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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 공산혁명의 원로 팜 반 동 사망

    [하노이 연합]베트남의 주언라이(周恩來)로 불리던 공산혁명의 원로 팜 반동이 베트남전 승리 25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달 29일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전쟁 기간인 50년대와 통일 시대인 70,80년대에 총리로 재직했던 동은 최근 고령으로 사실상 실명까지 겹쳐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숨지기 전 수개월간 병원에서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들이 노동절 휴간 중이어서 동의 사망은 2일 공식 발표되며 오는 5일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베트남 공산혁명의 주역들 가운데 호 치 민이 이상을 대변하는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를 가졌고 보 응옌 지압 장군이 전쟁 영웅이었다면 동은 베트남의외교와 정부의 틀을 짠 인물이었다. 전쟁 기간중에는 북베트남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는 대변인 역할을 맡기도한 동은 1906년 3월1일 쾅 응아이성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두이 탄 황제의 비서관이었다. 호치민과 보 응옌 지압이 수학했던 베트남 북부의 명문 코크 호크 대학에서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동은 1925년 하노이의 학생 파업에 참가한 이후 중국과 베트남등을 무대로 호치민 등과 더불어 공산주의 활동을 벌였다.
  • 새 영화/ 아나키스트

    1920년대 중국 상하이는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이었다.민족주의 제국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온갖 사상이 숨가쁘게 소용돌이친 질풍노도의공간이자 수많은 혁명가와 창녀가 한데 모여든 모험과 환락의 땅이었다.여권이나 비자 없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그 화려한 땅은 조국을등진 인간들을 감싸주는 ‘망명자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유영식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아나키스트’(29일 개봉)는 바로 이 상하이를배경으로 한 액션 느와르다.허무주의 인텔리겐차 세르게이(장동건),낭만적휴머니스트 이근(정준호),냉철한 사상가 한명곤(김상중),과격한 행동주의자돌석(이범수),소년 테러리스트 상구(김인권)등 5명의 조선인 무정부주의자가이야기를 끌어간다. 아나키스트는 ‘선장 없는 선원의 무리’란 어원의 그리스어 아나키야에서나온 말로 무정부주의자를 뜻한다.노동조합운동, 이상촌건설운동 등도 벌였지만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테러활동에 주력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항일 테러활동의 본산인 의열단에 속해 있다.의열단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공존하던 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김원봉이 중국 베이징에서 조직했다.그 사상적 지주는 단재 신채호였다.이들의공통된 적은 아시아 전체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은 실제로 항일운동에서 한몫을 담당했다.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잘알려져 있지 않다.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에게서 모두 버림받은 아나키스트들의 삶,그 역사의 사각지대를 복원하고자 했다는 데 이 영화의 의의가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이 뒷받침되지 못해아쉬움을 남긴다. 진중한 주제의식을 전하기에 시나리오는 밀도가 떨어지고,배우들의 연기엔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을 던진 열혈남아의 초상을 그려낼 만한 카리스마가 없다.댄디즘에라도 빠진 것일까.저마다 멋과 감상으로만 치달아 연기가 겉돈다.특히 비속어로 범벅이 된 이범수의 튀는 연기는 극의 원활한 흐름을 번번이 끊어놓는다. “삶은 산처럼 무거우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1920년대 격랑의 역사에휩싸인 조선인무정부주의자들의 삶을 표현한 이 말은 영화 ‘아나키스트’에선 왠지 공허하게 들린다. 김종면기자
  • [기고] 납·월북문제 새롭게 조명할 때 됐다

    지난 22일자 대한매일에 실린,중경임시정부 외교부장이자 삼균주의 이론가로 유명한 조소앙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현재 북에서 평화통일촉진협의회 고문으로 있는 김흥곤씨의 인터뷰기사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김씨는 1948년 남북협상,1950년 한국전쟁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북행 등에 대하여 쟁점이될 수 있는 증언을 해주었다.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좌우가 싸움만 벌이면 분단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고의 이념을 민족통일국가 건설에 두고 좌우합작·남북협상운동을 전개하였다.극우와 극좌는 ‘북벌’과 ‘남정(南征)’을 주장하면서 전쟁에 의해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1948년 분단을 코앞에 두고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그것의 일환으로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뒤 전쟁의 참화에 휩쓸렸고,만고풍상을 겪으며 평생을 조국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비극을 온몸에 안은 채 ‘납북’되고 말았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미처피신하지 못한 것은 이승만정부가 승리하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자기들만도피한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6월27일 새벽 2,3시경 이승만은 국회에도 국무회의에도 알리지 않고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그리고 다음날 새벽 2시반경에 한강교가 폭파되었다.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나라 걱정,민족 걱정이 앞섰기 때문에도 재빠르게 피신을 하지 못했다.중도파 민족주의자들 전부가 납북이었느냐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그러나 주요 지도자들은 강제로 끌려갔음에 틀림없다.안재홍은 피신해 있다가 끌려나왔다.김규식의 경우 피신 직전에 북의 요원들이 찾아왔다.김규식이 자진 북행하려고 했다면 그 자리에서부인 김순애 여사와 생이별을 했을 리가 만무다.이들은 압록강변에 있는 만포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고 북행을 거부했다는 증언도 있다.‘월북’중에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국회프락치사건으로 재판받은 제헌국회의원들은 전쟁이 났을 때 서대문감옥소 등이 저절로 열려 걸어나왔다.그러나 이들은 이승만정부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또 인민군 점령지역에 생겨난 여러좌익단체에 소극적으로 가담하였거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사람들도 ‘살기위해’ 산에 들어가거나 북행을 하였다. ‘남북협상’에 대해서도 곡해가 많다.극우반공세력은 김구·김규식 등의남북협상이 북에 이용만 당하였다고 주장하였고,북에서는 정통성과 결부시켜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유난히 강조하였다.1948년 4월 북에서는크게 성격을 달리하는 두 종류의 회의가 열렸다.하나는 연석회의이고 다른하나는 요인회담으로,세칭 남북협상은 주로 후자를 가리킨다.연석회의는 대규모 회의였지만,김일성 박헌영의 ‘미제국주의’와 단선·단정반대 주장에찬성일색의 발언만 하였다.그러나 김규식은 이 연석회의에 전혀 참석하지 않았고,김구도 단 하루 잠깐 나가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김규식과 김구의 강력한 요구로 열린 요인회담에서는 단선·단정반대도 있었지만,북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신헌법을 제정,통일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결의하였다.북으로서는 지킬 수없는 것이어서 회피하려고 하였지만,김구·김규식 등을 빈손으로 가게 할 수도 없었다.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결코 이용당한 것이 아니었고,민족의 대의를 세우는데 일단은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맞아 ‘남북협상’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그와 함께 월남한 사람,월북 또는 납북된 사람들의 문제가 민족 전체의 입장에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서 중 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 평양 리포트/(하)월·납북 인사 행적·최후

