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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대 최고령 단식 손학규 “선거제 개편 때까지 계속”

    역대 최고령 단식 손학규 “선거제 개편 때까지 계속”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등 거대 양당에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제 개편을 요구하며 지난 6일부터 단식에 돌입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단식 나흘째인 9일 현재 고혈압과 부정맥 등 건강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손 대표 물·죽염만 섭취… 부정맥 등 건강 이상 이날 단식 농성장인 국회 본청 로텐더홀을 찾은 홍이승권 가톨릭대 의대 교수는 “손 대표의 심장 부정맥이 심해지면서 건강이 매우 염려된다”며 “혈압도 150에 80으로 고혈압”이라고 말했다. 올해 71세로 역대 최고령 단식 정치인으로 기록될 손 대표는 물과 죽염만 섭취하며 단식을 이어 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가운 로텐더홀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며, 본청 지하 샤워장에서 씻고 있다고 한다. 급격히 추워진 날씨 탓에 당 관계자들이 전기장판과 난로 설치를 권유했지만 손 대표는 이마저도 거절했다. 손 대표는 서울신문 기자에게 “정치 개혁을 위해 이 정도 고생은 참을 수 있다”며 “거대 양당이 선거제 개편에 동의하기 전까진 단식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협상 대상인 민주당과 한국당 지도부는 손 대표를 직접 찾아가 단식 중단을 권유하고 있다. 손 대표의 단식이 시작된 6일에는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가 손 대표를 찾았고, 9일에는 김병준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농성장을 방문했다. 단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아직 손 대표와 만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YS, 전두환 독재 항의 23일간 단식 가장 유명한 정치인의 단식은 1983년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단식이다. 당시 YS는 5·18 민주화운동 3주년을 기념하고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항의하기 위해 곡기를 끊었다. 5월 18일부터 23일간 이어 간 투쟁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나라 정치인의 최장 단식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1990년에는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를 요구하며 단식을 했다. 13일간의 단식으로 DJ는 끝내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4년 8월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인 김영오씨와 9일간 ‘동조단식’을 했다. 가장 최근인 지난 5월에는 김성태 원내대표가 ‘드루킹 특검’ 수용을 촉구하며 9일간 식사를 하지 않았다. 집권 여당이 단식을 한 경우도 있다. 2016년 이정현 당시 새누리당(한국당 전신) 대표는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을 했다. 이근홍 기자 lkh2011@seoul.co.kr
  • 대법원 “전두환, 광주에서 재판받아야…공평성 문제 없어”

    대법원 “전두환, 광주에서 재판받아야…공평성 문제 없어”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를 받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판관할 이전신청을 대법원이 최종 기각했다. 이에 따라 전 전 대통령은 남은 재판을 광주에서 치러야 한다.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전날인 29일 전 전 대통령이 신청한 관할이전 기각 결정에 대한 재항고를 기각했다고 30일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출판한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을 목격한 고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은 ‘광주사태 당시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던 만큼 조비오 신부가 헬기사격을 목격했다는 것은 왜곡된 악의적 주장이다. 조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고 밝혔다. 이에 검찰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해 지난 5월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은 ‘고령으로 광주에 갈 수 없다’며 재판부 이송 신청을 하고, 서류 검토 등을 이유로 계속 연기신청했다. 첫 재판은 지난 8월 27일에서야 열렸다. 이후 전 전 대통령은 지난 9월 21일 광주고법에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며 관할이전 신청서를 제출했다. 전 전 대통령은 형사소송법 15조를 근거로 ‘공소제기가 토지관할을 위반했으며 범죄의 성질, 지방의 민심, 소송의 상황, 기타 사정으로 재판의 공평을 유지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주고법은 지난달 2일 이전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신청인이 주장하는 사유와 기록에 나타난 자료만으로는 본안사건이 제기된 광주지법에 재판의 공평을 유지하기 어려운 객관적 상황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즉시 항고장을 제출했지만, 대법원 역시 광주고법의 판단이 옳다고 판단했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문 대통령, 첫 일정은 ‘아르헨의 민가협’ 5월 어머니회 만남

