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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삼웅 칼럼] 신탁통치 문제의 역사인식

    김종필 자민련명예총재가 “찬탁인사가 정부요직에 있다”고 한 발언으로불거진 색깔론은 선거때면 나타나는 고질의 하나로 치면 그만이지만,신탁통치문제를 정략으로 삼는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에는 아쉬움이 따른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 해방공간에서 있었던,어느 측면 민족분단의 계기가된 탁치(託治)문제가 반세기도 한참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그것도 학술토론아닌 총선전략으로 제기되는 것은 우리 정치풍토가 얼마나 비지성적인가를보여준다. 한반도의 탁치문제가 외교석상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943년 영국총리이든과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의 워싱턴회담에서였다.그후 카이로·테헤란·얄타·포츠담회담을 거치면서 구체화되었다.원래 한반도 탁치안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루스벨트에 의해 구상되었다.그는 1942년 이래 전후 식민지에 신탁통치라는 새로운 제도를 적용시킬 것을 구상했다.식민지 국민은 자치능력이 부족하므로 일정기간의 교육을 통한 준비기,즉 국가의 신탁통치를 거친후 독립시킨다는 구상이었다. 1943년 11월 말 테헤란에서 열린 미·소 양국회담에서 루스벨트가 한국의탁치안을 제시하여 합의되었다. 이후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탁치안을 구체화하려했다.그러나 일본의 패망이 예상외로 빨라 한반도를 미·소 양국이 분할점령하게 되고,한반도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렸다.여기서미국이 제시한 탁치안에 소련이 수정안을 내어 채택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탁치안 1945년 12월 미국의 번스 국무장관,영국의 베빈 외무장관,소련의 몰로토프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결정한 탁치안의 요지는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②한국임시정부 수립을 돕기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③미·영·소·중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자 정치세력은 찬반양론으로 분열되고 격렬한 찬반투쟁이 전개되었다.3상회의 내용이 국내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45년 12월 27일이다.미국발 보도로알려진 이 소식은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며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내용이었는데,이는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탁치와 독립을 은연중 대립시키는 내용이었다. 이에 김구와 임정계열은 반탁과 즉각독립을 내걸고 반탁운동의 선두에 나섰다.김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과도정부수립”을 천명하면서 미군정에 대응하고 나섰다.이러한 반탁운동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초기반탁입장을 취했던 좌익세력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통일위원회 설치를 제의했으나,임정측이 비상정치위원회의 소집을 통해 통일정부를 추진하고자 하여 결렬되었다.그러나 이른바 ‘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은 46년 1월 2일3상회의 지지를 선언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좌익만의 통일전선을 이루었다. 한편 우익은 임정을 중심으로 비상정치회의 준비회를 열고,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이에 합세,좌익이 불참한 가운데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했다. 이로써 좌우분열은 극에 달했다. 실제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및 그를 통한독립’이라는 내용이었으나 이를 둘러싸고 친일세력과 민족세력간의 대립구도가 좌·우익간의 대립구도로 바뀌고,김구 등의 통일정부수립 노력이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노선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결국 탁치안은 친일분자 및 우익세력에게 도덕적 명분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찬·반투쟁 과정에서 정파간의 격렬한 대립을 벌이게 되어 민족분열의 계기를 만들었다. 민족·반민족에서 좌·우대결로 3상회의 결정에는 한반도의 분단보다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케 할 구상이 많이 포함돼 있었음에도 당시 정치지도자들은 ‘신탁통치’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미·소의 타협을 유도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지도자들이 국제적 식견이 있었다면 이 제안을 통일정부수립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인데도그러지 못하고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가져온 것은 민족사적 비극이다. 비슷한 시기 4개국 관리체제에 놓인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은 정파간의 협력과 외교력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했다.정치인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다. 김삼웅 주필
  • 오늘 이동녕선생 60주기…되돌아본 업적

    지난 96년 5월17일 15대 국회 개원을 며칠 앞두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한 역사적 인물의 흉상 제막식이 거행됐다.국회의사당 내에 특정인의 동상이 건립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흉상의 주인공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현 국회)의 초대 의장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1869∼1940)선생.국회가 선생의 동상을 의사당 내에 건립한 것은 상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아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해방 때까지 선생은 임정의 ‘기둥’ 역할을 했다.임시정부 공식출범 직전인 1919년 4월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 ‘대한민국’과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 후인 4월13일 이를 만천하에 공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 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정의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기록이다. 1869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이준·이승만 등과 함께 7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대한문 앞에서 항의 연좌데모를 벌이다 또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1907년 양기탁·유동열·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한 선생은 1910년 국권 상실 후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 교장에 취임,군사교육을 통한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국내는 물론 만주·노령(露領)·중국 등 국내외에서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은 일제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지조를 지켰다.또 임정 내 이념·계파간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동지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은 때문이다.백범 김구(金九)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선생은 재덕이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한편 선생의 여러 분야에 걸친 활동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언론계활동이다.1897년 ‘독립협회사건’으로 투옥,이듬해 출감한 선생은 당시 이종일(李鍾一)이 경영하던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설을쓰기도 하였으며,1907년 신민회 조직 후에는 당시 구국항일지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을 지원하기도 했다. 정운현기자 jwh59@. *이동녕선생 60주기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석오 이동녕(李東寧)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13일 오후 2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린다. 석오이동녕선생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상동교회이동학 목사의 추모기도를 시작으로 인하대 윤병석 명예교수의 약사 보고,추모·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 분향 순으로 진행된다.추모식에는 최규학 국가보훈처장,고건 서울시장,윤경빈 광복회장,박유철 독립기념관장,유족대표 이석희 (주)대우 상담역을 비롯해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한다. 정운현기자. *석오 이동녕선생 60주기에 즈음하여. 선열의 유지가 날로 퇴색되는 개탄스런 시기에 석오 이동녕 선생의 60주기를 맞음은 실로 감회가 새로울 뿐 아니라 나라와 겨레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 20대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앞날이 보장되었음에도 모든 영화를 버리고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로 뛰어든 것은 선생의 혁명적인 기질이 짙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선생의 독립투쟁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눈보라치는 만주벌판,얼음땅 시베리아,연해주,그리고 황야의 중국대륙에 이르기까지 수륙(水陸) 수만리를 뛸 만큼 웅장하고 방대한 발자취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우리 민족운동사에서 선생의 높은 위상은 가난과 무지에서 방황하던 암울했던 구한 말 뛰어난 문필로 여성해방운동과 민권사상을 주창했던 선각자였다는 데서 더욱 그렇다.이같은 민족사상의 맥락은 이미 3·1의거 직전 만주땅길림성에서 이른바 ‘무오(戊午)독립선언’에 앞장섰던 기개에서도 찾을 수있다.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초기 선생은 초대 의정원 의장으로서 역사적인 민주헌법 제정에 앞장섰는데 이는 선생의 투철한 민주사상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임시정부 주석 4차례,의정원 의장 3차례 등 총 7차례에 걸쳐 임시정부의 대임을 맡는 동안 선생은 항상 온화한 성품으로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독립운동의 열기가 한창이던 1910년대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인재양성이시급함을 통감하고 남만주 해외망명기지에서 최초의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에 손수 출자하여 동지들과 운영하였다.또 최초의 군사학교인 ‘신흥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에 부임해 후일 대한광복군의 초석을 다졌다.선생의 이같은 교육적인 열정은 멀리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군 사관학교를 세우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선생은 평소 덕행과 예절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당시 친러파와 친일파 간의 사상적 갈등,각 지방 파벌 간의 혼란 속에서도 선생은 초연한 입장에서 민족진영의 단합체인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수한 ‘터줏대감’이었다.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조선총독 사이토가 한국인 관리를 중국에 밀파,선생의 귀화를 적극 권유하였으나 일제의 유혹을 끝내 물리쳐 선생을두고 ‘불멸의 민족혼’으로 칭송하고 있다. 선생은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는 자리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이를 중재하고 수습하였는데 이는 겸손과 높은 식견을 갖춘 선생의 영도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고 동지들이 증언하고 있다.선생을 두고 ‘민족운동의 선구자’이자‘임시정부의 총수’라고 일컬었던 것은 강직한 성품과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사상,그리고 애국철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겠다.선생은 항상 남을 존중하고 남을 앞세우며 자신은 뒷전에서 도와주는 미덕의 소유자였다. 임시정부 시절 선생은 해외로 망명하기 전 서울 상동(尙洞)교회에서 기독교에 입교해 전덕기 목사를 알게 된 것을 늘 행복해 했다.또 그 시절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최초의 항일조직인 신민회를 창건한 사실을 몹시 그리워했다고전해오고 있다.1940년 선생은 조국광복을 불과 5년 앞두고 이역만리에서 향년 72세로 서거하였다.독립운동의 와중에서 참아왔던 지병인 급성폐렴이 악화된 탓이었다.선생은 유언으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정당의 통합’을남겼다.선생의 장례는임시정부 수립 후 첫 국장으로 예우하였으며 해방 후백범 김구선생의 지시로 유해가 봉환됐다.오늘 선생의 60주기를 맞아 선생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그 큰뜻을 되새긴다. 김석영 이동녕선생 기념사업회 상근부회장
  • “동아시아 전체 틀속에서 朝鮮 접근”

