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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찬종 영입/“또 모험”·“바람몰이 기대” 갈려

    ◎신한국당 위상후 위상 어찌될까/박씨 “홀로서기 9년동안 힘들었다” 「무정파 독불장군」으로 불리는 박찬종전의원의 신한국당 입당은 그 자신이나 신한국당 모두에게 「정치적 모험」으로 표현된다.정치적 모험이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도전이자 투자다.박전의원의 입당이 관심을 끄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박전의원은 17일,입당절차를 마친뒤 『9년동안 홀로서기를 해오면서 늘 불안했었다』면서 『이제 가장 큰 정파와 인연을 맺게 돼 퍽 안심스럽다』고 말했다.박전의원은 지난해 서울시장선거에 낙선한뒤 주변에 무정파의 설움을 자주 호소한 적이 있다.항상 혼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격」인 높은 곳에 도전했고 좌절했던 설움의 표현이다.그는 입당 이유를 『나를 지지하는 사람 가운데 75%가 입당에 긍정적이었고,김영삼대통령이 개혁작업의 대안들을 흔쾌히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그러나 정가에서는 그의 입당을 이런 명분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방황끝에 비빌언덕을 찾은 선택」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방황과 무정파가 「박찬종인기」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으로 볼 때 이는 그에게 남겨진 가장 큰 딜레마다. 현재 신한국당의 최대 현안은 총선에서의 승리다.특히 지역분할 현상이 심각한 지금 상황에서 수도권은 최대의 승부처다.수도권의 부동층,무정파 젊은층의 지지를 조금이라도 더 넓히자는게 박전의원 영입의 가장 큰 이유다.이회창·이홍구·강영훈전국무총리의 영입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대통령 및 서울시장 출마등 박전의원이 홀로서기로 가꾸어온 정치적 위치나 성향에 대한 조직으로서의 위험부담은 일단 뒷전이다.따라서 그가 지역구출마를 원하든 전국구의원직을 원하든 합당한 대접을 해준다는 것이 입당의 전제조건이다.신한국당은 앞으로 서울지역등 지구당개편대회에 박전의원을 연사로 참석시켜 수도권 바람몰이의 전면에 내세울 생각이다. 박전의원은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의원직과 당직등에 대해서는 백의종군의 결심과 각오로 임하겠다』고 밝혔다.대권도전에 대한 질문에는 『오늘 입당해서 헌신한 것도 없는데 지금 무슨 얘기를 하나…』라면서 말꼬리를 흐렸다.기반도 없이 단기로 입당한 그로서는 최선의 답변을 한 셈이다.그러나 그의 입당 회견장 주변에는 보좌진과 지지자 30여명이 동행해 은근히 세를 과시했다. 박전의원의 입당이 신한국당과 그에게 어떤 상승작용을 할지는 아직 미지수다.박전의원은 『개인이나 조직은 항상 새로워지는 것이다,백지에서 출발하겠다』고 그 시작의 의미를 부여했다.
  • “세계 도자기 시장서 한판 승부”/김동수한국도자기 회장(인터뷰)

    ◎영서 동종업계 첫 ISO품질인증 획득/해외유명사 긴장… 연매출 700억원선 『그동안 우리 도자기는 품질이 좋아도 세계 시장에서의 국가적인 지명도가 낮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그러나 한국도자기가 국제품질인증 마크를 획득함에 따라 앞으로는 우리 도자기를 보는 세계의 눈도 크게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최근 영국의 국제품질인증센터에서 세계 도자기업계 최초로 가장 힘들다는 ISO 9001을 획득한 한국도자기(주)의 김동수회장(59).그는 「세계 최고」로의 비상을 위해 새해 벽두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50여년동안 3대에 걸쳐 도자기산업을 이끌어 왔지만 도자기는 역시 영국이나 프랑스·일본제품이 최고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우수성을 인정받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그러나 이제 한국도자기가 영국 등 유럽의 유명회사들을 제치고 세계 본차이나 표준 제1호 모델이 됨에 따라 완전한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김회장은 지난 88년부터 3년간 20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초강자기(초강자기) 「슈퍼스트롱」으로 세계시장에서의 승부를다짐하고 있다.젖소뼈를 함유한 슈퍼스트롱은 수분흡수율이 0.01%이하(종전제품 4∼12%)로 일반도자기보다 2∼3배 강해 지난해부터 50여개국으로 기존제품들보다 30∼40% 이상 비싼 가격에 수출중이다.또 노동집약형인 도자기업계에서 80%라는 높은 자동화율을 자랑하며 커피세트와 홈세트 등 월 3백만개 이상의 제품을 생산,웨지우드와 로얄달톤·노리다케 등 굴지의 해외 유명 도자기업체들을 긴장시키고 있다.생산품은 내수 60%,수출 40%이며 연매출 규모는 7백억원. 바위처럼 큰 기업보다는 작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가치있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김회장은 우선 우리 국민들부터 도자기는 한국제품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 영원한 의병장 의암 유인석(압록강 2천리:20)

    ◎을미항일투쟁 실패 후 보달원에 은거/제천서 궐기… 한때 원주·단양일대 석권/청·러시아 방해로 의병활동 재기 좌절/한족들이 기념비·허묘세워 충절의 넋기려 요령성 관전현일대에는 19세기말부터 조산팔도의 의병들이 몰려들었다.이른바 서간도로 불리는 이 압록강유역은 일찍 항일의병은 동의 요람을 이루었다.그 지도자는 의암 유인석(1842∼1915)이었는데,1896년에는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 땅을 밟았다.1895년의 을미의병운동이 국내에서 실패하자 부득이 서간도로 들어온 것이다. ○작년 정부서 건립 그가 오래도록 살았다는 관전현 보달원은 이름그대로 가는 길이 멀었다.관전현 현성에서 80㎞나 되었으니,걸어가자면 먼 길이었을 것이다.지금도 승용차로 4시간이 걸린다.막상 보달원에 도착하고 나서 그가 숙영지로 삼았다는 고령지를 찾아가는 길은 더욱 멀었다.자동차로 고개를 넘어 혼하를 건넌 뒤 환인현 사첨자향으로 들어가 또 강을 따라 올라갔다.그리고나서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천신만고 끝에 고령지에 도착했다.유인석선생이 인솔한 의병들이 처음 자리를 붙이고 가솔들을 데려와 살았다는 고려구 골짜기가 동쪽 먼 발치로 보였다.의암 유인석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기 위해 마을사람들을 따라 좁은 골짜기를 한참 올라갔을때 평평한 산언덕이 나왔다.거기서 천연의 바위를 기석으로 삼아 세운 의암기념비를 만났다.지난해 95년 5월 관전현 현정부에서 세운 이 비석은 너비 1m,높이 70㎝로 그리 크지는 않았다. 유인석선생은 본래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지만 18 95년 학맥을 따라 충북 제천 장담으로 거처를 옮겨 활약한 조선의 거유다.18 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그해 을미년 12월24일 제천에서 3천의병을 일으킨 그는 한때 제천·충주·원주·단양지역을 석권했다.그러나 관군에 밀려 서북지방인 황해도·평안도로 이동했다.서북지방에서 재기활동도 결국 실패하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숨어든 곳이 만주땅 서간도에 해당하는 요녕성 관전현 보달원이었다. 유인석선생과 보달원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그의 의병부대가 환인현 현재 서본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이후 오랜 유랑과망명생활을 하고 다시 돌아온 곳이 부달현이었기 때문이다.의병운동이 청국정부와 러시아정부의 방해로 좌절되자 보달원 방취동에 물러앉아 있었던 것이다.의병활동의 기회를 눈여겨보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한 그는 방취동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춘천 태생 조선의 묘비 그가 말년을 살았던 방취동은 비석이 서 있는 자리에서 서쪽으로 2∼3㎞정도 떨어졌다.지금은 인가가 없고 인적도 끊겼는데,그가 「우주문답」을 저술했다는 산굴과 집터만이 남아있었다.그리고 보달원 사람들이 아직도 유인석묘소로 고집하는 무덤 하나가 자리잡았다.19 30년대 유인석선생의 증손이 유해를 고향땅 강원도 춘천으로 이장했는데 무덤이라니….당시 후손이나 독립운동가들이 여기 살아 잘못 옮겨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보달원의 한족들이 유인석선생의 허묘를 실제의 묘소로 우기는 까닭을 늦게야 터득했다.허묘를 모를까 만은 그를 오래 우러러 추모하기 위한 고집이라는 것을….평안도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도의 아내 최씨가 일본 영사관원에 능욕을 당하고 자결했을 때 그가 글을 지어서 써 준 묘비까지 문물(문화재)로 지정할 정도였다.그 묘비 「조선열부해주최씨표적비」는 지금 환인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지난해 6월29일 관전현 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는 유인석학술사상연구소를 세웠다.평북 벽동군 태생인 최신화(67)선생을 소장으로 한 이 연구소에는 13명의 연구원을 두었다.그리고 유인석선생의 사촌형 유홍석선생 증손이자,현재 한국광복회 강원도지부장인 유연익씨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이밖에 관전현 역사지명지판공실 상진생주임과 같은 한족 학자들도 연구소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유인석사상학술연구소는 중국 당대 역사상 첫 한국인 대상의 연구기관이다.연구소는 관전현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유역에 남아있을 유인석선생 반일활동사료를 발굴하고 있다.그러나 연구에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그의 문집을 아직 입수하지 못했다.그래서 연구소장 최신화선생은 그 안타까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유인석선생의 필적과 주석하셨던 고장은 국가 문물이 되었습니다.그런데 문집은 우리가 못 구했디요.선생께서 별세하신 뒤 문하생들이 문집을 정리해서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고 기래요.어떤 경로를 통해 그리 갔는지 몰라도 그 문집을 지금은 절강성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습네다.「의암문집」은 54권 29책이나 되디요.절강성도서관에 연락했더니 복사나 해가라고 기래요.부끄러운 말입네다만,복사비 5천불을 마련할 길이 없습네다』 지난해 5월 세번째 중국을 찾아온 광복회 강원도지부장 유연익선생이 기념사업에 써 달라고 노자에서 1천2백달러를 내놓았다.그도 1934년 요령성 무순시에서 태어나 무척이나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이다.사촌동생 유인석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와 항일운동에 참가한 유홍석의 증손인지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증조부로부터 부모까지를 일제의 손에 잃었다.기구한 운명을 산 독립운동가 후손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한국인 대상 첫 연구소 그는 지난 1994년 중국 방문길에 부친 유돈상의 묘소를 찾아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독립군으로 싸우다 일제에 체포되어 무순감옥에서 숨진 부친의 시신을 할머니 윤희순이 거두어 묻었다는 무순시 용봉 남산이 도시로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다행히 할머니 윤희순의 묘소는 당시 장례에 참석했다는 한족 영덕수(87)노인의 도움으로 찾아냈다.그리하여 남편과 자식을 중국땅에서 다 잃은 할머니의 골회는 고향 춘천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어떻든 강원도 춘천 가정리 유씨 일가들은 항일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걸었다.그런 가운데도 유인석선생은 충절을 지키면서 학덕을 쌓았다.오늘날 중국에서 그를 기리는 것을 보면 유인석선생이야말로 죽어서도 살아있는 불멸의 인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 「3대혁명 선구자 대회」 29일 개최(북녁 뉴스라인)

