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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지원」 기우는 북경(6·25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14)

    ◎중 수뇌 “혁명 완성위해 참전” 당위성 역설/러국위문서보관소 미공개자료 9백50건으로 엮는 시리즈/유소기 “이제 중국이 북조선 도울 차례” 개입 지지/중·소 인천상륙작전 이후 긴밀하게 작전 협의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사흘뒤인 50년 9월 18일 주은래는 북경주재 로신소련대사와 소련군사고문단의 코토프,코노프 장군을 불러 한국전 상황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크게 당황한 모습의 주는 이들에게 중국은 인천상륙작전을 신문보도와 평양라디오방송의 보도를 통해서야 알았다고 불평했다. ○주,인천상륙에 당황 로신대사가 같은날 스탈린에게 보고한 이 면담내용에 따르면 주는 북조선동지들과 중국군의 연락이 매우 어렵다고 밝혔다.그는 북조선군의 작전계획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말하고 북조선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군사관구에서 중국군 대표를 북한에 파견해 현지상황을 파악토록 하겠다는 요청을 보냈는데도 북조선에서 아무 회신이 없다고 불평했다. ○“모충고 무시” 큰 불만 이와 함께 주은래는 지금까지 모택동이 수차례 해준충고와 예견을 북조선 지도부가 모두 무시했다며 큰 불만을 표시했다.심지어 평양주재 중국대사가 작전관련 정보를 받지 못해 제때에 본국에 보고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따라서 중국정부는 인천의 진짜 상황을 모르며 그 때문에 일관성 있는 입장을 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그는 이와 함께 공식적인 보고에 의거해 다음과 같은 작전관련 주문을 내놓았다.(로신 대사가 스탈린앞으로 보낸 보고전문) 『1.만약 지금 북조선이 서울과 평양지역에 병력 10만명을 보유하고 있다면 충분히 상륙작전으로 들어온 적을 궤멸시킬 수 있다.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주전력을 전선으로부터 북으로 후퇴시킬 필요가 있다.전선에는 적의 진격을 저지할 일부의 병력만 남긴다.미군을 방어지역에서 밀어내 전전선으로 분산시킨 다음 치밀한 작전을 통해 이들을 하나하나 분쇄할 필요가 있다. 2.주공격부대를 창설해 이를 결정적인 전투에 대비,비밀리 유지할 것』 이같은 주문을 한 다음 주은래는 소련정부가 한국전상황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를 공유해줄 것을 모택동을 대신해로신대사에게 부탁했다.그는 최근 한국전상황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갑자기 중국의 유엔가입문제를 끄집어냈다.미국이 대통령선거를 치르기까지는 중국의 유엔가입을 계속 반대할 것으로 본다며 미국이 입장을 바꾸는 즉시 중국은 유엔에 가입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었다. 주는 또한 미·영·불이 소련·중국의 한국전 무력개입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왜냐하면 이들 나라들은 한국에서 장기적인 대규모 전쟁을 벌일 준비가 안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주는 이같은 두려움을 더욱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며 중국이 중국남부 주둔 병력 일부를 만주로 이동시키자 미·영정부가 크게 겁을 먹었다고 말했다. 로신 대사는 주가 소련측에 요청한 사항은 즉각 본국에 보고하겠다고 말하고 중·북조선간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중국대표단이 북조선을 방문하는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9월 20일 스탈린은 로신대사의 이 보고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북조선지도부가 중국동지들에게 조선전쟁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은 물론 잘못이다.하지만 우리는 김일성이 고의로 그랬을 것으로 생각지 않음.아마도 전선과의 통신불량으로 인한 문제로 생각됨.모스크바도 평양주재 대사로부터 이따금씩 그것도 낡은 정보를 보고받고 있음.모두가 북조선인민군이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고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임.인민군 사령부와 전선병력사이의 통신이 아주 불량한 수준임.전선의 보고수준이 불량해 제때 분석이 안됨. 거듭 말하거니와 북조선 당·군 모두 미숙함.불과 3개월의 전쟁경험밖에 없는 북조선군이 완벽한 장비를 갖춘 외국군대를 맞아 그정도 인상적인 전과를 올렸다는게 오히려 놀라운 일임.제물포(인천)의 패배는 인민군이 이승만뿐 아니라 영·미군을 함께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당한 것임.만약 이승만정권만 상대했다면 조선반도의 반동세력을 오래 전에 일소했을 것임』 ○스탈린,중·소 공조 다짐 스탈린은 이와 함께 다음의 4가지 사항을 모택동에게 전달했다.『1.대대·연대가 개별적으로 적과 싸우는 전략은 잘못됐음.이는 전략손실만 자초할뿐임.2.주전선에서 병력을 대부분 철수시켜 서울 동북부에 강력한 방어선을 새로 만들어야 함.3.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더 힘들어졌음.소련대표단이 유엔에서 중·소의 평화해결방안을 계속 역설하겠음.4.미국은 중국의 유엔가입 거부입장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보임.소련대표단은 국민당대표의 유엔축출을 계속 요구하겠음』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어려워진 전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작전변경과 함께 중·소의 국제적 공조체제를 재다짐하는 내용이었다. 이 무렵 중국측에서는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국면타개를 위해 어차피 중국측이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개진되기 시작했다.로신대사는 스탈린의 지시를 전하기 위해 주은래를 다시 만난뒤 이같은 중국측의 분위기를 9월 21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중국쪽의 참전지지 분위기를 보다 분명히 표시한 사람은 유소기였다.이날 유는 소련아카데미 회원 유딘을 위해 자신이 주최한 만찬에서 한국전 상황을 상세히 분석한 뒤 중국사회 각층의 이같은 참전지지 분위기를 이야기했다.9월 22일 로신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전문중에서 유소기의 발언중 참전관련 부분만 소개한다. ○일부선 개입에 반대 『노동자,농민,혁명적 지식인들 다수는 중국혁명이 진행되는 오랜기간 동안 북조선이 중국을 도왔다고 믿고 있다.이제 중국이 북조선을 도울 차례라고 말한다.이들 다수는 미제국주의를 증오한다.민주정당 지도자들도 정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물론 일각에서는 3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중국이 다시 고통을 당할까 두려워한다.활발한 정치선전 덕분에 중국군내 장교·사병 다수는 사기가 충천하다.필요하다면 미제국주의와 맞서 싸우겠다는 기세이다.미군의 사기는 크게 높지 않다는 판단이다. 물론 조선전쟁에 개입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다.오랜 전투를 치르다보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많다.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극소수일뿐이다.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는 미제국주의를 분쇄하기 전에 중국혁명은 완성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미국이 북조선을 위협하는한 중국은 북조선 동지들을 도와야 한다고 지도부동지들은 믿고 있다』 중국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한국전에 참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 전문보고와 같은 날인 9월 22일 모택동이 유딘을 불러 역시 중국의 참전 필요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로신대사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9월22일). ○“미,장기전 준비 미비” 『트루먼이 6월말 남조선과 대만에 미군을 보내기로 한 결정은 큰 실책이었다.그 때문에 영국의 입장이 난처해졌다.영국은 한편으로는 남조선에서 미국의 입장을 지지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했기 때문에 미군의 대만파병을 지지할 수 없는 입장이다.현재 남조선에서 미군의 군사활동을 보면 그곳에서 장기적인 대규모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돼 있다.그들이 하는 것은 소련·중국의 반응을 떠보고 군사력을 시험하는게 목적인 것 같다.모택동은 미군이 큰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다시 타협할 명분을 찾을지 모른다고 했음.이와 관련,미국이 중국의 유엔가입 가능성을 모색할 수도 있다고 모는 보았음.미국이 중국의 유엔가입을 반대하고 대만에 병력을 파병한데 대해 인도·필리핀같은 나라가 반대한 것이 이런 가정을 뒷받침한다고 모는 주장했음』 모는 이와 함께 『적어도 미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유엔가입이 허용될때까지 중국은 아시아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서 공개적으로 투쟁할 명분을 갖고 있다』며 한국전 참전을 시사한것이다.
  • 소의 「북영토 포기」 시나리오(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2)