    “역사와 삶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사료를 함부로 뛰어넘는 것도 위험하지만 그것에 얽매여서도 안되지요.역사 저술에는 언제나 생활현장이 중시돼야 합니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씨(62)의 학문 세계에는 언제나 ‘도전과 집념’이란단어가 따라 다닌다.역사의 현장을 누비며 이론과 접목시켜 나가는 것도 그의 이같은 독특한 역사의식에서 나온다. 그는 최근 지난 95년부터 집필하고 있는 ‘한국사 이야기’의 세번째 산물인 ‘조선 전기편’(전 4권)을 출간했다.2003년까지 한길사가 계속 펴낼 시리즈는 총 24권 분량.우리 역사를 모두 되짚어 보는 방대한 작업이다.개인이 사건사와 정치사,문화사,경제사를 현장 답사를 통해 통사형식으로 쓰는 것은 해방 이후 처음이다. 이씨는 지난 98년 6월 ‘고대편’ 4권을 첫 출간한 뒤 지난해 1월 ‘고려시대편’(전 4권)을 써내 한국 중세사 연구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그는 이에 대해 “해방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생활사와 문화사적측면에서 풀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작업에 나선 95년 7월부터 전북 장수와 김제,경기도 구리 등으로 집필실을 옮기면서 매년 200자 원고지 5,000여장을 쓰고 있다.이같은 강행군으로 무리가 따랐는지 요즘 손의 마비증상과 어깨 통증으로 병원을 자주 찾는다. 조선시대편은 조선의 건국부터 청일전쟁(병자호란)까지를 아우른다.우선 조선시대사를 명·청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의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따라서 그는 임진왜란은 조일전쟁으로,병자호란은 조청전쟁으로 용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조선의 유교적 통치이념이 민중과 생활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도 심층해부한다.음식 주거 의복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조선 여성들의 억압적삶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예를 들어 담배의 유입 과정을 다루면서 광해군이 담배 냄새를 싫어해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예절이 생겼다고 유래를 밝힌다. 이씨는 “조선시대의 역사는 많은 연구 결과물을 갖고 있어 고대와 고려시대보다 집필하기에 편한 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의 역사 관점은 주역사상의 대가이면서 야인 기질을 가졌던 부친 이달선생의 생활방식과 사상,학문의 방향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대구에서 태어나 16세때 가출,고아원 생활 등을 거치면서 광주고와 서라벌 예대를 중퇴하기도 했다.어린시절과 청년기는 방황과 새로운 세계의 경험,그리고 빈한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60년대 중반이후에는 민족문화추진위원회와 규장각에서 고전과 민족사를 연구했고,86년부터는 소장학자를 중심으로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답사기행을 주도해 학계에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는 결실을 거두었다. 저서로는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이야기 인물한국사,역사와 민중,한국의 파벌,허균 등 30여종이 있다.그는 요즘 ‘역사의 현장성과 생활화’란 일념으로 한달에 한번 꼴로 답사길에 오른다. 유홍준 영남대 교수는 “주위의 학문적 편의와 혜택을 터럭만큼도 받지 않고 오로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뜻으로 40여년을 역사 탐구에 몰두해 온 것이그의 삶”이라면서 “‘한국사 이야기’도 이같은 의지의 결산물”이라고 말한다. 정기홍기자 hong@
  • 올 곧은 元老 12人의 인생과 학문

    흔히 우리사회에는 원로가 없다고 한다.왜 없을까마는 배우고 닮을만한 표상이 많지 않다는 뜻일게다.그러나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학문적 업적은 물론 왜곡된 현실모순 속에서도 올곧은 삶을 살아온 원로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다만 이들은 남앞에 나서기를 자처하지 않았고 더러는 질곡의역사속에서 폄하돼 가려져 왔던 탓이 크다. 역사문제연구소가 발행하는 계간지 ‘역사비평’은 우리사회에서 학문적 성과와 ‘행동하는 양심’으로 존경받고 있는 원로 12명의 인터뷰기사를 묶어‘학문의 길 인생의 길’(역사문제연구소 엮음)을 출간하였다.주요 면면을보면,한국사 전공자로 이우성(민족문회추진회 회장)·임창순(전 태동고전연구소 소장)·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조동걸(국민대 명예교수),서양사 전공자로 민석홍(서울대 명예교수)·차하순(서강대 명예교수),경제사 전공자로최호진(한국경제학회 명예 회장)·주종환(동국대 명예교수),언론학 전공자로송건호(전 한겨레 신문 회장)·리영희(한양대 명예교수)·이상희(전 서울대교수협의회장),그리고 여성학(사회학)전공자로 이효재(정대협 명예공동대표)등.이들 가운데 임창순 선생은 지난해 작고하였고,송건호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현재 투병중이다.나머지 인사들도 대개 일선에서는 은퇴하였으나 연구·사회활동의 열정은 아직도 여전하다.정년퇴임 이후 더 바쁘고 노후가 ‘아름다운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12인은 해방후 척박한 우리 사회·학계를 특별한 관심과열정으로 주도하고 개척해온 선구자들로 우리 ‘지성사의 기록’이나 마찬가지다.특히 개인사적 기록을 넘어 학자로서의 삶,온몸으로 맞서싸운 시대상황과 그 이면사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도 담고 있어 우리 ‘동시대사의 생생한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한 선비로 불리는 이우성은 식민사학 극복과 민족사학 성립에 기여한 역사학자로,최호진은 1942년 ‘근대조선경제사’출간을 계기로 한국경제학 연구에 이정표를 남긴 한국경제의 산 증인으로 평가받는다. 또 민석홍은 프랑스혁명 연구와 한국민주주의 연구에 큰 성과를 남겼으며,임창순은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후학양성에 일생을 바쳤고 4·19 당시 교수단데모를 주동하였다.사재를 모두 재단에 기부하였으며 ‘화장유언’을 남기기도 했다.학자보다는 언론인으로 유명한 송건호는 일생을 반독재 언론투쟁에바쳤으며 한겨레신문 창간의 주역이기도 하다.강만길은 식민사관 극복과 민족해방운동사·분단문제에 천착해온 실천적 지식인으로 ‘분단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주도적으로 창립한이효재는 여성학자이자 사회학자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타파에 앞장서는등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해왔다.언론인 출신이자 언론학자인 리영희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 등사회비평서를 통해 시대를 앞에서 이끌었으며 수 차례 대학에서 쫓겨나 감옥생활을 했다.차하순은 한국의 서양사학을 반석 위에 올린 공로자이며,주종환은 농업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이상희는 비판적 언론학의 선구자로 언론개혁을 처음 주장했다.끝으로 조동걸은 한국독립운동사와 현대사학사 개척자로,특히 의병연구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고문은 “주로 진보적 학문 분위기를 지닌 인물로현실의 모순에 타협하지 않고 뚜렷한 자기 주견을 내세우며 치열한 삶을 산
  • 서울도 한자표기 있다

    서울로 보내는 편지 겉봉에 주소를 쓸 때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바로 ‘서울’이다.중국인들은 서울을 ‘한성(漢城)’으로,일본인들은 일제때 자기들이 사용하던 ‘경성(京城)’이나 혹은 일어로 ‘ソウル’라고 표기한다.그렇다면 과연 ‘서울’은 순한글 지명인가? 그동안 서울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순한글 지명으로 알려져 왔다.그런데 최근 한 재야 서지연구가가 ‘서울’도 한자표기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고서연구회 이사 김시한씨(金時漢·69·경안서점 대표)는 30일 서울중랑구 중랑문화원에서 열린 서울문화사학회(회장 김영상)주최 학술발표회에서 “‘서울’ 관련 고문헌들을 조사한 결과 ‘서울’의 한자표기는‘徐 ’”이라고 주장하고 그동안 자신이 수집한 ‘徐 ’ 한자표기 관련 고문헌 12종을 공개했다. 김씨가 공개한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조 정조때 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단군조선∼고려때까지의 고도(古都) 21곳을 시로 회고한 ‘21도(都) 회고시(懷古詩)’.이 시집의 신라편에서유득공은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신라의 국호 ‘서야벌’을 훗날 사람들이 도읍지를 지칭하는 ‘서벌’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서울’이 되었다(徐 文獻備考 新羅國號徐耶伐 後人稱凡京都曰 徐伐 轉爲 徐 )”면서 ‘徐 ’에 대한 기록의근거를 밝혔다. 또 1830년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서울의 대표적인 지지(地誌)인 ‘한경지략(漢京識略)’의 서울 ‘연혁’부분에도 서울을 ‘徐 ’로 표기하고 “사람들이 수도를 부르기를 ‘서울’이라고 했다(人稱京師曰 徐 者)”고 적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한글학자가 쓴 책에서도 확인된다.한글사전 편찬위원과 한글학회 이사를 지낸 이중화(李重華)가 1918년 육당 최남선이 경영한 신문관에서 출간한 ‘경성기략(京城記略)’ 제1권에는 “경성(京城)은 조선어에 ‘셔울’(徐 )이라 하니 이는 경도(京都)의 의의(意義)라.徐 은 신라의 방언이니…”라며 신라의 국호가 나중에 수도의 이름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4년(1922년)에 출간한 ‘배달민족사(倍達民族史)’ 제4과(課) ‘서울의 부여(扶餘)’편에는 “혁거세를 추대하여 거서간을 삼고 도읍 (慶州)을 서울사노(徐 斯盧)라 칭하니 서울은 도읍의 이름이요, 사노는 부여의 음전(音轉)이라…”고 나와있다. 월간잡지 ‘신지식(新知識)’(1928년 출간)의 서울특집엔 “서울을 한문으로 쓰면 徐 로…옛 신라시대의 방언이라.지금 우리가 말하는 서울은 그때의 徐 을 칭함이 아니라 이조(李朝)창업 한성부(漢城府)때 부터의 서울을 칭하는 것이다”고 하였다.이밖에도 ‘서울대관(大觀)’(1955년 출간),‘수도사적(首都史蹟)’(1956년 출간) 등에서도 서울을 ‘徐 ’로 표기하고있다. 김씨는 그동안 ‘서울’의 한자표기가 알려지지 않은 배경을 두고 “‘徐 ’의 ‘ ’자를 ‘원’자 등 다른 글자로 잘못 읽은 탓”이라며 “서울시가 편찬한 ‘서울육백년사’ 제1권 색인부분에서 ‘徐 ’을 ‘서원’항목에 둔 것이 그 증거”라고 말했다.이중화의 ‘경성기략’에서는 ‘徐’을 ‘셔울’로 표기하였으며 또 ‘전운옥편(全韻玉篇)’‘자전석요(字典釋要)’등에 ‘울’자가 ‘무성할 울(茂也)’로나와있어 김씨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은 “서울의 한자표기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얘기”라면서 “서울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차음(借音)한 것 같다”고 밝혔다.또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나각순 편찬위원은 “서울의 한자표기가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 “국어학 등 관련학계에서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기고] 지식과 접목된 ‘知價민족주의’로

