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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 톡톡 다시 읽기](48)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고전 톡톡 다시 읽기](48)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1. 라블레와 반(反)영웅의 계보학 ‘오디세우스’나 ‘일리아드’는 고대의 영웅들이 독점 출연하던 모험담이었다. 그들은 원대한 소명을 안고 태어났고, 근엄한 표정으로 놀랄 만한 위업을 추구했다. 건국과 구국(救國), 최고의 목적을 위한 희생 등은 아무나 할 수 없기에 영웅의 삶도 평범할 수 없다. 아서왕 전설과 롤랑의 노래, 이고리 원정기 등 중세 기사 무훈담도 비범한 영웅들을 찬양했다. 어릴 적부터 주변을 놀라게하는 총명함과 신앙심, 용맹함이 그들의 자질이었다. 모험담이 화려하고 감동적일수록 민중의 일상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음은 당연하다. 중세의 끝무렵, 그토록 존귀하던 영웅의 족보에 난데없는 돌연변이들이 등장한다.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엉뚱한 행동을 일삼는 광대와 난봉꾼들이 나타났다. 신화와 서사시를 패러디하며 튀어나온 그들은 단숨에 민중의 상상 세계를 사로잡는다. 위대한 업적과 아름다운 덕행 대신, 그들은 끝모를 난장(場)과 황당한 우스개를 벌였다. 평범하고 무지한 민중에게 다가와 때론 치고받기도 하고 때론 농담도 주고받는 친구가 된 것이다. 16세기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에 나오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 그 최초의 주인공들이었다. 2. ‘지금 여기’의 삶과 ‘위-대한’ 영웅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바보 같지만 온유하고 게으른 왕 가르강튀아의 나라에 탐욕스러운 이웃나라의 군주 피크로콜이 시비를 걸어 벌어진 전쟁 스토리가 전부다. 하지만 두 나라, 두 왕의 다툼은 엄숙하고 비장한 숙명의 대결이 아니다. 전쟁은 어리석음의 경주이자 황당함의 극치를 다투는 놀이로 바뀐다. 피크로콜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분노하며 파괴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데 반해, 가르강튀아는 좋은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사는 걸 원한다는 게 요점이다. 두 욕망이 빚어내는 두 가지 다른 삶의 양상. 우리는 새로운 영웅의 풍모와 삶의 방식, 그 세계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르강튀아는 키가 산만큼 크고 몸집은 대궐만 한 거인이지만 생각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가령,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은 이렇다. 먼저, 낮잠을 즐긴다. 그러다 누군가 싸움을 벌이면 술과 고기가 가득한 잔치를 벌이고 놀이를 제안한다. 끝! 국부를 증진시키려고 고민하거나, 영토를 늘리려고 전쟁을 벌이는 일, 책략을 짜서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따위는 그가 가장 귀찮아하는 짓들이다. 그저 배불리 먹고 등따뜻하게 한세상 사는 게 삶의 목적이라면 목적. 하긴 이런 천성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나 보다. 그는 엄마가 순대를 지나치게 먹던 날 ‘똥싸듯’ 태어났으며, 세상에 나오자마자 “응애, 응애, 술줘! 너희도 한잔 마셔!”하며 소리쳤다니까! 출생부터 기이한 가르강튀아의 행적이 범상할 리 없다. 오줌을 누면 강이 만들어져 마을이 떠내려가고, 똥을 누면 산이 몇 개 생겨날 지경이다. 먹고 마시는 스케일은 또 얼마나 큰지! 전투 후 벌어진 연회에서 그가 먹어치운 짐승들이 얼마인지 셀 수도 없다. “우선 소 16마리를 굽고, 암소 3마리, 송아지 32마리, 염소 63마리, 양 95마리, 양념을 친 돼지 300마리, 메추리 220마리, 도요새 700마리, 수탉 400마리와 다른 닭 1700마리, 암탉 600마리와 비둘기, 토끼 1400마리, 병아리 1700마리. 또 산돼지 11마리, 사슴 18마리, 꿩과 산비둘기 140마리, 오리, 물떼새, 왜가리, 황새, 칠면조….” 황당해 보이지만, 영웅이란 본래 위대(偉大)한 존재 아닌가? 그러니 좀 ‘위-대’(胃大)한들 어떠리! 피크로콜과의 전쟁도, 정처없는 모험도 모두 위-대함의 산물이며 이야기다. 위대한 영웅은 신화에나 있지만, 위-대한 영웅이라면 민중의 밥상머리나 술자리, 놀이판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단지 웃기는 코미디일까? 그 시대를 지배하던 교회는 라블레에게서 신이 주신 언어와 사물에 대한 허황된 요설, 신성모독적인 패설을 읽어냈다. 특히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이 수도사들과 어울려 취하도록 마시고 난폭하게 다투며 불경한 욕설을 퍼부을 때, 교회는 분노했고 유죄를 선고했다. 위엄과 경건함을 상실했다는 죄목이다. 하지만 삶에서 먹고 마시는 것, 육체를 살찌우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초인적인 업적이나 덕행보다 중요하다는 게 라블레의 생각이었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먼 신화 속의 영웅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삶이라는 사실! 3.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에 대한 비전과 웃음 라블레 시대의 민중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읽으며 이 세상을 상상했다. 그것은 비장하고 엄숙한 소명의 세계도 아니고, 금욕을 통해 힘겹게 버텨야 할 불가피한 현실도 아니다. 라블레의 소설은 삶은 먹고 마시며 놀이하고 사랑하는 과정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삶에는 병마와 고통,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괴로움에 초점을 맞출 때 삶은 그 자체로 무거운 짐이 된다. 신화와 서사시는 그런 현실을 잠시 잊게 해 주지만, 그만큼 이 세계는 갑갑하고 살아갈 ‘맛’을 잃고 만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 보여주는 세계엔 어떤 비밀스럽고 신성한 목적이 없다. 대신 주린 배를 채우고 힘겨운 노역에서 벗어난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에 대한 비전이 있다. 마음껏 먹고 실컷 잘 수 있는 세상, 삶의 간난신고를 잠시 잊은 채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이란 민중이 역사 이래로 늘 염원하던 세상이 아닌가? 그 출발점은 현세의 삶, 온갖 어리석음과 우스꽝스러움이 넘치는 ‘지금 여기’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데 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라블레라는 천재가 혼자 쓴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년간 쌓여온 민중적 삶의 흔적과 소망, 비전이 집대성되어 표현된 산물이다. 어리석고 바보 같은, 하지만 너무나도 친근한 반(反)영웅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웃음이 평범한 민중의 웃음과 뒤섞여 들리는 이유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최진석 서울신문·수유+너머N 연구원 서울신문·수유+너머 공동기획
  • 종소리만큼 깊은 울림 제야 ‘음악회’

