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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한일협정 반대로 민주화 운동 전면 나서YMCA 위장결혼 사건 등 수차례 옥고백원담 “父 마지막 글귀는 ‘노나메기’”“김미숙·김진숙 힘내라” 병상 메시지도 “그 돈 이웃 도와야” 유지… 靑조화 거부전국 16곳 분향소… 19일 대학로 노제“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새벽 폐렴 투병 끝에 별세했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그는 민중의 장쾌한 수호자 ‘장산곶매’가 돼 하늘로 떠났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교수)·미담(화가)·현담(출판사), 아들 일(울산과학대 교수)씨가 있다. 90년 가까운 그의 삶엔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질곡의 현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못 배우고 못 가진, 그리하여 배우고 가진 자들에게 압제받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앞서서 나가는’ 삶을 선택했다.백 소장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인 데다 분단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지만 독학으로 통일 문제와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을 키워 나갔다. 6·25전쟁 중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기 위해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직전에 사퇴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노동자 민중후보로 추대됐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송경동 시인은 “백 선생이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글귀는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전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는 평소 지론답게 여러 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냈다. 우리말 사랑도 남달랐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젊은 날’, ‘버선발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주인공…백기완 별세 눈물로 추모(종합)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주인공…백기완 별세 눈물로 추모(종합)

    15일 영면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1932∼2021)에 정치인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독재 정권과 싸운 ‘투사’이자 한국 민주·민족·민중운동의 ‘큰 어른’이었던 백 소장은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피신하던 백범 김구 선생을을 돌보았고, 이후 백 소장은 백범을 스승처럼 따랐다. 민중운동 진영은 그를 2차례에 걸쳐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했다. 군사정권 종식이란 국민적 염원 속에 치러졌던 1987년 대선에는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후보직을 내려놨으나, 1992년 대선에선 독자 민중후보로서 일명 ‘백선본’과 함께 완주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2013년 울산 현대자동차와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현장, 2014년 충북 옥천 유성기업 등으로 가는 ‘희망버스’에 빠지지 않고 올라 백발에 한복 차림 투사는 힘을 보탰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백 소장에 대해 “내 청춘 시절의 큰 별”이셨다며 “박종철 추모식때 내 손을 꼭 잡아주셨던 두툼한 손을 언제나 기억할 것”이라고 슬퍼했다. 강기정 전 민주당 의원은 이날 백 소장과의 추억을 회고했다. 강 전 의원은 백 소장이 직접 노랫말을 쓴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 “내 청춘의 노래이자 험난한 시대를 넘어서야 했던 동지들의 노래. 그리고 끝내 국회 본회의장에서 불렀던 노래”라고 밝혔다.이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 소장의 시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전 의원은 ‘재야’란 단어도 백 소장이 처음 썼으며 그 뜻에 대해 “인권이 침해당하고 자유가 박탈당하는 거친들에 곡식과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라 풀이했다고 덧붙였다. 우상호 민주당 의원도 “돌이켜보면, 선생님께서는 항상 앞에 서 계셨던 것 같습니다”라며 “그 그림자를 좇아가기에도 벅찼던 분. 시대의 등불을 이렇게, 또 잃었습니다”라고 애도했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평생을 노동자 민중이 주인되는 통일세상을 위해 투쟁해오신 백기완 선생님이 첫 새벽에 운명하셨습니다”라며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 소중한 가르침 잊지않겠습니다”라고 부고를 전했다. 그는 “파렴치한 권력에 맞서는 길은, 모든걸 걸고 제대로 싸우는것이 왕도다. 우리가 힘들면 기득권 간나새끼들도 힘드니 더 힘을 내라”라고 했던 백 소장의 생전 말씀을 눈물로 새겼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동학농민군이 지향했던 세상을 묻다

    전북 정읍시는 오는 25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국가기념일 제정 1주년 기념 동학농민혁명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17일 밝혔다. 정읍시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사가 주관한다. ‘동학농민혁명에 묻다’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는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더욱 위상이 높아진 동학농민혁명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당시 동학농민군이 지향하고자 했던 새로운 세상이 무엇인지 되짚어 본다. 특히 한국 근현대 민족·민중운동의 정점을 이룬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야 하는 가치와 당위성을 살펴본다. 한중일 학자들은 김익두 전북대 교수의 기조발제를 시작으로 ▲동학혁명과 동아시아 국제질서(미야지마 히로시 도쿄대 명예교수) ▲동학농민혁명군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동학농민혁명시기 청군대초안(淸軍代剿案)과 원세계(방민호 옌볜대 교수) ▲일본군의 조선파병과 인력문자 동원(조재곤 서강대 교수)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에 대한 시민혁명적 관점의 분석(유바다 고려대 교수) ▲문화사적 측면에서 본 동학농민혁명(김원호 (사)나라풍물굿 이사장) ▲동학사상의 종교적 전승(김탁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해 주제 발표를 할 계획이다. 정읍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일제강점기 35년, 독립운동가도 부역자도 기억해야”

    “일제강점기 35년, 독립운동가도 부역자도 기억해야”

    “3·1운동, 유관순 기억으로만 그쳐선 안 돼6월 항쟁까지 이어진 우리 민족의 DNA”김 알렉산드라·최재형 선생·손기정 선수그림 그리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 꼽아 “너무나 많은 독립운동가가 잊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친일 부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광복 이후에도 그들이 권력을 누리며 영화롭게 살도록 해 준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박시백 작가는 10일 서울 영등포구 광복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린 역사만화 ‘35년’ (비아북) 기자간담회에서 출간의 의미로 ‘기억’을 꼽았다. 책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35년을 담았다. 앞서 300만부가 팔린 밀리언셀러 ‘조선왕조실록’(20권)을 완간한 2013년부터 시작해 7년이나 걸려 모두 7권으로 완간했다. “일제강점기 35년사에 관해 일반인들 이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그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공부하며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전작에서는 ‘실록’이라는 명확한 자료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는 관련 자료들이 상충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무엇보다도 등장해야 할 인물이 너무 많았다. 박 작가는 “될 수 있으면 더 많은 독립운동가와 친일 부역자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기억에 남는 인물로는 조선인 최초로 볼셰비키 혁명에 참여했다가 총살당한 여성 김 알렉산드라, 연해주에서 큰 부를 일구고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바친 최재형 선생, 일장기 말소 사건 정도로만 기억하지만 여운형의 건국동맹 밑에서 활동한 손기정 선수 등을 꼽았다. 그는 이렇게 수많은 인물이 살아낸 35년이 “우리가 사는 민주공화국을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미국의 원자폭탄으로 해방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35년은 그저 그런 역사가 아니에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단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박 작가는 전체 7권 가운데 3·1운동을 다룬 2권과 친일파를 추적한 7권을 꼭 읽으라고 추천했다. 3·1운동에 관해서 “그저 유관순 열사로만 기억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세계 민중운동사에서 찾기 어려운 혁명이었고, 4·19와 6월 항쟁까지 이어진 우리 민족의 DNA라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7권에선 “당시 글이나 강연으로 ‘천황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라’고 한 지식인들을 다룬다. 광복 이후에도 이어지는 이들에 관해 우리가 좀더 엄정하게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워싱턴포스트에 문 대통령 얼굴이 크게 실린 이유는

