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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회찬이 국회에서 남긴 말 그리고 꿈…“촛불 이전의 낡은 정치를 반복하지 말자”

    노회찬이 국회에서 남긴 말 그리고 꿈…“촛불 이전의 낡은 정치를 반복하지 말자”

    노회찬 의원의 영결식이 지난 27일 국회 본청 앞에서 국회장으로 엄수됐다. 노 의원이 국회에서 활동한 기간은 2004~2008년 17대, 2012~2013년 19대, 2016~2018년 20대까지 6년여에 불과하지만 그가 국회에서 수립한 정책과 수행한 발언들은 반향이 컸다. 특히 그는 국회 본회의에서 모든 국회의원을 상대로 때로는 냉철하고 논리적으로 때로는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노동자와 서민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17대에선 국보법 폐지에 앞장“국가보안법은 이미 사망. 냄새나는 시체를 치우는 일만 남아” 노 의원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돼 활동했던 17대 국회의 본회의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로 언급했다. 당시는 노무현 정부와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국보법 폐지를 추진하고 야당인 한나라당이 강력 반발하면서 국회 내 이념 갈등이 심각했던 때다. 2004년 9월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노 의원은 “지난 시절 국가보안법이 지킨 것은 국가안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독재세력의 정권안보였다”며 “실로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국민화합을 저해하는 것은 바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수백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망국적인 지역감정 조장, 그리고 날로 심각해지는 빈부격차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이 나라의 안보는 우리 일하는 국민들이 지킨다. 그리고 이 나라의 안보는 우리 국민들의 화합과 단결이 지킬 수 있다”며 “많은 국민들의 불신을 받는 이 정치가 계속되는 한 이 나라의 안보 역시 위태롭다고 아니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열린우리당의 국보법 폐지안 기습 상정을 막기 위해 한나라당 의원들이 법제사법위 회의장을 점거하고 있었던 2004년 12월 8일 본회의에서 노 의원은 한나라당 의원을 향해 “이미 역사의 심판대에서 사망선고를 받은 국가보안법을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 의원은 “수명이 다한 당에 계신 분들, 이제 그만 역사의 뒷골목에서 배회하지 말라”면서 “국가보안법은 이미 사망했다. 냄새나는 시체를 치우는 일만 남았다. 왜 시체를 붙들고, 시체 옆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며 촌철살인의 화법으로 쏘아붙였다. 노 의원 특유의 풍자는 본회의에서도 빛을 발했다. 2004년 11월 12일 “노무현 정부와 정책이 좌파 편향적”이라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공세를 펼치며 여야 의원 간 고성이 오가던 때 노 의원은 ‘뼈있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노 의원은 “이제 좌파 정당 이런 얘기 좀 하지 말라. 좌파 정당 지금 조용하게 가만히 있다”라며 “그런데 왜 좌파 아닌 사람들끼리 그런 애기를 하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지금 짝퉁을 가지고 명품이라고 하면 허위사실 유포죄다. 그리고 짝퉁이면서 명품인 척하는 것도 사기죄”라며 “명품은 따로 지금 조용히 있다”라고 말해 회의장 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땐 촌철살인의 통렬한 비유 빛나 “박근혜식 국정을 중단해야”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2016년 말 노 의원은 국회 최전선에서 박근혜 정부와 맞섰다. 2016년 11월 11일 최순실 게이트 등 진상규명에 대한 긴급현안질문에서 노 의원은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를 상대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황 총리가 박 대통령의 하야, 거국내각 수립 등에 대해 “국정에 중단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답을 되풀이하자 노 의원은 “국정의 중단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박근혜식 국정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어 “20만 명이 광화문에 모여도 마이동풍이라는 것이다. 대통령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현재 대통령의 상태다”라고 덧붙였다. 노 의원은 최순실씨가 청와대와 내각 인사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해 “최순실이가 제청해 가지고 결국에는 대통령이 임명한 것”이라며 “실질적 제청권을 행사한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최순실씨 밖에 없다. 총리도 행사 못한 권한이다”라고 황 총리를 몰아붙였다. “대한민국에 실세 총리가 있었다면 최순실”이라는 노 의원의 말에 황 총리가 “속단할 일이 아니다”라고 답하자 노 의원은 “속단이 아니라 뒤늦게 저도 깨달았다. 지단(遲斷)이다”라며 통렬한 비유로 맞받아쳤다. 마지막까지 경제적·사회적 격차 해소와 정치개혁한반도 평화 실현 강조했던 노회찬 노 의원은 20대 국회의 정의당 원내대표로서 수행한 세 번의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경제적·사회적 격차 해소와 정치 개혁, 그리고 한반도 평화 실현을 거듭 강조했다. 그의 마지막 본회의 연설인 지난 2월 6일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는 국회가 자영업자·영세자영업자를 위한 대책을 수립하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것을 촉구했다. 노 의원은 “바로 1년 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시민혁명의 현장에서 우리 국민들이 가장 많이 들고 있었던 손팻말은 ‘박근혜 퇴진’ 그리고 ‘이게 나라냐’ 두 가지”였다며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박근혜 퇴진’은 불가역의 현실로 실현됐다”고 말했다. 이어 “반면 ‘이게 나라냐’라는 물음 앞에 대한민국은 아직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노 의원은 최저임금 인상과 더불어 중소기업·영세자영업자를 위한 대책을 국회가 조속히 수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을 회피하는 것으로 자영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갑질에 단호한 태도를 보여 주었나? 영세 자영업자를 위한 상가 임대차보호법은 도대체 왜 아직도 국회 법사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인가? 건물주의 임대료 폭리에 대해서는 무슨 조치를 취했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최저임금 인상이나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을 넘어서는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로드맵의 수립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노 의원은 “공정한 사회는 공정한 정치로부터 가능하다”며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제안했다. 그는 “2016년 총선에서 저희 정의당은 7.2%의 국민 지지를 받았으나 국회 의석수는 전체의 2%밖에 차지하지 못했다”며 “그러나 소선거구제의 수혜를 온몸으로 받는 거대정당들은 자신이 받은 지지보다 훨씬 많은 국회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에 정확히 반영되는 선거제도, 즉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야말로 공정한 정치를 만드는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남한 내 전술핵 배치, 북한에 대한 선제 공격 등이 언급되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던 당시 노 의원은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반대 결의안’을 국회가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예전과 같이 종북몰이나 색깔론, 핵을 운운하며 표를 계산할 때가 아니다”라며 “여야와 보수 진보 모두가 평화와 공존이라는 당연한 가치를 위해 힘을 합칠 때”라고 강조했다. 노 의원이 마지막으로 국회에 제안한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 처리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은 5개월이 지나고 그가 떠난 현재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다. 4·27 남북정상회담과 6·12 북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 평화의 문이 열렸지만 국회는 여전히 판문점선언 지지 결의안조차 채택하지 못하고 있다. 노 의원은 연설 말미에 “기원전, 즉 B.C 역사가 되풀이될 수 없듯이 Before Candle, 즉 촛불 이전(B.C) 시절도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며 “촛불 이전의 낡은 정치를 반복하지 말자. 정치가 스스로 개혁할 때 비로소 나라도 나라답게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기자칼럼]노회찬 의원이 말했던 “진보가 희망인 이유”

    [기자칼럼]노회찬 의원이 말했던 “진보가 희망인 이유”

