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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색 미인 “자외선이 미워”/여름철 선탠 이렇게

    ◎자외선차단제 2시간전 바르고/정오∼하오 3시 시간대 요주의/보습제 바르고 물 충분히 마셔야 본격적인 피서철이다.예년에 비해 거창한 휴가계획은 없더라도 가까운 수영장이나 야외로 나가 태양아래 노출될 기회가 많은 계절이다.그러나 의학적으로 볼때 햇볕은 피부에 관한한 득(得)보다 실(失)이 많다.특히 여성들에게. 유익한 점은 비타민D를 합성시켜 골격을 튼튼하게 한다는 것 뿐이다.그밖에는 피부의 수분을 증발시켜 피부건조와 탄력성을 감소시키고 각질층을 두텁게 만들어 노화를 촉진시킨다.뿐만아니라 환경오염으로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표면에 내리쬐는 자외선 양이 갈수록 급증하면서 피부암과 각막화상,백내장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자외선◁ 자외선은 파장의 길이에 따라 3가지로 구분된다.파장이 320∼400나노미터(㎚)로 가장 긴 UV­A와 290∼320㎚의 UV­B,200∼290㎚의 UV­C.(1㎚는 10억분의 1m) A는 피부의 표피를 통해 진피에 닿아 피부를 검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B는 피부 화상을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C는 생명체를 파괴하는 빛이지만 오존층 때문에 지상에는 전달되지 않으므로 피부와는 무관하다. ▷햇볕화상◁ 말그대로 햇볕에 의해 화상을 입는 것이다.피서지에서 성급한 마음에 무방비상태로 햇에 장시간 노출시켰다 잠자리에 들때쯤 가렵고 따가워 고생한 경험을 한번쯤 갖고 있을 것이다.피부가 빨갛게 되고 심할 경우 통증을 동반한 물집이 생긴다. 예방법은 하루중 자외선이 가장 강할때인 정오부터 하오3시까지의 시간대엔 특히 조심할 것.노출부위에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는 것은 필수고 긴 상하의에 차양이 큰 모자를 쓰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한다.자외선 차단제는 SPF(자외선 차단지수)가 20∼30이 적당하다.햇볕에 나서기전 2시간전에 미리 발라주되 3∼4시간마다 다시 발라주어야 효과를 볼수 있다. 해변이나 수영장에서는 차단제를 발라도 물에 씻겨나가므로 이보다 더 자주 발라야한다.흰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선 무조건 SPF지수가 높은게 좋은 것으로 알기 쉬운데 지수가 높을수록 피부 자극정도도 높아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것. 선탠후엔 피부가 극도로 건조해지므로 보습제품을 바르고 물을 많이 마셔 피부에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주도록 한다.일단 햇빛화상을 입어 화끈거리면 그 부위에 찬물이나 얼음으로 찜질을 해주고 찬 우유를 마시는 것도 증상을 누그러뜨리는 한가지 방법.물집이 잡힐 정도로 심한 햇볕화상엔 멸균소독을 하고 빨리 병원을 찾는게 좋다. ▷일광 피부염◁ 햇볕을 쐰 노출부위에 오톨도톨하게 좁쌀같은 것이 생기고 가렵다가 습진 비슷한 피부염이 되는 증상.햇볕에 대한 알레르기반응이 원인으로 때에 따라선 노출되지 않은 엉뚱한 부위에 나타나는 수도 있다. 이 피부염은 햇볕만 받았다고 생기는 경우는 드물고 복용중인 약물이나 화장품에 함유된 물질이 햇볕과 광화학작용을 일으켜 생긴다.일광 피부염 원인이 되는 약물은 강압이뇨제나 설파제.때문에 고혈압환자가 이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여성의 경우 살빼는 약에 의해 생기는 수가 종종 있다. 이럴때는 약을 끊든지 다른 약을 복용해야 한다.(도움말 삼성서울병원 피부과 박기범 교수,서울중앙병원 피부과 성경제교수)
  • 투시카메라… 알몸 들여다 본다니(박갑천 칼럼)

    11세기 영국 코번트리시 양복점주인 톰. 영어 ‘피핑톰­훔쳐보기 호색가’ 고사의 주인공이다. 영주 레오프릭백작의 중세정책에 그아내 고다이버부인이 반대하자 발가벗고 시내를 돌면 청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그러자고 한 고다이버. 감격한 시민들은 부인이 도는날 문을 닫기로 한다. 한데 톰은 약속을 깼다. 버력이던가,그는 눈이 멀어버린다. 테니슨이 시를 써서 더 유명해지는 얘기이다. 톰은 ‘고약한사람’이다. 그러나 이승을 사는 사내들치고 톰한테 뇟보라고 부라리며 돌던질수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내들은 발가벗은 여체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신이 빚어놓은 최고의 예술’ 운운하면서. 지난해 10월 타이완 가오슝(高雄)에서 있은 나체결혼식이 외신을 탄것도 그같은 사내들 마음 자극하는 뉴스성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역사가 ‘폭군’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알몸여체 보기를 즐긴다. 아그리파나 인공연못에서 명문부녀자들 알몸을 즐긴 로마의 네로만이 아니다. 동양에서도 걸주(桀주)가 그랬고 우리 조선조 연산군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연산군은 장악원(掌樂院)으로 하여금 스무살안쪽 여인들을 그러모아 음란한 처용무(處容舞)를 가르치게 한다. 발가벗고 왁달박달 춤추는 꼴을 보다못한 내시 金處善이 말리다가 처참하게 죽지않던가. 고대로마에는 ‘플로리아 놀이잔치’라는게 있었던 모양이다.의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6대황제 갈바때부터 시작된것으로 창녀였던 플로라를 기리는 행사였다. 플로라는 폼페이우스황제 티베리우스황제의 애첩이었는데 죽으면서 막대한 유산을 로마시민에게 바친다. 그걸 고마워하면서 해마다 4월26일부터 한달동안 많을때는 20만에 이르는 창녀들이 아느작거리며 광란의 잔치를 벌였다. 위는 벗고 아래는 비치는 차림새로 헤근거리며 온거리를 누볐다니 오늘날의 리우 데자이네루 삼바춤잔치쯤 저리가라였을 법하다. 오늘날엔 수영복을 입고 치르지만 고대그리스의 미인콘테스트는 전라의 경염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언젠가 현대판 ‘톰’들에 의해 ‘수영복 입은 나체콘테스트’로 탈바꿈할건지 모른다. 일본사람이 수영복 꿰뚫어볼 수 있는 투시카메라라는걸 개발해냈다지 않던가. 그게 이미 국내에 들어와 올 여름에는 수영장 해수욕장 경계령까지 나온다. 나중에는 정상복 속인들 못꿰뚫어본다 하겠는가. 허허,이거 참….
  • 서양화가 李大源(이세기의 인물탐구:175)

    ◎빛을 데생하는 화단의 신사/때묻지 않고 따뜻한 성품 작품에 그대로/화폭마다 생명력 약동 축제분위기 넘실/‘물방울처럼 영롱한 화경’… 독자 영역 이룩 만약 벚꽃이 만개한 눈부신 봄날에 함박눈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본 사람이라면 서양화단의 원로 李大源 화백의 그림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쏘는듯한 붓길은 비로드에 싸인 보석더미와 그 보자기를 펼치는 순간의 차갑고도 투명한 광채(光彩)의 이미지다. 겨울에는 오색 찬란한 꽃망울이 예감되고 무더운 장마에는 무지개빛 서광이 번뜩인다. 눈송이도 빗방울도 온통 색채의 의장(意匠)이 장식되어 못위에 내리는 빗줄기가 송곳처럼 수면에 꽂히는가하면 색채의 향연이 옥구슬처럼 농원에서 굴러다닌다. 광활한 공간에 만약 그의 그림이 한점만 걸려 있어도 그곳에는 생명의 결실과 축제의 분위기가 넘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그림은 미술’ 임을 확고히 지켜나간다. 아무리봐도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봐도 행복감에 젖어 그림속에서 흘러나오는 탐미적 향기에 도취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초기의 여거도(與居島)등 섬이나 산그림을 보면 웅걸(雄傑)한 호방함과 분방함이 도사리지만 그림의 내면은 오늘의 별빛 미래를 산뜻하게 예고했다고 할수 있다. 예를 들어 야트막한 산야와 그 아래 펼쳐진 과수원풍경,수목에서 솟아나는 활기와 생동감은 하루의 아침과 저녁이 다르듯이 ‘늘 같은 것을 보아도 화가의 눈에는 항상 다르게 보인다’는 말대로 가장 신선한 그림을 탄생시킨다. 그가 그림을 통해 추구하려는 것은 자연의 일부를 화폭에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가능성과 미묘한 조율(調律)을 변주로 뿜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생동감 變奏 그러기 위해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영감과 감상에 의존하기보다 다시한번 새롭게 사물을 관찰하여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관용으로 작가의 내면까지 화면에 담아낸다. 이른바 살아있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 연못에 이는 잔물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은 무의미하게 멀리 서있는 부동의 풍경화가 아니라 햇빛에 찰랑거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살아숨쉬는 소우주로서 재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그의 붓길은 속도감과 운동감으로 쉴새없이 움직이고 짧은 사선과 직선과 곡선이 그때마다 의외성을 다양하게 표출해 낸다. 평론가 박래경은‘상식적이지 않은 시선과 범상치않은 구도설정은 단순하면서도 참신한 맛을 추가하여 추상화된 그림세계에 연결되고 있다’고 예언한바 있다. 예를들어 지난 60년에 그린 ‘담쟁이’는 불꺼진 창과 밋밋한 벽으로 기어오르는 메마른 덩굴에 머물고 있으나 그로부터 2년후인 62년에는 같은 벽으로 기어오르는 덩굴이라도 빨강과 황금색등 색채의 축연을 조직하는 것이 남다르다. 이른바 12계절이라해도 좋을만큼 시절따라 시간따라 환상적인 보랏빛이 발휘되고 같은 유형의 색깔이 변조되어 맨 마지막 단계에서 오리지널리티의 완결성과 정신적 탐구를 성취해낸다. ○59년 첫 개인전 열어 이경(二耕) 이대원, 가장 흔히 회자되기는 그는 화단의 신사요 멋쟁이다. 그의 그림세계에는 예술가들이 자칫 가질수 있는 퇴폐적인 낭만이나 고뇌나 파토스 대신 아파테이아의 초연(超然)이 깃들여 있다. 그와 경복고 동문에다 절친했던 고고학자 김원룡박사에 따르면 ‘말쑥한 성품으로 태어나서 평탄한 청춘시절을 보내고 만년소녀로 소문난 아름다운 미인의 내조를 받으며 정상의 예술가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총장을 거쳐 집에서는 딸들과 훌륭한 사위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과연 이대원은 팔자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에다 ‘항상 멋있는 옷을 입어 화단의 드레서로 소문나 있고 미식가애 주가에다 집과 학교와 파주농원에까지 화실이 세군데나 되어 화단의 귀족’ 같은 존재지만 그의 어느 일면에도 ‘속물취(俗物臭)’는 찾아볼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예술가적 면모는 어느장소에서나 시와 정취와 인간미를 잃지 않는다. 지성적 풍모에 단정한 매너로 인해 언뜻 보기엔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그와 사귄 사람들은 ‘볼수록 때묻지 않고 따뜻한 성품’ 에 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평소에는 화단의 김흥수 권옥연과 잘 어울리고 최기원과 이만익, 삼성문화재단의 손기상 상무와도 각별한 사이다. 경기도 문산에서 농림회사에다니면서 그 일대 꽤큰 과수원을 가지고 있던 一耕 李鍾林씨와 金善伊씨 사이에서 삼남중 막내. 파주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서울로 이사해서 청운공립보통학교에 다닐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중학교 3학년때 선전에 연속 입선, 경복고를 졸업할때까지 미술공부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던 부친이 미술학교만은 강경하게 반대하여 지금의 서울대인 경성제국대 법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만을 그렸고 59년에 첫개인전, 한때는 우리나라 화랑의 효시로 기록되는 반도화랑을 운영한 적이 있다. 가족은 의사이던 부인 李鉉金 여사와의 사이에 딸 다섯, 63년간 살고 있는 유명한 혜화동집은 지난 89년 출간된 ‘혜화동 50년’의 바로 그 무대다. ○한때 반도화랑 운영 그의 미술역정은 파리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하면 ‘출중하고도 예외적인 인물’로서 ‘이대원은 빛을 그린다기보다 빛을 데생하는 화가’란 말로 압축된다. ‘선과 점과 조직을 사용해서 그것으로부터 그의 붓은 그가 창출한 수많은 색채로 형태를그려내기’ 때문이다. 그의 엄청난 재능들은 레스타니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그림속에 있는 모든 것은 화사함과 고요함과 기쁨’에 틀림없다. 현대작가중에서 이러한 자연적인 교훈을 자신의 창작으로 성취한 사람은 별로 흔치않다. 물방울처럼 튀기는 영롱한 화경에서 그가 이룩한 이대원식 표현이란 바로 ‘이대원 자신의 화창한 인생의 음률’일 것이다. 거기에는 국경이 없으며 범우주적인 진솔한 정서와 삶의 즐거움만이 투영되어 날이 갈수록 싱싱하고 청청한 빛을 발한다. 사람을 반기는 그의 색채점묘화는 보는 이의 가슴에 루비나 사파이어같은 보석의 광채를 언제까지나 눈이 부시게 비춰주게 될것이다. ◎그의 길 ▲1921년 경기도 문산 출생 ▲1938­40년 선전 출품 ▲1945년 경성제대 법과졸업 ▲1959년 첫개인전(중앙공보관화랑) ▲1959­60년 국제자유미술전출품 ▲1962­68년 신상전·동인전출품 ▲1967­86년 홍대 미술대 교수·대학원장·학장·총장 ▲1971년 개인전(반도화랑) ▲1973년 한국근대미술 60년전·한국현역화가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1975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위원 ▲1977년 개인전(현대·신세계) ▲1978년 중화민국 중화예술원 명예철학박사,영국국제하계미술전 출품 ▲1979년 뉴욕 한국화랑초대개인전 ▲1981년 회갑기념전, 성균관대 명예철학박사, 파리 살롱도톤느 출품 ▲1983·85년 현대화랑 개인전 ▲1986년부터 홍대 명예교수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한국박물관회회장,개인전(강남현대) ▲1988년 부산개인전 ▲1988­91년 국제현대미술제 및 아시아국제미술전 출품 ▲1989년 개인전,대한민국예술원회원 1993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장 ▲1995년 ‘이대원 1990­95년’개인전(갤러리 현대) 국민훈장목련장(73년) 5·16민족상(88년) 대한민국예술원상(9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94년) 오지호미술상·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95년) 역서 柳宗悅저 ‘한국과 그 예술’(74년)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96년) 화집 ‘이대원’(81년) ‘이대원,혜화동 50년’(89년)
  • 신중현:下(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3)