    새해 새 세기 새 천년이 시작되었다.많은 변화가 예측되지만 이 변화 가운 데 우리나라가 계속 생존하기 위한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우리나라는 20세기 초 나라를 잃고 36년 동안 일제 통치를 받았다.그때에도 세계의 변화를 예 측하고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까지 잃는 큰 불행을 당했던 것이다.하 느님의 기적과 같은 역사로 다시 살아나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우리는 20세기 초에 당한 교훈을 잊어선 안된다.21세기에도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이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이번에도 우리나라가 큰 불행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지금과 같이 국경이 없는 정보화시대에 웬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깊이 관찰해 보면 변화 속의 자기상실로 우리 민족이 계속 생존, 번영해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약소 단일민족으로 형 성된 우리나라는 민족주의가 뿌리가 되어 일제에 저항,투쟁하였고 해방 후 좌우대치 소용돌이 속에서도 민족의 단일성을 유지해 왔으며 또 앞으로 통일 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민족사상이 정신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민족주의는 우리에겐 꼭 필요한 것이었다.그러나 이제 세계는 글 로벌 정보화시대가 되고 있다.종전의 민족주의 개념은 배타적 종족주의나 관 념적 주장에 편재하는 시대적 유물 같은 존재로 평가받을 수도 있게 된 것이 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분명하게 우리나라 생존수단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직시해야 한다.글로벌 시대에 우리가 생존하기 위한 수단의 핵심은 우리국 민의 지가(知價) 수준에 달렸다고 본다.지가란 글로벌 지식시장에서의 값,즉 경쟁력을 창출하는 지식,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상대적 가치를 말한다.그러 나 이러한 지가만으로 우리의 생존을 지킬 수 있을까?(자칫 잘못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 나는 20세기에 있어 우리 국민사상의 뿌리가 돼온 민족주의에 지가를 접목 시킨 ‘지가민족주의’를 제창한다.나는 지난 30여년간 기술민족주의를 세우 고자 몸소 최선의 노력을 다해 실천해 왔다.그래서 플랜트 국산화를 꾸준히 육성,그 결과 동 업종에서는 세계 제일의경쟁력을 갖춘 단지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만 가지고는 21세기를 살아나갈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사 실을 체험했다(러시아는 200년의 수학과 기초과학의 전통을 갖춘 기술국가였 지만 오늘날 처지는 말이 아니다). 기술을 포함,모든 지식의 가치를 자기화하고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지가를 가져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이러한 지가를 갖추기 위해선 교육 과 문화·사회·도덕 등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국가정책과 국민적 인 노력이 필요하다.민족주의는 더이상 생존수단으로는 미흡한 것이지만 21 세기의 지가민족주의는 구체적이며 실존하는 생명체를 형성하고 창출하는 핵 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라가 작은 단일민족인 우리는 정보 공유와 상호생존의 세계화 속에서 자 기 상실이 아닌 자기 존재를 찾아야 할 것이다.우리 역사,우리 문화를 간직 하면서 새로운 미래에 뛰어들어야 한다. 장치혁 고합 대표이사 회장
  • [대한광장] 지식기반 경제와 노사안정

    IMF위기의 터널을 지나면서 새 천년을 맞았다.이제 우리는 지난 악몽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경제발전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환경보존과 복지증진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어느덧전세계적으로 공인되고 있는 지식기반경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위기극복에 여념이 없는 사이에 선진국은 물론 다른 중진국들도 이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축에 매진하고 있었다.산업화에서 뒤졌던 우리가 지식기반경제의 발전에서마저 뒤진다면 21세기 한국경제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새 천년의 처음 몇 년은 우리 민족의 한 세기를 결정하는 중요한시기이다.이 시점에서 우리는 갈등과 대립을 가능한 한 줄이고 합의와 협력을 증진하여 지식정보화에 매진해야 한다. 이러한 합의와 협력의 증진은 노사관계에도 해당되는 시대적 요구이다.지식기반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정되는 이유는 그것을 구성하는 노사관계의 성격이 산업사회에서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산업사회에서 노동은 기본적으로 생산의 ‘잠재적 장애요인’으로 간주되었다.그렇기 때문에 산업사회에서 효율성 향상이란 이 노동을 가능한 한 실물자본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지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노동자가 보유한 지식을 가능한 한 실물자본으로이전하여 노동을 단순노동화함으로써 생산에서 노동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것은 물론 남아있는 노동에 대해서도 경영진이 정한 원칙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기본경향이었다.이에 노동자는 노조로 대항했다.그러므로 산업사회에서 노사관계의 성격은 갈등을 기본으로 할 수밖에 없었고 노사협력이란 갈등에 따른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선택일 뿐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지식기반경제에서는 노동과 실물자본이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핵심적 생산요소로 부각되는 지식은 살아있는 노동자에 의해서 창출,확산,활용되며 실물자본은 노동자의 활동을 지원해주는 보조자일 뿐이다.그리하여 산업사회에서 실물자본에 밀려났던 노동이 이제 다시 생산의 중심지위로돌아오고 있다.그러나 노동은 산업사회에서와 같은 블루칼라가 아니라 평생학습해야 하는지식노동자다.이 지식노동자가 새로운 지식을 창출,습득,활용할수록 노동자에게는 높은 소득이,사용자에게는 높은 이윤이 보장될 수 있다.이러한 공통의 이해관계에 기초하여 지식기반경제에서 노사관계는 협력을기본성격으로 할 수 있다. 지식기반기업에서 대립적인 노사관계가 선택되면 생산성이 오히려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그렇지만 이 협력관계가 저절로 조성되는 것은아니며 노사 쌍방의 협의와 타협은 물론 힘있는 정부의 중재 노력도 반드시필요하다.한국경제가 아직 지식기반경제는 아니지만 이를 구축하기 위한 전제로서 합의와 타협에 기초한 노사안정이 절실하다. 노사안정을 위해서는 다시 상호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신뢰는 무너뜨리기는 쉽지만 쌓기는 대단히 어렵다.최근 일부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가 우리 사회의 ‘신뢰자본’을 크게 훼손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이제라도 지식기반경제에서 필수가 되는 협력적 노사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모든 당사자가 성의 있게 신뢰 쌓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IMF 위기의끝이 보이면서 위기극복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의 분배요구가 제기되고 있다.지난 연말에 시작된 갈등국면이 봄에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그렇지만 우리가 현 시기의 민족사적 중요성에 공감한다면 대화와 타협으로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노사안정을 이룩하여 세계 일류의 지식정보화를조속히 달성해야 할 것이다.지금은 우리가 대립과 갈등으로 국력을 소모할한가한 때가 아니다. 金 昊 均 명지대교수·지식정보학
  • [대한시론] 카오스와 창조적 개혁

