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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민족주의·영토분쟁’ 포럼

    한국학술연구원(이사장 박상은 의원)은 8일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동아시아 민족주의와 영토분쟁: 함의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제13차 코리아포럼을 개최한다. 포럼에서는 센카쿠 제도와 쿠릴열도,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사례와 민족주의에 대한 주제 발표 및 토론이 이어진다.
  • “독도문제에 너무 몰입하면 민족주의 광풍에 휩쓸릴 것…日 학습지도요령 깨부숴야”

    “독도문제에 너무 몰입하면 민족주의 광풍에 휩쓸릴 것…日 학습지도요령 깨부숴야”

    일본 교과서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시 바빠진 곳이 있다.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지자 학계·시민단체 전문가들이 2001년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로 출범시킨 단체다.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까지 터지자 지금의 형태로 확대 개편됐다. 이번에도 민간 차원에서 일본 교과서 왜곡에 대한 심층 분석과 대응방안을 모색한다. 교과서 분석 작업을 총괄지휘하는 이신철(46) 공동운영위원장(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30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실에서 만났다. →일본 교과서 왜곡의 대명사는 후소샤(扶桑社) 출판사였다. 이번엔 지유샤(自由社)와 이쿠호샤(育鵬社)다. 어떤 차이가 있나. -일란성 쌍둥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서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1997년 출범한 극우단체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었다. 이들은 2001년 후소샤를 통해 교과서를 냈다. 그 뒤 계속 교과서를 냈지만 채택률이 1%에도 못 미치는 등 지리멸렬하자 내분이 일어나면서 새역모가 두개로 쪼개졌다. 이때 생겨난 ‘교육재생기구’라는 단체가 후소샤의 자회사인 이쿠호샤와 손잡았다. →이쿠호샤는 후소샤의 실패가 투박한 서술 때문이었다면서 조금 더 세련되게 접근하겠다고 공언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롯해 서술이 개악된 이유가 뭔가.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다. 후소샤는 자신들이 교과서 문제로 너무 표적이 되어 있으니 자회사로 이쿠호샤를 만들었고, 이게 교육재생기구와 손잡았다. 기존의 새역모는 지유샤로 갈아탔다. 지유샤의 경우 일본 국내법적으로 교과서를 낼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교과서를 내는 출판사 자격 요건 가운데 전문가를 5명 이상 보유하고 교과서 출간 6개월 전에 회사가 설립되어야 한다는 등의 제한 규정이 있다. 그런데 지유샤는 고작 사장 1명과 직원 3명에 불과한 급조된 회사다. 그런데도 교과서 검정 신청을 했는데 받아들여졌다는 게 무척 의외다. 이쿠호샤의 세련된 서술이란 것도 잘못 알려진 대목이다. 2006년 교과서 채택 과정에서 일본내 반대 운동 진영이 쓴 전술 가운데 하나가 끊임없이 흠집 잡기였다. 요코하마에서 이 전술이 특히 먹혀들었다. 후소샤 교과서를 갖다놓고 일본사 서술이 잘못된 부분을 집요하게 문제제기했다. 그러다 보니 교육청에서 수정 공문을 내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이게 쌓이다 보니 결국 후소샤에서 틀린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는 삽지 작업까지 했다. 이쿠호샤가 세련되게 서술하겠다고 한 것은 이렇게 꼬투리 잡힐 짓을 안 하겠다는 뜻이지, 극우 논리를 완화하거나 정교하게 다듬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본 교과서에 등장한 독도 문제 왜곡이 어느 정도인가. -예전에도 독도 문제를 거론한 교과서들이 있었다. 차이라면 예전에는 한·일 양국 간 영유권 문제가 있다는 식의 비교적 건조한 서술방식이었던 데 반해 지금은 아예 한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고 못 박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안 나온다. 아예 한국땅이라고 인정하거나, 우익쪽 학자라 해도 양국 간 다툼이 있다는 수준에 그친다. 그런데 교과서에 ‘불법점거’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이다. 이는 일본 문부성의 요구사항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다만 독도 문제에만 너무 초점이 맞춰지면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민족주의)만 강화시킬 우려가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독도 문제에 너무 몰입하면 일본 우익의 손에 놀아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 같은 주장이 전형적인 한국 외교관료들의 논리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교과서 문제에 초점을 맞추자는 게 우리 태도다. 독도 문제는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고, 강력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면 애국주의 물결에 휩쓸릴 수 있다.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내셔널리즘 광풍이 불어닥치면 그 다음 행보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본질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는 아베 정권 당시 만들어진 학습지도 요령을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 전반적인 역사 인식 자체를 문제삼아야 하고, 그래야 다른 나라들과 연대해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된다. →독도 외에 다른 대목은 어떻게 교과서에 서술됐는가. -가장 중요한 게 사실 그 부분이다. 식민지, 전쟁 미화 등의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에 도움이 됐고, 위안부 문제는 아예 취업을 위해 공장에 간 것처럼 쓰여져 있다. 대동아전쟁은 아시아해방전쟁으로 미화했다. 2차대전 당시 미국과 치른 오키나와 전쟁에 대해 자신들의 침략전쟁은 쏙 빼버리고 미군이 침범해와서 많은 일본인들이 피해를 봤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결국 무라야마 담화, 간 나오토 담화 등 한·일 우호적인 내용의 담화를 깡그리 무시해버린 것이다. 이는 아시아 평화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독도 영유권 문제보다 장기적으로 더 위험한 대목들이다. 한마디로 애국심 고취를 위해 자신들에게 불리한 대목은 전부 빼버렸다. →그 대목에서는 우리나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다. 2008년 뉴라이트 진영의 대공세로 금성사 교과서가 문제되면서 집필자였던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가 교육과학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 -옳은 지적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2008년 교육안을 다시 만들었고, 교과서도 수정됐다. 대한민국 정체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대목이 강화됐고 북한 인권 문제도 거론했다. (교과서가) 정치 논리에 휘둘리기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매한가지다. →교과서가 나오기 직전 일본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까지 우리는 (교과서) 검정채택 결과가 나오면 그에 맞춰 대응했다. 그런데 검정 과정에 이미 일본 정부가 깊숙히 개입한 이상 결과가 나온 뒤에 대응하면 늦다는 반성이 나왔다. 그래서 관련 일본 단체들과 힘을 합쳐 미리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두루 만나고 왔다. →일본 시민단체들의 분위기는. -2001년에는 왜곡 교과서 채택률이 0.039%에 그쳤다. 그런데 최근에는 1.7%까지 올라갔다. 미미하지만 계속 올라가는 추세다. 채택률 상승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이런 왜곡 교과서들이 다른 출판사의 서술방향에까지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일본 시민단체들의 위기의식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 채택 저지 운동은 어디에 집중되나. -아무래도 교토와 요코하마다. 도쿄의 경우 우리로 치자면 구(區) 단위로 교과서가 채택된다. 그런데 교토와 요코하마처럼 우익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큰 곳은 좀 더 광역화돼 시(市) 단위로 채택된다. 그래서 이들 지역을 우선 타깃으로 삼았다. 글 사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장수하고 싶다면 오른쪽으로 누워자라”

