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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공원 식구들의 대모” 사육사 이길웅씨(이사람)

    ◎동물사랑 “외길 26년”/어릴때 창경원 구경뒤 “천직” 결심/병든 고릴라 살려냈을땐 눈물이…/“박봉의 절반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다” 서울대공원 동물사육사 이길웅씨(50). 그는 동물을 돌보고 키우는 일에 생의 반이상을 바쳐온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물정에 어두운 순박한 농군같은 인상이면서도 외길을 걸어온 장인의 풍모가 체취로 느껴진다. 『비록 사육사지만 동물에 관한 한 늘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는 그다.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시암리에서 빈농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가 사육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국민학교 5학년때. 집안형편이 어려워 어릴때부터 임진강에서 잡은 고기를 내다팔아 살림에 보태기도 했던 그는 난생 처음으로 서울 창경원에 소풍을 왔다가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개나 닭,소같은 가축만 보고 자랐던 나로서는 교과서에서 그림으로만 볼수 있었던 호랑이며 원숭이,코끼리를 직접 코앞에서 본 순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어요. 마침 공작우리에서 먹이를 주고 있던 사육사 한분에게 용기를 내나도 창경원에서 일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 사육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조그만 녀석이 뭘 할 수 있다고… 군대나 갔다 오면 취직시켜 줄께』라고 농담으로 약속을 했다. 이 농담을 철석같이 믿고 꿈에 부풀은 소년 이길웅은 정말 10여년뒤 청년이 되어 다시 창경원을 찾아간다. 군에서 제대를 20여일 앞두고 소년시절 취직을 약속했던 「아저씨」를 만나러. 『그 양반(박영달씨·작고)은 이미 반장이 돼있었는데 처음에는 나를 몰라보더군요. 10여년전 얘기를 소상히 하니까 그제서야 나를 알아보고 「지독한 놈」이라면서 윗분에게 데려가 소개시켜 주었어요』 제대하자 마자 그는 편지 한통만 집에 보낸뒤 작업복 한벌과 장화 한켤레를 구해 곧바로 창경원에 들어갔다. 천직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고참만 우리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나같은 졸병에게는 창경원 이곳 저곳을 청소하거나 풀을 뽑는 일만 시켰어도 동물과 가까이 할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어깨너머로 하나 둘씩 배워나갔습니다』 그는 동물들이 잠을 깨는 새벽4시쯤이면 미아리 사글세방에서 출근해 창경원 곳곳을 청소하면서 동물의 습성,특징,심리 등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며 파악해 나갔다. 이같은 버릇은 지금까지 이어져 사육사 36명 가운데 가장 고참인데도 가장 일찍 출근해 동물을 보살핀다. 서럽고 힘겨운 잡일을 한지 3년만인 지난 68년 4월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창경원 동물과장이던 오창영씨(63·서울대공원 연구관)가 꼼꼼하고 동물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진 그에게 로랜드 고릴라의 관리를 맡긴 것. 『생후 6개월된 고릴라 1쌍 가운데 이미 암컷은 죽었고 수컷도 원인모를 병에 걸려 발이 썩어 죽어가고 있었지요. 발을 잘라내는 수술을 한뒤 통증을 못이겨 「고리롱」(그가 붙여준 애칭)이 눈물을 흘렸어요. 나도 같이 따라 울며 병간호를 했어요』 결국 6년6개월20일 동안 함께 먹고 자며 항생제와 영양제를 투여하는 등 지극한 간호를 한 끝에 완전히 되살려 냈다. 그뒤 남들이 꺼리는 호랑이·사자·코끼리 등 맹수들의 사육도 서슴지 않았으며 병이 난 동물은 으레 그의 차지가 돼 동물폐사율을 한자리수로 끌어내리는데 큰 몫을 했다. 『야생동물을 키우고 보살피는 재미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금으로 산 비싼 동물을 멋지게 길러 어린이나 관람객들에게 선보였을 때 느끼는 보람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요』 특히 「고아원숭이」가 생기면 집에 데려가 우유를 먹여서라도 살려내야 직성이 풀린다. 이 때문에 동물원에서는 헌신적이고 자상한 동물의 「어머니」로 대접받지만 집에서는 「0점짜리」 남편 또는 아버지로 낙인찍힌지 오래이다. 『지금까지 내 집은 커녕 전셋집조차 마련하지 못한데다 한달 45만원쯤 되는 봉급의 절반을 동물들에게 쏟아부으니 아내인들 좋아하겠습니까. 또 동물 간호때문에 툭하면 집에 들어오지 않고 여름철이면 휴가를 반납해 함께 놀아줄 시간이 없는 아버지를 아이들이 좋아할리 없지요』 더욱이 그는 지난 80년도 빚보증을 잘못 서줘 남의 빛 2천만원을 갚느라 푼푼이 모았던 돈과 집 전세금을 빼내야 했다. 그러나 턱도 없이 모자라 지금은 이자까지 쳐 빚이 오히려 늘어 2천2백만원이나 됐다. 지난 89년 이같은 사정을 전해들은 모건설회사 사장이 생활에 보태쓰라며 3백만원을 내놓았을 때도 그는 4차례나 사양하다 결국 살림이 어려운 동물사육사 자녀들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내놓았다. 『주위에서 「결코 부정한 돈이 아니니 받아 쓰라」고 충고했지만 내가 받아 쓸 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동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들까봐 장학금으로 내놓았어요. 뚱딴지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동물은 정직하게 대해야 합니다. 사람이 정직해야 동물들도 그 사람을 따르고 말을 듣습니다』 26년 동안의 거칠고 궂으며 험한 사육사생활을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는 그는 끊기가 없는 요즘 세대의 후배들이 다소 못마땅하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놓기도 했다.
  • 「제2­남부순환도로」 만든다/성산대교∼영동대교