    27일 고(故)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국회 영결식이 열렸습니다. 평생을 한국의 민주화와 진보정치에 바쳤던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 의원을 기억하며 그가 2009년 당시 ‘서울신문’ 기자들의 공부모임이었던 ‘연대와 희망’ 초청강사로서 세 시간 가까이 진솔한 얘기를 들려줬던 얘기를 다시 꺼내놓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노 의원이 초청강연을 했던 2009년 1월 16일 당시 그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1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뒤 진보신당 공동대표로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2008년 1월부터 서울 노원(병)에서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할 당시 겪었던 얘기로 자신의 17대 의정활동에 대한 반성을 시작했습니다. 선거를 준비하면서 노 의원은 유권자들한테 받을 예상 질문을 뽑아서 맞춤형 답변을 열심히 연습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건 헛수고였습니다. 선거까지 석 달 동안 아무도 그가 준비했던 예상질문이었던 “너무 과격한 거 아니냐” “너무 한쪽으로 편향된 거 아니냐” “중간에서 폭넓게 해야 하지 않느냐” “왜 밤낮 데모만 하느냐”를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만 많이 받았답니다.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서민들 먹고 살게 해달라”였고, 그 다음이 “서민을 위해 앞으로도 열심히 일해달라”는 것이었답니다. 노 의원에게 특히나 충격적이었던 건 자신이 몸담았던 민주노동당이 유권자들에게 서민의 대변자로 비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노 의원은 17대 국회 당시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넓은 현대차 공장에서 옷차림만 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섞여서 같은 일을 하는데 복장이 다른 겁니다. 노 의원은 “정규직들은 우리를 보면 장갑을 벗고 반갑게 악수를 하며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눈다”면서 “비정규직은 장갑 안벗는다.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도 외면하기도 한다”고 털어놨습니다. 노 의원으로선 서운할 법도 한 그런 상황은 왜 벌어졌던 것일까요. 노 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일은 똑같은데 월급은 절반 밖에 안된다. 정규직노조가 파업이라도 하면 비정규직은 일감이 없어서 굶어야 한다. 정규직노조는 2층짜리 단독건물을 노조사무실로 쓴다. 상근자도 엄청 많다. 비정규직노조 사무실은 공장 한켠에 한 평 정도 된다. 노조 설립하고 나서 1년까지는 유선전화도 회사에서 안 놓아줬다고 한다.” 결국 비정규직 입장에선 정규직노조는 남의 편입니다. 민주노총은 정규직노조 집합체입니다. 민주노총이 지지하는 민노당은 당연히 자기들 편이 아닌 겁니다. 노 의원은 그런 인식이 굳어지도록 방치한 책임을 크게 느꼈습니다. 노 의원은 “민노당이 정말로 당시에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인식됐다면 지난 대선 지지율이 20%는 거뜬했을 것”이라면서 “돌이켜보면 진보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준비 부족, 정치력 부족, 전략 부족… 그런 걸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 의원은 2000년 1월 창당한 민노당 초기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민노당은 놀라운 성장세를 이어갔습니다. 노 의원은 “민노당이 창당 당시 당원 7000명에서 1년만에 두배, 2년차에 3만, 3년차에 5만, 4년차에 7만, 나중에 10만 됐다”면서 “지지율도 처음엔 1~2%였는데 17대 총선에서 정당투표로 13.4%까지 기록했고 그해 말 지지율이 18~19%까지 나왔다”고 회상했습니다. 노 의원은 “13%라는 건 국민들 사이에서 진보를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꽤 있다는 걸 보여준다”면서 “문제는 그걸 더 끌어내는 것과, 고정지지로 만드는 거였는데 민노당 의정 4년에 결과적으로 제대로 못하니까 국민들이 지지를 철회한 것이지 국민이 보수화된 게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 의원은 17대 국회 4년 동안 가장 아쉬운 대목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첫번째는 민노당 17대 총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공약을 제대로 끌고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는 “국민들은 그 공약의 실현가능성을 본 게 아니라 그런 얘기가 계속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면서 “문제는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를 민노당의 브랜드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2004년 원내 진출 이후 1년 내내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벌인 국가보안법 판에 휩쓸렸다”면서 “2005년 가을에야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관철 위한 본부를 만들었다. 노력도 별로 안하고 타이밍도 놓쳐버렸다”고 아쉬워했습니다. 2004년 당시 한창 시끄러웠던 국가보안법 논쟁도 아쉬운 대목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고수하자는 쪽은 한나라당 내에서도 적었다고 합니다. 국가보안법 7조(이적단체, 이적표현물, 이적행위)만 없애자는 게 한나라당 개혁파와 민주당 주류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강경파와 민노당에선 완전폐지를 주장했다. 노 의원은 “국가보안법 사범 보면 95%는 7조가 문제다. 나머지는 간첩처럼 국보법 없더라도 잡혀갈 사람들이었다”면서 “당시엔 나도 국보법 완전폐지 주장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반성할 부분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선언한 것을 계기로 탄생한 특검도 많이 아쉬운 대목이라고 했습니다. 특검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노 의원이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경륜부족”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상황에선 구석에 몰린 검찰이 대검중수부장 지휘받는 특별수사본부에 삼성 수사 열심히 해 좌천된 사람들로 구성했다. 이들이 당시에 제일 수사 잘할 사람들이었다. 성과도 있었다. 그런데 특검 때문에 중단됐다.” 노 의원은 “특검이 검찰보다 잘한다는 보장도 없고, 특검은 누가 되느냐에 따라 판도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노무현(대통령)이 검찰보다도 의지가 적었다”면서 “민변이 추천한 변호사가 했으면 100중에 60은 했겠지만 노무현은 삼성맨을 특검으로 임명했다. 나는 그것까지 내다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노 의원은 당시를 떠올리며 “운동권 관성과 흑백논리”를 반성한다고 했습니다. 노 의원은 17대 의원 시절을 반성하면서 미래에 대한 목표와 전망도 밝혔습니다. 지금 들어도 시사점이 많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진보는 지금 분명히 위기다. 지금 진보진영에게 필요한 건 실용노선, 즉 실사구시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되돌아봐도 성공한 혁명은 모두 실용노선으로 성공했다. ‘실사구시’를 진보의 기본철학으로 삼아야 한다.” 18대 총선 당시 선거참모들이 노회찬에게 “자유총연맹 회의가 있으니 거기 가서 인사를 하라고 권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몸이 굳어졌다”는 노 의원은 참모들 강권에 별 수 없이 자유총연맹 회의에 갔답니다. 그가 거기서 본 건 무엇이었을까요. “내 선거구 인구가 20만명이고 9개 동이다. 자유총연맹이 동마다 조직이 있다. 내가 찾아간 자리는 어느 동의 운영위원회 뒷풀이였는데 거기 참석한 사람만 줄잡아 30명이었다. 본격적인 이념투쟁 벌어질거라 생각하고 각오 단단히 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노 의원은 “자영업 위해 먹고살기 위해 가입한 사람도 있고, 동네에서 사람들 많이 만나야 하는 필요 있는 사람들도 있고, 놀랍게도 여성이 절반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유총연맹 수뇌부는 극우조직이지만 하부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다. 처음엔 인사만 하고 나오려 했는데 주저앉아서 결국 소주를 너댓병 먹었다”면서 “만나보니 자유총연맹 회원이라는 사람들이 서민 범주에 드는 사람들이었다. 나중에는 9개 동네 운영위원회마다 가봤다”고 회상했습니다. 결국 내친김에 재향군인회도 찾아갔답니다. 재향군인회 사무실 한쪽은 6.25참전무공자회가 쓰고 있었답니다. 연배가 최소 60세는 되는 이 단체 소속 할아버지들이 재향군인회보다 훨씬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외롭고 소외돼 있는데 알려진 사람이 찾아오니 반가운 거다. 나중엔 노원구 총회가 있는데 와달라고 귀띔까지 하더라. 70대 할아버지 500명이 모이는 자리였다. 후보들 중 유일하게 초청받아서 인사를 했다.” 그는 “결국 다른 게 아니다. 불의에 맞서 싸우는 거와 약자 편에 서는 활동에 호감 보인것”이라면서 “대중들을 만나보니 ‘친북만 아니면 사회주의도 좋다’는 정서가 강했다. 한국에선 노무현 정부조차도 친북으로 몰아세우는 분위기가 있지만, 가만히 보니 북한만 편드는 거 아니면 이데올로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레드컴플렉스가 막상 보니 웃기는 거였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노 의원이 말하는 “진보가 희망이 있다는 근거”였습니다. 그런 고민 위에서 노 의원이 가장 먼저 거론한 것은 남북문제였습니다. 노 의원은 “박근혜가 북한에 가면 조선노동당 관계자들이 만나준다. 정동영 전 통일장관이 북한 가도 조선노동당 관계자를 만났다. 하지만 민노당이 북한에 가면 노동당이 아니라 사회민주당이 만나준다”고 했습니다. 쿠바나 중국같은 혈맹은 조선노동당이 만나고 사회민주당은 서방세계 대표단 만나는 당이랍니다. 노 의원은 “북한은 오히려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힘’을 본다. 우리만 짝사랑한다고 되는게 아니다”면서 “오히려 진보정당이 북한 비판하면 그게 오히려 북한에게 따끔하다. 그걸 감안해서 북한에 대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습니다. 당시 노 의원은 선거제도 개혁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제는 바로 현재 정의당이 가장 주력하는 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선거제도 개혁이 개헌보다 더 중요하다”는 노 의원의 외침은 이제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 됐습니다. “국민들이 5% 지지하면 5%만큼 의석을 가져야 한다. 1등 말고는 다 떨어지는 구조에선 최소 50% 국민의 선택이 무의미해진다. 유럽정치도 초기엔 완전비례대표제도를 위해 한세대 가까이 걸린 투쟁이 있었다. 그걸 거쳐서 좌파정당이 집권도 하고 그런 거다.” 세종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문소영의 시시콜콜] 영면하세요! 노회찬 의원

