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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의 LP로 들여다본 대중가요 역사

    추억의 LP로 들여다본 대중가요 역사

    # 1970년대 신중현은 대중가요 흥행 보증수표였다. 특히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신중현 사운드’ 로고가 박혀 발매된 3장의 시리즈 음반은 지금도 LP 수집가들이 탐내는 희귀 음반이다. 특히 미8군 혼혈밴드 골든 그레이프스의 데뷔 앨범인 3집은 중고 음반숍에서 500만원에 거래될 정도다. 신중현의 창작곡과 화려한 기타 리프로 채워진 3집은 2007년 300장 LP박스로 재발매됐다. # ‘가왕’ 조용필의 육성 노래가 담긴 첫 번째 음반은 독집이 아닌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1971년 오스카레코드에서 발매한 ‘뮤지칼 사랑의 일기’다. 그해 5월 선데이서울컵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 ‘김트리오’로 참가, 가수왕을 거머쥔 그는 이 앨범에 ‘사랑의 자장가’와 ‘님이여’(바비 블랜드의 ‘리드 온 미’ 번안곡),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실었다. LP 표지의 뒷면에는 스물한 살 조용필의 사진과 함께 그의 이름이 ‘조영필’로 기재돼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음악을 전달하는 수단이 LP에서 시디, MP3에서 디지털 음원으로 변해 가는 동안 LP는 책장 한편에 고이 간직된 골동품으로 남았다. 지금이야 디지털 음원으로 노래의 후렴구만 휙휙 듣고 넘기는 시대지만 LP는 수록곡의 배치와 음질, 커버 디자인까지 노래와 가수의 가치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매개체였다. 그런 LP를 통해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 발간됐다.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이 쓴 ‘대중가요 LP 가이드북’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음반 그 자체를 위한 가이드북이다. 책은 국내에서 처음 LP가 제작된 1958년부터 빌보드 2위에 오른 싸이까지 총 191장의 음반을 살펴본다. 1964년 발표된 신중현의 밴드 ‘에드포’의 데뷔 음반, 국내 최초의 밴드 앨범인 키보이스 데뷔 음반, 유재하의 유일작 ‘사랑하기 때문에’ 등 수많은 아티스트의 등장과 사라짐이 목록 속에 반복된다. 또 LP의 초반과 재반을 비교하면서 음악과 가수에 관한 뒷이야기도 접할 수 있다. 1967년 발표된 윤복희의 데뷔 음반은 그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으로 초반을 장식했지만 재반에서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평범한 사진으로 대체됐다. 한대수의 1집은 LP 커버를 가득 채운 ‘불온한’ 자화상 때문에 판매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1974년 새로운 재킷 사진으로 재발매됐으나 역시 판매가 금지됐다. 책에 소개된 앨범들은 2월 말까지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복합 카페 갤러리 ‘1984’에서 전시된다. 부록으로는 LP 음반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한 추천 LP 음반들을 정리했다. 3만 5000원.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토지거래허가구역 287㎢ 6일부터 풀린다

    토지거래허가구역 287㎢ 6일부터 풀린다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된 면적의 60%가 풀린다. 국토교통부는 전국 토지거래허가구역 287.228㎢를 해제한다고 5일 밝혔다. 여의도 면적의 64배다. 이에 따라 토지거래허가구역은 전 국토의 0.2%에 해당하는 195㎢만 남게 됐다. 중앙행정기관 이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개발사업 등으로 투기 우려가 높은 세종시와 대전시에 지정된 허가구역은 이번 해제 대상에서 빠지고 내년 5월 말까지 재지정된다. 이번 해제는 땅값 안정으로 허가구역 지정 사유가 소멸된 지역, 장기간 지연되고 있는 개발사업지구와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허가구역이 풀린 주요 국책사업지구는 황해경제자유구역, 광명시흥·하남감일·하남감북·과천지식정보타운 보금자리지구 등이다. 의왕백운지식문화밸리지역 등 지자체 사업도 포함됐다. 이들 지역은 개발사업자의 재무여건 악화 등으로 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방치돼 토지를 소유한 주민들이 장기간 재산권 행사를 제한받고 있던 곳이다. 보상을 예상하고 토지를 담보로 대출받거나 주변 토지를 매입(대토)했으나 보상이 지연돼 이자 부담 등이 가중되고 있다. 하지만 허가구역 해제와 국책사업 추진 여부는 무관하다고 국토부는 설명했다. 유병권 토지정책관은 “허가구역이 풀린다고 개발사업이 무산되는 것은 아니고, 개발지역 보상은 지구지정일 해당 연도의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평가 당시의 정상적인 지가 상승분만 반영하므로 허가구역 해제에 따른 사업비 증가 우려도 없다”고 설명했다. 해제는 수도권과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서울에서는 고덕강일 보금자리지구를 포함해 용산구 용산동 미8군기지 국공유지, 강남구 자곡·세곡동 일대 주거지역이 허가 대상에서 풀렸다. 경기도에서는 성남 수정구 신촌·오야동 일대와 분당구 운중·석운동 일대, 하남시 보금자리주택지구와 주변 지역이 해제됐다. 인천은 경제자유구역과 주변 지역이 대거 풀렸다. 대구·광주·울산광역시와 경남은 이번 조치로 국토부 지정 토지거래허가구역이 모두 해제됐다. 해제 대상에서 제외된 지역은 내년 5월 30일까지 허가구역이 유지된다. 국토부는 해제 지역이더라도 땅투기 우려가 생기면 허가구역으로 재지정할 방침이다. 허가구역에서 풀린 곳에서는 6일부터 시장·군수·구청장의 허가 없이 토지 거래가 가능하고 기존에 허가받은 토지의 이용 의무도 소멸된다. 세종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현장 행정] ‘서울의 중심’ 도약 꿈꾸는 성장현 용산구청장

    [현장 행정] ‘서울의 중심’ 도약 꿈꾸는 성장현 용산구청장

    “한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신뢰행정을 구축하겠습니다.” 28일 구청 집무실에서 만난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신뢰’와 ‘소통’을 강조했다. 성 구청장은 “구청장이 바뀌었다고 이미 약속된, 결정된 것을 뒤집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면서 “행정의 연속성이 있어야 주민이 관(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다”고 했다. 이미 오래전에 결정된 한남뉴타운 개발은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서 계속 추진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그래야만 주민 갈등과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하고 낙후된 주거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용산구 한남동 일대는 서울의 강남·북을 연결하는 요충지이면서도 미8군 등 군부대 등으로 주거정비사업에서 소외된 대표적인 지역이다. 아직도 이태원 등에는 소위 쪽방촌과 비슷한 주택들이 밀집해 있다. 또 용산개발이 무산되면서 이촌동 일대 주민들도 많은 유무형의 피해를 봤다. 이런 어려움에 처한 지역 주민을 위해서라도 한남뉴타운 등 지역개발을 멈출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성 구청장은 “지역 조합 의견과 서울시 협의 등을 통해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선제적 지원을 하겠다”면서 “앞으로 용산구를 서울의 중심으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 국비와 시비 등 500억원이 투입된 한강로 침수대책도 마무리되고 있다고 했다. 삼각지와 용산역 주변은 지대가 낮아서 여름철 침수 피해를 당하는 지역이다. 그는 “서울역에서 한강로에 이르는 거리는 서울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상징거리”라면서 “이런 곳이 침수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2015년 지하 빗물저류조 3곳과 펌프장 등이 새로 들어서면 한강로 일대는 침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소통 행정’도 되새기고 있다. 성 구청장은 “소통이란 단순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해야만 진정한 소통이 된다”면서 “마권발매소 이전 문제도 마사회와 적극적인 소통으로 풀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명관 한국마사회장과의 만남은 미뤄졌지만, 마사회도 우리 주민들의 뜻을 이해하고 이전 강행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소통을 위한 노력이 주민에게 질 높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구의회와도 여야 정당을 떠나서 용산구 발전을 위한 상생을 가능케 했고 각종 인허가 민원의 원스톱 서비스로 ‘행정서비스 우수구’에 오르기도 했다. 성 구청장은 “책상 앞에 앉아 있기보다는 현장으로 나가 구석구석 살피면서 현실에 맞는 행정을 펼치려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노원구 ‘실버스타 K’는 누구?

