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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 더 분발하라”

    ‘문화자원을 활용해 서울이라는 브랜드를 확실하게 키워야 합니다.’‘외국인이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주세요.’‘기업활동을 제약하는 관료적인 문화를 줄여야합니다.’ 28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이명박 서울시장과 다국적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서울국제경제자문단(SIBAC) 2005년도 총회’에서는 서울이 외국인 투자자에게 매력적인 장소가 되기 위한 갖가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감성과 문화가 넘치는 도시로” 영국의 영 파운데이션 제프 멀건 이사장은 “삶의 질이 높은 호주 시드니, 랜드마크 빌딩이 있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심야 문화예술 행사가 다채로운 핀란드 헬싱키 등에 비해 서울을 떠올리면 특별한 게 생각나지 않는다.”면서 “서울에 대한 정체성을 일관성 있게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이어 “서울에 산다고 하면 남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뿌듯함이 느껴진다는 입소문(buzz)이 퍼지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국의 미디어기업 포브스 크리스토퍼 포브스 부회장은 “여행 중 누군가 서울에 간다고 하면 ‘사업 때문에 가는지, 휴가 때문에 가는지’ 질문을 하게 되지 않는다.”면서 “이는 서울에서는 사업밖에 할 게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서울이 지닌 풍부한 예술·역사적 재산이 서울에 대한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콩상하이은행(HSBC) 피터 스트링험 마케팅책임자는 “캐나다 밴쿠버는 천혜의 자연 자원을 지녔지만 이런 도시는 흔치 않은 만큼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개선할 방법으로 감성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면서 “해당 도시가 흥미진진한지,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여겨지는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인지 등 감성적인 부분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외국인 배타의식 벗어나야” 미국 정보기술(IT)업체인 ITUC 루돌프 슐라 회장은 “한국에서 사업을 해본 결과 한국인들은 민족주의적이며 외국인을 불신하는 특성이 있어 사업을 어렵게 하며, 한국인이 아닐 경우 고용인들의 충성도가 낮아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과 서울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호주 매쿼리은행 데이비드 클라크 회장은 “1996년 서울에 처음 진출했을 때 4명으로 출발해 현재 190여명으로 늘어난 것은 ‘빨리빨리’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금융허브의 잠재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면서 “다만 서울이 투자적격지가 되기 위해서는 규제 완화, 세제 혜택, 외국인 친화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서울을 디지털·쇼핑 허브로” 영국 유통업체 테스코PLC 데이비드 리드 회장은 “서울은 주거지와 숙소가 부족하고 외국 학생 교육시설·프로그램이 부족하다.”면서 이에 따른 대안으로 ▲세계 디지털 허브 건설 ▲아시아 쇼핑 천국 건설 ▲아시아 문화 중심지 조성 ▲외국인 투자에 경쟁력 있는 어드밴티지 제공 등을 제안했다. 그는 “한국은 최고 수준의 디지털 보급률을 자랑하는 동시에 서울시민 86.4%가 PC를 사용하고 이 가운데 91.8%가 초고속 인터넷에 가입돼 있다.”면서 “서울을 신상품을 테스트하고 인력을 개발할 수 있는 ‘세계 디지털 허브’로 건설하라.”고 충고했다. 이어 “서울에는 동대문 시장 등 세계 최초의 재래시장이 있는데다 이태원·명동 등 외국 관광객을 위한 지역, 문화·쇼핑을 경험할 수 있는 인사동이 있는 만큼 아시아의 쇼핑 천국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美작가가 본 ‘생명공학 한국이 앞서가는 이유’

    서울대의 세계줄기세포연구 허브 건립을 계기로 미국 언론은 다시 한번 ‘왜 한국이 줄기세포 연구의 최선두 주자가 됐는가.’에 대한 정밀분석에 들어갔다. 한국에서도 출판돼 화제를 모았던 ‘천재 공장:노벨상 수상자들의 정자은행’의 작가 데이비드 플로츠는 21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가 운영하는 인터넷 잡지 ‘슬레이트닷컴’에서 한국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줄기세포 연구가 꽃피운 이유를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플로츠는 우선 한국에 생명 윤리에 대한 논쟁이 없다는 점을 지목했다. 한국에도 복음주의 기독교도가 25%를 차지하고 천주교 신자도 6%에 이르지만 미국과 달리 낙태 등 생명 윤리에 대한 논쟁보다는 인권, 사회정의, 경제개발 등 보다 실용적인 이슈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 때문에 한국의 법체계는 낙태를 금지하고 있지만, 정부가 사실상 묵인하기 때문에 선진국 중 낙태율이 가장 높다고 플로츠는 지적했다. 플로츠는 또 한국인의 ‘핏줄’에 대한 관심도 복제의 성공요인으로 꼽았다. 한국인은 어느정도 규모가 큰 나라 중 인종적 ‘단일성’이 가장 뚜렷하고 누구나 자기 조상이 누군지 확실하게 알고 있을 정도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핏줄 찾기와도 관련이 있는 복제연구에 한국인들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인공수정 등 불임 클리닉이 발달한 것도 복제연구의 기초가 됐다고 플로츠는 주장했다. 자신의 진정한 ‘씨’를 이어가기 위해 인공수정 및 시술 방법을 발전시키다 보니 복제를 위한 수정 등에도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네번째로는 한국인이 ‘의료 행위를 통한 자기 개발’에 매우 개방돼 있는 점을 들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성형수술이 가장 많이 이뤄지고 있는 국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마치 수술을 통해 외모를 개선하는 것을 당연시하듯, 줄기세포 연구를 통해 유전자를 개선하는 데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플로츠는 연구소 전체가 공동으로 작업하는 한국적 연구 시스템도 성공의 요인으로 꼽았다. 복제 연구는 일관된 반복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서양식의 개인별 연구보다는 한국식의 집단 연구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또 우리 내부의 평가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플로츠는 한국에서 과학자들이 존경받고 대우받는 것도 복제연구의 성공요인으로 꼽았다. 황 교수가 미국의 과학자들은 꿈꾸기도 어려운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그의 연구를 위해 난자를 기증하겠다는 여성이 줄 선 것 등을 그 사례로 들었다. 끝으로 플로츠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성공요인으로 지목했다. 식민통치와 전쟁, 분단으로 얼룩진 20세기와는 다른 21세기를 만들기 위해 한국인 전체가 생명공학 분야에서 세계 제1이 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dawn@seoul.co.kr
  • 선저우 6호 민족주의 폭풍 몰고 귀환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의 두 번째 유인 우주선 선저우(神舟) 6호가 5일간의 우주 비행을 마치고 17일 귀환했다. 지난 12일 주취안(酒泉)위성 발사센터에서 발사된 선저우 6호는 지구를 77바퀴 비행하며 각종 과학 실험을 실시한 뒤 발사 115시간30여분 만인 이날 새벽 4시32분 네이멍구(內蒙古) 쓰쯔왕치(四子王旗)의 아무구랑(阿木古郞) 초원 주착륙장에 안착했다. 선저우 6호는 우주 환경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등 다양한 실험과 함께 우주선의 궤도 모듈을 사용한 식품 가열, 대소변 수집, 대기환경, 온도 및 습도 통제 등의 기능을 충분히 검증했다고 신화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이번 성공으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더욱 높아지게 됐으며 국내적으로 민족주의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중화민족의 자긍심 고취 중국의 두 번째 우주인 페이쥔룽과 녜하이성은 착륙 직후 전용기편으로 베이징 시자오(西郊)공항으로 날아와 환영 행사에 참석했다. 공항에는 차오강촨(曺剛川) 국방부장이 나와 이들의 귀환을 축하했고 공항에서 우주 통제센터로 향하는 거리는 환영 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이날 인민일보는 사설에서 “중국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자랑스러운 성과”라고 평가했다. 신경보(新京報) 등 일부 신문은 이날 호외를 발행, 가두에서 시민들에게 뿌리기도 했다.●중국 달 탐사 계획 가속화 중국은 2007년에 우주 유영을 실행하고 2010년 달에 무인우주선을 착륙시킨다는 야심찬 우주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창어프로젝트(嫦娥工程)’로 명명된 달 탐사계획은 ▲인공위성 발사를 통한 달 표면 입체분석 ▲탐사선 달 착륙 ▲우주인 달 착륙 후 귀환의 3단계로 이뤄져 있다. 중국은 달 탐사 이후 우주인이 우주에 단기 체류할 수 있는 캡슐을 발사하고 우주선과 다른 비행체가 도킹하는 기술을 개발, 우주 정거장 건설로 이어간다는 계획이다.oilman@seoul.co.kr
  • [오일만특파원 베이징은 지금] ‘중화의 야망’ 보여주는 선저우 6호

