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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촌 분쟁지역 점검

    지구촌이 뒤숭숭하다.엘니뇨가 몰고온 기상이변으로 곳곳에서 인류가 끔찍한 시련을 격었다.아시아는 엎친데 덮친 겪으로 경제위기까지 맞고 있다. 그러나 인류를 가장 안타깝게 하는 것은 전쟁.유럽의 발칸반도에서는 ‘인종 청소’라는 대학살이 또다시 시작될 것 같다는 소식이 전해진다.아프리카에서는 한달째 무모하게 죽고 죽이는 국경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아시아도 조용하지가 않다.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반세기 이상 국경분쟁을 겪고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실험을 강행해 인류를 전율케 했다.어느새 전쟁을 하기 시작했거나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세계의 분쟁지역을 긴급진단해 본다. ◎코소보 세르비아측 알바니아계 탄압 배경/민족성지서 이민족 판치다니…/세르비아 전성기유적 코소보에 오롯이/주민 90% 알바니아계 자치 누리며 생활/현정부 자치권 박탈하자 독립 외치며 투쟁/서방,인종청소 우려 ‘공습 불사’ 개입 태세 유럽의 발칸반도를 흔히 ‘화약고’라고 한다.발칸반도의 신(新)유고연방세르비아공화국 코소보주에서 포연이 피어 오른다.끝이 보이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다. 발칸반도를 자칫 전쟁으로 몰아 넣을 수도 있는 ‘코소보 사태’는 세르비아군이 자국민이면서 종족이 다른 코소보주 주민들을 유혈 탄압하면서 비롯됐다.코소보주는 세르비아 공화국 땅이면서도 주민은 엉뚱하게 90%가 알바니아계.코소보 사람들은 종족이 다른 까닭에 세르비아로부터 분리,독립하고 싶어 한다.코소보해방군(UCK)이라는 무장단체까지 만들었다. 세르비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분리주의자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즉각 군사행동을 폈다.알바니아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면 무차별 포격한다.3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5만명 이상이 집을 버리고 이웃 알바니아 등으로 피난을 갔다.세르비아가 알바니아계를 없애거나 코소보에서 모두 쫓아내려 한다고 우려한다. ▷배경 및 발단◁ 본질은 민족 갈등이다.유고에서는 세르비아계,알바니아계,몬테네그로계 등이 얽혀 산다.전체는 1,100만명 정도.알바니아계는 200만명 정도로 코소보에 몰려 산다.코소보의 90%가 알바니아계.세르비아계로 둘러싸인 알바니아계‘인종의 섬’같은 형국이다. 코소보의 고난이 시작된 것은 9년전인 89년.밀로셰비치 대통령은 티토정권이 들어선 2차 세계대전이후 인정해온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했다.코소보는 91년 급기야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다.세르비아는 바로 옆의 알바니아가 사주했고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세르비아 사람들에게 코소보는 결코 내줄 수 없는 땅이다.정신적 고향이 자성지이다.세르비아의 전성기인 14세기 스테판두산 왕국 시절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실제 1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세르비아계가 차지하고 있었다.전쟁이 끝나며 바로 옆에 있는 알바니아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오늘에 이르렀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이 세르비아가 코소보에서 ‘인종 청소’를 감행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세르비아는 95년 7월까지 3년이나 계속됐던 이른바 보스니아사태에서 ‘인종 청소’을 감행해 세계의 지탄을 받았다.유고연방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포하자 세르비아는 즉각 응징에나섰다.보스니아사람들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하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었다. ▷사태 전망과 해결◁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때와 마찬가지로 무차별 보복을 할 것이다.그러나 보스니아 사태와는 사안이 사뭇 다르다.코소보 뒤에는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있다.벌써 5만여명이 알바니아로 국경을 넘었다.알바니아를 근거지 삼아 장기적인 무력항쟁태세를 갖춘다면 세르비아는 알바니아를 공격하려 들 것이다.전쟁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즉각 감지됐다.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즉각 세르비아에 물리력을 자제할 것을 경고하며 무력시위에 나섰다.알바니아에는 전투기를 치키로 했다.여차하면 폭격을 감행할 참이다.세르비아와 알바니아에 함께국경을 대고 있는 마케도니아에는 지상병력을 파견키로 했다. 그러나 무력시위나 결의안 만으로 이번 코소보 사태가 풀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상대가 아예 없어져 주기를 바라면서 벌이는 싸움이다.보스니아 사태에서도 그랬듯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개입해야 발칸의 화약고가 잠잠해질 것같다. ◎印·파 카슈미르 분쟁 뿌리와 현주소/종교갈등이 핵경쟁까지 불러/주민 60%가 이슬람교도/47년 독립때 ‘파’ 귀속 희망/힌두교도 嶺主 인도에 양도/‘파’ 즉각반발 3차례 전쟁/협정이후 양국 분할 통치/모두 완전한 지배는 못해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유권 싸움을 하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이 세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두나라가 지구촌의 우려와 비난을 무릅쓰고 핵실험을 강행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곳 때문이었다.세차례나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상대를 압도할 무기가 필요했고 앞다투어 핵무기 개발에 진력해왔다.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과 중국 등이 국경을 함께 맞대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때문에 두나라간에 치열한 영유권 다툼을 가져왔고 남아시아의 화약고가 됐다.22만여㎢의 면적에 500만여명이 살고 있다.인구의 60%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종교적 차이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인도와 파키스탄.카슈미르는 어느 나라의 영토도 아니었다.주민들은 당연히 종교가 같은 파키스탄으로 편입될 것을 기대했다.그러나 힌두교도인 영주(領主)가 인도에서 원조를 받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통치권을 인도에 넘겼다. 파키스탄이 즉각 반발하며 전쟁이 벌어졌다.유엔이 중재에 나섰고 어느 쪽에 편입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했다.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히 맞섰고 결과적으로 분열만 조장했다.그리고 65년과 71년 또 두번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세번째 전쟁이후에는 협정을 맺었다.카슈미르를 두개로 쪼개 북부의 아자드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이,남부의 잠무 카슈미르는 인도가 통치하도록 했다.어느 나라도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해 지금도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다.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무력충돌 원인과 전망/독립당시 국경선 획정이 불씨/이웃사촌이 앙숙 사이로… 평화적 해결 불투명 아프리카 북동쪽에서 한달 가까이 총성이 그치지 않고 있다.국경선을 둘러싸고 에티오피아와 이웃 에리트레아가 전면전을 방불케 하는 국경분쟁을 치르고 있다. 이번분쟁은 지난달초 에리트레아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고 국경을 넘어 에티오피아를 공격하면서 본격화했다.에티오피아의 반격과 함께 두 나라는 전투기까지 동원,수도와 주요 도시들을 서로 폭격했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국민소득은 각각 400달러와 570달러.모두 95년도 기준치이지만 요즘이라고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근래엔 심한 가뭄마저 들어 더욱 먹고살기가 어렵게 됐다.싸울 형편도 못되는 두 나라가 곧 전면전에 돌입할 태세다. ▷발단과 배경◁ 직접적인 원인은 국경분쟁이다.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 서북부에 위치한 티그레주의 바다메를 침공해 점령한 것은 지난달 12일이었다. ‘내 땅은 내가 차지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루아침에 ‘내 땅’을 빼앗긴 에티오피아도 발끈했다 두나라의 응어리는 6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에리트레아는 2차대전이 끝나면서 50여년만에 이탈리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그러나 독립국가는 되지 못했다.국력이 월등했던 에티오피아가 흡수 통합해 버렸다.에티오피아와는 천년도 넘게 같은 생활권으로 살아왔던 터.에리트레아는 즉각 해방전선을 조직해 무력항쟁을 벌인다.그리고 31년만인 93년 마침내 신생 독립국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국경선이 문제였다.이번 분쟁의 빌미가 된 티그레주 일부가 에티오피아 땅으로 되어 있었다.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당시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며 자국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지금까지 에티오피아에 편입되어 있었다. 모호한 국경선이 늘 분쟁의 불씨로 남아 있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두 나라는 우호적이었다.한나라나 다름없이 화폐도 같이 쓰던 이들이 틀어지게 된 것은 지난해 11월.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 통화 ‘비르’를 버리고 ‘나크파’라는 화폐를 만들었다.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가 괘씸했다.예전과 달리 교역을 하면서 미국 달러로 결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에티오피아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온 에리트레아는 당장 큰 타격을 입었다.에티오피아의 국민총생산액은 250억달러에 이르지만 에리트레아는 20억달러.두나라 국민감정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잠재되었던 국경분쟁이 자연스레 불거졌다. 미국과 르완다,리비아 등이 앞다퉈 분쟁의 중재에 나섰다.두 나라에게 93년 이후 지켜져 왔던 국경선으로 각자 군대를 철수시키고 협상을 갖도록 촉구하는 평화안을 제시했다.그러나 감정이 절정에 다다른 두나라가 영토분쟁을 평화적으로 매듭지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두 나라 비교◁ 에티오피아 면적은 112만8,000㎢로 한반도의 5.5배쯤 된다.인구는 6,000만명.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독립을 유지했던 나라로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극빈국에 머물고 있다. 반면 에리트레아는 국토의 크기를 비롯해 전체인구와 국민총생산액 등 국력이 에티오피아의 10분의 1 수준.종족과 언어가 9개에 이르고 이슬람교에서 기독교까지 종교도 복잡한 것은 두나가 모두 똑같다.
  • 이옥순씨 에세이 ‘인도여자에게 마침표는 없다’ 펴내

