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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섯 영양의 보고 웰빙에 으뜸

    버섯 영양의 보고 웰빙에 으뜸

    목이버섯·잎새버섯·석이버섯·아가리쿠스버섯·수향버섯·포토벨라버섯·참숯병팽이버섯·홍삼팽이버섯·참송이버섯·셀레늄노란꽃버섯…. 버섯이 똑똑해지고 있다. 버섯은 수분이 90%고 나머지 10%가 단백질·지방질·당질·미네랄 등으로 구성돼 있는 만큼 저칼로리 식품이면서도 단백질 등 영양소가 풍부하므로, 신체 면역력을 높여 성인병을 예방하는 웰빙 식품으로 각광받으며 다양한 버섯제품이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황성재 신세계 이마트 버섯 담당 바이어는 “버섯은 농약이 있으면 자라지 못하는 특수한 식물이어서 값싸게 풍부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는 최고의 웰빙식품”이라며 “올들어 버섯 가격이 지난해보다 30% 정도 떨어진 데다 최근의 웰빙 바람에 힘입어 버섯을 찾는 소비자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상품은 목이버섯·잎새버섯·석이버섯·아가리쿠스버섯·수향버섯·포토벨라버섯·참송이버섯·셀레늄노란꽃버섯 등이다.‘목이버섯’은 나무에 붙어 있는 모양이 사람의 귀처럼 생겼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버섯향이 강하지 않고 맛도 담백한 덕분에 다양한 요리재료로 사용된다. 특히 치질과 변비, 하혈 치료에 좋고 항암제나 백혈병 치료에도 사용되는 등 장수식품으로 알려져 인기를 끌고 있다. 잡채나 중국요리에 널리 쓰인다. 건버섯 형태로 판매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회색과 검은색을 띠는 부채꼴 모양의 ‘잎새버섯’은 국내에는 아직 생소하지만, 버섯을 좋아하는 일본에서는 웰빙 식품으로 자리잡았다. 아토피성 피부염과 천식, 만성비염과 같은 알레르기성 질환에 좋은 것은 물론 암이나 비만, 고지혈증 예방도 효과적이다. 국내에서는 재배가 힘들어 살 수 있는 곳이 드물다는 단점이 있다. ‘석이버섯’은 목이버섯처럼 사람의 귀처럼 생겼는데, 바위에 붙어 자란다.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표면은 황갈색으로 광택이 없는 편이다. 마르면 단단해지지만 물에 담그면 회록색으로 변해 연하게 된다. 맛이 담백하고 튀김 요리에 많이 사용된다. 한방에서는 강장·각혈·하혈 등에 지혈제로 이용한다. 신령버섯으로 불리는 ‘아가리쿠스버섯’은 양송이 버섯과 비슷하게 생겼다. 자루의 색이 희고 버섯향이 향긋하다. 면역력을 높이고 항암작용을 하며, 콜레스테롤 억제 기능도 있다.‘수향버섯’은 팽이버섯보다 크고 색깔도 더 진해 노란 빛깔을 띠는 팽이버섯으로 일반 재배된 상품이다. 큰송이 버섯으로도 불리는 ‘포토벨라버섯’은 국내에 도입된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버섯. 크기가 크고 씹히는 느낌이 좋다.‘참숯병팽이버섯’은 버섯 배양지에 정화기능이 뛰어난 참숯을 넣어 재배한 팽이버섯. 팽이버섯보다 육질이 단단하고 탄력감이 뛰어나다.‘홍삼팽이버섯’은 버섯 배양지에 홍삼 추출물을 첨가해 재배한 팽이버섯으로 팽이버섯보다 생육기간이 긴 덕분에 저장하기 쉽고 쫄깃쫄깃한 맛이 난다. 자연산 송이버섯에서 균을 떼어내 배양한 ‘참송이버섯’은 자연산 송이의 고유한 맛과 향에 있지만, 항암·면역 성분인 베타글루칸이 다른 버섯에 비해 많이 함유하고 있다. 베타글루칸의 경우 자연산 송이가 100g당 20g 정도인데 비해 참송이는 26.2g이나 된다. ‘셀레늄 노란꽃버섯’은 설악산 백담사 주변에 자생하는 노란느타리버섯 종균을 유기 셀레늄을 전이시킨 배양지에 키운 것으로, 손쉽게 재배를 할 수 있다. 버섯 100g당 셀레늄 150㎍을 함유하고 있다. 셀레늄은 인체 신진대사에 필요한 미네랄의 일종으로 결핍되면 간질환·세포 노화·면역 기능 저하 등으로 여러가지 성인병을 유발하지만, 충분히 섭취하면 암 발생을 억제하고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학명 현대백화점 농산물 담당 바이어는 “버섯은 가격과 맛·향이 천차만별인데, 버섯 고유의 향을 잃지 않도록 종류에 따라 요리법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며 “양념이나 조미료를 가능한 한 넣지 않고 짧은 시간 안에 씻어야 하며, 굽거나 삶을 때 살짝 굽거나 끓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할인점들 줄줄이 기획전 할인점들이 다양한 버섯 기획·할인행사를 마련하고 대대적인 ‘버섯 마케팅’에 나섰다. 신세계 이마트는 24일까지 버섯을 20% 이상 할인 판매하는 ‘버섯 행복쇼핑전’을 진행한다. 새송이버섯(400g) 2480원, 참타리버섯(200g) 950원, 양송이버섯을 1750원에 선보였다. 롯데마트는 느타리버섯과 새송이버섯 2개 품목에 대해 할인 행사를 펼친다. 느타리버섯(250g)은 24일까지 35% 할인된 1980원, 새송이버섯(350g)은 27일까지 22% 할인된 2880원에 판매한다. 삼성테스코 홈플러스는 27일까지 양송이·새송이·팽이·맛타리버섯 등으로 이뤄진 모듬버섯 팩(300g)을 30% 할인된 1980원에 파는 ‘친환경 버섯기획전’을 갖는다. 이밖에 맛타리버섯(250g) 2450원, 목이버섯(50g) 1980원, 석이버섯(30g) 1850원, 새송이버섯(350g) 2680원, 느타리버섯(250g)을 2150원에 내놓았다. 농협 하나로클럽 양재점은 30일까지 ‘버섯 모음전’을 진행한다. 새송이버섯(500g) 3650원, 셀레늄노란꽃버섯(150g) 1500원, 참숯병팽이버섯(100g) 390원, 홍삼팽이버섯 300원, 팽이버섯 200원, 양송이버섯 660원, 표고버섯 1250원, 애느타리버섯(200g)을 990원에 판매한다. 그랜드마트는 28일까지 여러가지 버섯을 10∼30% 할인 판매하는 ‘버섯 페스티벌’ 행사를 실시한다. 새송이버섯(500g) 2680원, 맛타리버섯(200g) 980원, 병팽이버섯(300g)을 780원에 출시했다. 킴스클럽 강남점은 24일까지 ‘버섯 모음전’을 마련했다. 양송이버섯(150g) 1480원, 새송이버섯(500g) 4180원, 느타리버섯(300g)을 1480원에 내놓았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인간시대] 시각장애인 등산 돕는 선인자원봉사단 김종민 대표

    [인간시대] 시각장애인 등산 돕는 선인자원봉사단 김종민 대표

    눈을 한 번 감아보자.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보자. 먼저 다가오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집이나 직장 등 매일 ‘도장’을 찍는 곳도 더 이상 익숙한 공간이 아니다. 몇 걸음 걷지 못해 벽에 부딪히거나 넘어지기 쉽상이다. 이것이 일반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들의 현실이다. 등산조차도 이들에게는 여전히 높은 벽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들의 등산을 돕는 선인자원봉사단은 어둠 속에 소외돼 있는 이들에게 희미하지만 소중한 희망의 불빛이다. 봉사단 대표 김종민(47·송파구 가락동)씨는 3년째 봉사단의 ‘등대지기’ 역할을 하고 있다. ●3년째 이바지 ‘아름다운 역무원’ 김씨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사에 근무하고 있는 서울시지하철공사 소속 공무원이다. 지난 2003년 2월 처음 자원봉사에 발을 들여놨다. “40대 중반이 되자 ‘이뤄놓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제2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에 송파자원봉사센터를 찾게 됐죠.” 선인자원봉사단은 직장 산악회에서 활동해 왔던 김씨를 중심으로 그해 8월 1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출범했다. 선인자원봉사단은 ‘선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30여명이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 선인자원봉사단은 매주 목요일마다 10여명의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등산을 떠난다. 인천 등 수도권은 물론 대전에서도 매주 올라올 정도로 장애인들에게는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경기도 포천 왕방산, 양평 봉미산, 강원도 춘천 봉화산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80차례 넘게 산행을 다녀왔다. 지난 2월에는 설악산 등반까지 마쳤다. 시각장애인들은 앞장 선 봉사자의 배낭을 잡고 산을 오른다. 봉사자들은 ‘바위가 있으니 발을 조심하라.’는 식으로 그때그때 지형지물을 설명해 준다.3년째 한 몸처럼 산을 타다 보니 봉사자들과 시각장애인들은 모두 ‘가족’이 됐다. 김씨는 “장애인들이 ‘가족보다 더 가깝다.’는 말을 할 정도”라고 흐뭇해했다. 김씨의 가족은 이미 ‘봉사 가족’이다. 태영(17), 훈영(15) 두 아들도 수업이 없는 방학 때마다 봉사단에 합류한 지 오래다. 매주 넷째주 일요일 아이들과 함께 송파구 거여동의 장애인 시설인 소망의 집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아내 이순옥(45)씨도 산행 때마다 간식을 챙겨 주는 김씨의 든든한 ‘빽’이다. ●봉사로 하나 된 가족 등산 봉사를 하면서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지난해 8월 경기도 가평의 연인산으로 산행을 갔을 때 김씨는 그만 무릎을 다쳤다. 징검다리를 뛰어 넘다가 뒤따르던 장애인이 함께 뛰지 않고 김씨의 배낭을 잡은 채 서 있는 바람에 김씨는 그만 뒤로 고꾸라졌다. 김씨는 “장애인이 미안해할까봐 아픈데도 아무 말도 못 했다.”고 말했다. 첫 봉사 때 만났던 40대 여성 장애인에게서 시력을 잃고 극복하는 과정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그에게 ‘등산 공양’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봉사단원들은 주부나 퇴직자들이 대부분이다. 직업을 갖고 있는 단원은 김씨가 유일하다. 평일에 봉사를 한다는 것은 일반 직장인들에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씨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도 이 부분이다. 주간 근무 때는 봉사를 위해 목요일을 한 주의 유일한 휴일로 잡는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하는 야간 근무 때는 아예 잠을 포기하고 복지관으로 달려와야 한다.2년 가까이 그러다 보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산행 봉사를 포기할 수는 없다. 시각장애인들과 맺은 인연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김씨는 “일반인들이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가야 ‘장애인=정상이 아닌 사람’이라는 편견이 없어질 수 있다.”면서 “작은 힘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 봉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게 웃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교황 “다른 종파·종교와 계속 대화”

    |파리 함혜리특파원·서울 임병선기자|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일 오전 9시(한국시간 오후 4시) 바티칸의 시스티나성당에서 첫 축하미사를 집전함으로써 교황으로서 공식 직무를 시작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전날 자신을 교황으로 선출한 추기경들만 참석한 이날 미사에서 “교황으로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종파를 초월해)교회에 화합을 가져오는 일”이라며 “모든 기독교 종파와는 물론, 다른 종교와도 대화를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베네딕토 16세로 즉위명을 정한 독일 출신 요제프 라칭거(78) 추기경은 전날 오후 첫번째 투표이자 이번 콘클라베 네번째 투표에서 재적 3분의2 이상 표를 획득,11억 가톨릭 신도의 영적 수장에 오르게 됐다. 교황청은 새 교황이 직무를 수락함으로써 교황권은 발효됐으나 즉위식은 콘클라베 종료 후 첫 주일인 24일 성베드로광장에서 열린다고 밝혔다. ●교황은 라틴어로 진행한 이날 첫 미사에서 강론을 통해 자신은 부적합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나를 붙잡고 있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강한 팔을 느끼고 웃음띤 눈을 보며, 지금 ‘두려워하지 말라.’고 내게 말하는 그의 음성을 듣는 듯하다.”고 밝혔다. 또 “주님은 나를 선택하심으로써 모든 이들이 자신있게 딛고 설 수 있는 ‘바위’가 될 것을 주문하셨다.”며 “나는 내가 주님의 양떼를 위한 대담하고 진실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나약함을 채워주실 것을 간구했다.”고 덧붙였다. 성베드로 성당을 굽어보는 교황 아파트에 아직 입주하지 않은 교황은 오는 8월 쾰른에서 열리는 세계청소년대회에 참석할 것이라고 밝혀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각종 세력의 대결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번 콘클라베는 역대 최단기간 콘클라베 중 하나로 기록됐다.18일 오전 5시23분 시작해 19일 오전 6시46분 호르게 아르투로 메디나 에스테베스(칠레) 추기경의 “하베무스 파팜” 선언이 나올 때까지 25시간가량 걸렸다. 지금까지 최장 콘클라베는 1268년 이탈리아 비테르보 궁전에서 소집돼 1271년 9월에야 그레고리오 10세를 선출하면서 끝을 낸 콘클라베로 2년 9개월이 걸렸다. 최단 기록은 1503년 10월31일 로마에서 개최된 회의로 율리오 2세를 단 몇시간 만에 선출했다. 비오 7세도 1939년 콘클라베에서 20시간 만에 뽑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직 수락 직후 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 ‘우르비 엣 에르빗(세계 만방)’에 내린 첫 축복에서 “형제자매들이여, 위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추기경들이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보잘것없고 미천한 일꾼으로 나를 선출했다.”며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기도에 나 자신을 맡긴다.”고 말했다. ●독일 쾰른 대주교인 요아힘 마이즈너 추기경 등 독일 추기경 4명은 새 교황이 확정되자 추기경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박수 갈채가 일었다고 선출 순간을 전했다. 이들 추기경은 기자 질문에 45분 동안 답하면서도 서약 위반을 의식하지 않는 눈치였다고 취재진은 전했다. 마이즈너 추기경은 새 교황이 제의를 갈아입기 위해 ‘눈물의 방’에 들어설 때 “약간 쓸쓸해 보였지만 저녁 만찬시간에 비로소 교황다워 보였다.”고 털어놓았다. 새 교황은 추기경단에 콩수프와 콜드컷(식은 고기와 치즈를 곁들인 요리), 샐러드와 과일로 짜여진 만찬을 청했다고 덧붙였다. ●요한 바오로 2세(56세)보다 훨씬 고령인 78세에 즉위하게 된 베네딕토 16세는 특별한 병력은 없으나 90년대 이후 최소 두번 입원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바티칸 전문가인 존 앨런은 2000년에 낸 책 ‘라칭거 추기경’에서 91년 9월 뇌출혈로 잠시 왼쪽 시력에 문제가 생긴 일을 기록했으며 이듬해 8월 이탈리아 휴가 중 욕실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약간 다친 일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다. bsnim@seoul.co.kr
  • [조용섭의 산으路] 공주 계룡산