    워싱턴포스트에 문 대통령 얼굴이 크게 실린 이유는

    미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 22일(현지시간) 지면에 문재인 대통령의 얼굴이 크게 실려 이목을 끌었다. 미 현지 날짜로 월요일인 이날 WP 9면 지면에는 문 대통령의 얼굴과 함께 “문 대통령님, 이것이 그린 뉴딜에 대한 한국의 생각입니까”라는 문구가 함께 실린 전면광고가 게재됐다. 한국전력공사가 베트남 붕앙 2 석탄발전사업과 인도네시아 자와 9, 10호기 석탄발전사업에 투자를 진행하는 것과 관련해 이를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호주 환경재단 마켓 포시즈 등의 비판광고였다. 이 광고에는 필리핀의 비정부기구(NGO)인 ‘빚과 개발에 대한 아시아 민중운동’(APMDD), 인도네시아법률지원재단(YLBHI) 등 해외 여러 단체들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단체들은 광고에서 “한국 정부가 그린 뉴딜을 약속했음에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석탄 사업에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면서 “문 대통령이 ‘환경 악당’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한전의 해외 투자와 관련, 일각에서는 일부 사업에 대해 KDI의 예비타당성조사 결과를 근거로 수익성이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한전은 계층화분석법(AHP)상 종합평점 등을 근거로 사업 추진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고창, 국가적 차원서 성지화 작업 필요”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고창, 국가적 차원서 성지화 작업 필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고창 성지화 작업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해 왜곡된 역사의 면모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유기상 전북 고창군수는 11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무장봉기(무장기포)가 제7차 교육과정 한국사 교과서에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으로 수록돼 역사적 사실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무장은 고창의 옛 지명이고 기포는 동학의 조직인 포(교구 또는 집회소)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이다. “고창 동학농민혁명사 재조명 과업의 첫 번째 사명인 무장봉기 역사교과서 수록이 126년 만에 이뤄져 그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자긍심 찾기 노력이 이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는 “고창 동학농민혁명 성지화, 무장기포지·전봉준 장군 생가터 국가사적 등재, 동학농민혁명 역사벨트 조성을 적극 추진하겠다”면서 “동학선양사업을 의향정신을 살린 자랑스러운 군민운동으로 승화시키겠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유 군수와의 일문일답.-‘고창 무장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는 내용이 새 학기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에 모두 수록됐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1894년 3월 20일 고창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라는 사실이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정설이었다. 한국사 교과서 수록으로 동학 전문연구자와 고창군민 등 소수만 알던 역사적 사실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이로써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빚어졌던 동학농민혁명 시발지 논란은 정리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달 25일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에서 선열들에게 교과서를 봉정하는 행사를 가졌다.” ●‘보국안민’ 혁명의 목표 최초로 제시 -고창 무장봉기가 동학농민혁명에 미친 영향은. “조선 후기에는 지역적 한계를 넘지 못한 수많은 민란이 있었다. 무장봉기는 혁명의 이념이자 지표인 ‘무장포고문’과 농민군 행동강령인 ‘4대 강령’을 정립 발표함으로써 농민혁명의 틀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보국안민’이라는 혁명의 목표가 최초로 제시됐고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으로 커졌으며 봉건제도 개혁의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민족·민중항쟁의 근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창 무장봉기를 부각시키기 위한 과정과 지자체의 노력은. “자주와 평등의 위대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고창군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학술·연구·문화사업을 하고 있다. 동학기념사업회, 동학유족회 등 지역 단체와 울력해 매년 학술대회를 열고 무장기포기념제·무장읍성축제를 개최한다. 기념제와 축제는 ‘동학농민혁명은 무장기포지로부터, 3월 20일의 함성은 전국적인 봉기로’라는 주제로 개최된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과 무장기포일의 참다운 의미를 널리 알리는 한편 전국적인 축제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기념제에서는 동학농민혁명군들이 읽어 내려갔던 무장포고문을 낭독하고 농민군이 걸었던 진격로 걷기 체험행사를 한다. 축제 기간에는 무장현 관아·읍성 무혈입성 재현 등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전북 정읍시가 동학의 시발점은 무장봉기가 아니라 ‘고부봉기’라며 역사왜곡 바로잡기에 나서기로 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이제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을 넘어 한국사에 빛나는, 세계 속의 혁명으로 재평가돼야 한다. 지역주의가 발목을 잡는 것은 선열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한국사 역사교과서에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농민운동’으로 기술했다. “동학농민혁명의 대의와 의미, 가치를 생각할 때 교과서에도 운동이 아닌 혁명이라고 기술해야 한다. ‘실패한 혁명’이라는 일부의 평가절하를 극복하고 혁명을 운동으로 표기한 현행 교과서를 개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대접주 손화중의 근거지… 혁명 기반으로 -고창에서 대규모 농민봉기가 발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조선 말기 고창에는 판소리 사설로 사회적 모순과 봉건제도 타파를 꿈꾸는 민중들의 사상적 깨우침이 깔렸었다. 특히 고창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가장 강력하고 중심적인 활동을 했던 전봉준의 태생지이자 대접주 손화중의 근거지였다. 전봉준이 고창 출신이었기에 협력기반이 두텁고 호남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손화중포의 인적·물적 동원능력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도소(도접주들의 총집회 기관) 거소에는 주물공장, 대장간, 마방 등이 있고 보부상을 비롯한 장꾼들이 드나들며 정보 공유 및 조직이 활성화돼 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무장봉기가 일어난 공음면 구수마을의 넓은 충적지는 수천의 동학군들이 집결해 훈련하기 쉬운 지형이었고 석교 세창과 장터 포구는 군수품과 군량미 조달이 쉬운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 -고창군과 동학농민군을 이끈 전봉준과의 관계는. “고창이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간 정읍 고부, 정읍 태인, 전주 등 여러 설이 분분했지만 많은 연구자가 전봉준의 출생지가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임을 밝혀냈다. 현재 생가터를 사적으로 지정하고 전봉준 장군 동상을 세우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단체장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의의와 평가는. “동학농민혁명은 아래로부터 민중혁명이라는 측면에서 1만년 민족사의 가장 빛나는 한 장면이다. 제대로 조명되면 세계 4대 혁명의 맨 앞자리에 평가될 역사다. 동학농민혁명은 자주와 평등, 민주적 절차를 확립하고자 했던 근대 민중운동의 효시로 참여자와 유족, 기념사업, 발상지 고창군의 상징성 등이 높이 평가돼야 하나 일제와 군사정권 등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고 평가절하됐다. 126년이 지난 이제라도 동학농민혁명 고창 성지화 작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원활하게 진행돼 자주적인 우리 역사의 흐름을 계속 이어 가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며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당당하게 지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창은 의향… 청소년 역사교육의 장 활용 -동학농민혁명이 고창군의 정체성에 미친 영향은. “고창은 의향이다. 정의로운 고창군민들은 불의를 보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서 항일의병 운동, 독립구국운동, 최근의 촛불시위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에 고창·무장·흥덕 의병이 모두 참여했다. 임진·정유 왜란 때도 고창 흥덕 남당회맹단 등의 의병이 일어났다. 고창 성내 출신 근촌 백관수 선생은 당시 서른의 나이로 일본 유학생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거사를 주도했다. 그 독립선언서의 초안이 국내로 전달돼 3·1운동을 촉발시켰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국가유공자도 90여명으로 전북에서 가장 많다.”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 과제는. “고창 동학농민혁명 성지화, 무장기포지·전봉준 장군 생가터 국가사적 등재, 동학농민혁명 역사벨트 조성을 적극 추진하겠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과 국가기념일을 제정하고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아쉽다.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을 세계 혁명사의 한 축으로 알리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동학농민혁명을 지역발전과 연계 방안은. “전봉준 생가와 무장기포지를 역사문화유적지로 가꿔 청소년들의 역사교육과 체험의 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과 선운사, 고창읍성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해 관광벨트로 육성하겠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민초를 상징하는 녹두, 추운 겨울을 이겨 낸 청보리를 주제로 한 음식 등 동학농민혁명 콘텐츠를 개발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겠다.” 고창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美원폭에 日 항복했지만… 광복 직전 ‘독립작전’은 이미 시작됐다

