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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애아교육 개척 김후리다여사(이사람)

    ◎“정박아 가슴에 「복음밀알」 심기 20년”/73년 「성베드로학교」 설립… 「사랑실천」 첫발/“「한가족 삶」 부축” 아동 놀이도서관도 운영/일서 성공회 김성수주교 만나 69년 가정 이뤄/“모두가 형제… 장애아교육에 더 많은 관심 보였으면…” 덕수궁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낡은 건물­대한성공회 주교관을 찾았을때 김후리다여사(59)는 영문편지를 쓰고 있었다.장애자를 위해 오랜기간 봉사를 했다고 해서 털털하고 소박한 외양을 떠올렸으나 금테안경을 낀 얼굴이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전혀 없어 뵈는 인상이다. 영국태생으로 대한성공회 김성수주교(61)의 아내인 김후리다여사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 정신장애 어린이 교육의 개척자.현재 갓난 아기에서 8세까지의 정신장애 어린이를 장난감을 이용해 교육하는 시설인 「레코텍 코리아(Rekotek Korea)」의 원장인 그와 한국의 인연은 2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지난 62년 30살의 나이로 고국인 영국을 떠나 일본땅을 밟았다.성공회의 선교사가 되어 한달반이 걸리는 배편으로 낯선 아시아에 도착한 것이다. 『집안에서 부모님과 하나뿐인 언니가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억양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유창한 한국말로 김여사는 당시를 회상했다. ○사회복지학등 전공 영국의 리즈사범대에서 음악교육을 받고 런던대에서 사회복지분야를 전공했던 그는 일본에서 청소년 지도상담을 맡았다.그당시 일본은 벌써 제2차대전의 참화를 극복한 때라 국민들의 생활이 서구사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그래서 자신의 전공분야인 사회복지 활동보다는 성공회 선교사로서 종교적인 업무에 주로 매달리고 있었다.그무렵 한국에서 온 현재의 남편 김신부를 만나게 됐다. 김여사는 김신부와의 결혼을 역시 하느님의 뜻으로 돌린다.당초 두사람 가운데 누구도 결혼하자는 말은 없었다고 말한다.함께 일하다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결혼하게 됐다는 것.어떻든 69년 그는 결혼을 하러 김신부와 함께 한국에 왔다. 『결혼과 함께 정식선교사로서의 직분은 떠난 셈이었으나 한국에서주교님을 도와 하느님의 큰 뜻을 실천할 그 무엇이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 있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경제사정이 더 나빴다고 김여사는 이야기한다.한겨울인 2월에 입국했는데 길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어 교통사정이 형편없었으며 거리를 오가는 버스와 택시등도 금방 고장이라도 날듯 오래된 것들이었다는 것이다. ○박봉에 “애옥살이” 그때 김신부의 월급은 1만7천원이어서 하룻동안 김여사가 쓸 수 있는 생활비는 2백원에 불과했다.밥 짓고 연탄 가는 일이 어렵긴 했지만 너무 바빠 그럭저럭 저도 모르게 지나갔다.밥은 일본에서 길들여져 잘 먹었으며 김치도 처음부터 잘 먹었다.크게 불편했던 것은 오랫동안 마셔왔던 커피를 구하기 어려웠던 것. 73년 한국말에 어느정도 입과 귀가 열릴 즈음 그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서울 구로구 항동에 국민학생 연령의 정신장애아를 교육하는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했다.2층 건물의 윗층에서 김원장부부와 수녀 2명,교사 4명이 장애아 14명을 돌보았는데 나중에 학생수가 40명까지 늘어났다.그때 화장실이 하나였던 것이 가장 문제였다고 김여사는 회상한다.그는 집이 종로구 원서동에 있어 「성베드로학교」까지 버스를 3번 갈아타고 다녔다. 얼마뒤 이 시설들에 대한 정부의 제도적인 지원책이 마련되면서 김여사는 여전히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미취학 장애어린이쪽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현재 김여사가 관리하고 있는 교육시설은 지난 83년 개관한 서울시 중구 정동 성공회관의 「레코텍 코리아」를 비롯,피어슨 빌딩의 「레코텍 코리아」와 중계동의 「마들사회복지관 레코텍」등 세곳이다.레코텍은 스웨덴말로 놀이도서관이란 뜻.김여사는 이 세곳의 교육시설에서 장애어린이의 부모들을 위한 상담역할을 하고 있다. ○“미취학아에 관심을” 김여사는 이젠 한국에도 미취학 정신장애어린이를 위한 놀이방이 전국적으로 50∼60여곳으로 늘어나 장애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고 말한다. 『정부도 이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으니 미취학 장애아에 대한 교육에 신경을 써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이들에 대한 교육은 빠르면 빠를수록좋기 때문입니다』 ○장애아도 “가족일원” 김여사는 레코텍의 역할중 장애어린이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그는 장애어린이가 일단 가족 속에 끼어들어 자연스럽게 섞이게 될 때 그 다음단계인 학교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이 때문에 장애어린이를 가진 부모와의 상담을 통해 그들이 아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분노와 죄의식,절망등 여러가지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시키는 활동을 중요시하고 있다. 현재 김여사가 관리하는 세곳의 장애아시설에는 10명의 교사가 1백여명의 어린이를 교육하고 있다. 「레코텍 코리아」는 운영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이외에는 회비를 받고 있다.또 87년부터 기금마련을 위해 해마다 「레코텍 코리아」후원의 밤을 열고 있다. 김주교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둔 김여사는 한국에 온 뒤 미8군영내에 있는 남캘리포니아대 분교에서 교육학석사,연세대에서 교육학박사를 받기도 했다. 장애어린이 상담 문의는 733­3469.
  • 미군 신분증·물품카드 위조/PX제품 억대 빼내

    ◎미 하사등 9명 적발 【수원=김동준기자】 수원지검 특수부 이득홍검사는 7일 미군신분증과 물품구매카드를 위조해 미8군 PX에서 1억원대의 면세품을 빼내 시중에 팔아온 백재현씨(50·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63의 92)등 국내밀매조직 7명을 관세법위반및 사문서위조 동행사등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이들로부터 위조된 미군신분증·물품구매카드와 미화 1천5백달러를 증거물로 압수하고 이들에게 매수돼 위조된 신분증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물품을 구입해준 에돈버러 찰스하사(29)와 윌슨 윌리하사(27)등 미군2명의 신병처리를 미군당국과 협의중이다. 백씨등은 찰스하사등을 매수,위조된 신분증과 물품구매카드를 이용해 지난 5일 미8군 용산기지내 PX에서 TV·오디오세트등 70만원어치의 가전제품을 구입,시중에 내다파는등 지난해 9월부터 같은 수법으로 50여차례에 걸쳐 1억여원어치의 면세품을 시중에 유출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 서울 미국문화원/8군 영내로 이전/연말까지

    서울 중구 을지로 미국 문화원이 올 연말까지 2층의 도서관 전시관 회의실만을 남기고 용산 미8군 영내의 미대사관 부지로 옮겨간다. 주한 미국공보원은 12일 『서울시 소유로 연간 9억31백만원을 내야하는 문화원건물의 임대료를 절약하기 위해 대민업무와는 관계없는 문화원기구를 용산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서울시와 미국정부는 지난해 7월 옛 경기여고터에 미국대사관과 문화원이 신축되는 95년까지 5년동안 1년단위로 을지로 문화원의 임대차계약을 맺기로 했었다.
  • 전주의 “맹인 변호사” 최덕식씨(이사람)