    ◎지구촌 여성의 20%… 그들 삶의 무게/1시간42분마다 한명꼴 지참금 관련 강요된 죽음/속박넘어 자유 얻을 날은… 인도의 ‘위대한 영혼’ 간디는 “힌두 여성은 신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고 당당히 말했다.또 인도 고대의 법전인 마누법전은 “여성의 몸은 신성하기 때문에 꽃으로라도 때려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인도의 현실은 이러한 진리를 간단히 배반한다.죽은 남편의 화장더미에서 함께 타죽게 하는 ‘사티’의 전통이 아직도 숨쉬고 있고,지참금이 적다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사리에 불을 붙이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이옥순씨(숭실대 강사)가 펴낸 ‘인도여자에게 마침표는 없다’(사과나무)는 인도 여성들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문화에세이다. “얼마 전 인도 연방의회의 한 의원이 ‘단발머리를 한 여자들은 인도인이 아니다’라는 말을 해 말썽을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인도에서는 단발머리여성들은 보통 부도덕하고 헤픈 여자로 간주됩니다.이 정도면 인도 남성들의 사고는 초(超)보수적이라고 할 만하죠.인도 벵골 지방에는 ‘여자와 말이 있어야 할 곳은 남자의 다리 밑’이라는 모욕적인 속담도 있어요” 그러나 그는 인도 여성들의 척박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단서를 찾아낸다.‘바라트 마타’ 곧 ‘인도의 어머니’로 불린 인디라 간디 총리와 ‘작은것들의 신’으로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거머쥔 아룬다티 로이가 그 예다. “1966년 인디라 간디가 48세의 나이로 총리직에 오르자 남성들은 몹시 못마땅해했습니다.그러나 지난 71년 파키스탄과의 전쟁에서 보여줬듯 그는 결단력과 단호한 성격을 지닌 지도자로 역사에 확실하게 자리매김돼 있어요.오늘날 인디라 간디는 힘의 여신인 ‘두르가’로 숭배받을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로 통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인도를 실재하는 구체적인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추상으로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명상의 나라,굶주리고 헐벗은 몸으로 갠지스 강을 찾아와 행복하게 죽어가는 사람들,곳곳에서 신의 현현을 목도할 수 있는 영혼의 나라….인도는 과연 타락한 물질세계의 대안인가.‘정신주의’라는 알약을 내세워 인도를 과거에만 묶어두려 했던 영국 제국주의의 시선을 우리가 은연중 본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자신은 무한대의 세속적 욕망을 향해 줄달음치면서도 인도는 그저 심신이 고달플 때 잠시 쉴 만한 영혼의 땅으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한,우리는 이기적인 이방인일 뿐이다.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자성적 관점에서 씌어졌다. “이방인의 편견이 만들어낸 인도에 대한 허상을 깨고 인도의 명암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는 게 이 책의 집필 의도입니다.문맹,결혼지참금,부정부패,저개발,부당 착취와 같은 사회문제에 몸살을 앓으며 요로운 삶을 꿈꾸는 보통사람들이 호흡하는 땅이 인도예요.인도에 성자가 넘치고 종교가 넘치는것은 그만큼 삶이 힘들고 고단하다는 반증이 아니겠어요” 97년 유엔의 세계인구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 여자들은 1시간42분마다 한 명 꼴로 결혼지참금과 관련해 사망하는 것으로 돼있다.해마다 약 5,000건의 ‘강요된 죽음’이 발생하는 셈이다.인도에서 결혼은 한편으로는 ‘비즈니스’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바람처럼,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 경(經)에 나오는 이 구절처럼 인도의 여성들이 속박을 넘어 자유를 얻을 날은 언제쯤일까.전세계 여성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인도여성,그들의 옹이진 삶은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이 책 속의 인도여성들 이야기를 가볍게 읽되 결코 가볍지 않은 그들의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헤아렸으면 합니다” 인도 델리대학에서 ‘식민주의와 교육’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씨는 현재 식민지시대 인도와 영국의 관계를 다룬 에세이집 “인도에 온 ‘영국신사’”(가제)를 구상중이다.그는 나이 밝히기를 한사코 꺼렸다.
  • 아치에州 독립운동 가혹한 탄압/인니 인권단체 폭로

    ◎印尼軍,수년간 3만9,000명 학살 【자카르타 AFP 연합】 인도네시아 군대가 지난 몇년동안 북부 아치에주의 분리독립운동을 저지하면서 3만9,000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인도네시아 인권단체인‘아치에 비정부기구 포럼’이 5일 폭로했다. 이들은 또 올들어 말레이시아에서 불법 이민자로 추방된 아치에 출신인 1,000∼3,000명이 독립세력과의 관련설 때문에 아직도 경찰에 구금돼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고있는 콤나스 함(인권위원회)은 위란토 국방장관과 함께 이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아치에는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특별 군사작전 지역으로 선포돼 있으며 외교관이나 외국기자들의 방문이 엄격히 통제돼있다. 아치에 민족해방전선은 지난 70년대부터 ‘자바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벌여왔으며 인도네시아 당국은 90년대 초부터 반군을 소탕하기 위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벌여왔다.
  • 국민의 정부 출범 100일­특별대담:Ⅰ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 성과는 미흡/IMF 시련은 120년전의 開國 이은 ‘新開化’/현정부 적절한 초기대응… 換亂위기 일단모면 50년만에 여야 정권교체를 이룬 金大中 대통령 정부는 지난 100일 동안 대대적인 개혁작업을 추진해왔다.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친 개혁작업의 근저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金대통령의 국정운영철학이 그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이와 함께 이틀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의 결과와 이에 맞물리는 정계개편 문제는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현 정부의 새로운 대북 정책에 따라 그동안 교착상태를 면치 못하던 남북한관계도 서서히 개선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그리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설정,경제위기 극복과 한미간의 협력 등 외교문제도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崔相龍 교수(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정치학)와 韓相震 교수(서울대, 사회학)의 대담을 통해 당면 국정운영 현안을 점검하고 개혁의 목표와 방향 등을 분석해 본다. □대담=韓相震 서울대 교수·사회학­崔想龍 고려대 교수·정치학 ▲崔相龍 교수=먼저 金大中 대통령 정부 의 100일을 평가해 보면 위기관리능력을 높이 살 만하다.세부적으로 봐도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할 부분이 많다.하지만 모든 것이 체감적으로 좋아졌다고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개혁은 훌륭한 가치지만 많은 국민들은 이제 개혁 그 자체에 갈채를 보내지는 않는다.지난 정권이 5년동안 계속 떠든 것이 개혁이었다.마찬가지로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내용을 보자.당장 개혁의 성과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자칫 이런 기간이 길어지면 걷잡을 수 없는 침체와 (개혁의)하향화가 올수 있다. ○국민들 빠른 변화 요구/유화적 통치론 실망만 ▲韓相震 교수=金大中 정부 출범을 앞두고 국정의 기본목표를 설정하는데 있어 내부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제2의 건국이냐,화합과 도약이냐 등의 문제였다.객관적인 우리의 상황은 제2의 건국같은 큰 개혁의지를 갖고 출범하는 것이 좋지만 개혁을 뒷받침해주는 정치 사회적 조건이 결여돼 있어 과대포장했을 경우 역풍을 자초한다고 보고,온건하게 화합과 도약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것으로 안다. 그러나 100일 시점에서 불가피하게 근본적으로 재건을 필요로 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현 정부가 과거와 같은 강압적인 방식,위로부터 통치하는 모델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정상화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까 빠른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정부에 대한 실망이 표출되기도 한다. ▲崔교수=金대통령은 취임직후 일성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밝혔다.아시아의 지도자 가운데 이같은 정책목표를 밝힌 경우는 드물다. 중국의 경우 시장경제는 받아들이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중국의 특수사정을 주장하고 있고,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등에서도 ‘아시아 민주주의’를 추구할뿐 보편적 가치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아주 인색하다. 金대통령은 이같은 아시아적 민주주의에 관해 부정적이란 점에서 돋보일 뿐아니라 일본과 함께 서구의 인권개념을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도자다.이런 측면에서 특히 선진국에서 엄청나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실무형 행정가 대거 포진/이론적 중추부 보완 해야 ▲韓교수=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발전은 역사의 순리라고 보지만 토론이 요구되는 쟁점이기도 하다.국정철학은 기본적으로 올바르지만 이것을 체계화시키는 노력을 출범이후 하지 않았다.현 정부의 취약점이다.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부로서 많은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IMF(국제통화기금)시대 경제문제에 덮혀 이것을 추스리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 또 현 정부의 중추세력이 실무형 행정가들로 구성돼 있고 이론적 중추부가 결여돼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국정의 기본방향과 목표를 체계화시켜 전체적으로 조정하고 제어해가는 지적인 수준이 기대했던 것보다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崔교수=동감이다.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상호보완하는 측면도 있지만 상호모순되는 측면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유의해야 한다.시장화는 불평등을 낳게 마련이고 민주화는 평등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순되는 측면이 사회불안을 가져온다고 우려하는 의식이 별로 없다.성공하면 코리안 모델이 될것이다. ▲韓교수=정부에 의해 추진된 재벌개혁이 좋은 보기다.재무구조의 투명성 확보,소액주주의 참여발언권 강화문제,1인 지배체제의 개혁 등은 구체적이고 이를 통해 그동안 재벌가족이 전권을 행사했던 경제구조를 투명하고 민주적 방식으로 고치려는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더 나아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따로따로 발전해가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적 참여의 원리가 시장경제에 접목되고,경쟁과 효율의 원리가 민주주의에 접목되는 등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해가는 모델을 한국사회에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은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구조조정과 노사정 협의로 연관지어볼 수 있다.구조조정은 시장경제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즉 신자유주의 정책을 깔고 있다.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공동체기반이 와해되기 쉽다.때문에 노사정협력모델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당사자간 합의에 의한 민주주의 모델을 시장경제에 합친 것이다. ○협소한 관료주의틀 빠져/노동자의 의혹·불신 초래 정부가 노사정이 합의한 90개항을 성실히 이행해 노동자들에게 신뢰를 심어주고 이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는 협소한 관료주의의 틀에 빠져 노동자의 의혹과 불신을 사고 있다. 사실 노사정 1차 협약 내용은 획기적 의미를 띤다.이는 1936년 살츠요바튼협약(스웨덴),1978년 몽클로와 협약(스페인)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귀중한 합의를 해놓고도 노사정 모두가 그 의미를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崔교수=현재의 개혁 방향은 근본적으로 옳다고 본다.120년전 개국 당시의 쇄국정책이 역사의 진행방향으로 보아 오류였다면 이번 IMF충격에 대한 金大中 정부의 대응방향은 기본적으로 옳다. 나는 이를 ‘신개화(新開化)’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싶다.그리고 여기에 역사적 선택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다만 개혁의 주체가 불분명한 점은 지적할 수 있다.개혁의 주체는 주도세력과 기반세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주도세력은 민주개혁 세력을 의미한다.민주화에 역행했거나 반개혁세력이 IMF시대의 국정을주도할 수는 없다.지난 정권하에서 민주화세력과 이른바 산업화세력이 끝내 융화되지 못한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韓교수=‘신개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돼있다고 말한 崔교수의 시각이 흥미롭다.재벌 금융개혁을 포함해 노사정협력 등 중요한 골격은 이미 짜여 있다고 판단한다.문제는 효과적으로 국민지지를 동원하면서도 무리수를 쓰지 않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100일이후 金大中 정부의 과제라고 본다. 우리나라는 지난 40여년동안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경험했다.근본적으로 국가가 주도하고 재벌이 중심에 선 독특한 발전방식으로 40년동안 중단없는 고도성장을 이룩했다.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우리의 체질과 현재의 경제위기 사이에는 큰 간격이 존재한다.이제 불가피하게 많은 외국자본이 들어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우리의 마음과 태도가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느냐에 대해 불안하다. 현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국자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우리 의식수준은 아직까지도 자기중심주의,민족주의,혹은 우물안의 개구리 같은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클 것이다.대통령은 “국적에 관계없이 우리나라에 진출해 이윤을 내면 우리 기업”이라고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근본적인 처방과 준비가 필요하다. ○노사정 협약 성실히 이행/중산층 등 지지기반 확보 ▲崔교수=현 정부가 개혁에 있어 관료의 경험을 중시하는 정책에는 몇가지 점이 보완돼야 한다.우선 민주개혁노선에 걸림돌이 되는 관료가 개혁의 주체가 돼서는 안된다.관료가 민주개혁노선 실천에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정부가 확고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개발시대의 타성에 젖은 관료가 민주개혁의 이니셔티브를 취하기 어려우며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하에 확실히 장악되지 않은 관료는 복지부동이나 조직적 저항을 일삼기 쉽다. 민주개혁의 지지기반은 그동안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중산층을 바탕으로 해야한다.아무리 어려운 경제라 하더라도 중산층까지 견딜 힘을 잃고 해체되어 버린다면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아노미 상태로 떨어질 수 있다.지구상에서 90% 이상의 전폭적인 지지를 지속적으로 받는 정권은 없었다.민주개혁이란 이름아래 출발했던 金泳三 정권은 국민의 어떤 계층에게도 희망을 주지 못했다. 특히 중산층의 이반은 가히 무서운 수준이었다.국민통합이 중요하고 노사정협약의 실천이 중요한 것은 중산층을 주축으로 한 우리 사회의 지지세력을 견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관료·지식인 협력 유도/개혁주체로 끌어내야 ▲韓교수=지금 상황은 개혁의 한 중심에 대통령이 있고 주변에 장관 등이 있어 개혁의 중추부를 이룬다.그러나 개혁이 성공하려면 개혁을 지원해 줄수 있는 사회세력이 협력해야 한다.구체적으로 말하면 현 정부에서 지지를 가장 얻기 어려운 집단중 하나가 결국 관료와 지식인이 될 것이다.관료는 장관이 통제하면 될 것 같지만 실제는 절대 그렇지 않다. 관료들의 사보타지 능력이 생각보다 크다.지난 40년간 지속적 성장기간동안 중앙부처 고위 관료들은 상당부분 기득권 구조에 편입되었다고 본다.때문에 관료를 개혁의 주체로 만드는 데는 입체적인 구상이 필요하다.개혁은 위로부터 압력만이 아니라 옆으로부터 지원,밑으로부터의 요구도 종합적으로 필요하다. 지식인의 생명은 비판정신에 있다고 본다.그런데 중앙부처를 포함해 지식인 전문가가 참여하는 수많은 자문위원회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이것은 지식인을 위해서도,관료를 위해서도,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자문위원회를 투명하게 만들어 지식인 사회의 자극과 요구를 관료사회에 투입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인도­파키스탄 핵긴장 폭발할까

