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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8)목포항 100년의 진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8)목포항 100년의 진실

    압록강의 신의주, 대동강의 진남포, 한강의 인천, 금강의 군산, 그리고 영산강에 목포가 건설되었다. 개항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 집중되었으니 이는 바다를 통해 들어온 해양제국들이 젖줄인 강을 따라서 식민 내륙까지 뻗어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1897년 7월4일, 조선정부는 각국 사신 앞으로 동년 10월1일을 기해 목포와 진남포 두 항구를 외국통상을 위하여 개항하고 외국인 거주를 허가하는 칙령을 통보한다. ●1897년 10월 자주적으로 개항 청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이노우에(井上馨)영사는 1895년 1월6일 기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약 한달반 동안 서남해안을 시찰하고 현재의 목포가 가장 합당한 지역임을 건의한다. 그러나 일본의 외압과 무관하게 개항 초기는 아직은 대한제국기로서 제한적이나마 자주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개항이 서둘러지기는 했으나 상업을 확장하여 민국의 이익을 발달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칙령에 의해 자주적으로 개항한 셈이다. 목포의 출발은 매우 활기찼다. 자주적이었던 만큼 초기 건설도 일본 뜻대로 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힘이 미쳤기 때문. 조계지 이외의 도시건설은 전적으로 조선인 손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헌병대목포분견소가 들어서서 위압적으로 나선다. 마침내 1906년에 목포주재 일본 이사청 이사관인 와카야마(若松兎三郞)는 각국 거류지에 관한 권한을 빼앗아 간다. 이로써 목포개항장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만다. 한일합병이 되자 일제는 가장 먼저 시가지를 33정 51구획의 일본식으로 바꾼다. 마치(町)는 일본인 거리, 한국인거리에는 동(洞)을 붙여 이름에서부터 차별한다. 즉 목포는 도시계획상의 이중성을 갖고 태어났다. 서울 북촌의 양반, 남촌의 일본인처럼 일본마을(각국공동거류지역)과 조선마을(옛 목포부)로 나뉜다.‘제국주의신도시’ 목포출신의 동반작가 박화성은 데뷔작 ‘추석전야’에서 ‘남편으로는 늘비한 일인의 긔와집이오 중앙으로는 초가와 넷 긔와집이 섯겨있고, 동북으로는 수림 중에 서양인의 집과 남녀학교와 예배당이 솟아있는 외에 몇 긔와집을 내놓고는 땅에 붙은 초가뿐이다. 다시 건너편 유달산을 보자, 집은 돌틈에 구멍만 빤히 뚫러진 도야지막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히 빈민굴이다.’고 하였다. 일본과 한국으로 분명하게 갈려진 목포시의 이중적 성격을 주목한 고석규(목포대·‘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의 저자) 교수는 ‘일제 강점기 서울을 비롯한 식민지 근대도시는 왜곡된 근대 도시화가 만들어놓은 공간의 이중성과 식민지라는 억압구도가 낳은 대중문화의 이율배반성, 신파성을 동시에 갖는 기이한 도시’라고 압축정리한 바 있다. ●바다는 강을 잃고 강은 바다를 잃어… 목포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산강을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하다. 그래서 영산포 북관정에서 목포하구언까지 내려가는 뱃길을 택하였다. 마침 영산강살리기운동이 한창 벌어지면서 도지사 이하 여러 기관장들이 탄 배에 동승하였다. 배는 영산강을 내려가다 영암 몽탄나루에서 잠시 쉬고 다시 유장하게 흘러가다 하구언에서 막혔다. 그쯤에서 전남도청 이전부지인 ‘남악신도시’가 강가에 보인다. 다시 말하여, 목포는 영산강이 바다와 만나는 길목에 자리잡은 요충지인데 바다는 강을 잃고, 강은 바다를 잃어 엉망이 돼버렸다. 바닷배가 오르락거리면서 바다와 직접적으로 통하는 도시였던 광주시도 바다는커녕 강물조차도 끊긴 단절의 도읍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이중환도 택지리에서 ‘영산강은 서쪽으로 흘러 무안 목포에 이르는데…강 건너는 큰 평야를 이뤄…풍기가 화창하고 땅은 넓고 물자도 넉넉하여 서남쪽 강과 바다는 운수의 이익을 통제하여 광주와 함께 명읍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광주를 오로지 내륙도시로만 간주함은 대단히 그릇된 시각이며, 하구언만 터진다면 충분히 해양연계도시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일본인·조선인 마을 차별 심각 목포는 발전을 거듭했다. 전남의 현관이요 물산집합의 중심지로 조선에서는 제3위를 점할 만한 중요항이자 상업의 요지로 자리잡았다.1930년대에 인구 6만을 돌파하였다. 전남에서는 최초 최대로 근대문명의 세례를 받으며 전국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앞서 있었다. 그러나 그 세례는 사람이나 구역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내려졌던 것은 아니다. 차별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특히 일본과 조선인마을에 대한 차별은 일제강점기 목포도시화의 주요특성이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살기 편하도록 도시를 꾸몄다. 정거장, 관청, 은행, 학교, 시장 그밖에 근대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주요기관을 자신들과 가깝고 편리한 곳에 세웠다. 상하수도, 도로포장, 교통통신, 전기, 가스, 보건, 위생 등도 예외없이 일본인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그네들 거리는 짜임새 있고 깨끗하고 편리하였다. 반면에 조선인거리는 무참하기 그지없었다. 농촌에서 패잔한 무리와 봇짐행상들이 방황하는 곳이 상업도시 목포항의 이면이었다. 청년은 생선장수·지게벌이, 여자는 덕장수·고구마장사, 소년은 겐마이빵·덴뿌라·수건양말장사, 소녀는 콩기름·나물장사 등으로 길거리에 나섰다. 이들은 교통정리를 한답시고 내쫓는 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가련한 신세였다.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걸인도 무리지어 나다녔다. 엄청난 숫자의 유곽거리가 존재하여 창녀들이 득실대고 성병이 만연하였다.‘항구의 낭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비참하였다. ●목포시내는 ‘거리 박물관’ 영산강하구언에서부터 찻길을 내달리며 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목포시 구분법을 제시하였다.“영산강변의 전남도청부지가 21세기형이라면,1980년대 매립지에 1990년대 세워진 하당신도시는 합리주의식이지요. 신식모텔들이 아파트와 공존하는 90년대식 합리주의의 거리를 벗어나면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같은 공공시설이 몰려있는 문화의 거리가 나오지요. 세계은행(IBRD)차관으로 만들어진 1970년대식 거리가 나오는데 보행자중심 거리를 만든다고 어정쩡하게 T자형도로를 만들어 어데서고 직진이 불가합니다. 저기에 삼학도가 보이고 유달산이 있지요. 거기가 조선인과 일본인거리가 판이하게 갈렸던 목포시내지요.” 이쯤되면 ‘거리박물관’이다. 일본식과 한국식,70년대식,80년대식,90년대식,21세기식이 병존하면서 차곡차곡 쌓여져서 항구도시를 만들어 왔다. 지난 백년사를 웅변해주는 목포답사 1번지는 오늘날 목포문화원으로 쓰이는 일본영사관이 아닐까.1900년(고종37년) 러시아건축가의 손으로 지어졌는 바, 최고급 대리석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 등 백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견고한 모습 그대로다. 이곳에서는 동척을 비롯하여 일본인 조차지역이 한눈에 굽어보인다. 권위적인 위치에 도도하게 자리매김하였다. 목포이사청, 목포부청사 등으로 쓰이다가 광복 후에는 시청, 시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었다. 문화원에서 조금 내려오니 동양척식회사 석조건물이 나온다.1920년대 영산포에서 엄청 몹쓸 짓하다가 이리로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바, 남도의 고혈을 빨아먹고 성장한 기관이다. 동척 목포지점은 전국 최대의 소작료를 거두어들였으며 부동산 담보 대부, 고리대 등으로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었다.1930년대 유행한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은 이같은 슬픈 사연을 안고 흐르는 것이리라. 해군 소유였다가 철폐될 위기에 몰린 것을 시민들이 되살려서 문화공간으로 발돋움할 채비를 갖추고 있으니 동척 부산지점과 더불어 전국에 유일하게 남았다. 백미는 역시 이훈동정원이다.1999평이라는데 우치다니 만빼이란 사람이 1930년대에 세웠다. 광복 이후에 해양경비대가 주둔하였고, 국회의원 박기배 소유를 거쳐서 1947년에 조선내화를 설립한 이훈동(1917년 해남출신)에게 넘어갔다. 목포의 진산인 유달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았으며 입구정원, 알뜰정원, 임천정원, 후원 등으로 이루어진다. 남도에서 가장 큰 정원으로 나무 종류만 113종에 이르러 난대지방식물의 보고다. 일본식 석등은 물론이고 일본식다원정, 연못, 석탑 등이 배치되어 있다. 정원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노적봉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적을 시험할 요량으로 위장볏가리를 두르게 하여 싸움 한번 없이 물리쳤다는 전설의 주인공이 왜식정원을 굽어보고 있다. 실로 아이로니컬한 대목이다. ●충무공 진지가 목화수탈 현장으로 노적봉에 오르니 코 앞에 고하도가 보인다. 이순신이 명량대첩 후에 1597년 10월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겨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였다가 이듬해 2월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길 때까지 108일 동안의 진영터다.1722년, 통제사 오중주와 충무공의 5대손 이봉상이 유허지에 이충무공 고하도유적비를 세워 오늘에 이른다. 고하도선착장에는 또 하나의 비석이 있으니 조선육지면발상지비다.1899년 일본영사가 미국산 육지면을 시험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재배에 성공하면서 전국으로 육지면이 퍼졌다. 수확기에는 목포항이 온통 흰 목화로 뒤덮였으니 쌀과 더불어 남도수탈의 상징이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영사의 공적비까지 세웠으니 충무공의 진지가 목화수탈의 현장으로 뒤바뀐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목포 100년은 이렇게 슬프게 흘러갔다. 누가 식민지근대를 이야기하는가. 그 누가 계량적 통계수치만으로 식민지축적론과 식민지개발론을 논하는가. 식민지시대의 인간군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항구의 삶은 식민지의 자본축적이 오로지 일본인만을 위한 것이었고 그 열매는 조선인과는 무관함을 웅변한다. 목포항에 산처럼 쌓였던 쌀과 솜은 남도 백성 수탈의 상징이었다. 그러한즉,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서 강조되고 있는 식민지근대론의 허구와 결과론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국내 일부의 탁상이론가들에게 목포항 방문을 강권하고 싶다. 목포항을 1시간만 걷는다면 근대적 개발이 오로지 민족차별 및 착취를 바탕으로 한 날조였음을 금세 느낄 수 있으리라.
  • 고이즈미 “고통받은 亞국가에 통절한 반성”