    ◎맹인 무료변론… 복지증진에 앞장/눈먼이들 「개안」 인도/법무관 재직중 실명… 좌절끝에 재기의 삶/수임료 꼬박 적립,10년간 회관건립이 꿈/해외단체와 결연주선… 매주 경로잔치도 『비록 내눈은 멀었지만 다른 앞못보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팡이가 되겠습니다』 최덕식씨(37·전주시 완산구 경원동3가 64의6)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맹인변호사이다. 그는 지난 3월16일 군법무관 선배인 임종섭변호사(38)와 함께 변호사사무실을 개설,맹인들이 의뢰한 건에 대해서는 무료변론을 도맡는등 맹인복지 증진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전주시 중앙동4가 전북맹인회 사무실에 나가 경로잔치를 베풀거나 식사를 대접하며 자신이 실명하기 전에 본 아름다운 세상,실명후의 좌절을 극복한 과정등을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삶의 용기를 붇돋워 주려고 애쓴다. 또 국내 맹인단체를 외국단체와 자매결연을 맺어주는 것도 그의 중요한 업무가운데 하나이다. 주위에서는 최변호사를 「전북지역 1천8백여 맹인들의 희망이요,맹인복지증진의 선구자」라고 일컫는다. 그도 2년여전까지는 맹인이 되리라고는 짐작못한「정상인」이었다. 고려대 법대와 대학원을 나와 78년 군법무관 시험에 합격,공군 법무관 으로 근무하던 그는 지난 89년 3월 뇌수종치료를 받다가 항생제의 부작용으로 「스티븐슨스 존슨 신드롬」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렸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 서울 국군통합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뇌에 물이 차는 뇌수종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머리에 가느다란 관을 박아 물을 빼내는 수술을 받고는 곧 회복되는듯 했으나 10개월후 다시 뇌수종 증세가 나타나 재수술을 받았다. 이당시 열이 높아지자 병원측이 항생제를 대량 투여,온몸에 발진과 함께 「스티븐슨스 존슨 신드롬」증세가 나타났다. 이 병은 눈물이 나오는 모세관이 파괴돼 눈물이 안나오고 시력도 잃게 만든다는 것. 90년 4월에는 눈을 뜰 수도 없는 장님으로 변해있었다. 『하염없이 통곡을 해보았지만 눈물이 나오질 않더군요.눈만 벌겋게 부어오를뿐이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절망속에서 폐인생활을 해야 했다. 벽에 부딪치거나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온몸에 멍이 드는 일이 거듭됐다. 최변호사는 이 당시 『고통없이 죽는 방법만 생각했다』면서 한때는 처자식의 생활보장을 위해 교통사고를 위장,자살하려고도 했다고 기억했다. 90년5월 그에게 한줄기 햇빛과도 같은 기회가 왔다. 미8군 법무관실장인 한국계 김현수씨(39)가 그의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주선한 것이다. 그는 곧바로 도미,텍사스주 미공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최첨단 장비로 각막이식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막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수술은 실패로 끝났다. 절망은 더욱 깊어져 그는 병원에서 목을 매 자살을 기도했다. 이때 현지 한인교회 교인들이 찾아와 미국에서는 맹인변호사들이 거리낌없이 활동하고 있다고 그를 격려했다. 그말을 듣는 순간 「나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마치 전류에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에 와닿았다고 최변호사는 밝혔다. 그리고 20여년동안 유지해온 신앙생활을 되돌아보았다. 그는 『귀국하면 맹인들을 위해 남은 일생을 바치리라』는 각오로 맹인용 흰지팡이 사용법,타자치는 법,점자등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의 신념때문인지 치료에도 성과가 있어 오른쪽 시력을 0.1까지 희복했다. 그는 90년7월 귀국했고 91년1월 국가로부터 1급 원호대상자로 지정되면서 12년간의 군법무관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는 바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수임료는 생각하지 않고 모든 사건을 내일처럼 처리한다는 자세로 문을 열었습니다.개업후 3일동안은 사건의뢰가 한건도 없어 내심 걱정하기도 했지요』 그는 희미한 오른쪽 시력에 의지,법률서적·사건서류를 확대복사해서 보면서 일을 처리하고 있다. 희미하게 남은 시력마저 언제 꺼져 버릴지 모르지만 자신의 가족과 도내 1천8백여 맹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게 최변호사의 각오이다. 그는 부인 이정희씨(32),1남2녀의 자녀와 함께 2천5백만원짜리 전세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일찍이 홀로 돼 구멍가게를 하며,외아들만을 바라고 살아온 어머니 최기순씨(58)는 그가 실명하자 아예 전주 모교회에서 기거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실명했다는사실」을 이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활기차게 꾸려나가는 그에게도 안타까움은 남아있다. 꿈속에서나마 어머니,처자식의 얼굴을 완전히 보고 싶어 꿈을 자주 꾸려 하지만 뜻대로 안되는 것이다. 그는 현재 매월 들어오는 변호사수임료가운데 일정액을 맹인복지기금으로 내놓고 있다. 그의 장래희망이라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북지방에만 없는 맹인복지회관을 자신의 힘으로 짓는 것이다. 『그나마 변호사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이 나에게 의무를 부여한 것』이라고 말하는 최변호사는 지금처럼 수임료를 계속 모으면 10년안에 복지회관을 건립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환히 웃었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5

