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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속 예수, 문화 콘텐츠로 부활

    성경 속 예수, 문화 콘텐츠로 부활

    영화관과 뮤지컬 극장이 밀집해 있는 영국 런던의 레스터스퀘어에 있는 오데온극장은 건물 외벽 전체가 물바다를 이뤘다. 극장은 지난 10일 노아의 방주를 다룬 블록버스터 영화 ‘노아’의 개봉에 맞춰 대홍수를 상징하는 푸른색 파도 그림으로 건물을 도배하며 흥행몰이에 나섰다. 그런가 하면 12일 프랑스 파리의 서점가에는 유대의 독립과 민중을 위해 싸운 혁명가로서의 예수를 그린 화제의 책 ‘젤롯’(Le ZELOTE)이 진열대에 올라 독자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이란 출신의 이슬람교도인 레자 아슬란 미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쓴 ‘젤롯’은 25개국에서 번역됐고 국내에서도 최근 와이즈베리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기독교를 소재로 한 내용의 책과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다. 성경 속의 방대한 역사적 이야기를 글이나 영상으로 풀어내 기독교인은 물론 성경에 익숙지 않은 비종교인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추세다. 이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이야기가 부족해지면서 스케일이 크고 극적인 요소가 강한 성경 속 이야기들이 참신하게 다가왔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특히 종교적 의미만을 부여했던 이전과 달리 역사적 인물 및 사건에 주목하며 국가와 종교를 초월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선두주자는 노아의 방주를 소재로 한 영화 ‘노아’다. 국내에서도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순항 중인 노아는 영국을 비롯해 전통적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스페인 등지에서도 화제 속에 개봉되고 있다. 하지만 인기를 얻음과 동시에 종교적 논란도 심심찮게 불거지고 있다. 성경 속 인물을 허구로 설정하거나 기존에 제시된 내용과 다르게 해석하며 성경을 왜곡했다는 지적이다. 성경에는 노아 부부와 세 아들, 세 며느리 등 8명이 살아남는 것으로 기록됐는데 영화에서는 둘째 아들과 어린 셋째 아들의 배우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성경 속 노아는 의롭고 흠이 없는 인물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자신과 가족들 역시 타락한 인간들과 다를 바 없다며 둘째 아들 함의 여자와 손녀까지 죽이려 들고, 살아남기 위해 방주로 달려드는 다른 무고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내치는 냉혹한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책 ‘젤롯’의 경우 교회가 가르치는 예수의 이미지, 즉 ‘사랑과 평화를 가르친 순한 목자’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유대의 독립과 민중을 위해 싸운 혁명가로 그려 논쟁을 부르고 있다. 지난 20년간 주요 복음서를 분석하고 수백권의 저작들을 섭렵하며 예수의 진짜 모습을 추적해 그 연구를 바탕으로 집필한 저자는 예수가 민중운동을 일으키다가 로마당국에 의해 처형된 ‘열성(젤럿)적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종교적 편견을 배제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학자적 입장에서 쓴 책은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국내에서도 출간과 동시에 2주 만에 1만부 이상 팔리며 판매 순위 20위권에 진입하는 저력을 보이고 있다. 한편 지난 10일 국내에 개봉한 영화 ‘선 오브 갓’은 예수의 출생부터 제자들과의 만남, 고행, 죽음과 부활 등의 일대기를 성경에 근거해 충실하게 그려 교계의 호평을 받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영화 내용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모세와 히브리 백성들의 출애굽기를 다룬 성서 블록버스터 ‘엑소더스’도 올 연말 개봉할 예정이어서 기독교와 성경 속 예수 열풍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 사진 런던·파리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역사학계 진보-보수, 역사교과서 정면충돌

    한국 사학계 원로 교수 16명이 최근 정부, 여당을 중심으로 나오는 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 문제에 대해 ‘획일적인 역사 해석을 주입시키겠다는 시대착오적 망발’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주초 정홍원 국무총리와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현행 검인정 체제를 국정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역할과 교학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놓고도 지적이 이어졌다. 한국 사학계 원로 교수들은 12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 한국사 교과서가 유신 독재하에서 시행될 때 우리는 정부가 강요한 전체주의적 획일화 교육이 가져오는 황폐화를 체험했다”면서 “오늘날 다시 정권 입맛에 맞는 한 가지 역사 해석만을 획일적으로 주입하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망발이고 백년대계의 교육을 스스로 망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전 숙명여대 교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을 지낸 강만길 전 고려대 교수, 민족문제연구소장인 임헌영 전 서울교대 교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인 안병욱 전 가톨릭대 교수, 이야기인물한국사 등 수많은 저작을 낸 이이화 전 서원대 석좌교수 등 원로 교수들이 참석했다. 역사 교과서 논란의 시발점이 된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이들은 “교육 당국이 교과서의 기본 요건과 수준을 갖추지 못한 교학사판 교과서를 감싸면서 한국사 교육 자체를 파탄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아들의 한국 국적 포기로 논란을 빚은 유영익 위원장을 향해 “정권에 예속돼 가는 국사편찬위원회를 국가의 근간을 세우고 유지하기 위한 학술기관으로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국현대사학회는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8종 역사 교과서 비교 분석 세미나’를 열고 교학사 교과서를 제외한 7종의 역사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좋지 않다고 반박했다. 교학사 교과서 저자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는 “천재교육, 미래엔 교과서가 미주에서 전개된 외교 활동 등에는 부정적 의미를 부여한 반면 국내 사회주의·민중운동은 긍정적으로 묘사했다”면서 “한국 사학계의 큰 문제점은 한국 사학자들 다수가 민중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부고] ‘에큐메니컬 운동 대부’ 오재식 박사

    [부고] ‘에큐메니컬 운동 대부’ 오재식 박사

    에큐메니컬(교회일치·연합)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오재식 박사가 3일 오후 8시 20분 지병으로 별세했다. 80세. 오 박사는 평생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 비정부기구(NGO) 활동에 헌신하며 현장을 지켜 왔다. 서울대 종교학과와 미국 예일대 종교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 선교훈련원장 겸 통일연구원장, 세계교회협의회(WCC) 개발국장·제3국장, 크리스찬아카데미 한국사회교육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월드비전 회장과 참여연대 창립대표, 대북지원민간단체협의회 초대 회장, 월드비전 아태지역본부 북한사업부 자문위원, 아시아교육원장 등을 맡아 대북 협력 사업과 인도적 지원 사업 등을 적극 추진했다. 함석헌, 강원용 등에게 신앙적, 사상적 영향을 받은 오 박사는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사회운동 조직의 대가인 S D 알렌스키를 만난 뒤 평생을 민중운동의 조직 전문가로 활동했다. 특히 1960년대 기독교청년의 사회운동,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 1990년대 평화통일운동 등 역사적인 현장에 투신했다. 도시 빈민과 농민, 산업 노동자를 지원하는 조직운동가, 국내외 네트워크를 조직적으로 형성해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끈 활동가, 대북 협력 사업과 인도 지원 사업 등을 통해 남북한 교류의 물꼬를 튼 평화통일운동가 등이 오 박사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유족으로는 부인 노옥신씨와 자녀 승현(LG화학 부장), 경원(재미), 지원(주부)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7일 오전 9시 기독교회관 2층 강당. (02)2072-2020.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 “평등 실현으로 경제·국가운영 근본 바꿔야”

    “평등 실현으로 경제·국가운영 근본 바꿔야”

    “2012년 대통령 선거는 ‘국민 아래 김두관’과 ‘국민 위의 박근혜’의 대결이다.” 민주통합당 김두관 전 경남지사는 8일 한반도 최남단인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정조준했다. 1988년 경남 남해 이장, 1995년 남해 군수로 정계에 본격 입문한 지 17년 만에 대선 무대의 도전자가 되는 드라마틱한 인생 주인공이 됐다. 김 전 지사는 이날 평등을 국정 키워드로 내세워 “올해 시대정신은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신자유주의를 극복해 평등국가를 여는 것”이라며 “평등국가의 실현을 통해 경제 체질과 국가운영의 근본을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출마 연설에는 ‘평등’이라는 단어가 21차례, ‘서민’이 14차례, ‘재벌’이 10차례 등장했다. 대선 슬로건 역시 ‘내게 힘이 되는 나라, 평등국가를 향하여’를 제시했다.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세상은 평등이 기본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라며 “새로운 대한민국을 추동하는 힘은 평등과 균형”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지사는 12월 대선 구도에 대해 “대한민국을 크게 바꾸자는 세력과 이대로 좋다는 세력 간의 대결이며, 재벌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세력과 재벌의 부당한 횡포를 막아내야 한다는 세력 간의 대결”로 규정하며 “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해 대한민국이 특권·재벌공화국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 전 지사는 출정식에서 대규모 지지세를 과시했다. 원혜영, 김재윤, 안민석, 김영록, 문병호 의원 등 의원 멘토단 7명과 천정배 전 의원 등 원외 15명, 생활정치포럼·자치분권연대 등 외곽 조직 및 팬클럽인 ‘피어라 들꽃’ 인사와 지역 주민 등 6000여명이 ‘김두관’을 연호했다. 그는 출마 선언 후 곧바로 22일까지 보름 동안 전국을 도는 ‘김두관의 시민대장정’에 올랐다. 그의 삶은 좌절과 패배의 가시밭길이었다. 마늘 농사를 짓는 빈농의 아들로 남해종합고를 다니다 1977년 국민대에 합격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했다. 그러고는 2년 뒤에 경북전문대에 입학했다. 25세 때인 1986년 재야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로 활동하다 직선제 개헌투쟁 청주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다. 농민운동가로 30세에 마을 이장이 된 후 최연소인 36세로 남해 군수에 당선됐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남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참여정부 첫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된 지 7개월 만에 한총련의 미군부대 기습시위 사건으로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3·17·18대 총선에서 3전 전패했고 2002년, 2006년 경남지사 선거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신 뒤 2010년 6월 무소속 야권 단일후보로 경남지사가 됐다. 6전 5패의 선거 전적은 거꾸로 그를 ‘오뚝이’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정계에서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는 김 전 지사는 당내에서는 탈친노(친노무현) 행보로 ‘친노 적자’인 문재인 상임고문과 대조적인 발걸음을 하고 있다. 김 전 지사는 출사표를 던지면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 “나는 친노에서 육두품이고 친노 그룹의 지분은 1%에 불과하다.”고 말했었다. 자신의 자서전 ‘아래에서부터’에서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주군과 참모의 관계가 아닌 동지적 관계”라고 기술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대해 “안 원장이 50%의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한 민주당 주요 후보들의 지지가 오르지 않을 것이며 어떤 형태로든 (안 원장이) 정리되면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1987년 체제 출범 후 25년이 지난 만큼 개헌이 필요하다.”며 “5년 단임의 대통령중심제를 개혁하기 위해 대선에서 승리하면 개헌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안동환·해남 이범수기자 ipsofacto@seoul.co.kr
  • [화제의 당선자] ‘김근태 부인’서 ‘의원 인재근’ 위상 굳혀