    12월 31일. 사람들은 이날의 아쉬움을 ‘축제’로 치장하곤 한다. 그래서 분위기는 더욱 요란하다. 하지만 차분히 보낼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제야의 종소리만큼 깊은 울림을 주는 제야 음악회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은 클래식과 발레가 어우러지는 제야의 밤을 준비했다. 오후 9시 30분 콘서트홀에서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과 그의 제자들로 이뤄진 ‘바이올린 오케스트라’가 1부를 꾸민다. 지난 10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클라라 주미 강과 2008년 프랑스 롱 티보 콩쿠르 우승자인 신현수의 바이올린 협연 무대도 준비돼 있다. 2부에서는 서현석이 지휘하는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가 나선다. 첼리스트 송영훈이 차이콥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국립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주원·김현웅이 ‘백조의 호수’ 가운데 1막 ‘아다지오’와 ‘지젤’의 2막 ‘그랑 파드되’를 선보인다. 방송인 진양혜가 진행한다. 공연 뒤에 불꽃놀이도 펼쳐진다. 3만~7만원. (02)580-1300.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은 밤 10시 30분 대극장에서 제야 성찬을 펼친다. 소프라노 조수미와 뮤지컬 가수 브래드 리틀을 내세웠다. 조수미는 오페라 ‘카르멘’의 ‘하바네라’와 베토벤의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 등 우리 귀에 익숙한 곡들을 들려준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주인공으로 유명한 브래드 리틀은 ‘더 뮤직 오브 나이트’(The Music of Night) 등 뮤지컬 히트곡을 부른다. 재즈 기타리스트 박주원, 색소폰 주자 김진수, 성악 그룹 비바보체 등도 나온다. 반주는 모스틀리 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맡았다. 스크린을 통해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 장면도 보여준다. 새해 첫 날, 사랑하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시간도 주어진다. 1부가 끝난 휴식 시간에 로비에서 진행되는 와인 파티도 놓쳐서는 안 될 별미다. 3만~10만원. (02)399-1114.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성지서 아녀자 꾀여 ‘잠자리예언’ 몹쓸짓

    성지서 아녀자 꾀여 ‘잠자리예언’ 몹쓸짓

    한 일본 여성이 잠자리를 갖지 않으면 죽는다고 예언자를 사칭한 남자의 말에 속아 성폭행을 당했고 주장해 충격을 주고 있다. 23일(현지시간) 호주 지역일간 노던 테러토리뉴스에 따르면 피해 여성은 이번주 다윈 치안판사법원에서 진행된 공판에서 네 차례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날 “가해 남성이 ‘자신은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다.’며 ‘자신과 신성한 곳(우비르)에서 성관계를 갖지 않으면 3년 내에 병원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해 10월 16, 17일 양일간 현지 카카두 국립공원의 우비르 지역과 거기서 남서부로 40km 떨어진 가해자의 자택에서 사건이 발생했었다.”고 덧붙였다. 이 매체에 따르면 이번 공판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 폐기된 서류를 지난 8월 이안 영 형사가 우연히 발견해 재조사 하면서 진행됐으며, 피해 여성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고. 그녀는 인터뷰를 통해 “당시 무서웠기에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었고 따를 수 밖에 없었다.”며 “신성한 장소에서 ‘싫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이에 공판을 진행한 마이클 캐리 판사는 “피해 여성은 성적 접촉에 대한 거부 의사를 하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은 매우 순진했거나 바보같았다.”며 “하지만 피해 여성의 증거 만으로 유죄 판결을 할 수 없다.”고 말한 뒤 기각을 선고했다. 한편 호주 카카두 국립공원의 우비르 지역은 현지 원주민인 애보리진이 벽이나 동굴에 남긴 벽화 그림으로 유명하다. 우리에겐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지만 현지에서는 매우 ‘신성한 지역’에 해당한다. 사진=호주 카카두 국립공원 우비르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의전원 막차 타자” 학원 수강 전쟁중

    “의전원 막차 타자” 학원 수강 전쟁중

    15일 오후 10시 서울 서초동 P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 입시학원. 강의가 끝난 시간이었지만 복도와 강의실에는 800여명의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은 수강 신청을 위해 몰려든 대학생과 학부모들. 수강 신청 시작은 다음 날 오전 7시이지만, 유명 생물 강사의 강의는 불과 몇분 안에 정원이 차기 때문에 아예 밤 새울 작정을 하고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줄을 선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의전원을 목표로 전공을 선택한 대학 1~2년생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2014년 이후 주요 대학 의전원이 폐지된다는데 꿈이 사라질까 두렵다.”고 입을 모았다. 자녀를 대신해 지방에서 원정을 온 학부모들도 많았다. 새벽 부산에서 KTX를 타고 올라와 오전 9시 ‘대기번호 1번’을 받은 손모(56·여)씨는 대학 3년생 딸의 수강증을 손에 쥐기까지 꼬박 2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딸이 기말고사를 보는 중이라 대신 왔다는 손씨는 “의전원이 폐지된다는 발표에 불안감이 크다.”면서 “좋은 강사에 의지해 점수를 높이고 빨리 입학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2014년 시험부터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등 주요 대학의 의전원이 폐지되는 등 신입생 정원이 대폭 줄게 되면서 의전원을 목표로 삼은 대학생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특히 대학 1년생과 내년 신입생들은 1~2차례 기회밖에 가질 수 없다며 하소연을 하고 있다. 때문에 방학은 물론 학기 중에도 사교육에 의존하며 의전원 시험준비에 매달린다. 현재 전국에 27곳인 의전원은 2015년 11개, 2017년 11개 대학이 의대체제로 전환하면서 5곳만 남게 된다. 바뀌는 제도로 피해를 보게 된 학생들은 교육당국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서울시내 유명 사립대 생명공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최모(20)씨는 “의대 진학을 위해 재수를 하려다가 의전원으로 목표를 세우고 생명공학과에 진학했는데 군대까지 생각하면 과연 시험을 쳐 볼 수나 있을지 걱정”이라면서 “교육 정책을 몇년 만에 바꿔버리면 꿈을 갖고 준비해 온 학생들은 바보 되는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일부 학생들은 교육 당국에 대한 법적 대응을 모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우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바뀐 교육정책으로 의전원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면서도 “의전원에 가기 위해 자기가 손해를 본 부분을 입증하기 어려워 실제로 소송이 성립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육과학기술부 관계자는 “의전원 준비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잘 알고 있다.”면서 “2015년, 2017년에 절반씩 전환하게 해 전환속도를 늦추고, 의대로 전환하는 학교는 4년간 정원의 30%를 학사편입으로 채울 것을 의무화하는 등 대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글 사진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이용철의 영화만화경] ‘러블리, 스틸’

    [이용철의 영화만화경] ‘러블리, 스틸’