    ◎「도끼만행」은 월남전뒤 “미 의지 시험용”/운명의 날 8·18… 4분만에 미군 2명 살해/참모회의중 일보… 스틸웰장군에 “귀환 급전”/북측 병사 30여명,「가지치기 현장」 포위… “의도적 도전” 내가 다시 한국에 근무하게 된것은 1976년 봄 소장으로 주한유엔군사령부의 참모장을 맡게 되면서였다.이 직책은 주한미군 참모장과 미8군 부사령관등을 겸하며 또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의 수석대표도 맡았다.나는 대장이 된 스틸웰사령관과 다시 만나게 된것이 기뻤다. 7월1일 아내 메리와 함께 김포공항에 도착,용산 유엔군사령부까지 가는 동안 놀랍게 발전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그러나 이도시의 불과 25마일 북방에 싸늘한 긴장이 감도는 DMZ(비무장지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한국은 평화롭다고만 할수 없었다. ○군 배치 공격형으로 그당시 판문점에는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난후 김일성은 군대의 현대화 및 증강에 박차를 가했으며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부대배치를 방어형에서 공격형으로 전환시켜 놓고 있었다.이 사실의 발견은 당시 정보활동의 개가로 평가되고 있다.베트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CIA나 DIA(미국방정보처)의 사진분석가들이 인도차이나에만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북한관련 정찰사진이나 위성사진들이 제대로 분석되지 않은채 그대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남북한이 비슷한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판단된 70년도의 평가를 아직도 그대로 채택하고 있었다.미국은 그같은 정보판단하에 닉슨독트린의 일환으로 한국에서 갑자기 7사단을 철수시켰으며 북한은 72년부터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해 왔다. 그러나 74년 민간 정보분석가들에 의해 북한이 엄청난 양의 철강과 콘크리트를 생산,불명확한 군사목적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음해부터 북한의 군사적 능력과 의도에 관한 조사가 국가안전국 특수조사팀의 일원인 베트남참전 보병장교 출신 민간인 존 암스트롱에 의해 행해졌다. 14개월간의 연구끝에 그는 북한의 군사력이 70년의 평가보다 80%이상 증강됐고 대부분이 DMZ 부근에 전진배치돼 있음을 밝혀냈다. 이같은 북한군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엔군사령부는 76년말 김일성이 남침배치를 완료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이는 복잡한 국내문제와 외채압박등 경제난으로 전쟁도발은 어려울 것이라는 CIA보고와는 정반대 견해였다. 남침용 땅굴이 처음 발견된 것은 74년 11월로 그후 연달아 발견된 땅굴들은 북한의 침략의도를 보다 명백히 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특히 내가 부임하기 수개월전부터 북한군은 한국군 순찰대에 사격을 가해오고 부비트랩을 설치하는등 DMZ에서의 도발을 한층 강화시켜오고 있었다.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내에서도 북한경비병들의 도발 횟수가 늘고 있었다.우리정보기관들은 이를 지난 50년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침략을 위한 구실로 삼으려는 것으로 평가했다. ○“새 침략구실 노린듯” 북한군들이 저지른 대표적인 잔악한 도발이 부임후 두달이 채못돼 8월18일 아침 판문점에서 발생했다.JSA에서 북쪽을 연결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까이에 높이12m 가량의 무성한 포플러가 있었는데 유엔군측 경비초소의 시야를 가려 가지를 칠 필요가 있었다.이날 북측에 사전통보를 하고 10명의 경비병과 도끼 사다리 톱등 작업도구를 든 5명의 작업단이 2.5t트럭을 타고 현장으로 들어갔다.아더 보니파스대위와 마크 바레트중위가 그들을 인솔했으며 한국군 김문환대위는 통역장교로 동행했다.적에 의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20명의 신속대응군이 JSA 바로 안쪽 제2경비초소 옆에 배치돼 있었다. 상오 10시30분 작업단은 두개의 사다리를 나무에 걸쳐놓고 작업을 시작했다.5분정도 지난후 북측트럭 한대가 오더니 장교2명과 사병9병이 내렸다. 인솔자 박철중위는 JSA에 오래 근무했으며 성질이 고약하기로 이름나 있었다.박철이 자꾸 작업을 간섭하더니 20분쯤 후에는 보니파스에게 작업중지를 요청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작업은 계속됐다.이어 북측 경비병 10명이 트럭을 타고 추가로 왔으며 근처 경비초소에서 6명이 더와 모두 30여명의 북측병사들이 작업장일대를 포위한 형상이 되자 박은 가지 하나라도 더자르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해 왔다. 보니파스가 작업계속의사를다시 명확히 하는 순간 박이 『죽여!』라고 외치며 보니파스를 세게 걷어차 수로로 쓰러뜨렸다.이것을 신호로 북측병사들은 주머니에서 쇠파이프와 곤봉등을 꺼냈으며 작업중이던 도끼도 빼앗아 주로 장교와 하사관을 공격했다.보니파스는 수로바닥에 쓰러진채 발길질과 쇠파이프를 피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그때 한 북측병사가 도끼로 그의 머리를 내려 찍자 그자리에서 바로 죽고 말았다.바레트중위는 공격을 피해 트럭쪽으로 뛰었으나 뒤따라온 6명의 북한병사들에 의해 역시 도끼와 쇠파이프등으로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채 쓰러졌다.신속대응군이 도착했을때는 북한군은 이미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으로 달아난 후였다.정확히 4분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신속 대응 군 힘못써 키티호크기지의 당직장교로부터 전화보고를 받은 것은 참모회의 중이었다.나는 우선 사령부 지하벙커에 있는 「월 룸」(전쟁지휘소)으로 갔다.그러나 사령관 스틸웰대장은 일본자위대의 초청으로 교토를 방문중이었고 부사령관 존 번 공군중장은 월례 연습비행을 위해 서해쪽으로 출격중이었다.리처드 스나이더주한미대사도 업무협의차 워싱턴에 가있었다.또 한미1군단사령관 존 쿠시맨중장은 의정부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유엔군사령부의 최고 선임자였다. 몇분후 보다 상세한 보고가 올라왔다.보니파스대위와 바레트중위가 살해당했고 수명의 경비병이 중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이것은 분명 우리가 예측하고 있던 공산당의 의도적 도발이 틀림없었다.나는 즉시 주한미공군사령관 돈 피트만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스틸웰장군 귀환을 위한 비행기 급파와 연습비행중인 번중장에게도 급거귀환 연락을 하도록 지시했다.그다음 의정부의 쿠시맨중장에게 판문점의 상황을 보고하고 전투준비태세를 위한 데프콘 등급을 의논했다. 데프콘은 가장 약한 상태인 5등급에서 1등급까지 있는데 한국에서는 보통때도 데프콘4 상태였다.그러나 이를 높이기 위해서는 명백한 군사적 움직임이 수반돼야하기 때문에 적의 공격적인 대응을 예상해야했다.마침 스틸웰장군과 통화가 되어 그문제를 상의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이번 사태에 대한우리의 대응은 보다 확고해야했다.분명히 북한측이 우리를 테스트하려 할것이기 때문이었다.또 그해는 선거의 해로 조지아주지사 지미 카터가 베트남전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제리 포드대통령에게 강력히 도전하고 있었다. 북한은 포드가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에서 도박을 걸어온 것이었다.앞으로 48시간내에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도발에 대해 전쟁을 개시하느냐,그대로 주저앉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좋소』 마침내 사령관의 대답이 떨어졌다.『당신이 펜타곤과 한국군측 그리고 우방국에 상세히 상황을 설명하시오. 정전위원회를 내일 열도록 요청하고 모든 부대는 데프콘3에 대비,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전부대원이 영내대기토록 하시오』 즉시 참모회의를 소집,우리의 대응계획인 OPLAN 작성에 바쁠때 서울의 미대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마침 이날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비동맹회의 기조연설에서 북한측대표 김정일이 이날 아침의 사건을 미군장교들의 인솔하에 저질러진 북한군에 대한 이유없는 공격이라고 설명하고 비동맹회의가 미국의 행위를 비난하는 동시에 유엔사령부의 해체와 한국으로부터 미군의 철수를 주장,쿠바의 열렬한 지지로 이 결의안이 통과됐다는 것이었다. 이날밤 김포공항에 도착한 스틸웰사령관에게 나는 세가지 대응책을 보고했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1