    |도쿄 이춘규특파원|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2일 인도네시아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손해나 고통을 준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에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드린다.”고 밝혔다. 고이즈미 총리는 또 “이후에도 군사대국이 되지 않겠다.”는 결의도 함께 표시했다. 이날 개막된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자카르타를 방문 중인 고이즈미 총리는 연설을 통해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담화를 통해 표명했던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핵심으로 한 역사인식을 새롭게 표명했다. 일본 총리가 50여개국이 참가한 주요 국제회의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사과와 반성을 표시한 것은 처음이다. taein@seoul.co.kr
  • 최고령 올림픽 메달리스트 ‘칸’ 사망

    |뉴델리 연합|세계 최고령 올림픽 메달리스트였던 파키스탄의 페로제 칸이 21일 사망했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향년 100세. 칸의 아들인 파루크 페로제는 칸이 이날 카라치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필드하키 선수 출신인 칸은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던 1928년의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영면에 들기까지 아무 질병 없이 건강을 유지했다. 인도 펀자브주 잘란다르에서 태어난 칸은 하키 팀 센터포드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파키스탄행을 택한 그는 현지에서 선수 겸 코치생활을 했으며, 파키스탄 하키팀은 지난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 ‘박물관 마케팅’ 뜬다

    ‘박물관 마케팅’ 뜬다

    기업들이 ‘박물관 마케팅’으로 고객층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박물관 운영은 기업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고객들과의 ‘만남의 광장’을 마련할 수 있어 기업들이 점차 자사의 업종과 관련된 박물관 운영을 늘려가는 추세다. ●해태제과 ‘과자박물관’ 건립 나서 해태제과는 국내 처음으로 ‘과자박물관’ 건립을 추진중이다. 올해 안에 서울 용산구 남영동 본사 사무실 1∼3층 600여평에 ‘과자 박물관’을 완공한다는 계획 아래 현재 ‘박물관 프로젝트팀’을 가동하고있다. 아직 청사진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과자가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보여 주고 옛 우리 과자들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등 과자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밀 계획이다. 주변에서는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사장의 부인 육명희 고문이 박물관장을 맡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태제과 관계자는 “크라운제과가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과자업계 강자로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기업 홍보 차원에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평양 국내 첫 ‘차박물관’ 운영 태평양은 제주도에 국내 최초로 ‘차 박물관’인 ‘오 설록 뮤지엄’을 운영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동·서양,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문화공간이자 자연친화적인 휴식공간이다. 신혼부부 등 3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특히 지난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대별 잔 150여 점이 전시된 ‘잔 갤러리’까지 박물관안에 새로 마련해 인기를 끌고 있다. ●포스코 自社유래 담은 역사관 건립 포스코도 2003년 포항시에 포스코의 역사와 정신, 기업문화, 비전을 담은 포스코 ‘역사관’을 건립했다. 전시면적 600평 규모의 역사관을 둘러보면 철강 불모지에서 3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세계 유수의 경쟁력 있는 철강회사로 성장한 포스코의 성공 스토리를 볼 수 있다. 서울 포스코 빌딩에 있는 ‘스틸 갤러리’도 포스코의 명물이다. 현재와 미래의 핵심소재로서의 철강의 모습을 보여주는 갤러리에서는 일반 전시회도 유치, 포스코 방문객뿐 아니라 초·중학교 학생들의 체험학습 공간으로 떠올랐다. 우리은행도 지난해 은행사 박물관을 개관했다. 한국 근대 은행의 역사를 민족자본 은행 탄생에서부터 식민지 시대, 한국전쟁 시기, 경제개발기, 금융변혁기의 은행에 이르기까지 100여년의 역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 서울 중구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지하 1층에 마련된 박물관에는 고려시대 개성 상인들이 창안한 우리나라 고유의 장부정리 방법인 송도사개치부법에 따라 정리한 일기,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 설립청원서 등 희귀사료 200여점 등과 전 세계에서 수집한 저금통 5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신연숙칼럼] ‘망언’의 자유 제한

    [신연숙칼럼] ‘망언’의 자유 제한

    한승조, 지만원 등의 일제관련 망언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함께 반박 글을 쏟아냈다. 그러나 “백범 김구는 빈라덴, 일본경찰을 이유없이 죽인 살인범” “일본 대사관에서 집회를 하는 할머니 가운데 80%는 가짜” “전쟁 중에 여성을 성적 위안물로 이용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며, 그것도 일시적이고 예외적 현상이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일일이 반박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짜증스러운 일이다. 정말 이런 망언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수는 없을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방안을 내놓았다.‘일제찬양 행위자 처벌 특별법’을 제정하여 망언을 처벌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한나라당 원희룡의원도 ‘일제침략행위 왜곡 및 옹호방지법안’제정 구상을 밝혔다. 친일진상규명법에 따라 진상규명위가 친일범죄, 또는 친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한 행위를 옹호·찬양하는 경우 처벌할 수 있도록 별도 법률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아직까지 별다른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다. 반응을 보인 곳은 오히려 반대의사를 표명한 쪽이다. 표현의 자유 침해가 우려되고 폐기돼야 할 국가보안법의 찬양죄 조항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런 법을 제정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전쟁범죄 청산에 철저했다고 알려져 있는 프랑스조차 게소법(Gayssot Law)을 제정해 전범 부인행위를 처벌하고 있는 것을 보면, 친일청산이 되지 못한 우리의 경우 그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망언이 되풀이된다면, 미래세대 역사의 눈은 흐려지고 말지 않겠는가. 프랑스의 게소법은 뉘른베르크 국제 전범재판이 정의한 반인도범죄를 부인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다. 독일과 동맹국이 자행한 잔혹행위와 잔혹행위 혐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공개적 발언, 출판, 방송, 인터넷 유포, 판매자까지 처벌 대상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극우 정치인 르펜은 1987년 “가스실은 2차대전 역사에서 극히 사소한 부분”이라고 말했다가 120만프랑(20만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르펜은 10년후 독일에서 열린 한 출판기념회에서 ‘사소한’부분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고 “1000여 페이지의 2차대전에 관한 책에서 가스실은 15줄 정도 된다는 뜻”이라고 망언을 되풀이했다가 투옥과 함께 법원 판결문의 12개 신문 게재비용 20만프랑(5만달러)을 부담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한다. 르펜은 이후 스스로 ‘망언’은 다시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이밖에 수정주의 홀로코스트 사학자 포리송, 철학자 가로디, 국제법 교수 골니시 등 많은 사람들이 “유태인 학살은 거대한 정치적 사기” “독일군은 보호자”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진짜인가”등의 발언을 했다가 처벌되었다. 게소법은 언론의 자유와 인권침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대자들은 이 법을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소했지만 유엔인권위원회는 인권규약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 스페인 등도 게소법과 유사한 ‘홀로코스트 부인법’을 제정했다. 언론·표현의 자유는 기본권적 자유지만 무제한의 자유는 아니다. 우리 헌법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고,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했을 경우 피해자는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했다. 망언 제한법은 일제 피해자나 순국선열의 명예와 권리 구제를 현행법보다 좀더 확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프랑스처럼 국내에도 일제 식민지를 미화하는 ‘수정주의 사관’이 고개를 들고 있는 요즈음이다. 민족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는 이까지 생겼다. 식민 피해자들의 고통을 줄여주고 미래세대에 진실을 바로 알리기 위해 무엇을 할지를 깊이 생각할 때라고 본다. 수석논설위원 yshin@seoul.co.kr
  • 경산 쓰레기 매립장 상처만 남긴 ‘님비’