    정보화시대는 곧 복잡계(카오스)의 시대이다.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리고진은복잡계의 과학이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골을 메우고,21세기에는 새로운 지(知)의 패러다임이 형성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실제로 그가 주장한 내용이 속속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빌 게이츠는 자신의 윈도와 매킨토시의 시장점유율이 거의 같을 때 거액을 투자해 자신의 소프트웨어의 시장점유율을 높임으로써 업계를 석권했다.복잡계의 경제학에서는 이 사실을 ‘록인(lock in)의 성공’으로 표현한다.복잡계의 경제학은 기존의 경제학이 ‘수확체감의법칙’에 중심을 둔 것과는 정반대로,일단 록인된 상품이 시장을 싹쓸이하며,투자와 노력을 높일수록 이익이 증가한다는 ‘수확체증의 법칙’이 작용됨을 보여준다. 또 재일교포 실업가 손정의는 자신의 성공비결이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3개씩 생각해낼 것을 스스로에게 가한 결과라고 한다.그러나 일단 록인된 것이라 해도 끊임없이 차세대와 차차세대의 제품을 준비해야 하며,그것이 성공의 필수조건이다.그런 면에서 이 두 사람은카오스시대가 낳은 경제영웅이라 할 수 있다.록인과 창조적 개혁(break through)이 카오스시대의 생존과 번영의 지혜인 것이다. 경제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것은 모두 복잡계이며,복잡계 과학의 대상이 된다.카오스적인 현상에서는 ‘처음 출발할 때의 조건(초기조건)’의 사소한차이가 그 후의 결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이 사실을 “오늘 서울 거리를 날던 나비의 날개짓이 며칠 뒤 뉴욕에 큰 폭풍우를 일으킬 수 있다”라는비유로 설명하며,‘나비효과’라 한다. 사회현상에도 미미한 일로 여겼던 것이 후일 엄청난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프리고진은 복잡계 중 가장 미묘한 카오스의 생명력과 자기조직의구조를 밝혔다.카오스는 난잡(Randam)과는 다르다.무질서와 질서가 공존하는 미묘한 카오스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질서가 자기조직화되며,길고 긴 생물의 진화와 인류사의 발전에도 수없이 많은 자기조직의 과정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민족사와 사회 변동과정에도 카오스는 그대로 적용된다.조선왕조 500년사는 카오스를 거부한 결과가 비극적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장장 518년간같은 체제로 지속되었던 것은 ‘용의 눈물’로 상징되는 왕실의 영속화라는초기조건에서 출발하여,사대와 쇄국의 올가미 속에서의 사문난적 시비,온갖차별과 오기 등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왕조 초기에 록인된 풍조가 생명력이 있는 카오스의 발생을 억압함으로써 결국엔 식민지화라는 결과로 이어진것이다. A 토인비는 일본에 들렀을 때 “가까운 한국에 들르지 않겠느냐”는 건의를 받고 “한 왕조가 500년 이상이나 지탱한 나라에 볼 것이 뭐가 있겠는가”며 그대로 떠났다고 한다.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처음 록인되었을 당시에는 긍정적이었던 것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정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따라서 내일을 위한 이상(理想)의 설정과 착실한 계획으로 뒷받침되는 새로운 창조적 변혁이 요청된다. 애국시인 한용운은 “당신은 해당화 필 때 돌아오신다고 하였습니다.봄이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랬더니 봄이 오고 보니,너무 일찍 왔는가 싶습니다”라고 노래했다.우리는 여러 차례 좌절의 봄을 맞이해 왔다.해방의 봄은남북 분단을 가져왔다.4.19의 봄은 군사쿠데타,80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군화,그리고 문민정부의 봄은 IMF의 한파에 쓰러졌다.평화적 정권교체도 오늘의 정치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다.준비없는 변혁이 몰고온 비극들이다.통일 또한,확고한 준비가 없다면 더욱 고통스러운 봄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새로운 21세기,밀레니엄,이런 화려한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될 것이다.개혁적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구체적인 계획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긍정적인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강령이 절실하다. 金容雲 한양대 명예교수 한국창의기획학회장
  • [대한시론] 새 천년 정치안정과 지속성장

    인권과 야만,이성과 폭력이 뒤섞인 파란만장한 20세기가 저물고 바야흐로내일이면 희망과 불투명성이 교차하는 새 천년을 맞는다.요란한 새 천년 기념식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지금 미증유의 정보혁명,급진전되는 지식기반 산업화,시장과 무역의 초국가적 확장을 배경으로 급속한 세계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세계는 실시간대(實時間代)로 연결되는 단일한 의사소통공동체가 되었다. 한국은 세계화의 소용돌이와 세계적 경쟁을 뚫고 새 천년의 첫 3년에 지식기반사회의 기초를 닦아 2003년부터는 세계일류국가를 향해 도약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새 천년 첫 3년은 사람에 비유하면 고3 때와 같은 중차대한 시기이다.우리가 첫 3년에 지식기반사회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성공하면 향후 100년동안 세계일류국가의 지위를 누릴 것이고,실패하면 21세기도 다시 고난의세월이 될 것이다. 새 천년은 인류에게 새로운 자유와 번영을 예고하는 꿈의 시대이자 국제적불평등과 무질서의 위험을 안고 있는 불확실성의 시대이기도 하다.새 천년에는 인권,민주주의,평화,국제협력 등 세계주의적 보편가치가 힘을 얻는 한편,무한경쟁과 냉혹한 능력주의가 맹위를 떨친다.우리는 새 천년의 잠재력을 극대 활용하고 새 천년의 위험을 극소화하여 민족사적 대업을 이룩하여야 한다. 지난 1년 10개월동안 우리는 혼신의 노력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회복의 기조를 창출하는데 성공했다.4강외교,동아시아 지역협력 외교,APEC,ASEM 등 지역간 협력외교도 성공적이었다.대북포용정책도 북한이 ‘햇빛’이니‘포용’이니 하는 단어를 두고 시비를 걸고 있지만 점차 ‘서로 포용하고서로 햇빛을 쏘는’ 단계로 발전할 토대가 놓였다.다만 정치가 국민을 짜증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50년만의 정권교체로 탄생한 ‘국민의 정부’는 통치경험이 없는 상태에서출발하여 이제 경제,외교,대북관계 등에서 실력을 입증하고 자신감을 갖추었다.그러나 정부의 중책을 맡은 인물들의 빈발한 실수,과오,실언은 국민을 크게 실망시켰다.이 점에서는 ‘국민의 정부’가 역시 초보정권임을 부인할 수 없다.그러나 정권교체를 처음 경험한 국민과 언론이집권층의 이런 실수와실언들을 좀더 큰 틀에서 판단하지 못하고 이를 호재삼아 정권을 흔들어댄것을 보면 국민과 언론도 ‘초보국민’,‘초보언론’임이 틀림없다. 1969년 51년만에 정권을 잡은 뒤 권력의 심장부에 간첩을 임용한 실수로 수상이 갈린 독일 사민당 정권,1996년 71년만에 정권교체를 달성한 후 크고 작은 실책과 부정부패로 2년만에 수상이 갈린 이탈리아 프로디 정권과 비교하면 소수정권이면서 초보정권인 ‘국민의 정부’의 정치력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이기 때문이다. 정치불안과 정치불신의 근본원인은 정부인사들의 실수에 있다기 보다는 여야 간의 비생산적 정쟁이다.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개혁법안들이 통과되지못하거나 개악되었는가! 새 천년에는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다.특히 새 천년의 첫 3년에는 정치화합,정치안정이 백년대계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첫 3년의 정치안정만이 경제의 지속성장을 보장한다.이를 부인하고 시비하는 것보다 더 정략적인 언행도 없을 것이다. ‘안정 속의 지속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가 소수정권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한다.이 점에서 새 천년의 16대 총선은 민족사적 의미를 갖는중요한 선거이다.총선에서 ‘안정 속의 지속성장’이냐 아니면 정치불안이경제를 주저앉힐 것이냐가 갈릴 것이다.이번 총선은 ‘식물국회’에 이어 ‘식물정부’,‘식물대통령’을 탄생시키느냐,아니면 개혁과 경제발전을 주도할 강력한 정부를 탄생시키느냐를 결정한다.이것은 다시 국민이 ‘실패한 옷로비’같은 실체없는 사건이나 실언·실책들에 더 비중을 두느냐,아니면 국민이 정권의 경제공약,외교공약,대북정책의 실행 실적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黃台淵 동국대교수·정치학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 연재를 마치며

    이 연재의 목적은 광복 이후 오늘까지,20세기 후반기의 한국문학이 정치사회사적으로 당했던 검열과 규제와 탄압의 양상을 시대별로 정리하려는 것이었다.주로 작품을 중심으로,그것도 사회체제나 정치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만다뤘기 때문에 몇몇 필화 사건들은 빠졌다. 예컨대 지역감정을 유발하여 투옥까지 당했던 조영암의 ‘하와이 근성 시비’라든가,역시 같은 이유로 월간 ‘문학사상’을 몇 호 정간 당하게 만들었던 오영수의 ‘특질고’같은 사건인데,다른 자리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크게 비화되진 않았으나 독재자에 의하여 슬그머니 폐기처분 당해버렸던 서정주의 ‘이승만박사 전기’(1949)도 흥미있는 사건이었다.진보당가의 작사 시인 박지수,김동명 시인의 국가보안법 반대 논설문,소설 ‘오발탄’ 때문에 교직에서 쫓겨난 해직교사 제1호 이범선,이병주·송지영의 민족의식이 강했던 논설과 투옥 사건,단편 ‘임진강’으로 곤욕을 치렀던 유주현,희곡 ‘수치’로 물의를 빚었던 시인 구상,통혁당 관련으로 치도곤을 당했던 조동일·임중빈,동베를린 사건 관련의 천상병,1974년 문학인 사건의 이호철·정을병·김우종·장백일,긴급조치로 구속 당했던 김지하,언론인 해직기자 김병익,남민전 사건의 김남주 시인,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송기원,대학에서 해직 당한 김병걸·송기숙·백낙청,민족문학작가회의에 의한 여러 차례에 걸친 각종 집회와 시위로 끊임없이 연행 당했던 고은·신경림·민영·박태순·이문구·조태일·채광석·김정환,노동해방문학 사건에 연루되었던김사인·임규찬·정남영 등등은 문학인의 직접적인 사회참여 활동이 가져왔던 변혁운동의 일환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도 문학인은 가장 앞섰다.세칭 ‘문학인 방북 사건’ 제1호는 작가 황석영이었다.1989년 3월 20일,남한작가로 공개적으로는 처음으로황석영은 북한을 방문,아마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북한인사들과 가장 넓은지역을 두루 다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그는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4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면서 기행문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신동아’와 ‘창작과 비평’에 연재하다가 필화를 일으키기도 했으며1993년 귀국,구속되었다. 두 번째 방북 문인은 시인 박영희였다.그는 1991년 4박5일 동안 방북했다가7년의 수감생활을 겪어야 했던 불굴의 시인이다.1962년 무안에서 출생한 이시인은 중학 2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상경,공원·구두닦이·신문배달·건축공사장 인부 등 밑바닥 인생을 체험하면서 시집 ‘조카의 하늘’‘해뜨는 검은 땅’을 냈다.박시인은 일제 치하의 광부 징용을 서사시로 쓰기 위해 그취재차 방북을 감행했으나 전혀 목적을 이루지 못하여 아예 일정을 앞당겨귀국,즉각 투옥당했다. 세 번째의 방북은 작가 김하기였다.부산소설가협회 소속회원들과 백두산 등정 후 연길식당에서 술을 마신 뒤 실종,나중에 월북으로 밝혀졌던 이 사건은분단 민족사에서 가장 ‘문학적인 사건’으로 꼽을 만하다. 문학은 사회정치사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에로티시즘과도 끊임없이 마찰했다. 박용구의 ‘계룡산’ 이후 박승훈,염재만으로 이어졌던 외설시비는 마광수와장정일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면서 20세기를 마감한다. 20세기 세계 문학사에서 변혁으로서의 문학운동은 아마 한국이 가장 풍성한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며,이것은 21세기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48)20세기의 마지막 필화사건들