    ◎스탈린,「평양정권 중·소로 완전 철수」 검토/“계속 저항 무의미… 모든 병력·장비 후송” 전문/중군군 참전 결정따라 당일 철수명령 백지화 스탈린이 3번째로 생각한 대안은 보다 충격적인 것이다.바로 김일성정권 자체를 몽땅 철수시키겠다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50년 10월13일 스탈린은 김일성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10월13일 스탈린이 김일성 앞으로 보낸 전문)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함.중국동지들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음.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중국·소련으로 완전철수를 준비해야 함.모든 병력과 군사장비를 모두 가지고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함.이와 관련한 활동계획을 상세히 보고할 것.향후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한 역량을 유지시켜야함』.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같은 날 즉각 김일성·박헌영에게 전달했다.슈티코프는 두사람과의 면담결과를 이렇게 보고했다.(10월14일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김일성,불만속 동의 『10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났음.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전문내용을 전해듯고 의외라는 반응이었음.그러나 김일성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기는 하지만 스탈린 동지가 그런 충고를 한다면 이를 이행하겠다고 답했음.김일성은 스탈린의 충고를 다시한번 읽어달라고 요청한 뒤 박헌영에게 이를 받아적도록 지시했음.김일성은 이와 관련한 준비작업에 필요한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음』 그러나 김일성정권 자체를 북한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이 구상은 같은 날 잇따라 전달된 다른 전문에 의해 백지화됐다.바로 중공군의 참전결정을 알리는 긴급전문이었다.김일성에게 정권과 군대를 모두 데리고 북조선에서 철수하라는 전문을 보낸 직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슈티코프앞으로 내려보냈다. 『평양.슈티코프대사앞.김일성에게 전달할 것. 모택동으로부터 중국공산당이 상황을 재검토,조선동지들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받았음.중국군의 불충분한 무기사정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결정을 내렸다고 함.본인은 모택동으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음.중국지도자들의 새 결정에 따라 어제 날짜로 보낸 북조선군을 북조선 북쪽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의 전문은 실행을 보류할 것. 1950년 10.13. 핀시(편집자 주:스탈린의 가명)』 중공군참전이 결정된 직후인 11월 2일 김일성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60 06 03sh 50년 11월 2일.스탈린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 ○군사고문단 잔류요청 『중국동지들과의 합의에 따라 인민군 병력이 향후 전투에 대비 만주영토로 이동배치됐음:9개 보병사단,1개 사관학교,1개 탱크연대,훈련비행연대 1개를 포함한 항공사단.아울러 6개 전투사단이 규모가 상향조정돼 조선영토에서의 전투준비에 임하고 있음.본인은 경애하는 핀시동지(스탈린의 가명)에게 위 병력의 훈련지도를 위해 소련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국방부 보고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쿠드리야초프 중장의 보고.11월 11일.대통령문서소.p.51) ⑴만주지방:제6군(제18·제68·제36 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씩.제7군(제13·제32·제37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제8군(제42·제45·제76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사관학교 병력 1만 5천명. ⑵조선지역:제1군(제8·제46·제47 보병사단.제17기계화사단).각 사단병력 1만명.제3군(제1·제3·제15 보병사단,제26보병여단,제105탱크사단,제10사단,제6여단).제5군(제1·제12·제38·제24 보병사단).그외 4개의 독립사단(제2·제4·제5·제7)등 총20여개의 사단. ⑶적의 후방에 잔류병력.제2군(제31보병사단,제27보병여단,그외 독립 해병여단). 종합하면 총병력 25만∼27만명.8개군.25개 보병사단,3개 보병여단,1개 탱크사단,1개 기계화사단,해병여단 1개,독립보병연대,1개 독립탱크연대,사관학교 1개등이다. 한편 4번째 시나리오인 향후전투준비편을 살펴보자. 50년 9월 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했다.(슈티코프가 김일성의 서신을 첨부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60 03 82sh). 『미제국주의자들은 이제 조선영토 전역을 점령해 이를 향후 극동침략의 군사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을 것임.독립·자유·국가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은 장기화되고 매우 어려워질 것 같음. 미군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조종사,탱크운전요원,통신전문가,기술장교를 시급히 훈련시켜야 함.이와관련,다음 사항을 요청함. ⑴소련에서 수학중인 북조선학생중 2백∼3백명을 선발해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것을 허락해줄 것. ⑵재소한인중에서 1천명의 탱크운전요원,조종사 2천명,통신요원 5백명,기술장교 5백명을 양성토록 허락해줄 것』 바로 이튿 날인 10월 10일 모스크바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차관을 찾아가 소련에서 유학중인 북조선학생 전원(남학생 6백69명,여학생 69명)을 모두 항공학교로 전학시킬 것을 건의했다.다만 통신전문대학에서 수학중인 학생들은 군사무선학교로 전학시켜달라고 요구했다.(그로미코차관과 주영하와의 대화록.외교문서). ○북,공군1개 연대 창설 한편 10월 20일 그로미코차관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주영하 대사를 통해 받은 요청과 슈티코프 대사가 보내온 요청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보고했다.(그로미코가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N255­GE.50년 10월 20일)즉 주대사는 항공학교와 무선학교 양쪽에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한 반면 슈티코프가 전문으로 보낸 요청서에는 항공학교 한곳만 적혀있다는 것이었다.그로미코차관은 주대사가 이 경우 슈티코프 대사의 보고내용을 따르라고 말해 그대로 시행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군사고문관 자하로프 장군은 모스크바로 보낸 전문을 통해 11월 1일자로 훈련시킨 29명의 조선조종사들로 공군1개 연대를 창설했다고 보고했다.그리고 11월 1일 이 연대소속 전투기 8대가 완주방면으로 최초출격,B­29기와 무스탕등 2대를 격추시켰다고 보고했다.야크­9기를 타고 출격한 조선조종사들은 귀환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자하로프 장군은 안동지역에 리 파르트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인 혼성사단이 창설됐다고 이 보고서에서 밝혔다.(자하로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N26 416.50년 11월 11일) 11월 13일 모스크바 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소련국방부의 E 쿠르두노프 국장서리를 찾아가 소련유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에게무선훈련을 가르치는 문제를 재차 요청했다.주대사는 이밖에도 재소한인들중에서 조종사,탱크운전요원,무선요원을 선발해 교육시키는 문제를 김일성이 이미 요청했음을 상기시켰다.김일성은 이 문제를 서둘러 실행에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대사는 전했다.(E 쿠르드노프 국방성국장서리와 주영하 북한대사의 대화록.50년 11월 13일) ○연해주서 조종사 훈련 11월 20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조선인 조종사 훈련계획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전문번호 N75 835)『1.조선유학생 2백∼3백명을 선발해 훈련시키는 계획은 만주 양지에 있는 조종사학교에서 시행될 예정임.소련교육관을 파견하겠음.2.폭격기 2개 연대에 배속될 조종사 훈련은 만주주둔 소련군 사단중 한곳에서 실시할 수 있음.훈련은 미그­15를 이용하고 훈련을 마친 뒤 미그­15를 조선조종사들에게 제공하겠음. 폭격기 조종사 훈련은 연해주에 있는 조종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이 편리함.TU­2 폭격기가 폭격연대에 제공될 것임』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완전철수 위기에까지 몰렸던 김일성정권은 중공군의 참전결정으로 이렇게 다시 반전의 계기를 마련,대반격에 나설 준비를 갖추어갔다. ◎새로 밝혀진 사실/북한군 9개사단 만주이동 첫 공식 확인/재소한인·유학생 군사훈련→참전 드러나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북한정권의 생존문제였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번 자료에서는 중요한 사실 한가지가 새로이 밝혀져있다.19 50년10월13일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서 『중국·소련으로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전문은 이 시점에서 소련이 북한영토를 완전히 포기하려하였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이 시점은 김일성과 북한정부가 평양을 막 탈출한 직후 시점이었다.전쟁을 일으키도록 동의,지원해 놓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한을 버리려 하였던 것이다.이는 스탈린식 이중전술이었다.이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및 소련의 대북한정책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석점을 재공해줄 것이다.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는 기존의 연구와 자료에서도 일부는밝혀졌던 것이지만 그것이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일성은 이러한 스탈린의 제의에 대해 못마땅해하였으며,그러면서도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중국측의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세 역전에 직면하여 산악으로 이동하여 빨치산 투쟁을 하려 계획하고 있었다.그러나 스탈린이 『지원불가­철수』를 통고하자 이를 이행하려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철수계획이 중국군의 참전결정으로 당일날 변경되었다는 점도 아주 흥미를 끄는 새로운 사실이다. 한편 50년11월 현재 만주와 북한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의 병력 분포현황도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실이다.만주지방으로 대규모의 북한군이 이동하였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이 자료는 공산측 자료를 통해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흥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또한 이번 회에는 재소한인을 훈련시켜 참전케한 사실도 새로이 밝혀져있다.
  • 북은 남북대화로 돌아와야(사설)

    우리는 북한이 최근 보이고 있는 태도에 실망하며 모든 문제는 남북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을 다시한번 강조한다.최근 북한이 『한국과 쌀문제에 관해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일본측에 전달해왔다』고 일본정부의 관방장관이 밝힌 사실이나 지금 콸라룸푸르에서 계속되고 있는 북한과 미국간 경수로회담에서 북한이 10억달러규모의 경수로부대시설비용을 추가부담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북한이 한국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실리만을 챙기려는 모순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경수로지원비는 물론 부대시설도 해주게 되면 결국 그 태반을 낼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현실을 북한측이 더 잘 알고 있다.미국도 그 문제는 한국형경수로를 수용한 뒤 남북대화를 통해 남북경협차원에서 논의할 일이라고 일러주었으나 북한은 막무가내로 미국측에 요구하고 있다. 그런 억지에서 벗어나서 경협차원의 남북대화를 갖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우리 정부는 이미 그 문제는 근본적으로 북한과 미국간에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은 바 있다.문제는 결국 남북대화인 것이다. 한국돈을 받아내도 미국을 통해 받으면 괜찮다는 북한의 논리란 어떻게 된 것이며 경수로건설도 미국기술자들이 들어가 하면 되고 한국기술자들이 들어가면 체제가 위협을 받는다는 발상은 또 어떻게 가능한가.북한은 그동안 줄기차게 한국을 비방해왔지만 「미제축출」은 그보다 더 큰 북한정권 존립의 대의명분이 아니었던가. 84년 수재때 북한쌀을 우리가 조건 없이 받았듯이 북한이 지금 원하는 쌀을 조건 없이 주겠다고 한 것은 우리정부다.그런 말까지 일본을 통해서 하면 국가적 체면이 선다는 것인가.북한의 「주체사상」이란 민족주체인가 아니면 정권주체인가. 남북대화는 남북간 모든 문제의 시작이고 결론인 것이다.북한은 보다 현명하고 보다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
  • 「초콜릿 마찰」도 미에 양보/제품유형 표기의무 유예

    ◎정부,7월31일까지 【워싱턴 연합】 정부는 미국과 통관 마찰을 빚어온 초콜릿 부문에서 예상대로 결국 미측에 양보한 것으로 1일 나타났다. 주미대사관 고위 관계자는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한미 통상현안을 설명하는 가운데 초콜릿 라벨 부착문제에 대해 미측에 『오는 7월31일까지 제품 유형 표기의무를 유예해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같은 예외 적용에 따라 그간 세관에 묶여온 모두 1백만여달러 상당의 미제 초콜릿 17개 컨테이너의 통관이 허용됐다고 덧붙였다.
  • 미·불 항모·함정 5척 아드리아 도착/보스니아 위기 고조

    ◎러·대세계 강경입장으로 선회 【사라예보·브뤼셀 AP 로이터 연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추가공습을 막기 위해 유엔보호군(UNPROFOR) 3백70여명을 「인간방패」로 억류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보스니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온 러시아가 29일 세르비아계의 「야만적인」 행위를 더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강경입장으로 선회했다. 한편 신속한 구출작전과 전투훈련을 받은 미해병 2천여명을 태운 내슈빌호 등 미함정 3척이 이날 상오 보스니아연안인 아드리아해에 도착했다고 마이크 존 미제6함대 대변인이 밝혔다. 지난 28일 툴롱을 떠난 프랑스 항모 포쉬와 프리깃함 1척 등이 30일 밤쯤 보스니아연안에 도착할 것으로 전해졌다.
  • 모­김 북경 비밀회담(모스크바 새 증언:7)

