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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實錄, 한국전쟁] (5) 또 다른 주역-맥아더·트루먼의 갈등

    [實錄, 한국전쟁] (5) 또 다른 주역-맥아더·트루먼의 갈등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다. 전쟁을 도발한 공산진영의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과 맞선 자유진영의 대표주자였다. 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또 한 사람은 5성 장군 계급장을 달고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끝까지 함께 가지 못했다. 정책결정자 트루먼은 휴전협정이 진행 중이던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맥아더의 최후는 참담했다. 연합군이 중국군에 쫓겨 38선 이남으로 후퇴한 1951년 4월11일 트루먼으로부터 연합군 사령관직 등 모든 직위에 대한 해임통보를 받았다. 상원청문회장에 선 ‘전설적 장군’은 문민통제에 대한 불복종과 오판은 물론 거짓말까지 줄줄이 드러나 고개를 숙여야 했다. 미 의회는 전쟁영웅에 대한 예우를 참작, 청문회 공식 보고서를 내지 않았다. ●도쿄에 머문 맥아더 전세 파악못해 루스벨트라는 걸출한 대통령의 그늘에서 인기 없는 상원의원과 부통령직을 지낸 트루먼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그는 후세 역사가들로부터 스탈린과 함께 냉전의 양대 축으로 평가받았다.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이뤄진 트루먼 대통령의 확신에 찬 해군 및 공군 출동명령과 엿새 만의 지상군 참전결정이 없었다면 낙동강전선 사수와 인천상륙작전의 역공, 서울수복과 압록강 국경까지의 북진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트루먼은 재임 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정치적 앙숙인 맥아더를 사장시킨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매도당했다. 한국 땅에서 미국의 젊은이 3만 3000여명을 전사시키고도 전쟁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대통령이었다. 맥아더 해임 당시 트루먼은 패배자였지만, 후일 승리자로 기록됐다.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대통령의 군사자문기구인 합동참모본부가 만장일치로 승인한 ‘군사적 결정’이란 점이 작용했다.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은 트루먼의 참전결정과 함께 한국전쟁의 양대 분수령이었다. 보급라인이 길어진 인민군의 허리를 끊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해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전쟁역사상 육군의 공급선을 차단하면 열에 아홉은 무너지기 마련”이라고 큰소리쳤다. 사실이었다. 맥아더 일대기에는 “그의 인생에서 군인으로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날은 1950년 9월15일 하루였다.”고 적혀 있다. 성공확률 5000분의1의 거대한 도박에 성공한 것이다. 성공확률은 맥아더 자신의 언급이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에 따르면 맥아더는 “이 작전이 도박이라면 후에 1달러로 변해 나오게 되는 5센트를 항아리에 던져 넣는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가 남한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한반도를 민주국가로 통일시키겠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유일한 미국 장군이었다. 이승만 정부로부터 ‘수호자’로 숭배를 받았다. 한국의 통일이 바람직하다고 천명한 1950년 10월의 유엔결의가 맥아더의 호승심(好勝心)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워싱턴의 행정부 및 군 수뇌부는 중국과 옛 소련의 의도를 확신하지 못했고, 군사적 충돌을 우려했다. 한국전쟁이 세계 제3차대전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제한된 목표를 위하여, 제한된 수단으로 전쟁을 수행하려 했다. 맥아더의 거침없는 북진이 못마땅했지만, 상륙작전 성공 이후 ‘전쟁의 신’으로 격상된 맥아더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맥아더는 중국정부의 개입 경고를 무시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보도 엄포라며 한 귀로 흘렸다. 오히려 원폭투하 발언과 압록강 교량 폭격으로 가뜩이나 민감해진 중국 지도부를 자극했다. 오만에 빠진 맥아더의 결정적 오판이었다. ●1951년 전시중 해임통보 받아 미국 합참이 펴낸 ‘한국전쟁-제10장 맥아더의 해임’ 편을 보면 미국 대통령과 내각,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군사정책에 관련된 정책수립 및 자문기구를 맡는 합참과 맥아더의 관계가 속속들이 드러나 있다. 이 책은 “합참요원은 예외 없이 맥아더 장군보다 후임이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 원수는 육사 12년 선배인 맥아더 준장 아래서 소령으로 근무했다. 콜린스 육참총장과 셔먼 해군참모총장은 맥아더가 육사교장이었을 때 초급장교였다.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사관생도에 불과했다.”고 기술했다. 또 “군사조직이 이러한 인적관계로 구성됨에 따라 그 영향이 의사전달과정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맥아더 장군이 보낸 서신에서는 합참에 대한 암시적인 훈계 또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가 발견됐다. 역으로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게 결정적인 방법으로 명령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들이 기안한 지침서는 선임자에게 실례나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 공손한 말로 표현됐다.”고 적었다. 맥아더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1보를 보고받은 트루먼과 맥아더의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도쿄의 극동사령부에서 이 소식을 들은 맥아더는 무관심하면서도 초연했다. 함께 있던 덜레스 국무부 고문이 걱정하자 맥아더는 “단순한 정찰병력이며 등 뒤에 한 손을 묶은 채로도 처리할 수 있다.”고 신경 쓰지 않았다. 26일에도 천하태평이었다. 오히려 덜레스가 “무초 미 대사가 서울을 탈출했다.”는 급보를 전하자 그때야 알아보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적어도 1945년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맥아더에게 한국은 관심 밖의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주둔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거듭되는 보고를 무시했으며, “남한문제는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지시가 전부였다. 맥아더의 보좌관 바워즈의 회고에 따르면 맥아더는 한반도 문제에 개입을 꺼렸으며, 한국문제는 국무부 소관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만들어진 인물”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 전용기를 타고 전황을 살펴보러 잠시 들렀다가 곧바로 도쿄로 돌아가곤 했다. 인천상륙작전 때나 북진공격 때도 마찬가지였다. 압록강까지 거침없이 북진하면서 “중공군의 개입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장담과 달리 중국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뒤로 밀리자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 대표들은 맥아더가 한국의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사령관이 자리를 지키지 않는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맥아더가 파면된 이후 자리를 이어받은 리지웨이 장군은 종전 후 40년이 흐르고 나서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싸워야 했는지 도쿄의 사령부가 알지 못했다는 점이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으며 그런 상황을 만든 총사령관을 용서할 수도 없었다.”고 꼬집었다. 트루먼의 대처는 단호하고 빨랐다. 미국은 결코 ‘한반도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던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판단을 비웃듯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했다. 1950년 6월30일 새벽 5시 지상군의 투입을 승인했다. 유엔 안보리도 한국에서의 무력사용을 의결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에서 “1950년 6월25일자로 트루먼과 맥아더의 삶이 함께 엮였다. 대통령은 장군을 통제하지 못해 위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장군은 대통령직을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라고 분석했다. 또 “트루먼은 우연히 대통령이 되었지만, 맥아더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인물이었다.”고 썼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미국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아서 맥아더 장군의 아들이었다. 웨스트포인트 4년 동안 역대 최고 학점을 기록했고 미군 역사상 모든 최연소기록을 갈아치웠다. 1918년 처음 별을 단 이래 최연소 사단장, 웨스트포인트 교장, 육군 참모장, 소장, 대장, 원수에 올랐다. 1944년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는 떼어 놓은 당상으로 보였다. 트루먼은 결단력이 뛰어난 인물이었고, 직선적이고 꾸밈이 없었다. 함정을 파거나, 말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 저격당한 지 90년이 지난 뒤에야 훌륭한 대통령으로 추앙받은 링컨을 거울로 여겼다. 트루먼은 사적인 자리에서 “문제는 그가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거야. 자기가 일개 육군장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관은 바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잘못이지.”라고 맥아더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인생은 쇼, 세상은 무대’라고 생각하는 맥아더가 보기에 트루먼은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경쟁자였다. 워싱턴에 있는 반대세력의 수장이었다. 대학도 나오지 못했고, 군 경력은 주 방위군 대위 계급장이 전부인 ‘미주리 촌놈’에 불과했다. 자신을 파면한 트루먼을 탄핵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봤다. 그가 도쿄를 떠날 때 25만명의 일본인이 성조기를 흔들며 울었고, 뉴욕에 도착해 행진을 벌였을 때 700만명의 인파가 열광하면서 장군의 귀향을 슬퍼했다. 미국인들은 그를 한국전쟁의 순교자로 여겼다. 맥아더 해임은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 헌정위기를 불러왔다.’고 기술될 정도로 혼란상을 가져왔다. 상원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던’ 장군의 진면목은 매일 3000만명이 지켜보는 TV중계 앞에서 발가벗겨졌다. 일흔 살 대원수의 진실은 미리 준비한 연설과 달리 사흘 내내 계속된 청문회에서 바닥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그는 대통령에게 경례하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10월17일 웨이크섬 회담에서 맥아더 장군은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경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두 번씩이나 본국소환에 불응하는 기록을 세운 전무후무한 장군이기도 했다. ●군사작전 실행후 추후 보고 합참은 맥아더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4월8일 전원회의에서 참모들은 ‘예외 없이 맥아더 해임’에 찬성했다. 미국 합참이 펴낸 ‘한국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열거한 맥아더 해임의 주요 이유는 타이완 문제에 대한 대통령과의 불화였다. 맥아더는 중립을 추구하는 트루먼 정부의 타이완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중국의 개입에 대한 오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뒤 38선 돌파와 압록강까지 북진, 압록강 교량 폭격 같은 중요한 군사작전을 실행 후 추후 보고형식으로 승인받았다. 이 밖에 대외정책에 대해 공개 언급하지 말라는 대통령 훈령을 여섯 번이나 위반했다. 맥아더가 3월24일 중국본토로의 확전을 언급하자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군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더는 그의 불복종을 참을 수가 없었다.”면서 해임을 결심했다고 미국 합참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故 쇼 대위 유가족 해사 방문

