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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 서점가 ‘주옥같은 작품 ’ 쏟아진다

    올 서점가 ‘주옥같은 작품 ’ 쏟아진다

    윤흥길·박민규·은희경·하성란·조남주…중견·여성·스타작가 신작 잇따라 선보여줄리언 반스 등 외국작가도 새 작품 출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문학계에는 풍성한 한 상이 차려진다. 굵직한 자취를 남긴 원로·중견 작가들이 오랜만에 신작으로 독자들을 만나는가 하면 지난해 돋보였던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올해도 이어진다. 믿고 보는 외국 작가들의 작품도 대거 대기 중이다.우선 원로·중견 작가들이 오랜만에 신작을 내며 문학계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는 올해 등단 50년을 맞은 윤흥길 작가다. 올 하반기 20년 만에 발표하는 5권짜리 대하 장편소설 ‘문신’(문학동네)에서 일제 말기 한반도를 배경으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야기꾼 성석제도 4년 만에 장편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문학동네)를 상반기에 선보인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연재한 작품으로 조선 숙종조를 배경으로 우연히 왕과 의형제를 맺게 된 주인공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왕을 지키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모험담을 특유의 입담으로 펼쳐 낸다. 윤대녕 작가는 ‘도자기 박물관’(2013) 이후 오랜만에 새 소설집을 펴낸다. 이승우 작가는 하반기에 산문집 ‘작가일기’(은행나무)로 독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독자들에게 꾸준하게 사랑받는 스타 작가들의 작품도 반갑다. 한동안 뜸했던 박민규 작가는 위즈덤하우스의 웹소설·웹툰 플랫폼인 ‘저스툰’에서 오는 3월부터 연재하는 ‘코끼리’를 가을쯤 단행본으로 묶어 낸다. 1970년대 지방도시 노름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장르적 성격의 장편소설이다. 입담 좋은 이기호 작가는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한정희와 나’를 비롯한 7편을 묶은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문학동네)를 상반기에 출간한다. 지난해 문학계를 강타한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는 올해도 두드러질 전망이다. 은희경 작가는 ‘태연한 인생’(2012) 이후 6년 만에 장편소설 ‘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를 하반기에 낼 예정이다. 계간 문학과사회에 연재 중인 작품으로 1970년대 여자대학교 기숙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8년 만에 장편소설을 내는 하성란 작가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인간의 비밀을 담은 ‘정오의 그림자’(은행나무)를 비롯해 창비의 네이버 블로그 ‘창문’에 연재한 ‘여덟 번째 아이’, 2010년 웹진 문지에 연재한 ‘여우 여자’(문학과지성사)를 줄줄이 펴낸다. 지난해 ‘82년생 김지영’으로 신드롬을 몰고 다닌 조남주 작가는 올해 선보이는 소설집(제목 미정·다산북스)에서 10대부터 70대 여성들의 삶을 다룬다. ‘너무 한낮의 연애’,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등 소설집으로 젊은 독자들로부터 주목받은 김금희 작가는 상반기에 첫 장편 소설 ‘경애의 마음’(창비)을,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로 7만 5000부라는 판매 부수를 올리며 화제를 모은 최은영 작가는 하반기에 두 번째 소설집을 선보인다.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외국 작가들의 작품도 서점에 진열된다. 서늘한 통찰력과 지적인 위트로 유명한 영국 문학의 제왕 줄리언 반스의 적나라한 연애소설 ‘단 하나의 이야기’(가제·다산북스)가 출간된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문학 세계로 주목받는 폴 오스터의 작품 중 가장 분량이 긴 소설이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작품 ‘4 3 2 1’(열린책들)도 하반기에 출간이 예정돼 있다. 주인공 아이작 퍼거슨의 동시적이고 독립적인 4개의 삶을 다룬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최고의 소설로 꼽아 화제가 된 소설 ‘운명과 분노’의 작가 로런 그로프의 2012년 작품인 ‘아르카디아’(문학동네)도 독자들을 만난다. 1970년대 히피 문화가 득세하던 시절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대안공동체 ‘아르카디아’에서 자란 ‘비트’라는 남자의 40년간의 삶을 좇는다. 2016년 별세한 움베르토 에코의 유작 ‘제0호’(열린책들)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열린책들), 오르한 파무크의 ‘빨간 머리의 여인’(민음사)도 줄줄이 출간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뭉치니 뜨네!

    뭉치니 뜨네!

    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백남기 농민 사건 다룬 ‘무엇이…’유명작가 공동 작업… 판매 ‘쑥’ 출판계에 공동 집필 바람이 불고 있다. 여러 명이 글을 쓰기 때문에 집필 기간을 줄일 수 있고 유명 작가들이 참여해 판매에도 탄력을 받기 때문이다.이런 책은 특별한 사건이나 사회적 현상 이후 출판사가 알맞은 저자를 섭외해 만드는 사례가 주를 이룬다. 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다산북스)가 대표적이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으로 주목받은 조남주 작가를 비롯한 7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9일 다산북스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출간한 뒤 두 달여 만에 3만부를 넘겼다. 책을 기획한 다산북스 정민교 편집자는 “페미니즘 관련한 소설집을 구상하다 지난해 5월 강남역 근처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사건을 계기로 이를 구체화했다. 당시 막 인기를 끌던 ‘82년생 김지영’의 조 작가를 비롯해 여러 작가를 섭외했다”고 말했다. 한 작가가 장편소설을 내려면 평균 1년 이상 걸리지만, 여러 작가가 짧은 소설을 쓰면서 집필 기간이 3개월 남짓이어서 기획부터 출간까지 1년도 안 걸렸다. 정 편집자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사회 화두여서 당분간 인기를 끌 것”이라 내다봤다.이번 달 출간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낮은산) 역시 주목받는 협업물이다. 강남순 교수, 인권활동가 류은숙, 작가 홍세화를 비롯해 비정규직 강사, 문화평론가, 활동가, 학자, 정치인 등 8명의 글을 모았다. 필자들이 워낙 유명한 까닭에 출간 직후부터 언론사 논평을 비롯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 책은 강설애 낮은산 편집자가 2015년 11월 발생한 백남기 농민 사건을 계기로 기획했다. 강 편집자는 “사건 이후 우리 사회를 돌아봐야 한다는 고민을 했다. 이를 깊이 있게 써줄 작가를 섭외하는 데 공을 들였다”고 했다. 다만 여러 작가를 섭외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강 편집자는 “문학 작품에 비해 인문·사회 쪽 작가들은 워낙 바빠 글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면서 “작가들 협업물이 쉬워 보이지만, 위험 요인도 많고 실패하는 사례도 꽤 된다”고 설명했다. 작가들의 자발적인 연대 움직임도 거세다. 국내 공상과학(SF) 작가들로 구성된 첫 공식 단체인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가 지난 4일 창립한 것도 이런 흐름이다. 김창규·듀나·정보라 등 현재 작가 31명이 합류했다. 정소연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SF 작가들의 교류를 활발히 하고 SF 장르 저변을 넓히는 게 우선 목표”라면서 “앞으로 워크숍을 비롯해 여러 활동을 해 나갈 예정이다. 작가들의 연대를 통한 공동 작업물도 나올 것”이라고 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헌책 속 손글씨…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설렘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헌책 속 손글씨…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설렘