    김흥곤 선생(76·북한평화통일촉진협의회 고문)은 남한 현대사연구자들이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재북 인물중 한 사람이다.그는 전남 광주 출신으로 약관 22세 때부터 조소앙(임정 외무부장)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때는 조 선생을 수행해 평양에 다녀왔고,50년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후 인민군의 후퇴때 조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그는 지난 56년 7월 조소앙을 중심으로 안재홍,엄항섭(임정 선전부장),오하영(민족대표 33인중 1인),최동오(임정 국무위원),송호성(광복군·국방경비대 총사령관),김효석(자유당시절 내무장관)등 남한측 인사들이 조직한 북한 ‘평화통일촉진협의회’(이하 통협)에 참가해 현재 이 단체의 고문으로있다.그는 재북 임정요인들의 북에서의 삶과 최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4월 7일 오후 5시 평양 보통강호텔 면담실에서 어렵게 선생을 만났다. ●증언을 결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선생님의 증언은 우리 현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남에서 온 기자선생을평양에서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운명에 대해 제가 70평생 체험한 이야기를 하려 하니 정확히 보도해주기 바랍니다”●선생님께서는 어떤 인연으로 조소앙 선생의 비서가 되셨습니까. “일제하 광주사범학교 3학년때 2종 교원시험에 합격해 교원생활을 했는데학생들에게 조선어 공부를 시키다가 43년 반일교원으로 몰려 파면당했습니다.독립운동가 출신 당숙의 소개로 서울 백남운 선생댁에 피신해 있었는데 해방후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조 선생이 비서를 구하면서 내 얘기를 들으시고 비서로 삼으신 겁니다”●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셨을 때 일들을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남의 좌익세력들은 비법적으로 배를 타고 해주로 들어갔지만 민족주의 세력은 합법적으로 올라갔습니다.김구,김규식(임정 국무위원),조소앙,조완구(임정 국무위원) 선생 모두 자기 차로 평양에 가서,그 차로 돌아다니다가 내려가셨습니다.연석회의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은 대단했습니다.참가자들에게 양복 와이셔츠도 해주고 과일,사이다 같은 것을안겨주면서 열렬히 환송했습니다”. ●남에서는 남북연석회의가 실패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오늘의 관점에서 남북연석회의를 평가하신다면? “그것은 우리 역사상 공산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이 합작 단결을 과시한최초의 대민족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지금도 평화통일하자면 이념을 떠나민족이 대단결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가 있습니까.앞으로도 민족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북남연석회의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남북연석회의에 대해 남한의 보수진영 학자들은 ‘남북협상은 전적으로 북측에 이용당했다’는 입장이다.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협상 가운데 남북연석회의는 그런 측면이 있지만,이어 열린 남북요인회담(4김회담 포함)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한의 민족적 노력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편집자주]●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녹두꽃’에는 김 선생님께서 50년 9월 인민군이후퇴할 때 안재홍,조소앙 선생을 모시고 평양까지 후퇴한 것으로 나와있는데,후퇴과정과 그때의 민족주의 인사들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남쪽에서는대부분 이 분들이 강제로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들을 모시고 올라온 내가 납치범이란 말인가.당시 그 분들은‘남북협상파’ 세력이라고 불렸습니다.그분들은 ‘남북 국회가 우선 통합해서 통일헌법을 채택하고 50년 8·15를 기해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평화통일방안을 50년 6월 26일 국회에 상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6월 25일 전쟁이 난 것입니다.전쟁이 터진 후 조소앙 선생은 ‘우리가 조금만 빨리 평화통일방안을 통과시켰다면 이런 유혈전쟁이 없었을 텐데’하고 통탄해 하셨습니다.9월 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습니다.남북협상을 주장하시다가 김구 선생이 희생당하신 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안위를 걱정하지않을 수 없었습니다.조 선생께서는 빨리 유혈전쟁을 그치고 평화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고 전쟁이 그리 오래 가리라고는 보지않으셨습니다.이남 언론에서는 우리가 개성에서 서흥,봉산을 거쳐 대성산으로 갔다고 보도했는데 우리는 미국대사관에서 노획한 차를 타고 임진강 수중다리를 거쳐 다른 길로 왔습니다”[이에 대해 서중석교수(성균관대·현대사전공)은 “당시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조소앙·김규식·원세훈 등 중도우파 계열의 인사들이나 친일파로 지목된 이광수·백관수 등은 납북됐다고 볼 수 있다.반면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 등은 자진월북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당시 김씨처럼 남측인사들의 북행길에 동행했던 신경완씨(가명·80년대 망명·98년 작고)의 증언집 ‘압록강변의 겨울’에 따르면,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 노동당 군사위는 남한내 주요인사들을 포섭,재교육하여 통일전선을 강화키로 결정하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요인들을 연행,체포했으며,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후 후퇴하면서 평양에서 재교육을 받고있던 남측요인들을 데리고 자강도 만포까지 후퇴한 것으로 돼 있다-편집자주]●평양에 도착해서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당시 평양 대동강 남쪽에 국제전화중계소가 있었습니다.그곳은 국제적으로 등록된 곳이라 폭격을 안하게 되어 있습니다.우리는 9월 20일 평양에 도착해서 국제전화중계소 인근 농촌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동네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해와서 융숭하게 대접받은 후 백선을 두른 특별열차를 타고 강계까지 갔습니다”●북으로 간 민족주의 인사들은 박헌영,이승엽사건과 56년 ‘종파사건’이나면서 큰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최근 공개된 58년 10월 6일평양주재 러시아대사 푸자노프의 ‘업무일지’에 따르면 “58년 9월 30일 동료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조소앙 선생이 대동강에 투신자살했다”고 기록돼있습니다.사실입니까?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조 선생이 별세하신 것은 58년 9월 10일입니다.별세하실 때까지 조 선생은 상급(장관급) 대우를 받으면서 상(장관)들이 사는평양 흥부동 4호주택에 사셨습니다.별세하실 무렵 선생은 학질을 심하게 앓아 많이 쇠약해 있었습니다.별세 전날인 9·9절 술을 드시고 10일 새벽 대동강으로 산보를 나가셨다가 현기증을 일으켜 물에 빠지셨는데 겨우 정신을 차려 집에까지 오셨습니다.그길로 남산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만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병원에서는 사망원인을 학질로 진단했습니다”●김규식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주십시오. “김 선생께서는 50년 12월 10일 만포 적십자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머리 뒤에 혹이 있고,오랜 숙환이 계셔서 전쟁중에 후퇴하시면서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조완구,김의한(임정요인 김가진의 아들),엄항섭,송호성,유동열(임정 군무부장) 선생 등 다른 임정요인들의 사망시기와 최후도 궁금합니다. “면담에 나오기 전에 신 기자의 질문요지를 전해 받고,남에 있는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에게 제삿날이라도 정확히 알려주어야겠다는 일념에서 한분 한분 돌아가신 날짜를 정확히 적어 가지고나왔습니다(선생은 실제로 약 8쪽의 종이에 자필로 빽빽히 적은 메모를 보여주었다).조완구 선생은 홍명희 부상(차관)의 고모부가 됩니다.평소에도 홍명희 선생이 자주 나와 잘 돌봐드렸는데54년 10월 27일 평양 대성산구역 청암동 자택에서 운명하신 후 홍명희 부상이 주관해서 장례를 잘 치러드렸습니다.김의한 선생은64년 10월 9일 평양시 동대원구역 새마을동 자택에서 운명하셨고,통협 상무위원으로 부상급 대우를 받으시던 엄항섭 선생은 62년 7월 31일 평양에서 별세하셨습니다.통협 상무위원 송호성 선생은 평양 북새거리 자택에서 59년 3월 24일 운명하셨고,유동열 선생은 전쟁중 후퇴하다가 50년 10월 18일 자강도 희천 계선 쌍방골에서 폭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제헌의원 가운데 생존해 계신 분들은 어떤 분들이십니까. “경남 함안 국회의원이던 강욱중 선생은 69년 7월 1일 돌아가셨습니다.역시 제헌의원 출신이신 최태규 선생은 올해 80으로 얼마전 팔갑상을 받으셨습니다.통협 상무위원으로 재직하고 계십니다만 심장이 안 좋으셔서 요즘은 집에서 쉬고 계십니다”●돌아가신 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묘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김규식,조소앙,조완구,오하영,엄항섭,유동렬,최동오,임규섭 선생은 신미리 애국열사릉에,그외 통협 회원들은 신미리와 삼석구역(대성산) 특설묘지에 계십니다.또 통협 결성전에 돌아가신 현상윤(고려대 총장·50년 9월 25일폭격으로 사망),백관수(동아일보 사장·제헌의원·51년 10월 25일 폭격으로사망),정인보(국학자) 선생 역시 삼막 특설묘지에 모셨습니다.정인보 선생의따님은 홍명희 선생의 며느리가 되어 지금 평양 청류동에 살고 있습니다”junyoung@
  • [대한광장] 국민,민족,여성

    일본인 친구들 몇 명이 한국을 다녀갔다.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또 역사를 가르치는 친구들이다.한국에 오기 전,이들은 일본 보수파가 주도한 일장기와 기미가요에 관한 법률제정에 반대하는 지식인모임을 결성하고 인터넷을통한 서명운동과 여러차례의 집회를 개최했다.이들은 글과 정치적 실천을통해 2차대전의 기억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수정주의 사관을 단호하게 비판하고 일본 민족주의의 부활을 우려하는 진보적 탈민족주의의 입장을 분명하게밝힌 바 있다. 우리는 일본과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 늦은 밤까지 비교적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일본 제국주의의 조선과 대만에 대한 식민지 교육사를 전공하는 한 친구는,순배가 꽤 돌자 한국에 대한 솔직한 자기심정을 피력했다.일본에서 일장기에 반대하는 운동을 열심히 펼치다,한국에 와 보니 도처에 태극기 물결이라 무척 당혹스러웠다는 것이다.국기로 상징되는 일본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하고 비판적인 한국 지식인들이 유독 자기나라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이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모양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을 근거로 일본과 한국의 국가주의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이중적 잣대를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것이었다.덧붙여 그는 일제시기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중국대륙에 대해서는 강한 연대감을 표하면서도,정작 같은 식민지인 대만의 민족주의자들은 무시해버리는 일종의 우월의식이 존재한 것같다고 말했다. 제국주의 국가의 좌파 지식인이라는 굴레 때문에 그는 몹시 신중한 표현을사용했지만,나는 그의 지적이 옳다고 동의했다.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이 한국의 국가주의를 자동적으로 정당화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친구는 정신대 할머니의 증언이 일본의 역사학계에 미친 엄청난 파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문서화된 사료가 없다는 이유로 정신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우파 역사학에 대해,할머니의 증언 자체가 바로 사료라는 것이이들의 입장이었다.문서로 된 사료들은 지배자의 입장이 기록으로 남은 것이며,정신대 할머니의 증언이야말로 피억압자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구술된 더중요한 사료라는 것이었다.그것은 곧 실증주의와 역사인식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일본 지식인들의 이러한 진지함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정신대 할머니의 증언에 대한 한국사회의 주된 반응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한분노에서 멈추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일본에서는 2차대전에 참전했던 노병들의 양심선언이 나온 데 비해,한국에서는 정작 동이나 마을 단위에서 정신대를 모집했던 한국인들의 양심선언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한국측 모집책들의 철저한 침묵은 정신대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큰 공백이 아닐 수 없고,일본의 우파들이 정신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정당한 계약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리화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더 중요하게는 정신대문제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조선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착취를 의미할 뿐 아니라,같은 식민지 조선남성의 조선여성에 대한억압과 착취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더욱이 그것은 과거의 기억으로만그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제국주의 역사의 가장 큰 피해자 중의 하나라 할수 있는 이 할머니들에게 무려 50여년 동안이나 침묵을 강요했던 한국사회의 성적 억압구조를 함축적으로 드러내준다.반성해야 할 주체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뿐만 아니라,식민지 조선의남성과 대한민국의 남성들인 것이다. 민족문제의 프리즘으로 정신대의 역사를 바라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또 다른 반성의 주체로서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의 남성들이 생략된다는 점이다. 정신대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한국인 정신대 모집책을 설득하여 그들의 증언을 받아내고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남성국수주의에 대한비판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스스로에 대한 점검과 반성은생략한 채,상대방에 대한 반성만 촉구한다는 것은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林 志 鉉 한양대교수·사학
  • [대한포럼] 미국, 무역적자 타국에 전가말라