    해군사관학교는 6·25 전쟁에 해군장교로 자원입대했다가 전사한 고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유가족이 고인이 한때 근무했던 해군사관학교를 21일 방문했다고 밝혔다.<서울신문 6월17일자 28면> 쇼 대위는 6·25 전쟁 전인 1947년 미 군정청 소속으로 한국에 와 해군사관학교 함정 운용술 교관으로 1년간 근무하며 초창기 해군발전에 기여했다. 해사를 방문한 일행은 쇼 대위의 손자인 윌리엄 캐머런 쇼와 조카 등 유가족 3명과 6·25 참전용사인 해서스 로드리퀴즈 등 모두 5명이다. 이들은 해사 교정과 박물관, 거북선 등을 둘러보았다. 유가족은 22일 서울 은평 평화공원에서 열리는 고인의 동상 제막식 참석을 비롯해 6·25 전쟁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은평 평화공원은 은평구가 쇼 대위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511억여원을 들여 조성했다. 진해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美 오보역사에 비친 오늘의 언론

    ‘○○호 폭발하다’ ‘○○호 폭발은 폭탄, 또는 어뢰 때문인가?’ ‘○○호, 적의 비밀 병기에 두 조각 나다’ ‘○○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모독하다’ ‘○○호 병사들의 용맹에 대한 중상모략’ 많은 이들이 ‘○○’을 보고 ‘천안’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에 들어갈 단어는 ‘메인’이다. 1898년 2월 카리브해에서 의문의 사고로 폭발한 미국 해군 소속 ‘메인호’에 대한 당시 신문 기사의 제목들이다. 메인호 폭발의 정확한 원인은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지만 당시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은 해군 사문회(査問會)를 통해 선내 탄약고에서의 우발적인 폭발 때문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진실로 대할 수 없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전쟁을 원하는 군부와 언론의 부추김 탓이었다. 당시 100만부 안팎의 부수를 자랑하던 ‘뉴욕 저널’ 발행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를 미국이 소유하기를 원했다. 마침 미국이 군사 개입의 단골 메뉴로 쓰는 인권 문제가 쿠바에서 제기되자 미국 정부는 자국민 보호 명분으로 6682t짜리 전함 메인호를 쿠바 아바나 앞으로 보낸다. 스페인으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한데 ‘뉴욕 저널’은 어찌어찌 워싱턴 주재 스페인 공사의 사신(私信)을 입수해 이를 대서특필했다. 매킨리 대통령을 비난하는 편지 내용을 꼬투리삼아 ‘미 합중국 역사상 최악의 모욕을 당하다’라고 제목을 달며 정부와 국민들을 자극했다. 폭발 이후에는 아예 ‘물 만난 고기’였다. ‘메인호를 기억하라’는 명제를 달고 온갖 거짓 기사를 쏟아냈다. 당시 해군부 차관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을 가리켜 “기골이 초콜릿 과자처럼 말랑말랑한 사람”이라고 비아냥댄 것도 한몫 거들었다. 결국 매킨리 대통령은 스페인에 선전 포고를 했다. 허스트는 뜻을 이뤘지만, ‘황색 저널리즘의 창시자’라는 후대의 오명을 감내해야 했다. 385명의 미군이 죽고, 1660명이 다친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메인호를 기억하라’(에릭 번스 지음, 박중서 옮김, 책보세 펴냄)는 이 밖에도 날조와 왜곡으로 얼룩져 있는 미국 언론의 사례들을 하나씩 꼼꼼히 제시한다. 100년 훨씬 전의 미국에서 벌어진 언론과 기자들의 거짓말 사례들이건만, 오늘날의 한국 언론도 그다지 자유로워 보이진 않는다. 진실을 외면한 언론이 동서고금에 걸쳐 그려 낸 부끄러운 자화상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1만 7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휴전협상을 앞두고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일 년째 접어들자 기력이 쇠한 중국은 휴전을 꾀했다. 김일성도 정전을 원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유엔에 휴전을 발의하는 한편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 등 적극적인 군사 반격을 재촉했다. ●“스탈린, 끝없는 마오요구에 짜증” 베이징은 휴전교섭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달라고 모스크바에 요구했다. 모스크바는 오히려 한 발을 뺐다. 마오쩌둥이 휴전을 주도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토르쿠노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총장은 “소련이 전쟁의 주체자가 아님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휴전협정 문제가 처음 거론된 1951년 6월5일부터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가 정전교섭을 제안한 6월23일까지 모스크바와 베이징 그리고 평양 간 비밀문서의 교환이 급증했다. 마오쩌둥의 정전제안에 대해 스탈린의 첫 반응은 신통찮았지만, 김일성과 가오강 중국 동북성 서기를 만나고 나서 태도가 달라졌다. 스탈린은 6월13일 마오쩌둥에게 “정전이 현시점에서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긍정적인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두 공산 거목이 주고받은 서신의 형식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나 베이징 주재 대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고받았다. ‘경애하는 스탈린 동지’ 같은 서두는 생략됐고,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마오쩌둥’이라고 꼬박꼬박 썼던 마무리도 ‘마오쩌둥’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적는 것으로 끝냈다. 내용적으로도 마오쩌둥의 자기주장이 강해졌다. 휴전협정 장소가 개성으로 정해진 것은 마오쩌둥의 아이디어였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낸 1951년 6월30일자 친서에서 “다음 몇 가지 문제에 관해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면서 “회담 장소로 미국 리지웨이(유엔군 총사령관)는 원산항을 제안했지만, 북한 해군의 요새기지인 원산항에 적의 함정을 상륙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38선 부근의 개성이 적당하다고 본다. 회담개시는 7월15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 중지와 휴전을 포함한 모든 평화적 제안에 우리는 동의한다. 회담장소는 38선 인근의 개성지구를 제안한다. 귀하가 동의한다면 7월10일부터 15일 사이에 귀측 대표단과 만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유엔군에 보내는 회답문을 직접 작성해 마오쩌둥에게 보낸 친서에 동봉했다. 마오쩌둥의 의견을 100%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또 이 친서에서 “모스크바가 휴전교섭을 지시해야 한다는 제안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럴 필요조차 없다. 교섭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 귀하 자신이다. 우리는 개별 문제에 대해 조언할 뿐이다. 우리는 김일성과 접촉할 수 없다. 귀하가 직접 김일성과 접촉해야 한다.”고 썼다. 스탈린은 휴전교섭 책임의 배턴을 마오쩌둥에게 넘겨버렸다. 이후 스탈린은 중국이 요청한 군사고문 파견과 6억루블의 군사차관에는 동의했지만, 추가 고문파견과 장비공급은 거부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 사이에 오간 1951년부터 1953년까지의 기밀문서를 분석한 토르쿠노프 총장은 “휴전교섭 과정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끊임없는 지원요구에 짜증을 냈고, 분노마저 느끼는 듯했다.”고 말했다. 휴전교섭의 열쇠는 마오쩌둥이 쥐고 있었다. 스탈린에게 정기적으로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충고도 받았지만 형식적이었다. 김일성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박헌영은 “북한 인구의 10%가 기아상태에 있다.”면서 조기정전을 요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도 ‘유엔군 측의 요구를 다 수용하겠다.’고 나섰지만, 스탈린은 불리한 전쟁종결을 원치 않았다. 