    ◎강남 동·서로 연결… 96년 착공 안양천변 서부간선도로와 영동대교간을 잇는 제2 남부순환도로가 개설된다. 서울시는 10일 현재 도시고속도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김포공항∼대치동간의 남수순환도로의 대체노선으로 제2 남부순환도로를 현재 올림픽대로와 남부순환도로 사이의 도심반경 6∼8㎞ 지점에 개설키로 했다. 시는 이를 위해 지난해 1월 국무총리실 지역균형발전 기획단에서 제시한 계획구상을 토대로 지난해말 서울대 공학연구소와 ㈜제일엔지니어링에 용역을 의뢰,타당성을 조사중이며 용역결과가 나오는대로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거쳐 오는 96년부터 공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제2 남부순환도로는 성산대교 부근에서 출발 영동대교로 이어지며 현재 건설중인 북부간선도로 및 동부간선도로와 연계해 환상중심축으로 구축돼 기존 방사선형 도로망에 따른 도심통과 교통량을 외곽으로 우회분산시키게 된다. 시는 도로신설에 따른 재원문제를 감안,가능한한 기존 도로망을 확충하고 나머지구간은 고가차도 또는 지하차도를 신설,연결할 계획이다. 시는 이 도로의 폭을 강남지역 동서간,영동지역·청량리·미아리 등 부도심권,중부고속도로 및 도심진입지점의 2010년 교통량을 기준으로 정하되 입체교차시설을 최대화하고 교통신호체계도 현재의 고정식에서 스쿠트시스템 등 가변식의 최신형으로 도입,논스톱고속도로로 활용토록 할 방침이다.
  • 쓰레기장에 소제기관총/녹슨권총ㆍ실탄 1백여발도/63년도 신문에싸여