    [조용섭의 산으路] 공주 계룡산

    ‘산태극 수태극의 길지(吉地), 다가올 새세상의 중심이 될 곳’, 신령스러운 산으로 떠받들어져왔던 충남 공주의 계룡산(845m)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다. 그래서인지 산자락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산신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계룡산은 동학사와 갑사를 기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하지만 남서쪽 신원사 쪽은 상대적으로 사람의 발길이 뜸해 호젓한 산행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유적답사는 덤이다. 산길은 신원사에서 출발하여 고왕암-연천봉고개-연천봉-관음봉-자연성능-삼불봉-금잔디고개를 거쳐 갑사로 하산하는 코스로 잡았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때 보덕화상이 창건한 고찰로(현재 조계종 마곡사의 말사). 조선시대 3악(상악-묘향산, 중악-계룡산, 하악-지리산)으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중악단이 있는 곳이다. 신원사에서 산길 들머리가 있는 금룡암까지 도로가 이어진다. 힘차게 흐르는 계곡의 물길을 오른쪽에 두고 소림원, 금룡암을 지나면 이정표를 만나고 오른쪽 숲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산길이 시작된다. 극락교를 지나 돌계단을 한발한발 올라서면 고왕암에 닿는다.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이 피신해서 머물렀고,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다 하여 절 이름에 ‘머물 古’자를 썼다고 전한다. 법당 뒷쪽 절벽 아래에는 석간수가 있다. 산행시작후 약 40분 걸린다. 산자락에는 남보라의 현호색이 군락을 이루며 지천으로 피어있다. 보석 같은 풀꽃과의 만남은 봄산행의 즐거움이다. 큰 물길을 가르는 다리를 지나면 도치샘 이정표를 만나고, 길은 점점 가팔라진다. 어느덧 계곡의 물소리는 사라지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무계단을 만나면 연천봉 고개가 지척이다. 지금까지의 조용하던 산길과는 달리 연천봉 고개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왼쪽으로 올라 10분여 진행하면 바위봉우리인 연천봉에 닿는다. 고왕암에서 1시간30분 소요. 연천봉 남동쪽 바로 앞, 하늘을 가르며 서있는 주봉 천황봉과 쌀개능선의 모습이 늠름하다. 다만 거대한 시설물을 이고있는 봉우리의 모습이 안쓰럽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동쪽) 문필봉이 가깝고 그 오른쪽 뒤로 관음봉과 전망대가 살짝 보인다. 남쪽 바로 아래로는 등운암이 내려다보인다. 이 곳으로도 신원사위 소림원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잘 나있으나 휴식년제 탓으로 입산이 통제된다. 다시 연천봉 고개로 내려와 관음봉으로 향한다. 가벼운 산행을 원하면 이 고개에서 갑사로 내려서도 된다. 관음봉 앞 고개에서 왼쪽(북쪽)의 돌계단을 오르면 관음봉에 닿는다. 전망대 앞, 철계단 놓여있는 곳이 자연성능으로 이어져 삼불봉으로 향하는 길이다. 계단과 암릉길은 조심해서 운행하고 암릉길에 자신이 없으면 옆으로 나있는 우회길을 이용한다. 힘들게 계단을 올라 닿은 삼불봉에서의 조망도 일품이다.5분여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서 삼불봉 고개에 닿으면 왼쪽 금잔디고개로 진행, 갑사로 내려서며 산행을 마친다. 관음봉에서 금잔디고개까지는 약 1시간, 고개에서 갑사까지는 50여분 소요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경부고속도로 천안IC에서 빠져나와 1번국도와 23번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갑사로 하산했을 경우 차량은 공주행 버스로 계룡에서 내려 신원사행을 갈아탄다. 택시 요금은 4000원.(041) 857-3982. 대중교통은 각 지역에서 공주로 이동한 다음 신원사행 버스로 이동한다. 공주시외버스터미널(041-854-4911), 고속버스(041-855-2319), 시내버스(041-854-3163)를 이용한다. 계룡산 산신제가 21∼24일 신원사 일대에서 열린다. 산신제 보존회(041-855-4933).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7)거제도의 숭어잡이 ‘육소장망’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7)거제도의 숭어잡이 ‘육소장망’

    암벽 위 진달래가 꽃그림자를 드리울 즈음이면, 숭어떼가 몰려온다. 봄이왔다는 증거. 숭어만이 그러한가. 강과 바다를 오고가는 모든 고기들이 입춘만 지나면 봄을 알아차리고 운동량이 부쩍 증가한다. 거제도 최남단의 그림 같은 해금강이 건너다 보이는 남부면 다포리로 숭어잡이를 찾아나섰다. 숭어는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가리지 않는다. 한반도에서도 제주로부터 동서남해를 막론하고 없는 곳이 없으나 거제도 숭어잡이는 남다르다. 일명 숭어둘이, 혹은 육소장망(六張網)이라 불리는 전통어법은 부산 가덕도로부터 거제 남동해 곳곳에서 펼쳐진다. 가덕도는 TV 등을 통해 간간이 소개된 반면 거제도는 일반에 알려져 있질 않다. 신항 건설로 급속히 가덕도 어장이 사라졌지만 거제도의 지세포, 양화, 학동, 다포, 도장포에서는 현행 어법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산길 30분 올라가자 얼기설기 엮은 망통이… 어민 임성덕(59세)씨가 천장산 기슭의 망통으로 안내했다. 족히 30분 이상 산길을 걸었다. 바닷가 가파른 벼랑의, 사람 하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소로가 동네사람들이 오랜 세월 오고가던 숭어잡이 길이다. 동백 팔손이를 비롯한 상록수들이 남도임을 실감시켜준다. 망통은 깎아지른 벼랑 끝에 서 있다. 바다 사나이 하나가 묵묵히 망을 응시하고 있다. 얼기설기 엮은 헛간이 벼랑에 의지하여 간신히 바위에 매달려 있고 그 안에 사내들 몇몇이 둘러앉아 바다를 응시한다. 하늘에서 움직임을 굽어보면서 숭어떼가 들이닥치기를 기다렸다가 그물로 둘러싸서 잡는 글자 그대로 ‘둘이(두르다)’이다. 숭어는 2월1일부터 5월30일까지 날을 정해놓고 잡는다. 소머리 받치고 고사부터 지내는데 예전에는 무당까지 모셔다가 날 받는 날, 즉 낙망일을 정하였다. 그물은 포구를 향하여 ‘ㄷ’자 형으로 놓는다. 아가리가 포구를 향해 있어 외해로 나가는 길목을 차단하게끔 입을 벌려놓았다. 강철안 어촌계장은 “갯가를 문전문전 타고 다니지요.”라고 한다. 가덕도 쪽에서 내려온 숭어가 건너편 해금강에서 다포리 내만으로 접어들면서 육지로 바짝붙어서 골골이 만을 들른다는 설명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민물을 받아먹으려고 골에서 머물다가 어느날 갑자기 커다란 숭어 대군이 몰려오면 떼거리에 합세하여 포구의 모든 숭어들이 일제히 이동한다. 광장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출구에서 몰려드는 일련의 군중을 만나게되면 갑자기 합세하는 심리와 같다고나 할까. 수만마리 숭어들이 바다로 내려가는 통로는 어느 해나 일관되게 산 아래 육지쪽이다. 숭어 길목에 정확하게 그물을 놓는다. 어느 시각에 대군이 지나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망쟁이는 바다 빛깔의 변화를 보고서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입춘 직후에는 숭어가 ‘바닥을 기기 때문’에 여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알기 어렵다. 그러나 봄빛이 짙어지면 숭어가 물 위로 뜨기 때문에 웬만한 어민들도 알아차린다. 망쟁이(어로장)는 고도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금년에도 건너편 해금강에서 어민 최봉조(33)씨를 돈까지 주고 모셔왔다. ●숭어 몰려오면 물색 짙어져 ‘나이 젊어도 고기를 잘 보기 때문’이라나. 노련한 어부들도 숱하겠건만 고기도 아무 눈에나 띄는 것은 아닌가보다. 고기가 몰려오면 물색이 짙어진다. 고기 눈이 밝은 어로장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어민 17명이 한 팀을 이루어 전형적인 어촌 공동체의 협업정신을 발휘한다. 예전에는 그물을 돈 있는 선주가 담당하였으나 어촌계 몫으로 바뀌었다. 육소장망은 여섯 척의 배에서 비롯되었다. 좌우로 세 척씩 여섯 척이 진을 짜듯 벌려 있다가 숭어가 들어온다는 신호가 망통에서 내려오면 바짝 조여서 빈틈없이 에워싼다.‘독 안에 든 쥐’가 이것이다. 가덕도에서는 근래까지도 배를 이용하는 반면에 거제도에서는 10여년 전부터 고정적으로 그물을 쳐두는 것으로 개량화되었단다. “얼마나 잡힙니까.” “많게는 2만마리고요, 엊녁에도 5000마리 잡았어요.”그물질 한번에 2만마리라니. 마침 찾아간 날은 고기가 들지않았다고 울상이었는데 그래도 족히 500여마리는 잡혔다. 어촌계에서 10%를 제하고 나머지는 참가자들이 공평하게 분배한다. 객주가 전량 수거하여 부산권역으로 팔려나간다. 양이 많으면 노량진수산시장까지도 나가는데, 문제는 숭어값. 예전에 마리당 7000∼8000원 하던 것이 금년에는 마리당 1600원이다. 그래도 숭어잡이철은 비수기인지라 어민들로서는 제발로 찾아들어 잡혀주는 숭어가 고맙기만 하다. 숭어가 제 대접을 받지 못함은 흔하기 때문이다.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남의 영산강, 평북의 청천강, 경기의 한강 등에도 많이 회유한다. 어릴적과 성어 이름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 재미있다.1000여개의 토속이름이 분포하고 있으니 그만큼 흔하다는 증거다. 모치, 모쟁이 같은 어린 숭어 이름이 그것이다. 식성이 까다로워 양식이 어려우며 95% 이상이 자연산인데다가 기름진 숭어는 피로회복에도 그만이니 하대할 수산물이 아니리라. 지역명산으로 출시되는 영산강 몽탄의 숭어알로 만든 영암어란은 임금님 진상품이었으니 지금도 웬만한 가격을 치르지 않고는 서민들은 접할 수 없는 진미이다. 망을 보아 고기를 잡는 어법은 멸치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에 오른 망쟁이가 회유하는 멸치떼를 발견하면 신호를 보내어 일제히 후리로 끌어당겨 많은 양의 멸치를 잡곤 하였다. 고래잡이에서도 고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했으니, 잡은 고래몫에서 일정 부분을 발견한 이에게 먼저 떼줄 정도였다. 고기들이 몰려들어옴을 눈으로 발견할 수 있음은 그만큼 자원이 풍부했다는 증거. 사람들은 사람의 눈 대신에 첨단 어군탐지기로 ‘싹쓸이어법’을 감행하고 있으니, 육소장망 같은 어법은 하루에 1만마리씩 많은 양이 잡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다림의 어법’이란 점에서 쫓아가서 잡는 ‘싹쓸이어법’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쩌면 갯가로 몰려드는 숭어떼마저 사라지고 육소장망마저 멈춘다면 거제 바닷가의 봄은 꽃은 피웠으되 봄은 오지 않은 셈이 되어 레이첼 카슨의 표현대로 ‘침묵의 봄’으로 변하리라. ●멸치·대구·감성돔… 경남 최대의 어장 거제는 경남 최대 어장 중의 하나다. 멸치, 대구는 물론이고 감성돔, 볼락, 도다리 같은 고급어종이 많이 잡힌다. 우리나라 두 번째로 큰 섬답게 해안이 제주도보다도 크며 61개섬이 퍼져 있어 넓은 어장을 자랑한다. 관광객에게는 해금강이 관광명소로만 여겨지겠지만 고기들에게는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정거장 같은 곳들이다. 봄철에는 갓 잡은 도다리와 쑥을 끓인 쑥국을 식당에서 마주칠 수 있는 행운이 뒤따라 진한 봄내음을 식탁에서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 거제바다다. 이곳은 전통시대부터 어업규모가 만만치 않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오죽하면 ‘아배가 멸치를 잡기 때문에 멸치값이 올랐다.’는 소문까지 났을까. 거제도뿐 아니라 전라도까지 진출하여 잡아들이고 있다. 동지를 전후하여 찾아가면 대구 전진기지로 분주하다. 거제도를 중심으로 진해만과 거제 외포리 근해 통영해안에서 잡아들여 대구국과 내장탕을 끓이고, 대구포도 말린다. 예로부터 고급음식이었으니 돈 없는 사람은 명태를 사먹고 돈 있는 이나 대구를 먹었다고한다. 식당에서 볼락젓을 내오는 경우가 있다. 어린 볼락으로 담근 젓갈인데, 일찍이 김정은 우해이어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보라어’를 ‘보락’이나 ‘볼락어’라 부른다. 방언에 엷은 자주색을 보라(甫羅)라고 하는데 ‘보’는 아름답다는 뜻이니, 보라는 아름다운 비단이다. 보라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해마다 거제도 사람들이 보라어를 잡아 젓갈을 담아 배로 수백 항아리씩 싣고 와서 포구에서 팔아 생마(生麻)와 바꾸어갔다고 전해진다. ●日침탈·포로수용소… 모진 역사도 견뎌내 어업이 활발한 반면에, 생필품이 늘 부족하였다는 뜻이다. 실제로 산이 많고 거칠며 농토는 적은 반면에 고기는 흔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어업이 성했으니, 장승포나 지세포 같은 포구는 동서해안의 작은 포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1995년에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합쳐서 거제시로 재탄생하였다. 김광수 거제수협전무는,“고현으로 기관이 다 옮겨갔어도 어업의 본부격인 거제수협만큼은 장승포에 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옥포대첩이 이루어진 옥포성, 임진왜란 당시에 우수영이던 개배량성, 왜구들이 쌓은 견내량 같은 왜성 흔적은 일찍부터 일본의 침탈이 집중화된 해변임을 말해준다. 옥포조선소가 들어선 옥포에서 보자면 대한해협과 대마도가 빤히 보이니 임란 전에도 왜선들이 시도때도없이 출몰하였다. 본격적 어업침탈은 합방 19년 전인 1891년에 시작된다. 에히메켄(愛媛縣) 우오시마무라(魚島村)에서 어민 수백명이 구조라로 집단이주하여 멸치잡이에 종사한다. 합방도 되기 전에 일본인회, 학교조합이 들어선다. 일제의 폭압적인 지원에 힘입어 조선어민들은 어장을 내주어야 했다.‘일제36년’이라 하는데 틀린 계산법이다. 이후에 구조라 북쪽의 지세포, 장승포가 일본인에 의해 건설된다. 조선시대의 지세포성이나 구조라성이 모두 왜적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는 바, 하필 그곳에서부터 일제의 어업침탈이 시작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하다. 게다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용했던 섬에 미군들이 몰려들고, 한때 17만명에 이르는 전쟁포로들이 360여만평에 수용되었다. 좌우 대립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으니 전국의 유명 관광지로 연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드는 이 아름다운 섬에도 외세의 개입은 한시도 끊이지 않았던 셈이다. 수용소는 유적지로 변신하여 역사교육 현장으로 뭍에서 온 이들을 맞아들인다. 조만간 거제 장목과 부산간의 거가대교까지 개통된다고 하니, 거제의 변신은 어디까지일까.
  • 사랑으로 빚은 ‘통일빵’

    사랑으로 빚은 ‘통일빵’

