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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ARTΙ」 비준논의 무기 연기/우크라의회

    ◎대통령 비준 촉구 불구 민족계 의원들 반발 【키예프 AFP 로이터 연합】우크라이나 최고회의(의회)는 4일 제 1단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Ι)비준을 위한 논의를 무기한 연장했다고 최고회의의 한 대의원이 말했다. 스테판 흐마라 의원은 기자들에게 최고회의 대의원들이 이날 열린 비공개 회의에서 의회 특별위원회에 비준문제와 관련된 문서를 더 검토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고 전했다. 최고회의의 이같은 결정은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대통령이 대의원들에게 STARTΙ 비준을 촉구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가 국제적으로 고립될 것이라고 경고한뒤 나온 것이다. 이보다 하루앞선 지난 3일 레오니드 쿠츠마 우크라이나 총리는 자국에 배치된 옛 소련 핵무기 일부를 잠정적으로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무기를 보유한 옛소련 4개 공화국중 우크라이나만이 유일하게 START◎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STARTΙ을 비준할 경우 보유 핵무기 대부분을 포기하도록 돼 있어 최고회의내 민족주의계열 대의원들은 협정 비준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모두 1백76기의 전략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STARTΙ 비준문제는 지난 1월 조인된 제 2단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Ι)비준을 위한 전단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고용기회박탈·경제난 가중” 불만/EC 난민규제조치 배경

    ◎동구권 경제난민 대거 유입 문제화/“이기주의의 비인도적 처사” 비난도 냉전의 종식으로 철의 장막이 걷힌 유럽에 다시 이민족을 차단하기 위한 새로운 장벽이 설치되고 있다. 독일이 지난달 말 난민규제법안의 상·하원 통과로 외국인의 국내유입을 차단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데 이어 인접 프랑스도 2일 외국인의 국내이주를 중단시키기 위한 법안마련 작업에 착수했다. 이에 앞서 그리스는 지난 91년 이민법을 대폭 강화했으며 오스트리아도 지난해에 이미 독일과 유사한 난민규제법안을 마련,현재 시행중에 있다.그밖에 영국은 난민의 피난권을 제한하는 법안이 현재 의회를 통과중에 있고 벨기에·스페인 등도 외국인의 이민조건 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처럼 외국난민의 유입을 막기 위해 유럽내 개별국가들이 속속 법적 장치를 강구하고 있는 것과 때를 같이해 유럽공동체(EC)도 2일 12개 회원국 각료회담에서 난민의 수용을 엄격히 규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난민문제에 대한 공동대응에 나섰다. 지금까지 난민을 받아들이는데 비교적 관대했던 서유럽국가들이 이처럼 앞을 다투어 규제장치를 마련하고 있는것은 나름대로의 사정에 따른 것이다. 이들은 일찍 정착된 민주주의체제를 바탕으로 한동안 동구공산권·아시아·아프리카·중동 등지의 정치적 망명자들을 인도주의 차원에서 거의 무제한으로 받아들여왔다.그러나 내전을 피해 쏟아져 들어온 대량의 유고난민들은 이들 국가에 난민위기도 함께 몰고 왔다.게다가 과거의 식민지 아프리카와 동구권국가들로부터 부를 찾아 경제난민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인도주의 실현이라는 난민수용의 기본취지에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들 난민은 최근들어서는 상대적으로 고용기회와 복지비용을 빼앗긴 자국민들의 극단적인 불만을 야기,유혈사태로까지 이어짐으로써 가뜩이나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서유럽국가들에 경제적 부담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난민들에 대한 서유럽국가들의 집단적인 배척움직임에 대해 비난과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난민규제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우선 이같은 조치가 경제적측면만을 고려한 자국이기주의의 단견에서 비롯되는 비인도적인 처사임은 물론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신해 최근 고개를 들고있는 민족주의를 부채질,국제평화의 위협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한다.아울러 선진부국과 빈곤국가들의 적대감도 증폭시켜 남북문제의 해결이라는 거시적인 세계적 목표달성에도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우려한다.
  • 신유고/밀로세비치,전권 장악/세르비아대통령/코시치 연방대통령 축출

    【베오그라드 로이터 연합】 도브리차 코시치 유고연방 대통령이 축출된 이후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1일 이 나라의 전권을 장악했다. 베오그라드의 정치분석가 브라니슬라브 밀로세비치는 유고의회가 지난 달 31일코시치 대통령을 전격 축출함에 따라 밀로세비치 대통령이 향후 사태발전에 관한 전권을 갖게됐다고 말했다. 베오그라드에서 발행되는 중립적 주간지 「브레메」의 편집인 밀로스 바시치도 『밀로세비치가 무법천지인 이나라에서 군을 가장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면서 『그는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최고 통수권자』라고 말했다. 한편 밀로세비치는 내전종식에 대한 노력등 외부세계에 대한 유화적인 이미지를심는데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외교 소식통들은 내다봤다. 외교 소식통들은 또 극우 민족주의를 표방한 세르비아 급진당과 밀로세비치의사회당이 코시치 대통령 축출에 공동보조를 취함에 따라 밀로세비치와 세르비아 급진파 지도자 보이슬라프 세셀리간에 최근 빚어졌던 갈등도 해소됐다고 말했다. 【베오그라드·사라예보 로이터 AP AFP 연합】 신유고 연방의회는 1일 온건파로 알려진 도브리카 코시치 연방대통령을 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축출했다. 신유고연방 상원은 이날 새벽 실시된 코시치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안을 찬성 22표,반대 10표로 통과시켰다.이에앞서 하원은 지난31일 밤 늦게 대통령 불신임안을 찬성 75표,반대 34표로 가결해 상원에 넘겼다. 세르비아 급진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 의회와 협의없이 독단적으로 외교정책을 수행했다는 비난을 받은 코시치대통령은 이로써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됐다.코시치대통령은 지난해 6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2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신유고연방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 다변·세계화·미래지향의 신외교(사설)

    새한국 신외교의 방향이 구체화되어 가고있다.김영삼대통령의 24일자 「태평양시대와 한국의 신외교」연설이 신한국외교의 총론적 기본철학 제시였다면 「한국신외교의 기조」라는 한승주외무장관의 31일 외교협회연설은 그러한 대통령외교철학의 각론적 실체의 제시라 할수있다. 한외무는 신외교의 5대기조로 「세계화」「다변화」「다양화」「지역협력」및 「미래지향」을 제시했다.새정부의 신외교는 정책수립과 집행및 사고방식등 모든 면에서 한반도의 냉전상황을 탈피하고 미래세계형성에 적극 참여하며 주도적으로 기여해갈 의지를 천명하고있다. 세계화는 한국외교가 남북문제뿐아니라 도덕성등 대통령이 제시한 국제보편의 가치를 기초로 범세계적 문제해결에도 적극 기여한다는 것이며 다변화와 다원화는 그 연장선상에서 탈냉전의 상호의존시대에 맞는 전방위외교와 경제·환경·문화등 외교관심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되고있다.지역협력은 아시아 태평양 특히 동북아 안보·협력의 주도를 상정하고있으며 미래지향에서는 분단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통일외교의 지향이 강조되고있다. 한마디로 우리와 세계의 변화·발전을 반영하고 그에 걸맞는 신외교를 지향하겠다는 기조의 천명이라 할수있다.바야흐로 세계는 탈이념의 경제제일주의와 국익우선의 민족주의가 지배하고있다.그러한 세계환경과 시대정신의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 그것을 주도해 나가기위해선 우리의 의식구조는 물론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도 그동안 큰변화를 겪었다.오늘의 우리는 분명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세계도 무시할수없는 경제력을 쌓아가고있는 가운데 문민대통령의 등장과 개혁은 세계에 손색없는 민주한국의 모습을 과시하고있다.구소및 중국과의 수교와 유엔가입등으로 명실상부한 세계속의 한국으로 부상하고있다.그러한 변화에 걸맞는 신외교의 자신있는 모색은 너무도 당연한 일 일것이다. 통일외교도 예외일수 없다.세계와 우리자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냉전적 분단상황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고 남아있는 우리의 뼈아픈 현실이요 약점이며 극복해야할 도전이다.신외교가 풀어야할 중요과제의 하나인 것이다.그리고 그 돌파구는 개방과 개혁이라는 북한의 변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미래지향의 통일외교를 천명한 신외교의 기조는 북한의 아태질서편입을 통한 통일실현을 강조하고있다.북한을 경쟁상대아닌 후원대상으로 보는 인식전환을 요구한다.북한이 개방개혁의 세계적 흐름에 동참하도록 돕는데서 실마리를 풀어야한다고 강조하고있다.우리통일외교가 지향해야할 다른대안이 있을수없는 유일의 방향이라 생각한다.중요한 것은 적극적이고도 과감한 실천일 것이다.
  • “YS외교의 축은 민족주의”/일 요미우리신문 분석