    6일 하오3시40분쯤 서울 성북구 월곡1동 90의505 쓰레기적환장에서 환경미화원 조경태씨(44ㆍ성북구 길음3동 1008) 등 2명이 소련제 PPS-43 기관단총 1정과 탄창 1개,실탄 71발 및 45구경 권총실탄 43발을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발견당시 총기와 실탄은 지난 63년 4월18일자 K신문과 같은해 7월2일자 H일보 및 63년 5월 달력에 나뉘어 포장된 상태로 쓰레기 더미에 묻혀 있었다. 경찰은 이날 발견된 총기와 실탄이 심하게 녹슬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6ㆍ25때 참전했던 군인이 기념품으로 보관해오다 버렸거나 또는 발견지점이 6ㆍ25당시 「미아리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이므로 이웃 주민이 주워 갖고 있다가 버렸을 것으로 보고 출처조사에 나섰다. 경찰은 이날 발견된 총기 등이 63년치 신문지 등으로 싸인뒤 다시 풀러진 흔적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누군가가 이 무렵부터 비밀리에 보관해오다 더 이상 보관하기 어려워 최근에 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PPS-43 기관단총은 지난 68년 1월21일 서울까지 침투했던 김신조씨 등 북한무장간첩이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 “술집 불법영업 단속” 정보제공/경찰이 거액 상납 받아

    ◎10대 소녀 윤락행위도 묵인 서울시경은 9일 종암경찰서 율곡파출소 소속 정모경장(45)이 보안과 풍속반원으로 근무할 당시 술집주인으로부터 미리 단속정보를 알려주는 대가로 정기적으로 금품을 상납받아왔다는 진정에 따라 자체조사에 나섰다. 경찰은 이에따라 진정을 낸 성북구 하월곡1동 88의 158 속칭 「미아리 텍사스촌」안에 있는 술집 「주선정」(주인 곽옥근ㆍ41ㆍ여)에게 윤락행위를 해오던 박모양(22ㆍW대 졸업)과 인신매매 추방운동을 펴는 단체인 「민주시민운동연합」(의장 전재혁)의 주장을 토대로 정경장과 박양을 불러 조사를 벌이고 있다. 박양은 『정경장은 단속이 있을 때마다 주인 박씨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 정보를 알려줬으며 정경장이 직접 술집으로 찾아와 이에 대한 대가로 주인 곽씨에게 1백만∼2백만원을 요구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박양은 이밖에도 『이 술집에서 일하는 동안 경찰이 단속을 나왔다가 미성년자를 고용해 영업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이들을 데려갔으나 며칠뒤에 다시 이들이 술집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고밝혔다.
  • 인신매매사범 84명 검거/서울시경,58명 구속

    ◎구인광고로 유인,윤락가 넘겨 서울시경은 24일 인신매매사범 등에 대한 일제단속에 나서 모두 84명을 검거,이 가운데 정남숙씨(31ㆍ여ㆍ성북구 하월곡동) 등 58명을 영리를 위한 약취유인 및 직업안정법ㆍ윤락행위방지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하고 26명은 입건하는 한편 12명을 수배했다. 성북구 미아리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정씨는 지난7월 서울시내 지하철과 전신주 등에 종업원을 구하는 광고를 낸뒤 이를보고 찾아온 정모양(14ㆍ여중 3년) 등 2명을 술집에 가두어 놓고 윤락행위를 시켜 화대의 80%를 갈취하는 등 지난 2년동안 부녀자들로부터 1억여원을 빼앗은 혐의를 받고있다. 또 이문식(39ㆍ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금촌리 395) 강종영(34ㆍ파주군 문산면 섬유리 555) 권병로씨(35ㆍ은평구 불광동 494) 등 3명은 지난 5월8일 시골에서 올라와 청량리의 한 제과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모양(17)을 승용차로 납치,금촌읍으로 데려가 번갈아 폭행한뒤 청량리 사창가의 포주 박영희씨(46)에게 50만원을 받고 팔아넘겼다. 단속결과,유인 및 납치유형별로는 구인광고를 이용한 경우가 30건,직업소개소에서 매매한 경우가 20건,가출인 취직알선미끼 23건,납치 폭행뒤 매매한 것이 14건,차량이용납치 4건,국외송출매매 4건 등으로 모두 96건이며 부녀자수는 1백여명으로 나타났다.
  • 친구 폭행 살해/20대 공원 영장