    영화는 배우의 얼굴에서 영혼을 구한다. 문득 카메라가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깊은 눈과 오묘한 표정과 굳은 입술은 어떤 몸짓과 풍경도 표현해 내지 못할 마법을 행한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배우의 얼굴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적 체험은 언젠가부터 희귀한 보물찾기가 되어 버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물, 영상의 빠른 전환, 이야기의 긴박한 전개를 추구하는 현대영화가 클로즈업을 버려야 할 유산으로 만든 탓이다. 배우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시간은 사라졌고, 얼굴이 전하는 풍부한 감정 따위는 하찮은 것으로 취급받게 됐다. ‘러블리, 스틸’은 오랜만에 배우의 얼굴에 집중할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어느덧 연기의 전설로 남은 두 배우가 주연을 맡은 덕분이다. 로버트는 혼자 사는 외로운 노인이다. 그의 신세는 차고에 박힌 채 며칠이 지난 차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도 와서 염려하지 않았고, 그 또한 개의치 않고 그냥 걸어다니기로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아침, 그는 악몽을 꾼다. 그가 그에게 주는 선물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이 너무나 적적해 보였다. 바로 그날, 로버트는 메리를 만난다. 그녀는 안부 확인 차 방문한 이웃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첫눈에 호감을 느꼈지만 바보처럼 머뭇거리는 로버트와 달리, 메리는 적극적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난생 처음 데이트를 하게 된 그는 직장 동료에게 조언을 구하는 등 설레는 마음을 가누지 못한다.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에 기뻐할 즈음, 로버트는 메리에게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다. 로버트를 연기한 마틴 랜도(오른쪽)와 메리를 연기한 엘렌 버스틴(왼쪽)은 한국 관객에게 그리 익숙한 배우는 아니다. 둘 다 미국 아카데미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바 있지만, 그들의 대표작들이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한때 배우양성에 힘을 쏟았던 두 사람의 원숙한 연기는 ‘러블리, 스틸’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두 배우는 오랫동안 단련한 안면 근육으로 능수능란한 표정 연기를 만들어 내고, 잦은 클로즈업의 순간에도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출할 줄 안다. ‘러블리, 스틸’은 요즘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가 얼마나 소외받고 있는지 방증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블리, 스틸’을 두 배우의 대표작으로 치켜세울 수는 없다. 연기에 비해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편이며, 두 사람의 연기 또한 예전의 명연을 뛰어넘기엔 모자란다. 영화를 연출하고 각본까지 쓴 니컬러스 패클러는 갓 20대를 넘긴 청년이다. 20대가 노인들의 처지와 마음을 진심어린 글로 옮긴다는 게 어찌 쉬웠을까. 20대의 사라 폴리가 각색과 연출을 겸한 2006년 작품 ‘어웨이 프롬 허’ 같은 훌륭한 예가 있으나, 그 외에는 근사한 중년의 로맨스조차 찾아보기 힘든 요즘이다. ‘러블리, 스틸’은 연륜과 지혜 대신 훈훈한 이야기와 착한 인물로 부족함을 메우고자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무난하고 물렁해서 때때로 지루함과 공허함을 초래하며, 반전으로 챙겨 놓은 비밀도 이야기의 평범함을 가리기엔 역부족이다. 가장 큰 문제는 비밀의 공개 이후 영화가 서둘러 끝을 맺는다는 데 있다. 두 배우의 연기가 바야흐로 최고점에 도달하려는데, 영화는 마침표를 툭 찍어 버린다. 절정의 연기가 나올 무렵 실수로 막을 내린 꼴이다. 영화평론가
  • 고성 오간 당·정… 재편론까지

    고성 오간 당·정… 재편론까지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새해 예산 처리 과정과 결과를 둘러싸고 고성을 주고받는 등 예산안 후폭풍이 여야를 넘어 당정 갈등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당정 재편론도 제기됐다. ●템플스테이 등 올 수준 복원키로 안상수 대표는 13일 오후 여의도 당사를 방문한 윤증현 장관에게 “우리는 무슨 바보냐. 당신들만 똑똑한가. 애들 보육비 좀 주려고 당 대표가 약속했는데 하나도 반영이 안 된 거 아니냐.”고 따졌다. 안 대표의 고함 소리가 면담장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대화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이 자리는 안 대표가 예산안 편성과 관련, 경위를 듣고 정부를 질책하기 위해 윤 장관을 부른 것이라고 한나라당 관계자는 말했다. 40여분간의 면담에서 윤 장관은 재정 건전성 문제를 강조했다. 그는 “당도 예산기준 원칙 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맞받으면서 여당의 ‘선심성 공약’에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장관은 ‘정부의 준비 부족으로 지금과 같은 예산 문제가 일어났다.’는 당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당정은 이날 ‘템플스테이 운영 및 시설지원’과 ‘춘천∼속초 복선전철 건설’, ‘재일민단 지원사업’ 등 내년도 예산안의 국회 본회의 강행처리 과정에서 여권이 약속했으나 반영하지 못했던 3개 분야 예산을 올해 수준으로 복원키로 합의했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홍준표 “당 끌려다녀” 靑비판 이에 앞서 홍준표 최고위원은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당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독자성을 잃고 끌려다니는 거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면서 “총선과 대선은 당이 치르는 것이지 청와대가 치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사실상 청와대를 비판했다. 홍 최고위원은 이어 “정부 여당을 재편하고 전열을 재정비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정두언 최고위원도 홍 최고위원의 발언을 지지하고 나서는 등 내홍은 쉽사리 누그러지지 않을 기세다. 정부는 오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김황식 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2011년도 예산안의 국회 증액 동의 요청에 대한 동의 및 예산공고안’을 심의, 의결했다. 국회는 지난 8일 순계 기준으로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36조 7300억원에서 1조 1726억원 감액된 235조 5574억원으로 예산안을 수정 의결해 정부로 이송했다. 공자기금 융자계정 이차보전 6006억원·일반회계 국채이자 4689억원·국가하천정비 2000억원 등 3조 1329억원이 감액됐고, 참전명예수당 840억원·K9 자주포 620억원·서해5도 종합발전지원 420억원 등 1조 9603억원이 증액됐다. ‘2011년도 기금운용계획안의 국회 증액 동의 요청에 대한 동의 및 기금운용계획 공고안’도 처리됐다. 기금운용안은 정부가 제출한 371조 3685억원보다 2조 523억원 감액된 369조 3161억원으로 확정됐다. 정부는 이와 함께 ‘2011년도 예산배정계획안’도 의결했다. 계획안에 따르면 내년 경기회복 추세를 유지하고 보완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전체 세출예산의 67%를 상반기에 배정했다. 특히 일자리 지원, 민생안정 및 사회간접자본(SOC) 계속사업 등 민간 체감도가 높고 실제 집행이 용이한 사업을 중심으로 상반기에 우선 배정했다. 서해5도 지원과 가축방역 등 긴급지원이 필요한 예산은 회계연도 개시 전에 적극적으로 조기집행을 추진하기로 했다. 유지혜·김정은기자 wisepen@seoul.co.kr
  • [깔깔깔]

    ●도둑과 주인 어느 사내가 과음을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집 근처에 오자 대문 앞에서 도둑이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사내를 보자 도둑이 도망가려 했다. 사내가 말했다. “도망가지 마시오. 나와 흥정합시다. ” “ 네? 뭘 흥정? ” “ 당신이 담을 넘어 들어가 대문을 열어주는 데 얼마면 되겠소? 5만원? 10만원? ” “ 어림없소. 장농 열쇠라면 몰라도….” ●바보들의 대화 달 밝은 밤에 두 바보가 길을 가고 있었다. 첫 번째 바보가 말했다. “와, 달 참 밝다.” 그러자 다른 바보가 말했다. “야, 저건 달이 아니고 해잖아.” 두 바보는 달이다 해다 하며 티격태격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나그네에게 달인지 해인지 물었더니 그 나그네가 대답하길, “ 어, 저는 이 동네 안 살아서 잘 모르겠는데요.”
  • [길섶에서] 육필(肉筆)의 힘/구본영 수석논설위원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지인들이 자신들이 쓴 책 몇권을 엇비슷한 시기에 보내 왔다. 책 한권을 쓴다는 일이 말처럼 결코 쉽지 않을 게다. 지은이의 수고나 번민이 담겨 있지 않은 책이 어디 있으랴. 짬을 내 어느 책부터 읽을까 망설이다 차동엽 신부가 쓴 ‘바보Zone’에 맨 먼저 손길이 갔다. 아니, 마음이 움직였다고 해야겠다. 내용 속에 흔하디 흔한 자기 계발서와 달리 읽는 재미 이상의 종교인다운 영적 메시지가 담겨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책갈피 속에 지은이가 필자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사인펜으로 꾹꾹 눌러 쓴 메모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바보스럽게 살지 못함을 속죄하며…님의 무한 가능성 ‘바보Zone’이 맹아하여 함박꽃을 피우기를 기도드리면서”라는 메시지와 함께. 인쇄나 타이핑된 글에서 느껴지지 않는 정감이야말로 육필(肉筆)의 힘일 듯싶다. 문득 이 겨울에 오랫동안 보지 못한 옛 친구에게 이메일 대신 펜으로 쓴 편지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구본영 수석논설위원 kby7@seoul.co.kr
  • “돌아갈 팀 없지만 행복했어요”

