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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김일성자서전」이념이 퇴색했다/미지,평양출간 「92년판」내용보도

    ◎“생모에 불효” 사죄… 이간적 면모 부각/대일경협등 겨냥,김옥균옹호 눈길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지난 2일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지난 4월15일 80회 생일을 기해 펴낸 그의 자서전을 간단한 논평과 더불어 게재했다. 「김일성회고록,세기와 더불어」라는 제목의 이 회고록은 김일성생애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1912년부터 1935년까지의 성장기록을 담고 있는데 현재까지 2권이 출판됐다. 이 회고록은 지금까지 출간된 김일성에 관한 어느 출판물 보다도 인간적이고 덜 우상숭배적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김일성의 우상화로 유지돼온 북한사회에서 이같은 출판물이 이 시점에서 왜 발행됐느냐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이 의문에 대한 몇몇 전문가들의 논평을 곁들여 김일성회고록을 소개하고 있다.다음은 이 신문에 소개된 기사를 요약한 것이다. 『나는 나의 생애가 결코 남달리 특별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에서 적고 있다.그러나 이같은 겸손은 자신을 신과같은 존재로 선전해온 종전의 북한역사를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이 부분에 대해 북한문제 전문가인 일본 게이오대의 오코노기 마사오교수는 『김일성도 그가 죽은후 그에 관한 역사가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는 것같다』고 논평했다.때문에 『그는 보다 현실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오코노기교수는 덧붙였다. 이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보아 이제까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김일성의 생애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부분적으로 색다른 것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예로 그는 그의 생모에게 사죄하고 있는데 『나는 혁명에 뛰어든 이후 나의 어머님에게 특별히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쓰고 있다. ▲김은 또 구한말 친일개혁파 거두인 김옥균을 두둔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인정과 경제지원이 필요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이 코멘트도 항일·민족주의자임을 자처해온 김일성으로선 새로운 일면이다. ▲중국말을 썩 잘하는 김일성도 이책에서 항일투쟁 당시 항일게릴라들을 지원해준 중국공산당을 「선도자」라고 칭송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인민들에게 영웅적이고 불멸의 인간으로 신격화돼 있는 그의 생애에 하나의 오점이 될지도 모른다. 소설이든 아니든 북한에서 김일성의 생애는 모든 인민의 표상이다.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국내 정보와 다른 외부소식을 접할 수 있다.오코노기교수는 『김은 이책에서 보다 방어적이고 보다 솔직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이책이 그의 마지막 기록일 것』이라고 단언했다.그 이유로 오코노기교수는 『김일성이 만약 더이상의 개인적 진실을 밝혔다간 47년간이상 북한을 통치해온 기틀이 기본적으로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김일성 정통성의 핵심은 그가 항일게릴라 투쟁의 지도자였으며 그것을 통해 1945년 해방을 이끌어냈다는 것인데 그의 이 정통성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돼온 것은 철저한 세뇌교육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의 사후 소련의 스탈린처럼 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북한문제 전문가인 하와이대의 서대숙교수는 설명했다.김일성에 대한 북한의 과거 각종 간행물들에 비교하면 이번 책은 훨씬 덜 이념적이고 북한사람들이 읽기에 퍽 생소한 느낌까지 줄 정도로 사적내용이다. 이런 점은 김일성이 이미 황혼기에 있기 때문에 북한의 역사가들은 그의 사후 그가 거짓말쟁이가 되길 바라지 않은 나머지 그의 마지막 자서전을 보다 합리적으로 엮었을 가능성이 크다로 오코노기교수는 덧붙이고 있다. 한결 자유로워진 소련사람들이나 이웃 중국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진 북한사람들이 새로운 정보를 통해 김일성을 비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북한밖의 학자들은 김일성의 자서전 제3권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음 나올 책에서는 해방 전후사를 밝히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그 부분에선 소련군의 진주와 김일성이 괴뢰로 등장하는 과정이 취급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부분에서 김은 과거 보다 소련의 도움이 더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오코노기교수는 지적했다.
  • 체코­슬로바키아 왜 갈라섰나

    ◎「민족주의 태풍」에 무너진 “공존 74년”/경제차 심화로 갈등증폭/전통·언어 달라 끝내 결별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에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연방이 74년만에 해체돼 두개의 나라로 갈라서게 됐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조짐은 지난 5·6일 실시된 총선결과 체코지역에서는 급진개혁노선의 중도우파세력이,슬로바키아지역에서는 독립과 개혁완화를 표방하는 좌파민족주의 세력이 각각 집권하게 됨에따라 이미 예고됐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각각 제1당이 된 시민민주당(ODS)과 민주슬로바키아운동당(HZDS)대표들은 지난 9일부터 프라하와 브라티슬라바를 오가며 4차례의 마라톤회담을 벌였으나 양국간에 뿌리깊은 「갈등의 골」을 메워줄 합의점도출에 실패했다.지난 17일의 3차회담에서 바츨라프 클라우스 연방총리지명자와 블라디미르 메치아르 HZDS당수는 연방존립을 위한 최종절충을 시도했지만 타협안이 실패로 돌아간데 이어 18일 실무진들이 결별을 위한 과도정부 구성안을 마련,사실상 분리를 최종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사실 1차회담때부터 HZDS측이 기존 당론이자 선거공약이기도 한 슬로바키아의 「주권」을 강력히 요구,두공화국간에 타협을 볼 여지가 없었다.HZDS의 요구는 별도의 헌법제정,독자적인 경제정책등을 포함하고 있어 이것이 받아들여질 경우 현재의 연방체제는 존속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이와함께 HZDS는 이달말로 예정된 바츨라프 하벨대통령의 연방의회에서의 재선출에도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현연방정부자체를 부인하기도 했다. 1차대전후인 1918년에 연방국가로 결합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민족과 언어,문화등이 달라 민족갈등이 상존해왔다.서쪽 체코지역은 찬란한 문화유산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이 강하고 공업도 발달돼있는 반면 1천년간이나 헝가리제국의 지배를 받아온 슬로바키아는 낙후된 농업지역이다. 인구 5백만의 슬로바키아인들은 체코(인구 1천만)에 비해 상대적 불이익을 받고있다는 피해의식이 높아 공산정권 붕괴직후인 90년부터 분리운동을 본격화해왔다.민주화이후 개혁의 진통속에 농업과 군수산업이 집중돼있는 슬로바키아는 소비재공업이 발달한 체코공화국에비해 훨씬 격심한 경제적 침체를 겪을수밖에 없었다.체코쪽의 실업률이 4%정도인데 반해 슬로바키아는 12%나 되는 것이 그 단적인 사례다. 여기에 지난 2년간 유입된 서방자본 8억달러의 96%가 체코쪽에 집중 투입되는등 슬로바키아인들은 개혁의 혜택에서도 소외되는등 불만이 높았었다.또 소련쪽에 가까운 슬로바키아는 전통적으로 사회주의적 의식이 강해 체제전환에 따른 사회보장등 사회주의요소의 상실에 대한 반발심리도 만만찮았던 것으로 지적된다. 이같은 슬로바키아지역 주민들의 경제적 고통과 오랜 피해의식이 이번 총선에서 급진개혁에 반대하는 좌파민족주의세력에게 표를 몰아주었고 결국 두공화국간의 「합의 이혼」의 배경이 되고있다.
  • 체코연방 분리위기 모면/과도정부구성 합의/체코­슬로바키아 대표

    【프라하 AFP 로이터 연합】 체코슬로바키아의 연방총리 지명자인 바츨라프 클라우스와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탈연방 독립을 주장해 온 민족주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메치아르는 17일 가진 3차회담에서 연방 과도정부 구성에 관해 거의 합의에 도달했다고 클라우스의 한 대변인이 밝혔다. 이리 슈네이더 대변인은 이들 두사람이 새 정부의 구조와 구성에 관해 논의하고 있으며 이날 저녁이면 합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주전 총선에서 「민주슬로바키아운동」을 이끌며 슬로바키아 공화국 최다 의석을 확보한 메치아르는 슬로바키아가 체코 공화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됐다며 독립을 요구해왔다. 이에 반해 체코 공화국에서 승리한 클라우스는 강력한 연방구성을 주장하며 팽팽히 맞서 지금까지 회담에서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었다.
  • 6·25관련 구소 극비문건 공개/러시아 군사연 코로트코프박사