    ◎‘한국적 록 만들기’ 父子 한길 큰 위안/‘대마초’이후 23년 무대 잃은 음악 인생/궁핍보다 더한 고통으로 좌절·방황/분별없는 외래가요 범람 못내 가슴아파 “형광등이 비추는/천장을 보면서/눈을 떴다가 감았다/밤을 새우네/그여자는 지금쯤/무얼하고 있을까/이리둥굴 저리둥굴/혼자 생각하네/아침이 오면/붉은 태양이/나의 마음을/달래 줄텐데/길고 긴 이밤이/언제나 지나가나…” 기다림이 애틋하게 사무친 申重鉉씨의 노래 ‘긴긴 밤’. 마치 3년뒤 영어의 몸이 될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답답한 심경을 담아낸 72년도 발표곡이다. 노래말처럼 붉은 태양과 함께 아침이 밝았으면 좋으련만 운명의 신은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대마초 가수’로 서울 서대문 구치소에 갇혀 있던 기간은 4개월. 4개월이 마치 4년만 같이 여겨졌다.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만 했던 지난 날들이 악몽만 같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했던가. 마른 하늘에 뜬금없이 내려친 날벼락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고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76년4월. 지난 연말 구치소에 들어갈 때의 추위는 가시고 봄기운이 온누리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예전의 자유로움을 용납하지 않았다. 가요계,방송국,음악감상실…,그가 설 땅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빼어난 작곡가이며 기타연주가이기도 했던 록 가수 申重鉉의 인생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가수에게 활동중지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 유신정권의 혹독한 간섭 아래서 금지인생을 살아내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모든 공연이 철저히 막혔고 방송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게 됐다. 구속 전부터 1∼2곡씩 방송에서 사라지더니 구속과 동시에 통째로 금지곡이 돼버렸다. 당연히 음반판매도 막혔다. 어쩔 수 없이 악기를 몽땅 팔아야 했고 반포동 28평짜리 아파트를 청산해 동작동,방배동,문정동 셋방을 10여차례 옮겨 다녔다. 노래뿐만 아니라 작사·작곡에서도 한창 인기를 누리다가 좌절을 맛본 터라 하루하루를 견뎌내기가 더욱 힘이 들었다. 사람을 피해 낚시터와 산을 다니며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용산 미8군 무대에 다시섰다. 끼니를 마련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가 슬펐다. 3개월만에 그만두고 경기도 송탄으로 잠적,음악을 함께하던 친구들과 어울리며 시름을 달랬다. 기지촌의 미군들을 상대로 가끔씩 노래를 불렀는데 간섭이 없어 마음은 편했다. 감옥에서 나온지 3년이 지난뒤인 79년 활동중지가 풀렸지만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변해 있었다. 우선 생활이 쪼들리다 보니 음악활동을 시작할 여유가 없었다. 악기도 남아 있는게 없었다. 무엇보다도 독재정권의 탄압이 가져온 삭막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방송이 들려줄 이렇다할 대중음악이 없었어요. 금지의 태풍 속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지요. 당연히 흘러간 노래나 뽕짝풍이 판을 쳤고 대중들의 귀도 이런 음악에 순치돼 있었습니다. 50년대의 문화가 다시 살아났다고나 할까요” 대학가에도 춤곡과 디스코 선풍이 몰아쳤고 춤추는 문화의 유행으로 대중음악 자체가 표류했던 시기. 외래문화와 트로트가 휩쓸리면서 방향을 잃고 흘러만 가던 상황이었다. 신씨가 끼어들 틈새가 보이지가 않았다. 이미 가수 신중현이 설 땅은 허물어졌던 것이다. “당시 방송국에서 저와 제 음악을 이해하던 몇몇 프로듀서들이 저의 재기를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허사였습니다. 잊혀진 가수와 음악을 되살리기가 그렇게도 힘들 줄 몰랐습니다. 아니 어찌보면 그런 음악환경에서 제자신이 멀어지기를 바랐다고 할 수도 있지요” 79년 이후 공식적인 콘서트는 단 한번도 열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75년 겨울 ‘구치소 신세’를 질때부터 지금까지 23년간 신중현의 무대는 없었던 셈이다. 방송엔 ‘가뭄에 콩나기’식으로 가끔씩 출연했다. 지금은 출연제의가 완전히 끊겨 있다. 방송국 입장에서도 사연많은 ‘대마초 가수’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87년 그의 음악이 해금된지 올해로 11년째. 수원여대에서 주2회씩 현대음악 강의를 맡고 있고 밤에는 가락동 50평짜리 지하 작업실에서 자신이 만들고 불렀던 곡들을 녹음·정리하고 있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200여명의 출연진이 무대에 서는 대형 록 콘서트를 지난해 말부터 준비해왔는데 IMF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음악인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콘서트를 꿈꾸고 있지만 여의치가 않다. 그나마 아들 3형제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한국적인 록만들기에 뜻을 두고 한 길을 걷는게 큰 위안이다. “세살짜리 꼬마부터 80세 노인까지 모두 좋아할 수 있는 대중음악이라면 어떨까요. 그러려면 수준이 있어야 하고 음악성도 갖춰야 합니다. 방송이 주도하는 요즘 대중음악은 상업성에 치우쳐 문화적인 측면을 무시하기 일쑤지요” 한국적인 가락을 록에 담기 위해 평생토록 고민했다는 신씨. 그는 분별없는 외래문화 유입이 독재정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문화의 맥이 순탄하게 이어졌으면 지금 이처럼 혼란스럽진 않을텐데…. 국적없는 음악은 위험합니다. 우리만의 고유성을 담은 음악이 필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과거 독재정권의 문화탄압은 치명적이었다고 봅니다” ◎사연들/4t트럭 분량 악기 생계위해 팔아치워/레코드社 박대 서운 동료 손가락질 처연 75년 신씨가 구속되기 전만 하더라도 학생층이 주로 모이던 ‘이브’를 비롯,서울 명동과 종로의 음악감상실 5∼6곳에서는 고정적으로 신씨의 콘서트가 열렸다. 그러나 묶이고 난뒤엔 사정이 달랐다. 업소들은 신씨의 접근을 아예 봉쇄했고 레코드회사와 방송국은 문전박대로 일관했다. J레코드사와 K레코드사는 30대 이상의 연령층이면 지금도 기억하는 당시의 내노라는 음반사들. J사는 유류파동때 어려움을 겪다가 ‘미인’히트로 살아났고 K레코드사 역시 신씨의 노래들로 유명해진 대표적 레코드사다. 셋방을 전전할 때 레코드사를 찾아가 몇차례 도움을 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방송국도 마찬가지. 신씨가 묶이자 신씨의 노래들을 앞다투어 뺐고 녹화 필름도 모두 폐기해 버렸다. KBS,MBC 등 3개 공중파 방송사엔 신씨의 구속전 필름,레코드 등 관련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생활고에 지쳐 마침내 악기를 팔기 시작했다. 농군에게 소가 가장 큰 재산이라면 음악인에겐 악기가 그럴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 신씨만큼 귀한 악기를 많이 갖고 있던 음악인도 드물었다. ‘먹고 살기’위해 청산한 악기만도 1톤짜리 트럭 4대분은 족히 된다고 한다. 73년 영국에서 사들여온 530와트 용량의 ‘마샬’ 앰프를 팔땐 며칠간 잠을 못이루었다고 한다. 마샬은 당시 국내에 1대밖에 없었다. ‘미인’을 히트시킨 ‘신중현과 엽전들’이 쓰던 것으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자신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해야 할 동료 음악인들의 배신. 우연히 커피샵에서 만난 동료들이 정보부 요원과 함께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며 능멸할 땐 회의감마저 들었다고 한다. 서울 가락동 신씨의 지하 작업실 한 쪽 벽엔 시계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시간에 얽매이기 싫어서 아무렇게나 걸어 놓은 것이라는게 신씨의 설명. 그러나 억울하게 빼앗긴 시간들을 애써 찾으려는 듯한 인상이 짙다. ◎금지곡 연보 ▲69년 9월27일 ‘어떻게 해’(김상희 노래) ▲70년 7월6일 ‘미칠듯한 마음’(임성훈) ▲71년 7월25일 ‘못 견디겠어’(지연) ▲74년 12월7일 ‘나는 몰라’(신중현과 엽전들) ▲75년 7월5일 ‘거짓말이야’(김추자) ‘나비같은 사랑’ ‘두 남편’ ‘저기 저 소리’(장미리)‘세상에 만약 여자가 없다면’(김명희 서영옥 이다연) ▲75년 7월6일 ‘미칠듯한 마음’(임성훈) ▲75년 8월4일 ‘가나다라마바’(김정미) ‘너와 나’ ‘담배꽁초’‘바람’ ‘이건 너무 하잖아요’(김정미) ‘미인’ ‘생각해’ ‘저 여인’ ‘할 말도 없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신중현과 엽전들) ‘그리워’(김명희) ▲83년 11월7일 ‘설레임’(신중현과 엽전들)
  • 해외 한국학 지원 재평가할 때다/金三五(기고)

