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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훈교수 “박정희시대 뒤집어 보면 분배 잘돼”

    이영훈교수 “박정희시대 뒤집어 보면 분배 잘돼”

    최근 학계의 논쟁 가운데 선 인물이 있다. 바로 서울대 이영훈 교수다. 우리의 근대 경제성장이 식민지 때 시작됐다는 주장에 이어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에서 저임금 등의 꼬리표를 떼내자는 주장까지 내놨다. 이런 주장도 주장이지만 그의 특별함은 여기에 실증적 통계자료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쏟아지는 비판에 홀로 맞서고 있는 이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악역을 자처한 까닭은. -나는 실증주의자다. 온갖 오해에도 불구하고 내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은 자신과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내 주장은 식민지·박정희 시대에 대한 서술이 사실과 다르며,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자는 것이다. ●70년대 생산성 향상과 임금증가율 비슷 ▶박정희시대 논란은 어떤가. -흔히 저임금과 농어촌·중소기업 배제를 거론한다. 그러나 이는 60년대 데이터를 봤을 때나 맞는 말이다.60년대 이후 상황이 변했다. 이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주장이 지난 40여년간 고착화됐다. 상황 변화는 70년대의 고미가 정책과 대기업-중소기업간 산업연계정책인데, 고도성장은 이런 정책으로 가능했다. 저임금 부분도 노동을 한 단위 더 투입하는데 따른 생산성 향상과 임금 증가율이 비슷하게 갔다는 게 중요하다. ▶전태일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전태일로 70년대 상황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70년대의 임금이 생계비의 절반이었다는데 이는 단정하기 어렵다. 정말 그랬다면 빈곤의 세습과 광범위한 슬럼화가 누적되는 이른바 ‘사회적 침전’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뒤집어 보면 분배가 잘됐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는 것이다. ▶삶의 질을 통계로 평가할 수 있나.. -통계로 모든 역사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학적 접근법이어서 수많은 신화와 도덕적 허구를 깰 수는 있다. 그게 통계의 힘이다. ▶허수열 충남대 교수는 통계 수치만 보고 한·일 민족간 차별은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비판했는데…. -그 지적을 높이 평가한다. 허 교수 자료는 식민시기 생활수준이 최소한 수평을 유지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이는 수탈론 부정이다. 식민시기 경제성장을 30년대 후반의 일시적 현상으로 보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원리주의는 중세적 사고 ▶경제사 연구에 ‘민족’을 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허 교수와 다른 관점인 것 같은데…. -우리는 민족근본주의에 빠져 있다. 모든 기준이 민족이다. 그러나 근본주의, 원리주의는 중세적 사고방식일 뿐이다. ▶박정희 시대를 민주와 인권으로 평가하면 어떤가. -그것도 다시 봐야 한다.10·26 뒤 사면복권된 사람이 800명도 안된다.4000만 인구 중 일부다. 보통사람들은 일상적인 생활을 했다. 암울했다기보다 외려 자기실현 과정에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안 그렇다면 당시 10%대의 고성장을 설명할 수 없다.800여명을 비용으로 중화학·자동차공업, 철강산업을 일으킨 것은 평가받을 일이다. ▶시대를 평가함에 있어 도덕적 관점은 무의미하다는 뜻인가. -도덕적 잣대로 국가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그런 비판자들이 알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나라 만들기’는 장기적 과정이다. 미국 흑인들은 1950년대에야 공민권을 얻었고 조선도 반석에 오르는 데 70년이 걸렸다. 각 시대는 각각 담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도 그런 차원에서 봐야 한다. 두번째는 헌법이념과 대의민주주의를 이해하고 권리·의무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는 ‘교양인’으로서의 국민이 있느냐다. 조선시대 소농 중심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전환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근과거 집권세력은 상대적으로 청렴 ▶과거사 문제와 관련, 클린턴처럼 먼저 사과할 수는 없을까.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했다. 그리고 부패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과거 집권세력은 상대적으로 청렴했다고 본다. ▶결국 경제성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보는 관점인 것 같은데. -어떤 사물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이 성숙한 자세다.20세기 우리 역사도 그렇다. 식민지에, 분단에, 전쟁에 얼마나 끔찍한 경험이 많았나. 비판할 일이 있으면 해야겠지만 기본은 통합으로 가야 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이영훈교수가 주장하는 수량경제사란 이영훈 교수의 접근법은 수량경제사적 관점으로, 이는 서구에서 20세기 초부터 지속되어온 방법이다. 물가, 이윤, 임금 등 장기적인 경제지표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자는 입장이 그것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서구의 경우 90년대 들어 거의 폐기됐다는 반론도 있다. 통계로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정부는 각종 거시경제지표가 건전하다고 발표하지만 서민들은 와닿지 않는다고 아우성이고, 언론은 정부가 실체를 제대로 모른다고 비판하기 일쑤인 점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방법론은 60년대 이후 일본에서 활발히 다뤄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 중반 안병직 교수가 주도하는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받아들였다. 수량경제사가 한국의 근대 문제를 본격적으로 건드린 것은 90년대 중반. 그러나 우리에게는 공신력있는 자료와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서구 제국과 달리 근대적 의미의 통계가 도입된 것은 20세기 초였으니 그 이전 자료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이에 따라 낙성대팀은 양반가와 촌락의 각종 고문서에서 의미있는 통계치들을 추출해 냈다. 지금의 ‘가계부’ 개념과 비슷한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 출간되자마자 논란을 불러일으킨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등의 연구물도 이들 고문서에서 추출한 자료를 기초로 했다. 즉, 경북 예천의 박씨가 문헌, 전남 영암의 문씨가 계(契)문서 등을 통해 농촌경제를 분석하고, 족보를 분석해 인구사로 연구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물론 비판도 많다. 일본 학계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또 다른 식민주의 폐해라거나 제한된 자료에 근거한 만큼 해석 역시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반론 등이 그것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정감록’ 때문에 민중이 울었다. 정감록은 민중의 희망이었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정감록을 이용해 자기 한 몸의 안락과 치부(致富)를 꾀하는 못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정감록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배층의 평가는 늘 부정적이었다.‘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잣대로 삼은 것이었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상당수 민중이 정감록 때문에 재산을 잃거나 심지어 목숨을 앗기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백백교(白白敎)의 아전인수(我田引水) 일제시대 백백교 사건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대표적인 사례다.1937년 백백교 간부 150여명이 집단살인사건으로 검거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조사 결과 핵심 간부 18명이 최소한 신도 314명을 살해한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이경득은 61회에 걸쳐 166명을 살해했고, 문봉조도 129명이나 되는 교인을 죽여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백백교는 교단 이름부터 ‘정감록’을 빌렸다. 정감록에 보면 말세에 사람이 다 죽은 뒤 “사람의 종자를 양백(兩白)에서 구한다.”고 했다.‘양백’은 곧 백백(白白)으로 풀이된다. 백백교에서는 이 구절을 끌어다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오직 백백교도뿐이라고 내세웠다. 또 한 가지. 정감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라도운봉두류산(全羅道雲峰頭流山) 성인출어함양림중(聖人出於咸陽林中)”이란 대목이 있다. 글자 그대로는 “전라도 운봉에 두류산 즉, 지리산이요, 성인은 함양 땅 수풀 속에서 나온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백백교에선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앞부분은 “전(全)씨가 도(道)를 열(라)고 운(運)을 만(逢)난다.”고 보았다. 뒷부분은 성인이 출현하기로 예정된 ‘함양림’이란 장소를 백백교가 창시된 함(咸)경도 운림(林)면 마양(陽)리로 풀이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이쯤 되고 보면 정말 기발한 해석이었다.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억지 춘향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백백교 식의 정감록 해석을 환영했다. 그들은 도리어 기상천외한 해석에서 비결의 힘과 매력을 발견했다. 그만큼 순리대로 살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백백’이란 “한 가지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만들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구호를 요약한 것이기도 했다.‘흰 것’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계룡산 바위가 희어진다.”는 구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흰 바위란 전통적으로 미륵을 상징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 가지 흰 것”은 정씨 진인이 출현할 시기이자 미륵부처나 다름없는 백백교의 교주를 가리켰다. 요컨대, 새 종교 백백교와 더불어 이 세상이 완전히 바뀐다는 선동적 믿음이 구호에 담겨 있었다. 백백교의 남자 신도들은 “백백백의의의적적적”이라는 주문을 줄곧 외워댔다. 그러면 무병장수하고 말세에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들은 말세에 서양은 불로 망하고, 동양은 물로 망한다고 했다.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본래 기독교 성경에 나와 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의 본고장 서양은 불로 망한다고 보았다. 동쪽은 서쪽의 반대라 물에 약하다고 풀이했다. 중요한 점은 백백교를 믿는 사람만이 무사히 살아 남는다는 주장이었다. 교단 측은 신도들에게 일단 한국의 53개 성지에 들어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다 말세의 심판이 닥치면 곧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라 했다. 금강산엔 ‘피수궁’(물의 재난을 피하는 궁궐)이 있고 거기서 잠시 기다리면 백백교의 교주 대원님이 하강해 신도들을 이상향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백백교의 이상향은 동해의 섬이었다. 동해 바다 한 가운데 3000리나 되는 영주란 섬이 있다고 했다. 그 섬엔 봉황과 기린이 살고 불로초도 있다. 신선처럼 살고 싶은 백백교 신도는 누구나 그리로 인도된다. 그러나 만일 부귀영화를 한껏 누려보고 싶은 이라면 계룡산으로 안내된다. 백백교의 수장인 대원님이 새 세상의 왕이 되어 교단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신도들에게 관직을 준다고 했다. 교단에 재산을 많이 헌납한 사람은 당연히 큰 벼슬을 받게 된다. 이런 감언이설로 백백교 지도층은 세상 삶에 지친 민중을 유혹했다. 백백교를 세운 이는 가난한 농부 전정운(全廷雲)이었다. 본래 동학교도였던 그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에서 백도교(白道敎)란 간판을 걸었다. 얼마 뒤 그는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교명을 백백교로 바꿨다. 그는 1904년 6월 사상 초유의 대홍수가 한국을 휩쓸어 말세가 된다면서 이상향에서 살고 싶으면 무조건 백백교에 입교하라고 선동했다. 물론 전정운의 예언은 빗나갔다. 그럼에도,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는 등 세상은 무척 어수선해졌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백백교의 거짓 예언을 뿌리치지 못했다. 교주 전정운이 늙어 죽자 아들 전해룡이 뒤를 이었다. 전해룡은 1923년 경기도 가평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교당을 지었다. 교단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높이려는 술책이었다. 그는 평소 단식을 잘했다.20일 동안 단식한 뒤에도 평소와 같은 기력을 과시해 신도들 사이에 신비감을 조장했다. 이 역시 28수라는 그의 허다한 고등 사기수법의 하나였다. 전해룡은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했다. 그뿐 아니었다. 만일 신도들의 자녀 가운데 아직 미혼인 여성이 있으면 성적 노예로 삼아 착취했다. 유부녀라 해도 용모가 아름다우면 마음껏 유린했다. 전해룡은 변태성욕자가 분명해 자기의 정사(情事) 장면을 숱한 여신도들이 지켜보게 했다. 그는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불렀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신도가 있으면 이상향에 보낸다며 산으로 끌고 가 남몰래 살해했다. 살인을 담당한 간부들은 벽력사(霹靂使)라는 명칭으로 부를 만큼 백백교 지도층은 집단광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살인극은 무려 14년간 지속됐다. 만일 교주 전해룡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교단을 배신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는 경우는 물론 간부나 첩이라도 태도가 변한 기색이 보이면 즉시 살해되었다. 또한 신도들은 재산을 전액 헌금하게 돼 있었는데, 이를 조금이라도 어길 경우 생매장 당했다. 엄청난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백백교는 무사했다. 교단 간부들이 해마다 거액을 상납했기 때문에 일제 경찰은 눈을 감아준 것이었다. 그러다 1937년 우연한 일로 백백교의 비리가 세상에 폭로된다. 백백교 사건의 충격과 파장은 컸다. 소설가 박태원은 ‘금은탑(金銀塔)’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소설화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시기 한국의 민중은 정치에 실의하고 생활에 궁핍했다. 근대 한국 민중의 불안한 사회심리를 이용해 우후죽순 격으로 뻗어난 것이 바로 백백교 따위의 악질적인 사이비 종교단체였다.1930년 6월 현재 정체불명의 그런 사이비 단체가 55개, 신도 수는 10여만명을 헤아렸다(동아일보 1930년 6월16일자 사설). 백백교 같은 사이비 종교단체는 암울한 시대배경 속에서 자라난 독버섯이었다. ●정감록을 이용한 재물 뺏기 ‘정감록’을 이용한 사기행각은 식민지 시기 사회 전반에 꽤 널리 퍼진 병리현상이었다.1930년께 김창하라는 사람은 ‘천병만마’(千兵萬馬·무수한 군대)를 격퇴할 해인(海印)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병통치약이라며 가짜 약을 판매하다가 검거됐다. 비슷한 무렵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에 살던 경호창과 최성기는 태백산 기슭의 벽촌을 돌아다니면서 곧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보천교도 외에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입교하라고 강요했다. 물론 입교 시에는 소정의 돈을 납입하게 돼 있었다. 경호창 등은 유언비어를 살포한 죄로 20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중앙일보 1932년 3월16일자). 이런 일은 식민지 사회에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사건은 조선 후기에도 많았다.1826년(순조 26) 충청도 청주에서 정상채라는 사람이 붙들려 처벌을 받았다. 그는 여러 고장을 들락거리며 나이와 이름을 멋대로 속였다고 했다. 도술을 부린다고 거짓을 늘어놓고 ‘환묘문(幻妙門)’과 같은 도술 책을 친구에게 주어 타인의 물건을 빼앗게 했다. 마침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그것은 전주곡에 불과하며 진짜 난리는 얼마 뒤에 일어난다며 민심을 선동했다. 그러면서 정상채는 진인이 이미 섬에 와 있다고 황당한 말을 꾸미는 한편 진인의 당에 가입하려면 이름을 직접 서명하라고 사람들을 졸라댔다. 뿐만 아니라 섬에 있는 진인의 군대에 군복을 지어 입힌다며 군자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모은 돈을 그가 착복했음은 물론이다. 정상채의 동료 박형서도 비슷한 혐의로 체포돼 사형을 받았다. 주된 죄목은 남의 재물을 속여서 빼앗고 ‘흉언(凶言)’ 즉 거짓 소문과 예언을 지어내 인심을 소란케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전쟁이 박두했다는 둥, 해도(海島)에 진인이 있다는 둥 거짓 예언을 퍼뜨리며 자기가 살길을 아노라 했다(실록·순조 26년 10월27일 을해). 비슷한 예는 정말 많았다. 박형서나 정상채 같은 사람들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그들은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해 군자금을 마련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변호인들은 왕조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면서 ‘범인들’이야말로 실은 ‘혁명아’였다고 강변하겠지만, 과연 그랬을까? 남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군자금을 생활비와 용돈으로 소비한 사람들이 과연 혁명아일지 의문이다. 그들이 말한 진인은 결국 환상적인 존재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금품을 건네준 사람들의 기대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기꾼이었다. ●홍경래의 난 그런데 어떤 경우엔 도무지 이것이 ‘혹세무민’인지, 사기행각인지 또는 진정한 의미로 민중의 투쟁이었는지를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결코 백백교와 동렬에 놓일 성질은 아니지만 경계 짓기의 어려움을 확인하기 위해 홍경래의 난을 예로 들어 보겠다. 결코 홍경래 난을 매도하려는 뜻은 아니란 점을 다시 강조한다. 홍경래 난은 1811년(순조 11) 12월18일 시작됐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을 장악했다.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관군의 반격을 받고 곧 정주성에 갇혀 버렸다. 정주성 싸움은 이듬해 4월19일까지 제법 오래 계속됐지만, 결국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기간 싸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란군 측은 여러 차례 격문을 내걸었다. 격문엔 정감록이 예언한 정진인(鄭眞人)도 언급됐다. 서북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하라, 세도정권의 가렴주구는 악행이라는 등 그 시대 서북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도 모습을 드러냈다. 참고로 정감록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면 대개 이런 식이었다. “지금 나이 어린 국왕과 주위의 간악한 무리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 그런데 다행히도 세상을 건질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성인은 나서부터 비범하신데 평안도 지역은 성인의 고향이라 직접 손을 대지 못하시고 우리들에게 명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셨다.” 정감록이 예언한 새 왕조의 창건자가 이미 홍경래의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로써 반란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인식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격문을 짓게 한 홍경래 자신은 각종 병서(兵書)와 술서(術書), 특히 ‘정감록’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풍수지리에도 능통해 전국을 유람했다고도 전한다. 홍경래 일당은 정감록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그런 까닭이겠지만 난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도 사람들은 정감록과 해도 진인에 대해 더욱더 이야기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홍경래 난은 무려 10년 동안 사전에 준비됐다고 했다. 조직적인 반란이었던 셈이다. 풍수 전문가 홍경래를 비롯해 우군칙, 김사용, 김창시 등 유랑지식인 또는 몰락 양반들이 반란군의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중국과 무역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이희저의 가산 다복동의 사저를 거점으로 삼아 평안도 각지의 부자들과 연합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운산에 광산을 열어 빈농과 유이민 등을 모아 훗날 군사로 동원했다. 이 당시는 청나라와 국경무역이 활발했을 때라 평안도 출신 가운데는 이희저의 경우처럼 대상인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수요에 맞춰 평안도엔 유기(鍮器) 등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광산 개발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다. 홍경래 일파는 이런 시대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이 기회에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서울로 진격해 일거에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홍경래를 지지한 계층은 민중이라기보다는 평안도 각지의 부호들이었다. 좌수와 별감을 비롯한 향임(鄕任·행정보조집단)과 별장(別將)과 천총 등 무임(武任·군사 및 치안담당자) 가운데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이 홍경래를 후원했다. 민중의 지지는 정주성을 지킬 때 엿보이는 정도였다고 한다. 본래 유랑지식인이었던 홍경래나 자칭 제갈공명이라 불렀던 우군칙은 반란을 모의하는 과정에서부터 갖은 방법으로 부자인 이희저를 포섭하는 데 주력했다. 결과적으로 이희저는 반란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책임지게 됐으며, 비슷한 처지에 있던 평안도 유지들을 후원자로 끌어들인다. 그런 점에서 홍경래 난은 일부 유랑지식인과 상층부 인사들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홍경래 등은 서북지방의 숙원이던 지역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했고, 그 점에 있어 해당지역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만했다. 하지만 일반 민중과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평안도의 부호들이 반군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점으로 보아 실상은 평안도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를 반영하는 반란이었다. 실제로도 격문을 분석해 보면 소농과 빈농 등 하층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1894년의 동학농민운동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만일 이 점을 확대 해석한다면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지배층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홍경래 등이 자주 거론한 ‘정진인의 출현’은 민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중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홍경래 난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혹세무민’이었다. 왕조의 입장은 그렇다 해도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한때 홍경래 일파를 적극 지지했던 평안도의 부자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한마디로 판단하기는 참 어려운 문제다.‘사물은 하나지만 해석은 구구하다.’라 했던 어느 역사가의 주장이 문득 뇌리에 떠오른다. 홍경래의 난은 복잡했다 해두자. 어쨌거나 틀림없는 한 가지 사실은 때로 정감록은 민중에게 고난과 아픔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했다. 이 점을 인식한 듯 근세의 종교지도자 소태산은 이렇게 말했다.“근래의 인심을 보면 사술(邪術)로 대도를 조롱하는 무리와 모략으로 정의를 비방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하여, 각기 제가 무슨 큰 능력이나 있는 듯이 야단을 치고 다니나니, 이것이 이른바 낮도깨비니라. 그러나 시대가 더욱 밝아짐을 따라 이러한 무리는 발 붙일 곳을 얻지 못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기고] 제대로 된 지방분권, 국가경쟁력 이끈다/오재일 전남대 행정학 교수