    “돌아갈 팀 없지만 행복했어요”

    정말 일어났던 일이었을까. 아침에 눈 뜨면 아직 모든 게 꿈만 같다. 쏟아지던 강력조명, 관중들의 환호, 가슴을 휩쓸고 지나던 경기장의 진동. “내가 정말 그 경기들을 뛰었을까. 내가 거기 있었던 게 사실일까.” 혼자 되묻고 또 되묻는다.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것만 같다. 오랫동안 상상하던 걸 그냥 사실로 믿어버린 느낌. 한국 최초 여자 럭비 대표팀 민경진(26)은 매일 아침, 같은 질문을 던진다. 바보 같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스스로 믿기 힘들 만큼 꿈 같은 시간이었으니까요.… 아마 다른 선수들도 다 비슷할 거예요.”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난 지 열흘이 지난 7일, 민경진은 아직 그때 기억에 홀려 산다고 했다. 민경진은 광저우 대회, 여자 럭비 대표팀 주공격수였다. ● 성적은 나빠도 자랑스러워 사실 결과만 놓고 보면 행복한 기억이라고 하기 민망하다. 한국은 대회 내내 239점을 내주고 15점을 얻었다. 1승도 못했다. 6경기를 뛰어 모두 졌다. 8개팀 가운데 꼴찌. 단순히 숫자가 전해 주는 결과는 참혹한 수준이었다. 1승 꿈을 안고 광저우로 떠났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민경진은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이유가 있다. “대회 직전, 지더라도 비겁하게 지진 말자고 서로 얘기했었어요. 도망가지 말고, 겁먹지도 말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우리는 한번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성적은 나빴어도 우리 스스로는 자랑스러워요.” 결과와 상관없이 한국 최초 여자 럭비 대표팀은 성공작이었다는 얘기다. 민경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민경진이 처음 럭비와 인연을 맺은 건 미국에서 다니던 대학 시절이었다. 미국에선 15인제 경기에 측면 공격수로 뛰었다. 당시엔 취미 수준이었다. 한국에 들어와선 럭비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외국인들이 모인 클럽에 끼어 가끔 경기에 나섰다. 올해 6월, 대표 선발전 소식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적인 고민이 많았다. “과연 지금 일을 관두고 럭비를 해도 될까. 미래가 있을까.” 제약은 많고 여건도 좋지 않았다. “한국엔 여자 럭비팀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먹고살 고민도 해야 하고….” 그래도 일단 시작했다. 더 나이를 먹으면 다시는 이런 도전을 못할 것 같아서다. “주변에서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저 스스로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었고….”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경험을 했으니까요.” ●귀국 하자마자 해산… 일자리 찾아나서 꿈같은 시간은 다 지났다. 여자 럭비 대표팀 선수들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해산 절차를 밟았다.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돌아갈 실업팀도, 학교팀도 없다. 그저 각자 일상으로 복귀할 뿐이다. 현재 민경진은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저기 자리 알아보고 이력서도 적고 그러고 있어요. 그동안 공백이 길어서 자리 얻기가 쉽지 않아요.” 다른 선수들도 상황이 비슷하다고 했다.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몇명 빼면 다들 원래 생활로 돌아갔어요. 동료들 모두 지난 시간이 꿈 같을 거예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경기에서 뛰는 동안은 국가대표지만 대회가 끝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사실 이력서에 럭비 대표 경력을 쓰는 것도 꺼려져요. 자랑스러운 경력이지만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민경진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 민경진은 이제 럭비를 포기했을까. 대답이 묘했다. “현실적으로는 그만두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계속하려 해도 할 방법도 없죠.” 그런데 단서가 붙었다. “정말 선발 공고가 뜬다면 이번 대표 12명이 모두 다시 모일 것 같아요. 그러면서 말하겠죠. 너 또 왔느냐.” 현실은 어두워도 희망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길섶에서]의심/최광숙 논설위원

    남을 의심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근거 없이 타인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하고, 의심하는 이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다. 타당한 물증을 바탕으로 한 의심이라면 사실로 검증되겠지만 대부분 의심은 상상의 나래를 퍼덕이다 진실과는 점점 멀어지기 마련이다. 최근 이사를 했다. 그 와중에 손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이사비용 등 소소하게 지녀야 할 게 꽤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가방 안에 넣어 뒀던 물건이 안 보였다. 혹시나 다른 곳에 두었나 찾아봐도 나타나질 않았다. 처음에는 “함부로 의심하면 안 되지.”하는 마음으로 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찾는 물건이 손에 잡히지 않자 한순간 ‘의심’이 들었다. 급기야 혹 그 사람이 아닐까 하는 마음까지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물건은 집안에서 발견됐다.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잡아야 하는데 잠시나마 내 스스로에 놀아난 나를 보며 부끄러웠다. 이 어리석은 중생이여.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기념일은 특별하게~” 엽기 가족사진 화제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일을 맞아 가족끼리 기념사진 한 장쯤은 남길 것이다. 최근 조금은 유치하면서도 민망할 수 있는 가족사진들이 인터넷 상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2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 메일 등 외신들은 ‘Awkward Family Photos’라고 불리는 미국의 웹사이트에 기재된 엽기적인 가족사진을 소개했다. 공개된 몇 장은 이 사이트에서 인기 있는 사진 중 일부다. 산타 모자를 쓴 한 가족은 누드 상태에서 중요 부위를 무화과 나뭇잎 한 장으로 가렸고 엄마는 덤으로 코코넛 껍질로 된 비키니 상의를 입었다. 키 순서대로 서서 찍은 모습은 조금 민망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낸다. 다른 한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 손녀까지 크리스마스트리 형태의 옷을 입고 야외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또 다른 대가족은 아기가 우연히도 할머니의 가슴을 만지고 미소를 짓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편 이 웹사이트는 한 달 방문자 수만 1500만 명이 넘으며 독자들은 서로 ‘어색한 사진을 공유할 수 있다. 사이트를 만든 미국의 마이크 벤더와 더그 처네크는 지난해 4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해 지금까지 8만여 장의 사진을 공유하고 있다. 또 두 사람은 최근 가장 바보 같은 사진만을 골라 책에 실어 출판을 했다. 그들은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아 베스트셀러를 꿈꾸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거창한 보수의 수사학 대중에 왜 통할까”

    “거창한 보수의 수사학 대중에 왜 통할까”