    [화제의 당선자] ‘김근태 부인’서 ‘의원 인재근’ 위상 굳혀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부인인 민주통합당 인재근 당선자는 새누리당 유경희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당선된 뒤 끝내 눈물을 보였다. ‘김근태의 비밀병기’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압도적인 표를 확보하며 ‘국회의원 인재근’으로 위상을 굳혔다. 인 당선자는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고 서민경제를 살리겠다. 서민의 따뜻한 친구가 되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깨끗하고 따뜻한 정치를 하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김 고문이 가장 기뻐할 것 같다.”는 주변의 축하를 받고서는 “하늘에 계신 남편에게 감사하고, 사랑하고…”라고 답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도봉갑은 김 고문이 15~17대 국회위원을 지냈던 지역구인 동시에 인 당선자와도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김 고문 생전 바쁜 남편을 대신해 부지런히 지역구를 챙겨 ‘김근태 바깥사람’으로 민심을 얻었다. 인천 출신인 인 당선자는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주화운동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등에서 활동했다. 김 고문과 함께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수상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됐다. 도봉갑 지역 민주당원들은 전략공천이 있기 전, 인 당선자의 출마를 요구하며 연판장을 돌리기도 했다. 인 당선자는 김 전 고문 49재를 지낸 뒤 마음을 추스른 뒤 총선 출마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女탤런트와 선거유세 같이 다니더니 결국…

    女탤런트와 선거유세 같이 다니더니 결국…

    선거는 항상 사연을 낳고 드라마를 만든다. 새누리당의 예상밖 완승으로 끝난 지난 11일 4·11 총선의 화제의 당선자들을 살펴본다. [서울 광진갑 김한길(민주통합)] 국회·청와대·정부 요직 경험…4년만에 컴백 민주통합당 김한길 후보가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 정송학 후보를 꺾고 광진갑에서 승리의 깃발을 꽂았다. 배우 최명길씨의 남편이기도 한 김 후보는 선거 막바지에는 배우 황신혜, 손창민, 정찬 등과 함께 총력전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김 후보는 금품수수 혐의로 공천 철회된 전혜숙 의원 대신 출마하는 바람에 다른 후보들에 비해 뒤늦게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공천 탈락에 반발한 전 의원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김 후보에게 “통 큰 양보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잡음도 있었지만 결국 김 후보가 승리를 거머쥐게 됐다. 김 후보는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지내고, 문화관광부 장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중도통합민주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이어 15대, 16대 비례대표 의원을 거쳐 17대 구로을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울 도봉갑 인재근(민주통합)] ‘김근태 부인’서 ‘의원 인재근’ 위상 굳혀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부인인 민주통합당 인재근 당선자는 새누리당 유경희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당선된 뒤 끝내 눈물을 보였다. ‘김근태의 비밀병기’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압도적인 표를 확보하며 ‘국회의원 인재근’으로 위상을 굳혔다. “김 고문이 가장 기뻐할 것 같다.”는 주변의 축하를 받고서는 “하늘에 계신 남편에게 감사하고, 사랑하고…”라고 답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도봉갑은 김 고문이 15~17대 국회위원을 지냈던 지역구인 동시에 인 당선자와도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김 고문 생전 바쁜 남편을 대신해 부지런히 지역구를 챙겨 ‘김근태 바깥사람’으로 민심을 얻었다. 인천 출신인 인 당선자는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주화운동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등에서 활동했다. 김 고문과 함께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수상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됐다. 도봉갑 지역 민주당원들은 전략공천이 있기 전, 인 당선자의 출마를 요구하며 연판장을 돌리기도 했다. 인 당선자는 김 전 고문 49재를 지낸 뒤 마음을 추스른 뒤 총선 출마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노원갑 이노근(새누리)] “말꾼 대신 일꾼” 34년 관료 출신… ‘나꼼수’ 눌렀다 ‘막말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서울 노원갑에서 팟캐스트 ‘나는꼼수다’ 멤버인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를 제치고 승리한 이노근 새누리당 당선자는 34년간 공직 생활을 해 온 관료 출신이다. 행정고시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노원구청장을 지내며 지역 주민들 사이에는 인지도가 높았다. 특히 서울시 문화·주택기획과장과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종로·금천·중랑 부구청장, 종로구청장 권한대행 등을 거치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해 화제를 모았다. 실제 이 당선자는 노원구청장 재직 시절 시각장애인용 음성 내비게이션 사업 등을 직접 추진하기도 했다. 선거 당시 민주통합당에서 정봉주 전 의원을 대신해 김 후보를 투입하면서 유권자들의 관심이 김 후보에게 쏠리자 여론조사에서 밀리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를 불과 일주일 앞두고 김 후보의 과거 발언이 논란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김 후보와의 차별화를 위해 ‘말꾼 대신 일꾼’이라는 선거 구호를 내걸었던 것도 이번 승리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이 당선자는 “공직 생활을 하며 단 한 차례도 징계받은 적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도덕성 우위의 경쟁력을 홍보해 왔다. [성남 분당을 전하진(새누리)] ‘벤처신화’·‘스타CEO’… 여의도 입성 ‘벤처신화’, ‘스타CEO’, ‘인터넷 마케팅 전도사’ 등 갖가지 수식어구가 따라 붙는 전하진 전 한글과컴퓨터 대표가 여의도행 티켓도 거머쥐었다. 성남 분당을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한 전 당선자는 민주통합당 김병욱 후보를 여유 있는 표차로 눌렀다. 전 당선자는 당초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특보를 지낸 김 후보와 불꽃 튀는 경합을 벌일 것으로 전망됐다. 분당을이 서울 강남벨트 다음으로 여당 안방으로 꼽히기는 하지만, 손 고문이 지난해 4·27 재·보선에서 당선된 뒤 야당 기세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 당선자는 또 선거 막판 대학원생의 명의를 불법적으로 도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악재를 겪었다. 전 당선자는 ‘아래아한글’ 워드프로세서로 유명한 한컴이 부도 위기로 알짜 프로그램을 마이크로소프트(MS)사에 헐값에 넘길 뻔했던 1998년 한글지키기 운동본부가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대표이사로 추대됐다.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세웠던 벤처회사를 아내에게 맡기고 귀국, 한글지키기 캠페인을 진행하며 한컴 이미지를 개선했다. [서울 중구 정호준(민주통합)] 헌정 사상 첫 3대째 의원 가문 영예 19대 서울 중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정호준 후보가 새누리당 정진석 후보를 4% 포인트 차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이로써 정치 명문가 출신들의 대결에서 정 후보가 승리를 거두게 됐다. 중구는 여야의 4·11 총선 공천 후에는 정치 명문가 2, 3세 출신들의 대결로 이목을 끌었던 지역이다. 부친 정대철 전 의원이 5선을 한 지역구에 출마한 정 후보는 선거 초반엔 부친의 후광 및 세습 논란을 피하기 어려웠다. 정 후보는 이에 대해 “2004년, 2008년에 이어 세 번째 도전이고 공천과 경선을 통해 주민 선택을 받은 것”이라며 “오히려 그것(세습)보다는 전략공천으로 온 낙하산 후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더 많다.”고 반박했다. 정 후보는 올해 41살로 나이는 젊지만 선거 경력은 나이에 비해 풍부한 편이다. 정 후보는 15,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부친을 도와 선거를 도왔고 이후 여러 선거들에 직접 참여하면서 경험과 노하우를 쌓았다. 2010년 3월부터는 민주당 중구 지역위원장으로 일을 시작해 지방자치 선거를 치렀고 지난해 10·26 재·보궐 선거에서 박원순 시장을 도와 선거 승리에 일조했다. 정 후보의 조부는 8선 의원을 지낸 고 정일형 박사여서 이번 당선으로 정 후보의 집안은 헌정 사상 첫 3대째 국회의원을 지내는 가문이 됐다. 정치부·사회부 종합 event@seoul.co.kr
  • 민중의 삶·풍속으로 풀어낸 ‘격랑의 근대사’

    민중의 삶·풍속으로 풀어낸 ‘격랑의 근대사’