    민선 단체장이 재출범한 지 10년이 지났다.1950년대 자유당 정권이나 1960년 민주당 정권하에서도 지방자치는 실시되었었다. 그러나 1950년대의 지방자치가 주어진 지방자치였다면,1990년대의 부활된 지방자치는 민주화의 일환으로서 쟁취된 지방자치였기 때문에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0년전 민선 단체장 선거가 실시된 바로 이틀 후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민선 단체장 재출범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였다. 당시 여야가 첨예한 대립과 정쟁 속에서 지방자치 실시에만 지나친 관심을 가진 나머지, 지방자치의 본질에 걸맞은 제도적 설계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바, 올바른 지방자치 정착을 위한 논의를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지방자치란 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만을 뽑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주권자인 국민(주민) 가까이에 있게 해주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지방자치인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의 남용을 막고, 주인인 국민이 가까이에서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국민주권의 원리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제도로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자치를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의 자치의식과 함께 시민주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헌법 정신이 국정관리와 연계되어 잘 구현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방자치에 대한 헌법적 보장(헌법 제8장)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지방자치가 헌법기구로서 제대로 대우를 받아왔는가는 의문이다. 헌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국정운영은 너무나도 중앙중심적인 국정관리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 사무(73%)나 국세(80%)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을 뿐만 아니라 수도권 집중이 더 강화되어 가고 있어,‘지역’부재의 현상이 더욱 심화됨으로써 세계적 추세인 ‘지방화’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헌법과 지방화의 본질에 걸맞은 국가시스템을 재구축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점은 지방자치의 주요 원리 중의 하나인 보충성의 원칙에 충실하도록 하여야 하며, 아울러 분권가치가 국민들에게 체험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육자치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이루어져야 하며, 자치경찰이 창설되지 않으면 아니된다.19세기말 우리나라가 국제적 환경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가 어떠하였던가를 거울삼아, 민족적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분권형 국정운영 시스템의 기반을 공고히 하여야 할 것이다. 분권적 국정운영을 해 본 경험이 아주 미약한 우리나라에 있어서 지난 10년간의 지방자치는 실제로 나타난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주권재민의 정신을 구현시키는 등 풀뿌리 민주주의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여 오고 있다. 관청의 문턱이 낮아지는 등 주민지향의 정치·행정이 뿌리내리고 있으며,1998년 우리나라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기에도 중앙의 혼란이 지역사회에로 파급되는 것을 차단하기도 하였다. 단체장의 제왕적 권력에 대한 비판은 시민사회의 성숙과 단체장에 대한 견제장치의 제도화로 개선되어야 할 과제이지, 지방자치 그 자체를 부인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선진국의 역사적 경험은 중앙집권적 국정운영보다는 지방분권적 국정운영이 국가경쟁력 강화나 부패방지에서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선진국에서의 중앙정부는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교육이나 치안 등 미시적인 정책은 지방정부에 맡기고, 외교나 국방 등 민족적 생존을 위한 거시적인 정책에 집중하는 경향으로 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선진국과 같이 ‘작은 중앙정부’·‘커다란 지방정부’구현이라는 차원에서 과감한 중앙행정권한의 지방이양과 거기에 따른 재정분권을 실현시킴으로써 주민 생활 속에 체험된 지방자치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재일 전남대 행정학 교수
  • [영화속 수능잡기] 미션

    [영화속 수능잡기] 미션

    영화 ‘미션’은 1750년대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의 접경 지역에서 ‘과라니’족을 선교했던 예수회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는 유럽의 강국이 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아메리카에 영구적인 식민사업의 기반을 다져가는 때였다. 영화의 소재가 되는, 폭포 위에 위치한 원주민 선교회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의 구획 정리가 필요하던 곳이었다. 주인공 가브리엘 신부가 선교한 그 부락은 지리적으로 애매한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먼저 개척한 교회측의 승인 없이는 누가 그곳을 정치적으로 지배할지 미정으로 남아 있던 것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당국자들은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지배할 터이니 싸울 것 없이 교회의 판가름을 기다리겠다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주민의 의견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 즉 자결권(自決權)이 없다. 모든 것은 바깥 세계의 힘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교회는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하거나 노예로 전락시키고 평화로운 마을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것을 방임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교회는 미지의 땅, 야만의 땅을 문명화시키겠다는 미션(임무)을 내세우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신대륙에서 이권을 챙기겠다는 속셈을 미화한 것에 불과했다. 제국주의자들은 세계를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했다. 야만인들을 문명화하는 것이 백인들의 의무(mission)라는 명분까지 내걸고 식민지 정복의 길로 나선 것이다. 영국의 탐험가 스탠리는 아프리카를 가리켜 ‘암흑의 대륙’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는 빛이고 너희들은 어둠이다. 우리들은 이성이고 너희들은 미신이다. 우리는 문명이고 너희들은 야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들을 우리와 같이 계몽시키겠노라.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명분은 그럴싸하다. 한 민족과 국가를 침탈하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과 국가를 개화시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너희들은 스스로 근대화를 추진할 만한 자생적 능력이 없으므로 우리가 너희들을 근대화시키겠다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궤변이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전통은 전근대적인 것이 되고 전통적 믿음은 미신이 되며, 과학이 아닌 것은 모두 비이성적인 것이 된다. 제국주의의 비뚤어진 시각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서구의 폭력적 계몽주의가 이제는 우리 안에도 자연스럽게 내면화되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스스로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면서 우리 자신을 야만으로 규정하는 몰주체적인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서양인처럼 노랗게 염색한 머리, 토속적인 음식보다는 서양음식에 대한 선호,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면서도 서양인들은 세련된 존재로 보는 우리들의 태도가 우리 안에 깊숙이 각인된 서구우월주의를 말해준다. 롤랑 조페 감독, 로버트 드 니로,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1986작. 김보일 서울배문고 교사 uri444@empal.com
  • 예나 이제나 박람회엔 복권