    ◎모택동,김일성에 남침 세부작전 일일이 지도/모택동/“평화통일 불가능… 무력침공 밖에 없다”/미 개입땐 중국 지원병력 파병 재확인 □모 충고사항 장병에 구체적 임무 부여 모든 작전 신속하게 전개 대도시는 우회공격 할 것 적의 군사력 파괴에 주력 스탈린이 모택동앞으로 보낸 전문은 스탈린·김일성 두사람이 무력남침을 결행키로 합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소련군총참모부 제8국·전문번호N8600·1950년 5월14일). 『모택동 동지앞.조선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리포프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국제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선인들의 통일제의에 동의했음.이와 함께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동지들이 공동으로 내려야 한다는 데도 합의했음.중국동지들이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최종결정은 새로운 논의가 있을 때까지 미루어야 함.조선동지들이 이번 회담의 상세한 내용을 귀하에게 통보할 것임.­필리포프』 ○스팔린 가명 사용 스탈린은 김일성과 남침계획을 확정지은 뒤 이같이 모택동에게 뒤늦게 통보,그의 체면을 살려 주는 체하면서 개전의공범으로 만들려고 했다.재미있는 것은 남침결정 사실을 문서화한 이 전문에서부터 스탈린은 「필리포프」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이후 그는 필리포프외에 「환시」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이보다 이틀전인 5월12일 평양의 슈티코프대사는 본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전문을 띄웠다.『5월12일 김일성의 요청으로 그와 박헌영을 면담.김일성은 북경주재 대사 이주연이 김일성의 중국방문을 주재로 모택동·주은래를 만났다고 했음.주은래는 이 방문을 공식방문으로 하자고 주장.반면 모택동은 언제 북조선이 통일작전을 개시할 계획이냐고 묻고는 답도 기다리지 않고,군사작전을 곧바로 시작할 계획이라면 비공식 방문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함. 모택동은 또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며 무력에 의한 통일밖에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함.미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해서도 모택동은 미국이 그런 작은 나라에서 3차세계대전을 시작할 리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함.김일성은 이에 덧붙여 이주연대사는 자기와 모택동간의 회담을 논의할 권한이없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그래서 그를 소환해 견책한 뒤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음.5월10일 이주연대사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모택동을 만나 정식으로 김일성의 접견승인을 받았다고 함.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5월13일 아침 출발예정임.김일성은 그때까지 자신이 타고 갈 비행기를 준비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음.이에 대해 본인은 비행기는 이미 준비돼 있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문제를 당중앙위에서 토의하지 않고 김책(정치국원)과만 의논했다고 함』 여기서 엿볼 수 있듯이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을 추진하면서 스탈린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크게 신경을 썼다.이주연 대사를 소환해 견책한 것도 스탈린을 의식한 쇼였다.모택동과의 회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다룰 의제를 다음과 같이 슈티코프 대사에게 통보했다.다음은 슈티코프가 보낸 보고전문의 계속.『김일성은 모택동과 다음의 문제들을 토의할 계획이라고 함. 1,무력통일 의향을 알리고 모스크바 회담 결과를 통보. 2,조만간 북조선과 중국간 무역협정체결과 통일 후 양국간 우호조약체결을 희망.3,중국공산당과 북조선노동당 중앙위간 교류문제.4,북조선 수력발전소 건설,중국거주 조선인문제등 상호관심사 논의』 이와 함께 김일성은 중국거주 조선인군 부대가 갖고 있는 일본제 및 미제 무기에 쓸 탄약공급을 중국측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총참모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 김일성은 이 물건들은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전군이 사용할 3벌 분량의 탄약이 이미 비축돼 있다는 것이었다.김일성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이미 필요한 원조는 다 받기로 합의됐기 대문에 실제로 모택동으로부터 원조받을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5월13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예정대로 북경으로 날아갔다.도착 당일 저녁늦게 모택동과의 1차회담이 이루어졌다.그리고 주은래는 로신 북경주재 소련대사를 불러 회담결과를 설명했고 로신대사는 이를 곧바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다음은 로신대사가 보낸 5월13일자 전문. 『1,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에 도착했음.2,조선지도자들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상황이 바뀌어 북조선이 작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사항을 설명했음.이 문제는 조선지도자들과 중국,특히 모택동과 의논해야 된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도 전달됐음.3,조선지도자들은 이틀간 북경체류예정임.…중략…모택동 동지는 이 문제에 관해 필리포프 동지가 직접 설명해주기를 원함.중국동지들은 신속한 답을 원함』 ○개전땐 승리 보장 이튿날인 5월 14일 로신대사는 스탈린·김일성의 모스크바 회담결과에 대해 본국에서 보낸 전문을 받아 모택동에게 전달했다.그리고 로신 대사는 같은 날 모택동의 반응을 본국으로 타전했다.이 전문내용에 의하면 모택동은 신속한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지하며 승리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북한지도부가 내린 현 남북한 정세와 남북한 군사력 균형에 대한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모는 또한 통일 뒤 중소조약과 유사한 우호동맹조약 및 상호원조조약을 북조선과 체결할 것을 북조선지도자들에게 제의했다고 밝혔다.물론 이같은 조약체결은 스탈린동지의 의견을 들은 뒤에 추진할 것임도 덧붙였다. 5월15일 2차회담에서 모택동은 김일성·박헌영과 무력남침에 대해 상세한 입장교환을 했다.회담 뒤 로신대사는 양측(주은래·박헌영)으로부터 별도 브리핑을 통해 회담결과를 전해 들었다.회담결과의 대한 양측의 설명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다음 사항은 양측 브리핑내용이 일치한다.김일성이 먼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합의한 남조선 침공계획을 모에게 설명했다.즉 1단계 준비 및 병력집중배치.2단계 북조선이 수차례 평화통일 공세를 펼칠 것.3단계 남측이 이 평화통일제의를 거부하는 즉시 군사작전 개시.모택동은 이 3단계 작전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모택동은 작전과 관련,몇가지 중요한 충고를 덧붙였다.우선 모든 병사와 지휘관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할 것.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돼야 하며 대도시는 우회할 것.대도시 점령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됨.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적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데 두어야 함.이미 알려진 대로 후일 김일성은 모택동의 이 「귀중한」 충고를 제대로따르지 않아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3단계 계획」 동의 그 다음 모택동은 일본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물었고 김일성은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답했다.다만 미국이 2만∼3만의 일본군을 파병할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는다고 김일성은 말했다.하지만 그 경우 북조선군은 더욱 열심히 싸울 것이기 때문에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자신했다. 주은래가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에 따르면 이 말을 듣고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일본군의 개입은 전쟁을 장기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진짜 개입위험이 큰 쪽은 일본보다 미국이라고 모택동은 말했다.그러나 김일성은 이같은 지적에 대해 『미국은 극동에 군사적 개입의사가 없다』고 미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미국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중국에서 물러 났으며 한국에서도 이같이 신중한 입장을 지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후일 전쟁발발 직후인 50년 7월2일에도 주은래는 로신 대사에게 미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같은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반면 김일성은 끝내 미국의개입가능성을 과소 평가했다. 박헌영이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은 주은래의 것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다음은 로신이 본부에 보고한 박헌영의 브리핑부분.『50년 5월16일.박헌영의 발언.모택동은 일본군의 개입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음.미군개입시 중국이 병력을 보내 북조선을 지원하겠음.모택동은 또 소련은 미국과 38도선 분할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했음.반면 중국은 그같은 의무규정에 얽매이지 않아 북조선에 대한 지원을 쉽게 확대할수 있음』 5월15일 저녁 공식일정을 끝낸 김일성 일행을 위해 모택동은 만찬을 베풀었다.만찬시작 전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이렇게 말했다.『모택동 동지와의 회담은 매우 순조로웠다.모동지는 해방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모동지는 모스크바에서 있은 스탈린동지와 본인사이의 합의사항을 모두 지지했다』 이튿날 5월16일 스탈린은 모택동앞으로 전문을 보내 통일 뒤 중국·북한간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우여곡절끝에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인간 무력남침에 대한 합의는 이렇게 마무리됐다.이제 남은 것은 공격개시의 택일뿐이었다.
  • 일에 수출 미제차/2천5백대 리콜

    【도쿄 교도 연합】 미국의 포드와 크라이슬러 자동차사는 일부 자동차의 장치에서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결함이 발견됨에 따라 일본이 수입한 자사의 약 2천5백대의 자동차를 회수해 수리하게 될 것이라고 일본 운수성이 25일 밝혔다. 운수성은 이번 회수조치가 포드와 크라이슬러의 일본내 판매업자들에 의해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포드는 지난 93년 5월에서 94년 6월사이 수입된 머스탱 스포츠카 4백69대를 회수,최악의 경우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앞좌석 자동조정장치의 배선을 수리하게 될 것이라고 운수성은 밝혔다.
  • 미·일 이번엔 필름 분쟁/코닥사,301조 발동요구

    【도쿄 연합】 미 코닥사는 일본시장의 경쟁제한적 거래관행으로 사진필름과 인화지 판매가 피해를 입고 있다며 통상법 301조(불공정 무역관행에 대한 보복조치)에 의거한 조사와 구제를 미정부에 요청했다고 교도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코닥사는 이와관련,지난 70년대이후 일본시장에는 유통업자에 대한 리베이트관행등이 횡행,미제품의 거래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관행은 일본정부도 관여 또는 인식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미무역대표부는 45일이내에 정식조사 착수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미일 양국은 지난 86년 미 반도체업계가 이같은 절차를 밟아 일본국내시장의 유통규제를 문제삼은 것을 계기로 반도체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 자동차 밀수(두만강 7백리:12)