    [문소영의 시시콜콜] 영면하세요! 노회찬 의원

    일산에서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길에 연세대 장례식장이 있다. 운전기사가 “운구하나 보다”고 하는 말이 들려 버스 커튼을 열어보니 취재진과 관광버스, 검은 장례식 차량 등이 잔뜩 몰려있다. 문상을 가려고 4일째 검은 옷을 입고 다니다가, 어제 저녁에서야 겨우 조문했다.오늘, 2018년 7월 27일은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발인날이다. 오늘 국회 본청 앞에서 국회장(葬)도 언론으로 생방송됐다. 30도가 넘는 폭염에도 자리를 지킨 동료 국회의원들과 시민 등 2000여 명이 고인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조사에서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노회찬을 잃은 것은 (중략) 우리는 약자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민주주의의 가능성 하나를 상실했다”고 애도하는데, 눈물이 핑돈다. 2004년 총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도입된 정당투표를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 했듯이, 나 역시 그러했다. 그 덕분에 민주노동당 비례대표가 8명이 대거 국회에 처음으로 입성했고, 비례대표 8번이던 노회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노 의원과는 개인적 인연은 없다. 2005년 국회 출입기자일때 점심 먹으러 간 평양냉면집 을밀대에서 반가워하며 “언제 만나자”는 식의 인사가 전부였다. 2011년인가 대한문 앞에서 심상정 의원과 노 의원은 쌍용차 노동자 복직관련해 단식투쟁했는데, 그때도 그냥 천막을 지나치면서 ‘열심히 하신다’며 혼자서 좋아하던 정도였다. 물론 그는 내가 아끼는 후배의 외삼촌이었다. 2013년부터 늘 그의 활동을 더 눈여겨 봤다.노회찬 의원은 좋은 평가를 받는 정치인이었다. 진보정치를 대중화한 촌철살인의 정치인일 뿐만 아니라, 강자에 맞서고, 사회적 약자와 진보를 가치를 지켜온 ‘진보정치의 아이콘’이었다. 기자는 기사로, 판사는 판결문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국회의원은 입법으로 그 존재를 입증한다. 고인도 그러했다. 7년의 의정활동 기간에 1029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3선 의원이지만, 17대 4년하고 18대 낙선하고, 19대 ‘삼성X파일’ 폭로가 유죄가 돼 겨우 9개월, 20대 26개월에 불과했지만, 왕성한 의정활동이었다. 2005년 호주제 폐지법를 시작으로, 차별금지법, 대체복무법, 하도급거래 공정화 개정안,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 등 여성과 장애인, 노동자 등 소수자를 위한 입법에 앞장 섰다.‘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정의당을 아껴달라’는 노회찬의 유언은 현실화하고 있다. 국회의원 6명에서 5명으로 줄어든 정의당의 지지율을 11%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제1야당으로 국회의원 114명(탈당계 제출의원 2명 포함)인 자유한국당의 지지율 11%와 똑같은 지지율이다. 추모 열기가 여전할 8월 첫째 주의 여론조사는 정의당이 한국당을 제치는 골든 크로스를 기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노 의원의 비통한 죽음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정의당 당원에 가입하고 정치 후원금도 내고 있다. 좋은 정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후원할 생각을 못했다는 한탄과 함께 ‘지·못·미’(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의 마음을 행동하는 것이다. 6·13지방선거에서 나타난 조짐처럼 수구가 몰락하고 중도와 진보가 확대하는 정치지형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개될 수도 있겠다. 현역의원과 거대정당에 유리한 현행 정치자금법의 개선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노회찬도 지키지 못한 정치자금법’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금권정치와 부정부패를 가까스로 막아온 현 제도를 개악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2004년 1억 5000억원에 묶어놓은 후원금 한도를 14년이 지난 만큼 물가상승분이라도 반영해 상향조정해야 한다. 원외 정치인이나 정치 신인들이 정치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을 현행 선거 120일 전에서 1년 안팎으로 확대해 선거에서 공정한 경쟁 구도를 만들어줄 필요도 있다. 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당에 배분하는 국고보조금을 교섭단체(의원 20명 이상)에 50%를 지급하고 남은 50%로 의원 수 등으로 나누는 방식은 개선되어야 한다. 대신 회계를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 ‘노회찬의 비극’을 보면서, 큰일과 작은 일을 나눠 사안별로 비판의 경중을 가리는 건설적인 비판 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인이 2016년 경기고 동창에게 받은 4000만원은 후원회를 통하지 않은만큼 불법정치자금이 분명하다. ‘드루킹 특검’에서 이를 거론했을 때 노 의원은 ‘안받았다’며 거짓말도 했다. 삼성이 검찰에 건넨 뇌물을 폭로한 ‘삼성X파일’로 의원직까지 상실해 청렴하고 도덕적인 정치인으로 평판이 높았던 노회찬이었다. 만약 노 의원이 고백하고 사과했다면 과연 국민은 그를 용서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비난여론이 태풍처럼 불어 그와 정의당을 초토화했을 것이다.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몰아치는 정치비판 문화에서는 양심적인 정치인을 지키지 못하고, ‘방탄국회’나 일삼는 후안무치 형 정치인만 국회에 남기게 될 것이다. 수천만원 불법정치자금에 몸을 던지는 양심적인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수천억원의 부정부패을 비난하는 여론에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염치없는 정치인이 공존하는 사회가 한국이다. 잘못의 수준에 맞춰 비판하고 당사자가 감당할 수 있는 방향으로 비판문화도 개선되길 희망한다.노회찬 의원! 영면하시길. 논설실장 symun@seoul.co.kr/
  • [전문] 문희상·이정미·심상정·김호규 노회찬 의원 영결식 조사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영결식이 27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국회장으로 엄수됐다. 영결식에서는 국회장 장의위원장인 문희상 국회의장이 영결사를 맡았으며,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심상정 의원, 김호규 금속노동자가 조사를 낭독했다. 다음은 영결사와 조사 전문. 문희상 의장 “어떻게 하다가 이 자리에서 노회찬 의원님을 떠나보내는 영결사를 읽고 있는 것입니까?” 노회찬 의원님! 이곳 국회에는 한여름 처연한 매미 울음만 가득합니다. 제가 왜 이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다가 이 자리에서 노회찬 의원님을 떠나보내는 영결사를 읽고 있는 것입니까? 태양빛 가득한 계절이건만 우리 모두는 어두운 터널에 들어선 듯 참담한 심정으로 모여 있습니다. 둘러보면 의원회관 입구에서 본청입구에서 노회찬 의원님의 모습이 보일 듯합니다.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 속에서도 여유 가득한 표정의 우리 동료, 노 의원님을 만날 것만 같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믿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것에 황망함과 비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 가시질 않습니다. 노회찬 의원님!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항상 시대를 선구했고 진보정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만류에도 거대 권력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남긴 메시지에서도 노동자의 삶을 함께 아파했고 사회적 약자의 승리를 함께 기뻐했습니다. 정치의 본질이 못가진자, 없는 자, 슬픈 자, 억압받는 자 편에 늘 서야 한다고 생각했던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노회찬 의원님! 당신의 삶은 많은 이들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서슬 퍼렇던 유신에 항거했습니다. 보장된 주류의 편안한 삶 대신 민주주의와 노동현장에서 온몸을 던져 투쟁했습니다. 낡은 구두, 오래된 셔츠와 넥타이가 말해주는 대중정치인의 검소함과 청렴함은 젊은 세대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치사에 진보정치와 생활정치의 깃발을 세워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 서민의 버팀목이 돼주었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마치 이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하듯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명예를 중시하고 신중했던 삶이었습니다. 당신의 삶은 많은 이들의 이정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노회찬 의원님! 당신은 22일 저녁 병상의 어머님을 찾아뵙고 동생의 집을 들렀지만,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 누구도 꿈속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마지막 밤을 보내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차마 이 길을 선택한 노회찬 의원님의 고뇌와 번민, 회한과 고통을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는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당신은 여기서 멈췄지만 추구하던 가치와 정신은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노회찬 의원님! 지난 닷새 동안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수많은 이들이 눈물 속에서 꽃을 건넸습니다. 흐드러지게 꽃피었어야 할 거인과의 갑작스런 작별을 온 국민이 애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을 동료들과 함께 국회장을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유가족 여러분께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씀과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노회찬 의원님, 이제 평생을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영원한 평안을 누리십시오. 당신이 한국정치사에 남긴 발자취와 정신은 우리 국회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길이 빛날 것입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이정미 대표 “‘여기서 멈추겠다’고 했던 노회찬은 결코 멈추지 않고 우리와 함께 ‘당당히 나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표님! 수만의 시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대표님을 추모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등학생부터 구순 어르신까지. 막 일을 마치고 땀자국이 선연한 티셔츠를 입고 온 일용직 노동자부터 검은 정장을 정중히 입은 기업 대표까지.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이 오셔서 원내대표님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했습니다. 나이도 성별도 하는 일도 다르지만 이 분들이 저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하시는 말씀은 모두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꼭 필요한 사람’. 이보다 노회찬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노회찬 원내대표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단체가 추모 성명을 냈습니다. 그들은 해고 노동자이고, 산재로 자식을 잃은 어미이자 아비였으며,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였습니다. 노회찬이 우리 정치에 없었다면 ?간절한 외침을 전할 길이 없었던 약자들이 노회찬의 죽음에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습니다. 노회찬의 정치 이력은 바로 이들을 대변하고, 이들의 삶을 바꾸는 길이었습니다. 대학생 노회찬은 노동 해방을 위해 용접공이 되어 인천으로 향했고, 일하는 사람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해,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하기 힘든 진보정치 단체들을 두루 이끌며 청춘을 바쳤습니다. 진보정당 탄생 후에는 그 성공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 그가 만들고 키워 온 정의당을 위해 그의 삶을 통째로 바쳤습니다. 그래서 노회찬을 잃은 것은 그저 정치인 한명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자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민주주의의 가능성 하나를 상실했습니다. 노회찬, 당신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2013년 2월 14일 삼성 X파일 대법원 선고로 의원직을 상실한 날, 억장이 무너진 당직자들에게 당신이 처음 했던 말이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였습니다. 분노의 눈물을 삼킨 동료들에게 오히려 웃음과 유머를 보였습니다. 당신은 하늘이 주신 이 재능으로 시민들에게 정치의 통쾌함과 즐거움을 안겼습니다. 그 유쾌함은, 위기와 역경을 낙관으로 이겨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단단함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노회찬은 불같은 분노와 강직함을 함께 갖고 있었습니다. 2013년 의원직 상실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삼성 X파일을 공개 하겠다”고 말하는 지독한 고집쟁이였습니다. 마지막 유품인 10년이 넘은 양복 두벌과 낡디 낡은 구두 한 켤레에서, 스스로에게 엄격했지만 너무도 소박했던 노회찬을 봅니다. 우리 정치를 이상적이고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노회찬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국민들은 이런 노회찬을 보며 저기 국회에도 자기 편이 한명 쯤은 있다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한결 같은 노회찬을 보며, 많은 정치인들은 정당과 정견은 다르더라도 그를 존중했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노회찬이, 무겁고 무거운 양심의 무게에 힘겨워 할 때 저는 그 짐을 함께 나눠지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오직 진보정치의 승리만을 염원하며 스스로가 디딤돌이 되겠다는 선택을 할 때도 그 곁에 있어주지 못했습니다. 당원들과 국민들께 너무나 죄송합니다. 정의당은 약속드립니다. 조문 기간 백발이 성성한 어른께서 저의 손을 잡고 “정의당 안에서 노회찬을 반드시 부활시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저와 정의당은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노회찬의 정신은 정의당의 정신이 될 것이며, 노회찬의 간절한 꿈이었던 진보집권의 꿈은 이제 정의당의 꿈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문희상 의장님과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노회찬 대표의 2012년 정의당 창당대회 연설을 기억합니다. 노 대표는 투명인간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매일 새벽 4시 서울 구로구에서 6411버스를 타고 강남의 빌딩으로 출근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진보정당에서조차 투명인간이었다고, 그는 반성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함께 가져가자”고 했습니다. 노회찬의 이 다짐이 정의당만의 다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 정치가 너나 ?없이 투명 인간으로 취급해 온 일하는 사람들, 소수자들, 약자들을 향해 이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정치개혁과 시민의 삶을 바꾸는 개혁에 나서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여기서 멈추겠다.”고 했던 노회찬은 결코 멈추지 않고 우리와 함께 “당당히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정치 변화의 상징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벗, 존경하는 나의 선배 노회찬 이시여. 부디 영면하십시오. 먼 훗날 다시 만나면, 수많은 노회찬의 부활로 진보정치의 큰 꿈을 이루고 이 나라가 평등 평화의 새로운 대한민국이 됐다고 기쁘게 이야기 나눌 것입니다. 심상정 의원 “노회찬이 있었기에 심상정이 있었습니다. 가장 든든한 선배이자 버팀목이었습니다.” 노회찬 대표님! 나의 동지, 사랑하는 동지, 영원한 동지여! 지금 제가 왜? 왜? 대표님께 조사를 올려야 한단 말입니까? 저는 싫습니다.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뒤로 숨고만 싶습니다. 생각할수록 자책감에 서러움이 밀려옵니다. 쉬운 길 놔두고 풍찬노숙의 길을 자임한 우리들이었기에, 수많은 고뇌와 상처들을 기꺼이 감당해왔던 믿음직한 당신이었기에, 우리 사이의 침묵은 이심전심이고 믿음이며 위로였기에, 지금껏 그래왔듯 그저 침묵으로 기도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저의 아둔함에 가슴을 칩니다. 칠흑 같은 고독 속에 수 없는 번민의 밤을 지새웠을 당신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노회찬 동지여! 돌아보니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30년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인천에서, 저는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가로 알게 되어 이후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그리고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노회찬, 심상정은 늘 진보정치의 험준한 능선을 걸어 왔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패배로 점철되었던 진보정치의 역사에서 함께 좌절하고, 함께 일어섰습니다. 그 간난신고의 길,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던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이 열어주셨기에 함께할 수 있었고 당신과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역사와 국민의 부름 앞에서 주저 없이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뜻을 국민들께서도 널리 공감해주시기 시작한 이 때, 이렇게 황망하게 홀로 떠나시니 원통합니다. 당신 없이 그 많은 숙제를 어찌 감당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제 슬픔을 접으려 합니다. 당신을 잃은 오늘, 우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정치를 위해 당신이 감당했던 천근만근 책임감을 온몸으로 받아 안을 것입니다. 저와 정의당이 그 유지를 가슴깊이 아로새기겠습니다. 당신이 목숨보다 아꼈던 진보정치, 정의당은 더 강해지겠습니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아름답고 품격 있는 정당으로 발돋움 하여 국민의 더 큰 사랑 받겠습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노회찬 없는 진보정당, 상상할 수 없습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노회찬과 함께 할 것입니다. 당신이 끝끝내 지켜내고자 했던 진보정치의 꿈, 정의로운 복지국가, 저와 정의당 당원들이 함께 기필코 이뤄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노회찬 동지여! 나의 동지여! 마지막으로 생전에 드리지 못한 말을 전합니다. 노회찬이 있었기에 심상정이 있었습니다. 가장 든든한 선배이자 버팀목이었습니다. 늘 지켜보고 계실 것이기에 ‘보고싶다’는 말은 아끼겠습니다. 대신 더 단단해지겠습니다.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2011년 대한문 앞에서 함께 단식농성하며 약속했던 그 말, ‘함께 진보정치의 끝을 보자’던 그 약속, 꼭 지켜낼 것입니다. 정의당이 노회찬과 함께 기필코 세상을 바꿔낼 것입니다. 노회찬 대표님,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쉬소서. 국민들과 함께 소탈하고 아름다운 정치인 노회찬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김호규 금속노동자 “진보정당운동과 노동운동의 후배로서 선배의 유지를 받아안고 산 자의 결기로 나아가겠습니다.” 노회찬 선배께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너무나도 소박한 요구를 밤새 가르방으로 긁어 유인물로 만들고 새벽찬 어둠을 뚫고 잰걸음으로 인천, 부천지역 공단 주변 집집마다 돌리고 먼 길을 돌아 출근했던 노동자 생활이 떠오릅니다. 서로 얼굴도 모른 채 가명으로 활동한 1986년 늦가을이 생각납니다. 벅찬 가슴안고 뚜벅뚜벅 걸었던 노동자의 길을 기억 합니다. 그 길에서 만난 노회찬 선배. 30년이 지난 오늘 영원한 안식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제가 부족했습니다. 노동운동의 노선과 조직이름이 바뀌어도, 함께했던 선배였기에,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 양날개론을 증명해보고자 실천한 선배였기에, 온갖 시련과 갈등이 혼재된 진보정당운동에서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우뚝 선 선배였기에, 그저 믿었습니다. 저희가 안일했습니다. 예전 조직활동을 했던 때처럼 분명하게 비판하고 조직적으로 결정했다면 이렇게 허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필요할 때만 전화했던 이기심이 부끄럽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선배의 고민을 함께하지 못했던 얄팍함을 반성합니다. 그래도 노동자 민중의 정치를 위해 희망을 만들었던 선배를 존경합니다. 푸근한 호빵맨으로, 적절한 비유로 비판의 경지를 한 단계 높여 대중적인 진보정치의 새로운 길을 열어낸 선배의 열정을 사랑합니다. 낮은 울림이 큰 첼로를 연주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온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 할 수 있는 나라를 꿈꿨던 선배의 감성을 배우겠습니다. 1986년 부천에서 노동자의 길을 시작한 저에게 지난 30여 년 동안 선배와의 인연은 일선의 현장활동가로서 가까웠지만 사안에 따라 다소 멀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울산에서의 다양한 활동에 대한 선배의 지도는 늘 좋았고 명쾌했습니다. 갈등했던 기억은 잠시 뒤로 미루고, 울산 바닷가에서 의기투합했던 도원결의는 간직하겠습니다. 선배를 보내는 이 자리는 회한과 슬픔이 앞서지만 넋 놓지 않고 다시 한 번, 진보정당운동과 노동운동의 후배로서 선배의 유지를 받아안고 산 자의 결기로 나아가겠습니다.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선배를 통해 체득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활동하는 동안 놓치지 않고, 노동자의 길로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나지막이 퍼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장례기간 동안 선배를 추모하는 긴 추모행렬을 보았고, 다양한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노동자의 길을 걸었던 노동운동가에서 진정한 정치인으로 우뚝 선 선배이기에 영원한 안식의 공간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광화문 정동길 금속노조 사무실 옥상에서 선배를 기억하며 서성이는데 붉은 고추잠자리가 제 주위를 맴도네요. 추억과 동심의 잠자리 모습에서 씨익 웃는 선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번뜩 내려와 ‘귀로’라는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노래 중에 이런 대목이 다가옵니다. “무지개가 뜨는 언덕을 찾아 넓은 세상 멀리 헤매 다녔네 그 무지개 어디로 사라지고 높던 해는 기울어가네 새털구름 머문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숨을 쉬며 천천히 걸어서 나 그리운 그 곳에 간다네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 엄혹했던 노동운동가에서, 치열한 진보적 대중 정치인으로. 이제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국민들의 가슴 속에 첼로의 운율을 남긴 만큼 먼 길 돌아왔습니다. 처음처럼, 아가처럼 편히 쉬십시오.
  • [문소영 칼럼] 제우스의 번개와 노회찬

