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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근대미술 뒷이야기/이구열

    우리나라 근대미술사의 산증인으로 평가받는 미술평론가 이구열(73)씨가 근대미술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들을 다룬 에세이집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돌베개)를 펴냈다. 이씨는 근현대 미술 연구와 자료 수집에 평생을 바쳤으며,2001년 문을 연 한국미술기록보존소에 4만여 건의 자료를 기증, 화제가 되기도 했다. 책에는 조선화가 중 최초로 미국 풍경을 그린 화가 강진희, 외국인 화가로 조선의 사람과 풍경을 최초로 그린 영국인 여행가 겸 문필가인 새비지 랜도어,1900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상업화랑 ‘정두환 서화포’ 이야기 등을 자세한 설명과 함께 소개한다. 또 민영환이 자결한 후 그의 거처에서 충절의 넋이 발현하듯 솟아오른 푸른 대나무 줄기를 보고 당시 명성이 높던 화가 양기훈과 안중식이 그렸던 ‘혈죽’ 이야기 등 일제 강점기 미술계에서 벌어진 일들도 담았다.1만6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친일파-애국지사 후손 법정서 ‘땅싸움’

    친일파 송병준과 애국지사 민영환 선생의 후손들이 같은 땅을 놓고 소유권을 주장,법원의 최종 판단이 주목된다.민영환 선생의 후손 14명은 31일 송씨의 후손이 “국가 소유로 돼 있는 인천 부평구 산곡동 산20 미군부대 ‘캠프마켓’ 일대 땅을 돌려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낸 소유권 등기말소 등 청구소송에서 독립당사자 참가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독립당사자 참가란 이미 원·피고가 진행하고 있는 소송에 자신의 이해가 걸려 있거나 권리를 침해당할 경우 원·피고 중 한 쪽의 공동 당사자 또는 제3의 별도 당사자로 소송에 참가하는 법률적 행위다. 법원이 민 선생 후손의 신청을 받아들이면 애국지사 후손과 친일파 후손이 땅 소유권 문제를 놓고 직접 법정 다툼을 벌이는 최초의 사례가 된다.민 선생의 후손들은 신청서에서 “이 땅은 원래 민 선생이 1900년에 국내 최초의 근대농업회사인 목양사란 농장을 운영하던 곳”이라면서 “민 선생이 자결한 3년 뒤 식객으로 있던 송씨가 민 선생의 어머니를 협박,이 땅을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앞서 송씨의 후손 7명은 2002년 9월 캠프마켓 일대 땅 13만 3000평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이중 2956평(공시지가 62억원)에 대해 소유권 등기말소 소송을 냈다. 이들은 소장에서 “증조부 송병준이 임야 일부를 전답으로 개간하고 나무를 심어 합법적으로 국가로부터 양여받아 취득했는데도 광복 후 미 군정청이 국가에 귀속시켰다.”고 주장했다. 송씨의 후손들은 90년대 이후 경기 파주시 장단면 석곶리 일대 2필지 등의 부동산에 대해 4차례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소송을 제기,3차례는 패소하고 경기도 양주시 일대 1800평에 대한 소송은 승소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산악문학인 안재홍의 산 오르記]포천 운악산

    ‘경기 소금강’으로 불리는 포천군 화현면 운악산(雲岳山·935.5m)은 이맘때 산행들머리인 현등사(懸燈寺) 입구 주차장부터 빈틈이 없다.신록을 즐기려는 인파로 북적인다. 매표소를 지나면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200m 정도 더 가면 오른쪽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만경로’란 이 나무 계단길은 능선까지 이어진다.눈썹바위에 이르러 전망이 트이기 시작한다.바위 아래에서 쳐다보면 눈썹을 닮은 오버행 바위가 보인다. 눈썹바위 상단에 오르면 푸른 잔디로 장식한 골프장과 꽃동네가 잘 보인다.이어지는 암봉은 우회로가 있고 위험한 곳엔 밧줄을 매놓았다.고인돌을 지나 암봉에 오르면 운악산 전경이 잘 보이고 현등사도 보인다. 암봉이 우뚝한 미륵바위(725m)가 버티고 있는 곳에 ‘병풍바위 촬영소’라는 안내판이 있다.병풍바위는 흰 바위에 소나무를 수놓은 듯하다.미륵바위와 병풍바위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풍광은 가히 선경이다.운악산에서 경치가 제일 빼어난 곳이다.금강산의 만물상이나 설악산의 천화대를 축소한 것 같다. 여기부터 등산로는 더욱 험해진다.바위에 쇠줄을 쳐놓고 발 디딤까지 만들어 놓았다.어른들의 놀이터 같은 길을 조심조심 오른다.‘48계단’을 오르면 노송 두 그루가 있는 암봉이 나온다.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분재 같은 소나무 두 그루가 한 폭의 그림같다.앉아 쉬며 내려다보는 세상도 볼만하다.산으로 둘러 쌓인 조종천 변의 상판리와 현리가 시원하게 펼쳐진다.동북쪽으로 명지산과 멀리 화악산이 하늘과 닿아 있다.남쪽으로 이어진 한북정맥의 산들이 몸을 낮춰 운악산을 경배하는 듯 하다. 정상을 향하여 철 계단을 내려간다.철쭉 밭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헬기장이다.족구를 해도 될 성싶은 넓은 헬기장 북쪽 끝에 정상비가 있다.‘운악산·935.5m·하판리 산162-1·1998.8.1 설립’.정상비 옆에 큰 바위가 있다.바위에 음각으로 ‘결사돌파대’라고 다섯 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여기는 정상이 아니다.정상은 여기서 한북정맥을 따라 북서쪽으로 5분 정도 더 가야 한다.서쪽으로 47번 국도를 따라 일동과 이동으로 이어진 마을이 보이는 곳,이곳이 한북정맥의 산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이어진 중간 운악산의 정상이다. 하산은 절고개를 지나 동쪽 현등사가 좋다.현등사로 내려가는 길 왼쪽에 코끼리바위가 있다.코끼리 머리에 길게 늘어진 코가 웃음을 머금게 한다.너덜지대를 30분 내려가면 현등사다.천년고찰 현등사는 불사중이다.석탄일이 다가와 연등으로 장식해 놓았다.석양빛이 단청과 어우러져 고색이 창연하다. 구한말 궁내부대신이었던 민영환 선생이 기우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바위에 누워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는 무우폭포(舞雩瀑布)에 ‘閔泳煥(민영환)’이라고 새겨진 암각서(岩刻書)가 있다.그 아래 이어지는 백년폭포를 지나 30분쯤 내려오면 주차장이다. 옛날부터 운악산은 가평 화악산(1468.3m),개풍 송악산(488m),파주 감악산(675m),서울 관악산(629m)과 더불어 ‘경기5악’으로 꼽는 산이다. 만경로로 정상에 올라 절고개를 거쳐 현등사로 내려오는 코스의 산행거리는 7㎞,네 시간 정도 걸린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경춘 국도로 청평을 지나 청평 검문소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13㎞ 가면 현리다.현리 중심을 벗어나면 삼거리가 나온다.여기서 오른쪽으로 8㎞ 정도 가면 현등사 입구인 하판리다.왼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넓은 주차장이 있다.구리시에서 47번 국도로 내촌 베어스타운을 지나 신팔리 사거리에서 오른쪽 청평 방향으로 37번 도로로 현리까지 가도 된다. ●볼거리·먹을거리 현등사는 신라 22대 법흥왕(514~539)때 인도의 마라가미(摩羅呵彌)라는 승려가 신라를 찾았는데 이 때 그를 위해 세운 절이라 전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호인 범종이 전해지는데 현등사의 본사인 봉선사에서 만든(광해 11년·1619년) 범종을 말사인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경기도문화재 자료 제17호인 삼층석탑이 축대 아래,해우소 옆에 있다. 현등사 입구는 식당가다.손두부 집들이 두부 맛을 겨룬다(할머니손두부집 031-585-1219).닭백숙과 민물매운탕집들이 즐비하다.민박도 많이 있고 주차장도 널찍하다.현리 중심을 벗어나 삼거리에 있는 양평해장국집(031-585-8008)의 선지해장국은 선지와 천엽을 많이 넣는다.천엽을 소스에 찍어 먹으면 별미다.멀리서 단골로 찾는 이가 많다. ˝
  • 주말매거진 We/세상에 이런 일이-국내

    “마을 주민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제사라도 지내야지요.” 수령 1600년이 넘는 ‘괴목’(사진)앞에서 스님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이채로운 장면이 연출된다.충남 공주에 있는 계룡산 갑사 스님들은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계룡산 앞 갑사동 용천교 입구에 서 있는 괴목 앞에서 사하촌 주민들과 함께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이른바 ‘괴목대신제’다. 300년 넘게 이어져온 괴목대신제는 60년대 이후 절과 마을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명맥만 겨우 유지됐다.그러다 공주시가 지원을 하고 관심이 높아지면서 2000년 ‘대동한마당’ 형태로 복원됐고 올해에는 스님들은 물론 마을 주민들과 관광객이 모여 더욱 크게 행사를 열기로 했다. 괴목대신제의 유래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300여년 전 갑사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작명등의 기름이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상하게 여긴 스님들이 작명등을 지키기 시작했다.칠흑같이 어두운 밤 덩치가 큰 누군가가 기름을 훔쳐가는 것을 발견한 한 스님이 뒤를 쫓아갔다.기름을 훔친 이유를 묻자 ‘나는 괴목의 당산신인데 사람들이 담뱃불로 나무의 뿌리에 상처를 내 치유하려고 갑사의 작명등 기름을 가져가 발랐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은 괴목 주위를 잘 정리하고 제사를 지내줬다.그러자 작명등 기름도 없어지지 않고,마을에 돌았던 역병도 사라졌다.이후 갑사 스님들과 마을 주민들이 괴목의 당산신에게 매년 정월 초사흘에 제사를 올리게 됐다는 사연이다. 갑사 주지 장곡(49)스님은 “사찰과 마을의 주민이 제사를 지내는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 문화행사”라면서 “생명존중의 정신이 깃든 행사인 만큼 많은 대중이 동참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공주 김효섭기자 newworld@ “왜 일본 남자가 기분 나쁘게 한국 여자랑 일본 노래를 불러?” 서울 강서경찰서는 4일 일본 노래가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일본인과 시비를 벌이다 폭행한 한모(39·여)씨를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한씨와 맞붙어 싸운 일본인 K(61)와 한국인 아내나모(56)씨도 함께 입건됐다. 조사 결과 한씨는 전날 오후 8시40분쯤 서울 강서구 화곡동 모 노래방 홀에 앉아 있다 일본 노래를 부르는 K에게 일본인을 비하하는 욕을 하면서 시비가 붙으면서 양측이 서로 주먹질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족보를 위조해 100억원대가 넘는 토지보상금을 다른 파(派)가 가로챘다는 종중간의 법정 다툼이 9년째 계속되고 있다.종중간에 이만한 규모의 문중 부동산을 둘러싼 사기 사건은 보기 드문 일이다.‘족보의 진실’을 놓고 다투고 있는 종중은 온양 정씨(溫陽 鄭氏) 목자공파(穆字公派)와 정랑공파(正郞公派).목자공파의 종손 며느리인 장모(58)씨가 정랑공파와의 재산분쟁에 뛰어든 것은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남편과 일찍 사별한 장씨에게 지난 86년 아버지가 없어 의기소침해하던 작은 아들이 “우리 집안에 족보라도 있냐.”고 물은 것이 계기였다. 장씨는 남편의 뿌리를 찾아 본관인 온양을 시작으로 중앙도서관 족보실,서울대 규장각 등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지난 93년 마침내 온양정씨의 족보를 찾아냈다.목자공파의 4대조는 구한말 의금부 도사를 지낸 정술교(鄭述敎)로 을사조약 때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스승인 것도 알아냈다. 그러던 중 천안시가 95년 택지개발을 위해 온양정씨 조상묘가 있는 쌍용동 일대를 매입해 토지보상금을 온양정씨 정랑공파에게 지급한 사실을 알게 됐다. 장씨측 주장에 따르면 초기인 1856년·1916년 족보와 정모씨가 제작한 1923년·1957년 족보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장씨는 친척과 함께 지난 95년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소송 주체를 ‘종손’이 아닌 ‘종중’으로 한 절차상의 문제와 한두명의 전문가 견해는 증거로 불충분하다는 게 이유였다. 장씨는 이후에도 족보가 위조됐다는 흔적을 여러 곳에서 발견했고 손해배상 소송을 내 부분적으로 승소했다.장씨는 최근 “천안시가 선산의 토지개발보상금 140억원을 위조된 족보만 믿고 다른 파에 지급했다.”면서 지난해 3월 서울 강남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했다.그러나 진실을 밝혀내기는 여전히 여의치 않다. 유지혜기자 wisepen@
  • 진도 / 글씨·노래·그림에 비경은 덤

