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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시신, 교도소 감시탑 지하에 유기 뒤 콘크리트 밀폐”

    “5·18 시신, 교도소 감시탑 지하에 유기 뒤 콘크리트 밀폐”

    옛 광주교도소 감시탑 지하공간에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시신을 묻고 콘크리트로 밀폐했다는 증언이 최초로 나왔다.‘5·18 행방불명자 시신을 임시매장한 뒤 항쟁 직후 다른 장소로 옮겼을 것’이라는 5월 단체 추론과 일치하는 증언인 만큼 사실 여부에 관심이 모인다. 13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옛 광주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일했던 A씨는 최근 매체 5·18 암매장과 관련한 제보를 했다. A씨는 “교도소 제1감시탑 지하에 교도관인 나도 접근 못 하는 보안구역이 있었다”면서 “5·18 때 교도소 주변에 묻었던 시신을 꺼내 유기한 장소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시신을 유기한 지하공간은 콘크리트로 입구를 밀폐했다고 들었다. 제1감시탑은 교도소 4개의 감시탑 중 가장 규모가 큰 데다 지하공간 구조도 독특했다”고 설명했다. A씨는 제보 출처에 대해 “제1감시탑 경비를 담당하면서 상사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라며 “직접 사실관계를 입증하거나 관련 기록을 제시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5·18기념재단은 A씨의 제보가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 옛 광주교도소 시설물을 소유한 법무부와 진위 파악에 나설 예정이다. 재단은 옛 교도소 설계도를 확보해 제1감시탑 지하에 도면과 구조가 다른 공간이 있는지 확인하는 한편 5·18 당시 교도관으로 재직했던 퇴직자를 수소문 중이다. 또 오는 15일 옛 교도소 일원에서 진행 예정인 땅속탐사레이더(GPR·Ground Penetrating Radar) 조사로 감시탑 지하에 밀폐된 공간이 존재하는지 확인할 계획이다. 옛 광주교도소 암매장 진술은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와 ‘12·12 및 5·18 사건’ 검찰 수사에서 여러 차례 나왔다. 그러나 감시탑 지하공간에서 콘크리트까지 동원해 시신을 유기했다는 증언은 지난 37년 동안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5·18재단은 검찰 수사기록에 담긴 3공수여단 지휘관 진술과 암매장지 약도 등을 토대로 옛 교도소 북쪽 담장 주변에서 행방불명자 유해를 찾고 있으나 8개 배관 줄기와 생활 쓰레기만 발견했다. 재단은 암매장 추정지에 과거 굴착 이력이 남겨진 만큼 행불자 유해가 다른 장소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교도소 암매장 발굴 범위 넓히기로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암매장됐을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장소에 대한 발굴 조사가 범위를 넓혀 더 정밀하게 진행된다. 5·18기념재단은 10일 발굴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구간 내에서는 암매장과 직접 관련된 구덩이 흔적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난 6일부터 발굴 조사가 시작된 1구간은 5·18 당시 3공수여단 16대대가 주둔했던 교도소 북측(담양 방면) 담장 바깥쪽, 전체 117m(폭 3~5m) 중 40m 구간이다. 재단은 이에 따라 1구간의 발굴 조사 범위를 교도소 담장에서 2m 떨어진 곳부터 폭 2.5여m, 길이 40m 구간을 추가로 발굴하는 등 범위를 확대키로 했다. 재단은 이를 위해 오는 13~14일 발굴 장소를 덮고 있는 콘크리트를 절단해 제거하고 15일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2~3구간의 발굴 작업도 예정대로 진행한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10·27법난’ 37년 만에 진상 규명 힘받는다

    ‘10·27법난’ 37년 만에 진상 규명 힘받는다

    설정 총무원장, 도종환 장관 접견 때 촉구 불교계 1670억원 들여 기념관 건립 추진 “10·27법난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다음가는 국가 권력의 인권탄압 사건으로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진상 규명에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최근 취임한 설정 조계종 총무원장이 정부에 ‘10·27법난’의 진상 조사와 명예 회복을 강도 높게 요구했다. 총무원을 예방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통해서다. 취임 후 첫 정부 인사를 만난 자리에서 콕 짚어 요구한 사안인 만큼 정부의 향후 조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10·27법난’은 1980년 10월 27일 신군부세력이 불교계 정화를 명목으로 군경을 동원해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과 각 교구본사 주지를 비롯한 스님들을 강제 연행해 고문을 자행한 사건으로 1700년 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설정 스님도 법난 당시 보안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설정 스님은 지난 8일 총무원장 접견실에서 도 장관을 만나 “종단의 아픈 역사인 10·27법난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악하고 치졸한 탄압이었다”며 “법난이 일어난 지 37년이 지났지만 가해자와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현실이 공허하고 서운하다”고 밝혔다. 수덕사 주지 당시 충남도 보안대로 끌려가 승복이 벗겨지는 자신의 경험을 전한 설정 스님은 “군경 10만명을 동원해 본사와 수말사의 스님을 끌어내 보안대로 끌고 가서 승복을 벗기고 고문했다”며 “법난으로 인해 불교계가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다”고 거듭 강조했다. 설정 스님은 특히 “제대로 된 규명이 없었다. 기록이 없어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라고 묻고 “새 정부가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10·27법난 진상 규명에도 신경 써 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도 장관은 설정 스님에게 법난 당시 상황을 자세히 되묻고 경청하는 등 관심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방 자리에는 총무부장 지현, 사서실장 심경, 기획실장 정문, 문화부장 정현 스님과 이기흥 중앙신도회장, 김갑수 문체부 종무실장, 이상효 문체부 종무관이 배석했다. 10·27법난과 관련해 불교계는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대응은 법난 발생 25년이 지난 2005년 국방부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한 게 처음이다. 2008년 사건 발생 28년 만에 특정한 종교단체에 무리하게 적용한 국가권력 남용의 대표적 사건으로 공식 규정되고, 법난 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과 시행령이 제정, 공포되면서 총리실 산하에 법난피해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설치, 운용됐다. 지난해 6월 법난위원회가 해단될 때까지 피해 확인과 함께 명예 회복이 이뤄진 건 개인 95명과 단체 52곳, 54명에 대한 의료지원금 지급뿐이다. 10·27법난 기념사업은 지난해 7월 법난위원회가 문체부 소속으로 바뀌면서 계속 추진되고 있으며 불교계도 총사업비 1670억원을 들여 2018년 완공을 목표로 10·27법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 10·27법난 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지현 스님은 지난달 27일 열린 10·27법난 제37주년 기념법회에서 “기념관 건립 사업의 큰 방향은 잡혔지만 헤쳐 나갈 길이 멀다”며 “조계종 집행부를 비롯한 종단 관계자들의 책임이 가장 무겁겠지만 사부대중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고 밝힌 바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대한제국부터 현재까지 역사의 중심 ‘서울광장’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대한제국부터 현재까지 역사의 중심 ‘서울광장’