    [문소영 칼럼] 제우스의 번개와 노회찬

    올림포스 신전 제우스의 무기는 번개다. 범죄자를 응징할 때 이 번개를 쓴다. 잠깐 상상해 본다. 고(故) 노회찬 의원이 받았다는 4000만원을 기준으로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정치인에게 제우스가 번개를 때린다면, 서울 여의도 300명의 국회의원 중 몇 명이나 이 번개를 피할 것인가.현행 정치자금법은 일명 ‘오세훈법’이라고 부른다.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화두는 정치개혁이었다. 그 개혁 덕분에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 최초로 국회에 진출하고 노 의원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정당투표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정치자금법 개정은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정치자금 차떼기’ 파문 극복용이었는데 당시 한나라당의 초선 오세훈 의원이 주도하고 본인은 불출마를 선언한 덕분에 국회를 통과했다. 주요 내용으로 개인의 소액 후원은 장려하고 법인과 단체의 후원금 제공은 금지했다. 후원 한도로 국회의원은 평년에는 1억 5000만원까지, 선거가 있는 해에는 3억원까지 모금할 수 있다. 2004년 기준이 아니라 14년이 지난 지금도 평범한 직장인의 눈으로 1억 5000만원에서 3억원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다. 하지만 현실 정치는 ‘돈 먹는 하마’ 수준이라 새 발의 피다. 한 원로 정치인은 총선에 최소 5억원 정도를 써야 했다고 한다. 2004년부터 득표율에 따라 국가가 선거비용을 보전해 주지만, 서너 번 낙선하면 패가망신할 만한 비용이다. 또 지구당을 없앴지만, 편법으로 지역민의 민원을 들어주는 사무소를 내고 직원을 고용하면 매월 1000만~1500만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당내 선거도 맨입으로 할 수 없다. 기탁금을 수천만원을 내야 한다. 장소를 빌리고 행사를 하는 데 필요하다. 8월 25일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와 최고위원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은 등록비 500만원을 내고, 당대표 입후보자는 9000만원, 최고위원 후보자는 4000만원을 추가로 냈다. 진성 당원이 크게 늘어 1회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약 1000만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움직일 때마다 돈이다. 이 자금을 세비를 저금해서 마련할 수 있을까. 무리다. 그래서 “‘오세훈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하자”는 주장이 나오는데, ‘검은돈 근절’과 ‘깨끗한 정치’라는 명분이 늘 여론을 얻어 좌절된다. 돌아보면 국민에게 사랑받는 정치인들은 돈 고생을 많이 했다. 경기고·서울대(KS) 상대 출신이지만, 오랜 재야 민주화 운동으로 ‘운동권의 대부’라는 타이틀을 가진 김근태 전 최고위원도 그랬다. 그는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중에 ‘권노갑 고문에게 2000만원을 지원받았다’고 고백했다가 쏟아지는 비난에 크게 상심하고 경선을 접었다. 변호사였으나 상고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도 후원이 넉넉하지 않았다. 정치 낭인 시절 말 많고 탈 많은 물장사에 나섰던 이유는 ‘원수 같은 돈’을 마련하려 했던 탓이다. 그 가난 탓에 일부 보좌관은 한나라당에 몸을 의탁했다가 배신자라는 손가락질도 받았다. 서갑원 전 의원은 노 전 대통령과 지방 출장에서 운전기사까지 세 명이 한방을 썼는데 돈이 없었던 탓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렇게 혹독한 시절을 겪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된 뒤 2004년에 예비후보자로 등록하면 선거 120일 전부터 후원금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제60조의3(예비후보자의 선거운동) 신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평년 1억 5000만원에 묶인 한도는 그간 물가 상승률을 생각하면 2억원 이상으로 올려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후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예비후보 자격을 현행 6개월보다 더 길게 해야 한다. 물론 평년에 1억 5000만원도 ‘만땅’으로 못 채우는 정치인도 적지 않다. 어떻게 아느냐고? 연말에 몰아서 후원을 하는데, 한도가 차면 이체가 안 된다. 12월 31일 저녁에 존경하는 정치인들에게 정치후원금을 넣으면서 “쯧쯧! 아직도 한도를 못 채웠구먼” 하며 구시렁거리는 재미가 있다. 정치가 좋아지려면 좋은 정치인을 후원해야 한다. 이런 정치 현실을 외면한 채 당위로 ‘깨끗한 정치’만 주장하면 제2, 제3의 ‘노회찬의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 도덕성을 기반으로 올바른 정치를 해보려는 정치인일수록 돈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게 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는 윤동주의 서시를 좋은 정치인들은 이제 덜 사랑하기를 바란다. 이육사의 ‘광야의 초인’도 이젠 잊고 멀리하면 좋겠다. symun@seoul.co.kr
  • [단독] 이석기 회사, 언론사 상대 소송 5년 만에 일부 승소…법원 “200만원 지급”