    예나 이제나 박람회엔 복권

    안내 : 김화진(金和鎭) 옹 특등, 천원짜리 자동차 한대 1915년 공진회(共進會) 120만 인파 제1차 한국무역박람회가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에서 열리고 있다.「내일을 위한 번영의 광장」이라는「캐치·프레이즈」그대로 믿음직한 구경거리로 날이 날마다 사람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다. 한데 이번 무역박람회를 계기로 궁금증이 하나 더 늘었다. 우리 나라에는 언제부터 박람회가 있었으며, 그 옛날 박람회의 풍경은 어떠했나 하는 것이 그것이다. 옛날의 박람회는「가관(可觀)」투성이었고 일정 때였으므로 말 못할 울분도 많았다. 사실 우리에게는 우리 손으로 마련한 박람회가 없었다. 1906년의「기차박람회」, 이듬해의「경성박람회」, 1915년의「물산공진회」, 29년의「조선박람회」등이 다 일정이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선전하기 위한 선전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공진회」때,「공진회는 무엇인가, 시정 5년 기념일세. 천황폐하 덕택으로…」운운하는 노래를 주입시켜 가르친 것으로 보아도 당시의 사정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먼저 1906년「기차박람회」의 그 기차를 김화진옹(74)과 함께 타 보자. 이동시장 - 물건이 싸대요 박람회기차는 전국 35구(區) 돌고 돌아… 『물건이 싸대요. 광목을 좀 사야겠어』 마을에 기차가 들어오자 아낙네들의 입에서는『물건이 싸대요』가 사방에서 튀어나왔고,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아낙네들, 남정네들은 앞을 다투어 기차로 덤벼들었고, 광목, 옥양목, 비단 등의 옷감을 사들였다. 아마 2할쯤 싸게 살 수 있었던 듯. 그러나 기차 안에 진열해 놓은 물품은 별로 볼 것이 없었다. 대한매일신보 광무(光武) 10년(1906년) 11월 8일자 기사에 의하면「기차박람회」는 상품을 진열한 기차가 각 지방을 순회한 이동식 박람회. 낡은 상품진열차 3대와 화차 1대를 3천 5백원에 구입, 내부를 개조해서 진열장을 만들었다. 전국 35구(區)에서 출품했는데 1구 진열청원금은 1백원, 열차에서 먹는 식비는 각 출품인이 스스로 부담했다. 이「박람기차」가 순회한 곳은 남대문, 영등포, 수원, 대구, 김천, 부산, 마산, 인천, 대전, 평양, 신의주, 정주, 선천, 황주 등. 이해 8월 15일부터 12월 15일까지 전국을 돌았다. 이 기차는 이동시장의 역할도 겸한 셈이어서 각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의 특산물들을 앉아서 살 수 있었다. 「덕맥(德麥)」과 고치안주로 진탕 일녀(日女)의 교태 - 경성박람회 다음이 1907년의「경성(京城)박람회」. 지금의 내무부 자리에서 열렸던 듯하다. 당시 통감부의 일방적인 계획으로 열린 것인 만큼 일본 물건 전시장. 요정이 있었고. 기생들이 술을 따르는 등 애교와 수작으로 손님을 끌었다. 술은「덕맥(德麥)」(독일맥주)과 일본 약주(정종), 그리고 안주는 고치안주. 13세 소년 김화진은 국수와 떡을 얻어 먹었고, 초밥을 보고는 주먹밥이라고 불렀다. 일본 기생들은 삼미선(三味線:사미센)을 뜯으며 관객을 유인했고, 여자 관객을 위해「부인의 날」을 따로 두어 부녀자만 입장케 했다. 남녀유별, 여인들은 쓰개치마와 장옷을 쓰고 입장했는데 그런 식으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관용과 개화였을 터. 진열품은 여자 화장품, 그릇, 견직물, 완기 등 7만 6천여 점에 달했고 관람자 수는 20만 8천여 명. 한 집에 한 사람 강제징발(徵發) 「공진회 보따리」는 명월관행 1915년「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 물론 일본의 시정(施政)선전장이었으므로, 시골 사람들을 강제로 징발, 한 집에 한 사람씩 서울로 와야 했다. 기차값도 할인해 주고, 서울에 여관을 정해 주고, 개인 집도 임시 여관으로 쓰게 했다. 군수나 면장의 인솔로 서울에 온 시골 사람들은 한결같이 보따리들을 들고 있었는데, 이것이 유명한「공진회 보따리」라는 것. 새까만 보따리에서 갖가지 역겨운 냄새가 났는데, 그 뒤 무슨 나쁜 냄새를 풍기는 물건이 있으면『공진회 보따리냐?』빈정거렸다. 「공진회」는 경복궁에서 열렸는데, 당시 총독부에서「공진회」장소로 사용한다고 경복궁을 몰수했다. 진열품도 질이 나쁜 것과 좋은 것을 나란히 놓고, 나쁜 것은 조선 것, 좋은 것은 일제의 시정(施政) 때문에 잘 된 것이라고 선전했다. 경복궁 안에는 야외극장, 요정, 대중식당 등이 갖춰져 있었고 야외극장에서는「서커스」, 노래, 춤 등으로 관객의 흥을 돋우었다. 요정이라는 것은 서울의 유명한 요정들의 임시 출장소. 명월관(明月館) 출장소, 장춘관 출장소, 혜천관(惠泉館) 출장소 등이 나와 있었다. 대중식당에서는 장국밥, 설렁탕, 추탕 등을 팔았고 식권도 나누어 주었다. 농산물, 견직물, 농기구, 원서, 고서 등이 진열되었고 농악대가 장내를 돌아다니며 꽹과리와 피리를 불어댔다. 관람자수 1백 16만 4천여, 출품인원 1만 8천 9백여 명. 변사(辯士)의 신명에 넋 잃고 경복궁의 호화판 조선박람회 1929년의「조선박람회」. 가장 크고 호화로운 박람회였다는 이 박람회는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경복궁의 작은 건물들을 헐어버리고 진열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복권을 팔아서 관객을 모았다. 특등이 자동차(「호로)형 자동차) 그리고 광목, 소, 유성기, 사진기, 과자,「아사히」(朝日)담배 등의 상품이 구미를 돋우었다. 이만규(李晩珪)라는 사람이 자동차를 탔는데, 그것을 1천원에 팔아서「실컷 두들겨 먹고」집도 한 채 장만했다. 박람회 사무실에서는 신문기자들에게 2천원씩 주었고, 어떤 기자는 그 돈을 기금으로『삼천리』라는 잡지를 내기도 했다고. 장내에는 야외 영화관이 있어서 서양영화(주로 서부활극)를 상영. 무성영화였으므로 서상호(徐相昊), 성동호(成東鎬) 등 일류 변사들이 열을 올리고 있었다.『앞에 가는 자동차는 악당의 자동차, 뒤에 가는 자동차는 순사의 자동차…』또는『그때였다, 바람처럼 나타난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밖에『춘향전』,『심청전』,『배따라기』등,「구식연극」을 했고,「무도장」이라는 데서는 칼을 휘두르며 소리치는 일본 무사춤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농악과 함께 볼만했던 것은 봉산탈춤, 산대놀이 등의 가면무(假面舞). 당시『배따라기』와『항장무(項壯舞)』를 춘 조선 기생 백운선(白雲仙)은 지금도 7순의 나이로 살아있다. 8·15를 4년쯤 앞둔 1941년께에 동대문 밖 제기동 벌판에서 소규모의 박람회를 열기도 했으나, 그때는 소위 대동아전쟁 이후 일본이 피곤했을 때이므로 빈약했다. 그 후 우리 손으로 연 박람회가 1962년 4월부터 6월까지 열린 군사혁명 1주년기념「산업박람회」. 그리고 지금의「무역박람회」에 이른다. <宗> [ 선데이서울 68년 9/29 제1권 제2호 ]
  • 한중일 ‘역사왜곡 방지’ 심포지엄

    한중일 ‘역사왜곡 방지’ 심포지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파동이 낳은 최대의 성과는?아마 한·중·일 3국 시민사회의 건강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 가운데 일본 시민사회는 부러움과 우려의 대상이다. 철저한 풀뿌리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앞서 있지만 일본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 때문에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올바른 역사인식’이 일본 젊은이들에게는 ‘공자 왈 맹자 왈’하는 고리타분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며 지난 20여년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단체가 있다. 바로 ‘피스보트(Peace Boat)’다. 젊은이의 눈높이에 맞춘 활동 덕분에 ‘시민단체 활동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찬사까지 받고 있다. 심포지엄 참석 차 방한한 피스보트 대표 노히라 신사쿠를 만났다. 피스보트는 어떤 단체인가. -1982년 제1차 역사교과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역사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당시 언론인, 대학생, 연구자 등 200여명이 뭉쳐, 배를 타고 다니며 아시아를 직접 체험해보자고 했다. 이것이 피스보트다.1983년 정식 출범한 뒤 지금까지 49차례 항해에 2만 5000여명이 참석했으며 세계 60여개국을 돌았다. 지금도 바다 어딘가에 피스보트는 항해 중이다. 시민단체 활동의 새로운 모델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1960∼70년대 학생운동이 실패한 뒤 일본 시민운동에는 젊은이들이 없다. 이런 젊은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우리는 배 타고 다니며 댄스파티, 시장구경, 요리대회 등 즐거운 일을 벌인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여행할 욕심에 피스보트 사무국을 들락날락하다 자연스럽게 지뢰·기아·난민·역사 문제를 접하고 또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점이다. 세계평화를 체험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피스보트 참가자의 반 이상이 20대다. 한국 시민단체와는 연계해서 활동하나. -물론이다. 마침 올해 8월13일부터 27일까지 한국 환경재단과 함께 ‘부산-인천-단동-상하이-오키나와-나가사키’ 루트에 참가할 600명을 모집 중이다. 관심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환영한다. 노히라의 경우는 어떤가. 피스보트를 통해 어떤 변화를 겪었나. -도쿄 사람이 내 고향 가고시마를 ‘시골 깡촌’으로 여기는데 화가 났었다. 그런데 나 역시 동남아시아를 그렇게 보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됐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90년대 초에 피스보트에 올랐다. 그리고 베트남에 갔었는데 있는 그대로의 베트남보다는 ‘이국적인 뭔가’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미군이 일본에 와서 기모노 입은 여성을 보고 ‘뷰티풀’이라고 외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던 것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한국 사람들도 그런 편견을 많이 가지고 있다. -북한과 관련해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해주겠다. 내가 판문점을 통해 남에서 북으로 갈 때였다. 안내자가 청바지를 입지 말라고 했다. 북한은 청바지를 ‘미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이전에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내려올 때 우리 일행의 반 이상은 청바지 차림이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 사람이나 남한 사람이나 북한사람은 뭔가 세뇌당하고 로봇처럼 산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편견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한·중·일 3국인들이 모두 피스보트에 오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교과서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일본 언론은 한국·중국에 대해 “냉정하게 대화로 해결하자.”고 말하는데 ‘맞은 사람’은 화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때린 사람이 대화로 풀자고 하면 말이 안 된다. 왜 화가 났는지 물어보고 사과할 일이 있으면 사과해야 한다. 한국 내에서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한국과 일본의 민족주의를 똑같이 놓고 비교할 수 없다. 일본은 과거 침략과 지배를 미화하는 민족주의이고 한국은 이에 저항하고 해방운동을 벌여온 민족주의다. 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이미 한국은 많이 변했다. 인권이나 민주화 수준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왔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과하다거나, 걱정할 만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송승재 재일코리안청년연합 대표 “일본에서 살아가야 할 재일한인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한국 정부와 사회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강력히 대처해야 합니다.” 심포지엄에 참가한 송승재(31) 재일코리안청년연합(KEY) 대표는 조국의 도움을 강력히 요청했다.KEY는 재일한인 3∼4세들의 모임. 그들이 느끼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의 심각성은 국내에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왜일까. “역사교과서 왜곡을 통해 식민지시대를 합리화한다는 것은 곧 재일한인들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재일한인들은 식민지시대였기 때문에 일본에 건너간 우리 동포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과거의 잘못을 빼거나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교과서로 공부한 아이들이 자라나면 우리 재일한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한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큰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류열풍에 힘입어 재일한인들의 입장이 조금 나아진 측면도 있지 않을까.“일본의 미디어들은 ‘욘사마’를 한번 비추고는 일장기 불태우는 한국·중국의 집회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일본인들은 ‘일본은 아시아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다른 나라는 그러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혹여 재일한인들이 피해를 입은 사례가 있는지 물었다.“아직 공식적으로 보고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과서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지속적으로 읽혀지는데 길게 보면 교과서에 반영된 인식이 전체적인 사회의 인식을 바꿔놓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KEY는 역사교과서 채택률을 떨어뜨리는데 온 힘을 다 모을 예정이다.“8월 말쯤 각급 교육위원회와 학교의 채택결과가 나온다지만 실질적으로는 7월 초·중순쯤에 이미 결정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를 대비해 일본 시민단체들과 연계해 후소샤교과서의 내용과 본질을 알리는 작업에 매진할 생각입니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후소샤교과서 어떻게 막나 이제 7∼8월이면 일본의 각급 교육위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역사교과서 선택을 결정한다. 가장 왜곡이 심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후소샤 교과서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일본 우익은 채택률 10%를 목표로 내세웠다. 물론 한국과 중국은 채택률을 떨어뜨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와 중국의 사회과학원, 일본의 풀뿌리 시민사회단체들이 9일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 모여 ‘동북아 평화와 역사갈등, 해결을 위한 모색’이라는 이름의 심포지엄을 열었다. 후소샤 교과서를 어떵게 막을 것인가,‘마지막 전략’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먼저 하종문 한신대 교수, 변슈위에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교수, 다와라 요시후미 ‘어린이와 교과서 네트21’ 사무국장이 한·중·일 3국의 상황을 발표했다. 이들은 후소샤 교과서의 역사왜곡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이 교과서로 인해 다른 교과서들까지 우경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견을 모았다. 동시에 지난달 한·중·일 공동으로 출간한 ‘미래를 여는 역사’에 대해 “공통의 역사인식을 위한 실험은 일단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 뒤 후소샤 교과서 채택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한 시기라고 주장했다. 특히 요시후미 사무국장은 ▲후소샤 교과서에 대한 학습회를 개최하고 ▲교과서 순회 전시회를 여는 한편 ▲각급 시민단체와 지자체간의 연대를 튼튼히 한다는,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제시했다. 오후에는 한·중·일 3국 각 지역의 사례발표가 이어졌다. 여기서는 풀뿌리 시민단체 활동이 활발하고, 후소샤 교과서 채택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본내 활동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교육과 자치 사이타마 네트워크’는 후소샤 교과서를 감수한 사람이 교과서 채택권한을 가진 교육위원회의 위원으로 부임한 상황을 강력히 비판했다.7월10일 이 교육위원의 파면을 요구하는 심포지엄을 열 예정이고 여기에 한국측의 적극적인 참가를 요청했다. 류큐대 다카시마 노부요시 교수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는 방식을 소개했다. 알려진 대로 역사교과서 검정 과정에서는 선입관없이 공정한 심사를 위해 철저히 교과서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후소샤는 미리 검정신청본을 유출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유출과 동시에 각급 교육위원회 등에 후소샤 교과서를 채택하라고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노부요시 교수는 일본 공정거래위원회에 낸 신고서를 통해 “교과서는 교육적 상품이고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볼 때 불공정한 거래방식은 절대 금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교과서를 용서하지 않는 시민네트워크 후쿠오카’는 교육위원회 위원장에게 “21세기를 함께 살아갈 이웃나라와의 우호관계를 구축해나가기 위한 교과서인지 아닌지가 교과서 선정의 중요한 관점이 되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참가자들은 결국 “어떤 방법을 택하든 지속적이고 끈질긴 감시와 연대가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토끼 두마리 모두 잡는다