    【내외】 북한은 오는 29일부터 이틀간 평양에서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 선구자대회」를 개최할 예정인 것으로 중앙방송이 23일 보도했다. 이번 대회에는 3대혁명붉은기를 쟁취한 각 기관의 3대혁명기수들과 당정기관 및 행정경제기관,근로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해 『3대혁명붉은기 쟁취운동 전개 과정에서의 성과와 경험을 총화하고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이 운동을 더욱 심화발전시키기 위한 과업과 방도를 토의하게 된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평양시 「제3인민병원」 22일 개원 【내외】 북한은 평양 광복거리에 「평양시 제3인민병원」을 건립하고 22일 개원식을 가졌다. 연건평 1만7천㎡,7층건물에 5백여개의 병상을 가진 이 병원은 종합병원 규모로 『입원병동과 외래병동을 비롯하여 약무 및 후방시설을 훌륭히 갖추고 있다』고 중앙방송이 23일 보도했다. 이 병원에는 또한 37개의 임상부문 전문과와 5개의 양호부문 전문과들이 있으며 『만능수술대,복부초음파진단기,복강경,위내시경 등 40여종·1백여대의 의료설비들과 기구들이 마련되어 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묘향산 단군신앙소 복원 【내외】 북한은 최근 묘향산에 위치한 단군교들의 집단신앙처소인 「단군사」를 복원했다고 중앙방송이 17일 보도했다. 이 방송에 따르면 「단군사」는 묘향산 향로봉 남쪽 능선 중턱 8백60m에 위치한 천연바위굴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북한은 이곳을 『우리 민족의 건국시조인 단군을 숭상해서 선조들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단군교도들의 단군신앙처소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갈수기 화전보수 부심 【내외】 북한은 최근 겨울철 갈수기가 다가옴에 따라 전력생산의 차질을 우려해 화력발전소의 시설보수 및 정비에 부심하고 있다. 정무원 전력공업부 부부장 주동일은 최근 중앙방송과의 회견을 통해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하는 것은 사회주의 내나라 내조국을 굳건히 지키고 빛내나가는 길』이라면서 각지의 화력발전소 관계자들에 대해 설비관리 및 시설보수를 위한 각종 기술적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 여교사 토막시체 발견

    【남양주=윤상돈 기자】 23일 낮 12시55분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봉안부락 뒤편 예봉산 중턱에서 서울 C국교 교사 지효정씨(26·여·서울 양천구 신월동)가 토막 시체로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 마을 주민 박단묘씨(57·여)는 『달아난 너구리를 찾던 중 마을 뒤 예봉산 3부능선의 바위 아래에서 은색 자동차 커버에 싸여있는 시체를 발견,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 미 러시모어산 4인의 대통령상(세계의 명소/걸작건축감상:26)