    서울 올림픽의 해였던 1988년,한국 문단에는 두 필화사건이 창작의 자유를압박했다.하나는 주인석의 희곡 ‘통일밥’이었고,다른 하나는 이기형 시인의 실록 연작시집 ‘지리산’이었다. 김건원과 서울대 연극회원들의 도움으로 주인석이 지은 희곡 ‘통일밥’은한국 현대사를 축약시킨 전 13장의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이었다.1988년 6월4∼8일까지 서울대 총연극회 제30회 정기 공연작이었던 이 희곡은 대학가의인기 상승에 힘입어 같은 해 8월 4∼7일까지 연세대 100주년기념관에서 재공연 되었는데 바로 다음날인 8일 작가가 구속 당했다. 장시우와 그의 아들 해방,손자 동민 3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한 분단의 아픔과 8·15부터 1988년까지의 민족사를 ‘통일밥’은 투시하고 있다.해방의 혼란 속에서 노동자 자치운동을 하다가 감시를 피해 본의 아니게 월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장시우,그로 말미암아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갖은 수모를당하는 남한의 식구들이 팽팽하게 긴장미를 고조 시키다가 1984년 대홍수 때 북한 적십자사가 보내온 쌀로 ‘통일밥’을 짓는 것으로 남북의 동질성을강조한 이 작품은 다분히 전위적이다. 문제가 된 것은 해방 직후에 내걸었던 인공기였는데,이미 알려진대로 이 때의 ‘인공기’와 북한의 그것은 다른 것일 뿐만 아니라,장식용 소품으로 등장했다는 점 등으로 주인석은 9월 23일 기소유예로 석방,‘통일밥’ 필화는막을 내렸다. 원로 시인 이기형의 ‘지리산’은 ‘실록 연작시’라는 특이한 형식으로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실존 인물들을 취재하여 부각시킨 점이 돋보여 1988년 12월에 초판이 나오자 매진,재판에 돌입했는데 당국의 압수 수거 조처를 받았다.이어 출판사에 대한 수색이 진행되더니 1989년 2월 방송 뉴스로시집 ‘지리산’을 의법 조처하겠다고 예고한 뒤 아침출판사 정동익 사장을구속하고는 고령의 이기형 시인은 불구속 기소했다.해방 직후 이승만 정권의 오류를 폭로하는데 초점을 맞춘 이 연작시는 법정으로부터 정부가 선언한각종 통일 정책과 국가보안법 처벌은 무관하며,표현의 자유라 할지라도 체제 전복에 이용 당할 여지가 있는 작품은 용납하지 않는다는요지의 유죄 인정으로 시인과 발행인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지리산은 아마 한국 필화사 중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산일 것이다.1989년 4월 오봉옥 시인은 장시 ‘붉은 산 검은 피’(실천문학사,전2권)를 펴냈다.1930년대의 항일투쟁부터 1946년 10월 항쟁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이 장시는 “젊은 시인답지 않은 기량의 완숙함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최원식)거나,“남한 노동자 계급의 독자성을 견지하려는 힘과 주류적 혁명전통의 영향력을 확대 부식하고자 하는 힘 간의 갈등·충돌의 문예적 반영”(김명인),혹은 “일제 말기에서 해방 직후까지 민족의 생활상을 여실하게 그려낸 뛰어난 대서사물”(최유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이 시집 역시 필화로 가는 과정은 비슷하여 처음에는 수거,판금조치가 내려졌다가 서서히 출판사를 조여가며 구속,기소의 단계로 들어선다. 실천문학사 사장 이문구,주간 송기원,그리고 시인 오봉옥을 각각 충청도,서울,광주에서 도주의 우려라는 이유로 전격적으로 동시에 연행한 것은 1999년 2월 22일.송기원과 오봉옥은구속,이문구는 불구속으로 기소됐다.오봉옥과이문구는 제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송기원은 ‘민중교육’지 사건누범 기간이라 6개월의 실형을 언도 받았다. 마지막 하나의 필화가 남았다.그것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다.지금 기소중인 이 작품은 아마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한국문학의 마지막 필화가 될 것이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우리구 역점사업] 은평구

    은평구(구청장 李培寧)가 해외에 진출해있는 520만 한인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될 ‘세계 한민족관’ 건립을 추진,관심을 모으고 있다. 북한으로 향하는 관문으로서 서울 서북단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과 통일로파발제 등 역사성을 살려 한민족의 화합과 민족통일의 교두보가 될 한민족관을 설립,민족통일의 상징적 이정표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 구청장은 이와 관련,“우리 민족의 지난했던 해외이주사와 이들이 겪어온 수많은 영욕의 역사를 기록하고,그들이 생애를 바쳐 이룩한 성과와 업적을 기리기 위한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기념관을 건립해 해외 한인사를 재조명하고 모국과 이들을 잇는 가교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 이 구청장의 구상이다. 은평구는 우선 한민족관 건립비용의 국비 지원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문화관광부와 협의에 나섰다.외교통상부와는 국제교류재단,재외동포재단 등 해외한인단체들을 대상으로 한 성금 모금방안을 협의중이다. 은평구 진관외동 산 189의1 갈현근린공원내 6,000여평의 부지를 건립 예정지로 확정했다.오는 2005년까지 연차적으로 35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연건평 3,000평에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의 한민족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이곳에 해외 한민족사관과 기념·전시·역사교육관,공연·관리시설 등을 갖출 계획이다. 늦어도 내년중에는 관련부처와의 협의를 끝내고 실시설계 등 세부계획을 확정,공사를 시작한다는 방침이다.예정대로 절차가 진행될 경우 완공 및 개관일정이 1∼2년 앞당겨질 수 있다는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구청장은 “한민족관이 모국과 해외 한인의 가교가 됨은 물론 진취적인한민족사의 새 지평을 여는 모태가 될 것”이라며 “140개국에 진출해 있는해외 한인들의 역량과 염원을 모아 민족 번영과 통일의 요람으로 가꿀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심재억기자 jeshim@
  • 張俊河선생 정신계승 심포지엄 발제·토론 요지