    美원폭에 日 항복했지만… 광복 직전 ‘독립작전’은 이미 시작됐다

    “일본은 오늘 정오를 기해 미국에 항복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1901~1989)가 떨리는 목소리로 종전을 선언했다. 광복을 기뻐하는 국민의 만세 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중국군으로부터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들은 김구(1876~1949)는 크게 낙담했다. 그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본의 항복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일본 항복 받아낸 미국의 ‘리틀보이’ 이날 히로히토가 발표한 종전 방송은 “짐은 제국정부(일본)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해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하게 했다”로 시작한다. 히로히토가 말한 ‘공동선언’이란 1945년 7월 26일 발표한 독일 포츠담 선언을 가리킨다. 연합군이 일본에 항복을 권고한 이 선언에는 전후 일본 처리 문제 등이 담겼다.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이미 연합군에 항복했다. 포츠담 선언 당시 일본은 혼자서 연합군과 싸우고 있었다. 사실상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미국은 일본 도심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코드명 ‘리틀보이’가, 9일 나가사키에 ‘팻맨’이 투하됐다. 10일 일본은 스위스에 있던 국제연맹(유엔의 전신) 본부에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전달했다. 일본이 항복한 직접적 이유는 원자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히로히토가 발표한 종전 방송에도 “적국은 잔학한 원자폭탄을 사용해 수많은 국민들을 살상하고 있다. 그 참상의 범위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는 “더이상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하고 인류의 문명까지 파멸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짐작할 만한 구절이다. 민중운동가 함석헌(1901~1989)은 원자폭탄 투하 뒤 찾아온 광복에 대해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했다. 그만큼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뉴라이트’ 계열의 일부 학자는 “우리의 광복은 미국의 원자탄 두 발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미국의 폭탄이 없었다면 나라를 되찾지 못했을까. ●독립단체 “광복 위한 결정적 시기 온다” 확신 1930년대 후반부터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은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하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이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상대로 국외 무장운동 세력과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격하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폭동과 무장봉기에 나서면 충분히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1908~ 1932)의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뒤 중국 각지를 떠돌다가 1940년 충칭에 터를 잡았다. 김구는 이때부터 한국광복군을 훈련시키며 국내에 진입할 준비를 했다. 광복군은 지청천(1888~1957)을 총사령관으로 1940년 9월 결성된 임정 최초의 정규군이다. 초기에는 장교 30여명으로 이뤄진 ‘사병 없는 부대’였다. 1942년 김원봉(1898~1958)이 조선의용대 300여명을 이끌고 합류한 것이 큰 힘이 됐다. 광복군은 1945년 4월쯤 340여명, 같은 해 8월 700여명 정도였다. 아무리 많아도 1000명을 넘지는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은 군속을 포함해 최대 750만명으로 추산된다. 임정이 일대일로 맞붙어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일부 언론에서 “원자탄이 없었어도 김원봉 등 걸출한 혁명가들이 일본을 몰아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우리의 역량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 연구위원은 “광복군의 규모와 전투 능력을 아무리 높게 쳐도 일본을 몰아내기는 어려웠다. 광복군은 그저 항일투쟁의 상징적 존재였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일본군 750만… “광복군이 몰아내긴 힘들어” 그렇다고 임정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체념에만 빠져 있었을까. 아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해 우리 스스로 독립을 얻어내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4년에는 버마(현 미얀마) 임팔전투에 참가해 1945년 7월 일본군이 패배해 철수할 때까지 영국군을 도왔다. 1945년 8월 중국에 있던 미국 정보기구 육군정보전략본부(OSS)에서 광복군 38명이 특수요원 훈련을 마치고 국내 잠입을 기다렸다.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도 추진했다. 역사소설 전문 이원규(72) 작가는 “일본이 일주일만 늦게 항복해 광복군이 한반도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두고 국제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장제스(1887~1975) 중국 국민당정부 총통은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했다. 김구 등 임정 수뇌부의 간절한 청원을 받아들인 것이다. 애초 한국은 카이로 회담의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우리를 도왔다. 독립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염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장 연구위원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일본은 소련의 참전 등으로 결국은 패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당시 한반도는 (임정의 다각적 노력 등이 맞물려) 광복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연합국 덕에 해방? 독립노력 폄하해선 안돼” 일부 학자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길 힘이 없었고 국제사회도 임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 세계로 세를 넓혀 가던 강대국 일본을 우리 혼자 막지 못했다고 해서 독립을 위한 선조들의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이 항복한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다. 대한민국은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세력의 길고 긴 투쟁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복 이후 우리를 기다린 것은 ‘한반도 분단’이었다. 당시 소련은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한 뒤 거침없이 한반도로 진격했다. 당시 미군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어 한반도로 바로 들어오기 어려웠다. 결국 미국은 소련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에 나눠 들어오자”고 제안했다. 당시 임시로 친 철조망이 지금까지도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놨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우리가 좀더 주도적으로 독립을 얻어냈다면 해방 이후 한반도 분단과 전쟁, 이념 갈등 등은 없었을 수도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민주화 운동의 대부’ 문동환 목사 별세

    ‘민주화 운동의 대부’ 문동환 목사 별세

    문동환 목사가 지난 9일 오후 별세했다. 98세. 정치권 관계자는 10일 “어제 문 목사 측으로부터 비보가 날아들었다”며 연합뉴스를 통해 고인의 타계를 추모했다. 문 목사는 일제강점기이던 1921년 5월 5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독립신문 기자로 일했던 부친 문재린 목사와 여성운동가였던 김신묵 여사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이 늦봄 문익환 목사다. 고인은 독립운동과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였던 명동촌에서 형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 등과 함께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에 뜻을 뒀다. 특히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김약연 목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김약연 목사는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목사였다. 고인은 일본에 유학해 도쿄신학교와 일본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에 회의가 생겨 7년간 씨름했다고 한다. 그러다 형 문익환과 여행 중 경상도 금오산을 지나면서 너무도 함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을 보고서 ‘고난받은 민초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는 게 구원’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고인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1년 미국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았고, 1961년 모교인 한신대 교수로 초빙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유학중 만난 평생의 반려자인 미국인 부인 페이문(문혜림)과 함께였다. 고인은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부조리함을 교육 현장에서 설파했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투옥돼 2년 가까이 복역했다. 석방된 후에는 민중운동에 깊이 참여했고 동일방직 및 와이에이치(YH) 노조원의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되기도 했다. 1986년 한신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후 재야에서 민주화 활동을 하던 중,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민주화운동을 했던 젊은 청년 활동가들을 이끌고 평화민주당에 입당, 평민연(평화민주통일연구회)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88년에는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를 지냈고, 국회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창근·태근, 딸 영혜·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씨 등이 있다. 문성근(영화배우)씨가 조카다. 빈소는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일 오전 8시. 장례예배 오전 9시 한신대 채플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이다. 연락처는 (02)2227-7500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색다른 인터뷰] “3·1독립선언, 현대적 관점서도 탁월한 동아시아 평화선언문”