    경산 쓰레기 매립장 상처만 남긴 ‘님비’

    주민들의 집단 반대와 소송 등으로 9년째 표류 중인 경북 경산시의 쓰레기매립장 조성사업이 갈등의 종지부를 찍고 재개될 전망이다. 경산시는 쓰레기매립장 공사와 관련돼 그동안 맞소송을 벌였던 종전 공동도급 대표회사인 ㈜CIC와 연대보증사인 ㈜유성건설이 최근 공사현장 인수·인계 및 하도급 업체 인수·미불금 청산 등에 합의하고 각종 소송을 취하함에 따라 쓰레기매립장 공사를 본격 추진하기로 했다고 19일 밝혔다. 1997년 6월부터 남산면 남곡리 일원(9만여평)에 총 사업비 387억 8000여만원으로 16년 동안 쓸 수 있도록 추진된 시의 쓰레기매립장 조성사업은 주민 반발과 소송 등으로 장기간 표류됐으며, 현재 1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주민소송 이어 도급사간 밥그릇싸움 이번 공사가 순조롭게 추진될 경우 당초 계획보다 4년여 늦어지긴 했지만 내년 하반기부터는 쓰레기매립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15개 읍·면·동 지역으로 분산 처리해 오던 생활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 종합 관리해 위생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시의 쓰레기매립장 조성사업은 시작부터 각종 소송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97년 남산면 일대가 쓰레기매립장 후보지로 선정되자 주민들은 곧바로 ‘입지 선정 과정에 절차상 하자가 있었다.’며 행정소송과 헌법 소송을 제기,4년여 동안 공사가 중단됐다. 이후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2003년 공사가 재개됐으나, 이번엔 공동도급 3사간의 ‘밥 그릇’ 싸움 문제 등으로 공사가 제자리 걸음을 계속했다. 급기야 시가 지난해 10월 공동도급 대표회사인 ㈜CIC와의 계약을 전격 해지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부진공정과 현장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 주된 이유였다. 대신 시는 보증회사인 ㈜유성건설을 새 대표회사로 선정했다. 이에 ㈜CIC측은 “공동도급사 구성원 변경 승인 및 계약 해지는 경산시의 일방적 결정으로 수용할 수 없다.”며 계약해지효력정지 등 가처분신청을 대구지법에 내는 등 법적 대응에 나섰다. 이에 따라 공사는 또 다시 중단됐다 최근 이들 회사간에 공사현장 인수·인계 등에 대한 전격적인 ‘딜’이 이뤄져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경산시 관계자는 “현안인 쓰레기매립장의 조속한 완공을 위해 종전 공동도급 대표회사에 대한 계약 해지는 불가피한 조치였다.”면서 “이로 인한 장기간의 법정 공방 우려 등으로 ‘쓰레기 대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양사간에 합의가 이뤄진 것은 천만 다행”이라고 말했다. ●엄청난 행·재정적 손실을 입어 시가 쓰레기매립장 조성을 위해 치른 대가는 이것만이 아니다. 시는 남산면에 쓰레기매립장을 조성하는 조건으로 현금 125억원을 주민지원기금으로 내놓기로 한 것을 비롯해 ▲24개 이(里)별 숙원사업비 2억원씩,48억원 ▲남산종합개발 계획 수립 등을 약속했다. 쓰레기매립장 등 각종 혐오시설 건립과 관련, 이같은 주민지원 규모는 전국 최대로 알려졌다. 먼저 시가 입지타당성 조사에 대한 공람·공고를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충분한 여론 수렴과 투명성없이 밀어붙이기식으로 추진해 주민 반발을 사게 됐으며, 결국 소송으로 이어져 엄청난 낭비를 초래했다. 주민들도 혐오시설에 대한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내 집 앞 쓰레기장은 안된다.’는 님비현상으로 일관해 성숙한 시민의식 실종이라는 따가운 비난을 사게 됐다. 공익시설을 담보로 시공업체들이 벌이는 ‘사익 챙기기’도 사라져야 할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정성오(55) 경산시 사회환경국장은 “그동안 쓰레기매립장 건립을 둘러싼 주민 등과의 갈등으로 엄청난 행·재정적 손실을 입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경산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씨줄날줄] 크리켓 외교/육철수 논설위원

    1971년 3월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열린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훗날 지구촌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올 역사적 대사건을 잉태하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문화혁명 후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한 중국선수단은 대회가 끝날 즈음 미국선수단에 은밀히 친선경기 초청장을 내밀었다. 중국의 호의적 의도를 재빠르게 눈치챈 미국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며칠 뒤 베이징에 탁구선수단을 파견했다. 친선경기를 계기로 이듬해 닉슨 미국 대통령은 베이징으로 날아가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만나고 역사적인 수교를 결정한다.2.7g짜리 탁구공이 세계의 판도를 바꿔 놓은, 그 유명한 ‘핑퐁외교’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스포츠는 이처럼 인류평화와 국가간 선린증진에 크게 공헌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전쟁이 터지기도 했음은 불행한 일이다.1969년 7월 중앙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전쟁은 양국 축구경기에서 촉발됐다. 인접한 두 나라는 난민문제 때문에 서로 감정이 좋지 않던 차에 축구경기 도중 응원단끼리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내 전쟁으로 확산돼 스포츠 사상 ‘축구전쟁’이라는 오점을 남겼다. 마침 인도와 파키스탄이 50년간 앙숙관계를 접고 평화를 모색하고 있어 주목된다.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지난 주말 “양국간 크리켓 경기를 보고 싶다.”며 인도를 전격 방문했는데, 이를 두고 ‘크리켓 외교’라고 한다.‘공명정대하다’는 뜻이 담겨 신사들의 스포츠라 불리는 크리켓은 야구와 비슷하다. 영연방 국가에서 인기 있으며,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도 국기(國技)나 다름없다. 두 나라의 크리켓 경기가 열렸다 하면 경기장은 충성심과 애국심의 경연장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 나라에서 크리켓은 스포츠라기보다는 민족주의의 상징이요, 정치적 도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크리켓은 또 인도-파키스탄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두 나라의 크리켓 경기가 열리지 않으면 서로 토라져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크리켓 경기관람을 구실로 인도를 찾았으나 실은 싱 인도총리도 만나 군사적 화해와 경제협력에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양국간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겠지만 스포츠를 매개로 세계평화를 위한 또 하나의 초석이 다져졌으면 좋겠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열린세상] 기업 내부권력, 이사회로 옮겨가나/김화진 법무법인 율촌 미국변호사

    회사의 이사회를 영어로 ‘Board of Directors’라 한다. 옛날 영국의 식민지 시절 미국에서는 회사 사업을 감독하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회합할 때, 비싸고 제대로 된 가구가 귀했던 탓에 톱질할 때 쓰는 작업대를 양쪽에 놓고 그 사이에 긴 나무 판자(board)를 걸쳐 임시 테이블로 사용했다. 이사회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사들은 테이블 주위의 불편한 의자에 앉았으나 그룹의 리더는 고급 의자에 앉았는데 이것이 이사회 의장을 체어맨(chair-man)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다. 상법에 따라 회사가 합병을 하려면 주주총회에서 3분의2 동의를 얻어야 한다. 미국 뉴욕 주에서도 3분의2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미국 대기업의 다수가 설립된 델라웨어 주에서는 2분의1만 얻으면 된다. 합병을 승인하는 것은 주주들이지만 계획하고 주주총회에 올리는 것은 경영진(이사회)이다. 여기서 델라웨어 주법이 경영진의 권한을 강력하게 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전의 휼렛-패커드와 컴팩의 합병이 과반 찬성을 간신히 넘겨 성사된 일이 있다. 이 회사는 델라웨어주 회사였는데 뉴욕주 회사였다면 합병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창업자의 후손인 대주주가 반대했으나 전문경영인인 피오리나 당시 회장이 성사시켰다. 약 100년 전에는 미국 모든 주의 법이 합병에 주주 전원의 동의를 요구했었다.1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회사 내의 권력이 주주총회에서 이사회로 서서히 이동한 것이다. 우리 상법은 1962년에 제정되었을 때 이사회 권한을 강화하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전까지 우리나라 기업의 이사회는 법이 부여해 준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사외이사가 없는 이사회는 대주주 CEO가 있는 회사에서 별 힘이 없다. 최근에 이사회가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면 이는 외환위기 이후의 소액주주 운동에 힘입은 것인데, 주주들이 이사회의 권력을 강화시켜 준 것은 역설적이다. 사외이사 제도도 확산되고 정착되어 가고 있다. 지난 3월 기준으로 1217개 상장법인에 모두 2246명의 사외이사가 선임되어 있다. 정부는 내년 하반기부터는 대규모 상장법인 감사위원회 위원 전원을 사외이사로 할 계획이라 한다. 심지어 SK그룹은 비상장회사에도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 결단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넘는 것이므로, 다른 기업들에 확산되어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로 정착된다면 민간부문이 제도개선을 이끄는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이사회로의 권력이동은 이사, 특히 사외이사들의 법률적 책임을 부각시킨다. 요즘 사외이사들이 소송을 당해 곤욕을 치른다는 이야기도 가끔 들린다. 사외이사들이 소송을 당한다는 것은 독립성 강화에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경영진과 사외이사 보수의 적정성과 책임의 감면장치에도 관심을 기울일 때가 되었다. 권력이 집중된 기구에는 책임도 중하지만 유능한 인재가 모일 수 있도록 책임감면 장치와 합당한 인센티브를 책정할 필요가 있다. 얼마전 우리금융지주회사 경영진과 이사진의 스톡옵션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아직 별 이해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사외이사는 공익대표가 아님에도 유의해야 한다. 사외이사는 경영진과 주주의 이해가 대립될 때만 경영진을 견제한다. 그외 일상적인 모든 사안에서 사외이사는 전문성과 경험, 인적 네트워크의 가동을 통해 경영진을 지원해야 한다. 일부 악의적인 주주들이 다른 주주들과 회사의 이익에 배치되는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경영진을 곤란하게 한다면 사외이사들이야말로 경영진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언덕이 되어 줄 수 있다. 우리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어느 정도 개선되면 사외이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 ‘전문성’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윤리경영 개념이 풍미하는 시대지만 기업 내부의 권력기구에서 윤리성과 전문성은 대체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화진 법무법인 율촌 미국변호사
  • [CEO 칼럼] 앙코르와트/기옥 금호폴리켐 사장

