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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의 역사적 의미/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특별기고)

    민족사니 세계사니 하는 것도 결국 인간들의 일상 생활 하나 하나가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그 속에는 크고 작은 마디가 있게 마련이며,역사가(歷史家)란 사람들은 또 이 마디에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게 마련이다.우리 역사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에게는,지금도 5월만 되면 역사의 마디가 가지는 엄숙성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李承晩정권이 권력 연장을 위한 개헌(改憲)을 했다가 망해 간 역사를 보고,다시는 3선 개헌하는 어리석은 통치자가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가 朴正熙정권의 3선 개헌을 겪었다.10·26 궁정동사건에서 ‘유신’대통령 朴正熙의 최후를 보면서 쿠데타 일으키는 어리석은 군인이 다시는 안 나오리라 생각했다가 12·12 ‘군사쿠데타적 사건’과 ‘광주 학살’을 겪었다.이 참에 역사선생 영영 그만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또 ‘민중항쟁(民衆抗爭)’으로 이름 바뀌는 과정을 겪었고,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그 묘소가 성지가 되는 한편,‘군사쿠데타적 사건’을 주동해서 권력의 정상에 올랐던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면서,역사선생 그래도 할 만하다고 자위했던 일이 기억된다. ○역사의 엄숙성 또다시 절감 금년에는 또 ‘광주사태’때의 ‘내란음모사건’주모자가 대통령이 되어 다시 그 5월을 맞게 되었다.이렇게 되면 역사선생 할 만하다는 정도를 넘어서,역사의 마디들이 가지는 엄숙성(嚴肅性)과 정직성(正直性)을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또 ‘민중항쟁’으로 되고,‘폭도(暴徒)’가 ‘영예로운 전사’나 ‘민주열사‘가 되며,‘폭도’를 처치하고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들이 감옥에 가고,‘내란음모 주동자’요 사형수였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가 하고 묻는다면,그것에 대답해야 할 짐은 결국 역사선생이 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여러가지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그리고 좀 막연(漠然)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기어이 가고 마는 길이나 방향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 하는 것도 대답의 하나가 될수 있지 않을까 한다. ○‘광주항쟁’ 영예로운 전사로 어떤 사람들이 그 역사의 길이나 방향에 맞게 섰다면,설령 한 때는 역사왜곡으로 ‘폭도’가 되었다가도 결국 그리고 기어이 ‘영예로운 전사’나 ‘민주열사’가 되게 마련인 것이다.반대로 그 역사의 길이나 방향에 역행했다면 설령 한 때 권력의 정상(頂上)에 섰다 해도,그 권력이 끝나고 역사가 제길로 들어서게 되면 실정법적(實定法的) 판결뿐만 아니라,역사의 심판에서도 기어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될 것이다.만고불변(萬古不變)한 역사의 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더 자유로워지는 길,경제적으로 더 고루 풍부하게 되는 길,사회적으로 만민평등이 되는 길,문화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자유가 더 넓어지는 길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처절했던 광주항쟁이 있은 5월이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앞에서 든 네가지 길에 섰던 ‘폭도’가 ‘영예로운 전사’요 ‘민주열사’가 되고,‘내란음모 주동자’사형수가 대통령이 되는 반면,그 길에 역행했던 ‘쿠데타적 사건’의 주동자들이 기어이 감옥으로 가고 또 역사의 죄인이 되고만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 개방의 물결 흑룡강省(黑龍江 7천리:30)

    ◎88년부터 개방… 국경엔 러 장사꾼 북적/하얼빈·흑하·무원 등 통상구 25곳/92년부터 96년까지 5년간/러시아 관광객 130만명 다녀가 지난해 12월 6일 무원에 도착한 때는 저녁 아홉시였다.무원현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예약한 호텔 부근의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내렸다.도시의 거리와 지붕이 새하얀 면사포를 쓴 것처럼 하얀 빛인데 낙엽진 가로수 가지에도 눈꽃이 하얗게 폈다. 출근시간이 되자 거리에는 삽과 빗자루를 든 사람들이 눈을 쓸었다.‘눈이 오면 문앞의 눈을 치는 것’은 흑룡강성 시민들의 의무사항이다.눈이 멎으면 사람들은 어떤 명령을 받은 군인들처럼 자발적으로 나와서 길을 쓰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청나라 선통원년(宣統元年·1909년)에 수원주(綏遠州)가 설치,1913년 수원현이 되었다가 1929년에 무원현으로 되어 줄곧 가목사시에 예속되어온 현의 면적은 6천200㎢,인구는 겨우 4만여명이고 현성인구가 1만여명이라고 한다.러시아와의 통로가 열린 후로 외지 유동인구가 급증해서 사람도많아지고 거리도 많이 번성해졌다고 하지만 산간도시로 한산한 기분이 없지 않았다. ○전국 통상구의 10%나 차지 강변으로 갔다.‘1993’이라고 분명히 새겨진 국경비가 강둑에 세워져 있었는데 국장(國章) 아래 ‘중노국경’이라 쓰고 ‘258(1)’이라고 새겨져 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 한 점 없는 두나라 대지에는 햇빛이 가득했다.백설을 덮고 누운 무연한 강의 수면과 평야는 한빛으로 눈이 부시게 시야로 달려왔다.그물을 어깨에 멘 어민이 강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인적이 없는 해관뒤의 강면에서 어린아이들이 썰매를 타기도 하고 팽이를 치기도 했다. 5월에 강이 풀리면 10월까지 해관은 매일 2천여명의 러시아 장사꾼들로 북적댄다.중로무역성(中俄貿易城)에는 양국의 장사꾼들로 꽉 찬다.흑룡강성에는 국가의 비준을 거쳐 대외개방을 실시한 통상구가 25개나 있다.그것은 전국 동류의 통상구 총수의 10%,광동성 다음으로 전국 제2위이다.1988년말 흑하시가 처음으로 관광업무를 시작한 뒤부터 수분하,가목사,동녕,동강,무원,손극,나북,부금,요하,호림,밀산,하얼빈,목단강 등 17개 통상구에서 러시아와의 관광업무를 취급하는데 지난 92년부터 96년까지의 통계만 하더라도 1백30만명이나 된다.햇수로는 만 5년이지만 관광계절이 겨우 반년밖에 안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2년반만의 기록인 셈이다. 11월이 되어 일단 강이 얼기 시작하면 강을 오가던 중국의 화물선과 유람선들은 가목사부두로 가고 러시아 배들은 하바로브스크로 떠나간다.그때부터 흑룡강과 우수리강 통상구들은 수로왕래가 끊어진다.무원은 완전히 동면에 들어간다.말하자면 일년에 반년은 동면하는 곳이라 하겠다. 용강의 문화는 겨울에 있다.매혹적인 겨울의 눈과 얼음속에 있다.흑룡강성 소재지 하얼빈을 ‘빙성(氷城)’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누군가는 ‘빙성’에 시의(詩意)를 부여하여 ‘은도(銀都)’라고 했다.은은 눈의 별칭이고 순결을 뜻하기도 하면서 고대 화폐를 연상시켜서 부유한 도시라는 뜻도 내포한다. 역사기록에는 벌써 상주(商周)시기에 눈에서 스키를 타면서 수렵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12세기에는 겨울에 스케이트와 같은 오라활자(烏羅滑子·신밑에 쇠칼을 댄 것)를 타고 전쟁을 하고 17세기 누르하치때에도 스케이트와 중국식 스키가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매년 1월 빙등유원회 열려 해마다 1월 중순이면 하얼빈 조린(兆麟)공원에서는 빙등유원회(氷燈游園會)가 열린다.옛멋이 다분한 당나라 성곽이며 진나라 병마용이며 웅위로운 장성(長城)이며 번화한 시중심에 우뚝 솟은 소피아 천주교회당이며 12띠 짐승과 꽃,식물,명인들을 복제한 것 같은 얼음조각들은 절묘하기 이를데 없다.마치 일본 야마가타현 자오국정공원 지역에 해마다 스키시즌 때면 나타난다는 기기묘묘한 스노 몬스터를 통째로 옮겨온 듯했다.그리고 태양도공원에는 눈으로 조각한 예술품들이 전시되었는데 마치 안데르센이나 입센의 동화세계에 이른듯한 황홀한 감을 주었다. 지난해 말 나는 가족을 데리고 하얼빈으로 빙등구경을 갔다.22일 저녁 조린공원에서 빙등을 구경하고 차량통행이 금지된,러시아식 건물들이 길 양켠에 늘어서 이국의 풍치가 흐르는 중앙대가의 돌을 깐 옛거리를 걸어서 호텔로 돌아오면서 얼음음식에 대해 직감으로 공부했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고 길옆 식당에는 손님들이 붐볐다.그리고 중앙대가를 벗어나 경위로(經緯路)에 접어드니 언 배,언 감,언 두부,언 남새,언 만두,언 물고기 등 언 음식과 과일을 파는 난전들이 즐비했다.뼈를 에는 추운 겨울에 이곳 사람들이 더운 음식을 즐길 것이라고 넘겨짚는다면 착각이다.추운 곳이면서 찬음식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의 식성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북방의 빙설은 집집의 베란다를 천연 냉장고로 만들었다.아파트에서는 베란다에 매달린 물고기며 채소를 볼 수 있었다.청나라때부터 북방사람들은 황어 등 귀한 물고기에 물을 부어 얼음덩이로 만든 다음 그것을 황궁에 보냈는데 얼음을 깨내면 여전히 신선했다고 한다.긴긴 겨울 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언 배나 언 감을 녹여 먹고 밤이 되어 시장하면 얼려둔 만두를 펄펄 끓는 솥에 넣어 끓여서 먹는다.얼음음식은 그 종류에 따라 맛이 다르지만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용강문화는 ‘얼음을 먹고 얼음에서 놀며 얼음을 감상’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朴永學 集賢縣 공산당 부서기(黑龍江 7천리:28)

