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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 독서시장 겨냥 대중소설 출간 잇따라

    여름 더위를 식혀줄 재미있는 국내외 대중소설들이 줄을 잇고 있다.대부분재미라는 덕목을 위해서 재미롭지 못한 세계와 삶의 진정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기는 하다.그래서 이 대중소설에서 느껴지는 재미의 서늘한 바람이 산곡간에서 우러나는 자연풍이 아니라 현실왜곡의 1백마력짜리 초대형 에어컨을 돌려 가공되는 찬바람임을 부지불식간에 깨닫고 소름이 돋곤 한다.그러나 대중들은 재미있는 대중소설들을 선호한다.올 여름 인기를 끌 비본격소설들을 모아본다. ■‘6번 염색체’(전2권·열림원)의학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지난20년간 세계적 인기를 누려온 로빈 쿡의 18번째 소설. 인간 복제의 실현을 눈앞에 둠에 따라 인간의 장기가 병에 걸리거나 노화됐을 경우 복제 인간의 장기를 이식,생명을 거듭 연장시키는 꿈을 꿀 수도 있게 됐다.작가는 장기를 채취하기 위해 복제 인간을 사육하고 필요시에 생명을 간단히 끊어버리는 미래를 상정한다. 어떤 거대 생물공학 기업이 비밀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의 6번째 염색체를 딴영장류에 옮겨심어염색체상으로 인간과 흡사한 새 동물을 만든다. ■‘엔더의 게임’ ‘사자의 대변인 ’(시공사)미국에서 인기있는 공상과학소설가 올슨 스콧 카드의 엔더 위긴 시리즈의 일부. 먼 미래의 지구가 무대로 외계종족과 싸우기 위해 어린 영웅 전사가 길러지고 그 후보로 뽑힌 소년 엔더는 가족과 격리되어 훈련을 받는다.가장 무서운 살상 병기로 키워진 그는 ‘게임’으로 알았으나 실제 상황이었던 어떤 전투를 통해 적 종족을 몰살한다. ‘엔더의 게임’은 의사소통의 부재를 그리고 있으며 3,000년 뒤의 이야기이나 주인공 엔더가 그때까지 죽은 자를 위해 말하는 통로로 존재해 있는 ‘사자의 대변인’(2권)은 그 가능성을 펼친다. ■‘악의 환영’(2권·문학세계사)러시아에서 93년부터 22권을 차례로 발표해 2,000만부가 팔렸다고 하는 베스트셀러 추리작가의 시리즈 일부.57년생인 여류작가 알렉산드라 마리니나는 경찰조직 심리분석가 출신이며 시리즈 또한 60년생의 여자 형사가 주인공이다.이번 작품은 유전자 조작 실험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어머니는 괴물로,범죄조직은 횡재수단으로 여기는 데서 시작된다. ■‘코리아닷컴’(2권·해냄)500만부 가깝게 팔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작가 김진명이 인터넷에다 ‘민족주의’ 당의정을 입힌 소설.주인공은세계 문명의 이면에 공통된 수의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이어 고도의 문명을갖추었던 어떤 대륙이 우성 인간만 살아남게 한 실험을 하다 벌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작가는 인터넷을 제2의 우성인간 실험으로 몰고가면서 인터넷 문명을 주도하는 것은 물론 해결하는 비결로 천부경이라는한민족의 옛 문건을 제시한다. ■‘소설 삼국지’(5권·동방미디어)‘소설 토정비결’의 작가 이재운이 기존의 삼국지를 다소 비틀어 자기 식으로 썼다.유비나 제갈 량 대신 조조을삼국지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부각시키는 유행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조조 동탁 여포 등을 한족이 아닌 동이족 티벳 몽골 여진족 등의 북방민족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악한’ 조조가 동이족으로 영웅시될 뿐 아니라 기마유목의 북방민족이 거짓과 음모와 술수의 한족을 물리친다는 것이다.유비와 공명이 배신과 협잡을 일삼은 한족의 대표로 그려진다. ■‘강희대제’(3권·출판시대)중국 작가 얼위에허(二月河)의 ‘제왕삼부곡(帝王三部曲)’ 시리즈의 제1부.17,18세기 청나라 전성기의 강희,옹정,건륭황제를 차례로 다룬 이 역사소설 시리즈는 1억권이 팔렸다고 한다.만주족의청나라 기틀을 다진 강희제는 8세에 제위에 올라 61년간 통치했다. 김재영기자 kjykjy@
  • [대한광장] 美·蘇냉전의 역사적 교훈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민족통일에 대한 관심이 어느때 보다 높아지고 있다.그러나 단순히 관심이 높아지는 것만으로 통일이 쉽게 이루어지거나 앞당겨질 수는 없다.우리모두가 보다 구체적으로 통일터전 만들기에 나서야만 한다.곧 6.15공동선언의 조속하고 충실한 실현을 통한 통일기반조성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지난 미소냉전과 우리 민족사의 관계를 볼 때 우리의 통일역정은 우리의 예지와 긴급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과거 미소냉전과 더불어 우리 민족은 민족적 의지에 반하여 분단과 전쟁을 강요당하였다.그리고 남북간에 적대를 지금까지 지속해왔다.이 냉전기간에 설사 남과 북이 통일을 위해 민족공조로 나아갔다 하더라도 미소냉전에서 오는 외적 강제력이 너무 강력해서 통일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바로 이러한 미소냉전과 우리 민족사적 질곡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사적교훈을 얻을 수 있다.그것은 또다시 지구촌이나 동북아에 신(新)냉전이 생기게 되면 우리 민족이 아무리 민족공조를 취하여 통일을 이루려 노력하더라도이 ‘신냉전’에서 오는 강제력 때문에 민족통일은 재차 불가능하게 되고 말것이라는 점이다.통일에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다시 국지전이든 전면전이든 전쟁까지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 세계 각지의 권위있는 연구소들은 2020년에서 25년 사이에 중국의 GNP가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해마다 연 8%의 경제성장,중화주의를 중심으로 한 중국인의 패기찬 모습과 자신감,집체기업인 향진기업 등이 주도하는 지속적인 활력 등으로 중국은 천안문사태 때와는 달리 역동성과 안정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중화인의 저력과 민족주의는 중국의 GNP가 미국을 능가하게 되는 시점이 되면 더이상 미국 일방의 동북아 패권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곧,중국의 민족주의와 미국의 패권주의가 충돌하게 되고 그 결과 동북아에서 중국과미국간에 신냉전이 형성하게 된다. 이 시점까지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또다시 남과 북은 과거 미소냉전과 같이 북은 중국에,남은 미국에 종속되어 통일은 불가능하게 된다.이 결과 우리의 민족분단은 반세기 이상 지속될 것이다.그러므로 남과 북은 신냉전 도래 이전에 부분통일이라도 이루어 이 지구촌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기정사실화 하여 우리의 통일을 굳히는 작업을 시급히 추진하여야 한다.이것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미소냉전의귀중한 역사적 교훈이다. 이러한 장기적 통일정세를 조망한다면 이번 6·15공동선언 2항인 연합제와연방제를 결합한 통일방안의 합의는 너무나 소중하고 시의 적절하다.최종적으로 확정할 통일방안은 연합제의 요체인 국방과 외교권을 남북 자치정부가가지더라도 연방제의 요체인 연방통일국가를 비록 상징적인 수준이나마 반드시 갖추는 것이어야 한다.그래야만 형식적이나마 한반도가 통일국가가 되었다는 점을 지구촌에 인식시켜 우리의 통일을 기정사실화 할 수 있고,중미간신냉전이 도래하더라도 우리 민족의 통일을 굳힐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인지할 수 있는 예지를 조금이라도 갖추고 민족적 숙원인 통일을 진정으로 고뇌한다면 6·15공동선언 2항을 정말로 신주단지 모시듯 하여야 할 것이다.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말로만 남북화해와 통일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온갖 티끌을 잡으려고 외세는 안달한다.정상회담 한 번으로 모든 현안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라는 식의 일본 방위청과미 국방성의 언급은 군사력 증강으로 무엇이든 해결하려는 그네들의 속성을전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이러한 정상회담 죽이기는 오히려 우리의 내부에서 더 극성을 부린다.이미 정상회담 죽이기에는 지역분열주의 수렁에 빠진일부 지역세력,민족의 장래는 뒷전이고 오직 당리당략에만 매달리는 정치세력,정당한 386의 목소리를 당권으로 짓누르는 당파들,그리고 이들 모두를 부추기며 이끌어 가는데 운명을 걸고 있는 언론들,언제나 외세의 동향에 자기의 논지를 맞추는 쓰레기 사대주의 지식인 등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다.이러한 안팎의 죽이기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정상회담의 주체가 되어 정상회담 굳히기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 姜 楨 求 동국대교수·사회학
  • [대한광장] 통일시대 역사인식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11년 전 1989년 3월의 문익환 목사를 생각해 본다.당시 언론에 나타난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 대한 기사제목을 보자.“실정법을 어겼다,” “밀행에 충격과 경악,” “성급한 행동,” “혼란이 우려된다,” “통일창구를 깬 무분별한 행동,” “그는 대한민국을 무시했다”등으로 비판 일색의 기사였다. 그러나 바로 전 1월에 있었던 정주영 회장의방북에 대해서는 “민족경제공동체건설을 위한 첫걸음”,“남북화해 교류의큰 이정표요 크나큰 노력”이라고 긍정적인 보도를 했다.기업인이 정부에 미리 알리고 간 경우와 민간단체의 통일운동가가 알리지 않고 간 차이는 있지만,문목사를 밀행의 입북으로,정회장은 방북으로 표현하였다.한쪽은 실정법위반이며,한쪽은 남북 경제교류의 물꼬를 튼 민족역량 과시로 그 성과를 강조했다.이러한 기사는 북한을 우리의 적이며,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는 냉전적 시각에서 비롯됨이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1995년 국방부는 한 6·25포스터를 시중에 배포했다.당시 냉전시대보수언론의 대표격인 한 신문은 그 포스터에 대해서 6·25를 도발한 북한의 침략성과 불법성을 외면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국방부에반공적 색깔논쟁을 제기했다. 이 포스터는 6·25를 맞아 국방부가 공모한 작품 중 당선작이었는데,태극기를 바탕에 깔고 국군 장병과 인민군 사병이 서로 껴안고 있는 도안이었다.그림 밑에는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야만 했던 아픈 기억 6·25”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그 신문은 이 문제의 포스터가 6·25를 왜곡하고 북의 전쟁도발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이에 대해 국방부는 국군으로 참전한 형과 인민군으로 징집된 동생이 전장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만나야했던 비극적 실화를 형상화 한 것으로 민족의 비극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한다는 뜻에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냉전적 사고방식을 가진 언론은 남북이 같은 동포이고 형제라도 이념을 달리하기 때문에 보듬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조차 수용해서는 안된다는 관점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남북의 동족이 피로써 피를 씻는 참담한 비극을 방지해 보고자 백범 김구 선생이 북행을 나섰듯이 자신도 그로부터 41년 후 “통일에 대한 온 겨레의 염원을 이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는 상황이 방북을 결행하게 했다”고 말했다.남북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반세기에 걸친 분단의 치욕을 씻을 수 없고,인권·민주화·경제발전의 궁극적 해결이 있을 수 없다는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그는 다섯 번째 수감되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민족사적 최대의 과제인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남북정상의 만남으로 통일민족주의의 새 역사가 열린것이다. 7,000만 민족과 500만 해외동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기적이다.두 남북 정상의 만남은 민족적 자주성의 상징이요,우리의 불행의 역사를 청산하는 민족사적 쾌거이다. 이제 적대의식에서 동족의식으로,국민들의 대북한인식을 바꾸는 통일환경을조성해야 한다. 분단시대의 모든 제도적 유제,극우적 보수의식은 청산되어야한다. 북한을 돕는 일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동포애적 시각에서통일시대의 관건이 된다. 북한을 더 이상 적국이 아니라 동족의 나라로 보는 새로운 민족관이 요청되는 시기이다.역사적 변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립에서 화해로의 바뀜이다.대북 동족의식이 자리잡게 되는 날 남북 평화통일론,남북 대등 통일론이 확실히 정착되리라 믿는다. 徐紘一 한신대교수·국사학
  • [끊어지지 않는 지구촌 분쟁](4)티베트의 홀로서기