    [CEO 칼럼] 앙코르와트/기옥 금호폴리켐 사장

    올해 초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앙코르와트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에 직항로가 없어 방콕이나 하노이를 경유해서 가야만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나 앙코르와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달 초 국내 한 항공사가 직항로를 개설해 보다 편리한 방문길이 됐다. 앙코르와트는 ‘도읍’이라는 뜻의 앙코르(Angkor)와 ‘사원’을 의미하는 와트(Wat)의 조합어로,8세기 말부터 15세기 중반까지 약 600년간 캄보디아 전역을 지배했던 크메르 왕국이 이룩한 거대한 사원을 일컫는다. 아직도 발굴 중이지만 복원된 사원의 일부만 봐도 당시 크메르 왕국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앙코르와트는 12세기 초 수르야바르만 2세가 즉위한 해부터 무려 3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자신이 묻힐 영생의 집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힌두사원은 건축 구조상 생명을 의미하는 동쪽을 인간의 출입구로, 서쪽을 영혼들의 출입구로 여겼다. 앙코르와트는 그 유일한 출구가 서쪽으로 나 있다. 수르야바르만 2세의 의도를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등대,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정원,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러스 영묘, 로도스 항구의 크로이소스 거상이 꼽힌다. 이 중에서 현존하는 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뿐이고 나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현존하는 유적이나 건축물 위주로 선정할 경우에는 앙코르와트도 인도의 타지마할, 로마의 콜로세움 등과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앙코르와트는 12세기 이전에 지어진 어떤 건축물보다도 치밀한 구조와 섬세한 장식을 가지고 있고 배치, 구조, 조화 등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건축적 완성도를 자랑한다고 한다. 이렇게 뛰어난 완성도가 앙코르와트를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올려놓는 데 전혀 손색이 없게 하는 것이다. 앙코르와트라는 힌두문화의 결정체를 남긴 대제국 크메르 왕국은 14세기쯤 과중한 토목공사와 집권층의 부패로 점차 국력이 쇠퇴하여 주변 국가들의 잦은 침략을 받게 되고 결국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으나 캄보디아는 파벌간의 이념 대립으로 인하여 전쟁과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급기야는 1975년에 폴포트가 주도하는 급진 공산주의 세력인 크메르루주군이 수도 프놈펜을 장악하고 정권을 쥐게 된다. 이 때, 악명 높은 ‘킬링필드’라는 대학살이 자행되는데, 공산주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지식인, 자본가, 기업인, 승려 등 약 200만명이 처형되었다. 당시의 캄보디아 인구가 약 800만명이었다고 하니 인구의 4분의1이 이때 학살된 셈이다. 지금 캄보디아는 방글라데시, 아이티공화국과 함께 세계 3대 빈국 중 하나로 전락했다.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크메르 왕국의 후손인 캄보디아인들이 왜 지금은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던 크메르 왕국 조상들의 유전인자(DNA)가 오늘날 캄보디아인들에게 전해질 때 돌연변이라도 일으킨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국가 정체성의 혼돈, 체제의 불안정, 지도자의 리더십 부족, 집권층의 부패,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오늘날의 쇠락을 초래했을 것이다. 흔히들 역사의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그 가정을 실험해 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앙코르와트에 가보면 인류 역사에 있어 최악의 가정 중 하나를 실험해 본 결과를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앙코르와트는 현존하는 가장 유용한 역사의 산 교육장, 경제의 실험교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옥 금호폴리켐 사장
  • [열린세상] 한국이 일본과 다르려면/김민환 고려대 언론학 교수

    1959년도에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고작 83달러였다. 이 수치 하나만으로 당시의 궁핍이 어느 지경이었는지 알고도 남는다. 문제는 가난이 아니라 그것이 해소될 전망이 도무지 없어 보였다는 사실이다.6·25 이후의 베이비붐으로 어린아이가 늘어 살림살이 전망은 앞이 캄캄할 따름이었다. 장면 정부 시절에 경제개발 계획을 세우고자 했지만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국자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북한의 존재였다.5개년 계획이 끝나는 시점의 경제지표를 실현 불가능할 정도로 높여 잡아도 북한이 1959년에 이미 달성한 바에 미치지 못하는 분야가 허다했다. 그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북한은 가난해서 거지가 득실거린다.”는 대민 선전이 뿌리째 흔들릴 판이었다. 그러나 60년대에 우리나라는 몸에 밴 오랜 궁기(窮氣)를 떨어내고, 세계 자본주의사에 남을 만한 기적을 이루었다. 무엇이 우리 경제에 기적을 안겼는가? 그 이유로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른바 베트남 특수이다.1965년부터 1972년까지 베트남 전쟁으로 우리가 벌어들인 총 수입은 10억달러를 웃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바람에 1인당 GNP는 1964년에 105달러였으나 1973년에는 373달러로 300%이상 증가했다. 베트남 특수로 우리 산업기반 자체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미국의 신뢰를 얻어 외자도입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렸고, 그로 인해 정유·화학·시멘트·철강 등의 전략적 기간산업의 설비 구축에 성공할 수 있었다.6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에서 우리 기술로 냉장고와 텔레비전 수상기를 만들어냈을 때 국민은 그런 ‘첨단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했다. 그런 기쁨은 만약 베트남 특수가 없었다면 아마 최소한 몇년은 더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베트남 특수의 성과는 외형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쌓은 우리 토목 건설의 경험은 1970년대 이후 중동 등 각지에서의 해외건설 붐을 가능하게 했다. 더구나 우리 기술자들이 베트남으로 중동으로 진출하면서 경제활동의 범위가 그야말로 지구적으로 확장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소득이다. 우리가 60년대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데에 베트남 특수가 기여한 바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우리로 하여금 느닷없이 베트남 특수를 생각하게 한 것은 일본이다. 일본 역시 이웃나라의 전쟁 덕을 톡톡히 본 나라다.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경제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한국전쟁 특수로 단숨에 2차대전 이전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켜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기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 덕으로 다시 일어섰으면서도, 일본은 우리 가슴에 끊임없이 못을 박는다. 총리라는 분은 잊을 만하면 신사를 참배하고, 정객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망언을 내뱉는다. 일본에도 한류가 통하고, 그래서 이른바 ‘욘사마 붐’이 일고, 그 여파로 요즘도 남이섬이 통째로 일본 관광객 차지가 되어 있는 사실에서 일본 국민의 정서가 달라지고 있음을 체감하지만, 일본의 우파 정치인들, 우파 지식인들은 그런 흐름에 찬물을 끼얹기 일쑤다. 그들은 2세에게 일본인으로서 긍지를 갖게 하는 데 우리나라만큼 좋은 소재가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속좁은 일본에 대해 우리가 모멸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일본이 우리에게 좋은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면서 우리가 베트남을 위해 무엇을 도울까를 아울러 생각해야 한다. 김민환 고려대 언론학 교수
  • [대정부 질문] 웃음바다 만든 “거시기…”

    [대정부 질문] 웃음바다 만든 “거시기…”