    전남 진도에 가면 자랑하지 말라는 세가지가 있다.첫째가 글씨,둘째가 노래,셋째가 그림이다. 남도문화의 정수만 모아놓았다는 진도는 어느 마을에 가도 남도창 한 가락쯤 멋드러지게 뽑아내는 이가 서넛은 있게 마련.또 진도 출신의 조선 후기 남종문인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유(許維) 선생의 화풍은 지금도 한국 전통화단의 중심 맥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진도 나들이에서 진한 육자배기 한 가락,소치의 그림 한 점 구경못했다면 공연히 헛발품만 판 것.‘섬중의 보배’라는 진도의 비경도 구경할 겸 예술 향기 그윽한 진도로 나들이를 떠난다. ●구름속 화실 ‘운림산방’ 운림산방(雲林山房).소치 허유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다.마침 비 갠뒤 올라가기 시작한 구름이 산방뒤 첨찰산 중간쯤에 걸려 있는 풍광을 보면서 ‘당호(堂號) 한번 절묘하게 지었다.’란 느낌이 든다. 산방 앞 널찍한 연못엔 연(蓮) 잎이 수면을 반쯤 덮고 있다.군데 군데 봉곳이 솟은 하얀 연꽃이 초록 일색의 심심함을 덜어준다.연못 중앙엔 자연석을 쌓아 만든 둥근 섬이있는데,여기에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그루가 서 있다.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소치는 초의대사,추사 김정희로부터 서화수업을 받았다.특히 추사 문하에서 중국의 미불,황공망,예찬 등의 화풍과 추사의 서체를 익혔는데,스승으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너를 따를 자 없다.’란 칭찬을 듣기에 이른다.‘소치’란 호도 중국 원나라 4대 화가중 한 사람인 대치 황공망과 견줄 만하다며 추사가 붙여주었다고 한다. 운림산방엔 소치가 기거하던 초가와 사랑채,화실, 전시관 등이 있다. 전시관엔 소치,그리고 그의 화풍을 이은 아들 미산 허형,손자인 남농 허건 및 의재 허백련 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입장료 500원.(061-543-0088) 소전미술관과 남진미술관도 진도 예술나들이의 필수 코스.소전미술관(061544-3401)은 국전 심사위원장 및 운영위원장을 엮임했던 소전 손재형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올해 개관했다.중국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이른바 ‘소전체’란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그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구성진 남도가락 어깨춤 저절로 남진(南辰)미술관(061-543-0777)은 서예가 장전 하남호 선생이 사비로 세운 전시관.장전의 작품 뿐만 아니라 흥선 대원군,김옥균,민영환 등 유명 인사들의 서화작품,고려청자,백자 등 국사책에서나 보았던 국보급 미술품 등이 전시돼 있다.하지만 장전 선생이 노환과 경제적 문제로 미술관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어 찾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진도 민요를 듣고 싶다면 진도군에서 운영하고 있는 토요민속기행에 참가해보자.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진도향토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진행된다.강강술래를 비롯,진도 씻김굿,진도북놀이,남도 들노래,진도 다시래기,진도만가 등이 이어진다. 공연 끝 부분에서는 진도아리랑,둥덩게타령 등 흥겨운 가락을 관람객들과 함께 부르는 시간도 갖는다.(061)540-3139. 진도 나들이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진도대교를 건너자 마자 나오는 녹진 전망대.사방이 탁 트인 전망대 꼭대기에 서니 동쪽으로 거센 물살이 흐르는 울돌목과 그 위로 지나는 진도대교,구불구불 이어진 해남의 해안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숨막히는 옥색 물빛따라 드라이브 울돌목은 이 충무공의 3대 해전중 하나인 명량대첩지로 잘 알려진 곳.남해에서 서해로 나가는 길목으로 시속 12노트 정도의 거센 물살이 굉음을 내면서 흐르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이 충무공은 당시 왜선 130여척을 이곳으로 끌어들여 궤멸시킴으로써 왜군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230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진도는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그중에서도 서부해안쪽이 최고로 꼽힌다.진도대교를 지나 우측으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드라이브는 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세방까지 1시간 정도 걸린다. 가는 길목길목 다도해의 옥색 물빛과 어우러진 섬들이 눈길을 끄는데 그중 압권은 약 5㎞에 이르는 세방길.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노송과,투명한 바닷물,점점이 떠있는 섬들의 절묘한 조화가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진도 글·사진 임창용기자 sdargon@ 식후경/ 혀끝에서 살~살 ‘갈치구이’ 진도읍 성내리 진도초등학교 아래 ‘제진관식당’의 음식이 맛 좋기로 유명하다.요즘은 갈치구이(사진),간재미(일명 상어가오리)회가 잘나간다.갈치구이 맛의 생명은 재료의 선도.잡은지 오래됐거나 냉동했던 갈치는 아무리 요리를 잘해도 육질이 팍팍해 금방 표가 난다고.식당주인 조권의씨는 싱싱한 갈치 구입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 갈치구이 백반(1만원)엔 민어탕과 몇가지 나물,젓갈 등이 포함되는데,요즘 민어가 잘 안잡혀 서대,우럭으로 탕을 끓여낸다.간재미회는 오독오독 뼈째 씹히는 고소한 맛이 일품.진도 근해에서 많이 잡힌다고 한다.간재미를 적당하게 썰어 몇가지 야채와 양념,막걸리 식초를 넣어 버무린 회무침은 매콤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을 낸다.도톰하게 썰어 묵은 김치에 싸먹어도 좋다.1접시(2만원)면 2,3명이 먹기에 적당하다.(061)544-2419. 가이드/ 근처 관매도 들러 해수욕도 ●가는 길 승용차로는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에서 빠져 2,13,18번 도로를 차례로 갈아타면 진도대교로 진입할 수 있다.서울서 5시간 쯤 걸린다.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려면 광산IC에서 빠져 13번 도로를 타고 나주,영암을 거쳐 18번 도로로갈아타면 된다.서울 강남터미널에서 진도행 고속버스가 하루 4회 출발하며,광주와 목포에서 시외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다.광주 또는 목포까지 비행기 또는 열차를 타고가서 버스를 이용해도 된다.진도 시외버스터미널(061-544-2141),군내 버스(061-544-2062). ●숙박 진도대교 인근의 군내면 녹진리 및 진도읍 일원에 프린스모텔(061-542-2251),대동모텔(061-543-5188),진도하우스(061-542-7788) 등 여관이 많다.콘도형 통나무집에서 묵고 싶으면 의신면 송군리의 마린빌리지(061-544-7999)를 찾으면 된다. ●관매해수욕장 해수욕을 즐기고 싶다면 여섯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조도 군도중 대표적인 절경을 모아놓았다는 관매도로 가보자.진도 서남단 팽목항에서 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이곳엔 마치 금방 미장일을 끝낸 것처럼 고운 백사장을 자랑하는 관매해수욕장이 있다.길이 2㎞의 해변은 경사가 완만하고 물이 맑아 해수욕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백사장 주위론 3만여평에 달하는 송림이 들어서 있다.팽목항에서 조도페리호가 오전 6시부터 2시간 간격으로출발한다.요금은 6800원.승용차(2만6000원)도 가져갈 수 있다.팽목 매표소(061-544-5353,019-9162-1000).
  • 선현들의 情 옛편지에 듬뿍/ 성균관대 박물관, 정몽주·이황·이이등 서간문 전시

    “오라버님께 올립니다.그동안 안녕하시고,아버님도 건강하신지 문안드립니다.요즘은 대전(大殿)의 침수가 평안합니다.지난밤은 어떻게 지냈으며 오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조대비)가 친정 오빠에게 보낸 한글 편지(사진)다.대전은 헌종을 말한다. 성균관대 박물관(관장 김영하)에서 ‘옛 글에 밴 선현들의 정(情)’이라는 서간문 전시회가 지난 2일부터 열리고 있다.6월 말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에서는 정몽주 성삼문 이황 이이 송시열 김정희 고종 민영환 등 고려와 조선시대 유명인사들이 남긴 47편의 편지가 선보인다. 고종의 편지는 수재를 입은 백성을 위로하려 먼길을 떠나는 영의정에게 술 한잔 내려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담았다.그러면서도 어려움을 당한 백성들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서 알려달라는 당부를 잊지않고 있다. 농암 이현보가 후배 퇴계 이황에게 보낸 이별의 편지는 학문과 여가를 함께 즐겼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다시 만나기 어려움을 안타까워하는 솔직한 심정을 담았다. 조선 중기 숙종 때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한 박세당은 아들의 혼인에 쓸 각대와 기러기 등을 준비하지 못하여 친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여러 요직을 거쳤지만 청빈하게 살아갔음을 엿볼 수 있다.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로 떠나는 자하 신위에게 보낸 편지는 추사체의 성립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특히 전시된 작품은 초고로 잘못 쓴 글자를 고친 첨삭이 나타난다. 김상용이 상을 당한 애통함이 지나쳐 몸을 손상시키는 것은 오히려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며,모기를 쫓을 때 쓰라며 부채와 함께 보낸 편지에서는 속깊은 친구의 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풍익의 ‘동유첩’은 금강산 유람기이다.그는 “뜻을 유람에 두는 것은 안목을 넓히고 뜻을 크게 하려 하기 위한 것이지 어찌 하필 작은 것에 국한되려 하겠는가.”고 밝히고 있다.(02)760-1216∼7. 서동철기자 dcsuh@
  • 민영환선생 동상 옮긴다

