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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한나라 부산시장 ‘리턴매치’

    ‘6·5 지방 재·보선’이 18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여야는 후보공천을 속속 마무리하고 본격 선거전에 돌입할 채비를 갖췄다.이번 선거는 지난 4·15총선에서 정국이 ‘여대야소’ 구도로 재편된 이후 첫 ‘리턴매치’인 데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기각결정에 따른 여진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부산시장 부산시장 보선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양강 구도로 압축된다.열린우리당은 지난 17일 벡스코(BEXCO)에서 가진 부산시장 후보 선출대회에서 오거돈 전 부산시장 권한대행을 후보로 추대했다.한나라당도 허남식 전 부산시 정무부시장과 최재범 전 서울시 행정부시장 등 2명을 놓고 18일 경선을 실시해 허 전 부시장을 최종 후보로 선출했다.초반 판세는 일단 인지도에서 앞서는 열린우리당의 오 후보가 한나라당의 허 후보보다 우세하다는 분석이다.그러나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하면 뒤집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총선에서도 열린우리당은 여론조사의 지지율 우위를 지키지 못하고 단 1석을 얻는 데 그쳤다.다만 총선과 달리 광역단체장 선거라는 점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획기적인 지역개발’ 공약을 내걸 경우,선거결과를 쉽사리 예측하기 어려울 것 같다.한나라당은 고 안상영 전 시장의 자살과 안 시장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오 전 부시장의 열린우리당 입당을 집중 부각시킬 방침이다. ●경남지사 우리당과 한나라당간 대결구도에 민주노동당·무소속 후보가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우리당은 18일 단독 후보로 등록한 장인태 전 경남지사 권한대행을 추대했다.한나라당은 지난 17일 경선을 통해 ‘40대 기수론’을 내건 김태호 전 거창군수를 후보로 선출했다.장 후보는 3선 경력의 김혁규 전 경남지사와 호흡을 맞춘 행정경험을 장점으로 내세울 계획인 반면 40대 초반인 김 군수는 패기와 ‘김혁규 배신론’으로 표심을 파고든다는 전략이다.여기에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대표인 임수태 후보가 민노당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고,한나라당을 탈당한 김용균 의원이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임 후보는 열린우리당에,김 의원은 한나라당에 적잖은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전남지사 전남지사 보선은 4·15총선에서 호남표를 독식하다시피 한 열린우리당과 실지(失地) 회복을 노리는 민주당의 혈전이 예상된다.우리당은 17일 경선에서 민화식 해남군수를 후보로 선출했다.민주당은 박준영 전 청와대 공보수석을 내세웠다.초반 판세는 지난 총선 때처럼 일방적으로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것 같지 않다.박 후보의 지명도가 비교적 괜찮은 데다 총선 참패에 대한 동정여론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민지모(민주당 지킴이 모임)’ 등 인터넷 지지모임이 자발적으로 결성되고 있는 것도 민주당엔 희망을,열린우리당엔 부담을 주고 있다.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는 지난 17일 광주로 달려가 이틀간 지지세 확산을 시도했다.우리당도 지역개발사업을 공약으로 내걸고 여당의 이점을 최대한 살릴 방침이다. ●제주지사 제주지사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대결구도이다.우리당은 후보경선을 통해 진철훈 전 서울시 주택국장을,한나라당은 김태환 전 제주시장을 각각 출전시켰다.초반 판세는 지난 총선 때와는 달리 한나라당의 일방적 열세는 아닌 분위기다.최근 정부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 개최지를 경호상의 이유 등을 들어 제주에서 부산으로 바꾼 데 대한 반발 심리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광삼 구혜영기자 hisam@˝
  • 이이화씨, ‘한국사 이야기’ 완간

    한국사 5000년을 생활사·문화사 중심으로 풀어낸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67)씨의 ‘한국사 이야기’(한길사)가 22권으로 완간됐다.기획에서 집필,편집에 이르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린 출판사상 유례 없는 마라톤 작업의 성과다.선사시대부터 1945년 해방까지 장구한 한국사를 통사형식으로 서술한 이 시리즈는 이번에 ‘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20권),‘해방 그날이 오면’(21권),‘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 바람’(22권) 등 세 권이 나옴으로써 마침내 마무리됐다. ‘한국사 이야기’는 철저한 현장조사와 문헌고증을 바탕으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풀어 쓴 것이 특징이다.그런 만큼 역사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저자는 역사 용어의 선택부터 분명히 한다.고조선을 그냥 ‘조선’이라 부르고,남북국 시대를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로 명명한다.또 임진왜란은 ‘조일전쟁’으로,병자호란은 ‘조청전쟁’으로,일제 강점기는 일본 식민지 시기로 부른다.역사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겠다는 뜻에서다. 이번에 펴낸 6차분 세 권은 ‘식민지 3부작’이라 할 수 있다.저자는 ‘식민지 수탈론’이냐 ‘식민지 근대화론’이냐의 양자택일보다는 절충론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사실 전개에 역점을 둔다.기존의 독립운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좌파 계열의 민족해방운동사도 충실히 다뤘다.임시정부 위주의 역사서술에서 탈피,김구 등 우파의 활동과 함께 김원봉 등 좌파의 활동도 비중있게 다룬 것이 그 한 예다. ‘한국사 이야기’ 완간을 계기로 출판사측과 저자는 ‘우리 역사 바로 읽기 운동’을 펴나갈 계획이다.저자와 함께 하는 역사기행,전국 대학순회 역사강좌 등을 준비중이다.각권 1만원. 김종면기자˝
  • 별세 구상시인 詩세계·일생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시 ‘오늘’ 중) 11일 작고한 구상 시인의 삶은 ‘구도자적 자세’와 ‘영원한 현역 시인’으로 압축할 수 있다.산소호흡기를 쓰고 투병하던 지난해 격월간 문예지 ‘한국문인’ 10,11월호에 유언과 함께 남긴 위의 유언시는 이런 고인의 삶을 잘 보여준다. 구상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마치 흐르는 물같은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한다.그렇듯 그의 삶은 문학과 신앙이라는 두 축으로 지탱되는 구도(求道)의 그것이었다. 노년 들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짤막한 턱수염,얼마간 창백해 보이는 길다란 얼굴에 그럴 듯하게 구레나룻까지 이루며 자란 이 수염은 항상 그의 무명 한복과 어울려 이 땅의 수많은 독자와 문인들에게 ‘따뜻하고 순결한 시인’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표상으로 각인돼 있다.문인이기 전에 그는 암울한 식민지의 신문기자였다. 스물 네살 나던 1943년에 함흥에 있는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세상과 맞닥뜨렸던 젊은 구상은 이후 두 차례의 필화사건과 6·25,감옥생활과 질병 등 온갖 신산을 겪으며 오로지 문학에의 열정과 종교(가톨릭·세례명 요한)적 신념으로 시대를 앞서 이끌었다. 그가 겪은 첫번째 필화사건은 1946년에 일어났다.원산문학가동맹의 주축멤버였던 그는 해방 1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동인시집 ‘응향(凝香)’에 발표한 ‘여명도’‘길’‘밤’등의 시가 퇴폐적이고 악마적이라며 반동으로 몰리자 이듬해 2월 서울로 월남해 이산의 삶을 시작했다.이때 남한에서는 남로당 기관지였던 ‘문학’이 이 시집을 대대적으로 소개했고,민족진영에서는 김동리씨 등이 나서 이에 반박하는 등 한차례 격랑이 일기도 했으며,이 와중에 그는 별도의 입상이나 추천 절차없이 문단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후 본격적인 민권운동에 나선 그의 길은 평탄치 않았다.전쟁 후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던 그는 칼럼 ‘고현잡화(考現雜話)’와 시사평론집 ‘민주고발’ 등으로 사사건건 당시 자유당 정권과 부딪쳐 이적죄로 15년형을 선고받는 두번째 필화를 겪었다.그런가 하면 그는 평생 갖가지 병력(病歷)을 체험하며 형극의 길을 걸어온 시인이기도 했다.폐결핵으로 두번이나 수술을 했는가 하면 두번의 큰 교통사고와 당뇨병,만성 천식과 전립선 비대증,망막염과 백내장 등 수많은 병마와 싸워야 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고인의 지사적 풍모는 돋보였다.4·19 이전에 대표적 민권운동가였던 엄상섭,전진한씨 등과 함께 시국강연회를 갖는 등 치열하게 민권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고고함은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 장군의 상임고문역 추대를 거절한 것이나,전두환 정권의 부당한 학·예술원법 개정에 맞서 홀로 입법기구 회원직을 사퇴한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권력에 초연함을 유지했던 고인의 인품은 현세의 이해관계에 초월해 예술세계를 지키며 외롭게 살다간 예술가들에 대한 애정으로 나타나 소장품을 내놓고 모금운동을 벌여 서울신문이 주관하는 ‘공초(空超) 오상순 문학상’의 토대를 세우기도 했다. 시인 구상은 그의 삶이 험난할수록 더욱 강고하게 종교에 집착하는 면도 보여 주었다.이런 영향으로 그의 시에는 대부분 동양적 관조와 기독교적 영원성이 깊게 배어 있다.연작시 ‘그리스도 폴의 강’은 이런 그의 정서를 대변하는 작품이다. 한편 서울 강남 성모병원 빈소에는 김수환 추기경,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박삼중 스님,이한택 주교를 비롯해 문덕수,박연희,김남조,김광림,구중서,성찬경,김종길,김종해,신세훈,신달자,김이연,류자효씨 등 많은 종교인과 문인들이 찾았다.노무현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조의를 표했다. 김 추기경은 “고인은 좁은 의미의 가톨릭이 아니라 종파를 넘어서 온세계를 아우르는 의미로서의 가톨릭 시인이었다.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었고,항상 마음을 비우는 진실의 사람이었다.”