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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남베트남 역사가 주는 교훈

    ‘제3세계’. 참 낯설다면 낯선 단어다. 선진국의 문턱을 넘나든다는 우리에게 제3세계란 정치·경제적으로 낙후된, 지구상 저 어디쯤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사실 한국은 식민시대·압축성장·민주화 투쟁을 걸어온 전형적인 제3세계 국가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의 현대사를 평가하기 위한 비교연구대상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 서구 선진국보다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한 제3세계 국가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남한과 남베트남을 비교분석한 연구서가 나왔다. 한성대 전쟁과평화연구소 윤충로 연구원이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선인 펴냄)를 냈다.“베트남의 역사는 세계에서 한국 역사와 가장 비슷합니다. 식민지경험과 광복, 분단과 경찰독재국가의 성립,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거의 똑같습니다.”그런데 제대로 된 연구가 없다. 그가 남한과 남베트남 비교연구에 베트남 현지생활 1년을 포함해 7년여의 시간을 들인 이유다. 비교사회학자로서 윤 연구원의 관심은 두가지다.1945년 이후 왜 이승만·응오딘지엠 정권으로 상징되는 반공독재국가가 남한과 남베트남에 들어섰는가. 그리고 왜 남한은 성공하고 남베트남은 실패했는가.●일제식 강압적 통치기구가 남한의 기반 윤 연구원은 ▲지방통제능력 ▲이데올로기적인 것 ▲사회경제적 측면 등 3가지 원인을 꼽았다. 일제는 억압정책의 효율성을 위해 한국의 중앙집권화를 꾀했고 이는 미군정과 반공우익 정부에 그대로 계승됐다는 것. 반면 베트남은 마을 단위의 자치권이 강하다 보니 장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베트남에 미국은 프랑스에 이은 제국주의세력이었지만 한국에 미국은 맥아더 동상철거 논란에서 보듯 해방군의 성격도 있었다. 그렇다보니 남베트남이 외친 반공은 민족주의 바람에 밀려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문에 ‘반공’이 절대 가치로 떠올랐던 한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국가 입장에서 보자면 시민사회 제압을 통한 국가 안정에 도움이 됐다는 결론이 나옵니다.”이 과정에서 불거진 것들이 바로 각종 ‘폭동’과 ‘양민학살’ 사건들이다.●역사를 결과론적으로 보지 말라 이런 설명은 얼마 전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강정구 교수의 주장과 일치한다. 강 교수 주장의 배경으로 꼽혔던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사관과 역사추상형 접근법에 대해 물었다.“역사추상법이 그 사건에서 지나치게 확대됐습니다. 역사에서 어떤 단면을 잘라두고 ‘만약’이라고 가정해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그 방법 자체가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서구에서도 ‘가설적 가정법’이라는 방법을 씁니다.”수정주의 비판도 반박했다.“외려 수정주의를 너무 일찍 버린 것이 문제라 생각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미국의 개입과 그 효과입니다.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이라는 차원에서 수정주의는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뉴라이트 진영에서 제기하는 ‘건국과 부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역사를 보지 말자는 것.“지금 와서 보니 옳은 것이니 그것은 처음부터 정당했고 당시의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방식은 외려 다른 방향을 모색했던 ‘또 하나의 역사’를 외면하고 평가하지 말자는 얘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참전군인들 목소리 생생히 남길 터 윤 연구원은 앞으로 베트남전을 더 파고 들 예정이다.“베트남전에는 8년여에 걸쳐 30여만명의 한국인이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작게는 참전군인과 그 가족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크게는 남한이 본 남베트남과 남베트남이 본 남한을 그려볼 생각입니다.”연구방향이 이렇게 정해지다보니 아무래도 앞으로의 연구는 문헌연구보다 구술연구쪽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으로 보인다. 윤 연구원은 한국내 작업을 마무리짓는 대로 다시 베트남으로 떠날 예정이다.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이라크 ‘석유식민지’ 전락하나

    세간의 소문대로 미국과 영국이 점차 이라크를 사실상 ‘석유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고 영국 인디펜던트가 22일 보도했다. 영국 시민단체인 워온원트(War on Want)와 새경제재단(NEF), 플랫폼 등은 공동으로 발표한 ‘원유 설계’라는 보고서를 통해 이라크 정부와 국민에게 돌아가야 할 이라크의 석유 수입이 미·영을 등에 업은 세계적 석유기업들에 유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미 국무부가 이라크전 발발 이전부터 원유개발에 참여하는 외국인 투자자들과 ‘생산물분배협정(PSA)’을 맺을 것을 이라크 정부에 요구했으며, 연합군 임시행정처(CPA) 통치 시절 이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어 석유기업들이 원유개발에 투자하는 대신 원유를 시세보다 훨씬 싼 배럴당 40달러에 25∼40년 동안 공급받기로 이라크 정부와 계약할 경우 이라크는 최대 1940억달러(약 203조원)의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될 것으로 추산했다. 원유개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달 15일 총선 뒤 새 의회에서 제정할 ‘석유법’에 명시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미 다국적 석유기업들은 이라크측과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보고서는 이라크 석유 매장량 가운데 적어도 64%는 외국 기업이 개발권을 갖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라크의 확인된 석유 매장량은 1150억배럴로 세계에서 3번째로 많다. 앤드루 심스 NEF 정책국장은 “이라크는 ‘새로운 출발’ 대신 식민지라는 덫에 발목을 잡히게 됐다.”고 꼬집었다. 루이스 리처즈 워온원트 사무총장은 “사람들은 이라크전의 실체가 원유와 약탈, 이윤추구라는 점을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미·영 정부와 석유기업들은 이같은 주장은 ‘음모론’의 시각에서 본 억측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이라크는 재건사업을 위해 돈이 필요하며, 원유개발은 결국 이라크 국민에게 득이 된다는 것이다. 영국 외무부 대변인은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유엔의 제재와 최근 반군의 공격, 약탈 등으로 투자가 크게 부족한 실정이며 외국 기업의 투자를 절실하게 원하고 있다.”고 밝혔다.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수도권매립지 피해보상 축소

    수도권매립지 인근 주민들에 대한 피해보상이 대폭 축소·조정될 전망이다. 침출수·매립가스 처리기술 발달과 매립지 공원화사업 등으로 악취로 인한 환경피해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22일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에 따르면 용역을 통해 폐기물 매립에 따른 환경영향조사를 벌인 결과, 환경피해를 입는 마을은 매립지 경계로부터 0.5㎞내에 위치한 인천시 서구 검단동 42·44·45통 등 3곳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공사측은 ‘폐기물처리시설 설치촉진 및 주변지역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규정한 피해보상 대상인 2㎞이내에 있는 13개 마을까지 보상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지원대상 가구수는 기존 8856가구에서 1438가구로, 통·이도 44개에서 13개로 대폭 줄어들게 된다. 지금까지는 매립지 경계로부터 5㎞이내 떨어진 주민에게까지 피해보상을 실시해왔다.2㎞까지는 법률에 의해, 나머지는 1996년 실시한 환경영향조사를 토대로 간접 환경피해영향권으로 정해 민원해소 차원에서 보상을 실시해온 것이다. 이로 인해 피해보상에서 제외될 위기에 처한 주민들은 종전처럼 환경피해영향권을 유지해 지원을 계속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들은 “학술적인 논리로 인한 영향권 축소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2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지난 2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방문, 영향권 조정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홍종극(49) 검단주민대책위원장은 “영향권역 제외 주민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2㎞내에 위치한 주민들은 영향권 조정에 찬성하고 있다.피해보상 대상이 감소할 경우 연간 130억원에 달하는 주민지원금의 집중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그동안 주민지원금 배분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어왔다. 한편 인천지검은 이날 수도권매립지에의 불법 폐기물 반입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1억 3000만원대의 금품을 수수한 전·현직 주민감시요원 14명을 적발, 이 가운데 4명을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했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행정도시 건설청 내년1월 출범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총괄 지휘하는 건설교통부 산하 건설청이 내년 1월 공식 출범한다.4본부 1지원단 15팀 1사무소 체제다. 정부는 21일 중앙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같은 내용을 담은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 직제령’을 의결했다. 이에 따르면 건설청은 건교부 외청으로 차관급(정무직) 청장과 별정직 1급 차장을 중심으로 정책홍보관리본부, 도시계획본부, 기반시설본부, 주민지원본부 등 4개 본부와 청사이전지원단 등 1개 지원단을 두기로 했다.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추진위원회 사무지원 및 중앙행정기관 등과의 대외협력 업무지원을 위해 서울사무소를 두기로 했다. 특히 본부장과 팀제를 도입해 본부장은 2∼3급, 팀장은 3∼5급, 팀원은 직급 구분 없이 충원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전체 정원은 147명이다. 2,3급 본부장 중 도시계획본부장은 개방형직위로 내·외부 도시계획 전문가에서 선발하는 한편 주민지원본부장 및 15개 팀장직은 직위공모, 직원은 건교부, 중앙행정기관, 지자체를 대상으로 공개 모집한다. 민간부문 전문인력이 필요한 법무, 도시계획, 국제협력, 전산 등 직위는 민간 전문인력에서 계약직으로 뽑는다. 건교부는 이달 말까지 직제시행규칙을 제정하고 다음달 초까지 인력 선발을 끝낼 계획이다.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열린세상] 고도 지식사회의 대학정책/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 교수