    ◎「남침 D­데이」 김일성이 선택했다/“인민군 서울 진격” 소대사 본국 급전/미군 인천상륙하자 김일성 “나는 실패했다” 당황/스탈린 수습책임 중국에 떠넘기며 김에 등돌려 다음은 러시아 국방부직속 군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가브릴 코로트코프박사가 비밀문건을 중심으로 밝혀낸 한국전쟁과 북한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집권과정등에 관한 내용의 요약이다. ▷한국전쟁 관련◁ 한국전쟁이 어느 편에 의해 발발됐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모스크바와 평양이 「해방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을 내렸으며 다만 시기에 관해서는 김일성이 6월25일 단추를 눌렀을 뿐이다.당시 평양주재 대사 스티코프가 개전 당일 스탈린에게 보낸 긴급 전문에는『조선인민군이 강을 습격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평양은 아주 조용한 분위기이며 사람들은 누구도 전쟁개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씌어 있다. ○평양시민도 몰라 또 국방부 문서보관소에 있는 「작전계획 초안」에는 『6월25일,○○탱크연대는 ○○도시로 향한다.○○보병사단은 ○○방향으로 진출한다』는 식으로 연대급 이상 부대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으며 이밖에 「서울점령 초안」도 포함돼 있다. 전쟁이 초기 승세에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김일성은 크게 당황했다.당시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보낸 전문에는 『김일성이 쇼크를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그의 군대지휘와 국가지도는 엉망이 되고 있다.김은 지하사령부에서 본인에게 「나는 실패했다.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나는 또다시 빨치산투쟁을 하는 것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것같다.(미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서)상황이 긴박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부탁해 나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돼있다. ○“김일성 무능” 불만 스탈린은 10월 전쟁이 실패했음을 느끼자 수습책임을 중국에 떠넘기기 시작함과 동시에 초기에는 매우 빈번히 김과 전문을 주고 받았으나 이때부터는 김에게 아무런 답신도 보내주지 않음으로써 실망감을 표시했다. 당시 스탈린측근으로 총참모부 작전부장이었던 스테멘코 장군은 후일 본인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이 『김은 아주 무능한 장군이다.그가 어려운 시기에 처해 의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대체인물이 없으니 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또한 본인이 극동군총사령관 말리노프스키원수 휘하에서 한국전 정보담당 장교로 재직시 그는 김일성을 한번도 이름으로 호칭하는 법이 없이 오직 「모자를 쓴 대위」라는 별칭으로 부르면서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다.군대지식도 적고 전쟁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한국과 관련된 소련군◁ 45년 8월 소련군의 북한 진주부터 53년 종전까지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군인은 모두 약 1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훈장을 받았거나 전사자·부상자 및 유가족들은 2차대전 심지어는 최근의 아프간전쟁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상황은 소련당국(지금은 러시아정부)이 한국전 개입사실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본인 역시 한국전쟁과 관련해 적성훈장을 받았다.그러나 훈장증서에는이상하게도 「조선전쟁에서 주어진 과업을 수행했으므로 이 훈장을 수여함」으로만 돼 있고 구체적인 공적사항은 전혀 없다.이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다. ▷항일빨치산투쟁◁ 김일성이 붉은 군대에 정식 입대한 것은 1942년 7월17일이었다.이같은 사실은 45년 8월30일 그가 적기훈장을 수여받은 훈장증서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다.김이 훈장을 받게 된 공적사항으로는 항일빨치산투쟁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돼 있다.그러나 이에 앞서 김이 소련군 대위로 진급시 승진 상신서에는 「진지첸(김일성)을 만주에서 빨치산대장으로 활동하도록 파견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이는 김일성이 북한당국의 공식 선전에서 처럼 스스로 빨치산부대를 편성,지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극동군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군이 항일 명령 특히 김일성이 45년 9월 중순 북한지도자로 선발되기 위한 면접을 하기 직전 심사위원격인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상급대장과 동 군사위원 슈킨대장 앞으로 제출된 김의 인물평가서에는 ▲동만주에서 빨치산활동 참가 ▲하바로프스크 군사학교에서 특수과정 수료 ▲수차 걸쳐 사령부로 부터 표창 ▲42년 입대,현재 대대장등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는데 입대 전에 이미 소련군 당국으로 부터 표창을 수차 받은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이지도자로선택된과정◁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김일성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이때 김은 『특별인터뷰를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다. 두 장군은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김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국적을 가진 전문가들이 북한에 보내지고 있다.현재 북한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김일성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도자후보 분석 이에앞서 모스크바에서는 북한의 새 지도자감으로 많은 후보들이 심도있게 분석,평가되었다. 주로 장시우,박동홍 등 코민테른그룹과 박헌영,김두봉 등 자생적 공산주의자,김일성등 만주그룹,그리고 조만식선생등 비공산 민족주의자들이 대상이었다.그러나 스탈린은 이들이 군대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거부했다. 스탈린은 결국 그의 구미에 딱맞는 인물을 물색한 결과 김일성이 돌연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하여 지도자로 선택을 받은 김은 45년 10월2일 부터 「진지첸」이란 이름을 버렸으며 8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소련함정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다. 당시 원산시 소련 군정책임자인 크루지코프 대좌가 영접했는데 그는 후일 본인과의 면담에서 김일성 영접은 평양의 스티코프 대장의 긴급명령으로 행해졌다고 말했다.
  • 외언내언

    탈냉전이 시작되었을때 세계는 화해와 평화시대의 도래에 큰기대를 걸었었다.냉전시대보다는 훨씬 평화롭고 안정된 세계가 될것으로 기대했었다.그러나 그기대는 우선 걸프전으로 첫 시련을 겪었다.그리고 지난3년간의 탈냉전사는 다음의 세계가 결코 냉전시대보다 안정되고 평화롭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소련붕괴와 동구민주화에 이은 독일통일·한소수교·한중자유왕래실현등 세계는 이미 큰변화를 겪었다.그러나 그변화는 끝이 아니라 아직 시작일뿐.기왕의 것이 구질서파괴와 탈피의 변화였다면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새질서로 가는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모삭과 정착의 변화라 할수 있다.그리고 그변화의 방향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것.◆탈냉전이후의 세계를 지배하게 될 가치는 종교와 경제 그리고 국익제일의 민족주의일 것으로 예고되어왔다.그대로 되어가고 있는 느낌.소련과 동구다민주국가들의 내적 분열갈등과 중동회교민족주의가 여전히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운 가운데 세계는 경제지상의 국익제일주의로 치닫는 대립갈등의 불안정을 노출하고 있다.◆더욱 불길해보이는 것은 바로 우리주변인 동아시아정세.구질서파괴와 탈피의 변화도 미처 달성되지않은 상태에서 새질서의 가치추구가 시작되고 있는 혼돈의 상황.북한이 구질서와 핵을 고집하고 일본이 파병법(PKO)을 성립시키는등 군사대국의 길을 서두르는 가운데 중국도 핵실험과 항모보유희망등 군사력증강에 나서고 있다.군축아닌 군확경쟁이 벌어질판.◆이러고서야 평화공존 공영의 새아시아 질서가 정립되고 정착할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북한이 한미일을 자극하고 일본이 남북한 및 중국을 불안케하며 중국이 다시 한일의 우려를 가중시키는 악순환의 상황이다.그가장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것이 북한의 민주화 개혁개방거부요 일본의 반성할줄 모르는 국익지상주의 아닌가.
  • 패전굴레 탈피 「대일본 영광」재현 시도/PKO법안 강행처리의 저변

    ◎국민적 욕구 업고 「정치열강」진입행보/“파병앞서 「정신대」등 「전후처리」 해결을/거대경제력 바탕,유엔등서 신질서주도꾀해 일본 자위대의 해외파견을 합법화하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안이 9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했다.PKO법안이 앞으로 중의원 본회의를 통과하게 되면 법으로 확정되며 자위대의 해외파병에는 걸림돌이 없게 된다.일본이 이 시점에서 PKO법안을 제정하는 저의와 역사적인 배경은 무엇인가.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김태지본부대사와 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 김태우박사와의 대담을 통해 일본의 해외파병에 따른 문제점 등을 진단해본다. □대담 김태지대사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김태우박사 국방연 선임연구원 ▲김태지대사=일본은 경제력이 강해짐에 따라 정치·외교적인 분야에서도 영역을 확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봅니다.이런 가운데 냉전종식과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과정에서 압도적 위치에 있었던 미국의 힘이 저하됐고 일본이 그 공백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국제적 여론이 조성됐습니다.특히 권능이 강화된 유엔이 지역분쟁의 사전예방과 사태수습에 발벗고 나서는 이때 유엔결정을 바탕으로 한 평화유지활동참여가 가장 적절하다고 일본은 판단한 것같습니다. 때문에 일본은 유엔의 명분을 빌려 캄보디아사태등 아시아지역 분쟁문제에서부터 정치·외교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그러나 일본은 국내의 반대여론을 어떻게 무마시키느냐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경제력에 걸맞는 정치·외교적 역할을 위해 집권자민당이 지난해 제출한 PKO법안이 수정되는 진통을 겪은데서 잘 나타납니다. ▲김태우박사=일본이 전후 47년만에 해외파병을 합법화한 것은 경제대국·과학기술대국에서 정치·군사대국으로 변모하려는 전환점이며 국가적인 기회로 보입니다. 일본의 해외파병은 미국이라는 승전국이 씌워준 평화헌법이라는 족쇄와 굴레를 벗어나 전후 청산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창문이 열릴 때 나갈 기회를 포착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일본은 이 기회를 오랫동안기다려왔으며 사회분위기를 성숙시켜왔습니다. 일본의 국민적인 욕구가 분출되는 계기이며 패전국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김대사=일본평화헌법 9조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발동으로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행사는 국제분쟁해결수단으로서도 영구히 포기한다.이 목적을 위해 육·해·공군및 기타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이에따라 일본은 패전후 상당기간 해외파병은 엄두도 못낼 정도로 자위대 행동에 제약을 가했습니다.그러나 최근들어 일본의 국제적 지위 격상과 함께 「국제분쟁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력을 사용할수도 있다」는 적극적인 해석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김박사=일본의 해외파병은 1947년 제정된 평화헌법에 정면으로 상충됩니다.평화헌법 제9조는 전쟁포기,전력불보유,교전권부인등을 명시하고 있으며 주권국의 자위권은 인정하고 있으나 해외파병은 무슨 명분으로도 불가능합니다.1954년 일본국회는 해외출병을 포기하는 각서를 채택,세계 각국에 천명하기도 했습니다.PKO법안의 통과로 평화헌법은 개헌이 시작된 것으로 해석할수도 있습니다.현재 자위대 병력 20여만은 대부분 장교와 하사관등 직업군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순식간에 증강시킬 수 있습니다.자위대의 장비와 예산규모는 일본이 세계3위의 군사강대국임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헌법의 해석은 자국민이 하는 것이지만 일본은 이미 평화헌법정신을 위배해서 군사력을 증강해 오고 있습니다. ▲김대사=일본은 패전이후 미국의 안보그늘아래 경제성장에만 주력해왔고 바로 이것이 자민당의 장기집권을 가능케한 절대적인 요인이었습니다.하지만 패전이후 일본이 국제적 「봉」이 아니라 힘에 알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이 폭넓게 확산됐습니다.전쟁경험세대들은 일본의 옛 영광을 찾자는 쪽보다 평화헌법에 만족하고 있습니다.PKO법안은 경제력의 급상승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군사대국화를 목표로 한 것으로 보기는 힘듭니다.특히 유엔결의에 의한 평화유지활동이 비군사적 분야에만 한정된다면 괜찮다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어 야당의 반대도 명분론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일본이 과연 지금보다 적극적인 활동에 나설지는 동북아의 지역정세와 미국의 대일군사력인식 등을 종합적인 판단근거로 삼을 것으로 봅니다. ▲김박사=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예를 들더라도 군사적인 잠재력을 가진 나라가 힘을 발휘하지 않고 사장시킨 경우는 없습니다.스페인과 영국의 해군력,프러시아와 프랑스의 육군력,최근에는 게르만민족의 과학기술력이 세계지배를 꿈꾸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데 사용됐습니다. 일본은 그동안 경제적인 발전으로 온 국민이 윤택한 생활을 해왔습니다.과학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달했습니다.미국의 첨단무기도 일본의 과학기술을 응용해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사회를 이끌고 있는 보수 엘리트 집단은 과거 일본의 영광을 되찾자는 신념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일본의 정치·경제·사회전체는 전후 47년간 우익화·국수주의화·군사대국화 길을 걸어왔습니다.패전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일본주의↔소일본주의,민족주의↔국제주의,군사대국주의↔경제대국주의의 논쟁을 거쳐왔으나 일본의 자세는 언제나 「우향우」였습니다. ▲김대사=군사대국은 기본적으로 정의에 문제가 있습니다.일본이 군사력에 치중하더라도 세계적인 군사대국이 아니라 지역적 강국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지나치게 「군사대국」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또한 미국과의 안보관계변화및 일본이 위치한 지역의 안보정세가 커다란 가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PKO법안이 통과된 마당에 일본은 이제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진정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동북아는 물론 아시아전체로부터 깊은 신뢰감을 얻을수 있습니다. ▲김박사=일본의 군사대국화는 4단계로 추진되어 왔습니다.1단계는 전후부터 60년대말까지 안보무임승차시기,2단계는 70년부터 80년대말까지 방위영역신장기,3단계는 90년부터 전후청산기,4단계는 90년대 후반의 미일안보동맹변화에 따른 다극화단계등입니다. 일본은 앞으로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어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역할을 증대시킬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해외에 파병하기전에 교과서문제,정신대,재일동포처우개선,사할린동포송환 등 주변국들에 대한 도덕성을 우선 회복해야합니다. 또 국내의 민족주의적인 요소와 해외의 국제주의적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 주변국의 의혹을 불식시켜 지도력을 발휘한다면 국제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북아시아의 균형자역할을 하면서 과학기술력을 키워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다시 시작되는 「위험한 역사」/이창순 도쿄특파원(특파원수첩)