    서울 노원구가 구립 실버악단 전속가수를 모집한다고 16일 밝혔다. 모집인원은 45세 이상 2명으로, 노원구에 6개월 이상 거주한 주민이면 가능하다. 접수기간은 오는 20일부터 다음 달 12일까지로, 구청 어르신복지과를 방문해 신청하면 된다. 구는 다음 달 14일 오후 상계 3·4동 복합청사에서 응모자를 대상으로 실기시험을 치른다. 응시자는 자유곡 1곡을 반주기의 연주에 맞춰 부르면 된다. 합격자는 다음 달 20일 구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버악단 전속가수 활동기간은 오는 3월부터 12월까지로, 주 1회 정기연습과 각종 공연무대에 출연할 기회를 준다. 매월 30만원의 사례비도 지급된다. 실버악단은 2009년 4월 음악을 사랑하는 노인들이 모여 음악으로 인생을 나누고자 결성됐다. 단원 14명의 평균 연령은 72세로, 군악대와 방송국 관현악단, 지방자치단체 오케스트라, 주한 미8군 쇼무대 등에 올랐던 단원도 있다. 노원구 관계자는 “청마의 해 구립 실버악단이 한층 더 발전하고 새로 거듭날 수 있도록 관심 있는 지역 주민의 많은 참여로 실버 아이돌의 꿈을 이루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데스크 시각] 오보의 추억/이종락 사회부장

    [데스크 시각] 오보의 추억/이종락 사회부장

    ‘100건의 특종보다 1건의 오보를 조심하라.’ 언론사에서 선배 기자가 후배 기자들에게 늘 해주는 말이다. 기자의 신념이나 편견이 본질을 가려 잘못된 보도를 할 수 있다. 취재원에게 속거나 고의로 오보를 내는 경우도 있다. 특종은 기자의 영예이고, 오보는 기자에게 치명상이 된다. 하지만 기자에게는 지금껏 자랑스러워하는 오보에 얽힌 추억이 있다. 지난 2000년 10월 서울지검을 출입하던 기자는 지난해 서울중앙지검장을 퇴임한 최교일 당시 외사부 부부장검사에게서 부탁을 받았다. 외사부는 한강에 독극물인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토록 지시한 미8군 용산기지 영안실 부소장 앨버트 맥팔랜드에 대한 신병 처리를 놓고 고심하던 터였다. 맥팔랜드의 죄질로 봐서는 기소해 법원의 재판을 받게 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미국 측의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던 정부는 한국 사법기관 최초로 주한미군 관계자를 환경범죄로 처벌하는 결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정부 고위층은 불기소 벌금형을 선택하고 이를 검찰에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최 부부장에게는 본인의 양심과 소속 검사들의 반발, 국민들의 저항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최 부부장은 친분이 두터운 기자를 통해 어려움을 해결해 보겠다는 심산이었던 같았다. 검찰이 맥팔랜드에 대해 기소가 아닌 벌금형을 결정할 것이라는 기사를 보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사가 나간 뒤 검찰 내부와 시민단체 등의 반발을 등에 업고 기소하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바꿔 보겠다고 했다. 기자는 오보에 대한 부담이 있었지만 고민을 거듭한 끝에 애국심을 택했다. 서울신문 2000년 10월 5일자 25면에 ‘검찰 맥팔랜드 사실상 벌금형 결정’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자 예상대로 검찰과 시민단체, 시민들의 강력한 반발이 잇따랐다.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불법이 명백한 이번 사안마저 기소하지 않으면 한국 사법기관과 한국민들의 자존심이 커다란 상처를 입는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검찰은 서울신문의 기사가 오보이며 아직 맥팔랜드의 기소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서둘러 발표했다. 이후에도 정부 고위층과 검찰의 갈등은 지속됐다. 5개월이 지난 뒤 검찰은 결국 외압에 굴복해 맥팔랜드를 수질환경보전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의도한 오보였지만 달갑잖은 특종이 된 셈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법원이 정식 재판에 회부함으로써 새로운 양상을 맞았다. 사법부는 2004년 1월 재판에 참석하지 않은 맥팔랜드에게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듬해 항소심에서 맥팔랜드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다. 이 사건은 아직 부족하지만 일방적으로 불평등했던 한·미 지위협정을 미·일 지위협정 수준으로 끌어올린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미군이나 미 군속들의 범죄행위는 한국법에 저촉됐을 때 당연히 처벌을 받았다. 지난 2002년 효순·미선양 사건을 비롯해 각종 성범죄를 저지른 미군들이 SOFA보다는 한국법의 기준에 따라 처벌을 받고 있다. 기자는 진실만을 보도해야 한다는 기자 윤리를 위반했지만 지금도 국익에 자그마한 보탬이 됐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23년 기자 인생에 ‘자랑스러운 오보’를 하려 했다는 특이한 이력을 내세우는 이유다. jrlee@seoul.co.kr
  • 유치곤·이천길·현봉학… 영웅을 기억하라

    유치곤·이천길·현봉학… 영웅을 기억하라

    국가보훈처는 26일 내년도 ‘이달의 6·25 전쟁영웅’ 17명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내년 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유치곤(왼쪽) 공군 준장은 1952년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의 주역으로 영화 ‘빨간 마후라’(1964년·신상옥 감독)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북한군 후방 보급로의 핵심 요충지인 승호리 철교를 미 공군은 36회나 폭파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만 거듭했다. 임무를 넘겨받은 우리 공군 F51 전폭기는 세 번째 출격 만에 철교를 두 동강 내는 데 성공했다. 1951년 5월 양평 용문산 전투의 주역인 이천길 육군 상사와 노승호 육군 하사가 2월의 전쟁영웅으로 뽑혔다. 6·25전쟁 당시 주한 미8군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 장군과 어머니에게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는 전우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편지를 남기고 참전한 아들 밴 플리트 2세 공군 대위는 3월의 영웅으로 뽑혔다.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에드워드 알몬드(소장) 미 10군단장을 끝까지 설득해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통해 9만 8000여명을 구출하게 한 현봉학(오른쪽) 박사는 12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됐다. 보훈처는 내년 7월 27일 ‘유엔군 참전의 날’에 ‘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유가족을 초청해 위로할 계획이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사설] 연례행사 공직감찰… 체계적 반부패 교육을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경찰청 등은 연말을 맞아 전방위 공직비리 감찰을 벌이고 있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한 행정관은 기업으로부터 골프 접대와 상품권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소속 부처로 인사조치되기도 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지난주 원전비리 등과 관련해 “부정부패는 무관용으로 대처하겠다”고 밝혀 고강도 사정을 예고했다. 공직 감찰은 명절이나 연말만 되면 실시하는 연례행사로 비쳐져선 안 된다. 공직자들의 부정·비리를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공직 비리는 내년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상된다. 1995년 7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17년 동안 지자체의 비리를 분석한 결과 기초자치단체는 토착비리 발생 가능성이 광역단체에 비해 훨씬 높다는 연구도 있다. 지방분권으로 재량권과 자치업무가 많아진 영향도 있다고 한다. 인허가 등 선거와 관련된 토착비리의 악순환의 고리는 반드시 끊어야 한다. 감사원 감사도 토착비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공금횡령 등의 범죄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내부감찰 기능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일선 자치단체들이 공직기강 확립을 위해 자율적인 내부통제 제도를 도입할 채비를 하고 있다.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공직자의 청렴은 국가경쟁력의 핵심 요소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지난달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뇌물방지협약 이행보고서’에서 우리나라를 협약을 이행하지 않는 국가로 분류했다. 기업의 내부고발자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점 등이 지적됐다. 국제사회에서 부패국가로 낙인 찍히면 국내기업의 해외 입찰 수주에도 불이익을 받는 등 경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조지프 F 필 전 주한 미8군 사령관은 한국에서 근무할 당시 1500달러짜리 만년필과 2000달러짜리 가방을 선물 받았다가 지난해 전역 때 소장으로 강등됐다. 미국은 공직자가 20달러 이상 선물이나 향응을 받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일부 기관들은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청렴교육의무 이수제를 도입했다. 전체 공직사회로 확대하는 등 체계적 반부패 교육을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바란다.
  • 6·25 주한미군·카투사 추모

