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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외세론 한계”미·아세안과 관계개선(종전20년/베트남의오늘:상)

    ◎호치민대 미국학강좌 개설 2년째/“자주통일 위업” 민족자긍심 드높아/150만 보트피플·사회­자본주의 접목따른 과제 산적 75년 4월 30일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베트남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미해병 11명을 태운 헬기가 사이공 주재 미국대사관을 떠나는 장면을 끝으로 처절했던 베트남전쟁이 막을 내렸다.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그동안 베트남은 수백만명의 보트피플 문제와 이웃 캄보디아 점령으로 국제적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나 80년대 중반부터 빈곤탈피를 위한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과거의 적(적)미국과도 화해를 이룩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고 있다.변화하는 베트남의 어제와 오늘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 『미국이 베트남의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했다』­케네디 및 존슨 행정부 당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주도했던 로버트 맥나마라 전 미국방장관은 미국이 베트남전을 비극적으로 마감할수 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베트남의 민족주의를 꼽았다.사실 베트남에 있어서 민족주의는 베트남전 당시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수행의 가장 큰 대의명분이었음은 물론 지금까지도 체제유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해방 20주년」을 맞는 베트남에서는 현재 자신들의 위대한 민족민주주의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행사준비가 한창이다.특히 올해는 공산당 창당 65주년,건국 50주년,건국의 영웅이며 해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치민(호지명)탄생 1백5주년등 갖가지 행사가 겹치는 탓에 나라 전체가 온통 축제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호치민 전주석의 대형 초상화가 거리 곳곳에 나붙었으며 붉은색 베트남기와 다채로운 경축 깃발이 하노이와 호치민시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를 뒤덮고 있다. 미국이 자신들의 명백한 패배로 끝난 전쟁에 대한 앙갚음으로 전후 19년간 목조르기식 경제제재를 가하는 바람에 극도의 경제적 궁핍을 면치 못하면서도 베트남인들은 단결된 민족적 의지로 거대한 나라 미국을 물리치고 통일을 이룩했다는 자부심만은 종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갖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민족주의적 열정도 경제난 극복이라는 현실적인 필요성 앞에서는 더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같다.지난 86년 12월 6차 공산당대회에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본뜬 「도이 모이」(쇄신)정책을 채택한 것을 계기로 베트남은 국제무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그 결과 경제가 꾸준히 회복되면서 지난해에는 8.9%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하기도 했다. 경제개발이 가져다 준 혜택을 실감하면서 베트남인들의 태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베트남인들은 이제 미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에 대해 더이상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고있다.도 무오이 서기장 등 베트남지도자들도 과거에 자신들을 괴롭혔던 국가의 국민들에 대해 한결같이 『과거는 과거일뿐 우리는 과거에 얽매일 수 만은 없으며 앞을 보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베트남은 또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있다.아시아·태평양국가들과의 협력강화와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모색,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과 92년 7월 우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지난 78년 12월 캄보디아침공으로 빚어진 적대관계를 청산했으며 중국과는 이미 91년 11월 관계를 정상화했다.이와함께 베트남은 빠르면 올 7월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아세안 외무장관 및 확대 외무장관회담을 계기로 아세안에 가입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베트남은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지난해초 미상원의 대베트남 금수조치 해제결의안 가결을 이끌어낸 데 이어 올해 1월 미국과 상호연락사무소를 개설함으로써 서방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기초를 다졌다.또 과거의 「적」인 미국을 배우려는 새로운 움직임도 나타나 호치민 시립대학에서는 공산정권수립후 최초로 지난해부터 미국학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미래가 밝은 것만은 아니다.적극적인 경제개방정책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서구식 다당제 정치개혁을 거부한채 사회주의체제를 고집하고 있다.지난 90년 이후 동구에 밀어닥친 민주화 물결에 대해서도 베트남은 사회주의국가들이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제대로 사회주의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베트남의 이같은 경직한 태도는 90년 당시 열린 당중앙위 전체회의에서 「베트남의 옐친」이라고 불렸던 찬 수안 바크라는 개혁파 정치국원을 축출한 이래 일체의 정치개혁 움직임을 용납치않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베트남은 시장경제 도입과 사회주의 노선의 견지라는 부합될수 없는 상반된 국가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개발이라는 국가적 목표가 달성될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많다. 이와함께 공산화 이후 1백50여만명에 달했던 「보트 피플」은 아직도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으며 남·북간의 경제력 격차에 따른 남북갈등과 자본주의를 이미 경험한바 있는 남베트남인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은 국민통합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 적대감 떨쳐 버릴수 없나/김향숙 작가(기고)

    한차례 감기를 지독하게 앓느라 바깥출입을 못했던 까닭인지 비 온 뒤의 거리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게 다가 왔었다.샛노란 종들의 합창소리가 들려 올 듯한 개나리며 그 고운 꽃잎의 아른한 색감으로 온 세상을 물들일 듯 화사한 연분홍빛 벚꽃,그리고 겨우내 뒤집어썼던 먼지를 말끔히 털어버린 초록빛 나무들의 싱싱함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절기가 바뀌어도 덤덤하기 일쑤인 마음도 비온 다음 날의 초록빛을 보는 동안엔 그 아름다운 봄의 색깔들로 찰랑이는 듯했었다. 겨우내 앓는 동안 다시는 잎을 틔울 것 같지 않던,고목나무만 같은 마음에도 새순이 돋으려고 해 자연의 힘이 가진 치유력에 다시한번 감복하기도 했었다.어찌해 볼 수 없는 굳은 습관처럼 된 삶에 대해 또 다시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하는 힘이 봄의 풍경속에는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아름다운 절기에 난데없이 듣게 된 폭탄음이란.폭탄이 터지는 굉음속에서 죽어간 혹은 부상한 사람들의 고통스런 신음소리란 지하도며 쇼핑센터 구석에서 피어오른 독가스의 악취란.개발이라는 명목으로자연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파괴하려드는 인간의 저 멈출 줄 모르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저 자신이 가진 아름다운 순화력을 아직 잃지 않은 자연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람들 중의 누군가는 오클라호마시티 연방건물에 폭탄을 던지고 요코하마의 쇼핑센터 어딘가에 독가스를 가져다 놓음으로써 봄기운에 피냄새와 독기를 퍼뜨리고야 말았다니. 4월이 사계절 중에서도 가장 초록빛이 연하고 부드럽게 아름다운 계절 이어서인가.오클라호마시티의 한적한 거리에서 벌어진 그 살육의 현장이 문득 실감없이 다가오기도 한다.분노하게 되기보다는 내 자신 폭탄이 터지는 굉음 뒤의 멍함 속에서 내가 본 처절하게 무너진 연방건물의 잔해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떠올리기도 싫은 피범벅이 된 아기들 모습,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리를 잘라야 했다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 분노보다는 슬픔을 불러일으키질 않았던가.굳이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한 순간임을 절감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도 된다. 인간은대체 어떤 존재일까 하는 물음도 쉽게 머릿속에서 떠나려 하질 않는다.이 아름다운 계절에,겨울의 스산한 무거움을 떨치고 살아 볼만한 기운을 얻었을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 폭탄과 독가스를 가져다 놓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폭탄과 독가스를 던지는 마음속에 가득한 것은 적대감일까.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적대감을 어쩌지 못해 그 일을 하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이 샘솟는다.폭탄과 독가스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적대감 때문에 자식이 아버지를,아내가 남편을,아버지가 자식과 아내를 살해하는 경우를 보아왔다. 나처럼 아둔한 사람은 귀와 눈을 열어두는 것이 내키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숨가쁘게 달려가는 여러 현상들을 보여준다.정보화 사회니 인터넷이니 하는 용어들의 홍수 속에 있다보면 낙오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고 앞으로 이 세상의 주역들이 될 젊은 세대들은 참 힘들겠다는 노파심에 빠져들게도 된다.이 변화의 시대에 발맞추기 어려운 사람들의 소외감일까,허득임같은 감정들도 내 것인 양 이해할 수 있기도 한 것이다.이처럼 빡빡하고 급격한 변화의 시대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는 게 꼭 바람직한 것일까 하는 물음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미국연방수사국이나 일본 경찰청은 범인들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니까 범인들은 잡힐 테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민족주의적 감정이나 종교적 신념 같은 것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째서인지 나로선 그 모든 명분들 밑에 썩은 물처럼 고여있을 적대감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어떤 그릇된 명분이나 종교적 맹신은 그것의 주술이 걷히고 나면 떨쳐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그러나 우리들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을 더께처럼 앉은 적대감은 그리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노릇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고 우리가 만들어 가는 세상의 복합적인 힘이 너무 무겁게 다가와,어떻게 하면 이 숨막힐 듯한 속도전의 세상에서 자신만의 쉼터를 만들 수 있을까,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 데이비드 셰임보 북경장래 예진(해외논단)