나약한 보습을 보여 정치적 불이익을 가져왔다고 김일성을 나무랐다. ●마오, 스탈린에 협상상황 형식적 보고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1951년 7월20일자 전문에서 “휴전제안에 동의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전쟁종결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 같은 견해는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3월까지 유지됐다. 3월5일 독재자가 죽자 소련 내각회의는 전쟁을 종결짓는 쪽으로 한반도정책을 바꿨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휴전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대통령은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전쟁을 종식하고자 하는 중국과 미국의 의사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타이완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영어권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원치 않은 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서점에서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한국전쟁에 관한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콜디스트 윈터’를 쓴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책을 저술하던 2004년 미국 플로리다의 한 도서관 서가에 베트남전 관련 책은 88권이나 꽂혀 있었지만 한국전쟁 관련 서적은 4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영화도 그랬다. 미국이 만든 전쟁영화의 무대는 대개 베트남 정글이거나 사이공 거리였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 인기를 끈 작품은 ‘M.A.S.H’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80년대 이후에는 사라졌다. 한국전쟁에서 3만 3000명의 미군이 희생됐고, 10만 명이 넘는 상이군인이 발생했지만, 미국의 영광은 별것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전쟁영웅 맥아더를 추락시킨 것도 한국전쟁이었다. 그래서 잊고 싶은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총지휘한 스탈린의 나라, 옛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2차 대전 종식과 함께 38선 이북을 점령해 공산 이데올로기를 수혈시켰다. 항일무장 게릴라 지휘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둔갑시켰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전쟁은 무승부로 종결됐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부동항을 가진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 뼈아팠다. ●타이완 ‘戰禍’ 모면… 또 다른 수혜국 굳이 한국전쟁의 승자를 따지자면 중국을 거론할 수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오쩌둥이었다. 냉전체제 아래에서 중국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내전으로 축소했고, 마오쩌둥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성을 부인했다. 80년대 말까지 무려 40년 동안 감췄다. 중국과 마오쩌둥의 역할은 9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의 비밀문서에서 속살을 드러냈다. 한반도를 무대로 치른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한때 130만명의 대군을 일시에 참전시켰다. 3년간 연인원 500만명을 동원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이다. 갓 태어난 신생 사회주의국가 중국은 비록 미국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지옥을 보여줬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계획했던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미국의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됐다. 한국전쟁 최대의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일본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참전해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고 분석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군사기지 역할을 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 전차상륙함(LST)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조정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미국의 전후 복구자금은 대부분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다. 한국경제는 일본 예속형으로 변했다. 일본의 경제부흥에는 한국전쟁의 공이 지대했다. 타이완도 수혜국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을 대체하는 또 다른 전쟁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마오쩌둥과 중국은 한반도보다 타이완 점령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3년 동안 발이 묶였고, 힘을 소진하는 바람에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6월27일 7함대를 출동시켜 타이완해협을 봉쇄한 것도 중국 참전의 한 요인이었다. 해군력과 공군력이 없다시피 한 중국의 처지에서는 불리한 양안(兩岸)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한반도에서 보병으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부터 1949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워싱턴에는 중국의 공산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차이나 로비’였다. 워싱턴 정가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단체 중에서 가장 활발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존재감은 중국보다 워싱턴에서 오히려 더 클 정도였다. 장제스의 희망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공산당을 밀어내고 본토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해 중국과 싸우겠다고 큰소리쳤다. 한국전쟁 덕분에 타이완은 호전적인 마오쩌둥과의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공산 측 두 주역,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같은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꿈을 꿨다. 상호 의견교환이 별로 없던 두 지도자 사이에서 한국전쟁이라는 공통관심사가 생기면서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목적은 달랐다. 스탈린은 전지전능한 영향력의 유지를 원했지만, 마오쩌둥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으로부터 가해지는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신생 조국을 지켜내고 싶었다. 연합군의 파상공세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9월28일 노동당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열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0월1일 아침,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긴급 메시지를 타전했다. 김일성에게는 “중국의 동지와 협의하라.”고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는 “조선의 동지들이 절망적인 곤경에 빠졌다. 지원군을 보낼 수 있다면 속히 38선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이 건에 관하여 나는 조선의 동지에게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전할 생각이 없다.”라고 썼다. ●中 참전번복… 체면 구긴 스탈린 노회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는 ‘마오쩌둥에게 말하지 않겠지만’이라고 했고, 마오쩌둥에게는 ‘김일성에게 알리지 않겠지만’이라고 전했다. 도요가쿠엔 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중국과 북한을 분리시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군을 출병시킨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국의 참전결정이 두 번, 세 번 번복되면서 스탈린의 체면이 구겨진 것도 사실이다. 10월12일부터 14일까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내용이 ‘중국이 참전한다.’ ‘참전을 거부했다.’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는 식으로 계속 변경됐다. 비록 목적과 계산법은 달랐지만, 약속을 지킨 쪽은 마오쩌둥이었다. 독자적 참전 결단에 따라 스탈린은 중국과 마오쩌둥을 다시 보게 됐다. 중국은 공산주의국가의 ‘둘째 형’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 소련은 중국에 공군 사단을 배치해 본토방위에 대한 염려를 놓게 했다.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에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한국사랑 美 참전용사 60년만에 부활