    소설가 구보씨가 탐사한 1930년대 옛 경성길을 따라 걷다 답사단이 만난 서울미래유산은 서울광장,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칸티나, 무교동 북어국집, 해창양복점, 한국은행 광장 등 모두 다섯 곳이다. 서울광장이나 라칸티나, 북어국집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고, 해창양복점과 한국은행 광장은 소설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구보씨의 동선에 포함된 장소다.서울광장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 경운궁(덕수궁)을 국가 통치의 중점으로 삼으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미국의 워싱턴DC를 벤치마킹해 방사형 6거리 형태로 조성했다. 1919년 3·1운동을 시작으로 1960년 4·19혁명,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2002년 월드컵 응원전이 이곳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었다. 라칸티나는 1967년 창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부친 이재두씨에게서 가게를 물려받은 이태훈씨가 2013년부터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이 사장은 “욕심 안 부리고 100년, 200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식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직원과 손님 모두 만족하는 좋은 가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라칸티나는 이탈리아 말로 ‘와인 창고’다. 박태원 생가 바로 뒤에 있는 무교동 북어국집도 2대째 가업을 이어 오고 있다. 1968년 창업주 진인범씨가 고향 선배와 함께 개업했고, 1974년 현 위치로 이전했다. 아들 진광상씨가 운영하고 있다. 메뉴는 북어국 한 가지이며, 강원도 고성 덕장의 북어와 황태를 사용한다. 한국은행 앞 광장은 구보가 전차에서 내린 조선은행 앞이다. 1930년대 경성에서 가장 근대적인 거리로 꼽혔던 남대문통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심장부였다. 건너편에는 조선저축은행(SC은행 제일지점)과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신세계백화점 본점)이 건재하다. 일제강점기 소공로는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을 대각선으로 잇는 짧은 도로였지만 모던보이들이 즐겨 찾던 신식 양복점이 즐비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이병철·정주영 회장 등이 단골이던 해창양복점은 일본에서 양복 기술을 배운 창업주 이용수가 1929년 부산 중구 보수동에서 개업, 1932년에 서울 중구 산림동에 가정집을 얻어 해창양복점을 열었다가 194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맞춤 양복 전문점으로 복식사와 민속생활사 측면에서 지속적인 보존과 관리가 필요한 미래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팀
  •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일본 압박에 밀려 세계기록유산 등재 실패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일본 압박에 밀려 세계기록유산 등재 실패

    한국과 중국, 일본, 타이완 등 9개국이 공동으로 신청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이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저지 활동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실패했다.유네스코가 31일 공개한 신규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은 포함되지 않았다. 유네스코는 이날 홈페이지에 올린 공지 등을 통해 위안부 기록물과 일본 정부가 단독 신청한 ‘위안부와 일본군 군율에 관한 기록’을 심사해 ‘대화를 위해 등재 보류 권고’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위안부와 일본군 군율에 관한 기록’은 위안부가 합법적으로 운영됐다는 내용을 담은 자료다. 앞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The 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는 지난 24일부터 나흘 간 프랑스 파리에서 제13차 회의를 열어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가치를 심사했고,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등재 여부를 최종 결정했다.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은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상세히 알려주는 피해자의 증언 기록을 비롯해 위안부 운영 사실을 증명할 사료와 위안부 피해자 조사 자료, 피해자 치료 기록, 피해자 지원 운동 자료 등 2744건으로 구성됐다. 인권 유린을 당한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서 발언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상 규명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분담금을 무기로 유네스코를 압박한 일본 정부의 저지를 이겨내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막기 위한 총력전을 벌였고, IAC와 유네스코는 이해 당사국 간 역사 인식이 다를 경우 심사를 보류한다는 내년도 제도 개혁안을 앞당겨 적용해 심사를 보류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앞서 중국은 2015년 단독으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등재를 신청했다가 유네스코로부터 다른 피해국과의 공동 등재를 권고받았다. 이에 따라 8개국 14개 단체로 구성된 국제연대위원회와 영국 런던 임페리얼 전쟁박물관이 ‘일본군 위안부의 목소리’라는 명칭으로 지난해 등재를 재신청했다. 이렇게 일본 정부의 저지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지 못한 반면 한국과 일본의 민간단체가 등재를 공동으로 추진한 ‘조선통신사 기록물’과 ‘조선왕실의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조선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바쿠후(무사정권)의 요청으로 일본에 12차례 파견한 외교사절에 관한 기록을 가리킨다. 외교 기록, 여정 기록, 문화교류 기록 등으로 나뉘며 기록물 수는 111건, 333점이다. 1783년 변박이 초량왜관을 그린 ‘왜관도’와 신유한이 1719년 통신사로 다녀온 뒤 쓴 ‘해유록’(海游錄) 등이 포함됐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전쟁을 치른 양국이 사절단을 통해 문화교류를 이어갔고 평화 관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조선왕실의 어보(御寶)와 어책(御冊)은 의례용 도장인 어보 331점과 세자 책봉이나 직위 하사 시에 대나무나 옥에 교서를 새긴 어책 338점으로 이뤄졌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일제 항거의 역사가 오롯이 남아 있는 문건 2472건으로 구성됐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나랏빚을 갚기 위해 남성들은 술과 담배를 끊고, 여성들은 반지를 팔아 돈을 모으는 과정을 쓴 수기와 언론 보도 등이 포함됐다. 이번에 조선통신사 기록물, 조선왕실의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등 3건이 등재되면서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은 16건으로 늘어났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한국은 1997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유산에 처음 등재시켰고 2001년에는 승정원일기와 직지심체요절, 2007년에는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과 조선왕조 의궤, 2009년에는 동의보감을 각각 유산 목록에 추가했다. 이어 2011년에는 일성록과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2013년에는 난중일기와 새마을운동 기록물, 2015년에는 한국의 유교책판과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는 성과를 올렸다. 유네스코는 이번에 125건을 심사해 78건을 세계기록유산에 신규 등재했다. 세계기록유산은 모두 427건이 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헬기 사격·전투기 출격 대기…5·18 민주화운동 베일 벗나