    국회 대정부질문 마지막날인 14일 교육·사회·문화 분야에서 진행된 여야 의원들과 국무위원들간의 공방은 때때로 팽팽하면서도 부드러운 분위기도 연출됐다. 우선 16대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불법 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철창’ 신세를 지고 있는 정치인을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폭소’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안영근 의원은 이 대목에서 ‘거시기론’을 펼쳐 일단 눈길을 끌었다. 안 의원은 김승규 법무부 장관을 발언대에 세운 뒤 “대통령이 아무리 헌법상 사면권 고유 권한을 갖고 있다고 해도 법무부장관이 건의를 해주시면 ‘거시기’한지.”라고 물어 의석의 폭소를 유도했다.‘거시기’를 통한 농담성 질책에 김 법무장관은 “‘거시기’라는 말은 제가 잘…”이라고 웃은 뒤 “하여간 ‘거시기’에 대해 저도 잘 생각해 보겠다.”며 다시 웃었다. 그러나 이해찬 국무총리는 “(총리가)대통령에게 건의해서 될 일은 아니고, 국민적인 공감대 속에서 대통령이 판단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한나라당 정화원 의원은 시각 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정부질문 발언대에 서 ‘소수자’의 인권을 대변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특히 참여정부가 ‘장애인 불참 정부’라고 혹평하면서 ▲장애인 연금제 도입 ▲장애인 차량 액화석유가스(LPG) 면세 보장 ▲지하철 역사 엘리베이터 설치 의무화 등을 주장했다. 정 의원은 “점자 원고를 손으로 읽으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양해를 구했으나, 실제로는 대부분 내용을 미리 암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해찬 국무총리를 답변석에 부르면서 “총리가 나오셨는가.”라고 물으면서 “시각 장애인에게는 왔다 아니다를 말해주는 것이 세계적인 예의”라면서 “앞에 왔다가도 모른 척 지나칠 경우, 시각 장애인들은 슬퍼하게 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여야 의원들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제시해 관심을 모았다. 한나라당 허천 의원은 “식민 통치기에 일본의 표준자오선인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규정된 표준시를 바꿔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같은 당 권오을 의원은 “동해의 고유 명칭인 ‘한국해’가 국제 사회에서 설득력과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열린우리당 권선택 의원은 “최근 해외 대학들이 잇따라 한국어 강좌를 폐지하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예산 증액 등 특별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은 “건강보험 급여 확대 예산인 8000억원을 암 질환에 집중 투자해 암 환자부터 무상의료를 우선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 총리는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유족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유족에게 환원하거나 유족 뜻에 따라 부산 시민에게 환원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다고 본다.”고 답변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월드 이슈-中·印 갈등씻고 손잡나] 23억 ‘친디아’ 팍스아메리카나 맞선다

    [월드 이슈-中·印 갈등씻고 손잡나] 23억 ‘친디아’ 팍스아메리카나 맞선다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친디아(CHINDIA·중국과 인도의 합성어)’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62년 국경분쟁 이후 43년간 앙숙으로 지낸 양국이 지난 11일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 만모한 싱 인도 총리의 정상회담을 통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항공, 교육, 과학기술, 관광, 문화교류 등 다양한 부문에서 전방위적인 협력에 착수한 것이다. 인구 23억(중국 13억, 인도 10억)의 두 아시아 거인이 약속대로 손을 맞잡을 경우, 아시아 지역안보와 국제무역 환경에 큰 변화가 일 전망이다. ●중국, 인도 앞세워 미국의 포위전략 돌파 두 나라의 화해로 ‘아시아 안보 지형’에 일대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중국 입장에서 인도와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 구축은 시시각각 조여왔던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의 일각을 돌파했다는 의미가 적지 않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중앙아시아, 인도 등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 서부지역에 대한 포위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 군사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지난달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아시아 순방 당시 인도와의 군사협력 강화를 약속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러시아와의 전통적 우방관계인 인도에 대해 러시아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가상 적국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향후 미국과 인도는 미사일 방어체계(MD)를 비롯한 안보분야는 물론 첨단기술 및 경제·에너지분야 협력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인도에 F-16 전투기와 패트리엇 미사일 방어체계,PC-3 해상 초계기 등의 첨단무기 판매를 결정했다고 중국 관영 주간 ‘세계보(世界報)’ 최근호가 보도했다. 그러나 중국은 인도와의 최대 걸림돌인 국경분쟁의 정치적 해결이란 원칙에 합의하면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다. 미·일 동맹을 주축으로 하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일대 타격을 준 것이다. 적어도 중국은 인도를 친미 국가로 기울지 않게 했고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팍스아메리카나(미국 중심의 세계지배)’에 맞선 ‘다극화 전략’에 시동을 걸었다. ●美 아시아 전략에 일대 타격 베이징 우주항공대학 국제전략연구소 장원무(張文木) 교수는 “중동 페르시아만과 말라카 해협 사이에 위치한 인도는 전략적 요충지”라며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에 인도 역시 강한 압력를 느끼고 있어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 여지는 많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중국의 당근전략이 보다 구체화되고 있다. 원자바오 총리는 중·인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은 인도가 유엔과 국제무대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며 인도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지지를 분명히 했다. 그는 “인도의 소프트웨어와 중국의 하드웨어를 마치 파고다(탑)를 쌓듯이 결합시키면 두 나라는 ‘아시아의 세기’를 열어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기적으로 양국간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했고 지난해 137억달러였던 양국의 교역액을 2010년까지 300억달러로 확대키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홍콩 아주시보(亞州時報)는 두 나라가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경분쟁 ▲중·인·미 삼각관계 등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인도의 줄타기 외교 인도 역시 미·중간 파워게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국익을 극대화시키는 ‘줄타기 외교’를 시작했다. 아시아 대국을 꿈꾸는 인도는 일본과 싱가포르 등과 손잡고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동진(東進) 전략’을 추진 중이다. 지난 40여년간의 폐쇄경제에 종지부를 찍고 매년 6% 안팎의 경제성장을 지속,2050년 ‘라이벌 중국’을 따라잡겠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인도가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지만 동맹관계까지 발전시키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국과 아시아 패권을 다투는 일본도 최근 인도와의 관계개선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 카말 나스 인도 통상장관은 13일 “최근 인도와 일본의 교역이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며 일본의 대인도 투자 확대를 요청했다. 이에 화답하듯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도 이달 말 인도를 방문할 예정이다. 일본 총리의 인도 방문은 5년 만에 처음이다. 일본은 지난해 전체 ODA(공적개발원조)의 24%인 11억 4000만달러를 인도에 제공하며 인도에서의 시장확대를 노려 왔다. 인도는 중국과 미국의 ‘파워게임’을 활용하고 중국 역시 인도를 앞세워 미국의 대중 포위전략을 견제하겠다는 ‘3인 4각의 전략 외교’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oilman@seoul.co.kr ■ 양국 경제협력의 미래 중국과 인도의 전략적 접근이 가속화되고 있는 분야는 경제분야다.11일 뉴델리서 발표된 ‘델리 선언’을 구체화해 나가기 위한 후속 조치들이 이어지고 있다. 두 나라는 우선 오는 10월 이전에 경제무역 및 과학기술 공동위원회 개최를 위한 실무준비에 착수했다. 과학기술과 금융시스템 분야에서 별도의 협력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정보 교환, 인적 교류 등도 준비하고 있다. 중국은 한 발 앞선 인도의 정보통신기술(IT)과 금융·서비스업 분야의 노하우 전수를 희망하고 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인도 방문 후 처음 찾은 곳이 실리콘밸리인 방갈로르인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원 총리는 이 자리에서 “중국의 하드웨어와 인도의 소프트웨어를 합치면 세계 IT업계를 석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항공우주·생명공학 분야도 시너지효과 기대 원자력, 항공우주, 생명공학 등에서도 양국은 서로 주고 받을 것을 찾으면서 ‘동반 상승’을 꾀하고 있다. 기술 이전과 관련, 선진국들의 견제를 받고 있는 동병상련 입장에서 서로 연합을 통해 기술을 교류하고 시장을 공유해 이같은 봉쇄를 뚫겠다는 전략이다. 과학기술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기술합작지도 위원회의 발족과 올해내 상호 첨단기술교류회의 개최 등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 가시화되는 에너지 및 자원 협력도 대표적인 협력 분야다. 양국은 일단 원 총리의 방문을 계기로 에너지 및 자원 협력 등 공동 대처의 발판을 놓았다는 평가다. 국제 석유시장에서 원유확보를 위한 입찰경쟁 자제 및 해외유전 공동개발 등에 의견접근을 봤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지금까지 원유 공급량의 각각 40%와 70%를 해외에 의존하는 중국과 인도는 국제 석유시장에서 입찰경쟁을 벌이다 가격상승 부담 증가란 자충수를 둬 왔다. ●2008년까지 교역액 200억弗로 확대 인도의 마니 샨카르 아이야르 석유장관은 지난 2월 “중국과 인도의 경쟁으로 다른 나라들의 배만 불려왔다.”며 양국간 협조체제 구축의 필요성을 지적한 바 있고 중국측의 호응도 받았었다. 중국 3대 철강회사 가운데 하나인 중국 우한철강의 경우 주 수입원인 호주 BHP사가 철강석 가격을 올리자 인도로 수입원을 다원화할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같은 흐름과 맥이 통한다. 인도는 이와 함께 쌀, 포도 등 농작물의 중국 수출길도 열었다. 두 나라의 지난해 교역액은 137억달러. 전년보다 79%나 늘었다. 지난 1991년 2억 6400만달러에 비하면 폭발적인 증가세다. 교역액을 2008년까지 200억달러로 늘리겠다는 것이 두 나라의 목표다. 양국간 무역액이 연간 200억달러인 인도·미국간의 무역액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中·印 갈등의 역사는 국제사회에서 앙숙으로 알려진 중국과 인도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그리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1950년대까지만 해도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온 두 나라가 총부리를 들이대게 된 것은 국경분쟁 때문이었다. 현재 양국이 분쟁 중인 지역은 서쪽 카슈미르 일부인 악사이친과 동쪽 아루나찰 프라데시이다. 악사이친의 히말라야산 국경을 두고 1962년 10월 발발한 양국 전쟁은 40여일 만에 중국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고 중국은 인도가 점유했던 악사이친을 빼앗아 버렸다. ●1962년 국경분쟁이후 앙숙관계 악사이친은 현재 중국의 자치주인 신장(新疆)과 티베트를 잇는 고속도로가 나있는 전략 요충지이다. 중국은 아루나찰 프라데시도 점령했지만 병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리적인 문제점과 국제적 비난 등을 고려해 곧 철수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선조가 현재 중국의 자치주인 티베트에서 왔다는 점 등을 들어 아직까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영국, 인도 식민지배가 분쟁의 씨앗 두 나라간 국경 분쟁의 씨앗을 뿌린 당사자는 영국이었다.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영국은 티베트와 접한 인도의 북방 국경선을 명확히 정하지 않았다. 인도가 독립을 하고 중국이 1950년 티베트를 자치주로 강제 편입시키면서 시작된 양측의 갈등은 1950년대까지는 외교적으로 무마되는 듯 보였지만, 산발적 총격전이 일어나다 1962년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전쟁은 또 다른 갈등을 불러왔다.‘인도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기록된 전쟁 패배 이후 인도는 핵무기 개발 등 전격적인 국방력 증대에 나섰으며 중국은 인도를 견제하기 위해 인도의 숙적 파키스탄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지원했다. ●티베트 문제가 또 다른 갈등 불러 티베트 문제도 두 나라가 충돌을 거듭해온 부분이다. 인도는 중국으로부터의 티베트 독립을 외치는 달라이 라마가 1959년 봉기에 실패하자 자국 내 다름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게 해주었다. 티베트가 중국에 강제 편입됨에 따라 사라져 버린 중국과의 지리적 완충지대를 복원하도록 지원한다는 의미가 컸다. 하지만 양국은 가장 큰 쟁점인 국경 문제의 경우 1962년 전쟁 이후에 설정된 ‘실질적 국경선(LAC)’은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특히 지난 10여년 간 실무협상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이번 양국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합리적 해결’을 대전제로 구체적인 타협안을 이끌어낼 것으로 전망된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열린세상] 독도, 위기의 순간에 대비를/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일본 역사교과서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여 문제가 된 지 20여년이 넘었다. 한때 전향적인 교과서 서술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1995년 일본의 사회당 당수인 무라야마 총리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정점으로 오히려 훨씬 심각한 극우화의 길을 달리고 있다. 그나마 교과서 문제는 역사적 사실의 선택과 해석에 있어서 다양성의 가능성을 남긴다는 점에서 학술적 검토의 여지가 있지만, 공민교과서로 옮겨 붙은 독도영유권 문제는 가부의 결단을 향해 치달아 나가는 우려스러운 모습이다. 우리나라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안으로 모는 것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절묘한 타이밍 때문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는 근거인 시마네현에의 편입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2월 22일에 일어났다. 육전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둔 일본군이 바야흐로 동해에서의 일전을 앞두고 있을 때이다. 이미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어느 지점이든지 수시로 군사적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영토를 유린한 상태였다. 일본이 추천한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스가 외교고문이 되어 대한제국은 외교권도 침해당했다. 대한제국 국토 전체의 안위와 주권 자체가 유린된 위기의 상황에서 일본의 시마네현이라는 한 지방이 독도를 현에 소속시키는, 자기들만 아는 고시를 발하였다. 일본의 한 지방이 발한 고시가 무슨 국제적 외교적 의미를 지닐까마는 곧이어 진행된 외교권의 탈취와 보호국화, 그리고 일본의 한국병합에 의하여, 독도는 최초로 침탈당한 한국의 영토로서, 병합에 의한 전국토 탈취의 전초요, 상징이 되었다. 일본이 패전한 뒤 전후처리를 위한 강화회담이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다. 일본의 적극 반대로 우리나라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없었던 이 회의에서, 애초 연합국 측의 초안에 한국영토로 되어 있던 독도가 일본의 적극 로비로 인해 본안에서는 분명하게 명기되지 못했다. 이후 일본은 이를 빌미로 독도영유권 분쟁을 야기했다.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된 뒤 6·25전쟁이 일어나고 전후복구에 경황이 없어 제대로 국토를 보살필 겨를이 없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30여년 동안 극심한 무역역조를 겪은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를 당했다. 이웃나라 한국의 위기에 대하여 일본 금융기관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앞장서서 투자액을 회수해 감으로써 위기를 부채질했다. 그리고 그 위기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본정부는 1965년 체결한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외환위기의 극복을 위해 일본의 협조가 절실했던 우리나라는 일본의 안을 받아들여 독도를 한·일간의 공동어업수역에 넣고 말았다. 어업협정이므로 영토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애써 자위하면서. 그로부터 이제 불과 6년여, 일본은 본격적으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한다. 미·일동맹의 강화가 그 배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와 그들 나라와의 영토분쟁을 위한 전초전과 같은 느낌도 주고 있다. 그러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계기로 국가의 재도약을 꾀하려는 일본으로서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거센 반발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독도문제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되면서 수면 아래로 잠복할지 모른다. 문제는 미래에 올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다. 북핵문제가 원만한 결론을 맺지 못하거나 또는 북한정권의 붕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경우의 위기이다. 상대의 위기를 기다리면서 치밀하게 징검다리를 하나씩 놓아가는 일본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공민교과서에 올린 주장을 관철하려 들지 모른다. 독도위기의 해법이 결국 한·일간의 교류와 상호이해밖에 없다는 방향으로 흐를 것을 뻔히 알고 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온축된 상호이해가 한순간에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위기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이웃의 과거행적 때문이다. 나쁜 이웃과 함께 사는 게 불행이라는 한탄은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는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대책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 WE에서 경품을 펑펑 쏩니다~