    미국이 올해 우리나라에 통상압력을 높일 것으로 전해져 자칫 서두르는 나머지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미국 정부나 업계가 거론하는‘한국 시장의 폐쇄성’도 현실감이 없어 보이고 한국민의 미국 인식만 나빠질까 걱정스럽다. 한국 정부는 내달부터 자동차,제약,철강과 반도체 등에서 미국의 시장개방압력과 싸울 예정이다.우리나라가 지난 2년간 수백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내면서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사실상 졸업하자 미국이 자국 제품을 더 사라고 몰아붙이는 모양이다.미국도 사정이 딱하긴 하다.미국 경상수지 적자가지난해 4·4분기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는 등 97년이후 매년 1,000억달러 이상 급증해 이른바 신경제가 거덜날 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높아진다.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무역장벽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폐쇄적인 시장을 집중 거론한 것을 비롯해 주한미국상공회의소 관계자들도 한국에게 세제개선등 가시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미국이 슈퍼 301조까지 발동해 무역보복을 할 지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점쳐진다.안타까운이유는 미국이 한국 소비자와 시장분석없이 종전과 같은 구태의연한 개방압력에 집착하는 것같아서다. 한국 소비자들의 흥미로운 의식 단면은 최근 정신문화연구원의 조사에서 엿볼 수 있다.19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니고 현재 나이가 30대인 서울대 386세대 중 절대다수인 87.5%는 ‘품질이 좋고 값이 싸다면 국산과 외제를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그러면서도 65%가 ‘기간산업은 국가가보호해야 한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들 서울대 386세대뿐아니라 전국 30대들도 이른바 개인적으로는 외제를 수용하면서도 사회의식은 외세에 보수적인 ‘개방적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40대 이후 세대들은 사실 맹목적인 국산품 애용을 교육받거나 아니면 ‘양담배 피우면 처벌받는다’는 강압적인 문화에 길들어져왔다.따라서 더 보수적으로 ‘그래도 국산품을 써야지’하는 잠재의식이 강하며 기간산업의 국가소유에도 더 찬성한다. 그래도 한국 소비자들의 의식은 서서히 변하고 있다.젊은 소비자들은 미국이 ‘싸고 질좋은 제품’을 팔면 사줄 가능성이 더 높다.정보통신분야에서독보적인 미국의 컴퓨터 장비는 한국기업들이 ‘알아서’잘 사주고 있다.지난해 BMW가 국내 외제차 중 가장 많이 팔린 것을 비롯해 벤츠 등 독일차가호조를 보인 것은 경쟁력과 소비자선택에 따른 것이지 독일 정부의 압력 때문은 아니다.한국의 관세는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며 세금에 관한 한 한국 정부가 고칠 것은 거의 없다.외국인이 한국 기업과 건물을 대량 사도 덤덤하게봐줄 정도로 외국자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상당히 사라졌다. 다만 미국 정부나 기업들은 고려할 것이 있다.한국에는 미국의 부정적인 면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는 386세대가 주력 소비계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또 외환위기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음모론을 여전히 믿고 있는 사람도 있다.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한 기성 세대들은 한국의 경상수지흑자가 줄어들면외환위기가 재발될까 우려한다. 과거 미국은 통상압력에서 총대를 메고 앞장섰지만 ‘재주만 넘고’ 실제이익은 중국과 유럽이 챙겨왔다.외국인이 한국기업들을 인수한 뒤에도 소비자들을 고려해 국내 기업의 간판을 그대로 달게 하는 세심함을 미국은 무역정책에서 본받았으면 싶다. 한국이 이제 막 외환위기를 벗어난 시점에서 억지로 미국제품을 사라고 하면 미국정부와 미국 제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높이게 될 것이다. 미국은자국내 경기 활황으로 늘어난 경상수지 적자를 외국으로 넘기려 하지 말고국내 경기를 안정시키는 데 더 힘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李商一 논설위원]bruce@
  • 4·13총선 D-2/ 디지털선거운동 각축전

    ‘젊은표를 잡아라’-4·13 총선의 최대 변수인 20,30대 유권자의 표심(票心)을 잡기 위한 후보간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젊은 인터넷 세대를 겨냥한 신종 ‘디지털 선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종래 확성기와 거리유세 중심의 선거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있다.일부 후보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안방 유권자에게 홍보용 동영상을전달하거나 합동유세 장면 등을 생중계하고 있다. 화상통신을 이용,20대 네티즌과 채팅을 벌이는 사례도 등장했다. 인천 남동갑에 출마한 민주당 김용모(金容模)후보는 홈페이지에 ‘동영상선거유세’ 코너를 마련,유권자를 상대로 정책과 지역발전 공약을 설명하고있다.또 홈페이지와 일부 선거방송 사이트를 연결,유권자들이 전국 곳곳의유세현장을 생생한 동영상을 통해 시청할 수 있도록 했다.인터넷 방송의 영화채널과 각종 오락 관련 사이트도 접속시켜 젊은층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 마포갑의 한나라당 박명환(朴明煥)후보는 상대 후보의 홈페이지 운영에 뒤질세라 젊은층의 선거참여와 지지를 호소하는 동영상을 내보내는 등 ‘디지털 경쟁’이 한창이다. 서울 종로의 민주당 이종찬(李鍾贊)후보는 화상통신을 이용,선거구내 20대젊은 유권자와 채팅을 나누면서 투표 참여를 당부하고 있다. 인천 남동을에 출마한 자민련 박태권(朴泰權)후보는 N세대의 표심을 잡기위해 지역 인터넷 방송의 사이트를 홈페이지와 연결,후보간 정책토론회 전과정을 동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울 강남을의 자민련 김태우(金泰宇)후보는 선거구내 고학력 30대 유권자를 공략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민족주의 핵전략 박사의 핵주권론 이야기’코너를 마련,핵관련 정보를 알기 쉽게 전달하고 있다.전북 전주덕진의 민주당 정동영(鄭東泳)후보는 거리인사나 유세현장의 모습을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홈페이지의 ‘영상으로 보는 총선일기’코너를 통해 동영상으로 제공하고 있다.특히 정후보는 ‘사이버 유세와 로고송’ 코너를 통해 네티즌 유권자가 육성과 로고송 등을 직접 다운(down) 받아 실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난 9일 출마 지역구 후보 8명의 합동연설 장면을 홈페이지로 생중계한 무소속 이달원(李達源·서울 노원을)후보는 “이번 총선에서 새롭게 정착되고있는 디지털 선거운동은 21세기 전자민주주의의 시작이며 유권자 중심의 선거문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장택동 이상록기자 taecks@
  • ‘한국사 2000년’ 디지털화 결실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사의 대표적인 기록물을 모두 CD-ROM으로 제작,학계에 보급해온 한 업체가 ‘사상계’의 CD-ROM 출시로 ‘2천년한국사의 디지털화’의 마무리 작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이 업체는 해적판과 복사판이 기승을 부려 수익성이 거의 없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사의 소중한 기록들을 지속적으로 CD-ROM으로 제작,보급해 학계의 연구활동과 자료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방미디어(회장 이웅근)는 이달 중순 고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시사 월간지 ‘사상계’(총205권)를 6장의 CD-ROM에 담아 출시할 계획이다.1953년 4월창간된 ‘사상계’는 50,60년대 지식인과 학생층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당대의 대표적 시사잡지.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저항적·비판적 논조를 펴오던 ‘사상계’는 70년 5월호에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賊)’을 게재한 것이문제가 돼 폐간처분의 비운을 겪었다. 이번에 제작된 CD-ROM은 ‘사상계’ 원본을 영인본 형태의 이미지 데이터로구성한 것이다.모두 1만240편의 글에 필자는 3,361명,총 페이지는 6만8,297쪽 규모다.제작진은 “‘사상계’ 원본수집과 낙장 보완을 위해 1년여 동안전국을 뒤졌으며 소유권을 놓고 갈등중이던 유족으로부터 어렵게 양해를 받아내 제작을 성사시켰다”고 말했다. 이웅근 회장은 “‘사상계’는 해방후 한국의 정치·사회·사상사를 집약한한국지성사의 결정판으로 해방후 한국문학사를 집대성한 ‘창작과 비평’과함께 2000년 한국사의 마무리편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지난 67년 사상계사의 신인논문상 입상을 계기로 폐간직전 잠시 이곳에 근무한 적이 있는김삼웅 대한매일 주필은 “‘사상계’는 민족주의자 장준하 선생의 혼과 사상이 담긴 결정체”라며 “‘사상계’와 같은 정론지가 필요한 시점에 선배지식인들의 글을 모아 CD-ROM으로 출간한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라고말했다. 한편 동방미디어는 95년 조선 태조∼철종까지의 ‘조선왕조실록’을 1장의CD-ROM에 담아 보급한 것을 시작으로 ‘고종순종실록’(98),‘삼국사기’(99),‘창작과 비평’(99·창간호~통권100호)‘고려사’(2000) 등 한국사의 대표적인 공(公)기록물들을 CD-ROM으로 제작해왔다.최근에는 대상을 넓혀 ‘한국식물도감’‘신동의약보감’ 등을 비롯해 조선시대 생원·진사시험 합격자들의 신상명세를 담은 ‘사마방목(司馬榜目)’을 출시한 바 있으며 조선시대법전인 ‘경국대전’과 ‘한국조류도감’‘한국수목도감’‘갯벌생물도감’등 한국학 전반을 CD-ROM에 담을 계획이다. 이성무 국사편찬위원장은 “방대한 실록을 그동안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읽느라 숱한 세월을 허비했는데 ‘진작 나왔더라면’ 하는 생각마저 든다”며 한국학 관련 고문헌 자료의 CD-ROM출간을 반겼다. 정운현기자 jwh59@
  • 한상진원장 ‘386세대의 가치관‘토론회 기조발제