    이전을 둘러싸고 논란을 빚어온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동상(사진)이 3·1절을 맞아 옮겨진다. 5일 종로구에 따르면 오는 3월1일 창덕궁 돈화문 앞의 민 선생 동상이 견지동 조계사 옆 옛 우정총국 주변 공원 조성 부지로 이전된다.구는 “동상 부지 소유자인 문화재청이 수차례에 걸쳐 국유지를 돌려달라고 요구한 데다 ‘신하인 민 선생 동상이 궁궐 앞에 위치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어 3000만원을 들여 선생의 생가터로 알려진 조계사 부근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밝혔다.이날 행사에는 민 선생의 후손과 종로구민들이 행렬을 지어 30여년만에 자리를 옮기는 동상을 따라 가는 진풍경이 연출된다.또 동상 제막을 기념하는 다양한 퍼포먼스도 준비됐다. 민 선생의 동상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때 자결로 항의한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7년 안국동로터리에 설치됐다 70년대 초 현 위치로 옮겨졌다. 류길상기자
  • 우리구 살림 이렇게/김충용 종로구청장

    “정치1번지 종로를 문화·복지·교육 1번지로 만들겠습니다.” 김충용(64) 종로구청장은 5일 “취임후 지난 7개월간 공부도 많이 했고 실수도 많이 했으니 올 한해는 본격적으로 종로를 변신시키는 데 힘을 쏟을 것”이라며 각오를 밝혔다. 김 구청장은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노인복지 강화를 위해 부암동,창신1동,숭인1동에 각각 연건평 726㎡,495㎡,99㎡ 규모의 경로당을 건립하기로 했다.이를 위해 올해 9억 9000만원의 부지 매입비를 예산에 반영했다. 또 지난해 이화동에 대규모 노인복지센터를 짓기 위해 1300평의 부지를 매입한 데 이어 각종 잡종 재산을 매각,사업비 300억원을 충당할 생각이다. 경복궁,종묘,창덕궁 등 주요 지정문화재만 74개에 이르는 ‘문화재의 보고’ 종로만의 장점을 살려 수준높은 문화 관광 지구로 거듭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구는 지난해 전국 최초로 문화지구로 지정된 인사동을 제대로 가꾸기 위해 보행환경 개선,장애인 편의시설 확충,민영환 광장 조성,불법 주·정차 단속 등에 주력할 방침이다. 또 각종 공연장 등이밀집한 대학로를 문화지구로 지정하는 작업도 착실히 추진,이화동 로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1.5㎞ 구간에 대한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김 구청장은 “문화·관광 기반을 닦은 뒤 종로 도심에도 신라,하얏트,롯데 같은 특급 관광호텔을 유치해 관광 수입을 늘려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장기 구상도 밝혔다. 종로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도심재개발 사업 진행도 역점을 두고 있다.도렴,내수,청진,사직,익선 등 7개 구역에 주거·업무 복합타운을 짓고 58개 재개발사업 미추진 지구에 대해 홍보,행정 지원을 강화할 방침이다. 청계천 복원 사업과 관련해서는 광교·동대문 시장 부근에 광장을 조성할 계획이고 철거될 삼일 시민아파트 1만 879㎡ 부지에 공원을 조성하는 방안도 추진키로 했다.또 경기고,서울고 등 명문고가 밀집해 최고 학군으로 인정받던 옛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상반기중 교사,학부모,교육관계자 협의체를 구성해 ‘최고학군을 만들기 위한 토론회’를 여는 등 중장기적인 교육 환경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김 구청장은 “문화·교육·경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 시대에는 무엇보다도 종로구민,나아가 전 국민의 화합이 필요하다.”면서 올해 구의 캐치프레이즈로 선정된 ‘화합,단결,발전 나부터 실천하자.’를 힘차게 외쳤다. 류길상기자 ukelvin@
  • 민영환선생 동상 이전 건의

    창덕궁 돈화문 앞에 있는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동상을 견지동 우정총국 주변 시민광장 조성부지로 이전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종로구는 21일 “돈화문 부근 토지 소유자인 문화재청이 2년 전부터 5차례에 걸쳐 ‘신하인 민영환 선생 동상이 궁궐앞에 위치한 것은 부적절하니 동상을 이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면서 “민 선생의 생가터로 알려진 조계사와 가까운 우정총국 부근으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서울시에 건의했다. 종로구가 제안한 이전 후보지는 공공용지여서 사유지 보상이 필요없고 민선생의 후손,조계사,종로구 문화재위원회 등도 찬성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 선생의 동상은 지난 57년 안국동로터리에 설치됐다 70년대초 현 위치로 옮겨졌다. 류길상기자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비사] (9)고종-니콜라이2세 특별한 관계

    ■두帝國 ‘마지막 황제' 친서외교 10여년 고종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침탈외교사에서 다소 의외라고 여겨질 만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종(1852∼1919)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강제로 대한제국의 황제자리를 아들 순종에게 양위했지만 조선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니콜라이 2세(1868∼1918) 또한 1917년 2월 혁명에 의해 퇴위당한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한 러시아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두 사람이 조선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의 정서가 통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가 황제 대 황제의 동격 관계는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꺼져가는 국운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은 고종이 일본을 밀어내기 위해 러시아에 매달리는 입장이었다면 니콜라이 2세는 만주에서의 이익 등 국익에 반하지 않는 수준에서 ‘외교적’으로 고종을 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밀월관계의 출발은 아관파천(1896년 2월11일∼1897년 2월25일)이었다.초대 서울주재 대리공사로 10년 넘게 서울에 주재하면서 고종과 두터운 친분을 쌓은 베베르가다리를 놓았다.대(大) 러시아제국의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에게는 저 멀리 극동에 위치한 작은 나라의 왕이 자국 공사관에 1년이상 몸을 의탁한 채 도움을 요청하자 애처로움과 동시에 흥미를 느꼈을 수도 있다. 이같은 관계의 성립은 니콜라이 2세의 자상한 성격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해 보인다.니콜라이 2세는 전제군주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잔정이 많았다.해외 각국에 파견돼 있는 외교관들의 상주서에 일일이 답하는 것은 물론 건강까지 체크했다. 이번에 발굴된 문서중에는 고종과 니콜라이 2세가 친서를 주고 받은 사실이 30차례 가까이 등장한다.대부분은 고종이 보내고 니콜라이 2세가 받는 형식이었지만 니콜라이 2세도 여러 통의 친서를 보냈다.비공식 친서로는 1895년 7월 고종이 조선군 병참관 권동수(權東壽)를 연해주 지사 운테르베르게르 장군에게 보내 러시아 황제의 후원을 요청한 것이 있다.그러나 고종은 이후 문제가 야기되자 파견사실을 부인했다. 고종이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첫 공식친서는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 특사를 통해 전한 다음 친서이다. 짐의 나라는 관습은 물론 언어와 문자도 고유해 외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불행하게도 짐 나라의 동쪽 이웃나라가 일본이다.일본은 섬나라이며 관습은 짐의 나라에서 유래됐고 문자와 제도도 짐의 나라에서 가르쳐주었다.…그 때문에 일본은 짐의 나라를 자기의 조상과 주인의 나라로서 섬겼다.…최근에 일본이 서양의 제도를 흉내내고 배워 동양의 맹주가 되려한다.…짐은 폐하가 짐의 나라의 실정을 동정하고 정의를 토대로 세계 열강제국이 짐의 나라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인 행위를 꾸짖고 나라의 독립을 침해하지 못하게 모든 조약규정 위반을 즉시 중지하도록 권고하여 주시길 바라고 바란다.끝으로 짐은 눈물로 폐하께 호소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고종의 ‘눈물의 편지’를 읽은 니콜라이 2세의 마음이 움직였는지 러시아는 1896년 10월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을 파견했다.그리고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의 국호변경과 황제 즉위 등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선언하자 열강 중 가장 먼저 이를 승인하고 축하전문을 보내왔다.눈치를 보던 일본,미국,프랑스,영국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고종은 혹시 러시아가 거부할 지 몰라 노심초사했으며 “승인을 하지 않더라도 곧바로 거부하지 말고 현재의 호칭(대군주 폐하)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고 연막을 쳤던 터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간의 밀착관계는 1898년 조선이 러시아 군사교관단 및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의 본국소환을 요청하자 금이 가는 것처럼 보였다.고종은 “재정고문과 군사교관단의 소환으로 야기된 일련의 사태가 그동안 베푼 황제의 호의에 아무 영향이 없기를 바란다.”고 조심스러워했으나 니콜라이 2세는 “고종황제 개인에게 변함없이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안심하도록 진정시키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일단 무마됐다. 니콜라이 2세는 내심 불쾌했지만 복심(腹心)은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에도 니콜라이 2세는 “고종황제 개인이나 대한제국 정부가 앞으로도 러시아의 지지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지 문의하라.”는 칙령을 내리는 등 고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하지만 고종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겠다는 제2,제3의 아관파천 공작을 서울주재 공사관에서 보고하자 “그런 일은 현재의 정치여건 아래서는 지극히 위험한 사태를 몰고올 수도 있다.”면서 발을 빼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식에 니콜라이 2세가 베베르를 특사로 파견키로 하면서 절정에 올랐다.니콜라이는 고종에게 축하친서와 함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성 안드레이 사도 1급훈장 등 러시아 최고 훈장을 선물로 보냈다.이에 앞서 고종은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금척대훈장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바있다.안드레이 1급훈장은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 최고의 훈장으로 명예는 물론 당시 가격으로 5000루블을 호가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그러나 기념식이 콜레라 창궐로 연기되는 바람에 수여되지 않았다. 고종이 “기념식은 연기됐지만 베베르를 서울에 체류토록 해달라.”고 요청하자니 콜라이 2세는 “폐하의 요청을 받고 짐은 만약 뜻밖의 어려움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폐하의 재위 경축식이 다시 열리는 내년 4월17일까지 베베르의 서울체류에 동의한다.”는 친서를 보내는 등 서로의 돈독함을 공개적으로 내비췄다. 이후 1903년부터 1904년 사이 두 사람은 명헌태후 서거애도 친서,니콜라이 2세의 황태자 득남축하 친서 등을 주고 받았다.고종은 “황제께서 황태자를 생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고자 한다.이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축전을 치는 것이 도리였으나 외부의 방해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제 서한으로 축하를 드리게 됐다.”고 기술했다.니콜라이 2세는 “감사함을 전하라.”고 공사관에 지시했다. 러·일전쟁(1904∼1905)이 일어나자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확신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수호해 주기를 바란다.”는 친서를 띄웠고 “러·일전쟁 발발시 중립준수를 요청한다.”는 니콜라이 2세의 친서를 전달받자 곧바로 중립선언문을 작성,일본을 비롯한 열강에 보내 화답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일본은 보란 듯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이로써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던 고종의 전략은 한계에 부딪힌다. 러시아는 모든 열강이 대한제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무력으로 독립과 불가침권을 침탈한 데 대해 견해를 밝힌 바 있다.러시아 외무부는 일본정부가 고종을 일본으로 이송,미리 준비한 비밀장소에 연금시킨다는 계획을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입수했다.러시아는 천인공노할 일본의 계획에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1905년 5월10일 외무부가 해외 러시아 공관에 보낸 회람전문) 니콜라이 2세도 이 전문상단에 “일본의 그런 행위는 어떻게든 예방돼야 한다.”고 지시하는 등 고종의 안위를 지켜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덕분에 고종의 일본강제 이송 및 연금계획은 무산됐다. 고종 개인에 대해서는 우정을 유지했지만 기울어진 대세는 니콜라이 2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을사늑약체결 직후 고종이 “일본은 미리 작성해 온 조약문에 국새를 강탈해 날인하고 짐의 서명을 강요하였으나 단호히 거절했다.황제께서는 유럽 문명국에 일본의 만행을 알려 대한제국의 독립을 수호해 주시길 거듭 앙망한다.”고호소했으나 니콜라이 2세는 “국내문제로 더 이상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한 것이다. 이후 헤이그밀사파견(1907) 등 고종의 거듭되는 친서와 러시아에로의 정치망명 요청 등에 대해 러시아는 포츠머스강화조약(1905) 준수와 극동질서를 강조하는 등 계속 딴전을 피웠다.1905년 ‘피의 일요일’사건으로 러시아혁명이라는 폭풍앞에 선 니콜라이 2세로서도 동방의 소국에 더이상의 잔정을 줄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종황제는 병이 들어 나약하고 병력이 없는 군부대신은 허수아비처럼 서 있고 다른 각부 대신은 일본인에 복종하고 있다.노쇠한 황제는 고통스러운 감금의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대궐안팎은 일본인의 감시와 경비가 삼엄하다. 알현이 제한된 것은 물론 제3자를 통한 연락도 제한을 받고 있다.”는 1908년 12월8일자 소모프 총영사의 고종 및 대한제국에 대한 근황보고서는 두 마지막 황제의 관계가 대한제국의 몰락과 함께 종극(終劇)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주석기자 joo@ ■러시아가 본 조선王家 서울에 주재한 제정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의 왕가(王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이번에 새로 발굴된 제정 러시아시대의 외교문서를 보면 러시아 외교관들은 고종과 주위의 대신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순종을 비롯해 엄비와 대원군,다음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을 못마땅해 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오래전에 자주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고종은 측근에게조차 권위가 없다.또 우유부단한 상태에서 대한제국 지배계급의 어느 한 집단이나 혹은 끊임없이 교체되는 명칭만 요란한 독립협회,황국협회,만민공동회,친러파,친일파,친미파,친영파 그리고 친독파로 구성되는 대신들에 의지하고 있다.(1901년 파블로프 대리공사) 고종황제 자신은 아주 호감을 주는 인물이나 많이 쇠약해져 있다.황실에서는 고위직과 하위직을 막론하고 음모,뇌물수수,매수가 만연돼 공적과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의해서 임용이 결정된다.(1903년 베베르 초대 대리공사) 명성황후의 시해이후 10여년동안 사실상 왕비의 역할을 한 엄비(嚴妃)가 서거하자 “엄비는 평민출신으로 양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당의 굿에 의존했다.(1903년 베베르).”고 힐난한 대목도 나온다. 대원군에 대해서는 실제 이상으로 부정적이다.틈만 나면 고종 암살기도설 등을 정보보고하고 있다.1896년 베베르는 “고종은 부친 대원군을 숙청할 생각을 갖고 있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다.러시아가 대원군을 아무르주 혹은 사할린으로 이주시켜 주기를 바라는 고종의 소망을 실현시키는 것이 바람직스러운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황제의 친모인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민씨가 80세를 일기로 서거하자 “고종은 모친을 몹시 사랑했다.고종은 성품이 선량하고 동정심이 많고 나약한 점이 모친을 닮았다.(1898년 쉬테인)”고 애도하기도 했다. 1898년 대원군이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그로데코프에게 보낸 편지도 흥미롭다.처음으로 공개되는 이 편지에서 대원군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부모와 자식간에는 화목하게 산다.그런데 수십년전 4명의 신하가 고종 임금앞에서 늙은 아비를 비방한 일이 있었다.하늘에 맹세코 말하지만 우둔한 자들이 음모를 꾸며 부자지간을 이간시켜 놓음으로써 나는 지금도 아비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종은 천성은 선량하나 나쁜 신하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면서 러시아에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하고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에 대한 러시아 외교관들의 차가운 시선에는 애처로움이 느껴질 정도다. 순종의 즉위식이 8월27일 거행됐으나 고종과 세자는 참석하지 않았다.순종은 카키색의 군복을 입고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꺼렸다.황제의 인상은 침울하고 창백하며 놀란 듯한 두 눈에 얼굴은 병으로 부어 환자처럼 보였다.(1908년 소모프 총영사). 고종황제의 왕위를 이을 후계자에 대해 주목하면서 일일이 인물평을 늘어놓았다. 의화군 이강(李堈·후의 의친왕)을 유럽파견 공사로 임명했다고 조선정부가 통보해왔다.이강은 왕비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궁인(귀인 장씨)에게서 얻은 왕자로 젊고 유능하며 쾌할한 성격이다.일부 사람들은 그가 앞으로 세자로 책봉될 것이며 좀 우둔한 세자(순종)보다는 덕망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하지만 고종은 세자를 더 사랑한다.(1895년 베베르) 또 1906년 1월1일 고종황제와 황실가족과의 신년 경축 알현식에 참석한 플란손 총영사는 “장자인 황태자는 30세로 명성황후의 적자이며 법통 후계자다.의친왕(李堈))은 17세이며 명성황후 생존시 상궁소생으로 미국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삼자 영친왕(李垠)은 9세이며 엄비 소생으로 영특하고 야심만만하다.”라고 평가했다. 노주석기자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비사] (8)군사교육 지원의 전모