    문 대통령, 첫 일정은 ‘아르헨의 민가협’ 5월 어머니회 만남

    “지금도 가해자들이 추가로 밝혀지면 가해자들을 처벌합니까? 피해자들에 대해 보상도 합니까?(문재인 대통령)” “지금도 가해자들을 색출하고 처벌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2400명의 가해자들을 처벌했고, 1200명이 구속됐습니다.(호크바움 국립역사기념공원 원장)” “혹시 사회 화합 차원에서 진상 규명을 그만하자고 하는 요구들은 없습니까?(문 대통령)” “아직도 시민사회는 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일부는 인권유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처벌을 기다리고 있고, 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직 평화가 정착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호크바움 공원장).”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첫 일정으로 29일(현지시간) 오후 국립역사기념공원을 방문해 헌화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한국 대통령의 아르헨티나 방문은 지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이후 14년 만이다. 국립역사기념공원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에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시 북쪽 라플라타 강변에 조성됐다. 당시 희생자는 약 3만명. 아르헨티나는 1955년부터 1983년까지 모두 8차례의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고, 특히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비델라 정권의 통치는 이른바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고 불릴 정도로 잔혹했다. 국가재건 목표를 내걸고 반체제 성향의 사회·노동 운동가와 지식인들을 납치, 불법구금, 고문, 살해를 자행했다.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헌화 후 아르헨티나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5월광장 어머니회’ 관계자들을 만나 위로했다. 5월광장 어머니회 관계자가 “30년 전에 손자가 실종됐다가 3년 전에 찾았다”고 말하자 문 대통령은 손을 꼭 잡으며 “한국에도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분들의 어머니 모임이 있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며 위로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도 과거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분단·전쟁을 거치고 또한 군부독재 하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는 불행한 경험을 했으며, 특히 1970∼80년대 군부독재를 딛고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많은 분과 이분들의 어머니와 가족들이 대의를 위해 헌신·희생했다”고 소개했다. ‘5월광장 어머니회’는 군부독재 시기 실종자 어머니들이 세운 단체다. 41년간 목요일마다 항의 집회를 통해 군사정권 만행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 왔으며, 민주화 후에도 과거사 바로 세우기에 동참하고 있다. 1994년 6월 한국 민주화가족운동실천협의회(민가협) 및 재야단체 초청으로 일부가 방한했고, 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이 2015년 6월 광주에서 열린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이들에게 민가협이 전해준 선물과 직접 준비한 나비 브로치를 전달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나비는 희망·행복을 뜻한다. 민가협이 준비한 선물은 1994년 6월 민가협 측과 5월 광장 어머니회원들이 만났을 때 찍은 사진과 당시 착용했던 보라색 수건과 부채 등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5만 고시생의 성지는 ‘인생 고시생’ 안식처 됐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5만 고시생의 성지는 ‘인생 고시생’ 안식처 됐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0회 신림동(대학촌과 고시촌) 편이 지난 24일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서울대학교 정문을 출발한 참석자들은 서울대 관악캠퍼스 안 예술관(서울미래유산)과 규장각을 둘러본 뒤 캠퍼스를 빠져나와 첫눈이 제법 소담스레 쌓인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또 서울미래유산이지만 지난해 폐차된 콜럼버스 스넥카와 폐가 일보 직전의 조각가 전뢰진 가옥에서 서울미래유산의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해 생각을 나눴다.고시촌과 녹두거리, 지난해 조성한 민주열사 박종철 거리,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자리를 옮긴 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에서 투어를 마무리했다. 1981년 이후로 가장 많은 양의 첫눈이 펑펑 쏟아진 날, 지하철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정문까지 버스가 끊기는 바람에 출발 시간이 30분 지연됐다.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가 시작된 이래 첫 ‘천재지변’이 발생했지만 참가자들은 불평 없이 미끄러운 고갯길을 걸어서 올라왔다. 그리고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첫눈을 즐겼다. 관악산은 어떤 장소의 역사를 갖고 있을까. 서울을 정치·지리학적으로 설명할 때 역사도심은 한양도성이 에워싸는 내사산(內四山·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 안쪽을 가리킨다. 도성 안에 내수(청계천)가 흐르고 외수(한강)가 도성 밖을 감싸고 있다. 도성 바깥의 북쪽 삼각산(해발 836m), 서쪽 덕양산(125m), 남쪽 관악산(629m), 동쪽 용마산(348m)을 외사산(外四山)이라고 부른다. 외사산은 내사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성저십리(성 밖 십리)와 외사산 영역은 다르다. 성 밖 십리의 북쪽은 비봉~정릉동, 동쪽은 미아리~용답동, 남쪽은 한강변, 서쪽은 역촌동~모래내를 이른다. 도성 밖 십리는 서울의 통치 영역인 반면 외사산은 경기도에 속했다. 한강 이북의 성 밖 십리와 외사산의 영역은 겹치는 곳이 많지만 한강 이남은 소외됐다. 서울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생산기지이자 문화적으로 서울권에 속하는 강남지역은 관악산 안쪽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속하지 않았다. 서울의 풍수개념에서 삼각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상산(祖上山)이요, 지리산에서부터 뻗어 오른 관악산은 임금이 아침마다 알현하는 조산(朝山)이었다. 서울의 남과 북을 잇는 축선(軸線)은 삼각산과 관악산 선상에 있다. 광화문네거리에서 보면 서울의 주산 백악산과 경복궁이 직선 라인에 있지 않은 걸 알 수 있다. 서울의 남북 간 축선은 삼각산~백악산~경복궁~숭례문~관악산으로 그어졌기 때문이다. 관악산 정상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듯했다.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라고 부르고, 관악(冠岳)이라고 썼다. ‘벼슬 산’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조선 개국 초 무학대사는 관악산이 화산(火山)이고, 목멱산(남산)은 목산(木山)이어서 관악산 화기가 목멱산 나무를 불쏘시개 삼아 도시를 태운다고 예언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고자 남대문(숭례문) 편액을 세로로 세워 부적을 삼았고, 남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파서 방화수를 채웠다. 불이 길을 따라 올라오지 못하도록 직선도로(세종대로)를 닦지 않고, 숭례문에서 지금의 남대문로를 따라 보신각까지 둘러간 뒤 운종가(종로)에서 꺾여 육조대로(광화문광장)에 이르도록 정(丁)자형 길을 닦았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의 광화문네거리에는 황토마루라는 낮은 언덕을 쌓아 관악산의 불길이 대궐에 미치지 못하게 막았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 해치 두 마리에게 광화문 앞을 지키게 했다. 모두 5겹의 방화장치를 할 정도로 관악산 화기를 두려워했다. 관악산 기슭 지금의 신림동, 봉천동과 금천구 시흥동 일대는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금주, 조선시대엔 금천이라고 불렸다. 고려 강감찬 장군의 5대조 강여청이 터를 잡았으며, 부친 강궁진은 고려 창업과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봉됐다. 장군이 태어난 관악구 낙성대동 218의 14번지 생가 앞마당에 탄생기념 삼층석탑을 세울 정도의 떵떵거리는 호족이었다. 신림동(新林洞)이라는 지명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에서 비롯됐다. 서울대 캠퍼스 안 자하연이라는 연못은 의성 김씨가 모여 사는 자하동이라는 집성촌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야영장 등 군사시설로 썼고, 1963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해방촌, 청계천, 이촌동, 대방동 등지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을 수용하는 철거민 정착촌을 형성했다. 1970년대까지 도시빈민의 무허가 건물이 난립하는 기반시설 부재의 우범지대였다. ‘돼지막’이라는 절간 분위기의 하숙방 몇 채가 고시촌의 원조이다. 1969년 서울대를 ‘한강 이남 수원 이북’으로 옮기는 관악캠퍼스 건립계획이 확정됐다. 태릉, 신갈 일대, 과천, 안양 등이 후보지 물망에 오른 끝에 관악컨트리클럽이 있던 골프장 용지가 낙점된 것이다. 일부에선 “서울대 종합화는 구실이고, 데모 막으려고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1975년 2월 28일 동숭동에서 관악산 중턱으로 옮긴 서울대의 시위와 저항정신은 1980~1990년대 민주화운동의 열풍으로 타올랐다. ‘관악산의 화염이 나라를 태울 것’이라던 무학대사의 예언이 들어맞은 셈이다. 서울대 정문과 신림동 일대를 중심으로 동맹휴업, 수업거부, 시위, 이념서클활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시인 김지하는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라고 노래했다.학사주점 ‘녹두집’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이용하는 주점, 인쇄소, 당구장, 서점, 사진관, 슈퍼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오늘날 유흥가로 바뀐 녹두거리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젊은 지성의 의식화 공간이요, 은신처였으며, 화염병 제조 공장지대였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의 하숙집이 있던 골목이었다. 1980년대 말 고시학원이 등장하고, 사법고시를 통해 법조인을 대거 선발하던 1990년대가 되자 전국의 고시생이 신림동으로 모여들면서 신림동 고시촌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녹두거리는 ‘녹두 베가스’로 불렸다. 녹두거리의 인문사회과학서점들은 서울대 학내 시위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1980~1990년대 ‘그날이 오면’, ‘전야’, ‘열린글방’ 등은 녹두거리의 서점 트로이카로 꼽힌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고시생이었고, 전국에서 몰려든 고시생 5만명이 북적거리던 호시절이었다. 흔히 신림동이라고 불리던 신림9동은 2013년 행정명이 바뀌면서 대학동이 됐다. 고시촌은 2008년 로스쿨 도입을 꼭짓점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고시생들은 떠나기 시작했고, 고시 특수 때 신축한 고시원과 원룸의 공실률은 40%를 넘어섰다. 수많은 서점, 헌책방, 복사집, 고시식당, PC방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관악구는 여전히 서울에서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동네다. 10집 중 3집 이상이 1인 가구다. 서울 전역의 고시원 6곳 중 1곳이 관악구에 있다. 고시생들이 떠난 자리에 공무원시험이나 국가고시 준비생, 외국인 유학생이나 취업자, 새내기 직장인, 일용직 노동자, 기초생활대상자들이 스며들었다. 집값이 싸고, 물가가 저렴하고, ‘혼밥 혼술’ 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창문이 없고, 발조차 뻗을 수 없는 1평짜리 고시원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취약계층의 안식처로 풍속도가 변했다. 2018년 신림동 고시촌은 등껍데기가 없는 달팽이처럼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민달팽이족’들이 잠시 머무는 밀실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단편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 “누구에게나 인생은 하나의 고시와 같은 것이 아닐까…인간은-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고 고시촌 시대의 아픔과 자기성찰을 얘기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후암동 (문화주택단지의 어제와 오늘) ●일시: 12월 1일(토) 오전 10시~낮 12시 30분 ●집결장소 : 지하철 1호선 서울역 5번 출구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앞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http://futureheritage.seoul.go.kr)
  • ‘민주화항쟁 성지’ 향린교회, 역사 속으로