    WE에서 경품을 펑펑 쏩니다~

    늦도록 피우지 않아 그토록 애태우게 하던 봄꽃이 드디어 활짝활짝 피었습니다. 봄꽃은 추운 날씨에 얼마나 많이 움츠려 있었는지 사방에서 방긋 웃고 있네요. 노란 개나리와 함께 아이들도 신났습니다. 귀여운 개나리를 눈으로 즐기면서 경품 행사에도 참여해보세요. 옆에 있는 사진 조각 가운데 위의 원본 사진과 틀린 조각이 있습니다. 틀린 곳의 신문 조각을 모두 오려 엽서에 붙여 보내주세요. 모두 10명을 뽑아 에버랜드 자유이용권을 드립니다. 사연과 함께 보내주시면 추첨할 때 참작합니다. 많은 응모 바랍니다. ■ 경품 에버랜드 자유이용권(3만원 상당) 2장씩 ■ 보내실 곳 (100-745)서울시 중구 태평로1가 25 서울신문사 편집국 We팀 (성명, 우편번호를 포함한 주소, 전화번호 반드시 기재) ■ 마감 4월25일 오후 6시 도착분까지. 당첨자 발표는 28일자. 62호 당첨자는요 ●이윤경(서울 사당동), 신둘선(경남 거제), 최명인(경기 분당), 김지택(경북 청송군), 홍영화(부산 감만동), 민지영(서울 문래동), 최진옥(경기 고양), 임주명(경남 마산), 성애선(서울 신정동), 신승순(서울 아현동) ●서울지역 당첨자는 4월18일부터 5월2일까지 본사 4층 주말매거진 We팀으로 오후 6시까지 방문, 찾아가시기 바랍니다.(신분증 지참, 주말 제외) ★62호 정답 2, 7, 9
  • “한국에 아픔준데 반성”