    ◎화강암 절벽 깎아 만든 세계최대 조각/14년 동안 작업… 쪼아낸 돌만 무려 45만t/작가 보글럼 완성 직전 숨져 아들이 매듭/햇살받은 모습 장관… 관광객 매년 2백만명 세계의 명소 최근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사람의 얼굴이 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표지로 크게 나온 것을 볼 수 있었다.눈에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내는 모습이 표지 전체에 크게 확대되어 나타났었다.이 사람의 얼굴은 요즘 연일 국내외 매스컴에 등장하고 있다.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보게 되는 이 얼굴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얼굴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전직 대통령의 존경스러운 모습을 지켜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해방 후 50년이 지나는 동안 모두 여섯명의 전직 대통령이 우리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신문이나 방송매체에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씩 등장하는 이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다.망명하기 직전의 얼굴,암살당하기 직전의 얼굴,대통령직에서 떠밀려나기 직전의 얼굴,국민에게 사죄하는 얼굴. ○로키산맥 발원지 위치 미국 중서부 지방에 사우스 다코타라고 불리는 주가 있다.크기는 우리나라의 두배 정도인데 인구는 약 70만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6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서쪽으로 로키산맥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고 주요 생산품이라고는 사료용 옥수수뿐인,미국에서도 가장 한적하고 외진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놀랍게도 매년 2백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린다.사우스 다코타주 남서쪽 러시모어라는 산 어느 절벽에 미국 대통령의 자랑스런 얼굴들이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1927년에서 1941년에 이르는 14년동안 굿존 보글럼이라는 조각가는 거대한 화강암 절벽을 깎아내어 역대 미국 대통령 네 사람의 얼굴을 조각해 놓았다.미국의 국부로 칭송되는 조지 워싱턴,미국 독립헌장의 저자이며 초기 미국의 모든 제도를 완성시킨 토머스 제퍼슨,노예해방을 이룩한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그리고 20세기초 미국의 경제·외교 정책을 훌륭히 수행했고 그로 인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바로 이 자랑스러운 얼굴의 주인공들이다. 이 러시모어 대통령 얼굴상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각으로 제작 당시 깎아내어야 했던 돌의 무게가 45만t이나 된다.각 대통령의 얼굴은 그 길이가 각각 18m이고,6m의 코,옆으로 5m가 넘는 입,또 3m가 넘는 눈을 가지고 있다.이 얼굴에 비례한 크기의 전신상을 상상해 보면 그 높이가 1백38m에 이르게 된다.이 거대한 대통령 얼굴들이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찬란한 동녘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얼굴크기 18m 걸작품 보글럼은 당시 미국 최고의 조각가로서 특히 거대규모의 인물상 제작으로 유명했다.그는 정교하게 아름다운 형태보다는 단순하지만 거대한 덩어리가 더 큰 감동을 자아낼 것으로 믿는 조각가였던 것이다. 사우스다코타주에 미국의 훌륭한 역대 대통령의 인물상을 부탁받은 보글럼은 러시모어산에서 깎아지른듯한 화강암 절벽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이 절벽은 높이가 약 1백20m,폭은 약 1백50m가 되었다.여기에 보글럼은 우선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얼굴을 조각하기 시작했다.초대 대통령으로서 워싱턴의 얼굴이 가장 현저한 인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워싱턴의 얼굴이 완성되기 시작할 때까지도 다른 세명의 대통령의 위치와 모습은 결정되지 않았었다.제퍼슨과 링컨,루스벨트 대통령의 순서로 그때그때 절벽의 모양과 화강석 바위의 형상에 맞추어 이들의 얼굴상이 제작되었다.그러다 보니 실수도 하게 되었다.제퍼슨 대통령의 머리는 처음에는 워싱턴 대통령 머리의 왼쪽에 만들기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그곳의 바위가 너무 물러서 도리없이 워싱턴 머리의 오른쪽에 다시 만들어야했다는 숨겨진 이야기도 있다. 단단한 화강석 바위를 깎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광부와 채석공을 동원해 다이너마이트와 착암기를 써서 우선 바위 덩어리를 달걀같이 둥그스럼하게 깎아내야 했다.이어서 이 덩어리를 얼굴 형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끌과 정을 쓸 수밖에 없었다.연이은 작업으로 끌과 정은 금방 날이 무디어졌고 그래서 대장장이가 24시간 작업현장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게다가 매일 아침 7백60여개의 계단을 힘들여 걸어 올라가 바위 꼭대기에 닿고,다시 거기서 줄을 타고 내려와 매달린 상태에서 석공작업을 해야했던 사람들의 노고도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조건의 어려움보다는 엄청난 크기의 바위덩어리를 진흙덩이 마냥 이리저리 깎아내어 높이 18m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해 내는 일이 더 큰 어려움이었다.거대조각의 제작경험이 많은 보글럼은 아주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도구를 개발해 내었다.그는 우선 실제 들어설 인물상 크기를 12분의1로 축소시킨 모델을 만들었다.이것은 실제 인물상의 1피트가 모델에서는 1인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다음 모델의 머리 한 복판에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타워크레인 같이 생긴 포인터를 각도를 정확히 잴 수 있는 분도기와 함께 설치했다.포인터 끝에는 그 축을 따라 실을 끌어다가 추를 매달았다. ○대장장이 24시간 대기 추가 포인터에 매달리는 위치와 거기서부터 늘어뜨려지는 실의 길이를 조정하여 추를 얼굴 모델의 어느 한 지점에 닿게 하면 그 지점의 정확한 위치가 포인트의 회전각,추의 수평 위치,또 추의 높이로 정확히 측정될 수 있었다. 모델뿐만 아니라 실제 바위 덩어리 위에도 똑같은 모양의 포인트가 설치되었다.물론 이 포인트는 모델 포인트의 열두배 크기를 가진 것이었다.그래서 현장 한 구석에 지은 막사에 갖다 놓은 모델에서 한 지점을 측정하고 그것을 열두배로 키우면 여기에 대응되는 바위 덩어리 위의 지점을 정확히 표시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이 단순한 측정방식은 14년동안 한치의 오차도 없이 훌륭하게 쓰여졌다. 1927년에 시작된 작업은 제작비의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진행과 중단,재개를 거듭하게 된다.1941년 보글럼은 작품의 완성 직전 그만 죽고 만다.대신 굿존 보글럼의 아들 링컨 보글럼이 아버지의 과업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게 되는데 링컨 보글럼은 이미 15살 때부터 포인트 측정기사로서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고 한다. 14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보내며,그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을 1천6백만달러를 투자하며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를 물려가며,또한 그 어려운 제작여건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미국의 역대 대통령 4인의 얼굴상을 만들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는 진정으로 존경하고 간직할 수 있는 대통령의 얼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둡고 참담한 전직 대통령의 얼굴들만이 남겨진 우리에게는 이들 미국민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퇴임한지 2백년이 지나서도 매년 2백만명의 관광객을 불러들여 어림잡아 2억달러,우리돈으로 1천6백억원의 관광수입을 해마다 올려주는 미국 전직 대통령의 빛나는 얼굴이 재임시절 5천억원의 돈을 국민으로부터 갈취한 우리 전직 대통령의 얼굴과 겹쳐져 우리를 슬프게 한다.
  • 당진 안국사지 고려석불입상(한국인의 얼굴:50)

    ◎원통형 머리­꽉 다문 입 “장승과 흡사”/감은 눈에 납작한 코… 무속적 인상 짙어 고려의 석조불·보살상들은 개국의 시기로부터 멀어질수록 제작과정에서 생략기법이 보다 많이 적용되었다.불·보살의 의상인 천의를 간소하게 표현했다가 뒷날에는 아예 옷을 입히지 않았다.마치 스핑크스의 발모양으로 과장했거나 기호로 간략히 표현해온 발도 없애버렸다.얼굴,보관 및 보관의 덮개 등을 포함한 머리부분과 머리갖춤에 표현의 초점을 맞추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충남지역 몇몇 석조불·보살상에 나타났다.당진군 정미면 수당리 안국사 절터의 석불입상이 대표적 케이스다.이 불상은 선 자세인데 키가 5m에 이르는 거상이다.한 덩어리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괴체화 한 11세기 고려 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이는 뒷날 전북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에서 처럼 무속적 성격을 강하게 띤 석불로 이어지는 것이다. 불상의 머리는 원통형이다.얼굴은 네모꼴에 가깝고 넓적한 인상을 풍긴다.감아버린 눈 사이의 납작한 콧날은 얼굴을 더욱 넓게 보이도록한 몫을 단단히 거들었다.작은 입을 꼭 다물었다.그 다문 입은 몸둥이와 더불어 마치 장승을 연상시켰다.이마에 박혔던 구슬 백호는 누가 빼내어 구멍에 그늘이 졌다.보관 언저리에서 시작한 귀는 마냥 늘어져 어깨에 와 닿았다.장인이 의도한 석가모니 부처의 모습을 그런대로 갖추었다. 불상은 의관 중에 옷 말고 관모는 제대로 챙겼다.두상대로 원통형에 가까운 보관을 썼다.보관 위를 덮은 보개가 하도 넓어 몇 사람 정도는 불상 둘레에서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인동의 사람들이 석불입상을 가리켜 갓쓴 바위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 있다.그런 보관과 보개와는 달리 옷을 입은 흔적은 없거니와 인체의 볼룸조차 살리지 않아 몸둥이는 민패 그것이다.발을 표현코자 시도한 흔적은 전혀 없다. 그런데 억지로 갖다 붙인듯 해보이는 팔과 손이 드러나 있다.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하지만 손가짐(수인)만큼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다.아미타불이 극락정토의 9등급을 나타내는 구품인의 하나 중품중생인을 표현했다.이 석불은 혼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좌우에 협시보살을 거느렸다.그리고 절은 없을지라도 석탑 1기가 남아 그리 외롭지 않았다. 안국사는 지금 이들 불·보살상과 석탑이 남아있을 뿐 창건이나 폐사에 관한 기록이 없다.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안국산 중턱에 절이 있는데,안국사라고 부른다는 대목을 적어 놓았다.그로 미루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1531년 무렵까지는 절이 있었던 모양이다.절 뒷산 바위에 「여미북천구」라고 새긴 글씨가 있다.아마도 여미지역의 큰 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1929년에 한 승려가 중창한 바 있지만 곧 폐사된 것으로 알려졌다.안국사에서는 금동제 작은 불상이 출토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궁정동 안가터 공원 “변신”/「10·26」16주기… 지금 그곳은