    워낙 바삐 서두르다 보니 외출하면서 가방에 넣은 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버스와 지하철이 생각보다 일찍 연결되어서 약속 장소에 나와 시계를 보니 상대방이 도착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그제야 내가 가방 속에 무슨 책을 넣었는지 궁금해졌다. 책과 관련된 일을 오래 해서일까. 어딜 가든지 책 한 권을 함께 데려가지 않으면 조금 불안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꺼내 맨 뒤쪽 면지를 보니 누군가 써 놓은 글씨가 일순간 눈을 사로잡는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가방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이 책의 전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던가 보다. 그이는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고까지 말하는 것일까? 거기서 30분 동안 나는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나와 비슷할지도 모를 어떤 사람의 얼굴을 그려 보고 있었다. 정작 책은 한 문장도 읽지 못했다.올해로 헌책방 운영도 11년째를 맞이했지만, 그리고 다른 곳에서 직원으로 일하며 헌책방 일을 배운 것까지 더하면 11년 위에 몇 년을 더 얹어야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새 책이 아니라 헌책을 더 좋아할까.” 이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통된 것 중 하나는 헌책이 주는 특별한 질감이다. 여기서 질감이라고 하면 손으로 만져지는 감촉을 포함해서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특유의 나무 냄새,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런저런 흔적을 말한다. 그렇다. 전 주인이 남긴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책은 헌책뿐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흔적’이라고 해도 좋다. 책은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제 스스로 흔적을 남길 수 없다. 책에 있는 흔적은 모두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다.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책을 갖고 있었던 주인의 흔적이 책에 남아 있는 걸 발견하는 즐거움이 헌책을 만나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책 속에 있는 흔적을 마주하다 보면 그 책의 예전 주인과 어떤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본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밑줄과 메모가 가득한 책을 보면 그 책으로 열심히 공부했던 성실한 어떤 사람 얼굴이 금세 떠오른다. 시처럼 멋진 문장을 면지에 남긴 것을 발견했을 때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그이를 상상하게 되고, 어떤 때는 며칠 동안 그렇게 상상한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길을 가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 스쳐 지나가면 저 사람이 바로 그이가 아닐까 하면서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책의 흔적에서 비롯된 이런 기분 좋은 설렘도 헌책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어떤 사람은 왜 헌책을 좋아할까 그날 내 가방 속에서 수줍게 얼굴을 내민 책을 확인하니 허만하 시인의 산문집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라는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책은 아니지만, 표지를 감싸고 있는 종이커버 재질 때문인지 벌써 테두리 쪽은 빛바랜 자국이 선명하다. 책을 볼 때 항상 서지면을 먼저 보는 습관이 있다. 이 책은 솔출판사에서 2000년에 펴낸 것으로 초판은 10월 5일에 나왔는데 내가 가진 것은 2쇄 본이고 그 날짜는 10월 16일이다. 딱히 특별한 구석은 없는 책인데 초판을 내고 불과 열흘 만에 2쇄를 찍었다는 게 솔직히 부럽다.●“가방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다시 책 속에 누군가 써 놓은 글씨를 살핀다. “가방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이 글을 쓴 날짜는 2002년 5월 23일이다. 이 날은 목요일이고 일주일 후면 한·일 월드컵이 개막하기 때문에 거리 이곳저곳에서 벌써부터 월드컵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축구에 큰 관심이 없었고 아직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IT 회사에 출근했을 것이다. 그 외에 특별한 기억은 없다. 애써 특별함을 갖다 붙여 보자면 이날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날과 같다는 것 정도일까. 어쩌면 이 책의 주인도 나처럼 축구보다는 책을 좋아했던 것 같다. 급히 외출을 했는데 가방 속에 책을 챙겨 넣는 걸 잊었던 것이다.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근처 서점에 들어가서 산문집 한 권을 사들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선 책을 펼치고 면지 아래에 글씨를 쓴다. “가방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오늘을 잊지 않기 위해 날짜도 써 둔다. 2002년 5월 23일. 이 독서가는 낙타가 십리 밖에 있는 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처럼 어디서든 책과 그 안에 들어 있는 문장의 향기를 잡아낼 수 있는 재능이 있다. 이 책을 나보다 먼저 읽었던, 내가 그려낸 상상 속 독서가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렇듯 말 없는 헌책은 내게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몇 해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모아 엮어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에는 헌책방에서 일하며 느꼈던 보석 같은 즐거움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남다른 애정이 깃들어 있다. 보통은 책을 쓰고 난 다음 그 책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지 않고 다음 책을 준비하는데 이 헌책의 흔적에 관한 책만큼은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고 떠날 줄 모른다. 헌책방에서 계속 일을 하다 보니 끊임없이 이런 인연과 만나기 때문이리라.‘아이들의 풀잎노래’는 양정자 시인이 교사로 일하며 써낸 진정성 넘치는 시들이 읽는 이들에게 큰 감동을 선물한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1993년 초판인데 책 뒤표지 안쪽 면지에 누군가 긴 일기를 써놓았다. 그 내용을 읽어 보니 시집의 첫 주인은 시인과 마찬가지로 교사인 것 같다. 담당하고 있는 학급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빼곡한 손글씨 사이사이에 배어 있다. 한달음에 써내려 간 하루치 일기라곤 하지만 문장이 워낙 아름다워서 어쩌면 이 글을 쓴 사람이 양정자 시인 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언제고 시인을 만나면 시집을 내보이며 함께 이야기 나눠 보고 싶다. ●보들레르가 ‘바우델아이레’? 어떤 독자는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 책 속 면지에 강렬하고 치열한 시어 곳곳에서 “Baudelaire의 냄새가 난다”라고 썼다. 나는 한동안 알파벳으로 쓴 이 작가의 이름을 “바우델아이레”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이름을 가진 시인은 없었다. 전공자들이나 알 만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르네상스시대 작가가 아닐까? 상상력이 지나치게 발동되어 바우델아이레라는 시인의 작품을 꼭 찾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다시 이 책을 보았을 때 깜짝 놀랐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보들레르”였던 것이다. 전에는 무슨 이유 때문에 보들레르를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확실히 책이나 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에게서 비롯된 오해였기에 부끄러운 심정을 오랫동안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런 일을 겪고 난 다음 나는 반성하는 자세로 보들레르의 시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최승자 시인의 시들도 다시 천천히 곱씹으며 읽었다.●책이 주는 즐거움은 시대를 초월 알제대학의 철학교수인 장 그르니에는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아름다운 산문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해진 것은 알베르 카뮈라는 작가를 발굴해 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 그르니에의 책 중에서 ‘섬’은 카뮈가 쓴 서문이 들어 있어 많은 독자의 관심을 받았다. 카뮈는 ‘섬’의 원고를 처음 읽었을 때 너무나도 가슴이 벅찬 나머지 그대로 집까지 내달려서 방에 들어가 스승의 글을 읽었다고 썼다. 그것은 카뮈가 스무 살 즈음에 겪은 일이고 이 책을 읽은 후 자신도 글을 써 보겠다는 다짐을 가슴에 새겼다. 그는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한 무명의 독자도 카뮈와 같은 심정으로 민음사 이데아총서 시리즈로 펴낸 ‘섬’을 읽었나 보다. 그는 100년 전 카뮈가 그랬듯 “존재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두려움”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짧은 글을 남겼다. 이 문장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나중에 이 책을 읽게 될 또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의 선물이기도 하다. 책이 주는 즐거움은 시대를 초월한다. 헌책이라면 거기에 더해 이름 모를 또 다른 독자들과 친구가 되는 설렘을 만들어 준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이, 성별, 종교, 가치관, 이념, 그 무엇도 상관없다. 우리는 헌책 속에 남겨진 여러 가지 흔적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 인연을 나눈 것이다. 헌책을 읽는 것은 책과 사람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 남겨진 흔적은 그 책을 가졌던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이 만나는 거룩한 인연의 시작이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연재를 마칩니다.
  • [지금, 이 영화] 형제애 표방한 영화 ‘굿타임’

    [지금, 이 영화] 형제애 표방한 영화 ‘굿타임’

    ‘굿타임’은 뉴욕의 하룻밤을 그린 영화다. 그 야화(夜話)의 주인공은 청년 코니(로버트 패틴슨). 사실 그에 관해서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코니가 지적장애를 가진 남동생 닉(베니 사프디)을 끔찍이 아낀다는 것이다. “우리 둘뿐인 거야. 내가 네 친구야.” 형은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동생도 그런 형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할머니는 아니지만 형은 날 사랑해요.” 이처럼 끈끈한 형제애는 이 작품의 전면에 부각된다. 그런데 이들의 형제애가 발현되는 방식이 독특하다. 이런 논리다. ‘세상에서 서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형제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를 갈라 놓으려는 방해꾼이 많은 이곳을 떠나고 싶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형제는 은행 강도가 되기로 한다. 의외로 그들의 은행털이는 쉽게 이뤄진다. 그렇지만 돈을 들고 도망치던 도중 닉이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코니의 머릿속은 체포된 동생을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 그가 한바탕 동분서주하는 긴긴밤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굿타임은 직역하면 ‘좋은 시간’이라는 의미다. 한데 이 제목은 형제 입장에서 보면 반어적인 타이틀임에 틀림없다. 동생은 구치소에 갇혀 있고, 형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한밤이 이들에게 좋은 시간일 리 없을 테니까.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굿타임은 적절한 제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굿타임에는 ‘쾌락’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이때 쾌락은 두 가지 대상을 향한다. 하나는 관객이다. 형제의 고생담은 그것이 박진감 넘칠수록 관객에게 즐거움을 준다. 역설적이지만 타인의 고통을 체감하는 일이 자신에게는 기쁨으로 승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그렇다. 이와 같은 기묘한 마음의 정화 작용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쾌락이 향하는 나머지 대상은 누굴까. 바로 코니다. 이 말은 당신한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맞닥뜨린 곤혹스러운 상황을 괴로워하는 동시에, 이를 기꺼이 향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임기응변으로 난관을 넘을 때마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니는 스스로 꾸며낸 그 인물이 돼 버린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자아도취에 빠진 그는 변신의 쾌락을 거부하지 못하는 도착증자 같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도착증자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도착증자에게는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이 없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더이상 질문하지 않는다.”(브루스 핑크·맹정현 옮김,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 2002, 304쪽) 정리하자. ‘굿타임’은 형제애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형제애가 중심인 영화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한 치의 의심 없이, 세상을 치받는 존재자의 응축된 에너지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영화다. 그야말로 충만한 쾌락이다. 4일 개봉. 15세 관람가.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인생, 설계도 그리듯 뜻대로 되는 게 아닌 걸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인생, 설계도 그리듯 뜻대로 되는 게 아닌 걸