    |도쿄 이춘규특파원|마치무라 노부타카 일본 외상은 13일 “1945년까지 한국인에게 대단한 아픔을 드린 데 반성한다.”면서 “아울러 그러한 일본의 자세를 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의 담화와 98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 및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공동선언에서 밝힌 바 있다.”고 말했다. 마치무라 외상은 이날 오후 ‘독도수호 및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대책 국회특위’ 대표단(단장 김태홍 의원)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양국 정상회담이 더욱 좋은 환경에서 열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고 참석 의원들이 전했다. 마치무라 외상은 독도 문제에 대해 “한국이 식민지 지배와 관련해 생각하는 것을 이해한다.”면서 “그러나 양국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왔고, 이 문제의 의견 차이가 크게 부각돼 양국 관계가 손상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taein@seoul.co.kr
  • ‘반크’ 우리땅지키기 전국민 캠페인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www.prkorea.com)’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맞서 ‘전국민의 우리땅 지킴이화’에 나섰다. 반크는 12일 ‘2005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중점 사업’을 발표하고 “그동안 회원만을 중심으로 진행했던 ‘한국바로알리기 사업’을 민간기업과 일반시민 등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캠페인으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눈길을 끄는 사업은 ‘역사교과서 왜곡 인터넷 확산 저지 프로젝트’. 고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임나일본부설’을 담거나, 조선왕조를 ‘이씨왕조’로 비하하는 등 왜곡된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는 웹사이트가 벌써 1만개에 이르고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전국민의 동참을 호소하게 됐다는 것이다. 반크는 특히 웹사이트 관리자에게 정보 수정을 요구하는 기존의 방어적 활동에서 벗어나 “일본의 역사왜곡을 수용하는 것은 일본의 침략주의와 군국주의 부활을 묵인하는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하는 등 방법도 ‘업그레이드’한다는 방침이다. 독도와 동해를 영문으로 표기한 지도도 100만장을 배포하기로 했다. 자매결연한 해외 학교나 기업은 물론이고, 배낭여행객이나 해외동포 등 여러 통로로 ‘반크 세계지도’를 보급하는 것이 목표다. 또 일본의 초·중·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하는 등 ‘일본 국민들과 친구 사귀기’운동으로 민간 교류를 추진,‘우정’을 통한 한국 바로알리기 운동도 펼쳐 나간다는 계획이다. 박기태 단장은 “일본은 50년 동안 왜곡교과서의 내용을 세계에 퍼뜨려 왔다. 현재 파악하고 있는 왜곡 웹사이트만 100만개에 이르지만 우리가 7년 동안 바로잡은 웹사이트는 319개밖에 되지 않는 등 반크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새로운 사업을 펼치는 배경을 설명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직격토론] 日 “한국 독도지배 강화땐 맞대응”

    [직격토론] 日 “한국 독도지배 강화땐 맞대응”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영유권 주장을 둘러싼 파문이 확산되면서 한·일 양국관계가 유례없는 냉각기를 맞고 있다. 서울신문은 8일 건국대 법대 김창록 교수와 도쿄신문 야마모토 유지(山本勇二) 서울지국장의 대담을 통해 교과서·독도 문제 등 쟁점과 양국간 동반자 관계 재정립을 위한 해법을 찾는 자리를 마련했다. ●야마모토 유지 지국장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독도는 일본 땅이다. 양국의 외교로 사태가 현재보다 나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독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10%도 없고 관심도 없다. 한국이 독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한다면 일본도 대응을 할 것이다. 지난해까지는 다케시마에 대한 보도가 없었는데 일본 정부의 대응도 변한 것으로 짐작된다. 교과서의 경우 합격본이 신청본보다 많이 수정됐다. 부드러워졌다. 채택률도 높아질 것이다. ●김창록 교수 독도 문제는 일본 정부가 지나치게 갈등을 키우고 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분명히 한국의 땅이다. 한국민들은 영토 문제만이 아니라 과거사와 직결된 인식을 하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계속 도발하면 이 문제가 필요 이상으로 심각해진다. 문제의 본질과 한·일 관계를 고려해 잘 관리해야 한다. 교과서의 경우 역사인식을 개선하지 않으면 계속 검정과 채택률 문제가 불거질 것이다. 일본은 역사문제에 대한 몰이해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야마모토 양국 국사교과서를 비교해보면 한국은 한·일합병에서 광복까지 40년을 60페이지에 걸쳐 다뤘다. 일본은 2∼3페이지밖에 없다. 이같은 정보량 차이가 한·일 양국민의 역사 인식의 차이로 나타난다. ●김창록 양의 문제만이 아니다. 교과서 기술에 깔려 있는 역사 인식이 문제다. ●야마모토 도쿄신문에 한국 초등학교 역사교과서 내용을 소개했다. 일본 신문에서 한국 교과서를 다룬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안용복, 다케시마 편입, 위안부 문제, 안중근·유관순 선생 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간 시설을 정비하고 개발을 하고 토지 조사도 했지만 한국인은 이 점에 대해서 강하게 부인한다고 기사를 썼다. ●김창록 최근 문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 사회가 분기점에 와 있고 그 분기점이 무엇을 의미하며 방향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 정부의 태도가 과거와 상당히 달라졌다. ●야마모토 4년 전 교과서 파동 때와 비교해보면 과거에는 일본의 많은 교과서가 위안부 표현을 썼지만 현재는 거의 없다.4년 전보다 역사 반성이 명백하게 줄어들고 일본이 아시아 근대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부분이 늘었다.1995년 무라야마 총리는 식민지배와 전쟁에 대해서 사과했다. 고이즈미 정부도 이것이 기본 입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지난 20년 동안 일·미동맹, 중국의 강대국화, 북핵문제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우경화라고 볼 수 있지만 일본 사회가 무라야마 총리 시대와는 달라지고 있다.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대로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의미가 없다고 하기도 한다. ●김창록 1995년 무라야마 총리는 식민지배를 사과했고 1998년 한·일 신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도 오부치 총리가 거듭 사과했다. 고이즈미 정권 이후 기본 입장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야마모토 일본 사회는 1998년 이후에 변화가 있었다. 북한의 움직임이다. 핵문제나 납치문제가 일본의 태도를 변하게 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김창록 북한 관련 문제들이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자위대 파병과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이 변하는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일본의 정체성 변화가 한국에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야마모토 일본 국민이 최근 2∼3년간 관심을 갖는 것은 북한 문제이다. 북한이라는 위험한 나라가 있어서 방위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됐다. 대북 압력책과 테러와의 전쟁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과적으로 변했다고 본다. ●김창록 대응방식이 중요하다. 납치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실제 갖는 의미보다 너무 크게 과장됐다. 아시아 전체 질서에서 다뤄져야 하는데 너무 선정적으로 접근했다. ●야마모토 일본은 납치문제 때문에 북한을 지지할 수 없다. 일·북 수교를 하자는 여론이 줄어들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직접 시작한 외교니까 수교를 위해 노력하지만 외무성은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김창록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지향하는 국가로서 근린국가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북한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면 어떤 문제도 풀 수 없다. 세계의 지도국이 되겠다고 하기 전에 아시아에서 먼저 비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야마모토 일본 국민들은 일·한 관계에서 일본이 가해자, 한국이 피해자라는 인식이 있다.1998년 이후 월드컵 등 문화교류가 강화되고 파트너십이 생기면서 일·한 관계는 가해자·피해자가 아니라 동반자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일·북 관계는 납치와 미사일 문제 등을 이유로 일본이 피해자라는 생각이 계속됐다. ●김창록 한국민은 북한 정권을 지지하진 않지만 북한을 형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지메를 당하는 데 거부감을 느낀다. 일본은 한국이 같은 자유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편을 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역사적 맥락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잘못된 판단이다. ●야마모토 일본의 70대 이상 정치인들은 외교적으로는 사과를 하는 느낌이 있었지만,50∼60대 정치인들은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김창록 한국도 변했다. 김종필로 상징되는 일본통이 물러났다. 그 사람들이 지나치게 일본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면서 자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1987년 이후 한국은 크게 변했다. 스스로 민주화를 이루어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과거 문제보다는 현재의 경제력에 걸맞은 군사력을 갖추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은 저자세 외교로부터 대등한 파트너십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1998년 ‘한·일 신파트너십 선언’으로 과거사 문제를 털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은 과거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진정한 파트너가 되자고 약속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야마모토 일본과 한국 정치인의 교류는 활발하지만 불편해 보인다. 역사문제 때문인 것 같다. 일본 정치인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의 국회의원들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도 일본의 새로운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없다. ●김창록 적극적인 상호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은 양국 인식차를 해소하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식민지 배상문제를 해결하는 협정이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미봉책으로 덮어오다 보니 지속적으로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다. ●야마모토 사할린·원폭피해자·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은 1980년대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응해 왔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아시아 평화기금 창설에도 간여하지 않았는가. 역사 인식을 정리하자는 데 동의하지만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최선의 외교방법을 제의했는데 한국은 일본의 대응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김창록 원폭 피해자 문제의 일부 해결은 피해자들이 소송을 통해 쟁취한 것이지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어느 정도 노력을 했지만 피해자를 설득하기에는 부족했다. 게다가 고이즈미 정권 들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태도가 매우 부정적으로 변했다. 노무현 정부는 최근 일본이 보여주는 모습은 진정한 반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고 있다. 과거사에 대한 큰 인식차가 문제의 근원이다. ●야마모토 당분간 양국관계의 돌파구는 없다. 고이즈미 총리가 상반기에 한국을 오더라도 불편한 분위기가 될 것이다. 동북아가 계속 대립·갈등을 반복하고 있다. 너무 어려운 시대가 왔다. 한편에서는 교류가 계속된다. 일본 관광객의 숫자는 변함없다. 이론 대립과 교류가 동시에 나오는 시대이지만 희망을 찾고 싶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창록 낙관적이라고 전망할 수 없다. 갈등의 뿌리가 너무 깊다. 식민지배에 대한 양국의 이해가 충돌하는 한 계속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일본이 역사에 대해 보다 겸허하고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리 구혜영 박지윤기자 koohy@seoul.co.kr
  • [코드로 읽는책] 경제저격수의 고백/존 퍼킨스 지음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제국(帝國) 건설자들은 무력을 최우선으로 앞세웠다. 그러나 오늘날 기막힌 방법으로 현대적 ‘제국’을 건설해 나가는 미국을 본다면 고대 로마제국의 황제들도,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한 에스파냐의 왕들도,18∼19세기 수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던 유럽의 강대국들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말 것이다. 미국은 그 지배력의 범위와 강도에 있어서 역사상 어느 제국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제국적이다. 그리고 제국 건설의 첨병은 이른바 ‘경제 저격수’란 사람들이다.‘경제저격수의 고백’(존 퍼킨스 지음, 김현정 옮김, 황금가지 펴냄)은 미국이 이들 경제 저격수를 앞세워 탐욕을 채우는 과정을 폭로한 책이다. 책은 자유 보호와 평화 구축이란 미명 아래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유린하면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미국의 위선적 가면을 벗겨낸다. 저자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1971년부터 1980년까지 10년에 걸쳐 인도네시아,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등지에서 경제 저격수로 활동하며 미국 기업과 미국 정부의 이익을 위해 각국의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한다. 경제 저격수란 겉으로는 다국적 컨설팅 회사의 직원 신분으로 위장하지만 실제로는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훈련을 받고 미국의 이권이 걸린 곳에 들어가 해당 국가의 국고를 미국 기업이 손쉽게 털어내도록 회계부정, 선거조작, 뇌물, 협박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공작을 벌이는 경제 전문가다. 그는 인도네시아 전력 개발 사업, 석유 파동, 사우디 아라비아 돈세탁 프로젝트, 파나마 운하 소유권 재협상 등 20세기 경제사의 굵직한 사건들 이면에서 경제 저격수로 일하며 미국의 세계 경제 약탈에 한 몫을 담당했다. 경제 저격수들의 활약 이면엔 미국 특유의 ‘기업정치’가 있다. 거대 기업과 정부, 은행이 삼위일체가 되어 돈과 권력을 함께 주무르며 약소국을 대상으로 전횡을 일삼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처음엔 개도국에 호의를 베푸는 듯 행동한다. 개도국이 발전소, 고속도로, 항만 등을 지을 수 있도록 차관을 제공하는 것. 그러나 프로젝트 담당 업체는 반드시 미국 기업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기 때문에 빌려준 돈은 고스란히 미국으로 돌아온다. 더구나 과도한 차관을 감당하지 못한 개도국은 미국에 고삐를 잡히게 된다. 빚을 갚지 못하면 그 대가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유엔에서의 투표권을 장악하거나, 그 나라 영토 안에 군기지를 세우고, 석유 같은 중요한 자원을 빼앗거나 파나마 운하의 통제권 등을 뺏기도 한다. 책에 따르면 경제 저격수들이 실패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자칼’이라고 부르는 미 중앙정보국의 암살자들이 개입하고, 이라크에서처럼 자칼마저 실패하면 전통적인 방법, 즉 군인들이 쳐들어가는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이다.1981년 원인 불명의 사고로 숨진 하이메 롤도스 에콰도르 대통령과 오마르 토리호스 파나마 대통령은 실제로는 모두 자칼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주장한다.1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기고] 일본우익의 ‘선물’/하종문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