    ‘포퓰리즘’은 보수가 상대를 비판할 때 가장 애용하는 단어다. 그러나 가장 포퓰리즘적 언동을 보이는 이들은 다름 아닌 보수다. 특히 진보적 가치를 공격할 때면 단순한 논리에 과격한 결론을 담고 있는 포퓰리즘적 수사를 선보인다. 미국과 한국, 양국 보수집단의 포퓰리즘적 수사학을 엿볼 수 있는 주장이 나란히 나왔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무상급식 논란에서 보듯, 진보적 가치에 대해 보수진영이 정면반박하긴 쉽지 않다. 몰인정하게 보일 우려가 있어서다. 보수 앞에다 ‘따뜻한’, ‘온정적’, ‘인간의 얼굴을 한’, ‘중도’, ‘서민’ 등 온갖 말을 붙이는 이유다. 구체적 이슈에 들어가면 더 뚜렷하다. ‘보편적 복지’ 같은 추상적 주장에 대해서는 ‘막 퍼주다 나라 거덜난다.’는 재정전문가적 우국충정이라도 내세울 수 있지만, 무상급식을 두고 ‘그렇게 하면 애들이 한 끼에 밥을 서너 그릇씩 퍼먹어서 급식 재정이 파탄날 것’이라고 반박하기 곤란하다. 그럼에도 못내 껄끄러웠던지 ‘소득 수준 하위 70%’에 무상 급식하는 것에 그쳤다. 왜 이런 걸까. 미국 프린스턴대 고등연구소 석좌교수였던 앨버트 허시먼의 저작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이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를 참고하면 되겠다. ‘반동의 수사학’(The Rhetoric of Reaction)이라는 원제에서 짐작되듯 저자는 진보적 가치에 대해 정면반박하기 힘든 보수주의자들이 다른 방법으로 저항하기 위해 어떤 말을 만들어 내는지 다뤘다. ‘프레임’을 키워드로 보수주의자들의 논법을 파헤친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떠오를 법하다. 허시먼 교수는 원래 ‘터널효과’로 널리 알려진 경제학자다. 터널효과론은 경제성장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정부가 분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 성장 자체가 저해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는 그간 미국 경제학계에서 논의되던 성장과 분배에 관한 쿠츠네츠 가설(성장이 일정 궤도에 오르면 분배는 ‘자동’적으로 개선된다는 가설)을 반박한 것이다. 자유시장적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하는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가 최근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허시먼 교수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이런 경제학자가 왜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적 수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을까. 여기에는 19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놓여져 있다. 이 책의 기획 자체가 1985년에 시작됐는데, 이때는 레이거노믹스가 맹위를 떨칠 때다. 허시먼 교수가 궁금하게 여겼던 점은 레이거노믹스(구체적으로 공급중시·공공선택·합리적선택이론이 언급됐다)처럼 경제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논리가 왜 정치적으로는 먹혀드느냐다. 허시먼 교수는 지난 200년동안 진보에 대한 반동세력들이 내놓은 주장을 역효과·무용·위험명제 3가지로 분류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복지정책에 대해 “결국 놀고 먹는 사람들만 늘어난다.”거나 “어차피 구제 안 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라거나 “복지병 때문에 망조가 든 유럽이나 남미 못 봤느냐.”고 한다. 이들은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대중은 ‘반쯤 바보이고 반쯤은 범죄자’라고 생각한다. 허시먼의 반론은 간단하다. 그렇게 걱정만 하다 아무것도 안 하느니 그래도 뭐라도 해보는 게 낫다는 것이다. 가령 정부 개입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이들이 밀턴 프리드먼의 ‘샤워실의 바보’ 얘기를 들먹이면 “그럼 물 온도 맞추기 힘들다고 넌 평생 샤워 안 하고 살 거냐.”라고 해 주면 된다는 것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세상을 바꾸는 열두가지 바보 리더십

    바보는 ‘밥보’란 말에서 나왔다. 밥만 축내는 아둔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이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바보가 긍정적인 의미로 재해석되고 있다. 지난해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바보 자화상’이 대표적이다. 요즘 젊은층에선 바보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 혹은 ‘바라보는 힘이 있는 사람’의 줄임말로 쓴다고 한다. ‘바보 zone’(차동엽 지음, 여백 펴냄)은 21세기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바보 철학에 대한 예찬서다. 베스트셀러 ‘무지개 원리’의 저자인 차동엽 신부(인천 가톨릭대 교수)는 바보 안에 숨겨진 가능성에 주목하고, 역사 속 세상을 바꾼 바보들의 이야기와 우리 안에 내재한 무한 에너지를 일깨울 열 두가지 실천적 바보 철학을 소개한다.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은 하나같이 바보였다. 세계적 기업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는 2005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 졸업 축사에서 “Stay hungry, stay foolish” (계속 배고프고, 계속 바보스러워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지난해 방한한 윌리엄 바넷 스탠퍼드대 교수는 “최고 경영자는 바보가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고(故) 장기려 박사는 생전 제자들에게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얕은 지혜와 지식을 발판으로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대신 우직하고 순수한 성품으로 창조적인 세계를 개척하는 바보의 속성과 리더십이야말로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가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보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단언한다. 내 안의 바보 지대, 즉 바보 존(zone)을 찾는 일은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 만큼이나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를 위한 실천 방안으로 열 두가지 바보 블루칩을 제시한다. 1만 28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대한민국 차사순 할머니에게 도전정신 배워라”

    “대한민국 차사순 할머니에게 도전정신 배워라”

    “아이들에게 도전정신을 가르치고 싶다면, 차사순 할머니의 사진을 걸어 두라. 아이들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960번의 실패 끝에 운전면허를 따낸 올해 69세의 대한민국 할머니라고 말하라.” ●960번 실패 끝에 운전면허 따낸 오뚝이 미국 유력 일간 시카고트리뷴(트리뷴)이 25일(현지시간) 지난 5월 한국 사회에 감동을 줬던 차사순 할머니를 소개하며 도전의 귀감이라고 극찬했다. 전북 완주에 사는 차 할머니는 2005년 4월부터 950차례의 필기시험과 10차례의 기능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끝에 지난 5월 운전면허증을 손에 넣으며 화제가 됐다. 트리뷴은 이날 도전정신을 강조하는 ‘960번’이라는 제목의 사설에 이례적으로 차 할머니의 사진을 함께 싣고 “차 할머니는 현대 부모들이 자녀에게 기억시켜야 할 ‘집념과 끈기의 귀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할머니는 도전을 즐긴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트리뷴은 미국 프로풋볼리그(NFL)의 노장 쿼터백 브렛 파브가 최근 경기 도중 심한 부상을 당해 실려 나가면서 “바보라고 불러라. 고집쟁이라고 불러라. 나는 도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을 두고 “차 할머니 같은 오뚝이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또 “차 할머니의 나라 대한민국에는 1977년 슈퍼밴텀급 세계타이틀매치에서 4번의 다운 끝에 다시 일어나 세계 챔피언이 된 유명 권투선수가 있다.”면서 홍수환 선수의 4전5기 일화도 소개했다. 특히 트리뷴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 애플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 등 실패를 딛고 성공한 유명인들의 사례를 거론하며 최후의 승자인 ‘컴백 키드’가 되려면 실패가 밑거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컴백키드 되려면 실패가 밑거름 돼야” 트리뷴은 데이비드 솅크의 책 ‘천재성의 발견’의 한 구절을 인용, “인간은 총명하게 태어날 수도 있고,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날 수도 있지만 집념은 부모와 교사, 친구로부터 배워 가는 것이며 평범한 삶과 성공한 삶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집념”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다시 도전하라. 또다시 실패해도 좋다. 이번엔 한결 성공에 가까워져 있을 테니까.”라는 말로 시작한 이 사설은 “누구나 쓰러지는 일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이다.”라고 마무리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슈스케2’ 별명 …허각은 중국돼지, 존박은 초딩박존