    명동성당과 함께 1987년 민주화항쟁을 대표하는 명소인 향린교회(서울 을지로2가 164-11) 건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27일 개신교계와 향린교회 관계자 등에 따르면 향린교회는 최근 재개발 시행사에 현 건물을 매각하고 다른 곳에 교회 건물을 세워 옮기기로 확정했다. 지난 5월 교회 내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공동의회를 통해 교회 건물과 용지를 매각키로 한 결정에 따른 조치이다. 이에 따라 중구청에서 사업승인이 나면 본격적인 철거와 이주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향린교회는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 등 청년 12명을 중심으로 결성된 종교공동체가 1953년 5월 남산 기슭 고아원 터에 교회를 세운 게 시초다. 원래 특정 교파에 소속하지 않는 평신도 독립교회로 출발했다가 1959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했다. 남대문시장이 있는 남창동으로 옮겼다가 1967년 지금 자리로 이전했다. 교회 종탑이나 십자가를 건물 바깥에 세우지 않는 것을 비롯해 예배실 천장을 낮추고 고딕창 등의 장식적 요소를 일절 쓰지 않는 교회로 유명하다. 특히 1987년 5월 종교계와 정치계, 학생운동조직 등 각계 인사들이 모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한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본은 민주화 세력을 결집시켜 그해 6월 항쟁을 주도적으로 이끈 조직이다. 향린교회는 조만간 신도와 목회자 등 교회 내부의 의견을 수렴해 4대문 안으로 이전 장소를 확정할 예정이다. 특히 민주화 운동 등 역사성을 고려해 교회 건물 일부를 살리면서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을 만드는 방법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5·18 배후 북한군 배후‘ 퍼뜨린 지만원, 소송냈다 패소