    서울 종암경찰서는 24일 윤임기씨(26ㆍ공원ㆍ성북구 하월곡2동 43)를 상해치사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윤씨는 23일 0시40분쯤 성북구 하월곡동 18의14 금한준씨(21ㆍ공원)의 자취방에 찾아가 잠을 자던 금씨에게 『직장동료들이 「미아리 텍사스촌」에서 싸우고 있으니 가서 말리자』며 잠을 깨웠으나 금씨가 신경질을 내며 거절하자 금씨를 벽에 밀어 머리를 부딪히게 하고 주먹과 발 등으로 때려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소매치기서 손 떼라” 충고에 선배 흉기로 살해

    3일 상오3시30분쯤 서울 성동구 용답동 5의3 용답천 둑방에서 조성권씨(30ㆍ중구 회현동 130의1)가 「재건대」후배 홍삼흠씨(25) 등 20대청년 6명으로부터 흉기에 찔려 이웃 한양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조씨의 애인 오모양(25)에 따르면 이날 상오1시쯤 조씨와 홍씨가 성동구 용답동 집으로 찾아와 얘기를 나누던중 조씨가 홍씨에게 『소매치기에서 손을 떼고 떳떳하게 살라』고 충고하자 홍씨가 근처 여관에 있던 후배 5명을 불러내 조씨를 각목으로 마구 때리고 흉기로 온몸을 찔렀다는 것이다. 경찰은 홍씨 등이 미아리일대를 무대로 소매치기와 폭력을 일삼는 범죄조직임을 밝혀내고 이들의 행방을 찾고 있다.
  • 남로당총책 박갑동씨의 「체험적 6ㆍ25론」

    ◎“공산주의로 잘 산다는건 꿈” 뒤늦게 자각/휴전 임박해서 박헌영과 함께 연금생활/후퇴길에 평양보고 “거지공화국” 실망 6ㆍ25 동란당시 38선 이남지역 남로당 지하총책이던 박갑동씨(72)가 27일 한국전쟁기념사업회(회장 이병형)주최로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6ㆍ25 40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6ㆍ25체험담을 발표했다. 박씨의 체험담 요지는 다음과 같다. 50넌 6월 25일은 일요일이어서 나는 남로당 비밀아지트에서 쉬고 있었다. 아지트를 경비하는 사람이 외출후에 돌아와 전쟁이 터져서 피난민들이 미아리고개로 넘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순간 『김일성 이놈이 죽일놈』이라고 말하고 전신에 힘이 모두 빠져나갔다. 28일 새벽에 북한군이 탱크를 몰고 서울시내에 들어왔다. 나는 서대문 교도소에 갇혀있는 동지들을 구하기위해 나서며 비서에게 지하당원은 소공동 조선정판사빌딩에 모이도록 지시했다. 교도소에 갔다가 정판사빌딩에 가보니 비서 혼자 서있으면서 이승엽이 평양에서 전권을 가지고 서울시청에 와 당의 명령을 듣지않는 박갑동을 총살시키겠다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이승엽을 만나러 서울시청에 가서 정태식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이가 매우 화를 내고 있어 주위사람들이 말리고 있으니 잠깐동안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때부터 김일성과 이승엽에게 밉게 보여 지위가 점점 낮아져갔다. 나는 복간된 해방일보 논설위원으로 명맥을 유지해가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북으로 쫓기게 되었다. 유엔군이 북쪽에 가기도 전에 북쪽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인민위원회를 습격하고 약탈하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북쪽은 상당히 추웠는데 대부분의 북한사람들이 얇은 여름옷을 입고 이불도 못덮고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이놈의 나라가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거지공화국이 아니면 간부공화국』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김일성이 5년동안 사회주의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의 실상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평양에 도착해서 소위 인민시장에 가보았다. 국영상점 이외에 협동조합상점과 개인상점도 있었는데 생필품이 부족했다. 고무신점에 가보니 여자고무신이 두 종류 있었는데 하나는 흰색이고 하나는 회색인데 주인이 흰색은 남한제품이라며 품질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포목점에 가보니 옥양목은 짜지 못하는지 조악한 광목밖에 없었다. 국영정육점에 가보니 점원이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과 손으로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개인정육점에 가니 20세가량되는 처녀아이가 쇠고기1㎏을 정확히 한번에 잘라주는 것을 보고 국영상점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개인상점은 매일 매일 무거운 과세를 함으로써 국영상점을 우대했다. 국영상점 점원은 공무원이기때문에 손님에게 친절할 필요도 없고 많이 판다고 월급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니 성의가 전혀없었다. 사회주의 경제는 상품생산과 유통시장이 존재하는 경제가 아니었다. 상품이란 소비자가 소중한 돈을 주고 사고싶은 물품을 사는 상행위가 기본이어야 하는데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욕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저 최소의 생필품을 국가가 배급을 해주는것이 현실이었다. 휴전이 가까워지자 북한은 남로당계 인사를 출당하는 대대적인 숙청을 해 나는 박헌영과 함께 체포되어 56년 3월까지 감금생활을 했다. 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비판을 한뒤 석방되어 북경을 경유,공산권에서 탈출했다. 57년에 북경에 갔다. 중국은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대국주의ㆍ제국주의였다. 조선인민을 자기들이 도와서 미제국주의를 타도했다는 자부심으로 전국이 덮여있었다. 유엔군이 중국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국경을 지키기 위해 출병했다는 것이다. 세계강대국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지구상에는 하루도 전쟁이 그칠날이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약소민족의 서러움과 비애를 느꼈다. 모택동의 소수민족정책이라는 것도 자세히 보면 일본제국주의가 만주국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소련은 명목적이나마 공화국을 수립해주고 연방으로 묶어 통치하지만 중국은 소수민족의 공화국은 금지하고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50년대 후반의 중국 공산주의는 정말로 「독점」「독선」「배신」의 연속이었다. 나는 공산주의가고상한 도덕이며 인도주의라고 믿어왔는데 실제로 공산주의가 실천되는 현장을 보니 정치적으로는 중세기 암흑세계이고 경제적으로는 기술이 낙후하여 자본주의 생산성에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독립을 해서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위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 공산주의 국가 북한과 중국에 가서 앞날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내자신이 부끄러워서 일본에 망명하여 성명을 바꾸고 일개 노동자로 일평생을 살아가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일본에 망명하여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속이고 고무공장 노동자를 몇해 하면서 숨어서 살아왔다. 당시 오키나와는 미군점령하에 있어 일본경찰이 본적을 조회할 수 없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나와있는 것이 정말 부끄럽다. 선조가 남겨주신 유산으로 일본유학까지 해서 당시로서는 조선최고의 인텔리의 한사람이 그 능력을 옳게 발휘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바이다.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곳곳 빙판길… 오늘도 출근길 “북새통”/서울