    연말이 되면 늘 지난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낸다. 책에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책을 좀더 많이 읽는 편이다. 돌이켜 보니 올해도 거의 200권이나 되는 책을 읽었는데 매년 한두 권 정도는 작품성과는 별개로 상당히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 책이 있다. 올해 내게 그런 책은 ‘모눈종이 위의 생’이라는 장편소설이다. ‘조선작’이라는 작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헌책방을 찾은 손님들에게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 이름은 성별조차 짐작하기 어려워서 이미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기억 속에서 끄집어 올리기 어려운 작가다.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사람에게 “그럼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영화는 아시죠?”라고 물으면 또 열에 아홉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 영화를 본 적은 없어도 제목만큼은 널리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다. 영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데, 그 작품을 쓴 작가가 바로 조선작이다.1940년 대전에서 태어난 조선작은 1960년에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까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교사로 일하며 신춘문예에 여러 번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신춘문예 심사를 자주 했던 김동리 작가가 말하길, 조선작이 글 솜씨는 뛰어났는데 작품의 소재가 건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해 당선작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한국전쟁을 맞았고 그때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고 가난에 찌들어 자란 청년이 명랑하고 건전한 소설을 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71년 월간 ‘세대’ 잡지에 ‘지사총’으로 등단한 후에 펴낸 그의 작품 속엔 이렇듯 가난, 억압, 방황, 소외, 부조리 같은 암울한 느낌이 가득했다.‘모눈종이 위의 생’은 조선작이 ‘영자의 전성시대’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된 1970년대를 마감한 직후에 써낸 작품이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제목으로만 보자면 꽤 건전하고 긍정적인 내용인 것 같다. 하지만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다가 버스 차장으로 일하던 중 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영자에게 전성시대라는 게 찾아올 수 있을까? 영자는 결국 사창가로 흘러들어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되는데 여기서 약간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영자를 좋아하는 청년이 나무를 깎아 만들어 준 의수 덕분에 손님이 늘어 돈을 좀 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창가 골목에 화재가 나서 영자는 거기서 허망하게 죽고 이야기는 끝난다. 그의 작품이 대개 이런 식이다.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인생들은 끝까지 피로한 삶을 살다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끝나버린다. 그것이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정권이 바뀐 1980년대는 여러모로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1년에 조선작은 한국일보에 소설을 연재했는데 그것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 ‘모눈종이 위의 생’이다. 소설은 내용과 설정 면에서 그전까지 써 오던 조선작의 작품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주요 등장인물들이 밑바닥 계층이 아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 ‘안종희’는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6년 전 어떤 사건 때문에 결혼식 직전 실패를 경험한 일이 있다. 그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은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있는 ‘한민일’은 인기 있는 소설가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안종희가 한민일의 행적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는 내용으로 흡사 추리소설과 같은 구성을 가진 특이한 작품이다. 안종희는 치밀한 작전을 바탕으로 한민일의 심리상태마저 이미 손바닥 위에 놓고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 행동하는데 그 시작은 북악에 있는 ‘P호텔’에서부터다. 사실 P호텔은 주인공의 어머니가 이혼한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던 커피숍이 있는 곳이다. 어머니는 여기서 만나주지 않는 남편을 며칠 동안이나 같은 시간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P호텔은 소설 속에서 “세검정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터널 입구에” 위치해 있고 5층이라는 단서로 미루어 보아 1980년대 북악터널 근방에 있던 ‘북악파크호텔’이 그 모델일 것으로 추측한다. 소설 초반에 잠깐 나오는 P호텔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장(章)의 제목이 ‘북(北)호텔’이기도 하고 주인공 자신도 호텔 근처에서 어머니를 관찰하면서 어느 시인이 쓴 같은 이름의 시집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정확한 이름을 밝히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은 1979년에 민음사에서 초판을 펴낸 김영태 시인의 시집 ‘北호텔’일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북호텔’은 1938년 마르셀 카르네 감독이 연출한 프랑스 영화로 이어지며 조선작의 소설이 영화의 내용과 연계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외젠 다비가 1929년에 발표한 소설 ‘북호텔’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P호텔은 소설 초반에 한 번 등장했다가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운명적으로 다시 한 번 나온다. 모든 희망을 잃은 안종희가 이 호텔에 투숙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죽을 장소로 첫 장에서 어머니와 만났던 P호텔을 선택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첫 장 제목이 ‘북호텔’이기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 P호텔의 정식 명칭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에 주인공이 수면제를 먹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어머니를 떠올리며 쓰는 유서에서 느닷없이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이름을 ‘북호텔’이라고 쓴다는 점이다.외젠 다비의 소설 ‘북호텔’ 역시 죽음과 관계가 있다. 파리 10구 운하 근처에 있는 4층짜리 호텔은 온갖 인간 군상들이 머물다 떠나는 곳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줄거리 없이 그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기만 할 뿐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은 극적인 사건을 중심에 두고 있다. 한 쌍의 연인이 동반자살을 하려는 목적으로 북호텔에 투숙한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상대에게 총을 쏘고 뒤이어 자신에게도 총을 쏘는 방법이었지만 먼저 방아쇠를 당긴 쪽이 나중에 겁이 나서 도망가버리면서 사건은 복잡해진다. 그런데 ‘모눈종이 위의 생’에서 북호텔에 투숙한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 혼자다. 당연히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다. 죽기로 결심하기 전 안종희는 과거의 연인 한민일을 조사하면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치밀하게 준비했고 완벽하게 실행했다. 모든 게 완벽함을 추구하는 안종희의 뜻대로 되는 듯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그런 것이 적용될 수 없었다. 이것이 안종희가 절망한 이유다. 삶의 모든 것을 자신이 계획하고 마치 건축가가 모눈종이 위에 완벽한 설계도를 그리는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실상 인간의 삶이란 거대한 모순 덩어리임을 깨달았다. 나중에 가수가 된 주인공의 동생 안세호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서로 모순의 별들. 한동안 우리의 길을 잃은들 어떠랴.”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설계하며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매번 실수하고 상처도 받는다. 그것이 거름이 되어 또 조금씩 발전한다. 조선작은 신문 연재가 끝난 후 ‘모눈종이 위의 생’을 단행본으로 펴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신작사’(新作社)라는 출판사를 만들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나중에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여전히 이 소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작의 여러 작품을 알고 있지만 정작 조선작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손님들을 많이 만난다. 작가가 소설에서 쓴 것처럼 이것도 굳이 애써서 풀지 않아도 될 하나의 모순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 ‘식인 전설’ 축제로 바꾼 라틴아메리카

    ‘식인 전설’ 축제로 바꾼 라틴아메리카

    즐거운 식인/임호준 지음/민음사/272쪽/2만 2000원 제목부터 섬뜩하다. ‘즐거운 식인’이라니. 식인만으로도 충분히 오싹한데 그걸 즐겁다고 표현하니 더 괴기스럽다. 한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반전이다. 부제에 잘 표현돼 있다. ‘서구의 야만신화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유쾌한 응수’다.책은 1920년대 라틴아메리카 저항 예술의 핵심 개념인 ‘식인주의’를 담고 있다. 이 해괴한 개념에 대한 연원을 알려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금을 찾아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한 스페인 등 초기 정복자들은 원했던 만큼 금을 얻을 수 없게 되자 노예무역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식민사업에 뛰어든 유럽 열강들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화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 줄 구실을 찾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야만인이기 때문에 착취와 지배가 정당하다는 논리를 폈고, 이 야만인 담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식인종 신화였다. 식인 현장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초기 정복자들이 유포한 식인 전설은 유럽에 빠르게 전파됐다. 식인 전설(카니발리즘)에 대한 라틴아메리카 지성인들의 반응은 다분히 축제(카니발)적이었다. 식인을 축하하고 기념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대화를 상상해 보면 알기 쉽겠다. 유럽 정복자의 딸과 남미 원주민의 딸이 나눈 가상의 대화다. 유럽 정복자의 딸이 묻는다. “너, 식인종이라며?” 원주민의 딸은 답한다. “그래, 나 식인종이야. 그래서 이제부터 너를 먹으려고 해. 너, 머리 좋고, 몸매도 좋더라. 난 그것만 먹을 거야. 탐욕 같은 더러운 피는 먹지 않아. 설령 먹더라도 배설해 버리면 돼.” 식인주의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개념이다. 유럽 문물에 정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능동적으로 골라서 먹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화에 대한 단순 복사를 넘어, 먹어 삼키고 소화시키고 새롭게 합성해 유럽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적 자산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영화 ‘내 프랑스인은 얼마나 맛있었나’(1971) 등의 ‘엽기적’인 제목도 쉽게 이해가 갈 터다. 식인주의는 브라질 모더니스트들이 주창한 것이지만 이후 남미의 문화 담론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며 현재까지도 중요한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책은 이처럼 유럽인들이 정복을 위해 갖다 붙인 식인 풍습이 어떻게 수많은 라틴아메리카 문학, 예술, 음악, 영화들에 계승되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문장은 도를 싣는 그릇… 인문에 취하다

