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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남 백제궁궐터 초석 50여개 유실”

    ◎사학자 모임 「맥이민족회」,현장조사결과 밝혀/표지판도 없이 방치… 계속 훼손/당국에 “원형보존 대책·수사” 촉구 한강변 초기백제의 유적들이 마구 훼손돼 정부차원에서 이들 유적에 대한 보존및 체계적 연구가 시급한 것으로 대두되고 있다.경기도 하남시 덕풍천변 교산동토성에 있는 백제 궁궐터는 그 대표적인 곳으로 최근 초석 50여개가 유실당하고 주변의 궁지 원형이 크게 훼손돼 관련학자들이 관계당국에 신속한 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해 4월 발견돼 손보기박사등 사학계 중진들로부터 그동안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백제의 초기도읍지인 하남위례성터로 고증받은 이 지역은 백제 초기역사 연구에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해줄 귀중한 유적으로 간주돼 왔다.그러나 발견된지 1년이 넘도록 지표조사는 물론 보호구역 표지조차도 설치돼있지 않은채 방치돼오다 이같은 변을 당했다. 재야사학자들의 연구모임인 맥이민족회(회장 김용규)는 29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밝히고 하남시 당국에 경위설명과 초석 회수및 원형복구를 요청했다.또문화재당국에 대해서도 이 지역에 대한 빠른 지표조사 실시를 촉구했다. 이날 맥이민족회의 김성호문화국장은 『가로·세로 50m되는 장방형의 숲속에 크기 70×80㎝의 판판하고 반듯한 초석들이 2∼3m 간격으로 50여개가 놓여져 있는 것이 지난주까지 확인되었으나 1주일새 사라졌다』고 말하고 『누군가가 중장비를 동원하여 무게가 1t이 넘는 큰 초석들을 계획적으로 가져간 것이 분명하다』면서 현장사진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는 또 『하남시청측은 그 지역의 나무를 베겠다는 신청이 있어 그 허가만 내주었을뿐 초석에 대해서는 아는바 없다고 발뺌하고 있다』고 당국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난했다. 한강변의 백제유적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향토사학자 한종섭씨(50)에 의해 발견된 이 지역은 팔당 건너편에 있는 검단산의 동명묘­교산동토성­춘궁리 궁안유적­백제절터­백제미륵마애불등 일련의 백제유적들이 동서방향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태양숭배의 백제건국사상을 뒷받침해주는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바 있다. 맥이민족회는 지난해 10월3일 개천절을 기해 백제 초대왕으로부터 21대 개로왕에 이르는 21대 백제왕들의 원과 한을 해원시키는 「동명대제」를 하남시와 함께 주관하고 자체적으로 학술지표조사를 실시하는등 이 지역의 백제문화 복원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 장준하선생/죽음의 비밀 캔다/SBS 「그것이…」서 2회 방송

    ◎75년 포천 약사계곡서 의문사/가족·정치인 등 증언토대 구성 독립투사이자 70년대 반유신독재의 상징이었던 고 장준하선생의 죽음의 비밀이 SBS­TV 미스터리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2회(14일,28일 하오9시55분)에 걸쳐 다뤄진다. 젊은 시절 광복군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제와 싸웠고 60년대에는 월간잡지 「사상계」를 발간해 독재정권에 맞섰던 장준하선생.그러나 그는 지난 75년8월 경기도 포천 약사계곡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다.당시 항간에는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숱한 의혹과 소문이 난무했음에도 당국은 「단순실족사」라는 공식발표만 남긴채 서둘러 수사를 종결했으며 그후 장준하라는 이름은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것이 알고싶다」제작팀은 이번 「장준하,그 의문의 죽음」에서 그동안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던 가족,정치인,검찰,의사등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사건을 재구성한다는 계획이다.특히 이 사건을 최초로 기사화한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 장봉진 기자와 민주화운동을함께 벌였던 백기완씨등이 출연해 당시의 정황을 설명한다. 또한 사건 현장인 약사봉에서 당시의 현장을 그대로 재현,실족장소와 상처및 사건발생 시간에 얽힌 의문등 미공개 내용들도 밝힐 예정이다. 한편 제2부에서는 이 사건이 발생하게된 원인을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또 싱가포르에 살고있는 장준하의 장남과의 인터뷰를 시도하고 박정희와의 숙명적인 관계등에 관해 집중 조명한다.
  • 야곱의 사다리(새 영화)

    ◎월남전 용사통해 매몰된 개인의 삶 그려 인간을 둘러싼 사회의 인식 불가능한 불안과 공포의 세계를 현대적 감각의 스릴러물로 구현한 작품. 끔찍한 악몽과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베트남 참전용사가 그 병적 원인이 참전당시 부대의 음모에 있음을 알고 진실을 캐내기까지의 과정을 미스터리적 사건속에 그렸다.특히 이 작품은 단순한 사건식 나열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죽음,베트남전의 악령,성서의 은유,르네상스이후 계승돼온 악마주의 화풍등을 총체적으로 담아 상업성과 예술성이 어우러진 토털시네마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속에서 매몰돼버린 개인의 삶과 일그러진 사회상황을 음울하게 구성한 영화로 팀 로빈스와 브루스 조엘 루빈이 주연했다.연출은 애드리안 라인이 맡았다.
  • 트윈 픽스/미모 여고생 살인 다룬 미스테리물(볼만한 비디오)

    트윈 픽스(TWIN PEAKS) 미의 여왕이었던 미모의 여고생 살해사건을 다룬 사이코 미스터리물. 명장 데이비드 린치감독의 전율적이고 악마주의적인 영상처리와 함께 현미경으로 외과수술을 하듯 여고생의 살인범에 접근하는 서스펜스와 미스터리의 조화가 매우 뛰어난 걸작이다. 지난 91년 미ABC­TV에서 방영된 이후 영국 프랑스 일본등 세계각국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던 화제작이기도 하다. 91년 골든글로브상 수상,에미상 14개부문 노미네이트,영국 영화아카데미가 수여하는 ASCAP상 8개부문 수상등 격찬을 받은 작품으로 칼 멕라클란,셰릴 리,레이 와이즈등이 출연했다. 총15편 30부작(1,500분물).(주)현대비디오영상제작공사가 제작했다.
  • 폭파 주모자·목적 “오리무중”/「뉴욕무역센터사건」의 미스터리

    ◎현장서 단서될만한 유류품 발견못해/테러가능성 높으나 범행단체 아리송 세계의 심장이라 자부하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대형 폭발사건이 터진지 사흘이 지났으나 이 사건이 누구의 소행이고 목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진게 아무것도 없어 미스터리가 되고 있다. 미국연방수사국(FBI)과 뉴욕경찰은 지난달 28일 하오 이 사건이 시중에서 어렵지않게 구할수 있는 다이너마이트에 의한 폭발사고였다는 사실만 확인했을뿐 다른 수사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고 밝혔다. 사고가 난 세계무역센터는 잘 알려진대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1백10층짜리 쌍둥이 빌딩으로 여기에서는 자그만치 5만5천명이 일을 하고 있는데다 옥상전망대를 오르내리는 관광객만도 하루 수만명을 헤아리는 세계최대의 복합건물.건물의 크기만이 아니라 미국의 증권거래소를 비롯한 세계의 주요 금융기관이 다 몰려 있는 세계금융의 중심지다.우리나라만도 대우 럭키등 7개 증권사와 대한투자신탁 럭키화재등 9개 금융회사가 입주해 있고 인원도 54명에 이르고 있다. 이런 거대한 건물에,그것도 사람왕래가 가장 많은 점심시간에 이런 사고가 날수 있다면 미국에는 안전한 곳이 없다고 볼수 있다.지난 1월 수도 워싱턴DC 교외의 CIA본부 정문에서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2명사망 3명중상)의 뒤끝이라 수사당국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이 사건의 수사에 진전이 없는 까닭은 우선 사건현장에서 단서가 될만한 유류품을 발견하지 못한데 있다.알루미늄 포장트럭에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들어가 폭발시킨 것으로 추정될뿐 폭발위력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단서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건의 규모로 보아 폭탄테러 일 가능성이 가장 큰데 테러의 주모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점도 미스터리다.테러란 목적이 분명하기때문에 일을 성공시킨 다음 누가 왜 했다는 것을 선전하게 마련인데 이번 사건의 경우 아직 나서는 주체가 없다.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28일까지 38건의 전화가 수사기관등에 걸려왔으나 단서가 될만한 것은 없었다』고 밝혔다.그 가운데 하나가 「세르비아 해방전선」을 자처한 것이었다.이 전화는 미국이 보스니아 지역에구호품공수를 시작한 이후여서 수사요원들을 긴장시켰으나 곧 신빙성이 약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미국의 구호품 공수가 보스니아 회교도들만을 위한것이 아닐뿐아니라 미국안에 있는 세르비아계 단체들도 즉각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또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부당하게 해고됐다고 생각하는 실직자등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진 사람의 보복행위로 원래 의도보다 사건이 너무 커져버린 경우이다.똑같은 폭발물이라도 지하에서는 지상보다 최고 10배까지 폭발위력이 커진다는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이 사건은 지하2층에서 일어났다. 러시아 프랑스등지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각종 테러들과의 연관성도 현재로선 찾기가 어렵다는게 수사당국의 설명이다. 5명이 죽고 2명이 실종됐으며 1천명 이상의 부상자를 낸 이 사건은 인명피해의 규모도 규모려니와 세계무역센터에서 백주에 일어났다는 상징성 때문에 미국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고 있는것 같다.미국에 안전한 곳이 과연 있는가 하는 불안감이 미칠 파장이 걱정인 것이다. 경제에 미칠 영향에도 적지아니 신경을 쓰고있다.쿠오모 지사는 즉각 『이번 사건으로 우리 모두가 폭력앞에 노출돼 있다는 불안감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뉴욕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치안에 불안을 느껴 세계의 기업들이 뉴욕을 빠져나가게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정치가다운 기민성이라 할 수 있다.
  • 영 전통춤 모리스댄스 복원