    며칠 전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20세기 경영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 받는 드러커는 경영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지식사회의 도래를 예언한 그의 통찰력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그는 1950년에 ‘새로운 사회’가 오고 있다고 내다봤다. 그 후 수많은 저서를 통해 그는 고전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에서 가치의 생산수단으로 중시한 자본과 노동 대신에 지식이 미래사회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1950년의 드러커의 예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잠꼬대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때 자본주의는 2차대전의 터널에서 겨우 빠져나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져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비슷한 규모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세계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본 대신에 지식을 강조한 경영학 이론은 보통사람들에게 현실감을 안길 수 없었다. 그러나 5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예언은 멋들어지게 적중했다. 지식이 곧 최대의 자본이라는 명제는 상식화된 지 오래다. 드러커는 그의 명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을 ‘부존자원이 없는 후진국으로서 교육을 통해 성공적으로 산업사회에 진입한 대표적인 국가’로 들었다. 밀레니엄이 바뀌기 직전에 내가 만난 미국의 어느 한국학 교수도 지식이 자본이라는 드러커의 가설을 거증하는데 우리나라만큼 딱 들어맞는 나라는 없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치하에서 영국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 인도와는 달리 한국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그리고 미국의 군정통치하에서도 근대성을 열심히 습득했고, 그것이 결국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활짝 꽃필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그로 인해 배태된 한국 자본주의의 병폐를 과소평가한 것이긴 하지만, 최악의 조건에서도 자식만은 잘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열이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두 과제를 한꺼번에 풀게 한 저력의 원천이었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61년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5개년 경제계획을 처음으로 세우면서 당면한 풀기 어려운 숙제는 5년 후의 지표를 실현 불가능할 정도로 높게 잡아도 북한의 지표에 턱 없이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하기야 GARIO,ECA,CRIK,UNKRA,ICA에 PL480까지 마치 비밀번호 같은 다양한 이름의 원조자금으로 구구도생(區區圖生)해온 나라에서 경제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비웃음을 사기에 족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교육을 통해 구축한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20세기 말 이후 세계를 또다시 놀라게 하고 있다. 가난을 이긴 신흥공업국의 이미지도 벗어던지고, 반도체 전자 조선 철강 자동차 등 핵심 분야에서 선두주자로 올라섰다. 정보산업이나 사회의 정보화 지수에서도 선도적인 위치를 자랑하고 있다. 이런 질적인 도약을 몇 번만 되풀이하면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선진국으로 우뚝 설 것이다. 이런 단계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무엇일까? 역시 교육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동력이 교육이었듯이 교육만이 고도 자본주의로의 도약을 담보한다. 그러나 교육은 육체근로자 시대의 그것과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에는 평준화 교육이 값싸고 균질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식사회에서 지식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초우수자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병행해야 한다. 특히 대학 몇 개쯤은 세계 50대 대학에 낄 수 있도록 집중 육성할 필요가 있다. 여기 찔끔 저기 찔끔 나눠주는 대학교육 정책은 이제 접을 때가 왔다. 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 교수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日행정구역 통합 학산시 현장탐방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日행정구역 통합 학산시 현장탐방