    반세기동안 계속되는 티베트의 독립·분리운동은 중국에게는 피하고 싶은아킬레스건이다.티베트내의 인권상황은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곤혹스럽게 한다.97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주석의 미국 방문때 공식거론 여부를 놓고 막판까지 논란이 됐었고 최근 티베트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방한문제로 한-중간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올초에는 티베트 불교계 서열 3위인 카마파 라마(14세)가 인도로 월경,중국-인도관계가 불편해졌다.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끌어온 달라이 라마가 98년 11월 티베트 독립 포기를선언하고 ‘완전 자치’를 요구하면서 티베트 문제는 새 국면에 들어섰다.공은 중국 정부에게로 넘어갔다. [분쟁의 역사] 티베트는 13세기 이후 중국과 영국의 통치를 번갈아가며 받아왔다.1911년 신해혁명이후 한족을 몰아내고 1950년 중국이 지배권을 주장하며 무력 침공할 때까지 독립을 유지해왔다.중국은 1906년 티베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 영국과의 조약을 근거로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1951년 5월 베이징 정권이 무력을 이용,달라이 라마 정부와 17개조의 ‘티베트 평화해방협정’을 체결했다.정교일치 체제의 존속은 인정하되 토지개혁을 포함한 사회개혁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그러나 1959년 중국의 점령에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중국군에 의해 진압됐다.이후 79년까지 100여만명의 희생자가 생겨났다. 달라이 라마는 59년 추종자 6,000여명을 이끌고인도로 망명했다. 중국 정부는 65년 티베트에 자치구(서장)를 세웠다.67년 문화대혁명(∼1977년)이 시작되면서 역사적 유산이 모조리 파괴됐다.마오쩌둥(毛澤東) 사망을계기로 화해를 시도했지만 티베트 민족주의 저항은 약해지지 않았다.봉기 30주년인 1989년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90년 5월까지계엄체제가 지속됐다. [분쟁원인]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으로서는 ‘살아있는 부처’인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한 신권정치를 인정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티베트가 갖는 군사적·지리적 요충지로서의 의미도 빼놓을 수 없다.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티베트 고원은 지리적으로 무기배치와 개발에 이상적이다.중국의 로스알라모스(미국 뉴멕시코주에 있는 원자력 연구 중심지)에 해당하는 ‘제 9아카데미’가 티베트 북동부에 주둔하고 있다.중국과 인도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티베트가 미사일 및 핵시설등을 갖춘 중국의 전진 군사기지화되면서인도의 견제가 심화됐다. 중국은 목재·수자원·광물자원과 세계 최대의 우라늄 광산에 대한 개발권도 놓치고 싶지 않다.여기에 티베트의 독립 내지는 완전자치가 다른 소수민족에 미칠 파급효과를 우려하고 있다. [전망] 중국은 헌법에 소수민족의 자치를 인정하고 있다.하지만 티베트에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풍부한 자원개발 및 전략적 요충지인 티베트 고원에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일을중국이 선택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당분간 무리일 것 같다. 김균미기자 kmkim@. *티베트 분쟁 일지. ●1913.1 달라이 라마 13세,티베트 독립 선포. ●1950.10 중국군,티베트 무력 점령. ●1951.5 티베트,중국 서장자치구에 편입. ●1959.3 티베트서 독립요구 대규모 시위, 달라이 라마 인도로 망명. ●1965.9 중국,티베트 자치구 성립 선언. ●1987.9 달라이 라마 ‘평화 5항목’제안,중국 거부. ●1987.10 대규모 독립요구 시위. ●1989.3 59년 독립시위 30주년 대규모 시위로 6명 사망,100여명 부상.중국사상 최초로 계엄령 선포. ●1989.10 달라이 라마,노벨평화상 수상. ●1992.4,1993.10 티베트서 폭동 발생,사원들 폐쇄. ●1998.11 달라이 라마,티베트 독립포기 발표. *열매 맺는 망명정부 외교.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인도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인도와 네팔 부탄 등에 흩어져 사는 13만여 티베트인들의 중심이 되고 있다. 망명정부는 완전 자치를 쟁취하기 위해 대(對)유엔,미국,유럽 등 국제적인지원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이같은 노력의 결과 미국은 특히 티베트 문제를중국의 민주주의,인권문제에 포함시켜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망명정부는 사법부인 티베트 최고사법위원회와 입법부인 국민대표국회,행정부로 이뤄져있다.내각과 국회는 5년마다 선거로 구성원들을 선출한다.또 뉴델리와 뉴욕 런던파리 등 10여개 도시에 대표사무소를 설치,티베트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는데 활용하고 있다. 현재는 ‘국제 티베트 운동’의 후원 아래 세계 곳곳에 있는 수백개의 ‘티베트 우호회’ 지부들이 티베트 돕기에 나섰다.특히 미국의 영화배우 리처드기어 등 헐리우드 인사들이 티베트 돕기운동에 동참하고 티베트 관련 영화‘쿤둔’과 ‘티베트에서의 7년’이 개봉되면서 티베트에 대한 세계인들의관심이 높아지고 있다.티베트의 인권보호와 문화를 지키기 위한 ‘세계 티베트의 날’ 행사가 매년 열리는 등 국제적인 지원행사가 끊이질 않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운동과는 별개로 티베트 독립운동세력은 한때 미국과타이완의 지원을 받아가며 중국에 무력으로 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70년대이후 미국과 중국관계가 호전되면서 지원이 끊어졌고 지금은 비조직적인 소요가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김균미기자. * 印 다람살라 망명정부 르포. [다람살라(인도) 김성호기자] 인도 동북부 해발 1,900m의 산악지역인 다람살라.망명자들을 비롯,티베트와 인도 전역에 퍼져 사는 티베트인들이 고유의종교와 문화를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자치에의 염원을 이어가는 이색지대다.마치 일제하 상하이 임시정부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중국의 폭압이 한창이던 59년 6,000여명의 측근과 함께 티베트를 탈출한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네루 당시 인도 총리의 주선으로 정착하면서 세계의 이목이 쏠리게 된 망명도시.89년 달라이 라마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뒤 본격적견제에 나선 중국 정부와 이에 맞선 티베트인들의 줄다리기가 오늘도 팽팽히 벌어지고 있다. 망명 티베트인 1만명이 사는 고지대와 인도인 2만명이 거주하는 저지대를합쳐 인구는 총 3만명.소형차 한대가 간신히 통행할 수 있는 비좁은 길을 따라 상가와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망명정부 청사가 자리잡은 거리를중심으로 사원과 학교가 산재하며 어느 곳에서든 티베트 승려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거리에는 티베트 불교가 좋아 무작정 찾아든 서방세계의 젊은이들이 불상이며 탱화를 벌여 놓은 좌판 주위에 몰려 있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손님 주위에는 어김없이 인도 걸인들의 구걸이 이어진다. TCV(Tibetian Children’s Village)와 도서관은 티베트의 전통과 종교를 이어가려는 노력이 가장 두드러진 곳.달라이 라마의 누이동생 제툰 페마가 총괄하는 TCV는 일종의 종합학교로 티베트 불교 중심의 9년 과정.인도 전역에7개의 학교가 운영되는데 다람살라에는 700명이 수학중이며 한국 학생도 4명이 있다.59년 망명 때 티베트인들이 등짐을 져 날라온 경전 7,000종이 고스란히 보관된 도서관엔 각국 학생·승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티베트 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은 역시 사원.조캉사원엔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파드마삼바바와 관세음보살상 옆에 60년대 문화혁명 때 티베트에서 파괴된 불상의 목 2개가 함께 봉안돼 있다.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인들의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파괴된 티베트 사원은 6,000여개.산꼭대기 달라이 라마의 거처 주변에 자리잡은 중앙대회당에는 1년에한번씩 달라이 라마의 법어가 내려지며 남걀사원 역시 정월 대보름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듣기 위해 북새통을 이룬다.사원 곳곳에서 손을 뻗고 엎드려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승려와 일반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예비 비구니들이 10년에 걸친 교육을 통해 사미계를 받는 비구니 강원을 들어서면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예비 승려들이 읽는 독경소리가 신비감을 전한다. 토속 주술신앙과 티베트 불교가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갖춘 네퉁사원은 신통을 받은 승려가 달라이 라마에게 행동지침을 전하는 신탁의 장소다. 정부 청사거리.달라이라마가 신왕(神王) 위치에 있지만 총리 1명,장관 7명으로 구성된 내각 카샥과 망명 티베트인들이 뽑은 46명의 의원이 모인 의회등 나름대로 자치의 틀을 갖추고 있다.중국 대륙을 통일한 공산당이 50년 티베트를 쳐들어오면서 트기 시작한 비극의 싹이 결국 이곳으로 귀결된 것이다.59년 중국 침공에 맞선 독립시위에는 잔혹한 진압이 따랐고 그때 티베트 전체 인구의 20%인 1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행방불명된 이들은 헤아릴 수 없다.티베트에서 최근 망명한 전직 경찰관 탐딘 체링씨(56)는“폭압의 잔혹성은 59년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있다”면서 “60년 이후 약 20만명이 더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옛 티베트의 면모를 아스라히 풍기면서도 차츰 현대문명의 물결이 스며들고있는 다람살라가 언제까지 티베트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티베트인들이 더이상 달라이 라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이될 때 나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란 달라이 라마의 말이막연하게나마 다람살라의 앞날을 점쳐볼 수 있게 한다.
  • [문화예술 분단장벽 허무나](5.끝)결산대담