    ◎공무원등 20만명 동원 제설작업 박차/지하철 증차ㆍ택시 부제 해제/눈 멎어 고속버스ㆍ비행기 정상운행 21년만에 최대 적설량을 기록하며 이틀동안 서울지방에 내렸던 눈은 31일 자정부터 점차 멎었지만 밤사이에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면서 시내 곳곳의 도로가 빙판길로 변해 출근길이 또 한번 큰 혼잡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차량소통을 돕기위해 이날 밤새 남태령고개ㆍ무악재ㆍ봉천동고개ㆍ미아리고개ㆍ용산고개 등 취약지점 1백79곳과 주요 간선도로에 염화칼슘 3만9천5백42부대와 모래를 집중 살포하고 상오7시30분부터 공무원ㆍ주민 등 연인원 20만명과 제설장비 1천6백11대를 동원,대대적으로 잔설 제거작업을 폈다. 서울시는 또 시민들이 지하철역에 몰릴 것에 대비,평소 상오7시30분∼9시까지로 정했던 러시아워시간을 상오10시까지로 1시간 늘려 3분 간격으로 지하철을 배차시키고 시내버스도 2일 상오1시까지 연장운행토록 했으며 개인택시도 도로가 원상회복 될 때까지 부제운행을 해제시켰다. 또한 서울지역의 공무원에 대해서는 수원ㆍ인천ㆍ성남 등 먼거리에서 출근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9시까지 정상출근토록 했다. 31일 아침 엄청난 「출근전쟁」을 겪었던 시민들은 이날 하오에는 서둘러 일찍 귀가,하오10시 이후부터는 시내주요 간선도로에 차량이 끊겨 텅빈상태였으며 지하철역도 한산했다. 또 평소 인천ㆍ부천방면의 승객들로 밤늦게까지 붐볐던 영등포역 주변과 성남등지의 손님이 줄을 잇던 서울 강남구 잠실5동 근처의 「총알택시」들도 손님이 없어 빈택시만 늘어서 있었다. 하오11시가 지나면서부터는 광화문ㆍ종로ㆍ여의도 등 주요 도로에는 승용차의 모습이 거의 눈에 띄지않았고 시내버스와 택시만 간간이 운행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측은 눈길의 감속운행을 감안,이날 하오5시 이후에는 고속버스를 출발시키지 않았었으나 1일 상오5시10분부터 각 방면의 고속버스를 정상적으로 운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여객기의 이착륙이 금지됐던 포항ㆍ예천ㆍ경주ㆍ강릉ㆍ속초 등 6개 비행장도 제설작업을 모두 끝내 정상운항에 들어갔다. 한편 31일 서울을 비롯,강릉ㆍ대구ㆍ인천ㆍ대전ㆍ청주 등 전국 곳곳에서 차량통행이 통제되고 간선도로는 물론 이면도로까지 빙판길로 변해 출퇴근길 시민들이 극심한 교통난을 겪었다. 또 고속버스와 시외버스의 일부 노선운행이 중단되고 항공편이 결항되었으며 열차까지도 지연운행됐었다. 특히 이날 밤부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이틀동안 쌓였던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차량운행이 어려워지자 시민들은 지하철역과 기차역으로 몰려들어 귀성때보다 더 심한 「교통전쟁」을 지렀다.
  • 10대 윤락행위 강요/10대 1억대 뜯어