    한국사랑 美 참전용사 60년만에 부활

    한 미국인 6·25참전용사가 한반도 평화를 지키려다 죽음을 맞이했던 자리에서 동상(銅像)으로 다시 태어났다. 은평구는 16일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지금의 녹번동에서 산화한 미국인 윌리엄 해밀턴 쇼(당시 28세) 대위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2일 은평평화공원 준공식과 함께 동상 제막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고인의 큰며느리와 손자 등 유가족 7명을 비롯한 미 참전용사, 조지 W 부시 전 미국대통령 등 정관계 주요인사 1500여명이 참석한다. 제막식에선 어린이공원에 있는 기념비도 함께 이전해 선보인다. 구가 1950년 전사한 파란눈의 대위를 추모하기 위해 공원을 조성하고 동상까지 제작한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쇼 대위는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들어와 선교사 활동을 하던 윌리엄 얼 쇼(한국명 서위렴 1세)의 외아들로 1922년 6월 평양에서 태어나 고교까지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3년 미 해군소위로 임관해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한 뒤 전역, 한국으로 돌아와 경남 진해 해군사관학교 민간인 교관으로 지내며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도 기여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께 편지로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님 어머님! 지금 한국 국민들이 전쟁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돕기 위해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미 해군으로 재입대한 쇼 대위는 제2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후 서울수복작전 중 녹번동에서 꽃다운 나이로 전사했다. 현재 마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안타까운 전사 소식에 당시 백낙준 연세대 총장,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등 55명이 성금을 모아 6주기이던 1956년 9월 전사한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으나 도시계획에 밀려 응암동 어린이공원으로 옮겨졌다. 은평구는 2008년 안병태(20대 해군참모총장) 해군전략연구소장의 건의에 따라 추모공원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추모공원 조성에 박차를 가했다. 511억원을 투입해 조성한 은평평화공원은 5700㎡의 아담한 규모로 휴식하기엔 그만이다. 북한산과 한강을 잇는 녹지생태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하철 6호선 역촌역과도 가깝고 외곽에 소나무동산, 진입로에 벚나무·이팝나무 등으로 숲을 만들어 녹음을 뽐낸다. 특히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 바닥분수를 설치하고 등의자, 체육시설 등 각종 편의시설을 두루 갖췄다. 퇴임을 보름여 남겨 남다른 감회에 젖은 노재동 구청장은 “3대에 걸쳐 한국사랑을 펼친 쇼 일가를 기리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다. 특히 후세들에게 호국보훈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쇼 대위의 묘비명에 새겨진 글이 도드라진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위대한 사랑은 없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中 학자가 본 한국전쟁]中 냉전체제 공산권 ‘양대 축’으로

    [中 학자가 본 한국전쟁]中 냉전체제 공산권 ‘양대 축’으로

    한국전쟁은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 치른 첫번째 전쟁이다. 새로운 중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국제관계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도 충분히 연구할 만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국제정치나 세계구조의 관점에서 중·소 동맹의 체결은 중국을 냉전의 한 방향으로 이끌었고, 한국전쟁은 중국을 그 최전방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196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두 가지 측면의 영향을 끼쳤다.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냉전의 선봉에 섰다는 점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소련과 북한이 가장 위급했던 시기에 단독으로 병력을 파견해 참전했다. 당시의 결정은 사회주의 진영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스탈린 역시 감동했다. 소련은 중·소 동맹 협상 과정에서 중국에 최대한도로 양보했다. 모스크바는 태평양으로의 출구와 부동항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다.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김일성의 주장에 갑자기 동의하고, 전쟁초기 중국의 군사행동을 막은 것은 이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중국의 참전은 소련이 어쩔 수 없이 양보해 맺을 수밖에 없었던 중·소동맹을 신뢰의 기초에서 새롭게 확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중국은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대량 경제원조를 얻어낼 수 있었고, 아울러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결과는 마오쩌둥의 혁명 정서를 더욱 고무시켜 아시아 혁명을 이끌고, 더 나아가 세계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을 자극했다. 중국이 1950~60년대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봉에 서서 그 당시 가장 혁명적인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한국전쟁은 또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적대와 증오를 심화시켰고, 이데올로기적 투쟁 과정에서 이 같은 정서는 장장 20여년이나 지속됐다. 마오쩌둥이 친소련 일변도의 정책을 선택한 것에 대해 말한다면 국제관계와 국제왕래의 경험과 이해가 부족했던 데다 미국에 대한 불신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전쟁 기간중 마오쩌둥은 미국 정부의 모습을 주시했다. 미국은 타이완(臺灣)이 신중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포한 뒤 타이완 해협을 보호한다며 해군을 출동시켰다. 이로 인해 마오쩌둥은 결국 통일대업을 달성하지 못했다. 3년 동안의 막대한 희생을 핑계삼아 중·미 양국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을 주입했다. 상대방을 추악한 모습으로 선전했다. 20여년 동안 중국인들은 모두 미국이 중국의 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국민들의 정서를 기초삼아 중국은 오랫동안 냉전의 최일선에서 전투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이 모두 한국전쟁 기간에 태동됐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이 참전한 동기는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다. 동북 공업기지 보호와 반동세력의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 밖의 전쟁이 필요했던 마오쩌둥의 고민이 있다. 또 하나는 혁명 전파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념과 의지다. 마오쩌둥은 미 제국주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열정에 넘쳤고, 혁명의 동력을 지속시키면서 중국의 국제지위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막 혁명을 완수한 중국이 처한 복잡한 환경과 조건도 빼놓을 수 없다. 타이완 문제가 대미 항전 욕구를 자극했고, 국제 분업구조하의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중국의 책임과 의무를 요구했다. 중국의 참전은 이처럼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정됐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주관적 동기와 객관적 목적은 사실 합리적이고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세운 전략적 목표와 방침은 현실조건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중국은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그만둘 수 있었던 역사적 기회를 놓치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했다.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이 참전의 최초 목표를 억지로라도 달성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많은 불필요한 대가를 치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세계는 평화와 안녕을 얻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미·소 대결과 자본주의·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냉전상태를 더욱 심화시켰다. 한국전쟁은 강대국 간, 특히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간의 전쟁은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 첫번째 전쟁이다.
  • 러 “천안함 北소행 증거 불충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와 동의를 얻지 못하면서 한국 정부가 구상하는 ‘천안함 외교’가 암초에 부딪혔다. 러시아는 천안함 중간조사발표를 불신하고 중국 관영언론은 연일 한·미합동훈련을 비판하고 있다. 거기다 북한은 “(천안함 사건을) 의제로 삼으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경고 서한을 안보리 의장에게 보내는 등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은 국제합동조사단의 천안함 조사결과 검토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전문가팀이 한국 측 조사결과로는 북한 소행이라고 단정하기에 불충분하다고 결론내렸다고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러시아 해군대령 3명으로 구성된 러시아 조사단은 지난달 31일 입국, 평택 해군 2함대 사령부를 방문해 천안함 함체를 살펴보는 등 자체 검토작업을 벌인 뒤 지난 7일 돌아갔다. 중국 관영언론은 이달 말 실시 예정인 한·미 연합훈련을 연일 비판하고 나섰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미국은 중국 문 앞에서 군사행동 하지 말아야’라는 9일자 사설에서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항공모함이 중국 문 앞인 황해(서해)에서 군사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중국을 위협하는 행위로 수많은 중국인들을 분노케 할 것”이라고 미국에 경고했다. 신문은 “미국이 진정 서태평양의 안정과 번영을 원한다면 이 같은 중국인들의 생각을 제대로 헤아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서울 박건형기자 stinger@seoul.co.kr
  • [新 차이나 리포트] 中, 2000년이후 美에 부쩍 공세적