    “5·18 배후 북한군 배후‘ 퍼뜨린 지만원, 소송냈다 패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북한이 배후 조종한 사건’이라는 가짜뉴스를 퍼뜨렸다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제재를 받은 지만원씨가 국가 상대 소송에서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8부(부장 이원)는 27일 지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 지씨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방심위의 제재가 타당하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지씨가 역사적 사실을 정면 부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당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의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맞서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사건이라는 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지고 있는데 원고의 글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북한이 배후 조종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런 점을 보면 원고의 게시글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지역, 집단, 개인을 비하하고 편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방심위가 네이버에 게시글 삭제를 요구한 것은 재량권 일탈로 보기 어렵다”고 결론내렸다. 방심위는 지씨가 자신의 네이버 블로그에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게시글을 올리자 지난 4월 네이버 측에 시정 요구를 해 게시글을 삭제했다. 방심위 규정상 역사적 사실을 현저히 왜곡하거나 특정 지역 주민이나 특정 집단을 차별·비하하는 글에 대해선 시정 요구할 수 있게 돼 있다. 지씨는 해당 글에서 “5·18은 북으로부터 파견된 특수군 600명이 또 다른 수백 명의 광주 부나비들을 도구로 이용해 감히 계엄군을 한껏 농락하고 대한민국을 능욕한 특수작전이었다”고 주장했다. 지씨는 2015년에도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가 방심위로부터 제재를 받자 소송을 냈다. 당시에도 법원은 지씨의 동영상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전두환,5·18때 전남도청 재진입작전 최종결정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5월 27일 시민의 최후 항거지였던 ‘옛 전남도청 재진압 작전(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을 두 차례에 걸쳐 점검한 뒤 최종 결정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전두환씨는 1980년 5월26일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소준열 전투병과교육사령관 겸 전남북계엄분소장을 보안사령부로 불러 도청 재진압 작전을 논의·점검한 것으로 나타났다. 5·18 기록관은 ‘12·12, 5·18 실록(1997년 5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발간·이하 실록)’ ‘제5공화국 전사’ 검찰 수사·재판 기록 등을 토대로 전씨와 보안사의 5·18 관련 행적을 분석해 23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전씨는 5월25일 오후 12시15분쯤부터 2시간가량 국방부 육군회관에서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등과 상무충정작전 지침을 검토하고 5월27일 새벽 도청을 재진압키로 했다. 5월26일 오전 전씨는 보안사에서 재진압 작전과 관련한 두 번째 회의를 가졌다. 정호용 특전사령관, 노태우, 백운택 9사단장 등 하나회 회원들(이상 육사 11기)과 소준열 전교사령관(육사 10기)이 함께했다. 전씨는 5월26일 두 번째 회의 자리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으로부터 작전 계획을 보고받고 작전에 필요한 가발(침투시 변장용)을 지원했다. 전씨는 당시 광주에 있던 정호용·소준열을 헬기로 호출, 회의에 참석케 한 것으로 5·18 기록관은 분석했다. 정 특전사령관은 5월26일 오후 2시쯤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충격용 수류탄과 항공사진을 받아 같은 날 오후 9시쯤 광주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후 20사단장, 3·7·11공수여단장을 소집해 장비를 분배하고 ‘침투 시작 시간’을 27일 오전 4시로 밝힌 뒤 각 여단의 임무를 재확인했다. 소 전교사령관은 정 특전사령관보다 5시간 먼저(26일 오후 4시) 광주비행장을 찾아 공수여단 장병들을 격려하고, ‘27일 새벽 0시1분부터 작전을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전씨가 5월26일 광주비행장과 전교사에 대기 중인 계엄군 사병들에게 중식용 소 7마리를 지원하는 ‘잔치판’을 열어주고 격려금 전달을 지시했다는 기록(505보안대 작성)도 있다. 5월 25일(한국감시단 상황보고 7호)·26일자 미국 기밀문서에도 ‘교착상태를 종료하고 시내로 진입해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알려진 육군 실력자 전두환은 이제 군사행동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고 한다. 도시를 재장악하기 위한 군사작전이 24~36시간 내 실시될 것이라고 함’이라고 나와 있다. 이같은 기록으로 미뤄 전씨가 재진압 작전 결정회의에 두 차례 참석해 사실상 작전을 이끈 것으로 5·18 기록관은 분석했다. 재진압 작전 때 도청에서 반독재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최후 항쟁을 벌이던 시민군 16명은 3공수가 쏜 M16 총탄에 희생당했다. 나의갑 5·18 기록관장은 “이들 기록과 달리 전두환 지시로 1982년 5월 발간된 5공화국 전사에는 시국 수습 방안, 전두환이 재진압작전 결정 모임에 두차례 참석한 사실 등을 누락시켰다. 반드시 규명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밝혔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한국당 러브콜 거절하는 정책 전문가들

    경제·외교 분야도 합류 요청에 일부 난색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 취임 후 정책 정당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자유한국당이 정책 자문을 구할 전문가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한국당 관계자는 18일 “‘격세지감’이란 말이 딱이다. 야당이 되고 나니 정보가 부족해지는 것은 물론 전문가로부터도 외면받는 상황”이라며 “한국당 간판으로는 누구도 나서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소연했다. 한국당이 친박·비박, 잔류파·복당파로 나뉘어 계파 갈등만 표출하는 등 지리멸렬한 상황이 지속되자 보수 성향의 학자마저도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전문가 고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전문가가 상대적으로 야당보다는 여당을 선호하는 것도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대표적인 것이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한국당 몫 조사위원 추천 미달 사태다. 국회는 5·18진상조사위를 꾸리기로 하고 특별법을 통과시켰지만 한국당이 조사위원 추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5·18진상조사위가 두 달째 출범조차 못 하고 있다. 한국당은 지난 8일 보도자료를 내고 5·18진상조사위원 추천을 위한 공모 절차를 밟기로 했다. 지난 8월 출범한 국가안보특별위원회도 마찬가지다. 위원장으로는 전옥현 전 국가정보원 제1차장을 임명했다. 전 전 차장은 특위 구성을 위해 보수성향의 외교안보 전문가에게 합류를 요청했지만 일부는 난색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지금 한국당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아 정중하게 거절했다”며 “아마 다른 전문가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김성태 원내대표는 지난달 30일 “한국당은 시장에 확산되고 있는 경제 위기와 각종 경제지표로 나타나고 있는 위기 징후에 적극 대응하고자 다양한 영역의 경제계 인사와 원로 경제학자 등 전문가그룹을 중심으로 비상시국경제회의를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비상시국경제회의를 구성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또 다른 한국당 관계자는 “김 원내대표가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을 강조하면서 경제 위기 관련 원탁회의를 하고 싶었지만 그게 생각대로 안 된 것”이라며 “다음달 11일까지가 임기인 김 원내대표한테 (경제 원로·전문가가) 줄을 서려 하겠나”라고 반문했다. 일부에서는 소위 ‘에이스급’ 전문가가 아닌 비주류나 정치권에 줄을 대려는 인사가 찾아와 난감하다는 분위기도 읽힌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여당 때와 달리 정보 부족과 검증 미흡으로 황망한 일이 속출하는 것도 한국당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김용태 사무총장은 지난 16일 김상곤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딸의 대학 입학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의혹을 제기했다가 2시간여 만에 공식 사과하는 해프닝까지 연출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당의 중장기적 정책 밑그림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조언과 자문이 필요하지만 현재 한국당의 내분 상황에서는 이런 것이 무리인 것 같다”며 “앞으로도 직접 참여보다는 관망하는 경향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헌법소원까지 개입한 법원행정처