    한국전쟁은 우리 문화예술계에 깊은 파장과 상흔을 남겼다.그 한국전쟁이 50주년 되는 해, 6·15선언으로 획기적인 남북관계의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한국예술종합학교 최민 영상원장과 인하대 국문과 최원식 교수의 대담을 통해남북분단문화의 극복방안 등을 들어본다. ■최원식교수 6·15선언은 오랜만에 우리 정치가 국민을 기쁘게 해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홍콩과 마카오의 중국 반환이 20세기를 마감하는 빅쇼였다면,한국의 통일과정은 21세기를 여는 대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이 시점에서 우리는 통일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독일식 흡수통일이나 베트남식 무력통일만이 통일이 아닙니다.‘극적인 통일’관에서 벗어나 통일을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최민원장 동감입니다.어떤 과정을 통한 어떤 통일이냐가 중요해요.원상복구 차원의 통일은 이제 맞지 않습니다.새로운 통일개념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최교수 먼저 문화예술이 민족의 분단현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나아가 분단극복에 기여하고 있는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있습니다.올해는 더욱이 한국전쟁 50돌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최원장 미술의 경우 80년대에 특히 이념적인 작품들이 많이 나왔지만 장르적 특성상 그림으로 통일의 비전을 제시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입니다.한국영화 ‘간첩 리철진’은 북의 간첩도 인간임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합니다.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우리의 내적인 금기가 많이 깨졌습니다. ■최교수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서문을 보면 “이 작품이 나올 수 있게해준 어린 공화국에 감사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4·19직후인 당시로선 굉장히 전향적인 발언인 셈이죠. ■최교수 예술활동을 제재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통일을 주제로 뭔가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요즘 통일글짓기가 유행이나 6·25가 돌아오면 으레 해오던 반공웅변대회나 글짓기대회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제재론적인 입장에서 통일예술만을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예술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습니다.예술에는 자기검열이 필요합니다. ■최원장 늘 ‘반쪽의 시선’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게 문제입니다.한 쪽을봉쇄하니까 역지사지가 안되죠.지난 50년동안 남한사회는 정치적·문화적 고도와도 같았습니다.독일은 브란트총리 시절부터 동서독이 왕래하며 대화를시작해 지방과 지방끼리는 거의 하나가 될 정도로 섞였습니다. ■최교수 일찍이 지방자치를 했던 독일의 교류수준은 무척 깊었으나 막상 통일이 되려하자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통일을 반대했습니다.통일에 관한 모든논의들이 휴지조각이 됐다는 게 그들의 일성이었죠.결국 현실이 이념을 뒤집은 셈입니다.우리의 경우 한번 물꼬가 터지면 엄청난 가속도가 붙을 것이 예상되는 만큼 역기능이 우려됩니다. ■최원장 속도조절이 필요합니다.언론 보도에서도 나타났듯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시각이 급전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준비가 없었는가를반증하는 것입니다. ■최교수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그 차이가 쌓였을 때 더 큰 풍요를 낳을 수 있어요.에커먼의‘괴테와의 대화’에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대목이 생각납니다.“나는 독일이 통일이 되면 좋지만 지방의 발달한 분권적인 문화가 다 없어지고 베를린 문화 일색으로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최원장 민예총이 주최한 6월 인천 황해예술제에서 ‘불가사리’등 북한영화 5편이 상영됐습니다.이미 낮은 단계의 남북영화교류가 시작된 셈이죠.통일논의가 허공에 뜨지 않기위해서는 서로를 먼저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최교수 통일의 힘은 근본적으로 남한에 있다고 봅니다.특히 문화교류의 경우 우리가 주도적으로 풀어야 합니다.상호주의를 꼭 1대1의 계량적인 개념으로 봐서는 곤란해요.문화적 햇볕정책이 필요합니다.한일대중문화교류의 경우를 보면 일본이 먼저 한국가수들을 초청해 개방의 단초를 열었고 결국 한국도 빗장을 풀었습니다.남북문화교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큰 틀에서보면 상호주의로 귀결되는 것이죠. ■최원장 남북교류와 함께 중국과의 문화교류도 보다 활성화돼야 한다고 봅니다.지난달 북경전영학원에서 학술제 형식의 한국영화제가 열렸는데‘아름다운 시절’등 12편의 한국영화가 상영돼 호평을 받았습니다.한해 고작 20편의 외국영화를 수입하는 현실에서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컸는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지요.보다 다각적인 문화개방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최교수 문화예술가의 덕목중 으뜸은 역지사지 능력입니다.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자기안의 타자속으로 침투해가는능력이 예술인에게는 있어요.“문학을 하면 여러 삶을 산다”는 말도 있지않습니까.타자에 대한 공감이야말로 문화적 감성의 핵심입니다. ■최원장 현단계에서 남북의 통일문화를 위한 구체적인 처방전을 기대하기는어렵습니다.그때 그때 가능성을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아요. ■최교수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국민 각자가 깨어있어야 합니다.이른바신자유주의의 환상속에서 IMF체제를 맞아 나름대로 절실한 경험을 했지만 요즘 다시 도덕적 해이의 조짐이 보입니다.어느 원로시인은 금강산 관광길에버스속에서 춤추고 노는 것을 한탄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일정한 희생을 치르지 않고 통일국민이 되기는 어렵습니다.문화적인 저열성을 드러내지 말고 진정한 겸손을 배울 때입니다. ■최교수 90년대 들어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온갖 포스트주의가 창궐했습니다.경배대상이던 민족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해체적 사고가 득세했어요. 신자유주의의 분위기를 거부할 순 없지만 민족주의는 낡은 것이라고 폐기해서는 안되죠.민족주의를 갈무리하면서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지금은 민족예술이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는 실험기입니다. ■최원장 민족주의냐 탈민족주의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민족적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민족이란 게 언젠가는 의미없는 시점이올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봐요. ■최교수 그렇습니다.좋은 세상이란 민족주의가 필요없는 세상입니다. 정리 김종면 황수정기자 jmkim@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3)잃어버린 먹거리

