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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읽는 연극” 희곡집 출간붐

    ◎차범석·김상열·박재서씨 대본 서점가에/공연장·연출·출연진등 관련기록도 수록 중견 극작가·연출가들의 희곡집이 최근들어 잇달아 출간되고 있다. 희곡집 출간으로 그동안 연기자나 제작진등 한정된 연극계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돌던 연극대본들이 책으로 출간,희곡에 관심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쉽게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됐다. 올들어서만도 중진 극작가 차범석씨가 지난 86년 공연됐던 「식민지의 아침」 등을 포함,자신의 희곡 5편을 모아 여섯번째 희곡집을 냈다.(학고방간) 또 이에 앞서 극작가 겸 연출가인 김상렬씨가 70∼90년초까지 공연됐던 작품 13편을 「언챙이 곡마단」과 「애니깽」등 2권으로 나눠 출간했다. 이번에 나온 희곡집들은 공연 일시와 장소,일부 작품의 경우 연출가와 출연진까지 밝히고 있어 공연당시의 관련기록을 남기고 있는 셈.13일 숙환으로 별세한 희곡작가 박재서(51)씨도 지난해 자신의 대표작 「팽」「하나님 비상이에요」등 10여편을 모아 희곡집을 펴내 화제가 됐었다. 창작극만을 공연해온 아리랑극단도 지난해 공연됐던 「점아 점아 콩점아」와 신극사 왜곡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격정만리」등 김명곤씨의 작품 2편을 각각 창작대본집으로 펴냈다.
  • 외국의 실례(자치단체장 선거연기 ­그 결단에 부쳐:3)

    ◎미국/주민의사 결의하는 대의기구 더 중시/워싱턴시,의회출범 1백년만에 직선 미국의 지방자치의회 역사는 1776년 영국식민지에서 독립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반해 지방자치단체장 직선은 20세기에 들어서야 시작됐다. 영국은 1607년 일단의 이주자를 버지니아의 제임스강 연안에 정착시킨 뒤 의회제도를 도입,1619년 제임스타운에 지방자치를 시작했다. 그후 독립을 거치면서 자치의회 구성은 계속됐으나 자치단체장은 오랫동안 임명 또는 위원회제 등 직선 이외의 방식을 견지해왔다. 미국에는 약 3천개의 군(County)을 비롯,시(City) 읍(Town) 면(Village) 구(Borough) 특별구(Sp­ecial District) 등 약 8만1천개 정도의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카운티를 예로 들면 인구 7백만명의 로스앤젤레스카운티(캘리포니아주)에서부터 2백명의 라빙카운티(콜로라도주)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나 제도운영면에서 천양지차다. 이들 지방자치단체의 집행기관장 선출방법과 지위 권한도 기관유형에 따라 다양하다. 선출방식은 ▲주민직선 ▲의회에서 의원들중에 선출 ▲의회가 행정전문가를 선임 ▲의회 또는 위원회의 각 의원 또는 위원이 각 행정부문별로 분담 또는 호선하는 형태 등으로 나뉘어진다. 이 가운데 대도시를 비롯한 대부분이 지방자치단체장을 주민직선에 의해 선출하기는 하지만 규모가 작은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여타선출방법도 많이 채택되고 있다. 필라델피아로부터 1800년 연방수도의 지위를 넘겨받은 워싱턴 특별시의 경우 1804년부터 상하양원 모두를 주민들이 직접 선출,실질적인 자치의회를 구성했으나 시장의 직선은 그뒤 1백16년이 지난 1920년에야 실시됐다. 지방자치의회가 주민직선에 의해 구성된 뒤에도 자치단체장이 이토록 오랜기간동안 직선되지 않은 이유는 주민들이 집행기관의 권한을 억제하고 대의기관인 의회를 집행기관보다 우위에 둬 집행기관에 단지 의회결정사항을 집행하는 심부름꾼의 역할만을 부여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후 사회의 복잡화로 인해 다양해지는 행정수요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종합적인 행정책임을 명확히할 필요가 요구됨에 따라 자치단체장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면서 마침내 직선제가 도입됐다. 미국에서는 각급 지방자치단체선거가 같은날 동시에 치러지며 선거비용이 국가경제에 주름살을 가게하지도 않는다. 미국이 수백년에 걸쳐 경험했던 전철을 한국이 이제와서 그대로 답습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치단체장 임명제를 오래 경험한데서 연유되는 불만과 여러가지 선거를 한꺼번에 시작하는데서 나오는 경제파탄 및 사회혼란 우려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데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는 있을 것 같다. ◎프랑스/“경제부담 덜자” 모든 단체장 간선으로/파리시장 「코뮌」 탄생 백86년뒤 첫 선거 프랑스의 지방행정 또는 지방자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광역이든 기초단위든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간선으로 뽑아 직선에 따르는 인력 및 경비의 소모와 혼란 등을 덜고 있다는 점이다. 광역지방자치단체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레죵(26개)과 데파르트망(1백개이며 우리의 도규모)이 있다. 하위 지방자치단체로는 3만6천여개의 코뮌이라는 것이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지방자치단체의 지위를 가지지 못하는 행정단위로서 아롱디스망과 캉통이라는 것이 있다. 파리는 레죵과 코뮌이라는 두가지 지방자치단체의 지위를 겸하고 있다. 데파르트망의 집행기관은 데파르트망의회에서 선출된 의장이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도의회의장이 도지사와 같은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레죵의 집행기관장도 레죵의 회의장이다. 각 데파르트망과 레죵에는 국가적인 업무의 집행을 하는 「프레페」 또는 「코미세르드 레죵블리크」(중앙정부파견관)가 중앙정부에서 임명되어 와서 경제계획,국방,공안,교육 등 국가사무의 추진과 지방자치단체간의 조정을 맡아 지방분권의 결점을 보완하고 있는 것도 또하나의 특징이다. 갈수록 이러한 중앙집권적 개입이 늘어나는 추세다. 지방자치가 확대되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심한 지역간의 문화적 경제적 불균형현상이 심해졌다. 예를 들어 파리는 전국인구의 2%에 지나지 않지만 문화시설이 집중돼 있고 경제력 편중도 심하다. 전국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한 중앙정부 개입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대두되었고 오늘날에는 매우 많은 분야에서 중앙집권적 행정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근대적 지방자치는 1789년 왕정을 무너뜨린 혁명후 파리 코뮌의 성립으로부터 시작돼 2백여년의 연륜이 쌓인 것이며 그동안 단계적 발전과정을 겪었다. 지방의회제도의 역사는 이렇듯 길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이 선출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수도인 파리에서 시장선거(간선)가 실시된 것은 1975년부터이다. 이는 파리 코뮌 탄생후 1백86년만의 일이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실권의 행사자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무보수의 명예직이며 명망가들이 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코뮌의 장(메르)인 파리시장 자크 시라크·보르도 시장 자크 샤방델마는 대통령에 출마했던 거물 정치인이다. 시라크는 다음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이기도 하다. ◎일본/“시행착오 극소화… 지역이기주의 배제 도움”/1945년 이전까지 중앙정부서 단체장 임명 일본의 지방자치제는 1백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반세기 이상의 적응과정을거친후 실시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지방자치제도는 1889년에 도입됐다. 일본은 자치성이 지방자치단체장을 임명하는 이른바 「단체장 정부임명제」로 출범했다. 지방자치단체장 직선제가 실시되기 시작한 것은 지방자치제 도입 57년 후인 1946년부터였다. 일본은 이같이 지방자치제 도입후 단체장선거 실시까지 오랜 준비기간과 적응과정을 거쳤다. 일본의 이러한 단계적인 단체장 직선제 도입은 새로운 제도도입에 따른 혼란과 시행착오를 극소화하며 착실하게 지방자치제를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일본 입교대의 이가라시 아키오 교수(일본정치학 전공)는 『일본은 지방자치제의 효율적인 운영과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위해 지방자치단체장의 정부임명제로 출범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방자치제 도입으로 우려되는 지나친 지방자치의 「정치화」와 지역이기주의를 배제하고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국가전체 발전전략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단체장 직선제를 서두르지 않았다』며 『일본의 증앙정부는 아직도 지방자치단체에 비해 많은 강력한 권한을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2차대전 패전후 미군정 아래 있던 1946년 미제도를 모방,지방자치단체장의 직선제를 도입했다. 일본의 도·도·부·현의 지사 및 시·정·촌장 등은 국민들의 직선에 의해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직선제도입 초기에는 지방자치단체장에 행정의 비전문가인 민간인들이 대거 진출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의 다원화로 업무가 복잡해지면서 행정실무 경험을 갖춘 행정관료 출신의 진출이 급증하고 있다. 전국 47명의 지사중 73%가 행정관료 출신이며 그밖의 단체장도 70% 정도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관료출신이다. 일본은 또 단체장의 행정관리를 지원하기 위해 부지사,부시장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이같은 보조기관 임명제도는 지식과 경험을 가진 행정전문가로 하여금 단체장의 행정업무를 대행케하기 위한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장의 「행정관료화」 경향은 지방자치의 탈정치화를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경도지사,지난 67년부터 79년까지 3기 연임한 미노베지사는 공공시설투자보다는 「정치적인기」를 위해 복지도정이라는 구호아래 복지부문에 과잉투자를 했다. 그 결과,임기말에는 재정적자가 2천7백억엔으로 늘어나 결국 그는 4기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미노베지사 후임으로 당선된 현재의 스즈키지사(4기 연임중)는 대대적인 기구감축 등으로 재정적자 해소에 성공했다. 자치성 사무차관 출신인 스즈키지사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행정전문가로서 지방자치단체장의 위상을 굳혀가고 있다. 그러나 행정관료 출신의 지나친 증가는 지방자치에 대한 중앙정부의 영향력 강화를 가져올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가라시 교수는 『이상적인 일본의 지방자치단체장은 민주적이고 창조적인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북한 전인찬대사 일문일답