    중국의 두번째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6호’가 오는 13일 오전 11시 발사될 예정이다. 지난 2003년 10월 발사된 첫 유인 우주선 선저우 5호에 이어 이번에 발사될 선저우 6호도 중국인들에게 ‘중화의 꿈’을 투영시키는 중요한 매개 수단이 될 것이다. 중국 언론들은 선저우 6호 발사를 앞두고 분위기 조성이 한창이다.“선저우 6호로 상징되는 중국 우주 과학기술이 이미 러시아를 뛰어넘었고 세계 최강국 미국을 바짝 뒤쫓고 있다.”며 체제 홍보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관영 CCTV는 사상 처음으로 선저우 6호의 발사 과정을 생중계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전역에서 5억명 이상이 시청할 것으로 관측된다. 오성홍기(五星紅旗)를 휘날리는 가운데 선저우 6호가 대기권으로 날아가는 순간, 세계로 비약하는 중국의 위상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선저우 6호 발사는 1956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로 시작된 중국 우주개발 계획의 기념비적 성공이다. 문화대혁명의 폐허 속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우주를 향한 중국인들의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선저우 6호의 발사 이면에는 한족을 포함해 56개 다민족 국가로 이뤄진 중국 대륙을 중화주의(中華主義)로 묶으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개혁·개방 과정에서 불거진 소외계층의 불만을 중화주의적 자존심으로 잠재우려는 것 같다. 긴급 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중국 당국이 연간 20억∼30억달러의 막대한 예산을 쏟아가며 유인 우주선 발사에 총력을 기울인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선저우 효과’를 노리는 중국 기업들의 발빠른 상혼도 2년전(선저우 5호 발사)과 다른, 새로운 변화다.CCTV가 책정한 TV 생중계의 광고 단가는 무려 초당 51만 2000위안(약 6700만원)이다. 그래도 중국의 대기업들은 최소 10% 이상의 매출효과를 기대하며 광고 시간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선저우 6호를 통해 시장 경제주의와 중화 민족주의가 교묘하게 접목되는 중국의 현주소를 읽을 수 있다.oilman@seoul.co.kr
  •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구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가요, 항일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했다.‘조선 상고사’처럼 널리 알려진 연구서가 있는가 하면,‘꿈하늘(夢天)’ 같이 소설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꿈하늘’은 일종의 팬터지 문학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작가 신채호는 천상에 올라 ‘임’을 좌우에 모신 여러 영웅호걸을 만난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있고 철학자 화담 서경덕도 보인다. 도술의 달인 전우치도 함께 자리한다. 예상 밖인 것은 오윤부(伍允孚)라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성력(星曆)의 대가라 했다. 우선 성씨부터 낯선 오윤부. 좀 더 알고 보면 그는 ‘고려사’ 열전에 소개될 정도로 완전히 무명은 아니었다. 천문예언 전문가라고 했다. 섣부른 짐작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천문예언이 무척 중시됐다. 이름난 유학자 박상충의 전기에도 “성명(星命)에 밝아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중국에서는 13세기 이후 사주명리학이 예언이나 점의 핵심이었다. 고려는 경우가 달랐다. 풍수지리와 더불어 천문예언이 늘 예언의 중심축이었다. 인간 만사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땅의 기운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고려인들의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문은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정조9년(1785)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이른바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것은, 그 성씨가 김가이고, 이름은 자세히 모릅니다만,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유가는 정미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정가는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 세 집안사람들이 장차 백 년 동안 서로 싸웁니다. 그 증거로, 객성(客星)이 남방에서 이미 서울로 들어왔습니다.”(실록, 정조 9년3월1일 경술) 조선은 장차 3국으로 분할돼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는 예언이다. 객성이 남쪽에서 출현해 서울 쪽으로 들어왔다는 천문현상이 증거로 제시됐다. 나라의 운명은 별이 결정한다는 민중의 믿음이 읽힌다. ●대대로 별점을 본 오윤부 고려 충렬왕 때 일관(日官)으로 활동한 오윤부야말로 별점의 대명사였다. 그의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 한 때 부흥(復興)으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시대의 성씨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엔 배천 오(伍)씨가 없다. 오윤부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대물림을 해가며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살았다. 배천오씨들은 자자손손 별점을 보며 태사국(太史局)을 지켰다.(오윤부의 전기는 ‘고려사’, 권 122를 참조) 고려는 귀족사회였고, 모든 신분이 세습되었다. 심지어 군졸 노릇만 하는 집안, 아전과 서리를 배출하는 집안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일관 오윤부 일가는 귀족은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이나 상인보다는 훨씬 지위가 높았다. 오윤부는 용모가 초라했고 말수가 적었다. 여간해서는 좀체 웃지도 않았다. 그는 첫눈에 호감을 살 만큼 붙임성 있고 구변 좋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문을 익혔다. 장성해서는 일관에 임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말년에는 천문도(天文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후배 일관들이 그 천문도를 모범으로 삼았다니 그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오윤부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별점이었다. 타고난 재주도 재주였지만 그는 무척 부지런했다. 밤을 새워가며 하늘을 수놓은 수 백 개의 별들을 샅샅이 살폈다. 날씨가 제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그는 늘 성실했다. 오윤부의 먼 후배 격인 조선시대 일관들은 5개 팀으로 나뉘어 하루 24시간 내내 하늘을 관측했다. 그들은 관측 대상을 23종으로 나눠 정상적인 현상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해, 달, 흰무리, 지진, 혜성, 새별(新星) 그리고 28수로 요약되는 주요 별자리를 모두 점검했다. 일관들은 특히 새별과 흰무리 등의 모양, 정도, 자리, 바뀌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성변측후단자’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서운관지’) 이 보고서에 천체 약도가 첨부돼 날마다 임금님에게 제출됐다. 조선시대 일관들이 남긴 일지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천문 보고서였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천문 강국의 역사를 입증한다. 고려시대의 일관들은 그와 비슷한 활동을 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특히 오윤부는 이상한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어떤 별이 천준(天樽)을 범하자 “이번에 올 중국사신은 술꾼이다.” 고 예언했다. 천(天)은 중국, 준(樽)은 술통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별이 여림(女林)을 범하자, 중국 사신이 와서 소녀들(童女)을 데려갈 것이라며 걱정했다.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의 해석이 현대인의 눈엔 너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늘이 꼭 중국이어야 될 이유가 없다.‘여림’을 두고 공녀(貢女)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원나라의 횡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오윤부는 그런 현실을 감안해 모든 천문현상을 풀이했다. 그의 별점은 잘 들어맞았고 소문이 원나라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 ●원형 민족주의자 오윤부 고려 후기에는 원의 수시력과 같은 중국역법이 수입되기도 했다. 오윤부는 그 방면에도 상당한 전문가였다. 그는 달력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제일(祭日)을 중국과 비교했다. 고려에서는 봄가을의 가운데 달인 음력 2월과 8월의 마지막 무일(遠戊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나, 중국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첫째 무일(近戊日)을 제삿날로 삼았음이 확인됐다. 오윤부는 조정에 건의해 중국의 예를 따르게 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중국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는 고려인이었다. 충렬왕은 즉위 직후 선왕인 원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셨다. 새 위패를 선대왕들의 신위와 합설하기 위해 원종의 시책(諡冊 시호를 아뢸 때 쓴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충렬왕후는 원나라 공주였는데, 왕비로서 그 행사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다. 마침 오윤부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공주의 참여를 가로막았다. 선대왕들의 신령이 계신 곳에 원나라 공주가 술잔을 올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원나라는 과거 수십 년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원을 미워했다. 오윤부는 이런 반원의식이 강했다. 원나라 공주는 종묘 제사에서 제외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통쾌해 했다. 알려진 대로 원종 이후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됐다. 고려국왕은 대대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 왕은 죽어서도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호에 표기해 “충○왕”이 되었다. 고려왕실에 시집온 원나라 공주의 위세는 때로 왕권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었고, 오윤부는 이 점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천문 현상을 빙자해 공주를 압박했다.“천문을 살펴 보니 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요즘은 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청컨대 궁궐을 짓거나 고치는 공사를 중지하고 덕을 닦으십시오. 그래야 재변이 멈춥니다.” 원나라 공주는 오윤부의 제지를 받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원나라 공주에 대한 오윤부의 공격은 계속됐다. 공주는 고려에 시집온 뒤에도 여러 차례 본국을 오갔다. 그 때마다 막대한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공주는 원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기가 없는 동안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언젠가 한 번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놓고 좋은 날을 택해 아예 새 궁궐을 지어 놓으라고 졸랐다. 다들 불평은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다. 이 때도 오윤부가 발 벗고 나섰다.“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님께 불리하므로, 신하인 저는 절대 택일을 못하겠습니다.” 원나라 공주는 분노에 치를 떨며 오윤부의 벼슬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매로 때리려 했으나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어느 재상이 애써 말리는 바람에 매 맞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다. 그 일로 분이 안 풀린 공주는 오윤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왕은 공주의 청을 어기지 못해 오윤부를 매질하게 했다. 그는 매를 맞으며 이렇게 변명하였다.“날을 가리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신하를 협박하여 억지로 가리게 한다면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의 뜻에 아첨할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궁궐을 짓는 공사가 겨우 시작됐는데, 화성이 달을 삼키는 변이가 일어났다. 왕은 반승(飯僧 스님들에게 밥을 공양함)을 실시해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반승은 사소한 재앙이 예측될 때마다 되풀이된 고식적인 해결책이었다. 오윤부는 동료인 문창유와 함께 왕에게 간언을 바쳤다. 화성이 달을 삼키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스님들에게 밥을 주고 부처님을 공양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런 값싼 보시를 그만 둬야 한다. 진정한 길은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왕은 반대여론을 의식해 궁궐 짓는 일을 그만뒀다. ‘고려사’에 실린 전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오윤부의 간언은 전문분야인 천문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사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한 번은 오윤부가 전법총랑(典法摠郞 법률의 집행을 담당) 박인주에게 전법사의 사무가 자꾸 지연되는 까닭을 물었다. 원나라 공주의 명령과 임금님의 명령이 한없이 쏟아져,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과 공주는 각기 소송 사건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해 일처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윤부는 이런 일이 자기 소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따졌다. 이런 식으로 일관 오윤부는 가끔씩 왕과 의견충돌을 보였다. 그러나 원나라 공주에 대해 대들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는 공주 보기를 마치 원나라 침략군을 대하듯 했던 것 같다. 오윤부는 일종의 원형(proto) 민족주의자였다. ●백성을 대변한 오윤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천문에는 변이가 많다. 그럴 때마다 오윤부는 이를 정밀하게 살펴 고려왕실의 미래 운명과 관련지었다. 그는 특히 고려백성의 편에서 국왕 내외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천문현상을 활용했다는 혐의가 있다. 천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과거의 일관들은 기도를 권하거나 굿을 하라는 권고를 주로 했다. 다분히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오윤부는 달랐다.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백성의 원망이 없다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두 곳에 파견한 왕지별감(王旨別監 왕의 특사)을 소환하고, 여러 곳에 설치된 공주식읍(公主食邑 원나라 공주에게 준 토지와 백성)을 폐지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권고를 듣자 왕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마침내는 공주에게 줬던 식읍을 폐지하였다. 거기서 거둔 세금을 나라의 창고에 배속시켜 백관의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실 원나라 공주는 왕을 졸라 각처에 농장을 마련해 호사가 극에 이르렀다.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수만 명의 백성들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오윤부는 백성들의 의사를 대변해 식읍의 혁파를 주장했다. 하늘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변동도 오윤부는 마찬가지로 이용했다. 언젠가 한번은 궁궐 연못에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산소부족이었든지 아니면 약물에 의한 중독이었을 것이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물위로 떠오른 고기떼를 두고 오윤부는 충렬왕을 몰아쳤다.“갑술년(충렬왕 즉위년 1274)에 대궐 동편 못에서 이런 괴변이 일어났고 선왕이신 원종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스스로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궁궐의 물고기가 죽든 살든 그것이 왕의 목숨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관 오윤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칫하면 국왕이나 원나라 공주의 진노를 사게 될 거였지만 개의하지 않았다. 예언가 오윤부의 성공비결은 고려사회에 만연했던 반원적인 정서를 잘 이용했다는 점이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도 원나라의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렬왕 역시 친원과 반원의 두 노선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했다. 그 틈을 비집고 오윤부는 한결 같이 자주노선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묘청과 백수한의 후예였다. 그러나 오윤부는 묘청 등을 뛰어넘었다. 그는 일관으로서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정확히 인식시켜야 될 임무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일에 왕이 자기의 ‘충언’을 듣지 않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끝까지 졸라댈 정도였다. 오윤부의 해석은 유교의 재이론(災異論)에 가까웠다. 묘청 등이 불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에 기울어 있었다면, 오윤부는 다가올 성리학 시대의 천문해석에 근접해 있었다는 말이다. 유교적인 천문예언가 오윤부의 고집불통에 충렬왕은 때로 두통을 일으켰다. ●충렬왕이 졌다! 왕은 오윤부를 골탕 먹일 생각까지도 했다. 원 나라 세조가 요동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다. 왕은 상국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까지 나가게 됐다. 우선 유청신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때 오윤부가 별점을 쳤다.“아무 날 유청신이 반드시 돌아옵니다. 임금님께서는 요동까지 가실 필요 없이 말머리를 서울로 돌리게 되십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됐는데도 유청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오윤부를 체포했다. 점괘가 틀렸으니 벌을 받으라 했다. 하지만 오윤부는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며, 좀더 기다리자고 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먼데서 먼지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유청신이 타고 있었다. 예언이며 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문현상은 그저 자연계의 변화를 알릴 뿐이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 복을 불러들일 리 만무하고 화를 초래할 수도 없다. 오윤부의 사고방식은 이런 현대적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윤부는 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천문을 살폈고, 그 때문에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신채호가 그를 가장 뛰어난 천문예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조선 정조 때 일어난 ‘정감록’ 사건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공범인 평민 지식인 주형채도 오윤부처럼 별점을 보았다. 주형채는 말했다.“작년 섣달 초7일, 초8일, 초9일에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습니다. 그 속에 붉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장군성과 태백성이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서로 1도(度) 거리로 떨어졌으며,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떠밀어 여러 번 물러가고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정조,9년3월22일 신미) 주형채는 국가의 녹을 먹는 일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윤부처럼 밤하늘의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었고 밤새워 별을 보았다. 별자리의 이동을 1도 2도로 따질 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다. 고려시대에는 오윤부 같은 특수 계층만 그런 지식을 독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평민지식인들도 서적을 통해 공유하게 됐고, 그래서 주형채와 같은 평민도 직접 별을 바라보며 민중의 희망을 찾아 나섰다. 자유로운 지식은 곧 우리들의 희망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한국도 日민족주의 존중해야”