    ◎15세기 풍요기원 의식… 소멸 백년만에 재현 유럽의 섬나라 영국에서는 요즘 약 1세기 전에 거의 자취를 감춘뒤 관광포스터에서나 찾아볼수 있었던 모리스 댄스라는 전통춤의 복원운동이 활발히 일고있다. 꽃과 리본으로 장식된 화려한 중절모,깨끗한 와이셔츠에 십자반도를 두르고 다리에는 스타킹 위에 방울을 주렁주렁 매단 일단의 신사들이 야외풍경을 배경으로 펼치는 경쾌한 율동.아코디언,바이올린,콘서티나(아코디언과 비슷한 악기의 일종)가 어우러져 내는 포크음악에 맞춰 서로 빠르게 교차하면서 발뒤꿈치를 두드리기도 하고 나무막대기를 맞닥뜨리기도 하며 이따금씩 손수건을 꺼내 머리위로 흔들기도 한다.마치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리스 댄스 춤꾼들의 모습이 클레이게이트,헤딩튼,애더베리,셔본 등의 작은 마을들에서 자주 목격되고 있다. 모리스 댄스는 그 기록이 1458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깊은 뿌리를 갖고있지만 시대상황이 변하고 춤의 유래에 관한 해석이 달라짐에 따라 혹독한 수난을 당하다가 끝내 종적을 감췄던 이 나라비운의 전통춤이다. 이 춤의 유래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초기에는 영국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풍요를 기원하던 전통의식에서 파생된 고유의 춤으로 이해됐다.그 결과 이 춤의 장려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헨리7세 등 국왕들이었다.이들은 댄서들에게 재정보조를 해주고 왕궁에서 공연을 갖도록 배려했으며 상류층들의 후원을 적극 독려했다.이에 힘입어 모리스 댄스는 쉽게 대중화되어갔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댄서들은 시련을 맞기 시작했다.성직자들은 왕궁을 누비는 호화스런 차림의 이 춤에 대해 탐탁지 않게 여겼다.그리고 이에 맞물려 춤의 유래에 관한 해석도 명칭(Morris)에서 나타나듯 아프리카 북서부의 무어인들(Moorish)의 전통에서 파생된 외래춤이라는 쪽으로 바뀌었다.당시 댄서들은 얼굴을 검게 분장했는데 이는 모리스 댄스가 무어인의 춤이라는 해석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17세기 청교도혁명을 계기로 모리스 댄스는 마침내 불법화되고 댄서들은 음주,신성모독,춤의 난잡성 등을 이유로 재판까지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그 이후로는 음성적으로 명맥만 유지되다 그나마 세기말에 들면서 거의 사라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모리스 댄스가 부활의 기회를 갖게된 것은 작고한 음악사가인 세실 샤프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그는 1899년 이 춤을 목격하고는 복원을 결심,어린시절 이 춤을 추었거나 본적이 있는 80∼90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증언과 자료를 수집했으며 이를 토대로 나중 포크댄스협회를 창설했다.요즘 이곳저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모리스 댄스는 이 협회의 고증과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모리스 댄스는 아직은 다양한 직업과 연령층으로 구성된 소규모 마을사람들이 아마추어수준에서 재현해내는 동호인활동차원에 머물고 있다.그러나 일반적으로 남성춤으로 인식돼온 이 춤이 여성들에게도 급속히 확산되고있고 최근에는 국내뿐 아니라 홍콩,캐나다에서도 모리스 댄스 클럽이 결성되는 등 사라질뻔한 한때의 위기를 딛고 귀중한 전통 문화유산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 21세기 한국의 문을 여는 “이어령과의 대화:10

    ◎단추와 옷고름/괴춤의 여유로 세계를 감싼다/재고 또 재는 합리뒤에 오는것/한국적 가변성·포용성이 새 문명 활로/산업사회의 양복은 긴장의 병리를 유발/한복의 융통성은 「푸는 사회」의 건강처방/「법적죄임」속의 메마른 인간관계/서구의 마약·에이즈·홈레스 유발/바지·저고리 품 닮은 신축적 사고/미래사회 기본정신으로 삼아야 □황규호문화부장=한복은 몸을 싸는 옷이요,양복은 몸을 넣는 옷이라는 지난번의 말씀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었습니다.오늘은 보자기 문화에 뒤이어 양복과 한복의 비교문화론을 듣고 싶습니다.그리고 그 비교를 통해서 한국문화의 전망과 그 가능성도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이어령전문화부장관=양복을 보면 근대 산업문명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산업화가 합리적인 수치에서 생겨났듯이 양복도 재단사가 인간의 몸을 정확하게 재는 데서부터 태어나게 되지요.인체는 아주 복잡하지 않습니까.그것을 일일이 자눈으로 재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몸에 꽉 맞추는 기술­기계로 찍어내는 공산품하고 매우 유사하지 않습니까. ○여우사냥복서 유래 □우리가 오늘날 입고 있는 양복과 근대 산업문명이 시작된 것과 어떻습니까.그 연대가 비슷한지요. ■연대만이 아니지요.산업혁명을 낳은 영국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입고 있는 그 양복의 고향이지요.즉 남자들의 양복 원형은 영국 지방귀족들이 여우 사냥을 할때 입던 옷이라고 해요.활동적이고 간편하고 기능적인 그 모드가 산업사회의 특성에 맞아 떨어지게 된 것이지요.산업혁명이 보편적인 세계시스템을 구축한 것처럼 양복 역시 이제는 거의 세계인의 의상으로 표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양복의 생명은 그 재단이고 그 재단기술은 인체를 정확하게 재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셨는데 산업사회의 합리주의는 바로 이 재는 문화가 아니겠습니까.그런데 한복은…. ■맞아요.한복은 정확하게 치수를 재지 않아도 되는 의상이지요.만약 옛날 조선조시대의 우리 할아버지네들이 허리를 재고 또 재고 그러고도 모자라 가봉까지 하면서 허리통을 1∼2㎜ 따져가며 핀을 꽂는 양복점 재단사들을 보면 분명 미련한놈들이라고 한숨을 지었을 것입니다.그리고 이렇게 말하셨겠지요.『야 이놈들아 어디를 재는거냐.사람 배라는 것은 숨을 들여 쉴때 다르고 밥을 먹을 때 다른 것인데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을 그렇게 재서 어쩌자는 거냐』.(웃음)그리고 한복의 괴춤의 자랑할 것입니다.한복의 바지는 배를 재지 않고도 입을수 있도록 아예 허리통보다 5㎝가량 넉넉하게 말라 놓은 것이지요.배가 나올때는 풀어 입고 들어갈때는 조여 입으면 그만입니다.이 융통성이 바로 전번에 말한 한국인의 융통성이요 가변성입니다. □서양옷처럼 일일이 치수를 따지지 않아도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 된 것이 한복의 특성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사실 한복은 앞뒤도 없지 않습니까.(웃음)웬만하면 몸집이 달라도 누구나 입을 수 있는 포용성을 지녔지요.이 너그러움이 몸을 싸고 인생을 싸고 세계를 쌉니다.까다롭게 따지는 옷이 아니라 그윽히 품어주는 옷이지요.임어당은 언젠가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를 그같은 시각에서 비교한 적이 있었지요.서양사람(일본사람도 여기에 속합니다마는)들은 굴을 뚫을 때에미리 정확하게 계산해 놓고 양쪽에서 파들어 온다는 것이지요.그래서 한치의 에누리도 없이 도중에서 쌍방의 굴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는 문명이라는 겁니다.그러나 중국사람들은 양쪽에서 적당히 파들어 온다는 거지요.그러다가 굴이 서로 만나면 재수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굴이 두개 생기니 더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웃음) 이런 문명을 가지고는 물론 달나라에 갈 수는 없지요.그러나 정신병원에는 가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 산업문명은 양복처럼 치수가 맞을때에는 좋으나 조금만 틀려도 거북하기 짝이 없지요.신사복을 입을 때마다 품이 째기도 하고 허리가 조여 후크를 풀어야 만 되는 경우도 많지요.산업사회라는 것도 꼭 그렇게 인간을 숨쉴수 없게 조일 때가 많아요. ■바지만이 아닙니다.양복과 한복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단추와 옷고름입니다.나는 어째서 세상옷들이,중국옷도 마찬가지입니다.모두 단추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유독 한복만은 여자옷이나 남자옷이나 옷고름을 사용하였는가궁금하게 여겼지요.결국 이것도 치수를 초월한 융통성과 포용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금세 그 수수께끼가 풀립니다.단추는 그 구멍과 정확하게 대응되어야 합니다.단추와 구멍은 한치의 에누리도 용서되지 않지요.위치가 고정되어 있어서 그 간격을 조일수도 풀수도 없습니다.그러나 옷고름은 그렇지 않아요.품이 크면 바짝 조여 맬수 있고 반대로 품이 째면 느슨하게 풀어 맬 수가 있습니다.바지통처럼 여분이 있지요. □옷고름의 길이도 여분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흥부네 집 가난 묘사에도 있듯이 옛날 사람들은 기워 입을 헝겊조차 없어서 고생을 하였지요.그런시절이었는데도 어째서 옷고름을 그렇게 길게 만들었는지 미스터리중의 하나입니다.서양 리본을 보십시오.매고 난 끈은 짤막하게 자르지 않습니까.그런데 한복의 옷고름은 바람에 나부낄 정도이지요.옷감이 귀하면서도 왜 리본처럼 짤막하게 끊지 않았는가.그것이 한국인의 마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시골에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감을 다 따지 않고 하나 둘 남겨 두지요.까치도 먹으라고말입니다. □시골에서는 그것을 까치밥이라고 부르지요. ■옷고름이나 까치밥이나 그것은 다 궁색한 가운데도 여분을 만들어 내는 한국특유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 여분의 사상속에서 정도 생기고 포용력이나 융통성 그리고 멋이 생겨난 것이지요.좀더 복잡한 말로 하면 「무용의 용」이라는 겁니다.이것이 바로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기능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정보적 가치와 결합될 수가 있습니다. ○도둑이 소송 내서야 □산업문명이 양복처럼 디자인된 것이라면 오늘날 이 옷이 인간의 품에 맞는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처음에는 잘 맞았지요.그런데 1970년대 오일 쇼크나 월남전이 끝나는 무렵만 되어도 점차 허리가 거북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옷이 되고 맙니다.몸이 달라진 것이지요.한치 두치 따져야 살아갈 수 있는 산업문명은 결국 미국사회처럼 70만이 넘는 변호사를 배출하게 된 것입니다.일인당 비율로 일본보다 17배가 넘는 수이지요.치수를 따지지 않고서도 입을 수 있는 바지처럼 법없어도 사는 것이 한국인이 그리는 이상사회였습니다.정철도 가사를 통해서 『강원도 백성들아 송사를 하지말라』고 소리 높이 외쳤지요.옷에 치수를 따지지 않는 것처럼 한국사람들은 소송은 물론 웬만한 경우에는 따지는 것을 금기시합니다.그래서 누가 따질 때 『지금 나한테 따지자는 거야』라고 하면 상대방은 대체로 좀 수그러들면서 『내가 꼭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라고 변명을 합니다.(웃음) 따지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한국문화풍토때문이지요. 그러나 미국사회는 따지기를 좋아하는 로고스중심주의이며 법 만능사회입니다.법없이는 못사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지요.미국의 희극영화에는 거지끼리 싸우다가 마지막에는 나의 고문 변호사를 통해 고소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전문 변호사를 두지 않고서는 거지짓도 못하는 것이 미국사회라는 풍자지요.현실적으로도 미국에서는 정말 믿기지 않는 소송사건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도둑이 도둑질하려고 학교 실험실에 들어가려 했다가 지붕에 난 창유리를 잘못 밟아 떨어져 척추를 다칩니다.반신불수가 된 이 도둑은 그 학교를걸어 소송을 제기합니다.지붕으로 낸 창문을 지붕색과 똑같이 칠해 놓았기 때문에 창인줄 모르고 밟게 되었다는 겁니다.그러니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한 건물주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지요.(웃음) 그런데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도둑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어 결국 합의로 위자료를 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웃음)그 뿐만이 아닙니다.심지어 교사가 성적을 나쁘게 주어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소송을 제기한 학생도 있습니다.(웃음) □복용자로부터 소송이 걸려 올까봐 제약회사가 약품을 개발해 놓고도 판매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수라고 들었는데요…. ■의료분쟁이 아주 심하지요.걸핏하면 환자로부터 소송이 걸려오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의사가 되려면 인술보다 법에 밝은 법술에 능해야 되지요.그러나 소송왕국이 된 미국의 진정한 불행은 법의 고삐에 의해서만 조종되는 메마른 인간 관계속에 있다고 하겠지요.그러한 사회에서는 스트레스가 쌓이게 마련이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정신질환에 걸리게 됩니다.「사이코」가 일반적인 사회현상이되어 버립니다.한편 사이코에 걸리지 않으려면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약물에 의한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미국은 대통령이 선전포고를 하게되는 마약왕국이 되어버립니다.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미국에는 현재 홈레스(우리말로 하면 집없는 거지)가 전 인구의 1%로 2백50만이고 코카인같은 마약중독자가 또 1%라고 합니다.여기에 또 그만한 에이즈가 있습니다.이것은 미국의 사회를 좀먹는 삼각형으로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지요.홈레스의 대부분은 약물중독의 결과에서 비롯되고 에이즈 환자의 대부분은 약물중독과 상관성이 있습니다.클린턴은 미국경제의 재생을 걸고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지만 그 최대의 난관은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재정적자입니다.그런데 바로 홈레스 에이즈 마약의 세가지 사회현상이 재정적자의 삭감을 불가능하게 하는 난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지요. □서구 산업사회의 궁극에는 그 세가지 나락의 문이 열려 있다는 말씀이시군요.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문화의 전철을 밟게 되면 우리의 모습으로 될 수도 있다는 경고구요. ■그렇지요.우리는 그동안 경제 발전의 목표나 정치적 이상을 모두 미국을 모델로하여 한길로 달려 왔지요.그런데 아무래도 우리가 따라간 그 길이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미국의 반수 이상은 신문을 읽지 않아 정치에도 세계문명의 전환에도 무관심하고 책을 한권도 구입하지 않은 가정이 6할이나 된다고 하니(92년 통계)미국내에서 새로운 미래의 길을 찾기란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자신의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양복을 벗어던지고 한복을 입으라는 복고주의가 아니라 급변하는 세계에 맞는 새로운 의상을 디자인하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21세기의 성패 달려 □그 문명의 디자인을 하는데 한복의 옷고름 바지의 포용력을 기본정신으로 해야 된다는 말씀이지요. ■구체적으로 「긴장사회」를 「푸는사회」로 만들어갈때 개인이고 사회고 건강해진다는 겁니다.그렇지 않으면 마약 에이즈 홈레스가 바로 우리의 현실 인류문명의 병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비정상적인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이 세가지 좀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는 막아야 합니다.여기에 21세기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아직은 에이즈도 마약도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홈레스의 사회문제도 세계에서 우리나라 처럼 작은 나라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 말은 이 3대 좀의 온상이 되는 긴장문화가 덜하기 때문입니다.풀었다 조였다 할 수있는 바지와 저고리품처럼 신축성과 포용성이 우리 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까닭이라고 봅니다.일본만 해도 경제적 번영을하고 있습니다마는 정신질환이라는 면에서는 우리보다 심각하지요.어느날 갑자기 가출을 해버리는 중년 샐러리 맨,10대의 사망률 가운데 반수를 차지하는 자살자,변태성 잔악 살인자….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건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겉으로만 보던 미국사회 산업사회가 도달하는 궁극의 풍경을 이렇게 근접촬영을해보니 정말 불안과 공포가 생기는 군요.말끝마다 『미국에서는…』이라고 선진국모방에만 급급했던 것이 엊그제인데….느낌이 새로워지는군요.자 그러면 우리도 옷고름 자락을 남겨두고 다음에 다시 말씀듣기로 하지요.
  • 이씨자살 5가지 미스터리