    ◎“미와 무역문제등 협상도 희망/한국·미에 다른 요구사항 없다” ­북한은 안전협정 서명후 영변핵시설을 포함한 모든 핵시설을 사찰에 개방한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영변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나 IAEA가 규정한 대상 리스트에 따라 모든 시설과 물질을 비준후 30일내에 보고할 것이다. ­조만간 미국과 고위급회담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핵문제만 논의되는가,아니면 무역 등을 포함한 다른 문제도 논의되는가. ▲아직 어떤 논의가 이루어질지 알 수 없으나 북한은 핵 이외의 다른 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대화가 있기를 희망한다. ­안전협정 서명의사를 밝히면서 왜 월말까지 서명시기를 늦추는 것인가. ▲서명시기는 독립국가의 주권문제이다.핵사찰과 관련한 북한의 모든 요구는 실현됐으며 우리는 이것을 거대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한다.때문에 서명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현지에서도 체결할 수 있지만 본국에서 직접 대표단이 오기로한 것이다. ­구체적인 협정서명시기는. ▲1월의 마지막주중 하는 것으로 IAEA와 합의했다. ­서명후 비준·발효의 구체적인 일정은. ▲모든 요구를 얻었으므로 국내절차와 내부과정에 따라 가능한 최단시일내에 사찰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비준은 국내법에 따라 입법기관에서 한다. ­핵사찰문제와 관련,한국·미국 등에 더 요구할 것이 있나. ▲모든 요구는 이루어졌다. ­미국 등이 IAEA에 신고한 핵시설 외의 미신고 시설에 대해서도 사찰하는 강제사찰제를 추진하고 있는데. ▲우리는 미국의 식민지나 패전국이 아니다. 북한은 독립국으로서 국제조약의 의무를 수행할 권리가 있다.
  • 탈냉전이후 북한­중국 관계를 전망한다(오늘의 북한)

    ◎“외로운 사회주의 동반자”/평양­북경 밀월 언제까지/북/소 붕괴이후 경원등 대중 의존도 강화/중/겉으론 평양… 대한 관계선 실리를 추구/경제가 변수… 「혈맹관계」 오래 못갈듯 중국은 구랍 27일 북한의 김정일 군최고사령관 추대와 관련,외국지도자로서는 유일하게 당총서기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강택민을 통해 축전을 보냈고 이에 김정일은 『중국­조선간 당·인민 및 군간의 우호적이며 협력적 관계가 향후에도 공고·발전될 것을 확신한다』는 답전을 보냈다. 또 다음날 북한부총리겸 외교부장 김영남은 평양주재 중국공관이 주최한 「새해맞이 초대회」에서 북­중간 친선협력관계의 공고화를 거듭 강조하는 등 북한­중국간 친선협력증진과 사회주의체제 고수를 함께 다짐하는 모습들이 연일 전해지고 있다. 최근 「평화연변」의 경계속에서도 개방정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는 중국과,「남북합의서」「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타결 등으로 전례없이 유연한 대남자세를 보이고 있는 북한.구소련의 붕괴와 동구사회주의국가들의 민주화로 지구상에서 외로운 사회주의 파수꾼으로 남게된 이 두나라의 「밀월」이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는 예측불허의 체제격변속에서 세계의 시선을 모으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소련에 이어 두번째 세번째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1949년 10월 6일 외교관계를 맺은 북한과 중국은 6·25전쟁이 발발한지 넉달뒤인 1950년 10월25일 중국이 「인민지원군」이란 명목으로 85만명의 병력을 한국전에 투입한 이래 1953년 7월27일 휴전때까지 전쟁물자 지원 등을 통해 그야말로 「혈맹」의 돈독한 관계를 맺어 왔다.이어 중국은 전후복구기에 「비밀경제합작협정」등 각종 협정을 통해 북한에 무상원조를 베풂으로써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북한의 종주국이었던 소련과 대등한 입장에 올라서게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양국은 1961년 7월 전문 7조의 「조­중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군사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외교적 긴밀도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북한은 66년 「자주노선선언」등으로 한때 대중국관계가 냉각되기도 했으나 중소 이념분쟁의 와중에서 친중국으로 선회,북한­중국관계는 더욱 밀착됐다.이후 소련의 급격한 해체가 있기 전까지 북한은 등거리 외교노선을 견지,중소에 양다리를 걸쳐 왔다. 그러나 지난 85년부터 시작된 개혁과 개방,그리고 최근의 연방붕괴로 소련과 갈라설 수 밖에 없게된 북한은 중국과 이념·체제의 일체성을 재확인하고 제반정책에 대한 지지·보증을 얻기위해 대중접근을 강화,그 의존도를 심화시켜오고 있다. 90년 4월 강택민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평양공식방문,7월 김일성주석의 심양비공식방문,11월 연형묵정무원총리의 첫 중국방문에 이어 91년에 들어서 이뤄진 이붕총리(5·3∼6)와 외교부장 전기침(6·17∼20)의 방북도 양국간 관계긴밀화를 겨냥한 포석이었음은 물론이다. 그가운데서도 가장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것은 87년 5월이후 4년5개월만에 이루어진 김일성 중국장기(10월4∼13일)방문이었다.북한의 유엔가입직후 이루어진 이방문에서 김일성은 중국지도자들과 ▲이념적 유대강화문제 ▲대북경제지원 ▲북·미·일관계개선 ▲핵사찰문제등 여러 현안들을 심도있게 논의했을 것으로 보이나 관측통들은 중국측의 요란한 환대에도 불구,「전통적 우호관계」확인외에는 별 소득이 없는 방문이었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들 고위인사들의 상호방문외에도 의학협회대표단등 각종 친선단체수준의 교류 역시 빈번하다. 경제교류도 전시무상지원에서 출발,54년 「경제및 문화교류협정」체결이후 쌍방간 10년마다 재체결하는 물자상호제공협정서등에 의해 바터무역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물품을 국제가격보다 싼값으로 제공하는 이른바 「우호가격제」를 북한에 적용해 왔으며 대금결제는 물품교환후 나중에 남은 차액만 계상하는 「청산계정」을 채택하는 등 북한경제에 유리한 방식을 취해왔다. 그럼에도 불구,북한의 대중국 교역규모는 90년의 경우 4억8천만달러에 불과,전체 무역규모 50여억달러의 10%선에 머물고 있다.다만 80년대 후반들어서부터는 정부간 무역외에 지방기업들의 수출입권을 이용한 로칼무역이나 변경무역이 제법 활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물자의 상호 보완성·수송의 편리성 등으로 비교적 무역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양국 모두 경영의 노하우가 부족해 경협규모가 급격하게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한편 홍콩동향지등 외국언론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10월 김일성의 방중시 「소련의 원조중단」으로 「위기적 상황」에 처한 북한에 석유·식량·석탄 등 1백만t을 지원키로 약속했으며 군사원조액을 현재의 연15억원에서 25억원(5억달러)으로,군사판매액은 현재 30억원에서 50억원(10억달러)규모로 늘려주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보도내용이 사실일 경우 중국정부의 대북한지원약속은 중국이 소련사태이후 체제붕괴를 모면한채 남아있는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반미거점을 삼으려는 정책기조에서 내려진 결정일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최근들어 급격히 긴밀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탈냉전시대에 들어서 자국과 함께 「체제붕괴의 위험」을 공유하고 있는 북한의 안정을 바라는 중국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치·경제적 지원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중국 스스로가 안고 있는 어려움으로 그 한계는 분명하다.게다가 중국은 대북관계를 통한 대의 명분을 취하기보다는 경협에 무게를 실은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실리를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따라서 중국은 앞으로 북한과 미일의 수교를 측면지원하고 한중국교수립과 관련,양해를 구하는 「평형」상태의 남북한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같은 중국의 향후 태도변화를 통해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우방」이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될 것이며 그같은 상황전개는 북한으로 하여금 폐쇄의 문을 열게하는 정의 방향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 오늘의 혼돈상황 극복의 길/정옥자교수 인터뷰(서울신문 새해특집Ⅲ)