    문장은 도를 싣는 그릇… 인문에 취하다

    한국 산문선/안대회외 지음/민음사/각권 392~508쪽/각권 2만2000원“우레가 칠 때는 모두가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뇌동(同)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우렛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가슴이 철렁했다. 잘못한 일을 거듭 반성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기에 그제야 몸을 펴게 됐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1241)의 산문 ‘우렛소리’(說) 중 한 대목이다. 우렛소리를 접한 뒤 자신에게 허물이 있는지 살폈다는 심경의 고백이 흥미롭다. ‘한국 산문선’은 안대회, 이종묵, 정민, 이현일, 이홍식, 장유승 등 한문학자 6명이 한문 산문 중 사유의 깊이와 폭이 드러나는 작품을 선별, 번역해 9권으로 엮은 역작이다. 신라 고승 원효(617∼686)부터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1893∼1950)까지 1300년에 걸쳐 229명이 쓴 산문 613편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통사적 선집’인 셈이다.역사 기록상 한문 산문은 5세기 무렵 처음 등장한 것으로 관측된다. 광개토왕릉비(414년), 진흥왕 순수비(561년) 등 나라의 위업을 알리는 글이 주종을 이룬다. 그마저도 온전한 글을 파악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당대 문인의 글을 확인할 수 있는 건 고작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원효의 ‘금강경’ 정도에 그친다. 이 산문선의 특장은 바로 그 점에서 도드라진다. 다양한 한문 산문을 발굴해 우리말로 옮기고 읽기 쉬운 풀이 글로 선사하고 있다.“너는 본시 먼 시골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감히 강상을 어지럽히더니, 종국에는 불측한 마음을 품고 무엄하게 제위를 노려 도성을 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다.” 황소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한 최치원(857~?)이 지은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 중 일부이다. 최치원이 문명(文名)을 중국 전역에 떨쳤다는 바로 그 글이다. 황소가 ‘도덕경’과 ‘춘추전’을 인용해 자신을 꾸짖는 이 격문을 읽다가 놀라 말 위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흥미롭다.“해와 달과 별은 천문(天文)이요, 산천과 초목은 지문(地文)이요, 시와 서와 예와 악은 인문(人文)이다.” 조선 설계자 정도전(1342~1398)이 남긴 ‘문장은 도를 싣는 그릇’의 한 대목. 이 글에선 ‘인문’이라는 말이 생겨난 유래를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 ‘동문선’으로 유명한 서거정(1420~1488)의 ‘우리 동방의 문장’(東文選序)은 중국의 영향 아래서 조선의 독자적인 문학을 자리매김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우리 동방의 문장은 한과 당의 문장도 아니고 송과 원의 문장도 아니며 바로 우리나라의 문장이다. 당연히 역대의 문장과 더불어 천지 사이에 나란히 알려져야 할 것이니, 인멸되어 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책에는 이처럼 뼈대 있는 울림 말고도 소소한 재미를 안기는 읽을거리들이 숱하다. 논설, 상소문, 전기, 일기, 편지글, 기행문, 묘지명까지 문장의 모든 갈래를 보여준다. 마음이 아름다운 노비, 개성 있고 자존심 강한 화가, 담배·고구마·코끼리 같은 새로운 문물에 관한 보고서…. 그 다채로운 문화사를 펼쳐보인 저자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한문으로 쓰인 문장은 오늘날 독자에게는 암호문처럼 어렵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인문정신의 가치는 현대라도 보석처럼 빛난다. 이렇게 만나는 옛글은 더이상 낡은 글이 아니다. 오히려 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과 느닷없이 대면하는 느낌이 들 만큼 새롭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헛헛하지만 따뜻한 이주 빈민들의 삶…

    헛헛하지만 따뜻한 이주 빈민들의 삶…

    내 마음의 낯섦/오르한 파무크 지음/이난아 옮김/민음사/652쪽/1만 6800원오랜 시간 머물렀던 고향을 떠나 도시에 정착한 이주민들의 삶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을 것이다. 낯선 이웃, 새로운 일터, 넉넉지 않은 살림 형편, 늘 마음 한 편에 자리잡은 불안함…. 그럼에도 새롭게 둥지를 튼 보금자리의 온기를 뭉근하게 지킬 수 있는 건 가족과 연인의 사랑 덕분이다. 터키를 대표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새 장편소설 ‘내 마음의 낯섦’은 이렇듯 도시로 이주한 빈민의 생생한 삶을 터키의 현대사와 함께 풀어낸다. 이스탄불의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작가가 그간의 작품에서 이스탄불을 중상류층의 공간으로 다뤄 왔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빈민들의 터전에 주목한 점이 사뭇 인상적이다. 1950~60년대 돈을 벌기 위해 이스탄불을 찾은 이민자들이 지은 ‘게제콘두’(무허가 집)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아파트로 변모하는지, 그 당시 빈민가의 삶이 어땠는지 등 작가의 꼼꼼한 취재 덕분에 방대한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치밀하다.소설은 이스탄불에서 터키의 전통 음료인 ‘보자’를 파는 거리상인 메블루트와 그 가족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선한 마음의 소유자인 메블루트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가 놓여 있다. 시골을 떠나 이스탄불에 온 메블루트는 어느 날 사촌의 결혼식장에서 ‘라이하’라는 이름을 지닌 소녀와 눈을 마주친다. 메블루트는 사촌 쉴레이만의 도움으로 자신이 첫눈에 반한 라이하를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한밤중에 도망친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확인한 소녀의 얼굴은 그가 사랑에 빠진 미녀가 아니었다. 사실 메블루트가 반한 소녀는 라이하의 동생인 사미하. 사미하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쉴레이만이 메블루트의 도피 계획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메블루트를 속인 것이다. 자신이 흠모했던 여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얼떨결에 결혼하게 된 메블루트가 당황하고 좌절할 것이라는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메블루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채 라이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녀와 삶을 꾸리게 된 자신을 행운아라고 여긴다. 복잡다단한 삶 속에서도 매사 감사해할 줄 아는 메블루트의 삶을 보고 있자면 그의 삶 자체가 그가 길거리에서 파는 ‘단맛도 나고 신맛도 나는’ 보자와 닮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1968년부터 2012년까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메블루트와 주변 인물의 삶의 여정을 좇다 보면 자본주의에 따른 이스탄불의 급격한 변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십년간 이 도시의 골목길을 닳도록 걸어다닌 메블루트는 “도시는 더이상 거대하고 친숙한 집이 아니라 더 많은 콘크리트와 거리, 마당, 벽, 인도, 상점들이 추가된 신이 없는 장소로 변해 버렸다”고 생각한다. 영혼의 안식처였던 도시가 옛 얼굴을 잃는 것을 볼 때마다 허무함을 느끼는 메블루트는 곧 작가를 대변한다. 국내에 소개된 파무크의 모든 작품을 번역한 이난아 한국외국어대 터키어과 교수에 따르면 “파무크의 작품 대부분에서 생태주의 관점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이스탄불의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점점 초록빛이 사라지는 것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는 작가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더없이 차가운 도시의 풍경과는 다르게 매순간 자신이 머문 곳에서 자족할 줄 알며, 사랑을 잃지 않는 인간 군상이 더욱 따뜻하게 다가온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딱 한 권뿐인’ 백석 서명 시집 7000만원에 낙찰되다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딱 한 권뿐인’ 백석 서명 시집 7000만원에 낙찰되다