    ◎일제 중고차 1대3천∼4천불에 거래/ 두만강은 외줄기로 흘러가는 국경의 강이다.그 강의 유역에는 외진 마을들도 있다.십여년 전만 해도 기차구경을 못했다는 촌로들이 있을 정도였다.해방이 되던 해에 소련군 지프가 길도 아닌 길을 따라 천신만고 끝에 마을로 들어오자 차 앞머리에 여물을 수북하게 갔다놓았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있다.마치 소에게 여물을 먹이로 주기라도 하듯이…. ○차 앞머리에 여물까지 놔 그런 삼수갑산 같은 마을이 용정시 대소과수농장과 백금향 사이에 있다.세찬 물결과 깊은 산,그리고 나무숲에 갇힌 마을이다.이 마을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승용차들이 들어왔다.하이야라고 부르는 승용차들인데,이 산골마을에 몰려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이를테면 산골마을이 승용차 밀수기지로 이용되었던 것이다.마을 사람들은 밀수꾼들이 떨어뜨린 떡고물 얻어먹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신바람이 난다. 『하루에도 이 길로 매미차(승용차가 매미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 처럼 땅에 납작 엎드린다고 해서 생긴 말)들이 수십대씩 지나갔디.그래서 조용하던 동네가 벅적댔지 않았갔시요.그때 마을 사람들은 뗏목을 묶어 매미차를 실어오는 일을 했수다.하룻 저녁 나가 어슬렁대면 사오백원은 벌었다 이겁네다』 자동차 밀수는 1992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그러나 그해 가을에 꼬리를 사렸는데,세계 각국의 중고차는 다 흘러들어온 것 처럼 보였다.한대에 3천∼4천달러씩 하는 일본 도요타계열의 승용차로부터 몇만달러나 하는 미국제 차까지 다양하기 이를데 없었다.이들 승용차는 연변에 들어와 패쪽을 달고 곱배기 값으로 팔려 중국 각지에 흩어져 나갔다.외국 땅에서 실컷 굴러다니다 목숨만 간당간당 붙어 들어온 중고차가 중국에서 과분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 무렵에 모든 정력을 자동차 밀수에 바친 사람들이 많다.해관과 같은 유관기관원 주머니에 찔러주고 중개인 호주머니 역시 곯지않게 해주고도 두배 장사가 되었다.훈춘시 한 무역회사원 이강돈(35)씨 말을 들어보면 자동차 밀수가 화수분이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6만달러를 감춰가지고 로시야(러시아)로 건너갔디요.거기주먹들과 미리 선이 닿아 있어서 도착한 날로 흥정에 들어가 차 다섯대를 샀더랬습네다.길이가 7.5m나 되는 미제 링컨표와 도요타 넉대였디요.주먹들이 전신무장을 하고 우리가 산 차를 끌고 나오는 데 로시야 경찰이 추격해옵데다.우리 차가 속력을 내니까 추격을 포기했는지 로시야 경찰차가 안 보여서 겨우 안심했디요.국경선까지 배웅한 주먹패거리들과 작별하고 장령자 해관을 쏜살 같이 빠져나와 차를 그날 다 처분했수다.경비를 빼고 칠십만원이 남습데다』 ○노인들 달라진 세상 한탄 자동차밀수가 성행하면서 달러 씀씀이가 커져서 중국 여러곳에서 달러가 연변으로 몰려들었다.달러값도 물론 천정부지로 뛰었다.그래서 국정가격이 1달러에 8.27원인데 암시장가격은 12원까지 오른 적도 있다.전국에서 달러값이 제일 높은 지역이 연변이라고 한다.달러 장사꾼도 생겨나 비행기를 타고 남방 연해지구까지 펄펄 뛰어 다닌다.달러수집에도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자동차밀수가 주로 두만강연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음식업자와 여관업자들이 이사가는데강아지 따라가듯 강믿으로 옮겨갔다.해괴한 바람이 산 좋고 물 맑은 강가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놓은 꼴이 되었다.그래서 노인들은 달라진 세상을 한탄하기 일쑤다.용정시 백금향 백금촌에서 만난 박길남(68)노인도 그런 노인의 한분이었다. 『광복 전에도 백금향에 요리(요릿집)들이 있긴 했디.강 건너 회령과 무산에는 제법 고운 기생들이 욱실거리고….우리 동네 박아무개는 생강장사로 돈을 버네까 기생놀이에 빠져버렸디.한번은 생강을 사서 배 한척에 골똑 싣고 가서 받은 돈을 몽땅 이화자라는 기생 밑에 바쳤다 이거야.그런데 기생년이 돈 떨어지니끼리 박아무개를 내쫓아버렸디.박아무개가 쫓겨나오는 마당에 기생더러 옷을 한번 벗어달라고 간청하고는 시한수를 지었다고 기래요』 그 시는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멀리서 보면 죽은 말의 눈이요,가끼이서 보면 상처가 깊구나.더구나 이도 없는 짧은 입인데,생강 한배를 다 삼켰구나」라고 해석할 수 있는 한시였다고 한다.비록 돈은 다 날렸을지라도 위트가 있는 한량이었던 모양이다.기생 사타구니에 빠지면 패가망신이 자명하다는 말을 누누이 한 노인은 백금 산골에 들어온 음식점이나 여관·가라오케가 못마땅하다는 눈치를 보였다. 차밀수로 떼돈을 쥐게 된 사람들은 고기반찬에 얼큰히들 술을 먹고는 가라오케에 들어가 한때의 피로를 풀고는 여급의 젖가슴에 팁을 끼워주었다.화룡시 숭선진 가라오케에서 반년간 육체봉사를 한 어느 여인은 사내들의 손가락새에 끼워 묻어나온 돈으로 차 한대를 밀수해서 연길에 들어가 택시업을 벌였다고 한다. ○93년10월 된서리 맞아 뒤늦게 밀수소식에 접한 한국 장사꾼들이 부랴부랴 연변으로 달려왔다.그들은 연줄이 닿는대로 계약을 하고는 허둥지둥 돌아가 중고차를 모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많이는 산동쪽으로 흘렀지만 더러는 연변 가까이 로시야부두와 북조선 청진에도 배를 정박시켰단다.조금만 흥분거리가 있으면 자랑하지 않고 못배기는 민족이라 한국 신문에는 중국으로 들어간 차가 얼마인데 그중 정상무역과 밀수의 비례며,새 차와 중고차 숫자는 얼마라고 똑똑히 밝혔다.한국보다 엄청 많은 수량의 중고품을 쏘고도 입을 싹 다시고 아닌 보살 능청을 떤 일본은 너무나 대조적이라 하겠다. 1993년10월부터 연변에서는 차밀수를 타격하기 시작했다.주에서는 밀수타격사무실을 전문 내오고 해관과 군대를 동원하였다.망둥이가 뛴다고 전라도 빗자루가 뛰는 식으로 늑장을 친 사람들의 골통이 깨지기 시작했다.한국 차 수십대를 실은 연변 장사꾼의 배가 산동 앞바다에서 해군들에게 나포된 일은 전국을 들썩하게 들었다 놓았다.선불로 차까지 사놓았지만 길이 막혀버렸으니 가슴을 치고 통곡한들 용빼는 수가 없었다.
  • 일 수출 올 56억달러 감소/미제재때 일업계 손실은 얼마

    ◎도요타 등 자도차 5사 매출 2.9% 줄어/철강 등 관련사업 포함땐 3천8백억엔 미국이 지난 16일 발표한대로 일제 고급승용차 수입에 1백%의 보복관세를 부과하면 자동차업계등 일본경제가 입게 될 손실은 어느 정도일까. 발표대로 13종의 고급차량에 1백% 보복관세가 매겨지면 이들 차량의 수출은 어렵게 된다.이 경우 수출액은 56억달러(미국발표는 59억달러로 운송비와 보험료가 포함된 통관베이스)가 감소하게 된다.이는 1달러 85엔을 기준으로 16조4천7백억엔에 달하는 자동차5사 매상고의 2.9%에 해당된다.판매고의 감소로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자동차업계의 경상이익은 연간 8백억엔(한화 7천억원상당)가량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도요타의 렉서스와 닛산자동차의 인피니티등 제재대상 13개 차종은 모두 수출채산성이 좋아 한대를 팔면 지난해 경우 판매액 가운데 약 30%가 이익으로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자동차업계는 그러나 연초부터 지속된 엔고현상에도 불구하고 값을 올리지 않아 이익이 10%대로 떨어졌지만 3백만엔짜리 자동차를 팔면 40만엔정도의 이익을 올리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무라증권연구소가 지난해 대미수출차량대수를 기준으로 삼아 고급차 수출중단 경우를 가정해 추계한 바에 따르면 연간 경상이익감소는 도요타가 약 3백50억엔,마쓰다와 혼다·닛산은 약 1백30억∼1백50억엔의 이익이 줄 것으로 나타났다.이와 함께 미쓰비시자동차는 약 40억엔의 이익감소가 예상된다.내년 3월 결산시점에서 도요타·혼다·미쓰비시는 경상이익을 내지만 닛산은 7백억엔,마쓰다는 3백50억엔의 경상손해가 날 것으로 전망됐다.자동차업계는 또 경상이익감소 외에도 경영이 악화되는 미국내 딜러대책에도 비용이 들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닛코증권 리서치센터와 일본총합연구소는 산업간 의존도를 나타내주는 「산업연관표」를 이용해 계산한 결과 수출중단으로 철강·화학·기계등 관련산업을 포함해 3천8백82억엔의 생산이 감소되고 전체적으로 1만5천명분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 일본/족벌지배 없는 철저한 소유분산(세계화 외국에선)

    ◎경영자 발로 뛰는 현장주의 정착/인간중시 경영… 노사갈등 해소 도움 일본은 국내시장의 개방에서는 국제화 점수가 낮지만 해외시장 공략면에서는 만점에 가깝다. 일본 기업들이 강력한 국제경쟁력을 갖춘 데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예를 들면 도쿠가와 막부시절 이미 상당한 자본이 축적돼 있었다든지,국가주도의 생산자 위주 성장전략이 주효했다든지 하는 설명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기업들의 독특한 경영행태라고 할 수 있다.특히 한국의 입장에서는 행태의 측면이 눈여겨 볼 대목이다.일본 기업들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대충 괜찮아」는 통하지 않는다.미제 포드 지프를 갖고 있는 회사원 H씨.핸들이 오른쪽에 있는 일제차와는 달리 왼쪽에 핸들이 달려 있다.그는 『미제차가 싸고 성능도 좋아 샀지만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최근까지도 핸들을 왼쪽에 장착한 채 일본에 수출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일본기업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또 하나 일본 기업들의 현장중심주의를 꼽을 수 있다.이와 관련 일한산업기술협력재단의 이와나가 주조 사업2부장의 말은 시사적이다.『한국에 자주 다니면서 한국의 근로자들이 인간답게 대해 달라든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하는걸 자주 듣는다』.그는 이어 『한국의 관리자와 경영자들은 앉아서 지시하고 있다.관리자와 현장의 협조관계가 잘 안되고 있다』고 꼬집으면서 『관리자·경영자가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기업들은 사람을 중요시하고 있다.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뿌리 깊다.일본 기업들은 미국의 기업들과 비교하면 주주보다는 종업원 위주로 경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이와 관련,치요타화공 홍보부의 혼다 히데키 과장은 『주주는 단기 이익에 집착하지만 종업원 위주의 경영으로 일본 기업은 기술개발,장기투자,합리화등을 통한 장기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일본 기업들의 경우 최고 경영진과 대졸 신입사원의 봉급 차이가 8배정도에 불과하다.세금 공제후에는 5배로 좁혀진다.한국의 재벌 최고 경영진이나 백만달러를 넘는 고액연봉을 자랑하는 미국 대기업 최고 경영진보다 확실히 일본 최고경영진들은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고 사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일본 기업들은 철저하게 소유분산이 돼있어 족벌지배 체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기도 하다.심지어 창업자와는 완전히 인연이 끊겨 후손이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앞서 예를 든 치요타화공의 경우 창업자는 이미 사망,주식지분이 없으며 최대주주는 미쓰비시신탁은행으로 6.3%를 보유하고 있다.노무라증권은 금융기관이 최대 주주로 3%수준이다. 서울과 도쿄에서 「국제관광」이라는 여행사를 경영하고 있는 박석훈씨는 『한 일본 대기업이 사원 20명을 해외로 여행보내면서 5편의 비행기에 나눠서 표를 끊어달라고 주문받은 적이 있다』면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서다.애써 키운 사원들이다.5명 이상이 한꺼번에 유고를 당해서는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더라』는 경험담을 말한다.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은 기술의 심화,확대로 연결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노사갈등을 완화하는 데도 도움을 줘 경쟁력을 길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김일성의 남침 책략(모스크바 새 정언:1)