    “동북아시아 공동체를 위해서는 상대국가의 민족주의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전후 책임을 강조해 온 ‘일본의 양심’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4일 서울대에서 강연을 갖고 “한국이 일본의 민족주의를 부정한다면 동북아 공동체는 논의 자체가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대 통일포럼 초청으로 방문한 와다 교수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미래와 한국과 일본의 민족주의’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정치적 대화를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민족주의를 부정해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5년 시인 김지하가 출옥 후 ‘일본 민중에게 드리는 제안’이라는 글을 통해 한국인은 자기를 긍정하고 일본인은 자기를 부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이를 보고 일본인으로서 저항감을 느꼈다.”면서 “일본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민족주의가 갖고 있는 자기 긍정의 요소를 빼놓을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지배·침략에 대한 저항이 현대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다는 와다 교수는 “한국이 반성을 구하는 수준에 일본의 응답은 충분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논리적으로 봤을 때 사죄에 있어 ‘최소한의 수준’을 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로만 생각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유가 민족주의’ 통치이념 부상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공자(孔子)가 부활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지시로 ‘타도해야 할 봉건 잔재 1호’로 지목됐던 공자가 이제는 ‘중화의 스승’으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인본(人本)·친민(親民)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후진타오 체제가 공자의 핵심 사상인 ‘인의(仁義)정치’를 수용,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활용하려는 복안이 깔려 있다. 지난 28일 공자 탄신 2556주년은 일종의 신호탄이다. 국제유가연맹과 중화민족문화촉진회, 국가관광국, 산둥(山東)성 정부 주최로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曲阜)에서 ‘국제 공자 문화절’이 대대적으로 열렸다.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공자를 기리는 ‘국제 합동 제사’가 열린 것이다. 중국 중앙방송(CCTV)은 사상 처음으로 공자 제사를 4시간 이상 생중계했고 국가 고위급 간부들도 참석했다. 공자 탄신일에 맞춰 중국 전역에서 ‘논어 낭송 경연대회’ 등 각종 전통 유교문화 행사가 열렸다. 중국 지도부는 80년대 말 톈안먼 사태와 동구 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서양 중심의 현대화’에서 벗어나 전통 중화 사상으로 새롭게 중국의 좌표를 설정했다는 분석이다. 취푸 공자연구원 학술연구부 치징장(齊經疆) 부장은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전통문화는 정치적 응집력과 질서 안정에 도움이 된다.”며 “유가문화를 토대로 하는 민족주의는 전환기 중국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90년대 장쩌민(江澤民) 체제는 ‘도덕정치’를 앞세워 토대를 만들었고 2000년대 후진타오 체제는 중화민족 부흥을 외치면서 ‘유가 민족주의’가 전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독경운동(讀經運動·유가 경전읽기 운동)’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주의 이념의 퇴조로 통치 이데올로기의 빈곤에 직면한 중국 공산당은 ‘죽었던 공자’ 를 부활시킨 셈이다. 향후 공자 사상을 핵으로 하는 유가 민족주의는 시장주의와 함께 중국식 사회주의를 끌어 갈 쌍두마차가 될 전망이다.oilman@seoul.co.kr
  • [국제플러스] “고이즈미 연내 야스쿠니 참배”

    총선 압승으로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올 연말 이전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다고 영국 더 타임스가 28일 보도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총선 승리 뒤 더 타임스와 가진 첫 해외언론 인터뷰에서 “중국은 정치적인 이유로 나의 야스쿠니 방문을 반대한다.”면서 “하지만 중국도 나의 의도에 대해 알고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국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를 환영하지 않는다면서 중국이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진출을 반대하고 있음을 그 사례로 들었다. 고이즈미 총리 정부 아래에서 일본의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사실과 다르다며 적극 부인했다.
  • “민족주의적 일국사 관점서 탈피 역사교육 근·현대사 비중 늘려야”

    “근·현대사 위주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육 과정에서 근·현대사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마디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연대기식으로, 백과사전식으로 시대와 사건을 줄줄이 나열해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 한국교원대 김한종 교수 등 8명의 역사교육 전문가들이 쓴 글을 모은 ‘한국근·현대사교육론’(선인 펴냄)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수록된 글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충북대 주철민 강사가 쓴 ‘프랑스 고등학교 현대사 교육의 내용구성과 조직’. 역사교육에서 근·현대사 교육이 왜 중요한지 드러내는 일종의 ‘비교 사례’격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교육의 특징은 두 가지다. 우선 중학교 과정에서 통사 형식으로 전체 흐름을 익힌 뒤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철저히 프랑스혁명 이후 현대사 중심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도 42%로 그 비율이 높던 현대사가 고등학교 때는 94%까지 치솟는다. 이는 프랑스 역사교육의 목표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살고 있고, 미래에 실제적으로 참여해야 할 사회를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지금 현재’의 프랑스와 관련이 깊은 ‘혁명 이후’의 역사를 다룰 수밖에 없고, 동시에 주변국들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 때문에 프랑스 역사교육의 또 다른 특징은 ‘역(逆)환경확대법’을 택하고 있다는 데 있다. 프랑스사에서 유럽사로, 유럽사에서 세계사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에서 유럽사로, 유럽사에서 프랑스사로 줄어든다. 이럴 경우 민족주의적 일국사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 근·현대사 역사교과서는 국사과목과 분리돼 선택과목으로 바뀌어졌을 뿐 아니라 서술내용마저도 한반도 내에만 너무 치우쳐 있다. 그나마도 식민지 경험과 군부쿠데타, 압축성장의 기억 때문에 근·현대사 해석을 두고 온갖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주 강사는 “역사학 그 자체와 달리 역사교육에서는 ‘국가관’ 개념이 빠질 수 없고 이는 프랑스도 마찬가지”라면서 “다만 우리는 근·현대사 해석 문제를 두고 지나치게 쓸모없는 이데올로기 논쟁이 생기는 바람에 자꾸 근·현대사를 회피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고 말했다.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우암 송시열 주인공 역사소설 펴내

    ‘제로섬 게임’과 ‘파라도’로 잘 알려진 중견 소설가 김선주씨가 최근 우암 송시열을 다룬 역사인물소설 ‘송자소전(宋子素傳)’을 펴냈다. 김씨는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차례 이상 언급된 조선 최고의 사학자이자 사상가, 또 정치가이자 민족주의자였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부진하며 이번에 그의 인간적인 내면을 파고들고 싶었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다.경기여고와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김씨는 1985년 등단한 뒤 95년 창작집 ‘길 위에 서면 나그네가 된다’(제1회 민족문학상을 수상) 등 십수편의 중·장편집을 내놓았다.
  • [오늘의 눈] 유엔 60주년과 개혁/박정현 정치부 차장