    ◎동족 향촌의 풍요 일구는 조선족 당 간부/가난한 요원향 서기 부임 3년만에/현내 제일의 부휴한 향으로 개척/중앙민족대학 연수뒤 연 2인자로 지난해 12월11일 부금시에서 두흥농장 취재를 마치고 집현현(集賢縣)을 향해 밤길을 달렸다.눈길 100㎞를 두시간 달려서야 현정부 소재지 복리진(福利鎭)에 이르렀다. 석탄도시 쌍압산시(雙壓山市)의 관할구역에 속하는 집현현 복리진은 철도를 경계로 남북으로 갈리는데 남은 쌍압산시에 속하고 북은 집현현에 속한다.그래서 진(鎭)으로 보기엔 그 규모가 컸다.새로 지은 붕락원호텔(鵬落源大酒店)에 투숙했다.요금은 160원인데 호텔방은 깨끗하고 훈훈했다.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호텔 뒤는 양식창고였다.곡식을 만재한 트럭들이 줄을 지어서 나가고 빈 트럭들이 또 줄을 지어서 들어오는 모습이 장관이다. 상오 9시쯤 현 민족사무위원회 민장원(閔璋元·48) 선생이 호텔로 찾아왔다.흑룡강성 발리현(勃利縣) 태생인 그는 1976년부터 1979년까지 군복무를 한뒤 지금까지 줄곧 민족사업을 해왔다고 한다.우리가동강시 조선족마을을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 그는 무척 반색했다. ○곳곳에 식량 창고 즐비 “부천,부화,부광촌은 건설 초기부터 제가 있던 곳이랍니다.인구는 많지 않지만 사람들은 누구 하나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니다.1980년도에 그 마을에 가서 당지부를 세우려니 지부의 서기감이 잡히지 않더라구요.중국에서는 촌이 서려면 당지부가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원래 살던 마을에서 무얼 했는가고 물었더니 마침 김씨가 당서기를 했다는 겁니다.지금처럼 전화가 있나,버스가 통하나,통신과 교통이 막힌 때라 그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밖에요.그래서 촌의 당서기를 시켰답니다.그리고 1년이 지나서 당조직 서류를 가지러 김씨가 살던 원 촌으로 갔더니 당원이 아니라는 겁니다.저의 실수로 당조직이 비당(非黨) 허풍쟁이 손에서 1년간 돌아간 셈이었지요” 우리가 “현재의 부천촌 당서기는 도성수씨더라”는 말을 하자 민장원씨는 “아니 도성수가요?”라고 하면서 앙천대소하는 것이었다. “나하고 도성수씨는 아주 가깝습니다.도씨네집에 하숙을 했습니다.내가 자원해서가 아니라 거의 억지였지요.사람이 주먹이 드세고 성격이 괴퍅해서 감히 다른 사람들은 그의 비위를 건드릴 엄두도 못냈습니다” 민장원씨는 한참이나 웃더니만 심각한 얼굴을 짓고 “그 사람 당서기까지 한다니 사람꼴이 잡힌 모양이구려”라고 한마디 부언했다. 공산당 당조직은 향촌의 지도적 핵심이다.기차에 비하면 기관사격이라고 할 수 있다.하얼빈시 신길상성(新吉商城·하얼빈시 남강구 선화가 288호)의 김병건(金秉健·44) 사장은 말한다. “공산당이라고 하면 한국사람들은 조건반사처럼 빨갱이를 상기하게 됩니다.하지만 중국에서 공산당원이라면 우수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중국 공산당은 6천만의 당원을 가진 방대한 조직이다.중국사회는 바로 이러한 공산당원에 의해 움직여 가고 있다.조선족사회도 우수한 조선족 당간부들의 역할로 발전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현재 흑룡강성 내에는 20개의 조선족 향이 있고 500개의 조선족 촌이 있는데 바로 향과 촌의 당조직이 민족사회를 꾸려가는 핵심이다. “주은래 총리는 생전에 중국 동북지방이 조선민족 발상지의 한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우리 선조들이 이 땅을 개척하고 지켜왔습니다.수천 수만의 우리 민족 선열들이 이 땅에 피를 흘렸습니다.오성홍기(五星紅旗)에는 우리 민족 선열들의 피가 물들기도 했지요.오늘날 우리 민족이 향수하는 정치권리는 선열들의 피로 얻은 것이랍니다.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우리 선조들이 피땀을 뿌려 가꾼 땅입니다.그러므로 조선족의 조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며 우리의 고향은 우리 조선족들이 개척하고 살아온 이 땅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언론서도 ‘훌륭한 간부’로 조선족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박영학(朴永學·52) 집현현 당부서기가 말했다.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한 박영학은 요하진의 부진장,진장을 거쳐서 요원향의 당서기가 되었는데 3년만에 가난한 이 향을 전 현에서 제일 부유한 향으로 건설했다.뛰어난 재능과 성과로 그는 1984년에 부현장이 되었다.1988년에 중앙민족대학에 가서 2년동안 연수를 하고 돌아온 다음 요하현 당위원회 부서기로 임명됐다.지난 96년 11월 그는 집현현으로 전근되었다.집현현이 생겨서 첫 조선족 간부가 태어난 셈이다. 흑룡강신문의 박일 기자는 ‘훌륭한 간부 가정의 참다운 주인’이라는 기사를 썼다.당시 박영학 서기는 자기 돈으로 음식상을 마련하여 현 소재지에 있는 조선족들을 청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여러분의 도움을 받을 일은 별로 없습니다.여러분이 저를 많이 찾고 저의 도움을 받으라고 이렇게 모신 겁니다.저는 당의 간부이면서 또 조선민족의 간부입니다.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박영학 서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웃어른을 존중하고 높이 모시는 미덕이 있습니다.저는 현의 2인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현내 조선족의 한 성원이 아니겠습니까.어르신네들에게 드리는 저의 효도의 심정이랍니다” 아들 둘을 엄한 교육으로 훌륭한 인재로 키워왔고 또 8년동안 하루같이 반신불수가 된 아내를 간호해온 박서기는 자식한테는 자애로운 부친,아내한테는 따사로운 남편,그리고 사회의 만백성의 훌륭한 아들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별을 앞두고 나는 식당마당에서 박서기를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 빨치산 토벌(대한민국 50년:13)

    ◎49년 ‘레드 킬러 작전’ 3,400여명 사살·생포/군검,지리·오대·태백산일대 주민 90% ‘적색’ 분류/48년부터 6·25휴전후까지 산악지대서 ‘소탕전투’ ‘낮에는 대한민국,밤에는 인민공화국’. 빨치산의 점령지역을 일컫는 표현이다.낮에는 군경의 치안아래 있으나 밤만 되면 빨치산의 점령구로 바뀌었다.대한민국 영토이면서도 한국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곳.48년부터 50년 사이 일부 남한지역은 이처럼 사실상‘무정부 상태’였다. 봄바람이 북풍을 녹이기 시작하던 49년 3월.1백여명의 빨치산은 전남 곡성군에서 군경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경찰 사망자 수는 1백여명이고 통신도 파괴됐다.보성 화순 순천 나주 함평 구례 영광 등에서도 비슷한 전투가 잇따랐다.그해 8월 전남 화순도 더위와 피비린내로 뒤덮였다.3백여명의 빨치산은 광부들과 연합해 철로,통신시설을 차단한뒤 건물을 불태우고 경찰관을 무참히 학살했다.호남지역 빨치산 활동의 중심은 역시 험준한 산세를 갖고있는 지리산 일대. ○48년 ‘여순사건’서 촉발 경상북도도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빨치산이 은신해 있던 산의 이름을 딴 ‘일월산 부대’의 지휘자는 유명한 金達三이었다.일제 또는 미제 소총으로 무장한 빨치산은 경찰서와 군부대를 습격했다.국군 1개 중대는 빨치산의 공격으로 41명이나 사망하기도 했다.경북지역 가운데 봉화 영덕 영주 등의 동북지역에서 빨치산은 발호했다. 대중과 연계해 무장투쟁을 벌이는 게릴라를 일컫는 빨치산은 48년 10월의 여순사건으로 촉발됐다.토벌 군경에 쫓겨 지리산으로 들어간 반란군들은 소규모 유격전을 벌였다.49년 6월에 접어들면서 빨치산은 더위 만큼 날뛰었다.조국전선을 결성한 북한이 게릴라를 대거 남파했기 때문이었다.북한은 게릴라 전문양성기관인 ‘강동정치학원’을 설치해 게릴라들을 훈련시킨뒤 남으로 내려보냈다.때로는 남한에서의 투쟁을 독려하고 고무하기 위해 남한내 빨치산을 북으로 불러 올려 교육시켰다.강원도지역도 38선을 넘어온 북한군이 빨치산들과 어울려 유격활동을 했지만 남쪽지역에 비해 그다지 심하지는 않았다. 빨치산의 활동은 49년 9월들어 절정에 달했다.정규군 편제인 병단을 만드는가 하면 중대 소대 분대도 편성됐다.심지어 여단으로 편성되기도 했다.무기와 탄약은 북한으로부터 보급받았으며 생활은 현지보급에 의존했다.산악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들은 이즈음해서 산을 내려온다.경찰서와 군부대를 공격하는 ‘아성(牙城)공격’이다.목포형무소에서는 폭동이 발생해 1천4백여명의 죄수 가운데 4백여명이 탈옥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에 따라 李承晩 정부는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에 나선다.전국을 지리산,오대산,태백산 지구로 나눠 빨치산 토벌 동계 대공세를 벌였다.38선에서의 대치와 충돌 못지 않게 남한 내부의 산악지대는 ‘전장(戰場)’이었던 것이다.빨치산의 수는 1만여명.하지만 빨치산과의 전투보다 추위와 눈보라와의 싸움은 토벌을 더욱 힘들게 했다.빨치산은 지리산이나 일월산처럼 산세가 험하거나 외진 곳을 주 근거지로 삼았던 탓이다.빨치산을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당시 관계자들은 회고하고 있다.군경은 주민 가운데 90%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했을 정도로 주민들은 빨치산 편으로 분류됐다는 점은 중요한 대목이다.주민들은 빨치산에 대한 정보를 군경에 제공하기를 거부했다.빨치산의 보복과 경찰에 대한 반감·증오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6일 李承晩 대통령이 방송에 모습을 드러냈다.“최단시일에 공비소탕작전을 끝내고 명년 초에 후방치안문제로 유보해오던 지방자치단체의 선거및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실시한다”고 빨치산 소탕작전을 독촉하는 발언을 했다.토벌군은 마을을 불살라 유격대를 주민들과 분리시키는 ‘소진(燒盡)소개(疎開)작전’으로 빨치산의 끈질긴 저항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현상 체포로 “작전 끝” 정부군의 진압에 49년 겨울을 지나면서 게릴라들은 차츰 소멸돼 갔다.12월 15일 지리산에서 벌어진 빨치산 토벌작전인 ‘레드 킬러’로 1천7백여명의 빨치산이 사망했고 1천7백여명이 생포됐으며 132명이 귀순했다.이에 앞선 그해 10월 좌파에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던 남로당에 대한 등록취소령도 남한내 빨치산 활동에 조종(弔鍾)을 울리는데 일조를 했다.50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빨치산의 활동은 잠잠해졌다.마치 6월의 한국전쟁을 앞둔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 빨치산 토벌작전은 한국전쟁이 끝난후까지도 여전히 계속됐다.53년 5월17일 빨치산 소탕 작전사령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틀림없이지리산 벽점골 비트에 잠복중입니다”.작전과장의 설명에 장교들은 침을 삼켰다.남한내 빨치산의 총지휘자이자 충청 경상 전라도를 넘나들며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했던 남부군단 사령관 李鉉相.종적을 감춘지 3년만에 그의 은신처를 알아낸 것이다.여순사건의 지휘자였던 金智會 등을 체포해서 밝혀낸 쾌거였다. 치밀한 작전계획 아래 포위망을 좁힌 것은 그로부터 5개월뒤.李鉉相을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병력은 4개 연대였다.9월 18일의 새벽바람을 가르며 1연대는 운봉을 출발해 남원군 산내면을 경유해 반성리에 포진했으며 3연대는 노고단을 경유에 반야봉으로,5연대는 함양을 경유해 백무동 능선을 압박해 나갔다. 2연대는 돌격대 역할을 맡았다.바스락 소리에 돌격대는 숨을 멈췄고 수십미터 앞에는 잡초를 헤치는움직임이 포착됐다.빨치산 3명이 조금씩 움직였고 거리가 5m 앞으로 좁혀졌을때 돌격대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숨진 빨치산가운데 한명이 李鉉相.이로써 기나긴 3년동안의 빨치산과의 전쟁은 끝났다.당시 李承晩 대통령이 완전히 성공을 거둔 유일한 것이 빨치산 토벌이었다. ◎약간의 마을 파괴” 미 반공시각 파악/일부 국내학자들 “지금이라도 진산규명” 주장/“민족사 정립 차원 특별법 제정해야” 빨치산은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빨치산진압작전은 ‘모조리 죽이고,모조리 태우고,모조리 빼앗는(殺光,燒光,槍光)’다는 ‘삼광(三光)작전’.일본군이 만주 및 한만 국경지역에서 조선과 중국의 항일 게릴라들을 토벌할 때 사용하던 전술이었다. 일부 마을에서는 게릴라가 아닌 민간인을 대량으로 죽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군경의 초토화 정책에 따른 것이다.49년 경남 하동과 경북 문경에서는 국군이 마을사람 수백명을 모아놓고 집단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이다.국회에서도 “민중들의 삶의 근거지를 빼앗고 좌익으로 몰고 있다”는 비난이 제기됐다.李靑天 국방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까지 구성돼 현지 조사활동을 벌였으나 ‘빨갱이 소탕’이라는 지상명제에 밀렸다. 당시 주한미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영사가 본국에 타전한 보고서는 “별로눈에 띠지 않는 약간의 마을 파괴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드럼라이트영사의 보고서는 다분히 반공논리에 의해 작성된 측면이 많다.“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비공산주의자 청년들을 가려 뽑아 그들을 좌익과 같이 견고하고 무자비한 행동에 맞설 수 있도록 조직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0여년이 흐른 지금 일부 학자들 사이에는 이제라도 진상규명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특별법을 제정해 ‘민족사 정립을 위한진실규명 국민위원회’같은 기구를 설치하자는 것이다.제주 4·3사건의 피해자·유가족 명예회복을 위해 국회가 요즘들어 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구성키로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4·3사건과 빨치산은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응어리져 50년동안 슬픔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중 첫 조선족 장관 탄생/이덕수씨 국가민위 주임에