    근래 우리가 한국학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된 이유는 해외에서 그런 이름이 붙은 연구와 대학 강의가 늘어난 때문이다.한국학은 편의상 국내와 해외로 나눠 볼 수 있는데,해외 한국학에 대한 국내 인식은 대체로 매체가 보도하는 대로다.해외 한국학은 문화수출이며,한국의 자랑이라고 보는 시각이다.학문보다도 정책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라 하겠다.그러므로 그 보도는 언제나 어느 나라에 한국학이 붐을 이루고 있다든가 어느 나라,어느 대학에 한국어 강좌가 새로 개설되었다는데 무게가 실려있다. 한국정부나 민간단체가 해외 한국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지금의 정책은 분명 이상 말한 한국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 분야에서 예산삭감이 거론되는 요즘,한국학 지원을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전반적인 평가를 한번은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한국학은 문화수출로서의 기능을 발휘해왔던가,국내 한국학은 왜 필요한가,어떻게 지원해야 효과적인가?해외 현지에서 볼때 이에 대한 대답은 썩 긍정적이못되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긍정적이 못되는 이유는 우리와 그들을 둘러싼 상황적 변수가 크게 다른데 있다.서양인들,특히 영미인들의 문화우월주의,그리고 그들의 한국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은 우리의 문화수출 정책의 효과를 크게 상쇄하는 요인이다.때문에 이들은 어떤 이유에 따라 한국을 배운다 하더라도 한국인이 그들 나라를 배우면서 갖는 그런 정서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이번 IMF사태 이후 서방 언론과 지식층이 한국에 대하여 혹평을 퍼부었던 현실을 생각하면 납득이 갈 것이다.그렇다면 문화수출과 국가홍보에 나가는 막대한 돈은 아껴서 먼저 ‘집안 정리’에 잘 쓰는 것이 현명하다. 또 해외 한국학 지원 정책은 일부 이른바 ‘인스턴트’ 한국학 학자들을 배출했다.지원을 바라보고 하는 한국학 학자들을 현지 학자들이 부르는 말이다.이런 학자들은 ‘떡고물’이 떨어지면 친한파에서 반한파로 바뀌기 쉽다. 국내와 해외 한국학 연구활동에 대하여 똑같이 따져볼 또 다른 차원은 한국학의 학문적 의미이다.한국학(미국학,불란서학,일본학도 마찬가지)의 궁극적 목적은 한국의 ‘진실된 실체’를 알리는 연구 활동이어야 한다. 진실된 지역연구의 첫째 조건은 연구가 국가이익이란 좁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강대국들이 약소국에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또는 시장침투를 위한) 수단으로 그 지역을 연구한다면 그런 연구는 진실성이 결여되기 마련이다. 둘째 조건은 연구방법이 통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한국사회의 분석을 경제학,정치학,역사학,국문학등 각 전문 분야별로 나눠 접근해야 하는 사정은 이해한다.그러나 이 분업은 궁극적으로 통합되지 않으면 실제적 가치가 없다.오늘 한국이 국가위기를 맞이 하게 된 것도 한국사회의 실체를 경제논리로만 다뤄온 국내외 학자와 기업가들의 오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에 대한 통합적 연구를 위한 방법론이 쉽지 않다.정부의 지원을 받아 국내외에서 열리는 한국학 학술대회나 국내 한국학 연구기관이 그런 연구를 위한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 살찐 여자 용서못한다?/신문광고의 10.8%가 다이어트 관련

    ◎女協 모니터회 조사… ‘여성상품화’ 비난 ‘못생긴 여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살찐 여자는 용서할 수 없다’‘여름엔 노출 여인이 진짜 미인’‘…어떤 남자가 눈빛이라도 한 번 주겠습니까’ 외국잡지의 문구가 아니다. 우리의 소비생활이나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앙일간지의 광고문구다. 여성의 미를 날씬한 몸매로 규정하면서 외형미로만 여성을 평가하는 가치관을 유포할 수 있는 이런 다이어트광고와 여성을 상품화한 광고가 신문광고의 10.8%와 9.9%를 각각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매스컴 모니터회는 지난달 15일부터 6일동안 중앙 일간지 5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광고내용 분석에서 이같은 사실이 확인됐다고 지난 2일 밝혔다. 여협 모니터회는 다이어트 광고가 여성을 체형으로 평가,여성의 인격과 존엄성을 무시하고 남성의 가치관에 맞춰 ‘살을 빼야한다’는 가치관을 여성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필요이상으로 노출하거나 선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성의 사진을 상품의 내용이나 기능과는 무관한 광고에 사용,여성을 상품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니터회는 분석의 결론으로 “광고제작자들이 여성의 노출에 기대어 광고효과를 올리려는 기획보다는 참신한 브랜드 개발과 이미지 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 누런 이를 하얗게 ‘치아미백술’ 인기

    ◎미백용 젤 바른 비닐 틀/2∼3주일동안 잘때 착용/법랑질 착색물질 표백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는 미인의 필수요건중 하나. 굳이 이런 조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치아는 외모나 인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말할때나 웃을때마다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 얼굴중 상대방의 눈에 가장 잘 띄는 부위이기도 하다. 최근 국내 의료계에서 누렇고 검게 변색된 치아를 희게 하는 치아미백술이 도입돼 점차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다. 깨끗한 치아는 신선한 인상으로 한결 젊어 보이는 효과를 주므로 미혼여성은 물론이고 최근엔 중년여성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치아변색 원인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치아 법랑질에 수없이 분포해있는 아주 미세한 틈사이로 음식물이나 담배연기 등 착색물질이 침투해서 생긴다. 주 원인은 커피나 콜라 홍차 초콜릿 등에 의한 착색이나 흡연에 따른 경우가 가장 많다. 또 예전에 소아과에서 사용됐던 테트라사이클린 계통의 항생제 복용에 의한 경우도 종종 발견되는데 색깔이 전체적으로 회색을 띠거나 띠 모양으로 변색된 치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밖에 나이가 들어 변색되는 노인성이나 유전적 원인,불소과잉 섭취로 치아 색깔이 누렇게 변하기도 한다. 치아미백 원리는 쉽게 말해 이의 법랑질과 상아질에 착색된 색깔을 표백하는 방법으로 깍아내거나 붙이는 일반적인 치과진료와는 전혀 다른 약물치료의 일종이다. 즉,빗자루로 마루를 쓸때 마루틈 사이까지 깨끗이 청소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칫솔질이나 스케일링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에 약을 발라 착색된 물질을 제거하는 메카니즘이다. 방법은 얇은 비닐 소재로 치아에 정확히 맞도록 틀을 제작한뒤 여기에 미백용 젤을 살짝 발라 치아에 끼는 것이다. 그러면 젤의 성분인 카바마이드 페록사이드가 분해되면서 산소를 방출하고 이 산소가 법랑질과 상아질 안으로 들어가서 착색된 물질을 표백하는,의외로 간단한 원리다. 치료 기간이나 과정도 복잡하지 않다. 치료기간은 보통 2∼3주일이면 하얀 이를 회복할 수 있다. 치료과정은 치과에서 틀을 만들어 주면 집에서 잘때만 착용하되 1주일에 한번꼴로 진찰하면 돼 번거롭지 않다. 치료가 끝나면 평균 2∼3년동안 효과가 지속된다. 그러나 미백치료를 받은 뒤 6개월에 한차례씩 하루나 이틀밤만 이 장치를 끼면 희고 밝은 치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미국 조지아의대에서 최근 실시한 임상결과에 따르면 이같은 미백술로 노인성이나 유전적,음식물에 의해 변색된 경우 전체의 97%가 만족한 성과를 얻었고 항생제 복용에 따른 변색에선 75%가 미백에 성공한 것으로 집계됐다. 치아미백술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0여년전이지만 아직은 몇몇 대학병원과 개인 치과에서만 시술하고 있는 초보단계다. 그러나 미국에선 치아미백에 들이는 비용이 어마어마한 규모다. 치아미백을 위한 지출비용이 96년 한해동안 4억달러(한화 약 5,600억원)에 이를만큼 보편화된 치과 보존술의 하나다. ◇도움말=최동훈치과 최동훈 원장,연세대 치과대학병원 보존과 노병덕 교수
  • 궁중의 숙청(秘錄 南柯夢:16)