    작가 문순태(71)에게 강은 “본디 모습 그대로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이 되고 또 다른 생명과 교섭하면서 힘의 원천이 되는” 존재다. 그중에서도 영산강은 “전라도 사람들의 핏줄이고, 한과 희망,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 빛과 그림자를 안고 흘렀고, 지금도 그렇게 흐르는” 삶의 터전, 그 자체다. 작가가 영산강을 배경으로 격랑의 한국 근대사를 풀어낸 ‘타오르는 강’(소명출판 펴냄)이 전 9권으로 끝을 맺었다. 37년을 이어온 역작이 마무리됐으니 작가의 홀가분함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작가는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40년 가까이 붙들고 씨름해 온 책을 드디어 완간했으니 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면서 “식민사관에 휘둘려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광주학생독립운동까지 많은 사료를 근간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타오르는 강’은 1975년 작가가 전남매일신문에 연재한 ‘전라도 땅’에서 시작됐다. 당시 기자였던 작가는 취재차 만난 전남 나주 양반집 할머니에게 노비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노비를 꽤 많이 둔 양반집이었는데, 노비 세습제가 폐지되면서 노비들에게 문서를 나눠 주었더니 매달리면서 ‘제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단 한번도 주체적으로 살아 본 적이 없는 노비들이 갑작스러운 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 삶을 따라가 보니 당시 버려진 땅이 많았던 영산강에 몰려 터를 닦고, 한(恨)의 민중사를 만들어 낸 거죠.” 전남매일 연재는 2년 후 중단했고, 1981년 한 월간지로 옮겨 다시 소설을 이어 갔다. 이후 주간지와 일간지를 옮겨 가며 연재하다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전 7권으로 묶어 냈다. 1886년부터 1911년까지 이야기로, 노비인 장웅보 가족사를 중심으로 19세기 말 노비 세습제 폐지부터 동학농민전쟁, 개항과 부두 노동자의 쟁의 등 민중운동 속에 휘말린 민초들의 삶을 다뤘다. 8권과 9권은 작가가 그토록 쓰고 싶어 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객관적으로 서술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입니다. 독립운동 중심 인물이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고, 그나마도 식민사관에 기초해 한·일 학생들 사이에 일어난 우발적 단순 사건으로 비춰졌죠.” 참여정부 들어 이들의 역사적 공적이 인정받았고,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면서 집필이 가능해졌다. “7권까지는 역사적 사실 위에 대부분 상상력으로 채웠지만,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사료를 많이 참고했다.”는 작가는 “이 독립운동이 광주청년학원과 광주고보를 비롯한 학생들이 오랫동안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준비해 온 사건임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소설에 당시 노비들의 질박한 생활과 풍속사도 그대로 녹여 냈다. 특히 “작가는 언어의 채굴자이고 특히 죽어 있는 언어의 활용도를 높여 다시 살려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전라도 토박이말을 원형대로 살렸다. 소설의 별권으로 이 작품의 우리말 사전을 준비 중이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조선은 왜 근대화 실패했나

    조선은 왜 근대화 실패했나

    ‘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열린책들 펴냄)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 학자들이 “일본, 도대체 왜 이래?”라는 질문을 던지는 논문집이다. 지난해 한·일 병합 100년을 맞아 병합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했던 일본의 진보적 학자들이 낸 19편의 글이 실렸다. 일본 잡지 ‘사상’(思想)에 ‘한국 병합 100년을 묻다’를 주제로 발간한 특집호와 뒤이어 열린 심포지엄 내용을 정리한 단행본을 번역한 것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논문은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의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고리타분한 유교에 젖지 않아 우뚝 설 수 있었다는 ‘탈아론’(脫亞論) 자체를 겨냥한다. 미야지마 교수가 보기에 이는 거꾸로다. 유교에 젖지 않아 일본이 우뚝 설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유교 문화권이 아니어서 일본은 내내 주변부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미야지마 교수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서 추진한 사법개혁 작업을 한 예로 든다. 일본에 근대 민법과 상법을 도입한 법학자 우메 겐지로를 조선에 불러들였는데 그는 조선을 연구한 뒤 “소유권이라 할 수 있는 권리가 한국의 인민에게는 적어도 수백년 전부터 인정돼 왔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미개했던 일본은 서구문명 무조건 수용 쉽게 말해 우매한 조선에 한 수 가르쳐 주려 했더니, 조선은 이미 두세 수 앞서 가고 있더라는 얘기다. 조선은 어떻게 근대적 소유권 제도를 수백년 전에 이미 확립했을까. 미야지마 교수는 “그게 바로 (일본이 끝내 거부한) 유교문명권의 특징”이라고 답한다. 1871~1873년 메이지 정부가 단행한 일본의 근대 개혁 작업에 대해서도 미야지마 교수는 평가절하한다. 그때서야 일본에 도입된 호적·징병제도, 토지매매나 직업·이주의 자유, 군현제는 이미 조선에 있었다는 것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이 추진했다는 근대적 개혁의 상당 부분은 조선에는 필요 없었다.”면서 “조선에 이미 있었고, 그 까닭은 유교 모델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왜 근대화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있던 조선이 일본에 역전당했는가. 미야지마 교수는 “서구와 일본에서 근대 들어 비로소 실현됐던 상당 부분이 조선에 이미 실현돼 있었다는 조건” 그 자체가 걸림돌이었다고 본다. ●유 교문명 앞섰던 조선은 비판적 수용… 日에 역전당해 즉 이미 어느 정도 그런 제도가 뿌리내리고 있다 보니 “근대적 변혁을 실시하기 위한 과제가 무엇인지 불명확해지고, 이로 인해 서구 문명 수용이 절실하게 인식되기 곤란해졌으며, 동시에 서구문명을 상대화하려는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구 문명을 접한 조선·일본 양국 지식인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일본은 ‘매료’가 분명히 드러나는 반면, 조선은 ‘비판적 수용’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봤다. 뒤집으면 워낙 밑천이 없었던 일본은 남의 것을 금세 주워 먹을 수 있었지만, 유교 문명권 속에서 오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전통을 지닌 조선은 가진 게 워낙 많아 움직임이 굼뜰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미야지마 교수는 이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한 사례로 “일본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정체”를 들었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이행을 계기로 사회제도적 차원에서의 진보가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는 반면, 일본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서구적 전통을 근대화의 목표로 급속하게 수입한 것과 다소간 뒤틀림이 있고 전진과 후퇴가 있더라도 그 이전 사회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수용하는 것과의 차이라는 뜻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잘나가던’ 조선, 왜 일본에 역전당했을까?

     ‘일본, 한국병합을 말하다’(열린책들 펴냄)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 학자들이 “일본, 도대체 왜 이래?”라는 질문을 던지는 논문집이다. 지난해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병합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했던 일본의 진보적 학자들이 낸 19편의 글이 실렸다. 일본 잡지 ‘사상’(思想)에 ‘한국병합 100년을 묻다’를 주제로 발간한 특집호와 뒤이어 열린 심포지엄 내용을 정리한 단행본을 번역한 것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논문은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의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고리타분한 유교에 젖지 않아 우뚝 설 수 있었다는 ‘탈아론’(脫亞論) 자체를 겨냥한다. 미야지마 교수가 보기에 이는 거꾸로다. 유교에 젖지 않아 일본이 우뚝 설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유교 문화권이 아니어서 일본은 내내 주변부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미야지마 교수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서 추진한 사법개혁 작업을 한 예로 든다. 일본에 근대 민법과 상법을 도입한 법학자 우메 겐지로를 조선에 불러들였는데 그는 조선을 연구한 뒤 “소유권이라 할 수 있는 권리가 한국의 인민에게는 적어도 수백년 전부터 인정되어왔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쉽게 말해 우매한 조선에게 한 수 가르쳐주려 했더니, 조선은 이미 두세수 앞서 가고 있더라는 얘기다. 조선은 어떻게 근대적 소유권 제도를 수백년 전에 이미 확립했을까. 미야지마 교수는 “그게 바로 (일본이 끝내 거부한) 유교문명권의 특징”이라고 답한다.  1871~1873년 사이 메이지 정부가 단행한 일본의 근대 개혁 작업에 대해서도 미야지마 교수는 평가절하한다. 그때서야 일본에 도입된 호적·징병제도, 토지매매나 직업·이주의 자유, 군현제는 이미 조선에 있었다는 것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이 추진했다는 근대적 개혁의 상당 부분은 조선에는 필요 없었다.”면서 “조선에 이미 있었고, 그 까닭은 유교모델을 수용한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왜 근대화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있던 조선이 일본에게 역전당했는가. 미야지마 교수는 “서구와 일본에서 근대에 들어 비로소 실현됐던 상당 부분이 조선에 이미 실현되어 있었다는 조건” 그 자체가 걸림돌이었다고 본다.  즉, 이미 어느 정도 그런 제도가 뿌리 내리고 있다 보니 “근대적 변혁을 실시하기 위한 과제가 무엇인지 불명확해지고, 이로 인해 서구 문명 수용이 절실하게 인식되기 곤란해졌으며, 동시에 서구문명을 상대화하려는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구문명을 접한 조선·일본 양국 지식인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일본은 ‘매료’가 분명히 드러나는 반면, 조선은 ‘비판적 수용’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봤다. 뒤집으면 워낙 밑천이 없었던 일본은 남의 것을 금세 주워 먹을 수 있었지만, 유교문명권 속에서 오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전통을 지닌 조선은 가진 게 워낙 많아 움직임이 굼뜰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미야지마 교수는 이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한 사례로 “일본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정체”를 들었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이행을 계기로 사회제도적 차원에서의 진보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 반면, 일본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서구적 전통을 근대화를 목표로 급속하게 수입한 것과 다소간 뒤틀림이 있고 전진과 후퇴가 있더라도 그 이전 사회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수용하는 것과의 차이라는 뜻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그날의 정신···해외선 긍정평가·국내에선 인색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그날의 정신···해외선 긍정평가·국내에선 인색