    ‘386세대는 누구인가?’ 여야를 막론하고 이번 총선에 대거 출사표를 던진 ‘386세대’에 대한 첫학문적 분석결과가 나왔다.그동안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컸으나 객관적분석자료가 없어 정치적 담론이 구체화되지 못했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원장 한상진)은 7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386세대의 가치관과 21세기 한국’을 주제로 공개토론회를 개최했다. 한 원장은 기조발제를 통해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현재 30대인 386세대들은 광주항쟁·6월항쟁을 거쳐 성장한 세대들로,비판성향이 강하고,합리적·민주적 절차를 중시하는 특성을 가진 집단”이라고 말했다. 한원장의 이같은 언급은 정문연이 최근 지난 81년부터 89년까지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였던 한원장의 수업을 들은 학생 1,200명으로부터 생애사적보고서를 제출받아 분석,평가한 데 따른 것이다. 조사결과에 따르면,이들은 광주항쟁 이후 강압적 정치상황 하에서 정규 교과과정 보다는 학회 활동이나 이념서적을 더 열심히 공부하면서 대학생활을보낸 것으로 나타났다.386세대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응답자의 75%가 ‘자신들은 소외된 약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다른 어느 집단보다 강하다’고 대답한 대목이다. 한 원장은 “이들은 학창시절 상류 기득권층을 행위준거로 삼기보다는 사회의 주류에서 소외된 약자,즉 민중에 대한 애정과 이들의 권익신장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며 “이는 386세대의 큰 도덕적 잠재력”이라고 평가했다. 386세대들은 우리사회 전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우선 가사노동 분담,여성의 정치참여 등 여성문제에 대해 우호적일 뿐더러 효도,의리,경로사상,선비정신 등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높이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문화 개방이나 외제상품 수입 등에 대해서는 ‘개방적 민족주의’의 경향을 보이면서도 영어 공용어 채택에 대해서는 72%가 반대했다. 응답자들이 밝힌 내용 가운데는 부정적인 것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20대에 비해 전문성이 없다’(45.8%),‘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과잉의 경향이 있다’(76%),‘위선적이다’(24%) 등이 그것이다.한 가지 주목할만한 것은 386세대의 60%가 자신들도 지역·연구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고백한점이다. 한 원장은 “향후 10년내 한국사회에는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으로전망된다”면서 “중산층 안에서 성장한 시민의 역할이 신장되면서 386세대가 16세기 사림(士林)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조사는 386세대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서울대 386세대에 대한 보고서라는 점에서 일반화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정문연측은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쉽게 읽기] 실크 로드와 한국 문화

    ‘아시아 나라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본 한국 문화의 형성’이라는 부제가붙은 ‘실크 로드와 한국 문화’의 발간은 여러모로 반가운 일이다.전통 문화 교류의 다양한 연구 성과가 결집되어 있는 이 책을 펼치는 독자들은 무엇보다 한국 문화의 원류와 특징에 대한 풍부한 자료들,예컨대 음악,무용,복식,음식,건축,조각,역법 등등 예술사와 민속 문화사를 구성하는 풍성한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그러나 이 책이 이런 자료들을 단순하게 나열하여 제시했다면 ‘갇힌 공간에서 바라보는 시간의 박물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이책이 반가운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자료들을 문화 교섭의 측면에서,즉 ‘열린공간’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한국의 고유한 문화라고 믿어졌던 것들이 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한 교섭의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주장인데,이는 고대 세계가 지금의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국제화되고 세계화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특히한국 문화가 중국 일변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인도,이슬람, 북방,남방 등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변용과 재창조의 과정을 거쳤다는주장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실크 로드는 그 대표적인 네트 워크다.그러나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실크 로드는 ‘유일한 경로’가 아니라 상징적인 통로일 뿐이다.스텝 루트,오아시스 루트,바닷길 등 다양한 통로를 함축하는 기호인 것이다.한국의 전통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이 그만큼 폭넓게 열려 있었다는 의미다.실제로 책 속에는 다양한 경로,다양한 방식이 문헌 고증과 함께 생생한 사진 자료들을 통해 실증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비교 문화와 지역학을 전공하는 중진·신진 학자들이 모여 통합학문적 연구를 지향할 목적으로 쓰여진 이 책은 단일 민족 단일 문화를 주창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한 환상에 대한 경고의 성격이 짙다.아득한 고대 세계에도 우리 문화는 지속적인 교류의 과정을 통해 성장했으며 배타적 독립성을고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사계를 대표하는 12명의 집필진과 2명의 서평 담당자들이 견지하는 입장은 우리 문화에 대한 보다 넓게 열린 시각을 한결같이 요구하고있다. 그러나 우리 문화가 열린 구조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성장해 나가면서도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그것은 이들만의 주장이 아니라 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제사 음악에 대해 중국 음악을 고집하고 우리 음악을 버리려고 하자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우리 음악이 중국 음악에 비하여 부끄러울 게 없다.조상들이 살아서는 우리 음악을 들었는데,죽어서는 중국 음악을 듣게 되니 어찌된 일인가”(전인평의 ‘인도 음악과 한국 음악’에서) ‘세계화’와 ‘한국적인 것’사이에서 고민하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소나무 펴냄.값 3만원(CD포함). [윤 재 웅]◆윤재웅님 약력▲동국대 국어국문과 졸(문학박사)▲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91년) ▲저서:‘미당 서정주’ ‘문학비평의 규범과 탈규범’▲현 동국대·선문대 강사
  • 클린턴 서남아시아 순방/ 美,核경쟁 억제·관계개선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19일부터 6일간 서남아를 순방하고 있다.이번 방문의 목적은 이 지역에서 초래되고 있는 핵군비경쟁을억제하고 소원했던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이곳은 인도와 파키스탄간 핵무기 경쟁과 카슈미르를 둘러싼 영토분쟁으로인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불리는 곳이다.미 대통령이 방글라데시를 방문하는 것이 처음인데다 인도는 22년만에,그리고 파키스탄는 30여년만에 이뤄지는 공식방문이어서 역사적인 의의도 자못 크다. 클린턴 대통령의 이 지역 방문은 사실 지난해부터 계획된 것.그러나 인도·파키스탄 양국의 카슈미르 지역을 둔 긴장상태가 고조되고 양국이 핵무기 비확산이라는 국제추세를 무시한 채 핵실험을 실시하면서 미국은 양국과 거리를 둬 방문이 연기됐다. 방문의 목적과 방문이 연기된 이유가 같은 상황 때문인 것은 아이러니라 할수 있다.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부터 어정쩡하게 그어졌던 히말라야산자락의 카슈미르지역 국경선분쟁은 수년전부터 더욱 거세졌다. 98년 파키스탄에 으름장을 놓기 위해 인도가 핵실험을 전격 실시했으며,이어파키스탄도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실험을 강행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따라서 이번 방문 기간 동안 인도·파시스탄 양국에 포괄적 핵실험금지 조약(CTBT)가입을 촉구,핵위험을 낮추려 노력하는 한편 핵프로그램 제한,분열성물질 생산중단 및 수출규제 등 핵관련 개발 억제를 논의한다. 핵개발등 군사위협이 시작된 원인이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싼 갈등인 만큼양국과 이 지역분쟁 해결을 위한 방안을 심도있게 논의하는 것도 일정의 중요한 부분이다.그러나 수십년간 분쟁이 지속돼 입장차이가 큰 카슈미르 문제를 중재하기 위한 클린턴 대통령의 노력이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클린턴 대통령이 방문지로 출발하기 전 인도의 바지파이 총리는“우리 안보에 관한한 어떤 외부 압력도 배격하고 우리 스스로 결정할 것”이라고 밝히는가 하면 자스완트 싱 외무장관도“그동안 경험에 비쳐볼 때 제3자의 어떠한 개입이나 중재도 실패했다”며 중재노력에 한계가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클린턴 방문시인도내에서 “클린턴에게 죽음을,다국적 기업의 제국주의에죽음을”을 외치는 목소리가 거센 것도 양국 민족주의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드러낸다. 비록 인도·방글라데시·네팔지역 청정에너지 개발을 위해 5,000만 달러의원조를 비롯,방글라데시 식량지원을 위한 9,700만 달러,삼림보호를 위해 600만 달러,그리고 어린이 식량구호를 위해 1,400만 달러등 원조도 들고 왔지만결과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hay@. *印·파 軍備경쟁 어디까지. 인도와 파키스탄은 1998년 경쟁적으로 지하핵실험을 실시,서남아시아에서의군비경쟁 우려를 낳았다.그리고 그 우려는 인도가 내년도 국방예산을 28.2%증액시킴으로써 가시화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70년대부터 핵군비 경쟁을 시작,30여년간 계속해온 만큼상당량의 핵탄두와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아직 양국이 보유한 핵미사일이나 탄두의 정확한 숫자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서남아시아에서의 핵경쟁은 인도가 먼저 시작했다.인도는 1967년 핵무기 개발프로그램에 착수,1972년 첫 핵실험을 실시했다.얼굴을 맞대고 있는 중국의핵무기 개발이 계기가 됐다.그러나 인도의 핵실험은 파키스탄에 연쇄반응을낳았다.파키스탄은 70년대 중반 핵무기개발 계획에 착수,80년대 중반 핵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했다.양국의 핵군비 경쟁은 지금까지 평행선을 그어왔다. 그 결과 인도는 파키스탄의 어떤 곳도 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 2,500㎞ ‘아그니II’ 미사일 시험발사를 마친 데 이어 중국의 베이징까지 공격할 수있는 사정거리 3,500㎞의 ‘아그니III’ 미사일도 개발중이다. 파키스탄 역시 사정거리 2,000㎞의 ‘가우리II’미사일 시험발사에 이어 3,000㎞의 ‘가우리III’의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98년 각각 5월 중순과 5월 말 경쟁적으로 핵실험을 실시했고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게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핵실험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에 가입하지 않고 있고 핵관련기술의 타국 이전을 금지하는 핵확산방지조약(NPT)에도 서명하지않고 있다 인도는 올해 핵억지전력 확충을 위해 국방예산을 28.2% 증액하겠다고 지난달 발표,국제사회의 압력에 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파키스탄 역시 인도만큼은 되지 않더라도 충분한 ‘핵미사일’을 보유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어양국간 핵군비 경쟁은 끝이 없어 보인다. 박희준기자 pnb@
  • [기고] 베를린 선언과 통일문제