    ‘매일 8시간 잠잘 것, 오른쪽으로 누워 자기, 절대 폭음(醉)하지 말 것….’ 91년 전 나온 잡지 ‘개벽’(開闢) 창간호(1920년 6월 25일)에 실린 ‘100세 장수법’ 중 일부다. 천도교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개벽’은 100세까지 장수하기 위해 지켜야 할 15가지 건강법을 소개하고 있다. 음식 섭취와 수면, 운동에 관한 조언은 물론 공명심(功名心)을 제어할 것,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차분하게 하며(虛心平氣), 속을 태우고 노여움을 감추지 말 것(焦思藏怒) 등 정신 건강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어 흥미롭다. 영국의 한 의학박사가 실험을 통해 알아낸 것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다분히 민족주의적 가치를 품고 있었기에 ‘개벽’은 창간호부터 일제로부터 혹독하게 탄압받았다. 창간호가 압수된 데 이어 이틀 뒤인 27일에 발행된 호외(號外) 역시 압수돼 사흘 후인 30일에 다시 임시호를 발행했다. 창간 이후 6년 동안 발매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 등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26년 8월 1일 72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됐다. 올해 창도 152년을 맞는 천도교는 최대 경축일인 천일기념일(4월 5일)에 중앙대교당에 전시실과 자료실을 개관하고 개벽을 비롯해 여성잡지 ‘신여성’, 어린이 잡지 ‘어린이’, 농민잡지 ‘조선농민’ 등 10여종의 천도교 계열 잡지와 3·1 독립운동 선언서, 동학농민운동 사발통문 등을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아동문학가 윤석중 고향 논란 법정으로 비화 조짐까지… 왜

    아동문학가 윤석중 고향 논란 법정으로 비화 조짐까지… 왜

    ‘어린이날 노래’ 작사가이자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등 동시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년)이 때아닌 ‘고향’ 논란에 휩싸였다. 법정 공방으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인다. 논란은 윤석중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에서 불거졌다. 노경수 한서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지난해 말 펴낸 ‘동심의 근원을 찾아서-윤석중 연구’에서 윤석중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고향’의 정서는 충남 서산 지역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2008년 자신의 단국대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심화시킨 결과물이다. 윤석중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두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외조모 밑에서 잠시 크기도 했고, 젊은 시절 부친이 거주하던 서산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①태어나서 자란 곳 ②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③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보기에 따라 윤석중의 ‘고향’은 서울도, 서산도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노 교수는 “시골과 고향을 노래한 윤석중 작품을 살펴보면 그의 고향은 서산을 가리키며, 서산은 향수의 공간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 예로 ‘서울 사는 아이야/ 시골 왜 왔니?/시골 바람 맑은 바람/쐬고 싶어 왔단다’(‘서울 사는 아이야’ 중) 또는 ‘시골 사는 아이들은/몇 갑절 저보다 큰/나뭇짐도 잘 지고’(‘시골 사는 아이’ 중) 등의 시구를 든다. 하지만 유족들은 이에 거세게 반발한다. 윤석중의 장남 태원(미국 거주)씨는 “아버지는 일본 도쿄 유학 생활을 제외하고 80여년 동안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활동했다.”면서 “(아버지의) 정신적 고향이 서산이라거나 향수에 관련된 많은 작품이 서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법정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이에 대해 문단은 아동문학계에서 차지해 온 윤석중의 독보적 위치를 감안할 때 ‘고향’ 논란은 이해가 가지만 법정 공방까지는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그 이면에는 윤석중의 아픈 개인사가 있다. 윤석중의 부친 윤덕병(1885~?)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 소속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 세 차례나 투옥됐던 민족주의계열 좌익 지식인이었던 것. 1930년대 초 윤덕병은 사회 활동을 접고 사별했던 전처(윤석중의 모친)가 남겨준 땅이자 윤석중의 외가인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 46번지’로 내려와 은거하다 한국전쟁 때 좌우익 대립 속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유족들은 아직까지 윤덕병의 유골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노 교수는 “윤석중의 작품 이면에는 좌익계열이었던 부친을 한국전쟁 때 잃은 뒤 동심주의, 낙천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 체험, 반공주의와 연좌제가 서슬 퍼렇던 시대적 배경이 있다.”면서 “서울에서 태어나고 주로 활동했을지라도 고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외조모와 부친이 있었던 서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중 전기를 썼던 신현득(78) 새싹회 전 이사장은 “할아버지로 인한 불편한 기억 때문에 유족들이 아버지 윤석중과 할아버지 윤덕병, 그리고 서산과의 인연이 새삼 거론되는 것 자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노 교수의 책이) 윤석중에 대한 일각의 일방적 비판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대목 등은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윤석중에게는 ‘거목’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일제 치하 현실에 순응하려는 동심주의와 그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낙천주의를 앞세워 아이들의 정서를 박제화시켰다는 비판도 따라다녔다. 노 교수는 “겉으로 드러난 윤석중의 작품 세계는 동심주의적 정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초기 작품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강한 민족주의적인 색채와 일제 수탈에 대한 저항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조선아들행진곡’에서는 ‘피도 조선 뼈도 조선/이 피 이 뼈는/살아 조선 죽어 조선/네 것이라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1929년에 쓰인 ‘허수아비야’는 ‘허수아비야…/ 여기 쌓였던 곡식을/누가 다 날라 가디?/…/넌 다 알 텐데/왜 말이 없니?/넌 다 알 텐데 왜 말이 없니?’라며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현실을 상징과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이슈 인터뷰] “우리 학생들 독도교육 안 시키면 5년후 日 왜곡 논리에 밀려”

    [이슈 인터뷰] “우리 학생들 독도교육 안 시키면 5년후 日 왜곡 논리에 밀려”