    ***“6000精兵 양성” 러 군사교관단 2차례 파견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한 민영환(閔泳煥) 특명전권공사는 1896년 6월13일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났다.이 자리에서 민영환 특사는 러시아군대 파견,군사교관단 파견,차관제공,재정고문 초빙,전신선가설 등 5가지 요청 사항을 제시했다.이중 러시아군 및 군사교관단 파견요청에 대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답은 다음과 같다. 고종의 호위를 위해 러시아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 줄 수 있는가.(민영환).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 해군이 호위할 것이다.공사관에 체류하고 싶은 만큼 체류할 수 있다.(로바노프).조선군대를 훈련시키는 동시에 왕을 호위할 군사교관 200명을 파견해 줄 수 있는가.(민영환).군사교관은 파견할 것이나 빠른 시일안에는 곤란하다.(로바노프) 당시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아관파천(1896년2월11일∼1897년 2월20일)기간중이었고 러시아가 조선의 국사를 쥐락펴락하던 시기였다.고종은 자신의안위를 보호해줄믿을 만한 군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러시아군이 그같은 역할을해줄 것으로 여겼다.고종은 일본인 특히 일본 군사고문단의 한반도 진출을 꺼려했다.일본 군사고문단 대신 러시아 군사교관단을 초청하고 싶었다.하지만 군사교관단의 파견은 러시아의 의지만으로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열강을 동원한 일본과 친일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러시아로서도 극동주둔 군사력의 대(對)일본 열세를 잘 알고 있었고 당시 군사교관단의 파견은 군대 파견의 전제조건이자 러시아의 확고한 한반도 지배의사로 해석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1896년 2월23일 일본 군사무관 보각 대령은 참모본부 학술위원회에 보낸 전문에서 “조선의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 파견요청에 동의하면 일본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이 경우 일본 정계에서 조선문제에 관해 러시아와 협력을 하려는 분위기를 파국으로 이끌거나 아니면 일본의 적극적인 개입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러시아 군 내부에서도 반대여론이 팽배했다.이 때문에 러시아정부는 파견결정을 차일피일미뤘고 주한 베베르 대리공사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결국 군사고문단의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선에서 ‘생색내기용’파견이 이뤄졌다. 조선의 불안한 정세로 보아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 파견문제를 고종과 협의하기는아직 시기상조이다.(1896년 3월1일 로바노프 외무장관이 스페이예르 서울주재 공사대리에게) 가능하면 신속하게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야 한다.그것이 왕권강화,질서회복 그리고일본견제책의 유일한 수단이다.(같은해 3월20일 베베르가 외무부에 띄운 보고문)국방부에서 검토한 결과 고종의 시위대는 러시아인 장교를 지휘관으로 한인 1개 대대로 구성하고 교관은 위관급 5명,상사 4명,하사관 10명과 소총 1000정이 적합하다고 한다.(1896년 4월28일 외무장관이 베베르에게).고종은 무기와 교관단 파견결정에 감사를 표했다.조선군은 4000명이기 때문에 왕의 시위대외에 서서히 다른 부대의 교육도 위탁하고자 한다.(같은해 같은달 30일 베베르가 외무부에) 1896년 11월22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민영환 특사와 청국주재 군사무관이던푸차타 대령 사이에 제1차 군사교관단초청 계약서가 체결됐다.계약에 따르면 초청기간은 1년이며,인원은 장교 2명,하사관 10명,군의관 1명,악장 1명 등 모두 14명으로 돼있다.조선측은 장교급에겐 매월 150엔,사병에게 20엔의 월급과 숙소를 제공키로 했다.제물포까지의 여비와 부임수당 등도 별도로 부담하는 조건이었다.이들 중악장을 제외한 13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레마쉬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다. 곡절끝에 13명의 제1차 러시아 군사교관단은 1896년 10월24일 조선땅에 들어왔다.고종이 요청했던 200명에는 턱도 없이 모자란 숫자였지만 군사교관단의 한반도 파견의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갖고 있었다. 러시아는 군사교관단의 파견과 함께 푸차타 대령을 군사교관단장에 임명했다.또 1896년 1월 동부 시베리아 제2보병여단 소속 스트렐비스키 중령을 서울주재 러시아공사관 군사무관(軍事武官)으로 임명했다.1895년 6월17일 아무르군관구 참모부장이 외무장관에게 “이제 서울에도 별도의 상주 군사무관이 필요하다.앞으로극동의분쟁에서 조선의 무력이 큰 변수로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데 따른 후속조치였다.스트렐비스키 무관은 1902년 라벤 중령과 교체될 때까지 서울에서 근무했다. 조선은 청·일전쟁(1894∼1895)이전까지는 지리적 특성으로 러시아 우수리지방의중요한 국경을 보호해 주는 방벽구실을 했다.현재 독립국가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앞으로는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지 예상하기 어렵다.그러나 조선의 최근 역사를 분석해 볼 때 아마도 국내의 혼란으로 인해 정치적 욕망이 많은 열강,특히 일본의 세력각축장으로 변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푸차타 군사교관단장의 1897년 수기)조선은 6000명의 상비군을 보유해야 국내 질서가 안정될 것이다.고종은 유럽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3000명의 정병(精兵)이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에 맞지 않다.…6000명 정병양성은 조선의 영토나 국민수로 보아 외국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조선과 병력양성문제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뒤 일본과 협의를 해야 할것이다.군부에 만연돼 있는 부패를 척결하고 공정한 예산집행이 이뤄져야 한다.(1897년 6월17일 푸차타의 비밀보고서) 푸차타의 이같은 조선군대 증강계획안에 대해 일본은 거세게 항의했으며 러시아 내부에서도 논란이 일었다.증강계획을 포기하든지 일본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전쟁은 러시아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 계획에 착수하면 돌이킬수 없는 우를 범할 것이라는 경고도 나왔다. 제1차 군사교관단의 대한제국군 군사조련은 일단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1897년6월9일 고종과 각부 대신 그리고 주한외교사절단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조선군 의장대 사열식은 참석자들에게 큰 감격을 안겨주었다.대한제국군중 러시아교관단 산하부대로 들어오려는 경쟁도 치열했다. 당시 서울에는 대한제국군 5개 대대병력 4000여명이 있었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30대의 젊은 한국인 대대장이 부대에 출근할 때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영감행세’를 하기 일쑤였다.병력중 많은 숫자가 ‘유령 병력’이었다.식비를 횡령하기 위해 숫자를 부풀린 탓이다.대부분이 군인 신분을 창피하게 여겨 밖에 나갈 때는 사복으로 갈아 입었다.교관단은 이중 1600여명을 선발해 2개 대대로 조직했다.이들은 궁정을 경비하는 시위대 요원이었다.따라서 훈련과목에는 궁중 예절과 궁중 호칭법 등도 포함돼 있었다. 러시아정부는 대한제국 군대의 개편을 포함,재정지원을 제공하고 제2차 군사교관단을 또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장교 3명,하사관 10명,사관학교 교관·병기병·군악대지휘자 각 1명,군악대원 3명,위생병 2명 등 총 21명이다.(1897년 5월15일 베베르가 무라비요프 외무장관에게) 1차 군사교관단의 성공에 고무된 러시아가 제2차 군사교관단을 파견했다.2차 교관단의 장교와 하사관 등 13명은 아무르군관구에서 차출됐으며 나머지 기능직은 예비역중에서 선발됐다.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과 친일파의 득세 등으로 인해 대한제국내 정세는 급격하게 반(反)러감정이 확산되고 있었다.급기야 1897년 8월14일 푸차타 군사교관단장이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알렉세예프 중위에게 교관단 통솔권이 위임됐다.푸차타 대령의 야심찬 조선군 증강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는 이후 소장으로 진급,아무르지사로 임명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최근 여러 보고서로 미뤄볼 때 대한제국의 정세가 매우 불안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모든 당파가 러시아에 적대적이며 친러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고종황제 역시 매우 의심스럽게 되었다.이러한 상황 때문에 러시아가 대한제국 국내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니콜라이 황제께서 고종황제와 대한제국 정부가 향후 러시아의 지원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지 문의하라고 하셨다.대한제국의 요청으로 파견된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이 필요치 않다면 러시아는 마땅히 소환하겠다.(1898년 3월3일 외무장관이 스페이예르 대리공사에게) 대한제국 정부가 공식적인 회답을 보냈다.현재 러시아의 군사 및 재정고문(알렉세예프)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했다.러시아는 모든 외국인 고문의 파면을 요청하고 최근 통역관(김홍륙)살해 음모자 처벌을 요구해야 한다.대한제국 정부가 거부하면 공사관 기를 내리고 원산을 점령해야 한다.(같은해 3월12일 스페이예르의 회신) 평소 거칠고 직선적인 언사 때문에 초대 대리공사 베베르가 10년동안 한국에서 닦아놓은 외교적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은 스페이예르는 ‘공사관철수 후 한반도 북부 무력 점령’이라는 극단 처방을 내놓았다.니콜라이 2세는 1898년 5월4일 대한제국에서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허락했다. 러시아 군사교관단이 철수한 이후 대한제국군의 조직은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다.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20명의 한국인 장교들이 교관이 되었다.1901년 1월 당시 대한제국군은 장교 372명에 사병 1만 5200명이었고 군대예산은 360만엔이었다. 1,2차 러시아 군사교관단의 한반도 파견과 철수시기를 전후해 일본과 러시아는 1896년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모스크바 프로토콜)체결,1898년 로젠-니시협정(러·일특별협정) 등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협정을 맺었다.러시아가 일본과 일련의 협정체결과 함께 군사교관단을 철수시킨 것은 대한제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사실상 접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종은 이후 국내외 압력에 밀려 러시아교관단이 철수하도록 등을 떼민 자신의 ‘우둔한’결정을 한없이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고 돌이킬 수 없었다.‘눈엣가시’러시아군이 떠나자 일본의 한반도 점령 프로젝트 추진에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노주석기자 joo@ ■'거문도 사건' 러 대응 1885년 4월15일부터 23개월 동안 영국의 극동함대가 거문도(전남 여수시 삼산면)를 무단 점령한 사건은 러시아의 태평양진출정책을 경계한 열강,특히 영국의 극동에 대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친 사건이었다. 새로 발굴된 러시아문서보관소의 비밀외교문서에 따르면 러시아 군부는 거문도 점령 당일 외무부에 급보를 띄워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한편 서울점령 등 강공책을 제시하는 등 급박하게 움직였다.하지만 영국의 무력시위 앞에 러시아는 다소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이 과정에서 영국과 청의 비밀거래설도 제기돼 주목된다. 블라디보스토크호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귀국하는 길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거문도를 방문한다.거문도를 점령한 영국의행위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것이다.러시아의 태평양함대사령부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한 영국의 군사기지를 폐쇄하도록항의해야 한다.영국과의 협상에서 카스피해 동부지역과 조선이나 일본의 항구를 점령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야 한다.(1885년 4월15일 해군부관리관이 기르스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밀문서). 만일 영국이 거문도를 합병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러시아 순양함대는 동해에서완전히 군사적으로 봉쇄당하게 된다.또한 일본군이나 청국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면 러시아군이 그들을 몰아내고 아예 서울을 점령해야 한다. (1885년 4월1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코르프가 황제의 시종무관장에게 띄운 암호전문). 러시아는 정보라인을 총동원,영국의 점령의도와 군사력 등을 파악했다.거문도점령 9일후인 4월23일 일본 나가사키에 파견된 코스틸예프가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는“거문도에는 1척의 영국전함이외에 2척의 소형함정이 있다.오늘 식료품을 실은 기선이 거문도로 출발했다.그곳에는 상륙병 50명이 있으며 나가사키에 있는 영국군함에는 200명의 수병이 승선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또 베이징주재 러시아 공사 파포프는 1885년 9월20일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청국의 이홍장(李鴻章)은 영국의 거문도점령을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그는 종속국인 조선의 보호를 의무로 여기고 있다.청국의 거문도철수항의를 영국이 수용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거문도 때문에 전쟁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러시아가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하면 영국은 거문도를 떠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으며 영국의 거문도점령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한 결과로 분석된다.”라고정확하게 분석했다.청국주재 군사무관 시누에르는 1885년 11월17일 참모본부학술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확증은 없지만 청과 영국의 비밀거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이홍장의 한 측근은 나에게 ‘영국은 러시아와 전쟁시 거문도를 요새로 사용하고 전쟁후에는 시설물 일체를 청국에 팔기로 했다’고 귀띔했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해 영국과 청의 거래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결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중재에 의해러시아는 한국영토의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했고 영국함대는 1887년 2월27일 자신들이 헤밀턴섬이라고 이름붙인 거문도를 떠났다. 노주석기자
  • 구한말 외교명소 ‘손탁호텔’ 전경 첫 공개