    국방부는 30일 3급 비밀 2건을 포함한 비밀문서 16건을 해제해 ‘5·18 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 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에 제출했다. 문상균 국방부 대변인은 “국방부는 군이 보유하고 있는 5·18 민주화운동 관련 비밀문건을 모두 일반문서로 재분류해 5·18 특조위에 제출함으로써 위원회 조사활동이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7월 6일부터 지난 11일까지 3개월 동안 전군을 대상으로 5·18 관련 기록물 보유 실태를 조사했다. 군에서 공식적으로 보유·관리하고 있는 5·18 관련 기록물은 29개 기관 60여만쪽에 달했다. 이 중 비밀문건은 총 16건 2268쪽 분량으로 육군본부 11건(915쪽), 공군본부 2건(187쪽), 합동참모본부 3건(1166쪽)으로 파악됐다. 등급별로는 3급 비밀 2건, 대외비 14건이다. 이번에 해제된 3급 비밀 2건은 모두 공군본부가 보유한 문서다. 5·18 당시 작전 참가 부대에 대한 일자별 작전 활동 및 교훈 분석과 경계태세 2급 발령과 비상소집 등 ‘기지방어 계획’ 등이 포함된 당시 제1전투비행단 보유전력 활동내용이 포함됐다. 5·18 특조위가 전투기 출격 대기 의혹을 푸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지 주목된다. 대외비 문서는 5·18 당시 육군 부대 출동 및 이동 상황, 일자별 작전 활동과 교훈 분석, 부대 지휘관계 및 이동 관련 작전 명령·지시, 부대별 출동 및 탄약, 보급 현황 등이 포함됐다. 국방부는 비밀 해제한 문서 제목과 주요 내용만을 간략히 밝히고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국방부는 “현재 활동 중인 5·18 특조위 조사활동이 종료되는 즉시 비밀 해제된 기록물을 포함해 5·18 관련 군에서 생산·관리 중인 모든 형태의 기록물을 개인정보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록물 공개 관련 법령 및 절차에 따라 모두 투명하게 국민에게 공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5·18 특조위가 지난 23일 기존 군 자료가 왜곡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던 만큼 이번 자료들이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한다. 이건리 특조위원장은 “모든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다른 자료들과 교차 분석해 진위를 가린 다음 사실 인정에 반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전두환 정권 ‘망월동 5·18묘역 성역화’ 방해 공작했다

    전두환 정권 ‘망월동 5·18묘역 성역화’ 방해 공작했다

    이전비·위로금 등 제공 사실 명시 505보안부대가 신원 환경 분석 시행자에 檢·안기부·경찰 등 확인 CIA·軍동원 5·18 유족 분열 공작전두환 정부가 광주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역의 성역화를 막기 위해 묘지를 분산 이장하려고 한 ‘비둘기 시행계획’이 담긴 문건이 공개됐다. 유가족들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관리한 정황도 드러났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26일 국군 보안사령부의 비둘기 시행계획 문건을 공개하며 “광주 민주화운동 1년도 지나기 전인 1981년부터 유가족을 와해하려는 시도가 정부 차원에서 진행됐다는 내용이 새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는 “진상 규명 활동을 다시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1983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건에는 사망자 묘 현황을 지역 연고별로 분석해 관할 시장과 군수 책임으로 직접 ‘순화’하는 것으로 방침이 적혀 있다. 이전비와 위로금은 전남지역개발협의회에서 제공하기로 했다. 시행 관계자로는 전남지역개발협의회뿐 아니라 전남도청, 광주시청, 505보안부대, 검찰, 안전기획부, 경찰 등 국가기관이 총망라돼 있다. 505보안부대가 1차 대상 연고자 11인의 배경을 정밀 조사하고 전남도가 순화 책임자를 소집해 교육한다는 계획도 적혀 있다. 박 의원은 1981년 작성된 ‘광주사태 관련자 현황’ 문건과 1983년 작성된 ‘광주사태 관련 현황’도 공개했다. 이 문건에는 ‘공원묘지의 지방 분산’, ‘공원묘지 이전 계획’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특히 1983년 문건에는 ‘1982년 3월 5일 전남도지사 각하 면담 시 공원묘지 이전 검토 지시’, ‘1982년 9월 15일 내무장관과 도지사, 각하께 보고’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박 의원은 “대통령이 나서서 고인의 묘소를 이장하도록 공작한 것은 매우 충격적”이라고 설명했다. 보안사는 유족의 직업별, 생활수준별, 저항활동별 ‘성분’을 분석하고 이를 A∼C 등급으로 나누기도 했다. 희생자를 505보안부대, 부상자를 안기부, 구속자를 경찰이 각각 전담해 치밀하게 관리한 정황도 나타났다. 한편 같은 당 이철희 의원은 구속자 가족의 미국 공보원 농성을 와해하는 과정에서 미국 중앙정보부(CIA)와 협조하고 군 동원을 염두에 둔 훈련을 실시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보안사 내부문건 6종을 공개했다. 이 의원은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보안사가 유가족과 광주시민을 대상으로 ‘순화 계획’이란 이름으로 저지른 공작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문재인 구두’ 아지오, 폐업 딛고 다시 문 연다

    ‘문재인 구두’ 아지오, 폐업 딛고 다시 문 연다

    ‘문재인 구두’로 이름을 알렸던 수제화 브랜드 ‘아지오’가 다시 사업을 재개한다.유석영 구두 만드는 풍경 전 대표는 26일 오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이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국민들이 뜨겁게 (성원)해 주셨기 때문에 조금 고생스럽고 더디더라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문 대통령이 신은 구두가 화제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지오 다시 사겠다고 얘기했다”며 “아직 샘플도 나오지 않은 상태인데, 선주문이 들어와 공장을 만들고 재료도 사면서 막 출발한 상태”라고 전했다. 수제화 브랜드 아지오는 청각장애인의 자립을 돕기 위한 사회적 기업이다. 앞서 문 대통령이 지난해 5월 18일 민주화운동 36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무릎 꿇고 참배하는 과정에서 닳은 구두 밑장이 화제가 되면서 아지오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해당 아지오 구두는 문 대통령이 2012년 9월 국회 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구두데이’ 행사가 치러질 때 직접 구매한 것이다. 그러나 새 구두를 주문하려 했지만 2013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샀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며 많은 이들은 안타까움을 표했고, 성원이 모여 사업 재개까지 이른 것이다. 유 전 대표는 “이제는 많은 분들이 기도해 주고 사주시고 기부해 주신다. 이 레이스는 아마 성공일 것 같다”고 했다. “사업을 재개하면 문재인 대통령도 신청해서 다시 살 수 있겠다”는 진행자의 말에 유 대표는 “그냥 드리는 건 김영란법에 걸려 당시 그 가격을 받고 그대로 드릴까 한다”며 웃었다. 유 대표는 내년 봄쯤 아지오 구두의 새 상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1200만 ‘택시운전사’ 대종상 품다