    ◎“궁궐안 정씨 모두 해직” 어명/황제총애 받는 시종자리 이권·인사청탁 쇄도/오적 이지용 상중에도 여인보내 벼슬 부탁/“모든 정씨 국가에 유해” 상소에 “나가 기다려라”/시종 정환덕 궁내사건 예언시 적중하자 복직 1899년 8월에 선포된 대한국제(大韓國制)는 대한제국의 헌법이었다.이 법에 따르면 황제는 입법·사법·행정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전권을 장악한 전제군주였다.말하자면 서양의 절대왕권을 한국에 그대로 이식한 셈인데 고종을 루이 14세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누구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당시의 세계 대세로 보아도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시종원 막강권부 부상 이처럼 모든 권력이 고종황제에게 집중되었으니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이 권력의 핵심부가 될 수밖에 없었고 고종의 최측근인 시종원 시종들이 막강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대한민국의 역대 청와대 비서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았다. 정환덕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모든 이권과 인사청탁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게 마련이었다.지방 군수나 관찰사는 물론 중앙의 대신 자리까지도 일개 시종에 지나지 않는 정환덕을 거쳐야만 성사되었다.군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경우가 그 좋은 사례였다. 전 군부대신 이지용은 평양의 명기 죽향(竹香)을 소실로 삼고 있었는데 광무 6년8월 생부가 죽어 상중에 있을 때 죽향을 우리(정환덕)집으로 보냈다.내외를 하느라 나는 발을 치고 죽향을 만나 보았는데 용건은 다름 아니라 “영감께서는 우리 대감(이지용)을 모르십니까? 대감께서는 방금 거상(居喪)중이시라 한번만 문상을 와주시면 천만번 다행이라 하옵니다”는 것이었다.이에 대답하기를 “이 몸이 국사(國事)에 바빠 밤낮없이 함녕전 대청에서 폐하를 모시고 있는 처지라 여가를 낼 수가 없습니다.그러나 예까지 부인을 보냈으니 한번 짬을 내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옛부터 부모의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식의 도리요 바깥 출입까지 삼가하여야 했는데,감투욕에 불탄 이지용은 정한덕에게 미인계를 써서 기어이 기복(起復=상중에 벼슬을 하는 것)하려 했던것이다. 이지용은 이층 양옥집에 살고 있었다. 문상을 마치고 이지용에게 인사말을 건네기를 예전에 대감이 군부대신으로 계실 때 한번 찾아 뵌 일이 있었는데 그 때는 손님이 집에 가득하고 마당에는 수레와 말이 벌려 있었습니다.그런데 지금은 문정(門庭)이 적막하고 포저(예물)가 뚝 끊기어 있으니 보기에 민망스럽습니다”하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감투란 것은 쓰고 있을 때 즐거울 뿐 벗고나면 허전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이다.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줄 알면서도 한자리 하려고 버둥거리고 그것이 역사의 강물이 되어 도도히 흐르게 마련이다.이지용은 이름난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요 탐관오리였다.부모가 돌아가셨는데도 미인계를 써서 벼슬을 하여 집안의 불효자가 되었고 나라를 팔아 매국노가 되었다. 물론 정환덕은 이지용이 그런 인물이 될 줄은 모르고 그를 임금께 천거했던 것이지만 어느 해 추상같은 상소가 올라와 궁중 숙청이 단행되었다.전 동부승지(同副承旨) 홍병섭(洪丙燮)의 소장(疏章)이었는데 거기에는 무서운 말이 들어 있었다. 상감께서 물으시기를 “소장의 내용은 무엇이냐” 하시었다. 아뢰기를 “궁궐안을 숙청하라는 내용입니다”하였다.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상소는 금후 궁내부에서 받아 물리쳐 버리고 짐에게는 보이지 말라”고 하시었다. 이때 문득 생각하기를 상감의 총애가 날로 융성하고 흡족해지고 있는데 나라일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어 보필하는 신하로서 한자 한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탓이라 여겼다. 이야말로 시위소찬(尸位素餐:하는 일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하는 것이라 자책하였다.그래서 대궐문 밖으로 나가 사모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고 상감께 사죄하니 상감께서는 “네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하시면서 만류하시었다. “소신은 본래 초야에 있어야 할 몸이온데 이처럼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밤낮으로 대전을 모시다가 이렇게 탄핵을 받게 되었으니 마땅히 소신에게 과실이 있사옵니다.그러하오니 소신을 초야에 돌아가 살게 하옵소서”하고 간청하였다.그러나 상감께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는 본래 국가를 배반하지 않았고 임금에게숨긴 일이 없었다.너는 또 재주를 부려 남을 헐뜯거나 어진이를 투기하여 중상모략한 일도 없었다.너는 아래 사람에게 통통촉촉(洞洞燭燭)하였고 윗사람에게 주야로 성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너는 참으로 충신이라 할 것이다”하시면서 도리어 정삼품직을 하사하셨다. ○“초야로 돌아가겠다” 주청 그러나 시종원 시종 자리란 그렇게 늘 쉽사리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 뒤 얼마나 지났을까.난데없이 궁안에서 종사하는 모든 정씨(鄭氏)는 남녀를 가릴 것 없이 해직시킨다는 어명이 떨어졌다.청천병력과 같은 일이었다.아무 죄도 없이 정씨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궁궐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니 어처구니 없는 처사였다.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느날 궁중에 “鄭씨 姓을 가진 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국가에 유해하니 모조리 해직하여 쫑아내야 합니다”라는 상소가 올라왔다.내사해 본 결과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상궁(尙宮)이 여섯 명이고 내시(內侍)가 열명이고 무감(武監)이 세명,주사(主事)가 세명이었는데 거기다 노비 28명을 합하면 궁중에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63명이나 되었다.이 사람들을 모두 해직시켜 일시에 궁안에서 내쫑아 버린다는 것인데 나(鄭煥悳) 역시 거기에 끼여 있었다. 상감 부자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너는 잠시 너의 본집에 가서 머물러 있다가 처분을 기다리라.너무 바깥 출입을 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시었다.그리고 “혹시 내가 너에게 문의할 일이 있으면 봉서(封書=임금의 私信)로 통지할 터이니 어느 놈이 우리 군신 사이를 이간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었다.이에 나는 “예식관 이용태(李容泰)를 통해 하명하시면 즉시 올라와 뵈옵도록 하겠습니다”하면서 절하고 물러났다. ○“군신 이간질 가당찮다” 상감 부자께서는 서운해 하실 뿐만 아니라 상궁과 시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말없이 물러나는 나를 지켜 보았다.나도 또한 여러 해 동안 밤낮으로 가까이 모시고 있다가 까닭없이 사퇴하게 되니 옛날 당나라 시인 두공부(杜工部)가 지은 시 “성상께서 늘 사랑하심이 있는데 조정을 물러나니 의지할곳이 없네”는 귀절이 가슴을 쳤다. 어떤 자리를 막론하고 한번 앉았던 자리를 물러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물러나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요 인생의 비애이기도 하다.하물며 무상의 권부를 물러나는 정환덕의 심정이야 오죽했겠는가. 대궐을 물러나 집으로 돌아와 보니 무엇을 잃은 것처럼 허전하기만 하였다.이에 글 한줄 지었으니 “내일 모레 사이 서늘한 밤 자정 달이 서산에 숨을 때 동쪽 정원에 꽃 한송이 떨어질 것입니다(明再明間 凉夜三更 月隱西山之時 花落東園中). 이 글을 봉투에 넣어 이용태에게 주어 상감께 드리도록 했다.아니나 다를까 궁중에 사건이 일어났는데 야밤중에 김상궁이 측간(厠間=변소)에 빠져 죽은 것이다.정환덕은 이 예언 때문에 다시 궁안에 들어와 복직되었다. 상감께서는 “과연 수(數)를 맞히기는 정환덕만한 사람이 없도다“하시면서 나를 칭찬하셨고 궁녀들은 모두 박수갈채를 보내 한번 수(數)보기를 바랐으나 상감이 엄히 금지하셨다.
  • ‘미인’ 신중현:상(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2)

    ◎“어느새 耳順… 난 美人을 사랑할뿐”/50곡 금지 탄압 분명… 대마초는 그저 핑계/대통령찬가 작곡 주문 거부한게 빌미인듯/反戰·사랑메시지 우리가락 접목이 내꿈 1975년 12월 겨울 바람이 매섭던 어느 날,서울 서대문 구치소의 차가운 골방 구석에 낯익은 30대 인기 가수가 쭈그리고 앉아 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대마초 사건에 연루된 록 가수 신중현(申重鉉·당시 37세)씨 였다.작곡관계로 만났던 히피족이 선물로 준 마리화나를 피운 것이 꼬투리가 돼 인기 절정에서 한 순간에 죄수로 추락한 몸.자신의 앞날이며 문화 예술계에 떨어질 불벼락이 모두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60∼70년대 신들린 사람처럼 무대를 오가며 팬들의 혼을 빼앗았던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그는 트로트,포크송,록으로 대별되던 대중음악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어 ‘이단아’로 눈총을 받았다.젊은이들의 음악세계를 주도했던 장본인 이던 그의 운명을 갑자기 바꾸어 놓은 것은 무엇일까.흔히 알려진 대로 대마초 때문일까.아니다.‘대마초 가수’로 낙인 찍힌지 23년이 지난 지금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다르다. 인기 절정이던 72년 가을 어느날,서울 신촌 집으로 운명의 전화가 걸려왔다.느낌이 좋지 않은 벨 소리였다.수화기를 들자 청와대라고 칭한 30대 남자가 박정희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해왔다.그는 “정치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서민의 한 사람으로 내 길을 가고 싶다”는 말로 거부의사를 밝혔다.5분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이번엔 당시 공화당의 유력 인사였다.역시 같은 주문이었다.“독재정권도 싫은데 그런 것까지 주문하려 드느냐”며 강도높게 반발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앞으로 자신의 음악인생에 드리워질 어두운 그림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신씨가 대마초를 알게 된 것은 60년대말 록 음악을 하던 히피족들과 어울리면서부터.음악인으로서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록에 당연히 관심이 쏠렸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에 들어와 있던 히피들과 친분을 다지게 됐다.그중에서도 ‘환각음악’이라는 것에 빠졌고 함께 어울리던 히피들의 생활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남겨진게 바로 대마초(마리화나)다. “작업을 하다가 틈틈이 피웠는데 한번씩 피우면 1주일간 머리가 멍한 상태로 곡을 못 쓸 정도가 됐어요.그러다 보니 자연 끊게 됐지요”. 그때만해도 일반인들은 마리화나 등 환각제가 무엇인지도 모를때 였다.소문을 들은 음악인들이 “집에 마리화나가 있느냐”고 물어오면 법 위반이나 위험성도 모른채 “우리 집에 산더미처럼 많다”며 나눠줄 정도였다.대마초를 피운 유명 음악인들이 하나 둘씩 묶여 들어가고 추궁 끝에 시발점인 신씨에게 화가 미쳐왔다.보건사회부와 검찰 합동수사반에 덜미가 잡혔고 남대문옆 건물 지하로 끌려가 이틀 동안 감금된채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 “구타에 물고문까지….견딜 수가 없더군요.사실대로 불었지만 막무가내였어요.취조의 목적이 엉뚱한데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겠더군요” 신씨의 구속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연행 이틀째 새벽에 검사가 취조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국가 방침이니까 들어가 있으라”는 말을 전했다.정신병동에 1주일 입원해 있은 후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노래와 인생이 모두 묶이는 신세가 됐다.박대통령이 담당 검사 어깨를 두드리면서 격려했다는 소문을 후에 들었다고 한다. 신씨는 당시 정황을 볼때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문화탄압의 첫 표적이 자신과 자신의 노래였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60년대말부터 월남전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습니다.세계적으로 반전(反戰)무드가 강했고 록 음악은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강하게 담아 전했지요.그같은 록을 따랐던 제 노래가 금지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당시 히트했던 ‘미인’이나 ‘봄비’‘미련’‘저 여인’‘생각해’‘그 누가 있었나봐’ 등이 모두 현대감각을 살려 사랑을 표현한 노래들인데 모두 금지곡이라니요.평소 잘 알고 지내던 평론가들이 앞장서서 내 노래에 칼질을 해대더군요” 4년전에 피운 대마초를 핑계 삼아 75년 족쇄를 채웠고 87년 완전 해금될때까지 50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제가 구속된뒤 가요뿐 아니라 문학 등 문화예술 각 장르에서 구속과 금지의 회오리가 거세게 일었지요.당시 대중음악으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던 저를 희생양으로 삼은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대마초가 핑계로 작용했구요” 그저 음악이 좋아 혼자 기타를 배웠고 우리 것이 우러나는 음악 만들기에만 몰두했다는 신씨.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의 대마초 사건이 우습기만 하다.대마초가 무언지도 모르고 피워대던 일이며 대마초 가수란 오명을 낳은 시대적 상황들….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기억 속에만 있다.그러나 어쩔수 없이 치러야만 했던 과정 치고는 그 댓가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 ◎사연들/골목길에 울려퍼진 ‘한번하고 두번하고’ 독재연장 삐꼰다나?/단순한 리듬에 쉬운 가사/改詞曲으로 인기 ‘눈엣가시’/혐오감·폭력성 씌워 금지 ‘한번 보고 두번 보고/자꾸만 보고 싶네/아름다운 그 모습을/자꾸만 보고 싶네/그 누구나 한번 보면/자꾸만 보고 있네/그 누구의 애인인가/정말로 궁금하네/모두 다 사랑하네/나도 사랑해/나도 몰래 그 여인을/자꾸만 보고 있네/그 모두 넋을 잃고/자꾸만 보고 있네”(미인). 1974년 발표,레코드 1백만장이 팔려나갈 정도로 크게 성공을 거둔 노래다.그러나 첫 구절 일부가 ‘한번 하고 두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바뀌어 당시 독재정권의 정권연장을 빗댄 노래로 대학가에서 번져나가자 금지곡이 됐다.동네 꼬마들의 입에까지 자주 오르내리게 된 대표적 금지곡이다. 신씨의 노래는 우리 가락조의 록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평이한 가사와 리듬이 특징이다.대부분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분위기의 가사들을 담고 있다.그래서 그런지 그의 노래들은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흔히 개사(改詞)곡으로 애용되곤 했다.‘미인’은 그 대표적인 예.원 노래의 가사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개사곡이 널리 퍼지자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크다며 금지곡 딱지를 붙이게 된 것이다.이후 신씨가 만든 노래는 가사가 조금만 자극적이어도 ‘혐오감을 준다’‘폭력적이다’‘너무 슬프다’ 등등의 금지사유가 여지없이 따라 붙었다. “형광등이 비추는/천장을 보면서/눈을 떴다가 감았다/밤을 새우네/그 여자는 지금쯤/무얼하고 있을까/이리둥굴 저리둥굴/혼자 생각하네”(긴긴 밤)“저 여인은 왜 홀로 앉아 있나/저 여인은 무엇을 생각하나/그 옛날에 그 사람을/잊지 못하고 있나봐/그 여인∼아름다워”(저 여인)“웃으면 웃었지/울으면 울었지/왔으면 왔지/갔으면 갔지/나는 몰라/알게 뭐야/그 누가 웃으랬나/그 누가 울으랬나/그 누가 오랬나/그 누가 가랬나/아 그렇게 하면 어떻게/그렇게 노래 부르면/애인이 싫어하잖아(나는 몰라). □그의 길 ▲38년 서울 출생. ▲41년 만주 신경으로 이주. ▲45년 해방 맞아 귀국. ▲57년 서라벌고 2년 중퇴. ▲62년 한국 최초의 그룹 사운드 ‘애드4’ 결성. ▲75년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미인’‘거짓말이야’‘그사람 아니야’‘바람’ 등 무더기 금지곡 판정. ▲79년 부분(활동)해금. ▲87년 전면(금지곡)해금 ▲89년 서울 송파구 가락동 작업실 ‘우드스탁’ 입주. ▲92년 15분짜리 대작 ‘너와 나의 노래’ 작곡. ▲94년 실험적인 앨범 ‘무위자연’ 출반. ▲98년 음악인생 결산 대규모 록 콘서트 IMF로 무산. ▲현재 수원여대 출강.
  • 존 던의 연가/김선향 지음(화제의 책)