    일본 고이즈미 정부의 주요 개혁과제인 시(市)·정(町)·촌(村) 합병작업인 ‘헤이세이(일본의 연호) 대합병’이 진행 중이다.1999년 3232개이던 기초자치단체는 내년 3월 1821개로 대폭 줄어든다. 총무성은 대통합의 잘잘못을 내년 3월까지 검증, 합병 후의 문제점을 줄여가겠다는 구상이다. 합병 작업이 진행중인 이시가와현 학산(白山)시를 찾았다. |학산(이시가와현) 이춘규특파원|도쿄 서북쪽, 동해안 연안의 이시가와현 학산시는 지난 2월 1시,2정,5촌이 합병해 탄생했다. 이시가와현 최대의 면적에 인구는 11만명이 됐다. 합병 뒤 선거를 통해 새 통합시장이 탄생했고, 각 시·정·촌 의회는 해산, 시 의회로 통합됐다. 격변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는 셈이다. ●변화의 칼바람 맞은 상층부 합병에 따른 변화는 격렬하다. 우선 8개 자치단체장 중 시라미네 촌장 등 7명은 자리를 잃고, 맛토 시장이었던 통합 학산시 카도 미쓰오(74) 시장만이 기초단체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부단체장도 8명에서 1명으로 줄었고, 교육장과 회계·재정담당자도 역시 8명에서 1명으로 축소됐다고 기타노 고이치 학산시 총무부장이 설명했다. 지역사회 상층부 32명 중 28명이 대통합으로 인해 졸지에 자리를 잃은 것이다. 지역유지들인 의회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시·정·촌 의회 8곳의 의원들은 합해서 100명 정도였다. 카도 시장은 “숫자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의견도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단체장, 부단체장 등이 크게 줄었는데 안줄일 수 없다고 판단,35명으로 대폭 줄였다.”고 설명했다. ●대통합의 바람은 이제 시작일 뿐 하지만 군살빼기는 시작일 뿐이다. 시의회 의원 정수는 차기 선거 때 28명으로 준다. 이처럼 인건비 부담이 상대적으로 큰 상층부만 줄여도 예산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시관계자들의 설명이다. 8개 시·정·촌 소속 직원들은 한개 시의 직원이 됐지만 아직까지 1040명의 정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카도 시장은 “10년에 걸쳐서 직원을 200명(20%) 정도 줄이겠다. 인위적인 조기퇴직보다는 채용 인원을 3분의 1, 혹은 5분의 1로 해서 줄이겠다.”고 밝혔다. ●새로운 학산시, 자력갱생 목표 일본 정부는 합병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들었다. 재정적인 압박과 지원을 병행한 것이다. 덩치를 줄이는 자치단체는 중앙정부가 재정 지원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깍겠다고 선언, 대부분이 통합대열에 끼었다. 학산시도 마찬가지다. 학산시는 8개 시·정·촌이 기존의 이름을 모두 버리고 일본의 3대 명산 중 하나인 학산 자락에 위치한 점을 살려,‘학산시’로 태어났다. 지명도를 높여 관광과 공업, 농업으로 자립하겠다는 의지였다. 학산시도 통합에 따라 중앙정부에서 10년간 450억엔(약 4000억원)의 특별지원을 받을 자격이 생겼다. 그 중에서도 70%는 중앙정부의 직접 지원금이다. 하지만 카도 시장은 “중앙정부 지원은 빚일 뿐이다. 따라서 100억엔 정도만 지원받으려 한다.”고 말했다. ●학산의 관광자원·특산물 알린다 학산시는 우선 명산 학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 수입을 늘릴 예정이다.8개 자치단체에 흩어졌던 축제, 고산식물 등 관광자원을 모아 시너지효과를 노린다. 학산 브랜드의 각종 상품들을 개발, 판매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학산시내 5개의 니혼슈(청주) 회사들은 ‘학산’을 특허 형식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학산이란 상표로 청주 등을 생산, 판매하며 280년,16대째 이어온 고보리주조사 고보리 히로야스 기획실장은 “최고의 청주 생산을 위해 최고의 쌀과 물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학산이란 청주로 고향도 알리고, 세수 증대에도 기여하려는 것이다. 학산 청주는 도쿄, 홋카이도, 가고시마 등 일본 전역에서 유명하고 해외로 수출도 되고 있다. 학산시를 흐르는 테도리가 천은 매년 10월말부터 11월말까지 연어낚시꾼들로 붐빈다.1978년부터 이시가와수산종합센터가 매년 2∼3월 600만∼800만 마리의 연어 치어를 방류, 매년 1만∼2만 마리의 팔뚝만한 연어들이 모천으로 회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1920년대부터 학산에서는 대규모 산사태가 빈발, 이후 첨단의 사방(砂防) 기술을 발달시켰다. 이런 기술은 한국과 타이완, 중국 등지로 전수되는 중이라고 한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학산에서는 사방공사에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들이 100㎏ 전후의 바윗덩어리를 나르다 희생된 어두운 역사도 있다. taein@seoul.co.kr ■ 행정구역개편 이렇게 |학산(이시가와현) 이춘규특파원|일본의 대규모 행정제도개편은 이번이 세번째다.19세기말 메이지정부가 시·정·촌제를 도입하며 농촌위주의 봉건적 행정체계가 사라졌다. 전후 1953년부터 3년간은 역시 시·정·촌 합병인 ‘쇼와대합병’이 이뤄졌고, 이번 합병이 세번째다.47개의 광역단체 수를 대폭 줄여 도·주제(道州制)를 실시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이번 대합병의 가장 큰 목적은 악화일로의 재정난 타개다. 시대 흐름에 맞게 통합, 재정지출을 최소화한다는 취지다.50여년 된 현행 제도는 교통망 발달에 따른 생활권광역화에 적합지 않다는 점도 이유다. 이농현상에 따른 농촌·산간지역의 인구 감소도 행정비효율을 초래했다며 통합을 재촉했다. 앞으로 중앙정부는 통합 지자체의 예산과 공무원 수 삭감을 유도하는데 주력할 계획이다. 합병은 지자체 의회의 결의와 주민투표 등으로 결정됐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재정적 유인책이 컸고, 일부 강제성도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지방자치를 보장한 헌법에 반한다는 비판도 있고, 환상이란 우려도 있다. 대합병에 따른 명암도 엇갈린다. 새로운 통합자치단체 신청사 등 대규모 공공시설공사가 많아 합병특수가 있다. 주민의식조사, 신도시건설 계획 등 컨설팅업체도 분주하다. 반면 서리를 맞는 곳도 적지 않다. 이미 기초단체장, 부단체장, 교육장 등 많은 지역유지들이 자리를 잃었다. 전국의 정·촌을 회원으로 해 정·촌의 요구를 정부에 전달해 온 ‘전국 정·촌회’도 회원수가 격감, 회비수입이 줄며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전국의 정·촌수는 2003년 4월 2513개였지만 7일 현재는 1395개이다. 대합병이 완료되는 내년 3월말에는 1045개로 줄어들 전망이다. taein@seoul.co.kr ■ 학산시 술도가 오쿠무라부부 |학산(이시가와현) 이춘규특파원|우리나라의 막걸리와 흡사한 도부로쿠(탁주)가 고이즈미 정부의 규제완화 정책 덕분에 대중주로 부활하고 있다. 여관 ‘시시쿠소’ 주인 오쿠무라 에이지 부부도 대합병과 규제완화 등 개혁 바람의 한복판에서 ‘도부로쿠 특구’를 앞세워 새로운 학산시 알리기에 발벗고 나섰다. ▶도부로쿠 특구는 무엇인가. -구조개혁의 일환으로 술도가에서만 제조하던 도부로쿠를 일정한 요건만 갖추면 일반시민도 만들 수 있게 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시작했다. ▶조건은 무엇인가. -숙박시설을 갖춘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고, 자신의 집에서 쌀을 생산해야 한다. 면적 제한은 없다. 냉장보관숙성 시설 등 생산설비도 자격요건이다. 주세법의 제약이 남아 있다. ▶왜 이 동네에 특구가 허가났나. -이 곳은 술이나 미소(일본식 된장), 간장, 미네랄 등 공업이 번성했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도부로쿠 특구도 허가가 난 것으로 보인다.6주간 연수도 필요했다. ▶학산은 왜 술이 유명한가. -기온의 연·일교차가 크기 때문이다. 청주나 도부로쿠를 발효시키려면 온도 조건이 매우 중요하다. ▶정부나 이시가와현의 지원은 없나. -비품을 시에서 구입한 걸 빌려쓰고 있다. 생산공정도 지원해주고 있다. ▶맛이 궁금하다. -청주와는 전혀 다르다. 알코올 도수는 청주와 비슷하지만 마시기가 쉽다. ▶외부에서 온 손님에게도 파는가. -고객이 와서 사갈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들고 가 팔 수는 없다. 숙박손님이 사서 들고 갈 수도 있지만, 택배로 부칠 수는 없다. taei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정조9년(1785) 봄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천주교인 수십 명이 오늘날의 명동천주교회를 결성했고, 그것이 문제가 돼 이른바 을사박해가 일어났다. 마침 전국적인 지하조직망을 가진 것으로 조사된 또 한 번의 ‘정감록’ 사건까지 발생해 세상인심이 뒤숭숭했다. 결국 정감록 사건의 주모자 몇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형채(朱炯采)라는 평민지식인이 끼어 있었다. 당시 심문 기록에는 주형채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실로 구슬을 꿰듯 주워 모아보면 주형채의 일생은 역사상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조선후기의 허다한 평민지식인 또는 술사들의 삶을 대변한다. 더욱이 그들은 체제에 저항한 일부 양반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주형채의 삶은 더욱 관심을 끈다. ●주형채의 ‘범죄행위’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범인 문양해는 동지 주형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함경도 영흥이 고향인데 향악선생(香嶽 속명은 김정 또는 김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흉악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편지에 쓰인 흉악한 구절을 문양해는 자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예를 든다.“하늘이 내리는 재앙과 시국의 변천이 이와 같으니 이제 진인(眞人)이 마땅히 나와야 할 것이고, 우리들은 사람들을 모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을 반정(反正)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향악선생은 이 편지를 상자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향악선생이 외출한 틈을 타서 평소 호기심이 많았던 문양해는 몰래 편지를 꺼내 보았다고 했다. 문제의 편지가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아마 사건 발생 한 해 전인 정조8년 정월로 짐작되는데, 주형채가 하필 왜 그 시점에 이런 편지를 보내왔는지 문양해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했다. 주형채가 향악선생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적어도 사건 발생 15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주형채는 얼굴 생김이 괴상하고 못났지만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여 사람을 쏘아보듯 하였다. 주형채와 향악선생 사이에는 오랫동안 편지가 오갔다. 지리산에서 함경도 영흥까지는 근 2000리나 되는 먼 길인데도 서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편지 심부름을 한 이는 혜준 스님이었다. 혜준은 오래 전 함경도의 어느 사찰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주형채와 친해졌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도 함경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건 당시 혜준은 경상도 하동에 있는 영원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향악과 ‘괴이한’ 편지를 주고받은 것 외에도 주형채는 여러 차례 불온 문서를 조작했다고 한다. 그는 “멀리 귀양가는 노래”를 지어 조정의 잘못을 비난하고 민심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주형채는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했다. 그 노래는 충신이 멀리 귀양 갈 때 지은 시라고 누군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저 베껴두었을 뿐, 다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발뺌이 용이하지 않았다. 주형채는 장차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주장을 동지들 앞에서 서슴없이 했던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함경도의 평민지식인 주형채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불순세력’과 연합해 조선왕조의 전복을 꾀했다.‘정감록’ 사건을 종결짓는 마지막 확정 판결의 일절은 이랬다.“이율,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 여러 역적들이 반역을 음모해 여러 도에서 거사를 도모하면서 주형채를 북도의 원수로 정하였다. 그들이 서로 왕복하며 주도면밀하게 반역죄를 꾸민 사실은 여러 죄수들의 심문과정에서 샅샅이 드러났다.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들을 군율에 의거하여 한강 모래밭에서 효시(梟示)하라.”(실록, 정조 9년 3월22일 신미) ●천문과 점술의 대가 주형채 정감록 사건에서 “북도 원수”로 거론된 주형채에게는 사실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이웃사람들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아리송한 일이 생기면 주형채를 찾아갔다. 주형채의 집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가 만나는 접경지대에 있어 양도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주형채는 이를 테면 ‘만물박사’였으며, 여러모로 평민들의 교사역할을 담당했다. 정감록 사건이 발생하기 일년 전인 정조8년 12월 초7일부터 사흘 동안 별자리에 이상이 있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형채에게 물어왔다. 당시 주형채가 관찰한 바로는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었다. 그 가운데 붉은 기운이 있어 상서롭지 못했다. 특히 여러 별 가운데서도 장군성(將軍星)과 태백성(太白星)이 서로 사흘 동안 싸우다 1도(度) 거리로 멀어졌다. 그 때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부딪쳐 여러 번 이겼다 졌다 했는데, 이 모든 것이 흉한 조짐이었다. 주형채는 이같은 현상이 조선이나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해로울 일이 조금도 없다고 주민들을 달랬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난리를 염려해 피란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만류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정의 심문관들은 주형채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관리들이 보기에 주형채는 민심을 선동해 피란행렬을 조장한 혐의가 짙었다. 실제로 그 무렵 함경도에는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정감록’에 예언된 십승지가 모두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도 사람들은 여차하면 남쪽으로 옮길 태세였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십승지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주형채와 같은 평민지식인들은 이주운동에 음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형채는 관리들의 문제제기를 부정했다.“저는 주민들을 타일렀습니다.‘현명한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어찌 피란가는 일이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평민 주형채는 본래 고향 사람 장진익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사건 당시 이미 사망한 지 오래 되어 화를 면했다. 유교의 기본 경전은 물론이고 천문과 점술까지 통달한 주형채는 향악선생과 같은 도사는 물론이고 점술인들과도 친한 사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형채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함구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제게는 제자나 동문생도 전혀 없었으며, 도사나 점술인은 원래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주형채는 의리가 무척 강했던 사람이며, 의지가 대단했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한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주형채는 대단한 악질이었다.“주형채는 본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놈으로 천문 역법과 점술, 둔갑술 등 갖은 술수를 써서 백성들을 속이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을 일삼았다. 몰래 역적이 될 마음을 먹고 밤낮으로 기회를 엿보았으며, 스스로 ‘대장’이라 떠들기도 하고, 혹은 ‘도원수’라고 칭했다. 더러는 10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했고, 혹은 영흥(永興)의 군사용 창고를 접수하겠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제가 세울 나라의 국호를 제(齊)나라라고까지 했다. 놈은 마음속으로 이것도 작다고 생각했던지 중국 황제를 만나 추천을 받아 자기가 임금이 될 거라고 했다. 또한 꿈의 해몽을 빙자해 신하로서는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말을 멋대로 지껄인 편지가 남아 있다. 지극히 흉악한 죄상이 지금까지 압수된 문서 중에 이미 역력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자기 죄를 한마디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평민지식인 주형채의 생각으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 때의 부정 불의한 세상이요, 조정이었다. 자기와 자기 동료들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따라서 썩어빠진 관리들이나 임금 앞에서 죄를 인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살점이 떨어지는 혹독한 고문을 묵묵히 견디면서 주형채는 단 한마디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사태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주형채가 지하조직에 편입된 계기 ‘정감록’ 역모사건의 소용돌이에 주형채가 휩쓸리게 된 것은 물론 그가 지하조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하조직에 가입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주형채는 이 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문양해 일가와 인연이 깊었다. 문양해의 삼촌 문광도는 함경도 문천에서 잠시 감목관(監牧官 목장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곳을 여행하던 주형채가 천문에 관한 일로 문광도와 토론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문씨들을 사귀게 되었다. 문씨 일가는 충청도 공주의 평민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그들은 홍국영의 가까운 친족 홍낙순이 충청감사가 되었을 때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홍 감사가 충청도 감영(監營)에 계실 때 많은 은혜를 입었고, 감사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문양해의 아버지의 진술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평민 문광도 역시 홍낙순의 후원으로 감목관 벼슬을 얻은 게 틀림없다. 주형채는 이런 문광도와 서로 기맥이 통하게 됨으로써 장차 문양해 및 홍복영(홍낙순의 아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둘째,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양형과도 깊이 사귀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형채의 사촌 주형로는 이미 양형을 알고 지냈다. 주형로(일명 주형일)는 사건 당시 충청도 단양에 머물고 있었다. 양형은 주형로를 통해 주형채란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자기 친척 문광도에게서 주형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게 되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양형과 주형채는 서로 연락해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사이는 곧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다. 양형은 서울 입동에 사는 중인이었다.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글재주가 출중했던 그는 서울의 양반 홍복영 및 이율과도 매우 친한 사이였다. 정조 초년, 홍복영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아버지 홍낙순을 따라 공주에 내려가 있었다. 그 때 의약에 관한 일로 홍낙순은 고민을 하던 중 양형이 의술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상의한 적이 있었다. 양형의 처방이 적중했던지 의술을 매개로 그들은 서로 친해졌다. 홍낙순 일가가 서울로 돌아온 뒤 양형과 홍씨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홍복영은 양형의 살림이 어려울 때 도와주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나중에 함께 공모해 하동에 지하조직의 거점을 마련했다. 양형과 가까워진 주형채 역시 이 조직에 포섭된 것은 물론이었다. 셋째, 주형채와 홍복영은 끝까지 그 점을 부인했지만, 주형채는 여러 해 전부터 홍복영 일가와 알고 지냈다고 봐야 한다. 홍복영의 삼촌 홍낙빈은 주형채와 친밀해 편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조 5년(1781) 세도정치가 홍국영이 실각하자 가까운 친척 홍낙빈도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그 때부터 주형채는 홍씨 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다들 왕조의 전복을 꾀하였다. 위에서 살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주형채는 ‘정감록’ 사건의 주역들과 마음을 합친 것으로 생각된다. 주형채와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이 지하조직을 형성해 나간 과정을 살펴보면 뜻밖에도 두 가지 사실이 부각된다. 하나는 18세기 조선사회에서 중인 또는 평민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지리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주형채처럼 고향을 지키고 사는 경우에도 자주 이웃 지방을 여행해 사교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둘째, 평민 또는 중인 지식인들은 계층을 뛰어넘어 양반들을 사귀는 데 열심이었고, 양반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하층지식인들과 접촉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같은 신분층에 속하는 식자들만 사귀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달랐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은 그것이 비록 평교(平交 평등한 교제)는 아니었다 해도 인생의 다양한 국면에서 서로 만났던 것이다. ●주형채가 속한 전국규모의 지하조직 주형채는 조직의 상층부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나 하부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조직원들은 지하조직의 일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던 지도층 인사는 문양해 정도였다. 문양해는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지하조직의 얼개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북도의 원수는 주형채였지만 그 밑에 여러 명의 두목이 활동했다. 함경도 안변에는 조상호와 유덕휘가, 그리고 강원도 통천에는 유경일이 대도독(大都督)이라 불렸다. 고성의 칠송정에 사는 권생만 역시 대도독으로 통했다. 그들은 일단 유사시 지역사령관으로 능력을 발휘할 참이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경일과 권생만은 지리산의 향악선생과 가끔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양해는 사건 발생 2년 전에 그들이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밖에 황해도 봉산에 있는 이형윤과 황주에 사는 정몽로도 해서지방의 괴수로 손꼽혔다. 고위간부는 아니었지만 평안도 곽산에 살던 박필현도 이 조직의 일원이었다. 주형채 등의 명단은 지리산 거점에 보관 돼 있던 두루마리에 모두 적혀 있었다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서울 사는 양반들도 이 지하조직에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앞에서도 이름이 언급된 이율과 홍복영이었다. 진사 이율은 한양 이현에 살았는데 홍씨 일문에 보낸 편지에서,“이 세상을 보지 아니 할 때는 언제입니까? 제 뜻을 온 세상에 널리 펴지 못하게 된다면, 한탄한들 무엇 하겠습니까?”라며 반역의 뜻을 비쳤다. 서소문 밖에 살던 진사 정래정과 정래익도 지리산의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을 비방하였다.“우리가 비록 재주가 없고 불민하지만 거사하는 날에는 조영흥(趙永興 이름은 미상)이나 주공(朱公 주형채)의 부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기서 보듯 주형채는 조직 내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인식되었다. 물론 지하조직을 총괄한 이는 향악선생이었고, 그를 측근에서 보좌한 이가 문양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향악선생이 끝내 체포되지 않은 가운데 이 사건은 종결된다. 어쩌면 향악선생이란 인물 자체가 허구였을 수가 있다. 문양해가 가공의 향악선생 노릇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문양해야말로 실은 지하조직의 괴수였던 셈이다. 문양해는 문장에 능한 미혼의 노총각으로 비승비속의 도사였다. 지하조직에서는 충청도출신 인사들의 참여도가 높은 편이었다. 특히 공주지방 사람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으며, 내포지방의 양반들도 여러 명이 관여했다. 조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문양해 일족이 공주 출신이었던 데다, 조직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홍복영의 아버지 홍낙순이 충청감사를 역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공주 효포 출신의 권우는 지하조직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향악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의 재간은 천고에 뛰어납니다. 제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땅히 보내서 글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훗날 거사할 기일을 정확히 알려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밖에 공주의 상대장리에 사는 진규도 향악선생과 함께 흉악한 묘책과 비밀스러운 계책을 짰다고 한다. 공주 유구역의 홍정유, 한산의 정탁 3형제, 태안의 조수정과 조수인 형제, 역시 태안에 사는 가명정(賈命正) 등도 조직에 합류했다. 당진의 조두진, 서홍기, 한제만, 대흥의 이인치도 관련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라 경상 양도의 참여도는 무척 낮았다. 전라도 광양의 오성겸과 이춘홍이 군비 조달에 기여하기로 내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특히 경상도 쪽은 조직원이 아예 전무했다. 그것은 이 지하조직이 노론 출신의 홍국영 잔당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남인의 세력근거지인 경상도 인사들은 이 조직을 외면했던 것이다. 국가전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면서도 이 조직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가 짙었다. 하필 그 거점을 지리산에 둔 것은 안전은 물론 신비스러운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직의 실체는 문양해의 진술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던 만큼, 그리고 심문과정에서 마지못해 털어 놓은 이야기란 점에서 불충분한 점이 적지 않다. ●동학의 원조 지하조직에 가담한 사람은 다양했다. 이율과 홍복영 등 실세한 양반이 한 축을 이뤘다면, 지하조직의 운영을 직접 담당한 실질적인 주도층은 중인 이하의 평민지식인들이었다. 주형채, 양형 및 문양해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정치 종교적인 성격을 띤 전국규모의 민중운동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실례다. 이런 운동 경험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갔다. 그 결과,19세기 말 동학이 대두하자 각지의 농민은 순식간에 동학의 기치 아래 모여들어 거대조직을 만들어냈다. 빗방울이 바로 바다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인 빗물은 어디엔가 웅덩이를 이룬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문화마당] 언어는 문화생존권의 핵심/방현석 소설가