    ◎6·25내막/서울신문 발굴 소문서속 비사/김일성,“해안방어 취약… 소서 지원해달라”/스탈린/“북 해군 창설·전투기 제공 약속”/김일성/“남한군 6만명… 우리가 더 강해”/49년3월5일 대화록/김일성/“전국토 해방 절호의 기회왔다”/스탈린/“미군 남아있어 때를 기다려야”/49년3월7일 대화록/러 국립문서보관소 미공개자료 9백50건으로 엮는 시리즈 서울신문사는 6·25 반발 45주년,해방 50주년의 해를 맞아 현대사 재조명작업의 일환으로 러시아에 보관중인 미공개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 9백50여건 3천여페이지를 독점 입수했다. 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이 그동안의 노력끝에 러시아의 외무부 문서국을 비롯,대통령 문서국·옛소련공산당 중앙위 문서국·국방부 문서국 등에서 입수한 이들 문서들을 앞으로 20여회에 걸친 시리즈로 독자여러분에게 소개한다. 이 시리즈를 통해 한국전쟁의 준비로부터 전개과정,휴전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모든 의혹과 논쟁들이 말끔히 정리되길 기대한다.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인이 6·25를 공동기획하고 이끌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밝혀진 문서들을 통해 이제는 뒤집을 수 없는 사실로 굳어져 있다.그러면 이 3인중 전쟁에 가장 먼저 뜻을 둔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쯤인가.러시아측 문서에 따르면 1945년 해방을 맞은 뒤 48년 북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그리고 49년말까지 적어도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의사를 갖지 않았다.스탈린은 오히려 미국과 남한의 전쟁도발을 크게 우려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마치 2차 세계대전 전 독일에 대해 품었던 것같이 스탈린은 미국과 남한의 전쟁도발을 피하기 위해 급급했고 한반도에서의 현상유지에 매우 집착했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다음은 이 당시 크렘린의 분위기를 엿보게 하는 문서.(소련군 총참모부 제8국 전문번호 N121973.편집자주=제8국은 소련군 총참모부에서 해외공관과의 비밀통신을 취급하는 부서)러시아대통령문서소에 보관중인 이 비밀전문은 47년 5월 12일 당시 평양주재 소련대표부에 파견된 메레슈코프프장군과 슈티코프장군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긴급요청서였다. 『스탈린동지께.46년 7월 26일 전문번호 N15327로 보낸 우리정부의 결정에 의거,46년 12월 16일 우리는 82명의 소련전문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음.이 전문가 파견은 북한에서 산업시설복구와 철도건설작업을 돕기 위한 것임.그러나 지금까지 단 1명의 전문가도 북한에 도착하지 않았음.…중략… 소련을 비롯한 기타 외국전문가들의 도움없이 북한의 산업,철도체계는 가동되지 못함.북한의 붕괴를 막고 또한 남한에서 향후 우리의 입지와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소련 엔지니어,기술자의 파견이 절대 필요함. ○소전문가 보내라 만약 남북한이 통일돼 임시정부가 구성되기 전까지 소련전문가들이 도착하지 않을 경우 필히 미국 기술자들이 일하러 올 것임.그러면 우리보다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될 것임』 이 전문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보고서 위에다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휘갈겨썼다.『소련전문가 5∼8명을 보내줄 것.그들로 하여금 조선인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독려케 하라.우리가 조선에 너무 깊이 개입해서는 안됨』 북한과 소련관계가 이같은 식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김일성은 48년 2월 인민군 창건,그리고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이듬해인 49년 1월 17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슈티코프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만났다.슈티코프는 이날의 면담내용을 즉각 본부에 보고했다.(러시아대통령문서소 보관)『김일성은 이전에 언급한 바 있는 소련과의 우호협력협정 체결을 다시 희망했음.이에 대해 본인은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하에서 그런 조약체결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설명했음.남한의 반동세력들이 한반도 분단고착화의 기회로 이용하고 미소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수도 있음.이 문제로 김일성과 박헌영은 다소 당혹해 했음.김일성은 강경치는 않지만 조약체결을 고집했고 만약 조약체결이 안되면 소련의 비밀원조협정이라도 맺자고 요구했음.본인의 추가설득을 듣고서 김일성은 일단 지금 우호협력조약체결은 적절치 않다는데 동의했음』 그러나 이 전문보고가 있은 불과 1주일 뒤인 1월27일 슈티코프대사는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다시 보냈다.『북조선경찰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남한 군부대들이 38선 가까이 이동하고 있고 주 작전방향을 따라 병력이 집중배치되고 있음.남한에 파견됐던 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남한에서는 북침설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다고 함.남한장교들은 남한이 먼저 공격을 시작해 이니셔티브를 잡자고 말한다고 함.이에 따라 북조선당국은 38선의 수비를 강화하고 경계를 강화하기 위한 필요한 방안을 취하고 있음. 결론=본인은 현단계에서 남한이 공격해올 가능성은 낮다고 봄.국내외 여건이 이같은 공격을 불허함.이들이 병력을 38선을 따라 이동해 주방향에 집결시켰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음.남한은 북쪽의 서울공격을 항상 예상했기 때문에 서울방어를 위해 이같은 병력이동을 했을 수 있음.최근 남한은 북한에 테러부대 파견을 증대시키고 있음.총 80명의 테러범들이 체포됐음.개성에서는 14명이 체포됐는데 이들은 폭약 5통,액체폭발물 6병,휘발유 1통을 소지하고 있었음.이들은 창고,학교를 불태우고 지방지도자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왔음』 ○북침 가능성 낮다 2월에 접어들면서 평양의 소련대사관이 보내는 남측의 도발보고 건수는 점차 그 횟수가 잦아졌다.2월3일 슈티코프대사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본부의 몰로토프 외상 앞으로 보냈다. 『38도선 상황이 매우 소란함.남한 군경이 매일 38도선을 넘어 북한의 경찰경비초소를 공격함.현재 북한은 경찰 2개 여단으로 38도선을 경비하고 있음.이 여단의 무장은 일본군의 소총뿐임.소총 1정당 탄알은 3∼10발씩뿐임.자동소총은 없음.북한경찰은 남한경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후퇴하거나 탄약이 떨어져 포로로 잡히기도 함. 소련정부의 결정으로 이들 2개여단 병력에게 소련제 무기가 지급되기로 돼있음.소련국방부 명령에 따라 이들 무기들은 해안군사지구에 공급되기로 돼있음.그러나 본인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무기공급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있음.…중략… 그러나 소련정부의 이같은 결정에 따라 북조선은 소총사단 1개,여단 1개를 창설했는데 무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긴급히 이 사태에 손을 써줄 것을 요청함』 ○무기지원 등 요구 슈티코프대사는 하루 뒤인 2월 4일에도 본부에 전문을보내 남한의 대규모 도발을 보고했다.그는 이 공격을 통해 남한군은 38도선 북쪽 2백∼3백m에 위치한 고지 한곳을 점령했고 그옆 38도선 바로 남쪽에 남한군 1개 대대가 배치됐다고 보고했다. 49년 3월 5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극비 방문했다.그는 스탈린과의 면담에서도 38도선의 긴장문제를 제기했다.이날 북조선대표단이 스탈린과 나눈 대화내용은 러시아대통령문서소에 보관돼 있다. 『김=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있습니다.북조선에 대한 반동세력의 도발이 점점 더 격해지고 있습니다.우리도 육군은 있지만 해안방어가 거의 전무합니다.이 점에 소련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스탈린=미군은 남조선에 몇명이 주둔하고 있습니까. 김=최고 2만명쯤 됩니다. 스탈린=남조선은 군대가 있습니까. 김=있습니다.약 6만명입니다. 스탈린=이 숫자는 경찰을 포함한 것입니까. 김=아닙니다.정규군 숫자입니다. 스탈린=그들이 두렵습니까. 김=그렇지 않습니다.하지만 해군을 갖고 싶습니다. 스탈린=누구 군대가 더 강합니까.당신군인가 아니면 그들인가요. 박헌영=우리 군대가 더 강합니다. 스탈린=해군창설을 지원하겠습니다.군용기도 주겠습니다.남조선군 내부에 당신 사람들이 침투해 있습니까. 박=있습니다.하지만 모두 하위계급들이라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스탈린=잘한 일입니다.지금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남조선도 북에 첩자를 보냈을 것입니다.그러니 정신차려야 합니다.요즘 38도선 사정은 어떤가요.남조선군이 침범해 많은 초소들을 뺏겼다가 다시 찾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김=강원도지역 38선에서 충돌이 있었습니다.우리 경찰은 무장이 부실해서 나중에 정규군을 투입해 남조선군을 격퇴했습니다. 스탈린=쫓아냈나요,그들 스스로 물러났나요. 김=우리가 그들을 패배시켰고 그런 다음 그들이 물러났습니다. 스탈린=38도선은 평화로워야 합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기간은 김일성이 인민군창건 뒤 내부적으로 군비증강에 가장 힘을 쏟을 시점이었다.그는 어떻게 하든 남한의 도발위험이 높다는 점을 강조해 소련으로부터 무기지원을 하나라도더 받아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주목할 것은 이날 대화에서 김일성,스탈린 두사람 모두 남침문제는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월 7일 두번째 크렘린회담에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정식으로 남침승인을 요청했다.모스크바 방문의 진짜 목적을 털어놓은 것이다. ○남침 허가해 달라 힘들게 꺼낸 김일성의 남침허가 요청에 대해 스탈린은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밝혔다.러시아대통령문서소에 보관된 49년 3월 7일 스탈린과 북한대표단간의 대화록은 그러나 스탈린 역시 당장의 남침은 불가하지만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완곡한 시사를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일성=스탈린동지.이제 상황이 무르익어 전국토를 무력으로 해방할 수 있게 됐습니다.남조선의 반동세력들은 절대로 평화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들은 자신들이 북침을 하기에 충분한 힘을 확보할 때까지 분단을 고착화하려고 합니다.이제 우리가 공세를 취할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우리의 군대는 강하고 남조선에는 강력한 빨치산부대의 지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탈린=남침은 불가합니다.첫째 북조선인민군은 남조선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확보치 못하고 있습니다.수적으로도 열세이고,둘째 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있습니다.전쟁이 나면 그들이 개입할 것입니다.셋째 소련과 미국사이에 아직도 38도선 분할협정이 유효함을 기억해야 합니다.이를 우리가 먼저 위반하면 미국의 개입을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김=그렇다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통일의 기회는 없다는 말인가요.남조선 인민들은 하루빨리 통일을 해 반동정부와 미제국주의자들의 속박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스탈린=적들이 만약 침략의도가 있다면 조만간 먼저 공격을 해올 것이오.그러면 절호의 반격기회가 생깁니다.그때는 모든 사람이 동지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원할 것이오』 이렇게 최초의 남침 의도 표명은 결실이 없었다.49년 4월에 접어들면서 크렘린은 남한의 정세변화에 점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 했다.4월 17일 스탈린은 슈티코프대사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군사고문단 요청 『본인이 얻은 정보에따르면 5월중 남조선주둔 미군이 일본내 가장 가까운 섬으로 철수할 계획임.철수목적은 남조선군에게 행동의 자유를 더 많이 주기 위해서임.미군철수에 맞춰 유엔감시위원단도 남조선을 떠날 것임. 4·5월중 남조선은 38도선 부근에 병력을 집중시킬 것이 틀림 없음.6월 불시에 북침공격을 감행하고 8월까지 북조선군을 완전 궤멸시킬 목적임.이 정보의 사실여부를 긴급히 확인해 보고하기 바람』(대통령문서보관소) 사흘 뒤인 4월 20일 슈티코프대사는 이 지시사항을 이행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다음과 같은 전문을 스탈린앞으로 보냈다. 『북조선인민군의 전투태세는 매우 미흡함. 1,훈련받은 비행사는 8명 뿐임.훈련기인 U­2기 부족과 항공연료 부족으로 추가훈련을 하지 못하는 실정임. 2,소련군사고문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음.고문단장 스미르노프는 군사지식이 매우 부족하고 또한 태도가 거칠어 북조선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함. 3,무기·탄약생산을 지원한다는 소련정부의 결정은 아직 실행되지 않았음. 4,지금까지 해안방위군이 창설되지 않았음』 이어서 5월 2일 슈티코프대사는 미군철수 동향,남한군의 전투태세 등을 보고하라는 4월 17일자 스탈린의 지시에 대해 상세한 답변전문을 보냈다. 『…우리의 첩자가 보내온 정보와 서울의 라디오방송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과 남조선당국은 남조선 주둔 미군의 철수에 관해 협상하고 있음.…중략…남조선의 북침계획과 관련,남조선당국은 국방군 규모를 계속 증강시키고 있음.국방군은 1949년 1월1일 5만3천6백명에서 3월말 현재 7만명으로 늘었음.특히 기술,특수병력에 관심을 많이 기울여 이들은 2∼4배까지 늘었음.군내부의 불순사병,장교를 숙청하는 조치가 취해지고 있음.미국은 남조선에 많은 양의 각종 무기와 탄약을 보급하고 있음.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의 이런 북침관련 보고는 상당기간 계속 됐다.흥미있는 것은 같은 시기 남한측 군책임자들이 우리정부에 올린 보고서들은 북한측의 우려 할만한 동향에 관해 경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8월 13일 스탈린은 남북한간 전쟁이 시작될 경우에 대비한 소련군의 행동지침을 슈티코프대사 앞으로 내려보냈다.소련은 절대 이 전쟁에 개입하면 안된다는 원칙을 대전제로 한 하달문이었다. 『전쟁이 시작될 경우에 대비해 북조선에 있는 소련 해군기지와 공군부대를 폐쇄할 것.우리가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전세계에 과시하고 또한 적을 심리적으로 무장해제시키며 전쟁이 시작될 경우 우리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함임』 모스크바와 평양 사이에 북침가능성을 놓고 이렇게 숨막히는 전문이 오가는 가운데 49년 9월에 접어들며 김일성은 또 다시 남침의사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수개월에 걸친 내부 준비기간을 거친 다음이었다.
  • 남북협상 전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9)