    ◎등 사후 중국 분열은 없다/강택민은 과도기 인물… 부패로 사회는 불안 영국 런던대학의 데이비드 셰임보 교수(중국정치 전공)는 최근 월드 폴리시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강택민 국가주석은 과도기적 지도자가 될지 모르며 중국은 고도 경제성장과 강력한 군사력및 사회불안이 공존하는 국가로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다음은 그의 기고문 요약이다. 중국은 언뜻 보면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불가항력의 나라처럼 보인다.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최대 인구와 병력,거대한 제조업과 풍부한 자원.그러한 중국은 더이상 평범한 발전도상국이 아니다. 중국의 경제는 지난 10년이상 평균 9%의 성장을 이룩했다.최근 수년간의 경제성장은 더욱 빨랐다.그러한 성장이 계속되면 중국은 이번 세기말쯤 일본을 앞지르고 20 10년까지는 미국을 따라잡아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예상한다. 그 뿐만아니라 대만과 홍콩의 경제가 빠른 속도로 중국 경제에 통합되면서 「대중국」이 만들어지고 있다.대만과 홍콩이 합쳐지면 중국 전체의 경제규모는 대단할 것이다.무역,투자,외환보유고는 이미 중국을 세계의 지도국 위치로 끌어올렸다.이러한 것들이 중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게하는 요인들이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과정은 원만하지 못해왔으며 앞으로의 전망도 불투명하다.중국은 외국 투자가,무역업자 그리고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 중대한 위험을 줄 수 있는 잠재적으로 불안한 나라이다. 중국의 경제는 새로운 성장을 지원할 사회간접자본과 적절한 법의 정비 없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그러한 불균형의 와중에 경제는 과열 현상을 보여 인플레가 심각하다.정부의 진정책에도 불구하고 인플레가 잡히지 않아 소비자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으며 실업도 확산되고 있다.체제 혼란의 와중에 새로운 시스템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중국은 이같이 각분야가 뒤틀려 있다. 범죄와 부패도 만연하여 사회안정이 위협받고 있다.정치적 자유의 요구도 더욱 커지고 있다.공산당이 이러한 어려운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그것이 중국의 생존과 대중국을 위한 통합의 결정적인 요인이될 것이다.중국의 또 다른 불안요인은 죽음이 가까워오고 있는 등소평의 후계문제이다. 공산주의 권력시스템에서는 권력승계에 이변이 일어나는 경우가 흔히 있다.등의 가장 최근 선택인 강택민 국가주석은 일반적으로 과도기 인물로 평가된다.강주석은 물론 공산당과 군부의 지원을 받는데 어느정도 성공했다. 그는 등이 죽은후 권력계승과정에서 살아남아 한동안 집단지도체제를 이끌 것이다.하지만 그후 등이 모택동이 후계자로 선택한 화국봉을 밀어냈듯이 보다 강력하고 통찰력 있는 지도자에게 밀려날지도 모른다. 중국 공산당은 정통성의 기반을 전적으로 경제성장,민족주의 그리고 레닌주의적 통치수단에 의존하고 있다.공산당은 군과 경찰을 지배하고 있으며 권력의 독점,반체제 단속,경제성장,민족주의 고양등을 통해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투자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세금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있다.그 결과 인플레가 높아져 도시민의 실질적인 수입증가를 둔화시키고 있다.더욱이 농촌의 수입은 지난 몇년간 오히려 줄어들었으며 농촌지역의 잠재적인 불안은 현정부를 고민스럽게 하고 있다.그러나 농촌뿐만이 아니다.지난 94년이후 급증하고 있는 도시지역의 소요도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도시지역의 소요는 대부분 국영기업의 경영부실 때문이다.1만3천개의 국영기업중 3분의 2가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많은 공장의 생산라인은 작동하지않고 일하지않는 노동자의 비율이 높다. 그러한 국내문제와는 달리 외부환경은 평화롭다.19 49년 이후 처음으로 중국은 심각한 안보위협을 느끼지않고 있다.북경의 능란한 외교로 국경의 평화가 유지되고 과거 적대관계에 있던 국가들과도 국교를 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아시아 안보의 잠재적 위협이 되고 있다.영토분쟁은 주변국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하고 군비증강은 아시아 국가들을 불안케 한다.일부에서는 그러나 중국의 무기체계가 낙후돼 있기 때문에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적도 있다.중국의 무기는 서방국가보다 20­30년 뒤떨어져 있다. 중국의 무기는 또 러시아,일본,대만,한국과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보다도 현대화되지 못한 부분이 적지않다.그러나 높은 경제성장과 최근의 군비현대화 그리고 지역 강대국이 되겠다는 강력한 야망등이 어우러져 중국의 위상은 달라지고 있다. 중국이 경제적 파워로 보이든지 아니면 높은 잠재적 불안이 있는 약한 나라로 보이든간에 아시아와 앞으로의 세계에서 중국의 충격은 대단할 것이다.중국의 미래는 고도의 경제성장과 강력한 군사력및 불안이 공존하는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등소평이 죽더라도 민중 폭동이 일어나거나 중국이 분열되지는 않을 것이다.
  • 귀환뒤 “이제야 살것 같다”/안호상씨 귀환 이모저모

    ◎당국 “방북기간 종교행사 치중” 판단 대북 경수로문제로 남북관계가 미묘한 시점에서 정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방북을 강행했던 대종교 안호상총전교 일행이 16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해 정부의 처리방향이 주목된다. 정부는 이번 사안이 앞으로 유사 사례에 대한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불법방북혐의 등에 대해서는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른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방침이다.그러나 안씨가 민족주의적 성향의 원로인사인 점을 감안해 인신구속이나 국가보안법 추가 적용여부 등은 신중히 결정한다는 입장이어서 법적용의 가장 큰 잣대가 될 그의 방북행적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인신구속 어려움 ○…안호상 총전교와 김선적 종무원장은 16일상오 11시30분 검은색 벤츠승용차편으로 판문점 북측 판문각앞 광장에 도착,북측 관계자 안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국군측에 인계. 중절모에 검은 색 코트를 입은 안씨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으나 표정은 굳어 있었으며 군사분계선을 지나 우리측으로 넘어올 때도 북측 안내인들과 일절 대화를 하지 않았다. 이들은 차량편으로 비무장지대밖 헬기장까지 이동해 관계기관이 준비한 헬기에 탑승,서울 가락동 경찰병원으로 출발. ○…이들은 경찰병원에서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은 뒤 방북 행적등에 대한 조사를 받았으나 당국이 청취한 북한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이들이 비교적 종교행사에 치중한 것으로 판명. 안씨 일행은 11일 평양비행장에서 『통일은 사상과 이념이 아니라 단군민족이라는 공통점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요지의 도착 기자회견을 가진뒤 방북일정에 들어갔으나 당국은 방송상으로는 명백히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언행이 아직 노출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후문. ○보안법 신중 적용 정부의 한 당국자는 이와 관련,『북한방송 보도에 따르면 이들이 김일성 동상을 참배하는 식의 분명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례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면서 『구체적인 사법처리 방향은 이들의 방북행적에 대한 정밀조사를 마친뒤 결정될 것』이라고 설명. ○…안씨는 헬기에서 내려 승용차를 타고 경찰병원으로 가면서 갑자기 혼잣말로 『이제야 살 것 같다』고 말했다고.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들은 안씨가 원하던 단군릉 참배를 마치고 돌아와 흡족하다는 뜻이거나 북한사회의 경직된 분위기를 벗어나 안심이 된다는 의미일 것으로 해석. ○신도들 선처 호소 경찰은 안씨가 경찰병원에 도착하자 병원 정문과 1층 로비 등에 전경 2백여명을 배치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 ○…대종교 「전국교우회」(회장 김방경)소속 신도 50여명은 이날 상오 10시30분 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안총전교와 김종무원장의 귀환 환영 행사를 갖고 이들에 대한 당국의 선처를 호소.
  • 좌우합작 실패의 두안(새로쓰는 한국현대사:15)