    【베이징=정종석 특파원】 중국에서 처음으로 우리 동포(조선족)장관이 탄생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18일 열린 제6차대회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장관급)에 조선족인 이덕수(55) 중국공산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선출했다.국가민족사무위는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관련사무를 관장하는 국무원산하 행정부처이다.
  • 소수민족 허저족(흑룡강 7천리:22)

    ◎중 정부 “희귀 종족 보호” 산아제한 없애/45년 300여명서 95년엔 4,275명으로/‘고향’ 동강시만 821명… 민속박물관도 여기는 삼강평원,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동강이다.중국 역사는 동강을 이렇게 적고 있다.주나라 때는 동강이 숙진부,당나라 때는 하북도 흑수부,요나라에서는 동경도 오국부,명나라에 이르러 삼성부도관할구에 속했다는 것이다.1906년 이곳에 임강주가 서고 3년 후엔 임강부로 개칭,또 4년 후에는 임강현이 됐다.동강으로 이름이 고착되기는 그 다음해인 1914년이고 현에서 시로 승급한 때는 겨우 10년 전인 1987년이다. 오랜 옛적에는 성곽이었던 이 곳을 허저족들의 말로는 라하쑤쑤(나합소소),페허라는 뜻으로 불렀다. 1654년 조선 지원군이 러시아군을 일망타진한 곳이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떠올라 당장이라도 합수목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불붙듯 했다.하지만 아침 9시에 가목사를 떠나 270㎞ 겨울길을 달려서 동강에 도착한 때는 지난해 12월4일 하오 4시,벌써 겨울 짧은 해가 서산에 지고 어둠이 자리를 펴고 있었다. 가로등이 널따란 아스팔트 길을 밝히고 도로 양켠에 늘어선 고층 건물들에는 전기불이 밝혀졌다.옛날엔 페허였을지 몰라도 오늘의 동강시는 발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우리는 동강호텔로 곧장 갔다. 동강시 민족사무위원회의 우립군(35) 주임과 오채운(42) 부주임이 호텔에서 우리를 맞았다.가목사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이미 전화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점심에 도착할 줄 알고 식사를 같이 하려고 그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식당에서 그들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았다. 우·오 두 사람은 모두 허저족(혁철족)이었다.중국 사책에서는 허저족을‘허진(혁진)’ ‘허지쓰리(혁길사륵)’ ‘허지리(혁길륵)’ 등으로 표기했는데 그 뜻은 동방,하류라는 것이다. ○선조는 북해지방서 어렵 바로 흑룡강 하류에 사는 동방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허저족으로 사책에 처음 기재된 것은 ‘청성조실록’인데 “강희 2년 3월 임진(1663년 5월1일)에 4성 쿠리하(고리합) 등에 명하여 수달피를 바치도록 했는데 허저 등국은 영고탑에서 수납했다”고 씌어 있다.허저족으로 고정되기시작한 것은 민국 23년(1934년) 능순성이라는 사람이 ‘송화강 하류의 허저족’이라는 책을 펴낸 때부터다. “우리 선조들은 원래 북해지방 바이칼호 부근에서 어렵으로 살았답니다.어렵장 쟁탈 전쟁에서 쫓겨 흑룡강,송화강,우수리강 유역으로 옮겨온 연대는 똑똑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서북방에서 온 통구스(통고사)인임엔 틀림이 없답니다” 1976년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허저족을 위한 일을 해온 오채운 여사의 말이었다. 현재 동강시 오기진의 만족들이 1990년 인구조사때 허저족으로 등기하고 허저족자치촌을 만든 사실이 이를 입증하기도 한다.‘효종실록’에 기재된 변급의 견문기에도 “흑룡강 하류에 또 어피달자가 있다.북경에 귀순했다”고 돼있다. 이튿날 동강시에 있는 허저족 민속박물관을 참관했다.흑룡강변 공원 옆에 세워진 박물관 건물은 영국인들의 세관이었다고 한다.청조 말년에 동강이 중국 북방의 중요한 무역항구로 되면서 1907년에 라하쑤쑤분관이 섰다.그러나 청조는 영국·미국·독일·러시아·일본·프랑스 등 11개 국가와체결한 불평등한 ‘신축조약’에 따라 해 관세 등을 배상금으로 외국인한테 주었다.1910년 영국인들은 바로 중국식과 서양식이 반반씩 섞인 벽돌건물을 지었던 것이다. ○항일전투서 40명 희생 인적이 끊긴 박물관은 썰렁했다.모두 네 개의 칸으로 된 박물관은 허저족들의 복장(짐승가죽과 물고기 가죽으로 만들었다),생산공구(활,작살,그물 등)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에서 제일 인구가 적은 민족이랍니다.18세기 초 강희 말년에 1만2천여명(2천398호)이었는데 1856년에는 5천16명,1911년에는 3천400여명이었습니다.그런데 20년 후인 1930년에는 겨우 1천200명뿐이었고 광복이 되던 해에는 300명밖에 안 남았었지요.우리 민족은 멸망의 변두리에 이른 것이랍니다” 오채운 여사가 말했다. “동강,부금지구에서 우리 민족이 항일에 나선 용사들은 50여명입니다.칠성강 전투에서 40여명이 희생되고 나머지 분들은 러시아로 해서 신강으로 이전해서 항일을 계속했답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허저족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향수,인구가 급성장했는데 1995년 당시 4천275명이 되었다.한족은 무조건 아이 하나,만족을 제외한 모든 소수민족은 아이 둘까지 허용되어 있지만 허저족은 둘 이상도 허용된다. “정부에서는 허저족에 대한 특별한 우대정책을 주고 있습니다.동강시구역 내에 사는 허저족은 821명입니다.일년에 한 번씩 운동대회를 할 때면 국가에서 자금을 대지요.올해 여름 운동대회때 시 민족사무위원회,시 정부,향 정부에서 각각 10만원씩 30만원을 대주었습니다” ○조선족은 ‘대우’ 못받아 12만 인구를 가진 동강시 관할구역 내에 사는 조선족은 922명,허저족보다도 많지만 소수민족 대우를 그들처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동강진병원 원장 박광일(44)씨는 말한다. “동강은 허저족의 고향입니다.우리 조선족들이 연변자치주의 수도 연길을 수도처럼 생각하듯이 허저족들도 동강시의 동강진을 수도처럼 여긴답니다.민속박물관도 여기에 있습니다.용정에 조선족 민속박물관이 섰다더군요.허저족 민속박물관을 볼 때마다 용정에 가서 우리 민족의 박물관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민족을 모르고 산답니다” 흑룡강성 내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45만,그런데 조선족 민속박물관이 아직 없는 실정이다.내년에 가목사시에 박물관이 서는데 두칸을 내서 허저족과 조선족의 민속을 전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 창작악극 ‘눈물젖은 두만강’/일제시대 비극의 한 가족사

    악극의 대명사 극단 가교가 다섯번째 창작악극 ‘눈물젖은 두만강’을 15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다. 일제하인 1930년대 두만강과 만주,상해 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항일 독립운동과 이에 연루되는 한 일가의 비극의 가족사를 눈물과 진한 감동으로 그린 작품.두만강 백사공의 딸 정애는 독립군 승빈이 총상을 입은채 일경에 쫓겨 집으로 찾아들면서 역사의 격랑 한가운데로 휩쓸려 들어간다.독립군의 정인이 된 관계로 일제의 갖은 박해를 받다 화류계 여성으로 전락,일본 현병대장을 암살하고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는 정애의 인생유전을 중심으로 그녀의 부모,승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민우,일경의 앞잡이로 승빈을 밀고 하는 오빠 등 두만강변 한 가족이 겪어가는 불행한 민족사가 구슬픈 노래와 대사로 전개된다. ‘홍도야 울지마라’ ‘울고넘는 박달재’ 등 다수의 악극에서 기량을 쌓은 권소정이 주인공 정애역을 맡았으며 박인환 최주봉 윤문식 김진태 태민영 박승태 등 TV를 통해 낯이 익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눈물젖은두만강’ ‘물새야 왜 우느냐’ ‘청춘 블루스’ 등 흘러간 우리 옛노래와 ‘카르멘 조곡’ ‘인 더 무드’ 등 외국곡을 합해 총 35곡의 노래를 들려준다. 김상열 작·연출.하오 4시·7시30분(월요일은 쉼).369­2911.
  • 초대 대선과 첫 조각(대한민국 50년:5)