고 추모했다. 구중서씨는 “고인은 전쟁 중에는 인민군의 묘지를 만들어 준 뒤 ‘적군 묘지 앞에서’라는 시를 썼고,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승승장구할 때는 ‘인류가 아직 깜깜하다.’며 인간의 도덕적 양심을 묻는 시 ‘베트남 기행’을 썼다.”면서 “이데올로기나 정파,권력에 가담하지 않고 인간 본성과 양심을 쉬우면서도 뜻이 깊은 시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초토(焦土)의 시(詩)’ 8 -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땅은 30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람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 구상시인 연보 ▲1919년 서울 이화동 출생.본명 구상준(具常浚) ▲1941년 일본대학 전문부 종교과 졸업 ▲1946년 원산에서 시 ‘여명도’등으로 필화,월남 ▲1948∼1950 연합신문 근무 ▲1952∼1956 효성여대 교수 ▲1961∼1965 경향신문 논설위원겸 동경지국장 ▲1976∼1999 중앙대 대우교수 ▲주요 저서 시집 :‘구상(具常)’,‘초토(焦土)의 시’,‘까마귀’,‘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개똥밭’,‘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오늘속의 영원,영원속의 오늘’,‘인류의 맹점에서’,‘홀로와 더불어’ 등. 수상집 :‘침언부어(沈言浮語)’‘영원속의 오늘’‘실존적 확신을 위하여’‘시와 삶의 노트’ 사회평론집 :‘민주고발(民主告發)’,수필집 ‘우주인과 하모니카’ ‘현대 시창작입문’ 등. ˝
  • 사다리 걷어차기/장하준 지음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경제발전을 도모하던 시기엔 보호관세와 정부보조금을 통해 산업을 발전시켜 놓고 정작 지금에 와선 후진국들에 자유무역을 채택하고 보조금을 철폐하라고 강요한다.과거 자신들은 여성,빈민,저학력자,유색인종에 대해선 투표권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후진국들에 민주주의가 자리잡지 못하면 경제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경제학) 교수는 자신의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원제 ‘Kicking away the Ladder’,형성백 옮김,부키 펴냄)에서 후진국 및 개발도상국을 위한 선진국의 경제처방을 정면으로 반박한다.보호무역주의를 바탕으로 성장한 선진국들이 이제 와서 일방적인 세계화를 강조하는 태도는 자신이 밟고 올라온 사다리를 스스로 걷어차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2002년 영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지난해 제도경제학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뮈르달상’을 받은 화제작이다. 저자는 먼저 무역·투자자유화 논리에 숨어 있는 선진국의 이기주의적 의도를 고발한다.특히 영국의 성장신화 속에 감춰진 은밀한 역사를 파헤친다.저자에 따르면 ‘자유무역국가 영국’의 이미지는 완전히 허구다.영국은 중세 이후 13∼14세기까지만 해도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보다 경제력이 떨어졌다.그런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유치산업 보호정책을 펼쳤다.당시 영국의 주력 산업은 양의 원모와 ‘짧은 옷감(short cloth)’이라 불린 모직 옷감을 수출하는 것이었다.에드워드 3세 시절의 ‘국산품애용운동’ 이래 영국의 모직업은 꾸준히 발전해 엘리자베스1세 시대엔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영국의 산업혁명은 바로 이같은 모직업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식민지 국가들은 말편자의 못도 만들지 못하게 하라.”는 영국 정치가 대(大) 피트의 말은 영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보호주의정책을 펼쳤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영국은 19세기 경제 최강국의 자리에 오르자 자유무역의 장점을 역설하고 나섰다.저자는 영국의 곡물법 폐지 등 일련의 조치를 농업상품 및 원자재 시장을 확장함으로써 유럽대륙의 산업화를 저지하려는 ‘자유무역 제국주의’적 행위라고 비판한다.이런 위선적 행태는 물론 영국에만 특유한 게 아니었다.‘근대 보호주의의 모국이자 철옹성’으로 불린 미국은 발명품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 등의 절차적 수단을 통해 외국인의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미국 역시 선진국 대열에 오르자 영국과 마찬가지로 자유무역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처럼 자기 편한대로 왔다갔다하는 ‘박쥐외교’를 비판한다.나아가 선진국들이 내세우는 ‘글로벌 스탠더드’도 금과옥조로 여기지 않는다.우리와 비슷한 단계에서 선진국들이 어떤 정책과 제도를 썼는지를 살펴보고 현재의 여건에 맞는 정책과 제도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 두 개의 미국사/제임스 바더맨 지음

    2000년 4월 미국의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세레나 윌리엄스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열린 한 대회를 보이콧했다.사우스 캐롤라이나 의사당 정면에 걸려 있는 남부연합기 때문이었다.남부연합기는 남북전쟁 때 미 연방을 탈퇴한 남부의 주들이 사용한 깃발로 이전에도 심심찮게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에는 해마다 남북전쟁을 재현하는 남부인들이 있다.당시의 천과 염료로 그때와 똑같은 옷을 만들어 입을 뿐만 아니라,당시에 사용하던 무기를 들고 남부와 북부의 역할을 나눠 맡아 남북전쟁 때의 전투를 재현해 내는 것이다.시대착오적인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욕을 먹으면서도.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자부심을 느낀다.심지어 북부에서 가정을 꾸려 살다가도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자신의 아이가 진정한 남부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남부로 먼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니 ‘남부신화’의 힘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두 개의 미국사’(제임스 바더맨 지음,이규성 옮김,심산 펴냄)는 남부인의 시각으로 미국의 역사를 바라본다.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호박벌집’이란 소설을 펴내며 “미국 역사가 북부 중심으로 기술돼 왔기 때문에 남부의 역동성을 보여주기 위해 책을 썼다.”고 밝혔듯이,이 책의 저자(와세다대 문학부 교수)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사는 북부인의 시각에서 씌어진 것일 뿐 미국의 역사를 온전히 기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그렇다고 저자가 남부의 입장을 무조건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남부의 치부도 낱낱이 들춰낸다. 미국의 작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는 남부를 ‘세련된 신사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했다.이같은 남부신화는 그리피스 감독의 영화 ‘국가의 탄생’에도 그대로 드러난다.이 영화에서 남부인은 신사숙녀로,양키는 탐욕스럽고 제멋대로인 인물로,흑인은 바보 아니면 공모자로 묘사된다.또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남부 귀족이 영웅적이고 로맨틱하며 고귀한 존재로 그려진다.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남부 사회 전반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저자에 따르면 최근에도 각종 매스컴과 할리우드 영화,소설 등에서는 정형화된 남부인의 이미지가 재생산된다.이를테면 이런 식이다.남부인들은 보수적인 백인우월주의를 신념으로 삼으며,흰색 기둥이 있는 플랜테이션식 저택에 산다.남자들은 게으르고 상식이 부족한 데다가 눈앞의 일에만 급급하다.여자들은 항상 남성의 눈을 의식하며 치장하기에 바쁘고 남성의존적이다…. 이 책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남부인의 정체성 문제다.저자는 남부와 북부는 하나의 국가라고 하기엔 태생적으로 너무 달랐음을 지적한다.생존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북부 사람들과 달리 남부는 애초부터 번영과 출세를 위해 영국의 신사계급이 진출해 세운 식민지라는 것이다.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남북전쟁과 재건기에서 뚜렷이 드러나듯 이질적인 집단의 역사를 한쪽의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남부에는 여전히 ‘또 하나의 미국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북부 문화를 대표하는 뉴잉글랜드인은 또한 그들의 양키문화를 만들어간다.이 책은 남부신화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전체상을 이해하는 데 일정한 도움을 준다.1만 1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6일 TV 하이라이트]