    ◎한국인의 높아진 자신감 반영/남북통일·선진국진입 주목표 김영삼대통령의 외교에는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이 나타나고 이같은 외교정책은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신감이 높아지고 있는 시대의 흐름과도 어울린다고 요미우리(독매)신문이 12일 보도했다.다음은 김대통령 외교를 분석·전망한 요미우리신문 보도내용의 요약이다. 김대통령은 『분열된 민족을 결집,한국을 태평양시대의 중심국가로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하고 『남북통일은 금세기내에 이루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그의 외교목표는 21세기 한국건설을 위한 남북통일과 선진국화라 할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외교전략은 아직 불투명하다.취임 2개월을 조금 넘긴 김대통령이 밝힌 구체적인 외교정책은 종군위안부문제와 관련,일본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정도이다. 김대통령의 외교는 그러나 노태우 전대통령 외교와는 상당히 다를 것으로 보인다.구체적인 예측은 어렵지만 「안보보다는 통일」「국가보다는 민족」을 중시할 가능성이 높다. 김대통령 자신도 민족주의적 자긍심이 강할뿐만 아니라 외교브레인인 한완상 통일원장관,정종욱 청와대외교안보수석,한승주 외무장관등도 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세대이다. 김대통령은 남북통일에 의욕적이며 북한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를 선언했음에도 비전향 장기수 출신의 이인모씨의 송환을 예정대로 단행했다. 김대통령은 지난 4월 『누가 누구를 초대하고 여기저기 방문하는 외교는 그만두지 않으면 안된다.당당하고 의연한 자세,형식을 초월한 실질적인 외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한국 국민들도 민족적 자신감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김대통령의 이러한 외교인식에 공감하고 있다.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민족주의적 외교가 어떤 형태로 형상화되느냐 하는 것이다.북한의 핵문제,클린턴 미대통령의 7월 방한예정등 김대통령 외교가 실체를 나타낼 때가 다가오고 있다.
  • 흑인단체 충돌 최소 46명 사망/남아공

    【요하네스버그 로이터 연합】 지난 주말인 8일과 9일 남아공화국의 여러 흑인거주지구에서 흑인 민족주의단체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주요 경쟁상대인 잉카타자유당(IFP) 지지자들이 충돌,적어도 46명이 숨졌다고 10일 경찰과 ANC가 말했다. 경찰은 남아공 최대의 도시 요하네스버그 남쪽 3각형을 이룬 흑인거주 마을들인 세보켕·사프빌·에바톤에서 벌어진 두 흑인파벌간의 충돌로 최소한 13명이 사망했으며 발견된 시체들은 절단되거나 총상 또는 자상을 입고 있었다고 말했다.
  • 러 노동절시위 유혈충돌/옐친 퇴진 요구

    ◎경찰트럭 등에 방화… 3명 사망설 【모스크바 UPI 로이터 연합】 모스크바에서 1일 세계 노동절 행사도중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친공산계 보수 시민들의 격렬한 대규모 투석,방화 시위가 발생해 진압경찰과 시위군중을 포함 최소한 1백40여명이 부상했으며 2∼3명의 사망설이 나돌고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있다. 지난 91년8월 쿠데타기도사건 이후 최악의 유혈 사태를 빚은 이날 시위에서 2명이 사망했다는 미확인 소문이 나돌고 있으나 아직 확인 되지 않고 있으며 수천명의 시위군중들은 경찰의 진압작전에도 불구하고 해산하지 않고 러시아 의회 의사당을 둘러싼채 바리케이드를 치고 반옐친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친공민족주의 조직인 민족구국전선(NSF)이 주도한 노동절기념 행사에 참석한 약7천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은 당초 고르키 광장으로 한정된 행사장을 벗어나 모스크바대학쪽으로 이동하면서 경찰 경비망을 뚫고 크렘린 궁앞 붉은 광장쪽으로 진출을 시도,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 충돌했다. 레닌언덕 부근에서 경찰 저지망에 막혀 붉은광장 진입이 좌절된 시위대는 경찰이 저지선으로 세워놓은 버스와 트럭에 불을 지르고 경찰트럭에도 방화했으며 돌과 병,보도블록을 깨 진압경찰에 집어던지고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곤봉과 물대포로 진압작전에 나선 경찰에 격렬히 저항했다. 시위대는 『옐친에게 죽음을』이란 구호를 외치며 의사당 주변에 재집결해 경찰진압에 대비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의사당을 에워싼채 비상의회의 소집과 옐친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있다. 시위현장에 있던 한 시민은 시위양상이 한마디로 시가전을 방불케했다고 전했다.
  • 옐친,유고사태개입 선언/미국도 세르비아 추가제재안 곧 발표

    ◎세르비아계,또 회교도지역 진격 【모스크바 AFP 연합 특약】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27일 보스니아 사태와 관련,『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옐친 대통령의 이같은 선언은 신유고 연방에 대한 유엔의 추가 제재조치가 발효된 날과 같은 시점에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AFP통신에 따르면 옐친대통령은 이날 『러시아는 세계 공동체사회를 반대하는 집단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유엔의 강경한 대응조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베오그라드·워싱턴 로이터 AP 연합】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의회가 26일 보스니아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국제평화안을 거부하고 이에따라 27일 유고에 대한 유엔의 새 제재결의가 발효돼 세계 각국이 이에 동참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자국과 그 맹방들이 이 문제에 대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면서 앞으로 수일내에 미국의 새 제의가 발표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그레브 로이터 연합】 신유고연방에 대한 유엔의 추가제재가 27일(이하 한국시간) 공식발효된 가운데 탱크와 대포의 지원을 받는 약1천명의 세르비아계 병력이 27일 보스니아내 비하치마을 외곽의 회교도지역으로 진격했다고 유엔보호군(UNPROFOR)이 밝혔다.
  • 「대세르비아 추진」이 내전 도화선/보스니아사태 1문1답

    ◎20만명 사망·실종… 난민만 2백만/강대국 군사개입도 효과 불투명 과연 유고사태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1년 넘게 끌어오고 있는 유고내전은 급기야 유엔군의 군사개입까지 거론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상황이다.「세계의 고민거리」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의 실상을 문답풀이로 알아본다. ­내전발발 이유는. ▲냉전종식으로 인한 민족주의 확산의 여파로 과거 유고연방을 구성했던 6개공화국중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제외한 4개공화국이 각각 분리독립을 선언함에 따라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내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이 영토를 넓혀 세르비아공에 합병시키려는 대세르비아 건설을 꿈꾸며 세르비아공의 지원아래 내전을 일으켰다. ­전세와 피해는. ▲92년2월 독립을 선언한 보스니아에서 1년이상 지속된 내전으로 20만명이 사망,실종되고 2백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가운데 총인구의 32%인 세르비아인들이 영토의 70%를 차지,인구구성비 40%인 회교도들을 「인종청소」하고 있다. 어린이 학살과 임산부 강간 등 나치의유태인 학살을 방불케 하는 잔학행위가 자행되고 있다.총인구의 18%인 크로아티아계도 크로아티아공과의 합병을 노리며 회교도와 중부지역에서 싸우고 있다. ­국제사회는 그동안 뭘했나. ▲유엔안보리 결의로 지난해 5월30일부터 무기를 포함한 대유고 금수조치가 시행된 가운데 유엔특사인 밴스전미국무장관과 오웬경이 평화중재에 나서 보스니아를 10개주로 나눠 수도 사라예보는 독립지역으로 하고 나머지는 3개민족이 3개주씩 차지하는 내용의 중재안을 마련,수세인 회교도와 영토이득을 보게돼 있는 크로아티아계의 서명을 받았으나 영토의 43%만 할당받은 세르비아계는 거부했다.내전이 수그러들지 않자 올4월12일부터 보스니아상공 비행금지조치가 취해졌고 4월27일 하오1시(한국시간)부터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대한 육·해·공로 접근차단 및 세르비아의 해외자산 동결 등 경제제재 강화조치가 발효됐다. ­경제제재로 내전종식이 가능한가. ▲경제제재가 생필품 부족 등 극심한 혼란초래효과를 나타내고는 있으나 단기적으로 내전을 끝낼 정도의압력수단으로 작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군사개입 가능성은. ▲계속 논의는 돼왔으나 서방강대국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채택되지 못했다.러시아는 같은 슬라브족에 동방정교도인 세르비아와의 전통적 유대감때문에,영국 프랑스 등 유럽국들은 이해관계가 얽힌 인근국가로의 확전을 우려해 모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미국도 걸프전때와 같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세계각국에서 소극대처에 대한 비난여론이 비등함에 따라 세르비아계 진지에 대한 제한적 공습과 회교도에 대한 무기금수 해제 등이 적극 검토되는 등 분위기가 다소 달라지고는 있다.미국은 산악지대여서 상당한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지상군투입의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향후 전망은. ▲제한적 공습이 이뤄진다해도 중재안 수정협상을 거쳐 조기 평화정착효과를 가져올지 여부는 불투명하다.다만 휴전이 이뤄지더라도 산발적인 교전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는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6)