    ◎①우진전기에 빚보증 자청… 대신 갚기도/②희성철강선 50억 무단대출도 모른척/③CD자금 대신통해 주식투자 가능성/④죽기직전 인천투금 빚상환 의리주목/⑤롯데쇼핑 자금사용처도 앞뒤 안맞아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이희도씨 자살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나 좀처럼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의문점만 늘고 있다. 오히려 검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씨의 껄끄러운 돈관계들이 속속 노출돼 사건규명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여러 의문점 가운데 최근 새롭게 관심을 끄는 점은 이씨와 우진전기(사장 김영철)·희성철강(사장 안희철)과의 석연치않은 관계이다. 우진전기는 인천투자금융으로부터 39억원의 돈을 빌렸는데 숨진 이씨는 빚보증을 자청했는가 하면 죽기전 자신의 집과 부동산을 담보로 39억원을 대신 갚아준 것으로 밝혀졌다. 거액의 돈을 빌리는데 자신의 재산을 담보로 해가며 보증을 자청했다는 자체가 바로 우진전기와의 「특수관계」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씨는 우진전기 주식9만주(액면가 5천6백원)도 소지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졌다. 희성철강의 경우도 자본금이 겨우 18억원밖에 안되는 중소기업인데도 이씨에게 백지어음 50억원짜리를 선뜻 건네주었으며 이씨가 자살전 안희철사장 명의로 당좌대출 50억원을 일으켰는데도 아직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다. 1백억원의 채권에 대해 어떤 말못할 사연이 있으며 그것은 곧 이씨의 자살동기와도 무관치 않으리란 추측이다. 이씨와 대신증권과의 관계 역시 의문 투성이다. 검찰수사결과 이씨는 주식호황이던 88년부터 수백억원대의 주식거래를 해왔던 사실을 미뤄 볼때 이씨가 90년부터 매각한 CD 9천6백억원이 모두 대신으로 갔으며 거액주식 투자도 대신을 통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이는 89년이후 주식값이 크게 하락하면서 큰 손실을 봤을 이씨가 거액의 CD 매각자금을 유용,이같은 손실을 메웠을 것이란 추론과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와함께 이씨로부터 CD 7백30억원어치를 사면서 이자가 높은 콜자금을 끌어들였다는 인천투금의 경우에도 실제 돈의 주인이 배후에 있다는 설이 강력히 꼬리를 물고 있으며,이씨는 자살직전까지 1백억원의 CD를 갚는 「의리」를 보여줘 주목되고 있다. 롯데쇼핑측이 상업은행으로부터 보증어음 매입방식으로 대출받은 3백억원도 이씨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롯데는 이 돈을 기업이 빌린 다른 고금리자금상환에 썼다고 밝혔으나 은행감독원 자금추적에서는 납품업체에 결제자금으로 쓴 것이 확인돼 앞뒤가 맞지 않아 의혹을 사고 있다. 이씨가 숨진뒤 상업은행이 롯데가 CD보관증을 근거로 제시한 1백억원의 지급요청을 거절한 것도 이씨와 롯데사이에 긴밀한 거래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방송계,여상 다큐멘터리작가 맹활약