    5·18민주화운동의 평가는 오히려 나라 밖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세계 인권운동가들은 해마다 광주를 찾아 ‘5월 정신’을 공유하고 연대를 강화한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지역 사건’으로 폄하하려는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진상규명 과정에서 나타난 사실 왜곡 때문이다. ‘북한 개입설’ 등이 대표적이다. 관련 단체의 과격한 행동도 외면을 부추겼다. 해외에서의 긍정적인 위상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해외선 세계 민주주의 희망 인식 10여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5·18민주화운동 세계화 사업은 5·18을 아시아 인권과 민주주의의 중심 무대로 옮겨 놓았다. 대표적 프로그램은 광주인권상 제정이다. 첫해 수상자는 사나나 구스마오 현 동티모르 국회의장. 아웅산 수치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무르니 말리크 파키스탄 인권변호사 등 10여명이 이 상을 받았다. 17~23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는 ‘2010 광주아시아포럼’이 열린다. 아시아민주희생자가족연대, 광주국제평화캠프, 광주아시아인권학교 등이 참여한다. 포럼에서는 이주노동자 인권, 인권조례, 한반도 평화, 아시아의 언론자유와 환경문제 등이 논의될 예정이다. 국제 인턴 파견, 미국·일본 등 해외동포 단체와 정기적으로 교류하면서 활발한 국제협력 프로그램도 펼쳐진다. 최근 5·18기념재단 직원으로 채용된 수바쉬 아디카리(29·네팔)씨는 “5·18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민주화운동의 ‘롤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네팔은 2006년 민중운동 당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지금껏 진상규명 등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5·18의 위상 정립 과정과 절차 등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5·18기념재단 국제협력팀 정린(29·여)씨는 “세월이 지났어도 5·18의 정신과 가치는 세계인들 사이에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며 “이같이 소중한 자산을 확산·계승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국내 “들어본 적 없다” 26% 달해 그러나 국내의 상황은 좀 다르다. 일부 보수 논객들의 인테넷 사이트에는 아직도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저지른 국가 전복 사태’라는 황당한 글들이 보인다. 네티즌들은 이런 사이트에서 5·18과 ‘전라도’를 폄하하기 일쑤다. 기념식도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형식적으로 치러질 뿐이다.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난다. 기념재단이 2008년 실시한 ‘5·18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 결과 아직도 응답자의 9%가 ‘폭동’ 으로, 6.6%가 ‘사태’로 답했다. 5·18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란 답도 26%에 달했다. 민주주의 발전 영향 여부에 대해선 11.6%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5·18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엄존하는 것은 5월단체의 ‘밥그릇 싸움’과 5·18에 대한 ‘독점적 권리행사’ 행태에서 비롯됐다는 지적도 있다. 그동안 공법단체 등록을 둘러싸고 빚어진 각 단체 간 ‘헤게모니 싸움’과 운영비 마련을 위한 수익사업 추진 등은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 시민은 “5·18은 전 시민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이지, 단체 회원들만의 전리품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EBS 사탐 역사 명강사 최태성 교사의 ‘공신 팁’

    EBS 사탐 역사 명강사 최태성 교사의 ‘공신 팁’

    “백두산 근처 이 부분이 신민회가 활동했던 서간도 지역입니다. 사진을 보면서 선생님은 통일이 되면 우리 학생들과 수학여행을 가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EBS의 ‘갈아만든 사회탐구’ 역사 과목은 사진 자료 등을 보여주며 관련된 내용을 짚어준다. 강사인 서울 대광고 최태성 교사는 유관순 열사의 사진이 무섭게 보이는 이유는 고문 때문에 부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설명을 곁들인다. 중간중간 “이건 저번 시간에 무엇 때문이라고 했지?”라는 식의 반말도 한다. 그렇게 20분 동안의 인터넷 강의를 원고도 없이 단숨에 녹화한다. ●사진자료 등 보여주며 내용 짚어줘 최 교사는 2001년부터 꾸준히 EBS의 ‘스타강사’ 자리를 지켜 왔다. EBS가 민간 스타강사 30여명을 추가 영입하는 등 변신을 시도한 올해에는 더 바빠질 전망이다. 올해 처음 도입된 ‘파견 교사제’에 따라 1년 동안 EBS 파견이 확정된 학교 교사 4명 가운데 1명인 그는 교재개발과 연구, 강의법 개발 등의 일정을 빡빡하게 세워뒀다. EBS 안팎의 스타 강사들과의 경쟁에서 최 교사가 활용할 무기로 ‘민주시민의 양성’이라는 공교육 역사 과목을 목표로 내세운 것은 역설적이다. 대표적인 암기과목으로 규정돼 ‘태정태세문단세’식으로 쉽고 헷갈리지 않게 외우는 방법을 습득시키는 게 질 높은 교육으로 인정받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 교사는 19일 녹화 현장에서 “어떻게 가르칠까라는 고민만큼 중요한 게 무엇을 가르칠지 고민하는 것”이라고 했다. 비효율적인 듯 보이지만 오래 남는 교육, 공교육적인 방법이 그동안 인터넷 강의 히트수를 높인 비결이라고 했다. 그래도 ‘시험 성적’을 놓칠 수는 없다. ‘무엇을’만 보고 ‘어떻게’를 놓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강의를 만든다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최 교사 강의의 히트수가 높은 것도 그가 ‘무엇을’과 ‘어떻게’라는 토끼를 둘 다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르칠지 항상 고민 비법은 최 교사의 ‘칠판 필기법’에 있었다. 그는 교과서에 흩어져 나열돼 있는 사건들을 묶어 판서 한 장으로 정리해 제시한다. 예컨대 3·1운동의 경우 민족대표 33인의 모임부터 유관순으로 대표되는 학생과 민중운동의 전국적 확산, 재암리 학살로 상징되는 일제의 대응이 지도 한 장에 요약됐다. “그냥 듣지 말고 노트 필기를 하면서 들어라.”라며 최 교사가 ‘잔소리꾼’으로 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생들은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필기를 따라하고, 그렇게 이해하며 만든 필기는 자신의 것이 된다. 그때 좀처럼 잊어먹지 않는 ‘암기’가 가능해진다는 설명이다. “선생님은 ‘판서 디자이너’ 같아요.”라든지 “강의를 들으며 만든 필기노트가 수능 시험을 볼 때 갖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교재였습니다.”라는 학생들의 댓글은 최 교사가 받는 ‘보너스’이다. 초기 댓글 중에는 “돈이 없어서 사설학원 인터넷 강의를 못 들었는데 EBS 강의를 볼 수 있어서 좋다.”는 댓글도 있었다. 최 교사는 “처음에는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내 강의를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듣는 과목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최고의 강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EBS 강의를 ‘돈이 없어서 듣는 강의’가 아니라 ‘돈 주고도 못 사는 강의’로 바꾸려는 최 교사와 같은 강사들이 EBS의 변화를 이끌기 시작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新아시아시대-한국의 도약] “한국의 재도약 시대이념 재창조에 달려 있어”