    2001년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은 0.039%의 채택이라는 참패에도 굴하지 않고 4년 후의 ‘복수’를 공언했다. 이후 고이즈미 내각의 각료를 비롯한 우파 정치가는 노골적으로 새역모 편들기에 나섰다. 게다가 소위 납치 사건 이후 일본 사회에 몰아친 ‘북한 때리기’ 광풍은 새역모와 일본의 우익들에게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절호의 찬스로 비쳤다. 우리가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동안 새역모의 복수극 준비는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4월5일 새역모가 펴낸 후소샤 역사교과서는 재차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했다.4년 전에 137군데의 수정을 거친 누더기 교과서로도 검정에 합격했듯이, 이번에도 120여 군데의 오류가 지적된 함량미달의 교과서였다. 마치 월드컵처럼 4년 뒤에도 우리는 또 후소샤 교과서 등장이라는 뉴스를 봐야 할 것인가? 4년 전의 상황과 비교해 보자. 먼저 한국 정부의 경우,2001년에는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서 ‘과거사는 청산되었다.’고 밝힌 것이 결정적으로 정부의 발목을 붙잡았다. 들끓는 국민감정에 떼밀리듯이 주일대사의 소환이나 재수정의 요구 같은 강공책을 뒤늦게 내놓았지만 그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성급한 미봉책으로 탄생한 한·일역사공동위원회가 역사화해에 기여한 바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올해는 조금 다른 듯하다. 검정 발표 이전에 독도 문제로 양국 관계는 경색 국면으로 접어든 지 오래다.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대일 신 독트린이나 대통령의 담화에서 나와 있듯이, 인류보편적인 원칙이 한·일관계의 새로운 틀로서 천명된 바 있다. 그 구체적 실천의 장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역사교과서 문제이다. 따라서 분리 대응이라는 원칙이 결코 역사교과서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의지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문부과학성의 생색내기 검정을 통해 2001년도 수준에 턱걸이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일본호의 우향우가 너무 심각하다. 문제가 되는 기술내용에 대한 재수정 요구뿐만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한 일본 정부의 명확한 대처방안을 따지고 촉구할 일이다. 독도 문제와 마찬가지로 역사교과서 문제는 ‘역사 주권’을 위협하는 도발이라는 확고한 인식과 대응이 필요한 것이다. 시민사회의 대응도 짚어야 한다. 독도 문제는 뒤틀린 한·일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지만, 우리의 정당한 ‘공분’의 표출이 결코 다케시마를 노리는 일본의 우익과 같을 수는 없다.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내셔널리즘을 선동하는 일군의 한국인들은 작년 내내 친일청산 반대를 부르짖는 대열에 서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2001년은 국경과 민족으로 갈라진 한·일 양국의 ‘좋은 타자’를 발견하는 기회였으며, 그 결과 새역모의 참패를 이루어냈다. 바람직한 한·일관계와 동아시아의 미래를 걸고 벌어질 올해의 싸움은 ‘한국’이라는 틀에 시선을 가하고 그 외연을 넓히는 일과 결부되어야 한다. 지난 시절의 군사독재가 일본 보수정권과의 야합에서 자양분을 얻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현해탄을 사이에 둔 좋은 일본인과의 연대는 우리 내부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얼룩진 과거사를 청산하는 작업은 패자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모한 갈등과 대립으로 내몰려야 했던 보통 사람들의 해원이기 때문이다.4년 만에 새역모는 또 우리에게 소중한 선물을 주었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
  • 日, 왜곡시정 거부

    日, 왜곡시정 거부

    정부는 6일 일본 정부에 독도 관련 교과서 왜곡 부분을 즉각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등 초강경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같은 요구를 수용할 의사가 없음을 밝혀 한·일 양국의 입장이 접점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태식 외교부 차관은 이날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주한 일본대사를 외교부 청사로 불러 교과서 왜곡에 대해 전체적으로 유감을 표시하면서 일본 정부가 시정을 위해 노력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이규형 외교부 대변인이 전했다. 이 차관은 검정을 통과한 일부 공민교과서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차관은 특히 “공민교과서 검정 신청본의 내용이 검정 과정에서 일본 문부성의 일정 역할 및 관여로 변경 된 것으로 보인 점에 대해 설명을 요구한다.”면서 “일본 정부가 교과서 상의 독도 영유권에 관한 기술을 즉시 삭제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차관은 그러면서 “우리 정부는 독도 영유권을 개선하려는 어떠한 도발행위도 용납치 않고 엄정 대응해 나갈 것”이라며 “독도 문제로 인해 한일관계에 더이상의 긴장과 대립이 초래되지 않도록 일본이 부적절한 행동을 자제해달라.”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다카노 대사는 “독도에 관한 교과서 기술은 출판사의 판단에 맡겨져 있으며 구체적 기술은 편집자가 결정하는 것으로서 정부가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고 부인했다. 그러면서 “독도에 대한 양국의 입장은 상이하지만 그로 인해 어업문제를 포함해 양국관계가 훼손되지 않도록 대국적 견지에서 대처해 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차관은 “출판사의 독자적 결정으로 독도 문제가 기술됐다는 다카노 대사의 설명은 일본 언론의 보도내용과도 상치한다.”고 반박했다. 한편 라종일 주일 한국대사도 이날 일본 외무성을 방문해 일본의 교과서 왜곡 조치에 강력 항의했다.ACD(아시아협력대화)회의 참석차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를 방문 중인 반기문 외교부 장관도 7일 현지에서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일본 외상을 만나 교과서 왜곡에 대한 진상을 따질 예정이다. 김진표 교육부총리는 이날 국회 독도특위에 출석,“이달 중 개최될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와 유네스코 집행이사회, 유엔 인권위원회 등 각종 국제회의에서 교과서 문제를 집중 제기할 방침”이라며 “일제 식민지 피해 국가와의 연대를 통해 왜곡 시정을 위한 공동방안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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