    토끼 두마리 모두 잡는다

    “고속철(KTX)의 영등포역 정차와 양천구 자원회수시설 이용은 반드시 관철돼야 합니다.” 서울시 영등포구의회를 이끌고 있는 조길형(신길5동) 의장은 취임한지 1년도 안 됐지만 ‘3선의원’인 만큼 구의회가 그동안 추진해온 사안들을 일관성있게 추진하고 있다. 특히 풀뿌리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구의회 조직의 혁신에도 관심이 많다. ●광명역과 상호보완적 관계로 발전해야 조 의장은 “영등포역은 하루 27만여명이 이용하는 교통 허브(hub)이기 때문에 광명역에서 손님을 뺏긴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연간 1조 5000억원으로 추산되는 고속철의 적자를 해결하고 교통 편의를 위해 승객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의회는 지난해 1·10월 두 차례에 걸쳐 고속철 영등포역 정차 요구와 관련된 건의문·서명부를 국회, 건설교통부, 철도공사 등 관계기관에 제출했으며 지난 2월에는 영등포역 정차추진 범구민협의체 등 구민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궐기대회를 가졌다. 양천구 목동에 있는 ‘양천자원회수시설’의 공동 이용도 관심사다. 서울시가 지난 1996년 2월 준공한 뒤 양천구의 생활쓰레기만 소각 처리하는 탓에 가동률이 40%에 그친다. ●“시설 가동률 40%에 그쳐” 구의회는 99년 시설을 방문해 공동사용을 촉구한 뒤 지금까지 공동이용을 촉구하고 있다. 조 의장은 “양천구와 양천자원회수시설 주민지원 협의체의 반대가 심하기 때문에 당장 공동 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의 주민지원협의체 구성원의 임기가 끝나 이달중 새롭게 협의체가 구성되는 것에 희망을 걸고 다시 협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초의회 최초로 입법보좌관제 도입 예정 조 의장은 올 하반기 의회의 전문성과 입법 활성화를 위해 각 상임위원회(행정·사회건설)에 입법 보좌관을 두는 입법 보좌관제를 서울시 자치구 가운데 최초로 도입할 예정이다. 지금은 전문위원이 구의원들의 의정활동을 보좌하고 있지만 전문인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에서다. 이에 앞서 올해부터 의회 사무국은 의사·의안팀을 의사팀으로 통합하고 홍보팀을 신설하는 등 조직을 개편했다. 또 지난 4월부터는 의회 개원 처음으로 의정 소식지를 발간하고 있다. ●“문래동 준공업지역 해제돼야” 조 의장은 낡은 주택과 영세한 공장들이 뒤섞여 있는 문래동 지역의 준공업지역의 해제도 주장하고 있다. 문래동은 주택·아파트가 많은데도 극소수의 공장으로 인해 주민과의 마찰이 끊이지 않고, 관련 공장들의 인·허가시 주민·기업주·공무원간 마찰이 빚어지며 인구가 최근 10년 사이 3배로 급증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문래2동 신길철(운영위원회 위원장) 의원은 “공장부지들이 현재 주거·상업·업무 등의 용도로 전환되어 개발되고 있는 만큼 행정적인 조치도 이같은 위상변화를 뒤따라야 한다.”면서 “난개발을 막고 주민들이 살기좋은 동네를 만들기 위해 문래동의 준공업지역 해제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4)태평양전쟁과 남양군도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4)태평양전쟁과 남양군도

    오는 27∼28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종전 60주년을 기념해 남양군도의 사이판을 방문한다.6000여 일본인들도 이때 함께 이 작은 섬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극우 대변지인 산케이신문은 벌써부터 광분하며 기획특집을 쏟아내고 있다. 정말 ‘대단한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원래 일왕은 팔라우와 마셜군도 등 태평양 섬들을 두루 둘러볼 참이었으나 미국령인 사이판만 찾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지난주, 옛 일본 육군 제30사단 소속 야마카와 요시오(87) 중위와 나카우 스스키(83) 상등병이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인근 산악지대에서 숨어살다가 발견됐다는 오보 사태로 일본 열도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인 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1972년 괌의 요코이 쇼이치(당시 56세)에 이어 74년 필리핀에서 오노다 히로오(당시 51세)가 종전 30여년 만에 생환했었다. 당시 요코이는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라는 귀국 일성을 토해내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열광케 했는데, 이번에 ‘발견’된 이들은 또 무슨 말을 내뱉을까. 이래 저래 일본인들의 해묵은 관심이 태평양에 쏠리고 있다. 그 태평양과 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머나먼 태평양에 수만의 무주고혼들이 떠돌고 있다. 신혼여행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이판 같은 곳에서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군인과 군속,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죽어갔다. 그들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몸을 던졌다는 일명 만세절벽은 일본인 참배객의 메카가 되었으며, 일왕은 여기에 세워질 신사 준공식을 겸해 이곳을 찾는 것이다. 2차대전은 곧 태평양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주, 중국, 버마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전선이 확대되고 있었고, 같은 시기 남양군도에서는 바다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양군도란 오늘날 미크로네시아를 가리킨다. 지도를 펼치면, 일본 남쪽으로 괌, 사이판 등이 포함된 북마리아나군도가 있고 그 밑으로 얍과 팔라우 등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마셜군도가 있는데 이곳을 총칭하여 미크로네시아(Micronesia) 라 부르며, 여기에는 2106개의 섬이 포함돼 있다. 태평양의 일본군 최대 근거지였던 팔라우를 찾았다. 연전에 어느 정신없는 탤런트가 ‘정신대를 기리는’ 누드촬영을 하겠다고 나서 온 사회를 벌컥 뒤집어 놓은 바로 그곳이다. 육·해·공군을 관장한 팔라우 집단사령부와 식민청인 남양청 본청, 법원, 병원 등이 있던 매우 중요한 전략기지였다. 흔히 일본이 2차대전 무렵에 이곳으로 진출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일본의 태평양 진출은 이보다 앞선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럼버스의 이른바 ‘아메리카 발견’ 이후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식민지 쟁탈전을 조정하기 위해 태평양쪽은 스페인이 독식하는 것으로 합의된다. 그리하여 필리핀을 위시한 팔라우도 16세기에 스페인에 예속된다. 19세기 중반에는 카이저황제와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이곳에 독일 자본이 밀어닥쳤다. 독일의 스페인에 대한 도전은 1899년에 드디어 성공한다.1898년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함에 따라 힘을 잃게 되자 스페인은 파리에서 비밀협정을 맺어 독일에 이 섬들을 팔아넘긴다. 이에 1914년 10월, 일본은 영국과 연대해 독일에 대항하면서 미크로네시아를 넘본다. 사실, 일본의 태평양 탐욕은 훨씬 전부터 드러났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북방 대륙 진출에 여념이 없던 일본으로서는 남쪽 바다를 향한 야욕을 잠시 유보했을 뿐이다.1880년대에 다케코시 요사부로는 “적도를 얻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지 두달도 채 되지 않아 일본 해군은 캐롤라인과 마리아나, 마셜군도의 주요 섬에 상륙한다.1914년 10월7일, 수백명의 일본군이 폰페이섬의 성당에 들이쳤으며, 이곳에 기관단총을 설치하고 팔라우 공격에 나섰다. 1919년에 국제연합은 공식적으로 이곳의 일본 지배를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남양군도를 획득했으니, 일본의 태평양 식민사는 이로부터 근 100년에 이르는 것이다. 종교와 교육, 그리고 경제적 개발은 식민지를 건설하는 중요한 축이었다. 남양청을 세우고 식민 관료들이 섬을 지배한다. 일본인 이민이 급증했으며 그들은 전력산업, 알루미늄광산, 진주양식과 카사바 같은 상업적 농업에 종사했다. 일본 정부의 지원 속에 1935년까지 5만여 일본인들이 섬 곳곳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 대부분은 오기카와로부터 이주해 왔다.1940년에 일본인 인구는 7만 7000명까지 늘었으며,2년 뒤에는 9만 6000명을 헤아렸다.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인·군속들이 속속 집결, 일본인 수는 거의 2배로 불었는데, 팔라우와 사이판이 주요 거주지였다. 일본 식민청은 이곳에서 각 섬마다 이른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한반도에서 하던 방식과 똑같이 원주민의 토지 개인소유는 인정하되, 바닷가나 산의 공유지는 모두 식민청 소유로 돌렸다. 한마디로 ‘털도 벗기지 않고’ 대부분의 땅을 먹어치운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자 이 땅의 대부분은 군사기지로 징발된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것도 기실은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을 둘러싼 이해대립 때문에 생긴 필연적 귀결이었다.2차대전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양국은 서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으며 급기야 미크로네시아에서 태평양전쟁 중 가장 혹독한 전투가 치러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사실이 또 하나 있으니, 괌이 2차대전 때 미국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괌은 1898년에 미국과 스페인 전쟁의 부산물로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태평양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783년에 무역선 차이나호(Empress of china)를 통해 태평양에 본격 등장했다. 배에는 무역 상인과 선교사, 뉴잉글랜드의 포경업자, 해군 장교 등이 타고 있었다. 미국은 괌에 더해 20세기 초반에는 필리핀, 하와이, 사모아제도 등을 추가로 얻는다. 하와이에서는 1893년에 미국 상인과 선교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조를 전복시키기도 했다. 그 후 이곳에서 사탕수수 산업이 시작되었고, 한국인 이민도 비슷한 시점에 이뤄진다. 말이 이민이지 노예수출에 지나지 않았다.1899년에는 미국령 사모아에 미국 해군이 진을 친다. 괌에서도 미국은 ‘어머니 나라(Mother Country)’로 등장했다.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때린 것은 이처럼 태평양을 둘러싼 해묵은 패권 다툼의 발화였을 뿐이다. 거의 동시에 일본 육군은 홍콩을 공격한 데 이어 42년 2월에는 영국군 거점인 싱가포르까지 먹어치운다. 이런 일련의 사태로 태평양전쟁은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독립기념관) 김도형 연구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36년,15살 어린 나이의 한국인 위안부 10여명이 처음 팔라우에 끌려온다. 그 후 코롤섬 토목공사를 위해 전라·경상도에서 노무자 200여명이 왔다. 코롤시 동쪽 끝에 위치한 ‘아이고브리지’는 한인들이 다리를 놓을 때 너무 혹독하게 시달린 나머지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해 붙은 이름이라는 내력이 슬프다. 한인 노무자와 더불어 조선총독부는 농업이민도 보냈다. 모두 13회에 걸쳐 1266명이 이주됐다. 중부 태평양의 중심기지인 트럭섬이 궤멸되자 1944년 2월25일 관동군과 조선군에서 선발된 정예부대 29사단이 팔라우에 진주했다. 이때 중국 관동에서 1만 2000여명이 왔는데, 대부분 한인 병사들이었다는 설이 있다. 팔라우의 한인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은 군속이었다. 말이 군속이지 해군에서 토목작업을 시키기 위해 끌고온 노무자들이었다.1943년 5월20일, 부산을 거쳐 팔라우에 800여명의 한인이 도착했다. 이들은 처음에 일본 본토와 남양과의 수송시설 건설에 종사하다가 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진지 구축에 투입된다. 인근 무인도에서는 남양척식주식회사에서 갈매기 배설물인 인광을 채굴하여 비료를 만드는 일에도 이들이 투입됐다. 1944년 8월, 연합국이 중부 태평양의 마지막 공격지 팔라우에 들이쳤다. 미 제1전대의 공격으로 일본 육군 7212명 중 6766명이 전사하고 466명만 살아남았다. 해군도 3400명 중 단지 10명만이 생존했다. 물론 그 일본군 중에는 징병으로 끌려온 한인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미군 폭격이 거세지자 일제는 팔라우의 일본인 1만7800여명을 본국으로 강제소환한다. 그렇지만 강제 징용된 한인들은 송환 대상에서조차 제외된 채 전쟁이 본격화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식량보급이 끊기면서 한인들에게는 식량도 주어지지 않았다. 굶주림에 지쳐 식량을 훔치다 총을 맡고 숱한 한인들이 죽어 나갔다. 정신대로 끌려온 조선의 딸들도 곳곳에서 죽어나갔다. 창고에서 건빵을 훔치려다 들킨 한인을 나무에 매단 뒤 귀나 코를 베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만행과 흡사한 짓을 자행했다는 믿기 어려운 증언도 전해진다. 팔라우 주둔 일본군이 미군에 공식 항복한 것은 1945년 9월2일이었다. 총알받이로 수많은 한인들을 끌고 왔다 수세에 몰리자 나몰라라 내팽개친 뒤 자신들만 빠져나간 것도 일제 만행의 일부로 기록돼야 한다. 그 불바다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귀환한 사람이 2만 5773명이었고, 팔라우에서는 3000여명이 귀환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팔라우에서도 ‘천상의 바다정원’으로 소개되는 록 아일랜드로 스피드보트를 타고 나가 무인도에 배를 댔다. 물 속으로 들어가자 ‘물 반 고기 반’이다. 산호섬답게 산호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너무도 아름다워 ‘용궁’이 본디 이런 풍경이었을까 여겨지는 곳. 그러나 물 밑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탱크와 항공기, 선박의 잔해가 즐비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역사의 시간은 진행 중임을 이 잔해들이 말해주고 있다. 과거, 잠시 적이었고 이후 해양 패권의 든든한 동지로 미국에 보조를 맞춰 온 일본의 왕이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미국령 사이판을 찾는다. 태평양의 바다 속에 잠긴 탱크들이 다시금 포신을 곧추세우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경의 태평양을 다시 피바다로 만들 작정이다. 이 막막한 타국을 떠돌고 있을 한국인들의 넋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일왕에 의해 지금 다시 시작된 것이다.
  •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권혁희 지음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권혁희 지음