    ◎낡은 전통 거부한 존 던의 시세계 17세기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인 존 던(1572∼1631)의 시세계를 그의 연시(戀詩)를 중심으로 살핀 연구서.학구적이던 던은 예리하고 논리적인 지성을 지녔으나 매우 감성적이기도 했다.던은 당시의 시류였던 궁정 연가나 페트라르카식 시와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을 표현했다. 던은 종교적 갈등이 곧 정치적 논쟁이었던 시대에 살면서 구교도와 신교도의 잔인하고 무모한 희생을 지켜 보아야 했다.그런 만큼 그의 연가에 나타난 배반과 부정의 테마는 사랑에 관한 던의 사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시대적이고 종교적인 변화와 함께 생각하고 의문하고 변화하는 인간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연애시에서 여자는 항상 이상형의 미인으로,남자는 시종처럼 끊임없이 연시를 지어 바치는 인물로 등장한다.연시 속에서 여인의 눈은 별,이마는 상아,머리는 금발 등으로 흔히 표현된다. 그러나 던의 연가는 이러한 낡은 전통을 거부하고 형식과 내용면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던이 쓴 연가의 혁신성은 무엇보다언어사용에 있다.던은 대화체로 된 극적 독백의 형식을 통해 서정시의 언어에 신선함을 안겨 줬다.또한 그의 연가는 명령이나 의문으로 시작되는 게 많다. 던은 청년기에서 40세경에 이르기까지 20여년의 세월을 두고 연가를 썼다.이 책에는 ‘시성(諡聖)’‘삼중 바보’‘튀크넘 정원’‘장기’등 55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한신문화사 1만원.
  • 진품 문화재 해외전시(쟁점)

    우리의 진품 문화재들이 6월7일부터 열리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실 개관기념전에 선보이기 위해 22·23일 나들이에 나섰다.한번 훼손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문화재의 특성.따라서 관련 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그러나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는 것이 주최측인 국립박물관의 입장.任孝宰 서울대 교수와 鄭良謨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의견을 들어본다. ◎찬/鄭良謀 국립중앙박물관장/문화유산은 나라의 자긍심 선진국들 상호 교류전 빈번/해외 문화투자 뒷날 빛 발휘 문화우수성 적극 홍보해야 문화재는 문화의 근간으로 한 나라의 정통성이며 자긍심이다.그 나라의 정신이 살아 숨쉬며 그 나라의 개성과 특성이 규정 지어진다.따라서 우수한 문화유산일수록 그 나라를 지탱해 나가는 위대한 힘의 원천이며 다른 나라사람들에게 새롭고 특별한 자극과 감동을 줄 수가 있다. 선진국들은 벌써 몇백년전부터 수많은 박물관을 설립하고 자국의 문화재는 물론이고 방대한 양의 외국 문화재를 수집·전시하고교육·홍보해왔다.자국문화재를 다른 나라 박물관으로 옮겨 빈번한 전시회를 갖는 것은 이를 통해자국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고자 함이며,외국 문화재를 자국에 전시하는 것은 자국 문화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함이다.루블의 모나리자 그림이 일본에서 전시되었고 일본의 백제관음이 프랑스에서 전시된 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선진 각국에서는 매년 수십 회의 문화재 교류전이 열린다. 일본은 19세기말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골든 게이트 파크에 조그마한 일본의 정통정원을 개설하였다.지난 79년 현지에서 느낀 것은 문화투자야말로 먼훗날 큰 빛을 발휘한다는 점이다.그 조그만 일본 정원에 매일 물밀듯 관람객이 몰리고 미국 도처에 일본 정원이 생기고 일본 무사도를 소재로 한 영화가 번창하고 있었다.일본상품 전시를 선전하기 위한 가면극이 인산인해를 이루는가 하면 개인주택에도 일본정원이 등장하고 일식 스시가 최고의 요리로 대접을 받고 있으며 거리에도 일본상가와 훌륭하게 건설된 일본 문화 선전 빌딩이 줄을 잇고 있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단연 세계 제일의 박물관이다.우리는 미국측과 벌써 20년 전부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한국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심도있게 협의해 왔으며,양측의 진지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오는 6월7일 한국실이 개관하게 된다. 미인선발대회에는 정신과 육체가 모두 아름다운 후보가 나와야하며 납인형을 아무리 이상적인 미인으로 만들어 등장시켰다 해도 사람들의 감흥을 불어일으킬 수 없다.문화재를 전시할 때는 박물관내에서도 모든 스탭이 온갖 정성과 재능을 발휘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하물며 해외전시는 말할 것도 없다.우리 뿐 아니라 상대 나라에서도 우리 못지 않은 정성을 쏟는다.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주의와 점검,포장과 운송 방식에 의해 전시회가 이루어진다.이번 전시회는 절대 안전하게 치루어질 것을 확신하며,온 국민들과 더불어 성공적인 민족문화 과시의 자리가 되기를 기원한다. ◎반/任孝宰 서울대 교수/문화재 출토지 전시때 진가 관리·보존높은 철학 가져야/훼손되면 돌이킬 수 없어 장기간 나들이 재고 바람직 대규모의 우리나라중요문화재가 미국으로 나들이를 떠났다.뉴욕 중심가에 있는 유서깊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오는 6월7일부터 내년 1월까지 한국관 개관기념 전시를 위해서다. 필자는 그 박물관을 여러번 방문 하였고,그때마다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받고 왔었다.아침부터 저녁까지 세계에서 온방문객들이 들끓고 있었지만,그 훌륭한 중국관이나 일본관을 나온 후 한국관이 어디인지 찾다보면 갈 곳을 잃었다.한국유물이 내쪼ㅈ겨나다시피 복도변에 있는 것을 보고는 서글픔이 더해졌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 한국관을 새로이 만들어 세계속에 한국문화를 알릴 기회가 만들어졌으니,여간 경하할 일이 아니다.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야스퍼스가 일본에서 한국계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보고‘인간이 창조한 최대의 걸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이 생각난다. 이번 나들이에는 야스퍼스가 그처럼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목조미륵반가사유상과 쌍둥이라 할 수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83호)과 조선시대 최대의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작품 등을 포함한 국보 9점등모두 121점이 특별대여 형식으로 나선다.엄청난 대규모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아무리 중요한 의미가 있는 행사라 할지라도,이들 모두가 한국인의 얼이 새겨진 진품이라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지난 90년 서울서 개최되었던 옛 소련의 시베리아 맘모스전시회도 이번에 못지 않게 의미가 큰 양국의 행사였지만,전시된 유물의 대부분이 복제품이었다. 금년 1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중국문화대전’에서는 1,200여점의 전시품 중 걸작품으로 소개되었던 것은 모두 복제품으로 무려720여점이 복제품이었다.이번처럼 대규모 진품의 해외전시는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우리도 당연히 중요문화재는 복제품으로 대신했어야 했다. 문화재는 출토지에서 전시되고 이를 찾아가볼 때,그 높은 가치를 이해할수 있게 마련이다.이런 면에서도 우리문화재의 장기간 해외 나들이는 앞으로 다시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다.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길목에 있는 만큼,문화도이에 걸맞는 위치를 찾아야 할 때다.우리문화를 우리 자신이 가꾸고 관리·보존하는 높은 철학을 가질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정치권력의 한 도구로써 우리 문화재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우를 범하는 일은 이제 막아야 하겠다.
  • 고종과 嚴妃(秘錄 南柯夢:13)

    ◎쫓겨났던 嚴 상궁 돌아와 妃되니…/高宗,명성황후 서거후 失意의 나날/문상 온 嚴씨 우연히 재회… “궁에 머물라”/못생긴 얼굴에도 총애… 아들 보니 英親王 명성황후가 비명에 돌아가시기까지 고종은 창덕궁과 경복궁을 번갈아 오가며 살았다.그 뒤 경복궁 서쪽의 영추문을 빠져나와 정동의 아관(러시아 공관)에 피신했다가 바로 담만 넘으면 다시 아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었다. 이처럼 정궁인 경복궁을 두고도 이곳 저곳 별궁을 돌아다녀야 했던 것이 대한제국 황제의 신세였다. ○외아들 純宗에 지극정성 명성황후의 서거는 고종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남기고 간 외아들 순종에게로 모아졌다.그래서 덕수궁 함녕전에서 두 부자가 꼭 붙어서 함께 기거했던 것이다. 그럴 때 엄상궁이 나타났다.일설에 의하면 명성황후에게 쫓겨났던 엄상궁을 고종이 즉각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는 것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종이 부른 것이 아니라 엄상궁이 고종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엄상궁도 장상궁처럼 궁궐에서 쫓겨난 뒤 줄곧 수절하고 있었다. ‘엄상궁(嚴尙宮)은 중전마마가 생존해 계실 때에 죄가 있다고 하여 궁궐에서 쫓겨났었다.그 뒤로는 다시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었다.그런데 밖에서 생활한 두어해 사이에 의식주가 곤란하여 동분서주하면서 생활이 매우 구차하였다.그러던 차에 갑자기 곤궁(명성황후)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그리하여 대궐에 들어가서 문상을 하게 되었는데,그 뒤로는 자주 안상궁(安尙宮)이 거처하는 방에 드나들었다.그러던 어느 날 상감께서 마침 엄상궁을 보시고 물으시기를 ‘네가 엄상궁이 아닌가.근년에 왜 궁궐을 나가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느냐.’ 하시니 대답하기를‘자연히 궁궐밖에서 생활하다 보니 들어오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드디어 교시를 내리어 말씀하시기를 ‘지금부터는 궁궐 안에서 머무르고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시었다.그리고 며칠 후에 불러다가 동쪽에 있는 온돌로 된 지밀(至密) 방안에서 머무르게 하였다.그런 뒤에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으니 곧 지금의 영친왕(英親王)이다.엄상궁이 영친왕을 낳은 뒤에는 귀인(貴人:內命府의 종일품 封爵)에 봉해지고 경선당(慶善堂)에 거처하면서 왕실의 재산을 주관했으니 누가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겠는가’ ○32세 되어 高宗 눈에 들어 엄상궁에게 죄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고종의 사랑을 받아 승은(承恩)하였다는 이야기다.엄상궁은 나이 다섯 살때 궁궐에 애기나인으로 들어와 커서는 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승격한 궁녀였으나,나이가 벌써 32세나 되어 고종의 눈에 들기에는 어려운 과년한 노처녀였다.거기다 장상궁처럼 얼굴이 예쁘지 못했다.예쁘지 못했다기 보다는 못생겼다는 표현이 훨씬 진실에 가까웠다.그런데도 고종은 중전 몰래 엄비를 사랑하여 침소에 불러들여 잠자리를 함께 했던 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서 임금님은 중전의 눈을 피해 상궁과 동침을 하게 되며,상궁은 그렇게 쉽사리 임금님에게 몸을 맡겼는가.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한데 알고 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보통 임금님의 침소는 임금님과 중전만단둘이 자는 것이 아니라,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병풍을 쳐놓고 네 상궁이 각각 병풍 뒤에 누워서 밤을 지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으니 상궁들로서는 방안의 숨가쁜 상황을 일일히 듣고 감상할 수 밖에 없었다.엄상궁같은 지밀상궁은 거의 매일처럼 침소에 들어 숙직하였으니 비록 병풍으로 가려 있었으나 임금님과 한 방에 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그래서 왕은 때때로 상궁같은 나인을 불러들여 시침(侍寢)했는데,이를 승은이라 했다.엄상궁도 승은의 영광을 입은 분이었다. 정환덕이 덕수궁에서 처음 고종을 알현하였을 때 우연히 엄비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그때 일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엄씨 일가 모두 요직 앉아 ‘네 칸 정도 될까 하는 온돌방이었는데 전등빛이 휘황하게 밝았고 비단으로 만든 카텐에서는 향내가 가득했다.조금 있더니 살찐 얼굴에 기름끼가 번질한 한 미인이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머리 위에 무엇이 있던가.푸른 포도잎 같은 것이 달려 있고 등 뒤에는 구슬로 허리를 감은 것 같이 보였다.엷은 구름이 달을 가린 듯 하고 바람이 눈을 날리는 것도 같았다.또 아침해가 안개 속에 떠오르는 듯하고 연꽃이 푸른 파도 위에 뜬 것도 같았다.한마디로 말해서 갑자기 궁안에 선녀가 내려온 것으로 착각했다.바로 그녀가 엄비였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제 밤에 새로 임명받은 시종관 정덕환입니다” “어찌 이곳에 홀로 앉아 있는가”하고 다시 물었다.대답하기를 “상감께서 여기서 기다리라 하시어 앉아 있습니다” 하였다.그러나 엄비는 성난 듯한 얼굴로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 하더래도 여기 지밀(至密)한 곳에 함부러 들어와 앉아 있는가.썩 나가도록 하라”고 하였다.이말을 들고 밖으로 쫓겨 나오니 정신이 아찔하였다.’ 이상이 정환덕이 엄비를 처음 뵙고 쫓겨난 사연이었는데 그 뒤 고종이 정환덕을 불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정환덕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해놓고 잊어버린 것을 볼 때 고종에게 심한 건망증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황상께서 입대하라는 명이 있어 즉시 입시하였는데 황상께서 신에게 위로하여 말씀하시기를 ‘저번에는 갑자기 손이 있어그렇게 되었으니 너무 놀라지 말고 안심하라’ 하셨다.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보니 송구스럽 짝이 없어 불안한 마음 가시지 않았다.왜냐하면 상궁과 시녀가 밤참을 들고 탑전(榻前:임금님앞)에 올릴때 용상 뒤에 모시고 서 있는 분이 바로 엄귀인(嚴貴人)이셨기 때문이다.엄귀인은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을 낳은 분이시다.’ 엄상궁이 다시 궁안에 들어온 뒤 영친왕을 낳았고,그 때문에 엄귀인으로 승격하고 이어 엄비로 재차 승격하였으니 그 영광은 엄비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엄씨 일가 모두에게 돌아가 요직을 맡게 되었으니 장상궁의 경우와는 정반대되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 98 미스코리아 재심사 소동 계기 거센 비판