    ◎印 핵실험·카슈미르 포격전… 갈등 심화/美 등 국제사회 압력이 충돌 완충작용 인도와 파키스탄의 해묵은 적대관계가 다시 무력충돌로 내닫고 있다. 이달초 실시된 인도의 지하 핵실험은 파키스탄에 충격을 가하면서 두나라 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몰아넣었다.영토분쟁지역인 카슈미르에서 26일 대규모 포격전이 벌어지는 등 갈등은 점점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인도는 카슈미르 주둔병력을 증강시키고 있고 파키스탄도 접경지대 주민들을 무장시키면서 더 큰 충돌에 대비하고 있다.47년과 56년,71년 등 세차례 전면전을 벌였던 두나라가 핵개발경쟁을 둘러싸고 다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인도에게 핵개발경쟁의 선수를 빼앗긴 파키스탄이 공언대로 핵실험을 강행한다면 서남아시아의 안정과 세계적인 핵 비확산 노력이 뒤흔들릴 위험도 높다.핵실험에 이어 핵탄두를 운반할 미사일 개발과 재래식 군비증강 경쟁이 잇따를 것이란 전망이다. 핵개발을 둘러싸고 두나라가 외교적 해결책이나 대화 모색없이 대결상태로 치닫는 이유는 상대방의 핵개발을 용인하지 못하는 안보 불안감 때문이다.골 깊은 상호불신과 전쟁을 통해 누적된 적대감,공존하기 어려운 가치관과 종교 등이 바탕에 깔려 화해를 어렵게 한다. 한반도 면적 크기의 카슈미르지역을 둘러싼 영유권 다툼도 관계회복의 걸림돌이다.47년 영국의 식민지배 종식 후 영토분할 과정에서 통치권은 인도에 넘어갔지만 거주민의 70% 가량은 파키스탄과 같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어 파키스탄을 배후로 한 분리독립운동과 폭동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인도정부가 국내의 정치적 분열과 불안정을 핵개발과 민족주의적인 대외 강경외교정책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도 충돌 위험성을 높인다.이런 추세에 따라 카슈미르지역 등 인도·파키스탄 국경지역은 상대방의 주요 도시를 겨냥한 미사일과 중무장 병력들이 집중배치돼 몇 안되는 ‘화약고’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미국 등 국제사회의 압력과 경제제재를 견디기 어려운 파키스탄의 경제상황,중국 등과의 불편한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인도의 속사정등은 전면적 충돌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 서울신문 제정 6회 공초문학상 수상 詩人 신경림씨

    ◎“문학의 임무는 현실 변화 담는 것”/우리가락·사회참여 거쳐 어머니 품으로 돌아와/체험 못살린 기교 위주 신세대 詩세계 안타까워 “공초선생과는 문학경향이 달라 처음엔 상받기를 주저했어요.그러나 작품세계가 달라도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잣대로 상을 준다는 말을 듣고 망설임이 줄더군요.” 덤덤한 수상소감.사람좋아 보이는 순박한 미소 뒤의 단단함.수상의 기쁨보다 자기 시세계에 더 애정을 쏟는 시인 신경림.그의 겸허에는 고집이 묻어있다. “문단의 존경을 받는 공초선배가 불교나 허무주의에 중심을 두었다면 저는 현실참여에 무게를 두면서 살아왔지요.서로 다른 시정신이 빚을 부조화에 대한 우려 같은 거죠” 우리 문학사에서 그가 남긴 자취는 크다.문학을 떠받치는 양대 축의 하나인 현실주의 흐름에서 그를 빼놓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힘들다. 농심(農心)의 한과 신명을 우리 가락에 절묘하게 담아 70년대 시단에 첫징소리(‘농무’)를 울린 뒤 그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체제에 버림받은 ‘못난 놈들’의 현장을 민요 가락에 실어 한올한올 뽑아내면서 ‘새재’를 넘었다.발로 뛰며 보듬어 온 변두리 인생에 대한 참여관찰은 장시 ‘남한강’이라는 절창을 낳았다.그러나 갑작스런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에서 비롯된 흔들림 앞에서 한동안 호흡을 고른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나라를 걱정하는 글에서 지적했듯 우리 민족에게는 냄비기질이 있어요.저는‘시의 시대’라는 80년대의 불기가 사윈 정신적 배경으로 이 점을 지적하고 싶네요” 더 큰 목소리들이 잽싸게 변신을 모색하던 시절.시인은 다시 특유의 더딘 걸음으로 지난 날의 모습을 추스렸다.‘쓰러진 자의 꿈’을 달래가며 절망의 우물에서 작은 위안과 오래갈 희망을 길어 올린다.91∼9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맡아 지친 문학계를 끌어안았다.다시 6년만에,법인체로 바뀐 이단체의 이사장으로 돌아와 문단의 버팀목을 맡고 있다. 그의 수상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시인의 여정과 닮아 보인다.그러나 시인은 입을 다문다. “시가 설명되어 버리면 실패라고 생각해요.수상시도 그런 맥락에서 읽어주면 좋겠네요” 램프와 칸델라 시절을 거쳐 전등불로 바뀌면서 시인의 눈도 넓어졌다.대처로 나와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건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그들이 재봉틀로 빚던 노동에 대한 기억이다.다시 램프 시절이 전부가 된 것이다.(‘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문학은 어차피 현실을 떠나서는 숨쉴 수 없다고 봐요.이런 점에서 달라진 상황을 직시하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더 절실한 거구요.미몽에 사로잡힌 정치구호보다 현실의 변화상을 바로 보고 작품으로 얘기하는 게 문학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구호로 급하게 달구어진 80년대에 대한 냉철한 반성이다.바뀐 세태를 시인은 어떻게 보는가. “IMF한파 여파가 우리같은 글쟁이들에게 심해요.작가들이 마음놓고 글쓸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작가회의’의 과제이기도 합니다.하지만 좋은점도 있어요.상업주의에 편승한 문단의 거품을 뺄 좋은 기회죠” 상업성에 대한 시인의 경계는 곧장 신세대 작가들을 향한 우려로 나아간다. “감각과 기교만 난무하지 삶의 체험이 안보여요.시나 문학에는 체험이 실려야 합니다.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테크닉에만 신경쓰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여기에는 자본의 상업성도 한 몫 한 것 같아요.” 후학들에 대한 웅숭깊은 기대와 걱정.수상시가 수록된 시집의 다음 구절과 그 울림이 같다. “…사람들이 모두 한곳으로만 몰려간다./ 떼밀리고 엎어지면서 뒤질세라 달려간다/ 바위만이 어깨 내밀어 길을 내주고 있다…/그 얼굴에 웃음 서글프다 그 /얼굴에 웃음이 아름답다” □주요 경력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학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으로 추천 등단 △1973년 첫번째 시집 ‘농무’ △1979년 두번째 시집 ‘새재’ △1985년 세번째 시집 ‘달 넘세’ △1987년 장시 ‘남한강’ △1988년 네번째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 △1990년 다섯번째 시집 ‘길’ △1993년 여섯번째 시집 ‘쓰러진 자의 꿈’ △1974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이산문학상 △1994년 단재문학상 △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심사평/깨달음 과정속에 시인의 인생론 함축 공초문학상은 등단 20년 이상 되는 시인이 최근 1년동안 발표한 작품(시 혹은 시집)중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문학정신과 이념에 걸맞는 시를 그 심사대상으로 삼고 있다. 심사위원 일동은 각자 후보자 2명씩 천거하여 그 추천의 변과 각 시인들의 특장 등을 논의한 뒤 3명으로 압축된 후보를 대상으로 면밀한 토의과정을 거쳤다.심사위원 일동은 그간 공초문학상이 한국 시단의 대가급 시인들에게 수여된 점을 주시하는 한편 권위있는 문학상일수록 중앙문단 중심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점을 적시하면서 지방문단에도 앞으로 넉넉한 관심을 보일 것을 촉구했다. 충분한 토의 뒤 심사위원 일동은 저마다 충분한 수상자격을 갖춘 3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무기명투표를 실시했는데 만장일치로 신경림 시인을 1998년도 제6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게 되었다.수상작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동명의 시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지난 3월 간행됨)이다. 신경림 시인은 70년대 이후 어두웠던 한국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시종 서정성 짙은 인간주의적 문학사상으로 서민대중들의 삶을 전통적인 민요 형식의 기법으로 형상화하여 현대 한국시문학사의 한 흐름을 형성시켰다. 특히 이번 수상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시인 자신의 인생 여정이 ‘불’이라는 이미지의 변모로 축약되어 있는데,“멀리 다닐수록,많이 보고 느낄수록 /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는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노래하여 그간 시인의 추구해온 인생론이 미학적으로 절묘하게 진테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공초사상이란 무엇일까.식민지와 분단시대의 모순과 갈등속에서 그 지향할 바를 허무혼을 화두로 삼아 암중모색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그 허무혼이 이제 신경림 시인의 인생론과 접점을 이룬다는 게 오늘의 우리 시문학을 위하여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심사위원 일동은 공초의 문학사상이 신경림 시인의 수상을 계기로 더 큰지평으로 열릴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章湖 李根培 任憲永 宋秀權 李憲淑
  • ‘세계경찰’美의 이상한 침묵/“印尼문제는 스스로 풀어야할 숙제”