    사단법인 장준하(張俊河)기념사업회는 8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분단민족의 좌표와 평화통일의 길’이란 주제로 장준하선생 정신계승 심포지엄을 가졌다.1부에선 한국현대사의 재조명,2부에선 민족사의 새 지평(사회통합과 민족통일)을 소주제로 주제발표와 토론을 가졌다.참석자들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민족적 대안과 장준하선생의 항일독립·민주화·통일운동에 대한 역할및 선구적 의의에 대해 논의했다.다음은 주제 발표와 토론의 주요 내용. ■ 장준하와 박정희 비교연구(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집권 18년 동안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은 많은 적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대의 라이벌을 꼽는다면 장준하(張俊河) 선생(이하 호칭생략)이 가장먼저 떠오른다. 일제 시대건 60,70년대 건 박정희의 반민족성과 친일성을 부각하는데도,박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알리는데 장준하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광복군에 들어가 활동을 할 때나 OSS 특별훈련을 받을 때나 해방후 김구주석 등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을 모시고 환국할 때나 ‘돌베개’를 광야에서 베고 자는 심정으로 임했다.장은 60년대 두번 투옥,옥중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유신체제에 대항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최고형인 15년형을 받았다.출소후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이후 박정희의 독재와 부패에대항하여 싸운 민주주의의 심볼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반면 박정희는 오로지 일본 군인으로 입신하기 위한 일념으로 국민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고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최우등생으로 만주황제 부의(傅儀)로부터 금시계를,1942년 일본육사에 입학해 3등으로 졸업하여 육군대신상을 받았다.그후 다카키(高木正雄)란 이름으로 만주군에 배치,해방까지 항일부대와 싸웠던 인물이다.1979년 10·26 당시 일본의 한 외교관은 ‘국가와정보’라는 책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썼다.그의 정서적 고향은 죽을 때까지 일본제국의 군인정신 또는 군국주의였다는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 냉전문화 극복과 평화통일의 길(조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남북간 군사적 대립구조를평화구조로 전환시키고 남북한 공존과 협력을 제도화하는 길은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에 있다.냉전구조의 해체는 체제·제도·정책·관행 및 의식을 탈냉전의 세계사적 조류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다. 남북한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은 군사적 대립과 긴장이 상존하는 한 언제든지무산될 위험속에 있다. 냉전의식·냉전문화의 해소를 위한 노력은 통일후 남북한 사회통합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또 우리 사회내의 진보와 보수간의 입장 차이를 좁혀가는 국민화합의 과정이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물론 북한을 공존·협력의 동반자로 삼는 과정에서 많은 이견의 분출을 피하긴 어렵다. 통일문제와 관련,‘하나의 민족,두개의 국가’라는 두 정치체제가 병존을이루는 아일랜드의 예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이점에서 통일은 남북아일랜드처럼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고 교류 수준을 높여가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바람직하다. 정치적 통합을 완전히 달성한 법적·제도적 통일로 여기기 보다는 사실상의 통일상태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20세기동안 국가이익과 민족이익의충돌속에서 언제나 민족이익이 제약되는 상황이 초래됐다.21세기의 과제는 국가이익과 민족이익이 하나되는 길에서찾아야 할 것이다.냉전문화의 극복은 그 중심에 있다. ■ 해방후 한국민족주의 성격과 의의(임지현 한양대교수) 운동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남과 북은 다같이 의장된 형태의 민족주의이다’라는 지적은 쉽게 이해된다.서로가 표방하는 체제 이념이나 정책의 대치선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사실상 권력담론으로서 민족주의적 코드를 공유하고있다. 새마을 운동이나 천리마 운동 모두 주민들의 근로의욕을 부추겨 생산성을향상시키려는 의도였다는 평가도 같은 맥락이다.‘한국적’ 또는 ‘우리 식’이라는 수식을 벗기면 10월유신과 주체사상이 동일한 권력축을 위해 짜여있는 것이다. 즉 분단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재생산하는 방식이 통일을 위한 동원에서 체제강화를 위한 동원으로 변화한 것이다.통일은 이제 수사로만 남게 되었다.민족주체성 확립이란 슬로건 아래의 국민교육헌장 반포,국기에 대한 맹세 등을 통한 국민의례 강화, 국학연구에대한 장려와 민족전통에 대한 강조, 국정교과서를 통한 국사교육 지배 등 가파르게 전진해온 남의 유기체적 민족주의는 10월유신으로 절정에 달했다. 북에서도 민족전통이 곧 혁명전통으로 대치됐고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요구는 사대의와 교조주의로 비판받고 민족전통에 입각한 ‘우리식’ 사회주의가전면으로 등장했다.지도자에 대한 정과 존경이 북에서는 혁명적 동지애로 표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남의 국가경쟁력 강화론이나 북의 강성대국론은 다시금 국가권력이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전유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받아들여진다. ■ 한국의 주요 갈등양상과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제(이강로 전주대교수) 한국사회는 80년대 중반이후 다양한 갈등을 경험하면서 이를 풀어왔지만 지금도 여러갈등이 해결되지 않은채 진행되고 있다.노동과 자본의 갈등은 90년대 중반이후 이전에 비해 안정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여전히 제도적 절차에는 합의하지 못했다.정당이나 정치 지도력도 아직 민주주의의 공고화나 안정적 운영에 적합한 형태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내각제 개헌이냐,대통령제 고수냐’는 헌정주의의 제도화도 미발달·불안정 상태다.노동과자본의 관계·정치 지도력의 행사문제 등은 민주주의 공고화의 과제자의 기준이다. 민주주의 미래는 안정된 국민통합을 바탕으로 한다.지역갈등은 민주주의의안정을 위협한다.지역갈등은 정치세력간의 갈등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에서도침투,사회생활의 주요 준거가 되며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한국정치에선 힘의논리가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더 민주적인제도와 과정을 통해 갈등을 풀어나가는 추세다. 신성불가침이던 권력의 영역들이 하나씩 노출되면서 국민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아직 한국사회에선 갈등을 처리할 수 있는 국민적 합의로 만들어진 제도적장치는 미약하다.그러나 많은 갈등 양상에도 불구,불안정하지만 민주주의를다지는 요인들이 늘고 있다. * 張俊河선생 정신계승 토론 이모저모 ‘장준하와 박정희연구’주제발표에서 토론자로 나선 서강대 박호성교수(정치학)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민족주의는 통치술·통치전략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면서 “민족주의가 국민의 민주주의적 토대로서 기능하지 않도록억누르면서 국민동원의 수단으로 교묘히 이용했다”고 말했다. 또 “박정희 전대통령은 통치전략적인 차원에서 과거지향적인 복고적 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밝혔다.이에반해 21세기의 민족주의는 통일·화해·형제애를 촉구하고 지향하는 민족주의이며 국가사회·민족내부의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겸허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매일의 김삼웅(金三雄) 주필은 해방후 한국민주주의 성격등과 관련,“구한말·일제시대 등 어려웠던 시대의 양심적 선각자들이 지향했던 ‘한반도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조명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장준하,백범 등이 추구했던 ‘한국형 민족주의’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주문했다. 김 주필은 “평화적인 정권교체이후 많은 사회문화운동단체 등 자발적인 비정부기구(NGO)들이 생겨나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도권력에 종속됐던 과거에서 벗어나 시민단체들에의해 자유롭게 이뤄지며 새로운 모습을 형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성공회대의 김동춘 교수는 “장준하와 박정희를 같은 지평에서 평가하기 어렵다”면서 “박정희는 정치적 야심을 가진 직업군인으로서 현실적인 길을걸었다면 장준하는 도덕적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경남대 심지연(정치학)교수는 “장준하가 젊은이 사이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면서 “그가 추구했던 이념과 이상,그리고 생애에서 젊은이들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심 교수는 역사의 평가에 있어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적인 접근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고 특히 젊은세대가 역사적인 삶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교훈을 주기도 어렵다고 강조했다. 정리 이석우 오일만기자 swlee@
  • [대한포럼] 청소년 통일의식 높여야

    최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 한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국내중·고등학생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청소년들의 통일의식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남한 청소년들이 북한 청소년과의교류시 선호하는 분야는 스포츠경기(39.3%),컴퓨터통신(38.4%),노래와 춤(25.7%),캠핑(29.3%),펜팔(29.2%)순인 것으로 조사됐다.우리 청소년들이 건전하고 발랄한 생활영역에서 북한 청소년들과의 교류를 희망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정부의 대북포용정책으로 인한 남북간의 긍정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73.7%가 ‘통일이 되는 것이 좋다’고 답해 통일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갖고 있는 반면 17.6%는 ‘통일이 안되는 것이 좋다’는 응답이 나와 우리 청소년들 통일의식에 문제점을 드러냈다.지난90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통일이 돼야 한다’는 응답이 89%였던 것에 비하면 15%포인트 이상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우리 청소년들에게서 나타난이같은 낮은 통일의식 구조는 이들이 앞으로통일을 담당할 후계세대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할 수 있다. 지난해 9월 노동신문이 발표한 북한 청소년들의 통일열망이 100%인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우리 청소년들이 북한 청소년에 비해 통일의식이 취약한것은 통일역량 결집을 위한 국민통합 기능면에서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물론 분단의 고통과 전쟁의 쓰라림을 몸소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청소년들 의식속에는 분단상황에서도 삶의 부족함이 없고 불편함이 없는데굳이 통일비용을 들여가며 통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 편의주의가 크게작용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민족통일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제인가는 성취해야 할 민족적 책무이고 역사적 소명이라는 점에서 우리 청소년들에 대한 통일의식 제고는 필연적 과제다.따라서 통일 후계세대들에 대한 효과적인 통일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통일문제에 대한 청소년 통일교육의 효율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통일문제에 대한 청소년들의 지식습득과 효과적 통일교육 방법으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학교교육을 통해 통일의식을 높여줘야 한다.권위주의 시대의 냉전적반공(反共)교육에서 탈피해 북한을 통일의 동반자로 인식하는 지공(知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학교 통일교육은 통일에 대한 확신과 통일사회에 대한낙관적 전망을 심어주는 교육이 돼야 한다.통일 이후의 사회가 결코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이 많을 뿐만 아니라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민족의 발전역량을 배가시키고 현재보다 발전된 사회와 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통일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둘째,민주시민교육을 통한 통일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민주시민교육에서 통일교육은 청소년과정에서 사회적 환경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도와주며개인의 삶과 정치적 발전이 통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해서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어야 한다.청소년들에 대한 통일교육은 통일추진 과정과 통일 이후의 민족사회에 나타날 여러가지 갈등과 혼란을 예견하여 이것을 사전에 예방하고 극소화시킬 수 있는 정신·문화적 기반요소들을 튼튼히 길러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북한의 현실과 통일문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인 판단과 비판이 통일교육의 기초가 돼야 하며,이를 토대로 통일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태도와 의지를 고양할 수 있는 교육이돼야 한다. 청소년들에 대한 이같은 통일교육의 기능이 확보될 때 비로소 우리 청소년들의 통일의식이 제고될 뿐 아니라 통일의 주도세력으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장청수 논설위원 csj@]
  • [특별기고] 새 천년 우리민족의 새기회