    국내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회학자’로 평가받는 신용하(74)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도 지킴이’다. 그는 일본 정부가 1996년 1월 독도를 자신들의 배타적경제수역(EEZ) 기점으로 선포하고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사실상 주장하고 나서자 즉각 독도 지키기로 맞섰다. 당시 독도 관련 15개 단체의 연합체인 ‘독도연구보전회’와 ‘독도학회’를 창립한 뒤 전 세계에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리는 활동에 앞장서 왔다. 신 교수는 “일본의 교과서를 통한 독도 재침탈은 대한민국을 다시 빼앗으려는 1차적 징표”라면서 “우리가 독도를 지켜내지 못할 경우 대한민국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역설했다. →대지진으로 위기인데도 일본이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내용의 중학교과서 검정 결과를 조만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능성은. -우선 대지진 참사로 목숨을 잃은 많은 일본 국민들께 깊은 애도를 표하며 명복을 빈다. 또 일본 국민들이 지금의 난국을 잘 극복해 나가길 간절히 바란다. 일본 정부의 중학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 시기와 관련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디까지나 일본이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시기 문제와 표현의 변화가 있을지는 몰라도 발표는 확실해 보인다. →최근 우리 정부가 지진으로 인해 발표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지난해엔 2010년판 방위백서 발표를 연기한 전례도 있다. -우리 정부가 요청했지만, (발표 시기 등) 수용 여부는 전적으로 일본 정부에 달렸다. 전례가 있더라도 다소 일정을 늦추는 정도일 것이다. 일본은 한번 결정한 정책을 잘 바꾸지 않으며, 이 문제도 바꿀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이미 초·중·고교 교과서에서 방침을 정해 놓고 있다. 일본은 지진과 독도 영유권 주장 문제를 별개로 보는 것 같다. →이번 중학교 교과서 검증 결과 발표로 일본의 초·중·고교 의무교육 전 과정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가 다뤄지게 됐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의무교육 과정에 넣은 건 전 국민들에게 독도는 일본 땅인데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짓 교육시키기 위한, 의도된 전략이다. 장기적으로 독도를 재침탈하겠다는 포석이다. 일본 국민은 정부를 맹신하는 특성이 있다. →이번 검정 교과서에는 독도 영유권과 관련, 어떤 내용이 담기나. -최근 초안을 확인한 결과 ‘86해리 서북방에 있는 독도는 일본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일본은 우리의 국정교과서와는 달리 검인필 교과서다. 검인 과정에서 이 내용을 교과서에 의무적으로 담도록 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모두 탈락시켰다. →일본 내에서 독도 영유권 주장은 누가 주도하나. -일본 정부이고, 특히 외무성이다. 그들은 지금도 홈페이지에 영어와 스페인어 등으로 10개 항목에 걸쳐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며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지령 677호로 독도를 한국 영토로 판정한 것이 진실이다.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의 이면에는. -일본은 1905년에 독도를 한번 침탈해 봤다. 지금도 미련이 있다. 구한말 역사에서 일본의 독도 침탈은 한국 침탈의 전초전이었다. 또 동해 중앙에 있는 3개 섬(독도, 울릉도, 오키도) 가운데 2개 섬을 차지해 재해권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속셈이다. 가스 등 동해상의 수산자원과 독도 해역의 지하자원들을 손에 넣겠다는 것이다. →독도 문제를 너무 키우면 일본의 전략에 말릴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건 우리 외교부 주장이다. 통상 마찰은 기우다. 그들이 침묵하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대일 무역에서 연간 340억 달러의 적자를 보고 있다. 오히려 통상 마찰로 중간재 등의 수입을 기존 일본에서 다른 국가로 돌릴 경우 결국 일본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국내 일부 경제인들이 일본과 밀착돼 외교부를 부채질하는 것도 문제다. →정부는 어떤 대책을 펴야 하나. -독도는 역사적 진실이나 국제법상 지위에서 대한민국 영토다. 지금까지 발굴 자료 200여점이 모두 이를 입증한다. 외교부는 세계 각국어로 이를 번역해 세계에 당당히 알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일본은 국제재판까지 끌고 가는, 강탈이나 다름없는 행위로 나올 것이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독도 교육을 실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중학생이 5년 후 성인이 되는데 손을 놓고 있으면 논리에 매우 취약해진다. 향후 한·일 청년 간 독도 논쟁에서는 진실이 일본의 왜곡된 논리에 밀릴 수 있다. 교과부가 전국 각급 학교에 독도 교육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리고 9월 학기부터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교과서에 담아 본격적으로 교육을 실시하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독도의 실효적 지배 강화를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독도의 유인도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관련 법을 만들어 독도에 3~5인 가구가 상주토록 해야 한다. 군인(해병대)과 경찰을 함께 독도에 배치해야 한다.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가 정립되기 위한 조건은. -우선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침략외교를 지금의 대한민국에 적용시켜선 안 된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가 독도를 침략했다고 해서 지금 재침략할 수 있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당장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독도 침탈 정책도 폐기해야 한다. 일본 정부와 우파 정치인들도 독도 영유권을 계속 고집할 경우 양국이 애써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는 사실을 잘 새겨야 한다. 글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1937년 제주 출생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서울대 교수 ▲한국사회학회·한국사회사학회 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 대표 ▲독도학회·독도연구보존협회·한국영토학회 초대 회장 ▲서울대 명예교수, 울산대 석좌교수
  •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3) ‘신문화운동의 기수’ 최남선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3) ‘신문화운동의 기수’ 최남선