    ◎“수하르토 버릴 경우 국익에 큰 손상”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인도네시아 사태는 실익을 먼저 고려한다는 ‘미국외교’를 또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인도네시아 사태가 수일간 지속되는데도 미국은 침묵으로 일관했다.마지못해 밝힌 입장은 ‘잘해야 한다’는 게 전부였다.‘세계경찰’을 자임해온 예전의 미국이 아니다.인도네시아 사태의 분수령이 될 수하르토 대통령의 ‘결단’이 밝혀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백악관의 에릭 루빈 대변인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담화와 관련, “인도네시아 정부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조치는 정치개혁과 화해문제를 놓고 각계대표들과 즉각 공개적인 대화를 갖는 것”이라고 언명했다.한마디로 ‘좋게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어 “수하르토 대통령이 조기총선을 제의한 사실은 알고 있으나 구체적 일정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더이상 입장을 묻지 말아달라는 주문인 셈이다. 미국의 이상한 침묵이나 알멩이없는 언급은 12년전 필리핀 때와 대비시켜보면 더욱 의아심을 자아낸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락살트 상원의원을 필리핀으로 보내 마르코스의 퇴진을 직접 촉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이 바뀌어서 미국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미국의 실익을 고려한 액션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수하르토를 ‘버릴’ 경우 곧바로 닥쳐올 혼란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는 분석이다.국익이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수하르토의 뒤를 이을 인물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앞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때 식민지관계였던 필리핀에 비해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관계가 ‘진하지 못했다’는 점도 꼽혔을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하여튼 지금까지의 대응으로 보아 수하르토에 대해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학생들과는 달리 불확실하고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더 크게 보려고 하고 있다고 요약된다.
  • 戰犯의 영웅화/李世基 社賓 논설위원(外言內言)

    일제시대를 살아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에다 한국에서는 강제징병과 학도병제를 실시하고 종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서 ‘A급 전쟁범죄자’로 회부되어 48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일본의 군국주의자다. 그런 전쟁범죄자가 일본 영화 ‘프라이드:운명의 순간’에서 전범이 아닌 ‘영웅적 사무라이’로 등장해 중국과 서방언론등에 의한 국제적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일제의 식민지 침탈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대동아전쟁은 일본의 자위(自衛)를 위한 정당한 전쟁이자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聖戰)’이었음을 강변하고 도조는 ‘일본의 명예를 지키려다 연합군측의 사전각본에 따라 부당하게 처형되는 희대의 영웅’으로 부상된다는 것이다. 작은 일에 생색내고 무의미한 것도 의미있는체 꾸미는가 하면 엄연한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기를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이고 보면 또한 번심한 장난을 쳤구나 하는 안쓰러운 감이 없지 않다. 최근까지도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나 남경 대학살등을 고교교과서에 기술하는 것은 ‘자학(自虐)사관’ 이라면서 반일교과서 회수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해 왔었다. 그릇된 과거를 덮으려는 자체가 이미 그릇됨을 인정한다는 것을 아마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 개봉을 앞둔 영화시사회에서 과거사 망언으로 유명한 한 고위관리가“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뿐 아니라 핵심을 찾아내는데도 성공하고 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니 그 뻔뻔스러움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인간사회에서의 참다운 영웅이란 자신의 존재를 대중속에 파묻고 사는 자존심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한 영웅이 있듯이 악한 영웅도 있다. 영웅이 없는 사회에서 오죽이나 궁색했으면 전범을 영웅화했겠느냐는 측은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서 도도한 세계사를 역행시킬수는 없다. 영화라는 방법으로 과거를 미화하려는 자체가 영웅의 이미지에서는 이미 어긋난 처사다. 차제에 무분별한 일본영화수입을 심사숙고해봐야겠다.우리 청소년의 역사를 보는 눈은 우리어른들이 지켜줘야하기 때문이다.
  • 對美 의존 외교(대한민국 50년:18)

    ◎“무기 얻어내라” 駐美 대사에 첫 훈령/李 대통령 직접 지시… 쌀 등 원조확보 총력/45∼60년 전쟁비용 포함 200억弗 끌어내/아이젠하워 1백만달러 더 주고 큰 생색/“북진통일 시도하면 원조 중단” 카드 활용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했을 때부터 60년대초까지 한국은 안보·경제협력을 위해 대미의존 외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상실했던 대외경제관계 확립뿐 아니라 국내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도 원조외교는 우리의 절실한 목표였으며 이는 대부분 미국을 통해 충족될 수 밖에 없었다. ○48년 재산협정 체결 1950년대 한국은 미국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조를 해 준 나라였다.이원조는 국가를 재건하는데 큰 힘이 됐다.물론 미국은 한국을 대소(對蘇) 및 대중(對中)전초기지로서 전략적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그처럼 막대한 양의 원조를 해준 것도 사실이다.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직후 우리나라 대외경제관계의 기본과제는 신정부의 경제주권 확립,경제적 혼란의 극복과 민생안정을 이루기 위한 경제원조의 획득,대외통상증진 및 국제경제기구 가입 등이었다. 같은해 11월 ‘한·미 경제 및 재산에 관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미군정으로부터 재산권 인수를 완료했고,또 12월10일에는 ‘한·미 경제원조협정’으로 3년간에 1억2천만달러의 원조를 받게 됐다. 또 1945년부터 1960년까지 15년동안 미군점령지역 구제계획(GARIOA),미경제협력처(ECA) 등 구호,전후복구 및 경제부흥을 위한 대한(對韓) 무상원조는 12억1천4백만달러였던데 비해 미국의 한국동란중 지출비용은 1백80억달러에 이르렀다.이같은 미국측의 원조는 신생 한국에 물질적 기반을 갖추게 해주었고 나아가 장차 한국의 공업화에 크게 기여하게 됐다.국가경제부흥을 미국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한국정부는 대미안보 및 경제관계를 우선적으로 공고히 하는데 모든 외교역량을 동원했다.이러한 대미 의존정책은 또한 안보를 보장받는데 있어서도 필요한 현실주의적인 정책접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단 2명 직원 업무 개시 미국의 무상원조는 그러나 긍정적 측면이외에 우리나라의 무역구조를 대미의존적 구조로전환시켰으며 또 한국농업의 정체를 가져와 농공간의 균형적발전을 저해했다는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당시 주미대사관도 원조외교를 중심으로 일을 해나갔다.49년 1월 張勉 박사는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중 미국 대사로 발령을 받고 곧바로 워싱턴으로 갔다.張대사는 49년 3월25일 트루만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외화사정을 이유로 외교관의 가족동반 부임이 금지되던 시절,주미한국대사관은 張대사와 韓豹頊 1등서기관 등 단 2명의 직원으로 업무를 개시했다.본국 정부와의 교신은 일반 전보를 이용했으며 모든 업무연락은 외무부를 거치지 않은채 경무대와 직접 했다.본국 훈령도 李承晩 대통령이 직접 내렸다.내용은 경제원조와 안보관련이 대부분이었다. 李대통령이 주미대사관에 처음으로 내린 임무는 무기원조였다.李대통령은 훈령에서 “무기원조가 절실함을 설득하고 많은 액수의 원조를 얻을 것”을 지시했다.당시 林炳稷 외무장관도 “이북이 소련제 탱크로 중무장하고 있으며 이대로 가면 적화는 시간문제”라며 무초초대 주한미대사와 윌리엄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에게 무기원조를 줄기차게 요청했다.이처럼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외교적 노력은 1954년 7월 李承晩·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간에 열린 최초의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다.당시 한·미 정상회담의 회의의사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54년 7월에 정상회담 “미국은 대한민국을 정치,경제 그리고 군사적으로 강화시키기 위해 1955년 회계연도에 반영된 7억달러에 달하는 경제원조 및 직접군사원조사업을 통해 계속적으로 돕는다.이 액수는 당초 미정부가 같은 회계연도에 고려했던 액수보다 1백만달러 이상이 초과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미정상회담에서 1백만달러의 원조증액을 생색낼만큼 한국의 절박한 사정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기도 했다.50년 1월 윌리엄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유엔한국위원단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한국정부가 만일 북한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는 경우 미국정부는 모든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중단한다는 통고를 본관은 받고 있으며 미군이 남한으로부터 철수할때 방위용의 무기만을 양도한 것은 한국정부가 국토통일을 목적으로 한 전쟁을 시작할 생각조차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연유한 것이다” 미국은 李承晩 정부가 무력 북진통일론을 밀고 나가 미군이 본의아니게 전쟁에 휩쓸리는 사태를 경계했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한 일종의 위협수단으로 경제원조 중단카드를 사용했던 것이다. ○70년대 통상외교 전환 한편 정부수립후 한국전쟁때까지 정부는 인접국인 일본과의 대외통상을 시도하기도 했다.전통적으로 통상관계가 밀접했던 일본과의 교역을 잠정적으로나마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로 50년 6월2일 일본을 대신한 미 극동사령부 당국과 한·일 잠정무역협정 및 한·일 재정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또 미국과는 시장개척을 목적으로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에 참가하기도 했다.이같은 원조위주의 경제외교는 60∼70년대 우리 정부가 수출주도형 경제의 틀을 잡으면서 수출 제일주의 통상외교로 전환했으며 80년대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면서 미국의 통상압력이 본격화돼 이에 대항하는 외교로 이어졌다. ◎韓豹頊 前 유엔대사/“美 국무성 드나들며 끈질기게 원조 요청”/어려운 국내경제 설명 유일 정부 홍보에 주력/원조안 美 의회 否決에 국무성 설득해 되살려 “張勉 대사와 저,둘이서 미 국무성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외교를 펼쳤습니다” 張대사와 함께 49년 주미대사관 창설 멤버인 韓豹頊 전 주유엔대사(82)는 당시 주미대사관의 주업무를 이같이 소개했다.李承晩 대통령이 대사관에 직접 내린 훈령은 기본적으로,어려운 경제사정과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는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점을 주재국에 인식시키게 하는 것이 골격이었다. “한국에 대한 원조안이 미의회에 상정됐을때 1표 차이로 통과되지 못했던 때가 있어요.대사와 저는 바로 국무성으로 뛰어가 ‘한국이 너무 힘들어진다’고 통사정했습니다.곧이어 트루먼 미대통령이 지시를 내겨 이 안은 재상정돼 결국 통과됐죠” 韓전대사는 정부수립후 처음으로 외교업무를 하게 돼 서툴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전에 미국 유학경험이 있어 의사소통이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회고했다.또 당시 주미대사관에는 외교관 말고 3명의 구매관이 근무했다고 한다.이들의 역할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으면서 가급적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 오는 것이었다.이들 구매관이 李대통령으로부터 처음 받은 훈령은 ‘쌀 1만t을 한달안에 부산항에 닿도록 사보내라’는 것.구매관들은 먼저 미 농무성을 찾아가 입찰공고를 보내면 각 중개상인들의 입찰가격이 대사관에 도착하고 이 가운데서 낙찰자를 정했다.이어 선박업자를 찾아가 선박을 구한뒤 쌀을 실어 보내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모든게 남아 돌았고 우리는 뭐든지 급했습니다.담배,밀,보리 등 농산물과 기계류를 닥치는 대로 사보냈습니다”라고 韓전대사는 구매관과 함께 물건구매에 나섰던 일을 술회했다.韓전대사는 주미대사관 서기관으로 외교관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주제네바대표부,주유엔,주오스트리아,주영국대사를 거쳐 81년 은퇴했다.
  • 日 헌법의 평화정신 되새기자(해외사설)