    ◎김옥영… 시인출신,KBS서 활동/박명성… MBC 「인간시대」 7년째/송지나… 드라마·어린이프로도 써/대부분 스크립터로 출발 성공한 베테랑/기획∼편집까지 제작과정 함께 관여 방송계에 여성다큐멘터리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sbs의 미스터리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싶다」를 집필하는 송지나,MBC의 「인간시대」를 7년이상 써온 박명성,올해 한국방송대상수상작인 KBS의 「자본주의 1백년­한국의 선택」을 쓴 김옥영씨등.다큐멘터리작가로서 정상에 서있는 이들이 모두 여성이다. 다큐멘터리작가는 대본만 써서 넘기면 일이 끝나는 드라마작가와는 달리 프로그램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시작해 취재·대본집필·내레이터를 그림과 짜맞추는 편집에 이르기까지 제작의 거의 전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문장력이나 구성력만큼이나 체력·취재력·PD와 호흡맞추기·방송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 분야에서 일하는 작가들이 거의가 여성이라는 점은 매우 이색적이다. 다큐멘터리작가는 방송사의 전속작가로 인정받기까지 긴 기간을 부정기적인 일거리에만 매달려야 하는게 통례.따라서 많은 숫자가 도중에 탈락하며 특히 남자의 경우 끝까지 남아나기가 더 어려운게 현실이다. 그러나 송지나,박명성,김옥영씨는 각 방송사의 전속작가로 성공,10년이상씩 방송대본을 집필해오고있다. 이들은 「추적60분」 「11시에 만납시다」 「인간시대」 「사랑방중계」 「이산가족찾기」등 국내의 기억할만한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자신의 손을 거쳐갔다고 할만큼 이 분야에 내린 뿌리가 단단하다. 박명성씨(50)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76년 MBC코미디작가공채를 통해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았다.KBS의 「신팔도강산」 「사랑방중계」 MBC의 「한강의 4계」 「지구촌의 한국인」 「사할린통신」 등을 집필해 왔으며 현재 맡고있는 「인간시대」는 3분의2이상이 그녀의 작품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섬세한 묘사가 특징인 그는 휴먼다큐멘터리에 능하다는 평을 듣고있다. 시인 오규원씨와 부부지간인 김옥영씨(40)는 방송일에 뛰어들기 전만 해도 월간문학추천을 받아 등단한 시인이었다.그가 방송일을 하게 된 것은 82년 우연히 MBC의 「문학기행」을 집필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부터이다.이를 계기로 개인의 체험과 감수성에 주로 의지하는 문학대신 사회적 메시지전달이 우선시되는 방송으로 자리를 옮겨왔다고 한다. 「연변기행」 「판소리기행」 「진도씻김굿」 「광주는 말한다」 「도시의 새」등 장기제작물을 많이 써온 그녀는 역사·학술·정치등 다소 무거운 주제들을 잘 소화해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지난해 「여명의 눈동자」의 극본을 써 널리 알려진 송지나씨(32)는 다큐멘터리 이외에도 드라마·어린이프로등 다방면에서 좋은 원고를 생산해내는 팔방미인형 방송작가.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두고 보조작가를 따로 둘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방송3사/자회사 프로덕션 경쟁시대 예고

    ◎sbs,KBS·MBC에 이어 계열사 설립… 새 도약 준비/제작파트 연말까지 60명선으로 보강/취약부문 어린이프로 집중개발 계획/프로그램 해외판매망·방연권 확보도 추진 국내 방송계가 바야흐로 본격 자회사 경쟁시대를 맞고 있다.이는 KBS제작단,MBC프로덕션에 이어 서울방송(sbs)도 자체 계열사인(주)「sbs프로덕션」(사장 신영균)을 설립 기본골격을 갖추기 시작해 본격화됐다. 지난 5월 법인설립 등기를 마치고 정식 출범한 「sbs프로덕션」은 1백% sbs출자의 주식회사(자본금 20억원).매체 다변화시대에 대비,프로그램의 안정적 공급과 내부경영 합리화를 목표로 설립됐다. TV프로그램의 제작·배포·판매는 물론 기타 방송관련 수익사업을 펼칠 계획이다.이 프로덕션은 기능별 문화형태가 아닌 「대프로덕션시스템」을 도입,일관제작을 시도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현재는 전문PD를 포함,총48명(임원제외)의 인원을 확보한 이 프로덕션은 연말까지 60명선으로 확대,제작파트를 대폭 보강할 예정이다.본사와 별도의 독립채산제로 운영될 이번 자회사의설립으로 s­TV는 보도기능에 보다 중점을 둘수 있게 됐다.이에따라 오락·다큐멘터리등의 프로그램은 상당부분 외주제작하는 방식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TV방송프로그램의 제작과 관련 「sbs프로덕션」의 김동성전무는 『s­TV의 취약부문인 어린이프로그램을 집중 개발할 계획이며 토요일 하오 시간대(12∼5)도 대폭 강화할 생각』이라고 밝혔다.그리고 『1년에 한번쯤 테마기획을 통해 대형다큐멘터리물을 제작하겠다』는 포부를 보였다. 「스타와 만나요­서태지와 아이들·최진실편」프로를 이미 제작 방영한 바있는 프로덕션측은 내년 신년특집으로 내보낼 환경보존다큐멘터리 「지구를 지키는 사람들」(가제)제작에 전 스태프를 동원,심혈을 기울이고 있다.50분물 5부작으로 구성될 이 다큐멘터리는 미국·호주등지서 해외 로케될 예정인데 알찬 내용으로 이미지를 높이겠다는 각오다. 올해를 「안정기반 구축」의 해로 삼은 이 프로덕션은 1차로 ▲제작환경조성 및 내부팀웍 구축 ▲프로그램판매망 개설 ▲해외방영권 확보·비디오판매 정착등을 당면과제로 설정,94년까지 자립기반을 마련키로했다.프로덕션측은 지난달 출판사 등록도 마쳐 s­TV의 미스터리 다큐 「그것이 알고 싶다」시사진단 「핵심」등의 출판을 준비중이며 음반업에도 참여,인기드라마의 주제곡등을 뮤직비디오 형태로 제작,판매전략을 수립한다.또한 장기적으로 영화업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TV프로그램과 홈비디오를 연계한 영화작품도 제작키로했다. 특히 「sbs프로덕션」은 해외판매 기능에 역점,국제합작선을 적극 모색중이며 「sbs 아메리카」(LA소재)·「sbs USA」(뉴욕소재)등 2개의 미주본사 현지법인의 다목적활용 방안도 강구중이다.한편 「sbs 프로덕션」은 내년 12월께 강서구 등촌동에 완공예정인 sbs신사옥(공개홀포함 2천여평)에 입주한다.
  • 내전상처 아무는 현장 르포(캄보디아 통신)

    ◎킬링필드에 움트는 「화평의 새싹」/“「루주」집권 암흑기 극복” 프놈펜에 활기/유엔 깃발아래 「앙코르」 영화재현 꿈꿔 「킬링 필드」캄보디아에 평화의 새싹이 움트고 있다.유엔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는 민주국가건설작업으로 13년간의 내전에 찢긴 생채기가 하나 둘씩 아물어 가고 있는 것이다.서울신문은 유엔선거감시단 일원으로 선발돼 지난 19일 현지에 파견된 김주환씨(27)를 통신원으로 위촉,새삶을 일궈가고 있는 캄보디아인들의 생생한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하기로 했다.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앙코르와트사원이 있는 나라.그보다는 영화 「킬링필드」로 더 알려진 캄보디아에 진정한 평화는 올 것인가. 환락과 풍요의 도시 방콕에서 프놈펜까지의 비행시간은 한시간 남짓.19일 하오 1시 방콕항공을 떠난 낡은 소형비행기가 태국국경을 넘자 내려다 보이는 캄보디아 풍경은 짙은 녹음이 우거진 평화로운 농촌풍경 그대로였다.그땅이 지난 70년대말 불과 4년동안 8백만 인구중 2백만이 죽는 엄청난 동족살륙극을 치른 전쟁터이며그후에도 혼돈과 소요가 계속되고 있는 피의 땅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시골정거장처럼 썰렁한 프놈펜공항은 민간여객기는 눈에 띄지 않았고 하얀 유엔마크를 단 군용기들이 줄지어 있었다.그 너머 격납고에는 소련제 미그기들이 꼬리만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트랩을 내려오자 공항검사대라고는 책상 하나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을뿐이었다.그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주위에서 서성거리던 중년부인 하나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깡마른 소녀의 사진 한장을 내밀었다.「매춘」을 알선하는 뚜쟁이였다. 공항 보세구역에까지 잡상인(?)들이 드나들 정도로 부패와 무질서의 도가 극에 달한듯했다. 나이지리아 출신 UNTAC(유엔캄보디아과도행정기구)소속 사복경찰의 안내를 받아 프놈펜정부가 자랑하는 포첸통 하이웨이를 따라 시내로 향했다.얼마쯤 가다 안내인이 길 왼편으로 프놈펜대학 옆 3층정도의 건물이 여러채 모여있는 폐허를 가리켰다. 그 건물들은 과거 크메르루주 집권당시 이른바 「국민개조」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됐던 곳이라는 설명이었다.대부분의 건물들이 부서져 있고 간판등 많은 자취들이 잡초더미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얼핏보기에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캄보디아인들은 도대체 왜 동족간에 엄청난 살륙전을 치러야 했을까.우리나라의 6·25전쟁으로 인한 동족살상을 외국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듯이 폴포트 정권의 대량학살 이유 역시 외국인에게는 미스터리가 아닐수 없었다. 프놈펜에서 당시의 체험자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폴포트정권 당시 4년동안 수용소생활을 했던 킴 헹 찬씨(36·호텔지배인)는 악몽같던 그때를 생생하게 회상했다. 1975년4월17일 크메르 루주는 프놈펜을 점령하자 국가를 재건한다는 미명하에 기존관습과 질서의 파괴에 나서 3백만명의 프놈펜시민을 대부분 지방수용소로 강제이주시켰다.처음에는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곧 식량증산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당시 20세이던 킴씨역시 태국국경 근처의 한 수용소에서 하루15시간씩 일주일 내내 휴일도 없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멀건 옥수수죽 두그릇으로 하루를연명해야 했으며 의료품은 전혀없어 병이 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또 그들이 내세운 어설픈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반발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처형됐다.킴씨는 침묵과 복종으로 일관,살아나긴 했으나 가족 13명중 9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같은 엄청난 암흑기를 겪은 이들은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안정한 생활이지만 유엔의 존재에서 커다란 희망을 느끼고 있다.유엔평화유지군(PKF)의 존재에 대해 킴씨는 『이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실험인 만큼 공정한 선거를 통해 평화를 확립시키는 계기가 돼야 할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앙코르제국의 영화가 언젠가 다시 올것을 믿는다』며 과거 찬란한 민족유산에의 강한 집착도 나타냈다. 지난 20년 가까이 국제적으로 폐쇄되다시피했던 프놈펜은 이제 국제도시화하고 있다.아직 외국인중 상당수가 일본인이긴 하지만 유엔깃발아래 세계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가히 인종박람회를 방불케 하고 있다.오랜 내전에 고통당한 대부분의 캄보디아인들이 이번에는 진정한 평화가 오려나하는 기대를 이들 외국인들에게 걸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캄보디아인들의 실정을 무시한 외국인들의 호사스런 생활이 이같은 기대를 반감을 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최근 이곳 번화가인 아차르 민 가로에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 양식 레스토랑의 한끼식사값은 대개 3달러에서 20달러.이곳 공무원들의 한달 봉급에 해당하는 20달러짜리 「스끼야끼」를 거침없이 먹어치우는 외국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캄보디아인들의 시선이 곱지않기 때문이다.
  • 남침에서 「합의서」 채택까지… 그 교훈과 통일 전망 대담