    중국이 대양해군을 지향하면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미국과의 충돌이다. 2000년 이후 집중적으로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국은 최근 들어 미국과의 군사대결에서 눈에 띄게 공세적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해 미·중 양국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등에서 여러 차례 충돌 직전까지 가는 위기상황을 연출했다. 임페커블호 등 미 해군 해양관측선의 조사활동을 중국 어업지도선과 어선들이 ‘간첩활동’이라며 실력으로 제지했다. 지난 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9차 아시아안보회의에서도 양측은 각을 세웠다. 마샤오톈(馬曉天)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은 “미국이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중국을 상대로 감시, 정찰활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우리는 항해의 자유를 위협하는 어떤 물리력 사용이나 행동에도 반대한다.”며 해군력 증강, 분쟁수역에 대한 어로금지 조치 등을 통해 남중국해 등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는 중국의 행보를 지적했다. 이번 회의에서 인민해방군 소속 국방대학교 교수인 주청후(朱成虎) 소장은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무기판매와 관련, “미국은 중국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인민해방군 창설자인 주더(朱德)의 외손자인 주 소장은 중국 군부의 대표적인 매파 인사다. 중국이 지난해 말 실시한 미사일 시험발사도 주목된다. 랴오닝(遼寧)반도에서 대함 순항미사일 두 발을 공해상으로 날려보내 목표했던 함정을 명중시킨 이 시험발사는 가상의 미 항공모함을 목표로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초 잠수함, 구축함 등 10여척의 중국 군함이 일본 오키나와 인근까지 기동훈련을 실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은 2000년대 초부터 타이완 해협에서 긴장이 발생할 경우 미군의 개입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반(反)접근’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공세적 방어전략인 셈이다. 2001년 4월 중국 남부 하이난(海南)성 공해 상공에서 발생한 미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의 충돌 사건 이후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주변에서는 양국 간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중국이 해양강국, 대양해군을 지향하면서 충돌은 더욱 잦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NICS7’ 미방영 2편 방송

    채널CGV는 미 해군 범죄수사국 특수요원들의 활약상을 다룬 수사시리즈 ‘NICS7’의 미방영 에피소드를 7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10시 두편 연속 방송한다. ‘NICS7’은 미국 현지의 스케줄 조정으로 15회 방송을 끝으로 방송이 잠시 미뤄졌었다.
  • [최병규 기자의 헬로 남아공] ‘시끌벅적’ 요하네스버그공항… 축구공 아래 인종전시장

    [최병규 기자의 헬로 남아공] ‘시끌벅적’ 요하네스버그공항… 축구공 아래 인종전시장

    야트막한 구릉들을 빼면 거의 평원이나 다름없는 넓디넓은 땅이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서일까.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요하네스버그 주변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은 흑인들의 우범지대로 몰락했다던 요하네스버그의 OR탐보국제공항에 홍콩발 비행기가 도착한 건 5일 오전. 이른 아침 시간인데도 공항은 시끌벅적했다.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축구공, 그리고 아프리카연합(United Africa)이라는 글과 함께 세 명의 흑인 축구선수 사진이 드리워진 공항 입국장 전경. 그 아래에서 부지런히 오가고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레게풍의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흑인들, 히잡을 둘러 쓰고 남아공월드컵 마스코트인 자쿠미를 쳐다보며 까르르 웃어대는 아랍계 여성들. 포르투갈 깃발을 펄럭거리며 누구보다 당당히 입국장으로 들어서는 반바지 차림의 사진가. 요하네스버그공항은 마치 인종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그렇지만 분명 삶이 살아 있는, 흥겨운 풍경이었다. 축구공 아래 모인 사람들.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처음 열리는 제19회 월드컵축구대회는 이미 시작된 듯했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개봉한 ‘우리가 꿈꾸는 기적’이라는 영화가 요하네스버그행 비행기 안에서 상영됐다. 유명 흑인 배우 모건 프리먼이 넬슨 만델라로 분한 영화다. 영화에서 만델라는 흑과 백의 극단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럭비’라는 매개체를 사용한다. 남아공을 대표하는 스포츠다. 그런데 럭비는 백인만의 전유물이었다. 그는 자국 선수들 대신 라이벌 영국을 응원하던 흑인들을 보고는 반드시 1년 뒤엔 영국을 이겨 달라고 백인 주장에게 손을 내민다. 역시 1950년대 미 해군 잠수부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기내 영화 ‘명예로운 사람’(Man of Honor)’이라는 영화에서 실제 주인공인 흑인 칼 브래셔로 분한 쿠바 쿠딩 주니어는 자신의 다리 하나를 잃어가며 미 해군 최초의 심해 잠수사가 되는 꿈을 일궈 낸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많은 고통을 동반한다. 30년 전 흑백분리주의(아파르트헤이트)를 물리치고 처음 하나 된 남아공을 만든 만델라 전 대통령이나 첫 흑인 잠수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다리 하나를 맞바꾼 브래셔나 경우는 같다. 둘은 모두 비흑인이 독차지했던 불평등한 소유를 평등하게 만든 사람들이다. 지금 요하네스버그공항에서 벌어지는 흥겨움은 흥겨움대로 즐기되 ‘평등’이라는 흔하디흔한 말도 한번쯤은 되새겨 볼 일이다. 요하네스버그 cbk91065@seoul.co.kr 사진 요하네스버그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뉴스&분석]한·미 서해합동훈련 발목잡은 ‘G2 암투’

    한반도 안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관계가 심상치 않다. 중국이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의 방문 요청을 거부했다는 소식이 3일 전해진 데 이어 4일에는 미국이 서해에 항공모함을 파견하려던 계획을 전격 취소했다. 외교적·군사적으로 이례적인 현상이 연달아 일어난 격이어서 양대 강국이 뭔가 말 못할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는 관측이 뒤따르고 있다. 게이츠 장관의 방중 좌절 소식만 전해졌을 때는 미국이 타이완에 무기 판매를 결정한 데 대한 반발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곧바로 미군의 항모 파견 취소 사실이 알려지면서 천안함 사태가 두 나라 사이를 긁어놓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늘고 있다. 장광일 국방부 정책실장은 4일 “다음주 초에 (서해에서) 열릴 계획이던 무력시위 성격의 연합훈련이 미측의 준비사정을 감안해 2~3주 연기됐다.”면서 “훈련은 6월 중순 이후 실시되며 대(對)잠수함 훈련은 이달 말이나 다음달 초에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훈련에는 미 해군 7함대 소속 항공모함인 조지 워싱턴호가 참가하는 것으로 언론에 이미 통보됐었다. 한국 국방부에서는 항모를 취재할 풀 기자단까지 구성했었다. 그러나 이날 한·미연합사령부 측은 항모 참가 여부에 대해 “불분명하다.”고 물러났다.제프 모렐 미 국방부 대변인도 “조지 워싱턴호를 금명간 한반도 인근 해역에 파견할 계획은 없다.”고 부인했다. 훈련 변경이 미국 측의 요구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미군의 입장이 갑작스럽게 변하자 중국이 미국의 서해 항모 파견에 강력 반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즉각적으로 나오고 있다.서해는 중국 대륙에 접해 있어 중국이 안보상 극도로 민감하게 여기는 곳이다. 이를 감안, 미 해군은 그동안 경남 진해 서쪽으로는 기동을 자제해 왔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에 따른 무력시위 때도 미군은 항공모함을 동해에 파견했었다. 그에 반해 이번 훈련은 서해 덕적도 인근 해상에서 항모는 물론 전투기와 이지스 구축함 등이 대규모로 참여할 예정이었다. 중국의 앞마당에서 실전과 다름없는 군사훈련이 예정된 데 대해 중국이 발끈했다고 볼 수 있다. 당초 한·미가 항모 파견을 계획했던 데는 순수한 훈련 목적 외에 중국을 압박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논의에서 중국의 협조를 끌어내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게이츠 장관은 이날 “유엔에서 성과(안보리 대북제재)가 있는지를 보고 그 다음 단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훈련을) 중단할 수도 있다.”고 말해 서해 훈련을 중국에 대한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심중을 드러냈다. 중국이 안보리 논의에서 협조적으로 나올 경우 서해 훈련을 취소할 수도 있다는 뜻이어서 중국의 반응이 주목된다. 김상연 오이석기자 carlos@seoul.co.kr
  • [시론] 적벽대전과 천안함사태/이준태 경희대 교수·중국학연구소 소장