    1906년 3월, 17세의 최남선은 일본 와세다대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초행길은 아니었다. 이태 전인 1904년에도 그는 일본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단의 최연소 유학생이자 반장이었다. 당시 열 다섯이었던 소년의 눈에 비친 일본은 이전까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듣던 과거의 일본이 아니었다. 그곳은 눈부신 신세계였다. 그 신세계의 거리에서 소년은 서점 유리창 너머로 매달 쏟아지는 수십 종의 잡지들에 매혹당했다. 소년에게 그것은 문명의 상징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그리고 남들보다 비교적 일찍 시도된 그의 유학생활은 모두 짧게 끝이 났다. 도쿄부립 제1중학에서의 첫 번째 유학은 조선유학생들의 무질서와 준비 부족 때문에 석 달만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유학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갑작스레 파국을 맞았다. 문제의 발단은 와세다대 법정학부 학생들의 모의국회였다. 망해 버린 조선왕이 일본을 방문한다면 어느 정도의 의전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했던 것. 이 사건은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 유학생들에게 심한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최남선은 조선 유학생 대표로 총퇴학을 주도하는 등 강경 대응했지만, 결국 학교를 자퇴해 버렸다. ●‘소년’ 창간 통해 대륙 중심 패러다임 바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학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지만 문명에 대한 열망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최남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년은 스스로를 ‘신보잡지광’(新報雜誌狂)이라 자처했다. 얼마 후, 소년은 신세계로부터 최신 인쇄기를 구입하고 인쇄를 위한 전문 식자공까지 대동하여 그렇게 바다와 함께 귀국했다. 신문명의 메카임을 자부하는 인쇄소 겸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그리고 1908년 11월 1일, 바다 건너편의 것이었던 문명은 지금 이곳에서 최초의 근대적 잡지 ‘소년’(少年)이 되었다. ‘소년’은 최남선 1인 잡지였다. 일본을 경유한 새로운 지식들은 편집자 최남선을 거치면서 또 한번 선별되고 분류되어 마침내 전파되었다. 이 시기 최남선은 그 자체로 근대 지식의 매체(미디어)였다. 최남선은 일본 유학 시절 구입한 많은 신간 서적들과 당대 잡지들에 등장하는 담론들을 번역했을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그만큼의 글을 썼다. 문명은 그렇듯 지식을 통해 식민지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창간호에 실린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도래하는 문명의 힘과 미래에 대한 최남선의 태도와 각오가 잘 드러나있다. ‘텰썩 텰썩 텩 쏴’ 하는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바다의 위력 앞에서는 ‘큰 산이나 거대한 바윗돌’ 같은 무엇도, ‘아무리 권세를 가진 누구’도 힘없이 쓸려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돌이킬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시대의 조류이기에 끝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 어마무지한 새 기운이 대륙이 아닌 바다로부터 온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유사 이래 수천년간 대륙만을 바라보고 있던 반도 조선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日제의 만주건국대학 교수직 수락 지조냐 학자냐의 양자 중 그 일을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고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안다(‘자열서’(自列書) 중). 신문관 창립 이후 3·1운동까지 10여년간, 최남선은 자타가 공인하는 신문화운동의 기수였다. 하지만 ‘기미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3년여의 수감생활을 마친 후 그는 지조와 학자의 길 사이에서 학업을 선택한다. 학자로서의 최남선은 민족주의로 나아갔다. ‘조선역사통속강화’(1922)를 시작으로 최남선은 ‘불함문화론’(1925), ‘단군론’(1926), ‘살만교차기’(1927) 등 굵직한 역사 연구 저술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들은 모두 ‘단군에 기원한 조선 역사’라는 그의 민족주의 역사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였다. 동시에 그는 ‘풍악기유’(금강산, 1924), ‘심춘순례’(지리산, 1925), ‘백두산근참기’(1927), ‘금강예찬’(1928) 등 조선의 산천을 둘러보고 이에 대한 기행문을 남겼다. 그에게 있어 기행문은 여행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순례기였다. 민족은 그에게 이념이었고, 그는 이념에 입각한 자신의 이러한 작업을 조선학(朝鮮學)이라고 불렀다. 그가 했던 연구의 중심에는 언제나 조선 민족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가 버린 지조란 무엇이었을까. 대중들이 열망했던, 그리고 그 자신이 지켜오던 지조란 바다를 통해 흡수하려던 문명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남선에게 그 문명은 일본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바다를 맞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눈을 돌려 대륙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지조를 바칠 만한 어떤 것도 없는 현실. 그렇기에 최남선은 지조있는 학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지조 그 자체를 ‘휘뿌리고’ 학자의 길을 택한다. 그가 가고자 했던 학자의 길은 바다도 대륙도 아닌 새로운 지반에 대한 탐사였다. 모든 지조가 사라진 자리, 그 자리에 세울 새로운 시공간. 학자란 새로운 시공간의 발굴자들이었다. 최남선은 지조가 불가능한 현재를 버리고 과거 속으로 침잠한다. 문명화되어야 할 미래의 민족을 등지고, 대륙 바라기 조선의 시간을 넘어 순정한 시간, 그 태초의 시간인 단군으로 그는 깊숙하게 달려 들어갔다. 어느 순간 최남선은 그 태초의 시공간 속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순정한 지반이란 건 현실 위에서는 세워질 수 없었다. 문명이란 바다를 통해 조선을 덮치던 제국주의의 시대. 그 바다 앞에 쓰러져간 ‘큰 산이나 거대한 바윗돌’처럼, 그의 세계는 무력했다. 바다를 동경했던 ‘담 크고 순정한 소년’. 그 담대함으로 바다를 버리고 순정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소년. 하지만 그 소년이 도착한 곳은 결국 바다의 친구였다. 1939년 4월, 최남선은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 자리를 받아들인다. ●노년엔 민족주의와 결별 최남선은 그가 도착했던 태초의 시간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그는 샤먼(살만교) 및 민족주의와 결별한다. 그리고 1955년 최남선은 가톨릭에 귀의했다. 어쩌면 최남선에게 그곳은 샤먼과 민족 등이 없는 시공간, 아니 모든 시공간이 탈각된 지각 불가능한 무엇은 아니었을까. 최남선은 말한다. “민족이란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도 아니며, 당연히 있어도 안 될 것이요, 다만 ‘대립’의 의식으로만 성립된 것”이다. 민족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며 인류의 평등한 평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진실한 마음에 입각하여 이전의 가치를 완전히 쓸어버리는 민족혁명이다.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모든 지조를 쓸어버릴 것! 그에게 가톨릭은 “평화가 아닌 칼을 통해 불의를 없애고 정의를 세우는 교문(敎門)”이었다. 최남선이 지조 대신 학자를 선택한 것은 격변의 시대를 피해 달아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그는 일생 동안 단 한순간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학자로서 자신의 시대를 덮쳐오던 바다와 맞섰다. 현실을 뚫고 나갈 새로운 시공간을 발굴하는 지식인 최남선. 하지만 언제나 자신이 발굴한 그 시공간 속에 갇히고 방향을 잃을 위험에 놓인 지식인. 최남선은 끊임없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숙명을 가리키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현재를 넘어서고자 하나 너무도 쉽게 현실에 포획되고 마는! 문성환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열린세상] 화·절·인(和·切·忍)/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열린세상] 화·절·인(和·切·忍)/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일본 대지진 참사와 관련해서 일본인이 보여준 행동을 보면, 일본문화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이후 며칠 동안 일본인은 차분하게 질서를 유지했다. LA 지진이나 이집트 사태에서 발생한 혼란이나 폭력과는 분명히 달랐다. 방사성물질이 확산되면서 사재기 등과 같은 행동의 변화가 있었지만, 심각한 위기상황을 고려할 때 일본인은 상대적으로 절제와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일본문화는 화(和)·절(切)·인(忍)의 문화로 불린다. 603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성문 헌법에서 ‘화를 중시한다.’고 기술하면서 ‘화의 문화’는 일본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화의 문화’는 규율과 질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사이의 상호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절’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절’은 나와 남의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경계를 설정하고 그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은 창피한 것을 아주 중요시하며,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창피한 것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나의 경계를 지키는 ‘화의 문화’에 대한 진술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 튀는 행동을 하면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창피한 행동 역시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규율과 질서를 지키고, 조직과 제도 안에 나를 위치시키는 일은 ‘인’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표출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다. 참는 것은 소중한 가치지만, 때로는 자신을 억압하기도 한다. 지진해일이 일어난 이후 일본 언론, 특히 NHK가 보여준 보도는 그동안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만든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지만 ‘화의 문화’라는 일본의 문화적 전통을 반영한다. NHK는 피해를 집중보도하기보다는 질서 있는 대응방안을 말하고, 흥분하기보다는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부정적 태도보다는 긍정적 태도로 안정과 질서를 강조했다. 그만큼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사건을 보도했다. 이에 비하면 우리 언론의 보도에는 여러 가지의 바람직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민족주의가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재난과 피해자의 고통을 극화했으며, 그것은 썩 자극적이며 선정적이었다. 그동안 국내에서 했던 것처럼 똑같은 관행으로 일본 대지진을 보도했다. 우리 언론계 내부에서도 반성과 비판이 나오고 있다. 우리의 재난보도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NHK의 보도방식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NHK의 재난 보도에서 따라야 할 점은 흥분하지 않는 절제와 냉정함이지만,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는 것은 언론의 역할이 아니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지만, 일본 국민이나 국제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너무 제한되어 있었다. NHK나 일본 언론들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환경 감시기능을 포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일본 정부의 발표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준에 그침으로써 악화되는 위기상황에서 언론들은 제대로 된 환경의 감시와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우리는 일본 지진해일과 방사능 오염을 접하면서 일본문화가 지니고 있는 절제와 규율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는 듯하다. 일본인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질서와 규율을 잘 지키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이 지금의 일본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잠재해 있다. 사실상 한 나라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지리와 풍토와 같은 변하지 않는 구조다. 일본의 문화가 화·절·인의 문화라면, 그것은 쇼토쿠 태자가 ‘화’를 강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지리적 풍토 속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일본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해주고 함께 나누는 것은 필요하지만, 일본의 문화적 성향을 이상적인 것으로 볼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일본과 다른 지리와 풍토 그리고 사회환경 속에서 형성된 정(情), 한(恨), 아우름이라는 소중한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반군 臨政구성…리비아 ‘분단’ 위기