    요즘은 대학의 강의실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학생들이 한둘씩 앉아 있다. 재외국민의 자녀들이나 장기 해외거주자 출신이 아니어도 영어를 곧잘 한다. 해외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오지 않은 학생들 중에서도 일상적인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학생들도 많다. 밀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는 조기유학생들이 돌아오게 되면 대학의 강의실에는 더 많은 영어 실력자들로 채워질 것이다. 더 이상 영어가 달려서 한국이 국제사회에 진출하지 못한다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영어열풍은 대학가에서는 물론이고 대학 바깥에서도 시들지 않는다. 전국 각지에 영어마을이 들어서고 있다. 반면에 영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를 공부하려는 학생들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존립이 위태로운 독어, 불어학과가 한 둘이 아니다. 한국에 진출한 프랑스기업들이 현지 직원을 채용할 때 프랑스어를 잘 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뽑을 지경이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를 가진 중국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들이 영어의 위세 앞에 꼬리를 내리고 있다. 일찍이 이러한 대세를 간파하고 한국에서도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영어의 위세가 높아지는 현상이 다른 언어의 열등성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언어가 지닌 의사소통 기능의 측면에서 보면 영어가 확산되는 현상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하나의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 왜 나쁘겠는가. 독어나 불어, 네덜란드어와 같이 예전에 식민지를 거느리며 언어사용의 규모를 확장했던 패권적 언어들의 전달 범위가 좁아지는 것을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든 언어는 문화를 집적하고 공유하는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작가로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였던 은구기와 시옹오는 그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영어는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스웨덴에서도, 그리고 덴마크에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스웨덴인들과 덴마크인들에게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비스칸디나비아인들과 대화를 하기 위한 수단의 언어로서의 의미 외엔 말이다. 이 경우 영어는 문화의 담지자는 아니다. 그러나 영국인의 경우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다 문화 및 역사의 담지체로서 기능한다. 동부 아프리카나 중앙 아프리카에서 사용되는 스와힐리어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어려서부터 식민본국인 영어를 배우고 사용하며, 영어로 작품을 써온 은구기와 시옹오는 1977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전달범위를 지닌 영어를 버리고 수백만명도 되지 않는 그의 모국어 키쿠유어로 돌아갔다. 무모해 보이는 그의 선택이 잘못된 것인가. 한국에서도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어떤 언어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발명품이 아니다. 수천 년에 걸쳐서 축적된 그 집단과 민족 문화의 정수다. 모든 민족이 가진 고유한 문화가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언어도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수천 년에 걸쳐서 축적된 인류의 문화 한 개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언어들이 이 순간에도 고사당해가고 있다. 이것은 인류 전체의 손실인 동시에 문화패권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가 이끌어낸 문화다양성협약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연생태계를 보존하고 가꿀 의무가 있듯이 문화생태계를 보존하고 가꾸어나가야 할 의무도 인류에게 지워져 있다. 모든 인간이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하듯이 모든 민족은 자기 민족의 문화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생존권은 인권 중에 가장 밑바탕에 있다. 언어는 문화생존권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누구나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사용한 언어를 사용하며 인생을 마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되고 유전되어온 자기 문화의 수원지로부터 단절당하지 않고 살아갈 권리는 인류 모두에게 있다. 방현석 소설가
  • 고희탁씨, ‘황도유교’ 창시자 다카하시 재조명

    다카하시 도루. 동경제대 출신으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종교조사촉탁과 조선도서조사촉탁 등을 맡아 조선의 유학을 연구정리한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 유학’과 관련해 배우는 주기론, 주리론, 사단칠정같은 개념도 모두 다카하시에 의해 부각됐다. 일제 관변학자로 일왕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황도유교(皇道儒敎)’의 창시자다. 그러니 ‘다카하시 극복’이 최근 유학자들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다카하시의 논의를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글로벌컬처연구소 고희탁 연구원이 반년간지 ‘오늘의 동양사상’에 기고한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사상사론의 양면성’이 화제의 글. 고 연구원은 외려 “이제 우리도 식민사관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식민사관 콤플렉스 벗어나야” 사실 조선 지배층의 헤게모니는 임진왜란에서 끝났다. 임진왜란은 지배층의 무능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궁궐을 불태우고, 임금이 뻔히 궁궐에 앉아 있는데도 궁내를 휘저으며 도둑질하고, 피란길에 오른 임금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왜란이 끝난 뒤 조선 지배층이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반동적 보수화였다. 그럼에도 우리 연구자들은 조선후기사를 부정적으로 그려내는데 상당히 망설인다. 부정적으로 그리면 결국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할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고 연구원의 글도 이런 맥락에 있다. 그는 먼저 다카하시의 연구를 ‘지식사회학적 관점’이라 본다. 조선 유학을 철학적 기반이나 개별 학설보다 ‘정치적 영향력’에서 본다는 것. 고 연구원은 “다카하시가 단순히 조선 유학을 폄하만 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다만 학문적 논쟁이 점차 정치적 권력투쟁과 연결되면서 굉장히 소모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에 비판적이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다카하시가 다산 정약용에 주목하는 과정을 눈여겨 본다. 다카하시는 조선유학에 대한 비판과 달리 유학의 실용적 측면을 되살리는 다산을 “조선 사상사의 석학”이라고 극찬한다. 재미있는 점은 다카하시가 1930년대 이런 주장을 내놓는 시점에서 조선 민족주의자들도 ‘실학’을 연구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다산은 조선사상사의 석학” 다카하시의 조선 유학 비판에 대해 고 연구원은 ‘학자지배’ 사회에 대한 와타나베 히로시의 연구를 인용한다. 와타나베는 되묻는다.“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지배층이 왜 학문에서는 이를 모른 체하고 ‘도의’라는 엄숙한 자기규율적인 이론체계를 채택하는가.”그것은 학자지배 사회의 근본조건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와타나베의 지적이다. 즉, 존재 이유가 불명확한 특권층일 경우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입증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는 것. 왜란 이후 조선 유학자들이 주자학을 극단적으로 경직된 이론체계로 밀어붙여버린 이유를 알 수 있는 열쇠라는 게 고 연구원의 설명이다. 고 연구원의 주장에 따르면 의외로 다카하시는 지금 우리와 비슷하게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공공성 개념이 약했다는 점에서 조선 유학을 비판하지만 실학과 양명학을 연구하면서 상당히 변화한다.”물론 한계는 있다. 고 연구원은 “관변학자로서 ‘황도유교’ 철회를 선언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美언론 “프랑스, 우리한테 배워라”