    서울시경은 15일 성북구 하월곡동 104 속칭 미아리 텍사스촌의 불이성술집주인 김용태씨(41) 부부 등 3명을 미성년자보호법위반 등 혐의로 입건 조사중이다. 김씨 등은 지난해 9월부터 「월수입 50만∼70만원 보장」 「초보자 침식제공」 등의 광고문을 역과 터미널 등지에 붙인뒤 이를 보고 찾아온 성모양(17) 등 10대 8명을 고용,이들에게 술시중을 들게 하고 윤락행위를 시켜 화대중 하루에 90만원씩 지금까지 모두 1억1천7백여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 유흥업소 심야영업 일제 단속/시공무원ㆍ경관등 투입

    ◎강남 3개지역 중점/대부분 자정에 문 닫아 전국 각 시ㆍ도와 경찰은 유흥업소의 심야영업행위 제한에 따른 1주일간의 유예기간이 지남에 따라 8일 저녁부터 9일 상오5시까지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다. 이날 단속에는 각 지역별로 시ㆍ도직원과 경찰관,보건소 직원 등이 합동단속반을 편성해 영업시간위반업소와 함께 청소년유해업소 및 이들 업소에 출입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집중단속을 벌였다. 서울의 경우 8일밤과 9일 새벽사이 시청공무원 9백명과 경찰관 등이 3개 단속반을 편성해 유흥업소가 밀집된 서초구 서초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종로구 관철동지역에 대한 일제단속을 벌였다. 단속반은 이날 하오8시부터 무허가주점과 이용업소,청소년유해주점 및 전자오락실 등을 대상으로 직능단체 및 시민들과 합동지도캠페인을 벌인뒤 9일 0시부터 상오5시까지 집중단속을 벌였다. 이들 3개지역 업소들은 하오11시30분부터 손님들에게 귀가를 종용,0시를 전후해서는 거의 모든 업소들이 셔터를 내리고 영업을 마쳐 단속반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나 중점단속지역이 아닌 영등포ㆍ천호동ㆍ미아리 등지의 일부 업소들은 새벽까지 영업을 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이에따라 이날 서울시내 거리는 단속시작시간을 전후해 각 유흥업소에서 일제히 나온 손님들로 잠시 혼잡했을뿐 대부분의 시민들이 일찍 귀가해 평소보다 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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