    야심 찬 마음으로 헌책방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며칠 전 한 집에서 매입한 책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책들은 종류나 순서에 상관없이 마구 뒤섞여 있기 때문에 일단은 가져온 책을 분류하는 게 먼저다. 그다음은 망가진 책이 없는지, 더러워진 책이 있다면 쉽게 닦을 수 있는 책인지 눈과 손으로 일일이 만져가면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다 김수영 시인의 짧은 글 모음인 ‘시여 침을 뱉어라’의 오래된 판본을 하나 발견했다. 민음사에서 1977년에 출판한 것이다.유명 시인의 오래된 책이긴 했지만 이 책은 초판이 아니기 때문에 판매했을 때 많은 값을 받을 수는 없다. ‘시여 침을 뱉어라’는 1975년에 출판된 것이 처음으로,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68년 부산에서 있었던 문학 강연 원고의 주제를 책 제목에 사용한 것이다. 본문을 넘겨 서지 쪽을 확인한 다음 초판이 아닌 것을 알고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책 맨 앞 속지를 보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거기에 누군가 짧은 일기로 보이는 글을 볼펜으로 써 놓았는데 단상 옆에는 큼직하게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었다. 그 이름을 읽어보니 바로 ‘성석제’(成石濟)였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수영 시인의 책에 바로 그 성석제가 삼일치 일기를 써놓았다. 일기 밑에는 날짜까지 있다. 1978년 8월 7일부터 삼일간의 기록이다. 성석제 작가는 1960년생이기 때문에 1978년이라면 이런 일기를 충분히 쓸 수 있는 나이다. 이건 단순히 작가가 책에 서명한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조금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때 내 머릿속에는 온통 이런 생각뿐이었다. “이걸 판매한다면 도대체 가격을 얼마나 붙여야 할까?” 성석제 작가가 십대 나이에 개인적으로 써둔 삼일치 일기라면, 만약 작가의 열렬한 팬에게는 이것을 소장하기 위해서라면 가격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이미 머릿속에서 돈을 세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진위를 가리는 것이다. 확실하다고 해도 확인은 해야 한다. 나는 그 책을 우연히 발견한 나머지 너무도 흥분해서 그게 실제로 성석제 작가가 쓴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믿어버렸다. 일주일 정도 그렇게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흥분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게 되었을 때 책 속에 일기를 남긴 주인공이 실제 성석제 작가인지 확인해 볼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허망했다. 작가는 책에 그런 글을 쓴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니 한자로 적은 이름 가운데 ‘석’자가 틀린 것이다. 성석제 작가이름은 ‘돌 석(石)’자가 아니라 ‘클 석(碩)’자를 쓴다. 이렇게 해서 책 한 권으로 큰돈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내 어리석은 행동은 반성거리만을 남겨놓고 끝나버렸다. 책의 가치는 종종 가격으로 평가된다. 김수영 시인의 ‘시여 침을 뱉어라’는 1977년 당시에 5000원도 안 되는 가격이었지만 아무리 헌책방이라고 해도 지금도 그 정도 가격에 판매하지는 않는다. 그때와 지금은 돈의 가치만 해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봉지라면 한 개에 50원 하던 때와 지금 화폐의 가치를 단순비교로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헌책방의 책 가격은 말 그대로 엿장수 마음대로인 경우가 많다. 수십 년 전에 출판된 책의 가격을 정하는 기준이라는 게 딱히 없기 때문에 어떤 책은 저렴한 반면 또 어떤 책은 당시 정가의 수십 배에 이르는 가격표가 새로 붙기도 한다.책의 가격이 비싸지는 데는 의외로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출판된 지 오래 지났다고 해서 아무런 책이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조건은 절판된 것이어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책을 언제든지 서점에 가서 구입할 수 있다면 비싸질 이유가 없다. 두 번째, 출판 당시 발행부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반대로 가치는 높아진다. 이것도 상식적인 이유다. 절판됐다고는 하더라도 똑같은 책이 여기저기 많이 보일 정도라면 비교적 가격이 낮아진다. 금이나 다이아몬드도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라면 그저 빛나는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과 같은 이유다. 세 번째, 절판됐고 개체수도 적다면 책의 외관 상태가 좋을수록 가치가 높다. 여기까지가 누구나 공감할 만한 기본적인 책의 가치평가 기준이다.그 외에는 사정이 좀 더 복잡해진다. 길게 얘기하자면 책 한 권 분량으로도 모자랄 수 있으니 여기서는 간단히 ‘서명본’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책에 저자의 서명이 들어간 것을 서명본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종류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 우선은 서명본 자체가 흔치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이외수 작가 같은 경우는 워낙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고 작가 이벤트도 많았기 때문에 서명본도 엄청나게 많다. 물론 서명이 없는 책보다는 가치가 높겠지만 서명본치고는 가격이 높지 않다. 반대로 장정일 작가는 평소에 자신의 책에 서명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 역시 헌책방을 운영한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지만, 장정일의 책에 작가 서명이 들어가 있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이런 작가의 책 중에 절판된 서명본이 있다면 상당한 가격이 붙을 것이다.서명본 중에 가장 흔한 것이 작가 이름과 그것을 받은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들어 있는 경우다. 대부분은 작가 이벤트 등을 통해서 받게 된 서명일 것이다. 이런 책보다는 작가의 이름만 있는 책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보다 높은 경우는 작가 이름과 함께 또 다른 유명인의 이름이 함께 들어 있는 책이다. 서명을 받은 사람도 책의 작가만큼 잘 알려진 인사라면 일반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보다 희귀한 쪽에 속한다. 서명본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작가의 이름과 함께 또 다른 유명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은 물론, 이 두 사람이 친분이 있어서 작가가 사적인 메모를 함께 남겨놓았을 경우다. 오래전에 백석 시인이 사비를 털어 만든 시집 ‘사슴’ 원본을 본 일이 있는데 그 책 속지에는 시인의 직접 쓴 서명과 짧은 글이 남아 있었다. 이런 책이야말로 화폐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힘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백석 시인이 사적인 메모를 남긴 ‘사슴’은 세상에 딱 한 권뿐인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몇 년 전 일본의 고서점 거리인 진보초에 갔다가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이 직접 서명한 ‘거울 나라의 앨리스’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서점을 방문했다. 루이스 캐럴을 좋아해서 운영하는 책방 이름도 ‘이상한나라의헌책방’이라고 지었으니 그 책을 가질 수 있다면 내겐 너무도 큰 행운이 아닌가. 그리고 드디어 그 서점에 들러서 책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72년에 출판된 책이라 초판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보라색 펜으로 남긴 서명이 10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책 가격을 물으니 42만엔, 우리나라 돈으로 400만원을 훌쩍 넘기는 고가였다. 내게는 너무 큰 금액이라 그저 실물을 확인하고 귀국한 것으로 만족했지만 그 가격이 결코 비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비록 작은 양장본 책 한 권이었지만 그 안에는 글자뿐만 아니라 100년 이상의 시간도 함께 들어 있는 것이고 그런 시간이야말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책의 가치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고 보통 그것은 화폐 단위라는 숫자로 표시된다. 그러나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더 큰 가치도 분명히 있다. 그 몫은 몇몇 전문가가 아니라 지금도 어느 곳에서 책을 펼쳐드는 평범한 독자들, 바로 우리들에게 돌아간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 루스벨트도 대처 총리도 소수자였다

    루스벨트도 대처 총리도 소수자였다

    커버링/겐지 요시노 지음/김현경·한빛나 옮김/류민희 감수/민음사/368쪽/2만 2000원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각료회의 전에 늘 휠체어를 책상 뒤에 숨겨 놨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코치를 불러 음색을 낮추는 발성 훈련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주류 중의 주류’였던 이들의 행동은 장애, 그리고 여성이라는 소수자의 정체성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성적 취향, 성별, 종교, 국적, 인종 등으로 ‘차이’를 가르고 기어코 ‘소수자’란 낙인을 찍어 내는 이 세계의 폭력적인 셈법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이들의 노력은 일견 아연하다. 이미 더없이 공인된 주류이면서도 필사적으로 주류인 척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이 조그만 진실은 역설적으로 거대한 진실을 일러 준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은 소수자’라는 사실이다. 동성애자이자 인종 소수자란 ‘주홍글씨’로 누구보다 통렬하게 고통받아야 했던 저자 겐지 요시노 미국 뉴욕대 로스쿨 헌법학과 교수는 여기서 ‘커버링’이라는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을 캐어 올려 그 근원을 파내려간다.‘커버링’이란 주류의 질서에 맞게 타인이 선호하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을 억누르는 것이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언급한 개념으로,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존재들이 자신의 낙인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도록 신경 쓰는 과정’을 일컫는다. 우리 시대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합의 아래 굴러간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인종, 성별, 장애, 종교 등에 따라 타인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민권법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알고 있다. 문제는 날것 그대로의 현실이다. 저자는 동성애자로 통과해야 했던 숱한 장벽, 수백여개의 판례와 사례를 통해 모든 이들이 ‘커버링’을 사회와 법을 통해 폭력적으로 강요받고 있음을 드러낸다. 백인에 의한 소수 인종의 종속, 남성에 의한 여성의 종속, 이성애자에 의한 동성애자의 종속, 주류 종교에 의한 소수 종교의 종속, 비장애인의 장애인의 종속을 없애 온 것이 민권법이라는 게 우리의 오랜 믿음이다. 실상도 그럴까. 저자는 미국 사회가 ‘다양한 정체성의 폭발’을 해결하기 위해 연방대법원이 동화주의(소수자성을 주류 정체성으로 편입시켜 지우려는 것)적 태도로 숨어들었다고 비판한다. ‘분열된 미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미국의 차별 금지법은 차이에 대한 일관된 무심함을 평등과 혼동한다고도 꼬집는다. “차이에 대한 법이 주류 집단에게는 그 차이를 무시하도록, 주변인 집단에게는 그 차이를 감추도록 지침을 내리는 것”이라면서. ‘차별’은 보호하지만 ‘차이’는 보호하지 않는 이런 법과 사회의 교묘한 공격은 ‘커버링’을 더욱 공고하게 한다.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표현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권리가 박탈당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차이를 보호할 방법, 즉 새로운 민권의 패러다임이 절실하다고 호소한다. 견고한 법과 사회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법 밖의 개인들이 나서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개인들은 일상 곳곳에서의 대화를 통해 ‘커버링’을 대중적인 어휘로 만들고 커버링이 어떻게 개인을 옭아매고 파괴하는지 증언할 수 있는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뉴욕대 교수진 가운데 유일하게 종신 교수직을 보장받지 못한 저자에게 종신 교수직 심사위원장이 건넨 값진 조언처럼 말이다. ‘그는 내가 보다 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 즉 기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논증하기보다는 나의 진실을 이야기해서 법이 스스로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살인 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기억, 진실은