    6·25 주한미군·카투사 추모

    김종욱(왼쪽) 사단법인 대한민국카투사연합회 회장과 버나드 샴포우 주한 미8군 사령관이 지난 16일 서울 용산 미8군 기지 내 드래곤힐라지 호텔에서 열린 연합회 초청 VIP 초청행사에 앞서 6·25전쟁 당시 전몰 미군 장병 및 카투사를 기리기 위한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대한민국카투사연합회 제공
  • [주말 인사이드] 대한민국 파수꾼 마약탐지견 A to Z

    [주말 인사이드] 대한민국 파수꾼 마약탐지견 A to Z

    우리나라는 이른바 ‘마약 청정국’으로 불린다. 하지만 최근 신종 유사마약 밀반입량이 증가하면서 청정국 입지도 흔들리고 있다. 밀반입 수법도 점점 교묘해져 단속도 쉽지 않다. 공항·항만세관에 설치된 검사 장비만으로는 마약 포착에 한계가 있다. 이러한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해 1990년부터 ‘마약 탐지견’이 등장했다. 코끝으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파수꾼인 마약 탐지견은 각 세관에서 탐지요원(핸들러)과 함께 돌아다니며 수하물을 점검한다. 냄새를 맡는 일이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마약 탐지 능력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남모를 고통이 배어 있다. 지난달 31일 오전 9시쯤 방문한 관세국경관리연수원 탐지견훈련센터(인천 중구 운북동 소재) 안은 고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멍멍 소리가 적막을 깼다. 나지막했던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외 철창 안에서 검은색 또는 옅은 황색을 띠는 래브라도레트리버(이하 레트리버) 여럿이 가을 햇볕을 쬐고 있었다. 정종수 관세국경관리연수원 교관은 “레트리버는 잔병이 많다. 피부병을 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침에 견사(犬舍)에서 나와 야외에서 일광욕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왜 외국산인 레트리버만 있을까. “진돗개는 주인에 대한 애착이 강해요. 복종심이 워낙 강해서 인사 발령에 따라 핸들러가 바뀌는 상황에 잘 적응하지 못해요. 레트리버는 그런 게 덜하거든요. 그리고 진돗개보다 후각이 뛰어나죠.”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탐지견 훈련 장소로 이동했다. 주한미군 8명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날은 제4회 관세청장배 탐지견 경진대회 두 번째 날로, 주한미군과 관세청 소속 마약 탐지견이 서로 실력을 겨루는 날이었다. 경진대회는 센터에 마련된 수하물 창고 훈련장과 대인 탐지 훈련장에서 진행됐다. 대인 탐지 훈련장 안에는 여행객 옷차림을 하고 캐리어를 들고 있는 마네킹이 서 있었다. 탐지견들에게는 훈련장마다 25분 안에 마약을 정확하게 찾는 과제가 주어졌다. 만일 제한된 시간을 넘기거나 마약이 아닌 물건을 찾는 경우 등이 감점 처리 대상이었다. 1일 대회 결과를 확인한 결과 최우수상은 미8군 탐지견에게 돌아갔다. 센터 안에는 모견(母犬·암컷)과 ‘유견’으로도 불리는 자견(子犬), 훈련견 등 총 41마리의 레트리버가 살고 있다. 그러나 유견과 훈련견이 모두 마약 탐지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후 2년까지 진행되는 훈련에서 합격점을 받아야 한다. 먼저 생후 6개월 미만 시기에는 어미 품에서 일정 기간 자라도록 한 뒤에 사람과 친해지도록 유도한다. 생후 6~12개월에는 기초 체력 훈련과 집중력 훈련 등을 실시한다. 이 훈련을 통과한 개들에 한해 마약류 인지 훈련, 탐지 능력 개발 및 세관 현장 적응 훈련이 16주에 걸쳐 이뤄진다. 이 중 마약류 인지 훈련은 훈련견이 대마,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엑스터시(MDMA)를 비롯한 신종 유사마약 등 7종의 단속 대상 마약 냄새에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이때 ‘더미’를 활용한다. 더미는 수건을 돌돌 말아 막대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마약 냄새가 난다. 처음에는 향이 강한 대마를 냄새 맡게 하고, 나중에는 냄새가 약한 필로폰을 접하게끔 한다. 사용한 더미를 빨래하는 세탁기도 7종이다. 서로 다른 마약 향이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훈련 과정을 모두 마친 후 최종 평가 시 항목별로 평균 60점 이상을 획득하면 비로소 마약 탐지견이 된다. 물론 실전에 투입되고 나서도 훈련은 계속된다. 감을 잃지 않도록, 마약에 익숙해지도록 최소 하루 1회 탐지 훈련을 시킨다. 사후 평가도 1년 단위로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레트리버가 모든 훈련을 놀이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일이다. 정 교관은 “어렸을 때부터 더미를 장난감으로 여기도록 교육시킨다. 교관과 함께 뛰어다니면서 교관이 던진 더미를 물어오고, 입에 문 더미를 교관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버틸 만큼 좋아해야 한다. 이렇게 가르치면 나중에 현장에서 핸들러와 다닐 때 ‘주인과 놀기 위해서라도’ 마약을 찾는다”고 말했다. 마약 탐지견은 소리에 민감해서는 안 된다. 센터 내에는 컨베이어벨트 훈련장도 조성돼 있다. 교관은 훈련견이 마약을 찾는 동안 컨베이어벨트를 일부러 발로 찬다. 이때 탐지견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면 주의를 준다. 훈련장 안에는 수하물을 보관하는 선반이 있는데, 이 선반 맨 위에 오디오가 놓여 있었다. 오디오에서 나오는 갑작스러운 소리에도 당황하지 않고 임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훈련견을 길들이기 위한 조치였다. 또 마약을 탐지할 때 코로만 숨을 쉬도록 가르친다. 오로지 후각에만 신경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정 교관은 “현장에서 15~20분 간격(두 시간 휴식)으로 일하는 것이 보기에는 짧게 일하는 것 같지만 모든 감각을 후각에 집중하기 때문에 마약 탐지견의 체력은 금방 소모된다”고 전했다. 게다가 세관에 있는 마약 탐지견은 하루 한 끼 식사만 가능하다. 사료 400~500g을 섭취한다. 약 2000㎉에 해당하는 열량이다. 그런데 한 끼만으로 과연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정 교관은 “마약 탐지견이 포만감을 느끼게 되면 일을 잘 안 한다. 적당하게 먹일 수밖에 없다”면서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처럼 마약 탐지견으로 선발되는 훈련견은 10마리 중 3마리꼴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도태견’이 되고 만다. 또 탐지견의 경우 보통 아홉 살이 되면 신체 기능이 떨어져 현장에서 탐지 임무를 수행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되면 은퇴가 불가피하다. ‘은퇴견’ 판정을 받은 마약 탐지견은 공매되거나 군(軍) 또는 국립병원 수의대에 분양된다. 수의대에 가면 ‘공혈견’이 돼 부상을 당한 탐지견 등에게 혈액을 제공한다. 차가운 철창 속에서 피만 공급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또 우수한 적발 실적을 보인 탐지견에 한해서만 은퇴식이 진행된다. 그렇지 못한 마약 탐지견은 쓸쓸한 뒤안길을 걸을 뿐이다. 이기순 동물자유연대 정책기획국장은 “마약 탐지견을 비롯한 특수목적견은 죽을 때까지 평생을 인간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다. 단순히 일꾼을 부린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면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시점이 된 특수목적견 모두에게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형식적인 은퇴식만으로는 곤란하다. 여생을 일반인 곁에서 반려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일반인에게 분양하는 일이 불가능하진 않다. 이는 가장 최후의 수단이다. 하지만 일반인 입장에서 몸집이 27~32㎏에 달하는 은퇴견을 반려견으로 데리고 있는 일은 쉽지 않다. 이 국장은 “일반 분양이 어려운 은퇴견만을 따로 모아 관리하는 보호소 마련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뿐만 아니라 “관세청에서 은퇴견 또는 도태견을 세관 직원에게 임의로 떠넘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 직원이 일반인에게 임의로 재분양을 하고 이익을 챙기는 일이 있다. 이는 명백한 관리규정 위반”이라며 “은퇴견 등에 대한 관세청 차원의 철저한 사후 관리가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패티김 ‘그대 내 친구여’ 55년 노래인생 ‘못잊어’