    김대중 대통령이 9일 발표한 ‘베를린 선언’에 북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주시되고 있다.남한뿐 아니라 한반도의 냉전구도 해체를 원하는 거의 모든나라들이 북의 긍정적인 수용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북한이 당면한 최우선과제는 안전보장과 파탄된 경제회복이며 나아가 민족의 지상과제인 평화통일이다.이 모든 것이 남측의 협조없이는 원활히 이뤄질 수 없다.북의 국가안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과의 국교정상화 교섭에 있어 한국정부와의 관계증진이 필수 전제조건이다.북의 경제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북·일수교와 이에 따른 경제적 보상도 한국의 적극적 참여와 대일 촉구없이는 실현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전 한국정부가 주장한 당사국인 한국정부를 앞지르거나 제외한 양국 관계의 진전을 반대해온 소위 ‘병행과 조화의 원칙’의 부정적 기능이 이를 잘보여주고 있다.물론 지금까지 북의 주장과 원칙으로 보아 이번 선언이 미흡한 점이 없지않다.선언은 ‘경제규모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크고 부유한 서독이 엄청난 통일비용으로 아직도 어려움이 있는데,그에 비해 한국경제는 북한을 떠안을 능력이 없다….이런 문제들을 그대로 둔채 통일을 서두른다는 것은 무리이며 따라서 가장 합리적인 정책은 당장 통일을 추구하기 보다는 한반도에 상존하고 있는 상호위협을 해소하고 남북한이 화해·협력하며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것으로,통일은 그 다음의 문제’라고 했다. 한편 북은 그동안 ‘남북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의 근본원인이 분단에 있고,분단상태가 종식되지 않는한 전쟁의 위협은 상존하며,국력의 낭비를 막고국제사회에서 떳떳이 역할하기 위해서는 통일이 최 급선무’라고 주장해왔다.그리고 두개의 상이한 체제공존의 성공적인 예로 중국과 홍콩을 들었다.알려진 바와 같이,중국 본토와 홍콩 사이에는 이전과 다름없는 격리 경계구조가 그대로 있고 그 출입은 사증에 의하여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통일비용문제는 쌍방의 가능한 능력범위 내에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며,자존심 강한 북이 통일 제안에 있어 낙후한 경제나 사회간접자본 비용을 남측이 부담해야 한다든지,단시일내로 남측과 동등한 생활수준으로 해줄 것을 요구한다든지 하지는 않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 김대통령은 95년 국가연합,연방,완전통일의 ‘3단계 통일론’을 발표하였다.그동안 예기치 않던 북의 가뭄,홍수,남의 IMF 사태 등이 있었다.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은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통일을 이루었다.신라의 통일이 그렇고,왕건의 고려통일이 그랬다.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있을 때 탁월한 지도자가 통일에 대한 의지와 신념을 구체화하고 단결된 국민들을 분기시켜 민족의 역사적 소명을 달성할 것을 국민은믿고 기대한다. 지금은 국제화시대다.숙명적으로 가까운 이웃으로 싫든좋든 영원히 같이 살아가야 하는 일본과 대등하게 교류한다는 것은 현재의 분단상태로는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기대하기 어렵다.편협한 국수 배타적인 민족주의가아니라 인구팽창,식량,자원부족 등의 준렬한 환경아래 타국에 의존하지 않고,떳떳이 살기 위해 통일은 기필코 달성되어야 한다. 김정일 총비서가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했고 백남순 외무상의 중국방문이 18일로 예정돼있으며,가까운 시일내에 김 총비서의 중국방문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북미고위급회담을 위한 준비회담이 뉴욕에서 진행되고 있으며,북일수교회담이 다음달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다.북한은 이탈리아와 수교했고,유럽연합,호주,필리핀,캐나다 등 서방국가와 외교 다변화,러시아와 관계회복 등 외교노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는 무수한 외침에 저항한 끈질긴 투쟁의 역사이다.우리 조상들은 소의 꼬리로 안주하기 보다 작더라도 닭의 머리로 남기를 결심했다.정치는 타협이다.다소 미흡하더라도 대승적인 입장에서 북이 베를린선언을 수용하기 바란다.한반도 운명 개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타국이 아닌 우리 민족자체이기 때문이다. 손장래 前말레이시아 대사
  • [대한시론] 미술관과 큐레이터