    강제징용, 전교조, 통합진보당 등 여러 재판에 개입한 의혹을 받는 법원행정처가 헌법재판소 사건까지 개입하려 한 정황이 확인됐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조합원들이 제기한 업무방해 헌법소원 사건이다. 이 사건은 2012년 2월 접수 뒤 현재까지 결론이 나지 않아 헌재에서 가장 오래된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행정처는 2015년 7월부터 헌재의 주요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의혹을 받고 있다. 헌재 파견 판사를 통해서다. 한일협정 헌법소원, 민주화운동 보상, 과거사 소멸시효, 형사소송 성공보수 무효, GS칼텍스 사건 등 당시 법조계가 주목하던 사건들이다. 이런 내용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 적시돼 있다. 대부분은 정보 수집으로 끝났지만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업무방해 사건은 청와대를 통해 압박을 시도한 정황이 나온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간부들이 2012년 업무방해와 관련해 헌소를 제기했다. 이들은 앞서 2010년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뒤 특근을 거부했고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 전원합의체는 이미 특근 거부 등에 대해 유죄라고 판결한 상태였다. 행정처는 헌재 평의에서 한정위헌이 다수였다는 취지의 보고를 받은 후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한정위헌 결정이 나올 경우 대법 판결과 배치되고, 최고법원의 위상이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임 전 차장은 2015년 11월 사법정책실 심의관에게 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다. 이 보고서에는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을 하면 대법 판결의 법률 해석을 전면 부정하는 최초의 사례로 사법기관 갈등을 부추겨 두 기관의 정면충돌을 초래할 우려가 있고, 결국 국가 안정의 저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업무방해 한정위헌 논리는 민주노총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숙원 사업으로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것이고, 불법 파업이 폭증해 산업계와 재계의 부담이 급증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임 전 차장은 당시 박병대 법원행정처장,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보고한 뒤 청와대 관계자에게 해당 문건을 전달한 혐의를 받는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헌재 소송까지 개입한 법원행정처…“민주노총 숙원사업으로 불법 파업 폭증”

    헌재 소송까지 개입한 법원행정처…“민주노총 숙원사업으로 불법 파업 폭증”

     강제징용, 전교조, 통합진보당 등 여러 재판에 개입한 의혹을 받는 법원행정처는 헌법재판소 재판까지 개입하려 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조합원들이 제기한 업무방해 헌법소원 사건이다. 행정처는 청와대에 청탁을 넣었고, 2012년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은 현재까지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행정처는 2015년 7월부터 헌재의 주요 사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한 의혹을 받고 있다. 헌재 파견 판사를 통해서다. 한일협정 헌법소원, 민주화운동 보상, 과거사 소멸시효, 형사소송 성공보수 무효, GS칼텍스 사건 등 당시 법조계가 주목하던 사건들이다. 이런 내용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 적시돼 있다.  대부분은 정보 수집으로 끝났지만,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조의 업무방해 사건은 청와대를 통해 압박을 시도했다. 현대차 전주공장 비정규직 노조 간부 강모씨 등 4명이 2012년 업무방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사건이다. 이들은 2010년 3월 비정규직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뒤, 특근을 거부했고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미 특근 거부 등 합법 파업에 대해 유죄라고 판결한 상태였다.  법원행정처는 헌법재판관 평의에서 한정위헌이 다수였다는 취지의 보고를 받은 후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한정위헌 결정이 나올 경우 대법원의 판결과 배치되고,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위상이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임종헌 차장은 2015년 11월 사법정책실 심의관에게 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다. ‘업무방해죄 관련 한정위헌 판단의 위험성’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는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으로 인해 불법파업에 대한 형사처벌 공백이 발생해 결국 국가 경제가 급속히 악화될 것’이라는 핵심 내용이 담겼다.  이 보고서에는 헌법재판소가 한정위헌 결정을 하게 된다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법률해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최초의 사례로 사법기관 갈등을 부추겨 대법원 헌법재판소의 정면충돌을 초래할 우려가 있고, 결국 국가 안정의 저해요소로 작용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또한 업무방해죄에 대한 한정위헌 논리는 민주노총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숙원 사업으로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것이고, 불법 파업이 폭증해 산업계와 재계의 부담이 급증한다는 내용도 세세히 담겨 있었다. 임종헌 차장은 당시 박병대 법원행정처장,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보고한 뒤 청와대 관계자에게 문건을 전달한 혐의를 받는다.  실제로 2016년 헌재가 업무방해 헌법소원 사건에 대해 한정위헌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예측이 법조계에서 나왔다. 당시 헌재는 이례적으로 행정처 의견서까지 받았다. 2015년 11월 행정처는 ‘헌재가 한정위헌을 결정하면 안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헌재는 2012년 2월 접수된 업무방해 헌법소원 사건을 2015년 12월 이후 별다른 심리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현재 헌재에서 가장 오래된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검찰은 당시 청와대가 헌재에 업무방해 사건 관련 지시를 내렸다는 점은 밝혀내지 못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남영동 대공분실 첫 체포자는 中 실상 소개한 故리영희 교수