    ◎혁신창간의 주역들/“새 민족신문” 애국지사 총결집/「민족대표 33인」중 오세창 등 3명 참여/편집진인선도 “독립완성” 부합 인물로/이관구주필 주도… 몽양도 “각당 함께 혁신” 축하 8·15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11월22일 우리민족을 대변할 진실된 언론기관으로 재출발하게 된 서울신문은 당시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던 군소신문들과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달랐다. 인쇄시설등 시설면에서의 완벽한 구비는 물론이거니와 1904년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로 창간되어 구한말 격동의 6년간과 또 일제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의 36년간등 모두 42년동안 중단없이 역사 기록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왔기 때문에 서울신문이 국내외적으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당시 좌·우익 대립상황 속에서의 위상설정을 비롯,앞으로 서울신문을 이끌고 나갈 경영진과 편집진의 구성문제등은 단순한 일개 신문창간의 차원이 아니라 미군정당국의 향후 언론정책의 방향을 가늠케하는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하지중장이주문 미군정청으로부터 매일신보를 새로운 신문으로 창간토록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사람은 성재 이관구와 안당 하경덕 이었다.해방 2개월 후인 10월중순쯤 하지중장은 조선일보 정경부장과 조선중앙일보 주필등을 거치며 언론계 중진으로 활약했던 이관구에게 매일신보를 인수,위창 오세창을 사장에 추대하고 새로운 신문을 창간해 줄것을 요청했다.또 한편으로는 당시 하버드대 출신 철학박사로 연전교수로 있던 하경덕을 매일신보의 자산을 인수,관리하는 재산관리인으로 위촉했다. ○김동준 재정담당 대임을 맡은 이들에게 놓여진 선결과제는 신문창간에 필요한 재원확보와 대내외적으로 수긍할수 있는 권위있고 양심적인 인사들로 경영및 편집진을 구성하는 문제였다.이들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돼 나갔다.오세창선생의 서도 제자인 김무삼이 청년실업가 김동준을 이들에게 소개해왔던것.김동준은 광산업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으로 해방과 건국 과정에서 언론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때마침 원주의 토지를 매각한 충분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간 자본금을 쾌척할 준비가 돼있었다. 이같이 재원문제가 해결되자 간부진 인선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초대사장에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으로 지조높은 항일민족주의자로 추앙받던 오세창선생을 추대하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수 없었다.이어서 역시 33인중의 한분인 권동진과 벽초 홍명희 두사람을 상징적인 고문으로 추대,진용을 더욱 강화시켰다. 창간의 실질주역이자 미군정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하경덕은 부사장,자본투자자 김동준은 전무에,그리고 신문경영에 오랜 경험을 갖고 있던 이원혁과 조중환이 상무에 각각 인선됐다.해방직후 「매일신보 자치위」를 결성,6백여사원들과 함께 자체적으로 신문을 발행하며 외부로부터의 매일신보 접수기도를 막아냈던 문화부기자 윤희순은 출판국장겸 상임감사에 선임됐다.이렇게 짜여진 초창기 경영진은 다음과 같다. ▲사장=오세창 ▲고문=권동진 홍명희 ▲부사장=하경덕 ▲전무=김동준▲상무=이원혁 조중환 ▲취체역=김무삼 ▲상임감사역=윤희순 ○편집국에 10개부 당시 81세의고령인 오세창선생은 처음에는 사장취임을 고사했다.그러나 그가 자세를 바꿔 사장취임을 결심하게 된것은 해방후 혼란상을 보이고 있던 언론계 현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자신의 여생을 진정한 민족 언론기관 수립에 바쳐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던 그는 서울신문 창간이 순조롭게 진행,자리가 잡히게 되면 물러서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 창간 4개월만에 하경덕부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났다. 한편 편집진용은 주필로 선임된 이관구의 주도로 짜여졌다.그는 창간사설에서 「해방후 민주주의적 질서수립과 독립완성」이라고 스스로 설정한 과제에 부합할 인물들을 물색했다.편집국장에는 대산 홍기문을 내정했다. 1903년 충북 괴산에서 벽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가 일본대학 문학부와 조도전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귀국후 중동학교 교사로 있다가 부친의 권유로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언론계에 입문한 그는 논설위원도 겸임하며 문필을 날렸으며 문자보급 캠페인등 계몽사업에 주력했다.창간 편집진용은 다음과 같다. ▲편집국장=홍기문 ▲편집부=서강백(부장)허현 ▲정치부=박승원(부장)김영상 ▲경제부=주련(부장) ▲사회부=최금동(부장)고흥상 양형진 이봉구 인주현 여상현 한규호 윤일모 서병곤 오쾌일 유종대 ▲문화부=홍기무(부장) 조경희 노천명 이시우 이석희 ▲체육부=이용일 이유형 ▲특집부=김명수(부장) ▲사진부=조대식(부장)이병은 권태완 ▲교정부=최일준(부장) ▲조사부=한길수(부장) 이들 편집국의 창간진용은 이주필이 창간사설에서 밝힌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않는 공정하고 또 적확한 보도」를 위해 당시 혼란의 극치에 달했던 정치적 사회적 상황하에서 민족언론으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취해나갔다.또한 이주필의 「은같은 말은 김같은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은 당시 기자들에게 철저한 기자정신으로의 무장과 발로 뛰어 확인하는 책임정신을 가르친 것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져오고 있다. ○벽초3부자 참여 이들 창간진용 가운데 문화부장 홍기무는 편집국장 홍기삼의 친동생으로 벽초3부자가 서울신문 창간에 함께 참여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벽초는 자식 사랑이 남달라 자식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버지와 대화할수 있게 했으며 당시의 분위기로는 상상도 못할 부자상초(맞담배)를 허용,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자식들의 부친에 대한 효도 또한 지극해 홍기문은 월북한 부친을 따라 월북하기도 했다.벽초는 1948년 4월 과도입법의원 신분으로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남한대표로 참석했다가 그대로 눌러 앉았으며 홍기삼은 같은해 11월 조선일보 전무로 있다가 아버지를 찾아 월북했다. 새로운 각오와 불타는 사명감에서 출발된 서울신문을 보는 외부의 기대도 컸다.당시 미군정장관 아놀드는 『나는 서울신문이 조선의 한 독립신문으로 호평받을 것을 확신한다』고 축하인사를 보내왔다.또 여운형은 『덕망 높은 신간부를 맞이하여 제호까지 고쳐 명실이 함께 혁신한 자태로 출발한다는 것은 우리 조선의 앞날을 위해 가장 경축할 일』이라고 치하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50)