    리비아 반군세력의 구심체로 알려진 국가위원회는 23일(현지시간)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마무드 지브릴(59)을 총리로, 알리 타루니(60)를 재정·경제정책 책임자로 임명했다. 리비아 제2도시 벵가지를 거점으로 동부를 장악한 반군세력이 독자적인 정부 구성에 박차를 가하면서 리비아가 21세기 최초의 분단국이 될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반군 측은 새로운 정부 모양새를 갖춰 나가는 동시에 ‘세속적인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국가 정체성도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지브릴 임시총리와 타루니 재정·상업위원장 모두 미국식 사고방식에 익숙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각각 피츠버그대학과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유학파다. 타루니 위원장이 미국에서 활동했던 금융과 경제 전문가라는 점은 향후 반군세력의 경제정책이 카다피와 정반대로 미국식 자유시장경제에 치우칠 가능성을 시사한다. 카다피는 1969년 쿠데타로 전제군주를 몰아낸 뒤 외국자본이 장악했던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강력한 자원민족주의를 견지해 왔다. 외신들은 벵가지 출신인 타루니는 미국 워싱턴대 포스터 비즈니스 스쿨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카다피 반대 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해 왔다고 전했다. 반군 측은 현재 정부운영에 필요한 재원 확보를 당면과제로 삼았다. 타루니 위원장은 “지금 우리가 현금이 모자라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유동성이 있어서 기본적인 것들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에서 인쇄해 카다피 정부에 보내기로 했던 리비아 화폐 4억 디나르(약 1조 2000억원)를 영국정부가 자신들에게 제공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각국 정부가 동결된 리비아 국부펀드 자산을 바탕으로 신용을 제공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군 대변인인 니산 구리아니는 알자지라와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리비아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면서 “우리는 리비아 서쪽과 우리의 수도 트리폴리를 해방시켜 이 나라를 하나로 통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호언장담과 달리 반군은 여전히 카다피군에 맞설 만한 무력과 군인들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현재 미스라타와 아즈다비야 등지에서 카다피군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는 반군은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다국적군에게 무기지원을 요청 중이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시론] 석유개발 전문인력 육성 시급/성원모 한양대 자원공학과 교수

    [시론] 석유개발 전문인력 육성 시급/성원모 한양대 자원공학과 교수

    최근 유가가 급등하면서 석유소비량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는 그야말로 심각한 위기에 몰려 있다고 할 수 있다. 2010년 80~90달러 선을 유지해왔던 유가는 중동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정, 리비아 사태 등에 따른 공급 차질의 우려로 인해 계속 상승기류를 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따라 세계 각국은 석유·천연가스 자원 확보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고,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화하려는 자원민족주의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즉, 전세계적으로 메이저 오일기업보다는 국영기업 위주로 석유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세와 로열티 인상, 외국인 지분 제한 등을 통해 산유국의 지분 확대를 꾀하는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석유자원은 국가의 전략자원화될 것으로 보이며,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고유가 시대가 자주 발생하여 이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국가는 세계 경제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 석유개발 사업의 형태는 예산이나 전문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인해 대부분의 투자가 성공 불확실성이 매우 높은 탐사광구사업에 치우쳐 있었다. 반면에 현 정부 들어 최근 2년에 걸쳐 생산유전을 직접 매입하거나 생산유전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 결과, 2010년 말 기준으로 우리가 1990년도부터 꿈꿔 오던 석유가스 자주개발목표율 10%에 육박했다는 사실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하겠다. 동시에 M&A를 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우수한 기술진의 확보가 가능하여 단숨에 선진기술의 습득이 용이하며 국내 기술진에 기술 전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제 아침 아주 반가운 뉴스를 접했다. 중동 국가 중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되어 있고 소수의 메이저 기업만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서 최소 매장량이 10억 배럴이나 되는 초대형 생산유전에 우리나라가 참여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이다. 이는 석유 개발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서 우선은 큰 기쁨이 아닐수 없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봐야 알겠지만, 이 유전은 특히 리스크가 낮은 생산유전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산유전의 경우, 여러가지 기술적 방법에 의해 매장량이 확인된 것이므로 90% 이상 신뢰성이 있다. 탐사광구와는 달리 석유가스 자주개발률 증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참여와 동시에 곧바로 생산이 가능한 유전이므로 수익률은 낮더라도 리스크가 거의 없는 특징을 갖는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생산유전뿐만 아니라 탐사광구에 대한 투자도 등한시해서는 안 되므로 생산유전에서의 석유 생산을 통한 안정적인 현금흐름 하에서 포트폴리오 전략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석유개발사업은 기술력이 없으면 아예 개발에 참여도 시키지 않는 등 기술력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은 기술력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석유가스의 연구·개발(R&D) 기술력과 관련하여 적극적인 증진 노력을 통해 고급전문인력을 시급히 양성하고, 또 그에 걸맞은 지식서비스산업 육성 등과 같은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가 추진하고 있는 탐사광구와 생산유전을 적절한 배합으로 추진하는 방향은 옳으나 전문인력의 수적 또는 질적 수준에 대비해 보면 아주 초라한 수준이다. 어렵게 얻어낸 생산유전이 자칫하면 남 좋은 일만 될 공산이 클 수도 있다. 성공적 개발을 위해서는 정부, 산업체, 연구소 및 대학이 하나가 되어 사심없는 실질적인 노력을 해줄 것을 기대해 본다.
  • [기고] 튀니지발 민주화 바람 중국에 상륙할까/김윤태 동덕여대 중국학과 교수

    [기고] 튀니지발 민주화 바람 중국에 상륙할까/김윤태 동덕여대 중국학과 교수

    지난달 중국 상하이의 극장 앞에서 한 청년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재스민 혁명을 일으키자고 주장했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튀니지발 민주화 바람이 중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비록 불발에 그쳤지만, 중국의 심장부 베이징과 상하이에서의 시위 조짐은 중국 정부를 바짝 긴장시켰다. 지금 세계는 과연 중국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점화될 수 있을지에 이목이 쏠려 있다. 중국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부터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중국 전문가들은 반체제 운동 발생 가능성에 큰 힘을 싣지 않고 있다.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이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 그 이유다. 첫째, 북아프리카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던 데 비해 중국은 최근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많은 사람이 수혜자가 되었다. 지난해에는 일본을 추월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성장에 만족한다. 둘째, 중국에는 강력한 중화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1990년대부터 강화돼 온 중화민족주의와 강대국 이데올로기 속에서 국민은 민주화가 국가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고 경제성장을 방해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셋째, 중국은 강한 국가통제력을 갖고 있다. 중국의 경찰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하고 방대한 조직이다. 중국은 천안문사태 이후 반체제 운동에 정규군 투입이 가져다 주는 부담을 피해 정규군과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화력을 지닌 무장경찰을 구축했다. 넷째, 중국은 소셜네트워크와 인터넷에 대한 특수한 통제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원형교도소)을 만들어 네티즌이 탈옥을 기도하지 않도록 통제하고 있는 것이 여타 국가와 다르다. 중국에서 반체제 운동 발생 가능성은 비교적 적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간헐적이고 분산적인 시위를 통해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표출할 수는 있겠지만, 그 범위와 강도는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신장위구르·티베트 등에 만연한 소수민족과 한족 간 갈등, 심각한 실업문제와 물가폭등, 지역·계층 간 소득격차 심화, 권력기관 부패 등은 언제든지 체제를 위협하는 불씨가 될 수 있다. 중국의 지도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동안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우선 기층선거에서 주민참여제를 실시해 직접민주주의 도입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계층 간 갈등을 줄이고자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노동법을 개정했다. 여론을 대하는 자세도 예전과는 달라, 인민일보 인터넷 게시판인 ‘런민왕’(人民網)을 통해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원자바오 총리가 내세운 정치개혁도 눈길을 끈다. 그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결합한 형태의 중국식 민주제도를 주장했다. 타국 문제를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중국이 적절한 개혁을 추진해 보다 안정된 사회와 균형 잡힌 대외관계를 구축하기를 기대해 본다. 중국의 변화는 한반도 등 국제사회에도 바람직한 미래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지청천 ‘자유일기’] “외조부는 극우 아닌 민족주의자”

    [지청천 ‘자유일기’] “외조부는 극우 아닌 민족주의자”