    ◎선비정신 되살려야 한다/옛날의 「철저성」과 「검약」 다시 배워야/아집보다 대의·미래지향의 통찰 필요/시속 영합않고 시비 분명히 가리는 자세 긴요 물질문명의 발달이 극도에 이르고 사람의 지혜가 하늘꼭대기를 향해 끝간데를 모르고 달려가고 있는 오늘날,전통사회의 덕목이었던 「선비정신」을 들먹인다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지 않는 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도 더 나아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연 선비정신은 이미 오늘날에는 쓸모없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으며 이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일까. 이에 대해 뜻있는 많은 사람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뿐만아니라 오늘날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특히 지식인계층에 팽배해 있는 혼란·방황·무정견·몰가치 등 여러 현상을 극복하는 방도를 선비정신에서 찾아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정옥자교수(50·서울대 국사학과)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조선후기지성사」(일지사 간)란 저서를 펴내기도 했던 그는 가치판단과 윤리의식이 마비된 오늘날 우리 사회(특히 지식인 계층)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로지 선비정신의 회복밖에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를 만나 선비정신에 대해 들어본다. 『선비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오늘날 우리 지식인들의 실상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은데 저도 물론 그 속에 포함됩니다만 한마디로 실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썩은 냄새를 풍기는 이 시대에 지식인이라 해서 예외는 없다는 듯이 함께 부패하고 타락하는 군상들이야 이미 지식인이기를 포기했으니 언급할 가치조차 없겠지요. 그러나 그래도 일말의 기대와 관심을 모을만한 지식인들의 행태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니 바로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는 그러한 지식인의 예를 끝도 없이 나열한다. 지식전달자 이상의 역할은 아예 사양해버리고 단지 지식의 기능공으로 전락한 대학교수를 비롯해 이전투구의 정치상황속에서 스스로 도구화를 자처하는 지식인,비판의식조차 위험시하고 무사안일의 타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지식인,방향성을 상실한 채 현실도피의 무기력을 냉소로 위장하는 지식인 등…. ○지식인의 사명 상실 『오죽하면 이러다가는 지식인 전체가 이대로 안락사하는 것이 아니가 하는 위기의식까지 느끼겠습니까. 이들은 이미 이상과 도리를 펼쳐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기본자세까지도 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개인과 가족,집단과 영역의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당장의 이득을 위해서는 신념도 수시로 변해버리니 국민에게 심한 상실감만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지식인의 보편적 양태가 양심과 진보를 표방하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예외없이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 또한 스스로의 이득이나 기득권확보를 위해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상황이 불리할 때는 눈 딱감고 모른체 하다가도 상황이 호전되는 기미만 보이면 누구보다 앞에 나서서 목청을 높이는 불철저성이나 시류에 편승해서 한몫 보려는 사이비성 등이 다 이에 속한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좌절감과 신념의 결핍,그로 인한 방황과 표류,그리고 도피와 단절 등이 저 자신을 포함한 이 시대 지식인들이 어쩔 수 없이 공통적으로 몸에 붙이고 다니는 병균과 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행태들이 지식인의 본래 모습인가 하는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통사회 지주역할 이러한 회의 끝에 결국 그는 그 대안을 전통시대의 지식인­선비속에서 찾아냈다. 선비정신이 비록 단절되어 버린 과거의 가치관이었지만 그것을 현대적 입장에서 승화시켜 수용한다면 이 시대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지식인 사회가 이렇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의 전통사회를 지탱시켜온 선비정신이 갑자기 단절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서릿발같은 기개와 대쪽같은 지조,그리고 청빈으로 대표되는 선비정신이 조금이라도 살아있었던들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월등히 깨끗하고 활기찬 사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선비정신이 단절된데는 세가지 원인이 있다고 분석한다. 첫째는 19세기 후반부터 밀어닥친 서양제국주의의 힘의 논리이며,둘째는 이를 토대로 한 일제의 식민사관,그리고 셋째는 망국으로 인한 주체의식의 상실과 자기비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문화는 서양의 실용주의에 의한 물질문명과는 그 기본성격이 달라 일괄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인데도 결과적으로 그 힘의 논리가 물리적 우세를 차지하게 되자 마침내 힘의 유무를 우선순위에 두게된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정신문화 역량을 일찍이 감지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이를 깎아내리고자 힘의 논리만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해석했던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하루아침에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하자 극도의 좌절감과 자기비하에 빠져 모든 책임을 전통의 선비문화에 돌린 나머지 그 정신까지도 철저하게 평가절하했던 것이지요』 ○왕조 멸망으로 단절 결국 이렇게 하여 불과 1세기도 채 안되는 근대까지 우리사회의 버팀목이었던 선비정신은 여지없이 말살되고 오늘날에는 마치 아득한 옛날의 일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미국의 프런티어정신이나 일본의 사무라이정신이 오늘날까지 그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쉬어 그들을 지켜주고 그들의 힘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거기에 대응할 정신적 지주가 없음을 안타까워 한다. 그래서 더 늦기전에 우리도 우리의 선비정신을 오늘에 맞게 되살려 우리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혼돈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옹골차고도 청렴한 선비정신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선비의 역할과 모습은 조금씩 달랐지만 「철저성」과 「검약」으로 대표되는 그 근본정신은 언제나 한결같았다고 말한다. 『서릿발같은 기개와 대쪽같은 지조는 바로 이 「철저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를 분명히 알았고 결코 시류에 영합하거나 돈과 권력의 도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치가 도리를 벗어나든지 권력자가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리를박차고 나옵니다. 사필을 들었을 때는 선과 악을 직필함으로써 어떠한 권력의 부정과 불의도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검약은 청빈을 자랑으로 여기게 했고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부귀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지조를 지키게 하여 늘 확고한 비판정신을 가질 수 있게 했습니다』 ○보다높은 가치 추구 그리하여 선비정신은 각 시대마다에서 그 사회의 양심이요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으로 인식되었고 심지어 생명의 원동력인 원기로까지 여겨졌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비정신은 지식인으로 하여금 현실적·감각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하여 상승하기를 추구하는 가치의식을 갖게 해주며 그 신념을 실천하는데 꺾이지 않는 용기를 주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전통사회에서 선비정신이 빛을 발하면 사회 전체가 원기왕성해지고 반대로 선비정신이 퇴색하면 사회전체가 침체해지고 타락하는 현상을 보여왔습니다. 이 때문에 지식인들은 사회의 침체기에 이를 때마다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려고 노력했지요.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조선후기의 실학입니다』 그는 조선후기의 듯있는 지식인들이 침체된 지식인 사회를 실학으로 극복했듯이 오늘날 우리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바꿔놓기 위해서는 개혁의 의미로서의 또다른 실학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것을 바로 외래의 것이 아닌 우리 고유의 선비정신을 되살리는데서 찾자는 것이다. 『우리는 참 나쁜 버릇이 한가지 있습니다. 바로 모든 문제를 일본이나 서구 등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나은 외국의 경우에 비교해서 해결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저들과 우리는 문화적 배경이나 처해 있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른데도 저들의 경우와 맞으면 합리적인 것으로 보고 그렇지 않으면 애써 그들의 경우에 맞추어 억지로 합리화 시키려는 경항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문화적인 미신이라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합리주의는 그들의 실용주의에서 온 것이며 실용주의는 궁극적으로 물가가치기준에 다름 아니지요. 만약 이 방향으로만 치닫다 보면 결국 우리 사회는 정신이피폐해져 돌이킬 수 없는 윤리적·도덕적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징후는 이미 우리 주위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늘 도리보다 실리가 앞서기 때문에 염치없는 일을 버젓이 해놓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우리의 것인 선비사상으로 자기혁신을 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뼈깎는 자기반성을 그는 선비정신의 발현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들이 부단히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아집보다는 대의를 앞세우는 인격수양을 통해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선비정신을 되찾은 지식인 사회는 우선 대의를 앞세우기 때문에 눈앞의 작은 실리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개 되며 사소한 일로 서로 질시·반목하여 대세를 그르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는 불요불굴의 정신과 예리한 통찰력이 생겨 혼돈의 시대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국민적 화합과 협력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이득이 있고 없음보다 도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때문에 사회의 도덕성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며 사람들마다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함으로써 방황은 그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철저성 때문에 시시비비,즉 옳은 것은 어떤 경우라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언제라도 그르다고 함으로써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건전한 비판환경이 정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지만 지식인들의 각성여부에 따라 멀지않은 장래에 반드시 실현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 “일,정신대문제 조사 검토”