    ◎현실 무시한 감상적 통일론 경계할때/평양,체제유지 하려 대화채널 이용/상호사찰수용등 「합의서」 이행 급선무/남북신뢰 구축의 지름길은 북의 적화야욕 포기/마찰작은 문화­경제교류 힘써 북의 변화 유도해야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며 미래는 다가올 현재」라는 말이 있다.역사는 항상 연속선상에서 진행된다는 말인 것같다.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42년이 흘렀다.최근의 남북관계진전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통일에의 꿈을 부풀게 하고 있다.하지만 핵사찰문제에서 알수 있듯이 남북관계는 현실을 무시한채 성급한 결론을 유도하기 힘든 난제가 아닐 수 없다.국군사의 산 증인 채명신 전주월한국군사령관과 북한문제전문가 유석렬외교안보연구원교수의 대담을 통해 「6·25에서 남북합의서 채택」까지의 역사적 교훈과 통일의 전망등을 들어 본다. ▷채명신◁ ▲육본 작전참모부장 ▲주월한국군 총사령관 ▲주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 ▷유석열◁ ▲미 미주리주립대 정치학박사 ▲미 북 아이오와대 조교수▲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유석렬외교안보연구원교수=올해로 6·25전쟁 42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6·25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을 최근의 남북관계와 연결시켜 조망해보는 것이 올바른 남북관계를 펼쳐나가고 이해할 수 있는 기틀이 된다고 봅니다. 6·25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것이지만 어찌보면 남한이 너무 무방비상태였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군사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어서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채명신 전주월한국군사령관=저는 6·25가 발발하기 전에 북한에 거주하다 47년에 월남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해방직후 북한사정은 잘 알고 있지요.좌경화된 일부 세력은 6·25가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주장하는데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6·25는 소련군부가 북한 공산군을 육성,치밀한 계획아래 준비한 끝에 일으킨 것입니다.시초단계에서는 소련군이 주도했고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진후 남침계획에 참여했다고 보여집니다.46년 2월 본인이 진남포근처 보통학교에서교편을 잡고 있을때 공산당간부훈련기관인 평양학원설립식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그 설립식에서 축사를 한 소련군 사령관과 북한주재대사가 「내년에는 여기에 탱크·공군기가 참여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지요.이것은 6·25를 스탈린이 주도했고 김일성이 그 꼭두각시 노릇을 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유교수=말씀 중에 북침얘기가 나왔는데 요즘은 많이 들어갔지만 한때 일부 좌경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많이 주장됐었죠. 분명한 것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당한 것이나 전쟁 발발당시 전군의 3분의 1만이 근무중이었던 점만을 봐도 북침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으로 생각되는데 채선생님께서 좀더 설득력있게 설명해주시죠. ○수차례 예비도발 ▲채전사령관=소련과 김일성은 6·25 남침을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저는 장교임관 후 48년 송악산전투 등 인민군과 치열한 정기전을 여러차례 치렀는데 우리쪽 전투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예비도발이었어요.또 2천5백명에서 3천명에 달하는 게릴라부대를 태백산 등지에 남파시켜 후방을 괴롭혔는데 이것도 우리의 군전투능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게다가 50년 6월25일은 일요일이었으며 3분의 1 이상의 병력이 외출을 나간 상태였지요.농촌출신 군인들은 농번기휴가를 내보냈었습니다.그것도 새벽 4시의 기습남침이었으니 첫날부터 우리의 군전력이 궤멸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요.이때 두가지 미스터리가 아직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첫째는 군비상경계가 6·25전쟁발발 하루전에 해제된 이유와 둘째는 그해 6월10일 전후 대대적 군인사가 단행돼 6·25당시에는 자기 부대순시도 채 못한 전방 연대장·사단장이 많았었다는 점이지요. ○두가지 미스터리 ▲유교수=이제 최근의 남북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90년대 들어 남북한 관계가 어쨌든 호전된 양상을 보여 7차에 걸친 고위급회담이 열렸습니다. 3차회담까지는 기본관계합의서를 먼저 체결하자는 남측과 불가침선언을 먼저 해야한다는 북측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4차회담에 이르러서 남북 쌍방은 단일안건을 채택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5차회담에서 화해불가침교류협력이라는 단일안건을 채택,처음으로 합의를 도출했습니다. 7차회담에서는 북측이 놀랄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와 평양에서 모종의 특명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남북대화에 적극성을 띠게 된 것은 대충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먼저 체제의 위협을 느낀 것 같습니다.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을 막기 위해 제도적 장치로 합의서를 만들자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죠. 또 미국 일본과의 관계개선 및 수교문제가 있습니다.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침체와 국제적인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미·일과의 관계개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김정일에게 권력을 승계하기 위한 사전조정작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북한은 남북합의서 채택을 「역사적 사변」으로 선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도 공개적으로 크게 만족을 표시했습니다. 이와 함께 합의서채택이 김정일의 주도로 이루어진 업적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죠. 또다른 측면에서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축제분위기 속에서 맞자는 뜻도 포함돼 있습니다. 축제분위기를 만드는데는 남북합의서가 최상의 선물이고 이를 이용,김일성의 생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부각시키자는 것이죠. 이밖에 남한 주민들의 대북 경계심을 이완시켜 친북세력을 조성하려는 숨은 뜻도 보입니다. 북한은 남한사회를 불안하고 불투명한 사회로 규정하고 대남혁명의 기대를 결코 버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올해 대통령선거와 총선등 2차례의 큰 선거를 치르고 경제가 침체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국민과 정부간의 불신을 조장하고 혼란을 일으켜 보자는 거죠. ▲채전사령관=이북 공산주의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북한측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릴수도 있습니다.하지만 그들이 통일을 외치고 있는 것은 미·일의 경제적 지원을 바라는 절박한 필요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진심으로 평화구축을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다.7·4공동성명에 서명하면서 땅굴을 팠다든지 얼마전 3인조 무장간첩침투사건등 그들이 진정으로 평화를 바라지않는 예는 많습니다.KAL기 폭파범인 김현희씨가 엄연히 서울에 살고 있는데도 아직 우리측 조작이라고 우기고 있지 않습니까.그들은 거짓말도 공산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유교수=현재 남북관계에서는 핵문제의 해결이 선결과제로 등장했습니다. 6·25전쟁으로 얻은 교훈 하나가 북한을 실뢰할 수 없다는 것인데 북한의 핵개발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임시사찰 결과를 검토해보면 영변에 위치한 의문의 건물은 핵재처리시설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남북간의 비핵화공동선언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입니다. 북한은 IAEA의 사찰만으로 핵의혹을 해소하려 하지만 우리로서는 상호사찰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핵문제가 빨리 해결되지 않으면 정치군사·교류협력분과위원회가 제대로 활동할 수 없게됩니다. 북한이 진실로 남북간에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원한다면 상호사찰에 응해 핵의혹을 깨끗이 풀어야 합니다. ▲채 전사령관=유교수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의심스러운 곳은 어디든지 개방되어야 합니다.우리가 이제까지 얼마나 북한에 속았습니까.국제적 압력을 총동원,핵문제 만큼은 털끝만한 의심도 남겨서는 안됩니다.작은 땅덩어리,높은 인구밀도의 상황에서 핵무기를 쓰려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북한은 또 핵운반수단을 완벽하게 개발해놓았습니다.핵폭탄만 만들면 일본 일부까지 목표물이 됩니다.따라서 사찰대상에는 핵운반수단과 핵폭탄 못지않은 피해를 줄수 있는 화학무기까지 넣어야 된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유교수=이러한 상황인식 아래 앞으로의 통일정책 방향과 추진과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남북이 불신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통일정책은 쉬운 것부터,상호마찰이 적은 것부터 해결해나가자는 것입니다. 정치·군사문제부터 우선적으로 해결하자는 북한의 주장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지 않습니까. 남북이 먹고 먹히는 통일이 아니고 한민족이 함께 사는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점진적인 노력을 통해 남북의 합의 사항을 성실히 수행해 나간다면 통일은 반드시 이끌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채전사령관=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추구에는 위험이 많습니다.북한이 도저히 들어줄수 없는 주장을 할때는 받아들이지 않는 원칙론적 자세가 필요합니다.실천가능한 교류문제는 덮어둔채 정치·군사문제부터 해결하자는 것은 억지입니다.특히 남북한이 당장 몇십만명을 감군하자는 주장같은 것은 합의가 무척 어려운 난제인데 이런 주장을 전제로 내세운 대화는 무의미합니다.그것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하거나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과거 감정을 들추어내어 앞으로의 대화분위기를 깨서도 안되지요.말장난으로 시간을 끌때는 단호조치를 취해야겠지만 대화의 문은 항상 열어놓아야 합니다.이번 여름 남북이산가족 상호방문도 인원이 너무 적어 답답하긴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남북왕래를 해서 서로를 알겠다는 끈기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공존노력 중요해 ▲유교수=그러한 바탕에서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전망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남북간에는 핵통제공동위를 포함 모두 4개의분과위원회가 설치됐는데 남북합의서에 따른 부속합의서의 채택이 당면과제가 될 것입니다. 정치·군사분과위원회는 국가보안법 폐지 미군철수등을 주장하는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교류분과위는 북한이 경제교류를 원하고 있어 낙관되지만 결국 핵문제의 해결이 선행돼야만 본격적인 교류가 성사되겠죠. 통일의 시기를 말하기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김일성은 최근 한 연설에서 『95년을 통일의 해로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물론 완벽한 통일이 아니고 연방제 등 공존적인 의미죠. 우리도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69%의 국민이 10년 안에 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천년까지 통일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결정적인 기회가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해야겠죠. ▲채 전사령관=통일의 기본개념에 있어 우리와 북한이 다릅니다.북한은 공존·공영에 바탕한 평화통일이라기보다는 아직도 적화통일이 우선입니다.국제적 압력이 너무 거세니까 할 수 없이 시늉만 내는 것이지 속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그러니까 큰 줄거리는 합의해놓고 세부실천과정에서 계속 트집을 잡아 남북관계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 아닙니까.저들이 95년 통일을 얘기하고 있는 것도 그때가서는 적화 통일준비가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아래 나온 발언일 가능성도 있지요.핵무기개발뿐 아니라 김일성나이도 생각할때 그때쯤을 적화통일의 호기로 여길 수 있습니다.특히 북한은 남쪽의 혼란을 기대하는 눈치입니다.최근 주체사상·인공기 등이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겁니다.자기들은 무력강화를 늦추지 않으면서 남쪽의 변화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지요.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실각하는 북한내부변란이 없는한 통일에 대한 북한의 자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봅니다.일본도 통일한국등장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에 나설 수도 있어 통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독일의 경우도 엄청난 통일비용을 치르지 않았습니까.우리도 공산당의 실체를 직시하면서 초연한 자세로 통일의 기회가 성숙될때까지 실력을 쌓아야겠습니다. ○국민합의에 최선 ▲유교수=42년이 지난 뒤에도 6·25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북한의 행태로 볼 때 적대감과 불신이 없을 수 없지만 우선 점진적인 신뢰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 독일이나 예멘에서와 같이 금방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감상적인 생각은 한반도의 상황여건을 도외시한 것입니다. 대내적으로는 정치의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북은 우리사회가 어지러울 때마다 갖가지 제안을 내 혼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국민의 합의와 노력을 통해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북한이 동경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그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 외언내언