    구한말 독일여성 손탁(Sontag·孫鐸·1845∼1925)이 건립,‘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당시 서울 정동(貞洞) 외교가의 대표적 명소였던 손탁호텔의 화려했던 전모가 처음으로 공개됐다.그동안 손탁호텔에 대해서는 건물의 정면일부 사진 정도만 전해질 뿐 구체적인 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했다.손탁호텔은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지학자인 이종학(李鍾學·74) 사운연구소장이 18일 본지에 단독공개한 자료에 따르면,중구 정동 32-1번지(건립당시는 정동 29번지·현 이화여고 동문 일대)에 위치한 손탁호텔은 러시아풍의 2층 양옥건물로 부지가 1,184평에 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 이번에 이 소장이 공개한 자료는 손탁호텔의 대형 홍보용엽서에 실린 호텔 전경사진을 비롯해 토지대장, 지적도면,그리고 건립자 손탁의 사진 등으로 모두 처음 밝혀지는 것이다.건축전문가들은 한국 근대건축사의 미비된 부분을 보충해줄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국적이 독일인 손탁은 프랑스 태생으로 구한말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따라 1885년 조선에 왔다.손탁은고종이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俄館播遷·1896년) 전후 고종을 측근에서 모신 공로로 고종으로부터 궁궐의 일부를 하사받아 1902년 그 자리에 서양풍의 호텔을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손탁호텔로 명명했다.1905년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직후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에게 팔았으며,손탁호텔은 1910년 한일병합 후 유럽풍으로 개조돼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1918년 이화학당에 팔려여학생 기숙사로 쓰이던 손탁호텔은 4년뒤인 1922년 새 건물을 짓기 위해 완전 헐리고 말았다.새 건물(‘프라이홀’)도 지난 75년 화재로 소실됐다. 김정동(목원대·건축학) 교수는 “당시 손탁호텔은 일본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로쿠메이칸(鹿明館)과 같은 급의 격조높은 호텔로 건축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건축물이나그간 관련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했다”면서 “이번에 공개된 자료들은 기존 한국건축사를 보완해줄귀중한 자료”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번에 처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손탁호텔은 화려한 외양에 걸맞게 전체 규모 및 내부·부대시설 또한 당시로선보기 드물게 크고 고급이었다. 우선 토지대장을 보면 손탁호텔의 부지는 이제까지 알려진 184평이 아니라 이보다 1,000평이나 많은 1,184평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또 건물 역시 본관 1개동이 아니라 모두 3개동이었으며,부속건물에는 바와 당구장 등 고급 오락시설도 딸려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배재학당,독립문 등을 시공한 것으로 알려진 심의석(沈宜錫)이 시공한 이 호텔은 2층 벽돌건물로 1층은 보통 객실과 식당,다방으로 사용되었고,2층은 왕과 귀빈들의 특별 객실로 사용되었다.객실 수는 모두 25개. 한편 손탁호텔은 건립 당시에는 ‘정동 29번지’였으나,중구청 지적과에 확인한 결과 현재는 ‘정동 32-1번지’로지번이 바뀌어 있었다. 땅주인 명의도 명치45년(1912년)에손탁에서 ‘감리교회 부인(婦人)외국선교부’로 넘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정운현기자 jwh59@. ■손탁호텔 사연과 인물들.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그리고 손탁은 어떤 내력을 가진 여인인가. 목원대김정동(건축학과) 교수는 “구한말 당시 손탁호텔은 각국 외교사절들과 국내 개화파 인사들의 사교장으로서는 물론 1900년대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대표적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시내 유일의 최고급 호텔이었던 이곳에는 외국의 명사들이 종종 투숙하기도 했다.‘톰소여의 모험’으로유명한 미국작가 마크 트웨인이 러일전쟁 취재차 한국에들렀다가 이곳에 묵었으며,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따님인 앨리스 루스벨트 양도 숙박한 적이 있다.또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앞서 1904년 3월,1905년 11월 두 차례 방한했다가 머무르기도 했다.조선 국내 인사로는 친미 개화파들의 모임인‘정동구락부’소속 민영환·서재필·윤치호·이완용 등이수시로 이곳을 찾기도 했다. 한편 손탁호텔의 건립자인 손탁은 당시 서울(한양) 정동외교가의 ‘프리마돈나’라 할 수 있었다.4개국어에 능통했던 데다 조선 황실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1845년 프랑스 알사스 로렌 지방 출신인 그녀는 1885년초대 주한러시아공사로 부임한 웨베르를 따라 한국에 처음왔는데 웨베르의 처제, 혹은 처형이라는 등 신분에 대해서는 설이 엇갈린다. 당시 국내정세는 친러파가 득세하던 시절이어서 그는 황궁을 자주 드나들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고종황제 내외의 총애와 신임을 받게 됐다.‘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당시 그는 고종황제의 수라상을 차리는 등 측근에서 모셨으며,나중에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에는 웨베르의 추천으로 궁궐에서 사용하는 서양 집기 관리업무를 맡기도 했다.이같은 신임으로 1897년 고종으로부터 현 덕수궁 맞은편의 궁궐 땅 일부를 파격적인 값에 할양받은 손탁은 1902년 구옥을 헐고 그 자리에 러시아풍의 2층 벽돌건물을 짓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손탁호텔’로 이름지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 보엘(J.Boher)에게 판 뒤 호텔 주방에서 일하던 이(李)씨 성을 가진 한국 어린이를 양자로 입양,프랑스 니스로 귀국,그곳에서 죽었다.양자로 데리고 간 한국인이씨는 후에프랑스 여인과 결혼,프랑스 이씨의 시조가 됐다. 정운현기자
  • 11월의 독립운동가 민영환선생