    ◎김구·김규식 잇단 제안… 하지,“북 음모” 비난/평양,인민군창설 선포… 「정치 제스처」 드러나 남한에서 남북협상론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어 머리를 들었다.1948년1월26일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를 제안한 김구의 담화로 시작되어 다음날 같은 맥락의 김규식의 담화로 이어졌다.남한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미군정의 반응은 냉랭했다.미군정사령관 하지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는 비난과 함께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일성,18일전 선제안 우리는 여기서 하지의 불편한 심기를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는 일찍이 북한이 제안한 사안으로 김일성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 사실에 주목했을 것이다.특히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이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를 제안하는 담화가 나오기 직전 1월8일의 김일성의 발언에 주목했다. 김일성은 이 발언에서 『전민족적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미제국주의를 추종하지 않는 우익민족주의세력,특히 김구와 대담하게 합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김일성은 1월13일 자신의 발언과 부합되는 내용의 편지를 김구와 김규식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남한의 좌익세력들도 물론 가세했다.2월초 홍명희의 비밀방북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인 것이다.그는 북한에 머물면서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이면통합활동을 벌이기로 합의하고 서울로 돌아왔다.그리고 나서 김구·김규식·조소앙·여운홍등과 접촉했다. 홍명희는 이보다 앞서 1947년11월에도 북로당위원장 김두봉의 편지를 통해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할 것과 광범한 세력과의 연대로 통일전선을 강화해야 된다는 주문을 받았다.이 시기에 공산주의진영의 민전도 남북을 부지런히 넘나들었다. 이 무렵 북로당은 대남연락부장 임해(임해)를 서울로 밀파했다.남한의 정치상황을 체크하고 2월25일 평양으로 돌아갔다.그는 민전확대회의에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제의는 애국적 결단』이라고 극찬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소련의도와 먼 거리 북로당은 이 보고를 토대로 남북협상 주요대상의 연합을 적극 모색한다는 정치노선을 채택한다.주요대상은 과거 반탁진영에 속한 우익세력 가운데 단정에 반대하는 그룹을 지칭한 것이다.북한이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공작차원에서 계획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남북협상 움직임은 사실상 이율배반적 정치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남북협상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2월 북한은 이미 작성해놓은 헌법초안에 대한 지지결의대회를 확산시키고 있었다.그리고 인민군 창설까지 선포하고 난 뒤였다.이러한 북한의 정치행보는 북한을 볼셰비키화하는 소련의 뚜렷한 목표를 따른 것이어서 수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울에 온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장 메논이 두 이데올로기의 장단점을 취사선택한 한국적 정치조직의 탄생을 기대한 적이 있다.그러나 북한을 볼셰비키화하려는 소련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유엔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 이유도 여기 있다. 유엔총회가 유엔감시하의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한 것은 1948년2월26일이다.그러니까 북한이 서둘러 취한 일련의 조치,헌법초안에 대한 이른바 전인민적 토의와 지지결의라든가 인민군창건 선포등이 있고 나서다. 2월10일에는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하는 임시헌법초안이 공포되었다.이렇듯 북한은 정권수립과정을 재빨리 밟아나갔다.그들대로의 단독정권의 기틀을 남한보다 먼저 다져놓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북한에 독자적 공산주의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민족자결원칙에 충실한 민주적인 동시에 민족의 분열을 막는 구국적 대책이라고 선전했다. 김일성은 인민군창설을 정식으로 선포하는 열병식 연설에서는 「북조선 민주기지에 의거한 무력통일」의도를 처음 드러내 보였다.이때 남로당은 북한정권수립을 지원하기 위한 2·7폭동을 일으켰다.김일성의 열병식 연설에 나타난 민주기지에 의한 무력통일은 당시 남한의 2·7폭동과 맞물린 것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이어내려오는 북한의 통일전략이다.남북의 역량을 3으로 볼 때 남북혁명세력을 2,나머지 1을 남한의 보수세력으로 계산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이를 가리켜 흔히 「1+1/2전략」이라 부른다. 소련이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반대하면서 미·소 양군의 철수를 주장한 이면에도 이 전략이 깔려 있었다.미·소 양군이 철수하고 한반도문제를 한국인에게 자율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소련의 주장은 북조선공산당(북로당)과 북조선인민위원회,남한의 남로당을 포함하는 좌익세력을 신뢰한 데서 비롯됐다. 1948년3월9일 북한의 민전 중앙위원회에 참석한 김일성은 소련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그는 소련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투쟁을 광범위하게 펼치자고 선동했다. 이러한 남북의 정치상황 속에서 3월25일 북한의 9개 정당과 단체이름으로 내놓은 성명문이 평양방송의 전파를 탔다.「남조선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이라는 성명문이었다.조국의 민족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남한 정당·사회단체들을 4월19일 평양에서 여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초청한다는 형식으로 발표되었다.그 속에 포함된 남한인사는 좌·우·중간파 15명이었다. ○북,대외적 선전거리로 어떻든 북한은 정부수립으로 가는 모든 절차를 갖추어놓은 상태에서 남북협상을 절호의 선전기회로 삼았다.이 성명이 나온 이틀 뒤인 3월27일 「소범위 지도자연석회의」소집에 동의한다고 김일성과 김두봉이 연서했다. 김구가 주도한 한독당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자주연맹은 자신들의 협상제의를 전적으로 무시해버린 북한태도에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북한 민전이 사실상 단독결정으로 준비하고,또 개최할 남북연석회의에 초청객으로 참가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심했다.결국은 참가를 결심했고,김일성과 김두봉이 연서한 남북연석회의 초청편지는 2월27일 밤 김구와 김규식에게 전달되었다.이 편지는 공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북로당 연락부 요원이 직접 가지고 내려와 좌익계열의 성시백을 통해 전달했다.편지내용은 흰 인조견에다 썼다고 한다. 북한은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발표한 나흘 후인 3월28일부터 평양에서 북로당 제2차 대회를 열었다.이 날짜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석회의에 앞서 북한의 정치세력을 과시하는 한편 회의에서 기선을 잡자는 술수를 깐 것이다. ◎“북,남공산주의자에 「단선 방해」 지령”/UNTCOK작성 「공당 활동」/“미군 철수” 주장… 정세분석 협조도 거부/우익계 대동청년단 등에도 “붉은 손길” 한반도정치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서울에 들어온 19 48년의 봄은 혼란스럽게 다가왔다.남북총선을 위해 입북하려는 한국임시위원단을 저지한 북한은 남한 단독선거를 방해하려는 온갖 투쟁수단을 동원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최근 미국에서 기밀이 해제된 UNTCOK 관계문서를 입수,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 문서는 48년1∼3월 사이의 한국인의 정치활동을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처(G­2)와 방첩대(CIC)의 정보보고및 평양의 대남방송내용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UNTCOK의 임무를 혁명적 방법으로 반대한다고 전제한 이 문서는 모스크바와 평양의 지령에 의해 군대철수를 주장하고 있다고 적었다.이어 남한의 정세를 기록하기 위해 좌익계열의 허헌 등 4명을 UNTCOK에 나오도록 초청했으나 이를 거부했다는내용도 보인다. 그리고 38선이 지나가는 경기도 옹진반도의 공산주의활동을 소상히 기록했다.공산주의자는 성인인구의 10%에도 못미치지만 우익에 극력하게 침투,효과적인 간첩행위를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추어냈다.또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있는 우익계 대동청년단과 민족청년단체에까지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2·7폭동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했다.이 2·7폭동은 주모자들의 검거로 행동반경이 위축되는 듯하다가 3·1절과 3월25∼29일 사이에 재개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서에는 소련에 의해 통합된 임시헌법의 초안내용,인민군의 창군행진,남한단독선거에 반대하는 군중의 숫자를 평양방송이 연일 선전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이와 더불어 평양방송이 3월25일 방송한 북한 민전의 남북연석회의 제안내용을 전하면서 이 역시 소련의 전략으로 평가했다. 끝으로 북한사람들은 한반도를 소련이 지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확신있게 분석하고 남한에 장차 수립될 단독정부가 장래 통일을 실현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덧붙였다.이는 6·25 당시 남하한 인구를 보면 실증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 볼링공 수출가 조작/미 도매사·지사 수사