    고한 김일성 주석과 공개석상에서 또는 비공식으로 수십여 차례 만났던 얘기는 책 한권을 엮을만큼 많은 사연이 있지만,그동안 가장 미묘한 부분이기 때문에 한번도 제대로 써서 발표한 적은 없었다.몇 년 뒤의 회갑 때에 가서나회고록 안에서 정리를 해볼 작정이다. 맨 처음에 만났을 때에는 다 알려진 바와 같이 문익환 목사 일행과 동석한자리였다.접견 장소로 들어가는데 그가 집무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있었다.체격이 크고 쇳소리가 나는 음성이었다.김 주석은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들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호남자의 인상이었다.완전한 백발은 아니고 회색의 반백 머리를 올백으로 넘겼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눈썹이 짙고 길게 드리워져 있는 점이었다. 원형의 식탁에 모두 둘러 앉았는데 주석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문목사가 왼편에 내가 앉고 수행원들도 함께 앉았다.그는 당시에는 살아 계시던 문목사 노모의 안부도 물었고 용정이나 북간도 시절의 추억도 말했다.문목사는 만주용정에 살 때 집에 독립운동가들이 수많이 묵기도 하고 드나들기도 했는데안중근 의사도 모친이 대접해드린 일이 있다고 말했다. 김주석도 만주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 항일군들과 연대할 때에 중국인부락을 지나다가 군량을 보급 받거나 숙박하고 나서 돈이 없으면 간단한 차용증을 써주고 ‘조선인민혁명군 김사령’이라는 글을 남기곤 하였는데,중국혁명 이후에 옛날 지주들을 척결하면서 김사령의 차용증을 지닌 지주들은 거의 다 사면했다는 말이 있더라고 중국정부의 간부들 가운데서 자신과 가장가까웠던 주은래가 전하더라면서 웃었다.그는 특히 옛날 중국의 시 속에서나 꺼우리 라는 만주 지역 사람들의 성씨에도 나타나듯이 만주는 고구려의 옛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국의 서안을 비롯한 예전 고구려 땅에서 남에서는 ‘식혜’라고 하는 감주를 담가 먹는다는데 등소평이가 감주를 썩 좋아한다면서,그 너르고 기름진 땅을 우리 조상들이 국토로서 보존해내지 못했다고 아쉬워 하였다.그렇지만 함경북도 일대에는 한때 여진족이 살았다고 하면서 아오지 탄광의 아오지는 ‘불타는 돌’이란 여진 말이며,주을 온천의 주을은‘뜨거운 물’이라는 여진 말이라면서 인민들 중에도 예전 여진의 성을 가진 사람이 간혹 있어서 모두우리 식으로 고쳐 주었다고 했다. 일행 중의 누군가가 느닷없이 주석님 어머님이 전도부인이 아니셨느냐고 묻자 그는 잘 못들었다는 시늉으로 귓가에 손을 갖다 대며 되묻고나서 측근이모친께서 교회에 나가시지 않았느냐 하는 말씀이라고 설명해주자 웃으면서대답했다. 우리 오마니는 살기 힘드시니까 교회에 가서 주로 주무셨디…. 사실 주석의 외조부는 장로교의 목사였고 외삼촌은 장로였으며 부친도 장로교단 소속인 숭실학교를 다녔으며 모친도 ‘강반석’이란 성명인데 그 뜻은‘베델’이란 세례명에서 왔다고 한다. 이같이 나도 일찍이 개화한 집안 분위기를 나도 아는 터이고 당시 이북의 개화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게 흔한 일이었다.김주석의부친 김형직은 교회 식의 야학을 운영하면서 청년들을 모으고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러시아 혁명과 신문물에 접하면서 무산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독립운동에 눈 뜨게 되는데 그때가 아마도 어린 김성주와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만주로 떠날 때가 아닌가 생각 되었다.북선지방의 근대주의자는 마르크시스트와 크리스천의 두 얼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참으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나는 그 뒤에도 이미 작고했지만 당시에는 중국에 망명 중이던 캄보디아의 시아누크공 부처와 만찬을 함께했던 적도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점심을 함께한 적이 몇번 있었다. 공식적인 만찬 자리에서 그는 언제나 활달하게 좌중에 음식을 권하고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한식과 중식이 서로 적당히 어우러진 듯한 정식이 코스로 나오곤 했는데 약주도 즐겨 들었다.만찬 술은 인삼주이거나 백두산 들쭉술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15도 짜리 들쭉술을 좋아했다.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내외도 들쭉술을 좋아해서 열 두 상자나 비행기편에 실어 보냈다고 했다.들쭉은제주도의 멀구슬처럼 새까맣고 동그란 일종의 들딸기라고 하는데 고원지대에서만 자란다고 한다.요즘에는 남에서도 북한산 들쭉술을 먹을 수 있지만 한정된 야생의 열매로 그 많은 물량을 감당할 수는없을테니 혼합주로 맛을 낸 것이 분명하다.진품 들쭉술은 약간 쌉싸름하고 조금 떫은 것이 진한 적포도주 비슷하면서도 매우 향기롭다.전에는 담배를 하루에 두 갑씩 피웠지만 주위에서 하도 말려서 겨우 끊었다고 한다.그는 점심 뒤에 한 시간씩 집무실옆의 방에서 오침을 한다고 말했다. 가 깊은 인상을 받은 어느 점심은 매우 소박했다.작은 메추리 다리를 몇 개먹고나서 국수가 나왔다.주석은 자신이 국수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두 끼만 국수를 먹어도 곧 질린다고 하지만,자기는 한 열흘은 먹을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국수를 담은 유리 대접을 내려다보니 면이 그야말로새까만 색이었다.콩물국수인 셈인데 하얀 콩물에 검은 국수가 잠겨있는 모양이 이색적이었다.주석이 다른 날처럼 음식 설명을 내게 해주었다. 이거이 언 감자 국수라고 하는 거요.일전에 독일의 작가 루이제 린저 여사가 왔을 때 독일에 감자 음식이 많은줄 아는데 이렇게 조리하는 방법은 아느냐고 했더니,얼린 감자로 요리하는 건 세계에서 조선밖에 없다고 하더군. 검정색‘언 감자 국수’의 면발은 찰지고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웠다.언 감자를 우려내어 녹말을 낸 다음에 끓는 물에다 국수를 뽑는다는데 차디찬 콩물에 말아 먹는다.위에는 검은 깨를 뿌리고 함경도식 갓김치를 얹어서 먹는다. 그가 음식의 유래를 내게 말해 주었다. 우리가 두만강 연안에서 항일 투쟁할 때에 인민들이 많이 도와 주었소.화전하는 인민들도 저이 먹을 것이 없는데 우리가 지나는 산길에다 표를 해두고감자를 묻어놓군 합네다.눈이 한 길이나 쌓이고 땅은 꽁꽁 얼어 붙어 있디. 감자를 파내면 시꺼멓게 얼어서 돌덩이야.근거지루 질머지구 가두,언 감자를 구워도 못먹고 삶아도 못먹어요.그때 왜놈들 청야작전이 철저해서 보급선을 멀리서 차단하고 있대서.얼어 죽거나 굶어 죽고 남은 빨치산들을 토벌하겠다는 소리요. 인민들이 준 것을 버려서는 안된다구 그때 함경도 출신 동무가 우려내서 국수 만드는 법을 생각해냈소.가난한 인민들은 다 살아갈 궁리를 하는 지혜가있소. 맹물에다 소금만 넣고 끓인 국수가 어찌나 맛이 있던지. 나중에 뉴욕에서 나는우연히 개마고원이라는 냉면 집에서 이 국수의 조리법을 듣게 된다.아는 사람에게 듣기로는 그 집의 물김치가 기가 막히게 시원하고 맛있다는 것이었다.그래서 찾아가 보니 북청에서 피난 나왔다가 미국으로 이민했다는 사람네 집이었다.과연 물김치가 일품이었다.무는 보통 물김치처럼 나박썰기가 아니라 길쭉 길쭉하고 얇게 썰었고 배추 잎도 그만한 크기로썰었는데 오이쪽이 간간이 떠 있다.얇게 채 썬 밤,대추,사과,배,쪽파,등속의 건더기가 알맞게 섞였고 역시 김치 국물이 한 대접이다.고춧가루를 채에 걸러서 탔는지 붉은 물이 들었지만,나중에 뉴욕에 왔던 한시해 부부장에게서들으니 진짜 개마고원 김치는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집의 할머니가 팔십이 다 된 분인데 ‘언 감자 국수’를 알고 있었다.함북지방의 화전민들이 곧잘 해먹는다는 것이다. 언 감자를 강판에 갈아 채에다 녹말을 내리는 것은 감자국수 해먹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반죽을 하여 국수틀에 넣고 끓는 물에 국수를 뺀다.국수를 찬물에 우릴 적에 손가락으로 세심하게 끈기를 씻어내어야 찰기가 더 좋다고한다. 콩물 내는 것은,물에 담갔다가 위로 뜨는 콩을 버리고 골라내어 비린 맛이가실 때 쯤까지 끓이다가 설컹할 적에 건진다.그래야만 콩의 고소한 맛이 살아 있다고 한다.믹서에 갈 적에는 물을 조금 붓거나 편리한 대로 두유를 함께 넣어도 맛있다.콩국의 맛을 내려면 땅콩이나 잣을 갈아서 넣어도 좋고 들깨나 참깨도 좋다.검은 참깨를 뿌리고 위에다 함경도식 갓김치를 얹어 먹는다.함경도 산야의 들갓은 길이가 짧막하고 줄기도 여리다.여기 갓김치는 전라도 식으로 젓갈을 전혀 쓰지 않아서 깊은 맛은 없는 대신에 쌉쌀하고 향긋한 갓의 냄새가 싱싱한 것이 특징이다.
  • 홍성원 6·25대하장편「남과북」전6권으로 改作

    작가 홍성원이 23년전에 완간했던 ‘남과 북’(전 6권·문학과지성사)을 개작해 다시 내놓았다. 지난 77년초까지 월간 ‘세대’에 5년2개월동안 ‘6·25’란 제목으로 장기연재됐던 이 소설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부터 휴전이 성립된 직후의 1953년 9월까지 3년 반 기간을 다룬 6·25 대하드라마다.작가는 1만 장이 넘는 원고의 보완과 개작을 위해 꼬박 1 년 간의 시간을 투자했다고 개정판 서문에서 밝힌다.묵은 문장을 손질하고 냉전 시대의 ‘사나운 표현’들을 교체하고(북괴를 북한,괴뢰군을 인민군 등으로),새로운 주인공을 등장시키고,중복된 일부 내용은 과감히 삭제했다는 것이다. 작가 말대로 ‘남과 북’은 냉전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서슬 푸르게 살아 있던 1970년대에 씌어진 작품이다.이미 77년 2월의 초판 후기를 통해 작가는북한에 대한 표현의 상한선이 ‘감상적인 민족주의 언저리거나 당국에 의해철저히 도식화된 반공 가이드라인 내’로 제한된 사실을 적시했었다.그후 20여년이 지나 “‘한국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에서 전쟁의 절반을 담당한 북한 쪽 이야기를 빼버린다는 것은,표현상의 불평등 못지않게 공평하지 못한 일” 이며, “작품 ‘남과 북’이 한국 전쟁을 제대로 그리는 데 한계가있었다” 고 고백하면서 개작에 나선 것이다.작가는 북한 쪽 주인공을 작품에 새롭게 등장시킨 점을 이번 개작의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새로운 등장인물은 ‘자본주의 압제로부터 인민을 해방하여 사회주의 조국 통일을완수한다’는 북한측 전쟁 목표와 관련해 원래의 꿈을 잃지 않으려고 혼신의노력을 다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이번 개정판의 이같은 보완은 말 그대로 보완일 따름이다.작가가 초판부터 언급한 ‘남과 북’의 본질적인 한계가 이 보완으로 극복되는 것은아니다.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장점과 매력은 이로 해서 훼손되지 않는다.변화의 급류가 굽이친 20여년이 흘렀지만 이 소설은 아직도 읽고 주목할 가치가 있다.비록 제목과는 달리 남한 쪽에 꽉 붙잡혀 있긴 하지만 홍성원은 6·25의 ‘전모’를 드러내고자 한다.작가라면 누구나 가질 것같은이같은 목적의식은 그러나 20년 전에도 드물었고 지금도 흔하지 않다. 6·25는 수많은 한국의 소설가에게 심연의 대광맥이지만 그 채광의 결과물을 보면 가치 이전에 너무 개인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성을 어쩌지 못한다.품위를 잃지 않아 온 최초의 전업작가라고 할 수 있는 작가 홍성원은이와 달리 요컨대 6·25를 휼륭한 이야기 소재로서 접근한다.물론 작가는 ‘남과 북’이 6·25를 졸업하기 위한 졸업 논문과 같다고 말하고 6·25는 하루속히 졸업해야 될 우리 모두의 고통스런 과제라고 덧붙이고 있다.그러나작가는 6·25를 우리의 역사적인 개별 사건으로서보다 폭력과 자기 파괴의극단적인 현장인 인간의 전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역사·이데올로기 우선시대에는 역사성이 부족하고 경박·통속적이라는 평을 면치 못해 왔지만 그런과잉시대가 지나간 지금 ‘전방위적 이야기꾼’이 하는 ‘남과 북’의 스토링텔링은 이번 개작을 맞아 다시 주목할 가치가 있다. 6·25에 대한 이 작품의 ‘총체적 조망’을 확신하는 작가는 “30여 명의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국군·미군·중공군 등 각기 다른 국적의 여러 군인들을 비롯하여,한국 기자와 미국 기자·학자·상인·지주·의사·브로커·양공주·전쟁 고아·건달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저마다 전쟁에서 살아남기위해 자기의 최선을 다한다”면서 “영웅도 없고 승자도 없이 오직 패자만을 다량으로 생산한 이 전쟁은,바로 그 패자들의 눈을 통해서만 황량한 전체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전자책(e-book) 동시출간. 김재영기자 kjykjy@
  • 통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통일이 성큼 다가온 것만같은 성급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통일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이같은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책들이 출간됐다. ‘강만길선생과 함께 생각하는 통일’(지영사)은 민족이라는 큰 틀에서 북한과 통일을 바라본 원로 사학자의 ‘균형잡힌’ 시각을 담고 있다.그는 한반도 통일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인 필연이며,일제의 유물인 반공의 틀에 얽매인 분단교육에서 벗어나 이제는 통일민족주의 사관에 기초한 통일교육이필요하다고 강조한다.동질성 회복을 위해 역사와 국어 교과서 등을 남북학계가 공동 제작해 교육하는 방안도 제안한다.또 향후 통일방안을 마련할 때 양쪽 정부당국자들만이 아니라 양쪽 주민집단의 의사를 반영하고 동의를 얻는절차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값 8,000원. ‘인터넷 세대의 통일’(나남)은 구본영 대한매일 행정뉴스팀 차장이 풍부한취재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쓴 통일 후유증 최소화 방안 연구다. 새로운통일정책 패러다임으로 선별적 대북 포용정책을 제안하고,남북교류협력도 등가성만을 고집하지 않는 융통성있는 상호주의 원칙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일방적 미디어인 방송 개방을 거쳐 쌍방향 뉴미디어인 인터넷 교류를 통해남북한간 언어이질화 문제는 결정적으로 해소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인터넷세대에 대한 통일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이산가족 및 탈북자,해외동포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 대처도 주문했다.값 8,500원. 장명봉 교수(국민대 법대)는 독일과 예멘의 통일사례와 헌법자료를 중심으로‘분단국가의 통일과 헌법’(국민대출판부 값2만5,000원)을 펴냈다. 김주혁기자 jhkm@
  • ‘일상속 파시즘’을 고발한다