    ◎박 대통령 시해됐던 자리엔 석조상이… 「탕 타 탕」 16년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18년 독재역사의 거목은 배신한 측근이 뿜은 총탄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지난 93년 서울 종로구 궁정동 55의 3 3천2백평 필지에 조성된 「무궁화 동산」은 공작정치회동과 밀실연회의 산실인 청와대 안전가옥터다. 일본풍 향나무는 모두 뽑아내고 옮겨심은 수령 30년된 무궁화나무와 은은한 향기가 1백리까지 풍긴다는 울룽도 섬백리향이 새벽 공원을 찾는 인근 주민을 반갑게 맞이한다. 풍수발복의 땅 북악산 아래 무속헌터를 지켜온 3백년된 회화나무는 총성이 울린 인왕산 아래 안채를 굽어보며 덧없는 권력무상을 느낀다.헐린 안가 5채중 최고권력자가 술상앞에 쓰려졌던 이 터에 지금은 높이 3m의 석조물이 바위가 무너져내리는 형상으로 서 있다. 매일 아침 아내와 함께 운동삼아 이곳을 거니는 상훈(65·서울 종로구 옥인동)씨는 『30여년을 이곳에 살았지만 79년 당시 이곳이 청와대 안가인지 몰랐다』며 『국민의 뜻을 저버린 통치자가 겪은 역사적 교훈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되새겨진다』고 10·26 16주기 감회를 밝혔다.
  • 유명산 단풍인파 절정/어제 설악산에 10만… 고속도로 종일 붐벼

    단풍의 절정기를 맞아 휴일인 22일 전국 유명산에는 단풍 인파가 크게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단풍이 가장 곱게 물든데다가 전국적으로 쾌청한 가을 날씨를 보인 이 날 설악산에서는 10만여명이 찾아와 비선대,흔들바위 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원색 물결을 이뤘다. 오대산 국립공원과 소금강에도 평소 휴일보다 훨씬 많은 3만여명의 관광객이 모였다.단풍객들은 상원사에서 비로봉과 상왕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와 진고개에서 강릉시 연곡면 소금강에 이르는 산길에서 가을정취를 만끽했다. 이밖에 치악산의 2만6천여명을 비롯 춘천의 등선폭포,청평사,홍천의 팔봉산 등 강원지역 주요 관광지에는 20여만명의 행락객 발길이 이어졌다. 계룡산 국립공원의 3만5천여명의 행락객을 비롯,대둔산의 1만5천명 등 칠갑산 등 대전·충남 지역에서도 7만여명이 단풍 나들이에 나섰다. 이에 따라 영동고속도로 원주 인터체인지∼만종 분기점 구간 등 고속도로와 주요 국도는 하오 들어 귀경길에 오른 차량들로 심한 교통체증을 겪었다.한국도로공사는 『이 날 빠져 나간16만대와 전날의 21만여대의 일부가 한꺼번에 서울로 돌아오면서 밤늦게까지 심한 정체현상을 빚었다』고 밝혔다.
  • 전통 복식의 흐름 한눈에/「2천년전」 내일 민속박물관서 개막

    ◎직물·옷의 변천·장신구 등 7개 분야 전시/화려한 색감·섬세한 바느질 솜씨 엿보여 신석기 시대 실뽑는 도구(방추차)에서부터 조선조 말 의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복식문화 2천년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있는 「한국복식 2천년전」이 19일부터 12월4일까지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국내 복식전 사상 최대규모가 되는 이번 전시회에는 의복·장신구·관모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몸에 착용하던 모든 것과 바느질·빨래·염색 분야의 복식관련 유물들이 선보인다.전시되는 유물은 총 4백여점.문헌을 토대로 복원한 옷들 뿐만아니라 상당수는 출토품들을 그대로 전시해 우리 선조들의 손끝에서 나온 생생한 미의식을 그대로 느낄 수있다. 전시분야는 모두 7개.「직물및 염색」전에서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직조기술및 직조도구의 변천사와 함께 우리민족의 전통염색 문화의 진수도 보여준다.또「옷의 변천」전에서는 관복 서민복등 신분별 의상과 해녀복 기생복 승복 수의, 배냇저고리와 돌복,관례·혼례·회갑때 입는 의례복식 등을 보여줘 출생에서부터 장례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일생과 직업에 따른 복식의 특성을 감상할 수 있다. 또 떨잠과 관·망건·족두리·조바위·아얌 등을 모아놓은 「관모·두식」전및 「화장구·장신구」전,「신발」전은 우리 복식문화의 기능적 우수성과 함께 미의식의 화려한 일면을 볼 수있는 코너다. 국립민속박물관 최은수 연구원은 『이번 전시는 우리 민족의 복식이 단지 소박하고 투박하다는 고정관념을 바꿔주는 계기가 될것』이라면서 적·청·흑·백·황의 오방색등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색상과 섬세한 바느질법 등을 직접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산에 갈때 휴대폰 가져가세요”/올가을 설악산서 5명구조 도움

    휴대용전화가 인명구조에 큰 몫을 하고 있다. 14일 설악산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최근 단풍이 절정을 이루며 하루평균 2만명 이상의 등산객이 설악산을 찾는 가운데 올 가을 휴대용전화로 구조가 이뤄진 사례가 모두 5건이다. 13일 하오4시쯤 고분자씨(50·여·경북 울산시)가 천당폭포 부근에서 발을 헛디뎌 10m 아래로 추락,머리를 크게 다쳤을때 일행이 지녔던 휴대용전화로 구조를 요청,생명을 구했다. 같은 날 상오9시에도 김영묵씨(58·여·부산시 해운대구 우1동)가 희운각 근처에서 5m 아래로 떨어져 부상을 당했으나 휴대용전화로 연락,신속하게 구조됐다. 지난 12일 상오 6시40분쯤에는 희운각 위 4백m지점 바위에서 미끄러지며 머리를 크게 다친 현기천씨(74·서울 영등포구 당산동)도 지나가던 등산객이 휴대용전화로 구조신고를 했다. 설악산에 유선전화가 설치된 곳은 중청분소 한 곳이며 나머지 대피소도 모두 무전기를 갖추고 있으나 사고 즉시 구조요청이 이뤄지는데는 한계가 있다.
  • 자연 휴식년제 5년째… 「설악」의 두 모습

    ◎등산길 “중병” 휴식구간 “울창”/등산로­인파에 나무뿌리 노출… 곳곳 쓰레기/휴식구간­원시림 복원속 희귀식물 등 회생 5부능선까지 곱게 물들어 만산홍엽의 절정을 이룬 설악산이 수많은 등산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그러나 5년째 자연휴식년제가 실시되고 있는 일부 등산코스는 어느덧 원시림의 자태를 찾아가고 있어 현행 등산로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남한 제1의 명산 설악산의 두 모습을 르포로 구성해본다. 10월 초순의 설악산은 뼈대를 자신만만하게 드러내고 있는 기암괴봉과 절정에 이른 단풍 옷을 껴입은 능선,능선과 능선 사이 고적한 계곡,높고 맑은 하늘이 얽혀 가을 한복판에 접어든 명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그러나 내설악·외설악·남설악을 합쳐 3백73㎦에 이르는 설악산을 들여다 보면 군대의 행군같은 등산객들의 무수한 발걸음으로 곳곳이 심한 중병을 앓고 있다. 지난 8일 낮 12시쯤 설악산의 정상인 1천7백8m 대청봉에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인 오색코스 매표소 앞은 원색 차림의 등산객들로 시장터처럼 붐비고 있었다.이날 설악산을 찾은 6만명 가운데 1만4천여명이 이곳을 통해 대청봉을 올랐다. 예상했던대로 5㎞의 이 구간의 대부분은 등산로라고 하기보다는 잘 닦인 비포장 길 같았고 어떤 곳은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너비가 5m이상 될만큼 훼손돼 있었다. 수많은 발걸음으로 흙이 파여 곳곳에 나무 뿌리가 드러나 있는가 하면 이들 뿌리를 지팡이로 쓰려고 서슴없이 꺾어대는 사람도 있었다. 5부능선까지 내려와 곱게 물든 단풍을 기념품 삼아 꺾기도 하고 계곡에서 음식을 먹어가며 노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친 발길을 쉴만한 곳이면 어김없이 담배꽁초는 물론 사탕이나 초콜릿 봉지,나무젓가락,심지어는 쓰레기 비닐봉지등으로 어수선하기만 했다. 자연을 보존한다는 취지로 지난 91년부터 등산로를 폐쇄하고 5년째 자연휴식년제가 실시되고 있는 대청봉∼권금성간 8㎞ 등산로. 북동쪽으로 난 이 구간 초입은 길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죽이 수북이 덮고 있어 아주 보기 좋았다.만경대로 내려가는 갈림길의 칠성봉∼집선봉∼권금성 구간은 불과 5년의휴식에도 불구하고 원시림의 원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등산로 같으면 손길이 닿아 벌써 따갔음직한 빨간 마가목 열매가 그대로 달려 있었고 한해에 8㎝정도 자란다는 단풍나무도 40㎝남짓 크기로 오솔길 같은 등산로를 덮고 있었다.금강초롱도 사람의 발길에 채이지 않아 보라빛 꽃자태를 유감없이 자랑하고 있었다.길도 몇년째 낙엽이 쌓이고 쌓여 어떤 곳은 길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기고 나는 짐승들의 움직임도 어느곳보다 활기찼다. 나무와 풀은 물론 바위·흙까지도 자연의 휴식이 왜 필요한지를 실감케 하는,세계적 자연보존지구 설악산의 두 모습이었다.
  • 오늘 549돌 한글날… 이야깃거리 둘