    1200만 ‘택시운전사’ 대종상 품다

    ‘박열’ 5관왕-남우주연 설경구 최희서 여우주연·신인상 2관왕 주연상 후보 등 불참 사례 여전 영화 ‘박열’이 대종상영화제에서 5관왕에 오르며 ‘택시운전사’에 판정승을 거뒀다. 하지만 영화제의 꽃인 최우수작품상은 ‘택시운전사’가 가져갔다.‘박열’은 25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54회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에서 감독상, 여우주연상, 신인여우상, 미술상, 의상상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동반자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조명한 ‘박열’은 모두 12개 부문 후보에 올랐었다. 가네코 후미코를 열연한 최희서는 여우주연상과 신인여우상을 동시에 받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2006)에 이은 두 번째 수상. 실화를 모티브로 삼아 광주민주화운동을 조명하며 관객 1200만명을 동원한 ‘택시운전사’는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접전이 예상됐으나, 최우수작품상만 받아 아쉬움을 남겼다.남우주연상은 ‘불한당’의 설경구에게 돌아갔다. ‘오아시스’(2002)에 이은 두 번째 수상이다. 시나리오상은 ‘더 킹’의 한재림 감독이 받았다. 신인감독상과 신인남우상의 영예는 각각 ‘가려진 시간’의 엄태화 감독과 ‘청년경찰’의 박서준에게 돌아갔다. 공로상 격인 특별상은 지난 4월 세상을 뜬 김영애에게 헌정되며 숙연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쇄신을 선언한 대종상영화제는 그러나, 올해도 그 위상을 온전하게 회복하지는 못했다. 본심 심사의 전권을 현장의 영화인들에게 부여하고 TV중계 화면을 통해 채점표를 공개하는 등 공정성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여우주연상 후보 5명 중 4명, 남우주연상 후보 5명 중 2명이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않는 등 후보들의 불참 사례는 여전했다. 영상 수상 소감까지 동원했으나 전체 19개 부문 중 6개 부문에서 대리 수상이 이뤄졌다. 그나마 핵심 부문의 대리 수상을 줄인 게 위안거리였다. 수상작의 관계자가 아무도 오지 않아 두 개의 상을 대신 받은 진행자 신현준은 “대종상영화제를 우리 스스로 지켜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상자로 나선 이병헌, 손예진을 비롯해 이준익 감독, 송강호, 설경구, 조인성 정도를 제외하면 톱 감독, 톱 배우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지 않았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시상식인 대종상은 1990년대 중반부터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2015년에는 참가상 논란 등을 자초하며 남녀주연상 후보 9명 전원을 비롯해 다수 후보들이 불참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으며 24개 부문 중 11개 부문에서 대리 수상이 속출했다. 지난해에도 내부 갈등으로 영화제 준비가 늦어지며 후보자들의 불참이 이어져 23개 부문 중 11개 부문에서 대리 수상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아름다운 여배우들

    아름다운 여배우들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가 올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택시운전사’는 기획상(최기섭·박은경)까지 수상해 2관왕의 영예를 얻었다. 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제54회 대종상영화제는 최우수작품상·감독상 등 총 18개 부문에서 시상이 진행됐다. 감독상은 ‘박열’의 이준익 감독이 받았고, 남녀주연상은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의 설경구와 ‘박열’의 최희서에게 돌아갔다. 최희서는 신인여우상도 받아 2관왕의 영예를 안았으며, ‘박열’은 감독상, 여우주연상, 신인여우상 외에도 의상상과 미술상도 받아 5관왕에 올랐다. 다음은 수상 명단▲최우수작품상 택시운전사 ▲감독상 이준익(박열) ▲남우주연상 설경구(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 ▲여우주연상 최희서(박열) ▲남우조연상 배성우(더킹) ▲여우조연상 김소진(더킹) ▲신인남우상 박서준(청년경찰) ▲신인여우상 최희서(박열) ▲신인감독상 엄태화(가려진 시간) ▲의상상 심현섭(박열) ▲미술상 이재성(박열) ▲시나리오상 한재림(더킹) ▲음악상 달파란(가려진 시간) ▲편집상 신민경(더 킹) ▲조명상 김재근(프리즌) ▲기획상 최기섭·박은경(택시운전사) ▲촬영상 박정훈(악녀) ▲기술상 정도안·윤형태(악녀) ▲특별상 고(故) 김영애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국민 찾아가 경청, 유혈사태 막은 카리스마… 외유내강 리더십

    국민 찾아가 경청, 유혈사태 막은 카리스마… 외유내강 리더십

    ‘군림하되 다스리지 않는다.’ 입헌군주제 국가 국왕의 불문율이다. 푸미폰 아둔야뎃 전 태국 국왕은 이 선을 넘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13일 서거했으나 지금도 태국 전반에 정치·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과 높은 인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푸미폰 전 국왕의 장례식을 사흘 앞둔 23일 방콕. 장례식장이 열릴 왕궁과 에메랄드 사원 주변은 흡사 거대한 장례식장 같았다. 이글이글 내리쬐는 햇볕에도 아랑곳없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예행연습을 위해 거리 한편에 마련된 국왕의 추모소에 금색 제기를 바치고 경례를 했다. 왕궁 근처의 버스정류장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추모객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이날은 쭐랄롱꼰의 날로 공휴일이어서 추모 인파가 더욱 많았다. 푸미폰 전 국왕의 장례식이 치러질 왕궁과 에메랄드 사원으로 가까이 갈수록 추모의 열기는 더해 갔다. 길거리에서는 노란색 조화(弔花)와 국왕의 젊은 시절 모습이 담긴 엽서를 팔고 있었다. 사람들은 왕궁 근처 건물 외벽에 줄줄이 놓인 국왕의 벽화 앞에서 연신 기념사진을 찍었다. 왕궁은 지난 1일부터 출입이 금지돼 외국에서 온 여행객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태국인들은 신청서를 쓰고 신분증을 제시하면 왕궁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디아라고 소개한 한 여성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왕이었던 분의 가는 길을 배웅해 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우리는 시암(태국의 옛 지명)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정의(正義)로 여기고 지배할 것이다.” 1950년 5월 5일 열린 대관식에서 푸미폰 전 국왕이 한 말이다.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그는 시리낏 왕비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의 오지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곤궁함에 귀를 기울였다. 푸미폰 전 국왕이 땅에 앉거나 몸을 낮춰 백성들과 대화하는 장면은 주로 그때의 것들이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그의 인간미는 태국 국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것이 푸미폰 전 국왕의 리더십의 바탕이다. ‘나라의 아버지’로 불린 그는 1932년 입헌군주제가 공포된 이후 아버지와 형을 거치며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했다. 나라 곳곳을 직접 돌아보며 느낀 점을 토대로 푸미폰 전 국왕은 대대적인 국가 개발에 착수한다. 1951년 시작돼 50년 이상 지속된 ‘로열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태국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푸미폰 전 국왕은 농업, 환경, 공공보건, 수자원 관리, 통신 등 8개 분야에서 4000개 이상의 개발사업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6개의 국왕개발연구센터를 설치해 연구와 조사를 수행하기도 했다. 푸미폰 전 국왕은 이 로열 프로젝트에 자신의 돈을 쏟아부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산족 프로젝트다. 태국의 고산지대에는 소수민족들이 부락을 이뤄 살고 있다. 수확물이랄 게 없는 고산지대에서 유일한 수입원은 양귀비를 길러 아편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고산족들이 밀집한 치앙라이 지역은 마약의 소굴이기도 했다. 푸미폰 전 국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편 대신 차와 커피를 재배하게 했다. 왕실의 끊임없는 지원에 힘입어 치앙라이 지역은 유명한 관광지가 됐고, 고산족들은 특산물을 재배하는 어엿한 농민이 됐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푸미폰 전 국왕은 1988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고, 2006년에는 유엔으로부터 제1회 ‘인간개발 평생업적상’도 받았다. 정치적으로 보면 로열 프로젝트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1957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권주의자 사릿 타나랏은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푸미폰 전 국왕과 왕실의 위상을 높이는 데 사활을 건다. 국왕의 생일을 아버지의 날로, 왕비의 생일을 어머니의 날로 지정하는 한편 산업화로 인한 도농 격차로 빈곤에 허덕이던 지방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로열 프로젝트를 후원한 것이다. 푸미폰 리더십의 세 번째 요인은 정치적 위기 때마다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이다. 푸미폰 전 국왕은 정치적 힘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적절한 시기에 개입해 정치 지형의 흐름을 바꿔 놓곤 했다. 흔히 꼽히는 사례가 1973년과 1992년 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유혈 사태다. 1973년 타놈 끼띠카쫀 정부의 군부독재에 반대해 전국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군의 대규모 진압 작전으로 시위대에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자 푸미폰 전 국왕은 왕궁의 문을 열어 시위대에게 쉴 곳을 마련해 줬다. 푸미폰 전 국왕의 이런 제스처로 타놈 총리는 독재자로 낙인찍혀 망명해야 했다. 1992년에도 수친다 크라프라윤 정부의 독재에 항거해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푸미폰 전 국왕은 민주화 세력인 참롱 스리무앙과 수친다를 동시에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꿇어앉은 상태에서 국왕의 훈시를 들었고, 그 자리에서 모든 상황이 종결됐다. 푸미폰 리더십을 완성하는 원천은 태국의 불교 신앙일 수 있다. 불심 깊은 국민들을 상대로 국왕에게 부처의 이미지를 투영시킴으로써 푸미폰 전 국왕의 ‘자애로운 군주’ 이미지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뒤 아버지 마히돈 국왕과 형인 아난타 국왕을 거치는 동안 태국은 급진적인 정치인과 야심 찬 군에 의해 분할되며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군과 엘리트 정치인들은 약한 왕권을 원했고, 이에 맞서 왕실주의자들과 푸미폰 전 국왕은 왕실을 불교 신앙의 보호자라고 강조하며 왕권 강화의 근거로 삼았다. 물론 아무에게나 부처의 이미지가 투영되지는 않는다. 그의 형이나 부친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 다른 불교 국가의 국왕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현대사회에선 푸미폰 전 국왕만이 가능했다. 방콕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5·18 암매장 추정’ 옛 광주교도소 발굴 30일 착수