    ◎“미군정을 인민위 넘기라” 「민전」 일방발표/방헌영,우익 수용못할 「5원칙」 내세워 결렬/미군정고문 버치 개입… 친미세력구축 노력/중도우 김규식·여운형 「합작의 꿈」 무산 미·소공동위원회 1차회담이 1946년5월 무기휴회에 들어간 뒤 미국과 소련,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남북의 정치세력은 단독정부수립을 향해 나아갔다.비록 2차회담이 19 47년 열리긴 했지만 그 회의는 예정된 수순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이처럼 남북분단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의 대응은 어떠했나. 외세에 영합해 정파이익 찾기에 앞장선 무리가 있었는가 하면 민족통일과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도 등장했다.남쪽에서 가시화한 통일독립시도가 바로 좌우합작운동이다.좌우합작운동은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돼 남북분단이 민족 앞에 현실로 대두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차공위 결렬후 손잡아 좌우합작운동을 이끈 양날개는 우파의 김규식,좌파의 여운형이다.김규식은 미·소공위 휴회 직후 열린 「독립쟁취국민대회」에서 『남의 손에 정부가 수립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이제 우리가 자율적으로 정부를 세우자』고 역설한다(한성일보 1946년5월14일자).그리고 그 방안으로 ▲남쪽에서 먼저 좌우파간에 합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과 북의 정파가 통합해 통일정부를 이루자는 「좌우합작론」을 내세웠다.당시 김규식은 우익의 집결체이자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 의장이었다. 김규식의 제안에 좌파모임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장단의 한 사람 여운형(조선인민당위원장)이 대뜸 지지하고 나섰다.이들은 「좌우합작위원회」회의가 정식으로 열리기까지 때로는 단둘이서,때로는 좌우파 각 정당·사회단체대표와 함께 만나 좌우합작을 성사시키려고 애썼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합작운동에 쉽게 동의한 것은 무엇보다 민족통일이 최우선이라는 공감대를 가졌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임시정부수립」계획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데도 뜻을 같이했다.민족이 우선 힘을 합쳐 「임시정부」를 구성하면 신탁통치문제,일제잔재청산등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들이 이데올로기상에서 색깔이 희미했던 사실도 도움이 됐다.당시 미군정의 정보보고서는 김규식을 중도우파,여운형을 중도좌파로 일단 구분한 뒤 『근본은 민족주의자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 46년7월25일 덕수궁에서 열린 좌우합작위 1차회담에는 우파의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붕준등 5명,좌파에서 여운형·성주식·정노식·이강국등 4명이 참석했고 김규식이 사회를 맡았다.또 미군정측 연락장교로 정치고문인 L 버취중위가 출석했다.1차회담에서 양측은 합작의 기본원칙으로 3개 항을 합의했다.곧 ▲진정한 대의에 의한 민주공화국수립 ▲진정한 애국자,혁명가,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세력이 단결하여 민족통일달성 ▲북한에서도 진정한 민주적인 언론출판의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기초 위에서 남북이 합작해야 한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친다.합작위의 좌파 파트너인 민전은 1차회의 다음날에 양쪽 합의사항을 무시한 새로운 「합작5원칙」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그 내용은 「미군정의 정권을 인민위원회에게 넘기라」는 등 미군정과 우파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이 5원칙은 박헌영이 제안한 것으로,그 목적은 좌파내 지도권이 여운형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견제하는 데 있었다.좌파는 이어 7월29일 열린 2차회담에 불참했다. 그리고 나서 8월에 접어들어 정국이 일대격변에 휩싸이는 바람에 좌우합작은 뒷전으로 밀린다.조선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해 「9월총파업」「10월폭동」이 잇따라 벌어졌으며 이에 따른 견해차이로 남쪽의 좌파세력이 4분5열돼 합작운동에 눈돌린 겨를이 없었다. ○기본원칙 3개항 합의 더욱이 미군정이 그해 9월 좌우합작위원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좌우합작운동은 위기를 맞는다.미군정은 김규식이 처음 좌우합작에 나설 때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물론 어떤 때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열의를 쏟았다.정치고문 버취중위는 매번 회의에 참석해 회의진척상황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군정측에 냈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입수한 문서로 확인됐다(별도기사 참고). 이 문서에서 드러나듯 미군정은 자체 필요에 의해 좌우합작을 지원했으며 합작방향을 원하는 쪽으로 이끌기 위해 배후조종을 시도했다.미군정의 목적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에 좌파를 참여시키는 데 있었다.미군정은 친미세력기반을 안정시킬 의도로 과도입법기구인 「입법의원」을 구성하려고 했다.선출방식은 지역유지들을 통한 간접선거였다.미군정은 이에 관한 법령을 46년8월 제정하지만 여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숨겨왔다. 그러나 9월 언론에 관련보도가 나가자 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은 버취중위를 통해 좌우합작위에 눈길을 보낸다.합작위에서 입법위원의 절반을 선출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이는 합작위의 위상을 높여주는 제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합작위 자체를 입법의원으로 수렴하려는 시도였다.미군정의 제의는 거센 찬반논쟁 끝에 좌우합작위에 받아들여진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합작운동에 참여한 숱한 정파가 떨어져나갔다. ○「남 단독정부」로 기울어좌파대표 여운형은 9월23∼30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기자회견을 가졌다.그는 『좌우합작에 쌍방이 매우 접근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중지된 것은 유감』이라면서 『민족공동의 이익을 위하여는 좌우협의가 절대필요하다』고 소신을 밝혔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계속 접촉을 가져 10월7일 「좌우합작의 7대원칙」을 공동명의로 발표했다.그 주요내용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선임시정부수립,후신탁통치해결」을 적극 지지하며 ▲친일파숙청은 임시정부의 입법에 따른다는 것이었다.이들은 입법의원에 대한 합작위원회의 입장을 정리,하지에게 통보했다. 두 사람이 발표한 합작원칙에 대해 김구 주도의 한독당 등 대부분의 정파는 크게 환영했지만 좌우의 대표정당격인 조선공산당과 한민당,그리고 이승만 진영은 분명하게 거부했다. 좌우합작위는 입법의원구성에 참여함으로써 결국 성격이 변질된다.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은 거의 우파들이었고,합작운동보다는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기울어졌다.입법의원은 1947년1월 「신탁통치반대 긴급결의안」을 채택해 단정수립을 촉구하고 나섰다.입법의원을 좌우합작에 활용하려던 좌우합작파는 오히려 그 터전을 잃고 물러나야 했다. 미·소공위 2차회담이 6월25일 열리자 합작파는 「시국대책협의회」를 구성하는등 안간힘을 쓰지만 단정으로 흐르는 거센 물결을 막지는 못했다.그리고 7월19일 합작운동의 좌파지도자인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총격을 받아 숨졌다.좌우합작운동은 막을 내리는 듯하다가 1948년 봄 김구·김규식이 주도하는 「남북 정당·사회단체대표 연석회의」로 마지막 불꽃을 되사른다.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한 운동이었다. 그 원인은 ▲미·소의 한반도 제패전략 ▲정파이익추구에 몰두한 극우·극좌파의 견제 등에 있었다. 그러나 실패한 운동이었다고 해서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좌우합작파가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고 어떻게든 통일자주정부를 세우려 애쓴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남북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는 현시점에서는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이 시대에 활용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박헌영·여운형 갈등… 회담 깨졌다/버치보고서 내용/박헌영,“좌파대표에 회의참석 말라”/버치,좌우양쪽 움직임 낱낱이 파악 미군정 공보국 소속 레너드 버치중위는 하지사령관과 아놀드군정장관의 정치고문이었다.1946년 5월 전임자인 굿펠로의 귀국후 정치고문을 맡았지만 그해 1월5일 박헌영과 존 스톤(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의 기자회견에 간여해 그 내용을 왜곡시키는 등 일찌감치 정치공작에 뛰어들었다.그는 『스스로를 마키아벨리처럼 착각,남한 정계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정치적 책략에 부심한』(마크 게인 저 「해방과 미군정」속에서)인물이었다. 좌우합작에 대한 버치의 공작은 미군정측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다음은 좌우합작위원회 2차회담이 예정된 1946년 7월29일 작성된 「좌우합작회의에 관한 버치의 4번째 보고서」내용이다. 『일요일인 7월28일 저녁 박헌영이 합작위 좌파대표들에게 회의 불참을 지시했고 이 문제로 박과 여운형이 논쟁을 벌였다.다음날 상오 10시 김규식은 여운형으로부터 「몸이 아파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며 며칠동안 입원해야겠다」는 사신을 받았다』 버치는 이어 2차회담 연기가 박헌영과 여운형의 갈등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또 김규식으로부터 좌파 대표인 김원봉·허헌등을 만나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서 보듯 버치는 좌우 양쪽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으며,양쪽의 이견을 조정하거나 한쪽을 설득하는 일도 맡았음을 알 수 있다.미군정의 지원은 초기 좌우합작운동을 활성화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는 합작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에게 끝내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 안호상씨 밀입북 유감이다(사설)