    ◎대학생들 「한글사랑」 널리 퍼져/고려대 등 30곳서 1천여명 동아리 활동 9일은 5백49돌을 맞는 한글날. 「우리는 한글을 통해 나를 알고 민족을 알며 우리의 나아갈 길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자질을 익히기 위하여 여기 모였다」­고려대 한글사랑운동 동아리 「우리말 사랑모임」의 모임방 벽에 붙어있는 회칙의 하나다. 올해로 19돌을 맞는 이 동아리는 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우리것 찾기 움직임의 하나로 한글에 대한 관심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 결성됐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순한글 단어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회원들의 보이지 않는 운동과 노력으로 차츰 대학생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게 됐다. 지난달 24일에는 이 모임방에 전국 각 대학 「한말글 모람」(우리말 사랑 서클회원)의 「도령」(남학생)과 「아씨」(여학생) 「으뜸빛」(회장) 20여명이 모여 2학기 「갈닦기」(MT)준비와 한글날 행사를 논의했다.연세대 「한글물결」,전남대 「우리말동아리」 등 전국 30여개 대학 연합서클 회장단 모임으로 회원만도 1천여명에 이른다. 8일엔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에서 「꽃바치기」(헌화식)와 함께 전국모임을 가졌다.컴퓨터 용어가 온통 영어 투성이라 「우리말 사랑모임」에 기꺼이 가입했다는 고대 동아리 회장 송영민군(21·전자공학과2년)은 『단순히 외래어나 한자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과거의 국어순화운동에서 벗어나 널리 쓰이는 외국어는 적극 우리글화하고 조어도 널리 활용해 어휘를 풍부하게 해야 할것』이라고 말했다. ◎“동네이름 우리말로 바꿉시다”/땅이름 학회서 옛지도 등 찾아 고쳐쓰기 『숫자식 동이름을 순우리말로 바꿉시다』­서울시내 동이름 가운데 숫자로 된 이름을 우리말로 고치자는 운동이 뜻있는 한글연구가들 사이에 전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 땅이름 학회」(회장 배우리) 회원 80여명이 그들이다.이들은 서울이 비대해지면서 새로 생기거나 기존의 동에서 분리된 또다른 동이름을 지을 때 고유의 마을이름을 행정편의 차원에서 신림 1·2동과 같이 한자이름에 숫자를 넣어 지정해 온 당국의 관례를 깨고 우리글을 지키기 위해 이 운동을시작했다. 현재 서울의 행정동수는 5백26개로 이 가운데 「숫자동명」은 60% 가량 된다.이들의 숫자동명을 대신할 순우리말 지명 발굴작업은 현재 40%의 진척도를 보이고 있다. 학회가 발굴한 마을이름은 대동여지도와 같은 옛 지도나 문헌등에 남아있는 한자를 순우리말로 풀어쓴 것과 그 지역의 유명한 산·바위·고개이름을 우리말로 풀어 붙인 것등 크게 두가지다. 옛 문헌을 토대로 한 이름 가운데 무수막동은 지금의 성동구 금호4가동의 옛이름인 무쇠막(물과 쇠의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수철리를 풀어 쓴 것이고,숯내동은 송파구 잠실7동이 옛문헌에 탄천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고유말로 바꾼 것이다.지역 명소의 이름을 딴 예로는 은평구 불광2동을 독바위동으로 바꾼 것인데,인조반정을 모의한 독바위가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학회는 현지답사와 문헌조사를 통해 숫자동명의 우리말 이름찾기 작업이 끝나면 이를 서울시에 전달하고 시민들을 상대로 서명운동을 벌일 방침이다.
  • 멸종위기의 세계적 희귀식물 「고란초」 거제도에 집단 자생

    ◎군락지 2천여㎡ 보호구역 지정/낙화암 고란사에선 거의 사라져 「고란사의 종소리」로 우리 모두의 「귀」에 익숙한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고란초가 거제도에 집단자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환경부는 3일 멸종위기에 있던 고란초가 대규모로 자라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거제시 하청면 덕곡리 산 144일대 2천17㎡를 특정야생동·식물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고란초는 원래 백제왕조 멸망때 3천궁녀가 백마강에 몸을 날린 충남 부여의 낙화암부근의 고란사에서 집단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몇년 전부터 거의 사라진 상황이다. 이 식물은 고사리목,고란초과에 속하는 희귀종으로 그늘진 바위틈이나 낭떠러지등에서 자라는 상록다년초다. 특히 해안주변의 암벽절개지의 그늘등에서 잘 자라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돼 있다.이번에 발견된 지역도 거제도 북부의 폭 12m의 해안일주도로 진입로의 타원형 잡목림지역이다. 고란초는 잎이 약간 두꺼워 검은 빛이 돌고 물결모양의 무늬가 들어 있다.번식을 위한 세포덩어리인 포자낭은 둥글고 잎맥과 잎맥 사이에 하나씩 달려 있다.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이 지역에서는 고란초 채취가 금지되고 학술조사때 외에는 통행이 제한되며 고란초가 번성하도록 보존시설물이 설치된다. 환경부 관계자는 『거제도 환경단체인 「초록빛깔사람들」이 지역내의 생태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희귀식물인 고란초 자생지를 발견해 지방자치단체에 보호를 요청했고 이를 환경부가 관계부처등과의 학술조사끝에 야생동·식물보호지역으로 지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지정은 자생지가 사유지임에도 불구하고 전주 이씨 종의군파 문중땅의 소유주인 이평화씨가 보호지역지정에 동의해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에 요청해 이뤄진 첫 사례로 지방화시대를 맞아 앞으로 지역특색의 동·식물보호를 추진하려는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지난 연초 보호지역을 추진하면서 거제지역 주민은 고란초의 불법체취등 자생지 훼손방지를 위해 보호망을 설치하고 자생지옆 비포장도로에 자갈포장을 해 흙 튀김을 막고 있다.또 주민 2명을 명예감시위원으로 위촉,보호할동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보호대상 특정야생동·식물은 모두 1백79종이며 이중 식물은 고란초를 비롯,풍란·금강초롱·천마 등 1백26종이다. 환경부는 이와 함께 겨울철 철새도래지인 낙동강하구 등 6곳에 불과한 자연생태계보호지역을 연내에 9곳으로 늘려 수렵이나 채취로 인한 동·식물상의 훼손을 막고 인공적인 개발에 따른 생태계의 파괴를 예방하기로 했다. 자연생태계 보호지역으로 지정을 추진중인 곳은 민통선일대의 향로봉·대암산·두타연·철원평야 등 3곳이다.
  • 설악산 금강굴/이병기 서울대 교수·전자공학(굄돌)