    여기 사진이 하나 있다. 칼을 쓴 채 물끄러미 카메라를 응시하는 세 남자와 살짝 시선을 떨구고 있는 맨발의 소녀.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죄인들 왼쪽 뒤엔 감시하는 듯한 그림자가 서 있다. 죄인들 앞에는 카메라를 든 촬영자가 있을 것이다. ‘죄인들’(舊罪人)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 만들어진 관광엽서 속의 그림이다. 이들은 왜 감옥에 있지 않고, 관아의 뜰로 짐작되는 곳에 앉아있는 걸까?사진을 찍은 이는 누구일까?관광엽서에 왜 이런 사진이 실렸을까?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민음사 펴냄)는 이같은 의문에서 시작된다. 사진속 보이지 않는 촬영자 시선의 실체를 추적하고, 그 시선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헤친다. 지은이는 서울시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는 권혁희씨. 민음사가 제정한 ‘2005 올해의 논픽션상’ 수상작을 단행본으로 엮은 이 책은 지은이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와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생산해 대중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렸던 사진엽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해온 과정의 결실이다. 저자는 무려 1500여장의 사진엽서를 모았는데, 그중 주제가 선명히 드러나는 300여장을 추려 책에 실었다. 책은 그 자료의 방대함과 풍부함에서 우선 저자의 남다른 노고가 엿보인다. 더불어 그 사진들이 ‘시선의 권력’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하나의 충격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엽서속 그림들은 촬영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인 동시에, 제국주의적 시각이 담긴 ‘세기적 응시’의 결과물이다. 당시 사진엽서는 신문, 잡지, 서적 등과 더불어 제국주의를 재현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매체였다. 카메라가 희귀했던 시대에 수만리 밖 사람들의 생생한 이미지는 소설과 시가 가진 이야기 효과보다 훨씬 강력한 대중성, 상품성을 갖고 있었다. 책은 사진엽서가 하나의 ‘문화적 유물’이란 전제 아래 그 유물에 은연중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추적한다. 카메라가 담은 풍경중 제국 국민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것은 단연 식민지인들의 인종과 풍속을 부각시킨 이미지들이었다. 서구의 차별적 시선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바로 유색인종에 관한 것들이다. 젖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포즈를 취한 아프리카 소녀들, 요란스럽고 기이한 장신구를 휘감은 아메리카 인디언들, 흑인 아이 피부를 희게 만드는 내용의 모습을 담은 비누광고 카드, 흑인 입술을 오리처럼 삐죽 내밀도록 연출해 찍은 사진 등등. 이들 엽서들에선 공통적으로 원시성 내지는 미개성을 드러내려는 서구인의 차별적 시선이 또렷이 느껴진다. 인류 역사가 야만(savagery)에서 미개(barbarism)를 거쳐 문명(civilization)으로 발전해간다고 보는 3단계의 진보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었던 이들은 유색인종들을 이렇게 철저히 ‘타자화’했다. 같은 시기 제국화에 나선 일본도 이를 그대로 답습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후 자국이 조선 등 후진적인 주변국과 구별되는 아시아 일등국이라는 점을 선전하기 위해 이미지를 이용했다. 사진엽서는 주로 문화적 이질성과 경제적 낙후, 인종적 열등함을 보여주는 풍속사진을 담았다. 조선의 폐쇄적 이미지를 재현한 쓰개치마를 쓴 여성, 미개성과 함께 촬영자의 관음증적 시선이 농후하게 엿보이는 가슴 노출 여성사진,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엄청난 양의 독이나 짚신을 지게에 진 짚신장수, 청순가련한 모습의 기생 등등. 이같은 그림은 당시만 해도 날개돋친 듯 팔렸던 그림엽서를 통해 일본인들은 물론 서구인들에게 ‘조선의 표상’으로 각인됐다. 지은이는 100여년 전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지배자의 시선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니 오히려 재생산되면서 그 재현의 의미를 강화하고 있다고 확신한다.21세기 세계화시대의 현실 속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시선의 체계’가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하는 책이다.2만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사설] 한·일 역사공동위 그래도 계속돼야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3년 활동을 끝내고 어제 최종 보고서를 냈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공통된 인식을 담은 것이 아니라 양쪽 학자들의 주장을 각각 담은 논문을 나열하는 데 그쳤고, 여기 포함된 일본학자들의 역사인식은 우리에게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일본학자들은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이 합법 절차에 의한 ‘병합’이며 식민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기존의 주장에서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게다가 숱한 희생자를 낸 항일 의병·독립 항쟁을 무시한 채 당시 한국인의 국가·국민의식이 희박했다고 폄훼하기까지 했다. 성과라면 고대사 부문에서 일본의 일부 극우학자들이 주장해 온 ‘임나일본부설’이 허구라는 데 합의를 본 정도이다. 이러니 일본학자들의 역사인식이 후소샤판의 역사왜곡 교과서와 다를 바 없다는 둥 더이상 한·일 공동의 역사연구가 필요하냐는 둥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접국가 사이의 과거사란 얽히고설키기 마련인데, 이를 3년동안 공동연구한 것만으로 동일한 역사의식이 형성되기를 기대하는 자체가 무리이다. 독일과 프랑스·폴란드가 역사 공동교재를 만드는 데 30년 걸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번 1차 위원회의 의미는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역사연구를 시작했다는 점과, 양쪽이 쟁점사항별 인식차를 확인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할 일은 공동연구의 틀을 유지·발전시키면서 인식차를 어떻게 메워나갈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학자들이 연구성과를 더욱 쌓아 일본측 주장을 논리적으로 압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도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 [클릭이슈] 대학가 日극우단체 자금 유입 공방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1899년 오사카생.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22살 때 물려받은 유산으로 우익단체 ‘국방사’ 결성.1931년 국수대중당 총재에 선출된 뒤에는 당원들에게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의 제복을 입혔을 정도로 파시즘을 추종. 만주 항일유격대 소탕과 가미카제 특공대 창설에 깊숙이 관여. 패전 뒤에는 도쿄재판에 회부돼 A급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 받지만 투옥 3년 만인 1948년, 감옥에서 나와 사업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 1951년부터 경정사업을 시작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사카와는 ‘도박재벌’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자선사업과 함께 사사카와 재단(95년 사망후 일본재단으로 개명)을 설립한다. 그는 1970년 150t짜리 병원선 1척을 한국에 기증한 데 이어 1975년에는 한국나병연구원 건립자금으로 1억 2000만엔(당시 2억원)을 전달한다. ●일본재단의 돈을 둘러싼 해석 두고 치열한 공방 이런 사연을 갖고 있는 일본재단의 돈이 연세대와 고려대에 흘러들었다는 사실이 최근 부각되면서 해당 대학의 구성원들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 비록 공익법인이긴 해도 전범과 관련된 재단의 돈을 학문 연구에 사용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과 사사카와 개인이 아닌 공익법인으로부터 받은 돈이기 때문에 투명하게 쓴다면 문제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일본재단의 돈이 연세대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95년. 연세대는 당시 재단의 기금을 출연받아 학교법인 아래에 ‘한·일협력 연구기금’을 뒀다. 같은해 12월4일 알렌관에서는 ‘한·일협력 연구기금 전달 조인식’을 기념하는 행사도 열었다. 당시 일본재단의 기금을 끌어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던 송자 연세대 전 총장은 “한·일 국교 정상화 30주년을 맞아 양국 상호 이해 증진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사카와의 셋째아들로 일본재단의 이사장인 사사카와 요오헤이는 이날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하며 “일제의 박해에 쓰러진 그의 학문과 정신을 이 기금을 통해 이어가겠다.”고 밝혔다.‘한·일협력 연구기금’ 10억엔(당시 환율기준 75억원)이 일본재단의 돈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연세대는 심각한 학내 갈등을 겪는다. 교수평의회와 총학생회는 전범의 기금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학교 구성원들의 반대에 부딪힌 연세대는 결국 1996년 6월 ‘한·일협력 연구기금’을 독립적인 재단법인 ‘아시아 연구기금’으로 탈바꿈시킨다. 일본재단의 돈과 외부 지원을 합해 총 100억원의 자금을 확보한 아시아 연구기금은 여기서 나오는 이자 수입 등으로 해마다 3억∼8억원 정도를 교수들에게 연구비로 지급해 왔다. ●일본재단, 연구비 지원 제안 잇따라 연세대에 일본재단의 자금이 유입되기 훨씬 전인 1988년 고려대에도 이 재단의 자금으로 장학금이 조성됐다. 사사카와 생전에 장학금을 유치한 고려대는 그의 이름을 따 ‘사사카와 영-리더(Young-Leader)’라는 장학금을 설치하고 1억 2950만엔을 받았다. 이 기금의 이자는 2003년까지도 고려대 대학원생들에게 지급됐다. 고려대의 한 교수는 “1980년대 말부터 일본재단이 한국의 유명대학 교수에게 전화를 일일이 걸어 연구비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해와 실제 일부 교수가 그 돈을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아시아연구기금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본재단의 기금은 전범인 사사카와 료이치 한 사람의 돈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유 교수는 “일본재단은 경정사업을 하는 하나의 공익법인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로또나 마사회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지금까지 아시아연구기금은 동아시아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연구를 하는 데 사용해 왔다.”고 말했다. 반면 연세대 교수협의회 대표 최종철 교수(영문과)는 모든 기금에는 돈을 주는 단체의 의도가 있다고 반박한다. 일본재단의 핵심 운영진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구성원들로 일제 식민지배를 미화해 왔기 때문에 이들의 돈을 받아 연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재단의 자금을 받은 단체와 대학들은 지금이라도 사죄하고 기금을 모두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효연 김준석기자 belle@seoul.co.kr
  • ‘식민지배 잘못’엔 공감 강제병합 여부엔 이견