    『일본이 움직이면 세계도 움직인다』 일본의 국제정치학자 후나바시가 정의하는 오늘의 일본이다. 일본은 세계경제를 제패했다.일본은 전후 모든 에너지를 경제개발과 기술개발에 투자했다.일본은 서구기술을 받아들이기만 할뿐 아무것도 외부로 내보내지 않는 우주공간의 블랙홀과 같았다. 일본은 이같은 기술도입 정책을 바탕으로 첨단기술대국으로 성장했다.일본은 이제 현대기술문명을 창조하며 제3차 산업혁명을 예비하고 있다.일본의 놀라운 경제발전은 일본인들의 의식을 바꾸어놓고 있다.그것은 「제국주의적」민족주의의 부활이다.2차대전이후 억압되었던 민족주의가 그동안 축적한 힘을 배경으로 다시 표면화되고 있다. 일본의 군사적 해외진출을 합법화하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안은 이같은 위험한 민족주의의 부활을 상징하고 있다.PKO법안에는 제국주의적 잔영이 어른거린다. 일본의 자위대가 해외에 파견된다고 해서 당장 외국을 침략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일본이 현상황에서 외국을 침략한다는 것은 상상할수 없다.그러나 역사는 오늘로끝나는 것이 아니다.역사는 많은 변수를 안고 영속한다.냉전의 「불안한 평화」가 끝나면 진정한 평화가 올것으로 기대했었다.그러나 이데올로기시대가 막을 내리자 민족주의가 부활하며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의 군함외교로 개국,근대화에 성공했다.일본은 그러나 군사대국이 되자 미국을 공격했다.일본은 20세기초 러시아를 패배시키고 미국을 무력공격한 세계 유일의 국가다. 일본은 21세기를 앞두고 다시 군사대국화로 가고 있다.PKO법안은 전후 일본의 비군사화 대외정책 원칙이 무너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그러나 「평화헌법」에 명시된 비군사화 원칙은 일본인들이 스스로 만든것이 아니다.미국에 의해 강요된 원칙이었을 뿐이다. 일본은 이제 비군사화 원칙을 거부하고 있다.일본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이같은 일본의 군사적 해외진출은 아시아주변 국가들을 불안케 한다.그것은 역사적 체험때문이다. 일본은 「평화」라는 이름의 국제공헌을 강조한다.경제대국인 일본의 평화적 국제공헌은 당연하다.그러나 일본은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일본은 과거 아시아를 침략하면서도 아시아공영과 자위권 발동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그들의 「공격성」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일본의 공격성은 이미 경제전쟁에서 증명되었다.일본의 집중호우식 상품수출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일본의 경제침략은 많은 미국 기업을 유린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제마찰을 유발해왔다.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일본의 무역방식을 「적대적 무역」이라고 정의한다. 경제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자신만만하다.일본은 미국에 도전하고 있다.일본은 8일 미국의 불공정무역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얼마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하지못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정치·군사·경제 등에서 자신의 혼네(본마음)를 드러내고 있다.전후 반세기동안 감추어졌던 일본의 모습이 부상하고 있다.일본은 한국·중국 등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지만 군사적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다.그들은 조금씩 멈칫하는 「정치연극」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일본은 공을 상대편 코트로 넘겼다.그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상대편이 할 일이다.일본의 군사적 해외진출에 말로만 흥분할 것이 아니라 대응할만한 힘을 축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은 다음세기에는 더욱 강력한 국가로 부상할 것이다.일본은 첨단과학기술과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일본이 움직이면 세계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일본은 보편적 가치의 세계적 리더십이 없다.세계적 리더십과 국제윤리가 없는 국가의 군사대국화는 위험하다.일본의 위험한 역사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 아제르 새 대통령/엘쉬베이 당선돼/CIS탈퇴 공약

    【바쿠 AFP 연합】 7일 실시된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선거에서 민족주의인민전선(NPF)의 아불파즈 엘쉬베이 후보(54)가 60% 이상을 득표,당선됐다고 NPF가 8일 밝혔다. NPF는 이날 중간개표 결과 역사학자이며 반공주의자인 엘쉬베이가 64% 이상의 득표를 했다고 말했다. 엘쉬베이는 아제르바이잔을 독립국가연합(CIS)에서 탈퇴시키고 미국 및 터키와의 관계를 보다 긴밀히 할 것이라는 선거공약을 내세웠었다.
  • 체코연방 분리 위기에/독립요구정당 총선압승/슬로바키아공 이탈 조짐

    ◎하벨대통령,“분열땐 불출마” 5·6일 치러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자유총선 결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정당이 큰 차로 승리,연방분리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이 고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년전의 첫 자유총선이 89년말의 민주화혁명을 한 목소리로 지지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 실시된 두번째 총선은 서로 반대되는 내용의 두 목소리로 확연히 갈라지는 분열의 장이었다.두 공화국별로 독자의회의 의원을 선출하면서 정당별 득표비율에 의해 연방상하원 의석이 할당되는 이번 총선결과 체코지역에서는 바츨라프 클라우스 재무장관이 이끄는 시민민주당(ODS)이 33.66%의 지지를 얻어 체코공화국의회 제1당에 올라섬과 동시에 연방양원의 총 3백개 의석가운데 80여석을 차지,연방의회 최대정당으로 부상했다.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는 블라디미르 메치아르 전슬로바키아 총리가 주도하는 민주슬로바키아운동(HZDS)이 비슷한 33.65%의 지지율로 공화국 제1당이 되면서 50석를 넘는 연방의회 지분을 차지,연방 제2당으로 부상했다.40여개 정당이 난립한 총선에서 하필이면 국가체제와 경제개혁에 관해 첨예한 대립을 누적시켜온 이 두 정당이 양 공화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민주화직후부터 노정된 연방의 양극화현상이 총선을 통해 공식적인 국민의사가 됐는데 무엇보다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독립을 명백한 슬로건으로 내건 메치아르 전총리의 연방의회 제2당 세력화는 체코슬로바키아 정정을 긴박하게 만들고 있다. 【프라하 로이터 연합】 바츨라프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은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의 현 연방이 와해쪽으로 나아갈 경우 다음달 있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하엘 잔토프스키 대통령대변인이 8일 말했다. 잔토프스키 대변인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하벨 대통령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연방체제를 유지하고 지난 89년11월 이래 추진된 노선이 유지될 경우에만 자신의 입후보가 의미있는 것으로 보고있으며 연방체제유지나 지난 89년이래 실시한 경제개혁이 위태롭게 된다면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 체코연방 양분 가능성 높다/총선이후 공화국의 장래 불투명