    [색다른 인터뷰] “3·1독립선언, 현대적 관점서도 탁월한 동아시아 평화선언문”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과 일본은 과거보다 더 높고 두터운 장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성난 얼굴로 응시하고 있다. ‘피해’와 ‘가해’라는 역사의 대척점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방향과 관점이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두 나라 사이의 어두운 과거를 정리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추구한다는 당위론적 명제는 갈등과 대립 속에 좀체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일 연구에 오랜 시간 천착해 온 도노무라 마사루(53) 도쿄대 교수(한국학연구센터장)를 지난 24일 도쿄 메구로구 고마바 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나 100년 전 한국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의미와 발전적인 양국 관계를 위한 제언을 들어 봤다. 도노무라 교수는 지난해 국내 번역된 책 ‘조선인 강제연행’을 비롯해 활발한 저술활동을 펴고 있다.→오랫동안 일제강점기 한반도 연구를 해 오셨는데, 3·1 독립운동의 의미를 요약한다면. -3·1 독립선언은 현대적 관점에서 봐도 탁월한 내용이 담긴 동아시아 평화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를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동양의 전통이 아닌데도,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누르며 그 평화적 전통을 깨고 있음을 지적했다. 일본의 지배하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독립을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3·1 독립선언서를 제대로 읽어 본 일본인은 거의 없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3·1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이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특히 강조했는데. -독립선언서는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독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인들 스스로 자립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이었다. 관련해서 일본이 한국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일본의 통치로 조선이 발전하고 있다는 일본 측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당시 일본은 철도와 도로가 놓이고 근대적인 학교와 병원이 세워지고, 농업생산이 늘었음을 통계적으로 보이며 조선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는 그것이 조선인이 추구하는 행복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임을 강조했다. →당시 3·1 독립운동을 보는 일본 내 분위기는 어땠나. -일본 언론에서는 ‘천도교라는 미신을 믿는 불온한 사람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한국의 대중을 선동해 만세를 외친 사건’ 정도로 보도했다. 일본은 “천황(일왕) 아래에서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평등하다”고 선전했지만, 그렇다면 왜 조선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3·1 운동은 일본에서 어떻게 기억돼 왔나. -식민통치 기간 중에도 3·1 운동을 기념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당국의 거센 탄압 속에서도 지속됐다. 특히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을 계급투쟁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3월 1일을 전후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전단지 배포나 집회 개최 등을 시도했다. 일본 경찰들은 이것이 또 다른 민중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경계했고,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이에 대한 탄압이 한층 강화돼 거의 대부분 공공장소에서 3·1 운동을 기념하는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에는 어땠는가. -전쟁이 끝나면서 3·1 운동을 기념하는 움직임이 되살아났다. 1947~48년 신문을 보면 재일 조선인들이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 진보진영에는 3·1 운동을 세계혁명을 위한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전후로 과거 한국 식민지배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된 일본인이 늘면서 3·1 운동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일본사회의 분위기는 어땠나. -일본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대다수 일본인들은 타국에 대한 식민지배에 찬성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을 소중히 여기고 국민들의 생활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1894년 청·일 전쟁 이후 제국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1930년대 이후가 되면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침략전쟁을 적극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침략에 대해 반대했던 사람들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국을 침략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이 아니며, 소국주의와 평화주의를 견지해야 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식민지배에 반대한 정치인과 언론인도 있었다. 물론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자기 주장을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라는 한계는 있었다. 패전 후 조선에 대한 불평등한 지배 관계를 깨닫고 이를 반성하며 속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 일본인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식민자(植民者) 2세’로 불리는 한반도 출생자로 유명 소설가였던 가지야마 도시유키는 ‘이조잔영’과 같이 식민시대 조선의 아픔을 그린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일본에서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분위기가 이전보다 약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과거 ‘무라야마 담화’가 나오던 때는 물론이고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총리 등 시절만 해도 과거사와 관련해 반성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민당 소장파가 세력을 얻은 후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역사수정주의 책들이 많이 나온 가운데, 1990년대 말 이후 보수우파의 현실참여 활동이 부쩍 늘어난 것 등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일 관계 악화의 주된 이슈는 일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한국 법원의 배상 판결이다. 강제동원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나. -‘징용’이라는 말은 오해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전시노무동원피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조선인 노무동원의 피해는 매우 광범위하다. 직접 노동을 했던 당사자만이 아니다. 동원됐던 사람의 가족들, 강제동원을 피해 산골에 은신하느라 인간답게 못 살았던 사람들도 모두 피해자다. 특히 미쓰비시니 신일철이니 장소와 시기를 기억하고 있는 피해자들은 재판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인 경우다. 당시 조선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해 일본어는 물론이고 한글조차 못 배운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렇다 보니 자신이 홋카이도에 있었는지, 규슈에 있었는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강제노동을 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가장 큰 피해자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재판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피해까지 다 고려해 구제하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한·일 관계 미래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일본에는 정치인이나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국의 3·1 운동 100주년 기념을 통해 일본에 대한 반감과 반일 행동이 강화될 것으로 우려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3·1 운동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응원하고 한국인들 스스로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벌인 독립운동이라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중년 이후 세대에게 한국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지배했던 나라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한국은 경제적으로 잘사는 민주주의 국가로서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미래 한·일 관계에 희망을 주는 부분이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도노무라 교수는 누구 1966년 일본 홋카이도 출생. 와세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와세다대 사회과학연구소,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등을 거쳐 2007년부터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일본근대사.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2010년 국내번역), ‘식민지 시기에 있어서 재일조선인의 문화활동’ 등이 있다.
  • [색다른 인터뷰] “文정부 개혁, 돌아올 수 없는 쪽으로 ‘7부 능선’ 넘은 듯”

    [색다른 인터뷰] “文정부 개혁, 돌아올 수 없는 쪽으로 ‘7부 능선’ 넘은 듯”

    지난 14일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회계 부정 의혹을 ‘고의적 분식회계’로 결론 내리자 일각에서는 “역시 참여연대 정권”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박근혜 정부 당시 참여연대가 처음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삼성의 손을 들어줬던 금융당국이 정권이 바뀌자 결정을 번복했기 때문이다. 의혹을 부실하게 심사했던 2년 전 금융당국 관료들을 비판하는 게 논리적으로 타당한데도, 끈질기게 의혹을 파헤친 참여연대와 현 정부의 커넥션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재인 정부가 참여연대를 곱게 보는 것도 아니다. 참여연대 출신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재벌 개혁과 관련해) 진보진영의 조급증과 경직성이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참여연대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박정은 사무처장은 이런 ‘낀’ 상황에 대해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에겐 정치적 오해보다 지체되고 있는 개혁과 약화하는 시민운동의 동력이 더 큰 걱정이었다.→‘참여연대 정권’이란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보수세력이 현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참여연대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모르는 분들은 문재인 정부 들어 참여연대가 정부 보조금을 많이 받는다고 얘기하지만, 우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부에서 보조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100m 앞에서 맨 처음 집회를 한 단체가 우리다. 참여연대가 박근혜 정부 때 앞장서서 청와대 앞 100m 집회를 가능하게 했고 서울광장 집회 허가제를 폐지시켰는데, 지금 그 과실을 보수단체가 가장 많이 누리는 것 아닌가. →참여연대 출신들이 현 정부에 많이 들어간 것은 사실 아닌가. -참여연대가 설립된 1990년대 초는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분화하던 시기였다. 시민단체들이 더 많은 전문가들을 각종 내부 위원회 명단에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참여연대에 이름을 올렸던 수많은 전문가들 중 일부가 문재인 정부에 들어갔다고 ‘청와대 위에 참여연대가 있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김상조 위원장과 조국 민정수석이 참여연대에서 활동한 지 10년이 넘었다. 지금 참여연대 안에서 그분들과 함께 활동한 간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분들은 참여연대 경험이 없었더라도 현 정부에 참여했을 것이다. 기득권을 누리던 많은 검사와 판사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는데 시민단체 출신은 정치를 하면 안 되는가. 어떤 정치를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김상조 위원장의 진보진영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시민단체에서 활동할 때와 정부 부처 책임자로서 활동할 때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이 바뀐 이유까지 이해해줄 필요는 없다. 다만 김 위원장은 공정위가 지금까지 재벌개혁에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 공정위 간부들의 사기업 재취업 등 내부 비리에 얼마나 단호했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조급증과 경직성을 말할 때가 아니다. →참여연대 산파역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있어 든든하지 않나. -박 시장이 사무처장일 때와 똑같이 참여연대는 회비만으로 운영된다. 기업 후원금을 일절 받지 않고, 후원금을 무작위로 모금하지도 않는다. 정부 및 국회와 토론회를 해도 비용은 반드시 절반씩 부담한다. 오해를 살까 봐 서울시와는 토론회도 하지 않는다. 박원순이 서울시장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우리 스스로 엄격하게 검열하고 경계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 지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많은 적폐청산이 얘기됐지만, 얼마만큼 이뤄졌는지에 대한 평가는 회의적이다. 사법체계를 농단한 판사들, 국정을 농단한 관료들은 그대로다. 개혁의 대상이었던 검찰은 어느새 개혁의 주체가 됐다. 국정원과 기무사 개혁은 흐지부지됐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부는 삼성에 기대려 하고 있다. 돌아올 수 없는 쪽으로 ‘7부 능선’쯤 넘어간 것 같아 안타깝다. →어떤 이슈에 집중할 계획인가. -선거법 개정을 통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특별재판부 도입을 통한 사법농단 진상규명과 공직자비리수사처 설립 등 사법개혁, 보유세 강화 등이 당면 과제다. 많은 개혁 의제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개혁의 ‘병목’이 된 국회가 가장 큰 문제다. →여전히 거대 담론에만 매달리는 것 아닌가. -고민스러운 지점이다. 성평등, 이주민, 환경, 청년, 안전, 주거 등 다양한 이슈가 시시각각 분출하고 있지만 기존 시민운동은 이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참여연대 역시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개혁이 뒷걸음질치는 걸 저지하는 데 힘을 쏟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민을 조직해 저항하는 방식의 시민운동이 계속될 수 있을까. -나 역시 ‘기승전-집회’ 방식의 운동에 회의적이다. 요즘 사회적인 이슈에 목소리를 내는 청년들은 과거의 ‘권’(운동권)을 체질적으로 싫어하고 단체에 소속되기도 꺼린다. 구호와 투쟁가도 거부한다. 청년유니온처럼 새로운 단체가 떠오르는 듯했으나 지금은 시들해졌다. 기존 운동이 시민들의 새로운 요구와 특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시민들은 개인화하고 흩어졌다. 시민운동의 역할이 좁아지니 정부와 지자체가 시민 어젠다를 주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존 운동의 한계는 명확해졌는데 새로운 운동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참여연대가 생긴 지 벌써 24년이 됐다. 진보정권이 들어서면서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나. -참여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에서도 회원은 크게 늘지 않는다. ‘참여연대는 그나마 살만 한 것 아닌가’ 하는 인식 때문에 회비 내는 회원을 늘리기도 어렵다. 지금 상근자가 57명이고, 회계사 변호사 등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전문가 실행위원들이 200명이 넘는다. 한 달 살림에 1억 7000만원 정도가 들어가는데, 적자다. 퇴직금 지급용으로 쌓아뒀던 잉여금을 조금씩 헐어 버티고 있다. 몇 년 뒤면 정년퇴직하는 상근자도 나온다. 창립할 때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조직 운영의 난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창구 사회부장 window2@seoul.co.kr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박정은 사무처장은 누구 지난 2월 제7대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선출된 박정은씨는 참여연대 역사상 첫 여성 단독 사무처장이다. 대학원에서 노동정치를 전공한 그는 참여연대에 재직하던 선배의 권유로 2000년 처음 참여연대에 몸담았다. 참여연대 부설기관인 참여사회연구소 활동을 시작으로 정책실을 거쳐 평화군축센터 팀장을 지냈다. 2014년부터는 안진걸 박근용씨와 함께 협동사무처장을 역임했다. 평화군축센터에서 오래 활동하며 이라크 파병, 평택미군기지 확장 등의 문제를 두고 정부와 싸웠고 북핵 문제, 방위비 분담금, 북한 인권 등과 관련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 “새마을운동은 유신 잔재일 뿐? 본질인 ‘생명운동’ 발전시킬 것”