    유엔은 한때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창설된 1945년 10월24일을 기념한 ‘유엔데이’에 하루를 쉬면서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줬던 유엔의 고마움과 유엔의 막강한 힘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로 창설 60주년을 맞은 유엔은 과거와는 달라진 듯하다.172개국 정상이 참석해 ‘세계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라고 할 만한 유엔 정상회의는 이견을 노출하면서 삐걱거렸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은 14일(한국시간 15일) 기조연설에서 유엔의 개혁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는 나와 다른 많은 회원국들이 요구하는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유엔 개혁안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상임이사국을 늘리려는 일본·독일·인도·브라질과 저지하려는 한국을 비롯한 ‘커피클럽’ 국가간의 치열한 외교전을 이르는 말이다. 뉴욕타임스는 14일자 사설에서 유엔 개혁의 실패이자, 리더십의 실패라고 규정했다. 리더십의 실패는 유엔의 아난 총장을 포함한 도덕성의 문제점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바닥에 떨어진 유엔의 권위는 말이 아니다. 유엔 석유·식량조사위원회는 690억달러의 예산이 들어간 석유·식량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뇌물과 밀수, 석유 값 폭리가 횡행했다는 보고서를 최근 제출했다. 아난 총장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포함됐다. 유엔의 변화와 개혁은 남북한이 동시에 가입하던 1991년부터 예고됐던 것 같다. 냉전의 붕괴에 이어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은 2차대전과 냉전의 산물인 유엔이 변화해야 한다는 신호였다는 얘기다. 유엔은 탈냉전 이후 이념을 대체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도도한 물결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터다. 하루에 1달러도 안되는 돈으로 생활하는 기아선상의 10억명에게 제대로 된 대책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제 유엔은 강대국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회원국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때가 아닐까. 분쟁은 총칼이 아닌 기아와 차별에서 태동하는 탓이다. 유엔본부에서 박정현 정치부 차장 jhpark@seoul.co.kr
  • [오늘의 눈] 중·일 민족주의 파고 속의 ‘균형자론’/이석우 국제부 차장

    “일본에 대해 중국은 더이상 관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없다.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이야말로 동북아 평화의 파괴자다.” 중국전문가인 우제창(열린우리당)의원이 “동북아 안정을 위해 중국의 대국적이며 관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며 유화적인 대응을 주문하자 중국측 참석자들이 격앙된 어조로 반론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차이바이팡 전 프랑스대사, 장루이제 전 본부대사 등 중국측 참석자들은 “일본은 과거사 미화, 재무장 강화를 통해 군국주의 길로 나가고 있다.”면서 미·일 동맹강화,‘보통국가’ 시도에 대한 불신과 노여움을 드러냈다. 일본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나라란 투다. 신중하기로 유명한 중국 외교계 인사들이 외교적 수사가 아닌 직설적 표현으로 외국인들 면전에서 제3자를 질타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지난 5∼8일 중국 후난성 웨양(岳陽)과 즈장(芷江)에서 열린 한·중 지도자포럼 및 국제평화문화축전에서 있었던 일이다. 포럼 참석자뿐 아니라 최근 중국은 사회전반적으로 ‘일본 때리기’가 유행이다. 욱일승천하는 국력의 자신감 속에 ‘힘에는 힘’을 외치며 일본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가 민족주의 열풍과 함께 뜨겁다. 일본 기술·자본을 빨아들이기 위해 낮은 자세로 처신하던 1980·90년대 중국의 모습은 이제 옛일이 됐다. 일본이나 중국이나 상대방에 대한 증오의 강도와 군비 증강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바다 건너 일본열도에선 12일 새벽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절대안정 의석을 확보한 압승을 거뒀다. 그러자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일제히 “헌법개정 절차가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했다. 조만간 고이즈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강행되고 중·일 갈등도 고조될 것이란 해설도 이어졌다. 민족주의 불길이 거세지는 중국, 우경화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일본. 대립각이 날카로울수록 균형자론은 실현키 어려운 만큼 무게 또한 더한다. 포럼서 우 의원은 “중·일관계도 한국의 생존과 직결된다.”며 중국측의 대일관계 개선 자세를 주문했었다. 그의 제언에 대한 중국측의 격앙된 반응이 균형자론에 대한 반응은 아니었으면 한다. 중·일의 한반도에 대한 강요가 현실화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균형자론의 역할을 기대한다. 이석우 국제부 차장 jun88@seoul.co.kr
  •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 / 高유가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 / 高유가

    국제유가가 연일 급등해 70달러선을 오르내리면서 제3차 오일쇼크가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휘발유 1ℓ의 가격도 1600원을 넘어서는 등 고유가가 가뜩이나 움츠린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형 허리케인까지 발생해 멕시코만의 석유생산시설에 피해를 줌으로써 원유가격을 끌어올렸다. 이에 미국은 전략비축유를 방출하기로 결정해 치솟는 유가를 잡으려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70년대의 오일쇼크 오일쇼크(석유파동)는 70년대에 두차례 있었다.1973년이 1차이고 1978년이 2차다. ▲제1차 오일쇼크 1973년 10월6일 발발한 중동전쟁(아랍 이스라엘 분쟁)이 10월17일부터 석유전쟁으로 비화해 세계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다.(석유수출국기구)OPEC 소속 걸프만 6개 원유생산국은 10월16일 원유 가격을 17% 인상하고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5%씩 감산하기로 결정했다. 석유를 무기로 사용하기로 선언한 것이다. 이듬해 원유생산국들은 원유가를 또 인상해 단기간에 4배 가까이 원유가격을 올렸다. 이에 세계 각국에서는 제품 생산량이 줄어들고 가격이 올라 불황과 인플레이션이 닥쳤다.OPEC은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 자원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제2차 오일쇼크 1978년 12월 OPEC 회의는 유가를 14.5% 인상했다. 이때 세계 석유공급량의 15%를 점유하고 있던 이란은 국내의 정치적 혼란을 이유로 석유생산을 대폭 줄이고 수출을 중단했다.1980년 8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 원유가의 폭등에 부채질을 했다.1차 석유파동 이후 배럴당 10달러선을 조금 넘던 원유가격은 20달러선을 돌파했고, 현물시장에서는 배럴당 40달러까지 치솟았다. 단 5개월 사이에 2.6배 상승했다. 2차 오일쇼크도 세계 경제에 타격을 주어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리고 물가를 상승시켰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물가는 무려 32%나 올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국가의 경상수지는 1978년의 116억 달러 흑자에서 1979년 322억 달러의 적자로 돌아섰다. 한국도 1980년의 경제성장률은 -5.7%를 기록했다. ●국제유가는 어떻게 결정되나 국제 거래 가격 기준이 되는 유종은 중동의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 생산되는 두바이유(Dubai), 미국의 서부 텍사스에서 뉴멕시코에 이르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서부텍사스 중질유(WTI·Western Texas Intermediate), 영국 북해지역에서 생산되는 브렌트유(Brent)가 있다.WTI유와 브렌트유가 주로 선물로 거래되지만 두바이유는 중동권과 싱가포르에서 현물로 거래된다. 미국은 세계시장의 4분의1 정도를 차지하기 때문에 WTI 가격이 세계원유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세계 최대 선물거래소인 뉴욕상품거래소(NYMEX·New York Mercantile Exchange)에 선물로 거래되는 WTI는 API(미국석유협회)가 정한 비중 40도 정도의 초경질 원유이며 유황 성분이 0.24%로 매우 낮아 가격이 비싸다. 유황 성분이 적으면 정제비가 적게 들고 가격이 비싼 휘발유와 나프타 등 고급 유류가 많이 생산된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78%를 중동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두바이유의 영향을 주로 받는다. ▲전략비축유 미국이 1973년 석유위기 이후 전쟁이나 수급차질 등에 대응하기 위해 비축해 놓은 석유로,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주에 접한 멕시코만의 소금동굴에 약 5억 7100만 배럴이 저장되어 있다. 다른 국가들도 양에서 차이가 있지만 비축유를 저장하고 있다. ●국제유가 왜 오르나 유가가 오르는 첫째 이유는 원유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OPEC은 생산량을 크게 늘리지 않아 수급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석유소비 증가를 OPEC의 생산능력이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외환보유고가 세계 2위인 중국은 전략비축유를 확대하는 데 외환을 투입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올 1·4분기 하루 8380만 배럴이던 전 세계 석유 수요는 4분기에는 하루 평균 8590만 배럴로 210만 배럴 늘어날 전망이지만 산유국들의 추가 생산 능력은 이에 못미친다. 유가 상승의 또다른 원인은 이라크 전쟁 등으로 중동 지역의 정세가 불안한 것과 북미 지역의 자연재해를 들 수 있다. 원유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원유를 사재는 투기세력들도 원유가를 올리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국제유가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 유가의 상승은 우선 원유수입금액 자체가 증가함으로써 경상수지를 악화시킨다. 원유를 원료로 쓰거나 에너지를 많이 쓰는 석유화학, 철강, 제지, 섬유 등의 채산성이 떨어져 수출경쟁력이 떨어지게 한다. 수출 대상국과 세계 전체의 경기 악화는 우리의 전체적인 수출량 감소를 부른다. 석유제품 가격이 오르면 국내 물가도 오르고 내수는 침체된다. 운송료 인상으로 산업경쟁력이 떨어진다. 유가가 연평균 10달러 상승하면 제조원가 및 수출단가를 상승시켜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주력 품목의 수출은 연간 40억달러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유가가 1달러 상승하면 경상수지 흑자가 7.5억달러 감소하고 경제성장률은 0.1% 하락한다는 분석도 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유가 상승에 대처하는 방법은 범국민적인 절약과 대체에너지 개발, 해외자원개발, 장기적으로는 산업의 석유의존도를 낮추는 것 등이 있다. 자발적인 에너지 절약책을 유도하고 더 심각해지면 자동차 부제 운행 등을 강제로 실시할 수 있다.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전기 코드만 빼두는 것만으로 전기사용량의 10%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대체에너지는 원자력, 태양력, 풍력, 수력, 수소연료전지를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정부는 2011년까지 신재생 에너지의 비중을 총 1차 에너지의 5%까지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태양력이나 풍력 등은 개발비가 많이 드는 만큼 에너지 생산량이 많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손성진 기자 sonsj@seoul.co.kr ■ 포인트 국제유가가 계속 오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짚어보고 정부와 국민들이 어떤 대응책을 실천해야 하는지 알아본다.
  • [일본을 다시본다] (21) 전문가 좌담