    ◎길림시절:9/「유길학우회」 활동의 허구/“이준·안중근의 독립투쟁 비판” 주장/27년엔 공산당 영향력 없어 불가능/종교타파 주도자,자신서 여선생으로 바꿔 회고록에서는 길림소년회와 유길학우회가 한 사업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⑴조기회…아침마다 지구별로 열었다.일요일은 모든 회원들이 북산에 가거나 그 밑의 운동장에 가서 체육경기를 했고 가창행진도 하였다. ○“노동이 낫다” 인식케 ⑵종교타파…김일성이 조선인소학교의 여선생을 시켜 종교를 믿는 학생에게 하루종일 하느님에게 빵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였다.그 다음에 여선생에게 학생들을 데리고 밀 이삭을 주워 그것으로 빵을 만들게하여 먹을 것을 얻는 데는 「하느님」보다 노동이 낫다는 것을 인식시키도록 하였다.또 소년회원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소년 애국가」·「조선인 길림소년회가」같은 혁명가요를 보급하였다. ⑶국어강습…27년 여름에는 중국소학교에 다니는 소년 등 우리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20일동안 국어를 가르쳤다.「조선사람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란 구호를 내걸었는데 계영춘·김원우·박소심이 강의에 출연하였다. ⑷과외활동…용담산 원족,강남공원 야유회,문화유적 참관,강연회,토론회,학습회,웅변대회,독서발표회,노래보급,연예공연 등을 다양하게 조직하였다. ⑸비밀활동…강남공원·북산 등에서 야유회의 간판을 가진 비밀회의를 많이 하였다.북산의 약왕묘 지하실은 그들의 전용 회의실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⑹강연…오동진·이탁 등 정의부 지도자들은 국치일(8월29일),3월1일,단군 탄생일(10월3일)등 주요 기념일에 교포들과 청년학생들을 모아 놓고 강연회와 토론회를 자주 조직하였다.김일성도 연설했다. ⑺토론회…27년 여름에 손정도네 예배당에 유길학우회 성원들을 모아 놓고 이준의 방법이 옳은가,안동근의 방법이 옳은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가졌다.이 토론회를 계기로 조선을 독립시키는 데는 테러나 청원의 방법이 아닌 새로운 진로가 탐구돼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⑻계몽사업…소년회원들까지 동원하여 강동·육대문·신안둔·대황구와 같은 농촌마을에 나가 농민들의 일손을 도와주면서 그들을 계몽하였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활동」의 실태를 분석해 보자. 첫째로 손정도의 예배당에서 당시의 학생들이 일제 요인을 향한 테러나 강대국을 위한 청원의 방법으로는 나라를 찾을 수 없다고 토론했다는 것은 민족주의운동 진영에 공산주의 사조가 침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종래는 김일성 자신이 한 것으로 선전하고 있었던 종교타파 문제가 이번 회고록에서는 그 주인공이 「조선인소학교」의 여선생으로 바뀌었다.이 학교는 일본기록이 말하는 「신개문 밖의 예배당에서 경영하는 유치원」이다.공산주의 사조는 당시 유치원 선생에까지 파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부 계통” 입증 따라서 이러한 일들은 29년 께가 아니면 생길수가 없다.김일성이 주장하는 27년 상반기에는 길림지방에서는 민족주의진영 세력이 압도적이었고 조선공산당의 영향은 아직 그 내부에까지 침투되지는 못하였다. 셋째로 국어강습은 회고록 본문을 읽어보면 김일성이 한 일이 하나도 없다.대신 조선공산당 재건파의 하나인 서울상해파의 간부 박소심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 사실은 29년에 서울상해파가 국어강습을 지도했고 그들이 계영춘,김원우 등 정의부 좌경분자들을 강사로 끌어들인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넷째로 오동진,이탁 등 정의부의 지도자가 강연했는데 이런 강연을 김일성도 했다고 하고 있다.이것은 그가 국민부 계통이었다는 것을 실토한 대목이다.소년회장으로 있었던 29년 무렵 그가 소년들 앞에서 「강연」을 한 것 자체는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다. 다섯째로 29년 당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는 여러 종파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과외활동,비밀모임,대중 계몽사업을 벌였다.그들은 민족주의 단체에 적극적으로 침투하여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썼다. 이 때문에 국민부 인사들은 혹은 좌경화되고 혹은 「반동」으로 몰리고 동족상잔의 가지가지 비극이 연출되었다.정의부계통의 청소년들도 조선공산주의운동의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김일성도 그런 소년의 한 사람이었다. 회고록의 기술을 분석해보면 이상과 같다.그러나 회고록은 이러한 진실을 계속 외면하고 29년 께에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선상에 나타난 일련의 현상을 27년에 끄집어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 총영사 질겁” 과장 『조선인길림소년회,조선인유길학우회,마르크스 레닌주의 독서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길림일대에서는 「ㅌ·ㄷ」성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새세대의 혁명역량이 급속히 자라나게 되었다. 길림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총영사까지도 이것을 간파하고 우리의 활동에 주의를 돌리게 되었다.길림 일대에서 새로운 혁명세력이 등장하여 그것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는데 질겁한 총영사는 자기나라 외무대신에 보낸 공식 보고문에서 그 대오가 조직력이 강하다는 것과 장차 무서운 존재로 나타나게 될 위험성이 있으니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①「세기와 더불어 1」241면 이하 ②같은 책 2백46면
  • 유엔,크메르 루주에 강경책 써야(해외사설)

    지난 13일 크메르 루주군이 프놈펜을 은밀히 떠남으로써 유엔의 캄보디아 평화 계획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파리 협정에 함께 서명한 다른 정파들이 폴 포트파에 신뢰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마지못해 협정에 서명한 가장 떳떳하지 못한 정파가 발을 빼기로 한 결정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유엔 감시아래 5월23일과 28일에 치러질 선거는 점점 전망이 나빠지고 있다.크메르 루주는 투표가 제대로 안되도록 무슨 일이라도 벌일 태세가 돼 있음을 보였다. 비싼 종이 호랑이인 유엔은 분쟁 주역들에게 권위가 없었다.크메르 루주는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챘으며 자신들의 지역으로 유엔군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 약점을 이용했다.그들뿐만 아니다.전공산주의자와 전크메르 루주 분자로 구성된 프놈펜정권 또한 그것을 이용하여 경쟁세력인 시아누크파및 민족주의자들과 맞설 선거에서 유리한 기회를 차지하려 하였다. 옛유고슬라비아서와 똑같이 값비싼 무능기구 유엔은 결국 가장 광포한 무리들에게 칼을 갈도록 부추겼는데 뒤늦은 깨달음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분명히 크메르 루주가 모든 것을 단절한 것은 아니다.그들은 프놈펜을 「임시로」 떠난다고만 했다.그러나 지금 최악의 책략을 행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억제시킬 방도는 아무 것도 없다. 쫓겨난지 14년이 지난뒤 정권을 되잡으려는 폴 포트의 야심에 대해 유엔 당국은 얼마동안이나 무능을 광고할 것인가.학살자 크메르 루주를 상업적 이익때문에 지지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 태국을 지탄할 용기가 유엔에 있을까. 유엔 당국은 선거뒤의 철수를 준비하기 보다는 질서를 유지시키고 프놈펜 정권이 권력을 부정선거에 남용하든가 선거 패배 결과에 불복하든가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무엇보다도 협정 이행을 어기고 불법자가 된 크메르 루주를 그들의 밀림에 격리시켜야 한다.권력밖에 모르는 호전적인 폴 포트가 이성을 되찾게 하려면 얼마나 더 세월이 걸려야 할까.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5)