    서울세관은 8일 미국의 볼링공 도매회사인 HKD인터네셔널사가 국내 지사를 통해 볼링공을 들여오면서 실제가격보다 낮게 신고,거액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를 잡고 이 회사 대표 동모씨(35)와 한국지사 등에 대해서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동씨는 지난해 6월 미화 73달러(한화 5만5천원)짜리인 미제 「시크리트 웨픈」볼링공 2천3백여개를 지사를 통해 들여오면서 47·5달러인 것처럼 세관에 신고,관세차액 4백여만원을 포탈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서울세관은 지난 한햇동안 동씨가 국내에 들여온 물량이 4억5천만원어치에 이르고 지금까지 들여온 볼링공만 수십원억대에 이른 것으로 확인,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 미 자동차업계도 “가격파괴”/판매부진에 대대적 「할인특전」 단행

    ◎포드·미쓰비시 1천∼4천달러 싸게 미국 자동차 업계에 가격파괴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전례없는 매출을 기록한 미국의 자동차 업계는 올해 매출부진이 뚜렷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가격파괴를 선언하고 나섰다.이들이 구사하고 있는 전략은 소비자가격을 직접 인하하지 않고서도 가격인하 효과를 거둘수 있는 「할인특전」(리베이트)을 주는 것.이는 메이커들이 지난 2년동안 새 차 값을 평균 2만달러(한화 약 1천6백만원)선까지 올려놔 소비자들의 불만이 큰데다 판매마저 심각한 부진현상을 보이기 시작해 취해진 것. 이같은 사정은 미국의 중소형차 시장의 지배력을 탄탄히 굳힌 일본 메이커뿐 아니라 미국 메이커에 공통적인 현상이다.우선 지난 2년동안 대미 수출차량 값을 연간 평균 7% 인상했던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은 최근의 엔고로 가격 인상이 불가피한 형편이지만 일제차 대부분이 미제차에 비해 약 1천5백달러(약 1백20만원)나 비싸 추가 인상은 곧 시장탈락의 원인이 된다는 인식에 따라 현재 소비자 가격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입장이다.일제차를 핑믿거리로 삼아,슬그머니 값을 올렸던 미 메이커들도 이젠 장난을 그만해야 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금리인상에다 늘어나는 소비자 불만때문에 매출부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업계는 올해 판매 전망치를 수정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는 눈치다.특히 업계 분석가들은 올해 예상판매량을 지난해 1천5백10만대에서 1천4백80만대로 줄여잡고 있을 만큼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다만 딜러들은 1천5백40만대로 늘어날 것으로 점치고 있으나 당초 전망치인 1천6백만대에는 크게 못미친다. 이같은 「슬럼프」를 이겨내기 위해 업계는 될수록 생산량 감축은 피하고 광고 덕에 인지도가 높은 최신 모델중 판매가 더딘 일부 차종에 대해 할인특전을 부여하고 있다.포드사는 95년형 미니밴 「윈드스타」에 1천달러(약 80만원)의 할인특전을 주고 있으며 크라이슬러도 오는 6월말까지 같은 특전을 주기로 했다.미쓰비시는 지난 4월말까지 쿠페 서브 콤팩트카인 「미라지」와 픽업트럭을 판매하면서 1천달러의 할인특전을 주었다.마쓰다도비인기모델을 살 경우 1천달러의 할인특전을 주고 있다. 이같은 할인특전은 비인기 모델에 이어 재고품 판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94년도형 왜건 「디아만테」와 세단 「디아만테 LS」 재고가 쌓인 미쓰비시는 지난 4월말까지 왜건 4천달러,세단 3천5백달러씩의 딜러 인센티브를 제공했다.딜러 인센티브는 딜러들이 판매가를 내릴 여유를 주기위해 메이커가 딜러들에게 주는 일종의 할인특전이다.
  • 미­일 자동차협상 결렬/양국,무역보복조치 긴급 협의

    ◎미/관세부과 내일쯤 발표/일/“미에 맞서 WTO 제소” 【휘슬러(캐나다) 로이터 AFP 연합】 미국은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의 일본시장진출을 위한 양국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6일 엄청난 수입관세를 부과할 일본산 제품의 목록 작성에 들어갔다. 미키 캔터 미국 무역대표는 캐나다의 산악 휴양지 휘슬러에서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 일본 통산상과 회담을 속개했으나 합의 도출에 실패하자 미 군용기 편으로 급거 귀국,6일 상오(현지시간)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경제회의(NEC)에 참석해 대응방안을 협의했다. NEC가 주말회의를 개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미국정부의 대응이 주목되고 있다. 이번 NEC회의는 클린턴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으나 일련의 대일 보복조치들을 마련,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출할 것이라고 캔터 대표는 말했다. 캔터 대표는 예상되는 대일 보복조치들에 대한 언급은 회피했으나 클린턴 행정부는 연 약10억달러로 추정되는 일본산 제품에 대해 이중 수입관세를 부과키로 하는 결정을 내릴 것임을 암시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먼저 30일간의 공식 통고기간을 두어야하며,이같은 방침은 8일이나 9일쯤 공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대해 하시모토 일본 통산상은 미국이 대일 보복조치를 취할 경우,새로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등 맞대응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시모토 통산상은 또 일본 자동차업체들이 외국산 부품 수입을 늘리는 「자발적인」 합의를 미국이 계속해서 강요할 경우 협상 석상에 나서지 않을 것이며,합의점이 마련될 희망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차협상 결렬… 미­일 속셈/미,내년 대선 의식 강경 태세/일선 「수치목표」 철회 유도… 강·온책 구사 미일간 자동차교섭이 결렬됐다.미국은 6일 국가경제회의(NEC)를 열어 대일 제재조치를 논의함으로써 양국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클린턴정부 출범후 개시된 미일 자동차교섭이 20개월동안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미제 자동차부품의 수입확대를 위한 구체적인 수치목표 제시 ▲일본내 미제차 딜러망의 확충 ▲보수부품 시장의 규제완화등 미국이 제시한 3가지 목표를 일본이 완강히 거부한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연간 6백억달러가 넘는 대일무역적자 가운데 60%안팎이 자동차와 자동차부품 분야에서 발생하고 있어 이의 시정이 시급하다.지난 부시정권 당시 1백90억달러의 수치목표에 합의한 바 있기도 하다.클린턴 행정부는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또 협상결렬로 달러화가 또 평가절하된다 하더라도 인플레이션 우려가 적다는 것이 지난번 달러 하락시에 드러났기 때문에 강경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중국과의 지적재산권 협상에서도 강경자세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도 했다. 이에 반해 일본은 수치목표 수용은 관리무역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명분.또 수치목표를 받아들이면 타분야에서도 똑같은 요구가 제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이번 교섭에서 미국이 막판에 딜러망과 관련돼 수치목표를 내놓은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고 보고 있다.이와함께 자동차부품의 구매는 민간기업 소관사항으로 정부간 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일본측의 주장.일본은 협상 결렬을 피하기 위해 미국 자동차메이커를 위한 상설전시장의 제공,수출입은행을 통한 수입촉진 금융지원등을 제시했고 자동차회사들은 상당한 규모로 미제부품 수입계획을 늘려 잡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미국은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아 제재쪽으로 기울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클린턴 대통령은 최근 한 신문과 가진 회견에서 『이런 상황에서는 강한 조치를 취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캔터 미무역대표부 대표는 회담이 끝난 뒤 『미국으로서는 징벌관세말고도 9∼10개의 옵션을 준비해 놓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일부에서는 미국정부가 곧 제재리스트를 발표,일본측에 10∼12억달러 규모의 제재를 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기도 하다. 일본도 강경하다.일본은 미국이 제재를 가하면 즉각 이 문제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다는 방침이다.양자간 회담을 다자간 회담으로 한다는 의미와 함께 수개월의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이 수치목표라는 방식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다시 교섭을 재개한다는 유화책도 내놓고 있다.일본은 무역분쟁으로 치달아 전반적인 대미관계가 악화되고 결국 정권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원치는 않고 있다.
  • “기업은 「마마보이 체질」바꿔야”/장석환(공직자의 소리)

    ◎정부보호 의존말고 홀로서기 익힐때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씨던 모학원 이사장피살사건의 범인 김교수는 전형적인 마마보이라는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이 보도된 바 있다.마마보이 특성 중의 하나가 문제를 정면으로 맞부딪쳐 해결하려기 보다 자기주변에서 만만한 상대를 골라 해결하려 한다는 진단이다. 그러다보니 경영하던 회사의 임원이 일으킨 문제의 해결책을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자신을 돌아다 본다.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부모의 과보호 때문에 마마보이화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특히 어려서부터 「홀로 서기」를 실습시키는 구미제국과 비교하면 좀 더 확실해진다.우리 부모들은 어려서부터 자식들이 직접 부딪쳐 스스로 능력을 키우도록 하는 대신 감싸주고 보호하며 해야 할 일과 안해야 될 일을 일일이 정해준다. 자식들은 부모들이 하라는 대로 했으므로 책임은 없다.부모들은 자식들이 잘되면 보람과 긍지를 느낄 뿐이지만 잘못되면 모든 책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한다.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되면 조상탓이란 말까지 있지 않은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정부와 기업간의 관계로 풀어보면 우리기업들이 「마마기업화」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우리경제 발전과정을 돌아볼 때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세계무역기구(WTO)체제 출범으로 인한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기업이 좀 더 튼튼해져야겠다.이를 위해 정부가 해야할 일은 우선 과도한 규제와 간섭을 완화하여 기업 스스로 결정해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과거 정부는 농민에게 무엇을,언제,얼마만큼 심으라고 지도하고 농사가 잘못되거나 너무 잘돼 가격이 폭락하는 것까지 책임지던 시대도 있었다.­ 마치 대학은 부모를 위해서 가는 것처럼 정부의 목표달성을 위해 수출해 달라고 주문하던 시대도 있었다. 부모 체면 때문에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하고 정부 체면 때문에 수출하던 시대는 지나갔다.자기 실력에 벅찬 주어진 목표 때문에 허우적거리다 좌절해서도 안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무루어서도 안되겠다. 정부로서는 새끼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사자의 심정으로 무엇이 진정으로 기업을 위하는 길인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기업도 기업 나름대로 떨어져도 살아 남는 강인함 그리고 과정의 선택 뿐만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있는 탈마마기업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
  • 미,“대일 자동차 포괄협정 고수”/백악관 경제자문