    [新아시아시대-한국의 도약] “한국의 재도약 시대이념 재창조에 달려 있어”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중체서용(中體西用)’, ‘동도서기(東道西器)’ 중 최고의 가치는 동도서기입니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한(韓)’을 내세우지 않고도 정체성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서 마주한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傳史·61) 교수는 투박한 한국어로 또렷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40년 넘게 한국과 동아시아에 관한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지한파(知韓派)답게 “현재의 한국사회는 16세기에 형성된 500년 주기의 역사순환과 19세기 말 형성된 100~150년 주기의 순환이 모두 생을 마감하는 대전환기에 놓여 있다.”며 “동도동기(東道東器)와 같은 새로운 시대이념을 만들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한국사회는 지식인이 방향성을 잃으면서 더 큰 혼란을 겪고 있다.”며 “지식인과 민중의 활발한 현실참여는 유교적 전통의 하나로 한국사회의 발전동력”이라고 분석했다. →구한말 일본은 성공, 중국은 절반의 실패, 한국은 낙오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외형만 놓고 풀이한 단선적 해석이다. 조선은 중립국가 변신 등 다른 가능성도 열려 있었다. 한국은 선진문명 수용의 오랜 역사를 지녔다. 19세기 유럽문명이 왔을 때 잠시 움츠렸지만 조선 초기만 해도 당시 최첨단이던 중국문명을 200~300년간 점진적으로 꾸준히 받아들여 재창조했다.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약점이 오히려 19세기 유럽문명을 받아들일 때 발빠른 대응을 낳았다. 오늘날 중국이나 한국을 실패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최근 한반도 정세가 19세기 말과 유사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근대 이행기를 재점검해 답을 얻어야 한다는 말도 나오는데. -일부 학자마저 역사적 유추를 즐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단선적 이해는 오히려 역사의 오용을 가져온다. 역사학은 어떻게 시대를 이해하느냐에 대해 여러 얘기를 한다.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려면 사회과학과의 협력이 필요하다. →19세기 조선이 중국 중심 조공체제를 버리고 ‘만국공법적’ 질서를 수용했다. 21세기 한국은 냉전질서가 쇠퇴하며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질서를 수용하고 있다. -오늘날과 19세기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19세기에는 신문명을 받아들이면 부국강병할 수 있다는 벤치마킹 모델과 희망이 존재했다. 반면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시장만능주의는 희망이 없다. 사회가 어떻게 된다는 분명한 목표도 없고, 소수만 성취하고 다수가 패배자가 되는 무한경쟁 상황이다. 19세기 유럽문명이 가졌던 의미와 신자유주의의 비전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해법은. -새로운 시대 이념이 필요하다. 16세기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역사주기가 시작된 것은 사회혼란과 관련이 깊다. 앞서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생긴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자학이 생겼다. 원나라가 등장하며 세계 규모의 경제활동도 이뤄졌다. 고대 진·한 시대 이후 두 번째 중국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답은 주자학의 부활인가. -(웃음) 복고는 아니다. 주자학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인간의 평등성을 전제로 사회질서를 잡으려던 주자학은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가장 합리적 사상이었다. 이에 입각한 국가·사회체제도 선진적이었다. 그런데 주자학은 동아시아에서 내재적으로 극복되지 않고 버려졌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됐지만 근대 이후 오히려 주자학적 뿌리가 깊게 되살아났다. 주자학의 진짜 극복은 미완의 과제이다. 주자학적 전통의 형성과정까지 소급해 선조가 이루지 못한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게 21세기 동아시아의 공통된 과제이다. →신아시아적 질서는 무엇인가. -주자학은 신아시아적 질서가 될 수 없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나도 새로운 차원에서 공동선이나 인간관계 재창조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주자학적 사회구조가 500년 생을 마감하는 요즘 새 이념이 나오지 않으면 사회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 일본에선 과거 생각지 못했던 끔찍한 범죄가 매년 급증하고 있다.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희망을 주는 역사적 유산을 자주 접했다. 이 유산을 제대로 인식하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한다는 방향을 잡아야 한다. 지금 한국사회는 자긍심을 갖고 발전시킬 자산을 기르지 않고, 자산이 아닌 부분을 오히려 과대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발전전략은. -구한말 일본의 화혼양재,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 가운데 동도서기를 최고의 가치로 본다. 이는 유연한 주체성으로, 국민국가 건설의 표어로는 다소 약하지만 매개적 정체성으로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동도서기라는 구호를 새로운 각도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도서기가 오늘날 적용가능한가. -동도(東道)란 관념은 16세기 전환기 때 생긴 것이다. 19세기 후반 동도라는 것도 유교·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국가사회 체제이다. 조선사회가 갖고 있던 이념을 기초로 국가사회체제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기술문명에 대응하자는 내용이다. 이런 면에서 21세기 한국은 새로운 단계의 동도동기라고 할까, 가장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새로운 정신·기술문명을 구성해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향성을 찾자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강점을 주변국과 비교하면. -19세기 후반까지 보편적 이념을 갖지 못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주자학 등 보편적 문명을 활용, 국가체계를 완성한 경험을 지녔다. 역사적 경험의 차이라고 할까, 한국은 문명주의적 사고방식이 일본보다 강하다. 영어교육이나 유학열풍 등 한국사회는 ‘문명화 신앙’마저 지녔다. 중국의 경우 문명의 중심에 오래 서있어 자아관이 너무 강하다. 중국이 더 팽창해 국제질서에 혼란을 초래할 때 오랜 관계를 맺어온 한국만이 이를 통제할 수 있다. →한국 사회운동을 어떻게 보나. -구한말에도 개화파와 독립협회, 동학운동까지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한국은 지금도 (사회운동이) 활발하다. 경험을 지닌 만큼 앞으로도 (긍정적 방향으로) 계속될 것이다. 반면 일본은 거의 사라졌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한국은 광복 이후 4·19혁명부터 최근 촛불집회까지 시민 스스로 움직였고, 정치를 변화시켰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 자유민권운동이 있었지만, 이후 100년간 경험하지 못했다. →한국 지식인의 역할은. -영향력이 예전보다 약해졌다. 자신감 자체도 상실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헤매고 있다. 특히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그렇다. 진보진영 연구자도 마찬가지로 근시안적 현실만 보고 있다. 이전 지식인들은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면 유교적 전통의 영향으로, 유교적 정치제도와 과거제가 자리잡지 못한 일본에선 보기 힘든 모습이다. 또 동남아에선 지식인의 무게감과 운동의 방향성이 눈에 띄지 않는다. 동남아의 민중운동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느낌마저 든다. →국내 정책결정 과정에서 바뀌어야 할 점은. -앞서 말한 대로 너무 단기적으로 보고 있다. 당면과제만 바라본다. 장기적 마스터플랜 없이 단기적 처방만 찾으면 답이 안 나온다. →역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나. -그렇다. 역사의 사이클은 단기, 중기, 장기적으로 몇 가지 추이를 보인다. 공교롭게도 요즘은 그런 복잡한 사이클이 모두 겹치는 중대한 변화의 시기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19세기 후반은 물론 16세기도 동아시아 역사에 큰 전환기였다. 전자가 100~150년 주기라면 후자는 500~600년 주기이다. 이 생명주기 곡선이 요즘 모두 쇠퇴기에 놓였다. 단적 사례로 동아시아 친족제도를 들 수 있다. 500여년 전 주자학적 통치구조와 함께 형성된 친족제는 사회·문화적 요인과 함께 인구감소로 사라지고 있다. 인구 재생산이 불가능한 탓이다. 전쟁이나 재해를 포함해도 역사상 이처럼 장기적으로 인구가 감소하기는 처음이다. 사회구조 자체가 변화하고 외부에서 노동력과 인구를 충원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 교토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했다. 한국사와 동아시아비교사로 교토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카이(東海)대, 도쿄도립대 교수를 거쳐 1983년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로 발탁됐다. 동양문화연구소 최초의 비도쿄대 출신 교수다. 연구소장으로 재직하다 2002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치와 된장국을 좋아하는 지한파로, 부인도 한국인이다. 저서로 ‘양반’, ‘조선과 중국:근세 오백년을 가다’, ‘동아시아 근대 이행의 세 갈래’ 등이 있다.
  • [책꽂이]

    ●세계적인 과학수사(콜린 에번스 지음, 김옥진 옮김, 가람기획 펴냄) 미국의 자유기고가가 현대의 범죄수사 기법을 한 단계 끌어올린 역사적인 범죄사건 100가지를 추렸다. 범죄심리분석(프로파일링), DNA 분석, 혈청학, 독극물학, 탄도학, 치의학, 성문(聲紋) 등 다양한 과학수사 기법을 활용해 해결한 각종 이야기들을 짜임새있게 풀어 냈다. 1만 5000원●나쁜 돈(케빈 필립스 지음, 이건 옮김, 다산북스 펴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던 벤저민 그리셤의 법칙을 일깨우며,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와 세계 경제의 위기는 나쁜 돈에서 시작됐음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닉슨 전 대통령의 정치보좌관 출신으로 투기적 자금의 이동과 금융이 다른 산업을 희생시켰다는 점을 강조한다. 1만 5000원.●민중과 유토피아(조경달 지음, 허영란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재일사학자이자 조선근대사 연구자인 조경달 일본 지바대 교수가 1860년대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 일제 식민 지배의 막이 내릴 때까지 100년 동안의 민중운동을 추적했다. 2만 3000원.●몸 펴면 살고 굽으면 죽는다(몸살림운동 연구소 지음, 백산서당 펴냄) 병에서 벗어나려면 몸을 펴야 하기 때문에, 앉고, 서고, 걷고, 잠자고 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써놓았다. 허리가 굽으면 고혈압과 당뇨,허리디스크가, 등이 굽으면 고혈압이, 목이 굽으면 목디스크가 생긴다고 한다. 2만원.●1지망 인생(고철종 지음, 다산라이프 펴냄) 1지망에서 떨어지고 2지망에서 붙으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1지망에 대한 미련을 안고 살아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생은 선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택한 현실을 즐기고 가꾸어 나가는 행복에 주목했다. 1만 2000원.●허난, 우리는 요괴가 아니다(서명수 지음, 김&정 펴냄) 중국에 ‘허난런’은 허난(河南)에 사는 주민이나 허난이 고향인 사람을 말한다. 속을 잘 드러내지 않아 음융하고 나쁜 허난 사람들이란 의미가 담겼다. 기업과 국가에서 채용도 꺼리는 등의 무시와 차별이 비일비재하다. 1만 1000원.
  • 함석헌 씨알사상 전집 출간

    사상가 함석헌 선생(1901~1989년)의 서거 20주기를 맞아 생전에 남긴 글을 집대성한 30권 분량의 저작집이 발간됐다. 함석헌은 기독교적 평화주의를 기반으로 유교와 불교·선 등 동양 사상을 아우르고, 자연친화적인 생명주의를 강조한 민족 사상가이자 민중운동가로 꼽힌다. 한길사에서 펴낸 이번 전집은 1988년 나온 함석헌 전집(20권)을 토대로 새로 찾아낸 시 72편, 강연문 26편, 편지 39편, 에세이 11편, 동양고전풀이 17편, 인물론 9편, 대담 6편, 간디의 명상집 등을 새롭게 추가했다. ‘씨알의 희망’처럼 발표 당시 검열로 인해 실리지 못했던 글들도 살려냈다. 함석헌의 역사의식, 씨알사상, 세계주의, 여성사상, 비폭력운동 등이 총망라돼 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함석헌의 사상은 특정한 사상이 아니라 보편적 내용을 다루고, 시세(時勢)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고전”이라고 평가했다.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의 김영호 원장도 “선생의 저작은 다양한 삶의 원리와 실천론이 어우러진다는 점에서 통섭이 요청되는 시점에서도 대단히 선구적”이라고 말했다. 한길사와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은 1일 오후 6시 교보문고 지하 1층에서 출판기념회와 더불어 ‘함석헌 선생 탄신 108주년 심포지엄과 낭독의 밤’을 연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공기업 CEO에게 듣는다] 조춘구 수도권매립지공사 사장