    “함께 어울려 살게 될 친구들인데, 배 고파 아프면 안 되잖아요.” 초등학교 1학년인 임세희(7·광주시 광산구 운남동)양은 최근 피아노를 산다며 3년 동안 동전을 모아둔 돼지저금통을 깼다. 어머니 송순희(34)씨에게 “배고픈 북쪽 친구에게 빵을 만들어 주는 사업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내가 가진 것도 나눠 주고 싶다.”고 나선 것. 세희는 저금통에서 꺼낸 10만 380원 전부를 후원금으로 보냈다. 소식을 들은 친구들도 하나둘씩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꼬마부터 할머니까지 십시일반 대동강변의 공장에서 만든 빵을 북녘 어린이에게 나눠 주기 위한 ‘영양빵 사업’에 십시일반의 정성이 모이고 있다. 여섯 살배기 꼬마에서부터 수십년을 통일운동에 바친 할머니, 장기수 출신 80대 할아버지까지 갖가지 사연이 담긴 손길이 이 사업을 돕고 있다.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가 북쪽의 민족화해협의회와 함께 지난해 7월부터 추진한 끝에 지난 1일 처음 공장에서 빵을 만들어 냈다. 하루 생산량은 1만여개로, 평양 동부지역인 대동강·동대원·선교 구역 유치원과 탁아소에 공급된다. 이 사업을 위해 남쪽은 원료와 기계설비를 지원하고 북쪽은 ‘대동강 어린이빵 공장’과 인력을 제공했다. 전북 전주에 사는 김주완(6)군은 신발 가지런히 놓기, 할머니 물 떠다 드리기 등 하루에 한 가지씩 ‘착한 일’을 하고 어머니 강미순(33)씨에게 200원씩 받는다. 한달 동안 6000원을 모아 용돈을 뺀 5000원은 빵공장 후원금으로 보낸다. 강씨는 “아직 어려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배고픈 친구를 돕는 일’이라는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고 말했다. 장기수 출신으로 택시를 운전하다 두달 전부터 쉬고 있는 유기준(80) 할아버지도 매달 5000원씩 후원금을 낸다. 지난달에는 아들들에게 받은 용돈 40만원을 전부 보탰다. 함흥 출신으로 1951년 인민군으로 참전해 포로로 잡힌 뒤 10년을 복역한 유씨는 연탄 배달과 두부공장일 등을 하며 근근이 살아 왔다. 가족은 모두 북한에 두고 왔고 2001년 이산가족 상봉때 여동생을 만나기도 했다. 유씨는 “내 친척과 가족을 먹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통일운동의 원로로 꼽히는 김선분(80)·박정숙(88) 할머니는 정부에서 받는 생활보조금을 쪼개 후원금을 내고 있다. 또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45)씨는 지난 2년간 공연 수익금인 2000만원 전액을 기부했다. ●“지원늘면 진짜 영양빵 만들것” 사업을 홍보한 지는 4개월도 되지 않지만, 후원자가 몰려 매달 5000원씩 내는 후원회원이 4522명,100만원씩 내는 운영이사가 165명이나 된다. 후원금 5000원이면 어른주먹 크기의 빵 30개를 만들 수 있다. 원래 이 사업은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여성위원회가 “통일의 미래인 아이들을 남·북쪽 어머니가 함께 키워 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신수경 사무처장은 “정부 차원의 북한 지원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순수한 마음을 모은 민간의 현물 지원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아직은 속재료를 넣지 않은 밀가루빵 수준이지만, 지원이 늘면 신선한 육류와 야채를 넣은 ‘영양빵’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후원은 영양빵공장사업본부 홈페이지(okbbang.org)나 전화 02-3210-1005 로 신청하면 된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씨줄날줄] 나이키의 굴복/신연숙 수석논설위원

    지난주 스포츠용품업체 나이키의 ‘기업책임보고서’ 발표는 풀뿌리 NGO들이 거대 다국적기업을 굴복시킨 또하나의 쾌거로 기록될 것이다. 글로벌 익스체인지 등 NGO들은 나이키가 여성과 어린이 등 제3세계 노동력을 착취한다고 비판하며 하청공장 실태를 공개하도록 압력을 넣어왔다. 나이키는 마침내 569개 해외 하청공장 감사 결과를 공개했다. 시간외 노동강요, 신체적·언어적 학대, 어린이 노동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NGO들은 보고서를 토대로 개선을 촉구하며, 전세계 생산 현장에 감시의 눈길을 바짝 갖다 댈 것이다. 나이키 역시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모두가 선진국의 불공정한 무역을 개선하여 제3세계의 빈곤문제를 해결하자는 ‘공정무역(Make Fair Trade)’운동의 결과이다. 공정무역운동의 뿌리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시민단체 옥스팜 등은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구호하기 위해 수공예품을 사들이고 교육과 지역사회 발전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제3세계 빈곤의 원인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선진국과의 불공정한 거래다. 예를 들면 제3세계는 커피, 차, 바나나, 코코아 등의 대부분의 물량을 생산 공급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쥐꼬리만 한 임금이나 헐값의 판매대금 뿐이다. 고가의 제품판매 이익은 다국적 기업들이 챙긴다. 이른바 ‘자유무역’의 불공정한 거래관행이 개선되지 않고는 제3세계 생산자는 만성적 빈곤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 여기서 나온다. 공정무역운동은 자연스럽게 생산자에게 제값을 주고 다국적 기업들에 책임을 일깨우는 ‘대안무역(Alternative Trade)’운동으로 발전한다. NGO들은 ‘대안무역’ 인증서를 붙여 생산자와 소비자 직거래를 시도하기도 하고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고발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아니냐는 시선도 있었지만 효과는 마침내 나타나고 있다.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와 의류업체 갭이 고개를 숙였고 이번엔 나이키가 반응을 보였다. 충분치는 않지만 희망적인 변화의 조짐이다. 이젠 ‘윤리경영’이란 말이 기업에 당연한 명제가 되지 않았는가. 계란은 안돼도 풀뿌리는 바위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요즘이다. 신연숙 수석논설위원 yshin@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⑥- 현대백화점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⑥- 현대백화점