    [일본을 다시본다] (21) 전문가 좌담

    |특별취재팀|서울신문은 ‘한·일수교 40주년 특별기획-일본을 다시 본다’ 시리즈를 종합 정리하고 일본의 현주소와 미래를 전문가 시각에서 재조명하기 위해 김도형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 및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과의 좌담을 마련했다. 한종태 서울신문 국제부장의 사회로 진행된 좌담에서 두 일본 전문가는 일본의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에 대해 긍정평가를 자제하거나 평가 자체를 유보하는 등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일본 정치권의 세대교체 바람과 우경화 추세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이 기회에 보다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관계개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주문했다. -사회자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일본의 1990년대 경기침체 시기를 현 시점에서 평가한다면. ●진창수 센터장(이하 진) 잃어버린 10년은 새로운 기술 개발의 실패, 금융위기, 제도적 피로 등 3가지 원인으로 초래됐다. 이런 결점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여부가 포인트다. 우선 금융개혁부문은 굉장히 안정적이라고 본다. 부실채권을 해소하는 등 안정화 추세로 가고 있다. 기술 부문에서는 제조업 부문은 여전히 강하지만 차세대 정보통신(IT) 기술은 발전이 느리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리드하는 부문에서는 아직 부족함이 있다. 제도적 피로의 경우 고용 바꾸기 노력이 진행과정에 있다고 본다. 대체로 최근 일본경제가 안정적인 상황에 들어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이런 안정적인 추세가 개혁의 결실이라기보다는 중국 특수로 인한 수출 증가와 소비가 조금씩 살아나는 데 따른 결과인 측면도 있다. 결국 잃어버린 10년을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얘기다. 잃어버린 10년을 준비기간으로 봐야 하는지 침체기간으로 봐야 하는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개혁이 한창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김도형 교수(이하 김) 80년대 일본의 제조업은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은 시기였지만 91년 이후부터는 지가·주가하락으로 인해 자산가치가 하락했다. 무려 2∼3년 동안의 자산 손실이 110조엔에 이를 정도로 엄청났다. 이 후유증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가는 다소 회복됐지만 91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은 15년째 장기불황이라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린 15년을 야기한 원인은 첫째도 둘째도 ‘정책’의 실패다. 정부는 금리를 올려야 할 때 올리지 못하고 내려야 할때도 마찬가지였다. 재정도 그런 셈이다. 정부는 90년 이후 경기부양에 치중하느라 구조개혁을 미뤘다. 매년 연속해서 경기부양을 하다 보니 결과적으론 재정적자를 유발하게 됐다. 단기적인 경기부양이 국민들의 세금 확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소비를 줄이는 악순환을 반복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금융이든 재정이든 정부의 정책 수단이 굉장히 제한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빠졌다. 또 96년부터는 세계화가 본격화됨에 따라 중국의 성장 등으로 비정상적인 물가하락 추세까지 겹쳤다.2차대전 이후 5년 연속 물가가 하락한 자본주의 국가는 일본이 유일하다. 디플레이션의 와중에 재정적자와 부실채권 문제가 상승작용을 하면서 일본은 헤어나기 힘든 장기불황으로 빠지고 만 것이다. 결국 정책운용의 실패가 이런 결과를 빚었다.80년대 후반부터 정부가 경제를 주도하면서 민간이 활력을 잃게 됐다. 돈이 자꾸 정부로 흘러들어감에 따라 공공부문 비대화와 내수 위축을 초래했다. 반면 수출 의존도가 커지면서 해외 요인이 국내 경기를 좌우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사회자 일본이 제조업 분야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으로 보는가. ●진 기존의 제조업과 IT를 어떻게 결합하느냐가 일본의 고민이다. 예컨대 소니의 경우 TV 같은 품목이 80년대까지 가장 많은 부가가치를 냈다면 지금은 노트북이나 애니메이션 게임기 등이 주요 부가가치 품목으로 바뀌고 있다. 기존 제조업이 IT와 결합해 새로운 형태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고용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일본이 고용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개혁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만, 내부의 문제가 너무 많다. 총론은 찬성하면서도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각론에서는 반대하는 게 문제다. ●김 일본은 제조 기술력의 ‘보고’다. 그런데 경제운용이 잘못되면서 기술이 지체됐다. 제조업 설비투자의 연령이 10.5년이라면 미국은 9.5년이다. 일본은 특히 IT와 생명공학(BT) 쪽이 취약하다. 반면 나노기술(NT)과 환경기술(ET)은 미국보다 강하다. 일본은 IT,BT,NT,ET를 잘 융합해 활력을 찾는 게 중요하다. 이와 함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도록 경쟁력 시스템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사회자 화제를 정치 얘기로 돌려 보겠다. 일본 정치권에서도 세대교체 열망이 만만찮은 것 같다. ●김 지금 세대교체가 전면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 있다. 자민당의 경우 고이즈미가 등장하면서 파벌의 추천을 통한 공천 시스템이 붕괴됐는데, 이게 큰 의미가 있다. 전전(戰前) 세대의 정치가들이 전면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지금은 전후세대가 내각과 당의 주요 자리를 맡고 있다. 민주당은 더욱 젊은 정치가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있다.9·11 총선에서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세대교체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우리한테 반드시 좋은 징조로 볼 수만은 없다. 국제주의적 정치가가 늘어나는 형태로 진행되면 좋은 거지만, 일본의 젊은 정치인들은 여전히 국내 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힘의 논리에 치중하는 아베 신조 같은 인물이 총리가 된다면 오히려 우리와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더 있다. ●진 세대교체엔 양면성이 있다. 개혁과 시장의 논리를 중요시하는 형태로 가면서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좋은 모습으로 일본이 변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한·일관계에 있어 현실주의적인 외교정책이 실시되면서 우리 입장에서 더욱 힘들어질 수도 있다. ●김 2세 국회의원들의 국제감각이 부족한 것을 보면, 그들의 아버지 세대를 연상케 한다. ●진 고이즈미를 비롯한 2세들은 정치적인 훈련은 아주 잘 돼 있다.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반면 동북아 관계 등 세계질서에 대한 비전은 거의 문외한이다. -사회자 일본이 자꾸만 힘의 외교를 바탕으로 우경화로 치닫는 것 같아 걱정된다. ●진 일본의 군사대국화. 보통국가화는 첫째, 잃어버린 10년과 연관돼 있다. 경제가 내려가면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정체성을 논하는 국민이 많아졌다. 찬란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열망이 커진 것이다. 옛날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반반으로 변했다. 경제에서의 패배감을 회복하려는 자존심이 우익의 논리와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와 함께 정치권의 세대교체도 요인이다. 전전 세대는 한·일관계를 특수관계로 인정했지만 전후 세대는 보통관계로 보면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9·11테러 이후 대테러 전략의 일환으로 일본의 역할을 키우려는 미국의 의도도 일본 우경화에 한몫하고 있다. -사회자 독도,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왜곡 등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없나. ●진 과거사 문제는 정치적 쟁점으로 발전되지 않도록 관리를 해야 한다. 제도적으로 풀어야 한다. 독도 문제 쟁점화가 일본한테도 유리하지 않다는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 일본의 제1 표적은 북방도서 반환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도 독도 문제를 지나치게 쟁점화할 필요는 없다. 야스쿠니참배 문제는 제3의 추도시설 건립으로,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는 공동연구위원회의 위상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사회자 그렇다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한 과제는. ●진 우리 국민은 일본을 다원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봤으면 한다. 일본을 공포와 배신의 대상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협력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 속에서 친구를 만들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인식이 정착돼야 한다. 이와 함께 한·일간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발상을 버려야 한다. 장기적이고 제도적인 틀에서 꾸준히 접근해 가야 하는 것이지, 급격하게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경우 항상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또 양국 관계에서 좀 떨어져서 글로벌한 차원에서 한·일관계를 봤으면 한다. 일본 제국주의도 보편적 시각에서 틀리지만 일정부분 일본의 안보부문 확대도 인정해 줘야 한다. ●김 우리는 일본을 특수하고 이질적인 국가로 간주해서 부정적인 부분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 일본은 첨단기술을 보유한 경제대국이자 고급시장이다. 일본의 제조기술력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할 부분이다. 이제는 경쟁하면서 협력하는 동반자가 돼야 한다. 그 기초를 제도적으로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이에 대한 협상이 빨리 재개돼야 한다. 일본의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 문제는 조속히 해결돼야 한다. carlos@seoul.co.kr ●진창수 세종硏 일본연구센터장 ▲1961년생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도쿄대 정치학 박사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객원 연구원 및 교토대 법학부 객원교수 역임 ▲현재 세종연구소 국제정치경제연구실장 및 일본연구센터장 ▲저서 ‘일본형 금융시스템의 위기(한울아카데미 2004년) 등 ●김도형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 ▲1944년생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 및 대학원 졸업. 동 대학원 경제학박사 ▲산업연구원 일본연구센터 소장, 히토츠바시대 객원교수 역임 ▲현재 계명대 국제학대학 일본학과 교수. 한국무역협회 객원연구원 ▲저서 ‘일본의 구조개혁과 글로벌 경쟁력(계명대 출판부 2005년)’ 등 ●특별취재팀 한종태 국제부장(팀장), 황성기 사회부장, 이춘규 도쿄특파원, 주병철(경제부)·손원천 이언탁(사진부)차장, 안미현(산업부)·김상연 황장석(정치부)·유지혜(사회부)·정연호(사진부)기자 협 찬 POSCO
  • [임영숙칼럼] 어느 독립운동가의 딸