    ◎광복과 함께 새출발/오욕의 역사 청산… 공공지로 재탄생/「서울신문」으로 제호바꿔 11월22일 창간/지령 13738호… 대한매일신보정통성 계승/사장 오세창·주필 이관영 등 새 진용 포진 군국주의 일제의 패망은 한국언론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제도적 탄압장치였던 출판법등 언론계 악법이 미군정에 의해 폐기된데 이어 허가제였던 신문 출판물이 등록제로 바뀌어 갖가지 출판물과 신문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간부진 사표 수리 일제치하 36년동안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이하 매신)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오욕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 「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된 것이다.개편작업은 1945년9월8일 한반도 진주후 이남지역에 대해 군정을 실시하던 미군정청이 해방전 영업국장이던 이상철 임시관리인으로 임명(10월2일),매신의 간부중 일부를 개편토록하는 조치로부터 시작됐다.매신처리 실무를 위임받은 그는 10월9일 매신중역회의를 열었다.이 회의에서 사의를 표명한바 있는 사장 이성근과 상무 정인익의 사표를 정식 수리하는 한편 10월25일 신문사의 명칭변경이며 새중역진 선임문제등 주요사항을 토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매신의 자치위원회는 신문사의 처리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자치위원회란 9월23일부터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매신의 운영을 장악,신문을 만들어온 편집국과 공무국등 사원 6백명이 결성한 단체였다.위원장은 문화부기자 윤희순으로 적지않은 발언권을 행사했다.자치위는 10월23일자 지면에 「매신은 어디로」라는 성명을 통해 이 신문은 『특정 정당의 기관지나 개인의 소유가 절대로 될수는 없고 공정한 민중의 기관으로 개편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견해를 피력했다.이는 자치위가 『불편부당 엄정중립의 보도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할것』을 앞서 선언했던것과 일관된 논리였다. 자치위의 이러한 반응속에 주총은 예정대로 10월25일 개최됐다.주총에서 사장에 오세창이 추대됐고 부사장은 이상협,전무취체역 김형원,상무 이상철,주필겸 편집국장 이선근등 간부진용이 결정됐다.그러나 자치위의 강력한 반대의사에 부딪혔다. 주총의 결정이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았다는것이 표면적 주장이었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들이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양측의 막후교섭이 시도됐으나 타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이에따라 개편실무를 맡았던 이들은 모두 사퇴하게 됐고 매신은 표류할수밖에 없었다. 매신이 자치위와 개편실무자 사이에 이처럼 표류하고 있을 무렵 매신의 처리문제는 국내 각정당과 사회단체는 물론 언론계 전체의 집중적인 이목을 끌기도 했다.단순한 호기심의 시선이 아니라 차제에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춘 이 신문사를 접수하려는 직·간접의 암중모색이 여러차례 시도된것이다.천도교세력을 뒤에 업은 공진항이 10월초 매신접수를 시도한데 이어 동아와 조선 양지가 매신인수를 한차례씩 꾀한바 있다. ○개편안 싸고 대립 이러한 상황속에 놓이게된 매신에 대해 그동안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청은 새로운 갈래의 매신개편작업의 필요성을 느껴 본격적인 중재를 결심하게 된다.11월10일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대해 정간명령을 내렸다.그리고 이관구에게 「공정한 언론을 펴는 참다운 신문」을 만들도록 부탁하기에 이른다. 매신에 대한 정간명령은 자치위에게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다.그래서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의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한채 일단 한발 물러서게 됐다.증폭된 갈등속에 난항을 거듭하던 매신의 개편작업은 이로써 순조롭게 진행하게 됐다. 매신개편의 대권을 위임받은 이관구는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있는 인사들로 경영 편집진용을 구성하는등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우선 사장에 위창 오세창을 추대했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3·1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지조높은 항일민족주의자로서 그의사회적 덕망과 이미지는 새롭게 선보일 서울신문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 홍명희를 상징적인 고문의 위치에 영입함으로써 그 진용을 더욱 강화시켰다.이관구와 함께 매신개편작업에 참여한 하경덕이 부사장에 내정됐다.그는 저명한 교육자요 사회학자로서의 깨끗한 이미지와 함께 탄력있는 자유주의 신념의 소유자였다.중후하고 사려깊은 논조를 감당해 나갈 주필에는 이관구가 선임됐다.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귀중하게 평가받고있는 민족주의자와 좌파계열의 연합체인 신간회에 참여한바있어 좌우 어느 편에서도 무난히 받아들여질수 있는 인물이었다.특히 해방전 동아와 조선에서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논객으로서의 경력은 금상첨화였다. 당시 최고의 언론인들을 각부 데스크에 앉히고 이를 지휘할 편집국장에는 어문학계의 권위자인 홍기문이 내정됐다. 그리고 신문경영에 오랜 경험을 가진 원로 이원혁과 조중환이 상무에 실업가 김동준이 전무에 내정,안정된 신문운영을 기할수 있는 진용이 구성됐다. 제호는 이관구의 제의를 간부진이 숙의끝에 받아들여 「서울신문」으로 확정했다.제호의 글씨는 서예가이자 취체역인 김무삼이 썼다. 그리고 매신으로부터의 인수재산 확인도 마무리지어졌다. 우선 자치위산하에 있던 사원 6백명의 인원을 고스란히 흡수하기로 했다.인수받은 재산과 시설은 현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연건평 1천8백30여평 규모의 4층 콘크리트 건물인 구사옥과 그 부속건물을 비롯,부산등 지방에 산재해 있던 당시 35만3천원 상당의 부동산과 독일제 알버트윤전기 4대등 최우수 인쇄설비 일체,지사 지국의 배급망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이 규모는 신문사로서 해방전후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개편,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이 모든 준비작업은 11월21일 하오2시 5층 옥상에서 오세창초대사장의 취임식을 가짐으로써 매듭을 지었다.그리고 이튿날인 22일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지면을 이땅에 드러냈다.발행일자는 1945년11월23일이었다. 당시 사회적 관심의 열도를 반영하듯 미군정장관 아놀드를 비롯,조선인민당위원장 여운형,국민당당수 안재홍,한국민주당수석총무 송진우등의 인사들이 언론정세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경의와 기대를 보내오는 가운데 혁신된 속간호를 내놓게 된것이다. 『「서울신문」으로 「매신」이 경생』이라는 5단 크기의 컷(1면 중앙)과 함께 속간 첫호의 모습을 선뵌 서울신문의 이날짜 지령은 제13738호로 기록돼 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 지령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서 서울신문의 계보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 옐친,국민투표 선거운동/24일까지 전국순회 지지호소 계획

    【모스크바 AFP 로이터 연합】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6일 오는 25일 실시되는 국민투표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옐친대통령은 5일 귀국길에 잠시 머문 시베리아의 브라츠크에서 군중들에 행한 연설을 통해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에게 묻게 되는 4개항의 질의사항에 찬성표를 던져달라고 호소했다. 옐친 대통령의 보좌관들은 대통령이 투표일까지 남은 18일 동안 전국을 돌면서 그의 시장경제 개혁정책 및 지도력에 대한 지지를 호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옐친 대통령은 현재로서는 자신 이외에는 1억5천만 러시아인구를 이끌수 있는 다른 대안은 없다며 국민들을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최고회의내 반대세력과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계열 언론들은 대통령이 확보한 16억달러 원조액수는 거대한 러시아에는 무의미한 규모라고 반박,옐친대통령을 실패한 러시아의 나폴레옹에 비유하는 등 대통령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8)