    ◎가토관방장관,정부차원서 적극 대처 첫 시사/“민간단체의 일” 46년간 발뺌 급급/번복 전례… 공언 안될지 두고봐야 한인 종군위안부 문제와 관련,일본정부가 16일 처음으로 정부차원 대처방침을 시사해 주목을 끌고 있다. 일본의 교도통신은 가토 고이치(가등굉일)관방장관이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내각관방이 중심이 돼 조사태세를 가다듬어 검토를 하고 있다』고 언급,정부차원에서 실태조사를 벌인 후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는 생각을 표명했다고 보도했다.태평양전쟁때 일제 식민압제정권에 의해 저질러졌던 조선여인 정신대징용의 만행이 드디어 일본정부로부터 역사적 사실이란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인가. 최소한 15만명에 달하는 조선여인들의 전쟁위안부용 「징발」은 한국인에게는 도저히 망각할 수도,용서할 수도 없는 역사였다.그러나 일본정부는 사죄는 고사하고 종전후 반세기가 가깝도록 『정부로서는 전연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으로 일관해 왔었다.고작 한다는 말이 『민간업자들이 군에 함께 데리고 있었던 것 같다』는 정도인 것이다.따라서 가토 관방장관의 발언은 한국의 주목을 끌 수밖에 없지만 일본정부의 태평양전쟁이나 식민지지배 사과발언 행태와 그 전력을 염두에 두게되면 가토 장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의구심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가토 장관은 지난 11일 상오 기자회견을 통해 한인 정신대징용과 관련,『정부가 관여했다는 공식기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종래 주장을 되풀이한 후 뒤가 구렸든지 『노동성에 보다 치밀한 조사를 하도록 했다』고 말해 정부차원의 조사지시가 끝난 인상을 심어 주었다.한국의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가 앞서 지난 6일 국내에 생존해 있는 종군위안부 3명등과 함께 일본정부를 상대로 공식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최초의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했고 또 한국정부가 9일 한국인 정신대 피해자 명단을 공식 요청해와 일본정부와 가토장관은 뒤가 구릴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이같은 보도가 나가자 일본 노동성 측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관방장관이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며 이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서 가토장관의 발언이 무마조의 일회용으로 급조되었음이 탄로되고 말았다. 정신대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들이 일본 현지TV에 나와 일본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준 데다 정신대 강제연행에 직접 관여한 일본인에 의해 당시 정신대 동원을 담당한 「노무보국회」가 사실상 일정부의 산하기구임이 주장된 저간의 사정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따라서 정신대 만행과 관한 일본정부의 태도를 「개과천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이르다.
  • 기습능력 제거등 군축 가시화 급선무(남북「화해시대」로 가는가:4)

    ◎불가침/병력등 후방이동… 검증 통해 신뢰 쌓아야/군사훈련 참관·DMZ공동감시 실효기대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상호 침범을 않기로 합의함으로써 지난 53년 7월27일 휴전협정체결이후 38년 5개월만에 제2의 전쟁을 막고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게 됐다. 광복이후 분단과 6·25전쟁을 겪은 남북한에게 가장 절박한 과제는 무한정한 군사력증강경쟁을 하지 않고 군사대결을 푼 상태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문제였다. 6·25전쟁은 당사자인 한국이 제외된채 국제연합군을 대표한 미국과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등 미·조·중 3국의 휴전협정으로 종결됐다.이때문에 한국의 지도자들은 남북한간에 불가침협정이나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긴장완화를 위한 상징적인 조치가 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북한은 84년 이후 미국과는 평화조약,한국과는 불가침선언을 하자고 제안해오다 90년 10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불가침선언에 조인할 것을 촉구했었다. 북한이 주장해온 미국과의 평화협정이나 한국과의 불가침선언에 의해 한반도에 안정과 평화가 단시간안에 정착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협정을 미국과 맺어야 하겠다는 북한의 외교정책은 『조선문제는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조선사람끼리 해결하자』는 그들의 주장에 비추어 볼 때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속셈은 평화협정내용에 주한미군철수를 포함시킴으로써 이 협정의 비준을 통해 주한미군철수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올해초 유엔군사령관이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측수석대표를 한국군장성으로 임명한데 대해 한국은 휴전협정 당사국이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군사정전위원회 개최 제의를 해오지 않고 있다. 노태우대통령은 지난 88년 유엔총회연설을 통해 『한국은 결코 북한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을 한뒤 90년8월에는 한국정부가 8월15일을 전후해서 5일간 남·북한자유왕래를 허용하기위해 비무장지대내의 휴전선을 개방하겠다고 발표한바 있다. 노대통령의 이런 선언과 제안은 올림픽개최이후 북방정책의 결실에서 오는 외교적인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한반도통일정책의구체적인 실천방안이다. 남·북한간 불가침합의가 이루어졌다고해도 휴전선을 경계로 1백만명이상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평화가 보장된다고 할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가침조약이 침략전쟁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합의서에 명시된대로 ▲무력불행사 ▲분쟁의 평화적 해결 ▲군사당국자간의 직통전화설치운영등은 차후 구성될 군사공동위원회에서 협의하게 된다. 군사공동위원회는 휴전이후 최초로 남·북한의 대장급 장성을 수석대표로한 5∼6명의 장성급 장교를 대표로 군사적인 신뢰구축과 분쟁해결·군축실현문제를 추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과제는 ▲대규모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및 통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이용 ▲군인사교류및 정보교환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의 제거 ▲단계적 군축실현 ▲검증문제이다. 대규모군사훈련의 사전통보와 참관은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선례를 따를 수 있으며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휴전협정 1조와 11조의 규정대로 공동감시 소조의운용으로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군인사 교류및 정보교환은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 남북 해군의 비무장 상호교환 방문과 군사공동위원회의 남북한 군사시설방문및 인적·정보교환,군체육부대의 친선체육대회등을 가상할 수 있다. 불가침 합의에 따른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상호기습능력을 제거하기 위한 공격무기와 병력의 후방배치를 포함한 단계적인 군축실현이다. 한국의 군비통제방향은 제1단계 신뢰구축에 이어 제2단계 군비제한,제3단계 군비축소 등 3단계 과정을 설정하고 있다. 신뢰구축이 이루어진 단계에서 탱크와 미사일·잠수함등 공격무기를 상호 동수보유 원칙에 따라 적게 보유한 측을 기준으로 보유수준을 설정하고 초과분을 폐기하며 무기감축에 따른 운영병력도 감축하는 것이 군비제한 단계이다. 군비제한단계 이후의 군비축소 단계에서는 무기및 병력을 상호 균형감축하고 병력배치를 휴전선에서 후방으로 이동,공세적인 운용을 통제한뒤 상호 감시기지를 운영하면서 현장검증을 실시하는 것이다. 남북한의 군축실현을 위해서는상호 신뢰구축과 함께 쌍방의 군사력을 파악할 수 있는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거짓없는 솔직한 군사정보와 자료를 제공하고 군장교단의 친선교류를 통해 남북의 믿음을 확보하는 길이 불가침 합의에 의한 군축협상의 출발이 된다. 이러한 상호신뢰 없이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는 또 하나의 군사정전위원회와 같은 비생산적·소모적 논쟁만 계속하게 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비록 오랜 세월이 소요된다고 해도 불가침 합의에 따른 군축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 독립국가 공동체란