    근자에 우리의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문화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늘어나면서 일반인들의 예술전반 특히 미술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져가고 있다.또한인터넷의 보급으로 시공간적인 제약이 극복되면서 문화향유의 대중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비록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세계 유수의 미술관은 물론이고 군소 갤러리에 있는 작품까지 인터넷을 통해 살펴볼 수 있으며 관련 정보역시 풍부하게 제공되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더불어 세계 각지의 대도시는 물론 중소 도시에까지 미술관이 생기고 있으며,우리나라에도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맞물려 대규모의 공공미술관이 지역마다 건립되고 있고 또한 미술 관련 각종 비엔날레나 엑스포 등이 경쟁적으로 열리고 있다.과연 미술관의존재와 위상은 이제 지역과 나라의 문화지수의 척도가 된듯한 느낌이다.그런데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현상이 무조건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우리는 흔히 문화를 공연이나 전시 등 가시화된 행사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행태와 가치관 또는 의식과 생활습관 등모든 것이 어우러져 문화란 것이 형성되며 그것은 한 집단의 예술 활동이나산물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따라서 문화는 큰 미술관을 짓고 국제행사를 유치하고 볼거리를 마련하는 잔치로 이루어지거나 유지되는 것은 아니며 이런 하드웨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연히 그 내용을 채우는 소프트웨어와 그를 제시하는 방법이다.이런 관점에서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있게 생각해봐야 한다. 당대를 흔히 탈식민지 시대라고 하지만 과거 구미 열강의 식민지였던 많은나라들은 자국의 문화를 과시하기 위해 앞다투어 미술관을 건립하고 있다.현대적 의미의 미술이나 미술관은 모든 인류에게 본질적인 것이기 보다는 특정한 시대의 상황과 요구의 산물이다.그것은 세속화된 지식이 종교를 대신하기 시작한 18세기에 서구 자본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탄생했지만 현재는 탈식민주의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전 지구적으로 예술이 없이는 종족이나 민족을 논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결과적으로예술품을 수장하고전시하는 미술관을 통해서 총체적인 미술의 의미가 규명되고 예술은 서구 헤게모니의 보편공용어가 되었다는 지적이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기원이야 어떻든 간에 한 나라와 지역을 소개하고 정체성을 규명하는 중요한 잣대로서 미술관은 필요하다.그러나 건축물의 형태나 구조를 비롯하여 전시공간과 방법이 서구 중심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다.작품들은 일단 사각형의 공간 안에 들어오면 일상과는 유리된 특별한 전시효과를 얻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며,이런 효과는 비슷비슷한 미술관 건물이라는하드웨어에 작품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비슷비슷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반복되고 고착된다. 이런 서구중심의 미술관 문화가 각기 다른 작품의 현장성과 문화의 이질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형식과 구조가 비슷하더라도 내용물만 다르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발상은 미술관이라는 제도권에 내재한 이데올로기의 효과를 과소평가하는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미술관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학예사 또는 큐레이터라는 직종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부쩍 높아져서 관련학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이제껏 아무런 자격제한 없이 비전문가가 미술관의 행정과 전시를처리해온 관행을 정부가 바로 잡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도 이런 현상과무관하지 않다. 관계법령이 현재 다듬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우선 유념할 것은 박물관과 미술관은 서로 다르며 미술의 전시기획을 담당하는 학예사는 그밖의사업 즉 경영이나 행정을 맡는 사람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이미 간략하게 근본적인 문제를 언급했지만 전시담당 학예사는 미술의 본질과 역사에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며,미술관과 그 전시가 미술사 기술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현 상황에서는 폭넓은 미술사적인 지식과 깊이있는 인문학적인 배경,그리고 현장경험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이 미술관 큐레이터를 단기교육으로 취득할수 있는 학점이나 기능 위주의 자격시험으로 간단하게 평가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이다.따라서 자질있는 전문 큐레이터를 육성하기 위해서는자격심사의 기준을 높이는 구체적인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어차피 미술관이나 큐레이터는 서구문화의 산물이다.그러나 이 모델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결코 외면하지 말아야할 것은 그 요구사항의 엄격함과 세심함이다. 강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 오늘 이동녕선생 60주기…되돌아본 업적

    지난 96년 5월17일 15대 국회 개원을 며칠 앞두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한 역사적 인물의 흉상 제막식이 거행됐다.국회의사당 내에 특정인의 동상이 건립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흉상의 주인공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현 국회)의 초대 의장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1869∼1940)선생.국회가 선생의 동상을 의사당 내에 건립한 것은 상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아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해방 때까지 선생은 임정의 ‘기둥’ 역할을 했다.임시정부 공식출범 직전인 1919년 4월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 ‘대한민국’과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 후인 4월13일 이를 만천하에 공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 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정의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기록이다. 1869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이준·이승만 등과 함께 7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대한문 앞에서 항의 연좌데모를 벌이다 또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1907년 양기탁·유동열·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한 선생은 1910년 국권 상실 후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 교장에 취임,군사교육을 통한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국내는 물론 만주·노령(露領)·중국 등 국내외에서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은 일제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지조를 지켰다.또 임정 내 이념·계파간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동지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은 때문이다.백범 김구(金九)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선생은 재덕이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한편 선생의 여러 분야에 걸친 활동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언론계활동이다.1897년 ‘독립협회사건’으로 투옥,이듬해 출감한 선생은 당시 이종일(李鍾一)이 경영하던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설을쓰기도 하였으며,1907년 신민회 조직 후에는 당시 구국항일지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을 지원하기도 했다. 정운현기자 jwh59@. *이동녕선생 60주기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석오 이동녕(李東寧)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13일 오후 2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린다. 석오이동녕선생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상동교회이동학 목사의 추모기도를 시작으로 인하대 윤병석 명예교수의 약사 보고,추모·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 분향 순으로 진행된다.추모식에는 최규학 국가보훈처장,고건 서울시장,윤경빈 광복회장,박유철 독립기념관장,유족대표 이석희 (주)대우 상담역을 비롯해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다. 정운현기자. *석오 이동녕선생 60주기에 즈음하여. 선열의 유지가 날로 퇴색되는 개탄스런 시기에 석오 이동녕 선생의 60주기를 맞음은 실로 감회가 새로울 뿐 아니라 나라와 겨레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 20대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앞날이 보장되었음에도 모든 영화를 버리고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로 뛰어든 것은 선생의 혁명적인 기질이 짙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선생의 독립투쟁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눈보라치는 만주벌판,얼음땅 시베리아,연해주,그리고 황야의 중국대륙에 이르기까지 수륙(水陸) 수만리를 뛸 만큼 웅장하고 방대한 발자취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우리 민족운동사에서 선생의 높은 위상은 가난과 무지에서 방황하던 암울했던 구한 말 뛰어난 문필로 여성해방운동과 민권사상을 주창했던 선각자였다는 데서 더욱 그렇다.이같은 민족사상의 맥락은 이미 3·1의거 직전 만주땅길림성에서 이른바 ‘무오(戊午)독립선언’에 앞장섰던 기개에서도 찾을 수있다.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초기 선생은 초대 의정원 의장으로서 역사적인 민주헌법 제정에 앞장섰는데 이는 선생의 투철한 민주사상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임시정부 주석 4차례,의정원 의장 3차례 등 총 7차례에 걸쳐 임시정부의 대임을 맡는 동안 선생은 항상 온화한 성품으로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독립운동의 열기가 한창이던 1910년대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인재양성이시급함을 통감하고 남만주 해외망명기지에서 최초의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에 손수 출자하여 동지들과 운영하였다.또 최초의 군사학교인 ‘신흥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에 부임해 후일 대한광복군의 초석을 다졌다.선생의 이같은 교육적인 열정은 멀리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군 사관학교를 세우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선생은 평소 덕행과 예절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당시 친러파와 친일파 간의 사상적 갈등,각 지방 파벌 간의 혼란 속에서도 선생은 초연한 입장에서 민족진영의 단합체인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수한 ‘터줏대감’이었다.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조선총독 사이토가 한국인 관리를 중국에 밀파,선생의 귀화를 적극 권유하였으나 일제의 유혹을 끝내 물리쳐 선생을두고 ‘불멸의 민족혼’으로 칭송하고 있다. 선생은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는 자리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이를 중재하고 수습하였는데 이는 겸손과 높은 식견을 갖춘 선생의 영도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고 동지들이 증언하고 있다.선생을 두고 ‘민족운동의 선구자’이자‘임시정부의 총수’라고 일컬었던 것은 강직한 성품과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사상,그리고 애국철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겠다.선생은 항상 남을 존중하고 남을 앞세우며 자신은 뒷전에서 도와주는 미덕의 소유자였다. 임시정부 시절 선생은 해외로 망명하기 전 서울 상동(尙洞)교회에서 기독교에 입교해 전덕기 목사를 알게 된 것을 늘 행복해 했다.또 그 시절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최초의 항일조직인 신민회를 창건한 사실을 몹시 그리워했다고전해오고 있다.1940년 선생은 조국광복을 불과 5년 앞두고 이역만리에서 향년 72세로 서거하였다.독립운동의 와중에서 참아왔던 지병인 급성폐렴이 악화된 탓이었다.선생은 유언으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정당의 통합’을남겼다.선생의 장례는임시정부 수립 후 첫 국장으로 예우하였으며 해방 후백범 김구선생의 지시로 유해가 봉환됐다.오늘 선생의 60주기를 맞아 선생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그 큰뜻을 되새긴다. 김석영 이동녕선생 기념사업회 상근부회장
  • 계간 ‘역사비평’ 통권 50호 나와

    ‘역사연구의 대중화와 새로운 역사인식 정립’을 표방하면서 출발한 계간‘역사비평’이 2000년 봄호로 통권 50호를 맞았다.학문풍토가 척박한 여건에서 인문사회과학 전문지가 10년째 체제나 내용은 물론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나왔다는 것은 대견스런 일이다.특히 ‘역사비평’이 그간 우리 역사학계에서 거의 ‘무풍지대’로 남겨져온 근·현대사나 금기인물은 물론 당대사까지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번 기념호는 ‘일본 천황제와 과거청산’,‘역사와 시간’ 등 2개의 특집을 실었다.일본천황제 특집은 2002년 월드컵 개최에 앞서 방한예정인 일왕의존재가 우리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되짚어본 것이다. 역사와 시간 특집은 세천년을 맞아 시간의 문제를 역사와 결부시켜 되돌아본 것으로 나라마다 다른 ‘시간’의 개념이 근대 들어 서양·기독교 중심으로 기울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특별연구 ‘대원군과 서양’은 대원군이 과연 쇄국론자였는지를 따져보고있으며,집중기획으로 ‘피억압 민족과 민족주의’‘전근대 동아시아 질서와한국’을,권두시론으로는 국민대 조동걸 명예교수의 ‘개혁·통일·복지의 100년이 되어야 한다’가 실려 있다.통권50호 기념으로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을 별책으로 준비하였다.값 9,000원. 정운현기자
  • [대한광장] 국악 단상