    살인 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기억, 진실은

    거울의 책/E O 키로비치 지음/이윤진 옮김/민음사/484쪽/1만 5000원1987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저녁 미국의 한 저명한 교수가 끔찍하게 살해된다. 용의자는 프린스턴대 영문과를 다니는 한 모범생. 하지만 27년 후 뉴욕의 출판 에이전시에 이 남자가 보낸 한 편의 소설 원고가 도착하면서 사건의 새로운 실마리가 드러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들의 기억은 거짓말처럼 조금씩 다르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과연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진실한 것일까. 루마니아 출신의 작가 E O 키로비치의 심리 스릴러 소설 ‘거울의 책’은 세 남녀의 미묘한 관계와 한 교수의 의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를 꿈꾸는 리처드 플린은 같은 학교 심리학과 대학원생 로라 베인스와 한 숙소에 머물게 되면서 사랑에 빠진다. 로라와 사귀면서 미국 심리학계 스타 조지프 와이더 교수를 알게 된 리처드는 그의 커다란 서재에서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돕게 되며 자연스럽게 그의 집에 드나든다. 그러던 리처드에게 문득 로라와 와이더 교수의 관계가 생각보다 가까워 보였고, 이 의심은 질투로 번진다. 어느 날 리처드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와이더 교수는 며칠 후 자신의 저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지만 끝내 범인은 밝혀지지 않는 가운데 리처드가 용의자로 지목된다. 소설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또 다른 세 사람의 화자를 통해 이 미제 살인 사건을 추적한다. 리처드의 소설을 건네받은 이들은 뉴욕 출판 에이전트 피터 카츠, 카츠의 제안으로 수사를 떠맡게 된 전직 미스터리 잡지 기자 존 켈러, 27년 전 와이더 사건의 담당 형사였던 로이 프리먼이다. 작가는 세 화자가 만난 목격자들이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기억의 방’이 얼마나 다르게 생겼는지 안내한다. 소설은 인간이 기억하는 세계가 얼마나 주관적이고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 좇는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개개인의 욕망이며, 사실을 들여다보는 창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 작가는 어머니, 형과 함께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이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 그가 영어로 쓴 첫 번째 책이기도 한 이 소설은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상상력이 객관적인 현실을 다른 무언가로 바꿔 우리만의 주관적인 현실로 만들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에 대한 답변이다. 단순히 범죄 사건의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를 찾는 것 이상으로 기억이라는 신비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김호경 신작 ‘삼남극장’ 펴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김호경 신작 ‘삼남극장’ 펴내

    김호경 작가가 20년 만에 신작으로 돌아왔다. 신작 ‘삼남극장’에서 그는 ‘이리역(현 익산역)폭발사고’를 소재로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조명했다. 작가는 주인공 ‘김현철’을 통해서 베이비붐 세대(전쟁 후 또는 혹독한 불경기를 겪은 후 사회적ㆍ경제적 안정 속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가난과 유신, 무시험 고교입학과 광주민주화운동ㆍ6월항쟁ㆍIMF·명퇴ㆍ벤처붐 등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상을 표현했다. 작가는 주인공 김현철이 맺고 있는 관계와 그를 둘러싼 사건을 통해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편 익산 출신기도 한 김호경 작가는 제 27회 ‘오늘의 작가상(민음사)’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낯선 천국’과 다수의 스크린 소설·여행기·수필집 등이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길섶에서] 일일 공부/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이 눈길을 잡는다. 몇 해 전 우연히 읽고 놔둔 ‘하루 한 편 삶을 바꾸는 고전 수업’이라는 부제가 달린 ‘일일공부’(장유승 저, 민음사)라는 책이다. 저자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방송됐던 한국과 동양 고전의 한 대목을 들어 시사 뉴스를 다룬 코너를 정리한 글이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 좋았다. 특정 주제에 대해 짧지만 생각할 기회가 돼 더 좋았다. 길거나 전문적인 딱딱한 글들을 읽기 부담스러울 때, 그렇지만 뭔가 읽고 싶을 때,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찾는 책들이 있다. 시집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몇 년 전에 나온 정민 교수가 편역한 ‘우리 한시 삼백수’라는 책이 생각난다. 주변의 지인은 5언 절구, 7언 절구를 모아 놓은 이 책을 베개 옆에 놓고 잠자기 전에 꼭 읽는다고 했다. 시구든, 고전이든, 성경이나 불경의 한 구절이든, 지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보내 준 글이든 아침에 일어나,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아니면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짬을 내 읽는 여유를 누려 보자. 그 정도는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지 않을까.
  • “‘82년생 김지영’이 제기한 문제, 정치가 바꿔야”

    “‘82년생 김지영’이 제기한 문제, 정치가 바꿔야”

    “이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좋아질 거라 생각했어요. 제가 쓴 책도 아닌데 대통령께 책을 선물하며 ‘82년생 김지영을 안아 주세요’라고 썼던 것도 그래서죠. 책이 문제 제기를 한다면 바꾸는 건 정치입니다. 정치인들은 법이나 정치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뽑힌 사람들이니까요.”(노회찬 의원)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이 단순한 베스트셀러가 아닌 ‘시대의 현상’이 된 데는 정치권에서 주목해 입소문이 퍼진 것이 큰 화력이 됐다. 특히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공(?)이 컸다. 그는 지난 2월 자신의 트위터에 ‘올해 읽어야 할 세 권의 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은 데 이어 지난 5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책을 선물했다. 출간 직후에 주로 주목받는 여느 책과 달리 지난해 10월 출간 이후 순위를 역주행하며 30일 현재까지 27만부가 팔린 밑거름이 됐다. 조남주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한민국에서 사는 평범한 여성들이 겪은 미세하지만 끔찍한 차별과 억압, 모욕을 치밀하게 서술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더 인간다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책을 추천한 노 원내대표와 조 작가가 지난 29일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이날 서울 마포구 레드빅스페이스에서 열린 ‘2017 예스24 여름 문학학교’에서다.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모두가 다 아는 현실이었지만 그게 총체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에서 구현된다고 생각하니 책을 읽고 충격적이었다”는 노 원내대표의 말에 조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 속 상황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고 현실이라면 너무나 끔찍한 설정이죠. 책이 지적하는 문제들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기 위해선 세상의 절반이 이런 현실에 속해 있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에서 남자라는 게 여전히 최고의 스펙으로 여겨지는 관습, 제도, 문화가 있죠. 그걸 깨기 위해선 더 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봤으면 해요.”(조남주) 노 원내대표는 시대의 문제의식과 책의 메시지가 잘 맞아떨어진 게 독자들의 호응이 컸던 이유라고 짚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결국 ‘차이를 어떻게 다루느냐’인데요, 차이를 가장 억압적으로 야만적으로 다루는 것이 차별이라고 생각해요. 책 안에는 말도 안 되는 차별의 예들이 굉장히 많죠. 그것에 둔감해지는 완강한 질서가 우리 사회에 많고요. 이를 해소하려는 문제의식들이 어느 때보다 싹트는 시점이라 이 소설 한 권이 세상을 바꾸는 영웅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이 책을 30만명 가까이 읽었다는 게 우리 사회의 성과가 아닐까요. 마중물 한 바가지가 땅속 지하수가 나오도록 돕듯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사회를 바꾸는 마중물이 되길 바랍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예술은 실패로 완성…” 목소리 잃은 가수의 교훈

    “예술은 실패로 완성…” 목소리 잃은 가수의 교훈

    가수는 입을 다무네/정미경 지음/민음사/336쪽/1만 3000원 “좋은 생은 나쁜 노래를 만들어. 나쁜 생은 좋은 노래를 만들고. 그 둘을 겪은 사람만이 위대한 노래를 만들 수 있지.”(310쪽)지난 1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소설가 정미경(1960~2017)이 마지막으로 남긴 장편 ‘가수는 입을 다무네’의 한 구절이다. ‘노래’라는 단어는 ‘소설’로 대체해서 읽어도 무방할 테다. 삶과 죽음, 인간과 사회, 문학과 예술에 대해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고민했을 작가 자신의 숙명을 스스로 되낸 것은 아니었을까. 복잡다단한 삶의 끝자락까지 열정을 불태운 한 작가의 인생은 예기치 않은 때, 이렇게 위대한 노래로 남았다. 기형도의 시에서 제목을 가져온 이 소설은 한때 인기 정점에 이르렀던 가수 율과 우연히 율의 현재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하게 된 대학생 이경의 이야기다. 전설적인 밴드 ‘무무’의 보컬이자 리더였던 율은 화려한 지난날이 무상하게 10여년 동안 극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다. 독특한 음악 세계로 후배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던 그는 점점 무기력해져 예전의 목소리를 잃고 방에 틀어박힌 채 침잠한다. 교양과목의 시험 과제로 3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내야 하는 이경은 우연히 친구를 통해 율을 마주하게 된다. 히스테리 환자처럼 불안했던 율은 이경을 만난 이후 카메라 렌즈를 향해 자신의 고통을 조곤조곤 증언한다. 이 과정에서 율은 새로 노래를 만들고 세상에 나올 용기를 얻는다. “꺼진 지 오래된 모닥불”인 줄 알았던 자신에게 “아직은 불이 타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덕분이다. 하지만 다시 오르게 된 무대에서 율은 음을 놓치고 키를 높게 잡는 실수를 범한다. 청중의 귀를 단숨에 사로잡았던 율의 예전 목소리는 끝내 터져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열패감에 시달렸을 율은 며칠 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죽기 전까지 내내 자신의 예술 세계에 대해 고뇌한 그가 떠난 뒤 이경은 그의 영상을 돌려보며 무심히 깨닫는다. “그저 함께 머물며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완벽했던 순간들은 프레임 바깥으로 툭툭 잘려나가 버렸다”고. “진짜 삶은 잘려나간 부분, 아웃테이크 속에 있다”고. 두 인물이 교차하는 이야기 속에서 실패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작가의 통찰과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담담히 배어난다. 작품의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김미경의 말처럼 “소설 속 주인공인 가수 율을 작가 정미경으로 치환시키면 예술가들이 지닌 영광과 상처를 날것 그대로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씨줄날줄] 우리 동네 책방/황수정 논설위원