    [단독] 이석기 회사, 언론사 상대 소송 5년 만에 일부 승소…법원 “200만원 지급”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회사가 선거홍보 비용을 부풀려 조직적으로 국고를 빼돌렸다고 보도한 언론사에 법원이 5년 만에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부장 이상윤)는 CN커뮤니케이션즈(CNC)가 A일간지와 B종합편성채널 방송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A일간지는 원고에게 2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CN커뮤니케이션즈는 광고 기획 및 대행업을 하는 업체로 이 전 의원이 주식의 99.6% 소유한 실질적 1인 회사로, 2010년 6월 지방선거와 교육감 선거, 2012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후보들의 선거 홍보를 맡았다.  2012년 총선 이후 이 전 의원의 선거보전비 편취 의혹이 불거졌고, 이 과정에서 2012년 6~7월 보도된 기사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CNC가 언론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 가운데 A일간지의 2012년 7월 기사 중 한 부분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물었다. 해당 일간지는 이 전 의원이 CN커뮤니케이션즈를 운영하며 내부 매뉴얼까지 만들어 조직적으로 선거비를 조작하는 등 ‘국고(國庫)’ 사기를 벌였다는 취지의 기사를 실었다. 특히 기사 중 ‘2010년 선거 외에도 (CNC의 전신인) CNP전략그룹이 2005년 설립된 이후 맡았던 모든 선거홍보 업무에서도 같은 수법으로 국고 빼돌리기가 조직적으로 진행돼 왔음을 입증하는 자료들도 확보됐다’고 보도한 부분은 “허위사실인 데다 취재 과정에서 진실이라고 믿은 데에 상당한(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CNC에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해당 기사에 실린 CNC가 내부 매뉴얼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국고를 빼돌렸거나 이와 관련해 검찰이 2012년 7월 말쯤 이 전 의원을 소환 조사할 방침이라는 내용에 대해서도 허위사실이 맞다고는 봤지만 “언론사들로서는 각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여진다”면서 손해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또 이들 언론사 기사들에 대해 “선거비용 등 정치자금의 수입과 지출의 투명성에 관한 것으로서 공적 관심 사안에 관한 것이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 전 의원은 2010~2011년 지방선거 등에서 컨설팅 등 각종 업무를 수행하며 물품 공급 가격을 부풀리는 방법으로 선거보전비용 4억 440여만원을 타낸 혐의(사기·정치자금법 위반) 등으로 2012년 재판에 넘겨졌다. 2심에서 CNC 돈을 유용했다는 횡령 혐의만 일부 유죄로 인정돼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선거비용 보전 청구 시 제출된 회사와 후보들 사이의 계약서와 견적서 등을 보면 대금을 부풀렸다거나 허위로 작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앞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이 전 의원을 상대로 선거비용을 부풀려 보전받았다며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8부(부장 오상용)는 선관위의 청구를 기각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씨줄날줄] 노회찬과 부채의식/김성곤 논설위원

    [씨줄날줄] 노회찬과 부채의식/김성곤 논설위원

    “아무리 그래도 노원병 유권자들 반성 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노회찬을 떨어뜨립니까.” 10년 전인 2008년 18대 총선에서 노회찬 후보가 낙선한 것을 두고 언론계 한 동료가 한 말이다. 당시 최대 관심사는 노회찬의 당선 여부였다. 17대 민주노동당 소속 비례대표로 의원 배지를 단 그는 삼성 비자금 사건을 터뜨려 스타가 돼 있었다. 홍정욱 후보는 한나라당이 영입한 뉴페이스였다. 결과는 홍정욱 한나라당 후보 43.1%, 통합진보당 노회찬 후보 40.1%, 김성환 민주당 후보 16.3%이었다. 노회찬 후보가 3% 포인트 차로 아깝게 낙선했다. 상계동 노원병 선거구에 살던 유권자를 비판한 그 언론인은 보수지에 몸담고 있으면서 평소에도 강한 보수 성향을 보였던 터라 그 반응이 의외로 느껴졌다. 노회찬은 그런 정치인이었다. 그의 정치적 좌표는 왼쪽이었지만,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우리 곁에 항상 있었다. 진보정치의 상징이었지만, 친숙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정치인이었다. “청소할 때 청소를 해야지 청소하는 게 먼지에 대한 보복이라고 얘기하면 말이 됩니까.”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이라는 야당의 주장에 대한 그의 촌철살인은 유권자를 미소 짓게 했다. 그는 앞서 간 탓에 꽃길보다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3선 의원이지만 그는 각종 선거에서 이긴 적보다 진 적이 많았다. 19대 노원병, 20대 때 창원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그 전엔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지기도 했고, 지역구를 제대로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기도 했다. 유권자들은 그를 스타로, 한국 정치의 자산이라고 여기면서도 선거 때는 외면했다. “미안하지만, 정권 교체가 우선이지….” 그가 23일 드루킹 관련 특검 출두를 앞두고 유명을 달리했다. “드루킹 사건과 관련해 금전을 받은 사실은 있으나 청탁과는 관련이 없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겼다. 고인(故人)이 드루킹 측으로부터 돈을 받은 시점은 2016년 4·13 총선 직전인 3월이었다고 한다. 몇 표 차로 당락이 갈리는 선거판에서 돈은 참기 힘든 유혹이다. “운동원을 조금만 더 쓰면”, “자금이 조금만 더 있으면”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다는 게 한 은퇴 정치인의 얘기다. 정치판에서 돈에는 반드시 꼬리표가 달린다는데…. 막판에 판단이 흐려졌던 것일까. 누구나 살면서 실수를 한다. 정치인 노회찬에게는 그 실수마저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일까.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서 소속 정당과 진보진영, 지지자, 가족에 대한 ‘무게’가 그리 컸던 것일까. 안타깝고 비통하기조차 하다. 솔직하게 시인하고 유권자에게 한번 더 심판을 받아보는 것은 어땠을까.
  • ‘용접공 노씨’서 진보정치의 별로… “삼성 떡값” “50년 판 갈아야” 권력 겨눠

    ‘용접공 노씨’서 진보정치의 별로… “삼성 떡값” “50년 판 갈아야” 권력 겨눠

    2004년 민노당 비례대표로 여의도 입성 떡값 검사 밝힌 ‘X파일’로 의원직 잃기도 연동 비례대표·특활비 폐지 등 개혁 앞장 “정의당 아껴달라” 남기고 30년 정치 마감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소탈하고 서민적인 행보, 재치 있고 날카로운 화법으로 한국 진보정치의 대중성을 확장한 진보정당의 거두였다. 노동자와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고 정치 기득권 타파에 앞장서며 거대 양당 틈에서 진보정당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난 노 의원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하던 1982년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인천에서 ‘용접공 노씨’란 별칭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한 그는 1987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결성했다. 이 일로 노 의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1989년부터 2년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제도권 정당 정치를 시작한 건 1997년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의 기획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다. 민노당 창당 후에는 2000년 부대표, 2002년 사무총장을 거쳐 2004년 민노당 비례대표 8번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는 2004년 17대 총선 방송 토론회 때 “50년 동안 한 판에서 계속 삼겹살을 구워 먹어 판이 새까맣게 됐으니 삼겹살 판을 갈아야 한다”는 발언으로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이른바 ‘판갈이론’을 펼친 뒤 노 의원은 진보진영의 ‘입’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시련도 적지 않았다. 2012년 서울 노원병에서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지 9개월 만에 ‘삼성 안기부 X파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당시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해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형을 받았다. 노 의원은 2014년 7·30 서울 동작을 재보궐 선거에서 재기를 노렸다. 선거 막판 기동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해 야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나경원 당시 새누리당 의원과 정면 승부를 펼쳤으나 낙선했다. 20대 총선 때는 경남 창원성산으로 지역구를 옮겨 진보 정치인 중 드물게 3선 고지에 올랐다. 노 의원은 의정 활동 내내 개혁적 입법에 공을 들였다.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제를 극복하자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줄곧 주장했다. 국회의원들의 ‘눈먼 쌈짓돈’으로 불리는 특수활동비 관행을 바로잡는 데에도 주력했다. 노 의원은 지난 6월 교섭단체 원내대표로서 3개월 동안 받은 특활비를 반납했다. 하지만 지난달 ‘드루킹 특검´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 불거졌다. 2016년 3월 경공모가 노 의원에게 5000만원을 전달한 정황이 담긴 회계 장부 등이 확인됐다. 30여년간 한국 진보정치를 이끈 노 의원은 23일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고 노회찬 의원 장례위원회 구성... 전현직 진보정당 대표들 총망라

    고 노회찬 의원 장례위원회 구성... 전현직 진보정당 대표들 총망라

    노회찬 정의당 전 원내대표의 장례위원회가 꾸려졌다. 이정미 대표가 상임장례위원장을 맡고 심상정·유시민·조준호·천호선·나경채·김세균 민주노동당·진보신당·정의당 등 진보정당 전 대표들이 공동장례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최석 정의당 대변인은 이날 오후 브리핑을 통해 앞서 상임 위원장으로 결정된 이 대표 와 함께 전직 진보정당 대표들을 공동 위원장으로 하기로 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중 심상정 전 대표가 호상(護喪)을 맡기로 했다. 장례 집행위원장은 신장식 사무총장, 장례위원은 전·현직 국회의원으로 추후 구성하기로 했다. 최 대변인은 “장례위원은 제한없이 공개적으로 모집하기로 했으며 모집기간은 수요일(25일) 밤까지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장례위원은 모집 종료 후 구분 없이 인명 가나다 순으로 공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최 대변인은 “27일 오전 9시 발인 후 고인의 영정사진을 들고 당사를 방문하는 절차가 있을 것”이라며 “같은날 10시에 국회장으로 진행되는 영결식이 국회에서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한편 노 원내대표의 유해는 화장을 거쳐 장지인 마석모란공원에 묻힐 예정이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노회찬은 누구?…노동계 출신 진보정치 간판스타

    노회찬은 누구?…노동계 출신 진보정치 간판스타

    고 정의당 노회찬(62) 의원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을 대표해온 진보정치 진영의 간판스타였다. 대중 친화적인 언변으로 큰 인기를 얻어 소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 정의당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노 원내대표는 고등학생이던 1973년 당시 유신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면서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전기용접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1989년 구속된 노 원내대표는 만기 출소 후 대선에서 백기완 후보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했으며,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민주노동당 부대표를 거쳤다. 17대 총선을 통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하고서 이듬해 8월 옛 국가정보원 불법도청 테이프에서 삼성그룹 ‘떡값‘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이어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 지역구 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했으나, 곧이어 대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확정판결을 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20대 총선에서는 서울 노원병이 아닌 경남 창원성산을 지역구로 내려가 악전고투 끝에 새누리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며 다시 진보진영의 대표주자로 우뚝 섰다. 정의당 1~3기 원내대표를 내리 지내며 창당 초반 1%에 머물렀던 지지율을 10%까지 끌어올리는 데 공을 세웠다. 노 의원은 드루킹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노 의원은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떠한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며 “(특검이) 조사를 한다고 하니, 성실하고 당당하게 임해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노 의원은 이날 오전 9시 39분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 17층과 18층 사이에서 밖으로 투신해 숨졌다. 경찰은 해당 아파트 17∼18층 계단에서 노 의원 외투를 발견했고, 외투 안에서 신분증이 든 지갑과 정의당 명함, 유서로 추정되는 글을 찾아냈다. 유서 내용은 ‘드루킹 사건과 관련해 금전을 받은 사실은 있으나 청탁과는 관련이 없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취지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노 의원이 드루킹 사건과 관련, 신변을 비관해 투신했을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정확한 사망 경위를 조사 중이다. 이혜리 기자 lee@seoul.co.kr
  • 6·13지방선거 경남 합천군수 선거