    ●사과나무(오후 7시20분) 사과나무 장학금에서는 소년소녀가장,인천 석정여고 민지원양과 함께 한다.25년 만에 집을 마련해 이사를 하는 쌍둥이 주영이네 가족을‘무료이사 해드립니다’에서 만나본다.또한 17대 총선에서 촌철살인 유머로 ‘어록’까지 등장할 만큼 인기를 끈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을 만나본다. ●생방송 쟁점토론(오후 3시10분) 17대 국회에서 민생과 경제 우선의 정치,부패정치의 청산,새정치 실현의 조건은 무엇인지 살펴본다.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여야 대표회담을 열고 발표한 정치와 경제발전을 위한 ‘협약’을 논의한다.정장선 열린우리당 의원,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패널이다. ●문화센터(오전 11시) 꽃을 선물할 때 가장 흔한 아이템,꽃바구니.개성있고 세련된 꽃바구니를 만들려면 바구니를 바꾸어 본다.둥근 바구니가 아니라 긴 직사각형태의 바구니라면 꽃을 꽂기도 수월하고 집안 장식하기도 용이하다.푸른 나뭇가지를 함께 꽂아 동양적인 멋을 살린다.개성 있게 화분 포장하는 방법도 배워본다. ●1050정면승부(오후 10시50분) ‘버스안에서’는 고양시 축구부 어머니들과 결혼을 준비하는 커플,군대간 남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여대생들의 우리 고향 자랑 등 많은 사연들을 싣고 고양시로 출발한다.또한 가족들과의 통화로 제시어를 맞추는 ‘나에게 말해줘’에서 5가지 제시어를 맞추는 탑승객은 과연 누구인지 살펴본다. ●오픈 스튜디오(오후 4시10분) 현대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디지털 문화의 현주소에 대해 알아보고 디지털 문화의 병폐를 다방면으로 조명해 본다.특히 디지털에 열광하는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간의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과 올바른 디지털 문화 확립의 중요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본다. ●아름다운 유혹(오전 9시) 가지 말라는 민우의 말을 뒤로 하고 정희는 도망치듯 집을 뛰쳐 나온다.기태는 솔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화가 나고,정희는 남의 집 일 다니지 말라는 기태에게 그만둘거라고 말한다.세희는 기획안 발표에 재혁이 흥미를 보이자 의아해하고,금실은 세희를 싸고 도는 재혁이 못마땅하다. ●백만송이 장미(오후 8시25분) 혜란은 현규에게 현규가 결혼을 한다는 게 꿈만 같다고 말한다.민재와 귀분,순영은 인환이 세계 테마파크 총회에 참석하게 돼서 현규의 결혼식에 못가겠다고 하자 속상해 한다.민재는 인환 몰래 자신이 총회에 참석하도록 조치를 취한다.한편 인환은 귀분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는다. ˝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2)여자라는 이름의 논개 (上)

    도래 소주 열 번 고아 애(왜)늠 장수한테 믹이갖고 진주 기생 이애미(의암)는 우리 조선 살릴라꼬 옥가락지 열 찐(낀) 손에 애늠 장수 목을 안고 진주 남강에 떨어졌네 진주 남강 떨어짐서 노랑 수건 파랑 수건 수건 두 개 떠올라 오면 노랑 수건은 건져주고 파랑 수건은 건지지 마라. 두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곧잘 부르셨던 노래다.살아계셨으면 아흔 두 살이 되셨을 어머님이 처녀 적 길쌈하면서 부르시던 노래였다.물레질 할 때나 삼 삼을 때 동무들이 짝짝으로 마주 보고 앉아 한쪽에서 한 소절을 먼저 메기면 맞은편 여인들이 그 다음 소절을 받는다.노래하는 사람마다 남 모르는 설움이며 가슴 속 사연들을 살며시 섞어 부르곤 하기 때문에 노래는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일제 식민지 한복판 아슬한 민족의 베틀 위에서 기구한 운명을 씨줄 날줄로 엮어 짜며 불렀던 이 노래가 지닌 상징성은 컸다.어머니는 이 노래를 부르시면서 애옥살이에 자식 일곱을 낳아 기르셨고,‘이애미(의암,義巖)의 전설’은 식민시기 진주 남강 기슭에서 고달픈 삶을 꾸렸던 사람들에게 식을 줄 모르는 분노와 그치지 않는 민족 사랑을 함께 일깨워주었다. ●베틀질 노랫소리로 맥이은 ‘이애미 전설’ 노래의 주인공은 논개다.논개는 여자이고,기생이고,관청에 소속된 노비이고,적장을 살해함으로써 조선의 운명을 구한 전사이며,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장군이 사랑하던 여인이며,꽃다운 나이 스무살에 죽은 민족의 딸이고,죽은지 147년이 지나서야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전사 사실을 확인받은 인류 역사상 매우 드문 내력을 지닌 이다.그리고 논개는 그저 한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딸이 아니라,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애인이고 동무이다. 논개의 삶과 죽음이 전설과 오해로 점철되어 온 것은 그의 성장지와 죽은 곳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죽은 곳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가 정리되었기 때문이다.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태어난 1574년부터 죽던해인 1593년 초까지 그는 고향에서 살았고,부군인 최경회를 따라 진주성 결전장으로 온 것은 1593년 봄 이후였다.죽기까지 진주에서 머문 것은 길게 잡아도 5개월을 넘지 않았다.1593년 여름 진주성을 함락시킨 적장을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던진 이후 그의 죽음이 이룬 엄청난 전과에 대한 보상문제가 제기되었는데,이 때 진주목사가 논개의 집안을 확인하기 위하여 진주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는 공식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오해 속에 파묻어버린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여자였기 때문이다.흔히 진주성 2차 전투로 불리는 싸움은 임진왜란 7년 전쟁사에서 가장 많은 조선의 희생자를 낸 처참한 살육전이었다.유생들의 당파싸움과 허구에 찬 이론 논쟁으로 허수아비가 된 관군은 이미 국가를 수호하는 군인이 아니라 높은 관직의 유생들을 추종하는 비겁하고 무능한 자들이었다.조선의 성리학과 유생들이 이 시기에 저지른 죄와 그에 대한 응징은 없었다.관군들의 철저한 무관심과 변명 속에서 진주성은 외로운 섬처럼 왜적에게 포위돼 공격받았다.9일 밤낮으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웠다.진주성을 끝까지 지키려한 대부분은 호남에서 온 의병들이었다.비록 직함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였지만 최경회도 전라도 화순의 의병장으로서 진주성 사수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전라곡창 점령 위해 왜적들 진주성 공략 결국 전투력의 열세로 진주성은 함락되고,진주성안으로 피란해 있던 6만여 명의 피란민들까지 모조리 왜적에게 도륙당하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주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여자들과 노인들이었다.그들의 주검은 산이 되어 여름 장마 속에서 썩어갔다.국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그 흔하던 양반과 잘난 유생들은 모두 도망가버리고 죽음으로써 왜적의 칼날을 무디게하는 것은 민중뿐이었다.진주성 사수에 실패한 전라도에서 온 의병장들은 책임을 지고 진주성에서 자결했다. 왜적들은 진주성을 함락하자 곧장 하동 섬진강을 건너 전라도 곡창지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왜적들이 진주성 함락을 위해 총력전을 편 이유는 전라도 곡창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임진왜란이 시작된지 불과 두 달여 만에 평양까지 진출했던 왜군들은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긴 거리를 이용하여 전쟁물자를 수송해야 했다.그 때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 보급로를 공격하자 왜군은 다시 남쪽으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서해바다를 이순신의 해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해로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왜군사령부에서는 이순신의 해군을 제거해야만 조선을 지배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그러나 이순신과 그의 해군을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이길 수 없었다.대신 전라도를 점령하는데 힘을 쏟았다.이순신의 해군은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식량을 보급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전라도 의병들이 그토록 무섭게 전투에 임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전라도와 이순신을 제거해버리면 조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그 출입구가 되는 진주성을 먼저 점령해야만 했다.모든 왜군을 총동원하여 진주성을 함락했다.최경회 장군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왜적들은 하동을 거쳐 보성 지방까지 진군했다가 일단 진주로 돌아왔다.전력을 재정비하여 보다 완벽하게 전라도를 점령하자는 전략에서였다.진주로 돌아온 왜병들은 일단 진주성을 함락한 전승기념 파티를 열었다.왜장들이 촉석루 언덕 위에서 벌인 전승기념 파티에는 그때까지 살아남은 진주목과 경상우병영에 속해있던 관기(官妓)들을 모조리 끌어내고,진주의 여염집 젊은 여인들도 강제 동원되었다. ●관기로 잠입한 논개… 전승잔치서 적장 살해 진주는 지방 도시로서는 드물게 경상우병영과 진주목관아가 위치해 있어서 군인과 관료가 많았다.지방관에는 공공의 행사를 치르기 위해 음악과 춤을 주관하는 교방(敎坊)이란 부서가 일찍부터 설치되어 있었다.이곳에는 이른바 관기로 불리는 여성들이 음악,춤,그림,글씨 등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생활했는데,나쁜 목민관의 경우에는 관기들의 본래 목적을 훼손하여 마치 몸파는 일을 하는 여성들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논개는 부군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온 이후로 줄곧 이곳 교방에서 지냈다.그러다가 성이 함락되고 부군도 자결하자 논개는 복수를 결심했다.스스로 관기가 되어 왜장들의 전승축하파티에 잠입했다.그곳에서 왜장 기다 마코베(貴田孫兵衛)라는 가토 기요마사부대의 선봉장을 죽였다.기다 마코베의 뜻밖의 죽음은 왜병들에게 큰 충격이었고,전라도 침공 계혹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논개가 전라도를 위기에서 구출하고,나아가 조선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게 된 셈이었다.논개가 이같은 결과를 모두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이같은 사실을 놓고 조선 정부는 논개의 행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논개가 여자인데다 기생 신분이기 때문에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만약 이를 인정한다면 남자들의 권위가 진흙탕에 처박힌다는 두려움으로 논개가 죽은지 147년이 지나도록 외면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2)여자라는 이름의 논개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2)여자라는 이름의 논개 (上)