    대종교의 안호상 총전교와 김선적 종무원장의 밀입북은 무책임한 경거망동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이들이 지난달 14일 방북신청을 냈을때 정부는 4월은 경수로문제,김일성생일,평양축제 등이 겹쳐있어 시기가 좋지 않기 때문에 5월 이후로 미뤄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교육자이자 종교지도자인 안씨가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가리지 못하고 입북을 감행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대종교는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있는 민족종교이다.안씨의 입북목적은 14일의 어천절(단군이 승천한날)행사를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우리는 그의 순수한 뜻을 이해한다.그러나 북한이 대종교지도자들의 입북을 통일전선전략의 선전도구로 악용 할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미 개신교 문익환목사,가톨릭 문규현신부,통일교 문선명교주 등의 방북언동에서 그것을 확인한바 있다.안씨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더구나 북한이 최근 준공한 단군능을 그가 참배할 경우 평양당국에 더 없이 좋은 선전거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북한에도 종교단체들이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노동당의 외곽단체로 주로 대남선전·선동활동을 맡고 있다.따라서 북한의 종교인들은 종교인이 아니라 종교의 탈을 쓴 노회한 「통일일꾼」들이다.우리는 남북의 민간교류가 활성화 되기를 기대한다.그러나 그것은 북한이 민간교류를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다.종교·재계인사등의 올바른 대북인식과 각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특히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안이한 현실인식과 감상적인 민족주의가 남북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4월을 「통일투쟁의 달」로 정해놓고 정권타도등 대남선동을 강화하는 한편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에게만 초청공세를 펼치는등 우리사회의 혼란을 부채질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대북 경각심을 높여야 할때다.
  • 아프리카 대륙의 비극(해외사설)

    아프리카는 확실히 국제사회가 환멸을 맛본 대륙이다.기근과 대량학살,그리고 인간살육을 방지하기 위한 인도주의적인 간섭은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끝이 없는 일이다.적용된 수단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소말리아 사태에 1만5천명의 유엔군이 투입되는 대대적인 개입이 있었지만 조촐한 결과에 만족해야만 했던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부룬디의 폭력사태 재발이나 지난해 여름 르완다의 대량학살은 국제사회에 또 다른 장애물로 등장했다.최근 부룬디의 다수파는 민족주의자들이 95%를 차지하는 정규군의 보호아래 촉발된 극렬전사들의 폭력과 차별정책을 겪었다. 유엔 안보리나 아프리카기구의 책임자들은 현상황을 종결짓기 위한 구두 권고를 하기에 이르렀다.프랑스의 베르나르 드브레 대외협력장관은 부룬디를 방문해 프랑스의 의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즉 부룬디 문제가 자체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룬디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부룬디는 르완다 사태와는 다르다.집권자와 군부가 유엔의 개입을 바라는 다수 반대파들에 대응하기 위해 나라를 유혈 혼란속에 빠뜨렸다.현정부와 군부는 그들이 그같은 개입에 반대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온건한 요소들을 고무하는 이른바 「최소한의 프로그램」만이 가능한 선택으로 남아 있다.그것은 무장과격주의자들에게 계획을 알려주고 현재 부룬디에 남아 있는 서구인들의 철수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유고내전 같은 드라마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예방외교를 아프리카에서 전개하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본질적인 논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국경분쟁과 소수민족문제를 민간적인 방법으로 관리하게 되면 유럽연합의 여권사무소로 들어온다는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부족간 분쟁이 중단기적으로는 평화공존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을 것같지만,결국 증오심에 차있는 사회를 분리하거나 분류를 해야만 끝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가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 가고 온 사람들(두만강 7백리:5)

    ◎광복­6·25이후­문혁때 귀향 줄이어/60년대말까지 쉽게 도강… 65% 다시 연변에/“지금은 갈수 없는 땅”강 건너 바라보며 눈물 ○보따리 이고 강 건너 끼룩 끼룩 끼루룩…. 한떼의 기러기가 일찍 얼음이 녹은 강 한구석을 박차고 북한땅을 멀리 돌아 날아간다.걸음을 멈추고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았다.한낱 짐승들도 자유로이 넘나드는 강.그렇지 못한 우리에게 두만강은 늘 한을 던져준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옛날 선조들이 불렀다는 「월강곡」을 되뇌어 보았다.나라의 독립을 위해 개척민에 뽑혀 산길을 찾아 나선 선조들은 밀물처럼 강을 건너왔다.그리고 또 광복 후 이주 당사자들과 후손들은 고국이 그리워 피땀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시 강을 되건너 썰물같이 대거 고국으로 돌아갔다. 첫번째 귀향은 광복 당시였다.일제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나라가 독립을 맞자 조선족들은 보따리를 싸지고 두만강을 건넜다.당시 귀향민들은 두가지 부류다.대부분의 사람들은조상들이 묻힌 땅을 찾아 귀향했다.어떤 사람들은 북한의 고향을 찾았지만 살수가 없어 이남으로 곧장 월남했다.광복이 되자 연변과 북한의 공산당 정부는 일제주구 청산부터 시작했다.훈춘의 대지주이고 대동아전쟁때 비행기를 헌납하고 동경에 가서 천황의 접견을 받은 한희삼은 물론 다른 지주와 친일파들은 처단 당했다.항일부대 토벌에 공로가 있는 용정의 박도끼는 북한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청진에서 잡혀 총살당했다고 한다. 화룡현 신선대 대장 김일로는 일제가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만들어 세웠던 김동환 다음으로 가는 주구였다.1940년 3월25일 일본인 산림경찰대장과 함께 자기의 병졸들을 휘몰아 독립군을 추격하다가 홍기하에서 매복습격을 받아 1백20여명의 졸개를 잃었다.김일로도 졸개들을 호령하다가 벌린 입으로 탄알이 꿰뚫고 지나갔지만 요행히 목숨은 건졌다.이남으로 건너간 그는 여생을 편히 보내다가 수원에서 일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번째 대 귀향은 1956년부터 1962년까지였다.한국전쟁(6·25)이후의 일인데 전후복구 지원을 위해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들어갔던 것이다.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에서만도 49호가 나갔다.그리고 인민공사가 시작되면서 굶어 죽게 되자 다시 살길을 찾아 북으로 건너갔다.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의 최태경 일가는 19 62년에 함경북도 연사군으로 이사했다.최씨의 막내 딸 최해옥은 연사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중 5학년 때 평양으로 뽑혀갔는데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서 「꽃파는 처녀」에서 주인공 꽃분이 역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인재들이 많이 갔다.중국에서의 반우파투쟁이 지식인들을 잡는 운동이나 다름이 없고 민족심을 가진 사람들은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되는 판국이라 떠나들 갔다.유명한 시인 주선우,작곡가 정진옥,소설가 김동구,아동문학가 채택룡 등 문학예술계 인사들도 떠나갔다.용정시 삼합향 승적 신재룡은 길림성 공업학원 학생이고 축구를 잘 했다.지금 그는 조선체육대 교수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너왔다 도로 가고 용정시 삼합향 북흥촌 이기희(54)는 연변대학을 다니다가 2학년 때인 1961년 7월 북한에 들어가 만 6년을 살고 다시 돌아왔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북한에 살다가 다시 연변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다. 『당시 회령의 사탕공장건설은 연변에서 건너간 귀향민이 대부분이였댔습니다.나는 대학을 다니던 사람이라 공무직장에 배치 받았디요.직장장의 이름을 딴 김희진작업반에 배치합데다.그때 국가 철도상이자 함북도 건설사업소 소장으로 파견나왔던 김주봉이 하루는 우리 공장에 와서 연설을 하면서 「중국에서 하루에 백오십명씩 건너오고 또 매일 백여명씩 되넘어갑니다.조국에 왔으면 참답게 살아야지 이것이 뭡니까」라고 비판을 했디.어떤 날 출근하면 많은 사람이 없어집데다.알아보면 중국으로 돌아간거디요.67년 7월에 나도 가정을 데리고 도강을 했으니 아마 이튿날 내 자리가 비어 야단이었을 것이 뻔합데다.이북으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중국에서는 호구를 붙여주지 않다가 67년 9월 정부에서 한꺼번에 복적시켰댔시요』 세번째 귀향은 문화대혁명시기이다.용정시 대소과수농장만 해도 항일에 참가했던 사람들 70여명 모두가 귀순 분자로 투쟁을 맞았으니 2백50호 중에 70호가 적이된 셈이었다.그중 10여호가 북한으로 도망갔다.용정시 백금향 백금촌 차덕균은 일제시기 동경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다.일본에서 공부한 사실이 간첩조건이 되어 투쟁을 맞았다.모진 매를 견디다 못해 온 가족이 북한으로 갔는데 떠나던 날 큰 딸이 친척 집에 가고 없어서 두고 간것이 생이별이 되었다. 용정시 개산툰진 선구촌 사이섬에서 총 사격을 받고 수백명이 종성으로 집체도주 한 일이 대표적 사건이다.선구촌 문영기(54)씨도 그 사건에 끼었던 한사람이다.캉다(강대)요 홍색이요 하는 조직간에 말로하던 시비질이 주먹질,돌팔매질,몽둥이 싸움으로 번졌다. ○“북에 남아라”만류도 1967년7월29일 연길 캉다에서 개산툰에 와 개산툰 캉다와 합세하여 홍색을 쳤다.싸움은 공장울안에서 일어났는데 쌍방은 돌멩이를 던지고 창으로 찔렀다.홍색에서는 열세에 몰리자 해관의 총을 내다 불질을 해댔다.캉다패들은 결국 선구 대안 두만강 복판 사이섬으로 쫓겨나고 말았다.8월2일 홍색은 사이섬을 포위하고 투항하라고 공포를 놓았는데 총소리를 들은 북한땅 종성 사람들이 강변으로 나와 어서 건너오라고 소리를 쳤다.3백여명이 모조리 강을 건너갔으나 여자 하나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북한에서는 대우를 제법 해주었다.그러면서 돌아가면 잘못 된다고 북한에 남으라는 선전을 했지만 몇사람 이외에 모두가 두달 후 되돌아왔다.주모자들은 감옥에 들어가 1년씩 구류를 사는 것으로 그쳤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당시의 일들이 억울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그때 북한으로 건너가 거주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손해배상을 받아갔다.용정시 삼합진 승지촌 김광진은 지방 자위단에 있었다는 죄로 투쟁을 당하다 죽었다.그래서 온 가정이 야간 도주하여 회령으로 건너갔다가 지난 92년에 아들 김상연이 와서 용정시 민정국에 상소,3만원(인민폐)을 보상받았다고 한다. 현재 화룡시 덕화진 남평촌의 내 숙부(유인상·77)는 낮이면 두만강가에 나가 건너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지으시기 일쑤다.내 고모가 60년도에 조선 청진으로 간 이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조카들은 60년대 초에 다녀갔고 몇해전까지는 편지라도 오갔는데 벌써 5년째 소식조차 모르고 있다.앞길이 멀지 않은 숙부는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부친(유민상·84년 별세)께서도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말끝마다 외우시다가 한많은 세상을 뜨셨다.
  • 기술정책의 우선순위/이원재 경기대교수·경제학(굄돌)