    [공기업 CEO에게 듣는다] 조춘구 수도권매립지공사 사장

    “지난 2000년 수도권매립지를 찾았을 때만 해도 활용 방법을 몰라 소중한 에너지인 매립가스를 그저 태워 버리기만 했습니다. 쓰레기 냄새는 말도 못할 만큼 심했고 엄청나게 날아다니는 파리떼도 끔찍했죠. ‘어떻게 이런 곳에 기업이 들어와 일을 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지금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경기장을 짓기로 했을 만큼 환경이 좋아졌습니다.” 1992년 서울 난지도 매립지의 환경피해를 거울삼아 조성된 인천광역시 서구 백석동 수도권매립지(602만㎡)는 악취는 물론 침출수까지 완벽하게 차단한 첨단 위생 매립지로 거듭났다.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조춘구(65)사장은 2009년 공사 운영 목표를 자신이 직접 만든 슬로건인 ‘세계 최대의 매립지를 세계 최고의 환경명소로’라는 말로 대신했다. 지난해까지 수도권매립지가 혐오시설이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 올해부터는 지역 주민과 협력해 한국을 대표하는 대표적 환경 테마파크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수도권매립지를 환경 테마파크로 수도권매립지공사는 매립지 전체 가용면적의 65%에 달하는 455만㎡에 폐기물·바이오·자연력에너지·환경문화단지 등으로 구성된 ‘수도권 환경·에너지 종합타운’을 2016년까지 완공하기로 했다. 올해는 종합타운 건설에 대한 타당성 조사 및 실시설계와 민·관 협의체 구성 등에 주력할 방침이다. “환경·에너지 종합타운이 완공되면 수도권 매립지는 쓰레기·폐기물 관련 기술이 한 곳에 모여 통합 운영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재생에너지 타운이 됩니다. 현재 쓰레기 매립 기술이 꾸준히 개선되는데다 쓰레기 자원화 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어요. 종합타운이 본격 가동을 시작하면 수도권매립지는 반영구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수도권에 더 이상의 추가 매립지 건설이 필요없게 된다는 뜻이죠.” 조 사장은 또 정부의 국정과제인 ‘저탄소 녹색성장’에 발맞춰 여러가지 온실가스 저감 관련 사업도 순조롭게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매립가스를 모아 지역난방을 위한 연료로 활용하는 매립가스자원화사업(50MW 규모)의 경우 지난해에는 당초 계획보다 전력을 185%나 초과 생산해 451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산화탄소 감축실적도 인정받아 48만t의 온실가스 배출권도 발급받게 된다. ●폐기물 고체연료 시범시설 올 연말 완공 여기에 쓰레기에서 수분, 금속, 유리 등을 제거해 압축시켜 만든 생활폐기물 고체연료(RDF)의 상용화를 앞당기기 위해 하루 200t 규모의 시범시설도 올해 말까지 완공할 예정이다. 녹색성장 R&D(연구 및 개발) 인력 양성을 위해 매립지 내에 ´환경·에너지 대학원 대학´(가칭) 설립도 현재 추진 중이다. ●매립가스 바이오가스화 추진 하지만 조 사장의 목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환경·에너지 분야의 첨단기술을 적극 육성해 공사를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환경전문 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현재 스웨덴과 네덜란드 등에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매립가스 바이오가스화 사업’의 국산화도 수도권매립지공사가 시급히 추진하려고 하는 목표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매립지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를 지역난방용 발전연료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립가스에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몇몇 가연성 물질을 첨가해주면 액화천연가스(LNG)를 대체할 수 있는 ‘액화 바이오가스’를 만들 수 있어요. 쓰레기를 잘 이용하면 외국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와야 하는 차량용·취사용 연료를 뽑아낼 수 있다는 말이죠. 상당한 기술과 노하우를 필요로 합니다만 우리도 이를 상용화하게 되면 지금처럼 매립가스를 지역난방에만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천연가스 수입량을 줄일 수 있어 국가 경제에도 큰 보탬이 되죠. 이처럼 환경과 경제를 동시에 키울 수 있는 혁신적 기술을 육성해 중장기적으로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를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환경기술 기업으로 만들려는 게 제 목표입니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조춘구 사장은 ▲1944년 경남 창녕 출신 ▲68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77∼81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조직부장 ▲83∼84년 전국화학노동자연합 정책실장 ▲85∼87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차장·노동위원장 ▲89∼91년 민중당 대외협력위원장 ▲93∼98년 한국자원재생공사 전무 ▲95∼98년 환경마크협회 비상임이사 ▲98∼2000년 한국자원재생공사 감사 ▲00∼02년 한나라당 대외협력위원회 부위원장 ▲06∼07년 뉴라이트성북연합 공동대표 ▲07년 이명박 대통령 예비후보 대외협력위원회 부위원장
  • 이수광 소설 ‘대륙의 영혼 최재형’

    이수광 소설 ‘대륙의 영혼 최재형’

    독립운동가 최재형(1860∼1920). 그의 삶의 역정은 혼란의 시대에서도 단연 두드러진다.‘러시아 정부가 인정한 정치인’‘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재러 한인사회 지도자’‘독립운동가’‘일본군의 총탄도 두려워하지 않은 거인’….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겠지만 러시아에서는 전설적인 민중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꼽힌다. ‘노비’로 태어나서 굶주림을 피하고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간 최재형 선생은 온갖 밑바닥 생활을 하며 자산가로 성장했다. 삶이 안정되자 재러 한인사회의 근대화에 힘을 쏟아 재러동포들은 물론 러시아 정부로부터도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특히 1905년 항일운동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1920년 연해주에서 일본군에 처형될 때까지 의병을 조직하고, 민족 언론을 운영하는가 하면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아낌없이 바치는 등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헤이그 특사 이상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민족 사학자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이가 바로 그다. 사망하기 전인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된 그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지킨다는 신념으로 취임치 않고 끝까지 러시아에 남아 있다가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최재형 선생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주요 활동무대가 중국이 아닌 교류가 적은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소설 ‘대륙의 영혼 최재형’(이수광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으로 부활됐다.‘노비’로 어렵게 보낸 소년기부터 시신조차 남기지 못했던 비참한 죽음, 풍비박산 난 가족들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최재형 선생의 일생을 생생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복원한 팩션이다. 작가는 “최재형 선생은 동지들과 민중의 지지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체 게바라를 능가하는 인물”이라면서 “자산가로 성공했는데도 자기 삶에 안주하지 않고 민족과 조국을 위한 혁명과 독립운동에 영혼까지 송두리째 바쳤다는 사실이 너무 존경스럽다.”고 밝혔다.1만 20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8) 전주 원동 ~ 익산 여산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8) 전주 원동 ~ 익산 여산