    도래 소주 열 번 고아 애(왜)늠 장수한테 믹이갖고 진주 기생 이애미(의암)는 우리 조선 살릴라꼬 옥가락지 열 찐(낀) 손에 애늠 장수 목을 안고 진주 남강에 떨어졌네 진주 남강 떨어짐서 노랑 수건 파랑 수건 수건 두 개 떠올라 오면 노랑 수건은 건져주고 파랑 수건은 건지지 마라. 두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곧잘 부르셨던 노래다.살아계셨으면 아흔 두 살이 되셨을 어머님이 처녀 적 길쌈하면서 부르시던 노래였다.물레질 할 때나 삼 삼을 때 동무들이 짝짝으로 마주 보고 앉아 한쪽에서 한 소절을 먼저 메기면 맞은편 여인들이 그 다음 소절을 받는다.노래하는 사람마다 남 모르는 설움이며 가슴 속 사연들을 살며시 섞어 부르곤 하기 때문에 노래는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일제 식민지 한복판 아슬한 민족의 베틀 위에서 기구한 운명을 씨줄 날줄로 엮어 짜며 불렀던 이 노래가 지닌 상징성은 컸다.어머니는 이 노래를 부르시면서 애옥살이에 자식 일곱을 낳아 기르셨고,‘이애미(의암,義巖)의 전설’은 식민시기 진주 남강 기슭에서 고달픈 삶을 꾸렸던 사람들에게 식을 줄 모르는 분노와 그치지 않는 민족 사랑을 함께 일깨워주었다. ●베틀질 노랫소리로 맥이은 ‘이애미 전설’ 노래의 주인공은 논개다.논개는 여자이고,기생이고,관청에 소속된 노비이고,적장을 살해함으로써 조선의 운명을 구한 전사이며,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장군이 사랑하던 여인이며,꽃다운 나이 스무살에 죽은 민족의 딸이고,죽은지 147년이 지나서야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전사 사실을 확인받은 인류 역사상 매우 드문 내력을 지닌 이다.그리고 논개는 그저 한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딸이 아니라,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애인이고 동무이다. 논개의 삶과 죽음이 전설과 오해로 점철되어 온 것은 그의 성장지와 죽은 곳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죽은 곳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가 정리되었기 때문이다.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태어난 1574년부터 죽던해인 1593년 초까지 그는 고향에서 살았고,부군인 최경회를 따라 진주성 결전장으로 온 것은 1593년 봄 이후였다.죽기까지 진주에서 머문 것은 길게 잡아도 5개월을 넘지 않았다.1593년 여름 진주성을 함락시킨 적장을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던진 이후 그의 죽음이 이룬 엄청난 전과에 대한 보상문제가 제기되었는데,이 때 진주목사가 논개의 집안을 확인하기 위하여 진주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는 공식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오해 속에 파묻어버린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여자였기 때문이다.흔히 진주성 2차 전투로 불리는 싸움은 임진왜란 7년 전쟁사에서 가장 많은 조선의 희생자를 낸 처참한 살육전이었다.유생들의 당파싸움과 허구에 찬 이론 논쟁으로 허수아비가 된 관군은 이미 국가를 수호하는 군인이 아니라 높은 관직의 유생들을 추종하는 비겁하고 무능한 자들이었다.조선의 성리학과 유생들이 이 시기에 저지른 죄와 그에 대한 응징은 없었다.관군들의 철저한 무관심과 변명 속에서 진주성은 외로운 섬처럼 왜적에게 포위돼 공격받았다.9일 밤낮으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웠다.진주성을 끝까지 지키려한 대부분은 호남에서 온 의병들이었다.비록 직함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였지만 최경회도 전라도 화순의 의병장으로서 진주성 사수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전라곡창 점령 위해 왜적들 진주성 공략 결국 전투력의 열세로 진주성은 함락되고,진주성안으로 피란해 있던 6만여 명의 피란민들까지 모조리 왜적에게 도륙당하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주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여자들과 노인들이었다.그들의 주검은 산이 되어 여름 장마 속에서 썩어갔다.국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그 흔하던 양반과 잘난 유생들은 모두 도망가버리고 죽음으로써 왜적의 칼날을 무디게하는 것은 민중뿐이었다.진주성 사수에 실패한 전라도에서 온 의병장들은 책임을 지고 진주성에서 자결했다. 왜적들은 진주성을 함락하자 곧장 하동 섬진강을 건너 전라도 곡창지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왜적들이 진주성 함락을 위해 총력전을 편 이유는 전라도 곡창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임진왜란이 시작된지 불과 두 달여 만에 평양까지 진출했던 왜군들은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긴 거리를 이용하여 전쟁물자를 수송해야 했다.그 때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 보급로를 공격하자 왜군은 다시 남쪽으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서해바다를 이순신의 해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해로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왜군사령부에서는 이순신의 해군을 제거해야만 조선을 지배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그러나 이순신과 그의 해군을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이길 수 없었다.대신 전라도를 점령하는데 힘을 쏟았다.이순신의 해군은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식량을 보급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전라도 의병들이 그토록 무섭게 전투에 임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전라도와 이순신을 제거해버리면 조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그 출입구가 되는 진주성을 먼저 점령해야만 했다.모든 왜군을 총동원하여 진주성을 함락했다.최경회 장군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왜적들은 하동을 거쳐 보성 지방까지 진군했다가 일단 진주로 돌아왔다.전력을 재정비하여 보다 완벽하게 전라도를 점령하자는 전략에서였다.진주로 돌아온 왜병들은 일단 진주성을 함락한 전승기념 파티를 열었다.왜장들이 촉석루 언덕 위에서 벌인 전승기념 파티에는 그때까지 살아남은 진주목과 경상우병영에 속해있던 관기(官妓)들을 모조리 끌어내고,진주의 여염집 젊은 여인들도 강제 동원되었다. ●관기로 잠입한 논개… 전승잔치서 적장 살해 진주는 지방 도시로서는 드물게 경상우병영과 진주목관아가 위치해 있어서 군인과 관료가 많았다.지방관에는 공공의 행사를 치르기 위해 음악과 춤을 주관하는 교방(敎坊)이란 부서가 일찍부터 설치되어 있었다.이곳에는 이른바 관기로 불리는 여성들이 음악,춤,그림,글씨 등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생활했는데,나쁜 목민관의 경우에는 관기들의 본래 목적을 훼손하여 마치 몸파는 일을 하는 여성들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논개는 부군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온 이후로 줄곧 이곳 교방에서 지냈다.그러다가 성이 함락되고 부군도 자결하자 논개는 복수를 결심했다.스스로 관기가 되어 왜장들의 전승축하파티에 잠입했다.그곳에서 왜장 기다 마코베(貴田孫兵衛)라는 가토 기요마사부대의 선봉장을 죽였다.기다 마코베의 뜻밖의 죽음은 왜병들에게 큰 충격이었고,전라도 침공 계혹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논개가 전라도를 위기에서 구출하고,나아가 조선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게 된 셈이었다.논개가 이같은 결과를 모두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이같은 사실을 놓고 조선 정부는 논개의 행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논개가 여자인데다 기생 신분이기 때문에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만약 이를 인정한다면 남자들의 권위가 진흙탕에 처박힌다는 두려움으로 논개가 죽은지 147년이 지나도록 외면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흔히 진주를 한국 인권의 고향이라 말한다.1862년 류계춘과 그의 동지들이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농민 생존권 투쟁이 된 ‘임술년 농민항쟁’과 1923년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은 형평운동 80주년이었고,지난 1993년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진주에서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백정해방운동을 백정이라는 특수 신분의 해방 운동으로 기념하는 데 그치지 말고,보다 폭넓은 인간의 불평등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계기로 삼자는 뜻이었다.인권문제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형평기념탑을 세우고,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도 열어 70년 전 일제 때에 시작된 형평운동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을 논의하였다.일본에서는 일본의 백정에 해당하는 부락민(部落民) 다수와 부락민의 인권과 차별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부락민의 생존권을 돕고 일본사회의 차별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락해방인권연구소 관계자들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강상호와 장지필의 이름과 생애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그 이전에는 국내의 극히 적은 연구자들에 의해 간신히 이름과 생애가 이야기되고 있었을 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강상호는 진주를 대표하는 부자이며 명문가 출신인데다 후손들이 진주 지역에 살아 있었기에 그에 대한 연구 자료는 풍부한 편이었다.그러나 장지필의 경우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의 후예들은 공식참배 안해 형평운동 70주년 국제 행사 이후 한 해에 두 차례씩 일본 부락민들이 강상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일본 부락민들의 강상호 무덤 참배 때마다 안내자로 참석해온 필자는 올봄 그의 아들 강인수씨와 둘이서만 참배를 했다.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인권해방운동 선구자는 차도 옆에 누워서 자동차 굉음과 흙먼지,행인들이 내던지는 오물,그 보다 더 심한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었다.