    파시즘의 어원은 파시스모(fascismo).고대 로마 근위병의 장식인 파쇼(fascio)에서 유래했다.무솔리니 체제의 전체주의적·집단적·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지칭했던 말은 다시 스탈린 시대에 가서는 혁명에 맞서는 무장자본주의자들을 적대시하는 뜻이 되기도 했다.오늘날 그 쓰임의 영역은 크게 확장돼있다.파시즘의 현재적 개념은 권위주의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통칭에 가깝다. 한양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를 비롯해 각계 필자 11명이 참여한 책 ‘우리안의 파시즘’(삼인)은 같은 뿌리에서 싹터 민중의 삶과 의식속에 다양하게 가지를 쳐온 ‘일상적 파시즘’에 주목했다. 책은 “민중은 독재권력의 희생자였지만 동시에 공범자였다”는 통렬한 자기비판으로 논의를 펴나간다.예컨대 4월 총선에서 재확인된 지역주의(‘자발적’이라 단정짓는다)는 ‘합의독재’의 기반을 민중 스스로가 마련해주고 있는 사례라는 것. 무의식중에 일상을 잠식한 파시즘의 흔적은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드러난다.김기중 변호사는 주민등록제를 전체주의적 법질서의 토대라 꼬집는다.지난해 주민등록증 일제갱신때 ‘나라가 시키는 일’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단두달동안 2,500만명의 성인이 강제없이 동원된 사례는 우리가 ‘병영사회’이자 ‘동원국가’에 살고 있음을 입증해준 근거라고 주장한다. 세칭 386세대인 권인숙씨(미국 클라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는 여성문제에서파시즘의 뿌리를 본다. “학생운동에서건 조직사회에서건 성공을 꿈꾸는 여성의 전략은 거개가 여성성을 부인하고 자신을 남성과 동일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면서 이를 남성권위를 중시하는 사회경향 탓이라 풀이한다. 무심코 뱉는 일상언어 속에서도 파시즘은 살아있다.“너 뉘집 아들이냐?”내지 “넌 애비 애미도 없냐?”는 식의 이야기들.논리가 막힐 때 상대의 체계텍스트를 들먹이는 이런 말들은,전체에 누를 끼치면 윤리적 중죄자로 취급되는 전체주의 사고방식에서 나왔다는 해석이다(김근 서강대 중국문화학과교수). 또 전진삼씨(월간 ‘건축인 포아’ 편집인)는 한국 건축을 파시즘의 증식로라 파악하고,엘리티즘을 추구하는 건축물들의 파쇼적 혐의를 거침없이 따진다.“세종문화회관,예술의 전당,독립기념관 등의 건축양식이 하나같이 정권안정을 희구하는 기념적 상징들로 가득하다”는 등의 문제제기는 퍽 의미가깊다.값 8,500원. 황수정기자 sjh@
  • 스리랑카 분할론 대두

    [마드라스(인도) AFP 연합] 인도 연정에서 주축을 이루는 힌두민족주의당(BJP)의 강력한 제휴당인 드라비다진보전선(DMK)에서 4일 스리랑카 유혈내전을평화적으로 종식시키는 방안으로 구 체코슬로바키아식으로 스리랑카를 싱할리족과 타밀족 국가로 분할할 것을 주장하는 제안이 제기됐다. DMK 소속으로 인도 남부 타밀 나두주(州)의 주무장관인 무투벨 카루나니드히는 “콜롬보 당국은 정부군과 싸우고 있는 타밀 소수민족을 위해 독립적인영토를 양도해주거나 그들에게 보다 많은 권리를 부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제안은 타밀족의 무장단체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가 스리랑카북부 자프나반도에서 정부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 WP紙 “神의 나라 발언 美·日관계 악영향”

    [도쿄 워싱턴 교도 연합]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 총리의 ‘신(神)의 나라’ 발언이 일본 민족주의의 또다른 표현으로 미국-일본 관계에 악영향을줄 수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4일자 사설에서 경고했다. 포스트는 “이런 식의 민족주의는 과거 인근 아시아 국가들을 침범하고 미국과 전쟁까지 치른 일본의 맹목적 애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특히 이같은 발언이 “모리총리가 내달 도쿄에서 일본정부 주관으로열리는 G-8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제주의자로서의 이미지 구축을 원하고 있는 시점에 나왔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고 지적했다. 포스트는 “일본이 최근 한층 공격적이 되어 가고 있다”면서 “이런 추세로는 미-일 동맹관계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 [김삼웅 칼럼] 韓美 현안 어떻게 풀 것인가

    연초 미 정치학회장 로버트 코핸은 한 인터뷰에서 “제국(Empire)이라는 말은 미국을 표현하는 데 적절치 않다.역사상의 제국들과 달리 미국은 민주주의 체제이고 식민지 확장에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다.대국(Great Power)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미국의 지위는 기술적 지위가 계속되는 한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란 말을 남겼다. 미국에 비판적인 사람(국가)들은 ‘미제(美帝)’ 즉 미제국주의라 부르고우호적인 사람들은 ‘우방’ 또는 ‘혈맹’이라 호칭한다.코핸은 미국이 민주주의 체제이고 식민지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제국’이 아니라지만 보기에 따라 민주주의는 ‘국내용’이고 수많은 약소국가에 대한 이해 다툼은 ‘신식민지’ 정책이나 ‘속방’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그렇지만 과거 일본제국주의나 독일·러시아제국주의와는 존재양상이 크게 다른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두 얼굴의 미국’이 우리에게는 어떤가.일제로부터 나라를 찾아준해방자, 6·25전쟁에서 국가를 지켜준 구원자,배고플 때 도와준 은혜의 나라,수많은 유학생과 이민을 받아준 기회의 나라,상품수출의 최대시장 등 긍정적인 측면이 너무 많다.반면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침략을 양해해준 행위,분단의 배후,양민학살,독재정권 지원,대리전쟁(한국전과 베트남전) 조종,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SOFA) 등 부정적 측면 또한 심한 편이다.호오(好惡)와 선악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두 측면 함께 살펴야 개인이나 국제관계나 좋은 부분은 발전시키고 좋지 않은 부분은 시정해 나가는 것이 정도이다.한·미관계도 마찬가지다.80년 광주항쟁 이전까지 “양키 고 홈” 소리가 없는 곳이 한국이었다.그러던 것이 최근 양국관계가 곳곳에서 마찰이 생기고 긍정적인 측면보다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고 있다. 노근리와 매향리,린다 김,그리고 미8군 소속 매카시 상병 사건이 엎치고 겹치면서 그동안 묻히고 맺힌 일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주한미군의 본질문제에서부터 행정협정 개정,여기에 미군기지와 훈련장 등이 들어선 ‘공여지’문제,심지어 미군기의 착륙소음과 쓰레기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 언젠가드러나고 시정돼야 할 일들이지만 한꺼번에 분출되고 이것이 감정적으로 악화되어 양국의 우호관계와 공조체제에 손상을 가져와서는 안되겠다. 무엇보다 미국측이 한·미행정협정을 미·일협정이나 나토협정의 수준으로개정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노근리나 매향리 사건도 진실을 밝히고 응분의 배상을 해야 한다.한·미 두 나라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대등한 동반자관계이기 위해서는 상호주의 원칙이 존중돼야 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에 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전쟁억지력인 점에서 한반도의 평화유지에 크게 기여해온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병력과 예산으로 동북아지역의 안전유지라는 국익에도 큰 역할을 해왔다.결코 일방적 시혜가 될수 없는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로서는 미군이 수도 한복판에 주둔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적·역사적 상황을 인식하면서도,“일본이 미국의 배를 빌려 바다로 나가는(借船出海)식으로,이 기회를 자주방위의계기로 삼으려는”(李景治 북경인민대 교수)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주한미군의존재는 한반도의 전쟁억지력과 함께 중국과 일본의 군비경쟁과 대립을 완충시키는 동북아지역의 힘의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감정적이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만 주한미군의 존재에 대처할 것이 아니라 국제질서의 안목에서 이를 인식하면서 친미냐 반미냐의 수평논리보다 독일과 일본처럼 그들을 ‘활용’하는 입체논리가 중요하다. ■정상회담 앞둔 반미분위기 우려 우리는 지금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정부의 역량인지 국가의 행운인지,워싱턴·베이징·도쿄·모스크바가 모두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정상회담의 성공을 바라고 있다.이 기회에 한반도의 냉전체제 종식과교류협력의 증대를 위해 모든 역량을 정상회담의 성공에 집중시켜야 한다. 주한미군 문제나 SOFA 문제도 이 큰 원칙에서 예외일 수 없다. 미국측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미제’가 아닌 ‘우방’이기 위해서는 아메리카정신인 ‘합리주의’의 바탕에서 SOFA 문제나 현안을 풀어나가는 성실성을 보여야 한다.“웃는 얼굴에 침뱉을 수 없다”는 전통적인 한국인의 정서를 미국은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김삼웅 주필.
  • ‘美軍철수 시민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주한미군 철수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민감한 안보문제다.이는 남·북한과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일본,러시아 등 동북아 관련국 전체의 전략적인 이해가 달려 있는 사안이다. 한·미 양국 정부는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 재임 시절 ‘남북한이 통일된이후에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취임 이후 이같은 입장을 공식 천명했다.남북 통일 이후에도 강대국과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면 초강대국 미국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 정부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활동이 본격화되는것은 정부로서나 미국측으로서는 매우 껄끄러운 일이다. 박태준(朴泰俊)국무총리가 지난 7일 국무회의에서 이를 ‘특별히 유념해야할 현안과제’ 가운데 하나로 지목해 내각에 대응책 마련을 지시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법무부를 비롯한 당국은 주한미군철수국민운동본부의 인터넷 홈페이지와 활동상황 등을 면밀히 점검한 결과 미국을 ‘악(惡)의뿌리’라고 규정하는 등 다소 과격한 측면이 있지만 처벌할 만한 위법성은없다는 판단을 내렸다.지난해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개정 논의가 이뤼지면서논란의 여지가 있는 조항은 가급적 엄격히 적용한다는 검찰의 분위기도 이같은 판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부의 이같은 조치가 미국측으로 하여금 ‘섭섭한’ 감정을 갖도록할 가능성은 있을 것 같다.그러나 고위 당국자는 “주한미군의 주둔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부의 확고하고 공개된 방침”이라면서 “소규모 단체의 섣부른 민족주의 때문에 한·미 당국간에 불필요한 오해가 빚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이 당국자는 또 “반일 감정이 한·일관계에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반미 감정도 법으로 막을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도운기자 dawn@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 (6)라빈 아라파트 회담