    현대백화점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3남인 정몽근(63) 회장이 이끌고 있다. 9남매(8남 1녀) 가운데 작고한 몽필씨를 제외하면 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이어 두번째 ‘큰 형님’이지만 MK(몽구),MH(몽헌),MJ(몽준) 등 이른바 3M으로 불리는 화려한 다른 형제들에 가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원래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 데다 처음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로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이래저래 세간에서 멀어진 ‘황태자’가 됐다. 하지만 현대백화점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부친의 후광으로만 생각하지 못할 정 회장의 ‘몫’이 있다. 역시 ‘왕 회장’의 아들답게 때로는 부친과의 담판을 통해 새 사업을 추진하고, 때로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경영상의 문제들을 다른 형제들과 대화로 풀어내며 회사를 일궈왔다. 그가 1974년 현대백화점의 전신인 금강개발산업주식회사를 맡을 당시 회사는 현대그룹 주력사인 현대건설의 외곽 지원업체에 불과했다. 개발시대에 쭉쭉 뻗어나가던 현대건설이 진출하는 국내외 현장에 식품과 의복 등 잡화류를 공급하고 동부이촌동 등 6개의 금강슈퍼마켓 등을 운영하던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현대백화점그룹은 현재 주력사업인 백화점외에 홈쇼핑, 지역케이블 방송사업 등 계열사 20개를 거느린 유통그룹으로 우뚝 섰다. 지난해 매출이 5조 2500억원, 영업이익은 3300억원에 이른다. ●부친 설득해 한강가에 세운 명품백화점 현대백화점 사람들은 정 회장을 사실상의 창업자라고 말한다. 다른 형제들이야 자동차, 중공업 등 부친이나 삼촌들이 키워온 중후장대한 기업을 물려 받았지만 정 회장의 출발은 그들과 다르다는 설명이다. 현대백화점 한 임원은 “기껏해야 현대건설의 하청업체 수준이었던 회사가 그룹사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85년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을 지으면서다.”고 밝혔다. 현대백화점그룹의 모태가 된 압구정 본점을 짓고 그 이후 이윤을 남겨 1988년 무역점을 짓고 또 다른 백화점을 문여는 등 새 점포가 늘어나면서 지금의 그룹사로 발전된 것이라는 얘기다. 70년대 중반 이후 압구정동은 대규모 현대아파트단지가 들어섬에 따라 건축법상 근린상가를 의무적으로 지어야 했다. 당시 현대아파트의 건설주체인 한국도시개발(현대산업개발)은 롯데, 신세계 등 유통업체에 백화점 진출 의사를 타진했으나 반응은 시큰둥했다. 당시 아파트만 덩그러니 서 있고 배나무 밭으로 황량했던 이 곳은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 누가 봐도 백화점 입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현대가 백화점 사업에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극언을 서슴지 않던 기업인이 있을 정도였다. 이 때 정 회장은 백화점 진출 의사를 밝혔다. 예상대로 그룹 안팎의 반대에 부딪혔다.“현대가 유통경험이 없는 데다 아파트 단지 배후에 한강이 흐르고 백화점 옆에 고가도로(동호대교 연결)가 가로지르는 등 사업 타당성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일본 도쿄에 있는 다카시마야 백화점 후다코다마가와점의 성공을 예로 들며 부친을 적극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 백화점은 현대백화점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강이 흐르고 부촌에 자리잡고 있어 입지 여건이 비슷했다. 정 회장은 청운동 본가를 찾아가 사업 보고서를 보이며 백화점 사업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던 왕 회장도 아들의 집념 어린 설득에 결국 사업 참여를 결심했다. 현대가에서는 이를 두고 “몽근이한테도 이런 사업에 대한 의지와 추진력이 있었느냐.”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때 정 회장의 뚝심이 발휘된다. 다른 유통업체들이 구조조정을 하며 신규 출점을 주저하고 저가 정책을 추진할 때 정 회장은 오히려 거꾸로 가는 정책 결정에 손을 들어줬다.98년 부도위기에 놓인 서울 신촌 그레이스백화점을 인수해 신촌점으로, 울산 주리원 백화점 2곳을 인수해 울산점으로 탄생시키고, 서울 천호점도 문 열었다. 최고급 인테리어와 상품을 앞세워 ‘명품 백화점’임을 일반에 각인시키며 고급화 전략을 폈다. 이같은 정 회장의 역발상 기조에 대해 당시 유통의 흐름을 거슬렀다는 지적도 있지만 내부에서는 이런 정 회장의 정면 돌파형 리더십이 현대백화점의 성공 기반이 됐다고 평가한다. ●삼국지 꿰뚫는 ‘리틀 왕회장’ 정 회장의 이런 일면은 평소 삼국지 등 각종 전략 서적을 즐겨 읽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신규 백화점 출점후 임원들과 갖는 자리에서 ‘적벽대전’ 등 삼국지에 나오는 얘기들을 즐겨 인용한다. 중국 삼국시대 양쯔강 남안에 있는 적벽에서 위나라 조조가 오나라의 손권, 촉나라의 유비 연합군과 치른 전투 내용을 줄줄이 꿰며 승전 전략을 소개한다. 현대백화점의 한 임원은 “정 회장은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 이름과 전투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한다.”고 전했다. 그는 실제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 형상이다. 골격이 큰 몸집에 굳게 다문 입, 솥뚜껑처럼 큰 손과 발은 여지없이 현대가의 혈통을 지닌 남자임을 보여준다. 나이 들면서 얼굴에 돋아나는 검버섯과 걸음걸이를 보면 부친인 왕 회장과 흡사하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세간에는 한때 ‘건강 이상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매일 오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내에 있는 백화점 본사 4층 회장실에 출근, 굵직한 사업의 방향타 역할을 한다. 서울 시내 6개 백화점과 중동점 등 7개 백화점 가운데 하루에 2∼3군데의 백화점을 순시하는 이른바 ‘점 순회’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점포당 30분 정도 걸린다. 비슷한 시간대에 항상 나타나는 정 회장을 보고 매장 직원들이 인사하면 “어잇!”하며 꼭 화답을 한다.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니 직원들도 정 회장을 낯설어 하지 않는다. 매장을 지나다 고객들을 만나면 먼저 지나가도록 자신은 비켜 서는 서비스 정신도 몸에 배었다. 정 회장의 현장 중시 스타일도 부친과 닮은 꼴이다. 백화점 신축 공사 현장에는 늘 그의 발걸음이 닿는다. 공사장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안전모를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왕 회장’을 보는 듯하다고 현대백화점 맨들을 말한다. 그는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대화로 풀 것을 강조한다. 한번은 건설 현장에서 이뤄진 브리핑 도중 간부들간에 이견이 생기자 정 회장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함께 반영되는 것이 최선이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투박한 외모와 달리 자상한 편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얘기한다. 백화점을 둘러보아도 상품이 진열돼 있는 멋진 매장보다 주차장, 식품 작업장 등 구석진 곳을 먼저 찾는다. 어려운 여건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다. 봉투에 넣지도 않고 자신의 지갑에서 20만∼30만원씩 꺼내 “소주에 삼겹살이나 하라.”며 격려금을 건넨다. 다음날 이들을 만나면 “회식 잘 했냐.”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지난해 정 회장 생일에는 시내 모음식점에서 전·현직 임원들을 초청,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이날 정 회장 부부는 물론 장남 지선씨 부부도 나서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또 ‘주차장 제일론’을 갖고 있다. 임원들이 상품과 서비스, 매장 환경을 중요시한다면 정 회장은 임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설은 주차장”임을 내세운다. 현대백화점 목동점·미아점의 주차장 진입로 폭이 다른 백화점과 비교해 훨씬 넓은 것은 여성 고객들을 위해서다. 주차장 하나에도 “고객을 최우선으로 배려하라.”는 정 회장의 경영철학이 담겨있는 셈이다. ●황산덕가(家) 손녀 며느리로 맞아 경복고,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정 회장은 현대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평사원으로 있던 우경숙(54)씨와 결혼, 슬하에 지선(33), 교선(31) 등 2남을 뒀다. 부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여성스러우면서도 야무진 외모에 차분하고 깔끔한 성격의 우씨를 내심 며느리감으로 점찍었다는 후문이다. 우씨의 친정은 평범한 집안으로 부친은 우호식 전 현대그룹 고문이다. 우씨는 중앙여고를 졸업했다. 장남 지선씨는 경복고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현대가 3세들이 대부분 미국 유학파이듯 그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촌형제들 가운데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외아들 의선(35)씨와 가깝다. 아무래도 지선씨가 손아래 동생이다보니 의선씨로부터 사업상 조언을 받는다는 후문이다. 사업외에 여러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다. 지선씨는 고교 동창의 소개로 만난 동갑내기 황서림씨와 2001년 10월 정 회장의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결혼, 장남 창덕(1)군을 두고 있다. 서림씨는 황산덕 전 법무장관의 손녀로 서울예고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성격이 활달하고 대인관계가 좋아 선후배와 교수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고 기억했다. 지난 97년 삼성문화재단이 선정한 문화예술인재로 뽑혀 장학금을 받으며 미국 뉴욕대에서 미술관 경영을 전공했다.99년부터 1년간 세계 3대 미술관 중의 하나인 뉴욕 근대미술관 뉴미디어 부서에서 부지배인을 맡았고,2000년 3월부터 5개월 동안 세계적인 일본 멀티미디어 작가 마리코 모리의 스튜디오 조교를 지냈다.2000년 7월부터 뉴미디어와 교육 인터넷사이트에서 웹 프로듀서로 근무하기도 했다. 지선씨는 서림씨를 처음 보는 순간 아내로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특히 밝고 쾌활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서림씨 역시 정 부회장의 과묵하고 남자다운 면이 좋았다고 한다. 교선씨는 경복고, 외국어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 아델파이대에서 경영학석사를 땄다. 대학시절 청바지와 면티를 입고 다니는 등 소탈하게 생활해 같은 학과 친구들조차 그가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현대가의 3세라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다.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들에 따르면 지갑에 돈도 별로 없이 구내식당에서 밥먹고 버스를 몇번씩 갈아타고 통학하는 등 검소한 생활을 했다. 부드러운 성격에 논리도 갖춰 친구들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 중재역할을 맡곤 했다. 한때 미대 진학을 고려 했을 정도로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대원강업 허재철 부회장의 2녀 중 장녀인 승원(30)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승원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대 치과대에 다녔던 재원이다. 교선씨와 승원씨는 학교가 같은 미국 뉴욕에 있어 유학시절 자연스럽게 1년6개월 정도 사귀었다. 현대가와 사돈을 맺은 허 부회장은 32년간 스프링과 차량 시트 등 자동차 소재의 국산화에 앞장선 자동차 부품 전문기업인 대원강업의 오너겸 전문경영인이다. 연 매출 3600억원 정도다. ●현대백화점 이끄는 파워 엘리트 하원만 현대백화점사장은 1978년 입사해 기획·관리·영업·구매·마케팅 등 백화점 업무를 두루 거쳐 2003년 1월 현대백화점 사장에 오른 백화점통이다.“백화점은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생활문화를 제안하는 곳”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 다른 업체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라이프 스타일리스트 현대백화점’을 새 전략으로 내걸고 있다 부드러운 외모이지만 승부욕과 추진력을 갖췄다는 평이다.“음식재료나 요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식품 책임자를 할 수 있냐.”며 지난해 식품 책임자 전원을 요리학원에 다니게 했다. 또 여성 심리를 모르고는 유통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며 직원들에게 여성 심리를 알 수 있는 책 읽기와 ‘엄마를 잡아라’나 ‘왓 위민 원트’와 같은 영화 감상도 권하는 섬세한 스타일이다. 지난해 백화점협회장으로 취임, 일본백화점협회와의 68년 만의 교류방문 등을 펼치고 있다. 경청호 현대백화점 기획조정본부 사장은 영업·관리·기획 등 백화점의 주요 포스트를 두루 거쳤다.2003년 부사장을 달고 현대백화점그룹 경영지원실장을 맡아오다 지난 1월 경영지원실의 기능과 역할이 대폭 강화되면서 기획조정본부 사장을 맡고 있다. 기획조정본부는 그룹내 투자·인사 등 주요 핵심 업무를 조정, 통합하는 조직으로 다른 대기업의 구조조정본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최근 경기침체로 인한 유통업계 불황 타개를 위해 구조조정의 중추적 역할을 맡기도 했다. 회사내 권위, 형식, 온정주의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 사장은 평소 메모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기억력이 비상해 보고하는 임직원들이 땀을 흘릴 정도다. 열가지 사안을 한가지로 압축해 신속정확히 처리하는 업무방식과 건강 및 체력관리 등 자기관리가 워낙 치밀해 빈틈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간부들과 소줏잔을 기울이는 회식자리에서는 위트나 유머로 웃음바다를 만들곤 해 인간적 매력도 있다는 평이다. 김태석 현대백화점 H&S·현대푸드시스템 사장은 78년 현대백화점에 입사해 경리·회계·재무 등 관리 및 지원업무를 거쳤다. 지난해 말까지 백화점 영업본부장직을 맡다가 올부터 현대백화점H&S와 현대푸드시스템의 대표이사 사장직을 맡고 있다. 김 사장은 일, 생활 모든 면에서 폭이 넓은 CEO이다. 특히 진솔한 대화를 통한 친화력있는 리더십이 돋보인다. 일본 전국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를 다룬 ‘대망’을 임직원들의 필독서로 권한다. 김 사장은 임직원들이 자기 업무에 자긍심을 가질 것과 직무에 필요한 다양한 자격증 취득을 독려하는 등 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광균(부사장) 한국물류 대표는 74년 현대그룹에 입사, 현대백화점 천호점장·무역센터점장·현대백화점 H&S 대표이사를 거쳤다. 낙후된 물류 시스템을 바꿔 유통 경쟁력을 높이는 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반백의 머리와 걸쭉한 목소리로 처음 만나는 사람도 오랜 지기처럼 느껴지게 하는 친화력을 갖고 있다. 홍성원(부사장) 현대홈쇼핑 대표는 현대그룹 종합기획실 출신으로 ‘열린 CEO’라는 의견수렴 제도를 운영, 현대홈쇼핑의 무형상품 경쟁력을 높이는 데 성공했으며, 홈쇼핑업계의 후발주자로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일 새벽 집 근처 산 바위에 앉아 하는 명상으로 하루를 연다. 명상에서 얻은 업무 관련 아이디어를 감성적으로 표현한 일일쪽지를 이메일 형태로 아침마다 전직원에게 보내 새로운 업무 활력을 제공한다. 최신 유행가도 따라 부르고 패션 감각을 갖고 있으며 젊은 직원들과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다. bori@seoul.co.kr ■ 장남은 백화점, 차남은 H&S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의 후계 구도는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정 회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두 아들에게 백화점 관련 주식을 증여하며 자신의 지분을 계속 축소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장남 지선(33)씨는 현대백화점 지분 15.72%에 현대푸드시스템의 현대백화점 지분 4.3%를 더해 사실상 20.02%의 백화점 지분을 확보, 최대 주주가 됐다. 차남 교선(31)씨도 지난해 처음으로 부친으로부터 현대백화점 H&S의 주식 56만주(10%)를 증여받아 2대 주주가 됐다. 지선씨는 현대백화점, 교선씨는 현대백화점 H&S로 형제간에 경영권 관할이 가시화된 것이다. 현대백화점 H&S는 여행사 현대드림투어와 기업들의 명절 선물사업을 하는 백화점 특수판매 회사로 이뤄져 있다. 지선씨는 2001년 현대백화점 기획실장(이사)으로 기획·인사·재무·조직관리 등 핵심 업무를 두루 맡아왔다.2003년에는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부회장 직함을 달면서 지선씨는 전문 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던 백화점 경영에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백화점 등 계열사들을 세차례에 나눠 한달에 한번씩 경영전략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계열사의 투자·인사는 물론 업무 조정·통합 역할까지 진두지휘한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외부에서는 여전히 경영수업 중이라고 생각하지만 정 부회장은 실질적으로 그룹 경영 전반에 걸쳐 부회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선씨는 부회장이 되자 마자 어려움에 처했다. 경기침체로 백화점 업계가 불황을 겪으면서 현대백화점은 다른 유통업체와 달리 할인점이 없는 사업구조와 신규사업 진출 부진으로 미래 성장성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 부회장은 최근 회사의 미래성장 엔진 발굴에 적극적인 자세를 강조한다.“유통이든 유통이 아니든 수익을 내 회사에 도움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신사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검토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회사 역량 강화를 위해 외부 자문도 구하라.”는 제안도 했다. 그렇지만 “사업을 하다보면 구름도 끼고 햇볕도 드는 것”이라면서 자신감을 보이기도 한다. 또 지난 1월 조직개편을 단행, 기존의 경영지원실을 기획조정본부로 승격시키며 조직 장악에 나섰다. 사회공헌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최근 경영전략회의에서 ‘매칭그랜트’제도 도입을 지시하기도 했다. 임직원이 매달 봉급에서 일정 금액을 자발적으로 기부하면 회사에서도 그만큼의 금액을 출연해 사회공헌기금을 마련하는 이 제도는 유통업계에서는 처음 시도됐다. 정 부회장은 사내에서 “과묵하면서도 매우 꼼꼼하고 생각이 깊다.”는 평을 듣는다. 주요 회의에서도 다른 임원들의 의견을 경청한 뒤에 소신껏 자기 의견을 제시한다. 소수의견이라도 타당성이 있으면 흔쾌히 수용하고 정책방향을 수정하는 합리적인 스타일이다. 정 부회장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는다. 올해 계열사별 신년 업무 브리핑 이후 간부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아버님은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얘기를 듣는 스타일로 나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커뮤니케이터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웬만해서 지치지 않는 강인한 체력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다. 동생 교선씨는 지난해 1월 경영지원실 산하 경영관리팀장(부장)을 맡은 데 이어 올해 기획조정본부 기획담당 이사로 경영 수업을 하고 있다. 일을 배우는 단계여서인지 매사에 열심이다. 형 지선씨보다 선이 굵고 상당히 활동적인 성격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이들 형제는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사 사무실 4층에서 나란히 근무하고 있다. bori@seoul.co.kr ■ ’숨은 실세’ 우경숙 고문 정몽근 회장의 부인 우경숙(54) 고문은 현대가의 다른 며느리들과 달리 회사 경영에 참여한 활동파다. 현대가의 딸과 며느리들이 대부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시로 소리없이 문밖 출입을 했던 집안 분위기를 감안할 때 상당히 이례적인 케이스다. 훗날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경영전면에 나선 것과도 사뭇 다르다. 우 고문은 사실 정 회장과 결혼후 현대가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남편을 내조하는 전형적인 주부에 머물렀다. ●비서실 근무하다 며느리 낙점 현대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현대가에 시집와서인지 우 고문은 시부모를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본격적인 백화점 사업을 하기 전인 70년대 후반 울산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시절, 우 고문은 수시로 울산 방어진 수산시장에서 ‘참전복’을 공수해 청운동 본가로 보냈다.“정말 복 덩어리 음식이 참전복인 만큼 어른들 건강에 좋다.”며 살이 통통한 자연산만 고집했다. 잘 익은 제철 과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가정사에만 신경쓰던 당시 우 고문의 대외 활동이래야 1985년 백화점사업을 시작하기 전 서울 압구정동 본사의 작은 건물 직원식당에서 창립기념일 등에 참석하는 수준이었다. 우 고문은 회사 행사에서 시어머니인 변중석 여사와 함께 임직원들에게 직접 떡과 과일 등을 담아주는 일을 했다고 당시 직원들을 기억한다. 그러던 우 고문은 백화점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 96년까지 우고문은 상무 직급을 달고 현대백화점의 신상품 개발 담당 업무를 맡았다. 유통업계 후발주자인 현대백화점으로서는 롯데, 신세계백화점과 경쟁하기 위해 고급화·차별화 전략이 절실했던 시기다. 그래서 백화점 PB(자체브랜드)개발에 주력했다. 상품개발부 직원 30여명과 함께 그가 개발한 자체브랜드는 ‘시그너스’‘벨라지’‘아르모니아’ 등이다. 특히 아르모니아는 강남의 전문직 여성들 사이에 한때 붐을 일으킬 정도로 히트를 쳤다. 96년에는 전세계에 10개의 매장만 운영할 정도로 신규 매장 출점에 까다로운 이탈리아 하이패션 브랜드 ‘지비에르돈나’를 압구정점에 유치하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명품 브랜드 유치 수완도 당시 상품개발 부문에서 같이 일했던 직원들로부터 우 고문은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패션을 보는 안목과 미적 감각이 남다르다.”는 평을 들었다. 계절에 앞서 주력 상품을 고르는 과정에도 직접 참여하고 의견을 내놓아 담당 바이어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틈틈이 집에서 그리는 서양화 실력은 수준급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나면 미술전이나 각종 전시회를 찾는 것도 우 고문의 패션 센스와 맥을 같이 한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얘기다. 그는 최근 몇년사이 점포수 확대와 홈쇼핑 등 사업 다각화가 이뤄지고, 현대백화점이 현대백화점 H&S와 분할되는 과정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계열사간 투자, 인사에 관한 업무조정 및 중재가 필요한 시기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역할이 부각됐던 것이다. 때문에 그룹 안팎에서는 ‘우씨’집안에서 백화점 경영을 섭정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2003년 장남인 지선씨가 그룹 부회장을 맡으면서 우 고문에게 쏠리던 시선은 상당 부분 거두어졌다. 온화한 성품이지만 장남의 후계구도를 굳히는 과정에서 우 고문의 역할이 다소 과장되면서 실제 이미지와는 다르게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두 아들이 경영에 적극 참여하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다만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 사무실을 두고 이곳에서 지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백화점 분위기도 살핀다. 가끔 백화점 영업이나 환경에 대해 세심한 조언을 해 매장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다.500평 규모의 현대백화점 본점 옥상을 잔디공원으로 바꿔 고객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토록 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지난해부터 백화점 직원과 협력사원이 함께 하는 지역 사회단체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우 고문이 제안했다는 후문이다. bor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토요일 아침에] 다시 낙산사를 생각하며/원철스님 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아! 성지가 저렇게 없어지는 것이구나. 복원능력이 없다면 그대로 폐사지가 되겠구나.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예전에는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없어졌겠구나. 그 백두대간을 가로질러 칼바람이 미친 듯이 부는 날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면서 넋두리처럼 내뱉은 말들이다. 공양간에서 ‘밥맛을 모르겠다.’는 노스님의 한마디는 그날 아픔의 또 다른 표현이다. 꽃을 피워야 할 봄바람이 소나무를 쓰러지게 하는 광풍이 되었고 낙가산은 산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는 개골산이 되어버렸다. 십여년 전에 스승을 모시고 도반들과 중국의 보타낙가산 불긍거 관음원을 참배한 적이 있다. 영파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이었다. 그 바닷가는 우리의 낙산사 그리고 홍련암과 너무도 닮아 있어 남의 나라 땅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관음진신이 출현하였다는 글씨가 기록된 그 바위 근처에서 일부러 한참을 서성거리면서 바다 너머로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동쪽 끝에 있는 우리의 낙산관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낯선 땅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낯섦을 지금 정말 느끼고 있다. 그건 현재 남아있는 낙산사가 나를 참으로 낯설게 했기 때문이다. 처음의 황망함은 시간이 지나가니 이제 좀 냉정해지고 모든 걸 차분히 돌아보게 된다. 정말 그 낙산사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하지만 사실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도드라지게 드러난 성지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오히려 지금 그 화려한 화장을 다 지워버린 맨 얼굴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이제 마음의 눈으로 성지를 바라볼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제 육안(肉眼)으로만 성지를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심안(心眼)으로 바라보고 싶다. 물론 지혜로운 이는 육안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하고 심안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성지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성지와 마음으로 보는 성지가 항상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항상 육안으로 보는 것에만 너무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걸 너무 당연히 여긴 나머지 그게 집착인 줄조차 몰랐다. 이제 저 타버린 까만 솔밭 속에서도 심안으로 성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또 다른 나의 눈이 존재하고 있음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날 인근 산과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집과 논밭과 살림살이와 모든 것들이 타고 있었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했을 뿐이다. 이제 그들이 원래대로 몸과 마음과 생활기반이 복구되고 그들의 고통이 끝나면 우리의 고통도 자연스럽게 끝날 것이다. 수행자로서 신심이 바닥을 향해 달리고 또 공부길이 막힐 때면 늘 터만 남은 폐사지를 찾곤 했다. 그 자리에서 무상(無常)을 체험하고 또 발심(發心)의 계기를 통해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하곤 했다. 그 옛날 저 큰 절터들의 탑과 당간지주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그 황량함 속에서 ‘모든 것은 변해가는 것이니 절대로 방일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곤 했다. 빈 마음은 모든 걸 원점에서, 다시금 순수함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우리는 잘나갈 때에도 항상 어려운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삶의 화려함 속에서도 소박한 본래 모습은 잃지 말아야 한다. 넘쳐나는 물질의 풍부함 속에서도 모자랄 때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의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잊고서 살기가 쉽다. 반대로 타버림의 절망 속에서도 미래의 희망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낙담 속에서도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퇴굴심 속에서도 부단없는 용맹심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이제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성지를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육안으로도 볼 수 있도록 힘을 모아 가꾸어 내는 일만 남았다. 그동안 혹 군살이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과감하게 털어내야 한다. 그리고 성지가 가져야 하는 단순·절제의 미를 한껏 드러내는 그런 기회를 제대로 살려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또 다른 문화적 전환점 위에 서있다고 하겠다. 원철스님 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 교외선 기차타고 춘천가볼까