    ‘슈스케2’ 별명 …허각은 중국돼지, 존박은 초딩박존

    ‘슈퍼스타K 2’ 허각, 존박 등의 별명이 폭로됐다. 최근 진행된 SBS E!TV 철퍼덕 하우스 시즌2 ‘더 퀸’ 녹화에서 첫 게스트로 초대된 가수 박선주는 ‘슈퍼스타K 2’(이하 슈스케2) 멤버들의 별명을 공개했다. 박선주는 ‘슈스케2’ 멤버들의 숨은 공신. 무서운 보컬 선생님이며서도 누구보다 허물없이 편안한 멘토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날 박선주는 멤버들의 재미있는 별명들을 모두 공개했다. 허각은 ‘중국돼지’ ‘각선생’, 존박은 ‘초딩 박존’ ‘바보 존박’이라고 말했다. 허각은 맏형으로서 동생들을 잘 이끌어줘 동료들 사이에서 ‘각선생’이라 불리고 통통한 체격 때문에 ‘중국돼지’라는 별명도 함께 얻었다. 또 존박은 나이에 비해 생각이 너무 많아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을 끌어내주기 위해 ‘초딩’, ‘바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박선주는 “존박은 외국 생활을 오래해 한국에 잘 적응하는지를 늘 걱정했다. ‘초딩’, ‘바보’는 편안하게 만들어 준 것”이라며 별명을 통해 애정을 드러냈다. 박선주가 게스트로 출연하는 철퍼덕 하우스 시즌2 ‘더 퀸’은 오는 25일 첫 방송된다. 서울신문NTN 뉴스팀 기자 ntn@seoulntn.com
  • 김경진, 정다래 金 획득에 “밥 언제 먹냐”

    김경진, 정다래 金 획득에 “밥 언제 먹냐”

    ‘얼짱 수영선수’ 정다래와 개그맨 김경진의 만남이 성사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정다래가 지난 17일 중국 광저우 아오티 아쿠아틱센터에서 열린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여자 수영 평영 2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자 김경진이 정다래의 미니홈피에 찾아가 “밥 언제 먹냐”고 글을 남겼다. 김경진은 앞서 정다래가 광저우로 떠나기 전 12일 자신의 미니홈피에 김경진의 사진과 함께 “바보처럼 행동하는 게 아닌 진짜 바보 같고 정말 많이 착해빠져서 상처 많이 받아도 웃어넘길 것 같은 너란 남자. 귀여워 죽겠다. 정말 꼭 메달 따서 밥 한 번 먹어 보자”라고 공개적으로 남긴 식사 제안에 화답한 것. 같은 날 김경진도 자신의 트위터에 “광저우 아시안 게임 여자수영 국가대표 정다래 양이 실시간에 있길래 무심히 눌러봤다. 그리고 미니홈피에 들어갔는데 내사진이! 꺄악! 나랑 매달 따서 밥 먹고 싶단다. 내 사랑 너의 사랑 정다래”라고 글을 남겨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정다래는 금메달을 따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생각나는 사람으로 부모님과 코치와 동료 성동현을 꼽았다. 취재진이 “남자친구인가?”라고 묻자 정다래는 “남자친구는 아니고, 다래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며 복싱 국가대표 성동현 선수를 지목했다. 사진 = 정다래 미니홈피, 김경진 트위터 서울신문NTN 강서정 기자 sacredmoon@seoulntn.com
  •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레인보우’ 틀린 꿈은 없다, 다른 꿈을 꿀 뿐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레인보우’ 틀린 꿈은 없다, 다른 꿈을 꿀 뿐