    한 여름의 설악산은 자연의 농밀한 생명감을 한껏 맛볼 수 있는 곳이다.푸른 숲과 바위와 계곡 물이 어우러져 싱싱한 생명감을 뿜어 내고 등산객의 몸속에 이입되어 활력을 자극한다. 설악산 등산은 내설악을 거쳐 대청봉에 오른 후 외설악으로 내려가는 것이 제격이다.백담사 수림동계곡 길을 따라 올라가며 설악 계곡에 흠뻑 취해보고 쌍폭을 지나 깔딱고개를 넘으면서 스스로의 힘의 한계도 느껴본 후 막바지 기운을 내서 대청봉에 오르면 눈 앞에 전개되는 설악산 풍경이 더욱 장관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최소한의 체력으로 설악산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는 비법이 있다.설악동에서 계곡을 거슬러 걷다가 비선대에 이르면 방향을 틀어 뒷산 장군봉 중턱에 있는 금강굴에 올라 가는 것이다.길도 제법 험하고 가파라서 등산하는 맛도 좀 나고 땀을 훔치면서 시원한 금강굴에 들어가는 맛도 상쾌하다.그러나 금강굴의 별미는 무엇보다도 뒤돌아 서서 바라보는 외설악의 파노라마에 있다.오른쪽에 길게 둘러선 공룡능선과 왼쪽을 감싸 쥔 회채봉능선,그 사이에 가득 담긴 봉우리들과 그 뒤편 멀리 스카이라인을 그리며 둥그스럼하게 서 있는 세개의 봉우리들. 소청,중청,대청. 금강굴에서 기념품을 파는 안내인은 이렇게 설명한다.『이 자리는 설악산의 지·덕·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입니다.왼편 차분한 화채 능선의 지와 오른편 우렁찬 공룡능선의 용,그리고 이들 뒤편 한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는 청봉의 덕,작은 산들은 뾰죽한 멋을 자랑하나 큰산은 밋밋하고 부드럽습니다.이것은 인간사회에서와 같은 이치입니다. 실로 자연은 인간에게 있어서 살아 있는 배움터이다.자연이 무엇을 특별히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그래서 눈이 있는 사람은 배우고 눈이 없는 사람은 배우지 못한다.그러나 눈이 있는 사람도 자연이 보여주는 바를 다 배우지는 못한다.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배울 뿐이다.결국 사람은 자연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볼 뿐이기 때문이다.
  • 부랴트공 수도 울란우데(시베리아 대탐방:37)

    ◎시장마다 중국상인 호객소리 시끌벅적/중 국경과 인접,17세기부터 국제 교역도시/한때 칭기즈칸이 지배… 몽골·중·러 문화 혼재 울란우데에 도착하며 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는 5천5백32㎞로 늘어났다.이곳에서 제일 먼저 실감하는 것은 중국상인들의 위력이다.몽골국경을 넘어 들어온 중국상인들은 울란우데 시내 곳곳에 대형 중국시장을 형성해 오랜 소비에트체제에 젖어 굼뜬 이곳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있다.우리나라 남대문·동대문시장의 축소판을 연상시킬 정도로 활기찬 중국상인들의 호객소리·흥정소리는 주민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이곳 러시아인들의 의식에 가히 폭풍같은 변화를 몰고 왔다. ○남대문시장 축소판 이곳 민족시인 개세르의 이름을 딴 호텔 리셉션의 부랴트 아가씨는 얼마나 친절한지 이 도시에 대한 인상을 여행중 최고로 만들어 놓았다.택시기사·식당의 여급 등 대부분의 시민들이 지나온 시베리아의 다른 도시들과는 완전히 다른 개방 마인드를 보여주었다.중국상인들의 영향과 함께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거쳐 북경으로가는 기차의 교차역이라는 지리적 위치가 개방의식을 불어넣는 데 일조했음이 분명하다. 울란우데는 국제무역 도시로서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처음 도시는 1666년 코사크요새로 출발했다.이 요새를 거점으로 부랴트인·에벵키인 등 원주민들로부터 「애삭(공물)」을 거둬들였다.우다강과 그 지류인 셀렝가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울란우데의 옛지명은 「우다강 상류」라는 뜻의 베르흐니우딘스크였다.베르흐니우딘스크는 중국국경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곧바로 바이칼 이동 지역의 대형 상업중심지로 성장했다.이곳을 거점으로 중국으로부터 차·비단 등이 대거 수입됐다.1899년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이곳을 통과하며 도시발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1920년 잠시 극동공화국 수도였고 58년부터 부랴트공화국의 수도가 됐다.「붉은 우다강」이라는 뜻의 울란우데로 개명한 것은 1984년이었다. 부랴트인들은 원래 이곳 토착민들이다.그러다 8세기에는 위구르·투르크한의 지배를 받았고,9세기 때 몽골의 침략을 받기 시작해 10세기에 들어 칭기즈칸에 의해 완전히 몽골로 편입됐다.이후 줄곧 몽골말과 몽골글을 사용했다.그러다 17세기중반부터 러시아의 점령이 시작됐고 1939년부터 러시아문자를 쓰기 시작했다.이같은 복잡한 역사 탓에 여러 문화·종교·관습이 어지럽게 혼재돼 있다. ○곳곳에 라마교 사찰 특히 이곳은 시베리아에 진출한 라마교의 총본산이 있는 곳이다.도착한 이튿날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이곳을 찾아갔다.도심을 벗어나자 곧바로 광대한 평원이 펼쳐진다.평원 뒤로 얕은 산이 둘러쳐진 전형적인 자바이칼 스텝이다.평원에는 주말을 맞아 사람들이 대거 몰려나와 감자를 심고 있다. 불교의 절을 부랴트 말로는 「다싼」이라고 부른다.불과 1시간여만에 유명한 항공기 제작공장이 있는 소콜시를 지나 1백여호의 이볼긴스키 다싼 마을에 도착했다.평원 한 가운데 요란한 치장을 한 다싼의 불탑이 솟아있다.티베트에 있는 라마교 사원과 거의 똑같은 양식이고 불당안에는 달라이 라마의 초상이 곳곳에 걸려있다.주말인데도 불구하고 10여명의 승려만 예불을 보고있고 신도는 2∼3명에 불과했다.부랴트의 다싼들은 스탈린시절인 30년대말 종교탄압때 거의 폐쇄당해 이볼스키 다싼 한곳만 남았다고 한다.물론 NKVD(KGB의 전신)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그러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복원운동이 일어나 현재는 부랴트공화국 안에 모두 14개의 다싼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이볼스키 다싼에는 시베리아유일의 라마교 신학교도 개설돼 있다.바이칼 서쪽의 퉁가라는 마을에서 왔다는 한 신학생의 말에 따르면 현재 1백명의 신학생이 있으며 철학·천문·티베트어·영어·몽골어 등을 공부한다고 했다.그는 라마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묻는 질문에 『라마교는 샤머니즘 요소가 강하며 호랑이·큰 바위 등 잡신을 많이 섬긴다』고 했다. 이곳과 달리 바이칼 서쪽의 부랴트인들은 대부분 러시아정교를 믿는다.이 지역의 기독교화는 1681년부터 시작됐는데 러시아역사에는 이 선교운동을 「다우리아 미션」으로 부른다.18세기에 이르러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10만명 정도의 부랴트인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초대형 레닌 두상도 울란우데 시내중심가의 주청사앞 광장에는 아마도 러시아 전역에서 제일 클 것같은 초대형 레닌두상이 세워져 있다.기단높이 20여m,두상높이가 15m는 됨직하다.그런데 그 두상을 정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부랴트인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알마아타 중앙광장의 레닌얼굴은 어딘가 카자흐인을 닮았고 타슈켄트의 레닌동상에서는 우즈베크인의 분위기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묘한 일이다. 주청사 꼭대기에는 백·청·적의 러시아국기와 함께 청·백·황의 부랴트국기가 나란히 걸려있다.현재 이곳은 2년전 주민 직선으로 선출한 레오니드 보탐포브 대통령이 있고 자체국기,자체 공식언어 등 외형적으로는 거의 독립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울란우데 교외에는 시베리아 최대의 민속촌이 있다.고대 에벵키인·부랴트인들의 무속·관습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면 반드시 한번 둘러볼만한 곳이다.이들이 사용했던 유르타(천막집)·사냥도구·각종 무구 등이 잘 보존,전시돼 있다.차르 이반 그로즈니때 러시아정교가 신구파로 양분되고 난 뒤 구파 정교회의 건물도 이곳에만 보존돼 있다.지금의 러시아정교회는 당시 왕실과 타협해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새로운 전통을 받아들인 신파다.「라스콜(분리)」이라고 부르는 이 신구파 분리는 러시아 교회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구파,즉 「스타라오브랴치(전통관습이란 뜻)」는 주도권을 신파에게 빼앗긴 뒤 얼마간 독자적인 교회양식,전통을 고수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하오에는 트람바이를 타고 울란우데 외곽을 돌아보았다.반갑게도 「크바스」라고 부르는 러시아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전통음료를 길거리에서 팔고 있었다.이스트를 넣어 시큼달콤한 맛을 내는데 리어카에 실은 큰 철제탱커에 수도꼭지를 달아 아주 싼값에 판다.모스크바에서는 2∼3년전부터 코카콜라·펩시 등 서방음료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는데 시골마을이라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큰 유리컵에 가득 담긴 크바스를 노인과 젊은이 2명이 번갈아 마시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 지구촌 명과 암/사라지는 「흑백갈등」 뒤로가는 「인권시계」