    남영동 대공분실 첫 체포자는 中 실상 소개한 故리영희 교수

    ‘남영동 대공분실’에 최초로 체포된 이는 고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로 확인됐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행됐던 고문 피해자 384명에 관한 실태조사를 담은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13일 밝혔다. 보고서는 수사 피해자 384명의 명단과 고문 피해자 54명의 육성 증언, 고문 피해자 8인에 관한 심층 인터뷰를 수록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체포 또는 구속 수사한 정확한 인원과 명단은 지금껏 알려진 바 없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공식명칭은 물론 소속, 조직체계, 종사자 현황 등을 숨긴 채 비밀리에 운영됐기 때문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최초로 체포한 이는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다. 중국 사회의 실상을 소개한 책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 비평사)가 문제가 돼 1977년 1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이후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80년 신군부 집권에 맞춰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 언론인, 재야운동가를 마구잡이로 체포해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경기도 경찰국에 근무하며 출장수사를 다녔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도 1980년 3월에 남영동 대공분실로 왔다. 이근안은 1985년 당시 고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 의장을 비롯해 김태홍, 노향기 등 기자협회 간부 등을 고문했다. 이곳에서 발생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기념사업회 측은 “앞으로 제보와 더 많은 문헌과 기록, 증언을 수집해 실체를 더 구체화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이한열 열사 학술제 생긴다

    1987년 민주화 운동에 목숨을 바친 이한열 열사의 삶과 그의 영향을 다루는 학술제가 처음 열린다. 이한열기념사업회와 연세대 이한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오는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경영대 강의실에서 ‘이한열과 1987년 6월항쟁’을 주제로 제1회 이한열 학술제를 개최한다고 7일 밝혔다. 그동안 여러 단체와 학회 등이 1987년 6월항쟁이나 이 열사를 학술적으로 다룬 적은 있었지만, 열사의 이름을 딴 학술제를 개최하고 이를 정례화하는 것은 처음이다. 학술제는 매년 가을 개최될 예정이다. 이경란 이한열기념관장은 “지금까지 이 열사를 기리는 건 전시회 등 문화적 활동이 위주였는데 그런 작업도 학술적 기반이 필요하다”면서 “지금이야 기억에 의지해서 문화제 등을 열 수 있지만, 후대에는 어떤 준거가 필요할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이번 학술제에서는 가톨릭대에서 강의하는 김상숙 박사와 김대중도서관장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발제를 맡고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조성대 한신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선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정경두 국방 “5·18계엄군 성폭행 사죄”

    정경두 국방 “5·18계엄군 성폭행 사죄”

    피해 여성 치유·명예회복에 최선 가해자·소속부대 조사 권고 수용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7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성폭행 사실이 확인된 것과 관련해 “정부와 군을 대표해 머리 숙여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국방부에서 직접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방부 장관이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사과하는 것은 지난 2월 당시 송영무 장관이 5·18 때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무장출격 대기 사실이 밝혀진 뒤 사과한 데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앞서 국가인권위원회·여성가족부·국방부가 공동 구성한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은 지난달 31일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행 피해 총 17건과 연행·구금된 피해자와 일반 시민에 대한 성추행·성고문 등 여성 인권침해 행위를 다수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5·18 성폭력’ 사과문 전문

    ‘5·18 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에 관한 정부 조사에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행과 추행, 성고문 등 여성인권 침해행위가 확인됐습니다. 피해자는 10대에서 30대의 어린 학생과 젊은 여성들이었고,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나섰거나 가족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심지어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여학생, 임산부도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국민의 평범한 일상을 바랐던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여성의 인권을 짓밟는 참혹한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38년 동안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은 물론 여성을 향한 성폭력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들과 그 가족의 절망과 분노는 더 커졌습니다. 무고한 여성분들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상처와 고통을 드린 점에 대해 정부와 군을 대표하여 머리 숙여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계엄군 지휘부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무고한 여성시민에게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 것을 통렬히 반성합니다. 군은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고 국민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군의 책무이자 도리입니다. 국방부는 앞으로 출범하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에 적극 협조할 것입니다. 군사정부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나섰던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통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여성들의 상처를 위로하는 데에 인력과 자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피해 여성들의 명예 회복과 치유에도 적극 나서겠습니다. 가해자 또는 소속부대를 조사하고 5·18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상 진상규명의 범위에 ‘성폭력’을 명시할 것을 제언한 진상조사단의 권고를 엄중히 받아들여 군에 의한 성폭력의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계엄군과 국가권력으로부터 고통을 받으신 모든 시민과 여성들께 거듭 사죄드립니다.
  • 정경두 장관, ‘5·18 계엄군 성폭행’에 “머리 숙여 사죄”