아들은 여유없는 그의 노년을 부끄러워할 뿐 말이 없었다.한국의 백정 후예들이 강상호 무덤을 공식적으로 참배했다는 이야기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이 역시 안타깝다.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던 1923년 당시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는데,백정의 원류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 때 생겨난 전쟁 포로나 귀순자들이라고 한다.그들은 고구려로 온 뒤 주로 변방에서만 살았는데,‘삼국사기’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을 부락(部落)이라 불렀음을 적고 있다.‘280년(서천왕11)에는 숙신을 공격하여 주민 600호를 옮기고 항복한 부락 예닐곱 곳을 부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원래 부락은 흉노족이 사막지대에서 떼를 지어(部) 천막을 치고 정착한 곳(落)을 의미했다.고려 때는 고구려에 복속당한 북방 유목민들의 후예인 수척(水尺),양수척(揚水尺),화척(火尺)들이 살던 곳을 부락이라 불렀다.이런 예를 두고 볼 때 부락은 원주민과 다른 족속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겠다. 일제 식민지 이후 총독부는 한국 민속을 파괴하고 마을이나 산의 지명을 바꾸는 것으로 정체성을 소멸시키려 하였다.그 과정에서 한국 고유어인 ‘동네,마을’ 대신 ‘부락’을 쓰게 하였는데,일본의 부락과 부락민이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멸시당하듯이 한국인 전체를 부락,부락민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백정들의 거주지를 부락이라 불렀던 것과 일본의 부락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 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인들의 생활언어도 사용못해 당시에 백정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했고,상투머리엔 반드시 검은 띠를 둘러 백정임을 표시해야 했다.백정 여자들은 언제나 검정색 물들인 치마를 입어야 했고,비단옷이나 양반들이 입는 두루마기며 도포를 입어서는 안되었다.기와집에 살 수 없었으며 세 칸 이상의 넓은 집은 갖지 못했다.또,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고,혼인할 때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신랑은 말을 탈 수 없었다.서당이나 향교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글을 배워서도 안되었다.죽은 뒤에도 상여에 관을 얹지 못하며,거적대기에 말아 매장하되 일반인 무덤보다 높은 곳에는 봉분을 짓지 못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일반인 소년이나 아이에게 백정은 존댓말을 써야 했고 공공장소를 지날 때는 허리를 숙인 채 빠르게 뜀박질하여 지나가야 했다.이러한 법이나 관습을 어길 경우에는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일반인으로부터 처벌받아야 하고,같은 죄를 다시 범한 백정은 중형에 처해졌다.심지어 일반인들의 생활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금했다.백정들의 삶은 온갖 금지와 차별의 울타리 안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정마을은 전국 주요 행정관청이 있는 곳에 만들어졌는데,각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필요로 하는 육류와 피혁을 손쉽게 얻기 위해서였다.특히 향교가 있는 지역에서는 봄·가을에 있는 공자와 유교 선현들께 올리는 제사 음식 중에 반드시 필요로 하는 육류와 육류를 가공하여 만든 제수를 공급받기 위해 백정을 꼭 필요로 했다.따라서 숙종 연간만 하더라도 백정은 일종의 관노비였다.그 후 조선사회 신분제도와 경제토대의 붕괴로 지방 토호들이 백정을 사노비화하면서 백정들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백정들은 철저한 문맹과 궁핍으로 최하층민의 가련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백정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만 있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없었다. 강상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임을 절감했다.그리고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질타하였다.인간은 평등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사는 삶이야말로 고귀하다고 외쳤다.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며,미래를 위해 인간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1923년 봄 진주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이 운동에는 백정 출신들과 함께 일반 지식인들도 참여함으로써 신분차별의 철폐가 민족해방보다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낳았다.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일제히 환영하면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전국적인 사회 문화 운동의 출발지가 서울이 아닌 진주라는 작은 도시라는 점과 운동본부 및 핵심 지도부 인물 대부분이 지역인들이라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정자식 양자로 들여 취학시켜 강상호·장지필 등 본부 임원들은 각각 순회 지역을 나누어 돌면서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백정들의 군중 집회에 참석,축사를 하거나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백정들은 수백년 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폭발시켰지만 폭력 사태로는 나아가지 않았다.철저한 온건 노선을 지키면서 모든 조선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눈물 겨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민족 해방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어떤 사회적 쟁점을 논의하기 위한 집회도 아닌 오직 천한 신분 백정도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선언과 맹세의 집회다보니 일본 경찰도 적극 단속할 수는 없었다. 형평운동이 본 궤도에 올라 백정들의 생활 개선과 교육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차별의 벽은 백정들이 일반인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만약 백정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일반인들이 모두 동맹 휴학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강상호는 그때 두 명의 백정 자식을 양자로 들여 직접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등 일반 지식인들이 먼저 백정 차별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듯 들불처럼 확산되는 형평운동은 그때 막 한국사회에 상륙한 사회주의 노선과 다른 몇몇 사상단체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러면서 점점 예기치 못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었다.강상호는 장지필과의 계속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백정도 떳떳한 조선인으로 대우받는 것이 어쩌면 민족해방보다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형평운동에 자신과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넣었다.국가나 사회보다 인간이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심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죽었다. 굳이 형평운동이 아니더라도 인간평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진주 촉석공원 앞 그의 작고 외로운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강상호란 이름을 불러 보면 어떨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흔히 진주를 한국 인권의 고향이라 말한다.1862년 류계춘과 그의 동지들이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농민 생존권 투쟁이 된 ‘임술년 농민항쟁’과 1923년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은 형평운동 80주년이었고,지난 1993년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진주에서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백정해방운동을 백정이라는 특수 신분의 해방 운동으로 기념하는 데 그치지 말고,보다 폭넓은 인간의 불평등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계기로 삼자는 뜻이었다.인권문제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형평기념탑을 세우고,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도 열어 70년 전 일제 때에 시작된 형평운동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을 논의하였다.일본에서는 일본의 백정에 해당하는 부락민(部落民) 다수와 부락민의 인권과 차별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부락민의 생존권을 돕고 일본사회의 차별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락해방인권연구소 관계자들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강상호와 장지필의 이름과 생애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그 이전에는 국내의 극히 적은 연구자들에 의해 간신히 이름과 생애가 이야기되고 있었을 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강상호는 진주를 대표하는 부자이며 명문가 출신인데다 후손들이 진주 지역에 살아 있었기에 그에 대한 연구 자료는 풍부한 편이었다.