    ◎슬로바키아공 정당들 “독립” 공약/시장경제도 개편… 국가연합될듯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존속여부와 경제개혁 장래를 결정할 연방의회 및 체코와 슬로바키아공화국의회 총선이 5·6일 이틀간 실시돼 동구 마지막 다민족국가 장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투표가 끝난뒤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어느 정당도 절대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체코지역에서는 민주국민당(ODS)이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슬로바키아지역에서는 독립을 주장하는 슬로바키아 민주운동(HZDS)이 민족주의 분위기에 힘입어 우세를 보이고 있어 연방와해가 가시화되고 있다. 이번 총선은 민주화이후 90년에 이어 두번째 실시된 선거이지만 지난번 선거가 공산주의 포기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성격이었던 만큼 54년만의 첫 민주의회선거라 할 수 있다. 이번 선거는 41개 정당이 후보를 내세운 혼전상을 보였지만 최대쟁점은 연방해체와 시장경제개편 강행문제. 1천1백30만 유권자중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체코지역에서는 바크라브 크라우스재무장관이 이끄는 자유우파 ODS가 가장 유력하며 전공산당인 좌파연합은 급속한 시장경제도입 부작용에 대한 불만을 이용,지지도가 높았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연방해체론자인 메치아르 전슬로바키아수상이 이끄는 HZDS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역시 독립을 공약한 슬로바키아 기민당(KDH)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메치아르 전수상은 프라하중앙정부가 슬로바키아를 푸대접해온데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을 이용,큰 호응을 받았다.그는 HZDS가 승리하면 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켜 체코와 대등한 입장에서 국가연합을 구성하겠다고 공약했다. 체코출신 정치지도자들은 슬로바키아가 독자의 길을 걷게 되면 체코가 국제법상의 모든 권리와 조약을 승계,슬로바키아는 무에서 재출발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체코측은 경제력이 뒤진 슬로바키아가 떨어져 나가면 체코의 유럽공동체·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이 빨라져 독일·오스트리아와 접경한 지리적 이점으로 중부유럽 중심세력으로의 합류가 수월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체코연방 해체는 유고에서처럼 민족분쟁을 야기시키지는 않을 것으로 분석된다.체코와 슬로바키아인들은 역사적으로 전투를 벌인 일이 없을 뿐더러 2차세계대전때도 유고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히틀러의 부추김을 받아 살육전을 벌인 것과는 달리 평화공존을 유지했다. 연방해체의 정치공방 다음으로 쟁점이 된 문제는 경제개혁방안.슬로바키아측 메치아르는 시장경제도입의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체코측 크라우스재무장관이 추진중인 급격한 사유화정책을 중단하고 자본가에게만 유리한 세제를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체코측 정치인들은 메치아르가 선거에 승리해 연정에 참여할 경우 민주화이후 경제개혁을 수포화할 것이기 때문에 연정자체를 거부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투표결과 가장 큰 득표율을 보여 차기 수상으로 예상되는 크라우스 ODS총재는 연방유지와 시장경제 개혁은 밀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메치아르가 유권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슬로바키아가 독립하더라도 합스부르크시대의 헝가리·오스트리아와 같은 밀접한 정치유대를 맺고 기존의 민주화정책을 추진할 것을 제시했다. 체코연방은 1918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공화국이 합병해 구성되어 히틀러가 38년 뮌헨조약에 의해 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켰으나 45년 종전후 다시 연방화,동구민주화이래 민족주의 물결을 타고 독립운동이 재연되었으며 이번 총선이 그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 PKO법처리 이후의 행보(군사대국 치닫는 일본:상)

    ◎미와 함께 세계질서 주도 꿈꾼다/유엔깃발 아래 47년만의 해외출정/걸프전때 정치적 파워 아쉬움 절감/주변국선 “황군망령 되살아난다” 거센 반발 일본의 과거 군국주의시대를 회상케하는 「위험한 역사」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일본의 군사적 해외진출 야망을 실현코자하는 자위대의 해외파병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일본국회는 자위대의 해외파견을 합법화하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안을 이달내에 통과시킬 것이 확실해지고 있다.집권 자민당과 공명·민사당등 야당은 5일 PKO법안 재수정안을 참의원 국제평화협력특별위원회에서 통과시켰다.야당인 사회당이 참의원 본회의통과 강력저지를 공언하고 있지만 PKO법안이 다시 폐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PKO법안은 일본 대외정책의 중대한 전환을 상징하고 있다.전후 일본의 군사적 해외진출은 하나의 금기였다.그러나 금기사항은 「평화헌법」의 해석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조금씩 무너져왔다.PKO법안은 이같은 해석논쟁을 종식시키고 자위대의 해외파병길을 열어놓고 있다.전후 일본의전통적인 비군사화 대외정책 원칙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군사적 팽창주의는 걸프전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전쟁은 흔히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는다.걸프전은 일본인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경제력만으로는 정치·외교적 힘을 행사할수 없다는 의식이 일본사회에 확산되고 있다.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지도자들은 『경제중심의 독특한 일본의 파워구조가 위기상황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일본은 경제력을 지정학적 영향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정치·군사적 힘이 필요하다고 이들은 주장한다.군사력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이같은 변화는 걸프전에서 인적 공헌을 하지않았다는 국제적 비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군사대국화를 「합리화」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일본의 혼네(본마음)는 군사적 해외진출과 정치적 영향력 확대다. 일본사회에는 물론 자위대의 해외파견을 반대하는 세력이 적지않다.일본의 국제정치학자 후나바시는 『세계무대에서의 일본역할에 대한 보다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그러나 많은 일본인들은 군사적 해외진출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최근 요미우리(독매)신문 여론조사에 의하면 68%가 자위대 해외파견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사회 저변에는 「제국주의적」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2차대전이후 억압되었던 민족주의가 그동안 축적한 힘을 배경으로 다시 표면화되고 있다.일본은 글로벌파워(Global Power)라는 인식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메이지대의 아사이교수(국제정치전공)는 『일본과 미국은 공동으로 세계의 경찰력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는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군사적 해외진출 준비를 서둘러왔다.일본은 자위대의 캄보디아 파견을 위해 지휘관을 임명하고 현지활동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출동준비를 하고 있다. PKO법안이 성립될 경우 9월경에는 자위대원이 캄보디아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된다.일본군이 아시아에서 철수한지 47년만에 다시 아시아대륙에 상륙하게 되는 것이다. 자위대는 유엔깃발을 달고해외에 파견된다.일본은 「평화」라는 이름의 국제공헌을 강조한다.그러나 일본의 국제공헌론은 아시아 주변국가들을 불안케하고 있다.일본은 과거에도 아시아공영과 자위권 발동이라는 궤변으로 아시아침략을 「정당화」하려 했었다.일본 침략의 상처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치유되지 않았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다시 군사적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의 군사적 팽창주의는 아시아인을 무대로 하고 있지 않다.일본 외무성의 단바 유엔국장은 『자위대는 아프리카,중남미에도 파견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유엔깃발과 함께 일장기가 세계 곳곳에 휘날릴 날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유엔깃발은 평화의 상징이다.그러나 일장기는 「침략」이라는 어두운 이미지로 다가온다.「평화」와 「침략」의 깃발을 함께 단 일본은 어디로 가는가. □PKO법안 처리 일지 ◇91년 ▲9월19일=PKO협력법안 각의 결정,국회 제출 ▲10월4일=동 법안,국회 회기 연장으로 계속 심의 ▲11월27일=자민·공명 양당만으로 중의원 국제평화협력 특별위에서전격 가결 ▲12월3일=중의원 본회의에서 가결. ▲12월20일=참의원에서 계속 심의키로 결정 ◇92년 ▲1월24일=제123회 정기국회소집 ▲4월28일=참의원 국제평화협력 특별위원회에서 심의 재개 ▲5월29일=자민·공명·민사 3당이 법안 재수정키로 합의 ▲6월5일=참의원 국제평화협력 특별위에서 재수정안 가결 □PKO법안의 골자 ▲자위대의 부대 등이 행하는 업무로 평화유지군(PKF)에 관한 것은 해외파견 개시전에 국회의 승인을 받는다. ▲PKF관련업무를 2년을 초과,계속할 경우에는 국회의 승인을 받는다. ▲실시요령의 작성·변경 등은 업무의 중단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유엔사무총장의 지도에 적합하게 행한다. ▲파견된 자위대원은 국제평화협력대와 자위대의 신분을 공유한다. ▲업무에 종사하는 총 자위대원은 2천명을 초과하지 않는다. ▲대원은 자신과 다른 대원의 생명,신체를 방어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 합리적 필요라고 판단되는 범위내에서 소형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자위대의 부대 등이 행하는 PKF관련업무는 별개의 법률로 정하는 날까지 실시하지 않는다.
  • 신국제질서/「지역통합」등 갈등요인 곳곳에

    ◎미 가다스교수,저서 「미국과 냉전종식」서 주장/국경개념 약화… 물자·인구교류 활발/민족·국가이기주의등의 폐해는 계속/미 외교정책수립에 여론·도덕성 반영 필요 동구권의 붕괴이후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이 분야의 세계적 석학들이 제가끔 분석과 전망을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은 누구도 선명한 구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지금은 해체의 시기인 때문이다.해체의 심도와 결과가 분명치 않은때에 전망이란 기본적으로 무리다.그러나 미래의 세계를 다각도로 예상하고 그에 따른 전망을 시도해 보는 일 자체는 무익한 게 아니다. 미국 오하이오대 현대사연구소 존 누이스 가디스교수가 최근 펴낸 「미국과 냉전종식」(옥스퍼드대 출판부)이란 저서는 그런 점에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시도중 하나다. 가디스교수는 세계가 지금 평화의 길목에 들어섰고 미국은 커다란 승리를 안았으면서도 미국에는 지금 의외로 감동이 없다고 지적한다.그것은 미국이 앞으로 직면하게 될 국가적 도전이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는 냉전이후 나타나고 있는 각종 징후들은 앞으로 세계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갈등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면서 이런 문제들을 본질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민주주의와 정의·이해의 공유에 기초한 평화의 시대를 가져올 것으로 쉽게 연상하지만 그러한 판국은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경고한다.그렇게 광범위한 평화는 바람직하지만 그것을 유지시켜줄 기초가 취약하고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국제관계가 너무나 엉성하기 때문이란 주장이다.가디스교수는 현재 폭넓게 갈채를 받고 있는 지역적 통합운동도 많은 긴장을 쉽게 유발시킬 요인의 하나로 보고 있다. 앞으로의 세계는 국경개념이 약해져서 물자와 인구·문화교류가 활발해지고 심지어는 공해와 질병까지도 자유롭게 상호교류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데,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나 국가이기주의의 위험성이 사라지리란 보장이 과연 있을까.또 국제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고 사람들사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지속적인 세계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까. 그리고 민주주의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된다는게 과연 미국의 국익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일까.이밖에 중국의 지도자들이 포위가 돼 있다는 피해 의식을 갖게 되거나 통일독일이 독일에 언제나 과민한 유럽의 심장부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 새로운 위기를 조성할 가능성은 없는가 하고 그는 의문을 던진다. 이 책은 미국의 미래 외교정책과 관련해 이러한 일련의 기본적인 문제점들을 제기하고 있다.저자는 앞으로 강대국 간의 분쟁이나 마찰을 회피하는데 도움이 될 포괄적인 국제관계이론이나 국가행태를 도출해낼 가능성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동시에 그는 미국의 외교정책을 유도할 포괄적인 이론이 없을까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이 비록 지금 당장 정형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신비의 이론이 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미국의 외교정책 입안가들에게 국제문제의 본질을 이해시키고 국가안보나 경제안보와 마찬가지로 정책결정에 있어서 여론이나 도덕적 고려의 중요성에도 유의하도록 그는 권유하고 있다.그렇게 하는 것이 곧 국가안보를 위해 가장 현실적인 정책이란 입장이다. 가디스교수는 이 저서에서 미국이 앞으로 추구할 국가이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상세히 해둘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특히 미국의 정책목표가 지나치게 광범위해서 그것을 추구하느라 스스로 탈진해 버릴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가디스교수의 저서는 스스로 제기한 의문들에 어떤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불확실성의 성격을 규명하고 다가올 시대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일반화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 통일이후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영 이코노미스트부설연 예진