    ◎“미인대회 없애야” 전국이 시끌/여성 상품화 등 근본적 문제 제기/“국가행사냐” 공중파 생중계 비난 지난달 23일 공중파 방송으로 생중계된 98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컴퓨터처리 오류로 재심사를 하는 소동을 빚자,이를 계기로 미인대회 무용론이 들끓고 있다.미인대회 자체도 문제지만 무슨 국가적 행사라고 번번이 공중파방송에서 이를 생중계하느냐는 비판이 여성계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결과가 잘못됐다는 게 방송 당일에 알려지고 나자 비판의 글들이 컴퓨터통신 화면을 하얗게 뒤덮었다.많은 이들이 공정성을 불신했으며 칫수를 멋대로 정해 놓고 여성 신체를 상품화하는 대회의 본질에 문제를 제기했다. “어차피 명동의 유명 미용실과 끼리끼리 짜고 하는것 아니냐” “얼굴 뜯어고치고 요즘 좋아진 의술에 몸매까지 손보고,나이어린 애들이 나와서 하는 말이 다 각본에 있는 말,그 나이에 뭘 알겠나”“네가 제일 예쁘니까 돈 이만큼 받고 너는 그 다음이니까 요만큼 받고….아름다움이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자본주의 쓰레기같은 소모적 미인대회를 양대 방송에서 해마다 나눠먹는 것 우습다”“‘PD수첩’으로 미인대회 공화국 비판했던 MBC는 중계 그만두고 밝은사회 만드는 방송이나 하라” 등등 비난이 빗발쳤다. 여성단체들은 무엇보다 공영방송이 공중파로 미인대회를 중계하는 것을 문제로 꼽는다.여성단체협의회 권수현 여성정책부장은 “미인대회 하는 건 주최측 자유지만 대중에게 책임있는 공중파 방송에서 여성은 외모가 최고며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고 무의식중에 주입시키며 건강한 여성상을 왜곡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연세대 사회학과 조혜정 교수는 “서구 미인대회는 대기업 판촉책으로 심심한 사람들 볼거리일 뿐이다.우리처럼 국가대표 뽑듯 난리를 벌이지 않는다.국제 타이틀 붙인 대회도 온갖 게 다 있다”고 꼬집었다.미인대회 뽑혀 국위선양 한다는 말의 허구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뻔히 보인다는 얘기다. 90년대 들어 각종 특산물 선전 등을 내걸고 미인대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한국여성민우회 조사에 따르면 96년 지역별로 열리는 미인대회는 100여개에 이른다.조사결과 아연하게도 이런 대회에 지방자치단체들이 비용까지 지원하고 있었다. 미인대회가 사회 공해인 것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취업,대학 입시 현장에까지 연결되기 때문.미인대회 입상이 인기 연예인으로 가는 급행표가 된지는 이미 오래. 얼마전 입시에선 대구 몇몇 전문대학 관광학과에서 미인대회 입상자를 특례입학시켰다.여성계에선 얼마전 철도청이 사원채용 면접을 하면서 여성 응시자에게 반팔,무릎위 스커트 차림으로 일정거리를 걸어 보게 한 것도 미인대회 선발 방법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29일 MBC 정문 앞에서 미인대회 중계 반대 시위를 한 여성단체연합 관계자는 “여연에선 미인대회 방송중계 및 지자체 예산지원 중단 등을 이번 지자체 선거를 비롯,선거의 쟁점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 음료/“여름을 날린다” 뜨거운 판촉전