    ◎길림시절:7/조선인류길학우회사 날조/“27년 「유길학우회」로 개편 명예회장 취임” 주장/중1때 학생청년조직 최고간부부상은 불가능/안병기 등 지도자명단 일경기록서 삭제 김일성은 1927년 4월10일에 조선인 길림소년회를 조직하고,그 다음달인 5월8일 종래부터 있었던 조선인려길학우회를 조선인류길학우회로 개편했다고 주장한다.회고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29년 유길학우회로 『우리는 조선인여길학우회 속에 들어가 본래의 합법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점차 그 조직을 순수한 친목단체로부터 혁명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자고 하였다.공산주의자인 내가 명예회장으로 되었지만 표면상으로는 민족주의자들을 끼고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중국군벌당국의 주의도 덜 끌었다.나는 조선인여길학우회를 지도하면서 그것을 조선인유길학우회로 개편하였다.조선인 유길학우회는 조선인청년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라고 표방하였지만 실지로는 ㅌ,ㄷ의 이념을 실현하는 혁명적인 학생청년조직으로 활동하였다』「주①」 여길학우회는 1926년에 실지로 존재하고 있었다.「주②」그러나 이 친목단체가 유길학우회로 개칭된 것은 29년쯤일 것이며 이 조직에서 김일성이 「명예회장」으로 된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이것보다 더한 것은 김일성의 이러한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북한이 일삼는 대대적인 문건 변조작업이다.이 작업은 우상화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죄행인데 그 실태의 일단은 아래와 같다. 북한이 이용하는 유길학우회 문건은 1930년의 일본 길림총령사관 경찰기록이다.여기서는 이 기록을 편의상 3단락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겠다. 1)「유길학우회.본회는 길림 지나중등학교 이상의 재학선인 등이 조직하고 있으므로,현재 회원수 등은 불명하나(길림대학생 안병기·김인기·박일파 등이 오이를 잡고①)3·1기념일·국치기념일(한국병합)등에는 기념식을 단독 또는 다른 불령단체와 공동 거행하며, 또 기회 있을 때마다 강연회를 개최하며(민족주의의 고취②),배일선전을 하고 있다」「주③」 이 기록에 필자가 고딕으로 쓴 부분은 「조선전사16」에 나오는 같은 경찰기록의 변조판에서삭제되어 있는 부분이다.「주④」 그런데 삭제된 부분 ①에 따르면 30년 당시 유길학우회의 책임자는 안병기·김인기·박일파였다.당시 안병기는 조선공산당 재건파인 서울상해파의 중앙간부였고 김인기·박일파도 같은 서울상해파의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간부였다. 또 29년께,이 유길학우회의 임원으로는 김인기·박일파·신영근·이장청·이석옥등 5명이 문헌에 나온다.「주⑤」 이 중 신영근도 30년에 서울상해파에 들어간 전문학교 학생이고 이장청은 한인 여성교육사업에 종사한 정의부계통의 여성활동가였다.이석옥은 알 수 없으나 이 5명이 유길학우회의 최고지도자였다. ○고작 평회원 자격 그런데 조선전사는 대학생이나 전문학교 학생,그렇지 않으면 사회활동가인 이러한 간부들이 있었다는 것을 모두 은폐하였다.이번 회고록에서는 이러한 은폐작업 끝에 초급중학교 학생에 불과한 김일성을 「명예회장」으로 앉히는 것으로 그 변조작업을 마무리짓고 있는 것이다.그는 27년은 커녕 29년이라도 이러한 간부들을 누르고 학우회의 최고간부는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29년이라도 그는 중학 3학년으로 평회원 이상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②는 유길학우회가 조선공산당 재건파에게 휩쓸려 간 30년 현재라도 표면상은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전술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덮은 것이다. 2)『본년(1930년… 인용자)1월중 선내 학생소요사건에 대하여 지나인 일반의 동정을 구하여③ 대일반항운동을 유리케 전개할 「반일본 제국주의 선언」이라 제한 지나문이로서 과대·날조·중상적 문구를 나열하고④ 중한인 공동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취지의 불온 인쇄물(길림려길한인학우회 명의)을⑤ 지나측 관공서,학생간에 다수 배포하였다』 조선전사는 유길학우회가 중국에서 중국글로 삐라를 쓴 것을 「주체사상」에 걸리는 행동으로 해석하였는지 ③④를 삭제하고 있다. ⑤는 유길학우회가 30년 당시에도 「여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그런데 이것도 김일성이 27년 5월에 여길을 유길로 변경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길학우회란 명칭이 30년에도 사용되었다는 경찰문건을 가지고 생각하면 이 조직이 유길학우회로 변경된 것은 아마도 29년쯤일 것이다. ○중문전단 배포 은폐 3)『본년 3·1기념일에는 재만한인 반제국주의동맹이 발기하여 각 단체 합동기념일을 거행하였는데 이에 참가하였다.⑥』 ⑥은 1930년의 3·1절이므로 27년에 「유길학우회 명예회장」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김일성으로서는 삭제하지 않을 수 없는 기록으로 된다. 이상 일본기록 중에서 북한이 삭제한 부분만을 분석해 보았다.이 부분들은 유길학우회의 성격과 임무를 잘 보여주고 있고 아울러 이 조직에 망라되었을 때의 김일성의 보잘 것 없는 지위와 사상상태를 여러모로 암시하고 있다. 「주해」 ①「세기와 더불어 1」240면 ②「한국독립운동사 5」659면 ③같은 책 748면 ④조선전사 16,76면 ⑤「한국독립운동사 5」718면
  • 새정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7)

    ◎길림시절:6/「조선인 길림소년회」 조직설/민족주의자들이 28년경 만든 단체/“27년 결성주도”… 대조직가로 행세 김일성은 좌익문헌을 읽은 것이 자기 「혁명활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봉건군벌 장작상이 지배하는 중국의 오지 길림에서 그것도 1927년에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김일성은 전기에서 억지로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독서조 지도 억지 그는 한달에 열람료를 10전씩 내어 오마항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갔고 또 육문중학교에서 두번이나 도서주임으로 되었다고 주장한다.나중에는 몸소 비밀독서조를 조직하고 독립운동가가 경영하는 정미소의 방 한칸을 독서실로 만들어 거기서 좌익서적을 탐독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그가 도서주임이 되었다 하더라도 부유층의 자제가 가는 육문중학교가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구입할 리가 없고 봉건군벌이 경영하는 우마항의 도서관도 그런 책이 있을 턱이 없었다.또 비밀독서조란 것도 29년에 상월선생이 한 독서모임을 자기가 조직한 것처럼 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회고록은 이와같이 별로 좌익서적에 접하지도 읽지도 않았던 그를 대독서가로 만들어 놓았다.그 다음에는 그를 대조직가로 변신시키는 차례인데 그 첫번째가 길림소년회 결성이다. 「우리가 길림에서 처음으로 내 온 조직은 조선인길림소년회였다.그 때 길림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소년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름뿐이고 길림시내의 소년들은 그런 조직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우리는 1927년 4월에 손정도네 예배당에서 조선인길림소년회라는 합법적조직을 무었다. 나는 김원우·박일파와 함께 이 모임을 지도하였다.모임에서는 조직부와 선전부·문화체육부와 같은 소년회의 부서들을 내오고 학교와 지역별로 되는 반도 조직하였다」 여기서는 길림소년회의 조직자가 「우리」로 되어 있고 김원우·박일파의 이름도 보이지만 여태까지의 전기들은 한결같이 김일성 혼자가 길림소년회를 결성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시점조작 들통 조선인길림소년회는 여러가지 증거로 보면 27년이 아니라 28∼29년에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최형우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서 김일성이 길림에서 「소년운동 지도자의 일인으로 일년유여의 시일」심혈을 짜냈다고 쓰고 있다.따라서 김일성은 28년부터 29년 5월에 퇴학할때까지 1년 남짓 소년회에 있었던 것으로 된다.또 이명영교수는 1917년생인 최진무씨가 13세가량이었을 때 길림소년회 회원이었다는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이 증언에 의하면 29년경 김일성은 길림소년회 회장이었다. 그런데 회고록은 이 기림소년회 이외에 길림에는 민족주의자가 만든 이름뿐인 소년회가 따로 있었다고 하고 있다.김일성이 참가한 소년회는 민족주의 조직이 아니라는 주장인데 이것은 사실을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1930년 당시 길림에는 두가지 소년단체가 있었다.그 하나는 길성소년탐험대로서 공산당의 종파인 ML파의 표현단체 주중한인청년동맹 계열이었다.대장은 김일영,제1반장은 허성,제2반장은 진규삼이었으며 정미소 복흥태를 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고록의 상기 인용문에 나오는 「독립운동가가 경영하는 정미소」란 김일성이 있었던 길림소년회가 아니라 이 길성소년회가 거점으로 한 복흥태를 말한다.그는 자기와 그 입장이 반대되는 이 공산주의 길성소년회의 거점을 제멋대로 「길림소년회의 독서실」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일성은 29년 5월에 길림소년회를 떠났는데 이 조직은 29년 11월에 길림소년탐험대라 개칭하였다.30년의 일본기록은 민족주의단체 국민부산하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의 지휘를 받는 이 소년조직에 대하여 그 본부도 구성원도 적지 않고 있다.그러나 회고록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조직의 본부는 손정도의 예배당이었다. 이 길림소년회에 대한 1930년의 일본기록은 다음과 같다. 「소년회.예년 5월 제1요일을 소년데이로 정하고 운동회 등을 열고 있다.본년(1930년)은 5월4일이 마침 소년데이에 상당하므로 당일 유길학우회원 김인기,박일파의 사회로 신개문 외 야소례배당에 소년 약20명을 모아서 간단한 기념식을 행하였다. ○29년경 “회원” 증언 그후 소년데이라고 쓴 지제의 수기를 하나씩 배급하여 오후1시부터 강남공원으로 가서 과자를 일동에게 분배하여 유희를 하고 동 5시경 무사히 철수,해산하였다.」 요컨대 조선인 길림소년회란 28∼29년은 정의부,29∼30년은 국민부에 속하는 소년단체였다.김일성은 이러한 소년회에 28년 무렵에 들어가 29년경에 회장으로 되었다.그리고 만약 길림소년회가 27년에도 있었다면 그가 이해 8월경에 입회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소년회가 「27년 4월 그가 결성한」조직일 수는 없다. ▷주해◁ ①「세기와 더불어 1」208면 이하 ②같은 책 238∼9면 ③평전 113면 ④평전 112면
  • 보­혁시위대 붉은광장서 투석전/새 국면맞은 러 사태 이모저모