    ‘5·18 암매장 추정’ 옛 광주교도소 발굴 30일 착수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를 찾기 위해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에 대한 발굴 작업이 조만간 이뤄진다. 5·18기념재단은 23일 최근 잇단 제보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나온 관련 진술 등을 토대로 암매장 추정지를 특정하고, 이르면 오는 30일부터 발굴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재단은 지난 22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옛 광주교도소에 주둔했던 3공수여단 15대대 부사관 출신 김모씨로부터 관련 증언을 들었다. 김씨는 “신분증이 있으면 가슴 위에 얹었다. 관이 없으니 가마니를 덮어서 묻었다”며 구체적인 시신 처리 과정을 37년 만에 증언했다. 그는 1980년 5월 21일 오후 전남대에서 교도소로 퇴각한 뒤 호남고속도로가 바라보이는 교도소 서쪽에 배치됐다. 그는 “부대원과 함께 고속도로를 오가는 차량을 향해 총을 쐈고, 멈춰 선 차 안에서 시신을 수습했다”고 5·18재단에서 증언했다. ●당시 농장… 현재 풀숲·아스팔트 덮여 당시 3공수 5개 대대 병력은 교도소로 퇴각하면서 전남대에 연행한 시민 수십명을 끌고 갔고, 초과 인원이 탑승한 차량 적재함을 밀폐한 채 최루분말가스를 터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차량이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 6명이 숨져 있었다. 재단은 이와 비슷한 시민 제보도 최근 입수했다. 1980년 5월 교도소에 수용됐던 최모씨는 “1급 모범수로 생활하며 매일 저녁 6~7시 모포를 털거나 빨래를 걷었다”며 “어느 날 이 시간 교도소 담장 밖에서 굴착기가 작업하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당시 현장에 주둔했던 제3공수여단 김모 소령이 1995년 검찰 수사 과정에서 한 진술도 최씨가 굴착기 작업을 했다고 지목한 현장과 일치한다. 김 소령은 “1980년 5월 23일 오후 6시부터 2시간에 걸쳐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시민 3명 등 12구의 시체를 매장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다. ●광주시 인정 행불 76명 확인될지 주목 재단은 이들 제보자가 밝힌 지점을 5·18 당시 교도소에서 농장으로 사용했던 땅으로 특정했다. 길이 117m(폭 3~5m) 구간이다. 이곳은 과거에 농장이나 공터로 쓰였으며, 1980년 5월과 달리 현재 풀숲이나 아스팔트가 덮여 있고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테니스장과 교도경비대가 사용하는 건물, 주차장 등도 새로 들어섰다. 기념재단은 굴착기 등 중장비와 지중탐사레이더 등을 동원해 발굴에 나선다. 광주교도소는 5·18 당시 3공수여단과 20사단 병력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5·18 직후 교도소 관사 뒤에서는 시신 8구, 교도소 앞 야산에서는 시신 3구가 암매장 상태로 발견됐다.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1980년 5월 31일 ‘광주사태 진상 조사’ 문건에는 이른바 ‘교도소 습격 사건’으로 민간인 27명(보안대 자료 28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단순 계산으로도 16~17명의 신원과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광주시가 인정한 5·18 당시 행방불명자는 모두 76명이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軍 부정적 수기 재작성”… 국가기관이 ‘5·18 왜곡’ 주도했나