    최근 발표된 과학기술관련지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고무적이면서도 실망적인 동향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과기처에 의하면,94년도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수준은 세계24위,93년 27위에서 3계단을 껑충 뛰었고,국제학술지 발표논문수의 증가율은 세계 최고였다고 한다.그러나 기초과학은 종합적인 과학기술력 세계14위에 비하면 아직도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93년도 우리나라의 산업재산권출원은 세계5위,92년의 7위에서 2계단을 뛰었고,92년도의 총인구당 자국민 비율은 세계 2위를 기록하였다.그러나 상대적으로 기술연관성이 높은 특허,실용신안만을 별도로 집계하면,우리나라는 전체의 46%로서 일본의 68%보다 22%포인트 낮다. 한편,신기술의 기업화 실적을 보면,특정연구개발사업의 경우 82년부터 91년까지 10년간 연구완료된 1천4백70개 과제 중 기업화가 완료된 과제는 16%,추진중인 과제는 20%로서 비교적 높은 수준이었다.그러나 신기술기업화가 가시화된 사례는 연구개발 성과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면,이와 같이 들쭉날쭉한 지표를 놓고 볼 때,기초연구→응용연구→개발연구→시험조업→기업화의 과정에서 어떤 단계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인가? 20세기에 들어서 과학과 기술의 관계는,과학이 주인이 되고 기술이 조수가 되었다.더욱이 기술패권주의,기술민족주의가 국제적 행동규범으로 자리잡아 가는 오늘날,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하려면 기초연구부터 다져나가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기업화되지 않은 연구개발의 성과는 기술정보라고는 할 수 있어도 기술은 아니다.기술정책의 우선순위를 기업화에 두어야 하는 소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 “민족의 대학에서 세계의 대학으로”/이수성 서울대총장 취임사

    금년은 광복 50주년의 해입니다.민족의 진운과 서울대학교의 정향은 언제나 궤를 함께해 왔고 새로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우리 대학이 앞으로 걸어야할 힘겨운 역정 또한 민족의 장래와 유리될 수 없다는 전제 속에서 본인은 서울대학교가 수행해야 할 역할과 관련하여 평소 가슴 속에 묻어온 몇가지 생각을 감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근대 100여년간 세계사가 민족의 외연에서 강하게 작용할때 마다 올바르게 응전할 역량을 축적하지 못한 채 식민지와 민족분단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우리는 겪었습니다.통합과 분열의 세계적 해일속에서 우리는 온갖 분야에 걸쳐 무한경쟁이라는 치열한 쟁투에 직면하고 있습니다.정치·경제·교육과 문화·과학기술의 대 개혁이라는 격변의 과정에서 대학이 감당해야할 책무는 너무도 큽니다. 『누가 조국의 장래를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엄청난 믿음과 기대의 함축입니다.전국의 곳곳에서 우수한 인재를 서울대학교에 맡기고 성원해 준 바탕에는 우리 민족의 현재와 미래의 명운이 서울대학교에 달려 있다는 국민의 간절한 여망이 있습니다. 한 세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이 시점에서 서울대학교는 한 민족의 대학이라는 차원을 넘어 세계 속의 대학으로 변신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이제 우리는 외래의 학문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면서 사회변화에 추종하던 과거의 태도에서 벗어나 학문과 사회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어야 할 적극적 자세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현대사회는 다기한 학문의 통합적 공동연구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대학사회에 만연되어 온 학문 영역별 이기주의와 학과를 중심으로한 폐쇄성 또한 극복해야만 합니다. 서울대인 모두가 생각해야 합니다.물질주의 문명의 탁류에 휩쓸려 대학 조차도 지금까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떠받치던 일을 소홀히 한 채,시류에 안주하며 사회의 도덕적·정신적 구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오지 못했습니다.공기와 해양과 토질이 오염되고,입학시험의 파행적 관행이 교육의 정도를 벗어나도 우리는 남의 탓만 하였습니다.공동체 의식이 박약하고 도덕적으로쇠락해가는 우리 사회를 대학은 외면했습니다.대학교육이 정신적으로 재충전되어야 할 당위를 절감하고,지식과 인격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평소의 확신이 대학의 운영에도 필요하다고 본인은 생각합니다.대학은 이제 가치 지향적 관점에서 학문적 윤리와 사회적 덕성의 지표를 명확히 제시해야 합니다. 「도덕성을 겸비한 전문인」의 육성을 통해 「나라와 민족에게 헌신하는 대학」을 이루는 것은 국민의 요구입니다.끝없는 학문적 탐구와 민족의 진로에 관한 진지한 고뇌도 대학의 몫입니다. 뼈아픈 성찰에서 얻은 크나큰 교훈과 배일진의 신념으로 서울대학교는 재출발해야 합니다.우리는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위기를 극복한 민족의 저력이 우리에게 있고 갖가지 역사적 도전을 감연히 돌파해 온 대학의 정신이 우리의 심장 속에 온존합니다. 권위주의보다는 민족주의를,소아적인 영웅주의보다는 합의와 협력의 정신을 바탕으로 갖가지 난제를 우리는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대학이 추구해야 할 몇가지 교육의 정향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민족교육의 정향입니다.어떠한 세계적 경쟁에서도 그 주체는 엄연히 단위국가나 민족입니다.국적없는 교육은 역사적 표류일 뿐입니다.자랑스런 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승계하고 국학의 내실화를 다지는 일 또한 세계화의 과정에서 참된 자부심을 견지하면 변화를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적응력의 원천이 됩니다.서울대학교는 안일과 까닭없는 폄하,헛된 우월의식에서 벗어나 가장 진지하고도 겸허한 자세로 민족의 희망에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인간교육의 정향입니다.치열한 경쟁의 시대에서 고결한 인성과 예절을 지키며,공동체의 시민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협력과 이타적 헌신을 다하는 덕성을 함양하는 것은 교육의 필지적인 목표입니다.지역 빈부 각종 집단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통일 조국에서 주체적 역할을 담당할 지도자를 길러내는 일 또한 온 겨레가 서울대학교에게 부과한 책무입니다.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대신 더불어 살며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가치체계를 정립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 역시우리의 사명입니다.학문적 편견을 초월한 상호 이해,인문사회·예체능·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균형있는 발전 또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세번째로 국민문화생활의 수준과 국제경쟁력의 제고에 앞장서는 일도 서울대학교에 주어진 과제입니다.표준적 대중을 예정한 기계적 교육체제에서 벗어나 첨단의 통신·정보 혁명과 유전자를 포함한 생명과학에 동참하여 국민의 문화수준을 높이고 국제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총체적 교육체계,소수가 아닌 다수의 정예화와 전국민의 상향평준화,그리고 끝없는 창조력의 개발에서도 서울대학교는 그 선도적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이러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는 것은 우리를 믿고 키워준 조국과 민족,그리고 사회에 보은하는 길입니다.
  • 주변아시아국 해군 게속 증강/분쟁 대비 기동함대 확보해야