    「예두아르트 암부로시에비치 셰바르드나제」.1928년 1월 25일생의 63세.스탈린의 고향이자 라틴성향이 강한 그루지야공화국출신.소도시 마마티에서 평범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역사를 전공했으며 20세에 공산당에 입당했다.50년대말 콤소몰(공산청년동맹)에서 활동하다 65년 그루지야공화국 내무장관이 되고 72년이후 13년간 그루지야공산당제1서기.◆진작부터 그는 개혁주의자였다.제1서기시절 이미 공장들의 독립의사결정과 가족단위농업장려등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실시,고르바초프를 앞질렀다.부정부패관리척결도 단호해 수백명을 투옥하고 총살형에 처한 경우도 있다.콤소몰시절 알게된 고르바초프는 그의 이런 개혁과 청결의지에 반했다고 한다.◆고르비 서기장취임 4개월만에 외교문외한의 그가 외무장관에 발탁된 동기다.이후 5년간 그는 백발의 우아하고 상냥한 용모에 솔직하고 파격적인 자세로 소련외교를 「악의 제국」에서 「바람직한 상대」이미지로 바꾸는데 성공,고르바초프의 기대에 1백20% 보답을 했다.◆「신사고외교의 대목수」니 「전천후 협상가」또는 「고르비 분신」등의 소리가 자자하던 그가 갑작스런 사임의 폭탄선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 작년 11월20일의 일.「독재가 부활하고 있다」며 떠난 그의 사임이유는 아직도 미스터리의 신비에 싸여있는데 꼭 11개월만인 20일 갑자기 그는 다시 그자리로 돌아왔다.8월의 3일천하쿠데타 직후만해도 「고르비밑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던 그의 복귀이유 또한 이해하기 힘든 궁금지사.◆배고프고 긴 불안의 겨울을 맞고 있는 소련이다.경제는 파탄이고 연방은 소멸상태이며 공화국들만 남아있다.쿠데타우려도 다시 나오고.외무부가 축소약화된 연방「대외관계부」장관으로 돌아온 그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생각일까.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 그리고 옐친까지가 하나가 되면 희망이 없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1

    ◎한국부문/북한병력,남침 6일전 38선 집결/“개전 임박” CIA보고 극동 사서 무시/6·25 터지자 백악관·의회·군 “책임 논쟁”/휴일 미 보병학교서 야구중계 보다 “전쟁발발” 뉴스 들어 한국에서의 「미군」은 누구인가­.주한미8군참모장을 역임한 존 싱글로브장군(69)이 펴낸 회고록 「위험한 임무」(HazardousDuty)는 한국전쟁발발 및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77년 두번째 한국근무중 당시 지미 카터 미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다 소환되어 강제퇴역 당하는등 소신을 굽힐줄 모르는 강직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 싱글로브장군은 이 회고록에서 6·25는 미 CIA보고에 대한 미국정부의 판단착오 때문에 발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서울신문은 이 회고록을 긴급입수하여 「미군」으로서 체험하고 느낀 주한미군의 한반도에서의 역할과 책임,그리고 공과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몇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1950년 6월 25일 비내리는 일요일 새벽,날이 채밝기도 전에 10만여명의 북한인민군이 38선 전역을 가로질러 침공을 개시했다.남한에서는 이들을 편성도 채 갖추지 못한 3개사단 정도가 맞서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는 1945년 2차대전 후 일본인들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남쪽은 미군이,북쪽은 소련군이 나누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소련은 탱크와 중화기를 지원하는등 북한 인민군의 무력증강에 많은 투자를 했다.1948년 소련의 붉은 군대가 공식적으로 북한땅을 철수한 후에도 수천명의 군사고문단이 잔류,지속적인 군비증강을 꾀했으며 침공을 감행할 무렵에는 13만5천의 병력과 소련사관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전투를 참관한 유능한 장교단들로 구성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군은 10만명이 채 못되었으며 미 고문단에 의해 훈련을 받고 미군장비를 갖추고 있었다.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24군단 병력이 공식적으로 철수한 것은 1949년 5월이었으며 군사고문단과 병참요원등 5백여명만이 잔류하고 있었다.한국군에는 탱크는 없고 몇대의 대포만 있을 뿐이었으며 제대로자격을 갖춘 장교도 드물었다.더욱이 소규모 작전의 지휘권까지도 워싱턴에 있었으며 도쿄의 맥아더 극동사령부와는 중계를 통한 무선통신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군은 바로 첫날 새벽부터 현대전 사상 유래가 없는 패주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한의 방어에 미군을 사용한다는 극동사령부의 임시계획은 있었지만 그것은 이같이 38선 전역에 걸쳐서,또 다량의 우수한 최신 소련제 탱크의 공격을 예상한 것이 아니고 고작 북으로부터의 소규모 국경충돌이나 게릴라침투 등을 고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는 다른데 있었다. 내가 한반도에서의 전쟁발발을 안 것은 조지아주 베닝기지에서 였다.그 전날 보병학교에서 대대장교육을 수료한 뒤여서 그날은 숙소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야구중계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중간에 한국전쟁 소식이 스포트로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만주에서 여러해동안 정보업무를 맡아왔던 나로서는 우선 몹시 화가났으며 놀라움에서 불평이 튀어나왔다.그 다음에는 강한 의구심이 일었다.『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 침공을 예측하지 못했는가?』 봄철 내내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에 의한 철저한 준비와 위장이 있었을 것이고 그곳의 높아져가는 긴장감을 분명히 CIA와 윌로그비소장 산하의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감지했을 것이다. 나는 CIA의 북한 정보망을 내가 직접 작성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의도에 관한 정보를 완벽하게 놓치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CIA는 1946년부터 48년 사이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잘 훈련된 10여명의 젊은 한국인 정보원들을 북한에 투입했다.극동사령부의 맥아더원수와 윌로그비장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침략 조기경고의 특수한 임무를 부여해 북한땅에 헌신적인 반공주의자들을 투입시켰던 것이다. 그후 1949년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CIA는 마침내 서울에 지역본부를 설립했다.나는 그때 CIA의 중국담당 책임자였는데 서울본부는 아주 우수하고 믿을만한 장교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해 중반부터 서울본부에는 북한으로 침투시킨 정보원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상당부분 북한의 전쟁준비 움직임에 대한 경고를 해왔을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후에 CIA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정보 임무를 맡아 다시 일하게 되었을 때 그 당시의 민간및 군사정보 책임자들이 누구였는지 구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50년 6월 엄청난 「정보실패」의 미스터리를 풀수 있었다. 그해 봄부터 김일성의 공산당정권은 한국에서의 선거를 비난하고 군사적 도발의 위협을 가하면서 남한에 대한 악랄한 선동공세를 벌여왔다.그러는 가운데 소련지원을 받는 김의 군대는 침공준비를 위해 은밀하게 단계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당시 북한에 있던 우리 정보원들은 이미 북한의 교통시설은 물론 정부기관이나 군내부에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아 임무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같은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6월까지 몇몇 정보원들이 북한의 전쟁준비에 대한 특별보고를 해오거나 38선을 실제로 넘어와서 서울에 있는 CIA간부들에게 직접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CIA 서울지역국 보고」라고 명명된 1950년 6월19일자로 된 한 중요한 정보보고를 보면 중장비 등을 수송하기 위한 38선 북측 도로의 확충,1945년이래 소련에 의해 파괴되었던 남측으로의 연결도로에 대한 일제 보수등 광범위한 병력의 움직임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더욱 불길한 징조는 북한의 민간 교통수단들이 북한의 주요 군사기지에서 38선으로 연결되는 철로변에 집결돼 있다는 것이었다.결론적으로 이 보고서는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으며 김일성은 자신이 원할때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병력과 장비를 배치시켜 놓고 있다는 것이다. CIA국장 로스코 힐렌쾨터 해군대장은 북한의 침공이 있기 전 닷새의 시간동안 이 평가서는 백악관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등 트루먼대통령의 군사및 외교정책 핵심참모들에게 전달됐으리라고 확신했다.이 평가서의 요약본은 또한 전통을 통해 도쿄 극동사령부의 맥아더장군과 윌로그비장군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 군부및 민간의 핵심 정책입안자들은 남침 이전에 이미 북한의 침공의도에 관한 충분한 증거자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물론 이들 증거자료는 잘 훈련된 정보원들의 보고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연적인 의문점이 제기될수 있다.왜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 정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가? 왜 어떤 작은 군사적 행위도 강력한 응징을 받을수 있다는 공식적인 주의를 북한에 주지 않았는가? 왜 적어도 미공군의 정찰기들이 북쪽의 뒤엉킨 산들로부터 단지 세개 뿐인 남쪽으로의 통로를 감시하지 않았는가? 당시 태평양지역에서 일했던 CIA 지역책임자들이 후에 나에게 이 문제들의 해답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윌로그비소장의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는 그해 봄 서울에서 오는 모든 정보들을 분석평가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F6」정보,즉 「미숙한 정보원이 보낸 신빙성이 불투명한 정보」로 분류돼 거들떠보기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 있어서의 미국의 작전은 맥아더사령관의 관할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정보책임장교는 그 보고들을 심각한 고려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해버렸던 것이다.그러한 등급으로는 워싱턴에서 절대로 심각하게 고려되어질 수 없었다. 워싱턴에서 이들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힐렌쾨터 CIA국장 한사람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임무는 정책입안자들에게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무방비상태에서 전쟁은 발발했고 개전 다음날인 26일부터 워싱턴은 한국전쟁발발의 책임문제를 놓고 의회와 백악관,CIA와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간에 「정보수집실패」냐 「정보판단실수」냐의 뜨거운 논쟁에 휘말렸다.
  • 풀리지 않는 오대양 의혹/오승호 사회1부기자(오늘의 눈)