    “軍 부정적 수기 재작성”… 국가기관이 ‘5·18 왜곡’ 주도했나

    1985년 총리실·안기부 등 참여 3개의 실무팀·심의반으로 구성‘5·18 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가 23일 5·18 관련 자료의 왜곡·조작 가능성을 제기한 것은 기존의 조사위원회와는 다른 관점에서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검찰과 국방부는 1995년 합동수사에서 관계자 진술과 군 관련 자료를 근거로 5·18 당시 헬기 사격은 없었다는 결론을 한 차례 내린 바 있다. 이건리 특조위원장은 이날 서울 용산국 국방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도, 지금도 군 관계자는 ‘이미 40년이 다 돼 가는 일을 끄집어내 왜 분란을 일으키느냐, 공연히 쓸데없는 일을 해 군의 명예를 떨어뜨리느냐’고 말하며 진상 규명에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있다”면서 “자전적인 체험 수기도 천편일률적이거나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기재되거나 군에 불리한 내용은 누군가에 의해 삭제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특조위가 이날 공개한 ‘광주 사태 참가요원 체험담 수집 지침’에는 군에 부정적인 내용이면 회송·재작성하라는 지시가 명시돼 있다. 1988년 3월 체험 수기 수집은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과 주요 참모 현역 38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특조위는 1985년 6월 구성된 ‘80위원회’의 활동 결과가 5·18 관련 군 기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특조위는 전두환 정권하의 80위원회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대응 방안을 마련했다고 판단했다. 80위원회는 국가안전기획부 2국장이 실무책임을 담당하고 수집정리팀, 분석작성팀, 지원팀 등 총 3개의 실무팀과 이들 실무 활동을 관리하는 심의반으로 구성됐다. 특조위는 이날 80위원회의 활동 결과가 군 기록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체험수기 일부를 공개했다. 1981년 6월 8일자 체험 수기에는 5·18 당시 계엄군이 ‘무릎쏴’ 자세로 집단사격을 했다는 군 간부 증언이 있다. 그렇지만 1988년 군사연구소가 발간한 체험 수기에는 다르게 명시돼 있다. 일부 체험 수기엔 계엄군의 ‘공중 사격’ 내용은 남아 있고 시민군을 사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지면 사격’ 내용은 수정액으로 지워져 있다. 체험 수기의 3~4줄을 지우고 복사본을 첨부한 사례도 발견됐다. 특조위는 이날 특조위 출범 이유인 5·18 당시 헬기 사격과 전투기 출격대기 의혹에 대한 진전된 조사 결과를 내놓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지난달 11일 출범한 특조위는 그동안 헬기 사격 의혹 관련 목격자 등 19명, 전투기 출격대기 의혹 관련 조종사와 무장사 등 29명을 조사하는 등 총 50명을 조사했다. 현재 국방부 장관 훈령에 의한 특조위 조사 활동 기간은 다음달 30일까지다. 그렇지만 특조위는 조사할 내용에 따라 연장될 수 있다고 밝혔다. 80위원회가 작성한 5·18 관련 백서가 발견되면 ‘5·18진상규명특별법’의 국회 통과 등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된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전두환 80위원회, 5·18 왜곡”

    ‘5·18 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는 23일 전두환 정권 당시 정보기관 주도하의 위원회가 구성돼 5·18 관련 자료를 조직적으로 왜곡·은폐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건리 특조위원장은 이날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두환 정부하에서의 1985년 6월 국무총리실과 안전기획부의 ‘80위원회’ 등 국가기관을 통해 5·18 관련 역사적 사실이 왜곡됐을 것으로 추정돼 진상을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위원장은 “5·18 특조위는 한마디로 ‘가짜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며 “현재 보존돼 있는 군 자료 중 중요한 부분은 제대로 기재돼 있지 않고 보존 연한의 경과 등으로 폐기됐으며 남아 있는 자료들 일부는 왜곡되고 변질돼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특조위가 이날 공개한 1987년 6월 5일 관계장관 대책회의 자료에는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문공부, 육군본부, 치안본부, 청와대, 민정당, 안기부가 참여하는 가칭 ‘광주 사태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운영하기로 논의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위원장은 “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 사태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종합 검토해 광주 사태 백서를 발간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구체적인 업무 추진을 위해 실무위원회를 편성했다”며 “실무위원회의 위장 명칭을 80위원회로 명기한 것은 정부 차원의 기구 구성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했던 조치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80위원회의 구체적인 활동 결과와 광주 사태 백서의 존재 유무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당시 주관 기관이었던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에 광주 사태 백서의 보전 여부 확인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조위는 이날 80위원회의 활동 결과가 군 기록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광주 사태 참가 요원 체험수기 일부도 공개했다. 이 위원장은 “내용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 사건에 대해서는 다양한 수정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체험 수기의 수정과 변화에 80위원회와 같은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5·18 특조위 “1985년 ‘80위원회’ 통해 사실왜곡된 듯”

    5·18 특조위 “1985년 ‘80위원회’ 통해 사실왜곡된 듯”

    이건리 위원장 “전두환정부, 80위원회 구성해 범정부 대응 마련”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는 23일 전두환 정권이 정보기관 주도 아래 위원회를 만들어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자료를 조직적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 의혹 등을 조사하고 있는 이건리 특조위원장은 이날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985년 구성된 ‘80위원회’ 등 국가계획안을 통해 5·18 관련 역사적 사실이 왜곡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그 진상을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위원장은 “노태우 정부 아래 1988년에 511위원회 또는 511 연구반과 분석반을, 그보다 3년 앞선 전두환 정부 아래 1985년 국무총리실과 국가안전기획부의 80위원회 등이 구성되는 등 정부 차원의 조직적 개입 정황을 포착했다”고 전했다. 이 위원장은 구체적으로 “전두환 정부는 1985년 6월 ‘80위원회’를 구성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대응 방안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조위가 발굴한 1985년 6월 5일 관계장관 대책회의 자료에 따르면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문공부, 육군본부, 보안사, 치안본부, 청와대, 민정당, 안기부가 참여하는 가칭 ‘광주 사태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운영하기로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이 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사태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종합 검토해 광주사태 백서를 발간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구체적인 업무 추진을 위해서는 실무위원회를 편성했는데, 실무책임은 안기부 2국장이 담당하고 수집 정리팀, 분석작성팀, 지원팀 등 총 3개의 실무팀과 이들 실무활동을 관리하는 심의반으로 구성했다”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또 “1985년 6월 5일 관계장관 대책회의 자료로는 조직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광주사태의 진상규명 실무위원회 위장 명칭을 80위원회로 명기하고 있다”면서 “이는 정부 차원의 기구 구성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했던 조치로 보여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80위원회’ 자료 발굴에 대한 의미와 관련, “1988년 국회청문회 과정에서 실체가 알려진 511 분석반 이전에 이미 범정부 차원의 대응기구가 구성되고 운영됐다는 사실을 정부 문서를 통해서 확인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또 “80위원회의 활동 결과가 군 기록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군 자료 일부를 확인했다”며 군인들의 증언이 담긴 5·18에 관한 ‘체험 수기’의 예를 들었다. 1981년 6월 8일자 체험 수기에는 5·18 당시 계엄군이 ‘무릎 쏴’ 자세로 집단사격을 했다는 군 간부 증언이 있지만, 1988년 군사연구소가 발간한 체험 수기 내용은 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내용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고 특정 사건에 대해서는 다양한 수정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체험 수기의 수정과 변화에 80위원회와 같은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80위원회의 구체적인 활동 결과와 광주사태 백서의 존재 유무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당시 주관기관이었던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의 광주사태 백서의 보전 여부에 대한 확인을 오늘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 위원장은 “의혹을 받는 당시 및 현재 군 관계자들은 ‘이미 40년이나 다 돼가는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 왜 분란을 일으키느냐’, ‘왜 공연히 쓸데없는 일을 해 군의 명예를 떨어뜨리느냐’고 하면서 진상규명에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모습도 감지되고 있다”며 조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현재 보전돼 있는 군 자료 중 중요한 부분은 제대로 기재돼 있지 않고 보전 연한의 경과 등으로 폐지됐으며 존안된 자료 일부는 왜곡 또는 변질돼 있다”며 “특조위는 한마디로 ‘가짜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조위는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과 폭탄을 탑재한 전투기의 광주 출격 대기 의혹의 진상규명을 하라는 문재인 대통령 지시에 따라 지난달 11일 출범해 약 40일 동안 조사활동을 해왔다. 이번 기자회견은 조사활동의 경과 보고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 기간 특조위는 헬기사격 의혹에 관해 목격자를 포함한 19명을 조사했고 전투기 출격 대기 의혹에 관해서는 조종사와 무장사 등 29명을 조사했다고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포토] 지워진 ‘5·18 체험수기’