    15년 전,휴학을 하고 입대할 무렵까지 한해 동안 나는 국악에 빠졌다.최고의 드러머를 꿈꾸던 10대 시절 이후 록음악 일변도의 취향을 가지던 내가 국악을 가까이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뭐였는지는 이제 가물가물하다.FM에서 흘러나오던 단소 소리에 인상을 받은 일이 그 시작이었을까.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당시 내가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학생운동권에 이른바 민족해방진영 즉, NL이 등장한 것은 80년대 중반의 일이지만 나와 같은 80년대초 학번의 대학생들은 진작부터 반미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그것은 물론 광주 때문이었다.광주는 그간 우리가 목표로 한 세상이 고작 ‘건전한 미국령’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고 세상을 바꾸는 일의 차원에 대해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대학에 들어가 첫 축제때,초청받은 록그룹이 무대에 오르자마자 “양키 문화 물러가라”는 야유를 받으며 쫓겨나는 광경을 보며 나는 드럼이나 록음악에 대한 관심을 매우 사적인 차원으로 단속하게 되었다.그런 음악은 적어도반미 민족주의가 지배하던 나의 대학시절 동안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그러나 당시 우리가 선택한 한국 전통음악이란 사물 위주의 농악뿐이어서나의 음악적 갈증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그 한해 동안 나는 늪에 빠져들 듯 서서히 국악에 빠져들었다.처음엔 단소처럼 맑고 청아한 소리가 좋았지만 이내 대금의 깊고 드라마틱한소리를 이해하게 되었다(알다시피,대금엔 가운데 부분에 청공이라는 큰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은 갈대 속청으로 덮여 있다.특히 고음부에서 그 갈대 속청이 찌이 울리면서 내는 장쾌한 소리는 대금의 묘미지만 처음 들을 때는 좀거슬리기도 한다). 입대하면서 나는 국악과 멀어졌는데 한국 군대라는 데가 일개 사병이 국악이라는 ‘별스런 음악’을 듣기엔 적당치 않은 곳인 데다 내가 다시 드럼을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휴가때면 입대 직전 막노동을 해서 사두었던 대금을 꺼내 어루만지곤 했지만 어쩐지 나는 국악에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제대후들어간 문화운동단체에선 드럼이나 일렉트릭 기타 같은 악기들을 주요하게쓰고 있었다.오래전 야유를 받으며도망치던 록밴드를 떠올렸지만 세상은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 15년이 지난 요즘 나는 다시 국악을 듣는다.요즘 나를 사로잡는 음악은 무속음악과 노동요들이다.15년 전 이른바 민중의 시대에 내가 영산회상 같은선비들의 음악에 빠진 일이나 민중을 외치던 청년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오늘 민중의 음악에 빠지는 일은 시대를 거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건 나는 어떤 실용주의적인 이유도 아닌 그저 나에게 기쁨을 주는 음악인 국악에 자연스레 빠져들 뿐이라는 점이다. 박병천이나 김대례,김석출 같은 이들의 굿음악을 들으면 내 영혼이 정화되고 부질없는 욕망들(욕망은 우파의 독점물이 아니라 인간의 독점물이다)이사그라드는 기쁨을 느낀다.‘뿌리깊은 나무’에서 채록한 여러 지방의 아리랑들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이다.요즘 나는 그런 무속음악과 노동요에 레드제플린이나 레이지 어게인스트 머신,메탈리카 같은 쉽고 강한 록을 곁들이는것으로 최상의 음악적 균형을 얻고 있고 이따금씩 전율을 느끼는 일 또한 국악에서도 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리 오랫동안 국악에서 멀어졌던 정확한 이유가 뭔진 잘 모르겠다.생각나는 것은 내가 ‘서편제’라는 영화를 정점으로 외쳐지던 ‘우리것’ 캠페인에 질려 했다는 점이다.나는 국악을 우리 음악이라 듣는 게 아니다.단언컨대 지난 15년 동안 온갖 음악들을 부유하던 내가 다시 국악에 빠져드는 이유는 이 음악이 국적과는 상관 없이 그저 최고의 음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국악에 관한 한 ‘우리것’이라는 캠페인은 어떤 손색도 없는 고유한한 음악을 비참한 동냥아치로 만드는 일일 뿐이다. 김규항 아웃사이더 편집주간
  • [서유럽에 극우바람] 분리‘차별주의 기치 입지 넓힌다

    *배경과 실태. 서유럽에 극우(極右) 바람이 불고 있다.회원국 확대를 꾀하고 있는 유럽연합(EU)은 분리·차별주의를 지향하는 극우세력의 입지 확대에 쐐기를 박으려고하지만 그들의 꿈틀거림은 계속되고 있다. 바람은 알프스산맥에서 먼저 불고 있다.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다.두 나라는 지난해 10월 선거에서 극우 정당으로 분류되는 인민당과 자유당을 각각제 2당으로 올려놓았다.스위스 인민당은 독일어권인 스위스 동부지역에서의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유권자의 22.5%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오스트리아의자유당은 27%의 높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사민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중앙 정치무대에서 당당히 활동하게 됐다. 자유당의 연정 참여는 나치의 악몽에 시달렸던 EU 회원국들을 경악시켰다.EU 15개 회원국들은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관계 단절까지 검토하고 있다.이는자유당이 EU 확대,단일통화,이민자 반대 등으로 통합과 조화를 지향하는 EU의 정책에 반대해왔기 때문이었다. 나치당은 게르만민족의 우월성에 입각한 반유태주의와 팽창주의를 지향했다.유태인 학살은 인종차별의 당연한 결과였다.최근 입지를 확대하고 있는 극우정당들은 나치의 인종차별주의의 아류인 ‘외국인 혐오’‘이민 반대’를생명으로 삼는다.EU 등 국제기구 반대와 내국인 우대 정책 지지도 공통적인특징들이다. 하이더 당수의 경우 지난 선거에서 이민자 유입을 ‘외국인 침투’로 표현했다.나치가 2차대전 당시 만들어낸 용어였다.그는 또한 외국인들을 ‘범죄자’라고 연설에서 자주 언급했다.스위스 인민당의 크리스토퍼 블로허 당수도 이민자 반대 등을 내걸어 효험을 본 케이스다. 이탈리아 북부연맹도 롬바르디아 등 북부지역의 분리독립,외국인 이민 및 EU 단일통화에 반대를 내걸고 있다.북부연맹의 움베르토 보시는 오는 4월 북부지역 선거를 앞두고 하이더식의 부상을 꿈꾸며 중도 우파인 포르자 이탈리아당과 연대를 꾀하고 있다. 벨기에의 극우정당인 플레미시 블록은 플랑드르 지역의 분리독립과 이민 반대를 내세운다.필립 드윈터 당수는 나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지만이민 중단과 내국인 우대를 표명하고 있다.그에게 있어 외국인들은 범죄자와같다. 진보당이 15%의 지지를 받고 있는 노르웨이의 사정도 마찬가지다.프랑스의 국민전선(NF)이 십수년간 지속적인 지지를 모으고 있는 것도 외국인 혐오에 대한 호소 탓이라는 분석이다. 독일에선 정부의 강력한 단속 탓에 극우정당은 기를 펴지 못하고 있지만 잠재력은 매우 풍부하다.독일인민연합이 2년전 옛 동독지역인 작손 안할트주선거에서 18%의 지지를 얻은 게 이를 입증한다.게다가 나치 추종세력이 100여개 집단 7만여명에 이르는 점도 유념할 대목이다.베를린자유대학은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극우당의 지지율은 13%까지 치솟을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분석했다. 극우세력이 활개치는 데는 외국인 유입에 따른 일자리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인터넷도 일조를 하고 있다.현재 인터넷에는 300여개가 넘는 신나치주의자 웹사이트가 개설돼 동조자를 끌어모으고 있는 실정이다. BBC는 극우세력의 확산을 “변화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그리고 세계화와 이민이 일자리와 문화에 미칠 영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박희준기자 pnb@. *하이더 정신세계 나치물 ‘흠뻑’. 오스트리아 극우정당인 자유당의 연정 참여에 대해 EU 회원국은 물론 미국등 국제사회가 외교단절 등 초강수를 두는 이유는 하이더 당수가 오스트리아와 유럽에 잠자고 있는 ‘나치 망령’을 깨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선 하이더의 정신세계에는 ‘나치’ 물이 흠씬 배 있다.나치당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하이더는 16세 때 ‘오스트리아의 뿌리는 독일’이라는 제목으로 웅변대회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다. 그리고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잔영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그가 76년 대학을 졸업하고 이주해 주지사가 된 케른텐주는 역사적으로 외국인 혐오와 게르만 민족주의가 유난히 강한곳으로 꼽힌다. 오스트리아는 1938년 독일과 나치동맹을 구축한 나라다.나치당의 인종주의를 그대로 답습,2차대전중 유태인 7만명이 목숨을 잃게 했다.그러고도 독일처럼‘과거사’에 대해 반성하지도 않았다.그저 묻어두고 있었다.나치 정보장교 전력이 있는 쿠르트 발트하임이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한 게 나치에 대한 일종의 ‘묵인’이었다. 하이더의 인종차별적 친(親)나치 발언이 되풀이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그는 91년 히틀러의 ‘체계적 고용정책’을 찬양했고 95년에는 “나치의SS친위대는 영예로운 독일군의 일원”이라고 미화했다.홀로코스트(유태인 대학살)를 초래한 수용소는 ‘처벌 수용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93년엔 비(非)독일어권 학생비율을 30% 이하로 묶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97년엔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 3분의1을 2년 안에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나치의 인종차별주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면면이다.그리고 이 수법은 저소득 젊은층에게는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그것은 자유당에대한 높은 지지의 한 축이긴 하지만 동시에 오스트리아 고립을 자초한 화근이기도 하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EU에 가입하면 다른 회원국으로부터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안정된 일자리를 뺏게 된다며외국인 유입에 반대해왔다.현재 이민자는오스트리아 인구 800만명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빈 일부 지역에서는 3분의1에 육박한다.사상 유례없는 낮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저소득층 특히 가난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의 ‘외국인 혐오’는 큰 인기를 얻으며 세력을넓혀나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박희준기자 pnb@
  • 러 大選후보 15명 난립