    해군은 최근 중국 등 아시아각국이 해군력을 대폭 증가,우리나라 수출입물량의 99.9%가 오가는 해상수송로의 확보와 아시아 지역의 해양분쟁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대양해군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6일 밝혔다. 해군은 이날 60쪽 분량의 「21세기를 향한 해군」이라는 홍보책자를 발간,『아시아 각국은 민족주의적 국익우선정책과 해양주권수호를 위해 경제력을 바탕으로 잠수함·구축함·항공모함 등 해군력을 증강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우리해군력의 증강 필요성을 주장했다. 해군은 대양해군건설을 위해 ▲유도탄방어 이지스급(8천t급) 구축함 ▲함재기 탑재 다목적 전투함 ▲장기수중작전용 중형잠수함 ▲전략상륙함 ▲해상작전지원을 위한 함재기등으로 구성된 입체작전용 기동함대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러시아 스타트Ⅱ 비준 “회의적”

    ◎CIA/체첸작전 실패뒤 의회서 군축 반발 【워싱턴 AP 연합】 미중앙정보국(CIA)은 28일 러시아 의회가 핵무기의 대폭 감축을 규정한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를 비준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다고 밝혔다. CIA의 피터 클레멘트 러시아국장은 이날 상원 외교위 청문회에서 『러시아에 있어 군비감축은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클레멘트 국장은 최근 러시아군의 체첸저항군 진압 실패로 인해 의회내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주의자와 강경주의자를 비롯한 의원들이 군비감축에 우려를 품게 됐다고 진단했다. 오는 2003년까지 미국과 옛 소련의 핵탄두를 9천개 폐기,각각 3천개와 3천5백개로 감축키로 한 STARTⅡ는 지난해 12월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52개국 정상회담에서 빌 클린턴 미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에 의해 발효되었다. 클레멘트 국장은 『재래식무기들이 무력한 것으로 드러나자 일부 (러시아)의원들이 현재 핵무기를 감축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밝히고 게다가 6∼8개월 앞으로 다가온 선거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미상원은 STARTⅡ의 비준을 강력히 반대하던 제시 헬름스 공화당의원이 반대 입장을 철회함에 따라 지난달 비준 절차에 들어간 후 이날 청문회를 가졌다. 더글러스 맥이천 CIA 부국장도 이날 청문회에서 러시아 의원들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포기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밝히며 러시아로 하여금 미사일,폭격기,핵잠수함을 포함한 장거리 핵무기의 3분의2를 폐기토록 유도하기 위해 미국이 유일하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혜택이라고 지적했다.
  • 이­팔 평화협정 반대/팔 민족연합체 결성/아라파트 퇴진 요구

    【나블루스(요르단강서안) 로이터 연합】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과 회교도들은 22일 요르단강 서안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최초의 아랍연합세력을 결성했다고 발표했다. 요르단강 서안의 나블루스시장을 지낸 급진민족주의자 바삼 알 샤카(64)는 이날 새로운 「팔레스타인 연합」 결성을 선언하면서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연합체에는 그러나 PLO의 주류인 파타파와 라이벌인 과격파 회교운동단체 하마스는 포함되지 않았다. 샤카는 반아라트단체인 「팔레스타인 연합」이 「PLO의 대표 자격상실 이후 팔레스타인인을 단일지도체제 아래 재통합시키기 위한 목표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아라파트 의장의 퇴진은 『그의 완전실패에 따른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새 연합체가 예루살렘의 지위,이스라엘 점령지의 유태인 정착촌및 팔레스타인 난민송환 문제 등을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소식통들은 요르단강 서안에서 PLO­이스라엘 평화협정을공개반대하는 연합세력이 결성된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 옐친의 미스터리/르 피가로 프랑스 2월13일(해외사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그가 하는 말 몇마디면 충분하다.이것만 있으면 불확실한 소문들을 중요한 정치적 자료로 전환시킬 수 있다. 마지막에 서구국가들은 러시아대통령이 환자라든지 보드카를 너무 많이 마셔 아프다든지 하는 것을 무시해버린다.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에서 권력이 유명무실한지에 대해 느끼는 감각이다.또 벌어지고 있는 냉혹한 투쟁을 옐친의 그림자가 크렘린 통제를 위해 감추고 있느냐는 것이다.서구국가들은 새로운 사실에 천천히,그리고 하나씩 순응하려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대통령이 완전히 몰락했는지에 관한 소문을 서방국 대사관들이 규명하는 데는 아직도 1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특히 워싱턴은 모스크바 상대역의 안정이 너무나 필요하다.아일랜드를 방문했을 당시 그가 몸이 불편해서 비행기에서 내리는 일을 거부했다는 얘기는 놀랍다. 그때가 처음이어서 언론은 대서특필했지만 정부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했다.사람들은 몇차례에 걸친 옐친의 사라짐에 대해 말하기를 되풀이 하기 시작했다.옐친의 측근들은 그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그렇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일이 왜 갑작스럽게 이뤄지고 계속되고 있는가. 그로즈니에 폭격을 명령한 사람은 누구일까.옐친인가,아니면 그의 협력자인가.러시아대통령은 꼭두각시가 돼버린 것일까.우리는 어떤 날에는 그가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조하는 것을 확인했고 또 다른 날에는 그들과의 관계를 끊은 것으로 알았다. 알마타에서 열린 독립국가연합(CIS) 회의에서도 옐친은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비행기에서 내려왔고 기자회견을 할 수도 없었다.이번에는 모스크바의 새로운 정치적 위기라는 위험스런 가정이 계속되고 있다.런던·파리·본과 마찬가지로 워싱턴은 조금이라도 빨리 알고싶어 한다. 모두들 새로운 동요에 대비하고 있는 듯하다.옐친이 국제적 권위를 되찾을 수 있거나 권위를 원한다면 모습을 보여야 한다.모든 의문은 그가 아직도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느냐는 데서 나온다.
  • 미­중 지재권 “마지막 협상”/전문가들 비관·낙관 엇갈려

    ◎오늘부터 이틀간/캔터 “중,유연한 반응 보일것” 【북경 AFP 연합】 지적재산권문제를 둘러싼 분쟁으로 무역전쟁의 위기에 몰려 있는 중국과 미국은 분석가들의 조심스런 낙관적 전망 속에 14일부터 무역전쟁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절충에 들어간다. 13일 북경에 도착하는 미국협상팀은 미국의 중국상품에 대한 1백% 보복관세 부과 실시 예정일을 불과 12일 앞둔 14일 열리는 중국측과의 예비회담과 15일 본회담에서 무역전쟁을 피하기 위한 막바지 절충을 기울일 예정이다. 미국측의 요구에 대한 중국의 민족주의적 태도 표명이나 서로 상대방에게 양보를 요구하고 있는 경직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현지 외교관들과 사업가들은 회담의 재개 자체가 양측 모두 무역전쟁을 원치 않고 있다는 표시라고 분석하면서 회담타결에 대해 조심스럽게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서방의 한 외교관은 『중,미 양국은 당장의 피해보다는 상호무역관계에 미칠 영향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는 것같다』면서 『양국이 이번 회담에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한다』고 말했다. 서방의 한 소프트웨어 제조업자도 『양쪽 모두 무역전쟁에 휘말려드는 것을 원치않고 있다』면서 『중국도 높은 이윤을 안겨주고 있는 미국시장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키 캔터 미무역대표부 대표도 『중외무부가 이번 분쟁에 대한 책임을 미국측에 떠넘기려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중국이 이번 협상에서 유연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회담의 재개가 파국을 향한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는 분석가들도 있다. 이번 협상에 정통한 한 분석가는 『회담의 재개가 합의점의 도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서곡」이 될 수도 있다』면서 『이번 양국 무역분쟁이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 풀브라이트와 한국/김학준 단국대이사장·정치학(기고)