    *93년 이스라엘 - PLO 오슬로협정 체결. “이미 너무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렸다.전쟁터에서 죽어간 동료와 가족들을생각하면 만시지탄이다” 1993년 9월13일 미백악관.역사적 오슬로협정 테이블에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과 마주앉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축사라기엔 엄숙한 한마디를 던졌다.이날 양국 정상이 체결한 오슬로협정은 결코화해할수 없을듯 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오랜 적대감을 끊고 이끌어낸 평화 총론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갈채를 받았다.그러나 협정시효가 훨씬지난 지금까지도 그 각론이 합의되지 않은채 유혈충돌 역시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중동평화의 가시밭길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평화의 청신호는 80년대 후반부터 찾아왔다.국제사회 압력과 극심한 경제난이 옥죄는 가운데 90년대초 소련의 붕괴는 그 지원에 의존하던 아랍 투쟁기구들로 하여금 노선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다. 70년대 내내 반이스라엘 테러의 선봉에 섰던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는 88년 임시 유엔총회 연설을통해 이스라엘 생존권 인정과 테러 포기를 선언,국제사회의 요구에 발맞췄다.이스라엘에도 92년 선거에서 라빈이 이끄는 노동당이 강경 리쿠드당을 대체,화해분위기가 무르익었다.오슬로 협정은 양국정상의 평화의지 외에도 이같은 유화정세의 산물이기도 했다. 양국 대표단이 노르웨이 오슬로에 모여 오랜 물밑회담끝에 선보인 협정문은당시까지의 중동관계로 미뤄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협정원칙(Declaration of principles;DOP)이라는 이름으로 공표된 문서는 △99년 5월까지 가자지구 및 요르단강 서안으로부터의 이스라엘 철군△이 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 자치△자치 3년내 독립국가로서의 팔레스타인 지위 논의 등을 규정하고있다.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점령지를 돌려줄 뿐만 아니라 향후 독립국 건설까지도 인정하겠다는 것.협정문이 제시한 ‘영토와 평화의 교환’ 정신은 향후중동협상의 대원칙이 됐다. 오슬로협정 규정에 따라 라빈과 아라파트는 94,95년 1,2차 자치협정에 나란히 서명했다.양국 정상간에 직통전화가 놓이고 총선거를 거쳐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됐다.94년엔 요르단이 이스라엘과의 46년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평화협정에 조인,중동평화 도미노에 대한 예감으로 지구촌이들떴다. 그러나 94년 나란히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사회 갈채의 안쪽에서라빈과 아라파트는 국내 강경파의 거센 반발에 맞닥뜨려 진땀을 흘려야 했다.점령지에 정착중인 이스라엘인들의 반감이 극에 달했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역시 잊을만하면 폭탄테러를 자행,평화일정을 지연시켰다.결국 95년 11월라빈 총리가 반대파에 암살당하면서 한축을 잃은 중동평화호는 일탈이 불가피해졌다. 곧이어 집권한 강경 네타냐후 정권 아래서 오슬로 플랜은 19개월가량 정지되기도 했다.98년10월 와이리버 협정이 가까스로 체결됐으나 오슬로 시계에의하면 이미 이뤄졌어야 할 요르단강 서안 완전철군,팔레스타인 최종지위협정 등이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있는 실정이다.이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또한번 정상간 회담에 의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손정숙기자 jssohn@. *라빈당시 이스라엘 총리. 중동평화의 정착을 위해 힘쓴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그의 오랜 군경력 때문에 ‘철권을 쥔 평화의 병사’,‘미스터 안보’로 불렸다. 1922년 예루살렘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카두리 농업고등학교를 마치고는 곧바로 하가나부대, 팔마치 부대를 돌며 군인으로서의 명성을 쌓아나갔다. 32세의 나이로 소장에 오르고 40세에 참모총장으로 진급, 67년의 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68년에는 26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주미대사로 임명되어 미국과 전략적 관계를 이끌어 내 대규모의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73년 귀국,74년에는 골다메이어 총리정부에 노동장관으로 입각했으며 같은해 6월 메이어의 사임으로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자란 최초의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77년 부인의 미국내 은행 불법계좌가 드러나 총리직에서 불명예 퇴진했다. 이후 84년에는 국방장관으로 복귀하여 레바논 전쟁을 종식시켰다. 92년 다시 총리가 된 뒤 주변 아랍국들과 평화협상에 힘을 기울여 93년 워싱턴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원칙에 합의하고 오슬로평화협정에 조인했다. 이공로로 페레스,아라파트와 함께 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으나 95년 11월 4일 평화집회를 마친 직후 극우파 유태인 청년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송하기자. *아라파트 당시 PLO의장.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는 1929년 부유한 무역상의 아들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났다.4살 때 모친이 죽고 예루살렘의 삼촌 밑에서자랐다. 그러다 46년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무기밀매를 하며민족주의자로 거듭난다.아랍과 이스라엘의 첫 전투 이후 UN은 팔레스타인에게 자치 정부를 약속하지만 이행되지 않고 갈 곳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박해를 받는다.이후 팔레스타인 동료들과 연계하여 64년 군소 저항단체들을 통합해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창설한다. PLO는 게릴라전과 테러를 이스라엘에 행하여 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입힌다. 그러나 대대적인 팔레스타인 길들이기에 나선 이스라엘 정부의 공격으로 요르단 본부를 빼앗기고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긴다.계속되는 테러와 마찰로 아라파트의 PLO는 세계의 불한당이 되었지만 72년 UN 옵저버 자격을 획득한다. 88년 모든 테러를 중지하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조건을 내세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요구, 그해 70개국의 승인을 얻었다. 90년 걸프 전쟁으로 신뢰도에 위기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93년 평화를 위한 기초 합의를 이스라엘 총리 라빈과 이루었다.96년 자치 수반으로 취임하여 98년 중동 평화의 결실이자 상징인 와이 리버 합의를 이끌어냈다. 황인철기자
  • 베트남 공산혁명의 원로 팜 반 동 사망

    [하노이 연합]베트남의 주언라이(周恩來)로 불리던 공산혁명의 원로 팜 반동이 베트남전 승리 25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달 29일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전쟁 기간인 50년대와 통일 시대인 70,80년대에 총리로 재직했던 동은 최근 고령으로 사실상 실명까지 겹쳐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숨지기 전 수개월간 병원에서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들이 노동절 휴간 중이어서 동의 사망은 2일 공식 발표되며 오는 5일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베트남 공산혁명의 주역들 가운데 호 치 민이 이상을 대변하는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를 가졌고 보 응옌 지압 장군이 전쟁 영웅이었다면 동은 베트남의외교와 정부의 틀을 짠 인물이었다. 전쟁 기간중에는 북베트남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는 대변인 역할을 맡기도한 동은 1906년 3월1일 쾅 응아이성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두이 탄 황제의 비서관이었다. 호치민과 보 응옌 지압이 수학했던 베트남 북부의 명문 코크 호크 대학에서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동은 1925년 하노이의 학생 파업에 참가한 이후 중국과 베트남등을 무대로 호치민 등과 더불어 공산주의 활동을 벌였다.
  • 새 영화/ 아나키스트

    1920년대 중국 상하이는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이었다.민족주의 제국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온갖 사상이 숨가쁘게 소용돌이친 질풍노도의공간이자 수많은 혁명가와 창녀가 한데 모여든 모험과 환락의 땅이었다.여권이나 비자 없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그 화려한 땅은 조국을등진 인간들을 감싸주는 ‘망명자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유영식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아나키스트’(29일 개봉)는 바로 이 상하이를배경으로 한 액션 느와르다.허무주의 인텔리겐차 세르게이(장동건),낭만적휴머니스트 이근(정준호),냉철한 사상가 한명곤(김상중),과격한 행동주의자돌석(이범수),소년 테러리스트 상구(김인권)등 5명의 조선인 무정부주의자가이야기를 끌어간다. 아나키스트는 ‘선장 없는 선원의 무리’란 어원의 그리스어 아나키야에서나온 말로 무정부주의자를 뜻한다.노동조합운동, 이상촌건설운동 등도 벌였지만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테러활동에 주력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항일 테러활동의 본산인 의열단에 속해 있다.의열단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공존하던 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김원봉이 중국 베이징에서 조직했다.그 사상적 지주는 단재 신채호였다.이들의공통된 적은 아시아 전체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은 실제로 항일운동에서 한몫을 담당했다.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잘알려져 있지 않다.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에게서 모두 버림받은 아나키스트들의 삶,그 역사의 사각지대를 복원하고자 했다는 데 이 영화의 의의가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이 뒷받침되지 못해아쉬움을 남긴다. 진중한 주제의식을 전하기에 시나리오는 밀도가 떨어지고,배우들의 연기엔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을 던진 열혈남아의 초상을 그려낼 만한 카리스마가 없다.댄디즘에라도 빠진 것일까.저마다 멋과 감상으로만 치달아 연기가 겉돈다.특히 비속어로 범벅이 된 이범수의 튀는 연기는 극의 원활한 흐름을 번번이 끊어놓는다. “삶은 산처럼 무거우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1920년대 격랑의 역사에휩싸인 조선인무정부주의자들의 삶을 표현한 이 말은 영화 ‘아나키스트’에선 왠지 공허하게 들린다. 김종면기자
  • [기고] 납·월북문제 새롭게 조명할 때 됐다