    “새마을운동은 유신 잔재일 뿐? 본질인 ‘생명운동’ 발전시킬 것”

    “어떤 사람들은 ‘새마을운동’을 유신 독재의 잔재로 여겨 그 중요성을 애써 무시합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봉사단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요. 국민 대부분이 새마을운동의 참뜻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안타깝네요. 이 운동의 본질은 자신의 돈과 시간을 직접 투자해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시대정신’이라는 거창한 용어까지 꺼낼 필요도 없어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 자율적으로 실천 목표를 정한 뒤 꾸준히 활동하면 올바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죠.”정성헌(72) 제24대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은 23일 경기 성남시 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새마을운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정 회장은 “흔히 새마을운동 하면 주로 빈곤 퇴치사업을 떠올리는데 이는 1970~80년대 국민적 염원과 정부정책 모두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데 공감대를 이뤄 그쪽에만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라면서 “이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 전체를 놓고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올해 2월 시민사회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대표적인 관변 단체로 꼽히던 새마을운동중앙회 수장에 농민운동가 출신 정 회장이 뽑혔기 때문이다. 춘천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그는 1977년 한국카톨릭농민회 사무국장을 맡으며 농민 운동에 나섰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상임집행위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해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기도 한다. 새마을운동중앙회 내부에서는 그가 기존 이미지를 깨고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를 위해 정 회장은 ‘근면·자조·협동’으로 상징되는 새마을운동의 3가지 모토도 ‘생명·평화·공경’으로 발전시켰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중앙회 중심의 하달식 지휘방식이 21세기에는 잘 먹히지 않는다. 개별 단위 조직의 협치가 중요하다. 새마을운동 역시 분권으로 가야 한다”면서 “중앙회장이 되고 나서 회원 3000여명을 만나 새마을운동의 새로운 가치가 무엇이 돼야 할지 끊임없이 물었다. 이 과정을 통해 압축한 가치가 바로 생명·평화·공경”이라고 소개했다. 정 회장은 앞으로 새마을운동이 지구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매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만 봐도 올해 1월 혹한에 이어 4월 봄 추위, 7~8월 폭염 등을 겪었다. 지구온난화의 피해가 나타나기 시작된 것”이라면서 “이 상태로 가면 한반도 역시 2040년 정도면 기후이탈이 올 것이다. 사람이 살 수는 있겠지만 여름이 매우 길게 이어지는 등 기후 환경이 나빠져 노약자 등이 견디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생명운동의 여러 대안 가운데 하나로 ‘유기농·태양광 연계사업’을 추진 중이다. 유기농 밭이나 비닐하우스 위에 햇빛이 골고루 투과되도록 특수 설계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농산물 수확과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 회장은 “이 사업이 널리 퍼지면 농민들은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면서 동시에 전력 판매로 추가 소득을 얻는다. 멀쩡한 산을 깎아 태양광 발전소를 세우는 비극도 막을 수 있다”면서 “농약을 쓰지 않아 환경 파괴를 막고 온실가스 배출도 줄이며 농가 소득도 늘릴 수 있어 미래 농촌마을의 대안 사례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끝으로 그는 우리 사회에 ‘공경’의 가치가 확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미투’운동을 필두로 각계에서 인권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결국 고소·고발을 통한 법정 싸움으로 귀결되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인권을 제대로 보장하려면 그보다 한 단계 위 차원의 개념인 공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친노·친문 좌장 이해찬 민주당 대표 선출 “5당 대표 회담 개최하자”

    친노·친문 좌장 이해찬 민주당 대표 선출 “5당 대표 회담 개최하자”