    4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세인의 뇌리에서 거의 잊혀졌던 「오대양집단변사사건」이 김도현씨 등 오대양직원 6명의 집단자수를 계기로 다시 핫뉴스가 됐다. 그러나 이들의 자수로 미스터리의 실체가 벗겨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끝내 공염불로 끝나가고 있다. 미궁속에 빠져있는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오대양교의 교주로 알려진 박순자씨가 상당한 권력층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는 소문과 광신적인 사이비 종교집단의 행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사건발생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적지않은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충남도경은 자수한 9명의 신병을 검찰로 송치할 날짜를 겨우 이틀 남겨둔 17일까지 사건전모는 물론 집단자수의 동기조차 시원스레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찰은 이날까지 3명 살해,4명 암매장사건만을 간신히 매듭지었을 뿐 32명의 집단변사사건은 4년전 수사결과를 부분적으로 재확인하는 선에서 사실상 수사를 종결지은 상태다.따라서 앞으로 결정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이 사건은 또 다시집단자살로 귀결지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물론 4년전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던 사건이었던 만큼 지금와서 단시간내에 갈증을 해소하듯 속시원히 해결되리라는 것도 섣부른 기대라 할 수 있다.그러나 지난 10일이후 보여준 경찰의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수사태도는 이 기회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경찰은 뭔가 석연치 않은 자세로 집단자수해온 사람들이 4년전 집단변사사건 때는 이미 수감돼 있는 등 집단변사사건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수사의지」를 의심케 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경찰은 어떤 사건이든지간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로 의혹을 푼다는 수사의 기본을 결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더 이상 다른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한 우리는 경찰의 수사내용안에서 사건을 역사의 장으로 넘길 수밖에 없다. 사족을 단다면 사건을 넘겨받을 검찰에서나마 무언가 실마리가 풀렸으면 하는 것이다.
  • 오대양사건의 진상은…(사설)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오대양집단변사사건이 당시의 사건관련자 6명이 느닷없이 자수하고 나섬으로써 주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4년동안이나 미궁에 빠져있던 사건의 진상이 이번에는 밝혀지게 될 것인지 그것이 우선 궁금하다. 그러면서 이같은 참혹한 사건이 어떻게해서 지난 몇년동안이나 집단변사의 정확한 경위나 동기가 밝혀지지않은 상태로 남아있었는가에 대해 다시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더욱이 관련 6명이 자수를 하지않았다면 계속 미스터리상태로 묻혀버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될 때 관련수사기관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를 묻지않을 수 없다.마찬가지로 진실을 밝히는 것에 대한 사회의 노력부족은 충분히 반성의 대상이 된다고 여긴다. 우선 수사측면에서 이번사건은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그하나가 수사를 서둘러 종결하지 않았나하는 의문이다.경찰이 당초 이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판단한 회사총무과장 노씨가 이미 살해당했는데도 여지껏 행방불명된 것으로 보고있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그런가하면 이번에 자수자가 6명이나 되고 이밖에도 몇명이 더 있다는데도 경찰은 모르고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수사의 미진함을 확인하게된다.이런 이유로 경찰은 일찍 이사건의 추적을 그만두지않았나하는 결론이 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경찰은 종종 오해의 소지가 있는 사건의 수사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고 적당히 처리하는 고질적인 병폐가 자주 문제가 돼왔다는 것에서 이번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보게된다는 것이다.어떻든 어떤 사건이든 끈질기게 추적해야한다는 수사의 기본을 이사건은 결여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이사건을 둘러싸고 권력층과의 관련설등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았다는 데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이사건에는 이밖에도 적지않은 의혹이 있는게 사실이다.우선 집단자살이 노씨등 3명의 살해사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끝에 일어났다는 것이 잘 납득되지 않는다.그것은 그 이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고 더욱이 광신적인 종교집단이기 때문이다. 또하나는 6명의 불분명한 자수동기에도 의문을 갖게된다.무엇때문에 4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자수를 하게됐는지가 궁금하다.이들은 사건이후 양심의 가책과 교주인 박씨에게 속아살아온 사실을 깨닫게 돼 자수하게됐다고 밝히고있으나 충분한 자수동기에는 미흡하다. 당시의 오대양 교도들이 사건뒤에도 공동생활을 해왔다는 것이나 최근들어 서로 알력끝에 뿔뿔이 헤어졌다는 사실 등도 쉽게 이해되지않는 것 들이다. 경찰은 이사건의 진상을 중심으로 사건의 경위,동기등 모든 의혹을 이번기회에 밝혀내야한다.앞으로 자수자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미스터리의 실체가 밝혀질 가능성은 더욱 높다고본다.미궁으로 남겨둘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경찰의 수사결과를 기대한다.
  • “소련은 이제 밝혀야 한다”/장정행 국제부장(데스크시각)

    1983년 9월. 아직 초가을 이었지만 북방의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던 사할린의 바다는 창자를 끊는 듯한 통곡으로 가득했다. 이달 1일 새벽 KAL007기를 타고 뉴욕을 떠나 서울로 오다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공격으로 수중고혼이 된 승객 2백69명의 유가족들이 사랑하는 부모 아들 딸을 찾아 흔적도 없는 망망대해를 향해 울부짖었다. 세계가 다 함께 분노하고 상상할 수 없는 소련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사할린을 마주하고 있는 일본 최북단의 조용한 어항인 와카나이는 희생자들의 유품이라도 확인하려는 유가족들과 사고경위를 밝히려는 각국의 조사단,취재진들로 연일 붐볐다. 미국·일본,그리고 우리나라의 함정과 선박들이 사고해역에 몰려 한달 이상의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바닷가에 떠내려온 사고기의 일부 잔해와 승객들의 유류품 몇 조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사고경위를 밝힐 수 있는 블랙박스도 발신음까지 포착했으나 끝내 회수하지 못하고 말았다. 소련 영해인 사고지점을 일찌감치 둘러싸고 있던 소련 함정들의 집요한 방해 때문이었다.소련은 무고한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유가족들의 뱃길마저도 함정과 전투기로 위협했다. 유엔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규탄하고 나서자 소련은 사고발생 3일 만에 타스통신을 통해 KAL기 격추사실을 시인하고,그러나 이 여객기가 첩보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얼토당토 않은 어거지를 썼다. 9일에는 오가루코프 참모총장 겸 제1국방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수호이 15전투기가 미사일로 KAL기를 격추시켰으며 KAL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첩보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출격전투기와 기지와의 교신내용을 분석,소련측이 경고나 강제착륙의 시도없이 격추를 명령했음이 밝혀져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건 경위는 아무것도 없는 형편이다. 다만 소련의 자유화바람을 타고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가 당시 수색작업에 동원됐던 잠수부,출격전투기의 조종사 등을 광범위하게 취재,최근 10회에 걸쳐 사건의 내막을 보도하여 진상의 일부가 알려졌을 뿐이다. 이 보도에 이어 공개된 사건 직후의 해저상황을 촬영한 몇 장의 사진은 소련이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지금은 퇴역해 있는 출격전투기의 조종사는 당시 KAL007기가 여객기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명령에 따라 격추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수색에 동원됐던 잠수부들은 블랙박스로 보이는 오렌지색 상자도 분명히 인양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의 한소관계는 83년과는 판이하게 변했다. 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적대관계에서 협조관계로 바뀌었으며 빈번한 교류와 함께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었다. 19일에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샌프란시스코 모스크바에 이어 세번째 한소정상회담을 갖는다. 비록 일본방문 후의 귀국길이고 회담장소가 서울이 아닌 제주도이긴 하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한국방문은 세계사에 남을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비단 한소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소련의 위상도 이제는 더이상 냉전체제의 한쪽 우두머리가 아니라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동참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제는 KAL사건의 진상을 밝힐 때가 됐으며 또 당연히 밝혀야만 한다. 이 같은 불행한 사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소련은 최소한 현재까지 그들이 알고 있는 사건경위와 왜 격추시켰는지를 밝혀야 할 책임이 있다. 아울러 지금까지도 항공계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KAL기의 항로이탈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회수한 블랙박스를 공개하여 국제적인 분석을 하도록 해야 한다. 거대한 보잉747점보기를 민간여객기로 알아보지 못했다든가,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승객 2백69명을 태우고 KAL기가 첩보활동을 했다는 등의 어거지로 사건의 진상을 더 이상 묻어두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이제 막 본격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한국이 KAL기 사건의 피해당사국이기 때문에 앞으로 두 나라 관계의 발전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사건의 진상공개와 함께 그에 합당한 사과가 있어야만 한다. 소련은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 45년 동안이나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고 부인해 왔던 1940년의 폴란드군 대량학살 사건을 소련비밀경찰의 소행이라고 인정했고,「프라하의 봄」을 무참히 짓밟았던 68년 8월의 체코 무력침공도 소련정부의 과오였음을 솔직이 시인했었다. 그러나 소련은 KAL기 사건에 대해서만은 최근까지도 계속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는 식으로 발뺌하고 있다. 이달 내한했던 로가초프 외무차관은 사건진상의 공개를 바라는 우리 국민들의 기대에 『냉전시대에 발생했던 불행한 사건이었다』고 대답하며 관련자료가 추가로 입수되면 한국측에 전달하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려 버렸다. 급속한 접근과 빈번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의 대다수가 모스크바에 대해 느끼는 인상은 어딘가 음흉하고 어둡다는 쪽이 아직도 강하다. 소련 대통령이 역사적인 방한을 하고 두 나라 정상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고 정답게 상호 관심사를 의논하는 마당에,그깟 이미 흘러간 불행한 사건을 더 이상 굳이 들출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소 두 나라가 경제적이나 통일·안보적 필요에 의해 일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하여 참다운 협력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간의 신뢰가 회복돼야 하며 이 같은 신뢰를 쌓는 첫걸음이 KAL사건의 진상공개와 사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2백69명의 원혼과 그 유가족들을 달래고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세계에 소련의 변화를 확신시켜 주는 길이기도 하다.
  • 다시 공포에 휩싸인 「화성」/김동준 제2사회부기자(현장)