    지난 22일자 대한매일에 실린,중경임시정부 외교부장이자 삼균주의 이론가로 유명한 조소앙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현재 북에서 평화통일촉진협의회 고문으로 있는 김흥곤씨의 인터뷰기사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김씨는 1948년 남북협상,1950년 한국전쟁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북행 등에 대하여 쟁점이될 수 있는 증언을 해주었다.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좌우가 싸움만 벌이면 분단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고의 이념을 민족통일국가 건설에 두고 좌우합작·남북협상운동을 전개하였다.극우와 극좌는 ‘북벌’과 ‘남정(南征)’을 주장하면서 전쟁에 의해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1948년 분단을 코앞에 두고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그것의 일환으로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뒤 전쟁의 참화에 휩쓸렸고,만고풍상을 겪으며 평생을 조국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비극을 온몸에 안은 채 ‘납북’되고 말았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미처피신하지 못한 것은 이승만정부가 승리하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자기들만도피한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6월27일 새벽 2,3시경 이승만은 국회에도 국무회의에도 알리지 않고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그리고 다음날 새벽 2시반경에 한강교가 폭파되었다.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나라 걱정,민족 걱정이 앞섰기 때문에도 재빠르게 피신을 하지 못했다.중도파 민족주의자들 전부가 납북이었느냐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그러나 주요 지도자들은 강제로 끌려갔음에 틀림없다.안재홍은 피신해 있다가 끌려나왔다.김규식의 경우 피신 직전에 북의 요원들이 찾아왔다.김규식이 자진 북행하려고 했다면 그 자리에서부인 김순애 여사와 생이별을 했을 리가 만무다.이들은 압록강변에 있는 만포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고 북행을 거부했다는 증언도 있다.‘월북’중에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국회프락치사건으로 재판받은 제헌국회의원들은 전쟁이 났을 때 서대문감옥소 등이 저절로 열려 걸어나왔다.그러나 이들은 이승만정부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또 인민군 점령지역에 생겨난 여러좌익단체에 소극적으로 가담하였거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사람들도 ‘살기위해’ 산에 들어가거나 북행을 하였다. ‘남북협상’에 대해서도 곡해가 많다.극우반공세력은 김구·김규식 등의남북협상이 북에 이용만 당하였다고 주장하였고,북에서는 정통성과 결부시켜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유난히 강조하였다.1948년 4월 북에서는크게 성격을 달리하는 두 종류의 회의가 열렸다.하나는 연석회의이고 다른하나는 요인회담으로,세칭 남북협상은 주로 후자를 가리킨다.연석회의는 대규모 회의였지만,김일성 박헌영의 ‘미제국주의’와 단선·단정반대 주장에찬성일색의 발언만 하였다.그러나 김규식은 이 연석회의에 전혀 참석하지 않았고,김구도 단 하루 잠깐 나가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김규식과 김구의 강력한 요구로 열린 요인회담에서는 단선·단정반대도 있었지만,북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신헌법을 제정,통일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결의하였다.북으로서는 지킬 수없는 것이어서 회피하려고 하였지만,김구·김규식 등을 빈손으로 가게 할 수도 없었다.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결코 이용당한 것이 아니었고,민족의 대의를 세우는데 일단은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맞아 ‘남북협상’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그와 함께 월남한 사람,월북 또는 납북된 사람들의 문제가 민족 전체의 입장에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서 중 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 평양 리포트/(하)월·납북 인사 행적·최후

    김흥곤 선생(76·북한평화통일촉진협의회 고문)은 남한 현대사연구자들이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재북 인물중 한 사람이다.그는 전남 광주 출신으로 약관 22세 때부터 조소앙(임정 외무부장)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때는 조 선생을 수행해 평양에 다녀왔고,50년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후 인민군의 후퇴때 조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그는 지난 56년 7월 조소앙을 중심으로 안재홍,엄항섭(임정 선전부장),오하영(민족대표 33인중 1인),최동오(임정 국무위원),송호성(광복군·국방경비대 총사령관),김효석(자유당시절 내무장관)등 남한측 인사들이 조직한 북한 ‘평화통일촉진협의회’(이하 통협)에 참가해 현재 이 단체의 고문으로있다.그는 재북 임정요인들의 북에서의 삶과 최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4월 7일 오후 5시 평양 보통강호텔 면담실에서 어렵게 선생을 만났다. ●증언을 결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선생님의 증언은 우리 현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남에서 온 기자선생을평양에서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운명에 대해 제가 70평생 체험한 이야기를 하려 하니 정확히 보도해주기 바랍니다”●선생님께서는 어떤 인연으로 조소앙 선생의 비서가 되셨습니까. “일제하 광주사범학교 3학년때 2종 교원시험에 합격해 교원생활을 했는데학생들에게 조선어 공부를 시키다가 43년 반일교원으로 몰려 파면당했습니다.독립운동가 출신 당숙의 소개로 서울 백남운 선생댁에 피신해 있었는데 해방후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조 선생이 비서를 구하면서 내 얘기를 들으시고 비서로 삼으신 겁니다”●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셨을 때 일들을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남의 좌익세력들은 비법적으로 배를 타고 해주로 들어갔지만 민족주의 세력은 합법적으로 올라갔습니다.김구,김규식(임정 국무위원),조소앙,조완구(임정 국무위원) 선생 모두 자기 차로 평양에 가서,그 차로 돌아다니다가 내려가셨습니다.연석회의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은 대단했습니다.참가자들에게 양복 와이셔츠도 해주고 과일,사이다 같은 것을안겨주면서 열렬히 환송했습니다”. ●남에서는 남북연석회의가 실패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오늘의 관점에서 남북연석회의를 평가하신다면? “그것은 우리 역사상 공산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이 합작 단결을 과시한최초의 대민족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지금도 평화통일하자면 이념을 떠나민족이 대단결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가 있습니까.앞으로도 민족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북남연석회의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남북연석회의에 대해 남한의 보수진영 학자들은 ‘남북협상은 전적으로 북측에 이용당했다’는 입장이다.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협상 가운데 남북연석회의는 그런 측면이 있지만,이어 열린 남북요인회담(4김회담 포함)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한의 민족적 노력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편집자주]●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녹두꽃’에는 김 선생님께서 50년 9월 인민군이후퇴할 때 안재홍,조소앙 선생을 모시고 평양까지 후퇴한 것으로 나와있는데,후퇴과정과 그때의 민족주의 인사들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남쪽에서는대부분 이 분들이 강제로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들을 모시고 올라온 내가 납치범이란 말인가.당시 그 분들은‘남북협상파’ 세력이라고 불렸습니다.그분들은 ‘남북 국회가 우선 통합해서 통일헌법을 채택하고 50년 8·15를 기해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평화통일방안을 50년 6월 26일 국회에 상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6월 25일 전쟁이 난 것입니다.전쟁이 터진 후 조소앙 선생은 ‘우리가 조금만 빨리 평화통일방안을 통과시켰다면 이런 유혈전쟁이 없었을 텐데’하고 통탄해 하셨습니다.9월 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습니다.남북협상을 주장하시다가 김구 선생이 희생당하신 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안위를 걱정하지않을 수 없었습니다.조 선생께서는 빨리 유혈전쟁을 그치고 평화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고 전쟁이 그리 오래 가리라고는 보지않으셨습니다.이남 언론에서는 우리가 개성에서 서흥,봉산을 거쳐 대성산으로 갔다고 보도했는데 우리는 미국대사관에서 노획한 차를 타고 임진강 수중다리를 거쳐 다른 길로 왔습니다”[이에 대해 서중석교수(성균관대·현대사전공)은 “당시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조소앙·김규식·원세훈 등 중도우파 계열의 인사들이나 친일파로 지목된 이광수·백관수 등은 납북됐다고 볼 수 있다.반면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 등은 자진월북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당시 김씨처럼 남측인사들의 북행길에 동행했던 신경완씨(가명·80년대 망명·98년 작고)의 증언집 ‘압록강변의 겨울’에 따르면,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 노동당 군사위는 남한내 주요인사들을 포섭,재교육하여 통일전선을 강화키로 결정하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요인들을 연행,체포했으며,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후 후퇴하면서 평양에서 재교육을 받고있던 남측요인들을 데리고 자강도 만포까지 후퇴한 것으로 돼 있다-편집자주]●평양에 도착해서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당시 평양 대동강 남쪽에 국제전화중계소가 있었습니다.그곳은 국제적으로 등록된 곳이라 폭격을 안하게 되어 있습니다.우리는 9월 20일 평양에 도착해서 국제전화중계소 인근 농촌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동네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해와서 융숭하게 대접받은 후 백선을 두른 특별열차를 타고 강계까지 갔습니다”●북으로 간 민족주의 인사들은 박헌영,이승엽사건과 56년 ‘종파사건’이나면서 큰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최근 공개된 58년 10월 6일평양주재 러시아대사 푸자노프의 ‘업무일지’에 따르면 “58년 9월 30일 동료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조소앙 선생이 대동강에 투신자살했다”고 기록돼있습니다.사실입니까?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조 선생이 별세하신 것은 58년 9월 10일입니다.별세하실 때까지 조 선생은 상급(장관급) 대우를 받으면서 상(장관)들이 사는평양 흥부동 4호주택에 사셨습니다.별세하실 무렵 선생은 학질을 심하게 앓아 많이 쇠약해 있었습니다.별세 전날인 9·9절 술을 드시고 10일 새벽 대동강으로 산보를 나가셨다가 현기증을 일으켜 물에 빠지셨는데 겨우 정신을 차려 집에까지 오셨습니다.그길로 남산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만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병원에서는 사망원인을 학질로 진단했습니다”●김규식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주십시오. “김 선생께서는 50년 12월 10일 만포 적십자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머리 뒤에 혹이 있고,오랜 숙환이 계셔서 전쟁중에 후퇴하시면서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조완구,김의한(임정요인 김가진의 아들),엄항섭,송호성,유동열(임정 군무부장) 선생 등 다른 임정요인들의 사망시기와 최후도 궁금합니다. “면담에 나오기 전에 신 기자의 질문요지를 전해 받고,남에 있는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에게 제삿날이라도 정확히 알려주어야겠다는 일념에서 한분 한분 돌아가신 날짜를 정확히 적어 가지고나왔습니다(선생은 실제로 약 8쪽의 종이에 자필로 빽빽히 적은 메모를 보여주었다).조완구 선생은 홍명희 부상(차관)의 고모부가 됩니다.평소에도 홍명희 선생이 자주 나와 잘 돌봐드렸는데54년 10월 27일 평양 대성산구역 청암동 자택에서 운명하신 후 홍명희 부상이 주관해서 장례를 잘 치러드렸습니다.김의한 선생은64년 10월 9일 평양시 동대원구역 새마을동 자택에서 운명하셨고,통협 상무위원으로 부상급 대우를 받으시던 엄항섭 선생은 62년 7월 31일 평양에서 별세하셨습니다.통협 상무위원 송호성 선생은 평양 북새거리 자택에서 59년 3월 24일 운명하셨고,유동열 선생은 전쟁중 후퇴하다가 50년 10월 18일 자강도 희천 계선 쌍방골에서 폭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제헌의원 가운데 생존해 계신 분들은 어떤 분들이십니까. “경남 함안 국회의원이던 강욱중 선생은 69년 7월 1일 돌아가셨습니다.역시 제헌의원 출신이신 최태규 선생은 올해 80으로 얼마전 팔갑상을 받으셨습니다.통협 상무위원으로 재직하고 계십니다만 심장이 안 좋으셔서 요즘은 집에서 쉬고 계십니다”●돌아가신 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묘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김규식,조소앙,조완구,오하영,엄항섭,유동렬,최동오,임규섭 선생은 신미리 애국열사릉에,그외 통협 회원들은 신미리와 삼석구역(대성산) 특설묘지에 계십니다.또 통협 결성전에 돌아가신 현상윤(고려대 총장·50년 9월 25일폭격으로 사망),백관수(동아일보 사장·제헌의원·51년 10월 25일 폭격으로사망),정인보(국학자) 선생 역시 삼막 특설묘지에 모셨습니다.정인보 선생의따님은 홍명희 선생의 며느리가 되어 지금 평양 청류동에 살고 있습니다”junyoung@
  • [대한광장] 국민,민족,여성