    [임영숙칼럼] 어느 독립운동가의 딸

    독립운동가의 딸인 김순희(72)씨에게 지난 8월은 우울한 달이었다. 광복 60주년이라지만 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보훈처에 관련자료와 탄원서를 냈으나 ‘해방 이후 행적 불분명’이란 이유로 포상 대상에서 탈락됐다는 통고만 받았다. “심사위원님들께서 이 글을 읽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고 김유성씨의 5녀로 김순희라고 합니다.…1996년 6월 6·10만세 운동 70주년 기념학술회의가 열린 세종문화회관에 가서 책자에서 아버지 성함을 발견하고 감사하였습니다.…2004년 9월 신문에서 보훈처 포상보류 좌익 항일운동가 113명의 명단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보고 고민하였습니다.…제 나이 이제 72세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내 살아 생전에 아버지 명예회복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이 글을 올리니 살펴봐 주십시오.” 김 할머니가 지난 봄 탄원서와 함께 심사위원들께 올린 글은, 김 할머니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년 전 “내가 언문이라도 쓸 줄 알면 내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쓸텐데…”하며 딸에게 들려준 이야기와 자신의 어린시절 기억을 살려 쓴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아버지·어머니께 올리는 편지로 시작된다.“…이제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어버린 딸이 되었습니다. 두 분의 애틋한 사연과 통한의 세월들을 저의 가슴 속에 묻은지 43년이 지났습니다.…애국가만 흘러나오면 나는 아버지를 느낍니다. 가슴으로, 온 몸으로 나라를 사랑하셨던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이글에 따르면 김 할머니의 아버지 김유성(1893∼1950)씨는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고,6·10만세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3년 반 옥고를 치르고,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된 사건으로 체포돼 부당한 구타를 당하는 한국인 학생의 구명운동을 펼치고, 창씨개명을 거부해 초등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했던 딸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자 링컨 대통령의 사례를 들어 위로해주고, 거지를 집안에 들여 따뜻한 밥과 국을 대접하고, 허백련·김철·신익희 선생과 교분을 나누며 시조창과 판소리·서예 등을 즐기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6·25 때 잠시 인민위원장을 맡았으나 경찰과 군인 가족을 보호하다가 회색분자로 몰리고, 자식들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을 유언하고 선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한 낭만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따스한 체온과 함께 전해주는 글을 읽으며 글 쓰기의 중요성을 새삼 다시 생각해본다. 님 웨일스가 ‘아리랑’을 쓰지 않았다면 저 강인한 지성과 뜨거운 가슴의 혁명가 김산(1905∼1938·본명 장지락)을 지금 우리가 기억할 수 있었을까? 파출부로 일하며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평생 욕심 없이 지내왔는데 아버지 명예회복을 바라는 마음에 처음 욕심을 가져보았다. 독립유공자 인정은 못 받았지만 내 죽으면 아무도 기억 못할 아버지·어머니 이야기를 글로 써서 후손들이 알게 되었으니 이제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개인의 기억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 특히 이념, 주체, 노선 등 다양한 특징을 지닌 우리 독립운동사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그 시대를 산 각 개인의 기억들이 기록돼야 한다. 제2, 제3의 김 할머니가 등장하기를 기대하며 그들의 소박한 소망이 실현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논설고문 ysi@seoul.co.kr
  • ‘식민지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 펴낸 박환 교수

    ‘식민지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 펴낸 박환 교수

    아나키즘(anarchism).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그러나 아나키즘에 애착을 가진 이들은 그런 번역을 일종의 오역으로, 심지어는 일제의 잔재로까지 보기도 한다. 서구에서 수입된 이 단어가 제국주의 일본을 거치면서 ‘정부가 없는 무법·혼란 상태’라는 부정적 의미가 짙게 깔린 무정부주의로 번역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정부주의 대신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an-archi’라는 어원 그대로,‘지배자 혹은 권력집단이 없는’ 자유로운 개인간의 연대라는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노엄 촘스키가 아나키즘을 어떤 이론체계나 행동양식이라기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경향’으로 정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살아남기가 버겁다. 체제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냉전 같은 경우에는 더 그러하다. 자본주의·공산주의 모두에게 ‘체제를 부정하는 자’로 낙인찍히기 때문.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일제시대는 달랐다. 기존 체제를 격렬히 부정했기에 당시 많은 독립지사들은 아나키즘으로 ‘광복 이후’를 상상했다. 잊혀져 가던 이 대목을 정리한 책이 나왔다. 독립운동사 연구로 유명한 한국민족운동사학회장 박환 수원대 교수가 ‘식민지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선인 펴냄)를 정리해 낸 것. ●제3의 길, 아나키즘 얼마 전 유행했던 말로 치자면 일제시대 아나키즘은 제3의 길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독립운동 진영내 좌우파 대립을 보다 못해 택한 길이 바로 아나키즘이었다는 사실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박 교수는 이들이 왜 제3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집중 조명한다. ‘다물단’‘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남화한인청년연맹’‘한국청년전지공작대’‘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한족총연합회’‘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등 중국·만주·조선에서 1920년대부터 45년까지 활동한 아나키스트들을 통해서다. 이들이 꿈꾼 사회는 ‘자본주의의 착취’도 없고,‘공산주의의 독재’도 없는 국민자치에 의한 연합체였다. 중간에 낀 입장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선택은 다양했다. 사회주의 혹은 민족주의 진영과 힘을 합하는 경우도 있었고, 끝까지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을 유지한 사람들도 있었다. ●잊혀진 운동, 아나키즘 아나키즘은 환영받기 힘들었다. 일단 중간자였다. 우파가 보기엔 체제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좌파와 별 다를 바 없고 좌파가 보기엔 무모한 행동으로 혁명 역량을 분산시키는 어리석은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남북분단 뒤 이승만·김일성은 임정 중심의 일부 우익 세력과 제한적인 사회주의 계열에만 정통성을 부여했다. 또 아나키스트들은 행동력에서도 주목받기 어려웠다. 개인 중심의 저항운동이다 보니 순교자적인 행동을 요구했고, 그러니 숫자도 얼마되지 않았는 데다 그나마도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책에서 아나키스트들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을 추가해 놓았다. 바로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숨결이 녹아 있는 각종 문건들을 번역해 놓은 것. 중국의 대문호로 꼽히는 바진, 뤼신이 아나키즘에 대해 남겨둔 글과 조선 아나키스트 기관지 ‘고려청년’의 발간사 등이 각장 뒤에 달려 있다. 박 교수는 “학계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글이라도 사료 차원에서 참고자료 삼아 번역해 실어뒀다.”고 말했다. ●아나키즘의 현재적 의미 박 교수가 이렇게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지금 한국에도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운동으로서 어떤 성과를 냈느냐고 한다면 다소 부족하지만, 새로운 국가 건설론으로 이해하면 의미가 적지 않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다름 아닌 중간자였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아나키즘의 근본적인 목적은 인간성 존중과 풀뿌리 민주주의”라면서 “다른 체제로 살아온 남북이 통일할 때 한 방안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물론 박 교수가 마냥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연대라는 것이 현실성 있느냐는 질문은 여전하기에. 그래도 그는 “다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포기하기보다 하나의 이상향으로서, 미래지향적으로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박 교수는 책 내용에 조금 불만이 있다.“이번 책은 중국내 한인들의 아나키즘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다음 번에는 한국내 아나키즘의 수용과 전개에 대해 연구해볼 참입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일본을 다시본다] (17)심화되는 우경화