    ◎“내주 회담결렬땐 무역제재 검토” 【워싱턴 AFP 연합】 미국은 일본과의 자동차 분쟁 해결을 위해 포괄적인 협정체결을 희망하며 다음주 개최될 일본과의 협상이 결렬될 경우 무역제재를 포함한 모든 방안에 대한 선택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28일 밝혔다. 로러 타이슨 미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은 이날 대일 자동차 협상에 관한 정부 유관기관 회의를 마친뒤 기자회견을 통해 미행정부가 다음주 회담을 협상타결을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간주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밝히지 않은채 회담이 결렬되면 미측의 대응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고위관리 회의가 개최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음 주말께 협상진전 상황을 검토하기 위해 정부 유관기관 회의를 한차례 더 소집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측은 대일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일본이 무역역조 총액 6백60억달러의 3분의2를 점하고 있는 자동차부문에서 미제 승용차와 자동차부품 수입을 늘려주기를 바라고 있다. 한편 이번주 도쿄에서 개최된 실무회담은 이틀만에 합의없이 끝났다. 양측은 다음주 캐나다에서 실무급 회담을 시작으로 미키 캔터 미무역대표부 대표와 하시모토 류타로 통산상과의 회담등 3차례의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 정무1장관실 「지방화시대」 세미나/영·일 대사관과 공동주최

    정무1장관실은 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주한 영국·일본대사관과 공동으로 「지방화시대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중앙과 지방간의 조화 모색」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이날 세미나에서 영국 버밍엄대의 앨런 뮤리교수는 「영국지방자치의 변혁」,일본 동경대 법학부의 모리타 아키라교수는 「일본의 지방제도」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다.발표 내용을 간추려 본다. ◎영 지방자치의 변혁/뮤리 버밍엄대 교수/지방·중앙 건설적 관계… 협의·대화 중시 지방정부는 일을 스스로 잘해야 하는 것 말고도 중앙정부에 의한 업무감독및 조사에 응할 책임도 갖고 있다.지방언론과 압력단체의 활동,소송제기,옴부즈만시스템에 대한 조사와 감독에도 응해야 한다.효율적 회계시스템유지와 내부통제시스템의 적정운용,법령상의 재무보고기준준수,적절하고 효과적인 내부 회계감사실시등도 중앙정부의 감독과 조사의 대상이다. 영국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관계는 법제정및 감독,그리고 안보의 문제와 일부 관계가 있다.최근에는 환경문제가 민영화및 중앙집중화를 근간으로 하는 전국적 차원의 문제로 대두돼왔다.이는 지방정부가 사업을 집행하는 데 있어 민간부문보다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공통인식 때문이다.이로 인해 중앙부서와 지방자치기관 사이에 때때로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한다.중앙·지방관계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전국차원및 지역차원에서 동시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움직이느냐에 있다.만약 이런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면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에 조언과 아이디어등을 제공하고 정책개발을 자극하거나 촉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중앙과 지방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한층 쉽게 하기 위해 지금까지 여러가지 모델이 개발돼왔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널리 사용돼온 소위 「에이전시」모델이다.「에이전시」모델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관계를 종적으로 보고 있다.이 모델은 특히 재정분야에 관한 중앙정부의 권한확대를 중요시하지만 재정상황을 나타내는 각종 지표 안에 변수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에이전시」모델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 가운데가장 흔히 적용되는 것이 「파트너십」모델이다.이 모델은 서비스제공에 있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얼마간 동등한 동반자로 파악한다.가장 발전된 형태의 「파트너십」모델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배타적으로 자원을 이용하는 것으로 본다.그러나 이같은 경우 자원분배과정에서 불균형이 초래될 수도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이 모델은 기구 사이의 협의만을 중요시하고 정치·경제적 환경변화를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중앙정부가 지방당국과 협의하는 관례는 지난 80년대와 90년대초 사이에 크게 줄어들어 최소화됐다.대신 정책분야에 대해 중앙이 지방에 대해 통보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지방정부재정에 관한 협의회」와 같은 기구가 점차 형식적인 것으로 변했다.다시 말해 중앙으로부터의 지시가 증대된 것이다.그런데 지난 92∼93년부터 중앙과 지방간의 적대감이 누그러지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92년10월 마이클 하워드 환경부장관은 『중앙·지방간의 계속된 갈등양상은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고 『중앙부처 장관들은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지방기관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지금은 중앙과 지방간의 관계가 건설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지방정부가 대기업이자 주요한 고용주다.지방정부가 하는 일은 경제적으로는 물론 중앙정부를 움직이고 민주주의를 촉진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영국의 지방정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다양한 압력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지방정부의 행정수행및 효율성과 관련해 여러가지 채널을 통해 행사되는 영향력은 하나 하나가 중요하다.영국의 지방자치는 주민과의 공동보조,혁신및 창조의 전통에서도 장점을 찾을 수 있다.그러나 영국의 제도에는 취약점들도 있어 이에 대한 부단한 개선및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의 자방제도/모리타 동경대교수/「지방분권」실현 추진… 내용은 정립안돼 전후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방침에 따름으로써 자신의 이익도 추구해왔다.그러나 이런 중앙과 지방간의 관계를 크게 바꾼 것이 지난 60년대 출현한 혁신자치단체다. 당시 주민은 중앙정부에 대해 공해문제등 성장의 문제들을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중앙정부는 성장노선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이에 반발한 주민은 반중앙정부의 입장에서 공해규제·주민복지정책을 주장하는 혁신계 인물을 단체장으로 선출했다. 이같은 「지방의 반란」에 중앙정부는 종래 보수적 노선에서 벗어나 혁신적 성향의 자치단체가 시작한 모든 정책을 중앙정부의 정책으로 받아들였다.중앙정부에 대한 지지를 계속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결국 중앙과 지방 사이의 대결색도 점차 빛이 바랬다. 그 뒤로는 단체장선거에서 정치적·당파적 대립이 줄어들었다.대신 후보가 제시한 정책이 얼마나 실현될 것인지에 대한 행정능력이 평가를 받았다.이에 따라 일본의 지방자치는 어느 정도 안정상태에 들어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뒤이어 들이닥친 커다란 환경의 변화는 근대화노선을 전제로 하는 중앙집권적 지방자치제도방식을 점차 막다른 골목으로 몰았다.거기서 생겨난 것이 지금의 지방분권으로의 움직임이다. 전후 일본의 지방자치제도가 집권적 구조 아래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구미제국과같은 사회를 건설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해외로부터 큰 영향을 받지 않고 국내 발전에 전념할 수 있는 폐쇄된 환경도 뒷받침이 됐다.그러나 이처럼 혜택받은 성장의 전제조건은 80년대가 되면서 무너졌다.성장을 지탱해온 「생산제일주의」라는 노동윤리로부터 여가를 즐기고 충실한 인생을 추구하는 「생활중심주의」로 국민의식이 바뀌기 시작했다.정치·행정에 대한 국민의 기대도 달라졌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는 주민의 욕구에 맞춰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은 해당자치단체에 맡겨야 한다는 지방분권의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해 일본에서 지방분권이 국정과제로 부상한 것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개혁을 추구하는 욕구가 강해졌고 38년동안 계속된 자민당체제가 지난 93년 붕괴됐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지방분권을 위한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그러나 어떤 권한을 지방자치단체로 이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다.지방분권은 정치적 상징일 뿐 구체적인 내용은 불투명하다. 지방분권을둘러싼 대립은 관료집단과 정치인·언론이 맞서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그러나 정치인은 자신이 주장하는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관료에 의지하는 것이 현실이다.자연히 정치인도 지방분권의 실현에 제약이 될 수밖에 없다.자치단체도 분권을 주장하지만 중앙정부와의 협조관계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지난 9일 실시된 지방선거결과로 미루어 주민의 정치의식은 결코 낮지 않다.그들은 생활에 직접 영향이 없는 한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기성정당과 정당 소속원이 꾸려온 지방자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반면 도쿄·오사카라는 대도시의 지사선거에서 나타났듯이 불만을 들어주고 규제타파를 외치는 후보가 나타나면 그를 당선시켰다.여기에는 행정능력을 자랑하는 엘리트와 안이하게 그런 성향의 관료출신을 후보로 내세운 기성정당에 대한 반발도 곁들여 있다고 할 수 있다.
  • 김현희­여금주양 서울신문 합동인터뷰

    ◎두 북녀 서울서 뜨거운 만남/“언니” “금주야” 친자매처럼 남북얘기꽃/KAL기 희생넋 위로 「참회의 기도」/김/미팅·김건모 노래 배우며 대학생활/여 『현희언니』 『금주야』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으로 사형이 확정됐다가 정부의 특별사면조치로 자유인이 된 김현희씨(34)와 지난해 4월 30일 일가족 5명과 함께 귀순한 전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여만철씨의 외동딸 여금주양(21)이 서울신문의 주선으로 처음 만났다. 북에서 온 두 여인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봄기운이 완연한 주말인 15일 벚꽃이 만발한 덕수궁정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서울의 한복판 프레스센터에서 이루어졌다. 서울생활 9년째이지만 참회와 고뇌로 보내 아직도 「북의 여인」티가 남아있는 현희씨에 비해 금주양은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미팅등 자유분방한 대학생활을 하고있는 탓인지 서울 젊은이 못지않게 맑고 발랄했다. 두 사람은 생전 처음 만났음에도 친자매처럼 금방 친해져 남과 북의 다른 모습과 생활얘기를 나누었다. 여양은 『최근 상당수의 북한주민들이「귀국자」(재일북송교포)로 부터 듣거나 남한방송을 청취,남한이 잘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해 서울에 오기전까지 한국을 「파쇼와 미제국주의자들이 판치는 지옥」으로만 알고 있었던 현희씨를 놀라게 했다. 여양은 또 최근들어 『북한에서는 청소년들의 군입대기피 현상이 확산되고 있으며 상당수의 군인들이 영양실조로 군요양소에 후송되고 있다』고 밝혔다. 여양은 북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공산당에 입당,출세하는 것보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게 낫다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으며 외화(외화)를 만질 수 있는 직업의 남자가 여성들이 가장 원하는 배우자로 꼽히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도 매주 일요일 교회에 나가며 책을 쓰는 등 열심히 살고 있다는 현희씨는 그동안 모은 10억원에 가까운 출판인세 수입을 KAL기 희생자 유족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는데 쓰고싶다고 말했다. 현희씨와 금주양의 만남은 4시간동안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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