    ◎“신세대 잡아라” 아이디어 만발 음료 성수기를 맞아 업계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올 음료시장의 특징은 IMF 영향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위축된 소비자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대표적인 예로 25년 동안 코카콜라를 생산·판매해 온 범양식품이 콜라원액을 자체 개발,국산 콜라 ‘815’를 내놓았다.롯데칠성음료는 지난해 7월부터 수입개방된 외국 오렌지주스의 경쟁품목으로 국산과즙을 첨가한 ‘콜드주스’를 판매하고 있다.이외에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신세대 취향에 맞춘 알코올 음료 ‘데킬라’,커피에 소다를 섞은 ‘LOVE 1052’,가벼워진 소비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값싸게 원두커피를 즐길 수 있는 1ℓ 용량의 ‘액상 원두커피’,건강미를 추구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복숭아 농장’,당뇨병 환자들이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건강음료 ‘상비천’ 등 다양한 제품들이 올 여름 음료시장을 달굴 것으로 보인다. ◎범양식품 독립815/콜라 자주선언 “코카여 안녕”/최상급 원재료 들여와 원액 제조/원액받아 생산 25년 방식 종지부/전국 돌며 시음회… 고객 “손색없네” 우리 입맛에 맞는 국산 콜라가 나왔다.범양식품이 최근 내놓은 콜라 독립815가 그것.이름 그대로 25년동안 미국 코카콜라사에서 원액을 받아 국내에서 생산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순수 국산기술로 만들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815는 세계 각지에서 최상급 원재료를 들여와 범양이 직접 원액을 만든 뒤 상품화한 것이다.콜라시장에서 주권을 회복한 셈이라 할 수 있다.국내에서 원액을 제조하기는 범양이 처음이다.기존 업체들은 아직도 원액을 들여와 만든다.이 제품은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맛 시험을 한 결과 외국 콜라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맛과 품질이 뛰어난 것으로 입증됐다. 범양은 815를 지난 4월부터 출시,소비자들로부터 호평받고 있다.이에 고무된 범양은 4월 중순부터 전국에서 815 시음회를 가진 것을 비롯 각종 판촉활동을 강화하고 있다.시판 초기에 기존 콜라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전략이다.현재 국내 콜라시장은 연간 4천5백억원 규모.범양이 시장점유율 25%를 차지하고 있다.범양은 815 출시를 계기로 아성인 대구 경북지역과 대전 충청권지역을 지키며 다른 곳의 공략에 힘쏟고 있다. 범양은 73년 코카콜라측과 맺은 ‘원액도입 후 상품화 판매’라는 계약이 올 2월말로 끝남에 따라 그동안 축적된 자체 기술로 이번에 815를 개발하게 됐다.범양은 코카콜라와의 결별에 따른 영업악화를 막기 위해 815 외에도 다른 음료시장에 뛰어들기로 했다.커피소다 및 사이다류의 신제품 개발을 완료하고 각각 지난 4월 중순과 이달 중순 출시에 들어갔다.몇년 전부터 자매사인 건영식품을 통해 ‘가야’라는 브랜드로 야채 및 과일 건강음료 시장에도 도전장을 내놓고 있다.건강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시판 중인 당근농장 토마토농장 포도농장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일양약품 상비천/“당뇨환자 마음껏 드세요”/시판 7개월만에 30억 매출 기록/설탕·방부제·나트륨·카페인 全無/‘목 마르던’ 당뇨환자에 희소식 당뇨병 환자가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건강음료가 나왔다.일양약품이 시판 7개월만에 30억원의 매출을올릴 정도로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받고 있는 상비천.설탕과 방부제,나트륨,카페인 성분이 들어있지 않아 다이어트와 미용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적합한 기능성 음료다.국내 최초로 뽕잎과 실크단백,둥굴레 추출물을 사용했다.상비천의 주성분인 뽕잎은 혈당 고혈압 콜레스테롤을 낮춰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뽕잎에만 유일하게 혈당강하물질(DNJ)이 있어 당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쉽게 마실 수 있으며 모세혈관 강화물질인 루틴이 있어 동맥경화를 예방해준다. 실크단백은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가 만들어 낸 누에고치를 소화흡수가 용이하도록 가수분해한 것.인체내 생성되지 않는 8종의 필수 아미노산과 18종의 아미노산이 함유돼 있다.인슐린의 분비를 촉진시키고 치매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둥굴레는 칼슘 마그네슘 등 건강증진 성분이 있어 관절보호 등에 좋으며 여성들의 변비에도 효과가 크다.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여성의 얼굴과 몸을 아름답게 한다고 해서 ‘여위’로 불리고 있다. 이처럼 상비천은 이 3가지 성분과 함께 설탕을 전혀 첨가하지 않는 대신 결정과당을 사용했다.이 결정과당은 인슐린 대사를 하지 않고 소장에서 천천히 흡수되어 혈당치를 상승시키지 않으며 충치 예방의 효과도 낸다.음료를 마실 때 청량감을 주고 있는 성분이다. 상비천은 또한 동맥경화의 원인물질인 나트륨과 방부제가 일체 들어있지 않고 다른 차와 달리 카페인 성분이 전혀 없어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음료다.따라서 상비천은 물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음료를 마실 없었던 당뇨환자에겐 희소식이라 할 수 있다.일양약품은 이러한 데 착안,지난해 11월부터 상비천을 출시하고 있다.215㎖들이 한 캔에 소비자값은 1,000원. ◎(주)동서식품 프리마/야자유 주원료 식물성 올리고당·칼슘도 보강/시장점유율 85.1% 야자유를 주 원료로 만든 식물성 커피크림.최근 블랙과 아메리칸 커피를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으나 커피크림은 설탕과 함께 다양한 맛의 커피를 즐기는데 없어서는 안될 ‘약방의 감초’. 크림은 커피의 3가지 특징인 쓴맛 신맛 떫은 맛을 부드럽게 조화시켜 준다.또한 진한 갈색을 연하게 하여 시각적인 부드러움을 더해주며 약산성의 커피를 중화시켜 위장부담도 덜어준다. 최근에는 다양한 커피 맛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크림종류도 다양해져 원조격인 프리마,여기에 우유맛을 첨가한 프리마­엠,지방과 칼로리의 함량을 줄이고 올리고당을 첨가한 프리마 라이트,칼슘성분을 보강한 프리마 플러스,냉커피용으로 찬물에서도 잘녹는 아이스 프리마,액상프리마 등 여러 종류가 있다. 74년부터 동서식품이 판매해 온 ‘프리마’는 여전히 커피크림의 선두자리(시장점유율 85.1%)를 지키고 있다. 가격은 프리마와 프리마­엠이 500g에 각각 1,660원이며 라이트는 2,100원,플러스는 2,200원,액상프리마는 1,610원. ◎범양식품(주) LOVE 1052/거피+소다 독특한 맛 일품/‘1052’는 LOVE 의미 삐삐 암호/은색·검은색 두종류 캔 출시 커피와 소다가 섞인 독특한 맛의 신세대 커플 음료.혼자보다는 둘,익숙함보다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의 특성을 겨냥해 만든 제품이다.커피와 탄산음료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음료를 적절히 배합했다. ‘1052’란 브랜드명은 LOVE를 의미하는데 이는 삐삐,핸드폰,PC통신 인터넷 등으로 이미 숫자와 암호에 친숙한 젊은 층에 공감을 줄 것으로 회사측은 기대하고 있다. ‘커플반지’ ‘커플삐삐’ ‘커플모드’에 이어 커플음료라는 새로운 음료시장을 개척한다는 제품 특성에 맞춰 은색과 검은색 두가지 색깔의 캔으로 판매되고 있다. 가격은 250㎖에 700원이다. ◎건영식품 가야 복숭아농장/복숭아 속살 원료로 가공 ‘새맛’/“미인 만든다” 여성고객 겨냥/부드러운 느낌 뒷맛까지 깔끔 당근·토마토·포도농장에 이어 건영식품이 내놓은 새로운 과즙음료.복숭아 속살을 원료로 만들었으며 건강음료를 즐기는 연령층이 점점 낮아지는 추세에 맞춰 소재와 맛을 젊은 여성에 맞췄다.건강음료보다는 미용음료라는 면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이는 복숭아가 예로부터 미인의 얼굴에 비유되었던 점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제품임을 알 수 있다.복숭아에는 비타민A와 C가 듬뿍 들어 있어 혈액을 맑게 해준다.여성들의 피부색을 화사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스트레스도 완화시켜피로회복에 도움을 준다.과즙 함량을 65%까지 높여 복숭아 특유의 맛과 향이 살아있다.부담없이 마실 수 있으며 느낌도 부드럽고 뒷맛이 깔끔하다.투명한 병에 담아 소비자들이 내용물을 직접 확인하고 구입할 수 있다.180㎖,500㎖ 두 종류가 있으며 가격은 각각 950원,1,700원. ◎롯데칠성음료 델몬트콜드주스/수입 농축액 희석 방식 탈피/국산과즙 알맹이 추가 함량 높여/유통기간 1년서 45일로 줄여 신선한 과일 맛을 살린 음료.현재 시판되고 있는 병주스들이 오렌지 농축액을 수입,희석시켜 만들고 있는 것과 달리 국산과즙을 사용했다.생과즙 함량을 높였다.오렌지 알맹이를 첨가,상큼한 과일 맛을 더욱 잘 음미할 수 있게 했다.유통기간을 1년에서 45일(냉장상태)로 대폭 줄여 과일주스 본래의 신선함을 느낄 수 있게 했다.‘콜드주스’는 지난해 7월부터 수입이 개방된 외국산 오렌지주스의 경쟁상품이다. 유통과정에서 맛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냉장 유통시키는 등 품질 고급화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회사측은 “2천원대의 저가이면서 고품질 주스로 IMF시대에 주머니가 가벼워진 소비자들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며 “첨단 팩용기와 냉장유통시스템으로 맛과 신선함이 뛰어나 월 170만개(약 35억원)씩 소비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판매에 힘입어 지난 3월부터는 소비자 사은대행사를 통해 가계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이익금의 사회환원에도 힘쓰고 있다.1ℓ용량에 오렌지 적포도 사과 3종류가 있으며 가격은 2,200원. ◎대상(주) 로즈버드 액상원두커피/원두서 원액 추출 액상 원두커피/커피크림 없어 원두맛 그대로/얼음 넣어 아이스커피 만들수도 커피원두에서 원액을 추출해 만든 액상 원두커피.얼음을 넣거나 냉장하여 차게 한 뒤 간편하게 커피 맛을 즐길 수 있다. 기존의 캔 커피와 달리 커피크림이 들어있지 않아 원두커피 본래의 맛과 향이 살아있다. 기호에 따라 크림과 설탕을 첨가,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1ℓ용량의 페트병으로 나와 있어 간편하게 얼음과 물을 섞어 원두커피나 아이스커피 등을 즐길 수 있어 경제적이다. 커피메이커없이 집에서도 손쉽게 원두커피향을 음미할 수 있어 편리하다. 가격은 1ℓ에 2,400원. 가당,무가당과 감미로운 향을 즐길 수 있는 헤즐넛 향커피 등 3종류가 판매되고 있다. ◎웅진식품(주) 데킬라/적당한 탄산 기분전환 ‘만점’/멕시코 특산주 과즙 가미 ‘독특’/용기엔 컬트 이미지… 멋 추구 알코올을 첨가한 탄산과즙음료.멕시코의 전통주 ‘데킬라’에 오렌지와 사과과즙을 가미했다.일반 탄산음료보다 과즙 함량을 10∼20%로 더 높였다.진한 과즙에 적당한 탄산,그리고 데킬라의 조화로 갈증해소는 물론 기분 전환에도 도움을 준다.주성분인 ‘데킬라’주는 멕시코의 특산주로 용설란의 일종인 ‘아가베’에서 당분을 추출,발효시킨 뒤 증류해 만든 술.독특한 음주법(손등에 레몬즙을 문지르고 소금을 뿌린 뒤 살짝 핥고 나서 술을 들이키고 다시 레몬즙을 빨아먹는다)을 활용한 것이다.단순함보다는 음료를 마시면서 멋을 추구하는 신세대의 취향에 맞게 용기도 캔 자체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면서 이들이 선호하는 컬트적 이미지를 담았다.오렌지와 사과 2종류가 있으며 가격은 250㎖에 700원씩.
  • 스리랑카 불교유적(세계 문화유산 순례:73·끝)

    ◎그곳에 가면 ‘부처’가 된다/아누라다푸라­부처가 정각이룬 보리수 50m 루완웰리탑 위용/폴론나루와­드러누운 열반상 푸근/시기리야­200m 암벽에 세운 궁전 벽화 미인 살가운 미소 【스리랑카=金鍾冕·金明國 특파원】 인도양 위에 한 점 외로이 떠있는 망고모양의 섬 스리랑카.‘찬란하게 빛나는 섬’이라는 뜻을 지닌 스리랑카의 옛 이름은 실론이다.동북부의 타밀 반군과 14년 넘게 내전을 치르고 있는 나라지만 스리랑카에는 정신적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다.유구한 불교적 전통 때문일까. 스리랑카에는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가 불교를 처음 전전했다.석존이 열반한 직후에 전파된 소승불교였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신할라 왕조의 보호 아래 민중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식민세력인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가 불교를 박해했을 때에도 스리랑카사람들은 미얀마나 타이의 고승을 맞아들이는 등 소승불교의 전통을 굳건히 지켜나갔다.스리랑카는 지금도 소승불교의 성지로 숭앙받고 있다. 스리랑카는 전국이 문화유적지라고 할 만큼 고대 문화가 온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그 유산은 주로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그리고 캔디를 잇는 이른바 문화삼각지대(cultural triangle)와 시기리야에 몰려 있다.아누라다푸라는 기원전 5세기경에 세워진 스리랑카의 첫 수도다.콜롬보에서 북쪽으로 200㎞쯤 떨어진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리수인 ‘스리 마하 보리수’가 있다.전하기로는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쇼카 왕의 딸 상가미타가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가져와 옮겨 심은 것이다.이 보리수는 부처가 정각(正覺)을 이룬 나무로 신성시된다.수령(樹齡)이 2천200년이 넘는 이 보리수는 잎은 무성하지만 줄기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늘었다.보리수를 지나 오른편에는 40개씩의 돌기둥이 40줄로 늘어서 있는 ‘로하 파사다’ 절터가 있어 그 옛날의 영화를 전해 줬다.그 너머로는 높이가 50m에 이르는 루완웰리 대탑이 하늘을 찌를 듯 위용을 드러냈다.이 탑은 338개의 코끼리 조각품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채로웠다. 11세기초 남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타격을 받은 스리랑카는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에서 폴론나루와로 옮겼다.밀림 속의 고대도시 폴론나루와의 유적은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둘러보기 편했다.이 옛 도읍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비자야 바후 1세와 파라크라마 바후 1세 두 왕 시대의 것들이다.폴론나루와에서의 주목거리는 단연 파라크라마 바후 1세 때 세워진 갈비하라 불교사원이었다.이 곳에는 열반상·입상·좌상 등 3기의 불상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길이가 14m나 되는 열반상은 오른팔로 머리를 괴고 왼팔은 몸을 따라 쭉 뻗은 형상이었다.열반상 특유의 좌우 크기가 다른 발 모습도 볼 수 있었다.발 밑에 자잘하게 뻗친 연꽃의 뿌리는 땅을,꽃은 하늘을 향했다.입상의 높이는 7m,좌불상은 5m에 달했다.팔짱을 끼고 있는 입상은 석가의 수제자인 아난 존자라고 한다.하지만 연꽃대좌에 서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석가의 제자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석가라는 설도 있다.좌불상은 진리를 터득한 석존을 나타낸 것이다. 계율을 중시하고 자기 인격완성에 힘을 쏟는 소승불교의 참뜻을 새기며 시기리야로 발길을 돌렸다.시기리야는 5세기 카샤파 왕조때의 수도로 고고학적으로 특히 가치있는 유적지다.폴론나루와에서 시기리야까지는 약 70㎞.자동차로 정글 속을 50분 가량 달리니 곧추선 적갈색의 바위산이 거대한 요새처럼 다가왔다.이 시기리야 록은 예술가이자 정신이상자이기도 했던 카샤파왕이 부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뒤 후환이 두려워 바위 꼭대기에 세웠다는 궁전 터다.암벽의 높이는 200m는 족히 됐다.이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된 것은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시기리야 벽화 때문이다. 벽화를 보려면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를 타고 꼬불꼬불 나 있는 철제 계단을 올라야 했다.그것은 마치 외줄을 타듯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고행이었다.정상에 오르니 앙가슴을 훤히 드러낸 시기리야 벽화 미인이 살가운 미소로 이방객을 맞아 줬다.시기리야 벽화는 왕의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압살라라는 요정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이 ‘시기리야 레이디’는 당초 50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훼손돼 18명만 남아 있다.시기리야 벽화 아래쪽에는 ‘미러 월(mirror wall)’이라 불리는 회랑 벽이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달걀 흰자와 꿀,석회 등을 이겨 칠했다는 ‘거울 벽’은 진주처럼 반짝거렸다.벽에는 역대 왕조의 흥망을 노래한 서사시와 시기리야 벽화의 여인을 칭송하는 시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이 시들은 신할라어로 씌여진 최초의 문학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의 치아사리를 모신 불치사(佛齒寺)로 유명한 고도(古都) 캔디는 신할라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다.살색 벽에 갈색 지붕을 한 불치사는 인공호수인 캔디호를 끼고 있다.이 사원은 4세기에 자이나교의 세력에 쫓긴 남인도의 한 왕녀가 부처의 치아를 머리카락 속에 숨겨 스리랑카로 가지고 왔다는 전설을 안고 있다.그 부처의 치아는 지금도 불치사 본당에 있는 일곱 겹의 황금상자 속에 보관돼 있다.스리랑카 사람들은 이것을 민족의 상징이자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긴다.스리랑카에서는 매년 7∼8월에는 불치 축제가 열린다.화려한 의상을 걸친 코끼리의 등에 부처의 치아를 싣고 시내를 한바퀴 도는 행사다.‘불심(佛心)의 나라’스리랑카에 가면 부처의 얼굴을 닮는다. ◎여행 가이드/콜롬보서 200㎞ 거리… 시기리야는 버스타야 아누라다푸라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유적지의 세 구역으로 나뉜다.유적지는 도시를 흐르는 말와투 강의 서쪽에 주로 있다.유적순례는 유적지구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이수루무니야 사원에서 출발하거나 스리 마하 보리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폴론나루와는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교통은 좀 불편한 편이다.아누라다푸라에서 폴론나루와까지는 하루 여러 차례 버스가 다닌다.시기리야까지는 철도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가야 한다.직행편이 없을 경우에는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사원이 있는 담불라를 거쳐 가야한다.‘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로 불리는 캔디에서는 캔디왕조시대에 궁전연회에서 추었던 춤에 민속무용적 요소를 가미한 캔디안 댄스를 관람할 수 있다.
  • 남산이 북산을 보고 웃네/동서양 역사인물들 삶과 죽음