    교외선 기차타고 춘천가볼까

    ‘교외선 기차를 탈까, 아니면 해변 드라이브를 즐길까.’살랑대는 봄꽃 향기에 연인들이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겨우내 답답한 도심 카페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연인들에게 기다리던 도심 탈출의 시간이 찾아왔기 때문. 도심을 벗어나 푸른 강변을 따라 자전거 하이킹을 즐겨도 좋고, 한적한 꽃길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여도 좋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찬바람에 꽁꽁 얼었던 ‘러브지수’를 업시킬 수 있는 데이트 명소를 잘 골라야 금상첨화. 봄맞이 데이트로 고민하는 연인들을 위해 멋진 당일 데이트 코스 두 곳을 다녀왔다. 춘천은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바뀌어도 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도시. 교외선 기차를 타고 떠나는 데이트에는 아직도 낭만이 넘친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충남 보령은 드라이브에 제격인 곳. 무창포에 가면 ‘모세의 기적’처럼 매달 보름과 그믐 사리를 전후해 바닷물이 갈라져 신비함을 맛볼 수 있다. 연인들을 위해 준비된 봄. 입맛따라 골라 떠나 보자. ■ 기차게 ‘춘천 1박작전’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도시는 역시 춘천이다. 작고 깨끗한 춘천은 낭만적이라 추억을 만들기엔 이만큼 좋은 곳이 없다. 4월의 내 사랑이 숨쉬는 곳, 춘천가는 기차를 타고 가자! ●기차는 사랑을 싣고 토요일 아침 청량리역 시계탑 앞은 연인을 기다리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7시50분,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MP3의 이어폰을 하나씩 나누어 끼고 음악을 듣거나 PMP를 같이 보는 연인들로 기차의 공기마저 달콤하다. 팁:기차요금 5200원.30일 전부터 예매 가능. ●알콩달콩한 속삭임 남춘천역에 도착한 9시50분. 남춘천역 근처의 공지천 유원지와 중도는 걸어서 10분정도. 택시는 기본요금(1500원) 거리. 시원한 호수와 그 위에 떠있는 중도, 곳곳에 서있는 조각들. 여기서 연인이라면 얼마든지 ‘이쁜 척’해도 좋다. 디카나 휴대전화로 추억을 만드는 연인들은 서로 경쟁하듯 행복한 시간을 연출한다. 또 호숫가 앞 보트장에선 봄햇살을 즐길 수 있다.2인기준 시간당 8000원.100원의 분수쇼가 기쁨을 배로 늘린다.100원을 넣고 빨리 그녀의 옆에 앉으면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는 환상의 분수쇼를 감상할 수 있다.1분이란 짧은 시간이 즐거움을 몇 배 더 키워준다. 공지천유원지에서 자전거를 빌릴 차례. 조각공원과 어린이회관을 자전거로 둘러보고 내친김에 자전거를 배에 싣고 중도로 들어가면 된다.1인용은 시간당 3000원,2인용은 5000원. 2인용을 빌렸다면 이제부터 새털처럼 가벼운 그녀의 무게를 몸소 느낄 수 있다. 자전거로 10분거리의 어린이회관이 있고 5분만 더 가면 중도유원지로 들어가는 배를 탈 수 있는 삼천동 선착장이다. 중도 입장료와 배삯을 합쳐 어른 4300원, 청소년 3700원(학생증 지참). 자전거를 가지고 가면 1대당 1000원을 더 내야 한다. 눈부신 의암호를 약 10분간 가로지르면 중도로 갈 수 있다. 팁:배는 오전 9시부터 30분 간격. ●사랑은 영화처럼 잠깐이지만 배를 타면 더 낭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중도에 내리자마자 연인들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왕자와 공주를 꿈꾸며 단숨에 마차에 오른 것이다. 제일 먼저 ‘겨울연가’와 ‘유리화’를 촬영한 곳을 찾아야 한다. 김하늘이 앉았던 벤치에 앉아 사진을 찍는 것은 기본 코스. 사랑의 밀어가 익어간다. 또 중도에선 자전거 길을 달려봐야 한다.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강과 길, 바로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자전거길 오른편에는 호수를 바라보고 서 있는 예쁜 펜션. 나무로 지어진 펜션창을 통해 강을 내다보는 것도 멋지다. ●쫄깃, 달콤, 부드러운 춘천의 맛 점심은 당연히 춘천의 명물 닭갈비를 먹어야 한다. 공지천유원지에서 자전거를 반납하고 중앙로터리에 있는 닭갈비골목으로 향한다. 걸어서 15분, 택시로는 기본요금 거리. 단 택시를 부를 경우,1000원을 더 내야한다. 팁:콜택시는 강원콜서비스센터(033-264-1255), 그린 콜(033-244-0058), 춘천개인콜(033-255-2828), 시민콜(033-251-8257)가 있다. 명동의 닭갈비골목에 들어서면 매콤, 달콤한 냄새에 우선 취하게 된다.35년이나 같은 자리를 지킨 우미닭갈비(033-253-2428)를 찾았다. 커다란 불판에 가득 담긴 닭갈비와 떡사리, 고구마, 양배추가 푸짐한 춘천 인심을 느끼게 한다. 역시 원조는 다르다. 큼직큼직한 닭고기가 부드럽고 배인 양념이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다. 연인이라면 1인분을 시키고 사리를 추가해서 먹으면 된다.1인분 8500원.1만원이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소양호를 따라 청평사로 오후 2시30분. 일단 버스를 타고 소양호로 떠난다. 중앙로터리를 건너 인성병원 앞으로 가면 소양댐까지 가는 버스(12번)가 있다. 버스삯 950원. 소양호 선착장을 떠난 배가 봄 호수의 물살을 가른다.10분 후, 배는 청평사 선착장에 도착했다. 청평사는 고려때 창건된 절로 구성폭포에서부터 오봉산 정상까지에 이르기까지 3㎞의 산자락이 잘 꾸며진 정원 같다. 곳곳에 놓인 돌탑에 조심스레 돌을 얹어놓는 연인들은 사랑이 영원하기를 빌었을까. 나도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돌을 하나 올려놨다. 아홉 가지의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는 구성폭포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정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영지가 유명하다. 높이 7m의 구성폭포는 상사뱀에 얽힌 전설이 깃들어 있다. 또 폭포 위쪽 전망 좋은 능선 바위에 세워진 공주탑도 들러보자. 청평사 회전문에 도착했다. “어디 회전문이 있어?” 두런두런 주고받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스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문이라 설명해 준다.“청평사의 회전문은 중생들에게 윤회의 전생을 깨우치기 위한 ‘마음의 문’이랍니다.” 1000번의 생을 거쳐야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말을 연인들은 새겼을까. 5시10분 막배를 타기 위해선 조금 서둘러야 한다. 다시 춘천으로 돌아온다. 팁:명동 인성병원 앞에서 11,12,12-1번 버스가 소양댐으로 간다. 일반버스는 950원, 좌석은 1300원. 보통 20분 정도에 한번씩 운행하며 50분 정도 걸린다. 소양댐 선착장에서 배는 10분 정도, 왕복 4000원. 오전 9시30분터 오후 5시까지 30분에 한 대씩 운행. 청평사에서는 오후 5시10분이 막배. 선착장(033-242-2455). ●황홀한 야경에 빠져 커다란 호수 저편으로 붉게 넘어가는 저녁놀을 그녀와, 그이와 함께 본다면 자연스럽게 어깨에 기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봉산의 야경을 빼놓을 순 없다. 패러글라이딩장으로도 유명한 구봉산은 소양댐에서 춘천으로 나오는 버스를 타고 세월교(콧구멍다리)에서 내려 택시를 이용한다. 택시로는 20분 거리, 보통 5000원 정도. 붉게 물드는 의암호의 아름다움에 취해 하나둘씩 불을 밝히는 춘천 야경에 취해 그녀의 향기에 취해 구봉산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팁:세월교에서 춘천시내로 가는 버스는 밤 11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있다. 혹시 구봉산 전망대에서 나오는 택시가 없으면 택시를 부를 수도 있다. 춘천역까지 1만 5000원. ●돌아오는 기차에서 이제 밤 8시가 넘었다. 밤 9시50분 막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가야 한다. 춘천에서의 긴∼ 하루가 지나간다.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었던 하루다. 다음에, 다음에 오늘의 춘천여행을 기억하겠지. 글 사진 춘천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조용섭의 산으路] 안성 칠장산

    [조용섭의 산으路] 안성 칠장산

    숲이 소란스러워졌다. 연노랑 생강나무부터 물들기 시작한 4월의 산자락에는 이제 진달래와 제비꽃, 양지꽃 무리 등 풀꽃들까지 가세해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며 재잘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때 가벼운 봄나들이 가족산행을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수도권에서 그런 산행을 하기에는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492m)이 안성맞춤이다. 산길은 안성시 죽산면 칠장사에서 시작하여 칠장산에 오른 뒤, 칠현산~덕성산을 거쳐 경기도 안성과 충북 진천을 가르는 도계 능선으로 내려서서 진천 광혜원면 성당으로 하산하는 코스로 잡았다. 칠장산은 해발고도 500m에도 못 미치는 낮은 산이지만 한남정맥, 금북정맥, 한남금북정맥의 마루금들이 갈라서는 분기점으로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칠장산에서 덕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바로 금강 북쪽의 울타리를 이루는 금북정맥 구간. 충남 서산의 팔봉산으로 이어지며 서해에서 산줄기를 마감한다. 들머리인 칠장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고찰로 혜소국사비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으며 궁예·임꺽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현판에는 ‘칠현산 칠장사’로 새겨져 있다. 절 왼쪽 나한전 쪽에서 열려 있는 산길은 부드러운 흙길로 잘 나 있으며, 거리도 짧고 경사도 완만해 너무나도 쉽게 오를 수 있다. 맨발로 산행하는 사람들도 가끔씩 눈에 띈다.20여분만 오르면 금북정맥인 능선 삼거리에 닿으며, 오른쪽 칠장산을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 와야 한다. 전국의 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표지리본이 많이 달려 있고, 부산의 건건산악회에서 세워놓은 이정표에서 산사람들의 열정이 느껴진다. 잠시 오르면 나오는 헬기장옆 나무에 칠장산이라는 조그만 플라스틱 팻말이 걸려있고, 조금 더 진행하면 나오는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가 마루금의 분기점이 된다. 봉우리의 바위와 자그마한 팻말에 관해봉이라고 써 놓았다. 이제 조금 전 올랐던 삼거리로 되돌아 내려서며 칠현산쪽으로 향한다. 이정표도 잘 만들어 놓았고 산길도 외길로 넓게 나 있어 길찾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 칠장사에서 능선 삼거리 되돌아오기까지 약 50분이 걸린다. 돌탑과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칠현산까지는 삼거리에서 50여분 소요된다. 가벼운 산행으로 마무리 지으려면 이 곳에서 동쪽 명적암으로 내려서면 된다. 하산은 1시간 남짓 소요되는데 칠장사 가기 전 도로로 이어진다. 금북정맥과 도경계능선의 갈림길 이정표의 병무관 방향으로 100여m 올라서면 역시 돌탑과 정상석이 있는 덕성산에 닿는다. 금북정맥길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소나무가 몇그루 서 있는 덕성산 정상은 조망도 괜찮은 편이고 지나온 능선과 이어지는 금북정맥도 한눈에 들어온다. 칠현산에서 약 1시간 소요. 하산은 병무관 방향의 도경계능선으로 하며, 약 20분 진행하면 나오는 갈림길에서 오른쪽 지능선, 역시 이정표의 병무관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 능선을 끝까지 내려서면 산행종료지점인 광혜원 성당이 나온다. 덕성산에서 약 1시간40분 소요되며, 터미널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자가용으로 갈 경우 중부고속도로 일죽 IC에서 빠져 나와 38번 국도와 진천방향의 17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경부고속도로의 경우 안성 IC에서 나와 38번 국도와 17번 국도로 이동하면 된다. 하산 후 차량회수는 광혜원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요금 8000원·택시 043-535-3254,043-535-0050). 대중교통은 안성에서 죽산으로 이동 후, 칠장사행 완행버스를 갈아탄다(하루 4회 운행). 공도면, 대덕면 등의 배꽃이 화사하다. 안성시 봉산동 남사당 바우덕이 공연 등(안성시 문화관광 031-678-2068).
  • 儒林(325)-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25)-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고반(考槃). 이는 은둔할 곳을 마련하여 유유자적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또 한편으론 쟁반을 두드리면서 노래에 장단을 맞추는 행위를 말함이다. 퇴계는 이를 ‘은둔하는 높은 선비가 강의하는 곳’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단양에 군수를 하고 있을 무렵 바로 고반을 꿈꾸고 이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환향하여 도산서원을 짓기 시작하였던 것은 바로 자신의 손으로 ‘고반’을 완성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도산서원을 ‘고반’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10년에 걸쳐 60세에 도산서원을 완성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바위벼랑에 꽃은 피어 봄날은 고요하고 새는 시냇가 나무 위에서 울고 물결은 잠잠하구나. 우연히 젊은 제자들과 산 뒤를 돌아서한가로이 산 밑에 이르러 고반을 찾노라.” 퇴계에 있어 성현, 특히 공자의 가르침은 인생의 교훈이었다. 따라서 퇴계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성인이 가르침을 줄 때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터인데, 성인의 말씀은 저와 같고 나의 생각은 이와 같다면 이것은 곧 나의 노력이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퇴계는 이처럼 성현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욕망을 경계하였으며, 내면의 마음을 바로잡고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퇴계는 옛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또한 이를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고반을 꿈꾸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이상향(理想鄕)이 바로 도산서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마음을 도향은 눈치 채고 있었다. 두향은 퇴계가 풍기의 군수를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 고반을 짓고 은둔생활을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향은 또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것 역시 시경에 나오는 다른 노래였으나 이는 먼저 번의 노래보다 더 애절하고 애틋한 사랑노래였다. “즐겁게 산골짜기에 숨어 지내니, 큰사람의 너그러움이라./갈대는 우거지고 흰 이슬 서리되었네. 사랑하는 우리 님은 강 건너에 산다네./님의 마음 너그러워라. 물굽이를 건너자니 험한 길 멀기도 하여라. 넓은 여울로 건너자니,/강 가운데 멎겠구나. 홀로 잠들고 홀로 말하니, 이 뜻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이 뜻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考槃在澗碩人之寬 兼假蒼蒼白露爲霜 所謂伊人在水一方 碩人之寬遡廻從之 道阻且長遡遊從之 宛在水中央獨寐寤言 永矢勿暄永矢勿暄)” 노래를 부르던 두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멈췄다. 그 대신 가녀린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두향의 노래는 상사별곡이었다. 사랑하는 님이 지척지간인 강 건너로 떠나간다 하여도 찾아가려면 험한 길이 멀기도 하고 여울을 건넌다고 하더라도 강 가운데서 멎을 수밖에 없음을 탄식하는 이별가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 한번의 별리로 영원히 끊어지게 될 것이며, 이제는 홀로 잠들고, 홀로 말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잊지 않음을 맹세하는 단심가(丹心歌)이기도 했던 것이다. 두향은 흐느낌을 애써 자제하고 있었다. 퇴계 역시 입을 열어 두향의 슬픔을 달래지 아니하였으나 퇴계에 있어서도 이별은 살을 찢는 고통이었다.
  • ‘계란으로 바위치기’ 의료소송