    지난 2월9일 89세를 일기로 별세한 윌리엄 풀브라이트 전 미국 연방 상원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은 적어도 세가지 맥락에서 한국에 연결돼 있다. 첫째,그가 상원의원으로 활약하면서 입법한 풀브라이트 교환계획이다.국제적 이해의 증진이 세계평화에 크게 이바지한다고 믿었던 그는 이 교환계획을 입법화하는데 성공해 사실상 미국 정부의 돈으로 미국으로부터 수많은 학자들과 학생들이 다른 나라로 가서 연구하게 했고 또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로부터 미국으로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국은 이 계획의 대표적 수혜자들 가운데 하나이다.적지않은 한국인들이 풀브라이트 스칼라십을 통해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또 연수를 받았다. 둘째,그는 미국의 베트남정책을 매섭게 비판했으며 그러기에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해서도 좋지 않게 여겼다.베트남 전쟁을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북베트남이 외세의존적 부패정권인 남베트남을 「해방」하기 위한 내전으로 파악한 그였기에 남베트남을 유지시키기 위해 수많은 군인들을 쏟아넣는 존슨 대통령의 확전정책,그리고 거기에 발맞추는 한국 정부의 베트남 참전이 아주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는 상원 대외관계위원장이라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통해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앞장섰다.베트남 전쟁에 대한 청문회를 자주 열어 문제점들을 사정없이 노출시킴으로써 정부를 난처하게 만든 것이다. 60년대 말에 미국의 대학가를 휩쓸다시피한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은 어떻게 보면 풀브라이트 청문회에 자극된 것이기도 했다.그리고 그 반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존슨 대통령은 68년 봄에 「대통령 재출마 포기」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풀브라이트의 베트남 청문회와 관련해 특히 우리로서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김치」발언과 「용병」발언이다.그는 베트남에 파병된 우리 군인들을 「용병」이라고 매도해 우리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산 일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그때 주한 미국대사이던 윌리엄 제임스 포터와 김치 문답을 벌인 것이다. 발단은 『한국 군인들은 김치를 먹지 않으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고 그렇게되면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는 포터대사의 발언이었다.그러자 풀브라이트가 『김치가 뭐냐』고 물었고 포터는 『배추를 소금에 절인 뒤 고춧가루와 마늘을 배합해 만든 것』이라고 대답했다. 셋째,그는 미국의 정치가들 가운데 처음으로 「2개의 코리아 정책」을 미국 정부가 채택하도록 제의했다. 풀브라이트의 의견으로 한반도에는 2개의 국가가 실존하고 있으며 그래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이 현실을 공인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는 그 논리위에서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제의했다.그리고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면서 대화하고 협상하는 가운데 평화공존을 이룩해 내야 하며 그 바탕 위에서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켜 마침내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풀브라이트가 이러한 구상을 내놓았던 때가 지난 70년이었으니 우리 정부로서는 「하나의 코리아」정책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이른바 「한국판 할슈타인 원칙」을 고집스럽게 밀고나갈 때였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풀브라이트의 제의를 비판했다.그렇지 않아도「용병」발언으로 기분이 상해 있었는데 「2개의 코리아」를 들고 나오니 풀브라이트가 곱게 보일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특히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풀브라이트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셈이다.한국 정부는 73년의 6·23선언을 통해 사실상 「2개의 코리아」정책으로 돌아섰으며 91년 가을에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실현됐다. 베트남 전쟁도 풀브라이트가 내다본 방향에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의 군사력으로는 결코 베트남 민족주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리라고 늘 주장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풀브라이트의 죽음을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미국의 유력지들은 미국이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던 지혜로운 정치가」를 잃었다면서 그에 대한 경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외교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대단히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풀브라이트가 했던 말들 가운데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의 구상들 가운데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도 했지만 우리 정계에도 그만한 인물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 광복후 민족사 「통일 독립」 관점서 정리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운 「통일독립의 현대사」 발간/백범 김구·김규식 등 좌우합작운동 분석/중간간부 권태양·강병찬 평화통일 뜻 되새겨 광복이후의 민족사를 「통일독립」의 관점에서 정리한 연구서 「통일독립의 현대사」가 나왔다(지성사 간).지은이인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운 연구원(36)은 이 책에서 해방정국의 극심한 좌우대립 속에서도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에 온힘을 쏟은 백범 김구,김규식 등의 좌우합작운동을 분석하는 한편 민족통일을 앞둔 현시점에서 이들의 평화통일운동이 갖는 의미를 조명했다. 『「통일독립」이란 백범선생이 처음 사용했고 이후 즐겨 쓴 말입니다.이데올로기의 선택보다는 민족의 통일과 자주국가 건설을 우선해야 한다는 정치노선을 뜻합니다.남북이 갈리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도 물론 포함하고 있지요』 그러나 분단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통일독립」을 추구한 정치세력은 남과 북 양쪽에서 외면당했고 그들의 행적도 그늘에 묻혔다.따라서 「통일독립」을 주요 정치노선의 하나로 인정,그 개념을 확립하고 운동사로 정리한 학술서로는 「통일독립의 현대사」가 처음인 셈이다. 이 책에서 김연구원은 김구·김규식 등 명망가 중심으로 운동의 흐름을 파악하기보다는 권태양(1913∼66),강병찬(1910∼?)등 한 정치세력내에서 실무를 맡은 중간간부들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었다.그는 그 까닭을 『역사의 가르침을 현실에 적응하는 데는 이들의 역할이 실제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연구원이 발굴한 권태양의 삶은 조국통일을 위해 여러차례 사선을 넘나든 험난한 것이었다.안동 출신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권태양은 『노동계급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인텔리 민족주의자』였다.그는 광복직후 김규식을 만나면서 통일정부 수립이 무엇보다 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좌우합작운동의 최선봉에 선다.19 48년 4월8일 권태양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는 우익측 실무대표로서 처음 38선을 넘는다.이후 「남북연석회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김구·김규식의 정치적 입장이 불리해진 뒤에도 그는 어떻게든 남북회담을 성사시키고자 단신으로 남북을 오간다. 권태양은 「6·25」때 김규식등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북으로 끌려갔으며 공산정권은 그를 「대남 평화통일 공세의 앞잡이」로 활용하려고 한다.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진정한 평화통일운동 실현을 위해 단식투쟁을 하는등 항거하다 북에서 생을 마감했다.지은이는 권태양을 『시대의 과제인 평화통일운동에 생명을 바쳐 죽는 날까지 민족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이 책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인 「중간파」의 궤적을 추적한 것말고도 해방정국의 역사전개를 보여주는 새로운 자료들을 풍부하게 실었으며 미공개 사진 30여점도 수록했다. 김광운 연구원은 『이제 냉전체제가 끝나고 우리땅에도 평화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는 만큼 「중간파」들의 고귀한 뜻을 되새겨볼 때가 됐다』면서 이 책이 광복 50주년을 맞아 역사의 교훈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했다.
  • 방글라 대학서 총격전/2명 사망/두 학생조직 사제폭탄까지 동원

    【다카 로이터 연합】 방글라데시 라즈샤히대학에서 12일 새벽 총격전이 벌어져 2명이 죽고 1백여명이 부상당했다고 현지 경찰이 밝혔다. 경찰은 회교원리주의 정당인 국민당(JP)의 학생조직인 이스라미 차트라 시비르소속 학생이 집권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의 학생전위조직인 자티야타바디 차트라 달(JDC) 소속 학생들이 머물고 있는 여관에 총격을 가하면서 양측간 치열한 총격전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양쪽이 리볼버권총과 엽총,다수의 수제폭탄을 사용했으며 피해자가 많았다며 아직도 교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고 말했다. 라즈샤히대학은 다카에서 북쪽으로 2백70㎞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방글라데시 제2의 대학으로 1만5천여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는데 이날 총격전 뒤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 “남북상호사찰돼야 핵문제 완결”/김덕 통일부총리 관훈토론 일문일답