    ◎하지 사령관 서재필 대통령 꿈꿨다/암살 겁내 출마거부… 결국 국회 간선서 이승만 당선/초대총리 이윤영 제청,인준 부결 수모… 이범석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 지도력과 개성에 관해서는 평판이 극명하게 엇갈렸다.“대한민국을 세운 국부”“운산광산을 팔아먹은 매국노”“프린스톤 사람”(무초) “×자식”(하지)….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J.R.하지 중장은 애초부터 서재필을 귀국시켜 대통령에 입후보시키려 했다. 그것은 다분히 이승만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했다.당시 하지의 개인고문으로 일하던 서재필은 이미 암에 걸려 있었다.그는 자신이 살해될 것이라는 피해의식 때문에 입후보를 거절,미국에 돌아간 직후 운명했다. 19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간선으로 치러진 초대 대통령선거에는 결국 이승만과 김구,안재홍 등 3인이 나섰다.이미 예견된 대로 이승만은 196명의 재석의원 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김구는 겨우 13표를 얻었다.그리고 안재홍은 2표,무효가 1표였는데 무효는 미국 국적의 서재필에 투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7월24일 중앙청서 취임식 압도적인 다수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7월24일 중앙청 광장에서 취임식을 가졌다.“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그는 독립의 공을 연합군측에도,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독립운동파에도,국내의 항일투쟁 세력 어느 곳에도 돌리지 않았다.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다. 이승만은 취임후 곧바로 이화장에서 조각에 착수했다.‘조각의 산실’로 등장한 이화장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73세의 이승만은 철저하게 자신이 신뢰하는 측근만을 각료에 임명했다.그러나 그의 건국 내각은 국무총리 인준을 놓고 출발부터 상처를 입었다.이승만은 북한의 조선민주당 위원장인 조만식의 후광을 내세워 부위원장인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제청했다.하지만 이윤영 총리안은 제헌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는 수모를 겪었다. 지면이 거의 없는 이윤영을 내세운 것 자체가 당시 정황으로 볼때 무리였다.한민당의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회의 공론이었다.그러나 이승만은 자칫 한민당에 업힐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를 애써 무시했다.국회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발판을 국회에 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초대내각은 결국 항일독립운동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실마리를 풀었다.그리고 내무 윤치영,외무 장택상,국방 이범석,재무 김도연,법무 이인,문교 안호상,농림 조봉암,상공 임영신,사회 전진한,체신 윤석구,교통 민희식,법제처 유진오,공보처 김동성,무임소 이윤영 등으로 조각을 마무리했다.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인선은 국회에서 친일논쟁이 가열되면서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다.1948년 8월15일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은 출범했다.이와 함께 이날 상오 0시를 기해 미 군정은 폐지됐다. 이승만은 모든 관리들을 하향식으로 통제하려고 했다.이와 관련,미 중앙정보부(CIA)는 “이승만은 국무총리를 마치 ‘행정보좌관’처럼 부리고 있다”고 혹평했다.또한 미대사관은 상공부 장관 임영신을 “2다스의 속옷만으로도 매수당하는” 인물로 파악했다.그는 부패로 쫓겨난 최초의 각료라는 오명을 남겼다. 이같은 이승만 정권의 최고 통치방침 가운데 하나는 유엔에서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새롭게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계속 의존했던 만큼 합법정부로서의 국제적 승인을 즉각 얻어내지 못했다.1948년 10월19일 재일조선청년단체의 암살 위협 속에 이승만은 일본을 방문했다.목적은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를 만나 대한민국의 방위와 국제적 승인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 주한미국대사 무초에 의하면 이승만은 맥아더를 특별히 존중했다고 한다.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질 때마다 맥아더를 찾았다.1945년 10월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은 환국과 더불어 그를 만났다.1948년 10월 회담은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미국이 한국을 지키겠다는 계획을 이승만으로 하여금 내외에 공표토록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역을 맡았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은 1948년 10월8일 유엔에 제출할 최종 보고서를 채택했다.이 보고서에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 의해 성립된 한국정부는 정부의 기능이 점차 개선되어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모든 유엔 가맹국들은 한반도 전체의 독립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한다는 권고 내용도 포함시켰다.이 보고서는 제3차 유엔총회에서 심의에 부쳐졌다.1948년 12월12일 마침내 대한민국은 유엔 총회에서 46대 6으로 승인됐다.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된 것이다.그 후 대한민국은 소련과 그 동맹국가들을 제외한,50여개국의 자유진영 국가들로부터 개별적인 승인을 받았다. ○임정 세력 반대속 출범 대한민국의 출범은 민족사적으로 볼 때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진정한 의미의 민족국가가 비로소 출범한 것이다.우리 민족이 주권확보를 위해 장기간 노력해온 결과로,그 자체가 민족 숙원사업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남북에서는 상이한 정권이 출범했다.그것은 무엇보다 미·소 강대국의 서로 다른 한반도 정책에 기인한다.이는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정책에 있다.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반소·반공정책에 의한 남한지역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유엔이 결정한 데서 비롯됐다.당시 유엔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그대로 추수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제헌국회가 남북통일특별대책위 설립안을 부결시켰다는 사실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이는 국회가 남북통일문제를 도외시한 뚜렷한 징표라는 점에서 그렇다.국회소집 무렵 김구·김규식 등은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했다.통일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하려고 한 이들을 이승만은 공산당으로 몰아부쳤다.그렇듯 대한민국 정부는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의 반대 속에서 출범했던 것이다. ◎미,이승만 신뢰하지 않았다/본사특별취재반,미 CIA 작성 비밀보고서 입수/“독립위해 최선 다했지만 재난 불러올 행동 가능”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참된 애국자였다.그러나 그는 독립한국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최선을 다했다.……위험이 도사리고 있다.이승만은 증폭된 자아의식 때문에 재난을 불러올 행동을 하거나 적어도 신생 한국정부와 미국의 이해를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직설적인 평가를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의 국립공문서보존기록관리청에서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1948년 10월28일에 작성한 2급비밀보고서 ‘대한민국의 생존전망(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을 찾아냈다. 이 보고서는 당시 워싱턴 정책담당자들의 상황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자료다.이 문건에 의하면 미국은 결국 이승만을 옹립했지만 결코 신뢰하지는 않았다.따라서 미국은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계속했다.또한 미국은 군정이 끝난 후에도 CIC나 G­2,CIA 등을 통해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이 행한 부정축재 사실과 같은 부정적인 정보를 모았다. 또 방위와 재원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했다. 이 보고서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승만은 개인적인 이익과 로비활동도 들추어냈다. 워싱턴 임시정부 한국위원회의 수장이었던 이승만은 그 지위를 상당히 이용했다고 밝힌다.사적인 로비활동이야말로 이승만에게는 전쟁이 끝난뒤의 소중한 정치적 밑천이 되었다는 것이 보고서의 시각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최석충 총무처 의정국장 인터뷰/“국민 용기 북돋는 행사될 것”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 소비성사업 배제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실무추진을 맡고 있는 총무처의 최석충 의정국장은 “정부수립 50주년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면서 최근의 경제난 등을 감안해 최대한 간소하고 내실있는 기념행사로 치르겠다”고 밝혔다. ­정부수립 50주년의 의미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된지 반세기를 맞이했다.새 정부 출범의 원년이자 21세기의 문턱에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로 재도약하기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념사업의 기본 방향은 무엇인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의의를 재조명하고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각할 것이다.또 반세기 동안의 정부 역할을 객관적으로 평가·정리해 나가도록 할 계획이다. 동시에 겨레와 함께 새로운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 정부의 미래상을 제시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국민의 저력을 바탕으로 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이런 점에 중점을 두고 각종기념 행사와 사업을 펼칠 것이다. 특히 ‘IMF 시대’를 맞아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정부의 미래상을 대외에 알리는데 주력하려고 한다. ­정부수립의 역사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조명할 방안은. ▲민족과 함께 지난 반세기를 헤쳐온 정부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관련 자료 및 기록을 체계화해 나갈 것이다.이를 위해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해 세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알리는 일도 병행할 계획이다. 역사적인 조명뿐 아니라 국민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며 국민이 적극 참여하는 깨끗하고 민주적인 정부상을 구현해 나갈 것이다. ­기념행사의 초점은 어디에 둘 것인가. ▲국경일 제정 당시에 광복절에는 국권회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두가지의 의미를 뒀다고 여겨진다.그러나 정부수립의 의미가 그동안 다소 소홀히 취급돼 온 측면이 없지 않다.까닭에 기념사업을 통일된 주제 아래 묶어 정부수립의 의미를 뚜렷히 할 방침이다. 또 정부만의 행사가 아니라 국민이 널리 참여하는 행사로 만들어 국민적인 자긍심을 고취하면서 국가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것이다. ­광복 50주년 행사를 불과 3년전에 치렀고 최근의 경제난을 감안하면 50주년 행사는 낭비적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는데. ▲정부도 당초 가급적 돈 안드는 행사에 중점을 둬 왔다.예산도 최소화한다는 게 기본방침이다.더구나 나라의 어려운 경제여건을 감안해 일과적인 소비성 행사를 없애고 검소하면서 알찬 사업을 중심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다.
  • 개천에서 난 ‘조선족 용’(흑룡강 7천리:10)

