네딕토 교황이 직접 나를 ‘예수의 환생자’로 공표하려고 했지만 반대세력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SNS에 쉴 새 없이 설교 동영상 및 글을 올리고 있지만 그가 실제 ‘예수의 환생’이라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미국 남성은 그의 SNS 글과 동영상을 접한 뒤 그를 진짜 ‘환생한 예수’라고 믿고, 그와 함께 하기 위해 가족들을 버리고 호주로 이민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하고 있다. 이 미국 남성의 사위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은 데일리메일 호주판과 한 인터뷰에서 “아내의 의붓아버지인 그는 이단 종교(브라이언 마샬)에 빠져 아내와 아이들, 손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면서 “브라이언 마샬이라는 남자의 사기행각을 접하기 전까지, 나의 장인어른은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족을 아끼는 멋진 남자였다”고 전했다. 한편 브라이언 마샬에게는 아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프란치스코 교황 배경으로 한 운전사의 ‘셀카’ 화제

    프란치스코 교황 배경으로 한 운전사의 ‘셀카’ 화제

    보통 사람들의 '셀카' 는 지인들에게만 공유되지만 그 사진 속에 유명인물이 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최근 평범한 한 운전사의 셀카 사진 한장이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사이트(SNS)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진 속에 함께 촬영된 인물이 ‘빈자의 영웅’으로 불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기 때문이다. 지난 11일(이하 현지시간) 운전사인 세바스찬 곤잘레스는 교황과 함께한 셀카 사진 한장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려 큰 인기를 얻었다. 남미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배경으로 입가에 웃음을 드러낸 주인공이 바로 곤잘레스로, 운전사가 갖는 '특권'을 당당히 누린 셈이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의전차량인 ‘포프모빌'(popemobile)을 타고 거리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한편 남미 출신 최초의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2일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 남미 3개국 순방을 마치고 바티칸 교황청으로 돌아갔다. 특히 이날 전용기 안에서의 기자회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중산층이 겪는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내 실수”라며 "세계가 양극화되며 중산층이 줄었고 빈부 양극화가 커졌다. 아마도 이 때문에 내가 중산층의 문제에 대해 많이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며 이례적으로 사과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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