    [서울포토] 지워진 ‘5·18 체험수기’

    이건리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장이 23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5·18 특조위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 위원장이 5·18 민주화운동 헬기사격과 전투기출격대기 등과 관련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주도하 ’80위원회’를 통해 조직적인 진실왜곡 등 개입 정황이 있었던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조사단이 공개한 체험수기. 복사본인데다가 총기사격에 관한 부분이 통째로 지워져있다. 이호정 전문기자 hojeong@seoul.co.kr
  • [서울포토] 1985년도 당시 안기부 ‘80위원회’ 조직도

    [서울포토] 1985년도 당시 안기부 ‘80위원회’ 조직도

    국방부 5·18특별조사단이 23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5·18 특조위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했다. 5·18 민주화운동 헬기사격과 전투기출격대기 등과 관련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주도하 ’80위원회’를 통해 조직적인 진실왜곡 등 개입 정황이 있었던 사실을 설명했다.조사위원이 이번 조사로 새로 밝혀낸 1985년도 당시 안기부 주도 5.18 조사위원회인 ’80위원회’의 조직도 이호정 전문기자 hojeonㅎ@seoul.co.kr
  • 영화 ‘택시운전사’ 아들 김승필씨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아버지 추모사업 준비 중“

    영화 ‘택시운전사’ 아들 김승필씨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아버지 추모사업 준비 중“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모델 김사복씨의 큰아들 김승필씨가 ‘씨알의 소리’ 등 민주화운동 주역들이 아버지 추모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22일 알려졌다. 김승필씨는 지난 20일 경기 광명시청에서 특강을 하기에 앞서 양기대 시장과 만나 “최근 ‘씨알의 소리’ 등 과거 민주화 운동과 관련됐던 분들이 아버지의 추모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84년 세상을 떠난 선친을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에 있는 힌츠페터의 추모비 옆에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부친이 독일 방송사 기자 피터 힌츠페터를 광주까지 두 차례 안내하는 등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데 도와준 일화와 사진·책 등 유품을 공개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영화 내용과는 달리 팔레스 호텔 택시 2대를 운영했으며, 외신 기자들에게 잘 알려진 분이었다.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외신 기자들과 긴밀하게 교류했다”고 소개했다. 또 “우연히 광주로 가는 영화 내용과 달리 아버지는 당시 광주 상황을 알고 광주로 향했다”고 말했다. 그는 힌츠페터의 저서 ‘The Kwangju Uprising; Eyewitness(광주의 봉기: 목격자)’ 중 ‘드라이버인 김사복은 광주 상황에 대해 알려주었다’는 글을 인용하며, “아버지는 19일, 23일 두 차례 힌츠페터와 광주에 갔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 75년 10월 포천 약사봉에서 아버지와 피터 힌츠페터가 함께 있는 사진 속에 함석헌·계훈제 선생 등 재야 인사들의 모습도 보인다”며 “아버지가 장준하 발행 ‘사상계’, 함석헌이 번역한 간디 저서 등을 읽고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신문 칼럼을 스크랩하는 등 평소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고 밝혔다. 양 시장은 “김사복씨 추모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니 반갑다”며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목숨을 걸고 사실보도를 하고자 광주를 찾은 독일 기자를 도운 김사복씨와 같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나라 민주주의의 주역”이라고 말했다. 지난여름 영화 ‘택시운전사’가 12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화제가 되자 김씨는 트위터에 자신이 큰아들이라는 글을 올리고 부친과 힌츠페터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또 최근 5·18기록관에 아버지 관련 자료와 유품을 제시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한 시간에 쌀 한 가마니… 경성 1%의 특권, 택시