    [일본을 다시본다] (17)심화되는 우경화

    |도쿄 특별취재팀|“김정일과 타협하는 고이즈미는 물러가라. 자민당 숙정하라.”지난 5월24일 오후 1시40분, 도쿄 자민당 당사 앞에서 파란 제복을 입은 20여명의 사내들이 깃발과 피켓을 휘두르며 뭔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조심스럽게 이들을 피해 지나가고 있었지만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은 시민들의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라며 당부할 뿐 특별하게 이들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극우단체 도쿄도심 정기시위 일장기를 붙인데다 확성기까지 단 차량을 동원해 시위에 나선 이들은 정심동지사(正心同志社)라는 극우단체의 회원들. 자민당 당사 앞과 도쿄 번화가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시위를 하고 있는 이 단체는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자는 내용의 ‘교육 정상화’와 유사시의 방어만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자주헌법 제정’을 주장하고 있다. 이 단체 회원들은 이날 시위에서 “극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독재자 김정일을 타도하라. 김정일과 대화하는 자민당을 숙정하라.”고 외쳤다. 고이즈미 총리에 대해서도 “타도 대상인 김정일 정권과 협상을 시도하며 2차례나 평양을 방문했다.”고 거칠게 몰아붙였다. 이같은 극우단체의 비판을 받고 있는 자민당의 속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일본 사회 우경화의 심각성이 자리한다. 지난 4월 마치무라 노부타카 일본 외상이 참의원 외교방위위원회에서 한 발언은 자민당 정부의 우경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당시 마치무라 외상은 ‘일본도 독일처럼 철저하게 과거사를 반성해야 한다.’는 야당 의원의 비판에 대해 “독일은 나치에 유대인 학살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게 가능했지만 일본은 그것이 불가능했다.”며 정면 반박했다.‘독일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인데 다만 일본에는 희생양을 삼아 책임을 떠넘길 나치와 같은 존재가 없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라는 인식이다.‘일본만 욕을 먹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궤변인 셈이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에 대한 인식에서는 기득권 세력인 자민당 등과 진보세력간에 이미 메워질 수 없을 만치 깊은 골이 형성돼 있었다. ●자민당 “법·제도를 현실화하자는 것일 뿐, 우경화는 아니다.” 현재 자민당 내 실세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 계파 중에서 40대 ‘젊은 피’로 손꼽히는 고바야시 유타카 참의원 의원은 자민당뿐 아니라 일본 사회에 “우경화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가 속한 모리파에는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해 차기 총리 후보 1순위인 대표적 우익 인사 아베 신조 간사장 대리 등이 포함돼 있다. 고바야시 의원은 ‘현재 일본이 우경화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패전 이후 일본은 국가나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라든가 도덕 교육을 버렸다.”면서 “지금의 현상은 단지 헌법을 포함, 국가의 존재와 어떤 교육 제도를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일본이 패전 이후 하지 못했던 일을 6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만들려는 움직임과 관련해선 한국 사례를 들기도 했다. 그는 “한국도 이라크에 파병했는데 이처럼 국제사회 공헌을 위해 부대를 보낼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한다든지, 자위대를 군대가 아니라고 규정한 현실을 좀 더 유연하게 바꾸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자위’에만 한정하고 있는 무력행사의 요건을 완화하는 문제도 포함시켰다. 이런 움직임이 결코 군국주의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평화헌법 개정을 우경화와 동일시하지 말라는 이같은 주장은 그러나 자민당 등이 추진하는 평화헌법 개정의 핵심 조항 2개를 들여다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문제의 헌법 조항들은 ‘일본 국민은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으로서 국권 발동에 의한 전쟁과 무력에 의한 파괴, 또는 무력의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9조 1항과 ‘1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육·해·공군과 그 외의 전력(戰力)은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권 역시 허용하지 않는다.’는 같은 조 2항의 완전 비무장법이다. ●진보세력 “쇼비니즘이 자민당을 장악했다.” 지난 4월 마치무라 외상에게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주문했던 야당 의원은 공산당 소속 오가타 야스오 참의원 의원이었다. 도쿄 참의원 회관에서 만난 오가타 의원은 광신적인 애국주의를 일컫는 ‘쇼비니즘(chauvinism)’이 자민당을 장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자민당은 ‘침략 전쟁은 당연한 것이다.’는 입장으로 이웃 나라들이야 어찌되건 관여치 않는다.”면서 “과거에는 극우세력들이나 하던 쇼비니즘 같은 주장이 지금은 자민당 내에서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군사 대국화의 길이 일본 외교의 최우선이기에 주변국과의 관계가 무너져도 상관없다는 쪽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가타 의원은 올해 초 노무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독일은 일본과 다르다.”며 과거사에 대한 독일의 반성 노력을 높이 평가한 사실을 상기했다. 그는 “나치보다 먼저 침략에 나선 것이 일본인데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다. 이것이 고이즈미와 자민당의 인식”이라고 매섭게 비판했다. 그는 고이즈미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이 우경화와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일본이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논거로 들고 있는 것은 북한과 타이완, 특히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다. 오가타 의원은 유사시 자위대가 적극적인 공격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유사법제 제정시 한 자민당 의원이 “북한이 대포동(미사일) 한 발 쏘면 쉽게 통과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북한이 사정거리로 볼 때 일본까지 도달할 수 없는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해도 우익 성향 언론들은 ‘이것이 바로 일본이 미국과 미사일방어체제(MD)를 구축해야 하는 이유’라며 법석을 떤다.”면서 “언론도 우경화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우익세력이 이미 정치·언론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surono@seoul.co.kr ■ 日NGO ‘피스보트’ 노히라 신사쿠 대표|도쿄 특별취재팀| ‘왜곡된 역사교육을 바로잡자.’는 취지로 출범한 일본의 대표적인 시민단체 피스보트. 도쿄 시내 사무실에서 만난 노히라 신사쿠 공동대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정책을 ‘친미 민족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로 특징짓고 “일본은 아시아에서 점점 더 외톨이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1982년 제1차 역사교과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언론인과 대학생, 학자 등 200여명이 배를 타고 이웃 아시아를 체험해보자며 의기투합, 이듬해 정식 출범한 것이 피스보트다. 피스보트는 1990년 이후 ‘평화·인권·환경’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주제로 세계일주 크루즈를 기획,80개국 이상을 방문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해 가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의 환경재단 등과 공동으로 13일 도쿄를 출발해 부산, 인천, 단둥, 오키나와를 거쳐 나가사키에 도착하는 ‘아시아의 화합 기원’ 크루즈를 시작했다. ▶일본 사회가 우경화로 가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고이즈미 내각의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현 정부의 특징은 민족주의와 경제적 신자유화다. 교육으로 애국심을 높이려는 것이 민족주의적 측면이라면 경제적 민영화는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경제적 신자유주의로 인해 빈부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는데, 이는 ‘가치구미(勝ち組み·이긴 팀)’와 ‘마치구미(町組み·진 팀)’를 분리하는 엘리트주의이다. ▶민족주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일본 민족주의는 친미와 반미로 나뉘는데 고이즈미는 친미 민족주의다. 미국만 중요할 뿐 한국과 중국은 냉대한다. 미국은 무조건 추종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한국과 중국에 고자세를 취해야 한다. 자존심 때문이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와 평론가 니시베 스스무 등은 원래 반미였는데 후소샤판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입장을 바꿨다. 고이즈미가 미국을 따르는 이유는 주위에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없으면 고립되기 때문에 더욱 더 심해지고 있다. ▶일본의 이라크 파병에 대해. -독일과 프랑스 등이 이라크전쟁에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연합(EU)이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이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보낸 것은 아시아가 하나로 결속되지 못해 미국의 영향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의 방편으로 크루즈를 기획한 이유는. -60·7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했지만 내부의 노선투쟁이 많아 주위의 인식이 좋지 않았다. 크루즈는 가볍게 다가가는 ‘소프트 터치(soft touch)’다. 즐겁게 참가하는 새로운 개념의 시민운동이다. 일본이 다른 국가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 정부는 아시아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과 중국에도 친구가 있다.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한국과 중국(정부의 잘못된 행위)에도 항의한다. surono@seoul.co.kr ● 특별취재팀 한종태 국제부장(팀장), 황성기 사회부장, 이춘규 도쿄특파원, 주병철(경제부)·손원천 이언탁(사진부)차장, 안미현(산업부)·김상연 황장석(정치부)·유지혜(사회부)·정연호(사진부)기자
  • 北대표단, 서대문형무소 둘러봐

    ‘8·15 민족대축전’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이 분단 이후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파격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지난 14일 국립현충원 참배에 이어 광복 60주년인 15일에는 서대문 형무소와 백범기념관을 방문했다.16일엔 국회를 방문하고,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방문할 예정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이날 오후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남북 당국 공동행사에서 “평화를 통해 번영을 누리고 번영을 통해 평화를 공고히 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가자.”고 제의했다.●“김구 선생과 김일성 주석 인연” 북측 대표단은 서울 백범기념관에 도착, 김신 백범기념사업회장 등 김구 선생의 아들·손자와 환담했다. 북측 단장인 김기남 노동당 비서는 “북측대표단이 온 걸 알면 선친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김 회장 말에 “김 주석의 보천보 무장투쟁에 감격한 김구 선생이 사절을 김일성 장군께 보냈고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최성익 조선적십자위 중앙부위원장은 백범기념관에서 행한 연설에서 “쌍방사이 실질 화해와 신뢰의 확고한 구축을 위해 귀측의 국립현충원에 대한 참관도 진행했다.”면서 “체제·이념 대결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끼리 이념에 토대해 풀어나가자는 확고한 입장”이라고 말했다. 최 부위원장의 연설은 사전에 준비돼 배포된 것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북한 사전에 참배란 말은 주술적 의미가 깃든 것이라 잘 쓰지 않고,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을 ‘참관’했다고 표현한 사례들이 있다.”고 말했다.●“김주석님의 삼촌도 옥사하셨다” 오전 10시50분쯤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기남 단장 등 남북 당국 70여명은 민간 대표단보다 30여분 앞서 도착, 일제 독립투쟁의 상징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둘러봤다. 김기남 단장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참관 소감을 나누며 “(일제 때)처형된 선열 중에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다 포함돼 있고 그중에서 김일성 주석님의 삼촌되는 분, 사랑했던 친위군사들도 몇명 있다.”고 밝혔다.●임동옥 부부장 오찬서 자작시 임동옥 북측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15일 정 통일장관 주최 환영오찬에서 자작시를 소개했다. 정 장관이 “북에서 대남사업을 총괄하고 계시는 ‘무서운 분’인데 이번에 대표단에 포함돼 깜짝 놀랐다.”고 임 부부장을 소개하자, 작은 수첩을 꺼내 “우리는 서울을 보았다/이국의 도시가 아니었다…중략…평양과 서울은/똑같은 우리것/우리 민족의 것이로구나/쭈욱해도(술잔을 들이켜는 것)단번에 너무도 쉽게 통하는/우리는 정말 통일로 살아야 할 하나로구나.”란 시를 낭독했다. 김 단장은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이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서대문 형무소를 다녀갔다고 하자 “짐승이 아닌 이상 느끼는 바가 있었겠지요.”라고 말하기도 했다.김수정 나길회기자 crystal@seoul.co.kr
  • [광복60-미래를 위한 제언] 한·일 두 학자가 보는 양국관계