    오는 3월26일 치러질 러시아 대통령선거에 모두 15명의 후보들이 출사표를던졌다. 러시아 중앙선관리위는 13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권한대행,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 등 15명의 후보가 출마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선관위는 또 22일까지 후보 출마 자격요건인 유권자 50만명 서명확보 등 출마자들의 신청서를 정밀 검토,자격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출마 신청서를 낸 후보는 푸틴 권한대행과 주가노프 당수 외에 중도좌파인‘영적 유산당’의 알렉세이 포드베류즈킨 당수,개혁성향의 야블로코당 그레고리 야블린스키 당수,극우 민족주의 정당 자유민주당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당수 등이다. 96년 대선때 0.5%의 ‘치욕적인’지지율을 기록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대통령과 15%의 지지율을 얻었던 군사령관 출신의 알렉산더 레베드,예브게니프리마코프 전 총리, 모스크바 시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은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시장 등은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후보 난립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은 푸틴과 공산당의 주가노프 당수,지리노프스키 당수,야블린스키 등 4파전으로 압축될 전망이다.하지만 최대 라이벌로 떠올랐던 프리마코프 전 총리,루슈코프 시장과 레베드 주지사 등이 출마하지 않음으로써 체첸전쟁의 강경대응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푸틴의 승리가 점쳐지고 있다.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푸틴은 지금 곧바로 선거를 실시할 경우 50% 이상의 지지를 확보할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김규환기자 khkim@
  • 지나온 100년을 돌아보라/20세기의 역사

    제국주의 팽창에 이은 세계대전과 혁명,공황,냉전,그리고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DNA복제,우주탐사,인터넷…. 1900년대에 빚어진 각종 역사적 사건과 과학발전의 내용 등이다. 이런 20세기는 1900년 처음 문이 열렸을 때 당시 사람들에게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21세기를 맞는 지금 사람들이 희망과 우려를 함께 갖고 있듯이. 그래서 마이클 하워드 미국 예일대 교수는 “새천년을 맞는 21세기 역시 1900년대와 비슷한 역설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다.전통적 가치관과 사회구조가 붕괴하면서 강하고 무자비한 자들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100년전의 전망이새밀레니엄의 문턱에 들어선 요즘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다만 예전에는 이런 걱정거리가 서구사회에 국한된 것이었으나 이제는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영국 옥스포드대에서 지난 98년 펴낸 ‘20세기의 역사’(가지않는길 펴냄)는 격동의 20세기를 역사 정치 경제 과학 등 분야별로 살펴본다.대표 편집자인 전쟁사가 마이클 하워드를 비롯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스티븐 와인버그,동아시아사의 권위자인 아키라 이리에 하버드대 교수 등 석학 26명이 공동집필했다.번역에는 차하순 서강대 명예교수 등 국내학자 20명이 참여했다. 1900년부터 1997년까지 일어난 일을 개괄한 이 책은 서구중심의 역사기술에서 벗어나 아시아,중동,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사회구조 변화도 중요하게다룬다.나아가 20세기에 벌어진 인구증가와 도시화,과학지식의 확대,세계적인 경제성장 등을 바탕으로 21세기에 민족주의와 세계화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책은 20세기가 비극의 연속으로 점철되긴 했으나 인류는 결코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발휘해 왔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물론 한국의 20세기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기술돼 있다.아키라 이리에 교수는 한국을 “일제의 침략과 분단의 고통을 딛고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룩한 모범적인 동아시아 국가”라고 평가한다. 88서울올림픽 개막식 장면 등 120컷의 화보와 70쪽에 이르는 20세기 연표만봐도 20세기를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이다.값 2만9,000원.박재범기자 jaebum@
  • 墺 극우연정 출범 각국 반응

    [예루살렘·베를린·워싱턴 외신종합] 오스트리아에서 나치즘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온 극우 자유당과 보수 인민당의 연립정부 구성이 발표되자EU(유럽연합)를 비롯한 세계 각국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토마스 클레스틸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연립정부 구성에 대한 승인여부를 3일 발표할 예정이나 반대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에후드 바라크 총리는 2일 오스트리아 주재 대사 소환 결정을 발표하며 “21세기가 시작된 이 시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조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면서 “나탄 메롬 대사에게 오늘 당장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고 말했다.대사소환 조치는 외교상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치중 하나로 이스라엘이 나치를 연상시키는 자유당의 연정 참여에 대해 얼마나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은 2일 자유당이 연정에 합의하기로 최종 결정되면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재검토할 것이라고 경고했다.조 록하트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우리가 희망하는 새로운 유럽 이미지와 배치되는 자유당의 나치 두둔 발언에 대해 분명한 우려를 표명해 왔다”면서 “자유당이 결국 연정에 참여하면 향후 양국 관계가 어려워 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대통령 후보경선에 나선 앨 고어 부통령도 이날 자유당이 연정에 참여하기로 합의한 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고어 부통령은 “나치를 동정하고,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대학살)의 피해를 축소하려는 듯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던 인물이 연정에 참여하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시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은 2일 자유당이 유럽 전체에 위험을 초래할 수있다고 경고했다. 피셔 장관은 기자들에게 “자유당이 유럽 전체에 끼칠 수있는 위험 가능성이 현재 과소평가돼 있다”면서 “외르크 하이더의 자유당이 오스트리아에서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극우 민족주의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의회 의원들도 2일 오스트리아에 자유당의 연정 참여를 재고해 달라고요구하는 등 자유당 반대 캠페인에 동참했다. 유럽의회 의원들은 자유당을‘내부의 암적 요소’라고 규정하면서 자유당의 연정참여는 유럽의 민주적가치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비난했다. ●폴란드 남부 크라코프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영사관이 2일 새벽 누군가로부터 계란 세례를 받았다.영사관 관리들은 “비록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만 영사관 공격행위가 있었다”면서“이번 사건이 자유당의 연정 참여에 따른 국내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연정 참여 합의가 런던 외환시장에서 악재로 작용,유로의 하락행진을 부추겼다. 유로는 런던 외환시장에서 연정 합의 발표 당일인 1일 유로는 유로당 0.9724달러로 폭락했다가 2일에는 다소 회복된 0.9770달러에 거래됐다. *루시디 뉴욕타임스 기고 “墺극우정당 부상은 '체제부패' 탓” [뉴욕 연합] ‘악마의 시’로 이란 정부로부터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영국출신 작가 샐먼 루시디가 현재 전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오스트리아의극우정당 부상의 원인을 ‘체제 부패’라는 시각에서 분석한 기고문을 미국 뉴욕타임스에 2일 기고했다.다음은 루시디의 기고문을 발췌한 것. 오랫동안 오스트리아 정국의 틀을 유지해온 연립정권,이른바 ‘대연정(大聯政)’체제는 유권자들을 환상에서 깨워 하이더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고 해도과언이 아니다.유럽 신문들은 요즘 거액 정치자금 문제로 한창 시끄럽다. 불법자금 문제는 하이더와 같은 선동정치가에게는 기막힌 호재가 아닐 수 없다. 부패로 선고를 받았던 베티노 크락시 이탈리아 전 총리의 ‘상속인’들이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크락시와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의 부정자금이 서로 관계없는 일이라고주장한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다.너무나 손쉽게 목적을 수단시하는 건방진 지도자들간의 ‘대연정’ 사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하이더같은 극우정치인들에게 공격거리를 많이 만들어주게 된다. 정치이론가 칼 마르쿠스 가우스에 따르면 하이더는 유럽인 특유의 ‘트릭’을 잘 사용해왔다.그는 프랑스 출신 장 마리 르펜이나 이탈리아 출신의 움베르토 보시처럼 부유하고 성공적인 부르조아 계층의 지지를 받아왔다. 콜 전 총리를 반대하는 독일 시위대들의 플래카드는 “시스템이 부패했다”고 지적하고 있다.그들의 지적은 옳다.부패와의 전쟁과 하이더에 대한 투쟁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EU(유럽연합)는 하이더와 그가 이끄는 자유당과의 투쟁을 위한 단결 강화라는 측면에서 내부의 부패자금 기부자들을 소탕하는데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한다. 히틀러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는 해도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다시 준동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역사가 최근 유럽 일각에서 대두되고 있는 극우(極右) 분위기를 네오 나치즘 복귀현상으로 기록하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면 EU는 하루빨리 내부부터 잘 정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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