    아시아 경제위기를 맞아 일본은 국내 경제문제와 정치의 줄다리기에 매달려 진지하게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새 미일방위협력 지침(가이드라인)에 근거해 소위 ‘주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군의 전투행동을 자위대가 후방지원하기 위한 법제도가 정비되고 있다.미국과의 협력 틀안이라고는 하지만 장차 이 지역에 복잡한 반응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커다란 변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이웃 나라와의 신뢰구축 방안에 대해 일본은 여전히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긴장완화와 분쟁 예방,안정보장 질서 구축에 주체적 구상을 보이려는 의사가 결여돼 있다. 전후 일본의 아시아정책은 한반도의 식민지 지배,중국 침략,전장화한 동남아시아에 대해 속죄의식을 안고 있으면서도 오로지 장사 상대로서 어울리는 것을 우선해 왔다.길었던 냉전도 유리한 환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귀찮은 문제는 미국의 뒤에 붙어서 가면 끝난다라는 행동양식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이런 일본이 의지해야 하는 것이 있다.다름 아니라 일본국 헌법이다.51년전 오늘(3일) 시행된 이 헌법을 펼쳐 보는 의미는 두가지다. 첫째 9조(평화조항)의 존재가 아시아 국가에 얼마나 안심감을 주며 지역의 안정에 도움이 됐는가,또 나아가 이것이 일본 자신의 이익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한국의 金大中 대통령은 지난주 일본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세계평화를 유지하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결심을 담은 평화헌법”을 전후 일본의 긍정적인 현실로서 평가한다고 말했다. 미일안보체제의 주요 기능의 하나로서 종종 이야기되는 것이 ‘병 뚜껑’론이다.미국은 군사적으로 독주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본’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일본은 ‘뚜껑’이 없어지면 무엇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주는 한 국제사회와의 확고한 신뢰는 구축할 수 없다.일본에 요구되는 것은 9조를 출발점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갖고 있는 지혜와 힘을 평화와 안정을 위해 제공할 수 있는 가이다.이것이 헌법으로부터 취해야 할 두번째 의미다.
  • 주한미군:下(대한민국 50년:17)

    ◎경제 부축·문화 오염 ‘빛과 그림자’/대도시마다 기지촌·PX물품 암시장 형성/군납·건설로 고용 창출… 戰後 복구 큰 역할/80년대 주권의식 급신장 反美 기류 확산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출범이 다름아닌 미군정(美軍政)의 이양이라는 점과 미군이 이땅에 반세기 넘게 계속 머물러 온 사실은 주한미군의 존재가 그동안 우리 사회와 어떠한 함수관계를 맺어왔을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주한미군이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한국은 오랜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경제와 정신문화 모두가 고갈상태였다.따라서 그들이 풀어놓는 풍부한 물자와 생경한 문화는 쇼크와도 같은 영향력으로 다가와 기본 먹거리를 비롯한 생활양식에서부터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촉매역할을 하면서 지난 반세기동안 이땅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워 왔다.특히 주한미군으로 인한 사회상의 변모와 인식의 변화는 우리의 경제력 및 주권의식의 신장과 밀접하게 연관돼 왔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빈사경제 소생 원동력 안보 외적인 측면에서 주한미군이끼친 가장 큰 영향은 경제였다.45년 해방 직후의 경제혼란기를 거쳐 60년대 초까지의 재건기에 이르기까지 주한미군을 통해 배포된 물자와 미국측의 무상원조는 거의 빈사상태나 다름없던 우리 경제를 소생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이 사실이다.비록 물자의 대부분이 소비재이긴 했지만 56년과 57년 사이 3억달러의 무상원조에 힘입어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자물가가 하락한데서 보듯 주한미군의 존재는 우리 경제를 좌지우지했다.경제개발기인 60년대 이후는 우리 경제가 제 궤도를 잡아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주한미군 자체로서의 영향력은 감소됐다.하지만 당시 군납산업이니 PX경제니 하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미군에 의한 달러의 위력은 여전했다. 속칭 주보(酒保)로 불리던 PX(미군용 매점)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았지만 지난 78년 수입자유화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 우리의 실생활 및 의식구조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PX를 통한 미군물품의 시중유출은 미군의 상륙 직후부터 시작됐지만 50년 전쟁발발을 계기로 본격화돼 이후 대도시와 기지촌에는어김없이 PX물품 암시장이 형성됐다.국산은 상품다운 것이 없었기에 깡통식품,담배,커피,화장품,의류 등 PX물품은 미제(美製)로 통칭되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PX물품은 웬만한 집이라면 한두개쯤 다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안방 깊숙이 침투했으며 쓰고난 깡통이 버킷이나 판자집 지붕으로 이용되는 등 일상생활에서의 미제 의존도는 광범위했다.그래서 미군물품이 판을 친 50년대 우리 경제를 빗대 PX경제 또는 깡통경제라고 하는 혹평도 생겨났다.PX가 가장 많았던 50년대 말에는 전국 120여개소에서 총 취급품의 60%정도가 부정유출되고 이는 당시 가격으로 300억원어치 이상으로 추산됐다.PX물품의 부정유출은 그 자체가 불법이기도 하지만 경제질서를 교란시킴과 함께 범죄사건으로도 자주 비화해 끊임없이 사회문제화했다.또한 가짜상품이 판을 치게 만들고 국민들의 소비 조장,외제 선호,사치와 허영심의 확산 등 국민정서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하지만 부족한 물자의 공급을 메워전후 인플레 수습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긍정적 평가도 없지 않았다.주한미군은 이같은 PX유출과 원조를 통한 상품공급 외에 군납과 건설,고용창출 등 간접적으로 끼친 효과도 컸다.그러나 외국군의 주둔에 따른 부산물로 우리 사회가 떠안은 대가도 적지 않아 기지촌과 혼혈아,저급문화의 확산 등 부작용이 심했다. ○소비조장 허영심 확산 한국속의 아메리카인 기지촌,한국도 미국도 아닌 국적불명의 이방지대.양공주와 혼혈아,성(性)거래,마약과 폭력 등 부정적 언어로만 상징되던 기지촌의 역사는 주한미군의 역사와 떼놓을 수 없다.미군이 처음 진을 친 부평은 한국 최초의 기지촌으로 변했다.하지만 초기엔 엄격한 유교윤리와 미풍양속에 대한 뿌리깊은 사회관념 탓에 드러내 놓고 성의 거래가 이뤄지지는 못했다.45년 10월 열린 연합군 환영연무회가 “미군 앞에서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야유와 욕설을 퍼붓는 관중에 의해 깨질 정도로 우리 국민은 미군과 우리 여인들의 접촉을 용인하지 않았다.그러나 한국적 윤리의식의 높은 벽도 가난의 현실 앞에서는 오래 견디지 못했다.엄청난 물자와 달러를 쏟아내는 미군부대 주변엔 술집과 상점이 하나둘씩 들어섰고 자연 양공주 또는 양색시로 불리게 된 여인들도 몰려들었다. ○혼혈아 7만명 태어나 기지촌이 본격 정착하게 된 계기는 전쟁이다.전쟁은 이땅에 미군을 대거 불러들였고 또한 숱한 미망인과 고아들을 양산했다.생활능력이 없는 이들은 자연 물자와 달러를 찾아 미군부대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이에따라 기지촌 경기도 급속히 확산됐다.기지촌 경제가 황금기를 구가하던 60년대 후반 이태원·동두천·의정부·송탄·평택·대구·군산·부산 초량 등 전국 62개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윤락녀의 수는 2만명을 넘었다.한달에 이들이 화대로 벌어들인 달러의 규모도 1백만달러를 훨씬 상회,朴正熙 정권은 윤락행위방지법을 무시하고 미군상대 술집에 면세 혜택을 주는 등 기지촌 육성책을 펼 정도였다.또한 이런 와중에 기지촌에서는 외국군 주둔에 따른 필연적 산물로 7만여명으로 추산되는 혼혈아가 태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번성일로를 걷던 기지촌도 경제성장에 따른 달러의 위력 감소와 70년대 들어 단행된 미국의 연이은 철군정책으로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한때 7천명에 달했던 동두천지역 기지촌 여성들의 모임 ‘민들레회’가 지난 89년 회원이 없어 자진 해체한 반면 또다른 대표적 기지촌인 의정부시에서 96년 1월 ‘우리땅 미군기지 되찾기 의정부시민연대회의’가 결성된 것은 이땅의 주한미군 존재양식과 관련,한 시대가 지났음을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주한미군은 경제적 측면 못지 않게 문화적 영향도 크게 끼쳤다.미군교재가 대학교재로 그대로 사용될 만큼 한국 대중이 최초로 접촉한 미국문화는 군대문화였다.따라서 하위문화로서의 군대문화가 지닌 저급성과 퇴폐성,폭력성 등의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사기도 했다.그렇지만 비행기 한 대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조종사를 살리는게 더 중요하다는 미국적 사고는 목숨보다 소총한 자루가 더 중요하다는 일본식 사고에 젖어있던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한미行協 등 난제 남아 주한미군은 처음 이 땅에 해방군으로 들어왔다.그리고 한동안은 한국이 군사적·경제적으로 신세를 지는 원조자로 존재해왔다.하지만 70년대 후반을 고비로 애증이 교차하는 냉정한 재평가와 함께 우리 국민으로부터 새로운 존재양식을 요구받았다.그 대표적인 움직임은,80년대 대학가의 반미 기류를 계기로 급속히 확산된 우리 국민의 권리의식 신장이다.전에는 약자로서 억울해도 참았지만 이제는 이유없는 불이익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동등의식의 발로다.한국민의 권리의식 신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주한미군 기지이전과 미군 범죄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재판권행사 요구를 꼽을 수 있다.과거 주한미군의 문제가 주로 국가간 차원에서 중요성을 띠었다면 이제는 범죄·환경·권리침해·경제실리 등 국민 개개인이 권리차원에서 제기하는 문제가 주된 쟁점으로 등장한 것이다.아직도 타결되지 않은 한미행정협정(SOFA)의 개정을 비롯,주한미군과 한국민간에 새로운 좌표의 정립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抗日 민족시인 이상화 전집 발간

