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석의 스크린 엿보기] 언더 더 쎄임 문
멕시코에 사는 아홉 살 소년 카를리토스가 1500㎞ 떨어진 LA에서 일하는 엄마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돌봐주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자, 카를리토스는 직접 LA까지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미국으로 밀입국을 해야 하고, 혼자 다니는 아이를 위협하는 악당들은 물론 부모를 찾아주려는 미국경찰들도 피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더 큰 문제가 있다. 카를리토스는 엄마가 일하는 곳이나 집 주소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매주 일요일 아침 전화를 했던 엄마가 들려준 주변 풍경뿐. 도미노 피자가 있고, 빨래방이 있고, 선물 가게가 있고, 벽화가 그려져 있는 거리를 카를리토스는 찾아가야 한다.
멕시코와 미국 합작으로 만들어진 ‘언더 더 쎄임 문’은 엄마를 찾아 여행을 떠난 아홉 살 소년의 로드 무비다. 로드 무비는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들과의 만남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성장하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영화다.‘언더 더 쎄임 문’도 전형적인 로드 무비의 문법을 따라간다. 카를리토스는 여행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카를리토스는 세상이 얼마나 불평등하고 힘든 곳인지, 그러면서도 살아갈 희망이 존재하는 곳인지 배우게 된다. 때로는 노래를 부르면서 배우고, 때로는 배신을 당하면서도 배운다.
멕시코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에 밀입국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다. 그들은 국경을 넘는 순간 범죄자가 되고, 언제나 두려움에 떨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상하다. 미국은 원래 이민자의 국가 아닌가. 멕시코인들은 슈퍼맨과 멕시코인을 빗댄 노래를 부른다. 똑같이 비자도 없고, 시민권도 없는 신세이지만 왜 그렇게 처지가 다른 것일까? 슈퍼맨은 백인이고, 힘도 세기 때문에? 그렇다. 미국은 강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다. 인디언을 착취했고, 흑인을 착취하다가 지금은 히스패닉을 착취하는 것이 미국의 역사라는 멕시코인들의 농담은 단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언더 더 쎄임 문’의 진짜 힘은, 미국에 대한 조롱이나 비판이 아니다. 카를리토스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미소를 짓는 것처럼,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믿음이 ‘언더 더 쎄임 문’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영화로 만든다. 현실의 모순과 불합리함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의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멕시코 이민자들의 진솔한 마음을, 아이의 순수한 시선으로 담아냈다는 것이 ‘언더 더 쎄임 문’의 미덕이다. 영화가 끝나고서도, 카를리토스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잊혀지지 않는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