    6·13지방선거 경남 합천군수 선거

    6·13지방선거 경남 합천군수 선거에는 재선인 현직 하창환 군수가 명예롭게 퇴진하겠다며 출마를 하지 않은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정재영(55) 후보, 자유한국당 문준희(59) 후보, 바른미래당 조찬용(63) 후보, 무소속 윤정호(50) 후보 등 4명이 출마했다.합천군은 보수성향이 강한 지역이어서 자유한국당 문 후보가 유리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더불어민주당 정 후보도 지역에서 농민회 활동을 비롯해 사회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으로 지지기반을 다져왔다. 2010년 합천군의원 선거에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당선경력이 있는데다 당에서도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 해볼만한 선거라며 의욕을 보인다. 무소속 윤 후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방선거 출마 경력이 있다. ●정재영 더불어민주당 후보 “합천의 미래를 위해 힘있는 선택을 해야 할 때 입니다. 합천을 제대로 변화시킬수 있는 시간이 왔습니다” 정재영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이 합천에 올 때 마다 찾는 사람이 정재영 이다”며 “군수가 되면 군민을 대신해 대통령을 찾아가 합천의 현안과 미래를 당당하게 말하겠다”고 문 대통령과 인연을 강조한다. 정 후보는 “합천농민회 회장을 하면서 농민들과 부대끼며 살았고 바르게 살기 운동을 하면서 합천의 위상과 품격을 올렸으며 군의원을 하면서 군 살림살이를 꼼꼼하게 챙겼다”면서 “준비돼 있고 잘 할 자신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옥전고분군 사적지 확대와 다라국 역사테마파크 조성, 삼가고분군 발굴 정비 등을 추진해 가야사 프로젝트의 최대 수혜지역으로 만드는 공약을 했다.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해 국민교육장소로 활용하는 사업도 제시했다. 기존 농업정책을 일제 점검해 선순환 구조로 정비하고 6차산업 기반을 조성하는 등 농정혁신으로 부자농촌을 만드는데 전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정 후보는 숭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력이 인정되는 한남중미용정보고를 졸업했다. ●문준희 자유한국당 후보 “일 잘하는 군수로 군민들에게 보답하겠습니다” 문준희 후보는 “경륜과 경험, 역량을 갖춘 사람만이 혁신을 통해 합천 변화와 발전을 이끌 수 있다”며 “도의원 2번과 사회단체 활동을 하며 쌓은 경험과 역량을 합천을 일으키는데 모두 쏟겠다”고 준비된 군수 후보임을 강조한다. 문 후보는 인구 5만 회복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공약 1순위로 제시했다. 그는 “합천을 획기적으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서는 황강 직강공사를 추진해 황강의 기적을 창조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 후보는 “황강 직강을 통해 확보되는 하천부지에 복합단지와 산업단지, 개방형 스포츠 단지, 골프장 등을 조성하면 인구 1만명이 늘어나게 된다”며 “당선되면 2019년 황강직강공사 재추진사업 타당성 검토 용역을 하겠다”고 공약했다. 해외 이민자가 귀국한 뒤 거주하는 국제복합도시 유치, 남부내륙철도 합천역 유치, 합천호 주변에 대기업 복지타운과 대형 리조트 유치, 합천벌꿀 브랜드 육성 및 장수말벌 퇴치 유인기 보급 사업, 세계평화공원조성, 합천호 주변 예술인촌 조성 등의 공약도 내놨다. 대구대 국어교육학과와 경남대 행정대학원 정치외교학과(정치학 석사)를 졸업하고 대구 경일여상고 교사를 거쳐 2006년~2014년 경남도의원을 지냈다. ●조찬용 바른미래당 후보, 무소속 윤정호 후보 조찬용 후보는 “중앙과 경남도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 합천 발전을 이끌고 군민을 위한 행정을 펼치겠다”고 강조한다. 조 후보는 “예산·행정·농업·복지·보건·교육 전문가로서 소멸위기에 놓인 합천을 살릴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그는 17개 읍면이 균형있게 발전하는 합천통합정책에 따라 권역별로 맞춤형 개발사업을 추진해 합천인구 5만 회복을 이루겠다고 공약했다. 조 후보는 진주중·고와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민정당 공채를 거쳐 당 조직국 간사와 청년부장, 경남도의회수석전문위원을 지냈다. 2014년 군수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했다. 무소속 윤정호 후보는 농업회사법인 파머스클럽을 운영하는 기업가다. 윤 후보는 “가난을 이겨낸 흙수저 출신이 기업가 정신으로 합천을 살리는 불씨가 되겠다”고 밝혔다. 합천 중심지역에 인구 3만이 거주하는 정주도시를 건설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윤 후보는 계명전문대 원예과와 진주산업대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 대학원 분자생명공학과(이학박사)를 졸업했다. 합천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6·13 판세 분석-서울시 기초단체장] 與 ‘새얼굴’ 前 靑행정관 vs 現 구청장 무소속 출마… 5자 구도

    [6·13 판세 분석-서울시 기초단체장] 與 ‘새얼굴’ 前 靑행정관 vs 現 구청장 무소속 출마… 5자 구도

    영등포구는 서울 25개 기초지자체 선거 중 가장 눈길이 쏠리는 지역이다. 지난 15일 조길형 현 영등포구청장이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면서 다른 지자체와 달리 5자 구도로 재편됐다.앞서 더불어민주당은 채현일 전 청와대 행정관을 영등포구청장 단수 후보로 확정했다. 조 구청장은 재심을 통해 경선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출마 기자회견을 열어 공천 과정을 문제 삼았다. 이처럼 여당이 둘로 나뉘면서 채 후보, 김춘수 자유한국당 전 서울시의원, 양창호 바른미래당 전 서울시의원, 정재민 정의당 후보, 무소속 조 구청장이 양보 없는 싸움을 벌이게 됐다. 영등포구민에게는 6·13 지방선거가 2010년 민선 5기 지방선거의 데자뷔(기시감)로 보인다. 당시 선거에서 김형수 영등포구청장이 집권당인 한나라당(현 한국당)의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번 선거에도 출마하는 양창호 전 서울시의원을 공천한 것이다. 양창호, 김형수 두 후보가 경합을 벌이는 과정에서 각각 6만 2750표(35.48%), 3만 1778표(17.97%)를 얻어 표가 나뉘었고,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조 구청장이 3091표 차이로 신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여당 지지율이 유례없이 높고, 야당도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모두 후보를 낸 상황이라 선거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진보정당에서는 정 후보가 대표 주자로 나선다. 정 후보는 정의당 전신인 민주노동당 영등포구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냈고 도시농업, 마을공동체 등 풀뿌리 시민사회활동을 전개해 왔다. 2014년 구의원 선거, 2016년 총선(영등포갑)에 출마해 낙선했고, 이번에 ‘내 삶을 바꿀 젊은 구청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다시 한번 나섰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뉴스를부탁해]조롱받은 보수정치인 단식투쟁사

    [뉴스를부탁해]조롱받은 보수정치인 단식투쟁사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더불어민주당원의 댓글조작 사건, 이른바 드루킹 사건의 특검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습니다.목숨을 담보로 하는 단식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때 쓰는 투쟁 방법입니다. 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회적 약자들이 선택하는 저항 수단입니다. 그러나 종종 여야 정치인들도 단식을 통해 자기 뜻을 표현합니다. 과거 국회 안팎에서 벌어진 의원들의 단식투쟁을 모아봤습니다. 지난 3일 무기한 노숙단식 투쟁에 돌입한 김 원내대표는 이틀째인 4일 눈에 띄게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김성태 감시 CCTV 설치하자’ 국민 청원 등장 국회 본청 앞에서 하룻밤을 보낸 김 원내대표는 두툼한 패딩점퍼에 밀짚모자를 쓰고 단식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이날 오후 정세균 국회의장 주재로 열린 국회의장과 교섭단체 긴급 원내대표 회동에서는 고개를 의자 뒤로 젖히고 눈을 감는 등 피곤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습니다.김 원내대표의 단식투쟁에 네티즌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날 낮에 김 원내대표의 농성장 앞으로 보낸 사람을 알 수 없는 피자 한판이 배달됐는데, 김 원내대표의 단식을 조롱하기 위한 행동으로 추정됩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김 원내대표의 농성장 주변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해 24시간 감시해야 한다는 청원까지 올라왔습니다. 김 원내대표로서는 유쾌할리 없는 반응입니다. ●국회의원 최장 단식 기록은 27일 대한민국 국회 역사상 최장기간 단식 농성을 한 정치인은 현애자 전 민주노동당 의원입니다. 현 전 의원은 제주 군사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2007년 6월 7일부터 27일간 단식농성을 벌였습니다. 물, 소금, 감잎차만 섭취한 현 전 의원은 체중이 11kg 줄고 혈압이 최저 50까지 떨어지는 등 건강이 극도로 악화한 끝에 단식을 중단했습니다.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24년간 정치인 최장 단식 기록을 쥐고 있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5월 18일부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습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3주년을 기념하며 희생자를 위로하고, 전두환 독재 정권에 항의하는 뜻으로 곡기를 끊었습니다. ●김영삼 단식 중단 위해 고기 구운 안기부 전두환 정부는 같은달 25일 김 전 대통령을 서울대병원 특실에 입원시키고 수액을 맞게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단식 투쟁을 멈추기 위해 안기부 직원들이 병실 앞에서 고기를 구워 냄새를 피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김 전 대통령이 단식 도중 ‘보름달’이라는 빵을 먹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근거 없는 유언비어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의 단식을 멈추려고 가택 연금 조치를 풀어줬습니다.김 전 대통령의 기록은 2007년 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반대하며 단식에 들어간 문성현 전 민노당 의원과 천정배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에 의해 깨졌습니다. 문 전 의원은 26일간, 천 전 의원은 25일간 단식했습니다. 단식투쟁이 소수당 또는 진보 정치인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보수 정치인의 단식은 종종 비아냥과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의 2016년 단식농성이 대표적입니다. 이 전 대표는 그해 9월 26일 정세균 국회의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그는 “정세균이 물러나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라며 결의에 찬 단식투쟁을 벌였는데, 7일 만인 10월 2일 “민생과 국가현안을 위해 무조건 단식을 중단한다”고 밝혔습니다. ●박근혜를 위한, 박근혜로 끝낸 이정현의 단식투쟁 야당이 김재수 당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해임 건의안을 강행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 의장이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단식 투쟁을 시작한 이유였습니다.그러나 이 전 대표가 권력자라 할 수 있는 집권여당의 대표였다는 점, 국회의장의 사퇴는 국회 동의가 필요해 단식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는 점, 또 공개된 장소가 아닌 새누리당 당대표실 안에서 벌인 ‘나홀로 농성’이었다는 점 때문에 이 대표의 단식은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전 대표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단식을 만류하자 단식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김재원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은 두 번이나 이 전 대표를 찾아와 “대통령께서 많이 걱정하셔서 단식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하러 왔다”고 전했고 이 대표는 이틀 후 단식을 멈췄습니다.이를 두고 “박 전 대통령이 구순의 모친도 막지 못한 이 전 대표의 뜻을 꺾었다”는 낯뜨거운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전 대표의 단식 투쟁은 당시 국정감사에서 불거진 미르재단 및 K스포츠재단 사건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 쏠린 의구심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강성 친박’인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도 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습니다. 지난해 10월 10일 사법부가 박 전 대통령의 구속을 연장하자 단식에 돌입한 조 대표는 14일만인 같은 달 23일 단식을 중단했습니다.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서 단식을 마친 조 대표는 볼살이 다소 들어가고 수염이 돋은 모습으로 휠체어를 탄 채 병원으로 이동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무죄로 석방되는 날까지 무기한 단식 투쟁에 돌입한다”고 했지만 물과 소금으로 버티다 혈당과 혈압이 급격히 낮아져 중도 포기한 것입니다.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2003년 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 측근 비리의 특검 도입을 요구하며 10일간 단식을 했습니다. 최 전 대표가 흰 국물을 마시는 장면이 목격돼 ‘곰국을 먹었다’는 논란이 일었으나 쌀뜨물로 밝혀지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최 전 대표는 결국 특검 도입을 관철시키고 단식을 중단했습니다.문재인 대통령은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단식을 말리기 위해 ‘동조 단식’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었던 2014년 8월, 세월호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촉구하며 10일간 광화문광장에서 단식했습니다. 김영오씨가 46일간의 단식 끝에 미음을 먹기 시작하자 문 대통령도 단식을 중단했습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평화·정의당 협상 본궤도… ‘4번째 교섭단체’ 초읽기