    ◎미발표 유고 등 시·산문 80여편 묶어 올해는 항일 민족시인 상화(尙火) 이상화(1901∼1943)가 타계한지 55주년이 되는 해.대구문인협회가 그의 업적을 기려 이상화 전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그루)를 펴냈다. 상화는 1921년 동향의 글벗이던 현진건의 권유로 ‘백조’ 동인이 돼 시작활동을 시작했다.상화의 시는 그가 일본 관동 대지진 현장에서 동족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한 참극을 목격하고 1924년 귀국한 뒤 크게 바뀐다.이전의 도피적이고 소극적이던 시풍이 저항적이고 적극적인 항일시 내지 민중시로 탈바꿈한 것이다.그가 소년시절의 ‘무량(無量)’과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사용하던 낭만취향의 ‘상화(想華)’라는 아호를 혁명지향의 ‘상화(尙火)’로 고쳐 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박영희·김팔봉과 함께 카프 조직에 참여한 상화는 1926년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고발한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다. 상화 시의 특징으로는 육화(肉化)된 항일 문학성과 직정적(直情的)인 서정성, 선명한 상징성,휴머니즘적인 민중성 등을 들수 있다.한 예로 데카당스적인 요소가 짙은 그의 데뷔작 ‘말세의 희탄(희嘆)’과 ‘나의 침실로’에서의 ‘동굴’은 가스통 바슐라르가 지칭한 요나 컴플렉스로서의 아늑한 도피 공간으로서 식민통치하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또 산문시 형식의 ‘금강송가’에서의‘금강’은 민족정기를,붉은 피울음소리를 뜻하는 ‘비음(緋音)’에서의 ‘핏물’은 식민지 백성의 고단한 처지를 상징한다. 이번에 나온 이상화 전집에는 ‘백조’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희탄’에서부터 미발표 유고 ‘만주벌’에 이르기까지 60여편의 시와 20여편의 산문,이상화 연구논문 등이 실렸다.문학평론가인 중앙대 이명재 교수는 상화의 시를‘나의 침실로’와 같은 초기의 감상적인 낭만주의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중기의 민족·민중적 성향의 항일시,‘곡자사(哭子詞)’와 같은 후기의 민족적 비애를담은 우국시로 나눈다.상화는 그 문학 역정면에서 볼 때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민족문학 본연의 길로 되돌아온 변증법적인 항일 민족문학의 실현자”라는 게 이교수의 설명이다.
  • 취임 1돌 블레어 승승장구

    ◎경제안정·외교노력 성과… 英 국민지지 상승/내년 출범 유럽 단일통화 최대 과제로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가 5월1일 취임 1주년을 맞는다.18년만에 새로 정권을 창출한 노동당을 이끄는 블레어는 노동당을 신노동당(New Labour)이라고 칭하며 10가지 항목을 국민들에게 발표,앞으로 5년간 역점을 둘 것이라고 강조했었다. 주요 내용은 ▲교육에 대한 투자확대 ▲기초소득세 동결 ▲실업자 25만명 고용 ▲강력한 가족공동체 형성 ▲유럽에서 영국의 지도력확보 등이다. 1년이 지난 지금 안팎에서는 노쇠하고 주름살 많던 영국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지난해 3.1%를 기록한 경제성장률은 올해 또 다시 2.7%를 기록할 전망이다.전임 존 메이저 총리때 1천1백만명에 이르던 실업자중 25만명이 블레어 총리가 약속한 대로 새로 일자리를 얻었다. 경제상황이 이같이 호전되며 신노동당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영국(New Britain)이 서서히 유럽에서 옛 영화를 회복하고 있다. 이 덕에 노동당의 인기는 지난 1년전보다 10%가 올라 54%를 보인 반면 보수당은 30%대로 굳어져 있다.여론조사 응답자중 60%가 노동당 경제정책에 찬성한다고 밝혀 경제운용이 약속대로 잘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블레어 총리는 외교면에서도 훌륭한 점수를 받고 있다.무려 800년이상 계속된 북아일랜드 분쟁에서 게리 아담스와 담판을 지어 평화협정을 끌어냈는가 하면 지지부진한 중동평화협상에도 가담,미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 3자협상을 도출해내기도 했다.이러한 ‘부활’을 가져온 정책기조,즉 블레어리즘으로 명명되는 블레어 총리의 개혁은 좌와 우의 구분이 없는 실용적 중도주의로 자유와 책임의 균형,일하는 복지로의 전환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변수는 있다.아시아의 경제위기 여파가 앞에 도사리고 있어 언제 경제의 상승기조가 바뀌어 그 빛이 퇴색할 지 모르며,내년 1월 유럽단일통화출범은 견실한 경제기조를 뒤흔들 수도 있다.때문에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그가 추구하는 이념을 어떻게 체계화해 탄력을 갖게 할 것인가란 점이라고 영국인들은 지적한다.
  • 숨가빠진 정계개편 움직임/정치권 지각변동 가시화 안팎

    ◎DJ 野행태 비난… 정면대응 주문/지방선거 전후 입당 잇따를듯 여권의 정계개편 움직임이 빠른 물살을 타고 있다.金大中 대통령이 마침내 정계개편 의지를 가시화하고 나섰고,이에 맞춰 국민회의는 한나라당 의원 영입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여권의 행보는 23일 金대통령의 서울 경제회의 발언에서부터 전과 다른 무게로 다가서고 있다.金대통령은 ▲정계개편을 해서라도 정국안정을 이루라는 것이 국민 생각이며,▲야당이 이같은 국민여망을 저버리지 않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다분히 최후통첩의 색채를 띄고 있다.“인위적 정계개편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야당의 협조를 강조하던 종전 발언과는 궤를 달리한다.金대통령은 당초 원고에서 정계개편 관련대목을 보다 강한 메시지로 직접 수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金대통령은 이날 하오 趙世衡 총재권한대행 등 국민회의 주요 당직자들로부터 주례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대야(對野) 정면대응 의지를 보다 분명히 했다.金대통령은 한나라당의 최근 행태를 ‘반면(反面)교사’로 삼을 것을 지시하며 “기본자세 그대로 흔들리지 말고 대야 협상에 임하라”고 주문했다.金대통령은 “우리는 한나라당에서 정치를 배워야 한다”면서 “한나라당의 최대실수는 국민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는 것”이라고 한나라당의 행태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특히 “이 나라를 망하게 한 한나라당이 사사건건 새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난했다.金대통령은 “야당이 국가부도 위기속에서 여당을 도왔다면 정당 지지도는 높아졌을 것”이라며 “그러나 사사건건 여당의 발목을 잡고 대통령을 고발하고,초선의원들에게 끌려다니며 약속을 지키지 않아 국민지지도가 떨어졌다”고 한나라당의 실책을 열거했다. 여권의 행보를 볼 때 정계개편의 서곡은 빠르면 이달 하순부터 울릴 것이라는 관측이다.다만 정계개편의 폭과 수위,속도에 있어서는 보다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국민회의의 한 관계자는 “현재의 여론은 정계개편에 대해 긍정적이나,정계개편이 가시화되면 야당 동정론도 일어날 것”이라고 신중함을 보였다.이에 미뤄 여권의 정계개편 작업은 지방선거를 전후한 시점의 정국상황과 긴밀하게 맞물려 전개될 전망이다.당의 한 관계자는 “지방선거전까지 10명선은 영입할 수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20C초 日 독도점령은 주변국 침략책”