    |워싱턴 이도운특파원|프랑스 소요사태로 인해 미국에서도 이민과 소수인종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언론과 학계, 블로그 등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미국인들은 프랑스 사태가 “남의 일만은 아니다.”고 우려하면서도 “미국의 이민자 통합 정책이 유럽보다 앞서 있기 때문에 대규모 소요 위험은 적다.”고 우월감도 표시하고 있다. 테네시주에서 발행되는 차타누가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프랑스에서 6000대의 차량이 불타고 상점들이 털린 것은 ‘적대적 차별’에 항거하는 무슬림 젊은이들이 폭력을 통해 ‘의사표현’을 한 것”이라며 “미국에서는 결코 이같은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경계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소요는 하층민들이 사는 빈민지대에서 밤에만 일어났다.”고 지적하고 이같은 소요로 인한 피해자는 소요자 자신들일 뿐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미국내에서의 비슷한 상황 전개 가능성에 쐐기를 박았다. 플로리다주 발렌시아 커뮤니티 칼리지의 잭 챔블레스 경제학과 교수는 올랜도 센티넬에 기고한 글에서 “소요에 참가한 무슬림 청년들이나 다른 이민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기회를 달라는 것”이라면서 “미국의 경우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는데 비해 사회주의적인 프랑스에서는 기회가 제한돼 있으며, 그것이 지금 프랑스가 불타는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콜로라도주의 덴버포스트도 사설에서 “이민자와 소수 인종에게 길을 열어주는 데 프랑스 정부는 실패했다.”며 미국 이민정책의 우위를 상대적으로 부각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뉴아메리카재단의 어바인 코틀린 선임연구원 기고를 통해 “프랑스는 이민자가 사업을 하려 해도 중앙정부의 행정규제와 사회주의적 경제의 침체 때문에 진입이 사실상 어렵다.”고 분석하고 “미국내에도 흑인이나 아메리칸 인디언의 문제는 있지만 어떤 소수인종이나 이민자들에게도 기회의 문이 열려 있는 게 강점”이라고 강조했다.dawn@seoul.co.kr
  • [방방곡곡 팡팡축제] 제천 청풍호반 ‘수상 아트홀’ 개장

    [방방곡곡 팡팡축제] 제천 청풍호반 ‘수상 아트홀’ 개장

    ‘청풍호반으로 공연보러 오세요.’ 국내에서 처음으로 충북 제천 청풍호반 위에 500석 규모의 수상 공연장이 문을 연다. 제천시는 11일 청풍호반에 거룻배를 이용해 만든 다목적 수상공연장인 ‘수상 아트홀’을 개장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착공한 이 수상공연장은 길이 44m, 폭 30m의 규모로 진입 부교 91m와 500석의 객석과 조명시설을 갖췄다.43억원이 투입된 아트홀은 마치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와 2개의 하버 브리지를 연결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커다란 뿔 소라로 무대를 덮은 듯한 모습을 형상화했다. 공연장 옆에는 162m까지 물을 뿜어 올리는 수경분수와 수상비행장, 방생장, 수상결혼식, 야간 경관조명 등이 있어 청풍호를 찾은 많은 관광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다. 11일 준공식에는 최성수와 최진희, 최헌, 민지 등 인기가수들의 축하공연이 펼쳐진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정조7년(1783) 1월15일, 인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정감록’을 되뇌이던 역적들을 일망타진하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국왕에게 축하인사를 올렸다. 난리가 토벌되면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이날 정조는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웬만한 죄인은 다 풀어주라는 것으로, 이 역시 뒤숭숭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상투적인 조치였다. 왕은 포고문에서 문제의 정감록 사건을 일으킨 문인방과 이경래 등 주범들의 죄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역모사건의 전모를 백성들에게 간단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실록, 정조 7년 1월15일 정미) 먼저 사건의 중심에 있던 문인방의 죄를 성토한다. 문인방은 삿된 술수를 써 백성들을 현혹하였다고 했다.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비슷하다고 했다. 매우 심한 과장이었다. 그 옛날 장각이 이끈 황건적은 중국 한나라를 기우뚱거리게 만들었다. 문인방 사건이 미수에 그친 것과는 천양지차다. 정조는 문인방이 각지를 떠돌며 힘센 장사를 모으려 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명종 때 유명한 도적 임꺽정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역시 과장된 표현이다. 문인방은 백천식, 김훈 등과 짜고 상주의 백학산 아래 만든 소굴에 머물렀다. 이 사건이 발각된 것은 그들과 한통속이던 박서집이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 체포된 문인방은 전주 감영에서 취조를 받았고, 곧이어 서울로 붙들려가 본격적인 신문을 받았다. 그는 역모 사실을 모두 실토했다. 군량을 담당할 사람, 난리를 일으킬 때 선봉장을 맡을 사람 등 가담자들의 역할은 이미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는 도원수도 있었고, 대선생(大先生)으로 불리는 선비까지 존재했다. 문인방 사건 때 도원수로 내정된 이는 이경래였다. 이 사건이 뒷날의 여러 정감록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송덕상(宋德相)이란 유학자를 ‘대선생’이라 떠받들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는 점이다. 정조 즉위 초 산림(山林·재야에 묻혀 있던 큰선비)의 중심인물로 천거돼 조정에서 크게 활약한 송덕상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각별히 주목된다. ●산림 송덕상과 권신 홍국영 문인방 사건으로 조정이 한 차례 홍역을 겪기 5년 전이었다. 대대로 충청도 회덕에 살고 있던 성리학자 송덕상은 산림으로 천거되었다. 정조는 송덕상의 학덕(學德)에 크게 감복한 듯, 그의 건의라면 무엇이든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산림이란 명목으로 향리에 묻혀 지내던 큰선비들이 일시에 높은 벼슬에 등용되곤 했다. 그런데 영조 이후로는 산림이란 카드가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정국수습용 임시방편으로 활용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마치 1970∼80년대 한국의 국무총리 자리가 그러했듯, 산림은 일종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가끔 예외도 있었다.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며 정국을 홀로 이끌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다. 그는 산림으로서 노론의 명실상부한 우두머리였다. 산림 송덕상은 바로 송시열의 자손이었으나 그 처지는 자기 조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송덕상은 정조 즉위에 공을 세운 홍국영 일파의 추천으로 조정에 등용된 만큼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했다. 정조 3년(1779), 이조참판 송덕상은 홍국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김구주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실록, 정조 3년 6월18일 경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었다. 그는 영조 말기 세손(世孫·정조)의 집권을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물리치고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홍국영은 수년간 반대파를 모두 내쫓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정조의 신변보호를 구실로 숙위소를 창설해 직접 그 책임을 도맡으면서 더욱더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국영의 권력은 날로 비대해졌고, 과거에 그의 정적이었던 정후겸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홍국영을 ‘대후겸(大厚謙)’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홍국영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자기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장차 외척으로 세력을 굳히려 했다. 하지만 일년 만에 누이 원빈이 병사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꾀를 내어 왕제(王弟) 은언군 인의 아들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훗날 세자로 정할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담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였다. 정조4년(1780)에는 왕비 김씨를 살해하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 일로 홍국영은 실각했고 그 여파는 송덕상에게도 미쳤다. 송덕상은 재빨리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자기의 사이가 별것 아님을 애써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홍문관 교리 서유성 등 홍국영의 반대파들은 송덕상이 겉으론 산림으로 행세하면서 실제는 홍국영에게 아부를 일삼아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왕세자 책봉 건에 관여하는 등 수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맹렬히 규탄했다.(실록, 정조 5년 4월28일 신미) 결국 송덕상 역시 조정에서 물러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로선 억울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이런 식의 정계 개편은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늘 되풀이되어 온 일이다. ●송덕상의 제자 문인방 뜻하지 않은 스승의 정치적 몰락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미래 역시 어두웠다. 보통 스승이 중벌을 받으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미래를 기약하게 된다. 일단 죽림으로 들어간 젊은 선비들은 시서(詩書)를 연마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운이 좋아 언젠가 관리로 등용되기만 하면 왕에게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복권과정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송덕상의 제자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문인방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정감록’을 빙자해 난리를 꾸몄다. 과연 제자들이 스승 송덕상을 위해 역모를 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송덕상과 역적들 사이에 사제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인지,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송덕상의 몇몇 제자들은 군사적 행동을 준비하다 발각돼 역적으로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송덕상 역시 옥에 갇힌 것이 사실이다. 노론들 사이에서 박학다식한 큰선비로 통했던 송덕상은 여러 달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통을 받다 드디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실록, 정조 7년 1월7일 기해) 다른 역모사건들도 그렇지만 이 사건 역시 피의자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변호하며 남긴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있다면 취조문서가 전부다. 사건을 수사한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완전히 왜곡하였을 가능성마저 적지 않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문인방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겠다. 송덕상의 제자 신형하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며 스승을 변호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로 부각되어 신형하는 마침내 전라도의 한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송덕상을 추종하던 황해도 해주의 선비 박서집은 시를 지어 신형하의 절의를 기렸다. 그 시가 또 문제되어 박서집도 섬으로 귀양을 갔다. 박서집은 유배지에서 우연히 문인방이란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다. 평안도 출신인 문인방은 놀랍게도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한 처지를 생각해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물론 박서집은 그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박서집은 겁이 났다. 그는 섬에 파견돼 유배자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인방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였다. 그 섬은 전라도 관할이어서 깜짝 놀란 전라관찰사는 급히 영을 내려 관련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전주와 서울에서 혹독한 신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인방은 자기가 역모를 꾸민 사실을 시인하였다. 함께 붙들려온 백천식도 반란혐의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밀고자 박서집과 함께 일의 성사를 기원하며 하늘에 축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평민지식인으로 술사이기도 했던 문인방은 ‘정감록’의 한 구절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때 ‘여섯 글자’의 흉악한 예언이 문제로 부각되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구절은 문인방이 소지했던 ‘경험록’이란 예언서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 현재 ‘경험록’이란 책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사건 당시 문인방은 모두 4종류나 되는 예언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이른바 비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당류 이경래는 강원도 양양 임천리에 살며, 도창국은 평안도 영원 내락림에 있고, 김정언과 오성현은 함경도 안변에 거주하고, 곽종대는 평안도 순안에 살며, 이밖에 김훈과 백천식이 또 있습니다. 만일 난이 성공하게 되면 대선생으로 청계 선생을 모시려 하는데, 이는 송덕상이며 그 손자 송계유는 지금 나이 28세로 저와 마음을 합해 역모를 꾀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문인방처럼 고향이 평안도인 사람도 있지만 함경도 출신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밖에 강원도 출신도 역모에 참여했다. 아울러 송덕상의 집안사람들도 일부 포섭돼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송덕상 일가가 역모사건에 참여하였을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회덕에 세거하던 송씨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손꼽히는 명문 양반이었다. 설사 그들이 송덕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사회에서 그들이 향유한 특권적인 지위는 이런 정도의 일로는 무너질 리가 없었다. 따라서 송덕상의 손자가 모의에 참여했다는 문인방의 진술은 신문과정에서 억지로 강요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송덕상의 제자는 주로 서울과 충청도에 거주했을 텐데, 하필 조선사회의 변경인 서북지방과 강원도 해안지방의 몇몇 제자들만 스승을 위해 난리를 꾸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의 역적모의 사건의 주모자로 분류된 문인방은 힘세고 날랜 평안도 출신의 장사 도창국과 함께 강원도 양양의 선비 이경래와 친했다. 이경래 역시 송덕상의 제자였는데 정조5년(1781) 9월 문인방 등이 이경래를 찾아갔을 때 이경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스승님 송덕상이 조정에 죄를 얻어 뜻밖에 멀리 귀양을 가 계시므로 지금 사태가 급해졌다. 빨리 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다. 문인방 그대가 인재를 잘만 모집하면 일이 성사된 다음 장수든 정승이든 여하튼 높이 등용하겠다.” 문인방 등은 그 말에 기뻐하며 이경래를 도원수로 삼고,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정했다. 이경래는 양양에 일가친척이 많은 데다가 노복도 숫자가 많으므로, 일단 유사시에 난을 일으켜 양양군수를 잡아 죽이고 무기와 병사를 확보하는 것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이웃 고을인 간성을 공격하고 강릉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뒤 반란군은 원주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서울로 진격해 동대문을 거쳐 대궐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성공한 다음 그들은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책봉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란을 일으킬 시기는 갑진년(1784) 7월과 9월 사이로 정해졌다. 이경래의 집안은 강원도 양양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이경래의 친척 공조참의 이택징은 우선적인 포섭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택징은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해 규장각 운영을 강도 높게 비난한 적이 있다.“규장각은 전하의 사적인 관서에 지나지 않고, 규장각의 관리들은 전하의 사사로운 신하일 뿐입니다.” 이처럼 정조의 정책적 고려에 날카롭게 맞선 인물이었다. 문인방 등은 이런 이택징을 서둘러 합류시키고, 그들을 지렛대 삼아 서울의 여러 양반들을 역모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몇 해 전에 거세된 홍국영 일파를 비롯해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하며 울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던 양반들이 많았다. 조선은 양반의 국가라, 양반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 초년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무신란(1728)을 비롯해 몰락한 양반들이 반란을 꾀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적(政敵)들에 의해 완전히 조작된 역모사건도 없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어난 인조반정(1622)은 양반들이 반란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 본보기였다. 그런 점에서 문인방과 이경래 등이 무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문인방 사건의 경우 역모사건이 새롭게 달라진 측면도 있다. 권좌에서 밀려난 제일급의 양반들이 서북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평민지식인들 또는 술객(術客)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모의과정에서 평민지식인들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볼 때 이경래나 이택징과 같은 일급 양반들보다 평민지식인 문인방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은 ‘정감록’을 포함한 각종 예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문인방은 양양과 서울은 일단 이경래에게 부탁해 놓고 자신은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힘이 센 장사들을 다수 모집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그가 관헌에 체포되기 직전 충청도 진천에 머물고 있던 것도 장사를 모으기 위해서였다.(실록, 정조 6년 11월20일 계축) ●평민지식인이 송덕상 같은 양반과 결탁하다니 억울하게 멸시받던 평민지식인들로서야 송덕상과 같은 명문가 출신의 양반과 사귀고 싶어도 도저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지만,18세기 조선사회의 실상과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는다. 문인방 사건 때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용케 법망을 빠져나간 평민지식인들 중에 이규운이란 사람이 있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훈장노릇을 하던 평민지식인이었다. 그런 이규운이 산림 송덕상과 서로 가까워진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 비롯되었다. 정조 초년 이규운은 강원도 통천에 있었다. 통천은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머물던 곳이라 송시열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로 이규운은 송덕상을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강원도 김화 수령으로 재임하던 송덕상의 아들까지도 사귀게 된다. 어렵게 대갓집과 연줄을 대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규운에게 돌아올 몫은 아무 것도 없었다. 쥐꼬리만 한 벼슬 한 개도 차지할 운이 아니었다. 이규운은 본래 평안도 선천 사람이었고 진짜 이름은 오도하라고 했다. 이규운은 고향을 떠나 강원도를 떠돌았다. 그는 서울 양반 이찬이란 사람을 대신해 과거시험 답안지를 써주었는데 그 덕에 이찬은 진사가 되었다. 제 이름을 걸면 아예 과거시험장 출입이 불가능한 이규운이었으나 그가 대필해준 글로 다른 사람은 진사가 되었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허탈과 공황 속에서 이규운은 ‘정감록’을 읽었고, 반란을 꿈꾸었다. 이규운은 송덕상 같은 양반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술객에게 송덕상의 명예회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이근식 서울시립대교수, 이번엔 ‘상생적 자유주의’