    [씨줄날줄] 우리 동네 책방/황수정 논설위원

    내가 동네 서점에 발을 끊었던 이유는 돌아보면 단순했다. 원하는 책이 없을 때가 허다해서다. 의욕 충만해서 찾는 책이 재고가 없어 헛걸음할 때는 이만저만 김이 새는 게 아니다. 동네 서점은 오랫동안 참고서나 사러 가는 곳이었다.그랬던 우리 동네 서점을 요즘 다시 간다. 한 달 전쯤 계산대 한쪽에 자리 잡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 문고본이 눈길을 끌었다. 한 손안에 쏙 들어오는 판형도 좋았지만, 산뜻한 표지 디자인으로 리모델링된 매무새가 구미를 당겼다. 민음사가 기존의 세계문학전집에서 선별해 동네 서점에서만 팔려고 재출간한 ‘쏜살문고 동네 서점 에디션’. 책방 주인은 “광화문 교보문고에도 없고 인터넷에서도 주문할 수 없는, 우리 동네 서점에만 있는 책”이라고 몇 번이나 자랑을 했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문고본 ‘무진기행’을 사들고 온 그날 이후 나는 동네 서점에 다시 재미를 붙였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책을 또 사게 될까, 야릇한 기대감에. 요사이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니다 보면 “동네 책방 탐방이 취미”라는 이들이 많다. 조촐한 동네 서점을 찾아 멀리 소도시들을 여행하고, 동아리를 만들어 탐방 프로그램을 짜기도 한다. 신도시라 불리는 우리 동네에도 지하철역 근처 주택가에 작은 책방이 새로 생겼다. 올 초 어느 산책길에 개업떡을 받아들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반년 새 골목 명소로 자리를 굳혔다. 주말마다 주민 독서가들의 독서 토론이 열리고, 어떻게 섭외했을까 싶은 유명 작가들의 낭독회가 심심찮다. 계간 ‘동네서점’에 따르면 근년 들어 한 해 새로 문을 여는 작은 서점은 300여개다. 책을 안 읽는 세상이라는데도 동네 책방은 꾸준히 는다. 작은 책방의 매력은 백인백색일 것이다. 대형 서점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왜소해지는 느낌을 받지 않아서 나는 무엇보다 편하다. 그만큼 실속 있는 피안의 공간이 또 없다는 생각이다. 동네 서점에서만 파는 민음사의 ‘쏜살문고’ 마케팅은 가볍게 성공했다. ‘무진기행’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등 쉽지 않은 두 권을 한 달 새 3쇄 4000부나 찍었다. 초쇄 2000부로 실험했다는 출판사는 동네 서점 에디션을 계속 내놓을 요량이다. 문학동네도 인기 작가들의 새 소설을 최근 동네 서점에서 예약판매했다. 동네 서점을 살리자면서 정작 인터넷이나 대형 서점 중심으로 출판 마케팅을 했던 데 대한 자성이기도 하다. 좀더 욕심내자면 이런 실험은 작은 출판사로도 확장됐으면 한다. “최순실도 건드리지 않는 업계”라 자조하는 빈약한 출판시장에 동네 책방이 ‘원기소’가 되기를.
  •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호 돌파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호 돌파

    기형도·황지우 등 스테디셀러… 과거 시 130편 기념 시집 엮어 우리 시단에 다채로운 목소리를 불어넣어 온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이 500호를 돌파했다. 1978년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로 첫발을 뗀 이후 햇수로 40년 만이다. 출간 시기는 창비의 창비시선(1975),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1974)가 더 빠르지만 국내 문학사에서 시집 시리즈가 통권 500호를 넘긴 것은 문학과지성(이하 문지) 시인선이 처음이다.문지 시인선은 1989년 출간 이래 29만부를 찍은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82쇄),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63쇄),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52쇄),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46쇄) 등 수많은 스테디셀러를 배출하며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지금까지 출간된 499권의 시집 가운데 88%에 해당하는 439권이 중쇄를 찍었다. 우찬제 문지 공동대표는 13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열린 500호 기념 시집 출간 간담회에서 “동시대의 감수성을 새롭게 열어 나가는 시인들을 발굴해 한국 문학을 진화시키고 새로운 시사를 열어 가려고 좋은 시인, 좋은 시를 발굴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며 “앞으로도 우리말과 우리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이 감각적인 깊이, 사람다움의 깊이를 가져가게 하는 데 더욱 정진하겠다”고 밝혔다. 500호 기념 시집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는 오생근·조연정 문학평론가가 엮었다. 출간 10년이 지난 시집 가운데 시인 65명의 대표시 2편씩을 골라 담았다. 이광호 문지 공동대표는 “쇄를 거듭한 시집들이 시집을 낼 수 있는 동력을 줬고 독자들에게 선물처럼 안겨줄 수 있는 시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시를 선정한 조연정 평론가는 “이번 시집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 시사를 압축적으로 다시 읽는 보람을 느낄 수 있고 특정 시기에 탐독했던 시들과 재회하며 지난 시절의 ‘나’를 발견하는 소소한 기쁨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80년대 詩·판화의 컬래버레이션 말보다 더 강렬한 ‘민중미술’의 힘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80년대 詩·판화의 컬래버레이션 말보다 더 강렬한 ‘민중미술’의 힘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고등학생 때 이 시(詩)를 외워서 쓰는 시험문제가 나왔다. 김수영의 시다. 여기서 ‘풀’은 민중을 뜻하는 거라고 배웠는데, 배웠기 때문에 시험문제로 나오면 답을 그렇게 쓰긴 썼지만 도대체 왜 풀이 민중이 되는 건지는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다. 도무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늘 답답했다.고등학생이던 때 학교 동아리 중에 ‘우리말 지켜쓰기 부’라는 게 있었다. 모두들 그 동아리 이름이 길어서 ‘우말지’라고 줄여 불렀다. 우말지는 전통적으로 가을축제 때 부원들이 만든 시화(詩?) 작품을 전시했고 꽤 인기가 좋았다. 한번은 축제 전시회 때 내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김수영의 시 ‘풀’을 가지고 만든 시화 작품을 본 일이 있다. 그런데 ‘풀’이라는 시에 더해져 그린 그림은 꽃이나 넓은 초원풍경 같은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잠깐 동안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지만 이내 그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시집 표지 한 장 넘기면 판화 두 점 나와 김수영의 시와 함께 있는 그림은 전혀 고등학생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굵은 붓을 도화지에 대고 단번에 힘차게 그려 낸 듯 힘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어쩌면 먹물과 서예용 붓을 사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힘찬 붓놀림과는 달리 그림 내용은 우울한 것이었다. 몇 사람이 둘러서서 부둥켜안고 있는 모양새인데 눈물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얼굴엔 슬픔이 가득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슬픔은 패배자의 것이 아니었다. 아는 것 별로 없는 고등학생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함이 바로 민중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림 속에서 힘차게 슬퍼하고 있는 모양이 곧장 김수영의 시와 연결됐다. 이때 시화를 봤던 잠깐의 경험은 어떤 수업 시간에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이후로 나는 김수영의 글이 좋아져서 민음사에서 펴낸 김수영 전집을 구입했고 헌책방에 들렀을 때도 그의 시집이 있으면 자주 사곤 했다. 그러나 그때 봤던 그림에 대한 기억은 거의 잊혀졌다. 신촌에 있는 한 헌책방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그림을 발견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의 일이다. 그렇게 풀빛출판사에서 1980년대에 펴낸 ‘풀빛판화시선’과 처음 만나게 됐다.풀빛판화시선은 제목 그대로 풀빛출판사에서 시리즈로 출판한 시집으로 표지를 한 장 넘기면 판화 작품 두 점이 본문에 앞서 포함돼 있다. 시와 판화라는 두 예술 장르의 만남은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참신하기 그지없는 아이디어다. 요즘엔 음악이나 미술 계통에서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이나 ‘피처링’(featuring) 방식을 통해 새로운 결과물을 내놓는 일이 많다. 이것은 단순한 협동작업 혹은 도움 주기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동등한 두 예술가의 작업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작품 세계라고 할 만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풀빛판화시선의 기획은 벌써 수십 년이나 앞서 가고 있었던 것이다.고등학교 시화전에서 봤던 그림은 사실 그림이 아니라 풀빛판화시선에 나온 판화 작품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었다. 그와 똑같은 작품이 헌책방에서 발견한 박노해 시집 ‘노동의 해방’ 초판에 들어 있었다. 당연히 판화작가 이름이 궁금했는데 어디를 살펴봐도 작가가 누구인지 나와 있지 않았다. 제목이 ‘판화시선’인데 시인 이름만 있고 판화작가 이름이 없다는 게 의아했다.●1984년 26권까지 발간… 꽤 더 이어진 듯 갑자기 오기가 생겨서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풀빛판화시선은 이미 다 절판됐기 때문에 헌책방을 돌면서 수집했다. 그때는 인터넷이라는 게 있긴 했어도 초창기 시절이라 검색으로 정보를 찾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선은 내가 가진 책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서지면을 보니 1984년 초판이다. 뒤표지 책날개에는 풀빛판화시선이 26번까지 나온 걸로 돼 있다. 1984년에 이미 26번이면 그 후로도 꽤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시리즈 1번은 김지하 ‘황토’이고 2번은 양성우 ‘낙화’, 3번 강은교 ‘붉은 강’, 4번 김준태 ‘국밥과 희망’, 그리고 5번이 이 책 ‘노동의 새벽’이다. 그 외에도 신경림, 최하림, 백기완, 황지우 등 익숙한 이름이 많다. 그러나 풀빛판화시선을 모두 모으겠다는 목표는 지금껏 이루지 못했다. 십여 권 정도 모았다가 이사하면서 잃어버리기도 하고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하는 등 이래저래 사연을 겪다 보니 지금은 대여섯 권 정도만 남았을 뿐이다. 책을 다 수집하지 못했지만 소득이라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첫째는 내가 당시에 헌책방에서 구입한 ‘노동의 새벽’은 진정한 초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지에는 분명 초판으로 기록돼 있지만 책날개에 있는 정보를 다른 책과 비교했을 때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1984년에 초판을 펴낸 ‘노동의 새벽’ 책날개에는 시리즈 마지막 책이 26번인 황지우의 ‘나는 너다’로 돼 있는데 1985년 초판인 10번 시집 김정환의 ‘해방서시’ 책날개를 보면 15번이 끝이다. 한편 같은 해 나온 14번 시집 채광석의 ‘밧줄을 타며’ 책날개에는 22번을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26번까지 표기한 ‘노동의 새벽’은 사실상 1984년에 출판된 책이 아니라 나중에 다시 펴냈지만 초판본 서지면을 그대로 썼다는 얘기가 된다. 두 번째는 판화작가의 이름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는 “민중미술의 전설”라고 알려진 오윤(吳潤·1946~1986)이다. 특유의 힘이 넘치는 판화작품은 그가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 전 한두 해 동안 쏟아낸 예술혼의 산물들이었다. 오윤은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오랜 나의 숙제였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대하니 고등학생 시절 시화전에서 봤던 그림이 다시 떠오른다. 어째서 사람들 여럿이 부둥켜안고 있는 그림을 보고 김수영의 시가 단박에 이해됐는지 알 것 같다. 때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 없는 그림 한 장이 대신할 수도 있다. 오윤은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확실히 자신이 안고 있던 숙제를 끝내 풀었던 게 아닐까. ●오윤에게 일감 주려고 일부러 작품 부탁 출판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헌책방에서 풀빛판화시선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모든 책에 오윤의 판화를 쓴 것은 아니라서 시집 중 훼손되지 않은 오윤의 판화가 들어 있는 초판본인 경우 인기가 더 좋다. 그때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오윤에게 일감을 주기 위해 출판사에서 일부러 작품을 쓰고 싶다며 부탁을 했던 것이다. 작가는 제목도 따로 붙이지 않은 판화 작품 십여 점을 보내왔고 그렇게 풀빛판화시선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비록 오래전에 출판된 책이라 낡고 색이 바랬지만 시인과 화가가 꿈꾸던 민중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은 듯 판화시집과 함께 남아 있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 인삼정과·손편지·요리솜씨… ‘또 다른 협치’ 보인 김정숙 여사