    ◎국가연합형태 바탕,영 연방 특성 가미/“구성국에 독립국 자격”… 중앙정부 안둬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스등 3개공화국이 8일 결성키로 조인한 「독립국가공동체」(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는 외교정책과 핵문제를 포함한 군사전략에 있어 「합동행정기구」를 설립,공동 관장하게 된다. 또한 관세및 이민정책과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협력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기존의 소련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나 고르바초프가 구상하던 「주권국가연방」(Union of Soverign States)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가장 큰 차이점은 공동체내에 선거로 선출된 국가원수와 의회를 갖춘 중앙정부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제법상 연방(union)은 연합국가(federation)와 대동소이한 개념으로,다수의 국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통합,형성된 단일국가이며 구성국은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한다.오직 연방만이 국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으며 국민 또한 연방의 공통된 국적을 갖는다.또 구성국들은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나외교권은 연방이 독점하게 된다. 반면에 독립국가공동체는 원칙적으로 구성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자격을 갖고 공동체 자체는 국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국제법상 연방보다는 국가연합(confederation)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여기서 공동체라 함은 과거 영국식민지 국가들로 구성,「독립국가의 자발적 결합」으로 규정되고 있는 영연방(commonwealth)과 유사한 성격으로 볼 수 있다.즉 유·무형의 공통적인 이해관계,역사적 연결성을 바탕으로,서로 협력함이 유리하기 때문에 독립국가들이 자발적으로 결합된 개념인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로루스등이 이같이 국가연합형태에 영연방형태를 혼합시킨 형태인 독립국가공동체 형성에 합의한 것도 슬라브족이라는 민족적·역사적 토대위에 그동안 소련방내에서 취해온 각종 협력관계의 유지가 각각의 독립국가 유지에 더욱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소련 해체 일지 ▲1917년 레닌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11월7일의 혁명에서 정권장악 ▲1922년12월 인민대표대회서소련사회주의공화국연방 창설 ▲1940년8월 몰다비아 발트3국 합병 ▲1985년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피선(페레스트로이카정책 실시) ▲1989년5월 대통령제 신설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피선 ▲1990년3월 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등 발트3공화국 독립선언 ▲5월 보리스 옐친,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의장에 피선 ▲1991년7월 옐친,러시아공 직선대통령 취임 ▲8월19∼21일 소련 강경보수파의 쿠데타 실패 ▲8월24일 고르비,공산당서기장 사임과 동시에 공산당 해체선언 ▲9월 소인민대표대회,발트3국 독립승인 ▲10월 8개공화국 「경제동맹」조인 ▲11월14일 7개공화국 「신연방조약」에 가조인 ▲11월25일 고르비,7개공화국과 「신연방조약」조인에 실패 ▲12월1일 우크라이나공 독립여부투표서 가결 ▲12월8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스공등 3개공화국 대통령,「독립국가공동체」선언 ◎3개공 경제정책/요지 우리 공화국가들 사이의 기존의 긴밀한 경제관계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국가 경제상황을 안정시키고경제회생의 토대를 창설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각국이 합의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시장경제 창설및 소유제도 전환,자유로운 기업가정신 보장을 목표로 한 급진경제개혁을 협력,실행한다. ▲상대에게 경제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삼간다. ▲기존 통화의 토대 위에 경제관계를 발전시키고 상호 거래방법을 정착시킨다. 루블화는 각 집단의 경제적 이익의 존중을 보장하는 특별 협정의 토대 위에 전국통화로 기능한다. ▲자금유출을 줄이고 효율적인 통화수급관리및 상호 거래제도마련을 위한 은행간 협정에 서명한다. ▲공화국의 예산 적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협의를 추진한다. ▲가격 자유화와 시민의 사회보장제도를 위한 정책협의를 추진한다. ▲단일 경제 공간의 통합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 ▲각 집단의 대외경제활동및 관세정책,통행자유의 보장을 협의한다. ▲구연방 소유 기업들의 부채 문제를 조절하기 위한 특별 협정에 서명한다.
  • 치사하고 용렬한 「망언」(사설)

    일본 관방장관의 발언은 우리로하여금 일본을 향해 침을 뱉고싶게 한다.이렇게까지 비겁하고 이토록 용렬 할 수가 있을까. 태평양전쟁중 일본군의 종군위안부(정신대)로 동원되었던 한인여성들과 그 유가족에 대한 보상문제에 대해 일본의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을 갖고 『…노동성을 중심으로 실태를 조사하고 있으나 정부기관이 관여했다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요컨대 일본정부는 무관하니 보상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중에 『일본순사가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갔다』는 증언을 피를 토하듯이 하던 정신대출신 여인의 증언을 우리는 알고 있다.관동군참모의 요구로 이른바 총독부가 나서서 도청→군청→면사무소의 계통을 밟아 「경찰」이 동반하여 공출해간 1만명의 한인여성도 있었다.모두 20만명가까이의 「위안부」가 명단없이 숫자로만 「군수품」으로 일본군기록에 묻혀있었음도 드러났다. 최근에도 미스탠퍼드대학에서 발견된 미군작성의 공문서가 있고,당시의 소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이었다는 길전청치란 사람의 증언도 있다.그는 한인여성들의 강제연행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일본은 이런 것을 증언의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인가. 일본은 부자가 되었다.어느 정도인가 하면 미국이 국제적으로 누려온 세계1위의 선진대국의 자리를 뺏고싶을 만큼 부자나라가 되었다.부자가 되어가면서 그들은 그들이 저질렀던 야비하고 창피한 전과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피해만을 부각시켰다.그러면서 「평화」의 이미지를 「경제대국」이라는 성토에 심어보려고 애를 쓰고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세계의 지도국은 될 수 없다.일본의 평화의지를 믿어줄 사람들도 없다.「원폭피해」도 호전적 전쟁도발에 의한 자국민 희생의 자초일 뿐 연합군의 책임으로만 떠넘길 일이 아니다. 아직도 진행중인 동구의 개혁과 소련의 개방혼란의 와중에서 그곳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은 「아메리카」이고 「달러」이다.양아치같은 아이들이 서방관광객은 물론 황색인종의 일본여행객을 붙들고도 구걸하는 것은 여전히 「추잉껌」과 「1달러 기부미」다.그것은 세계통화로서의 「달러」의 능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자유」와 「정의」그리고 「평화」파수꾼으로서 미국이 분담해온 역할에 대한 세계시민의 신뢰이기도 하고 습관적인 타성이기도 하다. 식민지로 짓밟았던 이민주의 여성을 자국군인들의 전쟁위안부로 수십만명씩 집단유린한 과거를,몇푼의 보상금좀 면해보겠다고 「민간인운운」하는 치사하고 졸렬한 장관을 두고 있는 나라라면 세계의 지도국같은 것은 될 수 없다.이 치사하고 추악한 면모를 향해 성난 얼굴로 침을 뱉고싶다.
  • “아시아의 맹주로”(진주만 50돌:하)