    지구촌에는 언제나 명과 암이 엇갈린다.유혈 대립의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는 남아공에선 흑백 두 인종간의 화합 움직임이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에 기대를 갖게 한다.그러나 미국에서 벌어지는 흑인죄수들에 대한 백인 간수들의 인권탄압 사례는 인종대립을 끝내고 싶은 인류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다.줄루족들이 사는 남아공 나탈주에서 매년 9월초 열리는 「갈대춤」 축제.이 축제는 본래 줄루족장의 새 아내 낙점을 위해 온갖 치장을 한 줄루족 소녀들이 모여드는 행사.그러나 올해의 축제는 예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사상최초로 축제에 백인소녀들까지 참가,분위기를 한층 돋웠다.만델라가 흑인대통령이 된 뒤 남아공의 변화하는 사회분위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남아공의 흑백화합 분위기에 대해 낙관을 가지는 것도 잠깐,눈을 돌려 늘 인권을 부르짖는 미국에선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다.영화 「뿌리」의 흑인 노예들에게서나 봤던 쇠사슬이 미 죄수들에게 부활된 것.「보수」라면 무조건 앞장서는 앨라배마주가 지난 7월부터 죄수들의 발목을 쇠사슬로 엮어 일주일에 5일씩 하루 10시간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다.「체인 갱」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하는 일은 교도소 가는 길에 튀어 나온 바위를 깨뜨리는 것.일하다 게으름을 피우면 지키고 선 간수들로부터 매맞는 것은 예사다.흰 죄수복을 입고 쇠사슬을 끌며 행진하는 광경은 미국의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라는 인권단체들의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플로리다주와 애리조나주 교도소들도 곧 앨라배마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슬픈 소식이다.지구 반대편에서 빚어지는 두가지 극단적 양상의 현장을 시그마의 카메라가 포착했다.
  • 아나톨리 도브리닌 회고록 「극비」/요약

    ◎고르비의 경제 이해부적이 소 붕괴 불렀다/브레즈네프의 대미 스타워즈 군비경쟁이 파국 이끌어/체코침공때 서방측 미온적 대응이 아프간 침공을 고무 24년동안 워싱턴 주재 소련대사를 지내며 미·소냉전의 최일선을 지켜봤던 아나톨리 도브리닌 전대사의 회고록 「극비」(InConfidence)가 타임스 북스 출판사에 의해 최근 출판됐다.62년 후르시초프에 의해 임명돼 84년 고르바초프 대통령때까지 주미대사직을 수행한 도브리닌은 이 책에서 자신이 겪은 케네디로부터 레이건에 이르기까지 미국대통령 6명의 소련에 대한 태도 및 정책등을 소개하면서 미·소냉전발생의 동기 및 양국의 오해등에 관해 상세하게 서술했다.그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미와 전쟁 불가능” 시인 62년 워싱턴으로 부임인사차 들렀을때 후르시초프 총리는 나에게 솔직히 털어놓는다며 『미국과의 전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나 불과 수개월후 그는 쿠바에 공격용 미사일 설치로 미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가 미국이 눈치채지 못하게 극비리에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운명적인 오산이었다.그 목적은 미국의 모든 도시는 물론 캐나다 국경까지도 미사일의 위협하에 놓이게 하겠다는 것이었다.이로 인해 발생한 양국간의 전쟁위기는 워싱턴과 모스크바 지도자간에 미리 개설해놓은 비밀 대화창구를 가동,해결되었다. 그러나 본국정부가 쿠바정부와의 비밀협상을 나를 속이면서까지 추진해왔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결국 쿠바위기는 양국간 군비경쟁 레이스를 자극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그후 양국이 수십조달러씩을 퍼부은 뒤에 소련의 붕괴로 말미암아 93년 미국과 러시아는 겨우 케네디 당시의 수준으로 전략핵무기를 감축하자는 합의에 도달할수 있었다. 소련의 또하나의 오산은 70년대말 고도로 정교한 SS­20 미사일을 서부국경에 배치한 결정이었다.이로인한 서유럽에의 위협은 79년 미국의 퍼싱미사일과 크루즈미사일 배치 결정을 불러와 모스크바를 당황하게 했다.크렘린의 큰 오산으로 미국과의 핵균형을 깨지게 만든 것이다. 또다른 소련의 큰 오산은 아프간 침공이었다.이는 소련 군부에 의해서도 반대가 제기됐던,전략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승산이 없는 작전이었다.브레즈네프 총리는 작전 개시후 얼마 안된 80년 1월 나에게 3­4주면 끝날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얘기했다.그러나 아프간 침공은 소련체제 전체를 뒤흔드는 「불명예스러운 실패」만을 남긴 소련판 베트남전쟁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의 핵균형 깨져 이 침공은 「2차대전 이래 최대의 위협」이라고 허풍만 떨어대던 카터대통령에게는 다음해 대통령선거에서 치명타가 되었고 레이건의 당선에 도움을 주었다.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할수 있었던 것은 68년 체코 침공 당시 서방측의 미온적인 대응에서 고무되었던 것이다.이는 마치 2차대전 발발전 체코에 대한 공격에 영국과 프랑스의 무기력한 대응이 히틀러에게 39년 폴란드침공을 부추기게 한것이나 같은 논리다. ○“3∼4주면 끝날 것” 확신 독일의 통일은 고르바초프의 독단적인 협상에 의해 추진됐다.정치국원들은 한결같이 반대했다.고르바초프는 독일과 함께 유럽전체에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올안전보장체제 수립을 추진키로 했는데 독일은 안보체제 수립은 포기하고 통일만을 얻어냈다. 브레즈네프 치하의 수년동안 소련 군산복합체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미국과의 군비경쟁을 유도했으며 급기야 이는 레이건 대통령때에 들어서 「스타 워즈」라는 미국의 대응을 불러왔다.이 스타워즈 경쟁은 마침내 소련을 마지막 파국의 길로 이끌었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소련에 대한 이해심이 가장 많았던 사람은 레이건 대통령이었다.그는 특히 두번째 임기에 들어선 후에는 소련과의 「건설적 관계」 수립을 추구했으며 그같은 미국의 태도변화가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일련의 개혁을 가능케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붕괴로 이끈 가장 큰 책임이 있다.급격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그의 인식은 옳았다.그러나 그는 너무 빨리 서둘렀다.그의 원천적인 실패는 경제적 문제에 대한 이해와 그들을 다루는 정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다.그가 글라스노스트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열수록 실제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레이건 이해심 가장 많아 나는 63년 쿠바미사일 위기로부터 83년 KAL 007기 피격사건까지 첨예한 냉전의 현장에서 냉전 당사자들간의 메신저 역할을 하며 수많은 오산을 봐왔다.이 책의 목적은 이 세기내에 또다시 어처구니 없는 오산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모두에게 경고해두자는데 있다.
  • 전설의 고장/귀양지 순례/이색소재 역사기행 첫선