    ◎한국부문/북한병력,남침 6일전 38선 집결/“개전 임박” CIA보고 극동 사서 무시/6·25 터지자 백악관·의회·군 “책임 논쟁”/휴일 미 보병학교서 야구중계 보다 “전쟁발발” 뉴스 들어 한국에서의 「미군」은 누구인가­.주한미8군참모장을 역임한 존 싱글로브장군(69)이 펴낸 회고록 「위험한 임무」(HazardousDuty)는 한국전쟁발발 및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77년 두번째 한국근무중 당시 지미 카터 미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다 소환되어 강제퇴역 당하는등 소신을 굽힐줄 모르는 강직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 싱글로브장군은 이 회고록에서 6·25는 미 CIA보고에 대한 미국정부의 판단착오 때문에 발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서울신문은 이 회고록을 긴급입수하여 「미군」으로서 체험하고 느낀 주한미군의 한반도에서의 역할과 책임,그리고 공과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몇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1950년 6월 25일 비내리는 일요일 새벽,날이 채밝기도 전에 10만여명의 북한인민군이 38선 전역을 가로질러 침공을 개시했다.남한에서는 이들을 편성도 채 갖추지 못한 3개사단 정도가 맞서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는 1945년 2차대전 후 일본인들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남쪽은 미군이,북쪽은 소련군이 나누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소련은 탱크와 중화기를 지원하는등 북한 인민군의 무력증강에 많은 투자를 했다.1948년 소련의 붉은 군대가 공식적으로 북한땅을 철수한 후에도 수천명의 군사고문단이 잔류,지속적인 군비증강을 꾀했으며 침공을 감행할 무렵에는 13만5천의 병력과 소련사관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전투를 참관한 유능한 장교단들로 구성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군은 10만명이 채 못되었으며 미 고문단에 의해 훈련을 받고 미군장비를 갖추고 있었다.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24군단 병력이 공식적으로 철수한 것은 1949년 5월이었으며 군사고문단과 병참요원등 5백여명만이 잔류하고 있었다.한국군에는 탱크는 없고 몇대의 대포만 있을 뿐이었으며 제대로자격을 갖춘 장교도 드물었다.더욱이 소규모 작전의 지휘권까지도 워싱턴에 있었으며 도쿄의 맥아더 극동사령부와는 중계를 통한 무선통신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군은 바로 첫날 새벽부터 현대전 사상 유래가 없는 패주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한의 방어에 미군을 사용한다는 극동사령부의 임시계획은 있었지만 그것은 이같이 38선 전역에 걸쳐서,또 다량의 우수한 최신 소련제 탱크의 공격을 예상한 것이 아니고 고작 북으로부터의 소규모 국경충돌이나 게릴라침투 등을 고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는 다른데 있었다. 내가 한반도에서의 전쟁발발을 안 것은 조지아주 베닝기지에서 였다.그 전날 보병학교에서 대대장교육을 수료한 뒤여서 그날은 숙소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야구중계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중간에 한국전쟁 소식이 스포트로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만주에서 여러해동안 정보업무를 맡아왔던 나로서는 우선 몹시 화가났으며 놀라움에서 불평이 튀어나왔다.그 다음에는 강한 의구심이 일었다.『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 침공을 예측하지 못했는가?』 봄철 내내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에 의한 철저한 준비와 위장이 있었을 것이고 그곳의 높아져가는 긴장감을 분명히 CIA와 윌로그비소장 산하의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감지했을 것이다. 나는 CIA의 북한 정보망을 내가 직접 작성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의도에 관한 정보를 완벽하게 놓치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CIA는 1946년부터 48년 사이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잘 훈련된 10여명의 젊은 한국인 정보원들을 북한에 투입했다.극동사령부의 맥아더원수와 윌로그비장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침략 조기경고의 특수한 임무를 부여해 북한땅에 헌신적인 반공주의자들을 투입시켰던 것이다. 그후 1949년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CIA는 마침내 서울에 지역본부를 설립했다.나는 그때 CIA의 중국담당 책임자였는데 서울본부는 아주 우수하고 믿을만한 장교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해 중반부터 서울본부에는 북한으로 침투시킨 정보원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상당부분 북한의 전쟁준비 움직임에 대한 경고를 해왔을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후에 CIA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정보 임무를 맡아 다시 일하게 되었을 때 그 당시의 민간및 군사정보 책임자들이 누구였는지 구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50년 6월 엄청난 「정보실패」의 미스터리를 풀수 있었다. 그해 봄부터 김일성의 공산당정권은 한국에서의 선거를 비난하고 군사적 도발의 위협을 가하면서 남한에 대한 악랄한 선동공세를 벌여왔다.그러는 가운데 소련지원을 받는 김의 군대는 침공준비를 위해 은밀하게 단계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당시 북한에 있던 우리 정보원들은 이미 북한의 교통시설은 물론 정부기관이나 군내부에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아 임무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같은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6월까지 몇몇 정보원들이 북한의 전쟁준비에 대한 특별보고를 해오거나 38선을 실제로 넘어와서 서울에 있는 CIA간부들에게 직접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CIA 서울지역국 보고」라고 명명된 1950년 6월19일자로 된 한 중요한 정보보고를 보면 중장비 등을 수송하기 위한 38선 북측 도로의 확충,1945년이래 소련에 의해 파괴되었던 남측으로의 연결도로에 대한 일제 보수등 광범위한 병력의 움직임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더욱 불길한 징조는 북한의 민간 교통수단들이 북한의 주요 군사기지에서 38선으로 연결되는 철로변에 집결돼 있다는 것이었다.결론적으로 이 보고서는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으며 김일성은 자신이 원할때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병력과 장비를 배치시켜 놓고 있다는 것이다. CIA국장 로스코 힐렌쾨터 해군대장은 북한의 침공이 있기 전 닷새의 시간동안 이 평가서는 백악관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등 트루먼대통령의 군사및 외교정책 핵심참모들에게 전달됐으리라고 확신했다.이 평가서의 요약본은 또한 전통을 통해 도쿄 극동사령부의 맥아더장군과 윌로그비장군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 군부및 민간의 핵심 정책입안자들은 남침 이전에 이미 북한의 침공의도에 관한 충분한 증거자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물론 이들 증거자료는 잘 훈련된 정보원들의 보고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연적인 의문점이 제기될수 있다.왜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 정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가? 왜 어떤 작은 군사적 행위도 강력한 응징을 받을수 있다는 공식적인 주의를 북한에 주지 않았는가? 왜 적어도 미공군의 정찰기들이 북쪽의 뒤엉킨 산들로부터 단지 세개 뿐인 남쪽으로의 통로를 감시하지 않았는가? 당시 태평양지역에서 일했던 CIA 지역책임자들이 후에 나에게 이 문제들의 해답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윌로그비소장의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는 그해 봄 서울에서 오는 모든 정보들을 분석평가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F6」정보,즉 「미숙한 정보원이 보낸 신빙성이 불투명한 정보」로 분류돼 거들떠보기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 있어서의 미국의 작전은 맥아더사령관의 관할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정보책임장교는 그 보고들을 심각한 고려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해버렸던 것이다.그러한 등급으로는 워싱턴에서 절대로 심각하게 고려되어질 수 없었다. 워싱턴에서 이들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힐렌쾨터 CIA국장 한사람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임무는 정책입안자들에게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무방비상태에서 전쟁은 발발했고 개전 다음날인 26일부터 워싱턴은 한국전쟁발발의 책임문제를 놓고 의회와 백악관,CIA와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간에 「정보수집실패」냐 「정보판단실수」냐의 뜨거운 논쟁에 휘말렸다.
  • 용산 미군·유엔사령부/96∼97년 오산·평택 이전

    ◎한미,곧 「마스터플랜」 마련키로/이전비용 전액 한국부담/국방부/“미군의 안정적 주둔 보장돼” 서울용산 주한미군사령부가 97년까지 경기도 오산의 미공군기지와 평택 미육군기지로 이전된다. 한미양국정부는 19일 하오 서울 용산에 있는 주한미군사령부와 유엔군사령부,한미연합사령부,미8군사령부등 4개의 미군주요사령부를 96년에서 97년사이 현재 미군이 사용하고있는 경기도 오산의 공군기지와 평택의 미육군23지원단이 주둔하고있는 캠프험프리의 기지로 이전키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오산기지의 경우 공간부족이 예상되어 최소한의 필수 소요부지를 추가확보,확장하게 된다. 한미양국정부는 용산기지 이전합의에 따라 빠른 시간안에 이전종합계획(마스터 플랜)을 마련,기지이전사업에 착수할 방침이나 추진과정에서 시기조정이 불가피할 경우 상호합의하에 변경키로 했다고 밝혔다. 한미양국정부가 합의한 용산기지이전대상에는 기지안의 4개주요사령부와 AFKN 방송시설,미국인학교,체육·여가시설,헬리콥터비행장,통신시설등 각종 지원부대및 시설이포함되어 있으며 미국측의 단계적 주한미군감축계획과 연계,현재보다 대폭 축소된 규모로 이전된다. 그러나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소속 요원등 1백50여명은 군사정전위원회 공산군측대표및 국방부등과의 업무협조등을 위해 용산에 그대로 잔류할 계획이다. 약15억달러(한화1조원)이상 소요될 것으로 추산되는 이전비용은 군용시설교외이전특별회계법에 따라 한국측이 전액부담하고 미국측은 토지소요를 최소화하는 한편 유사기능을 가진 시설물을 통합해 이전비용절감에 최대한 협조키로 했다. 한미양국은 지난해 6월 용산기지이전에관한 합의각서(MOA)를 교환한뒤 그동안 구체적인 이전장소및 시기등에관한 실무협의를 벌여오다 지리적여건,군사작전의 효율성,이전비용의 최소화등을 고려,오산과 평택기지로 이전에 합의했다. 국방부는 『그동안 군용시설 교외이전계획의 하나로 이미 육군과 공군본부를 충남지역으로 이전했으며 용산기지도 이러한 군용시설교외이전 정책의 하나』라고 설명하고 『한국과 미국군의 사령부를 서울에서 남부지역으로 이전한다고 해도 한미연합전력이나 전투준비태세상의 어떤 문제도 없을것』이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주요사령부의 교외이전은 군작전에 효율성을 높이고 용산기지이전은 주한미군의 한국주둔여건을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보장되게 된다』고 덧붙였다.
  • “미군기지 온다” 술렁이는 평택/이전대상 시·군 주민 표정