    이근식 서울시립대교수, 이번엔 ‘상생적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폭넓은 단어다. 그러다 보니 그냥 자유주의 하면, 그 내용물을 짐작키 어렵다. 그래서 ‘고전적’,‘신(新)’,‘질서’,‘공동체’와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생적’ 자유주의다.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이근식 교수가 ‘자유와 상생’(기파랑 펴냄)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상생적 자유주의는 무엇인지 들어봤다. “개인주의 위에 서 있는 자유주의는 사회적 공론에 소홀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겠다고 나온 것이 ‘공동체적 자유주의’인데, 이 단어는 마치 양복 입고 갓 쓴 모양새입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인데 ‘공동체’라는 단어가 어울릴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동시에 ▲공동체 자유주의는 공동체 내부의 문제는 해결하더라도 공동체간 갈등은 해결할 수 없고 ▲공동체가 사람들의 모임이다 보니 환경문제 등에도 대처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공동체적 자유주의의 폭을 더욱 넓힐 수 있는 ‘상생적’이라는 단어를 고안했다는 설명이다.‘상생적’은 또 다른 의미도 있다.“개인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을 좋아하는데 그는 ‘갈등하는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저는 그것을 상충되는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유·평등, 분배·성장, 진보·보수, 이것들이 서로 적절하게 균형을 이뤄야 둘 다 나태와 안일에 빠지지 않고 생명력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의 개념이 왜 이리 혼란스러운지 물었다. 사실 이 교수는 책에서 지금의 시대정신을 자유주의로 규정한 뒤 자유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로 구분하고, 정치적 자유주의에 높은 점수를 줬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주의도 모호하다. 실제 좌파 정치학자들 일부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조정과 재분배’로 해석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마르크스도 정치적 자유주의자다. 이 교수는 선을 그었다.“그건 ‘자유’가 너무 좋은 단어라 그렇습니다. 대표적 좌파학자인 월러스타인은 자유주의를 ‘대중에 대한 유화주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사기라는 것이지요.” 이 교수는 오늘날 우리의 자유주의가 혼란스러운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자유주의가 일본과 미국에서 들어왔는데 식민지배와 광주사태의 기억으로 어떤 거부감이나 선입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 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소개가 없습니다.” 이 교수가 ‘자유와 상생’을 펴낸 것도 ‘대학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자유주의를 이해하도록 하겠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덕분에 목차만 봐도 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체계적인데다 서술도 쉬워서 읽는 데 부담이 전혀 없다. 이 참에 ‘이근식 자유주의 총서’라는 타이틀로 내년까지 아예 5권을 내놓을 생각이다.‘자유와 상생’은 그 첫번째 결과물이고 ‘애덤 스미스’,‘존 스튜어트 밀’,‘서독의 질서 자유주의’,‘신자유주의’까지 줄줄이 예정되어 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프로배구 삼성독주 더이상 없다

    ‘프로배구 춘추전국시대 선언’ 프로배구가 더욱 흥미진진해질 전망이다.8일 끝난 05∼06프로배구(KOVO) 시범경기에서 일합씩을 겨뤄본 결과, 절대강자도 절대약자도 없을 만큼 전력이 평준화됐음이 확인된 것. 과거 삼성화재의 일방적인 독주 양상과 달리 올시즌 시범경기에서는 경기마다 예측할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승부가 속출했다. 비록 신진식, 김세진이 부상으로 빠졌고 나머지 선수들을 두루 기용한 시범경기라고는 하지만 삼성화재가 대한항공에 1-3으로 패했고, 현대캐피탈과 LG화재에도 2-3으로 잇따라 무릎을 꿇어 올시즌 달라진 양상을 예고했다. 기대했던 브라질 용병 아쉐(32)가 팀 플레이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점도 신치용 감독의 애를 먹이고 있다. 반면 ‘거물급 신인’ 강동진(22)을 영입하고 박석윤, 이영택, 최부식 등이 상무에서 복귀해 탄탄한 전력을 구축한 대한항공, 리베로 출신의 라이트 공격수 키드(34)를 통해 이경수(26)와 좌우쌍포를 구축한 LG화재, 최연소 미국 국가대표 출신 숀 루니(23)의 스카우트로 전력을 더욱 보강한 현대캐피탈 모두 ‘우승후보 0순위’로 손색없는 전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밋밋했던 팀컬러의 LG화재는 지난 7일 삼성화재에 0-2로 끌려가다가 3-2로 뒤집는 끈질긴 모습을 선보였다. 여자프로배구도 흥미진진하기는 마찬가지다. ‘초특급 레프트’ 김연경(18·흥국생명)은 입단하자마자 단숨에 팀의 주공격라인으로 떠오르면서 지난 시즌 꼴찌 흥국생명을 일약 우승후보로 이끌었고, 그간 뒷전으로 밀렸던 여자프로배구 인기몰이를 주도하고 있다. 또한 김민지(20), 나혜원(19) 등 부상선수들이 복귀한 GS칼텍스 역시 수준높은 경기력을 보이면서 우승을 노리고 있다.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월드이슈-프랑스 소요사태 확산] 소요 진원지 클리시수부아를 가다