    한 시간에 쌀 한 가마니… 경성 1%의 특권, 택시

    “손님이 가자면 택시는 어디든 가는 거지.” 전국 관객 1218만명을 불러 모으며 역대 한국 영화 흥행 9위에 오른 영화 ‘택시운전사’. 영화의 주인공인 만섭(송강호 분)은 택시운전사로서의 사명감에 대해 이렇게 읊조린다. 평범한 소시민의 눈을 통해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알린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택시다.영화는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가운데 만섭이 모는 초록색 택시가 시원하게 한강 다리를 질주하면서 시작된다. 극중 만섭이 모는 개인택시는 1974년 첫선을 보인 기아자동차의 ‘브리사’다. 관객들은 택시의 모양만 보고도 1980년대 그 시절 속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영화에는 광주에서 태술(유해진 분)이 모는 택시인 현대자동차의 ‘포니’를 비롯해 ‘그라나다’, GM코리아의 ‘제미니’, 신진자동차의 ‘레코드’ 등이 그 시대 도로 위를 달린다. 택시는 그 시대 서민들의 생활상과 교통 문화 등을 한눈에 보여 주는 이동 수단이다. 택시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때는 1912년 서울 낙산의 부자 이봉래와 일본인 2명이 함께 ‘포드T형’ 승용차 2대로 시간제 임대업을 하면서부터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운전기사가 딸린 시간제 렌터카다. 요금도 비싸서 손님도 일부 초부유층 등으로 한정됐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기업형 택시회사가 들어선 것은 1919년 12월에 일본인인 노무라 겐조가 ‘닷지 1호’ 2대를 가지고 ‘경성택시회사’를 설립하면서부터다.이후 1920년 1월에는 계림자동차조합이 고급 세단형 차 4대로 영업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조봉승이 한국인 최초로 ‘종로택시회사’를 설립하는 등 택시회사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이동거리에 따라 요금을 지불하지 않고 시간당 임대를 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당시 시간당 대절 비용은 쌀 한 가마니 가격인 6원에 달했다. 택시보다는 비행기 요금에 가깝다. 현대식 개념의 택시가 등장한 것은 1926년 설립된 아사이 택시회사가 일본에서 도입한 택시 미터기를 달고 영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광복을 맞은 1945년 당시 택시요금은 시내에서 4㎞ 이내를 이동하는 데 50원이었고 1948년 4월에 택시요금이 개정돼 기본요금(2㎞ 운행) 200원, 이후 요금은 1㎞당 100원이었다.1950년대 중반 미군 지프의 부품을 재생하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얹은 시발자동차가 등장하면서 택시의 수는 본격적으로 증가한다. ‘시발’(始發)은 자동차 생산을 최초로 시작했다는 뜻이다. 택시로서 시발자동차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1955년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주목을 받은 이후 1963년 생산이 중단되기 전까지 생산된 3000대 대부분이 영업용 ‘시발택시’로 쓰였다. 잘나가던 시발자동차의 인기는 경쟁자가 생기면서 차츰 사그라든다. 1962년 8월 현재 GM대우의 전신인 새나라 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경기 부평에 공장을 꾸렸다. 재일교포가 설립한 새나라는 일본 닛산과 손잡고 ‘블루버드’ 부품을 수입해 차를 생산했다. 성냥갑처럼 각진 시발자동차와 달리 유선형에 가까운 세련된 외형에 완성도까지 높다는 평가가 입소문을 탔다. 당시 군사정권이 제정한 ‘자동차공업육성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동차공업육성법’이란 법의 이름과는 정반대로 국산차보다 일본 자동차의 조립 생산을 우선시했다. 택시회사들은 빠르게 ‘시발’을 버리고 ‘새나라’로 갈아탔다. 1960년대 후반 이후 국내 자동차 산업의 발전으로 택시도 전성기를 맞이했다. 1967년에는 개인택시가, 1970년에는 서울에 콜택시가 처음 등장했다. 1972년부터는 김포공항을 이용하는 승객의 교통 편의를 위해 처음으로 공항 택시가 생겨났다. 이때부터 택시 차종도 다양했다.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 제휴를 맺어 생산한 ‘코로나’와 현대차가 포드와 기술계약을 체결해 만든 ‘코티나’가 주로 택시로 이용되기도 했다. 1974년부터는 기아자동차의 ‘브리사’가 판도를 바꿨다. 일본 마쓰다의 ‘파밀리아’를 기본으로 한 ‘브리사’는 직렬 4기통 1.0ℓ 엔진을 장착해 연비가 좋았고 국산화율을 80%까지 높여 차도 부품가격도 착했다. 성인 5명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실내 공간도 넉넉했는데 당시에는 획기적이다. ‘브리사’는 출시 때부터 자가용과 영업용으로 분리됐고 1977년에는 LPG엔진을 장착해 택시로서 높은 수익률을 안겼다. 하지만 ‘브리사’는 1981년 자동차공업합리화조치에 의해 갑자기 강제 단종됐다. 1975년 울산에서 40대가 생산된 현대차의 ‘포니’는 ‘브리사’의 단종으로 생긴 공백기의 덕을 톡톡히 봤다.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가 디자인을 맡은 ‘포니’는 우리나라가 처음 생산한 자체 완성차다. 미쓰비시의 직렬 4기통 1.2ℓ 엔진을 장착했고 부품의 75%를 국산으로 채웠다. 1976년 8월의 전국 영업용 택시 2만 9000여대 가운데 ‘포니’는 2232대인 10%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당시 ‘포니’는 ‘브리사’와 GM코리아의 ‘카미나’ 등에 비해 스타일, 엔진 성능, 경제성과 애프터서비스 등이 월등해 택시기사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중형 택시제도가 도입됐다. 현대차가 ‘스텔라’를 내세워 택시 시장을 빠르게 점유했고 ‘쏘나타’, 대우차 ‘프린스’ 등의 택시 중형화 바람을 타고 인기를 끌었다. 요금도 변했다. 1988년 이전에는 소형 택시의 기본요금이 600원이었지만 중형 택시로 바뀌면서 800원으로 올랐다. 1990년대 들어서는 대우자동차 ‘로얄 듀크’가 중형 택시 시장 점유율 9.4%를 보이며 급성장했다. 기아의 ‘콩코드’, ‘캐피탈’도 중형 택시 시장의 경쟁자였다. 1992년 12월에는 모범택시가 처음 등장했다. 기본요금은 3㎞당 3000원. 지나친 택시요금 인상으로 서민 부담이 는다는 비판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이후 요금은 2005년 6월에 한 차례 더 올라 현재의 4500원이 유지되고 있다. 현대차는 1992년 2세대 ‘그랜저’ 모델, 2003년 ‘오피러스’ 택시 모델을 출시해 모범택시 시장을 공략했다. 1994년 1000원이었던 중형 택시 기본요금은 2005년 1900원, 2009년 2400원으로 인상됐으나 2013년 10월부터 현재의 3000원 요금이 계속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기아자동차가 택시 시장에서 강세를 보였다. 기아자동차는 2005년 ‘로체’ 택시, 2009년 ‘K7’ 택시, 2010년 ‘K5’ 택시를 잇따라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2009년에는 현대차의 ‘아반떼’ 하이브리드 택시가 서울에서 처음 운행을 했고 2015년 7월에는 BMW ‘3시리즈’나 볼보 ‘S90’, 도요타 ‘프리우스’ 등 수입 택시가 등장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현대차의 ‘YF 쏘나타’가 전국 개인택시 3만대를 돌파하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NF 쏘나타’, ‘LF 쏘나타’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기아차의 K5는 전국에서 1만여대가 도로를 달렸고 르노삼성자동차의 ‘SM5’도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후 현대차그룹은 연 4만대 규모의 택시 시장 가운데 80~90%를 점유하고 있다. 이런 독과점이 형성된 것은 차량 이미지 훼손과 낮은 마진율 때문에 다른 완성차 업체들이 택시 모델 출시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최근 업계에서는 ‘신차 홍보대사’로서 택시 모델 출시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기사들은 물론 택시를 탄 승객들 사이에서도 빠르게 평가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의 관계자는 “통상 신차 출시 후 몇 개월 간격을 두고 택시 모델이 출시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지난해 11월 신형 그랜저는 출시와 동시에 택시 모델도 함께 선보였다”면서 “차 좋다는 입소문이 신형 그랜저 전체 판매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도 “택시는 일반 승용차보다 더 가혹한 환경에서 운용되기 때문에 완성차 업체 입장에선 대중적으로 내구성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면서 “내수 판매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택시는 고정적으로 수요라는 점과 동시에 움직이는 광고판 역할을 하기도 해 긍정적인 효과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5·18진실 숨김없이 밝혀야”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5·18진실 숨김없이 밝혀야”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20일 서울 용산 국방컨벤션에서 ‘5·18 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대기 관련 특별조사위원회’ 위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투명하고 완전한 진상규명을 강조했다.이 자리에서 송 장관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숨김없이 진실을 밝혀내 이런 문제로 더이상 군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이번 특별조사가 군이 더이상 정치에 개입하지 않게 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5·18 민주화운동 특별조사는 투명하고 완전한 진상규명을 위한 주춧돌이 될 것”이라며 “국민적 의혹을 해소할 수 있도록 위원회 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앞서 국방부는 지난달 11일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중무장 출격대기 의혹 등을 조사할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를 발족했다. 특조위원은 대한변호사협회, 광주광역시, 역사학회, 한국항공대 등의 추천을 받아 이건리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모두 9명으로 구성됐다. 3개월 활동시한을 부여받은 특조위는 그동안 기무사와 광주광역시 진실규명지원단 등으로부터 제출받은 관련 문서들을 검토하는 한편 광주 현지 조사 등을 진행해 왔다. 특히 남겨진 문건 등을 통한 진실규명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시민 등의 공개 제보를 받기도 했다. 특조위는 조만간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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