    ‘계란으로 바위치기’ 의료소송

    “우리나라 법치의 치명적인 사각지대를 아십니까? 바로 의료사고 피해자들에게 법과 제도가 덤터기 씌우는 부당한 판정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고통입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의료사고 말입니다.”의료사고. 병을 고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더 큰 병을 얻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를 이르는 이 말이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선고’나 ‘파국’의 다른 말쯤으로 각인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렇듯 의료사고는 우리 사회에 비일비재한 일방통행식 폭력의 성향을 갖는다. 이 공공연한 폭력성은 대부분 제도권 내에서 형성된 ‘침묵의 카르텔’이 주도해 왔으며 피해자는 힘없는 ‘개인’들이었다. 그 ‘개인’들이 이제야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그들이 뭉쳐 제도권 내에서 공공연히 빚어지는 의료사고의 가해자 찾기에 나선 것. 지난 9일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여성플라자에서는 의료소비자의 주권과 참의료 실현, 의료사고 예방을 위해 결성된 ‘의료소비자 시민연대(의시연)’ 출범식이 있었다. 이 단체는 지난 2001년 몇몇 의료사고 피해자와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회 인사들이 모여 만든 ‘의료사고 시민연합’이 모태가 됐다. 이 단체 출범의 산파 역할을 한 강태언(42) 의시연 사무국장을 만났다. 그는 우리 사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더 이상 이런 폭력이 없어야 하며, 있다면 그 진실이 한 점 의혹없이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의료사고가 갈수록 늘고 있으나 공정한 법적 절차에 의해 피해를 구제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며 “정부에서도 이 사안을 쉬쉬하며 덮으려고만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제시하는 우리의 의료사고 현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부와 의료계에서는 설문과 의료소송 관련 감정신청 건수, 의료분쟁 관련 민원을 종합해 연간 5000건 정도 될 것으로 보고 있으나, 미국의 경우 2000년 병원 입원환자 중 최고 9만 8000명 가량이 의료 과실로 사망한 점 등을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연간 50만건, 많게는 100만건의 의료사고가 발생할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물론 통계는 없다. 의료사고는 병원과 의료인의 부적절한 치료행위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병원 내 감염, 응급의료사고, 약물에 의한 약화사고 등을 모두 포함한 개념인데, 본인이 모르는 경우도 허다해 통계 산출이 어렵고, 그나마 국가기관에서 그런 실태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병원 감염사고만 해도 그렇다. 우리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미국에서도 연간 200만명 이상이 병원에서 감염돼 이중 10% 정도는 목숨을 잃고, 여기에 지출되는 사회적 비용도 연간 50억 달러를 넘는다. 우리나라도 응급실에서 숨지는 환자 2명 중 1명은 죽지 않아야 될 사람으로 보이는데, 이는 병원들이 수익을 내세워 응급실에 전문의 대신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집중 배치해서 생기는 오진과 응급처치 과실 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도 지난 95년 의료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었다.6년간의 소송 끝에 본안소송과 의료비 소송을 모두 이겼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더는 되새기고 싶지 않다며 이해를 구했다. 강 국장은 현재의 법원 판결에서 드러난 문제도 지적했다.“재판부가 전문적인 의료지식이 없어 사안에 대해 외부에 감정을 의뢰하는데, 여기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의사들이다. 그러다 보니 뻔한 사안, 즉 일주일이면 나올 감정의견이 1년 후에 나오기도 하고, 의사들도 대부분 진실 규명에 비협조적이다. 어차피 같은 부류인데 자신들에게 불리한 판례는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의사조직의 폐쇄성도 의사들의 양심적인 감정을 막는 장애물이다. 게다가 판결에 절대적인 증거도 거의 병원 측이 독점하고 있어 여기에 개인이 맞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상황이 이런 데도 대책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의료분쟁 조정제도가 있지만 이 제도가 병원이나 의사들에 의해 악용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재판 과정에서 병원측 과실이 드러날 상황이면 병원이나 의사들은 기를 쓰고 이 제도를 이용하려고 든다. 재밌는 현상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판례를 만들기보다 차라리 조정안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 89년 의료인들이 주축이 되어 제안한 의료분쟁조정법도 16년째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그 법안이 또 웃긴다. 이게 무과실 보상제 등 의료인들 보호에 편중돼 의사와 병원 안전에만 포커스를 맞춰 놨는데, 그러고도 이걸 통과시키지 못해 14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자동폐기됐다. 아마 이 법안이 채택됐다면 엄청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대책이 없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더 이상 의료분쟁의 감정을 같은 부류인 의사들에게만 맡겨서는 안된다. 당연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감정 기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의지만 있으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것 말고 공정성을 담보할 대책은 없다. 또 사실상 치외법권 지역인 병원 응급실과 수술실, 중환자실에도 흔한 CC-TV를 설치해야 한다. 의료분쟁에 있어 사실은 어떤 주장이나 논리보다 중요한 것 아닌가. 이렇게 한 뒤에 의사들이 면책논리를 내세워야 설득력이 있다.” 그는 이런 견해도 내놨다.“특히 잦은 분만 사고의 경우 태아 심박동그래프기록만 보면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우리나라는 이의 법정 제출을 의무화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명백한 의료과실로, 의사가 잘못을 인정한 사안조차도 재판에서는 병원이 이긴다. 의료 사고로 미숙아가 됐는데, 재판부는 미숙아여서 생긴 문제라고 보는 식이다. 이 때문에 가슴을 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더는 우리 사회에 돈과 권력의 ‘카르텔’이 자행하는 의료사고라는 폭력은 없어야 한다는 그는 대부분의 의료사고와 분쟁이 의사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인 만큼 앞으로 이를 바로 잡는데 주력하겠다는 각오를 피력했다. 그는 조카를 의료사고로 잃은 한 젊은 의사의 편지를 소개하며 말을 맺었다. 한사코 공개를 꺼린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소송을 진행해 오면서 의사협회의 제 식구 감싸기식 객관성이 결여된 답변 내용, 피고 의사의 파렴치한 거짓말, 사고 조작 등에 대한 분노가 극에 치달아…. 젊기에 분노했고, 의사였기에 의사의 잘못과 파렴치한 변명을 쉽게 알아채고 더 철저하게 따져왔지만 넘을 수 없는 산을 만난 뒤 오히려 더 쉽게, 더 크게 좌절하고….”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아들 뇌병변 장애 4년소송 패소한 송인주씨 송인주(여·40·가명)씨는 지난해 11월 자신이 제기한 의료분쟁 소송에서 패소했다. 지난 2001년 2월에 낸 아들 유섭(7·가명)의 뇌병변장애가 의료진의 과실이라며 마산 F병원(현재는 창원으로 이전)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은 병원측 손을 들어줬다. 송씨는 그 판결에 대해 “지금도 죽고 싶을 만큼 억울하다.”며 울먹였다. 종합병원의 수간호사로, 결혼 후 슬하에 1남1녀를 둔 송씨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유섭이를 가진 지 31주 되던 지난 99년 6월 무렵이었다. 갑자기 복통 증세를 느껴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 M씨는 태반 조기박리와 복막염이라며 수술을 권했고, 그는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임신 31주 5일 만에 유섭이를 미숙아로 출산했다. 그는 “내가 간호사였지만 그 때는 의사의 진단을 믿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왔다. 간호사로 차트 읽기에 능숙한 그가 우연히 자신에게 태반조기박리는 없었으며, 복통도 복막염이 아닌 단순한 대장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그는 그때까지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인큐베이터에 있던 유섭이에게 산소부족으로 보이는 청색증이 나타났다. 송씨는 “뒤늦게 인큐베이터 산소공급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안 병원측이 무려 2시간 반 만에야 인공호흡을 시켰다.”며 “산소가 2∼3분만 공급되지 않으면 뇌사상태에 빠지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먼저 태어난 두 아이는 건강하며, 유섭이의 병증을 의심할 만한 어떤 가족력도 없었다. 유섭이는 조기출산한 미숙아였지만 의사들도 걱정하지 말라고 할 만큼 건강이 좋아 출산 직후 신생아의 건강상태를 나타내는 아프가(APGAR)지수가 정상 범주인 7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유섭이는 병원에서 정상적으로 퇴원했으나,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여긴 송씨에 의해 이듬해인 2000년 뇌병변장애 판정을 받았다. 송씨는 “지금도 그 때의 청색증과, 청색증 원인인 인큐베이터의 산소공급 중단이 문제라고 믿고 있다.”며 “이런 확신으로 소송을 냈다.”고 말했다. 그 후,4년여를 끌어온 소송에서 패한 뒤 그는 항소를 포기했다. “그 판결 이후 이 나라에서 산다는 게 한없이 고통스럽고 억울하다.”고 털어놨다. 송씨는 “법원은 마땅히 양심에 따라 판결해야 하며, 법원의 양심은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것이어야 한다.”며 “비록 나는 자식을 억울하게 잃은 셈이 됐지만 나같은 억울한 사람이 해마다 수십만명씩 새로 생기는 나라, 그래서 국민들이 의료인과 법조인의 양심을 믿지 못하고, 정부의 존재를 비웃는 나라는 아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잊고 싶으며, 유섭이 같은 아이들이 최소한의 재활훈련과 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국력에 걸맞은 사회복지 시스템을 갖춰주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얘기하는 동안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6) 낙산사와 해수관음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6) 낙산사와 해수관음

    놀라운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맙소사!’,‘아이구, 하나님!’이라거나 ‘어머나!’를 외친다. 그런데 예전 사람들은 ‘나무관세음보살….’이 입에 붙어 있었다.5일 식목일, 한국 관음도량의 진원지인 천년 고찰 낙산사가 화염에 휩싸인 장면을 보면서 ‘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관음보살은 화마도 물리친다는데…. 지난해 10월 낙산사를 답사했지만 ‘사람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곳’이라는 생각에 막상 글은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낙산사가 잿더미로 변했다. 동해의 ‘관해 1번지’는 두 말할 것 없이 낙산사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곳이라 오히려 수학여행 코스에서 빠질 정도로 널리 알려진 낙산사가 쑥대밭이 되었으니, 고찰의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남해 보리암·강화 보문사와 함께 3대 관음도량 관음보살은 관세음, 또는 관자재보살이라 한다.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진심으로 부르기만 해도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관세음보문품’에 부처께서 이르기를 “선남자여! 많은 중생이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관음을 한 마음으로 부르면 그 소리를 들으시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다. 활활 타는 뜨거운 불길에 갇힌다 해도 타지 않으니, 관세음보살의 위력 때문이다. 큰 물길에 떠내려간다 해도 관음을 부르면 곧 안전한 땅에 이르게 될 것이다.”고 했다. 큰 일 닥쳤을 때 저절로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것은 이런 관음 영력을 믿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낙산사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한국 3대 관음도량이자, 세계 8대 보타성지다. 그 중 관음신앙의 원조는 아무래도 낙산사다. 의상조사가 세운 가람이기 때문이다. 순조시절의 범해(梵海)가 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다음 같이 의상의 행장을 밝히고 있다.“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에 실려 입당, 화엄의 2대 조사인 종남산 지엄의 방에 들어가 함께 화엄경에 관해 문답하였다.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논함에 있어 깊숙하고 은밀한 부분까지도 철저히 해부, 분석하니 가히 청출어람 격이었다.”이렇듯 해동 화엄종의 시조라 하여 그는 의상조사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은 원효와 가까웠던 도반이다. 뜻을 같이 해 중국유학길에 오르다 원효는 되돌아오고, 의상은 건너갔다.661년에 산둥반도 끝에 있는 무역항 등주로 들어갔으니 이 때 그의 나이 이미 30대 후반. 오늘날까지 불교의식에서 빼놓지 않고 애송되는 그 유명한 법성게도 바로 의상조사의 창작이다. 화엄경의 심오한 진리를 7언시 30구로 응축시켜 놓았으니 본래 이름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의상은 일관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았으니, 철저한 신분제 계급사회인 당대에 거대한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사찰의 영화를 끝내 거부하였다. 그런 그가 세운 가람이 바로 낙산사이다. 설악산의 준수한 줄기가 양양쪽 동해로 흘러 내리다가 빚어낸 오봉산 품안에 넉넉하게 자리잡아 산은 작되 옹골지며, 산세가 수려하여 송림이 우거졌고, 동해를 벗하여 가히 해산(海山)의 격조를 말해 준다. 벼랑 때리는 파도를 벗삼아 잠들고, 다시금 파도 소리에 선잠을 깨는 가람이다. 오봉산은 본디 보타산 낙가산이었으니, 낙산이란 관음보살이 산다는 포타라카(Potalaka)의 음역으로, 낙가산 혹은 낙가로도 불린다. ●당에서 귀국한 의상, 관음 계시로 낙산사 지으니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온 나라를 주유하며 뜻을 펼칠 마땅한 땅을 찾다가 이곳에 이른다. 해변 석굴에 관음 진신이 산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높이 100자가 넘는 해식 단애의 깎아지른 바위 틈으로 쉴 새 없이 파도가 드나드는 험한 곳. 그곳에서 관음 진신을 만나길 간구했으나 뜻을 못이루자 그대로 바닷물에 몸을 던진다. 마침내 관음이 그 정성에 감복하여 진신은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건냈으며, 동해 용왕도 여의보주 한 알을 내렸다. 그러나 의상은 다시 이렛동안 진심으로 기도하여 마침내 관음을 친견한다. 관음은 의상에게 굴 위 산꼭대기에 쌍죽이 솟아날 것인즉, 그곳에 절을 짓도록 계시한다. 낙산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중국 보타산을 알아야 한다. 관음도량인 보타산은 오대산 문수보살, 아미산 보현보살, 구화산 지장보살 도량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4대 성지다. 바다 가운에 꽃처럼 피어있는 보타산은 상해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반, 항주 이남의 영파에서는 4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은 보타산의 여러 사원 가운데 중심이며, 조음동사원은 우리 낙산사와 주위 경관이나 지형이 너무도 흡사하다. 동해 일출의 관해지인 의상대와 바닷물이 절벽 아래까지 밀려들어와 절벽을 치며 동굴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홍련암 관음굴이 너무 비슷해 하나의 의문이 풀린다. 의상이 일찍이 중국 보타산을 순례하고 그곳 지형과 거의 흡사한 동해안에서 바다로 돌출한 해식 동굴을 찾아내 그 위에 건물을 올렸던 것이 다양한 연기설화로 전해진 것은 아닐까. 그동안 불긍거관음원을 세운 유래를 불조통기(佛祖統記)란 자료를 통해 일본 승려 혜악(慧鍔)선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학설이 주류였으나, 신라 상인들이 지었다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북송 말 서긍은 고려도경(1124)에서 “석교의 산록 위에 양무제가 세운 보타원이 있고, 전각 안에는 영험한 관음상이 있다. 옛날에 신라 상인이 오대산에 갔다가 그 불상을 조성해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바다로 나아갔으나 배가 암초에 걸려 더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관음상을 바위 위에 내려 놓았다. 관음원의 승려 조악이 전각 안으로 모셨더니 해상으로 왕래하는 이들이 반드시 나아가 기도하매 감응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적었다. 글은 보타산이 관음보살의 주도량이며, 항해를 위한 기도도량으로 조성된 사실을 알려준다. 실제로 관음원 앞바다에는 신라초(新羅礁)로 불리는 조그마한 암초까지 남아 있다. 의상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의 중국유학, 보타산과 비교되는 낙산사, 그리고 보타산의 신라인 흔적은 해로를 통한 중국과의 왕성한 교류를 잘 암시한다. ●중국 보타산과 주위경관·지형 흡사 낙산사에는 관음과 얽힌 여러 설화들이 전해진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효 역시 낙산의 관음 참배에 나선다. 낙산 근처에서 흰옷 입은 여인이 벼를 베기에 원효가 다가가 장난삼아 벼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벼가 흉작이라 줄 수 없다고 답한다. 다리에 이르니 한 여인이 서답을 빨고 있기에 마실 물 좀 달라고 청하니 서답 빨던 더러운 물을 주는지라 원효는 냇물을 새로 떠마셨다. 그랬더니 들판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휴제호와상아”라고 말하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나무 밑에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절에 이르러 보니 관음상 아래에 방금 전에 보았던 짚신이 한 짝 있음을 보고서야 자신이 만난 여인이 관음임을 깨닫는다. 원효가 다시 암굴에 들어가 관음 진신을 보고자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도 못한 채 낙산을 떠나야 했다. 원효의 관음 친견까지 더해 관음도량 낙산사의 격을 한층 높이는 설화다. 관음의 주장처이면서도 정작 낙산사는 늘 편치가 않았다.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략으로 초토화되어 관음상도 부서진다. 오대산에 자주 나다니던 세조는 원통전 석탑을 7층으로 늘리고 중창 불사를 단행한다. 그로부터 20년 뒤(1485)에 낙산사를 찾은 남효온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보면, 그 때까지는 의상이 만들었다는 관음소상이 관음전에 안치돼 있었고, 관음굴에는 파도가 돌을 쳐대는 전각도 있었으며, 그 시대에도 낙산 일출의 장관을 보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일출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유명세를 치렀으니 최소한 600년이 넘는 전통이다. ●여러번 화마에 휩싸였던 낙산사 또 ‘고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절은 다시 무너진다. 광해 11년(1619)에 관음굴을 중건하며, 인조 9년(1631)에 재건하여 어느 정도 복원된다. 그 모습은 겸재 정선이 힘찬 필치로 그린 낙산사와 관음굴에 잘 남아 있다. 이후 낙산사는 중건을 거듭하며 1925년에는 의상대까지 세워 동해 일출의 적지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삼팔선 근역에 위치, 한국전쟁의 격전지가 되면서 다시금 금석물과 원통전 앞 원문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불타버린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고려시대 불상인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362호)을 모신 원통보전도 전쟁 이후 새로 세운 것이다. 연꽃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관음이니, 낙산사 홍련암이란 검푸른 동해에 떠있는 붉은 연꽃, 즉 관음의 분신이렸다. 홍련암 마루바닥에는 10㎝ 가량의 구멍이 있어 파도가 들이치는 모습이 한 여름에도 전율을 느끼게 한다. 해일이 몰아쳐서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쳐도 홍련암만큼은 버텨 왔다. 의상이 관음을 친견하고 동해 용왕이 여의주를 내린 장소로 손색이 없다. 이상하게도 벼랑 위에 위태롭게 세운 홍련암은 온갖 병화에도 끄떡없다. 그것 또한 관음의 원력은 아닐런지. 그러나 이 모든 게 이번 산불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니 낙산사는 본디 애초의 출발지였던 관음굴로 되돌아 간 셈이다. 원통보전은 물론이고 해수관음을 상징하던 보타루도 사라졌다. 한가롭게 바다를 굽어보며 차를 마시던 솔숲이 흉물스럽게 그을렸다. 바닷가 홍련암 요사채도 사라지고 관음굴만이 화마를 피했으니 본디 낙산사의 원점으로 회귀한 폭이다. 붉은 장송이 하늘을 가린 아름다운 솔밭길을 올라가면 해수관음상이 있는 신선봉이 나오는데, 그 솔밭도 그만 타버렸다.1977년에 700여t의 돌을 들여 높이 16m로 세운 해수관음만이 남아있어 먼 동해를 굽어보며 서있을 뿐이다. 관음보살이 중생들의 원력을 시험하려고 하심인가. ●집채만한 파도 몰아쳐도 버텨온 홍련암 죽어 자빠진 소나무의 몰골들이 귀신을 부를 것만 같은데 화마가 훑고 갔어도 낙산의 일출만은 어제와 다를 바 없으니, 그 아름다운 관해의 1번지를 모두의 공력으로 다시 세울 일이다. 관해의 명당이어서 만은아니다. 역사적으로나, 규모로나 동해안 사찰의 태두 격인 낙산사의 화마 소식에 실로 안타까운 헌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덧없음을 갈파한 낙산사 조신설화처럼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말 못하는 문화유산도 덧없는 것이런가. 아름다운 원장(垣墻)이 처참하게 불에 그을린 채 동해를 굽어보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고 민망하다.
  • 儒林(322)-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22)-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퇴계의 이 교훈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가정은 평화와 화해를 실천하는 수도장이며, 따라서 가정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고함소리도 울타리 밖에까지 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며 또한 바깥세상의 추악한 욕망은 사립문 앞에서는 해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무장지대의 경계점이 바로 사립문이었던 것이다. 예수도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말하였다. 예수의 말처럼 사립문 안으로까지 내일의 걱정을 끌어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퇴계는 권씨 부인을 살아생전에는 손님처럼 공경하였을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명종 원년(1546년) 7월2일. 권씨 부인이 죽자 한양의 서소문집에서 죽은 부인을 두 아들을 시켜 분상(奔喪)하였을 뿐 아니라 계모를 대접하지 않던 당시의 풍속을 바르게 고쳐 친생모와 같이 적모복(嫡母服)을 입히는 한편 시묘도 시켰던 것이다. 남한강의 수로를 거슬러 단양까지 운구하고 퇴계가 단양군수를 끝내고 풍기로 가고 있는 바로 그 죽령에 빈소를 차려 영구가 되어 돌아오는 부인을 맞았다. 장례는 장차 자신이 죽어 묻힐 건지산 기슭의 앞산인 영지산(靈芝山)에 묘를 썼다. 지금도 산등성 하나 전체를 권씨 부인의 묘가 차지하고 있다. 퇴계가 좋아하던 철쭉이 해마다 봄이면 산 일대를 온통 뒤덮어 흡사 분홍치마를 두른 듯 붉은 꽃동산이 되는데, 퇴계는 산기슭에 여막을 지어 아들에게 시묘를 살게 하고, 자신은 건너편 바위 곁에 암자를 짓고 1년 넘게 권씨 부인의 무덤을 지켰던 것이다. 그뿐인가. 자신에게 불민한 딸을 맡겨준 장인 권질에게도 극심한 효성을 보였다. 적소에서 풀려난 후 장인 권질이 경치 좋고 한적한 냇가에 초당 하나를 짓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퇴계는 해마다 정초에 세배를 드리고 회갑잔치까지 열어준다. 이때 권질이 초당의 이름을 사위에게 지어달라고 하자 퇴계는 사락정(四樂亭)이라고 지어주었으며, 권질은 이를 자신의 아호(雅號)로 삼았던 것이다. 아들이 없어 대가 끊긴 장인이 죽자 비문에 ‘큰 집에 뒤가 끊기므로 내가 이 돌에 적어 새기노니 영원토록 잘 전할지어다.’라고 손수 비문을 짓고 묘비를 세운다.16년의 긴 각고 끝에 수양과 극복으로 금슬 좋은 부부생활을 끝냄으로써 길사고풍(吉士孤風)의 인격을 지녔던 장인에게 자신의 소임을 무사히 끝마친 후 장인의 묘소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옛날 그땐 참사람을 몰라보고 까닭없이 저승으로 이분을 데려갔네. 고향에 돌아와서 묘사를 지낸 후 매화피는 모습을 보고 장인 생각하옵니다.” 이처럼 두 아내와 사별함으로써 불우한 결혼생활을 보냈던 퇴계. 비록 이함형에게 스스로 고백하였듯 한결같이 불행한 결혼생활이었으나 이를 참고 견디어 처가향념(妻家向念)을 완성한 이퇴계. 퇴계가 단양의 군수로 있을 때에는 바로 권씨 부인과 사별한 뒤 2년이 흐른 뒤였고, 그 적요한 공방(空房)에서 바로 명기 두향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향은 퇴계에게 있어 고독하고 적적한 인동(忍冬)의 긴 세월 끝에 맞은 설중매(雪中梅)였던 것이다.
  • [임해리의 色色남녀] 오~ 풀잎에 누워