    ◎「통일한국」 아시아의 강국 된다/남한여당이 정치주도… 지역감정 사라져/북 노동력 남쪽 몰려 노동시장 혼란 초래/경공업분야 대북투자 확대… 중국·러시아 국경인접지역 크게 발전 『한반도의 통일은 남북한당사자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장래에 돌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통일한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에 이어 2인자로 부상할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권위있는 경제·시사문제 전문지인 영국의 「디 이코노미스트」지부설 정보분석기관인 EIU(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니트)가 최근 이같은 전망과 통일후 한국의 모습을 그린 「남북한관계 보고서」를 내 놓았다.이 보고서는 EIU가 남북한은 물론,중·소·미·일등 주변 강대국의 광범위한 관련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1백17쪽 분량으로 여러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중요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보고서 내용을 부문별로 정리,소개한다. ○제반희생 감내해야 ▷통일감당능력◁ 남한사람들은 통일이 가능한한 늦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할 것이다.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차기정권을 맡는 남한정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북한경제를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EIU는 그 상황이 오더라도 다음 이유로 낙관론을 갖고 있다. 첫째,한국은 동서독선례를 통해 값비싼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둘째,동서독의 경우 통일에 따른 제반문제가 무계획적으로 처리됐지만 남한은 정부의 리더십하에 계획에 의한 통일 처리가 가능하다.셋째,북한주민은 현상태가 최악이기 때문에 통일후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 것이다.넷째,민간부문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과 1천만이산가족의 강한 가족적 유대는 동·서독간에 볼수 없었던 많은 투자가 북한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다섯째,대부분의 한국인에게 통일은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감격스러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수년간의 남북통합에 따른 제반희생을 감내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게할 것이다. ○광업분야 투자 확대 ▷좋아지는 분야◁ 북한은 풍부한 철·석탄·아연·금을 가지고 있으며 통일후 이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직업이 보장될 것이다.금강산·백두산 개발과 일본시장을 겨냥한 스키장등 휴양시설은 개발전망이 밝다.남한의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분야 기업들은 북한에 투자를 확대할 것이다.러시아·중국·남북한 국경인접지역이 크게 발전할 것이다. ○농업인력 실업자로 ▷나빠지는 분야◁ 북한은 산악지역이 많아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으나 분단후 어쩔 수 없이 무리하게 경작지를 확대해 농토가 황폐화 되고 있다.북한인구의 4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통일후 이중 많은 인력이 실업자로 전락할 것이다.북한은 화학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해왔으나 기술이 국제수준에서 크게 미달하고 저임금에 강제징집된 인민병사에 의해 마구잡이 식으로 건설됐다.북한의 화학분야를 살리려면 남북경제를 단절시켜 놓고 남한의 재벌이 북한기업을 인수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 평양에는 정부관료를 포함,2백만 주민이 살고 있는데 통일후 이들의 지위는 약화될 것이다. 북한의 경우 노동인력중 여성이 반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통일후 실업문제 해결 방안으로 여성은 가정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국제교통 요충지로 ▷국제적 위상◁ 풍부한 자원,노동력,국내시장의 확대,국제교통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이점등으로 통일한국은 분명히 강대국이 될 것이다.그러나 경제적으로 일본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아시아의 대륙국가중에서 인구,총GNP,1인당GNP,경제구조,지역적 역할,군사력등의 변수를 항목별로 보면 통일한국보다 더큰 나라가 있을수 있지만 종합적으로 평가할때 통일한국은 아시아대륙국가의 최강자가 될 것이다. 중국·러시아등 주변국은 통상파트너로서,투자및 기술의 공급원으로서 통일한국을 필요로 할 것이다.한국은 과거와 같이 이 지역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의 역할을 하게돼 한국역사의 패턴이 뒤바뀌게 될 것이다. ○정치세력 달라질듯 ▷통일한국의 정치◁ 북한은 동독에서와 마찬가지로 통일을 이룩한 남한의 여당을 지지할 것이다.이 경우 여당은 일본 자민당 같은 양상을 보일 것이다.정치세력 판도와 정치이슈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남한에서의 야당지도자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고 지역감정문제도 통일에 따른 새로운 이슈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날 것이다.장기적으로 현대정치의 특징인 이데올로기·계층에 기초한 정당이 출현할 것이다. 북한을 지역기반으로 한 정당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북한사람들은 남한의 번영과 통일을 가져온 정당을 높이 평가하고 그 정당과 동질감을 획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설사 북한 지역당이 나온다 해도 북한 전역의 통일정당이 나오기는 힘들다.전통적인 지역 라이벌인 평안도와 함경도가 새로운 투자유치를 위해 싸우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통화가치 보장 필요 ▷통화동맹◁ 북한1원은 명목상으로 1달러가 조금 안되거나 남한 7백원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 돼있다.그러나 진실된 환율은 어느 누구도 알수 없다. 북한주민의 평균월급이 월 1백원인 점을 감안할때 적정환율은 주요 정책목표를 균형시키는 환율이 될 것이다.즉 북한의 임금을 투자유인이 발생할 정도로 낮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남한으로 넘어올 유인이 생기지 않도록 적정수준의 소득을 보장해줄수 있는 환율이어야 한다.특히 남북통합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물가상승을 보전할수 있는 소득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인구이동 통제 중요 ▷노동력 이동◁ 남한 노동시장은 점점 고갈돼가고 있으므로 북한에서 노동력이 유입될 경우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노동력 문제를 완화시킬수 있을 것이다.남한의 기업인은 북한노동자의 유입으로 인한 임금하락 추세를 환영할 것이다.그러나 남한의 노조는 이를 저지할 것이므로 노·사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통일의 축제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남한경제가 다시 저임금 경제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수 있다.결론적으로 북한 저임금 노동자의 과도한 남한유입은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남한이 필요로 하고 수용할수 있는 정도보다 많은 인력이 실업자로 쏟아져 들어와 경제·사회·정치적인 대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북한인구의 남한유입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즉 유토피아적인 환상에 젖어 DMZ(비무장지대)장벽을 허물어 내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이는 노동력 이동뿐 아니라 수백만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인구이동에 따른 혼란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통일시기와 비용/통일 생각보다 빨리 95년쯤 올지도/한국은 향후 10년간 6천억불 부담 한국은 2000년까지는 확실히(Certainly)통일될 것이며,95년까지 통일될 가능성도 상당히 있고(Probably),더 빨리 통일될 수도 있다(Possibly).통일은 독일처럼 한 체제가 다른 체제를 흡수·통합하는 형식이 될 것이다. 본기관의 견해로는 KDI(한국개발연구원)가 「통일보고서」에서 제시한 평양이 현노선을 고수하고 북한경제가 장기침체를 겪은후 2000년에 경제통합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경우와 같은 상황을 맞이할 것으로 본다.이경우 한국정부는 10년간 투자자금으로 매년 90억∼1백억달러,보조금으로 매년 60억∼1백60억달러를,민간부문은 매년 3백50억달러 정도를 각각 부담해야 할 것이다. 남한은 통일비용 조달을 위해 통일세 신설,통일채권 발행 이외에 해외차입이 필요할 것이며 한국정부는 해외차입을 재벌에 분배하는 방식으로 통일과 관련한 경제운영에서 주도권을 쥘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실업보험금 지급을 막기 위해 북한의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가능한한 조속히 재건시켜야 한다.이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해외에서 차입하는 것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고 한국정부가 원하지 않더라도 외국인 직접투자의 유입은 불가피할 것이다.이 경우 역사적·지리적 여건상 일본이 가장 큰 역할을 하게될 것이며 한국은 이를 피하기 위해 외국인투자 도입선 다변화를 보다 희망하게 될 것이다. 남북이 통일되면 군사비절감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즉 통일후에도 한국은 정예화된 군사력을 유지하고자 할 것이며 이는 여전히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다만 남북한 모두 군사인력의 감축은 가능할 것이다.아마도 북한 인민군(1백만명 이상으로 추정됨)이 대부분 해체되고 남한군이 주력이 될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북한인민군의 실업문제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등장할 것이다.일부는 남한의 고갈된 노동시장에 인력공급원이 될수 있겠지만 남한기업은 광산업 같은 일부분야를 제외하고는 훈련되고 교육이 잘된 남한 노동력을 선호할 것이다. ◎북한의 개혁전망/김일성체제 고수싸고 내부진통 예상/중국처럼 점진적 개방정책 택할것 김일성체제는 이제 개혁을 하느냐 현 노선을 고수할 것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어느쪽을 선택해도 위험은 따를 것이다. 북한경제는 루미나아와 같은 민중봉기나 북한내부의 쿠데타를 유발할 정도로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대부분의 북한주민들은 바깥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자신들의 생활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김일성집권 초기의 민족주의적 자존심,경제적 성공은 희미한 옛 기억이 되고 있다.상대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는 중간관리층은 외부세계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으며 날마다 상부의 모순된 지시를 이행하는데 넌더리가 나 있다.특권 계층인 수천명의 고위 당정 간부와 외교관들은 정책 노선이 강·온파로 나뉘어져 있을뿐 아니라 세대간 격차문제도 안고 있다.젊은 관료집단에게서는 김일성의 게릴라시절 동료들이 가졌던 충성심을 찾을 수 없다. 외관상 북한은 안정되고 통일되어 있는것 같지만 내막은 놀랄 정도로 균열돼 있다.때만 오면 급속히,그리고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기 쉬운 사회이다. 김일성의 후계자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북한주민의 생활수준을 높이고 경제소생에 필요한 자본 도입처로서 남한과 일본이 있다.남한보다는 일본에 매달릴 가능성이 크지만 일본과는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까이 하기엔 한계가 있다.김일성 이후의 북한은 중국처럼 점진적 개혀과 개방을 선언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일본이 중간에 낄 수도 있으나 결국 남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독일 외교 「유럽통합」에 주력/「겐셔」 이후의 대외정책 방향