    [시론] 적벽대전과 천안함사태/이준태 경희대 교수·중국학연구소 소장

    천안함 사태로 인한 이른바 북풍이 거세게 불었던 6·2 지방선거도 끝나고 곧 군의 대응 태세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결과 발표와 함께 책임의 과중에 따라 군 내부에 삼엄한 문책의 회오리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된다. 46명의 소중한 젊은 해군장병의 희생에는 철저한 진상조사와 그에 따른 문책과 군의 개혁이 필연적이겠지만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보여주기 식의 문책만이 천안함 사태를 풀어나갈 최선의 방도인지 곰곰이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현 시점에서 필자는 역사소설 삼국지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적벽대전의 교훈을 조조의 처지에서 주목해 보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손권의 오나라와 유비의 촉 나라 연합군을 치려고 조조는 백만 대군을 양쯔강에 결집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오나라 최고 지휘관 주유의 반간계(反間計)에 속아 조조 스스로 자신의 참모이자 수군 최고 지휘관인 채모와 장윤을 참수케 하였고 이 일은 결국 조조에게 적벽에서의 엄청난 패배를 안겨다 주었다. 평생을 육지에서 전투를 해왔던 백전노장 조조는 수군 장수 채모와 장윤을 참수한 직후 “수군을 어찌하려는가.”라는 주위의 말을 듣고서야 적의 간계에 속았음을 깨닫고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그 순간 적벽대전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에게 속고 돌아온 장수일지라도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우선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생방송을 통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국방부장관을 상대로 모 국회의원이 보여주었던 문제 접근 방식은 시청하는 국민으로 하여금 또 다른 걱정거리를 느끼게 해주었다. 불 끄는 소방관에게 “건물 안에 몇 명이 있느냐?”, “빨리 구해내지 않고 뭐하냐?”, “불났을 때 너는 뭐 했느냐?”와 같은 인기몰이 식의 질문보다는 “불이 더 번질 가능성은 없느냐?” 또는 “번질 경우의 대비책은 세워져 있느냐?”와 같은 질문이 오히려 위기에 직면한 국민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고, 넓은 의미의 국정을 맡은 정치인들에 대해 믿음이 가게 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GNP와 군사력의 함수관계를 따지지 않는다고 해도 대한민국 군대는 결코 약한 군대가 아니지만, 군사전략적으로 의도된 적의 기습을 막아내기는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본다. 수중의 적 잠수함을 탐지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과거 한·미 연합훈련 도중 미 항공모함과 주변 함정들이 소련의 핵잠수함을 탐지하지 못 하고 급기야 항모와 잠수함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 바 있는데, 이는 수중작전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완벽한 국가안보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안보의 전문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전문가를 육성하는 것에도 많은 시일과 노력이 소요된다. 동시에 베트남전 이후 실전을 경험한 지휘관이 거의 없다는 현실 등을 고려할 때 천안함 사태는 향후를 대비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이번 사태에 책임져야 할 지휘관이 있겠지만 될 수 있으면 지휘관 스스로 뼈를 깎는 자세로 각성하여 다시는 제2의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하고 대비할 기회를 줄 필요도 분명히 있다.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지난 3월26일을 국군으로서 치욕의 날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절대 그 의기가 일회성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많은 국민은 이번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한민국군을 믿고 신뢰하고 있다. 천안함 사태를 통해 군이 더욱 강해지는 발전적인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고 또한 이것이 먼저 간 46명 장병들의 희생을 값지게 하는 것이라 믿는다. 적의 간계로 아까운 장수의 목숨을 빼앗아 버린 조조처럼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對北제재조치 이후] 한·미 서해서 대규모 연합훈련

    미국 제7함대 소속의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가 참여하는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이 오는 8일부터 서해상에서 실시된다. 조지 워싱턴호를 중심으로 한 항모전단이 참여하는 이번 훈련은 서해상에서 이뤄지는 최대 훈련이다. 훈련은 7함대의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전력이 참가하는 데다 우리 해군의 잠수함과 수상전투함 전력이 참여해 천안함 사태 이후 북한을 겨냥한 최대 무력시위가 될 전망이다. 군 고위 관계자는 2일 “한·미 양국이 확실한 대북 억지 의지를 보여주기로 의견을 모았다.”면서 “대규모 무력시위 성격의 연합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서 해군은 지난달 말 서해상에서 폭뢰 투하를 비롯한 대잠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하버드 최고 명강의 ‘정의’를 만나다

    상상해 보자. 당신은 미국 중앙정보국 지역 국장이다. 테러 용의자를 붙잡았다. 맨해튼을 폭파할 핵무기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미 폭탄을 설치했다고 의심할 근거도 있다. 시계는 째깍거리는데 용의자는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며 폭탄 위치를 털어놓지 않는다. 수많은 시민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폭탄 설치 장소와 제거할 방법을 자백할 때까지 그를 고문해야 옳을까. 다음은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2005년 6월 미 해군 특수부대 군인 4명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인 탈레반 지도자를 찾는 비밀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 어린 아이가 끼어 있는 현지 염소치기들을 만났다. 이들을 그냥 풀어주면 소재가 탈레반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미군들은 이들을 사살하느냐, 풀어주느냐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결국 염소치기들을 놓아줬으나 미군들은 곧 중무장한 탈레반 병사들에게 포위됐고, 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을 구출하려던 미군 16명까지 숨졌다. 염소치기들을 사살했어야 옳았던 것일까. 자유 민주 사회에선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대한 다양한 주장과 이견이 난무한다. 요즘 우리 사회만 봐도 쉽게 이해가 간다. 너무 혼란스럽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시민의 미덕을 장려해야 하는가. 아니면 법은 미덕에 대한 여러 개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시민 스스로 최선의 삶을 선택하게 해야 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를 통해 저자인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와 논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27세에 하버드 최연소 교수가 된 샌델은 지난 30년 동안 정치철학을 가르쳤다. 이 책은 정의를 다룬 뛰어난 철학서를 소개하고,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오늘날의 법적·정치적 논쟁을 다루며 최근 20여년 동안 하버드 최고 명강의로 꼽혔던 그의 ‘정의’ 수업을 글로 옮긴 것이다. 책의 미덕은 독자들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개인의 권리 존중을 강조하는 자유지상주의, 평등을 옹호하는 평등주의 등 저마다 정의를 대변하는 이론들의 장단점을 다양한 각도의 질문과 논쟁을 통해 스스로 살펴보게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정의를 바라보는 방식을 행복의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 추구로 정리하며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근현대의 이마누엘 칸트,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까지 두루 섭렵한다. 샌델 교수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풍요를 지지하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정의에서 심판이라는 한 가닥 끈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한다. 정의에 미덕도 포함된다는 생각의 뿌리가 깊은 것이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곧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1만 5000원.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韓美 해·공군 무력시위 시작됐다