그러나 장지필의 경우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의 후예들은 공식참배 안해 형평운동 70주년 국제 행사 이후 한 해에 두 차례씩 일본 부락민들이 강상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일본 부락민들의 강상호 무덤 참배 때마다 안내자로 참석해온 필자는 올봄 그의 아들 강인수씨와 둘이서만 참배를 했다.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인권해방운동 선구자는 차도 옆에 누워서 자동차 굉음과 흙먼지,행인들이 내던지는 오물,그 보다 더 심한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었다.아들은 여유없는 그의 노년을 부끄러워할 뿐 말이 없었다.한국의 백정 후예들이 강상호 무덤을 공식적으로 참배했다는 이야기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이 역시 안타깝다.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던 1923년 당시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는데,백정의 원류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 때 생겨난 전쟁 포로나 귀순자들이라고 한다.그들은 고구려로 온 뒤 주로 변방에서만 살았는데,‘삼국사기’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을 부락(部落)이라 불렀음을 적고 있다.‘280년(서천왕11)에는 숙신을 공격하여 주민 600호를 옮기고 항복한 부락 예닐곱 곳을 부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원래 부락은 흉노족이 사막지대에서 떼를 지어(部) 천막을 치고 정착한 곳(落)을 의미했다.고려 때는 고구려에 복속당한 북방 유목민들의 후예인 수척(水尺),양수척(揚水尺),화척(火尺)들이 살던 곳을 부락이라 불렀다.이런 예를 두고 볼 때 부락은 원주민과 다른 족속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겠다. 일제 식민지 이후 총독부는 한국 민속을 파괴하고 마을이나 산의 지명을 바꾸는 것으로 정체성을 소멸시키려 하였다.그 과정에서 한국 고유어인 ‘동네,마을’ 대신 ‘부락’을 쓰게 하였는데,일본의 부락과 부락민이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멸시당하듯이 한국인 전체를 부락,부락민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백정들의 거주지를 부락이라 불렀던 것과 일본의 부락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 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인들의 생활언어도 사용못해 당시에 백정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했고,상투머리엔 반드시 검은 띠를 둘러 백정임을 표시해야 했다.백정 여자들은 언제나 검정색 물들인 치마를 입어야 했고,비단옷이나 양반들이 입는 두루마기며 도포를 입어서는 안되었다.기와집에 살 수 없었으며 세 칸 이상의 넓은 집은 갖지 못했다.또,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고,혼인할 때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신랑은 말을 탈 수 없었다.서당이나 향교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글을 배워서도 안되었다.죽은 뒤에도 상여에 관을 얹지 못하며,거적대기에 말아 매장하되 일반인 무덤보다 높은 곳에는 봉분을 짓지 못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일반인 소년이나 아이에게 백정은 존댓말을 써야 했고 공공장소를 지날 때는 허리를 숙인 채 빠르게 뜀박질하여 지나가야 했다.이러한 법이나 관습을 어길 경우에는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일반인으로부터 처벌받아야 하고,같은 죄를 다시 범한 백정은 중형에 처해졌다.심지어 일반인들의 생활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금했다.백정들의 삶은 온갖 금지와 차별의 울타리 안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정마을은 전국 주요 행정관청이 있는 곳에 만들어졌는데,각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필요로 하는 육류와 피혁을 손쉽게 얻기 위해서였다.특히 향교가 있는 지역에서는 봄·가을에 있는 공자와 유교 선현들께 올리는 제사 음식 중에 반드시 필요로 하는 육류와 육류를 가공하여 만든 제수를 공급받기 위해 백정을 꼭 필요로 했다.따라서 숙종 연간만 하더라도 백정은 일종의 관노비였다.그 후 조선사회 신분제도와 경제토대의 붕괴로 지방 토호들이 백정을 사노비화하면서 백정들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백정들은 철저한 문맹과 궁핍으로 최하층민의 가련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백정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만 있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없었다. 강상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임을 절감했다.그리고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질타하였다.인간은 평등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사는 삶이야말로 고귀하다고 외쳤다.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며,미래를 위해 인간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1923년 봄 진주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이 운동에는 백정 출신들과 함께 일반 지식인들도 참여함으로써 신분차별의 철폐가 민족해방보다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낳았다.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일제히 환영하면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전국적인 사회 문화 운동의 출발지가 서울이 아닌 진주라는 작은 도시라는 점과 운동본부 및 핵심 지도부 인물 대부분이 지역인들이라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정자식 양자로 들여 취학시켜 강상호·장지필 등 본부 임원들은 각각 순회 지역을 나누어 돌면서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백정들의 군중 집회에 참석,축사를 하거나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백정들은 수백년 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폭발시켰지만 폭력 사태로는 나아가지 않았다.철저한 온건 노선을 지키면서 모든 조선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눈물 겨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민족 해방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어떤 사회적 쟁점을 논의하기 위한 집회도 아닌 오직 천한 신분 백정도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선언과 맹세의 집회다보니 일본 경찰도 적극 단속할 수는 없었다. 형평운동이 본 궤도에 올라 백정들의 생활 개선과 교육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차별의 벽은 백정들이 일반인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만약 백정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일반인들이 모두 동맹 휴학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강상호는 그때 두 명의 백정 자식을 양자로 들여 직접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등 일반 지식인들이 먼저 백정 차별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듯 들불처럼 확산되는 형평운동은 그때 막 한국사회에 상륙한 사회주의 노선과 다른 몇몇 사상단체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러면서 점점 예기치 못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었다.강상호는 장지필과의 계속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백정도 떳떳한 조선인으로 대우받는 것이 어쩌면 민족해방보다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형평운동에 자신과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넣었다.국가나 사회보다 인간이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심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죽었다. 굳이 형평운동이 아니더라도 인간평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진주 촉석공원 앞 그의 작고 외로운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강상호란 이름을 불러 보면 어떨까.˝
  • [책꽂이]

    ●나는 편애할 때 가장 자유롭다(남재일 지음,시공사 펴냄) 소설가 김훈,법무장관 강금실,여성운동가 로리주희,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시마다 마사히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대를 헤쳐나가는 자유주의자 11인의 진솔한 내면 풍경을 담았다.언론인 출신 문화평론가인 저자(40)는 이들을 인간에 대한 ‘편애‘와 세상에 대한 ‘편견’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으로 진행된 새로운 스타일의 인물론으로 관심을 끈다.1만원. ●탐험과 비즈니스(권주혁 지음,지식산업사 펴냄) 한국의 민간기업 중엔 여의도 면적의 90배가 넘는 솔로몬 군도의 뉴조지아 섬 8000만평을 소유하고,제주도 면적의 2배인 초이셀 섬의 벌채권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이 있다.그 주인공이 바로 이건산업이다.이 책은 이건산업 부사장인 저자의 남태평양 25년의 사업개척기다.구미 여러 나라의 식민지였던 솔로몬 군도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악조건 속에서도 벌채허가권을 따낸 비결,환경친화적인 벌목 방법 등이 소개된다.1만 2000원.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이상엽·임재천 등 지음,청어람미디어 펴냄) 디지털 시대에도 변함없이 주목받는 클래식 카메라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 말까지 생산된 기계식 수동 카메라를 가리킨다.니콘·라이카·콘탁스·캐논·미놀타·롤라이·올림푸스·자이스 이콘다·페르케오·키예프·페드·조르키·코비카 등이 그것이다.초점과 노출 맞추기도 어렵고 만들어진지 수십년이 지난 클래식 카메라가 마니아를 만들어내는 까닭은 무엇일까.무엇보다 이 ‘따스한’ 기계엔 삶과 사람의 숨결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4명의 사진가가 이 카메라들을 들고 시간과 공간을 종횡으로 누비며 사진을 찍고 여정을 기록했다.1만 7000원.˝