    패티김 ‘그대 내 친구여’ 55년 노래인생 ‘못잊어’

    “오랜 여행의 마지막 정거장에서 내릴 준비가 된 것 같네요. 눈물 흘리지 마세요. 그럼 전 더 힘들어지니까요.” 노년의 디바는 덤덤하게 자신의 노래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1958년 미8군 부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55년 동안 숱한 히트곡을 발표했던 패티김(74). 지난해 2월 은퇴를 선언하고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해 온 그가 지난 2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생애 마지막 콘서트 ‘굿바이 패티’를 열었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패티김은 무대 뒤편에서 ‘서울의 찬가’를 부르며 콘서트의 포문을 열었다. ‘서울의 모정’, ‘람디담디담’까지 3곡을 내리 열창한 뒤 무대 중앙으로 나온 그는 “이제 오늘이 끝나면 아이 엠 프리(I am free)!”라고 외쳤다. 그는 “지금껏 공연을 앞두고 목이 안 좋으면 어쩌지, 살이 찌면 어쩌지 하는 압박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밥도 아이스크림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며 지금껏 그가 안고 살아왔던 부담감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날 공연에서 그는 ‘못잊어’, ‘초우’,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등 총 20여곡을 열창했다. ‘사랑하는 마리아’를 부를 때는 객석 구석구석을 돌며 관객들의 손을 잡았고, 한때 가수로 활동했던 둘째 딸 카밀라를 무대로 초대해 노래를 청하기도 했다. 마지막 무대라는 게 실감나지 않을 만큼 그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오늘 다섯 시간 동안 공연해 볼까요”라면서 박수를 받아내는가 하면 “아이돌 가수의 10대 팬들만 소리 지르라는 법 있나”라면서 관객들의 환호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곡인 ‘그대 내 친구여’를 부른 뒤 마침내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양희은, 인순이, 이선희 등 후배 가수들의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울먹이며 앙코르 공연으로 ‘이별’을 불렀다. 그는 “저는 영원히 행복합니다. 영원히 여러분들을 사랑하겠습니다”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10~30대 팬들이 주로 찾았던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 이날만은 중장년층과 백발의 노인들이 자리를 메웠다. 1만여명의 관객들은 야광봉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고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박수와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문화 소외계층을 위해 지금까지 22개 지역에서 1만여석을 기부해 왔던 그는 이날도 문화 소외계층 1200여명과 서울아산병원의 환자 및 가족 1000여명을 초대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세계 평화 위해 함께 달려요

    세계 평화 위해 함께 달려요

    3일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에서 강남구와 미8군 주최로 열린 제11회 국제평화마라톤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재즈 인생 50여년…국내 남성 재즈 보컬 1세대 김준