    韓美 해·공군 무력시위 시작됐다

    북한을 향한 우리 군의 무력시위가 시작됐다. 서해상에서 해군 단독 대잠수함 훈련을 실시하고 다음달에는 미군과 대규모 연합훈련을 펼친다. 그동안 살얼음판을 걷던 남북한이 또다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변화하는 셈이다. 이날 한미연합사령부의 ‘워치콘’ 2단계 격상은 이런 긴장 강도를 방증한다. 한미연합사는 북한이 2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을 때 워치콘을 2단계로 격상한 바 있다. ☞[화보]”이제는 뚫리지 않으리”…서해 해상 훈련 해군은 27일 서해 태안반도 격렬비열도 해상에서 대잠수함 기동훈련을 실시한다. 천안함이 소속돼 있던 경기 평택 해군 제2함대사령부 소속 함정 10여척이 동원된다.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대잠 폭뢰 투하 연습도 실시한다. 해군은 “천안함 사태 이후 해군의 방어태세를 점검하고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무력 시위 성격을 띠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달에는 한·미 연합 대잠 훈련도 계획돼 있다. 앞선 25일 김성찬 해군 참모총장은 피터 구마타오타오 주한 미 해군사령관과의 긴급회동을 통해 연합 훈련을 비롯한 확고한 공조태세 유지를 약속한 바 있다. 특히 미군 측은 서해상에서의 대북 억지력 강화를 위해 일본 요코스카에 본부를 둔 7함대를 서해안으로 전진배치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 7함대는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와 지휘함 블루리지를 비롯해 구축함 7척, 잠수함 3척 등이 소속돼 있다. 이와 함께 미군이 이달 중 최신예 전투기 F-22(일명 랩터) 24대를 일본과 괌에 전진배치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 공군은 뉴멕시코주 홀러먼기지에 있는 F-22 1개 비행대대(12대)를 일본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에 배치하고, 버지니아주 랭리기지에 있는 F-22 1개 대대도 괌의 앤더슨 기지로 옮길 계획이다. F-22 전투기들은 앞으로 4개월 정도 가데나 기지와 앤더슨 기지에 머무르며 유사시에 대비한 작전 및 훈련을 실시하게 된다. 특히 일본 가데나 기지에 배치된 F-22는 이륙 후 30분 이내에 북한 영변 핵시설을 타격할 수 있으며 1시간 이내에 북한 전 지역에서 작전 수행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 장광일 정책실장은 미군이 F-22 전투기를 일본과 괌에 전진배치할 것이란 소식에 대해 “미군 전력은 항상 순환 배치되며 자체 계획에 따라 옮길 때도 있고 다른 목적으로 할 때도 있다.”면서 “우리에게 통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 4척이 동해 기지에서 사라져 군 당국이 추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26일 “북한의 상어급(300t) 잠수함 4척이 함경남도 차호기지에서 출항해 훈련을 하는 상황이 포착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선규 청와대 대변인은 “북한의 특별한 움직임이 포착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홍성규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中 목소리 너무 컸나…亞국가, 미국 곁으로

    중국의 커진 목소리와 거침없는 행보에 아시아국가들의 친미(親美) 성향이 확산, 강화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26일 중국의 외교적, 군사적 자기 주장이 커지면서 이에 대한 우려로 아시아 주변국가들이 미국에 접근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천안함 사태로 중국의 북한 감싸기가 부각되면서 한국, 일본 등에서 중국에 대한 섭섭함과 경계 심리가 커지는 반면 미국과의 군사 동맹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분위기다. WSJ는 “한국의 중국과의 유대관계가 천안함 사태에 대한 중국의 (북한을 두둔하는) 대응으로 시험대에 놓였다.”고 전했다.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외쳐온 일본 하토야마 정부도 최근 미·일 동맹강화에 신경쓰는 분위기다. 일본 정부는 지난 3일 중국 함정들이 해상보안청 소속 해양 조사선들의 해양 측량조사활동을 중단시켰다며 지난 6일 중국 정부에 공식항의했다. 문제 지점은 일본 가고시마현 아오미오시마 북서쪽 320㎞지역의 동중국해.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대한 입장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중국이 처음 일본 선박에 대해 실력행사에 나서자 일본이 공식 항의라는 카드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잠복해 있던 동중국해 중·일간 영토분쟁이 표면화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셈이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등도 커가는 중국의 영향력과 비례해 대미 관계 개선 속도를 높이고 있다. 토착민과 화교들간의 유혈충돌 사태를 경험했던 말레이시아는 자국내 커가는 중국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국에 접근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베트남은 남중국해 주변에서 영토 분쟁으로 중국의 압박을 받아 왔다. 중국은 지난 1일부터 남중국해상의 난샤(南沙·스트래틀리)군도 주변에서 자국 어민 보호를 상시화하기 위해 순시선 순찰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앞서 지난해 말 남중국해 6900여개 도서를 대상으로 한 환경보호법을 통과시켜 베트남 정부 등 주변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지역은 중국이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과 서로 상대국가의 어선을 나포, 억류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은 곳이다. 중국의 적극적인 영토 주장은 갈등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중국 해군은 타이완과의 전쟁과 자국 해안 방위에 주력하던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 태평양과 중동으로 작전 영역을 넓히는 원양 방위 전략을 도입, 항공모함 건설 등 활동 범위를 넓혀 주변국가들의 경계심을 더하고 있다. 근년 들어 급속하게 커진 외교적 영향력과 군사적 완력을 배경으로 영토 문제에 있어서 눈에 띄게 자기 주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 주변국가들의 대미 접근의 요소가 되고 있다. 중국 외교부 장위(姜瑜) 대변인은 지난달 “중국 해군은 공해상에서 정기 훈련을 하고 있다.”며 “일본 등은 중국 군함이 먼바다에 빈번하게 출현하는 데 대해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중국의 달라진 모습을 당당하게 대변했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사설] 천안함 유언비어 대책 대증요법 넘어서야

    지난 3월26일 천안함이 침몰된 뒤 각종 유언비어가 그치지 않고 있다. 현역 해군 소령을 사칭해 인터넷에 “천안함이 낡아서 침수됐다.”는 허위사실을 퍼뜨린 20대 누리꾼이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지만 민·군 합동조사단이 지난 주 사고원인을 발표한 뒤에도 유언비어는 계속되고 있다. “미군 핵잠수함 하와이호가 천안함과 짜고 친 고스톱이다.”, “미 해군과 이명박 정부가 짜고 천안함을 폭파시켰다.”고 인터넷에 퍼뜨린 40대 누리꾼이 그제 불구속 입건됐다. 근거도 없는, 여과되지도 않은 누리꾼의 글을 다른 누리꾼이 퍼나르는 과정에서 더 그럴듯하게 유언비어는 확대, 재생산된다. 여기에 일부 야당 정치인과 지식인까지 가세하고 있다. 유언비어는 과거 권위주의적인 정부 시절에 많았다. 신뢰가 없고 소통이 부족하면 유언비어는 늘고 유언비어를 믿는 국민들도 많아지게 된다. 천안함과 관련한 유언비어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신뢰와 소통의 부족 외에 이념과 세대에 따라 사회가 나눠져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검찰과 경찰이 악의적인 유언비어 유포자를 처벌하는 식의 대증요법은 근본대책이 될 수 없다. 천안함 침몰 뒤부터 우왕좌왕하고 침몰시간도 오락가락하면서 신뢰를 잃은 군과 정부에도 책임이 없지 않다. 정부는 2년 전 촛불시위 때를 교훈으로 삼아 천안함과 관련한 유언비어가 왜 생기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침몰원인과 관련한 각종 의문을 해소할 수 있도록 성실한 답변과 대응을 해야 한다. 국무총리실이 주관하여 유언비어 대책을 총괄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 [對北제재조치 이후] 美 7함대 일부 서해배치 논의