     더불어민주당을 2년간 이끌 신임 당대표에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 좌장 이해찬(66) 의원이 25일 선출됐다. 이변은 없었다. 전당대회 기간 내내 앞서 있던 이 의원을 경쟁자인 김진표(71) 후보는 ‘경제 당대표’, 송영길(55) 후보는 ‘세대교체’를 각각 강조하며 추격했지만, 판세를 뒤집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민주당은 이날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전국대의원대회를 열어 당대표 및 최고위원을 선출한 결과 이 의원이 42.88%의 득표율로 당대표에 당선됐다. 송 후보는 30.73%, 김 후보는 26.39%에 그쳤다.  최고위원 후보로는 김해영·박주민·설훈·박광온·황명선·박정·남인순·유승희(기호순) 후보 8명이 나섰다. 박주민(득표율 21.28%)·박광온(16.67%)·설훈(16.28%)·김해영(12.28%)·남인순(8.42%) 후보 모두 5명이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득표율은 박정 후보가 9.30%로 남 후보를 앞섰지만 5위 안에 여성 후보가 들어가지 못하면 가장 많은 득표를 한 여성 후보를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기로 한 규정에 따라 남 후보가 최고위원이 됐다.  친노·친문 좌장 이 대표의 당선으로 친문이 당권을 차지하게 됐다. 차기 지도부는 대의원 투표 45%, 권리당원 ARS 투표 40%, 국민여론조사 10%, 일반당원 여론조사 5%의 비율로 이뤄졌다. 조직력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의원 투표와 달리 권리당원은 자발적으로 가입한 이들이 많아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왔다. 특히 권리당원의 상당수는 문 대통령이 당대표이던 시절 가입한 문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많아 문심(文心)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권리당원의 선택은 이 대표였다. 이 대표의 권리당원 득표율은 45.79%로 총 득표율(42.88%)을 앞섰다. 송 후보는 28.67%, 김 후보는 25.54%였다. 이 대표는 수락 연설문에서 “제일 먼저 민생경제 안정에 집중하겠다”며 “전국을 돌며 약속한 대로 ‘민생경제연석회의’부터 가동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을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당을 만들겠다”며 “더 좋은 일자리를 위해 기업과 노동자, 정부, 시민사회와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는 유능한 정당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을 도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공정경제가 조화를 이루는 포용적 복지국가를 만들어가겠다”며 “이를 위해 당·정·청 협의를 더 긴밀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장관, 국무총리, 당대표에 이르기까지 이 대표의 이력은 화려하다.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출판사 돌베개 대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 등을 지내며 시민사회권에서 활동했다.  이 대표는 1988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치권에 입성했다. 이후 20대까지 18대 국회를 제외하고 7선을 지냈다. 이 대표는 이번 전당대회 내내 21대 총선에 불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대표의 강점은 누구보다 국정운영 경험이 탄탄하다는 데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교육부 장관을 맡아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며 ‘이해찬 세대’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노무현 정부 때는 국무총리가 되어 ‘실세총리’로 이름을 날렸다.  전당대회 기간 ‘강한 리더십’을 강조해왔던 이 대표의 선출로 앞으로 민주당이 보이지 않았다고 평가된 당·청 관계에서 당에 좀 더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 대표는 전당대회 기간 기자간담회에서 “문재인 정부와 당·정·청 협의를 원활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며 “저보다 경험 많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자신감을 보였다.  다만 야당과의 협치는 쉽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전당대회 기간 야당과의 협치에 대해 “남북 간 교류 협력을 위한 판문점 선언 비준을 안 해주겠다고 하는 분들과 어떻게 협치를 하나”라며 “민족사적 관점에서 봐야 하며 당장 눈앞 이해관계에 휘둘려선 안 된다”고 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이날 여당의 당대표가 된 만큼 ‘최고 수준의 협치를 추진하겠다’며 야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 대표는 “야당 대표님들께 제안 드린다”며 “주제와 형식에 상관없이 5당 대표 회담을 조속히 개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시급한 민생 현안은 여야 합의로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뜻을 따르는 민생국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택시운전사’ 김사복씨 아들 “아들 된 도리…감격스럽다”

    ‘택시운전사’ 김사복씨 아들 “아들 된 도리…감격스럽다”

    영화 ‘택시운전사’ 실제 인물인 김사복씨가 밝혀진 가운데 김사복씨의 아들 승필(59)씨가 “아들 된 도리를 하게 돼 기쁘다”는 소감을 전했다.김승필씨는 6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언젠간 진실이 밝혀질 줄 알았다”며 “진실이 밝혀져서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승필씨는 지난 8월 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영화 속 ‘김사복’의 실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뚜렷한 증거를 내놓지 못했고 이에 사람들은 “사실이면 좋겠다”면서도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승필씨는 전날 아버지 김사복씨가 위르겐 힌츠페터가 함께 찍은 사진을 언론에 공개했다. ‘택시운전사’ 제작사는 이날 독일에 있는 힌츠페터의 부인을 통해 사진 속 인물이 힌츠페터가 맞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승필씨는 “그동안 아버님의 유품 속에서 사진을 다 찾았는데, 힌츠페터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은 찾을 수가 없었다”면서 “아내가 따로 정리해둔 아버님 앨범을 일반 책으로 착각하고, 그동안 열어보지 못한 탓”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다 아내가 그 앨범을 떠올리면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승필씨에 따르면 김사복씨는 팔레스 호텔에서 2대의 호텔 택시를 운영하면서 외신기자들을 주로 상대했다. 승필씨는 “아버님이 외신기자들의 스케줄을 일주일, 혹은 보름치를 미리 받았다. 그래서 그 스케줄 전에 당시 이슈들을 미리 점검하고, 외신기자들에게 당시 시국에 대해 브리핑을 해줬을 정도”라며 “아버님은 단순히 운전사가 아니라 가이드, 평론가 역할까지 하셨던 분”이라고 강조했다. 승필씨는 이번에 공개된 사진이 1980년 5월 광주로 가기 전에 힌츠페터가 민중운동가 함석헌 선생을 인터뷰할 때 동행해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김사복씨는 암 투병을 하다 1984년 53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승필씨는 “아버님은 인품이 좋으셔서 가족들에게 근심거리를 던져주는 경우가 거의 없으셨다. 그러나 5·18 광주에 다녀오신 뒤에는 가족들에게도 울분을 토하셨다”면서 “당시 22살이던 저에게도 광주에서 벌어진 잔혹한 일들을 설명하시면서 같은 민족끼리 어떻게 서로 죽일 수 있느냐고 했다. 당시 간 경화를 앓았던 아버님은 광주에서 잔혹사를 직접 목격하신 뒤 술을 다시 드시기 시작했고, 결국 건강이 나빠지셨다”고 설명했다. 승필씨는 아버지가 힌츠페터 추모비가 마련된 망월동 5·18 옛 묘역에 안장되길 바라고 있다. 승필씨는 “아버님은 당시 광주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광주로 가셨다. 아버지의 소신이 담긴 것”이라며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 단발성으로 끝나기보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옛 묘역에 안장되길 바라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서연 기자 wk@seoul.co.kr
  • [단독] 택시운전사 보며 운 구청장 민주화 인사 출신의 구청장 또 어디 없나요, 이런 구청장

    [단독] 택시운전사 보며 운 구청장 민주화 인사 출신의 구청장 또 어디 없나요, 이런 구청장

    “이제 민주화가 이뤄진 만큼 한몸 바스러질 때까지 봉사” “1980년 5월 28일 오전 9시 부마사태 주동 관련자 수배령이 내려져 8개월 가까이 피신했던 나는 서울 아현동 친구 집에서 수사관 3명에게 붙잡혔다.”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그린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한 뒤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친 수배와 도망, 구속과 구타 등을 생생하게 기록한 블로그 글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1979년 10·17 부마항쟁 당시 동아대 시위를 주도했던 유 구청장은 수배령을 받고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이듬해 발발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계엄이 확대되면서 검거돼 모진 고문을 당한 민주화 인사 출신이다. 그는 지난 15일 블로그에서 “영화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리는 내용이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다시 보니 그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운을 뗐다. 당시 영장도 없이 구속돼 부산지구 보안대에서 36일간 두들겨 맞았고, 다시 부산 제15헌병대로 이첩돼 한 달여간 삼청교육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수사관들이 ‘너 임마 김대중한테 얼마 받고 데모했어. 사실대로 말하면 살려 주지만 거짓말하면 광주에서처럼 전라도 새끼들은 씨를 말려야 돼’라고 협박했다”고 적었다. 그는 전남 나주 출신이다. 유 구청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시위대를 떠나지 않았다. 당시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김대중을 의장으로 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결성됐고 그는 민추협 선전부장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유 구청장은 블로그에서 “부산·마산 지역에서 5·18항쟁으로 수백명이 보안대 조사를 받았으나 구속된 사람은 대학생 8명과 민간인 20여명으로, 이분들의 운명도 참으로 가혹했다”고 적었다. 이어 “그래도 살아남아 영화도 보고 나는 이렇게 동대문구청장도 하고 있으니 이럴 때 나의 감정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면서 “이제는 민주화가 이뤄진 만큼 한몸 바스러질 때까지 동대문구에 봉사하며 살겠다”고 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6·29 선언, 민중 운동·기득권 유지 합작품”

    “6·29 선언, 민중 운동·기득권 유지 합작품”