    인삼정과·손편지·요리솜씨… ‘또 다른 협치’ 보인 김정숙 여사

    文대통령 상춘재 앞에 먼저 나와 영접 “대기 말고 약속시간에 오라” 미리 연락 참석자들 관례로 달던 이름표 안 달아 ‘통합’ 의미 비빔밥 메인 한식 코스 오찬 문재인 대통령의 첫 번째 여야 5당 원내대표 회동이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된 데는 김정숙 여사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날 회동에서 참석자들은 ‘조화’, ‘통합’의 의미를 가진 비빔밥을 메인으로 한 한식 코스를 먹었다. 후식으로는 김 여사가 직접 만든 인삼정과가 나왔다. 인삼정과는 달인 인삼을 꿀 등이 들어간 액체에 넣고 장시간 졸여서 만드는 전통음식이다. 전병헌 정무수석의 설명에 따르면 김 여사는 인삼과 꿀, 대추즙을 함께 넣고 10시간 동안 졸여서 인삼정과를 만들었다. 이날 회동에 참석한 원내대표들은 이 인삼정과를 정성스레 포장한 선물도 받아 돌아갔다. 여기엔 김 여사의 손편지도 들어 있었다. 전 수석은 “손편지에 ‘귀한 걸음 감사하다. 국민이 바라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함께 노력하자’는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여사는 선물을 조각보로 포장했다. 작은 천 조각들을 모아 만든 조각보는 ‘협치’를 상징한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말했다.특히 이날 회동은 많은 관례와 격식을 깬 형태로 마련됐다. 먼저 회동 장소로 사용된 상춘재는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 회의 장소로 이용되던 청와대 경내의 전통한옥 건물이다. 전 수석은 “박근혜 정부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던 무료한 공간이었는데, 활용했다는 측면에서 파격적”이라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상춘재 앞에 먼저 나와 참석자들을 기다리면서 원내대표들이 도착하는 대로 일일이 영접했다. 원내대표들은 미리 와서 대기하지 말고 약속 시간에 자연스럽게 오라고 연락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보통 대통령과의 회동에서는 다른 참석자들이 도착해 있는 가운데 대통령이 맨 마지막에 등장했다. 청와대는 식탁도 상석이 따로 없는 원탁으로 마련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의 행사에서 관례적으로 달던 이름표도 착용하지 않았다. 전 수석은 “대통령이 칼럼과 기사를 읽고, 청와대에서 열리는 각종 회의에 모든 참석자가 이름을 다는 관행을 재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했다”면서 “앞으로 권위주의, 국민 위에 군림하는 청와대의 상징으로 지목될 수 있는 방문객과 청와대 직원들의 이름표 패용 관행의 개선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는 이날 문 대통령에게 신간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을, 김 여사에게는 수필집 ‘밤이 선생이다’(난다)를 선물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마오쩌둥 집권 승부수는 ‘중국의 스탈린화’

    마오쩌둥 집권 승부수는 ‘중국의 스탈린화’

    마오쩌둥 평전/알렉산더 판초프 지음/심규호 옮김/민음사/1044쪽/5만원1966년 7월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은 그 스스로 ‘하늘 아래 완전한 무질서’라고 불렀던 문화대혁명의 충실한 집행자였던 네 번째 부인 장칭(江靑)에게 심경을 담은 편지를 썼다. “산속에 호랑이가 없으면 원숭이가 왕 노릇을 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내가 그런 왕이 되었소. 이는 절충주의가 아니오. 내 몸속에는 호랑이의 기운이 주가 되고 원숭이의 기질은 그다음이오.” 20세기 중국 현대사의 절대 군주이자 ‘건국의 아버지’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는 마오쩌둥(1893∼1976). 그는 자신을 ‘혁명 중국’을 이끈 호랑이로 여겼을까, 어쩌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모델을 추종한 원숭이라는 자괴감을 품고 있진 않았을까. 마오쩌둥의 삶과 권력을 다룬 전기 중 가장 ‘업데이트’된 버전으로 평가받는 ‘마오쩌둥 평전’이 국내에 출간됐다. 책은 그동안 접근할 수 없었던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RGASPI)의 마오 관련 극비문서와 소련 비밀경찰(KGB) 기록 등 방대한 자료들을 토대로 기술됐다.저자는 러시아 출신으로 중국에서 연구 활동을 했던, 미국 캐피털대 역사학 교수 알렉산더 판초프. 그의 조부 게오르기 보리소비치 에렌부르크는 러시아 최초의 ‘마오쩌둥 평전’을 쓴 학자였다. 마오쩌둥 연구가 저자의 가업인 셈이다. 1000쪽이 넘는 책이지만 핵심은 중·소 공산주의 태동 이후의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정치적 관계의 재조명이자 마오에 대한 기존 관점을 깨는 데 있다. 앞선 전기들은 마오쩌둥을 교조적인 스탈린주의와 대립하며 중국만의 독자적 사회주의를 영도한 사상가로 묘사해 왔다. 하지만 판초프 교수는 소련 기록을 기초로 “마오가 크렘린 두목인 스탈린의 충성스러운 추종자”였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마오가 스탈린을 스승으로 여겼고, 스탈린주의의 엄격하고 집중적인 전체주의와 당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 국민에 대한 중앙집권화된 통제, 중공업 우선주의를 중국에 이식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스탈린화’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당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모스크바의 재정 지원에 의존했고, 스탈린의 통제를 받던 코민테른(공산주의 국제연합)에 종속됐다.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의 권력 핵심에 굴기한 배경으로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힘을 조명한다. 6·25전쟁은 마오의 훗날 표현대로 자신을 ‘의심스러운 티토주의자’로 보는 스탈린에게 충성심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스탈린은 1950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가진 마오와의 회담에서 북한의 남침 계획을 언질조차 하지 않는 등 무시했다. 마오는 언짢아하고 분개했지만 스탈린의 한반도 무력 통일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파병한다. 6·25전쟁은 스탈린의 계획적인 세계 혁명 책략의 일환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열정적으로 떠벌린 한반도 통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을 북한·중국과의 무력 충돌에 묶어둔 채 동남아 공산화를 실현하는 성동격서를 꿈꾸고 있었다. 마오는 10만명 이상의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사하고, 경제마저 파탄 지경에 이르는 상황에서도 전쟁을 수행하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 사망 이후에야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있었다. 저자는 한국 독자들에게 쓴 글에서 “한국의 통치자들도 시민 권리에 반대하고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지만 고된 투쟁의 결과로 지금은 민주 사회에 살고 있다”며 “마오쩌둥의 피비린내 나는 독재 정권을 재조명한 이 책을 통해 그 누구도 인간의 뼈와 피 위에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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