    정경두 장관, ‘5·18 계엄군 성폭행’에 “머리 숙여 사죄”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성폭행한 사실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정 장관은 7일 ‘5·18 계엄군 등 성폭력 조사 결과에 따른 사과문’을 발표하며 “5·18 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에 관한 정부 조사에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행과 추행, 성고문 등 여성 인권 침해행위가 확인됐다”고 밝힌 후 머리를 숙였다. 그는 “계엄군 지휘부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으로 무고한 여성 시민에게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준 것을 통렬히 반성한다”고 말했다. 특히 “가해자 또는 소속부대를 조사하고 5·18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상 진상규명의 범위에 ‘성폭력’을 명시할 것을 제언한 진상조사단의 권고를 엄중히 받아들여 군에 의한 성폭력의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군사정부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나섰던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통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여성들의 상처를 위로하는 데에 인력과 자원을 아끼지 않겠다”면서 “피해 여성들의 명예회복과 치유에도 적극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앞서 국가인권위원회·여성가족부·국방부가 공동 구성한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은 지난달 31일 활동을 종료하면서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행 피해 총 17건과 연행·구금된 피해자와 일반 시민에 대한 성추행·성고문 등 여성인권침해행위를 다수 발견했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방부 장관이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사과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2월 송영무 전 국방부 장관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무장 출격 대기 사실이 밝혀지자 이에 대해 사과한 바 있다. 아래는 정 장관의 사과문 전문이다. ‘5.18 계엄군 등 성폭력 조사 결과에 따른 사과문’ ‘5·18 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에 관한 정부 조사에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행과 추행, 성고문 등 여성인권 침해행위가 확인됐습니다. 피해자는 10대에서 30대의 어린 학생과 젊은 여성들이었고,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나섰거나 가족을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심지어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여학생, 임산부도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국민의 평범한 일상을 바랐던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여성의 인권을 짓밟는 참혹한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38년 동안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은 물론 여성을 향한 성폭력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들과 그 가족의 절망과 분노는 더 커졌습니다. 무고한 여성분들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상처와 고통을 드린 점에 대해 정부와 군을 대표하여 머리 숙여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계엄군 지휘부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으로 무고한 여성시민에게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 것을 통렬히 반성합니다. 군은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고 국민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군의 책무이자 도리입니다. 국방부는 앞으로 출범하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에 적극 협조할 것입니다. 군사정부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나섰던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통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여성들의 상처를 위로하는 데에 인력과 자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피해 여성들의 명예 회복과 치유에도 적극 나서겠습니다. 가해자 또는 소속부대를 조사하고 5·18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상 진상규명의 범위에 ‘성폭력’을 명시할 것을 제언한 진상조사단의 권고를 엄중히 받아들여 군에 의한 성폭력의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계엄군과 국가권력으로부터 고통을 받으신 모든 시민과 여성들께 거듭 사죄드립니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 [서울포토] ‘5.18 계엄군 성폭행’ 사과하는 정경두 장관

    [서울포토] ‘5.18 계엄군 성폭행’ 사과하는 정경두 장관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성폭행을 자행했다는 사실이 국가기관 공식 조사로 확인된 것과 관련해 사과문을 발표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이낙연, 張 대변인 같다” vs “명예훼손” 또 난타전… 뒷전으로 밀린 예산 심사

    이장우 “사의 표명한 적 있나” 질의에 김동연 “고용상황 책임 의사 전달했다…張실장 연말 경제 호전 전망 동의 안 해”李총리 “5·18 계엄군 성폭행 관련 사과” 2019년도 예산안 심사를 위해 6일 열린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가 전날 여야 의원 간 주먹다짐 직전까지 간 데 이어 이날도 정치 공방의 장으로 변질돼 정작 중요한 정부 예산 심사는 뒷전으로 밀렸다. 발단은 이은재 자유한국당 의원이 이낙연 총리에게 “교체설까지 나도는 장하성 실장이 ‘시장에 경제를 맡길 수 없다’고 강변했다”며 “청와대는 민심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고 질타하면서 시작됐다. 이 의원이 “시장에 경제를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 성장이 이렇게 된 것 아니냐”고 쏘아붙이자 이 총리는 “지난 수십년 동안 시장에만 맡겼던 결과는 어땠느냐”고 반문했다. 이 의원이 “그렇게 토씨 하나 갖고 총리께서 국민 앞에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이 총리도 지지 않고 “의원님도 토씨 하나로 모종의 의도를 보내고 있지 않느냐”고 응수했다. 비위가 상한 이 의원이 “총리께선 무슨 장하성 실장 대변인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 총리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된다. 의원님께서도 의도를 내보이셨다. 저희 정부는 시장을 무시하지 않고 있다”고 맞섰다. 이 의원과 이 총리 사이의 설전이 오가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비판 수위가 도를 넘었다고 반발했다. 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의사진행발언을 신청해 “국무위원에게 자극적인 언사, 대변인이라는 표현도 쓰는데 이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한국당 예결위 간사인 장제원 의원이 “경제를 망쳐놓은 각료에 대한 야당 의원의 비판에 여당은 경청해야 한다”며 “조금만 아프면 각료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는 건 야당 질의의 연속성을 끊으려는 의도”라고 발끈했다. 같은 당 권성동 의원도 “여당도 국민의 목소리를 좀더 적극적으로 정부에 전달해야지, 감싸는 게 여당 역할이 아니다”라며 “우리도 감싸다가 망했다. 너무 감싸지 말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교체설이 나오는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당 이장우 의원이 ‘사의를 표명한 적 있느냐’는 질의에 “현재 고용 상황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런 의사를 전달했다”고 답했다. 김 부총리는 ‘연말에는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장하성 정책실장의 견해에 동의하냐’는 질문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정책실장은 자신의 희망을 표명한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이 총리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성폭행 사실이 드러난 것과 관련해 “1980년 5월 불의하게 동원된 국가권력이 여성의 삶을 짓밟았다”며 “피해자를 비롯해 광주 시민께도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5·18 3단체 공법단체로 지정 위한 법률안 발의