    [광복60-미래를 위한 제언] 한·일 두 학자가 보는 양국관계

    광복 60주년.1945년 8월15일에서 2005년 오늘 그 60년은 대한민국의 희망과 좌절, 격동, 전진의 대역사이기도 하다. 광복 60주년이 우리 대한민국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지금 이 시기 한반도 평화는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돼야 하는지, 그리고 한국과 일본은 한반도 평화 구축이란 대전제 속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가 두 나라 국민 모두에게 던져진 과제다. 이런 취지 아래 한·일 두 학자의 인터뷰를 통해 양국 관계의 미래를 위한 제언을 듣는다. 최상용 교수는 주일 한국대사를 지낸 대표적인 지일파(知日派)학자이며, 고하리 스스무 교수는 신진 지한파(知韓派)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최 교수는 직접 인터뷰를, 고하리 교수는 e메일 인터뷰를 했다. ■ 주일대사 역임 최상용 고려대 교수 ▶광복 60주년이 갖는 의미를 정리하면. -우선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을 갖고 싶다.1945년 광복 이후 3년 의 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우리는 자유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선택했고 그 기반 위에 산업화를, 산업화의 태내에서 자생적인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민주화된 시장경제를 구현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하지만 일본의 민주주의는 서구처럼 시민혁명에 의한 자생적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명치유신 이후 약 140년간 서구 민주주의를 학습해 왔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7년간의 미군의 점령정책이 일본의 민주화를 반석에 올려 놓았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은 분단과 전쟁, 독재, 수많은 희생, 반인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광복 60년 이순(耳順)의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냉혹한 국제현실에서 자주의 역량을 갖춰야 한다. 자주는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안팎의 자원을 주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이다. 냉전시대엔 서방의 맹주였던 미국이 있었고, 서방체제 안에 편입돼 있으면 안전했다. 이젠 달라졌다. 자주 역량을 발휘한 최근 두 사례가 있다.5년 전 6·15 남북정상회담은 바깥 세력에 의해 강제된 한반도 냉전을 우리 민족의 힘으로 풀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자주적 역량의 표시로 이를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본다. 지난 1년여 동안 정체된 6자회담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우리의 역내 조정자 역할도 훌륭했다. 우리는 이제 ‘중견국가’로서의 역량을 갖춰 나가면서 자유와 자주를 기반으로 한반도 평화를 일궈 나가야 한다. ▶한·일관계의 현주소와 미래는. -1965년 국교 정상화 무렵 한·일국민간 교류는 연간 만 명이었다. 지금은 하루 만 명 이상이다. 이 현실을 무게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1998년 한·일 파트너십 정신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과, 이를 토대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나갈 것, 그리고 일본 대중문화를 한국시장에 개방하는 것이 중심내용이었다. 우리와 일본의 문화산업의 격차를 우려해 많은 국민들이 반대했다. 나는 당시 문화 교류는 어떤 특정한 시기에서의 우열의 문제가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끊임없는 서로 배우기의 과정이라고 판단하여 찬성했다. 그래서 지금 한류(韓流)가 있다. 한·일 과거사 논쟁에서 항상 먼저 어기는 쪽은 일본이다. 소위 망언인데,6자회담에서 화두가 된 ‘말 대 말’‘행동 대 행동’ 원칙을 기초로 일측에 대응하되, 한·일관계 협력을 위한 큰 틀을 유지하는 게 성숙한 자세가 아닌가 한다. ▶구체적으로 독도 문제 등이 나오면 민감할 수밖에 없는데. -독도는 실효 지배를 유지하고 내실화하면 된다. 독도는 우리의 천연기념물이다. 우리 정원을 가꾸듯 해야 한다. 관광객, 군인, 경찰이 대거 들어가는 것보다 천연기념물 관련 전문연구원을 상주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관련해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사에 합사돼 있는 A급 전범이다.A급 전범의 분사, 또는 제3의 추도시설 등 일본의 사려 깊은 조치를 기대하고 싶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미국도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패전국 일본의 A급 전범 판단을 한 당사자는 미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 일본을 획일적으로 보는 경향에 대해선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일부 극우지도자들의 망언으로 일본 전체를 나쁘게 보면, 수많은 친구를 잃는 우를 범한다.4년 전 문제의 후소샤 교과서 채택률이 불과 0.039%였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한류에 마음을 열고 있는 수많은 일본인의 반응을 귀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평균적인 일본 국민에게 정서적으로 호감을 받을 수 있고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은 지난 베이징 6자회담에서 납치문제를 고집, 참가국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일본의 위치와 역할은. -이 지구상에서 비핵화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나라는 선진국이면서 핵을 갖고 있지 않은 일본이다. 인류사상 최초의 피폭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방법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전후 일본은 비핵3원칙을 바탕으로 핵무기를 만들 능력을 충분히 가졌으면서도 만들지 않고 있다. 그런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이런 점에서 비핵 이니셔티브를 위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가해자이자 동시에 원폭을 맞은 피해자이다. 그러나 그 두개 고리가 따로따로 논다. 그 간격을 이을 수 있는 전략도 설명 책임도 없어 보인다. 사실 일본에서의 ‘납치 문제’는 우리나라의 독도 정도의 파괴력을 갖고 있어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6자회담은 목적이 한반도비핵화다. 피폭국가 일본은 최소한 비핵과제와 납치문제를 병행할 수 있는 전략이라도 보여야 한다. 일본은 이번 6자회담을 통해 대 아시아 외교를 소홀히 해 온 대가를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미국과의 동맹에만 의존했던 안이함이 부른 화(禍)라고 할 것이다. 보통국가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헌법을 바꾸려 하고, 자위대를 강화하려는 ‘전쟁가해국가’ 일본이 아무리 히로시마 원폭의 피해국임을 강조한다 해도 이웃나라가 선뜻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김수정 기자 crystal@seoul.co.kr ■ 고하리 스스무 시즈오카현립대 교수 ▶지난 60년간의 한·일관계를 평가한다면. -엇갈림과 협력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시대에 한국인은 과거사 문제로 대일청구 의식을 강하게 했지만, 일본인은 한반도를 무관심·기피의 대상으로 했다. 박정희 시대에는 양국 정부가 양국간의 정치·경제적 협력을 모색했지만, 국민 차원에서는 상호 이해가 진행되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 시대에는 일본인이 이문화로서의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다. 김영삼·김대중 시대는 역사인식 문제로 갈등이 있는 한편 대중문화 교류가 비약적으로 진행되었다. 노무현 시대는 일본에서는 한류를 통해 호의적으로 한국을 보려 하지만, 한국에서는 외교갈등이란 부정적 측면에서 일본을 보려는 분위기가 있다. ▶역사문제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 해결방안은. -역사적 사실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양국간에 공동연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인식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를 모두 일치시키는 것은 꽤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검증할 때 한국에선 일제 식민지 지배를 실행한 장본인이라며 부정적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일본에서는 입헌정치의 기초를 확립한 초대 총리라는 긍정적 측면을 평가한다. 양국 모두 ‘우리 민족은 우수하다.’는 자민족 중심주의적인 역사관을 가르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북한 핵문제 해결 방식은. -북한의 핵무기는 절대로 포기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지가 양국 정부와 여론이 어느 정도인지 의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일본여론은 핵문제보다 일본인 납치 문제를 우선하는 분위기가 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외교 전쟁도 불사한다.’라고 하는 한편, 핵보유에 관해서는 ‘북한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라고까지 말한다. 양국 국민도 북한 핵문제에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북한에 체제보증을 약속하는 한편으로, 모든 핵보유를 완전하게 포기시킨다고 하는 점에 일·한·미가 완전하게 일치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3국이 대립해도 그걸 북한에 보여주면 안된다. 특히 한국은 북한이 다른 문제로 대일 공동대응을 제안해도 동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남북한에 대한 일본 여론이 악화되면 예상되는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도 이뤄지지 않게 된다. ▶동북아시아에서의 한·일 관계는. -10년 후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양국 지도자는 지금의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 많은 듯하다. 특히 중국과 미국 관계가 중요하다. 현재 일본은 ‘미국 중시-중국 경시’, 한국은 ‘미국 경시-중국 중시’의 경향이다. 일본은 좀 더 중국에, 반대로 한국은 좀 더 미국에, 정중한 외교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류와 한·일 문화교류의 공평성,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제언이 있다면. -지금까지 일본인 중에서 한국에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 핵심층은 중년의 여성이었지만, 욘사마 현상 덕분에 지금 중년 여성이 가장 한국에 친근감을 갖는 층이 되었다. 서울신문·도쿄신문 공동여론조사 결과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악화되는데도 과반수의 일본인이 한류현상으로 인해 한국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만약 한류현상이 없었으면 올해 한·일관계는 더 악화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국측이 경제효과, 국위선양 측면에서만 한류현상을 강조한다는 것이 일본에 전해지면 일본에서 한류현상이 식을 수 있다. 한국은 일본 등 외국 대중문화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고이즈미 총리와 노무현 대통령, 양국 지도자가 한·일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두 지도자는 ‘국제 협조형의 애국심’보다 ‘배타적인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이 계속 대두되고 있는 점을 더 우려해야 한다. 고이즈미 총리도, 노 대통령도 말을 좋아하지만 내셔널리즘을 자극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게 신경써야 한다. 한·일간의 문제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한 정부여당의 간부에게는 해임을 포함해 엄격하게 대처해야 한다. 외교관계가 악화되어도 문화교류나 자치체간 인적교류는 절대로 중단해선 안된다고 지도해야 한다. 일본에서 반한 감정이, 한국에서 반일 감정이 높아져도 양국에 이익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양국 갈등을 가져온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양국 쌍방에 다양한 원인과 배경이 있다. 한가지 들고 싶은 것은 언론 보도의 문제점이다. 양국 신문과 TV를 보고 있으면 자국민을 자극하는 도쿄발, 혹은 서울발의 보도가 너무 많다. 도쿄 이춘규특파원 taein@seoul.co.kr
  • EBS 해방60주년 ‘도올이 본 독립운동사’ 제작 김용옥씨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과 중국의 신해혁명을 도운 조선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우리는 왜 풍부한 독립운동사를 잃어버렸습니까?” 도올 김용옥이 이번에는 한국독립운동사에 도전한다.EBS가 해방 60주년을 맞아 준비한 특별 다큐멘터리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가 그것.8일부터 19일까지 2주간 토·일요일을 빼고 매일 밤 10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되는 10부작이다. ●출연·연출·편집·내레이션까지 ‘원맨쇼´ 방영을 앞두고 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는 ‘도올스러움’으로 넘쳐났다. 이런저런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낯설지 않은 모습도 연출됐다.1000여권의 각종 자료를 뒤적인 뒤 6개월여 동안 타이완, 러시아 연해주, 중국의 북부지역을 휩쓸고 다니며 촬영했다는 엄살 역시 도올답다. 다큐 형식도 마찬가지.‘1인칭’ 다큐다. 도올이 출연하고, 연출하고, 편집하고 내레이션까지 도올이 맡았다. 이러다 보니 기존 전문 PD들의 컷과는 다른 방식으로 편집돼 파격적인 형식이 꽤 눈에 띌 것이라는 게 제작진의 장담이다. ●“좌·우파 떠나 항일운동사 재조명” 그런데 내용까지 도올스러울 수 있을까. 애초 프로그램 기획취지는 좌·우파를 떠나 민족주의 관점에서 해방운동을 다루어 보자는 것이다.“누가 친일을 했다더라라는 식의 폭로 위주의 접근법은 과거사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립니다. 차라리 찬란하게 빛나는 항일운동의 역사를 써야 합니다.”한데 그 ‘찬란하게 빛나는 항일운동’을 다루려면 좌파 인사가 빠질 수 없다. 도올은 “있는 사실 그대로를 다루면 되지 거기다 왜 이념을 집어넣느냐.”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에게 서훈한다는 소식에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정체성을 들먹이며 발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한국의 현실이다. 그래서 프로그램 제목에 ‘도올이 본’이라는 구절을 일부러 집어넣었다.“도올의 ‘구라’라면 그래도 조금 봐주는 그런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라는 게 도올 스스로의 생각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문제, 즉 해방 뒤 북한에서 활동한 사람들까지 다룰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하던 도올도 즉답을 피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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