    ◎「신대동아 공영권」 야망 “꿈틀”/폭탄 대신 상품·자본… 무차별 경제공습/아주국들 “일 침략 잊지말자” 잇단 집회 일본의 진주만기습 50주년을 맞아 당사자인 일본과 미국은 서로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이 사건을 교훈으로 삼자는 각종 행사들로 요란하다. 당시 패전국이었던 일본은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부상,정치대국으로까지의 꿈을 펼치고 있고 승전국이었던 미국은 재정적자의 늪에서 허덕이며 세계지도국의 위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막상 양국 이익대결의 전장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아시아각국의 입장에서 이날을 맞는 느낌은 착잡하기만 하다.특히 36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물론 일본군의 군화발에 짓밟혔던 중국·대만·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홍콩등 동남아국가들은 초대경제력을 지닌 일본이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아시아국가들에서는 진주만기습 50주년을 계기로 이 사건이 더이상 일본과 미국의 문제로 국한돼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이 사건은 결국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에 제한돼 있던 전선을 동아시아전체로 확전을 개시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전략의 신호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일·미관계에만 초점이 주어져 상대적으로 본질문제인 일본의 아시아침략은 축소 왜곡돼 왔다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식민지화 하고 중국침략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일본은 41년 12월 8일(한국시간)새벽 진주만공습 1시간전에 이미 홍콩의 카이탁공항 폭격을 시발로 홍콩침공에 들어갔고 또 진주만공습 20분후에는 말레이반도 동안의 코타바루 상륙과 함께 싱가포르를 공습,본격적인 동남아침공을 개시했다.당시 인구80만중 불과 수개월 사이에 항일화교용의자라는 이유로 5만명이 학살됐던 싱가포르는 8일 대대적인 「함락50주년기념식」을 열어 일본침략의 교훈을 재확인하고 확고한 국민의식을 고양토록할 계획이다.또한 4년 가까운 일본의 점령하에서 아사자까지 속출할 정도로 극도의 식량부족과 헌병대의 탄압에 시달렸던 홍콩주민들은 최근 「홍콩보상협회」를 설립,『홍콩침략50주년을 맞아 일본정부는 후안무치한 사기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비난과 함께 당시 일본군이 물자조달을 위해 홍콩에서 발행했던 군표에 대한 보상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이날을 일본과 미국만의 날로 몰고 가려는데 아시아국가들의 불만이 있는 것이다.더욱이 일본인들은 아시아국가들에 대한 식민지배와 침공에 대한 한마디 사과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진주만기습에 대해서도 『덫은 미국이 놓고 걸려든 것은 일본』이라며 쉽사리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또 태평양전쟁은 아시아인들의 서구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궤변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국가들의 일본에 대한 불만과 증오에 관계없이 일본은 이미 아시아국가들에 깊숙히 침투해 있음을 부인할수 없다.군화발과 폭격기 대신 무차별한 일본상품과 자본·기술의 공격은 대부분의 국가를 「일본」앞에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계 총GNP의 17%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의 금년도 무역흑자는 8백50억달러를 넘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사상최초의 5년 연속호황이라는 최고의 호경기를 맞고 있다.또 소련의 붕괴로 세계의 질서구축을 정치와 경제의 두기둥으로 미국과 함께 나누어 지게된 일본의 입장에서 21세기를 향한 신아시아주의 즉 「신대동아공영권」구축의 필요성은 그 어느때보다도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EC(유럽공동체)가 EFTA(구주자유무역연합)와 통합,유럽19개국이 참여하는 세계최대의 경제공동체인 EEA(구주경제지역)로 재편되고 또 미국이 캐나다 멕시코와 함께 그에 버금가는 북미경제권을 구축하자 일본은 아시아경제권을 하나로 묶는 이 신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려는 의도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미 아시아대륙이 ▲NICS(신흥공업국)4국 ▲ASEAN(동남아국가연합)제국 ▲중·소등 사회주의 지역등 3개의 광역경제권으로 각각 일본과 연계돼 있기 때문에 이들을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로 묶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아시아 광역경제권이 대일의존도가 높은 종속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한국을 비롯한 신흥공업국들은 물론 아세안 제국도 대일무역에서 엄청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결국 일본은 50년전 무력에 의한 아시아공격과는 달리 자본과 기술로 아시아를 종속적 경제권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진주만기습 50주년을 맞아 아시아국가들은 이를 계기로 보다 철저하게 50년전 일본의 아시아침략이 규명되고 그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그러지 않고는 제2의 진주만기습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일,“정신대는 모르는 일” 강변/관방장관

    ◎자료 제시에도 “정부개입 흔적 없어”/전 종군위안부등 35명,7억엔 보상소 【도쿄 연합】 가토 고이치(가등굉일)일본 관방장관은 6일 태평양전쟁중 일본군의 종군위안부(여자 정신대)로서 동원됐었던 한인 여성들과 그 유가족들에대한 보상문제에 대해 『정부로서는 대처하기 곤란하다』며 보상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밝혔다. 가토장관은 이날 종군위안부로서 고통을 겪었던 김학순씨(67·서울 종로구)등 3명을 포함,한국 태평전쟁희생자 유족회 회원 35명이 도쿄지방재판소에 피해 보상을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데 대해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말했다. 그는 『노동성을 중심으로 실태를 조사하고 있으나 정부기관이 관여했다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도쿄=이창순특파원】 제2차대전중 일본에 강제 연행되어 피해를 입은 한국의 전군인·군속·위안부및 유가족 35명은 일본의 식민지지배와 전쟁으로 인한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1인당 2천만엔,총7억엔을 보상하라는 소송을 6일 도쿄지방법원에 제기했다. 한국의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회원인 이들은 소장에서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는 국제관습법으로 확립된 「사람의 도리에 대한 죄」에 해당된다며 일본정부는 한국인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해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일본정부의 보상을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소송은 많이 있었으나 전종군위안부가 원고로 참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이번 소송에는 김학순씨(67·서울)등 3명의 전종군위안부를 비롯,15명의 전군인군속및 17명의 유족이 참여했다.
  • 케냐,일당통치 종식/28년만에 다당제 도입

    【나이로비로이터연합】 케냐의 집권당인 케냐 아프리카민족동맹(KANU)지도자들은 2일 야당이 불법화된 이 나라에 다당제 정치를 허용키로 결정했다고 KANU의 한 고위소식통이 밝혔다. 이 소식통은 로이터통신과의 회견에서 이같이 밝히고 이번 결정은 격렬한 논쟁끝에 취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케냐는 지난 82년에 야당을 불법화한 헌법개정안이 의회에서 통과된 이후 공식적인 일당통치체제를 유지해왔다.그러나 사실상 케냐는 지난 63년 독립이후 줄곧 효과적인 알당통치를 해왔다.
  • “중화학 위주의 수출전략 주효”

    ◎70억불 수출탑 이필곤씨 『지난해 국내업체로서는 최초로 60억달러 수출의탑을 수상한데 이어 올해 또다시 70억달러 수출의 탑을 받아 무척 기쁩니다』 삼성물산 이필곤부회장(50)은 단일업체로서는 수출사상 최최의 70억달러 탑을 받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년 연속 큰상을 받게된 배경은. ▲전 임직원의 결집된 수출증대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라 할 수 있다.이와 함께 85년 75%에 지나지 않던 전기전자·선박·철강 등 중화학제품의 수출비중을 지난해 83%로 늘려 품목구조를 고도화한 것이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북방무역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데. ▲87년 북경,89년 모스크바지점을 개설한 이후 올 상반기중 중국 대연,베트남 호치민지점을 신설했으며 중국·소련·동구주요거점에 지점과 인력을 계속 보강하고 있다. 현재 10개지점에 23명이 영업활동중이며 올말까지 5개지점을 신설할 계획이다.올 상반기중 이들 지역에 대한 수출은 2억달러로 업계1위를 차지했다. ­앞으로의 국제화를 위한 대비책은 무엇인가. ▲해외공급력과 판매력강화를 위해 섬유·전기전자 생산공장과 판매자회사를 주요국가에 설치하는 한편 현지 마케팅강화를 위해 블록별로 총괄본부제를 운영하고 있다.또 기술·금융·법무 등 전문분야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해외연수·독신사원파견 등을 실시중이다.
  • 대산농촌문화재단/교보,50억 들여 설립

    대한교육보험(주)은 29일 농촌및 농민지원을 위한 대산농촌문화재단(이사장 신용호 대한교육보험 명예회장)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기금 50억원의 운용수익과 이자로 내년부터 연간 6억원정도씩 첨단농업기술의 개발을 위한 연구비를 지급할 계획이다. 농촌지원을 위해 문화재단이 설립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조상유물 보니 민족공통성 불변”/북 참가단 서울체류 이모저모