    평화·정의당 협상 본궤도… ‘4번째 교섭단체’ 초읽기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이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간다. 양당이 합의하면 다음주쯤 4번째 교섭단체가 탄생한다. 원내 발언권 확보를 위한 두 정당의 ‘손잡기’는 각각의 정강정책을 유지하는 ‘따로 또 같이’ 교섭단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또 공동교섭단체가 구성되면 진보정당 중 교섭단체를 만든 첫 사례가 된다. 진보진영에선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어 국회에 처음으로 진출하고서 번번이 원내교섭단체 20석 기준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총선에서 13석에 그쳤다. 두 당이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주요 명분은 ‘촛불 혁명의 완수’다. 장병완 평화당 원내대표는 19일 여수에서 개최한 현장최고위원회에서 “제4교섭단체로서 촛불 혁명의 완수와 지역발전을 위해 호남민이 맡겨 준 역할에 모든 힘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의당은 지난 17일 전국위원회 의결 뒤 “적폐 청산과 개혁이 국회에서 멈춘 현실을 타파하고, 촛불 민심을 실현하기 위해 협상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20일부터 시작되는 협상에선 양당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원칙 아래 개헌·남북 관계 등 대형 이슈에서 원내 교섭력을 높이는 방법을 모색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양당은 선거제도 개혁에 힘을 합치고 있다. 양당은 소선거구제 폐기와 투표의 비례성 강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한다. 협상 테이블에서는 공동교섭단체의 이름, 활동 기한, 두 당이 함께 추진할 중점 법안 등도 논의될 예정이다. 평화당에선 장병완 원내대표·이용주 원내수석부대표·최경환 대변인이, 정의당에선 노회찬 원내대표·윤소하 원내수석부대표·김종대 원내대변인이 참석한다. 주요 쟁점은 공동교섭단체의 사령탑인 원내대표와 상임위원장 배분이다. 양당이 교섭단체를 구성하면 하반기 국회에서 상임위 1곳의 위원장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원내대표와 상임위원장을 번갈아 맡는 기간과 주요 상임위 간사직 등에서 양당은 이견을 보이고 있다. 정의당은 협상 결과를 다시 전국위에 회부해 공동교섭단체 구성 여부를 최종 확정할 예정이다. 4번째 교섭단체가 구성되면 20대 국회 원내 세력 구도도 바뀐다. 현행 교섭단체는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으로 범진보 1당에 범보수 2당 구도였으나 2당 대 2당 구도로 변화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캐스팅보트 역할도 더욱 주목받을 수 있다. 범진보는 민주당 121석(민병두 의원 사직은 미처리), 평화당·정의당 20석, 평화당으로 활동하는 바른미래당 비례대표 3석, 무소속 이용호·손금주 의원, 정세균 국회의장, 민중당 1석 등 모두 148석이 된다. 범여권이 전체 재적의원 293석의 과반수를 넘는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국민의당·바른정당 통추위 “새달 ‘신설 합당’ 통합”

    국민의당·바른정당 통추위 “새달 ‘신설 합당’ 통합”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통합추진협의체(통추협)를 정식 출범하고 다음달 중 ‘신설 합당’ 방식으로 두 당의 통합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반면 국민의당 내 통합반대파는 신당 추진 검토를 언급하면서 분열로 치달을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국민의당 이언주·이태규 의원, 바른정당 오신환 원내대표·정운천 의원은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출범식 겸 첫 회의를 연 뒤 “양당의 단순 합당이 아닌 ‘신설 합당’ 방식을 취하기로 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는 제3세력의 대통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신설 합당은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이 통합진보당으로 합당한 방식이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각각 통합을 의결하는 절차를 거치고 제3지대에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합류하는 방법이다. 정당 해산이나 새로운 지역조직을 건설할 필요가 없어 비교적 간소하다. 국민의당으로서는 정당 해산에 반발할 것으로 보이는 반대파와의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다. 영입인사 등 새로운 인물이 신당 창당과 동시에 합류하기에도 알맞은 방식이라고 양당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통추협은 또 “양당 당원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2월 이내에 통합 완료를 목표로 노력할 것”이라면서 “양당에 공동 실무지원팀을 두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매일 비공식 협의를 갖기로 했으며 필요할 경우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기로 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통합 추진과 관련, 국민의당 당사 외벽과 당대표실 뒤 걸개(백드롭)에는 대형 쌍란 프라이 사진이 걸렸다. 사진엔 ‘새해에는 국민의 행복이 두 배가 될 때까지’라는 문구가 적혔다. 안철수 대표는 “쌍란은 1000분의1 정도의 확률로 올해 지방선거에서 기적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쌍란의 노른자 두 개가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을 뜻하는 것이며 통합을 염두에 둔 메시지라는 해석도 나온다. 반면 국민의당 내 통합반대파 모임인 ‘국민의당 지키기 운동본부’ 대변인인 최경환 의원은 “개혁신당 추진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며 “참석자 11명이 전부 동의했다”고 밝혔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블랙리스트 피해 2670건… 감사원 결과의 6배”

    명단, 공문서·DB로 실제 활용 단체·좌편향 인사 1만 1000명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 건수가 2670건으로 중간 집계됐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민관 합동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20일 블랙리스트에 올라 실제 검열이나 지원 배제 등의 피해를 본 문화예술인은 1012명, 피해 건수는 1898건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피해 문화예술단체는 320곳에 피해 건수는 772건에 달했다. 이는 특검의 공소장(436건)이나 감사원의 감사 결과(444건)보다 6배 이상 많은 수치다. 진상조사위는 이명박 정부 출범 6개월 뒤인 2008년 8월 작성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부터 올해 7월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서울중앙지법 1심 판결문에 첨부된 범죄일람표에 이르기까지 블랙리스트 관련 12개 문건을 분석해 이 같은 결과를 내놨다. 진상조사위는 또 “2014년 5월쯤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작성한 ‘문제단체 조치 내역 및 관리방안’ 보고서 등을 보면 블랙리스트 명단이 공문서와 데이터베이스(DB) 형태로 작성돼 실제 활용됐던 것으로 확인된다”며 “DB 규모는 문제단체 3000개와 좌편향 인사 8000명 등 1만 1000여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진상조사위는 블랙리스트 작성에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물론 그 이전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나왔던 각종 선언 명단까지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2000년 안티조선 지식인 선언,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취임사 준비위원회, 2006년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 등이 검열 및 지원 배제 사유였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더불어민주당 출신 정치인이 도지사나 시장으로 있었던 충북도, 전주시, 안산시, 성남시를 비롯해 당시 야권 성향의 단체장이 있었던 군포문화재단도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문체부 직원이 국가정보원 간부는 물론 경찰청 정보국 간부와 문자메시지로 관련 정보를 공유한 사실과 국정원이 영화진흥위원회에 최승호(현 MBC 사장) PD가 만든 다큐멘터리 ‘자백’과 이영 감독이 성소수자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불온한 당신’에 대한 지원 배제를 요구한 사실도 공개했다. 문체부 산하기관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예술경영지원센터,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특정 예술인의 지원을 배제한 정황도 새롭게 확인됐다.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2016년 저작권 수출을 위한 초록·샘플 번역 지원사업을 진행하며 특정 도서 배제 지침이 내려오자 심사표를 조작해 ‘차남들의 세계사’, ‘삽살개가 독에 감춘 것’, ‘텔레비전 나라의 푸푸’, ‘한국이 싫어서’ 등을 제외시켰다. 또 ‘찾아가는 중국 도서전’ 사업에서 특정 도서를 배제하기 위해 심사위원회 회의록을 조작하기도 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2015년 블랙리스트에 오른 ‘극단 마실’이 뉴욕문화원과의 매칭사업에 선정되자 이 사업을 폐지했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도 민족미술인협회·한국작가회의·우리만화연대·서울연극협회 등 블랙리스트 단체가 선정된 사업을 중단했다. 진상조사위는 “박근혜 정부 출범과 동시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난 9월 대통령기록관에서 발견된 ‘문화예술 건전화로 문화융성 기반 정비’ 문건은 빙산의 일각”이라면서 “블랙리스트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도록 대통령기록관은 관련 문건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러시아 혁명 ‘조용한 100주년’… 反정부 민심 분출 우려에 외면