    ‘식민지배 잘못’엔 공감 강제병합 여부엔 이견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성과는 양측의 뻔한 기존 주장 재확인에 그쳤다. 위원회 탄생 자체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두고 양국간 정치적 흥정의 결과물이었고, 양국 모두 민족주의적 시각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미 예견됐던 일이었다. ●임나일본부설 고대사를 다룬 1분과의 주요 쟁점은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이었다. 한국측은 4∼6세기 왜군은 백제나 가야의 원군 수준에 그쳤다고 주장한 반면, 일본측은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활동을 했고 동시에 이 지역에 대한 지배의사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양측 모두 치열한 사료전쟁을 벌였지만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일본서기’에 기초한 임나일본부설은 부인됐다고 공동위원회는 밝혔다. 그러나 연구기간이 짧아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연구가 충분치 못하다는 단서가 붙었다. ●조선시대 한·일외교와 임진왜란 중·근세사를 다룬 2분과의 쟁점은 임진왜란을 포함한 조선시대 한·일 관계였다. 한국측은 조선전기에는 왜구에 대한 징벌이 있었고 후기에는 ‘통신사’를 통해 어느 정도 물꼬를 터주었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양국간 인식 차이가 있는 만큼 전쟁의 참혹함을 경계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측은 조선전기에 이미 동아시아 교역권이 존재했고 후기에는 ‘통신사’가 있었는데 일본은 이를 조공사절로 이해했다고 반론을 폈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대한 정벌욕구와 조선에 불리하게 돌아간 정보의 실태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뒀다. ●식민시기 전후사 한국과 일본 연구자 모두 식민지배가 잘못됐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달랐다. 한국측은 자주국 조선이 강제적으로 일본에 병합당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일본측은 조선은 청나라의 조공국에 불과했고 청일전쟁의 승리로 동아시아에 근대적 질서가 도입됐다고 주장했다. 또 병합 과정의 각종 조약 역시 합법적인 데다 국제적으로 승인도 받았다고 밝혔다. 연장선상에서 일본측은 식민지배에 따라 조선에 근대적인 측면들이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한국측은 근대적 측면이 일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수탈이 뼈대를 이룬다고 반격했다. 따라서 한국측은 독립운동을 강조하지만 일본측은 한국의 저항은 미미했다고 봤다. ●65년 국교정상화와 북·일 관계 현대사 분야의 쟁점은 국교정상화와 북·일관계였다. 국교정상화에 대해 일본은 배상·보상 문제가 마무리됐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한 반면 한국측은 위안부 문제 등이 빠진 채 논의됐기 때문에 배상·보상의 책임은 여전하다고 주장했다. 북·일관계에 대해서도 일본측은 일본인 납치문제를 거론했고 한국측은 일본의 우경화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열린세상] 역사교과가 독립해야 할 이유/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2003년 여름, 우리는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 한 충격적인 사태에 접했다. 역사학계를 비롯해 정부·정치권·시민단체, 그리고 전 국민의 뜨거운 비판 열기에 놀라, 현재 중국은 주춤한 상태다. 우리는 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해 고구려 역사를 비롯한 북방사의 학술적 체계화에 주력하고 있다. 일찍이 1982년부터 시작된 일본 역사교과서의 식민지배 미화는 급기야 올 봄 극우적 ‘새로운 역사교과서’(후쇼사 판)를 탄생시키고, 이에 더하여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조례 제정으로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정부는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역사정립기획단’을 상설기구로 설치해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21세기 탈민족주의적 동아시아 평화를 추구하는 ‘동아시아 담론’을 다듬던 학계는 된통 벼락을 맞은 셈이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동북아 공동체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동아시아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중·일 삼국의 학계와 시민단체가 수년의 공동작업 끝에 공동역사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를 간행하게 된 것은 아주 소중하다. 교육인적자원부도 역사분쟁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들끓는 여론에 대한 응급처방으로 지난해 가을, 학계와 시민단체를 모아 ‘국사발전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물론 학계의 전반적인 중론은 ‘국사’ 교육의 강화가 아니라 동아시아사·세계사를 포함하는 ‘역사’ 교육의 재구성이 시급하다는 데 모아졌다. 이를 위해서는 국사와 세계사가 ‘사회 교과’에 편입돼 있는 현 교육과정을 수정해야 한다. 미군정 때 수입된 미국식 사회과는 민주시민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데, 민주주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미국의 역사를 사회과의 일환으로 교육하는 것은 그 나라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타율적 근대화의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전통 내지 전근대와, 근·현대의 연속성은 두드러지지 못하다. 사회교과에서 우리의 역사적 연원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경제 중심의 사회과 교육과정에서, 고구려 역사에까지 소급하는 역사교육과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국사와 세계사가 사회교과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역사를 전공하지 아니한 사회과 교사가 중학교 국사의 40% 이상, 세계사의 80%를 담당하고 있는 현실은 교육의 전문성을 유린하는 처사다. 남아도는 교사의 수급조절을 위해 교련·실업·제2외국어 담당 교사가 2회에 걸친 방학 중 연수만으로 국사와 세계사를 가르칠 수 있게 한 조치는 더욱 충격적이다. 또한 현재처럼 ‘국사’ 교과서만이 ‘사회’ 교과서와 별도로 제작되는 방식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발주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사로 규정하려는 시도나 일본이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역사교육이 나만을 자랑하는 국수적 자아도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지난 5월6일 교육부가 ‘역사’를 사회 ‘교과’의 한 ‘과목’으로 독립시킨다고 하여 마치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것처럼 발표한 것은, 교육과정과 교사 양성은 사회과 체제로 그대로 둔 채, 현재 사회 교과 안에 독립교과서로 돼 있는 ‘국사’ 교과서에 세계사를 포함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회과로부터 역사교과는 ‘교과’로서 분리 독립돼야 한다.‘한국을 중심에 둔 동아시아’‘세계사와 비교된 한국사’ 교육을 위해 하루속히 한국사·동아시아사·세계사 통합체제로서의 ‘역사’ 교육이 독립적으로 실시돼야 한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옹호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교육이 변해야 한다. 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3)진해와 포르투갈인 세스페데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3)진해와 포르투갈인 세스페데스

    진해는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다. 원래 웅천읍성이 자리했던 곳으로, 그 웅천 바닷가에는 ‘세스페데스 방한 400주년(1553~1993)기념’이란 설명문이 붙은 조각상이 서 있다. 그의 고향인 포르투갈 톨레도의 니야누에다 데알카르데테 시민들이 우정의 정표로 기증한 것이다. 그는 1593년 12월27일에 웅천포에 도착해 1년여를 이곳 왜성에서 묵었다. 그 34년 뒤인 인조 6년(1628)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부산 근처에 표착했고, 그로부터 59년 뒤인 1653년에는 하멜이 표류해 왔다. 그러고 보면 그는 표류가 아닌, 자의로 이 땅에 온 최초의 서양인이다. 그가 머물렀던 웅천 남산왜성을 올랐다. 돌들이 웅장하다. 틀림없는 왜성인데 옛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축성했고 정유재란때 재침해 수축한 것이다. 경상도에는 유난히도 왜성이 많다. 웅천 안골포 양산 영등포 마산 고성 사천 남해왜성 등등 아예 장기 주둔을 염두에 두고 진을 쳤던 흔적들이다. 진해에는 웅천왜성 바로 건너편 안골포에도 왜성이 있다. 사면이 두루 보여 그만한 요새가 없다. 세스페데스가 웅천까지 온 이유를 알자면 조금의 설명이 필요하다. 임진왜란때 평양성을 공격했던 고니시 고니시는 포르투갈 예수회에 의탁한 천주교도였다. 고니시의 딸 마리아는 당시 19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의 아내였는데, 소오는 임란 직전까지 대마도 병마사로 조선의 녹봉을 받았다. 그 역시 천주교 신자였다. 소오는 조선의 지리를 꿰뚫고 조선말에도 능통해 왜군의 앞잡이로 선봉에 섰다. 세스페데스는 이때 일종의 종군 신부로 온 것이다. 그의 수기에 의하면 조선의 훌륭한 문화재는 모두 고니시와 소오가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들은 문화재 약탈뿐 아니라 사람들도 엄청 붙잡아 갔다. 오죽했으면 강항이 ‘간양록’에서 ‘배 600∼700척이 몇 리에 걸쳐 바다를 메우고 있는데, 배마다 조선 남녀의 통곡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시킬 정도’라고 기록했을까. 고니시도 평양성 전투에서 6살 난 전쟁고아 소녀를 데려가 ‘오타’란 이름을 지어주고 길러 ‘줄리아’라는 세례명까지 얻게 했다. 도요토미가 죽은 뒤 천하의 패권을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벌인 대격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는 패하여 처형된다. 줄리아도 이때 외딴 섬으로 귀양가 신앙을 지키며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죽음으로써 하나의 ‘신화’가 됐다. 한편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오는 마리아와 이혼하고 도쿠가와의 가신으로 들어간다. 세스페데스는 1597년 3월에 다시 내한했다가 도쿠가와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수박골에 피신해 있다 두달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임진왜란이라는 한·일간의 유쾌하지 못한 전쟁통에 묻어 오기는 했지만 서양인의 첫 방문은 역사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왜성이 위치한 안골포는 임란 전승지로 유명한 곳.1952년 7월 왜 수군의 주력부대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하자 그를 따르던 가토 기요마사의 42척 제2 주력부대가 당황한 나머지 안골포에 옮겨 정박한 것을 이순신이 추격, 격파한다. 한산도해전과 더불어 안골포해전은 왜 수군 주력부대를 격멸한 큰 전공지였다. 이듬해인 1593년 2월부터 한달동안 이순신 함대는 웅포에 무려 7차례나 출격해 해전을 치렀는데, 이때 웅포 남산왜성의 왜 육군이 엄호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다. 세스페데스는 그 해 겨울 웅천으로 들어왔다. 안골포에는 굴강(掘江)이 남아 있다. 방파제와 선착장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전남 여천에 선소(船所)와 굴강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사라진 지금 이곳의 해양문화사적 의미는 크다. 이순신의 대격전지에 이같은 해양 유적이 전해지고 있어 감회가 새로운데 머잖아 간척될 계획이라 운명이 풍전등화다. 매립하여 공원을 조성하고 바닷물을 끌어들여도 굴강만은 살릴 계획이라지만 이 희귀한 문화유산이 전해지는 임진왜란 대첩지를 매립해 땅을 얻어 써야겠다는 문화적 반달리즘을 두고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진해는 대마도를 거쳐서 규슈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마산에서 여몽연합군이 후쿠오카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듯 최단거리에 있는 곳이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는 본디 최초의 왜관이 자리잡은 곳도 또한 이곳 웅천이다. 왜관은 모두 세 군데에 있었으나 삼포왜란 이후에 변란을 걱정해 웅천왜성은 폐지되어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통합됐다. 이같이 일본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진해에 다시 왜인들이 나타난다. 근 300여년 만에 이번에는 왜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로 변신해 나타났으니, 그들은 지형·정서적으로 가장 잘 아는 곳부터 점령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진해만을 동양 제일의 대군항으로 키우기 위해 한반도 최초로 조직적·계획적 도시계획을 입안한다. 진해라는 말부터가 일인에 의해 처음 쓰여졌고, 옛 웅천읍성과 무관하게 신도시로 재탄생했으니 식민지 항구도시 건설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당시 비동 현동 좌천 등 여러 마을을 합해 진해라 부르고 진해만 군항지를 편의상 진해만이라 칭한 것이다. 군항지 경영에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돈인 800만원을 퍼부어 10개년 사업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바닷가 염습지와 황무지를 매립하여 땅을 얻고 농민들의 땅을 강제수용했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12일에는 해군 함정을 거제도 송진포 연안에 대놓고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내기도 했다. 송진포에 ‘일본제국 해군 가근거지 방비대’를 설치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의 여세를 몰아 웅천지역의 토지를 강탈하기에 이른다. 당시 시가지는 12만평이었으며, 계획도시답게 모범적 시가를 만들기 위해 도로는 방사형으로 설계했다. 그래서 오늘날 진해의 중원로터리 등을 보면 사방팔통으로 도로가 교체하는데, 여타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미관을 엄격히 고려하고 토지를 1∼3등으로 3분하여 건축을 제한했다. 건물은 2∼3층을 원칙으로 하고 4층 이상은 허가를 받아 짓도록 했다. 이곳 토지를 불하받은 일인은 히로시마 후쿠오카 도쿄 사세보 사가 조슈 나가사키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한국에 오래 전에 나와있던 용산, 마산, 부산 등지의 일본인들도 이곳으로 몰려 왔다. 이로써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신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조선인도 참여할 수 없었으며, 목포나 군산처럼 본래의 조선인촌과 병존하게 하지도 않은 식민도시였다. 그리하여 일제 해군본부가 들어서고, 한국뿐 아니라 극동의 군항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한국 해군의 본거지로 자리매김했다. 진해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풍경을 읽는다. 방사선으로 뻗어나간 로터리 모퉁이에 고색창연한 진해우체국이 서있어 식민지 시대를 전하고 있다. 도로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는 일장기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충무공 동상으로는 전국 최초인 1951년에 창원 통영 고성 김해 마산 등에서 갹출해 북원광장에 조성한 것이다. 일장기형 도로와 이순신의 동상이 주는 이중창이 묘한 갈등으로 다가온다. 자고로 벚꽃이 유명하여 4월 초순에는 군항제가 열린다. 충무공의 구국의 얼을 추모하고 벚꽃도 즐기는 최대의 행사인데, 일본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벚꽃이 휘날리는 풍경 속에 서 있는 충무공 동상의 이미지는 왠지 좀 거북한 느낌이었다. 제황산정에는 웅장하게 솟은 탑이 있다. 일인들이 세운 러일전쟁 기념탑을 광복 후 철거하고 1967년 해군의 기함사령탑을 상징하는 이 탑으로 교체했다. 시내 로터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진해를 방문했을 때 남긴 기념휘호를 각인한 비석이 있는데 가장자리가 깨져 있다.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을 땜질해 붙여놓았다. 로터리 중심의 나무에 가려져 있어 외부인은 그런 비석이 있는 줄도 모른다. 반면에 진해 바닷가에는 도지정 무형문화재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과 전용 낚시터, 장제스를 만났다는 육각정 등이 잘 보존돼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본디 일본군 통신대가 쓰던 건물이다. 진해 사람들도 나름대로 불만이 많다. 해군기지와 해군사관학교가 있다 보니 도시의 주요 토지들은 모두 군용으로 묶여 발전이 없다. 군사도시인 탓에 규제가 심해 발족 당시의 인구에서 별반 늘어난 게 없다. 게다가 부산시와의 갈등도 내연 상태다. 신항만 건설부지의 80%를 내놓았지만 명칭이 부산신항만으로 결정되는 분위기여서 폭발 일보 직전이다. 부산신항인지, 부산·진해신항인지를 놓고 대격돌을 벌이는 중이라 이래저래 군사도시의 고충이 깊은 요즘이다.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군항에 의지해 살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게다가 이웃 거대도시 부산의 밀어붙이기식 행정에 진해 사람들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어찌보면 가장 쾌적하고 맞춤한 인구, 공장이 적은 대신 맑은 숲과 바다를 지닌 천혜의 미항 진해이건만 미래가 투명하게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벚꽃 펄펄 날리는 조건에서도 소작쟁의는 물론 동양제사 노동자들의 대투쟁, 그리고 각종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주기철 목사같이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진정한 종교인을 배출한 곳이 진해 아닌가(황정덕의 ‘진해 항일독립운동사’ 참조). 진해예술촌장을 맡아 군사도시 속에서 문화를 가꾸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박차생 진해문화원장이 망산도로 안내하면서 간절하게 전한 말은 이랬다.“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인 아유타국 허왕옥 공주가 처음 내린 망산도도 진해지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국제 항구도시였으니 부산·진해신항으로 결정돼 사람들 시름 좀 덜었으면 합니다.”
  • 한·중·일 공동저술 새 역사교재 ‘미래를‘ 출간