    ◎“동구 대변자역 자임” 러공등과 긴밀 협조/「세계평화」 명복,국제분쟁에도 적극 개입 겐셔독일외무장관이 18일 퇴임했다.그의 퇴임은 전후 서구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구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소멸된 만큼 유럽동쪽에 적대세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독일은 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했으며 동서대결의 와중에서 통일의 산파역할을 한 겐셔이후 독일외교의 비중이 증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겐셔장관은 이날 퇴임하면서 통일독일이 추구해야할 10대 외교원칙을 밝히고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역할증대는 지정학적 위치때문에 불가피한 추세라고 강조했다. 그는 독일의 역할과 책임이 커졌다고는 하나 독일이 기존의 유럽공동체(EC)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중심의 외교정책을 계속 유지하며 동구를 유럽안보협력협의회(CSCE)에 묶어둠으로써 유럽집단안보체제를 강화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특히 독일은 동구의 대변자로 러시아·폴란드 등과 긴밀한 협력을 할 것이나 그 활동은 어디까지나 CSCE를 통해 서구국과 행동을 같이할 것임을 밝혔다. 또 독일은 NATO와 유엔의 활동범위에서 해외파병도 불가피하다고 말해 독일이 범대서양주의·국제경찰 역할을 담당할 것임을 시사했다. 겐셔장관이 밝힌 10대 외교노선은 다음과 같다. ▲독일은 마스트리히트EC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협약을 조속히 비준,유럽통합을 심화시킨다 ▲유럽안보와 독일방위는 서구연합(WEU)을 통해 보장한다 ▲미국·캐나다가 포함된 NATO의 기능을 계속 강화한다 ▲독일은 동구및 독립국연합과의 정치·안보협력관계를 유지한다▲독일은 밴쿠버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유라시아 국가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 ▲CSCE를 통해 분쟁을 조정하고 평화공존과 민주제도확립에 노력한다 ▲전체 유럽의 발전을 위해 미국·프랑스·폴란드와의 협력이 중요하다 ▲핵무기를 포함한 군비축소에 힘쓰며 화학무기등 군사장비의 수출을 금지한다 ▲유엔회원국으로 평화활동의 의무를 다한다 ▲남북문제·지구환경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한다. 이같은 기본방침은 독일이 평화로운 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지난 40년간 서독이라는 이상적인 자유민주국가의 토대를 닦아왔기 때문이며 독일이 서구국가와의 결속에 충실했던 결과라는 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독일의 관심사는 서구국들과의 동맹과 신뢰를 주축으로 하는 내적통일이었으나 앞으로는 유럽의 안정과 국제평화유지가 목표이다. 독일은 유고사태에서 보아왔듯 이제 유럽의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전체 유럽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민주화이후 동구국들의 안정에 신경을 세우고 있다. 이 때문에 독일은 동구국들 분쟁에 적극 개입할 자세이나 영국·프랑스등은 독일의 영향력증대를 우려해 행동의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유고연방에서 탈퇴한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공화국을 제일 먼저 승인한 독일은 동구문제에 확고한 원칙을 세우고 있다.독일의 운명은 유럽과 함께하며 지역분쟁에 조정자의 역할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독일은 지금까지 러시아의 시장경제도입에 가장 큰 협력자로 경제적 지원을 했으며 통일비용의 부담을 안고 있으면서도 동구국들을 원조하고 있는 것은 동구의 안정이 유럽의 안정과 직결된다는 점때문이다. 겐셔이후 독일은 동구와 서구와의 가교역할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며 통일목표라는 짐을 벗은만큼 유럽과 국제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조짐은 신임 킨켈외무장관과 뤼헤국방장관이 독일은 국제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NATO지역을 벗어난 전투병력의 파병도 고려할 때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 겐셔장관도 퇴임사에서 『독일은 금세기에 민족주의로 인해 두번의 홍역을 치른만큼 앞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민족주의』라며 『통일후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책임이 커졌다고는 하나 유엔의 테두리에서 활동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겐셔장관은 퇴임후 베를린 자유대에서 정치학교수로 강단에 선다.
  • 사라예보,전투 재개/유고휴전 하룻새 깨져

    【사라예보 로이터 AP AFP 연합】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의 유엔평화유지군철수 촉구 수시간만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13일 새벽 다시 포와 박격포 등을 동원한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휴전이 하룻만에 깨졌다.
  • LA폭동 계기로 본 「인종재편」 움직임(세계의 사회면)