    우리 민족이 한반도 뿐만 아니라 아시아 대륙 일부까지를 생활 영역으로 하고 있을 때 민족사회는 열린 사회였고 국민의 힘을 모아 주변 강국과 우열을 겨루는 웅대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었다.그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천여년 전이었다.그러나 지나간 천년 동안 우리 민족 생활 영역은 한반도 안으로 축소되고 폐쇄되었으며 중앙집권의 정치제도가 확립되고 민족 문화의 개화를 본시대도 있었지만 오히려 골육상잔,정파싸움이 불신사회를 초래하여 민족의활력을 소진시킴으로써 급기야 국권을 상실하게까지 되었다.그와 같은 국운에 직면하면서도 나라의 지도자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외부대세의 추이에 민감하지 못하였으며 국정문란을 자초하는 민족비극의 원인에 무감각하였다 할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외부 침략세력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새로 일어나는 외세의 패권싸움 속에서 분열된 민족은 설상가상으로 국토까지 분단되어 동족상잔의 역사를 남겼으며 정치사상면에서 흑백논리는 민족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새 천년새 시대야말로 우리민족에게 새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새로운 각오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모든 미래학자들이 강조하듯이 과학기술의 혁명적인 발달은 인류사회 성격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지구 표면 전체가 한 개의 생활권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으며 세계시장 기능이 형성되고 NGO 활동의 국제연대 등은 인간생활의 세계화를 시사하게 되었다.더욱이 원자력시대를 맞아 핵으로 무장한 국가간의 전쟁은 공멸을 의미하며 후 산업사회 자연환경의 새로운 도전 앞에 국가간 협력이 불가결한 상황이다.새 천년 새 시대는 구 시대의 약육강식,힘이 정의인 시대에서공생공영 정의가 힘이 되는 시대로 발전하는 국제사회,인류사회 성격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사하고 있다. 힘이 정의인 시대에서 정의가 힘이 되는 시대로의 전환에는 상당한 시간이걸릴 것이 예상된다 할지라도 그 방향의 역전은 인류의 공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민족은 새 천년 인류역사의 의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민족의 새 도약 발전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새 천년새 시대는 우리민족에게 새로이 열리는 생활영역을 의미한다.새로열린 생활 영역은 무한 경쟁보다는 모든 민족이 더불어 사는 가치관과 공통된 생활 규범을 요청한다.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 믿을 수있어야 하며 서로 믿을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정직 성실해야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새 천년의 기회를 바라보며 우리는 우선 현실을 정확히 보고 고쳐야 할 문제들을 고쳐야 한다.과연 우리 사회는 정직 성실하며 상호 신뢰하고 새 천년,새 기회,새 도약을 위해 힘을 합칠 수 있는가.분열되고 분단된 민족의 평화통일도 정직하고 성실하며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우리사회 건설에 달려있다.우리민족이 평화통일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때우리민족은 새 천년,새 시대,새로운 국제사회 인류사회 발전의 모범이 되고주요 역군이 될 것이다.그렇게 생각할 때 과거 천년 동안 민족이 겪은 시련은 새 천년 새 시대의 ‘동양의 등불’ 역할을 할 수 있는 새 천년 준비기간이었다.이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민족 주관에서 하는 말이다.주관 없는민족이 새 세계 역사 창조의 주인대열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것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이제 우리는 우리민족 역사를 되돌아보고 인류사회의 새 천년 앞날을 내다보면서 오늘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때이다. 새 천년,새 아침에 우리민족 모두가 새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결의를 할 수있는 지혜를 하느님께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姜英勳 前 국무총리·세종재단이사장]
  • [특별기고] 분단국가주의 청산해야

    민족문제를 두고 우리의 20세기를 되돌아보면 명암이 엇갈린 세기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그 전반기에는 3·1운동때와 같이 양반 상놈 등 신분을 넘어항일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전체 민족구성원이 총동원하여 저항했으며,그 때문에 여기에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 비로소 형성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그런데도 그 후반기에는 일제의 강제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민족사회가남북으로 분단되었고 6·25전쟁을 겪음으로써 서로 ‘원수’가 되었다. 이후 7·4 공동성명을 시점으로 하여 남북한 정권당국자들이 전쟁으로 쌓인 원한을 해소하고 평화롭게 통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고 남북합의서가 교환되는 단계에까지 가기도 했다.그러나 전체 민족사회의 이익보다 분단국가 차원의 이익을 앞세운 결과 더 이상의 진전은 어려웠다. 휴전선을 경계로 실존하는 두 개의 국가를 평화적으로 하나로 만들어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무력이나 흡수 방법이 아닌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반세기 동안 강조된 분단국가주의를 청산하고 통일민족주의 차원의 평화통일론이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통일민족주의 차원의 평화통일론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남북 쌍방이 상대방 정권을 무력으로는 말할 것 없고 경제력에 의해서도 무너뜨리지 않을 것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만약 어느 한쪽이 무너지려는경우 다른 한쪽이 막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상당한 기간 남북 두 정부와체제가 공존하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보장해야 하며,1국가 1정부 1체제로 되어가는 완전 통일과정은 반드시 협상과 타협에 의해,또 대등한 처지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강제지배 아래서 비로소 근대적 민족의식이 형성되었고 그것이 민족해방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면,20세기 후반기는 분단국가 권력에 의해 남북 사이의 대결의식이 강화된 반면 한반도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민족의식이 실종되다시피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불온하게 본 시기이기도 했다. 20세기를 마지막 넘기는 과정에서 최초로 여야 사이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옳은 의미의 평화통일정책,즉 협상·타협·대등 통일정책이 어느 정도정착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특정 정권에 의한 통일정책의 진전은 후속 정권의 성격에 따라 얼마든지 후퇴할 수도 있다. 문제는 전체 국민의 대북 인식이 대결인식에서 화해인식으로 바뀌고 그것을바탕으로 하여 평화통일론이 정착되어야 하는 점에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20세기 전반기가 근대적 민족의식이 형성되고 정착되어간 시기였다면,그 후반기는 분단국가주의를 넘어서는 민족의식이 설 땅을 잃어버린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이제 21세기로 들어서면서 분단국가주의를 청산하고 남북 주민 전체를 같은 민족구성원으로 인식하면서 그 공동의 번영과 발전을 과제로 삼는 통일민족주의를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분단국가주의가 통일민족주의인 것처럼 꾸미거나 분단국가주의를 넘어서는통일민족주의 자체를 불온시하면서 정권을 유지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있다. 21세기에는 역사의 발전에 따라 20세기보다 국가권력이 약해지고 대신 개인의 인권이 한층 더 강화되는 세기로 될 것이며,그에 따라 한반도의 경우 분단국가주의를 극복하고 통일민족주의를 되살려서 협상·타협·대등의 통일을 이루는 시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 [대한시론] ‘시민권의 사회’ 를 향하여

    뉴밀레니엄의 세기라고 말하는 2000년대의 도래가 한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같은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어떤 의미로 이 새 천년을 해석하고 있는가를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뉴밀레니엄을 언급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일반적으로 이 용어를 씀에 있어 일종의 막연한 낙관적 기대,심지어는 무슨인류의 새로운 ‘복음’과 같은 환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태양은 날마다 떠오르지만,인간은 스스로 설정한 달력·연력에 바탕해 새해를 정하고,누구나 새해 초를 새로운 희망과 각오로 맞이하곤 한다.그 한해의 희망이,한해의 다짐과 각오가 설사 별 볼일 없이 끝난다 하더라도 새로운한해를 맞으면 또다시 한번쯤 새로운 각오를 해보는 것은 ‘인지상정’이라아니할 수 없다.이러한 연도개념에서 볼 때 10년 단위,100년 단위는 누구에게나 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100년대 단위 정도가 아니라 1,000년대 단위의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는 설렘이야 항차 설명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인류문명의 발전은 세월이 저절로 가져다주는게 아니다.문명이 정체할 때는 한없는 세월도 어제가 오늘같고 내일도 오늘같이 흘러갈 뿐이다.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민족사에서 보더라도 조선조 500년의 역사보다 최근 50년 우리사회가 훨씬 더 역동적으로 변화하였다.우리의 현대사에서 우리 사회를 급격히 탈바꿈시킨 변화의 축이 어디에서 비롯하였는가를 곰곰이 새겨보아야 한다.불행히 근세 100년에서 오늘날까지 이 ‘변화의 축’은 우리 민족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고 주로 외세에 의한 것이었고,타율적인 것이었다.조선조 500년이 상징하는 ‘정체성의 문화’가 외세의 근대문명이 상징하는 ‘변화의 문화’에 짓눌리고 밀려나간 이 한국근세사는 요약컨데 민족사적으로 ‘수동의 시대’요 ‘수난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같은 타율의 역사이자,‘수동의 역사’일 수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중세문명의 강고한 봉건성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다.조선 500년은 절대왕권과 유교적 관료주의가 민중 위에 철저히 군림한 전제주의 문명이었다.절대다수의민중은 명령에 길들여지고 관료들의 착취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이러한 문명 속에선 창의와 변화와 발전이 기대될 수 없으며 결국 조선을 ‘깊은 잠에 빠져든 고요한나라’로 만들었을 뿐이다. 과학문명으로 상징되는 근·현대 문명은 이런 우리 민족사와 관계없이 산업혁명·교통혁명·통신혁명 등을 통해 세계를 점점 더 좁게 만들어왔고,2000년대는 앞으로 세계를 한 나라처럼 오가게 만들 것이다.세계국가,그것은 더이상 공상이 아니라 인류문명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 2000년대의 예고되는 문명사적 대변화가 우리에게 ‘복음’으로 다가올것인가,‘재앙’으로 다가올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민족이 근대 100년사에서 보였듯이,문명사적 변화를 수동적·타율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능동적·주도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달려있다.우리가 이 변화의 세계에서 변화를 능동적·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려 한다면,무엇보다 먼저 갖추어야 할 전제조건이 있다.즉,우리사회 내부에서 낡은 봉건주의·전제주의의 잔재들을 청소하고 우리 사회를 진정한‘시민사회’로 만들어나가야만 하는 것이다.‘시민사회’는 단지 그 국민들에게 무슨 훈장을 주듯 ‘시민’이라는 칭호를 부여해서 형성되는 사회가 아니라 그 구성원 개개인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시민적 권리’를 보장하고,그 어떠한 권력도 시민의 신성한 권리를 자의적으로 침해하거나 유린할 수 없는 사회를 뜻하는 것이다. ‘시민사회’는 바로 ‘시민권의 사회’이며,‘시민권’이 확고히 보장된사회라야만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주체적이고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문명활동을 할수 있을 것이고,바로 그 힘들이 모였을 때 뉴 밀레니엄의 세계적 문명변화를 우리사회가 능동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우리의 시민운동,그것은 우리사회를 ‘시민권의 사회’로 발돋움하게 하는 운동이며,이러한의미에서 우리의 진정한 시민운동은 21세기가 그 본격적인 출발점일지 모른다. [成裕普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
  • [기고] 반성하고 회개하여 거듭나자