    6·29 민주화 선언 30주년을 맞이해 한국정당학회(회장 류재성)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김용직)이 2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6·29 민주화 선언과 한국 민주주의’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6·29 선언과 한국 민주화’를 주제로 진행된 세션에서 한정훈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6·29 선언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민중운동 세력의 결집에 의해 추동됐을 뿐 아니라 체제 지배세력 안에서 직선제 개헌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강신구 아주대 교수는 “6·29 선언을 계기로 최소한 절차적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관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조금은 더 성숙해지고 공고화됐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대통령 권력에 대한 통제의 미비, 제한적 요소가 있는 참여, 언론자유의 환경 등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류재성 한국정당학회장은 모두발언을 통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50대 이상 장년층에겐 가슴 뿌듯한 자부심이지만 그렇게 탄생한 헌법과 정치체제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면서 “1987년 민주화운동과 6·29 선언, 그리고 촛불과 19대 대선으로 이어져 ‘민주주의 만세’를 실행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재벌3세(홍성추 지음, 황금부엉이 펴냄) 재벌 평론가인 저자가 경영권이 3세로 이어지는 전환기에 맞닥트린 ‘재벌 3세’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책. 저자는 미래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재벌 3세들과 우리 경제의 전망에 대한 답을 총 5장으로 나눠 얘기한다. 1장 ‘재벌, 누구인가’를 통해 해방 이후 재벌의 탄생을, 2장 ‘재벌 3세의 과거’에선 창업주와 2세대에 이어 지금의 3세대는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점을 조명했다. 3·4장은 ‘재벌 3세의 현재’와 ‘재벌 3세의 미래’로 그들의 성장 과정과 경영 태도, 앞으로의 길을 예측한다. 5장 ‘우리는 어떻게 지켜봐야 하는가’에서는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어떤 의무와 책임을 부여할지 공론화했다. 284쪽. 1만 5000원. 한국현대 생활문화사(김학재·오제연·김경일·김정한 외 지음, 창비 펴냄) 1950~1980년대 우리 생활문화의 다양한 국면을 10년 단위로 풀어낸 문화사. 4권으로 구성된 책은 정치적 격변기에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 온 부모와 삼촌·이모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음악·스포츠·음식 등 생활문화부터 농업·전쟁·경제·북한·민중운동 등 각 분야 전문가 32명이 필자로 참여했다. 책은 4·19에 참여한 도시 빈민, 유신 시대의 대중문화, 민주화운동 시기 스포츠와 먹거리 변천사 등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넣었다. 북한 생활문화의 주요 변화상도 만날 수 있다. 당대의 생활상을 한눈에 보여 주는 이미지는 덤이다. 292~316쪽. 각권 1만 6500원.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민종덕 지음, 돌베개 펴냄) 전태열 열사의 어머니이자 한국 노동 운동의 대모로 불리는 이소선 여사의 타계 5주기에 맞춰 나온 평전. “제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세요”라던 아들과의 약속을 남은 평생 한결같이 지키며, 고통받고 소외당하는 노동자, 민중과 평생 함께하고 싸워 나갔던 그의 삶을 생전의 구술과 다양한 기록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 형식으로 생생히 그려냈다. 이소선의 삶을 따라가며 읽는 일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읽는 일과도 다르지 않다. 이소선 여사의 행보와 함께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씨실 날실처럼 촘촘히 그려낸 일종의 만인보다. 680쪽. 2만 5000원. 화폐의 종말:지폐 없는 사회(케네스 로고프 지음, 최재형·윤영미 옮김, 다른세상 펴냄) 미국 하버드대 교수인 저자는 소액권 동전만 남기고 지폐를 모두 없애자고 주장한다. 고액권 중심 지폐가 지하로 숨어들어 가면서 생기는 탈세·마약거래 등 각종 불법행위를 근절하자는 취지다. 저자는 고액권 화폐를 폐지하는 조치만으로 탈세를 지금의 10∼15% 수준까지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거시경제 차원에서는 지폐를 폐지하면 자유롭게 금리정책을 펼 수 있게 된다. 경제 활성화를 위한 마이너스 금리의 최대 걸림돌은 종이 화폐다. 사실상 무기명 제로금리 채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폐 탓에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절름발이’였다고 지적한다. 336쪽. 1만 6000원. 괜찮다고 말하면 달라지는 것들(새라 퀴글리·메릴린 시로여 지음, 이지혜 옮김, 갈매나무 펴냄) 이 책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해도 괜찮다고 위로하며 어깨를 토닥여 준다. 그리고 우리가 불안과 걱정, 두려움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내면의 평온함을 유지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조언한다. ‘1부: 남보다 조금 더 예민한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불안과 두려움을 마주하는 방법에 대해, ‘2부: 비관주의와 제대로 이별하는 방식’에서는 불편한 감정의 정체를 온전히 느끼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3부: 괜찮다고 말하면 달라지는 것들’에서는 두려움을 어떻게 용기, 희망 혹은 삶의 활력들로 바꿀 수 있을지 조언한다. 237쪽. 1만 3000원.
  • [열린세상] 병신년의 노래/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열린세상] 병신년의 노래/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지금으로부터 두 갑자, 즉 120여년 전인 1896년도 올해처럼 병신년이었다. 그 두 해 전인 갑오년(1894)에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다. 이때 “가보세 가보세/을미적 을미적/병신 되면 못 가리”라는 동요가 유행했다. ‘가보’란 갑오년을 뜻하고, ‘을미’는 이듬해인 을미년(1895), ‘병신’은 병신년을 뜻한다. 이 노래에 대해서 당시의 자료인 ‘동학농민란’(甲午東學亂)은 “동학란이 갑오년에 성공을 해야지 만일 갑오년이 지나고 을미년, 병신년에 다다르면 실패한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갑오년에 구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지 을미적대다가 병신년까지 가면 실패한다는 뜻의 노래다. 천도교 계통에서 발간하던 ‘별건곤’ 1928년 8월호에는 청오(靑吾)라는 필자가 ‘민중운동으로 일어난 갑오동학란(甲午東學亂) 비록(秘錄)’을 싣고 있다. 청오는 이 노래에 대해 “동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물론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노래는 동요라기보다는 정치 상황을 풍자하거나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희구하는 참요(讖謠)에 속한다. 영조 말엽에는 어린 아이들이 “망국동(亡國洞)에 망정승(亡政丞)”이란 동요를 불렀다고 전한다(‘영조실록’ 46년 3월 22일). 안국동에 살던 홍봉한·인한 형제 정승이 자신의 사위인 사도세자 살해에 가담하자 이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리라는 뜻의 참요가 유행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최치원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계림은 누런 잎(黃葉)이요, 곡령(鵠嶺)은 푸른 소나무(靑松)”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계림은 신라를 뜻하고, 곡령은 개경의 옛 이름이니 신라는 지고 왕건이 새 왕조를 개창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최치원이 이런 참요를 실제로 왕건에게 전달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국제적인 문명을 떨쳤지만 귀국 후에는 골품제라는 카르텔에 막혀 좌절했던 지식인 최치원이 골품제가 무너지는 새로운 세상을 희구했을 것이란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동학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동학은 1860년 4월 5일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고향인 경주 구미산 용담정에서 “마음이 떨리고 몸이 전율”하는 해탈의 경지를 체험하고 나서 창도(創道)했다. 그러나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다.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을 주창했는데, 최시형이 말하는 사람은 양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최시형이 ‘해월설법’(海月說法)에서 “나는 비록 부인이나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 만하면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 만하면 스승으로 모신다”고 말한 것처럼 양반 카르텔에 신음하는 밑바닥의 모든 백성들이 하늘이라는 뜻이었다. 동학이 삽시간에 농민들에게 퍼져 나간 것은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리라는 변혁의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라도 고부의 전봉준(全琫準)이 봉기의 깃발을 들자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주요한(朱耀翰)이 발행하던 ‘동광’(東光) 제26호(1931년 10월 4일)는 조용만(趙容萬)이 지은 “가보세”란 희곡을 싣고 있다. 민씨 척족정권 아래서 신음하던 전북 남원 근처의 한 촌가가 배경인데, 어린아이들이 “가보세 가보세…”라는 위의 동요를 부르면서 지나가자 주인공 순돌(順乭)이 “가자 빌어먹을, 병신 되기 전에 어서 가자”라고 동조하고 나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참요가 성행하는 것은 그만큼 사회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가득 차 있다는 방증이다. 20~34세의 청년들을 심층 면접했더니 절반에 가까운 청년들이 우리 사회의 ‘붕괴와 새로운 시작’(46.6%)을 원한다고 답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 사회의 붕괴가 이미 시작됐다는 뜻이다. 2015년 을미년이 금수저, 흙수저 같은 ‘수저론’과 ‘헬조선’같은 참구(讖句)로 을미적댄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병신년 새해지만 희망의 메시지는 들리지 않는다. “병신 되면 못 가리”라는 참요 대신 “병신년에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구조가 확 뜯어고쳐질 것”이라는 희망의 노래를 갈구하는 것이 필자만의 마음은 아닐 것이다.
  • “창조·진화론 둘 다 맞다”