    ◎한때 중국 행정부·군 최고자리 올라/“30∼40년대 한족간부와 항일운동·해방전쟁 참가 정치적으로 한자리씩 감투…” 흑룡강이 가음현에 이르면 그야말로 도도한 강을 이루었다.가음하와 결렬하,오운하 등 26갈래의 지류를 품에 안아 강폭이 바다처럼 넓어지기 시작했다.강 저쪽 러시아의 바스커워가 가물가물하게 시야로 들어왔다.극동 시베리아의 대철도가 지나는 화물집산지라서 중국쪽 흑룡강 대안은 가음통상구가 되었다. 그 흑룡강에는 20만t급 화물선들이 드나들고 있다.그런데 강폭이 넓은 가음현 경내의 흑룡강은 이름 그대로 용이 살던 곳인지도 모른다.강변공원에는 ‘공룡가족’과 ‘공룡세계’ 조각품이 들어선 것을 보면 태고때 공룡이 살았던 모양이다.그래서 가음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룡화석 발굴지역이라는 것이다.1915년부터 지금까지 가음현 용골산에서는 모두 6마리몫의 완형 공룡화석이 발굴되었다.러시아 레닌그라드박물관과 흑룡강성박물관 등이 보관하고 있다. ○성 행정 최고간부도 배출 강변공원 입구에 세운 안내판에는 ‘중화민족은 용의 자손’이라는 글귀를 담았다.중화민족은 물론 한족을 가리키는 말이다.용의 후손들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족들은 뿌리깊은 용문화를 지키고 있다.음력 설날부터 보름까지는 아직도 용춤을 추고 단오날에는 용주를 타는 민족이다.그리고 용은 지고의 권력을 상징했다.임금의 옷을 용포,얼굴은 용안,앉는 의자를 용상이라 하지 않았던가.우리 민족도 용을 우러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한족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한족의 용은 어마어마한 권력의 상징물이다.그 권력은 타고난 것이거니와,세습이었다.그래서 여느 사람이 출세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을 한다.한족사회에서 조선족의 출세는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그런 조선족으로는 전 중앙민족사무위원회 문정일주임과 전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군부장 조남기상장을 꼽을수 있다.이들은 중국의 행정부와 군부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조선족들인 것이다. 흑룡강성에서 고위직에 올랐던 조선족중에는 전 성민족사무위원회 이민주임이 있다.그녀의 남편 진뢰는 성장이었는데,부가 항일투사였다.지금은 항일과 해방전쟁 출신의 조선족 간부들은 다 퇴직하고 새로운 조선족 세대들이 들어섰다.그러나 옛날처럼 정치적인 출세라기보다는 기술직과 전문행정직이 대부분이다.흑하시에 사는 퇴직간부 한정순씨(64)는 조선족들이 기술이나 전문직에서만 출세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전의 조선족 간부들은 한족 간부들과 어울려 항일이나 해방전에 함께 참여한 동지이자 전우였디요.기래서리 정치적으로 길이 열려 한 자리씩을 했던거우다.요즘은 사정이 달라져 한족 틈새에서 간부를 하자면 실력이 뛰어나지 않고는 퍽 어렸습네다.개천에서 용이 나던 세월도 다 갔디요.” 그도 역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한족들과 함께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 조선족이다.평북 신의주 태생인 그는 1958년 대퇴한 이후 흑룡강성 밀산현 농업개간국에서 근무하다 1964년 흑하시 당학교로 전근했다.중학교를 졸업했으나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던 덕분에 지식인 대접을 받았다.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아내의친척들이 남과 북에 산다는 이유로 조선간첩 누명을 썼다.당시 흑하시의 조선족 간부 13명 모두 간첩이 되었다.조선족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북한도 백안시했던 때라 기쁜 소식을 말하는 ‘해보’를 통해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어떻든 조선족은 연변과 같은 자치구역이 아닌 한족구역 공공직장에서 제1인자가 되기는 점점 어렵게 되었다.용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고 이무기만 되어도 다행스럽게 여길 정도로 조선족 위치가 변했다.자리가 높아진다 해도 자리를 지키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치치하얼시에서 12년간 물자국장으로 일했던 성영석씨(58)의 회고담에는 그런 어려운 사연이 역역히 들어있다.소수민족이 다수민족 사이에서 홀로 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만했다. “물자국 직원은 600명이나 됐드랬디요.그런데 조선족은 내 혼자였디요.내가 총경리가 되고 나서리 밑에 있는 직원들이 상급기관에 고자질하기를 밥먹듯 합데다.그때 고자질 내용이 흑룡강신문에도 났디요.시에서 전문조사단을 통해 1년동안 검사를 해봤디만 헛물만 켠꼴이 되었댔습네다.내가 청렴하게 살았는데 걸려들 것이 있을리 만무했디요.내 인물이 잘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부에 아첨 잘한 것도 아닙네다.오로지 실력과 청렴으로 버틴 것이우다.” ○물가국장 12년간 봉직 그는 1964년에 치치하얼 물자국에 배치되어 1982년 총경리로 올라갔다.그리고 1994년까지 꼭 12년간 국장을 지냈다. 그는 당시 북한의 유일한 공과대학이었던 김책공대 출신의 기술엘리트다.흑룡강성 용강현에서 태어나 내몽골 우란하오터에서 중학교를 나온 뒤 1960년에 하얼빈공업대학에 입학했다.그런데 3학년때 북한으로 도망을 가서 김책공대에 시험을 쳤다.북한은 조선족을 무조건 받아주고 공부도 시켜주는 때라 김책대학에 들어가 매달 20원의 생활비도 받았다.김책공대를 졸업하고 잠깐 집에 들렀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중국에 주저앉아 버렸다. 오늘날 흑룡강유역에서 현직으로 활동하는 ‘개천의 용’은 겨우 두 손가락을 꼽을수 밖에 없다.막하현 기술감독국 박청천 국장(50)과 흑하시 우전국 서리희 국장(53)이 그들이다.그런 현실을 보면 기술전문분야를 파고들지 않고는 조선족중에서 ‘개천의 용’이 나올수 없다는 사실이 예견되었다.2백만 조선족을 대변할 정치적 ‘용’은 영영 나오지 않을 것인가.그 숙제는 조선족의 부단한 노력과 단결력에 달려있을 것이다.
  • “이번 대선은 새정치 확인 시금석”/김 대통령 시정연설

    98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그 심의를 요청하면서 저의 임기중 마지막 시정연설을 하게된 데 대해 각별한 감회를 느낍니다. 저는 우리 민족사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시기에 국정의 책임을 맡아 ‘변화와 개혁’ 그리고 ‘세계화·정보화’를 통해 우리나라를 선진국 대열에 합류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우리의 제도와 관행을 정상화 궤도에 올려놓고 삶의 질을 높이며,21세기 미래에 대비해 국가경쟁력을 높여 나가는 것은 시대적 당위였습니다. 개혁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역사발전의 순리였으며 세계중심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우리의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우리 스스로가 변하지 않고서는 세계의 무한경쟁에서 이길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이런 믿음에서 지난 4년8개월동안 국정의 각 분야에서 개혁과 21세기 준비를 추진해왔습니다.이른바 권력기관들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토록 하고,군 통수권확립과 군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노력했습니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의 실시,그리고 금융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경제정의를 구현하고 국가경쟁력을 높이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역사 바로 세우기’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국민화합과 사회정의를 진작시키고자 했습니다. 21세기 통일된 세계중심국가·선진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변화와 개혁’ 그리고 ‘세계화’는 앞으로도 계속 추진되어야할 국가발전의 기본과제라고 믿습니다.이 자리를 빌려 그동안 많은 불편과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개혁을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국민이 부여한 책무에 한 점의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임을 다짐합니다. ‘4자회담’은 현재 예비회담 단계에서 몇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여유와 인내를 가지고 의연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앞으로 4자회담이 열린다면 북한의 당면한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는 다각적인 협력방안을 협의해 추진할 것입니다.경수로 지원사업은 남북한의 많은 인원이 서로 협력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추진해나가는 첫번째 대규모 역사로서 앞으로 남북교류와 신뢰구축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그러나 지난 해 발생한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과 지난주에 2명의 양민이 휴전선상에서 납치된 것을 보더라도 우리는 북한의 대남 무력적화 노선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을 체질개선을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정부와 기업 모두가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오는 고통을 감내해야할 것입니다.지난 8월부터 시행중인 ‘금융시장 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대책’을 실효성있게 추진해 나가겠습니다.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은 성업공사의 기능확대와 부실채권 정리기금을 통해 조기에 정리해나가고,제2금융권에 대한 한은특융 지원도 차질없이 시행해 나가겠습니다. 정부는 교역상대국의 합리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수용하겠지만 부당한 요구나 압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앞으로 규제개혁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구조개혁 차원에서 추진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제도와 관행을 국제적 기준에 맞게 개선해 나감으로써 국가경쟁력과 정부의 생산성을 높여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21세기 물 부족 사태에 대비해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댐 건설 및 상수도 확충사업도 연차별로 차질없이 추진해 나가고 ‘상수원 수질개선 특별조치법’과 함께 ‘댐 건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의 제정도 추진하겠습니다. 이러한 시책을 추진하기 위한 내년도 예산안의 규모는 금년도 예산에 비해 5·8%늘어난 총 75조5천6백억원입니다.이는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작년에 비해 거의 동결된 수준입니다.정부가 절약을 솔선수범하면서 경제의 체질과 구조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분야에 재원을 집중 배분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룩해온 국정개혁의 성과를 바탕으로 통일된 세계중심국가를 건설해 위대한 한민족의 시대를 펼쳐 나가야 하겠습니다.저는 임기의 마지막 날까지 대통령으로서의 책무에 있는 힘을 다할 것입니다.
  • 정문연 정책세미나 이상우 교수 주제발표 요지

    ◎한국 안보환경 30년간 험난할듯/중·러·일­미 동맹 패권다툼 치열… 민족역량 모아 대비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원장 이영덕)은 13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여야대선 후보들을 초청한 가운데 ‘21세기의 문명사적 도전과 한국의 선택’이라는 주제로 정책세미나를 개최했다.세미나에서는 이상우 서강대 교수가 ‘21세기 한국의 역사적,환경적 여건’이라는 제목의 주제발표가 있었다.다음은 이교수의 주제발표 요지이다. 21세기를 내다보면서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불안과 기대가 함께 교차하고 있다.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너무 엄청나 어떤 세상이 닥칠지 몰라 불안해 한다.또한 이런 변화를 슬기롭게 이용하면 뒤쳐졌던 우리의 처지를 일거에 고쳐볼 수 있는 계기를 잡을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희망과 기대를 가져보는 것이다. 한민족의 21세기적 시대환경에 있어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앞으로 약 30년간의 기간이다.미국,중국,일본,러시아의 대아시아 정책을 중심으로 앞으로 30년간을 내다보는 한국의 주변환경을 살펴보기로 한다.첫째로 생각해야할 것이 중국과 일본의 패권경쟁이다.중국은 군사적으로 핵무기를 갖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중국이 지금처럼 매년 8∼9%의 성장을 지속한다면 8∼9년만에 경제역량이 2배로 될 것이고 30년후가 되면 현재의 8배의 경제역량을 가지는 무서운 강대국으로 변할 것이다.이러한 중국이 미국 또는 일본이 지배하는 아시아질서에서 종속적 지위를 누리며 안주하려 하지 않을 것은 명확하다. ○중·일 성내 종주국 경쟁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경제역량에 있어서 아시아 제일이고 세계적으로도 미국 다음인 일본이 경제역량에 상응하는 정치적·군사적 지도역량을 갖추려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중국과 일본의 패권경쟁이 현실화될 때 한국은 엄청난 시련을 겪게된다. 둘째로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미국은 로마 이후 최초로 전세계에 도전자가 없는 지배적 지위에 올랐다.미국의 장기적인 아시아 정책은 중국과 일본이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에 미국이 주도하는 안정질서를 구축하려 하는 것이다.미국의 이러한 아시아정책은 한국이 중·일 패권경쟁에서 희생되지 않을수 있는 길을 찾는데 있어 미국과 협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셋째로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관계 구축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유럽에서 봉쇄당한 러시아는 앞으로 대외진출의 길을 동아시아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동아시아에서 미국은 일본과 더불어 중국을 제압하고 있다.이런 사정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또다시 협력체제를 구축하려 할 것은 분명하다.이럴 경우 한국은 미·일 동맹과 중·러 동맹의 사이에 놓이는 위험을 안게 된다.21세기 한국의 안보환경은 이렇듯 험난하다. 한민족의 민족적 역량을 경제역량,군사역량,문화역량의 세가지 힘 차원에서 평가해보자.경제역량에서 한국은 통일을 이루지 않은 상태를 전제로 할 때 2015년에 GNP규모가 1조2천8백억달러 정도가 되리라 예상된다.그때 미국의 GNP는 9조4천억달러,일본은 7조8천억달러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한국은 경제역량에서 최소한 세계 10위내에 드는 규모의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각고의 노력 기울일때 군사역량은 경제와기술수준을 고려할 때 약 50만명 규모의 상비군과 최소한의 거부능력을 갖춘 군사력은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된다.문화역량에서는 문제가 예상된다.정치 민주화의 진행으로 민족내부의 갈등이 다소 완화되어 가고 있으나 특단의 조치와 각고의 노력이 경주되지 않을 경우 민족역량을 하나로 묶어 민족의식화하는데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민족사회의 미래상은 우리의 노력과 환경의 조화속에서 결실되는 유동적인 결과이다.우리가 민족적 지혜를 응집하여 21세기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대비해 나간다면 밝은 미래를 만들어갈수 있는 객관적 여건은 조성되어 있다고 본다.
  • 북한 ‘민족정통성 선점’ 전략에 대비를/홍승길(전문가 기고)