    백산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인 이준식(55) 전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위원은 외조부를 “강직한 군인”이라고 회고했다. 해방 이후 대동청년단의 설립에 관여해 극우적인 성향이 강했다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서도 “(외조부는) 넓은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들과도 생각을 나눌 만큼 열린 민족주의자였다.”고 말했다. 이 전 위원은 지난해까지 친일재산조사위 활동을 하며 3대째 나라 바로 세우기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외손자로서 기억하는 지청천 장군의 모습은? -내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돌아가셔서 직접적으로 기억하는 모습은 없다. 대부분 어머니를 통해 들었는데 강직하고 약속을 중히 여기는 분이셨다. 일본 육사에 들어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면서 육사 내 동지들과 ‘아오야마의 맹세’라는 것을 하셨다고 들었다. 이후 김경천 장군과 외조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하지만 홍사익이란 분은 일본군 중장까지 지내다 전범으로 처형되기도 했다. →지 장군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겪은 일 가운데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외조부가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가려 했는데 이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식음을 전폐해 몸을 초췌하게 해 일제의 감시를 피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 뒤 요양을 한다며 귀국했다가 만주로 넘어가셨다. 이후 제일 먼저 찾아가신 곳이 신흥무관학교였다. →외조부가 극우 성향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대동청년단 창립 등에 관여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외조부는 사회주의자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는 분이셨다. 이번에 공개한 자유일기를 봐도 전면적인 자유시장경제보다 계획경제가 1950년대 상황에 더 맞다는 의견을 피력하셨다. 극우는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어머니 지복영 여사도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어머니도 광복군에 입대를 하셨다. 초창기 멤버인데, 심순호·오광심 여사 등 5~6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30년대 중국 관내로 이동하면서 광복군의 모병업무를 맡으셨다고 들었다. 특히 중국 방송국을 빌려 대적방송을 할 때는 일본군들의 타깃이 돼 경호원을 서너명씩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다고 들었다. →최근 친일 문제가 사회적으로 많이 잊히고 있는데. -걱정이 많다. 특히 올해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이다. 이런 마당에 정부가 한·일 군사협정을 추진한다고 하는데도 사회적 관심이 너무 부족하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에서 논의 과정 없이 밀어붙이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진보·개혁진영이 말하는 장하준

    장하준 교수는 말 그대로 ‘문제적 인물’이다. 그는 보수와 진보,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경제학자일 뿐만 아니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자유시장경제를 강조하는 이들은 장 교수가 경제이론을 무시하고 역사적 경험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고 날을 세운다. 심지어 국방부는 2008년 장 교수의 책을 반정부·반미 성격을 띤 ‘불온서적’으로 지정했다. 반면 진보 성향 학자들은 장 교수가 박정희 독재정권의 관치경제를 옹호하고 재벌을 비호한다고 비판한다. 일부 진보적 학자는 오히려 복지국가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인 담론이 장 교수에게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장 교수와 관련해 진보·개혁진영에서 10년 가까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논쟁은 장 교수가 재벌개혁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한 기고에서 “민족주의 감정을 악용해 부패하거나 무능한 재벌총수 문제를 덮어선 안 된다.”라고 비판했다. 이는 대표적인 경제민주화운동으로 평가되는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한국은 주주자본주의가 아니라 총수자본주의”라면서 “회삿돈을 빼돌리는 총수를 고발하는 시민단체 활동이 뭐가 잘못됐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차이도 크다. 김 교수는 “그는 국가와 재벌이 짝짜꿍이 되었던 박정희 시대가 정치적 독재 빼고는 너무나 좋은 시대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는 장 교수가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는 견해를 정면으로 논박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더 나은 자본주의로 가기 위한 ‘대중적·시민적 동력’에 대한 얘기가 장 교수에게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최근의 저서 ‘진보집권플랜’에서 장 교수가 노조의 경영참가를 빠뜨렸다고 지적했다.
  • 최정호·정진홍·신용하 울산대 석좌교수 임용

    국내 인문학 분야의 최고 석학들이 2011학년도 봄학기부터 울산대학교 강단에 선다. 울산대학교(총장 김도연)는 미래에 대한 예지력으로 언론계·학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최정호(78) 교수와 종교문화 연구의 대가인 정진홍(74) 서울대 명예교수를 인문대학 철학과 석좌교수로, 민족주의 사회학자로 명성을 쌓은 신용하(74) 서울대 명예교수를 사회과학대학 사회과학부 석좌교수로 각각 임용한다고 9일 밝혔다. 최 교수는 ‘독일현대사’ 강의를 통해 1·2차 세계대전과 동서냉전, 분열과 통합의 유럽 현대사를 개괄하고 21세기를 전망한다. 정 교수는 ‘종교문화의 이해’ 과목을 통해 종교가 야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법을 제시한다. 신 교수는 ‘현대사회학의 사상과 이론’ 강의를 통해 현대사회학 대가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1980년대 좌파 다 어디로 갔나

    1980년대 좌파 다 어디로 갔나

    ‘인터뷰-한국 인문학의 지각변동’(그린비 펴냄)은 최근 학계 논란이 궁금한 이들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소속이던 김항·이혜령 두 필자가 논쟁적 주장을 내놓은 15명의 중견학자들을 찾아가 만난 인터뷰집이다. 인터뷰의 초점은 1991년 사회주의권 붕괴 뒤 20년 동안 한국 인문학이 어떻게 변했나하는 점이다. 쉽게 말해 ‘1980년대 그렇게 넘쳐나던 좌파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다. 때문에 눈길을 끄는 것은 각 학자들의 주장 자체보다 그 주장으로 인도했던 전환점에 대한 얘기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적 세계관과 제3세계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한국의 근대를 본격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점부터라고 입을 모은다. 가령, 문단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논쟁에 개입했던 황종연(동국대)은 한국 좌파의 지적 태도를 ‘농본주의적 사회주의’라 언급한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도시화, 산업화 자체를 죄악시하는 민족주의적 감성을 지목한다. 근대성이 있었기에 민족주의가 가능했다는 지적은 그의 좌표를 알려준다. 이와 관련, 동아시아 담론을 내세우는 백영서(연세대)는 얼마전 타계한 리영희 선생에 대한 기억을 공개했다. 1970년대 감옥에서 만난 김지하에게 중국혁명을 공부하고 싶다 했더니 리영희 선생을 추천해줘 사제지간이 됐다고 한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19 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동양 좌파에 대한 기대감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스탈린 비판으로 소련식 전체주의에 실망한 서구 신좌파들은 대체재로 동양의 마오이즘을 추켜세웠고, 한국의 젊은이들도 여기에 영향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1980년대 후반기 주사파로 이어졌다고 본다. 또 임지현(한양대)은 우리가 2차세계대전기 마르크스주의자 하면 떠올리는 인물 가운데 한명인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해 “정작 고향 폴란드에서는 로자가 누군지 잘 모른다.”고 전해준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민족보다 계급을 우선시한 마르크스주의자보다 강성대국을 추진하면서 히틀러와 동맹도 불사했던 피우수트스키를 더 높게 평가한다. 주사파 면전에서 “너희들은 박정희의 사생아”라 언급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유명한 이영훈(서울대)은 양극분해론의 입증 실패를 근거로 든다. 중간층이 소멸한다는 양극분해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노무현 정권 시절 ‘양극화’ 얘기에 우파 인사들이 알르레기 반응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영훈은 조선 후기를 검증해본 결과 양극분해 대신 전반적인 하향평준화가 나타났고, 결국 조선 후기 도덕경제가 실패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조선 후기 부농이 등장하고 화폐경제가 발달했다는 식의 자본주의맹아론에 비토를 놓는 이유다. 김철(연세대)의 얘기도 재미있다. 뉴라이트 역사관으로 선전됐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이영훈과 함께 책임편집자로 참여했던 그는 처음으로 그 사태에 대해 입을 열었다. “내가 반박하고 싶은 논문도 있지만, 어떻게 일거에 친일논리로 매도할 수 있느냐.”면서 “식민성의 핵심은 수탈이나 억압이 아니라 상상력의 박탈”이라고 정의한다. 오직 식민지를 미화하느냐 아니냐의 여부만으로 재단해 버리는 세태에 대한 울분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기로에 선 이집트] 무바라크 축출 서방과 힘모아