    “진화론과 창조론 둘 다 맞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8일(현지시간) 바티칸에서 열린 교황청 과학원 회의에서 생명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발달했다는 생각이 가톨릭의 가르침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dpa통신 등에 따르면 교황은 이 자리에서 “오늘날 우리가 세상의 기원으로 여기는 빅뱅이론도 하느님의 개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진화는 원천적으로 진화할 존재의 창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진화나 빅뱅이론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순수하게 자연의 섭리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자체를 설계한 ‘신의 개입’이 있었다는 의미다. 교황은 또 “하느님을 마법 지팡이 하나로 우주를 만든 마술사로 묘사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느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했다고 나오는 창세기 내용이 하느님의 창조 활동을 비유한 것이란 얘기다. 가톨릭 교회는 그동안 과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를 탄압한 후 자리 잡힌 ‘반과학’의 이미지를 벗으려고 노력해 왔다. 이미 갈릴레오를 복권시켰고 교황 비오 12세가 1950년 진화론을 인간 발달에 대한 타당한 과학적 접근이라고 말하는 등 진화론을 과학적 이론으로 인정한 바 있다. 한편 교황은 이날 열린 세계민중운동회의에서 빈자의 권리와 실업의 부당성 등에 대해 역설한 뒤 “이런 얘기를 하면 누군가는 교황이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TV?다큐?역사소비 통해 대중문화의 코드를 읽는다

    TV?다큐?역사소비 통해 대중문화의 코드를 읽는다

    역사를 소비하다/제롬 드 그루트 지음/이윤정 옮김/한울/560쪽/5만 6000원 사람들은 역사를 어떻게 만나는가. TV의 역사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아니면 역사서를 읽어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 역사적 지식을 얻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컴퓨터 게임이나 박물관 등을 방문해 역사를 터득할 수도 있다. 책은 영국 맨체스터대의 제롬 드 그루트 교수가 쓴 역작으로 대중이 역사적 감각을 키워온 방법들을 살피고 있으며, 특히 과거라는 것이 어떻게 상품성을 얻어왔는지를 파헤치고 있다. 한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소비하는가의 문제는 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기 이해와 사회적 구성을 이해하는 데도 요긴하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사이먼 샤마가 진행한 BBC방송의 ‘영국사’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면서 엄청난 시청자들을 안방에 끌어모으자 역시 저명한 역사가인 데이비드 스타키, 니얼 퍼거슨 등이 속속 TV의 역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역사는 레저로써 이야깃거리가 됐고, 학문적 추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역사를 보여주는 사람은 유명인이었다. 일부 명망 높은 역사학자들이 큰 인기를 얻은 다큐멘터리를 진행했지만 대부분의 역사 프로그램들은 역사가보다는 코미디언 존 오패럴 등 유명인 진행자들을 내세웠다. 역사 전문가는 조언을 하는 역할자로 등장했다. 또 역사 서적을 방송 진행자들이 직접 쓰면서 내용이 코믹해지거나 풍자적인 가벼운 것들로 변해갔다. TV나 다른 역사 관련 상품과 마찬가지로 대중 역사 출판물도 1990년대에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장르가 다변화됐다. 템퍼스 출판사는 2003년 역사물 시리즈로 1000만 파운드(약 174억원)를 벌었다. 인터넷과 데이터베이스(DB) 기술혁명 덕분에 역사에 관심이 많거나 아마추어 역사가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풍부한 자료를 가질 수 있게 되면서 역사에 대한 개인의 참여 권한이 확대됐고 역사탐구의 능력이 커짐에 따라 대중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역사적 주체가 돼 갔다. 역사 재현은 오늘날 대중이 역사를 접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활동 중 하나다. 거기에는 일반인들의 역사 참여 권한을 늘려주려는 시도와 민중운동, DIY(Do It Yourself)의 요소가 있다. 역사 재현이라는 문화적 현상은 주류역사 모델과 기존의 지식전파 방식에 도전하는 것이다. 2005년 영국의 박물관과 문화 유적지의 방문객은 1억명이 넘었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접하는 것은 관람객의 체험을 교육적 목적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으로 영국의 역사 소비 현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온라인 박물관이 등장, 박물관의 범위와 관객을 대폭 확장시켰다. 이 책은 문화적 실체로서 사회 속에서 역동적인 모습을 띤 대중적 역사를 진지하게 연구한 미덕이 돋보인다. 거기에 ‘비학문적 분야의 대중 역사 활동’에 대한 모든 것을 입체적으로 담으려는 저자의 노력이 더해져 한층 빛을 발한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TV?다큐?역사소비 통해 대중문화의 코드를 읽는다

    TV?다큐?역사소비 통해 대중문화의 코드를 읽는다

    역사를 소비하다/제롬 드 그루트 지음/이윤정 옮김/한울/560쪽/5만 6000원 사람들은 역사를 어떻게 만나는가. TV의 역사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아니면 역사서를 읽어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 역사적 지식을 얻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컴퓨터 게임이나 박물관 등을 방문해 역사를 터득할 수도 있다. 책은 영국 맨체스터대의 제롬 드 그루트 교수가 쓴 역작으로 대중이 역사적 감각을 키워온 방법들을 살피고 있으며, 특히 과거라는 것이 어떻게 상품성을 얻어왔는지를 파헤치고 있다. 한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소비하는가의 문제는 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기 이해와 사회적 구성을 이해하는 데도 요긴하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사이먼 샤마가 진행한 BBC방송의 ‘영국사’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면서 엄청난 시청자들을 안방에 끌어모으자 역시 저명한 역사가인 데이비드 스타키, 니얼 퍼거슨 등이 속속 TV의 역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역사는 레저로써 이야깃거리가 됐고, 학문적 추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역사를 보여주는 사람은 유명인이었다. 일부 명망 높은 역사학자들이 큰 인기를 얻은 다큐멘터리를 진행했지만 대부분의 역사 프로그램들은 역사가보다는 코미디언 존 오패럴 등 유명인 진행자들을 내세웠다. 역사 전문가는 조언을 하는 역할자로 등장했다. 또 역사 서적을 방송 진행자들이 직접 쓰면서 내용이 코믹해지거나 풍자적인 가벼운 것들로 변해갔다. TV나 다른 역사 관련 상품과 마찬가지로 대중 역사 출판물도 1990년대에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장르가 다변화됐다. 템퍼스 출판사는 2003년 역사물 시리즈로 1000만 파운드(약 174억원)를 벌었다. 인터넷과 데이터베이스(DB) 기술혁명 덕분에 역사에 관심이 많거나 아마추어 역사가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풍부한 자료를 가질 수 있게 되면서 역사에 대한 개인의 참여 권한이 확대됐고 역사탐구의 능력이 커짐에 따라 대중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역사적 주체가 돼 갔다. 역사 재현은 오늘날 대중이 역사를 접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활동 중 하나다. 거기에는 일반인들의 역사 참여 권한을 늘려주려는 시도와 민중운동, DIY(Do It Yourself)의 요소가 있다. 역사 재현이라는 문화적 현상은 주류역사 모델과 기존의 지식전파 방식에 도전하는 것이다. 2005년 영국의 박물관과 문화 유적지의 방문객은 1억명이 넘었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접하는 것은 관람객의 체험을 교육적 목적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으로 영국의 역사 소비 현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온라인 박물관이 등장, 박물관의 범위와 관객을 대폭 확장시켰다. 이 책은 문화적 실체로서 사회 속에서 역동적인 모습을 띤 대중적 역사를 진지하게 연구한 미덕이 돋보인다. 거기에 ‘비학문적 분야의 대중 역사 활동’에 대한 모든 것을 입체적으로 담으려는 저자의 노력이 더해져 한층 빛을 발한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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