    민족성은 한 민족이 지닌 정체성의 근원으로 대내적으로는 단합과 결속을 다지게 하고 대외적으로는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이에 민족성을 지키는 일은 국민 모두의 몫인바 특히 남북한의 경우엔 통일의 주도권문제와 맞물려 있어 상호 경쟁적인 성격을 띌 수 밖에 없다.즉 우리 민족의 우수한 특성을 남북 어느 쪽이 더 많이 살려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더 잘 구현해 내느냐의 경쟁이 불가피한 것이다. 민족성과 관련한 우리 한국사회의 현 실상은 어떠한가. 언어생활분야에서 나타난 한 예를 볼 때,우리 식품위생업종의 명칭의 경우 대부분 한글에서 영문으로 바뀌어진 상태이다.다방이 커피 하우스로 변하고 생맥주집과 통닭집은 호프와 치킨센터로,그리고 대중목욕탕이 대중 사우나로 영문화되더니 결혼예식장까지 웨딩 프라자로 변했다.앞으로 이발소마저 바버 숍으로 바뀌지 않을가 걱정이다. 어쨋든 우리는 민족성을 생활속에 살리는 일에 너무 소홀한 것 같다.설사 세계화·국제화 추세에 따른 것이라 할지라도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게다가 세계화·국제화가 자기 정체성,자기 민족성을 지니고 자존과 자애가 선행될 때 비로서 건전하게 이뤄지는 것인 바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남한 외래화·북한 폐쇄화 그러면 민족성과 관련한 북한사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북한은 모든 업종은 물론 대부분의 상품명도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 외통옷(원피스) 등 한글 일색이다.심지어 축구경기의 셰계적 공통어인 코너 킥도 모서리차기식으로 한글화하여 사용하는가 하면,의생활에 있어서도 “옷차림에는 민족성이 잘 나타난다”면서 여성들에게 흰저고리와 검정치마를 강요하는 등 우리와 비교할 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다.그러면서 우리 한국의 민족성이 “국제화·세계화 소동으로 여지없이 유린말살되고 있다”고 비난,우리에 대한 비교경쟁의 자세로 임하고 있다. 이상의 단편적인 실상을 통해 민족성에 대한 남북한의 태도가 일부나마 드러났는바 우리의 무의식,무관심이 문제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북한이 민족성을 국가전략차원의 문제로까지 발전시키고 있어 경각심을 요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김정일은 올해 발표한 두차례의 ‘노작’을 통해 ‘민족성의 고수여부는 민족의 흥망을 결정하는 사할적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민족성을 ‘혁명과 건설의 근본원칙이자 확고부동한 노선’으로 제시했다. ○민족성을 전략차원 악용 여기서 우리가 더 경계해야할 것은 북한이 현재 사활을 걸고 있는 전민족통일전선전략을 펴면서 민족성을 ‘중요한 기치’로 내걸고 대남 민족주의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점이다. 김일성은 생존시 단군릉 재건과 함께 민족주의자를 자처하고 나선 바 있다.(90·8)이후 북한은 민족주의에 대한 관점을 종래의 ‘적대적 반동적 사상’으로부터 ‘애국적 진보사상’으로 재정립하고 민족주의자들과의 ‘단결과 합작’을 적극 시도하고 있다. 우리와의 역량대결에서 패한 북한이 민족적 정통성을 선점하려는 새로운 대남도전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이는 남북한간의 대결양상이 체제와 역량차원의 경쟁에서 정통성 차원의 경쟁으로 바뀌어 전개되고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면 물리적 역량 못지않게 민족사와 전통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대의명분을 선점하는 일이 중요하다.따라서 북한이 전개하고 있는 새로운 차원의 도전에 대한 우리의 응전에 결코 소홀함이 있어선 안될 것이다.
  • 오로촌족의 곰 숭배(흑룡강 7천리:7)

    ◎“곰에게서 조상 태어났다” 단군설화 비슷/“사냥꾼 아내 산속서 남편 찾다 곰으로 변해”설도/곰 호칭않고 조부모뜻인 “타인텐과 야아”로 불러 흑룡강성 치치하얼시에서 내몽골 자거타치로 가는 열차편으로 오로촌족기 대양수진에 도착했다.여기서 ‘기’는 깃발이 아니라 오로촌족 근거지를 의미하는 어떤 구역에 해당하는 것이다.대흥안령 동남비탈에 위치한 대양수진은 내몽골자치구에서 이름난 목재생산기지다.5만5천㎢에 이르는 임지에 2억9천만㎥의 임목을 보유하고 한 해에 1백20만㎥의 목재를 생산하고 있다. 나무값이 쇠값이라 대양수진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곧 피부에 와 닿았다.역광장에는 손님을 맞는 택시들이 즐비했다.마중나온 조선족 김창복씨(33)를 이내 만나 그가 운영하는 ‘금강산조선족음식점’으로 안내되었다.“웬 차가 그리 많으냐?”고 물었더니 “개인소유 차량만도 5천대가 넘는다”는 대답이었다.밤 10시인데도 술손님이 많았거니와 좀체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술손님은 모두가 오로촌족들이었다.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얼핏 조선말처럼 들렸다.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전연 아니었다.대양수촌에는 3천여명의 오로촌족이 살고 있다.민족의 절반이 여기 산다는 것이다.1895년 청나라 정부의 호구조사에서 모두 1만8천여명이었던 대양수진의 오로촌족은 해마다 줄어들었다.1953년에는 2천256명으로까지 뚝 떨어졌다. ○목재생산지 대양수진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원시생활과 별 다름이 없는 삶을 살았다.강의연간에 국이침이 쓴 ‘이역록’을 보면 오로촌족은 사슴을 길러 타기도 하고 짐을 실어 부리는 민족이라고 했다.그러니까 사슴을 길들일 줄 아는 순록인이자,사냥을 주업으로 하는 수렵민족이었다는 이야기다.지금은 정부가 농업과 목축업을 권장하면서 정착생활로 유도했기 때문에 떠돌이는 별로 없다.김창복씨의 말을 들어보면 중국 정부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는 모양이다. “중국 소수민족 자치기중에 오로촌족자치기가 맨먼저 세워졌디요.1951년 4월7일이네까 꼭 46년이 됐다 말입네다.당시만 해도 수렵을 생활수단으로 하는 민족이라 총알도 정부가 무상으로 지급했다고 기래요.여러가지 특수 보호정책이 많았디요.그중에서리 사형면제 정책은 오로촌족들만이 누린 특권이었을 겁네다.술에 취한 아들이 홧김에 아버지를 총으로 쏘아 죽인 일이 있었는데,석달 구류를 살고 나왔다고 합데다.물론 자수는 했디요.” 오로촌족에게는 부계씨족공동체조직이 있다.하나의 부계조상을 모신 그들의 공동체 이름은 무쿤(목곤)이다.씨족 내부의 모든 일은 씨족장에 해당하는 무쿤다(목곤달)이 총괄했다.같은 혈육간의 씨족조직인 무쿤은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다.범죄에 대한 재판도 씨족장이 연장자들과 협의하여 판결하는 것이 보통이다.그 벌금은 사냥물이나 곡식 따위로 대신했다는 것이다.치치하얼시 민족사범학교 교원 막대령선생은 혈연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무쿤대회를 엽니다.3년에 한번 여는 무쿤대회는 족보를 바로 잡는 것이고 10년에 한 번씩 여는 대회는 무쿤다를 뽑기위한 것이지요.대회기간에는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별의별 놀이를 다 합니다.씨름,활쏘기,말타기 등 놀이를 겸한 시합을 통해 혈연간의 끈끈한 정을 나누지요.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학교 운동회와 같은 것입니다.이 회의는 최고 의결체 성격도 지녔기 때문에 씨족규범을 범한 사람에게 주는 벌을 논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문자가 없다.게다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도 드물어서 오늘날의 사회법규로 다스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한지 모른다.오로촌족의 교육은 1914년에 시작되었지만 곧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산림속에 50리나 100리 거리를 두고 띄엄띄엄 살았으니 학교 교육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그래서 오로촌족의 정상교육은 1953∼57년까지 국가가 집을 지어주고 강제적으로 정착시키고 나서 가능하게 되었다.1980년대에 들어 소학생 344명,중학생 131명이 겨우 통계로 잡혔다.대학입학은 무시험특례로 겨우 30명이 진학할 정도였다. ○사형면제제도 특전 중국 정부는 1996년 1월26일자로 오로촌족들로부터 총기를 모두 거두어들였다.실탄까지 무상으로 지급했던 관례를 깨고 사냥도 금지했다.산속에서 사냥하는 습관을 버리고 목축업과 농업에 종사토록 한 이 조치가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아직 의문이다.왜냐하면 ‘금강산조선족음식점’에서 노루 생회가 나왔기 때문이다.주인 김창복씨는 노루회가 나온 연유를 이런저런 말로 이야기했다. “재작년에는 노루고기 한 근을 사자면 3원을 줬디요.지금은 12원씩을 합네다.잘못 걸리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서리 그럴수 밖에 없디요.이 고기는 아까 해질녘에 잡은 것입네다.주로 밤 10시쯤에나 새벽 4시쯤에 사냥을 해서 몰래 밤에 지프차를 타고 가서리 헤드라이트를 비추면 노루눈 두 개가 파란점으로 나타납네다.기럴때 쏘면 백발백중으로 잡히디 뭡네까.” 그러나 직업 밀렵꾼은 없고 그저 재미로 노루를 잡는다고 했다.대부분은 사냥 대신 농사로 살아가고 있다.개고기와 생고기를 잘 먹는 오로촌족은 조선족이나 마찬가지로 매운 음식도 즐기는 민족이다.어딘가 우리 민족을 닮았다. 어떻든 오로촌족에게서는 여러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그 하나가 자신들을 ‘곰의 후손’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곰을 숭배하는 이면에는 두가지 설화가 깔렸다.그 하나는 암컷 곰이 사냥꾼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나서 낳은 아이가 오로촌족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다른 하나는 산속으로 짐승을 잡으러 떠난 사냥꾼의 아내가 남편을 찾아나섰다가 길을 잃은 뒤에 곰으로 변했다는 설화다.첫번째 설화는 우리 단군설화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한국인 때문에 곰 수난 그래서 곰이 혈연적 친족관계를 가졌다고 믿는 오로촌족들은 곰을 곰이라 부르지 않는다.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뜻하는 타인텐과 야아로 곰을 호칭하기가 일쑤고 더러는 외삼촌을 말하는 아마허로도 부른다.곰을 일부러 사냥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인데 어쩌다 잡을 경우는 의식을 곁들인다는 것이다.곰을 마을로 메고 와서 마을 사람들이 고기를 나누어 먹기는 하지만 머리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머리는 다른 뼈와 함께 나무에 걸어 풍장을 치렀다. 오늘날은 곰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져 곰을 잡는 경우가 있다.곰의 쓸개가 고가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조선족들이 뻔질나게 한국을 드나들면서 웅담을 구하러 대흥안령 동북비탈로 몰려든 것이 화근이 되었다.
  • 신주체 중심 ‘강한 리더십’ 추구/신한국 전대­이회창호의 행보