    옛길은 이야기속으로 사라진 길이다. 한때 민족 이동의 대동맥이었던 호남대로는 이제 역사로만 기억되는 잊혀진 길이다. 하지만 옛길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간직한 보고이다. 길을 다니던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옛길의 생명력은 또한 끈질기다. 국토의 개발이라는 거대한 밀물에 사라지기도 했지만 아직도 원형이 보존된 곳이 적지 않다. 개발에서 소외된 호남지역은 그런 의미에서 옛길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지역일 수 있다. 원(院)과 주막(酒幕), 객주(客主)는 사라지고 없지만 기쁨, 슬픔, 절망, 한의 역사를 간직한 옛길의 흔적을 좇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전주의 뒤안길이 된 옛길 전북 지방의 옛길은 전북의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의 서쪽 변두리를 지난다. 호남대로란 옛말이 무색할 정도다. 나지막한 구릉지대를 지나는 옛길은 한적한 2차선 도로로 변했다. 옛날 원이 있었다 해 붙여진 전주시 원동을 지난 옛길은 전주∼군산간 국도 26호선과 교차한다. 국도 26호선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길이다. 봄이면 전국에서 가장 긴 일백리 벚꽃터널을 이룬다. 벚나무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재일교포들이 전해준 것이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든 길에 재일교포들이 일본의 나라꽃을 심은 길은 이제 전주와 익산, 군산을 연결하는 산업도로로 변했다. 옛길이 국도 26호선과 교차하기 직전 오른쪽에는 ‘한국도로공사 수목원’이 자리잡고 있다. 1970년 호남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남은 땅에 다양한 수목과 희귀식물을 심어 꾸민 수목원이다.33만 9380㎡의 부지에 178과 3010종의 수목을 재배하고 있다. 인터체인지 부근은 일제 시대에 미쓰비시 재벌이 운영하던 동산농장을 비롯한 일본인들의 대규모 농장이 있었던 곳이다. 전라선 철도도 동산농장에서 생산되는 쌀을 반출하기 위해 부설된 사설 협궤 철도였다. 그러나 동산농장이 있던 곳에는 전주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섰다. 옛길은 용덕·용정·구정마을을 지나면서 호남고속도로와 교차해 완주군 삼례읍을 향한다. 호남고속도로를 왼편에 끼고 삼례까지 펼쳐지는 평야지대를 나란히 달린다. 옛길은 아련한 모습으로 논밭 사이를 지나다 만경강 상류인 삼례 한내 천변에서 끊겼다. 강을 건너던 다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내를 건너면 완산팔경(完山八景)의 하나인 비비정(飛飛亭)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비비정은 1573년(조선 선조 6년) 무관이었던 최영길에 의해 건립됐다. 이곳에 오르면 전주시내와 호남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앞으로는 한내가 흐르고 주변으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풍광이 대단히 아름답다. 유유히 흐르는 물위로 기러기들이 내려앉는 풍경을 볼 수 있어 옛 조상들은 이곳을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 했다. 양반들은 이 정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 주고 받으며 정취를 달랬다고 한다. 깊고 천이 넓어 군산, 부안에서 온 소금배와 젓거리배가 쉴새 없이 오르내렸다. 백사장 한쪽에는 큰 시장이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조선시대 9대로 가운데 전주·남원·통영 방면으로 가는 ‘6대로’가 분기하는 곳이다. 호남대로는 비비정 옆 언덕을 지난다. ●동학농민군 2차 집결지 삼례 비비정 마을을 지난 옛길은 삼례읍 중심지에 들어선다. 삼례초등학교 앞을 지나 원삼례마을을 향하면서 헤어졌던 국도 1호선과 다시 교차한다. 국도 1호선은 익산쪽을 향하지만 옛길은 호남고속도로와 나란히 삼례중앙초등학교 옆을 지난다. 삼례는 동학농민혁명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1894년 9월(음력) 10만여 농민군이 항일 투쟁의 깃발을 앞세우고 재집결한 2차 봉기 장소이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일본군과 탐관오리를 아내기로 결의한 농민군들은 삼례뜰에서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삼례봉기는 근대 민족·민중운동의 출발이요 새로운 한국사회를 밝히는 위대한 횃불이었다. 이에 앞서 1892년 11월(음력)에는 동학교도 수천명이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탄원하기 위해 모인 장소다. 이른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다. 삼례집회는 전라감영의 무력진압을 각오한 것으로 실은 탐관오리에 대한 투쟁이었다. 이들은 삼례역에 모여 두차례 전라감영에 의송(議送)을 보내 동학 교조의 신원(伸寃)을 할 것과 동학도에 대한 수탈 중지를 요구했다. 삼례집회는 본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동학도에 대한 부당 주구금지 조치를 얻어냈다. ●백제 도읍지 익산 호남고속도로 삼례인터체인지를 지나면 행정구역이 변한다. 옛길 남쪽은 완주군 삼례읍, 북쪽은 익산시 왕궁면이다. 왕궁은 백제문화제가 널리 분포되고 있는 지역이다. 제석사지(사적 제405호),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함벽정(전북도 유형문화제 제127호) 등이 있다. 왕궁리 유적은 1989년부터 학술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지설이 전해지고 있다. 왕궁리 유적지에는 백제계 석탑 형식에 신라탑 형식이 가미된 고려 초 작품으로 추정되는 5층 석탑(국보 제289호)이 남아있다. 옛길은 왕궁면 남촌마을과 삼례읍 농원마을 사이를 지나 봉광동을 스친다. 통정·역기·신기마을을 지날 때까지 왼쪽으로는 호남고속도로가 계속해 달린다. 전광리에서 호남고속도와 교차한 옛길은 왕궁저수지를 향한다. 왕궁저수지는 1931년 일제시대에 준공됐다. 옛길은 왕궁저수지 건설로 일정 부분이 수몰됐다. 대동여지도에 옛길은 왕궁저수지 중앙을 통과하는 것으로 기록돼있다. 저수지를 지나 연봉정 마을을 지난 옛길은 탄현고개를 넘는다. 연봉정 마을은 주막촌이었으나 현재는 초라한 농촌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탄현고개를 넘으면 익산시 여산면이다. 이곳부터 옛길은 국도 1호선과 다시 한몸이 된다. ●천주교 성지 여산 여산은 한양에서 내려올 때 호남의 초입 고을로 위세를 떨쳤던 지역이다. 호남에 들어가기 전 중요한 길목이어서 주막과 객주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는 장급 여관 하나 볼 수 없는 전형적인 농촌 면소재지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여산은 한때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였다. 천주교의 전래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빨랐다. 그만큼 박해도 많이 받았다. 여산성당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여산부의 속읍지였던 금산·진산·고산 등지의 심산유곡에 숨어있던 신자들이 여산관아로 잡혀와 모진 형별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하고 1868년 처형돼 순교한 성지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철거된 동헌이 남아 있다. 동헌은 사또가 있었던 관아다. 여산동헌(전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은 조선 후기 관아 건물 가운데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된 몇 안되는 귀중한 문화재다. 동헌 앞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붙여 질식사시킨 ‘백지사(白紙死)터 성지’가 남아 있다. 옛길은 여산 동헌을 지난 뒤 1번 국도와 다시 만나 충청남도 논산시를 향한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신정일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대표 “옛길 복원해 보행권 되찾아야” “역사 속에서 실재했던 옛길을 복원해 국민들의 보행권을 확보해야 합니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53) 대표는 “옛길을 복원해 보행권이 확보되면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은 물론 우리 국토의 재발견과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땅 걷기 모임은 차를 타는 것 보다 느리게 걸으며 우리 국토를 다시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발족했다.‘보행권 되찾기 운동’과 ‘옛길 문화재 지정 운동’을 벌이고 있다. 두발로 우리 땅을 걷자는 뜻으로 11월11일을 ‘길의 날’로 정했다. “우리 산, 우리 강, 우리 국토가 너무 아름다워 걷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하며 얻은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지식을 책으로 쓰고 있다. ‘다시 쓰는 택리지’를 비롯해 그가 펴낸 책은 무려 32권이나 된다. 모두 그가 발로 뛰며 몸으로 느끼고 본 것을 엮은 것이다. 영남대로, 삼남대로는 물론 한강, 낙동강, 금강, 만경강 등 8개 강을 걸었고 400개의 산을 올랐다.25년 동안 전국을 답사하며 걸은 거리만 해도 지구를 몇바퀴 돌 정도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현대판 김정호’라는 별명이 따라 다닌다. “옛날 만경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주로 배를 탔지요. 비비정이 완산팔경으로 꼽히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현재 왕궁리 근처에 가면 축산 폐수가 악취를 풍기지만 옛 백제의 숨결을 느끼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의미 깊은 곳”이라며 “호남대로는 걸으면 걸을수록 깊은 맛을 느낄수 있다.”고 강조한다. “옛 선비들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고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답사를 하다 지치면 책을 읽거나 쓰고, 이 역시 지치면 다시 답사를 떠나지요.” 그는 이처럼 요즘도 일주일에 3일은 답사를 위해 걷고 4일은 책을 쓴다. 신 대표는 “걷는 것은 곧 자연 사랑이고 자연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하나의 첩경”이라며 옛길 복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7) 한국민주주의 운동 토론회-지상중계(상)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7) 한국민주주의 운동 토론회-지상중계(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는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해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학술단체협의회와 공동으로 4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정해구(성공회대)·김호기(연세대)·김세균(서울대)·조희연(성공회대) 교수 등이 한국 민주화 운동 및 6월 민주항쟁의 의미와 평가, 민주화·세계화 이후 한국 시민운동, 민중운동, 국제연대운동의 전개와 평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으며, 에드워드 베이커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자문위원과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기조 발표했다.5일에는 홀거 하이데 독일 브레멘대 명예교수의 기조발표에 이어 강명세(세종연구소)·김종서(배재대), 박경(목원대)·서이종(서울대) 교수 등이 정치와 제도, 인권의 권리(평화, 인권, 생존), 민주화의 주체와 민주화의 길, 소통과 미래(미디어와 사상) 등 분야별 토론을 진행한다.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비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투쟁 대상이었던 수구 정치세력들의 가슴에 안겨 권력의 단맛을 보았다는 점에서 비롯됐다. 그들이 실현했다고 하는 그 민주주의는 이미 낡은 것이 되어 ‘시대의 징표’를 담지 못하고 있다.” 이광일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4일 ‘6월 항쟁, 더 많은 민주주의의 좌절’이라는 발제문에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 등장한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보수화 자유주의세력 민주주의 걸림돌 이 교수는 “6·29선언으로 직선제를 얻어낸 자유주의 정치세력에게 ‘더 많은 민주주의’는 더 이상 관심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전향, 자본과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어 “6월 항쟁의 현재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3차례의 집권을 거치면서 보수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이라면서 “이들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행동할 때만이 6월 항쟁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6월 항쟁을 지도했다는 국민운동본부조차도 자유주의적 제도권 야당이 직접 참여했고, 그들과 연결된 종교계, 그리고 재야의 ‘비판적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했으며 민중운동세력은 지배적인 위상을 점하지 못한 채 주변에 포진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우파와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좌파로 분류했다. 우파는 지주 계급에 기반을 둔 야당세력으로 공정선거를 통한 정부와 의회 구성이 목표이며, 좌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소외된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또다른 축으로 삼는 세력이다. 좌파는 재야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진보 아니다” 토론자로 나선 박명림 연세대 정치학과 교수는 이 교수의 주장에 대해 “6월 항쟁 전후 민주화 세력의 분화가 과연 이념적 분화인지 의문이 든다.”면서 “당시 상황을 면밀히 보면 이념적인 분화는 정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토론자인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도 “이 교수는 과도하게 정치 사회 중심으로만 6월 항쟁을 분석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특히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면 보수이고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면 진보라는 도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한국경제의 개방문제와 신자유주의는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정 교수와 박 교수의 비판은 자유주의에 대한 낡은 정치관에 기반하고 있다.”며 재반박했다. 그는 “신자유주의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이라면서 “다만 지구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노무현 정부와 범여권 등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진보가 아니다.”면서 “그들과 한나라당의 갈등은 신자유주의 대연정으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일 뿐이며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의견이 수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시민운동과 현실 괴리…민중 삶 개선 못해” 6월 항쟁 기념 토론회에서는 시민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발표문 두 편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배성인 한신대 교수(정치학)는 ‘신자유주의 시대, 변화하지 못한 시민운동의 한계와 과제’라는 발제에서 “시민운동 위기의 핵심은 ‘시민 없는 시민운동’ 혹은 ‘정치적 중립성’ 같은 문제가 아니라 시민운동의 운동노선과 현실의 괴리가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권력과 자본에서 자유롭게, 사회 공공성을 올바로 인식하며, 풀뿌리 운동에 주목하고, 급진적 운동으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시민운동의 과제로 꼽았다. 배 교수는 최근 시민운동의 행태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홍보적 시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일부 환경단체와 몇몇 유명 단체는 홍보 효과를 통한 기업 후원 기금을 마련해 자체 사옥을 확보하고 재단을 만드는 등 사실상 시민사회에서 귀족단체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경제 영역에서 재벌 개혁과 투명성 강화, 소액주주 운동을 했지만 이는 재벌의 자산을 초국적 자본의 먹잇감으로 돌려놓았다.”면서 “17대 총선에서는 양극화나 이라크 파병이 아니라 부패 청산과 탄핵 찬성을 기준으로 낙선운동을 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발제자인 김정훈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시민운동은 여전히 민주화의 동력인가.’라는 주제에서 정책대응 능력을 높일 것을 시민운동 진영에 주문했다. 그는 “한국 사회운동세력은 정책역량을 너무나 무시해왔다.”면서 “정책을 무시한 결과 진보학계는 거의 세대 단절 상태에 이르렀고 사회 전반은 보수화됐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시민사회가 보수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담론 전략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물적 토대를 갖춰야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와 함께 “사회운동이 분화되는 상황에서 사회운동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역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민중 힘으로 입신한 사람들, 사욕만 좇을뿐”