    그녀, 지완(박현영). 카메라를 잡아본 게 화근이었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 잘 다니던 학교에 무작정 사표를 냈다. 그리고 5년, 그녀 나이 서른아홉, 단편영화 몇 편을 찍어 감독이란 직함을 얻었으나 장편영화 데뷔의 길은 멀고도 멀다. 시나리오를 15번 고친 후에도 지지부진한 입봉에 화가 치민 지완은 제작사와 작별한다. 안 그래도 서글픈 그녀에게 가족의 눈길마저 곱지 않다. 꾹 참고 지켜보던 남편이 때때로 화를 내기 시작하고, 뮤지션을 희망하는 중학생 아들은 아예 엄마를 바보라 놀린다. 묵은 시나리오를 들고 이곳저곳을 방문하다 지친 지완은 문득 새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새로운 제작사가 마련해준 사무실에서 지완은 새 시나리오를 준비하는데, 상업영화의 덫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레인보우’는 감독 신수원이 자기 삶으로부터 길어 올린 이야기다. 10년 가까이 교편을 잡다 방향을 바꿔 영화를 공부했고 카메라를 들었지만 몇 년이 지날 동안 장편영화의 꿈을 이루지 못한 그녀의 모습이 영화 곳곳에 투영되어 있다. 상업성이 최고의 잣대인 현장에서 지완이 쓴 보통 이야기는 번번이 무시를 당하고, 대단한 지원자인 양 행동하던 프로듀서는 막판에 그녀를 내버리며, 이웃 사무실의 엉큼하고 약아빠진 감독이 연출의 기회를 휙 낚아챈다. 그렇다고 해서 신수원이 상업영화 판의 얄팍한 상황을 정면으로 비판하고자 ‘레인보우’를 만든 건 아니다. 영화를 한낱 분풀이로 삼는 어리석은 짓거리 대신 신수원은 자신에게 ‘다른 목소리’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지완에겐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었고, 그녀는 영화를 통해 그것을 거짓 없이 말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레인보우’는 그 단순한 생각이 통하지 않는 현실에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으냐고 묻는 영화다. ‘레인보우’의 한 장면을 보다 나는 웃다 울었다. 선배에게 맞아 뺨이 부은 아들이 마찬가지로 부은 뺨을 내민 엄마를 보게 된다. 얼떨결에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에서 주연배우는 그녀에게 “어디로 가느냐?”며 뺨을 때렸고, 수없는 NG 끝에 그녀의 뺨은 얼얼해졌다. 선배에게 저항하다 얻어터지는 순간, 낯선 배우가 손바닥으로 내리치는 순간, 아들과 엄마는 공히 길을 잘못 가는 건 아닌지 고민했을 게다. 그러다 두 사람은 ‘다른 꿈’을 꾸고 ‘다른 길’을 걷고 있을 뿐임을 깨닫는다. 아들에게 ‘루저와 위너’의 뜻을 설명하던 지완은 자신을 ‘행인’이라 표현-‘레인보우’의 영어제목은 극중 단역에게 주어진 이름인 ‘Passerby #3(행인 3번)’이다-한다. 승자와 패자 외에도 다양한 행인이 함께 길을 걷는 바, 흑백이 아닌 무지개 색깔이 사회를 구성한다. 다양한 빛깔이 아기자기 모여 한 몸을 형성하기에, 그리고 하나를 위해 여럿이 힘을 모은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무지개는 그렇게 예뻐 보이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오랫동안 무지개를 잊고 살았다. 무지개는 존재하지 않는 꿈이었고, 난 꿈을 지운 채 살고 있었다. ‘레인보우’는 그랬던 가슴 속으로 무지개를 복원시키는 영화다. 드라마, 코미디, 다큐멘터리 사이로 풋내 나는 뮤지컬과 판타지를 맛깔나게 섞은 솜씨도 훌륭하다. 그러기에 단언한다. 올해 만난 수많은 영화 가운데 ‘레인보우’는 감동과 재미에서 으뜸이다. 영화평론가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42)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고전 톡톡 다시 읽기] (42)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2010년 여름은 월드컵의 계절이었다. 남자 대표팀의 16강 원정 성공을 시작으로 20세 이하 여자 대표팀의 4강 진출, 17세 이하 여자 대표팀의 우승까지 축구의 열기에 여름 더위가 무색했다. 매 경기마다 승부가 갈리고, 끝까지 살아남는 한 팀이 우승컵을 거머쥐게 되는 월드컵. 우리는 승패가 갈리는 그 순간을 보기 위해 눈을 떼지 못한다. 뉴기니의 원주민 가후쿠가마족도 유럽 문명의 유입으로 축구라는 새로운 게임을 배웠다. 그런데 그들은 양 팀의 승부가 똑같아질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계속 경기를 했다고 한다. 이게 뭔 소리? 게임이란 승패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닌가. 축구의 초식도 모르는 바보들이나 할 법한 이들의 리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이것은 원주민들이 게임을 의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게임과 의례의 원리는 반대다. 게임은 1등, 2등을 가림으로써 팀들의 차별성을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의례는 서로 다른 두 팀 사이의 대칭적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대칭적 관계를 통한 공존의 세계. 이것이 가후쿠가마족의 기묘한 축구가 보여 주는 무승부의 사유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들의 이러한 사유를 ‘야생의 사고’라 명명한다. 우리는 원주민들을 아무 원칙도 없이 살아가는 ‘야만인’이나 ‘미개인’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편견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구조’를 통해 우리의 편견을 깨고자 한다. 구조는 체계와 다르다. 체계가 한 사회 내부만을 문제 삼는다면, 구조는 두 개 이상의 사회를 대상으로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현대대수학의 군론(群論)을 차용해 설명한다. 군론은 질적인 ‘수’를 다루는 대신 ‘연산 구조’를 중심에 둔다. 레비스트로스는 질적으로 다른 두 집합도 연산 구조의 측면에서는 동일하게 다룰 수 있다는 군론의 아이디어를 인류학에 적용한다. 그리고 여기에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을 가미해 원주민과 유럽 문명 사이의 구조를 정치하게 비교분석한다. 이를 통해 그는 원주민 사회에도 문명사회와 동일한 구조가 숨겨져 있음을 밝힌다. “야생의 사고는 야만인의 사고도 아니며 미개인이나 원시인의 사고도 아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세련화되었다든가 길들여진 사고와는 다른,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의 사고다.” 레비스트로스는 ‘브리콜뢰르’(손재주꾼)를 통해 이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를 설명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소개하는 작품 하나를 보자. 동서양과 시간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건축 양식을 구현하고 있는 ‘우편배달부 슈발의 아방궁’. 피카소까지 감동시킨 그 궁은 우편배달부 슈발이 편지를 배달하는 길에서 주은 돌들을 쌓아 만든 작품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슈발을 브리콜뢰르라 부른다. 브리콜뢰르는 문명의 상징인 장인과는 다른 작업 방식을 가지고 있다. 장인은 자신에게 꼭 맞게 마련된 재료와 도구가 없으면 제대로 작업을 할 수 없다. 그에게 훌륭한 재료와 도구는 좀 더 나은 작업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브리콜뢰르의 재료들은 우연적으로 그의 손에 들어온 것들이다. 장인의 눈에 브리콜뢰르의 작업대는 너저분해 보인다. 그러나 브리콜뢰르는 그런 눈으로 재료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잘 다듬어진 재료를 기다리는 대신 자신 앞의 그 우연적 재료들을 가지고 바로 작업에 돌입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재료와 직접, 그리고 전면적으로 만난다. 그 부딪침 속에서 재료가 가진 잠재적 능력을 끝까지 끌어올려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낸다. 브리콜뢰르는 훌륭한 재료를 가지지 못했다. 대신 그는 재료를 훌륭한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야생의 사고가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그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 있다.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폭력적’이지 않겠는가 하는 마뜩지 않은 눈길. 분명 원주민들이 보여 주는 통과의례는 끔찍해 보인다. 영화 ‘아바타’에도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주인공 제이크가 통과의례를 겪는 모습이 등장한다. 나비족의 전사가 되려는 제이크는 자신을 허락하는 익룡 ‘이크란’을 찾아 교감에 성공해야 한다. 그 과정에 세련되고 효율적인 매뉴얼이 들어올 틈은 없다. 그것은 차라리 싸움에 가까워 보인다. 그 싸움은 제이크가 인간으로서 이크란의 주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릴 때 끝난다. 문명 속의 우리는 그런 싸움을 통해 ‘나’란 존재가 다칠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친절’이나 ‘상냥한 미소’의 서비스를 바란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알았다. 교감은 그런 서비스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나’를 지키겠다는 두려움이 오히려 교감을 싸움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임을. 그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제껏 타자였던 자연과의 교감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감은 오로지 인간이란 정체성을 버릴 때 가능하다. 통과의례의 고통은 자신을 해체시키는 데 따르는 아픔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게임의 원리를 따르는 서구적 지성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특권적 영토 안에 인간을 세웠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꼭 그만큼, 인간들 스스로도 서로에 대해 분리된 채 살아가게 되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도, 서로에 대해서도 고립된 채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 확장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밀가루에서 배추로 이어지는 농산물 파동,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종 분쟁과 종교 분쟁. 그렇게 우리는 교감과 공존의 능력을 상실해 갔다. 타자든 자연이든 교감과 공존은 나의 것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않는 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후쿠가마족이 바보여서 그런 기묘한 축구를 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같이 살아가는 무승부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교감과 공존은 길들여진 자신만의 영토에서 나올 때 시작된다. 자신을 해체한 마주침 속에서 매 순간 새롭게 형성되는 교감과 공존의 지반. 그렇기에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용해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설령 그 용해가 기존의 ‘나’를 통째로 뒤집더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신근영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문화계 블로그] 드라마 ‘대물’ vs 영화 ‘부당거래’

    [문화계 블로그] 드라마 ‘대물’ vs 영화 ‘부당거래’