    ◎강경보수파 “비상선포땐 망명투쟁 불사”/옐친,인민대회 연설에서 “경제실정” 자인 ○…26일 열린 인민대표대회에서 강경보수파의 한 대의원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되면 최고회의 지도부는 지하로 잠적,망명투쟁까지를 각오해야 한다고 주장. 공산당 출신 올레그 카자로프 대의원은 옐친 대통령이 의회해산및 국가권력 전권장악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같이 촉구. 그는 최고회의가 비밀 핵심지도부를 사전구성,모스크바 외곽이나 필요할 경우 해외에서 반독재투쟁을 벌일 계획을 수립해야한다고 강조. ○독재 재등장 경고 ○…옐친 대통령이 보수파들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하게 되면 러시아는 혼란과 내전에 빠져 독재체제의 재등장에 이르는 파국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야 최고회의 의장이 경고. 그는 옐친의 힘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직선대통령이라는 점에 있으며 신임투표가 실시될 경우 러시아 국민 다수가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옐친이 패할 경우 공산주의 세력과 극렬 민족주의및 무정부주의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될것이라고 우려. ○중앙은에 책임전가 ○…옐친 대통령은 인민대표대회 연설에서 경제실정을 자인하면서도 중앙은행측에 책임의 큰 부분을 전가. 그는 경제개혁 정책에 대한 분명한 사회적 지향점도,이에대한 지원도 결여되어 있었으며 특히 인플레 억제에 실패하는등 현 경제위기는 정부의 실책이 한 요인이 되고있다고 시인. 그는 그러나 폭발적 인플레로 국민 생활수준이 급전직하한데는 중앙은행의 잘못이 크다고 대부분의 책임을 그쪽으로 떠넘겼다. ○…인민대표대회가 열리고 있는 26일 크렘린 주변 붉은광장 일대에서는 민주개혁을 지지하는 군중과 옐친을 반대하는 군중 수만명이 양편으로 갈라져 시위를 벌였으며 흥분한 양측간에 일부 투석전까지 빚어졌다. 개혁지지 시위대들은 『우리는 국민투표와 자유의사 표시만을 원한다』면서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한 반면 친보수 시위대들은 『그들을 탱크로 깔아 눕혀라』 『민주개혁파들을 처형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근래에 드문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공산세력 진로 모색 ○…이날 모스크바 오리온 영화관에서는 소련공산당 29차대회가 3일간의 일정으로 열려 향후 진로문제를 논의. 소련공산당은 옐친의 명령에 의해 불법화됐다가 헌법재판소의 이 명령에 대한 부분적 위헌판결로 부활하기 시작,급속한 팽창세를 보이고 있는데 당수 주가노프는 러시아 5대 일간지가 공동으로 선정하는 1백명의 유력정치인 명단에 지난 2월 20위로 부상,충격을 준바 있다. ○대규모 시위 준비 ○…「민주러시아」단체가 주도하는 민주개혁 진영은 28일 모스크바를 비롯,전국 67개도시에서 옐친 지지집회를 동시에 벌이기로 결정. 이들은 시위목적이 국민투표에 대한 인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모스크바 마야코프스카야 광장에서 열릴 시위의 경우 금년중 최대규모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26일자 러시아신문들은 일제히 인민대표대회 소집을 1면 톱으로 싣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촉구. 쿠란티지는 「대회가 자살로 종말을 고할 수 있다」는 제목으로 아마도 마지막 수단으로 대선과 총선의조기실시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으며 이즈베스티야지는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을 대회가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 대표적 보수지인 프라우다는 「탄핵이여 안녕」이라는 제하에 옐친이 탄핵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시사했으며 최고회의 기관지 「러시아 가제타」는 인민대표대회가 이제는 결정적인 정치적 결정을 채택할 능력이 없게 됐다고 전했다.
  • 북한은 붕괴될 수 밖에 없다/박화진(정경문화포럼)

    북한이나 통일문제를 생각하거나 논의할때는 좀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북한이나 통일문제는 있는 그대로 보고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외면이나 금기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점이 부족하지 않았나 반성된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오늘의 북한은 어떤가.한마디로 건국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있다.죽느냐 사느냐의 위기다.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보이는 사경에 빠져있다고 보는것이 보다 객관적이고 솔직한 관찰일지 모른다.북한이 놓여있는 여건을 살펴보면 당장 나오는 상식적결론이다.오랜 국제정치관측의 경험으로 볼때 국내외 정치흐름이 상식선을 벗어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국가명운도 마찬가지다.북한의 여건과 운명에 대한 솔직한 상식론은 어떤가. 오늘의 북한공산독재정권은 우선 존재해야할 이유와 명분을 상실하고 말았다면 지나친 주장일까.한반도의 분단은 미소 이데올로기냉전의 산물이다.북한정권은 구소련의 세계적화 전략에 따라 만들어진 정권이다.미소냉전은 민주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다.사회주의에는 실패의 심판이 내린지 오래다.세계는 이데올로기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탈냉전시대다.사회주의를 지켜야 할 이유와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그런데도 한반도는 분단되어 있어야하고 북한이 사회주의를 고수하며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난센스가 아닐수 없는 것이다.지나치게 단순화된 상식논리일지 모르나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다.북한정권의 붕괴는 역사의 순서요 요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그것을 거부하며 실패할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저항으로 사회주의체제 고수를 고집하고 있다.사회주의는 북한의 국가존립 명분이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사회주의는 선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개방과 개혁이 필수과정인 것이다.구소련·동구 붕괴와 중국의 개혁에서 우리는 그것을 보지 않는가. 그러나 개방개혁을 통한 사회주의고수도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다.개방과 개혁이란 북한이 관심을 갖는 중국식의 경우만해도 시장경제도입과 대외개방을 전제로 한다. 북한이 어떻게 개방을 할수있단 말인가.개방없는 개혁이란 불가능한 것이며 개방은 북의체제에 대한 국민적 환멸과 불만 그리고 저항을 불러올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북한은 개방과 개혁을 할 수도 안할수도 없는 딜레머에 빠져있는 것이다.않고는 살아남을 수없고 하면 붕괴를 촉진할수 밖에 없는것이 북한의 개혁이요 개방인 것이다. 결국 북한의 체제붕괴는 명분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불가피하며 시간의 문제일뿐 필연이라 보는것이 가장 솔직하고 객관적인 관측이 아닐까 생각한다.북한은 우리가 원하든 않든 붕괴될수밖에 없고 붕괴되어야 하는것이 역사의 명령이라 할수있을 것이다.그런 기본인식이 북한이나 통일문제 생각과 접근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북한당국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그것은 거부할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며 핵개발과 보유를 체제유지의 담보로 삼으려는등의 저항은 성공할수없을 뿐아니라 불필요한 비극과 혼돈을 연장시키고 희생만 크게할 뿐일 것이다.이데올로기 아닌 민족주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남북대화합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북한의 붕괴는 바람직 스러운것이 아닐지 모른다.가장 바람직 스런것은 북한이 자발적인 정치·경제민주화 개방과 개혁에 성공하는 것이다.북한이 우리와 같은 민주국가가 된다면 통일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통일이 되지않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한민족 두나라의 우호적이고 경쟁적인 이웃으로 공존공영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한번 솔직히 말해 그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것 같지는 않다.결국 북한의 붕괴사태는 오고야 말것이며 그것은 분단의 우리가 겪지않으면 안될 홍역이라 해야할 것이다.그렇다면 그러한 북한의 붕괴는 가능한한 빨리 오는것이 좋지 않겠는가.준비도 안된상태에서 갑자기 북한이 붕괴될 경우 독일에서 보듯이 막대한 통일비용등 엄청난 부작용을 우려하는 소리도 있으나 최근 방한한 독일의 통일총리 콜자신이 한민주은 통일비용같은 것을 걱정해서는 안된다고 한 충고의 의미를 진지하게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북한의 붕괴는 언제 올지 모르며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솔직히 북한붕괴의 촉진이고 붕괴에 대한최선의 대비책을 서두르는 일일지 모른다. 분단은 한국병의 근본적인 병근의 하나다.김영삼대통령이 한국병을 치유하는 신한국건설의 궁극목표를 통일민주한국 실현에 둔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분단은 남북한이 안고있는 만병의 근원이다.김영삼대통령도 콜처럼 임기중의 통일대통령이 되어야하며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그것이야말로 김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소임의 하나라 생각한다.
  • 옐친탄핵 중도파 89명 손에 달렸다/러 인민대회 표대결 정국