    러시아 혁명 ‘조용한 100주년’… 反정부 민심 분출 우려에 외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자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험’으로 불리는 러시아 혁명이 7일로 100주년을 맞는다.1917년 2월, 제정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억압과 빈곤에 지친 민중 봉기로 무너진다. 사회민주노동당 급진파인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은 그해 4월 망명 중이던 스위스에서 귀국, 10월 혁명으로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는다. 10월 26일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이 점령되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노동자·농민·병사들의 대표자 회의)로’라는 구호를 내건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쓰는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11월 7~8일 사이에 일어난 혁명이었지만 당시 러시아가 쓰던 구력(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26일이어서 ‘10월 혁명’으로 불린다. 10월 혁명 후 1922년 탄생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은 1991년 붕괴할 때까지 약 70년을 존속했다. 러시아 혁명이 100주년을 맞았지만 러시아 내부의 분위기는 조용하다. 정부 차원의 행사는 없고 공산당이 주도하는 몇몇 기념행사만 열리고 있다. 러시아 공산당과 좌파 정당들은 7일 모스크바 시내에서 가두 행진과 집회 등 혁명 100주년 기념행사를 연다. 앞서 2~3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19차 공산당·노동당 국제대회가 개최됐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2005년부터 ‘10월 혁명 기념일’을 폐지하고 ‘국민통합의 날’이란 국경일을 제정했다. 11월 4일인 국민통합의 날은 17세기 초 러시아 의병대가 폴란드군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7일에는 모스크바 크렘린 앞 붉은광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1년 펼쳐졌던 군사퍼레이드를 재현하는 열병식이 진행된다.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민중 혁명을 기념하는 대신 나치 독일에 맞선 소련 국민과 군인들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행사를 열어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행사다. 일각에서는 반(反)정부 민심이 10월 혁명 기념 분위기를 타고 분출되는 것을 러시아 정부가 우려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4기 집권을 보장해 줄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시점이기 때문이다. 5일(현지시간) 영국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러시아의 독립언론 ‘도즈드’ 창립자 미하일 자이거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조용하게 치러지는 이유는 푸틴 정권이 러시아 혁명을 선전함으로써 얻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사설] “노조도 사회적 비용 분담하라”는 노사정위원장

    문성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이 “싸움으로 노동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며 “노동자도 사회적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고 노동계에 쓴소리를 했다. 고용노동부가 전임 정부의 양대 지침(저성과자 해고 허용과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을 전격 폐기하면서 사회적 대화 복원의 물꼬가 트일 것으로 기대했으나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새로운 요구 조건을 내걸며 노사정위 복귀를 거부하는 와중에 나온 발언이어서 그 무게가 남다르다. 문 위원장은 그제 본사 주최 ‘광화문라운지’ 강연에서 노사가 기본급 1%를 출연해 상생기금으로 만든 SK이노베이션을 모범 사례로 거론하며 노동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경제가 어려울 때 노사가 이를 인정하고, 각자가 역할을 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면서 “최저임금 1만원을 줄 수 있는 경제를 만드는 과정에 노조가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문 위원장은 노조 출신 첫 노사정위원장이다. 1990년대 금속노조와 민노총 설립을 주도했고, 민주노동당 대표까지 지냈다. 세 차례 구속 전력도 있다. 노동계 출신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에 이어 문 위원장이 낙점되자 재계는 노동계로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노동계에 사회적 역할을 주문한 것은 여러 모로 의미가 작지 않다. 현 정부 들어 노동계는 성과연봉제 폐지, 최저임금 대폭 인상, 파리바게뜨 불법파견 시정 명령 등 숙원들을 일사천리로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노총은 “대통령과 직접 대화하겠다”며 옥상옥 격인 ‘노사정 8자 회의’를 제안하고, 민노총은 “노조할 권리가 먼저”라며 전교조·공무원노조 법정 노조화 등 5대 요구안에 대해 실행계획을 내놓으라고 정부를 윽박지르고 있다. 양대 노총의 강경한 태도는 친노동 정부 임기 초반에 확실하게 얻어 낼 것을 모두 얻어 내자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 정부에서 배제되고, 차별받은 경험 때문에 이번에는 어떻게든 요구를 관철하려는 그들의 조급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그래도 이래선 안 된다. 대통령, 고용노동부 장관, 노사정위원장이 모두 노동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도 대화와 협상의 장을 걷어차는 행태를 곱게 볼 국민은 없다. 문 위원장은 “오랜 노동운동 기간에 투쟁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실제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양대 노총이 그의 고언을 깊이 새겨듣길 바란다.
  • “MB청와대, 정진석 등 총선 지원·좌파문화단체 VIP 보고” 적시

    “MB청와대, 정진석 등 총선 지원·좌파문화단체 VIP 보고” 적시

    안희정 최문순 이재명 송영길 등 당시 野 단체장 31명 평가 담겨 KBS 좌파성향 간부 15명 분류… 공영방송 장악 정황까지 드러나 2009년 2월 ‘수석회의’ 노트엔 ‘이연택 명퇴→ 대통령을 위한 일’ 與 “MB 문화계 블랙리스트 개입”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가 28일 공개한 ‘대통령실 전출자 총선출마 준비 관련 동향’이라는 제목의 문건엔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의 선거개입 시도 정황이 드러나 있다. 2011년 12월 공직기강비서관실 감찰팀에서 만들었다고 적혀 있는 문건은 “대통령실 전출자 중 행정관 이상 11명(수석급 2명, 비서관급 7명, 행정관급 2명)이 내년 총선 출마 준비 중인데 대통령실 차원의 직·간접 지원을 호소”라고 적혀 있다.문건은 수석급으로 ‘박형준 전 시민사회특보’, ‘정진석 전 정무수석’ 등 2명과 비서관급 7명, 행정관급 2명의 실명을 적시하며 이들의 선거를 돕기 위해 “대통령실 진출자 지원창구 역할을 할 부서를 지정해 민원·애로사항을 청취하며 소통하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VIP(이 전 대통령) 국정철학 이행과 퇴임 이후 안전판 역할을 수행하도록 당선율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통령실 출신 당선자들은 퇴임 이후 VIP의 정치적 영향력 유지에 긍정적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면서 “총선 전까지 대통령실 내 지원창구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이명박 정부 관계자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스프링노트 1권에는 이 전 대통령이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해 보고받았을 것으로 의심되는 내용도 들어 있다. 2009년 2월 20일엔 ‘좌파문화예술단체 → VIP보고’라고 적혀 있다. 2월 2일엔 ‘VIP 주재 수석회의 안건’으로 ‘종교계 좌파동향’ ‘이연택 문화부 mishandling(잘못 처리하다) 사적감정 가질 필요 X 명예퇴임토록 해야 → 대통령을 위한 일’이라고 적혀 있다. 이연택 전 대한체육회 회장을 명예퇴임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적폐청산위는 “이 전 대통령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제가 자신과 무관하다고 변명했지만, 이미 2009년부터 관련 보고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나왔다”면서 “검찰의 강력한 수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야권 지자체장 국정운영 저해 실태 및 고려사항’ 문건에는 안희정 충남지사나 이재명 성남시장 등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 등 당시 야권 광역·기초 단체장 31명의 이름과 최근 행적, 성향에 대한 평가가 담겼다. 민주당은 이 문건이 ‘사실상의 블랙리스트’라고 지적했다. 문건은 송영길 인천시장에 대해 “대북정책 흔들기를 획책했고, 국책사업 반대활동을 선도했다”, “종북인물을 대거 기용했다”고 평가했다. ‘종북인물’로 신동호 현 청와대 연설비서관, 김효은 민주당 부대변인 등이 꼽혔다. 안 지사에 대해서는 “6·15, 10·4 선언 이행을 주장하는 등 대북정책 비판 활동 주도”라고 명시했고 김두관 전 경남지사는 “종북단체, 좌파단체를 편향 지원했다”고 지적했다. 최문순 강원지사에 대해서는 “세금급식 등 포퓰리즘을 추진했다”고 명시했다. 이 시장에 관해서는 “4대강 사업에 반대했고 좌파단체를 편향 지원했다”고 했다. 문건은 이들 단체장을 대상으로 행정안전부가 정기감사와 교부세 감액·반환 등 불이익 조치를 해야 하며 기획재정부에서는 예산을 삭감하는 등 실질적인 제어조치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가기관의 공영방송 개입, 기무사의 민간인 해킹 등의 정황을 담은 문건도 있다. ‘KBS 관련 검토사항’이라는 제목의 문건은 이명박 정부가 KBS를 장악하려 한 정황이 드러나 있다. ‘KBS 내 좌파성향 주요간부’ 목록엔 보도국장, 시사제작국장, 정치부장, 교양국장 등 15명이 ‘호남’ ‘친민주당’ ‘좌파성향’ 등으로 분류돼 있다. 적폐청산위 박범계 위원장은 “이날 공개된 문건은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경찰 등에서 작성된 문건으로, 김효재 전 정무수석의 보좌관이었던 김성준씨가 청와대 밖으로 유출한 문건의 일부”라고 밝혔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문성근 합성사진’ 유포한 국정원 ID, 배우 문근영에도 “빨갱이 핏줄”

    ‘문성근 합성사진’ 유포한 국정원 ID, 배우 문근영에도 “빨갱이 핏줄”

    이명박 정부 시절에 배우 문성근씨(64)와 김여진씨(45)의 나체 합성사진을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한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의 인터넷 아이디(tonk****)가 연예인, 언론, 사법부,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을 비방하는 글과 사진까지 무차별적으로 인터넷에 올렸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특히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배우 문근영씨(31)에게도 ‘빨갱이 이미지’를 덧씌워 비방한 것으로 드러났다. 21일 경향신문은 해당 아이디가 2009~2011년 게시됐던 글들을 최근 전부 삭제하는 등 증거인멸에 나서고 있다면서 이와 같이 보도했다. 검찰은 전날 이 작업을 했던 국정원 직원 2명에 대해 정보통신망이용촉진법상 명예훼손과 국정원법상 정치관여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2010년 9월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한 보수 성향 카페에 해당 아이디 명의로 “대한민국 신흥 종교 ‘노슬람교’”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노슬람교’는 일부 보수층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슬람교’를 합쳐 비아냥댈 때 쓰던 단어다. 해당 아이디는 ‘좌빨혐오’ ‘Leftzombie Hunter’(‘좌파좀비 사냥꾼’이란 뜻) ‘Mossad’(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 등으로 닉네임을 바꾸면서 글을 올렸다. 이 닉네임이 올린 글에서 노 전 대통령은 “뇌물현”으로, 봉하마을 자택은 “봉하 아방궁”으로 적혀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사망을 비하하는 표현도 등장한다. 이명박 정부 국정원의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권해효·김미화·김규리·김제동·명계남·문성근·윤도현씨와 고 신해철씨는 노 전 대통령 “홍보 대사”라고 했다. 이들은 같은 카페에 올린 다른 글에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쇄 살인범인 유영철, 강호순, 조두순에 빗대거나 사법부를 “빨법부”(‘빨갱이’와 ‘사법부’를 합친 말)라고 칭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연예인들을 비하할 때는 ‘종북’을 단골 소재로 삼았다. 2010년 7월21일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이란 글에는 방송인 김제동씨(43)와 이정희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48)가 함께 등장한 언론기사 사진을 올린 뒤 “좌빨 년놈”이라는 말을 썼다. 블랙리스트 82명에 오르지 않은 문근영씨도 “빨치산 손녀” “빨갱이 핏줄” 등의 공격을 당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이 글들은 지난 19일 오후까지 게시돼 있다가 20일 오후 현재 모두 삭제된 상태다. 증거인멸이 의심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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