    SBS 수목 드라마 ‘대물’과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부당거래’는 권력을 다룬다는 점에서 겹쳐진다. 공교롭게 요즘 정치권을 떨게 만들고 있는 검찰도 양쪽 모두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은 판이하다. ●‘교훈·감성 정치’ 정당화… 현실성도 없어 우선 대물. 작가와 PD가 교체된 후에도 정치 편향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중도 하차한 황은경 작가가 “국가정보원에 불려 가는 것 아닌지 불안했다.”고 밝힌 대목은 제작진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너무나 저급한 드라마 철학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대물은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다.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서혜림(고현정)은 “지키지도 못할 약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싶지 않다.”라고 일침을 놓는다. 말로 옮기기에도 쑥스러울 정도로 진부한 ‘발언’임에도 유권자들은 환호한다. 유세 장면은 더 가관이다. “이런 나라에서 우리가 무슨 희망을 갖고 살겠느냐. 이런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애를 키울 수 있겠느냐.”라고 절규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이기만 하면 하는 얘기인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이 말 한마디에 유권자들은 또 눈물을 주루룩 흘린다. 마침내 국회의원이 된 서혜림은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국민 여러분이 정치인들 종아리에 회초리를 쳐서 국민들을 표 찍어주는 사람으로만 아는 오만 불손함을 타일러 달라.”고 호소한다. 말이야 백번 옳은 소리다. 하지만 뻔한 말로 정치에 훈수를 두는 ‘교훈 정치’나 감동스러운 화술에 의탁하는 ‘감성 정치’를 정당하게 만드는 이 같은 설정은 시대를 역행한다. 현실성도 없다. 이미 국민들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정치인에게 이력이 나지 않았던가. 울부짖고 목소리 높이는 것 외에 이렇다 할 정치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는데도 서혜림은 국민의 열광적 호응에 힘입어 대통령까지 될 예정이란다. ‘국민=바보’라는 전제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가능할 수 있을까. 국민 의식을 한참 내려다보는 제작진의 태도에 시청자들도 슬슬 등을 돌리는 양상이다. 시청률 조사기관인 AGB닐슨리서치에 따르면 대물 시청률은 지난주 24.5%로 전주보다 2.8%포인트 하락했다. ●여론조작·부당거래 적나라하게 파헤쳐 영화 ‘부당거래’의 흥행 성공은 대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는 검찰과 경찰, 기업 그리고 언론이 한데 얽히고설켜 음모를 만들어내는 ‘권력의 뒤안길’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하지만 대물처럼 감성적인 대안을 강요하거나 교훈을 주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신랄하게 파헤쳐 여론 조작과 부당 거래의 과정을 거칠게 보여줄 뿐이다.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저절로 느낀다. “아, 권력 유착은 한 개인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복잡하게 꼬여 있는 것이구나.” 여기에 힘입어 부당거래는 개봉 9일 만에 관객 115만명을 넘어섰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심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드라마가 현실 비판을 그대로 담기에는 제약이 따른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물은 서혜림의 교과서적인 발언으로 오히려 정치 혐오를 부추기고 심지어 교조적으로 가는 측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구태의연한 정치 달변으로 국민을 ‘계몽’하려 드는 대물. 신랄한 리얼리티로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부당거래. 대척점이 분명해 보인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강남 좌파’라 불러도 좋다…후손들은 경쟁 폐단 피해야

    ‘강남 좌파’라 불러도 좋다…후손들은 경쟁 폐단 피해야

    ‘진보집권플랜’(조국·오연호 지음, 오마이북 펴냄)은 조국 서울대 법과전문대학원 교수에 대한 또 다른 성격의 ‘팬픽’(FanFic·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팬이 쓴 소설)과 다름없다. ‘직업 좋지, 글 잘 쓰지, 키 크지, 잘생겼지 게다가 진보적이기까지 한’ 조 교수가 “우리가 겪었던 무한 경쟁의 쳇바퀴 속으로 자식과 손자가 또 들어가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제안하는 데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책은 지난 2~9월 조 교수와 오연호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가 서울 방배동의 카페 그리고 조 교수의 서울대 법대 연구실에서 열 차례에 걸쳐 진행한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매력적인 진보’ 조 교수를 마음에 둔 오 대표는 그에게 미리 질문지를 주지 않고 한국 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묻는다. 성찰, 사회·경제 민주화, 교육, 남북 문제, 권력, 사람 6개 주제에 대해 조 교수는 예리한 답변을 내놓는다. 100명이 정원인 유료 특강에 400여명이 신청하고, ‘욘사마’(배우 배용준)에는 시큰둥한 한국의 ‘배운 아줌마’들이 그의 강의를 듣겠다고 몰릴 정도로 조 교수는 한국 사회의 ‘희망의 불씨’이기도 하다. 책은 조국(曺國) 교수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조 교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항렬자인 ‘현’(鉉)자도 넣지 않고 외자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아주 센 이름입니다. 모험을 거신 거죠. 저는 이 이름이 제게 부담을 준다고 생각했고, 그 부담을 감당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라고 ‘누구나 기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영남 좌파’ 또는 ‘강남 좌파’(생각은 좌파적인데 생활 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계층)란 비난을 다 받아들인다고 운을 떼면서 진보의 편에 서는 이유도 밝혔다. “한국 사회는 한국전쟁과 분단, 독재와 권위주의, 천민자본주의의 지배로 인해 진보가 심각한 과소 상태에 있다. 지식인으로서 이런 상황을 직시하면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으로 변신할 의지는 없느냐는 오 대표의 질문에 조 교수는 “정치인의 삶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고 밝혔다. 서울대 법대 82학번으로 학생운동 대오의 중간 정도에 서 있다가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완전히 발가벗은 채로 대중의 바다에 뛰어들 용기가 없어 졸업 후 진로를 공부로 택했듯, 한국 현실에서 정치인이 되려면 ‘야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점이 취약하다고 고백했다. 사람 만나서 술 많이 마시고, 골프 치면서 후원자도 만나고 인맥을 넓혀야 하는 정치인의 일상도 자신 없다고 덧붙였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는 조 교수의 ‘진보 플랜’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서울대 분할론’이다. 학벌 사회의 원흉이라 불리는 서울대에 있어서 죄송하다고 먼저 사죄부터 한 그는 우선 ‘국·공립 대학 통합 네트워크’를 소개했다. 전국 국·공립대 입시를 통합 전형으로 치른 뒤 공통 학점 이수와 졸업시험을 운영하여 졸업생에게 동일 학위를 수여하는 안이다. 하지만 대학생 대다수는 서울대에서 수업을 들으려 할 것이고 먼저 이 제도를 도입한 프랑스와 핀란드도 대학평준화 정책을 수정했다는 점을 들어 서울대 폐지보다는 분할이 타당하다는 게 조 교수의 설명이다. 너무 강한 영향력을 가진 서울대를 두개 정도의 국립대로 분할하는 것으로 학부대학과 전문대학원, 문과와 이과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 제안했다. 자연대·공대·약대·농업생명과학대 등을 묶어 ‘국립서울과학대학교’로 분가해 영국의 옥스퍼드대·케임브리지대, 일본의 도쿄대·교토대, 중국의 베이징대·칭화대처럼 경쟁할 수 있다는 부연설명이다. 책의 마지막 장은 유시민, 정동영, 이정희, 원희룡, 나경원 등 정치인에 대한 실명 평가로 채워져 있다. 조 교수는 결코 ‘주례사’를 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모범생’ 나경원 의원의 노트를 빌리기도 했다는 조 교수는 “보수 정치인으로 더 커가려면 ‘얼짱 경원’이 아니라 콘텐츠와 일관성을 갖춘 ‘주어 있는 경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유시민에게도 정치인들이 ‘동지애’를 느끼지 못하는 야멸친 품성에 대한 ‘낙인’이 있다며, ‘바보 노무현’의 인간 냄새가 더 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가격 1만 5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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