    ◎경복궁·중앙박물관 전시관등 관람/북 기자,“여씨 건강악화로 조기 귀환”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서울토론회에 참석한 남북한및 일본참가단은 이틀간의 토론회를 마치고 28일 중앙박물관과 경복궁을 관광. 이날 상오 10시30분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한 참가단 일행은 학예연구관 3명의 안내를 받아 3층 금속공예실·도자기실과 2층 가야실·신라실·불교조각실등을 차례로 관람했는데 북한의 여연구씨는 관람에 앞서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이우정대표와 다니면서 특히 신라금관·장신구·옷등에 깊은 관심을 표시. 여씨는 『남이나 북이나 같은 민족의 역사적 유물이 보관돼 있고 우리 민족의 공통성은 변한게 없다』며 『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다시 한번 보는 것 같다』고 느낌을 표명. 그는 『일제 식민지 수탈의 본거지인 조선총독부 건물에 들어서니 가슴이 아프다』며 『역사 유물도 좋지만 일본인들이 당시 사용한 고문기구나 이후 애국열사들의 유품도 함께 전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박물관에서는 북한 참가단에게 박물관 도록 5권을 선물했고 여씨는 답례로 이한홍박물관 사무국장에게 만수대 창작사에서 만든 청자를 선물. ○…이어 참가단은 경복궁 윤명렬 사무소장의 안내로 근정전·사정전·경회루등 경복궁을 둘러본뒤 삼청동 대원각에서 점심식사. 여씨는 안내자에게 『경회루가 어디냐』며 『그곳에서 아버지와 자주 스케이트를 타곤 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경회루 앞에서 보도진의 촬영에 포즈를 취하기도. 또한 북측 참관인인 정영희씨는 기념촬영을 하는 신혼부부를 보자 『나는 서양인인줄 알았다.왜 민족옷을 입지않고 저런 옷을 입느냐』면서 『북한에서는 결혼할 때분홍이나 빨간색 한복을 입는다』고 소개. 이날 모처럼의 바깥 나들이에 나선 북한 참가단은 『날씨가 무척 좋다』고 감탄하면서 『공해때문인지 공기는 평양보다 탁한 것 같다』고 말하기도. ○…북한 중앙방송의 송남수기자는 북한 참가단의 조기귀환결정과 관련,『원래 우리는 끝까지 좋게 행사를 마치려 했다』고 밝히고 『그러나 남측이 우리가 요구하는 일정을 거부,굉장히 불쾌했던데다 일련의불미스러운 일(시위등을 가리키는듯)들이 연발해 여연구씨 건강이 악화됐다』고 북측의 입장을 옹호. ○…북한참가단은 이날 하오 김영정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전정무제2장관)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을 거부,남측및 일본참가단이 배석하지 않은 가운데 호텔 12층 마리우스룸에서 조촐한 저녁식사. 이들은 훈제연어로 감은 굴을 에피타이저로,메인 디쉬는 소 안심으로 들었다고.
  • 「미군철수 연기」는 대북 실질적 압력/한·미 안보협의회의를 보고

    ◎남북관계 악화막게 군사적 행동은 신중히 한미 연례안보협의회가 끝났다. 동북아 안보협력,주한미군 추가감축,방위비 분담,방산협력 및 제3국 수출문제,연합지휘체제 개선등 안보협의회를 통하여 한미 양국이 함께 다듬어 가야할 사안들은 산적해 있다. 금년에는 북한 핵개발에 대한 대응방안,부시 미대통령 선언에 따른 전술핵 처리방안 등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핵문제가 가지는 의미는 그 어느때 보다 크다. 특히 양국이 합의한 『북한의 핵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주한미군 감축 동결』은 매우 실질적인 대북 압박조치로서 결과가 주목된다. 그럼에도 앞으로 한반도 핵문제는 한미 양국이 수평적 동맹관계내에서 유연하게 처리해야 하며,어느 한쪽만의 국익을 쫓아 일방적으로 처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양극체제와 단극체제에는 보는 각도에 따라 장단점이 혼재한다. 소련제국의 붕괴로 양극체제가 약화되고 일견 미국이 단극인 시대가 열리고 있고,온세계가 동서간 이념대결 마감,공산세력의 퇴조,군축무드 조성 등 즐거운 변화들을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단극체제하에서의 평화와 안정의 질은 별개의 문제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전쟁의 부재」를 평화와 안정으로 동일시하고 이를 추구한다면 한 국가에 의한 전세계의 통치 또는 식민지화가 이를 가장 확실히 보장해 준다. 이럴 경우 단극국가는 부와 힘의 독점자가 되고 여타국가는 「굴종」이란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평화와 안정의 질은 열악하다. 북한의 핵문제를 바람봄에 있어 한미간 시각차가 있다면 이는 「상호존중」차원에서 조정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핵정책을 존중함에 있어 한국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할 바를 다했다. 우선 비핵선언이나 농축·재처리 시설의 포기는 북한의 핵개발 명분을 제거하는 「대북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핵확산 방지에 관한한 미국은 우방이나 적성국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정책을 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금방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한국은 핵확산이 세계평화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핵확산금지조약이 위험스런 나라들의핵보유를 견제해 왔다는 점을 인정하여 미국의 핵금정책을 지지해 왔고 NCND 정책도 존중해 왔다. 이번에 선포한 비핵 5원칙도 한국이 대응적 핵개발로 북한핵 문제를 돌파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서방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오늘의 안보없이 내일의 통일이 있을 수 없고 때문에 한국은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상황은 피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미국은 맹방의 안보를 위해 북한의 핵개발은 반드시 저지하되 남북한 관계가 지나치게 적대화되지 않도록 배려함으로써 다른 한편에서 진행중인 남북대화를 도와야 한다. 미국이 어차피 세계 핵금정책 차원에서 북한의 핵보유를 허용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한국에 불필요한 「악역」을 내맡기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의 「모양새」를 강화시키는 국익이 될지는 몰라도 남북한 관계를 소중히 여겨주는 모습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23차 한미 안보협의회는 필자의 이러한 우려를 상당히 불식시켰다. 한미 양국은 북한의 핵개발 및 화학무기 위협에 관해 인식을 같이 했고 핵저지를 위해서도 군사적 긴장을 야기시킬 조치보다는 우선 외교·경제적 압력이 필요하다는데 합의했다. 미국은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한 이후에도 한국이 필요로 한다면 효과적인 대북공동감시체제 유지,핵우산 확약 등을 통하여 한국의 안보 이익을 존중해 주어야 하며 농축과 재처리마저 포기한 한국의 원자력산업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평화용 핵기술의 협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이런류의 일들을 게을리한다면 이는 미국을 위해 거의 모든 것을 양보한 우방의 국익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되어 상호성 원칙에 맞지 않는다. 미국의 무차별적 무역압력과 방위비 분담요구,그리고 동아시아경제지역(EAEG)의 결성을 반대하는 미국을 보면서 이것들이 한미관계에 단극시대의 부정적 측면을 예고하는 사건들이 아니기를 기대해 본다. 걸프전정이 동맹국들의 도움으로,그리고 다자간 협력을 통해 치러졌음을 강조하고 싶다. 미국이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상호호혜적인 것으로 다듬어 갈 때 추후의 다극화시대에서도 미국의 지도력은 계속 빛을 발할 것이다. 올해 연례안보협의회은 한미관계의 질을 높이는 하나의 시작이라고 본다.김태우
  • 「핵사찰」 이견속 「보상문제」 진전/북한­일본 5차수교회담 결산