    삶과 죽음을 사시(四時)의 운행으로 담담하게 풀이한 동양 철학자,‘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이라며 생을 강조한 서양철학자.어느 것이 옳고 어느것이 그른가.중견수필가인 맹란자씨(58)는 “남산이 북산을 보고 그저 방긋이 웃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 그가 최근 펴낸 ‘남산이 북산을 보고 웃네’(세훈출판사)는 동서양 역사인물들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들을 다룬 인문교양서다. 세네카와 네로,광해군과 부의,사약을 독촉한 소크라테스와 송시열,소강절과 서화담,카미유 클로델과 나혜석,두보와 김삿갓,이상과 카프카,클레오 파트라와 명성황후 민비,우미인과 양귀비,사도세자와 소현세자,공초 오상순과 양관선사…. 이책의 특징은 이처럼 동서고금을 망라해 유사한 인물들을 묶어 그들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 지점에서 지은이는 가슴 한 켠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독일시인 릴케의 시구를 한자락 인용한다.“저마다 자신의 죽음을 죽게 하소서”‘빈배에 가득한 달빛’이란 수필집을 내기도 한 그는 현재 강남에서 ‘동양서숙’이라는 글방을 운영하고 있다.
  • 인간을 위한 것/최혜실 KAIST 교수·국문학(굄돌)

    8∼9년전 퍼스널컴퓨터를 사용한 후 각종 명령어들을 외우는 일은 나에게 정말 고역이었다.철자법이 틀리는 것은 고사하고 띄어쓰기,대문자·소문자 사용 등 아주 사소한 것을 틀려도 화면에는 여지없이 ‘Bad command’라는 문구가 떠오르기 마련이었다.상식적으로는 조금 뒤바꿔도 무방할 것 같은 순서들이 컴퓨터가 작동안되는 결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었다.이런 고생을 몇번 하고나니 나도 모르게 컴퓨터 앞에만 가면 주눅이 드는 전형적인 컴맹증후군에 걸리게 되었다.치밀하고 논리정연하여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컴퓨터 앞에서 온갖 사소한 실수들을 거듭하는 인간 최혜실은 정말 한심한 족속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몇해 지속되면서 나는 하나의 의문을 품게 되었다.나는 컴퓨터를 발명하거나 고치는 전문가가 아니다.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사용하기에 편한 도구가 되어야 하며,그렇지 않은 컴퓨터에 잘못이 있는 것이다.인간의 의사소통 체계를 보라.인간은 맞춤법이 틀려도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고 은유적인 표현을 써도 상황맥락에서그 정확한 의미를 인식할 수있다.그럼에도 이 기계는 언어의 다양한 편차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다.내가 컴퓨터에게 느낀 두려움은 열등감이 아니라 인간의 의사소통 체계와 다른 데서 오는 ‘낯섬’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 깡통같은 기계에 분노를 터뜨린 지 몇년 되지 않아서 아이콘 방식의 프로그램이 컴퓨터 시장을 석권했다.적당하게 이곳저곳 열어보고 그때마다 친절하게 나타나는 지침들을 따라가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식,시행착오를 해도 시간이 걸릴 뿐이지 기계작동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상황으로까지는 가지 않는 방식,인간을 배려하는 이 프로그램에 미흡하나마 어떤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 조화 미덕 가르치는 김치케이크(박갑천 칼럼)

    魚叔權의 에 서로 어울리지않는 풍경을 예로 든 대목이 있다.맑은샘에 발을 씻는것,거문고를 태워서 학(鶴)을 삶는것,소나무 사이에서 길잡이가 외치는것,초헌에 말채찍,짚신에 징,거적문에 쇠돌쩌귀…따위.오늘날이라면 안짱다리(밭장다리)의 미니스커트,갓쓰고(도포입고) 오토바이타기…같은 풍경이 끼일수도 있겠다. 김치와 빵하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부터 온다.피자와 빈대떡,커피와 식혜같이.한데 서울의 한 호텔에서 김치와 빵을 섞어만든 김치케이크를 선보였다.프랑스인 주방장이 ‘합격’판정을 내렸다니 코큰 이들 혀끝에도 구뜰했던 모양.호텔측에서는 기네스북 한국협회에 등록을 요청하는 한편 반응을 봐가며 수출도 해볼 요량인 것으로 알려진다. 음식에는 서로 맞는것이 있는가하면 맞지않는 것도 있다.지난날에도 찰떡을 먹으려면서는 동치미국물이 따랐다.동치미국물은 좋은 소화제로 되었던 것이리라.돼지고기에 새우젓이나 메밀국수에 무강즙따위도 그런 관계였다고 할 것이다.물론 상극인 경우도 있다.그 사례를 가정실학의 보감이었던 빙허각이씨(憑虛閣李氏)의 [규합총서]에서 보자.두부를 많이 먹고서 배가 불러 숨이 막힐때 무강즙이나 행인즙 새우젓국은 좋으나 데운술을 마시면 “즉사한다“니 겁이 난다. 거기 쓰여있는 바 어울리지않는 음식의 사례는 많다.몇가지만 더 들어보면 이렇다.“게(蟹)와 감·배·꿀을 함께 먹지말고 조개와 초를 함께 먹지말라.머리털이 생선속에 있는걸 먹으면 죽고 메기와 형개(荊芥)를 함께먹으면 죽는다.소·양·돼지고기를 뽕나무로 삶거나 구워먹으면 뱃속에 벌레가 생긴다” “생·숙지황류는 마늘·파·무를 꺼리고 구기자는 사람젖과 우유를 꺼리며 모든 뿔(角)든 약과 녹용은 소금을 꺼리고 파와 부추는 꿀을 꺼리며…”.그밖에도 상극되는 음식은 많다.김치케이크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느낌으로 서름하다는 것뿐 실제에서는 아주 어울리는 먹을거리인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종족끼리 어울려서 나온 튀기에 미인이나 재사가 많다고 한다.얼핏 이질적인 듯해도 조화로운 동질성이 있다는 뜻이리라.가령 의학만해도 동과 서가 다르지만그 조화로써 치료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철학도 그점이 중요해지는 것이고.그러니 종교 또한 배타적으로 나갈일은 아니다.김치케이크가 그 대목을 가르쳐 주는 양하다.
  • 여성 불임과 유산/丁奎萬 정규만한의원장(전문의 건강칼럼)

    불임증은 결혼후 1년 이상 임신되지 않는 경우로 남녀 각 40%에 원인이 있으며 원인을 모르는 경우도 20%나 된다. 여성불임의 원인은 난관 폐쇄, 배란 장애, 복막 유착, 경관 구조 이상 등이 있다.그밖에 자궁내막의 유착은 주로 인공유산을 시킨 후 자궁의 내막이 손상되어 일어난다.자궁내막염으로 정자의 자궁내 활동 억제,정자의 사망,수정란 착상 억제가 일어나 불임이 되는 경우도 있다. 결혼후 5년이 되었으나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미인형의 부인이 찾아왔다. 병원의 모든 검사로는 정상이었다.부부생활도 극히 정상적이었다.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자위도 해 보았지만 얼마 가지 않았다.임신한 경험이 전혀 없느냐고 물으니 조금 머뭇거리며 비밀을 지켜 달라는 눈빛으로 사실은 처녀 때 임신중절을 딱 한번 했다고 털어 놓았다. 자궁이 냉하고 습담과 어혈이 착상을 방해한다고 판단하여 자궁기능을 강화하며 혈액순환이 원활이 될 수 있는 약제와 습담·어혈을 제거하는 약제를 가미하여 3개월 치료하여 임신에 성공하였다.이런 경우 팔자려니 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많아 참으로 안타깝다. 자연유산 또한 불임 못지 않게 심각하다.그 중에서 습관성 유산은 임신 20주 이전에 연속 세 번 이상 자연유산이 일어나는 경우를 말하는데 유전학적 문제 호르몬의 불균형 해부학적 이상 중 유전학적 문제가 가장 많다. 불임검사에서 모두 정상이거나 양방으로 만족할 만한 효과가 없을 때 한방으로 시도하여 상당수가 완치하고 있다. 너무 일찍 포기하거나 시험관아기부터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02)508­5161.
  • 높은 자리의 언행은 파장이 크다(박갑천 칼럼)

    세상일이란 반드시 바르게만 전해지는건 아니다.선의나 악의가 끼어들면서 사실과는 다르게 알려지는 일들이 적지않다.그래서 ‘콜럼버스와 달걀’ 얘기는 날조라든지 클레오파트라는 절세의 미인이 아니었다는 말들이 ‘증거’를 내세우면서 나오기도 하는 터이다. 옛얘기는 젖혀두자.당장 엊그제 일어난일의 보도에도 오보라는게 있잖던가.어떤건 그말을 했다는 본인이 살아있는데도 사실 여부가 가려지지 않기도 한다.가령 얼마전 보도된 인도네시아 사회복지부장관의 경우는 어떤것일까.그는 무료급식 식당에 들렀을때 식당주인들이 치솟은 수입사료값 따라 닭고기값도 올라서 급식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소연하자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그렇다면 수입사료 안먹고 풀을 먹는 토끼고기를 쓰면 되지않겠는가”.보도는 정확하다해도 본인의 뜻에서는 빗나간건지 모른다. 별뜻없이 더뻑 내뱉은 말이 듣는마음을 아프게 찌를수 있는법.어쨌거나 그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맏딸로서 다음 대권주자로 떠오르고도 있는 처지이니 말을 삼갔어야 하는건데.세론은 그의 말에대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을 일이지”했다는 18세기 망언의 20세기판이라면서 선거워하는 모양이다.그말은 프랑스혁명때 백성들이 굶주린다는 말을 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반응인 것으로 알려져오는 터.하지만 이말은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상관이 없다. 그말은 루소의[참회록](제6권)에 나온다.그가 1740년 리옹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을 때다.그집에 있는 와인을 몽태쳐 마시려했는데 빵이 없으면 못마시는 버릇이었다.그때 루소는 ‘어떤 고귀한 왕비’가 “농민에게 빵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 “그러면 브리오슈(brioche:최고급 과자빵)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대답한 일을 떠올리고 그걸 사다가 와인을 마셨다.거기쓰인 ‘고귀한 왕비’를 후세인들이 미운마음 곁들여 마리 앙투아네트로 안쫑잡았다는 해석들이다.1740년이면 그가 태어나기 15년전이다.우리 초대대통령에게 따라다니는“…그렇다면 사과를 먹을일이지”도 그에 유래한‘악의섞인 뒷말’아니었을까. “언행은 군자의 추기(樞機)”라는말이 [역경](易經:계사상)에 나온다.군자의 중요한 밑바탕은 바르고 기구있는 언행에 있다는 뜻이다.여기서의‘군자’는‘지도자’로 갈음될수도 있다.그리고 높은 자리의 사람일때 이말이 남의나라 얘기일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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