    한국·중국·일본의 양심세력들이 머리를 맞대고 집필한 3국 통합 근현대사가 26일 출간됐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동기가 돼 사상 첫 3국 공동 역사서가 탄생한 것이다. 세 나라 역사학자와 시민사회 인사 등 54명이 참여해 3년여 동안 만든 새 역사책의 이름은 ‘미래를 여는 역사’.‘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는 이날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출간기념회를 열고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 명의의 공동취지문을 발표했다. 편찬위원회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반성하지 않고 합리화 하는 것은 이웃나라는 물론 일본국민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라면서 “불행한 과거를 넘어 3국이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미래가 펼쳐지기 바란다.”고 밝혔다. ●일제의 침략과 강압정책 공식 인정 ‘미래를 여는 역사’는 16세기 중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3국 역사를 ▲개항 이전의 3국 ▲개항과 근대화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 한·중 양국의 저항 ▲침략 전쟁과 민중의 피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동아시아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등 6개 장으로 구성됐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를 다룬 2장과 3장.‘미래를 여는 역사’는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대한제국이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간섭, 군대해산, 언론탄압, 사법권 강탈 등에 나선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는 일본 극우파들이 만든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교과서’에서 축소되거나 왜곡됐던 대목이다. 후소샤는 대한제국 병합 과정을 ‘근대화’라고 미화했다. ‘미래를 위한 역사’는 또 “(일본이 주장한)대동아공영권은 식민지 지배를 치장하는 논리일 뿐이며 전쟁수행을 위한 자원, 자재, 노동력 조달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역시 후소샤 교과서에서 각국의 자주독립과 상호제휴에 의한 경제발전, 인종차별 철폐 등에 공헌했다고 미화했던 부분이다.‘미래를 위한 역사’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위안부로 끌려간 한국여성은 대부분 미혼의 10대 소녀들이었다. 한국, 중국, 필리핀 등에서 위안부로 동원된 각국 여성의 수는 최소 8만에서 15만명으로 추정된다.”고 썼다. ●공동 근현대사 탄생의 배경 한·중·일 3국 시민단체와 역사학자들은 2000년 일본에서 출간된 후소샤 교과서가 극우파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반영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한 국제연대에 나섰다.2002년 3월 중국 난징국제학술대회에서 각국 중학생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근현대사 교재를 개발하기로 합의했으며 한국 23명, 일본 14명, 중국 17명이 공동 집필진으로 참여했다. 씌어진 언어와 책의 판형은 다르지만 내용은 모두 같다. 한·중·일을 오가며 11차례의 회의가 진행됐다. 공동교재 총괄 편집위원회에는 한국측에서 교과서운동본부 대표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김성보 충북대 교수가 참여했다. 중국측에서 부핑(步平)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장, 우광이(吳廣義) 중국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 연구원, 일본측 오비나타 스미오(大日方純夫) 와세다대 교수, 다와라 요시후미(俵義文) 어린이와교과서전국네트워크21 사무국장 등이 포함됐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0) 현대판 정본 정감록의 배후를 찾아라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0) 현대판 정본 정감록의 배후를 찾아라

    일본인 호소이 하지메의 손끝에서 이른바 현대판 ‘정본(正本) 정감록’이 탄생했다(연재 19호 참조).1923년 이후 출판된 정감록은 예외 없이 호소이의 동경판 정감록에 실린 25종의 비결을 사실상 그대로 옮겨 싣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호소이는 과연 어디서 무얼 보았기에 감히 정감록의 정본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 ●정본 정감록의 대본은 규장각에 1980년대 중반 이민수는 정감록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에는 정감록의 원본이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좀더 정확히 말해,‘감결(鑑訣)’‘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記)’ 등 네 편의 비기가 규장각에 있다고 했다. 나는 동경판 정감록의 대본을 찾기 위해 규장각으로 달려갔다. 그 때가 1997년 8월이었다. 필사본 ‘정감록’이 도서번호 12371번으로 분류돼 있었는데 이민수가 말한 바로 그 책으로 보였다. 그의 말대로 방금 말한 4종의 비결이 한 권으로 묶여 있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비교해 보았다. 호소이의 동경판과 거의 일치했다. 나는 규장각의 필사본 정감록이 동경판의 대본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슬며시 일어난다. 이 필사본은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규장각에 들어왔을까? 알다시피 규장각은 명군으로 알려진 정조가 대궐 안에 세웠다. 그것도 즉위하던 1776년에 말이다. 다른 기능도 가지고 있었지만 규장각은 일차적으로 왕립도서관의 구실을 했다. 만일 문제의 필사본이 처음부터 규장각에 비치된 문서였다면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 된다. 조선후기 왕실이 정감록을 소장했다는 뜻이 되고 그러면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들도 읽었을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조바심을 억누르며 필사본 정감록의 겉장을 들추었다. 첫 장 윗부분에 큼직한 도장 하나가 찍혀 있다.‘조선총독부도서지인(朝鮮總督府圖書之印)’이라고 했다. 잠시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상황을 미루어 짐작했다. 이 필사본은 본래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가 소장했단 뜻이 틀림없지 싶다. 필사본 정감록은 일단 조선후기 왕립도서관 규장각과는 직접 인연이 없는 것으로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총독부 도서가 어떻게 해서 규장각 도서로 변신했을까? 필사본 첫 장 왼쪽 머리 부분에 또 다른 인장 자욱 두 개가 선명한데 거기 답이 있다.‘경성제국대학도서장(京城帝國大學圖書章)’과 ‘서울대학교도서(大學校圖書)’라는 인장 말이다. 연달아 찍혀 있는 도장의 내용으로 미루어 이 필사본의 역사는 대강 이러했다. 처음엔 조선총독부의 도서로 등록됐다. 호소이가 동경판 정감록을 출판한 것은 1923년, 그 때만 해도 이들 필사본은 조선총독부의 소장 도서였다. 그 뒤 1926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고 필사본은 어느 해엔가 대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그리곤 1945년 해방을 맞아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로 주인이 바뀌었다. 현재 규장각 도서를 자세히 살펴 보면 호소이가 참고한 또 다른 비결들이 있다. 이민수가 언급한 4종의 필사본 외에도 나는 또 다른 4종의 비결들을 찾을 수 있었다.‘남사고비결(南師古訣)’‘도선비결(道宣訣)’‘무학비기(無學記)’및 ‘북창비결(北窓訣)’이 그것이다. 물론 모두 필사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용이 호소이의 동경판 정감록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규장각에 보관되기까지 경위도 이미 앞에서 말한 필사본 정감록과 똑같다. 이런 식으로 이른바 정본 정감록 25종 가운데 8종의 정체는 확인된 셈이다. 요컨대 1923년 동경판 정감록을 출간할 당시 호소이는 조선총독부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을 대본으로 사용했다고 봐야 한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런 일은 총독부와 긴밀한 협의가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그럼 규장각에 남아 있는 8종의 비결은 그렇다 하더라도 나머지 17개의 비결은 또 어떤 유래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호소이의 동경판 정감록의 원고를 찾아서 호소이가 참고했을 법한 비결 책들을 찾느라 나는 한 동안 규장각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마침내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문건이 또 하나 발견됐다. 호소이의 동경판과 표지 제목이 똑같은 ‘비결집록’이란 필사본이었다. 전통적인 책자 형태로 장정된 이 필사본은 본래 경성제국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이었다. 거기엔 비결 25편이 수록되어 있었다.‘감결’‘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역대왕도본궁수’‘삼한산림비기’‘무학전’‘오백논사’‘오백논사비기’‘도선비결’‘정북창비결’‘남사고비결’‘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서산대사비결’‘두사총비결’‘피장처’‘화악노정기’‘북두류노정기’‘구궁변수법’‘옥룡자기’‘경주이선생가장결’‘삼도봉시’‘무제’‘서계이선생가장결’‘토정가장결’‘이토정비결’및 ‘갑오하곡시’가 차례로 나와 있다. 나는 이 필사본을 한 장씩 넘겨 보다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이 필사본은 제목도 편집 순서도 그리고 내용까지도 호소이가 펴낸 동경판 정감록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전 일치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필사본에 무슨 글자를 썼다가 나중에 고친 부분들이 간행본에는 고쳐 쓴 모습 그대로 인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도 있는가? 혹시 이 필사본은 동경판 정감록의 원고라도 되었단 말인가? 동경서 나온 정감록의 원고가 어떻게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됐을까? 미스터리의 연속이다. 여러 날 나는 이 문제로 골치를 썩였지만 끝내 의문을 다 풀지 못 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해 보였다. 이 필사본은 호소이의 원고일 가능성이 무척 크단 점이다. 이미 지난 호에서 알아본 대로 1923년 호소이는 동경에서 정감록을 간행했다. 그 당시 한국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이 그 책을 구입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동경판을 베껴 필사본으로 간수해야 될 어떤 이유도 나는 발견하지 못한다. 뿐인가. 필사본엔 원고를 수정한 흔적이 역력하고 수정된 사항이 인쇄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 기막힌 일이다. 그래도 아직 단정을 내리기엔 이르다. 이 필사본엔 동경판에 부록으로 실린 10편의 비결들이 하나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정감록에 대한 호소이의 비판이 빠져 있다. 그러면 이 원고는 역시 동경판 정감록의 발췌본이란 이야긴가? 그렇게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제국대학 도서관이 왜 하필 본문만 애써 옮겨 쓴 필사본을 소장한단 말인가? 아직 호소이가 부록과 서문을 작성하기 전에 편집한 본문 원고로 보면 문제는 풀린다. 나의 이런 짐작이 옳다면 위에 열거한 25편의 비결은 무엇인가 공통점이 많아야 한다. 본문이 부록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인가? 비결의 내용이 문제일 수도 있다. 비결의 수집 또는 편집 주체를 기준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총독부가 소유한 텍스트는 본문, 그렇지 않고 개인이 소장한 비결은 부록이란 구분도 있을 법하다. 나의 짐작은 맞았다. 뒤에 보듯 본문에 실린 25개의 비결은 모두 총독부가 관리하던 것이었다. 알고 보면 호소이의 동경판은 아유가이의 원고를 베낀 것이다 그렇다 해도 두어 가지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다. 조선총독부가 25종의 비결을 입수하게 된 것은 과연 언제였으며, 이 비결들을 편집 또는 변형시킨 장본인은 누구인가? 이런 문제가 해결돼야만 비로소 동경판 정감록의 비밀이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 끝에 나는 우리나라 주요 도시에 있는 도서관들을 순방하기로 했다. 천안, 대전, 대구, 부산, 전주, 광주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다시 서울의 도서관들을 뒤졌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뜻밖의 문서가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또 하나의 필사본 ‘정감록’이 발견된 것이다. 그 첫머리에는 호소이의 정감록 비판은 오간 데 없었고, 대신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란 일본인의 해제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 일본 사람이 해제를 쓴 것은 1913년(大正2년) 2월. 호소이가 동경에서 정감록을 간행하기 10년 전 또 다른 일본사람이 정감록을 편집했던 것이다. 일제 초기부터 한 일본인이 서울에서 정감록을 연구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아유가이 후사노신은 누구인가? 그는 러일전쟁(1904∼1905)이 끝나자 공로가 인정되어 훈장을 받은 일본제국의 ‘애국자’였다. 이미 1884년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학’을 공부했고 학교를 마치자 바로 한국에 건너왔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으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원수 같은 왜놈’이다. 그런 아유가이는 경부철도부설 등에 종사해 벼락부자가 됐고, 그 돈으로 한국의 고미술품과 서적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일찌감치 1902년 오오에 타쿠(大江卓), 마에마 교우사쿠(前間恭作) 등과 더불어 학회를 조직하여 한국문화를 ‘연구’했다.‘어리석은 한국인을 지도 계몽’할 목적이었다. 아유가이는 조선총독부가 사적을 조사할 때 위원이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여러 주제에 대해 글도 많이 썼다. 일본의 대표적인 어용학자 아유가이가 정감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럼 언제였을까? “내가 메이지 초년(明治 1868∼1911)에 한국으로 건너왔을 당시부터 이미 여러 차례 귀에 익숙하게 예언설(讖言)이 들렸다.”고 하였다.1880년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아유가이는 정감록에 주목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에는 각종 예언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성세(聖歲, 경술년 1910년)에 한양(조선왕조를 상징)의 운수를 보니 옮겨서 붉은 해(紅日, 일본) 아래로 간다(일본에 망한다는 뜻).”는 예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13년 아유가이가 편집한 정감록은 ‘감결’‘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역대왕도본궁수’‘삼한산림비기’‘무학전’‘오백론사’‘오백론사비기’ 등으로 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그가 편집한 정감록은 필사본 ‘비결집록’과 순서도 똑같고 내용도 같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두 필사본의 편집 형태마저 동일하단 점이다. 각기 맨 앞에 실린 ‘감록’을 보면 한 쪽이 10줄로 구성돼 있고 줄마다 20자씩으로 되어 있다. 두 필사본은 모든 글자의 위치가 완전히 일치한다. 이러한 몇 가지 사실로 미루어 호소이의 동경판 정감록은 총독부가 소장했던 비결을 대본으로 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10년 전에 편집된 아유가이의 원고를 베끼다시피 했다고 본다. 아유가이는 왜 호소이에게 출판을 양보했을지 의문이다. 당시 아유가이는 학자로서 이름이 꽤 난 편이었다.‘고명하신’ 학자께선 정감록 따위의 잡서에 관한 일로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좀더 ‘싸구려’인 언론인 출신의 호소이에게 양보했다? 자세히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현대판 ‘정감록’은 아유가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혹시 아유가이야말로 당시 조선총독부가 소장했던 여러 종류의 비결을 수집 정리한 사람이 아닐까? 아유가이의 필사본 27쪽 왼쪽 가장자리에 이런 메모가 있다.“(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있는 ‘정감록’에는 정말 이렇게 기록돼 있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 쪽 오른편 가장자리에도 “학무과 분실에 있는 무학기에는 (이하 대여섯 자 해독불가) 무학전, 오백론사, 오백논사비기의 세 책이 포함돼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명백해진다. 첫째,1910년대 초반 총독부 학무과에는 아유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노력을 통해 이미 많은 비결이 수집 정리돼 있었다. 둘째, 이것을 토대로 아유가이는 현대판 정감록을 편집했다. 정리하면 본래 총독부 도서였다가 우여곡절 끝에 현재 규장각으로 이관돼 있는 비결들은 아유가이가 참조했던 문서들이었다. 아유가이가 이용한 총독부 소장본 가운데 뒷날 ‘감결(鑑訣)’로 알려진 비결이 실은 1910년대 초반까지는 ‘정감록’으로 불렸다. 이런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연대 미상의 한글 필사본 비결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한글판 비결의 제목은 정감록이라 돼 있는데 내용과 구성 면에서 보면 한문본 ‘감결’과 대강 같다. 따지고 보면 아유가이가 총독부 소장문서를 참조해 ‘정감록’을 편찬하던 당시에는 ‘감결’이란 이름이 아직 없었다. 감결이란 명칭은 아유가이의 창안품이었다. 그는 총독부가 소장한 다양한 비결을 하나로 묶으면서 ‘정감록’이라고 했다. 그 때 한국의 예언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감록이었기 때문이다. 책 이름을 이렇게 정하고 나자 여러 종류의 다른 비결들과 본래의 정감록을 구분할 필요가 생겨났다. 아유가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감의 비결’이라는 의미로 ‘감결’이란 새로운 제목을 만들었다. 그러면 아유가이는 무슨 이유로 정감록을 편찬했는가? 항상 그가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러면 대답은 명료해진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정감록은 정치 사회적 혼란의 진원지였다. 그들은 정감록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나아가 정감록의 파괴력을 소멸시킬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일본제국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아유가이가 그 일에 앞장섰다. 그는 이미 총독부 학무과가 수집, 정리 그리고 변조해 놓은 여러 종류의 비결을 재정리했다. 그가 필사본 가장자리에 남겨 놓은 메모를 보더라도 증명되는 사실이다. 그의 메모를 자세히 살펴 보면 20세기 아유가이가 편집한 현대판 정감록의 특징이 뚜렷이 드러난다.1910년대 초반까지 ‘정감록’은 아유가이가 ‘감결’이라 명명하게 되는 바로 그 비결이 본체에 해당했다. 거기에 세편의 부록이 추가됐다.‘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역대왕도본궁수’및 ‘삼한산림비기’가 덧붙여진 것이었다. 당시엔 중요한 비결이라면 본문과 몇 개의 부록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무학비결도 그런 경우였다. 유명한 비결은 본문과 부록으로 편성되게 마련이었다는 점은 1923년 호소이가 내놓은 동경판에서도 증명된다. 호소이는 정작 서문에서 그 점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목차를 보면 본문과 부록의 차이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예컨대 ‘무학전’이라는 비결 제목에 이어 좀더 자잘한 활자로 한 칸 낮추어 ‘오백론사’와 ‘오백론사비기’라는 제목이 적혀 있는 식이다. 이처럼 비결들 상호간에는 주종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부록과 본문을 구별하는 태도는 김용주가 편찬한 한성판부터 점차 애매해진다. 김용주는 총 51편의 비결을 7편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는데 본문과 부록의 구별이 없었다.1930∼1940년대에 출간된 경성판에 이르러서는 전체를 몇 개의 편으로 나누는 관행조차 사라졌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비결은 정감록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경성판에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현병주의 입장은 해방 이후 출간된 모든 정감록 번역서들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정감록에 대한 인식은 일제시기인 1910년대부터 달라졌다. 그 변화는 총독부의 비호와 사주 아래 어용학자인 아유가이가 주도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가 ‘정감록’이라 하면 아유가이나 호소이의 정감록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일제는 정감록을 독립운동을 비롯한 ‘사회 혼란’의 기폭제로 경원시했던 것인데 알게 모르게 그 잔재가 여태 남아 있다. 문득 씁쓸한 생각이 든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마니아] ‘뽕짝’ 밖엔 난 몰~라