    5·18민주화운동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를 각각 공법단체로 지정하는 내용의 법 개정이 추진된다. 민주평화당 장병완(광주 동남갑) 의원은 이같은 내용이 담긴 ‘국가유공자 등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고 4일 밝혔다. 4·19민주혁명회 등 다른 유공자 단체와 달리 5월 3단체의 현재 법적 지위는 민법에 근거한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이에 따라 공유재산을 무료로 사용할 수 없고 사업비·운영비 등도 국가에서 지원받지 못해 왔다. 이들 단체는 지난 10여년간 공법단체 전환을 추진해왔으나 정부는 3개 단체를 하나로 통합할 것을 요구하며 공법단체 지정을 미뤄왔다. 장 의원은 “오랫동안 5·18을 기념해온 단체들의 고유한 역사성을 인정해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며 “법 개정을 통해 다른 국가유공자 단체와의 형평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사설] 확인된 5·18 성폭행, 한국당 진상조사위 협조해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여성 시위자들을 성폭행하고 성고문한 사실이 확인됐다. 어제 국가인권위원회, 여성가족부, 국방부가 공동 구성한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의 발표에 따르면 계엄군이 자행한 성폭행 사례는 최소 17건이었다. 국가 차원의 조사로 그간의 의혹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무려 38년 동안 진상이 가려졌으니 그날의 상처에는 딱지조차 앉을 수가 없었다. 공동조사단은 5·18 계엄군에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이들이 충격적인 증언을 하면서 지난 6월 출범했다. 여고생이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일상을 회복하지 못해 승려가 됐고, 음대생이 교생실습 현장에서 계엄사 수사관에게 고문을 받고 성폭행을 당했다는 증언들이었다. 이후 5개월 동안 조사단이 피해자 접수 및 면담, 관련 자료 분석 등을 거쳐 중복 사례를 제외하고 새롭게 파악한 14건을 합해 성폭행 피해는 최소 17건으로 집계된 셈이다. 시위에 가담하지도 않은 여성 시민들에게 성추행 등 인권침해 행위를 저지른 사례도 다수 확인했다. 성폭행 피해자가 대부분 10~30대였던 데다 총으로 위협받으며 여러 명의 군인에게 유린됐다니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악몽을 떨치지 못해 여전히 정신병원에서 고통받는 이들도 있다. 차마 용기가 없어 침묵하는 사례가 얼마나 더 많을지는 알 길이 없다. 가해자에 대한 조사 권한이 없는 공동조사단으로서는 이 정도의 피해 윤곽을 잡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공동조사단은 조사한 자료 일체를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시행으로 출범할 진상조사규명위원회(진상조사위)로 넘긴다. 조사 권한이 부여된 진상조사위는 가해자의 이름, 소속 부대 등의 세부 사항을 낱낱이 입증할 수 있어 가해자 처벌이 가능해진다. 무고한 시민의 인격과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국가 폭력의 잔혹함을 비로소 대면하고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활동 기한이 최대 3년으로 제한된 진상조사위의 발족은 그래서 하루가 급하다.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알토란 같은 시간이 이미 49일이 지났다. 여야 합의로 출범시키기로 해놓고 이제 와서 자유한국당이 할당된 위원 3명을 추천하지 않아 발목이 잡혔다. 국가 권력에 만신창이가 된 인권이 진상 규명을 학수고대하는데 대체 무슨 명분으로 미적거리며 비난을 자초하는가. 상식선에서 납득할 만한 인사를 추천하지 못하겠거든 한국당은 추천권을 차라리 포기하라. 진상조사위를 하루라도 표류하게 하는 것은 역사의 정의를 거스르는 패착이다.
  • [세종로의 아침] 시월의 마지막 밤에는/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시월의 마지막 밤에는/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용이 옵빠, 이날 벌어서 일 년을 산다’는 우스갯소리도 일 년에 딱 한 번이다. 바로 시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하루다. 가수 이용씨는 1981년 ‘국풍81’이라는 가요제를 통해 가수가 됐다. 5공화국 정권의 기반을 다져 가던 전두환 정부가 급조해 낸 이른바 ‘국책 가요제’다.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이자 ‘쓰리 허’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허문도씨가 주도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년을 전후해 군사정권에 대한 학원가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학생 대중의 의식을 분산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전국 194개 대학 6000여명의 학생들과 전통 민속인 및 연예인 등이 참여해 5월 28일부터 닷새 동안 여의도광장과 고수부지에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총 659차례 공연을 벌였는데, 주최 측에서는 연인원 1000만명이 참여했다고 떠들어 댔다. 여기에서 ‘바람이려오’라는 곡으로 금상을 받아 가요계에 진출한 이용씨는 이듬해인 1982년 노랫말이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으로 시작되는 곡으로 일약 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작사가가 자신의 9월 마지막 밤 이별 경험을 토대로 노랫말을 썼는데, 노래 발표가 늦어지면서 10월의 마지막 밤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개인적인 탈이 쌓이는 바람에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이용씨의 이 노래는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 번씩은 흥얼거리는 국민 애창곡이 됐다. ‘잊혀진 계절’이 발표된 1982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제법 굵직한 사건들이 꽤나 많이 일어난 해다. 정치적으로는 과연 그들의 바람대로 5공 정권이 자리를 잡았고, 사회적으로는 1945년 9월 광복 후 미군이 점령하면서 생겨난 야간통행금지가 37년 만에 해제돼 ‘밤 문화’가 시작됐다. ‘잠재적 광주’를 달래기 위해 앞세운 군사정권의 우민화 도구인 이른바 ‘3S’가 톡톡히 역할을 했다. 순박했던 국민들의 말초신경을 마비시키려는 노림수는 적중했다. 프랑스의 성애영화를 베껴 국산 에로영화의 효시가 된 ‘애마부인’도 1982년에 제작·개봉돼 4개월간 무려 31만명의 관중을 불러모았다. 스포츠도 한 몫을 했다. 시월의 마지막 밤처럼 느닷없이 프로야구가 탄생했고 1년 뒤 프로축구, 프로씨름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특히 프로야구는 영남 대 호남이라는 지역 간 대립구도를 더욱 심화시켰다. 지역 연고지를 기반으로 하는 종목의 속성 덕분이었다. 10월 31일은 서양의 ‘핼러윈데이’이기도 하다. 이 역시 속성은 ‘이별’이다. 일 년이 열 달로 이뤄진 달력을 사용하는 켈트인들에게 일 년의 마지막 날이다. 죽은 자들이 내세로 가는 이날 밤 농작물을 죽음의 신에게 바치면서 평화를 빌었다. 속을 파낸 호박 호롱에 불을 밝혀 이별하는 영혼들에게 저승길을 안내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분장해 악령으로 하여금 산 자와 죽은 자를 헷갈리게 했다. 한 해의 마지막 계절로 가는 길목 시월의 끄트머리는 서럽지만 아름다운 이별, 남은 날들에 대한 마무리가 시작되는 때이기도 하다.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다시 튼 지금은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할 남은 것, 남은 자’들까지 빼놓지 않고 챙겨야 할 때다. cbk91065@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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