    국가보훈처은 30일 ‘11월의 독립운동가’로 계정(桂庭)민영환(閔泳煥) 선생을 선정했다. 선생은 1884년 이조참의로 벼슬길에 오른 뒤 예조판서·병조판서·한성부윤을 거쳐 1894년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됐다.그러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에 분노,낙향했다.이어 1905년 의사조약이 체결되자 의정대신 조병세와 을사조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 5적을 처형하고 조약을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렸다.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돼수감됐다가 석방된 선생은 1905년 11월 29일 ‘동포형제들은 천만배 더욱 분려하고 지기(志氣)를 굳게 해 학문에 힘쓰며 자주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는 내용의 ‘경고 대한 2천만 동포유서’와 ‘각국 공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순국했다.45세때다.정부는 62년 선생의 뜻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보훈처는 11월 한달동안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에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연다. 강동형기자
  • 2001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12명 선정

    국가보훈처는 19일 내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민족대표 이승훈(李承熏)선생,한국의 잔다르크 정정화(鄭靖和)여사,상록수의 계몽작가 심훈(沈熏)선생,을사조약에 항거 자결한 민영환(閔泳煥) 선생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 12명을 선정·발표했다. 이밖에 이완용을 비수로 찌른 이재명(李在明)선생,호남지역 의병장기삼연(奇參衍)선생,대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펼친 윤세복(尹世復)선생,무정부주의 비밀결사운동가 유림(柳林)선생,머슴출신 의병장 안규홍(安圭洪)선생,임시정부 경무국장을 지낸 나창헌(羅昌憲)선생,임정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김승학(金承學)선생,황성신문 창간유공자 유근(柳瑾)선생 등이 뽑혔다. 국가보훈처는 “국민에게 신망을 받을 수 있는 업적으로 건국훈장을서훈받은 분중 독립운동의 계열을 고려해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선정 독립유공자들의 공헌을 선양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담은 교육용 소책자를 발간하고 생몰연대와공적을 새긴 기념패도 제작한다. 노주석기자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 (8)美洲 독립운동 전초기지 하와이

    [호놀룰루(하와이)김삼웅 주필] 지금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민 100주년(2003년)을 앞두고 행사준비에 바쁘다.하와이 이민 100년사는 바로한민족 이민사와 같고 미주지역 독립운동사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1903년 1월 13일 대한제국 수민원(綏民院)총재 민영환이 발행한 여권을 소지한 노동이민 97명이 미국상선 갤릭호를 타고 23일 간의 긴항해 끝에 호놀룰루항에 상륙한지 100년이 다가오는 것이다.하와이이민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전까지 65척의 선박편으로 7,200여명의한인이 하와이섬으로 이민,오아후섬 등 농장에서 사탕수수 재배와 관개사업에 종사했다. 일제시대 미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은 바로 이러한 이민동포들의 힘으로가능했다.그러나 을사조약과 함께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한국인의 해외이민을 봉쇄함으로써 하와이 이민도 중단되었다. 하와이이민 한인들은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근면성을 발휘해 몇년이지나면서부터 일부는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 미국본토로 건너가기도 했다.그러나 대부분이 현지에 정착하면서 역량을모았다. 현지 석간신문 Evening Bulletin지 1903년 2월 26일자에는 “지난 1월 31일 이곳 와이아루아 농장에 도착한 한인들은 몸이 건강하며 농업에 익숙한 사람들이다.그들은 모두 만족해 하며 농장노동일에 힘쓰고 있다.그러나 그들의 임금은 저렴한 것이 현실이다”라고 보도했다.한인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10시간 이상의 노동에 하루품삯이 남자는 69센트,여자는 50센트에 불과했다.교민들은 이렇게 열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중 일부를 떼어 독립운동자금으로 헌금했다.중국에 세워진 임시정부 운영자금의 상당액이 하와이 한인들이 보낸 돈이었다. 한편 교민들은 1905년 하와이 에바농장에 한인감리교회를 세워서 정신적인 유대를 나누는 한편 애국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인 항일운동에나섰다.1907년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되어 있던 24개 단체대표 30여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하와이 한인단체를 총망라하는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고 1909년 2월 1일에 ‘국민회’를 창립했다.국민회는 1910년 명칭을 ‘대한인국민회’로 고치고 조직 강화와 조국해방 사업에 필요한 외교·교육·출판사업 등을 관장할 인재의 필요성을 실감하여 1912년 네브라스카대학 정치학과를 수학한 박용만(朴容萬)선생을 초청했다. 박용만의 출현으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주정부로부터 경찰권을 부여받는 등 크게 신뢰를 받게 되었다.한인국민회는 1914년 호놀룰루시의 중심가인 밀러 스트리트 1306번지에 회관을 마련했다.초기에는 월세집을 얻어서 사용하다가 김종학 총회장때 회원들의 성금 7,250달러를 들여 목조 2층 양옥을 건축해 1948년현재의 회관으로 이전할 때까지 전후 30여년동안 독립운동과 한인사회 발전의 모태가 되었다. 1층은 상점,2층 회의실,그리고 2층 뒷편의 일부는 국민회 노인들의편의시설로 이용된 회관은 그러나 아쉽게도 하와이 주정부의 토지수용령으로 철거되었다.하와이대학 최영호교수는 국민회관 자리는 현재밀러스트리트의 하와이 주청사와 주지사 관저 사이에 위치한 국기게양대 앞이라고 지목한다. 하와이 지역의 독립운동은 박용만 선생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되었다.박용만을 중심으로한 지도급 인사들은 1914년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를 세우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 준비에 나섰다.교포들로 부터의연금을 받아 군용지를 마련하고 대한제국 광무군인 출신의 노동이민을 중심으로 사관학교 간부와 학도 124명으로 ‘조선국민군단’을창설한 것이다. 한인사회에서 ‘산너머 병학교’로 불린 사관학교의 교장은 박용만이었다.그는 조선국민군단 단장도 겸했으며 대대장에 박종수,중대장심세권,소대장 박충식 등의 간부진으로 편성되었다.지금은 주택지로변한 이곳은 호놀룰루시에서 63번 도로를 따라 동북쪽으로 10마일쯤떨어진 해안을 낀 아후이마누언덕에 위치해있다.박용만은 이곳에 조선국민군단 본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한때는 311명의 병력을 훈련시켰다.그리고 1909년 헤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우고 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國民報)’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박용만 중심의 하와이 독립운동은 국제정세(1차세계대전)의변화와 이승만과의 노선갈등(박용만은 무력독립투쟁,이승만은 외교노선)으로 사관학교도 20마일쯤 떨어진 카후구 사탕수수 농장으로 옮겨졌다가 얼마 안있어 해산되고,박용만은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암살됐다. 현재의 대한인국민회 회관은 호놀룰루시 북쪽 룩 애비뉴 2600번지푸노이계곡 언덕위 아담한 스페인풍 2층건물로 자리잡고 있다.1946년현 위치로 이전한 이 건물이 독립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하와이 한인사회를 발전시켜온 상징적 건물이다.300여평의 부지에 2층콘크리트 벽돌 건물의 전시장에는 지금도 국민회의 역사를 입증해주는 각종 문건과 자료가 많이 있다.1910년대에 제작된 태극기와 성조기,국민회 회원들이 납부한 독립운동자금 기록부,독립운동기금을 넣어두었던 두개의 대형금고,1922년 제작되어 각급 회의때 사용한 의사봉 등이 보존되어 있다.그러나 기관지 ‘국민보(國民報)’를 찍었던인쇄기는 본국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1918년 12월 이승만 박사와 30여명의 이민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호놀룰루시 리리하 스트리트 1832번지의 한인기독교회는 이박사가 하와이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다.1938년에 4만달러를 들여 신축해 지금까지 사용해온 것을 최근 교회당 재건축을 위해 주정부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교회사무실과 교회예배당,이박사 동상 등은 보존되고 이박사 기념관이 새로 건립중이다.현재 300만 달러의 예산으로1층의 교회당과 2,3층의 광화문 누각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이승만박사와 이민 초기 하와이 한인들이 주축이 되어 1903년에 세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는 그동안 이전을 거듭하여 1948년에 케아우모쿠 1639번지의 현 위치에 2년전 신축돼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와이 항일운동사적지를 살피면서 아쉬웠던 대목은 이승만 전대통령과 관련해서는 상당한 규모로 신축중인 기념관을 비롯해 많은 유적이보존되고 있는데 비해 박용만선생의 사적은 거의 찾아 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하와이 독립운동의 양 날개의 한쪽인 박용만 선생이 너무잊혀지고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박용만선생의 독립운동 역할을상기한다면 지나친 불균형이 아닐 수 없다. 한인회장의 거취를 둘러싸고 교민사회가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는것을 빼고는 이민 100주년기념사업을 준비중인 하와이 한인사회는 국권침탈기 하와이 이민 동포들의 고난의 이민사와 독립운동사 발굴·조사·정리에 열정을 모으고 있다.어떤 사람은 이승만-박용만의 뿌리깊은 노선갈등의 잔재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kimsu@
  • 을사조약 반대운동(다시 태어난 ‘대한매일’:6)