    [마니아] ‘뽕짝’ 밖엔 난 몰~라

    ‘뽕짜작 뽕짝, 뽕짜작 뽕짝….’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트로트는 ‘뽕짝’이라는 별칭 그대로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신바람을 일으키는 데 한몫을 한다. 나이 든 어른들의 노래라는 인식도 최근 ‘어머나’의 왕대박을 계기로 무색해졌다. 연령을 떠나 바람을 타고 있다. ●트로트 가수들은 왜 립싱크를 하지 않을까. 트로트 동호인들이 내놓는 답은 이렇다. 보통 립싱크 가수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춤추기 위해서다. 하지만 트로트는 특성상 춤이 격렬하지 않다. 그래서 립싱크를 할 명분이 없다. 트로트만 찾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 바로 ‘트로트 사랑방’이다. 전국에서 통틀어 회원 709명을 거느린 사랑방에는 40대를 주축으로 30∼50대 연령층이 참여하고 있다. 회원 금잔화(47·여)씨는 “행복한 중년을 가꾸기 위해 가입했다.”면서 “주부 등을 대상으로 가요를 가르치는 교실이 엄청 늘어났지만,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몰리다 보니 평소 배우고 싶은 노래를 배우기는 이런 모임이 낫다.”고 말했다. 철저하게 정회원 중심으로 조직된 사랑방에는 가요를 신청하면 세이클럽(www.sayclub.com) 사이트를 통해 들려준다. 금잔화씨는 23일 백수건달의 ‘잊지 말고 와주오’라는 노래가 마음에 와닿아 듣고 싶다며 곡을 아는 회원이 있으면 띄워달라고 글을 올렸다. ‘까마귀’라는 별명을 가진 한 회원(51)은 나훈아의 ‘모르고’를 신청했다.‘아무것도 모르고 사랑했어요 당신을/사랑이 이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당신을 사랑했어요/사랑은 날마다 행복한 줄 알았고/사랑은 꿀처럼 달콤한 줄 알았지/나는 몰랐네 나는 몰랐네/아픈 줄 나는 몰랐네’ ●트로트는 왜색(倭色)? 트로트를 둘러싸고 일어난 논란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트로트 동호인들의 대답은 노(No)이다. 각종 근거를 댄다. 우선 거꾸로 말해 우리나라에서는 트로트를 일본풍이라고 떠들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엔카(演歌)야말로 뿌리를 한국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본다며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는 김강섭(72) 관현악단 지휘자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 미 8군에서 악단 생활을 하다 1961년부터 95년까지 KBS의 전속 악단장을 맡았던 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일본을 싫어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왜색가요라며 금지곡을 남발했던 게 트로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낳았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논문도 있다. 논문 뼈대는 다음과 같다. 원래 트로트란 1910년대 미국에서 생겨 댄스 음악의 대명사로까지 발전했다. 이것을 아시아에 도입한 사람 가운데 한명이 바로 엔카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였는데, 그가 바로 미국의 ‘폭스 트로트’를 동양적 감성을 실은 다른 방식의 작곡을 통해 ‘폭스’라는 꼬리를 떼고 트로트를 창시했다는 설명이다. 일제시대 당시 한국에서 자라난 그는 또 판소리, 민요 등을 연구했는데 이 시기가 자신의 음악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마포의 ‘뽕짝 잔치’에 오세요 오는 28일 지하철 6호선 대흥역 쪽에 있는 마포문화체육회관에서는 우리나라 전통음악인 트로트를 살리기 위한 전국 가요제가 열린다. 이날 오후 2시 막을 올리는 제1회 대한민국 전통가요제는 한국전통가요운동본부(회장 김도현)가 주최한다. 예산만 해도 실내에서 열리는 가요제치고는 제법 많은 5000여만원이 들어간다. 지난 2월부터 4월 말까지 참가자를 접수한 결과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부터 60대 등 다양한 연령층 29명이 무대에 오르게 됐다. 전통가요운동본부는 대상, 금·은·동상, 장려상, 인기상 등 6명을 가려 한국연예협회 가수로 등록시키고 활동도 지원할 계획이다. 전통가요 홍보대사로도 임명한다. 흔히 뽕짝으로 깎아내리지만 생활 주변에서 트로트 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전통가요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근거는 이렇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최근 경제난 등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애환을 달래주고 기쁨도 함께한 장르라는 주장이다. 김 회장은 “식민지 시대에 유랑 악극단들이 전국을 돌며 민족의 울분을 어루만지고, 긍정적인 사고를 심어주며 활력소가 됐던 게 바로 전통가요였다.”면서 “서양문화가 급속도로 들어와 전통을 깨뜨린 데다, 최근 들어서는 국적없는 노래와 춤으로 음악세계가 혼탁해진 현실을 타개하려는 뜻”이라고 가요제 창설 배경을 설명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징용 조선인 유골 반환 韓日 25일 첫 정부협상

    |도쿄 이춘규특파원|한국과 일본 정부가 식민지 시기 강제징용 조선인 희생자 유골반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오는 25일 도쿄에서 첫 심의관급 협상을 개최한다고 마이니치신문이 22일 보도했다. 협상에는 한국측에서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측 간부가, 일본측에서는 외무성과 후생노동성, 내각관방 당국자가 각각 참석할 예정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9월부터 강제징용에 관여한 108개 기업을 상대로 유골 확보 여부를 조사, 이달 초 현재 조사기업 3분의1로부터 답변을 받았으며 이 중 2개 기업이 100위 가량의 유골을 사찰에 안치한 사실을 확인했다. 일본측은 별도로 전국 사찰과 조선인 징용자가 일했던 탄광 등의 현장조사를 실시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신문은 조사가 진행되면 징용자들이 잔혹하게 노동을 강요당한 실태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면서 일본 정부의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측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 소식통은 “식민지 지배로 인한 배상협상을 다시 하자는 운동이 펼쳐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른 관계자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taein@seoul.co.kr
  • 야만과 문명 / 잭 웨더퍼드 지음

    호주 남쪽 섬 태즈메이니아의 원주민은 왜 멸망했을까? 동남아시아·서인도제도 출신 사람들은 왜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유럽, 미국 등으로 이동해 커다란 도시공동체를 이뤄 살고 있을까? 미국 매칼래스터대 인류학과 잭 웨더퍼드 교수가 쓴 ‘야만의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권루시안 옮김, 이론과실천 펴냄)는 역사속 인류의 ‘흥망성쇄’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지은이는 전 대륙의 도시와 오지를 오가며 현존하는 문명과 문화의 일면을 볼 수 있는 현장을 답사해 인류의 1만년 역사 문명과 야만 사이의 교류와 협력, 폭력을 생생히 보여준다. 특히 서구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유럽의 식민지 시대 이후 ‘문명’이 어떻게 ‘야만’을 폭압적으로 제거했는지, 문명이 스스로 행한 야만과 문명의 내부에서 자라는 야만이 어떤 것인지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각 장마다 지은이가 몸소 체험한 도시의 ‘인류학적 여행기’도 색다른 읽을거리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멕시코 아카풀코, 필리핀 마닐라 등 세계 유명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문명의 발달·교류의 시각으로 풀어낸 것도 흥미롭다. 기마기술·인쇄술의 발달, 바닷길의 발견, 식민주의 등 역사와 문명 발달에 큰 역할을 했던 주요 사건들로부터 세계 각 문명과 문화에 대한 풍부한 상식도 얻을 수 있다.1만 8000원.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씨줄날줄] 한반도 우범지대론/이목희 논설위원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한반도 주변을 ‘우범지대’에 비유했다. 최근까지 주한대사를 지낸 힐 차관보는 한국을 이해하는 온건파로 분류된다. 힐 차관보 스스로 ‘한국산(made in Korea)’이라고 부르는 둘째딸 클라라는 서울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한반도를 비하하려고 그런 용어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힐 차관보의 뉴욕타임스 인터뷰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한국을 자극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우범지대라고 번역된 원문은 ‘high-crime neighborhood’. 전후 맥락을 살펴볼 때 ‘침략다발지역’이라고 풀이하는 게 낫겠다. 그는 또 “과거에, 아마도 지금은 아니겠지만”이란 전제를 달았다. 지난 수세기 동안 침략과 전쟁이 많았다는 부연설명을 했다.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친 일본과 청, 러시아의 한반도 각축전을 염두에 두고 그런 언급을 한 듯싶다. 힐 차관보의 선의(善意)를 인정하는 한편으로 논리상 모순을 지적해야겠다. 그는 동북아균형자론에 대한 물음에 우범지대론으로 답했다. 한국 정부는 멀리 위치해 있으며, 우범자가 아닌 미국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뒤집어말하면 중국·러시아·일본 등 인근국은 우범자군(群)에 속하게 된다. 힐 차관보가 ‘과거 사실’을 강조한 배경은 이들 나라의 눈치를 본 때문이다. 현재가 그렇다고 하지 않으려면 어설픈 비유를 자제해야 했다. 미국은 한 세기 전 일본의 한반도 침탈에 도움을 줬다.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해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한반도를 각각 식민지로 삼는 것을 양해했다. 앞서 1871년에는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했다. 동북아 근세사에서 미국도 광의의 우범자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멀리 있는 강대국’이 침략의사가 약하다는 시사도 문제가 있다.2300년전 중국 전국시대에 설파된 ‘원교근공(遠交近攻)’ 외교정책이 현대까지 이어져온 것은 사실이다. 영국의 세력균형정책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국경이 무너지고, 물리적 거리의 의미가 없어지는 미래상황에 맞지 않는 외교정책이다. 한국 정부가 동북아균형자라는 모호한 개념을 제시해 당황스럽긴 하겠으나 이런 식의 대응은 설득력이 없다. 한·미동맹 약화를 막으려면 양국 외교당국자의 발언 하나하나에 정교함이 필요하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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