    ◎‘코리아 업저버’ 봄호 사토 쇼징씨 기고/1785년 日 제작 지도통해 ‘조선영토’ 입증 과거 일본의 독도 점령과정은 국경선 팽창과정에서 이루어진것으로 요즘 일본의 독도 재점령 책동도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영토확대·확정·유지를 위한 타지역 타국가 침략책의 일환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같은 학설은 한국학술연구원(이사장 김명회)이 펴내는 영문 학술계간지‘코리아 업저버’ 봄호에 일본 아세아문제연구소장 사토 쇼징씨(左藤正人)가 기고한 것으로 최근 일본의 ‘북방영토반환’과 독도관련 주장을 보는 일본 학자의 입장이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여기에서 사토씨는 “1905년 1월말일본정부는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것을 각의로 결정했는데 대한제국 정부가 이 사실을 알았던 것은 1906년 3월말로 대한제국은 4개월전 일본의 보호국(식민지)이 돼 일본의 독도점령에 반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사토씨는 특히 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일본인은 자기의 영역에서 일본의 독도재점령 기도와 ‘북방영토반환’ 책동에 대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봄호에는 사토씨 말고도 전 홍익대 강사 현명철씨와 박희권 전 고려대 강사·최서면 국제한국연구소 원장의 글도 함께 실렸는데 모두 독도의 일본영토 주장의 허구성을 파헤쳤다.박희권씨는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의 정당성에 대한 반박과 전후 일본영토 처리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또 최원장은 1771년 발간된 조선팔도총도에 우산도(독도)가 울릉도보다 크게 그려져 있고 1785년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제작한 ‘삼국통람도설’에서 다케시마(당시 울릉도)와 동쪽의 조그만 섬(독도)을 황색으로 칠해 조선영토임을 분명히 했다며 독도 및 울릉도의 명칭변경·혼동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였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밝혔다. ‘코리아 업저버’는 국내외 대학과 공공기관,각 연구기관에 보내진다.
  • 제임스 먼로(美國의 대통령 문화:18)

    ◎‘먼로 독트린’ 천명… 미 외교정책 기틀 확립/재임전 국무­전쟁장관 자격 영과 전쟁서 승리/성실과 결단력으로 재선… 평화­번영시대 열어 【프레데릭스버그(美 버지니아주)=羅潤道 특파원】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1817­1825)는 1823년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간섭 배제를 천명한 ‘먼로 독트린’을 통해 신생 미합중국의 독자적 외교정책 기틀을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독립초기 신생국의 체제정비에 심혈을 쏟았던 버지니아왕조의 막내이자 건국세대(Founding Fathers)의 마지막 대통령을 역임한 그는 두차례 임기 내내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특히 그는 신생국가로써의 국내외적 불안정을 씻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호감의 시대’(Eraof Good Feelings)를 전개시켜 미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학중퇴 독립전쟁 참전 영국으로부터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던 1758년 버지니아주 웨스트모어랜드의 개척농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총명했으며 16세 되던 해에윌리엄스버그에 있던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의 최고 명문이던 윌리엄&메리 대학에서 수학했다.그러나 2년후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대륙군 소위로 참전,뉴욕전투,저먼타운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침으로써 특진을 거듭,1778년 전쟁이 끝날때는 계급이 중령까지 올랐다. 특히 먼로는 당시 버지니아 주지사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에 의해 남부 미군의 현황파악을 위한 연락관으로 임명받아 활약했으며 이후 줄곧 제퍼슨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전쟁이 끝난후에는 제퍼슨의 지도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프레데릭스버그에서 개업했다.제퍼슨과 먼로의 우정은 16년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죽을때까지 계속됐다. 이어 먼로는 1782년,24세의 약관에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으며 이듬해에는 대륙회의 의원으로 선출돼 3년간 활약한뒤 잠시 정계를 떠나 변호사일에 주력했다.그러나 1790년 연방 상원의원에 진출,제퍼슨,매디슨(4대 대통령)과 함께 민주공화당을 결성,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방주의당에 맞섰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주재 대사를 맡는등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나 이렇다할 결실은 거두지 못했다.1794년 초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프랑스대사로 임명돼 프랑스와의 관계강화에 노력했으나 프랑스혁명 신봉자인 그의 노골적인 친프랑스 언동은 워싱턴의 분노를 사게돼 2년만에 소환되고 말았다.그는 다시 1803년 제퍼슨 대통령에 의해 영국대사로 임명됐으나 역시 본국정부 의도와 다른 무역협상을 벌임에 따라 다시 소환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후에 먼로는 제퍼슨에 의해 루이지애나 식민지 구매협상 대표단장으로 프랑스에 파견됐다.1천500만달러에 당시 미국영토 2배에 달하는 영토를 구매토록하는 협상을 나폴레옹과의 담판에서 성사시킴으로서 협상력을 과시했다.또 매디슨에 의해 국무장관에 임명된 그는 1812년 영국에 선전포고,전쟁에 돌입했다.그러나 워싱턴이 함락되는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을 전쟁장관에 임명해줄 것을 요청,국무와 전쟁 겸임장관이 된 그는 탁월한 지휘역량을 발휘,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난후 매디슨 행정부 말기는 전례없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됐고 그 주역인 먼로의 인기는 치솟았다.대사로 프랑스·영국을 오가는 사이사이에 두차례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경력도 갖춘 그는 자연스레 민주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1816년 선거에서 당선,매디슨의 뒤를 잇게 됐다. 59세에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어느 대통령보다도 다양한 공직경험을 갖추고 있었으며 거기서 생성된 그의 정치감각은 탁월한 각료 임명으로 나타났다.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6대 대통령),전쟁장관 존 칼훈,재무장관 윌리엄크로포드,법무장관 윌리엄 워드 등은 지성적이고 뛰어난 능력과 함께 단합이 잘돼 환상의 진용으로 평가됐다.더우기 먼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과 굳센 결단력은 모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했다. 먼로는 남부와 서부 등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그의 인기는 더욱 치솟아 1820년 실시된 두번째 선거에서는 232표중 231표를 얻어 만장일치로 당선된 조지 워싱턴에 이어 최다 득표로 재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먼로는 퇴임후 리스버그의 오크힐에서 거주했으나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5년후 부인 엘리자베스가 죽자 뉴욕의 딸 집으로 옮겨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831년 7월4일,73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퇴임후 곤궁… 사저 매각 먼로의 유적으로는 현재 프레데릭스버그의 박물관,사저이던 샬롯빌의 애쉬론,리스버그의 오크힐 등이 보존돼 있다.변호사 사무실이 있던 건물에 들어선 박물관은 먼로독트린을 초안하던 책상 등 다양한 유품들이 진열되고 있다.또한 애쉬론 사저는 퇴임후 경제난으로 팔았던 것을 1931년 박애주의자 제이 존스가 구입,일반에 공개했다.1974년 존스 가족은 그의 모교인 윌리엄&메리 대학에 이를 기증,이 대학이 박물관과 함께 관리하고 있다. 먼로는 제퍼슨,매디슨과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특히 제퍼슨은 자신의 사저인 샬롯빌의 몽티첼로 인근에 ‘지적공동체’(intellectual community)마을의 설립을 위해 이들을 모여살도록 권고,애쉬론을 먼로에게 소개했으며 매디슨의 사저 몽펠리에도 이 부근에 있다. ◎먼로 지명/도시·학교·산·교회 등 238개/워싱턴·링컨과 함께 도시지명 ‘빅3’ 【프레데릭스버그(美 버지니아주)=羅潤道 특파원】 미국의 도시들은 역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많다.신대륙으로의 이주자들이 정착,새 도시를 건설할때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통령이나 위인들의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먼로 지명은 워싱턴,링컨과 함께 미대통령 가운데 도시명으로 가장 많이 쓰인 ‘빅3’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 지명이 49곳으로 가장 많고,링컨은 45,먼로는 44,제퍼슨은 41 순으로 나타나 있다.이 숫자는 미자동차협회(AAA)가 최근 발행한 ‘로드 아틀라스’에 나타난 지명을 기준으로 한것이기 때문에 산·강·호수 등 자연의 이름과 학교·역 등 공공기관의 이름까지 합하면 실제로 대통령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는 훨씬 많다. 먼로박물관이 펴낸 먼로 지명 연구 책자인 ‘먼로,USA’에 따르면 미국내 ‘먼로’가 들어가는 지명은 모두 238개에 달한다.그리고 미국 해방흑인들이 세운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수도 ‘먼로비아’와 남극해의 먼로섬 등 미국 밖에도 존재한다. 미국내 50개주중 36개주에 흩어져 있는먼로 지명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도시이름으로 26곳이 있다.인구 40명인 노스 다코타주의 소읍에서부터 인구 5만5천인 루이지애나주의 먼로시까지 다양하다.우리의 군에 해당하는 카운티 이름은 모두 18곳으로 인구 9천명의 미주리주 먼로카운티에서 인구 71만명의 뉴욕주 먼로카운티까지 그 규모가 제각각 이다. 먼로 지명이 가장 많은 주는 오하이오로 35곳이 있고,다음은 인디애나 23,일리노이 19,미주리 17,아이오와·펜실베이니아 13,버지니아 11 순을 기록하고 있다.자연지명으로는 강·호수명 10곳,산 6,숲 2,협곡 2,다리·전망대 1곳 등이 있고 교회 7곳,학교 3곳 등도 있다.
  • 낙동강 수질개선 2조9천억 투입/환경부 업무보고 요약