    ◎“제2이태원” 지역발전의 전기 기대/퇴폐문화 유입·토지수용에 걱정도 용산 미8군기지가 경기도 평택군 평성읍 안정리 K6(캠프 험프리기지)으로 이전키로 확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택시·평택군·오산시 등 인접 3개시군 주민들은 환영과 우려의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2월 한미양측이 용산기지를 옮기는데 합의한 뒤 이전부지로 가장 유력한 곳으로 이 지역이 부상되자 이곳 주민들은 불황을 탈피,지역발전을 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으려는 상인측과 저질·퇴폐문화의 확산과 범죄증가 등을 우려하는 주민들이 팽팽히 맞서 왔다. 그러나 이전부지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K6기지 주변의 상인모임인 「안정리 상인연합회」는 『미군기지의 이전을 대대적으로 환영한다』며 『이제 평택을 제2의 이태원으로 조성,국제적인 명소로 발돋움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또 미7공군이 주둔하고 있는 K55기지주변의 송탄시 상공인회(회장 이경추·52)도 같은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K6기지의 서쪽에 위치한 팽성읍 대추리 주민 1백50가구 6백여명은 기지가 확장될 경우 자신들의 집과 농토가 수용당할까봐 근심어린 표정을 보이고 있다. 이 마을 강신종씨(77·농업)는 『현 기지내에 살다가 지난 53년 쫓겨와 이곳에 정착했는데 만약 기지가 확장돼 다시 집과 땅을 내주게 되면 이전해 갈곳이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했다. 한 주민은 『미군기지가 들어서면 퇴폐문화의 확산,마약·AIDS의 창궐등 각종 병폐와 사회문제가 발생,전형적인 기지촌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 주권회복·안보확립의 “양면포석”/용산미8군기지 이전의 의의와 파장

    ◎“기존 기지와 인접”… 전략가치등 고려/완전 이전까지 6년 소요… 예산확보 어려움 따를듯/“오산등 개발촉진… 경제활성화 기대” 용산기지가 1백10년만에 한국에 반환되어 주권과 영토를 되찾게됐다. 서울의 한 가운데인 용산구 용산동 용산기지는 임진왜란때인 1592년부터 1593년까지는 왜군의 병참기지로 최초로 외국군에의해 사용되다 1882년 임오군란땐 청군에,그리고 1904년 노일전쟁땐 일본군에 각각 점령돼 기지로 사용됐다.그후 1945년 9월 미군에 접수돼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주권이 미치지못하는 미군의 아성이었다.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이 군사고문단 5백명만 남기고 철수한 50년 6월까지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이 지역을 2년간 사용한 일은 있으나 6·25전쟁때에는 북한군의 병참기지가 되었다가 서울을 수복한 이후 50년 9월부터 현재까지 만40여년간을 미군이 사용해 왔다. 용산기지는 한강에 근대적인 수리시설이 완비되기전까지만 해도 상습침수지역으로 한강의 여의도처럼 쓸모없는 모래땅이었으나 한강에 인도교가 놓이고 수리시설이 완비된뒤 서울의 인구가 1천만이 넘는 세계적인 도시가 되자 서울의 노른자위 땅이 되었다. ○“세계최대 공원 조성” 용산기지는 미8군사령부기지 92만3천여평을 비롯,골프장 9만여평,국방부및 구육군본부부지 9만1천여평,조달본부 4만2천여평등으로 전체대지면적이 1백14만6천여평이나 되어 우리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나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를 능가하는 세계적 수준의 공원으로 개발할 수도 있다. 1백만평이 넘는 용산기지가 서울 중심부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 교통체증과 도시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있으며 주권국가의 수도권 심장부에 외국군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온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용산기지는 70년대 이후부터 수도 서울을 기형적으로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직선으로 뻗어야할 도로와 다리를 우회시켜야하고 주변은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여 건축규제를 받아야 했으며 지하철 조차 이곳을 통과하지못해 노선을 변경해야 했다. 1945년 9월8일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제24군단과 7함대의 해군·해병을 태운 42척의 함정이 인천항에 도착한 뒤 미군은 일본군사령부로 사용되던 용산의 군시설을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접수 사용,용산기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용산기지에는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붉은벽돌의 2층 건물에서부터 AFKN방송시설,지하의 통신시설,지난해 준공한 9층의 드래곤호텔,면세품점,미국인학교,각종 오락시설들이 있어 「용산시」혹은 「용산합중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한미군사령부 4만3천여명의 병력이 「더 유에스 용산 컴파운드」의 총 지휘를 받으며 완벽한 통신·지휘체제를 갖추고 있다. 용산 주한미군사령부의 중요부대는 동두천의 보병2사단과 오산의 제7공군이다.주한미군은 전국 1백개부대에 흩어져 있는 육군과 15개 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공군등이 주력이며 미국방부문관과 해군및 해병대행정지도요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한 미군은 서울·동두천·오산 이외에 의정부·평택·대구·군산·부산·진해 등지에 첨단기자재와 정보통신망,한국군의 수십개사단과맞먹는 화력을 유지하며 1백55마일 휴전선을 지키는 첨병으로 한국인들에게 든든한 보루가 되어왔다. ○국방정책 공개 추진 정부는 88년 제6공화국출범이후 도심군용시설교외이전계획과 휴전선부근의 민간인 통제선과 어로한계선을 대폭 완화해 시민생활에 불편이 없는 공개국방정책을 추진,육군본부와 공군본부를 이전한데 이어 미국정부와도 협의,용산기지 이전계획을 착실히 추진해 왔다. 미군기지는 그동안 계룡대부근의 대전·공주권과 미군시설이 있는 오산·평택등이 논의되어왔으나 오산·평택이 기존의 미군시설이 있으며 2사단이 있는 동두천과도 가까워 전략적·경제적·지리적여건을 감안,이번에 선택된 것같다. 미제7공군사령부가 있는 오산은 부근의 우리공군의 작전사령부와 인접해있으며 평택의 미육군23지원단도 계룡대의 육·공군본부와 서울의 합참과 중간거리에 있어 효과적인 작전을 펼수 있기 때문이다. 건설경기가 과열로 치닫고 있는 요즈음 신기지를 건설하려면 1백만평에 이르는 부지를 확보하기도 어려울뿐 아니라 공사기간도 6∼7년이나 걸려 자금소요도 2∼3배나 늘어날것으로 예상되어 국가경제의 부담이 클것으로 보인다. 국방부는 용산기지가 중부권 중심인 오산·평택지역으로 이전됨에따라 이전지역에 대한 도로·상하수도·전기등 사회간접시설에 방대한 투자로 인한 지역개발이 촉진되며 고급장교들의 가족이전·방문객·관광객의 증가로 지역경기가 크게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육군과 공군본부가 이전한 계룡대지역은 논산군 두마면이라는 한촌이었으나 대규모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부터 신흥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볼때 평택과 오산지역도 멀지않아 준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게 될것이라고 국방관계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준국제도시 전망도 주한미군은 1단계철수시한인 92년말까지 약3만6천여명으로 감축되며 앞으로 2단계,3단계로 나뉘어 감축하게되어 있어 용산기지가 이전되는 오는 97년까지는 대체로 현재규모에서 약 절반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1백만평이나 되는 용산기지이전은 결코 간단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 도쿄와 오사카의 기지를 옮기는데 10∼15년의 기간이 걸렸다. 용산기지를 6년안에 이전한다는 정부의 야심적인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기에는 예산확보와 주민반대·군사시설 설계과정을 통해 상당한 진통이 있을것으로 예상된다.
  • 80일만에 37도선돌파…병참선 재정비(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4)