    ◎“신뢰못할 늑약” 무효화 투쟁 앞장/“고종 불윤에 이토 강압” 등 부당성 지적/한규설·민영환 자결­분노함성 대서특필/격렬한 항일논설 민족구국정신 일깨워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매일신보는 발빠르게 반대 투쟁에 나선다.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가 잇따르고 대신의 자결사태까지 발생하는 상황에서 국내 언론들은 조약의 침략성을 일제히 규탄하고 나섰다.이 가운데 대한매일의 반대투쟁은 그 어느 매체보다도 빠르고 강경한 논조로 일관했다. 조약 체결 당시 고종과 韓圭卨 참정대신을 비롯한 각료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군사력을 앞세운채 강압,마침내 일방적으로 이 조약체결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에 맞선 대한매일의 논조는 조약의 부당성 지적과 무효화에 초점을 맞추고 일관된 투쟁양상을 보였다.후에 통감부는 결국 이같은 반일논조를 잠재우기 위해 고종 퇴위와 대한매일 사주인 배설 추방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만다. 대한매일의 투쟁은 조약 무효선언으로 시작됐다.조약 체결 다음날인 18일자 2면 잡보란에 속보형식으로 내보낸 ‘칙어엄정’(勅語嚴正)이 그 시초다.“한국 황제께서는 한국독립을 중념(重念)하시와 정대한 의리로써 거절하신즉 伊藤(이등박문) 대사가 재삼 강청하되 강경하신 칙어로 불윤(不允)하셨다더라.” 일본이 강제로 만들고 체결을 강행한 을사조약에 대한 고종의 반대의사가 확고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사다. 이와함께 조약 체결 당일 각의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기사도 같은 날 잡보란에 실려있다.‘칙어엄정’ 아래 ‘대사관 각의’와 ‘殉國意決’ 제하의 글이 그것이다.‘대사관 각의’ 기사는 “어제 오전 11시에 참정대신 이하 각부 대신들이 이등 대사관으로 모여 중대사건을 각의하였다더라”라고 쓰고 있다. 또 ‘순국의결’에선 “참정대신 韓圭卨씨와 外大 朴齊純씨와 農大 權重顯씨가 이 중대한 요구건에 대하야 죽음으로 맹세코 굴복하지 않기로 상부통곡(相扶痛哭)하고 韓참정은 영결(永訣)까지 하였다니 삼대신의 순국하는 충의에 감읍하지 않은 자가 없다더라”라고 게재돼 있다.한규설은 내각 조직 당사자로 조약 체결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각료들에게 개별적으로 찬부를 물을 때 끝까지 반대,파면됐다. 다음날도 무효화 논조는 계속됐다.19일자 2면 상단 잡보란에 또다시 ‘신조약성립’(新條約成立)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냉정한 필치로 조약이 체결된 경위를 자세히 보도했다.기사 마지막에 “황제폐하의 성의(聖意)는 이 조약을 결사코 불허하시기로 확정하신 거일진대 각 대신의 황겁으로 성의를 공동하여 차경(此境)에 이르렀는데 韓皇폐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종사생령(宗社生靈)을 위해 상천(上天)에 기도하셨다더라”라는 글을 붙였다. 21일에는 전국 십삼도의 유약소(儒約所)에서 상소한 전문을 소개하고는 거리풍경을 싣는 것도 잊지 않았다.‘회조위소’(回眺爲笑) 제하의 글이 그것이다.“어떤 이가 주현을 지나다가 춤추는 사람이 있어 그 이유를 물은즉 신조약설을 듣고 실성해 밤새도록 통곡하더니 황상폐하와 참정 한규설씨는 처음부터 거절반대하셨다기로 기쁨을 이기지 못해 춤을 춘다 하매 사람들이 몰려들어 함께 춤을 추었다더라”고 적고 있다. 12월 1일자에서는 시종무관장 閔泳煥이 신조약에 통분해 순국한 소식을 2면 머리기사로 크게 다루면서 이와 관련한 ‘늑약무효’(勒約=강제로 맺은 조약)란 격렬한 논설기사를 실었다.이 글은 결론으로 “한일신조약은 신뢰가 없고 효과가 없음을 단언하건대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세상사람들의 공론이니 이렇게 적어 후일의 증거로 삼고자 하노라”고 못박았으니 당시 대한매일의 논조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대한매일은 일제와 일본군의 강압을 일절 무시하고 날이 갈수록 강경한 논진을 펴서 당시 흥분과 격분에 찬 겨레의 심정을 그대로 반영했던 것이다.을사조약 무효화 투쟁으로 시작된 대한매일의 반일운동과 극일논조는 1910년 문을 닫을 때까지 숱한 압박과 시련에도 굽히지 않은채 더해만 갔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논조/시종일관된 ‘배일’/황성신문 정간 등 주저없이 보도/‘이날에 또 목놓아…’ 명논설문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부터 각종 기사를 통해 조약 무효화투쟁에 나선 대한매일은 애국지사들의 순국 사실과 진전상황 등을 끊임없이 실어 항일의 선봉에 나섰다. 특히 을사조약의 체결과정에 있어서 일제의 억압과 진행과정 보도에 있어선 당시 다른 언론보도에 비해 훨씬 빠른 것이었다.황성신문의 정간과 사장 구금사실을 주저하지 않고 다룬 11월27일자 ‘황성의무’(皇城義務)와 같은날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이란 표제로 발행한 호외,그리고 다음날 28일 게재한 논설 ‘시일에 우(又)방성대곡’(이날에 또 다시 목놓아 크게 우노라)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대표적인 글들이다. 을사보호조약과 관련해 황성신문과 논조를 같이했던 대한매일은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비롯된 황성신문의 정간과 張志淵 구속에 눈감지 않았다.‘황성의무’는 대한매일과 함께 진보적 대표신문이었던 황성신문의 논조를 극구 칭찬한 글로 눈길을 끈다. ‘시일에 우 방성대곡’은 “한일신조약을 체결한 날에 한국경성내외의 일반 신사인민이 모두 방성대곡하였고 민조 두 충신이 순국한 날에남녀노유가 일제 곡하여 친척과 같이 슬퍼하였고 오호라 대한동포여 금일 슬픈 지경 진실로 가련하고 애석하오…”라고 적고 있다.
  • 을사조약 國恥(秘錄 南柯夢:23)

    ◎열사 잇단 자결 애태운 고종 “살아서 나를 돕는 것이 충성”/“乙巳年 망국” 예언 적중/日 남산에 대포설치 위협/고종,끝내 조약날인 거부/맨 먼저 민영환 ‘자결순국’ 조병세·송병선 등 뒤따라/의병들 방방곡곡서 궐기 그들이 있었기에 광복이… 1905년 1월17일 덕수궁에서 ‘을사오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일본군이 남산에 대포를 설치해놓고 위협하는 가운데 체결된 이 조약에 고종은 끝내 국새찍기를 거절했다. 따라서 이 조약은 지금도 원천적으로 무효인 셈이다.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었다. 일찍이 나는 광무 6년 임인년(任寅年 1902)에 말씀 올리기를 광무 9년 을사년(乙巳年 1905) 11월 갑자일이 주역(周易)으로 따져 건괘(乾卦)의 초구(初九) 효(爻)가 발동하는 날이라 반드시 한시대가 끝난다고 예언했는데 염려했던대로 망국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정의 수구파 원로대신들은 모두 두문사객(杜門謝客)하였고 시정의 상민(商民)도 또한 철시해 가게문을 닫았다. 을사오조약을 강요한 원흉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이 자는 스스로 한국의통감(統監)이 돼 고종을 농간했는데 뻔뻔하고 교활한 언행은 지금도 한국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때 이토가 돈덕전(敦德殿)에 와서 상감께 아뢰기를 “동양 3국이 연합해 동맹국가가 되어야 서양의 돌연한 기습을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구구하게 설명했으며 또한 말하기를 “한일 두 나라가 더욱 사이좋게 지내 소의 두뿔이 적을 막듯 형세를 이루어야 합니다. 시기하시거나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이토는 또 고종황제에게 “일본은 이미 영국과 동맹을 맺어 서로 가까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서양의 다른 나라들이 일본을 얕잡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차제에 폐하께서는 한번 일본을 유람하시기 바랍니다. 관광할 것이 많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상감께서는 “나 또한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가히 선진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명이 아름답고 화려하다고 듣고 있어 한번 가보기를 소원한지 오랬습니다. 그러나 귀국의 명치황제가 유신한지 40년이 됐으나 아직 한번도 서양을 유람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토는 “옳은 말씀입니다” 하면서 대한제국 각료들에게 “광무황제는 총명하시고 영특하신데 좌우에서 보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총명을 가리고 있습니다. 손바닥도 한 쪽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지금도 일본의 정치지도자,특히 이토의 후예들인 자민당그룹은 공공연히 아시아의 공생 운운하며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데 모름지기 우리는 여기에 속아서는 않될 것이다. 고종황제가 속지 않고 일본관광을 거절한 것을 보면 그리 호락호락 이토에게 속을 사람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있다. 동양삼국 평화 운운한 이토는 바로 그가 죽음을 당한 뒤 우리 안중근의사에게 진정한 의미의 동양삼국 평화론이 무엇인지 저승에서 듣게 된다. 아무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수많은 우국충신들이 목숨을 끓었다. 맨 먼저 민충정공이 순국하였는데 그의 선혈이 대나무로 되살아났다. 전 의정대신 민영환(閔泳煥)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을 보고 자기 목숨을 끊었으니 5백년 조국의 종사가 왜놈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단도로 자신의 몸을 찔러 죽었는데 피가 마루틈으로 흘러 들어가 한 그루의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일본인과 서양인들이 문상차 들러보고 살펴보아도 과연 자생한 대나무이지 사람이 조작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마다 차탄(嗟歎)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민영환의 처는 재취한 분인데 나이 30이 못된 여인이었고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을 따라 자결했다. 이때 또한 조병세(趙秉世)가 독약을 먹고 죽었으며 송병선도 따랐다. 병정 하사(下士) 김봉학(金鳳學),용인의 전참판 모씨도 따라 죽었다. 용인의 전 참판 모씨란 홍영식의 형인 홍만식(洪萬植)이었다. 동생 홍영식이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나라에 큰 죄를 지은 것을 자책하여 늘 미사신(未死臣)이라 자처하던 홍만식이 끝내 자결한 것이다. 송병선에 대해서는 정환덕이 직접 입대를 주선한 일이 있어 자초지종을 따로 소상하게 쓰고 있다. 송산장(宋山丈:山林=송병선)이 경기도 가평에서 상경하였는데 그의 문인 정석채(鄭奭采)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송산장이 상경해 황제를 알현하고 싶어 하시는데 어떤 절차로 입대(入對)할 수 있을까요?” 하고 상의하였다. 그래서 즉시 입궐하여 상감께 말씀드렸더니 상감께서는 “이같이 창황한 때 절차를 따질 여유가 있겠는가. 그러니 사례(私禮)로 들어와보는 것도 가하다”고 하시었다. 이에 송병선이 입궐하여 상감을 뵈었으나 퇴궐한 뒤 가만히 생각하니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지고 있는 이 때에 차라리 한번 죽어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문인 제자들을 불러 뒷일을 부탁한 뒤 자결하였다. 선생의 뜻은 바다같이 넓고 산과 같이 높다 하겠다. 상감 부자께서 이 비보를 들으시고 가슴 아파하며 감탄하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심상훈의 경우는 좀 달랐다. 자결 직전 고종의 부르심을 받고 마음을 고쳐 먹었기 때문이다. 이때 전판서 심상훈(沈相熏)도 역시 칼을 빼 목을 찌르려고 했는데 갑자기 상감의 부르심을 받게 돼 입궐했다.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어서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 살아서 국가에 보답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셔서 죽기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심상훈은 이듬해 을사오적 암살사건에 연루돼 경무청에 구금됐다. 살아서 애국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고 충신들이 목숨을 끊으니 고종으로서는 마음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고종은 정환덕에게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내가 함녕전뒤 섬돌복도인 북쪽 반침(半寢) 위에 시립(侍立)하고 있었는데 상감께서는 근심을 잊으시기 위하여 자수(自手)로 난로의 재를 닦아내고 계셨다. 그러다 나를 돌아보시고 말씀하기를 “네가 늘 을사년 11월 갑자일이 어떠하다 하더니 말대로 되었구나. 운명은 모면하기 어려운 것인가. 민영환이 절의로 죽은 뒤에 원로대신들까지 차례로 따라 죽으니 마음이 괴롭구나”라고 하시었다. 이에 엎드려 아뢰기를 “이런 때를 당해 한 사람도 절사(節死)하는 사람이 없다면 도리어 상감께서 수치스러운 일이신데 어찌하여 괴롭다고 하십니까”라고 위로말씀을 드렸다.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이야 그렇다하겠으나 나의 심신이 편안하지 않고 심정을 정돈하기가 어렵구나. 속담에도 ‘충신은 나라가 망할 때 많이 나오고 공신은 나라가 흥할 때 많이 나온다’(忠臣多出其國亡 功臣多出其國興)고 했는데,어찌하여 충신만 많이 나오는가. 이것도 운명인가” 하시었다. 엎드려 말씀드리기를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충신이 되기는 쉬우나 공신이 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저로 말하면 살아도 국가에 유익하지 않고 죽어서도 공로가 없을 것이니 차라리 죽어 한번이라도 보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고 하였다. 을사조약은 사실상의 망국이었다. 그래서 많은 순국열사가 목숨을 끊었다. 고종이 이들 충신에게 감사하였으나 그보다 더 감사해야 할 신하는 의병들이었다. 무기를 들고 일제에 항거했던 의병이야말로 바로 공신(功臣)이었고 이들이 있었기에 8·15광복과 건국이 있었던 것이다.
  • 「문화유산의 해」에 바란다/이달순(특별기고)