    [월드이슈-프랑스 소요사태 확산] 소요 진원지 클리시수부아를 가다

    파리 교외 저소득층 지역에서 지난달 27일 이래 계속되고 있는 소요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소요사태가 독일, 벨기에 등 이민자가 많은 인근 유럽 지역으로까지 번질 조짐마저 보인다. 이번 사태는 주로 북아프리카계 무슬림이 몰려 사는 대도시 교외 저소득층 지역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새삼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청소년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 이유가 단순히 검문을 피하던 소년들의 죽음과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우범지역 범죄에 대한 초강경 대응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저소득층 젊은이들의 뿌리깊은 소외의식이 극단적 방식의 분노로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이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장기적 안목의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방화가 차량 뿐 아니라 학교, 탁아소, 체육관, 상업시설 등으로 확대되고 인명 피해마저 발생하면서 저소득층 지역 주민들조차도 “이제 폭력은 그만”을 외치며 하루빨리 일상의 평정을 찾기를 바라고 있다. |클리시수부아 함혜리특파원| 7일 오후 3시(현지시간) 파리 북동부 교외에 있는 올네수부아의 부아욤 고등학교 앞 광장.400여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나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학생들의 대부분은 흑인, 혹은 북아프리카 계열의 유색인들이다. 아직 학교가 끝날 시간이 아닌데도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도 몇몇 눈에 띈다. 청소년들의 야간 소요사태로 유리가 깨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한 여학생에게 이유를 물었다. 학교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전화가 와 모든 학생들이 대피했다는 것이다. 이 여학생은 “우리 학교뿐 아니라 근처의 3개 학교가 폭발물 위협을 받았다.”며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내지 않는 한 소요사태는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단의 대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최소한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감전사 사고에 대해 공개사과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사르코지(내무장관)는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나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막 도착한 버스에 뛰어 올랐다. 올네수부아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클리시수부아. 지난달 27일 경찰의 검문을 피하던 10대 소년 2명이 감전사하면서 프랑스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소요사태의 진원지가 된 곳이다. 밤마다 차별과 소외에 대한 무슬림 청소년들의 분노와 방화로 점철됐던 것과 달리 이곳의 오후 풍경은 평화스러웠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장을 보러가는 무슬림 여성, 길 모퉁이에 삼삼오오 몰려있는 흑인 청소년들…. 대부분이 흑인이거나 아랍인들이다. 클리시수부아의 주민 2만 8000여명 중 이방인은 70%가 넘는다. 파리의 고색창연한 주거건물들과는 달리 노후한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어 한눈에도 슬럼가임을 알 수 있다. 아기를 안고 가는 한 주민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20여년 전 터키에서 이민 왔다는 칸(35·전기공)은 “청소년들의 폭력은 물론 나쁘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정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이곳 사람들의 50% 정도가 실업자라고 소개한 칸은 “부가 세습되는 것처럼 가난도 대를 물린다. 그들이 현재 상황에서 탈피하도록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조금 벗어나자 왼쪽으로 거의 불에 탄 채 흉물처럼 남아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6일 새벽 5시쯤 방화로 불에 탄 아르망 데스멧 체육관이다.1997년 준공된 이곳은 바로 옆에 있는 루이즈 미셸 중학교 학생들이 체육시간을 보내고 어린이와 학생, 시민들이 태권도, 유도 등 여가시간을 이용해 체육활동을 하는 장소였다. 루이즈 미셸 중학교에 다닌다는 사디(12)는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 왜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체육관을 불태웠는지 이해가 안간다.”며 “분별없는 폭력에 분노보다는 차라리 슬픔이 앞선다.”고 말했다. 사디의 학급은 모두 23명. 이 중 순수한 프랑스인은 단 한명이라고 했다. 이날 저녁 5시 30분 클리시수부아 시청 앞에서는 자녀들을 대동한 학부모들과 주민들이 모여 아르망 데스멧 체육관 화재사건과 지난달 27일 이후 끊이지 않는 일련의 폭력사태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클리시수부아 출신의 육상선수 이름을 딴 아르망 데스멧 체육관은 우리들의 자랑거리였고, 청소년들이 유일하게 체육활동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장소였다.”고 토로한 뒤 25년이 걸려 건설된 체육관을 불과 몇분만에 잿덩이로 변하게 만든 방화범들에게 분노를 나타냈다. 주민 포리셰는 “30년째 이곳에 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 다른 지역에서도 학교와 탁아소 등 공공시설물에 방화가 잇따르고 있다는데 이번 사태가 하루빨리 진정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르망 데스멧 체육관이 불에 탄 것을 가장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포함,200여명에 이르는 태권도 동호회 회원들과 태권도를 배우는 어린이들의 학부모들이다. 등에 ‘태권도’라는 한글이 선명하게 박힌 흰색도복을 입은 아들 야쿱(4)의 손을 잡고 시청 앞에 나온 베니나는 “우리 아이가 9월부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이제 어디에 가서 태권도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허탈해했다. 이민 가정의 청소년들과 클리시수부아 시간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하나시 목데드(28)는 “이곳 청소년들의 삶은 깊은 실망감으로 가득 차 있다.”면서 “열악한 주거환경, 학교생활 실패, 가족과의 갈등, 실업문제는 이곳 청소년들을 끝없는 분노로 치닫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적인 상황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그들은 분명 법을 어기고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면서 “젊은이들이 사회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lotus@seoul.co.kr 유럽 각국은 프랑스 전역을 휩쓸고 있는 무슬림 청소년들의 폭력사태가 남 얘기 같지가 않다.9·11 테러 이후 유럽에서 무슬림과 비(非)무슬림간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무슬림의 불만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파리 사태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벨기에와 독일 등 일부 주변국에서 유사 사건이 발생하자 관련국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가까운 예로 지난달 영국에서는 북아프리카계와 아시아계 이주민들간에 유혈충돌이 발생, 인명피해를 낳았다. 앞서 지난 7월 7일에는 런던 지하철과 버스 연쇄 폭탄테러가 발생,52명이 숨지고 700여명이 다쳤다. 용의자로 현장에서 즉사한 영국 국적의 파키스탄계 4명이 지목됐다. 2004년 11월 2일에는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보수 성향의 영화감독 테오 반 고흐가 모로코계 이민 노동자 2세인 부예리에 의해 살해됐다. 같은 해 3월 11일 스페인 마드리드역에서 열차 연쇄 폭발로 191명이 숨지고 1800여명이 다쳤다.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유럽 땅에서 무슬림과 관련된 공격이 잇따르면서 무슬림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그에 비례해 무슬림들의 소외감과 반발 역시 커져만 가고 있다. 현재 유럽에 사는 무슬림 인구는 1500만∼2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유럽 인구의 4∼5%다. 높은 출산율과 이주 인구의 꾸준한 증가로 오는 2025년에는 그 수가 두 배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북아프리카계와 아시아계의 유럽 이민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2차대전 이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저임금 이주 노동자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이번 소요사태의 중심층은 생활고와 싸우느라 여념이 없었던 이민 1세대가 아닌 유럽에서 태어나고 자란 2,3세대. 스스로 ‘유럽인’이라 여기며 성장한 이들은 사회에 진출하는 순간부터 뿌리 깊은 차별대우에 직면하면서 ‘2등 유럽 시민’이라는 냉엄한 현실에 맞닥뜨린다. 주류사회 편입 실패와 가난의 대물림, 사회적 편견, 문화적 소외 등으로 유럽 무슬림들의 인내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9·11 테러 이후 잇단 테러에 대한 대책으로 이민 제한책을 선택했던 유럽 각국은 뒤늦게 다문화통합정책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그런 점에서 5년 이상만 거주하면 국적을 주고, 언어를 배워 현지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스웨덴식 이민지원책이 관심을 끌고 있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프랑스 소요사태 일지 ▲10월27일 파리 북동쪽 클리시수부아에서 경찰 피해 달아나던 북아프리카계 소년 2명 감전사. 분노한 청년들 수백명 차량 23대 불태우고 경찰과 투석전. ▲10월28일 클리시수부아에서 청년 수백명 경찰과 충돌. 일부 경찰 향해 사격. ▲10월29일 주민 500명 침묵시위, 야간에 폭력사태 재발. ▲10월30일 경찰 최루탄이 이슬람사원에 발사돼 무슬림 분노 증폭 ▲10월31일 폭력사태 인근 교외지역 확산. ▲11월2일 드 빌팽 총리와 사르코지 내무장관 해외 방문 일정 취소. 파리 주변의 22개 소도시로 소요 확산. ▲11월3∼4일 디종, 마르세유, 루앙 등 전국으로 소요사태 확산 ▲11월5일 파리 중심가서 방화 사건 발생 ▲11월6일 시라크 대통령, 폭력행위 엄벌 천명 ▲11월7일 파리 교외서 첫 사망자 발생. 베를린·브뤼셀서 모방 방화 사건 발생 ▲11월8일 정부, 지역 도지사 야간 통행금지령 발동권 승인
  • “교섭 앞으로도 계속” 北·日 정부협의 성과없이 끝나

    |도쿄 이춘규특파원|북한과 일본은 4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2일간의 정부간 협의를 끝내고 앞으로도 교섭을 계속하기로 합의했다. 1년 만에 재개된 협의에서 일본측은 일본인 납치문제의 구체적인 해결을 촉구했으나, 북한측은 일본에 식민지시대의 보상 등 과거사 문제 청산을 집중 요구,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회담종료 뒤 북한측 대표인 송일호 외무성 부국장은 기자들에게 “협의는 오늘로 종료했다. 다음번 일정은 외교루트로 조정키로 했다.”면서 “과거 청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 공통인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taein@seoul.co.kr
  • 실업·차별… 이민 2·3세 ‘폭발’