    ◎삼국유사의 현장기행­설화 얽힌 60여곳 오늘의 모습/유배지 역사 기행­오지의 선비·의인 발자취 찾아 독특한 소재를 다룬 역사기행서 2권이 최근 나란히 출간돼 눈길을 끌고 있다.「삼국유사의 현장 기행」(문예산책 펴냄)과 「유배지 역사 기행」(집현전)이 그것.그동안 나온 답사기들이 유적이나 문화현장을 포괄적으로 소개한 것과는 달리 이 책들은 선명한 주제를 골라 관련장소들을 집중 조명한 것이 특징이다. 「삼국유사의 현장 기행」(이하석 지음)은 사라진 신화·설화의 세계를 오늘에 되살리는 답사기.삼국사기와 함께 한국 고대사의 양대 역사서인 삼국유사는 특히 우리 고유의 정서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시인이자 중견 언론인인 지은이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화·전설의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유적의 보존 상태를 점검하고 문화예술적 의의를 새롭게 자리매김해 준다.모두 60여곳을 찾았는데 경주 불국사,감포 문무왕수중릉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장소이다. 예컨대 경남 울산 시가지에서남쪽으로 10여리 떨어진 울산시 황성동 세죽마을 앞바다에는 처용바위가 있다.삼국유사에 「신라 헌강왕이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을 얻었다」고 기록한 옛 개운포가 바로 이곳이다. 지은이는 처용설화의 내용과,그 설화가 현대문학에 어떻게 수용돼 있는지를 들려준다.이어 「너무 투명해 밑바닥까지 보이던」이곳 바닷물이 불과 10여년사이에 심하게 오염되고,따라서 정월 보름이면 처용바위에 제사를 지내던 주민들이 다들 떠나버린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이에 견줘 원광대 신규수교수(국사교육학과)가 지은 「유배지 역사 기행」은 조선시대 절대왕권 아래 희생된 선비·문인들이 귀양살이한 지역 14곳을 밟았다.유배지라는 성격대로 제주도·보길도·흑산도등 섬이 대부분이고 내륙지방의 경우는 전남·강원도에 한정돼 있다.을사조약 체결후 의병을 일으켰다 실패한 의병장 9명이 끌려간 일본 쓰시마섬도 포함됐다. 이 유배지들은 아직도 개발이 덜 된 편이다.그 땅에 귀양살다 간 당대의 지식인들이 남긴 자취는 지금도 주민생활 속에 남아 있다.중종 때 개혁에 앞장서다 모함을 당한 조광조가 유배된 곳은 전남 화순군 능주면.조광조가 사약을 받기까지 이곳에 머문 기간은 비록 한달에 불과하지만 그 존재는 이 지역을 절의·학문을 기리는 「의향」「문향」으로 키웠다. 지은이는 왜 유배지만을 찾아다녔을까.신교수는 유배지에서 시대적 불리를 넘어선 자기완성을 찾는다.『유배라는 극악한 현실을 새출발의 계기로 삼아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완성이,가장 심오한 학문의 집대성이,가장 활기찬 현실의 반성과 모색이 꽃피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 BAM 철도(시베리아 대탐방:33)

    ◎지도에 없던 「극비 철도」… 스탈린이 계획/타이셰트∼콤소몰스크나아무르 총 3,200㎞/일제위협 대비 41년 착공… 84년 전구간 개통 이르쿠츠크에서 북으로 우스치림스크댐까지 거대한 인공호수가 돼있다가 이후부터 실제로 강의 모습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앙가라는 북으로 주경계를 넘어 크라스노야르스크주로 들어가 서쪽으로 가서 에니에시강과 합쳐진 다음 북극해로 들어간다.크라스노야르스크주의 보쿠차느이시가 있는 지점의 앙가라강에는 지금 제4의 댐건설이 한창 진행중이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시베리아여행중 제일 친절한 승무원을 만나서 비교적 유쾌한 여행을 즐겼다.모스크바교외에 산다는 이 젊은 여승무원은 한번 기차를 타면 2명이 1조가 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왕복 15일 밤낮을 쉬지 않고 교대로 일한다고 했다.그 다음 2주일을 쉬고 다시 2주일 동안 기차를 타는 것이다.보통 체력과 인내심이 없이는 지탱하기 힘든 직업임에 틀림없다.왜 많은 승무원들이 하나같이 불친절하고 신경질적이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했다. ○바이칼호 북단을 지나 이르쿠츠크주 초입에 있는 타이쉐트는 20세기 최대의 대공사로 러시아인들이 자랑하는 BAM(바이칼∼아무르철도)철도의 시발점이다.이곳에서 시작된 BAM철도는 동쪽으로 거의 직선거리로 진행해서 바이칼호수 북단 위쪽을 지나 종착역인 하바로프스크주의 콤소몰스크나아무르시까지 이어진다.총길이 3천2백㎞에 달하는 구간이다.이곳에서 지선으로 남쪽의 하바로프스크를 통해 다시 대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 철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건설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30년대 중반 스탈린이었다.가장 큰 이유는 바이칼호수 남단을 우회하는 대시베리아철도가 당시 일본의 점령하에 있던 만주국경과 너무 가까워 안보면에서 문제가 크다는 것이었다.이후 계획을 완성해 착공한 것은 41년이었다.바이칼호 북쪽은 바위·험로가 첩첩한 난공사구간이다.당초 대시베리아철도가 호수남단을 우회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첫번째 구간으로 아무르주의 스코보르디노∼튄다 사이의 공사가 시작됐다.일차적인 목적은 남쪽의 기존 시베리아횡단철도역인 스코보로딘을 통해 치타주로부터 공사장비·인력 등을 실어나르기 위해서였다. 이 구간은 2차대전 발발 직전인 41년 완성됐으나 이후 전쟁으로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모든 물자·인원을 모두 서쪽 전선으로 보냈기 때문이다.종전 직전인 45년 공사가 재개돼 콤소몰스크나아무르에서 태평양연안의 군항인 소베츠카야 가반항까지 구간이 착공됐다.블라디보스토크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될 경우에 대비해 태평양함대를 이곳으로 옮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태평양함대 이동 목적 그 다음부터 본격적인 구간공사가 시작됐다.46년이전에 타이쉐트∼브라츠크구간은 완공돼있었다.브라츠크의 목재·메탈·철 등을 서쪽으로 실어나르기 위해서였다.따라서 BAM공사의 실제 시발점은 브라츠크인 셈이다.46년부터 이후 51년까지 브라츠크에서 동쪽으로 계속 공사가 진행됐다.브라츠크에서 강항인 우스트구트까지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BAM철도는 레나강과 연결되게 됐다.레나강을 통해 실어온 주변의 목재들은 우스트구트에서 철도로 실어 러시아 각지로 운반해 나갔다. 이후 브레즈네프시절인 77년 콤소몰스크나아무르에서 튄다까지 구간이 완공돼 BAM의 동쪽구간이 완성됐다.당시 중소관계가 악화돼자 중국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안전철도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판단,공사에 박차를 가한 때문이다.BAM은 일명 「젊은 영웅들의 철도」라고 불린다.기차에서 만난 튜멘주의 건설노동자같이 젊은 콤소몰 청년들이 대거 건설현장으로 동원됐기 때문이다. 지난 84년 처음으로 동서 전구간이 연결돼 기차가 운행했다.그러나 토넬느이에 있는 터널 1곳은 아직 미완성인 채 우회로를 통해 기차가 다니고 있다.현재 미완성 구간은 토넬느이∼탁시모간 15㎞이다. 스탈린시절 BAM철도 건설은 1급비밀로 속해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물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수용소 죄수들이 동원됐다.이 철도가 지도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55년이었다고 한다.브라츠크발전소 건설을 발표하면서 이곳에 철로가 있으며 이 철로를 이용해 발전소를 건설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복선·전철화작업 진행 현재 BAM은 전구간 복선·전철화 작업이 진행중이다.그러나 아직은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철도란 건설 뒤 10∼15년 지난 뒤부터 철도주변에 개발효과가 가시화되는 게 보통이기 때문에 조만간 이 지역에도 경제개발붐이 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덕분에 일찍이 외국인에 개방된 곳이다.바이칼의 외국인 관광객 유치는 이미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따라서 우리가 묵은 인투리스트호텔은 입구에서부터 서구화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새벽에 체크인하는데도 교대근무자들이 친절히 맞아주었고 엘리베이터는 금성사제품,객실 세면대에는 한국산 비누·치약·샴푸 등이 깨끗이 준비돼 있는 등 여행중 최고로 쾌적한 인상을 주었다.객실의 냉장고도 다른 지방의 호텔에서 같이 「탱크 굴러가는 듯한」요란한 소음을 내는 러시아제 대신 말끔한 한국산 냉장고가 갖추어져 있다.우리나라 관광객들도 많이 들르는듯 한식당·일식당도 있고 호텔 로비 곳곳에 한국어 안내판이 나붙어 있다. 현재 인구 60만명의 이르쿠츠크시는 1661년남쪽의 몽골·중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출발했다. 이후 1686년 군사요새로서의 제한된 역할을 마감하고 정식도시로 재출발했으며 1698년 중국과의 교역이 시작되면서 이르쿠츠크는 매우 중요한 교역중심지로 부상했다.도시가 커지면서 17 64년에는 당시 이르쿠츠크 구베르니(주)의 수도가 됐고 총독의 집무처가 들어섰다.그래서 이곳에는 「벨르이 돔(백악관)」으로 불리는 순백의 당시 아름다운 총독관저가 지어져 지금 빼놓을 수없는 관광명소가 돼있다.가가린프로스펙트에 있는 이 건물은 현재 이르쿠츠크 시립도서관이 입주해 있는데 유명한 이탈리아 건축가 크바렝키가 설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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