    일본인 친구들 몇 명이 한국을 다녀갔다.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또 역사를 가르치는 친구들이다.한국에 오기 전,이들은 일본 보수파가 주도한 일장기와 기미가요에 관한 법률제정에 반대하는 지식인모임을 결성하고 인터넷을통한 서명운동과 여러차례의 집회를 개최했다.이들은 글과 정치적 실천을통해 2차대전의 기억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수정주의 사관을 단호하게 비판하고 일본 민족주의의 부활을 우려하는 진보적 탈민족주의의 입장을 분명하게밝힌 바 있다. 우리는 일본과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 늦은 밤까지 비교적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일본 제국주의의 조선과 대만에 대한 식민지 교육사를 전공하는 한 친구는,순배가 꽤 돌자 한국에 대한 솔직한 자기심정을 피력했다.일본에서 일장기에 반대하는 운동을 열심히 펼치다,한국에 와 보니 도처에 태극기 물결이라 무척 당혹스러웠다는 것이다.국기로 상징되는 일본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하고 비판적인 한국 지식인들이 유독 자기나라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이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모양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을 근거로 일본과 한국의 국가주의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이중적 잣대를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것이었다.덧붙여 그는 일제시기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중국대륙에 대해서는 강한 연대감을 표하면서도,정작 같은 식민지인 대만의 민족주의자들은 무시해버리는 일종의 우월의식이 존재한 것같다고 말했다. 제국주의 국가의 좌파 지식인이라는 굴레 때문에 그는 몹시 신중한 표현을사용했지만,나는 그의 지적이 옳다고 동의했다.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이 한국의 국가주의를 자동적으로 정당화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친구는 정신대 할머니의 증언이 일본의 역사학계에 미친 엄청난 파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문서화된 사료가 없다는 이유로 정신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우파 역사학에 대해,할머니의 증언 자체가 바로 사료라는 것이이들의 입장이었다.문서로 된 사료들은 지배자의 입장이 기록으로 남은 것이며,정신대 할머니의 증언이야말로 피억압자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구술된 더중요한 사료라는 것이었다.그것은 곧 실증주의와 역사인식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일본 지식인들의 이러한 진지함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정신대 할머니의 증언에 대한 한국사회의 주된 반응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한분노에서 멈추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일본에서는 2차대전에 참전했던 노병들의 양심선언이 나온 데 비해,한국에서는 정작 동이나 마을 단위에서 정신대를 모집했던 한국인들의 양심선언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한국측 모집책들의 철저한 침묵은 정신대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큰 공백이 아닐 수 없고,일본의 우파들이 정신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정당한 계약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리화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더 중요하게는 정신대문제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조선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착취를 의미할 뿐 아니라,같은 식민지 조선남성의 조선여성에 대한억압과 착취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더욱이 그것은 과거의 기억으로만그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제국주의 역사의 가장 큰 피해자 중의 하나라 할수 있는 이 할머니들에게 무려 50여년 동안이나 침묵을 강요했던 한국사회의 성적 억압구조를 함축적으로 드러내준다.반성해야 할 주체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뿐만 아니라,식민지 조선의남성과 대한민국의 남성들인 것이다. 민족문제의 프리즘으로 정신대의 역사를 바라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또 다른 반성의 주체로서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의 남성들이 생략된다는 점이다. 정신대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한국인 정신대 모집책을 설득하여 그들의 증언을 받아내고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남성국수주의에 대한비판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스스로에 대한 점검과 반성은생략한 채,상대방에 대한 반성만 촉구한다는 것은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林 志 鉉 한양대교수·사학
  • [대한포럼] 미국, 무역적자 타국에 전가말라

    미국이 올해 우리나라에 통상압력을 높일 것으로 전해져 자칫 서두르는 나머지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미국 정부나 업계가 거론하는‘한국 시장의 폐쇄성’도 현실감이 없어 보이고 한국민의 미국 인식만 나빠질까 걱정스럽다. 한국 정부는 내달부터 자동차,제약,철강과 반도체 등에서 미국의 시장개방압력과 싸울 예정이다.우리나라가 지난 2년간 수백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내면서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사실상 졸업하자 미국이 자국 제품을 더 사라고 몰아붙이는 모양이다.미국도 사정이 딱하긴 하다.미국 경상수지 적자가지난해 4·4분기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는 등 97년이후 매년 1,000억달러 이상 급증해 이른바 신경제가 거덜날 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높아진다.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무역장벽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폐쇄적인 시장을 집중 거론한 것을 비롯해 주한미국상공회의소 관계자들도 한국에게 세제개선등 가시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미국이 슈퍼 301조까지 발동해 무역보복을 할 지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점쳐진다.안타까운이유는 미국이 한국 소비자와 시장분석없이 종전과 같은 구태의연한 개방압력에 집착하는 것같아서다. 한국 소비자들의 흥미로운 의식 단면은 최근 정신문화연구원의 조사에서 엿볼 수 있다.19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니고 현재 나이가 30대인 서울대 386세대 중 절대다수인 87.5%는 ‘품질이 좋고 값이 싸다면 국산과 외제를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그러면서도 65%가 ‘기간산업은 국가가보호해야 한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들 서울대 386세대뿐아니라 전국 30대들도 이른바 개인적으로는 외제를 수용하면서도 사회의식은 외세에 보수적인 ‘개방적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40대 이후 세대들은 사실 맹목적인 국산품 애용을 교육받거나 아니면 ‘양담배 피우면 처벌받는다’는 강압적인 문화에 길들어져왔다.따라서 더 보수적으로 ‘그래도 국산품을 써야지’하는 잠재의식이 강하며 기간산업의 국가소유에도 더 찬성한다. 그래도 한국 소비자들의 의식은 서서히 변하고 있다.젊은 소비자들은 미국이 ‘싸고 질좋은 제품’을 팔면 사줄 가능성이 더 높다.정보통신분야에서독보적인 미국의 컴퓨터 장비는 한국기업들이 ‘알아서’잘 사주고 있다.지난해 BMW가 국내 외제차 중 가장 많이 팔린 것을 비롯해 벤츠 등 독일차가호조를 보인 것은 경쟁력과 소비자선택에 따른 것이지 독일 정부의 압력 때문은 아니다.한국의 관세는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며 세금에 관한 한 한국 정부가 고칠 것은 거의 없다.외국인이 한국 기업과 건물을 대량 사도 덤덤하게봐줄 정도로 외국자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상당히 사라졌다. 다만 미국 정부나 기업들은 고려할 것이 있다.한국에는 미국의 부정적인 면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는 386세대가 주력 소비계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또 외환위기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음모론을 여전히 믿고 있는 사람도 있다.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한 기성 세대들은 한국의 경상수지흑자가 줄어들면외환위기가 재발될까 우려한다. 과거 미국은 통상압력에서 총대를 메고 앞장섰지만 ‘재주만 넘고’ 실제이익은 중국과 유럽이 챙겨왔다.외국인이 한국기업들을 인수한 뒤에도 소비자들을 고려해 국내 기업의 간판을 그대로 달게 하는 세심함을 미국은 무역정책에서 본받았으면 싶다. 한국이 이제 막 외환위기를 벗어난 시점에서 억지로 미국제품을 사라고 하면 미국정부와 미국 제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높이게 될 것이다. 미국은자국내 경기 활황으로 늘어난 경상수지 적자를 외국으로 넘기려 하지 말고국내 경기를 안정시키는 데 더 힘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李商一 논설위원]bru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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