    이집트 군부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미국, 유럽 등 서방 국가와 힘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뉴욕타임스(NYT)는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무바라크를 퇴진시키려는 모하메드 탄타위 이집트 국방장관과 다른 군부 지도자들의 협조를 받으면서 이들 군부 엘리트 중심의 권력 이양을 수용했다고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시위대 분노 무바라크 집중유도 카이로 주재 미국 대사관이 2008년 워싱턴에 보낸 비밀 문서에 따르면 탄타위 국방장관은 ‘무바라크의 푸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바라크에 충성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로이터통신도 이날 이집트 군사 전문가인 로버트 스프링보그 미국 해군대학원(NPS) 교수의 말을 인용, 이를 뒷받침했다. 스프링보그 교수는 “이집트 군부가 반정부 시위대의 분노를 군사정권이 아닌 무바라크 개인에게 향하도록 전략을 집중하고 있다.”면서 “이는 군부를 나라의 구원자로 보이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군부는 스스로 권력 승계를 진행할 것이고 서방 국가들도 군부가 이집트 정치, 경제, 사회 등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지속할 수 있도록 군부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지난주 탄타위 국방장관과 네 차례, 마이클 멀린 미 합참의장은 사미 하페즈 에난 이집트 육군 참모총장과 지난주 두 차례 통화했다. ●국민 존경받는 軍 판단 중요 군부와 시위대 간의 우호적인 태도도 군부의 속내를 짐작케 한다. 이번 시위에서 수도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상공에 F16 제트기가 맴돌던 순간에도 일부 군인들이 시위대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미국 일간 매클라치는 군부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군 지도부가 무바라크 정부를 지키는 것보다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군의 지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전문가 의견을 인용, 보도했다. 군에 대한 국민들의 우호적인 태도 역시 이집트 군부가 이집트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오랜기간 자리잡아 왔음을 보여 준다. 조엘 베이닌 스탠퍼드대 중동사학과 교수는 “이집트인들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연간 13억달러)으로 강력한 국방력을 갖췄기 때문에 군부를 경제적 개혁의 걸림돌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야권과의 대화에 나선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도 정부 주요 지도자들과 함께 무바라크 대통령의 의사결정 권한에 제한을 가하고 대통령궁에서 그를 제거할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져, 무바라크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中, 유사시 日주요도시 核 타격”

    중국이 유사시 핵 미사일로 일본 본토의 주요 도시를 일제히 타격하는 시나리오를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이라면 이는 양국 관계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일본 측 대응이 주목된다. 중국의 군사전문 인터넷 포털 ‘시루왕’(西陸網)에 중국이 일본과의 군사적 충돌 시 핵 탄도 미사일로 일본의 25개 주요 도시를 선제 공격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고 31일 군 기관지 해방군보의 내부간행물을 인용한 글이 게재됐다. 게재자는 군사 관련 정보를 주로 제공해온 블로거이다. 내부 간행물은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충돌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양측은 불가피하게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고, 이럴 경우 미국의 개입 여부는 확실치 않다.”면서 “따라서 일본 타격 모의연습은 미국의 개입 또는 불개입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해 실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간행물은 또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중·일 간에는 군사 충돌 가능성이 있다.”면서 “일단 충돌이 발생하면 중국은 ▲경고성 타격 ▲제한성 타격 ▲궤멸성 타격 등 세 가지 형식의 타격을 준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고성 타격은 일본 해군함대 등 특정 목표물을 타격하는 것이고, 제한성 타격은 경고성 타격에도 불구하고 충돌이 확산되면 일본 본토의 군사기지 등을 순항미사일로 타격하는 시나리오다. 중·일 양국의 민족주의가 팽창하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해 중국이 1840년대 이후 당했던 민족적 수난과 치욕을 설욕하겠다고 나설 경우 양국의 군사 충돌은 곧바로 핵무기를 동원한 전면전으로 번질 것이라고 간행물은 내다봤다. 미국의 개입 여부는 일본 본토 공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거리 핵 미사일로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일본 내 25개 도시를 공격하면서 대륙 간 탄도미사일로 미국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간행물은 일본이 완전히 궤멸되면 중국은 미국의 전면적인 핵 공격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고, 미국 역시 중국의 반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끝을 맺었다. 글이 게재되자 중국 네티즌들은 “일본이 중국의 핵 공격을 받는 상황을 기대한다.”는 민족주의적 댓글로 호응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중국의 특성상 군의 내부 간행물이 어떻게 외부로 유출될 수 있느냐.”며 내용의 진실 여부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글로벌 시대] 한국의 반일 감정과 민족주의/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글로벌 시대] 한국의 반일 감정과 민족주의/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일제 식민지 시대의 역사에만 초점을 두고 한·일 간의 역사문제를 논하는 것에 의문을 느끼고 있다. 물론 식민지 시대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해방 후의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 한·일 기본조약 체결 이래 20세기 후반의 한·일 관계사에 대한 무지(無知)가 일반 대중에게 여러가지 오해를 낳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0여년 전 일본 도쿄 진보초(神保町)의 고서점에 책을 사러 간 적이 있다. 헌책 몇 권을 사면서 가게 주인인 60대 할아버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한국에서 일한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말했다. “한국에서 일한다니 힘들겠네. 반일감정이 아직 있을 테니까. 일본 패전 때 반일감정은 거의 없었네. 패전을 맞아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조선인들 중에는 ‘왜 일본으로 돌아가는 거지? 여기서 함께 살자’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했던 사람도 있었다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정책 때문에 손바닥을 뒤집은 것처럼 일본을 혐오하게 되었어.”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고, 해방 때에는 눈물을 흘려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4년 정도 지나, 한국인 사회학 교수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사이좋게 살았고, 해방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해방 후 새롭게 나라를 규합해 운영하려고 할 때 국민이 일제 황국신민의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독립국가가 될 수가 없지요? 국민의식을 일제 황국신민으로부터 탈각시키기 위해서는 반일정책을 해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가 있었어요.” 현대의 일본인에게는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때로는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의 역사를 고려함으로써 관용정신을 가지고 한국인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60여년 전의 역사문제가 자신에게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까.”하고 느끼는 일본 젊은 세대에게는 현재에 이를 때까지의 경과를 설명하는 편이 역사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인간정신의 ‘현재’를 구성하는 기저 요소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반일 세뇌 정책’이라고 하는 것이 해방 후에 한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이었다는 것을 인식해 주었으면 좋겠다. 일본 정치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사건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반일 감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민족의 벽을 넘어 함께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민족주의 사상은 그 민족성이 부정되고 시달리는 상황이나, 해방 후의 한국과 같이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는 민족을 규합해 그 존엄을 지키는 수단으로서 귀중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시대는 크게 바뀌었다. 지금은 한국이 독립국가인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의 국제적 지위도 비약적으로 올랐다. 군사정권이나 개발독재 시대도 있었지만, 근면한 국민성과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경제발전과 사회자본 정비, 기술력 향상 등 여러가지 면에서 선진국화하고 있다. 이미 독립해서 풍부한 사회를 구축한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너무 강조하면 단순한 자민족 우월주의, 인종주의 사상에 빠질 우려가 있다. ‘민족주의 세뇌정책’은 사회에 다양한 폐해를 가져올 것이다. 획일적이고 예외가 없는 자민족상(自民族像)을 추구한 나머지, 같은 민족 내에서 이질적인 인격이나 사고방식을 배제하고, 사회집단에서 다양성을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창조적인 사고활동의 환경을 억압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자민족상의 심리적 투영 작용으로서 타민족에 대해서도 획일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파악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 “푸틴의 테러 보복대응, 부메랑 될 것”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25일(현지시간) 전날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에 복수를 다짐하면서 강경 대응 방침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외신들은 이슬람 소수민족을 겨냥한 푸틴의 이 같은 ‘보복 대응’이 다시 피를 부르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AP통신은 푸틴의 강경책이 테러 증가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뿐이라고 꼬집었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도 “(이슬람에 대한 푸틴 정부의) 온건책은 비현실적이며 강경책은 이슬람 반군 지원자만 늘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슈피겔은 보안군이 캅카스(코카서스)에서 벌이는 ‘초법적인 군사활동’ 때문에 “반군 한명을 죽일 때마다 또 다른 이들이 반군에 가입하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면서 “러시아는 캅카스 주민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는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푸틴의 이슬람정책은 체첸을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으로 상징되는 강경책을 위주로 하면서 대규모 관광단지 개발이라는 온건책도 병행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푸틴 총리가 권력 강화를 위해 줄곧 슬라브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바람에 슬라브족과 무슬림 사이의 긴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12월에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이슬람 등 소수민족에 대해 무차별 폭행을 가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소수민족 대표들이 자위권을 위해 무장하겠다고 선언한 일까지 발생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올해 18조 3600억원을 투자하는 야심찬 캅카스 지역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하는 등 유화책을 지난주 꺼내든 바 있다. 하지만 슈피겔은 “스키 리조트 등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개발을 통해 캅카스 지역에서 관광산업을 부흥시키고 이슬람 반군을 약화시킨다는 발상은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정책보다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700만명에 이르는 러시아의 무슬림 인구는 주로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 지역에 거주한다. 150년 넘게 피의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는 체첸은 캅카스 지역에 위치해 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北캅카스’ 체첸반군 소행?…소수민족 탄압 보복인 듯