    [김문이 만난사람] 재즈 인생 50여년…국내 남성 재즈 보컬 1세대 김준

    전설의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에게 묻는다, 재즈가 무엇이냐고. “궁금해도 절대로 알 수 없을걸”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비비디 바비디 부”라고 한다. 아마도 재즈가 느낌으로 전해져 오는 음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재즈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재즈는 원래 블루스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아프리카와 유럽 문화권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프랑스인과 흑인의 혼혈인 크레올들의 음악적 요소가 뒤섞이면서 탄생했다. 1800년대 후반 농장에서 불리던 노동요나 뱃노래 등이 발전해 1900년대 초반 블루스적 특징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재즈음악이 들어왔을까. 흥미롭게도 대한매일신보 기자를 지낸 바 있으며 ‘봉선화’ 등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이 재즈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30년대 미국에 유학해 재즈를 익혔던 그는 지금의 KBS 전신인 경성중앙방송국에서 관현악단을 만들어 재즈를 연주했다. 1940년대 재즈 스타일 곡들이 대중음악에 조금씩 섞이면서 박단마가 부른 ‘나는 열일곱살이에요’가 국내 최초로 스윙 사운드를 사용한 재즈 스타일의 곡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광복 이후 미군 문화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재즈가 클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50년대 루이 암스트롱이 각종 영화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면서 본격적으로 재즈가 등장했다. 1960년대 미8군 쇼 무대는 가수 지망생들의 생활의 터전이었고 경음악단들이 앞다퉈 재즈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가을바람이 선선해지는 계절, 이쯤 해서 음악을 얘기해 보자. 음악은 귀로 마시는 황홀한 술이라고 했다. 이는 음악이 즐거움을 주는 것과 동시에 일상사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재즈는 어떨까. 재즈 인생 50여년, 우리나라 남성 재즈 보컬 1세대로 알려진 김준씨를 지난 5일 오후 만났다. 장소는 경기 남양주 호평동에 위치한 김준 재즈클럽이다. 3층 건물에 1층은 한식당(부인이 운영)이고 2층이 김준 재즈클럽 공연장이다. 단체 예약이 있을 때만 김씨가 직접 출연해 여러 곡을 선사한다. 클럽에 들어섰더니 ‘시작은 그 끝과의 약속이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신뢰에 대한 겸허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피아노와 드럼이 있다. 벽에는 재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미국 흑인 가수들의 공연 사진이 붙어 있다. 잠시 우리나라 재즈 1세대 뮤지션들의 얼굴이 나타난다. 1970~1980년대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수사반장’의 배경음악을 담당했던 재즈 드러머 유복성씨, 미8군 무대에서 비밥과 쿨 재즈를 다지면서 ‘영자의 전성시대’ ‘어제 내린 비’ ‘겨울여자’ ‘깊고 푸른 밤’ 등의 영화음악을 맡아 명성을 떨친 정성조씨, 피아니스트 신관웅씨, 트럼펫 연주가 강대관씨 그리고 보컬리스트 김준씨 등으로 이어진다. 클럽 내부를 잠시 구경한 뒤 야외에 마련된 의자에서 마주 앉았다. 주변에는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바로 앞에는 승마장이 있다. 자연의 치유에 대해 잠시 생각하면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여긴 언제 문을 열었나요?” “2002년부터 10년 동안 서울 평창동에 있다가 작년에 여기 왔어요. 재즈를 좋아하는 팬이 제공한 공간입니다.” “공연은 일주일에 몇 번 하는지요?”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는데 어떤 모임이 있을 때, 그렇게 모인 분들을 위해 재즈 한마당을 선사합니다. 재즈는 즉흥적이라 그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다 좋아합니다. 누구나 어울리기 좋지요.” “요새 한강에서 공연도 하고 있지요?” “여의도 쪽에서 합니다. 물빛무대라는 곳이 있는데 매주 수·금·토요일 저녁 7시에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예술총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관객이 700~800명쯤 모이는데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찾아와 재즈를 즐깁니다. 한번 오세요, 이 가을에(웃음).” “재즈는 사계절 중 언제 가장 듣기가 좋습니까?” “사계절에 다 맞출 수 있습니다. 가을에는 가을대로 맛이 있고요.” “국내 재즈 1세대는 몇 명이나 있나요?” “(잠시 생각하더니) 10명쯤 되지요. 공연 때 가끔 만납니다.” “국내 재즈 뮤지션은 어느 정도 됩니까?” “한 200~300명쯤 됩니다. 미국파가 있고 유럽 유학파가 있습니다. 우리 같은 1세대도 있지만 현재는 30대 전후인 재즈 3세대로 교체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재즈란 무엇인가요?” 지체 없이 답이 나온다. “가장 자유스럽고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음악입니다. 또한 가장 합리적이고 영적인 치유가 있는 음악이지요. 그래서 재즈는 영원할 겁니다. 혼이 담긴 음악, 흥이 녹여진 음악이라서 재즈만 가지고 있는 DNA가 있습니다. 재즈는 또 지구 상의 어떤 음악과도 협연이 가능합니다. 포용력이 있는 음악이지요.” 그는 재즈 보컬리스트 외에도 작곡가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동안 무려 1000여곡이나 작곡했다. ‘사랑하니까’(패티김)를 비롯해 1984년 TBC세계가요제 금상 수상곡 ‘나 이제 여기에’(박경희), ‘내 마음은 풍선’(장미화), ‘그래도 설마하고’(임희숙), ‘청바지 아가씨’(박상민) 등이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남성 4중창단 ‘쟈니 브라더스’의 멤버(리드 김현진, 테너 양영일, 바리톤 김준, 베이스 진성만)로 그 유명한 ‘빨간 마후라’를 불러 히트시켰다. 잠시 당시 얘기를 해 본다. 평상시에는 각자 점잖은 의상의 노신사들이지만 무대의상만큼은 반드시 화려하고 밝은 색상으로 통일했다. 김씨는 데뷔 시절부터 의상, 액세서리 등의 코디를 도맡았다. 그들에겐 ‘빨간 마후라’가 잘 어울렸고 정겨운 화음은 세월을 뛰어넘어 중장년층으로부터 깊은 공감을 얻었다. 김씨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 1940년 1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논밭 30만평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탄 자전거 짐받이에 앉아 신의주 시내를 구경했다. 가죽 장화를 신고 허리에 긴 칼을 찬 일본 기마경찰의 모습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다 1945년 광복을 맞이했다. 소련군이 진주했고 조선 노동당이 들어섰다.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아버지는 숙청 대상 1호로 낙인찍혔다. 가족들은 할 수 없이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월남했다.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원주로 이사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강원 영월과 경북 문경 등으로 피란을 갔다. 이어 1·4후퇴 때는 목포를 거쳐 제주로 피란 갔다.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산방산 인근이었다. 사계초등학교 6학년을 거쳐 대정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미군 부대 전용 교회의 찬양대에서 활동했다. 도내에서 열리는 음악 콩쿠르에서 ‘가고파’ ‘고향생각’ ‘고향이 그리워’ ‘달밤’ ‘봉선화’ ‘바다로 가자’ 등을 불러 우승을 휩쓸었다. 대정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단거리 육상과 마라톤 시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는 한편 음악 교사에게 피아노, 트럼펫,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합창단에서 바리톤도 맡았다. 19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관학교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고등학교 교장 선생의 권유로 나간 ‘전국 남녀 고등학생 음악경시대회’(경희대 주최)에서 3위를 차지해 경희대 성악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의 음악 인생은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4·19로 인해 잦은 휴강이 이어지다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종로2가 ‘뉴월드 음악감상실’에서 DJ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5·16 후에는 예그린가무단의 합창단원으로 강제로 뽑혀 갔다. 당시 가무단장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1년여 만에 예그린합창단이 해체되면서 쟈니 브라더스를 결성하게 된다. 쟈니 브라더스는 1962년 당시 TBC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주말 프로그램 ‘쇼쇼쇼’에 전속 가수로 출연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방앗간집 둘째딸’ ‘니가 잘나 일색이냐’ ‘마포 사는 황부자’ 등의 히트곡을 쏟아냈다. 신영균이 주연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곡을 부른 것도 이때였다. 1968년 쟈니 브라더스가 해체된 이후 각자 솔리스트로 변신한다. 김씨는 멤버 중 가장 먼저 독립했다, 스탠더드 팝과 재즈 번안곡이 주를 이룬 음반을 발표하면서 솔로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1970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로 ‘음악은 곧 인생’이라는 일관된 삶을 살아 오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솔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저는 재즈 뮤지션으로서 더욱 열정적으로 재즈 음악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앞으로 이뤄 나갈 꿈은 ‘김준 재즈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입니다. 재즈 아카데미, 재즈 박물관도 생각하고 있지요.” 헤어지면서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이 나이보다 젊게, 해맑게 느껴진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김준은 1940년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으로 경희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1962~1968년 ‘쟈니 브라더스’의 일원이었으며 KJC(한국재즈모임) 창립 회장과 고문을 역임했다. 이후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경기 남양주시 호평동에서 김준 재즈클럽을 운영하면서 극동방송 운영위원과 ㈔한국재즈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주요 공연으로는 ‘김준 디너콘서트’(1995년), ‘김준 재즈콘서트’(1996년), ‘서울 솔리스트 재즈 오케스트라 공연’(2007년), ‘아름다운동행 재즈콘서트’(2010년), ‘영화 브라보 재즈라이프 출연’(2010년), ‘브라보 재즈라이프 콘서트 출연’(2010, 2011년) 등이 있다.
  • 조셉 필 前 주한미8군 사령관 ‘부적절 선물’ 받은 사실 적발

    조셉 필 前 주한미8군 사령관 ‘부적절 선물’ 받은 사실 적발

    조셉 필 전 주한 미8군 사령관이 한국 근무 당시 ‘부적절한 선물’을 받은 사실이 국방부 감사에서 적발됐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WP가 정보자유법(FOIA)에 따라 국방부에 요청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필 전 사령관은 한국에서 한 시민으로부터 1500달러 어치의 도금한 몽블랑 펜, 2000달러 짜리 가죽가방 등을 선물로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8월 전역 당시 계급이 소장으로 미8군 사령관(중장) 때보다 한 단계 강등된 것으로 나타나 불명예 제대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김하정 전 남편’ 신선삼, 과거 사건·사고들은…

    ‘김하정 전 남편’ 신선삼, 과거 사건·사고들은…

    지난 14일 한 종편 채널에 출연해 굴곡진 과거사를 털어놓았던 가수 김하정의 전 남편인 코미디언 고(故)신선삼(1940~2002)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신선삼은 1960~197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유명 코미디언으로 ‘쓰리보이’(이름에 알파벳 S가 세 번 들어간다는 뜻으로)란 예명으로 활동했다. 1959년 미8군 영내 행사인 ‘김 시스터스 쇼’의 진행자로 연예계에 발을 내딛은 신선삼은 ‘후라이보이’ 곽규석과 함께 원맨쇼의 달인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 한국연예협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다 2002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김하정은 방송에서 신선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결혼 첫날밤부터 카지노에 가서 들어오지 않는가 하면 따지는 김하정을 베란다로 쫓아내기 까지 했다는 것. 또 가수 생활을 하지 못하게 무대 의상을 찢어버리는 등 의처증 증상도 있었다. 결국 김하정은 1976년 12월 신선삼의 불륜 현장을 급습해 간통으로 고소했고,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이혼했다. 신선삼은 생전 각종 사건 사고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1974년 3월에는 밤 늦게 승용차를 운전하다 길을 건너던 행인을 치어서 전치 16주의 상해를 입혔다. 신선삼은 경찰에서 “공연을 마치고 부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가던 중 통행금지에 쫓겨 사고를 냈다”고 진술했다. 1986년 6월에는 무면허 운전을 하다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하는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신선삼은 내연녀의 동생 김모(당시 29)씨에게 허위진술을 부탁하다 경찰에 적발됐다. 자동차 사고 뿐 아니라 도박과 폭행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81년 1월에는 상습도박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1990년에는 식당에서 만난 선배 코미디언이 “너 오랜만이다”라며 악수를 청하자 “내가 네 부하라도 되느냐”며 얼굴을 때려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신선삼은 이 코미디언의 고소로 수배를 받던 중 부산 모 호텔에서 2달 동안 머물면서 숙박비 400여만원을 지불하지 않은 혐의(사기)로 1993년 경찰에 검거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남북 대화 급물살] 朴대통령 “강력한 국방력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토대”