    순국선열 기념일에 즈음하여 온 국민은 반성하고 회개하고 거듭나야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국권이 일제에 강탈당한 이후 순국선열들의 혈투와 애국지사들의 독립투쟁으로 우리민족이 국권을 회복한 지도 5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국토는 아직도 분단된채 남북이 극도로 이질화되어 조국의 전도가 암담하고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다시한번 반성하고 각성하지 않으면 안된다.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이 보여준 살신성인의 희생정신과 투철한 독립정신의 유훈을계승하여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국민의 애국심을 환기시켜 확실한 국가관을정립해야 할 때이다. 이같은 뜻으로 지난 10월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독립군 중국 동북지역주요 대첩 기념식을 거행한 바 있다.무장독립운동의 독립군 전사상 승전의세 고봉이라 할 수 있는 1920년 6월의 봉오동대첩,그해 10월 청산리전투의대승,그리고 1933년 7월 대전자령전투의 승리는 우리 민족사의 금자탑이라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9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광복군 창군 59주년 기념식과학술회의를 개최했다.1940년 9월17일 일본군의 공습과 숱한 역경 속에서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을 비롯해 백수십명의 애국지사와 지청천 총사령관을 위시한 만주독립군이 맹장 수십명과 저명한 중국 국공(國共)양당의 여러 지도자들의 축하 속에 임시정부 국군을 창설한 빛나는 역사를기념하였다. 학술회의는 우리나라 무장독립군의 군맥,광복군 창군의 역사적 의의 및 활동,그리고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군으로 이어진 전통에 관해 학계의 중진교수들과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위원들이 연구한 논문들을 발표하는 뜻깊은 자리였다.1907년 구한말 일제에 의해 국군이 해산됐으나 그 군맥의 정통을 의병이 이었고,의병의 군맥을 다시 만주독립군이,그리고 만주독립군은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그 맥을 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정신과 맥락이 국군에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1939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순국선열이 시작됨을 감안해 순국선열 공동기념일을 11월17일로 정하였다.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재작년에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공포하였다.이제 과연 우리들이 이 기념일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할 때이다. 작금의 국정을 살펴보면 한보사태,전직 대통령들의 부정축재,기아사태,IMF의 외환관리체계,은행의 도산해체,재계의 구조조정,실업자의 격증,삼성자동차의 부채청산,대우사태,언론정책에 대한 여야 갈등 등 참으로 어렵고 암담한 시련에 직면해 있다.그중에서도 특히 안타까웠던 것은 지난달 말에 발표된 병역의무 수행에 관한 보도였다.한마디로 이래서야 어찌 정의사회를 구현할 수가 있으며,제대로 국정을 펴나갈수 있을는지 우려가 된다. 국민의 의무인 군복무를 이행하지 않은 통계를 보면,정부부처의 장관 가운데 30%,국회의원 가운데 28%,교육위원과 교육감의 30%가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같이 정부와 국회의 지도자급들이 군복무를 기피한 일은 참으로 경악을금치 못할 일이다.뿐만 아니라 고위공직자 직계비속의 군 면제자 비율이 국회의원 21.6%,장관급 16.4%,고위공직자의 14.9%나 된다는 사실이다.이러한정황 속에서 순국선열을 기념하는 일이나추모하는 행사를 올바르고 성실하게 치를 수 있겠는가 심히 염려된다. 순국선열의 날에 즈음하여 우리는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순국선열들의 살신성인의 애국정신을 되새기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고 회개해 참되고 의롭게 거듭난다는 다짐을 해야만 할 것이다. [김우전 한국광복군동지회장]
  • [대한포럼] 금강산관광 1년, 남북교류 큰 획

    금강산관광이 18일로 1년을 맞는다.분단 반세기만에 열린 금강산관광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남북간에 화해와 협력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에서큰 의미를 갖는다.특히 휴전선을 사이에 둔 남북의 첨예한 군사적 대립상황에서 우리국민 누구나가 북한땅을 오가게 됐다는 점에서 금강산관광은 민족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국토분단의 벽을 넘어민족동질성 회복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11월18일 숱한 우여곡절 끝에 금강산 가는 뱃길이 열린 이후 금강산을 다녀온 관광객은 1년간 289차례에 걸쳐 14만3,000여명에 이른다.분단 이후 북한을 방문한 사람의 수십배가 넘는 남한 사람들이 금강산을 다녀온 것이다.89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동안 북한을 방문한 사람이 5,725명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민족의 대이동으로 비유될 만하다.금강산관광사업 1년동안의 이같은 실질적 성과는‘국민의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온 대북포용정책이 이룬 값진 결실이며 남북교류 50년사에 큰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금강산관광 1년동안에 큰 위기도 있었다.관광객 민영미(閔泳美)씨억류사건으로 금강산관광객의 신변안전보장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돼45일간 관광이 완전 중단되는 위기도 있었다.현대와 북측은 그동안 논란이됐던 관광세칙을 정비함으로써 그후 단 한건의 억류사건 없이 금강산관광선은 순항을 계속하고 있다.더욱이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지난 10월1일 2차면담 이후에는 외국인 금강산관광까지 허용돼 금강산관광 2기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와함께 금강산관광 1주년을 계기로 19일부터는 구룡폭포,만물상,해금강및 삼일포 등 기존의 3개관광코스 외에 동석동코스를 새로 개방키로 함으로써 관광객들은 더욱 다양하고 편리한 관광을 즐길 수 있게 됐다.또한 최근현대그룹이 북한으로부터 금강산 30년간 독점개발권을 획득하고 4,000억원규모의 세부개발계획을 세워 본격적인 광역권 금강산 관광개발을 추진하게됨으로써 금강산 지역은 이제 관광특별구역의 기능과 역할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북한의자본주의 경제체제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획기적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물론 북한의 이같은 발상의 전환에는 금강산 관광사업에서 얻는 막대한 경제적 실익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현대가 6년동안 북한에 지불하게 될 9억4,600만달러는 북한의 입장에서 볼때 엄청난 외자유치 효과를 안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또 관광사업에 이어서해공단개발이 성사될 경우,연간 수출규모는 최소 200억달러에 이를 것이며 이에 따른 고용효과만도 22만명에 달할 전망이다.금강산 관광사업의 파급효과로 북한이 얻게될 부수효과는 연간 대외경제수입 규모의 10%를 웃돌 것으로 보는 분석도 있다.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은 금강산 관광사업을 통일사업으로 승화시키는 확고한 의지와 노력을 보여야 한다. 현대도 금강산 관광사업을 그룹차원이 아닌 민족적 사업이라는 인식 아래통일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기업능력을 발휘해야 한다.금강산 관광사업은 현대그룹과 조선아·태평화위원회만의 사업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사업이라는 것을 북한당국도 분명히 인식해서 민족화해를 도모하는 명실상부한 통일관광사업이 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야 한다.남북교류협력 의지를 현실적으로 보여준 통일사업이라는 점에서 통일이 실현될 때까지 차질없이 진행돼야 한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민족통일의 상징적 시범사업일 뿐만 아니라 북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중단없이 순조롭게 진행돼야 하므로 어떤 불미한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성의있는 안내와 편의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금강산 관광사업이 남북관계 개선과 민족의 평화적 통일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를 위한 북한당국의 보다 전향적이고 성의있는 자세가 뒷받침되기를 기대한다. [張淸洙 논설위원 csj@]
  • 사목연구회 ‘대희년 심포지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사목연구소(소장 김종수)가 2000년 대희년(大禧年)을 앞두고 최근 개최한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대희년 심포지엄’에서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참회하고 반성하는 토론회를 가져 주목을 끌었다. 발제자들은 대표적인 잘못으로 ▲18세기 말 서양선박 요청사건 ▲제사금지에 따른 갈등 ▲민족 고유의 정서와 문화 무시 ▲민족운동에 대한 소극적 태도 ▲신사참배 허용 등을 꼽았다. 원주교구 교회사연구소의 여진천 신부는 “1796년과 1801년 천주교회 지도자들이 서양 선박과 병력을 요청하는 서한을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낸것은 서양 배와 군대가 오면 천주교에 대한 금령(禁令)이 풀려 선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면서 “그러나 이는 신유박해(辛酉迫害)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또 인천가톨릭대의 최기복 교수는 “18세기 교황청의 제사금지 조처는 천주교를 패륜의 사교(邪敎)로 낙인 찍히게 했고 복음의 토착화를 더디게 하는장애로 작용했다”며 교회의 잘못을 인정했다. 가톨릭대 장동하 교수는 “개항기 선교사들이 민족 고유의 문화와 풍습 등을 야만시함에 따라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산 것은물론 지식인들의 반외세감정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전남대 윤선자 교수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천주교회가 민족운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행태를 문제를 삼았고,한신대 강인철 교수도 “교회가 신사참배를 허용하고 태평양전쟁 참전을 독려한 것은 반민족적·반가톨릭적인 과오였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천주교 전래기에 교회와 사회가 충돌했던 것은 대부분교회가 당시의 민족사적 요구나 보편적인 가치를 외면한 채 맹목적인 신앙의 논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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