    ◎‘대쪽’이미지 복원 공세적 대선전략/‘제도화된 개혁’으로 문민개혁 계승 신한국당 이회창 신임총재의 취임사는 여권의 새로운 중심축으로서 향후 국정운영에 대한 비전과 포부를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이총재는 집권당 총재이자 대통령후보로서 몇가지 메시지를 전달했으며,한때 정체성의 혼란을 빚었던 자신의 ‘색깔’도 분명히 했다.그중에서도 국민대통합의 정치는 가장 돋보인다.이총재는 건국세력과 산업화세력,민주화세력,정보화세력을 모두 합쳐 ‘민족정예세력’으로 규정하며 보수와 개혁의 조화로 새로운 민족사를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21세기 선진대국 실현을 위해서는 어느 한 정파나 계층,지역에 의해 이뤄질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다른 후보와의 연대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는 지적이다.그러면서 당의 성격도 명확히 했다.민주적·개방적 정당이요 다양한 이념과 세력을 포용하는 범국민정당이란 것이다.당내 민주화를 차질없이 진행시키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또 국정운영의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 이총재의 향후 행보도 읽게 한다.결속에 체중을 싣겠지만 끝내 ‘이회창체제’에 소극적인 인사들은 과감히 배제,이른바 ‘신주체세력’의 형성을 추진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해석이다. 둘째는 법치주의에 의한 국가운영과 개혁의 지속을 강조한 점이다.우선 법치주의 강조는 그동안 적잖이 손상당한 자신의 ‘대쪽’과 ‘법대로’ 이미지를 복원시키려는 공세적 대선전략으로 풀이된다.지속적인 개혁은 국민이 참여하는 미래지향적인 ‘제도화된 개혁’을 말하지만,이보다는 김영삼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는 곧 정권재창출에 대한 김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뜻한다.‘한배를 탄 동지’란 차원에서 취임사 서두에 김대통령을 극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김대통령도 명예총재 격려사에서 화답,두 사람간의 정례회동은 끝났지만 필요할 경우 수시회동을 가질 것으로 읽혀진다. 국가대혁신의 메시지도 빼놓을수 없다.전반적인 국가경영체제의 재검토가 골자다.이총재는 국회의원 선거구등 선거제도와 현재 3단계로 돼있는 행정구조,지방자치제의 운영을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이는 집권후 권력구조의 틀을 바꾸는 문제와 직결된다.그런 맥락에서 ‘21세기 첨단정부 기획단’발족을 공약한 것은 선진대국 실현을 위한 능동적인 자세로 평가된다.
  • “21세기 첨단정부 만들겠다”/이회창 총재 연설 요지

    대선이 80일밖에 남지 않았으나 우리 당은 아직 선거에 임할 전열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채 외부로부터의 도전과 내부 갈등에 직면해 있습니다.경선에 패배한 어떤 주자는 탈당해 독자출마를 선언하고 우리 당을 흔들어 대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 당은 한국정당정치를 이끌어오면서 민주발전을 주도해 왔습니다.경선을 통해 우리가 이룩한 정치발전은 한국 민주화의 중요한 성과입니다.우리 모두가 하나로 뭉쳐 정권재창출을 향해 진군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새로운 목표는 우리에게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방법,새로운 과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첫째,새 주체 형성을 위해 국민대통합의 정치가 필요합니다.건국세력과 산업화세력,민주화세력,정보화세력이 결합하고 지역주의를 극복하면서 보수와 개혁이 합세해 21세기를 이끌고 갈 ‘민족정예세력’을 형성해서 새로운 민족사를 열어가야 합니다. 둘째,21세기 민족비전 실현을 위해서는 ‘법치주의에 의한 국가운영’이 요구됩니다. 셋째,세계일류·선진대국을 실현하는 새로운 과제는 개혁의 지속입니다.구호가 아니라 경제와 안보를 바로 세우는 개혁을 할 것입니다. 넷째,우리는 국가대혁신을 이뤄야 합니다.입법·행정·사법부가 3권분립의 정신에 기초해 그 역할을 보다 적극적이고 민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국회의원 선거구 문제를 포함한 선거제도와 3단계로 되어있는 행정구조,그리고 지방자치제 운영도 전반적으로 재검토할 것입니다.정부를 무한 경쟁과 정보화 시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갈수 있는 ‘첨단 정부’로 만들어 가겠습니다.이를 추진하기 위해 ‘21세기 첨단정부 기획단’을 발족시키겠습니다.또 ‘자율·공정·정보화’를 3대 기둥으로 하는 ‘이회창 경제’를 추진하겠습니다.
  • TV토론에 대한 국민적 기대/황인정 전 KDI 원장(특별기고)

    21세기는 정보화 사회라고 한다.우리도 그에 걸맞게 이번 1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돈많이 드는 대중집회는 줄이고 TV 등 매스컴을 통해서 돈 적게 드는 선거운동의 장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 한다.이미 대통령후보들과의 TV토론회를 통해서 그분들의 면면을 소개하기 위한 TV중계가 여러 차례 방영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여준 TV토론으로는 너무나 아쉬운 점이 많아서 몇가지 주문하고자 한다.대학입시의 사지선다식 정답을 고르는 암기식 질문이나,정부 실무진에게나 할만한 질문,또는 과거를 들추기에 급급한 질문들은 과연 대통령이 될 사람을 상대로 하는 토론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다.앞으로도 이런 질문을 되풀이한다면 국민들은 식상할 뿐 아니라 선거를 망치고 말 것이다.특히 흥행 위주의 토론회의 방영이나,순간순간 적당히 얼버무리는 답변의 수용,분명한 검증없이 적당히 변명할 기회만 제공하는 토론회는 국민의 올바른 판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쉬움 많은 진행방식 이번에 선출되는 대통령의 임기동안에 우리국가와 민족은 금세기를 의미있게 정리하고 21세기 문명사적 대전환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더욱이 세계질서가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특히 유동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동북아정세의 역동성을 감안하면,향후 5년간 국가경영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될 새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그 어느때보다 크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권력구조가 대통령중심제로 되어있기 때문에 사실상 대통령 한사람에게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다시피 되어있다.따라서 나라 운명도 대통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은 그 어느때보다도 후보의 자격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알찬 기회를 희망하고 있다. ‘삼시 세판’이라는 말이 있다.이번 12월에 치르는 대선은 바로 민주화운동이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하는 세번째 대통령선거다.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민족사의 발전에 큰 획을 그을수 있는 훌륭한 대통령을 뽑을수 있게 되기를 진정 바란다.그러면 훌륭한 대통령,우리가 실망하지 않을 대통령의 자격검증을 위해서 과연 TV토론은 어떤 면을 따져봐야 하나.이를위해서는 ‘15대 대통령의 자격’에 대한 개념정립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자격’개념 정립을 우리나라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따라서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것은 국민의 권력을 어느 특정 후보자에게 일정기간 위탁하여 행사하게 함으로써 역사적 책임을 지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즉 영어로 ‘엠파워먼트’를 의미한다.누구에게 권력을 신탁·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선정될 누군가의 자격은 두가지 절대적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우선 능력면에서 믿음이 가야하고 인격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우리 민족사를 개척하고 이 시대 국가경영에 책임을 져야할 사람의 능력은 첫째,국정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건강이 주어진 사람이라야 한다.특히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다하려면 무엇보다 격무를 감당할 수 있는 건강을 갖춘 사람이라야 한다.둘째,이념면이나 국가관에 있어서 믿음이 가야 한다.그래서 분야별이나,시기에 관계없이 정책이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원리와 일관성이 보장되어야 한다.셋째,업무추진력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가야 한다.역사발전을 위한 중대한 개혁과제를 추진함에 있어서 국민여론이나 저항에 밀리지 않고 소신대로 국민을 설득해 가면서 정책목표를 관철해낼 수 있는 각오와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야 한다.인격면에서 믿음이 가는 사람이란 성실성,정직성,청렴성 등의 덕목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꾸는 사람,과거 부정을 저지른 사람,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웠던 사람은 믿을수 없다. ○세계관 등 판단기회 줘야 이러한 맥락에서 향후 TV토론에서는 후보들의 세계관,역사관,국가관,민족관,통일관,인생관 등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바란다.또한 객관적으로 밝혀진 국가경영과제,개혁과제 등과 관련하여 후보자의 기본시각,정책방향,소신,정책의지 등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란다.
  • 태양 숭배 오로촌·에벤키족(흑룡강 7천리:3)