    ◎북경자료 분석 통한 진겸 교수의 추적/보급난 간파한 유엔군,대대적 기습 반격전/“한강이남 포기… 휴전 모색” 건의에 모가 반대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기 앞서 김일성은 12월초 비밀리에 북경으로 가 모택동을 만났다.두 사람은 이자리에서 중국·북한군 통합사령부를 창설키로 합의했고 팽덕회가 총사령관겸 정치장교로 임명됐다. 팽덕회는 공세작전의 성패는 병참에 달렸다고 판단,즉시 수송 및 보급망 개선에 주력했다.이와함께 중공당중앙군사위는 국공내전참전 용사 8만4천명을 추가동원하고 인민해방군 제19군단에 대해서도 51년3월까지 춘계대공세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의 3차공세는 50년12월31일 시작됐다.초기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돼 이듬해 정월 2일까지 중·북한합동군은 유엔군 방어선을 15∼20㎞정도 밀고 내려갔다.중국지원군 38군과 조선인민군 1군은 서울과 인천을 향해 진격했고 중국군 42군은 인민군 제2,제5군의 지원을 받아 홍천,횡성으로 밀고들어갔다. 이들은 1월4일 서울을 함락하고 1월8일에는 37도선까지 밀고내려갔다.그쯤에서 팽덕회는 전황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중공군들이 엄청난 곤경을 겪고있었기 때문이다.팽은 유엔군이 비록 후퇴를 거듭하고 있지만 전력의 우위와 반격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공격작전을 중지하고 현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전전선에 시달했다. 1월8일 중공군사령부는 「조정기 중 우리의 할일」이라는 지침을 각급부대에 하달,차기 공세에 대비할 것을 명령했다.팽은 공격중지로 유엔군이 반격할 여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았지만 단시일내에 반격해오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팽의 건의대로 공격중지를 허락했지만 미군에게 반격능력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51년1월14일 모는 팽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미군은 최악의 경우 부산·대구지역에서 대규모 저항을 할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한국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월25일 중·북한군지도부는 춘계대공세를 위한 합동작전회의를 개최했다.같은날 유엔군은 김포,인천지역에서 대규모 반격작전에 나섰다.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장군이 불의의 자동차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매튜 리지웨이장군이 대신 작전지휘를 맡았다.리지웨이장군은 중공군의 작전수행능력이 물자,전투장비의 보급난 때문에 1주일 단위로 제한돼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리지웨이장군은 유엔군이 화력·기동성·보급면에서 앞서기 때문에 최단시간내 공세로 국면전환이 가능하다고 보고 반격작전에 나섰다.갑작스런 반격에 당황한 중·북한 합동군사령부는 춘계공세계획을 일단 중지하고 유엔군 저지에 나섰다. 1월27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미군의 작전목표가 『중국군을 한강 이북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탄약,식량의 부족 때문에 3월말까지는 이들의 공격을 저지하기가 힘들다고 보고했다.이와함께 팽은 『정치적으로 가능하다면』한강 이남지역을 포기하고 적당한 시점에서 휴전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그러나 모는 1월28일 저녁 팽에게 전문을 보내 반격할 것을 명했다.모는 이 전문에서 ▲4차공세의 목표는 미군과 이승만정권을 몰아내고 대전과 안동 이북을 점령하는 것▲중국군이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주공격을 원주·홍천방면에 집중시킬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고▲대전·안동이북을 차지하면 일단 2∼3개월 힘을 모은 뒤 마지막 5차공세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팽은 다음날 중·북한군 합동작전회의에서 모의 뜻을 전달하고 반격작전을 개시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전세로 보아 전면반격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선 현위치를 고수하고 서부전선에서만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서부의 중국지원군 제50군과 38군예하 1백12사단은 현위치를 지키고 제39·40·42·66군은 횡성과 지평리에서 진격해오는 유엔군을 공격하도록 했다.동시에 북한인민군 제2군과 제5군은 평창에서 한국군 제7사단을 공격,남진활로를 뚫도록 했다. 전면공격을 요구한 모의 지시에 크게 미흡한 작전계획이었지만 팽은 사실 이 정도도 무리라고 생각했다.1월31일 팽은 모에게 전문을 보내 현시점에서 반격을 개시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팽은 중국병사들이 식량·탄약·신발보급을 제대로 못받아 『눈길을 맨발로 걸어야 할』형편이라고 밝혔다.팽은 2월12일을 공격개시일로 잡았음을 알리고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한국전 전반에서 상황이 불리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공군의 반격은 2월 11일 횡성·원주지역에서 시작됐다.작전초기 한국군 제8사단을 상대로 잠시 승리를 거둔 중공군은 미제2사단의 우세한 탱크·포 화력앞에 많은 전사자를 내고 결국 지평리에서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중·북한 합동군사령부는 37도선북쪽과 38도선 이남의 두곳에 방어선을 치고 둘 중 한곳에서만이라도 유엔군의 북상을 막아보려고 했다.그리고 팽덕회는 북경으로 가 3월말까지 머물며 모와 향후전략을 숙의했다. 팽의 보고를 받고 한국전에 대한 모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모는 3월1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1년안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당초의 생각을 바꿔 전쟁이 2년 정도 더 끌 것같다고 밝혔다. 모는 중국군이 심각한 병참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단위부대 병력충원에 1개월 이상씩 걸린다고 말하고 『38도선 이북을 다시 적에게 내줄 가능성이높다』고 실토했다.이러한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모는 마침내 전략상의 일대 수정을 가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바로 장기전에 대비,총병력을 3개조로 나눠 교대로 전선에 투입한다는 전략이었다.
  • “공군지원불가”소 표변에도“파병강행”(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2)

    ◎북경자료 분석 통한 진겸 교수의 추적/모 “우리 안보·세계공산혁명과 직결”/“미서 핵은 안쓸 것” 재래식 전쟁 예상 모택동이 한국전 참전을 결심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모가 10월2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이 전문에서 『우리가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한 이상 우리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을 궤멸시키고 그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모택동은 한반도 전체를 「해방」시킨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는 그러나 중국군 파병을 결정하면서 한편으로는 미국이 중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는 미 공군이 중국의 주요 도시와 산업시설을 공습하고 미 해군은 해안공격을 감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는 그러나 중국군이 미군 특히 미8군을 패퇴시킨다면 미국의 대중국 선전포고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한반도가 「해방」된 후에는 중국과 미국이 전쟁을 치르더라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모택동은 그러나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고 한국전쟁은 답보상태에 빠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이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방지하기 위해 소련의 무기지원하에 중국의 풍부한 인력자원을 활용하는 이른바 「인해전술전략」을 쓰기로 결심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미국이 중국의 한국전 개입에 대한 보복으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까도 크게 걱정했다. 그러나 모는 이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다. 그는 9월5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고집한다면 아마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택은 그들 손에 달려 있다. 만약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수류탄을 사용하는 「원시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약점을 간파,마침내 그들을 패배시킬 것이다』 10월초 열린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도 미국의 핵무기 사용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중요성이 별로 없는 「제2의제」에 불과했다. 모와 중국 지도부는 한국전은 핵전쟁이 아닌 재래식 전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모택동과 중앙군사위가 한국전 개입을 결정한 후 중국 군수뇌부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10월8일 팽덕회는 심양으로 날아갔다. 그는 고강의 지원을 받아 「지원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날 저녁 팽덕회는 심양에 와 있던 김일성의 특사 박일유와 만나 중국군의 한국 진입문제를 논의했다. 같은 시간 평양에서는 예지량 북한 주재 중국 대사가 김일성의 지하사령부를 방문,중국군 파견결정을 통보했다. 다음날 팽덕회는 급히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안동으로 향했다. 팽덕회는 안동에 도착,한국전 상황을 검토한 후 모에게 긴급전문을 보냈다. 『우리는 보병 2개 사단과 포병 2개 사단을 한국전에 우선 참전시킬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초의 계획은 변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군대(4개 보병사단,3개 포병사단 및 3개 대공포연대)를 압록강 남쪽 제방에 집결시켜야겠습니다』 모택동은 현지사령관의 이날은 작전변경을 즉각 승인했다. 중국군은 마침내 한국전에 참전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상황이 갑자기 달라졌다. 10월10일경 소련이 당초 약속한 공군지원을 제공할 수 없다고 중국에 통보한 것이다. 소련은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공군지원을 늦출 수밖에 없다고 전해왔다. 소련의 갑작스런 태도변화는 중국 지도부를 당황케 만들었다. 10월11일 모는 팽덕회와 북동지역 주요 지휘관들에게 제13군단의 모든 군사활동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타전했다. 팽덕회와 고강은 북경에 돌아와 정치국회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택동이 10월8일 중국군의 한국전 참전명령을 내린 직후 주은래는 한반도에서의 구체적인 중소 군사적 협력 사항을 마무리짓기 위해 소련으로 날아갔다. 주은래는 러시아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임표와 왕가상 소련 주재 중국 대사와 함께 흑해연안의 한 별장에서 스탈린을 만났다. 소련이 공군지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은래는 스탈린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주의 노력도 모두 허사였다. 중국 공산당 정치국은 10월13일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결과 중국 지도자들은 소련의 공군지원이 없더라도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회의가 끝난 후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나는 정치국 동지들과 참전문제를 협의했소. 그결과 중국군을 파견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소. 전쟁 초기 우리는 한국군과의 전투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며 승리를 장담할 수 있소. 우리는 원산과 평양을 잇는 거래한 산악지대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오. 우리가 만약 개입 초기 한국군 수개 사단을 패퇴시킨다면 한국의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오. 이같은 적극적인 전략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동구 더 나아가 전세계에도 유익할 것이오. 만약 우리가 파병하지 않는다면 적군은 압록강까지 진출하여 거드름을 떨 것이오. 이같은 상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지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오. 요컨대 우리는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오. 참전은 그만한 대가가 있을 것이오. 참전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역작용이 있을 것이오』 중국이 소련의 공중지원없이도 한국전 참전을 강행한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중국소식통에 의하면 주은래가 중국의 참전을 알리자 스탈린도 놀라며 크게 동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안보와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모택동의 강한 집착을 감안한다면 참전결정은 당연한 것이며 불가피한 것이었다.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의 운명은 중국의 국가 안보이익뿐만 아니라 동구와 세계의 사회주의혁명과도 직결된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소련의 갑작스런 공중지원 거부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이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감행한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 6·25 전상자 임학준씨의 “인간승리”