    ◎음식물 쓰레기 사료화시설 대폭 증설/상수원지역 호텔·식당 신규허가 규제 【金仁哲 기자】 崔在旭 환경부장관이 10일 金大中 대통령에게 보고한 주요 업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맑은 물 공급=상수원 상류지역에 호텔 음식점 등 신규 오염원의 증가를 억제하는 한편 규제강화에 상응하는 주민지원 확대를 위해 상수원수질개선특별조치법을 조속히 제정한다. 팔당호 유역의 하수처리율을 현재 71%에서 2002년까지 85%로 높이고 음식점과 숙박시설의 신설을 억제한다. 낙동강의 수질개선목표(3급수→2급수)를 2005년에서 2001년으로 앞당겨 달성하고 이를 위해 2000년까지 2조9천6백억원을 투자한다.농어촌과 도서지역의 상수도 보급률을 2002년까지 현재의 19.8%와 9.5%에서 각각 45%로 높인다. □깨끗한 공기 확보=자동차 연료에 한해 (가칭) ‘도로확충기금’ 혹은 ‘대기개선기금’ 명목으로 부담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2007년까지 수도권 및 6대 대도시 2만여대의 버스를 천연가스 차량으로 대체하고 내년부터 2002년까지 2만2천대의 트럭과 버스 등 중·대형 경유차에 매연여과장치를 부착한다. □경제·환경 같이 살리기=환경관련 우수 신기술을 국가에서 평가·인증해 보급을 촉진하며 17개 업종 1만2천여개 영세 환경산업체를 업종별로 전문화,수출 경쟁력을 강화한다. 음식물쓰레기 자원화를 위해 사료화 촉진을 위한 공공처리시설을 늘리고 민간 사료화시설 설치도 적극 지원한다. 폐기물 재활용을 위해 제품생산때 폐자원 재생원료 의무사용비율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모든 공공기관에 재활용제품 사용을 의무화 한다. 국토청결,재활용품 및 폐비닐 선별,황소개구리 퇴치 등 5개 환경분야 사업에 2백90억원을 지원,연인원 9천여명의 실직자에게 고용기회를 준다. □국제현안=기후변화협약 등 각종 국제환경협약에 대비해 지구환경대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지구환경보전 기본전략을 수립하고 총괄조정기구의 설치를 추진한다.
  • 타임誌 ‘20세기 지도자·혁명가’ 선정

    ◎모택동·간디·‘천안문’ 탱크 막은 중 인사 포함/레이건·교황 바오로 2세·히틀러 등 20일 뽑혀 【홍콩 연합】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지도자 및 혁명가 20명중에 마오쩌둥(毛澤東),간디,胡志明과 텐안먼(天安門)사태 때 탱크에 맞선 무명인사 등 4명이 선정됐다. 타임은 오는 6일 발매되는 최신호(4월13일字)에 이를 내용으로 한 ‘20세기 지도자 및 혁명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고 5일 밝혔다. 마오쩌둥은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 중국 공산혁명과 통일을 성공으로 이끌어 세계적인 지도자 대열에 올랐다고 타임은 선정 이유를 밝혔다. 반면 간디는 비폭력 노선으로 인도 국민의 독립의지를 고조시켜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한점이 부각됐다. 지난 89년 5월 중국 당국이 대학생들의 텐안먼 민주화 요구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를 동원했을때 맨손으로 이 탱크 대열을 가로막은 한 중국 인사가 20세기의 인물에 꼽혀 이채를 띠었다. 이밖에 20세기를 이끈 20대 지도자에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교황 요한 바오로 2세,아돌프 히틀러,마거릿 생거 등이 포함됐다. 타임은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20세기의 1백대 인물을 ▲지도자 및 혁명가▲예술,연예인 ▲건축가와 운동선수 ▲과학자와 의사 ▲영웅과 아이디어맨 등 5개의 범주로 각각 20명씩 선정하고 그 첫 시리즈로 이번 기사를 게재했다고 밝혔다.
  • 국가 빈부론/데이비드 랜즈(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서양은 왜 잘살게 되었을까/지리·문화적 토양과 富의 연관 분석/유럽 온화한 기온 산업·민주화의 원동력/阿州 열대기후·중동 굴종문화 발전 걸림돌 【워싱턴〓金在暎 특파원】 미국 하버드대의 경제사학자 데이빗 랜즈의 ‘국가빈부론(國家 貧富論)’은 경제학의 시조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연상케 한다.‘왜 어떤 나라는 잘살고 어떤 나라는 못사는가’란 부제가 책 내용을 잘 말해준다.서양은 왜 다른 지역나라들보다 잘살게 되었을까.어떤 비결의 국부론(國富論)이라도 있는 것일까.저자는 인문지리학적인 관점까지 동원,이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다. 랜즈교수는 이 책에서 국부론이나 뛰어난 국부 정책 같은 건 없었지만 지리적 운명과 문화적인 토양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했다고 결론짓고 있다.30년전 ‘고삐풀린 프로메테우스’란 고전적 서양기술사 저작으로 일찍 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랜즈는 세계 경제의 지리적 운명성에 대해 천착을 거듭해 왔다.이 책도 이같은 천착의 한 결과다. 어느 특정문화가 특별히 낫다는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라는,‘정치적으로 의식화된’ 문화 상대주의가 유행하면서 대부분의 미국 학자들은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서양문화를 대놓고 칭찬하는 것을 꺼린다.그러나 랜즈는 서양의 성취는 아주 독특하다고 강조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잘못된 역사인식이라고 강조한다.그의 이론에 따르면 서양의 이같은 특별성은 인위적인 정책에 앞서 지리와 문화라는 두가지 요소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산업혁명도 그 뿌리를 캐면 멕시코만의 난류로 귀결된다고 랜즈는 주장한다.유럽의 온난한 여름은 격렬한 육체활동도 가능케 하는 등 문화활동에 적합한 조건을 만들었으며 문명발전의 기본 조건이 됐다는 주장이다. 유럽의 적당한 강우량도 문화발전의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열과 습기에 차있는 열대에선 정력적인 사람도 한낮의 햇빛으로부터 피난처를 찾게 하며 열대에서는 중노동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유난히 강해 부의 집중과 노예제 현상이 뚜렷하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경제적,사회적 조직에서는 자본주의가 제대로 자라기 어렵다.또 유럽의 추운 겨울은 병원균을 박멸시켰을 뿐 아니라 독립성이 강한 정신과 노동 능력을 증가시켰다고 지적한다. 이같이 좋은 기후는 유럽의 발전을 이끈 기반이 됐다는 것이 랜즈의 주장이다.17·18세기 유럽은 농업부문의 혁명으로 생활수준은 향상되고 투자가능의 잉여물이 생산됐으며 농업부문의 노동력 해방은 산업발전으로 전환됐다는 설명도 있다.좋은 기후는 말(馬)의 대량 사육을 가능케 했으며 이는 전쟁,침략자의 저지,진흙땅 갈기 뿐만 아니라 농업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동물 비료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유럽의 지리와 기후가 궁극적으로 출생시킨 것은 서양의 민주주의라고 랜즈는 말한다.인도와 중국에서는 잦은 홍수와 한발이 물에 대한 통제를 식량생산의 핵심으로 만들었고 물에 대한 통제는 강제노동을 통한 대형 수류(水流)사업을 낳았다.이는 곧 경제 말단까지 파고드는 강력한 중앙통제의 국가를 의미하며 여기서는 사유제나 개인의 자발성은 생각할 수 없는 사치품이됐다.발명과 혁신은 이익집단의 핵심인 정치적,종교적엘리트들에겐 위협으로 비쳐져 온 것이다. 반면 서양의 좀 더 온후한 기후와 지리적 조건은 이보다 좀 더 독립적인 삶을 가능케 했다.노동력을 동양처럼 집중시켜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이같은 조건덕택에 유럽에선 여러 부문이 맞물려 돌아가는 국가라는 틀 밖에서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컸었다.비록 억압됐다 하더라도 제발로 투표를 할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힘은 동의에서 나오고 그런 만큼 한계도 갖게 됐다. 지리에서 사회적,정치적 조직 뿐아니라 경제성장에 알맞은 문화가 튀어나온 셈이다. 특히 유럽중·북부의 종교개혁은 지적·정치적 창안(創案)을 반역으로 내몬 기득 종교세력에 근본적인 위협을 가했다.이에반해 이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남부 유럽는 그 다음 300년 동안 후진을 면치 못했고 이들은 정복지 남미에 같은 단점을 이식했다.북미는 지리와 이의(異意)의 문화가 알맞게 어울려 발전을 거듭했다.기후와 지리가 열대성을 띠어 노예 노동이 부추겨진 미국 남부도 기술문명의 유입으로 반 자본주의적 잔재를 금세 떨어낼 수 있었다. 비서양 국가로서 최초로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 역시 지리와 문화의 덕을 크게 보았다.한국과 대만은 일본의 학습이 강제적으로 이식된 곳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대부분의 비 서양 국가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랜즈는 말한다. 랜즈는 문화적 유산이란 털어버리고 싶다고 해서 쉽게 털어지는 것이 아니며,특히 지리적 운명은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논지를 강력히 편다.아프리카는 좋지 않은 기후로 지금도 발전이 더디며 중동은 이슬람의 굴종 문화에 갇혀있다.남미의 많은 나라들도 남부 유럽 이베리아 반도의 식민지 유산에 묶여있다.그래서 서양과 많은 문명이 대등하게 다투고 대립하는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 같은 일은 랜즈의 미래에는 생겨나지 않는다.서양아닌 ‘나머지’ 문명들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랜즈의 논지는 비서양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며 반박받을 소지도 있다.그러나 풍부한 자료와 논리는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다.이 책은 70쪽이 넘는 참고 문헌목록을 갖고 있다. 원제 THE Wealth and Poverty of Nations.노턴(Norton)출판사 출판.30달러.
  • 눈밭 낙오자 끝까지 인솔하다 ‘산화’/행군 참변 金光錫 대위

    ◎강한 의협심… 각종 평가서 줄곧 1위 차지 1일 밤 행군 도중 숨진 흑룡부대 중대장 金光錫 대위는 낙오한 부하들을 인솔하기 위해 끝까지 현장에 남아 있다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특전사에 따르면 金대위는 행군 도중 3명이 탈진해 더 이상 움직이자 못하자 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밤늦도록 애쓰다 산속에서 결국 낙오자들과 함께 탈진해 숨졌다.충남대 낙농학과를 졸업한 뒤 학군 30기로 군인의 길에 들어선 金대위는 95년 3월 부인 양현숙씨(29)와 결혼해 딸 민지양(3)을 두고 있으나 훈련 등으로 신혼여행도 가지 못해 오는 6월 전역한 뒤 제주도로 뒤늦게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동료들은 金대위가 남달리 의협심이 강했으며 각종 부대 평가에서도 한번도 1등을 놓치지 않은 우수한 장교였다고 말했다. 육군은 5일 국군수도병원에서 흑룡부대장으로 영결식을 갖는 한편 고인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 추서를 건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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