    봄바람은 여자를 춤추게 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T.S 엘리엇 ‘황무지’중에서) 1차 대전(1914∼1918) 직후 현대문명의 정신적 불모를 시인은 이렇게 절규하였다. 그리고 백년이 가까워진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애송하는 것은 황무지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믿음이 부재하고 사랑이 희석되고 생명력을 잃은 섹스 속에서 만물이 소생하는 4월은 잔인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수유와 진달래는 봄바람 속에서 흐드러지게 피고 여자의 몸과 마음은 꽃잎 벌어지듯 열려만 간다. 그래서 옛말에 봄에는 여자의 샘물이 바위를 녹인다고 했을까. 내가 아는 부부는 십년 째 매년 이맘때면 주중에 하루는 꼭 북한산 진달래 능선을 넘는다고 자랑을 하고 친구들은 부부동반으로 등산하는 것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부부가 평소에 산행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어쩌다 여자 몇몇이 모이면 단골화제 중 하나는 남편 흉보기와 팔자타령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늘 그녀는 자기 남편이 사업에 망하고 고생을 시키는 데도 ‘살 맛’이 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고 피부도 고운 편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래 경제점수는 F학점이지만 야간학습은 A학점이라는 거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은 평소에는 뚝배기 깨지는 듯해도 진달래꽃 피는 계절이 오면 부들부들해진다고 했다. 며칠 전에 만난 그녀는 열여덟 처녀처럼 달뜬 표정으로 다음날 북한산에 등산 간다고 거품을 물며 자랑하였다. 나는 여우의 신포도처럼 은근히 속이 부글거렸다.‘아니 산에 가는 게 저리도 좋은가? 하이고 봄만 되면 몸살을 하는구나! 진달래 구경을 가는지 산삼을 캐러 가는지 아무튼 누구는 좋겠다.’ 그런데 어제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윤기가 쫘악 흘렀다. 나는 볼멘 목소리로 산에 가서 진달래 꽃 따가지고 얼굴과 혀에 팩이라도 했냐고 포문을 열었다. 그녀는 호호거리며 아직도 눈치를 못 챘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자기가 봄만 되면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진달래 꽃 필 때면 목소리가 낭랑해지는 이유를 털어놓았다. 자기네 부부는 10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은 외박을 하면서 부부의 성에 대해 이론과 실천을 익히면서 서로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남편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따랐는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자신도 그런 경험이 즐겁고 생활에 활력소가 되어 지금은 일상의 프로그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봄이 되면 등산도 하고 ‘야외학습(?)’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자연 속에서 훌라당 벗고 숲에 누워 햇살을 맞으며 하늘을 보는 그 느낌이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다는 그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전해졌다. 나는 사랑과 섹스의 불모지가 되어 가는 이 땅에서 그들 부부의 건강함에 진심으로 축복을 빌었다. ●임해리는 15년 독신의 경험을 토대로 ‘혼자 잘 살면 결혼해도 잘 산다’와 ‘SQ를 높여야 연애에 성공한다’를 출간한 자타가 인정하는 ‘연애학박사’.
  • [조용섭의 산으路] 전남 순천 조계산

    [조용섭의 산으路] 전남 순천 조계산

    전남 순천시 승주읍 송광면 주암면에 걸쳐있는 조계산(884m)은 동쪽에는 태고종찰 선암사를, 서쪽엔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품은 명산이다. 백두대간에서 가지친 금남호남정맥에서 다시 갈라진 호남정맥의 산이다.‘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며 정호승 시인이 사뭇 명령조로 읊조린 바 있는 동쪽의 선암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조계산(장군봉)에 오른 뒤, 능선으로 진행하여 연산봉∼송광굴목치에 이르고 홍골을 거쳐 송광사로 하산하는 코스를 잡았다. 시간이 된다면 문화재 등 볼거리가 있는 두 사찰을 답사하는 것도 좋겠다. 선암사 매표소를 지나면 부도밭, 계곡위에 아름답게 걸쳐있는 승선교, 강선루를 차례로 지난다. 매점 앞의 삼인당(三印塘) 연못과 만세루의 육조고사(六朝古寺) 현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헤아려 보고, 다닥다닥 복잡한 듯 들어서 있지만 단아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가람 배치, 홍매화, 은목서, 삼나무, 측백나무 등의 수목들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산행 못지않은 답사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으리라. 산길은 사찰 왼쪽으로 나오면 되는데, 매점 오른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갈림길에서는 대각암을 거쳐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을 택한다. 왼쪽의 선암굴목치로 향하는 길은 정상을 거치지 않고 송광굴목치∼송광사로 이어지는 길로서 시원한 편백나무 숲을 만날 수 있다. 산길은 너르게 아주 잘 나있다. 다만 전형적인 육산의 모습을 띤 조계산의 산자락 중, 이 곳 오름길은 비교적 바위도 많고 가파른 편이다. 1시간여 땀흘려 진행하면 너른 옛 절터 쉼터에 닿는다. 이 곳에는 샘이 있다. 장군봉은 쉼터에서 30여분 오르면 닿는다. 내장산∼무등산을 거치며 남도의 산을 이어달리던 호남정맥이 지나가는 곳으로 이 산줄기는 북쪽 15분 남짓 거리에 있는 865봉에서 접치로 내려서며 백운산으로 향한다. 장군봉에서 펼쳐지는 조망도 막힘이 없다. 남쪽으로는 숨가쁘게 달려오던 남도의 산줄기를 넘겨준 고동산이 가깝다. 큰 오르내림없이 너르고 평탄하게 빙 두르며 이어지는 능선길은 그야말로 마음을 푸근하게 해줄 정도로 여유롭다.865봉 호남정맥 갈림길을 지나 계속 능선으로 나아가면 연산봉에 이른다. 정상에서 40분 소요. 서쪽 산자락 아래 가까이 보이는 호수는 주암호이다. 연산봉에서 30여분 내려서면 3거리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30여분 나가면 송광굴목치에 닿는다. 오른쪽 길이 홍골로 하산하는 길이다. 산행 종료지점인 송광사 매표소까지 약 1시간10분 소요된다. 호남고속도로 송광사IC나 승주IC에서 나와 22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대중교통으론 순천행 고속버스나 시외버스 혹은 철도(전라선)를 이용해 순천역이나 터미널로 와서 선암사행 버스(50분 소요)를 타면 된다. 순천시외버스터미널 (061)744-8877. 선암사 주차장 옆 시설지구에는 음식점과 숙박시설이 많다. 그중에 전원가든(061-754-5510)이 많이 알려져 있다. 소설 태백산맥의 중심지 벌교를 비롯한 낙안읍성 주암호 등이 있다.
  • 설악산 등 4일부터 입산 통제

    봄철 산불방지를 위해 국립공원 설악산과 오대산 주요 등산로가 4일부터 5월13일까지 40일간 입산이 통제된다. 3일 국립공원 설악산과 오대산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설악산은 오색∼대청봉 구간을 비롯해 마등령∼한계령, 백담사∼대청봉 구간 등 12개 구간이, 오대산은 상원사∼비로봉, 진고개∼노인봉, 소금강∼노인봉 등 4개 구간이 입산이 통제된다. 그러나 설악산의 경우 소공원∼울산바위, 소공원∼비선대, 소공원∼비룡폭포 구간과 오색약수터∼용소폭포매표소, 백담매표소∼백담대피소 구간 등 저지대 등산로 5개 구간은 개방된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5)통영의 해양문화와 굴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5)통영의 해양문화와 굴