    ◎전쟁상흔 딛고 “이웃사랑 반평생”/휠체어 타고 재활촌 건립등 앞장/30대에 대학진학,이젠 중견기업가로/장학회 운영… 불우한 이웃에 거금 “선뜻” 『6·25는 내몸을 불구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그대로 나와 같은 불우한 전쟁의 희생자를 도우라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남겨준 전체적 장애를 딛고 반평생을 동료 상이용사들을 돕는 데 몸바쳐온 전상1급 국가유공자 임학준씨(60)는 6·25 발발 41주년인 25일 이렇게 말했다. 임씨가 부상을 당한 곳은 적군과 아군간의 접전이 한창이던 50년 9월30일 포항 부근 피악산에서였다. 『지프를 타고 이동하다 적군의 포격을 받고 기절했다 깨어보니 소대원 3명은 이미 숨져 있었고 척추와 팔·다리엔 온통 파편투성이었습니다』 아직도 악몽 같은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임씨는 그때 부산 육군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다 끝내 군문을 나서야 했다. 『불구의 몸으로 세상을 나오니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더군요』 한동안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임씨는 57년 대한상이군경회의 전신인 상이용사회의 업무이사직을 맡으면서 자신과 같은 전쟁희생자를 돕는 데 평생을 바치기로 다짐했다. 그것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기도 했다. 처음 손을 댄 것이 상이군인들의 재활용사촌 건립사업. 『제몸 하나 추스리지 못하는 병신(?)이 너무 설친다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미8군 한미재단,군부대 등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모두 찾아다니며 목재와 불도저 등의 건축장비를 지원받아 64년 관악구 신림동에 32가구,66년 노원구 공릉동에 20가구,67년 강동구 방이동에 30가구의 집을 지었다. 상이용사를 위해 불같이 뛰던 임씨는 32살 때인 63년 건국대 법과에 진학했다. 가난으로 포기해야 했던 상급학교 진학의 꿈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내 전미자씨(57)와 조카 윤복씨(47)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임씨를 업고 4년 동안 학교계단을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68년 군경회 서울지회장을 끝으로 군경회를 떠난 그는 그 동안 모은 재산으로 고철수입,건설업 등에 뛰어들었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 트럭 20여 대로 시작한 화물운송사업이 번창하면서 그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임씨는 화물운송사업을 기반으로 현재 노원구 중계2동의 한윤교통,화물운송의 일신상운,스포츠용품 수출업체인 선미스포츠 등 3개 회사를 거느린 어엿한 경영자로 발돋움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도 한시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웃을 잊지 않았다. 72년 일신상운의 이름을 따 「일신장학회」를 설립,지금까지 가정환경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 하는 중·고교생 1천7백67명에게 1억5천여 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한 것을 비롯,83년에는 경기도 용인군 구정면에 고아원을 지어 수도원에 기증하기도 했다. 부인 전씨는 남편에 대해 『사업을 하면서 지나치게 구두쇠 노릇을 해 욕도 많이 먹었다』면서 『그러나 자기보다 어려운 이를 돕는 데는 결코 인색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25일 자신의 땀이 배어 있는 서울 노원구 화랑용사촌에서 옛전우를 만난 임씨는 『6·25와 같은 전쟁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면서 젊은이들에게보다 높고 멀리 눈을 돌려 나라를 생각하고 조국에 대한 긍지를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 용산 미군부대 부지/9만여평 내일 환수

    국방부는 서울 도심지에 주둔하는 미군부대를 교외로 이전한다는 계획에 따라 미8군 골프장 안에 있는 헬기장,AFKN 안테나,복지회관,야구장 부지를 제외한 9만여 평을 1일자로 환수하고 가족공원 조성공사를 시작해 93년말에 완공할 계획이라고 30일 밝혔다.
  • 청와대 민정수석 안교덕씨

    노태우 대통령은 1일 하오 공석중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장관급)에 안교덕 농수산물유통공사 사장을 임명했다. ◇안교덕 민정수석 약력 ▲경북 울진출신(57세) ▲육사11기 ▲서울 문리대 영문과졸 ▲육사교관 ▲맹호사단 작전참모 ▲미8군 연락장교단장 ▲연대장 ▲정우개발 사장·부회장 ▲11대의원(민정·전국구) ▲농개공사장 ▲농수산물유통공사 사장 겸 한국냉동 사장
  • 외화 1백32만불/미국으로 빼돌려/건설회사 대표 영장

    서울시경은 16일 전 대양건설 대표 조영석씨(44·서초구 반포동 삼호가든맨션 가동)를 외국환관리법 위반 및 업무상횡령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외자재공급회사인 미국 오리엔트사 대표 박용관씨(48) 등 6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조씨는 88년 1월20일부터 경기도 동두천에서 미8군의 사병숙소 등을 건설하는데 사용할 외자재를 수입하면서 외자재공급회사인 미국 오리엔트사 대표 박씨 등 수배중인 3개사 대표 등과 짜고 3백37만달러인 수입외자재의 가격을 4백69만달러인 것처럼 거짓 서류를 꾸며 1백32만달러를 불법유출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조씨는 또 미국으로 출장을 가 차액을 수령하거나 국내은행의 비밀구좌에 소액씩을 송금하도록 해 회사에 입금시키지 않고 3억8천여만원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 용산 미군골프장 6월1일 폐쇄/남성대로 옮겨