    ◎“잊는가 했더니 이번엔 할머니까지…” 부녀자만을 골라 폭행한 뒤 살해하는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화성은 다시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 86년 9월19일 이완임 노파(71)가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의 목초지에서 폭행·살해된 뒤 5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일어난 화성미스터리가 지난 4일 귀가길의 권순상 할머니(69)가 폭행·살해된 채 발견됨으로써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권 노파는 지난 3일 밤늦게 수원에 사는 큰딸 집에 다니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1백50여 m 떨어진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의 아카시아와 소나무가 우거진 야산에서 변을 당했다. 이에 따라 「화성부녀자 연쇄폭행살해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사건은 화성군 태안읍내에서 7건,팔탄면 1건,정남면 1건이며 이번 사건으로 피해지역이 동탄면으로까지 번져가고 있다. 사실 화성사건은 지난 88년 9월 박 모양(14)이 자기방에서 폭행살해된 뒤 10개월 만에 윤 모씨(25)가 범인으로 경찰에 검거돼 한 동안 잊혀지던 중 2년2개월 만인 지난해 11월 여중생 김 모양(13)이 하교길에 또다시 폭행·살해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김양 사건은 범인으로 지목된 윤 모군(19)의 진범여부로 한차례 홍역을 치렀으며 이후 당국은 사건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해왔었다. 경찰은 국내유일하게 태안읍 1개읍내에 태안·태봉·안녕지서 등 3개 지서를 운영하고 방범순찰대 3개 중대 4백여 명의 병력을 배치,야간순찰을 강화해 왔으며 안응모 내무부 장관은 연초 경기도청 연두순시 때 『더 이상 화성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도민에게 약속했을 뿐 아니라 지난 기초의회에 나선 이 지역 모 후보는 화성사건 재발방지를 공약으로까지 내세워 당선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범인은 독립된 자연부락이 많고 군데군데 산재해있는 솔밭 등지를 이용,범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 수사경찰을 우롱하고 있다. 선을 보러간 처녀가 상대남자가 화성에 산다는 이유로 기겁을 하고 달아난다는 내용으로 코미디프로에서조차 소재로 삼은 화성사건의 피해자인 화성주민들은 한결같이 고희에 가까운 노인을 범행대상으로 삼은 데 대해 치를 떨면서 이번 사건의 범인을 빨리 검거,불안을 해소해주고 제발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 “탈출이냐”·“대피냐”… 이란행 이라크기/1백여대 월경의 미스터리

    ◎거의 최신예기… 망명가능성 희박/“전력비축”·“이란 참전유도”… 분석도/미선 “종전까지 억류” 발표에 반신반의 이라크 공군기들이 이란으로 줄줄이 넘어가고 있어 이번 걸프전의 또 하나의 미스터리로 등장하고 있다. 지난 26일 이라크 전투기 7대가 황급히 이란으로 월경해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29일까지 1백여대의 이라크 공군기와 민간항공기들이 이란으로 날아들었다. 월경한 이란공군기들의 숫자에 대해서 미 합동참모본부의 톰 켈리 중장은 28일 80대 이상이 이라크를 빠져나갔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밝히고 이 가운데 60대는 전투기와 폭격기이며 20여대는 민간항공기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ITT 방송은 1백여대가 이란으로 월경했다고 보도했다. 대피한 전투기들도 주로 미그29 미그25 미라주F1 수호이24기 등 이라크가 보유한 전투기 가운데 최신예기이며 수호이24기는 전부 넘어가고 수송기도 20여대 포함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은 이들 비행기들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억류하겠다는 이란측의 말을 믿는다면서도 이란과 협의하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품은 채 앞으로 전쟁에 미칠 영향의 분석에 부심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추측만 난무하는 상태다. 우선 미국측의 희망적 관측은 이라크 공군기들이 망명했으리라는 것. 26일 처음으로 이라크기들이 이란으로 넘어갔을 때 이란측은 이들 조종사들을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게다가 최근 이라크의 공군지휘관 2명이 처형당했다는 설,다국적군의 공습에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절망스러운 전쟁상황 등이 망명설의 정황증거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다국적군의 일부 군 지휘관들과 군사전문가들은 망명보다는 대피가 아니겠는가 의심을 품고 있다. 이러한 견해의 근거는 ▲우선 망명은 한두대씩 간헐적으로 넘어오는 것이지 이번처럼 대거 한꺼번에 망명하는 예는 거의 없다는 것 ▲이란으로 넘어올 때 이란측이 전혀 공격을 가하지 않고 순순히 이들 비행기를 받아들인 점 ▲망명이라면 이라크가 비행기들이 넘어가자마자 사실을 보도했겠느냐는 의문 ▲이란으로서는 이라크가 이번 전쟁으로 완전히 무기력해져 미국과 친미세력이걸프에서 영향력을 휘두는 것은 바라지 않아 이라크의 전력을 보호해주려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이라크로서는 어차피 지상군이 주력이고 공군기들은 전력에 보탬이 되지 않고 있다는 점 ▲이란으로 넘어간 비행기들이 최신예기라는 점 ▲『이라크 공군기가 이란대피시 에스코트를 받으며 에스코트한 비행기는 되돌아간다』고 일본 NHK­TV가 미 군사소식통을 인용보도한 것 등으로 미루어 이란과 이라크가 「협의」하에 비행기를 대피시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대피의 경우에도 이라크가 다국적군에게 나중에 공격을 가하려고 대피시켰을 것이라는 추측과 후세인이 전쟁 패배후에도 전력을 어느 정도 남겨두려고 대피시키고 있다는 추측이 갈리고 있다. 그러나 이란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중립적 자세를 견지한다면 이라크로서는 대피시킨 전투기들을 전혀 쓸 수 없고 이란도 이번 전쟁에 말려들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대피설」도 약점을 가지고 있다. 망명설도 대피설도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자 일부에서는 이란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온갖 설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또하나의 미스터리는 인공위성과 AWACS 등 최첨단 시설과 장비로 중동지역을 들여다 보고 있는 미국이 과연 이 사건의 내막을 모르겠느냐는 것이다. 후세인 대통령도 28일 미 CNN­TV와의 회견에서 이란인 모두가 이 전쟁을 「신도들과 이교도간의 전쟁」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하고 이들 항공기가 전쟁에서 사용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란의 결정이 어떤 것이든 이를 존중할 것이라고 모호하게 답변,미스터리를 풀 실마리를 주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라크 공군기들의 월경에 대해 이란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걸프전과 걸프전 이후 중동 판도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이며 이 점이 바로 미국의 촉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 미,2월말 이전 지상전 돌입/체니 국방

    ◎병력배치·장비비축에 시간필요/이라크항공기 모두 69대 이란으로… 동기불명 【리야드·워싱턴·니코시아 외신종합연합】 걸프전쟁 개전 12일째인 28일에도 이라크 전역에 대대적인 공습을 단행한 다국적군은 늦어도 한달내에 지상전에 돌입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만전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리처드 체니 미 국방장관은 이날 미 NBC­TV와의 회견에서 현재 진행중인 다국적군의 공습작전만으로는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철수시킬 수 없음을 시인하고 미군은 2월말 이전에 이라크군을 축출하기 위한 지상공격에 돌입할 태세를 갖출 것이라고 밝혔다. 체니장관은 지상전에 필요한 병력의 대부분이 이미 사우디 현지에 도착했으나 약간의 추가병력 투입,병력의 전진배치와 탄약·장비의 비축 및 공중폭격의 효력이 극대화될 때까지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그러나 모든 준비가 2월말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팻 스티븐슨 미군준장은 28일 걸프전쟁 발발이후 적어도 69대의 이라크 항공기들이 이란으로 넘어갔다고밝혔다. 스티븐슨 준장은 이날 전황 브리핑을 통해 이란으로 넘어간 이라크 항공기들은 민간 및 군수송기 30대,전폭기 39대라고 밝혔으나 왜 이라크 항공기들이 이란으로 넘어갔는지는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영국관리들도 이라크 항공기 조종사들이 탈출을 한 것인지,또는 다국적군의 공습으로부터 항공기를 피신시킨 것인지 아직 불투명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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