  • [이경기의 스크린1인치] 희망의 ‘Que Sera Sera’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지.커서 미인이 될 수 있을까?,부자가 될 수 있을까?”그러면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지요.“네가 원하는 대로 잘될 거야!” 6·25 전쟁이 끝나고 정치,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던 1950년대 후반.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흥얼거렸던 팝송중의 하나가 ‘Que Sera Sera’이다. 흔히 ‘될 대로 되라!’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면서 애창됐던 이 노래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The Man Who Knew Too Much’의 주제곡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애정없이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산층 미국 부부.어느해 프랑스 식민지인 모로코를 관광차 방문했다가 정치적 암살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테러리스트들은 비밀이 누설될 것을 차단하기 위해 이들 부부의 아들을 유괴한다. 아들의 행방을 쫓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부부.그후 이들 부부는 아들의 유괴 사건에 깊숙이 연루됐다는 심증을 갖고 있는 런던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다.그리고 결혼 전 가수로 활동했던 아내는 아들을 재울 때마다 자장가처럼 흥얼거렸던 ‘Que Sera Sera’를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며 아들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열망한다. 미남 배우 캐리 그란트와 가수로 유명세를 얻고 있던 도리스 데이가 아들이 납치되는 사건을 계기로 짙은 부부애를 회복한다는 내용을 담은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는 히치콕의 스릴러 기법이 농축돼 1956년 국내 극장가에서 상영됐을 때 화제작이 됐다. 왈츠풍의 이 노래는 ‘피아노’로 1993년 칸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각본상을 따냈던 호주 출신 여류 감독 제인 캠피언의 신작 ‘인 더 컷’에서 주제 음악으로 다시 쓰였다. 만년 소녀 배우 멕 라이언이 올누드 정사신을 선보였던 ‘인 더 컷’에서 그녀는 맨해튼 거주 영문학 교수 프래니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녀의 집 정원에서 이웃집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다.강력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뉴욕 시경 형사 말로이(마크 러팔로)가 급파된다.심리적 불안감에 시달리던 프래니는 사건을 수사해가면서 친절을 베풀고 있는 미남 형사에게 이끌려 결국 육체적 관계까지 맺게된다.그런데 만남을 거듭하면서 프래니는 말로이가 형사의 신분을 악용해 악마적인 살인 행각을 벌이고 있는 사내라는 것을 깨달아 간다. ‘인 더 컷’에서는 예기치 않은 살인 사건을 목격한 뒤 정신적 공황 상태에 놓이게 되는 프래니가 어린 시절 남자 친구와 스케이트를 타면서 풋풋한 첫사랑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배경 음악으로 흘러 나오고 있다. 이외 캔자스 시티의 한 주점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는 베티(르네 젤위거)가 의학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자신의 오랜 꿈인 간호사가 됐으면 하는 희망을 추구한다는 ‘너스 베티·Nurse Betty’(2000)에서도 ‘케 세라 세라’가 배경곡으로 사용된 바 있다. 이처럼 이 노래는 현실적인 어려움에서 무사히 벗어나고 싶거나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개인적인 포부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나타낼 때 단골 배경곡으로 애용되고 있다.˝
  • [책꽂이]

    ●젊은 대지를 위하여(현기영 지음,화남 펴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 재직 중인 작가의 에세이집.80년대부터 자신의 소시민성과 맞서 고민한 의식의 흐름을 38편의 글에 담았다.뜨겁던 시대정신을 돌아보고 오늘의 지혜를 얻자고 역설한다.9000원. ●1920년대 초기 시의 이념과 미학(조영복 지음,소명출판 펴냄) ‘창조’‘폐허’‘백조’등 동인지 시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단순히 서구 문예사조의 모방이 아니라 초기 아나키즘의 영향 아래 혁명적 이념과 근대 문예의 미학적 이념이 동시에 나타난다고 설명한다.1만 7000원. ●프로페셔널(이원호 지음,은행나무 펴냄) 스포츠서울에 연재된 소설.조직세계에 몸담았다가 죽은 형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파헤치는 특전사 중사의 이야기.인간들의 권력·야망욕과 암흑가의 냉혹한 생존 경쟁 등을 그린다.모두 3권,각권 8500원. ●사이키 멘탈(홍재규 지음,열매출판사 펴냄) 베스트셀러 ‘야인’의 작가가 낸 장편. 한 여학생이 지키지 못한 약속을 모티프로 다양한 인간이 물고 물리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었다. 모두 3권,각권 8500원. ●체호프와 그의 시대(A P 추다코프 지음,강명수 옮김,소명출판 펴냄) 체호프의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예술세계를 본격 분석한 연구서.푸슈킨,톨스토이·고골·투르게네프 등 ‘러시아 황금기 문학’이라 불리는 19세기 작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체호프 문학의 독창성을 드러낸다.2만원. ●궁지(위스망스 지음,손경애 옮김,문학과지성사 펴냄) 세기말의 우울함을 탁월하게 그린 프랑스 소설가의 중단편집.부르주아 계급의 추악함과 탐욕을 드러낸 표제작과 자전적 소설 ‘등짐’ 등에서 당대의 시대 정신을 민감하게 포착한다.6000원. ●왕이 되고 싶은 사나이(루디야드 키플링 지음,김정우 옮김,함께읽는책 펴냄) ‘정글북’을 지은 작가의 작품으로 국내 첫 번역1800년대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 왕이 되고픈 욕망에 사로잡힌 두 떠돌이 젊은이의 삶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냉소적으로 형상화.7500원.˝
  • 쿠바 배경 ‘더티 댄싱:하바나 나이트’ 스크린속 라틴춤에 흠뻑

    ‘더티 댄싱(Dirty Dancing):하바나 나이트(Havana Night)’는 열기가 확 느껴지는 영화다.현란하고 정열적인 라틴아메리카 댄스가 영화 무대인 쿠바 수도 아바나의 열대성 기후와 카스트로의 혁명 전야의 뒤숭숭한 분위기와 맞물려 열기를 북돋운다. 여고 3학년생 케이티(로몰라 게리)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열광하는 친구들 속에서 홀로 문학을 꿈꾸는 내성적 소녀.하버드대 진학을 꿈꾸던 중 포드자동차 쿠바 주재원으로 발령난 아버지를 따라 아바나로 온다.호기심에 들뜬 어머니나 여동생과는 달리 그녀는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이국적 풍광에 들떠 파티 등 향락문화만 동경하는 미국인 동급생들도 탐탁지 않고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접근하는 아버지 상사의 아들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그러던 중 자기 실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호텔 웨이터인 쿠바 소년 하비에(디에고 루나)와의 우연한 만남이 이어지면서 묘하게 끌린다.아바나 광장에서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추는 라틴댄스의 매력에 빠진 케이티는 상금으로 하비에를 도우려고 하비에와 한 조를 이뤄 댄스 경연대회를 준비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진부하고 구성도 성기다.부유한 집 딸과 식민지의 가난한 소년의 만남.당연히 이어지는 집안의 반대와 속앓이 등.하지만 영화 전반에 난무(?)하는 다양한 라틴아메라카 댄스는 즐길 만하다.‘더티 댄싱’의 히어로 패트릭 스웨이지의 우정 출연도 향수를 자극하는 보너스다.게다가 산타나,크리스티나 아귈레라,마야 등 유명 팝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배경음악도 춤만큼 흥을 돋운다.신예감독 가이 펄 랜드가 연출을 맡았다.개봉은 15일. 이종수기자˝
  • 실제 영웅 그린 ‘네드 켈리’ 19세기 호주판 로빈후드

    16일 개봉하는 ‘네드 켈리(Ned Kelly)’는 몇가지 사항만 양해한다면 들여다볼 만한 점이 많은 영화다.우선,이름만으로도 엄청난 관객몰이를 기대할 수 있는 스타 캐스팅이 아니라는 점.그리고 영국의 식민지배에 있던 19세기 후반의 호주를 배경으로,실존했던 의적의 삶을 그린 일대기 영화라는 점.진지한 맛은 있으되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는 풍부한 영화적 상상력을 기대한다면 실화 영웅담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호주 동부의 시골마을.아일랜드계 청년 네드 켈리(히스 레저)는 식민지배국인 영국 경찰들과 마찰을 일으켜 투옥됐다가 풀려났다.고향집으로 돌아왔지만 경찰들과는 여전히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그런 가운데 경찰의 모함으로 네드는 살인미수 누명을 쓰고 그의 어머니가 대신 감옥에 끌려간다.그의 결백을 증명해줄 사람은 살인이 나던 시각에 몰래 사랑을 나눈 영국인 귀족부인 줄리아(나오미 와츠)뿐.그러나 가정을 지키려는 줄리아가 나서주지 않자 네드는 범죄자 가족으로 내몰린 동생들과 함께 도주한다. 네드와 줄리아의 비밀스러운 로맨스를 빼면 영화는 영국경찰과 네드 일행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이어진다.‘호주판 로빈 후드’라 불릴 만한 네드는 실제로 은행을 털어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등 의적생활을 하다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교수형을 당했다.교수형에 처해지기까지 네드의 5년간의 행적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기대 이상의 스펙터클 화면을 선사한다.철갑옷을 입은 네드 형제들이 장총을 들고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 등은 서사액션을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는 뜻밖의 보너스가 될 수 있을 듯하다.수려한 자연경관,장중하면서도 애상 넘치는 배경음악이 일대기 드라마의 묘미를 돋운다. 황수정기자˝