    “민중 힘으로 입신한 사람들, 사욕만 좇을뿐”

    “6월 항쟁의 성과를 과연 모든 민중이 누리고 있습니까. 정치인 몇 명이 독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픔과 분노, 좌절과 환호, 승리와 패배가 뒤섞였던 1987년 6월, 그 복잡다단한 표정을 한 장의 인화지에 담아낸 시인이자 기록사진작가 박용수(73) 한글문화연구회 이사장은 20년이 지난 오늘을 “더없이 살기 힘든 시대”라고 일갈했다. 당시 최루탄 가스 냄새에 갇힌 항쟁의 기억들이 역사적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은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고 현장을 누비고 다녔던 그의 땀방울이 있었기 때문이다.19일 서울 종로구 한글문화학회에서 만난 그는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18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언어장애인이 된 그는 중요한 부분을 언급할 때마다 펜으로 짧은 문장들을 적어나갔다. 맘속에 쟁여온 6월 항쟁의 뜨거움을 전하기에, 세상의 언어는 너무 빈약했다. “머리만 좀 다친 줄 알았는데 한열이가 죽었어. 난 (사진을) 찍어야 했어. 찍다 경찰에게 맞아도 찍어야 했기에 참았지. 나 자신을 한열이라고 생각하며 셔터를 눌렀어요.” 그가 담은 이한열 장례식 사진은 당시의 열기를 잘 보여준다. 그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근처에 가기도 힘들었다.”면서 “근처 봉제공장 여공들 도움을 받아 공장 건물에 올라가 찍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온갖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며 내 정신도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며 잠시 말을 중단하기도 했다. 경남 진주에서 사진가로 일하던 1960년 한 문예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70년 1월 상경했다. 1974년 11월 소설가 이문구·김정한·박태순·송기원, 시인 고은·신경림 등의 문인들과 함께 1974년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를 구성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6월 항쟁 당시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내에 보도실을 만들어 50대의 나이로 현장을 낱낱이 기록했고, 한국 민주화 과정을 담아낸 8만 7000여점의 사진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해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는 경찰이 사진기자의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어요. 나는 말투도 이상하니까 외신기자라고 속여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그가 촬영에 중점을 둔 부분은 구치소에 수감된 민주인사들에게 또 다른 폭력이 가해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호주머니에 작은 카메라를 숨겨 구치소 관계자 몰래 수많은 사진을 찍어 세상에 알렸다. 안동교도소에 갇힌 문익환 목사가 노별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자 문 목사 사진을 찍어 외신에 넘겼다. 서울교도소에 수감 중인 장기표씨를 면회 갔을 땐 기둥에 숨어 셔터를 눌렀다. 그는 “사진이 세상에 공개되면 담당 경찰들이 상부로부터 심한 문책을 받았다.”고 전했다. 기록사진가이기 이전에 민통련 중앙위원이었던 그도 두 번 구속됐다. 그런 그가 바라보는 항쟁 20년 후의 모습은 ‘민중의 삶과는 너무 먼 시대’로 요약된다. “항쟁의 성과로 정치에 입문한 사람들이 자기 이득만 취할 뿐 민중을 생각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닙니다. 항쟁 당시의 신념으로 산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는 현실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민주화 이후 ‘겨레말 갈래 큰사전’(93년),‘새우리말 갈래사전’(94년),‘겨레말 용례사전’(96년) 등을 펴내며 ‘우리말 지킴이’로 살았고, 또 그렇게 살다갈 그는 마지막 한 문장을 노트에 옮겼다. “6월은 해마다 오지만 1987년 6월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글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대선주자 24시] (2)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의 집을 찾은 19일 새벽 5시30분 무렵, 서울 창동 골목에는 눈이 채 녹지 않았다. 김 의장이 사는 빌라 2층에서 불이 켜지는가 싶더니 부인 인재근 여사가 목장갑을 끼고 현관으로 내려왔다. 민가협 초대총무와 서울민중운동연합 상임부의장을 거치며 오랜 세월 ‘동지’로 살아온 인 여사다. 차로 집근처 쌍문역까지 김 의장을 태워주기 위해 차 시동을 거는 인 여사를 지켜보며 김 의장이 ‘바깥사람’이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났다. 김 의장이 긴 투옥으로 교도소에 있을 때 혼자 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말이다. 쌍문역에 도착하자 잰걸음으로 하루를 여는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김 의장은 장갑을 벗더니 “날이 춥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라며 시민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낮은 지지율에 허덕이는 집권여당 의장으로서 경제니, 정치니 골치아픈 얘기를 꺼내기 싫었던지 서둘러 지하철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D-365,“시간은 충분하다.” 김 의장은 2007년 대선 1년을 앞둔 감회를 묻는 기자 질문에 “벌써 4년이 갔구나. 하지만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범여권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아직 국민들은 진보·개혁진영에 대해 보수진영 못지않은 지지를 보내주고 있다는 게 나름의 ‘희망의 근거’였다. 지하철 안에서 자리를 옮겨다니며 시민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김 의장은 부동산 정책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전세난과 부동산 거품이 급격히 꺼지는 이중적 딜레마를 막는 일이 시급하다.”면서 “부동산시장을 안정화시키는 것보다 정책의 일관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분양원가 공개를 끝내 지키지 않은 데 대한 비판으로 들렸다. 그는 “부동산은 무한정 생산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공공적 관리가 필요하다.”면서 “장사원리에 입각해 집권여당의 총선공약을 뒤엎은 관계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비판했다. ●“당청관계, 빨리 결단내야” 당청관계에 이르러서는 더욱 단호해졌다. 같이 갈 건지 말 건지 결론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상호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 그가 내린 진단이었다. 그는 “당정청 4인회동 다음날 여야정 정치협상회의가 제안된 것을 보고 이런 관계라면 4인 회동 자체도 의미없다고 판단했다.”고 쓴소리를 던졌다. 그는 “노 대통령이 나와 여당을 불편해하는 것 같다.”면서 “참여정부의 정책방향은 옳지만 다른 의견을 듣지 않으려는 자세 때문에 많은 정책이 손상됐고 결국 국민의 지지를 못 얻었다.”고 평가했다. 오전 7시30분쯤 서울 영등포당사 앞에 있는 해장국집으로 들어섰다. 최근 갈림길에 놓여 있는 당 진로에 대한 속내를 털어놨다. 전당대회는 치를 수밖에 없지만 이미 통합신당으로 대세가 결정난 이상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국민에게 할말은 한다” 그는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호남 향우회 전국연합창립대회에 가기에 앞서 기자에게 “이제 국민에게 할 말은 하는 집권당 의장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어 “한때 정치 참여를 망설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나라당의 독주를 막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가 왔다.”고 다짐했다. 통합의 또다른 대상인 고건 전 총리에 대해서는 “논쟁이 불가피한 측면이 많다.”고 불만을 드러냈다.(고 전총리가 주창한)가을햇볕정책론은 명백히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범여권과 함께 반한나라당 전선에 참여해야 할 유력한 주체임은 분명하다.”고도 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한 것에 대해서는 “선글라스를 끼고 박 전 대통령을 모방한 것은 국민의 정치의식을 얕잡아 보는 것”이라며 날을 세웠다. 범여권의 유력한 영입대상으로 거론되는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역량있고 자격있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운 뒤 “아직 그가 정치권에 뛰어들 조건이 마련돼있지 않지만 주변 의견과 다르더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라며 정치 개입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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