    |파리 함혜리특파원|파리 교외의 저소득층 거주지에서 지난달 27일 발생한 소요사태가 3일 일주일째 계속되고 있다. 소요 사태는 프랑스 주류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의 현주소를 새삼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이민 2,3세들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지만 사회에 나가면서 인종 차별에 직면, 좌절과 분노를 겪으면서 결국 이번 소요사태와 같은 심각한 도시폭력의 주범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회학자인 로랑 무치엘리는 “젊은이들의 사회적응은 취업과 직결된다. 직업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결국 거리로 내몰려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불량배로 전락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사태의 발원지인 클리시 수 부아의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청년들중 절반 이상이 직업 없이 사회의 보호막으로부터 외면당한 상태”라고 말했다. 실제로 프랑스인의 실업률이 9.2%인 반면 외국계 이주민의 실업률은 14%에 이른다. 대졸자 전체 실업률은 5%인 데 비해 대졸 이민자 실업률은 26.5%나 된다. 프랑스에서는 인종차별이 법으로 금지되고 있지만 사회 곳곳에서 차별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는 게 인권단체들의 지적이다. 무슬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경계심이 커 이슬람식 이름을 가지고선 영업직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무슬림이나 아프리카계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월세를 구할 때도 집주인이 꺼려 복덕방에서 서류조차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민자들이 도시 외곽의 저소득층 집단 거주지역에 몰리는 것은 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주류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프랑스 인구 6100만명 중 500만명이 무슬림이다. 프랑스의 역대 정부는 과거 식민지로부터 대거 건너온 외국계 이주민들을 주류 사회에 통합시키기 위해 지난 25년간 정책을 꾸준히 펴왔다. 미테랑 사회당 정권 당시인 지난 1981년 제2도시 리옹 교외에서 이와 비슷한 소요사태가 발생한 뒤 도시문제 전담 장관직을 신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학자들과 도시학자들은 정책이 별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25년전 있었던 리옹 교외의 도시 폭력사태를 계기로 도시 빈민층 자녀들과 이민 2,3세 청소년 문제에 전념하고 있는 들로름 신부는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덮는 데 급급해 온 정치인들의 접근방식이 문제”라며 “소외계층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안목에서 근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lotus@seoul.co.kr
  • 불의 기억/박병규 옮김

    다른 지역도 그렇지만 남미 역사서는 특히 지나치게 특정 인물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 많다.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 같은 독립 영웅에서부터 로사스와 피노체트와 같은 독재자들, 콜럼버스, 코르테르, 피사로 같은 정복자들이 항상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에 반해 남미의 ‘행동하는 지성’으로 불리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서술한 책 ‘불의 기억’(박병규 옮김, 따님 펴냄)은 연표 속 공식역사에서 지워진 하위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정복자들의 총칼에 짓눌려 버린 원주민들의 삶과 투쟁을 쫓아가고, 독립 영웅들이 내건 대의와 위세에 가려진 민중의 염원을 되살려 낸다. 또 독재자들의 억압 아래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고대사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시기를 다룬 1권 ‘탄생’,18∼19세기 식민지 굴레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담은 2권 ‘얼굴과 가면’, 군사독재정권이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를 짓눌렀던 20세기 이야기를 담은 3권 ‘바람의 세기’ 등 총 세 권. 연대기 형식을 취하되 여느 역사책과는 달리 독립적인 짧은 이야기들을 이어붙이는 방식을 택했다. 추상과 압축을 통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역사의 미묘한 숨결을 포착함으로써 단조롭기 쉬운 역사 서술을 맛깔스럽게 포장했다. 각권 1만 7000∼1만 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문명의 붕괴/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앙코르와트의 버려진 신전들, 정글에 감춰진 마야의 도시들, 이스터 섬의 거대한 석상들….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했던 문명의 흔적들을 보며 현대인들은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게 된다.‘이들은 왜 지속·발전하지 않고 몰락했을까?지금 우리의 문명도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지 말라는 보장이 있을까?한 사회가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실수를 범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미국 뉴올리언스 사태나 쓰나미 참사, 이라크 전쟁 등 최근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악몽 또한 이같은 문명 몰락에 대한 불안감을 던져 준다. 문명 비판서 ‘총·균·쇠’로 퓰리처상를 받은 베스트셀러 작가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이번엔 ‘문명 몰락’이라는 묵직한 테마에 돋보기를 갖다 댔다. 얼마전 폐막한 독일 프랑크루르트 국제도서전에서 화제를 모은 책 ‘문명의 붕괴’(강주헌 옮김, 김영사 펴냄)가 그것. ●이스터섬·마야의 문명이 몰락한 이유는? 책이 담은 내용의 줄기는 크게 두 가지.‘과거의 위대한 문명사회가 붕괴해서 몰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운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저자는 이스터섬의 폴레네시아 문화에서 시작해서 아나사지와 마야에서 꽃피웠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 그린란드에 식민지를 개척한 바이킹들의 불행, 그리고 현대세계까지 추적해 재앙의 기본 패턴을 찾아낸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 붕괴의 조짐이 보이는 곳들의 상황도 점검한다. 저자는 문명 붕괴의 이유를 크게 다섯가지로 나눠 관찰한다.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이웃 나라와의 적대적 관계, 우방의 협력 감소, 사회문제에 대한 그 구성원의 위기 대처 능력 저하가 그것이다. 그중 가장 강조하는 것은 환경파괴다. 폴리네시아의 이스터섬의 운명에 대해 저자는 ‘순전히 생태적 붕괴’에 가깝다고 말한다. 무자비한 삼림파괴가 전쟁으로 이어졌고, 지배계급이 전복되면서 위대한 거석문화마저 사라졌다는 것이다. 마야문명 몰락의 가장 큰 원인도 환경 파괴로 분석한다. 인구 과잉과 환경파괴가 식량 부족을 가져왔고, 이는 다시 전쟁으로 이어져 문명의 붕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이 정착한 피케언 섬과 헨더슨 섬은 우호적인 이웃의 지원 중단으로 붕괴한 예. 이곳에도 환경훼손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주된 무역 상대국인 망가레바 섬이 환경문제로 인해 붕괴된 것이 치명타였다. 이는 경제적 종속 현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이다. ●20세기 이후에도 지구촌 곳곳 붕괴조짐 그렇다면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서도 살아남은 사회는 없을까?이는 곧 문명 붕괴 이유 중 다섯번째인 사회 구성원들의 대응의 중요성으로 연결된다. 저자는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의 예를 들어 몰락한 사회와 살아남은 사회의 극명한 차이점을 보여 준다. 노르웨이령 그린란드는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노르웨이의 지원 중단, 이누이트족과의 적대적 관계로 인해 붕괴를 면치 못한다. 반면 아이슬란드는 취약한 환경을 딛고 가장 풍요로운 나라 중 하나로 우뚝 서 있다. 이들은 원주민들의 생활습관을 받아들이고, 노르웨이와의 우호관계를 위해 노력했으며, 환경 파괴를 최소화했다. 저자는 오늘날 이같은 문명 붕괴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대표적인 곳이 소말리아와 르완다. 환경파괴와 가뭄, 전쟁 등으로 인해 사회 자체가 몰락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곳이다. ●과거의 문명 몰락이 주는 교훈 잊지말자 그 정도는 아니지만 미국 몬태나에서도 그같은 가능성을 내다본다. 아직도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지만, 지난 200여년간 자행된 각종 개발로 인해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앓고 있는 곳이다. 한때 가장 부유했던 지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전락한 이곳이 겪고 있는 상황을 이미 붕괴된 문명들도 겪었음을 상기시킨다. 저자가 보기엔 과거보다 오히려 현대사회가 더 붕괴 위험이 크다.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세계화로 인해 멀리 떨어진 곳의 붕괴 파장에도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불어난 인구와 파괴적 첨단 테크놀로지 또한 당시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소말리아와 같은 붕괴조짐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과거의 문명 몰락이 주는 교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라고 지은이는 거듭 주문한다.2만 89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부고]

    ●김추규(전 상업은행장)씨 별세 형성(KCEF Capital 대표)한성(〃 팀장)씨 부친상 2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4일 오전 9시 (02)3410-6915●최재영(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사진부장)씨 빙부상 2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4일 오전 8시 (02)392-0899●이수근(전 신동아화재 중부사업본부장)수철(신동아화재 북부지점장)수한(인·아웃건설 대표)씨 모친상 2일 대전을지병원, 발인 4일 오전 7시 (042)471-1479●하종표(산업은행 강남지점장)재홍(관세청 검사실)현옥(양천구청)씨 부친상 유환열(마포구청 보건위생과장)씨 빙부상 1일 이대목동병원, 발인 4일 오전 6시 (02)2650-2751 ●한동엽(금억건설 대표)동준(E-Poi 〃)동윤(전 동남일보 〃)동욱(삼성화재 동민지점 〃)의정(미국 거주)씨 부친상 현우(외환은행 영업부 차장)씨 조부상 2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4일 오전 7시 (02)392-3299●안광남(죠아드 대표)광근(미국 거주)씨 부친상 지훈(미닉스 실장)씨 조부상 김민성(연세대 한국어학당 강사)씨 시조부상 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4일 오전 10시 (02)3010-2293●임세창(전 문화방송 해설위원)씨 별세 정훈(미국 오라클 아주본부 senior manager)신영(아주대 의대 재활의학과 부교수)씨 부친상 국진성(에디웹 대표)전재범(한양대 의대 류마티스내과 부교수)씨 빙부상 신혜수(삼성전자 반도체 책임과장)씨 시부상 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4일 오전 9시 (02)3010-2239●이원형(자영업)래형(포스코 기술투자 부장)재형(윈스틸 이사)씨 모친상 송규정(부산상공회의소 회장)씨 빙모상 2일 경주 동국대병원, 발인 5일 오전 10시 (054)776-9411●황석진(SK 법무1담당 상무)씨 모친상 2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4일 오전 8시 (02)590-2540●길창석(전 교사)윤석(서울경제 국차장 겸 종합편집부장)방석(관악경찰서)씨 부친상 2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4일 오전 7시 (02)3410-6902●강성목(해동그린정보통신 주임)희정(리드텍스)씨 부친상 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4일 오전 7시 (02)3010-2254●조준호(전한국공인회계사회 상근부회장)씨 별세 조성수(한국프랜지공업) 은희(유니버설뮤직)씨 부친상 진용탁(은혜병원 의사)씨 빙부상 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4일 오전 10시 (02)3010-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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