    ◎서울 역사탐방로 개설하자 문화유산의 해에 반드시 찾고 가꾸어야 할 과제가 있다.사직터널에서 인왕산쪽으로 100여m 오르다보면 보이는 붉은 벽돌집 대한매일신보 사옥(서울 서대문구 행촌동 1의 18)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1904년7월18일 영국인 베셀에 의해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측이 한국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그 당시에도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역할을 다할수 있었다.을사조약의 무효를 논파,배일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고종의 친서를 게재했다.친서를 영국의 「런던트리뷴」에도 게재,일본의 강압적 침략정책을 외국에 폭로한 베셀은 결국 1908년 일본인 배척을 선동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제도를 전복하려다 상하이에서 3주일의 금고생활을 보내고 1909년 서울에서 병사했다. 그 대한매일신보 사옥과 베셀이 살던 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사옥 곁에는 권율장군의 집터가 있고 베셀이 살던 집앞에는 이율곡의 사당자리가 있다.그곁에 한국의 최초여기자 고 최은희 여사가 살던 초라한 한옥도 있다.그 이웃에는 역사적인 음악가 홍난파가 살던 양옥도 보존돼 있다.훌륭한 문화유적지로 개발할 가치가 있는 타운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역사적 가치 훌륭 이 지역을 역사탐방로가 통과되도록 설계돼있다.어느 용역팀의 가상시나리오다. 교동과 재동의 전통한옥단지에서 출발,안국동 민영환기념탑을 지나 구총독부 건물터에서 일제만행을 확인하고 사직공원에서 민족정기를 가슴에 쓸어안고 인왕산을 끼고 돈다.곧 다가서는 것은 대한매일신보사옥이다.그 사옥을 신문박물관으로 개관하는 것이다.역대 독재정치에 항거한 우리나라 신문의 민주투쟁기록이 담겨진 그곳에서 민주화와 세계화의 미래를 전망하고 권율장군과 선비 이율곡,작곡가 홍난파의 집터에서 우리 후손이 우리문화 역사를 꽃피우는 것이다.베셀의 집터에서 우리를 위해 목숨 바친한 영국인의 고마움에 머리숙여야 하며 최은희 기자 집은 한국여기자 박물관으로 개관돼야 한다.여기자상 수상자의 공로의 기록은 한국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그 역할을 증대시키는 큰 몫을 할 것이다. 이 역사탐방로는 이어 한국초기의 관상대앞을 지나 경희궁터를 지나 광화문에 이른다. 발전하는 서울의 도시계획에는 이러한 문화유적의 보존과 개발이 병행돼야 한다.그런데 역사탐방로와 문화유적지 개발사업이 현재 멈춰진 모양이다. 당초 종로구청은 임자 없는 건물에 무려 20여가구가 살고 있는 대한매일신보 사옥을 매각하려 했다.주민의 건의로 서울시 문화재과에서 이를 중단케 했고 문화유적지개발을 위한 기본기획수립에 필요한 용역을 주기로 했다.그 계획과 예산은 시의회에 제출됐고 시의회에서 승인,예산안도 통과됐다. ○예산부족 사업 주춤 그러나 해가 바뀌어 민선시장이 들어서고 시의회 의원도 바뀌면서 이 용역계획은 보류됐다.사옥에 살고 있는 20가구에게 줄 보상비가 엄청나고 이를조달할 예산이 없다는 것이다.그 문제가 해결돼야 역사탐방로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유적지 단지조성을 위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는 실무자의 말이다.수치스러운 역사유물도 보존돼야 하고 자랑스러운 역사유물은 더욱 개발돼야 한다.정부의 돈이 부족하면 민자라도 유치하고 기업이윤을 문화유적지 형성에 투자하는 보람도 일깨울 수 있는 방도도 여러가지 있을수 있다. 문화유산의 해에 베셀의 훌륭함을 높이 평가하는 날이 왔으면 한다.
  • 고려원 「서울을 읽자」 출간

    ◎“정도 600년” 한성판윤에서 서울시장까지/1,500여명의 시장 발자취 소개/인사부장·환경문제 등 시정 숨김없이 파헤쳐 배고픈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치다가 잡혀 19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장발장.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훗날 비극적인 운명을 극복하고 메르 시의 시장이 돼 자유와 정의,휴머니즘이 넘치는 시정을 펼쳤다.이같은 「장발장」으로 이상화된 시장상,부침과 영욕의 상징으로서 시장의 모습은 비단 소설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조선조이래 현재까지 6백여년동안 1천5백여명의 서울시장이 거쳐갔고,그들중엔 연극보다 더 극적인 일화를 남긴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 출간된 「서울을 읽자」(고려원 펴냄,여현덕·임용한 지음)는 「한성판윤에서 서울시장까지」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서울 정도이후 6백여년간 역대 시장들의 발자취를 통해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살핀 흥미있는 역사책으로 관심을 모은다. 한성의 터전을 닦았던 조선조 초대 서울시장(한성부사) 성석린으로부터 현재의 조순시장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변모해온 서울의 모습이 스케치되어 있는 이 책은 서울시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감당하기 힘든 자리인가를 일깨워준다. 서울시장은 시대에 따라 한성부사,한성부윤,한성판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졌다.어전회의(국무회의)에 참석자격이 주어질 만큼 핵심요직으로 그 업무는 더없이 복잡하고 광범위했다.오죽하면 「영의정 하기보다 한성판윤 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나왔을까. 그런만큼 역대 서울시장의 주변엔 늘 일과 관련된 숱한 일화와 화제가 뒤따랐다.영조때 한성판윤을 지낸 암행어사 박문수는 그 두드러진 예다.당시 시정의 난제였던 청계천을 준설한 그는 양산 군수가 촌민이 키우는 닭까지 수탈할 정도로 뇌물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농부 차림으로 닭을 들고 찾아가 확인한 후 그를 파직시켰다고 한다.영남지방에서는 해방 직후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박문수의 제사를 지내 그의 업적을 기렸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역대 시정의 부정적인 단면,특히 구한말의 인사 난맥상을 숨김없이 보여줘 눈길을 끈다.1890년(고종 27년) 한햇동안 한성판윤은 무려 25명이나 바뀌었으며,20년동안 민영규 민영환 민영소 민영목 등 민씨 일족의 「영」자 돌림 8명이 서울시장 자리를 독차지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한편 이 책의 후반부는 「몸집은 크지만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지 못해 퇴화한 공룡의 모습」을 한 서울을 해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신생활운동」을 펼친 윤보선,재정쇄신을 이룬 허정,과도정부의 관리시장 장기영,카이젤 수염의 투사시장 김상돈.의전시장 윤치영,잠실벌 뽕나무숲을 도심화한 양택식,서울 포청천 조순 등….건국초기에서부터 개발독재시기를 거쳐 문민시대에 이르는,해방이후 30여명의 서울시장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서울공화국」「국방력만 없는 정부」로 불릴만큼 거대해진 서울의 현안,이를테면 환경·교통·인구·행정서비스문제 등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는 이 책은 지방자치 1년을 결산하는 의미로도 읽힐 만하다.〈김종면 기자〉
  • “광복 50돌… 나라사랑 새롭게”/민족사 관련 전시회 대성황

    ◎무궁화·태극기·애국지사 작품전 수만명 찾아 광복 5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각종 전시회등에 학생과 학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4일부터 서울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나라꽃 무궁화 대잔치」에는 광복절인 15일 하룻동안만 3만여명의 시민들이 몰리는등 대성황이다.19일까지로 예정했던 행사 기간을 하루더 연장했다.예상관람객은 10만여명. 이 행사에는 「백단심계」,「배달계」,「아사달계」 등 다양한 계통의 무궁화 70종과 개인이 출품한 5백점의 무궁화가 전시돼 있다. 또 서울시와 국기선양회가 지난 4일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하고 있는 「대한민국 태극기 변천사」전시회에도 하루 평균 2천∼3천명의 관람객이 몰리고 있다.1백40평규모의 전시장에 국·내외 자료 1백50여점이 선보인 이 전시회의 주 관람객은 방학을 맞은 초·중·고 학생들과 주부들.16일까지 3만여명이 다녀갔다.의외로 중장년층보다 자녀들의 손을 잡고 나온 주부들이 훨씬 많았다. 이와함께 총무처산하 정부기록보존소가 지난 9일부터 서울종로구 창성동 정부기록보존소 전시실에서 열고 있는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시회에도 광복절인 지난 15일 하룻동안 1천여명이 관람하는등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20년대의 서울전도,백범 김구선생의 장의에 관한 안건을 의결한 국무회의록등 5백여점의 자료 가운데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들도 적지않다. 이밖에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항일독립투사들의 서예작품·수묵화·유언·맹세문 등을 한자리에 모은 「애국지사유묵전」에는 꿋꿋한 절개의 향기를 맡으려는 학생 등 관람객이 하루평균 6백여명이 찾고 있다. 다음달 10일까지 서초구 양재동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회에는 구한말 민영환 선생의 유언,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자선서문,안중근 의사의 유묵 4점 등 항일독립투사 1백1명의 작품 1백30점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이념에 바탕을 둔 독립운동가로 분류돼 조명을 받지못했던 홍명희,여운형,김원봉,장건상 선생 등의 수묵작품도 공개돼 관람객들로 부터 이념을 초월한 전시회라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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