    │워싱턴 김균미특파원·서울 홍성규 기자│김성찬 해군참모총장과 주한 미해군사령관인 피터 구마타오타오 준장은 25일 해군본부에서 회담을 갖고 천안함 사태 관련 대북조치 이행을 위한 공조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 총장과 구마타오타오 사령관은 전날부터 시행된 남북 해상항로대 폐쇄 조치와 이르면 6월 실시 예정인 한·미 연합 대잠수함훈련, 올해 하반기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역내외 해상차단 훈련 등 한·미 합동 해상훈련을 원활히 이행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고 해군 측은 밝혔다. 한·미 해군은 서해상의 대북 억지력 강화를 위해 일본 요코스카에 본부를 둔 미군 7함대의 일부를 서해안에 전진 배치하는 방안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군은 미 7함대의 전진배치 전력 등 구체적 증강계획은 한·미 연합사와 합참을 통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해군은 이와 별도로 오는 27일 서해 태안반도 격렬비열도 해상에서 2함대 산하 함정 10여 척을 동원해 기동훈련을 벌이기로 했다. 해군은 이번 훈련에서 함포 사격 훈련과 함께 대잠수함 폭뢰 투하 연습도 실시할 예정이다. 천안함 사태 이후 해군이 서해상에서 해상 기동훈련에 나서기는 처음이다. 이에 앞서 미 국방부는 24일(현지시간) 한·미 양국군이 가까운 장래에 공동으로 대잠수함 훈련과 해상 선박저지 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kmkim@seoul.co.kr
  • [李대통령 대국민 담화] 하반기 PSI 역내외 차단훈련 실시

    [李대통령 대국민 담화] 하반기 PSI 역내외 차단훈련 실시

    김태영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대북조치는 크게 4가지로 ▲대북 심리전 재개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 전면 불허 ▲한·미 연합 대잠수함 훈련 ▲확산방지구상(PSI)의 실질적 참여 등이다. 국방부는 2004년 6월4일 ‘서해상 우발충돌 방지 및 군사분계선일대 선전활동 중지’에 관해 합의한 후 중단됐던 대북방송을 이날 오후부터 재개했다. 또 기상상태가 좋아지는 대로 대북전단도 살포하기로 했다. 군에 따르면 대북 심리전 방송은 북한군과 주민을 동요시키기 위해 과거 보냈던 ‘자유의 소리’와 같은 내용으로 FM방송을 통해 이뤄진다. 드라마 등 국내 방송을 포함한 각종 선전내용은 사람키보다 높게 올린 대형 확성기를 통해 155마일 군사분계선(MDL) 전지역의 94곳에서 방송할 예정이다. 또 남한 소식을 알려주는 대형전광판은 11곳에 설치된다. 이 작업은 철거됐던 확성기를 재설치하는 작업 등으로 이르면 6월 둘째주부터 시작된다. 군은 또 북한에 살포할 전단에 천안함 합동조사 결과와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동향 등을 담기로 했다. 대형 풍선에 전단지와 함께 남한의 경제상황을 알릴 수 있도록 시계와 단파라디오 등을 함께 넣어 보낼 예정이다. 이와 함께 2005년 남북해운합의서에 따라 이뤄지던 북한 선박의 우리 측 해역 운항을 이날부터 전면 금지하기로 했다. 다만 이미 허가를 받아 우리 해역에 들어와 있던 북한 선박 3척의 이날 영해 통과는 허용했다. 이번 조치에 대해 장광일 국방정책실장은 “북한군이 상선으로 위장해 우리 영해의 해양정보와 작전환경을 정탐하고, 해상침투용 모선의 기능을 수행하며, 잠수함정의 잠항 침투를 돕는 등의 행위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북한 선박은 이날부터 2004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리 군의 작전수역(AO) 밖으로 항해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나포, 강제 퇴거 등의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군은 또 제2의 천안함 사태를 막기 위해 이르면 6월 말에서 7월 한·미 연합 대잠수함 훈련도 실시하기로 했다. 이 훈련에는 미국의 7함대 전력이 참가할 예정이다. 항공모함을 비롯한 전단이 참여할 예정으로 사실상 무력시위를 벌이는 셈이다. 그동안 형식적으로 해오던 확산방지구상(PSI)에도 실질적으로 참여키로 했다. 군은 올해 9월 호주가 주관하는 역외 해상차단훈련에 참가한 뒤 올해 하반기 우리 해군이 주관하는 역내 해상차단훈련을 실시할 예정이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천안함 ‘北소행’ 이후] 대북감시 워치콘 3단계 → 2단계 격상 검토

    [천안함 ‘北소행’ 이후] 대북감시 워치콘 3단계 → 2단계 격상 검토

    천안함을 공격한 주체가 북한으로 밝혀지면서 군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국방부는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에 대한 검열단을 파견하겠다는 북측의 통보에 대해 21일 오후 사실상 거부 입장을 전화통지문으로 전달했다. 또 각 군에 대한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한·미연합사령부와 함께 대북 감시태세인 ‘워치콘’(Watch Condition)을 3단계에서 2단계로 한 단계 높이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군은 전날 김태영 국방장관이 주재한 전군 작전지휘관회의에서 워치콘 격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한·미연합사령부와 이를 논의한 뒤 최종 결정키로 했다. 또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한 군사대비태세를 강화키로 했다. [포토]천안함 ‘北소행’ 결정적 증거 앞서 연합사는 북한이 2차례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는 등 한반도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할 때 ‘워치콘’ 단계를 올려왔다. 각 군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육·해·공군 모두 전후방 모든 간부들의 휴가를 제한하고 있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고 군 관계자는 전했다. 계룡대의 지휘관들은 휴일에도 3교대 근무를 하고 있고, 일선부대의 지휘관들은 사실상 2교대로 비상 대기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인 작전상황에 대한 변화는 없지만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사실상 전군 경계강화태세를 유지하는 셈이다. 특히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해군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의 경계태세를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공군도 해상에서 발생하는 도발에 즉시 출동하기 위해 숙련된 조종사들에 대한 비행대기를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에서는 또 서해 NLL 일대의 유엔사 교전규칙을 보다 엄격하게, 공세적으로 실행하는 방안도 제기되고 있다. NLL을 침범하는 북한 경비정에 대해 ‘경고방송-경고사격-격파사격’ 등 3단계로 대응하는 현행 교전규칙을 그대로 두면서 단계적으로 실행되는 시간을 줄여 즉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NLL을 넘는 북한 함정에 대해 경고방송을 하는데도 뱃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즉시 경고사격하는 방식이 될 전망이다. 군의 고위 관계자는 “천안함 사건 발생 다음날인 3월27일부터 현재까지 비상경계태세가 유지되고 있다.”면서 “단호한 조치를 위한 준비를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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