    ◎모든 신상에 태양 그려 정성숭배/“황구가 해 삼켜 개기일식” 우리설화와 흡사 흑룡강성 막하현 막하향 북극촌에는 1988년에 세운 중국과학원 지구물리연구소 산하의 막하지자대가 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밀밭 한 가운데 자리한 막하지자대에는 태양 에너지 전지판으로 작동하는 지자감측기가 설치되었다.2층 건물아래 지하에 설치한 지자감측기는 지구 자기마당(자장)의 미세한 변화까지도 기록하는 기능을 지녔다.이 기록은 유도탄이나 인공위성 발사자료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지난 3월 개기일식 ‘장관’ 그런데 올해 천체관측을 하는 바람에 막하지자대는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지난 3월9일 개기일식을 바로 이 지자대에서 관측했던 것이다.그리고 중국국영 텔레비전인 CCTV ‘막하의 천상기관’이라는 이름으로 현장에서 생중계하여 1억2천만명이 동시에 시청했다.여간해서 만나기 어려운 우주쇼 개기일식을 보기 위해 중국은 물론 한국,미국,일본,독일,이탈리아 등지의 천문학자들이 막하로 몰려들었다. 올해 개기일식은 20세기에 나타난 6차례 개기일식중 마지막 일전식이라서 관심이 대단했다.더구나 막하지역은 개기일식을 가장 잘 볼수 있는 최적의 관측지라는 소문이 나 막하는 관광특수까지 누렸던 것이다.이에 따라 하얼빈철도 국제여행사는 관광객을 위해 3편의 전세열차를 운영했다.막하지자대가 위치한 북극촌은 일반인 통제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한 막하시는 시내에 임시관측소까지 세울 정도였다. 그 기개일식은 3월9일 상오8시44분 러시아 비스크 남쪽과 중국 신강성 일타이 북쪽에서 시작되었다.그리고 몽골을 지나 상오 9시8분 막하 상공에 들어선 개기일식은 동시베리아를 거쳐 북빙양에서 끝났다.300∼400㎞에 걸친 일식띠가 지나는 지역은 대부분 산이 아니면 황막한 들판이나 사막이었다.그래서 교통편과 숙박시설 등을 어느정도 갖춘 막하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개기일식은 중국 CCTV가 막하현 북극촌에서 생방송으로 내보냈다.해가 몽땅 자취를 감추어 북극촌 일대에 어둠이 깔린 시간은 정확히 상오9시7분40초대였다.그 순간이 지나자 태양 왼쪽 변두리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몇개의 점이 나타났다.빛나는 보석을 방불케 한 이들 점은 천문학에서 말하는 벨리구슬이다.몇초가 지나자 벨리구슬이 사라지고 달 그림자에 가린 태양에서 빛안개가 쏟아졌다. ○국영 CCTV서 생중계 중국의 TV와 신문들은 개기일식이 오기 1개월전부터 보도에 열을 올렸다.이는 계몽차원의 보도였는데,많은 사람들이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그만큼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 것이다.흑룡강유역의 원주민의 하나인 오로촌족(Orochon·악륜춘족)은 이번 개기일식때도 한 차례 소동을 벌였다.이들은 예부터 일식은 누렁개 황구가 해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태양을 숭배하는 오로촌족은 대낮에 태양이 사라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흑룡강성 치치할시 민족사범학교 교원이자 오로촌족인 황대영씨(39)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민족에게 태양은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그래서 신상에는 모두 태양을 그려 넣었습니다.두 사람이 싸움을 하다가도 해를 향해 시시비비를 가려달라 할 정도니까요….지난 3월9일 일식이 있던 날에는 머리에 소래기를 뒤집어 쓰고나수로 두들기고 다녔습니다.태양신을 더럽히지 말고 어서 해를 토하라는 뜻에서 그랬던 것입니다. 태양숭배는 에벤키족(Evenki·악온극족)도 마찬가지다.태양이 옥황상제의 딸이라는 설화를 지닌 에벤키족 노인들은 지금도 시간을 태양과 별에 의존하고 있다.날이 밝는 시점부터 새벽,아침,점심,저녁으로 낮을 네 등분하는 관습을 지켰다.또 밤은 삼성이 나타날 때를 기준으로 초저녁,밤중,새벽으로 구분했다.동·서·남·북의 방위 역시 해를 따라 결정한 에벤키족들은 해가 머문 방향을 보고 사냥감을 찾았다.해가 정남에 있을 때는 노루를,해가 솟을 무렵에는 말사슴을 잡는 시간으로 여겼다. 달을 기억하는 방법은 달이 졌다가 조각달로 나타나 다시 만월로 커지는 달모양에 두었다.우리 민족처럼 월력을 따른 이들은 지금도 월력을 철저하게 고수하고 있다. 흑룡강유역의 사람들에게서 우리 민족과 흡사한 심성을 읽었다.조선족 역시 일식은 개가 해를 삼킨다는 옛날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은 물론이고 혜성을 재성으로 보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월력문화권의 전통도 다 버리지는 않았다.그러고 보면 오로촌족과 에벤키족은 우리 민족이 차츰 잃어가는 상고의 심성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것이다.
  • 토지문화관(외언내언)

    원주시 단구동 742의 9.소설가 박경리의 집이다.치악산을 배경으로 드넓은 마당에는 소나무며 잣나무 대추 밤 호두 등 과일나무들이 무성하고 밭에는 온갖 푸성귀와 고추 마늘에 이르기까지 사철농사가 그치지 않는다.작가는 새벽 두세시면 일어나 글을 썼고 머리속의 샘물을 다 퍼올리고나면 마당으로 나가 풀을 뽑고 벌레를 잡는다.그가 수확한 배추로 김장을 담근 사람도 있고 가을에는 그가 딴 대추나 잣을 선물로 받기도 한다. 작가의 생명과 환경에 대한 외경은 남들이 관심을 갖기 훨씬 이전부터 실천되어 그는 마당에 날아오는 꿩이나 산까치에게 모이를 뿌려주고 집주변을 돌아다니는 들고양이들이 굶주릴 것을 염려하여 쌀한톨도 버리지않고 음식 남은 것을 모아둔다.또 나무를 꺾으면 나무에 깃든 생명이 피를 흘리며 슬퍼한다는 것을 아는 심심상인이 몸에 배 나무토막을 주으면 손칼로 새나 나비를 조각하고 원고지 파지뒷장에는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그런 작가의 혼신이 깃든 집이 지난 95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어 헐릴 위기에 놓였을때 그의 치열성과 정열을 아끼는 문단은 작가의 집 보존을 간절히 요청했고 한국토지공사는 오히려 작가의 문학적 업적을 고마워하며 박경리문학관으로 집을 쾌히 보존하기로 한 것이다.또 작가는 작가가 받은 보상금으로 흥업면 매지리에 1만5천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건축비는 토지공사가 부담하는 ‘토지문화관’을 설립,내일(15일)이 그 기공식이다.세미나실과 집필실을 갖춘 이 문화관은 숲속의 맑은 공간에서 세계의 석학·예술인들이 모여 삶과 환경을 토의하고 앞길이 기대되는 학자 예술가들에게 저술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된다. 그는 25년간의 대장정끝에 16권의 ‘토지’를 완결,자신의 대표작의 이름을 붙인 문학기념관을 갖는 최초의 작가가 되는 셈이다.사후의 청마나 지용의 생가가 보존되고는 있으나 생존작가의 집필실보존과 문화관도 처음있는 일이다.‘우리문학사를 찬연히 빛내주는 이정표’이며 ‘민족사에 길이 남을 광망’인 토지의 도도한 물결이 원주의 명소로 탄생하고 토지공사가 배려한 것에 의미가 있다.이는 문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은 ‘토지의 작가’‘환경과 생명’을 생각하는 작가의 기념비적 사업이기 때문이다.
  • 연변의 ‘조선족 만들기’(송화강 5천리:32·끝)

    ◎“조선족 희망은 연변에” 공동체의식 확산/교수·상공·언론인들 민족문화 뿌리찾기 선도/인물·역사·정치·경제 등 총괄 ‘두만강’ 4집 출간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사회는 무심히 꺾어 땅에 꽂은 버들개지가 마치 숲을 이루듯 형성되었다.정책적이거나 의도적인 이민정책에 따라 이주한 것이 아니라,호구지책이 어려워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사람들이다.수백년동안 인적이 끊긴 청나라 봉금구역으로 숨어들어 터전을 잡기 시작한 조선족은 끝내 오늘과 같은 민족사회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 조선족은 지금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민족속의 한갈래 민족으로 자리잡았다.그러나 다원일체 사회라는 중국에서 조선족은 어디까지나 소수민족이다.이들 소수민족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주체민족인 한족에 동화될 수 밖에 없다.그것은 필연적이다.더구나 최근에는 개방화 물결을 탄 인구 대이동에 따라 민족간의 통혼이 잦아졌다.이는 한족과의 동화를 더욱 가속시키고 있다. ○연해주 조선족근로자 20만 그런저런 이유로 민족성이나 민족문화를 지키기가차츰 더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었다.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은 늘어나고 소수민족의 증가속도는 늘 뒤떨어졌다.그런데 요즘은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민족집거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한족들이 야금야금 먹어들고 있다.연변사회과학원 김종국 원장은 이를 경계하면서 조선족이 타민족에 동화하는 현상을 비극으로까지 규정했다. 조선족이 선진민족으로 일어설 수 있는 관건은 민족경제 발전이다.어느 지역이든 민족기업이 많이 들어서면 조선족이 몰려들 수 밖에 없다.민족기업인 창녕그룹이 본거지를 하얼빈에서 진황도로 옮기자 많은 조선족이 따라갔다.러시아 연해주지구 한국기업에도 조선족들이 몰려있다.지난 1990년 연해주지구 조선족 근로자들이 10만명이었으니까,지금쯤은 20만명선을 훨씬 넘었을 것이다. 요즘 조선족 지식인들은 민족집거지 건설이 자연발생적이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반드시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더구나 연변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게 일고있다.유일한 조선족자치주이자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지리적 여건에서 그 당위성을 찾는다.이는 한반도 통일을 대전제로 할때 더욱 시급하다는 것이다.그래서 한국 대우그룹 김우중회장의 말을 기억하고 뜻깊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연변에 가야 한다.조선족 사회에 기여하지 않고는 다른 곳이 아무리 잘된다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대기업으로서 중국 연변에 가는 것은 기업인의 의무다.절대로 돈을 가지고 올 생각은 말고,또 장삿속으로 돈을 빼갈 생각도 하면 안된다.중국시장은 훗날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연변을 잘 살게 한 다음 돈을 벌어야 한다.” 연변을 우선 키워야 한다는 여론은 확산되고 있다.북경대 안상태교수는 “조선족의 희망은 연변에 있다”면서 “연변이 잘 되어야 민족이 산다”고 말했다.조선족 유동인구를 연변으로 끌어들이려면,한국기업과 조선족기업이 많이 들어와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느긋한 농사를 일거리로 한곳에 어울려 살았던 농촌집거구는 일찍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중국시장 우리에 큰 도움” 그런데 불행하게도 조선족들에게 결집력이 없다.그 결집력을상실한 이유는 우선 민족문화의 뿌리가 약해진데 있을 것이다.명절이 희미하게 퇴색한지 오래이거니와,조상을 숭배했던 양속마저 사라지고 있다.이는 이국타향에서 똘똘 뭉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자생적 민족공동체 의식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조선족사회 한모퉁이에서는 민족혼과 민족문화 뿌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이를테면 민족교육을 위한 출편사업인데,‘두만강 총서’간행이 그것이다.연변지역의 인물과 역사,정치와 경제,문화 분야에 초점을 맞춘 ‘두만강’은 이미 4집을 내놓았다.준비기간을 거쳐 4집을 간행하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교수와 작가들이 집필에 참여하고,출판자금은 연길시 백광무역상사 김선회 사장(40)이 대주고 있다. 조선족의 민족적 자존과 정신적 역량을 길러주리라는 기대감에서 간행한 ‘두만강’은 길림성은 물론 요령성과 흑룡강성에도 많은 독자를 두었다.‘사자가 이끄는 양떼는 양이 이끄는 사자를 이긴다’는 이야기가 있다.아무쪼록 ‘두만강’이 조선족이라는 양떼를 이끄는 사자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간행사업에 참여한 인사들이 바라는 소망이다.주간을 맡고 있는 연변방송국 문학부 김길련 부장(64)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민족사회는 사실상 심각한 격변기를 맞고 있습네다.그래도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서서 이 위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일을 시작했디요.우리 조선족이 스스로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키는 일이 될 것입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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