    ◎내년중 시민공원 조성키로 서울 용산 미8군 골프장이 오는 6월1일자로 폐쇄되며 92년 6월25일까지 한국측에 인계,이자리에 곧 대단위 가족공원공사가 시작된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15일 『지난해 6월 용산 미8군기지 1백6만평을 오는 96년까지 미군으로부터 돌려받기로 한미간에 합의된 바에 따라 이중 골프장부지 9만여평이 오는 6월1일 폐쇄된다』고 말하고 『이자리는 서울시가 시민휴양공원으로 꾸미게 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용산골프장이 폐쇄된 이후 클럽하우스와 헬리콥터착륙장 등 군사시설들을 타지역으로 이전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고 말하고 『골프장이외의 1백여만평은 96년말까지 연차적으로 돌려받게 되며 공원 주변에는 시민들의 이용빈도가 높은 문화·교육·체육시설을 설치하고 내부에는 지형을 고려한 울창한 숲으로 가꿀 계획을 서울시가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국방부의 이해종 시설국장은 이날 『용산 미군기지가 이전하게 되면 이땅은 국방부의 소유이나 사용권은 서울시에 양도하는 방식으로 넘겨지게 된다』고말하고 『새로운 미군기지의 부지와 시설은 군용기의 교외이전특별회계에 의해 추진되게 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미8군의 골프장은 남성대골프장으로 이전하며 이 골프장은 기존의 18홀 규모의 골프장 옆에 새로 미군만을 위한 18홀 규모의 골프장을 이미 건설했다고 말하고 골프장부지는 국방부 소유로 순공사비만 2백억원이 소요됐다고 설명했다. 서울시가 미8군 골프장을 인수받아 내년에 가족공원 조성공사에 착수하면 오는 92년말에 완공하게되며 이 가족공원 주변에는 팔도공원·세계공원·과학공원·근린공원 등이 연이어 들어서게 된다.
  • 영등포전화국등 15개 교차로/내일부터 좌회전 금지

    ◎사고위험 횡단보도 14곳 폐쇄/대학로등 12곳 야간주차 허용/서울시경,교통체계 대폭 개선 서울시경은 8일 날로 심화되는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당산역 및 영등포전화국 로터리 등 15개 교차로의 좌회전을 금지시키고 부족한 주차공간 마련을 위해 대학로 등 12개 가로에 시차제 주정차(하오9시부터 다음날 상오7시)까지를 허용하는 시내 교통체계를 대폭 개선,10일부터 시행키로 했다. 시경은 좌회전 금지에 따른 우회전운행을 최소화하기 위해 당산역 로터리 등 9개 교차로에 U­턴을 허용키로 했다. 시경은 또 횡단보도가 밀집돼 소통에 지장을 주거나 사고위험이 있는 미아국교 앞 등 14개소의 횡단보도를 폐쇄하는 한편 교통정체가 심한 영등포로터리∼서울교 남단까지 가변차선을 설치,내년 1월부터 운영키로 했다. 시경은 이와함께 중곡 및 압구정 교차로는 각각 상오7시부터 9시까지와 하오10시부터 다음날 상오7시까지 시차제로 좌회전을 금지하고 전농동로터리 등 5개 로터리의 신호를 직진·좌회전 동시신호로 바꾸며 밤시간의 차량통행이 한산한데도신호기를 운영,불편을 주고있는 중부시장앞 등 91개소는 자정부터 상오6시까지 황색점멸 등으로 처리키로 했다. ▷좌회전 금지◁ ▲당산역 로터리 ▲영등포전화국 로터리 ▲옛 영등포경찰서 앞 ▲여의도 동로고수부지 입구 ▲홍릉 가스주유소 ▲광업진흥공사 광장로터리 ▲청구성심병원 ▲모래내 설렁탕집 ▲서부세무서 로터리 ▲신월동 동아생명 ▲서울고 로터리 ▲양재전화국 로터리 ▲서초 삼호아파트 로터리 ▲무학여고 앞 ▷시차제 주정차◁ ▲돈화문로 ▲배오개길 ▲대학로 ▲훈련원로 ▲마른내길 ▲한강로 ▲강남대로 ▲도산대로 ▲도봉로 ▲의주로 ▲시흥대로 ▲언주로 ▷횡단보도 폐쇄◁ ▲미8군 6호정문 ▲의료보험공단 ▲망원동 노노식품 앞 ▲도봉산 갈비집 ▲강동경찰서 ▲강동 미주식당 ▲강동 대화합판 ▲강동 우리식당 ▲강동 현대컴퓨터 ▲미아국교 ▲석관로터리 ▲면목동 민속관광 ▲동1로 주택은행 ▲면일국교
  • 용산 미 8군 골프장/내년 3월 완전 폐쇄

    용산 미8군 골프장이 내년 3월 완전 폐쇄돼 우리나라측에 반환된다. 외무부가 28일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용산 미군기지내 골프장은 지난 3월 폐쇄된 이후 그 동안 시설물 철거작업을 벌여왔으며 이 작업이 완료되는 내년 3월중으로 우리나라측에 반환된다는 것이다.
  • 외언내언

    서울시가 용산 미8군 이적지 활용방안에 대한 시민설문 조사를 한 것이 있다. 이 결과는 여러 측면에서 오래간만에 환한 이미지를 보여 준다. 우선 이런 설문을 시민에게 직접 해보았다는 방법도 쓸만하다. 각 구별로 1천4백여 명이 넘게 응답회수율을 보였는데 1천명만 넘으면 사회의식조사로서는 충분한 의사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원칙에서 그 샘플량도 성공하고 있다. ◆시민의 의사는 더욱 즐겁다. 87%가 녹지공간을 온전하게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휴식과 산책을 위한 근린공간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것을 「유료」로 해서라도 보다 깨끗이 쓰는 것을 68.4%가 강조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녹지의 마지막 보루 그린벨트마저 와해돼 가고 있는 정책방향에 이런 시민의 뜻이 있다는 것은 다시 한번 모든 정책 결정에서 기억되어져야만 할 것이다. ◆구체적 시설의 항목들 조사에선 더 건강해 보인다. 순수한 녹지공간에 96.6%,굳이 체육시설이라면 배드민턴장 정도를 77.5%가,문화시설이라면 도서관을 84.2%가 지지했다.그러니 여타 시설들의 항목은 대부분이 거부하고 있는 게 된다. 어린이 놀이시설,경기장,위락시설들은 「없어도 그만」이라는 답변까지 크게 나왔다. 체계적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일상적인 느낌으로도 오늘날 도시민이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는가를 서울시민도 알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도시들이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은 도시의 과밀성으로부터 도시민의 정서를 회생시켜 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 어떤 시설도 없는 녹지공간의 확보이다. 미국 도시들의 공원에는 이제 사람이 걷는 길마저 내지 않는다. 길은 공간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앉을 자리도 붙여 놓지 않는다. 옆사람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자동차 귀가길에 있는 가로수에 더 관심을 갖는다. 시각적으로 나마 녹색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절대녹지공간을 요구하는 시민의 마음은 우리가 살아나갈 가장 건전한 믿음이다.
  • 미8군 경비용역업체/노조대표 40명 농성/덤핑계약 반발

    주한 미8군에 경비용역을 제공하고 있는 업체가운데 특정업체가 용역을 따내기 위해 미군측과 덤핑으로 계약,나머지 업체 노조원들이 사실상의 임금인상 봉쇄조치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경화ㆍ신원ㆍ봉신ㆍ초해 등 미군기지 경비용역업체 노조간부 40여명은 7일 지난6월 미군기지 경비용역을 놓고 입찰했으나 미군측은 평균 40%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이들 4개업체의 입찰을 제쳐놓고 단지 1.69%인상만을 요구한 한국경보㈜(사장 이동희)와 계약을 맺어 덤핑입찰을 유도함으로써 임금인상을 막고 있다고 주장,이의 철회를 요구하며 지난 1일부터 일주일째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3동 경화기업 노조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와함께 이들 4개업체 노조원 2천여명도 지난 1일부터 동두천 2사단기지 등 전국 10여개 미군기지에서 미8군측에 한국경보와의 계약무효화와 경비원임금 40%인상을 포함하는 내용으로 용역 재계약 등을 요구하며 근무를 전면 거부하고 있다. 미8군의 경비용역은 지난 67년부터 이들 4개회사가 나눠 맡아왔으며 3년마다 새로운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있는데 이번에 한국경보측이 용산ㆍ평택ㆍ의정부ㆍ동두천ㆍ오산 등 5개지역에 덤핑으로 응찰했다는 것이다. 현재 미8군에 종사하는 경비원들은 3천여명에 달하며 야근수당 등 제수당을 모두 합쳐 월 20만∼30여만원의 낮은 임금을 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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