    ◎북,경제난 타개하려 유연자세/「핵」은 종전입장 되풀이… 팽팽한 대립/“부시 핵선언 환영”… 상황변화는 인식 20일로 3일간의 회의를 끝낸 제5차 북한·일본간 국교정상화회담의 결과는 ▲북한의 핵사찰수용문제에 대한 이견해소 실패 ▲식민지시대에 대한 보상청구권에 있어서 북한이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인데 따른 경제부문에서의 진전가능성 발견이란 2가지로 요약될수 있을 것 같다. 이번 회담의 최대 이슈라할 핵사찰문제에 있어 북한이 종전의 입장을 고집하면서도 경제발전에선 앞으로 현실적 대응을 시사하는 자세를 보인 것은 2가지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일본의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첫째는 북한이 회담의 주요이슈를 핵문제에서 경제문제로 바꾸려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이 국교정상화의 조기실현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번 북경회담에서 핵사찰등 「국제문제」나 일본인처의 귀향등 「기타문제」보다는 식민지시대의 보상배상등 「경제문제」에 중점을 두었다.북한은 이를 위해 경제적 보상문제에 대해 과거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전인철 북한측대표는 『북한이 말하는 보상은 일본의 과거 무력침략,식민지통치로 한민족에게 안겨준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와 고통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보상』이라고 지적했다.그는 또 독일의 나치스범죄에 대한 보상과 같은 국제적 관행과 도덕·윤리적 관점에서의 보상을 촉구했다. 그러나 전은 지금까지 주장해오던 「교전국으로서의 배상」과 「전후 45년간에 대한 보상」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일본의 정치분석가들은 북한의 이러한 자세변화는 북한이 일본측에 인적·물적피해에 대한 증거자료를 요구한 것과 함께 평양당국이 보상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국교정상화교섭을 본격화하려는 의도라고 풀이한다. 북한은 경제문제외에도 『국제정세의 변화』를 처음으로 언급했다.전대표는 부시 미대통령의 전술핵 폐기선언을 환영한다고 말했다.북한의 이같은 태도는 노태우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선언과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기위한 한국과 미·일등주변국가들의 강력한 외교적 노력으로 북한이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그러나 핵문제에 대해 과거의 주장을 되풀이했다.전대표는 북한은 ▲한국에 있는 미군의 핵무기 전면철수 ▲북한에 대한 핵위협제거 ▲남북한 동시핵사찰등이 실현되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수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이같이 한반도의 정세변화는 인정하지만 핵사찰문제에 있어선 기존 정책을 고수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핵문제는 일본으로서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다.일본은 더욱이 이번 회담에서 북한의 핵연료재처리시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중대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북한측이 경제문제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다음회담에서는 경제적 보상문제에 구체적인 진전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슈인 북한의 핵사찰문제에 관한 양측의 대립으로 전체적인 국교정상화회담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 “사회주의 혁명” 주장 논문발표 대학원생/보안법 적용,3년 구형

    ◎「학문활동 기본권 침해」 논란 빚어와 서울지검 공안부 김수민검사는 13일 헌법에 보장된 순수학문활동에 관한 기본권침해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였던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구속사건」과 관련해 구속기소된 이 단체 운영위원장 신현준피고인(29·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박사과정)에게 국가보안법위반죄(이적표현물제작·반포)를 적용,징역 3년,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다. 신피고인은 지난해 3월 출간된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사회주의이론·역사·현실」등 단행본에 남한체제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단계로 규정하고 민중중심의 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등의 사회주의 혁명을 부추기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혐의로 지난 6월 구속됐다.
  • “한반도 통일후에도 미군 주둔 필요”/테일러 미 전략연소장 주장

    ◎“일도 통일한국의 잠재력에 두려움/미서 일·중의 군사대국화 견제해야” 한반도가 통일돼 북한의 대남도발위협이 제거된 된 후에도 일본·중국의 군사강국화를 견제하기 위해 주한미군은 계속 한국에 주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윌리엄 테일러 미전략및 국제문제연구소장은 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언론인들과의 간담회에 참석,이같이 말하고 특히 남북한 국민 모두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대한 의혹을 강하게 갖고 있다고 지적,미국이 양국관계의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테일러소장은 사견임을 전제,현북한의 경제난·국제적인 개방압력·남북한대화속도 등을 감안할 때 3∼5년안에 한반도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그때까지 주한미군은 8천∼1만명수준으로 감축될 것이나 완전철수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테일러소장은 한반도통일 뒤 한국민의 민족주의,특히 과거 일제식민지배에 대한 반일감정이 강하게 표출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한국은 일본의 경제·군사강국화에 대한 견제역할을 주한미군이 해주기를 기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일본도 통일한국이 갖는 군사 잠재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미군의 아시아주둔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테일러소장은 또 중국도 경제개혁에 상응하는 정치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강화해 아시아지역에서의 헤게모니 쟁탈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고 특히 중국이 한일간 마찰을 이용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키울 것에 대비,미국의 대아시아안보공약은 계속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일러소장은 향후 한미관계의 가장 큰 장애는 재정악화로 미국정부내에 증대되고 있는 안보고립주의와 한국내 반미감정이라고 지적,이를 극복하는 것이 양국관계의 가장 큰 과제라고 지적했다.그는 한국내 반미감정은 현재 무역마찰 때문에 지난 45년 이래 최악의 상태이며 자칫 양국간 안보협력관계까지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미국도 재정난으로 인해 2000년까지 방위비가 GNP의 2∼3.5% 수준으로 감소될 것이며 이에따라 주한미군도 1992년이후 감축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의 핵무기개발문제와 관련,테일러소장은 『북한도 유엔가입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됐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핵무기개발 압력을 끝까지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국제사회도 북한을 너무 코너로 몰아붙이지 말고 경제·사회·외교등 다각적인 수단을 동원해 「당근과 채찍」식 접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 서두는 일­북한 수교… “한가닥 불안감”

    ◎미야자와정권의 한반도정책 전망/북 핵사찰 수용땐 내년 수교 가능성/대한 우호정책 변화 없겠지만 이중외교 우려/일의 국제역할 증대 강조… 「정치대국화」 본격행보 예상 일본의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정부의 출범은 한반도에도 적지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한일간의 기본적인 우호관계는 변하지 않겠지만 일·북한간의 국교정상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미야자와 차기총리는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최대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일본은 북한과의 조기 국교정상화를 희망하고 있다.그러나 한국과 미국이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핵사찰 수용문제가 남아 있다. ◎조기정상화 희망 미야자와도 핵사찰의 문제가 남아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그러나 그는 『미국이 전술핵을 폐기하기로 방침을 세웠기 때문에 북한은 지금까지의 핵사찰 거부입장을 유지하지 않아도 좋은 상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야자와의 이같은 발언은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기 바라는 「희망사항」이다.하지만 북한이 새로 출범하는 미야자와 정부와의 조속한 국교정상화를 위해 핵사찰을 수용할지는 미지수이다.북한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무기가 완전히 철수된뒤 남북한의 동시 핵사찰을 주장해 왔다.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지 않는한 일본과 북한간의 국교정상화는 현실적으로 쉽지않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북한도 국교정상화를 위해서는 일본이 수용할 수 있는 정책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전망된다.일부 정치분석가들은 미야자와가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실현에 적극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정책의 변화만 보이면 양국간의 국교정상화는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그들은 내년 말까지는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한반도 중시 불변” 일본주재 한 아시아외교관은 미야자와가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이 한국과의 기본적인 우호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그는 미야자와 정부는 한국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일본의 한반도정책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남북한을 상대로일본이 2중외교를 펼칠 우려가 있다고 이 외교관은 지적했다. 그는 미야자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체험한 보수 원로 정치인이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등 과거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들에 대해서는 「특별한」배려를 하여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의 엉향력 인정 미야자와는 또 미일안보조약등 현체제의 유지를 강조하고 있다.그는 일본의 국제적 역할의 증대를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은 국제문제에 미국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미국에 정통한 미야자와는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힘이 강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원로정치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젊은 세대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있다.선두주자가 바로 다케시타파의 오자와(소택)전간사장(48)이다. 오자와는 미야자와에 이은 다음 총리로 유력시되고 있다.일본언론들이 미야자와를 「최후의 보수원류」지도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일본의 다음 총리는 젊은 세대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자와는 『일본은 전후정치를 총결산하고 정치대국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그는 헌법을 고쳐서라도 일본은 국제문제 개입을 적극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보수 원류” 오자와 같은 젊은 세대 정치인들이 일본의 지도자로 등장하면 일본의 아시아정책은 크게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전후세대인 그들은 과거 일본의 식민지지배역사를 외면하고 현재 상황을 기준으로 외교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때문에 한국과 중국등 아시아국가들로서는 미야자와보다 다음 세대 지도자들이 문제다. 젊은 세대 지도자들이 과거에 대한 반성없이 정치·군사대국화를 지향한다면 아시아안보는 크게 위협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중국의 군비증강을 촉발시킬 우려가 있다.그러나 젊은 세대 정치인들은 국수주의적 성향이 강하다.오자와는 지난번 노태우대통령의 방일때 『왜 우리가 매번 엎드려 사죄해야 하는가』라고 말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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