    ◎언론인 방북 실현땐 비정치교류 확대/「제네바합의」 이행 차질땐 「팀」 재개 검토 다음은 김덕 부총리겸 통일원장관과의 일문일답. ­북한의 정당·사회단체연합회의식 대화방식과 우리측의 책임있는 당국자간 대화제의가 맞부딪쳐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다.파격적인 방안을 내놓을 용의는. ▲남북관계 경색의 제1차적 이유는 북한의 권력상황이 안정되지 않고 있는 탓이다.한마디로 우리가 어떠한 파격적 제의를 하더라도 긍정적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따라서 작은 제의부터 내놓고 계속 반복해서 호소해 경색국면을 뚫을 수밖에 없다. ­학술·종교·문화 등 비정치적 교류분야에 과감히 물꼬를 트는 제의를 할 의향은.그 연장선상에서 김수환추기경의 방북을 허용할 용의는. ▲우리가 이미 제의한 언론인 방북등이 실현되면 이를 계기삼아 종교·문화 등 여타분야의 교류를 활성화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북측의 김추기경 초청사실은 아직 사실확인을 못했다.다만 김추기경을 직접 만나 생전에 방북을 성사시키겠다는 얘기를 전했다. ­김부총리의 성향에 대해 보수적이라는데. ▲전직 안기부장 출신이라 그런가 보다.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보수 대 진보라는 이분적 틀에 끼고 싶지 않다. ­남국간 남북대화를 거부하면서 북한이 분위기조성론을 내세우고 있는데.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용의는. ▲국가보안법을 개폐하는데는 법과 현상황과의 괴리,법익,정부의 법운용방식등을 기준으로 고려해야 한다.과거에는 이 법으로 인해 인권유린 등의 사례가 없지 않았으나 문민정부 들어서는 다르다.한반도가 아직 유일한 냉전지대로 남아 있는데다 북한이 통일과 혁명을 분리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체제를 지켜야 하기에 이 법을 폐지하는 것은 모험이다.다만 남북관계가 서로 안심하는 바람직한 관계로 발전하면 법개정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러한 상황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남북대화에 대한 대미 의존경향과 남북대화시 논의내용을 얘기해달라. ▲남북대화를 미국에 구걸하는 것은 좋지 못하고 앞으로 이 문제를 구걸할 생각도 없다.남북대화가 열리면 경협과 관련 투자보장·이중과세방지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남북대화시 상호사찰문제를 다시 제기할 것인가. ▲상호사찰이 이뤄져야 핵문제가 완결된다.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과 미신고시설에 대한 특별사찰도 5∼6개월 지난 뒤에야 받도록 약속된 상황이다.따라서 이같은 전단계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형편에 미리 상호사찰을 주장할 게 아니라 나중에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상회담에 대한 정부의 구체적 입장은. ▲이미 합의됐으나 김일성의 죽음으로 무산됐다.북한의 새 정상 옹립이 성공하면 자연스레 북한의 의도에 따라 제기될 문제다. ­남북대화와 북·미관계개선을 어느 시점에,어떤 기준으로 연계할 것인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연계정책이므로 기준과 한계를 명료하게 답변하기는 어렵다.남북대화와 북·미관계는 상호보완적으로 조화되어야 한다. ­북한이 끝까지 한국형경수로를 거부하면 작년 6월 상황으로 제네바합의는 파기되는가. ▲현실적으로 한국형을 거부한다면 작년 6월 상황으로 돌아가는 결과를 낳는다.북한이계속 한국형경수로를 거부한다면 이는 유엔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시간적 여유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면 한국형경수로가 몰고올 체제유지에 부정적인 효과를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북한이 벼랑끝 전술로 재미를 봐왔지만 벼랑끝에서 떨어질까 걱정된다. ­북한이 경수로건설 외에 5억∼10억달러의 추가지원을 요청했는데. ▲북한이 요청한 추가경비에 대해 한푼도 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확고한 입장이다. ­최근 방북 기업인들이 북측에 돈과 선물을 제공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정부는 이에 대한 법적 규제장치를 이미 마련해놓았다.필요할 경우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조정명령을 발동할 수 있으나 민간자율기구를 통해 먼저 조정되도록 할 것이다.항간에 돌고 있는 뒷돈거래소문은 보고받고 있으나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확인되면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이다. ­김정일의 국가주석및 당총서기 취임시기는 언제쯤으로 예상하는가. ▲솔직히 말해 정확하게 모르겠다.북한의 상황이 원체 불확실해 확언하기 힘들다.김정일이 확실하게 북한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인다.일부 권력투쟁설과 건강이상설이 얘기되고 있는데 김정일이 군부대를 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닌 것 같다.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와 관련,현실적으로 2+2회담을 제의할 용의는. ▲남북기본합의서 5조에 평화협정문제는 남북간에 논의할 사안으로 명백히 규정돼 있다.따라서 북·미간 논의는 생각할 수 없다.2+2방식의 타결문제는 여건이 조성되면 남북한이 체결하고 이에 대한 국제적인 보장문제는 그뒤의 일이라고 본다. ­남북기본합의서의 구속력은 어느 정도인가. ▲북한이 일시적으로 자기편의대로 무시하고 있지만 무효를 선언한 적은 없다.여건이 허락하면 기본합의서의 정신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미국의 기업이 북한에 잇따라 진출하는 상황이 남북경협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이 자주 북한에 갔지만 그 결과가 투자로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김 통일부총리 기조연설 요지 남북한관계가 탈냉전시대의 오늘에 있어서도 냉전적 유산을 벗어던지지못하고 있으며,실질적 개선의 확실한 계기를 찾지 못한 채 지극히 불확실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정치적 통일을 지상과제로 부각시킨 일국주의의 관념은 통일을 모든 문제의 궁극적이고도 완벽한 해결을 절대화시키는 신화로 자리잡게 만들었다.이러한 현상은 남북관계의 실질적 진전과 무관하게 우리의 통일정책에 있어 하나의 강박관념으로 표출시켰으며 현실적 남북관계개선의 노력도 경시되게 했다.신화의 무게에 짓눌려 남북관계를 조금씩 점진적으로 개선하려는 어떤 작은 노력도 반통일적 분열책동으로 한때 낙인되기가 예사였다. 분단 반세기가 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이같은 환상과 신화에서 틸피해야 한다.이제 통일을 현실속의 실천과제로 받아들이고 남북한이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도모하기 위해 조그마한 노력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우선 한국형경수로의 대북지원 실현에서부터 그러한 실천의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다. 남북한이 민족주의 명분을 독점하기 위한 비생산적 대결과 준신학적 통일논쟁에서 벗어나 민족의 공생과 나아가 공영을 이룩하기 위한 실천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우선 생각해야 한다. 신화에서 탈피한 우리의 통일노력은 개방과 자유화,변화와 개혁이라는 세계화의 시대적 요청속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받고 있다.남북관계의 개선은 실현가능한 것부터 실천해나감으로써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다.거창한 정책과 현란한 조치보다는 허세없이 작은 보폭으로 추진하는 일들이 착실하게 축적될 때 남북관계의 실마리는 발견될 것이다.
  • 최팔용선생/3·1운동전 「2·8독립운동」 주도(이달의 독립운동가)

    ◎주일 한인유학생 학우회서 맹렬 활동/일제 고문·투옥생활 후유증… 32세 순국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또 국가·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하는 것은 아니다』 1918년4월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중이던 당남 최팔용(당남 최팔용)선생이 도쿄 YWCA에서 열린 「와세다대 동창 웅변대회」에 참가해 외친 내용이다. 선생은 이같은 신념 아래 1919년2월8일 2·8독립선언을 주도,일제에 의해 투옥됐다가 32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일제 때 있었던 3대 독립선언 가운데 하나인 이 2·8독립선언은 간도에서 조소앙 선생등이 2월1일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에 이어 두번째 나온 것으로 20여일 뒤의 3·1독립선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리 남당읍에서 태어난 선생은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 신학문 습득을 위해 일본 유학을 하던중 항일의식을 갖게 됐다. 일본 와세다대 정치과에 입학한 선생은 일본한인유학생 학우회에 가입,일제의 민족차별을 몸으로 겪으면서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키워나갔다. 일본한인유학생 학우회는 도쿄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1927년10월27일 조직된 단체로 민족주의사상을 고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선생은 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을 통해 갖가지 글을 발표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선생은 이후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학지광 편집위원 최승만에게 제의,비밀리에 동지규합에 나섰다.당시 선생을 비롯한 학생들은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는 영자지에 『미국에 있는 한국인대표 이승만과 민찬호등이 일제의 침략행위를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는 기사와 조일신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거류 한인들이 독립운동자금으로 30만원의 거액을 모금했다』는 기사가 게재된 것을 보고 고무돼 있던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이어 1918년12월28일 유학생망년회에서 「민족자결론에 의한 한국독립론」을 주제로 의견을 나누고 이듬해 1월6일 도쿄에서 학우회 주최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운동방법을 숙의했다. 웅변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민족자결대원칙에 입각해 우리 민족은 반드시 자주독립을 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젊은 학생들이 앞장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선생은 이 대회에서 송계백·전영택등과 함께 10명의 실행위원으로 선출돼,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방법을 구체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선생등은 우선 독립선언문과 민족대회소집청원서,그리고 독립과 관련한 결의문을 작성,일본 조야와 외국공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선생등은 이에 따라 독립선언문을 비밀장소에서 등사판으로 작성하고 거사 하루전인 2월7일 밤 와세다대 부근에 후배들을 불러놓고 『내일 붙들려가면 언제 나올지 모른다.여러분은 우리의 뒤를 이어 잘 싸워달라』고 당부했다. 2월8일 날이 밝자 선생등은 독립운동서를 각국 대사관·국회·조선총독부와 각 신문사·저명인사등에게 우송,거사에 돌입했다.선생등은 이어 하오2시쯤 YWCA에서 6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학우회총회를 열었다. 선생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단상에 올라 「조선청년독립단」발족을 선포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독립선언문은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침략을 강행했으며 한민족은 독립을 요구할 당연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회의가 끝난 뒤 가두행진을 펼치려 했으나 일경이 회의장주변을 둘러싸고 가두진출을 막아 충돌 끝에 대부분 체포됐다. 선생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일경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재판에 회부돼 1년전후씩 금고형을 선고받았다.송계백의 경우 옥중 순국했으며 선생은 수형생활 9개월만인 1920년3월26일 만기출소했다. 선생은 그러나 옥중에서 체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2년여 뒤 세상을 떠났다.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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