    러시아 최대 항공 허브인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공항이 24일(현지시간) 공격당하면서 누가 테러를 계획했는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직 배후를 자처한 세력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러시아에서 분리독립을 원하는 극단주의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최근 수도 모스크바를 겨냥한 테러 공격이 잇따르면서 러시아의 소수민족 정책이 실패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러시아 보안당국은 24일 폭발 현장에서 테러범으로 추정되는 30대 아랍계 남성의 시신 일부를 발견했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전했다. 러시아 언론들은 목격자와 보안당국 관계자 등을 인용해 테러범이 한명 또는 두세명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번 테러를 저질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북 캅카스는 러시아 남부의 이슬람 문화권으로, 대표적인 ‘유럽의 화약고’로 꼽힌다. 최근 이 지역 이슬람 무장세력과 러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희망하는 체첸 반군이 자주 테러를 공조해 왔다. 캅카스 산맥 북쪽에 위치한 체첸 반군은 2002년 모스크바 두보르포카 지역의 한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였고 지난해 3월에도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자폭 테러를 자행하는 등 2000년 이후 모스크바를 여러 차례 공격해 왔다. 2004년에는 이번 테러의 표적인 도모데도보 공항에서 여객기를 납치, 자폭공격을 벌여 90명이 숨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테러가 지난해 12월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모스크바에서 캅카스 출신 등 소수민족을 무차별 폭행하는 등 폭동을 일으킨 데 대한 보복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모스크바 카네기센터의 알렉세이 말라셴코는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이 캅카스 내 어떤 세력에 의해 계획됐는지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면서 “중요한 것은 러시아 행정부의 캅카스 정책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연평 사과만큼은…北, 南에 명분줘야”

    “연평 사과만큼은…北, 南에 명분줘야”

    최근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 관련국들이 6자 회담에 앞서 남북대화 재개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데에 뜻을 같이하고 있다. 이에 따라 향후 한반도 정세는 남북대화의 진전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북한은 조건 없는 대화재개를 요청하고 있고, 우리는 3대 조건(연평도, 천안함, 비핵화)이 선결되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양측이 평행선을 걷고 있는 상태다. 19일 열리는 미·중 정상회담이 중요한 모멘텀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남북대화 재개 가능성, 재개 조건 등에 대해 전문가들의 분석을 들어 봤다. 남북한 대화 재개를 위해서는 “3대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화해선 안 된다.”는 입장과 “우리 측이 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 명확하게 갈렸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천안함, 연평도 등을 매듭지어 놓고 대화에 나서야지 무조건 대화에 나설 순 없다.”고 못 박았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과거 정부라면 이 정도 국면에서 대화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하겠지만 이번엔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첫째 연평도 포격이라는 명백한 북한의 무력기습도발에 대한 유감표명이나 재발방지에 대한 언급 없이는 대화로 갈 명분이 없다는 점과 둘째 외교부, 통일부, 국방부의 각 부처의 입장이 다르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반면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진정성 요구도 좋지만 남북대화에 속도를 내지 않으면 6자회담이 남북대화를 앞서갈 수도 있다.”면서 우리 측의 전향적인 자세를 요구했다. 양 교수는 “남북한 의제를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당국 간 실무자급 접촉을 통해 의사소통을 할 필요가 있다.”면서 “남국 당국 간 불신의 골이 깊은데 계속해서 3대 의제의 진정성을 요구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굴복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도 “인도적 사안, 적십자 회담 정도는 유연성을 갖고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유연성을 주문한 전문가들도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만큼은 북한의 사과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현 교수는 “북한도 남측이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을 줘야 한다.”면서 “연평도 포격은 북한의 책임 있는 사과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6자 회담 재개 이전에 남북한이 상황을 풀어야 한다고 국제사회가 분위기를 몰아주고 있다.”면서 “한반도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남북한에 준 만큼 남북당국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김영수 교수는 “북한은 우리에게 명분을 만들어 줄 의사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지금으로서는 해결방도가 없고 계산이나 사리판단으로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면서 “우리가 경색국면을 풀지 않는다고 해서 주도권을 놓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공은 아직도 북한 코트에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한문제가 주요의제로 다뤄지는 만큼 정상회담 개최에는 주목했지만 성과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양무진 교수는 “미국, 중국이 대북정책을 대화로 전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면서 “남북대화→북·미대화→6자회담의 순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덕민 교수는 “중국이 팽창주의, 민족주의적 행동에서 정상적인 외교상태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 이라면서 “한·미·일과 북·중이 대립하는 신냉전적 기류가 개선되고 한반도에 선순환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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