    ◎「민족분규」 확산에 지구촌 곳곳 열병/「탈이념」타고 가속… 30여곳서 내홍/구소 가장 극심,러시아연 2곳도 독립요구/유고내전 치열… 「팔­이」대립 중동 새 화약차로 인종분규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있다.1천2백여 민족이 얽히고 설키고 있어 단 하루도 분쟁이 그칠 날이 없다.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흑인폭동을 비롯한 인종간 갈등은 비단 미국만이 안고있는 문제가 아니다.독립국가연합(CIS)의 카자흐·타지크·나고르노­카라바흐·크림반도에서부터 보스니아,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세계 30여곳에서 구성민족들간 각기 다른 정치적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지금도 유혈사태가 빚어지고 정정이 불안하다. 탈냉전 이후 인종·민족간의 갈등 표출은 그동안 공산당이나 독재자들의 철권통치아래 강압적으로 눌러왔던 족쇄가 일시에 풀리면서 점차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이들 분쟁지역의 민족주의 감정은 소수민족 또는 다른나라 거주 민족들의 통일·통합 요구로 이어지면서 「인종 재편」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동유럽국가들의 사회주의붕괴는 더 나아가 도미노현상을 초래해 서유럽·중동·아시아지역은 물론 아프리카 각국에서도 오랫동안 내연해온 민족문제를 일깨워 세계는 이제 이데올로기시대에서 민족주의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느낌이다.이처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종·민족간 분규는 국제관계에도 새로운 긴장을 조성,장기적으로는 세계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구소련 ▷러시아연방◁ 러시아에는 16개 자치공화국,5개 자치주,10개 자치구가 있는데 이 가운데 체체노­잉구슈,타타르 2개 자치공화국의 독립요구가 거세게 일고있다. 러시아남부 인구 1백30만명의 체체노­잉구슈 자치공화국은 지난해 11월 전쟁위협을 무릅쓰고 독립을 강행했으며 타타르 자치공화국은 지난 3월21일 러시아연방으로 부터의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주민의 61.4%지지로 독립안을 채택했다. 소련건국당시 공화국이었다가 이후 자치공화국으로 강등된 카렐리아,극동지역으로 내몰린 유태인들도 동요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카자흐등 5개국이 있으며 종교적(회교)언어적(터키계)으로 공통점을 갖고있다.카자흐인들은 86년12월 수도 알마아타에서 반러시아폭동을 일으켜 소련민족분쟁의 불길을 댕겼었다.지난해 2월에는 우즈베크에서 비슬라브계 회교권의 대동단결을 모토로 회교부흥당이 결성돼 우즈베크는 물론 인접공화국들로 급속히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카프카스지역◁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내 아르메니아인 거주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88년부터 유혈충돌을 거듭,지금까지 1천5백명의 사망자를 냈으나 분쟁해소책은 요원하다.그루지야내의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은 인접 북오세티아 자치공화국과의 병합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으나 그루지야군대가 이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기타지역◁ 지난해 12월1일 탈소독립을 강행,연방해체의 기폭제가 됐던 우크라이나는 3백만의 루마니아인들이 탈우크라이나운동을 벌이고 있다. 몰도바 또한 전체인구중 64%인 2백70여만 몰도바인들이 루마니아와의 합병을 바라고있는 대신 각각 14%인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이에 반발,무장투쟁에 돌입했고 터키계인 가가우즈인들도 지난해9월 「몰도바로부터의 독립」을 결의했다. ○유럽 ▷유고슬라비아◁ 연방내 2대민족인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지난해 6월이래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있다.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2공화국이 세르비아 주도의 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을 결행함으로써 촉발된 내전은 수많은 인명패해를 낸채 현재도 진행중이다.코소보 자치주내 알바니아인들도 자치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복수민족국가로 체코인에 대한 슬로바키아인들의 분리·독립 요구가 강해 오는 6월 총선이 연방해체의 분기점이 될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아일랜드섬 북부지역의 프로티스턴트계 다수주민과 카톨릭계 소수주민들 사이의 종교분쟁 성격을 갖고있으나 카톨릭 주민들이 영국지역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전개,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의 민족분규 성격도 아울러 갖고있다. ▷스페인◁ 30여년간 바스크주 분리·독립을 위한 게릴라활동을 벌여온 바스크인들이 올여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중동 ▷팔레스타인◁ 반세기 가까이 계속돼온 독립국가 창설문제를 놓고 이스라엘과 팽팽한 대립을 벌이고 있다.역사적인 중동평화회담이 지난해 10월부터 4차례나 계속됐으나 아무런 진전없이 간헐적인 유혈충돌을 보이고있다. ▷쿠르드인◁ 이라크와 이란,터키등에 걸쳐 광범위하게 흩어져있는 2천만명의 쿠르드인들이 지난해 걸프전이후 독립국인 쿠르디스탄 설립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시아 ▷인도◁ 파키스탄과의 영유권 분쟁을 빚고있는 잠무·카슈미르주와 시크교도 다수의 펀잡주가 분리·독립 요구를 강화시키고 있다. ▷스리랑카◁ 소수 타밀인이 다수인 싱할라인에 대항해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 지난 59년 강점한 티베트의 독립요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중앙아시아 회교세력 발흥에 힘입은 신강위구르 자치구에서 회교분리주의자들이 중국통치에 반대하는 테러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동티모르◁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군의 발포로 다수의 주민이 사상,다시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 동티모르는 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으나 그 이듬해 인도네시아의 27번째주로 병합된 이래 독립투쟁을 벌이고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다수 암하라인에 대한 에리트리아인과 티그레인의 분리독립 요구로 30년째 내전을 계속하고 있다. ▷소말리아◁ 북부는 영국령,남부는 이탈리아령으로 식민통치의 후유증을 가장 심하게 앓고있는 국가중의 하나.북부에 기반을 둔 소말리아국민운동(SNM)이 「소말리랜드 공화국」창설을 선언해놓고 있다. ▷수단◁ 북부의 아랍계와 남부의 흑인계로 분리돼 있으며 이슬람정권에 대항,흑인 주도의 반정부단체인 수단인민해방군(SPLA)이 남부의 분리·독립을 위한 내전을 장기간 계속해오고 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무력으로 독립쟁취” 만주 항일투쟁 이끌어/한일 합방직후 망명,신흥무관학교 등 설립/독립군단체 통합 주도… 임정국무령도 역임/의병활동·교육자로 평생 구국활동… “광복전 유해 옮기지 마라” 유언도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선생이 선정됐다. 5월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은 1896년 경북지역의 의병으로 활동하다 한일합방이후인 1911년 만주로 망명,그곳에 한인사회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독립전쟁을 위한 인재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26년 1월 국무령을 사임한 이 선생은 32년 5월12일 74세의 노령으로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했다. 이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되새겨 본다. 1925년 3월23일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이승만대통령을 탄핵면책하고 국무총리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박은식대통령은 임시정부헌법을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무령에 만주지역에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와 통군부를 이끌던 이상은선생을 지명했다. 1911년 만주로 이주한 이 선생은 만주에 항일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의식을 고취,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 국무령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온 김좌진·오동진·김동삼 선생들을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임시정부가 활발한 무장독립투쟁을 이끌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창조파와 개조파,국내파와 해외파 등으로 나뉘어 임시정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926년 1월 이 선생은 초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조직인 의정부·신민주·참의부의 통협에 심혈을 기울이고 힘썼다.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일본 군국주의 지도자들을 살해한 뒤 12일만인 1932년 5월12일 이 선생은 74세로 만주 길림성 소성자에서 『외세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독립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선거했다. 70평생중 반세기에 걸친 이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활동·민족계몽운동·독립군지도자·임시정부 정치지도자·교육자·사상가 등 당시의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32년 74세로 별세 이 선생의 깊은 학식과 큰 인품은 조국은 되찾겠다는 의지와 정열로 승화되어 민족진영이나 사회주의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 선생은 1858년 11월24일 경북 안동에서 유학자 이승목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이 선생은 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수업을 쌓다가 1896년 일자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영남지방의 의병에 참가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지방유지들과 합자,가야산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부족과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선생은 김동삼 등 동지들과 안동에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결성,민족각성과 청소년 교육등 민족자강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이 선생은 국내최대의 항일비밀경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전국 13개 도의 유지들과 부호들을 규합,만주에 거대한 조선인 자치구를 설립할 목적으로 이민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시영·이회영·이동영·주진수·김창환 등 구한말의 관리와 양반·선비들은 가산을 정리하고 무인지경이던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1911년 4월 53세의 이 선생은 52명의 대가족을 인솔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 선생은 만주의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 촌락을 만들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청년들을 교육시키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동지들과 함께 개척이민의 선두에 섰다. 이 선생은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유하현 삼원포에 거류민단조직인 경학사를 설립,사장에 취임했다. 경학사는 1914년 부민단으로 발전되고 신흥학교를 설립,인재를 양성했다. 이 선생은 3·1운동직후에는 한족회를 설립,동포들에게 민족자긍심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한인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켜 1천여명에게 군사교육을 받게 했다. 이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서로군정서를 설립,총재에 취임했다. 부총재에는 여준,정무청장은 이탁,참모부장은 김동삼,독립군사령관엔 지청천을 임명,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국내 진공작전계획도 세웠다. ○서로군정서 총재 당시 만주에는 3·1운동이후 일제의 탄압과 만행에 시달린 조국의 열혈청년들이 대거 이주해와 2천여명을 무장킬 수 있었다. 이 선생의 서로군정서 조직은 당시 해외독립운동단체중 최대규모였다. 1919년 4월13일 이동영·이시영선생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이 선생은 『한민족에 두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고 광복운동에는 단결이 가장 큰 선결조건』이라는 이유를 들어 참모들을 대동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으로 들어갔다. 이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와 내치·재정을 담당하고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은 단결해서 군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하들을 설득,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중인 홍범도·이동주 등과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모색했다. ○통군부 확대개편 이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개최된 조선인 군사통일회에 참가,박용만·신숙 등과 군사기구의 통합방안을 협의하고 22년 6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룬 통군부를 조직했다. 그뒤 이 선생은 통군부를 다시 확대개편하여 17개 독립운동단체로 하여금 통의부를 구성하는 등 독립군의 군세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전통깊은 유학자집단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외교나 교육에 치중하지 않고 일생동안 무력항일투쟁만을 주장했다.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와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소련 등과 연합해서 독립군을 조직,화력과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1925년 3월 미국에 체류하면서 위임통치를 주장하던 이승만대통령이 탄핵되자 국무령에 취임한 이 선생은 임시정부를 독립군지휘관으로 구성,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이 선생의 구상은 내분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되자 26년 1월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지도하던 이 선생은 일본이 만주국을 설립한 32년 5월12일 노령으로 별세했다. 『국토를 찾기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말라』고 한 유언을 남김으로써 이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90년 9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증손자인 항회·범회씨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선생의 기념사업회 결성을 준비중이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20년대 독립군총사로 불멸의 업적 석주 이상룡 선생은 70생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였다. 이 선생은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향리에서는 의병의 지도자로서,민족계몽운동가 또 2세교육자로 활동했으며 1911년 만주로 이전해서는 민족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 선생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교육·산업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이를 동지들과 함께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만주의 한인사회에서산업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동포들의 법적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중화민죽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등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한인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이 선생은 이주한인들의 생업을 위해 벼농사를 적극 권장,지도해 만주에서 쌀을 생산했으며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된뒤 독립군을 조직했다. 그는 경학자·부민단·한족회·군정부·통의부·정의부·혁신의회 등으로 이어지는 항일 민족독립운동단체를 직접 지도해 만주지역의 민족지도자로서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이 선생은 노년에는 김동삼을 위시한 여러 혁명가들을 지도함으로 써 항일대열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23년 해외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을 파견,6개월동안 의장을 활동시켜 항일독립운동의 전략·전술을 수립하게 했다. 유학자로서,의병으로서,때로는 민족의 교육자요 지도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던 이 선생은 1932년 5월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그의 혁명가적인 행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어 남을 것으로 확신한다.
  • 아프간사태 초긴장의 인접국(해외사설)

    아프가니스탄 전지역에서 신공산주의자들의 통치체제는 죽었다.수도 카불에서는 절명 직전이다.회교주의자들의 정부가 정권을 넘겨받게 될 것인데 그 형태가 어찌될 것인가는 다음 며칠이 지나봐야 알 것이다.이 중앙아시아 국가의 권력투쟁은 전쟁에 지친 1천5백만 아프가니스탄인에게 고통과 희망을 함께 주고 있다. 또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외교공관들을 긴장케 하고 있다.이 지역 국가들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은 유엔이 평화 회복을 위해 개입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강대국들이 아무리해도 80년대 내내 갈등이 계속돼 온 이 나라를 쉽사리 변환시킬 수는 없을 듯하다. 파키스탄·이란·터키·투르크메니스탄·중국 등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은 마찰의 불똥이 자국에 튀어올까봐 걱정이다.아프가니스탄 난민 3백만명이 서북쪽 변경 한 지역에 몰려가 있다.파키스탄은 이 지역을 자국 행정구역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이 오래전부터 할량을 요구해오고 있는 땅이다.이곳 주민과 난민은 종족적으로 형제관계에 있다.이란 역시 스스로의 문제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사태의 결말에 관심이 크다.이란 주민의 절반쯤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소수민족들이 언제 갈라서겠다고 나올지 모른다.도리없이 이란 정부는 파키스탄과 함께 유엔의 평화 계획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다. 불과 몇㎞의 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라고 해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중국 신강성의 회교 소수민족에게 같은 터키계 언어 사용자들인 이웃사촌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해방이 어떤 본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보다도 적정이 태산인 것은 옛 소련의 일부였던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이다.국민 대다수가 회교도인 이 나라들은 남쪽의 이웃나라 아프가니스탄의 급변이 자국에 끼칠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종족구성이 복잡해서 깨지기 쉬운 이 모든 신생 공화국들에서는 정부들(더러는 갑자기 민주주의적 인물로 전향한 전공산당 비밀정보원들이 장악)이 기꺼이 이웃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형제들 편을 들려는 회교주의자및 민족주의자들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 백범암살/엇갈리는 증언… 진상규명 본격화해야