    [남북 대화 급물살] 朴대통령 “강력한 국방력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토대”

    박근혜 대통령은 7일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추진하기 위해서도 가장 기본적 토대는 강력한 국방역량”이라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로 전군 주요 지휘관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한 자리에서 “그동안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적극 가동하겠다고 밝혀왔다”며 이같이 말했다. 오찬에는 김관진 국방장관을 비롯해 전군 주요 지휘관들과 존 D 존슨 주한 미8군사령관 등 장성 140명이 참석했다. 박 대통령이 전군 주요 지휘관들을 만난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다. 이날 오찬은 지난 2월 12일 북한의 제3차 핵실험 이후 북한의 도발 위협이 고조된 상황에서 각 군이 국가안보 수호를 위해 해온 노고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준비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흔들리는 땅 위에 건물을 지을 수 없듯이 안보가 흔들리면 대화도 평화도 설 수가 없다”면서 “ 완벽한 군사대비태세와 대북 억지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북한이 감히 도발할 생각을 할 수 없게 되고, 진정한 변화를 유도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관련, “지난 한·미정상회담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도 의견을 같이했고, 이달 말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시진핑(習近平) 주석과도 이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국방부는 이날 오전 전반기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열어 도발 유형별로 확고한 대비태세를 유지해 적 도발을 억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주요 지휘관들은 하반기에도 전시작전권 전환에 대비한 한국 군 주도의 작전수행능력을 향상시키고 미측과의 협의 과정을 거쳐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위협에 대비한 ‘맞춤형 억제전략’을 수립하기로 했다. 오일만 기자 oilman@seoul.co.kr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역사 품은 셰라톤워커힐 50년 사진전

    역사 품은 셰라톤워커힐 50년 사진전

    8일 서울 광진구 셰라톤워커힐 호텔에서 개관 50주년을 맞아 마련한 ‘추억의 사진전’에 옛 모습과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사진들이 출품됐다. ① 당시 국내 최고의 스테이지쇼로 인기를 끌었던 ‘하니비쇼’의 무희들이 각선미를 뽐내고 있다. ② 신혼 여행객 유치를 위해 한 예식장에 내걸렸던 광고판. 워커힐 호텔은 주변의 한강과 아차산 덕분에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았다. ③ 6·25전쟁의 영웅이던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을 기려 1963년 4월 일명 ‘워커힐’에 지어진 호텔의 전경. 셰라톤워커힐 호텔 제공
  • [씨줄날줄] 가왕(歌王)의 귀환/함혜리 논설위원

    우리가 샹송이라고 부르며 즐겨 듣는 프랑스의 대중 음악은 감미로운 리듬과 감상적인 가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작 많은 프랑스인들은 프렌치 록을 즐긴다. 큰 사랑을 받은 가수도 조니 할리데이라는 록 가수다. 실비 바르탕의 첫 남편이기도 한 그는 ‘프랑스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1943년 생으로 17세부터 가수 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181회의 투어 콘서트에 18개의 플래티넘 앨범을 기록했으며 1억 1000만장의 레코드 판매기록을 세웠다. 그는 연예생활 50년째가 되던 2009년 순회 콘서트를 끝으로 무대를 떠났다가 201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캐나다 퀘백에서 컴백 공연으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시며 열정을 불사르는 그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드는 팬들의 연령층은 매우 다양하다. 10대 소녀부터 40대 엄마, 60대 할머니까지 3대가 함께 찾는 경우도 흔하다. 식지 않는 열정과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음악을 구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에겐 조용필 ‘오빠’가 있다. 1950년생인 조용필은 올해로 63세. 1969년 미8군 무대의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고 1975년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 공전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했다. 2년간의 활동금지가 풀린 후 1979년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된다. 100곡이 넘는 그의 히트곡은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 그는 독보적인 가수인 동시에 작곡, 편집, 무대연출까지 못하는 게 없다. 재능과 감각을 타고났지만 노력하는 가수로도 유명하다. 데뷔 초기엔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미성으로 노래했지만 각혈까지 해 가며 판소리 창법을 터득하면서 3옥타브 5음계까지 음역을 넓혔다. 그가 시도한 장르도 매우 다양하다. 록, 팝, 발라드, 블루스, 민요, 트로트, 동요, 록오페라까지. “서양 음악을 비틀스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누듯 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씨가 내린 정의는 하나도 과장이 아니다. 그가 가진 각종 기록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우리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그의 기록 리스트에 하나가 추가됐다. 10년 만에 내놓은 19집 ‘Hello’에 수록된 ‘바운스’(Bounce)가 국내 음원차트 개설 이래 최고령 1위라는 것. 지치지 않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실험정신으로 전 세대가 공감할 음악을 만들어낸 가왕(歌王)의 화려한 귀환에 박수를 보낸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DB를 열다] 1971년 성탄절 대연각호텔 화재

    [DB를 열다] 1971년 성탄절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의 고요를 깨뜨리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서울 충무로 22층짜리 대연각 호텔에 큰불이 난 것이다. 불은 이날 오전 9시 50분쯤 1층 커피숍에서 프로판가스가 폭발해 일어났고 2m쯤 떨어져 있던 가스레인지로 옮겨 붙으면서 삽시간에 번졌다. 소방차만으로 진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군 헬기와 미8군 헬기, 대통령 전용 헬기도 동원되었지만 건물 주변을 빙빙 돌기만 했을 뿐 구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호텔 안에는 스프링클러도 없었고 탈출용 밧줄도 없었다. 고가사다리차가 있었지만 겨우 8층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그러니 피해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 건물에 옮겨붙은 불은 10시간이 지나서야 꺼졌다. 사망자만 163명에 이르렀다. 대연각 화재는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 사고로 기록돼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이 사고를 모델로 삼아 ‘타워링’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타워’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가관인 것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수만 명의 시민들이 호텔 주변에 모여 불이 옮겨붙고 투숙객들이 탈출하는 과정을 재미 삼아 구경한 것이다.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가서 불구경을 한 사람도 있었다. 사진은 질식 직전에 이른 투숙객이 매트리스를 들고 아래로 투신하는 모습을 당시 서울신문 사진부 김동준 기자가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은 제10회 보도사진전에서 특상을 받았다. 화재 사고 관련자들은 처벌을 받았고 호텔은 화재 후 수리해서 ‘고려 대연각타워’로 남아 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8) 한국 스포츠외교 산증인 김운용 前 IOC 부위원장(상)

    [명사가 걸어온 길] (8) 한국 스포츠외교 산증인 김운용 前 IOC 부위원장(상)