  • 로버트김 범국민지원센터 출범

    미 연방교도소에 수감중인 로버트 김의 재기를 돕기 위한 범국민지원센터가 로버트김 후원회(회장 이웅진)와 각계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5일 서울 압구정동 팝그린 호텔에서 출범했다.중국에서 1년여 수감생활을 했던 사진작가 석재현씨를 비롯,유재건 열린우리당 의원 등 70여명이 참가했다.지원센터는 700서비스,기업체 후원,인터넷 모금,거리 모금 등의 활동을 벌인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미궁에 빠진 세계사의 100대 음모론/데이비드 사우스웰 지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인류의 역사는 ‘음모의 역사’다.음모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가지를 치며 번성해왔다.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어온 많은 것들은 어쩌면 사실이 아닌지도 모른다.특별한 권력집단이 만들어낸 위선과 거짓,곧 음모론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음모론은 이미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됐다.왜 이처럼 음모론이 기승을 부릴까.우리는 왜 음모론을 필요로 할까. ‘미궁에 빠진 세계사의 100대 음모론’(데이비드 사우스웰 지음,이종인 옮김,이마고 펴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모론 100가지를 골라 사건에 얽힌 의혹,유력한 용의자,회의론자의 입장 등을 균형있게 소개한 음모론 백과다. ●미국, 진주만 공습 미리 알고 있었다 음모론엔 사실과 의견,해석이 뒤섞여 있다.가장 설득력 있는 음모론 가운데 하나인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그 생생한 예다.1941년 일본은 진주만을 침공했고,당시 해군력의 꽃이라 할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대부분 5000㎞나 떨어진 샌디에이고에 정박해 있었다.이것은 ‘사실’이다.이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의견’이 도출된다.“미국의 주요 전력을 이런 식으로 빼돌린 걸 보면 일본이 공격할 것을 미리 알고 조치를 취한 게 아닐까.” 이런 의견은 다시 ‘해석’으로 발전한다.“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미국내 참전 반대여론을 잠재우고 결정적인 참전의 계기를 잡기 위해 진주만 침공을 방치했다.” ●존 F 케네디는 음모의 희생양? 하지만 음모론이 꼭 사실과 의견,해석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사실과 의견의 경계 자체가 모호할 때도 있다.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같은 경우다.이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는 용공주의자 리 하비 오스왈드가 혼자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그렇지만 70%가 넘는 미국인들은 아직도 대통령이 음모의 희생자라고 믿는다.케네디 암살사건은 이를 추적하던 여기자 도로시 킬갈렌이 의문사하고 암살범 오스왈드가 마피아에 다시 암살당하는 등 음모에 음모를 낳았다.FBI,CIA,마피아,존슨 부통령,심지어 캐나다 자유당과 재클린 케네디까지 암살 배후로 입에 오르내린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FBI의 비호 아래 살아있다?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가 마흔 두살의 나이에 죽었다는 소문은 대중을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일 뿐,그는 아직도 건재하며 그를 본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책은 음모론의 진원지로 엘비스 자신을 지목한다.엘비스는 존 버로스라는 가명을 즐겨 썼으며,총기 오발사고를 가장해 자신의 죽음을 꾸며낸 적도 있다.자신을 명성이란 이름의 감옥에 갇힌 죄수쯤으로 여긴 엘비스의 자작극이라는 것이 엘비스 음모론의 요체다. ●외계인 둘러싼 끝없는 음모 음모론의 단골 메뉴는 역시 외계인이다.외계인에게 납치됐다가 돌아왔다는 사람들의 증언,외계인들의 홍보장이 돼버린 할리우드,외계인들에게 인간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준 대신 얻은 게 첨단기술이라는 설 등 외계인과 관련된 음모론은 밑도 끝도 없다.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47년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웰에 추락한 UFO를 둘러싼 음모론이다.실제 목격자가 신고까지 했던 이 사건은 발생한 지 47년이 지나서야 미 공군의 공식보고서가 나왔다.그러나 로스웰 사건은 여전히 미스터리다.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추락 현장을 방문했을 뿐 아니라 살아남은 외계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는 소문도 있다. ●남극 빙산 밑엔 나치 비밀기지가? 책은 논리나 추리 혹은 과학이나 역사적 증거에 토대를 둔 ‘유력한’ 음모론과 함께 ‘믿거나 말거나’식의 음모론도 가감없이 전한다.히틀러와 나치가 달의 뒷면과 남극의 빙상 아래 비밀기지를 건설했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연합국에 패배할 것을 예감한 나치가 작전기지를 달로 옮겨 제3제국의 장기적인 식민지 건설을 도모했다는 얘기.히틀러가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것을 좋아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황당함을 지울 수 없다.음모론의 옥석을 가리기 위해선 물론 믿기지 않는 이야기라도 열린 시각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음모론을 부정적으로만 봐야 할까.피해의식이나 전도된 욕망의 표현이란 점에선 부정적이지만,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는 데 일정한 도움을 준다는 점에선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음모론은 때로 ‘창조정신의 비약’을 가져오기도 한다.1만 8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이런 책 어때요]

    ●살아 있는 무명용사 이야기-장이브르 나우르지음 20세기 사학계의 큰 흐름으로 떠오른 것은 단연 신문화사·미시사·일상생활사·심성사였다.이런 역사 글쓰기의 계보를 잇는 이 책은 1차대전후 행방불명된 앙텔므 망젱이란 한 프랑스 귀환 병사의 이야기를 다룬 ‘전쟁미시사’다.프랑스는 전쟁이 자국 본토에서 일어났던 만큼 그 인적·물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1차대전 최대 피해국 중 하나다.1914년부터 1918년까지 25만명의 군인이 행방불명됐다.‘살아 있는 무명용사’로 불린 망젱은 그 비극을 대변한다.이 책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떠올리게 하는 현대 신문화사의 역작이다.1만 5000원. ●제국의 슬픔-찰머스 존슨 지음 ‘선제공격’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어떻게 자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나아가 세계 각국의 주권을 짓밟으며 확대되고 있는가를 고찰.미국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미국은 해외 식민지를 정복하고 착취하는 과거의 제국들과는 달리,군사기지를 해외 전략적 요지에 진출시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새로운 유형의 제국,즉 ‘군사기지의 제국’이라고 주장한다.미국은 전 세계에 725개(2002년 기준)의 군사기지를 두고 있다.저자는 해외주둔 미군의 ‘전사문화’가 역으로 미국 사회 전체를 군국주의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2만원. ●문익환 평전-김형수 지음 “역사는 꿈을 통해 부활한다.”고 한 늦봄 문익환.그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으며,어려운 한자어에 갇혀 있던 성서를 생동하는 우리 말로 옮겨놓은 구약연구자였고,시편의 맛을 살려내기 위해 한국시를 섭렵하다 스스로 시인이 돼버린 사람이다.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엄혹했던 ‘겨울공화국’에 희망의 불씨를 심은 민주인사로 기억된다.이 책은 현대사의 질풍노도를 온몸으로 헤쳐온 그의 진정한 면모를 밝힌다.저자(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는 문익환은 ‘좌’도 ‘우’도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꿈꾼 ‘중립화 통일론자’라고 주장한다.1만 8000원. ●침팬지 폴리틱스-프란스 드 발 지음 정치적 권력관계와 사회적 우열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침팬지에 관한 보고서.동물행동학자인 저자는 네덜란드 아넴 지방의 한 동물원에서 침팬지 무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 사이에 고도의 정치행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침팬지들은 싸움을 한 뒤엔 서로 회피하기보다는 갖가지 접촉행동에 나선다.싸움이 끝난지 1분도 안돼 서로 껴안고 키스에 몰두하거나 털을 골라주기도 한다.갈등을 해소할 필요성을 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저자는 인간의 권력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거의 모두 침팬지사회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1만 8000원. ●경주문화권-국민대학교 국사학과 지음 경주는 사로국으로 출발한 신라의 발원지였다.신라문화권의 모태가 된 경주문화권엔 경주를 비롯해 영천·포항·경산·청도·울주·울산 등이 포함된다.경주 사람들이 사방 80리 지역에 해당하는 영해나 영천,울주와 통혼권을 형성해왔던 사실은 경주문화권의 유구한 전통을 잘 말해준다.신라 멸망 이후 경주는 정치적으론 소외돼갔지만 그 사회경제적인 기반은 고려·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조선시대 여주 이씨·경주 손씨의 집성촌인 양동마을이나 ‘경주최부잣집’ 같은 만석꾼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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