    ◎일제청산·단정반대로 이박사와 갈등/극우·친일파 조직적음모 여부가 초점/안 1년복역후 출감… “암시”발언 의무투성이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진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암살지령을 내린 배후는…? 사건발생 43년이 지나도록 줄곧 단독범행을 주장해온 암살범 안두희씨(75)의 최근 증언으로 이 사건이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안씨는 최근 두차례에 걸쳐 『김창용육군특무대장·장택상초대 수도경찰청장,노덕술수도경찰청수사과장,최운하수도경찰청정보과장 등이 나와 반공이념·인생철학이 같았으며 이들 모두 백범을 미워했다.누구로부터 암살지시를 받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알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증언해 갖가지 추측만 무성하게 낳고 있다.백범암살사건의 전말과 관계자들의 증언,앞으로의 사건전개 전망등을 짚어본다. ○안두희발언 계기 사건전말·관계자주장 재조명 백범은 1919년 중국의 상해로 건너가 이봉창·윤봉길의사등의 의거를 지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몸바쳐 임시정부의 주석에까지 올랐다.그는 8·15해방을 맞아 45년11월 26년만에 광복 조국에 돌아왔다. ◎반탁운동에 앞장 백범은 서대문 경교장에 숙소를 정한 뒤 28년 이시영 이동령 등과 함께 중국에서 창당한 한국독립당을 이끌며 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47년 11월 국제연합(유엔)은 남북총선거에 의한 독립정부수립을 결의하고 48년초 총선거감시위원단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그러나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은 남북분단을 고착화 시킨다』면서 5·10선거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등과 4자협상등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백범은 8월15일 이박사를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경교장에 머물며 일제잔재의 청산과 통일정부수립 등의 노선을 견지,갈수록 이박사등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같은 상황아래서 49년 6월26일 정오 경교장 2층 집무실에 있던 백범은 육군포병사령부 소속 안두희소위가 쏜 4발의 총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안두희는 범행직후 『단독범행』이라고 밝힌뒤 헌병사령부 김병삼대위 등 헌병들에게 연행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재판장 원용덕소장)에서 「살인및 군인의 정치관여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태원 형무소에 수감됐다.한달뒤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곧이어 징역15년으로 감형됐으며 백범 1주기를 하루 앞둔 50년 6월25일 6·25의 발발과 함께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됐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7월10일 육군소위로 복직됐으며 51년 국회질의에서 이같은 사실이 문제가 되자 소령으로 예편,강원도에서 식품군납업체를 경영하게 됐다. 그의 「단독범행」주장에 대해 49년8월 한독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이대통령에게 ▲백범이 안을 응대한 시간이 겨우 3분에 불과하고 안과 같은 청년과 정치언쟁을 벌였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범인의 심리로 일시적 흥분에 의한 것이면 1발로 족할 것이며 저격후 8발의 탄환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던지고 체포당한 것은 안의 개인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없다▲경교장 경비경찰관의 손에 체포되는 즉시 난데없이 헌병대가범인을 데려간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진상규명 요청서를 보내 의문을 제기했다.백범의 장례는 그해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엄수됐다. ◎새로운 내용은 없어 백범암살에 대한 안두희씨의 최근 증언이후 안씨의 배후문제에 대한 또다른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으나 그동안의 증언들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며 안씨 역시 최근 두차례의 증언에서 일부 대목을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안두희씨(범인)=당시 백범을 암살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지는 않았으나 김창용육군특무대장 초대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씨와 친일경찰관으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던 노덕술,정보과장 최운하씨 등으로부터 백범을 암살해야 된다는 강력한 암시를 받고 공감해 범행했다. ▲김신씨(70·백범아들·전교통부장관)=김창용육군특무대장 등이 지시했다는 안씨의 증언은 빙산의 일각이다.이승만정권하에 있던 친일세력과 해방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을 중심으로 당시 군부와 경찰·정계 고위층을 망라한 정권차원의 배후세력이 선친살해에 관련되었다는 일부 증거를 갖고 있다.그러나 정확한 명령계통을 밝히지 못해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진상규명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 ▲최대교씨(91·변호사·당시 서울지검장)=사건직후 최초지휘때 김병삼헌병대위가 한때 경교장출입을 막기도 했다.권승렬법무부장관과 함께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이범석국무총리 집에 갔으나 꿩사냥을 갔다고 해 신성모국방장관 집으로 가 아프다는 신장관을 겨우 만나 『경무대에 빨리 백범피살 사실을 알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됐다』고 말했다.또 검사장인 나도 모르게 범인 안씨에게 비밀당원증을 발급해준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 등 민간인 7명의 살인교사죄 구속영장을 김익진 당시 검찰총장이 직접 청구,한격만서울지법원장에 의해 발부됐다.이를 김총장에게 항의하자 『저 영감(이대통령 지칭)이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러니 양해해 달라』고 해 백범암살 수사가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얼마뒤 사표를 냈다. ◎“동족에 죽을일 없다” ▲선우진씨(71·당시 백범비서실장)=백범피격 하루전 대광고교 교감 박동엽씨가 찾아와 『옛 제자인 김정진소령을 만났더니 역시 제자인 오병순소위가 암살조에 가담,괴로운 나머지 털어 놓았다』고 밝혀 『몸조심 하십시오』라고 백범선생께 말했다.백범은 『동족에게 맞아 죽을 일은 하지 않았다』면서 이같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박씨로부터 들었다. ◎인천에서 사격 훈련 ▲정관일씨(71·안씨와 육사특8기 동기생으로 포병사령부에 함께 근무)=안씨는 당시 장은산포병사령관의 지시로 인천앞바다 비밀사격훈련장에서 주5회 극비사격훈련을 받았다. ▲홍영기씨(74·국회의윈·당시 육군법무감실검찰과장)=안씨를 기소한뒤 채병덕육참총장이 부르더니 『안두희에게 몇년을 구형할 생각인가』고 물어 『살인범이니 마땅히 사형』이라고 대답했더니 『사형은 너무 심하니 징역10년만 구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후 은폐위한 사기 ▲한필동씨(72·사건당시 김창용특무대장과 같은 부대에 근무·미국거주)=김창용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는 안두희씨의 증언은 진짜 배후인물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다.내가 알기로는 신성모국방장관·채병덕육참총장,김태선내무장관 등의 비호아래 장은산포병사령관이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전봉덕헌병사 부사령관이 작전을 지휘하는등 백범암살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김교식씨(56·현대역사자료연구소장)=안씨의 증언은 앞뒤가 맞지않으며 직접 명령을 내렸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뒤 수사과정에서 처음 만난 김창용을 끌어들였을 뿐이다.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씨 등도 암살사건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김태선씨 또한 김지웅을 지원하며 경찰쪽에서 별도의 암살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포병장교인 안씨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암살계획의 시나리오는 포병사령부쪽에서 실행을 맡고 헌병사령부쪽에서 현장을 감시하며 육군정보국제3과에서 수사종결처리를 맡는 것으로 짜여진 것으로 보는게 옳다. ○서거43년… 「백범암살 재조명」을 보며/박성수 정문연교수 ◎민족정기 바로잡는 계기로/「통일민족주의」의 큰뜻 되새겨야 할때 최근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가 범행 40여년만에 드디어 일부 배후 인물을 밝혔다 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고 있다.그러나 그의 증언 내용이 겨우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을 뿐 바다속의 엄청난 얼음덩어리는 여전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잠겨 있다. 안두희의 증언 자체가 이처럼 불성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행이 얼마나 중대한 과오였는가에 대해서도 거의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게 세론이다.아직도 안두희는 자신을 애국지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그의 증언 태도는 오만하기까지 했다. 백범 김구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큰 인물이다.그의 이름 두자를 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를 쓸 수 없음은 물론 광복이후 47연사도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백범이 살아 있었어야 한다』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대답일 것이다.백범은 생전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받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었다.「아름다운 나라」란 더러운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선생 자신이 아름드리 거목이듯이 이 나라도 아름드리 나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군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의 불가능에 도전한 사실을 안두희와 같은 극우반공주의자들은 단순한 용공주의자로 몰아 세울수 있었을지 모른다.그러나 평생을 통일운동에 몸바친 선생의 혈적을 모르는데서 온 무지의 소치였다.흔히 임정을 상해시대 14년(1919∼32년),이동시대 8년(1932∼40년),중경시대 5년(1940∼45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27년을 단순한 독립운동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된다.그것은 동시에 통일운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중경시대에 이르러 모든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산하에 통일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 만은 연안으로 도주하여 중공산하에 들어갔으며 1950년 6·25 남침의 주력부대가 되는 김무정의 소위 조선의용군이 되었다.김구선생은 귀국후 임정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통일운동을 광복된 조국에서 실현하려고 했다.그것이 군정반대로 나타난 것뿐이다.그에게 있어 남북통일은다름아닌 한국독립운동의 연속이요 완성이었던 것이다. 좌우익투쟁의 피비린내나는 해방정국에서 그것은 부당하게도 김구로선으로 명명되어 그 실질이 왜곡되고 말았으나 그것은 김구자신의 역사신앙이었던 것이다. 만일 김구선생이 그때 없었어도 될 안두희라는 인간,아니 짐승에게 쓰러지지 않고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다른것은 몰라도 최소한 남북의 분단상태를 악용한 이른바 사이비 통일민주주의만은 이땅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 것이고 진실된 통일민주주의가 자라나서 통일의 날을 앞당겼을 것이다. 오늘처럼 김구선생의 독립정신,통일정신이 절실한 때가 또 있었을까.또 오늘처럼 우리나라가 아름드리 나라로 커야 한다고 바라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다시한번 경교장의 비극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앞날을 생각할 때라 할 것이다.
  • 정치·사회학회 연합학술대회/「정치변동과 시민사회」주제로

    ◎“인접학문간 공동연구의 발판 마련” 기대 한국정치학회(회장 서정갑)와 한국사회학회(회장 한완상)가 23,24일 서울대 선경경영관에서 「한국의 정치변동과 시민사회」라는 주제로 대규모 연합학술회의를 갖는다. 현대사회를 분석함에 있어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90년대 들어 사회과학계열의 11개 학회들의 공동협의체인 한국사회과학연구협의회 주최로 학술심포지엄이 열리는등 활기를 띠고 있지만 이번처럼 양학회의 중견·소장,보수·진보학자들이 총망라된 공동학술발표회가 열리기는 처음이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두 학회는 그동안 국가라는 위로부터의 분석틀에서 접근해 왔던 한국사회에서의 정치변동문제를 6·29이후부터 지난 3·24총선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는 시민사회운동입장에서 분석한다. 한완상 서울대교수는 『온건하고 중도적인 시민운동단체들의 대중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 행사와 진보정당의 참패라는 이번 총선결과에서 나타난 것처럼 각종 시민사회운동의 활성화에 따른 정치사회적 변화는 90년대 한국사회·정치학회의 주요 연구과제』라고 기조발제문에서 밝힌다. 한교수는 또 『비록 불완전한 시민운동이라 하더라도 민중의 구조적 고통을 어느 정도 덜어줄 수 있는 한 이 운동들을 단색적 이념으로 그리고 추상적인 급진론의 시각에서 푸티부르주아적 개량운동으로만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한국자본주의발전과 시민사회의 성격」이라는 논문을 발표할 부산대 김성국교수는 한국시민사회는 혈연·학연·지연등의 연고주의와 민족주의 지역적 불균등을 특성으로 하고 있어 종종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와 같은 특성들은 오히려 서구시민사회의 개인주의적 폐해를 막고 한국사회의 외세종속적 정치·경제문화를 치유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민사회의 이론과 역사적 변천」「한국시민사회의 성장과 갈등구조의 변화」「세계체제와 이데올로기의 문제」「90년대의 한국사회­과제와 전망」등으로 나눠 진행되는 이번 공동학술대회에는 주제발표자 16명을 포함,직접 토론참가자만도 60명이 참가하는데 인접학문간의 연구성과와 방법론을 서로 교류,보다 활발한 학제간 연구의 시발이 될 것으로 학계의 기대를 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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