    김운용(82)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을 만나기로 한 건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자신의 발자취를 오롯이 모아둔 ‘김운용닷컴’(www.kimunyong.com) 사무실이 입주한 곳이었다. 약속 시간 10분을 앞두고 그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남색 캐시미어 코트, 맞춰 두른 고동색 에르메스 목도리는 현역 시절 그대로였다. 이날은 택시법의 재의결을 요구하며 택시업계가 총파업을 벌인 날이었는데, 그는 기자에게 “택시 스트라이크 때문에 오는 길은 괜찮으셨소”라고 영어를 섞어 말을 건넸다. 말투와 몸짓 하나하나에서 한국 스포츠 외교의 첨병으로 오래 활약한 세월이 묻어났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에 취임하며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1986년 IOC 위원, 1988년 IOC 집행위원, 92년 부위원장에 당선돼 활동했다. 그동안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유치,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북 동시 입장, 1994년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승인 등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굵직굵직한 스포츠 이벤트들을 진두지휘한 그다. 좌절되긴 했지만 2001년 유색 인종으로는 최초로 IOC 위원장직에 도전, 세계에도 얼굴을 알렸다. 그의 인생을 함축한 ‘올림픽 30년, 태권도 40년’ 문장 속에는 한 사람이 일궜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성취와, 딱 그만큼의 시련이 녹아 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운동과 영어를 유난히 좋아했던 한 소년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를린올림픽이 열린 1936년, 다섯살 나이에 부모님 손을 잡고 대구 만경관에서 ‘민족의 제전’이란 올림픽 기록영화를 본 것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의 기억에 생생하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생 처음 느낀 강렬한 두근거림은 어쩌면 훗날 그가 올림픽 무대의 중심에서 일하리라는 자기암시로 작용했는지 모른다. 다섯 살 위의 형은 “동아일보가 손 선수의 일장기를 지워서 큰일이 났다”고 말해줬다. 신문사에서 일하던 부친 김도학(1936년 별세)씨의 영향으로 어린 형제는 또래에 비해 아는 것이 많았다. 대구 조선민보사 기자였다가 서무부장 겸 경리부장으로 일했던 부친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바이올린과 오르간 연주를 즐겼고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다. 부친을 닮아 그는 다재다능한 소년으로 자라난다. 서울 욱구중학교(1945년 해방 후 6년제 경동중학교로 변경, 현 경동고)에서 공부 말고도 복싱·스케이팅·공수도 등 운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연마했고, 피아노도 개인 레슨을 받을 정도였다. “나는 과목별 편차가 심했다. 영어는 월등히 뛰어났지만 수학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싸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면서 5등 하는 게 1등보다 낫다는 생각이었다.”(저서 ‘미련한 사람은 자기 경험에서 길을 찾고 현명한 사람은 선배에게 길을 찾는다’ 중에서) 특히 영어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내 꿈이 외교관, 피아니스트, 국제법 학자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원래 영어를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엔 방학 때 다음 학년도 책을 미리 읽고 4학년 때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크리스마스 캐롤’(찰스 디킨스), ‘스케치북’(워싱턴 어빙) 같은 문학 작품도 많이 읽었다.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왔을 때는 그들이 주둔한 동숭동 서울대에 찾아가 보초들과 회화 연습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선교사가 세운 연희대(현 연세대)를 택하게 됐다. “그때는 (연희대가) 국제적인 학교라 외국 교사가 많아서 성경도 영어로 1주일에 3시간, 회화도 언더우드 부인이 직접 가르치는 3시간, 영어강독 3시간 등 일주일에 영어만 9시간 공부했다.” 그러나 해방,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근대사의 소용돌이는 그가 외교관의 꿈을 이루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대학 2학년이던 1950년 제2회 고등고시 행정 3부(현 외무고시)에 응시한다. 응시원서 마감일인 6월 20일 대학 1학년 수료증과 인지세 2000원을 들고 고시회관에서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불과 닷새 뒤 전쟁이 터졌다. 시험은커녕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인생은, 특히 그런 격동기를 통과하는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고향인 대구로 피란가지 못해 서울에 갇혀 있던 그는 9월 말 서울이 수복되고 나서 육군본부에서 국제연합 연락장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된다.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라 징집 공고가 곳곳에 나붙었는데, 국군과 미군의 공조를 위해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역시 절실했던 것이다. 당시 19세이던 그는 연희대 학도호국단 사무실에 가서 2학년 재학증명서를 뗀 뒤 이를 4학년으로 고치고 나이도 응시 자격인 21세로 올리는 ‘문서 위조’를 감행하면서 지원한다. 1951년 12월 그는 보병 중위로 임관해 동해안을 지키는 5사단의 사단장 전속부관으로 발령받는다. 인생의 항로는 바뀔지언정 목적지를 바꾸지 않는 것은 그의 영민함 덕이었다. 영어가 나침반이 됐다. 엉겁결에 군인이 됐지만 그는 좋아하는 영어책을 놓지 않았다. 외교관이 될 수 없다면 군사외교 분야에서 활동하면 됐다. 기회는 적극적으로 구하는 사람에게 왔다. 1953년 1월 1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보병학교 훈련 시험에 합격해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를 다녀온 것을 비롯해 세 차례나 군사유학을 다녀왔다. “요즘 한창 얘기하는 드론(첨단 무인폭격기)을 1955년에 벌써 공부했다. 산 영어를 많이 하니까 (나를) 써먹기 좋잖아. 직업군인도 아닌데 (군대에서) 내보내지를 않았다.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참모총장의 전속부관으로 일했다. 참모총장이 미8군과 매일 접촉해 탄약이나 기름을 지원받던 때였으니….” 1960년 4·19 혁명 당시엔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참모총장의 부관으로 일했고 다음해 5·16 군사쿠데타 이후 송 장군이 내각수반(총리)에 오르면서 의전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령으로 예편한 뒤 1963년 8월 주미대사관 참사관이 돼 워싱턴으로 갔지만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 사건,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청와대에서 미국담당 1급 비서관으로 일하라는 전갈을 받고 귀국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해가 맞물리면서 경호실 보좌관(차장 1급)으로 발령이 난다. 그 뒤 6년 동안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한다. 조금 길지만 그의 육성 증언을 옮겨본다. “장군을 맨 처음에 뵌 건 1954년 2군단 소속으로 강원도 화천에서 포병사령관을 할 때였다. 나는 막 미국 유학을 다녀온 상태였다. 세 번째 유학을 마치고 1군사령부 비서실에 있을 때 그분은 작전참모부장이었는데, 비서실이 참모장 소속이었다. 그때 장군들은 주말이 되면 자유당에 ‘사바사바’하러 다녔는데 박 장군은 안 그랬다. 휘하에 소령이나 대위들 데리고 골목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다 우리를 만나면 ‘김 소령 어디가, 한 잔 할래?’ 하고 말도 건넸다. 인정이 많은 분이셨다. 판공비를 본인이 안 쓰고 다 나눠줬는데, 나도 많이 얻어 썼다. 그분의 성품이 드러나는 얘기가 두 가지 있다. 상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이 1963년 동아일보에 ‘군은 민정이양하고 복귀하라’는 성명서를 낸 뒤 구속됐잖나. 그걸 풀어주고 송 장군이 나온 뒤에 딸을 하버드 법대에서 공부시키는 걸 도와줬다. 자신이 한 번 친 사람들도 후에는 명예회복을 해줬다. 순경 시켜서 ‘누가 줬다고 말하지 말고 가족에게 갖다주라’며 도움을 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개인적인 에피소드도 있는데, 내가 출장 다녀오면서 여비를 털어서 카디건 같은 걸 사오면 ‘이런 거 왜 사왔어’하며 나무라셨다. 선물 같은 건 당연한 건 줄 알고 ‘좀 더 사오지’ 할 법도 한데, 그 정도로 인정이 있는 분이었다. 5·16 후에는 박 장군이 내각 수반으로 왔을 때 의전비서관으로 있었다. 1968년 청와대 경호실 차장으로 가서 6년간 모시다가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나왔다. 경호실에 가려고 해서 간 게 아니었지만 막상 가보니 (경호실이) 권총만 차는 데가 아니고 미국 식으로 서비스, 즉 공공 업무를 하는 곳이었다. 다른 기관들과 협력도 해야 하고 사전 경비를 위한 장비도 준비해야 하고…. 경호실에 있으면서도 다른 심부름(군사원조 관련)도 많이 했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나가지 않아도 됐지만 책임지고 나왔다. 사표를 냈더니 박 대통령이 부르더라고. 장례식 때문에 좀 가다듬고 나서 부르는 거라면서 봉투를 줬다. ‘다시 부를 테니까 가 있어’ 했다. 그런데 그 후에 자신이 암살당했으니…나는 (청와대를) 나와서 태권도만 열심히 했다. 1971년에 유신정우회에서 국회의원 제의도 들어오긴 했는데 내가 고사했다. 4·19 때 자유당이 하루저녁에 무너지는 걸 다 봤는데…절대 안한다고 했다.” 육 여사 묘소에 참배를 하고 청와대를 떠난 김 전 부위원장은 1971년 태권도협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스포츠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가자, 4월 축제 속으로… 가볼 만한 5선