    국방, 예술, 수산, 관광, 생태. 이 복잡하고 동거가 불가능해 보이는 항목들이 한 동네에 밀집된 곳을 한 곳만 들라면 나는 주저없이 남해안 통영을 꼽겠다. 무언가 하나쯤이 돋보이는 바닷가는 많지만, 통영같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곳이 또 있을까. 이름하여 ‘조선의 나폴리’. 섬과 섬이 꼬리를 문 한려수도의 미려한 절경이 펼쳐진 가운데 하얀 집들이 초록빛 바다색과 어우러지고, 비구름이 섬 봉우리를 감싸도는 풍광은 가히 ‘조선의 나폴리’란 별칭이 어울릴 만하다. 솔직히 말한다면 ‘이탈리아의 통영’이란 표현이 오히려 걸맞을 것 같기도 한 곳. ●군사와 예술이 묘하게 어우러진 곳 그래선지 예술가들이 유난히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윤이상 김상옥 박경리 유치환. 그들의 고향도 통영이다. 임진왜란의 엄혹했던 시절,‘지고도 이긴 그 전쟁’을 상징하는 세병관이 있는 곳인가 하면, 코 앞에 한산도가 있어 당대의 피어린 해전을 돌이켜보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다 보니 승전무 같은 ‘국방예술’을 비롯, 나전칠기, 통영갓, 소목, 두석 같은 수공업이 발달했다.1604년 통제영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육방이 설치돼 군수품·관수품·민수품 등 다양한 수공예품이 생산되었다. 통영오광대, 남해안별신굿 같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가 가장 많이 밀집된 곳 또한 통영이다. 군사와 예술이라는, 언뜻 서로 조화될 것 같지 않은 양자가 절묘하게 결합해 예부터 예향의 본거지로 꼽혔다.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한산대첩도 기실 어부 김천손의 첩보에 힘입은 것이었다. 숱하게 왜구에 시달려 온 이곳 어부들은 평소에는 고기를 잡지만 유사시에는 전선에 배치돼 그들을 물리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전략가적 자질을 과소평가할 수 없지만 그 바탕에 어부들의 숨은 공로가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통영 사람들은 배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방이 바다인 곳에서 살아 바다생활에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팔라우제도의 원주민들을 보면 그들이 천부적인 뱃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작은 배로 망망대해를 용하게도 떠다닌다. 자잘한 다도해의 섬 사이를 누비면서 거칠 것 없이 달리고, 맘 먹은 곳에 닻을 내리고, 정확하게 낚시를 던진다. 해저 지형은 물론이고 조류, 어종, 바람, 암초 등 선대에게 배우고 스스로 체득한 온갖 바다정보를 유전인자처럼 내장하고 바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통영사람들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바다를 마당 삼아 살아온 덕분에 왜병을 물리치는 든든한 파수 역할을 해낼 수 있었으리라. 이순신이 새삼 강조되는 시대에, 그 이순신을 가능하게 한 인적 토대로서 바다사람들의 삶을 한번쯤 진지하게 되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 ●왜란 때 통신수단으로 사용… ‘충무 방패연’ 통영의 삼덕포구, 한산도, 사량도, 견내량, 적덕, 착량, 걸망포 등은 당시 승첩의 현장이거나 함대의 병참·기항지로 제 역할을 다한 곳들이다. 전쟁이 끝나면서 지금의 통영땅 전신인 두룡포에 경상·전라·충청도 3도의 수군을 관장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옮겨오게 된다. 두룡포기사비문에 ‘서쪽으로는 판데목에 의지하고 동으로는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으로는 큰바다와 통하고 북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어 깊어도 구석지지 않고 얕아도 드러나지 않아 진실로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란을 겪으면서 국가적으로 건설된 계획적인 군사도시가 곧 통영이니, 그로부터 일제에 의해 통제영이 철폐될 때까지 300여년간 지속되면서 독특한 해양문화를 형성해 온 셈이다. 돌이켜 보면 ‘상처입은 용’ 윤이상 선생이 애타게 보고싶어 하던 고향도 바로 통영의 푸른 바다였다. 그는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도 ‘보고 싶은 고향땅 쪽빛 바다’를 애달프게 증언하지 않았던가. 그는 아마 꿈 속에서 훨훨 날아오르는 유명한 ‘충무 방패연’을 상상했을 것이다. 내륙지방에서 만든 한지 반장짜리 연과 달리 바람이 센 바닷가 통영의 연은 대문짝만 하게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유서깊은 그 연 아닌가. 그 연에 날지 못한 윤이상 선생의 비원이 서려 있는 듯하다. ‘통영문화의 지킴이’ 김세윤 문화원장은 “윤이상 선생이 통영에서 살 적만 해도 국악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며 통영의 문화적 환경을 설명한다. 그의 음악에서 한국적 정서를 읽을 수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고향 바닷가에서 싹 틔우고, 배불린 것이리라. 그는 “통영이 예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통제영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활발한 수산업에 기반한 물적 토대를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향’ 만들어낸 또 다른 공신, 굴 옳은 말이다. 수많은 통영의 예술인이 외국 유학을 떠날 수 있는 배경에는 수산업으로 형성된 진취적 기질과 풍요가 바탕이 된 셈이다. 이렇듯 통영의 역사와 문화라는 것도 모두 어업에 종사하며 삶을 일궈 온 통영 사람들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배태한 것 아니겠는가. 그들이 전통시대의 뛰어난 해군이자 노련한 어민들이었다는 사실이 곧 이곳의 역사이자 문화인 셈이다. 오늘날의 통영 어업을 이해하려면 통영항에 위치한 ‘굴수하식수산업협동조합’이란 다소 긴 이름의 조합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굴의 80%가 이 조합에서 생산되고 있으니 굴이 없다면 통영경제도 사실상 ‘끝’이며, 도시의 소비자들도 굴 대신 금을 먹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굴껍데기를 까는 여성 노동력, 굴 양식에 필요한 자재를 공급하고 판매하는 이들, 굴을 조리해 파는 음식점까지 모두 포함한다면 무려 4만여명이 굴에 생계를 의지하고 있다. 그만큼 굴은 통영 경제에 절대적이다. 20대에 굴조합에 뛰어들어 3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로지 굴 하나에 바친 이 조합 이종훈 전무를 만났다. 그에 따르면 굴은 바위에 붙어사는 바위굴, 그리고 줄에 매달아서 물 속에 드리워 키우는 수하식 굴로 나누는데, 바위굴은 전체 생산량의 10%도 안 된다.90%의 굴이 수하식이다. 그런데 그 수하식을 사람들은 ‘양식’이라고 ‘오해’한다. 굴은 엄밀하게 말해 양식이 없다. 긴 줄에 수직으로 매달아 키워낼 뿐 인공 먹이를 주거나 하는 따위의 양식과는 전혀 다르다. 굴은 양식어류와 달리 제공하는 사료가 아닌 자연 플랑크톤을 먹고 성장한다는 아주 간단한 상식을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한국인의 수산물 선호도는 높아가지만, 정작 수산물 이해도는 아직 낮다. 굴에 대해서도 엄청난 오해를 갖고 있지 않은가.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맹종죽을 이용한 뗏목식 시설을 도입했다. 그러나 비싼 대나무값 때문에 물 속에 줄을 드리워 굴을 매다는 연승로프식인 수하식을 개발했다. 한국 굴의 대부분이 자라는 통영, 거제, 고성, 여수 바닷가에 둥둥 떠있는 긴 줄과 부표들이 바로 수하식 굴밭의 표지판이다.“수하식은 바다면적을 늘리는 일대 전환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싸게 좋은 굴을 섭취할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수하식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미국 FDA도 인정한 통영의 굴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바위에 붙은 작은 굴, 즉 석화를 선호한다. 반면에 알이 큰 수하식 굴은 상대적으로 낮게 친다. 바위굴은 썰물 때 성장을 멈추는 반면 수하식굴은 항상 물 속에 잠겨 있어 물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장한다. 이런 이치를 아는 외국에서는 그래서 우리와 달리 수하식 굴을 더 위로 친다. 실제로 미국 FDA는 매년 조사관을 파견해 통영, 고성, 여수, 고흥, 거제 일대의 굴밭을 샅샅이 조사한다. 미국은 물론 EU 및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수입식품으로 인한 자국민의 공중보건상의 위해를 차단하기 위해 자국으로 수입되는 수산물에 대하여 수출국이 그 위생상태를 보장하여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이렇게 현지조사를 벌이고 있으니, 그들의 검증이 곧 상품의 보증이기도 하다. FDA는 고흥, 여수, 남해, 통영, 거제, 고성 등의 남해안 일대를 수출용 패류생산 지정해역으로 설정, 엄정한 검사기준을 적용해 수입을 허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까다로운 선진 외국에서 그 청정성을 인정해 사들이는 굴이 이곳 남해안의 수하식 굴이며, 국내 소비량도 90% 이상을 이곳에서 공급한다. 한려수도가 한국 최고의 청정해역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씨알 작은 자연산 굴이 아무래도 좋다.”는 오해로는 더 이상 우리의 식탁 안전과 소비량, 낮은 가격 등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이곳에서는 오후 6시면 전국 유일의 굴공판장이 열린다. 저마다 자신들이 생산한 굴을 박스에 담아 낸다. 굴조합 엄철규 과장은 “생산자들의 이름이 모두 등록되며, 같은 굴이라도 실명제로 체크되어 가격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고 설명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굴이 클수록 비싸다. 이곳에서는 ‘벗굴’이라고 부르는, 크기가 주먹만 한 굴을 접시에 올려놓고 칼로 썰어먹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선호하는 ‘쪼잔한 굴’은 상품으로 치지도 않는다. 알이 꽉 차서 영양가가 오를대로 오른 큰 굴이 그들의 기호에 어울린다고 믿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예전에 먹던 식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전국 생산량의 10%에도 못미치는 바위굴을 선호한다. 사실 바위굴 중에는 깨끗한 곳에서 나는 것도 있지만 갯가의 오염된 환경에서 채취되기도 해 식탁의 안전성을 위협하는 일도 없지 않다. 한국인의 보수성과 과거 집착은 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거기에서 비롯된 온갖 편견과 오해가 식탁을 점령하고 있다. 회는 물론 전, 찜, 튀김, 구이, 국이나 죽, 밥, 젓 등 세기조차 어려운 다양한 메뉴가 있지만 굴은 그저 날로 먹는 것으로만 아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선호하는 굴은 말린 건굴이며, 미국인들은 통조림문화에 길들여져 면실유로 만든 통조림을 수입해 간다. 반면 우리는 이만큼 다양한 굴음식을 향유하고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럼에도 우리의 인식은 이렇듯 보수적이다. 술꾼들 해장용으로 선짓국, 콩나물국 등은 알려졌지만 굴국은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철마가 새끼치고, 돌계집은 노래하고 통영을 떠나오면서 습관처럼 미륵섬 미륵사를 찾았다.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그가 미륵섬에 온 것은 한국전쟁 때. 도솔암에서 도솔선원을 차려 문제(門弟)들을 거느리고 선정(禪定)에 들었다. 아름다운 다도해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아 미래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니, 그도 미륵의 당래하생을 염원했던 것일까. 미래사 입구에 세운 효봉 스님 비문에 담긴 화두를 떠올린다.‘천지가 뒤바뀌고, 철마가 새끼치며, 돌계집은 노래하고, 나무장승 춤을 추다.’ 이 뒤집힘의 엄청난 미학까지 통영 바닷가에서 배우고 온다.
  • 전자파 ‘건강 위협’ 본격대응 신호탄

    전자파 ‘건강 위협’ 본격대응 신호탄

    전기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조차 어려울 법하다. 공기를 숨 쉬듯 전기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전기가 주는 풍요로운 혜택만큼이나 그늘도 짙어가고 있다. 전기가 흐르는 곳엔 언제나 존재하는 전자파 때문. 길가의 전선이나 집안의 가전제품, 전철 같은 교통수단, 사무실의 각종 기기, 휴대폰 등 전자파는 사실상 현대인의 일상을 언제, 어디서나 포위하고 있다. 마이크로파 등 인체에 열(熱)작용을 일으키는 일부 전자파의 유해성은 과학적으로 이미 입증됐다. 하지만 전자제품, 전철, 송전선로 같은 극저주파(0∼1㎑)에 의한 자극(非熱작용)에 대해선 학자마다 엇갈린 연구결과를 내놓는 등 지난 1980년대부터 20여년동안 유해성 논란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적어도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데 대해선 별다른 이견이 없다.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을 확보하진 못했지만 심증만큼은 굳힌 셈이다. 이에 따라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에서는 갈수록 전자파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가면서 권고·규제기준 설정 등 정책 반영의 폭과 깊이를 넓혀가는 중이다. ●“국민건강 영향 감안한 지침” 환경연구원이 이번에 제시한 ‘안전거리 지침’도 이런 국제적 추세를 적극 반영한 결과다.“최소한 이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안심할 수 있다.”는 기준인데, 우리나라도 전자파의 ‘건강 위험성’에 대해 본격적인 대응에 나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장성기 실내환경사업단장은 “가전제품 등의 극저주파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증거는 불확실하지만 사전예방적 차원에서 지침을 제시했다. 전자파에 대한 높은 대중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에 대한 과학적 연구결과나 자료는 부족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번 연구는 정부차원에서 실태조사를 벌여 국민건강을 고려한 최소한의 이격거리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통·산자부 ‘인체보호기준’은 느슨 환경연구원이 조사한 14개 품목,138개 가전제품의 전자파 방출실태는 기존의 연구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품별 평균 방출량이 많게는 76.9mG(전자레인지), 적게는 0.9mG(김치냉장고)였다. 그동안 학계나 업계 등에서 간간이 조사해 발표해 온 수치와 비슷한 수준으로, 지난 2000년과 2004년 정보통신부와 산업자원부가 각각 제정한 ‘전자파 인체보호기준’(833mG)을 훨씬 밑돌고 있다. 그럼에도 환경연구원의 권고는 강력하기 이를 데 없다.▲헤어드라이기(64.7mG 아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안전) ▲전기장판(13.8mG 아이와 임신부는 절대 사용 말아야) ▲전자레인지(76.9mG 아예 아이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세탁기(6.9mG 탈수시엔 접근 금지) 등이다. 정통부 등의 인체보호기준은 신경과 근육조직의 쇼크와 같은 직접적 인체 영향을 방지하기 위해 ‘순간 최대 노출치’를 정한 것이어서, 일상에서 되풀이되는 노출로 인한 인체건강 위해성 방지기준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환경연구원의 판단이다. 국내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현재의 인체보호기준이 주거 환경에서 측정되는 통상적 수치보다 매우 높게 설정돼 있다.”(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전인수 박사)는 비판도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우리는 이제 막 ‘권고 지침’을 정했을 뿐이지만, 외국은 훨씬 잰 걸음이다. 스위스나 스웨덴 이탈리아 미국의 일부 주 등에선 수년전부터 2∼10mG를 각종 ‘규제기준’으로 설정하는 등 엄격한 관리대책을 시행 중이다. 최근 많은 역학연구 조사에서 밝혀진 “2mG 이상의 60㎐ 극저주파에 장기간 노출시 소아백혈병 등의 암 발생률이 높아진다.”는 경고를 정책으로 반영한 것이다. 연세대 의대 김덕원 교수는 이에 대해 “흡연과 폐암간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데 40년이 걸렸지만 전자파 유해성의 과학적 확증은 이보다 훨씬 오래 걸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해가 될 수 있으므로 지금부터라도 안전거리 설정 등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전철 승객도 무방비 노출 환경연구원은 지난 한해 동안 전국 지하철 구간에서의 전자파 방출량도 동시에 측정했다.2000년에 이어 두번째 조사인데 이번엔 조사대상을 늘렸다.1∼8호선의 직류·교류 노선과 분당선, 국철 등 서울의 14개 구간과 부산 2개, 대구·인천·광주 각 1개 등 총 19개 노선이다. 수도권 전철 안산선(선바위∼오이도)의 객실 내 평균 방출량이 28.5mG로 가장 높았고, 경인선(남영∼인천), 의정부선(회기∼의정부북부), 분당선(선릉∼오리) 등 순으로 높았다. 광주지하철(상무∼소태)은 0.2mG로 가장 낮았다. 연구원은 “수만 볼트의 교류전원 사용구간이 직류구간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전자파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특히 건강위험성과 관련한 가장 엄격한 척도인 ‘2mG’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 19개 구간 가운데 11개 구간(객실내)이 이를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장성기 단장은 “하루 600만명 이상이 이용하는 국내 전철의 전자파 방출 수준은 비교적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면서도 “그러나 장시간 노출될 경우 전자파 영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말하기엔 어렵다.”고 말했다. ●법제화까진 시일 걸릴 듯 환경부는 10여년 전부터 전자파의 유해성 및 규제기준 강화 등을 주장하며 법제화를 시도해 왔다.2001년과 2002년 전자파를 생활환경오염원에 포함시킨 환경정책기본법 개정을 시도했으나 정통부, 산자부를 비롯한 정부와 기업 등 안팎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환경부를 중심으로 “외국에선 발암성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데도 기업의 경쟁력 저하와 막대한 사회적 비용발생, 시기상조 등을 이유로 무조건 반대해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은 소수에 그쳤다. 법제화 움직임은 지난해 7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의원입법으로 환경분쟁조정법 개정안이 발의돼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인데,“전자파로 인한 피해도 소음·진동·악취 등과 마찬가지로 환경분쟁조정 대상에 넣어 피해구제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그러나 여태까지 상임위 심의조차 진행되지 않아 시행여부는 불투명한 상태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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