    ◎보수파,「비상통치」 철회로 명분없어 당황/루츠코이 대통령승계땐 헌정중단 불보듯 24일의 마지막 타협기회를 무위로 넘김에 따라 러시아의 보혁대결은 결국 대통령탄핵을 놓고 의회에서의 표대결로 승패를 가리게 됐다. 26일 열릴 9차임시인민대회에서 제적 대의원 3분의2가 찬성할 경우 옐친대통령은 「법적으로」대통령직을 상실하게 된다.현재 인민대회 제적대의원수는 총1천33명.전원 참석할 경우 탄핵에 필요한 6백89명의 표확보가 일단 최대 관심사항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민대회 대의원간 보수파와 개혁파 세력분포를 보면 표결결과는 양측 모두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게 돼있다.반옐친 최대계보인 시민동맹측은 현재 확실한 찬성표를 6백표로 잡고 있다.중도보수세력을 망라한 시민동맹파와 공산주의 및 극우민족주의파 대의원을 합친 수이다.나머지 필요한 89표는 부동표에서 흡수해야하는데 이들의 향배가 극히 예측키 힘든 실정이다. 극우보수파 구국전선의 블라디미르 이사코프대의원은 『지난 수일간 옐친대통령의 위헌적 행동이 반옐친유대를 결속시켜서 3분의2 확보는 무난하다』고 낙관했다.반면 시민동맹의 블라디미르 자르힌공보국장은 24일 기자에게 『경제정책등 일반사안에서 우리가 동원가능한 표는 3분의2를 넘는다.하지만 대통령탄핵은 워낙 중대사인이기 때문에 부동표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장담키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로 몇차례 표결선례를 보면 대통령탄핵의 경우 반옐친진영에서 이탈표가 많이 생겼음을 알수 있다.7차 8차인민대회때도 보수진영에서 대통령탄핵안을 의제로 채택하려했으나 의제상정에 필요한 단순과반수인 5백17표를 못얻어 기각됐었다.이번 경우는 옐친대통령의 비상통치선언이 있었고 양측이 「사생결단」에 나섰기 때문에 이것이 반옐친표의 결속을 가져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게 사실이다.24일 최고회의에서 찬성1백44대 반대1표로 대통령탄핵을 다룰 인민대회 개최를 압도적으로 가결시킨게 좋은 예이다. 옐친진영에서는 일단 인민대회에서 대통령탄핵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돼 표면상으로는 의회의 탄핵결정에 승복치 않겠다는 입장이다.아울러 옐친대통령은 지난 주말에 한 TV연설내용을 24일 문서로 의회에 제출하면서 의회권한을 침해하는 위헌조항들을 모두 삭제,비상통치선언을 철회함으로써 사실상 탄핵명분을 없애버렸다.대통령TV연설을 기초로 한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은 사실상 공중에 뜬 셈이 됐다. 아울러 옐친측은 최대역점을 4월25일의 대통령신임투표와 새헌법채택에 둔다는 전략이다.신임투표때 자신의 새헌법안과 총선안등을 함께 부쳐 앞으로 의회해산등 강경통치의 명분으로 삼겠다는 것이다.24일 크렘린에서의 3자회동이 실패한뒤 옐친대통령은 대의회 공개서한을 발표,현헌정위기의 원인을 『새국가가 탄생됐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은 소련시절에 만든 구헌법을 갖고있기 때문』이라고 역설,새헌법채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옐친대통령은 최후수단인 군대동원은 아직 결정치 않은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국민에게 직접호소하는 신임투표의 결과에 아직 자신하기 때문이다.24일 인민대회소집결정 직후 모스크바 여론조사협회에서 유권자 1천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결과는 옐친 지지 40%,루슬란 하즈불라토프 최고회의장 15%,나머지 45%는 지지자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탄핵이 실제로 강행되고 자동승계순에 따라 루츠코이부통령등이 새대통령으로 지명될 경우의 혼란이다.이 경우 러시아전국이 옐친지지와 의회지지등으로 분열돼 사실상 내전상태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옐친의 구도대로 한달여 남은 신임투표일까지 정국유지가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는 많지 않다. 24일의 막판타협실패에서 드러났듯이 현러시아의 헌정위기는 이미 타협을 통해 통합될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대통령탄핵,신임투표등도 쌍방의 대립을 더 극단화하는 계기만 될뿐이지 문제해결의 방책은 못된다는 지적들이다.파멸을 뻔히 예상하면서 끝없는 혼란의 미궁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다.□옐친 포고령 「이 사회의 첨예한 정치적 대결과 분리주의,민족주의및 범죄가 점증하고 있음을 고려해 본인은 상황를 안정시키고 개혁을 효과적으로 실행할 여건을 조성키 위한 긴급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한 것으로판단하고 있다.나는 오는 4월25일 러시아연방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이와 동시에 러시아 새헌법초안및 연방의회 선거법초안도 아울러 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했다.나는 국민의 권력,연방주의,공화정적 정부형태및 권력분립에 기초해 러시아연방 헌법체제를 수호할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바이다.나는 사회의 정치적 안정의 수호,즉 러시아연방의 영토보전과 정부및 국가의 존립에 대한 책무를 맹세한다. 나는 힘에 의해 헌법체제의 변경을 도모하거나 러시아연방의 완전성을 침해하거나 국가의 안전을 저해하거나 불법적인 무력단체를 만들거나 사회적,민족적,종교적인 투쟁을 선동하는 경우등 이외에는 국민의 헌법적 권리와 자유권의 준수 및 모든 정당,공공조직,대중운동의 활동의 자유등을 보장할 것이다.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거치지 않은 채 대통령의 명령과 포고령을 정지시키려는 국가기관과 공무원들의 결정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무효화된다」
  • 러 위기정국에 떠오른 옐친정적들

    ◎루츠코이/러닝메이트서 반옐친 선봉으로/하스불라토프,급진개혁 제동에 앞장/군부·전 KGB조직의 행보도 변수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정적들은 보수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최고회의를 비롯,행정부와 군부및 공산주의자,극우 민족주의자등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에 깔려있다. 특히 과거 옐친의 지지를 얻었거나 친옐친 세력이었던 인물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반옐친 세력으로 변했다는 사실은 특이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나고 있는 옐친의 정적들 가운데 대표격인 인물은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부통령과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을 꼽을 수 있다. 루츠코이 부통령(46)은 아프가니스탄 침공때 전투기 조종사로 참가,전쟁영웅이란 칭호를 받기도 한 군출신이다.지난날 공산당 세력과 군및 KGB내 온건파의 지지를 받았었다. 90년 고향인 쿠르스크에서 러시아공화국 인민대표대회 대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무대 전면에 나서기 시작,91년 6월 사상 최초로 치러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의 러닝메이트가 됐다. 이같은 루츠코이가 옐친과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은 부통령에 당선된뒤 6개월쯤 지난 91년말부터다. 그는 당시 『옐친의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국정운영이 무정부 상태와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면서 옐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섰다.더욱이 92년 1월 단행된 가격자유화 조치를 가장 강도높게 비난한 것을 계기로 옐친대통령으로부터 한직인 농업부문만 관장하도록 하는 조치를 받기도 했다.루츠코이는 이때부터 반옐친 세력의 선봉에 나서게된 셈이고 고르바초프와 옐친이후 차세대 지도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루츠코이와 함께 옐친의 주요 정적인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50)은 지난 13일 폐막된 인민대표대회에서 옐친을 옭아매는데 선봉장 역할을 한 인물. 90년 정계에 진출하기전까지만해도 모스크바 인민경제대학 교수였을 정도로 정치 신인에 불과했던 그는 옛 소련이 해체되면서부터 옐친대통령과 불화를 빚기 시작했다.급진개혁을 주장하는 옐친에게 온건개혁을 주문했고 옐친이 의회를 무시하고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체제개편을 서두르자 급기야는 반옐친 대열의 선봉에 나섰다. 90년 5월 옐친의 후원으로 최고회의 부의장이 됐고 이듬해 12월 역시 옐친대통령의 강력한 천거로 최고회의 의장직에 오르는등 옐친에게 빚을 지고 있던 그는 지난 인민대표대회에서는 옐친대통령으로부터 거의 모든 것을 빼앗다시피 했다. 이밖에 반옐친 세력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최고회의 안에서 강경 보수파를 이끌고 있는 빅토르 알크스니스와 자유민주당이란 단체를 이끌고 있는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등이다.이들은 모두 극우 민족주의자들이다. 알크스니스는 비공산계 민족주의자들을 규합,옛 소련과 같은 강력한 연방국가를 재건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앞날은 이들보다도 아직 옐친과 최고회의 어느 쪽에도 확고한 지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 군과 옛 소련국가보안위원회(KGB)의 향배에 더큰 영향을 받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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