    가자, 4월 축제 속으로… 가볼 만한 5선

    투두둑, 봄꽃이 터진다. 매화와 산수유가 절정이고 벚꽃과 진달래 등도 뒤를 이을 태세다. 덩달아 여기저기서 축제도 펼쳐진다. 봄 축제의 ‘고전’ 진해 군항제와 여수 영취산 진달래축제 등이 줄을 잇는다. 이 좋은 봄날, 꽃구경이 전부랴. 고령 대가야축제, 남원 춘향제 등 역사와 문화, 이야기가 가득한 축제도 준비됐다. 벚꽃, 황홀의 궁극: 진해 군항제(1~10일) 해마다 이맘때면 온 국민의 시선이 경남 창원으로 쏠린다. 옛 진해의 여좌천 벚꽃이 얼마나 피었는지 궁금해서다. 창원기상대는 29일쯤부터 활짝 필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올봄 유난히 포근한 날이 이어지면서 만개 시기가 일주일 정도 앞당겨졌다. 제51회 진해 군항제는 오는 31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4월 1~10일 열린다. 가급적 행사 기간 중에 찾는 게 좋다. 해군사관학교 등 여좌천에 견줄 만한 군부대 벚꽃 명소들이 일년에 단 한 번, 축제 기간에만 개방되기 때문이다. 함정과 거북선, 박물관 등 관련 시설도 문을 활짝 연다. 다음 세 가지는 꼭 기억하고 가자. 우선, 벚꽃 축제와 같은 기간 열리는 ‘2013 진해 군악의장 페스티벌’이다. 우리 육해공군 및 해병대 의장대와 군악대, 미8군 군악대 등이 역대 최대 규모의 퍼레이드를 선보인다. 둘째는 벚꽃 순환 열차다. 축제 기간 중 마산역∼진해역 구간을 1일 14회 운행한다. 만성적인 교통 체증을 피할 좋은 방법이 생긴 셈. 순환 열차는 마산역, 창원역, 신창원역, 진해역 등에 정차한다. 셋째는 올해 처음 선보이는 높이 136m 짜리 솔라타워다. 진해구 명동 음지도 해양공원에 세워진 타워형 태양광 시설이다. 원래 7월 1일 공식 개장이지만 벚꽃 축제 기간에 맞춰 임시 개방됐다. 무료다. 120m 높이의 전망대에 서면 거가대교와 부산항, 신항 등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홈페이지(gunhang.changwon.go.kr), 창원시청 축제지원담당 (055)225-2341. 봄날, 광한루, 사랑: 남원 춘향제(26~30일) 봄만 되면 사랑의 열기로 달뜨는 도시, 전북 남원이다. 올해로 83회째를 맞은 남원춘향제가 4월 26~30일 성춘향과 이몽룡이 ‘즉석 만남’을 가졌던 광한루원을 중심으로 열린다. 춘향 제향과 국악대전, 춘향 선발 등 전통에 기반한 대표 프로그램들이 여전한 가운데 춘향전 길놀이와 춘향시대 속으로, 춘향 프린지 공연 등의 체험 행사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새롭게 꾸몄다. 특히 18세기 생활상과 풍류를 엿볼 수 있는 ‘춘향시대 속으로’와 가족, 연인 간의 사랑을 다짐하는 ‘사랑등 띄우기’ 등의 프로그램은 각별한 인기를 끌 것으로 전망된다. 축제가 열리는 광한루원 자체가 대단한 볼거리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광한루원을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라 적고 있다.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을 상징하는 광한루를 짓고, 연못 가운데엔 전설의 삼신산(三神山), 봉래·방장·영주섬을 조성했다. 사랑의 광장 앞 요천 둔치엔 ‘춘향 캠핑장’도 새로 마련된다. 가족 단위 관광객과 연인들을 위한 캠핑시설 60여동이 들어설 예정이다. 홈페이지(www.chunhyang.org), 춘향제전위원회 (063)620-4861. 죽은 왕들의 도시: 고령 대가야체험축제(11~14일) 경북 고령은 옛 대가야의 수도다. 500여년 동안 고령 일대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대가야는 562년 신라에 복속되면서 자신의 역사를 통째로 잃고 만다. 신라가 패자의 기록을 철저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산리 일대에 대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건 다행이다. 대가야체험축제가 지산리 고분군 일대에서 4월 11~14일 열린다. ‘산성을 쌓아 궁성을 지키다’라는 주제관이 볼 만하다. 부대 프로그램도 알차다. 대가야산성 루트 체험과 금화 발굴 체험, 대가야용사 선발대회 등 58개의 프로그램으로 꾸려졌다. 고령 여행의 첫걸음은 고분군 트레킹이다. 최초로 순장 풍습이 확인된 44호 고분 등 주산 능선을 따라 늘어선 고분들을 둘러보는 데 2시간쯤 걸린다. 홈페이지(fest.daegaya.net), 축제추진위원회 (054)950-6424. 조상 氣 받고 힐링: 영암 왕인문화축제(5~8일) 월출산과 더불어 전남 영암의 대표 아이콘으로 꼽히는 인물이 왕인 박사다. 일본 아스카 문화의 시조가 된 백제 시대 학자다. 영암에선 해마다 벚꽃이 만개할 무렵 ‘영암 왕인문화축제’가 열린다. 왕인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고 뜻을 전승하자는 취지의 축제다. 올해는 4월 5~8일 왕인 박사 유적지와 구림마을, 도기박물관 등에서 여행객을 맞는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왕인 박사 일본 가오’다. 왕인 박사의 탄생에서부터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의 과정을 거리 퍼레이드로 재현한다. 올해는 특히 6~7일 이틀에 걸쳐 초대형 길놀이 축제로 진행된다. 영암의 전통문화를 즐기는 ‘도포제 줄다리기’와 세계의 타악기와 만나는 ‘드럼서클’ 등의 프로그램도 준비됐다. 홈페이지(wanginfs.yeongam.go.kr), 영암군향토축제추진위원회 (061)470-2255. 선홍빛 유혹의 山: 여수 영취산 진달래축제(12~14일) 해마다 4월이면 전남 여수 영취산은 진달래로 온 산이 붉게 물든다. 선정 기준은 불분명하지만 경남 창녕의 화왕산 등과 더불어 전국 3대 진달래 군락지 중 한 곳으로 꼽힌다. 5~30년생 진달래 수만 그루가 군락을 이뤘는데 면적만 15만평에 달한다. 축구장 140개와 맞먹는 규모다. 올해 21회째인 영취산 진달래축제는 4월 12~14일 돌고개와 흥국사 등 영취산 일대에서 열린다. 산신제, 산상문화공연 등의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대체로 상암초교 인근에서 시작해 봉우재를 거쳐 영취산 정상에 오른 뒤 흥국사로 내려오는 코스를 선호한다. 여수 인근 여행지를 도는 봄꽃 여행길 코스도 이름났다. 영취산(진달래), 오동도(동백꽃), 금오도 비렁길(산벚꽃), 하화도(야생화)를 연계했다. 지난 2월 개통한 이순신 대교는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홈페이지(www.ystour.kr), 여수시청 문화예술과 (061)690-2041.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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